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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이전존안 札 移 電 存 案 의정부가, 1894년 8월 10일에서 1896년 1월 21일 사이에, 도찰원 都 察 院 에 보낸 찰위 札 委, 학무아문 내무아문 탁지아문 등에 보낸 공이 公 移, 각 감영에 보 낸 전기 電 奇, 각지 감사에 보낸 조회 照 會, 각 감영 감사에 보낸 전문 電 文 그리고 각 감영 감사로부터 의정부로 온 전문 電 文, 주한일본공사 등이 의정부에 보 낸 전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전보를 모은 책이다. 각지에서의 동학농민혁명 관련 사실이 풍부하게 기술되어 있고, 특히 공 주전투 패배 이후의 전봉준의 동정, 농민군의 거괴 巨 魁 들이 체포되는 상황이 자세하며, 청일전쟁 관련 사실도 많이 기술되어 있어서, 동학농민혁명 연구 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398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찰이전존안 札移電存案 1894년 [甲午] 8월 [八月] 초 10일 도찰원1) 주사都察院 主事 손장현孫章鉉에게 편지를 보내니 먼저 경 상도에 가서 본부本府의 도헌都憲 이李를 도와 선무宣撫하는 일을 처리하라. 반 드시 이 편지를 수취인이 받아야 한다.2) 17일 학무아문學務衙門에 공이公移3)를 보냅니다. 귀 아문衙門의 수리가획비 修理加劃費, 더 책정된 수리비용와 학교의 역비役費는 저번에 귀 아문의 대신에게 요청 하여 기무처機務處, 군국기무처4)에서 의논이 되었습니다. 기무처에서 그 의정議定 의 권한을 모두 정부政府, 의정부에 돌려주게 될 것인데, 지난날의 관문關文, 공문이 1) 도찰원(都察院) : 1894년 의정부에 둔 관아로 모든 관원의 잘잘못을 규찰하는 임무를 맡 았다. 곧 종전의 사헌부를 고친 이름이다. 도헌은 도찰원의 책임자로 대사헌과 같다. 2) 수지찰자(須至札者) : 편지를 받아야 할 사람이 그 편지를 반드시 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 한다. 3) 공이(公移) : 동급의 관아사이에 보내는 공문을 말한다. 이문(移文)이라고도 한다. 4)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 : 갑오경장을 추진하였던 최고 정책기관을 말한다. 1894년 7월 27일부터 12월 17일까지 존속하였다.

찰이전존안 札移電存案 399 많은 일에 관계되니 바로 되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19일 도찰원 주사都察院 主事 김명호金明鎬에게 편지를 보낸다. 유학幼學 공재 성孔在聲을 대동하여 먼저 영영嶺營, 경상 감영 등지에 가서 백성들의 고충을 채집 採集하고 지나가는 각 관아에 조사할 사건이 있으면 이 서찰을 지방관에게 보 여주어 협조를 구해 일이 어긋나지 않도록 하라. 반드시 이 편지를 수취인 이 받아야 한다. 20일 도찰원 주사都察院 主事 정재관丁在寬에게 편지를 보낸다. 관서선유사關 西宣諭使 조趙5) 아무개를 수행하여 일을 도와 처리하라. 반드시 이 편지를 수취 인이 받아야 한다. 23일 전보電報로 경상감사에게 기별을 한다. 영해寧海 <부사를> 교체하고 후임으로 신태휴申泰休를 임명하니 속히 중군中軍, 경상감영 중군 신태휴을 부임하게 하고, 그 후임을 자벽自辟, 장관이 자기 뜻에 따라 아래 관원을 추천하여 임명하는 것하여 보고 하라. 26일 내무아문 낭서6)內務衙門 郎署에 공문을 보냅니다. 삼가 말씀드릴 것 은, 경무청警務廳의 경비로 부족한 돈이 5,000원이라고 했기 때문에 우선 각 부아府衙의 8월 연봉조捐俸條, 봉급로 본부本府에 보관하고 있는 돈이 2,690원이 고, 귀 아문의 연봉으로 잉류조仍留條, 계속 보관하고 있는 돈가 310원이어서 모두 합 하면 3,000원이 되는데, 떼어 보내려고 합니다. 경무청에 관칙關飭, 관문으로 지시 5) 관서선유사(關西宣諭使) 조(趙) : 이름은 희일(熙一)이다. 전보문이어서 이름을 생략한 것이다. 6) 낭서(郎署) : 종래 낭관(郎官)과 실무 책임자를 말한다.

400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하다하여 가져가도록 하는 것이 타당하리라 여겨집니다. 이런 연유로 삼가 이문移文을 합니다. 탁지아문 낭서度支衙門 郎署에 공문을 보냅니다. 삼가 말씀을 드릴 것은, 경무 청警務廳의 경비로 부족한 돈이 5,000원이라고 했기 때문에 각 부아府衙의 8월 연봉捐俸으로 본부에 보관하고 있는 돈 3,015원 중에서 15원은 우선 본부에 남겨두고 3,000원을 우선 떼어서 주었습니다. 나머지 2,000원은 다음 달에 다시 조치할 방도가 있을 것이니 이것을 헤아려주시기를 바랍니다. 귀 아문 의 문부文簿, 장부에 8월 달 각 부아府衙의 연봉捐俸 3,000원을 정부政府, 의정부에 가 져왔으니 귀 아문에서 경무청에 떼어 보냈다는 뜻을 명백하게 적어 놓는 것 이 타당하리라 여겨집니다. 이런 연유로 삼가 이문移文을 합니다. 29일 영영嶺營, 경상감영이 보내온 전보에, 지금 용궁龍宮의 보고에 의하면, 동도東徒 수 천명이 읍내에 들이닥쳐 무기고를 부수고 군기軍器를 빼앗아갔 다 고 하니 매우 놀랍습니다. 잃어버린 무기가 어느 정도인지와 저들의 주 둔여부는 애초에 상세한 보고가 없어 우선 교졸校卒을 보내 인근의 각 읍들을 정탐하여 더욱 방비를 하고, 다른 한편으로 추격하여 체포하도록 감결甘結로 지시하였으니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27일 해시亥時, 오후 9~11시 용궁에 전보로 회답하기를, 동도東徒의 소요가 놀랄만하다. 더욱 읍과 진 鎭에 지시하여 그들을 체포하고 다시 보고하라 고 하였다. 그믐 9월 [九月] 초 7일 기영箕營, 평양 감영이 보내온 전보에, 안주安州 목사와 우후虞候도 관 아를 비웠습니다. 고 하였다.

찰이전존안 札移電存案 401 초 9일 영영嶺營이 보내온 전보에 동도東徒 몇 백명이 성주星州에 들어올 것이라고 하여 이교吏校와 민정民丁의 방비가 매우 치밀하니 근심이 없을 만합 니다. 그러나 그저께 자시子時, 오후 11시~오전 1시에 해당 수령이 <그들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겁을 먹어 영내營內로 몰래 피하니 방비를 하던 아전과 백성이 점차로 흩어져버렸고, 저들이 몰려와서 끝내 지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지 금의 사정은 아직 듣지 못해 송구스럽고 울적합니다. 소식을 듣는 대로 장 관將官, 초관 이상의 무관을 보내 우선 정탐을 하고, 한편으로 물러나서 <일을> 도 모하여 다시 병사를 보내어 그들을 토벌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중군中軍이 데려간 병사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인근의 개령開寧과 김산金山 등지의 읍 도 모두 자체적으로 방비하고 있어 병사를 징발하기가 어렵습니다. 매우 손 쓸 도리가 없습니다. 이후의 형편은 계속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전보를 보내는 것이 매우 어려워서 늘 중도에 지체되어 걱정스럽습니다. 라고 하였다. 8일. 초 10일 기영箕營, 평양 감영에서 보내온 전보에, 4개 읍의 관아가 빈 것은 저번에 전보로 말씀을 드렸으나 아직 보지 못한 듯합니다. 기윤箕尹, 평양감사은 죽었고, 숙천肅川수령은 관인官印을 버리고 도망을 갔습니다. 강동江東 성천成川 상원祥原 영변寧邊 안주安州와 우후虞候도 관아를 비웠습니다. 정주定州 이북의 수령들에 대해 아직 상세히 알지 못하나 사정이 매우 급박하여 묘당廟堂의 처 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신印信이 없어 계啓를 쓰지 못하여 송구스 럽습니다. 라고 하였다. 20일 영영嶺營에서 보내온 전보에, 지금 사천泗川 향리의 문장文狀7)을 보 7) 문장(文狀) : 공형(公兄)과 아전 등이 본관(本官) 또는 타관(他官)에게 보고하는 문서를 말한다.

402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니, 13일에 곤양 昆 陽 과 하동 河 東 등지에 주둔한 동도 東 徒 가 묵패 墨 牌, 문서를 만들 고 공형 公 兄 을 잡아갔습니다. 군량 軍 糧 이라고 하며 많은 쌀과 돈을 가져갔고, 또한 무수한 사람들이 남문 南 門 에 들어가서 해당 수령을 위협했으나, 아전과 백성이 대항하여 머무르지 못하고 갑자기 중도 中 途 에 와서 화를 모면하려고 5,000명과 500명으로 표 票, 문서를 만들어 돌아가기를 간청했다고 합니다 라 고 하였는데, 날로 불어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곳곳마다 이와 같은데, 비록 읍과 진에 그들을 추격하여 잡도록 엄중히 지시한다고 해도 이것은 실제로 거행할 수가 없습니다. 잘 타일러서 그만두게 할 수가 없으니 매우 근심스 럽습니다. 깊이 헤아려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20일. 24일 영백 嶺 伯, 경상감사이 보내온 전보에, 안의 安 義 수령 조원식 趙 元 植 이 제 법 역량이 있어 인근의 백성도 모두 유임하기를 바라며 이 수령이 아니면 호비 湖 匪, 호남의 동학군의 침입을 막을 수 없다고 합니다. 비록 그 시종 始 終 이 어떤 지는 알 수가 없더라도 여론이 이와 같습니다. 안의와 함양 咸 陽 은 남원 南 原 과 경계를 접하고 있어 가장 근심스러운 곳입니다. 그리고 함양수령은 아직도 부임하지 않고 있어 안의 수령이 이곳을 겸임하기로 정했는데, 이것도 함양 의 백성이 바라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안의 수령이 임시로 다스린다면 <그 곳을> 방어하고 <그들을> 토벌할 방법이 있으며, 더욱이 이웃 읍에 영 향이 있기 때문에 말씀을 드립니다. 헤아려서 재가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라 고 하였다. 23일. 25일 영백 嶺 伯 의 전보에, 부산 감리서 監 理 署 8)의 전보에, 어제 외무아문 의 전보를 받았는데, 부산의 일본군이 하동에 파견되었는데, 일본 영사 領 事 도 8) 감리서( 監 理 署 ) : 조선말기에 개항장에 설치되어 행정과 대외관계의 사무를 맡아보던 기 관을 말한다.

찰이전존안 札移電存案 403 가기에 우리 감리監理, 감리서의 관리도 함께 가는 것이 마땅하여 현재 등정等情, 공문 이 재가되어 영사와 담판을 하였다 고 하였습니다. 진주 등지는 동도東徒가 창궐하여 매우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내일 새벽에 먼저 항구에 있는 150명 의 병사가 출발하는데, 우리에게 서기書記 3명과 서예署隸 및 모군募軍, 모집한 병사 100여명을 파견하여 함께 동행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영사는 사태를 보 았다가 나중에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통영統營에 빠르게 이문移文을 하니 바 로 병사를 조달하여 성화같이 진주에 오게 하면 함께 토벌하리라 여겨집니 다. 그러나 길이 멀어 왕복하는데 많은 날이 소요되어 일을 거행하는 것이 자연히 지체되어 근심스럽습니다. 잠시 전보에 의지하여 <소식을 전하니> 헤아려주시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24일 신시申時, 오후 3시~5시. 10월 [十月] 초 4일 영백嶺伯이 보내온 전보에, 내일 통곤統梱9)에 밀부密符를 주어 신 속하게 나아가라는 일은 하교下敎에 따라 거듭 지시하였습니다. 비도匪徒가 아직도 귀화하지 않고 일정함이 없이 모였다가 흩어지니 근심스럽습니다. 여러 읍들 중에 영향력이 있는 사람과 요호饒戶에게 군량을 운반하는 일은 빨 리 각 읍에서 탐문하여 정하도록 하겠으나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만약에 그 힘이 아니면 도리어 빌미만 더 해질듯하여 미리 근심스럽습니다. 부산의 감리는 애초에 가지 않았고 서기관書記官이 대신 갔다고 합니다. 군량 을 공급하는 데 기미를 보아 주는 일은 이미 토포사討捕使와 각 읍에도 지시하 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3일. 초 10일 일본 공사公使의 편지 9) 통곤(統梱) : 경상도 통영에 둔 삼도수군통제사영의 약칭이다. 곧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의 수군 최고 사령부이다.

404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삼가 말씀을 드릴 것은, 남부병참감 南 部 兵 站 監 의 품보 稟 報 와 공주 公 州 에 파견된 우리 병사들의 보고에 의하면, 아산 牙 山 과 면천 沔 川 의 각 지역을 순찰할 때에 마침 예산 禮 山 에 청나라 사람 몇 명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곳에 가서 조사 를 하였더니 며칠 전에 종적을 숨겼고 그들은 일정한 주거가 없이 각지를 배회한다 고 하였습니다. 그 후에 정산현 定 山 縣 과 3리 三 里 되는 어떤 마을의 정 평사 定 平 寺 에 청나라 사람 30명이 숨어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모두 아산의 일에 관계되어 나중에 와서 숨은 듯합니다. 우리나라 달력으로 9월 20일에 일본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공주를 향해 도망을 가서 현재 그 절은 텅 비어 한 사람도 없었고, 바로 공주에 달려가서 조사를 하였더니, 9월 20 일 이후에 정말로 청나라 사람 7명이 곧바로 공주의 관아에 들어가서 창을 가지고 관장 官 長, 수령을 위협하며 2,000 금 金 을 빌려달라고 협박을 했으나, 해 당 관장이 따르지 않고 도리어 그들의 흉기를 빼앗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모두 도망을 갔는데, 그 7명 중에도 병사 2~3명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7 명도 정산에 숨은 한 패와 관계가 있는 듯합니다. 전라도로 도망친 실정을 대략 살펴보니 그 조사에 따르면 그 청나라 사람들은 일정한 거처가 없고 일정한 일도 없이 종적을 숨겨 끝내 유민 流 民 이 될 것입니다. 만약에 조사하 여 잡아 단속하지 않는다면 실제로 지방의 해가 될 것입니다. 지금 남쪽의 각 지역에 비도의 불꽃이 창궐하여 약탈한다는 소식을 제법 듣고 있는데, 지방에서는 관용 官 容, 관군이 궤멸을 당하고 군민 軍 民 이 배회하며, 여염 閭 閻 에서 는 지탱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허물이 늘어가니 실 제로 귀국과 우리사이의 동맹의 취지에 어긋납니다. 편지의 요청에 상응하 여 귀국의 대신이 처리하여 통행 通 行 을 가지런히 정돈하고 각 해당 지방관이 착실하게 조사해서 <그들을> 반드시 잡아 지방이 그것에 의지하여 안정되 며 아울러 공평함을 밝게 드러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노우에 가오루 井 上 馨, 일본 공사. 우리나라 달력양력으로 11월 6일.

