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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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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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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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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민락초신문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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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노래와 해외 음악의 유입 : 20 세기 전반기의 경우 김병오 (전주대학교 공연엔터테인먼트학과) - 목차 - 1. 들어가며 2. 해외 음악의 유입 2.1 <독립군가> 2.2 <봉기가> 2.3 <최후의 결전> 2.4 <해방의 노래> 3. 과거를 향한 오늘의 비평 1. 들어가며 주지하다시피 한국 사회는 20 세기의 전반기 내내 외세의 간섭과 통치에 시달렸다. 그 과정에서 새롭게 구성된 한국사회는 일본의 영향뿐 아니라 서구 열강들과의 다양한 혹은 일방적인 교섭 과정을 통하여 오랜 전통으로부터의 단절, 낯설고 새로운 외부 문화의 이식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는 음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그 시대를 거치면서 전통음악은 급격히 쇠퇴하였고 서양음악은 급격히 성장하였다. 식민지적 현실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정치적, 민족적 지향과 같은 가치들과는 무관하게 서양음악, 그것도 일본화된 서양 음악이 한국 음악사회의 정서 및 제도적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강렬한 정치적 민족적 지향과 일본에 대한 반대를 표방했던 독립군들의 문화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아마, 음악문화, 그 중에서도 선율, 화성적 측면은 그러한 가치와 별다른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서양음악의 역사에서도 선율이나 화성이 특정한 감정과 대칭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들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독립군들의 음악적 실천도 이러한 역사와 맥락을 같이 할 수 있을 것이다. 독립군의 전투력 강화를 위해 노래를 만들고자 할 때는 결의와 각오를 고취시키는 특정한 가사와 그 가사를 얹어 부르기에 편리한 선율을 대응시키면 되었다. 가사나 선율은 적당한 게 있으면 가져다 쓰면 되었고 없을 경우에는 창작을 하면 되었는데 가사에 비해 선율의 창작은 좀 더 어려운 일이었는지 아니면 굳이 새로운 선율을 창작할 필요를 못 느낀 것인지 가사에 비해 선율은 차용한 것이 많았다. 그 결과 다른 여러 나라의 음악이 독립군들이 부르던 노래의 음악적 바탕을 차지하게 되었다. 따라서 독립군가에는 여러 스타일의 노래들이 담겨져 있었는데 대개는 군가 풍으로 인식되는 장조 행진곡이었다. 그동안의 연구는 원곡의 출처를 밝히는 데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마치 요나누끼음계 라는 말을 쉽게 지나치지 못하듯이 일본노래, 그 중에서도 일본 군가를 독립군들이 차용했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지나치기 힘든, 뭔가 점검을 해 보아야 할 것만 같은 놀라운 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물론 일제의 강점이 끝나고 수십 년

