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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 2014년 3월 제57권 제1호, pp. 1-25 장성택 숙청 이후 김정은 체제의 안정성 평가* 1)정성장 ** Ⅰ. 문제의 제기 Ⅱ. 장성택의 실제 영향력과 숙청 배경 Ⅲ. 주요 권력기구와 파워 엘리트의 위상 변화 Ⅳ. 장성택 숙청 이후 김정은의 유일적 영도체계 강화 Ⅴ. 맺음말: 김정은 체제의 안정성 평가 요 약 일부 전문가들은 장성택 숙청이 김정은 체제의 불안정성 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 했고, 심지어 이를 급변사태의 신호탄 으로까지 해석했다. 이 같은 평가는 장성택이 북 한 지도부에서 차지하고 있던 위상에 대한 과대평가 및 김정은의 권력 장악력에 대한 과소평가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김정은은 2009년 2월부터 당시 북한군 총정치국의 김정각 제1부국장과 김원홍 조직 부국장을 통해 군부 엘리트들을 장악해왔고, 동년 4월부터는 직접 국가안전보위부장직 을 맡아 당과 국가의 파워 엘리트들을 감시 통제해왔다. 그러므로 북한의 핵심 파워 엘 리트 중 장성택 추종 세력은 외부에서 추정하는 것처럼 많지 않고, 엘리트들에 대한 김 정은의 장악력은 매우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장성택 숙청 이후 당에서는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의 조연준, 김경옥 제1부부장들, 군 대에서는 최룡해 총정치국장, 공안기관에서는 김원홍 국가안전보위부장, 내각에서는 박 봉주 총리의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 그리고 김정은의 유일적 영도체계가 더욱 강화되어 장성택 숙청으로 북한체제가 불안정해질 가능성은 매우 낮은 것으로 평가된다. 핵심어: 북한, 김정은 체제, 장성택, 숙청, 정치적 안정성 *이 논문은 2011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1-362-H00001)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연구실 수석연구위원.

국방연구 57 1 2 Ⅰ. 문제의 제기 지난 2013년 12월 8일 북한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를 개최해 장성택 국 방위원회 부위원장의 반당 반혁명적 종파행위와 관련한 문제 를 토의한 후 그를 모든 직 무에서 해임하고 출당, 제명을 결정했다. 1) 그리고 4일 후인 동년 12월 12일 국가안전보위 부 특별군사재판소에서 장성택에게 국가전복음모행위 혐의로 사형 판결을 내리고 이를 곧바로 집행했다. 2) 그동안 한국의 다수의 전문가들과 언론이 북한의 명실상부한 제2인 자 로 간주해온 장성택이 하루아침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다. 장성택 숙청과 관련 다수의 전문가들은 장성택 숙청이 김정은 체제의 불안정성 을 보 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했고, 일부 전문가들은 이를 심지어 급변사태의 신호탄 으로까지 해석했다. 3) 예를 들어 한 전문가는 겉으로는 장성택 제거는 김정은 1인체제를 강화시켜 준 것으로 보이지만 큰 우산이 사라져 김정은은 온갖 비바람을 혼자 막아내야 하는 처지 가 되었고, 북한체제의 불안정성은 증대되고 북한의 붕괴 가능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고 주장했다. 4) 또 다른 전문가는 김정은 정권이 단기적으로 안정되더라도 중 장기적으로 계획경제와 시장화로 인한 체제불안, 김정은의 무능, 엘리트 간 권력갈등, 대북 경제제재 등으로 인해 불안정성이 심화될 것 이라고 전망했다. 5) 이 같은 평가는 장성택이 북한 지도부에서 차지하고 있던 위상에 대한 과대평가 및 김정 은의 권력 장악력에 대한 과소평가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한 전문가는 장성택 이 40여 년간 북한 정권에서 2인자로 권력을 행사 해왔고, 김정일 국방위원장 와병 이후 김정은 후계체제 구축 과정과 김정은 정권 공식 출범까지 전 과정에서 사실상 북한을 실질 적으로 통치하는 1인자나 다름없이 권력을 행사 해 왔다고 주장했다. 6) 그런데 만약 이 같 은 주장이 사실과 괴리되어 있고 장성택의 영향력이 제한적이었다면 장성택 숙청이 북한 체제의 안정성에 미칠 영향도 제한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본고의 제2절 은 북한 지도부 내에서 장성택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위상에는 부침이 1) 로동신문, 2013. 12. 09. 2) 로동신문, 2013. 12. 13. 2009년 화폐개혁을 주도했던 박남기 전 당중앙위원회 계획재정부장도 국가안전부 특별군사재판소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정창현, 장성택 사건 숨겨진 이야기 (서울: 선인, 2014), p. 55. 3) 헤럴드경제, 2013. 12. 13 사설. 4) 강철환, 장성택 사태의 본질, 그는 왜 잔혹하게 처형당했나, 북한, 2014년 1월호, p. 30. 5) 오경섭, 장성택 숙청 이후 김정은 정권의 불안정성, 정세와 정책, 2014년 2월호 (성남: 세종연구소), p. 11. 6) 최선영, 北 김정은, 장성택 처형 신속 처리 왜, 연합뉴스, 2013. 12. 13.

장성택 숙청 이후 김정은 체제의 안정성 평가 3 없었는지, 파워 엘리트에 대한 김정은의 영향력은 어떠한지 구체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그리고 장성택 숙청 이후 북한 체제의 안정성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파워 엘리트 그룹 내의 동요 가능성을 김정은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지 분석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제3절에서는 북한 파워 엘리트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기구들인 국가안전보위부 와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그리고 이 기구들의 핵심 엘리트 및 북한군을 정치적으로 통 제하는 최룡해 총정치국장의 위상과 역할에 어떠한 변화가 발생하고 있는지 분석할 것이 다. 또한 장성택 숙청이 북한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김정은 체제의 정치적 불안정 성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는지를 검토하기 위해 현재 북한 경제를 이끌고 있는 내각과 박 봉주 총리의 장성택 숙청 이후 위상 변화도 분석할 것이다. 제4절에서는 장성택 숙청 이후 김정은의 유일영도체계 강화 경향을 분석하고, 제5절 결 론 부분에서는 김정은 체제의 안정성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를 내릴 것이다. Ⅱ. 장성택의 실제 영향력과 숙청 배경 북한이 2013년 12월 8일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지적한 장성택의 죄명과 12월 12일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소가 내린 죄명 간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에서는 장성택의 반당 반혁명적 종파행위 에 대해서만 지 적했는데, 4일 만에 갑자기 죄명이 국가전복음모행위 로까지 확대된다. 이는 북한이 장성 택의 반당 반혁명적 종파행위 혐의만 가지고 사형 판결을 내리는 것을 대외적으로 정당 화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해 장성택에게 국가전복음모행위 라는 용납하기 어려운 죄 명을 뒤집어씌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북한 국가안전보위부가 장성택에게서 국가전복음모행위 를 했다는 자백 을 이끌어내 기 위해 그를 고문하고 구타했다는 것은 북한이 공개한 사진을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확인 된다. 그러므로 북한이 2013년 12월 8일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를 통해 지적한 죄 명이 장성택의 진짜 숙청 이유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은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장성택의 해임 사유와 관련, 그가 앞에서 는 당과 수령을 받드는 척하고 뒤에 돌아앉아서는 동상이몽, 양봉음위 7) 하는 종파적 행위 를 일삼았다 고 밝혔다. 장성택이 정치적 야심으로부터 출발하여 지난 시기 엄중한 과오 7) 북한 사전에 의하면 겉으로는 지지하고 받드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반대하고 뒤로 돌아서서 딴 짓을 하는 것 을 의미한다. 사회과학출판사, 조선말대사전 (2)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92), p. 1409.

