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불교계의 항일운동 연구 동향과 과제 한 동 민(중앙대학교) Ⅰ. 머리말 Ⅱ. 불교계 항일운동 연구 동향 1. 시기별 연구 동향 2. 주제별 연구 동향 Ⅲ. 과제와 전망 <차 례> 1. 친일문제와 관련한 논의 2. 식민지 이전 불교계의 동향 3. 항일운동의 외연 확대: 문화운동 과 전통수호운동 Ⅳ. 맺음말 <국문요약>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항일운동의 연구는 이 시기 종교계의 항일운동 자체가 그렇듯이 전반적으로 부진하다. 이는 종교인( 宗 敎 人 ) 개인의 항일과 활동은 자유롭더라도 교단( 敎 團 )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권력과 일정한 타협에 의해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교단의 조직적 인 대응과 참여가 상대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항일운동의 규모와 강도가 상대적 으로 미약하였던 것이다. 특히 불교는 출세간( 出 世 間 )의 경향으로 세속의 일에 무관심한 편이어서 사회 적 참여와 활동이 상대적으로 미약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승려들을 중심으로 한 항일운동은 주목의 대상이 될 수밖 에 없고 더욱 의미있는 사건이 되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의 분수령을 이루었던 역사적 사건은 1919년 3 1운동이 다. 당시 이 운동을 계획했던 33인의 민족대표 가운데 불교계를 대표하여 한용운
226 선문화연구 창간호 ( 韓 龍 雲 )과 백용성( 白 龍 城 )이 참여하였다. 따라서 불교계의 항일운동은 한용운과 백용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한용운은 중앙학림( 中 央 學 林 )의 젊은 승려 들을 중심으로 운동을 조직하였고, 이들 젊은 승려들은 이후 항일운동의 주력이 되었다. 따라서 불교계의 항일운동에 대한 연구는 3 1운동과 한용운 및 백용성에 대한 연구에 집중되어 있다. 3 1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되는 과정과 이를 주도했던 개인들에 대한 연구가 필 요하고, 이후 일제의 조선불교를 통제했던 법률이었던 사찰령( 寺 刹 令 ) 철폐운동 등에 대한 연관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의병전쟁 당시 불교계의 항일운동과 불교계 학교의 애국계몽 활동에 대하여 주 목할 필요가 있다. 불교계의 항일운동은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포괄하 는 日 帝 에 대한 일체의 저항운동이다. 따라서 국내 승려들의 사회주의 운동과 더불 어 해외 특히 중국에서 활동했던 승려들에 대한 연구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동시에 일제에 대한 일체의 저항은 의혈투쟁, 대중투쟁, 무장투쟁을 비롯하여 문화운동 및 국학운동 등도 포함한다. 따라서 사찰령 철폐운동을 비롯하여 불교 전통을 수호하는 운동과 자주적 종단건설의 노력도 넓은 범주에서 불교계 항일 운동에 포함될 수 있다. 따라서 항일운동의 폭을 다양하게 파악함으로써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역동적 인 모습을 복원해야 할 것이다. 주제어: 한용운, 백용성, 3 1운동, 사찰령, 중앙학림 Ⅰ. 머리말 일제강점기 종교계의 항일운동( 抗 日 運 動 ) 1) 은 여타 부문운동에 비해 1) 불교계의 항일운동 이라는 주제는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포괄하 는 日 帝 에 대한 일체의 저항운동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즉 일제에 저항하는 운동에 대하여 항일민족운동, 독립운동, 민족해방투쟁, 항일투쟁 등의 용어 가 혼재되어 사용되고 있다. 항일민족운동은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여 국권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항일운동 연구 동향과 과제 / 한동민 227 연구 성과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이는 종교인 개인의 항일과 활동 은 자유롭더라도 교단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권력과 일정한 타협에 의해 유지되었던 측면에서 교단적인 대응과 참여가 상대적으로 어려웠 다는 점과 연결된다. 2) 이는 특히 불교계 가 갖는 특수한 현실적 고통과 맥을 같이한다. 동학 과 천도교 또는 서학으로서 천주교 및 개신교가 갖는 교리의 단순명료 함과 교단의 결속적 단일함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숭유 억불의 지난한 종교적 탄압으로 교단조차 없었다. 각 사찰과 승려들은 천차만별의 조건과 처지에서 단일한 교단적 결속이 없는 현실이었다. 이 에 교단적 차원에서 일관된 행동과 집단적 실천을 찾기는 불가능한 일이 다. 더욱이 1911년 사찰령 이후 조선총독부에 의해 통제된 불교계는 1941년 조계종 성립 이전까지 자주적 교단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불교계 항일운동에 대한 연구의 일천함과 편중현상은 1911년 사찰령 에 의해 한국불교가 조선총독의 지배하에 편입됨으로써 일본불교화 되 었다는 점과 일제강점기 한국불교가 교단적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일제 의 불교침탈에 대항하지 못함으로써 민족의식의 고취나 독립운동에 참 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3) 결국 여타의 종교도 마찬가지지만 불교계 교단 차원에서 일제에 저항하지 못한 까닭에 항일운동은 개인적인 차원 에서 진행되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을 회복하려고 한 일체의 저항운동이며, 독립운동은 주권의 회복을 통해 자 주독립을 쟁취하고자 한 운동이고, 민족해방운동(투쟁)은 외세로부터 해방 과 동시에 일체의 착취와 억압에 대한 저항과 계급모순에서의 해방을 위한 투쟁이며, 항일운동은 민족주의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일제에 대한 일체의 저항운동으로 정리하고 있다. 金 昌 洙, 日 帝 下 韓 國 民 族 運 動 의 歷 史 的 位 相,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3(1999) 2) 趙 東 杰, 獨 立 運 動 史 硏 究 의 回 顧 와 展 望, 정신문화연구 1985년 여름호, 29쪽 3) 류성민, 일제 강점기의 한국 종교와 민족주의, 韓 國 宗 敎 24(1999), 206-207쪽
228 선문화연구 창간호 한편 이는 불교를 탄압하였던 조선왕조를 무너뜨린 일제와의 야합과 사회참여에 대한 무관심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4) 이러한 특수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항일운동 은 의식있는 승려들에 의해 지속되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김창수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불교의 동향을 개항 이래 일제의 종 교침략에 대한 한국불교의 정통성 수호운동이 민족의 구국운동 차원에 서 전개되었던 시기와 3 1운동 이후 항일민족 독립운동을 전개한 시기 로 나누고, 문화운동으로서의 종교투쟁을 후자에 해당하는 시기로 보고 있다. 이러한 문화운동으로서 종교투쟁에 대한 연구를 한국불교에 대한 일본불교의 침투라는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견해와 불교의 동향을 저항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긍정적인 견해로 나눌 수 있다고 보았다. 5) 단순한 구분법이기는 하지만 명쾌하기는 하다. 일제에 대한 항일운동은 의혈투쟁, 대중투쟁, 무장투쟁 등 직접적인 행동을 수반한 항쟁을 비롯하여 문화운동과 국학운동 등 간접적인 투쟁 도 포함될 수 있다. 따라서 사찰령 철폐운동을 비롯하여 불교전통을 수 호하는 운동과 자주적 종단건설의 노력도 넓은 범주에서 불교계 항일운 동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기존의 불교계의 항일운동 연구는 3 1운동과 상해임시정부 참여에 집 중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曹 溪 宗 史 : 근현대편 가 불교 자주화 와 종단건립운동 이라는 큰 틀에서 항일운동을 다루면서 불교계 의 대표적 항일운동으로 3 1운동과 임시정부 참여를 들고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러나 김광식은 불교계의 독립운동의 범주를 임제종운동, 3 1운동, 전통불교 수호 및 발전, 식민지불교의 극복 노력 등으로 서술함으로써 4) 서경수, 일제의 불교정책-사찰령을 중심으로, 불교학보 19(1982) 5) 김창수, 문화운동 연구 국내독립운동에 관한 연구의 현단계와 과제, 한 민족독립운동사 12(국사편찬위원회, 1993), 321-322쪽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항일운동 연구 동향과 과제 / 한동민 229 기존의 항일운동의 범주를 확장하고 있다. 6) 이는 3 1운동 이외에 임제종운동, 전통불교수호운동, 식민지불교 극 복노력을 항일운동으로 서술함으로써 불교계 항일운동의 내용과 외연 을 확장하는 셈이다. 7) 한국독립운동의 큰 흐름 속에서 불교계의 항일운동만을 별개의 주제 로 설정하여 다룬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또 불교계의 항일운동 을 부조적으로 과대 해석함으로써 독립운동 전체상을 왜곡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계가 갖는 역사성과 다른 종교와의 특수성, 특히 세속세계와 유리된 환경 속에서 독립운동 전선에 동참하여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Ⅱ. 불교계 항일운동 연구 동향 1. 시기별 연구 동향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항일운동에 대하여 독립적인 연구성과가 나타 나기 시작하는 것은 1960년대 이후라 할 수 있다. 시기별로 보면 해방 이후 1960년대에는 일제시기 활동했던 인물들이 특정 사건이나 독립운동에 대한 回 想 記 및 지나온 삶에 대한 回 顧 錄 등 이 잡지 및 신문에 단편적으로 실렸다. 8) 6) 김광식, 일제하 불교계 독립운동의 전개와 성격, 불교평론 8호(2001 가을) 7) 예를 들면 백용성의 독립운동의 경우 임제종운동, 3 1운동의 참여, 전통불교 의 수호 및 발전, 식민지 불교의 극복 등의 항목으로 서술하고 있다. 김광식, 白 龍 城 의 獨 立 運 動, 대각사상 창간호(1998) 8) 김법린, 3.1운동과 불교, 新 天 地 1-2(1946. 3); 김정설, 고 한용운선생 추 도문, 新 生 1(1946. 3); 최범술, 己 未 運 動 과 獨 立 宣 言 書, 新 生 1(1946. 3); 장도환, 만해 한용운 선생, 開 闢 74(1946)
