개국 대 쇄국 : 글로벌스탠더드와 한국사 함 재 봉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1. 서론 세계화(globalization)의 시대다. 이념의 벽이 허물어진지 이미 오래다. 그리고 바야 흐로 엄청난 양의 자본, 정보, 상품이 민족, 문화, 종교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이동하 기 시작하였다. 냉전에서 승리한 서구식 자유-자본주의 체제의 급속한 확산이 가져온 결과 다. 이러한 현상은 과거에는 이념과 종교, 문화의 장벽에 의해서 고립되어 있던 민족, 국가, 인종, 문화권 사이의 교류를 급속히 확산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 과거의 이념대립 대신 에 문명 간의 대립과 갈등을 야기 시키고 있다. 혹자는 이러한 현상을 놓고 문명간의 충돌 을 예견하고 있다. 뚜렷이 구별되는 종교, 문화, 민족 그리고 인종을 함께 묶어 주었던 이데 올로기가 더 이상 접착제로 기능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종교, 문화, 민족, 인종에 따른 각각 의 정체성을 내세우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르완다와 보스니아 사태는 문명과 문명간의 거대한 충돌을 알리는 전조에 불과하다. 그리고 911 사태는 이러한 예측이 정확하였음을 보여준다. 문명충돌을 예견하던 사람들은 911 사태야말로 기독교 문명과 이슬 람문명간에 새로운 전선이 구축되고 있음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보여준 것이라고 말한다. 미 국과 그 동맹국들은 이슬람과의 전쟁을 문명과 테러리즘 사이의 전쟁으로 규정하려 애쓰지 만 많은 사람들은 그 전쟁을 한 문명과 다른 문명사이의 전쟁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스라엘 과 팔레스타인간에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유혈사태 역시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해주고 있 다. 반면 우리는 세계화로 인하여 예전에는 명확히 구분되었었고, 상호 적대적이기까지 했던 문화들이 수렴되어 가는 현상을 볼 수 있다. 한국의 아이들과 젊은이들은 디즈니가 해 석한 동화를 보고 맥도널드 햄버거와 도미노 피자를 먹으면서 자라난다. 그들은 닌텐도와 소니가 만든 전자게임을 즐기고, 메이저리그 야구, NBA 농구를 시청하고 로스앤젤레스와 서울에서 동시에 개봉되는 아놀드 슈왈쯔제네거의 영화와 탐 크루즈의 영화를 본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세계 여느 곳의 아이들이 그렇듯 컴퓨터, 인터넷 그리고 이메일에 익숙하다. 그 리고 영어를 잘 하는 것은 좋은 학교에 입학하고 직장에서 승진하기 위해 반드시, 그리고
당연히 갖추어야 할 능력이 되었다. 외국, 특히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 학생들의 수도 기하급 수적으로 늘고 있다. 실제로 최근 몇 년 동안 중학생들 뿐 아니라 초등학생들의 유학도 증 가하고 있다. 유학을 가는 한결같은 이유는 가능한 한 초기에 영어를 잘하기 위해서이다. 이 러한 현상은 문명의 충돌을 걱정케하기 보다는 오히려 문명의 동질화, 심하게 말해서는 획 일화 내지는 홉수 에 대한 우려를 갖게끔 한다. 세계화의 급속한 추세속에서 한국인들의 문 화적 정체성(identity)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한국문화는 세계화 또는 미국화 에 단순히 압도돼 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세계화는 문명간의 충동을 일으킬 것인가? 아니면 문화의 수렴 (convergence) 즉 동질화(homogenization)를 초래 할 것인가? 물론, 문명의 충돌과 수렴이라 는 두 현상은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동시에 일어나는 과정이다. 다르기 때문에 충돌할 수도 있고 또 서로를 배워가면서 수렴과 동질화의 과정을 거쳐나갈 수도 있 다. 그런 의미에서 문명의 충돌과 수렴은 세계화라는 한 동전의 양면이다. 부연하자면 세계 화를 단지 부정적 차원의 근대화로 여기는 것을 넘어서서 서양화 더 나쁘게는 미국화라고 생각할 때 문명의 충돌은 일어난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의 저자인 조세프 슘 페터는 자본주의에 의해서 전통적 삶의 방식이 붕괴되는 과정을 창조적(creative)파괴 라 일컬었다. 수많은 저개발국 또는 개발도상국가들은 슘페터의 이 말에 동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산업화와 도시화의 초기 단계에서 늘 목격할 수 있는 급격한 변화와 불안정, 불안감 그리고 늘어나는 빈부격차가 가져다주는 상대적 박탈감 속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은 이러한 체제를 대표하는 서구의 근대문명과 이를 대표하는 자국내의 자본주의자들에 대한 강한 적 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 자본주의는 전통적인 삶의 방식과 문화를 파괴하는 잔 인한 것일 뿐 결코 창조적일 수 없다. 