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sta Iberoamericana 25.1 (2014): 127-152. 잉카가르실라소, 르네상스, 메스티소텍스트 * 우석균서울대학교라틴아메리카연구소 우석균 (2014), 잉카가르실라소, 르네상스, 메스티소텍스트. 초록잉카가르실라소의 잉카왕실사 도시대에따라평가가달라졌다. 하지만출간때부터적어도 1960년대이전까지안데스식민지시대관련기록중에서항상중요한, 또때로는가장귀중한텍스트로꼽혔다. 이는잉카가르실라소의지적능력과글쓰기수준이당대인르네상스의기대지평선을충족시켰고, 그덕분에안데스관련지식의장 ( 場 ) 에서일찌감치중요한위치를확보했기때문이다. 하지만 1970년을전후로는비판적시각이주류를이루었다. 르네상스의이상에사로잡혀잉카시대를지나치게미화했다는비판은그이전에도이따금씩제기되었지만, 그를아예르네상스에포섭된식민화된주체로보는시각까지대두되었다. 가령, 르네상스의이면에서식민주의와의공모를읽어낸월터 D. 미뇰로의관점은인문주의자였던잉카가르실라소의평가절하에영향을미칠수밖에없었다. 하지만그후 잉카왕실사 의가치를재평가하는반론들도제기되었다. 잉카왕실사 를코러스적글쓰기로, 나아가메스티소텍스트로규정한호세안또니오마소띠의시도가대표적인경우이다. 이글은잉카가르실라소의전기나시대적맥락, 텍스트분석등을통해각각의관점을뒷받침하는논지를추적하는것을주요목표로하고있다. 또한일종의대위법적방법론에입각해미뇰로와마소띠의관점을간단하게나마비교하였다. 핵심어잉카가르실라소, 잉카왕실사, 르네상스, 월터 D. 미뇰로, 호세안또니오마소띠, 메스티소텍스트 * 이논문은 2008 년도정부 ( 교육부 ) 의재원으로한국연구재단의지원을받아수행된연구임 (NRF-2008-362-B00015).
우석균잉카가르실라소, 르네상스, 메스티소텍스트 I. 들어가면서에스파냐인정복자와잉카공주사이에태어난잉카가르실라소데라베가 (Inca Garcilaso de la Vega, 1539~1616) 의 잉카왕실사 Comentarios reales de los Incas 1부와 2부는각각 1609년과 1617년간행되었다. 1) 정복시대와그직후를주로다룬 2부보다잉카시대를다룬 1부가특히식민지시대문헌중에서높은평가를받아왔다. 그이유는아무래도저자가원주민과페루에대한정보를쉽게, 또직접얻을수있는위치에있었기때문이다. 1539년꾸스꼬에서태어나 1560년까지거주했고, 잉카왕족이었던모계친척어른들의잉카시대와정복시대에대한체험담을직접들을수있었고, 원주민어인께추아어가모국어였기때문이다. 또한에스파냐식교육을정식으로받아서글쓰기면에서도손색이없을뿐만아니라나아가에스파냐인들의기록까지도수월하게참조할수있었다는점역시 잉카왕실사 의가치를높였다. 그렇지만 잉카왕실사 가현대독자의기대지평선을충족시킨다고보기는힘들다. 무엇보다도상투어나비슷한구조의이야기들이지나치게반복된다. 더구나이러한반복이대체로잉카시대와군주들에대한과도한미화를위한도구로사용되면서역사서로서의사실성에대한의구심까지준다. 그런데 잉카왕실사 의이런결점은잉카가르실라소의문재 ( 文才 ) 부족때문이아니다. 상당부분그가살았던르네상스의흔적, 즉그시대특유의이상주의적세계관이잉카시대와군주들에대한미화로귀결되었다. 시대와의유착은확실히당대에는유리하게작용했고, 그후에도 잉카왕실사 의위상에도움이되었을것이다. 하지만 1970년을전후해서는이러한유착관계가오히려잉카가르실라소의평가절하요인으로작용했다. 식민화된주체, 식민체제의조력자라는인식이광범위하게퍼진것이다. 하지만이에대한반론도존재한다. 국내에서잉카가르실라소연구가그다지많이되어있는것도아니고해서 1) 2 부는잉카가르실라소사후에출판되었고, 저자의원래의도와는달리 페루일반사 (Historia general del Perú) 라는제목이붙었다.
이글은우선이러한해석의차이를전기적요인들을곁들여소개하고자한다. 먼저 II장에서는잉카가르실라소의글쓰기특징을, III장에서는이런특징을낳은시대적맥락을, IV장에서는잉카가르실라소가식민화된주체라는비판의논지를살펴볼것이다. 그리고마지막으로 V장에서는이에대한반론을검토할것이다. Revista Iberoamericana 25.1 이베로아메리카연구 II. 잉카왕실사 의과도한반복과미화 잉카가르실라소의 잉카왕실사 가식민시대초기의다른문헌들에비해높은평가를받을수있었던데에는유려한글솜씨와지루함을덜어주는텍스트구성도한몫했다. 비슷한시기에각각 새로운연대기와선정 El primer nueva corónica y buen gobierno (1615; 1616) 과 페루왕국의고대에대한보고서 Relación de antegüedades deste reino del Perú (1613?) 를쓴펠리뻬와만뽀마데아얄라 (Felipe Guamán Poma de Ayala) 2) 나산타끄루스빠차꾸띠 (Juan de Santa Cruz Pachacuti Yamqui Salcamaygua) 같은원주민작가보다글솜씨가더나을수밖에없는것은당연했다. 독학자였던이들과는달리잉카가르실라소는꾸스꼬시절정식교육을받았기에에스파냐어구사능력자체에서차이가컸다. 또한잉카가르실라소는당대에안데스관련기록들을남긴에스파냐인들에비해서도대체로더정제된문체의소유자였다. 적어도 1580 년대부터문필가로서의삶을살았기때문에글쓰기에익숙했던반면, 1세대정복자들은오히려무식한이들이많았다. 게다가당시에스파냐인의기록들 128 129 2) 이글의인명과지명은통상적인외래어표기법에준하지만께추아어의흔적을남기고자 우아만 대신 와만 이라는표기를고수한다. 현재원주민들은꾸스꼬 (Cusco) 대신꼬스꼬 (Q osqo) 로적는등에스파냐어표기법에입각한표준어정책에도전하고있다. 그들의표기를다수용하는것은지나치겠지만, 식민지시대연구자들사이에서도 Guamán Poma 이나 Huamán Poma 대신 Waman Puma 를고수하는이들이있고, 현재안데스인들은자신의상징으로삼은깃발을에스파냐어식표기법인 huiphala 대신 wiphala 로표기하고있다는점을감안해상징적인차원에서 와만 이라는표기를택했다.
