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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생각해야 한다는 제안이 일어나게 되었다. 예를 들면 貫 井 正 之 씨는 豊 臣 秀 吉 의 대외적 인 정복의도 전반을 검토하고 책 이름에 海 外 侵 略 이라는 문구를 채택했으며( 豊 臣 政 権 의 海 外 侵 略 과 朝 鮮 義 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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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동북아역사논총 41호 인과 경계공간은 설 자리를 잃고 배제되고 말았다. 본고에서는 근세 대마도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인식을 주로 영토와 경계인 식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이 시기 대마도에 대한 한일 양국의 인식을 살펴볼 때는 근대 국민국가적 관점에서 탈피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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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봅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체험합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집시다. 5. 우리 옷 한복의 특징 자료 3 참고 남자와 여자가 입는 한복의 종류 가 달랐다는 것을 알려 준다. 85쪽 문제 8, 9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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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국어에서 관용표현 지도 방안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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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보수정치인들의 역사인식과 역사적 전개 209 일본 보수정치인들의 역사인식과 역사적 전개 이종국 /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Ⅰ. 머리말 그동안 한일관계는 일본 정치인들의 과거사 관련 망언 으로 양국이 대립하는 상 황에 자주 직면하였다. 최근 역사인식 문제 1) 를 둘러싸고, 일본의 우파정치인과 투고: 2015년 10월 16일, 심사 완료: 2016년 2월 5일, 게재 확정: 2016년 2월 24일 1) 동북아시아에서 논쟁이 생겨나게 된 계기는 냉전이 종식되고 난 이후 일본의 침략 전쟁으로 인한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부터였다. 그리고 탈냉전 이후 근대 국가의 역할이 변화하면서 역사인식 문제도 새롭게 문제 제기 되었다. 일본에서는 90년대 전반 일본 정부가 법적책임을 부인하는 입장을 보이자, 1995년 일본의 가해 책임에 대한 대법정이 개최되면서 시민들에 의한 평화운동이 전개되었다. 90년대 후반은 반동기로 일본의 전후 역사는 자학사관 이라고 비판하면서 자국중심적인 역 사관을 주장하는 그룹들의 활동이 강화되었다. 따라서 90년대 역사인식을 둘러싼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 후 일본의 역사인식은, 글로벌 역사로 인식되는 흐 름도 있으나, 새로운 국가주의적인 경향이 강화되는 상황에 있다. 이러한 논의에 대 한 관련 문헌으로는 이하를 참고하기를 바란다. 다카하시 데쓰야, 임성모 옮김, 2009, 역사인식 논쟁, 동북아역사재단; 若 宮 啓 文, 2006, 和 解 とナショナリズ ム, 朝 日 新 聞 社 ; 若 宮 啓 文, 2014, 戦 後 70 年 保 守 のアジア 観, 朝 日 新 聞 社 ; 中 野 晃 一, 2015, 右 傾 化 する 日 本 政 治, 岩 波 書 店 ; 菅 英 輝 編, 2011, 東 アジアの

210 동북아역사논총 51호 보수적인 역사학자들이 역사수정주의 노선을 지지하면서 일본은 우경화 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한국을 비롯하여 동아시아 그리고 미국과 유럽국 가들이 염려하고 있다. 2015년 아베 신조[ 安 倍 普 三 ] 총리의 방미 후, 미국학자 들과 세계의 역사학자들이 연대하여 일본의 역사인식을 문제 삼아 성명서를 내는 등 과거와는 달리 일본의 역사인식 문제는 세계적인 문제로 확대되었다. 2015년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지 70년이 되는 해였다. 지난해 동아시 아 3국은 물론 관계국들은 관련 행사들을 치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여러 국가 의 전문가들은 전쟁종결과 전후 처리, 전후 질서에 관한 전후사 재평가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제2차 세계대전을 어떻게 기억 할 것인가? 그리고 전후 처리가 남긴 역사적인 의미를 기억하면서 어떠한 교훈을 얻을 것인가? 또한 그동안 진행된 가해자의 전후 처리 정책들을 상기하면서 무엇이 부족하 였으며, 그러한 것들을 향후 어떻게 보완하여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들을 주 로 논의하였다. 그러나 전후 질서를 둘러싸고 관계국들은 서로 인식을 달리하고 있다. 그 것은 전쟁책임론 2) 과 전후 질서 탈각 3) 과 같은 형태로 주장되었고, 역사인식 을 통한 정체성 수립과정에서 갈등으로 나타났다. 이 글에서는 그동안 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였는가? 를 둘러싸고 논의된 선행연구들을 확인하면서, 먼저 전후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면서 냉전기 歴 史 摩 擦 と 和 解 可 能 性, 剴 風 社. 2) 전쟁에 초점을 맞추어 일본의 근대사 전체를 문제시하는 것으로, 1945년 이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역사를 대상으로 하는 시각이다. 그리고 전쟁책임을 회피하는 일 본을 비판한다. 전쟁책임과 관련하여 일본 내에서는 전쟁책임 긍정파( 大 沼 保 昭, 高 橋 哲 哉, 小 管 信 子 )와 부정파( 小 堀 桂 一 郎, 渡 辺 昇 一 )로 나눌 수 있다. 3) 아베 총리를 비롯하여 일본의 보수정치인들에 의해 주장되는 것으로, 그들은 역사 교과서 기술을 둘러싸고 新 しい 教 科 書 をつくる 会 의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 고, 교과서 기술에서 위안부( 慰 安 婦 ) 문제를 삭제하려는 국민운동을 전개하기도 하 였다. 정치인들도 明 るい 日 本 国 会 議 員 連 盟 을 결성하여 일본의 자학사관을 비판 하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의 일본의 동향은 정치 차원과 민간 차원에서 동시에 전 후의 역사관을 바꾸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다카하시 데쓰야, 임성모 옮김, 2009, 앞의 책, 104쪽 참조.

