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헤어스타일의 변천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history of Korean hair style 권 대 순* Kwon, dae-soon 1) 목 차 Ⅰ. Ⅱ. 서 론 머리모양의 변천 1. 고대의 미용 2. 중세의 미용 3. 근세의 미용 4. 현대의 미용 Ⅲ. 결 론 Ⅰ. 서 론 미용은 인류의 문화유산 가운데서도 인간의 미적 욕구를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한 분야로서 인류의 문화가 어떤 단계를 거쳐 변화 발전되어 왔는가를 밝히는 역사적 가치를 지닌 문화적 산물이다. 인간은 고대시대부터 자신의 몸을 장식하였으며, 이러한 변화는 사람들의 생활을 변 화시키고 감각을 변화시키며 그 위에 그 시대의 문화를 변화시켰다. 미( 美 ) 에 관심이 많아진 오늘날의 미용은 그 시대의 문화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맺으며 유 행의 흐름속에 생활의 일부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헤어스타일은 그 시대의 의복과 함께 다양 한 미적 요소를 가지고 여러 세기 동안 많은 흥미와 변화를 주며 발달해 왔다. 20세기에 들어와서 헤어스타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자 신의 개성표현과 유행에 대한 인식증가 등의 영향에 따라 점차 다양해지고, 복잡해져가는 양상 을 띄었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 미용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1991년부터 전문대학 에 미용관련학과가 신설되어 학문적으로 영역을 넓혀가기 시작하였 다. 현재는 미용관련 학교가 57개 대학에 60개의 학과로 한 해에 선발하는 신입생만도 7,380명 에 이르는 비약적인 성장을 가져왔다. 이와같이 다양화, 세분화, 전문화 되어가고 있는 미용분야를 시대적인 변천에 따라 미용의 *공주영상정보대학 헤어디자인과 전임강사
2 公 州 映 像 情 報 大 學 論 文 集 第 Ⅶ 輯 (2000) 역사를 고찰하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헤어스타일의 변천과정을 고대, 중세, 근세, 현대로 구분하였으며 그 시대의 그림이나 사진을 토대로하여 유행했던 머리모양과 미의식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Ⅱ. 머리모양의 변천 1. 고대의 미용 (1) 상고시대의 미용 인류가 머리모양에 관심을 갖게 된 기원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설화에 의하면 단군 원년부터 땋아서 늘어뜨린 머리모양으로서 편발을 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고대사회에 서부터 머리모양에 관심을 가졌음을 추측 할 수 있다. 문헌비고 ( 文 獻 備 考 ) 에 의하면 단군 원년부터 머리를 땋고 머리를 덮는 것을 가르쳤다고 하였으며, 사기( 史 記 ) 에는 위만이 추계만이복 ( 椎 髻 蠻 夷 服 ) 을 하고서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만은 우리나라 사람처럼 보이고자 추계로 빗고 만이복을 입은 것이다. 1) 부족 국가시대 채협총에서 출토된 채화칠협에서 보여지는 인물상은 머리가 단정히 정돈되고, 머리털을 뽑아 이마를 넓히고, 눈썹이 굵고 진하게 그려진 점으로 보아 이 시대에 최소한 단정 한 몸가짐이 생활의 기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이족의 문헌적 연구 에 의하면 마한의 남자는 괴두노계 ( 魁 頭 露 髻 ) 이고, 진한과 변한 사 람은 미발( 美 髮 ) 이며 편두의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괴두는 동글동글 돌려 올챙이 같이 묶은 상투를 말한 것이다. 편두는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돌로 누르는 머리의 변형으로 고대 한족( 韓 族 ) 내지는 동북아시아족 특유의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2) 해동역사 ( 海 東 歷 史 ) 에 따르면 삼한의 부인은 반발을 하였는데 모두 아계를 지었고, 여발 은 늘어뜨렸으며 여자는 말아서 뒤에 드리운다 3) 고 하였다. 여기에서 반( 盤 ) 을 서린다 는 의 미로 풀이하면 변발은 일종의 얹은머리 로 볼 수 있으며, 여자 는 부인과 대칭되는 미혼녀 라 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2) 삼국시대의 미용 고구려 사람들의 수발 형태는 문헌에서는 구체적인 기록을 찾아볼 수 가 없으나, 고분벽화에 그 형태가 잘 나타나 있다. 고분에 보이는 고구려 사람들의 수발형태는 여자의 경우 모발을 뒤 1) 우리나라 머리모양의 변천, 박경자김용문, 도서출판 신유, 1996, p.218. 2) 김해종, 동이족의 문헌적 연구, 1980, pp.32-33. 3) 한치윤, 해동역사, 제20 권, 예지삼.
헤어스타일의 변천에 관한 연구( 권대순) 3 로부터 머리 앞쪽으로 감아 돌리어 끝을 정수리 가까이에 꽂은 얹은머리, 머리를 셋으로 나누 어 하나는 위로 둘은 좌우 두 뺨 근처에서 각각 묶어 내려뜨린 푼기명머리, 모발을 뒤에서 묶어준 묶은머리, 모발을 뒤통수에서 낮게 틀어준 쪽머리, 정수리 가까이에 두 개의 상투를 솟게 한 쌍상투, 모발을 자연스럽게 내려 빗은 내린머리 등을 볼 수 있다. 또한 남자는 여자 의 수발과 동일한 형태인 쌍상투와 수계식으로 된 상투가 보이며, 되는 대로 풀어헤친 머리도 보인다. 이 중 쌍상투는 미혼 남녀의 대표적인 머리형태로 많은 동자석상에서 그 형태를 찾아 볼 수 있다. 고구려 사람들의 수발 풍속은 단순히 외모를 아름답게 꾸민다는 목적외에 신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곧 북사( 北 史 ) 에 따르면 고구려 사람들은 모두 머리에 절풍( 折 風 ) 을 썼는데 그 모양이 고깔과 같았고 사인( 士 人 ) 은 두 개의 깃털을 더 꽂으며 귀인( 貴 人 ) 은 그 관골을 소 골( 蘇 骨 ) 이라 말하는데, 자줏빛 비단을 많이 써서 이를 만들고 금과은으로 장식한다 고 했다. 또한 신당서( 新 唐 書 ) 에서는 고구려의 임금이 다섯 가지 채색 옷을 입고 흰 비단으로 만든 관을 만들어 쓰는데, 양쪽에 새 깃을 꽂고 금은을 섞어 가장자리를 꾸민다 고 했다. 4) 백제 부인들의 수발 형태는 중국의 문헌에서 그 단편적인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북사( 北 史 ) 에 여자는 머리를 땋아 뒤로 늘이되 혼례를 하게 되면 두 가닥으로 나누어 머리 뒤에 서린다. 5) 고 했다. 또 수서( 隋 書 ) 에도 부인은 분대하지 않고 머리를 땋아, 뒤로 늘어뜨리고 출가하면 두 갈래로 나누어 머리 뒤에 서린다. 6) 고 하였다. 이밖에 주서( 周 書 ) 에도 미혼녀들은 머리 를 땋아서 머리 위에 둥그렇게 얹고 다닌다. 7) 고 하였다. 이상의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수발 형 태는 기혼녀의 경우 머리를 둘로 나누어 머리에 얹은 형태를 하였으며, 미혼녀는 머리를 땋아 서 뒤로 늘이거나, 땋은 머리를 둥그렇게 얹은 후 한가닥을 뒤로 내려뜨려 기혼녀와 구별이 되 게 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남자의 수발 형태는 한대의 문물( 漢 代 の文 物 ) 에 백제 무녕왕릉에서 작차( 爵 ) 가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봉황새를 장식한 비녀의 일종으로 머리위에 얹고 대각선으로 마주 질러 고정시키는 데 사용되는 물건이다. 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머리카락을 모두 머리위로 끌어올려 한데 묶는 수계식 상투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수발 형태는 구당서( 舊 唐 書 ) 동이전 신라조에 부인의 머리는 매우 아름답고 길 다고 하면서 정관5 년(631) 에 여악사 2 인을 바친 바 있는데 검은머리가 아름답다고 기술했었 다. 또한 다래도 유행했는데 삼국사기( 三 國 史 記 ) 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성덕왕때에 당나라 에 사신을 보내는 편에 다래를 예물로 가져가게 했다는 것과 경문왕때 당나라에 가는 사신이 4자5치 길이의 다래 1백50냥과 5자3치 다래 3백냥을 가지고 갔다는 기록이 나온다. 더욱이 성 4) 조효순, 한국복식풍속사연구, 일지사, 1988, p.402. 5) 北 史, 卷 九 十 四, 列 傳, 百 濟 項. 6) 隋 書, 卷 八 十 一, 列 傳, 第 四 十 六. 7) 周 書, 卷 四 十 九, 列 傳, 百 濟 項.