반일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그리고 음악에 대한 저작권 관념과 창작자에 대한 일정한 존중이 사회적 상식으로 구축되어 있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그러한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수도 있겠다. 따라서 다른 나라의 음악은 다 괜찮지만 점령국인 일본의 음악은 안 된다는 입장을 갖는 것은 우리 사회의 맥락 속에서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선율의 차용에 대해 당대의 행위자들과 오늘의 제 3 자들의 세계관을 동일시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많이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일제강점기 및 해방정국에서 가장 널리 불렸던 노래들 4 곡을 선택하여 그 노래들이 어디서 비롯되어 어떤 경로와 어떤 주체를 거쳐 당대의 노래운동의 이정표가 되었는지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당대의 사람들이 노래의 가사를 뺀 음악적 텍스트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는지 혹은 그에 대해 얼마만큼이나 관심이 있었는지 우리에게 약간의 힌트를 던져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2. 해외음악의 유입 2.1 <독립군가>

독립군가 가운데 <독립군가>라는 대표 명칭을 가진 이 노래는 80 년대 이후로도 집회 및 시위 현장에서 그 명맥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으며 최근에는 광복 60 년을 기념하여 국가보훈처가 제작한 독립군가 음반에 수록되어 크라잉넛의 리메이크를 통해 젊은 세대에게도 널리 알려진 바 있다. <신독립군가>라 칭하기도 하는데 노래의 선율은 외국으로부터 수입되었고 한국어 노랫말을 창작 혹은 정리한 인물은 누구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독립군가>의 원곡은 1865 년 미국의 작곡가 Henry Clay Work 가 지은 <Marching Through Georgia> 1 라는 노래로서 남북전쟁 당시 활약한 William Sherman 장군의 전투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은 행진곡풍의 노래였다. 이 노래는 미국 군인들에게 널리 애창되었으며 그들이 퇴역한 후 일반 사회로도 널리 전파되어 원 선율에 다른 가사를 붙인 몇몇 노래들도 등장하게 되었다. 따라 부르기 쉬운 선율과 경쾌한 리듬이 실린 이 노래의 인기는 미국 내부로만 국한되지 않고 해외로도 널리 전파되었다. 일본 군대는 물론 여러 나라의 군인들이 즐겨 부르게 되었는데 영국군들이 인도의 점령군으로 등장할 때도 이 노래를 불렀고 1904 년에 일본군이 러일전쟁 당시 만주 여순항으로 진격할 때도 이 노래를 불렀다고 전해진다. 2 <Marching through Georgia>의 상업용 악보 표지이다. 표지 기록을 통해 S. BRAINARD'S SONS 음악출판사에서 출판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회사는 1836년에 피아노 매매업체 로 처음 만들어졌으며 1864년에는 악보 사업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였다. (* http://ech.cwru.edu/ech-cgi/article.pl?id=sbs 참조) 1 한국과 일본에서는 <Georgia March>라고 간략하게 쓰는 경우가 많지만 영어권 국가들에서는 대부분 <Marching through Georgia>라는 정확한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듯하다. 2 위키백과사전 (en.wikipedia.org) Marching Through Georgia 항목 참조.

한편, <독립군가>는 위의 사진에서 보듯 원본과 저작자가 명백히 제시되어 있기 때문에 이 선율의 연원에 대한 논란은 현재로서는 무의미하다. 그러나 명백한 근거를 확인할 수 있는 오늘날과 달리 당대에 이 노래를 수용하고 향유한 조선인과 독립군들은 우리들과 다른 연원을 갖고 있었을 것 같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노래가 의미, 영토를 넘나들며 대중들의 커다란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민경찬(2006; 155p)은 이 선율이 찬송가 <우리들의 싸울 것은>을 통해 처음으로 한국에서 차용되었고 1910 년대부터 독립군가로 불렸다고 말한다. 지금도 찬송가집에는 <우리들의 싸울 것은>이 수록되어 불리고 있다. 그리고 1919 년에 수립된 임시정부와 관련된 당시의 여러 기록들에서 이 노래가 애국가처럼 채택되어 공식 행사 때마다 불렸던 것으로 보아 1910 년대에 이미 만들어지고 전파되었던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3 그런데 찬송가로부터 전파되었다 는 판단은 가능성이 매우 높은 가설이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구전이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던 시절이자 저작자 혹은 저작권에 대한 관념이 지금과는 완전 딴판이던 당시에 이 노래가 흘러들어오는 경로는 더 다양했을 수 있다. 