일본 보수정치인들의 역사인식과 역사적 전개 211 동안 집권 자민당의 보수정치인들이 한일관계에서 어떠한 역사인식을 가졌는 가?를 중심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냉전이 종식된 후 일본의 보수정치인들이 자국의 정체성과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면서 역사수정주의 노선을 선택하는 과 정을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베 정부 등장 이후 우파 정치인들은 어떠한 역사인식을 하여 한일 간의 갈등을 유발했는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의 전후 질서 속에서 일본의 역사인식을 돌이켜 보면, 냉전이 시 작되면서 한일 양국은 안전보장과 경제성장이라는 두 가지 과제에만 집중한 결과 역사 문제는 이차적인 문제로 다루었다. 그 결과 식민지 문제와 제2차 세 계대전에 대한 전쟁책임과 같은 역사 문제 는 충분히 논의되지 못하였다. 그리 고 미완의 전후 질서가 형성되고 역사 문제는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논의 의 대상이 되지 못한 채 국교정상화와 같은 외교행위로 봉합되었다. 그러나 역사 문제는 일본 정치가들의 망언 등으로 거듭 외교 문제가 되었 으며, 이것이 정치와 외교에 영향을 미쳐 사죄와 반성을 촉구하는 형태로 진행 되었다. 198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상호의존 관계가 깊어지고 동시에 국가 간 우호적인 관계가 진전되면서도 역사 문제는 국가 간의 상호협력 관계를 약화 시키는 형태로 간헐적으로 나타났다. 일본의 역사인식을 둘러싼 문제는 정치인 개인의 사과와 장관직 해임이라 는 형태로 마무리되기도 하였으나, 냉전이 종식되고 글로벌화가 진전되면서 일본 내에서는 신대국주의 4) 와 신자유주의 개혁 5) 과 함께 중요한 쟁점이 되었 다. 동시에 민주당의 정책실패로 자민당이 정권을 탈환하고, 아베 총리가 집권 하면서 역사 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보다 보수 우익적인 경향으로 진행되었다. 4) 1990년대 이후 등장한 신대국주의 의 흐름은 전후 존재하였던 복고주의와는 달리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渡 辺 治, 2001, 日 本 の 大 国 化 とネオナショナリズムの 形 成, 桜 井 書 店, 139쪽 이하 참고. 90년대 이후 일본의 보수 우익 정치인들이 안전 보장면에서 새로운 우파의 정책 전환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참고로 1980년대부 터 일본의 내셔널리즘이 부활하기 시작하였으며, 두 가지 흐름에 따라 국가이념과 운동이 진행되었다. 鄭 敬 娥, 2011, 歴 史 認 識 をめぐる 日 韓 摩 擦 の 構 造 とその 変 容, 菅 英 輝 編, 東 アジアの 歴 史 摩 擦 と 和 解 可 能 性, 剴 風 社, 235~236쪽. 5) 渡 辺 修, 2013, 安 倍 政 権 と 日 本 政 治 の 新 段 階, 旬 報 社, 65 66쪽.

212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아베 정권 탄생 이후에도 일본 정치인들은 선거를 치르면서 포퓰리즘적인 입장에서 역사 문제를 왜곡하여 한일관계를 악화시켰다. 특히 하시모토 도루 [ 橋 下 徹 ]와 같은 선동적인 정치인은 모든 현상은 역사성이 있다. 또는 모든 나라가 전쟁에서 여성을 이용했다 는 주장을 하여 한일 간에 문제를 초래하였 으며, 정치인들이 망언하는 논리를 제공하였다. 비슷한 현상으로 혐한( 嫌 韓 ) 적인 서적이 증가하는 등 다른 국가에서 볼 수 없는 풍경들이 관찰되었다. 그 결과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점점 냉각되었다. 반면, 한국의 정치인들은 일본의 바람직한 역사인식이 모든 한일관계 정상화의 기본이라는 입장을 취하면서 일 본의 역사인식을 비판하였다. 즉 위안부 문제를 비롯하여 한일관계의 현안들 은 과거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바람직한 인식하에서 해결되어야 한다는 입 장이다. Ⅱ. 문제인식과 선행연구 일본의 역사인식 문제는 과거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행한 식민지 지배와 전쟁 범죄 행위를 둘러싸고 도덕적 법적책임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면서 제기되 었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 미국의 점령통치를 받으면서, 그리고 60 년대 일본의 경제성장이 어느 정도 완성되고 일본의 자립이 강조되기 시작하 면서 강한 국가 일본으로의 정체성, 그리고 냉전종식 이후 패권국가 미국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위치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논의되었다. 또한 잃어 버린 20년과 중국의 부상이라는 상황하에서 미래 일본을 둘러싼 논의가 진행 되면서 일본의 정체성 논의가 더욱 활발해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의 역사 인식은 일본이 주변국가들과의 관계 속에서 과거사와 전쟁을 어떻게 인식하느 냐의 문제로 학술적인 차원에서 논의되었으며, 일본의 보수우익 정치인들은 약화되는 일본을 지키기 위하여 침략전쟁을 부인하고 동시에 전후체제를 부정

일본 보수정치인들의 역사인식과 역사적 전개 213 하면서 바람직한 역사인식을 거부하고 있다. 그동안 진행된 선행연구를 세 그룹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먼저, 일본의 보 수적인 시각 6) 의 연구로, 일본 전후사의 해방이라는 입장에서 러일전쟁부터 아 시아 태평양전쟁까지라고 표현한 시기를 다룬 호소야 유이치[ 細 谷 雄 一 ]의 역 사인식이란 무엇인가? 는 보수와 진보를 넘어선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그러 나 호소야의 시각은 보수진영의 논리를 아주 세련되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한일 역사인식 문제를 연구한 기무라 칸[ 木 村 幹 ]의 일한 역사인식문제란 무 엇인가 가 있다. 둘째로, 리버럴한 시각에서 이루어진 연구 7) 로는 다카하시 데 쓰야[ 高 橋 哲 哉 ]의 역사인식 논쟁 이 있다. 데쓰야는 역사인식 문제를 총괄적 으로 다루면서, 동아시아 국가와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초국가적 역사인식의 가능성을 시험한 것으로 동아시아에 있어서 과거 극복을 하는 데 좋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 전후의 아시아관 속에서 역사인식을 비판하고 있 는 연구로는 와카미야 요시부미[ 若 宮 啓 文 ]가 있다. 그는 전후 70년 보수 정치 인들의 아시아관을 소개하면서 탈냉전 이후 일본의 정치지도자들의 역사인식 을 설명하였다. 또한 현재 일본의 우경화를 만들어 낸 원인을 분석한 연구로 나카노 고이치[ 中 野 晃 一 ]의 우경화하는 일본정치 가 있다. 마지막으로 국경 을 초월하여 역사인식을 공동연구하는 작업에 관한 연구로 8) 동북아역사재단 이 펴낸 역사적 관점에서 본 동아시아의 아이덴티티와 다양성 이 있다. 이 글 에서는 이러한 선행연구들의 분석을 참고하면서, 일본의 보수 정치인들의 역 사인식을 살펴보면서, 특히 일본의 역사인식의 중요한 전환기라고 할 수 있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小 泉 純 一 郞 ]와 아베 총리의 역사인식을 분석할 것이다. 6) 細 谷 雄 一, 2015, 歴 史 認 識 とは 何 か 日 露 戦 争 からアジア 太 平 洋 戦 争 まで, 新 潮 選 書 ; 木 村 幹, 2014, 日 韓 歴 史 認 識 問 題 とは 何 か, ミネルヴァ 書 房. 7) 다카하시 데쓰야, 임성모 옮김, 2009, 앞의 책; 若 宮 啓 文, 2006, 앞의 책; 中 野 晃 一, 2015, 앞의 책; Lind Jennifer, 2008, Sorry States: Apologies in International Politics, Cornell University Press. 8) 동북아역사재단 편, 2010, 역사적 관점에서 본 동아시아의 아이덴티티와 다양성, 동북아역사재단.

