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4년 한일관계사학회 학술발표회 발표집.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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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2014년도 한일관계사학회 학술대회 주최 : 한일관계사학회 후원 : 동북아역사재단 이 발표논문집은 2014년도 동북아역사재단의 지원을 받아 발간되었음

표지그림 : 지볼트가 그린 나가사키 수용소 내의 조선 표류민 가족 지볼트는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독일인 의사로 1823년부터 1829년까지 6년 간 일본에 머물면서 일본 연구에 심취했다. 이 과정에서 1823년 3월 조난으로 나가시키에 체류 중이던 조선인 어부와 상인들을 만나 조선에 관한 지식을 수 집하였다. 이 삽화는 수용소 내에 모여 있는 조선인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검은 갓 과 겨울용 난모( 煖 帽 )를 쓴 조선인들이 둘러앉아 바둑을 두고 있다. 상투 머리 에 흰색 한복을 입고 긴 담뱃대를 물고 있는 모습에서 한국인의 특징이 강하 게 부각되어 있다. 그러나 바둑알이 놓여 있는 바둑판은 일본 것이다.

2014년도 한일관계사학회 학술대회 일시 : 2014.06.14(토) 오후 1:30~오후 6:00 장소 : 동북아역사재단 11층 대회의실 한 일 관 계 사 학 회

2014년도 한일관계사학회 학술대회 일정 주제 : 조선의 대외관계와 국경지역 사람들 일시 : 2014년 6월 14일(토) 13:30~17:30 장소 : 동북아역사재단 11층 대회의실 접수 및 등록 (13:00 ~ 13:30) 개 회 (13:30 ~ 13:40) 사회 : 남상호(경기대) 개 회 사 : 정성일(한일관계사학회 회장) 제1부 주제발표 제1주제 (13:40 ~ 14:10) 조선의 對 明 關 係 와 義 州 사람들 발표: 민덕기(청주대) 토론: 이상규(한국학중앙연구원) 제2주제 (14:10~14:40) 조선의 對 女 眞 關 係 와 6 鎭 지역 사람들 발표: 한성주(강원대) 토론: 박정민(전북대) 제3주제 (14:40~15:10) 조선의 對 淸 關 係 와 羅 州 唐 津 사람들 발표: 김경옥(목포대) 토론: 원종민(사이버한국외국어대) 중간 휴식 (15:10~15:20)

제4주제 (15:20~15:50) 조선의 對 日 關 係 와 東 萊 사람들 발표: 양흥숙(부산대) 토론: 장순순(전북대) 제5주제 (15:50~16:20) 조선의 對 日 關 係 와 巨 濟 사람들 발표: 정성일(광주여대) 토론: 이훈(동북아역사재단) 좌석정리 및 휴식 (16:20 ~ 16:40) 제2부 종합토론 (16:40 ~ 18:00) 발표자 및 토론자 전원 사회 : 유재춘(강원대)

모시는 글 이번에 한일관계사학회 회원을 비롯한 국내외 석학들을 모시고 조선 의 대외관계와 국경지역 사람들 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하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를 보면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감이 감 돌고 있습니다. 중국의 급부상과 일본의 우경화, 북한의 핵개발 시도 등 으로 말미암아 동북아시아의 갈등은 점점 커져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에서 대한민국은 과연 어떤 길을 선택할지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형국입니다. 과거의 역사 전개와 현재의 흐름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조선시대의 대외관계를 현 시점에서 다시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 합니다. 조선시대 국경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이 조선의 대외관계 유지에 어떻게 대응해 나갔는지를 살펴보고 거기에서 현재적 의의를 찾는 것도 뜻 깊은 일이 될 것이라 기대합니다. 부디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서 활발한 토론과 교류가 펼쳐지고 더 나아 가서 동북아시아 문화의 이해와 통합을 위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모색 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2014년 6월 14일 한일관계사학회장 정 성 일 드림

1 - 제 1 주 제 : 조 선 의 對 明 관 계 와 義 州 사 람 들 민덕기(청주대) 목차 1. 머리말 2. 조선의 赴 京 使 行 과 明 의 天 使 3. 호송군과 평안도의 피폐 4. 의주 백성들의 핍박과 조정의 대응 5. 世 宗 世 祖 代 三 島 와 對 明 관계 6. 成 宗 代 三 島 와 對 明 관계 7. 中 宗 代 三 島 와 對 明 관계 8. 맺음말 1. 머리말 義 州 府 는 지방 군현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여느 군현과는 달라서 동래와 더불어 외국과 교류할 수 있는 중요한 창구였다. 그래서 의주를 가리켜 一 國 의 門 戶 이자 海 東 의 咽 喉 라고 지칭했던 것이다. 義 州 城 의 南 門 에 걸린 海 東 第 一 關 현판은 그 위상을 상징했다. 1) 다음은 1476년(성종7) 대사헌 윤계겸 등이 올린 9조의 시무책 속에 평안도에 대한 피폐 현상과 그 대책에 대해 논한 것이다. 1) 박범, 17~18세기 의주부의 경제상황과 재정 운영의 변화, 조선시대사학보 58, 2011. 99쪽.

2 - 평안도는 중국과 朝 聘 할 때에 왕래하는 길이며, 野 人 들이 入 寇 하는 요충지여서 勞 役 에 이바지하는 것이 다른 道 보다 배나 되는데, 지역은 넓은데다가 인구는 적어 서 物 力 이 모자라 도저히 지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조 대왕께서는 南 道 의 백성을 이주시켜 이를 충당시켰는데, 지금 여러 고을의 백성 중에 實 戶 로 불리워지 는 자는 모두 그 때에 옮겨온 사람으로서 여러 고을에서 그들의 힘을 입게 되었으 니, 이는 만세를 위한 깊은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근년에 와서는 邊 警 이 자주 있 게 되자 번거로운 使 命 이 전보다 더 많아져서 온 道 가 어수선하여 편안하게 쉴 여 가가 없게 되었으니, 백성들의 고생을 차마 말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이런 때에 그들을 보호하여 안정되게 해주기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臣 등은 세조께서 移 住 시킨 백성들이 따라서 離 散 될까 걱정입니다. 신 등은 듣건대 중국 京 師 에 가는 使 臣 이 沿 路 의 各 官 에서 착취한 물건들이 너무도 많아서 그것을 鬼 神 도 輸 送 할 수 없는 것이고 보면 반드시 그 일이 沿 路 의 백성에게 미치게 되어, 이를 번갈아가면서 운반하여 行 人 이나 居 人 이나 모두가 齎 送 하느라 온 가족이 길거리에 나와 거기에 시달리다 보니 심지어는 破 産 까지 하게 되며, 그렇게 해서 義 州 까지 이르면 또 그 것을 護 送 軍 士 에게 나누어 주어 駄 馬 에 싣게 합니다. 군사들의 말은 본래가 파리하 고 약한데, 무거운 짐을 싣고서 험하고 먼 길을 가게 되면 말이 어떻게 죽지 않으 며, 사람은 어찌 피곤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평안도의 큰 고통입니다. 나라에서 보내는 檢 察 官 은 그 일행을 규찰하여 이러한 폐단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 나 험난한 만리 길에 함께 갔다가 함께 돌아오는데, 私 情 이 없을 수가 없을 것이니, 비록 非 行 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철저하게 규명하여 들추어 내지 못하는 것은 필연 적인 형편입니다. 청컨대 지금부터는 감찰을 보내지 마시고, 漢 訓 學 官 을 선택해서 書 狀 을 주어 보내며, 義 州 에다 臺 員 을 보내어, 가지고 가는 일체의 물품을 정해진 수와 대조 점검해서 만일 규정을 범한 자가 있을 때 즉시 그 죄를 다스린다면, 沿 路 의 백성들이 거의 다시 소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또 그들의 徭 役 을 가볍게 해주고 세금을 줄여서, 급하지 아니한 貢 稅 는 면제하여 그들의 생활을 넉넉 하게 해주시면, 어찌 연로의 백성뿐이겠습니까? 온 道 의 백성들이 모두 蘇 復 될 것 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살펴주소서. 2) 이외에도 의주의 피폐와 관련된 실록의 기사는 여기저기 많이 산견된다. 사신 접대 로 피폐한 의주를 부흥하는데 遊 離 한 의주 백성들을 귀환시키는 방법을 논의하고 있 는 것, 3) 의주 지역에 들어와 사는 사람들은 세금을 면제하자는 호조의 제안을 이행하 자는 것, 4) 의주 백성들이 遊 離 하지 않게 할 방도와 土 官 을 더 설치하여 의주를 富 盛 2) 성종실록 7년(1476) 5월 15일(정사) 7번째 기사. 3) 세종실록 13년(1431) 11월 15일(병자) 5번째 기사. 4) 세종실록 17년(1435) 7월 10일(기묘) 1번째 기사.

3 - 시킬 것을 건의한 것, 5) 평안도 백성은 邊 鎭 에서 番 上 하고 중국 사신은 支 待 하고 出 役 하느라 피폐했는데 의주는 더욱 그러하다는 진단, 6) 의주는 중국사신이 처음 도착하 는 곳으로 쇠잔하니 定 寧 郡 을 폐지하여 의주에 붙이자는 것 등이 그것이다. 7) 평안도 지역은 중국과 경계를 접하고 있는 관방 지역이면서 사신의 행렬이 지나는 지역이므로 재정운영에서 중앙정부로부터 독립되어 독자적인 운영체제를 지니고 있었 다. 이러난 지역적인 특성은 평안도의 군역 운영을 다른 도와는 다르게 하였다. 8) 조선의 대명외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외교의 창구 역할을 담당했던 사 행의 모습을 규명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한다. 이러한 점에서 그동안 사행 연구나 사 행을 통한 대중국관계 연구는 적지 않은 관심을 받아왔는데, 유감스럽게도 대부분 조 선 후기 對 淸 關 係 에 집중되어 있다. 반면 조선 전기 對 明 關 係 의 사행 연구는 상대적 으로 소략하다. 이러한 경향은 현존하는 조선 전기 기행문인 朝 天 錄 의 편수가 조선 후기 연행록 에 비해 현저히 적은데다, 15세기의 조천록 은 그마저도 내용이 詩 로 이루어져 있어서 당대 사행과 관련한 다양한 정보를 파악하기 어려운 데에 기인한 것 으로 보인다. 9) 물론 의주 인민의 생활과 관련된 기존연구도 조선 후기가 주로 연구되 어져 왔다. 10) 2. 조선의 赴 京 使 行 과 明 의 天 使 (1)조선의 赴 京 使 行 사행은 매해 정기적으로 보내는 節 行 과 특정 사안이 있을 때 파견하는 別 行 으로 구 분된다. 정기사행인 절행의 종류로는 正 朝 使, 聖 節 使, 千 秋 使, 冬 至 使 가 있다. 정조사 는 정월 초하루에 元 旦 을 賀 禮 하기 위하여 파견되는 사행이고, 성절사는 황제의 誕 日, 천추사는 황태자의 탄일을 하례하는 사행이다. 그리고 동지사는 冬 至 를 하례하기 위한 것이었다. 太 祖 代 에는 3년에 한 번 파견하는 3 年 1 使 가 원칙이었다. 많은 사절 을 파견하려 했던 조선은 1 年 3 使 를 원했지만 洪 武 帝 는 조공횟수를 외교적 빌미로 삼 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조공횟수가 정식으로 1년 3사로 전환된 것은 定 宗 代 부터였 다. 당시 明 의 藩 王 이었던 燕 王 이 반란을 일으키자 皇 帝 였던 建 文 帝 가 조선을 회유할 5) 세종실록 26년(1444) 2월 3일(계묘) 2번째 기사. 6) 문종실록 즉위년(1450) 10월 19일(기축) 1번째 기사. 7) 세조실록 3년(1457) 3월 29일(임진) 4번째 기사. 8) 정인식, 17 18세기 평안도 良 役 制 의 변천, 한국문화 27, 2001. 178쪽. 9) 구도영, 조선 전기 對 明 陸 路 使 行 의 형태와 실상, 진단학보 117, 2013. 60~61쪽. 10) 의주와 관련된 기존연구는 논문 말미의 <참고문헌>을 참고할 것.

4 - 목적으로 1년 3사를 승낙해 준 것이다. 이후 明 과의 정기적 사행은 1년에 정조사, 성 절사 등 두 번을 파견하고, 황태자가 있을 경우 천추사를 파견하는 1년 3사가 정착되 었다. 11) 중국과의 조공책봉관계의 근간으로 정기적으로 꼭 보내야하는 사신이 節 行 이라면, 別 行 은 특정 사안이 발생했을 때 별도로 보내는 비정기 사행을 말한다. 대표적인 別 行 으로는 奏 聞 使, 奏 請 使, 謝 恩 使, 進 賀 使, 陳 慰 使, 進 香 使 등이 있고 欽 問 使, 告 訃 使, 問 安 使, 進 獻 使, 管 押 使 등 다양한 명목으로 사신이 파견되었다. 사행단은 크게 正 使, 副 使, 書 狀 官 의 三 使 를 주축으로 從 事 官, 從 人 등으로 구성된 다. 正 使 와 副 使 는 사행의 업무와 일정을 총지휘하고, 書 狀 官 은 사행단을 管 理 監 察 하 는 檢 束 의무를 맡았다. 通 事 가 종사관으로서 明 관리와의 통역, 公 貿 易 수행 등 사행 업무의 실질적인 활동을 맡았으며, 이밖에 子 弟 軍 官, 醫 員, 畵 員, 짐꾼인 종인 등이 포함되었다. 먼저 三 使 인 정사, 부사, 서장관에 대해 살펴보면, 正 使 는 使 行 을 대표하는 인물이 었다. 따라서 사행의 중요성에 따라 정사의 品 階 와 인물 배정에 차이가 두어졌으며, 明 에서도 정사의 품계에 따라 조선의 외교사안 해결 의지를 다르게 이해하였고 사행 단의 대우에도 차등을 두었다. 정사의 品 階 는 본 사행의 중요성을 가늠할 수 있는 척 도이기 때문에 定 規 가 있었다. 절행인 정조사, 동지사, 성절사, 천추사는 일반적으로 2품 관원으로 차정하였고 때로는 정3품 신료를 結 銜 하여 종2품의 직함을 띠고 보내 기도 하였다. 통문관지 에 의하면, 절행의 경우 正 使 는 正 2품을 結 銜 하여 從 1품으로 삼고, 副 使 는 정3품을 종2품으로 결함하였으며 書 狀 官 은 정5품을 정4품으로 결함한 다고 기록되어 있다. 별행인 사은사, 주청사, 진하사, 변무사 등은 정사와 서장관의 품계가 가장 높은데, 주청사는 조선의 외교적 필요성에 의해 파견하는 것이므로 그 간절함과 중요성을 나 타내기 위해서였고, 사은사는 황제가 내린 恩 數 에 감사하는 뜻을 보이는 사신이므로 품계가 높았다. 그렇지만 별행이라고 모두 품계를 올리는 것은 아니고, 왕위 책봉이나 황제의 은수에 대한 아주 특별한 謝 恩, 宗 系 辨 誣 奏 請 등 주요 외교사안이 있을 때에 만 정사의 품계를 올렸다. 고위급 사신 파견을 남발하면 외교현안의 중요도를 구분하 기 어려워지므로 조선 전기에는 특별한 사안 외에는 별행도 절행과 마찬가지로 종2품 사신이 차정되었다. 사행단은 연회 외에도 忌 日 이라든지 날씨에 영향을 받아 滯 在 기간이 길어졌다. 특 히 조선의 국경을 넘어가기 바로 전인 압록강 부근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여기에 서 사행단의 짐바리 검속과 進 貢 할 말에 대한 점검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먼 11) 제2장은 기본적으로 구도영의 앞의 논문을 참고하였다.