찰이전존안 札移電存案 405 11일 삼가 말씀을 드릴 것은, 이번에 비도를 토벌하기 위하여 우리 대 대大隊를 3 갈래로 나누어 보내려고 합니다. 먼저 미리 가서 각 도에 비도가 모여 있는 곳을 조사하는 것이 긴요합니다. 그래서 귀 대신에게 요청하니 조趙 서리군무대신署理軍務大臣에게 부탁하여 본서本署에 와서 자문에 응해주시 기를 바랍니다. 이만 줄이며 대감의 복을 기원합니다. 백작伯爵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일본 공사 올림. 우리나라 달력양력으로 11월 9일 삼가 답장을 하여 말씀을 드릴 것은, 지난번에 온 편지를 받고 귀국의 대 대가 3 갈래로 나뉘어 먼저 가서 비도가 모여 있는 것을 미리 조사하는 것이 긴요하다는 말을 읽어보니 모두 타당하였습니다. 그래서 바로 군무軍務를 맡 은 조장신趙將臣, 조희연에게 전달하여 귀국의 서署에 가서 자문에 응대하게 하였 습니다. 이만 줄이며 대감의 복을 기원합니다. 13일 영백嶺伯이 보내온 전보에, 본영의 중군으로 박항래朴恒來를 추천하 여 재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관 박朴이 비록 영내에 도착했으나 아직 부 임하지 못하여 권천權川 군관軍官에게 병사 50명을 인솔하여 나가서 <비도를> 잡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김산金山 등지에서 잡아 죽인 동괴東魁, 동학군의 우두머리 가 모두 7명인데, 그 사이에 계를 이미 올렸습니다. 금산 등지에 그 무리는 아직 모인 일이 없고, 군량을 계속 대기가 어려워서 우선 군대를 돌리게 하 였습니다. 폐관幋官, 자신을 낮춤과 5영五營은 모두 비었습니다. 중군 박항래가 <임금의> 재가를 받았다면 조정에 인사하고 부임하는 절차를 생략하도록 전보로 알려주시어 그를 부임하게 하고, 원래 관문關文을 재촉하여 내려주시 기를 바랍니다. 의령宜寧과 단성丹城 등지는 여전히 비도가 창궐한다고 하니 근심스럽습니다 라고 하였다. 15일 <편지를> 받아보고 일본군의 은밀한 요구를 살펴보았습니다. 저

406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들이 말먹이를 많이 요청하여 그것을 여러 읍에서 징발하는 것은 선유원 宣 諭 員 이 마음대로 할 수 없어서 변통 變 通 을 기다려야 할 듯합니다. 영백 嶺 伯 이 보내온 전보는 바로 토포사 討 捕 使 10)에게 도착하였습니다. 11일 에 보낸 전보에, 일본군 150명과 아군 100명은 곤양 昆 陽 에 주둔하고, 다방면 으로 뒤를 밟아 비도의 우두머리 임석준 林 碩 俊 을 잡았습니다. 라고 하였다. 19일 삼가 말씀을 드릴 것은, 이번에 우리나라 달력양력으로 내일 이후 18일 귀국의 달력으로는 21이다 오후 1시에 본 공사 公 使 가 운현궁 雲 峴 宮, 대원군 이하응을 찾 아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귀 貴 대신에게 바라는데, 각 아문의 대신과 서리대 신 署 理 大 臣, 서리직함의 군부대신 지칭도 이 날에 맞추어 함께 만나서 고견을 듣기를 간 절히 원합니다. 각 아문의 대신과 서리대신이 있는 곳에 귀대신이 이런 연 유를 모두 알게 하여 늦거나 잘못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만 줄이며 간절히 바랍니다. 큰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백작 伯 爵 이노우에 가오루 井 上 馨. 우리나라 달력양력으로 11월 16일이고, 귀국 의 달력으로는 10월 19일. 20일 금영, 완영, 영영의 감영 監 營 이 임금의 유지 諭 旨 를 받들어 일본군이 동도를 토벌하러 내려가는데, 우리 때문에 군사를 징발하여 매우 편안하지 않다. 지나가는 각 읍마다 그들을 접대하는 일을 특별히 지시하라. 정부 政 府, 의정부가 삼가 <답장을 보내> 말씀을 드릴 것은, 어제 보내주신 편지를 받고 귀국의 달력으로 18일 오후 1시에 오카모토 岡 本 11) 군 君 을 보내 운현궁을 보 10) 토포사( 討 捕 使 ) : 대구부 판관인 지석영( 池 錫 永 )이 임시로 이 직책을 맡아 경상좌도의 농민군 토벌을 위해 출동했다. 11) 오카모토 류노스케( 岡 本 柳 之 助 ) : 일본 동양협회 회원으로 당시 일본신문 조선특파원 으로 조선에 건너왔으며, 1895년에는 궁내부 고문관으로 있으면서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시해 현장을 지휘했던 인물이다.

찰이전존안 札移電存案 407 러가는 길에 각 아문의 대신들도 함께 만나기를 바란다는 말씀을 알았습니 다. 본대신이 각 아문의 대신과 서리대신署理大臣에게 알려서 이 날의 그 시 각에 맞추어 함께 나가려고 합니다. 이만 답장을 줄이며 복을 받기를 바랍 니다. 다시 말씀을 드릴 것은, 이번에 보내주신 편지는 어젯밤에 도착하였습니 다. 귀국의 <달력으로> 18일에 운현궁을 찾아가는 일에 대해 말씀을 하셨는 데, 그 원래 편지대로 순조롭게 이루어지리라는 편지를 보내니 받아주시면 다행스럽겠습니다. 22일 영백嶺伯, 경상감사이 보내온 전보에, 일본군을 접대하는 일은 각 읍 에 빨리 지시하고, 위무慰撫하는 일은 바로 해당 사또에게 통지할 계획입니 다. 진주의 비도와 일본군이 접전하여 죽은 비도가 수 백명이고, 종정부宗正 府12) 포유주사布諭主事가 삼가三嘉의 포군砲軍을 인솔하여 의령宜寧에 와서 비도 51명을 쏘아 죽였다고 들었습니다. 삼가 단성丹城 의령의 수령은 내려갈 것 을 재촉해주십시오. 거창居昌은 무주茂朱 운봉雲峯과 경계를 접하고 있고, 또 해당 수령의 엄중한 경계가 긴밀하다고 하더라도 이웃 읍에 위엄을 펼칠 힘 이 없다고 합니다. 소모사召募使13)을 더 임명하여 하유下諭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처분을 전보로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21일. 영영嶺營, 경상 감영에 전보로 답신하기를, 삼가 단성 의령의 수령은 지금 내려가도록 재촉하였고, 거창에 소모사를 임명하였다 고 하였다. 10월 22 일 미시未時, 오후 1시~3시 정각正刻, 오후 2시에 정부政府, 의정부. 12) 종정부(宗正府) : 돈녕부와 의빈부를 통합하여 1894년에 설치한 관청을 말한다. 13) 소모사(召募使) : 향병(鄕兵)을 모집하기 위하여 임금이 임시로 임명하던 관리를 말한다.

408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1894년 10월 21일 회담의 초고 [十月 二十一日 會坐談草] 총리대신總理大臣 궁내대신宮內大臣 외무대신外務大臣 학무대신學務大臣 탁지대 신度支大臣 내무대신內務大臣 공무대신工務大臣 농상대신農商大臣 군무서리대신軍務 署理大臣 오카모토岡本 공이 평소에 태공太公, 흥선대원군과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일본 공사 공사의 뜻을 알고 있어 이번 회담에 참석하였다. 태공이 말씀하시기를, 정치를 개혁하는 논의가 100일이 넘었으나 아직 실시한 것이 없다. 이후로는 정부이하 각 아문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맡아 각자 권리를 갖고 서로 침범을 하지 말라. 협조하여 변통할 일이 있으면 협 의해서 결정하라. 이노우에井上 공사는 일본의 명치유신의 원로공신이고 동 양의 선각자이다. 우리 정부는 허심탄회하게 대우해야 한다. 잘 헤아려서 우리가 두루 실행할 수 있는 것을 보여준다면 국가의 정치에 유익할 것이 다. 공들은 힘쓰고 힘쓰라 고 하였다. 삼가 말씀을 드릴 것은, 지난번에 경기도 광주廣州의 농민이 사람을 불러 모아 관장官長을 압박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흉악함을 드러내었다고 합니 다. 그 보고를 들은 날이 우리 달력으로 11월 11일입니다. 우리 군대를 파견 하여 먼저 가서 탄압을 하고 바로 해당 주州의 지방관이 지목한 영두領頭, 변란의 주동자 남대희南大熙 구연태具然泰 심상현沈相賢 등 3명을 다음날에 사로잡아 한 양으로 돌아왔습니다. 바로 우리 영사領事에게 심문을 하게 했는데, 지금 구 술로 공초供招, 죄인이 진술한 말를 갖추어 보고를 하였습니다. 미리 그 공초의 사정 을 살펴보았더니 정말로 확실하게도 해당 지방관이 지나치게 세금을 거둔 데에서 연유하였습니다. 비록 백성들이 세금 감면을 호소하는 데에서 연유 했더라도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앞장 선 민인을 잡아 들이려고 하여 끝내 민인이 과격한 변란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근래에 동학

찰이전존안 札移電存案 409 의 비도匪徒가 각지에서 난리를 선동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것은 모두 지 방관이 백성의 재산을 깎아먹는 데에서 연유합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사 사로움을 드러낸 이런 지방관을 조처하는 것을 등한시하고 또한 엄중하게 징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귀국의 대신에게 요청하니 먼저 이번의 민변民變, 백성의 변란을 상세히 조사해서 확실하게 지방관의 가혹한 세금징수에 서 일어났다면 해당 광주부의 관장官長을 엄중히 징계해야 합니다. 그밖에 이런 때에 귀국 정부가 각 도의 크고 작은 지방관에게 관문을 보내 고질적 인 폐습을 고치고 관규官規를 깨끗하게 한다면 관을 압박하는 민란에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해당 영두領頭 남대희 등에 말한다면 실제로 같은 패거리를 불러 모아 관부官府에 저항한 자들입니다. 비록 그 일이 공정한 마음에서 나 왔다고 해도 그 행위를 살펴본다면 관대하게 용서해서는 아니되고, 사정을 참작하여 법을 살펴 처벌을 해서 전장典章, 나라의 법도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 것은 본 공사의 소견을 편 것에 관계되나 귀국의 대신께서 분명히 살펴주시 기를 요청합니다. 공초 단자를 덧붙였으니 보시고 헤아려서 시행해 주시기 를 바랍니다. 이만 줄이며 대감의 복을 기원합니다. 백작伯爵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올림. 우리나라 달력양력으로 11월 18일. 남대희南大熙의 구술공초口述供招를 간추려 적은 글 [摘記南大熙口供] 광주廣州 경안면慶安面 직동直洞에 사는 48세 농민 남대희의 공초供招. 이르기를, 광주부의 경내에는 원래 전환錢還14) 별환別還15) 유고환留庫還 등의 세금을 거두는 명목이 있습니다. 전환이라는 것은 지금부터 40년 전에 14) 전환(錢還) : 환곡을 돈으로 바꾸어 백성에게 꾸어주고 곡식으로 거두어들이는 것을 말 한다. 15) 별환(別還) : 아전들이 여러 가지 구실을 붙여 환자곡을 타내던 일을 말한다.

410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정했는데, 3월에 관에서 호 戶 를 계산하여 4냥씩 빌려주어 농민들의 종자를 충당했다가 추수한 뒤에 쌀 1포를 관에 납부하는 것입니다. 별환이라는 것 은 29년 전에 대원군이 만든 것으로 해마다 관아의 쌀 3,000포 包 를 꾸어주어 얻은 쌀값으로 호를 계산하여 900문 文 을 빌려주었다가 기일이 되면 관에 쌀 1포를 납부하는데 빌려준 돈에 해당됩니다. 빌려준 3,000포는 그대로 공제 하고 남은 쌀은 관아 서리 胥 吏 의 신수 薪 水, 봉급를 충당하는 법입니다. 유고환 留 庫 還 이라는 것은 남한산성에 영고 營 庫, 창고가 있어 쌀 4,000포를 비축했다가 일 단 농민이 흉년을 만나 몰락하면 그 쌀의 융통을 허가합니다. 다만 호를 계 산하여 해마다 7등급으로 나누어 쌀을 납부합니다. 1등급은 1말을 납부하 고 그 이하는 점차로 줄어 7등급은 3되가 됩니다. 이러한 과세 課 稅 에 백성들 이 모두 그 가혹함을 괴로워하는데다가 올해에 관에서 빌려준 돈은 당오전 當 五 錢 16)으로 지난번에 빌려준 엽전과 비교하여 계산한다면 5분의 1로 줄어 듭니다. 그러나 농민이 납부하는 쌀은 예년과 다름이 없습니다. 더욱이 유 고환과 같은 법은 창고에 여전히 실액 實 額 의 쌀이 있는데, 근래에 이르러 창 고에 쌀이 남아있지 않으나, 농민은 여전히 해마다 같은 수대로 상납을 하 여 많은 농민들에게 피폐가 더욱 심해지게 하였습니다. 또한 전세 田 稅 라는 한 가지 항목이 있어 그 해의 <풍흉을> 감안하여 100부 負 마다 돈 20냥을 납 부했으나 올해는 100부마다 돈 150냥을 납부해야 합니다. 호포 戶 布 라는 것은 원래 관직에 있는 자와 관계가 있으나 그것을 고려하지 않고 호 戶 마다 군정 軍 丁 을 내는 법입니다. 그 뒤에 호마다 돈 1냥 9전 5푼을 납부하여 정역 丁 役, 군정 을 내는 역을 대신하였으나 올해에는 늘어나서 9냥을 징수하였습니다. 이상의 각종 세금은 농민 가구에 고통이 아닌 것이 없고 실제로 말없이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람들을 위해 먼저 관에서 빌려 준 돈을 제기했 는데, 전환 錢 還 의 경우에 이자를 한결 같이 계산하여 4냥을 빌린 자는 4냥 4 16) 당오전( 當 五 錢 ) : 19세기 말 발행한 법정가치를 상평통보의 5배로 한 화폐를 말한다.