국방연구 57 1 4 를 범하여 처벌을 받은 자들을 당중앙위원회 부서와 산하 단위 간부대열에 박아 넣으면서 세력을 넓히고 지반을 꾸리려고 획책 했다는 것이다. 8) 장성택이 스탈린주의체제에서는 용납이 되지 않는 종파행위 를 했다는 것은 그의 과거 경험에 비추어볼 때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이미 김일성 시대에 장성택은 김정일의 피 로회복관 건설, 1989년 제13차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준비, 1990년대 초 평양의 통일거 리 건설 등 김정일의 특별지시를 집행하면서 장성택의 말은 곧 김정일의 말로 인식되었 고, 장성택은 김일성 김정일 다음 가는 위상과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북한에서 1호 행 사(김일성 부자가 참석하는 회의)가 진행되는 경우 모든 간부들은 직급에 관계없이 최소 한 30분전에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하지만 장성택만은 예외였다. 그는 김일성 부자 가 나오기 10분전에 나왔고 먼저 나온 모든 간부들은 그에게 90도로 정중히 인사를 올리 는 것이 관례 가 되었다. 그리고 북한 간부들은 장성택을 장 부장 동지 라고 부르면서 친 애하는 지도자 동지 (김정일)를 부를 때만큼이나 존경과 아부의 정을 담아 불렀다. 장성택 은 그야말로 김정일의 분신( 分 身 ) 과 같은 대우를 받은 것이다. 이처럼 장성택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자 장성택 측근들의 영향력도 커지게 되었고, 장성택에게 줄을 서려 는 간부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9) 이처럼 김정일의 분신 행세를 하던 장성택에게도 시련의 시기가 있었다. 장성택 당중 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은 2003년 7월 초 김정일의 자강도 강계시내 산업시설 및 교육기관 시찰 수행 이후 공식석상에서 사라졌다. 흥미롭게도 장성택이 공식 석상에 서 사라진 시점은 황장엽 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비서가 한국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 린 탈북자 북한인권 문제 토론회 에 참석해 김정일 체제가 무너질 경우, 그래도 다음을 이을 사람들이 있는데, 지금으로서는 장성택이 제일 가깝다 고 지적하고, 장성택이 노 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사방에 자기 사람을 박아놓았다 10) 고 말한 2003년 7월 4일 직후이다. 11) 장성택은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의 다른 제1부부장들과 함께 김정일 다음으로 영향 력 있는 직책에 있었고, 공안기관 및 사법 검찰기관에 대한 당 생활 및 정책적 지도를 담 당했다. 12) 또한 당시 장성택의 큰형 장성우가 평양 방어를 책임진 차수 계급의 3군단장이 8) 로동신문, 2013. 12. 09. 9) 고영환, (북한외교관 고영환이 밝히는) 평양 25시 (서울: 고려원, 1992), pp. 11-154 참조. 10) 조선일보, 2003. 07. 05. 11) 정성장, 현대 북한의 정치: 역사 이념 권력체계 (서울: 한울아카데미, 2011), p. 138.

장성택 숙청 이후 김정은 체제의 안정성 평가 5 었고, 둘째형 장성길도 인민군 중장으로 군단 정치위원이었기 때문에 장성택은 김정일의 갑작스러운 유고시 정권을 장악하기에 가장 유리한 위치에 놓여 있는 인물로 외부 세계에 서 주목받아왔다. 그런데 김정일이 장성택에게 크게 의존하기는 했지만 그를 자신의 후계 자로 내세울 생각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황장엽의 발언 이후 김정일과 고용희 13) 는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김정철이나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세우는데 장애가 될 수 있는 장성택의 영향력을 서둘러 축소시킬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으로 보인다. 14) 장성택은 공식석상에서 사라진 후 종파(파벌)행위 와 권력남용 등으로 당으로부터 집중 검열을 받았다. 북한은 수령 과 수령의 후계자 이외의 당 간부 주위에 사람이 모 이는 것을 종파행위 로 간주해왔기 때문에 주변에 다수 측근세력을 형성한 장성택이 종파행위 를 해왔다고 볼 수 있다. 과거에는 그가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의 남편이고 김정일이 그에게 크게 의존했기 때문에 그러한 행위가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그러나 김 정일이 환갑이 지남에 따라 후계자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하게 되고, 그의 부인 고 용희가 유선암으로 사망하기 전에 그녀의 두 아들 중 하나를 후계자로 지명하기 위해 서 두르게 됨에 따라 장성택의 종파행위 는 김 총비서에게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15) 장성택의 직무정지는 그의 측근들의 해임 또는 좌천으로 연결되었다. 장성택의 측근 중 최춘황 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 리광근 무역상, 박명철 체육지도위원장 등은 해임되어 김일성고급당학교에서 재교육을 받거나 농촌으로 추방된 것으로 알려졌 다. 그리고 2003년 7월에 임명된 최룡수 인민보안상은 만 1년 만에 해임되었으며, 지재룡 당중앙위원회 국제부 부부장도 지방의 노동자로 좌천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장성택 파벌 이던 군 장성급 7~8명도 지휘관 등의 자리에서 물러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약 80여 명 의 장성택 계열 고위 간부들을 대상으로 집중 조사가 진행되었다는 보도도 나왔다. 16) 장 성택의 형 장성우는 2004년 상반기에 평양 방어를 책임진 3군단장직에서 물러나 민간무 12) 현성일, 북한노동당의 조직구조와 사회통제체계에 관한 연구, 한국외대 정책과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9), p. 43; 연합뉴스, 2003. 07. 27. 13) 김정은의 모친 이름은 오랫동안 잘못 알려진 것처럼 고영희 가 아니라 고용희 이다. 정성장, [ 김정일의 요 리사 후지모토 겐지의 재방북 후 첫 인터뷰] 김정은의 어머니 이름은 고영희 아닌 고용희 확인, 월간중앙, 2013년 8월호, pp. 80-84; 로동신문, 1972. 12. 31; 고경택, 복받은 우리 가정, 조선, 1973년 4월호, pp. 30-31 참조. 14) 정성장(2011), pp. 138-139. 15) 정성장(2011), p. 139. 16) 연합뉴스, 2003. 07. 27, 2004. 07. 11, 2004. 11. 26; 조선일보, 2004. 07. 12, 2004. 11. 25.

국방연구 57 1 6 력을 관장하는 당중앙위원회 민방위부장을 맡게 되었는데, 이는 유사시 장성우가 장성택 의 권력 장악을 돕기 위해 군대를 동원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인사 조치 로 해석된다. 17) 장성택은 고용희가 유선암으로 사망한 후인 2006년 1월 28일 국방위원회가 주최한 설 연회에 김정일 총비서와 함께 참석, 정치무대에 복귀하였으며 당중앙위원회 근로단체 및 수도건설부 제1부부장 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2007년 10월경 장성택은 당중앙위원회 행 정부장으로 승진하면서 2004년 직무정지 당하기 전 조직지도부의 행정 담당 제1부부장 으로서 맡았던 업무를 다시 관장하게 되었다. 18) 이처럼 장성택은 외형적으로는 과거의 지 위를 되찾게 되었지만, 종파행위 로 인해 다시 낙마하지 않도록 보다 신중하게 처신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2008년 8월 김정일의 뇌혈관계 이상은 장성택에게 김정은의 후계체계 구축을 지원해 야 하는 새로운 과제를 안겨주면서 장성택의 영향력도 다시 커지게 되었다. 그러나 장성 택이 김정일 국방위원장 와병 이후 김정은 후계체제 구축 과정과 김정은 정권 공식 출범 까지 전 과정에서 사실상 북한을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1인자나 다름없이 권력을 행사 해 왔다는 일부 전문가의 주장 19) 은 명백히 사실과 다르다. 2009년부터 2011년 김정일 사망 시까지 김정은의 군부 장악을 지원했던 엘리트들은 당시 김정각 군 총정치국 제1부국장, 김원홍 총정치국 조직부국장, 리영호 총참모장 등으로 장성택은 김정은의 군부 장악과 관 련해서는 거의 기여하지 못했다. 20) 그리고 김정은이 2009년 4월경부터 국가안전보위부 장 직을 맡아 북한의 모든 파워 엘리트들을 감시 통제하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으므로 장 성택의 직접 휘하에 있는 인사들이나 경제적 이권과 관련된 인물들을 제외하고는 장성택 의 측근 이 되어 그에게 줄을 섰던 최고위급 인사들은 드물었을 것이다. 김정은은 2012년 10월 29일 김일성군사종합대학에서 열린 김일성 김정일 동상 제막식 에서 한 연설에서 당과 수령에게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군사가 다운 기질이 있고 작전전술에 능하다고 해도 우리에겐 필요 없다 21) 고 강조하면서 과거 김정은의 군사명령 지휘체계 수립을 보좌했던 리영호 총참모장의 해임을 정당화한 바 있다. 이 같은 논리를 17) 정성장(2011), pp. 139-140. 18) 정성장(2011), p. 140. 19) 최선영(2013). 20) 정성장, [북한 인물 탐구] 장성택 당중앙위원회 행정부장2: 김정은의 부상과 장성택 승진 간의 함수관계, NKvision, 2013년 3월호, p. 48 참조. 21) 연합뉴스, 2012. 11. 02.

