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篇
1 19세기 이전
한 을 만 나 다 역사상에 중과 은 로 다른 각각 근원을 가지고 있지만 완전히 다른 길 을 걸어온 것은 아니다. 17세기 이전 중은 여러 가지 유사한 발견과 발명이 있어왔 다. 예를 들어 한대 장중경 (약 142-210)은 목적 1) 이라는 본초를 효천증 을 치 료하는데 사용하였는데, 이는 에 마황(ephedrine)을 사용한 것보다 1700년이나 앞선 일이다. 2) 그리고 명대 장개빈 (1543-1640)은 당시 해부지식과 자신 추론에 근거하 여 심장 작용이 마치 풀무 3) 와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영국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 1578-1657)가 1628년 <동물 심장과 혈액 운동에 관한 해부적 연구>라는 논 고를 발표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것과 거 동시대 일이다. 4) 또한 천연두를 예방하는 인 두술 경우 에 출현이 중국에 비해 늦었기 때문에 많은 자들이 아마도 중국 에부터 기원했을 것이라고 본다. 중 역사에 눈여겨 볼 점은 유럽에 르네상스를 전후로 구 자연과 발달 하고 근세 이 일어나 19세기까지 발달하여 현대 이 되었다는 것이다. 중국 본토에는 르네상스에 비견할 만한 과 혁명은 없었지만, 괄목할 만한 성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6 세기 이시진 (1518-1593)은 본초를 백과사전식으로 정리한 <본초강목 >을 저작하여 중 역사에 크게 자리매김 하게 했으며 이는 매우 뛰어난 술 성과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명청대 500년간 중은 구 과에 비견할만한 지식 혁신이 거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청대에는 온병설 이 나왔으나 이는 장중경 <상한론 >에 부분적 으로 도전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이 시대에 찾아보기 힘든 발전 중 하나이다. 5) 본 1장과 2장에는 중 만남과 그 이후 발전에 대하여 토론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하기 위해 19세기 이전 중 각각 역사를 술하고자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본 책에는 중을 대조하여 비교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어떤 자들은 중과 으로 나누는 이분법이 사실 청대 말에 이르러야 제기된 것이라 주장한다. 6) 사자인 폴 운슐트(Paul Unschuld)도 역시 중국 전통은 다원화에 바탕을 두는 것이므로 빠른 시일 내에 통일된 하나 이론을 형성하는 것이 꼭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라고 지적하였다. 7) 따라 중 역사와 현대화에 대하여 논술할 때에 중은 정체관 이며, 은 환원론 이다. 와 같이 추상적으로 도식화하는 것을 지하고, 함부로 단순화하여 잠재되어 있는 중요한 내용을 놓치는 것을 피해야 할 것이다. 1) 저자 주 : horsetail, 즉 목적마황, ephedra equisetina 2) <Timetables of Medicine>, p21 3) 역자 주 : 불을 피울 때에 바람을 일으키는 기구 4),, < >, p.104 5) < >, pp.127~131, 185~189 6), < >, p.75;, < >, p.95 7) p.unschuld, <Medicine in China - a History of Ideas>, pp.1~2 4