214 동북아역사논총 51호 Ⅲ. 냉전기 역사인식은 어떻게 다루어졌는가? 냉전기에 동아시아 질서에 있어서 역사 문제는 중요한 이슈가 아니었다. 냉전 기 한일 양국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공산주의에 대응하기 위한 안전보장 정 책이었다. 그러므로 당시 미국은 역사 문제와 관련된 사항에 관해서 동아시아 국가들과 논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9) 과거 동북아 냉전질서는 두 가지 요소에 의하여 구성되었다. 첫째는 미소를 중심으로 한 팍스 루소 아메리카라고 명명 되어진 세계질서였다. 둘째로는 두 초강대국에 의해 유지되는 강력한 대결구 조의 국제정치의 전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요소들이 냉전 초기부터 전쟁이 라는 형태를 거치면서 변용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질서 속에서 냉전기의 한일관계는 기능적인 명분보다는 실리 위주 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므로 역사인식 문제는 정책 당국에는 관 심 밖의 문제였으며, 혹시 문제가 발생하면 대응하기에 급급하였다. 즉 냉전체 제는 안전보장을 중심으로 한일관계를 가깝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는 주로 기능주의적으로 안전보장과 경제협력 분야에서 이루어 졌다. 그러나 냉전체제 는 역사 문제에서 한국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부분적으로 부정적인 역할을 하 여 식민지 청산을 어렵게 만든 측면도 있었다. 그러므로 한일관계는 냉전체제 의 변화와 함께 망언 과 사죄 요구라는 역사 문제의 형태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냉전구조는 한일 간의 역사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장애 요 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 이유는 미소 간의 냉전은 군사적 경제적 이데올로기 적인 차원에서 대립하였기 때문이다. 냉전의 대립이 진행되는 가운데 서방 진 영 간의 관계 정상화가 우선 진행되었으며, 식민지 청산 문제는 첨예하게 대립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그 결과 한일관계 속에서 역사 갈등 문제는 외교 문제의 쟁점이 되지 못하였다. 9) Mike Mochizuki, 2011, 修 正 主 義,ナショナリズム,グローバリぜ ション, 東 ア ジアの 歴 史 摩 擦 と 和 解 可 能 性, 剴 風 社, 439쪽.

일본 보수정치인들의 역사인식과 역사적 전개 215 냉전기 역사 문제는 주로 과거에 대한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 일본교과서 검정 문제를 둘러싼 갈등, 그리고 일본 국내에서는 야스쿠니 관련 법안을 둘러 싼 대립이 주요 내용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둘러싸고 일본은 항상 회피하려는 입장을 취하였다. 한일기본조약 에서도 과거청산 문제는 역사적 배경으로만 기록되는 등 문제점을 남기고 국교정상화 교섭이 진행되었다. 즉 역사 문제는 경제협력의 방식으로 부분적으로 해결된 것이다. 이렇게 역사 문제는 양국 간 교섭과정에서 배제되고 불완전한 국교정상화를 이루었다. 그 이후 양국은 이 따금씩 분출하는 역사 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모색 도 하였지만 처리되지 못한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당시 냉전구조 속에서 역사 문제가 처리되려면 어떠한 조건과 노력이 필요 하였을까? 물론 한일 양국은 역사 문제가 양국 간의 중심과제가 되기를 원하 지 않았고, 그 영향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서로 갈등요인을 관리하고자 노력하 였다. 당시 양국 지도자들은 경제 문제와 안전보장 문제가 중요하였으므로 역 사 문제에서 발생하는 긴장관계는 관리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 결과 국교정상화 교섭이 진행되었으며 1965년 국교정상화가 성립하였다. 이러한 한 일 간의 형태는 동아시아 냉전시스템 속에서 작동하면서 한일관계는 관리 대 상이 되었다. 10) 한국 정부는 역사 문제를 보류 상태로 하고 안전보장과 경제교류를 중심으 로 국가운영을 진행하였으나, 한국이 민주화되면서 그동안 보류상태에 있던 역 사 문제가 점점 목소리를 내게 되었고 정체성의 새로운 정의를 시작하였다. 이 러한 상황이 진행되면서 한일 양국은 기능적인 접근을 통하여 11) 역사 문제를 다 루었으나 1982년 교과서 문제 등으로 한일 양국의 갈등이 재현되기도 하였다. 일본의 역사왜곡으로 한국에서 반일 내셔널리즘이 강하게 나타나자, 일본 10) Christopher W.Hughes, 2011, 修 正 主 義,ナショナリズム,グローバリぜ ショ ン, 東 アジアの 歴 史 摩 擦 と 和 解 可 能 性, 剴 風 社, 163쪽; Victor D.Cha, 1999, Alignment Despite Antagonism: The United States Korea Japan Security Triangle, Stanford University Press. 11) Christopher W.Hughes, 2011, 위의 글, 164쪽

216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에서는 80년대부터 망언 이 분출 12) 하기도 하였다. 당시 자민당의 우파는 친한 파로 반공을 중시하면서 한일협력을 진행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과거의 역사를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이었다. 13) 1982년 제1차 교과서 문제에서 일본은 대외침략을 진출 로 표시하고, 3 1운동을 폭동 이라고 서술하여 한국 과 중국의 비판을 받았다. 14) 그러자 일본은 내정간섭 이라는 논리로 대응하는 등, 과거의 역사에 대한 인식 문제가 한일 간에 표면화되었다. 또 하나의 사건 으로는 1986년 9월 당시 문부대신이었던 후지오 마사유키[ 藤 尾 正 行 ]가 월간 잡지에 한일강제병합은 합의하에 이루어 졌다고 주장하고 한국에도 책임이 있다 고 기고하여 문제를 일으켰던 15) 제2차 교과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나카 소네 야스히로[ 中 曾 根 康 弘 ] 총리가 야스쿠니신사 참배 후 중국으로부터 비판 을 받고, 자신의 방침을 전환시키려고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으며, 의식적인 자민당 우파의 반발이었다. 이처럼 나카소네 정권에서도 일본의 강경파 정치 인들은 한국의 감정을 자극하는 논리를 전개하면서 자신들의 정당화를 계속 주장하였다. 그 이후 호소카와 모리히로[ 細 川 護 熙 ] 총리가 취임한 이후 1993 년 10월 이시하라 신타로[ 石 原 慎 太 郎 ]도 전쟁에 대해 일본이 사과할 필요가 없다 고 주장하는 등 자민당의 우파 가운데 반미파들은 반한적인 논리구조로 한국인의 감정을 건드렸다. 일본의 국내정치는 50년부터 70년대까지 고도성장기를 거치면서 서서히 자신감을 얻기 시작하자, 일본의 국가 내셔널리즘을 강화하는 환경을 만들어 갔다. 그리고 80년대 나카소네 정권에 이르러, 국제적으로 신자유주의의 흐름 과 함께 일본은 대국화 논의를 활발하게 진행하면서 역사왜곡을 강화해 나갔 음을 확인할 수 있다. 12) 박진우, 2013, 야스쿠니 문제의 논리적 비판을 위해서, 동북아역사재단 편, 일 본아베정권의 역사인식과 한일관계, 87쪽. 13) 若 宮 啓 文, 2006, 앞의 책, 206쪽. 14) 당시 일본 국내에서는 군국주의 대두의 증거라고 보기도 하였다. 木 村 幹, 2014, 앞의 책. 15) 若 宮 啓 文, 2006, 앞의 책, 208 209쪽.

