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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순천지역 여순사건 결정사안 강재수( 姜 裁 秀, 직다-324) 외 438명이 여순사건 직후인 1948년 10월 말부터 1950년 2월 까지 순천시내, 승주읍, 서면, 월등면, 황전면, 상사면, 해룡면, 주암면, 외서면, 낙안면, 별량면 등 순천시 일대에서 국군 제2연대(1ㆍ2대대)ㆍ제3연대(1ㆍ2대대)ㆍ제4(20)연대 (1ㆍ2대대)ㆍ제12연대(1ㆍ2ㆍ3대대)ㆍ제15연대(1ㆍ2대대) 소속 부대원 그리고 순천경 찰서 경찰에 의해 불법적으로 사살당한 사건에 대하여 진실을 규명한 사례. 결정요지 1. 강재수( 姜 裁 秀, 직다-324) 외 438명은 여순사건 직후인 1948년 10월 말부터 1950년 2월까지 순천시내, 승주읍, 서면, 월등면, 황전면, 상사면, 해룡면, 주암면, 외서면, 낙안 면, 별량면 등 순천시 일대에서 국군 제2연대(1ㆍ2대대)ㆍ제3연대(1ㆍ2대대)ㆍ제4(20) 연대(1ㆍ2대대)ㆍ제12연대(1ㆍ2ㆍ3대대)ㆍ제15연대(1ㆍ2대대) 소속 부대원 그리고 순 천경찰서 경찰에 의해 불법적으로 집단사살되었다. 2. 국군 제2연대(1ㆍ2대대) 부대원들은 순천 진압작전부터 1949년 초까지 순천시내 민간인을 연행, 북국민학교, 순천농림중학교에서 고문 및 취조한 후, 북국민학교, 순천농 림중학교 건물 뒤편에서 집단사살했다. 3. 국군 제3연대(1ㆍ2대대) 부대원들은 순천진압작전 이후 1949년 초까지 순천농림중 학교와 순천 철도국에 주둔하면서 순천거주 민간인을 불법적으로 사살하거나, 연행하여 고문 및 취조한 후, 북국민학교, 순천역, 낙안면 등지에서 위법적으로 사살했다. 4. 국군 제4(20)연대(1ㆍ2대대)는 순천진압작전과 1949년 토벌작전 과정에서 순천시 남국민학교와 풍덕동 옛 펄프공장, 황전ㆍ월등면 등지에 주둔하면서 별량면ㆍ순천시내ㆍ 황전면ㆍ월등면 등지에서 마을을 수색하고 소개했다. 이 과정에서 4연대는 민간인들을 주둔지로 연행하여 고문 및 취조한 뒤, 사살했다. 5. 국군 제12연대(1ㆍ2ㆍ3대대)는 1948년 10월 하순, 1949년 1월 순천농림중학교, 풍덕동 옛 펄프공장, 구례읍 등에 주둔하면서, 순천시내ㆍ황전면ㆍ월등면 등지에서 마을 을 수색하고 소개했다. 이 과정에서 제12연대는 주둔지와 북국민학교ㆍ황전지서 등지로 순천지역 여순사건 473

2 제3권 민간인을 연행하여 취조한 후, 인근 순천농림중학교ㆍ양지맷골 등지에서 사살하였다. 또 한 이들은 마을을 수색하고 소개한 후, 마을 인근에서 민간인을 사살했다. 특히 12연대 지휘관들은 소심한 부하에게 즉결처분을 지시하거나, 난폭한 부하에게 목을 베라고 한 뒤 총에 걸고 다니게 하는 등의 가해행위를 했다. 6. 국군 제15연대(1ㆍ2대대)는 순천 탈환 이후부터 1949년에 걸쳐 순천남국민학교, 순천농림중학교, 풍덕동 옛 펄프공장, 주암면ㆍ황전면 등지에 주둔하면서, 순천 전 지역 을 대상으로 마을을 수색하고 주민을 소개했다. 그 과정에서 가옥을 소각한 뒤, 민간인들 을 연행하여 불법적으로 집단사살했다. 특히 15연대는 친인척들에게 반군협조혐의가 있 는 민간인들을 척살하도록 교사하거나, 민간인을 살상하여 전과를 허위보고하는 등의 가 해행위를 했다. 7. 한편, 순천경찰서 경찰은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말까지 사찰계를 중심으로 관 내 반군토벌 및 반군협력자 색출작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민간인들을 본서나 읍면별 지 서로 연행하여 고문 및 취조한 뒤, 해당 관내에서 불법적으로 사살했다. 8. 조사결과 강재수( 姜 裁 秀, 직다-324ㆍ1378) 등 모두 439명의 희생자 신원이 확인되 었다. 1948년 10월 말에서 1950년 2월까지 순천지역 여순사건에서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자 수는 약 2,000여 명 정도로 추산되지만, 정확한 피해규모는 파악할 수 없다. 위원 회에 신청된 자와 기록에서 확인된 희생자는 439명이며 희생추정자는 5명이다. 9. 본 사건 희생자의 연령별 분포를 보면, 전체 439명 가운데 20대와 30대가 319명으로 73%를 차지하였다. 성별 분포를 보면, 남자가 91.4%로 희생자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 는 가장 활동적인 시기의 청년 남성이 민간인 희생의 주요 대상이었음을 보여준다. 면별 분포에서는 순천시내권과 10개 읍면 가운데 서면과 상사면, 순천시내권에서 44.6%에 해 당하는 204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특히 서면지역의 피해가 많았다. 이는 서면이 백운 산과 인접해 있고, 광양과 구례로 가는 길목인 까닭에 반군의 이동통로로 이용되었던 지 리적인 요인과 더불어 국군 15연대에 의해 발생한 판교리 노은마을 사건ㆍ용계산 사건 의 희생자가 많았던 점에 기인한다. 서면에서는 반군이 근거지로 삼았던 지역이 많았고, 이에 서면 사람들이 군경과 반군의 중간에 놓이게 되면서 다른 면에 비해 희생자가 많았 다고 판단된다. 10. 군경 참고인 가운데 일부는 희생자들이 반란에 가담하거나 협력한 남로당원, 지방 폭도, 빨갱이 였다고 주장하며, 가해의 정당성과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본 사건 당시 반군 활동지역에 거주했던 주민들은 반군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을 수 없었던 상황에 놓여 있었다. 신청인들이 주장하는 피해이유는 대체로 이를 반영하 듯 반군과의 관련성 여부에 집중되어 있다. 첫째는 가장 일반적인 반군협조혐의로서 숙 식이나 식량제공ㆍ노무동원ㆍ반군과의 연락이나 반군 은닉 등이 대표적이었다. 여기에는 반군이 활동한 작전지역에 거주한다는 이유로 희생된 경우도 포함된다. 둘째는 반군에 가담한 혐의로 희생당한 경우이다. 이러한 경우 가담혐의로 지목되었다는 추정만 있을 뿐, 구체적인 가담사실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군경의 가해는 자의적 인 성격이 강했다. 셋째는 본 사건 자체와 무관한 대살( 代 殺 )로, 바로 좌익 및 입산자가족 또는 동료라는 이유로 희생된 경우이다. 이밖에도 연행이유와 피해이유를 모르거나 무고 와 모략, 고문으로 희생된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당시 군경이 민간인을 자의적이며 무리 하게 연행 및 취조하고 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1. 본 사건의 가해주체는 제2연대(1ㆍ2대대)ㆍ제3연대(1ㆍ2대대)ㆍ제4(20)연대(1ㆍ 2대대)ㆍ제12연대(1ㆍ2ㆍ3대대)ㆍ제15연대(1ㆍ2대대) 소속 부대원 그리고 순천경찰서 경찰로 확인되었다. 국군 제2연대의 지휘ㆍ명령계통은 반군토벌전투사령부(사령관 송호성 준장) 제2여단 장(원용덕 대령) 제2연대장 이 제1대대장 박로 확인되었다. 국군 제3연대의 지휘ㆍ명령계통은 반군토벌전투사령부(사령관 송호성 준장) 제5여단장(김백일 중령) 제3연대장 함 제1대대장 박ㆍ제2대대장 조ㆍ제3대대장 한로 확인되 었다. 국군 제4(20)연대의 지휘ㆍ명령계통은 반군토벌전투사령부(사령관 송호성 준장) 호남방면전투사령관(제2여단장 원용덕) 남지구전투사령관(김백일 중령) 제4연대장 이 ㆍ위ㆍ박 제1대대장 유ㆍ제2대대장 이ㆍ제3대대장 오으로 확인되었다. 국군 제12연대의 지휘ㆍ명령계통은 반군토벌전투사령부(육군 준장 송호성) 호남방면전투사령관(제2여단장 원용덕) 남지구전투사령관(제5여단장 김백일) 제12 연대장 백ㆍ백ㆍ송 제1대대장 허ㆍ제2대대장 김ㆍ제3대대장 이 ㆍ연로 확인되었다. 1949년 3월 1일 이후에는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정일 권)가 구례지역에서 작전을 지휘하였다. 국군 제15연대의 지휘ㆍ명령계통은 반군토벌전 투사령부(육군준장 송호성) 호남방면전투사령관(제2여단장 원용덕) 남ㆍ북지구전투사 령관(제5여단장 김백일ㆍ제2여단장 원용덕) 광주5사단(사단장 원용덕) 제15연대장 신 ㆍ김ㆍ윤ㆍ송 제1대대장 이ㆍ양ㆍ김ㆍ제2대대장 최 ㆍ제3대대장 최으로 확인되었다. 본 사건은 현지 토벌작전 지휘관의 명령 아래 발생했지만, 최종적인 감독 책임은 국방 순천지역 여순사건 475

4 제3권 부,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과 국가에 귀속된다고 할 수 있다. 순천지역 경찰의 경우는 이중의 지휘ㆍ명령계통 하에서 활동했다. 하나는 순천지역 계 엄사령관 순천경찰서장, 다른 하나는 제8관구경찰청(전남경찰국) 순천경찰서장으로 하 달되는 계통이었다. 본 사건 당시 순천경찰서장은 변ㆍ양ㆍ손ㆍ이이었 다. 그리고 당시 제8관구경찰청장(전남경찰국장)은 김ㆍ김이었다. 경찰 최상급 기관인 내무부 치안국이 본 사건과 관련하여 직접 명령을 내렸거나 보고받았는지는 확인 할 수 없지만, 지휘 및 관리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12. 본 사건 과정에서 군경당국은 본 사건 관련자를 체포하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민간 인에 대한 무차별적 연행, 불법적인 취조와 고문, 자의적인 심사와 분류에 따른 살해 등 여러 가지 형태의 불법행위를 자행하였다. 본 사건에서 군경이 작전 과정에서 민간인을 살해한 근거는 계엄령에서 비롯된다. 그 러나 본 사건 당시 계엄령은 계엄법이 부재한 상황에서 공포되었고, 비록 계엄사령관에 게 행정권과 사법권은 주어졌으나, 이를 실행할 수 있는 관련 법령이나 규정은 없었다. 본 사건 당시 현지 사령관은 계엄령에 대한 자의적인 판단 아래, 민간인을 반군협력자라 는 혐의만으로 불법적으로 연행하여 살해하였는데, 이는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 는 계엄령의 일반적 한계를 벗어난 위법적인 행위였다. 계엄령 아래에서 이루어진 군의 즉결처분권 은 민간인 살해나 처형을 정당화하는 주요 한 근거였으나, 법의 일반적 요건이나 정당성을 결여하고 있었다. 계엄포고문에서 즉결처분은 군율 에 따르도록 규정하였으나, 민간인을 즉결처분, 곧 임의처형하는 과정에서 관련 법 조항을 따르지 않았다. 본 사건에서 군경당국은 법적 통 제를 받지 않고 작전의 편의성이나 효율성만을 고려하여 즉결처분 을 남용하였다. 이에 많은 민간인들은 반군에 협조한 혐의만으로 재판절차를 거치지 않고 사살당했으며, 이는 즉결처분 이 사실상 학살이었음을 말해준다. 13.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가 순천지역 여순사건과 관련하여 과거 국가권력이 저지른 잘못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건 관련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사과할 것과 희생자에 대 한 명예회복 및 위령사업 지원 조처를 마련할 것을 권고한다. 또한 유사 사건의 재발 방 지를 위해 본 사건의 진실규명내용을 관련 역사기록에 반영하고, 평화인권교육을 강화할 것을 권고한다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전 문 사 건 직다-324 외 202건, 순천지역 여순사건 신청인 강병화 외 202명 결정일 주 문 이 사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실이 규명되었으므로 진실규명 으로 결정한다. 이 유 Ⅰ. 조사개요 1. 사건개요 가. 신청접수와 처리 진실ㆍ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 는 진실규명 신청기간 ( ) 동안 군경이 국군 제14연대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민간인을 살해했다고 주장하는 사건(총 832건)을 접수하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상기 접수된 사건을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제14차 회의( 구례봉성산여순사건 9건), 제17차 회의( , 구례봉성산여순사건 3건), 제20차 회 의( 건), 제26차 회의( 건), 제28차 회의( 건), 제30차 회의( 건)에서 병합하여 조사하기로 의결하였다. 또한 본 사건의 명칭 을 여순사건 으로 결정(조사1팀-1373, )하였다. 제39차 전원위원회( )는 여순사건을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 으로 규정하여, 직권조사하기로 의결(48건 병합ㆍ조사개시 포함)하였다. 순천지역 여순사건 은 여순사건 중 전라남도 순천(승주읍)군 일대의 민간인이 군경에 의해 집단으로 희생된 사건을 말하며, 대상 시기는 1948년 10월 말부터 1950년 2월까지이 다. 1) 사건의 원인 및 발생배경의 측면에서 본다면, 여순사건에는 전남 동부지역 국민보 1) 제39차 전원위원회( )는 여순사건에 대한 직권조사 사건 전환을 의결하면서, 1948년 10월 19 일부터 1950년 9ㆍ28 수복 이후 10월까지 전라남도 동부지역 및 전북ㆍ경남 일부 지역에서 반란군과 진 순천지역 여순사건 477