정황적 추측일 뿐이지만 이 선율은 일본 군가에 담겨 왔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민경찬 스스로도 그가 집필한 다른 책을 통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 일본의 제 4 사단 군악대가 가지고 온 군가를 일반인들이 일본 군가인지 모르고 무의식적으로 따라 부른 것이 구전되었고 거기에 새로운 가사를 붙여 독립군가, 혁명 가요, 항일 군가 등으로 불렸을 것 4 이라 추정하고 있다. 일본 군가가 두 차례의 전쟁과 일제의 합병을 계기로 조선에 널리 전파될 수 있었다면 이 노래도 그러한 범주에 들 만한 자격이 충분한 노래였다. 또한 군가라고 해서 반드시 군대를 통해서 들어온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같은 책에서 민경찬(2002; 53 쪽)은 일본 국내에서 이 군가들은 큰 유행을 일으키고 있었다 고 한다. 그리고 군인들에 의해 불리운 것 외에도 일본의 엔카시들에 의해 <도꾜부시[ 東 京 節 ]>라는 만요 컨셉의 노래로 인기를 끌기도 했다. 따라서 일제의 강점을 전후하여 대대적으로 이주한 일본인들을 통해 이 노래가 조선인들에게 전파된 부분이 일정 정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1910 년을 기점으로 살펴보면 경성의 인구는 23 만명 정도 5 인데 그 중 일본인의 숫자는 3 만 4 천에 달해 전체 경성 인구의 10%를 넘어서는 커다란 규모였다. 게다가 당시 한국으로 이주한 일본인 교원들의 숫자가 2 천 명에 육박하는 등 이들이 주로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높은 위치를 점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이들에 의한 일본 문화, 노래의 전파 가능성도 배제해선 안 될 것이다. 결국 이 노래의 전파 경로를 단순하게 가능성만으로 정리해 보면 우선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경로를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Marching Through Georgia > 미군 > 미국목회자 > 조선기독인 > 대중화 > 독립군 > 미군 > 일본군 > 대중화 > 독립군 > 미군 > 일본군 > 엔카시 > 일본거류민 > 대중화 > 독립군 3 1920년 3월 4일자 독립신문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져 있다. 다음에 學 生 一 同 이 雄 渾 하고도 悲 憤 을 뛴 音 聲 으로 獨 立 軍 歌 나가나가 싸호려 나가 를 唱 함에 非 常 히 興 奮 된 會 衆 은 全 身 에 戰 慄 을 感 하고얼골에 나타난 決 心 의 表 情 은 獨 立 戰 爭 의 將 來 를 祝 하다 李 總 理 의 發 聲 으로 民 國 萬 歲 를 三 唱 하고 渾 和 裏 에 閉 式 하다. 기사제목은 < 臨 時 政 府 及 議 政 院 의 祝 賀 >, 4 이강숙, 김춘미, 민경찬 (2002) 53쪽에서 인용. 5 경성부와 서울, 서울문화, 서울시사편찬위원회 編.. 서울시 웹사이트 참조. http://www.seoul.go.kr/life/life/culture/history_book/seoul_culture/index.html

2.2 <봉기가> 독립군가가 차용했던 대표적인 외국 선율이라 하면 싫든 좋든 일본 군가를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일본 군가들 가운데에서도 <봉기가>는 우리나라에서 90 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오래도록 애창되었던 노래다. 이 노래는 일본에서 군인들이 애창했던 <アム-ル 川 の 流 血 や>의 선율을 차용하여 독립군의 목표에 맞게 새롭게 개사를 한 것이다. 이 노래는 <봉기가> 말고도 <메데가(mayday 歌 )>로도 널리 애창되었다. 6 7 두 노래의 시기를 비교해 보면 <메데가>보다는 <봉기가>가 먼저 등장했다. <메데가>는 1920 년에 < 聞 け 万 国 の 労 働 者 (들어라 만국의 노동자여)>라는 제목으로 일본에서 발표된 것이다. 한국의 <메데가>는 일본의 <메데가>를 그대로 번역해서 부른 것이므로 1920 년 이후에 전파된 노래다. 반면에 <봉기가>는 1919 년 5 월의 총독부 문서 8 에 이미 그 노랫말이 실려 있음을 볼 수 있다. 9 6 민경찬(1998) 141~145쪽 참조. 7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불렸던 메데가(mayday 歌 ) 는 1920년에 < 聞 け 万 国 の 労 働 者 (들어라 만 국의 노동자여)>라는 제목으로 일본에서 발표된 것이다. 8 < 朝 鮮 獨 立 問 題 에 관한 秘 密 印 刷 物 및 鮮 人 그후 狀 況 >, 不 逞 團 關 係 雜 件 - 朝 鮮 人 의 部 - 在 滿 洲 의 部. 1919년 5월 13일. 9 이곳에 수록된 노랫말은 현재 전승되는 것과 가사가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데 실제 달리 불렀을 가능성과 총독부 실무자가 정확하지 않게 대강 썼을 가능성이 공존한다. 한편, 총독부 문서에는 이 노래의 제목이 <광복가>라고 등장한다. 1919년의 문서와 1926년의 문서가 모두 동일하게 표