일본 보수정치인들의 역사인식과 역사적 전개 217 1980년대 이후 일본의 역사인식은 역사교과서 논쟁 등을 통하여 왜곡된 역 사인식을 반영하기도 하였다. 특히 교과서 논쟁이 정치 문제화하면서 일본 정 부는 근린제국조항 을 추가하였다. 그리고 역사교과서에서 전시 가해 관련 내 용이 기술되면서 가해자의 책임을 묻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동안 침묵하였 던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피해자들이 큰 목소리를 내면서 전후보상에 대한 요 구도 높아졌다. 16) 그리고 위안부 문제도 80년대부터 한국의 시민운동단체들에 의해 문제 제 기 되기 시작하였다. 식민지 시대에 발생한 위안부 문제는 일본의 왜곡된 역사 인식 속에서 발생한 것으로 여성 문제라는 시각에서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이 러한 문제의식은 한일 양국에 새로운 역사인식을 요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 시 일본의 나카소네 정부는 이웃국가들의 역사교과서에서 보이는 역사관을 수 용하는 방향으로 다가섰다. 한국은 일본의 사회당과 함께 역사인식 문제로 협 력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하였고, 일본의 자민당과는 갈등관계를 유지하였다. 일본의 사회당은 식민지 지배 청산과 침략전쟁에 대한 책임을 일본 국회에서 제기하면서 17) 한국과의 관계개선 노력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도 하였다. Ⅳ. 냉전종식과 일본의 역사인식 탈냉전 후 동북아 질서는 냉전기의 엄격한 구조로부터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 면서 미중일 3국관계가 새롭게 전개되었다. 또한 세계에서 유일한 패권국이 된 미국은 새롭게 등장하는 중국의 대두 속에서 동북아시아 지역에 어떠한 형 태로 관여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정책의 변화를 모색하였다. 그리고 그 이외 16) 다카하시 데쓰야, 2009, 앞의 책, 117 118쪽. 17) 木 村 幹, 2014, 앞의 책, 144쪽.

218 동북아역사논총 51호 국가들은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18)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냉전종식과 함께 자국의 정체성을 강화하면서 동 시에 강대국화의 전략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미국과의 관계를 중요시 하였다. 동아시아 질서 속에서 일본의 위치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 그리고 대국주의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이러한 일본의 문제인식은 기 본적으로 일본의 내셔널리즘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과거 제국주의 침략성을 사과하지 않으면서 대국화를 이루려는 구상을 하였다. 19) 특히 자민당 우파에 속하는 보수주의 정치인들의 입장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새로운 대국주 의를 주장하는 분위기 속에서 일본의 보수정치인들은 침략전쟁, 식민지에 대 한 사과 등을 둘러싸고 충분한 사과와 행동을 하지 않고 오히려 역사왜곡을 하 면서 자신들의 논리를 정당화하였다. 일본 정치인들의 이러한 움직임과 관련하여 외국의 언론과 일본 국내, 그 리고 한국의 언론들은 과거보다 일본의 우경화 에 대하여 많은 비판을 가했다. 특히 일본의 안전보장과 역사인식 두 분야와 관련하여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 되었고 먼저, 안전보장 문제에서 보면 일본은 미일동맹을 중심으로 전개하고 있는 측면에서 우파적이고 군비확장을 중심으로 하는 안보정책을 채택하고 있 다고 염려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역사인식 문제는 과거의 침략전쟁에 대해 조 금은 반성하면서, 새로운 대국으로서의 행동과 과거를 구별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고 분석하였다. 1_ 역사왜곡과 망언 전후 일본 정치인들의 역사인식은 1995년 이전까지 망언 이라는 표현으로 널 리 표면화되었다. 당시 정치인들은 일본 국내 정치에서 자민당의 거물들로 자 신의 의정활동에서 어느 정도 경륜과 자신감을 가지고 있던 인사들이었으나 18) 로버트 케이건, 황성돈 옮김, 2015, 돌아온 역사와 깨진 꿈, 아산정책연구원. 19) 渡 辺 治, 2001, 앞의 책, 142쪽.

일본 보수정치인들의 역사인식과 역사적 전개 219 과거의 침략이나 식민지 지배에 관한 종합적인 지식에서는 이웃국가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였다. 그들의 주장은 세 가지 형태의 망언으로 전개되면서, 20) 한국 국내에서 비 판의 대상이 되었다. 먼저, 그들은 아시아 해방사관 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국 회결의가 있을 경우 표결 반대쪽에서 문제의 발언을 계속하였다. 대표적인 인 물은 자민당 우파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오쿠노 세이스케[ 奥 野 誠 亮 ]였 다. 그리고 법무대신이었던 나가노 시게토[ 永 野 茂 門 ]는 난징대학살의 날조론 을 주장한 인물로 오쿠노 보다 더욱 심각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그리고 이 러한 연장선에서 사쿠라이 신[ 桜 井 新 ]은 일본은 침략전쟁을 하려고 싸운 것 은 아니다. 아시아는 일본 덕에 유럽지배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하여 아시 아에 경제부흥의 기세가 생겨났다 고 문제적인 발언을 하여 경질되었다. 그리고 한일병합이 원만하게 이루어졌다 는 식의 망언 형태다. 식민지 지 배 와 침략 이라는 문구를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둘러싸고 국회에서 공방이 오가던 중, 와타나베 미치오[ 渡 辺 美 智 雄 ]는 일한병합은 원만하게 이루어진 국제적 조약 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국회에서 식민지 지배 와 침략 이라는 문구를 넣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언은 한국의 심각한 반발에 직면 하였다. 마지막으로, 일본이 좋은 것도 했다 는 망언 형태다. 무라야마 도미이치 [ 村 山 富 市 ] 총리가 무라야마 담화를 준비하는 중에, 에토 다카미[ 江 藤 隆 美 ]는 총리의 발언이 잘못이라고 지적하면서, 식민지시대에 일본이 좋은 것도 하였 다 고 주장하여 한국을 자극하였다. 당시 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였을까? 한일국교정상화를 진행하는 과정에 서 나타난 일본 외교관들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일본 정부와 의회 그 리고 여론은 전전 일본의 아시아관 21) 과 비슷한 인식을 하였기 때문이다. 20) 若 宮 啓 文, 2006, 앞의 책, 258 261쪽. 21) 일본의 아시아관은 대체로 대일본주의와 소일본주의로 나누어 설명이 가능하다.