4 公 州 映 像 情 報 大 學 論 文 集 第 Ⅶ 輯 (2000) 덕왕 22년초에는 미체라는 것이 나오고 경문왕 9년에는 4척5촌 두발 또는 3척5촌 두발이라 는 것이 나오고 있어 그 당시 이미 다래가 신라의 명물로써 외국으로 수출에 까지 이르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신라의 남자들도 가발을 잘 사용한 것으로 들어나는데 당서( 唐 書 ) 동이전 신라조에 신라 의 남자는 머리를 깍아 팔고 흑건을 썼다. 함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는 상투를 틀던 당시 가 난한 자는 부득이 머리를 깎아 다래로서 팔고 다시 머리가 자라 상투를 틀게 될 때까지 맨머리 를 가리기 위해 흑건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신라시대의 수발형태는 우리나라 사서 뿐만 아니라 중국의 사서에도 자주 나타난다. 동경 잡기( 東 京 雜 記 ) 에 신라때에 국도( 國 都 ) 의 북방이 허결하여 여자들이 뒤통수에 쪽을 찌고 이름하기를 뒤쪽이라 하였으니 지금도 그러하다 고 하였던 바, 이는 집안현이나 용강군의 벽 화에서 볼 수 있었던 쪽머리와 동일한 형태일 것이다. 또 이러한 쪽머 리 외에도, 수서( 隨 書 ) 의 동이전 신라조에는 부인이 머리를 땋아 머리에 두르고 여러 가지 비단과 구슬로써 장식한 다. 고 했으니 역시 고구려 벽화에서 보이던 얹은머리와 두레머리가 공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림1. 중발머리 그림2. 얹은머리 그림3. 쪽진머리 출처: 한국화장문화사
헤어스타일의 변천에 관한 연구( 권대순) 5 2. 중세의 미용 (1) 고려시대 고려의 수발은 왕조 건립 초기에는 앞시대인 신라의 풍속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러나 고종 18년 몽고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한 채 원과의 치욕적인 화친이 성립된 후에는 그들의 동화정책 에 따라 원의 수발 풍속을 많이 따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충렬왕 원년 12 월에는 개체변발 ( 開 剃 辮 髮 ) 을 따르자는 논의가 있었고 같은 왕4년2 월에는 정식으로 개체변발을 명하였다. 이 개체 변발은 중간에 머리를 남기는 형태로 겁구아( 怯 仇 兒 ) 라고 불리기도 하였는데 8) 충렬왕 4년에 일반 서민보다는 출세를 희구하는 관료들 사이에 유행했다가 원의 힘이 약해진 공민왕에 이르 러서야 사라졌다. 이 기간은 약100년정도 계속된 것으로 그 후 본래의 고유한 수발 양식인 상 투와 얹은 머리로 돌아갔다. 고려도경 ( 高 麗 圖 經 ) 에 따르면 일반 서민 남자의 수발 형태는 미혼인 경우 검은 노끈으로 묶고 그 나머지는 아래로 늘어뜨린다. 고 했다. 그리고 장가를 들지 않은 자는 건( 巾 ) 으로 머 리를 싸고 내려뜨리다가 장가든 뒤에 속발을 한다 고 한 것으로 미루어 건( 巾 ) 으로 머리를 싸 는 것이 일반적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서민 부녀의 수발 형태는 고려도경 ( 高 麗 圖 經 ) 에 부녀의 상투는 귀천이 동일하게 오 른쪽 어깨에 늘이고 나머지는 늘어뜨려 붉은 비단으로 묶고 귀한 사람은 작은 비녀를 꽂는다. 고 했다. 그리고 부인이 추계를 아래로 드리운 것은 마치 상제가 북상투를 짠 모양과 흡사하 다 고 했으며, 송사( 宋 史 ) 에도 부인의 빈계는 오른쪽 어깨에 늘어지고 나머지 머리털은 아 래로 늘어뜨려 붉은 비단으로 매고 비녀를 끼고 거듭 돌려 내려오는 것을 이겨 내게 했다. 고 했다. 이상의 기록을 종합해 볼 때 고려시대의 부녀의 수발 모습은, 상대( 上 代 ) 의 얹은머리와 비슷한 형태이나 귀밑머리를 실타래처럼 틀어 오른쪽 어깨에 드리움으로써 새로운 스타일을 시 도했던 것 같다. 9) 미녀의 경우는 미혼남자의 수발 형태와 동일했다. 다만 남자의 검은 노끈 대신 붉은 비단으 로 머리를 묶는 것이 다를 뿐이다. 고려도경 ( 高 麗 圖 經 ) 에는 아직 시집가지 않을 경우 열 살 남짓한 여자였는데도 피발( 被 髮 ) 하지 않았다 고 한 기록으로 보아 일부 귀족층에서는 어린 아이의 머리를 틀어 올려 어른스럽게 보이도록 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것은 극히 드문 경우이고 일반적으로는 머리를 붉은 비단으로 묶어준 후 그 나머지를 아래로 늘어뜨리는 것이 상례였다. 8) 김동욱, 한국복식사연구, 아세아문화사, 1991, p.223. 9) 조효순, 전개서, pp.409-411.