5 - 길을 떠나는 사행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한 마지막 慰 宴 이 두 번이나 열렸다. 사행단은 조선 내에서는 각 고을의 영접을 받았으나, 국경을 넘어가면 사정이 달라 졌다. 명으로 들어가면 조선 사행단은 스스로 安 危 를 지켜야 하는 外 國 人 일 뿐이었 다. 교통수단이라고는 말과 수레밖에 없었던 당시, 외국인으로서 긴 路 程 의 고됨은 특별한 것 이 아닌 당연한 것 이었다. 1534년(중종29) 進 賀 使 蘇 世 讓 은 사행길 와중 에 갑자기 악천후를 만나 人 馬 가 모두 뒤집어 지는 사고를 당하였고 1539년(중종34) 종계변무 주청사로 파견되었던 권벌도 9월 15일 갑자기 大 溝 를 만나 차량이 건너지 못하여 차량의 卜 物 을 모두 내려 사람들이 지거나 메고서 15 里 를 가기도 하였다. 요 동평야 지역에 이르면 400여리를 지나가도 언덕 하나가 없이 평탄했고, 소혹산에서 산해관까지는 간혹 언덕이 이어지지만 높지는 않았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으로 장마 가 지면 물이 나갈 곳이 없어 진흙탕이 되었다. 따라서 사행단은 이곳에서 큰 비를 만나면 부득이하게 진흙탕 속에서 수레를 끄느라 고생이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1500 년(연산6) 質 正 官 으로 明 에 다녀온 李 荇 은 高 平 을 지나면 끝없이 평야가 펼쳐졌는데, 杏 山 에서 큰 비를 만나 언덕까지 온통 진흙탕이라 미끄러워 물 천지를 헤쳐갔다 고 적고 있다. 게다가 차량이 낙후하여 이러한 어려움은 가중되었다. (2) 明 의 天 使 중국 사행의 구성은 보통 정사 부사 頭 目 등 20~30명 정도였다. 사신이 오면 義 州 安 州 平 壤 黃 州 開 城 등 5곳에 2품 이상의 관리를 선위사(또는 원접사)로 선 발하여 맞이하고 연회를 베풀었다. 요동도지휘사사가 오면 3품 당상관을 보냈다. 사 신 접대는 임시기관인 迎 接 都 監 에서 총괄하였다. 이때 통사는 사역원에서 11명이 선 발되는데, 통사의 외교적 경험을 중시하여 통사 출신을 영접도감의 실무책임자인 영 접도감사에 임명하였다. 12) 사신과의 원활한 통역을 위하여 의주에 통역관을 배치하였다. 즉 의주는 외교상 중 요한 장소로 사신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처음 머무는 곳이자 중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일정 정도 머무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1428년(세종10) 譯 學 訓 導 를 설치하고, 의주와 인근 각 고을의 자원자를 모아서 漢 文 과 漢 語 를 가르쳐 그 학업을 이룬 자는 平 壤 土 官 에 임명하였다. 13) 세종실록지리지 의주목조에도 역학 훈도 1인이 기록되어 있 다. 14) 사신들이 왕래하는 과정에서 접대로 인한 의주민의 고통은 심하였다. 특히 중국의 12) 장희흥, 朝 鮮 時 代 對 明 使 行 의 接 待 와 護 送 軍 - 義 州 民 의 生 活 을 中 心 으로, 백산학보 75, 2006. 351쪽~. 13) 세종실록 10년 12월 병술. 14) 세종실록 지리지 평안도 의주목.

6 - 사신만이 아니라 호송군이 많을 경우는 더욱 심각하였다. 사신들은 의주 의순관에서 머물면서 요동에서 호송군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돌아갔다. 그러나 요동호송군이 오는 기간이 오래 걸릴 경우 사신들은 의순관에서 몇 달을 머무는 경우도 있었다. 또 한 중국에서 사신과 호송군이 오게 되면 접대와 함께 擺 堡 의 말까지 주었다. 15) 그런 데 접대가 과다한 것이 문제였다. 그 비용은 의주 주변의 세금에서 충당되었기 때문 이었다. 그들에게 공급하는 1년 비용은 쌀로 1천여 섬으로 의주에서 부담하는 것은 한도가 있었다. 결국 이웃의 군현에서 가져다 쓰게 되는 형국이었다. 16) 이 폐단에 대 하여 黃 喜 는 사신을 맞이하러 가는 迎 逢 軍 이 적어 사신들이 의주에서 오래 머무는 것 은 한 때의 폐단이지만 호송군을 보내면 만세의 폐단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17) 중국 사신이 돌아갈 때에는 요동 호송군이 와서 호송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文 臣 인 天 使 이면 都 司 가 호송군 2, 3천 명을 거느리고, 太 監 이면 摠 兵 官 이 8천 명 을 거느리고 왔다. 그 접대 비용은 약 4천여 곡이었다. 그 외 조선에서 중국으로 갈 때 호송하는 군사나 滿 浦 에서 항상 나오는 野 人 에게 공급하는 것이 많았다. 결국 국 가에서는 무명을 보내기도 하였지만 일시적인 조치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적자를 해 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屯 田 을 개간하자는 방안이 논의되었다. 연산군대 의주의 圓 直 從 達 두 섬의 밭을 當 領 船 軍 이 개간하여 양곡 1천 곡을 수확한 경우가 있었다. 국 가에서는 威 化 島 의 토지가 비옥하므로 이를 개발하자고 하였다. 결국 사신과 요동호 송군이 머무는 접대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개간을 하자는 안이 제시되었다. 이 역시 국경 분쟁이 있어 쉽지 않았다. 18) 사신들의 왕래 시 물건을 운반하는 것 역시 문제가 되었다. 각 지역의 향리가 말을 이용하여 이들 물건들을 운반하였다. 사신의 물건을 운반하는 원칙은 단자가 있는 것 외에는 운반에 대한 책임은 없었다. 이를 계속 요구할 때에는 요동을 갔다가 돌아오 는 인원에게 책임을 물었고, 돌아갈 때에도 가져온 말에다 싣고 가고, 나머지는 호송 군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가져가도록 되어 있었다. 나머지 물건은 의주에 보관하게 하 였다. 19) 3. 호송군과 평안도의 피폐 15) 연산군일기 8년 6월 임자. 16) 연산군일기 9년 3월 기묘. 17) 세종실록 13년 12월 갑인. 18) 장희흥 앞의 책, 357-358쪽 19) 성종실록 15년 5월 을묘.

7 - 正 官 외에는 짐을 나르고 허드렛일을 도맡을 從 人 과 사행단의 안전을 지켜줄 護 送 軍 이 있었다. 20) 사행은 明 과의 외교 현안을 해결하는 임무의 중요성과 더불어 황제께 바치는 表 文 및 方 物 을 소지하고 있어서 建 州 女 眞 이나 도적들에게 습격 받을 위험 소지가 다분했다. 따라서 이들을 호위하는 護 送 軍 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護 送 軍 은 平 安 道 의 正 兵 에서 차출하였고, 사신 일행의 짐을 날라줄 騎 馬, 駄 馬 도 평안도 各 官 의 鄕 戶 馬 에서 輪 番 으로 정하여 보냈다. 그러므로 사행 파견이 많아지면 평안도민이 그 피해를 가장 직접적으로 받았다. 그렇다면 호송군은 몇 명이나 차정되었을까. 經 國 大 典 에는 사행의 호송군을 餞 送 시 4 隊, 出 迎 시 2 隊 로 差 定 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1 隊 가 25명이니 餞 送 시의 호송군은 100명, 出 迎 시의 호송군은 50명이었다. 이렇게 호 송군의 숫자가 지정되어 있지만 政 丞 이 사신으로 파견될 때에나 북쪽 변방에 聲 息 이 있을 때에는 일시적으로 그 숫자가 증액되었는데, 많을 때에는 천여 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중종대에는 평안도민이 호송군에 차정됨으로써 입게 되는 폐해가 지속적으로 거론되자, 변란의 소식이 없을 때에는 4 部 隊 에서 1 隊 를 감하여 보내기로 하였고, 이 것이 법제화되었다. 병영에는 각 鎭 에 예속되지 않고 평안병사가 직접 거느리는 隨 營 牌 라는 親 兵 이 있 었다. 이들은 북경으로 가는 사신 일행을 야인들의 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호송 군사로 차출한 군대이다. 본래 별도의 호송군이 있었으나 서북 변방의 사정이 좋지 않을 때 특별한 사태에 대비하여 호송군 외에 수영패를 데리고 갔다. 그런데 후에는 특별한 정황이 없을 때에도 통상적으로 데리고 가서 이들에게 짐을 수송하는 일을 맡 겼다. 21) 평안도는 부경사신의 왕래가 끊이지 않아 백성들의 고생이 다른 도보다 배나 심하 였다. 22) 특히 이 폐단이 심화된 것은 성종대 이후이다. 사실 세종대에는 영송의 폐단 이 그리 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때는 1년의 사행 횟수가 일정했고, 짐을 실어 나 르는 군마가 지치지 않도록 千 戶 가 알맞게 護 養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종대에 들어 일단 別 例 로 가는 사행이 잦아졌고, 부경하는 사람들을 검찰하지도 않았다. 23) 사신들이 부경할 때 날라줄 말은 평안도 各 官 의 鄕 戶 馬 에서 輪 番 으로 정하여 보냈 는데, 24) 부경사신들은 행차를 호송하는 군마에 사사로운 물건을 많이 실었다. 이들은 品 數 밖의 포자를 많게는 100여 同 에서 적어도 8, 90 同 까지 가져져 그것으로 중국의 紗 羅 綾 緞 이나 白 鐵 綠 礬 등과 바꾸었다. 25) 여기에 사신 외에 通 事 押 物 者 들도 물 20) 제3장은 기본적으로 구도영의 앞의 논문을 참고하였다. 21) 차문섭, 중종조의 정로위,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 출판부, 1973, 179쪽. 22) 중종실록 36년 2월 임신. 23) 성종실록 6년 5월 계해. 24) 성종실록 15년 5월 을묘.

8 - 건을 많이 가져갔다. 그런데 사신과 서장관들은 이를 금지하기는커녕 도리어 이들과 더불어 이익을 꾀하고자 했다. 26) 이런 상황이다 보니 평안도의 困 敝 는 오로지 중국 으로 가는 사신 행차의 짐을 나르고 迎 送 하는 일에서 말미암는다. 27) 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평안도 군사들이 말을 마련하지 못할 경우 各 官 의 수령은 그의 먼 일가에 독촉했 다. 군사들이 설령 말을 마련했다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쇠약하면 튼튼한 말을 내놓으 라고 團 練 使 가 퇴짜를 놓기 일쑤여서 군사들은 家 財 를 다 팔아서 말을 사야 했다. 이 에 평안도 백성들은 차라리 중국 사신을 맞이할지언정 부경사신을 맞이하지 말았으 면 28) 하면서 평안도 일대가 잔폐하게 된 것은 오로지 중국 물품을 무역하기 때 문 29) 이라고 했다. 평안도는 서북쪽으로 압록강 건너 울창한 산림을 경계로 여진과 맞닿아 있었다. 평 안도의 지리적 상황이 이러했으므로 여진은 태종 이후 주로 평안도의 江 界 渭 原 理 山 碧 潼 昌 城 朔 州 義 州 등 이른바 7읍으로 침입했다. 그것은 압록강 상류에 설 치되었던 4군이 세조대에 모두 폐지되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던 데다가, 건주위 에서 三 水 甲 山 까지는 백두산 기슭이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 나무만이 무성할 뿐 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진이 침입할 수 있는 곳은 북쪽으로 강계 만포로부터 남 쪽으로 의주까지였다. 조선에서는 여진 침입에 대비해 평안도 楸 坡 에서 隣 山 에 이르 기까지 압록강을 따라 15개소의 鎭 을 벌여놓고 군사들로 하여금 방수하게 했다. 그래 서 평안도 군사들은 별다른 聲 息 이 없어도 얼음이 어는 시기가 되면 방수하러 가야 했지만, 여름에는 그나마 수월했다. 그것은 얼음이 풀리면 압록강 강물이 불어서 여진 들이 강을 건너 침입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15세기 중반인 성 종대 후반에 이르면 달라졌다. 왜냐하면 이전에는 여진들이 간헐적으로 강을 건너왔 지만, 이때에 이르러서는 짐승의 털가죽으로 만든 작은 배인 皮 船 을 타고 본격적으로 강을 건넜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들은 계절에 구애받지 않고 무시로 침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평안도 군사들은 거의 대부분 변경에서 방수했기 때문에 방비의 고통이 그 전에 비해 크게 가중되었다. 1491년(성종 22) 許 渾 의 일 이후로, 평안도 군사들은 9월부터 2월 보름까지는 남도 군사와 合 番 해 부방했다가 분번한 후 4월부 터 8월까지는 단독으로 방수했다. 여기에 방수하러 연변 각 진으로 가는 데에도 거의 열흘에서 한 달이 걸렸다. 그러다 보니 쉴 수 있는 날이 거의 없는 셈이었다. 30) 25) 성종실록 22년 3월 을사. 26) 성종실록 5년 2월 임술. 27) 성종실록 6년 5월 계해. 28) 중종실록 23년 2월 경술. 29) 중종실록 28년 12월 무인.