230 선문화연구 창간호 이는 직접 겪었던 경험담을 통해 사료에서 얻기 힘든 생동감 넘치는 귀중한 역사적 사건들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과 인물에 대한 회상기 및 회고록조차 해방 후 곧바로 나오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는 이데올로기적 갈등과 국가건설론의 이견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이어 지는 정치적 격변에 따른 사회적 분위기 탓이었다. 전쟁과 전후복구기라 할 수 있는 1950년대는 생존의 문제가 우선이었던 까닭에 학문의 암흑기 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에 조지훈에 의해서 기존의 회상기 혹은 회 고류 형식에서 한 단계 진전된 형태의 한용운론이 나왔을 따름이다. 9) 이 러한 시대적 상황에 따라 일제강점기 항일적인 사건과 인물에 대한 회상 기조차 1960년대 중반 이후 산발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불교계 잡지들이 주도한 이러한 회상기들은 나름으로 의미있는 작업이었다. 10) 특히 대한불교 가 한국불교항일투쟁회고 라는 이름으로 김법린을 시 작으로 김상호 민동선 최범술 등 독립운동 주체들의 회고기를 실었다. 11) 그러나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의 주인공들에 의한 본격적인 회고록이 나오는 것은 1970년대 이후의 일이다. 12) 물론 1980년대 이후에도 3 1절 혹은 광복절을 맞이하면서 잡지 혹은 신문들이 항일운동 관계자들을 찾 9) 조지훈, 한국의 민족주의자 한용운론, 思 潮 1-5(1958) 10) 閔 東 宣, 한용운 선생 회상기, 불교계 22호(1969. 5. 30); 金 觀 鎬, 三 一 운 동과 卍 海 선생, 불교 3(1970. 8); 이용조, 만해선생의 회억, 불교 4호 (1970. 9); 박영희, 광복절에 생각한다, 법륜 174(1973. 8) 11) 金 法 麟, 韓 國 佛 敎 의 抗 日 鬪 爭 記 - 曹 溪 寺 는 이렇게 創 建 됐다-, 대한불교 (1963. 8. 1); 金 尙 昊, 3 1운동에서 8 15광복까지, 대한불교 54호(1964. 8. 23); 李 龍 祚, 내가 아는 만자당 사건, 대한불교 55호(1964. 8. 30); 김법린, 동래읍 기미만세사건, 대한불교 (1964. 9. 6); 閔 東 宣, 왜정말기 해인사 사건, 대한불교 58호(1964. 9. 20); 崔 凡 述, 3 1운동과 해인사 1-3, 대한 불교 (1969. 2. 16, 2. 23, 3. 9) 12) 최범술, 청춘은 아름다워라, 국제신보 (1975. 1. 25~4. 5); 이종익, 한국 불교 風 雨 半 世 紀, 週 刊 宗 敎 (1979. 6. 27~10. 3); 吳 濟 峰, 나의 回 顧 錄 (물 레출판사, 대구시, 1988)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항일운동 연구 동향과 과제 / 한동민 231 아 그 의미를 되새기는 기사들을 쓰곤 하였다. 13)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의 화신처럼 각인되었던 만해 한용운에 대한 뜨 거운 관심은 해방 직후 그에 대한 회상기가 보여주듯 일찍부터 시작되 었다. 이에 따라서 불교계의 어떤 인물보다 연구성과가 많은 편이고, 연 구 영역도 독립운동을 비롯하여 문학 등 다양한 편이다. 이에 한용운에 대한 연구서가 일찍부터 출판되었고, 평전 등이 간행되었다. 14) 그리고 이러한 한용운에 대한 연구는 독립운동이나 불교학보다는 문학이 압도 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15) 불교계의 항일운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3 1운동 50주년을 맞이하 여 동아일보에서 주관한 50주년기념논문집에 실린 안계현의 3 1운동 과 불교계 라 할 수 있다. 16) 그리고 1970년대에 들어와서도 불교계 항일 운동의 주제는 3 1운동과 이와 관련한 인물들에 대한 연구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7) 이러한 연구주제의 편중현상은 1990년대 이후 지금까지도 극복되지 못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1990년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 동안의 연구업적에 기초하여 불교계 인사들에 대한 간단한 평전이 가능할 정도 로 연구의 폭이 넓어졌다는 점이다. 18) 13) 朴 暎 熙, 조선민중은 노예의 삶을 거부했다, 불교신문 (1989. 3. 1); 梵 山 김법린 선생, 대중불교 1992년 6월호 14) 인권환 박노준, 韓 龍 雲 硏 究 (통문관, 1960) 15) 김광식, 한용운 불교 연구의 회고와 전망, 만해학보 8(2004) 16) 안계현, 3 1운동과 불교계, 3.1운동 50주년기념논문집 (1969) 17) 안병직, 만해 한용운의 독립사상, 창작과 비평 5-4(1970); 이영자, 白 龍 城 硏 究 序 說, 佛 敎 思 想 6(1973); 서경수, 개화사상가와 불교, 숭산 박길 진박사 화갑기념 한국불교사상사 (1975); 이현종, 3 1운동 당시의 불교계, 월간 法 輪 (1978. 3); 김창수, 한국불교 3 1운동의 의의, 월간 法 輪 (1978. 3); 조종현, 식민지치하의 한국불교, 월간 法 輪 (1978. 5); 안병직, 한 용운, 한국근대사상가선집 (한길사, 1979) 18) 이정, 한국불교인명사전 (불교시대사, 1993); 불교신문사, 한국불교인물사
232 선문화연구 창간호 근현대 불교사 연구는 연구자의 절대적 부족이 문제이지만 나름대로 폭발적인 연구성과를 보이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근대불교 연구가 일제에 의한 불교침투와 식민지배를 위한 불교정책 등의 구조적 문제의 해명에 보다 많은 연구가 집중되고 있다. 1990년대 이래 2000년대에 걸 쳐 다양한 연구성과가 제출되고 있음은 고무적인 일이다. 19) 한편 불교계의 항일운동을 대표하는 한용운과 백용성에 대한 기념사 업을 통한 연구 영역과 내용의 확장을 꼽을 수 있다. 80년대 이후 90년 대 중반 이후 활성화되고 있는 기념사업회 등의 활동을 꼽을 수 있다. 만해 한용운 연구는 1980년 김관호 전보삼 등이 중심이 되어 신구문 화사에서 만해사상연구회 를 결성하고 만해사상연구 제1집을 간행함 으로써 학문적 축적을 시작하였다. 이후 1991년 한계전을 중심으로 만 해학회가 결성되어 만해학보 를 발간하고 있고, 1999년부터 만해축전 이 지속적으로 개최됨에 따라 만해 한용운과 관련한 연구활동이 비약적 인 탄력을 받고 있다. 더욱이 백담사 만해마을이 만들어져 만해학회와 만해 의상연구원을 지원하고 만해학술총서 및 계간 유심 지를 발행하 고 만해의상연구, 만해학보, 불교평론 등을 지원하고 있다. 백용성 스님에 대한 연구를 하는 대각사상연구원이 있다. 大 覺 寺 를 상사 (민족사, 1990); 선원빈, 한국근대불교의 산맥 17인 큰스님 (법보신문 사, 1992); 불교전기문화연구소, 현대고승인물평전 (불교영상, 1994); 윤청 광, 고승열전-작은 솔씨가 낙락장송되나니- (언어문화사, 1995) 19) 佛 敎 史 學 會 編, 近 代 韓 國 佛 敎 史 論 ( 民 族 社, 1992); 鄭 珖 鎬, 近 代 韓 日 佛 敎 關 係 史 硏 究 (인하대학교출판부, 1994); 김광식, 韓 國 近 代 佛 敎 史 硏 究 (민족사, 1996); 김경집, 한국불교 개화기 교단사 연구 (동국대 박사학위논문, 1997); 김경집, 한국근대불교사 (경서원, 1998); 김광식, 韓 國 近 代 佛 敎 의 現 實 認 識 (민족사, 1998); 박희승, 이제, 승려의 입성을 許 함이 어떨는지요 (들녘, 1999); 김광식, 근현대불교의 재조명 (민족사, 2000); 김순석, 朝 鮮 總 督 府 의 佛 敎 政 策 과 佛 敎 界 의 對 應 (고려대 박사학위논문, 2001); 김광식, 새불교운 동의 전개 (도피안사, 2002); 김순석,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과 불교계의 대응 (경인문화사, 2003)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항일운동 연구 동향과 과제 / 한동민 233 건립하여 大 覺 思 想 을 통해 大 覺 敎 를 조직하여 불교 대중운동을 전개한 스님의 뜻에 따라 1996년에 재단법인 大 覺 會 를 설립하고 대각사상연구 원을 설치함으로써 연구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특히 1998년 이래로 매년 大 覺 思 想 이라는 학술지를 간행함으로써 용성 스님에 대한 연구를 심화하고 있다. 근래 주목되는 것은 2005년 운암 김성숙기념사업회가 조직되어 활동 을 시작하였는 바, 많은 연구영역과 내용이 기대되는 바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현양 기념사업은 보다 객관적 연구태도와 방법 론에 입각하여 종합적인 연구를 지속한다면 기존의 미진한 연구영역을 확대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은 2001년 임혜봉에 의해 일제하 불교계의 항일 운동 이라는 단행본의 출간은 이 분야의 연구가 나름으로 궤도에 오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20) 불교계의 일제하 항일운동에 관해서는 다 소의 논문과 단편적인 글들이 있으나 단행본으로 정리할 만큼의 분량은 되지 않는다고 보는 기존의 입장을 전복했다. 1995년부터 모아온 자료 를 정리하여 편찬한 책으로 이미 殉 國 지에 1년에 걸쳐 연재한 항일불 교론 을 바탕으로 일제하 불교계의 항일운동에 대한 기술을 시도했다. 서술범위는 의병전쟁기에서 해방이 될 때까지 불교계의 항일운동을 시 기별 주제별로 정리하고 있다. 또한 항일인물과 광복 이후의 독립유공 자 현황을 첨부함으로써 불교계 항일인물에 대하여 일목요연한 정리를 할 수 있게 하였다. 한편 근대 불교계의 변화와 항일운동 그리고 주요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주체들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과 증언채록이 이루어지지 못한 현실 이다. 10년만 먼저 시작했어도 보다 풍부한 내용과 인물에 대한 증언 채 록이 가능했을 법한 아쉬움을 갖게 되는 것이 구술사(Oral History)이다. 20) 임혜봉, 일제하 불교계의 항일운동 (민족사, 2001)
234 선문화연구 창간호 예를 들면 운암 김성숙에 대한 증언 채록은 그의 생존에 이루어졌다. 21) 그나마 선우도량 한국불교근현대사연구회에서 불교계 원로 22명의 증 언을 통해 근대불교사를 복원하고자 한 시도 역시 2000년대 역사방법 론의 추세를 반영한 것으로 유의미한 일이다. 22) 이는 선우도량 한국불 교근현대사연구회에서 신문으로 본 한국불교근현대사 1집 상 하권 (1995년), 2집 상 하권(1999년), 그리고 일제시대 불교정책과 현황: 총 독부관보 불교관계 자료집 상 하권(2001년)의 후속작업이었다. 선우도 량의 이러한 자료집 발간은 1990년대 말 이후 근현대 불교사 연구에 탄 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톡톡히 한 귀중한 사업이었다. 기록을 남기지 않았던 선승들의 전통과 한국 근현대사의 특수성으로 인해 문자자료가 없는 현실에서 구술사는 또 다른 의미있는 자료가 될 것 이다. 그럼에도 구술사는 개인적인 열의와 노력으로는 엄두를 내기 힘든 일이다. 따라서 불교계의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계획과 노력이 요구 되는 상황이고, 향후 지속적인 승려들의 구술사가 산출될 것으로 본다. 2. 주제별 연구 동향 1) 대한제국기 불교계의 항일운동 (1) 의병전쟁과 불교계 1876년 개항 이래 일본의 존재는 조선에 대하여 개화와 독립의 옹호 자 이자 제국주의적 침략자 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다. 23) 따라서 당 시 친일과 항일의 경계선은 분명하지 않았고, 그 구분이 명료할 수 없었 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양면적 태도는 1894년 청일전쟁과 1895년 명성 21) 면담 이정식, 편집해설 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1988) 22) 선우도량 한국불교근현대사연구회, 22인의 증언을 통해 본 근현대 불교사 (선우도량출판부, 2002) 23) 許 東 賢, 近 代 韓 日 關 係 史 硏 究 (국학자료원, 2000)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항일운동 연구 동향과 과제 / 한동민 235 왕후 시해를 계기로 급격하게 침략적 형태로 인식되면서 의병투쟁이 전 개되었다. 이후 1905년 소위 을사보호조약 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면서 일본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자의 모습을 제대로 인식하면 서 의병투쟁이 들불처럼 번져갔다. 이러한 일제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연장선상에서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과 고종황제 폐위 및 군대해산은 의병투쟁을 전국적 규모의 의병전쟁으로 확대시켰다. 의병전쟁의 전국적 확산은 소수의 병력으로 집중과 전개라는 유격전 을 통한 투쟁으로 산속에 위치한 사찰은 중요한 이용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日 本 軍 守 備 隊 는 산중의 사찰이 의병들의 근거지 내지 유용한 이용물이 되는 것을 염려하면서 사찰에 대한 放 火 를 통해 의병과 승려 들의 연결을 막고자 했다. 따라서 의병전쟁기 불교계의 항일운동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은 형편이다. 이 시기 불교계의 항일에 대한 내용을 단편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정도의 초기 연구단계라 할 수 있다. 24) 박희승은 의병전 쟁기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 여러 승려들의 이름을 파악하고 정리함으로 써 의병전쟁기 불교계의 항일운동에 대한 연구의 단초를 제시하였다. 김광식은 유인석 노응규 최익현 민종식 김동신 민용호의병진 호좌의병 진, 전북 창의동맹, 양주의병 등에 승려가 참여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임혜봉 역시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불교계 인사들의 의병투쟁에 참여하고 있음을 밝혀내고 있다. (2) 국채보상운동 1907년 2월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에게 빚진 1,300만 24) 박희승, 불교계와 의병전쟁, 이제, 승려의 입성을 許 함이 어떨런지요 (들 녘, 1999); 김광식, 불교계의 광복운동, 불교저널 창간호(1999); 임혜봉, 의병항쟁기의 불교계의 항일운동, 일제하 불교계의 항일운동 (민족사, 2001)