<봉기가>의 원곡인 <アム-ル 川 の 流 血 や>는 塩 田 環 이 작사하고 栗 林 宇 一 이 작곡하였다. 10 처음부터 일본군가로 부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1901 년 당시 일본 제일고등학교( 第 一 高 等 学 校 )의 기숙사 노래로 창작되었는데 공식적인 제목은 < 第 11 回 紀 念 祭 東 寮 寮 歌 >이며 일본 내에서도 학교의 울타리를 넘어 전국적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고 다양한 노가바 11 파생곡들의 음악적 재료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최초의 시점을 중시하는 서술의 경우 일본 군가라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서 당시에 군인들에 의해 널리 애창되었고 가사도 일정정도 군사적 정서를 지니고 있으며 곡조 자체도 군가의 표준적 형태인 전형적인 행진곡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 또한 러일전쟁이 발발할 당시 이 노래의 선율에 새로운 가사를 붙인 征 露 歌 (ウラルの 彼 方 ) 라는 더욱 군사적인 노래가 등장하여 널리 불렸던 점을 감안한다면 이 노래의 원형을 일본 군가로 이야기하는 것이 부당한 것은 아니다. 12 일본 군대를 경험했거나 거류민들의 군사적 취향을 경험한 당대의 조선인들과 독립군들은 이 노래를 군가와 다른 무엇으로 인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노래가 응원가로 널리 사용되었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는 있다. 이 노래가 일본의 여러 학교 운동회 때에 응원가로 널리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한국에 들어온 상당수 일본인과 일본인 교사들 및 그들에 의해 새로운 교육제도를 배워 나가야했던 한국의 교사들에 의해서도 학교라는 안정된 교육 공간에서 목적적으로 교육되고 전파되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역시 노래의 전파 경로를 단순하게 가능성만으로 예상해 보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경로가 있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서 건너온 <독립군가>보다는 다소 구체적인 흐름이다. 寮 歌 > 일본 군가 > 대중화 > 독립군 > 일본 거류민 > 대중화 > 독립군 2.3 <최후의 결전> <최후의 결전>이 처음 불리기 시작했던 시점은 명확하지 않다. 기존의 국내 백과사전들과 독립군가 보존회 (www.doklipkunga.co.kr) 등의 설명에 따르면 3.1 운동이 일어나던 즈음이나 1920 년대~30 년대에 이 노래가 널리 불렸다고 서술하고 있는 반면에 연변 현하고 있다. 따라서 <광복가>가 <アム-ル 川 の 流 血 や>의 선율을 차용한 노래를 특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당대 광복군들의 노래를 일반적으로 그렇게 부르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논의가 필 요할 것이다. 다만 여기서 <광복가>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가사는 모두 오늘날 이야기하는 <봉 기가>에 해당하는 것이다. 오히려 <봉기가>라는 제목이 과거 문서에는 등장하지 않고 있는 것 을 봐서 <봉기가>라는 이름은 다소 후대에 일반화된 것이 아닐까 한다. 10 이 노래의 작곡자는 당시 제일고등학교의 학생이었는데, 일본에서는 작곡자의 정확성에 대해 이론이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일본어 위키백과 사전 (http://ja.wikipeia.org) 'アムール 川 の 流 血 や', ' 寮 歌 ' 항목을 참조할 것. 11 노래가사바꿔부르기 를 줄여서 표현한 것임. 12 일본어 위키백과 사전 (http://ja.wikipeia.org) 'アムール 川 の 流 血 や', ' 寮 歌 ' 항목 참조