우석균잉카가르실라소, 르네상스, 메스티소텍스트 중에는식민체제정당화를위한관료적책무나개인혹은특정집단의공적을인정받으려는현실적이해때문에쓴글도많은데, 이들은 사실 ( 史實 ) 이나 진실 전달에치중해서문체가무미건조하거나조악한경우가많았다. 텍스트구성에서도잉카가르실라소는독서의재미를고려했다. 잉카왕실사 의집필의도는 1부는잉카군주들의치적, 2부는정복자들의무훈을역사적으로재조명하고예찬하는것이었다. 그렇지만이중심축과직접적관련이없는 다채로운이야기를집어넣어독서가너무싫증나지않도록 (Vega 1995, 91) 했다. 이이야기들중에는우선잉카의문물과풍습에대한이야기들이대거눈에띈다. 이이야기들은페루의지리, 자연, 산물등을소위 콜럼버스의교환 (Columbian exchange) 관점에서쓴내용, 즉정복후구세계와신세계의만남이물질적인분야에서야기한변화상까지포괄하고있다. 잉카왕실사 가민족지학지로서대단히흥미로운텍스트로꼽히는이유이다. 문학적으로도탁월한부분들이있다. 콜럼버스이전에신대륙이발견되었다는주장을담은장이나 (1부 1권 3장 ) 로빈슨크루소이야기를연상시키는조난일화 (1부 1권 8 장 ) 등야사성격의장들에서잉카가르실라소는이야기꾼으로서의미덕을보여주고있으며, 잉카의저항왕조였던빌까밤바 (Vilcabamba) 왕조의마지막군주뚜빡아마루 (Túpac Amaru) 의처형을다루는장면에서는 (2부 8권 19장 ) 극적인긴장감을고조시키면서도독자의심금을울리는능력을발휘하기도한다. 2010년노벨문학상수상자인마리오바르가스요사가연대기저자로서가아니라문인으로서잉카가르실라소의미덕을예찬한것도 (Chang-Rodríguez 2010, 196) 이런맥락에서였다. 그럼에도불구하고현대독자의입장에서 잉카왕실사 를흥미진진하게읽는것은쉽지않다. 가장큰걸림돌은상투어와동일구조이야기들의반복이다. 이는독서의흥미도떨어뜨릴뿐만아니라역사서로서의 잉카왕실사 의신빙성마저의심하게만든다. 특히 1부의중심축인잉카군주들의업적을다루는부분의천편일률성이두드러진다. 애당초잉카군주들을태양의자손으로신격화시키기때문에이들에대한극도의예찬은당연할것이다. 하지만모든군
주에게다 너그러움 (generosidad), 덕 (virtud), 가련한이들을사랑하는자 (amador de pobres) 등의상투어가따라붙고있다. 동일구조이야기의반복은잉카군주들의주요업적으로상세하게거론되고있는영토팽창과정에대한서술에서두드러진다. 거의모든정복전쟁의준비, 전개, 결말이너무나뻔하다. 질서정연한전쟁준비와출정, 본격적인전쟁이전의항복권유, 이에응하지않을경우개시되는최소한의전쟁과승리, 복속된부족에대한관용과시혜등이이야기구조의핵심이다. 3) 정복대상부족들은보통어진군주로서의잉카군주들의명성에순순히항복하기일쑤이고, 전쟁이일어나면거의예외없이잉카가승리하고, 새로복속된부족들은잉카의덕에감화되어이내충성스러운백성으로변하는이야기구조가십여차례반복된다는것은독서의긴장감을떨어뜨릴수밖에없는요소이다. 가령, 3대군주였다는잉카요께유빵끼 (Inca Lloque Yupanqui) 의전공을다룬부분을예로들어보자. 잉카요께유빵끼는선왕들의가르침대로적들과의전투를최대한피했다. 마치포위한것이아니라포위당하기라도한것처럼야만인들이안기는모욕을감내하면서, 휘하에게가능하면무력을쓰지말고포위망만강화하도록유념시켰다. 하지만아야우이리족은잉카군주의온건한태도에오히려용기백배해서는그를겁쟁이로간주하면서항복하는대신나날이더완강하게버티고전투에서는더욱더거칠어지더니마침내는잉카의본영에까지진입하기에이르렀다. 아야우이리족에게이전투들의결과는늘나빴다. Revista Iberoamericana 25.1 이베로아메리카연구 130 131 잉카요께유빵끼는이일이다른부족들에게나쁜본보기가되지않도록, 또무기를드는무례한사태를벌이는것을예방하기위해, 그들의완강함을응징하기로했다. 그는지원군을요청했다. 필요해서가아니라세를과시하기위함이었다. [...] 그들은 [ 아야우이리족 ] 혹시라도운이자기들편인지시험해보고자했다. 하 3) 안또니오로렌떼메디나 (Antonio Lorente Medina) 는이과정을 6 단계로 (Mazzotti 2010, 143), 노성일은 9 단계로 (Song No 1999, 27-39) 분류해설명하고있다.
우석균잉카가르실라소, 르네상스, 메스티소텍스트 루는아주격렬한전투가벌어졌다. 잉카군은아주용맹하게저지했고, 양측모두많은사상자가발생했다. 아야우이리족은이전투에서아주큰손실을입은채후퇴했고다시는섣불리싸우러나오지못했다. 잉카군은마음만먹으면충분히그들의목을벨수있었지만, 이를원치않았다. 대신포위로압박하면서항복을유도했다. 그사이잉카요께유빵끼가요청한지원군이도착했다. 이로써적들은낙담하여항복하는것이낫겠다고결정했다. 잉카군주는그들을응징하지않고아무조건없이받아들였다. 그리고는태양의아들에게대항한일을준엄하게꾸짖은후, 휘하에게그들의완강한저항을염두에두지말고잘대우하라고명했다.(Vega 1995, 111) 포위전이오래지속되고, 사상자가많이발생하고, 원군을요청했다는것을보면분명잉카가고전한정복전쟁이었을것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잉카가르실라소는잉카요께유빵끼가방어적전쟁을지시해서승리가지체되고사상자도많이났다고하며, 지원군도필요해서가아니라세를과시하기위해요청했을뿐이라고적고있다. 전쟁을그토록관용적으로수행했다는서술도, 또이런식의동일한역사가계속되풀이되는것도 잉카왕실사 의역사로서의신빙성을가로막을수밖에없는것이다. 잉카가르실라소가 1부와 2부의집필의도와다소동떨어지는다양한주제의이야기를집어넣으면서까지독서의재미를고려한흔적이있다는점을생각하면상투어와상투적이야기구조는저자의글쓰기능력결여때문이아니라의도된것으로보아야할것이다. 이를테면, 상투어와상투적이야기구조의무한반복을통해잉카군주들의미덕을독자에게세뇌시킬작정인듯보인다. 때문에향수어린시선으로잉카시대를서술했다는평가가 잉카왕실사 를따라다니는것이그리이상한일이아니며, 실제로역사기록으로서의공신력을의심받는일도왕왕있었다. 가령, 메넨데스이뻴라요 (Marcelino Menéndez y Pelayo) 같은비평가는 잉카왕실사 는역사텍스트가아니라유토피아적소설이라고단언했고, 히스패닉주의자이자페루근대역사학의초석을닦았으며 잉카왕실사 의역사적가치에대한열혈옹호자였던리바아구에로 (José de la Riva Agüero) 도잉카시대를유토피아적으로다루다보니역
