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성박씨 우당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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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밀성박씨 우당공파 밀성박씨우당공파

2 소개글 밀성대군 후손관련자료

3 목차 1 광해군 3년 신해(1611, 만력 39) 6월 3일(신미) 8 2 광해군 3년 신해(1611, 만력 39) 4월 30일(기해) 합천의 박건갑이 유생과 10 3 박건갑( 朴 乾 甲 ) -국조방목 12 4 박천우( 朴 天 祐 ) -국조방목 13 5 박난( 朴 鸞 ) -국조방목 14 6 박훤( 朴 萱 ) -국조방목 15 7 채지당 박구원 국조방목 16 8 돈와공 박시예 ( 朴 時 乂 )선조님 사실 17 9 容 軒 先 生 文 集 卷 之 二 詩 次 朴 松 溪 詩 (용헌 이원선생문집권지이 시 차박송계시) 동문선 제4권 오언고시( 五 言 古 詩 ) 중서 박중미에게[ 贈 朴 中 書 中 美 ] 년3월 밀성대군 춘향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7권 경상도( 慶 尙 道 ) 창녕현( 昌 寧 縣 ) 朴 胄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7권 경상도( 慶 尙 道 ) 창녕현( 昌 寧 縣 ) 朴 近 仁 채지당 박구원 1442년(세종 24)~1506년(중종 1) 해동야언 2 무오당적 ( 戊 午 黨 籍 ) 해동야언 2 무오사화 사적 ( 戊 午 士 禍 事 跡 ) 태종 11년 신묘(1411, 영락 9) -박융 심암유고( 心 庵 遺 稿 ))- 朴 天 翊 의 松 隱 集 목은시고( 牧 隱 詩 藁 ) 제31권 시( 詩 )서울에 돌아온 밀성( 密 城 )의 두 분 박 선생( 朴 先 生 )을 방문하다 순조 16년 병자(1816, 가경 21) 7월 2일(기유) 부사 박경신( 朴 慶 新 ), 고 현감 박경전( 朴 慶 傳 ), 고 첨정 박경윤( 朴 慶 胤 41 ) 21 순조 12년 임신(1812, 가경 17) 3월 13일(을유) 박경인( 朴 慶 因 ).예조에서 각 식년 경외의 충 효 열의 문서를 보고42 하다 22 선조 27년 갑오(1594, 만력 22) 3월 25일(계묘) 박경신 23 선조 26년 계사(1593, 만력 21) 9월 12일(계해) 삼우정 박경신 24 선조 26년 계사(1593, 만력 21) 1월 14일(기사) 삼우정 박경신 세조 2년 병자(1456, 경태 7) 12월 7일(임인) 의금부에서 형옥의 일로 전옥서 등의 관리에 대해 벌할 것을 청하다

4 26 세조 2년 병자(1456, 경태 7) 5월 21일(기축) 순라를 범한 중 지경이 태조의 원종공신 탁시준의 손자이므로 면죄하다53 27 해동잡록 1 본조( 本 朝 ) 박홍신( 朴 弘 信 ) 연려실기술 제3권 세종조 고사본말( 世 宗 祖 故 事 本 末 ) 왜( 倭 )를 치던 병역( 兵 役 ) 박홍신 성호사설 제19권경사문( 經 史 門 )정 대마도( 征 對 馬 島 ) 박홍신 세종 1년 기해(1419, 영락 17) 6월 29일(임인) 편장 박홍신( 朴 弘 信 ) 세종 5년 계묘(1423, 영락 21) 8월 26일(갑술) 박언충 현귀명 심도원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국당유고( 菊 堂 遺 稿 ) 박흥생( 朴 興 生 ) 익재난고 제4권 시( 詩 ) 안렴사( 按 廉 使 ) 박대양( 朴 大 陽 )을 전송하다. 무술년 익재난고 제2권 오두백( 烏 頭 白 )으로 박인간( 朴 仁 幹 )을 전송하다 고려사절요 제24권충숙왕( 忠 肅 王 )을묘 2년, 원 연우 2년 박인간( 朴 仁 幹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6권 밀양도호부( 密 陽 都 護 府 ) 박의신 동문선 제35권표전( 表 箋 )광주에서 사례하여 올리는 표[ 廣 州 謝 上 表 ] 의신 고려사절요 제10권 인종 공효대왕 2( 仁 宗 恭 孝 大 王 二 ) 의신( 義 臣 ) 조선왕조실록-박강생 騎 牛 先 生 文 集 卷 之 二 不 朝 峴 言 志 錄 박침 貞 齋 先 生 逸 稿 卷 之 三 杜 門 洞 言 志 錄 박침 고려사절요 제30권신우 1( 辛 禑 一 )판사 박사경( 朴 思 敬 ) 조선왕조 실록 태조 총서편 박춘 고려사절요 제27권공민왕 2( 恭 愍 王 二 ) 박춘 고려사절요 제27권공민왕 2( 恭 愍 王 二 ) 박춘 고려사절요 제28권 공민왕-박춘 고려사절요 제28권-박춘 고려사절요 제28권공민왕 3( 恭 愍 王 三 )병오 15년(1366), 원 지정 26년 동사강목-박춘 동사강목- 박춘 91

5 51 동사강목 박춘 동사강목 을사년 공민왕 14년(원 순제 지정 25, 1365) 동사강목 제15상갑진 고려 공민왕 13년부터, 갑인 공민왕 23년까지 11년간 朴 椿 一 蠹 先 生 續 集 卷 之 四 師 友 門 人 錄 四 美 亭 박형달( 朴 亨 達 ) 태조 2년 계유(1393, 홍무 26) 3월 1일(병오) 야광사를 허물고 관사를 수즙한 죄로 죽주 감무 박부에게 베 5백 필을 징99 수하다 태조 2년 계유(1393, 홍무 26) 5월 7일(신해) 박영충의 농장에 은닉한 양민을 충군시킨 죽주 감무 박부가 원한을 사 101 귀 양가다 57 임하필기( 林 下 筆 記 ) 제33권 화동옥삼편( 華 東 玉 編 ) 고려 말의 팔은( 八 隱 ) 58 동문선 제16권차 연상루 운( 次 延 爽 樓 韻 )박진록( 朴 晉 祿 ) 59 목은문고( 牧 隱 文 藁 ) 제20권 박씨전( 朴 氏 傳 ) 박윤문( 朴 允 文 )) 60 동문선 제85권 기 박지평시서( 寄 朴 持 平 詩 序 ) 박윤문( 朴 允 文 ) 61 동문선 제16권단양 취운루( 丹 陽 翠 雲 樓 ) 박윤문( 朴 允 文 ) 62 고려사절요 제25권 충혜왕( 忠 惠 王 )갑신 5년(1344), 원 지정 4년 박윤문( 朴 允 文 ) 63 태조 총서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세우다 64 해동잡록 1 본조( 本 朝 )박연( 朴 堧 ) 65 임하필기( 林 下 筆 記 ) 제20권 문헌지장편( 文 獻 指 掌 編 )박연( 朴 堧 )의 상소 66 용재총화 제8권 박연 67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1 - 경전류 1(속) 악( 樂 ) 속악( 俗 樂 )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19) 68 연려실기술 별집 제12권 정교전교( 政 敎 典 故 )여악( 女 樂 ) 69 연려실기술 제3권 세종조 고사본말( 世 宗 祖 故 事 本 末 ) 세종조의 명신( 名 臣 ) 70 성호사설 제5권만물문( 萬 物 門 ) 박연 악률( 朴 堧 樂 律 ) 71 사가시집 제3권세종대왕( 世 宗 大 王 )의 만장( 挽 章 ) 6수 박연 72 동문선 제10권쌍운 연화회문체 유거 작( 雙 韻 蓮 花 回 文 體 幽 居 作 ) 73 국조보감 제11권 세조조 2( 世 祖 朝 二 ) 5년(경진, 1460) 박연 국조보감 제9권 단종조( 端 宗 朝 ) 즉위년(임신, 1452) 박연

6 76 동문선 제4권 오언고시( 五 言 古 詩 ) 중서 박중미에게[ 贈 朴 中 書 中 美 ] 壄 隱 先 生 逸 稿 卷 之 二 靖 國 君 派 祖 (정국군파조) 乙 材 - 三 司 左 尹 公 派 祖 (삼사좌윤공파조) 天 翊 - 判 圖 判 閣 公 派 祖 (판도판각공파조) 元 光 - 令 同 正 公 派 祖 (영동정공파조) 良 彦 - 密 直 副 使 公 派 祖 (밀직부사공파조) 彦 仁 - 左 僕 射 公 派 祖 (좌복야공파조) 彦 祥 - 都 平 議 事 公 派 祖 (도평의사공파조) 鉉 - 糾 正 公 派 祖 (규정공파조) 陟 - 忠 憲 公 派 祖 (충헌공파조) 諱 元 - 四 門 進 士 公 派 祖 (사문진사공파조) 中 美 (중미) - 密 直 府 院 君 派 祖 (밀직부원군파조) 언부( 彦 孚 )태사공파( 太 師 公 派 ) 또는 문하시중공파( 門 下 侍 中 公 派 ) 임선미 [ 林 先 味, 1362~1394] 우현보( 禹 玄 寶, 1333~1400) 변안렬( 邊 安 烈 ) 1334(충숙왕 복위 3)~1390(공양왕 2) 해동잡록 1 본조( 本 朝 )-박영( 朴 英 ) 해동잡록 1 본조( 本 朝 )-박훈( 朴 薰 ) 해동잡록 1 본조( 本 朝 )-박위( 朴 ) 해동잡록 1 본조( 本 朝 )-박의중( 朴 宜 中 ) 請 額 上 言 [ 朴 時 增 ] 書 遺 事 後 [ 金 大 有 ] 遺 墟 神 道 碑 續 識 [ 皇 甫 仁 ] 立 碑 告 由 文 [ 卞 春 亭 ] 162

7 광해군 3년 신해(1611, 만력 39) 6월 3일(신미) :47 광해군 3년 신해(1611, 만력 39) 6월 3일(신미) 삼가 유생 박건갑 이 상소하여 영의정 이덕형이 조식과 정인홍을 무함하였음을 논하다. 삼가( 三 嘉 ) 유생 박건갑( 朴 乾 甲 )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개는 사론의 시비를 바로잡으라고 청하는 일이었다. 건갑 은 정인홍( 鄭 仁 弘 )에게 당부( 黨 附 )하여 양현( 兩 賢 )을 무함하였는데 그 말이 극히 흉악하고 패려하였다. 그 상소에 이 르기를, 삼가 생각건대, 사정( 邪 正 )이 어느 시대인들 없겠습니까마는, 신하로서 임금을 속이는 일이 불행히도 지금 있습니다. 신 이 삼가 영의정 이덕형의 차자를 보니, 그 가운데에 조식( 曺 植 )이 방울을 차고서 자성( 自 省 )했던 일을, 학문의 정도가 달 랐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마치 이단으로 지목을 하는 듯한 면이 있었으니, 신은 통분스러움을 누를 길이 없습니다. 아, 조 식은 정금 미옥( 精 金 美 玉 )과 같은 자질에다 학문을 독실하게 하는 노력까지 보태어, 경( 敬 )과 의( 義 ) 두 글자를 일생동안 실천해 나가는 바탕으로 삼았고, 항시 맑게 깨어 있는 일념이, 잠시나마 태만해진 적이 없었으니, 그가 항시 금방울을 차 고 지낸 것 또한 자성을 하는 한 가지 일인 것입니다. 옛날의 송유( 宋 儒 ) 이통( 李 ) 또한 학문의 수준이 다르게 됨을 면 하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정인홍이 문학의 해로움이 홍수보다도 더 심하다. 고 한 것으로 말하면, 학자들이 완물 상지( 玩 物 喪 志 )하는 폐단이 있 게 될까 염려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덕형은 이를 육자( 陸 子 )의 도( 道 )와 석씨( 釋 氏 )의 교( 敎 )에다 비하였습니다. 아, 성현( 聖 賢 )이 학문하는 방법은 오로지 언어와 문자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정자( 程 子 )께서, 글을 지 으면 말이 많아지고 말이 많게 되면 도에 해롭다고 경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정자 역시 육자나 석씨로 낙착됨을 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까. 김우옹( 金 宇 )과 박성( 朴 惺 )이 모두 정인홍과 논변이 같지 않은 것을 이유로 서로 절교하였 다. 고 한 것으로 말하면, 더욱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이 인홍에 대해서 우러러 흠모하기를 시종일관 변하지 않은 것은, 사람들이 다함께 알고 있는 일입니다. 어찌 서로 절교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아, 지금 올바른 사람을 무함하여 헐뜯는 자들이 많습니다만, 저 어줍잖은 꼴로 덩달아 따라붙는 무리들이야 진실로 끝까 지 따져볼 만한 가치도 없는 자들이지만, 이덕형은 벼슬이 정승 자리에 있으면서 함부로 대현( 大 賢 )을 의논하여 온 나라 를 충동질함으로써 한쪽으로 휩쓸리게 하였던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덕형이 어떤 소견이기에 감히 순우( 淳 于 )가 맹 자( 孟 子 )에 대해 의논하다가 제발로 임금을 기만하고 올바른 자를 해치는 짓에 빠졌던 길을 본받는 것입니까. 신은 조식이 살던 고을에 태어나 인홍의 문하에 종유하였습니다. 비록 그 찌꺼기나마 제대로 배워 얻은 것은 없지만, 일 찍이 그 도덕이 순정( 醇 正 )한 점을 흠앙하였는데, 지금 횡의( 橫 議 )를 들으니 성미 급한 혀가 저절로 씰룩이어, 감히 몇 자 되지 않는 소를 가지고서 기만, 무함하는 죄를 변별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살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소의 내용은 잘 알았다. 인심과 사습이 날로 투박해져 오직 군부를 협박하여 제압하는 것만을 고상한 일로 여기면서 그 칠 줄을 모르니, 이는 모두가 못난 내가 외람스레 자리를 차지하여 교화가 밝혀지지 않은 탓이라고 하겠다. 비록 나라 전 체가 따지고 나서더라도 시비가 정해질 날은 당연히 있는 법이니, 그대는 이제 물러가서 부지런히 학업을 닦도록 하라. 광해군 3년 신해(1611, 만력 39) 6월 3일(신미) 7

8 하였다. 원전 31 집 633 면 분류 *정론-정론( 政 論 ) / *역사-고사( 故 事 ) / *사상-유학( 儒 學 ) / *사법( 司 法 ) [주D-001]조식(( 曺 植 )이) 방울을 차고서 자성( ( 自 省 )했던) 일 : 조식이 생전에 늘 금방울[ 金 鈴 ] 하나를 몸에 차고 지내면서 이를 성성자( 惺 惺 子 ) 라 이름을 지었고, 죽을 무렵에 그의 문인인 김우옹( 金 宇 다고 한다. 우산문집( 愚 山 文 集 ) 권2. )에게 주었 [주D-002]이통(( 李 ) : 송나라 때 남검주( 南 劍 州 ) 태생으로, 자는 원중( 愿 中 )이며 통칭 연평 선생( 延 平 先 生 ) 으로 불린다. 주자가 한때 그에게 수학한 바 있다. 그는 후학을 지도할 때, 강론( 講 論 )보다는 말없이 앉아 스 스로 터득하는 것을 중시하였다. 송사( 宋 史 ) 권428 송원학안( 宋 元 學 案 ) 권39. [주D-003]순우(( 淳 于 )가) 맹자( ( 孟 子 )에) 대해 의논하다가 제발로 임금을 기만하고 올바른 자를 해치는 짓 에 빠졌던 길 : 순우는 전국 시대 제( 齊 )나라의 변사( 辯 士 )인 순우곤( 淳 于 명예와 사공( 事 功 )을 주제로 문답을 나누었다. 맹자( 孟 子 ) 고자 하( 告 子 下 ). )을 말한다. 그가 맹자와 더불어 광해군 3년 신해(1611, 만력 39) 6월 3일(신미) 8

9 광해군 3년 신해(1611, 만력 39) 4월 30일(기해 기해) 합천의 박건갑이 유생과 :39 합천의 박건갑이 유생과 대간은 임금을 협박하여 사심을 이루려는 자들이라고 아뢰다. 합천( 陜 川 ) 사람 박건갑( 朴 乾 甲 )이 상소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구차하게 동조할 수 없는 것이 인심이고, 으름장을 놓아 밀어붙일 수 없는 것이 공론입니다. 으름장을 놓아 밀어붙 이는 날이면 그것은 당장 공론이 아닌 것입니다. 삼가 보건대, 이무( 李 ) 등이 전현( 前 賢 )을 끼고 태학을 가차하여 처음에는 재신의 반열에 있는 사람에게 삭록( 削 錄 )을 하였고 재차 공관( 空 館 )이라는 행위를 군부에게 시행하면서 기세를 한껏 부리니, 나라 전체가 그 에 말려들고 있습니다. 신이 청컨대, 천만 사람이 앞을 막고 있어도 내 생각이 옳으면 앞으로 나아가겠노라는 의리로써, 전하를 위해 몇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아, 풍성( 風 聲 ) 기습( 氣 習 )이 세상을 통틀어 다들 똑같은 상황일 때에도 혼자서 특립( 特 立 )하여 자기의 소신대로 행동하며 의혹되지 아니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가차없이 공박을 하려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정원은 아직 아뢰지도 않은 봉서( 封 書 )를 베껴 서 사당( 私 黨 )에게 퍼뜨리고, 태학은 아직 내리지도 않은 차자를 팔로( 八 路 )에 제멋대로 돌리면서 변무해야 될 일이다. 라고 소리 치는데, 신은 무함했다는 것이 무슨 무함을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노( 老 ) 장( 莊 )의 사상이 학문의 병통이 되었다. 는 말이 그의 문집( 文 集 )에 분명하게 실려 있고, 왕자( 王 子 )를 죽였으면 합니 다. 는 말이 선조 때의 성교( 聖 敎 )에 있습니다. 그런데 소에 동참을 하라고 남을 협박하여 임금에게 사람수가 많음을 보이니, 팔도 의 먼 지방과 외진 시골의 만학( 晩 學 ) 중에는 애당초 그 현자의 이름이 무엇이고 그 소가 무슨 일을 논하는 것인지도 모른 채, 협박 을 받고 억지로 따른 자들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강제로 인원수를 정하고 그 날짜를 못박으면서 아무 주( 州 )에는 10명, 아무 부 ( 府 )에는 10명, 모군( 某 郡 ) 모현( 某 縣 )에는 5, 6명 하는 식이었고, 삭적하겠다고 위협을 하고 정거시킨다고 겁을 주면서 마치 군정 ( 軍 丁 )을 조발( 調 發 )하여 어서 길을 떠나도록 독촉을 해대듯이 강제적이었습니다. 선현을 존숭하는 일이 과연 이와 같은 것이겠습니 까. 정원이 선구( 先 驅 )가 되고 팔로가 외원( 外 援 )이 되어 오늘 소를 올리고 내일도 소를 올리고 다시 그 다음날도 소를 올렸으며, 청금 록 에서도 이름을 지워버렸고 태학관( 太 學 館 )도 벌써 비웠습니다. 그리하여 한 시대의 입을 틀어막고 군부를 협박하면서 기어코 자 기들의 뜻을 관철시키고야 말겠다고 벼르니, 이야말로 이른바 시샘하는 여편네를 다스리지 않고 버릇없는 아이를 혼내주지 않았다가 결국에는 지아비에게 삿대질을 하고 아비한테도 욕을 하기에 이른 셈입니다. 선비들의 풍습이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공론이 어디로 부터 나오겠습니까. 묘당과 대각까지 덩달아서 이것이 사기이고 이것이 공론이다. 고 편을 들고 나서니, 아, 어떻게 한 시대의 입 을 틀어막고 군부를 협박하고서도 사기가 될 수 있겠으며, 공론이 될 수 있겠습니까. 신은 감히 모르겠습니다만, 태학생들이 거주하는 데가 어떤 자리입니까. 선현을 존숭하고 역적을 성토하는 두 가지를 그들이 배우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지난 무신년에 나라 안에 적( 賊 )이 있었는데 토역( 討 逆 )하자는 정론( 正 論 )을 태학에서는 못들은 체하였으니, 이들이 어째서 전일의 토적( 討 賊 )하는 일에 대해서는 수수방관하고, 오늘날 존현( 尊 賢 )하는 일에는 장황하게 나서는 것입니까. 만약 역적은 꼭 토죄하지 않아도 되고 존현은 반드시 이와 같이 해야 된다고 말한다면, 이는 단지 자기네가 존경하는 것만을 존숭하여 일 개 사심을 성취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아, 사기는 강약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정론은 중과( 衆 寡 )에 달려 있지 않는 법이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구차히 동조하는 것을 인심( 人 心 )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협박하는 것을 공론으로 여기지 마소서. 하였다. 건갑( 乾 甲 )은 인홍( 仁 弘 )의 향인( 鄕 人 )으로, 평소의 행실이 무뢰하여 형효갑( 邢 孝 甲 ) 유경갑( 劉 慶 甲 )과 더불어 대북 3갑 광해군 3년 신해(1611, 만력 39) 4월 30일(기해) 합천의 박건갑이 유생과 9

10 ( 大 北 三 甲 ) 이라고 불리었다. 이 세 사람이 연이어 소장을 올려 시사( 時 事 )를 논했는데, 심지어 모후( 母 后 )를 폐하도록 청하는 등, 글의 내용이 참혹하고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반정( 反 正 ) 후에 모두 유배를 당해 죽었다. 이 소는 김양선( 金 揚 善 )이 지은 것이었다. 원전 31 집 628 면 분류 *정론-정론( 政 論 ) / *교육-인문교육( 人 文 敎 育 ) / *사상-유학( 儒 學 ) / *사법-탄핵( 彈 劾 ) [주D-001] 왕자(( 王 子 )를) 죽였으면 합니다.. 는 말 : 을사 사화 때 여러 신하들이 봉성 대군( 鳳 城 大 君 )을 죽이자고 정 청( 庭 請 )하였는데, 이때 이황( 李 滉 )이 참가하였다. 연려실기술( 燃 藜 室 記 述 ) 권19. [주D-002]무신년에 나라 안에 적( ( 賊 )이) 있었는데 : 광해군이 즉위한 해에 있었던 임해군의 역모 사건을 가리킨다. 연려실기술( 燃 藜 室 記 述 ) 권19. 광해군 3년 신해(1611, 만력 39) 4월 30일(기해) 합천의 박건갑이 유생과 10

11 박건갑( ( 朴 乾 甲 ) -국조방목 :35 박건갑( 朴 乾 甲 ) [생원진사시] 선조( ( 宣 祖 ) 38년 (1605) 을사( ( 乙 巳 ) 증광시( ( 增 廣 試 ) 생원( ( 生 員 ) 3등( 3 ( 三 等 ) 20위 [인적사항] G002+AKS-KHF_13BC15AC74AC11B1558X0 자 응성( 應 成 ) 생년 무오( 戊 午 )/1558/ 합격연령 48 본관 밀양( 密 陽 ) 거주지 삼가( 三 嘉 ) [이력사항] 전력 : 유학( 幼 學 ) [가족사항] [부] 성명 : 박사돈( 朴 士 敦 ) 관직 : 학생( 學 生 ) [부모구존] 자시하( 慈 侍 下 ) [제] 박곤갑( 朴 坤 甲 ) [출전] CD-ROM 사마방목( 司 馬 榜 目 ) ( 韓 國 精 神 文 化 硏 究 院 ) 박건갑( 朴 乾 甲 ) -국조방목 11

12 박천우( ( 朴 天 祐 ) -국조방목 :24 박천우( 朴 天 祐 ) [생원진사시] 선조( ( 宣 祖 ) 9년 9 (1576) 병자( ( 丙 子 ) 식년시( ( 式 年 試 ) 진사( ( 進 士 ) 3등( 3 ( 三 等 ) 11위 [인적사항] G002+AKS-KHF_13BC15CC9CC6B0B1546X0 자 자수( 子 受 ) 생년 병오( 丙 午 )/1546/ 합격연령 31 본관 밀양( 密 陽 ) 거주지 삼가( 三 嘉 ) [이력사항] 전력 : 유학( 幼 學 ) [가족사항] [부] 성명 : 박인수( 朴 仁 粹 ) 관직 : 전부장( 前 部 將 ) 관직 : 현신교위( 顯 信 校 尉 ) [부모구존] 구경하( 具 慶 下 ) [형] 박천정( 朴 天 禎 ) [제] 박천우( 朴 天 祐 ) [제] 박천기( 朴 天 祺 ) [출전] CD-ROM 사마방목( 司 馬 榜 目 ) ( 韓 國 精 神 文 化 硏 究 院 ) 박천우( 朴 天 祐 ) -국조방목 12

13 박난( ( 朴 鸞 ) -국조방목 :58 박난( 朴 鸞 ) [생원진사시] 중종( ( 中 宗 ) 29년 (1534) 갑오( ( 甲 午 ) 식년시( ( 式 年 試 ) 진사( ( 進 士 ) 2등( 2 ( 二 等 ) 12위 [인적사항] G002+AKS-KHF_12BC15B780FFFFU9999X2 자 운경( 雲 卿 ) 본관 밀양( 密 陽 ) 거주지 청도( 淸 道 ) [이력사항] 전력 : 유학( 幼 學 ) [가족사항] [부] 성명 : 박맹문( 朴 孟 文 ) 관직 : 순천훈도( 順 川 訓 導 ) 관직 : 장사랑( 將 仕 郞 ) [출전] CD-ROM 사마방목( 司 馬 榜 目 ) ( 韓 國 精 神 文 化 硏 究 院 ) 박난( 朴 鸞 ) -국조방목 13

14 박훤( ( 朴 萱 ) -국조방목 :49 박훤( 朴 萱 ) [생원진사시] 중종( ( 中 宗 ) 29년 (1534) 갑오( ( 甲 午 ) 식년시( ( 式 年 試 ) 생원( ( 生 員 ) 3등( 3 ( 三 等 ) 58위 [인적사항] G002+AKS-KHF_12BC15D6E4FFFFU9999X0 자 낙이( 樂 而 ) 본관 밀양( 密 陽 ) 거주지 삼가( 三 嘉 ) [이력사항] 전력 : 유학( 幼 學 ) [가족사항] [부] 성명 : 박서림( 朴 書 林 ) 관직 : 습독관( 習 讀 官 ) [출전] CD-ROM 사마방목( 司 馬 榜 目 ) ( 韓 國 精 神 文 化 硏 究 院 ) 박훤( 朴 萱 ) -국조방목 14

15 채지당 박구원 국조방목 :37 박구원( 朴 龜 元 ) [문과] 중종( ( 中 宗 ) 2년 2 (1507) 정묘( ( 丁 卯 ) 증광시( ( 增 廣 試 ) 을과( ( 乙 科 ) 7위7 [인적사항] 자 언영( 彦 靈 ) 본관 밀양( 密 陽 ) G002+AKS-KHF_13BC15AD6CC6D0U9999X0 [이력사항] 전력 : 생원( 生 員 ) 관직 : 현감( 縣 監 ) [가족사항] [부] 성명 : 박효선( 朴 孝 先 ) [출전] 국조문과방목( 國 朝 文 科 榜 目 ) 채지당 박구원 국조방목 15

16 돈와공 박시예 ( 朴 時 乂 )선조님) 사실 :22 돈와공 박시예 ( 朴 時 乂 )선조님 사실 공은 조선 단종선위 때의 절의신이다. 이름은 시예( 時 乂 ). 자는 덕부( 德 夫 ). 호는 돈와( 遯 窩 ), 공은 밀성박씨 행산부원군 세균의 증손이며,도은 공 문빈의 손자로 조선 태조(1392~1398) 때의 증찬성사이조판서( 贈 贊 成 事 吏 曺 判 書 ) 박신열( 朴 臣 悅 ) 의 셋째 아들로 밀양 삽포에서 출생 하 였다. 공은 자품이 빼어나고 재예를 일찍 이루어 태종(1401~1418)때 과거에 올라 벼슬이 청송부사( 靑 松 府 使 ) 안호서제학( 按 湖 西 提 學 )에 이르 렀다. 1455년 6월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선위함을 보고 관복을 찢어버리고 처자들을 거느리고 고사( 姑 射 -단장면 고례리)의 극히 좁은 협곡에 숨어 살면서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아니하며 스스로 호를 돈와라 지어 부르며 그 뜻을 되새겼다. 공의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천년 산나무는 무능함을 부끄러워 하며 일편단심은 꿈만 같구나, 능( ( 陵 )의) 붉은 도장끈이 나타나는 새 아침에 까마귀가 모자를 벗기고, 흰구름은 옛마을에 사슴과 벗하여 앉아있는 샘과 돌의 그윽한 정을 보네. 일어나 먼 장안( 서울) 을 바라보니 방울지는 눈물은 그치지 않는데, 정성을 드리운 해바라기는 대월 남쪽에서 그치고, 한강물은 눈 속에 가득하네. 돈와공 박시예 ( 朴 時 乂 )선조님 사실 16

17 容 軒 先 生 文 集 卷 之 二 詩 次 朴 松 溪 詩 (용헌 이원선생문집권지이 시 차박 송계시) :26 容 軒 先 生 文 集 卷 之 二 詩 次 朴 松 溪 詩 (용헌 이원선생문집권지이 시 차박송계시) 異 鄕 難 得 一 淸 遊 타향이라 풍류놀이 한 번 얻기도 어려운데, 況 是 經 旬 雨 未 收 하물며 열흘이 넘게 비가 오고 있음에랴. 早 風 吹 雲 散 盡 조만간에 바람불어 구름 다 흩어지면, 共 乘 明 月 賞 中 秋 함께 달빛 밝으며 중추 구경 합시다. 容 軒 先 生 文 集 卷 之 二 詩 次 朴 松 溪 詩 (용헌 이원선생문집권지이 시 차박송계시) 17

18 동문선 제4권 오언고시( ( 五 言 古 詩 ) 중서 박중미에게[ [ 贈 朴 中 書 中 美 ] :23 곽균( 郭 ) 옛날 큰 회나무 꿈 꿀 때 / 憶 昔 夢 大 槐 문앞에는 수레 말 탄 손이 많았네 / 門 多 車 馬 賓 아무리 뿌리쳐도 끝내 가지 않고 / 揮 之 竟 不 去 문안하려고 어이 그리 머뭇거리던고 / 伺 候 何 逡 巡 귀거래사 시 지은 뒤로 / 自 從 賦 歸 來 동각에는 뽀얀 먼지 덮이었네 / 東 閣 凝 素 塵 박후는 구정을 버리지 않고 / 朴 侯 不 遺 舊 지금도 자주 찾아오나니 / 至 今 來 頻 頻 소나무 잣나무는 가을에 청청하고 / 靑 青 松 栢 秋 지초와 난초는 봄에 향기로워라 / 馥 馥 芝 蘭 春 아름답구나 그대는 군자로세 / 美 矣 君 子 哉 맑은 바람은 속된 무리 깨쳐 주네 / 淸 風 驚 俗 倫 [주D-001]큰 회나무 꿈 : 당나라 소설 남가기( 南 柯 記 ) 에서 나온 말인데, 낮잠을 자다가 꾼 꿈에, 대괴국( 大 槐 國 )에 가서 남 가태수( 南 柯 太 守 )로 영화를 누리다가 깨어서 살펴본즉, 뜰 앞에 있는 큰 괴목( 槐 木 )이 대괴국이었고, 남가군( 南 柯 郡 )은 그 괴목의 남쪽 가지였다. 동문선 제4권 오언고시( 五 言 古 詩 ) 중서 박중미에게[ 贈 朴 中 書 中 美 ] 18

19 2009년3월 밀성대군 춘향 : 년3월 밀성대군 춘향 19

20 2009년3월 밀성대군 춘향 20

21 2009년3월 밀성대군 춘향 21

22 2009년3월 밀성대군 춘향 22

23 2009년3월 밀성대군 춘향 23

24 2009년3월 밀성대군 춘향 24

25 2009년3월 밀성대군 춘향 25

26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7권 경상도( ( 慶 尙 道 ) 창녕현( ( 昌 寧 縣 ) 朴 胄 :40 효자 본조 박근인( 朴 近 仁 ) 부모상을 당해서 3년 동안 여막에 살았다. 영락( 永 樂 ) 8년에 정문이 세워졌다. 박주( 朴 冑 ) 부모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막에 살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문이 세워졌다. 벼슬이 인산군사( 麟 山 郡 事 )에 이르렀다. 박운( 朴 云 ) 나이 14 세, 그 아우 운산( 云 山 )은 8세 때였다. 그 아버지가 범에게 물려 가니 운이 조그만 도끼를 들고 운산( 云 山 )과 함께 30여 보( 步 )를 쫓 아가면서 하늘을 부르며 크게 울자, 범이 버리고 갔다. 운( 云 )은 시체를 업고 운산은 도끼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일이 조정에 보 고되어 정문이 세워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7권 경상도( 慶 尙 道 ) 창녕현( 昌 寧 縣 ) 朴 胄 26

27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7권 경상도( ( 慶 尙 道 ) 창녕현( ( 昌 寧 縣 ) 朴 近 仁 :35 효자 본조 박근인( 朴 近 仁 ) 부모상을 당해서 3년 동안 여막에 살았다. 영락( 永 樂 ) 8년에 정문이 세워졌다. 박주( 朴 冑 ) 부모상을 당하여 3 년 동안 여막에 살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문이 세워졌다. 벼슬이 인산군사( 麟 山 郡 事 )에 이르렀다. 박운( 朴 云 ) 나이 14세, 그 아우 운산 ( 云 山 )은 8세 때였다. 그 아버지가 범에게 물려 가니 운이 조그만 도끼를 들고 운산( 云 山 )과 함께 30여 보( 步 )를 쫓아가면서 하늘을 부르며 크게 울자, 범이 버리고 갔다. 운( 云 )은 시체를 업고 운산은 도끼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일이 조정에 보고되어 정문이 세워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7권 경상도( 慶 尙 道 ) 창녕현( 昌 寧 縣 ) 朴 近 仁 27

28 채지당 박구원 1442년(세종 24)~1506년(중종 1) :02 공의 자( 字 )는 언령( 彦 齡 ). 호는 채지당( 采 芝 堂 ). 본관이 밀성( 密 城 )으로 돈와 시예( 時 乂 )공의 증손이며 진사 효선( 孝 先 )의 둘째아들로 세종 24 임술년(1442) 8월 22일 밀양시 단장면 고사촌( 姑 射 村 =고례리)에서 태어났다. 자성이 따뜻하고 일찍이 재예를 갖추었으며 배움에 부지런하 고 언행이 엄하여 어른스러웠다. 어른에게 효성을 다하고 친구를 사귐에는 돈독하였으며 부모를 섬기고 봉양함에는 항상 그 뜻을 따랐다. 부 모님 상을 당하여서는 예절에 따라 제례용구를 갖추어 장례를 치루고 슬픔이 깊어 몸을 상하게 하였으며, 형제 5명이 한방에서 같이 살았는 데 서로 네것 내것이 없고 샘하는 일이 없었다. 글을 읽음에 온 정성을 다하고 가난한 친척이나 친지들을 보면 반드시 도와줌이 그의 천성이 었다. 학문에 있어서는 모든 책을 두루 읽고 그 이치를 꿰뚫었으며, 매일 아침 가묘( 家 廟 )에 배알한 뒤에 물러나서는 책을 대하고 앉아 종일 토록 공부하였다. 사람을 대할때에는 충정이 두터웠으며 급한 일을 당하였을 때에도 내색을 하지않고 침착하였다. 그의 학문은 깊고 행실은 독실하며 성망이 높아 일찍 사마시( 司 馬 試 )를 거쳤으며 성종때(1470~1494) 벼슬에 올라 이조정랑 사헌부감찰 칠원현감( 漆 原 =함안)을 역임하 면서 백성을 다스림에 조리가 정밀하였다. 엄하고 어진 것이 각각 적절하고 또 한편으로는 부지런히 학교를 일으켜 교화를 밝혀 읍의 자제들 과 강론, 담론을 펴서 경서를 익히니 몇년안에는 군내에는 벼슬한 사람들로 가득찬 듯 하였다. 어느날 개연히 몇권의 책만을 가지고 고향으 로 돌아와 그의 증조부 돈와 박시예공이 은거하던 곳에 정자를 짓고 성령의 양성에 힘쓰고 유학을 일으키니 사방에서 학자들이 소문을 듣고 모여 들었다. 산수가 맑은 고례리 절경 아홉구비를 주자( 朱 子 )가 살던 곳과 비유하여 구곡가( 九 曲 歌 ) 시를 짓고 스스로 호를 채지당( 采 芝 堂 ) 이라 하였다. 중종 1년(1506) 병인 2월 21일 이곳 고사촌(고례리)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가 남긴 글과 정자 사호도( 四 皓 圖 )그림 등을 점필재 선생과 연루되었다하여 무오사화때 불살라졌으며 그 뒤에 그의 현손 낙춘( 樂 春 ) 양재( 讓 齋 ) 두 사람이 사호정( 四 皓 亭 )을 중창하였는데 한강 ( 寒 岡 ) 정구( 鄭 逑 )선생이 양송을 지었고, 13세손 재용( 在 溶 )이 연몰된 자취를 수습하여 유사 한권을 구상하고 묘갈은 고흥( 高 興 ) 이시좌( 李 時 佐 )가 지었다. 지금의 단장면 고례리 사희동( 四 熙 洞 )은 사호리( 四 皓 里 )에서 유래되었다. 채지당 박구원 1442년(세종 24)~1506년(중종 1) 28

29 해동야언 2 무오당적 ( 戊 午 黨 籍 ) :16 김종직( 金 宗 直 )의 자는 계온( 季 溫 )인데, 사예( 司 藝 ) 김숙자( 金 淑 滋 )의 아들이고, 호는 점필재( 畢 齋 )이며, 선산인( 善 山 人 )이다. 세 조 때에 급제하여 예종과 성종을 섬기면서,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간공( 文 簡 公 )이다. 효행이 있고 문장이 고결하여 당시 유림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후학들을 권장하기 좋아하여, 많은 사람이 학문을 성취하였다. 정여창( 鄭 汝 昌 ), 김굉필( 金 宏 弼 )과 같은 이는 도학으로 명성이 있었고, 김일손( 金 馹 孫 )ㆍ유호인( 兪 好 仁 )ㆍ조위( 曹 偉 )ㆍ이종준( 李 宗 準 )ㆍ남효온( 南 孝 溫 )ㆍ홍유손( 洪 裕 孫 ) 같은 이들은 문장으로 드러나게 되었으며, 그 밖에도 방법을 가리켜 주어서 이름 얻은 이가 매우 많다. 연산군 때 무오사화가 일어날 때는 공이 이미 죽었으므로, 화가 저승에 미치어 관을 쪼개고 시체를 목베었다. 그의 문집이 있어서 세상에 전한다. 김일손의 자는 계운( 季 雲 )이요, 호는 탁영( 濯 纓 )이며, 집의( 執 義 ) 김맹( 金 孟 )의 아들이고, 본관이 김해( 金 海 )이다. 청도( 淸 道 )에서 대대로 살았고 김종직에게 수업하였다. 문장에 능하였고, 또 성품이 간결하며 높아서 허여하는 사람이 적었다. 벼슬이 이조 정랑에까 지 이르렀으며, 연산조 무오사화 때에 화를 입었었다. 혹자가 말하기를, 이극돈( 李 克 墩 )이 전라 감사로 있을 때에 성종의 상을 만 나 서울에 향( 香 )을 올리지 아니하고, 기생을 싣고 다닌 사실을 김일손이 사초( 史 草 )에 썼는데, 이극돈이 사사로이 이 사실을 고쳐줄 것을 청하다 김일손이 듣지 아니하므로 원한을 품고 있던 중에 성종실록 을 편수하게 되자, 이극돈이 당상관으로 있게 되어 실로 이 참화를 일으킨 것이다. 하였다. 권오복( 權 五 福 )의 자는 향지( 嚮 之 )요, 호는 수헌( 睡 軒 )이다. 상세한 것은 서문에 있다. 권경유( 權 景 裕 )의 자는 군요( 君 饒 ) 또는 자범( 子 汎 )이며, 안동인( 安 東 人 )이다. 성종 을사년에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로 옥당에 들 어가서 정자( 正 字 )가 되고, 여러 차례 천거되어 교리에까지 이르렀다. 연산조 때에 시사( 時 事 )가 점차 변함을 알고 외직을 청하여 제 천 현감( 堤 川 縣 監 )이 되었다가,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일손과 같은 날에 피살되었다. 추강( 秋 江 ) 남효온( 南 孝 溫 )이 말하기를, 군요 ( 君 饒 권경유)는 성품이 강직하고 지어서 꾸미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하였다. 이목( 李 穆 )의 자는 중옹( 仲 雍 )이며, 전주인( 全 州 人 )이다. 성품이 강직하고 곧은 말을 잘하였다. 일찍이 태학에 있을 때에 윤필상 ( 尹 弼 商 )이 대신으로서 국사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날씨가 가뭄이 들자 이목이 상소하기를, 윤필상을 삶아 죽이면 하늘이 비를 줄 것입니다. 하였다. 그 후 우연히 윤필상이 노상에서 그를 만나자, 그를 부르며 말하기를, 자네는 노부( 老 夫 )의 고기를 꼭 먹고자 하는가. 하니, 이목은 목을 꼿꼿이 세우고 전혀 개의치 않으면서 갔다. 연산군 초년에 장원으로 발탁되었는데 사화가 일어나자, 윤 필상이 당상관으로 있으면서 먼저의 감정을 가지고 이목을 김종직의 제자라고 하고서 끌어다 죽였다. 허반( 許 盤 )의 자는 문병( 文 炳 )이며, 양천( 陽 川 ) 사람이다. 추강집( 秋 江 集 ) 에 이르기를, 허반은 성리학에 뜻을 두고 진취에 힘쓰며, 일마다 고인( 古 人 )을 사모하고자 한다. 하였다. 김대유( 金 大 猷 )는 그 단아함에 감복하여 언젠가 좌상 홍응( 洪 應 )에게 말하 기를, 세자는 국가를 계승할 임금으로 만백성 우러러 보고 의지하는 바인데, 지금 환시( 宦 寺 )와 더불어 거처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였다. 무오년에 급제하였고, 이어 권지( 權 知 ) 승문원 부정자로 있다가 사화로 죽었다. 강겸( 姜 謙 )은 자가 이요, 진주( 晉 州 ) 사람이다. 경자년에 급제하여 홍문관( 弘 文 館 )에 선발되었다가 여러 차례 승진되어 정랑 ( 正 郞 )까지 되었으나, 무오사화에 연좌되어 형장을 맞고 귀양갔었다. 그 형인 강형( 姜 )은 대사간으로 있다가 갑자사화 때에 죽었 다. 표연말( 表 沿 沫 )의 자는 소유( 少 游 )요, 신창( 新 昌 ) 사람이다. 성묘 임진년에 급제하였고, 문명이 있어서 더불어 교유( 交 遊 )한 자가 모두 당시의 명사들이었다. 일찍이 한림( 翰 林 )이 되었을 때에 동료들이 우육( 牛 肉 )을 가지고 잔치한 일이 있었는데, 상왕이 이를 알 게 되어 예에 따라 파직이 된 일이 있었다. 그 후로는 연회에 금지하는 고기만 보이면 문득 치우게 하면서 말하기를, 차마 법을 범 할 수 없다. 하였다. 복상( 服 喪 )함에 예를 극진히 하였는데, 그 일이 알려지게 되어 한 계급을 가( 加 )하였고, 후에 벼슬이 동지 중 해동야언 2 무오당적 ( 戊 午 黨 籍 ) 29

30 추부사( 同 知 中 樞 府 事 )에까지 이르렀다. 홍한( 洪 翰 )의 자는 온진( 蘊 珍 )이요, 남양( 南 陽 ) 사람이다. 을사년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의에 이르렀다. 성품이 강직하여 마음으로 허여하는 이가 적었고, 권세있고 높은 관직에 있는 이에 미움을 받아 무오사화의 화에 걸려 형장을 맞고 귀양가다가 도중에 죽었다. 중묘 때에 이조 참판을 증직하였다. 정여창( 鄭 汝 昌 )의 자는 자욱( 伯 勖 )이요, 하동( 河 東 ) 사람이며, 호는 일두( 一 蠹 )라고 한다. 효행으로 참봉에 천거되었는데, 사양하 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다. 급제하고 한림이 되었으며, 벼슬이 안음 현감( 安 陰 縣 監 )에 이르렀다. 김광필과 뜻을 같이하여 김종직 에게 사사( 事 師 )하고 성리학에 전심하였다. 무오사화로 종성( 鍾 城 )에 귀양가서 졸하였으며, 얼마 후 갑자사화 때에 다시 부관참시( 剖 棺 斬 屍 )를 당하였다. 후에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를 문헌( 文 獻 )이라고 하였다. 무풍부정( 茂 豐 副 正 ) 총( 摠 )의 자는 백원( 百 源 )이며, 태종의 증손이다. 시에 능하고 글씨를 잘 쓰며, 또 거문고를 잘 탔다. 양화도 ( 楊 花 渡 )에 별장을 짓고 작은 배와 어망( 魚 網 )을 가지고 항상 손수 고깃배를 저어서 시인과 문사를 맞이하여 날로 시를 모은 것이 무 려 천백 편이나 되었다. 스스로 호하기를 서호주인( 西 湖 主 人 )이라고 하더니, 무오사화 때에 곤장을 맞고 원지에 유배되었다. 강경서( 姜 景 叙 )의 자는 자문( 子 文 )이요, 진주( 晉 州 ) 사람이며, 호는 초당( 草 堂 )이다. 성묘 정유년에 급제하고 또 정사년의 문과 중 시( 重 試 )에 합격하였다. 연산조 무오사화 때에 점필재( 畢 齋 )의 문생이라 하여 회령( 會 寧 )에 장류되었다가 뒤에 풀려 돌아왔다. 중 종조 때에는 벼슬이 좌부승지( 左 副 承 旨 )에 이르렀고, 초당집( 草 堂 集 ) 이 있으며, 후에 예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이수공( 李 守 恭 )의 자는 중평( 仲 平 )이요, 광주( 廣 州 ) 사람이며, 이둔촌( 李 遁 村 )의 후예이고, 영의정 이극배( 李 克 培 )의 손자이다. 성 묘 무신년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정언과 장령을 지냈는데, 간신( 諫 臣 )의 풍이 있었다. 홍문관( 弘 文 館 )에 들어가서는 교리ㆍ응교ㆍ전 한 등에 제수되었는데, 무오사화 때는 창성( 昌 城 )에 귀양갔다가 다시 광양( 光 陽 )으로 옮겼고, 갑자사화 때에 사약이 내려졌는데, 그때 의 나이 41세였다. 중묘 초년에 도승지를 증직하였다. 정희량( 鄭 希 良 )의 자는 순부( 淳 夫 )요, 호는 허암( 虛 庵 )이다. 연산군 초년에 급제하였고 예문관 검열이 되었는데, 얼마 후 무오사화 에 연좌되어 옥에 갇히었다가, 의주( 義 州 )로 귀양갔다. 점을 쳐서 길흉을 잘 알아맞혔는데, 일찍이 이르기를, 갑자년 화는 무오년보 다 더 심할 것이다. 하더니, 어느 날 자취를 감추고 도망하였는데,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시집이 있어 세상에 전 해지고 있다. 정승조( 鄭 承 祖 )의 자는 술이( 述 而 )이다. 연산조 갑인과에서 급제하여 한림( 翰 林 )에 뽑혔는데, 무오사화 때에 원지로 장류되었다. 이종준( 李 宗 準 )의 자는 중균( 仲 均 )이요, 호는 용재( 慵 齋 )이다. 문장에 능하고 그림과 글씨를 잘 썼으며, 성종 을사년에 급제하였 다. 일찍이 서장관( 書 狀 官 )으로 중국에 가던 도중에 어느 역에서 쉬는데, 그 역관( 驛 館 )의 병풍그림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붓으로 먹칠을 하여 거의 다 없애버리니, 역의 관원이 통사( 通 事 )를 불러서 괴상한 일이라고 하면서 문책을 하였다. 통사가 말하기를, 서 장관이 글씨와 그림에 능숙한데, 반드시 그 병풍의 그림이 자신의 뜻에 불만이 있으므로 그런 것이다. 하였다. 그제야 역관이 깨닫 고 수긍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또 그 역에 들렀는데, 새로 단장하여 만든 병풍 두 벌을 쳐 놓았으므로, 이종준이 한 벌에는 글씨를 쓰고, 또 한 벌에는 그림을 그렸는데, 모두 지극히 오묘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무오사화 때에 북계( 北 界 )로 귀양가던 도중에 고산역( 高 山 驛 )을 지나면서 이사중( 李 師 中 )은 외로운 충성으로 자처하나, 많은 사람들은 허여하지 않는다는 율시 한 수를 벽에다 쓰고 갔는데, 감사가 보고하여 연산군이 원망하는 의사가 있다 하여 잡아서 국문하여 죽였다. 홍귀달( 洪 貴 達 )이 구제하려고 힘썼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최보( 崔 溥 )의 자는 연연( 淵 淵 )이요, 호는 금남( 錦 南 )이며 나주( 羅 州 ) 사람이다. 학문을 널리 들어 알고, 또 기억을 잘하며 영걸스 럽고 구속받지 않았다. 성묘조 때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언젠가 사명을 받들고 제주도에 갔다가 배가 풍랑으로 표류되어 서 중원( 中 原 )의 절강성( 浙 江 省 ) 영파부( 寧 波 府 )에 표착하였는데, 그곳 변신( 邊 臣 )이 왜구로 의심하고 장차 죽이려고 하다가, 최보의 응답이 민첩하고 분명하므로 화를 면하였다. 성묘가 그때의 행록을 지으라고 하여서 표해록( 漂 海 錄 ) 을 지어 올렸다. 벼슬이 예빈 시 정에 이르렀다. 무오사화 때에 귀양갔다가 그 뒤 끝내 갑자사화 때에 피살되었다. 이원( 李 )의 자는 낭옹( 浪 翁 )이요, 경주 사람이며 이익재( 李 益 齋 )의 후예이다. 성묘 기유년에 급제하고, 벼슬이 호조 좌랑에 이르 렀다. 무오사화에 원지에 장류되었다가 갑자사화 때 죽었다. 중묘 초년에 도승지를 증직하였다. 추강 남효온( 南 孝 溫 )의 사우록 에 해동야언 2 무오당적 ( 戊 午 黨 籍 ) 30

31 이르기를, 이원은 익재의 후손이요, 박팽년( 朴 彭 年 )의 외손인데, 두 현인의 집안에 오직 이 사람 하나가 맺혀 있다. 하였다. 이주( 李 冑 )의 자는 주지( 冑 之 )요, 고성( 固 城 ) 사람이며 이행촌( 李 杏 村 )의 후예이다. 문장에 능숙하고 기절이 있었다. 자호를 망헌 ( 忘 軒 )이라고 하였고, 성묘 무신년에 급제하고 정언에 제수되었는데, 무오사화 때에 점필재 문인이라 하여 진도( 珍 島 )에 귀양갔다가 갑자사화에 죽었다. 김굉필( 金 宏 弼 )의 자는 대유( 大 猷 )요, 호는 한훤당( 寒 暄 堂 )이며, 점필재를 사사( 師 事 )하였다. 동방의 선비들이 모두 문사( 文 詞 )를 업으로 하였으나, 성리학에 잠심하여 몸가짐을 예로써 하였고, 염락관민( 濂 洛 關 )의 계통을 찾은 이는 김굉필로부터 시작되었다. 천 거되어 나와서 형조 좌랑이 되었다가, 무오사화 때에 희천( 熙 川 )에 귀양가서 다시 순천( 順 天 )으로 옮겨져 극형에 처해졌다. 후에 영 의정에 추증하고 시호를 문경( 文 敬 )이라고 하였다. 박한주( ( 朴 漢 柱 )의) 자는 천지( ( 天 支 )요,) 밀양( ( 密 陽 ) 사람이며, 자호를 우졸자( ( 迂 拙 子 )라고) 한다. 점필재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성묘 을사년에 급제하여 정언과 헌납을 지냈다. 말과 일이 확연하고 강직하였다. 일찍이 예천( ( 醴 泉 ) 군수가 되었 다가 무오사화로 벽동( ( 碧 潼 )에) 장류되었으며, 갑자사화 때 피살되었다. 중묘 초년에 도승지를 증직하였다. 임희재( 任 熙 載 )의 자는 경여( 敬 輿 )요, 풍천( 豐 川 )사람이다. 무오과에서 급제하였는데, 얼마 되지 아니하여 점필재의 문도라고 하여 장류되었다. 임희재는 임사홍( 任 士 洪 )의 아들로서 세상 사람들은 임희재가 글씨를 잘 쓴다고 하였는데, 일찍이 병풍 위에, 순( 舜 )을 조( 祖 )로 하고, 요( 堯 )를 종( 宗 )으로 하면 자연히 태평시대되는데, 진시황( 秦 始 皇 )은 무슨 일로 창생( 蒼 生 )을 괴롭혔는가. 담장 안에서 화 일어나는 것을 알지 못하고, 헛되이 되놈을 막으려고 만리장성 쌓았어라. 라는 한 구절을 썼는데, 연산군이 하루는 창졸히 임사 홍의 집에 와서 그 병풍을 보고, 누가 저 글을 썼느냐고 묻는지라, 임사홍이 사실대로 대답하니, 연산군이 노색을 띠며 이르기를, 경의 아들은 불초하다. 내가 죽이려고 하니, 경의 뜻은 어떠한가. 하므로, 임사홍이 꿇어앉아 대답하기를, 저의 아들은 원래 성 품과 행실이 불순한 것이 과연 상의 말씀과 같습니다. 신이 일찍이 아뢰고자 하였으나 아직 그렇게 못하였나이다. 하므로, 드디어 화를 당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임희재는 항시 그 아버지의 잘못을 간하였으므로, 임사홍이 좋아하지 아니하여 참소한 것이 다. 하였다. 강백진( 康 伯 珍 )의 자는 자온( 子 蘊 )이고, 신천( 信 川 ) 사람이며, 점필재의 외생질이다. 성묘 정유년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간이 되었 다가, 무오사화 때 장류되었다. 이계맹( 李 繼 孟 )의 자는 희순( 希 醇 )이요, 전의( 全 義 ) 사람이다. 성묘 기유년에 급제하였으며, 그 시문은 점필재도 취택하였던 것이 다. 무오사화 때 점필재의 문생이라 하여 장류되었다가 중종조 때에 다시 등용되었다. 벼슬이 찬성( 贊 成 )에까지 이르렀고, 시호를 문 평( 文 平 )이라고 하였다. 성품이 자유스럽고 활달하며, 모든 일에 검속( 檢 束 )을 잘하지 아니하므로 처음에는 기묘 선비들에게 시원하 지 않게 보이더니, 사류( 士 類 )가 패하게 되자, 홀로 구하려고 힘써 마지아니하다가 권간( 權 奸 )들에게 미움을 받아 근심걱정으로 죽었 다. 강혼( 姜 渾 )의 자는 사호( 士 浩 )요, 호는 목계자( 木 溪 子 )이며, 진주( 晉 州 ) 사람인데, 그 문명( 文 名 )이 김일손( 金 馹 孫 )의 다음이었다. 연산 말년에 그 폐희( 嬖 姬 )가 죽자, 지나치게 애도하여 조신들에게서 뇌문( 誄 文 )을 받는데, 강혼은 제문을 지어서 극히 아름답고 고 운 것을 칭송하였다. 그리하여 연산군이 기뻐하여 이로부터 총애를 얻었는지라 사론( 士 論 )에게 천시를 받았다. 중묘조 때는 벼슬이 판중추부사( 判 中 樞 府 事 )에까지 이르렀다. 허후( 許 )는 영의정 허조( 許 稠 )의 아들로서, 대대로 충효의 집안이다. 부친이 죽고 그 모친을 공양함에 있어 어머니의 안색을 살 피면서 봉양하였다. 세종조에 벼슬하여 20여 년간 몸을 삼가고 말을 조심하였다. 갑자 을축 연간에 허후가 경기 감사로 갔는데, 그때 마침 큰 흉년이 들어서, 기전( 畿 甸 ) 간에 한 포기 풀도 없고, 백성은 아사 지경이었으나, 수령들이 구제할 도리가 없었다. 허후가 봉 사( 封 事 )를 올리어 경창( 京 倉 )의 곡식을 풀어서 구휼하자고 청하였지만, 왕이 윤허하지 아니하자, 허후는 궐정( 闕 庭 )에 엎드려 울부짖 으며 애통해 했다. 그러자 그 좌우에 있던 사람도 따라서 흐느꼈다. 고례( 古 例 )에 흉년이 들어 주현창( 州 縣 倉 )을 풀어 굶주린 백성에 게 주려면 먼저 감사가 호조( 戶 曹 )에 보고하고, 호조는 왕에게 알려서 윤허를 얻은 다음에야 곡식을 내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발급 의 명령을 기다리는 동안에 많은 백성이 아사하게 되는지라. 허후가 건의하기를, 감사나 호조는 모두 대신인데, 반드시 호조에 공 문으로 알리자면 백성이 그 은택을 입는 것이 더디오니, 신은 호조에 알리지 아니하고 편리한 대로 창고를 열기를 청하나이다. 하 해동야언 2 무오당적 ( 戊 午 黨 籍 ) 31

32 니, 왕이 윤허하였다. 이에 경창의 곡식을 운반하여 들에 노적해 놓고, 겸하여 의창( 義 倉 )을 열어서 죽을 쑤어서 진휼하여 구제하였 다. 또 상서하기를, 전라ㆍ충청도의 곡식을 옮겨서 식구를 계산하고, 토지를 요량하여 양식과 종자를 주어 백성들이 힘입어서 농사 에 힘쓰게 하자. 하였고, 또, 서산 기슭의 수목이 울창한 곳에 산나물이 풍성히 나는 것을 기다려서 백성들에게 채식을 돕게 하 자. 청하였으니, 모두 허후의 힘이었다. 4월이 되어 군현( 郡 縣 )을 순행할 때에 보리가 익으려는 것을 보고 이삭을 취해 오게 하여 맛보고 이르기를, 보리가 이미 결실을 맺었으니, 너희들 백성이 살았도다. 하니, 그가 백성을 근심하는 것이 이같이 깊었다. 그 해 가을은 과연 큰 풍년이 들었는데, 백성들은 어느 집 할 것 없이 그 송덕( 頌 德 )의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하였다. 그 가사가 속되고 야비하여 기록하지 못하나, 대개 자기들을 살려준 은혜를 노래한 것이다. 이 일이 보고 되니, 왕이 듣고 감탄하여 마지아니하였다. 그 후 문종에게 벼슬하여 신하의 직책을 다하였다고 하였다. 문종이 죽을 때에 황보인( 皇 甫 仁 )ㆍ김종서( 金 宗 瑞 )들에게 유주( 幼 主 )의 보호를 부탁하였는데, 그때 허후는 우참찬( 右 參 贊 )이었다. 광묘(세조)가 수양대군( 首 陽 大 君 )으로 중국에 고하려 하자, 허후가 광묘에 게 청하여 말하기를, 지금 재궁( 梓 宮 )이 빈소에 있고, 어린 임금이 국사를 담당하여, 대신들은 아직 우왕좌왕하며 백성들도 의심하 고 있는 이때, 공자( 公 子 )는 이 나라의 종신( 宗 臣 )인데 나라를 떠나서 어디로 가시려 하십니까. 하니, 광묘가 따르지는 않았지만 마 음속으로는 그의 말을 옳게 여겼다. 계유년에 광묘는 비밀히 권람( 權 擥 )ㆍ한명회( 韓 明 澮 )와 정란( 靖 亂 )을 꾀하여 먼저 김종서를 그 집에 가서 죽였다. 그때에 왕(단종)은 부마 정종( 鄭 悰 )의 집에 있었는데, 밤에 광묘가 그 집 문밖에 가서 왕에게 고하기를, 김종서 가 모반하므로 일이 급하여 미처 알리지 못하고 삼가 이미 죽였나이다. 하니, 왕은 그때 나이가 어린지라, 놀라며 일어나서 말하기 를, 그러한 일이 있으면 어떻게 되오. 숙부는 나를 살려주오. 하니, 광묘가 대답하기를, 이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신이 모두 처치하겠나이다. 하고, 즉시 상전에서 대신들을 패초( 牌 招 )하고 한편 무사로 문을 지키게 하여 입문하는 자에 따라서 그 당파를 가 려서 제거하게 하니, 영의정 황보인( 皇 甫 仁 ), 이조 판서 조극관( 趙 克 寬 ) 등이 이때에 죽음을 당하였으나, 허후는 이전에 중국에 가는 것을 만류한 일이 있으므로 이때 화를 면하였다. 허후가 불려 들어가 좌석에 얹으니 술을 내고 풍악을 연주하였는데, 그때 재상 정인 지( 鄭 麟 趾 )와 한확( 韓 確 ) 등은 손뼉을 치며 희희낙락하였지만, 허후는 홀로 초연( 愀 然 )히 앉아 즐기지 아니하고, 또 고기를 먹지 아 니하므로 광묘가 그 연고를 물었다. 허후가 조부의 기제사라고 칭탁하였는데, 광묘는 핑계인 줄을 알면서도 다시 물어보지 않았다. 이윽고 김종서와 황보인의 머리를 시중( 市 中 )에 매어 걸게 하고, 또 그 자손을 모조리 죽이려고 하자, 허후가 말하기를, 그 사람들 이 무슨 큰 죄가 있어 머리를 매고 또 그 처자를 살육하려고 합니까. 나와 김종서 사이는 교분에 신의가 있는 사이도 아니므로, 그 마음을 잘 알지 못하오나, 인( 仁 황보인) 같은 이는 제가 평소부터 그 사람을 살펴 알거니와, 결코 모반 할 리는 없습니다. 하니, 광묘가 이르기를, 네가 고기를 먹지 않은 것이 그 때문이냐. 하니, 허후가 답하기를, 그렇습니다. 조정의 원로들이 한날에 모두 죽었으니, 나는 아직 살아 있는 것으로 족하거늘 어찌 차마 고기를 먹을 수 있겠소. 하면서, 곧 눈물을 흘리며 우니, 광묘가 심히 노하기는 하였으나, 그 재덕을 사랑하여 죽이려고 하지는 아니하였는데, 이계전( 李 季 甸 )이 극구 참소하여, 허후를 외지에 귀양보냈다 가 필경은 목매여 죽였다. 허후가 죽은 후에 조정은 모두 변하였고, 함길도 절도사 이징옥( 李 澄 玉 )이 배반하여 여진족에게로 가려다 가 판관 정종( 鄭 宗 )에게 잡혔고, 또 백성들에게서는 소란한 헛소문이 떠돌았다. 한편 동서 주민과 경기도 백성들은 떼로 모여 이리저 리 뛰어다니면서 어떤 사람은 가산을 땅에 묻고, 혹은 배에 싣고서 서울로 올라가려 하니, 하루에도 네다섯 차례나 경동( 驚 動 )하나, 관리도 능히 그를 금하지 못하였다. 이에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내는 자는 죽이는 데 그치고, 그릇되게 전파한 자는 나누어 귀양보낸 뒤에야 평정되었다. 처음에 허후가 승선( 承 宣 )의 배명을 받았을 때에, 사람들이 모두 와서 축하하는데, 그 부친인 허조( 許 稠 )만은 근 심하는 빛이 있고,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아니하므로, 어떤 사람이 그 연유를 물으니, 허조가 답하기를, 천도( 天 道 )는 가득하면 덜어 냄을 부르고 겸허하면 더함을 받게 되는 것인데, 나는 세상에 공덕도 없이 지위가 인신으로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는데, 또 내 아들이 승선이 되었으니, 이는 멀지 아니하여 허씨의 집안에 화가 일어나리라. 하였는데, 이때를 당하여 허후가 죽은 뒤에 그 아우며 조카 가 모두 금고( 禁 錮 )를 당하였으니, 과연 그 말이 징험이 되었도다. [주D-001]염락관민(( 濂 洛 關 ) : 염계( 濂 溪 )의 주돈이( 周 敦 頤 ), 낙양( 洛 陽 )의 정호( 程 顥 )와 그 아우 정이( 程 頤 ), 관중( 關 中 )의 장재( 張 載 ), 민중( 中 )의 주희( 朱 熹 ) 즉 정주학( 程 朱 學 )의 정통을 말함. [주D-002]순( ( 舜 )을) 하면 : 여기는 순임금이나 요임금을 법받는다는 말이다. 해동야언 2 무오당적 ( 戊 午 黨 籍 ) 32

