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독도 침략 논리와 국내 학계의 추종 -이른바 시마네현( 島 根 縣 ) 고시 제40호의 실체와 박유하의 독도 주장을 중심으로- 1. 들어가는 말 2. 시마네현( 島 根 縣 ) 고시 제40호 의 실체 3. 일본 논리의 추종-박유하의 주장을 중심으로- 4. 나오는 말 신운용(한국외국어대학교) 1. 들어가는 말 1945년 국권회복 후 최초의 독도논문은 1948년 신석호의 獨 島 所 屬 에 對 하여 이 다. 이후 67년 간 독도 연구는 양적 질적으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우리의 독도 논리 가 일본의 그것을 압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의 주장이 국제사회에 서 인정받고 있을까? 우리의 현실을 냉정하게 평가하면 어느 누구도 그렇다고 대답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한국 정부의 초기 독도 정책은 신석호 이병도 등 친일 전력이 있는 인사 들이 중심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독도를 일본의 영토라고 주장할 수 없었지만 그 들의 사관은 그대로 한국 고대사를 장악한 것이 사실이다. 1) 그 결과는 중국의 고대사 왜곡에 대응하라고 동북아역사재단이 47억에 발주하여 참여한 60여 명의 고대사 학 자들이 중국의 한사군과 만리장성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 동북아역사지도 로 나타났 다. 2) 이러한 현상은 독도문제에서 드러나고 있다. 동북아역사지도 에 독도가 누락되는 3) 등 우리의 논리적 모순은 여기저기에서 감지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 대표적인 분야는 시마네현 고시 41호 에 대한 분석과 연구이다. 한국 학계는 거의 모두 이 고 시가 공포되었다는 전제 위에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는 일본의 무주지 선점론에 따른 파상 공격으로 나타났다. 이로 인해 여러 학자들이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불철 주야 연구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1)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덕일, 우리 안의 식민사관, 만권당, 2014 참조. 2) 이에 대해서는 이덕일, 賣 國 歷 史 學, 만권당, 2015; 중앙일보, 한반도에 한사군 왜곡된 고대사 자료 미 의회에 보냈다 참조. 동북아역사재단은 한군현 설치 지역은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부라는 것이 우리 학계(국사편찬위원회의 입장 표명- 하버드대학 서적 관련 감사원 제출자료) 의 이해임. 라 고 하여 한사군의 한반도 내에 있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 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동북아역사재단, 보도해명자료(제2015-29호(2015.10.05) 중앙일보 10.5(월) 미의회 보고서 관련 보도 해명 ). 이는 동북아역사재단이 일제의 식민사학의 주장이 한국 고대사학회의 정설임을 다시 확인해주고 있는 것이 다. 3) 이에 대해서는 이덕일, 위의 책 참조. - 28 -
그런데 2000년에 들어와 시마네현 고시 41호 가 공포되었다는 증거가 없다고 주 장하면서 독도 연구의 대표적인 학자인 신용하의 연구를 비판적 시각으로 평가한 연 구자가 등장하였다. 그는 이종학이었다. 그는 한국 역사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음 에도 역사학의 정규교육을 못 받았다는 이유로 늘 학계에서 소외당하였다. 그런 그가 시마네현 고시 41호 가 공포된 증거가 없음을 실증하면서 독도의 편입이 세방신문에 고시되었다는 신용하의 주장을 논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시마네현 고시 41호 의 실체를 철저히 분석한 한국의 학자는 나오지 않았다. 여전히 일본의 주장대로 그 고시는 공포된 것으로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 인 위에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 한국의 독도론은 별다른 발전을 보지 못하고 답보상태를 면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특히 최근에 발견 되는 독도관계 자료는 전적으로 일본에 의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자료집에 근거하여 논 의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자료집의 원본을 직접 확인한 학자가 있 다고는 들어보지 못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글쓴이는 이종학의 주장을 다시 조명해 보고 시마네현 고시 41호 의 실체를 발전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여전히 그 고시의 공포를 증명할 수 있는 사 료를 일본은 제시하고 있지 않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면서 이 글을 진행하려고 한다. 현재 한국의 독도연구는 역사전문가가 아닌 문학전공자의 주장이 한일에 크나큰 충 격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이 글에서 다룰 박유하이다. 그 는 일본 케오대학과 와세다대학 출신이라고 한다. 이는 일본의 영향이 그에게 적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일본군위안부를 일본군의 동지 라고 할머 니들을 매도하였다. 신채호의 말대로 공자의 조선이 되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는 일 본의 이또 히로부미 가 되어 한국의 세종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4) 박유하의 독도 주장은 일본의 독도 공유 주장자들과 깊은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는 점에서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그는 한일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와 다 하루키( 和 田 春 樹 ) 와 같은 인물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본론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겠지만, 그는 독도를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인식을 갖 고 있는 것 같다. 그가 독도가 한국의 영토라고 언급하는 대목도 있지만 이는 그 자 신의 속마음을 숨기기 위한 장치에 지나지 않다. 그의 최종 목적은 바로 우선 독도를 한일의 공유로 만들고 최종적으로는 일본에 넘기는 것이다. 특히 박유하의 독도 공유 주장은 일본군 위안부문제 교과서 문제 야스쿠니신사 문제와 논리적으로 연동되어 있 다 5) 는 점에서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4) 반면, 같은 대학 교수로서 일본에서 귀화한 호소카 유지는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많은 연구를 통하여 뒷받침하고 있다. 5) 박유하는 교과서문제에 대해 한국의 일본 교고서 비판이 긍극적으로 유효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나 라를 위해 몸바치는 일을 당연시 하는 교육과 자국 중심적인 민족주의 수정이 우선되어야 한다. (박 유하, 교과서- 긍지 에서 책임 으로, 화해를 위하여, 뿌리와 이파리, 2005, 53쪽) 라고 하여 독립 투쟁사를 교육하는 것 자체도 비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아스쿠니에 합사되어 있는 한국인에 대해 그들 중에는 천황폐하를 위해 공헌하는 일에 의해 진짜 일본국민으로 인정받기를 원하던 이들도 적지 않았다. (박유하, 야스쿠니- 사죄 하는 참배, 위의 책, 137쪽) 라고 망언 을 하는 등 야스쿠니 의 정당성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 29 -