사서로서취약한면이없지않다고인정했다 (Mora, Serés y Serna 2010, 11-12). 잉카군주들의업적부분의신빙성문제는뼈아픈일이아닐수밖에없다. 앞서언급한것처럼 잉카왕실사 1부의중심축이잉카군주들의업적인데다가, 정복시대를다룬 2부는동일한시기를다룬에스파냐인들의기록도많기때문에애초부터별로주목도받지못했고반향도적었기에 1부에대한평가가곧 잉카왕실사 전체에대한평가나진배없었기때문이다. Revista Iberoamericana 25.1 이베로아메리카연구 III. 르네상스적인간잉카가르실라소 현대독자의기대지평선에위배되는이러한과도한반복과미화는미리결론을이야기하자면시대의산물, 구체적으로는르네상스의영향이었다. 잉카가르실라소는이미꾸스꼬시절에일정부분르네상스의세례를받았다. 꾸스꼬시절에그가받은교육이바로인문주의교육이었다. 그리고익히알려진것처럼에스파냐시절의잉카가르실라소는르네상스에완전히심취했다. 이탈리아어를배운것도르네상스인문주의에경도되어있었기때문이고, 문필가로서처음명성을얻게된것도당대인문주의자들이높이평가한레온에브레오 (León Hebreo, 1460?~1521) 의 사랑의대화 Diáologos de amor 4) 를이탈리아어에서에스파냐어로번역하면서였다. 또한코르도바인근의작은마을몬띠야 (Montilla) 에거주할때부터, 특히 1592년코르도바에정착하면서부터이도시와세비야의인문주의자들과열성적인지적교류를했다. 잉카가르실라소의사후에장서를정리할때도, 에스파냐저자들의책보다그리스와로마저자들의책과이탈리아르네상스때쓰인책들이훨씬더비중이컸다 (Miró 132 133 Quesada 1994, 293-298). 5) 4) 이책은 1502 년탈고되어 1535 년출판되었다. 저자레온에브레오는성에서추측할수있듯이유태계였다. 그의집안은원래포르투갈에살았지만 1483 년부친이역모혐의를받으면서에스파냐로도주했다. 그리고 1492 년에스파냐의유태인추방령때문에또다시이탈리아로건너가정착했다. 5) 이때문에에스파냐르네상스보다이탈리아르네상스가잉카가르실라소에게더결정적인영향을끼쳤다는주장까지제기되고있다 (Castro-Klarén 2011, 214).
우석균잉카가르실라소, 르네상스, 메스티소텍스트 잉카가르실라소의문장 ( 紋章 ) 에들어있는 칼과펜으로 (Con la espada y con la pluma) 라는문구는그가추구한인간형을짐작하게해준다. 그문구는친척할아버지뻘되는가르실라소데라베가 6) 의 전원시 III Egloga III 에들어있는 때로는칼을잡고, 때로는펜을들고 (tomando ora la espada, ora la pluma) 라는구절에서비롯되었다. 에스파냐르네상스를대표하는시인인가르실라소데라베가가칼과펜을언급한이유는그가시인이자군인이었기때문이었다. 그것도여러차례혁혁한무공을세웠으며, 1536년전투에서는선두에서서용맹하게싸우다가부상을입고사망한이력의소유자였다. 잉카가르실라소도 1568년그라나다에서발생한모리스꼬반란때토벌군으로참여했고, 1570년에는 300명을지휘하는대위 (capitán) 로임명된전력도있지만그렇다고가르실라소데라베가에비길만한군경력은아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잉카가르실라소가칼과펜모두를문장에집어넣은이유는르네상스적인간임을과시하고싶었기때문이다. 르네상스가추구한인간형은보편적인간 (l uomo universale) 으로국내에는보통전인 ( 全人 ) 으로번역되어왔다. 보편적 에함축된의미가 다재다능함, 즉여러방면에서의완벽한지식과능력이기때문이다 ( 야콥부르크하르트 1999, 183-186). 바로레오나르도다빈치같은경우가전인인것이다. 그래서잉카가르실라소가 칼과펜 을문장으로 삼았다는것은이를테면스스로문무를겸비한전인임을과시한것이다. 7) 6) 주지하다시피 잉카가르실라소 라는이름이바로이에스파냐시인에서비롯된것이다. 본명인고메스수아레스데피게로아 (Gómez Suárez de Figueroa) 를사용하지않게된이유는단순히에스파냐에동명의친척어른들이있었기때문이라고도하고, 페루에서곤살로삐사로 (Gonzalo Pizarro) 가엔꼬멘데로 (encomendero) 들의입장을대변해에스파냐왕실에대한반란 (1544~1548) 을일으켰을때동명의당숙이참여했기때문에본명을고수하기꺼림칙했기때문이라는견해도있다 (Mazzotti 2005, 5). 개명이유를정확히알기는힘들지만잉카가르실라소의부친이곤살로피사로에협조했다는의심을받은전력이있는지라두번째견해는상당히설득력있다. 7) 물론이탈리아르네상스의맥락에서보면잉카가르실라소의시도는시대착오적인것으로보일수있다. 르네상스의궁정문화에서기사도는이미철지난것으로간주되어, 자수성가한모험가와상인이나서민층출신의인문주의자들이기사들의지위를대거잠식했다 ( 아르놀트하우저 1999, 67-69). 또한기사도에대한패러디도이탈리아콰트로첸토 (1400 년대 ) 시대에는이미공공연한것이었다. 이탈리아르네상스에
잉카왕실사 에서전인에대한잉카가르실라소의갈망이투영된인물들이바로잉카군주들이다. 잉카왕실사 의부제에서는물론본문에서도여러차례 평화시에도전쟁시에도 (en paz y en guerra) 라는구절이잉카군주들의묘사에따라다니고있는데, 이는펜과칼이각각평화와전쟁으로치환된것이다. 이로써잉카군주들이야말로내치와외치에두루통달한진정한전인임을주장한것이다. 너그러움, 덕, 사랑같은최고의수식어들이상투적으로따라붙는것이당연할수밖에없다. 두번째로상투적인이야기구조문제도르네상스의맥락에서충분히이해가능하다. 레온에브레오의 사랑의대화 는중요한단서가된다. 이책의핵심사상은하느님이창조한세상은만물이조화, 통합, 균형, 질서를이루는세계라는것이다. 바로르네상스의신플라톤주의와일맥상통하는사상이다 (Hernández 1991, 123-134; Miró Quesada 1994, 129-146). 잉카가르실라소가 잉카왕실사 를통해구현한잉카시대가바로이러한모습을띠고있고, 늘같은방식으로되풀이되는정복은그사례중하나이다. 하느님이만든세상에서조화와질서를깨트리는사건은존재할수없었다. 전쟁은돌발적으로일어나거나파괴적양상으로진행되는것이아니라질서정연한준비와신의섭리실현이라는뚜렷한목표속에서만가능한일이었다. 설사그섭리에서벗어난아야우이리족과의치열한전투같은일이벌어진다해도결말은늘어진군주와충성스러운백성이하나가되는상태, 즉조화와통일성의세계가복원되어야했다. 그밖에도 잉카왕실사 에서르네상스의흔적은무수히많다. 지면관계상한가지만더들자면꾸스꼬에대한묘사가그렇다. 잉카왕실사 에서꾸스꼬는도덕적이고유능한왕실이있고, 국가적으로중요한제천의식들이거행되고, 문물이고루발전한도시이고, 수준높은도시계획과행정체계를갖추고 Revista Iberoamericana 25.1 이베로아메리카연구 134 135 서기사도는철지난중세의이상에불과했던것이다. 에스파냐경우에도이를비판한 돈키호테 (1605) 가있다. 그러나에스파냐르네상스는기원과전개가이탈리아보다시기적으로늦었던데다가, 아메리카정복과정에서무훈이중요시된풍토가여전히남아있었다는점을감안한다면칼과펜의동시예찬이이해못할일만은아니다.