근원 Origins of Western Medicine 현대 근원은 16-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르네상 스 시기 벨기에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 1514-1564) 인체해부과 17 세기 영국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 1578-1657) 순환생리을 가장 확실한 근원으 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 열거한 르네상스 시대 과 발전 이전으로 거슬러 올 라가 보면 대략 2세기 로마 갈레노스(Galen of Pergamum, 131-201)와 그보다 앞선 고대 그리스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of Cos, 약 BC460-BC377)를 들 수 있다. 히포크라테스는 아버지 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대강과 술 연구 방 법을 세운 공헌으로 말한다면 갈레노스를 진 실로 기초를 닦은 사람이라 해야 할 것이다. 히포크라테스에 관련하여 폴 운슐 트는 히포크라테스가 살았던 시대는 중국 전국시대 와 같으며 이는 중 기틀 을 다진 경전인 <황제내경 >(이하 <내경 >)에 약간 앞선 것이다. 고 하며 8), <내경> 에 황제 와 함께 도 를 논하는 기백 에 대해 기백( :[Qi-Bo]) 고대 발음은 히포크라테스 줄임말인 Hippo[히포]와 유사 하니 만약 기백이 바로 히포크라테스라면 제 1 장 19 세 기 이 전 고대 그리스 시대에 아버지 라 불린 히포크라테스 (Hippocrates of Cos). 온화한 치료방법을 주로 활용하였으며 평 형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이는 중 사유방식과 사뭇 통한다. 8) 저자 주: <황제내경 >은 주로 한 (BC206-AD8) 시대 이전 300여 년 동안 여러 다른 파들 설을 포함하는 저작이다. 5
물, 불, 공기, 흙 사원소이론. 중 오행과 통하는 측면이 있다. 한 을 만 나 다 이 어찌 중사와 사가 술을 토론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 아니겠는가? 라 하였다. 9) 이는 물론 우스갯소리이지만, 실제로 히포크라테스 설과 고대 중에는 확실히 적지 않은 공통점이 있다. 히포크라테스 생리은 체액설(Humour)을 기본으로 하고 건강 평 형 상태는 혈액(blood), 점액(phlegm), 황색 담즙(chole), 흑색 담즙(melancholia) 내 적 조화와 평형으로써 결정된다고 하였으며 이들이 평형을 잃으면 병을 얻게 된다고 하였다. 그는 생명 기, 즉 영기 (pneuma)가 좌심실에 나와 동맥이 이를 싣고 운반한다는 사 실을 알았으며 혈액은 곧 간에 생성되어 우심실에 들어간 후 온후 되어 다시 정맥을 거 쳐 전신으로 분포된다고 인식하였다. 여기 혈 과 기 두 개념은 중에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히포크라테스 은 질병 자연적 전변 과정(natural course)과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일지를 예측하는 것에 중점을 두어 설명하고 있다. 그는 온화한 치료 방법으로써 심신 자연 치유력을 도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또한 네 종류 체액과 불, 물, 공기, 흙 만물 4원소 철적 사상이 로 결합될 것이라고 했으며, 치료 상에 조, 습, 한, 열 평형을 추구하고자 하였는데 이러한 모든 사유 방식은 중과 로 통하는 부분이 있으며 오히려 현대 과 공통점보다 더 많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부터 로마 초기에 이르기까지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Alexandria)가 바 로 중심지였다. 이곳은 그리스와 이집트 문명이 모이는 곳이었으며 각종 파가 9) p.unschuld, <Chinese Medicine>, p.12 6
생겨나는 곳이었다. 그 파들 중 경험파(empiricist)는 히포크라테스 모순적이고 근거 없 는 사변을 반대하고 폐기하고자 하였으며 치료 근본을 구하기 위해 관찰과 경험을 중 시하였다. 이들은 경험을 중시하고 사변적인 사상을 반대한다는 면에 현대과 유사하다. 하지만 경험파는 소박한 관찰에 만족할 뿐 그 병인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인체 해부에 반대 했는데, 이 점은 현대 과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10) 그 외에도 저명한 자인 아스클 레피아데스(Asclepiades, BC120-BC70)도 히포크라테스 4원소설과 체액설을 공상이라고 비판하여 조금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히포크라테스 기 혈이론(vitalism)을 자연적 목적론 (teleology)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비웃었다. 