글쓴이가 박유하의 독도 공유 주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려는 이유는 독도가 일본의 영토라고 주장한 그의 화해를 위하여 (2005) 가 2006년 문화체육관광부의 유수교양 도서 로 지정되었다는 사실 6) 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이 나라의 정부가 독도를 일본 에 팔아먹는 일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는 판단에서이다. 이러한 현상이 무지에서 나온 것이든 어떤 의도에서 나온 것이든 이는 일본인들이 한국 정부가 독도를 일본 고유의 영토로 인정하고 있다는 근거로 문화체육관광부의 우수교양도서 지정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아직 글쓴이는 정부가 이를 취소하였다는 소식 은 듣지 못하였다. 이러한 글쓴이의 노력이 독도의 진실을 알리는데 조금이나마 도움 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 시마네현( 島 根 縣 ) 고시 제40호 의 실체 일본 정부는 타시마의 영유권에 관한 아국의 입장과 한국에 의한 불법점거의 개요 ( 竹 島 の 領 有 権 に 関 する 我 が 国 の 立 場 と 韓 国 による 不 法 占 拠 の 概 要 ) 를 일본외무성 홈 페이지에 게시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1900년대초,시마네현의 오키도민( 隠 岐 島 民 ) 이 본격화한 강치 사냥 사업의 안정화를 요구하 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아국은 1905(명치38) 년 1월 각의 결정에 의해 다 케시마( 竹 島 ) 를 시마네현에 편입하고, 영유의사를 재확인함과 동시에 그 후 관유지 대장 등 록, 강치 사냥 허가, 국유지 사용료 징수 등을 통한 주권행사를 타국의 항의를 받은 적이 없 이 평온하고 계속적으로 행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이미 확립된 다케시마에 대한 아국의 영유권 이 근대국제법상으로도 여러 외국에 대해서 보다 명확하게 주장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7) 여기에서 보듯 일본의 주장은 1 국제법에 의해 1905년 1월 각의 결정에 의해 시마 네현에 독도를 편입하여 영유의사를 재확인하였다. 2 이에 대해 타국(한국) 의 항의 가 없었다는 것이 핵심이다. 물론 일본의 이러한 주장은 이른바 1905년 시마네현 고 시 40호 에 근거한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1905년 1월 28일 각의 결정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별지 내무대신이 청의( 請 議 ) 한 무인도 소속에 관한 건을 심사하였는데, 이 섬은 북위 37도 9분 30초, 동경 131도 55분이다. 오키도( 隱 岐 島 ) 로부터 서북쪽으로 85리( 浬 ) 에 있는 무인도는 타국이 이를 점령 6) 한국일보, 2014년 7월 22일자, 2006년 문화체육관광부 지정 우수교양 도서로 지정. (http://www.hankookilbo.com/v/0b72c2b43ac04f47889767571fbd1930). 7) www.mofa.go.jp/mofaj/area/takeshima/gaiyo.html 1900 年 代 初 期, 島 根 県 の 隠 岐 島 民 から, 本 格 化 したあしか 猟 事 業 の 安 定 化 を 求 める 声 が 高 まっていま した.こうした 中, 我 が 国 は1905( 明 治 38) 年 1 月 の 閣 議 決 定 により 竹 島 を 島 根 県 に 編 入 し, 領 有 意 思 を 再 確 認 するとともに,その 後 官 有 地 台 帳 への 登 録,あしか 猟 の 許 可, 国 有 地 使 用 料 の 徴 収 などを 通 じた 主 権 の 行 使 を 他 国 の 抗 議 を 受 けることなく 平 穏 かつ 継 続 して 行 いました.こうして, 既 に 確 立 していた 竹 島 に 対 する 我 が 国 の 領 有 権 が, 近 代 国 際 法 上 も 諸 外 国 に 対 してより 明 確 に 主 張 できるようになったのです. - 30 -
했다고 인정할 만한 형적( 形 跡 ) 이 없고, 재작년 메이지 36년(1903년: 글쓴이) 본방인( 本 邦 人 ) 나카이 요 사브로( 中 井 養 三 郞 ) 란 자가 어사( 漁 舍 ) 를 짓고, 인부( 人 夫 ) 를 데리고 가 엽구( 獵 具 ) 를 갖추어서 강치 ( 海 驢 ) 사냥에 착수하고, 이번에 영토편입 및 대하( 貸 下 ) 를 출원하였는 바, 이번에 소속 및 도명을 확정 할 필요가 있으므로, 이 섬을 다케시마( 竹 島 ) 라고 명명하고 지금부터 시마네현 소속 오키도사( 隱 岐 島 司 ) 의 소관으로 하고자 한다고 하므로 심사하건데, 메이지 36년 이래 나카이 요사브로( 中 井 養 三 郞 ) 란 자가 이 섬에 이주( 移 住 ) 하여 어업에 종사한 것은 관계서류에 의하여 밝혀지며, 국제법상 점령한 사실이 있 는 것이라고 인정하여 이를 본방( 本 邦 ) 소속으로 하고 시마네현 소속 오키도사의 소관으로 하는데 지장 없는 건이라 사고( 思 考 ) 하여 청의( 請 議 ) 대로 각의 결정함이 가하다고 인정한다. 8) 물론 일제가 이러한 각의 결정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음모 가 있었음은 두말할 필 요도 없다. 9) 즉, 1904년 9월 29일 리앙코섬 영토 편입 및 대하원 을 일제에 제출한 나카이 요사부로는 本 島 (독도: 글쓴이) 가 울릉도에 부속하여 한국의 所 領 이라고 하 는 생각을 갖고서, 장차 통감부(한국 정부의 잘못: 글쓴이) 에 가서 할 일이 있지 않 을까하여 상경해서. 10) 라고 한 데서 보듯이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정확하게 알고 있 었음에도 일제의 공작에 따라 독도의 소속이 결정 되지 않다고 강변하였다. 즉 무주 지 선점론을 내세웠던 것이다. 이에 따라 내각결정을 통해 일본은 국제법에 따라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 40호 를 고시하여 독도를 일제의 영토로 편입하 였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일 양국의 독도 연구는 거의 예외 없이 1905년 시마네현고시 40호 가 국제법에 의해 고시되었다는 논리 위에 이루어졌다. 특히 한국의 연구는 1877년 일본 인들의 울릉도 독도 도항을 금지한 1877년의 태정관지령, 독도의 소속을 울릉도로 명 시한 1900년의 칙령 41호 등을 역사적 근거로 제시하며 무주지 선점론을 논파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 일본 정부와 연구자들은 국제법을 내세워 합법적 편입 을 지속적 으로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1905년 2월 22일 고시했다는 시마네현 고시 40호 는 국제법 절차에 따라 공포되었을까? 만약 이 고시가 국제법 절차를 거치지 않고 공포되지 않았다면 독도문제는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을 것이다. 이것이 사실로 밝혀지면 사실상 독도문 제의 종결을 선언해도 좋을 것이다. 이 점에서 시마네현 고시 40호 의 고시 여부를 밝히는 일은 독도문제 해결을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핵심 연구 과제라는 점 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주장한 학자는 이종학이다. 그는 신용하의 獨 島 에 대 한 日 本 의 1905년 領 土 偏 人 의 不 法 性 과 不 當 性 11) 을 비판한 독도를 둘러싼 바 다 명칭에 대하 韓 日 간의 시각 12) 라는 논문을 남겼다. 그는 이 논문에서 일본의 대 8) 公 文 類 聚 第 二 十 九 編 明 治 三 十 八 年 (1905) 卷 一 ( 日 本 国 立 公 文 書 館 所 蔵 ). 9) 內 藤 正 中 朴 炳 涉, 竹 島 = 獨 島 論 爭 歷 史 資 料 から 考 える, 新 幹 社, 2007, 238-241쪽. 10) 中 井 養 三 良, 中 井 養 三 良 事 業 京 營 槪 要, 독도 독도자료총람 (김병렬, 다다미디어, 1998, 388쪽). 11) 신용하, 獨 島 에 대한 日 本 노 1905년 領 土 偏 人 의 不 法 性 과 不 當 性, 독도영유의 역사와 국제관 계 (독도학회 제3회 학술심포지움), 독도학회, 1997년 12) 이종학, 독도를 둘러싼 바다 명칭에 대한 韓 日 간의 시각 (독도박물관 제1회 학술 발표회), 독도박물관, 2000; 독도를 둘러싼 바다 명칭에 대한 韓 日 간의 시각, 군사논단 24, 한국군사학 - 31 -
표적인 독도 연구가인 가와카미 겐죠( 川 上 健 三 ) 가 다케시마의 역사지리적연구 (214쪽) 에서 나카노도리도( 中 の 鳥 島 ) 편입 증거로 동경부고시 제58호 을 제시하며 이를 일본의 영토편입의 관행이라고 하면서도 시네현고시 40호 의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하면서 일제의 무주지 선점 주장론을 부정하였다. 13) 그런데 이종학은 위의 논문에서 가와카미 겐죠도 고시 증거로 제시하지 못하였는 데, 신용하가 일제의 독도 편입 증거로 세방신문( 世 方 新 聞 ) 을 들고 있으므로 그 진 위여부를 수차례 직접 신용하에게 확인하였다. 14) 라고 한다. 하지만 10여 년 전 외 무부에서 얻은 자료라서 정확히는 모르나, 일본 측의 문서로 기억한다. 외교문서를 그 들이 거짓으로 기록했겠는가라는 생각에서 더 이상 출전을 확인하지 않고 인용했다. 라는 답을 김연갑을 통해 들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15) 이후 이종학은 시마네현 도서관 향토자료실, 일본국회도서관 신문관, 도쿄대학법학 부 부속 근대일본법정사료센터 메이지 신문잡지문고 등과 외무부에 문의하여 세방신 문의 존재여부를 확인하였다. 그 결과 그는 일본 측으로부터 세방신문의 존재를 부인 하는 답을, 한국 외무부로부터 대외비 라는 이유로 열람이 불가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고 한다. 여기에서 두 가지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이종학이 세방신문이 일본에서 발행된 적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신용하와 당시 외교부 는 세방신문의 존재를 인정하였다는 것이다. 둘 중 하나는 거짓말 을 하고 있음이 분 명하다. 그런데 세방신문은 일본의 어느 기록에서 확인되지 않은 유령신문임이 사실 에 가까운 것으로 판명된다. 따라서 신용하와 한국 외교부의 주장은 그 근거를 상실 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6) 이종학은 더 나아가서 시마네현고시 40호 의 존재와 고시 여부를 집요하게 추적 하였다. 그 결과 秋 鹿 村 役 長 島 根 縣 告 示 明 治 38 年 이라는 책 안에 시마네현고시 40호 가 유일본으로 남아 있다는 점을 시마네현 총무부 총무과에서 1999년 11월 22 일 보낸 회답에서 확인하였다. 17) 그것도 회람 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는 채로 보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고 시하지 않고 시마네현에서 돌려만 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편입한 사실을 고시하였 다면 신문이든 방문( 榜 文 ) 을 찍은 사진이든 고시했다는 증거가 남아 있어야 하지만 그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18) 회, 2000. 13) 이종학, 위의 논문, 75-77쪽. 14) 신용하, 獨 島 에 대한 日 本 의 1905년 領 土 偏 人 의 不 法 性 과 不 當 性, 독도영유의 역사와 국제관 계 (독도학회 제3회 학술심포지움), 독도학회, 1997, 59쪽. 15) 위의 논문, 78쪽. 16) 신동욱은 1905년 2월 22일 시마네 현 고시 제40호를 현청 문 앞에 게시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신 동욱, 독도영유에 관한 연구, 어문각, 2008, 85-86쪽). 또한 박현진은 현보에 고시문을 게재하였 다. 라고 주장하였다(박현진, 일제의 독도 군사점령과 비밀 유사편입, 일본 아베정권의 독도침탈정 책 강화추세와 한국의 독도영유권의 명증 ((사) 독도연구보전협회 2015년도 학술대회), (사) 독도연구 보전협회2015, 26쪽).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17) 이종학, 위의 논문, 84쪽 18) 이에 대해 시마네현은 시마네현 고시는 널리 일반에 행하는 통지이며, 명치 38년(1905) 의 시마네 - 32 -