찰이전존안 札移電存案 411 전을, 9냥을 빌린 자는 9냥 9전으로 하니 공평해져서 그것을 관에 호소하였 습니다. 9월에 연이어 호소하기를 5차례나 하였으나 허가를 받지 못했기 때 문에 10월 10일에 한양에 가서 호소를 하려고 했는데, 바로 20여명의 포교捕 校에게 잡혀 관아로 압송될 때에 촌민이 모여들어 포교와 다투었습니다. 저 는 몸을 빼어 마을에 돌아와서 경계를 하니 포교가 잡으러 왔습니다. 15일 에 다시 일본군에게 체포되었습니다. 16일에 이르러 관에서 전환과 유고환 의 2가지 항목은 백성의 호소를 살펴서 줄이거나 면제해주고, 별환은 그대 로 관례에 비춰 쌀을 납부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내년에 관에서 50냥을 빌 려주어 기일에 쌀 1포를 내야하는데, 이것을 살펴보면 이치가 갖추어져 있 고 사람들이 마음으로 승복할 것입니다. 호포는 반으로 줄어 4냥 4전을 납 부하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공초에서, 관에서 부府에 전령을 보내어 민원民願을 따른다면 백성들 은 분수를 편안히 여기고 생업을 지켜 감히 다시 일을 벌여 소란을 더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전세田稅 한가지 항목은 20냥으로 늘려 징수하는데, 당 오전으로는 150냥이 되어 백성의 폐단을 없애기가 어려우니 이것도 절반으 로 줄여 납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삼가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은, 광주의 농민이 모인 한 가지 일은 구두 로 진술한 공초를 간추려 번역한 것을 살펴보니 정말로 해당 유수留守의 처사 가 정당함을 상실하였습니다. 정부에서는 해당 유수를 견책하여 파직하고, 명망 있는 중신重臣을 뽑아 대신하게 하며, 무리를 모아 관에 대항한 백성들 을 엄중히 조사하여 징계하도록 지시하십시오. 이것도 폐단을 고치는 일이 니 각 도에 통문으로 알리는 것이 합당합니다. 이만 답장을 줄이며 편안하 시기를 바랍니다. 삼가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은, 계사년癸巳年, 1893년 조선 3관三關, 부산 인천 원산의 3항구의 통상무역 사정을 적은 책이 상해上海에서 인쇄되어 보내온 것을 모두 사서 함函을 갖추어 책 5벌을 덧붙여 드립니다. 귀국의 대신께서 살펴

412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보시고 아울러 귀 정부의 관원도 함께 보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만 줄이며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브라운栢卓安17) 갑오년 겨울 10월 22일. 삼가올립니다. 영선무사嶺宣撫使가 보내온 전보에, 현재는 비도를 토벌하는 것을 우선으 로 하고 있고, 돌아오는 길에 <백성을> 위로하는 일은 지시를 기다리겠습니 다. 라고 하였다. 24일 진주의 토포사討捕使18)가 보내온 전보에, 그 사이에 일본군과 합 세하여 수 백명을 죽였고, 잡아서 효수梟首, 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걸어 둠한 자는 2 명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조금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날이 갈수록 창궐 하여 밥에 몰려드는 파리 같습니다. 사천泗川 남해南海 단성丹城 적량赤梁에서 는 무기를 전부 빼앗아갔고, 지나가는 마을은 모두 비어 울음소리가 땅을 진동시켰습니다. 저들이 의지하는 곳은 지리산 계곡입니다. 만약 군사를 늘 려서 그곳에 주둔하지 않는다면 하동 진주 곤양 등지는 반드시 저들에게 유린될 것이니 급히 조처해서 일본군을 빌려 하동과 진주의 여러 곳에 주둔 하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백성들의 심정이 크게 일본군에 의지하고 있습 니다. 라고 하였다. 영영嶺營, 경상 감영에서 보내온 전보에, 사천 남해 단성 적량의 군계軍械, 군 기도 침탈을 당하였습니다. 달판達判, 경상 감영의 판관이 일본군과 협력하여 진주 에서 우두머리 2명의 머리를 베고 수 백명을 죽였으나 저들은 여전히 창궐 하여 걱정스럽습니다. 계속 토벌하도록 특별히 각 읍과 진에 지시하였습니 17) 브라운(栢卓安, John Mcleavy Brown) : 고종 대 영국인 조선 총세무사. 18) 진주의 토포사(討捕使) : 지석영을 말한다.

찰이전존안 札移電存案 413 다 라고 하였다. 영남의 선무사宣撫使에게 전보를 하기를, 위무사慰撫使로 임명하니 일본군 이 영남의 경계에 들어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뒤를 따라 다니며 여러 읍들을 진정시켜라 고 하였다. 정오 12시 정부政府, 의정부. 25일 삼가 말씀을 드릴 것은, 이 날 오후 3시에 먼저 귀서貴署에 가서 귀 대신각하大臣閣下를 만나보려고 합니다. 그 때에 김金, 윤식 외무대신과 어魚, 윤중 탁지대신도 합석해서 말씀을 나누면 고맙겠습니다. 삼가 이런 연유를 간절 히 말씀드리고 아울러 대감께서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일본 공사 올림. 우리나라 달력양력으로 11월 22일. 삼가 답장하여 말씀을 드릴 것은, 김金 외무대신과 어魚 탁지대신에게 함께 만날 것을 부탁하고 그 시각에 기다리겠습니다. 편안하시기를 빕니다. 27일 영백嶺伯, 경상 감사이 보내온 전보에, 황간黃澗 영동永同 등지에 비류匪 類몇 만 명이 모여 있어 그 사정을 예측할 수 없다는 소식을 듣고 병정 70명 에게 김산金山의 경계를 지키게 하였습니다. 또한 이들이 금산錦山으로 향하 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 군을 지키지 못한다면 호서와 영남은 반드시 입 술과 이빨의 형세여서 매우 근심스럽습니다. 급히 정예병을 보내 밤을 가리 지 않고 요로要路를 엄중히 지키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헤아려주시기를 바 랍니다. 양호兩湖, 호서와 호남에 비류가 창궐하여 본도의 비류도 갈수록 날뛰어 진실로 더욱 근심스럽습니다. 영천永川의 회계回啓19)와 관교關敎, 관문으로 한 지시는 지금 받아보았으나 법무法務<대신의> 감합勘合20)이 아직 내려오지 않아 바로 19) 회계(回啓) : 임금의 물음에 대해 신하들이 심의하여 대답하는 것을 말한다. 20) 감합(勘合) : 발송할 공문서의 한 끝을 원부(原簿)에 대고 그 위에 얼려 찍던 도장을 말한 다.

414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거행하지 못했습니다 라고 하였다. 경상 감사. 29일 토포사가 보내온 전보에, 그 사이에 일본 육군대위와 함께 주선 하였습니다. 지금 대위의 편지를 보니, 일본군 600~700명이 하루가 못되어 3길로 나눠 인천에서 출발했고, 아울러 양호로 가서 동당 東 黨, 동학군을 격파했 으며 가솔 家 率 이 지난번에 부산에 갔다 고 하였습니다. 병사를 통솔하여 하 동 河 東 을 지켜 좋은 소식을 날마다 전했으나 여러 날을 달려오고 병든 병사가 절반이나 되었기 때문에 병영에 공문을 보내 병사를 파견하여 하동을 지키 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동은 요충지에 위치하여 비도의 출입을 막는 관문 입니다. 만약에 패배를 당한다면 양호 兩 湖 의 기세가 펼쳐져서 그 해독이 하 동과 진주 등지에 이를 것입니다. 그러나 약간의 병사로는 절대로 지킬 방 도가 없는데다가 일본군이 철수한다면 백성들은 의지할 곳이 없게 되고 적 은 다시 무리를 모아 반드시 형세를 이룰 것입니다. 이곳의 형편이 매우 위 급하니 급히 조처하여 다시 일본군이 진주와 하동에 주둔하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19일 영백 嶺 伯 이 보내온 전보에, 토포사가 22일에 보내온 전보에, 일본군이 철 수하려고 하는데 이곳에는 지킬 군대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씀을 드리면 하동과 곤양 昆 陽 등지에 주둔하는 일본군이 없다면 재앙이 이어질 것이니 이 전보를 의정부에 전달하여 죽을 지경에 처한 수많은 생명들을 구해주시기 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일본군이 주둔할 때에도 잠시도 고개를 돌릴 수가 없는데, 더욱이 일본군이 철수한 뒤에는 어떠하겠습니까? 매우 시급하다고 하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니 헤아려서 바로 조처해주시기를 바 랍니다. 지금 곤양의 보고를 받아보니, 20일에 일본군이 광양 光 陽 땅에서 모 여 온 동도 東 徒 와 싸움을 하여 저들의 죽은 자가 셀 수가 없었으나 나머지는 일정함이 없이 모였다가 흩어집니다 라고 하니 근심스럽습니다 라고 하였 다. 28일.

찰이전존안 札移電存案 415 제1호. 삼가 말씀을 드릴 것은, 영전營電, 경상 감영의 전보가 빨리 전해졌는지 모 르겠습니다. 귀 군대의 출정여부는 진력해야 할 방략이 아닙니다. 각 지방 관에게 통문通文으로 지시하여 그 이후에 동도의 사정을 먼저 귀 군대에 알리 니 기일을 정해 그들을 토벌할 방책에 편리할 것입니다. 이만 줄이며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삼가 답장을 하여 말씀을 드릴 것은, 당신의 이혁주고釐革奏稿 번역본 1책 을 주신 데에 대해 고맙습니다. 유도헌兪都憲, 유길준에게 지시하여 원문原文과 대 조하겠습니다. 새벽녘에 다시 선고문宣告文의 초고를 유도헌에 부탁하여 한 문으로 지었는데, 뜻이 아니라 문장을 지었기 때문에 다소 거친 듯합니다. 문장가의 손을 빌려 온전히 의역意譯을 한다면 그 문장과 뜻이 모두 좋아질 것이라고 합니다. 다만 이것으로 답장을 줄이며 대감께서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영백嶺伯이 보내온 전보에, 일전에 양호의 동도가 갈수록 날뛰어 금산錦山 으로 향하려는 한다는 일에 대해 감히 제 소견을 펼쳤는데 보셨으리라 여겨 집니다. 이번 14일 밤에 엄청나게 많은 저들이 와서 금산을 무너뜨려 해당 수령과 제원역승濟原驛丞이 모두 결박을 당하였고, 셀 수 없이 <사람들을> 죽 였다는 소식을 지금 들으니 어찌 놀라움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전 봉준全琫準의 포包는 김산金山으로, 손화중孫和中의 포는 지례知禮로, 김개남金介南 의 포는 안의安義로 향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3개 읍은 경계를 접하고 있어 그 근심이 적지 않으나 손을 쓸 방도가 없습니다. 고립된 군대의 향정 鄕丁과 같은 것으로는 반드시 엄중히 경계하기가 어렵습니다. 일본군 100명 을 내려 보내 3곳의 경계에 나누어 주둔하여 그들에 대응하여 전멸시키도록 한다면 실제로 모두 온전할 것입니다. 헤아려서 바로 조처해주시고, 이 일 은 급박한 데 관계되니 바로 회교回敎, 회답을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 였다.

416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11월 [十一月] 초 2일 삼가 말씀을 드릴 것은, 내일 오후 1시에 만나서 이야기를 하려 고 하는데, 귀貴 대신의 그때의 공무公務와 여가餘暇 여부를 모르겠습니다. 만 약에 귀 대신과 만날 때에 외무대신과 탁지대신도 함께 공관公館에 오신다면 다행스럽겠습니다.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백작伯爵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일본 공사 올림. 우리나라 달력양력으로 11월 28일. 삼가 답장을 하여 말씀을 드릴 것은, 보내주신 말씀은 잘 받았습니다. 외 무대신과 탁지대신 2명과 함께 시간에 맞추어 귀 공관에 가서 만나 이야기 를 나눌 계획입니다. 이만 답장을 줄이며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초 5일 의정부 도헌議政府 都憲 유길준兪吉濬이 조회照會, 통지할 일은, 남원부사 이용헌李龍憲의 아들인 이계훈李啓薰이 복수하려고 선봉진先鋒陣에 출정하는 것 을 자원하였습니다. 그 정성이 가상하니 이르는 곳마다 특별히 보호하고, 싸울 때에 적을 토벌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총리대신總理大臣의 하교下敎를 받 들어 널리 알리니 헤아려 주시는 것이 타당하리라 여겨집니다. 우 조회右 照會 충청도관찰사 박제순朴齊純 각하閣下 평안 감사에게 보내는 전보 [發電箕伯] 비도匪徒를 토벌하는 일로 위원渭原 수령 김유현金有鉉이 부임을 하지 않고 의 사義士, 의병 350명을 모집하여 급히 한양에 오니, 감영에서 비용을 지급하라. 정부政府, 의정부. 선유사宣諭使로 해백海伯, 황해도관찰사을 임명하니 하루가 가기 전에 바로 부임 하라는 뜻을 신속하게 전하라. 정부政府, 의정부. 창룡선蒼龍船편으로 보산寶山, 지명에 있는 석탄을 수송하라. 날씨가 추워 매

찰이전존안 札 移 電 存 案 417 우 시급하다. 외서 外 署, 외무아문 초6일 화영 華 營, 수원에서 총리대신 댁에 전보를 보냅니다. 동적 東 賊, 동학농민 군의 소문은 공주 公 州 위로는 전해지지만 내포 內 浦 의 동적이 신창 新 昌 과 예산 禮 山 에 주둔하였기 때문에 홍주 洪 州 의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신임 완백 完 伯, 전라 감사은 그저께 와서 머무르고 있으며, 강화 병정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금 영 錦 營, 충청 감영의 소식을 듣고 전진한다고 합니다. 소인 小 人 화성 華 城, 수원 유수 留 守. 수원 水 原 에서 보낸 전보에 답신하기를, 전선 電 線 이 진위 振 威 아래를 통하는 대로 빨리 보고하라 고 하였다. 정부 政 府, 의정부. 기백 箕 伯, 평양 감사이 보내온 전보에, 신임 해백 海 伯 이 교유서 敎 諭 書 21)와 밀병 부 密 兵 符,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병부를 차고 처분 뒤에 부임하였고, 김유현 金 有 鉉 은 지금 의주부윤 義 州 府 尹 에게 전보로 지시하여 하루가 가기 전에 그를 기송 起 送, 사람을 내 세워서 보내는 것하게 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영백 嶺 伯 이 보내온 전보에, 호비 湖 匪, 호서와 호남의 동학군에 대한 소문은 매우 놀 랍습니다. 저들이 만약 고개를 넘었다면 기세가 끝이 없을 것입니다. 형세 에 따라 빨리 일본 공사관에 알려 구원하게 해주십시오. 근래에 외서 外 署, 외무 아문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 사령관과 상의하여 부산의 영사 領 事 에게 전 보로 지례 知 禮 와 김산 金 山 의 경계를 나누어 지켜주도록 간청을 하였습니다. 아직 전보에 대한 회답이 어떠한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부산 항구의 일 본군이 철수하였고, 토포사 討 捕 使 도 관아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동 의 일이 매우 소홀하여 연이어 곤읍 梱 邑, 兵 使 가 있는 읍과 각 관 官 에 특별히 경계할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하동 수령의 새로운 정치는 취할만한 것이 많고 위세 21) 교유서( 敎 諭 書 ) : 임금의 명령을 적은 교서와 유서를 말한다.