9-4. 의주 백성들의 핍박과 조정의 대응 평안도 백성들은 군역을 피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강구했다. 이 시기 평안도 백성 들은 중국 땅엔 노역이 없고 먹을 것이 넉넉하다는 소문을 듣고 압록강 너머로 도망 갔다. 국가에서는 유망한 인물에 대해 기필코 모두 쇄환하려 했지만, 그들은 오지 않 으려고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름을 바꾸는 자까지 있었다. 31) 성종 연간이 되면 의주 등지의 평안도 사람들이 요동방면으로 도망가는 것에 대한 논의가 종종 보인다. 예를 들어 조선에서 도망한 사람들이 東 八 站 에 많이 살고 있으 니 의주에 長 城 을 쌓아 이를 방지하자든가, 32) 요동에서 봉황산 방면으로 조선말을 쓰 는 사람들이 다수인데 이들은 모두 조세와 요역이 적은 이곳으로 도망한 결과라고 판 단하고 있다든가, 33) 중국이 동팔참에 성을 쌓아 인구를 이주시키는데 여기엔 도망간 평안도 사람들이 다수 살고 있는 듯하다든가, 34) 중국의 東 八 站 과 東 寧 衛 백성은 조선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중국 영토가 조선 경계에 점점 근접해 오니 평안도 사람 의 도망이 우려된다든가, 35) 중국 송참은 조선에 너무 근접해 있어 의주사람들의 도망 이 우려되니 禁 防 節 目 을 만들어 예방해야 한다든가, 36) 병조에서 의주와 七 站 의 방비 에 대해 아뢰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37) 호송군으로 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안도의 군사들로 각 군이 돌아가면서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요동으로 갈 때는 대부분 의주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의주민들이 짐을 운반하게 된 이유는 황해도에서 짐을 싣고 의주에 도착하면 말과 사람이 지쳐 중국에 갈 수 없기 때문에 곧바로 의주 사람을 충당하여 요동까지 짐을 운반하였다. 때문에 요동호송군이 의주에 이르면 연고가 있는 자는 모두 의주 사람으로 충당하였다. 1484 년(성종15) 동팔참에서 사행 도중에 다수의 호송군이 죽은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들 대부분이 의주 사람이었다. 법적으로 의주 麟 山 龍 川 鐵 山 宣 川 郭 山 龜 城 사 람은 호송군에서 제외하였다. 그러나 실제 대부분은 의주와 그 인근 주민들로 구성되 30) 김순남, 15세기 중반~16세기 조선 북방 軍 役 의 폐단과 軍 額 감소, 朝 鮮 時 代 史 學 報 61, 2012. 47~49쪽. 31) 중종실록 23년 3월 임진. 32) 성종실록 14년(1483) 12월 12일(신미) 2번째 기사. 33) 성종실록 17년(1486) 10월 8일(기묘) 3번째 기사. 34) 성종실록 19년(1488) 8월 24일(을묘) 3번째 기사. 35) 성종실록 20년(1489) 7월 8일(갑자) 2번째 기사. 36) 성종실록 21년(1490) 5월 21일(임신) 4번째 기사. 37) 성종실록 24년(1493) 3월 22일(정해) 1번째 기사.

10 - 었다. 의주 사람들이 호송군에 참여하는 이유는 결국 물건 매매로 이익이 생기기 때 문이었다. 사행에는 많은 고통이 수반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물건을 가져가는 것을 인정하였 다. 다만 진헌 금지 품목으로 지정된 苧 布 麻 布 등을 가져가는 행위는 엄단하였다. 이것을 조사하기 위하여 물목을 만들어 의주에서 사행단 전체의 물품을 대조하였다. 수행원 역시 필요한 경비의 마련이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몰래 물건을 가져가기 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여기에 적극적인 사람들은 상인들로 통역관에게 부탁하여 무 역에 참여하거나 호송군과 이름을 바꾸어 대신 요동으로 가서 장사하였다. 호송군이 법을 위배할 시에는 정도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심할 경우 재산을 몰수하고 水 軍 에 충당하였다. 1413년(태종13) 조정에서는 호송군의 노고를 위로하고 일정 정도의 이익 을 도모하기 위하여 牛 馬 를 제외한 10 升 이하의 苧 布 麻 布 人 蔘 皮 物 등의 무역 을 허락하였다. 하지만 호송군들은 布 物 을 정수대로 하고, 다른 물건을 모두 금지하 는 것은 문제가 많다고 하였다. 요동에 오래 머물 경우 농사를 망치기 때문에 이익을 금지한다면 생활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결국 布 10필, 인삼 5 斤 으로 하되 笠 帽 등은 금하지 않았다. 그 양이 많고 적다는 것으로 논의가 분분하였다. 여기서 문제는 평안도 호송군들이 1인당 私 布 10필씩을 가지고 갈 수 있도록 허용 하였으나 그 지방 풍속이 베를 짜는데 능하지 못하다는 데 있었다. 즉 서울의 富 商 大 賈 들이 의주에 가서 호송군에게 부탁하여 물건을 대신 가져가게 하거나 보내는 사람 의 이름을 사칭하고 대신 들어가서 이익을 취하였다. 5. 世 宗 世 祖 代 三 島 와 對 明 관계 여기서 三 島 란 압록강 하류의 주요 섬 3개를 가리킨다. 실록엔 삼도가 시기에 따라 다르지만 본 논문에서는 성종실록 19년(1488) 6월 13일(을사) 2번째 기사와 4번째 기사에서의 지적처럼 어적도 검동도 위화도를 삼도로 보려한다. 38) 1410년(태종10) 2월, 서북면 도절제사 김승주가 의주 軍 民 이 강을 건너가 밭을 경작하는 것( 越 江 耕 田 )을 금하자고 조정에 요청하고 있다. 39) 이는 압록강을 건너 의주사람들이 경작을 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여기서 越 江 이란 인식이 주목된다. 그런데 1432년(세종14) 1월 호조에서 아뢰어 의주 등지의 백성들의 越 耕 하는 것 38) 서인범, 압록강 하구 연안 도서를 둘러싼 조 명 영토분쟁, 명청사연구 26, 2006. 35 쪽. 본 논문에서 검토하는 조선 전기 삼도를 둘러싼 對 明 관계에 대한 기존연구는 서인범 의 앞의 논문이 유일하다. 39) 태종실록 10년(1410) 2월 16일(계축) 4번째 기사.

11 - 이 온당한지의 여부와 경작에 대한 조세 징납 여부를 논의했다고 하자, 세종이 10리 를 限 界 로 越 耕 하는 것을 금지하지 말 것이며 그에 대한 조세는 보통 경우의 반액 을 받게 하라고 답하고 있다. 40) 월강 월경 이 조선 조정에 의해 합법화된 것을 의 미한다. 그런데 월경 이 국경을 넘어선 경작행위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후 농경 이 끝났을 같은 해 9월, 병조에서 아뢰어 兀 良 哈 의 指 揮 林 加 羅 가 압록강 하루 근처 에서 횡행하며 약탈을 행하니 의주 이외의 강변에 거주하는 백성들은 명년부터는 彼 邊 耕 田 을 금지하게 해야 할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러나 백성의 생계를 위해 허락한 경작이므로 예전대로 허락하자는 허성의 의견이 수용되었다. 41) 1433년(세종15) 11월 영의정 황희가, 越 江 경작을 금지한 까닭에 평안도 백성들이 곤궁하여 도망치곤하나 賊 變 이 예상되니 금지는 계속해야한다고 아뢰었다. 이에 세 종이 적의 소굴과 멀리 떨어진 곳은 경작케 함이 어떨까 제안하고 있다. 42) 다음해인 1434년(세종16) 평안감사가 의주 등지의 주민들에게 越 江 耕 田 을 허용하되 수령과 千 戶 로 엄중히 수호하면 될 것이라 아뢰고 있다. 43) 이로 보아 경작을 위한 준비가 진 행되었던 듯하다. 1436년(세종18) 3월 세종이 평안감사에게, 여연에서 의주에 이르는 7개 邑 의 연변엔 이미 목책을 설치하여 괜찮으나, 인가도 드물고 목책도 없는 곳은 올봄에 내지로 철수시켜 여진의 습격에 대비해야 할 것이라는 최윤덕의 의견에 찬성 하고 있다. 그러나 작년 7월 여연에서 일어났던 야인에 의한 3회의 약탈사건도 있었 으니, 목책이 없는 곳에선 낮엔 경작하고 밤엔 파수를 보는 방법도 강구하라고 하고 있다. 44) 1445년(세종27) 3월 평안도 도관찰사 조극관이 아뢰길, 의주는 경작할 만한 땅이 원래 적어서 백성들이 모두 威 化 島 와 今 音 同 島 및 於 赤 島 의 땅을 경작하여 먹고 살 았는데, 이 三 島 에 경작하는 것을 금지한 이후로부터 백성들의 생활이 곤란하오니, 청하옵건대, 그전대로 경작하게 하소서. 하니, 의정부에서 의논해 아뢰기를, 六 典 謄 錄 의 越 耕 禁 止 條 에, 의주의 狄 江 안의 어적도는 싸잡아 금지하지 말고 살피고 조사 하여 조세를 받으라. 하였고, 위화도와 금음동도는 어적도의 밑에 있어서 賊 路 와는 더욱 멀리 떨어져 있사오니 마땅히 관찰사가 아뢴 바에 따르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 다고 한다. 45) 여기서 처음으로 三 島 가 등장하고 있다. 40) 세종실록 14년(1432) 1월 4일(갑자) 6번째 기사. 41) 세종실록 14년(1432) 9월 9일(갑자) 3번째 기사. 42) 세종실록 15년(1433) 11월 11일(경인) 2번째 기사. 43) 세종실록 16년(1434) 2월 6일(갑인) 8번째 기사. 44) 세종실록 18년(1436) 3월 25일(신묘) 1번째 기사. 야인의 약탈사건 기사는 세종실록 17년(1435) 9월 18일(병술) 3번째 기사, 9월 21일(기축) 2번째 기사. 45) 세종실록 27년(1445) 3월 13일(병술) 1번째 기사.

12 - 의주 백성들이 비옥한 삼도를 왕래하며 경작하던 것이 일대 변화를 가져온 것은 1461년(세조7년) 兀 良 哈 의 趙 三 波 등의 습격이었다. 이로 인해 農 幕 을 설치하고 경작 하던 백성 중에 잡히거나 살해된 자가 182명, 말 26마리와 소 155마리를 약탈당했다 고 한다. 46) 그럼에도 이듬해인 1462년(세조8년) 2월 한명회는 의주 백성들에게 비옥 한 삼도를 다시 왕래하며 경작케 하자고 건의하였고, 세조는 삼도의 농경을 허락하며 대신 참호를 깊이 파고 목책을 설치해서 수호군을 많이 배치하여 왕래 농경케 하라고 하고 있다. 47) 그러던 1464년(세조10) 11월 평안도 순찰사 한계미가 아뢰길, 압록강의 조몰정과 검동도는 농사짓던 땅이나 賊 路 가 사방으로 통하여 경작이 곤란하지만 위화도는 강 을 깊게 파서 야인이 쉽게 접근 못하게 하면 백성이 안심하고 경작할 수 있다고 하 며, 내년 봄에 군인 2천명을 동원하여 파게 해야 한다고 제안하자, 세조가 허락하고 있다. 48) 세조는 이어 다음해인 1465년(세조11년) 2월 평안도 관찰사 김겸광에게 의주 三 島 와 申 胡 水 의 耕 墾 事 目 을 내려보내고 있다. 그 내용은 신호수는 목책을 설치하지 말고 점차 개간 경작할 것, 삼도인 蘭 子 島 黔 同 島 招 募 島 는 의주목사가, 위화도는 麟 山 節 制 使 가, 신호수는 方 山 萬 戶 가 守 護 할 것, 경작엔 건장한 남자 농민이 참여하고 부녀자나 노약자를 거느리지 말게 할 것, 밤엔 안전시설 만들어 집단거주하게 하고 낮엔 군사가 경작농민을 지켜줄 것, 의주 농민의 경작순서는 먼저 招 募 亭 을, 다음은 검동도, 그리고 위화도와 난자도로 할 것. 난자도와 위화도와는 다르게 초모정은 목책 을 견고하게 설치할 것, 검동도는 도적이 건널 수 없게 여울을 깊게 팠으므로 목책을 설치할 필요가 없다. 농민도 무기를 준비하게 할 것 등이었다. 49) 세조의 삼도 농경에 대한 자세는 이처럼 적극적이다. 1466년(세조12) 윤3월 세조가 평안도 관찰사에게 狄 江 이 깊어지면 삼도에서의 농경이 편해질 것이라 하니, 동봉하 는 지도를 보고 그 지리와 水 力 등을 살피라고 명하고 있다. 이에 평안도 관찰사 오 백창이 답하여, 압록강 물이 넘치면 九 龍 淵 의 물도 넘쳐 적강과 합치게 되므로 적강 의 물을 깊게 파서 삼도의 경작에 도움이 되게 하라고 하신 것을 살펴보니 도움이 되 지 않음이 드러났다고 보고하고 있다. 50) 그런데 1466년(세조12년) 10월 평안도 절도사가 아뢰길, 야인 일족인 羅 下 의 군사 가 겨울 얼음이 어는 것을 기다려 의주의 삼도를 노력질하려 한다는 정보를 얻었다고 하고, 이 때문에 종종 賊 의 출현을 우려하여 삼도 농민을 보호한다고 주변에 斥 候 를 46) 세조실록 7년(1461) 9월 28일(을축) 2번째 기사. 47) 세조실록 8년(1462) 2월 19일(갑신) 5번째 기사, 2월 26일(신묘) 3번째 기사. 48) 세조실록 10년(1464) 11월 17일(병인) 3번째 기사. 49) 세조실록 11년(1465) 2월 15일(임진) 3번째 기사. 50) 세조실록 12년(1466) 윤3월 4일(을해) 4번째 기사, 11월 11일(기묘) 2번째 기사.