당시 국제법에 의한 고시방법은 관보게재, 신문보도, 방문( 榜 文 ) 등을 들 수 있다. 일제는 대체로 미나미도리도( 南 鳥 島 ) 등의 경우에서 보듯이, 편입 증거로 신문에 고시 하였다. 19) 이에 이종학은 당시 104개의 신문을 모두 조사하였지만 사마네현 고시 40호 의 공포 증거가 확인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케시마( 竹 島 ) 라는 명칭도 관보에 6월 5 일에서야 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한국주재 일본 영사관도 다케시마라는 명칭 이 독도를 의미한다는 점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 20) 과 부합된다. 물론 이는 일제가 독도를 편입했다는 주장의 허구성에 대한 지적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각의 결정으로 독도를 국제법에 따라 편입하였다는 일본 정부와 연구자들의 일방적인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허론( 虛 論 ) 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21) 그렇다면 일본 정부와 연구자들은 고시했다는 증거도 없이 독도를 편입하였다고 주 장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독도가 조선 영토라는 태정관의 결론 등 역사적 사실에 따른 1905년 1월 28일 각의 결정 이전의 내무성의 판단이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즉, 이에 대해 나카이의 다음과 같은 기록은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시국에(일러개전 중) 한국영지라는 의심이 있는 황막한 일개 불모의 暗 礁 를 걷어 들여 환시( 環 視 ) 의 제외국에게 아국이 한국병탄의 야심이 있다는 의심을 크게 하는 것은 이익이 극히 작은데 반하데 사태는 결코 용이하지 않다고 하여 아무리 설명해도 출원은 장차 각하될 것이었다. 22) 현 고시 40호는 다케시마( 竹 島 ) 가 시마네현 소속의 오키도사( 隱 岐 島 司 ) 의 관할 하에 들어간 것을 알리는 것이다. 이 당시 고시는 현내의 도청, 시역소( 市 役 所 ), 전군역소( 全 郡 役 所 ), 전정촌역장( 全 町 村 役 場 ) 에 복수의 부수가 배포되어 현재,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는 5개 정촌( 町 村 ) 의 것이 확인되고 있다. 시마네현은 고시 공포 후 현역( 縣 域 ) 의 북단을 변경했다. ( 島 根 縣 總 務 部 總 務 課, 九 明 治 三 十 八 年 島 根 縣 告 示, 竹 島 關 係 資 料 集 第 二 集 - 島 根 縣 所 藏 行 政 文 書 -, 2011, 6쪽) 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시마네현은 시마네 현 고시 40호 를 고시했다는 증거를 정확하게 제시하고 있지 않다. 더구나 일본 측은 명치 38년(1905년) 1월의 각의결정에 의한 다케시마( 竹 島 ) 의 영토편입은, 동년 2월에 시마네 현 지사에 의해서 고시되어, 산인( 山 陰 ) 지방의 신문에도 게재되었지만. 라고 주장하고 있다(WeB 竹 島 問 題 硏 究 所, 竹 島 問 題 에 關 한 調 査 硏 究 報 告 書 平 成 20 年 度, 島 根 縣, 21쪽). 하지만 이는 산인신문 24일자의 기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종학이 지적하였듯이(이종학, 위의 논 문, 82-83쪽) 고시가 그 자체가 아니라 고시했다는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2013년 11월 6일 시마네현 공무서 보관소에 직접 방문하여 시마네현 고시 40호 원본 열 람을 요청하였지만, 1945년 8월 24일 시마네현 청사가 전소될 때 불에 타서 없어졌다. 라는 독도 일본에 알리기 운동연대의 배삼준 회장의 주장( 연합뉴스, 2013년 11월 8일자, 시민단체 日 시마 네현 고시 제40호, 68년 전 소실 ) 은 독도 소속과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일 제가 독도를 고시하여 편입했다는 주장은 더 이상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19) 이종학, 위의 논문, 76쪽. 20) 박병섭, 200년 이후 독도 관련 일본학계의 역사학 연구, 일본의 독도연구동향과 분서, 지성인, 2014, 80쪽. 21) 허영란은 일제의 독도 편입 을 국제법이 아닌 국내법에 따른 조치라고 주장하고 있다(허영란, 1905 년 각의결정문 및 시마네현 고시 제40호 와 독도 편입, 독도연구 17, 2014, 129쪽). 그러나 일 제가 독도 편입 요건을 국제법에서 찾는 이상, 그리고 일본의 도서 편입의 일반적인 예를 보더라도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고 판단된다. 22) 中 井 養 三 良, 中 井 養 三 良 事 業 京 營 槪 要, 독도 독도자료 총람 (김병렬), 다다미디어, 1998, 338쪽. - 33 -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 내무성과 나카이는 독도가 한국의 영토라는 인식을 분 명히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외무성은 군사상의 목적으로 독도 강탈 을 추진하였고, 결국 각의 결정에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국제 여론을 의식하여 각의에서 독도 강탈을 결정하고서도 국 제법에 의한 고시까지는 하지 못하였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23) 이처럼 그 동안 일 본은 독도를 강탈하였음에도 국제법 절차를 마치고 편입하였다. 라고 일방적으로 주 장한 일제의 논리를 그대로 아무런 반성 없이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각의 결정은 국제법에 따른 무주지 선점 요건을 갖추지 못하였다 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3가지 측면에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설 사 시마네현 고시 40호 가 고시되었다는 증거가 있다 해도 이 고시는 국제법 절차에 따른 것으로 인정될 수 없음은 당연하다. 첫째, 각의 결정문의 다케시마( 竹 島 ) 가 현재의 독도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각의결정문 에는 독도의 위치가 북위 37도 9분 30초, 동 경 121도 55분 으로 기록되어 있다. 24) 이외 다케시마라고 주장되는 섬에 대한 일본의 공식 기록들은 다음의 표에서 확인된다. 수로지 구분 독도 오키도의 거리 위도 북위 37도 14분 환영수로지(1886. 12) 동경 131도 55분 북위 37도 9분 30초 일제 내각결정문(1905. 1) 86해리 동경 131도 55분 시마네현 고시 40호 북위 37도 9분 30초 (1905.2) 동경 131도 55분 북위 37도 14분 조선수로지 (1907. 3) 80헤리 동경 33도 55분 일본수로지(1907. 6) 일본수로지(1911. 12) 일본수로지(1916. 12) 일본수로지(1920. 4) 80해리 86해리 80해리 86해리 북위 37도 14분 18초 동경 131도 52분 22초 조선연안수로지(1933. 1) 86해리 23) 이는 일제의 지도 등에 1910년 일제의 한국 병탄 이후에도 독도가 한국의 영토로 기록되어 있는 점 에서 확인된다. 24) 시마네현 고시 제 40호, 시마네현 토지대장 (1905년), 다케시마의 코가무라 편입 (1939) 시 마네현 고시 제352 (1953) 에도 내각결정문의 다케시마의 위치와 같은 곳에 경도와 위도가 표시되어 있다(김신, GPS에 의한 독도의 시마네현 고시에 관한 연구, 인터넷비즈니스연구 제14권 제1호, 한국인터넷비즈니스학회, 2013, 162-163쪽). - 34 -