우석균잉카가르실라소, 르네상스, 메스티소텍스트 있으며, 외래부족과물자들이모이는국제적인도시이다. 같은신분의두사람이길에서마주쳤을때, 꾸스꼬로가는사람이이도시에서나오는사람을윗사람처럼떠받들었다는구절은 (Vega 1995, 188) 꾸스꼬에대한잉카가르실라소의자부심이어느정도였는지엿볼수있는대목이다. 그런데까스뜨로-끌라렌은꾸스꼬의묘사에서르네상스의흔적을발견한다. 그녀가문제삼는부분은꾸스꼬를아난꾸스꼬 ( 위꾸스꼬 ) 와우린꾸스꼬 ( 아래꾸스꼬 ) 로이분하고, 창건자인망꼬까빡과마마오끄요가각각교화시킨사람들을아난꾸스꼬와우린꾸스꼬에나누어거주하게함으로써두창건자를영원히기억하게했다는대목이다. 아난과우린의구분은르네상스와는무관한잉카고유의행정체계이지만이에두창건자의기억이투영되어있다는서술이도시계획에사회적질서를반영하는르네상스의도시계획과부합된다는것이다 (Castro- Klarén 2011, 218). 잉카가르실라소의르네상스에대한경도는그와 잉카왕실사 의위상에커다란도움이되었다. 인문주의자들이당대에스파냐지성계의주역이었기때문이다. 잉카가르실라소가교류하던인문주의자그룹이코르도바지성계에서굳건한지위를유지하고있었고, 코르도바인문주의자들의뒤에는당대에알깔라대학과에스파냐지성계에서영향력이컸으며왕실의신임을받았던인문주의자암브로시오데모랄레스 (Ambrosio de Morales) 가있었기때문이다. 8) 하지만이점은또한잉카가르실라소의부정적평가의근거로도활용 8) 잉카가르실라소의시대를르네상스시대로만규정하기에는어려운점도있다. 잉카가르실라소는세르반테스와완벽하게동시대인물이었다. 세르반테스는잉카가르실라소보다 8 년늦게태어났지만, 사망은같은날혹은하루차이였다. 또 돈키호테 1, 2 부는 1605 년과 1615 년간행되었고, 잉카왕실사 1, 2 부는각각 1609 년과 1617 년에빛을보았다. 게다가잉카가르실라소시대의코르도바에는바로크의대표문인인루이스데공고라 (Luis de Góngora, 1561~1627) 도명성을얻고있었다. 따라서잉카가르실라소의시대를르네상스에서바로크로의전환기롤보는것이더타당할것이다. 그러나잉카가르실라소자신은바로크와는무관했고, 적어도제도권지성계는인문주의자들이지배하고있었다. 에스파냐인문주의자들과잉카가르실라소의관계, 또당대지성계에서인문주의자들의위치는까르멘데모라 (Carmen de Mora) 의연구 (Mazotti 2010, 103-117) 를참조하라.
되기도했다. IV. 식민화된주체의면모와만뽀마의 새로운연대기와선정 이 1908년덴마크에서발견되고, 영인본이 1936년만들어지면서본격적인연구의계기가된일은장차 잉카왕실사 의정전으로서의지위를위협하게된다. 그리고 1960년대에이르면 새로운연대기와선정 이 잉카왕실사 보다높은평가를받기시작한다. 무엇보다도 새로운연대기와선정 은 398개의삽화때문에크게주목을받았다. 대단히파괴적인정복과문자의부재로대거유실된잉카역사의복원에새로운빛을주었기때문이다. 여기에다가잉카가르실라소가메스티소인반면와만뽀마는인디오였다는점도 잉카왕실사 보다 새로운연대기와선정 을높이평가하게된분위기조성에영향을끼쳤다. 와만뽀마의텍스트가소위 깊은페루 (Perú profundo) 를더잘대변하리라는기대지평선이조성된것이다. 마소띠 (José Antonio Mazzotti) 에따르면이기대지평선은나탕바흐텔 (Nathan Wachtel) 의 1973년연구를필두로파트리시아시드 (Patricia Seed) 와자크라파예 (Jacques Lafaye) 에이르기까지광범위한연구에서되풀이되어왔다 (Mazzotti 1996, 28). 하지만 1970년옥스포드대학에서 펠리뻬와만뽀마데아얄라에나타난역사개념 The Idea of History in Felipe Guaman Poma de Ayala 으로박사학위를딴후안 M. 오시오역시논문주제를선정할때 새로운연대기와선정 이원주민의증언기록이었다는점을고려했다고말하는것으로보아 (Ossio 1973, 155-156), 무게중심의이동은 1960년대에이미가시화되었다고보아야할것같다. 잉카가르실라소의가치절하가비단그가메스티소였기때문만은아니다. 비슷한시기에, 역시메스티소였던뚜빡아마루 2세는오히려집중조명을받았기때문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이례적으로반제국주의적, 민중주의적성격의군부쿠데타로 1968년집권한벨라스꼬 (Juan Velasco Alvarado) 정권 Revista Iberoamericana 25.1 이베로아메리카연구 136 137
우석균잉카가르실라소, 르네상스, 메스티소텍스트 이뚜빡아마루 2세를혁명의상징으로삼으면서이다 (Klarén 2004, 415). 그가잉카의저항왕조최후의군주뚜빡아마루 1세의피를이어받은인물이라는상징성도있지만, 식민체제에맞서봉기해인디오공화국건국을천명하기도했다는점이벨라스꼬정권의반제국주의적, 민중주의적노선에부합했다고볼수있다. 즉, 1970년을전후해인디오 / 메스티소의이분법적평가구도도작동했지만, 반식민적 민중적주체인가아닌가가또다른가치기준으로작용한것이다. 그런데잉카가르실라소는원주민도아니지만반식민적 민중적주체로도보기어려운점이있다. 식민체제하에서상당한지위를누렸기때문이다. 대략똘레도부왕 (1569~1581) 부임이전, 즉식민체제의기틀이잡히기전까지잉카왕족들은어느정도대접을받았고, 잉카가르실라소같은메스티소 1세대와이들의아버지세대에해당하는 1세대정복자들의관계도반드시나쁘기만한것은아니었다. 잉카가르실라소의경우는 1560년페루를떠나기전까지메스티소와잉카왕족을통틀어서도상당히괜찮은위치에있었다. 