반면, 산업화에 성공하고 시장경제가 어느 정도 자리잡은 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 세계화는 새로운 기회다. 이미 자본주의 체제 속에 편입되어 적응하는 성공한 나라로서는 국가간의 관세, 자본의 이동에 대한 통제, 사람과 상품의 자유로운 이동에 대한 제한들을 허 물어뜨리는 세계화란 선(good) 그 자체다. 특히 인터넷 등이 대표하는 새로운 정보기술을 십분 활용하여 세계화의 이익을 최대한 누릴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발전된 나라의 관점에 서 볼 때 세계화에 의한 구식 거래관행과 무역장벽의 파괴는 말 그대로 창조적인 것이다. 결국 세계화의 문제는 세계화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의 문제로 모아진다.: 세계화에 대항할 것인가 아니면 그 흐름에 합류 할 것인가? 분단된 한반도의 북쪽은 대원군과 Fidel Castro를 무색케 하는 지독한 쇄국정책을 아직도 고집하고 있다. 반면 남쪽의 대한민국은 세계 10대 무역국인 동시에 인터넷 보급률 세계 1위를 자랑하는 국가로써 세계화를 적극적 으로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남한 내에서도 세계화의 위험을 경계하고 경고하는 많은 사람 들이 있다. 그들은 한국 기업구조와 그들의 관행을 세계적 표준으로 끌어올리려는 개혁과
구조조정은 너무 많은 고통과 희생을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또, 문화 민족주의자들은 세계화 는 곧 총체적인 미국화를 의미하며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경우 한국의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이 파괴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계화 시대에서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하는가? 세계화를 거부할 것 인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전통을 고수할 것인가 아니면 세계적 표준을 받 아들일 것인가? 한국의 역사는 이 난해한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신라와 고려의 불교수용 그리고 조선의 주자학 수용의 역사는 한민족이 세계문명사의 전환기 때마 다 세계적 표준을 적극적으로(proactively) 받아들임으로써 그 생존을 도모함은 물론 독창적 이고도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음을 보여준다. 남한 역시 근현대의 세계사가 만들어낸 세계적 표준인 자유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적극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성공 한 대표적인 사례다. 따라서 한국의 역사는 강력한 헤게모니국가가 주도하는 글로벌 스탠더 드를 거부하느냐, 받아들이느냐의 기로에 선 국가가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옳은가를 분명 하게 예시해 준다. 2. 불교 삼국시대와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에 이르는 시대의 글로벌스탠더드는 단연 불교였 다. 중국은 기원 후 1세기경에 처음 불교가 들어오지만 4세기 초 남북조시대가 열리면서 비 로소 중국의 토착불교사상이 출현하기 시작한다. 인도의 불교를 받아들여 철저하게 중국화 시키는 작업을 거친 불교가 한반도에 전파된 것은 기원 후 4세기 중반이었다. 고구려가 372 년 삼국 중에서 최초로 불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였고, 다음으로 백제가 384년에, 그리고 마 지막으로 신라가 572년에 받아들였다. 당시 한국에 들어온 불교는 중국 불교였다. 즉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전파되어 중국의 시각에서 재해석 된 격의 불교였다. 고구려는 최초로 불교 를 수용했지만 그 자신만의 독특한 불교로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통치엘리트, 특히 왕족들이 적극적으로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였지만 고구려 불교는 민중들 사이에 뿌리내리지 못했고 독자적인 불교 사상가들을 배출하지도 못했다. 백제 또한 일본불교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면 서 찬란한 문화유산을 남긴 불교의 융성을 맛보았지만 불교를 토착화시키거나 고유의 불교 사상가를 배출하는데는 실패하였다. 반면에 신라는 삼국 중에서 제일 늦게 불교라는 글러벌스탠더드를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불교문명을 꽃피울 수 있었다. 불교가 전파되는 초기 단계에서 신라의 통치계층과 대중은 이 새로운 외래종교를 격렬하게 거부했었다. 이차돈의 순교 설화는 그 진실여부를 떠나서 그 당시 불교에 대한 저항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그 러나 신라가 일단 불교를 수용하자 이 외래사상은 급속하게 민중사이로 퍼지면서 이후 천