236 선문화연구 창간호 원의 외채를 국민의 힘으로 보상하자는 취지에서 전개된 범국민적인 모 금운동이었다. 국채를 상환함으로써 국권을 회복하고자 한 것으로 2천 만 국민이 석 달만 담배를 끊어 그 돈을 모으면 1,300만원의 국채를 갚 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취지가 당시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 을 통해 알려지면서 전국 각처의 국민들이 단연회 단연동맹 등을 만들 어 참여하였다. 이에 서울의 國 債 報 償 期 成 會 를 비롯하여 국채보상운동 을 추진하기 위한 國 債 報 償 會 가 전국적으로 설립되면서 각계 각층의 국 민들이 참여하는 전국민적인 모금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전국 각계 각층 에서 벌어졌던 국채보상운동에는 불교계도 동참하였다. 불교계의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전모를 알려주는 체계적인 연구는 현 재 없는 형편이다. 그러나 불교계의 국채보상운동은 동대문 밖 佛 敎 硏 究 會 에서 1907년 3 월 첫 일요일 오후 1시에 통상회( 通 常 會 )를 열고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결의를 하였다. 불교연구회는 국내 각 사찰에 알려 일반 승려가 힘닿는 대로 의연금을 거출하도록 총무 이보담과 評 議 長 홍월초 및 유지 선사 150여 명이 결의하였다. 이는 불교계 전체가 동참하는 양상으로 기존의 불교연구회의 친일적 성격과 다른 면모를 보이는 것이고 불교계 전체의 사안으로 발전했던 의미있는 운동이었다. 25) 그럼에도 각 사찰의 동참 내용과 의연금의 규모는 상대적으로 미약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이 당시 자료의 미비인지 아니면 불교계 전 체의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내는데 실패한 것인지는 좀 더 규명이 필 요하다. 당시 1907년 4월 9일 건봉사( 乾 鳳 寺 ) 봉명학교( 鳳 鳴 學 校 )와 만일회 염 불계( 萬 日 會 念 佛 契 )의 이름으로 국채보상의연금으로 모두 146원 76전을 거출하였다. 이들 승려의 이름을 대한매일신보에 게재하면서 불교계의 25) 한동민, 한말 일제 강점기 龍 珠 寺 의 변화, 수원문화사연구 5(2002)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항일운동 연구 동향과 과제 / 한동민 237 국채보상운동도 불이 붙었다. 이후 4월 28일 경기도 장단 화장사( 華 藏 寺 )가 61원 90전, 5월 9일 용주 사 12원, 5월 24일 유점사( 楡 岾 寺 ) 유신학교( 楡 新 學 校 ) 55원 50전, 6월 18 일 해인사 100원, 7월 3일 범어사 63원 10전, 7월 25일 계룡산 신원사( 新 元 寺 ) 6원 등 국채보상의연금 광고가 대한매일신보에 지속적으로 게재 되었다. 이러한 국채보상운동은 이듬해인 1908년에도 이어져 1908년 3 월 6일 밀양 표충사( 表 忠 寺 ) 승려 39명이 국채보상금으로 30원을 거출한 것을 광고하고 있다. 임혜봉은 이러한 각 사찰의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신문자료를 정리함으로써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 상황임을 보여주고 있다. 26) 2) 임제종 운동 李 晦 光 이 주도한 圓 宗 을 일본 曹 洞 宗 과 연합하려는 사건, 소위 조동 종 맹약 에 반대하여 일어났던 임제종 운동은 한국불교의 保 宗 運 動 으 로서 한국불교를 일본 종파불교에 팔아먹는 賣 宗 행위를 차단하고 한국 불교의 전통을 지키려 했던 자주적 운동이라는 평가이다. 27) 이러한 임제종 운동은 이후 3 1운동과 불교청년회운동 및 禪 學 院 설 립으로 연결됨으로써 일제강점기 한국불교의 자주적 흐름의 전통을 잇 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1911년 영 호남의 불교청년회가 조선불교청 년회의 연원임을 밝히며 한국불교수호 운동의 연속성을 밝히고 있다. 28) 또한 한국의 정통적인 불교기관임을 자임하며 영호남 지방에서 시작된 임제종 운동의 극치가 1912년 5월 26일 인사동의 臨 濟 宗 中 央 布 敎 堂 건 립과 운영임을 밝히고 있다. 당시 개교식에는 수천명의 군중이 참여한 26) 임혜봉, 국채보상운동과 불교계, 일제하 불교계의 항일운동 (민족사, 2001) 27) 김광식, 1910년대 불교계의 曹 洞 宗 盟 約 과 臨 濟 宗 運 動, 한국민족운동사 연구 12(1995) 28) 김광식, 朝 鮮 佛 敎 靑 年 會 의 史 的 考 察, 한국불교학 19(1994)
238 선문화연구 창간호 가운데 개최되어 그 운동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개교식에 서 포교당의 主 務 였던 한용운은 趣 旨 說 明 을 하였고, 백용성은 開 敎 師 長 즉 포교 책임자로 說 敎 를 담당하였음을 밝혀 한용운과 백용성의 관 계를 규명하고 있다. 29) 그러나 임제종 운동의 개별적 주체들의 참여 동기와 내용 및 임제종 에 대한 인식 등 총체적인 내용을 알려주는 것은 없는 실정이다. 당시 임제종 운동의 주도세력으로 일컬어졌던 朴 漢 永 韓 龍 雲 陳 震 應 金 鍾 來 金 擎 雲 金 鶴 山 등의 인적 연결 과정과 구성의 내용 및 임제 종 운동의 궁극적 목적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들 구 성원들의 향후 관계망 구성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보아야 임제종 운동의 성격이 보다 명료해질 것으로 보인다. 3) 법정사 항일봉기 불교계 항일운동에서 개별 사찰차원의 독립운동 연구는 미약한 편이 다. 채상식의 범어사의 사회운동에 대한 연구 이래 지역적 차원의 연결 고리를 갖는 사회운동 차원에서의 연구는 부진한 형편이다. 이후 사찰 단위의 연구는 법정사 승려들의 투쟁, 금산사의 사격, 화엄사 본산승격 운동 그리고 근대불교계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봉선사 그리고 용주사의 변화에 대한 고찰이 있을 뿐이다. 투쟁의 강도와 내용, 그리고 탄압의 정도에서 제주도 법정사의 무장 봉기는 제주도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는 1910년대 가장 전투적이고 치열한 무장항쟁의 사례이자 일제의 폭력적 진압의 정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즉 1918년 10월 한라산 중턱의 法 井 寺 를 근거지로 둔 봉기대 약 400 여 명이 서귀포 중문리로 내려가 주재소를 불태우고 일본 관헌을 납치 한 사건이다. 불교계 승려와 보천교도 등이 관여한 이 사건은 한일합방 29) 김광식, 白 龍 城 의 獨 立 運 動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항일운동 연구 동향과 과제 / 한동민 239 이후 최초의 조직적인 반일 무장봉기였다. 이에 일제는 제주도에 대규 모 군대를 파견하여 일대 소탕전을 벌여 조직원 수백 명을 체포하였다. 법정사 사건의 주체에 대한 해석에서 불교계 승려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사건과 보천교도들의 항일봉기라는 것으로 나뉘고 있다. 임혜봉은 승려 주도로 이루어진 제주도의 첫 항일투쟁으로 보면서 방동화( 方 東 華 ) 스님 을 비롯한 김연일 강창규 등 13명의 승려들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30) 이에 비해 안후상은 보천교 24방주 조직이 깊이 관여한 것으로 파악함 으로써 보천교도들의 역할과 의미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31) 따라서 법정사 항일투쟁에 대한 연구는 독특한 위상을 지니는 것이었 다. 이에 종교계의 항일운동 차원을 넘어 제주도를 대표하는 항일운동 이라는 시각에서 연구가 진전되었다. 즉 제주도 및 중문청년회의소 차 원에서 학술적 연구가 진행되었다. 32) 결국 항쟁 주체의 성격을 어떻게 파악하는가가 쟁점이지만 법정사 결집의 이유와 봉기의 원인과 목적 그 리고 봉기 이후 제주도 항일운동에 끼친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광식은 운동이 법정사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진 점을 강 30) 임혜봉, 제주도 승려들의 무장봉기, 불교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4) 31) 안후상, 무오년 제주 법정사 항일항쟁 연구, 종교학연구 15(1996); 안후 상, 보천교와 물산장려운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한국민족운동과 종 교 (국학자료원, 1998) 32) 김봉옥, 법정사 항일운동의 재조명, 제주도사연구 4(1995); 임혜봉, 제 주 법정사 스님들의 항일투쟁, 중문청년회의소 창립20주년, 해방50주년 기념학술토론회자료집 (1995); 안후상, 무오년 제주 법정사 항일무장 봉기 연구, 중문청년회의소 창립20주년, 해방50주년 기념학술토론회자료집 (1995); 박찬식, 1918년 중문지역 항일운동, 제주도 99(1996); 박찬식, 법 정사 항일운동의 역사적 성격, 제주도 연구 22(2002); 조성윤, 일제하 제 주도의 종교상황과 법정사 항일운동, 제주도 연구 22(2002); 김창민, 법 정사 항일운동 가담자와 운동의 성격, 제주도 연구 22(2002); 김정인, 법 정사 항일투쟁의 민족운동사적 위상, 제주도 연구 22(2002)
240 선문화연구 창간호 조하면서 주도세력 및 항쟁의 원인을 좀 더 객관적인 시각에서 고찰하 고 있다. 33) 4) 3 1운동 일제강점기는 시기에 따라 약간씩 다른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 서 항일의 내용도 시기에 따라 그 심급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정세 의 변화를 고려한 항일운동사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다. 그러나 운동의 고조와 퇴조를 이해하는 분수령적 사건이 전민족의 항쟁이었던 3 1운동 이라 할 수 있다. 3 1운동은 전국 각 지역 각 계층이 참여한 운동이었다. 따라서 당시 불교계도 다양한 만세시위운동을 펼쳤다. 이에 불교계의 만세시위활동- 참여계기, 참여시기, 참여방법, 참여내용- 등이 부각될 수 있다. 동시에 3 1운동 이후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많은 사람들이 참 여했을 때 불교계의 인사들의 활동이 연구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일상적인 식민지 상황에서 항일의 내용은 돌출적이지 않은 형 태로 지속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불교계에서는 일제에 의한 불교 계의 관리와 통제라는 틀이었던 寺 刹 令 에 대한 저항, 사찰령 철폐운동 등도 불교계의 항일운동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불교계의 항일운동 가운데 상대적으로 가장 많은 연구성과를 낸 분야 가 3 1운동과 관련된 것이다. 불교계의 3 1운동에 관한 연구는 3 1운동의 발발과 전개 및 주도 세 력 등에 대한 연구라 할 수 있다. 김순석은 불교계의 3 1운동 연구는 세 가지 방향에서 진행되었다고 정리하고 있다. 34) 첫째는 불교계가 주도한 시위운동과 불교계 인사들이 참여한 항일운동에 관한 연구, 둘째 민족 대표 33인으로 참여하였던 韓 龍 雲 과 白 龍 城 에 대한 개별적 인물연구, 33) 김광식, 법정사 항일운동의 재인식,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5(한국독립운 동사연구소, 2005) 34) 김순석, 3 1운동기 불교계의 동향,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9(2001), 8쪽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항일운동 연구 동향과 과제 / 한동민 241 셋째 기미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의 기초를 둘러싸고 崔 南 善 전담설과 한용운 수정설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불교계의 3 1운동이라는 용어의 범위는 승려가 중심이 되어 만세시위 를 주도하였거나 당시 불교계에서 운영하던 중앙학림과 지방학림에서 수학하던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사찰 또는 장터 등 많은 사람들이 운집 한 곳에서 전개되었다. 35) 안계현, 삼일운동과 불교계의 동향 이후 불교계의 3 1운동 관련 연 구 동향은 운동의 참여과정과 그 주동적인 인물인 만해 한용운에 대한 연구가 압도적이다. 36) 한용운의 주도적 역할과 백용성의 참여에 따른 불교계의 참여는 中 央 學 林 승려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더욱이 중앙 학림 승려들이 3 1운동과 함께 관련 사찰로 돌아가 만세시위를 조직함 으로써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불교계는 만해 한용운과 더불어 白 龍 城 이 참여 하였기 때문에 백용성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다. 37) 35) 안계현, 三 一 運 動 과 佛 敎 界 (동아일보사, 1969); 김동윤, 日 帝 下 佛 敎 界 의 救 國 運 動 -3 1운동의 지방 확산과정을 중심으로-, 경주사학 2(1983); 채 상식, 한말, 일제시기 梵 魚 寺 의 사회운동, 한국문화연구 4(부산대 한국 문화연구소, 1991); 김창수, 日 帝 下 佛 敎 界 의 抗 日 民 族 運 動, 가산 이지관스 님 화갑기념논총 한국불교문화사상사 하(1992); 김소진, 大 韓 僧 侶 聯 合 會 宣 言 書 와 佛 敎 界 의 獨 立 運 動, 원우논총 13(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총학 생회, 1995) 36) 한용운 관련 연구서(문학 제외)만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인권환 박노준, 韓 龍 雲 硏 究 (통문관, 1960); 송욱, 전편해설 님의 침묵 (과학사, 1974); 임 중빈, 한용운 일대기 (정음사, 1974); 고은, 韓 龍 雲 評 傳 (민음사, 1975); 만 해사상연구회, 韓 龍 雲 思 想 硏 究 (민족사, 1980); 박걸순, 한용운의 생애와 독립투쟁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2); 박철희, 한용운 (서강대출판부, 1992); 최동호, 한용운, 혁명적 의지와 시적 사랑 (건국대출판부, 1996); 고 명수, 민족의 청년 한용운-나의 꽃밭에 님의 꽃이 피었습니다- (한길사, 2000); 김광식, 만해 한용운 평전-첫키스로 만해를 만난다- (장승, 2004); 최동호, 한용운, 사랑과 혁명의 아우라 (건국대출판부, 2001)