가령, 잉카왕실사 1부에서잉카가르실라소는프란시스꼬삐사로사후정복자들의구심점이된곤살로삐사로가 나를친자식처럼대해주었다 (Vega 1995, 441) 라고적고있다. 또잉카가르실라소는부친의공이충분히인정받지못한것에대해평생유감의뜻을표했지만, 부친은곤살로삐사로반란에연루되었다는의심을받았음에도불구하고 1554년에는에스파냐왕실로부터꾸스꼬의사법과치안을담당하는수장 (Justicia mayor) 겸꼬레히도르 (corregidor) 로임명되었다. 또한, 권력자의집에사병성격의식객이대거신세를지는것이당시풍습이었는데, 잉카가르실라소부친의집에드나들던이들은그수가물경 150~200명에이르러구설수에오를지경이었다고하니 (Miró Quesada 1994, 87) 사실부친의만년은오히려영화로운것이었다. 비록, 부친이에스파냐여성과다시결혼을하면서잉카가르실라소와모친은각각사생아와첩으로전락하고말았지만, 그래도부친은그를총애하여계속자기집에기거하게하면서서기일도시키고코카밭도증여했다. 그리고사후에잉카가르실라
소가에스파냐에서공부할수있도록재산을남겼는데, 라껠창-로드리게스의추산으로는오늘날가치로환산해서 25만달러에달할정도였다 (Chang- Rodríguez 2010, 197). 에스파냐생활도경제적으로궁핍하다고할정도는아니었다. 잉카왕실사 2부에서 고독과가난으로점철된벽촌에정착 할수밖에없었다고말하고 (Vega 2009, 481), 1592년후안페르난데스프랑꼬 (Juan Fernández Franco) 라는인물에게쓴편지에서자신을 보잘것없고체불되기일쑤인보수때문에서생이된군인 ( 재인용, Asensio 1955) 으로소개하고있지만, 몬띠야의숙부부부가차례로사망하면서유산을물려받아어느정도의지대소득이있었고, 덕분에코르도바에정착해서큰어려움없이지적교류와집필에전념할수있을정도는되었다. 이런전기적사실만으로도잉카가르실라소를식민체제의피해자로만보기는어렵고, 나아가그를식민체제의적극적협력자로해석할만한여지도있다. 월터 D. 미뇰로 (Walter D. Mignolo) 의 르네상스의이면 : 글쓰기능력, 영토성, 식민화 는잉카가르실라소를지나가면서언급하는정도이지만그를식민화된주체로볼수있을강력한논거를제공하고있다. 미뇰로는서구의기존시각처럼르네상스를인류문명의총아로보지않는다. 르네상스때이루어진고대그리스와로마문물의부활과혁신은그에게는식민주의적팽창을정당화하기위한도구에불과했다 (Mignolo 2003, vii). 미뇰로의다각도의분석중에서본고에서주목하는점은역사서술과관련된고찰이다. 미뇰로에따르면서구에서역사서술은알파벳의탄생과함께그리스시대에시작되었고, 로마시대의키케로등에의해서역사는오직알파벳을이용한글쓰기를통해서만서술될수있다는관념이발생했으며, 이러한관념이르네상스시대역사관의표준이되었다 (Mignolo 2003, 134-136). 에스파냐에서는문법학자로유명한안또니오데네브리하 (Antonio de Nebrija) 가이런관념을되살려강력히주장했고 (Mignolo 2003, 1장 ), 인디아스의풍속사와자연사 Historia natural y moral de las Indias (1590) 저자인예수회신부호세데아꼬스따 (José de Acosta) 가안데스원주민들의지적능력을인정하면 Revista Iberoamericana 25.1 이베로아메리카연구 138 139
우석균잉카가르실라소, 르네상스, 메스티소텍스트 서도문자가없었다는점을커다란결함으로지적했다 (Mignolo 2003, 133). 이로써메소아메리카의코덱스나잉카의매듭문자끼뿌 (quipu) 혹은낭송같은문자외수단에입각한역사전승은제대로된역사로인정받을수없게되었다. 미뇰로는문자가없는사람들은곧역사가없는사람들이라는논리는결국원주민이열등하다는결론으로귀결되었다고지적한다 (Mignolo 2003, 127). 9) 이는결국정복의정당화로, 또정복의가장큰대의명분인기독교전파 ( 그리고이를통한교화 ) 의정당화로귀결될수밖에없었다. 특히미뇰로는훗날제국주의시대의식민지배논리였던문명화사명, 20세기의발전주의, 20 세기부터오늘에이르는시장민주주의논리의기원에기독교복음화가있었다고지적하면서 ( 미뇰로 2010, 40-41) 르네상스의이면이곧서구지배담론의기원임을부각시킨다. 에스파냐의아메리카지배는미뇰로의고찰에비추어생각해볼점이많다. 주지하다시피에스파냐는아메리카 발견 으로적어도 17세기초까지기독교복음화작업의주도권을쥐고있었다. 이시기가신교의종교개혁시기와겹치고, 그국면에서가톨릭세력이단행한대항종교개혁의주요추진축도에스파냐였다. 이과정에서에스파냐는대단히폭력적이었던아메리카정복과식민통치를미화할필요를느꼈다. 그래서에스파냐는이사업들이순수한종교적동기에서시작되고조화롭게진행되었다는것을재천명했고, 까르멘데모라에따르면바로모랄레스같은제도권인문주의자들이야말로에스파냐의기독교적사명을로마제국의기독교수용에비유하였다 (Mazzotti 2010, 105-110). 이를테면에스파냐의국가적사명을팍스로마나의재현, 특히기독교 9) 잉카왕실사 에서아꼬스따신부는가장많이인용되는사람중하나이다. 그의책이아메리카자연에대해권위를인정받았고, 정복과기독교문명이식에대한합리화로일관하기일쑤인다른에스파냐인들의기록과달리원주민역사를나름대로는객관적으로쓰려고노력했고, 특히교육받은메스티소의지적능력을높이평가했기때문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아꼬스따신부역시에스파냐제국주의의무의식적공모자였다는평가가주를이룬다. 물론반론도존재한다. 가령, 페르민델피노 - 디아스를참조하라 (Mazzotti 2010, 51-77). 아꼬스따에대한국내연구로는박병규 (2013) 를참조하기바란다.