아스클레피아데스는 기계론적 생물관을 따랐으 며, 원자는 체내에 운동한다. 는 가설을 제기하며 기계원리로써 생리 현상을 해석하였다. 그는 히포크라테스 은 사변철에 기초하고 있으며 공상적인 생각이 너무 많아 전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겼다. 11) 로마 시대 자들 가운데 셀스(Celsus)는 사는 아니 었지만 넓은 식과 사상가 통찰력으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 이집트 각 자들 장점을 결합하여 가치 있는 임상 지식이 어디에 있는지 판단하였다. 12) 그는 철을 완벽하게 이해하였지만 사변적인 것을 논하지 않았으며 부화뇌동하지 않았다. 그는 염증 4대 증상인 열 (calor), 홍 (rubor), 통 (dolor), 종 (tumor) 을 가장 먼저 발견하였으며, 아울러 외과 수술을 할 때는 반드시 실혈 을 잘 막아야 함을 강조했다. 13) 셀스는 전 인 <논 (Dere medicine)>을 저술했으나 이 책은 중세에 전해지지 않다가 르네상스시대 에 이르러 겨우 플로렌스(Florence)지방에 새로 재발견되어 세상에 간행되었다. 제 1 장 19 세 기 이 전 10), < >, p.29 11),, pp.34~36 12) Arturo Castiglioni,, < >, pp.260~200 13) Lois N. Magner, <A History of Medicine>, pp.85-86 7
갈레노스 세계 The World of Galenic medicine 한 을 만 나 다 르네상스 이전 중세는 갈레노스 이 거 유일하게 권위 있는 이었다. 갈레노스는 그리스와 로마 을 집대성한 인물이며 후세 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그 저작은 이 방대하며 전면을 다루고 있을 뿐 아니라, 해부, 생리, 발생 등 과 같이 구분되어진 현대 분야도 대부분 그가 확립한 것이다. 갈레노스는 21세가 되기도 전에 자궁해부 등 전문적을 출판하였다. 또한 그는 동물을 해부했을 뿐 아니라 생리 실 험을 처음 실시하여 현대 이 정밀한 과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은 현대 적으로 옳은 것도 있고 그른 것도 있으나 그 모든 것들은 1000여 년 동안 자 들 사상을 주도해 왔으며 후세 자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갈레노스는 자부심이 너무 강하여 외로운 천재였으나 히포크라테스에 대해만은 매우 존경하였다. 그가 이처럼 히포크라테스를 숭 상했기 때문에 후대 자들이 히포크라테 스를 아버지라고 존칭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14) 비록 해부이 갈레노스로 부터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가 처음으로 해부에 정통했던 것은 아니다. 그와 동시대 혹은 심지어 그 이전 고대그리스에도 해부 연구는 있어왔으나 그는 이를 일종 종교처 럼 그 정신을 경건하게 다듬은 것이다. 그가 말하기를 생물을 죽이고 신에 제사지내며 향 을 태우고 초에 불을 붙이는 이러한 것들이 2세기 로마시대 갈레노스(Galen of Pergamum)는 그리 스 로마 을 집대성한 인물이자, 해부 창시자이다. 14) Lois N. Magner, <A History of Medicine>, p.93 8
갈레노스 해부이 동물시체를 통해만 이루어지기 는 했지만, 인체를 직접 해부해왔던 고대 그리스 자들보다 지식 수준이 깊었다. 그림은 1946년 사가 찰스 싱어(Charles Singer)가 연역한 갈레 노스 해부도. <인체 구조(De humani corporis fabrica)>에 실려 있는 근육구조도 모두 조물주를 경외하는 것과 같을 수 없으나, 오 히려 한층 한층 해부를 하면 조물주 오묘함을 보게 될 때 비로소 경외감을 바로 지니게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종교적인 마음으로써 지식을 깊게 탐구하고, 현대과 즉 생리과 수으로부터 종교적 세계 장엄한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으니 이 모든 것이 하나로 합쳐지게 되는 것이었다. 