6 제3권 도연맹 사건ㆍ전국형무소재소자 희생사건ㆍ부역혐의 민간인 희생사건과 여순사건 당시 반군과 좌익에 의해 희생된 사건 등이 포함된다. 다만,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사건조사 의 효율성을 위해 사건을 유형별로 분류하여 조사하고 있으므로 국민보도연맹사건, 전국 형무소재소자 희생사건, 부역혐의 민간인 희생사건 등은 본 사건에 포함되지 않았다. 순천지역 여순사건의 신청건수는 총 258건이다. 본 보고서는 이 가운데 14연대 입대 후 사망 4건, 지방좌익과 반군에 의해 희생된 22건, 순천지역 여순사건이 아닌 29건 2) 을 제외 한 총 203건을 조사대상으로 삼았다. 203건의 신청인이 주장하는 희생자 수는 총 258명이 다. <표 1> 순천지역 여순사건 신청서 접수와 처리상황 연번 사건번호 접수일자 신청인 강병화 ( 姜 炳 和 ) 장경자 ( 張 敬 子 ) 오광호 ( 吳 光 虎 ) 진실규명대상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강재수 ( 姜 裁 秀 ) 김대례 ( 金 大 禮 ) 강옥순 ( 姜 玉 順 ) 장환봉 ( 張 環 峰 ) 오인권 ( 吳 仁 權 ) 신청인과 관계 남 57 부 여 59 모 여 12 누나 남 29 부 남 27 부 비고 압군에 의해 발생한 집단희생사건을 조사대상과 범위로 설정했다.(제39차 전원위원회, 여순사건의 직권 조사 전환 안건에 대한 심의 의결안, 집단희생규명위원회.) 본 보고서는 국민보도연맹 사건, 전국형무소 재소자 사건 관련 희생자를 제외한 1948년 10월 19일부터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 순천시 전 역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사건을 조사대상과 범위로 제한했다. 조사대상에는 순천지역 거주 민간인들과 순천 인근 지역 출신으로 순천에서 희생당한 민간인들을 포함했다. 2) 기존에 조사개시 결정되었던 순천지역 여순사건 258건 중, 신청인 조사결과 여수지역 여순사건으로 판단 된 1건(직다-2760),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판단된 7건(직다-2248ㆍ6067ㆍ6068ㆍ6220ㆍ7643ㆍ7956 ㆍ9648), 전국형무소재소자희생사건으로 판단된 7건(직다-1386ㆍ6655ㆍ8789ㆍ9103ㆍ9106ㆍ3376ㆍ 7031),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으로 판단된 4건(직다-368ㆍ1359ㆍ8783ㆍ9905)을 해당 부서로 이 관하였다. 또 진실규명대상자가 복수인 신청사건 재검토 결과, 국민보도연맹사건과 전남 광주지역 부역혐 의 민간인 희생사건으로 판단된 2건(직다-1381ㆍ2329)을 각기 직다-1381(1)ㆍ2329(1)로 분리ㆍ이관 조치하였다. 또한 구례지역 여순사건으로 2008년 7월 17일 진실규명 결정된 7건(직다-6446ㆍ6447ㆍ 6448ㆍ7268ㆍ7269ㆍ7271ㆍ7272)을 제외하였다. 이 가운데 사건번호 직다-6655는 전국형무소재소자 희생사건(직다-6655(1))과 전남광주부역혐의희생사건(직다-6655(1))으로 각각 분리되어 이관되었다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번 사건번호 접수일자 신청인 허택 ( 許 澤 ) 진실규명대상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허길성 ( 許 吉 星 ) 신청인과 관계 남 31 부 비고 이진휘 ( 李 鎭 輝 ) 이기증 ( 李 奇 增 ) 남 50 부 이강원 이기담 ( 李 起 淡 ) 남 23 부 안귀엽 ( 安 貴 葉 ) 안두영 ( 安 斗 榮 ) 남 23 부 이춘형 ( 李 春 炯 ) 이상근 ( 李 相 根 ) 남 40 부 박병찬 ( 朴 炳 贊 ) 박상래 ( 朴 相 來 ) 남 39 부 여두성 ( 呂 斗 星 ) 여두원 ( 呂 斗 元 ) 남 18 형 허동환 ( 許 銅 奐 ) 허정년 ( 許 正 年 ) 남 24 숙부 양병옥 ( 楊 炳 玉 ) 양경식 ( 楊 炅 植 ) 남 26 숙부 박영규 ( 朴 英 圭 ) 박병구 ( 朴 炳 球 ) 남 28 부 송칠귀 ( 宋 七 貴 ) 남 56 조부 송기충 ( 宋 基 忠 ) 이효심 ( 李 孝 心 ) 김임순 ( 金 壬 順 ) 여 42 조모 여 26 모 송기화 ( 宋 基 和 ) 남 3 동생 허문범 ( 許 文 凡 ) 허규범 ( 許 圭 凡 ) 남 21 형 정남두 ( 丁 南 斗 ) 정인택 ( 丁 仁 澤 ) 남 36 형 허선행 ( 許 善 行 ) 허필동 ( 許 弼 同 ) 남 19 숙부 순천지역 여순사건 479

8 제3권 연번 사건번호 접수일자 신청인 허채구 ( 許 彩 九 ) 배금엽 ( 裵 金 葉 ) 정재종 정태영 김선문 ( 金 善 文 ) 김천일 정현종 ( 鄭 賢 鍾 ) 최동숙 ( 崔 東 淑 ) 홍동호 ( 洪 東 鎬 ) 손삼순 ( 孫 三 淳 ) 남인심 ( 南 仁 心 ) 김영곤 ( 金 永 坤 ) 박종열 ( 朴 鍾 烈 ) 진실규명대상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허갑진 ( 許 押 震 ) 허만두 ( 許 萬 斗 ) 배학선 ( 裵 學 善 ) 정기영 ( 鄭 基 榮 ) 정추택 ( 鄭 樞 澤 ) 김철중 ( 金 喆 中 ) 김원기 ( 金 源 基 ) 정기석 ( 鄭 基 碩 ) 나성환 ( 羅 成 煥 ) 홍목침 ( 洪 木 沈 ) 정선례 ( 鄭 善 禮 ) 홍일순 ( 洪 一 順 ) 홍재호 ( 洪 在 鎬 ) 위형량 ( 魏 瑩 良 ) 조정순 ( 趙 正 順 ) 이삭심 ( 李 朔 心 ) 김용기 ( 金 容 基 ) 이공월 ( 李 空 月 ) 신청인과 관계 남 30 부 남 25 숙부 남 27 오빠 남 41 부 남 28 부 남 24 부 남 27 부 남 37 부 남 32 시부 남 45 부 여 32 모 여 17 누나 남 3 동생 남 68 시부 여 38 시모 여 4 시누이 남 25 숙부 여 43 모 비고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번 사건번호 접수일자 신청인 강병화 ( 姜 炳 和 ) 강질용 ( 姜 秩 龍 ) 장홍석 ( 張 弘 錫 ) 공준모 ( 孔 俊 模 ) 김용석 ( 金 容 錫 ) 박균호 ( 朴 均 鎬 ) 박정수 ( 朴 貞 洙 ) 이상호 ( 李 相 浩 ) 박희원 ( 朴 喜 源 ) 염금순 ( 廉 今 順 ) 김종철 ( 金 鍾 哲 ) 장옥자 ( 張 玉 子 ) 황정수 ( 黃 正 水 ) 김효수 ( 金 孝 洙 ) 유순오 ( 兪 順 吾 ) 진실규명대상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강재수 ( 姜 裁 秀 ) 김대례 ( 金 大 禮 ) 강옥순 ( 姜 玉 順 ) 강양수 ( 姜 陽 秀 ) 조성림 ( 趙 成 林 ) 공재권 ( 孔 在 權 ) 오연심 ( 吳 連 心 ) 김영모 ( 金 永 模 ) 박기옥 ( 朴 基 玉 ) 박유만 ( 朴 有 萬 ) 이상연 ( 李 相 連 ) 박기영 ( 朴 基 英 ) 김용연 ( 金 容 淵 ) 김태구 ( 金 泰 求 ) 장석남 ( 張 錫 楠 ) 황만수 ( 黃 萬 壽 ) 김복종 ( 金 福 鍾 ) 유복암 ( 兪 福 岩 ) 신청인과 관계 남 57 부 여 59 모 여 12 누나 남 42 부 여 46 모 남 44 부 여 37 모 남 47 부 남 48 부 남 40 부 남 24 형 남 36 부 남 27 시숙 남 24 부 남 32 부 남 33 부 남 29 양부 남 41 부 비고 324와 중복신청 순천지역 여순사건 481

10 제3권 연번 사건번호 접수일자 신청인 이광섭 ( 李 光 燮 ) 제갈종 ( 諸 葛 鍾 ) 제갈덕모 ( 諸 葛 德 模 ) 이항근 ( 李 伉 根 ) 고화석 ( 高 化 錫 ) 김재홍 ( 金 在 洪 ) 박종대 ( 朴 鍾 大 ) 박종대 ( 朴 鍾 大 ) 윤계배 이양기 ( 李 良 基 ) 김주곤 ( 金 株 坤 ) 권종국 ( 權 鍾 國 ) 이순애 ( 李 順 愛 ) 이영섭 ( 李 永 燮 ) 김영기 ( 金 永 基 ) 장광수 ( 張 光 洙 ) 방경규 ( 房 㯳 圭 ) 진실규명대상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이복석 ( 李 福 石 ) 제갈숙 ( 諸 葛 淑 ) 제갈아지 ( 諸 葛 可 只 ) 이봉주 ( 李 鳳 柱 ) 고재옥 ( 高 在 玉 ) 김성균 ( 金 晟 均 ) 박재정 ( 朴 載 汀 ) 박인규 ( 朴 仁 奎 ) 윤우암 ( 尹 又 巖 ) 이희철 ( 李 熙 哲 ) 김용배 ( 金 容 培 ) 권성옥 ( 權 性 玉 ) 이기찬 ( 李 基 贊 ) 이삼근 ( 李 三 根 ) 김인석 ( 金 仁 錫 ) 장용암 ( 張 龍 岩 ) 장종환 ( 張 鍾 桓 ) 방용규 ( 房 鏞 圭 ) 신청인과 관계 남 36 부 남 19 동생 남 22 숙부 남 19 형 남 26 부 남 27 형 남 23 숙부 남 28 부 남 36 숙부 남 31 부 남 37 부 남 29 부 남 40 부 남 35 부 남 27 부 남 63 조부 남 34 부 남 18 형 비고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번 사건번호 접수일자 신청인 방경규 ( 房 㯳 圭 ) 박종영 ( 朴 鍾 永 ) 정종원 ( 鄭 鍾 元 ) 전일수 ( 全 一 秀 ) 박춘근 ( 朴 春 根 ) 최낙선 ( 崔 洛 璇 ) 박복구 ( 朴 福 久 ) 최두용 ( 崔 斗 鎔 ) 박중환 ( 朴 仲 煥 ) 신희중 ( 申 熙 重 ) 황종은 ( 黃 鍾 磤 ) 박종혁 ( 朴 鍾 赫 ) 진실규명대상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방영규 ( 房 泳 圭 ) 박재규 ( 朴 在 圭 ) 정귀남 ( 鄭 貴 男 ) 전덕상 ( 全 德 相 ) 박명구 ( 朴 明 九 ) 최석호 ( 崔 石 鎬 ) 박성일 ( 朴 聖 一 ) 김점례 ( 金 点 禮 ) 최채용 ( 崔 彩 鎔 ) 최덕용 ( 崔 德 鎔 ) 최덕심 ( 崔 德 心 ) 최창용 ( 崔 昌 鎔 ) 최정호 ( 崔 廷 鎬 ) 최경심 ( 崔 敬 心 ) 신태수 ( 申 泰 秀 ) 황종부 ( 黃 鍾 涪 ) 박노은 ( 朴 魯 銀 ) 이장순 ( 李 長 順 ) 신청인과 관계 남 15 형 남 24 부 남 33 부 남 34 부 남 35 부 남 37 부 남 31 부 여 47 모 남 27 형 남 25 형 여 20 누나 남 19 형 남 12 형 여 31 모 남 31 부 남 24 형 남 53 조부 여 41 조모 비고 순천지역 여순사건 483

12 제3권 연번 사건번호 접수일자 신청인 박종혁 ( 朴 鍾 赫 ) 박일규 ( 朴 一 奎 ) 한재임 ( 韓 在 壬 ) 박준옥 ( 朴 準 玉 ) 공형모 ( 孔 亨 模 ) 최익우 ( 崔 翼 宇 ) 황방자 ( 黃 芳 子 ) 이홍재 ( 李 弘 宰 ) 박정석 ( 朴 正 錫 ) 김종길 ( 金 鍾 吉 ) 정동현 ( 丁 東 鉉 ) 서길석 정기순 ( 鄭 基 淳 ) 정기순 ( 鄭 基 淳 ) 허순자 ( 許 順 子 ) 김용출 ( 金 容 出 ) 진실규명대상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박옥란 ( 朴 玉 蘭 ) 박노은 ( 朴 魯 銀 ) 이장순 ( 李 長 順 ) 박옥란 ( 朴 玉 蘭 ) 신청인과 관계 여 14 고모 남 53 부 여 41 모 여 14 누나 한관섭 남 19 오빠 박동련 ( 朴 東 連 ) 양두남 ( 梁 豆 男 ) 최춘우 ( 崔 春 宇 ) 황천식 ( 黃 天 植 ) 이영오 ( 李 永 五 ) 남 66 조부 여 48 모 남 20 형 남 30 부 남 30 형 박상교 남 48 부 김희곤 남 18 숙부 정맹현 ( 丁 孟 鉉 ) 서병중 ( 徐 丙 中 ) 이상호 ( 李 祥 昊 ) 남 21 형 남 12 작은 아버지 남 24 사촌형부 정기홍 남 26 사촌오빠 허종순 ( 許 鍾 順 ) 이영수 ( 李 永 洙 ) 남 25 부 남 25 시동생 비고 1948과 중복신청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번 사건번호 접수일자 신청인 허수길 ( 許 秀 吉 ) 김영기 ( 金 英 基 ) 박영자 ( 朴 英 子 ) 박정순 ( 朴 貞 順 ) 박정순 ( 朴 貞 順 ) 진실규명대상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허만우 ( 許 萬 佑 ) 김용수 ( 金 容 洙 ) 박현석 ( 朴 現 錫 ) 박영옥 ( 朴 永 玉 ) 남동산 ( 南 東 山 ) 임병순 ( 林 炳 順 ) 신청인과 관계 남 26 부 남 34 부 남 33 부 남 21 부 여 59 조모 여 20 모 비고 정인순 ( 鄭 仁 順 ) 이후권 ( 李 後 權 ) 송영종 ( 宋 永 鍾 ) 정운산 ( 鄭 雲 山 ) 송순심 ( 宋 順 心 ) 최석근 ( 崔 錫 根 ) 한일상 ( 韓 日 相 ) 최봉규 ( 崔 琫 圭 ) 최종우 ( 崔 鍾 宇 ) 방종섭 ( 方 鍾 燮 ) 송갑수 ( 宋 甲 水 ) 정일천 남 27 부 송삼덕 ( 宋 三 德 ) 이선권 ( 李 先 權 ) 송기찬 ( 宋 基 贊 ) 정순원 ( 鄭 順 源 ) 송기봉 ( 宋 基 琫 ) 최석호 ( 崔 錫 澔 ) 이소유 ( 李 小 臾 ) 최병주 ( 崔 炳 周 ) 최동두 ( 崔 東 斗 ) 방기현 ( 方 琪 現 ) 송태은 ( 宋 泰 銀 ) 여 25 모 남 16 쌍둥이형 남 21 부 남 23 숙부 남 32 부 남 19 형 여 28 조모 남 25 부 남 28 부 남 48 부 남 35 부 순천지역 여순사건 485

14 제3권 연번 사건번호 접수일자 신청인 박양근 ( 朴 良 根 ) 박병준 ( 朴 炳 俊 ) 지득례 ( 池 得 禮 ) 방종섭 ( 方 鍾 燮 ) 박점덕 ( 朴 点 德 ) 공봉덕 ( 孔 奉 德 ) 공봉덕 ( 孔 奉 德 ) 오수만 ( 吳 壽 萬 ) 민병일 ( 閔 丙 一 ) 서원배 ( 徐 源 培 ) 우채규 ( 禹 採 圭 ) 정하용 ( 鄭 夏 溶 ) 김성기 ( 金 成 基 ) 위계룡 진실규명대상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박계호 ( 朴 桂 浩 ) 박정호 ( 朴 政 浩 ) 지득권 ( 池 得 權 ) 방윤섭 ( 方 允 燮 ) 박선호 ( 朴 繕 浩 ) 박임석 ( 朴 壬 錫 ) 정현순 ( 鄭 玄 順 ) 박영구 ( 朴 永 求 ) 오연근 ( 吳 連 根 ) 민계식 ( 閔 季 植 ) 김점수 ( 金 点 秀 ) 우영철 ( 禹 榮 哲 ) 정태구 ( 鄭 泰 龜 ) 김홍연 ( 金 烘 淵 ) 황인주 서평촌 신청인과 관계 남 28 부 남 21 조부 남 23 오빠 남 20 형 남 22 부 남 56 시조부 여 50 시조모 남 21 시숙부 남 41 부 남 18 숙부 남 38 외조부 비고 남 19 숙부 6419와 중복신청 남 19 삼촌 남 24 숙부 기타 (시민단체 대표신청) 기타 (시민단체 대표신청) 김옥순 기타 (시민단체 대표신청)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번 사건번호 접수일자 신청인 진실규명대상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황하연 신청인과 관계 기타 (시민단체 대표신청) 비고 황종은 기타 (시민단체 대표신청) 방광수 기타 (시민단체 대표신청) 우영철 ( 禹 榮 哲 ) 남 19 기타 (시민단체 대표신청) 6382와 중복신청 성명미상 남 기타 (시민단체 대표신청) 중앙병원 간호사의 부 위계룡 성명미상 성명미상 여 여 기타 (시민단체 대표신청) 기타 (시민단체 대표신청) 중앙병원 간호사의 모 중앙병원 간호사의 언 니 김모 기타 (시민단체 대표신청) 김 치과 동생 (8267, 9939와 중복신청) 나모 기타 (시민단체 대표신청) 나씨 딸 성명미상 남 기타 (시민단체 대표신청) 나씨 사위 안태현 남 47 김삼수 여 42 기타 (시민단체 대표신청) 기타 (시민단체 대표신청) 7165와 중복신청 7165와 중복신청 순천지역 여순사건 487