장성택 숙청 이후 김정은 체제의 안정성 평가 7 장성택에게 적용한다면, 장 부위원장이 김정은의 고모부이고 과거 김정은의 후계체계 구 축과 김정일 사후 김정은의 국정 장악에 큰 기여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와 그의 측근이 당 과 수령 에게 충실하지 못하면 필요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2013년 6월 19일 김정은은 당, 국가, 군대 등의 핵심 간부들에게 한 연설을 통해 1974년 에 김정일이 발표했던 당의 유일사상체계확립의 10대 원칙 을 대체하는 당의 유일적 령 도체계 확립의 10대 원칙 을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유일영도체계 강화를 본격적으로 추진 했다. 김정은은 이 연설에서 당과 수령에 대한 충실성을 척도로 하여 모든 사람들을 평가 하고 원칙적으로 대하며 당에 불충실하고 당의 유일적령도체계와 어긋나게 행동하는 사 람에 대해서는 직위와 공로에 관계 없이 날카롭게 투쟁을 벌려야 한다. 고 주장했다. 그리 고 당의 통일단결을 파괴하고 좀먹는 종파주의, 지방주의, 가족주의를 비롯한 온갖 반당 적 요소와 동상이몽, 양봉음위하는 현상을 반대하여 견결히 투쟁하여야 한다 (강조는 필 자)고 강조했다. 22) 이 같은 새로운 10대 원칙 의 제시를 통해 김정은의 유일적 영도체계 수립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과거에 크게 문제되지 않았던 장성택의 종파행위 가 심각 한 문제로 부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북한은 2013년 12월 8일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 보도를 통해 당에서는 장성 택 일당의 반당반혁명적 종파행위에 대하여 오래전부터 알고 주시해오면서 여러 차례 경고도 하고 타격도 주었지만 응하지 않고 도수를 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수수방관할 수 없어 장성택을 제거하고 그 일당을 숙청함으로써 당 안에 새로 싹트는 위험천만한 분파 적 행동에 결정적인 타격을 안기였다 고 주장했다. 23) 북한이 장성택을 제거하고 그 일 당을 숙청함으로써 당 안에 새로 싹트는 위험천만한 분파적 행동에 결정적인 타격을 안 기였다 라고 분파적 행동 제거를 과거형으로 묘사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볼 때 장성택과 그의 측근 세력의 제거가 이미 어느 정도 완료되었고, 후속 숙청은 크지 않을 것으로 예 상해볼 수 있다. 2013년 12월 8일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 보도는 또한 장성택이 권력을 남용하 여 부정부패 행위를 일삼고 여러 여성들과 부당한 관계를 가지였으며 고급식당의 뒷골방 들에서 술놀이와 먹자판을 벌렸다 24) 고 공격함으로써 그를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인간 22) 김정은, 혁명발전의 요구에 맞게 당의 유일적 령도체계를 더욱 철저히 세울데 대하여 (당, 국가, 군대, 근로단 체, 출판보도부문 책임일군들 앞에서 한 연설, 주체102(2013)년 6월 19일)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2013), p. 18. 23) 로동신문, 2013. 12. 09. 24) 로동신문, 2013. 12. 09.

국방연구 57 1 8 적으로도 완전히 매장시키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북한이 당중앙위원회 정 치국 확대회의를 개최하고 장성택 숙청을 대내외에 공개한 것은 차제에 이 문제를 비상 사건화 함으로써 유사한 권력누수 현상이 발생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는 의 지를 보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Ⅲ. 주요 권력기구와 파워 엘리트의 위상 변화 1. 김원홍 국가안전보위부장의 역할과 위상 강화 장성택의 처형은 갑자기 결정된 것이 아니고 오래 전부터 준비된 것이었다. 국정원은 2013년 12월 3일 금년 들어 보위부(국가안전보위부)에서 장성택 심복에 대한 비리혐의 를 포착하고 내사에 들어가는 등 일부에서 견제 분위기가 나타나면서 장성택은 공개활동 을 자제 해왔다고 밝혔다. 25) 북한은 먼저 장성택의 핵심 측근부터 공개처형하고, 그 다음에 장성택을 처형하는 순서 를 택했다. 국정원 발표에 의하면,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의 핵심 측근들인 리룡하 당중앙위원회 행정부 제1부부장과 장수길 행정부 부부장은 2013년 11월 하순 공개 처형 되었다. 국정원에 의하면, 북한은 내부적으로 장성택 측근들을 비리 등 반당 혐의로 공개 처형한 사실을 전파하고, 김정은에 대한 절대충성을 강조하는 사상교육을 실시하는 등 내 부 동요 차단을 위해 노력했다. 26) 리룡하와 장수길의 죄명은 월권 과 분파행위, 당의 유일적 영도체계 거부 등이다. 27) 리룡하와 장수길 모두 당중앙위원회의 간부들이고 이들의 혐의가 반당종파행위 이므로 군부가 아니라 국가안전보위부에 의해 재판이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리룡하와 장수길이 처형된 2013년 11월 하순에 있었던 김정은의 주요 활동으로는 11월 20일 인민군 제2차 보위일군대회 지도, 26일 평양건축종합대학 현지지도, 29일 삼지연군 사업 지도 및 인민군 항공 및 반항공군 제991군부대 방문 등이 있다. 28) 11월 20일 개최된 25) 프레시안, 2013. 12. 03. 26) 데일리NK, 2013. 12. 03. 27) 정성장, 장성택 숙청과 북한 권력구도 변화 전망, 세종논평, No. 279 (2013. 12. 9). 28) 로동신문, 2013. 11. 21, 2013. 11. 27, 2013. 11. 30.