위의 표에서 일제의 각의 결정문과 일제의 공식적인 기록들의 독도 오키도의 거리 및 독도 좌표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 국제법에 의한 무 주지 선점론을 주장하는 일본의 논리가 얼마나 엉터리 인지 확실히 드러난다. 이처럼 일본은 존재하지도 않은 섬을 다케시마라고 하여 편입 하였다고 억지 주장으로 일관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경희대 교수 김신이 정확하게 실측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25) 독도의 동도 북위 37도 14분 26.8초 동경 131도 52분 10.4초 독도 서도 북위 37도 14분 30.6초 동경 131도 51분 54.6초 김신에 따르면 일제의 각의 결정으로 편입되었다고 주장되는 섬은 현 독도에서 일 본 쪽으로 11km나 떨어진 곳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26) 이는 당시 일제 내각이 독 도의 위치를 정확하게 모르는 상태에서 있지도 않은 섬을 일방적으로 다케시마라고 하여 편입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국제법에 의한 영토 편입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임에 분명하다. 무엇보다 이러한 일제의 수법은 나카노 도오리시마( 中 の 鳥 島 ) 를 편입하였다가 취소한 전례가 있다는 점과 관련하여 볼 때 27) 그 정당성을 잃 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둘째, 독도를 타국이 점령하였다는 형적이 없다. 라는 각의결정은 태정관 지령 칙령 41호 등에서 보듯이 역사적 사실이 아님은 이미 여러 연구에서 밝혀졌다. 28) 25) 김신, 위의 논문, 171쪽. 나이토 세이츄( 內 藤 正 中 ) 와 박병섭( 朴 炳 涉 ) 의 독도의 동도 위치에 대한 기술은 김신의 그것과 같다( 內 藤 正 中 朴 炳 涉, 위의 책, 263쪽). 26) 위의 논문, 27) 이종학, 위의 논문. 75-76쪽. 28) 그런데 배성준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이처럼 독도에 대한 진실이라고 믿고 있었던 사실조차도 많은 부분이 잘 못 알려져 있다. 누구나 알고 있고,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진실 조차도 선입 견을 버리고 찬찬히 전후 맥락을 따져 본다면 낯설게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사용되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독도 명칭이 1906년 시마네현에서 독도 시찰차 울릉도에 들른 사건을 보고하는 울도( 鬱 島 ) 군수의 보고서에서 처음 등장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독도 명칭마저 낯설게 보이기 시작한다. (배성준, 독도문제를 보는 비판적 시선을 위하여, 문화과학 42, 문화과학사, 2005, 200쪽) 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보듯 배성은 한국의 독도론이 진실 이 아닌 거짓이라고 주장하 고 있다. 이는 1905년 2월 이전 독도가 무주지라는 일제의 주장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배성준의 주장과 달리, 일본 사료 軍 艦 新 高 行 動 日 誌 1904년 9월 25일조 송도에서 리앙 꾸르암 實 見 者 로부터 청취한 정보 에 리앙끄르암은 한인은 이를 獨 島 라고 書 하고 本 房 어부들은 리 앙꾸르도라고 호칭한다. (밑줄: 글쓴이) 라고 되어 있다. 이는 이미 일본 정부가 독도를 편입했다고 주장한 1905년 2월 이전 이미 독도라는 명칭은 널리 알려져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대한매일신보, 1906년 5월 1일자, 無 變 不 有 에 本 郡 所 在 獨 島 라는 보도가 나올 수 있던 것이다. 따라서 배성준의 이러한 주장은 대단히 의도적 행위 로 앞으로 다를 박유하의 독도 주장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배성준은 더 나아가 독도수비대 에 의한 독도 점 령. (배성준, 위의 논문, 200쪽) 이라는 문장을 구사하고 있다. 점령이라는 용어는 우리 땅이 아닌 독 - 35 -
셋째, 각의결정문 에 따르면 나카이 요사부로가 다케시마에 이주하여 어업에 종 사한 사실이 관계서류에 의해 밝혀진 바이므로 국제법상 점령의 사실이 있음을 인정 하여. 라는 문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국제법상 1 무주지 발견 2 자국민의 이주와 경제활동 3 해당 도서의 귀속에 대한 확인 영토 편입 및 대하( 貸 下 ) 청원 4 각의 결정 5 고시 6 대하의 절차를 밟아야 하기 때문이다. 29) 그러나 리양코도 영토 편입 및 대하원 과 나카이 요자부로 사업경영개요( 中 井 養 三 良 事 業 經 營 槪 要 ) 등에서 보듯이 나카이가 존재하지도 않은 다케시마에 이주하여 국제법 상 점령하였다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다. 설사 백보 양보하여 각의결정문 중의 다케시마를 독도 라고 해도 독도에 나카이가 이주하여 경제활동을 하였다. 라는 각의결정문 의 내용은 일본의 어떤 기록에서도 확인되지 않은 허위사실이다. 나카이는 향후 다케시마에서 이주가 아 니라 몇 개월 강치 사냥 등의 경제활동을 하겠다고 주장한 것이다. 따라서 설사 다케 시마가 독도라고 해도 나카이가 이주(정착) 하여 경제활동을 하였다는 각의결정문은 허위사실을 유포한 문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30) 3. 일본 논리의 추종-박유하의 주장을 중심으로- 1990년대에 들어와 식민지근대화론이 서울대 교수들이 주도한 낙성대 경제연구소 를 중심으로 확산되는 경향을 보인다. 특히 이는 일본군위안부를 비하하고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일제의 침략 논리에 경도된 안병직 31) 이영훈 등이 주도하였다는 점 도 주의해서 보아야 한다. 이들의 주장은 일본군위안부를 일본군의 동지 32) 또는 돈 때문에 자신의 신체 를 팔았다며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금 의 기만성 33) 을 옹호 한 34) 박유하는 이들의 주장을 화해를 위하여 35) 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표출하였다. 36) 도를 무력으로 확보했다는 의미이다. 이는 독도를 한국이 불법정령하고 있다. 라는 일본 정부의 주 장과 같은 것이다. 29) 허영란, 위의 논문, 126쪽 30) 內 藤 正 中 朴 炳 涉, 위의 책, 246쪽; 정태만, 17세기 이후 독도에 대한 한국 및 주변국의 인식과 그 변화, 단국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14, 참조. 31) 미디어 오늘, 2006년 12월 7일자, 안병직, 위안 강제 동원 없어 또 망언. 식민지근대화론을 지 지하면서 일본군위안부를 모독한 그가 최근 일본군위안부 연구자로 자처하고 있는 현상을 우리는 어 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굳이 찾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다. 이러한 안병직이 독 도가 역사적으로 우리 것이라는 게 완전히 증명되면 좋지만, 사실 일본도 일본 것이라고 주장할 만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 서울신문 2008년 7월 16일자, 안병직 日 보다 독도 증거 많다고 주장 못 해 ).라고 강조한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32)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제2판 34곳 삭제판), 뿌리와 이파리, 2013, 138쪽. 33) 이에 대해서는 스즈키 유코( 鈴 木 裕 子 ), 日 本 軍 慰 安 婦 問 題 와 國 民 基 金, 梨 の 木 舍, 2013, 참 조. 34) 박유하, 위안부- 책임 은 누구에게 있나, 화해를 위하여, 71쪽. 35) 박유하, 독도-다시 경계민의 사고를, 위의 책. 36) 박유하의 등장은 단순한 개인적 일탈이 아니라, 1990년대 이후 표면화된, 일본에 만연되어 있는 식 민지근대화론의 득세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조우석이라는 문학평론가의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http://www.mediapen.com/news/articleView.html?idxno=73446) 다시 말해 이러한 현상 은 대일전쟁기의 민족주의사학과 식민사학의 대결이 재점화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 36 -
그가 독도와 관련하여 일본 논리를 얼마나 철저하게 추종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 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박유하는 독도가 한일간의 문제가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1) 독도가 한일 간에 문제화된 것은 1952년 한국이 이른바 이승만라인을 선포하면서 독도에 경비대를 보내 한국 땅임을 선언한 시점에서부터이다. 말하자면 패전국 일본이 미국이 대표하 는 연합국의 지배체제로부터 벗어나 독립국가가 되어 주권을 갖게 되기 시작한 바로 그때, 한 국이 독도를 한국 땅으로 선언하면서 벌어진 일인 것이다. 37) 여기에서 박유하는 독도문제가 불거진 책임을 한국 정부에 돌리고 있는 사실을 확 인할 수 있다. 이는 일본이 주권국가로써 독도의 영유권을 되찾기 위한 조치였다는 의미이다. 그는 한국 정부의 대한민국인접해양에 대한 대통령선언(국문원고시 제14 호) (1952.1.18) 을 일본의 주권에 대한 도전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는 일본과의 어업분쟁을 막고 어업과 대륙붕 자원 보호를 위한 주권 행위였다. 이 선 언은 한국 영토인 독도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일본 정부 가 독도를 들고 나온 것은 어업권과 해양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해석하 는 것이 타당하다. 결국, 이러한 그의 시각은 일본의 고유영토인 독도를 한국이 강점 하고 있다. 