16 제3권 연번 사건번호 접수일자 신청인 위계룡 최용식 ( 崔 龍 植 ) 김병태 ( 金 炳 泰 ) 주주원 ( 朱 珠 元 ) 이희자 ( 李 熙 子 ) 정종채 ( 鄭 鐘 采 ) 문덕심 ( 文 德 心 ) 김용순 ( 金 龍 順 ) 진실규명대상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안종만 남 17 안선자 여 15 성명미상 8명 최경식 ( 崔 敬 植 ) 김길동 ( 金 吉 童 ) 주두신 ( 朱 斗 新 ) 주성창 ( 朱 成 錩 ) 최인규 ( 崔 仁 奎 ) 최진규 ( 崔 珍 圭 ) 최승수 ( 崔 昇 壽 ) 최승모 ( 崔 昇 模 ) 박태윤 ( 朴 泰 允 ) 박태숙 ( 朴 泰 淑 ) 이군보 ( 李 羣 甫 ) 박우남 ( 朴 禹 南 ) 미상 미상 신청인과 관계 기타 (시민단체 대표신청) 기타 (시민단체 대표신청) 기타 (시민단체 대표신청) 남 28 형 남 35 부 남 19 종조부 남 22 숙부 남 23 사촌시숙 남 18 시숙 남 19 처남 남 17 처남 남 24 사촌시동생 남 21 사촌시동생 남 42 시부 여 43 시모 이점례 여 2 시누이 비고 7165와 중복신청 7165와 중복신청 손은기 ( 孫 銀 基 ) 손인갑 ( 孫 仁 甲 ) 남 33 조부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번 사건번호 접수일자 신청인 진실규명대상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신청인과 관계 비고 허치성 허전 남 24 부 박종현 ( 朴 鍾 炫 ) 박선규 ( 朴 先 圭 ) 박윤규 ( 朴 允 圭 ) 남 37 부 남 24 숙부 박종현 ( 朴 鍾 炫 ) 박득규 ( 朴 得 圭 ) 남 22 숙부 양재순 ( 梁 在 順 ) 양회정 ( 梁 會 正 ) 남 27 부 안태현 남 47 부 안금자 ( 安 錦 子 ) 김삼수 여 42 모 안종만 남 17 오빠 안선자 여 15 동생 송철현 ( 宋 哲 鉉 ) 송임석 ( 宋 任 錫 ) 남 22 사촌형 손승상 ( 孫 承 相 ) 손형수 ( 孫 亨 洙 ) 남 31 숙조부 윤세인 ( 尹 世 寅 ) 윤달헌 ( 尹 達 憲 ) 남 21 숙부 이철섭 ( 李 澈 燮 ) 이정철 ( 李 正 哲 ) 남 36 부 조영 ( 趙 英 ) 조한송 ( 趙 漢 松 ) 남 47 백부 이용권 ( 李 墉 權 ) 이봉권 ( 李 奉 權 ) 남 29 형 최병선 ( 崔 炳 善 ) 최순식 ( 崔 順 植 ) 남 28 부 최병선 ( 崔 炳 善 ) 최운식 ( 崔 雲 植 ) 남 23 숙부 정영주 ( 鄭 永 住 ) 정순현 ( 鄭 順 鉉 ) 남 37 부 순천지역 여순사건 489

18 제3권 연번 사건번호 접수일자 신청인 정영주 ( 鄭 永 住 ) 최택철 ( 崔 澤 澈 ) 김영수 ( 金 永 秀 ) 허남석 ( 許 南 淅 ) 정대연 ( 鄭 大 連 ) 지정애 ( 池 政 愛 ) 김정애 ( 金 禎 愛 ) 김양희 ( 金 良 喜 ) 정수환 ( 鄭 守 桓 ) 이종옥 ( 李 宗 鈺 ) 최진동 ( 崔 鎭 東 ) 강남수 ( 姜 南 秀 ) 허기 ( 許 棋 ) 최미자 ( 崔 美 子 ) 이건찬 ( 李 建 讚 ) 진실규명대상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정계현 ( 鄭 桂 鉉 ) 최진영 ( 崔 鎭 永 ) 김병수 ( 金 炳 洙 ) 김학수 ( 金 學 洙 ) 신청인과 관계 남 27 숙부 남 27 삼촌 남 28 부 남 20 숙부 허영구 남 19 삼촌 정종신 ( 鄭 宗 臣 ) 지채종 ( 池 采 鍾 ) 김용환 ( 金 容 煥 ) 한석기 ( 韓 碩 基 ) 정기영 ( 鄭 基 永 ) 이재선 ( 李 在 先 ) 최진숙 ( 崔 鎭 淑 ) 강길수 ( 姜 吉 洙 ) 강종훈 ( 姜 鍾 勳 ) 방봉애 ( 房 鳳 愛 ) 허순조 ( 許 淳 祖 ) 박홍기 ( 朴 洪 紀 ) 이덕행 ( 李 德 行 ) 남 21 부 남 28 부 비고 남 23 숙부 6419, 9939과 중복신청 남 40 시부 남 26 부 남 63 부 남 20 형 남 22 장형 남 19 형 여 18 장형수 남 33 당숙 남 26 시부 남 22 부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번 사건번호 접수일자 신청인 정창조 ( 鄭 昌 朝 ) 양희승 ( 梁 熙 承 ) 추환열 ( 秋 桓 烈 ) 추환열 ( 秋 桓 烈 ) 추환열 ( 秋 桓 烈 ) 추환열 ( 秋 桓 烈 ) 김채문 ( 金 采 文 ) 위귀순 ( 魏 貴 順 ) 정용택 ( 鄭 容 澤 ) 박철근 ( 朴 哲 根 ) 정동우 ( 鄭 東 宇 ) 김영주 ( 金 永 柱 ) 하정래 ( 河 晶 來 ) 지봉연 ( 池 奉 連 ) 배형철 ( 裵 炯 喆 ) 박병도 ( 朴 炳 道 ) 조찬익 ( 趙 贊 翼 ) 진실규명대상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정기선 ( 鄭 淇 銑 ) 양회주 ( 梁 會 炷 ) 신청인과 관계 남 29 백부 남 26 백부 추인수 남 25 숙부 추석순 남 17 숙부 추기선 ( 秋 基 善 ) 추기운 ( 秋 基 雲 ) 추형량 ( 秋 炯 亮 ) 김흥열 ( 金 興 烈 ) 김두표 ( 金 斗 杓 ) 정영철 ( 鄭 泳 喆 ) 박호지 ( 朴 浩 志 ) 정동선 ( 鄭 東 善 ) 김정기 ( 金 正 基 ) 하재규 ( 河 在 奎 ) 지태석 ( 池 泰 錫 ) 배형회 ( 裵 炯 檜 ) 박기래 ( 朴 錤 來 ) 남 28 당숙 남 26 당숙 남 27 부 남 36 부 남 22 남편 남 18 숙부 남 21 백부 남 19 형 남 33 조부 남 25 조부 남 20 백부 남 20 형 남 22 숙부 이덕심 여 34 모 비고 순천지역 여순사건 491

20 제3권 연번 사건번호 접수일자 신청인 한상순 ( 韓 相 順 ) 황동하 ( 黃 東 夏 ) 박대수 ( 朴 大 秀 ) 박대수 ( 朴 大 秀 ) 홍용석 ( 洪 龍 石 ) 박외규 ( 朴 外 圭 ) 박외규 ( 朴 外 圭 ) 신대우 ( 申 大 雨 ) 김세태 ( 金 世 泰 ) 최덕용 ( 崔 德 鏞 ) 조동진 ( 趙 東 進 ) 김영인 ( 金 永 仁 ) 김동호 ( 金 東 浩 ) 이광하 ( 李 光 夏 ) 오정권 ( 吳 正 權 ) 김순덕 ( 金 順 德 ) 신홍근 ( 申 洪 根 ) 진실규명대상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한광수 ( 韓 光 洙 ) 한익수 ( 韓 益 洙 ) 황인만 ( 黃 仁 滿 ) 박병근 ( 朴 炳 根 ) 박병두 ( 朴 炳 斗 ) 홍성표 ( 洪 聖 杓 ) 박병렬 ( 朴 炳 烈 ) 박병기 ( 朴 炳 箕 ) 신복동 ( 申 福 同 ) 김종필 ( 金 鍾 弼 ) 최창열 ( 崔 昌 烈 ) 조한상 ( 趙 漢 相 ) 김화현 ( 金 和 鉉 ) 이수개 ( 李 守 介 ) 이준평 ( 李 晙 坪 ) 오종호 ( 吳 宗 鎬 ) 이계수 ( 李 啓 洙 ) 신원문 ( 申 元 文 ) 신청인과 관계 남 37 부 남 24 숙부 남 21 부 남 23 백부 남 18 삼촌 남 23 삼촌 남 34 백부 남 27 부 남 39 부 남 29 부 남 20 삼촌 남 26 부 남 34 조부 남 19 외삼촌 남 35 부 남 31 부 남 26 시동생 남 17 삼촌 비고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번 사건번호 접수일자 신청인 한영섭 ( 韓 英 燮 ) 윤석진 ( 尹 錫 珍 ) 백영묵 ( 白 永 黙 ) 김인중 ( 金 仁 中 ) 김동석 ( 金 東 錫 ) 신만식 ( 申 萬 植 ) 신만식 ( 申 萬 植 ) 이기화 ( 李 起 和 ) 김태옥 ( 金 太 玉 ) 박이관 ( 朴 以 寬 ) 조기원 ( 趙 基 元 ) 장우수 ( 張 友 洙 ) 김양곤 ( 金 良 坤 ) 정대환 ( 鄭 大 煥 ) 정영기 ( 鄭 瑛 基 ) 진실규명대상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한상범 ( 韓 相 範 ) 윤석봉 ( 尹 錫 奉 ) 백학선 ( 白 學 先 ) 김용환 ( 金 容 煥 ) 김복개 ( 金 福 介 ) 신창우 ( 申 昌 雨 ) 신현우 ( 申 炫 雨 ) 이기신 ( 李 起 新 ) 김만옥 ( 金 萬 玉 ) 박이만 ( 朴 以 萬 ) 장순심 ( 張 巡 心 ) 최명순 ( 崔 明 順 ) 김용태 ( 金 容 台 ) 정대룡 ( 鄭 大 龍 ) 정옥기 ( 鄭 鈺 基 ) 신청인과 관계 남 38 부 남 26 형 남 24 부 남 22 삼촌 남 37 형 남 26 부 남 20 삼촌 남 22 동생 남 26 형 남 21 형 여 41 조모 여 28 모 남 31 부 남 19 동생 남 25 형 비고 신청건수 (신청인 수) 203건 대표신청(총 28건, 총 68명) - 2명 신청: 직다-1357 등 17건 - 3명 신청: 직다-324 등 6건 - 4명 신청: 직다-1352 등 3건 - 6명 신청: 직다 건 - 26명 신청: 직다 건 순천지역 여순사건 493

22 제3권 연번 사건번호 접수일자 신청인 진실규명대상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신청인과 관계 비고 진실규명대상자 258명 중복신청(총 6건, 총 13명) - 직다-324: 직다-1378(3명) - 직다-1948: 직다-1970(3명) - 직다-6419: 직다-7165(4명) - 직다-6419: 직다-9939(1명), 직다-8267 (1명) - 직다-6382: 직다-6419(1명) 신청사건 희생자수 = 신청건수 203건 + 대표신청(2명:17건, 3명:6건, 4명:3건, 6명:1건, 26명:1건, 총 28건) 68명 - 중복신청 13명(총 6건) = 258명 나. 신청인의 주장 본 사건의 신청인들은 여순사건 당시 반군을 토벌하기 위해 출동한 진압군경(국군 제2연대 ㆍ제3연대ㆍ제4연대ㆍ제12연대ㆍ제15연대ㆍ제2여단ㆍ제5여단, 수도경찰대ㆍ특경대ㆍ경 찰토벌대ㆍ순천경찰서 경찰)이 1948년 10월 하순부터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전까지 순천시 전역에서 민간인을 불법적으로 학살했다고 주장했다. 순천시내권과 각 읍면별로 신청인의 주장을 정리했다. 순천시내 순천시내(가곡동, 덕암동, 덕월동, 동외동, 매곡동, 안풍동, 오천동, 와룡동, 용당동, 저전 동, 조곡동, 풍덕동) 신청인 장경자(직다-1026) 외 19명(총 20건)은 1948년 10월 22일 부터 1950년 1월 2일(음 )까지 3연대ㆍ12연대 외 진압군과 순천경찰이 민간인들 을 반군에 협력했다는 혐의로 연행하여 죽도봉, 매곡동 매산여고 담벼락 길, 이수중학교 부근 공동묘지, 구랑실재 등지에서 구타하여 학살하거나, 집단으로 학살 후 시신을 소각 했다고 주장했다. 승주읍 3) 승주읍(구강리, 남강리, 도정리, 도평리, 두월리, 석흥리, 신전리, 유흥리, 죽학리) 신청 인 최종우(직다-4926) 외 14명(총 15건)은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8월 11일경(음 3) 1985년 쌍암면이 승주읍으로 승격되었다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까지 쌍암지서 경찰 및 군경이 연행ㆍ자수한 민간인들을 서정마을 원모퉁이, 쌍암 지서 앞마당, 두월리마을 앞 논, 죽학리마을 등지에서 학살하거나, 월등ㆍ쌍암지서 등지 에서 고문하여 학살했다고 주장했다. 서면 서면(운평리, 선평리, 죽평리, 판교리, 흥대리, 구상리, 압곡리, 청소리, 지본리) 신청인 양병옥(직다-1350) 외 48명(총 49건)은 1948년 10월에서 1950년 1월 8일(음 ) 사이 3사단, 백골부대 등의 군인과 경찰토벌대, 순천경찰이 민간인들을 반군에게 협력을 했다 는 혐의로 연행하거나, 구경하던 민간인을 죽도봉 골짜기, 판교리 노은마을 앞 노은고지, 서면 용계산 골짜기, 생목동 공동묘지(현 이수중학교 부근), 순천농림중학교(현 순천대학 교) 옆 산 아래 공터 등지에서 학살하거나, 서면지서에서 고문하여 학살했다고 주장했다. 월등면 월등면(계월리, 농선리, 신월리, 월용리) 신청인 유순오(직다-1397) 외 19명(총 20건)은 1948년 11월 18일(음 )부터 1950년 1월 4일(음 ) 사이 군경이 민간인들을 반군 협력혐의로 월등면 농곡마을 앞산 양지맷골, 월등면사무소 앞 중봉산 아래 논두렁, 화지마 을 지사골재 등지에서 학살했고, 연행된 민간인들은 행불되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황전면 황전면(괴목리, 금평리, 모전리, 선변리, 월산리, 죽청리, 황학리) 신청인 장옥자(직다 -1394) 외 15명(총 16건)은 1948년 10월 30일부터 1949년 12월 15일(음 ) 사이 주둔 군인들과 순천경찰이 민간인들을 연행하여 월전중학교 옆 양지맷골, 조곡동 둑실마을 죽 도봉 계곡, 월등면 망룡마을 옆 골짜기 등지에서 학살하거나, 고문으로 살해했다고 주장 했다. 상사면 상사면(도월리, 마륜리, 오곡리, 용계리, 응령리, 흘산리) 신청인 전일수(직다-1427) 외 21명(총 22건)은 1948년 10월 22일(음 )부터 1949년 12월 7일(음 ) 사이 15연 대 외 군인과 순천경찰, 토벌대가 민간인을 연행하여 상사지서 뒤편 상사면 흘산마을 땅 고재 중턱 공동묘지, 조계산, 승주에서 주암 가는 접치재 골짜기 등지에서 학살하거나 고 문하여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순천지역 여순사건 495