220 동북아역사논총 51호 2_ 우경화 하는 일본 그들이 주장하는 망언은 기본적으로 전전 일본의 지도자들이 주장한 것과 비 슷하였다. 전후 50년이 되는 해인 1995년을 맞이하면서 일본 정치인들에게서 다수의 망언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일본 정치인들이 바라보는 아시아관 과 과 거사에 관한 부분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즉 사죄와 망언이 당시 한일관계 를 긴장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당시 3당 합의로 무라야마 총리가 무라야마 담화 를 채택하면서 담화의 중 심 내용인 과거의 침략, 식민지 지배, 통절한 반성 과 진심으로 사과 문제를 둘러싸고 자민당 우파 정치인들과 우익들의 저항이 강해졌다. 22) 자민당 우파 정치인들은 우익적인 활동을 강화하면서 내셔널리즘을 고양하고, 역사교과서 를 둘러싼 새역모 등이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예를 들면, 무라야마 정 권의 통산장관이었던 하시모토 류타로[ 橋 本 龍 太 郎 ]는 아시아 국가들을 상대 로 침략전쟁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는 등의 발언을 하면서 아시아 침략의 역사 를 왜곡하려고 하였다. 하시모토 역시 자민당 소속의 매파 국회의원으로 당시 진행되던 일본의 내셔널리즘을 강화하는 측에 속했다. 다음으로 와타나베는 강 제병합이 국제적으로 합법적이라는 것이 일본 정부의 입장 이라고 주장하여 한국 정부와 여론이 도발행위라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22) 당시 무라야마 정권은 전후 50년 결의를 채택하려고 하였지만, 사죄결의에 반대하 는 세력들이 존재하여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였다. 특히 오쿠노 등은 일본이 아시 아를 해방시켰다는 논리를 거듭 주장하며 무라야마 정권에 저항하였다.

일본 보수정치인들의 역사인식과 역사적 전개 221 Ⅴ. 고이즈미 총리의 역사인식과 한일관계 탈냉전 후 일본은 미일관계를 재조정하는 과정에서 냉전기처럼 순응하는 외교 정책을 전개하면서 어떻게 국익추구와 경제발전을 함께 이룩할 수 있을 것인 가? 혹은 동아시아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보통국가 내지 국제국가 혹은 문민국가 로 자신들이 직접 국제질서 형성에 관여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탈냉전기 일본은 이러한 의문점을 가지고 국제환경의 변화를 지 켜보면서 자신들의 역할을 모색하였다. 물론 일본은 자국의 안전보장 확보, 국 제적인 영향력 행사의 증대, 국제질서 형성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려 하였으나 주변국으로부터 신뢰가 결여된 상태에서 일본의 구상은 많은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고이즈미 총리는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하여 일본 경 제계의 동아시아 전략과 주변 국가들과 함께 공동체 구축을 실시하려는 구상 을 하고 있었다. 글로벌화가 진행되면서 일본의 경제단체는 일본기업의 동아 시아 진출을 통한 동아시아 경제권을 구축하여 거점지역으로 하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구상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고이즈미 총리의 외교정책 이 동아시아 여러 국가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진정한 동반자가 되어 야 했다. 이러한 구상이 이루어지면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지도력을 발휘하면 서 경제공동체를 통한 경제외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 었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는 당선 전부터 공약사항으로 한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로 동아시아 지역 국가들과 관계정상화는 멀어지게 되었다. 한국과 중국 의 비판을 받으면서 일본이 구상하던 동아시아 지역질서 구축이라는 구상은 점점 멀어져갔다. 그리고 일본의 경제계는 이러한 영향으로 경제교류가 후퇴 하면서 위기감을 갖게 되었으며 미국과 유럽과 같은 국가들과의 경쟁에서도 뒤쳐지게 되었다.

222 동북아역사논총 51호 당시 일본은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예를 들면 오부치 게이조[ 小 淵 恵 三 ] 전 총리가 주장한 21세기 일본의 구상 을 살펴보면, 21세기 일본은 열린 국익을 추구하는 글로벌 시빌리언 파워 국가로 국제사회에서 그 역할을 하기 위해서, 인간의 안전보장과 국제적인 공익을 고려하면서 종합적이고 중층적인 안전보 장을 확보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실천에 옮기기 위하 여, 일본은 동아시아 국가들과 협력관계를 강화하여야 한다고 강조되었으나, 고이즈미 정권은 주변국과의 신뢰구축보다는 국가의 정체성 강화정책을 실시 하여 많은 비판을 받았다. 23) 고이즈미의 등장은 일본의 대국화를 가속화하면서 동시에 군사대국화 단 계로 진입시키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대국화의 내용은 전후 일본이 경험한 것 에서부터 나온 교훈이었다. 첫 번째는 미국으로부터 가해지는 압력으로 대국 화 문제였다. 냉전종식 이후 세계 여러 지역이 정치적으로 불안정해지면서 새 로운 전략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경제의 글로벌화 확대로 일본기 업이 해외에서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였다. 그리고 군사대 국화는 미일안전보장을 재정의하면서 분쟁지역에서 일본의 역할을 강화는 것 이었다. 24) 이러한 대국화와 군사대국화가 요구되는 상황하에서, 고이즈미 총리의 역 사인식은 보수를 넘어 우익적인 사고를 하고 있었다. 고이즈미 정권의 목표는 일본의 국가의 정체성을 강화하면서 대국화를 가속화하고 동시에 군사대국화 를 실현시키는 것이었다. 고이즈미는 2006년 8월 15일 야스쿠니신사를 공식방 문하였다. 일본의 전쟁 패전일에 총리가 방문한 것은 21년 만이었다. 이것은 자신의 선거공약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일본 내셔널리즘의 복권 을 알리는 것이었다. 25) 이러한 그의 활동은 이미 총리에 당선되기 전부터 계산 된 행동이었다. 물론 그가 계산된 행동을 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 두 가지 가설 23) 고이즈미 정권하의 우경화 문제는 김영춘, 2005, 일본의 보수우경화와 국가안보 전략, 서울: 통일연구원, 43쪽. 24) 渡 辺 修, 2013, 앞의 책, 77 78쪽. 25) 若 宮 啓 文, 2006, 앞의 책, 14쪽.