6 公 州 映 像 情 報 大 學 論 文 集 第 Ⅶ 輯 (2000) 그림4. 몽고식 머리형 그림5. 여모 출처: 한국의복식 출처: 한국복식사 (2) 조선시대 조선시대 여인들의 초기 머리형태는 급격한 변화없이 거의 과거와 유사한 모습이었다. 고분벽화에 나오는 고구려의 얹은머리 양식을 보면 다같이 손을 모으고 서 있는 세 여인의 발형( 髮 型 ) 이 긴 머리를 땋아 두상중앙에 틀어 얹고 이마 위 중간은 수건으로 묶고 있는데, 이 머리모양은 조선후기의 인물도에 나오는 양식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백제의 처녀들은 머리를 땋아 한가닥으로 수식( 首 飾 ) 하였는데 삼국시대 이후 고려를 거쳐 조선에까지 이어져온 처녀의 두발양식이었다. 이 외에도 쪽진머리, 푼기명 머리, 땋은 머리, 묶은 중발머리, 쌍상투 등의 머리모양이 계속 이어졌다. 10) 조선 중기 부녀자에게는 얹은머리를 크고 높게 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고발 ( 高 髮 )은 다래를 필요로 하였는데 값이 비쌀 뿐 아니라 그 위에 장식물의 사치가 극심하였으므 로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해 영조는 31 년(1756) 에 다 래에 소요되는 체발을 50속에서 20 속으로 줄이도록 하였고, 32 년(1757) 에는 얹은머리 금지령 을 내렸으며, 34년에는 족두리로 대신할 것을 허용하는 등 이 풍습을 없애려고 노력하였으나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고, 순조 중엽에나 가서야 실효를 거두었다. 조선시대에는 머리모양으로 직분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첩지는 여자의 수식( 首 飾 ) 으로서 상궁은 은( 銀 ) 개구리첩지, 정경부인이 도금( 淘 金 ) 개구리첩 지, 정부인이 두미( 頭 尾 ) 만을 도금( 鍍 金 ) 한 개구리 첩지를 매었고 왕비, 왕자비, 왕손비는 도금 봉( 淘 金 鳳 ) 첩지를 맸으며 부모상이나 남편의 상을 입었을 때에는 흑색개구리 첩지를 매었다. 10) 김현 조선시대 여자 머리모양에 표현된 미의식에 관한 연구 공주사대 논문집 제 집,,, 23, 1985, p.144.
헤어스타일의 변천에 관한 연구( 권대순) 7 쪽머리는 대감( 大 闞 ) 이나 반가( 班 家 ) 에서는 쪽머리도 크게 하고 비녀와 뒤꽂이도 호사하였 으나, 천인( 賤 人 ) 들은 풀머리로 쪽을 짓고 두석( 豆 錫 ) 혹은 백동( 白 銅 ) 비녀를 꽂는 것이 고작 이었다. 얹은머리는 상류사회에서는 좋은 다리를 사용하여 보기좋게 얹고 끝에는 빨간 댕기를 매었으 며, 천인들은 풀머리로 초라하게 얹었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수모( 手 母 ) 라는 일종의 미용전문가가 있어서 어염집뿐만 아니라 궁중의 행사에도 참여하여 머리손질 및 예절교사의 역할을 하였다. 조선시대의 유행한 머리모양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큰머리 궁중에서 의식때 하던 두발양식으로 앞가리마 위에 첩지를 매고 그 위에 현금( 玄 錦 ) 천에다 솜을 두어 중간을 잘룩하게 묶은 어염 족두리를 올려놓고 다리꼭지를 땋아 뒷머리에서 머리형 대로 좌우로 갈라서 어염족두리 위에 고정시키고 그 위에 가체를 좌우로 둥글게 구부려 만든 다음 거대한 Y 계( 髻 ) 를 덧붙인 머리모양이다. 수식( 首 飾 ) 으로는 어염족두리 정상과 머리 측면 좌우에 옥판( 玉 板 ) 에다 여러 가지 보석을 박고 화잠( 花 簪 ) 등 떨잠을 꽂았다. 11) 2 어여머리 어여머리는 큰 머리에 버금가는 예장용으로 궁중에서나 반가 부녀들이 하였고 상궁으로서는 밀실상궁만이 하였는데, 머리에 솜족두리를 쓰고 그 위에 다래로 된 큰머리를 얹어 옥판( 玉 板 ) 과 화잠( 花 簪 ) 으로 장식하였다. 12) 3 대수( 大 首 ) 궁중에서 왕비의 의식용으로 대예복과 병용하던 두발양식으로, 전면에서 보면 머리 정상은 고발( 高 髮 ) 을 만들고 그 밑으로는 좌우 어깨까지 내려오면서 A 형으로 펼쳐진다. 후면도 앞면에 서와 같이 고발( 高 髮 ) 을 이루고 좌우를 A 형으로 펼친 것은 같은 양식이지만 중간은 종( 縱 ) 으 로 머리를 땋고 그 위에 비단 댕기를 묶고 있는 것이 다르다. 이 머리모양은 가체( 加 髢 ) 자체도 고대( 高 大 ) 하지만 그것에 금옥패식 ( 金 玉 貝 飾 ) 의 비녀와 떨반자 등으로 더욱 화려하게 꾸며졌 으므로 당대( 唐 代 ) 에서 보계( 寶 髻 ) 라고도 했다. 13) 4 조짐머리 외명부( 外 命 婦 ) 가 궁중에 출입할 때 쓰던 가채로서, 다리를 소라껍데기 비슷하게 틀어올린 것으로 정조의 가발금지령 이후 얹은머리 대신 쪽진머리를 하게 함으로써 쪽을 돋보이게 하기 11) 김현, 전개서, p.144. 12) 유희향, 한국복식문화사, 교문사, 1982, p.280. 13) 배정용, 조선조 중후기 부녀자의 두발양식고, 숙명여대 아세아연구소 제21 집, 1982, pp.285-287.
8 公 州 映 像 情 報 大 學 論 文 集 第 Ⅶ 輯 (2000) 위하여 생겨난 수식( 首 飾 ) 이다. 5 첩지머리 궁중에서 예장할 때 머리위에 띠던 다리의 하나이다. 첩지( 帖 紙 ) 라함은 왕비는 도금으로 봉 ( 鳳 ) 의 모양을, 내외명부는 도금은, 또는 흑각( 黑 角 ) 으로 개구리 모양을 만들어 좌우에 긴 머 리카락을 단 것을 말하는데, 이것을 가리마 가운데에 중심을 맞추어 대고 느릿느릿 양쪽으로 머리를 땋아 머리 뒤에서 머리체와 한데 묶어 쪽을 진 머리모양이다. 첩지의 장식은 화관( 花 冠 ) 이나 족두리 등을 쓸 때에 이를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14) 미혼 남녀가 사용한 머리모양으로 머리카락을 뒤에서 세갈래로 갈라 엇걸어 땋아서 댕기를 들 였는데, 반가( 班 家 ) 의 규수들은 귀밑머리로 귀를 가렸고, 일반처녀들은 귀를 가리지 않았다. 15) 6 새앙머리 머리를 두갈래로 나누어 땋은 다음 이것을 17-18cm 길이로 구부려 가지런하게 묶고 중간을 댕기로 맨후 금, 은, 산호, 비취 등으로 장식하였는데, 아기상궁이나 상류계급의 규수들이 하던 예장용 머리모양이다. 7 얹은머리 얹은머리는 큰머리 모양을 축소시킨 머리로 서북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상류사회에서 는 좋은 다리를 사용하여 보기 좋게 얹고 끝에는 빨간 댕기를 매었다. 그러나 가체가 점점 고 대( 高 大 ) 해지고 화려해지면서 가체금지령이 내려지고 쪽머리에 족두리로 대체되었다. 16) 8 쪽머리 머리를 감아 올려 머리 뒤통수에다 얹은 후 비녀를 꽂는 머리형으로 정조의 가체금지령 이후 사용되었으며, 궁중에서는 첩지를 가운데 가리마 위에 얹어 존비를 표시하였다. 9 상투 머리 남성의 머리모양으로 머리카락을 끌어올려 정수리에 모아 감은 것으로, 근래까지 전승되어 온 머리모양이다. 14) 유희향, 전개서, pp.280-281. 15) 황희순, 미용학개론, 청구문화사, 1997, p.11. 16) 석유선, 한국복식사, 보진재, 1971, p.67.