418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威 勢 를 행할 이웃 읍이 없으니 조방장 助 防 將 으로, 인동 仁 同 수령을 좌도토포사 左 道 討 捕 使 로 임명한다면 혹시라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감히 말씀을 드 리니 헤아려보시고 화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토포사가 보내온 전보에, 3일에 부산항에 도착한 일본군과 진주와 하동 의 비류를 토벌하니 지금은 도망가거나 흩어졌습니다. 흩어졌다가 다시 보 여 기량 技 倆 이 있는 저들이 만약에 다 운집한다면 백성들에게 끼치는 해독은 지난날의 100배가 될 것입니다. 이미 촉영 矗 營, 진주병영의 병사 100명을 보내 하동에 주둔을 시켰으나 쇠잔하여 쓸모가 없습니다. 일본군을 빌려 진주와 하동 등지에 주둔을 요청하는 일은 여러 번 전보로 말씀을 드렸으나 아직 회답을 받지 못하여 매우 송구스럽고 울적합니다. 외서 外 署 에 지시하여 일본 공사에게 가서 다시 일본군 몇 백명을 파견하여 진주 등지의 침입을 받는 곳에 나누어 주둔하고, 때에 따라 대응하여 끝맺음을 온전히 한다면 좋을 듯합니다. 백성의 바람이 모두 이와 같습니다. 엎드려서 재가를 하여 회답 을 내려주시기를 기다리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4일. 곤양에서 잡아온 동도 東 徒 13명은 현재 일본 육군의 조사를 받고 바로 토 포사 討 捕 使 에게 보내졌습니다. 그 중에 10명은 엄중하게 곤장을 쳐서 풀어주 었고, 3명은 동래부 東 萊 府 에 옮겨 가두었습니다. 울산 蔚 山 에서 잡은 동도 최 崔 와 김 金 2명은 3달 동안 가두었으나 아직도 정안 定 案, 결정된 사안이 없습니다. 현 재 일본 영사의 말에 따르면, 반드시 전보로 외무아문에 보고하여 결정을 도와야 한다 고 합니다. 살펴보시고 하교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화류 華 留, 수원유수에서 총리대신의 댁에 보내온 전보에, 지금 포내 浦 內 의 한 강나루터 방수좌열장 防 守 左 列 將 이 인시 寅 時, 오전 3시~ 5시에 보낸 수본 手 本 22)을 보면, 일본 윤선 輪 船 1척이 한강나루에 와서 정박했다가 바로 백석포 白 石 浦 로 향했는 데, 내린 병사의 수효는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내포 內 浦 소식은, 비류가 22) 수본( 手 本 ) : 공사( 公 事 )에 대한 사실을 상관에게 보고하던 문서를 말한다.

찰이전존안 札移電存案 419 근래에 많이 예산과 덕산 등지에 주둔하였으나 홍주의 군대는 탄환이 떨어 져서 아직 싸움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 초 7일 영영嶺營에 전보로 답신하기를, 하동河東 수령을 조방장助防將으로, 인동仁同 수령을 토포사討捕使로 지금 임명한다. 울산에 갇혀있는 비도는 죄의 유무를 조사하여 감영에서 징계하라. 토포사가 전보로 일본군이 진주晋州와 하동에 주둔할 것을 요청했으나 일본군이 상주尙州에 오기를 기다렸다가 상 의하는 것이 좋겠다 고 하였다. 정부政府, 의정부. 초 8일 영영嶺營에 전보하기를, 흥해興海 현감에게 부임하도록 재촉하고, 자리가 비거나 부임한 지의 여부를 바로 전보로 답신하라 고 하였다. 정부政 府, 의정부. 초 9일 영백嶺伯, 경상 감사이 보내온 전보에, 정부政府, 의정부가 전보로 하교 하신 뜻은 잘 알았습니다. 하동과 인동 2개 읍의 일은 지시하신대로 통지하 였고, 울산의 죄수는 조사하여 처리할 계획입니다. 양호의 비류는 갈수록 예측하기가 어렵고, 황간黃澗 영동永同 무주茂朱 등지에 1,000명 또는 10,000 명씩 모여 행인을 만나면 바로 쏘아죽여서 정탐하러 간 자가 바라만 보다가 지금 돌아왔습니다. 전에 외서外署, 외무아문의 전보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 몇 대隊가 3개 읍의 요충지에 나누어 지키는 일에 대해 일본 사령관과 담판을 하였는데, 부산의 영하領下에 전보로 부탁을 했더니 지난번에 경상 감사의 통 보에 따라 바로 떠났다고 합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왕복하고 내왕來往하는 도중에 일이 반드시 어긋날 것 같아 근심스럽습니다. 진주 목사[민준호] 는 병 때문에 여러 번 단자單子, 사직을 올리는 글를 올렸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어 제 위무사慰撫使가 진주에 이르러 보내온 글을 보았더니, 진주 목사의 병이 위중하여 며칠을 지나 교체된다고 해도 길을 나서기가 어려울 것 같다 고

420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하였습니다. 헤아려서 변통하여 <진주 목사를> 특별히 가려서 뽑아 빨리 내 려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화성 유수留守가 총리대신 댁에 보내온 전보에, 지금 내포의 기별을 들으 니, 지난 25일에 일본군 장교 아카마츠赤松國封가 89명의 병사를, 장위영壯衛營 귀관 김홍수金弘秀와 통위영 황영옥黃永玉이 병사 40명을 인솔하여 홍주洪州로 향하다가 당진唐津의 도동道洞에 이르러 이곳에 주둔한 적을 격파하였습니다. 해미海美의 여미장餘美場에 이르러 적은 많고 아군의 수는 적어서 어쩔 수가 없 어 밤새 물러나서 홍주에 도착했다 고 합니다. 서산瑞山과 태안泰安의 적괴賊魁 유상대柳相台와 박덕칠朴德七 등 6명이 광천廣川 등지의 3포三包와 연합하여 덕산德 山과 면천沔川의 경계로 흩어져 나와 연로에서 폐단을 저질러 100리가 모두 비게 되었습니다. 적이 예산 신례원新禮院에 주둔하여 홍영洪營, 홍주 초토영에서 군사를 보내 적을 토벌하였는데, 군관軍官 김병돈金秉暾과 이창욱李昌旭 등 4명이 싸우다가 한바탕 적을 꾸짖으며 굽히지 않고 죽었습니다. 한기경韓基慶은 16 세의 어린나이에 용기를 내어 싸움터에 나가서 죽었습니다. 죽은 군졸은 30 여명입니다. 그러나 경군과 일본군은 10리에 미치지 못하여 구원하지 못했 다고 합니다. 28일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에 적들이 홍주성에 가까이 다가가 려고 성 밖의 민가를 모두 태웠는데, 성안의 토병土兵인 700여명의 총수銃手와 창수鎗手가 일본군 및 경군과 합세하여 밤새도록 포를 쏘았습니다. 포에 맞 아 죽은 적들이 600여명이 넘어 적의 기세가 조금 꺾여 성의 동쪽 5리쯤으 로 물러나서 주둔하였습니다. 그래서 29일에 성을 나가 격퇴하고 50~60을 쏘아 죽였으며 빼앗은 소 말 총 창은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관 군은 한사람도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달 4일에 백석포白石浦에서 내린 일본군은 남쪽을 향해 내려가서 6일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 쯤에 포소리 가 신창新昌 등지에서 연달아 나왔으나 그 승부를 알지 못해 지금 소식을 탐 문하러 보냈으나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라고 하였다.

찰이전존안 札移電存案 421 초 10일 기백箕伯, 평안 감사이 보내온 전보에, 의주부윤이 전보하기를, 일 본군 진영에서 죽은 자를 화장하여 통군정統軍亭23) 옆에 비를 세우려고 선유 의원宣諭議員에게 말을 했으나, 의원이 이 땅은 임진왜란 때에 어가御駕가 머물 렀던 신성한 곳으로 허락하기 어려워서 순찰사巡察使에게 편지로 요청을 하였 습니다. 순영巡營, 감영에서 의정부에 전보를 한 뒤에 회답을 주시기를 바랍니 다 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전보로 회답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영백嶺伯의 회답 전보에, 전보로 하신 하교는 잘 받아보았습니다. 흥해興海 수령은 아직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양호의 비류에 관한 일은 여러 번 말씀 을 드렸는데, 지금 운봉雲峯의 보고를 받아보니, 남원 수령은 효수梟首를 당했 고, 순천 수령은 곤장을 맞았으며, 장수長水도 함락되어 운봉을 거쳐 영남으 로 향하려 한다고 하니 구원을 요청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함양咸 陽의 정예병사 200명을 감결甘結을 보내어 구원하게 하였습니다. 김산金山 지 례 안의 하동은 바로 양호와 경계를 접하고 있어 저들이 일본군에게 쫓겨 나면 반드시 영남으로 향할 것입니다. 만약 이 경계에 온다면 수습을 할 수 없어 어찌 갈팡질팡하는 것이 없겠습니까? 만약에 일본군 수 백명을 금산 등의 4개 읍에 나누어 보내고 감영에서 토병土兵, 향병 몇 백명을 각각 보내 기 미에 따라 전진하여 아래와 위에서 협공을 한다면 저들을 토벌할 수가 있고 이 도를 안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처분이 어떠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러나 부산 영사가 말하기를, 저들이 고개를 넘어오는대로 가서 토벌을 할 수 있다 고 하지만 만약에 갑자기 저들이 고개를 넘으면 왕래하는 사이에 이를 수가 없어 반드시 낭패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다시 말씀을 드리 니 헤아려서 빨리 하교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일본군이> 아직 내려오지 않 아 근심스럽습니다 라고 하였다. 23) 통군정(統軍亭) : 의주의 국경에 세운 정자로 조선과 중국의 사신들이 왕래하면서 머물 던 곳이다.

422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11일 정부에 전보하기를, 의주부윤이 보내온 전보에, 김유현 金 有 鉉 이 사간 司 諫 김우용 金 禹 用 과 함께 지난 그믐에 나갔으나 그 향방을 모르는데, 그 아비의 말도 이와 같다 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 기백 箕 伯. 12일 정부가 기영 箕 營 에 <전보하기를>, 김우용은 이미 올라왔으니 김 유현에게 바로 지시하여 올려 보내라 라고 하였다. 정부. 13일 1호 一 號 기영 箕 營 에 전보하기를, 일본군을 접대하는 등의 일은 안곤 安 梱, 안주의 병사의 요청에 따라 진심으로 함께 처리하고 의심하지 말며 여러 읍들에게 관문 關 文 으로 지시하라 고 하였다. 정부. 2호 二 號 안곤 安 梱 에게 전보하기를, 일본군을 접대하는 등의 일은 순영 巡 營 과 협력 하여 처리하고, 여러 읍들에 관문으로 지시하라 고 하였다. 정부. 화영 華 營, 화성유수영에서 총리대신 댁에 전보하기를, 지금 내포 소식에, 홍 주 목사가 11월 7일에 군사를 보내어 9일에 해미에 주둔한 동도를 토벌하고 흩어진 무리를 모두 잡았다 고 하였습니다. 전분국 電 分 局, 전보국의 지방 분국은, 내 포와 공주의 소식을 모두 모을만한 데로 수원만한 곳이 없으니 동도를 토벌 하는 동안에는 수원에 전국 電 局 을 두고, 분국 分 局 은 천안에 두어 공주와 청주 및 보은 소식을 통하게 하십시오. 여기에 전국 電 局 을 두면, 전국에 해 害 가 되 는 줄을 알지만 시급한 군정 軍 政 에 약간의 해를 보는 것이 있겠습니까? 헤아 려서 처분해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소인 小 人 화류 華 留, 수원 유수. 15일

찰이전존안 札 移 電 存 案 423 3호 三 號 영백 嶺 伯 에게 전보하기를, 진주 목사의 병이 위중하다는 위무사 慰 撫 使 의 전 보에 근거하여 진주 목사를 교체하고 달성판관 達 城 判 官 을 임명하니 바로 신속 하게 부임하도록 지시하라 고 하였다. 정부. 정부가 일본군을 접대할 때에 협의해서 하라고 안곤 安 梱 에게 보낸 전보가 상세하지 않아 다시 하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의원 議 員 권 權. 4호 四 號 안주 병사 兵 使 에게 전보하기를, 일본군이 왕래하고 군수물자를 운송할 때 에 그 접대는 순영과 협력하여 처리하고 여러 읍들에 관문으로 지시해서 진 심으로 협조를 하라 고 하였다. 정부. 16일 영백 嶺 伯 이 보내온 전보에, 전보로 하교하신 뜻은 잘 받아보았습 니다. 본 관아가 이처럼 피폐한데다가 영송 迎 送, 관리를 보내고 맞이하는 일을 해야 하 니 읍의 일이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헤아려서 특별히 유임시켜주시기를 바 랍니다 라고 하였다. 17일 화성 유수가 보내온 전보에, 지금 금백 錦 伯, 충청 감사 선봉 先 鋒 의 편지 를 보니, 이 달 14일에 적괴 賊 魁 김개남이 청주에 들어와서 성을 압박하니 청 주 병사 兵 使 가 미리 격퇴하여 1,000여명을 죽였고 무기를 빼앗았는데, 그 중 에 붉은 갑옷을 입은 자가 탄환에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이 자가 김개남인 지 모르겠습니다. 15일에 군사를 보내 노성 魯 城 의 적을 토벌했는데, 금영 영 장 營 將 이 먼저 노성의 괴봉 乖 峯 을 점거하고, 일본군과 경군 京 軍 이 그 앞을 정리 하니 전봉준은 여전히 거리에 진을 치고 있으나 나머지는 각기 흩어졌습니 다. 전적 全 賊, 전봉준을 잡아 목을 베었다고 하기도 하고 탄환에 맞았다고 합니 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2적 賊 들이 비록 패배했어도 이밖에 적들이 곳곳에서

424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날뛰어 차례대로 토벌해야합니다. 시일이 만약에 늦어진다면 나머지 무리 의 기세가 다시 일어날 것이니 하루가 아니 되어 군사를 내어서 바로 토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5호 五 號 영백 嶺 伯 에게 전보하기를, 달성판관에 창녕 昌 寧 의 조병길 趙 秉 吉 을 임명하니 바로 부임하도록 지시하라 고 하였다. 정부. 화성 유수가 보내온 전보에, 호남 소모관 召 募 官 전동석 田 東 錫 이 순무영 巡 撫 營 에 전한 관문에, 총과 환도 環 刀 각각 200자루와 탄약을 적당히 헤아려서 주 라 고 하였으나 관문에 따라 주는 것은 다시 처분을 기다려서 거행하려고 합니다. 본영 本 營 의 군기고에 있는 총의 숫자는 적지 않으나 하나도 쓸 만한 것이 없습니다. 아병 牙 兵, 본진에서 대장을 수행하는 병사 중에 총을 소지하지 못한 자가 23명입니다. 탄약은 지난날에 요청하여 500근 斤 을 얻었으나 변포 邊 圃, 주변 지역 인 듯 10여 곳을 방어하고 3삭 三 朔 동안 시험 삼아 발사하는데 사용해버려서 남 은 것이 거의 없습니다. 환도 외에는 줄 것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 겠습니다. 헤아려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6호 六 號 화영 華 營 에 전보하기를, 환도는 순무영의 전보대로 시행하라 고 하였다. 정부 政 府. 기백 箕 伯 이 보내온 전보에, 신임 해백 海 伯, 황해도 관찰사의 교유서 敎 諭 書 는 무슨 이유로 오지 않는지 모르겠고, 아직도 부임하지 않아서 매우 근심스럽습니 다. 도중에 의주의 전보를 보았더니, 김유현 金 有 鉉 이 김우용 金 禹 用 과 함께 갔 다 고 합니다. 김우용에게 물어보시면 그 거취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새로 부임한 안주 병사가 보낸 전보에, 일본군의 접대와 운송 및 전선 電 線