출신의 연구자 김덕균(1991)은 1938 년에 만들어져서 1930 년대 말기에서 1945 년에 이르기까지 주로 불렸다고 이야기한다. 김덕균의 이야기가 좀 더 구체적인 정황과 맥락을 제시하고 있으나 증언 이외에 확실한 물증을 제시한 것은 아니어서 정확한 시점을 결정짓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 노래는 작사자가 알려져 있다. 밀양 출신으로 의열단의 단원이었던 윤세주가 노랫말을 썼다. 13 <최후의 결전>의 원곡은 폴란드 지역의 노래인 <바르샤비앙카(Warszawianka 1905)>이다. <인터내셔널>과 함께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혁명가인데 원곡이 1879 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 그리고 1905 년 노동절 시위 이후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곡으로 자리 잡았다는 정보 등으로 미루어 보자면 현재 이 노래를 지칭하는 가장 일반적인 제목 <Warszawianka 1905>는 1905 년 이후에 붙여진 제목이다. 작사자는 Wacław Święcicki 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작곡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아서 작자 미상 혹은 전래 민요로 기록하고 있는 곳이 많은데 폴란드를 중심으로 한 몇몇 관련 사이트 14 에서는 Józef Pławiński 이라는 인물을 작곡자로 언급하기도 한다. 이 노래는 일본을 경유했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만주와 시베리아를 통해 독립군과 조선인에게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폴란드를 거쳐 러시아에서도 번안되어 <인터내셔널>과 함께 국제적으로 가장 널리 불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노래는 사회주의적 지향과 직접적 관련이 있고 또한 이것이 일본에서 처음 번역된 때가 1928 년이라 하니 역시 그 경로와 시점을 판단 내리기에는 어려움이 여전하다. 15 경로와 기원의 불분명함과 달리 이 노래가 전달해 주는 뚜렷한 음악적 의미가 있다. 원래 단조로 구성된 이 노래가 누군가에 의해서 장조의 노래로도 탈바꿈해서 전파되기도 했다는 점이다. 노래운동 영역에서는 원래의 단조 음악대로 부르는 경향 16 이었던 반면 독립군가보존회에서는 이 노래를 장조로 기록하고 있다. 17 이러한 현상은 유행가 영역에서 나타났던 채규엽의 <방랑의 노래>(콜롬비아, 1933)가 보여주는 것과 동일한 혹은 정반대의 현상이다. 18 이에 대해 김덕균(1991; 7 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노래(최후의 결전을 말함; 인용자 주)가 장조노래로 변한 것은 당시에 외국의 단조노래들이 우리 민족에게 쉽사리 접수될 수 없는 시대적 환경에서 나타난 현상인 것 같다...(중략)...이와 같은 다른 한 가지 예로는 1930 년대의 대중가요 타향살이 를 들 수 있다. 이 노래가 중국의 여러 곳에서 장조로 변태되여 류전되었는데, 지금도 노인들이 변태된 타향살이 를 부르고 있는 것을 때때로 들을 수 있다. 이 말은 <최후의 결전>을 부르던 당시 독립군들에게도 적용될 개연성이 있다. 하지만 채규엽의 사례에서 정반대라고 표현했던 바와 같이 오히려 장조 음악을 쉽사리 접수 하지 못하고 단조노래로 고집스럽게 부르는 채규엽 같은 경우도 있으므로 이러한 판단은 다소 부연 13 작사자의 이름에 대해서는 윤세위, 원세위 등의 이름도 등장한다. 이는 모두 한자를 잘못 읽어 서 생겨난 해프닝인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김덕균(1991)을 참조할 것. 14 http://pol.anarchopedia.org/warszawianka_1905 http://www.usc.edu/dept/polish_music/essays/herter_elgar.html 15 일본에서 이 노래는 <ワルシャワ 労 働 歌 >로 명명되었다. 당시 전위예술가동맹( 前 衛 芸 術 家 同 盟 ) 에 소속되어 있던 鹿 地 亘 (1903~1982)의 번역으로 1928년에 일본에 처음 소개되었다. 16 1989년에 발간된 노래책 <메아리 9집>에는 마단조로 악보가 소개되어 있다. 17 독립군가보존회(http://www.doklipkunga.co.kr)가 2005년에 광복 60주년 기념으로 발매한 음 반에서는 마장조로 연주되었다. 독립군가보존회의 웹사이트에서 음반 전체를 들어볼 수 있다. 18 이에 대해서는 이영미(1998) 54쪽 참조.