33 해동야언 2 무오당적 ( 戊 午 黨 籍 ) 33

34 해동야언 2 무오사화 사적 ( 戊 午 士 禍 事 跡 ) :14 홍치( 弘 治 명 나라 효종의 연호) 무오년 연산4년 7월 17일의 전지( 傳 旨 )에 이르기를, 김종직( 金 宗 直 )은 초모천사( 草 茅 賤 士 )로 세 조조 때에 급제하였고, 성종 때에는 경연에 발탁되어 오래도록 시종( 侍 從 )관으로 있으면서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그 은총이 조정에 서 제일이었는데, 병으로 사퇴한 뒤에도 성종은 아직도 그가 있는 고을 원을 시켜 미곡을 그가 죽는 해까지 특별히 내려주었다. 이제 그 제자인 김일손( 金 馹 孫 )이 편수한 사초( 史 草 ) 내에 무도한 말로 선왕의 조정사를 거짓 꾸미몄을 뿐 아니라, 또 그 스승인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 弔 義 帝 文 )을 기재하였는데, 그에 이르기를, 정축년 10월 어느 날에 내가 밀성( 密 城 )에서 경산( 京 山 )으로 오던 도중에 답계역( 踏 溪 驛 )에서 자는데, 꿈에 칠장복( 七 章 服 제왕의 의복)을 입은 신인이 근심된 빛을 하고 와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초 회 왕( 楚 懷 王 )의 손자인 심( 心 )인데, 서초패왕( 西 楚 霸 王 항우)에게 피살되어 침강( 江 )에 버림을 받았다. 하고서, 그대로 홀연히 사라 졌다. 내가 놀라 깨어서 생각하기를, 초 회왕은 남초( 南 楚 )의 사람이요, 나는 동이( 東 夷 )의 사람이며, 남초는 거리가 여기서 만여 리나 될 뿐 아니라, 세대로 말한다 하더라도 천 년이 넘었는데, 이제 와서 꿈에 보이니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 하고, 또 사기를 상 고하여 보니, 의제를 강에 던졌다는 말은 없으니, 아마도 항우가 사람을 시켜 몰래 죽이고 그 시체를 강물에 던진 것이었던가. 그것 은 알 수 없다. 드디어 글을 지어 조상한다. 오직 하늘이 사물의 법칙을 제정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누가 사대( 四 大 ) 오상( 五 常 )의 존귀함을 알지 못하겠는가. 중국에는 풍요하고 이적( 夷 狄 )에는 인색할 이 없으니 어찌 옛날에는 있었고 지금인들 없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동이 사람이며, 또 천 년이나 뒤에 났지마는, 공손히 초 나라의 회왕에게 조상하노라. 옛날 조룡( 祖 龍 진시황)이 어금니와 뿔( 牙 角 무력)을 희롱할 적에 사해의 파도가 크고 거칠었었다. 비록 전유추예( 鮪 鰍 鯢 철갑상어ㆍ다랑어ㆍ미꾸라지ㆍ도롱뇽) 같은 잔 물 고기도 생명을 보호하지 못하고 그물에서 새어 나려고 몸부림친다. 그때 육국( 六 國 )의 유손[ 遺 祚 ]들은 결딴나고 쫓기어 겨우 평민되 는 것을 면하였다. 양( 梁 )은 남쪽 나라 대장의 후예로서 고기와 여우의 뒤를 이어 거사( 擧 事 )하였다. 왕을 구해 얻어서 백성들의 바 람을 따랐고 웅역( 熊 繹 초 나라 시조)의 제사 없던 것을 이었도다. 하늘의 옥새를 쥐고 남쪽을 향하고 앉으니 천하에 진실로 우씨( 芋 氏 초 나라 임금의 성)보다 높은 이 없었다. 장자( 長 者 )를 보내어 관중( 關 中 )에 먼저 들어가게 하였으니, 그 역시 그의 인의( 仁 義 )를 볼 수 있었다. 승냥이처럼 사납고, 이리처럼 탐하는 자 마음대로 관군( 冠 軍 총대장 송의( 宋 義 ))을 죽였으니, 어찌 먼저 잡아 도끼날에 피 묻히지 않았던가. 슬프다. 대세가 그렇지 못하였으니 나는 더욱 왕에게 황구하게 여기는 바이라, 도리어 그들에게 식혜나 초와 같 이 먹히고 말았으니 과연 천도가 거꾸로 되는도다. 침산( 山 )이 우뚝 하늘을 찌를 듯, 태양빛 어둑어둑 저물어가고, 침강( 江 )은 주야로 흘러흘러 물결이야 일어나건만 다시 오진 못하도다. 하늘같이 깊고 땅같이 오래된 한 언제나 다할쏜가. 혼백이 이제까지 아직 도 방랑하며 떠도누나. 나의 마음이 쇠나 돌이라도 뚫기로 왕이 문득 내 꿈속에 나타났다. 자양( 紫 陽 주자)의 노련한 붓을 본뜨니 마 음과 같지 아니하여 근심된다. 구름 같은 술잔 들어 땅에 부으며 영령( 英 靈 )이 와서 흠향( 歆 享 )하기 바로옵네. 하였으니, 그 말한, 조룡( 祖 龍 )이 어금니와 뿔을 희롱한다. 하였는데, 조룡은 곧 진시황인데, 종직은 진시황을 세조에게 비기었다. 또, 왕을 구해 얻어 백성들의 바람을 따랐다. 하였는데, 왕은 초 회왕( 楚 懷 王 )의 손자 심( 心 )이다. 처음에 항량( 項 梁 )이 진 나라를 치고 손자 심 ( 心 )을 얻어서 의제로 삼고자 하였으니, 종직이 제를 노산( 魯 山 )에 비긴 것이다. 또, 승냥이처럼 사납고 이리처럼 탐하는 자가 마음 대로 관군을 죽였다. 한 것은 종직이 승냥이처럼 사납고 이리처럼 탐하는 것으로 세조를 지목한 것이고, 마음대로 관군을 죽였다 함 은 세조가 김종서 죽인 것을 지목한 것이다. 또 말한 어찌 먼저 잡아서 도끼에 피 묻히지 않았는가. 함은, 종직이 노산이 어찌하 여 세조를 잡지 않았는가라고 말하는 것이요, 또, 식혜나 초처럼 도리어 먹혔다. 는 것은 종직이 노산이 세조를 잡지 아니하고 도 리어 식혜나 초처럼 세조에게 먹혔다는 말이다. 또 자양( 紫 陽 )의 노필( 老 筆 )을 본떠서 글을 쓰려고 하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근 심이 된다. 는 것은, 김종직이 주자( 朱 子 )로 자처하여, 그 마음에 이 부( 賦 )를 지어서 강목( 綱 目 ) 의 필법에 비긴 것이다. 김일손 ( 金 馹 孫 )이 그 부를 찬미하여 말하기를, 충성된 울분을 붙였다. 하였으니, 생각하면, 우리 세조대왕은 국가가 위태하고 의심스러 해동야언 2 무오사화 사적 ( 戊 午 士 禍 事 跡 ) 34

35 운 때를 당하여 간신들이 난리를 꾸며서 화의 기미가 거의 터질 지경이었으므로, 역도를 주제( 誅 除 )하여 나라가 위태하다가 다시 안 정되어 자손이 계승하여 오늘에까지 왔으니, 그 공업이 높고 높아 덕망이 백왕( 百 王 )의 으뜸이었는데, 뜻밖에 종직이 그 문도와 더불 어 성덕을 기롱하고, 심지어는 김일손으로 하여금 역사까지 거짓 꾸미게 하였으니, 어찌 일조일석의 일이겠는가. 몰래 불신( 不 臣 )의 마음을 품고 삼조( 三 朝 )를 내리 섬긴 것이다. 내가 이제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처참하고 황송해진다. 그들의 형명( 刑 名 )을 정하여 아 뢰이다. 하였다. 7월 27일에 크게 사면하는 교지를 반포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세조 혜장대왕( 世 祖 惠 莊 大 王 )은 신무하신 자 질로 국가가 위태롭고 의심스럽고 여러 간신들이 도사려 차지하고 있는 때를 당하시어, 깊은 생각과 밝은 결단으로 화란을 가라앉히 시어, 천명과 인심이 저절로 귀속된 바가 있었다. 성덕신공( 聖 德 神 功 )이 높이 백왕의 으뜸이 되시고, 조종에서 하기 어려운 일을 더 욱 빛나게 하였고, 자손을 도와 편안히 하는 계책을 끼쳐 주었으므로 계계승승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는데, 뜻밖에 간신 김종직( 金 宗 直 )이 못된 마음을 품고 가만히 당류를 모아 흉모를 성취시키려 한 지 벌써 날이 오래되었다. 항적( 項 籍 )이 의제( 義 帝 )를 죽이려는 일에 가탁하여, 문자를 만들어 선왕을 욕하고 헐뜯었으니 하늘에 넘친 죄악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대역으로 논의되어 관을 쪼개 어 시체를 자르고 그 도당인 김일손( 金 馹 孫 )ㆍ권오복( 權 五 福 )ㆍ권경유( 權 景 裕 )는 간악한 붕당으로서 같은 말로 서로 도와가며 그 글 을 칭찬하여 충성된 의분의 격발된 것이라 하였을 뿐 아니라, 사초( 史 草 )에 써서 오래도록 전하려고 하였으니 그 죄가 김종직과 같은 것이다. 모두 능지처참하게 하고, 김일손은 또 이목( 李 穆 )ㆍ허반( 許 盤 )ㆍ강겸( 姜 謙 )들과 선왕이 하지 않은 일을 거짓 꾸미어 말을 만 들어 전파하고, 또 사초에 썼으니, 이목과 허반은 다 참형에 처하고, 강겸은 형장 1백 대에 그 가산은 몰수하고 변방의 노비로 삼으 며, 표연말( 表 沿 沫 )ㆍ홍한( 洪 翰 )ㆍ정여창( 鄭 汝 昌 )ㆍ무풍부정( 茂 豐 副 正 ) 총( 摠 ) 등은 난언( 亂 言 )을 지었으며, 강경서( 姜 景 叙 )ㆍ이수공 ( 李 守 恭 )ㆍ정희량( 鄭 希 良 )ㆍ정승조( 鄭 承 祖 ) 등은 난언을 알고도 관에 고하지 않았으니, 모두 형장 1백 대에 3천 리 밖으로 귀양보내 고, 이종준( 李 宗 準 )ㆍ최보( 崔 溥 )ㆍ이원( 李 )ㆍ이주( 李 冑 )ㆍ김굉필( 金 宏 弼 )ㆍ박한주( 朴 漢 柱 )ㆍ임희재( 任 熙 載 )ㆍ강백진( 康 伯 珍 )ㆍ이계 맹( 李 繼 孟 )ㆍ강혼( 姜 渾 )은 모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어 서로 칭찬하고, 혹은 국정( 國 政 )을 기롱하며 때로는 시사( 時 事 )를 조롱하였으므로, 희재와 이주는 형장 1백 대에 극변으로 부처하고, 이종준ㆍ최보ㆍ이원ㆍ김굉필ㆍ박한주ㆍ강백진ㆍ이계맹ㆍ강혼은 모두 형장 80대를 때리고 원방에 부처하라. 귀양보낸 사람들은 모두 봉수대( 烽 燧 臺 )에서 뜰에 불피우는 부역을 정하고, 수사관( 修 史 官 )으로 있으면서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도 즉시 아뢰지 아니한 어세겸( 魚 世 謙 )ㆍ이극돈( 李 克 墩 )ㆍ유순( 柳 徇 )ㆍ윤효순( 尹 孝 舜 )들은 파 직하고, 홍귀달( 洪 貴 達 )ㆍ조익정( 趙 益 貞 )ㆍ허침( 許 琛 )ㆍ안침( 安 琛 ) 등은 좌천시켰다가 그 죄의 경중에 따라 모두 이미 처결하고, 삼가 이 사유를 종묘 사직에 고하였다. 생각하면, 나 같은 덕없는 우둔한 사람으로 간당을 추려서 제거하고 보니, 떨리고 두려운 생각이 깊으면서 한편 기쁘고 다행스런 마음 또한 간절하다. 이에 이번 7월 27일 새벽 이전에 강도와 절도, 그리고 강상( 綱 常 )죄인 이외에는 기결정( 旣 決 定 )이건 미결정이던 간에 모두 용서해 줄 것이니, 감히 교지 있기 전 일을 가지고 서로 전해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 죄로 써 죄를 다스릴 것이다. 슬프다. 인신은 역적하려는 마음이 없어야 하므로, 이미 무도한 죄를 처벌하였고, 과실과 죄있는 이를 용서 해주고 너그럽게 처리해야 하므로 의당 유신의 은혜에 젖도록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를 내리나니, 모두 다 알 줄 믿는다. 하였다. 해동야언 2 무오사화 사적 ( 戊 午 士 禍 事 跡 ) 35

36 태종 11년 신묘(1411, 영락 9) -박융 :51 태종 11년 신묘(1411, 영락 9) 11월 25일(임오) 사냥하라고 장연에 보낸 내관 황도 등을 사간원 정언의 진언에 따라 소환하다 황도( 黃 稻 ) 등을 소환( 召 還 )하였다. 사간원( 司 諫 院 ) 정언( 正 言 ) 박융( 朴 融 )이 진언( 進 言 )하였다. 지금 내관( 內 官 ) 황도 등이 개와 말을 가지고 장연( 長 淵 )에 가서 사냥하는데, 풍해도에 실농( 失 農 )이 더욱 심하니, 불가하지 않습니 까? 임금이 말하였다. 개와 말은 여기에 있더라도 먹이가 있으니, 비록 그곳에 가더라도 더하고 덜할 것이 없다. 박융이 말하였다. 개와 말의 먹이는 그러하지마는 개와 말을 조련하고 연습시키는 때에는 장연( 長 淵 ) 사람이 어찌 수고롭지 않겠습니까? 임금이 말하였다. 말은 무용( 武 用 )에 이바지하는 것인데, 유생( 儒 生 )의 말 같으면 조련시키는 폐단이 없지마는, 봄가을로 강무( 講 武 )하는 것을 폐지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조련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간관의 말[ 言 ]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임금이 이에 소환하였다. 원전 1 집 611 면 분류 *왕실-행행( 行 幸 ) / *왕실-국왕( 國 王 ) / *농업-농작( 農 作 ) 태종 11년 신묘(1411, 영락 9) -박융 36

37 심암유고( ( 心 庵 遺 稿 ))- 朴 天 翊 의 松 隱 集 :47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정조 병진 嘉 慶 1 1 4월 7일, 태어나다. 순조 경오 嘉 慶 大 丘 徐 氏 徐 俊 輔 의 딸과 혼인하다. 순조 임신 嘉 慶 월, 모친상을 당하다. 순조 병자 嘉 慶 司 馬 試 에 합격하다. 순조 임오 道 光 월, 金 應 根 과 驪 州 의 神 勒 寺, 大 老 祠 등을 유람하다. 순조 갑신 道 光 4 29 舍 人 巖, 島 潭, 華 陽 洞 등을 유람하다. 순조 병술 道 光 월, 柑 製 에 首 席 하여 殿 試 에 直 赴 되다. 순조 정해 道 光 7 32 순조 경인 道 光 월, 문과에 합격하다. 규장각 대교가 되다. 9월, 부친상 을 당하다. 陞 六 하고 홍문관 부교리가 되다. 8월, 迎 勅 問 禮 官 에 差 任 되 어 義 州 에 다녀오다. 순조 신묘 道 光 규장각 직각, 홍문관 응교가 되다. 순조 임진 道 光 월, 의정부 검상이 되다. 7월, 통정대부에 오르다. ~ ~ ~ ~ ~ ~ ~ 安 岳 郡 守 가 되다. 순조 갑오 道 光 월, 성균관 대사성이 되다. 헌종 을미 道 光 월, 冬 至 副 使 로 燕 京 에 가다. 헌종 병신 道 光 월, 이조 참의가 되다. 헌종 정유 道 光 헌종 무술 道 光 월, 홍문관 부제학이 되다. 11월, 예조 참판으로서 太 祖 의 影 幀 舊 本 을 가지러 咸 鏡 道 永 興 의 濬 源 殿 에 다녀오다. 1월, 이조 참판이 되다. 8월, 同 知 春 秋 館 事 로서 純 祖 實 錄 의 봉안을 위해 太 白 山 史 庫 에 다녀오다. 10월, 황해도 관찰사가 되다. 헌종 신축 道 光 월, 홍문관 부제학이 되다. 10월, 이조 참판이 되다. 헌종 갑진 道 光 도승지가 되다. 헌종 을사 道 光 월, 대사헌이 되다. 5월, 공조 판서가 되다. 7월, 예문 관 제학이 되다. 9월, 한성부 판윤이 되다. 12월, 형조 판서가 되다. 헌종 정미 道 光 월, 호조 판서가 되다. 헌종 무신 道 光 월, 평안도 관찰사가 되다. 헌종 기유 道 光 월, 文 衡 이 되다. 심암유고( 心 庵 遺 稿 ))- 朴 天 翊 의 松 隱 集 37

38 철종 경술 道 光 철종 신해 咸 豐 1 56 철종 임자 咸 豐 월, 판의금부사가 되다. 館 伴 으로 差 下 되다. 3월, 병조 판 서가 되다. 1월, 이조 판서가 되다. 2월, 다시 文 衡 이 되었다가 규장각 제학이 되다. 7월, 이조 판서가 되다. 10월, 판의금부사 가 되다. 4월, 예조 판서, 호조 판서가 되다. 8월, 李 若 愚, 徐 箕 淳, 金 學 性 등과 함께 日 講 官 으로 差 下 되다. 철종 계축 咸 豐 월, 판의금부사가 되다. 6월, 우의정이 되다. 철종 을묘 咸 豐 5 60 철종 정사 咸 豐 월, 桓 祖 에게 酌 獻 禮 를 올리기 위해 咸 興 에 다녀오다. 10 월, 우의정을 사직하다. 2월, 다시 우의정이 되다. 윤5월, 熙 政 堂 의 次 對 에서 虛 司 果 의 積 滯 를 疏 通 시킬 방안을 아뢰다. 8월, 摠 護 使 에 임명 되다. 11월, 涵 仁 亭 의 次 對 에서 式 年 마다 道 臣 에게 추천하 게 하여 人 材 를 찾아낼 것을 청하다. 철종 무오 咸 豐 월, 좌의정이 되다. 5월, 任 憲 晦 를 천거하다. 철종 임술 同 治 월, 熙 政 堂 의 次 對 에서 三 政 의 改 革 에 대해 아뢰다. 고종 갑자 同 治 월, 영의정이 되다. 고종 을축 同 治 4 70 耆 社 에 들어가다. 고종 기사 同 治 8 74 致 仕 하다. 고종 경오 同 治 월 8일, 졸하다. 11월, 洪 州 金 井 里 에 장사 지내다. 고종 갑술 同 治 13 12월, 文 獻 으로 諡 號 를 내리다. 권28은 序 42편이다. 壽 序 로는 豐 恩 府 院 君 趙 萬 永, 雲 石 趙 寅 永, 外 舅 徐 俊 輔, 游 觀 金 興 根, 金 錫 禧, 金 在 顯 등을 위해 지어 준 것이 있고, 文 集 序 로는 朴 天 翊 의 松 隱 集, 金 守 訒 의 九 峯 稿, 金 祖 淳 의 楓 集, 陳 의 梅 湖 集, 李 選 의 芝 湖 集, 李 彦 适 의 聾 齋 遺 稿, 李 明 五 의 泊 翁 集, 南 秉 哲 의 圭 齋 集, 蘇 斗 山 의 月 洲 集, 姜 의 對 山 集 등에 대한 것이 있다. 이 밖에 書 辛 巳 錄 序 는 醫 員 任 德 卿 이 1821년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에 鍼 術 로 많은 사람을 救 濟 한 사실을 기록한 글에 써 준 것이고, 風 謠 三 選 序 는 劉 在 建, 崔 景 欽 등이 19세기 초ㆍ중반에 활약한 委 巷 詩 人 의 詩 를 모아 엮은 風 謠 三 選 에 쓴 序 文 이며, 時 憲 紀 要 序 는 조선 후기의 천문학자 南 秉 吉 이 時 憲 法 의 요점을 기술한 天 文 書 인 時 憲 紀 要 에 대해 쓴 서이다. 심암유고( 心 庵 遺 稿 ))- 朴 天 翊 의 松 隱 集 38

39 목은시고( ( 牧 隱 詩 藁 ) 제31권 시( ( 詩 )서울에) 돌아온 밀성( ( 密 城 )의) 두 분 박 선생( ( 朴 先 生 )을) 방문하다 :45 서울에 돌아온 밀성( 密 城 )의 두 분 박 선생( 朴 先 生 )을 방문하다.송은,도은 선생을 칭 함.문집 참조 벽도화 만발한 그늘 아래 달이 황혼에 떠 있을 때 / 碧 桃 花 下 月 黃 昏 긴 가지 다투어 휘어잡자 눈발이 술잔에 흩뿌렸지 / 爭 挽 長 條 雪 洒 樽 당시에 함께 노닐던 분 지금은 몇이나 남아 있나 / 當 日 同 遊 幾 人 在 애달파라 그림자 끌고 나 혼자 다시 찾아가다니 / 自 怜 携 影 更 敲 門 바닷가에서 돌아온 분 귀밑머리 희끗희끗 / 海 上 歸 來 鬢 二 毛 모래톱 물새 신세 다 함께 표표히 떠도누나 / 沙 鷗 身 世 共 飄 飄 정원의 꽃나무들 새로 심은 것 많은 속에 / 園 中 花 木 多 新 種 그래도 소나무만은 역시 푸른빛 여전하네 / 只 有 長 松 獨 後 凋 흑사의 긴 냇물이 섬돌을 휘돌아 흐르는지라 / 黑 寺 長 溪 遶 砌 流 주인이 그래서 영남으로만 노닐러 가시나 봐 / 主 人 偏 愛 嶺 南 遊 돌아오니 알던 이들도 예전 모습과는 딴판 / 歸 來 故 舊 非 前 日 하기야 연소한 나도 지금 백발이 됐으니까 / 年 少 吾 今 亦 白 頭 병들어 한가히 거하며 왕래도 끊었나니 / 病 裏 閑 居 絶 往 來 창엔 가득 산색이요 뜰엔 가득 이끼로세 / 滿 山 色 滿 庭 苔 외모는 변했건만 가난한 살림은 여전해서 / 形 容 改 盡 貧 如 舊 술잔 드는 대신에 새 시만 자꾸 짓는다오 / 只 把 新 詩 當 酒 杯 [주D-001]긴 가지 흩뿌렸지 : 예전에 이 집에서 가졌던 술자리에서 복사꽃이 하얀 눈처럼 우수수 떨어지는 정취를 맛보 았다는 말이다. 소식이 달밤에 살구꽃 아래에서 술을 마시며 지은 시에 꽃 사이에 술자리 벌이니 맑은 향기 발하는데, 다투어 긴 가지 휘어잡으니 꽃잎이 눈처럼 떨어지네.[ 花 間 置 酒 淸 香 發 爭 挽 長 條 落 香 雪 ] 라는 구절이 나온다. 蘇 東 坡 詩 集 卷 10 月 夜 與 客 飮 酒 杏 花 下 [주D-002]흑사(( 黑 寺 ) : 청기와로 지붕을 덮은 사찰을 민간에서 일컫는 말이다 목은시고( 牧 隱 詩 藁 ) 제31권 시( 詩 )서울에 돌아온 밀성( 密 城 )의 두 분 박 선생( 朴 先 生 )을 방문하다. 39

40 순조 16년 병자(1816, 가경 21) 7월 2일(기유) 부사 박경신( ( 朴 慶 新 ), 고 현 감 박경전( ( 朴 慶 傳 ), 고 첨정 박경윤( ( 朴 慶 胤 ) :36 예조의 청에 따라 정광로 이경대의 효행에 대해 정문을 세워 주다. 예조에서 영남 어사의 별단에 따라 장흥( 長 興 )의 고( 故 ) 학생( 學 生 ) 정광로( 鄭 光 露 ), 상주( 尙 州 ) 아전 이경대( 李 慶 大 )의 효행( 孝 行 ), 진주( 晉 州 ) 사인 성사해( 成 師 海 )의 아내 정씨( 鄭 氏 ), 사천( 泗 川 ) 사인 하용관( 河 龍 寬 )의 아내 김씨( 金 氏 ), 동래( 東 萊 ) 장교( 將 校 ) 손중일( 孫 重 一 )의 아 내 강성( 姜 姓 )의 열행( 烈 行 )에 대해 모두 정문( 旌 門 )을 세워 줄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정광로는 바로 단종조 때 상신( 相 臣 ) 정분( 鄭 )의 아들로 화를 만나 거짓으로 미쳐서 자취를 숨겨 제사지낼 자손을 보존한 자이다. 이조에서 어사의 별도 단자에 따라 경상도 사람 고 부사 박경신( ( 朴 慶 新 ), 고 현감 박경전( 朴 慶 傳 ), 고 첨정 박경윤( ( 朴 慶 胤 ) 등에게 증직( ( 贈 職 )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는 한 가문에 세 사람이 왜적을 토벌하여 공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원전 48 집 100 면 분류 *행정-지방행정( 地 方 行 政 ) / *인사-관리( 管 理 ) / *사상-토속신앙( 土 俗 信 仰 ) 순조 16년 병자(1816, 가경 21) 7월 2일(기유) 부사 박경신( 朴 慶 新 ), 고 현감 박경전( 朴 慶 傳 ), 고 첨정 박경윤( 朴 慶 胤 ) 40

41 순조 12년 임신(1812, 가경 17) 3월 13일(을유 을유) 박경인( ( 朴 慶 因 ).예조에서 각 식년 경외의 충 효 열의 문서를 보고하다 :32 예조에서 각 식년 경외의 충 효 열의 문서를 보고하다. 예조에서 각 식년( 式 年 )의 경외( 京 外 )의 충 효 열의 문서 를 정부( 政 府 )에 보고했는데, 등급을 나누어 초계( 抄 啓 )하였다. 충신 정려질( 忠 臣 旌 閭 秩 ) 보은( 報 恩 )의 고 부호군 이명백( 李 命 百 )은 문렬공( 文 烈 公 ) 조헌( 趙 憲 )의 문인( 門 人 )으로 왜변( 倭 變 ) 때 창의( 倡 義 ) 하여 보은을 지키다가 적암( 赤 巖 )의 전투에서 죽었고, 청산( 靑 山 )의 고 주부 박문강( 朴 文 綱 )은 정축년 노변( 虜 變 ) 때 충청도 관찰사 정세규 ( 鄭 世 規 )를 따라 음죽( 陰 竹 )에서 죽었다. 효자 정려질( 孝 子 旌 閭 秩 ) 서울 사는 고 참봉 오재능( 吳 載 能 ) 고 교관( 敎 官 ) 홍석보( 洪 錫 普 ) 고 현령 홍헌유( 洪 獻 猷 ) 고 도정 윤면원( 尹 勉 遠 ) 고 참판 유의( 柳 誼 ) 고 학생 장후근( 張 厚 根 ) 고 생원 이광유( 李 光 裕 ) 고 학생 김치형( 金 致 亨 ) 고 생원 홍헌모( 洪 憲 謨 ), 경주부( 慶 州 府 ) 고 사인( 士 人 ) 허호( 許 浩 ), 개성부( 開 城 府 ) 고 사인 한광겸( 韓 光 謙 ), 여주( 驪 州 ) 고학생 구석의( 具 錫 儀 ), 영동( 永 同 ) 고 통덕랑( 通 德 郞 ) 이 현규( 李 顯 揆 ), 목천( 木 川 ) 고 사인 김수필( 金 壽 弼 ), 옥구( 沃 溝 ) 고 양인( 良 人 ) 정시손( 鄭 時 孫 ), 전주( 全 州 ) 고 한량 백행량( 白 行 良 ), 상주( 尙 州 ) 고 사인 홍도운( 洪 道 運 ), 금산( 金 山 ) 고 학생 조응방( 曹 應 邦 ), 안동( 安 東 ) 고 학생 금홍달( 琴 弘 達 ), 고 학생 이한오( 李 漢 伍 ), 거제( 巨 濟 ) 고 학 생 정유( 鄭 游 ), 평산( 平 山 ) 고 동지( 同 知 ) 조만길( 趙 萬 吉 ), 평양( 平 壤 ) 고 사인 김취의( 金 就 義 ), 위원( 渭 原 ) 고 사인 강건항( 姜 建 恒 ), 안변( 安 邊 )장교 신만화( 申 萬 和 ), 함흥( 咸 興 ) 고 부사 위광익( 魏 光 翼 )이다. 열녀 정려질( 烈 女 旌 閭 秩 ) 서울 사는 고 사인 강언성( 姜 彦 成 )의 처 이씨( 李 氏 ) 고 학생 이원식( 李 元 植 )의 처 최씨( 崔 氏 ) 고 통덕랑 김노직 ( 金 魯 直 )의 처 송씨( 宋 氏 ) 고 교관 홍석보( 洪 碩 普 )의 처 조씨( 曹 氏 ) 고 학생 이철운( 李 轍 運 )의 처 유씨( 柳 氏 ) 고 생원 홍헌모( 洪 憲 謨 )의 처 윤씨 고 사인 임우전( 林 雨 田 )의 처 정씨( 鄭 氏 ) 고 한량 김유항( 金 有 恒 )의 처 신씨( 辛 氏 )와 고 학생 장후근( 張 厚 根 )의 처 이씨 고 군수 정 문재( 鄭 文 在 )의 처 김씨 무의공( 武 毅 公 ) 조심태( 趙 心 泰 )의 처 송씨 고 생원 정우영( 鄭 祐 榮 )의 처 윤씨 고 헌납 정지원( 丁 志 元 )의 처 이씨 고 목사 홍술조( 洪 述 祖 )의 처 이씨 고 생원 조의철( 趙 宜 喆 )의 처 이씨 고 학생 서경보( 徐 慶 輔 )의 처 김씨 고 현령 남성로( 南 省 老 )의 처 조씨( 趙 氏 ) 양인 김세봉( 金 世 鳳 )의 처 박성( 朴 姓 ) 고 학생 박종건( 朴 宗 謇 )의 처 김씨 고 동지 이사룡( 李 思 龍 )의 처 고씨( 高 氏 ) 고 학생 이장철( 李 章 喆 )의 처 송씨, 개성부 고 학생 진득충( 秦 得 忠 )의 처 임씨( 林 氏 ), 고 사인 이영필( 李 英 弼 )의 처 김씨와 그의 종질( 從 姪 )인 이응번 ( 李 應 蕃 )의 처 김씨, 영평( 永 平 ) 고 학생 김순인( 金 順 仁 )의 처 변씨( 邊 氏 ), 안산( 安 山 ) 고 사인 이도용( 李 道 容 )의 처 김씨, 적성( 積 城 ) 고 학생 경육( 慶 )의 처 남씨( 南 氏 ), 파주( 坡 州 ) 고 사인 김한규( 金 漢 奎 )의 처 조씨( 趙 氏 ), 통진( 通 津 ) 고 주부 윤재익( 尹 在 益 )의 처 이씨, 과천( 果 川 ) 고 학생 홍유룡( 洪 有 龍 )의 처 전씨( 全 氏 ), 양주( 楊 州 ) 고 사인 홍선영( 洪 善 泳 )의 처 조씨( 曹 氏 ), 여주( 驪 州 ) 고 학생 이광모( 李 光 模 )의 처 박 씨 고사인 권순건( 權 順 健 )의 처 이씨, 연산( 連 山 ) 고 사인 백상준( 白 尙 準 )의 처 송씨, 서원( 西 原 ) 고 사인 오세환( 吳 世 煥 )의 처 김씨, 목천 ( 木 川 ) 고 사인 남섭( 南 燮 )의 처 김씨, 공주( 公 州 ) 고 부사 유회원( 柳 晦 源 )의 처 김씨와 고 사인 이익선( 李 翼 善 )의 처 한씨( 韓 氏 ), 회덕( 懷 德 ) 고 충목공( 忠 穆 公 ) 이시직( 李 時 稷 )의 처 이씨, 홍산( 鴻 山 ) 고 처녀 윤씨, 익산( 益 山 ) 고 사인 권시하( 權 時 夏 )의 처 조씨( 趙 氏 ), 창평( 昌 平 ) 고 사인 양학언( 梁 學 彦 )의 처 이씨, 남평( 南 平 ) 고 양인 박처준( 朴 處 俊 )의 처 김성( 金 姓 ), 함평( 咸 平 ) 고 부장( 部 將 ) 윤해( 尹 海 )의 처 강씨( 康 氏 ) 와 고 사인 김석규( 金 碩 圭 )의 처 진씨( 陳 氏 ), 무안( 務 安 ) 고 사인 서익천( 徐 益 天 )의 처 정씨( 鄭 氏 ), 남원( 南 原 ) 고 사인 김익( 金 )의 처 이 씨, 고부( 古 阜 ) 고 사인 김방수( 金 芳 洙 )의 처 정씨( 丁 氏 ), 동복( 同 福 ) 고 양인 정쌍룡( 鄭 雙 龍 )의 처 이성( 李 姓 ), 창녕( 昌 寧 ) 고 사인 성효열( 成 孝 悅 )의 처 손씨( 孫 氏 ), 경주( 慶 州 ) 관노( 官 奴 ) 현옥( 顯 玉 )의 처 황아( 黃 娥 ), 안의( 安 義 ) 고 사인 김세적( 金 世 績 )의 처 허씨( 許 氏 ), 영덕( 盈 德 ) 고 사인 신길환( 申 吉 煥 )의 처 권씨( 權 氏 ), 선산( 善 山 ) 사노( 私 奴 ) 복재( 卜 才 )의 처 김녀( 金 女 ), 밀양( 密 陽 ) 고 사인 이석린( 李 錫 麟 )의 처 박씨, 통천( 通 川 ) 고 사인 임붕원( 林 鵬 遠 )의 처 고씨( 高 氏 ), 원주( 原 州 ) 고 사인 권유( 權 愉 )의 처 원씨( 元 氏 ), 금성( 金 城 ) 고 사인 배정로( 裵 廷 老 )의 처 진씨( 秦 氏 ), 금화( 金 化 ) 고 사인 이한유( 李 漢 裕 )의 처 한씨( 韓 氏 ), 횡성( 橫 城 ) 고 사인 김광한( 金 光 漢 )의 처 원씨( 元 氏 ), 정선( 旌 善 ) 고 공 생( 貢 生 ) 고지걸( 高 志 屹 )의 처 김성( 金 姓 ), 삼척( 三 陟 ) 고 공생 김윤근( 金 允 瑾 )의 처 남성( 南 姓 ), 재령( 載 寧 ) 고 업무( 業 武 ) 손언장( 孫 彦 章 )의 처 한씨( 韓 氏 ), 장연( 長 淵 ) 고 사인 박한성( 朴 漢 成 )의 처 김씨, 서흥( 瑞 興 ) 고 사인 신재순( 申 在 舜 )의 처 유씨( 柳 氏 ), 해주( 海 州 ) 고 영리( 營 吏 ) 지상함( 池 相 涵 )의 처 김성( 金 姓 ), 의주( 義 州 ) 고 사인 백광련( 白 光 鍊 )의 처 최씨, 곽산( 郭 山 ) 고 학생 지덕룡( 池 德 龍 )의 처 김씨, 삼등( 三 순조 12년 임신(1812, 가경 17) 3월 13일(을유) 박경인( 朴 慶 因 ).예조에서 각 식년 경외의 충 효 열의 문서를 보고하다 41

42 登 ) 고 통덕랑 주평( 朱 坪 )의 처 김씨, 강계( 江 界 ) 고 학생 김성삼( 金 省 三 )의 처 김씨, 평양( 平 壤 ) 고 사인 김이곤( 金 理 坤 )의 처 이씨, 개천( 价 川 ) 고 사인 이일초( 李 日 初 )의 처 김씨, 영흥( 永 興 ) 고 학생 김왕추( 金 旺 秋 )의 처 장씨( 張 氏 ), 함흥( 咸 興 )의 고 학생 이종눌( 李 宗 訥 )의 처 김 씨 고 학생 한명갑( 韓 命 甲 )의 처 진씨( 秦 氏 ) 고 급제( 及 第 ) 유혜중( 柳 惠 重 )의 처 이씨, 삼수( 三 水 ) 전 권관( 權 管 ) 김성정( 金 聖 鼎 )의 처 박 씨, 부령( 富 寧 ) 출신( 出 身 ) 이원배( 李 元 培 )의 자부( 子 婦 ) 장씨( 張 氏 ) 양씨( 楊 氏 ), 이원( 利 原 ) 고 무인 연재협( 延 再 協 )의 처 엄씨( 嚴 氏 )이다. 효부 정려질( 孝 婦 旌 閭 秩 ) 서울에 사는 고 현령 홍헌유( 洪 獻 猷 )의 처 이씨, 예천( 禮 泉 ) 고 사인 이진헌( 李 鎭 憲 )의 처 권씨( 權 氏 )이다. 충신 증직질( 忠 臣 贈 職 秩 ) 영동( 永 同 )의 고 목사( 牧 使 ) 이수( 李 洙 )는 기사년 곤전( 坤 殿 )께서 손위( 遜 位 )하셨을 때 벼슬하지 않고 스스로 폐 ( 廢 )했던 사람이다. 청도( ( 淸 道 )의) 고 만호( ( 萬 戶 ) 박경선( ( 朴 慶 宣 ) 고 장사랑( ( 將 仕 郞 ) 박경인( 朴 慶 因 )은 왜변( ( 倭 變 ) 때 의병을 일으켜 전사( ( 戰 死 ) 했던 사람이다. 안의( 安 義 )의 고 사인 김우석( 金 虞 錫 )은 무신년 역적 정희량( 鄭 希 亮 )의 변 때 창의( 倡 義 )하여 역적을 잡았던 사 람이다. 대구( 大 丘 )의 고 부장( 副 將 ) 허득량( 許 得 良 )과 그의 종제( 從 弟 ) 고 정( 正 ) 허복량( 許 復 良 )은 정축년 노변( 虜 變 ) 때 경상 병사 민영( 閔 )을 따라 쌍령( 雙 嶺 )에서 전사했던 사람이다. 고 현령 최계( 崔 誡 )와 그 아우 최인( 崔 認 )과 그 종자( 從 子 ) 최동보( 崔 東 輔 )는 왜변 때 창의하 여 공을 쌓은 사람이다. 밀양( 密 陽 )의 고 참의( 參 議 ) 손조서( 孫 肇 瑞 )는 단묘( 端 廟 ) 때 육신( 六 臣 )의 일이 있고 난 뒤 뉘우치고 스스로 폐기( 廢 棄 )했던 사람이다. 상주( 尙 州 )의 고 처사( 處 士 ) 채득기( 蔡 得 沂 )는 정축년에 남한 산성에서 내려온뒤 과거를 보지 않고 스스로 깨끗함을 지켰 던 사람이다. 효자 증직질( 孝 子 贈 職 秩 ) 서울 사는 고 지사( 知 事 ) 황운하( 黃 運 河 ) 고 학생 유해균( 柳 海 均 ) 고 남학 교수( 南 學 敎 授 ) 현계정( 玄 啓 楨 ) 고 학생 이혼( 李 混 ) 고 감역( 監 役 ) 김정주( 金 鼎 柱 ) 고 학생 심사정( 沈 師 定 ) 고 사인 홍병오( 洪 秉 五 ) 고 서윤( 庶 尹 ) 홍계서( 洪 啓 瑞 ) 고 동지 ( 同 知 ) 이사룡( 李 思 龍 ), 수원부( 水 原 府 ) 고 참봉( 參 奉 ) 윤형로( 尹 衡 老 ), 양주( 楊 州 ) 고 학생 이삼석( 李 三 錫 ), 장단( 長 湍 ) 고 사인 한광세( 韓 光 世 ), 양천( 陽 川 ) 고 통덕랑 김숭제( 金 嵩 濟 ), 부여( 扶 餘 ) 고 사인 최사백( 崔 賜 百 ), 영동( 永 同 ) 고 사인 최복원( 崔 復 源 ), 목천( 木 川 ) 고 정랑( 正 郞 ) 조명( 趙 銘 ), 공주( 公 州 ) 고 사인 윤박( 尹 搏 ), 서원( 西 原 ) 고 사인 송상휘( 宋 尙 輝 ) 홍귀서( 洪 龜 瑞 ), 진천( 鎭 川 ) 고 통덕랑 정도( 鄭 棹 ), 전주 ( 全 州 ) 고 사인 조대수( 趙 大 壽 ) 이진운( 李 鎭 運 ), 영암( 靈 巖 ) 고 직장( 直 長 ) 신사준( 愼 師 浚 ), 장수( 長 水 ) 고 동지 김성보( 金 聖 輔 ), 능주( 綾 州 ) 고 사인 박헌가( 朴 獻 可 ), 고부( 古 阜 ) 고 사인 송수현( 宋 守 賢 ), 금구( 金 溝 ) 고 사인 송정모( 宋 廷 模 ), 지례( 知 禮 ) 고 사인 이수호( 李 遂 浩 ), 함창 ( 咸 昌 ) 고 사인 조수구( 趙 守 球 ), 고성( 固 城 ) 고 사인 백봉래( 白 鳳 來 ), 영월( 寧 越 ) 고 사인 엄계태( 嚴 啓 泰 ), 강릉( 江 陵 ) 고 사인 신갑동( 辛 甲 東 ) 고 생원 최현민( 崔 顯 珉 ), 성천( 成 川 ) 고 현감 나홍점( 羅 弘 漸 ), 강서( 江 西 )고 학생 한태형( 韓 泰 亨 ), 상원( 祥 原 ) 고 학생 방덕일( 方 德 一 ), 중화( 中 和 ) 고 학생 한창대( 韓 昌 岱 ), 용강( 龍 岡 ) 고 사인 김진수( 金 震 秀 ), 삼화( 三 和 ) 고 사인 김처겸( 金 處 謙 )이다. 원전 48 집 15 면 분류 *인사-관리( 管 理 ) 순조 12년 임신(1812, 가경 17) 3월 13일(을유) 박경인( 朴 慶 因 ).예조에서 각 식년 경외의 충 효 열의 문서를 보고하다 42

43 선조 27년 갑오(1594, 만력 22) 3월 25일(계묘 계묘) 박경신 :22 비변사에서 경주 등지에서 적과 싸워 공이 있거나 죽은 자들을 시상할 것을 청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경상도 감사 등이 연속으로 치계한 것을 보면, 울산( 蔚 山 ) 경주( 慶 州 )의 외롭게 살아남은 백성들이 충의에 분발하여 몸을 바 치지 않는 이가 없어서 강적과 날마다 혈전을 벌여 아홉 번 죽더라도 돌아가지 않는다 하니 매우 가긍합니다. 지금 또 밀양 부사 박경신( 朴 慶 新 )이 밀양의 남은 백성 20여 명을 불러 모아 꽤 전공을 세웠다고 하는데, 다른 곳의 백성이 적에게 달라붙는 것을 달갑게 여기고 오래도록 나오지 않는 것과 비교하여 본다면, 차이가 큽니다. 이러한 무리는 조정에서 별도로 융숭하게 장려하여 어여삐 돌보아 주는 뜻을 보인 다음에야 거의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 줄 수 있을 것이며 사방 먼 곳에서 소문을 듣는 이도 더욱 귀순할 뜻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힘껏 싸워 군공( 軍 功 )이 있는 이는 이미 논상( 論 賞 )하는 중에 있으나 그 나머지 각 인원 등은 특별히 실시할 만한 상이 없으니, 신들의 의사로는 경주 울산 밀양 등처 에 종군한 사람은 모두 10년간 복호( 復 戶 )해주고 영원히 잡역을 면제하며 비변사에게 공명첩문( 空 名 帖 文 )을 만들어 나누어 주게 하고, 동래( 東 萊 ) 장기( 長 ) 기장( 機 張 ) 부산( 釜 山 ) 김해( 金 海 ) 웅천( 熊 川 ) 등처에서 적군의 진중으로부터 스스로 빠져 나 온 이는 모두 복호첩을 줌으로써 조정의 덕의( 德 意 )를 알게 하고 그들의 친부하려는 마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소서. 이것은 조정 에서 하찮은 은혜를 행하여 한 지방의 백성을 수습하는 것이니 관계됨이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전후로 힘껏 싸우다가 진중에서 죽은 사람은 별도로 기록하되, 만일 처자가 있는 이라면 즉시 잡역을 영원히 면제하여 수 고롭지 않게 하고, 또 장관( 將 官 )으로 하여금 한 곳에 단( 壇 )을 세워 간략하게 탁주( 濁 酒 )와 보리밥으로 초혼제( 招 魂 祭 )를 올려 충혼을 위로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뜻을 경상 감사 및 좌 우 병사 수사와 도원수에게 하유하여 각 장관에게 알려서 일 제히 시행한 뒤에 계문하게 하소서. 하니, 매우 옳다고 답하였다. 원전 22 집 241 면 분류 *인사-관리( 管 理 ) / *군사-군역( 軍 役 ) / *군사-전쟁( 戰 爭 ) / *재정-역( 役 ) / *풍속-예속( 禮 俗 ) 선조 27년 갑오(1594, 만력 22) 3월 25일(계묘) 박경신 43

44 선조 26년 계사(1593, 만력 21) 9월 12일(계해 계해) 삼우정 박경신 :19 간원이 황정욱 등의 일과 해주 지역 수령에 대한 가자 개정을 청하다 간원이 황정욱과 황혁 등의 일에 대해 죄줄 것을 청하고, 또 아뢰기를, 거가( 車 駕 )가 머물렀던 본읍( 本 邑 )의 수령을 으레 순서를 뛰어 넘어 승진시킨 데 대해서는 이미 옳지 않다는 의논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옮 겨와서 머무신 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본도의 감사 병사와 본주( 本 州 )의 목사( 牧 使 ) 판관( 判 官 )에게 일시에 아울러 중가( 重 加 )를 내린 것은 너무 지나칩니다. 감사 유영경( 柳 永 慶 )과 목사 박경신( 朴 慶 新 )은 모두 개정하게 하소서. 병사 조인득( 趙 仁 得 )은 방백( 方 伯 )으로 있을 때 방어( 防 禦 )에 관심을 두지 않아 견고한 성( 城 )을 지키지도 않고 적봉이 이웃 고을에 이르기도 전에 먼저 도망하여 해도( 海 島 )에 숨어 버려 온 도( 道 )의 사람으로 하여금 소문만 듣고 흩어지게 하였고 여러 고을이 허물어지게 하였습니다. 판관 목전( 睦 詮 )은 성을 버리고 도망간 죄가 조인득과 다를 것이 없는데 아직도 관작( 官 爵 )을 보전하고 있고 이번에 또 중가( 重 加 )를 제수하셨으므로 물정( 物 情 )이 더욱 통분하게 여깁니 다. 아울러 개정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황정욱 등의 일은 이미 하유하였으니 윤허하지 않는다. 거가가 본도에 머물게 되면 방백 곤수 수령에게 가자( 加 資 )해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 개정할 수 없다. 성( 城 )을 버린 사람이 어찌 그 사람뿐이겠는가. 진작에 그의 죄를 들어 파직시키기를 청했더라면 좋았을 것인데, 이 번에 가자를 인하여 거론하는 것은 온당치 않은 것 같으니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원전 22 집 98 면 분류 *왕실-행행( 行 幸 ) / *인사-관리( 管 理 ) / *인사-임면( 任 免 ) / *정론-간쟁( 諫 諍 ) / *사법-탄핵( 彈 劾 ) / *윤리-강상( 綱 常 ) / *군사-전 쟁( 戰 爭 ) / *외교-왜( 倭 ) 선조 26년 계사(1593, 만력 21) 9월 12일(계해) 삼우정 박경신 44

45 선조 26년 계사(1593, 만력 21) 1월 14일(기사 기사) 삼우정 박경신 :17 좌상 윤두수가 이 제독에게 가려하자 인견하여 위로하고 경성 수호 등을 논의하다 좌의정 윤두수가 제독의 군전( 軍 前 )에 나아가려고 하면서 아뢰기를, 신이 지금 직사( 職 事 )를 형편없이 처리했다는 것으로 군전에 나아가게 되었으니 한번 죽는 것밖에 다른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선위( 禪 位 )하시겠다는 전교를 받고부터는 온편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 염려를 금치 못하겠습니다. 지금의 국가 일을 보면 큰 병을 앓는 사람과 비슷하여 기식( 氣 息 )이 위축되고 지쳐 생사( 生 死 )를 알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어찌 먼저 동요하여 명백( 命 脈 )을 손상 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십분 안정하셔서 군정( 群 情 )이 실망하거나 민심이 놀라지 말게 하시며, 또한 이 지역에 와 있는 명나라의 장상( 將 相 )들로 하여금 해괴하게 여기지 않도록 하소서. 신이 떠나면서 염려됨을 금치 못하여 감히 이와 같이 구구하게 아뢰니 황공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민망함은 경보다 심하여 하루라도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다. 이 일은 끝내 막기만 해선 안 되니, 이것이 어떠한 일인 데 말만 하고 그만둘 수 있겠는가. 다만 지금 경이 여기를 떠난다면 이곳에는 대신이 없으니 대사( 大 事 )를 거행하기가 어려울 듯 하다. 내가 우선 죽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기다리겠다. 명나라 장수의 패( 牌 )를 보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으며 그 까닭을 모르 겠다. 그리고 나로 하여금 안주( 安 州 )로 진주하라고 했으니 만일 빨리 진주하지 않으면 아마도 책노( 責 怒 )가 있을 듯하다. 나도 18일에는 정주( 定 州 )로 나아갈 것이다. 하고, 인해서 윤두수를 편전( 便 殿 )에서 인견하였는데 승지 유근( 柳 根 )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제 패문( 牌 文 )은 무슨 뜻인가? 하니, 윤두수가 아뢰기를, 생각하건대, 양식과 꼴이 준비되지 못하고 적의 우두머리가 탈출하였기 때문에 이 노여움을 산 것입니다. 때문에 술을 실컷 마시며 스스로 즐긴다. 는 등의 말이 있는데, 임세록( 林 世 祿 )의 말에 대군( 大 軍 )이 전진할 때에 비자( 婢 子 )가 수행한 적이 있 었다. 고 했습니다. 군중( 軍 中 )에는 여자를 꺼리는데도 이 사람이 데리고 갔으니 매우 거리낌이 없는 것입니다. 하고, 유근이 아뢰기를, 제독의 수행인인 이연경( 李 延 慶 )이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 당시 여러 신하들 중에 마음대로 술을 마시면서 스스로 즐기며 사가에서 편안하게 지내지 않는 자가 거의 없 었다. 견책( 譴 責 )이 이르자 바로 이연경에게 죄를 돌렸는데 이연경은 일개 무지한 무부( 武 夫 )이다. 비록 실로 이런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어찌 엄하게 책망할 수 있겠는가. 애석하다. 식견이 있는 사람도 이 율( 律 )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단지 이연경으로 책 임을 메우려 하니 원통하지 않은가. 상이 이르기를, 소모관( 召 募 官 )들도 기생을 태우고 갔다고 한다. 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기타는 듣지 못했으나 허유( 許 )란 자가 기생을 태우고 다니며 여러 고을에 폐단을 끼쳤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찌하여 허물을 대신에게 돌렸는가? 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책임이 대신에게 있으니 그 허물을 돌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선조 26년 계사(1593, 만력 21) 1월 14일(기사) 삼우정 박경신 45

46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준( 李 準 )이 어찌하여 영유( 永 柔 )에 누워 있는가? 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병이 어떠한가는 모르겠지만 영유는 순안( 順 安 )의 직로( 直 路 )가 아니니 매우 이상스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 사람들은 직접 수고하지 않으려고 한다. 심지어 양식과 꼴을 나누어 주는 것을 욕되게 여겨 직접 하지 않으니 이것 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신이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잘 단속하고 경계시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일( 李 鎰 )의 일은 알 수 없다. 평양을 토평한 뒤에 어찌 한 차례의 치계( 馳 啓 )도 없는가? 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이일은 문장이 모자랍니다. 하고, 유근은 아뢰기를, 문서로 보고하는 등의 일은 박경신( 朴 慶 新 )에게 위임하였는데, 박경신이 체임당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하였다. 두수가 아뢰기를, 어제 전교를 내리신 뒤로 상하의 모든 사람들이 민망하고 답답하게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하가 어찌 간격이 있겠는가. 내가 숨기지 않고 말하겠다. 예로부터 제왕 중에 멸망하여 파천한 자가 어찌 한 둘이겠는가마는 회복한 뒤에 물러났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내가 물러나려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니다. 나는 본래 잔약하고 용렬한 사람으로 단지 껍데기만 있고 그 속이 비어 아무리 힘쓰려 해도 할 수 없다. 지난날의 경우는 나라의 일이 마침내 어떻게 될지 몰랐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지금의 경우는 회복하는 형세가 있으니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있다. 다만 대신이 없으니 거행할 수 없어 우선 뒷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하였다. 두수가 아뢰기를, 큰 난리를 겪은 뒤에 스스로 노력하신다면 위태로움을 도리어 편안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아무리 물러나려 하셔도 물러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곳에 온 뒤로부터 행동거지가 전도되고 음식도 한두 숟갈만 뜨니 단지 죽지만 않았을 뿐이다. 당( 唐 )나라 일로 말하면 현종 ( 玄 宗 )이나 숙종( 肅 宗 )은 말할 것이 못되나 대종( 代 宗 ) 덕종( 德 宗 ) 희종( 僖 宗 )은 모두 파천하였으며 전조( 前 朝 )의 현종( 顯 宗 )도 파천한 임금이다. 내가 이것으로 혐의스럽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기력( 氣 力 )이 미치지 못해서일 뿐이다. 하였다. 두수가 아뢰기를, 당 태종( 唐 太 宗 )은 내가 그 수고를 담당하여 편안한 것을 네게 물려주었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신민의 소망을 따 르시어 조종의 기업을 재조( 再 造 )하셔야 합니다. 만약 한결같이 사피( 辭 避 )만 하신다면 군신들이 모두 해이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정에 대신이 한 사람도 없으니 어떻게 해야겠는가? 하자, 두수가 아뢰기를, 정주( 定 州 )에 진주하여 양궁( 兩 宮 )이 함께 모이시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곳의 일은 비변사와 함께 의논하여 조처하고 가는 것이 가하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이 지역에도 선성( 先 聖 )의 묘( 廟 )가 있으니 알현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것은 회복하는 근본이고 군신의 의리도 여기에서부터 나올 것이다. 한 고조( 漢 高 祖 )는 전쟁하는 즈음에도 오히려 태뢰( 太 牢 )로써 제사를 지냈으니 내가 마땅히 몸소 제사를 지내겠다. 선조 26년 계사(1593, 만력 21) 1월 14일(기사) 삼우정 박경신 46

47 그리고 시재( 試 才 )하여 사람은 뽑아 먼 지방의 사람으로 하여금 향교( 鄕 校 )의 존엄함을 알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알성하고 시재하는 것은 매우 성대한 거사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상황으로 말한다면 경성( 京 城 )을 수호할 수 있겠는가? 평소에는 단지 성자( 城 子 )만 있는데, 갑자기 변고를 만난다면 어찌 대적할 수 있겠는가? 들으니 북경( 北 京 )은 평상시에도 무기를 상설한다고 한다. 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경성은 실로 수호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도성은 종묘와 창름( 倉 廩 )이 있는 곳이고 백관과 군민( 軍 民 )이 모이는 곳이므로 성지( 城 池 )의 튼튼함과 갑병( 甲 兵 )의 많음이 어느 곳이 이보다 낫겠는가. 그러니 한 걸음이라도 여기서 떠나면 선인의 강토를 나에게서부터 잃어버리는 것이다. 만약 성안의 사람으로 도성을 지키며 팔도의 군사를 징발하여 기전( 畿 甸 )에다 진을 치고 군율을 엄격하게 하여 군사들의 마음을 결집시켰다가 적이 도성을 핍박하면 기전의 군사들은 그 뒤를 의논하게 하고, 적이 기전을 나누어 공략하면 경성( 京 城 )의 군사가 그 후미를 공격하게 하여 서로 성세( 聲 勢 )를 만들어 군사를 휴식시키며 번갈아가면서 출동시킨다면 멀리서 깊숙이 들어온 적이 양식은 떨어지고 군사는 피로하여 저절로 쓰러져 죽을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한번 충주( 忠 州 )에서 실패하자 곧 도성을 버렸고, 재차 한강에서 무너지자 곧 송경( 松 京 )을 버렸으며, 세 번째 임진강에서 패배하자 곧 기성( 箕 城 )을 버려 난여( 鑾 輿 )가 마 침내 삭막한 들판에 피했으니 땅은 이미 다하여 단지 한줄기 압록강( 鴨 綠 江 )만이 가로막아 있을 뿐이다. 다행히 저 큰 하늘이 화 란을 내린 것을 뉘우치고 귀신이 정성을 쏟아 마침내 흉악한 적으로 하여금 평양성에서 더는 진격할 수 없게 하였으니, 이것은 하늘이 돌본 것이다. 가령 적이 안정( 安 定 ) 사이에서 날뛰며 서쪽으로 향하여 곧장 진격하였다면 외로운 의주성을 공격하여 함락 시키는 것은 순식간일 것이니 난여가 한번 압록강을 건넌다면 우리의 산하는 적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이씨( 李 氏 )의 사직( 社 稷 )도 의탁할 곳이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초야에 파천하다가 마침내 멸망당하는 것이 어찌 조종의 기업을 지키면서 국군( 國 君 )이 사직을 위하여 죽는다는 의를 따르는 것만 하겠는가. 믿을 수 없는 하늘에다 요행을 바라며, 죽을 힘을 다하고 떠나지 말라는 경 계를 준수하지 못했으니 오늘날 거가( 車 駕 )가 서쪽으로 순행한 그것도 위태로운 것이다. 이산해( 李 山 海 )가 앞서 그르치더니 윤두 수가 또 대의( 大 義 )로써 잘 변론하지 못하고 단지 상이 뜻을 따를 줄만 알아 겉으로는 비록 큰소리를 치지만 사실은 지킬 수 없다. 고 하였다. 신의 생각에는, 이 말이 만약 후세에 전하여진다면 천하의 사람들이 틀림없이 오늘날의 군신( 君 臣 )은 모두 적 을 보자마자 도망하여 피하는 것을 상책으로 삼았다고 할 것이니, 어찌 그르지 않겠는가. 사간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이 제독의 패문을 보니 유성룡과 윤두수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오게 하였는데, 이는 틀림없이 말먹이와 식량, 기무 ( 機 務 )를 의논하여 조처하려고 해서인 것입니다. 다만 행조( 行 朝 )에 다른 대신이 없어 지금 만약 나간다면 군국( 軍 國 )의 중대한 계책을 주장하여 결단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 유성룡으로 하여금 최황( 崔 滉 ) 김명원( 金 命 元 )과 함께 주선하여 잘 처리하도 록 하시고, 또 이 뜻을 명나라 조정에 이자( 移 咨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명나라 장수가 부르니 가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원전 21 집 606 면 분류 *왕실-국왕( 國 王 ) / *왕실-행행( 行 幸 ) / *외교-왜( 倭 ) / *외교-명( 明 ) / *군사-전쟁( 戰 爭 ) / *사법-탄핵( 彈 劾 ) / *정 론-간쟁( 諫 諍 ) / *교육-인문교육( 人 文 敎 育 ) / *인사-선발( 選 拔 ) / *역사-사학( 史 學 ) / *역사-전사( 前 史 ) / *역사-고사( 故 事 ) [주D-001]전조(( 前 朝 ) : 고려. 선조 26년 계사(1593, 만력 21) 1월 14일(기사) 삼우정 박경신 47