라는 일본의 주장을 추종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38) 이어서 박유하는 1945년 이후 한국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약 2장 정도로 언급한 39) 반면, 일본의 주장을 약 3장 넘게 소개하면서 40) (2) 이때 일본은 (중략) 한국이 점거를 시작한 1954년 9월에 독도문제가 국제법상의 영유권에 관한 분쟁인만큼 양국 정부가 합의하여 이 분쟁을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자고 제의했지만 한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41) 37) 위의 책, 144쪽. 38) 이는 배성준(위의 논문, 197쪽) 의 논리와 같은 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한편 일본의 대표적인 극우 독도 연구자인 시모즈 마사오( 下 條 正 男 ) 는 1952년 1월 18일, 한국 정 부가 이승만라인을 설정하고 죽도(독도: 글쓴이) 를 그 영역에 포함시킨 것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이 발효되기 약 3개월 전의 일이었다. 한국 정부는 일본이 외교권을 상실하고 있던 공백의 시대를 이 용하여 이승만라인 을 설정한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은 1953년 이후 죽도를 계속 무력 점거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였다(시모즈 마사오, 죽도문제의 문제점, 한국논단 8, 1998, 138쪽). 여기에서 보듯이 시모즈 박유하 배성준 모두 독도문제가 양국의 외교문제가 된 원인 을 대한민국인접해양에 대한 대통령선언 에서 찾고 있는 것은 공통된 현상이다. 배성준의 독도론에 대한 자세한 비판은 이덕일, 賣 國 歷 史 學, 참조. 39) 박유하, 위의 책,169-171쪽. 40) 박유하, 위의 책, 172-175쪽. 41) 위의 책, 144-145쪽. 특히 박유하는 일본 측의 주장을 일본은 독도 문제를(평화적 수단에 의해서 해결하기 위해) 국제사 법재판소에 제소하고자 제의했으나 한국은 이제껏 거부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 측 주장에 설득력이 없기 때문이다. (위의 책, 175쪽) 이라고 마무리하고 있고 있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 그는 한국의 주장이 설득력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 37 -
라고 주장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독도문제는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야 한다는 일본 정 부를 대변하면서도, 오히려 그는 한국이 반대하였기 때문에 독도문제가 해결되지 못 하였다고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는 다음과 같이 일본의 독도영유권주장에 대한 한국의 대응을 지리 고하고도 소모 적인 짓이라고 폄하였다. (3) 중요한 것은 그렇게 그때 합의를 보지 못한 탓에 한일 양국이 이후 40년 동안이나 독도를 둘러싸고 지리하고도 소모적인 대립을 거듭해왔다는 사실이다. 42) (2) 와 (3) 의 박유하 주장은 국제사법제판소로 가야한다는 일본 정부의 방침을 추 종하여 그 책임을 한국으로 돌리는 반한( 反 韓 ) 태도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의 일본 추종 성향은 다음의 글에서 더욱 심각하게 드러난다. (4) 그동안 그 분쟁 이 크게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은 일본 측이, (중략) 강력한 행동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중략) 그러한 평화적 자세를 견지해왔다는 사실 자체는 평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박유하는 독도문제가 한일양국의 분쟁 으로 등장하지 않은 이유를 일본의 자제 와 평화적 자세의 견지 때문이라고 일본 정부를 두둔하고 있다. 이는 한국이 자제력을 상실하였고 침략적 자세로 독도를 강점하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일본 의 대변인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 박유하의 기본적인 독도 시각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박유하가 독도가 한국영토라는 사실은 2쪽에 걸쳐 짧게 요약한 43) 반면, 일 본 측은 어떤 근거로 독도를 일본 땅이라 하는 것일까. 그들의 주장을 종합하면 다음 과 같은 또 다른 독도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라고 하면서 한국의 주장만이 다가 아 니라고 강조한 다음, 한국의 독도론 2배에 해당하는 장장 4쪽에 걸쳐 일본의 주장을 소개하고 있다. 44) 이는 그가 사실상 일본에 독도영유권 이 있다는 일본 논리를 선전 하는 전위대 역할을 자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자 그의 성향으로 보아 당연한 귀결이다. 급기야 그는 (5) 일본이 독도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언제나 남의 땅을 빼앗는 야욕 으로만 치부 되어 왔다. (중략) 그들의 주장을 제대로 들어볼 필요가 있다 45) 라고까지 부일성향을 드러낸다. 그는 일본의 주장이 독도를 다시 점령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강조한 반면, 한국의 독도론이 또 다른 야욕 이라고 망언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가 일본의 주장을 한국의 그것에 비해 거의 두 배가 넘도록 장황 42) 위의 책, 145쪽. 43) 위의 책, 146-147쪽. 44) 위의 책, 148-151쪽. 45) 위의 책, 152쪽. - 38 -
하게 설명하고 있는 이유를 읽을 수 있다. 박유하의 일본 편향 경향은 이에 머물지 않고 다음에서 보듯이 더욱 깊어진다. (6) 한국과 일본이 거론 하는 자료에 나타난 이름들이 다케시마라고 해서 혹은 독도라고 해서 그 이름만으로 소유자를 판단하기는 어려워진다. 46) (7) 그런데 지금도 쾌속선으로 네 시간이 걸리는 거리에 있는, 따라서 당시의 항해술로는 울릉 도에서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을 독도를 당시 사람들이 부속도서 로 인식하는 일은 과연 가 능했을까.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도서 혹은 모자관계 에 있는 섬이라고 생각하기에는 거리가 너무나 멀어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독도를 부속도서 나 모자관계 로 표현하는 일은 너무 나 자의적이고 인간중심적 사고일 뿐이다. 47) 여기에서 박유하는 자신의 독도 인식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울릉도와 독도는 전혀 관계없는 섬이라는 일본의 주장을 그가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울 릉도와 독도를 모자관계로 보아 일본판도 외의 섬으로 인정한 태정관지령 등 역사 적 근거와 울릉도의 부속도서 혹은 모자관계 라는 인식 아래 그 동안 논의되어 온 학계의 상식을 부정하는 몰학문적인 태도이다. 이는 그가 화해를 위하여 출판을 위 해 참고한 서적 가운데 일본인 저작물이 6종이고 한국인 저작물은 5종이라는 사실에 서 확인된다. 48) 특히 일본인 저작물은 거의 독도의 일본 고유영토론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박유하의 독도 인식은 성종실록 의 삼봉도는 울릉도이다. 49) 라는 그의 기술에서도 확인된다. 물론 이는 한국의 이도론( 二 島 論 ) 을 부정하기 위해 일도설( 一 島 說 ) 을 주장한 가와카미 겐죠 50) 와 같은 일본 극우세력의 견해와 일치하는 것이다. 그의 울릉도 독도인식의 몰학문성은 독도가 울릉도의 시야권(생활권) 에 있다는 점과 오키도에서 독도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 이 두 가지 사실만 보아도 명확하게 설명될 수 있다. 더 나아가 박유하는 울릉도와 독도를 분리하기 위해 (9) 한국은 일본이 도해면허를 발급했다는 사실을 놓고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 조선의 영토라 고 말하지만, 조선 역시 조선인들이 본토 밖으로 나가는 것을 이렇게 허락하거나 금지했다. 51) 라는 위논( 僞 論 ) 을 내세우고 있다. 여기에서 보듯 그는 도해면허 발급 사실이 독도가 일본영토가 아니라는 근거가 된다는 한국의 연구결과가 틀리고, 오히려 독도 도해를 46) 위의 책, 153쪽. 47) 위의 책, 153쪽. 48) 위의 책, 192쪽. 49) 위의 책, 154쪽. 50) 카와키미 겐죠, 竹 島 の 歷 史 地 理 的 硏 究, 古 今 書 院, 1966, 94-139쪽. 51) 박유하, 위의 책, 155쪽. - 39 -