설명이 더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좀 더 세부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다음과 같은 개연성들이 존재할 수는 있을 것 같다. 1) 단조의 노래이지만 계면과 달리 우조처럼 씩씩하고 장중하게 불리는 노래여서 그럴 가능성이 있다. 2) 노래가 일반적으로 A/B/C/B/C...의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여기서 B 부분은 장조로 진행이 된다. 따라서 조성 자체에도 어색했을 그들에게 장단조가 공존하는 노래들이 부자연스러워서 한 쪽으로 몰아주기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 3) 당대에 함께 부르던 군가들, 예컨대 <독립군가>, <광복가(봉기가)>, <애국가> 등 독립군들이 애창했던 노래들이 대개가 다 일본을 통해 건너 온 장조 행진곡 풍이어서 그러한 취향의 관성에 이끌렸을 가능성이 있다. 4) 악보를 읽고 전달하는 과정에서 교육자가 미숙하여 실수를 했던 것에 기인했을 가능성도 있다. 19 한편 이 노래는 한국의 이후 군가에도 다시 영향을 미친 바 있는데 박시춘 작곡 유호 작사로 군가 가운데 가장 대중적 인기를 모았던 <전우야 잘 자거라>가 바로 그 영향을 받은 노래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로 시작되는 이 노래의 도입 부분 4 마디는 단조로 이루어진 <최후의 결전>의 도입부를 닮아 있음을 알 수 있다. 20 추정해볼 만한 노래의 이동 경로는 다음과 같다. Warszawia -nka 1905 > 러시아 / 중국 운동가 > 독립군 > 러시아 / 중국 운동가 > 일본 운동가 > 독립군 2.4 <해방의 노래> 이 노래는 해방정국에서 좌익들에게 애국가처럼 불릴 정도로 대중들의 많은 지지를 받고 향유되었던 노래다. 앞에 이야기한 노래들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누가 뭐래도 노래의 선율을 조선 작곡가가 직접 창작했다는 데에 있다. 독립군들이 각종 공식적 모임에서 <독립군가>를 불렀다면 해방 후 좌익들은 이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해방 후 터져 나온 각종 노동자의 집회와 시위에서도 널리 불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노래는 1945 년 김순남에 의해 작곡되었다. 가사는 대개 작자를 표기하지 않거나 혹은 당대의 시인 임화가 창작한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21 문화관광부에서 김순남을 소개하는 사이트에도 임화가 작사자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 노래는 임화가 작사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노동자이자 노동운동가였던 大 場 勇 이 작사한 < 聞 け 万 国 の 労 働 者 (들어라 만국의 노동자여)>의 가사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이 노래는 총 5 절로 이루어져 있는데 현재 전해지고 있는 <해방의 노래>는 이 가운데 첫 번째 절과 네 번째 절을 가져와서 2 절의 노래로 정리가 된 것이다. 이처럼 <해방의 노래>의 연원은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다. 다음은 각각의 노래에 등장하는 일본어 노랫말과 한국어 노랫말이다. 19 최 후 의 결 전 을 맞 으 러 가 자 / 생 사 적 운 명 의 판 가 리 다 3 3 2 1 1 7 6 6 5 6 1 / 7 3 3 3 2 1 7 1 6 1 3 만일 악보가 위에서처럼 숫자보 형식이 부가되어 있었다면 뿌리 깊은 취향의 차이가 아니라 악전 상의 실수로 노래가 변했을 확률이 훨씬 적었을 것이다. 20 4마디면 한 소절이지만 2박자 악곡인 까닭에 그 길이는 매우 짧다. 21 http://www.art.go.kr/vli_dir/vli_dir08_pop_detail.jsp?ar_vvm_cd_seq=191 문화관광부의 해당 웹사이트는 위의 주로슬 참조할 것. 한편, 노래운동에 대한 가장 최근의 연구 서라 할 수 있는 정경은(2007; 30쪽)도 <해방의 노래>의 작사자를 임화라고 말한다.