헤어스타일의 변천에 관한 연구( 권대순) 9 그림 6. 얹은머리 ( 김홍도의 미인화장도 ) 그림 7. 상투머리 출처: 미용학 개론 출처: 미용학 개론 그림 8. 첩지머리 그림 9. 얹은머리 출처: 화장문화사 출처: 화장문화사 3. 근대의 미용 (1) 개화기의 미용(1870-1910) 개화기 이후에도 여성들의 머리모양은 의상에 비해 유행이 늦게 나타났는데 아마도 이것은 신체발부수지부모 ( 身 體 髮 膚 守 之 父 母 ) 라는 민족의식에 기인한 듯 하다. 이 당시에도 얹은머리, 쪽머리 등이 계속 유지되었고, 여학생들은 댕기머리를 하였는데 가리 마를 중심으로 양 옆머리를 대담하게 내려 이마가 바른 세모꼴이 되도록 귀를 가린 채 땋아내 리고 끝에는 자주 제비부리 또는 토막 댕기를 들여 길게 늘어뜨렸다. 17) 그러나 개화된 일부 여성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머리형태를 하기도 하였는데 팜프도어와 퐁파 두르 스타일이 그 예이다. 팜프도어 스타일은 당시 일본에서 유행했던 머리모양으로, 1907년 최활란 박사가 귀국할 때 17) 한국미용신문, 미용정보신문사, 1999.3.4, 제157 호, 10 면.
10 公 州 映 像 情 報 大 學 論 文 集 第 Ⅶ 輯 (2000) 하였는데, 머리를 치켜올려 빗어 정수리에 틀어 얹고 리본을 매거나, 이마 위에 모자의 챙같이 불룩 내밀게 빗기도 하였다. 또한 서양에서 유행한 퐁파두르 스타일을 고종때 마지막 미국 공 관장을 지낸 김윤창의 부인 고순영과 우리나라 최초의 문학사인 하란사가 귀국할 때 하고 온 머리모양이다. 이 스타일은 앞에서 뒤로 머리를 빗어 넘기거나 올린 머리형에 챙이 넓지 않은 밀짚모자나 헬트모자를 앞이마 쪽으로 기울여 쓰고 모자에는 리본, 깃털, 꽃 등을 장식한 것으 로 이 당시에 사회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친일 개화 성향의 김홍집 내각은 을미사변 이후 1895 년에 전국에 단발령을 내렸다. 고 종도 솔선수범하여 머리를 깎았으며, 1884 년에 최초로 단발한 유길준은 고시( 告 示 ) 를 내려 관 리들이 칼을 가지고 거리나 성문에서 강제로 백성들의 머리를 자르도록 하였다. 그러나 오랜시 간 동안 뿌리내린 전통을 파괴한 단발령에 대한 반발은 극심하였다. 정부의 대신들 중에서도 이도재 같은 사람은 반대 상소를 올리고 사퇴하였으며 전국의 유생들은 여기에 반발하여 각지 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결국, 고종이 친일 내각을 거세 함으로써 단발령은 철회되었지만 이 사 건은 역사의 상처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중에도 서양식 조발을 하는 최초의 이발소가 등장하였다. 1901년에 유양 호가 개업한 동호이발소 가 그것인데 머리를 깎기보다는 잔머리를 길러 상투를 다시 짜주는 일이 더 많았다고 한다. 18) 그림 10. 팜프도어 그림 11. 단발령전의 모습 출처: 한국복식논문 출처: 인터넷 사이트 (2) 일제시대의 미용(1911-1945) 1920년경에는 트레머리가 1926 년에는 앞가리마를 똑바르게 타고, 양쪽 귀밑머리를 땋을 때 이것을 세가닥으로 갈라 앞의 두가닥을 엮은 그 위로 남은 한가닥을 곱게 빗어 첩지를 씌운 첩 18) 이규태, 이규태의 역사에세이, 조선일보, 1999.4.23, 23 면.
헤어스타일의 변천에 관한 연구( 권대순) 11 지머리가 유행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주목할만한 것은 단발의 유행이었다. 1920년대 일부에서 유행하던 단발형의 헤어스타일이 점차 늘어나 단발미인, 모던걸(modern girl) 이라는 신용어가 나올 만큼 오래 지속 되었는데, 기생에서 사회운동가로 변신한 강활란을 시작으로 여자배우 이명화, 김명순이 그 뒤 를 이었으며 김활란 박사나 무용가 최승희에게서도 단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당시에는 토월회라는 극단이 대단한 인기였는데 이곳의 배우들은 대중의 스타로서 유행까지 좌우하였다. 가령 복혜숙이나 석금성 같은 주연급 배우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몰려와 서 저기 토월회가 지나간다. 고 수군거렸고 이들의 헤어스타일이나 옷은 그대로 여성들의 유 행이 되었으며, 어떤 여성들은 미용실에 가서 석금성이 한 머리로 해달라 는 주문도 있었으니 그 당시의 머리유행도 배우들의 영향이 컸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한편, 챨스 네슬러(Charles Nessler) 에 의해 고안한 파마는 1920년대 화장품을 팔던 백계 러 시아인이 파마기구를 들여와 서울 정동의 집에서 히트퍼머를 시작한 것이 시초였다. 그런데 한 번 파마를 하려면 가격이 쌀2-3가마에 해당하는 20원의 거액이었으므로 극소수의 특권층만이 이곳을 이용할 수 있었다. 19) 1930 년대에도 계속해서 단발이 유행하였으며, 일부 멋쟁이 여성들 사이에서는 웨이브가 있 는 단발머리를 하였다. 따라서 여성들은 웨이브를 만들기 위해 고데를 하였다. 그러나 머리를 감으면 웨이브가 없어지고 모발이 손상되는 단점때문에 웨이브가 오래가는 미용수단이 필요하 였다. 이무렵 일본에서 미용을 공부한 오엽주 여사가 최초로 화신미용실 을 개업하였고, 1936년 에 일본에서 파마기구를 들여오면서 부터 파마가 조금씩 퍼지기 시작하여 일정기간 웨이브를 유지 할 수 있었다. 아 이 당시 파마는 숙발( 淑 髮 ) 이라고 불렸으며, 한 개40와트짜리 전구를 20개 가량 머리에 말 20-30 분간 암모니아수 파마액을 스며들게 했다가 푸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 당시의 파마 는 보수적인 한국인의 정서상 일반화가 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임형선 여사( 전 예림미용고등 기술학교 교장) 의 회고에 의하면 30년대 후반 당시에는 부인네들이 미용실에 와서 처음 파마 를 하면 훤한 대낮에는 좀처럼 바깥에 나갈 생각을 못하고 어두어지기를 기다려 인력거를 타고 돌아가곤 했다. 또 파마를 하기는 했지만 너무 창피해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다니기도 하고, 남 편에게 호된 꾸지람을 듣고 머리를 풀기 위해 다시 미용실에 돌아오는 손님도 많았다. 그래서 당시 파마는 겉에서 보이지 않게 속머리에 파마를 해서 뒷머리를 부풀리는 형태가 유행하기도 했다. 는 것으로 미루어 파마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곱지 않았음을 짐작 할 수 있겠다. 19) 미용, 유미코스메틱, 1995, 5-6 월호, pp.28-29.