금지하지 않았다는 일본 극우 세력의 주장이 옳다고 되풀이 하고 있다. 일본의 독도 논리를 철저하게 추종한 박유하는 다음과 같이 식민지 개념을 호도하 여 본토와 울릉도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아예 울릉도 사람들을 한민족이 아닌 이민족 이라고 규정해버리고 말았다. (10) 신라 사람들에 의해 정복 당한, 즉 신라 사람들과 다른 이민족, 최소한 다른 부족이었다 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략) (울릉도와 본토의 관계는: 글쓴이) 속국 내지는 식민지 관계임 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52) 이는 일본 극우세력도 감히 하지 못하는 주장이다. 여기에서 본토와 울릉도의 관계 는 마치 일제의 한국지배와 같은 것으로 울릉도와 본토는 절대로 융합할 수 없다는 식민지 관계 이라는 인식 아래, 울릉도 사람들의 조상을 이민족으로 치부하는 그의 황당하고 몰상식적인 태도가 확연히 드러난다. 울릉도를 본토에서, 독도를 울릉도에서 분리하여 독도를 일본에 넘겨주겠다는 신념 에서 이와 같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밖에 해석이 안 된다. 하지만 울릉도가 본 토 특히 신라의 문화권에 속하였다는 것이 사실임이 학문적으로 증명되었다는 점 53) 을 그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말할 필요도 없이 그는 이마저 부정할 것이다. 이처럼 그는 한국의 모든 독도관계 사료를 부정하는 일본의 극우세력보다 더 심한 독도 부정론자 임이 틀림없다. 심지어 그의 몰학문적인 태도는 다음에서 보듯 한국의 독도 인식을 현대에 들어와 그것도 자민족 중심의 해석에 기인하고 있다고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11) 이러한 가정이 곧 울릉도나 독도의 현실적 영유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중략) 그러한 기억은 울릉도나 독도에 대한 소유의식이 어디까지나 현대인(현대국가) 의 자기(자민 족) 중심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것임을 깨닫게 해줄 수 있다. 이는 한국의 독도영유가 한국의 소유의식 즉 야욕 에 기인한다는 의미이다. 이를 입 증하기 위해 박유하는 한국 측의 주장을 1장 반정도 기술한 데 반해, 54) 일본 측의 주 장을 3장 55) 에 걸쳐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물론 이는 그의 일본 추종 성향으로 보아 당연한 결과이다. 이와 같은 박유하가 시마네현 고시 40호 의 불법성을 지적할 리는 전혀 없는 것 으로 판명된다. 오리려 그는 일제가 독도를 시마네현 고시 40호 공포로 국제법에 입각하여 편입하였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12) 일본은 이미 에도 막부 말기부터 만국공법의 실천을 문명 국으로 가는 지름길로 생각해 52) 위의 책, 156-157쪽. 53) 이에 대해서는 이성주 외 지음, 한반도 고대문화 속의 울릉도, 동북아역사재단, 2010 참조. 54) 위의 책, 157-159쪽. 55) 위의 책, 159-162쪽. - 40 -
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터였다. 그런 의미에서는 1905년의 시마네 현 편입은 아는 자로서 먼저 이 법 의 행사에 참여해 그 효력을 쟁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이 근대국가로서 소유권을 확인했다고 말하는 것은 그런 의미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것이 국제적으로 통용되던 규칙에 근거한다는 의미에서 합 법 적이었다는 점이다. (중략) 편입의 효력 은 법적 으로는 인정될 수밖에 없겠지만, 법 이 폭력일 수 있다는 점에서 는 이 부분은 윤리적 판단이 필요한 부분이다. 56) 위 글의 핵심은 일본이 국제법에 따라 독도를 편입시켰으므로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는 것이다. 박유하가 윤리적 판단 운운하는 것은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 라는 주 장에 대한 비판을 무마하기 위한 장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물어볼 것도 없이 이는 독도영유권의 법적 권원이 일본에 있다는 그의 확신에 따른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한국의 독도영유를 국제법 위반이자 강점이라고 부르짖는 일본의 극우세력과 견해를 완전히 같이한다고 해도 전혀 지나치지 않다. 더 나아가 그는 시마네현 고시 40호 의 문제점을 지적한 한국의 논리를 비난하면 서 일제의 독도 침략을 미국과 영국마저 끌어들여 다음과 같이 일본의 독도 영유주장 을 합리화하는 술수까지 동원하였다. (13) 한국은 일본이 몰래 편입했다고 비난하지만, 설사 일본이 공개적으로 편입했다고 하더라 도 일본에 한반도의 소유권을 인정한 미국이나 영국이 독도에 대한 일본의 욕망을 부정했을지 는 의심스럽다. 57) 이는 고시여부와 관계없이 당시의 국제법과 국제 질서에서 본다면 1905년 2월 22일 일본의 독도 편입 은 필연적이고 당연하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그는 일본의 무주지 선점론을 재차 언급하면서 독도 침략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국제법적 선점 이라는 확신에 차서 다음과 같이 일본의 주장을 적극 선전하고 있다. (14) 그런 의미에서 이 시기의 일본은 주인 없는 땅 무주지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고 독 도가 실제로 무주지였는가 아닌가와는 상관없이 독도에 대한 욕망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중 략) 독도는 일본에게 새로운 땅으로 가다왔을 확률이 크다. (중략) 그런 의미에서는 독도 편입 은 일본이 말하는 법적 선점일 수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류큐나 홋카이도와 마찬가지로 제 국주의적 선점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58) 이어서 박유하는 독도침략을 새로운 땅에 대한 제국주의적 선점 이라고 강조하면서 도 59) 다음과 같이 그 선점이 폭력과 탐욕의 의한 약탈이 아니며 주인이 없는 섬 독도 56) 위의 책, 162-163쪽. 57) 위의 책, 164쪽. 58) 위의 책, 165쪽. 59) 이러한 백유하의 주장은 19세기 말 독도의 발견 은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 속에서 동아시아 근대 민족국가의 수립 및 그 국경의 형성이라는 맥락에 놓여 있으며, 새롭게 발견 되는 독도(울릉도?) 문제 의 가치도 이러한 맥락 속에서 결정된다. (중략) 즉 독도문제는 단순히 독도를 뺏으려는 일본의 음모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 세계체제 변동에 빠른 동북아의 (재) 구조화라는 맥락 속 - 41 -
를 일본이 선점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15) 독도 편입을 곧바로 폭력 및 탐욕에 의해 약탈한 것으로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 다. 이러한 단어가 타당성을 가지지기 위해서는 독도에 명확한 주인이 있어야 하고, 조선이 과연 독도를 인지하고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60) 그는 일본의 무주지 선점론을 지지하기 위해 독도를 조선이 인지하고 있지 않았으므 로 독도가 명확한 주인이 없는 섬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이는 일본의 무주지 선 전론 그 자체로 볼 수밖에 없다. 일제의 무주지 선점론의 정당성을 확신한 박유하는 (16) 울릉도에서 어업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자국영토임을 주장하는 것이 그 토지 자신의 역사 를 무시하는 일인 것처럼, 본토의 국민을 귀양 보냈던 땅에 혹은 본토의 국민이 국민 되기를 거부하기 위해 이탈했던 지역에 한 때 국민이 거주했다는 이유로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일 은 지극히 자의적인 사고가 아닐 수 없다. 라고 하여 독도를 일본에 넘기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울릉도마저 한국의 영토가 아니 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울릉도가 한국의 영토가 아니라 일본의 영토라는 속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박유하는 한국의 독도론을 무려 5쪽 61) 에 걸쳐 자의적 이라고 비난하 고, 그 원인을 민족주의의 탓으로 62) 치부하면서 일본 특히 시마네 현의 독도영유권 주장에 대해서는 (17) 우리는 여기서, 시마네 현으로서는 수교 40주년이란 다케시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40 주년이었고, 일본 정부가 그 동안 그들의 요구에 미온적이었으며, 그 때문에 그러한 정부에 불만을 가져왔음을 알 수 있다. 2005년의 다케시마의 날 제정의 배경에는 그런 긴 세월이 있 었다. 에 놓여지며, 그때마다 독도는 새롭게 발견 되는 것이라고. (배성준, 위의 논문, 202쪽) 라고 하는 배 성준의 독도 인식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60) 위의 책, 166쪽. 61) 위의 책, 177-181쪽. 62) 배성준도 박유하와 같은 논리 구조 속에서 한국의 독도론을 아무런 역사적 국제법적 근거가 없는 허무맹랑 한 주장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즉, 그렇다면 지난 50여 년 동안 독도문제를 독도는 우리 땅 식의 이해에 가두어 두었던 것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입증하려는 현실적 인 요청이 독도에 대한 이해를 규정하였는데, 이 현실적인 요청을 뒷받침하면서 독도문제에 대한 논 리를 제공하는 것이 민족주의적 인식이다. (중략) 이렇게 민족주의적 인식에 기반한 독도 이해, 반일 감정과 막연한 위기감에 휘둘린 독도 이해가 독도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거부하고 한일 간의 갈등을 초래한다. (배성준, 위의 논문, 204-205쪽) 라고 하여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주장의 근거를 단순히 민족주의적 인식에 기반한 것으로 몰아 한국이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이러한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은 일본의 민족주의 개념을 추종한 결과로 보인다. 일본 의 민족주의는 침략을 정당화 시키는 이론인데 반하여 한국의 민족주의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대항이론이었다는 점을 간과하는 것이다. 이점에서 박유하와 배성은 민족주의 개념마저 일본을 추종 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 42 -