13 - 보내고 군마를 整 齊 하였다. 이에 대해 세조는 먼저 스스로 騷 擾 하지 말고 충분히 형 세를 살핀 연후에 거동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51) 1467년(세조13) 세조가 鳥 暮 亭 에서의 戰 敗 한 일을 논할 때, 의주목사의 禹 貢 의 후 임으로 제수받은 이윤인이 의주가 오랑캐에게 욕을 당한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경계 를 넘어 삼도에서 경작을 시킨 것이니 이를 포기하라고 하였다. 이에 세조가 禹 貢 이 사냥하다 적지에 깊이 들어간 때문이지 삼도 때문이 아니라며, 하물며 작은 패배로 인하여 갑자기 국토를 버리겠는가? ( 況 以 小 敗, 遽 棄 國 土 乎 )고 힐난했다. 그러자 신숙 주가 아뢰길, 농번기에 집중 농경케 하고 柵 壘 를 잘 지켜내면 軍 需 도 넉넉해지고 욕 을 당할 근심도 없다고 하자, 세조는 곧 이윤인을 사임시키고 西 班 職 에서 천거를 하 라고 하자 신숙주가 성귀달을 천거했고 곧 의주목사로 제수되었다. 52) 세조의 삼도 경 작 의욕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인사교체라 하겠다. 세조의 삼도 경작에 대한 열의는 다음에서도 보이고 있다. 즉 1468년(세조14) 3월 평안 서도절도사 김견수가 의주사람들의 의견으로 검동도, 조모정, 위화도는 신미년 (1451년[문종1])에 올량합이 쳐들어와 농민이 잡혀가는 등하여 이익이 없으니 경작하 지 말게 해달라고 치계하였다. 이에 대해 세조가 말하기를, 경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넷이 있으니, 매년 耕 種 하여 곡식을 얻는 땅에다 금년에 경작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금년 곡식을 잃는 것이니, 그 폐할 수 없는 것의 하나이며, 옛날엔 한 번에 百 里 씩 나라를 넓혔는데, 이제 버리고 경작하지 않으면 이것은 날로 백리씩 나라를 줄이는 것이니, 그 폐할 수 없는 것의 둘이며, 금년에 경작하지 아니하고 명년에도 경작하지 아니하여, 오랑캐가 얻어 스스로 경작하게 한다면, 저들이 장차 말하기를, 이 땅과 이 밭은 모두가 본시 나의 소유였다. 고 하면 뒤에 말할 수 없으니, 그 폐할 수 없는 것의 셋이며, 人 主 는 의당 위엄을 四 方 에 펴야 하는데, 이제 사로잡히는 것 을 두려워하여 버리고 경작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약하다는 것을 보일 뿐이므로, 그 폐할 수 없는 것의 넷이니, 경 등은 모름지기 다시 商 量 하라. 고하고 있다. 이어 농민 을 호위하고 건너가 경작하고 돌아오게 하되 고기잡이와 음주를 금지하라고 명하고 있다. 53) 예종대가 되어서도 한명회와 신숙주는 삼도 경작에 대해 적극적이다. 1469년(예종 1) 윤2월 그 둘은 예종에게 삼도 경작을 재개해야 하며, 그것은 가난한 의주 백성들 을 위해서라고 하며, 다만 군사를 주둔시키고 기일을 정해 농경을 행하면 될 것이라 아뢰고 있다. 54) 같은 해 6월 신숙주가 삼도 경작을 위한 守 護 圖 를 바치자 예종은 평 51) 세조실록 12년(1466) 10월 15일(계축) 3번째 기사, 세조실록 13년(1467) 4월 9일(갑 진) 2번째 기사. 52) 세조실록 13년(1467) 5월 10일(갑술) 2번째 기사. 53) 세조실록 14년(1468) 3월 20일(경진) 1번째 기사.

14 - 안도 관찰사 어세겸 등에게 이를 보내면서, 의주의 여러 섬에서 농사지을 때 煙 臺 와 木 柵 을 설치하여 수호할 위치 등을 마련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55) 6. 成 宗 代 三 島 와 對 明 관계 성종대가 되어도 신숙주의 관심은 여전하다, 1470년(성종1) 2월, 그는 삼도에서의 의주백성들의 경작이 오랑캐의 습격 이후 의주와 삼도를 오가며 경작하고 병졸로 일 일이 수호하게 하니 군사나 백성 모두 괴로워한다면서, 목책을 설치하여 수호를 엄중 히 하고 삼도에 거주하며 경작케 하면 좋아할 것이라고 성종에게 아뢰고 있다. 그러 면서 世 祖 께서 반드시 이 섬을 耕 種 하게 하려고 하였던 것은 후세에 반드시 중국 사 람에게 빼앗길 것을 염려한 까닭( 慮 其 後 世 必 爲 唐 人 所 奪 ) 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56) 이에 성종은 같은 달, 평안 서도절도사 하숙부에게 삼도 起 耕 事 目 을 내리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왕복 선박을 많이 마련할 것, 방어시설을 확충하고 군사로 하여금 적의 침략에 대비할 것, 농민들의 주간 농경이 끝나면 목책 안에서 숙박하게 할 것 등이었다. 다음 달인 3월에도 성종은 평안 동도절도사 이종생에게, 삼도 농사일이 바 야흐로 시작될 때이니 요동지방에 사람을 보내 賊 의 종적을 정탐하여 만약에 대비 하라고 이르고 있다. 57) 그런데 같은 달 신임 평안 서도절도사 이철견은, 의주 백성들 이 삼도 왕복 경작을 번거롭고 賊 變 을 두려워하여 소극적이며, 삼도에 연대와 목책을 설치해 놓긴 하였으나, 중국측의 여진 방어를 위한 역참 건설이 완료되는 것을 기다 려 5, 6년 후에 경작해도 될 것이라 아뢰고 있다. 58) 그런데 11년이 지난 1481년(성종12) 6월, 김승경이 아뢰길, 비옥한 삼도 경작을 금 한 이후로 의주가 殘 廢 되고 있으며, 중국이 站 을 설치해 압록강 가까이 오면 삼도를 그들이 경작하게 만들 수 있으니 조선측이 먼저 경작을 재개해야 한다고 아뢰고 있 다. 성종이 이에 경작재개를 수락하고 있다. 59) 이어 동지사 이파도 신숙주의 전술한 의견처럼 삼도 경작이 왕복형태라 의주백성이 힘들어 하니 목책과 농막을 설치해 군 사로 방비케 하면 될 것이라 아뢰고 있다. 성종도 평안도 관찰사 신정에게 비옥한 삼 도 경작에 백성들이 전념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라 이르고 있다. 60) 이러한 분위기 54) 예종실록 1년(1469) 윤2월 10일(을축) 1번째 기사, 윤2월 24일(기묘) 5번째 기사. 55) 예종실록 1년(1469) 6월 9일(신유) 4번째 기사, 6월 22일(갑술) 2번째 기사. 56) 성종실록 1년(1470) 2월 16일(을축) 3번째 기사. 57) 성종실록 1년(1470) 2월 22일(신미) 6번째 기사, 3월 7일(병술) 5번째 기사. 58) 성종실록 1년(1470) 3월 7일(병술) 6번째 기사. 59) 성종실록 12년(1481) 6월 9일(임자) 1번째와 2번째 기사.

15 - 에 다음 달인 7월 평안도 관찰사 신정이 삼도에서 起 耕 할 방책을 아뢰었고 조정에서 이를 논했지만 賊 變 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금지하고 있다. 61) 1485년(성종16) 10월 사헌부 장령 이의가 상소로 삼도인 위화도 조몰도 검동도의 경작 재개를 요청하며 방비 방법까지 詳 論 하고 있다. 이에 삼도의 경작 재개를 조정 에서 논의했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62) 그에 의주목사 조숙기가 의주의 軍 需 가 부족하여 인근 고을에서 가져다 채우니 폐단이 많으니 삼도 중에서 변란 적은 위 화도라도 우선 둔전하자고 아뢰고 있다. 63) 이로부터 3년 후인 1488년(성종19) 5월 무령군 유자광의 다음과 같은 상소는 아주 구체적이며 시사하는 점이 많다. 의주는 나라의 西 門 인 큰 鎭 이며 중국 사신이 왕래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關 防 을 엄중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성곽은 저렇게 협소하고 거주하는 백성들도 저렇게 쇠잔하며, 입을 수 있을 만큼 견고한 갑옷과 당길 수 있을 만큼 강한 활이 없는 것이 저와 같고, 1천 명의 군사가 수개월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을 비축하지 못한 것이 저와 같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중국에 변고가 있으면 의주에서 맨 먼저 군대를 받게 됩니다. 지금 중국에서 이미 애양포( 靉 陽 鋪 )를 설치하여 많은 군대를 주둔시켰으며, 起 點 을 遼 城 으로부터 하여 남북으로 廣 寧 까지 긴 담을 쌓아 야인이 요동 지경에 들 어갈 수 없는 것이 오래입니다. 그래서 開 州 이북에는 백성들의 거주가 이미 조밀합 니다. 그래서 지난해 개주에 성을 쌓았고 또 앞으로 湯 站 에 성을 쌓을 것입니다. 개 주는 의주에서 1백여 里 의 거리이며, 탕참에서는 6,70여 리가 됩니다. 탕참에 성을 쌓으면 또 반드시 婆 娑 府 에 성을 쌓을 것인데, 의주와의 거리는 겨우 30여 리입니다. 파사부에 성을 쌓으면 (중국은) 반드시 압록강 三 島 의 田 地 를 경작할 것인데,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 걱정해야 할 것으로서 이를 보류하여 뒷날의 근심이 되게는 할 수 없 습니다. 그리고 東 八 站 은 수백년 동안 텅비어 있던 지역인데 백성들의 거주가 이미 조밀하고 평안도는 백성들의 거주가 날로 더욱 쇠잔해지니, 비록 의주가 있으나 巨 鎭 이라고 여기고 關 防 이 있다고 믿을 수는 없습니다.(중략) 전하께서는 사방이 무사하다 고 해서 장차 의주에 큰 걱정이 없다고는 하지 마소서. 거기에 거주하는 백성이 정말 쇠잔하다면 모름지기 금년에 남쪽의 백성 4,5백 戶 를 옮겨서 채우고 명년에 또 그렇 게 하며, 근방의 5,6 郡 縣 에도 남쪽의 백성들을 많이 옮겨서 그곳에 채워 백성들의 거주가 조밀해지게 되도록 하게 하소서. (중략) 그리고 남쪽의 백성들을 옮겨서 채운 다면 압록강의 三 島 는 경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60) 성종실록 12년(1481) 6월 13일(병진) 1번째와 4번째 기사. 61) 성종실록 12년(1481) 7월 13일(병술) 2번째 기사. 62) 성종실록 16년(1485) 10월 25일(임인) 3번째 기사, 10월 29일(병오) 3번째 기사. 63) 성종실록 17년(1486) 10월 19일(경인) 3번째 기사.

16 - 그 전에 장맹창 우공 허형손이 義 州 鎭 帥 가 되었을 적에, 兵 事 에 어두워 척후를 조심하지 않다가 敵 變 이 있게 되자 조정에서 논의하여 삼도를 묵혀 두었던 것이지, 세조대왕의 본뜻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얼마 안되어 세조께서 다시 경작하려고 하 였으나 조정의 의논이 정해지지 않았고, 세조께서 병으로 자리에 누우셨다가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아아! 지금 의논하는 자가 삼도를 경작하는 便 否 는 의주의 백성들을 찾아서 물어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백성들은 비록 경작 을 하려고 하지만 관리들이 혹시라도 변고가 있을까 염려하여 편하다는 것으로 대답 하지 않는데, 누가 감히 편하다는 것을 말하겠습니까? 혹시 백성들도 그곳을 경작하 려 않는다고 한다면 그만두겠습니까? 큰 계획을 하는 사람은 마땅히 일의 이롭고 해 로운 것으로 결단해야 합니다. 일을 시행해서 이익이 많으면 지금은 불편하다고 말하 겠지만 뒤에는 모두 편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중략) 더구나 의주는 建 州 와는 거리가 멀지만 애양포는 상류에 鎭 守 하고 있으니, 우리의 창성과는 서로 바라볼 수 있는 거 리입니다. 그리고 창성에서부터 의주까지에는 구령 方 山 두 鎭 이 있습니다. 만약 斥 候 를 멀리하고 烽 火 를 조심스럽게 한다면 야인들이 압록강가에 와서 말에게 물을 먹 이지 못할 것인데, 삼도의 경작하는 백성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생각 하지 않고 기름진 田 地 를 내버려두어 고기가 노니는 장소로 만드니, 조정의 의논이 계책을 잃은 것입니다. 만약 중국에서 파사부에 성( 城 )을 쌓고 경작하게 된다면 큰 근 심거리는 없겠으나 후회하여도 미칠 수 없을 것입니다. 64) 한 달 후인 6월 유자광은 다시 상소하여 말하기를, 지금 (중국은) 천하가 富 盛 해서 천하의 땅을 소유하고 있는데도 요양으로부터 장성 ( 長 墻 )을 쌓고, 이미 애양보( 靉 陽 堡 )를 설치하였으며, 또 開 州 에 성을 쌓고, 점차 湯 站 에 성을 쌓고, 파사보에 성을 쌓았으니, 슬기로운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알 수 있으며, 더욱이 요동 사람들 또한 모두 그것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라며 중국의 위협을 우회적으로 표현하였고 남쪽의 백성을 옮겨 의주 인구를 더 키우고 성곽도 높 고 넓혀 쌓고 삼도도 정착하여 경작할 것을 요청하였다. 65) 1488년(성종19) 6월 유자광이 의주 및 동팔참 등지의 지도를 바치며, 중국이 탕참 에 성을 쌓아 10년 이내에 의주 가까이로 근접해 올 것이라고 중국을 우려하여, 의주 성을 넓게 쌓아 대비하자고 아뢰었다. 그리하면 동시에 삼도 경작도 수월해질 것이라 전망한 것이었다. 66) 이에 평안도 절도사 이병정도 같은 달 상소하여 삼도의 경작과 관련해 어적도는 경작이 용이하지만 검동도는 왕래하는데 멀어 곤란하다고 구분짓고 64) 성종실록 19년(1488) 5월 27일(경인) 2번째 기사. 65) 성종실록 19년(1488) 6월 4일(병신) 3번째 기사. 66) 성종실록 19년(1488) 6월 11일(계묘) 2번째 기사.