일본 보수정치인들의 역사인식과 역사적 전개 223 이 제기되었다. 먼저, 나카소네보다 더 훌륭한 총리로 일본역사에 남으려고 하 였다는 것이다. 그의 노력은 미일관계의 강화와 우정민영화 그리고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으로 충분이 역사에 남을 수 있었으나, 주변 국가와의 관계에서 특히 한국과 중국과 갈등을 남기면서, 고이즈미는 과거의 침략성이나 식민지 문제와 같은 역사인식 문제에서 많은 한계를 보였다. 다음으로 그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통하여 획기적인 외교를 전개하려고 하였을지 모른다. 그는 식민 지 문제와 관련하여 계속 사과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한국의 이해를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26) 그러나 그의 역사인식과 행동은 거듭되는 야스쿠니신사 참배로 인해 모두 허사가 되고 말았다. 고이즈미 총리의 역사관을 두 가지로 정리하면, 먼저, 그는 야스쿠니신사 참배라는 형태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인 목표를 달성하려고 노력한 정치인이었 다. 즉 야스쿠니와 관련된 역사인식을 긍정적으로 보면서 한일 간의 역사갈등 을 유발시켰다. 그는 일본에서 야스쿠니 문제가 논의되는 촉매 역할을 하였 다. 27) 그리고 주변국과의 관계를 무시하는 인식을 하였다. 한국과 중국의 관계 는 물론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도쿄재판 부정론의 입장에 서는 등 관련 국가들 이 이해할 수 없는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고이즈미의 행동은 한국 과 중국에서 반일의 움직임을 초래하였고, 그동안 자민당 보수파들이 전개한 역사관련 정책들은 악순환을 거듭하게 되었다. 그는 일본 국내에서 구조개혁 이라는 이름하에 개혁을 단행하여 자민당의 구세력을 약화시키면서, 28) 이웃국 가들에게는 침략의 역사를 부정하는 퇴행적인 행동을 하였다. 고이즈미 정권기 동안 한일 간 세 가지의 역사 문제가 쟁점이 되었다. 하나 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 의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한 것이 다. 새역모의 교과서는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를 비판하면서 아시아 국가들과 26) 若 宮 啓 文, 2006, 앞의 책, 18~19쪽. 27) Sheila A. Smith, 2015, Intimate rivals, Columbia University Press, p.92. 28) 고이즈미는 다나카 가쿠에이[ 田 中 角 栄 ], 오히라 마사요시[ 大 平 正 芳 ] 전 총리 등 구 우파들이 추진한 아시아 화해정책에 반하는 정책을 전개하면서 자민당 내 새로 운 복고주의적인 국가주의 그룹들이 등장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224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의 화해에 부정적이었다. 특히 위안부 기술을 삭제하는 등 일본의 애국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였다. 고 이즈미는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고집하여 결국에는 한일관계와 중일관계를 단 절시켰다. 그러나 국내적으로 고이즈미는 야스쿠니신사 문제를 부분적으로 이 용하여 총리에 당선된 지도자였다. 과거 나카소네와는 달리 야스쿠니신사 참 배 문제를 철저히 이용하여 국내 정치에서 인기를 얻었다. 그는 자민당 총재선 거 전부터 지란[ 知 覽 ]특공대박물관을 방문하여 일본 유족회의 지지를 얻어 총 리가 되었다. 그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는 일본의 전쟁관을 긍정하는 것으 로, 단순히 아시아만이 아니라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많은 문제점을 남겼다. 이 러한 문제는 한일 간의 외교 문제이면서 동시에 정치 문제가 되어 갈등을 촉발 시켰다. 고이즈미 총리는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와 역사인식의 실패로 동아 시아 외교의 재건과 동아시아 질서구축이라는 자신의 목표를 전혀 진척시키지 못하고 물러났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은 스스로 커다란 약화를 초래하였으며 그 결과 일본 재계의 불만도 점점 더해졌다. 마지막으로 위안부 문제 해결이 어렵게 되었다. 위안부의 설치 모집 관리에 일본군이 관여하였다는 문제가 자료로 밝혀지면서 정치 문제로 이어졌고 소송도 제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서 일본의 우파들은 위안부 문제를 비판하면서 우파언론과 정치인들을 옹호하 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제1차 아베 내각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29) 고이즈미 정권기에는 일본의 역사인식이 잘못되면 될수록, 아시아 외교는 경색되는 현상이 계속되었고, 결국 일본은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아시아 의 통합보다는 분열을 부추기는 외교를 전개하였다. 고이즈미 총리의 계속되는 야스쿠니신사 참배로 한일관계는 최악의 상황 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총리 취임과 동시에 야스쿠니신사를 공식참배하여 자 신의 역사인식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중학교 교과서 검정결과가 오류 와 역사왜곡이 있어 한국은 일본에 수정을 요구하였다. 특히 새역모가 만든 교 과서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이 없음을 지적하고 수정을 요구하였으나 고 29) 若 宮 啓 文, 2014, 앞의 책, 265 266쪽.

일본 보수정치인들의 역사인식과 역사적 전개 225 이즈미 총리는 검정 후 재수정은 없다 고 말하여 한일관계 교류가 일시적으로 중단하게 되었다. 30) 고이즈미 총리는 한중 양국과 국제적인 비판을 받아가면서도 야스쿠니신 사 참배를 계속하며 완강한 고집을 부렸다. 그의 행동으로 한일관계는 점점 악 화되었다. 그는 재임기간 옛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하여 김대중 대통령과 한일 정상회담을 갖고,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한국 국민에 대해 많은 손해와 고통 을 준 것에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과하는 마음으로 시설을 참배하였다 고 의견 을 피력하였다. 그는 한일정상회담을 가지면서 위와 같은 역사인식을 보였으 며 한일 간의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구축하겠다고 강조하는 등 김대중 대통령 과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야스쿠니신사 참배로 비판받는 모습도 보여 주 면서, 한일 간의 관계 악화를 초래하였다. 2003년에 접어들자 마자 고이즈미는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여 한국 정부 로부터 비판을 받았지만, 그는 10월 8일 기자단에게 앞으로도 계속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겠다는 생각을 명확히 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이 방일하여 한일 정상회담을 가지면서 한일 양국이 과거의 역사를 직시하고 21세기 미래지향적 인 발전을 위해 전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공동발표를 하였다. 그 이후 한일 양국은 교류를 확대하면서 양국관계를 강화하여 나갔다. 그러나 2005년 2월 일본의 시마네 현이 죽도의 날 을 제정하는 조례를 제 안하면서 한일관계는 다시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6월 20일 한일정상회담에서 는 역사 문제가 초점이 되고, 노무현 대통령은 야스쿠니신사 문제가 핵심이 며,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대해 어떤 설명을 하더라도 역시 과거를 정당 화하는 것으로 이해되므로 거듭 그만두기를 바란다 는 취지로 설명하였다. 반 면 고이즈미 총리는 의견의 차이가 있어도 대국적인 견지로부터 양국관계를 원래의 궤도로 돌리고 미래지향적으로 진행하고 싶다 31) 고 말하였지만, 한일 양국의 입장 차이는 계속되었고, 결국은 야스쿠니신사 문제를 둘러싼 일본의 30) 内 山 融, 2007, 앞의 책, 136쪽. 31) 内 山 融, 2007, 위의 책, 146쪽.