242 선문화연구 창간호 그럼에도 중앙학림을 중심으로 한 불교학생들의 만세 참여와 조직체 계에 대한 보다 진전된 연구가 필요하다. 기존의 연구는 만해 한용운의 연결과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중앙학림의 자생적 조직과 주체 적 역량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또한 3 1운동 직후 중앙학림 내에 설 치된 한국민단본부( 韓 國 民 團 本 部 )의 존재와 활동에 대한 연구가 병행되 어야 한다. 한국민단본부는 승려 백초월( 白 初 月 )을 중심으로 중앙학림 출신 승려 수십 명이 결성한 항일비밀결사로서 기관지 혁신공보( 革 新 公 報 ) 를 발행하면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였다. 민단본부는 상해 임시정부와 만주 등지에 부원( 部 員 )을 파견하여 국외독립운동과의 연결 을 꾀했고, 이들이 결국 만세시위의 주체였으며 향후 불교계의 대표적 인 항일세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신상완, 金 章 允 김법린, 정남용, 송 세호 등 3 1운동 이후 일제강점기 이들의 삶의 행태와 실천 등에 대한 개별적 연구와 동시에 각 지방 만세운동의 진원지 역할을 했던 개별 사 찰에 대한 연구도 미진한 상태라 할 수 있다. 38) 상대적으로 불교계 3 1운동 연구에서 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의 기초 자에 대한 논란은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다. 즉 기존까지 통설은 김법린 의 회고와 이갑성의 증언 및 김관호의 기록 등을 통해 만해 한용운이 최 남선의 독립선언서에 불만을 품고 공약삼장을 追 書 한 것으로 이해되어 37) 이영자, 白 龍 城 硏 究 序 說, 佛 敎 思 想 6(1973); 한보광, 白 龍 城 禪 師 硏 究 (감로당, 1981); 한보광, 龍 城 禪 師 의 譯 經 事 業 이 갖는 歷 史 的 意 義, 석림 26(1993); 한보광, 용성선사의 불교개혁론, 회당학보 2(1993); 光 德, 龍 城 禪 師 의 새 불교운동, 새로운 정신문화의 창조와 불교 (1994); 김광식, 1926년 불교계의 대처식육론과 백용성의 건백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1(1997); 김광식, 白 龍 城 의 獨 立 運 動, 대각사상 창간호(1998); 김광식, 용성 (민족사, 1999) 38) 김동윤, 日 帝 下 佛 敎 界 의 救 國 運 動 -3 1운동의 지방 확산과정을 중심으 로-, 경주사학 2(1983); 채상식, 한말, 일제시기 梵 魚 寺 의 사회운동, 한국문화연구 4(부산대 한국문화연구소, 1991)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항일운동 연구 동향과 과제 / 한동민 243 왔다. 그러나 조용만에 의해 한용운 추가설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한 이 후 최남선 전담설을 지지하는 연구들이 진행되었다. 39) 그 이유는 공약 삼장의 한용운 추가설은 만해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과장된 측면이 있다 는 점, 만해 한용운이 독립선언서를 보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일제의 재판기록은 독립선언서 기초자로 육당 최남선이 지속적인 취조의 대상 이었던 점을 들고 있다. 그러나 한용운 추가설은 최린의 집에서 만해 한용운이 독립선언서를 보았다는 점, 공약삼장의 최후의 1각까지, 최후의 1인까지 등의 내용이 한용운의 독립사상과 맥을 같이하는 점을 들었다. 특히 자유 비폭력 국 제주의를 표방한 공약삼장은 만해 한용운이 양계초의 자유사상에서 영 향을 받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40) 5) 임시정부의 참여 3 1운동 과정에서 검거를 피하고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됨에 따라 뜻있는 많은 사람들이 상해로 모여들었다. 이는 상해 임시정부와 연계되어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국독립운동사 연구에 있어 임시정부와 관련한 연구는 3 1운동 이후 많 은 사람들이 대거 참여하였다는 점과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결부된 이념 39) 조용만, 獨 立 宣 言 書 의 成 立 經 緯, 3 1운동 50주년 기념논집 (동아일보사, 1969); 신용하, 3 1 獨 立 運 動 勃 發 의 經 緯, 韓 國 近 代 史 論 (1977); 홍일식, 3 1 獨 立 宣 言 書 硏 究,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9); 박걸순, 3 1 獨 立 宣 言 書 公 約 三 章 起 草 者 를 둘러싼 논의,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8(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4) 40) 김상현, 韓 龍 雲 과 公 約 三 章, 東 國 史 學 19 20합집(1986); 김상현, 三 一 운동에서 韓 龍 雲 의 역할, 이기영박사고희기념논총 佛 敎 와 歷 史 (1991); 신 국주, 3 1독립선언, 한민족독립운동사 3(국사편찬위원회, 1988); 블라디 미르 티호노프, 기미독립선언서 공약삼장 집필자에 관한 고찰, 불교평 론 8(2001년 가을)
244 선문화연구 창간호 적 문제와 상승작용하면서 많은 연구 성과를 내고 있는 부문이다. 불교계 3 1운동을 주도하였던 젊은 승려들은 검거 선풍을 피하고 조 직적인 독립운동을 펼치기 위하여 중국으로의 망명을 택하였다. 이들은 국내 유력한 승려들을 중국으로 망명시켜 승려들의 조직과 승군을 조직 하고자 하였고, 국내에서 독립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동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인적 구성과 활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없는 실 정이지만 각 활동 단체와 관련한 연구에서 부분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정도이다. 즉 개별적으로 의친왕 李 堈 탈출모의 등 大 同 團 과 관련한 정남용, 백 초월 등의 활동, 41) 한국청년외교단과 관련한 이종욱의 활동, 대한독립애 국단( 大 韓 獨 立 愛 國 團 )과 관련한 신상완의 활동 등 불교계 인물들이 부분 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42) 대한독립애국단의 주된 활동으로는 임시정부의 선전활동과 재정 자 금의 조달, 그리고 국내의 조직망을 바탕으로 임시정부 연통부( 聯 通 府 ) 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따라서 상해 임시정부 특파원으로 활동했던 이들의 조직활동에 대한 연구가 있었다. 특히 3 1운동 이후 불교계 항일 운동에서 특기할 부분은 大 韓 僧 侶 聯 合 宣 言 書 와 義 勇 僧 軍 과 관련한 연 구이다. 일제강점기 불교계가 독자적으로 선언서를 발표하고 승려들에 의한 군대를 조직하고자 했다는 놀라운 사실은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이에 특히 대한승려연합선언서와 관련하여 그 기초자에 대한 이견이 제출되고 있는데, 그 기초자에 대하여 백초월과 이종욱, 그리고 신상완 으로 나뉘고 있다. 선언서의 기초자가 연륜과 당시 강사였던 점에서 당시 불교계의 지도 자급 대열에 위치한 백초월이라는 설, 43) 그리고 임시정부와 국내 군자 41) 신복룡, 大 同 團 實 記 (양영각, 1982) 42) 장석홍, 大 韓 獨 立 愛 國 團 硏 究,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한국독립운동사연 구소, 1987)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항일운동 연구 동향과 과제 / 한동민 245 금 모집 등의 상황을 추정하여 이종욱으로 보는 견해, 44) 당시 중앙학림 의 대표로 활약한 신상완으로 추정하는 입장이 있다. 45) 6) 불교청년운동과 자주적 종단 건설운동 1920년 6월 20일 청년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불교를 통한 민족의 각성 과 조선의 독립을 염원하며 조직되었다. 이는 당시 3 1운동 이후 운동의 고조기로 항일 민족해방의 염원과 사찰령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하였 다. 이러한 불교청년운동은 조직 당시부터 자랑스런 역사가 되었고, 만 해 한용운 연구와 더불어 일찍부터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46) 사찰령 이후 불교계 내외적 수난과 억압에 대항하고 불교를 바로잡기 위하여 조선불교청년회는 1921년 결성된 불교유신회와 연대하여 본사 주지들과 전면 대항하는 등 조선불교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 다. 불교유신회가 불교청년회의 별동대와 같은 존재였으며 불교청년회 의 조직과 구성 등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김광식은 1920년 창립되 어 1931년 조선불교청년총동맹으로 전환될 때까지 한국불교청년운동의 중심역할을 담당한 조선불교청년회의 창립과 활동, 침체와 재기의 일련 의 과정을 밝히고 있다. 47) 그는 불교청년운동의 연원이 임제종 운동이 었음을 밝히고 있으며, 이들이 정교분립의 원칙에 입각하여 사찰령철폐 운동과 통일기관 설립운동을 추진한 것은 불교계 발전의 일대사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43) 김순석, 3 1운동기 불교계의 동향,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9(2001); 김광 식, 백초월의 삶과 독립운동, 佛 敎 學 報 (2002) 44) 박희승, 일제강점기 상해임시정부와 이종욱의 항일운동 연구, 大 覺 思 想 5(2002) 45) 김소진, 大 韓 僧 侶 聯 合 會 宣 言 書 와 佛 敎 界 의 獨 立 運 動, 원우논총 13(숙명 여자대학교 대학원 총학생회, 1995) 46) 양주동, 만해의 생애와 불청 운동, 법륜 25호(1970. 8) 47) 김광식, 朝 鮮 佛 敎 靑 年 會 의 史 的 考 察, 韓 國 佛 敎 學 19(1994)