오 백년을 이어갈 수 있는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특히 불교전파 100년도 안 되어 걸출한 사상가들을 배출하면서 불교에 대한 신라 고유의 해석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독창적인 불교 사상을 형성했다. 신라 고유의 불교사상이 꽃피우기까지는 원광 ( 圓 光, 542-640), 자장( 慈 藏, 590-658), 원효( 元 曉, 617-686), 의상( 義 湘 ( 相 0 625-702)과 같은 독창적인 불교사상가들은 이 새로운 종교의 가장 심오한 측면과 토착종교의 감수성을 결합하여서 새로운 통합사상을 일 구어 낼 수 있었다. 신라의 승려들은 특히 중국에 유학하여 선진 불교사상과 문명을 철저하게 하고 토 착화시켰다. 원광은 수나라에, 그리고 자장은 수나라를 멸망시킨 당에서 당시의 최첨단 사상 을 연구하고 돌아와서 신라에서 중책을 맡으면서 이 새 사상을 전파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 다. 의상은 중국 화엄종의 제 2대조인 지엄의 수제자였다. 당시 세계최고의 석학 밑에서 공 부한 그로서는 중국에 남아서 중국 화엄종을 완성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있 었다. 그러나 그는 조국인 신라에 돌아와서 신라 화엄종의 창시자가 되었다. 훗날 최치원, 안향, 이색에서 일제시대의 동경유학생, 해방후의 미국 유학생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유학생 들이 당시의 글로벌스탠더드의 사상과 체제, 제도를 가르치는 본고장 의 최고 학부에서 당 대의 지식인, 사상가들 밑에서 수학하면서 인정을 받지만 귀국을 고집한 후 조국을 새로운 글로벌스탠더드에 맞추어서 개혁 하는데 앞장서는 패턴은 이미 이때부터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반면 원효는 유학을 포기하면서 국내파'로 남아 새로운 사상이 민중사이에 뿌리내 리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된다. 불교의 토착화를 통해서 삼국은 정치적으로는 종래의 부족국가 체제에서 벗어나 중 앙집권적인 군주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다. 불교는 훗날 유교, 자본주의, 민주주의 등의 사상 들이 새로운 정치체제의 틀과 이념을 제공하였듯이 삼국이 새로운 차원의 정치적 통합을 가 능케 한 이념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토착화에 성공한 신라 불교는 석굴암,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봉덕사종 그리고 미륵반가사유상 등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독특한 미적 감수 성이 담긴 찬란한 문명을 태동시킬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신라 불교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삶에 대한 새로운 철학에 기반 한 구체적인 프락시스 (praxis) 를 만들었다는데 있다. 원광 은 세속오계를 지어서 불가적인 철학에 기초하면서도 세속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삶의 자세 를 구체적으로 풀어냄으로서 이론과 실천의 연결고리를 제공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처럼 철 학과 실천의 괴리를 새 삶의 방식은 신라 엘리트들에 의해 성문화되었고 실행되었다. 불교 에서 나온 철학사상을 교육받은 젊은 엘리트집단인 화랑도( 花 郞 徒 )는 김유신 장군( 金 庾 信, 595-673), 태종무열왕( 太 宗 武 烈 王 604-661)과 같은 미래의 지도자들을 양성함으로써 삼국통 일에 크게 기여했다. 당나라가 불교를 적극적으로 보급하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 신라는 중 국에서 이름을 떨친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불교를 수용함으로써 당과 가치관과 세계관을 공 유할 수 있었고 결국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한 나당 연합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신라는 한국역사에서 그 시대의 지배적인 세계관을 성공적으로 도입한 첫 번째 사례였다. 세계화표준을 수용하는 가운데 신라는 예술, 철학, 정치의 모든 측면에서 신라만의 독창적 문명을 창출할 수 있었고 급기야는 통일의 대업을 완수할 수 있었다. 3. 유교 한국역사에서 새로운 글러벌스탠더드가 들어오는 다음 시기는 고려(918-1392)와 조선 (1392-1910) 사이의 왕조교체기였다. 유교는 원래 고구려가 태학이라는 독창적인 유교교육 기관을 설립한 3세기에 때부터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 또한 국학이라는 유교교육 기관을 7세기에 이미 설립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유교사상은 당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고 국 신라에 돌아와 새로운 사상을 보급하고자했던 최치원( 崔 致 遠, 857-?)