찰이전존안 札 移 電 存 案 425 은 먼 거리에 어려운 일이 많아 일본군 진영과 상의하여 안주 등지에 가서 대면하여 지시하고 규정을 세울 것입니다. 또한 순영 巡 營 과 일을 처리하고 의주에 돌아가서 조처할 계획입니다. 그러나 부임하는 일은 아직 조령 朝 令, 조 정의 명령이 없어 단지 갔다가 돌아올 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18일 기백 箕 伯 이 보내온 전보에, 자산 慈 山 의 신임 수령 김영진 金 永 鎭 이 자 성 慈 城, 자산에서 바로 상경했다가 아직도 부임을 하지 않아 관아가 비어 근심 스럽습니다. 빨리 내려가도록 재촉하거나 바꾸든지 바로 처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7호 七 號 기영 箕 營 에 전보하기를, 자산 慈 山 <수령의 일을> 들었으니 해임을 건의하 는 글을 올릴 것이다 라고 하였다. 정부. 8호 八 號 기영 箕 營 에 전보하기를, 해백 海 伯 의 교유서는 8일에 보내어 부임을 하도록 재촉을 했고, 안곤 安 梱, 안주 병사의 유서 諭 書 는 5일에 보냈다 고 하였다. 정부. 화성유수가 <전보하기를>, 신임 완백 完 伯, 전라 감사 이도재의 병이 조금 나아 서 방금 심영 沁 營, 강화 진무영의 병정 兵 丁 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라고 하였다. 19일 9호 九 號 영영 嶺 營, 경상 감영에 전보하기를, 달성 판관 判 官 은 이전의 전보에 따라 유임 을 요청했고, 진주 晋 州 목사는 김해 金 海 로 빨리 옮겨가며, 창녕 昌 寧 수령은 임소 任 所 로 돌아가라는 계 啓 를 올렸더니 <임금께서> 윤허를 하셨다 고 하였다. 정부.

426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20일 영백 嶺 伯 이 보내온 전보에, 지금 안의 安 義 의 보고를 받아보니, 호 남의 비류가 이 달 10일에 다시 용담 龍 潭 을 무너뜨리고 많은 무리를 모아 운 봉 雲 峯 과 본읍 本 邑, 안의를 침범하려한다고 해서 구원을 요청합니다 라고 했기 때문에 병사 100명을 영관 領 官 최처규 崔 處 圭 에게 인솔하게 하고, 지금 계문 啓 聞, 감사가 임금에게 문서로 보고하는 것합니다. 신임 달성 판관은 매우 적임자를 얻었으나 해임된 수령이 교제 交 際 를 잘하여 이런 때에 이런 사람을 잃어 애석합니다. 그 정세상 사직을 청하는 단자 單 子 를 올리고 결코 부임하지 않으려 할 것 같 아 근심스럽습니다 라고 하였다. 의정부가 조회 照 會, 통지할 일은, 법무참의 法 務 參 議 이재정 李 在 正 과 본부의 주사 主 事 최석민 崔 錫 敏 을 먼저 양호 兩 湖 에 출정한 장사 將 士, 장수와 병사들이 있는 곳에 보 내 의정부의 뜻을 알리고 군사 상황을 보려고 한다. 위의 2명에게 식사 제공 과 여비를 귀영 貴 營, 충청 감영에서 요구하는 대로 마련해주라는 총리대신의 하 교 下 敎 를 받들어 통지하니 그것에 따라 마련하여 시행하라 고 하였다. 우 조회 右 照 會 충청도 관찰사 박제순 朴 齊 純 각하 閣 下 의정부에서 편지를 보내기를, 본부 本 府 의 주사 최석민은 먼저 양호에 출 정한 장사들이 있는 곳에 가서 정부의 뜻을 전하라. 반드시 이 편지를 수취 인이 받아야 한다 고 하였다. 의정부에서 편지를 보내기를, 법무참의 이재정은 먼저 양호에 출정한 장사들이 있는 곳에 가서 정부의 뜻을 전하라. 반드시 이 편지를 수취인이 받아야 한다 고 하였다. 기백 箕 伯 이 전보로 회신하기를, 해백 海 伯 의 교유 敎 諭 가 아직도 오지 않아 중 도에 병이 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부임이 비록 급하더라도 감히 길을 떠 날 수 없음을 알립니다 라고 하였다.

찰이전존안 札 移 電 存 案 427 22일 영백 嶺 伯 이 보낸 전보에, 단성 丹 城 장덕근 張 德 根 의 죄를 논해 파직한 것은 사체 事 體 에 따랐으나 그 때의 태도는 단지 놀랍고 한탄스러울 뿐입니 다. 백성의 일과 무관하고 관직에 있는지 6달 만에 백성들의 마음이 흠뻑 젖 어들어 여러 번 <그의 파직을> 애석해하는 글이 있었습니다. 지금 비록 계 문 啓 聞, 감사가 임금에게 문서로 보고하는 것하고자 해도 이미 파직되었는데 유임을 요청 하는 것도 매우 예의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감히 제멋대로 바꿀 수가 없어 말씀을 드리니 헤아려서 지적해주어 결정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10호 十 號 영령 嶺 營 에 전보하기를, 흥해 <수령은> 부임을 했는가? 그렇지 않다면 교 체할 터이니 후임을 바로 알려라. 신임 단성 수령은 벌써 출발하였다 라고 하였다. 정부. 23일 11호 十 一 號 안주 병사는 임소 任 所 에 도착한 뒤에 바로 의주에 가서 일본군에 관한 일 을 처리하라. 의정부. 삼가 말씀을 드릴 것은, 오늘 관보에 실린 중추원 中 樞 院 의 좌우 左 右 의장 議 長 임명에 대한 유지 有 旨, 임금의 명을 적은 글를 읽어보았는데, 저번에 본 공사 公 使 가 보 낸 중추원의 관제 官 制 와 부합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만약에 고칠 곳이 있 으면 서로 대조하여 시행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편지의 요청에 부응하여 귀 대신께서 살펴보시고, 본 공사가 다시 가서 상의를 하기 전에 의원 議 員 을 뽑아 임명하는 일은 잠시 늦추는 것이 매우 타당합니다. 이만 편지를 줄이 며 큰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백작 伯 爵 이노우에 가오루 井 上 馨, 일본 공사 올림.

428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삼가 <답장을 보내> 말씀을 드릴 것은, 의관 議 官, 중추원 의원을 뽑는 일은 <당 신의> 고견처럼 잠시 늦추겠습니다.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총리대신 김 金, 김홍집 기백 箕 伯 이 정부에 보낸 전보에, 해백 海 伯 의 교유 영책 令 冊 이 내려와서 내일 보내려고 합니다. 은산시 殷 山 市, 은산 수령을 말하는 듯함는 뽑아 보냈습니까? 내려 보 내도록 재촉해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24일 반접관 伴 接 官 권 權 이 전보하기를, 보내주신 전보는 잘 받았습니다. 김응옥 金 應 玉 이 용천 龍 川 의 일을 분장 分 掌 하여 안주에 가서 의주가 비게 되니 권 기수 權 箕 壽 를 종사관 從 事 官 으로 가차 加 差 하여 의주에 머물러 일을 보게 해주시기 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12호 十 二 號 안주 安 州 병사 兵 使 권기수 權 箕 壽 를 정부에서 반접종사관 伴 接 從 事 官 으로 임명하니 부임하여 의주에 돌아올 때까지 주장 主 將 을 대신하여 일을 처리하라. 정부. 26일 매영 梅 營, 전라좌수영에서 정부에 전보하기를, 군량은 준비하였으나 일본군은 오지 않고 동도가 와서 포위하여 위태로움이 조석 간에 있습니다. 부산에 있는 일본군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신속하게 동도를 토벌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매곤 梅 梱, 전라좌수사의 막하 幕 下 에 있는 김학규 金 學 圭 가 28일에 영에서 출발하여 부산항에 도착해서 대신 전달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소모관 召 募 官 이 보내온 전보에, 14일에 수 만명의 적들이 운봉 雲 峯 을 침범 하기에 참모와 함께 은밀히 밤에 습격을 해서 1,000명을 베고 빼앗은 포와 창은 1,000여 자루가 넘을 정도로 크게 승리하였습니다. 18일에 6만명의 적 들이 모여 침범을 하려고 하여 위태롭기가 조석 간에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찰이전존안 札移電存案 429 소모관이 영영嶺營에 급하게 와서 간청하기를, 일본 공사에게 전보를 하 여 일본군이 주둔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내려주신 목관 방木關防24)은 남이 믿지를 않아 군기軍機가 많이 막혀 한탄스럽습니다 라고 하 였다. 27일 13호十三號 영영嶺營, 경상 감영에 전보하기를, 도내에 사는 괴산槐山 수령 안창렬安昌烈에게 사조辭朝, 조정에 부임 인사를 하는 것를 생략하고 신속히 부임하도록 지시를 하라 고 하였다. 영영에서 보내온 전보에, 흥해興海 수령이 아직 부임하지 않았으니 헤아 려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영영에서 보내온 전보에, 지금 운봉雲峯의 보고를 받아보니, 이 달 14일 축시丑時, 오전 1시~3시에 저들 수 만명이 남원에서 바로 본 경계를 침범했기 때문 에 박봉양朴鳳陽과 백낙중白樂中이 군사를 인솔하여 용감하게 적진에 나가 크게 싸웠습니다. 15일 진시辰時, 오전 7시~9시까지 승부가 나지 않을 때에 박봉양이 우 두머리 5명을 베고서야 저들이 무너져서 흩어졌습니다. 기세를 타고 추격하 여 포와 화살을 쏘았는데, 포에 맞아 죽은 자가 2,000명 아래로 내려가지 않 고 빼앗은 각종의 무기도 적지 않으며 아군 중에 죽은 사람은 5명이고 부상 을 입은 사람은 25명입니다. 실제로 완전한 승리를 얻어 본도本道 감영에 첩 보捷報를 하여 바로 계문啓聞, 감사가 임금에게 글로 보고하는 것해야 마땅하지만 길이 막 히고 관첩關牒, 공문이 통하지 않아 특별히 계문을 합니다 고 하였습니다. 해당 수령의 방략과 박朴 백白 2사람의 용기는 실제로 가상합니다. 비록 본도는 아니더라도 접경지역에 관계되고 시급한 첩보이어서 타도의 일이라고 일상 24) 목관방(木關防) : 공문서의 위조를 막기 위해 찍는 나무 도장을 말하는 듯하다.

430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적인 규례를 고집해서는 아니 되기 때문에 지금 계문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먼저 이 전보로 말씀을 드립니다 라고 하였다. 28일 14호 十 四 號 영영 嶺 營 에 전보하기를, 이용호 李 容 鎬 의 일은 김유 金 儒 의 보내온 증거가 매 우 긴급하니 어찌 소홀하게 처리하는 것을 용납하겠는가? 빨리 보내도록 엄 중히 지시하라 고 하였다. 정부 政 府, 의정부. 15호 十 五 號 북백 北 伯, 함경 감사에 전보하기를, 새로운 세금을 어겨 3명의 상인 商 人 을 잡아 서 가둔 일 때문에 일본 공사가 반박하니 석방을 바란다 고 하였다. 29일 영영 嶺 營 에서 보내온 전보에, 안동 安 東 김유 金 儒 를 올려 보내라는 지 시는 16일에 관문 關 文 을 받아 바로 해당 읍에 엄중히 통지하였습니다. 그 날 짜를 계산하면 기송 起 送, 사람을 세워 보내다했을 듯하지만, 지금 다시 군교 軍 校 를 뽑 아 올려 보내도록 지시할 계획입니다 라고 하였다. 영영에서 보내온 전보에, 괴산 傀 山 수령 안창렬의 집이 순흥 順 興 에 있다고 했기 때문에 지금 관문으로 해당 군에 지시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30일 16호 十 六 號 공주에 전보하기를, 참의 參 議 이재정 李 在 正 은 노문 路 文 을 잠시 둔 뒤에 돌아 오라 고 하였다. 정부. 완백 完 伯, 전라 감사이 보내온 전보에, 전봉준은 19일에 논뫼 論 山 에서 완영 完 營, 전라 감영에 들어갔다가 23일에 금구 金 溝 로 도주하였고, 김개남은 청주에서 패

찰이전존안 札 移 電 存 案 431 한 뒤에 남원으로 달아났으며, 경병 京 兵 과 일본군 300여명은 24일에 전주에 들어갔고, 200여명은 26일에 들어갔습니다. 25일에 1초 一 哨, 군대의 부대 단위는 금 구로 가고 다른 1초는 남원으로 갔습니다. 완판 完 判, 전주 판관은 27일에 관아에 돌아왔고, 29일에 감영에 도착할 계획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재정이 보낸 전보에, 어제 금영 錦 營, 충청 감영에 도착했더니 비류는 전주 아래로 물러갔고 선봉은 완영 完 營, 전라 감영으로 향했습니다. 비류의 남은 무리 가 서천 舒 川 등지에서 소란을 일으켜서 성하영이 또 크게 승리하였고, 이두황 은 전라우도 全 羅 右 道 로 향한 것은 명백합니다. 노문 路 文 25)은 각처에 흩어져있 어 쫓아갈 수가 없습니다. 노문의 일은 그만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 였다. 금영 錦 營 이 보낸 전보에, 대관 隊 官 김명환은 소대 小 隊 를 인솔하여 오늘 연산 連 山 을 나가고, 성하영은 서천의 도적을 토벌할 것이라고 합니다 라고 하 였다. 17호 十 七 號 영영 嶺 營 에 전보하기를, 위무사에게 지시하여 신속하게 돌아와서 내무 內 務 를 처리하게 하라 고 하였다. 정부 그믐. 금영 錦 營 에서 보내온 전보에, 15일에 원평 院 坪 에서 56명의 적을 죽였고 군 물 軍 物, 무기과 곡식 및 가축 등을 많이 획득하였습니다. 금영에서 전주에 이르 기까지 1명의 적도 보지 못했고, 전주에 들어오기 하루 전에 적이 도망하였 는데 전주를 빠져나간 자들이 400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 25) 노문( 路 文 ) : 공무로 지방에 가는 관리의 도착 예정일을 미리 해당 관아에 알리는 공문을 말한다.