48 선조 26년 계사(1593, 만력 21) 1월 14일(기사) 삼우정 박경신 48

49 세조 2년 병자(1456, 경태 7) 12월 7일(임인) 의금부에서 형옥의 일로 전옥 서 등의 관리에 대해 벌할 것을 청하다 :43 의금부( 義 禁 府 )에서 아뢰기를, 전옥서( 典 獄 署 )의 쇄장( 鎖 匠 ) 사리( 司 吏 ), 형조( 刑 曹 )의 조례( 皂 隷 ) 장수( 杖 首 ) 등이 죄수를 능학( 凌 虐 )하여 재물을 핍박하여 취하였으니, 일관( 一 貫 ) 이하는 죄가 장( 杖 ) 80대, 자자( 刺 字 )에 해당하고, 전옥승( 典 獄 丞 ) 이사달( 李 思 達 ) 지맹손( 智 孟 孫 ), 부승( 副 丞 ) 김이석( 金 以 石 ) 등 은 옥졸( 獄 卒 )을 놓아 죄수를 침학( 侵 虐 )하고 검찰( 檢 察 )을 가하지 않았으니, 죄가 장( 杖 ) 1백 대, 도( 徒 ) 1년에 해당하고, 이사달은 또 수인 ( 囚 人 )의 병을 구료( 救 療 )하지 않아 앉아서 죽게 하고, 주서( 注 書 ) 승전( 承 傳 )이 척간( 擲 奸 )할 때에 미치어 다만 가물( 加 勿 )이 급작히 죽었다 고만 말하고, 또 이옥( 李 玉 )의 죽은 것을 숨기었으니, 중한 것을 따라 장( 杖 ) 1백 대, 도( 徒 ) 3년에 처하고, 형조 좌랑( 刑 曹 佐 郞 ) 황윤원( 黃 允 元 )은 이옥을 세 차례 고문하고, 정랑( 正 郞 ) 강우문( 姜 遇 文 )은 가물을 네 차례 고문하였는데, 뒤에 두 사람이 모두 병이 심하여도 급급히 이 문( 移 文 )하여 보관( 保 管 )하여 밖에 내놓지 않았고, 좌랑( 佐 郞 ) 박찬조( 朴 纘 祖 ) 정랑( 正 郞 ) 고신교( 高 愼 驕 )는 장금사( 掌 禁 司 )로서 일찍이 점검 ( 點 檢 )하고 구료( 救 療 )하지 않아서 수인( 囚 人 )을 옥에서 죽게 하였으니, 죄가 아울러 장( 杖 ) 60대, 도( 徒 ) 1년에 해당하고, 김이석은 이전( 吏 典 )의 우두머리이니 장( 杖 ) 70대에 전의 죄 나머지 장( 杖 ) 20대를 계산하고, 지맹손은 장관( 長 官 )이니 두 등을 체감( 遞 減 )하여 장 60대에 처 하고, 황윤원 박찬조 고신교는 이전( 吏 典 )의 우두머리이니 한 등을 감하여 장 1백 대에 처하고, 강우문도 또한 한 등을 감하여 태( 笞 ) 50대 에 처하소서. 하니, 명하기를 박찬조 황윤원은 공신( 功 臣 )이니 논하지 말고, 다만 고신교만 장 1백 대를 때리고, 나머지는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원전 7 집 159 면 분류 *사법-행형( 行 刑 ) 세조 4년 무인(1458, 천순 2) 4월 14일(신미) 성균 직강 민정이 윤대하여 성균 생원의 수효를 2백 인으로 복구토록 건의하다 상참을 받고 정사를 보았다. 성균 직강( 成 均 直 講 ) 박찬조( 朴 纘 祖 ) 민정( 閔 貞 ) 등이 윤대( 輪 對 )를 행하였다. 박찬조가 아뢰기를, 듣자오니, 평안도민( 平 安 道 民 )이 도망하여 저들의 경내로 들어간다 하니, 청컨대 금단( 禁 斷 )하소서. 또 이미 공처( 公 處 )의 술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니, 청컨대 민간에도 아울러 금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또한 도망하여 들어가는 폐단을 알았으나, 금단( 禁 斷 )하는 계책을 알지 못한다. 하였다. 민정이 아뢰기를, 지금 문사( 文 士 )가 매우 적으니, 청컨대 문신을 가려서 예문관에 겸차( 兼 差 )하여 문학( 文 學 )을 전습( 專 習 )하게 하소서. 국가에는 예로부터 상양( 常 養 )하는 성균 생원( 成 均 生 員 )이 2백 인인데, 이제 흉년이라 하여 1백 인을 감하였으니, 국가에서 양현( 養 賢 )하는 뜻[ 意 ]에 있어 어떻겠 습니까? 청컨대 복구( 復 舊 )하게 하소서. 또 주군( 州 郡 )의 석전제( 釋 奠 祭 )에 수령들이 게을리 하여 치의( 致 意 )하지 아니하여 희생과 술[ 牲 酒 ] 이 풍결( 豐 潔 )하지 못하니, 청컨대 검핵( 檢 覈 )하게 하소서. 또 세상 사람이 계모의 상( 喪 )을 친모와 다름없이 하는데, 그 노비를 전수( 傳 受 ) 하지 못함은 정리( 情 理 )에 미온( 未 穩 )하니, 청컨대 대전( 大 典 ) 에 찬정( 撰 定 )하소서. 하였다. 원전 7 집 265 면 분류 *왕실-국왕( 國 王 ) / *외교-야( 野 ) / *사법-법제( 法 制 ) / *호구-이동( 移 動 ) / *교육-인문교육( 人 文 敎 育 ) / *어문학-문학( 文 學 ) / *사 상-유학( 儒 學 ) / *풍속-예속( 禮 俗 ) / *신분-천인( 賤 人 ) 세조 4년 무인(1458, 천순 2) 9월 7일(신묘) 조혜 이승소 이연손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서( 李 曙 )를 덕원군( 德 源 君 )으로 삼고, 조혜( 趙 惠 )를 중추원 사( 中 樞 院 使 )로, 이승소( 李 承 召 )를 호조 참의( 戶 曹 參 議 )로, 이연손( 李 延 孫 )을 예조 참의( 禮 曹 參 議 )로, 강희안( 姜 希 顔 )을 첨지중추원사( 僉 知 中 樞 院 事 )로, 박찬조( 朴 纘 祖 )를 사간원 좌헌납( 司 諫 院 左 獻 納 ) 세조 2년 병자(1456, 경태 7) 12월 7일(임인) 의금부에서 형옥의 일로 전옥서 등의 관리에 대해 벌할 것을 청하다 49

50 으로, 김하( 金 何 )를 판중추원사 봉조청( 判 中 樞 院 事 奉 朝 請 )으로, 예승석( 芮 承 錫 )을 평양 소윤( 平 壤 少 尹 )으로 삼았다. 이전에 충청도 이산 현감( 尼 山 縣 監 )은 한 사람도 고만( 考 滿 )된 자가 없었는데, 예승석이 현감이 되어 정최( 政 最 )로서 고만이 되어 특별히 헌납 ( 獻 納 )을 제수하였었고, 이제 또 고을을 잘 다스렸다 하여 이 직( 職 )을 제수하였다. 원전 7 집 294 면 분류 *인사-임면( 任 免 ) / *인사-관리( 管 理 ) [주D-001]판중추원사 봉조청( ( 判 中 樞 院 事 奉 朝 請 ) : 정 3품의 관리가 치사( 致 仕 )한 뒤에 임명되는 벼슬. 임금께 문안드리는 일 을 맡으며, 종신토록 봉록( 奉 祿 )을 받음. [주D-002]고만(( 考 滿 ) : 벼슬의 임기가 만료되는 것을 말함. 외관( 外 官 )은 처음에 3기법( 三 期 法 )을 시행하여 그 임기가 3년이었 으나, 세종 때 6기법( 六 期 法 )을 시행하여 6년으로 되었으며, 중앙의 관원은 1년 반이었음. [주D-003]정최(( 政 最 ) : 치적( 治 績 )의 최상등( 最 上 等 ). 세조 5년 기묘(1459, 천순 3) 7월 13일(임진) 좌헌납 박찬조가 관직 임명의 잘못에 대해 아뢰다 좌헌납( 左 獻 納 ) 박찬조( 朴 纘 祖 )가 본원( 本 院 )의 의논을 가지고 아뢰기를, 이달 초3일에 이조 판서( 吏 曹 判 書 ) 성봉조( 成 奉 祖 )의 아들 성율( 成 慄 )과 삼촌질( 三 寸 姪 ) 이철견( 李 鐵 堅 )과 사촌제 ( 四 寸 弟 ) 성중식( 成 重 識 )과, 지조사( 知 曹 事 ) 윤자운( 尹 子 雲 )의 사위 정옥( 鄭 沃 )과 삼촌질( 三 寸 姪 ) 신찬( 申 燦 )과 정랑 ( 正 郞 ) 이문환( 李 文 煥 )의 형 이문형( 李 文 炯 )과 정랑( 正 郞 ) 박건( 朴 楗 )의 처삼촌숙( 妻 三 寸 叔 ) 최희( 崔 曦 )와 좌랑( 佐 郞 ) 최한보( 崔 漢 輔 )의 처부( 妻 父 ) 조안효( 趙 安 孝 )와 사촌제( 四 寸 弟 ) 허종( 許 琮 ) 등은 상피( 相 避 )를 헤아리지 않고 관직을 임명했습니다. 삼관( 三 館 )에서 거관( 去 官 )할 때는 그 직( 職 )에 준하여 임명하는 것이 예( 例 )인데도, 승문원 박사( 承 文 院 博 士 ) 김자정( 金 自 貞 )은 강등( 降 等 )시켜 행 부사정( 行 副 司 正 )에 임명했습니다. 구인문( 具 人 文 )은 음성 현감( 陰 城 縣 監 )에 임명되어 임지( 任 地 )에 가지 않았으니, 법으로서는 마땅히 3년 동안을 서용( 敍 用 )하지 않아야 하는데도 갑자기 경직( 京 職 )에 임명되니, 신( 臣 ) 등은 법에 어긋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전교( 傳 敎 )하기를, 이것은 모두 내가 아는 바이다. 하였다. 원전 7 집 337 면 분류 *인사-관리( 管 理 ) / *인사-임면( 任 免 ) / *정론( 政 論 ) [주D-001]본원(( 本 院 ) : 사간원( 司 諫 院 ). [주D-002]상피(( 相 避 ) : 친족( 親 族 )이나 인척( 姻 戚 ) 관계로 인하여 같은 곳에서 벼슬하는 일이나 또는 벼슬을 제수하 거나 승진시키는 것을 피하던 일. [주D-003]삼관(( 三 館 ) : 홍문관 예문관( 藝 文 館 ) 교서관( 校 書 館 )의 통칭. [주D-004]거관(( 去 官 ) : 임기가 만료되어 벼슬을 갈던 것을 말함. 세조 2년 병자(1456, 경태 7) 12월 7일(임인) 의금부에서 형옥의 일로 전옥서 등의 관리에 대해 벌할 것을 청하다 50

51 세조 2년 병자(1456, 경태 7) 5월 21일(기축 기축) 순라를 범한 중 지경이 태조 의 원종공신 탁시준의 손자이므로 면죄하다 :37 형조( 刑 曹 )에서 아뢰기를, 본월( 本 月 ) 14일에 중 지경( 志 冏 )이 초경( 初 更 )의 순라( 巡 邏 )를 범하여 그 죄가 태형( 笞 刑 ) 50대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그 할아 비 탁사준( 卓 思 俊 )이 태조의 원종 공신( 原 從 功 臣 )이니 예에 의하여 면죄됩니다. 하니, 어서( 御 書 )로 말하기를, 속히 놓아 보내라. 하고, 또 전지( 傳 旨 )하기를, 순라를 범한 중을 왜 지금까지 가두었느냐? 그 낭관( 郞 官 )을 불러 이를 물어보라. 하니, 좌랑( 佐 郞 ) 박찬조( 朴 纘 祖 )가 아뢰기를, 지경이 순라를 범하고 갇혔으나 그 이튿날 국문( 鞫 問 )하고 보방( 保 放 )했습니다. 하였다. 전지하기를, 문종조( 文 宗 朝 ) 때부터 유신( 儒 臣 ) 관리들이 중들과 양립( 兩 立 )하여 대체로 중이 범한 것이라면 아뢰지도 아니하고 심하게 핍 박하니, 참으로 얄미운 일이다. 그를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라. 하였으나, 그 때 밤이 이미 깊었으므로 전교하기를, 우선 보류하고 승정원에서 명을 기다리게 하라. 하더니, 결국 하옥( 下 獄 )시키지 아니하였다. 원전 7 집 132 면 분류 *사법-재판( 裁 判 ) / *사법-치안( 治 安 ) / *사상-유학( 儒 學 ) / *사상-불교( 佛 敎 ) [주D-001]보방(( 保 放 ) : 죄인을 석방할 때 연고자의 보증( 保 證 )을 받고 풀어 주던 것. 보석( 保 釋 ). 세조 2년 병자(1456, 경태 7) 5월 21일(기축) 순라를 범한 중 지경이 태조의 원종공신 탁시준의 손자이므로 면죄하다 51

52 해동잡록 1 본조( ( 本 朝 ) 박홍신( ( 朴 弘 信 ) :46 우리 세종 초년에 박홍신은 그의 형 언충( 彦 忠 )을 따라서 대마도( 對 馬 島 )을 정벌하러 갔다가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임금이 홍신에게 이르기를, 나는 언충( 彦 忠 )의 용맹을 안 지는 오래였으나, 뜻하지도 않은 네가 또한 무술의 재주가 있으니, 참으로 백중( 伯 仲 )이라고 이를 말한다. 하였다. 모든 재상들도 다투어 위로하여 이르기를, 자네의 형제는 완안( 完 顔 여진족( 女 眞 族 )이 사는 지명( 地 名 ))의 종족이 아니면 서 어찌 그렇듯 날쌔고 건장함이 남보다 훨씬 뛰어나는가. 하였다. 용재총화 박홍신전( 朴 弘 信 傳 ) 에 이르기를, 6월에 군사를 일으켜 험하고도 넓은 바다를 건너서 그 빈틈을 엿보아 그 늙은이와 아이를 사로잡 으려 하였으니, 이것이 전술의 가장 잘못이다. 하였다. 전발( 傳 跋 ) 언충( 彦 忠 )은 체구가 작으면서 용맹스러웠고 홍신( 弘 信 )은 몸집이 크며 관대하였고, 언충은 술잔을 입에 가까이하지 않았으나 홍신은 잘 마시니, 사람들은 이르기를 2반( 二 反 둘이 정 반대)이라고 하였다. 본집( 本 集 ) 우리 배는 느리고 무거웠으며, 적의 배는 가볍고 빨라서, 돛에 바람을 날쌔게 받아 눈깜짝할 사이에 천리를 행하였다고 하였다. 홍신전 발( 弘 信 傳 跋 ) 해동잡록 1 본조( 本 朝 ) 박홍신( 朴 弘 信 ) 52

53 연려실기술 제3권 세종조 고사본말( ( 世 宗 祖 故 事 本 末 ) 왜( ( 倭 )를) 치던 병역 ( 兵 役 ) 박홍신 :38 왜( 倭 )를 치던 병역( 兵 役 ) 기해 5월에 왜선( 倭 船 ) 3천 척이 비인( 庇 仁 )ㆍ해주( 海 州 ) 등지에 들어와 약탈하였다. 지봉유설( 芝 峯 類 說 ) 그때에 충청 감사가 보고하기를, 왜인이 비인현에 침입하였는데, 도두음곶 만호( 都 豆 音 串 萬 戶 ) 김성길( 金 成 吉 )은 술에 취해서 저항하지 못한 채 스스로 물에 뛰어 들었고, 그의 아들이 힘껏 싸우다가 빠져 죽었습니다. 하였고, 황해 감사( 黃 海 監 司 )는 보고하기를, 절제사( 節 制 使 ) 이사검( 李 思 儉 ) 등이 해주 연평곶( 延 平 串 )에서 적의 실정을 살피다가 적에게 포위당했는데, 적이 말하기를, 우리는 조선을 보고 온 것 이 아니라 중국으로 가다가 식량이 떨어져서 이곳에 이르렀다. 하기에, 사검이 쌀 닷 섬, 술 열 병을 주었으나 포위를 풀지 않기에 쌀 40섬 을 주었더니 비로소 풀고 갔습니다. 고 하였다. 상왕과 임금이 유정현ㆍ박은ㆍ조말생ㆍ이명덕( 李 明 德 )ㆍ허조( 許 稠 ) 등을 불러서 저들의 빈틈을 타서 대마도( 對 馬 島 )를 섬멸하고 적이 제 소 굴로 돌아가는 것을 맞아서 칠 계책을 의논하였다. 모두 말하기를, 저들의 빈틈을 타서 칠 것이 아니라 마땅히 적이 돌아갈 때를 기다려서 칠 것입니다. 하였으나,유독 조말생이 말하기를, 빈틈을 타서 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왕이 이르기를, 만일 그들을 소탕하지 않으면 매양 침략을 당할 것이니, 옛날 한 고조( 漢 高 祖 )가 흉노( 匈 奴 )에게 욕을 본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저들의 빈틈을 타서 치고, 그 처 자들을 잡아 가지고 제주( 濟 州 )로 군사를 돌려 적이 돌아가는 것을 기다려 다시 맞아 공격하여 그들의 배를 빼앗아 불사르고,장사하러 온 자 들과 배에 남아있는 자들을 아울러 구속하되 명령을 거역하는 자가 있으면 모두 무찔러서 우리의 약함을 보이지 말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뒷날의 걱정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하였다. 곧 장천군( 長 川 君 ) 이종무( 李 從 茂 )를 삼군 도체찰사( 三 軍 都 體 察 使 )로 삼아서 중군( 中 軍 )을 거느리게 하고, 우박( 禹 博 )ㆍ이숙묘( 李 叔 畝 )ㆍ황의 ( 黃 義 )를 중군 절제사( 中 軍 節 制 使 )로, 유습( 柳 濕 )을 좌군 도절제사( 左 軍 都 節 制 使 )로, 박초( 朴 礎 )ㆍ박실( 朴 實 )을 좌군 절제사( 左 軍 節 制 使 )로,이 지실( 李 之 實 )을 우군 도절제사( 右 軍 都 節 制 使 )로, 김을지( 金 乙 知 )ㆍ이순몽( 李 順 蒙 )을 우군 절제사( 右 軍 節 制 使 )로 삼아 경상ㆍ전라ㆍ충청 세 도 의 군함을 거느리고 왜적이 돌아가는 길을 맞이할 즈음, 6월 초파일에 각도의 군함이 함께 견내량( 見 乃 梁 )에 모여 대기하기로 약속하였다. 또 호조 참의 조치( 曹 致 )를 황해 체핵사( 黃 海 體 覆 使 )로 삼아서 모든 장수의 일을 늦추거나 기회를 잃은 자를 사찰하고,영의정 유정현을 삼도 도 통사( 三 道 都 統 使 )로, 참찬 최윤덕( 崔 潤 德 )을 삼군 절제사( 三 軍 節 制 使 )로, 사인 오선경( 吳 先 敬 )과 군자시정 곽존중( 郭 存 中 )을 종사관( 從 事 官 )으 로 삼았다. 이준록( 彝 尊 錄 ). 아래도 모두 같다. 이달 기사일에 떠날 때 상왕과 임금이 한강정( 漢 江 亭 ) 북쪽에 거둥하여 전송하고 안장ㆍ말ㆍ활ㆍ화살ㆍ옷ㆍ갓ㆍ신 등을 주었다. 경인일에 이종무가 아홉 절제사를 거느리고 거제( 巨 濟 ) 마산포( 馬 山 浦 )에서 떠났다가 바다 가운데서 바람이 일어 돌아와 거제에 닿았으니, 배가 227척 이요, 군사가 1만 7천 2백 85명이었다. 하번갑사패( 下 番 甲 士 牌 )ㆍ별시위패( 別 侍 衛 牌 ) 및 수성군( 守 城 軍 )ㆍ영속( 營 屬 )ㆍ재인( 才 人 )ㆍ무자[ 水 尺 ]ㆍ한량( 閑 良 )ㆍ인민( 人 民 )ㆍ향리( 鄕 吏 )ㆍ일수( 日 守 )와 양반 중에 배를 탈 줄 아는 군정( 軍 丁 )이 있거든 모두 종군하라 명하였다. 65일 간 먹을 식량을 준비했다. 계사일에 배 십여 척이 먼저 대마도에 이르니, 적이 바라보고는 본도( 本 島 대마도)의 사람이 이익을 얻어 서 돌아온다 하여 주육을 갖추고 기다렸다. 대군( 大 軍 )이 뒤를 이어 이르러 두지포( 豆 知 浦 )에 닿자 적이 넋을 잃은 채 도주하고 다만 오십여 명이 맞이하여 싸우다가 패해서 식량과 물건을 모두 버리고 달아나 험한 곳으로 들어갔다. 먼저 귀화한 왜인 지문( 池 文 )을 보내어 글로 도도웅와( 都 都 熊 瓦 )에게 깨우쳤으나 답이 없었다. 이준록 병조 판서 조말생에게 명하여 도도웅와에게 글을 보내 깨우쳤으니 그 글의 대략에 이르기를, 대마도는 애당초 경상도의 계림( 鷄 林 )에 예 속되어 본래 우리나라 땅이었음이 문적에 실려 있어 뚜렷이 상고할 수 있다. 다만 그 땅이 매우 적고 또 바다 가운데에 있어서 오가는데 불편하므로 백성이 살지 않았던 것이다.이에 왜노( 倭 奴 ) 중에 제 나라에서 쫓겨나 갈 곳이 없는 자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들어 소굴을 삼아 간간이 우리나라에 몰래 들어와 평민을 노략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항상 도도웅와의 아비 종정무( 宗 貞 茂 )가 우리의 덕의( 德 義 )를 사모 하여 정성을 바치던 것을 생각해서 너희들의 신사( 信 使 )를 맞이하여 관( 館 )을 정해서 머무르게 하였고,또 너희들의 생활이 어려움을 생각 연려실기술 제3권 세종조 고사본말( 世 宗 祖 故 事 本 末 ) 왜( 倭 )를 치던 병역( 兵 役 ) 박홍신 53

54 하여 상선의 통례를 허락하여 경상도의 곡식이 대마도로 건너가는 수량이 해마다 몇 만석이나 되었었다. 이제 뜻밖에 너희들이 은덕을 잊 고 의리를 저버려 스스로 앙화의 시초를 만들기로, 이제 변방 장수에게 명하여 섬을 에워싸서 항복하기를 기다렸는데, 오히려 미욱하게 고 집을 피우고 깨닫지 못하는구나.섬 가운데의 땅은 모두 산과 뫼와 바위들이어서 곡식을 심을 수 없으므로 다만 틈을 타서 몰래 나와 남의 재산과 곡식을 도둑질하여 그 죄악이 극도에 달하였다. 또 너희들은 다만 고기를 잡아 팔아서 생계를 삼았는데 이제 와서는 너희들 스스 로가 살길을 끊고 말았으니, 이런 생업을 잃고서는 앉은 채 죽기를 기다릴 뿐이리라.만일 일조에 뉘우쳐 모두 와서 항복한다면 도도웅와에 게는 좋은 벼슬을 주고 후한 녹을 내릴 것이며, 대관( 代 官 ) 등도 역시 넉넉히 돌보아 줄 것이며, 나머지 무리들도 아울러 우리 백성과 같 이 대우할 터이니, 이것이 곧 너희들이 스스로 새롭게 되는 길이며 생계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다. 하였다. 국조보감 훈련 판관( 訓 鍊 判 官 ) 최기( 崔 岐 )를 보내어 이종무에게 글을 내렸다. 예로부터 군사를 일으켜 적을 친다는 것은 그 뜻이 죄를 책하는 데 있는 만큼 많이 죽여야 함은 아니다. 배도( 裵 度 )가 채( 蔡 )를 친 것이나 조빈( 曹 彬 )이 촉 나라에 항복 받은 일이 모두 역사에 실려 있어 뚜렷 이 볼 수 있으니, 오직 경은 나의 지극한 생각을 잘 짐작하여 그들로 하여금 항복하기를 권유하되,오히려 은덕을 잊고 의리를 저버려 몰래 우리 경계에 들어와 군사와 인민을 죽이고 노략하는 자는 잡는대로 베어서 큰 법을 바로 잡을 것이며, 전일부터 우리의 덕의( 德 義 )를 사모하 여 우리 경계에 살고 있는 자는 이내 여러 고을에 나누어 두어 옷과 식량을 배급하여 그 삶을 이루게 하라. 하였다. 국조보감 우리 군사가 길을 나누어 수색하여 크고 작은 적의 배 129척을 빼앗아 그 중에서 쓸만한 것 20여 척을 골라 두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워 버렸다. 또 적의 집 1천 9백 39호를 태우며, 1백 14명의 머리를 베고, 21명을 사로잡았으며, 중국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포로된 자 남녀 1백 31명을 얻었고, 밭에 있는 곡식을 베었다.포로로 잡은 중국사람에게 물어서 섬 속 백성이 매우 주렸고 또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비록 부 자라도 한두 말의 쌀을 지니고 달아났을 뿐이므로 오랫 동안 에워쌌다면 그들이 반드시 주려 죽을 것임을 알고서 곧 목책( 木 柵 )을 훈내곶( 訓 乃 串 )에 설치하여 오가는 길목을 막아 오랫 동안 머무를 뜻을 보였다. 유정현이 종사관( 從 事 官 ) 조의후( 趙 義 煦 )를 보내어 승첩을 고하자, 3품 이상이 수강궁( 壽 康 宮 )에 나아가 축하하였다. 이종무 등이 두지포( 豆 知 浦 )에 머물어서 날마다 부하 장수들을 풀어서 적을 수색하며 다시 적의 집 68호와 배 15척을 불사르고 적의 머리 아홉을 베며 중국인 15명과 우리나라 사람 8명을 얻었다. 기해일에 이로군( 尼 老 郡 )에 이르러 삼군으로 하여금 길을 나누어 육지에 내려서 그 들과 한번 싸우고자 좌우군을 재촉하였다.먼저 내려간 좌군 절제사 박실( 朴 實 )이 적과 서로 만났는데 적이 험한 곳에 의거하여 복병하였으므 로 우리 군사가 패하여 편장( 偏 將 ) 박홍신( 朴 弘 信 )ㆍ박무양( 朴 茂 陽 )ㆍ김해( 金 該 )ㆍ김희( 金 喜 ) 등이 전사하였다. 박실이 군사를 거두어 돌아와 배에 오르자 적이 추격하여 죽은 우리군사가 일백 몇십 명이나 되었다. 우군 절제사 이순몽( 李 順 蒙 )과 병마사( 兵 馬 使 ) 김효성( 金 孝 誠 )이 힘써 막아 싸웠으므로 그제서야 적이 물러갔다. 우리 중군은 끝내 육지에 내리지 않았다. 도도웅와( 都 都 熊 瓦 )는 우리 군사가 오래도록 머물까 두려 워하여 글을 보내어 군사를 물리고 강화할 것을 빌고, 또 말하기를, 7월 사이엔 항상 큰 바람이 있으니 대군은 오래 머물지 마시오. 하였 다. 7월 병오일에 이종무 등이 수군을 이끌고 거제로 돌아왔다. 상왕이 상호군 오익생( 吳 益 生 )에게 명하여 법주( 法 酒 )를 가지고 가서 위로하였 다. 경술일에 이종무를 찬성으로 삼고, 나머지도 모두 승급을 시켰으며, 전사자에 대해서 부사( 副 使 ) 이상에게는 곡식 여덟 섬을 주고 군관 ( 軍 官 )에게는 다섯 섬, 군정( 軍 丁 )에게는 석 섬씩을 주었다. 벼랑에 떨어져 죽은 군사들이 1백 몇십 명이나 되었다. 이종무가 돌아오는 길에 밀양부( 密 陽 府 ) 지동( 池 洞 ) 앞길을 지날 때에 박실의 딸이 집에 있으면서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울며 여종으로 하여 금 길가에 나가서 발을 돋우고 서서, 우리 아버지는 어디에 계신가. 하고 묻게 하였다. 종무가 말고삐를 잡고 길게 탄식하며 소매로 얼굴 을 덮고 지나면서 말하기를, 이건 나의 죄가 아니요. 장수들이 경솔하게 나아간 과오이니, 원컨대 아가씨는 나만을 허물하지 마시오. 하였 다. 길가는 사람과 이웃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이준록 8월에 상왕과 임금이 이종무 등을 낙천정( 樂 天 亭 )에서 영접하여 위로하고 친히 장수들에게 잔치를 베풀 때, 상왕이 상호군 조치( 趙 )에 게 명하여 김성길( 金 成 吉 )은 패전한 죄로 문초하여 베고, 이사검( 李 思 儉 )은 군사를 늦춘 죄로 벼슬을 빼앗고 황해도 수군에 충당하였다. 조 야첨재 [주D-001]법주(( 法 酒 ) : 궁중에서 만든 술. 연려실기술 제3권 세종조 고사본말( 世 宗 祖 故 事 本 末 ) 왜( 倭 )를 치던 병역( 兵 役 ) 박홍신 54

55 성호사설 제19권경사문( ( 經 史 門 )정) 대마도( ( 征 對 馬 島 ) 박홍신 :37 정 대마도( 征 對 馬 島 ) 내가 어느 친구 집의 묵은 상자 속에서 얻은 국조정토록( 國 朝 征 討 錄 ) 은 지금 선비로서는 얻어본 자가 아마 드물 것이다. 오래되면 더욱 민멸( 泯 滅 )될까 염려하여 그 중 번잡한 것은 깎아 없애고 대강 적어 두기로 한다. 세종( 世 宗 ) 원년 기해( 己 亥 1419)년 여름 5월 신해일( 辛 亥 日 )에 왜( 倭 )가 비인현( 庇 仁 縣 )으로 침입해 왔다. 얼마 후에 윤득홍( 尹 得 洪 )과 평 도전( 平 道 全 ) 등이 왜를 백령도( 白 翎 島 )에서 만나 사로잡고 목베어 죽이니 남은 자는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도전은 본래 왜인( 倭 人 )이었는 데 이보다 앞서 대마도( 對 馬 島 )에 밀통하기를 조선( 朝 鮮 )서 너희들을 대우하는 것이 점점 박해진다. 만약 침략한다고 으름장을 놓으면 반드 시 옛날 대우처럼 할 것이다. 했다. 이때에 이르러 도전은 병마사( 兵 馬 使 )를 도와 싸우게 되었는데, 힘껏 싸우지 않았으므로 평양( 平 壤 )으 로 유배( 流 配 )되었다. 그러므로 대마도를 정벌하자는 의론이 일어났는데 모두들 적이 돌아간 후에 하자. 하였으나, 오직 병조판서 조말생( 趙 末 生 )만이 이 빈 틈을 타서 하는 것이 좋다. 하였다. 그리하여 장천군( 長 川 君 ) 이종무( 李 從 茂 )에 명하여 삼군 도체찰사( 三 軍 都 體 察 使 )를 삼아 중군( 中 軍 )을 거느리게 하고 우박( 禹 博 )ㆍ박성양( 朴 成 陽 )ㆍ황몽( 黃 蒙 )이 보좌하게 했다. 유습( 柳 濕 )은 좌군( 左 軍 )을 거느리는데 박초( 朴 楚 )ㆍ박실( 朴 實 )이 보좌했다. 이지실( 李 之 實 )은 우군( 右 軍 )을 거느리는데 이천( 李 )ㆍ이순몽( 李 順 蒙 )이 보좌했다. 3군( 軍 )의 임명이 끝난 다음 경상( 慶 尙 )ㆍ 전라( 全 羅 )ㆍ충청( 忠 淸 ) 3도( 三 道 )의 병선( 兵 船 ) 2백여 척과 갑사( 甲 士 )ㆍ별패( 別 牌 )ㆍ시위( 侍 衛 )ㆍ선군( 船 軍 ) 등 1만 7천여 명을 출동시켜 11 일 뒤인 임술( 壬 戌 )에 이종무( 李 從 茂 ) 등이 작별을 고하는데 임금이 친히 백사정( 白 沙 亭 )에서 전송하였다. 또 포로가 되어 포구( 浦 口 )까지 끌려 온 왜인 5백 90명 중에서 흉악한 자만을 목베라. 고 명하니 죽임을 당한 자와 물로 들어가 자살한 자가 1백 3명이나 되었다. 평망고( 平 望 古 ) 등은 나눠서 내읍( 內 邑 )에 두었는데, 망고는 도전의 아들이다. 6월 임진일( 壬 辰 日 )에 이종무는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50일 동안 먹을 군량을 배에 싣고서 바로 대마도를 향해 달려갔는데, 왜는 멀리 바라 보고 저희 군사가 돌아오는 것으로 여겨 금( 金 )을 가지고 와서 맞이하였다. 우리 대군이 잇달아 오르자 왜는 도망쳐 험한 지대로 들어갔다. 우리는 그들의 군함( 軍 艦 ) 1백 40여 척을 빼앗고 1백 50급( 級 )을 참수( 斬 首 )했으며, 불태운 여사( 盧 舍 )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왜의 포로가 되었던 한인( 漢 人 ) 남녀 1백여 명을 사로잡아서 책문( 柵 門 )을 설치하고 오래 머물러 있을 계획을 하니, 왜는 일기도 상송포( 一 岐 島 上 松 浦 )에 구원을 청하고 복병( 伏 兵 )을 설치하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좌군( 左 軍 ) 박실( 朴 實 )은 적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높은 곳을 향해 습격하려 하였는데, 저들의 복병이 갑자기 일어나 싸움이 불리하게 되어 편장( 褊 將 ) 박홍신( 朴 弘 信 ) 등은 그만 죽고 말았다. 왜가 우리 군사를 추격하자, 우리 군사는 언덕에서 떨어져 죽은 자와, 힘껏 싸우다 죽은 자가 1백 십여 명이나 되었다. 이순몽 등이 죽을 힘 을 다해 싸우면서 대항하였으므로 왜가 후퇴했는데 중군은 배에서 내려오지도 않았다. 도주( 島 主 ) 도도 웅와( 都 都 熊 瓦 )가 편지를 올려 수호 ( 修 好 )를 요청하면서, 7월에는 태풍( 颱 風 )이 있으므로 대군이 여기에 오래 멈추어 있음은 마땅치 않습니다. 하였다. 이리하여 7월 병오( 丙 午 )에 이종무는 주사( 舟 師 )를 인솔하고 돌아왔다. 모든 장수에게는 각각 공로에 따라 작급( 爵 級 )을 하사하고 임오일( 壬 午 日 )에 임금께서 친히 동정 장사( 東 征 將 士 )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하였다. 내가 상고해 보니 대마도라는 섬은 고금이 다 말하기를, 본래 신라( 新 羅 )에 소속되었다. 고들 하나 삼국사( 三 國 史 )에는 반드시 그런 말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섬에는 곡식 심을 만한 비옥한 토지가 없고 오직 귤과 탱자와 남초( 南 草 )만이 가장 잘 되니 그 지방 사람은 상업 을 주로 삼고 먹을 것은 조선( 朝 鮮 )만 쳐다볼 뿐이다. 이로 본다면 칼자루는 우리에게 있는 셈이다. 진실로 은혜로 어루만져 주고 위엄으로 복종하도록 하여 처우하기를 그 도( 道 )로 했다면 채찍을 꺾어 없애고도 그들을 제압할 수 있었을 것 인데 어찌하여 군사를 수고롭히는 데까지 이르렀는가? 우리나라에는 창과 칼이 날카롭지 못하고 편함만 생각하는 것이 습관으로 되었으니, 갑자기 힘껏 싸우기를 도모한다 해도 외국을 상대해서 꼭 뜻대로 될 수 없다. 이 싸움에도 좌군( 左 軍 )은 불리하게 되었고 우군( 右 軍 )만이 힘껏 대항한 셈이다. 이종무( 李 從 茂 ) 등은 끝내 중군만을 고수하여 수레에 앉아 패망을 관망하였으니 죄는 죽여도 용서할 수 없는데 돌아와서는 벼슬과 상이 먼저 그에게 미쳤으니, 이렇고야 어찌 백성에게 나라를 위해 죽 으라고 권장할 수 있겠는가? 성호사설 제19권경사문( 經 史 門 )정 대마도( 征 對 馬 島 ) 박홍신 55

56 [주C-001]정 대마도( ( 征 對 馬 島 ) : 대마도를 정벌함. 대마도는 일본 구주( 九 州 )와 우리나라 사이에 있는 섬. 임진왜란( 壬 辰 倭 亂 ) 이전에는 도주( 島 主 )가 우리나라 봉작( 封 爵 )을 받았음. 類 選 卷 9 上 經 史 篇 7 論 史 門. [주D-001]남초(( 南 草 ) : 담배. 본래 남방( 南 方 )에서 수입되었다 하여 남초라고 했다 함. 성호사설 제19권경사문( 經 史 門 )정 대마도( 征 對 馬 島 ) 박홍신 56

57 세종 1년 기해(1419, 영락 17) 6월 29일(임인 임인) 편장 박홍신( ( 朴 弘 信 ) :34 이로군의 접전에서 박실이 많은 군사를 잃었으나 마침내 적이 물러나 수호를 빌다. 이종무 등이 배를 두지포( 豆 知 浦 )에 머무르게 하고 날마다 편장( 褊 將 )을 보내어 육지에 내려 수색하여 잡고, 다시 그 가옥 68호 와 배 15척을 불사르고, 도적 9급( 級 )을 베고, 중국인 남녀 15명과 본국인 8명을 얻었다. 적이 밤낮으로 우리 군사 막기를 생각하 므로, 26일에 종무가 전진하여, 이로군( 尼 老 郡 )에 이르러 3군에 명령하여, 길을 나누어 육지에 내려, 한 번 싸우고자 좌우 군사들 을 독려하여 먼저 하륙케 하니, 좌군 절제사 박실( 朴 實 )이 적과 서로 만났다. 적이 험한 곳에 모여 복병하고 기다렸다가, 실이 군 사를 거느리고 높은 곳에 올라 싸우려 할 그 순간에, 졸지에 복병이 일어나 앞으로 돌격해 와서, 우리 군사가 패전하여, 편장 박 홍신( 朴 弘 信 ) 박무양( 朴 茂 陽 ) 김해( 金 該 ) 김희( 金 熹 )들이 전사하였으므로, 실이 군사를 거두어 다시 배에 오르니, 적이 추격하 여 왔다. 우리 군사 중에 전사하거나 언덕에서 떨어져 죽은 자가 백 수십 인이나 되었다. 우리 절제사 이순몽( 李 順 蒙 )과 병마사 김효성( 金 孝 誠 )들이 또한 적을 만나 힘껏 싸워 막으니, 적이 그제야 물러갔고, 중군은 마침내 하륙하지 아니하였다. 도도웅와는 우리 군사가 오래 머물까 두려워서 글을 받들고 군사를 물려 수호( 修 好 )하기를 빌면서 말하기를, 7월 사이에는 항상 풍파의 변이 있으니, 오래 머무름이 옳지 않습니다. 하였다. 원전 2 집 324 면 분류 *군사-전쟁( 戰 爭 ) / *외교-왜( 倭 ) 세종 1년 기해(1419, 영락 17) 6월 29일(임인) 편장 박홍신( 朴 弘 信 ) 57

58 세종 5년 계묘(1423, 영락 21) 8월 26일(갑술 갑술) 박언충 현귀명 현귀명 심도원에 게 관직을 제수하다 :24 세종 5년 계묘(1423, 영락 21) 8월 26일(갑술) 박언충 현귀명 심도원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박언충( 朴 彦 忠 )으로 경상좌도 병마 도절제사를, 현귀명( 玄 貴 命 )으로 좌군 총제( 左 軍 摠 制 )를, 심도원( 沈 道 源 )으로 호조 참의를, 정귀진( 鄭 龜 晉 ) 으로 형조 참의를, 정흠지( 鄭 欽 之 )로 판사재감사( 判 司 宰 監 事 ) 지형조사( 知 刑 曹 事 )를, 유박( 柳 博 )으로 사헌 집의( 司 憲 執 義 )를 삼았다. 원전 2 집 554 면 분류 *인사-임면( 任 免 ) 세종 12년 경술(1430, 선덕 5) 4월 24일(계사) 판우군부사 변계량의 졸기 판우군부사 변계량이 죽었다. 계량의 자는 거경( 巨 卿 )이요, 호는 춘정( 春 亭 )이니, 밀양부( 密 陽 府 ) 사람 옥란( 玉 蘭 )의 아들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4살에 고시대귀( 古 詩 對 句 )를 외고 6살에 비로소 글귀를 지었다. 14살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고 15살에 생원 시험에 합격하였으며, 17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교 주부( 典 校 主 簿 )에 보직( 補 職 )되어 여러 번 옮겨 사헌 시사( 司 憲 侍 史 )가 되고, 성균 악정( 成 均 樂 正 )을 지나 직 예문관( 直 藝 文 館 ) 사재 소감 겸 예문 응교( 司 宰 少 監 兼 藝 文 應 敎 ) 예문 직제학( 藝 文 直 提 學 )을 지 냈다. 정해년 중시( 重 試 )에서 을과( 乙 科 )의 제1등으로 뽑혀서 특별히 예조 우참의에 임명되고, 기축년에 예문관 제학에 승진하였 다. 을미년에 크게 가물어서 임금이 심히 근심하니, 계량이 아뢰기를, 본국에서 하늘에 제사하는 것은 비록 예( 禮 )가 아니라고 말할 것이나, 일이 이미 박절하오니 원단( 圓 壇 )에 기도하옵소서. 하니, 곧 계량에게 글을 지어 제사지내라고 명하였다. 정유년에 예문 대제학에 임명되고 이듬해에 예조 판서로 옮겼다가 이내 의 정부 참찬으로 옮겼다. 그 다음 해에 왜놈들이 우리 나라 남쪽 변경을 침략하여 죽이고 약탈함이 많았는데, 태종 대왕이 계량의 말을 취하여 정벌( 征 伐 )하기로 하였다. 병오년에 판우군 도총제 부사가 되었다가 이에 이르러 죽으니, 나이 62살이었다. 부고를 듣자 사흘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유사에게 명하여 치제( 致 祭 )하고 부의와 관( 棺 )을 하사하며, 동궁도 부의로 쌀과 콩을 아울러 30석을 내리었다. 시호를 문숙( 文 肅 )이라 하니, 배우기에 부지런하고 묻기를 좋아함이 문( 文 )이요, 마음을 굳게 잡고 일을 결단함 이 숙( 肅 )이다. 계량이 문형( 文 衡 )을 거의 20년 동안이나 맡아서 대국을 섬기고 이웃 나라를 교제하는 사명( 詞 命 )이 그 손에서 많 이 나왔고, 시험을 주장하여 선비를 뽑는 데 한결같이 지극히 공정하게 하여, 전조( 前 朝 )의 함부로 부정( 不 正 )하게 하던 습관을 다 고쳤으며, 일을 의논하고 의문을 해결하는 데에 이따금 다른 사람의 상상 밖에 나오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문( 文 )을 맡은 대 신으로서 살기를 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귀신을 섬기고 부처를 받들며, 하늘에 절하는 일까지 하여 하지 않는 바가 없으니, 식자들이 조롱하였다. 처음에 철원 부사 권총( 權 總 )의 딸에게 장가들었다가 버리고, 또 오씨( 吳 氏 )에게 장가들었다가 죽고, 또 이 촌( 李 村 )의 딸에게 장가들어 몇 달 만에 버리고, 또 도총제 박언충( 朴 彦 忠 )의 딸에게 장가드니, 아내가 있으면서 다른 아내에게 장가들었다는 일로서 유사들의 탄핵하는 바가 되었다. 마침내 아들이 없고, 비첩( 婢 妾 )의 아들이 있으니, 이름이 영수( 英 壽 )이다. 원전 3 집 233 면 분류 *인물( 人 物 ) / *왕실-사급( 賜 給 ) / *인사-관리( 管 理 ) [주D-001]문형(( 文 衡 ) : 대제학. 문종 즉위년 경오(1450, 경태 1) 7월 28일(경오) 나이가 연만하여 귀로한 자에게 달마다 음식물을 내리도록 하다 예조( 禮 曹 )에 전지( 傳 旨 )하기를, 세종 5년 계묘(1423, 영락 21) 8월 26일(갑술) 박언충 현귀명 심도원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58

59 나이 많은 사람을 존대하는 것은 고금의 통한 의리이다. 전 제학( 提 學 ) 윤상( 尹 祥 )과 전 도절제사( 都 節 制 使 ) 박언 충( 朴 彦 忠 ) 전 참판( 參 判 ) 노귀상( 盧 龜 祥 ) 전 중추( 中 樞 ) 전흥( 田 興 ) 전 부사( 府 使 ) 윤유한( 尹 柳 漢 )이 모두 나이가 찼으므로 치사( 致 仕 )하고, 시골에 돌아가 만년을 보내고 있으니, 그 도의 감사에게 하유하여 소재지의 수령으로 하여 금 백 세 노인의 예와 같이 달마다 식물( 食 物 )을 보내게 하되, 매양 사맹삭( 四 孟 朔 )을 당하여 보고하여 시행하고, 이 제부터 만일 당상관( 堂 上 官 )이 연만( 年 滿 )하여 귀로( 歸 老 )한 자가 있으면, 또한 이 예에 의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원전 6 집 264 면 분류 *윤리( 倫 理 ) / *인사-관리( 管 理 ) [주D-001]사맹삭(( 四 孟 朔 ) : 매철 첫달. 정월 4월 7월 10월. 중종 11년 병자(1516, 정덕 11) 4월 12일(계해) 한급의 어미가 아들의 원통함을 상서하니 그 처리에 대해 논의하다 한급( 韓 汲 )의 어미가 상서( 上 書 )하여 아들 급의 원통함을 호소하니, 전교하기를, 전에 강릉( 江 陵 ) 유생이 상소하여 급이 죄없음을 호소했었으나, 한급은 전에 강릉부사로 있다가, 탐장( 貪 臟 )의 죄 로 녹안( 錄 案 )하고 금고된 사람이다. 그때 의논하는 대신들이 모두 지금 만약 다시 변경한다면 뒤에 반드시 이를 본받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 하므로 드디어 다시 고치지 않은 것인데, 과연 애매하다면 비록 이미 녹안( 錄 案 )했더라도 풀어주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의 상언에 고형산( 高 荊 山 ) 황맹헌( 黃 孟 獻 ) 이세응( 李 世 應 )이 일찍이 강원도 관찰 사로 있었으니, 이 사람들을 불러 들은 말을 물러보라. 고 했었다. 하니, 고형산 등이 아뢰기를, 강릉에 갔다가 우연히 동년( 同 年 ) 친구와 만나 이야기할 즈음에 전 부사 한급이 관청 물건을 가져간 것이 아닌 데, 탐장( 貪 臟 )이란 누명을 쓰게 되어 정리( 情 理 )에 애매하게 되었다. 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자, 전교하기를, 이는 한때의 소문만이 아니라, 곧 전에 왔다갔다하면서 모두들 애매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음을 들었다. 임금으로 서 이미 그 애매함을 알았으므로 신원( 伸 冤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내일 대신들에게 수의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한급은 사람됨이 학식이 없고 성격이 교오( 驕 傲 ) 탐비( 貪 鄙 )하여, 젊어서부터 제배들에게 끼이지 못하 였다. 그러나 민활한 말재주로 간알( 干 謁 )을 잘하고 이름내기를 좋아하여 몰래 남의 손을 빌어 과거하고, 사람이 모 자라는 때를 만나 장령( 掌 令 )이 되니 더러 칭찬하는 사람이 있었다. 당상으로 승진하여 강릉부사가 되어서는 오만한 기습이 그득하여 조정의 사신( 使 臣 )을 보고도 더러는 예우( 禮 遇 )하지 않았으며, 겉으로 공정 청렴하게 백성 돌보는 뜻을 보이므로 우매한 백성들이 신임하여 모두들 어진 태수( 太 守 )라고 칭찬했었다. 일찍이 판관( 判 官 ) 유식( 柳 軾 )과 사이가 좋지 못하여 더러 유식의 비밀한 일을 드러내니, 식이 깊이 급을 원망하여 모함하려 했는데, 마침 급이 좋은 말을 팔아 받은 값과 고을에 저장했던 면포를 첩의 집으로 보내자, 식이 가만히 자기의 처남인 동지( 同 知 ) 윤희손( 尹 喜 孫 )을 교사하여 이 일을 관찰사 안윤덕( 安 潤 德 )에게 말하게 하였다. 윤덕이 그 말만 믿고 조정에 계문( 啓 聞 )하였는 데, 급이 추국( 推 鞫 )을 받으면서도 스스로 발명하지 못하여 장안( 贓 案 )에 오르니, 식견 있는 사람들은 비록 죄가 없 을 수는 없으나 탐장 죄에 걸림은 과중하다. 고 했었다. 그 뒤에 급이 딸을 강릉 유생 최수성( 崔 壽 )에게 시집보내 고서, 수성과 강릉 선비들에게 자기가 애매하게 죄를 받은 정상을 전파하여 조정에 들리게 되기를 바랐었는데, 이때 에 이르러 강릉 유생들이 과거보려고 서울에 모이게 되자, 급이 자기 집으로 맞아다 후히 대접하며 연명( 連 名 )으로 자기의 원통을 호소하도록 유도하니, 아는 사람들이 모두 간사한 짓이라고 여겼다. 진사 최세덕( 崔 世 德 ) 박언충( 朴 彦 忠 )은 곧 수성의 족속인데, 급의 지휘대로 다른 사람들의 성명을 열서( 列 書 )하여 상서한 것이고, 다른 유생들은 실지 로 몰랐었다. 급이 일찍이 박수량( 朴 遂 良 )을 초대하여 상소를 짓도록 강박하였었는데 수량이 사절하자니 급의 애걸에 세종 5년 계묘(1423, 영락 21) 8월 26일(갑술) 박언충 현귀명 심도원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59

60 핍박되고, 짓자니 당시의 공론이 두려워 강릉으로 도망하여버렸는데, 급이 듣고서 박생원이 어찌 그리 야박한가? 하였었다. 원전 15 집 157 면 분류 *사법-탄핵( 彈 劾 ) / *역사-사학( 史 學 ) [주D-001]간알(( 干 謁 ) : 청탁. 세종 5년 계묘(1423, 영락 21) 8월 26일(갑술) 박언충 현귀명 심도원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60

61 국당유고( ( 菊 堂 遺 稿 ) 박흥생( ( 朴 興 生 ) :57 형태서지 권수제 菊 堂 先 生 遺 稿 판심제 菊 堂 遺 稿 간종 활자본 간행년 1895 年 刊 권책 本 集 2권ㆍ 附 錄 1권 합 1책 행자 12행 24자 규격 (cm) 어미 上 下 三 葉 花 紋 魚 尾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도서번호 승계 古 文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8 저자 성명 박흥생( 朴 興 生 ) 생년 1374년(고려 공민왕 23) 몰년 1446년(조선 세종 28) 자 敬 夫 호 菊 堂, 菊 隱, 春 谷 본관 密 陽 특기사항 金 自 粹 의 문인, 金 訓 ㆍ 徐 ㆍ 朴 堧 등과 교유 가계도 朴 時 庸 成 均 直 講 朴 天 貴 漢 城 府 判 尹 沃 川 陸 氏 典 客 令 陸 臣 佑 의 女 국당유고( 菊 堂 遺 稿 ) 박흥생( 朴 興 生 ) 61

62 朴 興 生 忠 州 梁 氏 知 事 梁 肅 의 女 朴 仁 蕃 察 訪 朴 仁 挺 縣 監 朴 仁 碩 贈 參 判 載 寧 康 氏 左 尹 康 熙 의 女 女 金 公 根 小 尹 朴 興 居 監 察 기사전거 : 行 狀 ( 外 9대손9 宋 元 錫 撰 ) 및 事 實 錄 ( 仲 子 朴 仁 挺 追 錄 )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공민왕 갑인 洪 武 7 1 태어나다. ~ ~ ~ ~ ~ ~ ~ 金 子 粹 의 門 下 에서 수업하다. 우왕 병인 洪 武 進 士 試 에 합격하다. 공양왕 경오 洪 武 生 員 試 에 합격하다. ~ ~ ~ ~ ~ ~ ~ 驪 興 ㆍ 春 川 二 府 의 敎 授 官 이 되다. 태종 신묘 永 樂 월, 모친상을 당하다. 태종 임진 永 樂 撮 要 書 를 저술하다. 태종 계사 永 樂 월, 撮 要 書 下 編 跋 을 짓다. 세종 계묘 永 樂 세종 갑진 永 樂 ~ ~ ~ ~ ~ ~ ~ 昌 平 縣 令 이 되다. 獄 訟 을 잘 처리하여 道 內 에 이름을 떨치다. 龍 潭 亭 重 新 序 ㆍ 擬 禮 曹 請 女 服 華 制 箋 을 짓다. 부친상을 당하다. 벼슬을 그만두고 永 同 으로 돌아와 登 雲 洞 에 장사 지내다. 삼년상을 마친 후 名 利 에 뜻을 끊고 永 同 高 塘 浦 에 二 樂 堂 과 雙 淸 樓 를 짓고 이후 20여 년간 경전을 탐구하다. 監 司 申 商 ㆍ 鐵 城 君 국당유고( 菊 堂 遺 稿 ) 박흥생( 朴 興 生 ) 62

63 李 原 이 道 學 으로 선생을 추앙하다. 세종 신해 宣 德 6 58 對 句 連 珠 集 序 를 짓다. 세종 갑인 宣 德 9 61 二 樂 堂 記 를 짓다. 세종 경신 正 統 5 67 雙 淸 樓 記 를 짓다. 세종 병인 正 統 월, 卒 하다. 永 同 高 塘 馬 陰 에 장사 지내다. ~ ~ ~ ~ ~ ~ - 아들 朴 仁 蕃 이 부친상을 마친 후 저자의 詩 文 을 모아 草 卷 을 만들 다. 숙종 임술 康 熙 21 - 外 9대손 宋 元 錫 이 行 狀 을 짓다. 숙종 계해 康 熙 22 - 宋 時 烈 이 墓 表 를 짓다. 숙종 갑자 康 熙 23 - 가을, 永 同 에 花 嵓 祠 를 건립하고 神 主 를 奉 安 하다. 순조 계해 嘉 慶 8 - 宋 煥 箕 가 花 嵓 書 院 三 賢 事 實 錄 跋 을 짓다. 순조 무자 道 光 8 - 후손 朴 禧 錫 이 문집을 간행하다. 고종 임신 同 治 11 - 후손 朴 祥 浩 가 문집을 새로 편집하다. 고종 갑오 光 緖 20 - 봄, 族 人 朴 重 浩 가 서울에서 撮 要 書 2 編 을 간행하다. 5월, 이조판서로 추증되다. 고종 을미 光 緖 21-7월, 후손 朴 重 浩 가 永 同 雙 淸 樓 에서 二 樂 堂 遺 稿 를 合 編 하여 문집을 중간하다. 기사전거 : 行 狀 ( 宋 元 錫 撰 ) 및 墓 表 ( 宋 時 烈 撰 )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의 詩 文 은 死 後 몇 년 있다가 아들 朴 仁 蕃 에 의해 정리되었다. 朴 仁 蕃 은 삼년상을 마친 후 哀 慕 의 여가에 부친의 시문을 모아 손수 편집하여 草 卷 을 만들고, 그 후 金 守 溫 의 序, 徐 居 正 의 詩 集 跋 (1456년) 및 徐 가 지은 行 狀 을 붙여 10여 編 의 遺 稿 를 成 編 하 였다. 草 本 그러나 이 草 本 은 간행되지 못하고 병란을 겪는 동안 거의 산일되어 현재 전하지 않는다. 한편 저자는 道 德 性 情 과 禮 樂 刑 政 에 관한 撮 要 書 12권을 저술했으나 10권은 없어졌다. 1612년 5대손 朴 以 謙 이 남아 있는 저자의 시문과 撮 要 書 를 三 巖 書 舍 에 보관하였다. 그 후 후손 朴 禧 錫 이 亂 草 로 쓰인 저자의 시문 약간 수를 얻었으나 故 紙 가 殘 缺 되어 거의 읽을 수 없어, 校 讎 를 한 다음 諸 族 과 의 논하여 1828년 活 字 로 印 行 하였다. 초간본 이 초간본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그 뒤 초간본이 널리 유포되지 못하고 교수가 정 밀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1872년 후손 朴 祥 浩 가 居 喪 중에 家 藏 된 二 本 을 참고하여 문집을 새로 편집하고, 아들 朴 鳳 으로 하여금 書 寫 하게 하였다. 즉 原 稿 의 詩 文 은 類 別 로 편차하고 雜 著 諸 篇 은 撮 要 書 에서 뽑아 붙였으며, 그 나머지 附 錄 도 모두 次 序 가 있 게 편집하여 成 編 하였다. 1873년 봄에 朴 鳳 이 奇 正 鎭 에게 序 를 받고 간행하려 하였으나 朴 鳳 의 죽음으로 인하여 간행되지 못하고, 저자의 弟 朴 興 居 의 二 樂 堂 遺 稿 를 끝에 附 集 해 두었다. 1894년 봄에 族 人 朴 重 浩 가 서울에서 撮 要 書 2 編 을 간행한 다음 또 詩 集 의 重 刊 을 계획하고 이때 二 樂 公 詩 文 을 合 附 할 것을 應 敎 朴 喜 容 과 상의하였으나 마침 세상이 어수선하여 중단되었다. 이듬해 1895년 7월에 朴 重 浩 가 다시 族 人 朴 相 欽 ㆍ 朴 來 奎 등의 협조를 받아 일찍이 후손 朴 相 浩 가 저자의 문집을 彙 次 한 바에 따라 考 訂 하고, 응교 朴 喜 容 이 二 樂 堂 詩 文 을 合 附 하려던 뜻에 따라 菊 堂 과 二 樂 堂 이 休 息 한 舊 宅 인 永 同 雙 淸 樓 에서 二 樂 堂 遺 稿 를 合 編 하여 목활자로 중간하였다. 중간본 이 본은 현재 국립중 앙도서관(승계 古 文 ), 서울대 규장각( 奎 15673)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895년 雙 淸 樓 에서 간행된 重 刊 本 으로 국립중앙도서관장본이다. 이 중 合 編 된 二 樂 堂 遺 稿 는 영인에서 제외하였 다. 국당유고( 菊 堂 遺 稿 ) 박흥생( 朴 興 生 ) 63