정신에입각한팍스로마나로확대시킨것이다. 이로써에스파냐는선봉에서서서구의이해, 즉기독교문명권의이해를대변하는지위를스스로에게부여한셈이다. 네브리하같은언어학자, 아꼬스따같은신부, 모랄레스같은역사가, 식민지관련기록을남긴무수한역사가내지연대기작가, 왕실에식민지사정을알린보고서집필자들이모두다잔혹한정복자나수탈자였던것도아니고, 이들이모두인문주의자들도아니었다. 하지만르네상스 ( 특히르네상스의언어와역사개념 ) 가식민주의적팽창과무의식적인, 그러나긴밀한공모를했다고볼수있다. 잉카가르실라소를에스파냐정복에협조한식민화된주체로보는입장에서가장명백한전거는그가 잉카왕실사 2부를통해정복자들을예찬했다는점일것이다. 잉카왕족의후예이기도하지만정복자의아들이기도했던잉카가르실라소에게정복자예찬은어쩌면당연한일이겠지만, 이는또다시르네상스적인간관에의거한것이기도하다. 혈통보다개인의능력을중요시하기시작한시대가바로르네상스였기때문이다 ( 아르놀트하우저 1999, 95). 잉카왕실사 2부에는 사람들이알만한부모를가지지못한사람들은각자의덕과공적 ( 功績 ) 으로평가되어야한다 (Vega 2008, 225) 라는구절이있는데, 이는대체로고위귀족출신이아니었던정복자들이오직개개인의능력과희생으로아메리카정복이라는 위업 을달성한점을높이산것이다. 그러나잉카가르실라소가개인의능력에대한단순한예찬을분명넘어서고있다는점을직시해야한다. 그는 2부의집필의도중하나가 신과국왕과자신들을위해용기와군사지식으로그풍요로운제국을얻은영웅적인에스파냐인들의위대함을예찬하기 (Vega 2008, 23) 위함이라고적고있다. 정복자들의 위업 을신과에스파냐국왕의영광과동일시하고있는것이다. 이는펠리뻬 2세때의대항종교개혁을통해신의계획과국가의사명과정복사업을동일시하려는노력을경주한모랄레스같은제도권지식인들의시도와정확히일치하는것이다. 기독교전파에대한맹목적인예찬이단순히개인적인견해가아니라식민 Revista Iberoamericana 25.1 이베로아메리카연구 140 141
우석균잉카가르실라소, 르네상스, 메스티소텍스트 주의담론에의거하고있다는점도잉카가르실라소가식민화된주체라는의구심을배가시킨다. 잉카가르실라소는안데스의역사를잉카이전시대, 잉카시대, 정복이후시대로구분하고있다. 그리고잉카이전시대는심지어인신공양과식인풍습까지존재한야만인의시대였다고말한다 (1부 1권 11장 ). 루이스미요네스 (Luis Millones) 는이를안데스가메소아메리카지역보다기독교를받아들이기더좋은조건을갖추고있었음을암시하는대목으로, 나아가잉카의줄기찬정복전쟁을기독교전파를위한일종의성전으로포장하려는시도로해석한다 (Mazzotti 2010, 65-68). 이를테면잉카가르실라소가로마제국과잉카를같은반열에놓으려고한것은잉카에대한예찬을넘어, 잉카가로마제국처럼기독교수용의기틀을마련했다는주장을하기위함이었다고해석할여지가발생하는것이다. 잉카가르실라소가잉카시대에이미기독교수용준비가되어있었음을주장하기위해잉카종교는물론안데스종교까지왜곡하는점은미요네스의해석이타당하다는근거이다. 잉카가르실라소는우선잉카인들의우상숭배가태양숭배에국한되어있었다고주장한다 (Vega 1995, 75). 달이나번개등자연이나자연현상을숭배한사실을부정하고있는것이다. 안데스전역에서숭배대상이던일종의상급신위라꼬차 (wiracocha), 대지모신빠차마마 (pachamama), 일종의산신령인아뿌 (apu), 모든종류의신성을통칭하는와까 (huaca) 에대해서도잉카가르실라소는가급적이면신성을부여하지않으려고노력한다. 다만빠차마마와유사한신인빠차까막 (pachacámac) 을태양신보다우위에두는데이역시식민주의에물든결과로볼수있다. 잉카인들은진정한신인우리주님을인식했다 라는제목의 1부 2권 2장에서잉카가르실라소는잉카인들이내면적으로는빠차까막을태양보다더상급신, 즉일종의절대자로떠받들었으며, 빠차까막-태양신- 잉카군주의종교체계를잉카종교의특징으로규정하고있다. 기독교의삼위일체론을연상시키는주장이고이를위해위라꼬차, 아뿌, 와까등의신성을일부러격하시켰다는추론이가능하다. 또 1부 2권 3장에서는꾸스꼬에십자가가있었다고주장하기도하고와
이나까빡은태양신보다 더우월하고권능있는 (Vega 1995, 583) 신이있을지모른다는견해를발설하기에이른다. 와이나까빡이정복직전의군주였다는점은잉카의창건자망꼬까빡과더불어시작된기독교수용준비의사명, 즉하느님이예정한사명이완수되었다는점을암시하고있다. 1부의 독자에게바치는서문 에서안데스에기독교가전파됨으로써안데스가우상숭배의심연에서구원되었다는점을강조하고, 나아가 기독교공화국 (república cristiana) 10) 이라는표현까지사용하며기독교전파를긍정적인것으로평가한것이 (Vega 1995, 4) 잉카의멸망과에스파냐식민체제의등장은하느님의섭리였다는잉카가르실라소의시각을단적으로드러내고있다. 로렌떼메디나에따르면잉카가르실라소의이런논지는 16세기연대기상당수에서되풀이되는만상섭리주의 (providencialismo) 에서비롯된것이다 (Mazzitti 2010, 141). 즉정복을신의섭리로간주한식민주의담론이 잉카왕실사 에스며들어있는것이고, 그렇다면잉카가르실라소역시르네상스의수많은인문주의자들처럼부지불식중에식민주의적팽창에협력했다고볼수있는것이다. Revista Iberoamericana 25.1 이베로아메리카연구 142 143 V. 메소티소텍스트로서의 잉카왕실사 잉카가르실라소가식민화된주체라는비판에서자유롭기는쉽지않다. 하지만그는인디오가아니라메스티소였다는점을유념해야한다. 즉, 잉카가르실라소가패자의입장을대변해야할의무는없었던것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잉카가르실라소는 잉카 를이름에사용했고, 심지어때로는자신을 인디오 로규정하기도한다. 물론자신을기독교도나메스티소로도규정하기때문에어찌보면이를기회주의로볼수도있겠다. 하지만식민체제가굳어져지배자와피지배자가명확하게갈린시대에, 또지식의장 ( 場 ) 에서원주민의역사가부정된르네상스시대에자신의원주민기원을당당하게내세웠다는 10) 여기서 공화국 은현대적의미의정치제제를갖춘국가를의미하는것은물론아니고, 플라톤과관계가있다.