226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잘못된 역사인식으로 인해 한일관계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경제관계는 희생 되었다. Ⅵ. 아베 정권의 역사인식 아베 총리는 경제와 안전보장이라는 측면에서 전후체제로부터의 탈각 을 궁극 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그를 포함한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자들의 논점은 일본 평화헌법 9조 등 일본의 자학사관을 수정하는 데 있다. 그리고 역사수정주의 자들은 일본인들이 집단적으로 자신들의 역사를 기억하도록 형태를 취하고, 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논리를 집단적으로 기억하고자 한다. 그 결과 일본 이 침략국이고 반주권 국가라는 사실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태도 32) 를 보이 고 있다. 아베의 등장이나 일본 내셔널리즘이 격화하는 것은 어쩌면 고이즈미 정권의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33) 아베 정권의 등장은 한일 간 역사전쟁의 시작이라고 염려되었다. 1_ 아베 정권의 성격과 사상 일반적으로 아베 정권의 성격에 대한 세 가지의 설명이 있다. 34) 먼저, 아베 정 권은 복고적이며 강경파 정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헌법 개정이나 교 육기본법 개정 등을 부르짖으며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 32) 菅 英 輝 編, 2011, 앞의 책, 168쪽. 33) 若 宮 啓 文,2014, 앞의 책, 17쪽. 34) 渡 辺 治, 2007, 安 倍 政 権 論 : 新 自 由 主 義 から 新 保 守 主 義 へ, 旬 報 社, 17 21쪽.

일본 보수정치인들의 역사인식과 역사적 전개 227 이 있다. 이에 대해 리버럴한 전문가들은 아베 정권의 위험성을 주장하며 위기 감을 표현하며 아베는 위험한 정치가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아베를 중심 으로 시모무라 하쿠분[ 下 村 博 文 ], 야마타니 에리코[ 山 谷 えり 子 ] 등 우파 정치 인들이 포진하고 있는 점을 강조하면서, 향후 일본의 대아시아 외교와 교육재 생에 대한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다음으로,아베 정권은 전후체제로부터 탈각하려는 정권이라는 것이다. 앞의 성격과는 대조적인 것으로 아베 정권이 주장하는 정책들을 지지하면서, 일본의 보수정치를 변화시키려는 입장으로 나카니시 테루마사[ 中 西 輝 政 ] 등 정론( 正 論 ) 과 쇼군[ 諸 君 ] 의 많은 논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들은 특히 중 국의 침투공작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강한 일본을 만들어야 하고, 무라야마 담 화의 수정과 근린제국조항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들의 논리는 헌법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고, 해석개헌을 통해 집단적 자위권도 인정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아베 정권은 약체 정권이라는 것이다. 아베 정권을 지지하는 그룹이 다양하므로 결국 정권의 수명은 단명할 것이라는 것이다. 아베 총리는 지도력이 부족하여 우익들의 언설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인사에 있어서도 논 공행상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제1차, 2차 아베 정부 인사 들의 면면을 보면 여러 파벌들 위에 총리가 존재하는 형태를 보였다. 이상과 같은 정권의 성격을 고려하면서, 아베 총리의 정치적 사상을 세 가 지로 지적할 수 있다. 먼저, 아베 총리는 전후 내셔널리즘으로부터 벗어나기 를 시도하고 있다. 그것은 전전 일본 제국주의가 저지른 침략전쟁을 부정하고 역사적인 반성을 하지 않는 것이다. 35) 과거 자신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 岸 信 介 ]의 내셔널리즘은 아시아주의 를 주장하면서, 동시에 반미국적 반식민지주 의 그리고 아시아 해방을 주장하며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것이었다. 이 러한 내셔널리즘의 대표로는 나카소네 전 총리가 있고, 그는 전후 일본에서 어 떻게 민족주의를 재건하고 일반국민에게 침투시킬 것인가를 고민하였다. 35) 渡 辺 治, 2007, 앞의 책, 208쪽.

228 동북아역사논총 51호 그러나 아베의 내셔널리즘은 그것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베의 내 셔널리즘은 글로벌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폐해들은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글로벌화와 신자유주의 개혁에 친화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둘째로, 아베는 신보수주의적인 주장을 하면서 구체적으로 일본의 전통, 가족, 국가재건론을 주장한다. 글로벌화하는 세계의 흐름에 반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교육기본법이 추구하는 개인주의, 자유주의 그리고 이를 초래 한 유도리 교육 과 같은 것을 개혁하여 어린이들에게 규율과 도덕을 가르쳐 국 가발전에 기여하게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베의 주장은 전후 일본의 경제 성장으로 인해 일본사회의 가치관이 붕괴되고 사회가 약화되었기 때문에 이러 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베 총리는 전통적인 공동체를 유지하고 개건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36) 셋째로, 아베 총리는 새로운 국가주의 사상을 주장하고 있다. 자신의 저서 에서 아름다운 나라 일본을 만들기 위해서는 교육기본법 개정, 개헌절차법 제 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전후로부터 일본이 새로운 자주를 하여야 한다 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지금까지 일본은 아름다운 나라를 가지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닌가, 무엇이 아름다운 나라인가를 정의할 필요가 있 다는 반론도 있다. 2_ 역사인식의 후퇴 일반적으로 역사 문제에 대한 인식은 경험과 학습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아베 총리는 역사인식에 있어서 왜 우익적인 사고를 가졌을까? 가문의 영향으로부 터 혹은 우익적인 인사들로부터 학습된 결과인가? 물론 두 가지 모두 해당될 것이다. 그의 정치활동을 보면 그의 역사인식을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아 베 총리는 호소카와 전 총리의 침략전쟁 인식에 대한 반대운동에 참가하였고, 36) 渡 辺 治, 2007, 앞의 책, 212쪽.

일본 보수정치인들의 역사인식과 역사적 전개 229 이어서 자민당의 야스쿠니 관계 검토위원회 에 참가 37) 하면서부터 역사 문제에 대한 인식은 편향적으로 되었다. 그리고 무라야마 정권 성립과 동시에, 일본 국회에 종전 50주년 국회의원 연맹 이 결성되자 아베 총리는 사무국 차장을 맡으며 연맹의 간부가 되었다. 당시 연맹의 취지서는 전쟁을 긍정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전후 처리가 끝났음 을 강조하고 2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국회의 결의를 용인하지 않는 입장을 취 하였다. 38) 그러나 1995년 6월 9일 중의원에서 자민당, 사회당, 사키가케 3당의 지지로 역사를 교훈으로 평화에 대한 결의를 명확히 하는 결의 39) 를 채택한 후, 일본에서 다수의 합의로 인식되었고 일본 정부의 기본인식이 되었다. 그러 나 1996년 위안부 문제가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에 기술되자, 연맹의 간부들 은 밝은 일본 국회의원 연맹 을 결성하고 기술의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 고 일본의 미래와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 모임 을 통해 교과서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을 보면, 고이즈미 정부 이후 등장한 역사수정주의자들이 자 국중심적인 역사인식을 하면서 한국과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우경화 활동이 계속되자 한국과 중국에서도 내셔널리즘이 강화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40) 2002년 9월 고이즈미 전 총리의 평양 방문 이후 일본여론은 납치 문제로 우경화해가기 시작하였으며, 배외주의가 강하게 진행되는 상황이 전개되었지 만 일본의 진보진영은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일본에서 새로운 37) 和 田 春 樹, 2006, 安 倍 晋 三 氏 の 歴 史 認 識 を 問 う, 世 界 10월호. 38) 和 田 春 樹, 2006, 위의 글. 39) 이 결의에서 일본도 침략적 행위, 식민지 지배로 아시아 여러 국민에게 고통을 가 하였다고 인식하고, 깊은 반성을 표명하였으나, 연맹의 오쿠노 의원 등은 기자회 견을 열고 결의안 반대의 의지를 표명하였다. 和 田 春 樹, 2006, 위의 글. 무라야마 담화는 그 이후 하시모토, 오부치, 모리 요시로[ 森 喜 郞 ], 고이즈미 총리에 의해 견 지되었다. 40) 진창수, 2013, 일본정치권의 변화와 아베정권의 역사인식, 도시환 박진우 편, 일본 아베정권의 역사인식과 한일관계, 동북아역사재단; 이면우, 2014, 일본정 계의 우익 성향 강화와 동북아, 세종연구소.