64 기사전거 : 行 狀 ( 宋 元 錫 撰 )ㆍ) 追 感 錄 ( 아들 朴 仁 蕃 撰 )ㆍ) 遺 稿 追 敍 (5대손 朴 以 謙 撰 )ㆍ) 遺 稿 刊 行 跋 ( 宋 穉 圭 撰 )ㆍ) 遺 稿 重 刊 序 ( 徐 相 雨 撰 )ㆍ) 二 樂 堂 遺 稿 序 ( 宋 近 洙 撰 )ㆍ) 遺 稿 後 識 ( 후손 朴 祥 浩 撰 )ㆍ) 後 敍 ( 후손 朴 正 欽 撰 )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本 集 2권ㆍ 附 錄 1권 합 1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수에는 1894년에 쓴 徐 相 雨 의 遺 稿 重 刊 序 와 1873년에 쓴 奇 正 鎭 의 遺 稿 序 및 目 錄 이 실려 있다. 권1은 詩, 권2는 文, 권3은 附 錄 이다. 그리고 권 앞에 각각 目 錄 이 첨부되어 있다. 권1에는 詩 體 別 로 四 言 雜 詠 1 題, 오언고시 1제, 칠언고시 1제, 오언절구 5제, 칠언절구 43제, 오언율시 23제, 칠언율시 15제가 실려 있다. 저자의 詩 는 1423년 昌 平 縣 令 으로 있을 때 광주에 귀양온 申 秤 과 次 韻 한 詩 등 약간 편을 제외하고는, 末 年 에 관직을 그만두 고 永 同 高 塘 浦 의 二 樂 堂 과 雙 淸 樓 로 退 居 한 이후에 지은 것이 대부분이다. 이 시기에 永 同 縣 監 李 達 과 수창한 次 韻 詩 가 가장 많으 며 原 韻 이 첨부되어 있다. 이 밖에 諸 賢 들과 교유하며 次 韻 한 詩 등이 있다. 또한 七 言 律 詩 聯 珠 集 은 1431년에 古 人 의 對 句 를 모아 지은 1242 聯 의 長 篇 으로서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권2에는 문체별로 書 2편, 記 2편, 序 2편, 文 4편, 箋 1편, 狀 2편, 跋 1편, 雜 著 1편이 실려 있다. 記 는 벼슬을 그만두고 弟 朴 興 居 와 함께 退 居 한 永 同 高 塘 浦 의 二 樂 堂 과 雙 淸 樓 의 記 文 이다. 二 樂 과 雙 淸 은 山 水 二 樂 과 風 月 雙 淸 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文 은 祭 文 으로 先 妣 ㆍ 先 考 祭 文 이 1편씩 실려 있다. 撮 要 書 下 編 跋 은 1413년에 지은 것으로 陰 陽 性 理 를 논한 撮 要 書 의 성격 을 엿볼 수 있다. 雜 著 는 居 官 箴 戒 로서 관직에 있는 자가 경계해야 할 사항을 모은 것이다. 권3은 附 錄 으로서 15편의 글이 실려 있다. 行 狀 ㆍ 墓 表 ㆍ 追 感 錄 ㆍ 事 實 錄 을 비롯하여 詩 集 跋 ㆍ 遺 稿 刊 行 跋 그 밖에 花 嵒 書 院 三 賢 事 實 錄 跋 ㆍ 請 旌 贈 疏 ㆍ 旌 閭 事 實 記 등 저자에 관계된 글이다. 권미에는 1888년 후손 朴 祥 浩 가 쓴 遺 稿 後 識 와 1895년에 후손 朴 正 欽 이 쓴 後 敍 가 실려 있다. 이어 乙 未 梧 秋 日 雙 淸 樓 重 刊 이란 刊 記 가 있다. 필자 : 金 圻 彬 국당유고( 菊 堂 遺 稿 ) 박흥생( 朴 興 生 ) 64

65 익재난고 제4권 시( ( 詩 ) 안렴사( ( 按 廉 使 ) 박대양( ( 朴 大 陽 )을) 전송하다. 무술 년 :57 안렴사( 按 廉 使 ) 박대양( 朴 大 陽 )을 전송하다 무술년 칠순 된 늙은이 손자 하나 두고서 / 七 旬 殘 叟 有 孤 孫 해변의 마을로 좌천되어 있다네 이때 보림 좨주( 寶 林 祭 酒 )가 남원( 南 原 )을 맡았었다. / 謫 宦 區 區 傍 海 村 경연에 같이 있던 옛 친구 생각하면 / 若 念 書 筵 舊 知 己 축천정 위에서 온화한 말을 해주겠지 / 丑 川 亭 上 賜 溫 言 익재난고 제4권 시( 詩 ) 안렴사( 按 廉 使 ) 박대양( 朴 大 陽 )을 전송하다. 무술년 65

66 익재난고 제2권 오두백( ( 烏 頭 白 )으로) 박인간( ( 朴 仁 幹 )을) 전송하다 :23 오두백( 烏 頭 白 )으로 박인간( 朴 仁 幹 )을 전송하다 까마귀 생김새 칠처럼 검다고/ 烏 之 生 兮 黑 如 漆 사람이 볼 때마다 모두 미워하지만/ 人 之 見 兮 心 共 嫉 가련한 연단의 서러움 풀어주려고/ 可 憐 解 爲 燕 丹 羞 하룻밤을 애쓰고 나니 머리가 희어졌다네/ 一 昔 含 冤 成 白 頭 나는 일찍이 네가 태양 속에 있다는 것도 괴이하게 생각하고/ 我 嘗 怪 汝 日 中 處 또 금모가 너를 부렸다는 말도 허망하게 여겼더니/ 又 怪 金 母 常 使 汝 지금에야 비로소 재잘거리는 새들 중에/ 今 乃 知 啾 蹌 萬 類 中 일편단심 너 같은 새 없다는 것 깨달았네/ 一 點 丹 心 無 汝 同 지저귀면서 날아왔다 또 날아가는데/ 啞 啞 飛 來 復 飛 去 반포하느라 우거진 숲 속에서 온갖 고생하네/ 反 哺 林 間 受 辛 苦 들어오면 효자요 나가면 충신이니/ 入 爲 孝 子 出 忠 臣 아아 너는 새 모양을 한 사람이네/ 嗟 哉 汝 是 禽 頭 人 세상 사람 누가 너의 행동 따르겠느냐/ 世 人 與 汝 誰 能 伍 차라리 사람의 옷을 네가 입어라/ 願 把 襟 裾 換 毛 羽 [주C-001]오두백(( 烏 頭 白 ) : 까마귀 머리가 희어진다는 뜻. 전국 시대 연 태자 단( 燕 太 子 丹 )이 진( 秦 ) 나라에 인질로 잡혀가 있 을 때, 연단( 燕 丹 )이 고국에 돌려보내 주기를 요구하자, 진왕( 秦 王 )이 말하기를 "까마귀 머리가 희어지고 말 머리에 뿔이 나면 보 내 주겠다." 하므로 연단이 하늘을 쳐다보고 탄식하던 끝에, 까마귀 머리가 갑자기 희어지고 말 머리에도 뿔이 생겨나므로 진왕 이 어쩔 수 없이 연단을 보냈다는 고사이다. 史 記 刺 客 傳 贊 注 燕 太 子 [주D-001]가련한 희어졌다네 : 연단( 燕 丹 )은 연 태자 단( 燕 太 子 丹 )을 가리킴. 자세한 것은 주 59-1) 오두백( 烏 頭 白 ) 참조. [주D-002]네가 부렸다 : 금모( 金 母 )는 선녀( 仙 女 )인 서왕모( 西 王 母 )를 지칭하는 말인데, 태양 속에 있다는 삼족오( 三 足 烏 )가 항시 서왕모를 위해 먹을 것을 가져다 준다는 데서 온 말이다. 史 記 司 馬 相 如 傳 의 "다행히 삼족오가 있어 부리게 되었다."는 주에 "삼족오는 청오( 靑 烏 )인데, 주로 서왕모를 위해 먹을 것을 가져다 준다." 하였다. [주D-003]반포(( 反 哺 ) : 까마귀 새끼는 자란 뒤에, 어미 까마귀에게서 얻어먹은 만큼의 먹이를 다시 늙은 어미 까마귀에게 물어 다 먹인다 하여, 까마귀의 별칭을 반포조( 反 哺 鳥 ) 또는 효조( 孝 鳥 )라 한 데서 온 말이다. 本 草 慈 烏 部 에 "까마귀가 처음 나면 60일 동안은 어미가 먹이를 물어다 먹이고, 자라나면 새끼가 어미에게 먹이를 60일 동안 물어다 먹인다." 하였다. 익재난고 제2권 오두백( 烏 頭 白 )으로 박인간( 朴 仁 幹 )을 전송하다 66

67 고려사절요 제24권충숙왕( ( 忠 肅 王 )을묘) 2년, 원 연우 2년 박인간( ( 朴 仁 幹 ) :11 봄 정월에 동당시( 東 堂 試 )를 고쳐서 응거시( 應 擧 試 )로 하였다. 원 나라에서 사자를 보내 와서, 조서로 귀ㆍ천의 복색을 정하였다. 박인간( 朴 仁 幹 ) 등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인간 등 3명을 보내어 원나라의 과거에 응시하게 하였는데, 모두 낙제하였다. 인간은 그대로 머 물러서 상왕을 모시었다. 정묘일에 왕자 정( 楨 )이 출생하였다. 2월에 밀직부사 조운경( 趙 雲 卿 )을 원 나라에 보내어 절일을 축하하게 하였다. 낭장 권석( 權 碩 )을 보내어 동녀( 童 女 )를 상왕저( 上 王 邸 )에 바쳤다. 중장( 重 房 )에서 공주와 왕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중 2천 명에게 5 일 동안 연경궁에서 밥을 먹였다. 가을 7월에 삼사사 권한공을 원 나라에 보내어 황태후에게 존호 올린 것을 축하하게 했다. 9월에 공주가 원 나라에 갔다. 겨울 12월에 갑오일에 공주가 원 나라에서 훙하였다. 고려사절요 제24권충숙왕( 忠 肅 王 )을묘 2년, 원 연우 2년 박인간( 朴 仁 幹 ) 67

68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6권 밀양도호부( ( 密 陽 都 護 府 ) 박의신 :01 인물 고려 박의신( 朴 義 臣 ) 본부의 아전으로서 학문을 힘써서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을 거듭하여 공부 상서( 工 部 尙 書 )에 이르렀다. 박영 인( 朴 永 寅 ) 의신의 5대손인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문림랑 감찰어사( 文 林 郞 監 察 御 史 )에 이르렀다. 박의중( 朴 宜 中 ) 전라도 김제( 金 堤 ) 우거 ( 寓 居 ) 조 아래 자세히 나온다. 박인간( 朴 仁 幹 ) 과거에 급제하였다. 태위심왕( 太 尉 瀋 王 )을 따라 토번( 吐 藩 )에 들어갔다가 귀국하자 익찬공신 첨의평리( 翊 贊 功 臣 僉 議 評 理 )가 되었다. 본조 박위( 朴 ) 처음에 우달적( 于 達 赤 )에 보직되었다가 여러 번 벼슬을 옮겨 지문하부사( 知 門 下 府 事 )에 이르렀고 충의군( 忠 義 君 )에 봉해졌다. 4번 수령이 되고, 3번 남쪽 변경을 수비하니 구적( 寇 賊 )이 평정되어 백성이 편안했으므로 크게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당성( 唐 誠 ) 절강( 浙 江 ) 명주( 明 州 ) 사람인데, 원 나라 말기에 병란을 피하여 동으로 와서 본조 초부터 사대 이문( 事 大 吏 文 중국에 보내는 공문서)을 전담했다. 벼슬은 공안부윤( 恭 安 府 尹 )에 이르렀다. 나라에서 명하여 본부로 그 본관( 本 貫 )을 삼게 하였다. 박돈 지( 朴 敦 之 ) 과거에 급제하였고, 벼슬은 비서감( 祕 書 監 )에 이르렀다. 박언충( 朴 彦 忠 ) 고려 말기에 왕복명( 王 福 命 )을 따라 왜병을 격파하고 동 래성( 東 萊 城 )을 회복했다. 본조에 들어와서는 호조 참의를 지냈고, 지방에 나가서 경상좌도 도절제사( 慶 尙 左 道 都 節 制 使 )가 되었다. 나이 97세 에 죽었다. 박홍신( 朴 弘 信 ) 인충의 아우인데, 뜻이 크고 기개가 있으며 무예의 재간이 있다. 벼슬은 사재 감정( 司 宰 監 正 )에 이르렀다. 세종 기 해년(1419)에 좌군병마사( 左 軍 兵 馬 使 )로 대마도( 對 馬 島 ) 정벌에 종군하여 선봉으로 상륙해서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변계량( 卞 季 良 ) 자는 거 경( 巨 卿 )인데, 나이 17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은 판우군도총제부사( 判 右 軍 都 摠 制 府 事 )에 이르렀다. 세자의 스승이며 20여 년 동안 대제학 을 지냈고, 사대교린( 事 大 交 隣 )하는 글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시호는 문숙( 文 肅 )이고, 춘정집( 春 亭 集 ) 이 있다. 박중손( 朴 仲 孫 ) 과거 에 급제하여 화려하고 중요한 벼슬을 두루 역임했다. 정난공신( 靖 難 功 臣 )으로서 밀산군( 密 山 君 )을 봉하였고, 벼슬은 좌참찬에 이르렀으며, 시 호는 공효( 恭 孝 )이다. 아들 미( 楣 )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조 참의에 이르렀다. 손비장( 孫 比 長 ) 2번 과거에 급제하였다. 문명( 文 名 )이 있 으며, 벼슬은 좌부승지에 이르렀다. 신증 박건( 朴 健 ) 중손의 아들로 과거에 급제했고,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공간( 恭 簡 )이다. 박열( 朴 說 ) 과거에 급제했고,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다. 시호는 이정( 夷 靖 )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6권 밀양도호부( 密 陽 都 護 府 ) 박의신 68

69 동문선 제35권표전( ( 表 箋 )광주에서) 사례하여 올리는 표[ [ 廣 州 謝 上 表 ] 의신 :58 광주에서 사례하여 올리는 표[ 廣 州 謝 上 表 ] 윤언이( 尹 彦 頤 ) 지난 병진( 丙 辰 )년 5월에 중군( 中 軍 원수( 元 帥 ) 김부식( 金 富 軾 ))의 탄주( 彈 奏 )를 입어 칙지로 신의 관직( 官 職 )을 면( 免 )하여 양주( 梁 州 ) 방어 사( 防 禦 使 )의 직을 받아 신이 즉일로 달려갔삽고, 다음 무오( 戊 午 )년에 성은( 聖 恩 )으로 신에게 광주 목사 병마금할 관구학사 예부시랑( 廣 州 牧 使 兵 馬 鈐 管 句 學 事 禮 部 侍 郞 )을 제수( 除 授 )하옵고 부임을 독촉하옵기에 경신( 庚 申 )년 12월에 이르러 조사( 朝 謝 )하게 하여 아울러 시행하여 지금 이미 재임중이옵나이다. 좌폐( 坐 廢 )한 지 6년에 분수로 이미 만사( 萬 死 )를 달게 여겼사온대 은명( 恩 命 )을 받자와 일조에 이 몸이 다시 살아난 듯하오니, 하늘을 우러 러 말이 막히고 제 몸을 어루만져 눈물을 뿌리옵나이다. 중사( 中 謝 )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위에서 아래를 제어할 때 충성을 요구하지 않음이 없고, 신하가 임금을 섬길 때 기어이 신임을 받고자 하였으나, 반드 시 그렇게는 안 되어 때로 혹 서로 어긋남이 있었었나이다. 주공( 周 公 )은 유언( 流 言 )을 면치 못하였고 강후( 絳 侯 )는 결박을 당하였으며, 망지 ( 望 之 )는 황제의 사부( 師 傅 )였으나 마침내 독약을 마셨고,굴원( 屈 原 )은 왕의 친척이었지만 끝내 강물에 빠져 죽었사오니, 성현도 오히려 이와 같았는데 용렬하고 미세한 자야 어찌 족히 이르리이까. 신과 같은 자는 천품( 天 稟 )이 워낙 비박( 鄙 朴 )하고 천성이 치우치게 강하여, 지모( 智 謀 )가 족히 제 몸도 갈망하지 못하였사오니 학술이 어찌 나라를 빛낼 수 있사오리이까. 젊어서 일찍이 요행으로 성고( 聖 考 )께서 현량과( 賢 良 科 )의 급제를 주시옵시고 뒤에 다시 반연으로 폐하께서 요 로( 要 路 )에 발탁해 주시어 때로 혹 국정( 國 政 )에 참여하고 자주 경연( 經 筵 )에 입시( 入 侍 )하게 되었나이다. 그리하여 신의 망령된 생각에는 때 를 만났다 하여 지나치게 염려를 하고, 일을 만나면 곧 말하여, 일의 옳고 그른 것을 가리기엔 그 말을 듣거나 안 듣거나 살거나 죽거나를 돌아보지 아니하니, 선배들이 한심히 여기고 후생들이 이로써 지목하여, 온갖 중상ㆍ모략으로써 덧붙여 글을 꾸며 탄핵( 彈 劾 )의 상소가 여러 번 위에 들려 신을 죽임이 가하다 하였나이다. 인왕( 仁 王 )께서 신의 우직함을 아시오나 중론( 衆 論 )을 어쩔 수 없어 중론에 의해 먼 곳에 귀양 보내어 그 잔명( 殘 命 )을 보전케 하고자 하였사온데, 신은 폄명( 貶 命 )을 받은 날 저녁 길을 떠나던 때에도 죄를 입은 까닭을 통 알지 못하여 한갓 극도로 근심만 쌓였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중군( 中 軍 )의 상주( 上 奏 )한 바를 보니 이르기를 언이가 지상( 知 常 )으로 더불어 사당( 死 黨 사생을 같이하는 도당)을 맺어 대소사를 모두 같이 상의하였고, 지난 임자년 서행( 西 幸 )하셨을 때 글을 올려 연호( 年 號 )를 세우고 황제를 일 컫기를 청하였으며, 또 국학생들을 유인하여 전건( 前 件 ) 일을 아뢰게 하였으니, 이는 대개 대금( 大 金 ) 나라를 격노시켜 일을 내어 틈을 타서 마음대로 제 붕당 외의 사람들을 처치해서 불궤( 不 軌 )를 도모함이니, 인신( 人 臣 )의 도리가 아니다. 함이었나이다. 신이 재삼 이 상소를 읽 고 나서야 마음에 안도되었었나이다. 왜냐하면 첫째 연호 세우기를 청한 것은 임금을 높이자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라 본조( 本 朝 )에서도 태조 와 광종( 光 宗 )의 고사( 故 事 )가 있고, 비록 신라와 발해( 渤 海 )는 연호를 세웠으나 대국이 일찍이 군사를 움직인 일이 없었으며 소방( 小 邦 )이 감히 그 실책을 의논하지 못하였었는데, 어찌 이 성세( 聖 世 )에 그것을 도리어 참월( 僭 越 )한 행동이라 이르오리이까. 다음, 신이 일찍이 의논 한 죄는 있거니와 사당( 死 黨 )을 맺고 대금을 격노하게 하려 했다 함은 말이 비록 심히 크나 본말( 本 末 )이 서로 맞지 않나이다. 왜냐하면, 가 사 강적( 强 敵 )이 와서 우리 나라를 침노한다면 대개 병란( 兵 亂 )을 막기에도 겨를이 없을 터인데 어찌 틈을 타 농간을 부릴 수 있겠으며, 그 붕당이라 지목하는 자는 누구며, 처치하려는 대상은 어느 사람이리이까. 뭇사람이 화목치 않으면 싸우는 대로 패하여 제 몸도 용납할 여지가 없겠거니 어찌 마음대로 꾀를 부리오리까. 하물며 신이 대화( 大 華 )의 말에 참예하지 않았음과, 지상( 知 常 )과 의견이 일치하지 아니한 것과, 백수한( 白 壽 翰 )의 천거에 참가하지 않았음은 폐하께서 이미 통촉하시는 바이옵니다. 신이 한번 강호( 江 湖 )에 떨어진 뒤로부터 이미 여섯 번이나 한서( 寒 暑 )를 바꾸었나이다. 그 동안 녹름( 祿 廩 )이 오래 궐하고 의식을 마련하기 어려워, 친구가 모두 교제를 끊고 처자가 모두 있을 곳을 잃어, 초췌한 몰골이 앙상한 마른 가지 같고 놀란 혼백이 멍하니 술 취한 사람같고 꿈꾸는 사람 같사오니, 오늘까지 살아온 것도 오직 성지( 聖 知 )만 믿어온 덕택이옵니다. 동문선 제35권표전( 表 箋 )광주에서 사례하여 올리는 표[ 廣 州 謝 上 表 ] 의신 69

70 거듭 생각하옵건대, 신이 지극히 연약한 몸으로 서정( 西 征 )의 역( 役 )에 종군하여 제 몸을 잊고 나라를 방위했음은 의( 義 )와 분수에 당연한 일 이요, 일을 성공한 것은 다 딴사람에 인한 것이온데 무슨 근로( 勤 勞 )를 말하오리까마는, 이제 말씀을 하려 함은 감히 공이라 함이 아니요 다 만 작은 정성을 약간 피력하여 혹 성심( 聖 心 )의 일고( 一 考 )를 빌[ 乞 ]고자 함이옵나이다. 지난 을묘( 乙 卯 )년에 중군( 中 軍 )이 적( 賊 )의 양식이 다될 것을 전략( 戰 略 )으로 삼았사오나, 흉당( 兇 黨 )이 아직 항복하지 않았고, 시일이 차츰 오래되자 강의 얼음이 다 풀려서 어찌할 계책이 없었사옵기, 신이 3월에 비로소 거인( 距 堙 )을 세울 것을 발의( 發 議 )하였사오나 저지( 沮 止 )하 는 사람이 있어 시행치 못하였는데, 11월에 이르러 중군이 비로소 양명문( 楊 命 門 )에 거인을 만들면서 지병마사( 知 兵 馬 事 ) 지석숭( 池 錫 崇 )과 신( 臣 ) 언이( 彦 頤 ) 등을 시켜 번갈아 현지에 가서 흙을 얼마나 쌓을까를 검시( 檢 視 )하게 하시어, 계산하니 두어 달에 이르면 성 위에 붙여 올 라감직 하였나이다. 신이 또 전군사( 前 軍 使 ) 진숙( 陳 淑 )과 더불어 화공( 火 攻 )하기로 의정( 議 定 )하여, 판관( 判 官 ) 안정수( 安 正 脩 )로 하여금 화 구( 火 具 ) 5백여 석( 石 )을 만들게 해서 그달 9일 이른 새벽에 조언( 趙 彦 )이 만든 석포( 石 砲 )로 쏘니, 그 화염( 火 焰 )이 번개 같고 그 크기가 수 레바퀴 같은데, 적이 처음에는 또한 쫓아다니며 껐으나 날이 저물자 불기운이 크게 성하여 적이 불을 끌 수 없었고, 밤새껏 포를 쏘니 양명 문과 그에 딸린 행랑 20칸 가량과 적이 쌓아올린 토산( 土 山 )이 모두 불타 버렸나이다. 12일엔 적이 모두 궤멸( 潰 滅 )되어 인마( 人 馬 )가 드나들 만하기에 신이 곧 중군에 이르러 본말( 本 末 )을 갖추어 진술하고, 기회를 놓치지 말고 어서 공격하여 적으로 하여금 설비하지 못하게 하자 하였으나, 어떤 사람이 화를 내며 불가하다 하기에 신도 격노하여 다투었나이다. 14일에 또 전군( 前 軍 )에 이르러 급히 공격하면 적을 파할 수 있다고 의논하니,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흙쌓기를 다한 뒤를 기다려서 그때에 공격 함이 가하다. 하였으며, 적이 벌써 전에 만들었던 목책( 木 柵 )에서 방어하므로 신이 급히 공격하기를 간청하였으나 그때도 오히려 결정을 짓 지 못하였나이다. 16일에 원수( 元 帥 )가 전군에 와서 오군( 五 軍 )의 막료( 幕 僚 )들을 다 모아 놓고 의논하니, 사람마다 다 앞의 의견을 고집하였 나이다. 이날에 적이 또 겹성[ 重 城 ]을 쌓으니, 그 사세가 도저히 적을 공격함을 지체할 수 없었나이다. 이보다 앞서 지석숭이 군에 있어 역사 를 감독하던 중 신과 의견이 맞았고, 이어 부사( 副 使 ) 이유( 李 愈 )와 판관( 判 官 ) 왕수( 王 洙 )ㆍ이인실( 李 仁 實 ) 등 8명이 신의 의견에 찬동하니 이에 원수가 비로소 그 의견을 좇아 그리하기로 채택되었으며 19일에는 군사를 세 길로 갈라 쳐들어가니, 그야말로 마른 대[ 枯 竹 ]를 쪼개듯 하나도 거침과 어려움이 없었나이다. 신은 그날 중군을 전장( 專 掌 )하여 판관( 判 官 ) 신지충( 申 至 沖 )ㆍ김정황( 金 鼎 黃 )ㆍ장군 권정균( 權 正 鈞 )ㆍ 방자수( 房 資 守 ), 녹사( 錄 事 ) 임문벽( 林 文 壁 )ㆍ박의신( 朴 義 臣 ) 등과 더불어 비밀히 병력을 정비하여 일찍이 칠성문( 七 星 門 )에 이르러 나무를 쌓고 불을 지르니, 불이 난 뒤에야 적이 깨달았으나 당황하여 창졸간에 끄지 못하고, 문랑( 門 廊 ) 도합 97칸을 태웠습니다. 바라보니 훤하기에 곧장 들어가려 하였사오나 마침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오기에 군사를 거두어 영( 營 )으로 돌아왔나이다. 이튿날 새벽에 적의 괴수 정덕환( 鄭 德 桓 )ㆍ유위후( 維 緯 侯 )와 소관( 小 官 ) 4명이 살그머니 성을 빠져 나오므로 자수( 資 守 )가 부하로 하여금 잡아 영( 營 )에 이르렀고, 신이 덕환과 위 후를 원수부로 보내고, 따로 별장( 別 將 ) 김성기( 金 成 器 ) 등을 시켜 생포한 소관 2명을 거느리고 경창문( 景 昌 門 )에 가서 적을 효유( 曉 諭 )하니, 적장 홍걸( 洪 傑 )이 나와 항복하였나이다. 이날에 전군( 前 軍 )이 광덕 함원문( 廣 德 含 元 門 ) 밖에 있었는데 적이 아직도 문을 닫고 대항하여 싸우 니 걸( 傑 )이 의민( 義 民 )들과 상의하여 위원수( 僞 元 帥 ) 최영( 崔 永 )을 잡고 인하여 두 영( 領 )의 군사를 거느리고 귀순하였사오며, 그런 뒤에 적 의 대장 소황린( 蘇 黃 鱗 )ㆍ정선곡( 鄭 先 谷 )ㆍ박응소( 朴 應 素 ) 등 문무( 文 武 ) 90여 명이 서로 이어와서 항복하였고, 나머지 잡류( 雜 類 )들은 이루 셀 수가 없었나이다. 신이 자수영군사망( 資 守 領 軍 士 望 ) 이징정( 李 徵 正 )과 항적( 降 賊 ) 서효관( 徐 孝 寬 )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성에 들어가 궁궐과 창름( 倉 廩 )ㆍ부고( 府 庫 )를 봉하게 하고, 징정으로 하여금 그 쇳대[ 鑰 匙 ] 6ㆍ7궤를 거두어 영에 바치도록 하였사온데, 한편 들으니 좌 군( 左 軍 )이 북문으로부터 성중에 들어가 군사들을 놓아 대부( 大 府 )의 재물과 비단을 닥치는 대로 뒤져 가지게 한다기에, 신이 의신( 義 臣 )을 보내어 만류했으나 듣지 않음으로 다시 정균( 正 鈞 )을 보내어 만류하여 대부( 大 府 )가 그제서야 완전하게 되었나이다. 이에 신이 신의 아들 양 ( 讓 )을 원수처에 보내어 그 사실이 있던 날자를 보고하니, 원수가 그때야 중군에 이르러 다시 이인실ㆍ이식( 李 軾 ) 등에게 명하여 궁궐ㆍ창름 ㆍ부고를 봉하고 인하여 표( 表 )를 갖추어 주달( 奏 達 )하였나이다. 이상이 그 대략이옵고, 모두 갖추어 진술하기는 어렵사옵나이다. 그때를 당해서야 신은 나라 일에 작은 공을 세웠다 생각하였사온데, 어찌하 여 그 뒤에 손바닥 뒤집듯이 갑자기 무사( 誣 辭 )를 얽어매어 마침내 이 어리석은 몸으로 하여금 원통하고 억울함에 빠지게 하였사옵나이까. 생각하옵건대, 평소에 저지른 바는 역시 미신( 微 臣 )의 탓인가 하옵나이다. 신이 엎드려 소식( 蘇 軾 )의 폄직( 貶 職 )된 때에 임금에게 올린 표를 읽으니, 신이 먼저 서주( 徐 州 )에 재임할 때 하수( 河 水 )가 성안에 범람하여 성이 거의 함몰할 지경이었는데 밤낮으로 막아 지켜 우연히 안전 함을 얻었고, 또 일찍이 기주( 沂 州 ) 백성 정비( 程 )를 선용( 選 用 )하여 그로 하여금 흉당( 凶 黨 )을 현상( 懸 賞 )으로 잡게 하여, 그 모반한 요괴 한 도적인 이탁( 李 鐸 )ㆍ곽진( 郭 進 ) 등 17명을 잡을 수 있었사오나, 바라옵건대 혹시 요행히 공과 허물이 서로 면제( 免 除 )될 수 있었으면 하 였사오나 자첨( 子 瞻 )의 호일( 豪 逸 )한 재주로도 오히려 이렇듯 잔소리로 변명하거든, 하물며 언이( 彦 頤 )의 외로운 몸으로 어찌 입을 다물고 잠 잠하오리까. 하도 사정의 궁박( 窮 迫 )함이 이렇사온대 우러러 진술함을 어찌 그만둘 수 있나이까. 또한 김정( 金 精 )은 일찍 형리( 刑 吏 )의 문초 동문선 제35권표전( 表 箋 )광주에서 사례하여 올리는 표[ 廣 州 謝 上 表 ] 의신 70

71 를 받았으나 일곱 달 만에 다시 현관( 顯 官 )으로 복직되었고, 추충( 推 忠 )은 같이 강남( 江 南 )으로 귀양갔으나 3년 만에 옛 벼슬로 돌아갔는데 오직 신만이 불초하여 세상과 어긋남이 많아서 이름이 이미 가혹한 법조( 法 條 )에 걸려 있으니 사람들이 다투어 뜬 비방을 일삼아 죄를 논하 기에 쉴 날이 없어 지금까지 몇 해를 겪어 오는 중이옵니다. 감히 자살하여 심사를 밝히기를 아끼었으리까마는 진실로 성군( 聖 君 )이 알뜰히 도 그립사와 오래도록 제법 욕을 참고 잔 목숨을 보전하면서 억울함이 퍼지기만 고대하였사온대 뜻밖에도 이제 황자( 皇 慈 )께옵서 특히 큰 도 량을 베푸시어 신의 몹시 궁한 꼴을 딱하게 여기시고, 신의 둘이 없는 마음을 불쌍히 여기셔서, 여러 번 유사( 有 司 )를 시켜 훈유( 訓 諭 )하옵시 고, 먼 귀양살이에서 고충( 孤 忠 )을 다시 일으켜 주옵시니, 우러러 새 교화( 敎 化 )에 훈도되어 버젓이 평민 속에 끼였사오니 끝내 악명( 惡 名 )을 씻도록 다시 후일을 기약하옵나이다. 이는 대개 지극한 인( 仁 )은 밖이 없고, 두터운 덕은 거친 것도 포용하사, 개와 말에게도 혹 개유( 蓋 惟 )의 은혜를 적시우고, 비녀와 신짝도 차 마 버리지 못하시는 생각으로, 뭇사람들의 노여움이 번갈아 일어나는 때에 신의 여생( 餘 生 )을 구해 주시고, 몇 해 동안 유락( 流 落 )하던 중에 서 신의 쇠약한 몸을 거두어 주시어, 특별히 새로 벼슬을 제수하시고 옛 녹( 祿 )으로 다시 돌림이옵나이다. 무망( 誣 罔 )이 다 풀림에 해가 뜨려 하자 음집[ 蔀 屋 ]도 밝아지는 듯, 시들고 썩었던 몸이 회생되어 봄이 벌써 돌아와 단비가 내리는 듯하니 진실로 이 몸이 목석( 木 石 ) 같은 무지한 물건에 비할 것이 아니온대 감히 천지ㆍ조화의 사사로운 은혜를 모르오리까. 장한 기운이 이미 쇠하 여 평소의 옛모습에 방불치는 못하오나, 단심( 丹 心 )만은 아직도 있사오니, 맹세코 만절( 晩 節 )의 구치( 驅 馳 )를 다하여 비록 구학( 溝 壑 )을 메울 지라도 감히 결초보은( 結 草 報 恩 )을 잊사오리까. [주D-001]주공(( 周 公 )은) 못하였고 : 주 무왕( 周 武 王 )이 죽고 성왕( 成 王 )이 어리므로 성왕의 숙부( 叔 父 ) 주공( 周 公 )이 섭정 ( 攝 政 )하였는데, 주공의 형제인 관숙( 管 叔 )과 채숙( 蔡 叔 )이, 주공이 장차 어린 임금을 해칠 것이다. 라고 유언( 流 言 )을 퍼뜨렸 으므로 주공은 쫓겨났다가 3년 만에 돌아왔다. [주D-002]강후(( 絳 侯 ) 하였으며 : 한( 漢 ) 나라 강후 주발( 周 勃 )은 여씨( 呂 氏 )의 난을 평정하고 문제( 文 帝 )를 세운 공이 있 었는데, 뒤에 모반( 謀 反 )한다는 무고( 誣 告 )를 입었다가 곧 풀렸다. [주D-003]망지(( 望 之 ) 마셨고 : 한 원제( 漢 元 帝 )의 태부( 太 傅 ) 소망지( 蕭 望 之 )는 소인의 참소로 옥에 들어가게 되자 독약 을 먹고 자살하였다. [주D-004]굴원(( 屈 原 ) 죽었사오니 : 전국 시대에 굴원( 屈 原 )은 왕을 간( 諫 )하다가 쫓겨나서 자살하였다. 동문선 제35권표전( 表 箋 )광주에서 사례하여 올리는 표[ 廣 州 謝 上 表 ] 의신 71

72 고려사절요 제10권 인종 공효대왕 2( 仁 宗 恭 孝 大 王 二 ) 의신( ( 義 臣 ) :55 갑자 22년(1144), 송 소흥 14년ㆍ금 황통 4년 봄 정월에 금 나라에서 태부감 소예( 蕭 隷 )를 보내와서 생신을 하례하였다. 친히 원구( 圓 丘 )에 제사하였다. 친히 적전( 籍 田 )을 갈았다. 왕은 따비를 다섯 번 밀고, 여러 왕족과 삼공은 일곱 번 밀고, 상서와 여러 경[ 列 卿 ]은 아홉 번 밀었다. 궁으로 돌아와서 사면령을 내리고, 여러 신하들이 표를 올려 하례하였다. 2월에 호부 상서로 치사한 허재( 許 載 )가 졸하였다. 허재는 도필리( 刀 筆 吏 문부( 文 簿 )만을 처리하는 아전) 출신으로서 청백으로 이름이 있 었고, 구성( 九 城 )의 난 때에 중군 녹사로 길주( 吉 州 )를 지키고 있었는데, 여진이 와서 공격하여 성을 굳게 방비하였는데, 수개월 동안 공격하 여 성이 거의 함락하게 되어 다시 겹성[ 重 城 ]을 쌓고 항거하니, 여진이 비로소 물러갔다. 그 공로로 감찰 어사에 임명되었으나, 배우지 않고 재주가 없어 이자겸ㆍ척준경에게 붙어서 드디어 재상 자리에 올랐다. 두 사람이 패하게 되자, 간관이 그 죄를 극도로 말하여, 그 견책으로 좌 천되어 풍주( 豐 州 )를 맡게 하다가, 임기가 되어 병부 상서로 임명하고 곧이어 치사하게 하니, 간관이 논박하였다. 때마침 서해도( 西 海 道 ) 안 찰사가 아뢰기를, 허재가 풍주에 있을 때 정무의 업적이 있으니 버릴 수 없습니다." 하여, 드디어 호부 상서에 임명하고 치사하였다. 여러 신하들과 대관전( 大 觀 殿 )에서 잔치하고, 말 한 필씩을 하사하였다. 조서를 내리기를, 척준경( 拓 俊 京 )이 비록 신하로서의 도리를 잃었으나, 사직을 보호한 공이 있으니 검교 호부 상서를 제수함이 옳다." 하였다. 수십 일 만에 등창이 나서 곡주( 谷 州 )에서 죽었다. 그의 조상은 본래 곡주의 아전이었는데, 준경이 빈천하여 배우지 못하고 무뢰배와 교유하며 서리가 되려고 하였으나 되지 못하였다. 숙종( 肅 宗 )이 계림공( 鷄 林 公 )이 되니 그 부( 府 )에 종자( 從 者 )가 되어 드디어 추밀원 별가 ( 樞 密 院 別 駕 )가 되고, 구성( 九 城 )의 난리에 공이 있어 현달하게 된 것이다. 조서를 내려, 평민으로서 효도하고 우애하며 농사에 힘쓰는 자는 납세와 부역을 면제하게 하였다. 여름 5월에 김돈중( 金 敦 中 ) 등 26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돈중은 부식( 富 軾 )의 아들이다. 처음에 제2등으로 하려던 것을 왕이 그 아버지를 위안하기 위해서 1등으로 올리고 궁내 시종( 宮 內 侍 從 )에 속하게 했는데, 돈중이 나이는 젊고 기품이 날카로웠다. 뒤에 대궐 뜰에서 행하는 섣 달 그믐날 밤 나례( 儺 禮 ) 때에 촛불로 견룡( 牽 龍 ) 정중부( 鄭 仲 夫 )의 수염을 불사르니, 중부가 손으로 돈중을 치고 욕을 하였다. 부식이 노하 여 왕에게 고하고 중부를 결박지어 때리려 하였으나, 왕이 중부의 사람됨을 비상히 여겨서 도망쳐 모면하게 하니, 마침내 돈중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중부는 해주( 海 州 ) 사람으로, 눈동자가 모지고 이마가 넓으며 살결이 희고 수염이 아름다웠으며, 신장이 7척( 尺 )이 넘었다. 이전 에 그 고을에서 군적을 올릴 때에 중부에게 봉비( 封 臂 관아에서 급한 명령을 전할 때 팔뚝에 끈으로 단단히 매고 종이로 봉하는 일)하여 서 울로 보냈는데, 재상 최홍재( 崔 弘 宰 )가 그를 보고 특이하게 여겨서 공학금군( 控 鶴 禁 軍 )에 넣어 주어 왕의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게 되었다. 가을 7월 경신일에 왕자 탁( 晫 )이 탄생하였다. 9월에 기두군( 旗 頭 軍 ) 나신( 羅 信 )이 제 자식을 칼로 죽였으므로 기시( 棄 市 )하였다. 겨울 10월에 백좌도량을 선경전에서 3일 동안 설치하고, 중 3만 명에게 밥을 먹였다. 친히 남녀 노인에게 음식을 먹이고, 효자ㆍ순손ㆍ의부ㆍ절부와 환( 鰥 )ㆍ과( 寡 )ㆍ고( 孤 )ㆍ독( 獨 )과 고칠 수 없는 병자들에게 차등 있게 물 품을 내렸다. 왕이 몸소 다니며 효자를 찾아 보고서 친히 행실을 묻고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11월에 좌사 낭중( 左 司 郞 中 ) 박의신( 朴 義 臣 )을 금 나라에 보내어 생신의 하례를 사례하고, 위위 소경( 衛 尉 少 卿 ) 고영부( 高 瑩 夫 )는 신정을 하례하게 하였다. 12월에 왕이 금 나라 임금이 동경으로 행차하였다는 말을 듣고, 비서감 곽동순( 郭 東 珣 )을 보내어 문안하게 하고, 소부 소감 김귀부( 金 龜 符 )는 방물을 바치게 하고, 호부 시랑 최자영( 崔 子 英 )은 만수절을 하례하게 하였다. 김정순( 金 正 純 )을 상서 우복야로 삼고, 한유충( 韓 惟 忠 )을 참지정사로, 왕충( 王 冲 )을 추밀원사로, 박정유( 朴 挺 )를 추밀원 부사로 삼았다. 고려사절요 제10권 인종 공효대왕 2( 仁 宗 恭 孝 大 王 二 ) 의신( 義 臣 ) 72

73 고려사절요 제10권 인종 공효대왕 2( 仁 宗 恭 孝 大 王 二 ) 의신( 義 臣 ) 73

74 조선왕조실록-박강생 :54 태종 5년 을유(1405, 영락 3) 2월 6일(임신) 행차시 의장을 준비 못한 병조 정랑 박강생을 순금사에 가두었다가 곧 석방하다 병조 정랑( 兵 曹 正 郞 ) 박강생( 朴 剛 生 )을 순금사( 巡 禁 司 )에 가두었다가 곧 석방하였다. 의정부에서, 강생이 임금이 거동하는 날에 의장( 儀 仗 )을 미쳐 갖추지 못하였음을 아뢰었기 때문이다. 원전 1 집 318 면 분류 *사법-행형( 行 刑 ) / *사법-탄핵( 彈 劾 ) 태종 8년 무자(1408, 영락 6) 2월 4일(계미) 세자의 경사 도착 소식을 전한 서장관 박강생 등에게 쌀 콩을 내려주다 진위사( 陳 慰 使 )의 서장관( 書 狀 官 ) 박강생( 朴 剛 生 ) 통사( 通 事 ) 장홍수( 張 洪 壽 )에게 각각 쌀 콩 20석( 石 )을 내려 주었다. 박강생 등이 경사( 京 師 )로부터 돌아와서, 세자( 世 子 )가 경사( 京 師 )에 도착한 뒤에 황제께서 접대하는 것이 매우 넉넉하고 후하다고 갖추 아뢰니, 임금이 기뻐하여 이 상사( 賞 賜 )가 있은 것이었다. 원전 1 집 429 면 분류 *왕실-사급( 賜 給 ) / *외교-명( 明 ) 태종 8년 무자(1408, 영락 6) 10월 16일(경인) 민무구를 옹진진에 민무질을 삼척진에 옮겨 두다. 의정부와 삼성의 상소문 명하여 민무구를 풍해도( 豐 海 道 ) 옹진진( 甕 津 鎭 )에, 민무질을 강원도( 江 原 道 ) 삼척진( 三 陟 鎭 )에 옮겨 두었다. 의정부 좌정승( 議 政 府 左 政 丞 ) 성석린( 成 石 璘 ) 등이 상서하여 말하기를, 무구 무질의 불충한 죄는 일국( 一 國 )의 신민( 臣 民 )이 모두 들어서 아는 바입니다. 지난번에 신 등이 두번이나 백관을 거느리 고 그 죄를 바루기를 청하였사온데, 전하께서 훈친( 勳 親 )인 까닭으로 인하여 차마 갑자기 법에 의해 처치하지 못하시고 수령( 首 領 )을 보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무구 등은 전하의 재생시킨 은혜를 생각지 않고 붕음( 朋 淫 ) 방자( 放 恣 )하여 개전( 改 悛 )하는 바가 없습니다. 근일에 대간( 臺 諫 )이 소( 疏 )를 올려 법에 따라 시행하기를 여러 번 청하였사온데, 전하께서 이미 그 죄를 아시고 도 곧 유윤( 兪 允 )하지 않으시니, 신 등은 두렵건대, 간악한 자가 징계되는 바가 없어서 왕법( 王 法 )이 문란해질까 염려됩니다. 엎 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지공( 至 公 )한 도( 道 )를 넓히셔서 한결같이 대간의 청을 따라 밝게 그 죄를 바루시어 길이 만세( 萬 世 ) 인신( 人 臣 )의 경계를 삼으소서. 하였고, 사헌부 대사헌( 司 憲 府 大 司 憲 ) 박은( 朴 )이 상서하여 말하기를, 엎드려 교서( 敎 書 )를 살피옵건대, 상벌( 賞 罰 )을 공정하게 하는 것은 내가 마땅히 할 일이요, 충성( 忠 誠 )하고 순실( 純 實 )하여 두 마음이 없는 것은 신하가 감히 힘쓰지 않으랴? 하셨으니, 크시도다 성교( 聖 敎 )여! 실로 만세의 자손( 子 孫 ) 신서( 臣 庶 )의 교 훈이 될 것입니다. 천하 국가의 치란( 治 亂 )과 흥망( 興 亡 )은 항상 상벌( 賞 罰 )의 당부( 當 否 )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전하 께서 이미 지공( 至 公 )한 것으로 자처( 自 處 )하셨으니, 군신( 群 臣 )으로서 누가 감히 감격하여 충성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오직 불충 한 신하 무구 무질 등만 죄악이 하늘에 닿았는데도 아직 마음을 고치지 않으니, 이른바 외로운 병아리와 썩은 쥐는 호랑이가 먹지 않는다. 는 것입니다. 비록 그 고기로 회( 膾 )를 친다 하더라도 어찌 족히 나라 사람의 분( 憤 )을 풀 수 있겠습니까? 정부( 政 府 ) 대간( 臺 諫 )이 일찍이 여러 번 상소하여 그 죄를 바루기를 청하였사온데, 전하께서는 왜 곧 베어서 천위( 天 威 )를 베풀어 대소 신민( 大 小 臣 民 )으로 하여금 상벌( 賞 罰 )의 지공 무사( 至 公 無 私 )함을 효연( 曉 然 )히 알게 하지 않으십니까? 대개 그 불충한 죄는 천 지( 天 地 )가 용납하지 않는 것이고, 신인( 神 人 )이 함께 분( 憤 )하게 여기는 것이오니, 군신( 群 臣 )의 청을 기다리지 않고 베는 것이 가합니다. 군신( 群 臣 )이 굳이 청하여도 전하께서는 오히려 대의( 大 義 )로 결단하지 못하시고, 죄인으로 하여금 세월을 도둑질하여 연장해 가면서 본래 계획했던 땅에서 안민( 安 眠 )케 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성상( 聖 上 )의 뜻은 갑자기 법에 의해 처치하는 조선왕조실록-박강생 74

75 것이 인정( 人 情 )에 차마 행할 수 없는 데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관숙( 管 叔 )은 형인데 주공( 周 公 )이 베었어도 성인( 聖 人 )이 되기에 해롭지 않았고, 건성( 建 成 )은 맏이인데 태종( 太 宗 )이 제거하였어도 현주( 賢 主 )가 되기에 해롭지 않았으니, 옛날의 성현( 聖 賢 )은 어찌 불인지심( 不 忍 之 心 )이 없었겠습니까? 형제( 兄 弟 )의 변( 變 )에 처해서도 오히려 사은( 私 恩 )으로 대의( 大 義 )를 폐하지 못 하거늘, 하물며 이 척리( 戚 里 )의 흉인( 凶 人 )은 죄( 罪 )가 차고 의( 義 )가 끊어져서 결코 용서할 도리가 없는 것이겠습니까? 또 상벌 이 어긋나게 되면 간사한 것이 반드시 일어나는 것이니, 이는 고금( 古 今 )의 통환( 通 患 )입니다. 지난날 회안( 懷 安 )의 역모( 逆 謀 )는 법( 法 )에 베임을 용서할 수 없고, 이거이( 李 居 易 )의 말은 죽어도 남는 죄가 있사온데, 전하께서 법을 굽혀 은혜를 펴서 포용 보전 ( 包 容 保 全 )하시어 오늘날에 이르렀으니, 비록 예전에 없는 성덕( 盛 德 )의 일이기는 하나, 사직( 社 稷 )의 대체( 大 體 )와 군신( 君 臣 )의 대의( 大 義 )에 있어서는 진실로 교서( 敎 書 )에 이른바 고식( 姑 息 )의 계책 입니다. 고식의 계책은 다만 난( 亂 )을 열어 놓을 뿐이 고 후래( 後 來 )를 권하고 징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흉악한 불충한 신하들이 징계할 바가 없어서 오늘날 접종( 接 踵 )하는 것이니 어찌 우연한 일입니까? 자고로 척리 소인( 戚 里 小 人 )이 국가의 근심이 되는데, 인군( 人 君 )이 그 악한 것을 알고도 토벌하 지 못하여 변( 變 )을 부른 것이 심히 많습니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심사 숙려( 深 思 熟 慮 )하시고, 대의( 大 義 )로 결단하여 무구 형제의 그 불충한 죄를 바루어서 상벌이 공정하다는 뜻을 보이시고, 또 회안( 懷 安 )과 거이( 居 易 ) 등 부자( 父 子 )의 소위( 所 爲 )를 살피시어 만일 혹시라도 스스로 검속( 檢 束 )하지 못하고 개전( 改 悛 )하는 마음이 없거든, 아울러 극법( 極 法 )을 행하여 넘겨다보는 소망을 근절하소서. 하였고, 형조 좌참의( 刑 曹 左 參 議 ) 윤규( 尹 珪 ) 등이 상서하여 말하기를, 신하로서 불충한 것은 천하의 대역( 大 逆 )이니, 천지가 용납하지 않고 인군이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불충한 신하 무구 무 질을 전하께서 특별히 가벼운 법을 적용하여 안처( 安 處 )하게 하셨는데, 무구 무질이 주상의 은혜를 돌보지 않고 붕당( 朋 黨 )을 끌어들이기를 평시와 다를 바 없이 하고, 또 주상의 은혜를 입어 경사( 京 師 )에 발을 붙인 것이 여러 날이었습니다. 신 등은 생각 하옵건대, 지난날에 무구 무질이 오랫동안 병권( 兵 權 )을 잡고 있어서 아름다운 것을 가로채고 은혜를 팔았으니 의탁하고 아부하 는 무리들이 악( 惡 )을 같이하여 서로 이루어서 은밀히 불궤( 不 軌 )를 도모하지나 않을까 진실로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무구 무질 이 의( 義 )로는 비록 국척( 國 戚 )이나, 죄가 십악( 十 惡 )을 범하였으니, 삼가 대명률( 大 明 律 ) 에 상고하면 팔의( 八 議 )가 있는데 십악을 범한 자는 이 율( 律 )을 쓰지 않는다. 하였고, 춘추전( 春 秋 傳 ) 에 또한 말하기를, 난신( 亂 臣 )을 베는 데는 중전( 重 典 )을 쓴다. 하였으니, 선왕( 先 王 )의 성법( 成 法 )을 전하께서 가볍게 고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일시( 一 時 )의 사은( 私 恩 )으로 만세( 萬 世 )의 대법( 大 法 )을 폐한다면, 이와 같은 무리들이 뒤를 이어 나올 것이니, 비록 날마다 주륙( 誅 戮 )을 베푼다 하더라도 어 찌 능히 제어할 수 있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유윤( 兪 允 )해 시행하셔서 왕법( 王 法 )을 보이소서. 하였고, 사간원( 司 諫 院 ) 좌사간 대부( 左 司 諫 大 夫 ) 유백순( 柳 伯 淳 ) 등은 말하기를, 신 등이 엎드려 보건대, 무구 무질 등은 죄악이 관영( 貫 盈 )하여 천주( 天 誅 )가 용서하지 못할 것이므로, 대간( 臺 諫 )이 교장( 交 章 )하여 죄를 청하기를 두 번 세 번에 이르렀으나, 전하께서 사은( 私 恩 )에 끌리어 일찍이 공의( 公 義 )로 결단하지 못하셨으니, 대 소 신료( 大 小 臣 僚 )로서 통심( 痛 心 )해 하지 않는 자 없습니다. 전( 傳 )에 말하기를, 착한 자가 상( 賞 )을 받지 못하고 악한 자가 형벌에 나가지 않으면, 비록 요순( 堯 舜 )으로 군신( 君 臣 )을 삼더라도 하루도 천하를 다스릴 수 없다. 하였으니, 이것은 만세에 바뀌지 않는 지론( 至 論 )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무구 무질을 대의( 大 義 )로 결단하여 방헌( 邦 憲 )을 바루셔서 종사 ( 宗 社 )의 무강( 無 彊 )한 계책을 삼으시고, 자손 만세의 교훈을 보이소서. 하였다. 임금이 이에 참찬의정부사( 參 贊 議 政 府 事 ) 유양( 柳 亮 ) 대사헌( 大 司 憲 ) 박은( 朴 ) 사간( 司 諫 ) 유백순( 柳 伯 淳 ) 서선( 徐 選 ) 의정부 사인( 議 政 府 舍 人 ) 박강생( 朴 剛 生 ) 검상( 檢 詳 ) 신개( 申 槪 )를 불러 명하기를, 무구 무질이 부처( 付 處 )한 땅에 있는데 어찌 붕당( 朋 黨 )을 불러들이겠는가? 무지( 無 知 )한 사람들이 고구( 故 舊 )의 정( 情 )으로 인하여 가서 보므로 거절하지 못한 것뿐이다. 내가 일찍이 교서( 敎 書 )를 반포한 것은 대중( 大 衆 )에게 이르고자 한 것이지, 다시 죄를 가하려고 한 것이 아닌데, 전후( 前 後 )의 언관( 言 官 )이 죄를 청하여 마지 않는다. 지금 국가( 國 家 )가 마침 액운( 厄 運 )을 만나 대상( 大 喪 )을 당하고, 대신( 大 臣 )이 많이 죽으며, 기후( 氣 候 )가 고르지 못하여 음복 양건( 陰 伏 陽 愆 )하고, 간혹 어둔 안개가 사방에 막히며, 혹은 대수( 大 水 )가 표류( 漂 流 )하여 오곡( 五 穀 )이 흉년들고, 또 사신( 使 臣 )이 나라에 온 지가 이미 반년이 넘었으니, 나의 근심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비록 이 일이 아니더라도 잠시도 마음 편안할 때가 없는데, 정부( 政 府 ) 대간( 臺 諫 ) 형조( 刑 曹 )가 또 소장( 疏 章 )을 올리니, 먼 땅에 옮겨 두게 하겠다. 만일 두 사람이 전의 마음을 고치지 않고 붕당( 朋 黨 )을 불러들이면, 왕래하 며 서로 만나보는 자도 반드시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이니, 그때에 이르러 다시 그 죄를 청하면 내가 마땅히 들어서 허락하겠다. 조선왕조실록-박강생 75

76 지금 경들을 불러서 밝게 말하는 것은 장차 내 마음을 편케 하려는 것이다. 마땅히 이 뜻을 몸받아 다시는 신청( 申 請 )하지 말 라. 하고, 무구 무질을 옮겨 두었다. 조금 뒤에 두 도( 道 )의 감사( 監 司 )에게 명하여, 옹진( 甕 津 ) 삼척( 三 陟 )의 수령( 守 令 )으로 하여 금 농장( 農 場 )의 마땅한 곳에 넓고 깨끗한 집을 가려서 주게 하였다. 원전 1 집 458 면 분류 *사법-행형( 行 刑 ) / *사법-탄핵( 彈 劾 ) / *정론( 政 論 ) / *변란( 變 亂 ) / *역사-고사( 故 事 ) [주D-001]십악(( 十 惡 ) : 대명률( 大 明 律 ) 에 정한 열 가지의 큰 죄( 罪 ). 즉 모반( 謀 反 ) 모대역( 謀 大 逆 ) 모반( 謀 叛 ) 악역( 惡 逆 ) 부도( 不 道 ) 대불경( 大 不 敬 ) 불효( 不 孝 ) 불목( 不 睦 ) 불의( 不 義 ) 내란( 內 亂 )을 말함. [주D-002]팔의(( 八 議 ) : 당( 唐 )나라 때에, 평의( 評 議 )하여 형벌을 감면( 減 免 )하던 여덟 가지 조건. 즉 의친( 議 親 ) 의고( 議 故 ) 의현( 議 賢 ) 의능( 議 能 ) 의공( 議 功 ) 의귀( 議 貴 ) 의근( 議 勤 ) 의빈( 議 賓 )을 말함. 조선왕조실록-박강생 76

77 騎 牛 先 生 文 集 卷 之 二 不 朝 峴 言 志 錄 박침 :46 洪 武 二 十 五 年 壬 申 秋 七 月 哉 生 魄 乙 未 卽 麗 氏 運 訖 本 祖 受 命 之 際 也 忠 臣 烈 士 之 徒 罔 有 臣 僕 之 志 自 靖 其 義 之 所 當 盡 於 是 焉 齊 登 松 都 市 東 南 峴 掛 朝 天 之 冠 戴 蔽 陽 之 笠 南 登 不 朝 峴 朴 門 壽 曰 天 命 有 歸 國 事 已 非 吾 屬 盍 各 言 其 志 成 思 齊 曰 寧 爲 王 氏 鬼 不 作 李 家 臣 曹 義 生 曰 甘 心 杜 門 死 而 後 已 林 先 味, 高 天 祥 曰 惟 當 從 者 義 田 貴 生 曰 深 入 於 山 耕 者 誰 知 李 崇 仁 曰 陶 河 之 世 嗟 己 遠 矣 李 孟 藝 曰 願 灑 淸 風 於 雷 首 柳 玽 曰 磻 溪 直 鉤 釣 周 何 意 田 祖 生 曰 欲 爲 耕 者 何 山 可 往 具 鴻 曰 伯 夷 何 人 我 何 人 禹 玄 寶 曰 去 國 季 札 終 身 可 效 趙 永 肅 曰 伯 夷 之 餓 亦 我 意 也 蔡 貴 河 曰 東 瞻 開 城 非 復 我 土 西 望 首 陽 忍 忘 一 心 李 行 曰 西 望 首 陽 忍 食 周 粟 徐 仲 輔 曰 願 不 北 面 於 新 朝 愧 二 心 之 人 邊 肅 曰 樓 宋 誰 家 子 其 操 可 慕 朴 諶 曰 願 尋 高 麗 山 申 晏 曰 新 王 非 我 王 忍 作 二 王 臣 朴 寧 曰 橫 島 安 在 欲 往 茫 然 高 天 祐 曰 願 歸 田 里 趙 安 鄕 曰 時 已 非 矣 不 去 何 求 言 訖 咸 望 松 京 曰 夷 齊 何 人 曾 餓 西 山 流 涕 而 皆 曰 可 去 矣 時 鄭 夢 周 殉 國 於 善 竹 橋 李 穡 已 見 放 韓 山 吉 再 先 去 金 烏 山 朴 門 壽 歸 排 祿 洞 田 貴 生 逃 入 絶 島 成 思 齊 退 居 於 午 正 門 外 山 谷 間 李 祐, 李 孟 藝 隱 東 鼇 川 趙 捐, 具 鴻, 元 寶 隱 松 山 曹 義 生, 林 先 味, 高 天 祥, 徐 仲 輔 皆 入 杜 門 洞 李 守 生, 鄭 煕 良, 金 震 陽, 李 種 學 並 流 遠 地 崔 瀣 隱 猊 山 柳 玽 隱 五 鳳 山 元 天 錫 隱 雉 岳 山 金 澍, 禹 玄 寶 入 中 國 崔 瀁 入 中 臺 山 趙 承 肅 歸 德 谷 全 五 倫 入 瑞 雲 山 趙 珙 遯 栗 原 金 自 粹 隱 秋 嶺 李 思 敬 隱 肅 薪 里 李 遂 生 隱 栗 里 金 若 時 隱 金 光 里 南 乙 珍 隱 古 沙 川 蔡 貴 河 隱 多 義 峴 朴 諶 隱 立 巖 趙 安 鄕 隱 泉 山 邊 肅 隱 鴨 山 朴 寧 隱 法 峴 徐 隱 積 巖 李 行 隱 醴 泉 洞 申 晏 歸 黃 衣 山 李 淪 歸 桃 灘 李 養 中 遯 廣 陵 徐 甄 遯 襟 陽 林 卓 歸 錦 城 金 英 庇 隱 古 石 山 宋 桂 歸 洪 陽 高 天 祐, 邊 龜 壽, 安 從 約, 金 俊, 尹 珪, 朴 忱, 許 錦, 裴 尙 志, 李 惟 仁, 閔 普, 文 成, 車, 嚴, 張, 金 沖 漢, 李, 金, 閔 安 富, 田 祖 生 之 徒 歸 排 祿 洞 而 皆 抗 不 二 之 節 取 其 義 而 成 其 仁 焉 當 時 士 大 夫 皆 高 尙 其 道 希 之 者 惟 恐 不 及 更 相 標 榜 爲 之 稱 號 self.toptextdiv.style.zoom=size; // self.contentview.style.display=""; //이미지가 안보이는 문제때문에 일단 보류 騎 牛 先 生 文 集 卷 之 二 不 朝 峴 言 志 錄 박침 77