장성택 숙청 이후 김정은 체제의 안정성 평가 9 보위일군대회의 주석단에는 최룡해(총정치국장), 김원홍(국가안전보위부장), 김수길(총 정치국 조직부국장), 렴철성(총정치국 선전부국장), 조경철(보위총국장 또는 보위사령관) 이 참석했다. 김정은이 보위일군대회 참가자들과 함께 공훈국가합창단 공연을 관람할 때 에는 이들 외에도 황병서(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부부장)가 동석했다. 29) 2013년 11월 29일 김정은의 삼지연학생소년궁전과 백두산지구 체육촌 등 방문에는 김 원홍, 김양건(당중앙위원회 통일전선부장), 한광상(당중앙위원회 재정경리부장), 박태성 (당중앙위원회 부부장), 황병서(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부부장), 김병호(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부장), 홍영칠(당중앙위원회 기계공업부 부부장), 마원춘(당중앙위원회 재 정경리부 부부장)이 동행했다. 이 때 김원홍 국가안전보위부장의 이름이 제일 먼저 호명 되고, 동행 인물 중에는 황병서 조직지도부 부부장도 포함되었다. 김정은 동행 인물 중 김 원홍을 제외하면 모두 당중앙위원회의 부장 또는 부부장들이었다. 동일 김정은의 인민군 항공 및 반항공군 제991군부대 방문에는 최룡해 총정치국장, 김영철 정찰총국장, 황병서 조직지도부 부부장이 동행했다. 30) [사진 1] 공훈국가합창단 공연을 관람하는 김정은과 보위 관련 간부들(2013.11) 출처: 로동신문, 2013. 11. 21 주: 김정은 제1비서의 우측엔 최룡해 총정치국장이, 좌측엔 김원홍 국가안전보위부장이 착석 29) 로동신문, 2013. 11. 21. 30) 로동신문, 2013. 11. 30.

국방연구 57 1 10 리룡하와 장수길의 공개처형은 11월 29일 김정은의 삼지연군 방문 이전에 이루어진 것 으로 판단된다. 김정은은 리룡하와 장수길의 공개처형 후 핵심 측근들과 함께 삼지연을 방문해 장성택의 실각으로 인한 업무 공백을 메우고, 장성택이 담당해온 외자유치, 체육 지도 등의 권한을 누구에게 맡기며, 향후 장성택 숙청을 어떻게 공개할 것인지 등을 논의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성택 측근의 공개처형과 장성택의 실각은 북한의 엘리트들에게 불안감을 주어 김정 은에 대한 충성경쟁을 유발하고 그로 인해 김정은의 권력이 더욱 공고화될 것으로 예상된 다. 다만 장성택의 실각으로 급격히 커진 최룡해의 영향력을 김정은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정권 불안정을 유발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최룡해의 영향력을 견제할 수 있는 간부들로는 김원홍 국가안전보위부장과 김경옥 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군사 담당 제1부부장을 들 수 있다. 특히 장성택 측근의 반당 혐의 적발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김원홍 국가안전보위부장의 영향력이 이번 사태를 계기로 한 층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김원홍은 2009년 2월 보위사령관에서 총정치국 조직부국장으 로 승진해 김정은의 군부 엘리트 장악에 큰 기여를 한 인물로서 2010년 9월 당대표자회에 서 바로 김정은의 오른편에 앉아 그의 핵심 측근임을 과시했다. 31) 김원홍은 현재 당중앙 위원회 정치국 위원직을 맡고 있어 정치국 후보위원직도 가지고 있지 않은 리영길 총참모 장이나 장정남 인민무력부장보다 당내에서 더욱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2.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의 위상 강화 장성택의 처형 이전에 당중앙위원회 행정부의 리룡하 제1부부장과 장수길 부부장이 먼 저 처형됨으로써 당중앙위원회 행정부는 사실상 해체 수순에 들어갔다. 32) 당중앙위원회 행정부가 과거에 관장했던 업무 중 내각과 공안기관들에 대한 지도는 향후 당중앙위원회 31) 연합뉴스, 2009. 03. 15, 2010. 09. 30, 2012. 04. 12; 로동신문, 2012. 04. 12 참조. 김원홍은 2009년 4월 14일의 군 인사에서 유일하게 대장으로 승진했는데, 이는 그가 동년 2월 보위사령관에서 총정치국 조직부국 장으로 승진한 것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일부 언론에서는 김원홍이 2010년 2월에 총정치국 조직부국장직에 임명된 것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이는 부정확한 것이다. 총정치국 조직부국장 직은 인민군 총정치국에서 군부 엘리트에 대한 조직 및 인사 사업을 전반적으로 관장하는 핵심 요직이다. 김원홍의 최근 경력에 대해서는 정 성장, 북한군 총정치국의 위상 및 역할과 권력승계 문제 (성남: 세종연구소, 2013), pp. 39-41 참조. 32) 정창현은 장성택 숙청 후 각 도 시 군 당위원회의 행정부에 모든 업무를 중단하라는 지시가 내려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장성택 숙청으로 지방당 행정부가 그 동안 맡아왔던 사업들은 지방당 조직 부로 이관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정창현(2014), p. 34.

장성택 숙청 이후 김정은 체제의 안정성 평가 11 조직지도부에 의해 흡수될 가능성이 높다. 1980년대에도 당중앙위원회 행정부가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면서 조직지도부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다가 해체된 적이 있었다. 당시 김정일은 당중앙위원회 행정부가 당 위의 당 이냐고 비판하면서 행정부를 해체하여 조직지도부에 통합시켰다. 33) [그림 1] 중앙당 조직지도부의 당 국가 군대 공안기관에 대한 지도체계 (2007년 행정 부문의 분리 이전) 출처: 곽인수, 조선로동당의 당적 지도에 관한 연구,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 석사학위논문(2003), p. 41의 그림 을 부분적으로 수정하여 작성. 33) 김시학 당중앙위원회 행정부장은 1980년대 말 사법 검찰 부문에 대한 검열과정에서 당중앙위원회 행정부와 조직지도부 사이에 발생한 마찰 때문에 근신 처벌을 받았다. 이후 당중앙위원회 행정부가 조직지도부에 편입되 면서 조직지도부 행정 담당(사법 검찰부문 등 담당) 제1부부장에 기용되었다가 1990년대 후반에는 개성시당 책임비서직을 맡게 되었다. 현성일, 북한의 국가전략과 파워엘리트 (서울: 선인, 2007), p. 235 참조. 김시학의 뒤를 이어 1995년 11월경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행정 담당 제1부부장 직에 임명된 인물이 장성택이다.

국방연구 57 1 12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의 한 부문이었다가 2007년 장성택의 행정부장 임명과 함께 독립된 부서가 된 당중앙위원회 행정부는 ⑴ 내각, 도인민위원회 등 북한의 모든 행정기 관에 대한 행정지도, ⑵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부, 중앙검찰소, 중앙재판소에 대한 행 정지도, ⑶ 비서국 합의대상 간부 이상의 외교관을 비롯한 해외근무자와 모든 해외출장 자, 3대혁명소조 책임자, 국내 타기관내의 파견근무자에 대한 행정사업 등 3개의 큰 기능 을 여러 명의 부부장들이 분담해 맡고 있었다([그림 2] 참조). 여기서 행정사업 이란 해당 국가기관들의 정치사업을 제외한 대내외 행사 일반 행정업무 등에 대한 행정지도 와 이 에 따른 정기 부정기 총화를 말한다. 행정지도 는 해당 기관의 행정에 관한 모든 사항을 지시하거나 보고받고 이를 사안에 따라 행정부장과 공안부서, 김정일 등에게 차등 보고한 뒤 이들의 지시사항을 다시 해당 기관에 명령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그림 2] 당중앙위원회 행정부의 조직체계(추정) 출처: 김성윤 조민호, 조선노동당, 채경석 김성윤 강신창 외, 북한학개론 [증보판] (서울: 법문사, 1996), p. 101; 조선중앙통신, 2013. 12. 13을 토대로 작성. 당중앙위원회 행정부는 이처럼 행정사업을 담당하면서 국가안전보위부 등 권력기관에 대한 안테나 역할도 병행하기 때문에 조직지도부의 분신( 分 身 )으로 간주되기도 하고,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를 제외한 전문부서 가운데 으뜸으로 꼽혔다. 그런데 북한에서 는 정치사업 을 행정사업 보다 더 중시하고 있고, 권력기관 중에서도 인민무력부와 호위 사령부(또는 호위총국)에 대한 행정사업은 기밀 문제로 인해 조직지도부가 각각 조직사업 과 함께 맡고 있고, 조직지도부 내의 행정사업 역시 조직지도부가 맡고 있기 때문에 행정 부의 권한은 조직지도부에 훨씬 못 미친다. 34) 그러나 김정일이 2008년 8월의 건강이상 이