로마 시대부터 사람들이 천주교를 믿기 시작함 에 따라 인체 해부가 금지되었고 이로 인해 갈레 노스 해부은 다른 동물 시체를 사용해야만 했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제한 속에도 그 지식은 인체 해부를 직접 했던 고대 그리스 자들을 넘어섰다는 것이다. 갈레노스 에 는 오직 해부가 생리 연구 기점이 되고 있다. 그는 히포크라테스 시대 대부분 자들이 주 장하는 동맥은 기 (pneuma)를 나르고, 정맥은 혈 을 나른다. 는 이론은 분명히 시체를 해부했 을 때 혈액이 없는 빈 동맥을 보고 판단했을 것 이라는 심을 품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갈레노 스가 한 실험은 매우 간단했는데 동맥 끝을 결 찰하고 중간에부터 신선한 피가 나오도록 하여 살아 있는 동맥에는 결코 빈 공간이 없음을 증명한 것이었다. 이는 이후 실험 생리 본보기가 되었다. 갈레노스는 스스로가 히포크라테스 체액설과 조, 습, 한, 열 사상을 계승했다고 생각했 다. 예를 들면, 한 한 성질 약은 열 병을 치 료하는 데에 사용하고, 한 병을 치료하는 데에는 곧 열 한 성질 약을 사용하는 것이다. 표면적 으로 보면 히포크라테스 이 더 평형을 중시했 지만 치료 측면에는 갈레노스가 히포크라테스 보다 더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히포크라테스 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 것 중에 첫 번째 규율 은 해 를 입히지 말 것(First, do no harm) 이 다. 환자 자체 생리적 평형을 조금만 조절하면 제 1 장 19 세 기 이 전 9
충분히 스스로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갈레노스가 사용한 갈레노스 처방(Galenicals)에는 복합처방이 많으며 각 처방은 20여종 약으로 구성되어 있고, 효과가 강했다. 15) 임상에도 갈레노스는 그리스 자들 정맥방혈술 (phlebotomy)을 계승했으며 이는 복잡한 체계로 발전하여 거 모든 병에 사용하는 치료법이 되었다. 이후 그 추종자 들은 이 방혈술을 수백 년 동안이나 남용해왔다. 갈레노스 잘못된 부분은 르네상스시기에 이르러야 수정이 가해지기에 이르렀다. 이는 르네상스 시대 정신, 즉 이성비판, 실험정신, 불신권위 등과 유관했다. 갈레노스 패권 은 베살리우스와 파라켈수스(paracelsus, 약 1493-1541)라는 개혁적인 두 인물에 해 무너지게 되었다. 그 중 베살리우스가 28세 때 발표한 <인체해부(De humani corporis fabraica)>과 <인체해부강요(Suorum de fabrica corpris humani librorum epitome)>는 갈레노스 해부 그림에 마침표를 찍는 사건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근본에부 터 천여 년 간 이어져온 갈레노스 권위를 뒤집어주었다. 16) 스위스인 파라켈수스는 박다식하며 창조성이 뛰어난 약물자이자 화자로 후세로부터 약물 아버지 로 불린다. 그 성격은 불같고 오만했으며 베살리우스와 함께 연구한 해 부생리자들과도 많은 부분 달랐다. 파라켈수스는 일찍이 갈레노스와 기타 고대 가 저작에 공개적으로 불지름으로써 전통과 결별을 선언했다. 게다가 그는 대대적으로 전통 라틴어 저작들을 폐기하고 독일어로 통용하도록 하여, 지식이 널리 퍼질 수 있게 하였다. 한 을 만 나 다 파라켈수스(Paracelsus) <대외과(Great Surgery)> 중 삽화. 그림 왼쪽에는 다리절단 수술을, 오른쪽에는 두개 수술을 하고 있다. 15) Lois N. Magner, <A History of Medicine>, p.71 16), < >, p.85 10
제 1 장 19 세 기 이 전 안드레아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 인체해부은 현대 사 명확한 지표가 된다. 그림은 베살리우 스 <인체 구조(De humani corporis fabrica)> 속 표지에 나온 것을 그 지인 스티븐 카르카가 조각한 것. 11