78 貞 齋 先 生 逸 稿 卷 之 三 杜 門 洞 言 志 錄 박침 :44 有 明 太 祖 洪 武 二 十 五 年 壬 申 秋 七 月 哉 生 魄 丙 申 卽 麗 朝 運 訖 本 朝 受 命 之 際 也 忠 臣 烈 士 罔 有 臣 僕 之 志 自 靖 其 義 之 所 當 盡 於 是 焉 齊 登 松 都 市 東 南 峴 戴 蔽 陽 之 笠 掛 朝 天 之 冠 因 登 不 朝 峴 各 言 其 志 李 崇 仁 曰 陶 河 之 世 嗟 已 遠 矣 柳 珣 曰 磻 溪 直 鉤 釣 周 何 意 禹 玄 寶 曰 去 國 季 札 終 身 可 效 田 祖 生 曰 欲 爲 耕 者 何 山 可 往 李 孟 芸 曰 願 灑 淸 風 於 雷 首 曺 義 生 曰 甘 心 杜 門 洞 死 而 後 已 田 貴 生 曰 深 入 於 山 耕 者 誰 知 林 先 味, 高 天 祥 咸 曰 惟 當 從 其 義 趙 曰 吾 當 觀 變 死 而 後 已 蔡 貴 河 曰 東 瞻 松 京 非 復 我 土 西 望 首 陽 忍 忘 一 心 徐 輔 曰 願 不 北 面 於 朝 愧 二 心 之 人 朴 諶 曰 願 尋 高 麗 山 申 晏 曰 新 王 非 我 王 忍 作 二 王 臣 邊 肅 曰 樓 宋 誰 家 子 其 操 可 慕 也 朴 寧 曰 橫 島 安 在 欲 往 茫 然 金 沖 漢 曰 願 從 伯 夷 採 薇 西 山 高 天 祐 曰 願 歸 田 里 徐 仲 輔 曰 國 破 君 亡 余 將 焉 往 趙 安 卿 曰 時 已 非 矣 不 去 何 求 閔 安 富 曰 混 跡 農 夫 是 吾 志 也 金 明 理 曰 國 破 君 亡 吾 將 何 去 朴 門 壽 曰 天 命 有 歸 國 事 已 非 成 思 齋 曰 寧 爲 王 氏 鬼 不 作 李 家 臣 言 訖 咸 望 松 岳 曰 夷 齊 彼 何 人 曾 守 西 山 餓 流 涕 而 已 皆 曰 可 去 矣 時 鄭 夢 周 已 殉 國 於 善 竹 橋 李 穡 見 放 韓 山 金 九 容 卒 于 江 門 吉 再 先 去 金 烏 山 田 貴 生 逃 入 絶 島 朴 門 壽 歸 排 祿 洞 趙 先 隱 雲 藏 山 李 孟 芸 隱 東 鼇 川 趙 承 肅 歸 隱 德 谷 山 曺 義 生, 林 先 味, 高 天 祥 皆 入 杜 門 洞 趙 狷 隱 松 山 李 守 仁, 鄭 煕, 金 震 陽, 李 種 學 幷 流 遠 地 柳 珣 隱 五 鳳 山 金 澍, 禹 玄 寶 入 中 國 崔 瀣 退 猊 山 元 天 錫 隱 松 嶽 徐 仲 輔 入 杜 門 洞 全 五 倫 歸 瑞 雲 崔 瀁 入 中 臺 山 朴 宜 中 退 碧 骨 趙 洪 遯 栗 原 山 金 自 粹 隱 秋 嶺 李 思 敬 入 肅 薪 里 李 遂 生 隱 栗 里 金 若 時 入 金 光 里 蔡 貴 河 退 多 義 峴 趙 安 鄕 隱 泉 山 南 乙 珍 入 古 沙 川 朴 諶 隱 立 巖 邊 肅 入 居 鴨 山 朴 寧 逃 法 峴 徐 輔 遯 積 巖 李 行 退 醴 泉 洞 申 晏 歸 黃 衣 山 李 遯 桃 灘 李 瀁 中 隱 廣 陵 徐 甄 隱 矜 陽 林 卓 歸 錦 城 金 英 退 古 石 山 邊 貴 壽, 安 從 約, 高 天 祐, 金 埈, 尹, 朴 忱, 許 錦, 裴 尙 志, 具 鴻, 李 唯 仁, 成 思 齊, 閔 普 文, 車 原, 嚴 泰 憲, 金 沖 漢, 李 失 名, 金, 閔 安 富, 申 德 隣, 申 包 翅, 田 祖 生, 張 安 世, 宋 桂 之 徒 遠 遯 于 頭 流 山 下 排 祿 洞 而 皆 抗 不 二 之 節 取 其 義 成 其 仁 焉 當 時 士 大 夫 皆 高 尙 其 道 希 之 者 惟 恐 不 及 更 將 標 榜 爲 之 稱 號 儒 臣 李 大 建 撰 貞 齋 先 生 逸 稿 卷 之 三 杜 門 洞 言 志 錄 박침 78

79 고려사절요 제30권신우 1( 辛 禑 一 )판사) 박사경( ( 朴 思 敬 ) :38 을묘신우 원년(1375), 대명 홍무 8년 판사 박사경( 朴 思 敬 )이 북원에서 돌아와 태후께 아뢰기를, 나하추의 말에, '너희 나라 재상이 김의를 보내어 왕이 죽었는데 아들이 없다 고 아뢰고, 심왕을 받들어 임금을 삼기를 원하기에, 황제께서 심왕을 봉하여 너희 임금으로 삼은 것이다. 만일 전 왕에게 아들이 있다면 조정 에서 반드시 심왕을 보내지 않겠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태후가 인임을 불러 이르기를, 재상이 김의를 원 나라에 보냈다는 말은 내가 들 은 지가 오래다. 경들은 알지 못하는가." 하였다. 이전에 어떤 사람이 이인임에게 말하기를, 옛날부터 왕이 시해를 당하면 재상이 먼저 그 죄를 받는 법인데, 명 나라 황제가 만일 선왕의 변고를 들으면 반드시 문죄하는 군사를 일으킬 것이니, 공이 반드시 면하지 못할 것이다. 원 나라와 화친하는 편이 낫다." 하였다. 인임이 그렇게 여겨서 찬성사 안사기( 安 師 琦 )를 보내어 거짓으로 채빈( 蔡 斌 ) 등을 전송한다고 말하고, 비밀리에 김의( 金 義 )에게 지시하여 채빈 등을 죽여 비밀을 누설하지 못하게 하였다. 김의의 수행원이 돌아오니 인임과 사기가 후하게 대접하 였다. 박상충( 朴 尙 衷 )이 상소하기를, 김의가 명 나라 사신을 죽인 죄는 당연히 문책하여야 하는데, 재상이 김의의 수행원을 매우 후하게 대 접하니, 이것은 사기가 김의를 사주하여 사신을 죽인 형적이 이미 드러난 것입니다. 이제 만일 그 죄를 다스리지 않으면 사직의 화는 이로부 터 시작될 것입니다." 하였다. 그 상소를 오래 내려 보내지 않았다가 이때에 와서 태후가 그 상소를 도당( 都 堂 )에 내리고, 또 안사기를 옥에 가두게 하였다. 사기가 남의 집으로 도망하여 들어가서 칼을 뽑아 목을 찔렀다. 이어서 베어 죽이고 저자 거리에 목을 매달았다. 인임이 말하 기를, 김의를 원 나라에 보낸 것은, 찬성사 강순룡( 康 舜 龍 ), 지밀직( 知 密 直 ) 조희고( 趙 希 古 ), 동지밀직 성대용( 成 大 庸 ) 등이 한 짓이다." 하 여, 모두 먼 땅으로 귀양보냈다. 대개 강순룡 등이 일찍이 원 나라에서 벼슬하였기 때문이었다. 고려사절요 제30권신우 1( 辛 禑 一 )판사 박사경( 朴 思 敬 ) 79

80 조선왕조 실록 태조 총서편 박춘 :24 공민왕을 폐위키 위해 최유가 요양성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 오니 이성계 등이 쳐부수다 공민왕 13년(1364) 갑진, 처음에 여러 기씨( 奇 氏 )들이 참형( 斬 刑 )을 당하니, 기 황후( 奇 皇 后 )가 공민왕에게 감정( 憾 情 )이 있었다. 본국( 本 國 )의 최유( 崔 濡 )가 원( 元 )나라에 있으면서 장작 동지( 將 作 同 知 )가 되었는데, 여러 불량배( 不 良 輩 )들과 더불어 기 황후를 달래어 왕을 구함( 構 陷 )하 여 폐위( 廢 位 )시키고 덕흥군( 德 興 君 )인 탑사첩목아( 塔 思 帖 木 兒 )를 세워 왕을 삼으려고 하여, 요양성( 遼 陽 城 )의 군사를 내어 정월에 압록강( 鴨 綠 江 )을 건너왔다. 왕은 찬성사( 贊 成 事 ) 안우경( 安 遇 慶 ) 등을 보내어 이를 방어하였으나, 패전하여 물러와서 안주( 安 州 )를 지켰다. 왕은 찬성 사( 贊 成 事 ) 최영( 崔 瑩 )에게 명하여 날랜 군사[ 精 兵 ]를 거느리고 안주( 安 州 )로 빨리 가서 여러 군대를 지휘( 指 揮 )하게 하고, 태조에게 명하여 동북면으로부터 날랜 기병[ 精 騎 ] 1천 명을 거느리고 가게 하였다. 밀직 부사( 密 直 副 使 ) 이귀수( 李 龜 壽 ) 지밀직사사( 知 密 直 司 事 ) 지용수( 池 龍 壽 ) 판도 판서( 版 圖 判 書 ) 나세( 羅 世 )와 안우경( 安 遇 慶 )은 좌익( 左 翼 )이 되고, 판개성( 判 開 城 ) 이순( 李 珣 ) 삼사 좌사( 三 司 左 使 ) 우제( 禹 ) 밀직사( 密 直 使 ) 박춘( 朴 椿 )과 태조는 우익( 右 翼 )이 되고, 최영은 중군( 中 軍 )이 되어 행군하여 정주( 定 州 )에 이르렀다. 태조는 여러 장수들이 패전하여 물러나온 것을 보고 그들이 겁내고 나약하여 힘써 싸우지 않은 것을 말하니, 여러 장수들이 그를 꺼리었다. 이때 적병이 이미 수주 ( 隨 州 )의 달천( 川 )에 둔쳤는데, 여러 장수들이 태조에게 이르기를, 내일의 싸움에는 그대가 혼자 이를 맡으시오. 하니, 태조는 여러 장수들이 자기를 꺼림을 알고 조금 근심하는 기색이 있었다. 이튿날 적병은 3대( 隊 )로 나누어 오매, 태조는 가운데 있고, 수하( 手 下 )의 늙은 장수 두 사람을 좌군( 左 軍 )과 우군( 右 軍 )으로 삼아, 각기 그 1대( 隊 )를 대적하게 하여 용기를 내어 적을 쳤다. 태조의 탄 말이 진창[ 泥 濘 ]에 빠져서 심히 위태로왔는데, 말이 힘을 떨쳐 뛰어서 나오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놀라며 이상히 여겼다. 태조가 적장 두서 너 사람을 쏘고 드디어 적병을 크게 부수었다. 태조가 늙은 장수 두 사람을 바라보니, 두 사람이 칼을 빼어 함부로 적병을 치고 있었다. 적병 은 이미 패하여 달아났는데, 다만 먼지가 공중을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원전 1 집 5 면 분류 *인물( 人 物 ) / *인사( 人 事 ) / *왕실( 王 室 ) / *역사( 歷 史 ) / *외교( 外 交 ) 조선왕조 실록 태조 총서편 박춘 80

81 고려사절요 제27권공민왕 2( 恭 愍 王 二 ) 박춘 :22 임인 11년(1362), 원 지정 22년 안우ㆍ안우경이 개선하여 행궁으로 나아가 왕을 뵙고자 중문으로 들어가려 하니, 김용이 문지기로 하여금 그의 머리를 몽둥이로 치게 하 였는데, 안우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세 번이나 자기가 찬 주머니를 가리키면서 크게 소리치기를, 잠깐 참아라. 주상 앞에 나가서 주머 니에 든 글을 바치고 나서 죽음을 받겠다." 하였으나, 몽둥이를 가진 자가 다시 쳐서 죽여 뜰 아래로 끌어내렸다. 왕은 이 일을 미처 알지 못 하고 전지를 내려 이르기를, 너희들이 맘대로 정세운을 죽여서 몸과 머리가 따로 떨어지게 하였다. 이제 너희를 베지 않는 것은 큰 공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였다. 안우의 주머니에 있는 글이란, 김용이 안우 등에게 주어, 정세운을 죽이라." 한 글이었다. 김용은 제 조카 김림 ( 金 林 )이 음모를 누설할까 두려워 먼저 죽였다. 김용이 왕에게 아뢰기를, 안우 등이 제 마음대로 주장을 죽인 것은 전하를 왕으로 여기지 않은 소치이오니, 그 죄를 용서할 수가 없나이다." 하고 품하니, 전지를 내려 방을 붙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안우 등은 불충하여 제 마 음대로 정세운을 죽였는데, 안우는 이미 처단되었다. 김득배ㆍ이방실을 잡는 자가 있으면 3급을 건너뛰어 쓰리라" 하고, 대장군 오인택( 吳 仁 澤 ), 어사중승( 御 史 中 丞 ) 정지상( 鄭 之 祥 ), 만호( 萬 戶 ) 박춘( 朴 椿 )ㆍ김유( 金 庾 ) 등을 나누어 보내어 잡게 하였다. 이날 이방실이 용궁현( 龍 宮 縣 경북 예천( 醴 泉 ))에 이르렀는데, 박춘이 전지를 전하니 이방실이 뜰에 내려서 꿇어앉았다. 오인택이 칼을 빼어 쳐서 옷을 벗기니, 거꾸러져 기절했다가 한참 만에 다시 살아나서 담을 넘어 달아났다. 박춘이 쫓아가 잡았다. 이방실이 박춘의 칼을 빼려는데, 지상 등이 뒤에서 칼로 쳐 죽였다. 김득배는 기주( 基 州 경북 영주( 榮 州 ))에 이르러 변을 듣고 도망하여 산양현( 山 陽 縣 문경산양)에 숨었으나, 김유( 金 庾 )ㆍ정지상( 鄭 之 祥 ) 등이 찾아서 베고 상주( 尙 州 )에서 효수하니, 보는 이 중에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일찍이 모귀( 毛 貴 )가 의주를 침범할 적에, 안우가 기병 70여 명을 거느리고 싸움터로 나가서 산에 올라 말을 쉬게 하였는데, 마침 적병이 갑자기 쳐들어왔다. 장사( 將 士 )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얼굴빛을 잃었으나, 안우는 태연하게 담소하고, 오줌 누고 세수하고 양치질한 다음, 조용히 말에 올라 군사를 거느리고 앞으로 나가서 적과 시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적병 몇몇 기병이 창을 휘두르면서 용맹을 과시하므로, 우가 진격해서 대패시켜 마침내 홍두적을 섬멸 시켰으니, 경성을 수복한 것은 모두 그의 공이었다. 그 뒤에, 나이가 겨우 10여 세인 안우의 아들이 거리에서 놀면 사람들이 다투어 먹을 것 을 주면서 말하기를, 지금 우리들이 편안하게 먹고 잘 수 있는 것은 모두 세 원수( 元 帥 )의 공이다." 하고, 심지어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 었다. 고려사절요 제27권공민왕 2( 恭 愍 王 二 ) 박춘 81

82 고려사절요 제27권공민왕 2( 恭 愍 王 二 ) 박춘 :18 계묘 12년(1363), 원 지정 23년 역어( 譯 語 ) 이득춘( 李 得 春 )이 원 나라에서 와서 말하기를, 황제가 덕흥군( 德 興 君 )을 왕으로 삼고, 기삼보노( 奇 三 寶 奴 )를 원자로, 이공수 ( 李 公 遂 )를 우정승으로 삼았습니다. 최유( 崔 濡 )는 스스로 좌정승이 되고, 김용을 판삼사( 判 三 司 )로 삼았으니,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원 나라에 있는 자는 모두 위관( 僞 官 )에 임명되었습니다. 또 요양성( 遼 陽 省 )에 군사를 청하였는데 군사가 출발하였습니다."하였다. 당시 왕은 원 나라에 서 자신의 왕위를 폐하였다 해도 공헌( 貢 獻 )을 폐한 일이 없었고, 여러 번 사신을 보내어 사대하는 예의를 더욱 공경히 하였으며, 진정( 陳 情 ) 하고 계품( 啓 稟 )하여 황제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랐으나, 최유( 崔 濡 )와 박불화( 朴 不 花 ) 등이 이것을 가려 진헌하는 예물을 빼앗아서 황제께 보내는 글이 하나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왕이 어찌할 수 없어 재ㆍ추들과 함께 요양성의 군사가 오는 것을 막을 방법을 의논하 여 경천흥을 서북면도원수( 西 北 面 都 元 帥 )로 삼아 안주( 安 州 )에 둔을 치게 하고, 안우경을 도지휘사로 삼아 의주( 義 州 )에 둔을 치게 하며, 이 귀수( 李 龜 壽 )를 도순찰사로 삼아 인주( 麟 州 평북 의주( 義 州 ))에 둔을 치게 하고, 이순( 李 珣 )을 도체찰사로 삼아 이성( 泥 城 평북 창성( 昌 城 ))에 둔을 치게 하며, 홍선( 洪 瑄 )을 도병마사( 都 兵 馬 使 )로 삼아 정주( 靜 州 평북 의주( 義 州 ))에 둔을 치게 하고, 우제( 禹 )ㆍ박춘( 朴 椿 )을 도병마사 로 삼아 군사를 나누어 강계( 江 界 )와 독로강( 禿 魯 江 ) 등에 둔을 치게 하며, 전공판서( 典 公 判 書 ) 지용수( 池 龍 壽 )를 순무사( 巡 撫 使 )로 삼아 용 주( 龍 州 평북 용천( 龍 川 ))에 둔을 쳐서 북쪽을 방비하도록 하되, 모두 도원수의 절도( 節 度 )를 받게 했다. 이인임( 李 仁 任 )에게 명하여 평양윤 ( 平 壤 尹 )을 삼아 군사의 군량을 조달하게 하고, 밀직부사 정찬( 丁 贊 )을 서북면 도안무사로 삼아, 한휘( 韓 暉 )와 함께 유병( 遊 兵 )을 거느리고 여 러 병영 사이를 왕래하면서 군정( 軍 情 )을 살피도록 하고, 한방신( 韓 方 信 )을 동북면 도지휘사로, 김귀( 金 貴 )를 도병마사로 삼아 화주( 和 州 함 남 영흥( 永 興 ))에 둔을 치게 하여 동북쪽을 방비시켰다. 고려사절요 제27권공민왕 2( 恭 愍 王 二 ) 박춘 82

83 고려사절요 제28권 공민왕-박춘 :16 갑진 13년(1364), 원 지정 24년 봄 정월에 최유( 崔 濡 )가 원 나라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덕흥군( 德 興 君 )을 받들고 압록강을 건너와서 의주의 궁고문( 弓 庫 門 )을 포위하니, 도지휘사( 都 指 揮 使 ) 안우경( 安 遇 慶 )이 일곱 번 싸워 이를 물리쳤다. 최유가 산에 올라 우리 군사의 수효가 적고 후원군이 없는 것을 엿보고는 군사를 일곱 부대로 나누어 북을 치고 떠들썩하게 나오니, 우리 군사가 도망해 돌아와서 문 안으로 들어왔다. 중랑장( 中 郞 將 ) 최흑려( 崔 黑 驢 ) 가 말에서 내려 창을 쥐고 문 밖에 서 있으니 최유가 전진하지 못하였다. 흑려가 우리 군사를 뒤에서 호위하여 천천히 몰아서 문 안으로 들 어갔다. 우리 군사가 다시 나가서 싸웠는데 적군이 도병마사( 都 兵 馬 使 ) 홍선( 洪 瑄 )을 사로잡으니 우리 군사는 패하여 달아나서 안주( 安 州 평 남)를 지켰다. 최유가 선주( 宣 州 평북)에 들어가 점거하였다. 왕이 찬성사 최영에게 명하여 도순위사( 都 巡 慰 使 )로 삼아 정예 군사를 거느리고 급히 안주로 달려가서 모든 군사를 지휘하게 하였다. 길에서 도망하는 군사를 만나면 목을 베어 군중에 돌리니 군령이 비로소 엄숙하여졌다. 또 우리 태조( 太 祖 이성계( 李 成 桂 ))에게 명하여 동북면( 東 北 面 )에서 정예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이성( 泥 城 평남 창성( 昌 城 ))으로 달려가게 하였다. 도체찰사( 都 體 察 使 ) 이순( 李 珣 )과 도병마사 우제( 禹 )ㆍ박춘( 朴 椿 )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모이니 우리 군사의 기세가 다시 떨 쳐졌다. 최유의 척후 기병이 정주( 定 州 )에 이르니 안우경이 정예 기병 3백 명을 거느리고 습격하여 쳐서 이를 패퇴시키고, 그 장수 송신길( 宋 臣 吉 )을 사로잡아 죽여 몸뚱이를 쪼개어 군중에 돌리니 최유가 기운이 꺾였다. 평창현령( 平 昌 縣 令 ) 배중련( 裵 仲 連 )이 탐욕스럽고 잔인하여 불법을 자행하므로 가산( 家 産 )을 몰수하였다. 황상( 黃 裳 )을 동북면 도순토사( 東 北 面 都 巡 討 使 )에 임명하였다. 여진의 삼선( 三 善 )ㆍ삼개( 三 介 ) 등이 홀면( 忽 面 )ㆍ삼살( 三 撒 )을 침범하므로 교주도 병마사( 交 州 道 兵 馬 使 ) 성사달( 成 士 達 )에게 명하여 정예 기병 5백 명을 내어 이를 치게 하였다. 처음에 북방 사람 김방괘( 金 方 卦 )가 우 리 도조( 度 祖 )의 딸에게 장가들어서 삼선과 삼개를 낳았으니, 태조( 太 祖 이성계( 李 成 桂 ))에게는 고종 형제였다. 여진 땅에서 나서 자라 완력 이 남보다 세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다. 불량한 젊은이를 모아 북쪽 변방에서 거리낌없이 돌아다녔으나 태조를 두려워하여 감히 방자한 행동을 취하지 못하였다. 태조는 함주( 咸 州 함북 함흥( 咸 興 ))에서 대대로 자라 은혜와 위엄이 그 전부터 쌓이니 백성들이 부모와 같이 우러러 보고, 여진도 두려워하고 우러러보며 스스로 조심하였다. 이때에 와서 삼선ㆍ삼개가 태조가 가서 서북면을 원조한다는 소문을 듣고 여진을 꾀어 크게 침략을 자행하고 함주를 함락시키니, 지키던 장수 전이도( 全 以 道 )ㆍ이희( 李 熙 ) 등이 군사를 버리고 도망해 돌아왔다. 동북면 도지 휘사 한방신( 韓 方 信 )과 병마사 김귀( 金 貴 )가 화주( 和 州 함북 영흥( 永 興 ))에 진군했다가 역시 패하여 물러나와 철관( 鐵 關 함남 덕원( 德 源 )의 북쪽)을 보전하였으니, 화주 이북 지방이 모두 함몰되었다. 관군이 여러 번 패하자 장수와 군사가 기운이 꺾여 밤낮으로 태조가 도착하기만 바라고 있었다. 대호군 김두( 金 斗 )가 서북면 체복사( 西 北 面 體 覆 使 )로 갔다가 돌아왔다. 이때 군졸들이 춥고 배고파서 도롱이를 입어 몸을 덥히고, 말 한 필을 쌀 한 말로 바꾸었다. 길에서 죽는 자가 잇달았으며, 걸식하고 있는 도망병이 길에 가득 찼는데 얼굴이 매우 초췌하니 이웃 사람이나 친구라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 살아 돌아온 자가 백 명에 겨우 한두 사람뿐이었는데 권세 부리는 신하가 왕의 총명을 가려서 아뢰지 않으니 체복사가 연이어 가더라도 군중의 허실을 왕이 끝내 알지 못하였다. 안우경( 安 遇 慶 )ㆍ이귀수( 李 龜 壽 )ㆍ지용수( 池 龍 壽 )ㆍ나세( 羅 世 )가 좌익( 左 翼 )이 되고, 이순( 李 珣 )ㆍ우제( 禹 )ㆍ박춘( 朴 椿 )과 우리 태조가 우익( 右 翼 )이 되고, 최영이 중군이 되어 정주( 定 州 )에 이르렀다. 태조가 여러 장수들이 패배한 것을 보고, 그들이 겁을 내어 힘써 싸우지 않 았다고 말하니,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꺼렸다. 이때 적이 수주( 隋 州 평북 정주( 定 州 ))의 달천( 川 )에 둔쳤는데, 여러 장수들이 태조에게 말 하기를, 내일 싸움은 그대가 홀로 맡으시오." 하니, 태조는 여러 장수들이 자기를 꺼리는 줄 알고 조금 걱정하는 기색이 있었다. 이튿날 적 이 세 부대로 나누어 쳐들어오므로, 태조는 가운데 있고 수하의 늙은 장수 두 사람을 좌우로 갈라서 각기 적의 한 부대씩 맡게 하여 힘을 내 어 쳤다. 태조가 탔던 말이 진흙에 빠져 매우 위태로웠는데, 말이 힘을 내어 뛰어서 솟구쳐 나오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이상히 여겼 다. 태조가 적의 장수 두서너 사람을 쏘아 넘어뜨리자 적이 그제야 패주하였다. 두 늙은 장수가 칼을 뽑아 마구 치니 적이 벌써 패하여 도망 하였고 티끌과 먼지만이 하늘을 덮을 뿐이었다. 처음에 최유가 몽고ㆍ한족 군사에게 이익으로 꾀기를, 고려왕이 장수와 군사를 협박하여 서북면을 지키게 하였으니, 신왕이 온다는 소문을 들으면 싸우지도 않고 흩어질 것이다. 일이 성공되면 고려의 재상 이하 사람들의 가산을 고려사절요 제28권 공민왕-박춘 83

84 상으로 주겠다" 하니, 여러 사람이 모두 이를 믿었다. 압록강을 건너오자 우리 군사가 굳게 막고 한 사람도 항복하는 자가 없었다. 몽고ㆍ한 족 군사는 우리가 그들을 꾀어 깊이 들어오게 하고 군사를 매복시켜 놓고 기다리는가 의심하더니, 달천에서 패전하자 그제야 최유의 꾀에 빠 진 줄 알고 밤에 거짓으로 우리 군사인 것처럼 하여 큰 소리로 떠들며 경동시키매, 최유의 군사가 그 진영을 불사르고 다시 압록강을 건너 달아났다. 우리 군사가 뒤쫓아 압록강까지 이르렀으나 도달하지 못하였다. 유인우( 柳 仁 雨 ) ㆍ강지연( 康 之 衍 )ㆍ안복종( 安 福 從 ) 등이 피곤해서 뒤떨어져 있으므로 이를 잡아서 죽였다. 저들 군사 중에 연경( 燕 京 )에 돌아간 자는 겨우 17기뿐이었다 고려사절요 제28권 공민왕-박춘 84

85 고려사절요 제28권-박춘 :14 을사 14년(1365), 원 지정 25년 김보( 金 普 )ㆍ이춘부( 李 春 富 )를 도첨의 찬성사( 都 僉 議 贊 成 事 )로 삼고, 임군보( 任 君 輔 )ㆍ김난( 金 蘭 )ㆍ박희( 朴 曦 )를 밀직부사로 삼았으니 모두 편조가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편조가 찬성사 이귀수( 李 龜 壽 ), 평리( 評 理 ) 양백익( 梁 伯 益 ), 판밀직 박춘( 朴 椿 ), 예성군( 芮 城 君 ) 석문성( 石 文 成 ), 진원부원군( 晋 原 府 院 君 ) 김수만( 金 壽 萬 )을 참소하여 귀양보내고 그 가산을 모두 몰수하였다. 유탁( 柳 濯 )ㆍ이인임( 李 仁 任 )에게 명하여 도당에 서 모든 정사를 맡게 하고, 김난ㆍ임군보ㆍ목인길( 睦 仁 吉 )에게는 궁중에서 모든 사무를 맡게 하였다. 경천흥( 慶 千 興 )은 정사에 참여하지 못하 였다. 6월에 이공수( 李 公 遂 )ㆍ경천흥ㆍ이수산( 李 壽 山 )ㆍ송경( 宋 卿 )ㆍ원송수( 元 松 壽 )ㆍ왕중귀( 王 重 貴 )ㆍ한공의( 韓 公 義 )를 면직하고 김보를 수도첨 의 시중( 守 都 僉 議 侍 中 )으로 삼고, 이인복을 판삼사사로, 이인임( 李 仁 任 )을 첨의찬성사( 僉 議 贊 成 事 )로, 권적( 權 適 )과 목인길( 睦 仁 吉 )을 첨의평 리( 僉 議 評 理 )로, 박원경( 朴 元 鏡 )을 밀직부사로, 홍영통( 洪 永 通 )을 감찰대부로 삼았다. 편조가 또 양천군( 陽 川 君 ) 허유( 許 猷 ), 전 전공판서 ( 典 工 判 書 ) 변광수( 邊 光 秀 ), 판사 홍인계( 洪 仁 桂 ), 첨의평리 김귀( 金 貴 ), 춘성군( 春 城 君 ) 박희( 朴 曦 ), 허유( 許 猷 )의 아들 전리판서 허서( 許 瑞 )를 참소하여 귀양보냈다. 가을 7월에 편조가 그 무리 상호군 이득림( 李 得 林 ), 순군경력 오계남을 나누어 보내어 최영ㆍ이귀수( 李 龜 壽 )ㆍ양백익( 梁 伯 益 )ㆍ석문성( 石 文 成 )ㆍ박춘( 朴 椿 ) 등을 국문하여 그들이 내신( 內 臣 ) 김수만( 金 壽 萬 )과 서로 결탁하여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이간시키고, 현량을 배척해 내쫓 아 크게 불충한 짓을 하였다고 죄를 얽어 옥사를 만드니, 최영 등이 모두 자복하였다. 그 가산을 모두 몰수하였다. 감찰장령 허소유( 許 少 游 )를 내쫓아 전라도의 수졸로 삼았다. 처음에 감찰사에서 전 호군 우선좌( 牛 宣 佐 )가 사람을 죽인 죄상을 국문하려 하니 선좌가 도망하므로, 선좌의 친구 오계남( 吳 季 南 )의 종을 잡아 선좌를 수색하게 하였다. 왕은 오계남이 한창 최영 등을 국문하고 있으므 로 우선좌를 국문하지 말도록 명하였더니, 허소유가 왕의 명을 받들지 않으므로 왕이 노하여 소유를 유배보냈다. 첨의사( 僉 議 司 )에서 대궐에 나아가 소유를 용서해 주기를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소유의 죄는 경들이 모른다." 하였다. 그리고는 측근의 신하에게 이르기를, 소유의 아버지 허옹( 許 邕 )이 강포하여 세상 사람에게 미움을 받더니, 소유는 참으로 그 아비에 그 아들이구나." 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사랑하고 미워함은 치우쳐서는 안되는 것이다. 허옹은 곧은 신하인데도 왕이 소유의 억센 기질을 미워하여 그 미움이 아버지에게 미치고, 계남은 간사한 사람인데도 왕이 편조를 총애하여 그 친구인 계남까지 용서하게 되니, 악한 자가 어찌 두려워하겠으며 착한 사람이 어찌 권장되겠는가."하였다. 편조를 진평후( 眞 平 侯 )로 삼았다. 고려사절요 제28권-박춘 85

86 고려사절요 제28권공민왕 3( 恭 愍 王 三 )병오) 15년(1366), 원 지정 26년 :11 덕녕공주( 德 寧 公 主 )가 태후를 위하여 문예부( 文 睿 府 )에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왕이 모시고 있었다. 신돈이 왕을 따라 들어가서 태후를 뵈 었는데, 태후가 앉을 자리를 내주지 않으니 신돈이 빨리 나가 버렸다. 왕이 태후에게 아뢰기를, 첨의는 나라의 주석인데 어찌하여 앉을 자 리를 내주지 않습니까." 하니, 태후가 정색하면서 이르기를, 미망인이 어찌 감히 외간 중과 자리를 같이할 수 있겠소." 하였다. 왕은 잠자코 말이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신돈이 태후에게 원한을 깊이 품었다. 이때 공경과 구신들이 모두 내쫓겨서, 신돈이 꺼려하는 사람은 태후뿐이므 로 온갖 계책을 써서 참소하고 이간하였다. 이귀수( 李 龜 壽 )를 형벌로 머리를 깎아 송광사( 松 廣 寺 )에 두고 김귀( 金 貴 )를 머리를 깎아 노산사( 盧 山 寺 )에 두고, 박춘( 朴 椿 )을 머리를 깎 아 열암사( 裂 巖 寺 )에 두었더니, 그 2년 후에 신돈이 사람을 보내어 모두 강물에 빠뜨려 죽였다. 심왕( 瀋 王 )이 사신을 보내왔다. 심왕은 곧 왕고의 손자이다. 이전에 원 나라의 황후와 태자가, 왕이 기씨( 奇 氏 기철( 奇 轍 ))를 베어 죽인 데 원한을 품고, 김용( 金 鏞 )에게 내응하게 하여 심왕을 왕으로 세우려 하니, 심왕이 굳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숙부께서 아들이 없으니 세상을 떠난 뒤에는 나라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지금은 숙부께서 몸에 탈이 없으신데 내가 숙부의 왕위를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천하 사람 들이 그를 어질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가상히 여겨 안부를 묻고 매우 후하게 물품을 주었다. 왕이 이름을 전 ( )으로 고쳤다. 고려사절요 제28권공민왕 3( 恭 愍 王 三 )병오 15년(1366), 원 지정 26년 86

87 동사강목-박춘 :08 임인년 공민왕 11년(원 순제 지정 22, 1362) 도원수 안우와 원수 이방실ㆍ김득배를 죽였다. 안우 등이 함창( 咸 昌 )에 이르렀을 적에 왕은 대신 가운데서 계획이 있는 자를 뽑아 보내서 그를 맞아 비상( 非 常 )한 일이 있을 것에 대비 하게 하였다. 이에 시중 유탁( 柳 濯 )을 보냈다. 유탁이 함창에 이르러 꿇어앉아서 술을 올리면서 원수가 서서 마시기를 청하니, 안우가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유탁이 말하기를, 이제 공( 公 )이 삼한( 三 韓 )을 수복하였습니다. 내가 감히 관직의 지위를 마음에 두겠습니까? 하고 눈물을 흘렸다. 29일(을사)에 안우가 개선하여 행궁에 나아가 알현( 謁 見 )할 적에 김용이 목인길( 睦 仁 吉 )에게 인도하게 하고 안우가 중문( 中 門 )에 이르자, 문 지키는 자를 시켜 안우의 머리를 철퇴로 쳤다. 그러나 안우는 얼굴빛을 조금도 변하지 않고, 차고 있던 주머니를 세 번이나 가리키면서 큰 소리로 부르짖기를, 조금만 늦추어다오. 원컨대, 임금 앞에 나아가서 주머니 속의 서신을 바치고 죽임을 받겠다. 하였으나 철퇴 든 자가 다시 쳐서 죽이고 그 시체를 뜰에 끌어내렸다. 왕은 안우가 죽은 것을 알지 못하고 전지( 傳 旨 )하기를, 너희들이 제멋대로 정세운을 죽였으니 마땅히 목을 베어 죽일 것이로되 이제 너를 목베지 않는 것은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하였다. 안우가 가리킨 주머니 속의 서신이란 곧, 안우 등을 속여서 정세운을 죽이게 한 김용의 서신이었다. 김용은 또 김림( 金 琳 )이 자기의 음모를 누설시킬까 염려하여 먼저 김림을 목 베었다. 그리고 왕에게 보고하기를, 안우 등이 멋대로 주장을 죽였으니 이는 전하를 염두에도 두지 않은 것으로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얼마 후에 왕은 안우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안우의 어린 아들이 벌거벗은 채로 길가에 섰는 것을 보고 애처롭게 여겨 그를 불러서 금중( 禁 中 )에 머물게 하였다가 그가 갈 만한 곳을 물어서 돌려보냈다. 이에 안우의 휘하 장사들이 모두 놀래어 달아나려 하자 왕이 그들을 불러 주식( 酒 食 )을 주며 위로하였다. 김용이 다시 교지( 敎 旨 )를 선포하면서 방시( 榜 示 )하기를, 안우 등이 충성하지 못하여 제마음대로 정세운을 죽였기 때문에 그는 이미 죄를 받았다. 김득배와 이방실을 붙잡아 오는 자가 있으 면 중한 상을 준다. 하고, 대장군 오인택( 吳 仁 澤 ), 만호 박춘( 朴 椿 )ㆍ김유( 金 庾 )ㆍ정지상( 鄭 之 祥 ) 등을 나누어 보내서 그들을 체포하게 하였다. 이날 이방실이 행재소에 나아가려고 용궁현( 龍 宮 縣 )까지 왔었는데, 박춘이 그곳에 와서 왕의 교지가 있다고 일컬으니, 이방실이 뜰에 내려가서 꿇어앉자 오인택이 칼을 뽑아 그를 쳤다. 이방실이 곧 넘어져서 기절하였다가 한참 만에 다시 깨어나서 담을 넘어 도망가자 박춘이 그를 쫓아가 붙 잡고, 정지상이 뒤에서 다시 쳐서 죽였다. 김득배는 기주( 基 州 )지금의 풍기( 豐 基 ) 까지 와서 변이 있었음을 알고, 따르는 기병 두어 명을 데리고 도망쳐 산양현( 山 陽 縣 )지금은 상주 에 속한다. 상주 북쪽 63리에 있다. 선영( 先 塋 )의 곁에 숨었다. 이에 김득배의 아내와 자식들을 옥에 가두고 국문을 하니, 그의 사위인 직 강( 直 講 ) 조운흘( 趙 云 仡 )이 장모에게 말하기를, 사실대로 말을 하여 고초를 당하지 마소서. 하니, 그 장모가 한참 동안 참고 견디다가 마침내 사실대로 고하였다. 그리하여 3월 1일(정미)에 김유ㆍ박춘ㆍ정지상 등이 김득배를 붙잡 아 목베어 상주( 尙 州 )에서 효수( 梟 首 )하니 보는 자들이 탄식하며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안우는 탐진인( 耽 津 人 )이고, 김득배는 상주인이고, 이방실은 함안인( 咸 安 人 )이다. 김득배는 과거를 보아 진출한 자였다. 그의 문생( 門 生 )인 직한림( 直 翰 林 ) 정몽주( 鄭 夢 周 )가 왕에게 간청하여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내는데 그 제문에, 홍두적이 쳐들어와서 임금이 피난하였을 적에 공( 公 )이 만번 죽음을 무릅쓰는 계책을 세워서 삼한( 三 韓 )을 회복하는 큰 업을 이루었 으니, 비록 죄가 있더라도 공( 功 )으로 죄를 덮었어야 할 것이요, 만일 죄가 공보다 더 무거우면 반드시 그 죄를 승복( 承 服 )시킨 뒤에 동사강목-박춘 87

88 목을 베어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말[ 馬 ]에 땀이 마르기도 전에, 개가( 凱 歌 )가 끝나기도 전에, 태산 같은 큰 공을 세운 분이 칼날 밑에 서 피로 물들게 되었습니까? 이것이 내가 피눈물을 흘리며 하늘에게 묻는 바입니다. 하였다. 이것을 듣는 이들은 그를 의롭게 여겼다. 안우와 이방실의 아들들은 나이 겨우 10여 세였다. 그들이 저자로 돌아다니니, 사람들이 서로 물건을 그들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우리들이 오늘날 편안하게 침식( 寢 食 )하는 것은 모두 세 원수의 공이다. 하며, 눈물을 흘리는 자들까지 있었다. 오씨( 吳 氏 )는 이렇게 적었다, 하늘을 떠받는 큰 공훈이 있는 세 원수가 모두 김용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다. 그런데도 왕은 이를 반성하여 깨닫지 못하였으니, 이는 아마 하늘이 왕씨( 王 氏 )를 싫어하여 그의 총명을 빼앗아서 멸망을 재촉하는 조짐을 싹트게 함이 아니었을까. 일찍이 관찰하여 보건대, 위기를 당하여 난리를 평정할 적에는 장수에 주의( 注 意 )하게 된다. 그런데 공( 功 )이 온 세상을 덮은 자로서 도리어 의심을 받고 시기를 당하고, 소인들이 이러한 틈을 타서 귀신과 물여우 같은 짓을 하여 군사를 데리고 반역을 도모한다. 고 말하지 않으면, 군사의 마음이 모두 그에게로 돌아간다. 고 하여 반드시 손으로 장성( 長 城 ) 같은 장수를 죽이게 하니,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마저 삶아 죽이는 격으로 나라가 따라서 멸망한다. 앞 수레가 이미 엎어졌으니 뒷수레가 엎어질 것은 고금( 古 今 )이 동일한 법칙이어서 오직 저 혼미하고 용렬한 공민왕은 구태여 깊이 책망할 것도 못된다. 그러나 당시에 시종하던 신하로서 이암ㆍ유탁ㆍ홍언박 등 여러 사람이 어찌 모두 적( 賊 ) 김용의 도당들 이기야 했겠는가마는 한 사람도 말 한 마디 내어 임금을 깨우치는 이가 없었다. 이는 오히려 세 원수의 아들들에게 서로 물건을 주어 은 공을 갚으려는 시정인( 市 井 人 )들만도 못함이니, 아, 슬프다. 유씨( 兪 氏 )는 이렇게 적었다. 김용의 계교가 본래 간악하고 묘해서, 왕이 그렇게 시킨 것이 아니라고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왕은 본래 잔인하고 시기심이 많은 임금으로 서 평소에 김용을 심복으로 대하였었다. 이제 여러 장수들이 세상에 뛰어난 큰 공을 세우는 것을 보고는, 의구심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김용과 더불어 그들을 억제하는 방법을 비밀히 의논하여, 김용으로 하여금 왕의 마음을 엿보아 헤아리게 한 것이다. 그러기 에 김용이 틈을 만들어서 간악한 짓을 할 수 있었으리라. 그렇지 않았다면 김용을 죽일 적에 왕이 눈물을 흘려서까지 김용을 생각하였겠 는가. 당시의 일을 대략 짐작할 만하다. 안 김용이 세 원수를 죽였는데도, 김용이 죽였다고 쓰지 않은 것은 죄를 왕에게 돌리려는 뜻에서이니, 유씨의 의론이 대개 그 실정( 實 情 )을 얻었다 하겠다. 동사강목-박춘 88

89 동사강목- 박춘 :06 계묘년 공민왕 12년(원 순제 지정 23, 1363) 경천흥( 慶 千 興 )을 서북면 도원수( 西 北 面 都 元 帥 )로 삼아 나아가 안주( 安 州 )에 둔치게 하였다. 이때에 왕은 왕위를 잃었다고 해서 원에 조공바치는 것을 폐하지 않고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어 진정하여 원의 황제가 깨달아 주기를 바 랬다. 그러나 최유 등이 서로 막고 가려서 바치는 폐물( 幣 物 )과 표전( 表 箋 )을 빼앗으므로, 왕이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또 원에서 장차 덕흥군을 왕으로 삼고 기삼보노( 奇 三 寶 奴 )를 원자( 元 子 )로 삼아 요양의 군사를 징발하여 호송한다 함을 듣고, 드디어 재추 들과 더불어 방어할 방책을 의론하였다. 그래서 경천흥을 서북면 도원수로 삼아 안주에, 안우경을 도지휘사로 삼아 의주에, 이귀수( 李 龜 壽 )를 도순찰사( 都 巡 察 使 )로 삼아 인주( 麟 州 )에, 이순( 李 珣 )을 도체찰사( 都 體 察 使 )로 삼아 이성( 泥 城 )에, 홍선( 洪 瑄 )을 도병마사( 都 兵 馬 使 ) 로 삼아 정주( 靜 州 )에, 우제( 禹 )ㆍ박춘( 朴 椿 )을 도병마사로 삼아 강계( 江 界 )ㆍ독로강( 禿 魯 江 ) 등지에 나누어 둔치게 하고, 지용수( 池 龍 壽 )를 순무사( 巡 撫 使 )로 삼아 용주( 龍 州 )지금의 용천( 龍 川 ) 에 둔치게 하여 서북 지방을 방비하되 모두 도원수의 지휘를 받게 하고, 이인 임을 평양윤( 平 壤 尹 )으로 삼아 군사들의 식량을 조달하게 하였으며, 도안무사( 都 安 撫 使 ) 정찬( 丁 贊 )은 한 휘( 韓 暉 )와 함께 유병( 遊 兵 )을 거 느리고 여러 진영 사이를 오가면서 군정( 軍 情 )을 살피게 하였다. 또 한방신( 韓 方 信 )을 동북면 도지휘사( 東 北 面 都 指 揮 使 )로, 김귀( 金 貴 )를 도병마사로 삼아 화주( 和 州 )에 둔쳐서 동북 지방을 방비하게 하였다. 이때에 왕에게 남으로 행행하여 난을 피하기를 권하는 자가 있어 왕 이 그럴 듯이 여겼으나, 판서 오인택( 吳 仁 澤 )이 아뢰기를, 덕흥군은 홍두적과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대가가 한번 남쪽으로 행행하시면, 도성의 이북은 뉘라서 전하를 좇겠습니까? 오늘의 방책 은 전하께서 친히 정벌하시는 것이 상책입니다. 하니, 남으로 행행할 의론이 드디어 가라앉았다. 동사강목- 박춘 89

90 동사강목 박춘 :04 갑진년 공민왕 13년(원( 元 ) 순제( 順 帝 ) 지정( 至 正 ) 24, 1364) 최영( 崔 瑩 ) 등이 최유( 崔 濡 )의 군대를 토벌하여 크게 패배시키니, 유와 탑사첩목아( 塔 思 帖 木 兒 )가 달아났다. 최영이 군중에 이르고 우리 태조와 이순( 李 珣 )ㆍ우제( 禹 )ㆍ박춘( 朴 椿 ) 등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합류하자 군세가 다시 떨쳤다. 최유의 후기( 候 騎 척후 노릇을 하는 기병)가 정주( 定 州 )에 이른 것을 안우경( 安 遇 慶 )이 정예 기병 3백 명을 거느리고 습격하여 패배시키고, 그 장 수 송신길( 宋 臣 吉 )을 사로잡아서는 몸을 쪼개어 군중에 돌려 보이자 적의 기세( 氣 勢 )가 꺾였다. 그런 뒤 이때에 이르러 안우경( 安 遇 慶 )ㆍ 이귀수( 李 龜 壽 )ㆍ지용수( 池 龍 壽 )ㆍ나세( 羅 世 )가 홍선( 洪 瑄 )을 대신해 와서 좌익이 되고, 이순ㆍ우제ㆍ박춘과 우리 태조가 우익이 되고, 최 영이 중군이 되어 행군하여 정주에 이르렀다. 태조가 여러 장수들이 후퇴하여 달아나는 것을 보고 그들이 겁을 내어 힘을 다해 싸우지 않 음을 말하니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꺼렸다. 당시 적은 이미 수주( 隨 州 )지금은 정주에 속해 있는데 폐군( 廢 郡 )이 정주 남쪽 15리에 있다. 의 달천( 川 )정주 동쪽 5리에 있다. 에 주둔하고 있었다. 여러 장수들이 태조에게 말하기를, 내일의 싸움은 그대 혼자 맡으라. 하였다. 이튿날 적이 3대( 隊 )로 나누어 공격하자 태조가 가운데에 있고 수하의 노장( 老 將 ) 두 사람이 각기 그 1대( 隊 )씩을 맡아 분발해 쳤 다. 태조가 탄 말이 진흙 속에 빠져 몹시 위태롭게 되었는데 말이 힘껏 뛰어 빠져나오니 뭇사람들이 모두 경이( 驚 異 )롭게 여겼다. 태조가 적장 두엇을 쏘고 두 노장과 합력하여 쳐서 크게 깨뜨리니 적들은 달아나 무너지고 오직 먼지만이 하늘을 가렸다. 당초에 최유가 몽한군( 蒙 漢 軍 )을 이익으로 꾀기를, 새 왕이 고려에 들어가기만 하면 고려의 장졸들은 싸우지도 않고 흩어진다. 일이 평정되면 고려의 재상 이하들의 가산( 家 産 )을 상으 로 주겠다. 하니, 뭇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믿었다. 그러나 압록강을 건너오자 아군이 완강하게 항전하고, 달천 전투에서 패배하자 몽한군은 그제야 최 유의 계략에 빠진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밤에 거짓으로 아군인 것처럼 하여 큰 소리로 떠들며 경동( 驚 動 )시키니 최유가 드디어 병영 을 불지르고 압록강을 건너 달아났다. 아군이 추격하였으나 미치지 못하고, 피로하여 뒤처진 유인우( 柳 仁 雨 )ㆍ강지연( 康 之 衍 )ㆍ안복종( 安 福 從 ) 등만 잡아 죽였다. 최유의 군사로 연경( 燕 京 )에 되돌아간 자는 겨우 기병 17명뿐이었다. 당시 우리의 군사도 오랜 출정( 出 征 )으로 얼고 굶주려, 전쟁이 끝나 살아 돌아온 자는 겨우 1백 명 중에 한두 사람 꼴이었다. 동사강목 박춘 90

91 동사강목 을사년 공민왕 14년(원 순제 지정 25, 1365) :02 을사년 공민왕 14년(원 순제 지정 25, 1365) 찬성사 이귀수( 李 龜 壽 ) 등을 먼 고을로 유배하였다. 귀수와 평리( 評 理 ) 양백익( 梁 伯 益 ), 판밀직( 判 密 直 ) 박춘( 朴 椿 ), 예성군( 芮 城 君 ) 석문성( 石 文 成 ), 환자( 宦 者 ) 진원부원 군( 晋 原 府 院 君 ) 김수만( 金 壽 萬 )을 유배보내고 모두 그 집을 적몰하였으니 편조의 참소에 의해서였다. 유탁( 柳 濯 )과 이인임( 李 仁 任 )을 명하여 도당( 都 堂 )의 서정( 庶 政 )을 맡게 하고 김난ㆍ임군보ㆍ목인길( 睦 仁 吉 )을 명하여 궁중의 서 무( 庶 務 )를 맡게 하였다. 경천흥은 정사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동사강목 을사년 공민왕 14년(원 순제 지정 25, 1365) 91

92 동사강목 제15상갑진 고려 공민왕 13년부터 년부터, 갑인 공민왕 23년까지 11년 간 朴 椿 :59 병오년 공민왕 15년(원 순제 지정 26, 1366) 8월 태백( 太 白 )이 경천( 經 天 )하였다. 왕이 태후전( 太 后 殿 )에서 태후를 모시고 연회하였다. 이때 덕녕 공주( 德 寧 公 主 )가 문예부( 文 睿 府 )에서 태후에게 잔치를 베풀고 있었는데 왕이 시연( 侍 宴 )하였다. 신돈이 왕을 따라들어가 뵈었으나 태후는 돈에게 앉으라고 하지 않았다. 돈이 나가자 왕이 태후에게, 첨의( 僉 議 왕이 신돈을 공경하여 부른 칭호)는 나라의 주석( 柱 石 )인데 어찌 앉으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하였다. 태후가 정색을 하고, 미망인( 未 亡 人 )이 어찌 감히 외승( 外 僧 )과 같이 앉겠오? 하니, 왕은 잠자코 있었다. 돈이 이로 말미암아 깊이 앙심을 품었다. 당시 공경 구신( 公 卿 舊 臣 )들은 모두 축출되고 돈이 꺼려하는 이는 오직 태후뿐이었으므로 갖가지 계략으로 참소하고 이간시켜 이에 왕의 태후에 대한 효성이 드 디어 쇠해갔다. 전( 前 ) 찬성사( 賛 成 事 ) 이귀수( 李 龜 壽 ), 평리( 評 理 ) 김귀( 金 貴 ), 밀직( 密 直 ) 박춘( 朴 椿 )을 죽였다. 신돈이 세 사람을 기어코 죽이고자 이들을 모두 삭발시켜 산사( 山 寺 )에 두었다가 얼마 뒤에 사람을 보내어 강물에 빠뜨려 죽였다. 이에 조신( 朝 臣 )들이 눈을 흘겨 보며 돈을 이리나 호랑이처럼 보았다. 안 죽인 자는 신돈인데 돈의 이름을 쓰지 않는 것은 왕을 죄줌이다. 최적( 崔 賊 : 최충헌을 가리킴)이 마음대로 사람을 죽인 것은 정사가 최적에게서 나왔고 왕은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적의 이름을 썼으나, 신돈이 마음대 로 사람을 죽인 것은 왕이 신돈에게 정사를 맡겨 전횡을 부리게 했기 때문에 돈의 이름을 쓰지 않았다. 다른 경우 도 이에 준한다. 동사강목 제15상갑진 고려 공민왕 13년부터, 갑인 공민왕 23년까지 11년간 朴 椿 92

93 一 蠹 先 生 續 集 卷 之 四 師 友 門 人 錄 四 美 亭 박형달( ( 朴 亨 達 ) :20 畢 齋 金 先 生 諱 宗 直 字 季 善 山 人 景 泰 癸 酉 進 士 天 順 己 卯 登 第 官 至 刑 曹 判 書 諡 文 簡 學 問 精 深 文 章 高 古 爲 一 代 儒 宗 名 賢 碩 士 多 出 其 門 行 狀 云 門 弟 之 中 以 道 學 名 而 上 接 濂 洛 圃 隱 之 源 下 開 後 學 無 疆 之 休 者 金 宏 弼, 鄭 汝 昌, 兪 好 仁, 朴 漢 柱 也 戊 午 史 禍 禍 及 泉 壤 栗 亭 李 先 生 諱 寬 義 字 義 之 廣 州 人 進 士 寓 居 利 川 經 明 行 修 精 於 性 理 之 學 一 時 學 者 多 所 推 服 先 生 弱 冠 往 從 學 焉 成 廟 命 召 講 論 性 理 之 原 又 問 天 地 度 數 日 月 星 辰 歲 差 曆 法 辨 對 不 失 後 褒 贈 吏 曹 判 書 金 宏 弼 字 大 猷 瑞 興 人 號 寒 暄 堂 與 先 生 受 學 于 畢 齋 之 門 嘗 與 論 心 先 生 曰 學 而 不 知 心 何 以 學 爲 寒 暄 曰 心 在 何 處 先 生 曰 無 乎 不 在 亦 無 有 處 成 廟 庚 子 中 生 員 官 至 刑 曹 佐 郞 燕 山 戊 午 遭 史 禍 付 處 煕 川 甲 子 再 禍 受 刑 諡 文 敬 從 祀 文 廟 南 孝 溫 字 伯 恭 號 秋 江 宜 寧 人 成 廟 朝 上 疏 請 復 昭 陵 不 報 絶 意 斯 世 散 漫 爲 事 燕 山 甲 子 禍 及 泉 壤 朱 溪 君 名 深 源 字 伯 淵 號 醒 狂 太 宗 玄 孫 與 先 生 同 遊 畢 齋 門 經 明 行 飭 忠 孝 正 直 先 見 任 士 洪 不 道 極 陳 其 必 誤 國 成 廟 感 悟 竄 士 洪 於 外 燕 山 政 亂 爲 其 所 構 誣 幷 二 子 見 殺 中 廟 朝 特 贈 一 品 又 旌 其 門 茂 豐 副 正 名 摠 字 伯 源 太 宗 曾 孫 與 先 生 受 業 畢 齋 門 天 資 絶 世 詩 語 奇 妙 秋 江 稱 其 宏 量 結 墅 楊 花 渡 口 自 號 西 湖 主 人 戊 午 杖 流 巨 濟 賜 死 曺 偉 字 太 虛 號 梅 溪 昌 寧 人 自 童 稚 時 人 皆 期 以 遠 到 旣 筮 仕 大 被 成 廟 之 知 奬 爲 親 乞 郡 守 咸 陽 時 先 生 遭 母 夫 人 喪 致 慰 甚 厚 焉 官 至 參 判 燕 山 朝 以 撰 修 畢 齋 詩 文 謫 義 州 移 配 順 天 弘 治 癸 亥 卒 甲 子 被 泉 壤 之 禍 兪 好 仁 字 克 己 號 溪 高 靈 人 忠 孝 淸 儉 詩 文 高 古 筆 力 遒 勁 人 稱 三 絶 壬 午 生 員 進 士 甲 午 登 第 官 至 郡 守 與 先 生 交 契 深 厚 卒 後 先 生 有 祭 文 朴 漢 柱 字 天 支 密 陽 人 自 號 迂 拙 齋 與 先 生 及 金 寒 暄 堂 學 畢 齋 門 下 時 稱 畢 門 三 賢 成 廟 乙 巳 登 第 歷 正 言, 獻 納 言 事 直 截 出 爲 醴 泉 郡 守 戊 午 杖 流 碧 潼 甲 子 再 禍 被 殺 中 廟 初 贈 都 承 旨 表 沿 沫 字 少 游 號 溪 新 昌 人 成 廟 壬 辰 登 第 歷 翰 林 至 兩 館 提 學 與 先 生 生 長 同 郡 交 契 深 厚 戊 午 之 禍 流 慶 源 楊 煕 止 字 可 行 號 大 峯 中 和 人 成 廟 甲 午 登 第 官 至 大 司 憲 當 燕 山 戊 午 之 禍 先 生 杖 流 鍾 城 公 以 書 告 訣 因 庚 申 之 災 異 疏 論 戊 午 謫 人 之 冤 枉 皆 得 量 移 而 先 生 獨 不 與 焉 及 臨 終 作 喉 間 語 連 問 鍾 城 者 再 先 生 嘗 稱 公 曰 蹈 白 刃 辭 爵 祿 惟 楊 可 行 一 人 也 尹 孝 孫 字 有 慶 號 楸 溪 南 原 人 嘗 與 先 生 講 朱 書 論 性 理 及 禮 說 官 至 贊 成 諡 文 孝 朴 亨 達 字 通 仲 密 陽 人 號 四 美 亭 以 學 問 行 誼 薦 授 通 禮 院 引 儀 又 以 明 經 除 奉 敎 不 就 金 馹 孫 字 季 雲 號 濯 纓 金 海 人 成 廟 丙 午 登 第 官 至 吏 曹 正 郞 與 先 生 受 業 畢 齋 門 構 亭 於 溪 上 往 來 討 論 經 一 蠹 先 生 續 集 卷 之 四 師 友 門 人 錄 四 美 亭 박형달( 朴 亨 達 ) 93