장성택 숙청 이후 김정은 체제의 안정성 평가 13 후 매제인 장성택 당중앙위원회 행정부장에게 크게 의존했고, 장성택이 김정은의 후계체 계 구축과 관련하여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장성택은 행정부장의 권한을 넘어서는 더 큰 영향력을 보유하게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당중앙위원회 행정부가 해체되어 조직지도부에 통합되면 당중앙위원회의 참모부서 로 간주되어온 조직지도부 35) 의 영향력은 더욱 커지고, 당 간부들과 당원들에 대한 통제도 더욱 강화될 것이다. 2014년 3월경 황병서는 조직지도부의 제1부부장으로 승진했는데, 이는 그가 조직지도부에 통합된 당중앙위원회 행정부 조직을 관장하게 되었음을 시사하 는 것이다. <표 1> 2012년과 2013년 김정은 공개활동 동행 인물 순위 2012년 2013년 순위 성명 횟수 성명 횟수 1 장성택 106 1 최룡해 153 2 최룡해 85 2 황병서 59 3 김기남 60 장성택 52 3 4 박도춘 50 박태성 52 5 현철해 48 마원춘 47 5 김정각 45 장정남 47 6 김양건 45 7 리영길 43 8 문경덕 42 8 김격식 41 9 김원홍 41 박정천 37 9 김경희 41 김기남 37 출처: 연합뉴스, 2014. 01. 14; 통일뉴스, 2014. 01. 14 참조. 북한 내부 상황에 정통한 소식통에 의하면, 김경희 당중앙위원회 조직 비서의 건강이 계속 악화됨으로써 인사 관련 그의 권한이 상당 부분 조연준, 김경옥 조직지도부 제1부부 장에게 이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황병서 부부장은 2013년에 김정은의 공개 활동에 두 번째로 가장 많이 수행했는데, 2014년에 들어와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승진함으 로써 그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 34) 김성윤 조민호, 조선노동당, 채경석 김성윤 강신창 외, 북한학개론 [증보판] (서울: 법문사, 1996), pp. 100-103 참조. 35) 김정일, 당사업에서 낡은 틀을 마스고 새로운 전환을 일으킬 데 대하여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 부, 선전선동부 일군들 앞에서 한 연설, 1974년 2월 28일), 김정일 선집 4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94), p. 94.

국방연구 57 1 14 3. 최룡해 총정치국장의 역할과 위상 강화 36) 2012년에 북한의 파워 엘리트 중 김정은의 공개 활동에 장성택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가장 많이 수행했고, 2013년에는 가장 많이 수행한 최룡해 총정치국장은 장성택의 실각 으로 김정은 다음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엘리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일부 전문가들 은 장성택이 최룡해 총정치국장 등 군부세력과의 파워게임에 밀려 실각 했다고 주장하 는데, 이 같은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최룡해가 관장하는 인민군 총정치국이 당중앙 위원회 행정부에 대해 조사할 권한이 없는 점을 고려할 때 최룡해나 군부가 장성택 측근 의 숙청에 관여했을 가능성은 낮다. 최룡해 총정치국장은 전형적인 당 엘리트로서 총정치국장 직책을 가지고 군대에 대한 당의 통제를 보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최룡해는 단순히 군부세력 이 될 수 없으며 반당반 군( 半 黨 半 軍 ) 엘리트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전통적인 군부 엘리트인 총참모장과 인 민무력부장의 위상은 김정은 시대에 들어와 계속 하락해 현 총참모장(리영길)과 인민무력 부장(장정남)은 당중앙위원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직도 가지고 있지 않다. 37) 따라서 장 성택이 군부 세력과의 파워게임에 밀려 실각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장성택 실각 전 우리 사회의 다수 언론들은 최룡해가 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현재의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에 들어가 위원장에 오르기까지 오랜 세월 동안 장성택 밑에서 일했다 고 주장했다. 일각에서는 최룡해를 장성택의 아바타(분신) 로 묘사하기도 하고, 장성택이 최룡해 총정치국장을 통해 당 정 군을 장악했다 고까지 주장했다. 결론적으 로 상당수의 언론들이 최룡해를 장성택의 사람 또는 장성택의 최측근 으로 묘사했는데, 이 같은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명백히 배치되는 것이었다. 최룡해가 당중앙위원회 위원 이라는 당내 중요 지위를 가지게 된 것은 1986년 12월이 었다. 그런데 최룡해보다 4살이 더 많은 장성택은 1989년 6월에 가서야 당중앙위원회 후 보위원 직에 선출되었고, 당중앙위원회 위원 직에는 1992년 12월에 가서야 선출되었다. 탈북자 중 최고위 엘리트인 황장엽 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비서는 과거 김정일이 사 망하더라도 북한에는 김정일을 대신할 인물이 100명도 넘는다. 고 주장한 바 있는데 100 36) 최룡해 총정치국장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정성장, [김정은의 두 남자] 최룡해는 장성택의 아바타 가 아니 다, 월간중앙, 2013년 7월호, pp. 50-56; 정성장, [북한 인물 탐구] 최현 전 인민무력부장과 최룡해 총정치 국장, NKvision, 2013년 8월호, pp. 40-43 참조. 37) 최근에 장정남 인민무력부장은 대장에서 상장 계급으로 강등되어 그 위상이 더욱 약해졌다. 연합뉴스, 2014. 02. 04 참조.