급속히 발전하는 현대 과 Booming of Modern science 한 을 만 나 다 16~17세기는 자연과이 급속히 발전하는 시기였다. 베살리우스 <인체해부>과 당시 정설이었던 천동설 을 뒤흔든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 지동설은 같은 1543년에 발표되었는데 이 두 가지 새로운 설은 기존 설을 매장시키고 각각 과 신기원을 열어갔으며 각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1665년에는 뉴턴(Sir Isaac Newton, 1642-1727)이 만유인력 법칙을 발견했다. 이 1543년부터 1665년까지 100여 년간 천문 및 생리 분야에 새로 제기된 설은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이며 그 중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가 연구한 만유인력과 그가 발명한 천체망원경은 과사 이정표가 되고 있다. 갈릴레이는 자는 아니었지만 그 발명으 로 은 완전히 새로운 연구 분야를 열게 되었다. 1610년 연구에 응용할 수 있는 첫 번째 현미경을 설계해냈던 것이다. 이탈리아 자 인 말피기(Marcello Malpighi, 1628-1694)는 이 현미경을 생물과 해부 경계 안으로 끌 어들여 닭 배태 형성과 신장 내 작은 소구조직 을 관찰해냈다. 현미경 응용은 기초를 인체 해부로부터 세포생리 및 세포병리 차원으로 이동시킴으로써 18세기 병리이 이로 말미암아 급속히 발전하는 계기 가 되게 하였다. 17) 19세기 헨리(Jacob Henle, 1809-1885)는 현미경을 임상에 응용한 가장 17세기 이탈리아 자 말피기(Marcello Malphghi) 는 현미경을 생물과 및 해부 경계로 끌어 온 선구자이다. 17), < >, p.149 12
중요한 인물이다. 신장 미세해부에 말피기소 체(Malpighian body)와 헨리 루프(Loop of Henle) 발견은 이 두 인물로 하여금 자로써 명성을 얻게 하였다. 18) 19세기에 이르러 술 중심지는 르네 상스가 일어났던 이탈리아부터 기타 유럽 국가들까 지 확산되었는데 그 중 프랑스와 독일이 현대 중심이 되었고 더욱이 실험 연구 방면에 있어 는 이 두 국가가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다. 프랑스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5)는 끈기 있게 세균과 방역 접종 분야를 연구하였다. 한편, 독일 코흐(Robert Koch, 1843-1910) 19) 는 세균 기 준을 만들었는데 이는 표본 고정법과 염색법, 현미 경 촬영법과 세균을 병원체 필수조건으로 삼는 것 을 포괄하였다. 20) 또한 코흐 동료 피르호(Rudolf Virchow, 1821-1902)는 세포생리과 세 포병리을 집대성하였다. 그는 세포를 인체 구성 기본 단위로써 명확히 수립하도록 제기 한 과자이며 생리와 병리 변화 근본은 모두 세포 기능 차원에 있다고 확신하였고, 더불어 그에 상응하는 형태 변화도 함께 관찰할 수 있 다고 하였다. 21) 또한 임상 방면에 있어는 베를린, 비엔나, 런던 역시 떠오르는 중심 으로 자리매김 하였다. 미생물과 전염병 연구는 19세기 공중보건 개선 기초가 되었다. 중과 이 19세 기에 로 만날 때 중이 맞게 된 도전은 무엇 보다도 먼저 이 분야에 있어였다. 22) 16세기 벨기에 안드레아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는 갈레노스파에 종지부를 찍었다. 현미경은 19세기 초 임상과 병리 관찰에 응 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림은 1845년 즈음에 만들어진 파시니 복식현미경(Pacini compound microscope). 현미경과 화적 방법은 (세균, 세포 병리) 새 분야를 열었는데, 이는 중요한 두 개 획을 그었다. 하나는 이 미시 제 1 장 19 세 기 이 전 18) E H. Ackerknecht,, < >, p.77 19) 저자 주: 그는 파스퇴르와 헨레 생이었다. 20) 저자 주: 이것이 곧 코흐 가설(Koch's postulates)이다. 이 책 마지막 장에 다시 논하겠다. 21), < >, p.140 22) 저자 주: 본 책 제 3장에 논할 것이다. 13
한 처음으로 세포를 인체 기본 구성단위로 정한 독일 과자 루돌프 피르호(Rudolf Virchow). 을 (micro) 연구 길로 들어게 한 것으로 20세기에는 분자생물과 유전자 연구 지평에까 만 지 진입하게 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연구와 기타 문과 신지식을 결합하여 나 문이 발전해 나갈 수 있는 역량을 키울 수 있게 한 것이다. 이 두 가지에 대해 본 뒷부 다 분에 다시 중요하게 논할 것이다. 다음 장에는 먼저 중 19세기 이전 역사를 훑어보도록 하겠다.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