聞 け 万 国 の 労 働 者 (1 절) 聞 け 万 国 の 労 働 者 とどろきわたるメーデーの 示 威 者 (じいしゃ)に 起 こる 足 どりと 未 来 をつぐる 鬨 (とき)の 声 해방의 노래 (1 절) 조선의 대중들아 들어보아라 우렁차게 들려오는 해방의 날을 시위자가 울리는 말굽소리와 미래를 고하는 아우성 소리 (2 절) 起 て 労 働 者 奮 い 起 て 奪 い 去 られし 生 産 を 正 義 の 手 もと 取 り 返 せ 彼 らの 力 何 物 ぞ (2 절) 노동자와 농민들은 힘을 다하야 놈들에게 빼앗겼든 토지와 공장 정의의 손으로 탈환하여라 제놈들의 힘이야 그 무엇이랴 노랫말은 이렇듯 일본에서 만들어진 데 반해 선율은 김순남이 창작하게 되었다. 기존의 독립군가들이 일본에서 만들어졌거나 일본을 경유해서 들어오면서 우리 전통적 흐름과 유리된 특정한 음악적 질감을 드러냈다면 전통 음악적 어법에 관심이 많았던 김순남을 통해 창작된 <해방의 노래>는 일본을 통한 음악의 서구화 경향 속에서도 전통적인 선법과 장단의 느낌을 행진곡 풍의 노래에 담아내고 있다. 다른 음악들이 전통을 밀어내며 외부로부터 흘러들어오는 물결을 정치적 편의에 따라 일방적으로 받아들였다면 김순남의 음악은 새로운 흐름과 전통적 흐름의 교섭을 적극적으로 실천한 경우라 할 수 있다. 3. 과거를 향한 오늘의 비평 이상에서 살펴보았던 대로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당시의 운동가들은 민족적 저항 색채가 강렬한 이야기를 외세의 색채가 강한 선율 위에 담아서 노래했다. 그리고 하나의 가사에 선율을 대응시키고 그 노래가 히트라도 치면 일대일 대응이 더욱 강고해지는 오늘날의 음악적 관습과 달리 당시의 사람들은 선율과 가사를 마음대로 대응시켜 부르고 그 노래가 인기를 얻으면, 특히 선율의 경우 기존의 노랫말을 떠나 또 다른 노래들과 결합하여 오래도록 불리고 또 불리는 경향을 보였다. 달리 말하면 이는 구체적인 물건이 아닌 음악적 선율에 대해 당시에는 소유 관념이 불분명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또한 앞서 이야기했듯이 사람들의 음악적 실천은 특정한 선율이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가질 것이라는 강박적인 생각과도 거리가 멀었음을 보여 준다. 좌, 우익, 독립군, 산업 그 누구를 막론하고 일본에서 만들어진 선율이나 가사를 사용하는 것은 당시에 아주 평범하고 거리낌이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친일이나 저항 여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전통적인 혹은 보편적인 음악적 실천이었다. 따라서 이제는 연구자들이 과거 조상들이 향유했던 음악의 기원들을 밝히는 데에서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당대 사람들의 음악에 대한 소유 관념은 어떠했는지, 그리고 가사와 음악을 대하는 습관은 어떤 것이었는지, 또 그들에게 노래라는 표현 방법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이었는지 등 당대의 노래 문화를 둘러싼 여러 정황들에 대해서 말이다. 본고도 지금은 단순히 문제제기만 하고 그치는 형국이라 부끄럽고 안타깝지만 말이다. 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조상들이 향유했던

문화적 기원을 알아보는 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는 일이지만 기원에 대한 오늘의 관점과 그에 의한 집착으로 과거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일뿐더러 때로는 불편하고 위험한 일이 되기도 한다. 그런 집착은 최근에도 논란을 야기했다. 전교생 100 명이 채 안 되는 강원도 횡성의 작은 초등학교의 교가가 사회적인 이슈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해당 학교의 교가는 독립군들이 <봉기가>를 부르기 위해 집어다가 사용했던 그 선율을 다시 집어다 썼는데 그것이 언론에 노출되었던 것이다. 당연히 언론은 뜻밖 의 놀라운 일로 이를 간주하고 취재를 진행했으며 학교는 이에 대해 해명을 하고 구차한 변명을 내 놓아야 했다. 이 학교의 교가는 아마도 짧은 시간 안에 바뀌게 될 터이다. 몇 해 전 영화 <실미도>에 등장했던 <적기가> 사건도 이러한 맥락에서 발생되었던 사건이다. 영화감독은 자신의 작품의 삽입가 하나로 인해 국가보안법에 의해 법정에 기소되는 해프닝을 낳기까지 했다. 집착의 심리가 악용되는 가까운 경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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