24 제3권 낙안면 낙안면(금산리, 목촌리, 상송리, 옥산리) 신청인(총 24건) 가운데 강병화(직다-324) 외 16명(총 17건)은 1949년 10월 8일(음 ) 군경이 반군토벌을 위해 신전마을에 들어와, 반군협조자를 치료해주었다는 혐의로 주민 22명을 학살한 뒤 소각했다고 주장했다. 신청 인 박종혁(직다-1948) 외 6명(총 7건)은 1948년 11월(음 10월)부터 1949년 4월 6일(음 3. 8.)까지 군경이 민간인을 반군으로 오인하거나, 반군협조혐의, 모략 등의 이유로 낙안면 신전마을 앞, 낙안면 검안리 소재 공동묘지, 이수중학교 부근 죽두봉, 낙안지서 앞 등지에 서 학살하거나 구타하여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해룡면 해룡면(도롱리, 용전리, 상내리, 월전리, 중흥리) 신청인 김남수(직다-8366) 외 13명(총 14건)은 1948년 11월부터 1949년 늦가을까지 군경이 민간인들을 좌익책임자, 반군협조자, 은신 등의 혐의로 도롱리마을 뒷산, 순천 조례동 법원 뒷산, 월전리 자택 등지에서 학살 하거나, 순천경찰서로 연행하여 덕암동 이수중학교 주변, 순천-광양 경계 산골, 생목동 공동묘지(현 이수중학교 부근) 등지에서 학살했다고 주장했다. 별량면 별량면(대룡리, 금치리, 덕정리, 봉림리, 송학리) 신청인 이상호(직다-1385) 외 9명(총 10건)은 1948년 11월 6일(음 )부터 1950년 2월 15일(음 )까지 별량지서 경찰 및 군인이 민간인을 연행하여 고문한 뒤 별량역, 대룡리 야산, 석현리 저수지 야산 등지 에서 학살하거나, 지서경찰과 한청단원이 민간인을 대룡리 용안마을 과수원 오두막에서 학살했다고 주장했다. 주암면 주암면(복다리, 요곡리, 주암리) 신청인 정종원(직다-1424) 외 4명(총 5건)은 1948년 10 월 22일부터 1949년 12월(음 11월)경 사이에 주암지서 경찰이 민간인을 주암지서로 연행 한 뒤 접치재, 구랑실재, 순천시내 초등학교 등지에서 학살했다고 주장했다. 외서면 외서면(금성리, 반용리, 월암리, 장선리) 신청인 이강원(직다-1335) 외 9명(총 10건)은 1948년 12월 21일(음 )부터 1949년 12월(음 11월)경 사이에 군경이 민간인을 연행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하여 금성리 월평마을 도로변, 외서면 도신리 마을 뒷산, 외서면 반용리 수직마을 앞 논 등지에서 학살했다고 주장했다. 송광면 송광면(장안리) 신청인 박준옥(직다-2278)(총 1건)은 1948년 12월 22일(음 ) 경 찰이 민간인을 장안리 대밭 위 움막에서 학살했다고 주장했다. 기타 지역 출신 희생사건 기타 지역(고흥군 도양읍 봉암리ㆍ두원면 성두리ㆍ대서면 남정리, 곡성군 옥곡면 오지 리, 나주군 다도면 방산리, 보성군 벌교읍 벌교리, 광양군 옥곡면 묵백리, 구례군 산동면 계천리, 여수시 여천군 삼일면 화치리, 화순군 남면 사평리) 신청인 박이관(직다-9959) 외 9명(총 10건)은 1948년 10월 22일부터 1949년 봄까지 지역 거주 민간인들이 군경에 게 연행되어 학살되었다고 주장했다. 2. 조사의 근거와 목적 가. 조사의 근거와 목적 진실화해위원회는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법률 제7542호, , 이하 기본법) 제22조제3항에 의거, 여순사건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으로서 진 실규명에 해당한다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근거가 있고 진실규명이 중대하다 고 판단하 여, 아래와 같은 이유로 동 사건을 직권조사 사건으로 전환하였다. 4) 진실화해위원회는 여순사건에 대해, 1) 계엄령 실시와 국가보안법 제정( ) 등 한국사회의 분단체제 공고화에 큰 영향을 끼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으로, 2) 여수 제14연대의 반란으로 비롯되었지만, 진압군경과 반란군 양측에 의해 군경과 민 간인이 다수 희생된 복합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므로, 신청사건만을 조사할 경우 진실규 명이 불가능한 사건이며, 3) 한국전쟁 발발 이후 국군과 경찰 등 국가권력에 의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제2전선 지역에서의 민간인 집단희생의 발단이 되어, 국민보도연맹 사건ㆍ전국형무소재소자 희생 4) 진실화해위원회 제39차 전원위원회 의결( ). 순천지역 여순사건 497

26 제3권 사건ㆍ부역혐의 희생사건과도 밀접하게 관련된 사건이며, 4) 당시 전라남ㆍ북도와 경상남도지역의 일부 주민들은 반란동조세력 으로 규정되어, 피해의식도 깊고, 상호불신감을 심어준 사건이므로, 국가적 차원에서 진실을 밝혀내어 지역사회의 화해를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타 지역 여순사건과의 관계, 지역사회 및 관련 유족의 진실규명 노 력, 유해발굴사업과의 관련성, 사건규모, 조사인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진실규명결 정( )이 된 구례지역 여순사건 다음으로 순천지역 여순사건 을 우선 조사하기 로 결정하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를 통해 사건의 실재 여부, 사건경위와 희생과정, 희생규모, 희 생자의 신원과 특징, 피해이유, 가해주체와 그 지휘ㆍ명령체계, 가해의 위법성 유무, 유족 의 피해 등을 규명하고, 궁극적으로 피해자 및 유족의 명예회복과 함께 국민화해와 통합 을 위한 적절한 법적ㆍ제도적 조치를 국가에 권고하고자 하였다. 나. 조사의 필요성 1) 과거 국가기구의 사건 처리경과 여순사건 발생 직후인 1948년 11월 1일 전라남도 보건후생국에서는 순천지역의 피해 현황을 사망자 1,134명ㆍ중상자 103명ㆍ행방불명 818명ㆍ가옥피해 전파 13호(피해예 상액 1,350만원)ㆍ식량피해 200석(피해예상액 2,000만원)이라고 발표하였다. 5) 비록 순천지역 피해실태를 별도로 산정하지는 않았으나, 1949년 1월 중앙청에서 파견 된 조사관들이 여수ㆍ순천을 비롯하여 구례, 곡성, 광양, 고흥, 보성, 화순 등을 현지답사 하고 전체 피해상황을 보고했다. 이에 따르면 1949년 1월 10일까지 밝혀진 인명피해는 총 5,530명(사망 3,392명ㆍ중상 2,056명ㆍ행방불명 82명)이고, 가옥피해는 8,554호(전 소 5242호ㆍ반소 1,128호ㆍ소개 2,184호)였다. 가옥을 비롯한 총 재산피해 추정액은 99억 1,763만 395원에 달했다. 6) 또한 여순사건이 일어난 지 1년 뒤인 1949년 11월 11일 전남도 당국이 집계한 여순사 건 피해규모를 보면, 인명피해 11,131명, 가옥피해(파괴 및 소실) 11,871호, 재산피해 200 억 원에 달했다. 7) 5) 호남신문, ) 동아일보, ) 김득중, 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 성균관대 박사논문, 2004, 187~188쪽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순천시는 1997년 순천시지 를 편찬하였으나, 각 면별은 물론 전체적인 피해규모를 밝 혀내지는 못했다. 8) 2) 유족회의 진상규명 활동 순천지역 여순사건 유족들은 2000년 이후 여순사건화해와평화를위한순천시민연대 (순 천시민연대)를 중심으로 피해자 실태조사, 관련 학술행사, 역사순례 등을 전개하였다. 2000년 6월 발족한 여순사건 순천유족회 (회장 장준표)는 여수ㆍ구례ㆍ고흥ㆍ보성 등 유족회와 함께 매년 10월 19일 합동위령제를 봉행하고 있으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 단희생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입법청원운동에 함께했다. 2006년에는 순천시청의 지원을 받아 순천시민연대와 함께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2006년 12월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하자, 관련 유족들은 순천지역 여순사건의 진실규 명을 신청했다. 3. 조사방법 가. 신청인 조사 진실화해위원회는 기본법 제23조(진실규명 조사방법), 동법 시행령 제7조(조사의 절차 및 방법), 진실규명 신청 및 조사에 관한 규칙 (위원회 규칙 제13호)에 의거, 개별 신청 인 203명을 조사하였다. 신청인 조사는 신청인을 면담하여 를 작성하는 형태로 진행하였으며, 부득이 한 경우 전화로 조사했다. 는 문답형식으로 작성하였으며, 주로 육하원칙에 따라 사건개요와 피해과정, 피해이유, 군경의 가해혐의 확인, 유족의 피해상황 등을 확인하였 8) 한 문헌은 여순사건의 피해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강조는 인용자. 여수지구: 인명피해 1,200여 명, 소실ㆍ파괴된 가옥 1,548동, 이재민 9,800명 순천지구: 사망자 1,134명, 행방불명 818명, 전파가옥 13 동 진압군의 작전결과: 유기시체(즉결처분) 392명, 포로 1,512명, M1 소총 952정, 3ㆍ8식 소총 679정, 9ㆍ9식 소총 863정, 박격포 14문 진압군 측 피해: 전사장교(순천파견대의 5명 포함) 9명, 사병 42명, 부 상 118명 처벌: 11월 1일 사건 관련자 89명 사형집행, 11월 7일 광주군법재판은 28명에 사형언도, 11 월 13일 14일 순천군법재판은 102명에 사형언도, 11월 6일 고등군법재판은 35명에 사형언도. 이기봉, 빨치산의 진실, 다나, 1992, 142쪽. 여순사건 당시 육군본부 정보과장이었던 김점곤은 순천지역 피해상 황을 논하며 적의 손실 부분에서 즉결처분이라는 용어 없이 유기시체 392라고만 적고 있다(김점곤, 한 국전쟁과 노동전략, 박영사, 1972, 202쪽). 한편, 순천지역 시민단체가 추산한 여순사건 관련 인명피해 는 1,661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대한민국 군경에 의한 여순사건 희생자는 1,026명, 반군과 지방좌익에 의한 희생자는 635명이라고 밝혔다. 여순사건 화해와 평화를 위한 순천시민연대, 여순사건 순천지역 피 해실태 조사보고서 2006, 271쪽. 순천지역 여순사건 499

28 제3권 다. 9) 신청인 조사는 2007년 4월부터 2008년 11월까지 203명을 대상으로 수십 차례의 현 지 출장과 전화통화로 이루어졌다. ([별첨 1] 신청인 조사상황 참조.) 나. 참고인 조사 진실화해위원회는 기본법 제23조(진실규명 조사방법)ㆍ제24조(동행명령 등)ㆍ제31조 (조사대상자의 보호), 동법 시행령 제7조(조사의 절차 및 방법)ㆍ제8조(의 녹음 등), 그리고 진실규명 신청 및 조사에 관한 규칙 (위원회 규칙 제13호)에 의거하여, 참고인 을 조사했다. 1) 경찰 관련 참고인 조사 진실화해위원회는 참전경찰유공자회 전국명단을 입수하여 이 가운데 전남ㆍ순천지부 163명을 대상으로 전화탐문을 벌였다. 그 결과 사건관련자 18명의 명단을 확보하였으며, 이 중 면담을 거부한 3명을 제외한 15명에 대한 참고인 조사를 진행했다. 또한 참고ㆍ신청인의 에서 가해 경찰로 언급된 당시 순천경찰 안의 인사기록 을 퇴직 당시 소속인 강원지방경찰청에 요청 10) 하여 사건 관련 여부 및 소재지를 파악하 는 한편, 그 결과를 바탕으로 참고인 조사를 벌였다. 안과 더불어 유력한 가해 경찰 로 언급된 구에 대해서도 참고인 조사를 진행했다. 한편, 국방부에 참전사실확인서를 제출한 민원인 중 전남지역 관련자를 탐문하여, 참고 인을 탐문했다. 이와 함께, 순천경우회 소속 전직 경찰관 명단을 입수, 참전경찰유공자회 전남ㆍ순천지부 명단과 중복되지 않는 관련자(사건 당시 경찰 재직자ㆍ대한청년단 단원 ㆍ순천경찰서 의경ㆍ향토방위대 등) 5명을 참고인으로 조사했다. ([별첨 2] 경찰 관련 참고인 조사상황 참조.) 9) 참고(신청)인 조사는 ㆍ서ㆍ녹취록ㆍ면담보고서ㆍ통화보고서 등의 방법으로 이루어졌 다. 각 형식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 : 조사관이 작성한 후 인의 서명 및 간인을 받은 자료 - 서 : 인이 직접 작성한 후 서명 및 간인을 한 자료 - 녹취록 : 인의 동의 후 내용을 녹취한 자료 - 면담보고서 : 인의 동의 후 면담내용을 정리한 자료 - 통화보고서 : 인의 동의 후 통화내용을 정리한 자료. 10) 강원지방경찰청, <요청자료 송부>, 경무과-6642(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2) 군 관련 참고인 조사 진실화해위원회는 군 관련 참고인 대상자를 선정하여 명단을 작성한 다음, 전화로 사 전조사를 거친 후에 참고인을 조사했다. 그러나 상당수의 군 관련 참고인들이 작성 및 확인 서명에 거부감을 표명하여, 의 형태를 수정하거나 면담보고서를 작성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했다. 녹음이나 녹화에 동의한 참고인의 경우, 동의서 작성 후 조사내용을 녹음하거나 녹화했다. 일반 사병 참고인 명단은 국가보훈처의 협조를 받아, (참전)유공자 등재자 중 년 군에서 복무했던 12군번자, 14군번자, 15군번자, 27군번자, 52군번자, 53군번자 총 8,766명의 연락처와 주소를 확보하였다. 11) 이 가운데 순천지역 여순사건 관련자로 추정되는 325명을 대상으 로 전화탐문을 벌여, 관련자 43명을 확보하였다. 답변을 거부한 10명을 제외한 사건 관 련자 33명에 대해 참고인 조사를 벌였다. 또한 진실화해위원회가 진실규명을 결정한 구 례지역 여순사건 관련 제3연대ㆍ12연대 소속 군인들 가운데 순천지역 여순사건 관련자 44명을 대상으로 본 사건에 관하여 재조사하였다. 국군 제2연대, 제3연대, 제4(20)연대, 제12연대, 제15연대 출신 참고인의 주요 내용 은 [별첨 3], [별첨 4], [별첨 5], [별첨 6], [별첨 7]과 같다. [별첨 8]은 상기 연대 출 신이 아닌 기타 군 관련 참고인의 주요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별첨 3] [별첨 8] 군 관련 참고인 조사상황 참조.) 3) 일반 참고인 조사 진실화해위원회는 신청인 및 유족회 관계자의 과 기존 증언자료를 종합하여, 생존 자나 목격자를 중심으로 본 사건 관련자를 파악하고, 이들을 일반 참고인으로 선정하여 조사하였다. 또한 진실화해위원회는 진실규명 신청기간( )에 신청하 지 못했지만, 본 사건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유족(미신청 희생자 유족)들도 참고인으로 11) 여순사건 조사 관련 자료 협조 요청 (조사1팀-844, ); 참전명예수당 수령자 명단 통보 보상급여-2007 ( ). 이 밖의 참고인 명단은 사건 당시의 신문ㆍ잡지, 호국전몰용사공훈록 제1 7권(국방군사연구소, ), 한국전쟁 증언록 (군사편찬연구소 소장), 국군의 뿌리 창군 ㆍ참전용사들 (50동우회 편, 삼우사, 1998), 육사제5기생 (육군사관학교제5기회, 1990), 육군사관학 교 제3기생 회원주소록 (육군사관학교 제3기회, 2007), 장교자력표 (육군본부 기록정보관리단 소장), 인사명령부 (통위부 및 국방부 인사명령철), 기타 참고인들의 등을 참고하여 확보하였다. 순천지역 여순사건 501