12 公 州 映 像 情 報 大 學 論 文 集 第 Ⅶ 輯 (2000) 그림 12. 틀어얹은머리 그림 13. 둘레머리 출처: 한국복식논문 출처: 한국여성양장변천사 그림 14. 최승희의 단발머리 그림 15. 김할란의 단발머리 출처 : 화장문화사 출처 : 미용학회지 4. 현대의 미용 (1) 해방이후의 미용(1945-1969) 해방과 미군들의 진주는 미국패션의 직수입으로 이어졌고, 일제말 사치풍조의 하나로 금지되 기도 했던 파마는 다시 여인들의 미의 상징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 당시의 파마를 김옥진 여사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20) 퍼머는 주로 전기 파마였다. 이북에 화력발전소가 있어서 전기를 전국에 공급해 주었는데, 남북 한 간의 정부가 따로 수립되자 북한에서는 전기를 잘 공급해 주지 않아서 전기 사정이 좋지 못하였 다. 전기 파마를 하는 도중에 졸지에 정전이 되는 소동이 벌어지자 전기만을 믿을 수가 없어서 별 도로 개발한 것이 불파마였다. 지금의 번개탄과 비슷한 것으로 손가락 크기만한 연료를 가봉이라 했는데 그 가봉에 불을 붙여 파마집게의 양쪽에 두개씩 네개를 넣어 은박지를 대고 머리를 말아서 파마를 하였다. 그러나 가봉의 재가 옷에 떨어져 옷을 더럽히기도 했고, 잘못하면 가봉의 불똥이 옷 에 튀어 구멍이 나기도 했었다. 불의 온도를 짐직할 수가 없어서 머리카락이 타서 끊어지기도 했고 20) 김옥진, 나의 미용 나의 인생, 도서출판 범한, 1995, pp.51-52.
헤어스타일의 변천에 관한 연구( 권대순) 13 심지어는 이마나 귀주위에 화상을 입기도 했지만 그러한 위험부담률에도 개의치 않고 불파마를 하 였다. 이 자서전에서 보면 전쟁중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유행에의 호기심과 아름다움을 추구하겠 다는 여성들의 미적 욕구는 대단한 것처럼 여겨진다. 1946 년경에는 어깨정도 길이의 파마머리에 앞머리를 세운 머리형이 유행하였다. 그 당시의 신천지( 新 天 地 ) 라는 잡지에서는 앞머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해방이되자 소위 링그 라고 해서 머리가 툭 불거져 올라온 것이 있는데 이걸 조선어사전에 삽입한다면 링그 머리의 혹 또는 뿔 또는 챙 이라고 역( 譯 ) 한다. 또1948 년경 국제 신문의 연재만화 미스 깡통 에서도 앞머리를 높이 세운 단발형 파마머리 를 볼 수 있는데, 광복 후 젊은 여성들은 대개 어깨에 못 미치는 길이의 단발에 파마를 하고 옆가리마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21) 1950년대에는 파마의 보급이 훨씬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 대부분의 젊은 여성들이 파마를 할 정도였는데, 특히 아이론을 이용한 단발형의 우찌마끼 ( 안말음) 와 소도마끼 ( 바깥말음 ) 가 대부분 의 여성에게 선호되었다. 22) 또한 이 시기를 전후해서 전기파마와 콜드 웨이브 파마같은 새로운 파마법이 소개되어 간편하게 파마를 할 수 있게 되어 파마를 대중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한편, 극장에서는 서양영화가 인기였는데, 출연한 배우들의 헤어스타일이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였다. 특히 오드리헵번이 주연한 영화 로마의 휴일 에서 그녀의 짧은 컷트 스타일은 헵 번스타일이라 불리우며 젊은 여성들이나 여대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1957 년에는 박계국, 이정녀, 김춘자 여사가 중심이 된 대한미용총연합회 가 발족되어 전국 의 미용조합협회를 정비하였는데, 이 당시 9개구로 나누어진 서울의 미용실 숫자는 약 200개 정도였다고한다. 23) 1961 년에는 세슬컷트, 즉 귀양끝이 뾰족하게 뻗치는 컷트에 의한 로켓트라인이 유행했고, 1965년경부터 부분 가발붐이 조성되어 머리모양과 어울리는 스타일을 선보이는 등 더욱 다양 해지고 세련되어 갔다. 1960 년대 중반에는 앞머리 부위와 귀 양옆에 높이를 준, 즉 부푼 양감을 준 모양이 유행하 였다. 양의 높이, 양옆의 부풀기가 이중으로 되어 있어 듀오라인 이라 이름을 붙였는데 우리나 라에서는 바가지를 엎어 놓은 것 같다하여 바가지머리 라 불리었다. 가수 윤복희씨에 의해 소 개된 이 머리는 미니스커트와 함께 붐을 일으켰다. 또한 60 년대 남성들 사이에는 비틀즈의 더벅머리 장발이 유행하였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사 회기강 차원에서 장발이 있으면 잡아들여 훈방하거나 머리를 자르는 등의 진풍경이 목격되기도 21) 유수경, 전개서, p.262. 22) 민봉기, 헤어스타일의 변천사, 대한미용사회 중앙회, 1996, p.58. 23) 김옥진, 전개서, pp.78-79.