246 선문화연구 창간호 불청운동의 역사적 전개는 당시 청년운동의 흐름과 맥을 같이하면서 1931년 불교청년총동맹으로 전환되었다. 불교청년총동맹의 창립과 활동 그리고 불교청년총동맹의 이면단체로 비밀결사였던 卍 黨 의 결성과 해 소문제를 총동맹과의 관계를 통해 밝히고 있다. 48) 더욱이 만당은 政 敎 分 立 敎 政 分 立 大 衆 佛 敎 實 現 을 내세우며 전국의 불교청년운동을 주도 하였고, 일제말기까지 불교계가 지속적으로 항일운동을 펼쳤던 자부심 의 상징이기도 했다. 불교청년운동에 대한 김광식의 선구적 업적은 사실 禪 學 院 에 대한 연 구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49)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독특한 위상을 지녔던 선학원은 전통불교의 핵심적 부문이었던 선불교 전통의 복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선학원의 존재는 당대 불교학과 항일의 직 접적 접점을 이루고 있지는 않지만 조선의 불교전통의 고수라는 측면에 서 저항적 면모를 지닌 것이었고, 실상 항일지향적 승려들의 집합처가 되어다는 점이다. 따라서 선학원을 이끌었던 승려들의 연원이 멀리 임제종 운동에 연결 되고 있고, 이후 불교유신운동의 중핵적 역할을 담당하면서 만해 한용 운과 연관하여 지속적인 항일지향적 삶을 보여주면서 卍 黨 으로 이어진 다고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카테고리에서 불교청년회와 불교유 신회, 불교여자청년회 및 불교청년총동맹의 조직과 활동 및 만당에 대 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러한 불교청년운동적 지향, 항일적 요소는 전통불교의 수호와 자주 적 종단건설로 나타난다고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후 불교계의 總 本 山 건설운동과 禪 敎 兩 宗 僧 侶 大 會, 조선불교선교양종 宗 憲 의 실행 등 을 자주적 불교종단의 건설 노력으로, 항일의 또 다른 형태로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의 궁극적 총화가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에서 발간한 48) 김광식, 朝 鮮 佛 敎 靑 年 總 同 盟 과 卍 黨, 한국학보 80(1995. 9) 49) 김광식, 일제하 禪 學 院 의 운영과 성격, 한국독립운동사연구 8(1994)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항일운동 연구 동향과 과제 / 한동민 247 曹 溪 宗 史 : 근현대편 이라 할 수 있다. 50) 이는 친일불교적 시각에서 조선불교중앙교무원 및 총본산 조계종의 건립 등이 일제 총독부의 입김과 영향 아래 이루어진 비자주적 형태라 는 시각과는 차이를 갖는다. 51) 그러나 이는 동전의 양면에 대하여 어떤 부분을 보다 강조하느냐의 문제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총독부라는 정치권력에 의해 장악된 불교계 의 처지에서 교단의 수뇌부의 친일문제로 그 조직 전체를 친일로 보는 것도 문제지만 교단의 주요 인사가 행한 친일적 행태를 눈감는 것도 올 바른 태도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청년운동을 지향했던 그들이 이후 교단의 지도부를 구성 했을 때 나타나는 여러 양상과 태도 및 지향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요망 되는 바이다. 또한 잡지 佛 靑 의 발굴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당시 불교청년회 기 관지였던 佛 靑 에 대한 확보없이 불교청년회 운동의 온전한 복원은 어 려워 보인다. 또한 서울을 중심으로 한 불교청년운동 이외에 각지에서 조직된 불교청년회에 대한 지역적 연결과 지역운동 및 연대활동 등에 대한 종합적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불교계 중앙과 관계뿐 아니라 지역을 매개로 하는 지역운동, 청 년운동의 차원에서 진행되었던 다양한 행사와 운동을 올바로 파악하고 평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7) 불교계의 사회주의 운동 실상 독립운동사 연구는 해방과 함께 시작되었으나 남북분단과 한국 전쟁 이후 좌우 이데올로기적 대립에 따라 학문 연구는 많은 제약이 따 50)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曹 溪 宗 史 -근현대편- (2001) 51) 임혜봉, 친일불교론, 친일승려 108인 ; 김순석,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과 불교계의 대응
248 선문화연구 창간호 르게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남북간에는 역사인식과 역사주체에 대한 입 장을 달리하며 상호간에 연구영역과 내용 및 방법을 달리하게 되었다. 남쪽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을 비롯한 유물사관은 발붙이지 못하였고 북 쪽은 유물사관 이외의 방법론은 터부시되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도 남쪽은 상해임시정부를 비롯한 민족주의 운동을 주류로 파악하고 있는 반면, 북쪽에서는 항일무장투쟁 세력과 사회주의 운동을 주류로 파악함 으로써 남북간의 역사인식과 연구에도 분리가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남한에서 사회주의 운동세력에 대한 연구는 1980년대 이후에 나 가능하였던 주제였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분단의 이데올로기에 자유 스러운 외국에서 연구가 나온 것은 우리의 이념적 불구성을 잘 보여준 다고 할 것이다. 52) 이미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 과정에 대하여 관심을 지녔던 서구 지식 인들은 직접 중국 혁명과정에 참여하거나 중국 연안을 방문하여 그들의 실상을 보고 들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즉 Times 誌 가 뽑은 20세기 최 고의 책 100선에 들었던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 (1937)은 우 리가 1988년이 되어서야 읽을 수 있었던 책이다. 그동안 금서였기 때문 이다. 이는 광복 후 Song of Ariran 의 번역문이 잡지 신천지 에 연재되 다가 1946년 10월 갑자기 중단되었고, 1984년에 비로소 아리랑 초판이 서울에서 나왔던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53) 따라서 이러한 이념적 편견에 따라 불교계의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최 초의 연구는 1990년대 말 김남수에 의해서 시도되었다. 54) 그럼에도 불 52) 水 野 直 樹, 民 族 獨 立 運 動 史 の 人 物, 金 星 淑, 朝 鮮 民 族 運 動 史 硏 究 4(1987) 53) Edgar R. Snow, Red Star over China(Pub Group West, 1937); Kim San and Nym Wales, Song of Ariran-The Life of A Korean Rebel(New York: John Day Co., 1941, 개 정판 New York: Ramparts Press, 1972); 김산 님 웨일즈, 아리랑 (서울: 동녘, 1988) 54) 김남수, 일제시대 불교계의 사회주의 운동, 선우도량 13(1998)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항일운동 연구 동향과 과제 / 한동민 249 구하고 불교계의 사회주의 세력과 운동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불모지의 상태라 할 수 있다. 김남수는 1919년 3 1운동 이후 각지에서 청년회 조직이 만들어지고 1923년 시점부터 사회주의적 경향을 갖는 청년회 조직들이 속출하였고, 불교청년회 李 鍾 天, 불교여자청년회 禹 鳳 雲 등과 중국에서 활동했던 金 星 淑 을 비롯한 金 鳳 煥 車 應 俊 金 奎 河 등의 승려들이 펼친 항일운동의 활동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또한 초기사회주의자들로 잘 알려진 金 思 國 등이 불교계와 지속적으로 접촉하였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들에 대한 연관관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다. 현재 불교계 항일운동과 관련하여 한용운과 백용성 이후 가장 많은 관심과 연구성과가 제출되고 있는 인물이 운암 김성숙이다. 이미 1987 년 미즈노( 水 野 直 樹 )에 의해 김성숙의 중국에서의 활동에 대한 선구적 연구 성과가 나온 뒤, 이듬해 면담을 통한 몇 명의 항일혁명가의 이야기 를 담은 회상기가 출간되었고, 55) 다시 그와 함께 활약했던 김산(장지락) 의 이야기를 담은 님 웨일즈의 아리랑 이 국내에서 출간되었다. 이러 한 상황에서 김성숙에 대한 관심은 지속적으로 고조되었지만 구체적인 연구는 없었다. 1990년대 북경 유학생회에서의 주도적인 활동과 의열단 활동 및 중국 광주의 留 粤 한국혁명동지회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에서의 김성숙의 역 할 등은 민족협동전선운동 차원에서 연구되었다. 56) 북경의 조선유학생회에서 분화되었던 學 生 俱 樂 部 (이후 高 麗 留 學 生 會 로 개명)는 金 星 淑, 尹 宗 黙, 金 奉 煥, 沈 鏞 周 등이 이끌었다. 이들 가운데 김성숙, 김봉환, 윤종묵은 佛 敎 留 學 生 會 소속이었다. 고려유학생회 안의 불교학생회가 고려유학생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셈이다. 기존의 조 55) 면담 이정식, 편집해설 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1988) 56) 金 光 載, 在 中 抗 日 民 族 協 同 戰 線 運 動 과 金 星 淑,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3 (1996)
250 선문화연구 창간호 선유학생회가 민족주의적 색채의 단체였다면 고려유학생회는 사회주의 단체로 일반에게 인식되고 있었다. 고려유학생회는 新 光, 荒 野, 新 人 物, 學 苑, 詩 壇 등의 인쇄물을 발간하였다. 특히 황야 는 불교 학생회에서 주관하던 잡지였다. 불교학생회는 韓 鳳 莘 (전북 정읍, 1925년 1월 귀국), 金 鳳 秀 (1924년 가 을 귀국), 김성숙, 金 奎 河 (경남 의성군), 金 鼎 完 (강원도 유점사), 윤종묵 (강원도 신계사), 尹 錦 (경남 표충사, 1924년 여름 귀국), 김봉환(경남 동래 범어사), 車 應 俊 (경북 영천 은해사) 등 9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57) 따라서 김성숙 이외의 관련인물들에 대한 추적과 이들의 연고지 및 각 사찰과의 관계를 연구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사회주의자들의 불교관 혹은 1925년을 정점으로 하는 반종교 운동 과정에서 불교에 대한 태도와 인식 등도 주요한 연구대상이라 할 수 있다. Ⅲ. 과제와 전망 1. 친일문제와 관련한 논의 2002년 2월 28일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 모임 에서 친일 반민족행위 자 708명을 공개 발표하였다. 이에 불교계 인사로는 이회광 이종욱 허 영호 김태흡 권상로 등 5명이 지적되었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은 이들 가운데 일부는 독립유공자로 국가공훈 자라는 점이다. 즉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허영호,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받은 이종욱 등이다. 따라서 기존의 독립유공자에서 친일 57) 機 密 제123호(1925. 3. 20), 北 京 天 津 附 近 在 住 朝 鮮 人 狀 況 報 告 書 進 達 件, 朝 鮮 人 에 대한 施 政 關 係 雜 件 一 般 의 部 (3)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항일운동 연구 동향과 과제 / 한동민 251 파로 지목된 이들의 반발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더욱이 임혜봉은 건국 공로 대통령표창과 건국공로훈장 애족장을 받은 차상명, 국민훈장 무궁 화장을 받은 최범술, 대통령표창과 건국공로훈장 애족장의 박영희 등에 대한 친일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논란이 큰 대상은 지암 李 鍾 郁 과 효당 崔 凡 述 에 대한 평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승려로 알려져 있던 이종욱의 친일행적을 파헤쳐 일본제국주의와 야합해 조선불교 조계종 을 만든 장본인이자 불교계 최고의 친일 인물이라 평하고 있다. 또한 지 암 이종욱 연구회 가 설립돼 연구기금 지원과 장학회, 학술세미나 등을 통해 그 업적을 기리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암 이종욱에 대한 평가는 극단으로 갈리고 있다. 월정사 주 지이자 조계종 종무총장이었던 이종욱은 불교계의 1급 친일파였다는 시 각, 58) 겉으로 불교교단을 대표하여 사무를 보면서도 은밀하게 임시정부 와 연결하여 독립자금을 모집하여 보내주었다는 시각이다. 59) 즉 선항일 후친일의 전형적인 인물로 평가하는 입장과 독립운동을 위 한 위장친일로 평가하는 입장으로 나뉘어져 있는 셈이다. 결국 일제강 점기 항일운동의 어려움과 독립운동의 은밀한 진행에 대한 평가를 어떻 게 하는가에 달려 있다. 일제의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독립운동사 연구의 또 다른 한계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즉 검거되거나 투옥된 사 실이 없는 숱한 독립운동가들에 대하여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독립운동 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문제일 것이다. 그렇다고 친일의 객관적 정 황과 친일적 행태를 온전히 무시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58) 임혜봉, 친일불교론, 불교계 친일 108인 ; 이재형, 불교계 친일행적 어떻 게 볼 것인가, 불교평론 11 12호(2002 여름가을호) 59) 박희승, 智 庵 李 鍾 郁 硏 究 (동국대 불교대학원 석사논문, 2000); 박희승, 일 제강점기 상해임시정부와 이종욱의 항일운동 연구, 大 覺 思 想 5(2002)