30 제3권 선정하여 조사하였다. ([별첨 9] 일반 참고인 조사상황 참조.) 다. 자료조사 진실화해위원회는 기본법 제23조(진실규명 조사방법) 및 동법 시행령 제7조(조사의 절 차 및 방법), 진실규명 신청 및 조사에 관한 규칙 (위원회 규칙 제13호)에 의거하여, 본 사건과 관련된 자료를 조사했다. 1) 주요 참고자료 가) 경찰 관련 참고 자료 순천경찰서, 뺷보안기록조회회보서뺸1 2권, 1979 전 면 뺷보안기록 뺸기재사례 확대 사진 뺷보안기록조회회보서뺸(회보서)는 경찰이 작성한 보안 또는 대공관련 개인별 신원자료 이다. 본 자료는 2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권 156명ㆍ2권 150명 총 306명의 인적사항 (성명, 원적, 본적, 주소, 생년월일)과 대공신원상 특이사항(부역 및 처형내용과 주체)이 기재되어있다. 불분명한 내용을 제외하고, 1 2권을 통틀어 여순사건 관련 사살자 12)로 기재된 자는 82명이었다. 이 가운데 진실화해위원회에 접수된 진실규명대상자는 1명으로 확인되었다. 특이사항에는 남로당(38명), 노동당(2명), 보도연맹(5명), 민청(31명) 등으로 12) 사살자 는 사전에 없는 말이다. 정확하게는 사살당한 자 또는 피살자로 써야한다. 그러나 본 보고서에서는 군경의 자료에서 등장하는 사살자 라는 용어가 사살한 자를 나타내기보다 사살당한 자를 의미하고 있고, 의미의 혼동이 크지 않다는 점에서 사살자 로 표기하기로 한다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3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부역ㆍ활약ㆍ활동하다가 아군(256명)과 경찰(3명)에게 사살되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보 안기록조회회보서 는 경찰이 1970년대 말부터 전산화하기 시작한 보안기록 을 근거로 제작된 자료로서, 경찰은 이 자료를 근거로 관내의 이른바 인적위해자 (부역자, 처형자 연 고자, 좌익ㆍ간첩출소자, 공안사범)들을 관리해오고 있다. 따라서 회보서 는 경찰이 경호 ㆍ보안ㆍ신원조회 등의 현용업무에 사용하는 기본 데이터로서 자료의 신뢰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07년 본 자료를 경찰청과거사위원회로부터 제공받았다. 순천경찰서, 사실조사서 1 33권, 1980 전 면 사실조사서 기재사례 확대 사진 사실조사서 는 1980년 연좌제를 폐지한다는 취지에서 신원기록일제정비계획 에 의거 하여 전국 각 경찰관서에서 생산된 한국전쟁 전후 좌익관련 개인별 동향 기록이다. 사실조 사서 는 기존의 대장 등을 근거로 관리대상자들을 재분류, 전산처리의 기본자료로 활용하 기 위해 만들어졌다. 13) 순천경찰서 사실조사서 는 총 33권으로, 1948년 초부터 1954년경 까지 한국전쟁 전후 관내에서 활동한 좌익활동 혐의자들이 사살자 와 생존자 등으로 분류 되어 있다. 여기에는 순천 관내의 남로당, 여순사건, 민청, 보도연맹원, 여맹, 유격대원, 공비, 노동당 등의 부역사실 과 개인 인적사항(이름ㆍ본적ㆍ주소ㆍ직업ㆍ성별) 및 신원기록(전 과관계ㆍ시찰사항ㆍ국가공헌도 및 현재 사상 동향 내용 등)이 수록되어 있다. 사실조사서 에 등재된 사살자 는 총 643명이고 자수자는 1,461명이다. 이 가운데 국민보도연맹 사건과 13) 경찰청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보고서, 경찰청, 쪽 순천지역 여순사건 503

32 제3권 전국형무소재소자 사건, 기재 오류 등을 제외하면 순천지역 여순사건 관련 사살자 는 205명 으로 확인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에 접수된 진실규명대상자를 사실조사서 에 조회해본 결과, 37명이 확인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가운데 10명을 무작위로 선정하여 표본조사 를 벌인 결과, 10명 모두 순천지역 여순사건 관련 사살자 로 확인되어 자료의 신뢰도는 높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른바 인적위해자 로 불리는 관내의 관리대상자들로는 인민위원회(1,168명), 의 용군(886명), 농맹(727명), 보도연맹원(21명) 출신자들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진실화해 위원회는 경찰청과거사위원회로부터 2007년 본 자료를 제공받았다. 전남지방경찰청 소장, 인사사령부, 내무부 치안국, 한국경찰 10년사, 1958 전남경찰국, 사살자 가족 동향 감시 철저 지시 (정보 , ) 진도경찰서, 사살자 가족 동향 감시 철저 (정보 , ) 진도경찰서 각 지서, 사살자 가족 동향 감시 철저 ( ) 내무부 치안국, 한국경찰사 ( ) Ⅱ, 1973 전남지방경찰청, 전남경찰사, 1992 윤장호, 호국경찰전사, 도서출판 제일, 1995 전남지방경찰청 소장, 인사기록카드 다수 참전유공자회, 전남지역 참전유공자 회원 명부 치안본부, 대공신원기록편람 1 4, 1984 순천경찰서, 경무기본대장 순천경찰서, 순직경찰관(전몰애국단체원)대장, 순천경찰서, 상이경찰관(전상애국단체원)대장, 순천경찰서, 참전ㆍ보훈, 2005 智 異 山 地 區 警 察 隊 總 指 揮 本 部, 戰 鬪 祥 報 ( 檀 紀 ), 內 務 部 治 安 局, 경찰청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보고서, 경찰청, 나) 군 관련 자료조사 국방부 역사일지 육군 작전참모부 군사처, 육군 1.2.년사(초안) 40 50년도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3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국방부 기획관리실 총무과, 국방본부 역사일지, 군사편찬연구소ㆍ육군기록정보관리단 소장, 장교자력표 41건. 장교임관순대장(육군) ( ). 육군기록정보관리단 소장, 병적기록부 42건. 육군본부, 공비토벌사, 1954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 : 해방과 건군( ) (제1권), 1967 보병제5사단, 부대약사, 1969ㆍ1980 육군정보참모부, 공비연혁 1 2, 1971 장창국, 육사졸업생, 중앙일보사, 1984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대비정규전사 ( ), 1988 육사제5기생회, 육사제5기생, 1990 보병제1사단, 전진역사, 1994 국방군사연구소, 호국전몰용사공훈록 제1 7권, ( 50동우회 편, 국군의 뿌리 창군ㆍ참전용사들, 삼우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전쟁의 배경과 원인, 한국전쟁사 1, 공군본부, 6ㆍ25전쟁 증언록, 2002, 79쪽 군사편찬연구소, 6ㆍ25전쟁 전후 계엄업무 수행체계 연구, 민군 관련 연구 논문 집, 2006 군사편찬연구소 소장, 한국전쟁 증언록 ([별첨 10] 군사편찬연구소 소장 한국전쟁 증언록 조사상황 참조.) 2) 일반 자료 조사 가) 국내자료 조사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세계일보, 서울신문, 한성일보, 자유신문, 국제신문, 독립신보, 호남신문, 동광신문, 강원일보, 국민신문, 대동신문, 평화일보, 부산신문, 수산경 제신문, 민주일보 외 신문 및 잡지 다수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대한민국사 제8 18권, ( 선휘성 채록, 이계유 외 구술, 지역민이 체험한 여순사건 녹취록1 2, 국사편찬위 순천지역 여순사건 505

34 제3권 원회, 2006 대한민국국회, 제헌국회속기록, (선인문화사, 1999) 대한민국정부 공보처, 관보, 국가기록원 소장, (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빨치산 자료집 제1ㆍ7권, 1996 여수지역사회연구소 편, 여순사건 피해실태조사보고서, 제1집-여수편, 1998 여수지역사회연구소 편, 여순사건 피해실태조사보고서, 제3집-순천외곽지역편, 2000 여수지역사회연구소 편, 여순사건 자료집 (여순사건 연구총서 제2집), 1999 전남동부지역사회연구소, 여순사건자료집Ⅰ 국회속기록ㆍ잡지편, 선인출판사, 2001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팀, 여수 14연대 반란 녹취록 ( 방영) 지창환, 순천 KBS 여순사건 60년 특별기획 잃어버린 기억 녹취록, ( 방영) 전남도지편찬위원회, 전남도지 Ⅱ(정치ㆍ행정ㆍ사법 편), 1994 순천시사편찬위원회, 순천시사 上 ㆍ 下, 1997 구례문화원 소장, 구례군 마을조사자료, 2005 이윤, 진중일기, 여문각, 2001 백선엽, 실록 지리산, 고려원, 1992 권경안, 큰산 아래 사람들 : 구례의 역사와 문화, 향지사, 2000 최기덕, 내 생애 최고의 비밀, 사상계 130호, 1964년 1월호 존 R. 메릴 저ㆍ신성환 옮김, 침략인가 해방전쟁인가, 과학과사상사, 1988 윤기출, 극기, 정문사, 2006 전남일보 광주전남현대사 기획위원회, 광주전남현대사 1 2, 실천문학사, 1991 이기봉, 빨치산의 진실, 다나, 1992 짐 하우스만ㆍ정일화 공저, 한국의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대위 - 하우스만 증언, 한국문원, 1995 유건호, 전환기의 내막, 조선일보사, 1982 김동춘, 전쟁과 사회, 돌베개, 2000 황남준, 전남지방 정치와 여순사건, 해방 전후사의 인식 3, 한길사, 정석균, 지리산 공비토벌작전 : 여순반란군 토벌을 중심으로, 군사 제19호, 김순태, 제주 4ㆍ3민중항쟁 당시의 계엄에 관한 고찰 - 계엄의 법적 근거 유무에 대한 판단을 중심으로 -, 민주법학 제14호,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3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김창록, 1948년 헌법 100조 - 4ㆍ3계엄령을 통해 본 일제법령의 효력, 법학연 구, 부산대학교, 1998 Allan R. Millett/ 김광수 역, 하우스만 대위와 한국군 창설( ) 군사 40호, 2000 홍영기, 문헌자료와 증언을 통해 본 여순사건의 피해현황, 4ㆍ3과 역사 제1호, 2001 정청주, 여순사건 연구의 현황과 과제, 여수대학교 논문집 제13집 1권, 1998 최정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의 진상 규명을 위하여 : 광주ㆍ전남 지역의 실태조사에 대한 중간보고, 전쟁과 인권 : 2001 민간인 학살 심포지엄,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 노영기, 여순사건과 육군의 변화, 전남사학 22집, 노영기, 여순사건과 구례 여순사건 직후 군대의 주둔과 진압을 중심으로, 사 회와 역사 제68호, 김득중, 여순사건과 이승만반공체제의 구축, 성대 사학과박사논문, 2004 김득중, 여순사건 의 실상과 민중의 피해, 내일을 여는 역사 2호, 2000 김득중, 이승만정부의 여순사건 왜곡과 국회논의의 한계, 역사학연구 7호, 역사 학연구소, 2000 최정기, 국가형성과정에서의 국가폭력, 지리산권 주민의 한국전쟁경험과 지역공 동체의 재구성, 한국사회사학회 여름워크숍 발표자료집, 2005 김수자, 대한민국수립직후 민족주의와 반공주의의 형성과정, 한국사상사학 25권, 2005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II-기원과 원인, 나남출판, 1996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역사비평사, 2007 브루스 커밍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창비, 2001 김점곤, 한국전쟁과 노동전략, 박영사, 1981 이효춘, 여순군란연구-그 배경과 전개 과정을 중심으로, 고려대 역사교육과 석사 논문, 1996 선휘성, 여순사건 발생 배경과 피해 실태에 대한 인식, 순천대학교 교육대학원 석 사학위 논문, 2004 진실화해위원회ㆍ한국현대사회연구소,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 관련 유해 매장 추정지 조사용역 최종보고서, 2007 진실화해위원회ㆍ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 관련 피 해자현황조사 용역사업 결과보고서, 2007 순천지역 여순사건 507

36 제3권 진실화해위원회ㆍ충북대학교 박물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 관련 2007 년 유해발굴 보고서 제1 3권, 2008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전국유족회, 한국전쟁전후 학살(추정)지 현황 제출 ( )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유해발굴센터ㆍ한국도로공사, 여순사건 집단희생지 (전남 순천시 서면 구랑실재) 유해발굴 약보고서, 2008 순천문화원, 여순사건, 순천이야기, 2004 나) 해외자료 조사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 )(주한미군 정보일 지) 제6권,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1989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 )(주한미군정보일 지) 제7권,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1989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 )(미군사고문단정 보일지) 제1권,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1989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 )(미군사고문단정 보일지) 제2권,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1989 HQ, USAFIK, G-2 Weekly Summary ( )(주한미군주간 정보요약) 제5권,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1990 HQ, USAFIK, Counter Intelligence Corps, Monthly Information Report, 미군정기 정보자료집 : CIC(방첩대) 보고서 ( ) 제3권,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1995 KMAG, W.L. Roberts 문서철 Far East Command, Daily Intelligence Summary, RG319 - ID File ㆍJohn J. Muccio, Review of and Observation on the Yosu Rebellion, ID No ㆍAmerican Mission in Korea, Political Summary for October 1948, November 16, 1948, ID No Entry OCMH Box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3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ㆍJohn P. Reed, The Truth about the Yosu Incident, History of the Korean Army, 1 July 1948 to 15 October 1948 RG338 Records of United States Army in Korea, Lt. General John R, Hodge Official Files Entry 11070, Box 68 ㆍG-3 Section, ⅡⅣ Corps, History of the Rebellion of the 14th Regiment and the 6th Regiment of the Korean Constabulary, 10 November 1948(24사단 작전참 모부, 국방경비대 제14연대와 제6연대 반란사 ) - Entry 11071, Box2, Yosu Rebellion ㆍSpecial Agent 9016의 보고, 유창남 인터뷰, 28 October, 1948 ㆍCaptain Howard W. Darrow, The Yosu Rebellion, Amphibious Phase RG407 Entry 427 File No. 306 ㆍ6th Division, Chronological Journal of Events (18 October 1948 to 21 November 1948) USAFIK G-3, OPERATIONS JOURNAL, 1948, RG554, BOX9 USAFIK G-3, OPERATIONS JOURNAL, 1948, RG554, BOX10 USAFIK G-3, SUBJECT FILES, , RG554, BOX12 Interview with Prudoncio D. Uliberri ( ), RG 319. Box 6, R.K. Sawyer, Military Advisors in Korea : KMAG in Peace and War, Office of the Chief of Military History, Department of the Army(Washington D.C.), 1962 Carl Mydans & Shelly Mydans, The Violent Peace-A Report on Wars in the Post War World, The Free Press(New York, Atheneum), 1968 Carl Mydans, More than Meets the Eye, Harper&brothers(New York), 1959 Bruce Cu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The Roaring of the Cataract ) Volume Ⅱ,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0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사자료집ㆍ한국관계 영국외무성문서10 17권, 1994 라. 현장조사 진실화해위원회는 본 사건의 조사과정에서 신청인과 참고인의 안내를 받아 사건현장 순천지역 여순사건 509