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전파되었다. 후에 고려의 네 번째 왕인 광종(재위 925-975)은 당의 관료제와 행정제 도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도 불교가 글로벌스탠더드였다. 한국이 진지하게 유교 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3세기가 되어서이다. 이 무렵 유교는 주자성리학으로 새롭게 발 전된 상태였다. 주돈이( 周 惇 頤, 1017-1073), 장횡거( 張 橫 渠, 1020-1077), 정이( 程 頤, 1033-1107), 정호( 程 顥, 1032-1085) 그리고 주희( 朱 喜 1130-1200)와 같은 대사상가들에 의해 서 유교는 새롭게 풀이되었다. 주자성리학은 고려왕조 말, 충렬왕( 忠 烈 王 1020-1077)의 통치 기간동안에 안향( 安 珦,1243-1306)에 의해서 최초로 한국에 들어왔다. 그리고 백이정( 白 正, 1247-1323), 우탁( 禹 倬, 1263-1342), 권부( 權 溥, 1262-1346)와 그들의 제자인 이제현( 李 齊 賢, 1287-1367), 이색( 李 穡, 1328-1396), 이숭인( 李 崇 仁, 1349-1392), 정몽주( 鄭 夢 周, 1337-13920) 등이 한국 주자학의 기초를 형성했다. 주자학은 이성계( 太 祖, 1335-1408)의 쿠데타 그리고 뒤이은 왕위찬탈과 조선왕조 건국을 통해서 정치적 지지기반을 얻는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는 중국이 원 에서 명으로 전환되는 시기와 일치한다. 고려왕조의 가장 강력한 군벌 이었던 이성계는 쇠 약해진 원의 요청을 받아들여 요동반도에 있는 명의 요새를 공격하려는 당시 고려 최고의 군벌이었던 최영의 계획을 맹렬하게 반대했었다. 그러나 위화도 정벌의 지휘관으로 임명된 이성계는 압록강에서 회군하여 수도를 점령하고 결국 왕좌를 차지하였다. 왕위에 오른 후 이성계는 주자학을 새로운 왕조의 공식 종교로 채택했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창립과정은 정 도전( 鄭 道 傳 1337-1398), 권근( 權 近 1352-1409)과 같은 열성적 주자학자들이 새로운 글로벌스 탠더드에 입각한 선진국가를 건설하고자 이성계라는 장수의 힘을 이용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새로운 왕조의 창건과 함께 조선의 지도자들은 전통적인 불교를 낡은 사상으로 규
정하고 국가를 유교에 입각해서 개혁해 나가기 시작했다. 불교가 이미 1000년 가까이 한국 인의 세계관을 지배하였다는 사실을 상기해볼 때 이러한 개혁작업이 얼마나 많은 반대에 부 닥치고 난관에 봉착했을까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조선의 유학자들은 자신들이 받아들인 유교의 보편성에 진보성에 대한 철저한 신념과 개혁에 대한 집념, 그리고 놀라운 정책적 수완을 발휘하면서 천년불교 국가를 주자성리학에 입각한 유교국가로 철저하게 개혁 하는데 성공한다. 개국 후 태조에서 성종( 成 宗 1457-1494)에 이르는 첫 일세기 동안 조선의 조정은 관, 혼, 상, 제 등 국민의 삶 전반에 관한 새로운 의식과 행동준칙들을 정립하고 이 를 보급시켜 나갔다. 조선 초의 왕들은 모두가 개인적인 신앙의 차원에서는 불교신자였지만 주자성리학에 기초한 나라를 세우고 사회를 개혁해 나가는 것에 대한 신념에 있어서는 추호 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 결과 유교교육만 받고 자라서 보위에 오른 첫 왕인 성종이 즉위 할 즈음 유교국가로서의 조선의 기반은 확고해졌다. 당시의 글로벌스탠드였던 주자성리학을 바탕으로 새 나라를 세우고 사회를 개혁하 는데 성공한 조선은 두 번째 세기에 이르러서는 수입한 사상과 이념, 제도를 공고화시키고 토착화시키는데 성공한다. 조광조( 趙 光 祖, 1482-1519)로 대표되는 사림의 출현은 비로소 새 사상의 세례만 받고 성장한 철저한 주자성리학자들의 등장을 뜻하였다. 이들은 그들의 전세 대가 이룩한 개혁이 불완전한 것으로 비판하면서 보다 철저하게 주자학에 입각한 사회를 건 설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나라를 세운 세력을 보수적인 기득권세력으로 비판하 면서 보다 진보적인 성리학적 세계를 위한 개혁에 임했다. 사림파의 이러한 무수한 노력은 훈척신 으로 대변되는 보수 기득권 층의 저항에 부딪혀 네 차례의 사화를 비롯한 여러 번의 좌절을 겪지만 마침내 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사림파가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시기는 또한 조선 특유의 주자성리학이 꽃피우는 시 대였다. 이황( 李 滉, 1501-1570), 조식( 曺 植, 1501-1572), 기대승( 奇 大 升, 1527-1572), 이이( 李 珥, 1536-1584) 등은 외래사상인 주자성리학을 새롭고 독창적으로 해석하면서 조선 특유의 사상을 창조해냈다. 그 결과 17세기 무렵의 조선은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유교국가가 되었 고 명이 청에게 멸망하자 스스로를 문명의 중심으로 자부하게 되었다. 