432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12월 [十二月] 초 1일 화성유수가 보내온 전보에, 근래에 동비가 비록 조금 진정되었 어도 내포 등지에서 귀화했다고 하는 자들 중에 겉으로만 귀화한 자가 많습 니다. 호중湖中, 충청도의 적들이 영원히 없어지기 전에는 근심을 풀기가 어렵 습니다. 그들의 동정에 따라 급속히 보고하는 것은 전보에 의지할 뿐입니 다. 그러나 지금 이 영營에 임시로 가설한 전국電局을 내일 철거한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소홀하고 근심스러워서 말씀을 드립니다. 헤아려서 처분해주시 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초 2일 영백嶺伯이 보내온 전보에, 위무사가 안의安義 등지를 향하고 있 는데, 보름쯤에 돌아온다고 합니다. 헤아려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 다. 1일 초 3일 18호十八號 기영箕營에 전보하기를, 해백海伯이 언제 길을 떠났는지 알려달라 고 하였 다. 정부. 초 4일 기영이 전보로 답신하기를, 해백은 지난 달 24일에 출발하여 그믐날에 감영에 도착할 것이라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 정부. 초 5일 영백이 보내온 전보에, 안동의 김유金儒를 기송起送하는 일은 일 전에 전보를 받아 지시를 했고, 다시 군교를 뽑아 해당 읍에 관문으로 통지 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관문은 다만 보고를 덧붙여서 왔는데, 해당 읍의 태도가 매우 소홀하다. 해당 공형公兄의 죄를 먼저 다스리고 다시 엄중한 말

찰이전존안 札移電存案 433 로 지시하라. 정부. 19호十九號 영영嶺營에 전보하기를, 안동의 김유에게 지시하여 보름 전에 한양에 도 착하게 하고 잘못하게 하지 말라 고 하였다. 정부. 초 6일 20호二十號 금영錦營에 전보하기를, 순무사의 회제回題에 박정빈朴正彬을 잡아 가두고 육상필陸相弼의 첩帖을 거두는 일은 잠시 미루고 편지를 기다리라 고 하였다. 정부. 금영에서 보내온 전보에, 이 달 2일에 심병沁兵, 강화 진무영의 병사이 태인泰仁에 서 김개남金介男을 사로잡았는데, 그 곳의 사람이 접선接線했다고 합니다. 2일 의 편지를 정성껏 보내드리니 그것에 따라 처리해주시기 바랍니다. 성하영 成夏永이 군산群山의 적의 소굴에 가서 적을 해산시키고 쌀 600석을 압류하여 다시 <바다를> 건너 지금 보령保寧에 이르렀으며 연산連山에 주둔한 군사가 비도 몇 명을 잡았다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 다시 보내온 전보에, 비괴匪魁 안영선安映善을 오늘 압송하니 도착하면 전 보로 회신해주십시오. 깊은 산의 토굴에서 잡았는데 임괴任魁보다 크고 최비 崔匪와 대등하다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 다시 보내온 전보에, 병영兵營에 지시하여 박기익朴己弋과 육첩陸帖, 육상필의 첩 을 거두는 일은 편지를 기다리라 고 하였다. 최석민崔錫敏이 보내온 전보에, 전주에 주둔한 심병沁兵이 김개남을 잡았습 니다. 태인의 비도가 각처로 도망을 가서 선봉先鋒은 3갈래로 나누어 추격을 해서 지금 전주에서 금영으로 왔고, 내일 돌아가려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

434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초 7일 금영에서 보내온 전보에, 번역관繙譯官 전석규田錫圭에 의하면 전 주에서 온 술객術客은 원평院坪에서 적을 격파한 뒤에 모두 남쪽으로 달아났 고, 좌선봉左先鋒은 이 달 1일에 장성長城에 도착하여 해당 읍이 제법 온전해서 정탐군을 먼저 보냈다고 합니다. 연산連山에 주둔한 군대는 진영陣營을 떠나 좌도左道, 충청도의 좌도로 향해 가서 청병淸兵, 청주 병영의 군대과 합세하여 그들을 토벌 하려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 다시 보내온 전보에, 김개남의 수급首級, 목이 도착하여 순무영에 보냈고, 청주의 병사 50명을 병영에서 뽑아 보내도록 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다시 보내온 전보에, 청산靑山 백성의 등소等訴, 집단으로 백성들이 관아에 호소하는 것를 보니, 상주의 유격장遊擊將이 평민을 침탈한다 고 합니다. 영백嶺伯, 경상 감사에 게 전보를 하여 그 일의 진위 여부를 알아보아 회답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라 고 하였다. 초 8일 21호二十一號 금백錦伯에게 <전보하기를>, 안安, 안영선은 무사히 압송되어 도착하였다 고 하였다. 정부. 영백嶺伯에 전보하기를, 상주의 유격장이 청산의 평민을 침탈한다는 금백 의 전보를 받았는데, 그것의 진위여부를 알아보아 회답하라 고 하였다. 정 부. 금영에서 보내온 전보에, 전적全賊, 전봉준을 사로잡아 압송한다고 하는데, 임실任實 수령과 일본군이 그를 압송하여 금강을 건넜습니다 라고 하였다. 다시 보내온 전보에, 박정빈朴正彬의 <일은> 병영에 지시하여 그 무리를 풀어주었고, 2명의 거괴巨魁는 잡았다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 다시 보내온 전보에, 편지로 <말씀하신 뜻은> 잘 알았습니다. 박朴, 박정빈 이 처음에 그들의 고족高足, 수하 또는 제자이 되어 그들을 알 터이니 잠시 병영에

찰이전존안 札移電存案 435 가두고 그 무리에게 힘을 다해 우두머리를 잡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완영完營, 전라 감영에서 보내온 전보에, 심영沁營, 강화 진무영의 군대는 12월 2일 에 태인泰仁에서 적괴賊魁 김개남을 사로잡았습니다 라고 하였다. 22호二十二號 완백完伯에게 전보하기를, 김개남은 무슨 이유로 <목을> 베었는지 상세 하게 알려 달라. 전봉준이 잡혔다고 하는데, 반드시 함거檻車, 죄인을 실어 나르던 수 레로 데려와서 유지有旨를 받들어라 고 하였다. 정부. 금영錦營이 보내온 전보에, 전全, 전봉준은 바로 틀림없이 함거로 데려가겠습 니다 라고 하였다. 초 9일 영백嶺伯이 보내온 전보에, 각처의 소모사召募使는 정말로 조용히 지내고 있으나 상주尙州의 소모사만 행동거지가 매우 크고 읍을 돌며 폐단을 끼치는 것도 많습니다. 더욱이 각 읍에 통지하여 포군砲軍을 뽑고 군량으로 호戶마다 몇 되의 쌀을 마련하게 하는데, 무슨 일로 많은 포군을 뽑고 쌀을 백성에게 거두는 지는 말할만한 것이 아닙니다. 도내에는 지금 변고가 없는 데, 이런 일 때문에 읍마다 시끄러워 매우 근심스럽습니다. 백성에게 쌀을 거두는 것은 지금 감결甘結을 보내 금지하였으나, 서로 간에 의지하는 부분이 없지 않으니 미리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소모사와 조방장助防將 및 토포사討 捕使를 임명하는 공문을 주고받는 형식이 어떠하면 정당停當, 사리에 맞다하겠습니 까? 휴이攜貳, 서로 어그러져 믿지 아니하거나 딴 마음을 가짐와 갈등이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 는데, 지적해서 가르쳐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다시 보내온 전보에, 전보로 하교하신 뜻은 잘 알았습니다. 상주 소모 사26)의 일은 지금 전보로 말씀을 드렸으나 유격장遊擊將, 金奭中이 청산의 평민 을 침탈한 것은 매우 놀랍습니다. 지금 당장 소모사에게 공문을 보내고 상

436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주 목사에게도 지시하여 바로 조사를 해서 정부에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초 10일 23호二十三號 금영錦營에 전보하기를, 상주 유격장의 일은, 영백嶺伯이 지금 특별히 조사 를 하겠다고 전보로 답신을 하였다 고 하였다. 정부. 24호二十四號 영영嶺營에 전보하기를, 상주 소모사의 일은 편지로 보고하였고, 소모사 와 조방장 및 토포사는 모두 평등하게 하는 것이 정당하다 고 하였다. 정부 완영完營이 보내온 전보에, 전봉준은 순창淳昌의 백성이 잡아서 현재 일본 군 진영에 갇혀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금영에서 보내온 전보에, 완백이 일관日官, 일본군 장교의 편지를 넣어 보냈는 데, 전석규田錫圭, 역관가 태인泰仁에서 도망하여 일본군 진영의 짐을 횡령한 듯 하니 법에 따라 압송하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전석규가 일전에 금영에서 출 발하여 경기도에 들어 간듯하니 기영畿營, 경기 감영과 경무청警務廳27)을 통해 잡 아서 조사하여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11일 의정부 도헌議政府 都憲 유길준兪吉濬이 조회照會할 일은, 이용헌李龍憲의 자식이 선봉진先鋒陣에 나가는 일을 법무참의法務參議 이재정李在正과 본 정부의 주사主事 최석민崔錫敏에게 출정한 장사將士가 있는 곳에 정부의 뜻을 알리는 공 26) 상주(尙州) 소모사(召募使) : 상주의 유림인 정의묵(鄭宜黙)을 말한다. 27) 경무청(警務廳) : 1894년에 관제가 개편되어 내무아문에 소속된 관청의 하나로 경찰업 무를 관장한 기관을 말한다.

찰이전존안 札 移 電 存 案 437 문 公 文 을 보내 알린 것이 2차례이나 한 번도 답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본 도 헌은 공문에 답장이 없는 것에 의혹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그 공문을 받 았는지의 여부를> 알지 못하는데, 더욱이 본 편지에 있어서야 어떠하겠습니 까? 총리대신 總 理 大 臣 의 하교 下 敎 를 대신 가서 전하는 것과 부내공독존안 府 內 公 牘 存 案 2건은 보냈으나 온 것이 없어 관부 官 府 의 관례 慣 例 를 갖추기가 어렵습니다. 이상의 2차례 공문도 바로 답장을 주시기 바랍니다. 우 조회 右 照 會 충청도관찰사 박제순 朴 齊 純 각하 閣 下 금영 錦 營, 충청 감영에서 보내온 전보에, 병사 兵 使 의 치보 馳 報 를 받아보니, 수 만 명의 남비 南 匪, 호남의 동학군가 무주 茂 朱 에서 7일에 옥천 沃 川 에 머물렀다가 영동 永 同 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2갈래로 군사를 뽑아 보은과 영동으 로 향했다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 완영 完 營, 전라 감영에서 보내온 전보에, 김개남은 잡았으나 목숨이 끊어졌 고, 비록 함거 檻 車 로 보내려고 했으나 중도에 빼앗길 염려가 있었습니다. 먼 저 목을 벤 연유는 벌써 계문 啓 聞 하였습니다. 전적 全 賊, 전봉준은 지금 일본군 진 영에 갇혀 있고, 함거로 보내어 바칠 계획입니다 라고 하였다. 25호 二 十 五 號 금영 錦 營 에 전보하기를, 공주와 충주에 각각 140명의 경군을 주둔시키는 데 공주는 토병 土 兵 을 더하고, 청주와 홍주 洪 州 에도 각각 70명의 경군에 토병 을 더하며 천안에 주병 州 兵 을 배정할 계획에 대해 가부를 평가하여 알려 달 라 고 하였다. 정부. 26호 二 十 六 號

438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완백 完 伯 에게 전보하기를, 전주와 남원에 각각 210명을, 나주와 고부 古 阜 에 각각 70명을 주둔시키는데 나주에는 토병을 더하고, 순천에 140명을 배 정하는 계획에 대해 가부를 평가하여 알려 달라 고 하였다. 정부. 27호 二 十 七 號 금영 錦 營 에 전보하기를, 급히 서산 瑞 山 의 군사를 불러 지켜라 고 하였다. 정부. 금영에서 보내온 전보에, 천안 <수령이> 비보 飛 報 하기를, 임실 任 實 수령이 목천 木 川 도리 道 里 고개에서 밤중에 없어졌는데, 일본인 6명이 서울에 올라가 기 위해 지방관에게 일본 공관으로 압송해줄 것을 위탁하였으나 어디로 갔 는지를 알지 못해 매우 근심스럽습니다 라고 하였다. 다시 보내온 전보에, 경병 京 兵 을 배정한 액수는 감히 평가할 수가 없습니 다. 서산 瑞 山 <수령의> 편지를 받아보니, 해당하는 그 곳은 아직도 조용하여 대관 隊 官 에게 병사를 인솔하여 나아가서 기미를 보아 나누어 주둔하도록 지 시하였다 고 하였습니다. 소모사 召 募 使 문석렬 文 錫 烈 이 감영에 도착하여 총알을 주어 보은 報 恩 에 가게 하였고, 구완희 具 完 喜 와 이종헌 李 鍾 憲 이 토병을 인솔하여 근처 경계를 나누어 순찰하여 찾아내서 잡으려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 다시 보내온 전보에, 병사 兵 使 가 다시 보고하기를, 남비 南 匪 수 만명이 8일 에 보은읍 30리 밖에 머무르자, 보은 수령이 구원을 요청하여 이용정 李 容 正 에 게 달려가서 구원하도록 지시하였다 고 합니다. 감영의 수비가 소홀하여 서 산의 병사[성하영의 군사] 를 부르려고 하니 신속히 하교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라 고 하였다. 영영 嶺 營, 경상 감영에서 보내온 전보에, 지금 안동의 보고를 받아보니, 김두 락 金 斗 洛 이 이달 2일에 파원 派 員 을 올려 보내겠다 고 합니다. 헤아려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찰이전존안 札移電存案 439 12일 원전국元電局, 원산의 전보국에서 보내온 전보에, 지난번에 전보를 바로 함영咸營, 함경 감영에 보냈는데, 북백北伯, 함경 감사이 이 전보를 무슨 이유로 보내는 지를 들어 전예電隸, 전보국의 하인를 잡아갔습니다. 사체事體를 보아 놀라움과 의 혹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그만두지 않는다면 함영에 가는 전보를 다시 보낼 수가 없어 이것을 보고합니다 라고 하였다. 13일 금영錦營.에서 보내온 전보에, 보은에서 편지로 보고하기를, 10일 에 청주군淸州軍 200명이 보은에 도착했더니 비도匪徒는 청읍靑邑, 청산읍으로 들 어가서 10,000명이 되지 않았고 남쪽에서 패배하여 돌아갔다고 합니다 라 고 하였다. 다시 보내온 전보에, 첩보牒報할 일은, 이 달 10일에 도착하여 받은 의정 부의 관문關文에, 근래에 동학을 운운하는데, 교화가 쇠퇴하고 괴이한 말이 시끄러운 것을 생각하면 동학의 외부에 다시 남학南學28)이 있을 뿐만 아니라 남학의 다른 파를 북학北學29)이라고 합니다. 동학과 대비하는 것은 서학西學, 천주교이라고 한다. 북학이 중국의 학문이고 서학이 서양나라의 학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리석은 백성이 쉽게 현혹되어 편안하지 못하다 라고 하였습 니다. 이것이 저들에게 들어가면 길은 다르나 한곳으로 귀결되거나 시작은 같지만 끝내 나누어지기도 하는데, 그 폐단은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조정이 이전의 금지를 훤히 풀어 종교들이 모두 허용되어 장애가 없으나, 신臣은 지 금 유민莠民, 몹쓸 백성이 하찮은 종교에 가탁하여 무리를 믿고 일을 키우는 것은 금지해야만합니다. 그들은 독사가 될 뿐 아니라 귀신과 물여우가 될 것입니 다. 서로 원수가 되어 약한 자의 고기를 강한 자가 먹고 관리는 손을 못 쓰 28) 남학(南學) : 김일부 정역파(正易派) 계통인 영가무도가(詠歌舞蹈歌)의 한 파로 전라도 진안에 근거를 두었다. 동학과는 별개의 문호를 가지고 있었다. 29) 북학(北學) : 동학과 다른 계열로 동학과 행동을 달리했다.