17 - 있다, 이에 성종이 어적도 검동도 위화도의 삼도는 야인에 대한 장맹창의 대응 잘 못으로 2년 동안 경작하지 못했지만 그 地 勢 를 조사하여 재경작의 방편을 궁리하라고 명하고 있다. 67) 1488년(성종19) 12월 삼도 개간을 중국 요동이 허락하지 않을 것을 우려하게 된다 (논의된 의견의 정리 필요). 삼도도 적강도 중국 땅이란 의견도 제기되고 그러므로 이 문제를 중국에 咨 文 으로 보내는 것도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68) 1년 후인 1489년(성종20) 5월 성종은 삼도를 둔전하려 했다가 중지한 것은 중국의 형세를 살피려 함이었다고 하고, 7월, 의주목사 경유공에게 삼도 개간건을 가서 살피 라고 명하고 있다. 69) 이같은 성종의 명령에 대한 회답인지 같은 해 12월 特 進 官 이병 정이 삼도 경작은 불가하다고 아뢰고, 그 이유로 삼도 경작을 위해 왕래 선박으로 漕 船 300척과 大 船 50척을 만들기로 했는데 이를 위해 벌목하느라 야단인데 중국 조정 에서 이런 소식을 들으면 실로 작은 일이 아니며( 中 朝 聞 之, 則 誠 非 小 事 ), 비가 내리면 삼도가 물에 잠겨 경작 농민이 죽을까도 두렵다는 의견이었다. 이극배도 같은 의견이 었다. 70) 1496년(연산2) 10월 어세겸이 아뢰어 삼도 경작을 이젠 백성들이 괴로워하는 일이 되었다고 아뢰고 있다. 윤효손도 적의 침략을 자주 입어 삼도 경작을 금한지 오래되 었다고 동의하고 있다. 71) 그러나 1503년(연산9) 3월 다음과 같은 이세좌의 제안으로 다시 경작건이 논의된 다. 요동 호송군이 으레 義 順 館 까지 오므로 그들 군사에게 주는 양곡과 仁 情 이 쌀 로 환산하면 1년 1,000여 석이니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特 進 官 조숙기가 아뢰기를, 文 臣 인 天 使 가 사신으로 올 땐 요동도사가 호송군 2, 3천 명을 거느리고, 太 監 이면 총병관이 8천 명을 거느리고 옵니다. 이들에 대한 접대비용이 4,000여 斛. 이러저러 한 지출로 둔전이 시급합니다. 2년 전에 직접 의주의 圓 直 從 達 두 섬을 둔전하여 양곡 1,000 곡을 수확한 바 있으니, 그 곁에 있는 비옥한 위화도를 경작하길 바란다 는 제안이었다. 이에 조정은 위화도 둔전 여부를 논의하여, 현지의 사정을 더 자세히 파악하여 결정하자고 결론짓고 있다. 72) 그런데 같은 해 8월 호조에서 위화도 개간이 섬을 왕래하며 경작하는 일이라 쉽지 않다고 하며, 그 대신 水 利 도 좋고 賊 變 도 염려 없는 大 川 水 口 등지를 개간하자는 의견이 개진되고 있다. 73) 67) 성종실록 19년(1488) 6월 13일(을사) 2번째 기사, 4번째 기사. 68) 성종실록 19년(1488) 12월 29일(무오) 2번째 기사. 69) 성종실록 20년(1489) 5월 1일(무오) 1번째 기사, 7월 7일(계해) 1번째 기사. 70) 성종실록 20년(1489) 12월 2일(을유) 2번째 기사. 71) 연산군일기 2년(1496) 10월 30일(계묘) 2번째 기사. 72) 연산군일기 9년(1503) 3월 12일(기묘) 1번째 기사, 3월 17일(갑신) 2번째 기사.

18-7. 中 宗 代 三 島 와 對 明 관계 중종반정 이후에도 한동안 삼도 경작건은 논의되지 않고 있다. 그러던 1531년(중종26) 11월 성절사로 갔던 반석평이 귀국하여 복명하는 중에, 위 화도의 중국인 쇄환건을 요동도사에게 알려, 上 國 의 백성들이 국경에 흩어져 살아 두 나라 경계에 만연하고 있다. 그래서 혹 사로잡혀 가는 일이라도 생기면 조정의 문 책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땅이 비록 지금 비어 있지만 우리나라 백성들이 가서 살면서 농사지을 수 있겠는가? 그대로 비워두는 것은 오로지 대국을 섬긴다는 뜻에서 인 것이다. 라고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74) 중국인들이 드디어 압록강 지역에까지 출 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532년(중종27) 10월 예조가, 요동 大 人 이 指 揮 3인을 파견하여 위화도와 圓 直 島 의 중국인을 推 刷 하는 중이라며 조선측의 접대에 대해 논하고 있다. 75) 중국인들의 출 몰이 잦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1532년의 년말은 압록강 출몰 중국인 추쇄건으로 몇 개의 기사가 보인다. 우선 11월 通 事 이화종이 아뢰길, 지난 달 10월 29일 중국인 손승은이 위화도와 원직도의 중국인 117 家 를 모두 쇄환해 가면서 의주목사에게 중국인들이 다시 그곳에 살지 못 하게 하라고 했다고 전하고 있다. 76) 12월의 평안도 관찰사 신공제의 치계 즉, 추쇄 당했던 중국인들이 다시 위화도에 들어와 천막을 짓고 거주하려 하니 불태워버리겠다는 것에 대하여 예조가, 이 겨울에 다시 돌아온 것은 비옥한 토지라 아예 평생 거처하려는 뜻이지만 강제로 구축한다면 사단이 생길 듯하니 더 논의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77) 이에 의정부와 예조에 서도 논의하길, 위화도에서 쇄환해 간 중국인들이 다시 와 살려하니 그때마다 강제 철거시켜야 한다. 그들이 개간하지 못하게 파종했으면 갈아엎어야 한다. 그러나 중국 인은 내쫓고 조선백성은 들어가 농사지으면 토지를 탐내는 것이 되니 결국 조선백성 도 入 島 경작을 금지시켜야한다고 하고 있다. 78) 다음 해인 1533년 5월 평안도 관찰사 신공제의 書 狀 에, 쇄환해 갔던 중국인들이 위 73) 연산군일기 9년(1503) 8월 16일(경술) 1번째 기사. 74) 중종실록 26년(1531) 11월 2일(임자) 1번째 기사. 75) 중종실록 27년(1532) 10월 18일(임진) 1번째 기사. 76) 중종실록 27년(1532) 11월 12일(병진) 1번째 기사. 77) 중종실록 27년(1532) 12월 6일(기묘) 1번째 기사. 78) 중종실록 27년(1532) 12월 9일(임오) 1번째 기사.

19 - 화도에 다시 와 야간에 농지를 개간하고 곡식을 심고 김매는 지경이다, 군관과 훈도 로 하여금 가서 금지하게 했더니, 중국인 100여 명이 몰려들어 몽둥이와 돌멩이로 공 격하여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러자 중종은 위화도의 중국인 경작 건은 방치하라 했는데 금지시키려 하다가 그렇게 사단을 만들었다. 앞으로는 금지시 키지 말라고 하고 있다. 79) 같은 해 12월에도 의주목사 민제인이 아뢰어, 삼도에 무단 침입한 중국인이 의주로 들어와 도둑질하면 어떡해야 하느냐고 묻고 있다. 중종이 답 하여, 삼도 무단거주의 중국인은 요동에서 조치할 것으로 도둑질한 중국인은 일단 구 류시켜 놓고 중앙에 보고하라고 하고 있다. 80) 1534년 초기에도 중국인 문제는 이어지고 있다. 윤2월 예조가 작년에 탕참 지휘사 가 위화도 잠입 농경을 금지했는데도 지금 다시 중국인들이 잠입해 밭을 일구고 있다 며, 탕참에서는 조선이 그들을 내쫒아라 하지만 조선으로서는 쉽지 않으니 탕참에 말 하고 요동에도 咨 文 을 보내자고 제안하고 있다. 중종은 성절사가 가는 길에 요동에 사실을 상세히 알리는 게 해결책일 듯하다고 답하고 있다. 이에 승정원이, 성절사행은 5월에 가는데 지금은 농경이 시작될 때에 해당하므로 조속히 알려야 경작을 금지할 수 있다고 하며, 위화도의 중국인들에게 요동도사에 고발하여 중죄에 처하게 할 것이 라며 지속적으로 위협해야 할 것이라 하고 있다. 81) 같은 해 3월에도 예조판서 유관이 아뢰길, 위화도 경작하는 중국인 날로 증가하고 있는데, 지금 布 政 司 가 평안도 함경도에서 중국인들을 쇄환하고 있다 하니 이화종을 시켜 해송하게 하면서 요동에 移 咨 하여 말함이 어떨까 제안하고 있다. 중종이 답하 여, 위화도는 국경 밖으로 조선 땅이 아니다. 위화도건은 중국 조정에서는 아직 모르 는 일이므로 알면 견책할까 염려된다. 명분 없이 요동에 사람을 보내는 것도 곤란하 니 변방 장수를 위화도에 보내 깨우치게 하라고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에 三 公 이 성절사가 갈 기일은 아직 멀었으나 위화도에선 이제 땅갈이와 파종을 하는 시 기가 되었으니 시급히 이화종을 보내 요동에 移 咨 하게 하자고 재촉하고 있다. 82) 4월 이 되자 咨 文 을 가지고 요동에 갔던 이화종이 돌아와 위화도 중국인에 대한 강제송환 이 결정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즉 그가 요동측에 위화도의 중국인들이 의주에까지 들어와 도둑질을 하고 있다고 하였고, 이에 요동측은 중국 조정에 보고해 중죄로 다 스리게 할 것이라는 답을 얻었다고 하고 있다. 83) 79) 중종실록 28년(1533) 5월 3일(을사) 5번째 기사. 같은 날 4번째 기사에 의하면 이 때는 通 事 이화종이 위화도 경작건 때문에 요동으로 간 때이다. 80) 중종실록 28년(1533) 12월 20일(무자) 1번째 기사. 81) 중종실록 29년(1534) 윤2월 26일(계해) 1번째 기사, 윤2월 28일(을축) 2번째 기사와 4 번째 기사. 82) 중종실록 29년(1534) 3월 6일(임신) 1번째 기사, 3월 7일(계유) 1번째 기사.

20 - 그런데 같은 해인 1534년(중종29) 11월 중종은, 黔 同 島 와 위화도의 중국 경작지에 遼 東 大 人 이 푯말을 세워 경작을 금했는데 그들이 다시 조선 경내로 침입하여 물고기 를 잡곤 하니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결정하여 평양에서 대기 중인 謝 恩 使 에게 알려야 한다고 하고 있다. 이에 예조판서 유관이 아뢰길, 중국인들이 금동도와 위화도에서의 경작금지를 위반하고 조선 경내에서 노략질과 어렵행위마저 자행하니 사은사가 대동 한 通 事 이응성을 압해관으로 정하여 요동에 가서 호소하게 하라고 서두르고 있다. 84) 1535년(중종30)에 와서 조선은 삼도 중에서도 특히 위화도에 중국인들의 거주가 증 가하는 것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85) 그래서 중종은 위화도 등 삼도 경작 불 가건을 성절사를 통해 요동에 호소하려 하지만 오히려 직접 예부로 呈 文 함이 낫지 않 을까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그러나 좌의정 김안로가 아뢰길, 삼도 경작 금지건은 성 절사가 가는 참에 요동에 알린다 했는데, 금년 농사철이 시작되어 이미 늦었으니 예 부에 정문하자는 임금의 뜻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요동을 거치지 않는 것이 되므 로 요동측에서 불만 가질 것이며 삼도의 중국인은 또한 요동의 관할이다. 정문한다 해도 예부 또한 어차피 요동쪽에 그 전말을 문의해 알려 할 것이므로 조선으로서 입 장이 곤란해진다. 그러므로 이화종을 요동에 급히 보내 간절히 호소함이 좋을 듯하다. 이에 요동측이 소극적으로 나오면 중국 조정에 주달하겠다고 우회적으로 압박하고 그 런 연후에 예부에 자문을 보내면 요동측도 조선을 탓하지는 못할 것이다. 성절사는 시일을 지켜야 하지만 陳 慰 使 와 進 香 使 는 좀 늦출 수도 있으니 이화종을 서둘러 먼 저 보내 진위사와 진향사가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요동의 뜻을 파악해 놓음이 좋을 듯하다. 곤란하다면 예부에 보내는 자문을 만들어 이화종에게 건네는 방법도 있을 것 이고, 동지사 편에 자문을 보내는 것도 좋을 듯하다고 의견을 내고 있다. 86) 이처럼 경작 금지건을 예부로 올릴까, 요동측으로 할까는 이후에도 계속된다. 같은 해인 1535년(중종30) 중종은 이화종을 요동측으로부터 삼도 중국인 경작건을 금지한 다는 허락을 받았지만 어떻게 그들을 조선이 통제하고 금지시켜야 할 것인가 쉽지 않 다. 예부에 자문을 올리는 것이 좋을 듯하니 진위사편에 보내기로 함이 어떨까 묻고 있다. 이에 영의정 김근사 등이 논하길, 예부에 자문 올리는 것은 요동을 노여워하게 해 득될 것이 없을 것이라며 요동의 조치를 일단 지켜봄이 좋을 듯하다는 의견을 내 고 있다. 87) 다음 달인 1535년(중종30) 8월 평안도 관찰사 반석평 등은 장계에서, 遼 東 鎭 撫 강 83) 중종실록 29년(1534) 4월 30일(병인) 1번째 기사. 84) 중종실록 29년(1534) 11월 20일(임오) 2번째 기사, 11월 21일(계미) 1번째 기사. 85) 중종실록 30년(1535) 4월 21일(신해) 2번째 기사. 86) 중종실록 30년(1535) 5월 9일(기사) 1번째 기사, 5월 10일(경오) 1번째 기사. 87) 중종실록 30년(1535) 7월 1일(경신) 1번째와 2번째 기사.

21 - 진 등이 의주에 와서 말하길, 夾 江 의 땅을 조사하라는 명령 받고 왔다며 협강의 경작 을 금지하여 비워둘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위화도 등지에 가서는 곡식을 다 베어버릴 것이라며 경작하던 중국인 100 여명을 심문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88) 그런데 1536년 12월 김근사 등이 아뢰길, 이번에 조선에 오는 天 使 에게 삼도 경작 금지건과 관련하여 推 刷 되었던 중국인들이 고소하여, 요동측이 조선의 뇌물을 받고 삼도에 지은 우리 집들을 헐고 농사짓던 곡식을 베어냈다고 말하고, 이것이 중국조정 에 전하여지면 변명하기에 힘들 것이다. 삼도 경작 불허건은 이화종이 그 전말과 관 련문서도 있으니 천사에게 잘 알려야 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89) 그러나 조선에 온 천사는 서울을 다녀 돌아가는 길의 검동도에 들르면서도 삼도의 경작 금지건에 대 해선 전혀 언급이 없다. 90) 1540년은 삼도 경작건과 관련하여 한 획을 긋는 성과를 가져온 해이다. 그 과정을 보면 4월 영의정 윤은보 등이 아뢰길, 의주의 造 山 坪 과 設 陷 坪 등지에 중국인이 와서 농사짓고 있으니 이를 요동에 移 咨 해야 할 것이다. 검동도와 위화도 경작건은 이미 요동대인으로 하여금 금지시키게 하였는데, 조산평과 설함평은 위화도보다 더 의주에 가까운 곳이니 시급하게 禁 防 策 을 강구해야 할 것으로 요동에 移 咨 해서 요청해야 할 것이라고 서두르고 있다. 91) 그런데 8월에 예조 참판 윤개가 요동 徐 大 人 의 宣 尉 使 로 의주에 갔다 와서 아뢴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즉 신이 선위사로 의주에 갔었지만 경작을 금지하는 땅은 반 드시 강을 건너가서 보아야 하므로 신이 직접 가지 못하고 거느리고 간 通 事 차윤성 을 보내 그곳의 주민과 경작하는 전답이 얼마나 되며 추수는 어느 정도 하였는가를 알아오게 하였더니 위화도에서 黔 同 島 까지는 15여 리이고, 금동도에서 設 陷 坪 한 변 까지는 12 13리였으며, 설함평의 길이는 어림잡아 一 息 은 되었다. 중국 사람이 전일 에 冒 耕 하던 곳은 위화도와 금동도이고 현재는 造 山 坪 과 설함평 두 섬까지 모경하고 있다. 조산평의 주변 둘레는 20여 리이고 설함평의 둘레는 15여 리였다. 이 두 섬은 경작할 만한 땅은 이미 전부 경작하였고, 두 섬에는 농막이 몇 군데 설치되어 있었 다. 다만 狄 江 의 건너편 강가에 사는 자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 강은 비가 많이 내리지 않은 경우 배를 사용하지 않고 걸어서도 건널 수 있기 때문에 그곳 사람 들이 항상 오가며 모경한다. 저들이 마을을 이루고 사는 것은 오로지 이 지역을 경작 88) 중종실록 30년(1535) 8월 10일(무술) 3번째 기사. 89) 중종실록 31년(1536) 12월 5일(병술) 3번째 기사. 90) 중종실록 32년(1537) 4월 13일(신유) 2번째 기사엔 의주 별전위사 박수량의 천사의 행 적을 아뢴 내용이 있으나 검동도를 지나면서도 삼도 경작 금지건과 관련하여 아무런 언급 이 없다. 91) 중종실록 35년(1540) 4월 10일(신미) 1번째 기사.