장성택 숙청 이후 김정은 체제의 안정성 평가 15 명이 넘는 사람 이라는 표현은 바로 당중앙위원회 위원들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이처럼 중요한 당중앙위원회 위원 직책에 최룡해가 장성택보다 6년 먼저 진출했으므로 장성택 이 최룡해를 키웠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1996년과 1997년 김정일의 공개활동 수행 인물 관련 북한 보도를 보면 당시까지도 최 룡해가 장성택보다 먼저 호명되었다. 예를 들어 김정일의 1996년 10월 강원도월비산발전 소 시찰, 동년 12월 조선인민군협주단공훈합창단 공연 관람, 1997년 3월 인민무력부 혁명 사적관 방문 등에 장성택과 최룡해 등이 동행했는데, 최룡해의 이름이 장성택보다 항상 먼저 호명되었다. 이는 최룡해와 장성택 모두 당중앙위원회 위원 직에 선출된 이후에도 최룡해가 장성택보다 공식 서열에서 우위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지배 적인 선입견과는 다르게 최룡해가 장성택 휘하의 인물은 아니었던 것이다. 장성택은 2007년 12월에 당중앙위원회 행정부장 직에 임명되었는데, 2009년에만 해도 김정일의 공개활동 수행 인물 호명 순서에서 최룡해가 장성택보다 여전히 앞서 최룡해의 특별한 지위 가 재확인되었다. 2010년에 들어와서는 때로는 최룡해가 장성택보다 먼저, 때로는 장성택이 최룡해보다 먼저 호명되는 등 둘의 공식 서열에 일정한 혼란이 나타났 다. 이는 김정일이 건강이상으로 장성택에 대한 의존도가 커지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2010년 9월에 개최된 제3차 당대표자회는 최룡해에 대한 김정일의 특별한 신임이 재확 인되는 기회였다. 당대표자회 개최 전날인 9월 27일 김정일은 김경희, 김정은, 최룡해, 현 영철, 최부일, 김경옥에게 대장 칭호를 수여했다. 최룡해의 이름은 김정은 바로 다음에 호 명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흔히 북한의 제2인자 로 간주되어 온 장성택은 이 때 대장 칭호 를 받지 못했다. 이는 장성택이 대장 계급을 받음으로써 군부에 대해 영향력을 가지게 되 는 것을 김정일이 경계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9월 28일 개최된 제3차 당대표자회에서 최룡해는 김정일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당중 앙위원회 정치국과 비서국, 당중앙군사위원회에 소속되었다. 김정일이 후계자로서 대외 적으로 모습을 처음으로 드러낸 19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정치국과 비서 국 그리고 군사위원회에 모두 이름이 들어간 인물은 김일성과 김정일뿐이었다. 이 같은 점을 고려하면 최룡해가 3대 주요 권력기구에 모두 들어간 것은 그에 대한 김정일의 신임 이 매우 특별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당시 최룡해는 당중앙위원회 정치국과 당중앙군사 위원회 모두에서 장성택 바로 앞에 호명되었다. 이 같은 사실은 김정일이 2008년 8월 뇌혈 관계 이상 이후 장성택에게 더욱 의존하면서도 장성택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확대되지 않 도록 최룡해를 통해 장성택을 견제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국방연구 57 1 16 현재 최룡해는 과거 자신의 부친 최현과 조명록 전 총정치국장처럼 김정은과 노동당에 대 한 군부의 충성을 이끌어내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현지요해 라는 특권적 권한을 가지고 군인건설자들이 동원되는 각종 기념관과 아파트, 공원, 체육시설 건설 및 대 규모 축산단지 개간 현장 등을 빈번하게 방문해 감독함으로써 과거 김정일 시대에 장성택 이 수도건설과 관련해 맡았던 것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2013년 5월에는 김정은의 특사 자격으로 베이징을 방문해 시진핑 중국공산당 중앙위 총서기 등 중국의 최고위급 인 사들을 만나 북한의 장거리로켓 발사와 핵실험으로 악화된 북 중 관계의 회복을 모색했다. 최룡해는 과거 조선축구협회 위원장, 조선청소년태권도협회 위원장, 국가체육위원회 부위원장 직을 맡은 바 있다. 그의 이 같은 경력은 그가 체육 분야에서도 장성택이 과거 국 가체육지도위원장으로서 맡았던 역할의 상당 부분을 감당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군부의 제2인자였던 리영호가 2012년에 갑자기 총참모장직에서 해임되었고, 핵심 실 세 중 한 명이었던 장성택이 2013년에 처형된 것처럼 북한이라는 군주제적 스탈린주의 체제에서 최룡해도 하루아침에 해임되거나 숙청될 수 있는 수령의 제자 및 전사 에 불과 하다. 그러나 현재 김정은이 어느 파워 엘리트보다 최룡해에게 크게 의존하고 있어 최룡 해는 과거 김정일 시대에 장성택이 누렸던 것 이상으로 김정은의 특별한 신임을 받고 있 는 것으로 보인다. 4. 내각과 박봉주 총리의 위상 강화 장성택이 내각책임제와 내각중심제를 위반했다고 비판받은 점에 비추어볼 때 과거 장성 택과 그의 측근들이 관장해왔던 외국인 투자 유치 및 경협 관련 업무는 향후 내각으로 이전 될 가능성이 높다. 장성택의 실각으로 그가 관장해온 라선경제무역지대와 황금평, 위화도 경제지대의 북 중 공동개발과 외자유치에 단기적으로는 차질이 불가피할 것이다. 그런데 장성택의 2012년 방중 시 라선특구와 황금평, 위화도 특구 관련 북 중 간 주요 현안이 타 결되었으므로 38) 장성택의 실각이 이들 특구 사업에 미칠 부정적 영향은 제한적일 수 있다. 장성택이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모든 직무에서 해임되고 공개적으로 체 포된 2013년 12월 8일 북한과 중국은 신의주 평양 개성 380km 구간에 고속철도와 왕 복 8차선 고속도로의 건설을 함께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39) 이 같은 사실은 장성택의 관여 38) 정창현(2014), pp. 152-154. 39) 연합뉴스, 2013. 12. 11.

장성택 숙청 이후 김정은 체제의 안정성 평가 17 와 관계없이 북 중 간의 경제협력이 확대 발전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북한 조선경제개발협회 윤영석 국장은 장성택 처형 후인 2013년 12월 15일 평양에서 가 진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장성택 처형이 북한의 경제정책 변화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 라며 북한은 외국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경제개발구 관련 계획을 계속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윤 국장은 장성택의 처형이 북한이 경제정책의 방향이나 외자를 유치하려는 노력 에 변화를 가할 것이라는 징후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윤 국장은 또한 장성 택이 국가의 일치단결에 위협이 되는 존재였기 때문에, 그를 제거한 것은 오히려 경제 일선 의 발전 속도를 높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40) 장성택 처형 사건은 북한의 국가 이미지를 악화 시켜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외국인 투자 유치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지만, 라선 특구와 황금평, 위화도 특구 개발과 외자유치 사업이 내각으로 이관되면 중장기적으로 박 봉주 총리의 경제 개혁과 개방정책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될 것으로 예상해볼 수 있다. 박봉주 총리는 1939년생으로 함경북도 김책시에서 출생해 평안남도 덕천공업대학을 졸업한 후 기계제작기사의 자격을 획득한 전형적인 기술관료이다. 그는 1962년 만 23세 의 나이에 평안북도 룡천식료공장 지배인을 맡았고, 19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만 41세의 젊은 나이에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 41) 되어 북한을 움직이는 약 200명 내외의 핵 심 엘리트 그룹에 들어가게 되었다. 북한 내각에는 김일성종합대학과 김책공업대학 등을 졸업한 엘리트들이 많지만, 박봉주는 오직 실력 하나로 통치 엘리트 그룹에 올라간 그야 말로 입지전적인 인물인 것이다. 박봉주는 1983년에 평안북도 박천군의 종합화학공장인 남흥청년화학연합기업소 당 책임비서에 임명되어 약 10년 동안 일하는 동안 다시 확실하게 능력을 드러냈다. 1987 년 조선예술영화촬영소가 제작한 보증 라는 영화가 주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는데, 이 영화는 바로 남흥청년화학연합기업소 당 책임비서 시절 박봉주의 활동을 소재로 한 것이었다. 42) 박봉주는 1993년에 당중앙위원회 경공업부 부부장에, 1994년에 당중앙위원회 경제정 40) 연합뉴스, 2013. 12. 15. 41) 한기범, 북한 정책결정과정의 조직행태와 관료정치: 경제개혁 확대 및 후퇴를 중심으로(2000~09), 경남대 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9), p. 197; 연합뉴스, 2002. 10. 24. 42) 연합뉴스, 2013. 06. 21; 통일부 북한자료센터 홈페이지: http://library.unikorea.go.kr/search/detail View.ax?sid=1&cid=75043 (검색일: 2014. 2. 1); 한기범(2009), p. 162 참조. 한기범은 박봉주를 소재로 한 영화의 이름이 군당 책임비서 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박봉주는 군당 책임비서 를 맡은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군당 책임비서 라는 영화의 내용도 박봉주의 경력과는 무관한 것이다.