440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며 법이 없고 약속을 깨뜨릴 것입니다. 정부와 순무영巡撫營은 장정章程을 분명 히 정하고 5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엄중히 하며 문패門牌의 규모를 상세히 바로 잡는 일도 긴급하게 처리해주시기를 요청합니다. 경계하여 단속하는 일은, 각 면面과 리里에 순사巡査를 설치하여 기료饑料, 봉급인 듯를 주고 진범眞犯을 식별 하여 조사하며 밤낮으로 순찰을 돌아야 합니다. 만약에 점점 늘어나서 도모 하기 어려우면 각 진鎭에 주둔하고 있는 병진兵陣에 통지하여 때에 맞추어 격 파하기를 신은 바랍니다. 다만 그들을 영원히 근절시키려고 법에 맡겨 일을 처리한다는 말들을 각 관아에 통지하면 저들의 분노를 초래할 것이고, 단지 헛된 말에 의탁하면 끝내 실효가 없을 것입니다. 다시 비류匪類가 소요를 일 으키는 지금에 각 지방에 유회儒會를 만들어 그 기세를 분산시키고 그 예봉을 꺾는 것이 진실로 훌륭한 방책인 듯하나 이것은 각각에 적합하지만, 오래 지속해서는 아니 됩니다. 지금 군대를 쓴 뒤에 예전대로 시행해서는 아니 될 듯합니다. 무뢰배들은 교활하고 본래 일정한 생각이 없어 강한 자를 따 르고 힘을 받아드릴 뿐입니다. 흩어져서 무력한 동학을 보면 유회에 의탁할 생각을 합니다. 또는 의병에 들어가서 동학을 토벌한다고 하며 양민을 침탈 하는데, 그 이름을 물어보면 유회와 의병입니다. 그러나 그 행동을 살펴보 면 비류와 강도입니다. 속이고 또 속이니 막아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근래 에 호남 지방에도 유표儒標, 유회에서 발행한 표를 준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규정이 어떠한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유생 농민 상인 공인工人을 막론하 고 모두 백성입니다. 동포로 대우하고 적자赤子, 갓난아이처럼 보호해야 합니다. 따로 명목名目을 세우고 규정을 만들어 다툼의 단서를 열어서는 아니 됩니 다. 진실로 이전처럼 한다면 유표를 가진 자는 모두 선류善類, 동학군이 아닌 사람이 고 유표儒標가 없는 자는 모두 비류입니까? 더욱이 유표를 가진 자가 제각각 온전한 유생이 아니지만 유생의 이름을 빌려 진유眞儒에게 패배를 주고 욕되 게 하는 것은 이치상 정문呈文, 하급 관청이 상급 관청에 내는 문서으로 보고하는 것이 합 당합니다. 정부와 순무영은 양호兩湖, 호서와 호남의 감영과 병영에 관문을 보내

찰이전존안 札移電存案 441 각 지방관에게 지시를 전해서 일률적으로 처리하여 분란의 폐단이 없도록 하는 것이 실제로 공정하고 편리할 것입니다. 수취인이 반드시 첩정牒呈을 받아야합니다 라고 하였다. 다시 보내온 전보에, 각 군대가 보은에 모였는데, 내일 새벽에 다시 반대 半隊, 군대의 단위중 一隊의 절반를 구원하러 보낼 것입니다. 경병經兵30) 50명이 전주에 서 왔고, 서산瑞山의 군대는 일간 도착할 듯합니다. 적이 장흥長興을 침범했다 는 소식을 들었고, 다리 한쪽이 부러진 일본군을 구해 치료를 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14일 영영嶺營, 경상 감영에서 보내온 전보에 지금 상주尙州 목사의 보고를 받아보니, 비류匪類가 황간黃澗 영동永同 청산靑山의 무기를 빼앗아 지금 황간 의 용산장龍山場에 주둔하며 영남의 경계로 향하려 한다 고 하였습니다. 연이 어 도착한 김산金山 소모사召募使가 보낸 공문에, 수만의 동도東徒가 황간을 무 너뜨리고 영동에 주둔하였습니다 라고 하며 구원을 요청하였기 때문에 바 로 금산과 상주의 2개 읍에 군사를 나누어 보냈습니다 라고 하였다. 금영錦營이 보내온 전보에, 병사兵使를 맡고 있는 보은報恩 수령이 보고하기 를, 관군이 물러나 <적이> 보은읍에 들어와서 매우 급박하여 구원을 요청 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일본군 병참兵站, 군대가 머무는 곳에 전보로 급히 구원해 주도록 요청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다시 보내온 전보에, 연산連山의 신임 수령이 어느 곳에 집이 있는지 <모 릅니다> 부임을 재촉하려하니 곧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28호二十八號 금영錦營에서 전보하기를, 연산의 수령이 충주에 집이 있으니 관문關文을 30) 경병(經兵) : 경리청(經理廳)에 소속된 군사를 가리키는 듯하다.

442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보내 부임을 하도록 재촉하라 고 하였다. 정부. 금영에서 보내온 전보에, 경 經, 경리청과 청 淸, 청주의 2 진영과 보은 수령이 청주에 들어갔으나 적의 기세가 창궐하고 최 崔, 최시형을 가르키는 듯가 정말로 종적 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 15일 금영 錦 營 에서 보내온 전보에, 일본군이 청비 靑 匪, 청산의 비도를 크게 격파해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청주에서 보발 步 撥 로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라 고 하였다. 완영 完 營 에서 보내온 전보에, 지형을 살펴보고 적의 사정을 참고하면 전 주에 200명의 군사를, 금산 錦 山 에 100명을 남원에 100명을 순천에 100명을, 나주에 50명을, 고부에 50명을, 담양에 50명을, 장흥에 50명을 주둔시키는 것이 사리에 맞을 듯합니다 라고 하였다. 16일 금영에서 보내온 전보에, 청주에서 보발로 비도를 격파했다는 얘기는 잘못 전해진 것입니다. 일본군 40명이 상주에서 왔다가 적이 많은 것을 보고 돌아갔다고 하는 소식을 들었는데, 혹시 크게 거사하여 다시 오 려는 듯합니다 라고 하였다. 청곤 淸 梱, 청주 병사이 보내온 전보에, 남쪽에서 온 비류가 지금 영동과 청산 에 있는데, 날로 많아져서 10,000명이 되어 적의 기세가 대단합니다. 이 달 12일에 경리영과 진남영이 패배하여 본영 本 營 의 위태롭기가 조석간에 있게 되었습니다. 정부 政 府, 의정부에서 일관 日 館, 일본 공사관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충주 와 상주에 주둔한 일본군 500명이 17일에 보은에 모인 병력을 토벌하였습 니다. 최시형은 도망 중입니다 라고 하였다. 완영 完 營 에서 보내온 전보에, 이 달 12일에 고창 高 敞 의 사민 士 民 이봉우 李 鳳 宇 가 손화중 孫 和 仲 을 잡아서 바쳐 지금 현 縣 의 옥에 가두었습니다. 유쾌하고 다 행스럽습니다 라고 하였다.

찰이전존안 札 移 電 存 案 443 기영 箕 營, 평안 감영에서 보내온 전보에, 선천부사가 임소 任 所 에 도착한 일은, 읍에서 바로 장계 狀 啓 하는 것은 전례가 없으며, 본영 本 營 의 등계 謄 啓, 공문을 베켜서 임금께 보고하는 것가 없어 규정에 어긋납니다. 의정부에 도착한 장계는 들이지 마 시고 본영의 수계 修 啓 를 기다려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29호 二 十 九 號 기백 箕 伯, 평안감사에게 전보하기를, 선천부사가 임소에 가는 것은 감영의 계 문 啓 聞 을 기다리겠다 라고 하였다. 정부. 영백 嶺 伯 이 보내온 전보에, 호남의 비류가 황간과 영동 등지에 벌떼처럼 모여 그 기세가 매우 커서 청주의 군대도 패하여 물러갔다고 합니다. 부근 읍의 장정과 남영 南 營, 대구에 설치한 친군영의 병사에게 힘을 합하여 추격해서 잡도 록 지시하였습니다. 지금 상주 소모사의 답신을 보니, 유격장이 평민을 함 부로 잡아들인 일이 없다고 하나 특별히 조사해서 보고할 계획입니다. 밀양 密 陽 의 아전과 백성이 도내에서 가장 교활하고, 서로 나뉘어서 다투어 이기는 것을 주로 하여 법이 없다고 할 만합니다. 자격 資 格 에 구애받지 말고 엄중하 고 공명한 사람을 특별히 뽑아 밤을 가리지 않고 부임을 재촉해주시기를 바 랍니다. 위무사 慰 撫 使 는 어저께 돌아갔습니다 라고 하였다. 30호 三 十 號 완백 完 伯 에게 전보하기를, 손화중을 일본군에게 보내 압송하라 고 하였 다. 정부. 17일 영백 嶺 伯 이 보내온 전보에, 지금 달성 達 城 판관 判 官 의 보고를 보니, 8월에 일본군이 본읍 本 邑 사문 沙 門 에 사는 백성의 밭에 머물면서 두락 斗 落 마다 도조 賭 租 로 6냥씩을 낼 때에 대구 사령부에서 증표를 만들어 주었는데, 전 田 38두락에 228냥의 도조 값을 아직까지 지급하지 않아 백성들이 소장 訴 狀 을

444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실에 근거하여 사령부에 기별하였더니, 이 일을 전에 일본 공사에게 전보로 알려 귀국 정부에서 조처한다는 하교를 받았으 니, 이것을 전보로 정부에 보고하면 저절로 구별된다 고 하였습니다. 읍의 보고가 이와 같아서 말씀을 드리니 헤아려서 처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라 고 하였다. 18일 31호三十一號 7도안무사七道按撫使에게 전보하기를, 정조正朝, 설날에 봉진封進할 전문箋文은 표문表文으로, 주상전하主上殿下는 대군주폐하大君主陛下로,31) 왕세자저하王世子邸下 는 왕태자전하王太子殿下로 호칭을 하라 고 하였다. 정부. 32호三十二號 감사監司 유수留守 곤수梱帥, 병사 이하는 지금부터 상주上奏하지 말고, 사무 를 분별하여 해당 아문에 보고를 하라. 참작하여 상주할 일은 명이 내리면 살펴서 시행하라 고 하였다. 정부. 금영錦營에서 보내온 전보에, 청주 병사兵使의 보고에, 구원병은 오지 않 았고, 청주의 군대는 보은에 도착했으나 전진하지 못했다 고 하였습니다. 일본 공사관에 알아보아 각 병참兵站에서 언제 출병했는지를 물어서 바로 알 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서산瑞山의 1대一隊가 오늘 도착하여 바로 보내려고 하 며, 탄환이 떨어져서 보내주기를 요청해서 몇 상자를 사람을 시켜 보내려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 31) 표문(表文)과 폐하(陛下) : 갑오개혁 이후 조선왕조에서 제후의 격식에 맞는 용어를 쓰 지 않고 황제에 걸맞는 용어를 쓴 조치이다. 독자적 연호를 사용한 것도 마찬 가지의 뜻 이다.

찰이전존안 札 移 電 存 案 445 33호 三 十 三 號 금영에 전보하기를, 경병 京 兵 은 일본군과 함께 내일 크게 일어나서 남쪽 으로 내려가라 고 하였다. 19일 영영 嶺 營 에서 보내온 전보에, 정조 전문 箋 文 은 정식 定 式 에 따라 이 달 12일에 봉 封 해서 바쳤는데, 다시 봉해서 바쳐야 할지와 관례대로 존호 尊 號 를 써야 하는지, 그리고 장계 狀 啓 는 감사와 유수가 모두 중지해야 하는지를 상세하게 하교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금영에서 보내온 전보에, 회인 懷 仁 에서 보고하기를, 적괴 賊 魁 양홍개 楊 紅 盖 가 들어와서 그 수가 점차 늘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고, 병사가 보고하기를, 별군관 別 軍 官 이태 李 泰 가 보은 報 恩 의 죽암 竹 巖 에 도착하여 30여명을 죽였으나, 고립된 군대로 적을 상대하기 어려워서 물러나 미원 米 原 과 충주 忠 州 의 병참 兵 站 에서 병사를 징발하게 하였습니다. 제천 堤 川 에서 구원하러 나오는 것이 아직 더디고 만약 제천의 군사가 오지 않는다면 물러나서 청주를 지킬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서산에서 1대 一 隊 의 군사가 오늘 아침에 여기에 도착하였 습니다 라고 하였다. 20일 34호 三 十 四 號 영영 嶺 營 에 전보로 답신하기를, 전문 箋 文 은 다시 올릴 필요가 없고, 장계 狀 啓 는 감사와 유수 모두 중지하라 고 하였다. 정부. 35호 三 十 五 號 금영 錦 營 에서 전보하기를, 무주부사 茂 州 府 使 이탁 李 倬 이 사조 辭 朝, 조정에 인사를 하고 부임하는 것를 면제하고 빨리 임소 任 所 에 가는 일을 완백 完 伯 에게 전하라 고 하였 다. 정부.

