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피부 때문에 속상했던 바바라 카라스코 - 트랜스라틴 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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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하얀 피부 때문에 속상했던 바바라 카라스코 유화열 바바라 카라스코 자화상 (Self-Portrait, 2007)

88 트랜스라틴 24호 (2013년 6월) 이 세상에 피부색을 화두로 한 예술작품은 아주 많다. 얼핏 하얀 피부에 대한 유색인종의 불평등을 다룬 것이 떠오르지만, 그녀처럼 다수의 갈색 피부 속에서 소수의 밝은 피부가 갖는 박탈감을 다 룬 것도 있다. 그녀가 치카나 운동의 선봉에 선 세사르 차베스, 돌로레스 우에르타 와의 친분을 고려한다면 구릿빛 피부에 초점을 맞췄을 듯싶지만, 의외로 그렇지가 않았다. 사실 그녀의 가족 모두는 구릿빛 피부색이었으나, 유독 그녀만이 하얀 피부로 태어났다. 게다가 그녀와 같은 멕시코계 미국인 이 웃은 왜 너는 피부가 희냐고 물어왔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어릴 적부 터 그녀에게 상처가 되었고,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마음 한 구석에 남아 그녀의 삶을 조종하고 있었다. 그녀의 그림에는 구릿빛 피부를 가진 집단 속에서 하얀 피부 때문에 상처를 받아야만 했던 소외감이 그려지고 있다. 그런 탓에 일부러라도 문 화적 코드를 강조시켜 나는 당신들과 다르지 않다고 외치고 있다. 심지어 는 이래 뵈도 나는 그 매운 할라페뇨 고추를 먹을 수 있다고 자화상에 재 현할 정도였다. 치카노 미술계에서 피부색을 문제 삼은 바바라 카라스코 의 작품은 히스패닉 미술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시선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버스운전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예술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고 하셨죠 바바라 카라스코는 텍사스의 엘파소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리오그란 데 강을 사이에 두고 멕시코와 국경을 나누는 사막 도시 엘파소의 토박이 었다. 하지만 바바라 카라스코가 태어나서 얼마 안됐을 무렵 가족은 정든 고향을 뒤로 하고 로스앤젤레스에서 새롭게 정착하기로 결정했다. 어렸 을 때의 기억은 오롯이 컬버시티의 공공주택인 마르 비스타 가든으로 가

89 득해요. 거기는 아주 흥미로운 곳이었어 요. 이웃은 모두가 우리처럼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었어요. 그야말로 다국적인 동네 였고, 지구상의 모든 인종이 다 모여 있는 것 같았어요. 우리 옆집에는 이집트 가족 이 살았고, 건너편집에는 아프리카계 미국 인 가족이 살았거든요. 그리고 우리 같은 라티노도 아주 많았어요. 미국에 사는 히 스패닉을 일컫는 말 중에 라티노 라는 표 현이 있다. 미국의 웬만한 공식서류에는 인종을 표시하는 항목이 있는데, 첫 번째 로스앤젤레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 술가 바바라 카라스코 관문으로 당신은 라티노인가요? 아닌가요? 부터 묻는다. 그만큼 수적으로 라티노가 많다는 얘기다. 바바라 카라스코는 훗날 여러 인터뷰에서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결코 빼놓지 않았다. 아버지는 산타 모니카행 버스 운전기사로 일하셨고, 어 머니는 집에서 우리 남매들을 엄격하게 키우셨어요(오빠 라카르도와 나는 엘파소에서 태어났고,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한 후에 동생 세 명이 태어났 지요). 아버지는 집에서 쉴 때면 아끼는 화보집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시간을 보내셨어요. 그중에 멕시코의 거장 디에고 리베라의 그림도 있었 는데, 아버지는 열렬한 팬이었어요. 내가 처음으로 알게 된 화가도 디에 고 리베라였지요. 아버지는 예술가라는 직업이 얼마나 훌륭한가하면 버스 운전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예술가가 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없는 일이 라고 두고두고 말씀하셨죠. 그 때문이었을까요? 어릴 적부터 내 머릿속에 는 예술가가 가장 좋은 직업이라는 변치 않는 믿음이 있었죠. 바바라 카 라스코 집 거실 한쪽 면에는 아버지가 정성스레 사 모은 멕시코미술 전집 이 꽂혀있었고, 그 옆에는 일본미술 전집도 있었다. 으레 미술전집을 보 는 것이 일상의 습관이 되었고, 집 다음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던 성당에