조선은 14세기말 당 시에 가장 새롭고 근대(modern)적인 글로벌스탠더드를 받아들이고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재해석하면서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는 세계적 표준의 적극적인 수입과 변용을 통해 한국인들이 어떻게 상반된 것으로 보이는 두 가지 목적-주자학의 보편 적 가치 수용과 조선만의 독창적인 문명의 창조-을 동시에 달성했는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이다. 조선왕조의 창건이 우리에게 세계화 표준을 적극적으로 채택하는 것의 당위성을 긍 정적인 측면에서 보여주고 있다면 조선왕조의 몰락은 반대로 글러벌스탠더드의 거부가 얼마 나 참담한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19세기 조선은 중국, 일본과 더불어 새로운
글로벌스탠더드의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새로운 표준을 강요하는 서구의 제국주의 세력 은 과거 그 어느 세력보다도 막강했다. 조선은 처음에는 중국과 일본처럼 서구제국주의로부 터의 도전에 쇄국으로 대응했다. 조선의 문명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자부심으로 무장한 대 원군파는 위정척사 의 이름으로 철저한 고립정책을 추구했다. 그리고 조선은 외세의 압력 에 의해서 도저히 쇄국정책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야 뒤늦게 새로운 글로벌스탠 더드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주적인 근대화를 이를 수 있는 기회는 이미 사라져버 렸다. 조선은 결국 일본에 의해서 일본의 해석을 거친 근대화를 강압적으로 받아들일 수밖 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 후 36년 동안 한국은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 없었다. 자 의로 세계화 표준을 수용하지 못한 것은 독립의 상실로 이어졌다. 독립 후에도 새로운 세계 화의 표준을 찾아서 수용하는 과정은 고통스러웠다. 남북은 서로 다른 글로벌스탠더드를 고 집하였고 그 결과 한반도는 분열되고 말았다. 오늘날까지도 계속되는 남북의 분열과 대치는 두 개의 상반되는 세계화 표준간의 대립으로 결과다. 4.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일본제국주의의 강점기간동안 일본은 한국을 소위 대동아 공영권 이라는 제국주의 체제 안으로 완전히 끌어들이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일본은 일본 방식의 관료, 군 대, 경찰, 경제제도를 조선에 성공적으로 이식했고, 그것은 한국사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 쳤다. 심지어 독립한 후에도 일본표준은 한국 사회에서 계속 작동했다. 한국 군대는 일본 제 국군대에서 훈련받은 한국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한국경찰 또한 일제점령기간동안 일본 경찰로 일했던 한국인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교복과 교과서는 물론이고 경제체제 역시 일본제국주의 모델의 복사판이었다. 경제체제 역시 제 2차 세계대전 전의 일본식 체제와 제 도와 관행을 답습하고 있었다. 그리고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계기로 일본의 자본과 기술, 경영기법이 다시 한번 한국에 대량으로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일본경제의 특징인 정부와 기업간의 밀접한 관 계, 재벌 이라 불리는 거대 기업군, 수출주도형 경제는 모두 곧 한국경제의 특징이 되었다. 그런데 한국의 입장에서 가장 큰 아이러니는 한국이 일본의 경제 모델을 적극적으로 따르던 1960년대, 70년대, 80년대는 일본모델이 곧 글로벌스탠더드였다는 사실이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은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하여 제 2차 대전의 폐허 속에서 세계 제 2의 경제대국을 일 구었고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일본식 경영기법, 도요다식 생산방식, 국가 주도형 산업정책 등 일본 스탠더드를 도입하고자 애썼다. 일본은 무서운 기세로 전세계의 시장을 잠식해 나갔고 곧 일본 경제가 미국마저도 추월할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바로 그 기간동안 한국은 일본의 경제모델을 가장 성공적으로 답습하였고 일본과 더불어 급 속한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 한국경제는 한국인의 강한 반일 감정에도 불구하고 일본경제의 모든 것을 모방했고 그 결과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경제시스템은 일본경제의 단순한 모방에 그친 것이 아니라 모방 속에서 도 한국적인 것을 잘 살려냈다. 60-80년대 사이에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성장한 현대, 삼성, 포스코, SK, LG, 대우와 같은 한국재벌들은 한국 특유의 조직력과 관리능력을 수입한 일본모델에 접목함으로써 토착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회사들은 세계경제 속 의 중요한 행위자로 부상하면서 한국 특유의 경영모델을 만들어냈다. 