우석균잉카가르실라소, 르네상스, 메스티소텍스트 점은그가완전히식민치제에포섭된인물이아닐가능성에대한고찰을요구한다. 호세안또니오마소띠의 1996년저서 잉카가르실라소의메스티소코러스 : 안데스적반향 Coros mestizos del Inca Garcilaso: Resonancias andinas (1996) 은 1970년을전후해정립된반잉카가르실라소기류를논박한대표적인연구이다. 마소띠는법, 직업선택, 상속, 관직, 결혼등여러가지면에서당시메스티소들에게가해진제약을상기시킴으로써 (Mazzotti 1996, 23) 잉카가르실라소의경제적 사회적지위에대한과도한해석을차단한다. 또잉카가르실라소가르네상스적인물이라는점에의거한에스파냐화된 (hispanizado) 잉카가르실라소 / 원주민사유의대표자와만뽀마라는비판적이분법을배격하고 (Mazzotti 1996, 28), 오히려잉카가르실라소에대한기존연구들이 잉카왕실사 에끼친유럽저서들의영향에지나치게매몰되어있다고비판했다 (Mazzotti 1996, 102). 가령, 잉카왕실사 를정전의지위로격상시키는결정적인계기가된이스빠니스따리바아구에로의 잉카가르실라소예찬 Elogio del Inca Garcilaso (1916) 이고전주의, 라틴주의, 지중해문화등의연결고리로이책의가치를높이평가한것을비판한다 (Mazzotti 1996, 330-331). 즉, 잉 카가르실라소가아니라그의연구자들이식민화된주체라고비판한것이다. 11) 마소띠는자신의주장을입증하기위해 잉카왕실사 이전에텍스트화된꾸스꼬의구전전통을주목한다. 잉카군주들의가계, 통치, 정복에대한보고서 Relación de la descendencia, gobierno y conquista de los Incas (1542), 잉카군주들에대한모든이야기 Suma y narración de los Incas (1548-1556), 페루정복이야기 Relación de la conquista del Perú (1570) 들이그것이다. 12) 첫번째텍스트는그때까지끼뿌 13) 를해독할줄알았던원주민노인 4인의구술기록 11) 마소띠는리바아구에로와정반대로 잉카왕실사 의잉카적특징이나원주민적특징만을예찬한루이스 E. 발카르셀 (Luis E. Valcárcel) 에대해서도비판적이다 (Mazzotti 1996, 331). 12) 연도는출판연도가아니라구술, 채록연도임. 페루정복보고서 대신 페루정복이야기 라는제목을택한이유는우석균 (2012, 461-463) 을참조하라.
이고, 두번째텍스트는꾹시리마이오끄요 (Cuxirimay Ocllo) 라는잉카공주와결혼한후안데베딴소스 (Juan Díez de Betanzos y Araos) 가처가식구들의이야기를토대로쓴책이며, 세번째텍스트는빌까밤바왕조의 3대군주띠뚜꾸시유빵끼가구술한원고이다. 잉카가르실라소가이텍스트들을알고있었다는증거는없다. 그는자기삶의경험, 모계친척어른들의이야기, 집필중꾸스꼬의지인들과주고받은편지등을토대로 잉카왕실사 를썼다고말할뿐이다 (1부 1권 19장 ). 마소띠도이텍스트들이 잉카왕실사 에직접적인영향을끼쳤다고주장하지는않는다. 다만상기언급한세텍스트는물론잉카가르실라소의경험과자료들모두두세계의만남의결과라는점을보여주고자했고, 이를통해잉카가르실라소에게만집중된비판이부당한것임을주장하고싶었을뿐이다. 구전전통을주목했다고해서마소띠가문자 / 구술의이분법적인접근을시도하는것은아니다. 그는와만뽀마나산타끄루스빠차꾸띠같은원주민연대기작가들역시잉카가르실라소처럼유럽역사서술전통에서자유로울수없었으며 (Mazzotti 1996, 58-59), 그보다훨씬전인 1550년대중반의잉카구왕족의언어표현역시일정부분서구화되어있었다고지적한다 (Mazzotti 1996, 110). 즉안데스에이식된문자전통은물론이고구전전통역시식민체제와긴밀한관계가있다는것을냉철하게인식한것이다. 그렇지만마소띠는원주민들의구술이중요한사료였던식민지시대글쓰기에서그들의목소리가완전히배제되었을가능성역시비현실적이라고본다. 여기서마소띠는바흐친의다성성의개념을빌린다. 지배자와피지배자의관계가지배자들의독백이독점하는관계가아님을텍스트분석과대조를통해입증하고자했고, 이를통해식민지시대텍스트들을 코러스적글쓰기 (escritura coral) 로정의하고, 서사적목소리들이증식되고포개지는 (Mazzotti 1996, 324) 것을이러한글쓰기의특징으로보았다. 이러한논지에입각해마소띠는 잉카왕실사 가코 Revista Iberoamericana 25.1 이베로아메리카연구 144 145 13) 잉카의매듭문자로잉카시대에는역사전승에도이용되었음.
우석균잉카가르실라소, 르네상스, 메스티소텍스트 러스적글쓰기의대표적인사례이며, 이를메스티소텍스트로규정한다. 메스티소가쓴텍스트라는의미에서가아니라, 승자와패자와그사이에낀메스티소의목소리가서로대화하는문화횡단 (transculturación) 텍스트라는의미에서이다 (Mazzotti 1996, 323-325). 잉카왕실사 가식민주의의팽창에협력한르네상스텍스트라는비판에대한마소띠의반박이자결론이다. 다만마소띠는유보적인언급도잊지않는다. 당시꾸스꼬사회가바흐친의대화주의이론을전적으로적용할수있을정도로수많은목소리가자유롭게분출하고대화할수있을상황이아니었고 (Mazzotti 1996, 326), 따라서안또니오꼬르네호뽈라르 (Antonio Cornejo Polar) 의지적처럼 잉카왕실사 는애초부터 불가능한조화의담론 (Mazzotti 1996, 39) 일수밖에없다고말한다. 언뜻보면잉카가르실라소의 잉카왕실사 가 불가능한이상을꿈꾸었다 는일반화된평가에되돌아온셈이다. 하지만마소띠의출발점은잉카가르실라소와다른원주민연대기저자들과의형평성문제에있었다. 즉, 잉카가르실라소의재조명을통해원주민텍스트들은가능한이상을꿈꾸었고식민주의에서자유로울수있었겠냐고반문하고있는것이다. 사실와만뽀마와산타끄루스빠차꾸띠역시식민주의에서완전히자유로울수는없었다. 가령, 이들도잉카가르실라소처럼기독교수용은기정사실로받아들였다. 와만뽀마나산타끄루스빠차꾸띠의텍스트를들여다보아도안데스인들이노아의자손이라거나에스파냐정복훨씬이전에예수의제자도마가안데스에서포교활동을벌였다는대목을볼수있다. 이는안데스인역시하느님의피조물이고기독교도이기때문에에스파냐인과동등한처우를받을권리요구를뒷받침하기위한것이다. 잉카왕실사 의기본입장과다를바없는것이다. 심지어이텍스트들보다 40년전후앞선띠뚜꾸시유빵끼의 페루정복이야기 에서이미동일한현상을목격할수있다. 띠뚜꾸시유빵끼는자신이세례를받았으며교회와십자가건립에도협조했다는점을내세워펠리뻬 2세에게자신이항복할경우에온당한처우를받을권리가있다고주장했다 (Titu Cusi Yupanqui 2006, 156, 158).