14 公 州 映 像 情 報 大 學 論 文 集 第 Ⅶ 輯 (2000) 하였다. 한편, 국내 미용계에서는 1947년 스페인에서 발족한 국제 미용 기능 올림픽에 1967년 제16 회 대회에 처음으로 출전하여 우수한 성적을 거두기도 하였다. 그림 16. 크라운 봄베지숏트 그림 17. 웨이브 인 컬 출처 : 아모스 헤어컬레션 출처 : 아모스 헤어컬레션 (2) 1970-80년대의 미용 1970년대는 경제성장과 TV 등 전파매체의 보급으로 많은 여성들의 미에 대한 관심이 훨씬 높아지고 각자의 개성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다양한 퍼머넨트 기법의 보급과 컷트 기술의 향 상, 각종 미용기구의 도입 등으로 더욱 세련된 머리 모양이 등장하여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 켜 주었다. 70 년대 초기에 유행한 컷트로는 레어어 컷트를 들 수 있는데, 이 커트는 정수리에 기준을 두 어 전체의 머리를 일정한 길이로 자른 것으로 양옆이 짧고 뒷목덜미가 길어서 뒤에서 보면 V 자 모양으로 연결되어 보인다. 그 단적인 머리모양을 1980년대에 헤어디자이너 박준이 모델 을 거꾸로 세우고 흘러내린 긴머리를 직선으로 일정하게 잘라 자연스럽게 층을 만든 스타일을 TV 에 선보여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일명 거지 컷트라고 명명된 이 머리모양은 현재 에도 젊은이들 사이에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으며 머리숯이 많이 경우에 효과적인 디자인이다. 또한 이 시기에 영국의 유명한 헤어디자이너 비달 사순이 창작한 보브 스타일의 컷트가 국내 에 들어와 유행하였는데, 기존의 꾸민 듯한 딱딱한 조형적인 전통미를 과감히 버리고 자연스런 모발 흐름의 아름다움을 강조한 기하학적인 컷트가 특징이다. 1970년대 중반부터 80 년대까지는 버섯모양의 머쉬룸(mushroom) 커트가 유행하였다. 이 머리 모양은 모발의 흐름이 중심에서 방사형으로 흘러서 옆이 넓게 되며, 모발 끝이 안쪽을 향해서 모아진 실루엣의 스타일로 중세의 승려머리 스타일에서 발달한 것이다. 이 스타일은 심플한 실
헤어스타일의 변천에 관한 연구( 권대순) 15 루엣으로 기능성을 지니면서도 여자다움을 잃지 않는 디자인으로 여성들에게 애용되었다. 24) 파마는 클래식한 느낌을 주는 풍성한 머리모양과 복고 스타일을 현대화한 내추럴한 파마가 유 행하였다. 그리고 파마 뒤에는 블루어 드라이를 사용하여 볼륨감과 생동감을 주어 마무리하였다. 1970 년대 후반에는 헤어스타일에도 유니섹스의 바람이 불어 뒤에서 보면 남성인지, 여성인 지 구별할 수가 없었고 이러한 헤어스타일의 바람은 금남의 집으로 여겨졌던 미용실에도 나타 나 심심찮게 남성의 고객을 볼 수가 있었다. 당시 남성의 장발을 여성의 헤어스타일처럼 커트 하고 퍼머하는 최신 풍속도가 외국에서 도입되어 주간여성의 기사에 의하면 서울에서만 한달에 약 15,000 명이 미용실을 이용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1980년대는 파마를 세트나 아이론을 위한 중간단계로 생각하던 이전단계에서 벗어나 파마 그 자체가 하나의 헤어스타일로 창작하였다. 또한 블로드라이어와 아이론을 대지 않고도 원하 는 형태로 자연스럽게 볼륨감과 풍성한 모양을 낼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디자인 롯드가 개발 되어 머리모양의 다양화가 이루어졌다. 1984년에는 스트레이트 파마가 등장하여 생머리에 볼륨감과 윤기를 주거나 웨이브 파마를 펴서 생머리로 만드는 것이 유행하였다. 스트레이트 파마는 분말과 액체퍼머약, 그리고 스트레 이트크림 등을 혼합하여 파마약을 제조한 다음 이 약을 머리카락에 바른 후 긴 프라스틱 패널 에 고정시키는 방법으로 단발머리나 컷트머리에는 이 것을 응용하여 셋팅롤로 머리를 말거나 프라스틱 패널의 끝부분을 접는 롤 스트레이트 퍼머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84 년 후반기에는 단발머리인 보브스타일이 부쩍 인기를 끌었다. 내츄럴 파마로 전체의 머리결은 생생하게 살리고 윗 부분은 약간 펑크 스타일로 처리하여 단발머리의 단조로움을 커 버해 주었으며, 10대 소녀에서부터 40대 중년부인에 이르기까지 연령에 구애받지 않는 대중적 인 스타일이었다. 1985년 이후에는 1984 년 유행하던 단발형의 생머리와 비대칭적인 모양, 중간길이의 파마로 집약되던 스타일이 얼굴 전체를 들어내는 쪽보다는 마치 얼굴과 이마를 감싸는 듯하게 보이는 새로운 머리형이 등장하였다. 또한 머리끝이 제각기 멋대로 바람에 흐트러져 화려한 듯 하면서 도 야성적인 느낌을 주는 머리모양이 유행하였는데 그런 분방함 속에서도 부드러운 여성미를 느낄 수 있었다. 한편, 컷트는 기법이 다양해져서 가위와 레이저(Razor), 클리퍼(Clipper) 등의 기구를 이용하 여 다양한 질감을 표현하는 헤어스타일이 유행하였다. 80년대 후반에는 88올림픽 등 국제교류의 활발한 활동으로 미용의 세계화는 더욱 세련되어 졌으며, 특정한 스타일의 유행보다도 의상과 조화를 이루면서 각자의 개성을 표현하는 헤어스 타일이 유행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머리결을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웨이브에 탄력과 윤기를 더해주는 무스 24) 김희숙, 한국과 서양의 화장문화 비교, 성균관대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9 pp.96-97.
16 公 州 映 像 情 報 大 學 論 文 集 第 Ⅶ 輯 (2000) (mousse) 와 젤(gel) 이 보급되어 남녀 청소년은 물론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사용되었다. 그림 18. 머쉬롬( 상) 엄브렐러 ( 하) 그림 19. 바람머리 출처: 아모스헤어컬레션 (70 년대) 출처: 아모스헤어컬레션 (80 년대) (3) 1990년대의 미용 1990 년대의 미용은 각자의 개성을 최대한 표출하는 시기로 헤어스타일이 화장과 의상, 악세 사리 등과 서로 조화를 이루는 토탈패션화의 경향을 띄고 있다. 헤어스타일에 있어서는 이들 요소와 더불어 영상매체, 특히 TV에 나오는 연예인의 머리 모양이 유행을 주도해 가는 선두적 인 역할을 하였다. 1990년대 초에는 1960년대의 복고풍으로 돌아가 크라운 부위에 둥글게 양감을 살리면서 현대 감각에 맞게 재창조한 자연스런 움직임이 있는 스타일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레이져(Razor) 를 사 용하여 길고 짧은 앞머리를 자연스럽게 컷트하고 뒤통수와 정수리에 볼륨감을 주어 자유로운 변 형의 멋을 준 로맨틱 스타일과 청순함을 보여준 긴 단발, 보이시한 컷트 등이 인기가 있었다. 남자의 헤어스타일은 한동안 짧은 머리가 유행을 하였다. 영화 레옹 의 주인공 장르노, 스 피드 의 키아누 리브스, 탤런트 최민수, 김민종 같은 스타들이 거의 같은 시기에 짧은 머리로 등장하면서 이와같은 머리모양이 젊은 층에 크게 어필되면서 거리에서 짧게 머리를 자르고, 젤 이나 무스를 바른 스타일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이 스타일은 두상이 예쁘고, 반곱슬머리에 특히 잘 어울리는 스타일이다. 파마스타일은 한 가지의 롯드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러 가지로 개발된 롯드와 새로운 기술에 의해 다양한 웨이브가 유행하였다. 모발을 조금씩 엮어 꼬아가며 가늘게 롯드에 말아주는 레게 파마나 이른바 폭탄머리로 불리는 다이렉트 파마, 뿌리파마, 르네상스 파마, 부메랑 파마, 퍼펙 트 파마, 위빙 파마 등이 그것이다.