446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완백이 보내온 전보에, 손적孫賊, 손화중의 일은, 최편함崔片椷에게 일본군 진 영까지 그를 압송하게 하였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금영에서 보내온 전보에, 일본군 대위 미야케三宅와 상주 병참에 있는 쿠 와바라桑原가 병사 50명을 인솔하여 상주와 청주의 병사와 합세해서 18일에 적을 격파하였습니다. 최崔, 최시형는 도망을 가고 그 무리는 흩어졌으며 보은 수령이 관아에 돌아왔습니다 라고 하였다. 다시 보내온 전보에, 매일 전주에서 금강錦江을 건너는 소와 말이 이어진 것처럼 매우 많았습니다. 군실軍實, 군사에 관계된 모든 일은 보고하고 회제回題, 답신를 기다려야 하지만 사사롭게 가져가서 오늘 집류執留, 압류한 것을 성책成冊하여 순무영에 보고하니 회답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21일 26호二十六號 금영에 전보하기를, 남쪽에서 오는 소와 말은 금강을 지나지 못하게 하 고, 그 주장主將의 이름을 조사하여 성책해서 보고하라 고 하였다. 정부. 21일 완백完伯이 보내온 전보에, 무주茂朱 금산錦山 진산珍山 임실任實 김제金堤 등의 읍의 형편이 매우 시급합니다. 해당 수령을 밤을 가리지 않고 내려가도록 재촉해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19일. 금영에서 보내온 전보에, 목천木川에서 보고하기를, 비류 수천명이 청안 淸安에서 진천鎭川에 와서 주둔하였습니다 라고 하였고, 19일에 경병京兵이 출 발했습니까? 라고 하였다. 다시 보내온 전보에, 은진恩津과 노성魯城의 백성이 말을 잃어버리고 와서 호소를 하기에 조사를 하려고 어제 그 사람을 비로소 잡았으나, 대부분 억 세서 구속하기 어려운데다가 인마人馬가 먹는 비용도 적지 않습니다. 본도本道 에서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면 치尺, 증명서를 검사하여 풀어주고 그 이름을 적

찰이전존안 札 移 電 存 案 447 어 빨리 보고하려고 합니다. 조사를 그만두고자 한다면 순영 巡 營 을 통해 사 람을 동진 銅 津 에 보내어 조사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원감 元 監, 원산 감리서에서 보내온 전보에 전보를 잘 받았고 북백 北 伯, 함경 감사에 게 마노 瑪 瑙, 보배의 일종인데 선물인 듯를 전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기백 箕 伯 이 보내온 전보에, 대동 찰방 大 同 察 訪 노덕순 盧 德 純 의 거처를 알지 못 하고, 당사자도 새 명령을 듣지 못하여 지금에야 임소에 도착하였습니다. 아직 사조 辭 朝 를 면제하는 처분이 없으니 지적하여 하교해주시고, 신임 자산 慈 山 수령을 내려가도록 재촉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22일 금영 錦 營 에서 보내온 전보에, 진비 鎭 匪, 진천의 비도는 바로 청주 <병사 兵 使 가> 보고했던 패배한 자들의 한 부류입니다. 다시 속리산으로 향하여 어 제 길을 나눠 2개의 대를 파견하였습니다. 지난번에 청주 <병사 兵 使 >가 보고 한 진천 鎭 川 의 비도는 경병 京 兵 의 지원을 기다리겠습니다. 서산에서 1대가 와 서 주둔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완백 完 伯 이 보내온 전보에, 전문 箋 文 의 존호 尊 號 는 전보로 하교하신 것에 따 라 봉 封 하여 바치겠습니다. 전에 보낸 전문 箋 文 은 되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다시 보내온 전보에, 전보로 하교하신 뜻은 잘 알았습니다. 봉주 封 奏, 밀봉한 상서를 정지하고 각 아문 衙 門 에 바로 보고하는 일은 중대한 데에 관계가 되니 공문을 보낸 뒤에 거행하도록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23일 금백 錦 伯 이 보내온 전보에, 병사 兵 使 가 보고하기를, 충주의 일본군 70명이 청안 淸 安 에서 진천에 왔습니다 라고 하였고, 천안 天 安 수령이 보고하기 를, 목천의 군사와 합세하여 그들을 치러 갔다가 진천의 비도가 다시 흩어 져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최 崔, 최시형도 진천에 도착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448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순무영 중군中軍 휘하에 <전보하기를>, 오늘 주본奏本은 비괴匪魁 3명의 목 을 베어 경계하고 김적金賊, 김개남의 잘린 머리를 조사하는 것입니다. 귀영貴營, 순무영의 초기草記는 뜻을 받들어 임금의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총리대신 의 하교를 받들어 지휘할 일은, 수집사首執事 1명을 바로 보내어 명을 전하도 록 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라고 하였다. 정부政府, 의정부 도헌都憲 유兪, 유길준. 24일 37호三十七號 금영錦營에 전보하기를, 어제 칙령勅令을 받았는데, 호남의 비류가 봄부터 겨울까지 <지속되어> 농사에 때를 잃고 가뭄과 흉년으로 먹는 것도 어려워 졌다. 백성의 실정을 생각하면 비단과 옥玉도 편안하지가 않다. 해당 도는 갑오조甲午條, 1894년도에 해당하는 세금의 대동미大同米를 특별히 반으로 줄여 조정에서 <민을> 불쌍히 여긴다는 뜻을 보여라. 심지어 재해災害를 <입은 백성의 세금 을> 줄이고 궁박한 백성을 진휼하는 일은 도신道臣, 감사의 보고를 기다려서 정 부가 품달稟達한 뒤에 시행하라 고 하였다. 칙령의 뜻을 바로 완백完伯에게 통 지하고 거행하라 고 하였다. 정부. 금백錦伯이 보내온 전보에, 목천木川에서 비도가 안성安城을 향했다고 보고 를 하였으나 경병京兵이 어디에 도착했는지를 듣지 못했습니다 라고 하였다. 영백嶺伯이 보내온 전보에, 지금 상주 목사의 보고를 받아보니, 청주의 비도匪徒 수 만명이 보은에 머물러서 18일에 일본군이 각처의 병사와 합세하 여 그들을 쏘아 죽였고, 청주의 군사들도 도왔습니다. 저들 중에 죽은 자들 은 500~600명이 되고 나머지는 속리산으로 도망을 가거나 사방으로 흩어졌 습니다. 그러나 일본군과 아군은 한사람도 부상을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라 고 하였습니다. 또한 김산金山 소모사召慕使가 보낸 공문公文을 보면, 20일에 각 역병魊兵이 황간黃澗에 주둔한 비도를 공격하여 2명의 우두머리를 베고 300여 명을 쏘아 죽였다 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

찰이전존안 札 移 電 存 案 449 금백 錦 伯 이 보내온 전보에, 비도가 충주로 옮겨가서 이태 李 泰 가 왔고, 목천 木 川 수령이 따라갔습니다 라고 하였다. 29일 기백 箕 伯, 평안 감사이 보내온 전보에, 위원 渭 原 <수령> 김유현 金 有 鉉 이 의병 20명을 인솔하여 지금 평양에 도착했습니다. 그래서 전보로 말씀을 드 립니다. 전진과 후퇴를 하는 것은 다시 정부의 처분을 기다리겠습니다 라 고 하였다. 금백 錦 伯 이 보내온 전보에, 하늘이 쇠퇴한 것입니까? 새로 보충하던지 아 니면 상주 上 奏 와 도계 道 啓, 감사의 狀 啓 를 그대로 두기를 요청합니다. 관례 慣 例 를 크 게 바꿀 뿐만 아니라 <비도를> 추격하는 중이라 달리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 다 라고 하였다. 다시 보내온 전보에, 어제 객병 客 兵, 다른 곳에서 온 병사이 비도로 가장하여 와 서 소란스럽게 하기에 쫓아 보냈습니다. 그들이 청산 靑 山 과 보은에서 패배하 여 홍산사 鴻 山 寺 에 모여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토병 土 兵 은 간담이 작아 일을 수행할 수가 없어 전보로 요청을 합니다. 병사와 포 砲 몇 십명만 보내주시면 충분합니다. 공주는 늘 몇 명의 군사가 상주해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30일 38호 三 十 八 號 금영 錦 營 에 전보하기를, 박정빈 朴 正 彬 을 내무주사 內 務 主 事 인데 청산현감 靑 山 縣 監 으로 임명하니 사조 辭 朝, 조정에 하는 부임인사를 그만두고 신속히 부임하도록 지시 하라 고 하였다. 정부. 39호 三 十 九 號 기영 箕 營 에 전보하기를, 김위원 金 渭 原, 위원 수령 김유현은 의병과 함께 바로 한양

450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에 오라 고 하였다. 정부. 40호四十號 금영錦營에 전보하기를, 천안은 예전대로 상주上奏를 하라 고 하였다. 정부. 1895년 [乙未] 1월 [正月] 초 1일 기백箕伯, 평안 감사이 보내온 전보에, 김위원金渭原이 전진하고 후퇴 하는 일은 전보로 말씀을 올렸으나 답신이 없어 이상합니다. 의병 20명이 많은 날을 묵는 것도 근심스럽습니다. 바로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41호四十一號 기영箕營에 전보하기를, 김위원의 일은 전보를 이미 보냈다 고 하였다. 정부. 42호四十二號 금영에 전보하기를, 신기선申箕善32)의 상소上疏에 비답批答하기를, 시국의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고 여전히 사직辭職에만 애쓰니 이것이 어찌 신하로서 의義를 나눈 것이겠는가? 바로 올라와서 명을 따르라 고 하였다 라고 하였 다. 정부. 32) 신기선(申箕善) : 1851~1909. 본관은 평산이고 자는 언여(言汝)이며 호는 양원(陽園) 노봉(蘆峰)이다.

찰이전존안 札 移 電 存 案 451 11일 영백 嶺 伯, 경상 감사이 보내온 전보에, 지금 돈으로 진휼을 시행하는 데, 진미 賑 米 1석의 값은 예전처럼 15냥이고 지금 세미의 값도 15냥입니다. 그래서 장정 남자가 10일 동안 받는 진휼을 5승 五 升 마다 돈 5전 錢 으로, 성인 여자는 4승마다 돈 4전으로 마련하였습니다. 감진관 監 賑 官 이 지금에야 감영 에 도착하여 정부의 관문 關 文 을 보니 그 관문의 후록 後 錄 에, 승 升 과 홉 合 을 따 르던 예전의 규정을 폐지하고 달마다 2개의 등급으로 나누어 주라 고 하였 습니다. 그렇다면 달마다 3번씩 2개의 등급으로 나누어 진휼을 해야 하는 데, 비록 승과 홉의 규정을 폐지했어도 규례대로 돈을 계산하여 나누어 주 는 것이 맞습니까? 아니면 새로 정하여 더 주어야 합니까? 10일 전에 규례에 따라 남녀노소와 식구 및 등급마다 지급할 돈의 액수를 소상하게 하교해주 시기를 바랍니다. 읍에서 거둘 사창 社 倉 의 쌀은 쌀로 거두어 나중에 본전 本 錢 을 채울 계획입니다 라고 하였다. 43호 四 十 三 號 금영 錦 營 에 전보하기를, 호남 소모관 召 募 官 전동석 田 東 錫 이 100여명을 인솔하 니 영 營 에서 서울까지 일정을 계산하여 공전 公 錢 에서 넉넉히 비용을 지급하고 보고하라 라고 하였다. 정부. 완백 完 伯 이 보내온 전보에, 지금 이노우에 井 上 공사가 일본군 진영에 보낸 전보를 보니, 일본군을 철수시키고, 경군 京 軍 도 모두 돌아간다 라고 하였습 니다. 지금 비괴 匪 魁 몇 명을 비록 잡았다고 해도 법망에서 빠져 잠복하여 틈 을 노리는 자가 몇 만명이나 되고, 민심의 향배 向 背 도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군사를 철수한다면 재앙이 뒤를 잇는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다 시 3~4개월 동안 연장하여 인심이 조금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지방관이 제자리에 선 뒤에 점차 철수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노우에 공사와 의논하 여 대대장에게 다시 전보를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452 동학농민혁명 정부 진압자료 12일 44호四十四號 금영錦營에 전보하기를, 전의 상소上䟽는 어제 올려서 비답批答이 내려지지 않았으나 나중의 상소는 벌써 올려서 회답을 받았다 라고 하였다. 정부. 금영이 보내온 전보에, 윤영성尹泳成이 <인솔하는> 1대가 감영에 머무르 고 있고, 조병완曺秉完과 김명환金命煥의 2대는 옥천沃川에 있습니다. 지난 해 정 부의 전보에 따라 각 진鎭에 나누어 주둔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분부를 기다 렸다가 지시를 전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금백錦伯이 총리대신에게 보내온 전보에, 전의 전보는 잘 받아보았습니 다. 전田, 호남 소모관 전동석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그대로 마련하겠습니다. 전 괴全魁, 전봉준 등 8명의 비괴와 함평咸平 수령은 남원에서 출발하여 아직 공주에 오지 않았습니다. 강곤康梱, 강진의 兵使은 지금 나주의 일본군 진영에 도착했다 고 합니다. 2건의 상소가 아직 비답을 받지 못해 송구스럽고 걱정스러우며 답장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14일 45호四十五號 금백錦伯에게 전보하기를, 상소에 비답하기를, 이런 때에 이런 직임을 어 찌 가볍게 교체하겠는가? 경卿은 사직하지 말고 더욱 순선旬宣, 감사의 책임을 다하라 고 하였다 라고 하였다. 정부. 금영錦營에서 총리대신의 댁宅에 전보하기를, 빨리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 랍니다 라고 하였다. 금영에서 보내온 전보에, 출정한 장령將領 조희문趙羲聞이 경리군대經理軍隊 에 보낸 공문에 따르면,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않아 영내營內에서 철수한다 라 고 하는 말들이 있었습니다. 각 부대가 영내에 함께 주둔하는 것은 합당하 지 않아 각 진鎭에 나누려고 하는데, 어느 대관隊官이 어느 진에 주둔할 지를

찰이전존안 札 移 電 存 案 453 헤아려서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어제 초토사 招 討 使 가 찾아와서 경병 京 兵 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다시 보내온 전보에, 객비 客 匪 33)등이 어제 도착했고 내일 출발하려고 합 니다. 칙사 飭 使 34)가 천안에 도착하여 구완희 具 完 喜 를 만나 함께 목천으로 갔습 니다. 의병의 폐단을 막기 위해 이경희 李 景 熙 가 병사를 데리고 아산 牙 山 을 순찰 하러 나갔습니다 라고 하였다. 16일 안곤 安 梱, 安 州 兵 使 이 내각 內 閣 에 보내온 전보에, 15일 축시 丑 時, 오전 1 시~3시에 병영 兵 營 에 불이 나서 주헌 籌 軒, 東 軒 과 내아 內 衙, 관아의 안채가 모두 타서 남 은 것이 없습니다. 겨우 유서 諭 書 와 인부 印 符, 官 印 과 兵 符 를 가지고 문을 나와 화 를 모면하였습니다. 그러나 경계하고 조심해야 처지에 부지런히 단속하지 못하여 이런 화재를 초래해서 황송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17일 영영 嶺 營 에서 보내온 전보에, 10일에 규정에 따라 나누어 진휼하 는 일은 전보로 말씀을 드렸으나 아직 회답을 받지 못하여 걱정스럽습니다. 진정 賑 政 을 지금 펼쳐야 하니 지적해서 하교를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18일 46호 四 十 六 號 영영에 전보하기를, 파견한 관원의 공문대로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하였다. 정부. 33) 객비( 客 匪 ) : 다른 고을에서 온 동학군으로 여기서는 호송되어오는 전봉준 등을 가리키 는 듯하다. 34) 칙사( 飭 使 ) : 칙사( 勅 使 )를 잘못 쓴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