그 결과 1990년대 초 반에 이르자 한국모델은 곧 모든 개발도상국가의 모델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식 경제모델은 그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일본이 심한 불경기에 빠져들자 한국 경제 또한 문제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러자 한국은 1990년대 초반부터 경제를 보다 개방적이고 시장 지향적으로 개혁하려는 노력 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은 일본식 모델 안에서 성장했던 재벌 및 기득권의 반대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그 결과 한국경제는 1997년 위기를 맞았고 한국은 새로운 글 로벌스탠더드를 도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한국은 미국 모델에 기반 한 신자유주의 라 불리는 글로벌스탠더드를 받아들이는데 모든 힘을 쏟고 있다. 아직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강 한 거부감이 간간이 표출되고 있고 제3의 길 과 같은 대안을 모색하려는 시도가 있지만 이 것만이 한국경제가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사실은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이 추진하고 있는 개혁 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 동안 추구해온 일본식 표준을 미국식 표준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2002년 현재 한국은 과거의 모델이면서 동시에 경쟁상대였던 일본보다도 훨씬 더 현재의 세계화 표준에 근접할 수 있는 경제개혁들을 이루어냈다. 아직도 경제체제를 개혁하 는데 실패하고 있는 일본이나 미국식 글로벌스탠더드의 도입을 노골적으로 거부한 말레이시 아와 달리 한국은 신자유주의적 제도와 관행(practice)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1997년 외 환위기(financial crisis)를 맞은 동아시아의 모든 나라들에 비해 한국은 시장개방, 금융개혁, 기업 구조조정을 훌륭하게 수행해 냈다. 그 결과 한국은 이제 동아시아 국가 중 가장 지속 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어낼 수 있는 국가로 여겨지고 있다. 한국이 도입하는데 성공한 또 하나의 글로벌스탠더드는 민주주의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은 한국의 문화유산은 민주주의와 조화되기 힘들다고 주장해 왔다. 실제로 한국의 역 사는 군주제, 식민지, 권위주의 체제로 점철되어 왔다. 한국인들은 20세기의 전반부를 자치 (self-governance)의 경험이 전무한 채 보냈다. 20세기 후반부의 대부분은 독재 정권과 권위 주의 체제 밑에서 살았다. 한국경제가 도약에 성공하면서도 한국민의 참정권은 철저하게 제 한되었고 인권침해는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다. 억압적인 정부에 대항해서 필사적으로 싸우는
이들도 있었지만 민주주의로의 전환은 가망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한국은 1987년 순식간에 민주화의 물결에 휩쓸리게 된다. 10년 전부터 이루 어지기 시작한 급속한 경제발전만큼이나 갑작스러운 민주화였다. 대통령직선제가 그 해 도 입되었고, 1992년에는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1997년에는 야당 후보가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수평적 정권교체에 성공하였다. 아직도 국내외로부터 비민주적인 관행에 대한 비난의 목소 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민주주의가 동아시아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선진적이라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다. 정부 그리고 정당 내에 권위주의적 잔재가 말끔하게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민주주의는 제3의 물결 민주주의 가운데서 가장 돋보이는 발전을 이룩했 다. 민주화 과정은 김영삼 전대통령 그리고 2000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김대중 대통령과 같은 민주투사들을 배출했다. 