94 史 其 在 檢 閱 時 疏 薦 先 生 學 行 請 代 己 官 有 道 通 天 人 學 備 體 用 之 語 戊 午 史 禍 被 刑 諡 文 愍 姜 渾 字 士 浩 號 木 溪 子 受 學 于 畢 齋 之 門 文 名 亞 於 濯 纓 中 廟 朝 官 至 判 中 樞 曺 伸 梅 溪 偉 之 弟 號 適 菴 先 生 宰 安 陰 時 以 詩 賀 之 鄭 汝 諧 字 仲 和 號 遯 齋 先 生 四 從 弟 先 生 以 書 勉 之 曰 易 曰 蒙 以 養 正 聖 功 也 禮 曰 玉 不 琢 不 成 器 豈 可 自 蟄 窮 鄕 而 不 求 師 友 之 助 乎 公 感 悟 卽 從 學 于 畢 齋 之 門 與 先 生 及 寒 暄, 秋 江 從 容 講 磨 多 所 發 明 成 廟 庚 子 進 士 以 孝 廉 薦 除 朔 州 敎 授 丁 未 拜 持 平 李 守 恭 字 仲 平 廣 州 人 領 議 政 克 培 之 孫 成 廟 戊 申 擢 第 歷 典 翰 戊 午 謫 昌 城 移 光 陽 甲 子 賜 死 中 廟 贈 都 承 旨 林 大 仝 字 貞 叔 羅 州 人 號 晦 軒 成 化 甲 午 中 生 員 官 至 縣 監 畢 齋 宰 咸 陽 時 從 遊 講 業 先 生 頭 流 之 行 同 遊 龍 游 潭 權 五 福 字 嚮 之 號 睡 軒 醴 泉 人 成 廟 丙 午 登 第 選 補 翰 苑 轉 入 玉 堂 戊 午 禍 與 金 馹 孫 等 同 罹 極 刑 權 景 裕 字 君 饒 安 東 人 成 廟 己 巳 登 第 由 檢 閱 遷 校 理 燕 山 朝 知 時 事 漸 變 乞 外 爲 堤 川 縣 監 戊 午 禍 與 濯 纓 金 馹 孫 同 日 死 李 穆 字 仲 雍 號 寒 齋 全 州 人 能 文 章 尙 氣 節 在 大 學 因 天 旱 極 論 尹 弼 商 姦 邪 曰 烹 弼 商 天 乃 雨 弼 商 遇 諸 途 呼 曰 君 必 欲 食 老 夫 肉 耶 公 昂 然 不 顧 而 去 燕 山 初 擢 拜 北 評 事 戊 午 禍 作 弼 商 構 殺 之 許 磐 字 文 炳 陽 川 人 癸 卯 進 士 志 於 性 理 恬 於 進 取 事 事 慕 古 寒 暄 堂 服 其 端 雅 出 於 天 性 戊 午 登 第 官 至 正 字 坐 史 禍 死 李 字 浪 翁 號 再 思 堂 慶 州 人 益 齋 之 後 氣 象 堂 堂 可 以 託 六 尺 之 孤 成 廟 己 酉 登 第 官 至 戶 曹 佐 郞 戊 午 杖 流 遠 地 死 于 甲 子 之 禍 中 廟 贈 都 承 旨 李 胄 字 胄 之 固 城 人 杏 村 之 后 能 文 章 有 氣 節 自 號 忘 軒 成 廟 戊 申 登 第 拜 正 言 戊 午 禍 流 珍 島 後 被 殺 姜 謙 字 謙 之 晉 州 人 成 廟 庚 子 登 第 官 至 正 郞 戊 午 杖 流 弟 字 之 庚 戌 登 第 爲 大 司 諫 死 甲 子 之 禍 後 贈 參 判 鄭 希 良 字 淳 夫 號 虛 庵 海 州 人 燕 山 初 登 第 爲 檢 閱 旣 而 坐 戊 午 禍 謫 義 州 量 移 金 海 未 幾 蒙 放 每 有 逃 世 之 志 一 日 云 甲 子 之 禍 甚 於 戊 午 我 輩 亦 且 不 免 遂 絶 迹 洪 瀚 南 陽 人 成 廟 乙 巳 登 第 官 至 參 議 性 剛 直 少 許 可 忤 權 貴 罹 戊 午 禍 杖 流 道 死 中 廟 朝 贈 吏 曹 參 判 姜 景 敍 字 子 文 晉 州 人 號 草 堂 成 廟 丁 酉 登 第 又 捷 重 試 戊 午 禍 杖 流 中 廟 朝 官 至 左 副 承 旨 後 追 贈 禮 曹 參 判 鄭 承 祖 慶 州 人 燕 山 甲 寅 登 第 選 補 翰 林 戊 午 杖 流 遠 地 李 宗 準 字 仲 匀 號 慵 軒 慶 州 人 能 文 章 善 書 畫 成 廟 乙 巳 登 第 官 至 縣 令 遊 畢 齋 門 坐 戊 午 禍 被 殺 崔 溥 字 淵 淵 號 錦 南 羅 州 人 成 廟 朝 登 第 爲 校 理 戊 午 被 謫 任 煕 載 字 敬 輿 豐 川 人 燕 山 戊 午 登 第 以 畢 齋 門 徒 杖 流 康 伯 珍 字 子 信 川 人 畢 齋 之 甥 成 廟 丁 酉 登 第 官 至 司 諫 戊 午 被 禍 杖 流 李 繼 孟 字 希 醇 全 義 人 成 廟 己 酉 登 第 以 畢 齋 門 徒 杖 流 中 廟 朝 官 至 贊 成 諡 文 平 李 仁 亨 字 公 夫 咸 安 人 號 梅 軒 與 弟 義 亨 從 子,, 受 學 于 畢 齋 之 門 成 化 戊 子 登 第 官 至 大 司 憲 甲 子 禍 及 泉 壤 一 蠹 先 生 續 集 卷 之 四 師 友 門 人 錄 四 美 亭 박형달( 朴 亨 達 ) 94

95 盧 友 明 字 君 亮 豐 川 人 號 信 古 堂 先 生 宰 安 陰 時 往 來 問 業 樂 道 行 義 爲 一 世 名 流 所 推 重 擧 遺 逸 除 參 奉 贈 吏 判 李 希 曾 字 魯 翁 陜 川 人 號 月 暉 堂 先 生 在 鍾 城 也 受 學 三 年 爲 世 名 儒 登 第 中 廟 二 年 丁 卯 以 待 敎 疏 伸 戊 午 諸 賢 高 崇 傑 字 伯 高 高 城 人 號 樂 天 堂 居 鍾 城 受 學 于 先 生 深 被 薰 炙 之 德 正 德 丙 子 進 士 爲 北 鄙 倡 一 蠹 先 生 續 集 卷 之 四 一 蠹 先 生 續 集 卷 之 四 師 友 門 人 錄 四 美 亭 박형달( 朴 亨 達 ) 95

96 태조 2년 계유(1393, 홍무 26) 3월 1일(병오) 야광사를 허물고 관사를 수즙 한 죄로 죽주 감무 박부에게 베 5백 필을 징수하다 :36 야광사를 허물고 관사를 수즙한 죄로 죽주 감무 박부에게 베 5백 필을 징수하다 죽주 감무( 竹 州 監 務 ) 박부( 朴 敷 )가 안렴사( 按 廉 使 )에게 결정을 얻어 그 고을에 있는 야광사( 野 光 寺 )를 무너 뜨리고 관사( 官 舍 )를 수즙( 修 緝 )하였으므로, 승록사( 僧 錄 司 )에서 계문( 啓 聞 )하니, 임금이 죄를 가하려고 하였 으나 그만두고, 베[ 布 ] 5백 필을 징수하고 본래의 직책으로 다시 임명하였다. 원전 1 집 41 면 분류 *사상-불교( 佛 敎 ) / *행정-지방행정( 地 方 行 政 ) [주D-001]승록사 ( 僧 錄 司 ) : 중의 도첩( 度 牒 ) 사무를 맡아 보는 관아. 태조 2년 계유(1393, 홍무 26) 3월 1일(병오) 야광사를 허물고 관사를 수즙한 죄로 죽주 감무 박부에게 베 5백 필을 징수하다 96

97 태조 2년 계유(1393, 홍무 26) 5월 7일(신해) 박영충의 농장에 은닉한 양민 을 충군시킨 죽주 감무 박부가 원한을 사 귀양가다 :34 박영충의 농장에 은닉한 양민을 충군시킨 죽주 감무 박부가 원한을 사 귀양가다 죽주 감무( 竹 州 監 務 ) 박부( 朴 敷 )를 곤장을 쳐서 축산( 丑 山 )으로 귀양보냈다. 처음에 동지중추원사( 同 知 中 樞 院 事 ) 박영 충( 朴 永 忠 )의 농장( 農 莊 )이 죽주( 竹 州 )에 있었는데, 박부가 숨겨 둔 양민( 良 民 ) 4인을 찾아내어 군대에 충당[ 充 軍 ]했더 니, 박영충이 이를 원망하였다. 뒤에 새 도읍을 건설하고 역사( 役 事 )를 파( 罷 )하고 돌아오다가, 죽주( 竹 州 )에 이르러 박부가 공복( 公 服 )을 입지 않고 맞이한다고 책망하고는, 와서 임금에게 호소하였던 것이다. 원전 1 집 43 면 분류 *사법-행형( 行 刑 ) / *농업( 農 業 ) / *신분( 身 分 ) / *군사( 軍 事 ) 태조 2년 계유(1393, 홍무 26) 5월 7일(신해) 박영충의 농장에 은닉한 양민을 충군시킨 죽주 감무 박부가 원한을 사 귀양가다 97

98 임하필기( ( 林 下 筆 記 ) 제33권 화동옥삼편( ( 華 東 玉 編 ) 고려 말의 팔은( ( 八 隱 ) :11 고려 말의 팔은( 八 隱 ) 송은( 松 隱 ) 박천익( 朴 天 翊 ), 포은( 圃 隱 ) 정몽주( 鄭 夢 周 ), 목은( 牧 隱 ) 이색( 李 穡 ), 야은( 冶 隱 ) 길재( 吉 再 ), 성은( 成 隱 ) 김대윤( 金 大 潤 ), 동은( 桐 隱 ) 이재홍( 李 在 弘 ), 휴은( 休 隱 ) 이석주( 李 錫 周 ),만은 ( 晩 隱 ) 홍재( 洪 載 ), 이상의 여덟 사람들을 팔은 이라고 한다. 포은의 시에, 평생 친구는 새벽별처럼 듬성듬성한데 / 平 生 親 舊 曉 星 疎 늙은 이 몸 지금처럼 쓸쓸하게 사는 것 한탄스럽다 / 老 圃 如 今 歎 索 居 도은은 서쪽에 놀러 가고 약재는 죽었으니 / 陶 隱 西 遊 若 齋 死 사람으로 하여금 매번 박중서를 추억케 하네 / 令 人 每 憶 朴 中 書 하였는데, 중서는 바로 송은이다. 임하필기( 林 下 筆 記 ) 제33권 화동옥삼편( 華 東 玉 編 ) 고려 말의 팔은( 八 隱 ) 98

99 동문선 제16권차 연상루 운( ( 次 延 爽 樓 韻 )박진록) 박진록( ( 朴 晉 祿 ) :07 박진록( 朴 晉 祿 ) 벼랑을 따라 보일락 말락 작은 길 / 緣 崖 隱 見 有 微 徑 옛 고을이 산을 의지 산이 성을 지었구나 / 古 邑 依 山 山 作 城 서걱서걱 돌밭은 눈을 일찍 맞이하고 / 磽 石 田 延 雪 早 가파른 송림 길은 구름 속으로 비꼈네 / 崎 嶇 松 磴 入 雲 조금 숨어살려 하나 뾰족한 수가 없네 / 欲 成 小 隱 眞 無 策 벼슬 그만둔다 해도 진정이 아닌 것 같아 / 縱 說 休 官 似 不 情 며칠 동안 관아에 공사가 적으니 / 數 日 郡 齋 公 事 少 발 내려 높이 누우매 심신이 맑아지누나 / 下 簾 高 臥 有 餘 淸 동문선 제16권차 연상루 운( 次 延 爽 樓 韻 )박진록( 朴 晉 祿 ) 99

100 목은문고( ( 牧 隱 文 藁 ) 제20권 박씨전( ( 朴 氏 傳 ) 박윤문( ( 朴 允 文 )) :43 쾌헌( 快 軒 김태현( 金 台 鉉 )) 김 문정공( 金 文 正 公 )은 문장과 도덕을 한 몸에 지니고 충렬왕( 忠 烈 王 )과 충선왕( 忠 宣 王 )과 충숙왕( 忠 肅 王 )을 차례 로 섬겼다. 그리하여 국가의 의혹이 있을 때마다 마치 시귀( 蓍 龜 )처럼 명쾌하게 결단을 내리면서, 임금의 교화( 敎 化 )가 바르게 펴지도록 보좌 하여 국가를 떠받치는 주석( 柱 石 )이 되었다. 그리고 가정에서도 더욱 엄하게 교육을 시킨 결과 여러 자제들이 등과( 登 科 )하였는데, 백씨( 伯 氏 김광식( 金 光 軾 ))는 불행히도 일찍 죽었으나 중씨( 仲 氏 )인 둔헌( 鈍 軒 김광철( 金 光 轍 ))과 숙씨( 叔 氏 )인 송당( 松 堂 김광재( 金 光 載 ))이 모두 재상 의 지위에 올라 가문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한편 쾌헌의 사위로는 안씨( 安 氏 안목( 安 牧 ))와 박씨( 朴 氏 박윤문( 朴 允 文 ))가 있는데, 안씨는 정당문학( 政 堂 文 學 )이요 박씨는 밀직 대언( 密 直 代 言 )으로서 모두 문과( 文 科 )를 통해 현달하였으며, 안씨의 손자 셋과 박씨의 아들 셋이 또 모두 등과( 登 科 )하여 현재 사( 士 )의 관직에 몸담 고 있다. 그런데 이름이 소양( 少 陽 )이고 자( 字 )가 중강( 仲 剛 )인 자가 있으니, 박씨의 아들이다. 차서로 보면 그가 셋째 아들이 되는데, 비록 성균시( 成 均 試 )에는 입격하였지만 대과( 大 科 )에는 누차 응시했어도 급제를 하지 못하였다. 이에 내가 그를 슬프게 여긴 나머지 여기에 그의 일을 기록하게 되었다. 중강( 仲 剛 )은 성품이 고결하여 장구( 章 句 )의 학문 따위는 아예 좋아하질 않았다. 그리고 자신은 평소에 책을 읽지도 않고 과거 공부를 하지도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미 급제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을 보면 그다지 탐탁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가 열릴 때면 시험 장에 으레 들어가긴 하면서도 지필( 紙 筆 )과 등촉( 燈 燭 )만을 가지고 갈 뿐 책은 한 권도 지니질 않았다. 그러고는 담소( 談 笑 )하는 사이에 글 한 편을 짓고 나면 잘 됐는지 못 됐는지 따져 보지도 않고서 그냥 던져 버리고 나오곤 하였으므로 끝내 급제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가 일찍이 혼자 생각하기를 대장부가 답답하게 한쪽 구석에만 처박혀 있다면 우물 속의 개구리와 뭐가 다르겠는가. 하고는, 길을 떠나 서쪽으로 경사( 京 師 )에 유람하러 갔다. 그리하여 산천과 인물, 궁궐과 성읍을 실컷 구경하고 나서는 옛날과 달리 안목이 한층 넓어지고 기상 이 호탕하게 트인 가운데 평소의 소망을 어느 정도 채울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서하( 西 夏 ) 간극장( 幹 克 莊 )의 치서공( 治 書 公 )이 그를 한 번 보 고는 사랑한 나머지, 자기 집에다 숙소를 정해 주고 후하게 대접하면서 때때로 시서( 詩 書 )를 가르쳐 주기도 하였으나, 중강은 또 이런 데에 마음을 두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중강이 오래 머물러 있다 보니 북방의 언어를 곧잘 구사하게 되었으므로, 밖에 나가서 행인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중강이 우리 동 방의 사람이라는 것을 행인들도 알지 못할 정도였다. 이에 중강 스스로 꽤나 기뻐하면서 벼슬을 해 볼 뜻을 가지기도 하였으나, 이를 주선해 줄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 인친( 姻 親 ) 가운데 산남 염방사( 山 南 廉 訪 司 )의 지사( 知 事 )를 맡은 이가 있었으므로 중강이 그를 따라 노닐게 되었는데, 산남( 山 南 )이 그 관아의 주차( 奏 差 )로 임명해 주었으므로 그가 일찍이 첩서( 捷 書 )를 지니고서 경사( 京 師 )에 한 번 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해에 마침 내가 또 외람되게 회시( 會 試 )에 급제하였으므로, 여관방에서 그를 만나 며칠 동안 허물없이 유쾌하게 지내 다가 헤어졌는데, 그 뒤로는 다시 그를 보지 못하게 되었다. 아, 중강이 지금 살았는지 죽었는지 도대체 알 길이 없다. 우리나라 사신이 해마다 건강( 建 康 남경( 南 京 ))에 들어가서 조근( 朝 覲 )을 하곤 하 는데, 그에 대한 소식을 들려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어쩌면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데다가 경사( 京 師 )에는 친한 사 람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아니면 일반 백성들 사이에 뒤섞여서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에 본국 사람들을 보는 것이 부끄러 워 나타나지 않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이미 세상을 떠나 다시는 일어날 수 없는 몸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 미 8, 9년의 세월이 지나고 사신들의 왕래가 또 한두 번이 아닌데 이처럼 그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가 없단 말인가. 나는 중강과 죽마고우( 竹 馬 故 友 )도 아니고 그저 경사( 京 師 )에서 그의 얼굴을 한 번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송정( 松 亭 ) 선생이 바로 나의 좌주 ( 座 主 )이고 보면, 좌주의 생질( 甥 姪 )인 그와 범범하게 사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때문에 내가 친근감을 표시하면서 같이 밥을 먹자고 하 면 중강도 감히 배불리 먹지 않을 수가 없었고, 내가 같이 옷을 입자고 하면 중강도 감히 그 옷을 걸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 은 중강을 종잡을 수 없는 기인으로 여겼지만 나는 그를 근후( 謹 厚 )하게 대우하였고, 사람들은 중강을 방탕한 인물로 여겼지만 나는 법도에 입각해서 그에게 충고를 해 주곤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중강도 나에 대해서는 감히 보통 사람을 대하듯 범범하게 사귀려 하지 않았던 것이 다. 목은문고( 牧 隱 文 藁 ) 제20권 박씨전( 朴 氏 傳 ) 박윤문( 朴 允 文 )) 100

101 쾌헌공의 자손들로 말하면 그야말로 한 시대에 성황을 이루었다고 말할 만하다. 그런데 중강만은 중원( 中 原 )에서 노닐면서 끝내 돌아오지 않 고 있으니, 중강의 사람됨이 어떠한지 후세 사람들이 장차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중강이란 존재는 자취도 없이 사라져서 전해지지 않게 될 것인데, 하물며 자식도 없는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내가 이 점을 특히 애달프게 여긴 나머지 대략적인 내용을 간추려 써 놓고 는, 뒷날 중강에 대해서 알려 줄 자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중강이 만약 중원에서 공을 세워서 사씨( 史 氏 )가 고려( 高 麗 ) 출신으로 성은 박씨 요, 부친은 모( 某 )이며 모친은 모씨( 某 氏 )이다. 라는 기록 등을 역사책에 남기게 된다면, 나의 이 전기( 傳 記 )는 전해지지 않아도 무방하겠지 만, 혹시라도 그렇게 되지 못할 경우에는 박씨의 자손들이 가보( 家 譜 )를 만들 적에 나의 이 기록을 참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목은문고( 牧 隱 文 藁 ) 제20권 박씨전( 朴 氏 傳 ) 박윤문( 朴 允 文 )) 101

102 동문선 제85권 기 박지평시서( ( 寄 朴 持 平 詩 序 ) 박윤문( ( 朴 允 文 ) :39 이곡( 李 穀 ) 전 감찰지평( 監 察 持 平 ) 박윤문( 朴 允 文 ) 질부( 質 夫 )는 선대가 밀성군( 密 城 郡 )에서 살았는데, 그 형 중랑장( 中 郞 將 ) 윤겸( 允 謙 )이 인척의 관계로 복주( 福 州 )에 살면서 대부인을 맞아들여 봉양하였다. 지원( 至 元 ) 무인년 8월에 대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그곳에서 장사하니, 지평( 持 平 )이 묘 소에 여막을 짓고 살면서 흙을 모으고 나무를 심으며, 또 예( 禮 )를 읽는 겨를에 염불( 念 佛 )도 하고 사경( 寫 經 )도 하여 명복을 빌면서 그 상기 ( 喪 期 )를 마쳤다. 복주는 경상도에서 큰 고을이 되어 빈객이 많이 내왕하는데, 그 사이에 무릇 알고, 모르고 간에 복주를 경유하는 자는 반드 시 점전( 苫 前 )에 나아가 위문하고 서울로 돌아오게 되면 칭찬이 입에서 끊어지지 않았다. 나는 예전 신유년에 복주의 막관( 幕 官 )이 되어 중랑( 中 郞 )과 면식이 있었고, 신미년에 예문관에 들어와서 지평의 뒤를 이었으니, 박씨 형제와 는 매우 익숙한 처지이므로 한번 책( 冊 )을 지고 가서 추향( 蒭 香 )을 올리려고도 하였으나, 워낙 멀어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친구들에 게 물어서 가시( 歌 詩 )에 의탁하여 그 감모하는 정을 부치며, 이에 이르기를, 효도라는 것은 사람의 자식된 자로서 당연히 할 바이므로, 옛 날에는 하지 못하는 자를 가르쳤을 따름이요, 능한 자를 상 주지는 아니했는데, 후세에 와서 효행이 출중한 자가 있으면 관에서 정문( 旌 門 )을 세워주고 신역( 身 役 )을 면제해 주었으니, 여기에서 풍속이 변한 것을 볼 수 있다. 본국의 제도에는 부모의 묘소를 3년동안 지킨 자에게는 정문을 허락하게 되어 있으며 평소의 행동이 어떠했는지는 묻지 않는다. 그래서 근세 의 사대부가 흔히 자기 집 종을 시켜서 대신 여묘살이를 하고, 끝마치면 종의 신분을 해방시켜서 임의로 떠나게 하니, 그 때문에 종살이 하 는 자들은 다투어서 하려고 한다. 무릇 소인이 이득에 급급한 것이 마치 군자가 의리를 중히 여기는 것과 같으니, 자식이 부모를 생각하는 것이 어찌 종들이 상전을 사랑하는 것만 못하겠는가? 다만 습속에 끌리어 못하는 것이다. 지평은 평소에 그 어버이를 봉양하여 지극하지 않 은 바 없었고, 어버이가 돌아가자 능히 예로써 장사하고, 장사하고서도 능히 일정한 상기를 마쳤으며, 또 능히 시묘하여 애도를 극진히 하였 으니, 그 박한 습속을 도탑게 하고, 무너진 풍교를 격동한 것이 많았다. 선왕( 先 王 )이 예를 제정하면서 중( 中 )을 지키기 위해 상기( 喪 期 )는 3 년을 지나지 못하게 하였다. 지평은 상기( 祥 期 )가 이미 가까웠으므로 거문고를 타는 저녁이 되어 우리들의 시를 노래한다면 비록 자로( 子 路 ) 의 용맹으로도 감히 비웃지는 못할 것이다. [주D-001]추향( 蒭 香 ) : 생추( 生 芻 )와 향을 말한 것인데, 영전( 靈 前 )에 올리는 예물임. 동한( 東 漢 ) 사람 서치( 徐 穉 )가 곽림종( 郭 林 宗 )의 모친상에 가 조문하면서 생추( 生 芻 ) 한 묶음을 올리고 갔다. [주D-002]거문고를 저녁 : 예기( 禮 記 ) 단궁편( 檀 弓 篇 )에 공자( 孔 子 )가 대상( 大 祥 )을 지낸 5일만에 거문고를 타는데 소 리가 나지 않더니 10일만에 피리 불고 노래하니 소리가 되었다 한다. 동문선 제85권 기 박지평시서( 寄 朴 持 平 詩 序 ) 박윤문( 朴 允 文 ) 102

103 동문선 제16권단양 취운루( ( 丹 陽 翠 雲 樓 ) 박윤문( ( 朴 允 文 ) :35 박윤문( 朴 允 文 ) 관동에 봉사했다가 이 다락에 오르니 / 奉 使 關 東 一 上 樓 10리 솔 그늘이 가장 깊고 그윽하네 / 松 陰 十 里 最 深 幽 길을 덮은 노목들은 오똑오똑 서 있고 / 蔭 程 老 樹 童 童 立 성을 두른 긴 강은 늠실늠실 흐르네 / 遶 郭 長 江 袞 袞 流 산 밑 비낀 이내 속에 길 잃은 송아지가 누웠고 / 橫 麓 斷 煙 迷 犢 臥 난간에 가득한 서늘 바람은 가는 사람 만류하네 / 滿 軒 涼 吹 勸 人 留 행색이 총총하여 구경할 여가 없으니 / 此 行 未 暇 登 臨 賞 다른 날 거듭 오거든 술 싣고 노닐리라 / 他 月 重 來 載 酒 遊 동문선 제16권단양 취운루( 丹 陽 翠 雲 樓 ) 박윤문( 朴 允 文 ) 103

104 고려사절요 제25권 충혜왕( ( 忠 惠 王 )갑신) 5년(1344), 원 지정 4년 박윤문( ( 朴 允 文 ) :34 왕이 서연( 書 筵 )에 참석하였는데, 강의가 끝난 뒤에 기거랑( 起 居 郞 ) 박윤문( 朴 允 文 )이 늦게 나왔다. 환자 이백( 李 伯 )이 왕에게 고하기를, 박윤문을 시켜서 빨리 저의 형의 고신에 서명하게 하여 주십시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만일 그렇게 한다면 전대의 최화상( 崔 和 尙 )이 하던 것과 무엇이 다르냐. 네가 사사로이 그에게 청하는 것이 좋겠 다." 하였다. 왕이 신궁을 헐어버리고 숭문관( 崇 文 館 )을 지으라고 명하였다. 찬성사 박충좌( 朴 忠 佐 )가 정관정요 ( 貞 觀 政 要 )를 강의하고, 또 연( 燕 )의 소왕( 昭 王 )이 황금대( 黃 金 臺 )를 지어놓고 곽외( 郭 隗 )를 맞이한 일을 말하였더니, 왕이 초( 鈔 ) 50정( 錠 )을 하사하였다. 고려사절요 제25권 충혜왕( 忠 惠 王 )갑신 5년(1344), 원 지정 4년 박윤문( 朴 允 文 ) 104

105 태조 총서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세우다 :26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세우다 처음에 청친조사( 請 親 朝 使 ) 윤승순( 尹 承 順 ) 등이 경사( 京 師 )로부터 돌아왔는데, 예부( 禮 部 )에서 황제의 조칙을 받들어 도평의사사 ( 都 評 議 使 司 )에 이자( 移 咨 )하여, 이성( 異 姓 )으로써 왕씨( 王 氏 )로 삼았음을 책망하고 후에는 친조( 親 朝 )함을 허가하지 않았다. 이때 에 이르러 태조는 판삼사사( 判 三 司 事 ) 심덕부( 沈 德 符 ) 찬성사( 贊 成 事 ) 지용기( 池 湧 奇 ) 정몽주( 鄭 夢 周 ) 정당 문학( 政 堂 文 學 ) 설 장수( 偰 長 壽 ) 평리( 評 理 ) 성석린( 成 石 璘 ) 지문하부사( 知 門 下 府 事 ) 조준( 趙 浚 ) 판자덕부사( 判 慈 德 府 事 ) 박위( 朴 ) 밀직 부사 ( 密 直 副 使 ) 정도전( 鄭 道 傳 ) 등과 흥국사( 興 國 寺 )에 모여 병위( 兵 衛 )를 크게 벌여 두고 의논하기를, 우( 禑 )와 창( 昌 )은 본디 왕씨( 王 氏 )가 아니므로 봉사( 奉 祀 )하게 할 수가 없는데, 또 천자( 天 子 )의 명령까지 있으니, 마땅히 거짓 임금을 폐하고 참임금을 새로 세워야 될 것이다. 정창군( 定 昌 君 ) 요( 瑤 )는 신왕( 神 王 )의 7대 손자로서 족속( 族 屬 )이 가장 가까우 니, 마땅히 세워야 될 것이다. 하고는, 공민왕의 정비궁( 定 妃 宮 )에 나아가서 정비의 말씀을 받들어 우왕은 강릉( 江 陵 )에 옮겨 두고, 창왕은 강화( 江 華 )에 내쫓아 폐하여 서인( 庶 人 )으로 삼고, 요( 瑤 )를 맞아서 왕으로 세우니, 이 분이 공양왕( 恭 讓 王 )이다. 원전 1 집 13 면 분류 *인물( 人 物 ) / *왕실( 王 室 ) / *외교( 外 交 ) / *역사( 歷 史 ) / *변란( 變 亂 ) [주D-001]도평의사사(( 都 評 議 使 司 ) : 고려 때의 관청. 1279년(충렬왕 5)에 초기의 도병마사( 都 兵 馬 使 )를 개칭한 것으로서, 국가 의 중대한 일이 있으면 이곳에 소속된 관원 중 3품관 이상이 한자리에 모여 의논해서 처리하였음. [주D-002]신왕(( 神 王 ) : 신종( 神 宗 ). 태조 총서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세우다 105

106 해동잡록 1 본조( ( 本 朝 )박연) 박연( ( 朴 堧 ) :14 박연( 朴 堧 ) 본관은 밀양( 密 陽 )으로 우리 태종조에 급제하였다. 음률( 音 律 )에 정통하여 세종이 아악( 雅 樂 )을 제정하는데, 박연이 실질적으로 이것을 주 관하였다. 관직은 대제학에 이르렀고, 효자의 정문( 旌 門 )이 있다. 우리 세종이 일찍이 석경( 石 磬 돌로 만든 악기( 樂 器 ))을 만들어 박연으로 하 여금 교정하도록 하였던 바, 박연이 아뢰기를, 어느 소리는 1푼이 높고, 어느 소리는 1푼이 낮습니다. 하므로, 다시 조사해 보니, 높은 소 리 나는 것에 진흙 찌꺼기가 끼었으므로, 세종이 진흙 찌꺼기 1푼을 긁어내게 하고, 또 낮은 소리 나는 것에는 진흙 찌꺼기 1푼을 덧붙이게 하였더니, 박연이 아뢰기를, 이제는 소리가 모두 정해졌사옵니다. 했다. 사람들이 그 신묘함에 탄복하였다. 용재총화 후에 아들의 사고로 말미암아 관직을 파면당하고 향리로 돌아가는데, 한 필의 말에 한 사람의 동자가 딸렸을 뿐, 그 행장이 쓸쓸하였다. 친한 벗들이 강가에서 전송하는데, 공( 公 )은 어려서부터 피리를 잘 불었기에 피리를 빼어서 3곡을 불고 가니, 듣는 이로서 슬퍼하지 않는 이 가 없었다. 동상 연화 회문체( 蓮 花 回 文 體 )를 짓고서, 옛사람이 선기회문체( 璿 璣 回 文 體 )를 지었는데, 별도로 오언( 五 言 ) 8구를 지어 연꽃 무늬 모양과 같 이 하고 이름지어 연화회문( 蓮 花 回 文 )이라고 했다. 하였는데,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홀로 처하여 숨는 것을 달게 여기고 / 獨 處 甘 遺 逸 몸을 한 작은 동산에 편히 하리라 / 安 身 一 小 園 골짜기가 둘렀으니 누추한 집이 적당하고 / 谷 盤 宜 陋 室 물굽이가 가느다라니 맑은 술동이와 가깝도다 / 灣 細 近 淸 樽 푸른 대에는 밝은 달이 깃들어 있고 / 翠 竹 栖 明 月 푸른 산은 흰 구름을 이었도다 / 靑 山 冠 白 雲 신선을 배우려는 마음 간절하나 / 學 仙 心 切 切 일이 어려운 세상은 분분하도다 / 難 事 世 紛 紛 하였다. 동문선 우리 세종이 거서( 秬 黍 곡물의 일종. 악기ㆍ도량형기 제작에 쓰임)를 해주( 海 州 )에서 얻으매, 박연이 밀[ 蠟 ]을 녹여서 거서의 모형을 만들 었는데, 그 낱알이 좀 컸다. 분( 分 )을 쌓아서 관( 管 )을 만드는데, 한 낱알로써 한 푼을 삼고, 열 알을 쌓아 올려 한 치로 삼았으며, 9치[ 九 寸 ] 황종( 黃 種 12음율의 하나)의 길이로 법을 삼아, 3푼을 손익( 損 益 )하여 12율을 이루어서 편경( 編 磬 )을 만들었다. 동국여지승람 새로 편경을 만들었는데, 이칙( 夷 則 ) 한 장이 그 소리가 맞지 않으므로, 박연이 살펴보고 말하기를, 먹줄이 아직 다 깎이지 않았다. 하 고, 곧 갈아 내어, 먹줄이 다 갈리자 소리가 맞게 되었다. 국조보감 해동잡록 1 본조( 本 朝 )박연( 朴 堧 ) 106

107 임하필기( ( 林 下 筆 記 ) 제20권 문헌지장편( ( 文 獻 指 掌 編 )박연) 박연( ( 朴 堧 )의) 상소 :57 박연( 朴 堧 )의 상소 박연이 상소하기를, 성악( 聲 樂 )을 조화롭게 하는 것은 예로부터 어려웠습니다. 옛사람이 성음( 聲 音 )을 논하면 반드시 경( 磬 )을 치는 것을 위주로 하였고 율 관( 律 管 )을 말하면 반드시 기장[ 黍 ]을 포개어 척도를 삼는 것으로써 기본을 삼았는데, 이제 하늘이 거서( 秬 黍 )를 내려서 지극히 화( 和 )한 감응을 보이고 땅이 경석( 磬 石 )을 내어 능히 화합한 단서를 내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마땅히 먼저 바로잡아야 할 것은 율관( 律 管 )입니다. 옛일을 상고하건대, 주( 周 )나라에서는 유태( 有 邰 )의 거서를 얻고서 악( 樂 )이 조화로웠고, 한( 漢 )나라에서는 임성( 任 城 )의 거서를 얻고서 고악( 古 樂 )에 가까워졌으며, 수( 隋 )나라에서는 양두산( 羊 頭 山 )의 기장을 얻었으나 조화롭지 못하였고, 송( 宋 )나라에서는 경성( 京 城 ) 의 거서를 얻었으나 역시 들어맞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기장을 포개어 척도로 삼는 법이 책에 실려 있기는 해도 참다운 거서를 얻 기가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신이 이제 동적전( 東 田 )에서 기른 기장을 가지고 이를 포개어 황종관( 黃 鍾 管 )을 만들어서 불어 보니, 그 소리가 중국의 황종보다 한 율 ( 律 )이 높았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아마도 땅이 메마르고 날씨가 가물어서 기른 기장이 조화를 잃어서 그러한 듯합니다. 신이 인하여 생 각건대, 다 같은 종류의 벼일지라도 남쪽 지방의 쌀은 윤택하고 굵직굵직하며, 경기( 京 畿 )의 쌀은 메마르고 자잘하며, 동북 지방의 것은 메마르고 자잘한 것이 더욱 심하니, 기장의 크고 작음도 응당 이와 같을 것입니다. 원하건대, 남쪽 지방 여러 고을에서 기르는 기장을 모두 가져다가 세 등급으로 골라 이를 포개어 율관( 律 管 )을 만들어서 그 가운데 중국 음( 音 )과 합하는 것이 있거든 삼분 손익( 三 分 損 益 )의 법으로 십이율관을 만들어 5성( 聲 )을 조화롭게 하면 도량권형( 度 量 權 衡 )도 따라서 살 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역대의 율( 律 )을 만든 것은 기장이 일정하지 않아 성음( 聲 音 )의 높고 낮음이 시대마다 차이가 있으니, 오늘날 중국의 율이 참된 것이 못 되고 우리나라 거서( 秬 黍 )가 바로 그 참된 것일지 어찌 알겠습니까. 그러나 율과 도량형을 통일시키는 것은 바 로 천자( 天 子 )의 일이고 제후국에서 스스로 마음대로 할 바가 아닙니다. 만약 이제 거서가 끝내 중국의 황종에 맞지 않으면 우선 권의( 權 宜 )에 따라 다른 기장을 사용해서 포개어 율관을 만들어 중국의 황종과 맞게 한 다음, 법에 의하여 손익( 損 益 )해서 성률( 聲 律 )을 바르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만약 율관을 만들지 않으면 오음( 五 音 )의 청탁( 淸 濁 )이 참됨을 잃게 될 것입니다. 맹자( 孟 子 )가 말하기를, 사광( 師 曠 )의 귀밝음으로도 육률( 六 律 )로써 하지 않으면 오음을 바르게 할 수 없다. 하였으니, 참으로 만세에 변치 않을 이론입니다. 하였다. 박연은 음률에 정통하여 상에게 인정을 받고 종률( 鍾 律 )을 제작하여 당대의 음악을 분명하게 볼만하게끔 만들었으니, 모두 그의 힘이었다. 단 종( 端 宗 ) 임신년에 특별히 자헌대부( 資 憲 大 夫 ) 중추원사( 中 樞 院 使 )를 가자( 加 資 )하도록 명하였다. 임하필기( 林 下 筆 記 ) 제20권 문헌지장편( 文 獻 指 掌 編 )박연( 朴 堧 )의 상소 107

108 용재총화 제8권 박연 :53 대제학 박연( 朴 堧 )은 영동( 永 同 )의 유생이었다. 어렸을 적에 향교에서 수업할 때, 이웃에 피리 부는 사람이 있었는데 제학이 독서하는 틈 에 겸하여 피리를 익히니, 그 지역에서 모두 훌륭하다고 인정하였다. 제학이 과거 보러 서울에 가다가 이원( 梨 園 )의 훌륭한 배우를 보고 교정 을 받는데 배우가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음절이 속되어 절주에 맞지 않으며 습관이 이미 굳어져서 틀을 고치기 어렵다. 하니, 제학이 말 하기를, 그렇더라도 가르침을 받겠소이다. 하고, 나날이 왕래하여 게을리하지 않았다. 수일 만에 배우가 들어보고서, 선배는 가르칠 만 하다. 하고, 또 수일 만에 들어보고는, 규범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장차 대성에 이르리라. 하더니, 또 수일 후에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무릎을 치고 말하기를, 나는 도저히 미치지 못하겠다. 하였다. 그뒤에 급제하여 또 금슬( 琴 瑟 )과 제악( 諸 樂 )을 익히니, 정묘( 精 妙 )하지 않 은 것이 없었다. 세종( 世 宗 )의 총애를 얻어 드디어 관습도감( 慣 習 都 監 ) 제조( 提 調 )가 되어 오로지 음악에 관한 일은 관장하였다. 제종이 석경 ( 石 磬 돌로 만든 경쇠)을 만들고 제학을 불러 교정케 하니, 제학이 말하기를, 모율( 某 律 )은 1푼이 높고, 모율은 1푼이 낮다. 하여, 다시 보니, 고율( 高 律 )에 진흙 찌꺼기가 있었다. 세종께서 명하여 진흙 찌꺼기 1푼을 없애게 하고 또 저율( 低 律 )에는 다시 진흙 찌꺼기 1분을 붙이 게 하였더니, 제학이 아뢰기를, 이제는 음률이 고릅니다.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그 신묘함에 탄복하였다. 그 아들이 계유( 癸 酉 )의 난에 관여되어 제학도 또한 이로 인하여 파직되고 향리로 내려갈 때, 친구들이 강가에서 전송하였는데, 제학이 말 한 필과 종 하나만 데리고 그 행장이 쓸쓸하였다. 배[ 舟 ] 안에서 같이 앉아서 술자리를 베풀고 소매를 잡고 이별하려 할 때 제학이 전대 속에서 피리를 꺼내어 세 번 불고 서 떠나가니, 듣는 사람들은 모두 처량하게 여기어 눈물은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용재총화 제8권 박연 108

109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1 - 경전류 1(속) 악( ( 樂 ) 속악( ( 俗 樂 )에) 대 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19) :48 속악( 俗 樂 )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19) 대저 악( 樂 )이란 바로 사람의 언어( 言 語 )와 성음( 聲 音 )이다.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 것인가 하면 이미 5음( 音 )ㆍ7성( 聲 )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 다. 악기( 樂 記 )에 이르기를 "무릇 소리는 사람의 마음에 말미암아서 난다." 했으니, 악이란 스스로 고금( 古 今 )과 아속( 雅 俗 )의 분별이 있을 뿐 이다. 송나라 방서( 房 庶 )의 저서에, 고악이 금악과 멀지 않다고 논했으니 그 말이 사리에 맞는 듯하다. 상고에는 질박하여 기구와 소리가 모두 질박했는데, 후세로 내려오면서 차츰 변하였다. 석( 石 )인 경( 磬 )이 변하여 방향( 方 響 )이 되고, 사죽( 絲 竹 )인 금( 琴 )ㆍ소( 簫 )가 변하여 쟁( 箏 )ㆍ적( )이 되고, 토( 土 )인 훈( 塤 )이 변하여 구( 甌 )가 되고, 목( 木 )인 축( )과 어( )가 꿰어져서 박판 ( 拍 板 )이 되었는데 이는 세상에서 쓰기에 매우 편리하다. 그런데도 이를 알지 못하는 자는 묘악( 廟 樂 )인 박종( 鐘 )ㆍ편경( 編 磬 )ㆍ궁헌( 宮 軒 )을 가리켜 정성( 正 聲 )이라 하고, 대체로 이부( 夷 部 )ㆍ노부( 鹵 部 ) 노는 곧 노( 虜 )자임를 가리켜 음성( 淫 聲 )이라고 한다. 옛날의 조두( 俎 豆 제향 때에 음식을 담는 목기( 木 器 )이다)를 후세에서 배우( 杯 盂 대접ㆍ사발 등 그릇)로 바꾸고 점석( 簟 席 대자리)을 탑안( 榻 案 걸상)으로 바꿨으니, 성인이 다시 세상에 난다 하더라도 배우ㆍ탑안을 버리고 조두ㆍ점석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8음( 音 )의 악기가 어찌 이것과 다르겠는가? 공자의 "정성( 鄭 聲 )이 음란하다."는 말이 어찌 그 기구가 옛것만 못하다 해서 한 말이겠는가? 역시 그 소리의 변함을 미워했을 뿐이다. 시험 삼아 악을 아는 자로 하여금 오늘의 기구에다 옛날의 소리를 붙여서 첨체( 滯 음조( 音 調 )가 막혀 고르지 못함)ㆍ미만( 靡 曼 화미( 華 美 )함을 말함)을 버리고 중화( 中 和 )ㆍ아정( 雅 正 )으로 돌아가게 한다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화기를 인도할 것이니, 치세( 治 世 )의 음률이라고 하 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상에서 이르는 아악이 반드시 옛것과 같다고는 못하겠지만, 교방( 敎 坊 )에서 연주하는 것이 어찌 다 음성( 淫 聲 )뿐이기야 하겠는가? 오제( 五 帝 )ㆍ삼왕( 三 王 )이 다 악을 달리했으니, 그 시대에도 고금과 아속의 분별이 있어서 그러했겠는가? 이미 대( 代 )가 갈리면 저마다 일대의 제도 가 있기 때문에 악도 달라진 것이다. 우리나라의 토악( 土 樂 )으로는 단군ㆍ기자의 시대에는 상고할 길이 없고 삼국 시대의 속악으로는 동경( 東 京 )ㆍ목주( 木 州 )ㆍ여나산( 余 那 山 )ㆍ장 한성( 長 漢 城 )ㆍ이견대( 利 見 臺 )ㆍ선운산( 禪 雲 山 )ㆍ무등산( 無 等 山 )ㆍ정읍( 井 邑 )ㆍ지리산( 智 異 山 )ㆍ내원성( 來 遠 城 )ㆍ연양( 延 陽 )ㆍ명주( 溟 州 ) 등의 이름이 있는데 모두 사적이 있는 가사( 歌 詞 )이다. 성호( 星 湖 ) 이익( 李 瀷 )의 사설( 僿 說 ) 에 "속악에 낙시조( 樂 時 調 )로 하림( 河 臨 )ㆍ최자( 子 )ㆍ탁목( 啄 木 ) 등 곡조가 있다. 신라사( 新 羅 史 )에 '왕이 가야( 伽 倻 ) 사람 우륵( 于 勒 )을 하림궁( 河 臨 宮 )으로 불러보고 하림( 河 臨 )ㆍ수죽( 竹 ) 두 곡조를 연주하게 했다.' 하였으니, 이것이 동방 악조( 樂 調 )의 시초이다. 지금의 악범( 樂 範 악학궤범 을 말함) 에는 일명 청풍체( 淸 風 體 )라고 하며, 탁목( 啄 木 )을 또한 하림이라고 일컬으 니, 모두 우륵의 여류( 餘 流 )이다. 오늘날의 정과정( 鄭 瓜 亭 ) 계면조( 界 面 調 )는 애상에 젖어서 사대부로서 배워 익히지 않는 이가 없다." 하였 다. 계면( 界 面 )이라 함은 그 곡조를 듣는 자가 눈물이 흘러내려 얼굴에 경계를 이룬다 해서 하는 말이다. 동방의 가사에 대엽조( 大 葉 調 )라는 것이 있는데, 사방이 모두 마찬가지이다. 대체로 장단( 長 短 )의 분별이 없고 그 안에 또 만( 慢 )ㆍ중( 中 )ㆍ삭 ( 數 ) 세 가지 곡조가 있으니, 본디 칭호는 심방곡( 心 方 曲 )이었다. 만은 극히 느려서 사람들이 지루하여 싫어하고, 중은 조금 빠르기는 하나 역시 좋아하는 자가 드물다. 오늘날에 통용되는 것은 대엽 중의 삭조(빠른 조)이다. 그 이사( 俚 詞 ) 1편은 세 가지 조(즉, 만ㆍ중ㆍ삭)에 다 통 할 수 있으나 이는 본디 비속( 鄙 俗 )해서 족히 말할 것이 못 된다. 악본 ( 樂 本 ) 1책은 신라 김대문( 金 大 問 )이 지은 것이고, 삼대목( 三 代 目 ) 1책은 신라 진성여왕이 각간( 角 干 ) 위홍( 魏 弘 )과 사통하여 위홍이 항상 대내( 大 內 )에 들어가 일을 보았는데, 홍에게 명하여 대구화상 ( 大 矩 和 尙 )과 함께 향가( 鄕 歌 )를 편수케 하였으니 이것이 삼대목 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향악( 鄕 樂 )으로는 현금( 玄 琴 )ㆍ비파ㆍ가야금ㆍ대금( 大 )ㆍ장고( 杖 鼓 )ㆍ아박( 牙 拍 )ㆍ무득( 无 得 )ㆍ무고( 舞 鼓 )ㆍ해금( 奚 琴 )ㆍ필률 ( 篥 )ㆍ중금( 中 )ㆍ소금( 小 )ㆍ박( 拍 )ㆍ사경( 砂 磬 )이 있다. 본조( 本 朝 )의 종실( 宗 室 )의 영재( 英 才 )인 수천군( 秀 川 君 )의 손자 함천군( 咸 川 君 )이 사경을 잘 쳤다. 오늘날 태악( 太 樂 :장악원( 掌 樂 院 )을 말함)에 전해오는 사경은 공( 公 )에서 비롯된 것이다.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1 - 경전류 1(속) 악( 樂 ) 속악( 俗 樂 )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19) 109

110 가곡( 歌 曲 )으로는 무애( 无 )ㆍ서경( 西 京 )ㆍ대동강( 大 同 江 )ㆍ오관산( 五 冠 山 )ㆍ양주( 楊 州 )ㆍ월정화( 月 精 花 )ㆍ장단( 長 湍 )ㆍ정산( 定 山 )ㆍ벌곡조 ( 伐 谷 鳥 )ㆍ원흥( 元 興 )ㆍ금강성( 金 剛 城 )ㆍ장생포( 長 生 浦 )ㆍ총석정( 叢 石 亭 )ㆍ거사련( 居 士 戀 )ㆍ처용( 處 容 )ㆍ사리화( 沙 里 花 )ㆍ장암( 長 岩 )ㆍ제위보 ( 濟 危 寶 )ㆍ안동자청( 安 東 紫 淸 )ㆍ송산( 松 山 )ㆍ예성강( 禮 成 江 )ㆍ동백목( 冬 柏 木 )ㆍ한송정( 寒 松 亭 )ㆍ정과정( 鄭 瓜 亭 )ㆍ풍입송( 風 入 松 )ㆍ야심사( 夜 深 詞 )ㆍ한림별곡( 翰 林 別 曲 )ㆍ삼장( 三 藏 )ㆍ사룡( 蛇 龍 )ㆍ자하동( 紫 霞 洞 )이 있는데 이는 고려의 속악이다. 본조의 악서로는 당속악보( 唐 俗 樂 譜 ) 가 있다. 세종이 박연( 朴 堧 ) 등에게 명하여 당속악보 를 만들어서 만( 慢 )ㆍ삭( 數 )의 음조( 音 調 )를 고르게 하였다. 악학궤범 은 성종이 유신( 儒 臣 )ㆍ악리( 樂 吏 )에게 명하여 악보( 樂 譜 )ㆍ합자보( 合 字 譜 )를 찬하게 하였는데, 성현( 成 俔 )이 악원 제조( 樂 院 提 調 )가 되어 전악( 典 樂 ) 박 곤( 朴 )ㆍ김복근( 金 福 根 ) 등과 함께 사림광기( 事 林 廣 記 ) ㆍ 대성악보( 大 成 樂 譜 ) 등 서적에 의거하여 종전의 규식을 준용하면서 자기의 뜻을 참작하여 만든 것이다. 지조( 指 爪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의 법과 현주( 絃 柱 :괘( )임)의 차례를 가지고 여러 성자( 聲 字 )를 합쳐서 보( 譜 ) 를 만들었는데, 그 울림을 거두어서 소리를 만들고, 그 중요한 대목을 가려 절주( 節 奏 )를 만들고서 현금합자보( 玄 琴 合 字 譜 ) 라고 이름했 다. 가야금ㆍ당비파( 唐 琵 琶 ) 같은 모든 현( 絃 )이 있는 것은 다 유추( 類 推 )하여 보( 譜 )를 만들어서 한데 묶고 제목을 합자보( 合 字 譜 )라고 붙여 세상에 간행( 刊 行 )했다. 지금의 취탄( 吹 彈 :취는 부는 것, 탄은 타는 것)은 옛날과 다르고, 또 당금( 唐 琴 )ㆍ당비파ㆍ생황( 笙 簧 )ㆍ양금( 洋 琴 )이 우리나라 음( 音 )으로 번 역된 것이 있으나, 손에서 손으로 서로 전할 뿐 자보( 字 譜 )가 없다. 그러므로 내가 일찍이 생황ㆍ양금의 자보를 지었으나 몇 곡( 曲 )에 불과한 데, 상자 속에 깊이 넣어 두었으므로 이를 본 사람이 없다. 생황자보( 笙 簧 字 譜 )ㆍ동금자보( 銅 琴 字 譜 )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속악은 단지 7조( 調 )를 쓸 뿐이다. 협종ㆍ고선이 궁음( 宮 音 )으로 되는 것은 일지( 一 指 )가 누르는 것이고, 중려ㆍ유빈이 궁음으로 되는 것은 이지( 二 指 )가 누르는 것이고, 임종이 궁음으로 되는 것은 삼지( 三 指 )가 누르는 것이고, 이칙ㆍ남려가 궁음으로 되는 것은 사지( 四 指 )가 누르는 것이고 속칭 빗가락[ 橫 指 ]임 무역ㆍ응종이 궁음으로 되는 것은 오지( 五 指 )가 누르는 것이고 속칭 우조( 羽 調 )임 청황종( 淸 黃 鐘 ) 이 궁음으로 되는 것은 육지( 六 指 )가 누르는 것이고 속칭 8조( 調 )임 청대려( 淸 大 呂 )ㆍ청태주( 淸 太 簇 )가 궁음으로 되는 것은 칠지( 七 指 )가 누 르는 것이다. 속칭 막조( 邈 調 )임 무릇 속악은 소리가 높으므로 협종을 첫소리로 한다. 이것이 대체로 소( 簫 )ㆍ적( )ㆍ필률[ ]ㆍ대금[ ]의 탄주법이다. 생황에 6음( 音 )이 있으니, 일자관( 一 字 管 )의 음은 루( ), 이( 二 )자관의 음은 로( 盧 ), 삼( 三 )자관의 음은 예( 芮 ), 사( 四 )자관의 음은 라( 羅 ), 오 ( 五 )자관의 음은 예( 芮 ), 륙( 六 )자관의 음은 리( 里 )이다.무릇 속악은 일( 一 )자ㆍ이( 二 )자ㆍ오( 五 )자 세 구멍으로 상하성( 上 下 聲 )이 되는데, 이 것을 또 자모성( 字 母 聲 )이라고 한다. 무릇 일( 一 )자ㆍ이( 二 )자를 누르면 반드시 오( 五 )자를 누르게 되는데, 사( 四 )와 사( 四 ), 삼( 三 )과 삼( 三 ), 오( 五 )와 오( 五 )는 모두 쌍성( 雙 聲 )이고, 륙( 六 )자는 단성( 單 聲 )이다. 무릇 소리가 짧은 것은 혹 불거나 들이마시는 데에 있어 약간 길어지기 도 하나, 소리가 긴 것은 한 번 내불고 한 번 들이마시는 것이 모두 길다. 무릇 속악은 거문고ㆍ생황의 모든 소리가 노래에 반주한다. 3장 ( 章 )을 마쳤으면 노래하는 자가 조금 쉬고 악은 여성( 餘 聲 )을 연주하여 사이를 두는데, 이것을 중여음( 中 餘 音 )이라 이른다. 4장과 5장을 다시 노래에 반주해서 5장을 마치면 노래하는 자가 또 멈추고 악이 여성을 연주해서 이를 끝내는데, 이것을 대여음( 大 餘 音 )이라 이른다. 5장 2여음 을 7편( 編 )이라고 이르니, 이것이 1조( 調 )인데 속칭 계면대엽( 界 面 大 葉 )이다. 그리고 농락조( 弄 樂 調 )ㆍ낙시조( 樂 時 調 )가 있는데 편악( 編 樂 )으로 무릇 4조이니 모두 노래소리와 서로 조화되는 것이고, 영산회상( 靈 山 會 相 ) 1조는 금( 琴 )ㆍ적( 笛 )과 서로 조화된다. 무릇 1조에 각기 7편( 編 )씩 갖추어졌다. 이것이 생황을 부는 것의 대략이며, 생황은 계면ㆍ대엽, 속칭 자지라엽( 紫 芝 羅 葉 )을 묘( 妙 )로 삼는다. 현금( 玄 琴 )은 여섯 현( 絃 )에 다섯 소리[ 聲 ]이니 첫째는 문현 상( 文 絃 商 ), 둘째는 유현 우( 游 絃 羽 ), 셋째는 대현 궁( 大 絃 宮 ), 넷째는 괘상청 각 ( 上 淸 角 ) 우ㆍ궁ㆍ각 3현은 금괘( 琴 ) 위에 있음 다섯째는 기괘청 치( 淸 徵 ), 여섯째는 무현( 武 絃 )이다. 괘상( 上 )ㆍ기괘( ) 두 현이 음정이 서로 맞고, 유현ㆍ괘상 두 현이 서로 맞고, 대현ㆍ괘상 두 현이 서로 맞고, 문현ㆍ대현 두 현이 서고 맞고, 무현ㆍ기괘 두 현이 서로 맞아야 하는데, 그 조현( 調 絃 )하는 법은 오른손으로 술대를 잡아서 술대 끝이 안을 향한다. 문현에서부터 술대[ 匙 ]로써 차례로 5현을 그 어서 무현에 이르러 그치는 것을 도( 挑 )라고 하는데, 이것이 속칭 사랭( 撒 冷 )이며, 실지로 소리가 나는 것은 두 청[ 二 淸 :괘상청과 기괘청]뿐이 다. 술대 끝이 밖을 향해서 무현에서부터 5현을 거슬러 그어서 문현에 이르러 그치는 것을 구( 勾 )라고 하니 속칭 다랭( 多 冷 )이며, 실지로 소 리나는 것은 두 청과 누르는 현뿐이다. 두 청이 음정이 서로 맞은 뒤에는 왼손의 장지( 長 指 )로 제2괘( )의 유현을 누른 다음 모지( 母 指 )로 뜯으며, 왼손의 식지( 食 指 )로는 괘상청을 뜯어 유현과 음정을 서로 맞추고, 왼손의 장지로 대현 제6괘를 누른 다음 모지로 뜯으며, 왼손의 식 지로 괘상청을 뜯어 대현과 맞춘다. 다음은 문현을 고르게 되는데 왼손의 장지로 먼저 제2괘 대현을 누른 다음 오른손으로 술대를 잡아 튕겨 서 두 현을 서로 맞추고, 무현과 기괘청도 술대로 튕겨서 서로 맞춘다. 이것을 조현( 調 絃 )이라 이른다. 옥보고( 玉 寶 高 ) 신라 때 거문고를 잘 타던 사람 거문고 곡조에 상원( 上 院 )ㆍ중원( 中 院 )ㆍ하원( 下 院 )이 있다. 신라 시대에 또 거문고의 일곱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1 - 경전류 1(속) 악( 樂 ) 속악( 俗 樂 )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19) 110

111 곡( 曲 )을 만든 것이 있으며, 곡에는 두 조( 調 )가 있는데 평조( 平 調 )ㆍ우조( 羽 調 )라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라 향악( 鄕 樂 )의 고조( 古 調 )이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남추강( 南 秋 江 ) 자는 효온( 孝 溫 )이며 단종( 端 宗 ) 때 사람이다. 세조조( 世 祖 朝 )에 소릉( 昭 陵 ) 복위( 復 位 )를 청한 일로 인 해 화를 입었다. 이 현금( 玄 琴 )의 장( 壯 )ㆍ한( 閒 )ㆍ화( 和 )ㆍ원( 怨 ) 4조를 지었는데 그 가사가 속되기는 하나 청아( 淸 雅 )하다. 우조( 羽 調 ) 항왕 ( 項 王 )이 말을 달리매 웅검( 雄 劍 )이 허리에서 울고 대강( 大 江 ) 서쪽에 견고한 성지( 城 池 ) 없네. 는 장( 壯 )하고, 만조( 慢 調 ) 금리선생( 錦 里 先 生 )의 초당( 草 堂 )에 해는 긴데, 아내가 발회( 撥 灰 )하니 우율( 芋 栗 )이 향기롭네 는 한( 閒 )하고, 평조( 平 調 ) 낙양( 洛 陽 ) 3월에 소자( 邵 子 )가 수레 를 타고 꽃밭 속에 수레가는 대로 천천히 가네 는 화( 和 )하고, 계면조( 界 面 調 ) 영위( 令 威 )가 나라를 떠났다가 천 년만에 돌아오니, 무덤만 총 총하구나 산천은 그대로나 사람은 간데 없네 는 원( 怨 )이다. 금보( 琴 譜 ) 에서 계면( 界 面 )을 북전( 北 殿 ) 서상기( 西 廂 記 ) 의 사곡( 詞 曲 )에 북곡( 北 曲 )ㆍ남곡( 南 曲 )이 있는 것과 같은 뜻이다. 이라고도 한다. 이 밖에도 속악의 가곡이 너무 많아서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주D-001]7성(( 聲 ) : 궁 상 각 치 우 5음에다 변치( 變 徵 ) 변궁( 變 宮 )을 더한 것이다. [주D-002]방향(( 方 響 ) : 악기 이름. 쇠 또는 구리로 만든 쇠판을 가자( 架 子 : 악기를 걸어 놓는 틀)의 위아래 두 단에 각각 8장씩 16장을 걸어 놓고 각퇴( 角 槌 )로 친다. 치수는, 길이가 보통 9촌, 넓이가 2촌이며, 모양은 위가 둥글고 밑이 모가 졌다. [주D-003]훈(( 壎 ) : 흙으로 구워 만든 악기. 저울추 모양으로 되고 상단 취구( 吹 口 )까지 합하여 여섯 구멍이 있는데, 이를 불어서 소리를 낸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석전( 釋 奠 ) 때면 이를 사용하고 있다. [주D-004]구( 甌 ) : 부( 缶 )의 일종임. 12개의 사발에 물을 가득 채우고 저( 箸 )로 두드려서 12율의 음을 내는 것이다. [주D-005]축(( ) : 나무로 만든 악기. 사방이 2척 4촌, 길이가 1척 8촌으로 된 나무 통으로 되었는데, 밑바닥 한가운데에 구멍을 뚫어 자루[ 椎 柄 ]를 집어넣고 이를 흔들어서 소리를 내는 것이다. 음악 연주를 시작하는 신호이다. [주D-006]어(( ) : 나무로 만든 악기. 모양은 엎드린 범[ 伏 虎 ] 같으며 등 위에 27개의 톱니 같은 것이 있어 견( )으로 긁어 소 리를 낸다. 음악 연주를 그치게 할 때에 사용한다. [주D-007]박판(( 拍 板 ) : 악기의 하나. 2매 내지 10여 매의 매끄러운 목판( 木 板 )의 한 끝을 끈으로 꿰어 손에 잡고서 음악의 박자 를 맞추는 것이다. [주D-008]묘악(( 廟 樂 ) : 종묘( 宗 廟 ) 제향에 쓰는 음악. [주D-009]편경(( 編 磬 ) : 아악기( 雅 樂 器 )의 하나. 2층으로 된 걸이가 있고, 한 층에 여덟 개씩 매어단 경쇠. [주D-010]궁헌(( 宮 軒 ) : 궁현( 宮 縣 )과 헌현( 軒 縣 )을 말한다. 현( 縣 )은 즉 종( 鐘 ) 경( 磬 ) 등 악기를 틀에 단다는 뜻이다. 주례 춘관( 春 官 ) 소서( 小 胥 )에 "악기 다는 위치를 정하는 데 있어 왕은 궁현( 宮 縣 )이고 제후는 헌현( 軒 縣 )이다 " 하였고 정현( 鄭 玄 ) 의 주에 의하면, 순거( : 악기를 다는 틀)의 4면에 다 악기를 다는 것은 궁현이고 3면에만 다는 것은 헌현이라고 하였다. [주D-011]이부(( 夷 部 ) : 문헌통고 악지에 이부악( 夷 部 樂 )이 보이는데 이는 곧 동이( 東 夷 ) 서융( 西 戎 ) 남만( 南 蠻 ) 북적( 北 狄 ) 등의 악을 말한다. [주D-012]노부(( 鹵 部 ) : 서양의 음악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주D-013]8음(( 音 )의) 악기 : 옛날에는 금( 金 ) 석( 石 ) 토( 土 ) 혁( 革 ) 사( 絲 ) 죽( 竹 ) 포( 匏 ) 목( 木 ) 등 여덟 가지 물건이 악 기의 재료로 쓰여졌으며, 그 재료에 따라서 소리를 각각 달리했으므로 8음이라 하였다. 주례 춘관 대사( 大 師 )에 " 播 之 以 八 音 金 石 土 革 絲 木 匏 竹 "이라 했으며, 주에는 ' 金 鐘 也 石 磬 也 土 壎 也 革 鼓 也 絲 琴 瑟 也 木 也 匏 笙 也 竹 管 簫 也 '라 하였 다. [주D-014]왕이 연주하게 했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新 羅 本 紀 ) 진흥왕( 眞 興 王 ) 12년 조에 "3월에 왕이 순수하다가 낭성 ( 娘 城 )에 머물러 우륵 및 그 제자 이문( 尼 文 )이 음악을 안다는 말을 듣고 왕이 특별히 이들을 하림궁으로 불러들여 그 악을 연주 하게 하자, 두 사람이 각각 새 노래를 지어서 연주했다." 하였다. [주D-015]7조(( 調 ) : 여기서 말하는 칠조는 한 가락[ 一 指 ]에서 일곱 가락[ 七 指 ]까지를 말한다. 네 가락은 빗가락[ 橫 指 ], 다섯 가 락은 우조( 羽 調 ), 여섯 가락은 8조( 調 ), 일곱 가락은 막조( 邈 調 ) 등 별칭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락이란 기본음 또는 '청'을 말 한다. [주D-016]일자관(( 一 字 管 ) 리( ( 里 ) 이다 : 일( 一 ) 이( 二 ) 삼( 三 ) 사( 四 ) 오( 五 ) 육( 六 ) 등 숫자는 생황( 笙 簧 ) 보( 譜 )의 기 보방법( 記 譜 方 法 )이고, 루( ) 로( 盧 ) 예( 芮 ) 라( 羅 ) 리( 里 ) 등은 육보( 肉 譜 )에 속한 것인데, 이것을 입으로 외며 구음( 口 音 ) 이라고 한다.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1 - 경전류 1(속) 악( 樂 ) 속악( 俗 樂 )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19) 111