22 - 하여 먹고 살기 위해서이니 만약 이 지역에서 경작하는 것을 금지한다면 살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올해의 경작은 대단히 잘되었으며, 신이 이달 11일 출발하였 는데 그때 추수를 거의 끝내간다고 하였으니 지금쯤은 아마도 수확을 마쳤을 것입니 다. 신이 千 秋 使 조광원이 보낸 呈 文 의 내용을 보니, 조산평에 돌을 세워 경작을 금지 토록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옛날에 돌을 세운 곳을 보면 大 威 化 島 및 금동도와 설함 평 세 군데로서 대개 이 지역 일대는 다 경작이 금지되었는데 올해 경작한 곳은 전일 에 돌을 세워 경작을 금한 지역에 속합니다. 돌을 세운 지역 안에서 중국 사람들이 모경하는 것을 금해 달라고만 청하고 모름지기 다시 돌을 세우자고 청하지 않은 것도 당연한 듯합니다. 그리고 중국 사람이 앞서 이미 양단과 중앙 등 세 곳에 돌을 세웠 으니 이제 다시 요청한다 하더라도 다시 세우게 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 일 을 조정과 本 曹 에서 자세히 알지 못할 것이므로 도면을 그려서 아룁니다. 는 것이었 다. 92) 이로부터 조선의 움직임은 더욱 활발하게 이뤄진다. 우선 9월 영의정 윤은보 등이 아뢰길, 검동도에 설치한 冒 耕 을 금한다는 標 石 세 곳 중에 또 모경 지역이 있습니 다. 재차 모경을 금지해야 한다는 자문을 작성해 새해가 되기 전에 이화종에게 중국 인 압송 임무를 겸임시켜 요청하게 하라고 건의하고 있다. 93) 다음 달인 10월 중종은 堂 上 官 을 불러 전교하기를, 협강에 대한 일은 심히 중요한데 중국인들이 경작을 금지 하는 표석을 쓰러뜨리고 글자를 깨뜨려 버렸다고 하니 어찌하면 좋을까 우려하고 있 다. 이에 대신들이 아뢰길, 협강의 일은 요동의 이대인이 북경에 주달하러 갔고 협강 의 중국인을 추쇄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도 이화종을 보내 탐문한 다음 처 리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하고 있다. 94) 12월 드디어 통사 이화종이 요동에서 돌아와 요동측의 자문을 전하고 있다. 이 자 문에 접한 대신들은 경작을 금지하는 일로 처음 이화종을 파견하였을 때에는 허락을 얻기가 어려울 것으로 여겼으나, 지금 허락을 받았으니 매우 통쾌합니다. 라고 술회하 고 있는 점으로 보아 삼도 경작건이 일단락 되었음을 알 수 있다. 95) 그런데 요동의 자문엔 흥미로운 점이 보인다. 어사가 이화종을 불러 협강은 중국 의 경계선으로 중국인이 살며 경작함은 법에 당연한데, 너희 나라에서는 왜 그렇게 심하게 다투는가? 라고 묻자 이화종은 답하여, 혹 우리나라의 무지한 자들이 중국의 인민과 서로 왕래하여 우환을 야기시킬까 걱정이기 때문이라며, 전에 우리나라의 변 92) 중종실록 35년(1540) 8월 23일(임오) 1번째 기사. 93) 중종실록 35년(1540) 9월 20일(무신) 1번째 기사. 94) 중종실록 35년(1540) 10월 14일(임신) 4번째 기사. 95) 중종실록 35년(1540) 12월 18일(을해) 4번째 기사.

23 - 방 백성인 金 同 難 이 중국에 들어가 본래는 戶 籍 이 없는 사람들과 무리지어 소와 말과 재물을 훔쳐 말썽을 일으키는 그런 일들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런데 자문에서 요동측은 협강으로 빨리 가서 지은 집들을 불태워 부수고 경작한 토 지의 면적을 조사하게 하고, 불법으로 경작한 사람들을 잡아오게 하였고 標 石 의 글씨 를 고친 것도 조사하게 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실제 협강에 도착하여 거주하는 사람들의 집과 쌓아둔 땔감과 곡물 등을 한꺼번에 다 태워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협강에 사는 중국인이 조선인도 불법으로 경작하는 곳이 있다. 고 한 것에 대해 이화 종은 본래 우리나라 경계 안이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正 德 연간에 옛날 경작하던 곳 에다 표석을 세워 금한 이후 감히 개간하지 않고 있다. 고 둘러댔다. 이에 요동측은 그대 나라도 경작을 금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96) 이처럼 삼도 경작건은 요동측의 자문으로 일단락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게 아 니었다. 다음 해인 1541년(중종36) 11월 윤은보 등이 말하길, 夾 江 지역은 前 任 御 史 曾 侁 이 엄하게 금지하여 세 곳에 비를 세워 요동의 軍 民 은 이곳에 살거나 경작을 하 지 못하며, 조선의 군민은 이곳에 넘어와 採 取 하지 못한다. 고 새겨 놓았고, 막 익기 시작하는 들판의 벼들을 모두 베어 버렸습니다. 금지하고 경계함이 이같이 엄하였는 데도 증선이 돌아간 뒤에 요동의 군민은 농사지어 수확하는 이익을 탐내어 집을 짓고 함부로 농사를 지어,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胡 御 史 가 각종 범인들을 죄의 경중에 따라 차등을 두어 엄하게 다스려서 협강의 군민들이 경계할 줄을 알고 있으나, 호어사가 임기가 끝나 북경으로 돌아간 뒤에 금하는 것이 해이해지면 틀림없 이 전처럼 와서 경작을 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97) 1542년(중종37) 윤5월에도 영의정 윤은보 등이 아뢰길, 夾 江 에 불법으로 거주하는 중국인은 胡 御 史 가 자세하게 조치하여 이미 탕참에 엄히 경계를 내리고, 또 우리나라 에도 通 諭 하여 양쪽에서 금한 이후로는 중국인이 함부로 경작하는 일은 이미 없어진 듯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비록 불법으로 협강의 땅을 경작하지는 않지만 강을 따라 수많은 가호가 살고 있는 것은 옛날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고을과 아주 가까워 아무리 서로 통하는 것을 금하더라도 關 門 이나 城 塹 이 없는 한 막기가 어려운 형세입니다. 더군다나 이익을 좇아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奸 民 들의 常 情 이 어서 틈만 있으면 법을 어기고 몰래 통하기 때문에 금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이 일 은 나라의 큰 걱정인데 선처할 계책이 없습니다. 라고 논하고 있다. 98) 다음 달인 6월에도 평안도 관찰사 민제인이 書 狀 에서 아뢰길, 압록강에서 중국인들 96) 중종실록 35년(1540) 12월 17일(갑술) 3번째 기사. 97) 중종실록 36년(1541) 11월 6일(무자) 2번째 기사. 98) 중종실록 37년(1542) 윤5월 11일(경신) 1번째 기사.

24 - 이 예전과 똑같이 어렵행위를 자행하고 있으며, 馬 山 이하에서 麟 山 蘭 子 島, 西 江 위 화도 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闊 洞 앞 三 岐 水 口 乾 川 등의 堡 에도 오지 않는 곳 이 없으며 더러는 이쪽 편에 와 정박하는 등 조금도 꺼리는 바가 없다고 고발하고 있 다. 이에 윤은보 등이 아뢰길, 압록강 건너편에 사는 중국인들이 전에 금법을 어기고 고기를 잡는 폐단이 만연되어 일찍이 통사를 보내 湯 站 에 고하였는데도 아직까지 그 치지 않고 더욱 함부로 어기고 있습니다. 심지어 강가에 정박하여 고기를 잡으며 조 금도 꺼리지 않고, 항상 우리 백성들과 섞여 살아서 사건이 야기될 것은 뻔한 형세이 므로 매우 염려됩니다. 별다른 금지책은 없고, 평안 감사가 아뢴 바에 의해, 일을 잘 처리하고 중국말에 능통한 통사를 다시 보내어 전처럼 胡 御 史 의 禁 革 申 令 公 事 를 가 지고 가 탕참 守 堡 官 에게 고하여 엄금하기를 청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라고 하고 있 다. 99) 1587년(선조20)에도 의주 강변의 威 化 島 에 중국인들이 와서 馬 耳 山 에서 이주하여 와 농사를 짓고 있었으므로 역관을 차견하여 遼 鎭 巡 按 使 에게 이에 대해 爭 辨 하고 禁 牌 를 내어 법령대로 몰아내게 하였다. 고 있는 것으로 보아 끊임없이 상황이 재발되 었던 듯이 보인다. 100) 8. 맺음말 조선 후기엔 사신에 대한 八 包 에 이어 瀋 陽 팔포라고 하여 또 하나의 私 무역을 허락 하고 있었다. 즉 1665년 조선 사행이 심양을 거쳐 赴 京 하도록 되자 심양교역으로 심 양팔포를 이용한 사무역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101) 林 下 筆 記 제19권의 文 獻 指 掌 編 - 八 包 大 商 에 보면 심양팔포의 성립에 대해 영종(영조) 4년 이광좌가 경연 석상 에서 다음처럼 밝히고 있다 즉 원래 중국과의 관계로 關 西 지방의 재정이 쇠잔해 있었 는데 義 州 가 더욱 그러했었다. 그런데 근간에 칙사의 행차가 1년에 5, 6차에 이르기 까지 하는 바람에 그 접대로 더욱 힘들어하자, 정부에서 심양의 八 包 大 商 여섯 자리 를 정해서 의주에 주고, 평안 감영과 평안 병영, 松 都 에 각기 두 자리씩을 주게 되었 다. 그렇다면 부경사행의 팔포무역이 實 職 을 주지 못하는 역관에 대한 보상이듯이, 심 양팔포는 칙사 접대 등 事 大 외교에 무거운 의무가 지워진 義 州 府 등의 관서지역 官 99) 중종실록 37년(1542) 6월 16일(을미) 3번째 기사, 6월 18일(정유) 1번째 기사. 100) 선조수정실록 20년(1587) 1월 1일(경인) 2번째 기사. 101) 이철성, 조선후기 무역상인과 정부의 밀무역 대책 - 사행무역을 중심으로, 사총 58, 2004, 57쪽.

25 - 府 에 대한 보상조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으로 연결되는 관문인 의주부의 재정은 무역과 몹시 밀접한 입장에 놓 여있었던 듯하다. 1718년 義 州 府 尹 이성조는 정부에 호소하여, 本 府 에는 달리 財 貨 를 생산할 길이 없고 다만 銀 貨 를 교환하여 利 殖 을 내므로 公 私 모두 이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팔포로 수를 정한 뒤에는 稅 를 거둘 수 없고, 柵 門 貿 易 및 中 江 後 市 도 단절되어 官 用 경비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義 州 의 백성들은 태반 이 장사치로서 매매의 길이 단절된 뒤에는 대부분 생활이 절박합니다. 비록 潛 商 이 나라에서 금하는 것임은 알고 있으나 달리 생활할 길이 없으니 번번이 법을 犯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라고 하고 있다. 102) 이러한 의주였기 때문에 1725년에도, 齎 咨 官 과 譯 官 이 사사로이 常 人 을 데리고 가면서 銀 貨 가 매우 낭자하였다고 하니, 이것도 또한 의주에서 수색하여 검거하는 것 이 엄격치 못한 소치입니다. 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듯이, 재정의 중요 부분을 상업세에 의존하고 있던 의주로서는 잠상이 행해지는 것을 알면서도 금 지하지 못하는 입장이었다. 103) * 참고문헌 구도영, 16세기 對 明 私 貿 易 의 정책 방향과 굴레 - 中 宗 代 明 의 조선사행단 출입제한 조치 를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 62, 2012. 구도영, 中 宗 代 對 明 외교의 추이와 정치적 의도, 조선시대사학보 54, 2010. 구도영, 조선 전기 對 明 陸 路 使 行 의 형태와 실상, 진단학보 117, 2013. 구도영, 조선초기 대명 무역체제의 성립과 운영, 사학연구 109, 2013. 권내현, 조선후기 평안도 재정연구, 지식산업사, 2004. 권내현, 17세기 후반~18세기 전반 평안도에서의 淸 使 접대와 재정 운영, 역사와현 실 43, 2002. 권내현, 17세기 후반~18세기 전반 평안도의 대청사행 지원, 조선시대사학보 25, 2003. 권내현,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평안도의 대청사행 지원과 무역수세,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사총 56, 2003. 권내현, 조선후기 호조의 평안도 재정 활용,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동양학 102) 비변사등록 숙종 44년 윤8월 6일. 103) 영조실록 1년 10월 16일(경진). 김동철, 19세기 牛 皮 무역과 東 萊 商 人, 한국문화연 구 6, 1993, 4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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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토 론 문 조선의 對 明 관계와 義 州 사람들 이상규(한국학중앙연구원) 1. 논문의 의의 그 동안 17세기 이후에 연구가 집중되었던 경향에서 벗어나 15~16세기에 義 州 府 가 처한 환경 그리고 그곳 부민이 담당한 사신 왕래에 따른 잡역을 부담하면서도 활로를 찾기 위해 사행 무역에 집착하고 三 島 耕 作 에 주력했다는 점을 밝혔다. 사대관계의 관문이었기 때문에 명나라 사신단이 머물다가 갔으며 명 사자를 응대하기 위해 도성 에서 파견된 조선의 접반사 일행이 이 곳으로 나왔다. 조선에서 명나라로 보내는 조 천사도 역시 의주를 거쳐가면서 이 곳에 일정 부분 부담이 지워졌다. 사행 무역에 종 사하는 의주민 그리고 범월해서 압록강 하류의 三 島 를 경작하려고 했던 의주민, 압록 강을 넘어오는 여진족의 침입... 이것 이외에도 15-16세기의 의주부 또는 의주 백성 들의 사정을 밝히기 위해서는 지면이 더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발표자께서 복잡 하고 사건이 많은 것을 대체를 잡아 분석한 공로는 크다고 본다. 또한 15~16세기 대명관계의 핵심 사안이 宗 系 辨 誣 에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 실이다. 이 논고에서 그런 사안 말고도, 삼도 경작 건이 15세기에는 의주를 비롯한 압록강 일대의 읍민들이 적극성을 보였는데 중종대 이후 역전 현상이 뚜렷해져 마침 내 명나라 쪽에서 압록강 일대로까지 침범해오는 형국이 되었다는 점을 구명한 것도 참신해 보인다. 이 방면에 문외한인데도 토론을 맡게 된 것은 조선시대 대외관계를 다각적으로 비 교해서 살펴보고자 한 학회의 고려인 것으로 여겨진다. 원고의 내용을 뛰어넘어 눈에 드러난 점만으로 의견 개진하는 것을 널리 혜량하기 바란다. 2. 목차를 내용에 맞게 고치는 것