252 선문화연구 창간호 더욱이 친일행위와 언설이 명백한 경우 그 행위의 비밀스런 의미를 찾는 것은 더욱 어려워 보인다. 결국 주어진 위치와 역할의 역사적 무게 는 행위 자체도 그렇지만 그 위치가 주는 상징성과 파급력에 있다는 점 에 있다. 이종욱의 위치와 역할은 조계종단 건설의 주역이자 종무총장 의 위상으로 당대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겉으로 친 일을 하면서 속으로 항일운동을 펼쳤다는 주장은 당대 혹은 해방 이후 명명백백하게 언명되지 않을 경우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효당 최범술의 친일에 대한 시비는 또 다른 문제로 보인 다. 효당 최범술과 관련한 친일의 평가는 항일운동의 지속성에 대한 평 가와 관련된다. 임혜봉은 최범술의 항일운동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친일 을 한 인물로 이해하고 있다. 이는 1937년 북지황군위문사 참여와 다솔 사 주지를 오랫동안 했다는 사실, 다솔사에서 일본승려들과 법회를 함 께 했던 사실들을 들고 있다. 60) 이에 대하여 김상현은 1937년 효당 스님의 북지황군위문사를 두고 중 일전쟁 전후 친일로 변절했다는 주장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즉 위문을 다녀온 지 몇 달 후인 1938년 10월 효당은 만당의 활동으로 인해 구속되었고, 1942년 9월 신채호문집 간행을 주도한 죄목으로 또다 시 구금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 만해 스님이 효당 스님을 위문하기 위해 구치소로 꽃다발을 들고갔다며 친일 승려가 황군 위문을 다녀온 직후 또 다시 구속될 수 있으며, 그 엄격하기로 유명한 만해 스님이 어 찌 친일 승려의 위문을 갈 수 있었겠냐고 반박하고 있다. 61) 한 개인의 삶에서 총체적 평가가 중요하다는 점에서 일정시기 일정한 역할을 부조적( 浮 彫 的 )으로 추출하여 연구하는 경향은 문제가 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사상 특기할만한 시기에 특별한 역할을 한 승 60) 임혜봉, 친일불교론 (1993); 임혜봉, 친일승려 108인 (2005) 61) 김상현, 효당 최범술의 독립운동, 동국사학 40(2004); 김상현, 曉 堂 崔 凡 述 의 生 涯 와 思 想, 曉 堂 崔 凡 述 스님의 生 涯 와 業 績 ( 曉 堂 思 想 硏 究 會, 2006)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항일운동 연구 동향과 과제 / 한동민 253 려들과 단체들의 활동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에 대한 연구조차 부족한 실정에서 친일의 표식을 붙임으로써 연구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은 문 제라 할 수 있다. 항일과 친일이라는 단선적 구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 지는 즈음이다. 개항 이후 일제 강점기를 1 개항기 및 도성해금에 따른 일본불교 따라 배우기, 2 1910년 합방과 1911년 사찰령에 의한 현실 추 수기, 3 1919년 3 1운동 등 독립운동과 친일의 길항기, 4 1931년 만주 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에 의한 친일화, 5 1941년 총동원체제에 의한 압살기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따라서 일본을 대상으로 항일, 친일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은 보다 정 치한 역사적 시기구분에 입각하여 불교계의 주체적 계기와 시기에 따른 친일의 내용과 문제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2. 식민지 이전 불교계의 동향 따라서 개항기 이후 개화 자강기에 보여주었던 일본불교에 대한 우호 적인 태도는 항일운동으로 범주화하기 어려운 측면이 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불교에 우호적인 입장이라 하여 무비판적으로 타매시하 는 연구 풍조는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의병전쟁과 동학농민전쟁 당시 불교계 인사들의 참여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동학농민전쟁의 외세에 대한 반침략적 태도와 항일운 동적 측면이 부각되기 때문이다. 또한 불교 승려들의 동학농민전쟁 참 여는 당시 시대적 상황과 불교계에 대한 자기 인식을 확인할 수 있기 때 문이다. 농민전쟁이 일어나기 1년전 동학교단이 주도한 충청도 보은집회와 호 남농민들이 주도한 전라도 원평집회에 참여한 승려집단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원평집회 당시 불갑사 승려 仁 源, 백양사 愚 葉, 선운사 水 演
254 선문화연구 창간호 등이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이들 세력은 이미 보은집회에 亘 葉 을 파견 하는 등 조직적인 양상을 띄고 있었다. 62) 특히 금강산 승려출신으로 보이는 徐 璋 玉 은 동학의 교조신원운동기 사회변혁 세력의 중심인물이었다. 서인주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 도 한 그는 호를 一 海 라 하였다. 승려였다가 1885년 이전에 동학교문에 입교하였고, 그 후 동학교문의 여러 법식을 마련하는 등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최시형의 제자인 서장옥은 전봉준과 김개남 손화중 등을 제자 로 두었는데, 이들은 최시형보다 서장옥의 능력이 위에 있다고 믿고 따 랐다. 이에 이들을 南 接 이라 부르게 되면서 최시형과 그를 따르는 제자 들을 北 接 이라 하였다. 이로써 동학의 남접 북접의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63) 서장옥은 갑오년 이전인 교조신원운동기부터 이미 최시형과는 다른 노선을 걸었으며 南 接 이란 이름으로 전봉준 등과 상당한 관계를 형성하 고 있었다. 1892년 7월 서장옥과 서병학은 최시형에게 교조신원을 구실 로 집회를 가질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자 다시 동년 10월에 여러 교인들과 합세하여 재차 집회를 요구하여 최시형으로 하여금 立 義 文 을 지어 각지로 보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으며 결국은 삼례집회의 소집령 을 내리게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은 서장옥과 서병학이 동학교단 내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암시해준다. 따라서 서장옥처럼 불 교 승려에서 동학교도로의 변신과정과 의미, 승려로써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한 인물들에 대한 추적 및 사찰들의 대응 등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 어야 할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의병투쟁기에 일본군에 의해 불타고 의병들에 의해 침 탈당했던 산간의 사찰들을 중심으로 진행된 관리청원의 문제에 대한 재 해석이 필요하다. 62) 이이화, 불교와 민족민중운동, 대중불교 88(1990. 3), 29쪽 63) 東 京 朝 日 新 聞 (1895. 5. 11)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항일운동 연구 동향과 과제 / 한동민 255 의병전쟁기 국권회복의 정당한 시대적 요구에도 불구하고 산간의 사 찰들은 무력에 의지한 무지막지한 침탈에서 우선적으로 생존의 길을 선 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생존의 갈림길에서 국권의 회복이라는 추상적 당위는 먼 곳에 있었고, 사찰의 방화와 침학은 구체적 무력으로 압박해왔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일본 종파불교에 의한 관리를 통해서 일본 각종의 말사를 표 방하며 표찰을 내걸어 일본군에 의한 사찰의 방화를 막고자 하였다. 물 론 당시 보다 발달한 것으로 이해하였던 일본 각 종파에 의한 관리를 통 하여 각 사찰의 발전을 도모한 측면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일제 에 대한 인식부족과 더불어 당시 불교계의 한계로 인식되는 측면이 강 하다. 즉 친일적인 부분으로 평가절하되면서 향후 불교계의 친일화의 계기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의병전쟁기 불교계의 항일투쟁에 대하여는 단편적으로 언급되고 있 는 정도이고 체계적인 연구는 전무한 상태라 할 수 있다. 물론 자료의 부족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전반적인 인식과 시각에 문제가 있다 고 할 수 있다. 승려 雨 蓮 이 각지 의병들과 연합하여 아관파천 중인 고 종황제를 환궁시키고자 노력했던 것 등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 내용들이 많기 때문이다. 둘째, 불교계 학교의 동향과 항일운동을 적극적으로 발굴해야 한다. 각 사찰의 보통학교, 지방학림의 학인들에 의해 3 1운동이 주도되었다. 대한제국기 불교계 사립학교가 일본불교의 영향 아래 건립되었다는 것 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일본 정토종의 영향 아래 명진학교가 생긴 이래 각지의 유력한 사찰에는 명진학교의 예를 따라 근대적인 학교가 건립되 었다. 따라서 한말 불교계 사립학교의 성격에 대한 이해를 좀더 능동적 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적어도 1907년 의병전쟁 이전의 상 황과 이후의 상황을 구분할 필요가 있으며, 이후 한일합방 이전까지 계 몽적 자강운동의 분위기에서 학교가 운영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내야 한
256 선문화연구 창간호 다. 이는 불교계 국채보상운동이 불교계 학교가 운영되던 곳에서 더욱 활발히 진행되었다는 사실과도 연결되는 것이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불교계 학교운영이 일본 종파불교의 영향 아래 설 립, 운영된 측면이 강조되었다. 각지의 불교계 사립학교에 일본인 교사 들이 채용되어 일어교육을 실시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907년 의병전쟁이 고조되면서 반일적인 분위기에서 일인 교사들의 상당수가 빠져나가면서 불교계 학교 운영은 소강상태에 빠졌다. 지방의 불교계 사립학교는 1908년 이후 새롭게 재편되는 양상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친일적 양상에서 자생적 운영원리에 따른 변화 등 한말 불교 계 학교 운영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이는 애국계몽 혹은 자강운동의 측면에서 각지에서 펼쳐진 민중야학과 관련하여 파악할 필요가 있고, 나아가 이후 불교계 학교의 학생들에 의하여 3 1운동에 참가하는 등의 연결고리가 규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대한제국기 일본 종파불교와 길항하면서 근대적 양상의 교육과 포교 등에서 변화의 양상은 외세에 의해 국권이 침탈당해가는 상황과 불교발전이라는 이중적 틀에서 불교계가 겪었던 일제에 대한 인 식의 동요와 연계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불교계 학교의 내용과 운영에 대한 분석을 통해 특히 1919년 3 1운동 당시 학림 등 청년승려들에 의해 만세시위가 조직되고 확산되었던 사실을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항일운동의 외연 확대: 문화운동과 전통수호운동 항일운동의 외연을 의혈투쟁, 무장투쟁, 대중투쟁으로 한정하는 것에 대한 문제이다. 