90 트랜스라틴 24호 (2013년 6월) 서는 회벽을 가득 메운 종교회화에 흠뻑 도취되었다. 학교는 오빠와 함께 컬버시티에 있는 가톨릭 학교에 다녔는데, 학교에 가면 노상 그림만 그려 대는 통에 본의 아니게 선생님들로부터 주의를 듣게 됐다. 집에선 그림 만 그리고 있으면 언제나 칭찬을 받았는데, 학교에선 그러면 안 된다고 해서 그 당시엔 도무지 이해가 안됐어요. 노동지도자 세사르 차베스를 만나다 바바라 카라스코의 운명을 바꾼 것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로스앤젤 레스 캠퍼스(UCLA)에 입학해서 첫 해에 들은 강연 때문이었다. 어느 날 학교에 농장노동자조합을 발족해서 유명해진 세사르 차베스가 강연을 한 다고 해서 온통 술렁였어요. 강연장을 꽉 채운 청중 앞에서 세사르 차베 스가 하는 말은 카리스마가 넘쳤고, 내 머릿속에 쏙쏙 들어왔어요. 이 땅 에서 온 몸으로 부딪쳐 투쟁해온 생생한 증언이나 다름없었죠. 강연이 끝 난 뒤에 다가가 내가 할 수 있는 뭐가 있냐고 대뜸 물었죠. 지금 생각하 면 무슨 용기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그의 반응은 뜻밖에도 매우 적극적이었어요. 물론 있죠, 우리는 당신 같은 예술가가 필요합니다. 이 한마디는 바바라 카라스코 안에 잠자고 있던 열정을 끄집어냈고, 그로 인 해 아주 오랫동안(1976 91) 농장노동자조합에 헌신하게 되었다. 집회가 있는 날이면 집단적 저항을 표명하는 아주 거대한 벽화를 그렸으며, 수많 은 슬로건이 바바라 카라스코의 손에서 탄생됐다. 그녀의 예술적 의식은 정치적인 활동에 둥지를 틀었으며, 급기야 대학에서 치카노 신문의 첫 번 째 여성편집자로 활약하면서 가속도가 붙었다. 아침에 눈만 뜨면 수없이 많은 이슈가 내 관심을 사로잡았고, 뜸들이지 않고 곧바로 신문표지로 싣 고, 삽화로도 실었죠. 그중에 털실에 갇힌 임산부 (Pregnant Woman in a Ball of Yarn, 1978)라는 삽화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요. 다국적

91 제약회사가 푸에르토리코의 가임여성 을 상대로 피임약 임상실험을 했는 데, 후유증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안 했을 뿐만 아니라 결국엔 심각한 부 작용이 일어나고 말았어요. 실험에 참여했던 여성 대부분은 지독하게 가 난했고, 아주 젊었으며, 그 중엔 어 린 십대소녀들도 있었죠. 피임약 임 상실험 사건을 접하고는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임신 가능성이 있는 여성들이었고 임신계획도 있는 여성들이었으나, 본인의 의사와는 상 관없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불임여 바바라 카라스코 털실에 갇힌 임산부 (1978) 성이 되었으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털실에 갇힌 임산부 에서 임산부 를 털실에 비유했어요. 털실은 어떤 형태를 만들어가는 세포 조직과도 같 잖아요. 임산부의 몸 안에서 새 생명이 탄생되어야하건만 되레 임산부의 몸이 털실에 묶여 억눌려있는 비극이 초래된 거죠. 바바라 카라스코는 현실에서 뻔히 드러나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대할 때면 치가 떨리도록 화가 났다. 이런 분노, 못마땅함은 그녀에겐 예술적인 열정을 불사르도록 만든 불쏘시개였다. 그리고 겁 없이, 정면으로 문제점을 다 드러내 표현 한 것이 그녀의 표현방식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여성노동자는 돌로레스 우에르타 입니다 바바라 카라스코는 세사르 차베스의 깃발 아래 활동하는 동안, 아주 훌륭한 여성노동자를 만났다. 농장노동자조합의 공동발족자이자 현재는

92 트랜스라틴 24호 (2013년 6월) 바바라 카라스코, 돌로레스 (1999) 인권운동가로서 맹활약하고 있는 그 여성노동자의 이름은 돌로레스 우에르타(Dolores Huerta, 1930년 생)이며, 치카나 여성들에게 사회문 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라고 주문 함으로써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새 로운 롤모델을 제시한 인물이다. 돌로레스 우에르타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성노동자이며, 무엇보 다 우리가 아주 친하다는 걸 자랑 하고 싶어요. 오랜 세월 마음속으로 돌로레스 를 존경하고 흠모하던 바바라 카라 스코는 심혈을 기울여 돌로레 스 (Dolores, 1999)를 완성했다. 나에게 이 그림은 말도 못하게 특별합 니다. 내가 돌로레스를 몹시도 아끼고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거든요. 아 마도 내 평생 그런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거예 요. 그림 속 돌로레스의 구릿빛 피부색은 하늘색과 초록색의 중간쯤으로 보이는 배경 앞에서 유난히 돋보인다. 태양 아래서 검게 그을리며 노동한 흔적과 오랫동안 농장노동자조합을 위해 땀 흘린 노동자의 숭고함을 보여 주고 싶었던 걸까? 여기에 핑크색 블라우스는 억압받는 여성에 관심이 많 았던 돌로레스 우에르타의 여성성을 부각시키기는 데는 안성맞춤의 선택 이다. 그런데 말이죠, 미술사에서 남성 아이콘은 아주 많아요, 그런데 여성 아이콘은 대개 남성화가가 그렸죠. 나는 여성화가로서 돌로레스의 아이콘 을 세사르 차베스와 동등한 위치에서 그리려고 시도했어요. 이 두 사람이 야말로 그동안 농장노동자조합을 일궈온 훌륭한 지도자이거든요. 실제로