라고 하여 일본의 2005년 다케시마의 날 제정이 충분한 배경과 당연한 이유 아래 이 루어진 정당한 행위 라고 치켜세우고 있다. 아울러 그는 시마네 현에서 벌어지고 있 는 현상을 일본 정부의 미온적, 어떤 의미에서는 평화적 방식에서 찾고 있다. 여기 에서 일본은 평화적인데 반하여 한국은 폭력적이라는 박유하 특유의 사고방식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63) 이처럼 박유하는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을 옹호하는 전형적인 부일행위 를 드러내 고 있다.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부정하고 있는 일본 극우 세력이 그의 글을 읽는다 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필시 일본 극우 세력은 박유하는 진정한 일본인이다. 라고 탄복할 것이다.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라는 박유하의 인식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한국 의 독도 수호의지를 이익을 지키기 위한 행위 로 폄하하면서 심지어 한국이 평화를 무너트리며 전쟁을 유도하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침략을 일삼고도 반성하지 않는 일 본 정부를 두둔하면서도 자신의 모국인 한국을 비난하고 있다. (18) 한국 정부는 독도문제로 시끄럽던 2005년 봄, 한일관계보다 독도의 영유권 수호가 더 중 요하다고 말했다. 독도 수호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한국-우리의 이익을 지키자는 얘기이다. 즉 평화보다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불화를 감수하겠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64) 이와 같이 한국의 독도 수호 의지를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평화를 훼손하는 욕망 이라고 폄하하고 있는 박유하는 (19) 울릉도에서 그들(한일 양국민들은: 글쓴이) 은 어떻게 공존하고 있었을까. (중략) 이러한 상황이야말로 바로 근대 이전, 즉 국민국가로서의 경계가 아직 불확실했던 시대의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65) 라고 하여 일본인의 울릉도와 독도의 어로 행위를 공존이라고 호도하면서 그 불법성 을 감추는 술수를 구사하고 있다. 일본인들의 불법행위 조차 공존 으로 포장한 박유하가 진정으로 독도와 관련하여 하고 싶은 말은 다음에서 여실히 드러나듯이, 독도 공유 이다. (20) 차라리 독도를 양국 공동영역으로 하면 어떨까. (중략) 전쟁을 하면서까지, 즉 평화를 훼 손하면서까지 지킬 가치가 있는 영토란 없다. (중략) 그런 의미에서도 독도를 어느 한쪽이 차지하면서 또다시 수 십년 혹은 더 먼 후대에까지 불화의 불씨를 남겨 놓는 것보다는 서로 양보하면서 공유하는 편이 훨씬 나을 수 있다. 66) 63) 위의 책, 181-182쪽. 64) 위의 책, 183쪽. 65) 위의 책, 185쪽. 66) 위의 책, 1890-191쪽. - 43 -
여기에서 한국의 영토를 지키고 회복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며 일제와 전쟁을 한 독 립투쟁가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독도는 일제가 본토를 침략하기 직전 약탈한 우리 영토의 상징이다. 독도가 우리 영토인 이상, 독도는 오히려 평화를 지키기 위한 최전 선이다.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라는 주장은 곧 침략하겠다는 의지로밖에 받아들일 수없다. 67) 박유하는 평화를 훼손하면서까지 지킬 가치가 있는 영토란 없다. 라고 강조하지 만, 이는 영토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안중근과 같은 독립투쟁가에 대한 모욕을 넘어 독립투쟁가들의 힘으로 국권을 회복한 대한민국의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하는 행 위이자 국권에 대한 도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에게 독립투쟁가들은 일제가 말하는 불령선인( 不 逞 鮮 人 ) 인 것이다. 결국 일본군위안부를 일본군인에 몸을 파는 존재. 라고 규정한 그의 잘못된 역사인식은 독도에도 반영되어 독도를 일본과 나누어 갖자는 독도 공유 주장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박유하의 독도 공유 주장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법적 책임을 회피 하기 위해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 구상을 주도한 와다 하루키( 和 田 春 樹 ) 동경대 명예교수 등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2008년 8월 29일 국회본관 귀빈식당 3층에서 열린 독도문제 해결 어떻게 할 것인가 에서 발표된 와다 하루키의 다음과 같은 독도 공유 주장에서 엿볼 수 있다. 한국인 측에서는 그 해(2005년: 글쓴이) 중반 세종대학교 교수 박유하 씨가 저서 화해를 위 해서 (뿌리와 이파리) 를 저술, 한일 역사논쟁을 검토한 후에 독도를 한일 공동영역, 공동영 유로 하는 해결책을 제안했다. 이 책이 일본어로 번역되어 2006년 11월에 일본에서 출판되자 아사히신문 의 와카미야 씨가 12월 25일 칼럼에서 거론하며 섬을 평화우호의 섬 으로 하자 는 꿈을 재차 말했다. 이 컬럼에서는 같은 해 11월에 일본어로 출판된 현대송 도쿄대학 준교 수의 저서 영토 내셔널리즘의 탄생-- 독도/다케시마문제의 정치학( 領 土 ナシィナリズの 誕 生 -- 獨 島 / 竹 島 問 題 の 政 治 學 ) (미네르바 서방) 도 함께 거론되었다. 현대송 씨의 저서는 이 문제의 본격적인 학문적 연구이며, 해결책으로는 독도=다케시마를 한일 간의 회색지대로 삼 아 공존의 길을 모색 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현대송 씨의 서적은 마이니치 신문사의 아시아 태평양상 특별상을 수상했고 박유하 씨의 책이 아사히신문사의 오사라기 지로( 大 佛 次 郞 ) 논단 상을 수상한 것은 일본인 속에 두 사람의 제언이 공감을 불렀다는 것을 보여준다. 68) 여기에서 박유하와 현대송 등이 한국의 대표적인 독도공유를 주장자들이라는 점과, 67) 최근 일본 아베정권은 2015년 9월 19일 전쟁법안이라고 할 수 있는, 평화헌법 9조를 위반한 안보 법안 을 통과시켰다. 배준성은 독도를 일본에 빼앗기는 경우는 국제사법재판소의 판정과 전쟁 두 2 지 방법이 있는데 전자는 한국이 응하지 않으면 실현될 가능성이 없고, 후자는 평화헌법 아래서는 불 가능하고 설사 평화헌법이 개정된다고 하더라도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은 거의 없다. (배성준, 위의 논 문, 206쪽) 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일제는 한국을 병탄하기 전에 동양평화를 주장하면서 한국을 장 악해 들어간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이제 일본은 언제든지 한국을 침략할 수 있는 법적 체계를 갖추 었다. 과거처럼 한국을 병탄하기 위한 첫 번째 조치로 독도를 침탈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 다. 박유하와 배성준의 주장은 100년 전 일진회의 그것과 같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68) 바다와 경제 국회포럼 아시아 평화와 번영 포롬, 독도문제 해결 어떻게 할 것인가, 2008, 24-25 쪽. - 44 -
독도 공유 주장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는 일본 인사들이 이른바 친한파 일본지식인 이 라는 점도 확인된다. 무엇보다 그가 일본 언론을 대표하는 아사히신문사가 주는 상을 받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69) 이와 같은 일본의 독도 공유 주장은 1963년 1월 자민당 부총재 오노 반보쿠( 大 野 伴 睦 ) 으로부터 시작되어 2005년 6월 쓰다주쿠대학( 津 田 塾 大 學 ) 교수 다카사키 소지 ( 高 崎 宗 司 ), 2005년 9월 세종대 교수 박유하, 2006년 11월 전 도쿄대학 교수이자 현 국민대 교수 현대송, 2006년 11월 아이치가투인 대학 교수 세리타 겐타로( 芹 田 健 太 郎 ), 2008년 8월 동경대 명예교수 와다 하루키, 2009년 2월 성균관대 동아시아역 사연구소 교수 이신철, 2009년 4월 전 아사히신문 논설 주관 현 동서대 석좌교수 와 카미야 요시부미로 이어지고 있다. 70) 그러나 나이토는 특히 다케시마 편입과 식민지지배는 무관다라고 하는 일본의 주 장은 법적으로 옳다. 라는 세리타 겐타로의 주장에 대해 태정관지령 과 칙령 41 호 를 거론하면서 일본의 독도 공유 주장자들의 다케시마 방기 와 양도 라는 용어는 소유를 단념한다는 의미로 소유하고 있지 않은 것에 사용할 수 없으므로 독도 공유를 주장하기 전에 역사공부를 하라. 라고 일본의 공유 주장을 비판하였다. 71) 이러한 나이토의 지적은 박유하에게도 해당할 것이다. 72)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박유하의 속마음은 독도 공유가 아니라, 오히려 독도를 일본으로 넘겨주는 것이다. 73) 69) 아사히신문 논설 주간 와카미야 요시부미( 若 宮 啓 文 ) 는 2009년 4월 1일 동북아역사재단의 지원으로 서울에서 개최된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세계NGO역사포럼 에서 양국 간에 가장 어려운 현안은 다케시마 독도 영유권 분쟁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1905년 일본 정부에 의한 다케시마 편입이 한 국 병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나 그렇다고 해서 한국의 주장이 100% 옳다고는 보기 어렵다. 