38 제3권 을 확인하였다. 주요 현장은 순천시 월등면 일대(양지맷골), 북국민학교(현 북초등학교), 순천농림중학교(현 순천대학교), 구랑실재, 학구 대구실재, 조곡동 둑실마을 안골(죽도봉 골짜기), 상사 우산보 인근 보장골, 월등면 망룡부락 보름터골(망룡계곡), 월등면 큰박골, 생목동 수박등 공동묘지(현 이수중학교 부근), 매곡동 매산길(매산중학교 옆길), 판교리 월치재 인근(노은ㆍ지본고지), 용계산 계곡 골짜기(구상리 안골, 앵기산 골짜기, 용골), 주암면 접치재, 낙안면 금산리 신전마을, 외서면 도신마을 뒤 대나무골, 별량면 돌고개재 공동묘지 등이었다. 이 가운데 구랑실재는 한국도로공사ㆍ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유 해발굴센터가 2008년 6월 25일부터 7월 13일까지 유해발굴사업을 벌인 장소이다. 14) 한 편, 매곡동은 진실화해위원회ㆍ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유해발굴센터가 7월 29일부 터 8월 10일까지 집단희생 추정지에 대한 유해발굴사업을 추진했다. 15) Ⅱ. 조사결과 1. 사건배경 가. 해방 후 순천의 정치상황 해방이 되자 1945년 8월 17일 순천건국준비위원회(이하 순천건준)가 결성되었다. 순천 건준은 좌익세력들을 배제한 채 위원장에 김양수, 부위원장 김정기 등 우익인사들로 채 워졌다. 16) 건준에서 배제된 좌익은 노동조합(위원장 정충조)을 조직하여 우익 일색인 건 준과 반목했다. 17) 국가건설을 둘러싼 좌우익 대립의 시작이었다. 미군이 진주하자 우익 세력은 9월 25일 서울을 제외하고 전국지부로는 최초로 한민당 순천지부를 결성하여 건 준에서 이탈했다. 18) 이에 따라 좌익계 인사들은 김기수를 중심으로 건준을 인계하여 인 14) 구랑실재의 경우 고속도로 건설사업 추진에 따라 훼손될 유해에 대한 구제 차원에서 발굴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 1구의 시신이 수습되었다. 유해발굴단은 더 이상 유해가 발굴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유해 발굴을 잠정 종료한 상태다.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유해발굴센터ㆍ한국도로공사, 여순사건 집단희 생지(전남 순천시 서면 구랑실재) 유해발굴 약보고서, 2008, 10쪽 15)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유해발굴센터의 유해발굴 결과, 매곡동 발굴지에선 시신이 발굴되지 않았다. 16) 김양수는 미국에서 대학을 나온 대지주 출신의 인텔리였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속ㆍ수감되어 집행유 예로 석방되었다. 8ㆍ15 직전 예비검속, 순천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된 채 해방을 맞았다. 김정기는 곡성 출신으로 전문학교를 졸업한 기독교 장로로 목포,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온건한 명망가였다. 훗날 한민당에 관계하면서 순천군수와 승주에서 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안종철, 광주전남지방 현대사연구, 한울, 1988, 93~94쪽 17) 좌익을 중심으로 한 노동조합이 건준을 습격하기도 했다. 순천시사편찬위원회, 순천시사-정치사회편, 1997, 733쪽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3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민위원회(인민위)로 명칭을 바꾸었다. 19) 미군 진주 후 한민당과 인민위가 조직적으로 대립하는 가운데, 김양수가 군수에, 일제 시기 경찰 출신 이종수가 서장에 임명되자, 인민위와 산하 단체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 었다. 농민조합 대표가 체포되었고, 1946년 1월 20일에는 좌익계 청년연맹 정보부장 김백 일이 광복군 순천지부장 이정열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20) 1946년 3월에는 순천 경찰이 좌익 총검거에 나서 인민위와 공산당 간판을 박탈하고, 공산당 순천대표 정충조, 민전 사무국장 박남현, 인민당 부위원장 한태선, 백광해 등을 검거했다. 21) 전남 동부지역은 해방 초기부터 사회경제적인 조건 등의 이유로 우익세력의 힘이 강한 지역이었다. 22) 순천의 경우 우익세력은 결집력이 매우 강했고 미군의 직접 주둔에 힘입 어 전반적인 정치상황을 지배하고 있었다. 반면 좌익세력도 상대적으로 결집이 강해 주 로 면 단위 이하에서 농민조합 등과 같은 조직을 통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따라서 순천의 경우 좌우익 갈등의 정도가 전남 동부지역 가운데 상대적으로 높았다. 23) 18) 순천은 전남에서 우익세력이 우세한 대표적인 지역이었다. 전남일보 광주전남현대사 기획위원회, 광주전남 현대사 1, 실천문학사, 1991, 96쪽. 19) 인민위에는 위원장 김기수, 부위원장 정충조과 오만봉, 손남삼, 박만고, 이석모, 김성봉, 장남현, 오경심, 정영한, 이영민 등이 참여했다. 이효춘, 여순군란연구 그 배경과 전개 과정을 중심으로, 고려대 역사교육과 석사논문, 1996, 19쪽. 20)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순천은 다른 지역과 달리 한민당과 광복군이 연결되 어 있었다. 안종철, 광주전남지방 현대사연구, 한울, 1988, 156쪽. 21) 김득중, 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논문, 2004, 21쪽. 여순사건 당시 학생연맹 감찰부장을 지낸 황은 1946년도 좌익검거 시 한태선은 도피했다고 했다. 참고인 황 면담( ). 22) 안종철, 전남지방의 정치상황과 여순사건, 여순사건 논문집, 여수지역사회연구소, 2006, 164쪽. 순천 대한청년단 단장 황는 우익 확산의 본산지가 순천이라고 말했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팀, 여수 14연대 반란 녹취록 ( 방영), 황우수 증언, 141쪽. 23) 3ㆍ1운동 이후 순천은 농민운동과 사회운동이 활발했다. 1920년대에는 소작쟁의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순천지역은 지주제가 발달하여 소작농(지) 비율이 높았고, 아울러 재지지주가 많아 소작쟁의의 사회ㆍ경제적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1923년과 1924년에 일어난 소작쟁의 가운데 순천은 가장 많은 쟁의를 기록했다. 1922년 12월 서면에서 소작농 1,600여 명이 4작 소작료 관철, 지세의 지주 부담 등을 주장하며 투쟁을 벌였다. 서면민요( 西 面 民 擾 ) 로 불린 이 쟁의는 모든 면과 광양 여수까지 번졌다. 소작쟁의의 경험은 자연스레 농민운동으로 이어졌다. 1924년에는 사회주의 성향의 조선노농총동맹을 출범시키는 등 순천지역은 일제하 농민운동에서 상당히 비중 있는 역할을 하였다. 일제하 순천지역의 사회운동에 큰 역할을 한 활동가로는 이영민, 이창수, 김기수, 박병두, 박중임, 이건, 박만고 등을 꼽을 수 있다. 김기수는 전남 노동동맹위원이었고 소작쟁의의 지도자였다. 그는 박병두, 이창수, 이영민 등과 함께 제2차 조선공산당에 가입했고, 1926년 이들과 함께 순천 야체이카를 조직했다. 해방 후 순천군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지냈고, 여순사건에 가담한 뒤 월북했다. 박병두는 남선농민연맹원, 이창수는 순천농민연합회 집행위원이었다. 이영민은 순천농민연합회 집행위원과 순천 민전 회장으로 여순사건 당시 은거했다. 정충조는 여수 출신으로 여순사건 전 월북했다. 박만고는 여순사건 당시 3일 군수 로 불리다 진압군에게 체포, 부인 오경심과 함께 실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호남의 대표적인 소프라노 성악가였던 아내 오경심은 한국전쟁 당시 풀려나 인민군 장교로 순천에 나타났다. 순천시사편찬위원회, 순천시사-정치사회편, 1997, 583~599, 650~653, 순천지역 여순사건 511

40 제3권 나. 여수 제14연대의 반란과 순천 점령 육군본부가 1948년 10월 19일 오전 7시 여수 제14연대 24) 에 제주4ㆍ3사건 진압을 위한 출항명령을 하달하자, 이에 반대하는 14연대 소속 군인 약 2,000명이 반란을 일으켰다. 25) 제14연대 반군은 지창수 상사의 지휘 아래 차량을 동원하여, 경찰의 저지선을 무너뜨 리고 여수를 장악했다. 26) 10월 20일 반군의 주력부대가 시내에 침입하여 교전이 개시되 었으나, 소수의 경찰병력은 반군을 저지할 수 없었다. 반군이 시내로 들어오자, 여수 시민 600여 명이 반군에 합세하였다. 10월 20일 오전 9시에 이르러 여수시는 완전히 반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27) 반군은 주요기관과 건물을 접수하고 체포된 경찰관과 기관장ㆍ우익 단체원ㆍ유지 등을 여수경찰서 뒤뜰에서 집단으로 사살했다. 이어 인민위원회가 조직되 고, 인민공화국 깃발이 주요 건물에 걸렸다. 28) 여수를 장악한 반군의 주력 2개 대대는 20일 오전 9시 30분경 김지회 중위의 지휘 아래 여수역에서 통근열차를 이용, 순천으로 북상했다. 29) 순천역 앞에서 대기하던 홍순석 중위 휘하 순천 파견 2개 중대가 즉시 반군에 합류했다. 30) 순천교와 순천역에 배치된 광주 급파 제4연대 1개 중대도 반란에 반대하는 일부 사병을 사살한 뒤 반군에 합세했다. 31) 20일 오후 733쪽; 김득중, 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논문, 2004, 20쪽. 24) 14연대는 광주 4연대 1대대를 기간병력으로 1948년 5월 4일 전남 여수에서 창설되었다. 당시 전국 각 지역에서 벌어졌던 군과 경찰의 갈등에서 상대적으로 열세에 놓여 있던 군에는, 경찰에 반발하고 있던 사병들과 지창수를 비롯한 김지회ㆍ홍순석 등 좌익계의 하사관과 장교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게다가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었던 좌익 동조자들과 일반 범죄자들까지도 경찰의 추적을 피해 쉽게 입대가 가능했기 때문에 경찰에 대한 적대감정이 높았다. 안종철, 전남지방의 정치상황과 여순사건, 여순사건 논문집, 여수지역사회 연구소, 2006, 172~173쪽. 당시 의무병으로 14연대에서 근무한 곽상국은 14연대 모병이 부락마다 할당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구술했다. 고된 훈련에 비해 보급이랑 처우 등이 형편없어 군입대자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 다. 곽상국 구술, 선휘성 채록, 지역민이 체험한 여순사건 녹취록1, 국사편찬위원회, 2006, 4쪽. 25) 육군본부 전사감실, 공비토벌사, 육군본부, 1954, 13~14쪽; 육본 발간 공간사에는 10월 19일 21시 20분 이라고 적고 있다. 육본 작전참모부 군사처, 육군1.2.년사(초안), 1969, 197쪽. 26) 공군본부, 6ㆍ25전쟁 증언록, 2002, 79쪽. 27) 육본 정보참모부, 공비연혁 1, 1971, 204쪽. 28)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 : 해방과 건군( ) (제1권), 1967, 455쪽. 29) 김점곤, 한국전쟁과 노동전략, 박영사, 1981, 198쪽. 여수에서 출발한 반군들의 당초 진로가 순천이 아니라 구례였다는 주장이 있다. 동순천역 부근에서 벌어진 순천경찰과의 전투로 예정에 없던 순천을 점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구례로 진로를 정한 것은, 여순사건 전 구례구역에서 일어난 군경충돌사건에 대한 보복을 한 뒤, 지리산 입산을 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남로당 순천군당 조직책 윤기남은 당초 반군이 구례로 들어가 독자적인 유격활동을 할 계획이었다고 말했다. 민간인들과 함께 봉기할 계획은 없었다는 것이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군사처, 육군1.2.년사(초안), 1969, 206쪽;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팀, 여수 14연대 반란 녹취록 ( 방영), 김정효(당시 순천열차 사무소 차장) 증언, 122쪽; 순천시사편찬위원회, 내가 겪은 여순사건 윤기남, 순천시사-정치사회편, 1997, 801쪽. 30) 김득중, 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논문, 2004, 67쪽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4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3시경 반군은 순천시내를 완전 점령하였다.32) 이어 반군은 병력을 3개부대로 재편성하여 주력 1천여 명은 구례, 곡성, 남원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학구 쪽으로 진격해나갔고, 일부는 광주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벌교, 보성, 화순 방면으로, 나머지 일부는 경상도지방 진출을 위해 광양, 하동 방향으로 진격해나갔다.33) 남원ㆍ구례ㆍ보성 등지에서는 반군이 도착하기 도 전에 지방좌익세력들이 점령을 하여, 14연대가 무혈 입성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 다.34) 그동안 비합법 상태에서 지하활동을 하던 이 지역의 민애청원이나 노조원 그리고 남로당원 학생 등이 사건에 적극 가담35)하면서부터 14연대 반란은 여순사건 이 되었다.36) [지도 1, 2] 미 군사고문단 1948년 10월 20ㆍ21일 24시 상황 지도37) 20일 24시 순천을 점령한 반군이 세력을 학구, 광양, 21일 24시 4연대 450명과 3연대 2ㆍ3대대가 반군과 보성 방면으로 확장하고 있다. 학구에서 대치하고 있다. 14연대 군인들이 순천시내를 점령한 10월 20일 밤, 여맹과 민청이 지하에서 나와 간판 을 걸었고 인민위원회도 재건되었다.38) 순천의 좌익세력들은 반군에게 무기를 지급받고, 31)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뺷대비정규전사( )뺸, 1988, 34쪽. 32) 순천시사편찬위원회, 뺷순천시사-정치사회편뺸, 1997, 761쪽. 다른 공간사(公刊史)는 순천 점령 시점을 10 월 20일 17:00시경으로 적고 있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뺷대비정규전사( )뺸, 1988, 34쪽. 33) 안종철, 여순사건의 배경과 전개과정, 뺷여순사건 논문집뺸, 여수지역사회연구소, 2006, 74쪽. 34) 이효춘, 여순군란연구 그 배경과 전개 과정을 중심으로, 고려대 역사교육과 석사논문, 1996, 32쪽. 35) 육본 작전참모부 군사처, 뺷육군1.2.년사(초안)뺸, 1969, 198쪽. 36) 서중석, 뺷이승만과 제1공화국뺸, 역사비평사, 여순사건의 특기할 점은 민간인, 특히 학생들의 적극적 인 참여였다. 좌익계 학생들은 민애청, 민주학생동맹을 중심으로 여순사건에 깊숙이 개입했고, 이는 학생 전체를 대상으로 한 피의 보복을 낳았다. 순천지역의 경우 순천사범, 순천여중, 순천중학, 순천농림, 매산 중학 등의 일부 학생들이 가담했다. 진압 직후 군경은 순천사범의 40%, 순천농중 30%가 반란에 동조했다 고 발표했다. 손태희, 여순사건 참가계층의 제유형, 순천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30 31쪽. 37) NARA, USAFIK, 뺷Adjutant General Section뺸, RG554 Records of 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Supreme Commander, Allied Powers and United Nations Command, General Correspondence(Decimal Files) , A1 1378, Reports (2). 순천지역 여순사건 513