112 [주D-017]문현 상( ( 文 絃 商 ) 기괘청 치( ( 岐 淸 徵 ) : 이는 억지로 궁( 宮 ) 상( 商 ) 각( 角 ) 치( 徵 ) 우( 羽 )의 5음에 배비( 排 比 )한 것이고, 실제( 文 絃 : 濁 黃 鐘, 游 絃 : 仲 呂, 大 絃 : 無 射, 上 淸 : 林 鐘, 岐 淸 : 林 鐘 )와는 다른 듯하다. 또 5음을 12율에 맞추어 보면 궁은 황종, 상은 대려, 각은 고선, 치는 임종, 우는 남려이다.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1 - 경전류 1(속) 악( 樂 ) 속악( 俗 樂 )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19) 112

113 연려실기술 별집 제12권 정교전교( ( 政 敎 典 故 )여악) 여악( ( 女 樂 ) :45 여악( 女 樂 ) 세종이 명하여 회례( 會 禮 )의 아악에 무동( 舞 童 )의 춤을 추게 하고 여악을 쓰지 못하게 하였으며, 이웃 나라 사절의 잔치 때에도 역시 여악을 쓰지 아니하였다. 문종 경오년에 중추원사( 中 樞 院 使 ) 박연( 朴 堧 )이 상소하기를, 공연( 公 宴 )에 여악을 쓰지 아니하는 것이 예( 禮 )입니다. 문종 시대에 사신 단목례( 端 木 禮 )가 와서 여악을 보고 대단히 잘못하는 것이라 말하고, 한 번도 베풀지 못하게 하였으며, 금년 봄에 사신 예겸( 倪 謙 )과 사마순 ( 司 馬 恂 ) 등이 처음 도착한 날 저녁에 여악이 모인 것을 보고 말하기를, 이는 오랑캐의 풍속이다. 대개 예의의 나라에서 어찌하여 스스로 욕됨을 취하기를 이같이 한단 말인가. 하였습니다.태종께서 이를 수치로 여기시어 곧 제도를 정하여 사신의 잔치에는 여악을 쓰지 아니하 였습니다. 세종께서 위에 오르시어 태종의 뜻을 본받아 회례( 會 禮 )와 양로연( 養 老 宴 )에 여악을 쓰지 아니하였고, 이웃 나라 사절의 잔치에도 역시 남악( 男 樂 )을 사용하였사오니, 이는 우리나라에서 옛날에 오랫동안 없던 정례( 正 禮 )이오며, 민속을 바꾸고 기풍을 옮기는 거룩한 일입니 다.그러하오나 홀로 사신의 연회에는 변경하기를 어렵게 생각하시고, 또 그 기회를 얻지 못하여 필경 사신 오량( 吳 良 )으로 하여금 방자하게 황란한 행동을 하게 하여, 사명( 使 命 )을 욕되게 하고 예속( 禮 俗 )을 더럽히게 한 것은 전하께서도 친히 보시고 들으신 바이옵니다. 세종께서 한 번 그 수치를 씻어 영구히 그 폐단을 없애버리고자 하였으나, 다만 누대( 累 代 )의 유풍( 遺 風 )을 고치는 것을 중하게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명 나라에 새 황제가 등극하고 마침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기이오니, 옛것을 폐지하고 고칠 때는 바로 이때입니다. 원하옵건대 성상께서 는 이를 재정( 裁 定 )하옵소서. 하였다. 이리하여 의정부에 내려서 의논하게 하니, 영의정 하연( 河 演 ), 우찬성 정분( 鄭 ), 좌참찬 정갑손( 鄭 甲 孫 )은 여악을 쓰지 말자. 고 헌의하였고, 우의정 남지( 南 智 )는 헌의하기를, 동남( 童 男 )을 계속 모집하기도 어렵고, 여악을 쓴 지도 이 미 오래인데, 어찌 예겸의 말 한마디로 갑자기 폐지하겠습니까. 청하옵건대, 예조와 관습도감( 慣 習 都 監 )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게 하옵소 서. 하였고, 좌찬성 김종서( 金 宗 瑞 )는 헌의하기를, 여악은 예가 아닙니다.그러므로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식 연회에는 쓰지 아니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 조정과 사신의 연회에 써 와 오늘까지 이른 것은 다른 쓸 만한 음악이 없었던 까닭입니다. 지금부터 모든 공연 에 여악을 쓰지 말게 하는 것이 아마 예속에 맞을 것 같사옵니다. 그러나 갑자기 변혁하는 것은 어렵사오니, 예관으로 하여금 숙의( 熟 議 )하게 하여 상세하게 검토하여 정하도록 하옵소서. 하였다. 성종 8년에 전교하기를, 정전( 正 殿 )에 여악을 쓰는 것은 조종의 상법( 常 法 )이 아니다. 세조께서 특히 한때 권도로 쓰신 것이 이내 그대 로 오늘에 이른 것이니, 지금부터 곡연( 曲 宴 ) 이외의 모든 정전에서 예로 베푸는 연회에는 쓰지 말도록 할 것이며, 그 노래하고 춤추는 아이 들은 미리 교습하게 하라. 하였다. 22년에 대사헌 김여석( 金 礪 石 ) 등이 상소하여 연향( 宴 饗 )에 여악을 쓰는 데 대해 논하여 아뢰기를, 바야흐로 여러 신하를 예로써 접할 때에 노래와 여자로써 어좌( 御 座 )에 가까이하는 것은 매우 외설된 일입니다. 노래와 여색은 성탕( 成 湯 )이 가까이하지 않은 바이며, 노 나라에 서 제 나라가 선사하는 여악을 받음으로 공자께서 노 나라를 버리고 간 까닭이온데, 어찌 반드시 여악을 써야만 임금과 신하가 서로 즐기는 음악이 되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 시행하고 있는 모든 것이 한결같이 중국의 제도를 좇고 있는데, 유독 여악 한 가지만이 성조( 聖 朝 )의 정치 에 누( 累 )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하였다.영돈녕부사( 領 敦 寧 府 事 ) 이상과 정부에 수의하라 하니, 윤필상( 尹 弼 商 )ㆍ이철견( 李 鐵 堅 )ㆍ어세겸 ( 魚 世 謙 ) 등은 아뢰기를, 헌부( 憲 府 )의 말이 매우 정당합니다. 그러하오나 나라의 연회 때에 여악을 행하여 온 지가 이미 오래이며, 모든 중국 조정의 문헌을 아는 선비들은 우리나라가 예의의 나라임을 극히 칭찬하고 있고, 여악을 쓰는 것으로써 비방한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하 였습니다.사방의 모든 나라가 각각 그 풍속이 있어 그 일에 해롭지 않은 것은 공자도 오히려 버리지 아니하였으니, 역귀( 疫 鬼 )를 쫓는다는 향 나( 鄕 儺 )와 사냥을 시켜 제물을 구하던 엽각( 獵 較 ) 따위가 이것입니다. 지금 중국에서는 비록 관리가 창기와 같이 묵는 것을 금지하고 있으 나, 또한 갑자기 폐하지는 못하고 있으며, 조정의 연회에 이르러서는 으레 창우( 倡 優 )의 잡희( 雜 戲 )를 쓰고 있으니, 이것이 여악보다 무엇이 낫겠습니까. 이제 비록 여악을 고치지 아니하더라도 반드시 예의를 아는 나라가 아니라고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중종 기사년에 명하여 여악의 폐지 여부를 의논하게 하니, 김수중( 金 壽 重 )이 말하기를, 여악을 예연( 禮 宴 )에 쓰는 것은 대단히 장중( 莊 重 )하지 못하오나, 다만 임금과 신하 사이의 예연에는 음악이 없을 수 없으니, 해조( 該 曹 )로 하여금 남악( 男 樂 )의 수를 참작해서 정하여 가르 연려실기술 별집 제12권 정교전교( 政 敎 典 故 )여악( 女 樂 ) 113

114 치고 검열해서 쓰자. 하고, 박원종( 朴 元 宗 )ㆍ성희안( 成 希 顔 )ㆍ정미수( 鄭 眉 壽 )ㆍ권균( 權 均 )ㆍ이손( 李 蓀 )ㆍ홍경주( 洪 景 舟 )ㆍ김준손( 金 俊 孫 )ㆍ 신윤무( 辛 允 武 )ㆍ이점( 李 ) 등은 말하기를, 폐지할 수 없다. 하고, 유순정( 柳 順 汀 )ㆍ박안성( 朴 安 性 ) 등은 내연( 內 宴 )에만 써야 한다. 하고, 민효증( 閔 孝 曾 )ㆍ김응기( 金 應 箕 ) 등은, 설립하는 뜻을 상고해서 다시 논의하자. 하였고, 노공필( 盧 公 弼 )ㆍ신용개( 申 用 漑 )는, 폐지 하는 것이 옳다. 하고, 정광필( 鄭 光 弼 )은 헌의하기를, 여악은 본래가 폐정( 弊 政 )이며, 정전( 正 殿 )에서 사용하는 데 이르러서는, 더욱 야비 하고 속되어 정직한 선비들이 폐지하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다만 모두 남악을 쓴다면 남정( 男 丁 )의 모집과 관복( 冠 服 ) 등의 일이 매우 어 려울 것입니다. 조종조에서 폐풍임을 알지 못한 것이 아닐 터인데, 고치지 못하고 그대로 오늘에 이른 것은 생각하옵건대, 반드시 까닭이 있 을 것입니다. 옛날대로 좇는 것이 편리할까 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광필의 의견에 좇았다. 신미년에 여악을 줄이는 데 대한 편리 여부를 장악원 제조 유순정과 예조 판서 신용개에게 물었다. 순정과 용개 등이 청하기를, 서울 안의 여악은 전대로 두고, 지방에 있어서는 폐지해야 할 것은 폐지해야 합니다. 하였다. 기묘년 봄에 대간( 臺 諫 )이 여악을 폐지하기를 청하였다. 중종 기묘에 들어 있다. 문헌비고 에는 중종 20년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릇된 것 같다. 음복연( 飮 福 宴 )에는 여악을 썼다. 제향( 祭 享 )과 선조 경진년 조에 상세하다. 선조조에 일본인 현소( 玄 蘇 ) 등이 올 때에 임금이 친히 접대하려 하니, 헌부에서 아뢰기를, 외국 사람을 접대하는 것은 중대한 예이온 데, 만약 여악을 마음껏 아울러 베풀어 주면 이는 제왕( 帝 王 )의 여색( 女 色 )을 멀리하는 도리가 아니오며, 먼 곳에 온 사람에게 대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청하옵건대, 해조에 명하시어 남악을 대신 쓰도록 하옵소서. 하였다. 임금이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기재잡기 인조 반정 초에 사간( 司 諫 ) 이성구( 李 聖 求 )가 여악을 폐지하기를 건의하였다. 하담록 인조조 상신( 相 臣 ) 조에 상세하다. 조익( 趙 翼 )이 경오년에 올린 차자에, 옛날 제( 齊 ) 나라가 노 나라에 여악을 보내니, 계환자( 季 桓 子 )가 이를 받아들이어 임금과 신하가 함께 여악( 女 樂 )에 빠져서 사흘 동안이나 조회를 폐지하니, 공자가 노 나라를 떠났으며, 안연( 顔 淵 )이 나라를 다스리는 길을 질문하니, 공자 가 답하여 말하기를, 정( 鄭 ) 나라 음악을 추방하고 아첨하는 사람을 멀리해야 한다.정 나라의 음악은 음탕하고, 아첨하는 사람은 위태하기 때문이다. 하였고, 예기 에 말하기를, 간사한 성음과 음란한 여색을 이목( 耳 目 )에 대하지 말며, 음탕한 음악과 사특한 예( 禮 )를 마음에 두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여악이란 본래 국가에서 마땅히 둘 것이 아니며, 단아하고 정직한 선비가 가까이할 것이 아닙니다.옛날 부터 제왕의 정치에 여악이 있은 일이 없었는데, 오직 당 나라 현종( 玄 宗 ) 때에 이원제자( 梨 園 弟 子 )가 있었고, 진( 陳 ) 나라 후주( 後 主 ) 때에 여악사( 女 樂 士 )가 있더니, 두 임금이 모두 나라를 어지럽게 하고 멸망하게 하였으니, 이는 극히 법받을 것이 못 됩니다. 우리나라에 여악이 있은 것은 어느 시대부터인지 알지 못하오나, 신이 지난번에 강화에 가서 실록을 상고하였사온데, 예종( 睿 宗 )의 하교를 본즉, 변경의 기생 은 그대로 두고 내지( 內 地 )의 기생은 모두 폐지하라. 변읍( 邊 邑 )에는 장사( 將 士 )들이 집을 떠나 수자리에 오래 있으면 의복이 해어져도 깁기 가 어려울 것이므로 기생을 폐지할 수 없다. 하셨습니다.그때 논의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명 나라 사신이 올 때에는 지방에 있는 기생 들을 반드시 서울로 거두어 모아야 할 것이니, 만일 내지( 內 地 )에 기생이 없으면 멀리 변경에서 불러오는 것은 불편하다. 하였습니다. 이것 으로 본다면, 이때 서울에는 기생이 없었던 것을 가히 알 수 있습니다. 비록 풍정( 豐 呈 )의 예에는 여악이 없을 수 없다 하오나, 그러나 옛날 부터 제왕 중에 모후( 母 后 )를 효도로 받든 이가 많습니다마는, 여악으로써 즐겁게 하였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옛날 월( 越 ) 나라가 오( 吳 ) 나라를 포위하였을 때에 조양자( 趙 襄 子 )가 음식을 감하여 먹었는데, 가신( 家 臣 ) 초융( 楚 隆 )이 그 까닭을 물으니, 양자는 말하기를, 황지( 黃 池 )에서 회합하였을 때, 선주( 先 主 )와 오왕이 말하기를 좋고 나쁜 일을 서로 같이 하자 한 바 있다. 고 하였습니다. 대개 조앙( 趙 鞅 )과 오왕이 한마디의 약속이 있으므로 해서 오 나라가 포위당하였을 때, 그 아들이 음식을 감하여 먹은 것입니다.이제 우리나라와 명 나라 와의 은의( 恩 義 )의 무거움이 조양자와 오 나라와의 그것보다는 만 배나 더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 명 나라 서울에 병란으로 계엄을 펴고 있 는 때를 당하여 우리나라의 임금과 신하는 모두 마땅히 근심하고 슬퍼하며 지내야 할 것이어늘, 어찌 서울 안에 음악의 소리가 분분히 나게 하여서야 되겠습니까. 대신( 臺 臣 )들의 여악 보내는 것을 파하자는 청을 이미 윤허받았더니, 이제 또 보류하자는 논의가 있습니다. 원하옵건대, 전의 뜻을 고수하시어 속히 보내는 것을 파하도록 하옵소서. 하였다. 임금이 그대로 좇아 기악 보내는 것을 파하였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12권 정교전교( 政 敎 典 故 )여악( 女 樂 ) 114

115 연려실기술 제3권 세종조 고사본말( ( 世 宗 祖 故 事 本 末 ) 세종조의 명신( ( 名 臣 ) :42 세종조의 명신( 名 臣 ) 박연( 朴 堧 ) 박연은 자는 탄부( 坦 夫 )이며, 호는 난계( 蘭 溪 )이고, 처음 이름은 연( 然 )이었다. 본관은 밀양( 密 陽 )이니, 삼사 좌사( 三 司 左 使 ) 박천석( 朴 天 錫 )의 아들이다. 효행으로 정려되었고, 태종 신묘년(1411)에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지중추원사 제학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헌공( 文 獻 公 )이다. 공은 영동( 永 同 )의 유생( 儒 生 )으로 젊었을 때 우연히 피리를 익혔는데, 온 고을 사람들이 그를 선수( 善 手 )라 일컬었다. 그뒤 서울에 왔을 때 어떤 광대가 보고서 웃기를, 음절이 야비하여 가락에 맞지 않는데, 이미 습관이 되어 고치기도 어렵겠다. 하니, 공이 굳이 배우기를 청하였다. 며칠만에 광대가 말하기를, 선배님은 가르칠 만합니다. 하였다.또 며칠 지나서 말하기를, 규범( 規 範 )이 이미 이룩되었습니 다. 하고, 또 며칠 지나자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으면서, 나로서는 미칠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 다음 급제한 뒤에 또 거문고와 비파 등 모든 악기를 연습하여 정묘하지 않음이 없었다. 용재총화 공의 아들이 계유년 사변에 관계되었으므로 그 역시 이로 인하여 파면되어 향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친구들이 강가에 나가서 전송할 때, 그는 말 한 필과 종 하나를 데리고 나와 행장이 초라하였다. 친구들이 함께 배 가운데에 앉아서 술잔을 베풀다가 손을 잡고 하직할 때 그가 주머니에서 피리를 뽑아 세 곡조를 분 뒤에 떠나니, 그 소리를 듣고 처량하게 느껴 눈물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용재총화 연려실기술 제3권 세종조 고사본말( 世 宗 祖 故 事 本 末 ) 세종조의 명신( 名 臣 ) 115

116 성호사설 제5권만물문( ( 萬 物 門 ) 박연 악률( ( 朴 堧 樂 律 ) :38 박연 악률( 朴 堧 樂 律 ) 세종 대왕은 음악 만드는 데 뜻이 있었다. 그 당시에 거서( 秬 黍 )는 해주( 海 州 )에서 났고 경석( 磬 石 )은 남양( 南 陽 )에서 났는데, 세종이 박연 ( 朴 堧 )에게 명하여 편경( 編 磬 )을 만들도록 하였다. 박연은 이 거서라는 기장을 가지고 적분( 積 分 )해서 황종( 黃 鍾 )이란 관( 管 )을 만들었다. 그 소리가 중국 율관( 律 管 )에 비해 조금 높게 된 것은 땅의 비옥하고 척박한 것이 다르고, 기장에도 크고 작은 것이 있기 때문에 밀[ 蠟 ]을 녹 여 붙여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중국 기장은 우리나라 해주 기장과 비교하면, 조금 크게 생겨서 한 개만 해도 1푼이 되고 열 개만 쌓으면 1촌 이 된다. 이러므로 아홉 치로 황종 길이를 만들고 서 푼씩 덜기도 하고 보태기도 해서 12율( 律 )을 만들었다 하니, 이 말은 아주 웃을 만하다. 옛날 이조( 李 照 )는 종서( 縱 黍 )로 측정했은즉, 구멍 지름이 3푼으로서 기장 1천 7백 30알이 담겨지게 되었고, 호원( 胡 瑗 )은 횡서( 橫 黍 )로 측정 했은즉, 기장 1천 2백 알이 담겨지게 되는데 구멍 지름이 3푼 4리( 釐 ) 7호( 毫 )였었다 하니, 이는 모두 1천 2백 알의 기장이 담겨져야 한다는 법에는 맞지 않는다. 방서( 房 庶 )는, 1천 2백 알의 기장이 담겨져야 9촌이 되는데 90분의 1이다. 이 1이란 것은 1푼이란 말인데, 후유( 後 儒 )들은 이 말을 잘못 알 고 기장 한 알로써 1푼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 말이 조금 근사한 듯하다. 기장을 담는 것은 기장 자체가 미끄러워서 쌓아올릴 수 없기 때 문이다. 밀을 녹여서 만든 기장은 매우 깔끄러워서 여러 개를 쌓을 수 없을 것이다. 참 기장을 쌓는다 해도 오히려 자빠지고 얹히게 되어 허공에 빠질 염려가 있을 것인데, 하물며 밀을 녹여서 만든 기장임에랴? 또 밀을 녹여 만든 기장이 참 기장보다 조금 컸다면 뭐 거서를 꼭 필요로 할 것이 있겠는가? 이는 박연이 자기의 추측으로 만든 데에 불과한 것이다. 세상에 사광( 師 曠 )처럼 귀밝은 이가 없는데, 그것이 음률에 맞는지 안 맞는지를 뉘라 서 알겠는가? 해주에서 났다는 기장도 이미 이처럼 믿을 수 없으니, 남양에서 난 옥도 역시 옥과 비슷한 민석( 珉 石 )에 불과했을 것이다. 활석( 滑 石 )이 비교 하면 조금 굳기는 하나 사빈( 泗 濱 )에서 나는 부석( 浮 石 )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중에 성현( 成 俔 )이 지은 악학궤범( 樂 學 軌 範 ) 서문에, 박 연이 얻었다는 경석은 흙부스러기[ 土 苴 ]였던 것이다. 하였으니, 그는 이 경석을 보았던 것인가? [주C-001]박연 악률( 朴 堧 樂 律 ) : 박연의 악률. 類 選 卷 4 下 人 事 篇 治 道 門. 林 下 卷 20 文 獻 指 掌 編 10 朴 堧 專 掌 樂 事. [주D-001]거서( 秬 黍 ) : 검은 기장. [주D-002]경석(( 磬 石 ) : 경쇠 만드는 옥돌. [주D-003]박연( 朴 堧 ) : 고려 우왕 4년에 태어나 조선조 세조 4년에 죽은 음악가. 자는 탄부( 坦 夫 ), 호는 난계( 蘭 溪 ). [주D-004]편경(( 編 磬 ) : 아악( 雅 樂 )의 하나. 두 층으로 된 걸이가 있는데, 한 층에 여덟 개씩 매어 단 경쇠. [주D-005]관(( 管 ) : 피리. [주D-006]호원(( 胡 瑗 ) : 송( 宋 ) 나라 학자. 자는 익지( 翼 之 ). 호는 안정( 安 定 ). [주D-007]방서(( 房 庶 )는) 듯하다 : 이상의 말들을 송사( 宋 史 ) 율력지( 律 曆 志 ) 참조. [주D-008]사광(( 師 曠 ) : 춘추 시대 진( 晉 ) 나라 악사( 樂 師 ). 자는 자야( 子 野 ). 귀가 예민하여 소리를 듣고 길흉을 잘 분별했고 새 소리까지 구분하여 금경( 禽 經 ) 을 지었음. [주D-009]활석(( 滑 石 ) : 광물( 礦 物 )의 한 종류. 겉은 반질반질하고 몸은 무른데 약품으로도 쓰임. [주D-010]부석(( 浮 石 ) : 아주 가벼운 돌. [주D-011]성현(( 成 俔 ) : 조선조 성종~연산 연간의 학자. 자는 경숙( 磬 叔 ), 호는 용재( 慵 齋 ) 또는 부휴자( 浮 休 子 )ㆍ허백당( 虛 白 堂 )ㆍ국오( 菊 塢 ). 성호사설 제5권만물문( 萬 物 門 ) 박연 악률( 朴 堧 樂 律 ) 116

117 성호사설 제5권만물문( 萬 物 門 ) 박연 악률( 朴 堧 樂 律 ) 117

118 사가시집 제3권세종대왕( ( 世 宗 大 王 )의) 만장( ( 挽 章 ) 6수 박연 :36 세종대왕( 世 宗 大 王 )의 만장( 挽 章 ) 6수 하의 국운은 구가가 복종하였고 / 夏 祚 謳 歌 協 요는 역수가 돌아감을 감탄했네 / 堯 咨 曆 數 歸 건룡이 자리에 나아감으로부터 / 乾 龍 初 在 位 밝게 살핌이 정히 거듭 빛났기에 / 離 照 正 重 輝 국운은 천 년의 태평을 접하였고 / 運 接 千 齡 泰 공은 백대의 으뜸으로 추앙되었네 / 功 推 百 代 巍 어찌 알았으랴 문득 말명을 듣고 / 何 知 聞 末 命 슬피 사모하여 눈물을 뿌릴 줄을 / 哀 慕 涕 交 揮 정일함은 천인의 학문이거니와 / 精 一 天 人 學 서로 전한 건 옛 성인의 마음이라 / 相 傳 古 聖 心 어진 이 구하여 자주로 전석하고 / 求 賢 屢 前 席 간언 들이고자 스스로 맘 비웠네 / 納 諫 自 虛 襟 노인 공경함은 다 효를 인하였고 / 敬 老 皆 因 孝 형법 밝히는 덴 공경뿐이었으니 / 明 刑 只 在 欽 우리 삼한 땅 천만세에 이르도록 / 三 韓 千 萬 世 그 은택이 인심에 깊이 새겨지리 / 流 澤 入 人 深 공검으로 안일치 않은 데 처하고 / 恭 儉 居 無 逸 시종여일 근심하고 근로하면서 / 憂 勤 有 始 終 향기로운 제수로 엄숙히 제사하고 / 苾 芬 嚴 祀 事 농사일을 친히 하기도 하였네 / 稼 穡 卽 田 功 하우씨의 공부는 규모가 커졌고 / 夏 貢 規 模 大 우순의 소와는 제작이 같았으니 / 虞 韶 制 作 同 찬란한 역사의 기록들이 / 煌 煌 太 史 筆 모두 전모 속에 들어 있고말고 / 都 在 典 謨 中 한 시대에 인문은 찬란해졌고 / 一 代 人 文 煥 천 년 만에 아송 또한 밝아졌네 / 千 年 雅 頌 明 국가간 교류는 신의를 돈독히 했고 / 交 鄰 敦 信 義 대국을 섬김엔 충성을 다했거니와 / 事 大 盡 忠 誠 지리는 주 나라 강토를 회복했고 / 地 理 周 疆 復 기형은 순 임금 책력을 이루었으니 / 璣 衡 舜 曆 成 한갓 십자의 시호 올린 것만으론 / 徒 崇 十 字 號 성덕을 끝내 이름하기 어렵고말고 / 盛 德 竟 難 名 사가시집 제3권세종대왕( 世 宗 大 王 )의 만장( 挽 章 ) 6수 박연 118

119 친목하는 덴 인자한 은혜가 컸고 / 親 睦 仁 恩 大 재기한 데서 성효는 우뚝하였네 / 齊 聖 孝 巍 종족의 지손은 백세에 융성하고 / 宗 支 百 世 盛 하나의 화악루는 서로 빛났도다 / 花 萼 一 樓 輝 지극한 정치 삼십 년을 넘어서는 / 至 治 臨 三 紀 만기를 싫어하여 신선이 되시니 / 仙 游 厭 萬 機 상심되어라 옥좌를 바라보니 / 傷 心 瞻 玉 座 다시는 천위를 뵐 수 없게 되었네 / 無 復 望 天 威 좋은 계책을 사왕에게 전하시고 / 貽 謀 傳 嗣 聖 궤에 기대 정미한 말씀 끊어지니 / 憑 几 絶 微 言 금등의 길한 점을 쳐보지 못하고 / 未 卜 金 縢 吉 갑자기 옥책의 존호를 올리다니 / 俄 崇 玉 策 尊 출발하는 상여에 바람은 처량하고 / 風 悲 仙 馭 動 백관의 상복 위에 달빛은 차가워라 / 月 冷 縞 儀 奔 오랫동안 시종신으로 있었는데 / 侍 從 經 帷 久 이젠 성은에 보답할 길이 없구나 / 無 由 報 聖 恩 [주D-001]하(( 夏 )의) 복종하였고 : 맹자( 孟 子 )가 이르기를, 하 나라 우 임금이 현신 익을 하늘에 천거한 지 칠 년 만에 붕하자 삼년상을 마치고는 익이 우 임금의 아들인 계를 피하여 기산의 북쪽에 가서 숨어 있었더니, 조회하고 송옥하는 자들이 익 에게 가지 않고 계에게 가면서 말하기를 우리 임금의 아들이다. 하고, 덕을 노래하는 자들도 익을 노래하지 않고 계를 노래 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임금의 아들이다. 했다. 禹 薦 益 於 天 七 年 禹 崩 三 年 之 喪 畢 益 避 禹 之 子 於 箕 山 之 陰 朝 覲 訟 獄 者 不 之 益 而 之 啓 曰 吾 君 之 子 也 謳 歌 者 不 謳 歌 益 而 謳 歌 啓 曰 吾 君 之 子 也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직접 부왕( 父 王 )의 자리를 이었음을 의미 한다. 孟 子 萬 章 上 [주D-002]요(( 堯 )는) 감탄했네 : 요 임금이 이르기를, 아, 순아, 천운의 역수가 네 몸에 있게 되었으니, 진실로 중도를 지 키거라. 그렇지 못하여 사해가 곤궁해지면 하늘의 복록이 영원히 끊어지리라. 咨 爾 舜 天 之 曆 數 在 爾 躬 允 執 其 中 四 海 困 窮 天 祿 永 終 한 데서 온 말로, 이는 곧 전왕( 前 王 )으로부터 선위( 禪 位 )를 받았음을 의미한다. 論 語 堯 曰 [주D-003]건룡(( 乾 龍 )이) 자리에 나아감으로부터 : 주역 건괘( 乾 卦 )에, 구오는 용이 날아서 하늘에 있는 것이다. 九 五 飛 龍 在 天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제왕( 帝 王 )의 자리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주D-004]말명(( 末 命 ) : 임종( 臨 終 )의 유언( 遺 言 )을 말한다. 서경 고명( 顧 命 )에, 위대한 임금님께서 옥궤에 기대어 말명을 말씀하사, 너에게 명하여 문왕과 무왕의 교훈을 잇게 하셨다. 皇 后 憑 玉 几 道 揚 末 命 命 汝 嗣 訓 하였다. [주D-005]정일(( 精 一 ) 함은 마음이라 : 정일은 요( 堯 ), 순( 舜 ), 우( 禹 )가 서로 전수한 심법( 心 法 )으로서, 즉 요 임금은 순 임 금에게 선위( 禪 位 )할 때에 진실로 그 중을 잡으라. 允 執 其 中 하였고, 순 임금은 우 임금에게 선위할 때에 인심은 오직 위태롭고 도심은 오직 은미하니, 오직 정밀하고 전일하게 하여 진실로 그 중을 잡으라. 人 心 惟 危 道 心 惟 微 惟 精 惟 一 允 執 厥 中 한 것을 이른 말이다. 여기의 천인( 天 人 )은 곧 제왕( 帝 王 )을 가리킨다. [주D-006]전석(( 前 席 ) : 한 문제( 漢 文 帝 )가 일찍이 한밤중에 가의( 賈 誼 )를 선실( 宣 室 )로 불러 귀신( 鬼 神 )의 근본에 대하여 묻자, 가의가 그 소이연( 所 以 然 )을 갖추 아뢸 적에 문제가 몹시 흥미를 느낀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가의의 앞으로 자꾸만 다가앉았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임금이 신하의 말을 경청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D-007]공검(( 恭 儉 ) 으로 처하고 : 주공( 周 公 )이 성왕( 成 王 )에게 훈계하기를, 아, 군자는 안일하지 않는 것을 처소로 삼 는 것입니다. 먼저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고 나서 안일하면 백성들의 의지하는 바를 알 것입니다. 嗚 呼 君 子 所 其 無 逸 先 知 稼 穡 之 艱 難 乃 逸 則 知 小 人 之 依 한 데서 온 말이다. 書 經 無 逸 사가시집 제3권세종대왕( 世 宗 大 王 )의 만장( 挽 章 ) 6수 박연 119

120 [주D-008]농사일을 하였네 : 주공이 훈계하기를, 문왕께서는 허름한 옷을 입고 백성을 편히 해 주는 일과 농사일을 하 셨습니다. 文 王 卑 服 卽 康 功 田 功 한 데서 온 말이다. 書 經 無 逸 [주D-009]하우씨(( 夏 禹 氏 )의) 커졌고 : 하우씨가 처음으로 중국 천하의 토지( 土 地 )에 공부( 貢 賦 )의 차등을 정했던 데서 온 말로, 여기서는 곧 조선 세종( 世 宗 )이 국토( 國 土 )를 개척하여 넓힌 것을 의미한다. 세종은 일찍이 서북( 西 北 ) 방면의 여진족( 女 眞 族 )을 막기 위하여 압록강( 鴨 綠 江 ) 상류에 여연( 閭 延 ), 자성( 慈 城 ), 무창( 茂 昌 ), 우예( 虞 芮 )의 사군( 四 郡 )을 설치하였고, 또한 동북 방면의 여진족 내침에 대비하여 두만강( 豆 滿 江 ) 하류에 종성( 鐘 城 ), 온성( 穩 城 ), 회령( 會 寧 ), 경원( 慶 源 ), 경흥( 慶 興 ), 부령( 富 寧 )의 육진( 六 鎭 )을 설치했었다. [주D-010]우순(( 虞 舜 )의) 같았으니 : 소( 韶 )는 순( 舜 ) 임금의 음악 이름으로, 즉 정악( 正 樂 )을 의미하는데, 세종이 일찍이 박연( 朴 堧 )에게 명하여 아악기( 雅 樂 器 )를 개조해서 고래( 古 來 )의 아악( 雅 樂 ), 당악( 唐 樂 ), 향악( 鄕 樂 )의 모든 악기( 樂 器 ), 악곡( 樂 曲 ), 악보( 樂 譜 ) 등을 정리하게 한 것을 이른 말이다. [주D-011]전모(( 典 謨 ) : 옛 성현( 聖 賢 )들의 훈계( 訓 戒 )하던 말로, 서경 요전( 堯 典 ) 순전( 舜 典 ) 대우모( 大 禹 謨 ) 고요 모( 皐 陶 謨 ) 익직( 益 稷 ) 등편의 글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곧 세종의 언행( 言 行 )을 전모에 비유한 것이다. [주D-012]인문(( 人 文 ) : 시서 예악( 詩 書 禮 樂 )의 교화( 敎 化 )를 말한다. [주D-013]아송(( 雅 頌 ) : 시경 의 대아( 大 雅 ), 소아( 小 雅 )와 주송( 周 頌 ), 노송( 魯 頌 ), 상송( 商 頌 )을 가리킨 것으로, 아는 조정( 朝 廷 )의 아악( 雅 樂 )이고, 송은 조선( 祖 先 )의 공덕( 功 德 )을 찬양하는 종묘악( 宗 廟 樂 )이므로, 전하여 여기서는 조정과 종묘에 쓰는 정 악( 正 樂 )을 의미한다. [주D-014]지리(( 地 理 )는) 회복했고 : 세종의 국토( 國 土 ) 개척을 두고 한 말이다. [주D-015]기형(( 璣 衡 )은) 이루었으니 : 기형은 서경 순전( 舜 典 )에 나오는 선기옥형( 璿 璣 玉 衡 )의 약칭이다. 이는 곧 천 체( 天 體 )를 관측하는 데 쓰는 기계로서, 즉 구형( 球 形 )의 표면에 일월성신( 日 月 星 辰 )을 그려 사각( 四 脚 )의 틀 위에 올려놓고 이를 회전시키면서 천체를 관측했던 것인데, 여기서는 곧 세종이 천체를 관측하는 데 쓰는 혼천의( 渾 天 儀 ), 혼상( 渾 象 ), 앙부일구( 仰 釜 日 晷 ) 등 다수의 기계를 제작한 것과, 칠정산내편( 七 政 算 內 篇 ), 칠정산외편( 七 政 算 外 篇 ) 등의 역서( 曆 書 )를 편찬한 것을 가리켜 한 말이다. [주D-016]십자(( 十 字 )의) 시호( ( 諡 號 ) : 세종이 죽은 뒤에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 英 文 睿 武 仁 聖 明 孝 大 王 ) 이란 열 글자의 시호 를 올린 것을 말한다. [주D-017]재기(( 齊 夔 ) : 순( 舜 ) 임금이 자기 아버지인 고수( 瞽 )를 뵐 때에 기기하여 공경하고 두려워했다. 夔 夔 齊 慄 는 데서 온 말로, 즉 부왕( 父 王 )께 효성이 지극했음을 의미하는데, 여기의 기기는 곧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형용한 말이다. [주D-018]하나의 빛났도다 : 당 현종( 唐 玄 宗 )이 일찍이 흥경궁( 興 慶 宮 ) 서남쪽에 화악상휘지루( 花 萼 相 輝 之 樓 )를 세우고 여러 아우들과 함께 이 누각에 올라서 서로 즐기며 우애 깊게 지냈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여기서는 세종 또한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음을 의미한다. [주D-019]만기(( 萬 機 ) : 제왕( 帝 王 )이 매일 처리하는 정사( 政 事 )의 매우 번다하고 바쁜 것을 형용한 말이다. 기( 機 )는 기( 幾 )와 통용하는 것으로, 서경 고요모( 皐 陶 謨 )에, 하루 이틀 사이에도 만 가지나 됩니다. 모든 관직을 비우지 마소서. 하늘의 일을 사람이 대신하는 것입니다. 一 日 二 日 萬 幾 無 曠 庶 官 天 工 人 其 代 之 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20]궤( 几 )에 끊어지니 : 주 성왕( 周 成 王 )이 임종( 臨 終 ) 무렵에 옥궤( 玉 几 )에 기대어 여러 대신( 大 臣 )들을 불러놓고 유명( 遺 命 )을 내렸던 데서 온 말이다. 書 經 顧 命 [주D-021]금등(( 金 縢 )의 못하고 : 금등은 서경 의 편명인데, 이 편에는 무왕( 武 王 )이 일찍이 병들어 위독했을 때, 주공 ( 周 公 )이 무왕 대신 자기를 죽게 해 달라고 선왕( 先 王 )께 기도하고, 주공과 태공( 太 公 ), 소공( 召 公 ) 3인이 함께 거북점을 쳐 본 결과 모두 길( 吉 )하여 마침내 무왕의 병이 쾌유되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한 말이다. 사가시집 제3권세종대왕( 世 宗 大 王 )의 만장( 挽 章 ) 6수 박연 120

121 동문선 제10권쌍운 연화회문체 유거 작( ( 雙 韻 蓮 花 回 文 體 幽 居 作 ) :31 쌍운 연화회문체 유거 작( 雙 韻 蓮 花 回 文 體 幽 居 作 ) 박연( 朴 堧 ) 옛사람의 회문시에 십자체ㆍ선기체ㆍ옥련환체ㆍ금전지체 등이 있어 각기 다른 체재가 있다. 지금 내가 옛것을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따로 오언사운시 두 편을 지어 그림으로 연꽃 모양을 그려서 그대에게 부치며 연화회문이라고 이름해 본다. 혼자 거처하여 소일함을 달게 여겨 / 獨 處 甘 遺 逸 작은 동산에 몸을 편히 하네 / 安 身 一 小 園 골짜기는 오붓하여 누추한 집에 알맞고 / 谷 盤 宜 陋 室 물굽이는 가늘게 맑은 술병 가까이 흐르네 / 灣 細 近 青 尊 대는 푸른데 밝은 달이 머물고 / 竹 翠 棲 明 月 산은 푸른데 항상 흰 구름을 갓 쓰고 있네 / 山 青 冠 白 雲 신선을 배우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 學 仙 心 切 切 어려운 일은 세상이 분분함이네 / 難 事 世 紛 紛 홀로 살아 흥이 그윽한데 / 獨 居 幽 興 逸 분수를 편히하여 숲 동산을 지키네 / 安 分 守 林 園 골짜기는 은밀하여 낡은 집을 감추고 / 谷 密 藏 頹 室 물굽이는 맑아서 누운 술병에 비치네 / 灣 澄 映 臥 尊 대밭이 성기매 담담한 달빛을 체질하고 / 竹 疏 篩 淡 月 산이 멀어 한가로운 구름을 내네 / 山 遠 出 閑 雲 도를 배우고자 간절히 수련하나 어렵구나 / 學 道 勤 磨 切 착잡한 것을 풀기가 힘드네 / 難 哉 解 錯 紛 동문선 제10권쌍운 연화회문체 유거 작( 雙 韻 蓮 花 回 文 體 幽 居 作 ) 121

122 국조보감 제11권 세조조 2( 世 祖 朝 二 ) 5년(경진 경진,, 1460) 박연 :25 4월. 보태평( 保 太 平 )과 정대업( 定 大 業 )을 원구( 圓 丘 )에 제사지내고 종묘( 宗 廟 )에 제사지낼 때 연주하는 음악으로 삼았다. 처음에 세종이 아 악( 雅 樂 )을 고증하여 경안( 景 安 ), 숙안( 肅 安 ), 옹안( 雍 安 ), 수안( 壽 安 )의 악장을 종묘에서 연주하는 음악으로 정하고, 또 달에 따라서 율을 쓰 는 음악을 제정하여 연향( 宴 享 )과 회례( 會 禮 )에 사용하였다. 최후에 박연( 朴 堧 )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속악( 俗 樂 )은 토속( 土 俗 )에서 일어난 것으로, 아송( 雅 頌 )을 쓰던 때에 국풍( 國 風 )이 있었던 것과 한가지입니다. 완전히 폐지할 필요는 없 으니, 바로잡아 상하가 통용하는 음악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세종이 마침내 국초의 고취악( 鼓 吹 樂 )에다 아음( 雅 音 )으로 선궁( 旋 宮 )하는 법을 붙여 보태평, 정대업 등 무곡( 舞 曲 )을 지어 연향과 회 례의 종장( 終 章 )에 쓰게 하였다. 상이 처음 즉위하여 종묘에 직접 제사지내고 돌아와 경회루에 나아가서 음복연( 飮 福 宴 )을 베풀었는데, 이때 보태평, 정대업의 춤을 보고 정인지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이것을 부면 조종( 祖 宗 )의 창업( 創 業 )이 어려웠다는 것과 세종의 제작( 制 作 )이 거룩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서 명하기를, "악학( 樂 學 )과 관습도감( 慣 習 都 監 )을 하나의 관사( 官 司 )로 통합하여 악학도감( 樂 學 都 監 )이라 칭하고, 아악서( 雅 樂 署 )와 전악서( 典 樂 署 )를 하나의 관사로 통합하여 장악서( 掌 樂 署 )라 칭할 것이며, 재랑( 齋 郞 ), 무공( 舞 工 ), 악생( 樂 生 )은 좌방( 左 坊 )에 소속시키고 악공( 樂 工 )은 우방 ( 右 坊 )에 소속시키고, 악생을 가성랑 좌방령( 嘉 成 郞 左 坊 令 )이라고 부르라." 하였다. 이에 하교하기를, "예( 禮 )를 제정하는 것은 성인( 聖 人 )이 아니면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수천 수만 년이 지나도록 경장( 更 張 )한 경우가 없었던 것은 성인이 세상에 나기 어렵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세종께서 하늘이 내려준 성지( 聖 智 )로 여러 악무( 樂 舞 )를 제작하셨는데도 미처 쓰지 못하였으니, 지금 일으키지 않는다면 나중에는 폐기되고 말 것이다. 이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지금부터 정대업, 보태평, 발상( 發 祥 ), 봉래의( 鳳 來 儀 ) 등 새 악장을 익히고 옛 악장을 모두 폐지하되, 인물과 헌가( 軒 架 )의 수, 익히는 절목에 대해 속히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고 마침내 양성지와 성임( 成 任 )을 악학도감 제조로 삼아 새 악장을 가르치고 익히게 하였다. 상이 별도로 곡보( 曲 譜 )를 지어 상일( 上 一 )에 서 상오( 上 五 )까지, 하일( 下 一 )에서 하오( 下 五 )까지를 가지고 만( 慢 ), 중( 中 ), 삭( 數 ) 삼조( 三 調 )의 규정을 정하였는데, 무릇 중에 해당되는 것 이 궁( 宮 )이고 궁 이상은 삭이 되고 궁 이하는 만이 되었다. 그러므로 아악의 청황( 淸 黃 )이 속악의 상이( 上 二 )가 되고, 청림( 淸 林 )이 상오( 上 五 )가 되고, 황종( 黃 鐘 )이 하삼( 下 三 )이 되고, 탁림( 濁 林 )이 하오( 下 五 )가 되었으니, 모두 세종조의 보태평, 정대업의 곡보를 따르지 않은 것이 었다. 또 아악의 옛 제도를 없애고 속악의 새 제도로써 대신하였으니, 아악은 당상( 堂 上 )에는 현가( 絃 歌 )가 있고 포죽( 匏 竹 )이 없으며 당하 ( 堂 下 )에는 포죽이 있고 현가가 없는데 비해 속악은 당상과 당하에 모두 현가가 포죽이 있고 필률( 篥 )과 비파 등의 악기가 섞여 있었다. 또 아악은 영신( 迎 神 )할 때 천( 天 ), 지( 地 ), 인( 人 )에 따라 그 수를 달리하여 천신( 天 神 )은 6성( 成 ), 지기( 地 祇 )는 8성, 인귀( 人 鬼 )는 9성이며, 그 밖에 관헌( 獻 ) 이하는 당상에서는 음려( 陰 呂 )가 오른쪽으로 돌아 곡을 마치고 당하에서는 양률( 陽 律 )이 왼쪽으로 돌아 곡을 마친 다음 음양이 소리를 합해 번갈아가며 연주하되 매 절( 節 )을 각각 1성으로 한 데 비해, 속악은 천신과 인귀의 구분이 없이 영신부터 삼헌( 三 獻 )까지 모두 각각 9성을 연주하였고, 또 각각 인입( 引 入 )과 인출( 引 出 )이 있어 11성( 聲 )이 되었다. 그리고 원구에는 당상과 당하 모두 협종( 夾 鐘 ) 치 음( 徵 音 )을 써서 곡조를 시작하고 마치며, 종묘에는 당상과 당하 모두 황종( 黃 鐘 ) 청궁( 淸 宮 )을 써서 곡조를 시작하고 마쳐 양( 陽 )은 있되 음 ( 陰 )은 없고 창( 倡 )은 있되 화( 和 )는 없었으므로 왼쪽으로 돌고 오른쪽으로 도는 절차도 없었으니, 한번 제사지내는 때를 통틀면 모두 47성이 었다. 이는 모두 예지( 叡 智 )로 재정한 것으로 정대업, 보태평 가사를 지을 때 용비어천가( 龍 飛 御 天 歌 ) 15장을 모두 사용하였는데, 이때에 이 르러 제향의 악장 가사가 아니라고 하여 최항( 崔 恒 )에게 명하여 악장을 개찬( 改 撰 )하게 하였다. 원구 속악 악장의 영신( 迎 神 ) 음악은 다음과 같다. 천명이 보우하사 큰 경사 누리니/ 佑 命 荷 玄 休 하늘을 대신하여 뭇 백성 다스리네/ 代 理 主 群 生 그 은덕에 보답코자 크게 제사 올리니/ 崇 報 筵 窮 壇 국조보감 제11권 세조조 2( 世 祖 朝 二 ) 5년(경진, 1460) 박연 122

123 기다리는 나에게 신령은 이르소서/ 翹 竚 臨 雲 輧 희문( 熙 文 )의 음악이다. 전폐( 奠 幣 ) 음악은 다음과 같다. 서직이 어찌 이리 향기로운가/ 黍 稷 胡 亶 馨 온갖 예를 성대히 갖추었도다/ 百 禮 壬 有 林 나의 옥백( 玉 帛 )을 받들어 올리며/ 我 將 我 珪 幣 하찮은 정성을 밝게 고하나이다./ 昭 事 奏 微 忱 희문의 음악이다. 진찬( 進 饌 )하는 음악은 다음과 같다. 나의 희생과/ 以 我 繭 栗 나의 서직을/ 與 我 齊 明 진설하고 받들어/ 或 肆 或 將 정성껏 바치도다/ 祗 薦 我 誠 신께서는 흠향하시고/ 神 其 居 歆 그 영혼을 드러내소서/ 赫 赫 厥 靈 융안( 隆 安 )의 음악이다. 초헌의 음악은 다음과 같다. 아, 아름다운 상재는/ 於 穆 玄 宰 신명을 헤아릴 수 없도다/ 神 明 莫 測 엄숙하고 경건하게 제사를 올리니/ 禮 嚴 毖 祀 바라건대 신께서는 강림하소서/ 庶 幾 降 格 기명( 基 命 )의 음악이다. 아헌의 음악은 다음과 같다. 위대하신 상제께서/ 皇 皇 上 帝 환히 임하고 계시도다/ 臨 下 有 赫 나 밝은 명에 응하였으니/ 我 膺 明 命 조심하고 조심하도다/ 翼 翼 欽 若 아름다운 열조께서/ 假 哉 烈 祖 하늘과 짝하여 오르내리도다/ 配 天 禮 陟 모든 신께서 차례가 정해지니/ 咸 秩 百 神 제사 일이 어긋나지 않도다/ 祀 事 不 나의 제수가 매우 많고/ 我 羞 孔 庶 나의 희생이 매우 정결하도다/ 我 牡 孔 潔 나의 정성을 돌아보소서/ 顧 予 精 衷 두 번째 잔에 술을 가득 따르나이다/ 再 崇 我 爵 선위( 宣 威 )의 음악이다. 종헌의 음악은 다음과 같다. 예가 이미 갖추어졌고/ 禮 旣 備 음악이 이미 연주되었도다/ 樂 旣 奏 거듭하여 술잔을/ 觴 之 重 정성으로 바치노니/ 誠 以 侑 나에게 복을 주시고/ 錫 我 祉 국조보감 제11권 세조조 2( 世 祖 朝 二 ) 5년(경진, 1460) 박연 123

124 상제께서는 흠향하소서/ 帝 其 右 탁정( 濯 征 )의 음악이다. 변두( 豆 )를 거두는 음악은 다음과 같다. 정갈하고 맛있는 음식 올리니/ 於 薦 靜 嘉 변두가 가지런히 줄지었도다/ 豆 有 楚 변두를 이미 올리고 나서/ 豆 旣 踐 술도 술잔에 따르었도다/ 獻 酌 亦 擧 신께서 이미 취하셨으니/ 神 旣 醉 止 이제 거두어 치우겠나이다/ 廢 徹 有 且 성안( 成 安 )의 음악이다. 송신( 送 神 )하는 음악은 다음과 같다. 신께서 이제 일어나시어/ 神 載 起 兮 하늘 나라로 돌아가시도다/ 返 玄 宅 兮 회오리바람 치솟아오르더니/ 騰 輪 兮 휑하니 허공만 남아 있도다/ 遡 寥 廓 兮 발돋움하여 바라보아도/ 跂 予 望 兮 푸르디 푸른 하늘뿐이로다/ 杳 空 碧 兮 영안( 寧 安 )의 음악이다. 종묘 속악 악장의 영신하는 음악은 다음과 같다. 세덕으로 후손을 계도하시니/ 世 德 啓 我 後 빛나도다 그 모습 그 음성이여/ 於 昭 想 形 聲 깨끗한 제사를 엄숙히 받드니/ 肅 肅 薦 明 강림하여 우리를 편안하게 하소서/ 綏 我 賚 思 成 희문의 음악이다. 전폐하는 음악은 다음과 같다. 검소한 예물로도 교응할 수 있으니/ 菲 儀 尙 可 交 광주리를 받들어 폐백을 올리나이다/ 承 筐 將 是 帛 선조께서는 돌아보고 흠향하소서/ 先 祖 其 顧 歆 예를 차리는 마음이 깨끗하나이다/ 式 禮 心 莫 莫 희문의 음악이다. 진찬하는 음악은 다음과 같다. 공경히 음식을 직접 만들어/ 執 爨 나의 제수를 올리도다/ 登 我 俎 豆 제수를 이미 올리고/ 俎 豆 旣 登 음악을 화락하게 연주하도다/ 樂 且 和 奏 향기로운 제사를 효성으로 올리니/ 苾 芬 孝 祀 신께서는 흠향하소서/ 維 神 其 右 풍안( 豐 安 )의 음악이다. 초헌의 음악은 다음과 같다. 열성이 나라의 운을 여시니/ 列 聖 開 熙 運 찬란한 문치가 창성하였도다/ 炳 蔚 文 治 昌 거룩한 아름다움 기리기 위해/ 願 言 頌 盛 美 국조보감 제11권 세조조 2( 世 祖 朝 二 ) 5년(경진, 1460) 박연 124

125 노래를 진설하나이다/ 維 以 矢 歌 章 아, 위대하신 목조께서/ 於 皇 聖 穆 바다 건너 경흥으로 옮기셨도다/ 浮 海 徙 慶 붙좇는 사람 날로 늘어나/ 歸 附 日 衆 영원한 천명을 터잡았도다/ 基 我 永 命 위대하신 상제께서/ 皇 矣 上 帝 백성을 안정시킬 방책 구하여/ 求 民 之 莫 깊숙한 땅을 돌아보시고/ 乃 眷 奧 區 명덕의 임금을 옮기게 하셨도다/ 乃 遷 明 德 어진 사람을 놓칠 수 없어/ 仁 不 可 失 많은 백성들 크게 따르도다/ 于 胥 景 從 따르는 사람 많아 저자와 같으니/ 其 從 如 市 나의 사사로움 때문이 아니로다/ 匪 我 之 私 나의 사사로움 때문이 아니라/ 匪 我 之 私 어진 이에게 귀의함이로다/ 維 仁 之 歸 어진 이에게 귀의하니/ 維 仁 之 歸 큰 터전을 여셨도다/ 誕 啓 鴻 基 위대하신 익조께서/ 於 皇 聖 翼 그 임금을 섬기셨도다/ 祗 服 厥 辟 성스러운 도조께서 그 뜻을 계승하사/ 聖 度 繼 志 돌보고 의지함이 돈독했도다/ 眷 倚 斯 篤 크게 형통하여 사랑을 받으니/ 大 亨 以 嘉 하늘의 명이 따름이로다/ 景 命 維 僕 쌍성이 멀고 멀지만/ 雙 城 漫 천부와 같은 곳이로다/ 曰 維 天 府 관리가 직무를 다하지 못해/ 吏 之 不 職 백성이 안도하지 못하였도다/ 民 未 安 堵 환조께서 편안하게 돌보아주자/ 聖 桓 輯 寧 유민들이 마침내 돌아왔도다/ 流 離 卒 復 총애하는 명을 받으시어/ 寵 命 是 荷 큰 복록을 이룩하셨도다/ 封 建 厥 福 아, 위대하신 태조는/ 於 皇 聖 祖 그 덕이 뛰어나도다/ 駿 厥 德 인으로 위무하고 위로 복종시켜/ 仁 綏 義 服 신령스런 덕화가 두루 퍼졌도다/ 神 化 隆 洽 사나운 저 섬 오랑캐와/ 憬 彼 島 夷 산 속의 오랑캐가/ 及 其 山 戎 크게 정화되고 회유되어/ 孔 淑 以 懷 따르지 않는 자 없도다/ 莫 不 率 從 배를 타고 산을 넘어/ 航 之 梯 之 끝없이 관문을 두드리도다/ 款 我 繹 繹 아, 위대하신 그 신령으로/ 於 赫 厥 靈 국조보감 제11권 세조조 2( 世 祖 朝 二 ) 5년(경진, 1460) 박연 125

126 가까운 곳 먼 곳을 다스리도다/ 邇 妥 遠 肅 아, 위대하신 우리 성고시여/ 於 皇 我 聖 考 난리를 평정하고 종묘를 지키셨도다/ 戡 亂 保 宗 찬양하는 노래와 여망이 높아도/ 謳 歌 輿 望 隆 돈독히 사양하여 미덕이 드러났도다/ 敦 讓 顯 美 德 천자가 바야흐로 노하시니/ 天 子 方 나라 사람들이 근심하도다/ 邦 人 憂 惶 성고께서 들어가 아뢰시니/ 聖 考 入 奏 그 충성 밝게 드러났도다/ 忠 誠 以 彰 천자에게 사랑을 흠뻑 받으니/ 媚 于 天 子 빛나고 빛나는 그 은총이로다/ 赫 哉 龍 光 단아하고 공경스런 성모께서/ 思 齊 聖 母 성고의 배필이 되셨도다/ 克 配 乾 剛 난리를 이겨내어 안정시키니/ 戡 定 厥 亂 도우신 계책 실로 훌륭하도다/ 贊 謀 允 臧 거룩도다 곧고 밝으심이여/ 猗 歟 貞 明 무궁히 인도하고 도와주소서/ 啓 佑 無 疆 열성이 광명을 거듭 펴시고/ 列 聖 宣 重 光 문교( 文 敎 )로 사방을 위무하도다/ 敷 文 綏 四 方 제도가 이미 갖추어지니/ 制 作 旣 明 備 큰 정책 너무도 찬란하도다/ 大 猷 伺 煌 煌 대대로 닦아온 덕을 이어서/ 世 德 作 求 어루만지는 공을 이루었도다/ 率 維 功 태평 성대가 빛을 떨치고/ 光 闡 太 平 예악이 바야흐로 융성하도다/ 禮 藥 方 隆 약과 적을 들고 춤을 추니/ 左 籥 右 翟 아홉 번 곡조가 변하였도다/ 曰 旣 九 變 빛나는 공적을 크게 밝히니/ 式 昭 光 烈 참으로 아름답고 참으로 선하도다/ 盡 美 盡 善 보태평의 음악이다. 아헌과 종헌의 음악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열성을 돌아보시어/ 天 眷 我 列 聖 대대로 무덕( 武 德 )을 밝히셨도다/ 繼 世 昭 聖 武 크나큰 공렬을 드날렸으니/ 庶 揚 無 競 烈 이에 노래하며 춤추나이다/ 是 用 歌 且 舞 아, 위대하신 목조께서/ 於 皇 聖 穆 북방에 깃발을 세우셨도다/ 建 牙 于 朔 돈독토다 그 경사/ 篤 其 慶 우리 왕업을 시작하셨도다/ 肇 我 王 迹 완악한 토호가/ 頑 之 豪 쌍성에 웅거하거늘/ 據 雙 城 거룩하신 우리 환조/ 我 聖 桓 국조보감 제11권 세조조 2( 世 祖 朝 二 ) 5년(경진, 1460) 박연 126

127 깨끗이 소탕하셨도다/ 于 濯 征 사납고 모진 적을 없애고/ 狙 獷 亡 우리 강토를 개척하셨도다/ 拓 我 疆 고려가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여/ 咨 麗 失 馭 외적이 번갈아 모멸하였도다/ 外 侮 交 熾 섬 오랑캐 함부로 침탈하고/ 島 夷 縱 噬 나하추[ 納 哈 出 ]가 눈을 부릅뜨고/ 納 寇 恣 홍건적이 기세를 떨치고/ 紅 巾 烋 원의 잔당이 핍박하고/ 元 餘 요망한 중이 발호하고/ 孼 僧 跋 扈 호발도( 胡 拔 都 )가 날뛰었도다/ 胡 魁 陸 梁 아, 위대하신 태조께서/ 於 皇 聖 祖 신무를 크게 드날리어/ 神 武 誕 揚 하늘의 위엄을 펼치시니/ 載 宣 天 威 빛나고도 당당하도다/ 赫 赫 堂 堂 적개한 우리 군사/ 愾 我 敵 비호처럼 날쌔도다/ 戎 虎 貔 그들의 용기를 고무시키니/ 鼓 厥 勇 하늘을 날아가는 듯/ 若 翰 飛 구천을 진동시키니/ 動 九 天 바르고도 뛰어나도다/ 正 又 奇 당랑처럼 버티어도/ 斧 亢 곧바로 제풀에 쓰러지도다/ 旋 自 糜 파죽같은 형세에/ 竹 斯 破 어느 누가 버티리오/ 孰 我 支 무공을 정하시니/ 耆 定 武 신령의 도움이로다/ 神 之 爲 우리의 굳셈을 우리가 떨치니/ 我 雄 我 奮 우레와 같고 벼락과 같도다/ 如 雷 如 霆 아무리 튼튼한들 꺾지 못하며/ 胡 堅 莫 催 아무리 험한들 평정치 못하랴/ 胡 險 莫 平 줄줄이 포로를 늘어 세우고/ 連 連 安 安 귀와 머리를 베어 바치도다/ 奏 我 訊 馘 신령스런 창 한번 휘두르니/ 神 戈 一 揮 요망한 기운 사라지도다/ 妖 氛 倏 廓 모멸하고 항거하는 사람 없으니/ 無 侮 無 拂 우리나라의 복이로다/ 祚 我 東 國 고려왕이 간언을 듣지 않고/ 麗 主 拒 諫 감히 난을 일으키려 하였도다/ 敢 行 稱 亂 신령한 결단을 내리시어/ 我 運 神 斷 우리 군사 되돌리니/ 我 師 我 返 하늘과 사람의 협찬이로다/ 天 人 協 贊 국조보감 제11권 세조조 2( 世 祖 朝 二 ) 5년(경진, 1460) 박연 127