헤어스타일의 변천에 관한 연구( 권대순) 17 1993 년에는 코팅파마가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이 파마는 일반 파마약에 산성 염색약을 첨가 하여 파마와 동시에 검은 머리를 포도주색이나 보라색, 갈색 등의 색상으로 변화시켜 단조롭고 딱딱한 한국 여성의 머리색을 세련되게 변화시켜 주었다. 1998년에는 셋팅퍼머기와 곱슬머리를 피는 전문제품이 등장하여 미용업의 새로운 변화를 가 져왔다. 셋팅퍼머는 굵은 웨이브와 강한 릿지로 드라이와 셋팅을 말지 않아도 우아하고 탐스러 운 웨이브를 연출할 수 있는 장점이 있고, 곱슬머리 전용 스트레이트파마는 기존의 패널을 이 용한 스트레이트파마에 비해 펴지는 정도가 우수할 뿐만 아니라 패널을 대지 않아서 무겁지 않 으므로 가격이 비싼 단점에도 불구하고 여성들 사이에서는 대단한 인기를 모으고 있다. 염색은 1994 년에 자연스러운 갈색 계통의 색상이 유행을 하였으며,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몇 가닥의 머리다발을 밝게 블리치(bleach) 하여 머리에 포인트를 주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20대 뿐 만 아니라 30, 40 대의 직장인들도 염색을 즐겨하면서 명동, 압구정동, 이대 등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시내중심가를 나가보면 검은머리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총천연색으로 물들인 머리와 마주치게 된다 색상도 과거 연한 갈색이나 블루블랙, 가벼운 블리치에서 벗어나 빨강, 노랑, 파 랑, 초록색 등 화려하고 강렬한 색상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염색의 이같은 인기 를 반영하듯 97년 염모제의 시장이 749 억원대로 성장했다. 1998 년에는 탤런트 김희선이 드라마에서 헤어픽스 를 유행시켜 굳이 탈색에 코팅을 하지 않아도 원하는 머리의 색상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헤어픽스는 자신의 머리결에 100% 인모와 천연성분 접착제를 이용해서 원하는 색상을 모발에 붙이는 것으로 여기에 사용되는 모발은 세 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인도인의 모발이 사용되었다. 한편, 퍼머나 컷트, 염색을 중심으로 발전해 온 우리나라 미용업계가 최근에는 모발관리로 방향 전환을 시도하면서 두피와 모발의 특성을 분석해 아름다운 머리결로 가꿔주는 헤어트리트 먼트 쪽으로 관심이 높아지는 추세이다. 그림 20. 염색머리 그림 21. 레게머리 출처: 레이디경향 출처: 미용회보
18 公 州 映 像 情 報 大 學 論 文 集 第 Ⅶ 輯 (2000) IV. 결 론 인간의 생활양식과 미용과의 관계는 역사적 경험을 통하여 뚜렷이 찾아볼 수 있다. 뿐만 아 니라 정치적 이념, 종교적 이념, 가치관, 윤리관 등도 미용을 통해서 표현된다. 그 시대, 그 문 화권의 미에 대한 개념도 미용에 영향을 미치고 있어 미용이야말로 그 사회의 생활상을 가장 잘 표현하는 문화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본 논문은 미용문화의 가장 근원적 분야인 헤어스타일의 변천과정을 주제로 선정하고 그 시대의 그림과 사진, 문헌 등을 통해 머리모양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한 선행과정으 로 시대를 고대, 중세, 근세, 현대로 구분하였으며, 각 시대별 머리모양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 과 같다. 상고시대의 미용은 단군설화에도 편발을 했다는 기록이 있듯이 이 당시에도 머리모양에 대해 상당한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의 미용은 문헌이나 고분 등을 통해 그 시대의 미용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고구려 는 고분벽화에 그 당시의 미용을 알아볼 수 있는데, 얹은머리쪽진머리푼기명머리묶은중발머 리쌍상투머리 등의 머리모양이 있었다. 백제는 북사( 北 史 ) 나 주서( 周 書 ) 등과 같은 문헌 을 통해 종합해보면, 기혼녀들은 머리를 둘로 나누었고, 미혼녀들은 머리를 땋아서 뒤로 늘인 기록을 찾을 수 있다. 한편, 신라는 가체 기술이 뛰어나서 당나라에 수출을 했다는 기록을 중국 의 고서( 古 書 ) 에서도 엿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미용은 왕립 건국 초기에는 신라의 풍속을 이어 받았으나 고종 18년 몽고의 침 입을 막아내지 못한 채 원과의 치욕적인 화친이 성립된 이후, 그들의 동화정책에 따라 일부에 서는 원의 수발 풍속을 따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초기의 미용은 얹은머리, 쪽진머리, 푼기명머리, 땋은머리, 묶은중발머리, 쌍상투 등 상고시대부터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그대로 습용되었다. 그러나 중기에 이르러 얹은머리에 가체 ( 加 髢 ) 가 성행하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고계( 高 髻 ) 의 폐단이 고질화되어 마침내 가체금지령 이 내리기도 하였다. 개화기에도 미용은 얹은머리, 쪽머리, 댕기머리가 계속 유지되었는데, 일부 여성들 사이에는 팜프도어나 퐁파두르 같은 새로운 머리를 하기고 하였다. 일제시대의 미용은 1920년경에 트레머리가 1926 년에는 첩지머리가 유행하였다. 또한, 이 시 대에 단발이 유행하여 모던걸이라는 신용어까지 나오기도 하였다. 해방이후에는 일부에서 하던 퍼머가 대중화되어 우찌마끼 ( 안말음) 와 소도마끼 ( 바깥말음 ) 형태 의 머리를 선호하였으며, 오드리헵번이 주연한 영화 로마의 휴일 에서 그녀의 짧은 컷트 스타 일은 젊은 여성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1970년대의 미용은 경제성장과 TV의 보급으로 여성의 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개성화를
헤어스타일의 변천에 관한 연구( 권대순) 19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거지컷트, 비달삿순의, 단발 머쉬룸 컷트가 유행하였으며, 미용에도 유니 섹스 바람이 불어 남성들 사이에서는 장발에 파마를 하기도 하였다. 1980 년대에는 컷트의 기법이 다양해져 가위와 레이저(razor), 클리퍼(clipper) 등을 사용해 다양한 질감을 주었다. 1894 년에 등장한 스트레이트퍼머는 생머리에 볼륨감을 주거나, 웨이브 한 머리를 가지런하 게 펴서 손질을 쉽게 할 수 있으므로 학생이나 젊은 주부들이 꾸준히 즐겨찾는 스타일이다. 1990 년대의 미용은 각자의 개성을 최대한 표출하는 염색이 크게 유행하였으며, 퍼머에서도 색상을 주는 코팅퍼머가 노소( 老 少 ) 에 구별없이 즐겨찾는 미용품목으로 정착하였으며 모발의 관리차원에서 두피관리, 헤어관리 등 새로운 시스템이 도입되어 두피, 탈모, 비듬 등에 관한 새 로운 정보의 도입과 전문화 시스템을 갖춰가고 있다. 21 세기의 미용은 고정관념을 거부하고, 틀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자유로움속에 무엇인가를 창조하려는 개성적인 형태와 단순함과 다양함의 극과극 스타일이 공존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 이 밀레니엄 시대를 장식하지 않을까 예측해본다. 이상과 같이 미용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유행은 돌고 돌아서 그 시대의 풍속을 반 영하여 변화하는 한편, 특히 오늘날의 미용은 인터넷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동서양의 헤어트랜 드가 거의 동시에 유행하는 지구촌 글로벌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고유한 우리 미용 문화를 현대의 정서에 부합되도록 재창조하여 발전시킨다면 이것이 곧 세계적인 미용문화가 될 것이다.