42 제3권 함께 경찰ㆍ우익요인ㆍ청년단원들을 습격하거나 우익인사들을 적발하는 데 앞장섰다.39) 이들은 친일파의 은행예금을 동결하거나 재산을 몰수하는 한편, 식량창고를 개방하여 쌀 과 물자를 시민들에게 배급하였다. 일부 지역에서는 경찰이나 우익인사에 대한 인민재 판40)을 실시하기도 했다.41) 10월 27일자 영국 외무성문서에는 미 외교관 보고를 인용하 여 300명의 경찰과 비공산주의자 시민들이 반군에게 학살되었다고 적혀 있다.42) 진압군 측은 400여 명의 경찰관이 사살당한 것으로 추산했다.43) 반군은 10월 21일 이후 정부군의 진압작전이 본격화되자 다시 순천으로 집결하였다가, 광양의 백운산과 구례를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이때부터 지리산 부근에서는 제14연 대원들이 주축이 된 구빨치 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다. 정부의 진압작전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정부는 이를 즉각 반란으로 규정하고 진압에 나섰다.44) 1948년 10월 20일 임시군사고문단 단장 사무실에서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 이범석,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준장, 임시군사고문단 단장 로버츠 준장, 국방부 고문 제임스 하우스만 (James Hausman) 대위를 비롯한 미군과 한국군 참모들이 모여 비상회의를 가졌다. 이 회의에서 광주에 토벌군사령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45) 38) 김득중, 뺷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뺸,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논문, 2004, 77 78쪽. 해방 직후 남 한 지역의 지방인민위원회는 미군정의 탄압으로 잠시 동안의 활동에 그쳤고, 여수나 순천지역의 인민위원 회는 강한 행정력을 행사한 것은 아니지만, 자연발생적인 민중의 의지를 대변했던 조직으로서, 그 영향력 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이는 1946년 10월의 전국적인 추수봉기 시 이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다른 지방과는 달리 이 시점까지도 해방 직후의 건준지부와 인민위원회를 주도했던 세력이 여전히 붕괴 되지 않았던 데 기인했다. 박명림, 뺷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II-기원과 원인뺸, 나남출판, 1996, 410쪽. 39) 육군본부 전사감실, 뺷공비토벌사뺸, 육군본부, 1954, 14쪽; 육본 작전참모부 군사처, 뺷육군1.2.년사(초안)뺸, 1969, 200쪽. 40) 여순사건 당시 재판부는 민간인으로 구성되었고, 그들에 의해 재판이 실시되었다. 미군정 정보보고서(G-2 Report)에 의하면 벌교지역의 경우 5명의 재판관 가운데 3명이 지방 공산주의자였다고 한다. 피고는 경찰, 정부관리, 지방 우익인사, 그리고 방첩대(CIC)에서 일한 우익인사였다. 김동춘, 뺷전쟁과 사회뺸, 돌베개, 2000, 159쪽. 41) 육본 작전참모부 군사처, 뺷육군1.2.년사(초안)뺸, 1969, 200쪽. 42) The American Vice-Consul at Kwangju has reported that the rebels have butchered over 300 police and non-communist civilians. 국사편찬위원회, 뺷대한민국사 자료집ㆍ한국관계 영국외무성문서 10뺸17권, 1994, 272p. 43) 육본 정보참모부, 뺷공비연혁뺸1, 1971, 205쪽. 44) 사건 발발 당시 군 수뇌부 중 일부는 통상적인 군경 갈등이라 판단, 사태를 관망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사 사키 하루다카, 뺷한국전비사上-건군과 시련뺸, 병학사, 1977, 쪽. 한편 이승만 정권은 발발 당시 사 건을 우익에 의한 군부쿠데타로 의심하기도 했다. Allan R. Millet, 하우스만 대위와 한국군의 창설, 뺷군 사뺸40, 2000, 259쪽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4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육군 총사령부에서는 1948년 10월 21일 반군토벌전투사령관에 육군총사령관인 송호성 ( 宋 虎 聲 ) 준장을 임명하여 제2여단과 제5여단을 지휘하게 하였다. 46) 또한 제2여단장에 원 용덕 대령을, 제5여단장에 특별부대사령관 김백일( 金 白 一 ) 중령을 임명하여 진압작전을 지휘하게 하였다. 47) 송호성은 특별기 편으로 10월 21일 오후 1시 광주 송정리 비행장에 도착했다. 또한 미 임시군사고문단 장교들과 국군참모들도 송호성과 함께 광주에 도착했 다. 48) 10월 21일 진압부대는 육군 5개 연대와 비행대 그리고 수색대로 편성되었다. 반군의 대응이 예상 밖으로 강력해지자, 10월 22일에 부산의 제5연대가 추가로 배치되었다. 49) 이와 함께 1948년 10월 22일 정부에서는 여수ㆍ순천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를 위반할 시에는 군법에 의해 사형 및 기타에 처한다고 밝혔다. 50)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 관 이범석은 10월 22일 반란군에 고한다 라는 포고문에서 제14연대 반란은 국법상 도 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이며, 총살당하지 않으려면 즉시 투항하라고 명했다. 51) 10월 23 일 이승만은 여순사건과 관련하여 일반 국민에게 경고문을 발표했다. 52) 정부는 처음부터 45) 노영기, 여순사건과 육군의 변화, 전남사학 제22집, 2005, 263쪽. 46)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군사처, 육군1.2.년사(초안), 1969, 203쪽. 반군토벌사령부의 구성과 주요 지휘관은 다음과 같다. 전투사령관 육군준장 송호성( 宋 虎 聲 ) 제2여단장 육군대령 원용덕( 元 容 德 ) 제5여단장 육군중령 김백일( 金 白 一 ) 비행대장 육군대위 김정렬( 金 貞 烈 )(L형 연락기 10대) 수색대장 육군대위 강 필원( 姜 珌 遠 )(장갑차). 작전부대로는 제4연대 3개 대대 연대장 육군중령 이성가( 李 成 佳 ) 제3연대 2개 대대 연대장 육군중령 함준호( 咸 俊 鎬 ) 제6연대 1개 대대 연대장 육군중령 김종갑( 金 鍾 甲 ) 제15연대 1 개 대대 연대장 육군중령 최남근( 崔 楠 根 ) 제12연대 3개 대대 연대장 육군중령 백인기( 白 仁 基 )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 : 해방과 건군( ) (제1권), 1967, 459~460쪽. 47) 5여단 참모장에는 위대선( 魏 大 善 ) 소령을 임명, 현지로 급파했다. 육본 작전참모부 군사처, 육군1.2.년사 (초안), 1969, 203쪽. 48) 주한임시군사고문단 장교는 하우스만(Houseman : 국방부 작전고문), 리드 대위(Reed : 국방부 정보고문), 트리드웰 대위(Treadwell : 전 제5여단 고문), 프례 대위(Frye : 제5여단 고문)였고, 국군참모는 채병덕 대 령(국방부 총참모장), 정일권 대령(육군 참모장), 백선엽 중령(육군 정보국장), 고정훈 중위(육군 정보국 장교) 등이었다. G-3 Section, X X IV Corps, HISTORY OF THE REBELLION OF THE 14TH REGIMENT OF THE KOREAN CONSTABULARY. 49) 14연대 반란은 중앙정부로서는 매우 당황스러운 일이어서 38선 경비 병력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가용 병 력을 진압작전에 투입하였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편, 전쟁의 배경과 원인, 2004, 459쪽. 50) 계엄령은 순천을 진압작전을 벌이던 1948년 10월 22일, 현지 사령관인 제5여단장 김백일에 의해 처음 내 려졌다. 그리고 진압군이 순천을 완전히 점령하고 여수를 공격하기 시작한 10월 25일, 뒤늦게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대통령령 제13호로 공포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0월 22일 발표에서 현지사령관에 의한 계 엄령을 인정하는 형식을 취했다. 사사키 하루다카, 한국전비사 上 -건군과 시련, 병학사, 1977, 354쪽; 대 한민국정부공보처, 관보 제10호, ; 경향신문, ) 서울신문, ) 다음의 이승만 경고문은 이미 민간인 집단희생을 예고하고 있었다. (전략) 정부에서는 각부 당국에게 신 칙해서 우선 각 학교의 각 정부기관에 모든 지도자 이하로 남녀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 는 다 제거하고,(강조-인용자) 조직을 엄밀히 해서 반역적 사상이 만연되지 못하게 하되, 앞으로 어떠한 법령이 혹 발포되더라도 전 민중이 절대 복종해서 이런 비행이 다시는 없도록 방위해야 될 것이다.(후략) 순천지역 여순사건 515

44 제3권 강경진압의 방침을 정한 채 진압작전을 전개했다.53) [지도 3, 4] 미 군사고문단 1948년 10월 22ㆍ23일 24시 상황 지도54) 22일 24시 3연대 2대대, 12연대 1ㆍ3대대가 순천외곽에 주둔하고 있다. 23일 24시 순천은 완전 점령되었다. 5여단 본부 예하 4ㆍ3ㆍ12연대가 순천을 장악했다. 한편 여순사건 당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은 미국의 수중에 있었으며, 따라서 진압작전 은 완전히 미군의 통제 하에 있었다.55) 광주 반군토벌전투사령부에는 작전ㆍ정보ㆍ군수 업무를 지원하는 미군 군사고문이 배치됐다. 한국군 부대에 이미 배속되어 있던 군사고 문들은 담당 부대들의 작전에 자동적으로 참여했다.56) 당시 12연대 부연대장이었던 백 수산경제신문, ) 노영기, 여순사건과 군 육군을 중심으로, 뺷여순사건 논문집뺸, 여수지역사회연구소, 2006, 190쪽. 반란 에 대한 책임으로 토벌사령관에 임명된 송호성은 광복군 출신으로 평소 군내에서 비주류였다. 반군에 대 한 만주군 출신 지휘관들의 강경 진압방침과 달리 송호성은 온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당시 강경한 진압작 전을 주장하고 실행한 인물들은 이승만-채병덕-김백일, 백선엽, 백인엽, 송석하로 이어지는 세력이었다. 사건 초기, 진압작전의 주도권은 이미 송호성에서 김백일, 백선엽으로 넘어갔다. 훗날 송호성이 부정적으 로 평가된 것은 이 같은 태도와 훗날 납북되어 북한에서 활동한 사실 때문이었다. 김득중, 뺷여순사건과 이 승만 반공체제의 구축뺸,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논문, 2004, 쪽. 54) NARA, USAFIK, 뺷Adjutant General Section뺸, RG554 Records of 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Supreme Commander, Allied Powers and United Nations Command, General Correspondence(Decimal Files) , A1 1378, Reports (2). 55) 점령기간이 끝났으므로 미국은 표면상 한국의 내정을 간섭할 권한이 없었지만 반란의 진압은 미국인들이 조직하고 지시했다. Bruce Cumings, Korea's Place in the Sun: a modern history, W.W. Norton & Company, 1997(브루스 커밍스, 김동노 외 옮김, 뺷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뺸, 창비, 2001, 312쪽). 56) 반군토벌사령부 송호성 총사령관을 보좌하는 군사고문으로 하우스만이 파견됐다. 하우스만은 미 임시고문 단을 대표하는 작전 책임자이자 송호성 총사령관의 고문 자격으로 반군토벌사령부에 배속됐다. 하우스만과 정보부(G-2) 리드 대위는 처음부터 토벌사령부에 참여해 작전을 주도한 고문단원들이었다. 이들 외에 윌슨 (Marvin G. Wilson) 중위는 군수참모(G-4) 고문관으로서 작전에 필요한 군수품을 조달하는 역할을 맡았 다. 그리피스(Arthur G. Griffith) 중위는 연락비행기를 타고 반군과 정부군의 움직임을 정찰하는 일을 담당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4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은 작전권이 임시군사고문단에게 있었고, 병력이동과 장비이동을 임시군사고문단이 관리했다고 했다. 57) 백의 에 따르면, 본 사건 발생지역인 순천지역 진압작 전을 주도했던 12연대에도 미군 고문관이 동행하면서 작전에 관여했다. 58) 당시 임시군사고문단의 주요한 임무는 장비를 비롯한 병참물자 지원이었다. 59) 고문단 은 M-1소총, 81mmㆍ60mm 박격포, C-47수송기, M208 무전기 등 한국군에 필요한 물 자와 장비를 관리하고 현지에 제공했다. 60) 특히 고문단은 여순사건 발발 직후부터 부대 간 연락과 공중정찰을 위해 L-4(10대), L-5(10대) 경비행기를 진압군에 제공했다. 61) 여순사건 발발 직후 미군은 정일권ㆍ채병덕ㆍ김백일 등 젊은 한국군 대령들의 도움을 받아, 실제로 반군진압작전을 지휘했다. 진압작전에 관여한 미군 주요 고문은 할리 풀러 (Harley E. Fuller) 대령, G-3의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 Hausman) 대위, G-2의 존 리드(John P. Reed) 대위 등이었다. 62) 했다. 김득중, 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논문, 2004, 136~138쪽. 57) 백은 고문관의 지시 없는 병력이동이 불가능하진 않았지만, 작전권은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으니 까 물어봐야지 라고 했다. 참고인 백 ( ). 58) 백은 제12연대에 배속된 미 군사고문관이 순천 진압작전에서 박격포 사격을 도왔고, 10월 말 지리산 으로 도주한 반군을 추격하기 위해 12연대와 지리산 노고단까지 동행했다고 했다. 순천에 들어갔는 데 (중략) 우리 부대는 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미군 고문관이 박격포 출신이었어요. 그 사람이 박격 포를 잘 아는데 (중략) 박격포를 정비해서 들이때렸죠. (중략) 그 사람하고 같이 하다가 도중에 내가 지리 산 노고단, 반야봉, 천왕봉, 심온 (중략) 화개장으로 해서 작전을 끝내는 길이 있어요. 그 길을 고문관하고 동행을 하다 노고단에서 헤어졌어요. 미고문관이 연대에 둘인가 셋이 있었어요. 다 있었습니다. 참고인 백 ( ). 59) UNITED STATES MILITARY ADVISORY GROUP TO THE REPUBLIC OF KOREA, Advisor's Handbook ( ), W.L. Roberts 문서철, p ) 김득중, 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논문, 2004, 140~141쪽. 백도 장 비 지원과 편성, 그에 따른 인원 편성도 임시군사고문단이 관리했다고 했다. 곧 전차양륙정(LST) 지 원이나 유류 사용, 인력편성, 무기지급 등에 대해 고문단과 상의하고 그들의 승인이나 관리를 받았다고 말 하였다. 참고인 백 ( );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팀, 여수 14연대 반란 녹취록 ( 방영) 중 백 증언. 61) 먼저 지원된 L-4 연락기는 긴급연락, 정찰, 지휘관 수송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는데, 항속거리가 짧아 L-5 연락기 10대를 추가로 지원받았다. 여순진압작전은 공군 최초의 비행기에 의한 항공작전이었다. 한편 공 군 소장으로 예편한 오점석은 L-4 연락기를 10대를 이미 보유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공군본부, 6ㆍ25전 쟁 증언록, 2002, 80~84쪽. 62) Bruce Cu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Ⅱ(The Roaring of the Cataract ), Princeton Univ. Press, 1990, p 순천지역 여순사건 517