128 의로운 기치를 돌리니/ 義 旗 載 回 순조로워 돕는 이 많았도다/ 順 乃 多 助 하늘의 아름다움 진동하니/ 天 休 震 動 남녀 노소 기뻐하도다/ 士 女 悅 豫 사랑하고 위무할 이 기다렸기에/ 我 寵 綏 호장을 가지고 맞이하도다/ 壺 漿 用 迎 더러운 죄악을 씻어버리니/ 旣 滌 穢 惡 동해가 영원히 밝으리로다/ 東 海 永 淸 배반한 저 신하가/ 彼 孤 臣 화란을 선동하자/ 煽 禍 機 위대한 부친께서/ 我 皇 考 그 기미를 밝히시어/ 克 炳 幾 신령스런 계책을 결정하시니/ 神 謀 定 세상이 안정되도다/ 世 以 靖 섬 오랑캐가 헤아리지 못하고/ 島 夷 匪 茹 우리 변방을 살육하였도다/ 虔 劉 我 圉 이에 불끈 노하시어/ 爰 赫 我 怒 우리 군대를 정비하여/ 爰 整 我 旅 만 척의 배로 바람을 타고/ 萬 艘 駕 風 나는 듯이 바다를 건너셨도다/ 飛 渡 溟 渤 그 둥지를 뒤엎고/ 乃 覆 其 巢 그 소굴을 쳐부수니/ 乃 擣 其 穴 비유컨대 새털이/ 譬 彼 鴻 毛 세찬 불길에 활활 타는 듯/ 燎 于 方 烈 사나운 물결 잔잔해지니/ 鯨 波 乃 息 우리나라 영원히 안정되도다/ 永 奠 鰈 域 아, 위대한 조종께서/ 於 皇 列 聖 대대로 무공을 세우셨도다/ 世 有 武 功 거룩한 덕과 큰 업적을/ 盛 德 大 業 어찌 다 말로 형용하리오/ 曷 可 形 容 우리의 춤 찬란히 빛나고/ 我 武 有 奕 진퇴에 법도가 있도다/ 進 止 維 程 차분하고 위의가 있으니/ 委 委 佗 佗 길이 이름을 보게 되리라/ 永 觀 厥 成 정대업의 음악이다. 변두를 거두는 음악은 다음과 같다. 그릇에 제수를 담으니/ 盛 于 豆 나무 그릇과 대나무 그릇이로다/ 于 豆 于 향기로운 그 음식을/ 有 其 香 조상님이 오셔서 잡수셨도다/ 來 假 然 우리의 예가 이루어졌기에/ 我 禮 旣 成 상을 거두기를 삼가 고하도다/ 告 徹 維 虔 국조보감 제11권 세조조 2( 世 祖 朝 二 ) 5년(경진, 1460) 박연 128

129 옹안( 雍 安 )의 음악이다. 송신하는 음악은 다음과 같다. 정결한 제사 마치니/ 祀 卒 度 신령께서 즐거우셨으리/ 神 康 樂 而 떠나시고 얼마 안 되어/ 洋 洋 未 幾 문득 우리를 돌아보시고/ 回 我 倏 而 예정 같은 깃발로/ 霓 旌 髣 髴 구름 타고 아련히 멀어지도다/ 雲 馭 邈 而 흥안( 興 安 )의 음악이다. 국조보감 제11권 세조조 2( 世 祖 朝 二 ) 5년(경진, 1460) 박연 129

130 국조보감 제9권 단종조( ( 端 宗 朝 ) 즉위년(임신 임신,, 1452) 박연 :22 10월. 박팽년을 발탁하여 부제학으로 삼았다. 상이, 박팽년의 학문이 정밀하고 심오하여 매번 경연에서 진강을 할 때에 발명한 부분이 많 았다는 이유로 특별히 통정( 通 政 )의 품계를 가자하고, 이어서 이 명을 내린 것이다. 중추원사 박연( 朴 堧 )에게 자헌( 資 憲 )의 품계를 가자하였다. 박연은 음률( 音 律 )에 정통하여 세종의 인정을 받아 종률( 鐘 律 )을 제작하였다. 한 시대의 음악을 분명히 보고 알 수 있게 한 것은 다 그의 노력 덕분이었기에, 이때에 와서 특명으로 품계를 더해준 것이다. 국조보감 제9권 단종조( 端 宗 朝 ) 즉위년(임신, 1452) 박연 130

131 국조보감 제6권 세종조 2( 世 宗 朝 二 ) 15년(계축 계축,, 1433)박연 박연( ( 朴 堧 ) :20 조제( 朝 祭 )에 처음으로 아악( 雅 樂 )을 사용하였다. 처음에 고려 예종( 睿 宗 ) 때 송 나라 휘종( 徽 宗 )이 제악( 祭 樂 )의 종( 鐘 )ㆍ경( 磬 ) 각각 1가 ( 架 )와 금( 琴 )ㆍ슬( 瑟 )ㆍ생( 笙 )ㆍ우( )ㆍ소( 簫 )ㆍ관( 管 ) 등의 악기를 각각 2부씩 하사하였는데, 홍건적의 난리에 거의 다 없어지고 늙은 악공 이 종과 경 두 악기를 연못 속에 던져 놓은 것만 보존되었다. 태조 고황제와 태종 문황제도 다 악기를 하사하였으나 소리가 율격에 맞지 않았다. 제악( 祭 樂 )은 팔음( 八 音 )을 구비하지 못하여 제사를 지낼 때에는 경( 磬 )은 와경( 瓦 磬 )을 쓰고 종( 鐘 )도 잡다하게 매달아 쓴데다 그 숫자도 구비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을사년 가을에 검은 기장이 해 주( 海 州 )에서 나오고 병오년 봄에 경( 磬 )을 만들 수 있는 돌이 남양( 南 陽 )에서 생산되니, 상이 옛것을 바꾸어 새로 만들 뜻을 갖게 되었다. 이에 박연( 朴 堧 )에게 명하여 편경( 編 磬 )을 만들게 하니, 박연이 해주의 검은 기장을 가져다가 그 푼과 치수를 쌓아가지고 고설( 古 說 )대로 황 종( 黃 鐘 ) 1관( 管 )을 만들어 불어보니 중국의 황종보다도 조금 높은 소리가 났다. 이에 전현( 前 賢 )의 의논을 참고해 보니, 토질에는 비옥하 고 척박한 차이가 있고 기장에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어서 소리의 높낮이가 시대마다 같지 않다." 하고, 진양( 陳 暘 )도 "대를 많이 잘라서 기 운을 살피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지역이 동쪽에 치우쳐 있어서 중국의 풍토와는 아주 다르기 때문에 기운을 살 피는 것으로도 해결하기 어려웠다. 이에 해주의 검은 기장알 모양으로 밀랍을 녹여 조금 크게 만들어서 푼을 쌓아 관( 管 )을 만들었다. 한 알 을 1푼으로 삼고 열 알을 쌓아 1치[ 寸 ]로 하는 법을 삼았다. 9치를 황종( 黃 鐘 )의 길이로 삼은 다음, 3푼을 더하기도 하고 빼기도 하여 12율 ( 律 )을 완성하였다. 한 달이 지나서 신경( 新 磬 ) 2가( 架 )를 제작하여 올리면서 아뢰기를, "지금 만든 경( 磬 )은, 모양은 한결같이 중국 것과 같게 하였습니다만 소리의 경우는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중국의 경( 磬 )이 유빈( 賓 )은 그 소리가 도리어 임종( 林 鐘 )보다 높고, 이칙( 夷 則 )은 남려( 南 呂 )와 같으며, 응종( 應 鐘 )은 무역( 無 射 )보다 낮아서, 당연히 높아야 할 것은 도리어 낮고 당연히 낮아야 할 것은 도리어 높으니, 아마도 한 시대에 제작된 것이 아닌 듯합니다. 만약 이것대로 제작을 하게 되면 결코 음률에 맞을 이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삼가 중국의 황종( 黃 鐘 )의 소리에 의거하여 황종의 관을 만든 다음, 그것을 기준으로 더하기도 하고 빼기도 하여 12율관( 律 管 )을 만들어 불어서 율을 맞춘 다음 이것으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신경( 新 磬 ) 2가와 명 나라에서 하사한 경( 磬 ) 1가, 소( 簫 )ㆍ관( 管 )ㆍ방향( 方 響 ) 등의 악기를 새로 제작한 율관과 협주해 보게 하 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의 경은 과연 음이 맞지 않고 지금 새로 만든 경이 제대로 되어서 소리가 맑고 아름답다. 율을 제정하고 음을 바로잡은 것이 뜻밖에 잘되어서 나는 매우 기쁘다. 단지 이칙만이 음이 맞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니, 박연이 즉시 살펴보고 아뢰기를, "한계를 나타내는 먹줄이 아직 있는 것으로 보아 다 갈아내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하고, 즉시 갈아서 먹줄을 다 없애고 나니, 소리가 제대로 났다. 경( 磬 )이 완성되고 나자, 박연에게 명하여 악기 제작하는 일을 전적으로 담당 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조제( 朝 祭 )의 음악이 처음으로 완비되었다. 국조보감 제6권 세종조 2( 世 宗 朝 二 ) 15년(계축, 1433)박연( 朴 堧 ) 131

132 동문선 제4권 오언고시( ( 五 言 古 詩 ) 중서 박중미에게[ [ 贈 朴 中 書 中 美 ] :03 중서 박중미에게[ 贈 朴 中 書 中 美 ] 곽균( 郭 ) 옛날 큰 회나무 꿈 꿀 때 / 憶 昔 夢 大 槐 문앞에는 수레 말 탄 손이 많았네 / 門 多 車 馬 賓 아무리 뿌리쳐도 끝내 가지 않고 / 揮 之 竟 不 去 문안하려고 어이 그리 머뭇거리던고 / 伺 候 何 逡 巡 귀거래사 시 지은 뒤로 / 自 從 賦 歸 來 동각에는 뽀얀 먼지 덮이었네 / 東 閣 凝 素 塵 박후는 구정을 버리지 않고 / 朴 侯 不 遺 舊 지금도 자주 찾아오나니 / 至 今 來 頻 頻 소나무 잣나무는 가을에 청청하고 / 靑 青 松 栢 秋 지초와 난초는 봄에 향기로워라 / 馥 馥 芝 蘭 春 아름답구나 그대는 군자로세 / 美 矣 君 子 哉 맑은 바람은 속된 무리 깨쳐 주네 / 淸 風 驚 俗 倫 [주D-001]큰 회나무 꿈 : 당나라 소설 남가기( 南 柯 記 ) 에서 나온 말인데, 낮잠을 자다가 꾼 꿈에, 대괴국( 大 槐 國 )에 가서 남 가태수( 南 柯 太 守 )로 영화를 누리다가 깨어서 살펴본즉, 뜰 앞에 있는 큰 괴목( 槐 木 )이 대괴국이었고, 남가군( 南 柯 郡 )은 그 괴목의 남쪽 가지였다. 동문선 제4권 오언고시( 五 言 古 詩 ) 중서 박중미에게[ 贈 朴 中 書 中 美 ] 132

133 隱 先 生 逸 稿 卷 之 二 :46 應 製 錄 恭 愍 王 十 一 年 壬 寅 秋 九 月 辛 酉 王 幸 北 亭 拜 表 遂 登 拱 北 樓 令 文 臣 和 板 上 詩 韻 出 高 麗 史 元 松 壽, 李 穡, 成 士 達 次 韻 製 進 洪 博, 李 嵒, 李 齊 賢, 黃 石 奇, 柳 淑, 金 漢 龍, 禹 吉 生, 李 岡, 廉 興 邦, 田 祿 生, 崔 龍, 權 鑄, 朴 中 美, 金 君 鼎, 華 之 元, 禹 玄 寶, 李, 韓 昉, 曹 繼 芳, 許 佺, 田 得 良, 李 邦 直 皆 和 進 出 輿 地 勝 覽 諸 公 詩 今 不 錄 壄 隱 先 生 逸 稿 卷 之 二 133

134 - 靖 國 君 派 祖 (정국군파조( 정국군파조) :05 靖 國 君 派 祖 (정국군파조) 諱 (휘 위 - 靖 國 君 정국군)은 密 城 大 君 ( 彦 忱 )의 15 世 支 孫 (시조 44 世 孫 )이며 三 司 左 尹 乙 材 (삼사좌윤 을재) 三 子 版 閣 公 (판각공)의 7 世 孫 이다. 고려공민왕조에 김해부사로 盆 山 城 을 축조하였다. 또 공은 對 馬 島 守 令 (대마도수령)을 격퇴하고 고려 마지막왕(34대) 恭 讓 王 (서기1389~1392년)으로부터 忠 義 伯 (충의백)에 봉해졌으며 李 太 祖 ( 李 成 桂 이성계)의 威 化 島 (위화도) 회군시 공으로 전민( 田 民 )을 下 賜 (하사)받고 靖 國 君 (정국군)에 봉해졌다. 묘소는 실전하고 밀양시 무안면 신남서원에 배향하고 원덕사 및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수적재의 경현사에 배향하여 음3월15일 음9월 15일 제향하다. 遺 所 (유소)는 창원시 용지공원에 신도비가 보존되고 김해시 분성 정상에 충의각 산성역내에 축성기념비가 있다. - 靖 國 君 派 祖 (정국군파조) 134

135 乙 材 - 三 司 左 尹 公 派 祖 (삼사좌윤공파조( 삼사좌윤공파조) :04 三 司 左 尹 公 派 祖 (삼사좌윤공파조) 諱 乙 材 (휘 을재 - 左 尹 )는 密 城 大 君 ( 彦 忱 )의 8 世 支 孫 (시조 37 世 孫 )으로 고려 명종조 丁 巳 에 문과 벼슬이 三 司 左 尹 密 直 副 使 에 이르 다. 호는 雅 川 지(아천)이며 배위는 창년조씨이고 直 提 學 繼 芳 高 (계방)의 따님이다. 묘소와 기타문헌은 실전하다. 원덕사및 화남서원에 배향하며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수덕제의 경현사에 봉안하며 음3월15일 음9월15일 향사하다. 乙 材 - 三 司 左 尹 公 派 祖 (삼사좌윤공파조) 135

136 天 翊 - 判 圖 判 閣 公 派 祖 (판도판각공파조( 판도판각공파조) :03 判 圖 判 閣 公 派 祖 (판도판각공파조) 諱 天 翊 (휘 천익 - 版 圖 判 閣 ) 密 城 大 君 ( 彦 忱 )의 8 世 支 孫 (시조 37 世 孫 )으로 고려때 版 圖 版 閣 을 지냈다. 유지는 전하지 않고 원덕사에 배향하며 밀양시 삼랑진읍 검세리에 설장 재향하다. 음9월 20일 향사일이다. 天 翊 - 判 圖 判 閣 公 派 祖 (판도판각공파조) 136

137 元 光 - 令 同 正 公 派 祖 (영동정공파조( 영동정공파조) :02 令 同 正 公 派 祖 (영동정공파조) 諱 元 光 (휘 원광 - 令 同 正 )은 密 城 大 君 ( 彦 忱 )의 13 世 支 孫 (시조 42 世 孫 )이며 密 直 副 使 彦 良 의 6 世 孫 이다. 謚 은 襄 惠 公 孫 (양혜공)이요 고려조에 벼슬이 영동정에 이르고 行 宰 相 中 書 令 (행재상중서령)을 지냈다. 공민왕조에 홍건적이 서경 함락시에 안유 이방실과 함께 격퇴하였으며 신축년에 박문거가 전몰한즉 홍언박과 함께 大 駕 扈 從 (대가호종)하여 평란에 공을 세워 보리공신보국숭록대부에 이르고 밀직부원군에 봉해졌다. 유지는 전하지 아니하고 원덕사에 배향하다. 元 光 - 令 同 正 公 派 祖 (영동정공파조) 137

138 良 彦 - 密 直 副 使 公 派 祖 (밀직부사공파조( 밀직부사공파조) :00 密 直 副 使 公 派 祖 (밀직부사공파조) 諱 良 彦 (휘 양언 - 密 直 副 使 )은 密 城 大 君 ( 彦 忱 )의 8 世 支 孫 (시조37 世 孫 )으로 고려때 奉 翊 大 夫 密 直 副 使 를 역임하였다. 上 系 祖 父 曾 祖 父 高 祖 父 4대를 失 傳 하였다. 公 의 위폐는 沃 川 遠 德 祠 에 奉 安 되었다. 良 彦 - 密 直 副 使 公 派 祖 (밀직부사공파조) 138

139 彦 仁 - 左 僕 射 公 派 祖 (좌복야공파조( 좌복야공파조) :59 左 僕 射 公 派 祖 (좌복야공파조) 諱 彦 仁 (휘 언인 - 左 僕 射 )은 太 師 公 ( 彦 孚 )의 아우로 고려때 벼슬이 壁 上 三 重 大 匡 平 章 事 (벽상삼중대광평장사) 尙 書 左 僕 射 를 역임하 고 密 直 君 에 封 해졌다. 彦 仁 - 左 僕 射 公 派 祖 (좌복야공파조) 139

140 彦 祥 - 都 平 議 事 公 派 祖 (도평의사공파조( 도평의사공파조) :58 都 平 議 事 公 派 祖 (도평의사공파조) 諱 彦 祥 (휘 언상 - 都 評 議 事 )은 太 師 公 ( 彦 孚 )의 아우로 고려때 벼슬이 都 評 議 事 에 이르고 밀직군( 密 直 君 )에 봉하였다. 유지는 풍각화산이라 하나 전하지 않고 있다. 彦 祥 - 都 平 議 事 公 派 祖 (도평의사공파조) 140

141 鉉 - 糾 正 公 派 祖 (규정공파조( 규정공파조) :56 糾 正 公 派 祖 (규정공파조) 諱 鉉 (휘 현 - 司 憲 糾 正 )은 密 城 大 君 ( 彦 忱 )의 16 世 支 孫 (시조 45 世 孫 )이며 太 師 公 彦 孚 (언부)의 長 子 門 下 侍 中 孝 臣 의 8 世 孫 이다. 공 의 손자 상장군공이 지은 묘지에 의하면 배위는 동래정씨 밀직의 함의 따님이며 고려조에 문과에 급재하여 벼슬이 사헌규정( 司 憲 糾 正 - 正 三 品 )에 이르다. 노후에 향리에 돌아와 팔십칠세에 졸하다. 문장이 탁월하고 덕행이 높아 우리나라 유학발전에 크게 이바지하 였다 한다. 묘소는 알수없으나 장단군 장도면 사시리 박릉동 두매산 아래 자좌라 하였다. 고양 두응촌과 전주 봉서재 옥천 원덕사 경 산 율산 서원에 배향하였다. 鉉 - 糾 正 公 派 祖 (규정공파조) 141

142 陟 - 忠 憲 公 派 祖 (충헌공파조( 충헌공파조) :54 忠 憲 公 派 祖 (충헌공파조) 공의 諱 陟 (휘 척 - 密 城 君 )은 密 城 大 君 彦 枕 (언침)의 13 世 支 孫 (시조 42 世 孫 )이며 工 部 尙 書 ( 義 臣 )의 次 子 少 監 公 윤( 允 )의 曾 孫 이시 다. 고려 26대 임금 忠 宣 王 (서기1308~1313년)때 내부시승 이며 絶 忠 同 贊 化 功 臣 (절충동찬화공신)으로 삼중대광 밀성군이며 시호를 충 헌이라 증하고 贈 賜 牌 地 (증사패지)하야 공신자손으로 하여금 世 受 秩 祿 (세수질록)하다. 배위는 계림군부인 경주이씨이며 묘는 밀주 수산현에 있고 유지는 풍각화산에 있다 하였다. 밀양시 하남읍 귀명리 경모재에 단을 세우고 음10월 3일에 향사하다. 陟 - 忠 憲 公 派 祖 (충헌공파조) 142

143 諱 元 - 四 門 進 士 公 派 祖 (사문진사공파조( 사문진사공파조) :52 四 門 進 士 公 派 祖 (사문진사공파조) 諱 元 (휘 원 - 四 門 進 士 )은 密 城 大 君 ( 彦 忱 )의 10 世 支 孫 (시조 39 世 孫 )으로 太 師 公 彦 孚 의 둘째아들 諱 義 臣 의 長 子 다. 공의 부친인 의신( 義 臣 )은 당대의 文 章 家 로 널리 알려졌으며 벼슬은 工 部 尙 書 에 올랐다. 공은 고려조 인종조에 사문진사를 지냈으며 또는 國 子 進 士 라고도 한다. 유지는 밀양시 하남읍 귀명동이라 하나 전하지 아니한다. 배위는 계림김씨이며 원덕사에 배향하였고 전북 김제시 상 동면 삼수리에 삼송재가 있어 설단하여 제향하다. 諱 元 - 四 門 進 士 公 派 祖 (사문진사공파조) 143

144 中 美 (중미( 중미) ) - 密 直 府 院 君 派 祖 (밀직부원군파조( 밀직부원군파조) :50 密 直 府 院 君 派 祖 (밀직부원군파조) 공의 諱 는 中 美 (휘 중미 - 密 直 府 院 君 )이다. 密 城 大 君 ( 彦 沈 )의 15 世 支 孫 (시조44 世 孫 )이며 工 部 尙 書 義 臣 (의신) 의 次 子 少 監 公 允 (윤) 의 6 世 孫 이다. 태사중서령공 彦 孚 (언부)의 8 世 孫 이기도 하다. 公 은 고려 29대 임금 忠 穆 王 (충목왕 서기1344~1348년) 때 문과에 급제 하여 中 書 令 을 역임하였고 고려 31 代 恭 愍 王 (공민왕 서기1351년~1374년)때 이방실등과 함께 紅 巾 賊 亂 (홍건적란)을 평정하여 輔 理 功 臣 大 匡 輔 國 崇 祿 大 夫 (보리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를 追 贈 받고 密 直 府 院 君 에 봉해졌다. 태조가 등극하여 三 徵 (삼징)하였으나 나가지 아니하고 卒 하니 왕이 禮 葬 (예장)하고 시호를 文 肅 (문숙)이라 사시하였다. 묘는 풍각 묘 봉리 酉 坐 에 있고 묘갈이 있다. 배위는 부부인 박씨이고 전리좌랑 대장군 문유의 딸이다.묘는 공과 동원에있다. 청도군 풍각면 묘봉리 묘소아래 묘봉재( 妙 峰 齋 )가 있어 음 10월 7일 향사하다. 中 美 (중미) - 密 直 府 院 君 派 祖 (밀직부원군파조) 144

145 언부( ( 彦 孚 )태사공파) 태사공파( ( 太 師 公 派 ) 또는 문하시중공파( ( 門 下 侍 中 公 派 ) :48 태사공파( 太 師 公 派 ) 또는 문하시중공파( 門 下 侍 中 公 派 ) 중시조( 中 始 祖 ) 고려 문종조( 文 宗 朝 )에 문과( 文 科 )에 급제하여 권신( 權 臣 ) 최충( 崔 沖 )과 함께 태사( 太 師 )를 지내고 문하시중과 도평의사( 都 評 議 事 )를 거쳐 밀성부원군( 密 城 府 院 君 )에 봉( 封 )해졌다고 동사평림( 東 史 評 林 )에 기록되어 있다. 묘소는 경북 청도군 풍각화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실전하였다.배( 配 )의 기록은 미상( 未 詳 )이다. 박언부 효자비( 朴 彦 孚 孝 子 碑 : 청도군 각북면 덕산2리 536번지) 행 록( 行 錄 ) : 효자 박언부( 朴 彦 孚 )는 어렸을 때부터 효행이 지극하여 병환으로 고생하시는 아버지께 손수 반찬을 만들어 드리고 밤 이 다하도록 그 곁을 떠나지 않고 손발이 되어 드렸으며 식사 중에도 대소변을 뜻에 따라 빨리 응하도록 도우시고 침구( 寢 具 )를 손 수 빨아 항상 깨끗하게 하였으며 매일 아침 저녁에 아버지께서 남기신 음식을 직접 자기가 먹는 등 정성을 다하였다. 부친께서 별세 하시자, 장례를 정성을 다했다. 이후 자신도 부친과 같은 병을 얻어 죽게 되었으나 자신은 아버지의 병이 전염되어 죽게 되었다고 말 하지 않고 하늘이 내린 천명이라 하였다. 문중에서 그의 효행을 널리 기리기 위해1876년에 비( 碑 )를 건립하였다 언부( 彦 孚 )태사공파( 太 師 公 派 ) 또는 문하시중공파( 門 下 侍 中 公 派 ) 145

146 12.임선미 [ 林 先 味, 1362~1394] :18 임선미 [ 林 先 味, 1362~1394] 본관 평택( 平 澤 ). 자 양대( 養 大 ). 호 휴암( 休 庵 ). 성석린( 成 石 璘 ) 박상충( 朴 尙 衷 )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닦았고 고례( 古 禮 )를 참작, 삼년 상( 三 年 喪 )을 권장하는 등 퇴폐한 세속을 바로잡았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태학생( 太 學 生 )인 조의생( 曺 義 生 ) 등 71명과 입산, 은거했다. 태 조가 고려의 유신들을 등용하려 했으나 이에 끝까지 불응, 충의( 忠 義 )를 지키다가 죽었다. 뒤에 그들이 은거한 곳을 두문동( 杜 門 洞 )이라 하여 충절을 기렸다. 표절사( 表 節 祠 )에 배향되었다. 12.임선미 [ 林 先 味, 1362~1394] 146

147 11.우현보 우현보( ( 禹 玄 寶, 1333~1400) :09 양호당( 養 浩 堂 ) 우현보( 禹 玄 寶, 1333~1400)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살아서 얼마나 환호하고, 얼마나 절망하고, 얼마나 비통하고,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가 세상을 뜬 지 6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가 느꼈을 영욕( 榮 辱 )은 아직 삭혀지지 않았을 것만 같다. 고려 말 최고의 명문가로 한산 이씨와 단양 우씨를 꼽을 수 있다. 한산 이씨는 가정( 稼 亭 ) 이곡( 李 穀 )과 목은( 牧 隱 ) 이색( 李 穡 ) 두 부 자( 父 子 )가 중국에서 연달아 급제하면서 문명( 文 名 )을 떨친 집안이다. 단양 우씨는 우탁( 禹 倬 )이 두각을 보였고, 우현보에 이르러 아 들 5형제가 모두 급제하면서 고려 말의 막강한 문벌이 됐다. 두문동 72현을 꼽을 때, 구성 인원이 다른 두 개의 명단이 존재한다. 그 하나는 정몽주를, 다른 하나는 우현보를 앞장세운다. 우현보 는 이색, 정몽주와 함께 고려 말 삼인( 三 仁 )으로 꼽힌다. 이색, 정몽주, 길재로 구성된 고려 말 삼은( 三 隱 )이 후대의 영향력을 반영한 명단이라면, 삼인은 당대의 세력 구도와 영향력을 반영한 명단이다. 선죽교에서 살해된 정몽주의 시신 거둬 우현보의 집안에서 크게 이름을 얻은 인물은 시조 우현( 禹 玄 )의 8세손인 역동( 易 東 ) 우탁이다. 그는 도끼를 들고 임금에게 상소를 할 만큼 결기 있는 선비였고, 작가가 분명한 우리말 노래 형식을 갖춘 최초의 시조 탄로가 를 지은 시인이었다. 또한 역학( 易 學 )에도 뛰어나 역동( 易 東 ) 이라 불린 성리학자였으며, 훗날 퇴계 이황이 안동에 역동서원을 세워 추앙했을 정도로 후대로부터 존경을 받 았다. 우탁에게 늦도록 아들이 없어 들인 양자가 우길생( 禹 吉 生 )이다. 그는 나라에 공을 세워 삼중대광숭록대부( 三 重 大 匡 崇 祿 大 夫 )에 올랐고 적성군에 봉해졌는데, 특히 정몽주가 일찍이 스승으로 모셨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 우길생의 아들이 우현보다. 우현보가 10세 때에 우탁이 세상을 떠났으니, 우현보는 할아버지를 충분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현보는 1333년에 태어나 1355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최고 권력자인 시중( 侍 中 ) 벼슬에 올랐다. 그는 당대에 상례( 喪 禮 )를 삼년상으 로 하고 동성동본 혼인 금지, 유학 증진, 의관( 衣 冠 ) 제도 확립 등에 힘썼다. 안향에서 우탁으로 이어진 성리학의 기반을 넓히는 데 기여한 셈이다. 우현보에게 가장 큰 자랑거리는 아들 5형제, 홍수( 洪 壽 ) 홍부( 洪 富 ) 홍강( 洪 康 ) 홍득( 洪 得 ) 홍명( 洪 命 )이 모두 과거에 급제한 것 이다. 아버지와 아들 5형제가 정부 요직에 두루 포진했으니, 한 집안에서 국사( 國 事 )를 논할 정도였다. 더욱이 큰손자인 우성범( 禹 成 範 )이 공양왕의 부마(사위)가 되면서 왕실과 튼튼한 인연을 맺기도 했다. 이 때문에 우씨 집안은 성리학 정착에 기여한 신진 사대부 집안이면서도 왕실의 외척으로 왕의 비호를 받는 집안이라는 엇갈린 평가를 받게 된다. 11.우현보( 禹 玄 寶, 1333~1400) 147

148 10.변안렬 변안렬( ( 邊 安 烈 ) 1334(충숙왕 복위 3)~1390(공양왕 2) :57 변안렬( 邊 安 烈 ) 1334(충숙왕 복위 3)~1390(공양왕 2) 자( 字 )는 충가( 忠 可 ), 호( 號 )는 대은( 大 隱 ), 원주변씨( 原 州 邊 氏 )의 시조( 始 祖 ). 고려( 高 麗 )의 절신( 節 臣 ), 1268년(고려 원종 9) 원사( 元 使 ) 탈타아( 脫 朶 兒 )를 수행하여 갔던 순( 順 )의 손자( 孫 子 )이며 양( 諒 )의 둘째 아들이다. 1351년(충정왕 3) 공민왕( 恭 愍 王 )과 노국공주( 魯 國 公 主 )를 배행( 陪 行 )하고 수장( 首 將 )으로 고려에 돌아와 판추밀( 判 樞 密 ) 원의( 元 ) 의 딸과 혼인( 婚 姻 )하여 원주( 原 州 )를 사관( 賜 貫 )받았다. 1363년(공민왕12) 안우( 安 祐 )를 따라 홍건적( 紅 巾 賊 )을 토벌하여 추성보조이등공신( 推 誠 輔 祚 二 等 功 臣 )으로 판소부감사( 判 少 府 監 事 )에 올랐고 이어 부원수( 副 元 帥 )가 되어 최영( 崔 瑩 ) 등과 함께 제주도( 濟 州 島 )에서 왜구( 倭 寇 )를 토평하여 지문하부사( 知 門 下 府 事 ) 및 평 리( 評 理 )에 올랐다. 우왕 때 추충양절선위익찬공신( 推 忠 亮 節 宣 威 翊 贊 功 臣 )의 호를 받은 뒤 양광전라도도지휘사( 楊 廣 全 羅 道 都 指 揮 使 ) 겸 조전원수( 助 戰 元 帥 )로서 나세( 羅 世 ) 조사민( 趙 思 敏 ) 등과 함께 왜구( 倭 寇 )를 크게 물리치고 돌아와 문하찬성사( 門 下 贊 成 事 )로 승진했다. 이어 도순찰 사( 都 巡 察 使 ) 이성계( 李 成 桂 )의 부장( 副 將 )으로 운봉( 雲 峰 )에서 왜적을 대파하고 개선한 뒤 정방제조( 政 房 提 調 )가 되어 세력을 임견미 ( 林 堅 味 ) 이인임( 李 仁 任 ) 등과 겨누게 되었다. 단양( 丹 陽 ) 안동( 安 東 )의 왜구를 몰아낸 후 원주부원군( 原 州 府 院 君 )에 봉해지고 판삼사사( 判 三 司 事 )를 거쳐 영삼사사( 領 三 司 事 )에 이 르렀다. 이보다 앞서 1389년(창왕 1) 대호군 김저( 金 佇 ) 등이 이성계의 제거와 우왕의 복위( 復 位 )를 모의한 일로 이임( 李 琳 ) 우현보 ( 禹 玄 寶 ) 이색( 李 穡 ) 등과 함께 이를 연루되어 한양( 漢 陽 )에 유배, 뒤에 살해되었다. 10.변안렬( 邊 安 烈 ) 1334(충숙왕 복위 3)~1390(공양왕 2) 148

149 해동잡록 1 본조( ( 本 朝 )-박영 박영( ( 朴 英 ) :36 해동잡록 1 본조( 本 朝 )-박영( 朴 英 ) 본관은 밀양( 密 陽 )으로, 자는 자실( 子 實 )이요, 호는 송당( 松 堂 )이다. 어릴 때에 기개가 있어 사물에 구애되지 않았다. 무과( 武 科 )에 급제하였다가 곧 관직을 버리고 물러나 살면서 갑자기 뜻을 바꾸어 글을 읽기 시작하여, 깊이 자득( 自 得 )한 묘함이 있었다. 무인년에 조정에 돌아 와서 관직이 병조 참판에 이르렀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내쫓겨 외관( 外 官 )이 되었다. 만년에는 정신당( 鄭 新 堂 정붕( 鄭 鵬 ))과 서로 좋아하여 매우 서로 돕는 즐거움을 가졌다. 의술에도 정통하여 집에서 부리는 아이로 하여금 항상 약재를 캐게 하여 다 른 사람들의 병을 구해 주었다. 백록동학규( 白 鹿 洞 學 規 주자서원( 朱 子 書 院 )의 수학규칙)를 주소( 註 疏 )한 것이 있어 세상에 행한다. 송 당은 젊어서 무과( 武 科 )를 취하였다가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 왔는데, 덕스런 행용이 점잖고 원만하여 부지런히 후학을 가르치되 스스로 깨쳐 앎을 선무( 先 務 )로 삼았다. 그가 저술한 시나 문( 文 )은 다 깨닫고 통철한 것이었고 더욱 의술에 정통하였다. 무인년에 승지가 되었을 때, 권벌( 權 )이 임금께 아뢰기를, 박영은 의술에 정통하니, 청하건대, 어약( 御 藥 )을 감제( 監 製 )하는 것을 겸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공은 한사코 사양하여 하지 않으니, 그때의 의론이 두 사람 다 칭찬하였다. 내의제조( 內 醫 提 調 )에 관해서는 경국대전( 經 國 大 典 ) 에 단지, 승지가 겸임한다. 고만 했기 때문에 도승지가 겸임하는 것이 관 례였던 것이다. 기묘년에 병조 참판이 되었고, 경진년에 김해 부사( 金 海 府 使 )가 되었는데, 백성 김억향( 金 億 香 )이 송사에 지고서 원한 을 품어, 공과 경주 부윤( 慶 州 府 尹 ) 유인숙( 柳 仁 淑 )이 정권 잡은 사람을 제거하려고 모의를 했다고 무고하여 잡혀가 혹독하게 신문 받았다. 공은 무슨 죄인지도 모르고 여러 번 형벌을 받아 뼈가 부서짐에 이르렀다. 후에 비로소 억향( 億 香 )의 무고 때문임을 알고서 부임한 후에 인숙( 仁 淑 )을 만나본 일도 없고, 억향이 송사에 졌다는 일을 변백하여 도리어 억향이 죄인이 되고, 들것에 담겨 돌아와 치료하여서 죽지는 않았다. 낙동강( 洛 東 江 ) 위에 조그마한 정자를 짓고, 송당( 松 堂 ) 이라 편액을 붙였다. 뒤에 경상병사( 慶 尙 兵 使 ) 가 되었으나, 얼마 안 가서 죽었다. 처사( 處 士 ) 조광보( 趙 廣 輔 )가 있었는데 식견이 높고 밝았으나 거짓 미쳐 스스로 자취를 감추었다. 연산군 때 임사홍( 任 士 洪 )이 권세 를 부리므로 처사가 분노하여 송당에게 이르기를, 너는 무부( 武 夫 )이면서 어찌하여 이런 놈을 베어 죽이지 않느냐? 안 죽이면 내 가 너를 죽이겠다. 하니, 송당이, 한 역적을 베어서 나라 근심을 풀 수 있다면, 진실로 마음에 달게 여기겠으나, 뒤의 역사에 이 르기를, 암살했다. 고 하면 어찌할까? 하므로, 처사가 웃어버렸다. 송당이 죽으니, 이회재( 李 晦 齋 이언적( 李 彦 適 ))가 만장( 輓 章 ) 을 지어 이르기를 하늘이 사문(유학)을 망하게 하지 않아 / 天 不 喪 斯 文 동쪽 구석에 아직도 사람이 있었도다 / 東 隅 尙 有 人 연원은 원래부터 내려온 곳 있었는데 / 淵 源 元 有 自 영특하고 잘난 것도 또한 사람에 뛰어났도다 / 英 邁 又 超 倫 철저한 탐구는 심원하고 오묘함을 다했고 / 窮 探 極 遐 妙 높은 경지는 참되고 순수한 곳에 들었도다 / 高 步 入 眞 純 사람을 살리는 데는 약 먹이는 것에 의지했고 / 活 人 憑 餌 藥 나라를 고치는 데는 경륜을 비장했도다 / 醫 國 秘 經 綸 늦게 저문 때에 태평 성대를 만났으나 / 遲 暮 時 逢 泰 풍운이 일어 길은 다시 어렵기만 하였다 / 風 雲 道 更 屯 임금께 일편단심 바쳤고 / 丹 心 天 北 極 해동잡록 1 본조( 本 朝 )-박영( 朴 英 ) 149

150 해동 땅에서 머리가 희어졌네 / 素 髮 海 東 어리석은 이 몸이 일찍이 깨우침을 받았으나 / 愚 陋 蒙 曾 擊 서로 어기어져 친히 배우지 못했도다 / 乖 離 炙 未 親 문득 신선길 멀어진 것(죽은 것을 말함)을 듣고 / 忽 聞 仙 路 遠 큰 의논 사라짐을 길이 통곡하도다 / 長 慟 大 論 湮 늦은 가을 서쪽으로 가는 길에 / 秋 晩 西 行 路 석 잔 술로 다만 눈물이 수건을 적실 뿐이로다 / 三 杯 但 沾 巾 하였다. 해동야언( 海 東 野 言 ) 박영( 朴 英 )이, 임금 앞에서 흰 말이 버들가지에 매여 있는 것을 보고 시를 지어 바치었는데, 임금이 특별히 그 백마를 하사하였다 한다. 그 시에 백마는 울며 버들가지에 매여 있는데 / 白 馬 寒 嘶 繫 柳 梢 장군은 일이 없어 칼을 칼집에 감추도다 / 將 軍 無 事 劍 藏 鞘 나라 은헤를 갚지 못하고 몸이 먼저 늙으니 / 國 恩 未 報 身 先 老 꿈길에나 밟는 관산엔 눈이 아직 녹지 않았네 / 夢 踏 關 山 雪 未 消 하였다. 본집( 本 集 ) 해동잡록 1 본조( 本 朝 )-박영( 朴 英 ) 150

151 해동잡록 1 본조( ( 本 朝 )-박훈 박훈( ( 朴 薰 ) :34 해동잡록 1 본조( 本 朝 )-박훈( 朴 薰 ) 본관은 밀양( 密 陽 )으로, 어려서부터 몰려다니며 놀지를 않고, 희롱하며 구경하는 기구를 손에 가까이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큰 인물이 될 것으로 지목하였다. 9세에 아버지가 죽고는 분발하여 학업에 힘써서 의리( 義 理 )의 학문을 정밀하게 연구하였고, 곁들여 모 든 사기( 史 記 )에 통하여 꿰뚫지 않은 바 없었다. 갑자년 사마시( 司 馬 試 )에 합격하고, 무인년에 추천으로 의영고 주부( 義 盈 庫 主 簿 )가 되었다. 어머니를 위하여 현령( 縣 令 )으로 임명해 줄 것을 빌었으나, 말하는 자가 대각( 臺 閣 사헌부)의 직( 職 )에 합당하다고 하여 감찰 ( 監 察 ) 벼슬을 제수하였다가, 낭관( 郞 官 )ㆍ지평( 持 平 ) 벼슬로 옮겼다. 천과( 薦 科 )에 급제하여 장령( 掌 令 )으로 발탁되었고, 검상( 檢 詳 ) 과 사간( 司 諫 )을 역임하고 동부승지( 同 副 承 旨 )로 올랐다. 사화( 士 禍 )가 일어나자 죄수가 되어 처음 성주( 星 州 )에 귀양갔다가, 의주( 義 州 )로 옮기고, 13년 만에 안악( 安 岳 )으로 옮겼다가 그 후 3년 만에 전리( 田 里 )로 추방되어 돌아갔다. 당시 어머니가 아직 생존해 있어 서 그는 모자간에 오래 떨어져 있었음을 마음 아프게 여겨서,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고 모신지 5년간을 귀와 눈의 낙이 되어 단맛의 봉양에 극진하더니, 어머니가 돌아가자, 너무 슬퍼하여 병을 앓아 복 입은 동안에 죽었다. 청주( 淸 州 ) 사람들이 서원( 書 院 )을 세우고 그를 제사한다. 기묘록( 己 卯 錄 ) 해동잡록 1 본조( 本 朝 )-박훈( 朴 薰 ) 151

152 해동잡록 1 본조( ( 本 朝 )-박위 박위( ( 朴 ) :28 해동잡록 1 본조( 本 朝 )-박위( 朴 ) 본관은 밀양( 密 陽 )으로 고려 말에 김해부사가 되었다. 왜병을 황산강( 黃 山 江 )에서 격파했고 누차 진급하여 지문하부사( 知 門 下 府 事 )에 이르렀다. 네 번이나 수령을 지냈고, 세 번이나 남쪽 변방을 지켰는데, 왜구( 倭 寇 )는 그쳐지고 백성은 편안해져서 성망과 치적 이 대단하였다. 뒤에 본조에 벼슬했다. 재주는 경가( 耿 賈 ) 보다 뛰어나고, 용맹은 관장( 關 張 관우( 關 羽 )와 장비( 張 飛 ))보다 나았다. 공양왕 교서( 恭 讓 王 敎 書 ) 고려 말에 왜구가 한창 치열 할 때, 박위가 지략이 있어, 대장이 되었는데, 백 번 싸워 백 번 이겨 적으로 하여금 방자하게 굴지 못하게 하였다, 지금도 사람들은 그를 지장( 智 將 )이라고 칭찬하고 있다. 지지( 地 志 ) [주D-001]경가(( 耿 賈 ) : 경감( 耿 )과 가복( 賈 復 )으로 모두 한 나라 광무제( 光 武 帝 ) 때의 명장들이다. 해동잡록 1 본조( 本 朝 )-박위( 朴 ) 152

153 해동잡록 1 본조( ( 本 朝 )-박의중 박의중( ( 朴 宜 中 ) :25 해동잡록 1 본조( 本 朝 )-박의중( 朴 宜 中 ) 본관은 밀양으로 자는 자허( 子 虛 )이다. 처음 이름은 실( 實 )이고 호는 정재( 貞 齋 )라 했다. 공민왕이 청주에 내려왔을 때, 장원으로 뽑혀서 신우( 辛 禑 ) 때 밀직제학( 密 直 提 學 )에 이르렀다. 본조( 本 朝 )에 들어 와서 참찬 의정부사( 參 贊 議 政 府 事 )를 임명( 任 命 ) 받았다.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전아( 典 雅 )하고 정밀하며 깊었다. 공민왕이 경연( 經 筵 )에 임하여, 나는 나이가 이미 늙어 가니, 비록 성현의 경전을 읽는다 해도 유익함이 없을 것 같다. 하니, 박의중( 朴 宜 中 )은 사광( 師 曠 )이 진평공( 晉 平 公 )을 간하던 말을 인용하여 간하기를, 소년 때 학문을 좋아함은 해가 뜨는 것과 같고, 어른이 되어서 학문을 좋아함은 해가 빛나는 것과 같고, 늙어서 학문을 좋아함은 촛불의 밝음과 같으니, 촛불을 밝히고 다니는 것과 어두움 속에 다니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낫겠습니까? 하였던 바, 임금이 이를 좋아하고 받아들였다. 고려사 일찍이 사명을 받들고 북경( 北 京 )에 갔었는데, 요동 진무사( 遼 東 鎭 撫 使 ) 서현( 徐 顯 )이 모시베를 요구하기에 의중( 宜 中 )이 자루를 털어 보이고, 자기가 입은 모시옷을 벗어 주니, 서현은 그 청백함을 감탄하고 그 사실을 예부( 禮 部 )에 보고하였다. 천자( 天 子 )가 인견 ( 引 見 )할 때 대접을 더 잘하여 주었다. 동국여지승람 북경에 조공갔다가 돌아 오는 길에 수일 동안을 오다가 요동( 遼 東 )으로부터 최영( 崔 瑩 )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이 있어 종자( 從 者 )들이 잡힐까 겁이 나서 도중에서 모두 달아났으나, 의중은 단신으로 요동에 도착하면서도 별로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열전 ( 列 傳 ) 옛사람은 잘 다스려진 세상에도 위태로이 여기고, 밝은 임금에 대해서도 근심하였다. 대개 임금의 밝고 어두움은 덧없으며, 시대 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은 서로 갈마들기 때문이니, 다스려진 세상도 위태롭게 여길 것이지 편안하게 여겨서는 안 되며 밝은 임금에 대해서도 우려할 것이지 믿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정재집( 貞 齋 集 ) 삼국( 三 國 )이 솥발처럼 셋으로 서 있을 때, 각각 한 구역씩을 지키며 날로 치고 싸우기를 일삼아 형세는 만촉( 蠻 觸 )과 같았다. 동 상 북경( 北 京 )에 갔다 돌아 오니, 고황제( 高 皇 帝 명 나라 첫째번 황제)가 자문( 咨 文 )을 보내어, 다섯 가지 모욕적인 일을 열거하며 들 어 책망하기를, 해마다 바치는 종자말은 모두 둔하고 재주 없는 말이니 이것이 모욕적인 일의 첫째 것이요, 말[ 馬 ]로써 예절을 차 린다 하면서 도착해 온 것은 모두 얼룩진 잡색으로써 행상배( 行 商 輩 )도 쓰지 못할 것을 보내니 이것이 모욕적인 일의 둘째 것이요, 때로 간혹 사람을 보내어 몰래 사세를 엿보고자 하다가 발각되어 드러나게 되니 이것이 모욕적인 일의 셋째 것이요, 수륙( 水 陸 )으로 왕래하며 명백하게 물건을 매매하면서 무슨 일인들 안 되며 무슨 기밀인들 못 얻을 것이냐고 말하니 이것이 모욕적인 일의 넷째 것 이요, 비단과 말을 바꾸어 오랑캐를 치려고 하는데 배신( 陪 臣 )들이 모두 노마( 駑 馬 게으른 말)를 가지고 와서 바꾸어 가니, 그 가격 으로 비교해 보면, 지금의 3, 4필의 말 값으로 한 노마를 바꾸게 되나 끝내 쓰지 못할 것으로써 이것이 모욕적인 일의 다섯째 것이 다. 하였다. 본사( 本 史 ) 박자허( 朴 子 虛 )는 그 자질과 천품이 단아하고 근엄하며 학문이 정밀하고 해박하여, 한 시대의 벼슬하는 사람 중의 우수한 자였다. 자설( 字 說 ) [주D-001]만촉(( 蠻 觸 ) : 장자( 莊 子 ) 에 있는 말인데, 달팽이 왼쪽 수염 끝에 만( 蠻 )이라는 나라가 있고, 오른편 수염 끝 에 촉( 觸 )이라는 나라가 있어서, 항상 서로 전쟁하는데, 죽은 자가 수만 명씩이나 된다고 하였다. 그것은 이 지구상의 큰 나라라고 자처하는 나라들도 무한대한 우주에서 볼 때에는 달팽이 수염 끝 밖에 되지 않는다는 풍자인 말이다. 해동잡록 1 본조( 本 朝 )-박의중( 朴 宜 中 ) 153

154 [주D-002]배신(( 陪 臣 ) : 황제의 직속된 신하가 아니고 제후국의 신하를 가리키는 말이다. 해동잡록 1 본조( 本 朝 )-박의중( 朴 宜 中 ) 154

155 請 額 上 言 [ 朴 時 增 ] :56 請 額 上 言 [ 朴 時 增 ] 前 行 戶 曹 正 郞 臣 朴 時 增 謹 齋 沐 百 拜 上 書 于 主 上 殿 下 雲 屛 之 下 伏 願 垂 察 焉 天 道 有 屈 有 伸 人 事 有 顯 有 晦 若 遲 速 先 後 之 不 齊 則 亦 莫 非 時 也 逮 我 太 祖 大 王 招 選 前 朝 忠 臣 之 時 或 賜 爵 贈 諡 或 招 入 爲 顯 揚 者 不 知 其 數 至 於 臣 矣 身 八 代 祖 天 翊 以 前 王 不 忘 之 心 五 徵 不 起 視 死 如 生 終 不 赴 命 退 隱 於 杜 門 洞 是 白 如 可 仍 還 密 州 古 莊 恒 遊 於 松 竹 之 間 講 周 易, 論 語 文 章 淵 源 乃 爲 師 門 之 宗 理 學 之 祖 是 白 遣 以 褒 贈 之 渥 論 之 則 或 遲 或 速 或 先 或 後 亦 各 有 時 者 也 故 左 贊 成 臣 卞 季 良 筵 臣 直 請 曰 故 前 朝 侍 郞 朴 天 翊 爲 理 學 之 宗 道 德 淵 源 莫 非 一 國 之 賢 師 而 況 歷 事 三 朝 功 著 北 藩 樹 立 大 功 炳 煥 若 此 昨 以 筵 臣 陳 達 俾 獲 二 字 之 贈 仍 蒙 忠 肅 之 諡 豈 非 國 史 之 彰 美 乎 卽 請 額 號 而 疊 請 未 安 故 以 待 來 後 是 白 如 乎 其 後 非 但 子 孫 之 零 星 除 良 請 額 一 款 國 典 本 嚴 故 卽 未 蒙 允 是 白 乎 乃 旌 忠 奬 節 迺 朝 家 之 盛 典 而 若 無 如 是 闡 美 則 烏 能 施 於 後 世 乎 以 其 時 賢 輩 論 之 則 或 屈 不 屈 伸 不 伸 者 多 也 臣 矣 祖 忠 節 若 此 文 獻 有 徵 是 乎 矣 世 遠 人 亡 身 名 俱 晦 豈 非 士 林 之 慨 恨 又 豈 非 子 孫 之 冤 鬱 者 乎 矣 祖 天 翊 與 趙 洪 段 只 緣 子 孫 之 殘 微 冤 枉 之 情 不 能 徹 九 重 之 天 是 白 乎 所 鄭 圃 隱 夢 周, 李 牧 隱 穡, 李 陶 隱 崇 仁, 吉 冶 隱 再, 洪 隱 載 一 體 之 人 特 蒙 建 院 贈 額 尊 奉 之 澤 而 其 子 其 孫 擧 皆 入 於 聖 上 明 命 之 下 仍 爲 蔭 職 之 列 是 白 乎 矣 至 於 臣 矣 祖 段 獨 漏 於 曠 世 之 恩 忠 亮 道 德 果 安 在 哉 其 在 一 視 之 道 寧 有 厚 薄 於 其 間 耶 臣 矣 身 獨 抱 之 冤 實 爲 百 世 之 公 議 也 矣 臣 不 避 鉞 之 誅 煩 擾 擊 鼓 極 知 猥 越 而 冤 鬱 所 激 不 知 裁 止 臣 罪 尤 萬 萬 矣 伏 願 天 日 之 明 照 臨 於 覆 盆 之 下 使 矣 祖 比 於 鄭 圃 隱, 李 牧 隱 之 例 而 特 下 院 額 之 恩 典 則 矣 祖 貫 日 之 誠 耿 耿 不 昧 是 白 乎 聖 代 光 明 之 典 豈 獨 專 美 於 前 亦 可 爲 垂 裕 於 後 矣 其 在 臣 矣 身 爲 先 之 誠 死 無 餘 憾 敎 味 白 齊 伏 乞 一 視 之 下 俾 獲 二 字 之 恩 千 萬 幸 甚 批 曰 令 銓 曹 採 達 焉 時 値 朝 家 多 事 未 得 蒙 允 請 額 上 言 [ 朴 時 增 ] 155

156 書 遺 事 後 [ 金 大 有 ] :55 書 遺 事 後 [ 金 大 有 ] 前 正 言 甁 齋 主 人 朴 河 澄 持 其 五 代 祖 松 隱 公 遺 事 及 公 之 子 四 兄 弟 遺 事 所 錄 以 不 佞 且 求 文 以 揚 顯 先 徽 不 佞 謹 讀 松 京 誌 八 隱 集 觀 至 松 隱 盲 篇 其 貞 忠 卓 節 與 日 月 爭 光 缺 圃, 牧, 冶, 陶 把 袖 痛 哭 曰 時 已 若 此 天 也 誰 怨 誰 咎 自 古 及 今 天 無 二 日 臣 無 二 君 圃 老 誓 死 之 日 呼 公 泣 言 曰 生 寄 死 歸 雖 曰 天 命 吾 獨 死 歸 於 吾 王 之 庭 知 我 者 乃 天 翊, 再, 穡 也 公 曰 唯 唯 吾 亦 王 臣 則 誓 不 食 李 粟 而 斷 當 從 此 逝 矣 諸 賢 拭 淚 大 言 曰 朴 天 翊 眞 義 士 也 盟 深 河 海 之 渴 志 高 泰 山 之 固 有 若 孤 竹 子 之 節 乎 粤 我 太 祖 大 王 以 寬 容 之 德 以 幣 聘 公 于 私 第 時 公 獨 稱 盲 而 坐 若 尋 常 顧 左 右 言 他 終 不 迎 幣 禮 官 權 近 卽 報 曰 竊 見 朴 天 翊 不 顧 王 幣 之 所 重 視 死 如 生 臣 獨 不 得 致 也 下 答 曰 朴 天 翊 曾 已 知 之 者 雖 曰 吾 家 不 良 乃 王 氏 之 忠 臣 彼 五 徵 不 起 旣 有 不 事 二 君 之 心 予 何 以 依 律 論 罪 哉 嗚 呼 謹 見 公 之 遺 事 及 公 之 子 四 兄 弟 遺 事 則 乃 我 厖 翁 之 所 撰 也 不 佞 焉 敢 贅 焉 錄 中 詩 所 言 死 生 期 報 誰 仇 義 不 食 李 粟 其 兆 已 現 矣 結 之 以 海 頭 風 雪 則 又 可 以 見 大 冬 松 柏 之 貞 節 嗚 呼 唏 矣 惟 我 厖 村 翁 爲 公 作 遺 墟 碑 文 墟 在 密 州 浦 而 降 仙 之 臺 在 其 西 村 翁 野 老 相 傳 以 爲 公 五 父 子 杖 觴 詠 於 臺 之 上 公 與 此 臺 其 在 千 古 也 哉 三 足 居 士 金 大 有 敬 題 書 遺 事 後 [ 金 大 有 ] 156

157 遺 墟 神 道 碑 續 識 [ 皇 甫 仁 ] :53 遺 墟 神 道 碑 續 識 [ 皇 甫 仁 ] 按 麗 史 壬 申 四 月 臺 府 之 請 按 趙 浚, 鄭 道 傳 等 先 生 時 爲 禮 判 事 過 司 宰 監 正 蹈 實 與 聞 焉 及 其 事 之 翻 就 吏 議 當 斬 而 賴 我 聖 朝 寬 容 愛 護 之 德 徒 爲 流 竄 嗚 呼 先 生 見 朝 政 失 紀 脫 冠 於 不 朝 之 峴 佯 爲 盲 稱 病 辟 穀 長 詠 松 竹 之 韻 而 與 諸 賢 圃, 牧, 冶, 陶 同 心 不 貳 視 死 如 生 其 爲 卓 異 之 節 與 日 月 爭 光 五 百 年 淑 正 之 氣 亦 可 謂 拔 類 於 世 也 賜 祭 文 曰 盟 深 先 後 立 人 之 紀 竊 伏 念 先 生 節 義 孰 不 有 仰 之 者 乎 論 其 繼 開 之 功 知 者 似 或 有 鮮 矣 至 我 厖 翁 始 可 闡 揚 之 無 餘 然 則 大 碑 之 成 於 十 年 之 間 是 可 謂 待 時 歟 斯 建 也 河 相 公 崙 經 紀 其 緖 實 由 於 尊 崇 慕 缺 衛 道 之 誠 士 林 亦 不 可 不 知 者 也 後 學 永 陽 皇 甫 仁 敬 書 請 按 趙, 鄭 謂 圃 隱 爲 侍 中 使 臺 諫 構 疏 除 去 朋 黨 也 事 之 翻 就 謂 四 月 四 日 圃 隱 死 也 吏 議 當 斬 謂 禍 之 延 及 於 先 生 及 同 時 諸 賢 遺 墟 神 道 碑 續 識 [ 皇 甫 仁 ] 157

158 立 碑 告 由 文 [ 卞 春 亭 ] :51 立 碑 告 由 文 [ 卞 春 亭 ] 羅 國 姓 孫 海 東 賢 人 昕 夕 相 從 圃 牧 同 隣 世 守 敦 睦 忠 孝 盡 倫 淸 風 孤 竹 明 月 魯 連 含 笑 就 義 戒 深 後 先 飄 然 解 田 園 長 春 厖 村 撰 文 罕 國 忠 臣 猗 歟 貞 節 蘇 武 海 濱 永 扶 天 理 不 改 心 神 聖 命 誕 贈 桑 梓 增 新 抱 冤 丹 心 幾 泣 鵑 血 鷗 鷺 同 盟 松 竹 幷 列 蒼 蒼 之 節 長 貫 日 月 賜 爵 贈 諡 忠 肅 華 閥 生 前 克 訓 父 子 異 時 事 君 盡 命 不 忘 辭 遺 靡 公 忠 孝 豈 有 今 日 眷 茲 幽 宅 松 柏 密 密 泣 血 英 魂 陟 降 堂 室 七 十 餘 賢 死 生 同 結 竹 橋 寒 天 山 哀 澗 咽 爲 誰 之 思 圃 老 情 切 畫 像 在 廟 警 咳 不 滅 威 儀 如 生 何 其 壯 烈 秋 菊 春 蘭 遺 香 益 潔 放 哭 永 慕 山 川 欲 裂 用 衛 墓 道 碑 長 十 折 四 子 四 婦 列 立 無 闕 如 在 膝 下 小 心 翼 翼 泣 視 碑 文 恩 渥 不 息 去 人 來 人 朝 誦 暮 習 文 誰 製 之 卞 春 亭 識 茲 將 菲 文 用 告 事 由 神 明 所 臨 曷 不 顧 余 立 碑 告 由 文 [ 卞 春 亭 ] 158

159 밀성박씨 우당공파 블로그 저자 발행일 密 城 朴 氏 全 國 靑 年 會 밀성박씨우당공파 :45:38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복제와 전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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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0 인물 강순( 康 純 1390(공양왕 2) 1468(예종 즉위년 ) 조선 초기의 명장.본관은 신천( 信 川 ).자는 태초( 太 初 ).시호는 장민( 莊 愍 ).보령현 지내리( 保 寧 縣 池 內 里,지금의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에서 출생하였다.아버지는 통훈대부 판무 제11편 성씨 인물 579 제3장 인 물 1. 고려ㆍ조선시대 인물 강순 강열황 구계우 구상은 김감 김경상 김계백 김계환 김규 김광오 김광원 김극성 김극신 김근행 김낙항 김남호 김노기 김노영 김맹권 김명현 김문서 김백간 김상현 김생려 김선지 김성국 김성우 김수정 김수현 김숙 김시걸 김신행 김억 김여남 김영석 김영수 김영제 김용제 김우식 김위 김응순 김응의 김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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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titled (Rev. 1.6) 1 1. MagicLAN.......8 1.1............8 1.2........8 1.3 MagicLAN.......10 2.........12 2.1.... 12 2.2 12 2.3....12 3. Windows 98SE/ME/2000/XP......13 3.1.....13 3.2 Windows 98SE.... 13 3.3 Windo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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