93 바바라 카라스코, 우유 통과하기 (1990) 바바라 카라스코, 이름이 상처가 된다 (1991) 바바라 카라스코뿐만 아니라 많은 치카노 예술가에게는 돌로레스 우아르 타의 존재 자체가 창작의 영감이 될 정도로 사회적 예술적으로 영향력 있 는 인물이다. 사회운동을 한 진짜 이유는, 하얀 피부 때문이었다 바바라 카라스코가 어릴 적에 살았던 동네는 멕시코계 미국인과 아프 리카계 미국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었다. 부모는 전형적인 멕시코계 미 국인답게 까무잡잡한 피부색을 띠었고, 여동생도 그랬다. 하지만 바바라 카라스코만은 유독 밝은 피부를 갖고 태어났다. 그런데 문제는 또래아이

94 트랜스라틴 24호 (2013년 6월) 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났다. 아이들은 그녀를 하얀 애 또는 초록색 눈 이 라 불렀다. 아이들 사이에서 밝은 피부색으로 기억됐고, 그 때문에 간혹 놀림거리가 되곤 했다.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왜 다른 애들과, 심지 어 동생하고도 피부색이 다르냐는 거였다. 다르다 그래서 차별 받는다 를 일찌감치 경험한 바바라 카라스코는 누구를 만나든 간에 피부색이 먼 저 신경이 쓰였다. 자화상 우유 통과하기 (Milk the Pass, 1990)는 이런 심정이 잘 나 타난다. 한 소녀가 우윳병에 담겨있는데, 흰 우유만큼이나 소녀의 살갗도 하얗다. 이 그림에서 핵심 메시지 가운데 하나는 소녀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김에 있다. 이 김은 후끈후끈한 목욕탕에서 나오는 수증기 하고는 차원이 다른다. 바바라 카라스코가 어릴 적에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할아버지처럼 매운 할라페뇨 고추를 먹을 줄 알아야 진짜 멕시코사람이 되는 거란다. 그 말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바바라 카라스 코는 매운 할레페뇨 고추를 통째로 아작아작 씹어 먹은 후에 뜨거운 김을 내뿜었다. 흰 우유와 할라페뇨 고추의 조합은 심리적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한 나름의 처방이었다. 또 다른 자화상 이름이 상처가 된다 (Names Can Hurt, 1991)에서도 밝은 피부색으로 인한 고충을 토로하고 있다. 그 림 속에서 바바라 카라스코는 일부러 친구들과 같은 피부색으로 보이기 위해 어두운 색조로 화장하고 있다. 간혹 앵글로와 라티노 예술가집단 양 쪽에서 바바라 카라스코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런 어정쩡한 소속이 피부 색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바바라 카라스코는 여기고 있다. 그 때문이었을 까. 바바라 카라스코는 치카노 공동체가 피부색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어 떻게 인종적인 이름표를 붙이는지를 아주 노골적으로 문제 삼고 있다. 1978년에는 문인이자 사진가로 활동하는 해리 감보아(Harry Gamboa Jr.)를 만났다. 해리는 내 작업에 많은 도움을 주는 조력자이며 가끔은 내가 예술에 시들해질 때 많은 용기를 주곤 했죠. 우리는 1993년 결혼을 했고, 이듬해 딸 바비를 낳았어요. 한동안 평온하던 삶은 서른 후반에

95 찾아온 암과 사투를 벌이면서 또다시 어릴 적에 느꼈던 광란의 회용돌이 속에 휩싸였다. 최근에 발표한 자화상 (Self-Portrait, 2007)을 보면, 그녀 에게 드리워진 심리적 불안이 잘 나타난다. 어릴 적 내게 다가왔던 세상 살이는 결코 아름답지 않았지만 그때에 더 많이 집착할수록 몇 번의 수술 로부터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었어요. 내 몸에 붙어있는 온갖 고통이 날 아가는 기분이 들다가도, 어느 순간 내 눈에는 수많은 고통으로 얼룩져있 습니다. 바바라 카라스코는 요즘에도 동료인 치카노 예술가, 문인, 지식인들 과 함께 로스앤젤레스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녀에 대한 예술적인 평은 매 우 다양하다. 일각에서는 타고난 페미니스트 라 말하고, 어떤 이들은 인 종, 계층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 작가라고 말한다. 어찌 보면 바바라 카라 스코는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인종 계층 젠더에 대한 문제를 거칠 것 없이 한꺼번에 힘차게 혼합시킨 예술가라 할 수 있다. 유화열 - 텍사스대학교 오스틴캠퍼스의 LLILAS에 방문학자로 있으며, 저서로는 라틴현 대미술, 저항을 그리다, 예술에서 위안 받은 그녀들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