즉 냉정히 생각해 보면 희다고도 검다고도 할 수 없는 회색 영역이 상 당 부분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일본의 영유권 주장을 지금도 영토 확장의 야욕을 갖고 있어 서 그런 것처럼 과도하게 반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한 감정적인 반발이 일본의 내셔널리 즘을 자극하여 일본 국민이 거의 신경 쓰지 않던 다케시마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 나는 가능하다면 이 섬을 한일의 공동 영유로 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면 21세기적인 역사의 화해와 영토분쟁을 극복하는 선진적인 사례로서 세계에 자랑할 수 있다. 그리고 양국이 이 섬이 세계유산으로 등록될 수 있도록 공동 신청하면 어떨까 하는 꿈을 가져보기도 한 다. (독도수호대, 독도 한일공동영유론-일본에 의한 일본을 위한 일본의 주장 (http://www.tokdo.kr/detail.php?number=921&thread=11r03r01) 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이 박유하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점은 우연의 일치일까? 또한 와카미야 요시부미가 근무한 아사히 신문사의 오사라기 지로( 大 佛 次 郞 ) 논단상을 받았다는 무슨 의미인가? 박유하 스스로 답할 문제이다. 70) 독도수호대, 위와 같음. 71) 內 藤 正 中 朴 炳 涉, 위의 책, 258-259쪽. 72) 하지만 박유하는 이미 일본의 영웅으로 부상하였다. 아사히신문의 한 독자는 박유하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지난해 한국에서 출판돼 전 위안부 분들의 명예를 훼손했다. 며 제소 고소당한 박유하 의 제국의 위안부 일본어판이 드디어 출간됐다. 감명 받았다고 쓰기도 망설여질 정도로 준엄함으로 가득한 이 책은 이후로 쓰여질 모든 위안부 에 관한 말에서, 공감하든 반발하든 부동의 항성처럼 흔 들리지 않는 기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이 정도까지 고독한 책을 읽은 적이 없다고 느꼈다. 아니 이 정도까지 고독한 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저자의 마음을 생각하며 말을 잃 을 수밖에 없었다. ( 한국일보, 2014년 11월 27일, 아사히신문,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서평 게재 (http://www.hankookilbo.com/v/eef4cd72da6e49a7a160e3c223618ab1) ). 여기에서 위안부문제를 독도로 옮겨 생각해보면, 일본인들은 박유하를 다케시마의 영웅 나카이 요 자부로 로 여기지 않을까? 과연 이런 판단은 기우일까? 73) 백유하와 같은 논리를 펴고 있는 배성준의 독도관련 주장의 최종 기착점은 독도를 우정의 섬 으로 만들자는 와카미야 요시부미 아시아신문 논설주간의 목도리도 들어봄 직하다. (배성준, 위의 논문, - 45 -
다만 차선책으로 독도 공유를 주장하는 데 불과한 것이다. 와다 하루키도 속으로 독 도는 일본 고유영토지만 현실적으로 돌려받을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으므로 독도 탈환을 위한 차선책으로 공유를 주창한 것이다. 독도를 일본과 공유한다는 것은 독도가 한국의 영토가 아님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 이라는 점에서 이들 독도 공유 주장자들의 최종 목표를 읽을 수 있다. 74) 박유하가 대 마도와 조어도( 釣 魚 島, 센카쿠열도( 尖 閣 列 島 ) ) 공유 주장을 하였다면 일본에서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 곱씹어 생각해볼 일이다. 필시 일본 극우 세력이 그를 가만히 두지 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오늘도 한국에서 대학교수로 더욱 이름을 날리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4. 나오는 말 이상에서 글쓴이는 시마네현 고시 40호 와 박유하 독도 주장의 실체를 살펴보았 다. 한일양국 정부와 독도 관련 학자들은 이 고시가 공포되었다는 전제 아래 자국령 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 고시가 실제로 공포되었다는 증거는 지금까지 어디 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고시 공포 여부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한 이는 이종학이다. 그는 가와카미 겐 죠가 나카노도리도의 편입 증거로 동경부 고시 제58호 를 자신의 연구서에 제시하고 있는데 반하여 독도 편입을 고시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과, 세방신문에 시마네현 고시 40호 가 게재되어 있다는 신용하의 주장에 의문을 품고서 그 고시의 실체를 추적하였다. 그 결과, 세방신문은 존재하지 않은 유령신문일 뿐만 아니라, 시마네현 고시 40 호 는 시마네현 현청에 회람 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는 채로 유일본으로 보존되어 있 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종학은 시마네현 고시 40호 는 공포되지 않았거나 공포 되었다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동안의 독도연구는 완전 히 잘못된 전제 위에 이루어진 것이고, 일제가 국제법에 따라 독도를 편입했다는 일 본 정부의 주장은 사실 상 용도 폐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여러 독도전문가들이 일본의 파상공격에 맞서 독도가 한국령임을 학 206쪽) 라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독도 공유 이다. 74) 특히 성균관대 동아사아연사연구소 교수 이신철은 2009년 일본 메이지 대학에서 열린 독도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하여 라는 심포지엄에서 박유하의 독도 공유 주장에 공감을 표하며 독도공유론에 대해 타당성이나 실현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만 고집하여 평가하지 말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논의 를 펼쳐나가기 위한 출발점으로 삼자. 라고 하면서 심지어 만약에 한국이 제국주의 길을 걷고, 일본 이 식민지화의 길을 걸었다면 근대법에 의해 한국 정부가 쓰시마를 (한국) 영토로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라고 주장하였다고 한다(독도수호대, 독도 한일공동영유론-일본에 의한 일본을 위한 일본의 주 장 ( http://www.tokdo.kr/detail.php?number=921&thread=11r03r01). - 46 -
문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진력하고 있는 상황에서 2005년 박유하는 독도를 일본과 공 유하자는 주장을 내놓았다. 그의 독도 공유 주장은 철저하게 독도가 일본 고유 영토 라는 확신에서 나온 것이다. 특히 그는 와다 하루키와 같은 일본 연구자들과 아이디 어를 공유하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더 과격하게 독도를 한국이 강점하고 있다는 인식 에서 한국의 독도영유권을 부정하고 있다. 그는 독도를 포함한 한국 영토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독립전쟁을 수행한 수많은 독립투쟁가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대한 민국의 존재와 국권을 부정하는 사상적 확신범 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러한 박유하의 주장을 일본인 이외에 배성준 현대승 이신철 등 한국인 학 자들이 되풀이 하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무엇보다 독도 공유를 주장하 는 한국인들은 식민지근대화론자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글쓴이는 판단하고 있다. 일 본군위안부의 강제성을 부정하는 안병직과 같은 인사들이 바로 식민지근대화론을 이 끌고 있고, 이들이 일본의 영향 하에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따라서 박유하의 독도 공유 주장은 한 개인의 일탈행위가 아니라, 식민사관에 경도 된 사상활동 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이병도 등의 식민사학은 국권회복 60주년인 2005년 박유하의 화해를 위하여 로 일층 확대되어 국권회복 70주년인 2015년의 동북아역사지도 로 그 본질을 드려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채호 등의 민족주의사학이 이제 시대적 요청이 되었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 할 것이다. 근대 한국이 일제의 지배를 받기 전부터 식민사학은 독버섯처럼 한국의 역사를 마비시켰다. 독도문제의 올바른 인식은 바로 식민사학과의 싸움을 의미하는 것이다. - 4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