230 동북아역사논총 51호 형태의 민족주의가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염려된다. 즉 보통국가 론의 등장과 전후 정치 총결산 등을 통하여 일본의 역사를 수정하겠 다는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점점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 3국은 역사교과서 문제, 도쿄재판,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 등과 같은 이슈에 서로 민감하여, 잘못된 일본의 역사인식에는 서로 강한 비판을 가 하고 있다. 동시에 이러한 문제들은 글로벌화의 진전으로 국제사회가 규범과 가치를 중시하기 시작하자 국제적인 이슈가 되고 시민단체들의 국제적인 연대 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색도 나타났다. 탈냉전으로 동아시아에서는 일본과의 관계가 수직적인 관계에서 수평적인 관계로 변화하면서 일본의 우익들은 가해 의 기억 을 말살하려는 움직임을 보임으로써 한국과 중국을 자극하여 대항하는 민족주의를 자극하고 있다. 한국과 중국은 도덕성을 강조하면서 일본의 역사 에 대한 반성을 강조하고 있으나, 일본은 과거에 대한 반성, 전쟁책임에 대한 반성보다는 주기적으로 망언을 행하기도 하고, 새로운 역사교과서 집필과 같 은 폐쇄적인 민족주의를 선택함으로써 동아시아 각국들과의 역사인식 공유 의 기회를 잃어가고 있다. Ⅶ. 맺음말 일본의 역사인식과 우경화 에 대해서는 주로 한국언론이나 외국의 언론이 많 은 비판을 하였고, 일본 국내에서는 안전보장과 역사인식 두 분야 중에서 주로 안전보장을 강화하기 위한 환경관련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대 조적인 모습은, 아베 정부는 안전보장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보 여주고 있다. 즉 미일동맹을 중심으로 우파적이고 군비확장을 중심으로 하는 안보정책을 전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한편 역사인식의 측면에서 아베 정부는 반일하는 주변 국가들의 환경변화에 과거보다 우파적인 대응을

일본 보수정치인들의 역사인식과 역사적 전개 231 하는 경향을 많이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동안 많이 이야기된 교과서 문제 등을 보더라도, 과거 시민운동 차원에서 전개되던 리버럴한 분위기로부 터 그들은 학습하면서, 냉전이 종식되면서 가치관의 흔들림 현상이 보이자, 포 퓰리즘적인 츠쿠루카이[つくる 会 ] 운동 등을 전개하면서 보수운동의 하나의 형태로 교과서 채택운동을 전개하였다. 현재 일본은 보수연합을 통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역 사 문제에서는 국가주의적인 사관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역사관을 확대해 나가 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 이후 보다 적극적으로 진행된 일본의 전통으로 회귀하 려는 현상은 현실정치나 동북아 국제정치에서 강한 국가 일본의 정책들을 수 행하는 데 기초가 되고 있다. 이처럼 일본이 진행하는 역사수정주의의 흐름은 향후 동북아시아 국제정치에 긍정적인 역할보다는 지역통합이나 공동체 형성 에 장애요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만약 일본에서 야당이나 리버럴한 그룹들이 대안을 찾지 못한다면 현재와 같은 소선거구제와 같은 구조에서는 별다른 선 택지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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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 동북아역사논총 51호 [국문 초록] 일본 보수정치인들의 역사인식과 역사적 전개 이종국 이 글은 일본정치인들이 전후 역사인식을 어떻게 하였는가를 설명하였다. 첫 번째로, 냉전기 역사인식 문제는 과거에 대한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 일본교과 서 검정 문제를 둘러싼 갈등, 그리고 일본 국내에서 야스쿠니신사 관련 법안을 둘러싼 대립이 그 내용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둘러싸고 일본은 항상 회피하려 는 입장을 취하였음을 지적하였다. 두 번째로, 냉전종식 이후 일본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강대국화의 전략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문제인식은 기본적으 로 일본의 내셔널리즘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과거 제국주의 침략성을 사과하 지 않으면서 대국화의 구상을 하고 있음을 설명하였다. 세 번째로, 고이즈미 총리는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하 여 일본 경제계의 동아시아 전략과 주변 국가들과 함께 공동체 구축을 실시하 려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구상은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로 인해 한국과 중국의 비판을 받으면서 동아시아 지역질서 구축이라는 일본의 초기 구상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마지막으로, 아베 총리는 경제와 안전보장을 강화하면서 전후체제로 부터 의 탈각 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그 결과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자들은 일본 집단적으로 자신들의 역사를 기억하는 형태를 취했고, 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 는 논리를 집단적으로 기억하려 한다고 설명하였다. 주제어 우경화, 망언, 역사수정주의, 한일관계, 아베 역사인식

일본 보수정치인들의 역사인식과 역사적 전개 235 [ABSTRACT] The Historical Perceptions of Conservatives in Japan and the Development of History Lee Jongguk This article describes how Japanese politicians comprehend postwar history. First, the historical perception problem for the Cold War period includes the remarks of Japanese politicians regarding the past, the conflict surrounding the Japanese textbooks issue, and legislation related to Yasukuni Shrine. Japan has always avoided taking a stance with respect to those issues. Second, after the end of the Cold War, Japan started pursuing the super power strategy for strengthening the country s identity. This is closely related to Japanese nationalism. But Japan has dreamed of becoming a superpower without apologizing for the imperialist invasion. Third, former Prime Minister Koizumi Junichirō planned to forge an East Asian community with neighboring countries in order to exert leadership in East Asia. But his conception has disappeared under criticism from China and South Korea regarding the Yasukuni Shrine issue. Finally, Abe Shinzō has focused on riddance from the postwar system, and upon strengthening national security and enhancing economic growth. As a result, historical revisionists in Japan have taken a stance remembering collectively their history.

236 동북아역사논총 51호 Keywords conservative swing, ludicrous statements, historical revisionism, Korea Japan relationship, Abe Shinzō s historical recogni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