이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전통불교 수호운동을 항일운 동의 범주로 포함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이미 1920년대 문화운동 에 대하여 긍정론과 부정론, 그리고 분리해석론이 있어 왔다. 문화운동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항일운동 연구 동향과 과제 / 한동민 257 은 교육 언론 예술 등 고유한 문화영역에서의 활동을 축으로 하여 기존 의 문화적 지배질서를 개혁하려는 운동으로 제한되지만, 넓은 의미에서 문화운동은 사상 의식 생활관습 규범 등의 영역에서 개혁을 지향하는 모든 운동을 포함하기에 농민의식계몽 노동교육 등 모든 부문운동 내의 문화활동은 물론 대중의 정치의식 각성을 위한 문화선전 선동까지도 포 함된다. 64) 독립운동에서 무장항쟁이 갖는 중요성과 위대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방법에 무장항쟁의 방법만 있는 것은 아 니다. 무장항쟁 외의 항쟁을 독립운동의 법주에서 탈각시키는 것은 우 리 스스로 우리의 역사를 경직화시키는 것이고, 한편으로 경도된 역사 인식을 갖게 하는 어리석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독립운동사 범주를 넓게 한다고 하여 독립운동사의 의미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독립운동으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전체 독립운동 사와의 관계 속에서 설명되고 위상을 정립할 수 있는 정확성 타당성이 있는가이다. 65)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전통불교의 수호와 자주적 종단건설 운동에 대한 적극적인 평가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1920년대 이후 불교청년들에 의 한 불교유신운동과 사찰령 철폐운동은 항일적 성격이 명확한 것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 전통강원의 복구 흐름과 계율강조 등의 전통불교 수 호운동이 갖는 유의미성을 찾는 작업이 보다 적극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전통불교에 대한 의미와 내용에 대한 구체적 함의에 대한 좀더 치밀한 논구가 선행되어야 하지만 전통불교 수호 의지와 노력 자 체가 일제에 항거하는 의미에서 진행된 측면을 찾을 수 있다. 64) 역사문제연구소 민족해방운동사 연구반, 민족해방운동사 쟁점과 과제 (역 사비평사, 1990), 443쪽 65) 윤선자, 문화운동 용어 어떻게 써야 하나, 독립운동사 용어, 무엇이 문제 인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5), 49쪽
258 선문화연구 창간호 따라서 교단적 차원의 조직적 대응이 없었고, 총독부를 비롯한 권력 에 의해 일정하게 견제 내지 견인되었던 상황에서 전통불교의 수호를 위해 노력했던 일련의 승려들에 대한 활동과 노력에 대한 적극적인 평 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4. 불교교단 내적 연구의 지양 특히 지역과 연계된 불교계의 동향과 지역운동과 결합된 항일운동을 연구해야 한다. 3.1운동의 경우에도 각 지방에서 펼쳐졌던 운동을 추적 해야 한다. 각 시군지들이 편찬되었고, 각 시군지에서 불교관련 항목 특히 항일 운동과 관련하여 사찰 및 승려 등 불교관련 자료와 서술에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이는 3 1운동에 대한 연구의 경우 한용운을 중심으로 한 중앙에서의 만세운동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각 지역에서 펼쳐졌 던 3 1운동에서 이루어졌던 각지의 승려들에 대한 활동을 지역과 연계 하여 연구해야 한다. 또한 불교청년회와 불교유신회 활동이 교단 내적인 역할과 역학관계 에만 국한되어 있다. 이들 단체의 대외활동에 대한 조명이 필요하다. 불 교청년회의 경우에도 중앙만의 조직이 아니라 해동불교회, 진주불교회, 평양불교청년회 등 지방단위에서 활동했던 인물과 내용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지역의 독자적인 불교회 조직 등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東 亞 佛 敎 會 같은 경우이다. 동아불교회는 경남 양 산군 通 度 寺 주지 鄭 在 華, 金 九 河, 曹 奉 承 외 40명 發 起 人 으로 설립이 계획되었다. 이는 중앙단위의 불청운동과 다른 양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동아불교회의 목적은 本 敎 를 경성에, 支 敎 를 지방에 설치하여 眞 理 敎 化 人 志 向 上 發 展 慈 善 普 及 衆 生 感 化 薦 導 를 위하여 점차 佛 敎 學 校 를 增 設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항일운동 연구 동향과 과제 / 한동민 259 하고 불교의 발전을 기약하고자 하였다. 불교학교 설립을 목표로 하였 던 동아불교회는 총독부의 간섭으로 효과적인 활동을 전개하지 못했지 만, 함경도 해동불교회, 진주불교회 등 지역단위의 불교회 활동에 대한 연구는 반드시 진행되어야 할 주제라 할 수 있다. 국내 뿐 아니라 만주와 중국 그리고 일본 등지에서의 각 운동과 연결 되어 활동했던 승려들의 항일활동이 조명되어야 한다. 이는 한국독립운 동사에서 중요한 계기이자 청년회운동, 신간회 운동, 조선어학회 사건 등에서 활동을 했던 불교계 인물들과 각 운동의 국면에서의 연계와 활 동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불교교단 내적인 연구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한국사의 맥락에 서의 연구라 할 수 있다. 5. 다양한 인물에 대한 연구 인물연구의 경우에도 만해 한용운과 백용성 등 대표적인 항일운동의 주체에 대한 연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는 각기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져서 꾸준한 연구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과 연 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물연구는 상당한 재력을 갖춘 사찰 또 는 문도회 등에서 주도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 연구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가져오고 있다. 일제강점기 불교계 항일운동에서 만해 한용운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 대적이었다. 따라서 한용운 연구가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 러나 만해 한용운 연구에서 역사적 연구 및 불교 연구보다 문학과 관련 한 연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詩 에 대한 연구가 90%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만해 한용운 연구에서 불교적 연구가 희박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 는데, 이를 조계종단과 태고종단간의 분쟁, 연구를 주도해야 할 조계종
260 선문화연구 창간호 단의 승려 결혼을 주장한 만해 한용운에 대한 거북함, 그리고 근현대 불 교연구자의 희소성을 꼽고 있다. 66) 따라서 한용운에 대한 연구는 문학, 불교, 역사 등 개별적 연구를 지 양하고 총체적 연구가 되어야 하며, 종교학, 탈근대성, 비교종교학, 사상 의 계보 등 연구 분야도 다양해져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백초월의 경우 김광식에 의해 구체적인 그의 삶에 대하여 상세히 밝 혀졌다고 할 수 있다. 후손 및 제자들에 대한 조사와 증언을 통하여 백초월의 생애에 대하 여 꼼꼼하게 재구성한 노력은 인물연구에 대한 하나의 전범을 보여주고 있다. 새롭게 이대영의 백초월스님 행장일부, 조영암의 구국당 백초 월 대선사 옥사 순국록(약기), 윤벽산의 故 白 初 月 스님 光 復 行 蹟 抄 (1985) 등을 발굴하였다. 그러나 낙서사건 및 一 心 敎 사건의 판결문을 확보하 지 못함으로써 일제말기까지 일제에 강력하게 저항했던 항일승려 백초 월의 총체적 운동에 대한 파악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67) 一 心 敎 를 조직 하여 활동했던 승려 백초월의 사상과 실천은 일제 강점기 불교계의 항 일운동의 인맥과 조직을 재구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아닐 수 없 다. 백초월은 朴 武 炳, 金 瀅 珹, 申 尙 玩, 姜 性 周, 金 陳 漢, 朴 得 雲, 朴 相 熙, 奉 京 鍾, 韓 慧 城, 金 命 秀, 趙 壽 宗, 金 明 基 등을 동지로 획득하였다. 따라 서 일제말기 한용운의 만당과 더불어 백초월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이는 동시에 백용성 스님의 大 覺 敎 와 상호 비교 연구될 수 있을 것이다. 66) 김광식, 한용운 불교 연구의 회고와 전망, 만해학보 8(2004) 67) 용산역 군용열차 낙서사건 및 일심교 사건에 대하여 법원 판결문은 아니지 만 경찰의 조사서류를 참조할 수 있다. 京 高 特 秘 제1128호, 朝 鮮 獨 立 을 目 的 으로 하는 一 心 敎 檢 擧 에 관한 건, 思 想 에 關 한 情 報 (12) (1940. 5. 4); 京 龍 高 秘 제3051호, 軍 隊 輸 送 列 車 不 穩 落 書 容 疑 者 送 局 後 의 動 靜 에 관한 건 (1940. 7. 5), 思 想 에 關 한 情 報 (12)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항일운동 연구 동향과 과제 / 한동민 261 실상 국내 항일운동으로 3 1운동이 연구되었지만 그 운동의 주역이었 던 백성욱, 백초월, 신상완 등 개별적 승려들의 활동에 대한 연구가 부 족한 실정이다. 동시에 국외에서 활동했던 인물들, 특히 김성숙을 비롯 하여 중국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한 김봉환, 차응준, 김규하 등에 대 한 연구가 필요하다. 앞으로 김성숙과 관련한 연구성과가 좀더 많은 내 용이 나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국내의 경우에도 3 1운동의 주축이었던 중앙학림의 세력들과 연결되 는 인맥과 불청운동 및 선학원운동, 교단자주화운동 등의 내적 동력을 파악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김법린, 최범술, 최영희, 박윤진 등 만당 에 참여했던 승려들의 움직임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인물 연구에서도 승려에게만 집중되어 있는 연구 경향을 극복해 야 한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 상황에서 승려로 출발하였다가 환속한 인 물들의 항일운동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동시에 신심이 돈독해 서 불교신자로 평가받는 인물들, 즉 재가불자들의 항일운동에 대한 논의 가 좀더 진행되어야 불교계 항일운동의 폭과 내용이 심화될 것이라 본다. 임혜봉의 불교계 항일운동 연구는 승려출신의 항일투사 김성숙, 열 렬한 민족주의자 최범술, 승려로 항일에 앞장선 김법린, 박영희 스 님의 항일투쟁 등 별도의 항목을 두어 4명 승려들의 항일운동을 특기 하고 있다. 또한 비구니 오상근 스님을 비롯하여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 을 살려내고 있다. 또한 부록으로 불교계 독립유공자 현황 을 싣고 있 다. 이에 따르면 불교계 독립유공자는 36명이 포상되어 있다. 앞으로 연 구결과에 따라 포상대상자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현 재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36명의 인물들에 대한 연구는 불교계 항일운동 의 주체로서 집중적인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다. 보다 적극적인 자료 발 굴과 이들 상호간의 연결고리 등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262 선문화연구 창간호 Ⅳ. 맺음말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항일운동의 연구는 이 시기 종교계의 항일운동 자체가 그렇듯이 전반적으로 부진한 편이다. 이는 종교인( 宗 敎 人 ) 개인 의 항일과 활동은 자유롭더라도 교단( 敎 團 )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권 력과 일정한 타협에 의해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교단의 조직적인 대응 과 참여가 상대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항일운동의 규모와 강도가 상대 적으로 미약하였던 것이다. 