이는이미띠뚜꾸시유빵끼시대때부터식민체제를무너뜨릴생각보다그체제안에서생존을모색하고있었다는반증이다. 그만큼식민체제가돌이킬수없을만큼굳건하게뿌리를내린것이다. 사실, 꼭두각시왕으로옹립되었다가도주하여 1536년빌까밤바왕조를세우고대규모봉기를일으킨망꼬까빡의무장투쟁은 2차봉기에실패한 1539년에이미추동력을상실했다 (Hemming 2004, 300). 또한식민지배를뒷받침하는담론도완성되었다. 마르가리따사모라는그시초를후안데마띠엔소의 페루통치 Gobierno del Perú (1567) 로본다. 이글은잉카군주의전제정치 / 에스파냐군주의선정이라는이분법을확립하고, 공동의이익 (common good) 을위해서라면잉카지배층의정치적권위를제거해야한다는주장하고있다 (Chang-Rodríguez 2010, 122). 그리고똘레도부왕이잉카시대피지배원주민들을대상으로잉카군주들의폭정 (tiranía) 을조사한일이나이런기조에부응한역사서인사르미엔또데감보아의 잉카역사 는띠뚜꾸시유빵끼의 페루정복이야기 와동시대의산물이었다. 띠뚜꾸시유빵끼는정복자들이악마의꼬드김에넘어가금은보화에눈이멀었고, 심지어부친인망꼬잉카의부인까지탐하였다고강력히비판한바있다 (Titu Cusi Yupanqui 2006, 36: 38: 40). 자신은기독교포교에협조한반면, 정복자들은기독교도의의무를저버렸다는이러한대비는식민주의와반식민주의의주요전쟁터가기독교수용여부에서진정한기독교도논쟁으로옮아갔음을의미한다. 잉카가르실라소가자신을줄곧기독교도로지칭하고, 나아가하느님을위해, 또지상에서하느님의대리인인교황에게아메리카포교를위임받은에스파냐국왕을위해충성을받쳤다는주장역시이러한맥락에서이해해야할것이다. 정복이전에절대자에대한성찰과십자가가이미존재했다는식의 잉카왕실사 의언술역시마찬가지이다. 단순히식민주의와의공모의결과물로만단정할수는없는것이다. 심지어마르가리따사모라는 잉카왕실사 2부가정복자들을미화시켰다는비판까지반박한다. 2부 8권에서에스파냐식민지배자들의정치권력남용, 뚜빡아마루 1세처형, 메스티소박해등에서잉카 Revista Iberoamericana 25.1 이베로아메리카연구 146 147
우석균잉카가르실라소, 르네상스, 메스티소텍스트 가르실라소의분명한반식민주의노선을읽을수있다는것이다 (Chang- Rodríguez 2010, 119). 식민주의에협력하는듯한흔적이농후한가운데에서도메스티소나원주민들의권익옹호를위한목소리들이새어나오는 잉카왕실사 의특징에서이를메스티소텍스트로규정한마소띠의시도가전혀설득력없다고는볼수없는것이다. VI. 결론지금까지잉카가르실라소를식민화된주체로보는관점과이에대한반론을살펴보았지만명약관화한결론을내리기는사실쉽지않다. 무엇보다도 4 세기의세월을뛰어넘어당대의시대적맥락과잉카가르실라소개인의고뇌를꿰뚫어보는작업자체가한계가있는일일수밖에없다. 또한잉카가르실라소스스로도기독교도, 인디오, 메스티소, 에스파냐제국의백성, 페루인등다양한정체성을지니고있음을과시하니, 그의진정한발화위치를포착하는일은더욱더어려운일일수밖에없다. 잉카가르실라소를식민화된주체로, 나아가식민체제완성에협력한공모자로단정짓기에는나름대로고단했던그의인생역정이나잉카왕족의후예라는자부심이가득한 잉카왕실사 에대한모독인듯하다. 그렇다고잉카가르실라소의반식민주의적면모만부각시킨다면그역시지나친미화일것이다. 잉카중심주의자, 꾸스꼬중심주의자나아가르네상스적인간이요지식인이었던잉카가르실라소가당대밑바닥인생을살았던민중들과이해관계가같을수가없기때문이다. 분명한것은그가 1부에서는잉카인들을 2부에서는정복자들을예찬함으로써불가능한조화를꿈꾼일을과도하게비판할수는없다는점이다. 2011년보스턴에서열린제5회해외페루연구자국제회의 (Congreso Internacional de Peruanistas en el Extranjero) 에서루이스미요네스는 우리는 [ 페루인들 ] 모두삐사로이고, 동시에모두아따왈빠이다 라는말로기조연설을마무리한바있다. 정복자이자피정복자, 승자이자패자, 지배자이자피지배자, 백인이자원
주민일수밖에없는페루인들의숙명을요약한말이다. 그런데그학회에서백인과메스티소는다수였지만, 원주민연구자는거의보이지않았다. 우리모두삐사로이고아따왈빠인데도여전히평등하지않은사회상의한단면이다. 그렇다면잉카가르실라소의시대에서 4세기가지나도록아무도풀지못한숙제를그에게만짊어질것을요구하는것은부당한일이다. 그래서본연구자가보기에잉카가르실라소에게보아야할미덕은이숙명을인식한혜안이다. 그는 잉카왕실사 1부에서잉카창건신화를다루고난뒤 우리건물의주춧돌을놓았다 (Vega 1995, 48) 라고적고있다. 그가생각하는 우리 의범주는 2부서문에서명확히드러난다. 그는 페루제국 (Imperio del Perú) 의 인디오, 메스티소, 끄리오요에게 에게책을바친다고하면서자신을이들의 형제이자동포이자동향사람 (hermano, compatriota y paisano) 으로규정했다. 페루제국 이라는표현을통해페루와타자의경계를설정하고있고, 페루사회의구성원에서반도인 (peninsular) 을배제하고있으며, 경계내부의여러인종간차이를무화시키려한것이다. 영토적귀속감과경계내부의사람들과의유대의식이담겨있다는점에서적어도잉카가르실라소가일종의원민족주의 (proto-nationalism) 의식을지니고있었음을알수있다. 비록유럽과아메리카의만남이대단히폭력적이고위계화된사회질서를낳았다지만, 어쨌든그만남을통해페루라는새로운사회가탄생했음을천명한것이다. 그에게 최초의페루인 이라는평가가따라다니는이유가그때문이고, 그가인종적으로메스티소여서가아니라인종간차이에구애받지않는메스티소의식을선취하고있었다는점을높이평가해야할것이다. Revista Iberoamericana 25.1 이베로아메리카연구 148 149 참고문헌박병규 (2013), 16세기아메리카원주민기원담론의형성, 스페인어문학, 69 권, pp. 226-245. 아르놀트하우저 (1999), 문학과예술의사회사 제2권, 백낙청 반성완옮김, 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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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균잉카가르실라소, 르네상스, 메스티소텍스트 Inca Garcilaso, Renaissance and Mestizo Text Suk-Kyun Woo Institute of Latin American Studies, Seoul National University Woo, Suk-Kyun(2014), Inca Garcilaso, Renaissance and Mestizo Text. Abstract The estimation of the Royal Commentaries of the Incas has also changed according to the age. However, since its publication, at least until the age of 60 the previous century, this work has always been considered as a important (sometimes the most important) one between the colonial texts. It is because, besides the rich information of the text, Inca Garcilaso de la Vega s intellectual capacity and the writing level satisfied the horizon of expectations of his time, the Renaissance, so that from the origin this text occupied an important place in the field of knowledge production in respect to the Andes. But around 1970, some perspectives that underestimate its value has been prevailing. Although the excessive idealization of the Inca period according to the ideal of the Renaissance had been repeatedly pointed out, Inca Garcilaso even was regarded as a colonized subject. But in recent years, there are revaluation attempts beyond this perspective. This article traces these two different approaches. Key words Inca Garcilaso, Royal Commentaries of the Incas, Renaissance, Walter D. Mignolo, José Antonio Mazzotti, Mestizo t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