28 - 내용을 종관하면서 정리했기 때문에 목차를 간략하게 할 필요성이 있다. 외형상으 로 명나라 사자가 왔을 때에 의주가 부담한 비용(역), 조천사가 의주를 거쳐갈 때 주 어진 부담, 의주 백성들에게 주어진 부담으로 나눠질 듯한데, 이것을 내용적으로 긴밀 하게 엮을 수는 없을까. 주로 三 島 에 국한되었지만 압록강 너머의 경작지로서 잇점이 있었고 조정에서도 백 성의 부담을 줄이는 방향으로 방비도 담당하면서 경작을 지원하는 방침이었다가 명 내부의 눈치로 보고 괜한 어려움을 불러올 것으로 예상하여 소극적으로 나왔고 나중 에는 의주 너머 요동 지역에 인구가 늘면서 저쪽에서 오히려 조선 국경으로 좁혀오기 까지 추세의 변화를 요령있게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윤문하듯이 숨겨진 흐름을 드러내면서 가지런히 하면 될 듯하고 보완하라는 의미는 아님] 3. 입체적인 이해를 위해서 지도를 활용하는 것 발표문에 평안도 지명이 많이 나오고 압록강 너머의 명나라 쪽 지명도 나온다. 의 주부 관내의 圓 直 島 從 達 島, 의주 軍 民 이 압록강을 건너서 경작했던 於 赤 島 今 音 同 島 威 化 島 의 삼도, 兀 良 哈 의 본거지와 그들이 월강하는 지역 등이 나온다. 지도로 보 여준다면 내용 파악이 확연히 될 것이다. 곁들여, 1572년에 명나라 사자가 의주에 왔 을 때 그려진 義 順 館 迎 詔 圖 가 있다. 이런 그림도 의주의 사정을 시각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자료임. 4. 의견 개진 1) 2번 발표는 조선전기 대여진관계와 경성 경원 사람들 이다. 이 발표와 관련하여 연관적으로 고려할 점은 없는지 궁금하다. 특히 중종대에 三 島 를 의주 사람들이 경작 하려고 했던 방향에서 정반대로 중국쪽에서 의주쪽으로 좁혀오는 역전 현상은 뭔가 2 번 주제와 관련하여 요동 지역의 여진 동향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문제라고 본다. 2) 11~12쪽에 나오는 유자광의 소장을 본격적으로 분석해 보는 것이 어떨까 함. 15 세기까지 압록강 너머의 삼도 경작에 지역민들이 적극성을 보인 것에 중앙 정부가 호 응했는데 성종대 이후 명의 눈치를 보거나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으려 한 것으로 기조가 바뀐 이유를 면밀하게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을 위해서는 조천사의 기

29 - 록이나 중국측 자료를 추가해서 강조할 수는 없을까. 명 내부의 실정은 어떠했는지도 궁금한데, 이러한 궁금증을 답해줄 다른 자료가 있다면? 곁들여서 조용조용하게 해결 하는 방식으로 갈려고 하는 조선 조정의 방향은 고식적인 대응이라고 봐야 할지 아니 면 다른 외부적인 요인이 있었는지? 또는 종계변무와 같은 큰 사안에 눌려 그보다 작 은 사안은 덜 목소리를 냈는지? 3) 맺음말에 쓴 내용은 17세기 이후의 사정 변화를 일부분 쓴 것인데, 이것보다는 본문에서 다룬 내용의 의미적 관계를 짚어주는 것이 어떨까 한다. 선조대부터 建 州 衛 女 眞 의 세력이 커지기 때문에 17세기 이후와는 뚜렷한 구별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한 다. 오히려, 15~16세기의 조명관계에서 종계 변무 가 핵심 사안이었는데 이것과는 삼 도 경작의 추이가 어떠한 비중으로 놓일지를 써 주는 것이 어떨지 생각함.

31 - 제2주제: 조선의 對 女 眞 關 係 와 6 鎭 지역 사람들 한성주(강원대) 목차 1. 머리말 2. 번리 구축과 대여진관계의 특징 3. 6진 지역의 조선인들 4. 6진 지역의 여진인들 5. 맺음말 1. 머리말 조선의 대여진관계는 조선의 건국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 을 건국한 이성계의 세력기반은 동북면이었는데, 동북면에는 고려유민과 여진인들이 혼재하고 있었다. 이들은 고려말에 이성계를 따라 從 軍 하였으며, 조선 건국 후 태조 는 자신에게 종군하였던 여진인들에 대한 만호 천호 등의 관직을 수여하는 등의 포상 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두만강 유역의 여진인들을 편맹, 즉 조선의 백성으로 여겼으며 조선의 경계를 두만강까지 확대시켰다. 그러나 태종대에 明 의 적극적인 여진 초무로 인한 두만강 유역 11처 여진인의 귀 속 문제가 발생하면서 조선과 명의 외교전이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이 명에 복속한 여진인들에 대해 무역소를 폐쇄하자, 여진인들의 조선 변경 침입이 시작되었 고, 여진의 침입은 조선의 여진 정벌을 불러왔다. 정벌에 대한 여진인들의 보복 침입 이 격하되어 조선은 경원부를 鏡 城 으로 옮겼는데, 이것은 사실상 행정과 군사 방어선 의 후퇴였다.

32 - 세종대 이만주의 건주위는 압록강 유역으로, 동맹가첩목아의 건주좌위는 두만강 유역으로 이동해 옴으로써 두만강 유역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조선의 여진관계가 압록 강 유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압록강 유역 이만주의 건주위에 대해서는 여연이 여진 인들로부터 침입을 받은 것을 계기로 두 차례의 정벌을 실시하면서 4군을 설치하였 고, 두만강 유역 동맹가첩목아가 여진인들의 침입에 의해 패망하자 6진을 설치하였 다. 4군과 6진의 설치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 조선의 영토를 확정하였다고 볼 수 있다. <4군과 6진> 세조대가 되면 방어상의 어려움을 이유로 4군은 폐지되지만, 6진 지역은 지속적으 로 유지되었다. 4군 지역은 압록강 중상류 지역에 삼각형처럼 돌출되어 여러 방면에 서 여진인들의 침입을 받을 수 있는 불리한 위치였고, 척박한 환경 때문에 조선인이 나 여진인들이 거주하기 쉽지 않았다. 6진 지역은 두만강으로 둘러쌓여 있었지만 강 의 중하류 지역의 어느 정도 비옥한 토지 때문에 조선인과 여진인들의 거주도 4군 지 역에 비해 용이하였으며 집중되어 있었다. 조선 초기 여진인들의 분포 역시 이러한 점을 잘 말해주고 있다. 1) 그렇지만 조선의 4군의 폐지가 영토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 은 아니었다. 4군 지역에 들어와 거주하려던 여진인들을 구축하여 강 밖으로 쫓아 보 내려는 시도가 지속된 것은 이를 잘 대변해 준다. 2) 세조대와 성종대에도 각각 압록강 유역과 두만강 유역의 여진인에 대한 정벌이 이 루어졌는데, 이 중 압록강 유역의 건주위에 대한 정벌은 명의 요청을 받아 조선과 명 의 협공으로 이루어졌다. 3) 그리고 연산군대 여진인들의 위원 침입에 따라 귀화인 동 1) 김구진, 麗 末 鮮 初 豆 滿 江 流 域 의 女 眞 分 布, 백산학보 15, 1973. 2) 김순남, 조선 中 宗 代 의 북방 野 人 驅 逐, 조선시대사학보 54, 2010.. 3) 한성주, 세조대(1467년) 朝 鮮 과 明 의 建 州 女 眞 협공에 대한 연구, 한일관계사학회 45,

33 - 청례를 건주삼위에 파견하기도 하였고, 명종대에에는 두만강 이북 지역인 이응거도에 자모진을 설치하는 문제를 시작으로 여진의 서수라보 침입, 조선의 초관 정토, 여진의 조산보 재침입 등의 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4) 한편 선조대에는 임진왜란 전에 조 선의 번호였던 니탕개의 반란이 있었으며, 임진왜란 전후로 두만강 유역의 번호들의 반란을 정토라는 형식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이처럼 조선 초기 여진관계는 시기적으로, 공간적으로 다양한 양상을 가지고 있다. 특히 압록강과 두만강을 중심으로 공간적으로 살펴보면, 두 지역에 대한 조선의 정책 과 여진과의 관계가 대비되는 부분들이 있다. 특히 가장 특징적인 점은 압록강 유역 은 번호가 형성되지 못한 반면 두만강 유역은 조선의 번호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조선의 대여진관계의 특징을 두만강 유역의 번호 형성과 조선의 정책에 맞추어서 살펴보고, 조선의 번호가 형성되었던 6진지역의 조선인들과 여진인의 모습 들을 단편적이지만 살펴보고자 한다. 2. 번리 구축과 대여진관계의 특징 고려시대에는 서북면 및 압록강 유역의 여진인들을 서여진, 동북면 및 두만강 유 역의 여진인들을 동여진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서여진, 동여진 중 고려에 내조하여 복 속한 여진인들을 西 蕃 과 東 蕃 이라고 하였다. 蕃 은 藩 과 혼용되어 써 왔으며, 중국에 서 藩 은 天 子 의 藩 屛 이라 뜻이다. 고려시대 여진에 대한 번 인식은 여진의 내조 내헌 과 긴밀한 관계가 있으며, 여진의 내조에는 관직을 주는 賜 爵 이 이루어지면서 의례적 인 측면에서는 천자와 봉신의 관계의 형식으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5) 따라서 고려 시대 여진에 대해 번병이라고 인식하던 지역은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말 조선초가 되면 조선의 번병 인식의 대상이 두만강 유역으로 한정되 고 있다. 두만강 유역 여진인들에 대한 조선의 번 인식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세 력 기반이 두만강 유역이라는 것에 영향을 받은 것도 있겠지만, 이것은 이 지역의 번 병 인식에 대한 하나의 배경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조선의 번 인식이 두만강 유역 으로 한정된 것은 무엇보다 대외적인 문제, 즉 압록강 유역에서는 명과의 마찰이 일 어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건국 직후부터 요동의 여진 문제를 둘러싸고 2013. 4) 한성주, 조선 연산군대 童 淸 禮 의 建 州 三 衛 파견에 대하여, 만주연구 14, 2012; 조선 명종대 豆 滿 江 以 北 지역에 대한 鎭 설치 시도- 伊 應 巨 島 의 子 母 鎭 설치와 女 眞 과의 분쟁 을 중심으로, 한일관계사학회 42, 2012. 5) 추명엽, 고려전기 번( 蕃 ) 인식과 동 서번 의 형성, 역사와 현실 43, 2002, 21~36쪽.

34 - 명과의 마찰이 있어왔는데, 명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여진인들은 두만강 유역보다 압록강 유역의 여진인들이었다. 고려와 조선의 영역은 이미 압록강 중하류 지역에 미 치고 있었지만, 압록강을 넘어 그 지역에 거주하는 여진인들에 대해 조선의 번병을 구축하는 일은 태조대에도 그 이후에도 명과의 외교적 마찰이 일어날 소지를 항상 가 지고 있었다. 두만강 유역에 대해서는 公 險 鎭 이남이 고려의 境 內 라는 인식과 이성계의 세력기 반, 즉 祖 宗 舊 地 라는 인식이 더해져서 이 지역에 대한 번 인식이 계승되어 왔다. 고 려말인 공양왕 때 공험진은 本 國 의 경내라고 하면서 그 지역에 거주하는 여진인들을 초유하여 귀부하도록 하고 있으며, 6) 조선 건국 후 두만강을 경계로 삼았다고 하면서 도 江 外 의 여진인들이 조선에 내조하고, 시위하고, 관직을 받고, 邊 將 에게 爭 訟 하여 판결을 받는 등 우리나라 사람과 다름이 없다고 하고 있다. 7) 태종대가 되면 두만강 유역에 대한 번 인식은 藩 籬 로 지칭되면서 보다 구체화되 기 시작한다. 특히 명에서 성조 영락제가 즉위하고 적극적인 대외확장정책 아래 두만 강 유역의 여진인들에 대한 초무를 실시하자 11처 여진 추장과 인민의 귀속문제가 발 생하였다. 11처 중 3개 지역은 두만강 바깥지역이지만 9개 지역은 조선의 동북면에 해당되었다. 8) 당시 동북면에 조선인과 여진인 혼재되어 있는 상황에서 명의 11처에 대한 여진 초무를 그대로 인정하면 조선의 영역이 축소될 수도 있는 심각한 문제였 다. 왜냐하면 명에서는 地 面, 즉 땅을 다투는 것이 아니라 여진 추장의 명 입조와 복 속을 바라는 것이었지만, 영토를 구성하는 핵심인 인민의 귀속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음에 틀림없다. 태종은 역시 공험진 이남이 옛 고려의 땅임과 이성계의 세력 기반임을 주장하여 11처 인민의 귀속을 허락받았지만, 명의 거듭된 초무 앞에 두만강 유역의 여진 추장 들의 명 입조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특히 태종은 알타리족의 대추장 동맹가첩목아를 동북면의 번리라고 지칭하면서, 9) 그의 초무를 위해 노력하였지만 동맹가첩목아는 조 선을 배신하고 명에 입조하였다. 이후 태종대 이루어진 여진 정벌은 올적합의 침입으 로 경원부에서 兵 馬 使 韓 興 寶 가 피살된 것이 원인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조선을 배 반하고 명에 입조한 두만강유역의 올량합과 알타리에 대한 응징이 되어 버렸다. 세종대 6진의 설치 과정도 번리 및 조종구지 인식이 바탕이 되고 있다. 세종 역시 동맹가첩목아가 조선의 번리라고 인식하였고, 동맹가첩목아가 패망하게 되자 그 땅에 鎭 을 설치하면서 원래 조종의 땅에 진을 설치하는 것은 당연한 것임을 천명하였다. 6) 고려사 권46, 세가46, 공양왕 4년 3월 경자. 7) 태조실록 권8, 4년 12월 계묘. 8) 한성주, 朝 鮮 前 期 豆 滿 江 流 域 에 나타나는 두 개의 朝 鮮, 명청사연구 37, 2012, 251 쪽. 9) 태종실록 권9, 5년 3월 기유.