모든 것이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글로벌스탠더드를 철저하게, 지속적으로 도입하여 토착화시키고자 노력한 결과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의 정체성은 소멸되고 있는 것일까?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다. 글로벌스탠더드의 적극적인 수용은 독창적인 한국적 정체성을 보존하고 유지하기 위한 노력 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차이 (difference)에 대한 수용과 인식만이 정체성 (identity)에 대한 인식을 가능케 하는 법이다. 그러나 한국화에 대한 의식적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국적인 독 창성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들이 무의식적으로 접하고 해석한 것들도 한국적 특징을 띠게 마련이다. 이러한 사실은 최근 중국과 동아시아를 휩쓸고 있는 한국의 영화, 음악, 광 고의 인기를 보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동아시아의 한류 열풍이 재미있는 것은 영화나 TV, 랩 또는 힙합은 분명히 서구적/미국적인 것이지만 동아시아인들을 열광하게 만드는 것은 그 안에 담긴 한국적인 요소라는 점이다. 물론 이 요소들은 한국사람들조차 잘 의식하지 못하 고 있는 것들이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한국인들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스스로에게 적 합한 형태로 바꾸어가고 있다. 한국인들은 불교, 유교, 기독교 그리고 대중문화를 한국적인 것으로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글로벌스탠더드를 한국적 방식대로 만들어 나갈 것이다. 5. 결론 한민족은 중국 56개의 소수인종 중 하나이지만 나머지 소수민족들과는 달리 단일민 족국가를 성공적으로 유지해 왔다. 몽골 역시 하나의 단일민족국가를 이루었지만 한국과 같 은 성공스토리를 만들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한국의 생존과 성공을 가능하게 했을 까? 어떻게 한민족은 독립된 문화적, 정치적 실체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한민족은 특이하 게도 중국을 한번도 침범한 적이 없다. 흉노, 선비, 몽골, 거란, 여진, 만주족과 같이 중국의
중원( 中 源 )을 둘러싸고 있던 변방민족들은 끊임없이 중국을 침략했었고, 정복왕조를 세우기 도 했다. 그러나 한민족은 중국에 대항하기보다는 오히려 중국으로부터 글로벌스탠더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삼국과 통일신라시대, 고려에는 당의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송의 주 자학을 받아들였다. 다시 말해서 한민족의 성공비결은 세계화 표준의 적극적인 수용에 있다. 중국을 침략하고 한때 중원을 호령한 대부분의 소수민족들이 문화적 정체성을 상실하고 빠 르게 중국에 흡수돼 버렸지만, 한국은 역설적으로 중국의 글로벌스탠더드의 수용을 통해서 그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20세기 한국의 역사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새로운 세기의 시작과 함께 우리민족은 주권을 상실했고 일제의 식민통치를 경험했다. 해방 후에도 동족상잔의 전쟁, 독재, 혁명, 쿠 데타, 권위주의, 빈곤의 악순환으로 인해 비극은 계속되었다. 북한은 지금도 이 비극적인 역 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남한의 경우는 다행히도 다르다. 한국은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 실패와 후퇴를 반복했지만 결국 세계적 표준을 수용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지 난 50년 동안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가장 중요한 글로벌스탠더드를 받아들이기 위해 끊 임없이 노력했고 마침내 놀랄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남한과 달리 북한의 현실은 참담하다. 북한은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쇄국주의를 결합시킨 주체사상을 강조하면서 세계화의 표준을 거부해 왔고 그 결과 북한 인민들은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하게 억압적이고 잔인하며 시대착 오적인 체제하에서 오늘도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다. 한국역사의 과거와 현재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글로벌스탠더드를 수용하고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것만이 우리의 생존과 번영을 보 장할 수 있는 길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