20 公 州 映 像 情 報 大 學 論 文 集 第 Ⅶ 輯 (2000) 참 고 문 헌 김동욱, 한국복식사연구, 아세아문화사, 1991, p.223. 김옥진, 나의미용 나의인생, 도서출판 범한, 1995, pp.51-52. pp.78-79. 김해종, 동이족의 문헌적 연구, 1980, pp.32-33. 김 현, 조선시대 여자 머리모양에 표현된 미의식에 대한 연구, 공주사대 논문집, 제23 집, 1985, p.144. 김희숙, 한국과 서양의 화장문화 비교, 성균관대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1999. pp.96-97. 김희숙, 화장문화사, 청구문화사, 2000. 레이디경향, 경향신문사, 1996. 미용, 유미코스메틱, 1995, 5-6 월호, pp.28-29. 미용회보, 대한미용사회, 1997. 민봉기, 헤어스타일의 변천사, 대한미용사회 중앙회, 1996, p.58. 박경자, 일제침략시대의 복식연구, 신구문화사, 1983. p228. 박경자김용문, 우리나라 머리모양의 변천, 도서출판 신유, 1996, p.218 백영자, 한국의 복식, 경춘사, 1993. p.147. 배정용, 조선조 중후기 부녀자의 두발양식고, 숙명여대 아세아연구소 제21 집, 1982, pp.285-287. 석유선, 한국복식사, 보진재, 1971, p.67 조효순, 한국 복식 풍속사 연구, 일지사, 1988, p.402. 아모스 헤어컬렉션, 1999. 유희향, 한국복식문화사, 교문사, 1982, p.280. 이규태, 이규태의 역사에세이, 조선일보, 1999.4.23, 23 면. 한국미용신문, 미용정보신문사, 1999.3.4, 제157 호, 10 면. 황희순, 미용학개론, 청구문화사, 1997, p.11. 北 史, 卷 九 十 四, 列 傳, 百 濟 項. 隨 書, 卷 八 十 一, 列 傳, 第 四 十 六. 周 書, 卷 四 十 九, 列 傳, 百 濟 項.
헤어스타일의 변천에 관한 연구( 권대순) 21 A Study on the history of Korean hair style by Kwon dae soon Department of hair design The relationship between culture and life style of human being and hair is distinctively aware by experiences and events of the history. Further the hair art can be expressed through other sources such as political ideology, religious doctrine, sense of value, and ethics. The hair art is one of most expressive cultures which can show a society and common life style because the concept of beauty in certain period or culture strongly influence the hair. In this regards, this thesis selects a process of change of the hair style as a subject and aims at analyse the hair style, based upon paintings, pictures, and various references of a target period. Prior to the main subject, the period is necessary to be divided into an ancient, a middle age, a modern age, and a present. The characteristics of each age are as follows: The hair of the Ancient age, according to Pyeonbal in the Tangun mythology demonstrates that an interest of hair was common and prevalent. In the era of Three Kingdoms, the hair style was shown by records and old tombs. There were a variety of hair styles such as the Eonzun hair-style, Chogzin hair-style, Pungimyeong hair-style, Mugeun-jungbal hair-style, and Ssangsangtu hair-style in Koguryo dynasty which were found in many wall paintings of old tombs. In accordance with records of the Buksa and Juseo, married women divided their hair into two parts and single women braided hair in the Baekje dynasty. Further, some documents of China witnessed that the art of Gache in the Silla dynasty, fairly estimated was exported to China. In the early stage of the Koryo dynasty, the hair style of the Silla was generally inherited, but people followed a pigtail hair-style under the an assimilative policy of the Y?n dynasty after the Koryo, 18th years of the King Gojong was surrendered to the Mongolia. In the Chosun dynasty, the Chogzin, Pungimyeong, Braided, Mugeun-jungbal and
22 公 州 映 像 情 報 大 學 論 文 集 第 Ⅶ 輯 (2000) Ssangsangtu hair had been inherited since the Ancient age. However, Gache with Eonzun hair became popular in the middle of dynasty. Finally, Gache was prohibited because it caused problems of Gogye. In the civilized period in 19C, an Eonzun, Chogzin, Pigtail Ribbon hair-style were continuously general, in the mean time a new trial of Pampdoor, Pompadour was sometimes made. In addition, a Tre hair, a Cheopsi, hair were looming up a popular style during the Japanese imperialism. A shoulder length hair, also boomed in this period made a new word of Modern Girl. After independence in 1945, a perm hair which had been limited since inception became widely spread and women preferred Uchimaki (inner curling) and Sodomaki (external curling). A short cut hair-style adapted by Audrey Hepburn in the Roman Holiday started attracting young women Rapidly growth of the national economy and distribution of TV encouraged women to have a strong interest of beauty and search for unique characteristics in 1970s. A beggar cut and a shoulder-length mushroom cut were spreading and men started a long or perm hair style or both through the trend of a unisex. In 1980s, a wide variety of cutting style with scissors, razor, and clipper expressed kinds of touch and a straight perm, started in 1984 influenced school girls and young housewives because this hair-style can stress a volumed touch of natural hair and easily take care of making waived hair straight. Recently, a dyed hair-style and colored coating perm has been popular and in order to express characteristics strongly, regardless of age. More importantly, the collective hair care system to take a good care of skin of head and hair has been adapted so widely that new information, and specialized system are updated consistently. In 21st century, hair art will not only free from convention or formal styles, but pursue creative characteristics including enhancement of antinomy which coexists simplicity and variability. Mentioned above, a brief history of the hair art is introduced. Definitely to say, a vogue reflects culture and tradition of each period and the present hair art, one of important portions of culture faces globalization which facilitates simultaneous fashion between the East and the West through development of internet and telecommunication. Therefore the Korean hair art will be globally recognized if our traditional hair art is harmonized to the modern concept with recreativeness and develop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