국방연구 57 1 18 책검열부 부부장에 그리고 1998년에는 장관급인 화학공업상에 임명되었다. 박봉주는 화 학공업상 시절인 2002년 10월 하순 북한경제시찰단의 일원으로 한국을 방문해 8박9일간 삼성전자, LG전자, 포스코 포항제철소,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 등을 참관한 바 있다. 그리고 한국 방문 후에는 곧바로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의 역 동적인 산업지대를 시찰했다. 43) 2003년 9월 박봉주는 마침내 경제 관료로서는 최고위직인 내각 총리에 임명되었는데, 그것은 당시 김정일의 경제개혁 구상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것이었다. 김정일은 2000년 5 월 베이징 방문과 2001년 1월 상하이 방문을 통해 개혁개방의 결과 발전된 중국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2000년부터 내각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관리방식 개선 지시를 내 렸고, 2002년에는 7 1경제관리개선조치 로 알려진 경제개혁을 단행했다. 그리고 2003년 에 개혁 성향의 박봉주를 총리직에 임명해 노동당과 내각의 조직 및 인력 구조조정, 당과 군대의 경제사업 축소, 내각의 전문화 및 연소화, 내각 인사권 및 경제관리 재량권의 총리 위임 등의 조치를 취해 내각이 주도적으로 국가경제를 관리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44) 박봉주는 이 같은 김정일의 신임을 바탕으로 2004년에 가족영농제, 기업경영 자율화, 노동행정체계 개혁 조치를 단행했고, 경제관리구조는 물론 상품유통관리, 가격관리, 금융 구조, 곡물가격 관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시장경제 도입을 시도했다. 45) 박봉주가 총 리를 맡고 있던 2005년에 농업 부문 예산은 전년도에 비해 29.1%, 2006년에는 12.2% 증 가했다. 반면 총리가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김영일로 바뀐 후 농업 부문 예산은 전년도에 비해 8.5%(2007년), 5.5%(2008년), 6.9%(2009년) 증가하는데 그쳤다. 이 같은 사실은 북 한 총리의 성향에 따라 인민생활과 관련된 예산 배정에 있어서 중요한 차이가 발생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46) 박봉주는 또한 과거 총리 시절에 사회주의경제관리를 개선 완성하는 것은 나라의 경 제를 활성화하는데서 더는 미룰 수 없는 절실한 문제 라고 지적하면서 경제관리의 개선 을 매우 적극적으로 강조한 바 있다. 47) 그러나 박봉주의 개혁 조치에 의해 조직과 영향력 이 축소된 당과 군부의 반발을 김정일이 수용하면서 2005년부터 개혁이 후퇴의 길에 들 43) 연합뉴스, 2002. 10. 24; 한겨레, 2002. 11. 05; 서울신문, 2002. 11. 06. 44) 한기범(2009), p. 162. 45) 정창현(2014), p. 138 참조. 46) 정성장(2011), p. 358. 47) 조선중앙통신, 2004. 03. 25 참조.

장성택 숙청 이후 김정은 체제의 안정성 평가 19 어서게 되었고, 마침내 2007년 4월 박봉주는 총리직에서 해임되어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 의 지배인으로 좌천되었다. 48) 이처럼 당과 군부의 보수파의 반격으로 지방으로 밀려났던 박봉주는 김정은이 후계자 로 결정된 이후인 2010년 8월 당중앙위원회 경공업부 제1부부장직에 임명되어 중앙당으 로 다시 복귀했다. 그리고 김정일 사망 후인 2012년 4월에는 당중앙위원회 경공업부장으 로 승진했고, 2013년 3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당의 가장 권위 있는 기구인 정치국 의 위원직에 선출되어 당내에서 확고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동년 4월 내각 총리 에 다시 임명되어 북한의 경제사령탑을 지휘하게 되었다. 49) 김정은 제1비서는 2013년 3월 31일 개최된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경제건설 노선 과 관련 농업과 경공업 발전, 지식경제로의 전환, 과학기술과 경제의 유기적 결합, 경제지 도와 관리의 개선, 대외무역의 다각화 및 다양화, 관광지구 개발 및 경제개발구 창설 등 을 제시했다. 박봉주 총리는 바로 이 같은 김정은의 경제 개혁 개방 구상을 실행에 옮기 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박봉주가 총리에 임명된 후인 2013년 5월 29일 북한은 중국의 경제개발구를 모방한 경 제개발구법을 채택해 경제특구를 북한 전역으로 확대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50) 2000년대 중반에 비해 박봉주 총리의 당내 지위가 확고해지고 군부의 영향력도 현저하게 축소되어 현재는 박봉주가 과거보다 더욱 과감하게 경제개혁개방을 추진할 수 있는 여건 이 형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Ⅳ. 장성택 숙청 이후 김정은의 유일적 영도체계 강화 장성택 숙청 이후 북한은 김정은의 유일영도체계를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2013년 12월 14일자 로동신문은 정론을 통해 나는 김정은 동지밖에 모른다, 나는 김정은 동지만을 위해 숨 쉬고 피가 뛰며 김정은 동지만을 위하여 싸우는 전사다.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이렇게 소리높이 웨치며[외치며] 나서야 한다. 고 강조했다. 51) 48) 한기범(2009), pp. 160-198. 49) 정창현(2014), p. 145; 로동신문, 2013. 04. 02 참조. 50) 북한의 경제개발구법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유욱, 북한 경제개발구법의 평가와 전망 개성공업지구법 및 라 선경제무역지대법과 비교를 중심으로, 북한법연구회 월례발표회 발표 논문(2013년 10월 31일) 참조. 51) 로동신문, 2013. 12. 14.

국방연구 57 1 20 동년 12월 16일에는 김정은을 단결과 영도의 유일중심으로 높이 받들어 모시고 결사 옹위할 것을 다짐하는 조선인민군 장병들의 맹세모임 이 금수산태양궁전광장에서 진행 되었다. 이 모임에서 참가자들은 위대한 김정은 동지밖에는 누구도 모른다는 신념의 노 래를 심장으로 부르며 천만이 총폭탄되여 김일성결사옹위로 시작되고 김정일결사옹위로 이어온 조선혁명무력의 자랑스러운 전통을 김정은결사옹위로 더욱 빛내여나갈 것을 엄 숙히 맹세 했다고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52) 또한 2013년 12월 17일자 로동신문 사설은 오늘의 현실은 경애하는 원수님을 유일중심으로 하는 당과 혁명대오의 일심단결 을 반석같이 다지고 전당과 온 사회에 당의 유일적 영도체계를 더욱 철저히 확립해나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 고 주장했다. 53) 이처럼 장성택 숙청 이후 북한 지도부는 김정은의 유일적 영도체계 확립을 전례 없이 강조하고 있어 향후 김정은으로의 권력 집중이 심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 같은 김정은 1 인으로의 권력 집중은 북한 체제의 경직성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 분명하다. 2013년 12월 8일의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 개최 이후 북한은 김정은에 대해 과 거 김정일에게 사용했던 위대한 영도자 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 같은 호칭의 변화 는 김정은에 대한 개인숭배 수준이 과거 김정일에 대해 이루어졌던 것과 같은 수준으로까 지 높아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진 2] 김정은을 위대한 영도자 로 표현한 현수막 출처: 연합뉴스, 2013. 12. 10. 52) 조선중앙통신, 2013. 12. 16. 53) 로동신문, 2013. 12. 17.