35 - 그리고 두만강 유역의 여진인들에게 조선의 번리가 되면 彼 我 가 서로 큰 이익임을 강 조하면서 여진인들이 동요하지 않고 그대로 머물면서 6진을 방어하는 번리가 되도록 하는 번리구축정책을 추진하였다. 10) 조선은 명을 이용한 외교적인 방법으로, 조선의 회유책 및 강경책으로 6진에 묶어 두려고 하였고, 심처 올적합의 침입을 막아주고 보 호하였으며, 여진인들을 조선에 내조시키고 관직을 수여하였다. 조선은 두만강유역의 여진 번리화를 통해 여진인들과 정치 군사적 우위에 기초한 상하관계의 조공관계를 형성하였다. 특히 세종대의 수직정책은 향화여진인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것에서 6진 설치 후 두만강유역에까지 확대되고 그 수도 급증하였다. 正 朝 와 冬 至 에 집중시킨 여진인 들의 내조와 조공은 의례화 정례화 되어갔으며, 11) 내조와 조공에 대한 반대급부인 관 직의 제수는 두만강유역의 여진번리가 조선에 복속하여 정치사회화 되었음을 의미하 고 있다. 결국 조선의 여진 번리 구축의 결과 여진인들의 조선에 대한 내조와 조공, 조선의 여진인에 대한 관직 수여가 이루어진 성격을 의례적인 측면에서만 한정하여 보면 조공과 책봉이라는 형식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번리 인식을 계승한 세조는 마침내 야인과 왜인은 모두 우리의 번리이고, 모두 우 리의 臣 民 12) 이라고 하고 있으며, 두만강유역에서 서로 반목과 투쟁을 하던 올적합과 올량합 알타리의 화해의 일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女 眞 和 解 事 를 주관한 이유는 여진 인들이 서로 투쟁과 반목 때문에 서로 모여 살게 되면 변경이 안정되지 못하고 불안 해지는 진다는 것으로 두만강유역의 여진 번리 안정화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13) 또한 세조는 두만강 유역에 거주하던 낭복아한의 처벌 이후 명과의 외교적 마찰 속에서도 낭복아한은 隣 境 의 사람이 아니라 조선의 편맹과 다름이 없다는 주장을 굽 히지 않았다. 당시 두만강유역에 왔던 명 사신 馬 鑑 역시 野 人 가운데 城 底 에 사는 자들은 곧 귀국의 번리 라고 하고 있다. 14) 이후 낭복아한 일족의 거듭된 보복 침입에 북정을 단행하여 두만강 유역에 대한 명의 간섭이 불필요한 것임을 각인시키고 조선 의 영향력 및 국위를 과시함으로써 여진인들의 이탈을 막고 조선에 대한 복속을 강화 시켜 나갔다. 성종대인 1491년(성종 22)의 이른바 辛 亥 北 征 은 올적합의 造 山 堡 침입과 慶 興 府 使 羅 嗣 宗 의 죽음이 계기가 되었지만, 당시 올적합의 침입은 두만강 유역의 번리인 10) 한성주, 조선전기 수직여진인 연구, 경인문화사, 2011, 184~194쪽. 11) 박정민, 朝 鮮 時 代 女 眞 人 來 朝 硏 究, 전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박정민의 연구 결과 조선시대 여진인의 내조의 전체적인 현황과 시기별 검토가 이루어졌는데, 여진인의 내조가 正 朝 와 冬 至 에 집중되었음이 실증적으로 밝혀졌다. 12) 세조실록 권8, 3년 7월 경인. 13) 한성주, 조선 세조대 女 眞 和 解 事 에 대한 연구- 申 叔 舟 의 파견을 중심으로, 동북아역 사논총 38, 2012. 14) 세조실록 권21, 6년 8월 병진.

36 - 알타리에 집중되어 있었다. 당시 2만 4천명이라는 대규모의 군사 정벌에 비해 올적합 이 도망하여 숨었기 때문에 전공을 이룬 것은 거의 없었지만 두만강 유역의 알타리를 비롯한 여진 번리에 대해서 조선의 군사적 위세를 드러내어 이들의 조선 복속을 심화 시켰다. 15) 명종대의 草 串 征 伐 은 골간올적합의 서수라보 침입에 그 원인이 있었지만, 사실 서 수라보 침입을 유발한 것은 두만강 이북 지역인 이응거도에 조선이 자모진을 설치하 여 여진인들을 쫓아버린 것에 있었다. 번리들은 이제 藩 胡 로 지칭되고 있었는데, 조 선이 두만강 이북 지역에 진을 설치하더라도 번호가 조선을 침입한 것뿐만 아니라 이 후 아무런 변명이나 사죄가 없는 것은 조선의 국위를 손상시킨 것으로 판단되었다. 조선의 국위 손상은 두만강 유역에 있어 번호들의 통제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는 중 요한 일이었으며, 이에 따라 초관정벌이 이루어졌다. 16) 한편 두만강 유역의 번호들은 농업생산력의 발전 등 사회경제적 성장과 함께 부락 과 인구가 집중화되고 있었다. 집중화된 번호들은 점차 조선의 질서체제에서 이탈하 려는 경향을 보였는데, 바로 니탕개와 같이 조선의 변경을 약탈하기 시작한 것이다. 번호는 6진의 屛 蔽 17), 즉 병풍과 담장으로서 深 處 胡 를 막는 조선의 1차 방어선과 같 았지만, 이제 1차 방어선이 오히려 조선을 침입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다. 또한 임진왜란은 번호의 이탈을 가속화시켜 번호들의 반란이 지속되었으며, 이에 대해 조 선은 거듭 정토를 시행하여 번호의 복속과 변경의 안정화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한편 번호의 반란 원인으로는 조선 변장의 威 虐 이 지적되고 있는데 18), 번호를 보호하고 무 육해야 할 변장과 수령들이 오히려 번호들을 지나치게 貪 虐 하고 있었다. 19) 이렇듯 조선의 대여진정책의 핵심은 두만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번리 구축에 있었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압록강 유역으로 여진인들이 새롭게 이주를 청하자, 이들을 번리로 삼는 방안이 모색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삼포에서처럼 왜인들이 번성하게 되면 조선 내부의 화근이 될 것이라는 우려와 중국과 가깝다는 이유로 여진 인들의 압록강 유역 이주는 허락하지 않았다. 20) 조선에서는 압록강 유역에 여진인들 이 이주하여 번성하게 되면 번리가 되더라도 조선의 우환이 될 것으로 예견하고 있었 다. 그렇지만 두만강 유역은 고려말부터 고려 유민과 여진인들이 혼재하던 지역이었 고, 공험진 이남에 대한 영토의식과 더불어 이성계의 세력기반으로서 압록강 유역과 비교할 수 없는 정치적 영토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세종대 6진의 설치로 행정적 군 15) 김순남, 조선 成 宗 代 兀 賊 哈 에 대하여, 조선시대사학보 49, 2009. 16) 한성주, 앞의 논문, 한일관계사학회 42, 2012. 17) 선조실록 권17, 16년 2월 계사. 18) 선조실록 권17, 16년 2월 정유. 19) 선조실록 권55, 27년 9월 기축; 신묘. 20) 성종실록 권154, 14년 5월 신축; 권209, 18년 11월 임자.

37 - 사적 경계선이 두만강 유역까지 확대되었지만 이 지역에 거주하던 여진인을 驅 逐 하여 江 外 로 모두 몰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진인들을 모두 구축하는 것은 현실적 으로 불가능하였으며, 그들을 구축할 경우 오히려 땅을 뺏긴 여진인들과의 분쟁 속에 서 변경의 안정화를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조선은 6진 성 밑에 여진인들의 거 주를 허용하여 城 底 野 人 이라 지칭하고, 더불어 두만강 유역 내외에 조선과의 상하관 계를 바탕으로 한 여진 번리 및 번호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두만강 유역을 중 심으로 한 조선의 대여진관계의 특징은 여진 번리를 구축함으로써 조선인들과 여진인 들이 공존하는 평화적인 변경과 공간을 형성하려고 했다는 점에 있다. 3. 6진 지역의 조선인들 조선의 6진 설치로 두만강 유역의 5 鎭 城 밑에는 城 底 野 人 이 거주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6진 주변과 두만강 유역 내외에 흩어져 있던 조선의 번리였다. 조선은 조선인 들과 여진인들이 공존하는 평화적인 변경과 공간을 구상했겠지만, 조선인들과 여진인 들의 혼거는 결코 평화적이지만은 않았다. 우선 조선은 태종대에 여진인들의 침입으로 경원부를 鏡 城 으로 이동시킨 결과, 조 선인들은 남쪽으로 이주하였고 두만강 유역은 여진인들에 의해 점거된 상황이었다. 21) 따라서 세종대 6진을 설치하면서 방어를 위해 새로운 木 柵 과 城 을 쌓고 군사를 파견 하는 것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이주시켜 변경을 충실하게 할 필요성이 있었다. 백성을 이주시키는 徙 民 은 두만강 유역에는 북청 이북과 길주 경성 등지의 사람들 로, 북청 길주 경성에는 그 이남 지역인 고원 영흥 문천 안변 등지의 사람들로 옮기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22) 강원도 및 하삼도의 백성들도 동원되었다. 그러나 백성들 은 사민에 대해 고통스럽게 여기고 있었고, 23) 향리 등이 토호들과 결탁하여 富 戶 는 숨겨 빠뜨리고 殘 戶 만을 뽑아 정하는 등의 폐단도 발생하였다. 24) 세종실록 지리지 를 보면 6진 지역의 戶 口 와 軍 丁 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사민의 결과였고, 다음 <표 1>과 같다. <표 1>을 보면, 경원에는 1,162호, 5,271명, 회령에는 624호, 2,157명, 종성에는 900호, 21,815명, 온성에는 800호, 3,637명, 경흥에는 402호, 5,058명, 부령에는 262 호, 2,294명의 인구가 있었는데, 6진 전체의 인구는 4,150호, 40,232명이었다. 6진으 로의 사민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지만, <표 1>을 보면 당시 6진으로의 사민이 대규모 21) 세종실록 권62, 15년 12월 경오. 22) 세종실록 권68, 17년 6월 갑진. 23) 세종실록 권62, 15년 12월 경오. 24) 세종실록 권69, 17년 7월 을미.

38 - 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표 1> 세종실록 지리지 에 나타난 6진의 戶 口 와 軍 丁 (단위 : 명) 六 鎭 戶 口 軍 丁 甲 士 正 軍 계 비고 경원 1,162 5,271 133 629 762 회령 624 2,157 25 695 720 종성 900 21,815 12 724 736 온성 800 3,637 25 686 711 경흥 402 5,058 90 312 402 갑사 90명은 船 軍 부령 262 2,294?? 262 翼 屬 甲 士 와 正 軍 을 함께 표시 합계 4,150 40,232 3,593 6진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새로 토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지으면서도 끊임없이 여진 인들의 침입을 경계해야 했고, 여진인들의 주된 침입 경로가 되는 곳에서는 농기구와 병장기를 휴대한 채 농사를 짓기도 하였다. 또한 조선인들은 여진인들의 침입이 있으 면 농사를 짓다가도 城 으로 피신하여 군사들과 함께 여진인들의 침입을 막아야만 했 다. 군사들이 五 更 초에 두만강변 일대를 순찰하고 守 護 廳 에 이르렀다가 멀리 망보고 해가 질 때에 들판의 농민들과 鎭 堡 로 철수하는 것을 守 護 라 하였으며, 추수가 끝나 고 두만강이 얼어 여진의 침입이 격화되는 겨울철에는 집을 버려두고 성안으로 들어 갔다가 5월이나 6월이 되어 돌아가는 것을 疊 入 이라고 하였다. 25) 그리고 주민들은 石 城 과 小 堡 을 쌓는 일에도 사역되었는데, 26) 제승방략 에는 경흥 경원 온성 종성 회 령 부령의 6진의 소속 鎭 堡 가 29개로 나타나고, 女 墻 擁 城 曲 城 등의 방어시설을 갖 춘 것으로 되어 있다. 27) 6진에는 모두 이러한 屬 鎭, 즉 소속된 진보가 있어서 주민들 은 속진에서 僉 事 와 萬 戶 에게 부역을 당하고 본진에서도 부역을 당하면서 백성들은 조잔해지고 피폐되어 간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28) 한편 주민들은 良 人 皆 兵 의 원칙에 따라 군역에 종사하여 正 軍 이 되어야만 했다. 정군은 중앙에서 파견된 갑사와 함께 6진을 방어하는 주된 임무를 맡았다. <표 1>에 나타난 6진의 군정은 경원에 갑사가 133명, 정군이 629명으로 총 762명, 회령에 갑 사가 25명, 정군 695명으로 총 720명, 종성에 갑사 12명, 정군 725명으로 총 736명, 온성에 갑사가 25명 정군 686명으로 총 711명, 경흥에 갑사(선군) 90명, 정군 312명 으로 총 402명, 부령에는 익속갑사와 정군 모두 총 262명이 있었는데, 6진 전체의 군 25) 성종실록 권252, 22년 4월 병진; 제승방략 卷 之 2, 軍 務 二 十 九 條. 26) 세종실록 권75, 18년 11월 임진. 27) 제승방략 卷 之 1, 列 鎭 防 禦. 28) 성종실록 권185, 16년 11월 정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