특히 불교는 출세간( 出 世 間 )의 경향으로 세 속의 일에 무관심한 편이어서 사회적 참여와 활동이 상대적으로 미약하 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승려들을 중심으로 한 항 일운동은 주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고 더욱 의미있는 사건이 되는 것 이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불교계의 역할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미진한 이 유를 김창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첫째, 불교계의 독립운동을 일제의 식민지 종교정책에 대한 저항의 일환으로 다루고 있는 것을 지 적하면서 이는 결과적으로 한국 불교계에 대한 일본 식민지 불교의 침 투라는 타율적 부정적 측면만을 강조하여 우리 불교의 자주적 측면을 매몰하는 것으로 보았다. 둘째, 한국불교의 움직임을 긍정적으로 평가함 으로써 사실 이상의 역할강조와 과대평가 내지 예찬론에 기울어져 있다 는 것이다. 셋째, 이 분야의 연구사는 과대평가되었다는 점과 자료의 부 족을 들고 있다. 넷째, 불교라는 종교적 성격이 지니는 출세간적 은둔적 인 경향 때문에 그 특수성 아래에서의 역사인식의 부족을 꼽고 있다. 68) 종교인 개인에 의한 공헌은 클지라도 교단적 차원에서는 일제권력과 타협을 통해서만 교단운영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교단적인 참여가 힘 68) 金 昌 洙, 日 帝 下 韓 國 民 族 運 動 의 歷 史 的 位 相,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3 (1999)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항일운동 연구 동향과 과제 / 한동민 263 들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종교투쟁에 대한 연구가 다른 분야에 비해 상 대적으로 늦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종교와 천도교의 경우 다른 종 교와 달리 민족적 성향과 독립운동으로 인하여 이에 대한 많은 연구 성 과물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계의 항일운동 연구는 여전히 미진한 상태라 할 수 있다. 이는 불교계의 항일운동의 참여의 정도에 따른 것이기도 하겠지만 연 구자의 부족도 일조하고 있다. 동시에 한국근현대사의 큰 흐름 속에서 불교사 연구, 특히 항일운동을 맥락지우고 연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함에도 이를 방기하고 있는 셈이다. 일제강점기의 이해에서 운동사적 역사연구와 역사이해에 대하여 문 제제기를 하고 있는 부류도 있다. 이는 일상적 삶의 내용에서 항일운동 등이 과도하게 해석되었다는 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해방투 쟁으로서 항일운동은 제국주의적 억압과 수탈에서 인간이 해방되고 천 부적인 자유에 대한 추구로서 지극히 정당한 삶의 지향이라 할 수 있다. 제국주의시대에서 反 帝 를 외치며 실천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존중 받아야 한다. 따라서 불교계의 항일운동은 붓다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실천하고 있다는 당대의 승려들의 인식과 같이 지극히 정당하다. 이러 한 항일운동에 대한 연구는 자료의 빈곤과 연구인력의 부족으로 구체적 실상을 파악하고 있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연구경향은 길희성은 여타 종교부문에도 해당하는 것이겠지만 우선 불교연구의 지향할 바를 지적하고 있다. 첫째, 편협한 실증주의적 불교사 연구의 극복이다. 사실이 지니는 의미와 더불어 연구의 목적과 의미를 성찰 그리고 다양한 관심과 문제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 불교연구자가 불교에만 관심을 가지면 안 되며 한국불교를 바 라보는 시각도 다양해져야 한다. 셋째, 비교불교사적 관점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넷째, 비판적 관점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69) 즉 비판적 관점과 의미없는 실증주의에 대한 극복과 다양한 관점과
264 선문화연구 창간호 비교사적 연구 방법을 주문하고 있다. 이는 현재도 유효한 지적이라 할 수 있다. 일제에 대한 일체의 저항은 의혈투쟁, 대중투쟁, 무장투쟁을 비롯하여 문화운동 및 국학운동 등도 포함된다. 따라서 사찰령 철폐운동을 비롯하여 불교전통을 수호하는 운 동과 자주적 종단건설의 노력도 넓은 범주에서 불교계 항일운동에 포함 될 수 있다. 따라서 항일운동의 폭을 다양하게 파악함으로써 일제강점 기 불교계의 역동적인 모습을 복원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1. 시대별 연구 현황 1960-70년대 조지훈, 한국의 민족주의자 한용운론, 思 潮 1-5, 1958. 서경수, 한국불교청년운동사개관, 대한불교 137호, 1966. 3. 27. 안계현, 3 1운동과 불교계, 3 1운동 50주년기념논문집, 1969. 안병직, 만해 한용운의 독립사상, 창작과 비평 5-4, 1970. 이영자, 白 龍 城 硏 究 序 說, 佛 敎 思 想 6, 1973. 서경수, 개화사상가와 불교, 숭산 박길진박사 화갑기념 한국불교사 상사, 1975. 정광호, 3 1운동과 불교계: 獨 立 運 動 과 佛 敎, 法 輪 85, 1976. 3. 이현종, 3 1운동 당시의 불교계, 월간 法 輪, 1978. 3. 김창수, 한국불교 3 1운동의 의의, 월간 法 輪, 1978. 3. 조종현, 식민지치하의 한국불교, 월간 法 輪, 1978. 5. 안병직, 한용운, 한국근대사상가선집, 한길사, 1979. 69) 길희성, 한국불교 특성론과 한국불교 연구의 방향, 한국종교연구 3(서강 대 종교연구소,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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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불교계의 항일운동 연구 동향과 과제 / 한동민 275 <Abstract> The Trend and Projects of Research on the Anti: Japanese Movement in the Buddhist Community Han, Dong-Min The anti-japanese movement in the Buddhist community during the Japanese ruling period is poor in general in comparison with the anti-japanese movement in the religious community during this period. This was because the religious body was maintained under a certain level of compromise with the power, although there is a difference in level and individual religious people were free to conduct anti-japanese movements and activities. Since a systematic response and participation by the religious body were relatively difficult, the scale and intensity of the anti-japanese movement was relatively poor. In particular, Buddhism was supposed to be disconnected from the world in principle and was expected to be indifferent to worldly affairs; therefore, it was relatively poor in social participation and activity. Therefore, the anti-japanese movement centering on monks in the Japanese ruling period couldn t help to be a target of attention, and can even be a more meaningful incident. The historical incident that forms the backbone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in the Japanese ruling period was the 1st March Movement in 1919. Among the 33 national representatives who planned this movement, Han Yong-Woon and Baek Yong-Sung participated in the movement as representatives of the Buddhist community. Accordingly, the anti-japanese movement in the Buddhist community was developed mainly by Han Yong-Woon and Baek Yong-Sung. In particular, Han Yong-Woon organized a movement focusing on young monks in the Joongang Hakrim( 中 央 學 林 ), and those young monks later became the main force of the anti-japanese movement. Therefore, research on the anti-japanese movement in the Buddhist community is concentrated on the study about 1st March Movement, Han Yong Woon, and Baek Yong-Sung. It is necessary to conduct research into the process for the spread of the 1st March
276 선문화연구 창간호 Movement and individuals who took the initiative in the process, and the relationship with the movement for the annulment of the temple ordinance, which was a law governing Korean Buddhism by Japan, and the later relationship with the movement. It is necessary to focus on the anti-japanese movement in the Buddhist community and patriotic enlightenment activities of the Buddhist school at the time of the war of the loyalist troops. The anti-japanese movement in the Buddhist community is the entire resistance movement against Japanese imperialism covering the independence movement and the socialist movement. Therefore, research on the Korean monks who performed activities in foreign countries, particularly in China, along with their socialist movement is also significant. At the same time, all resistance against Japanese imperialism included the struggle for justice, public struggle, and armed struggle as well as the cultural movement and the Korean literature study movement; therefore, in a wider sense, the movement for guarding the Buddhist tradition along with the movement for lifting the temple ordinance and an effort to build an independent religious order may be included in the anti-japanese movement. Consequently, it is necessary to restore the dynamic appearance of the Buddhist community in the Japanese ruling period by identifying the diverse facets of the anti-japanese movement. Key Words: the anti-japanese movement, Buddhist community, Han Yong-Woon, Baek Yong-Sung, the 1st March Mov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