장성택 숙청 이후 김정은 체제의 안정성 평가 21 Ⅴ. 맺음말: 김정은 체제의 안정성 평가 김정은이 2012년 7월에 군부의 핵심 실세였던 리영호 총참모장을 전격적으로 해임한 데 이어 2013년 12월 8일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를 개최해 장성택을 모든 직무에 서 해임시키고 출당 및 제명시킨데 이어 사형까지 시킨 것은 김정은이 그만큼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정은이 2009년 2월경부터 당시 김정각 인민군 총정치국 제1부국장과 김원홍 총정치국 조직부국장을 통해 군부 엘리트들을 장악해왔고, 동년 4월부터는 국가안전보위부장을 맡아 당과 국가의 파워 엘리트들도 감시 통제해왔기 때문에 북한의 최고위층에 장성택과 친한 인사들은 많겠지만 장성택을 추종하는 측근들 은 드문 것으로 판단된다. 2014년 3월 9일 실시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과 후 보위원 중 장성택 숙청과 관련해 대의원 명단에서 탈락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은 문경 덕(당중앙위원회 비서 겸 평양시당 책임비서)과 리병삼(전 인민내무군 정치국장) 정도이 다. 이 같은 사실은 장성택이 관장했던 당중앙위원회 행정부에는 당연히 그를 따랐던 측 근들 이 많겠지만, 북한 핵심 엘리트 중에는 장성택 측근 이 외부에서 막연하게 추정하는 것처럼 결코 엄청나게 많지 않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장성택과 그의 측근들에 대한 숙청이 김정은 체제에 불안정을 가져오거나 일부 전문가들의 주장처럼 대량 탈북사태 를 불러올 가능성은 낮다. 1956년 8월종파사건 이후 연안파와 소련파 숙청 그리고 1967년의 갑산파 숙청 이후 김일성 체제가 더욱 공고화된 데서 추론할 수 있는 것처럼 장성택파에 대한 숙청은 김정은 체제에 불안정을 가져오기보 다 오히려 안정성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2013년 12월 9일 북한은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에서의 장성택 해임 사실을 보 도하면서 같은 날 로동신문 지면에 김정은이 건설부문일군대강습회 참가자들에게 보낸 서한을 공개하고, 건설부문일군대강습회를 예정대로 진행했다. 54) 그리고 장성택 처형 직 후 김정은은 인민군 설계연구소를 방문해 현지지도하고 마식령스키장도 시찰했다. 55) 이 같은 사실은 장성택 숙청으로 인해 김정은의 공개 활동이 전혀 위축되지 않고 있음을 보 여주는 것이다. 장성택 숙청으로 인해 피해자를 보는 인물과 조직이 있는가 하면 그것으로 인해 오히 54) 로동신문, 2013. 12. 09. 55) 로동신문, 2013. 12. 14, 2013. 12. 15.

국방연구 57 1 22 려 혜택을 보는 인물들과 조직도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중앙위원회 행정부 의 해체는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와 내각의 영향력 확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고, 장 성택 숙청으로 최룡해 총정치국장과 김원홍 국가안전보위부장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더 욱 높아졌다. 종합하면 당에서는 조연준, 김경옥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들, 군대에서는 최룡해 총정치국장, 공안기관에서는 김원홍 국가안전보위부장, 내각에서는 박봉주 총리 의 위상이 더욱 높아졌고, 향후 김정은은 이들 5인의 파워 엘리트들에게 크게 의존할 것으 로 판단된다. 김정은에게 그를 보좌하는 핵심 엘리트 그룹이 있으므로 장성택이 사라졌다 고 해서 일부 전문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홀로서기 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김정은 체제가 불안정해진다면 내부 결속을 위해 대외적으로 도발할 가능성이 커질 수 있겠지만, 적어도 단기적으로 김정은 체제가 불안정해질 가능성은 낮다. 만약 김정은 체제가 안정적이라면 한국 정부는 한편으로는 북한의 도발 가능성에 대해 철저히 대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김정은 정권과의 대화를 통해 한반도 평화를 관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013년 8월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의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발표에 따 르면, 2012년 이후 북한을 탈출한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김정은에 대한 북한 주 민의 지지율이 50% 이상이라고 답한 사람은 61.7%에 달했다. 통일평화연구원이 2011년 에 실시한 조사에서 김정일의 지지율이 50% 이상이라고 답한 비율이 55.7%였던 점에 비 추어볼 때, 김정은에 대한 지지도가 김정일에 대한 지지도보다 높게 나온 것이다. 56) 김정 일 사망 직후 국내외 다수의 전문가들은 김정은 체제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 지만, 이 같은 예상과는 반대로 김정은은 대내적으로 최고지도자로서의 권위를 확고하게 확립하는데 성공했다. 장성택 숙청은 김정일 사망보다는 훨씬 국내정치적 영향이 적은 사 건이기 때문에 그로인해 김정은의 개인절대독재권력에 곧 큰 변화가 발생할 가능성은 매 우 낮은 것으로 판단된다. 56) 이영재, 탈북자 62%, '김정은 주민지지율 50% 이상' 답변, 연합뉴스, 2013. 08. 29.

장성택 숙청 이후 김정은 체제의 안정성 평가 23 참 고 문 헌 강철환. 장성택 사태의 본질, 그는 왜 잔혹하게 처형당했나. 북한 2014년 1월호. 고경택. 복받은 우리 가정. 조선 1973년 4월호. 고영환. (북한외교관 고영환이 밝히는) 평양 25시 서울: 고려원, 1992. 곽인수. 조선로동당의 당적 지도에 관한 연구.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3). 김성윤 조민호. 조선노동당. 채경석 김성윤 강신창 외, 북한학개론 [증보판], 서울: 법문사, 1996. 김정은. 혁명발전의 요구에 맞게 당의 유일적 령도체계를 더욱 철저히 세울데 대하여(당, 국가, 군대, 근로단체, 출판보도부문 책임일군들 앞에서 한 연설, 주체102(2013) 년 6월 19일)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2013. 김정일. 당사업에서 낡은 틀을 마스고 새로운 전환을 일으킬데 대하여(조선로동당 중앙 위원회 조직지도부, 선전선동부일군들앞에서 한 연설, 1974년 2월 28일). 김정 일 선집 4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94. 사회과학출판사. 조선말대사전 (2)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92. 오경섭. 장성택 숙청 이후 김정은 정권의 불안정성. 정세와 정책 성남: 세종연구소, 2014년 2월호. 유욱. 북한 경제개발구법의 평가와 전망 개성공업지구법 및 라선경제무역지대법과 비 교를 중심으로. 북한법연구회 월례발표회 발표 논문 (2013년 10월 31일). 이영재. 탈북자 62%, 김정은 주민지지율 50% 이상 답변. 연합뉴스, 2013. 08. 29. 정성장. 현대 북한의 정치: 역사 이념 권력체계 서울: 한울아카데미, 2011.. 북한군 총정치국의 위상 및 역할과 권력승계 문제 성남: 세종연구소, 2013.. [북한 인물 탐구] 장성택 당중앙위원회 행정부장2: 김정은의 부상과 장성택 승 진 간의 함수관계. NKvision, 2013년 3월호.. [김정은의 두 남자] 최룡해는 장성택의 아바타 가 아니다. 월간중앙, 2013년 7월호.. [ 김정일의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의 재방북 후 첫 인터뷰] 김정은의 어머니 이름 은 고영희 아닌 고용희 확인. 월간중앙, 2013년 8월호.. [북한 인물 탐구] 최현 전 인민무력부장과 최룡해 총정치국장. NKvi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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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택 숙청 이후 김정은 체제의 안정성 평가 25 Assessment of Kim Jong-un Regime Stability After the Purge of Jang Song-thaek Cheong, Seong-chang Keywords North Korea, Kim Jong-un Regime, Jang Song-thaek, purge, political stability Some North Korea watchers diagnose the purge of Jang Song-thaek as instability of the Kim Jong-un regime and even come up with prognosis that Jang's execution is a precursor for contingency. Such an assessment is attributable to the overestimation of Jang's political status in the North Korean leadership and to the underestimation of Kim Jong-un's grip on power. Kim Jong-un started to control the military elite from February 2009 through First Vice Director Kim Jong-gak of the General Political Bureau of the Korean People's Army (KPA). Beginning April 2009, Kim assumed State Security Ministership and started to spy on the power elites of the the Workers' Party of Korea (WPK) and the state. Therefore the number of Jang's close powerful associates was not as large as the outsiders estimated, whereas Kim's control over the power elites was much tighter than thought. Emerging prominent figures in the party, military, public security, and state after the Jang purge include First Vice Directors Jo Yon-jun and Kim Kyong-ok of the Organizational Leadership Department of the WPK Central Committee; Director Choe Ryong-hae of General Political Bureau of the KPA; State Security Minister Kim Won-hong; and Premier Pak Pong-ju in the cabinet respectively. The consolidation of monolithic leadership under Kim Jong Un makes it highly unlikely that the North Korean regime will be shaken up by instability in the wake of Jang purge. [논문투고일 : 2014. 01. 31] [심사의뢰일 : 2014. 02. 11] [게재확정일 : 2014. 03.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