46 제3권 [사진 1, 2] 송호성 준장과 풀러 대령 반군토벌사령관 송호성 준장이 군경 지휘관을 불러 반군토벌사령관 송호성 준장과 미임시군사고문단 작전을 지시하고 있다. 할리 풀러(Harley E. Fuller) 대령 칼 마이던스( )/<LIFE> 칼 마이던스( )/<LIFE> 또한 미군은 직접 공중정찰과 CIC를 통해 반란 지역의 현지 정보를 수집했다.63) 당시 CIC 요원이었던 울리베리(Prudongcio D. Uliberri)에 따르면, 미군은 반군진압에 적극적 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진압작전의 세부적인 정보를 원하고 있었다. 울리베리는 이동 식 무선전신으로 사건을 주한미군에 보고했다.64) 광주 CIC는 1948년 10월 19일 23시 제 14연대 군인들이 봉기를 일으키고 순천을 향해 기차로 출발했다는 현지 상황을 10월 20 일 오전 주한미군에 보고했다.65) 전주 CIC도 10월 20일 19시 35분 반군 1천 명이 남원으 로 진격 중이고 12연대가 경계태세에 들어갔고 3연대가 지원병력을 보냈으나 상황은 악 화됐다고 주한미군에 보고했다.66) 63) 6th Division, Chronological Journal of Events (18 October 1948 to 21 November 1948), p. 14. 미국 정보기관들은 한국군 및 한국 국립경찰 내의 정보기관과 긴밀하게 협력했다. Bruce Cumings, Korea's Place in the Sun: a modern history, W.W. Norton & Company, 1997(브루스 커밍스, 김동노 외 옮김, 뺷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뺸, 창비, 2001, 312쪽). 64) Interview with Prudoncio D. Uliberri ( ), RG 319. Box 6, ) 6th Division, Chronological Journal of Events (18 October 1948 to 21 November 1948), p ) 6th Division, Chronological Journal of Events (18 October 1948 to 21 November 1948), p. 6. 반군은 CIC 요원들을 처형하기도 했다. 제14연대 반군이 여수를 점령한 후 10월 20일부터 23일 까지 처형한 사람들의 명단에는 여수 CIC 요원 이광선ㆍ최인태ㆍ김수곤 3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김득중, 뺷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뺸,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논문, 2004, 82쪽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4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2. 사건경위 본 사건은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7월까지 순천에 주둔한 진압군경의 반군토벌 과 정에서 발생하였다. 본 보고서는 사건경위를 순천지역 진압군의 토벌작전, 순천경찰의 반 군협조자 및 좌익혐의자 색출, 순천지역 민간인 희생과정으로 구분하여 순천시내, 각 면 별로 사건의 경위를 재구성하였다. 가. 순천지역 진압군의 토벌작전 미 임시군사고문단장 로버츠는 송호성에게 보낸 훈령에서 정치적ㆍ전략적으로 여수와 순천이 중요하기 때문에 가능한 빠른 시일 안에 탈환해야 한다 는 입장을 밝혔다. 67) 토벌사 령부는 최초 탈환목표를 순천으로 정하고 이를 세 방면으로 나누어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68) 진압작전은 순천에서 광주로 향하는 북상로와 백운산ㆍ지리산으로 향하는 도주로를 차단하고 해상과 육상에서 협공으로 여수반도 일대를 압박해 들어간다는 개념이었다. 주 공격은 제5여단(대령 김백일 지휘) 예하의 제3연대(함준호 중령 지휘)와 제4연대(이성가 중령 지휘)를 중심으로 하여 학구에서 순천으로 진격하고, 4연대 제1대대(제5여단 참모 장 오덕준 중령 지휘)는 보성을 경유하여 벌교 쪽에서 순천을 공격하며, 제15연대(최남 근 중령 지휘)는 하동에서 광양을 경유하여 동쪽에서 순천을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69) 국 방부 총참모장 채병덕 대령은 10월 22일 기자회견에서 병력을 집중시켜 압박섬멸전의 공격을 시작했다고 발표했다. 70) 각 진압부대가 순천 학구에 집결하기 시작한 것은 반군 이 순천을 완전히 장악한 이후였다. 학구는 화순 경유 광주, 남원, 하동에 이르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반군의 북상이 예상되는 지점이었다. 71) 진압군은 먼저 순천 외곽의 반군 보초를 생포하여, 진압군 요원을 순천시내에 투입, 당 핵심간부를 순천농림중학교 부근에서 살해하는 첩보공작을 펼쳤다. 72) 한편, 10월 22일 군산에서 출동한 제12연대 2개 대대(부연대장 백 소령 지휘)가 학구에서 반군과 교 67) W.L. Roberts To General Song Ho Seung, Letter of Instruction ( ), W.L. Roberts 문서철, p ) 순천시사편찬위원회, 순천시사-정치사회편, 1997, 767쪽. 69)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군사처, 육군1.2.년사(초안), 1969, 204쪽. 경찰의 대응도 기민했다. 제8관구경찰청 (전남경찰국)은 반군이 순천을 점령한 1948년 10월 20일 주암지서에 전투지휘소를 설치했다. 최기덕, 내 생애 최고의 비밀, 사상계 130호, 1964년 1월호, 219쪽. 70) 노영기, 여순사건과 육군의 변화, 전남사학 제22집, 2005, 263~264쪽. 71) 백선엽, 실록 지리산, 고려원, 1992, 172쪽. 72) 순천시사편찬위원회, 내가 겪은 여순사건 심명섭, 순천시사-정치사회편, 1997, 814쪽. 순천지역 여순사건 519

48 제3권 전하면서 대치하고 있던 3연대ㆍ4연대를 지원하여 합동작전을 개시하였다. 진압군의 대 규모 반격이 시작되자 반란군은 일부가 투항하고 주력부대는 순천으로 퇴각하였다. 73) 학 구를 장악하자 제4연대(연대장 이성가 중령 지휘)를 남겨두고 제12연대의 주력부대와 제 3연대(부연대장 송석하 소령 지휘) 병력은 순천으로 추격하여 오후 4시경 외곽지에서 반 군과 교전하였다. 74) 4연대 병력을 학구에 잔류시킨 것은, 4연대가 반군의 모집단으로서 병력 일부가 이미 반란군에 합류하는 등 사상적으로 불순하다고 판단, 순천 탈환작전에 서 배제한 것이었다. 75) [사진 3, 4] 진압작전 2연대 소속 사병이 주먹밥을 먹고 있다. 철모에 쓴 숫자 2는 2연대를 의미한다. 칼 마이던스( )/<LIFE> 진압작전 당시의 모습. 미 임시군사고문단 소속 장교는 현지에서 작전을 지휘했다. 칼 마이던스( )/<LIFE> 순천과 광양으로 분리되는 삼거리(강청리)에서 제12연대는 순천 시가를 반으로 나누 는 동천( 東 川 )을 경계로 하여 제2대대(대대장 김희준 대위 지휘)는 봉화산 하단부를, 제 3대대(대대장 이유성 대위 지휘)는 가곡동고지, 난봉산고지로 진출하고 제3연대의 제2대 대(조재미 대위 지휘)는 외곽고지를 차단하면서 진격했다. 76) 이날 진압군은 순천시내에 73) 반군 주력부대의 퇴각방향을 한국전쟁사 에서는 광양 방면으로, 순천시사 는 순천 방면으로 기술하고 있다. 퇴로가 차단된 반군 중 일부는 순천시내로 퇴각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주력부대는 백운산을 거쳐 지 리산으로 입산하는 광양 쪽 루트를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 : 해방 과 건군( ) (제1권), 1967, 462쪽; 순천시사편찬위원회, 순천시사-정치사회편, 1997, 767쪽. 74) 육본 정보참모부, 공비연혁 1, 1971, 209쪽. 75) 안종철, 전남지방의 정치상황과 여순사건, 여순사건 논문집, 여수지역사회연구소, 2006, 81-82쪽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4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진출하여 시가지를 점령했으나, 완전히 점령한 것은 아니었다.77) 날이 어두워지자 순천 북방입구를 점령한 진압군은 전투를 중지하고 외곽지대에 주둔하여 방어선을 굳히고 다 음날의 공격을 준비했다.78) 이튿날 23일 새벽 제2연대 1개 대대, 제4연대 1개 대대, 장 갑차부대, 경찰부대로 증강된 진압군은 순천 주변의 산과 이른바 인민군사령부로 되어 있던 동순천역을 일시에 포위하고 박격포사격과 정찰기의 지원을 받으며 장갑차부대를 선두로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김지회 등의 반군지휘관과 순천의 주요 좌익간부들로 구 성된 주력부대는 이미 광양 방면의 백운산과 지리산 줄기의 인근 산악지대로 도피한 상 태였다.79) 사실 23일 무렵 순천읍에는 총과 죽창으로 무장한 현지 출신의 치안대, 민애청원 등의 좌익단체원이나 좌익학생들만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중무장한 진압군에게 큰 위협이 될 수는 없었다.80) 화력과 병력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진압군은 10월 23일 오전 11시경 순 천을 탈환81)하고 오후에는 시가지 소탕전을 완료했다.82) 순천을 완전 점령한 진압군은 1 개 대대병력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여수를 향해 떠났다. 10월 24일에는 보성과 벌교를 진 압했다. 동시에 하동과 순천에서 광양을 향해 진격했다.83) 순천에 남은 진압군은 반란에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뺷한국전쟁사 : 해방과 건군( )뺸(제1권), 1967, 462쪽. 사사키 하루다카, 뺷한국전비사 건군과 시련뺸(상권), 병학사, 1977, 349쪽. 순천시사편찬위원회, 뺷순천시사-정치사회편뺸, 1997, 768쪽. 안종철, 전남지방의 정치상황과 여순사건, 뺷여순사건 논문집뺸, 여수지역사회연구소, 2006, 82쪽. 백선엽, 뺷실록 지리산뺸, 고려원, 1992, 180쪽. 백선엽의 동생인 12연대 부연대장 백인엽도 순천 탈환이 쉬 웠으며 박격포 쏘고 파죽지세로 들어갔다고 말했다. 또 순천농림중학교 교사로 순천시내 상황을 목격한 김관수도 진압작전 시 진압군에 비해 반군의 화력이나 병력이 현저히 약했다고 말했다.(MBC <이제는 말 할 수 있다> 제작팀, 여수 14연대 반란 녹취록 ( 방영), 김관수ㆍ백 증언, 147, 234 쪽.) 또한 2여단 하사관 교육대 중대장으로 순천에 가장 먼저 진입했다는 서도 반군은 모두 도피하여 저항이 없었다고 했다. 3연대 1대대 3중대 소속으로 진압작전에 참전했던 김도 순천 진압작전이 중대별ㆍ소대별로 시가전을 벌이며, 큰 저항 없이 행군하며 수색하는 수준이었다고 했다. 참고인 서 ( ); 참고인 서 면담보고서( ); 참고인 서 면담보고서 ( ); 참고인 김 통화보고서( ). 81) 순천시사편찬위원회, 뺷순천시사-정치사회편뺸, 1997, 768쪽. 순천을 진압하는 데는 이철승이 대표로 있던 전국학생총연맹(학련) 등의 우익청년단체도 일익을 담당했다. 진압군이 순천에 진입할 때 길잡이 역할을 했다. 순천학련은 여수, 구례, 광양학련을 관장할 만큼 활동이 활발했다. 사건이 발발했을 당시 피신하지 못한 학련단원들은 사살당하거나 고초를 겪었다.(김득중, 뺷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뺸,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논문, 2004, 121쪽.) 당시 순천학련 감찰부장이었던 황은 여순사건 전에도 학련에게 총이 지급되어, 좌익학생들에 대한 테러와 폭행을 일삼았다고 했다. 또한 진압 후에는 군경과 함께 부역자 색출이나, 잔비소탕에 가담했다고 말했다. 참고인 황 면담( ). 82) 당시 신문들은 진압군의 발표를 근거로 전투가 치열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미군은 세 발의 박격포탄을 발사한 후 시내에 진입하자 별다른 전투를 치르지 않고서도 방어선이 무너졌다 고 보고했다. 존 R. 메릴, 뺷침략인가 해방전쟁인가뺸, 과학과사상사, 1988, 210쪽. 83) 노영기, 여순사건과 육군의 변화, 뺷전남사학뺸제22집, 2005, 265쪽. 76) 77) 78) 79) 80) 순천지역 여순사건 521

50 제3권 가담했던 자들을 찾아내기 위해 시내 가옥들을 하나하나 수색하기 시작했다.84) [지도 5, 6] 미 군사고문단 1948년 10월 24일 12시ㆍ24시경 상황 지도85) 24일 12시 5여단 2여단 본부가 순천에 설치되었고, 12연대가 여수 탈환작전에 나섰다. 24일 24시 5연대가 여수로 진격했고, 사령부는 주암에 설치되었다. 반군토벌전투사령부에서는 10월 24일 여수 탈환작전을 개시하였다.86) 이때 작전은 여 수를 중심으로 육지와 해안에서 포위망을 구축하여 진압하는 것이었다. 즉, 제4연대는 여 수의 서쪽, 제3연대와 제2연대는 여수의 북쪽, 제12연대는 여수의 북서쪽, 제5연대는 바 다, 제6연대는 여수의 북쪽 산맥, 제15연대는 여수의 동쪽으로부터 진격하는 것이었다.87) 1948년 10월 24일 반군토벌전투사령관 송호성이 수색대대와 장갑차 그리고 제3연대(부 연대장 송석하 소령)를 앞세우고 직접 여수 진압작전을 시도한 결과, 10월 26일 여수에 진입할 수 있었으며, 10월 27일 여수를 완전히 탈환했다.88) 1948년 10월 27일 하우스만과 리드는 광주의 사령부에서 순천에서 북쪽 방향으로 이동한 반군을 토벌하기 위해 백운산 과 지리산지역을 동시에 소탕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89) 11월 5일 로버츠는 채병 84) 안종철, 전남지방의 정치상황과 여순사건, 뺷여순사건 논문집뺸, 여수지역사회연구소, 2006, 82쪽. 85) NARA, USAFIK, 뺷Adjutant General Section뺸, RG554 Records of 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Supreme Commander, Allied Powers and United Nations Command, General Correspondence(Decimal Files) , A1 1378, Reports (2). 86)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뺷한국전쟁사 : 해방과 건군( )뺸(제1권), 1967, 466쪽. 육군본부 전 사감실에서 펴낸 뺷공비토벌사뺸에는 여수작전을 22일에 개시, 23일 여수를 완전 탈환한 것으로 되어 있으 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육군본부 전사감실, 뺷공비토벌사뺸, 육군본부, 1954, 16쪽. 87) 노영기, 여순사건과 육군의 변화, 뺷전남사학뺸제22집, 2005, 265쪽. 88) 1948년 10월 27일까지의 진압작전에는 총 140명의 장교와 4,732명의 군인들이 참가했다.(노영기, 위의 논 문, 266쪽.) 진압군은 본부를 여수군청, 헌병대와 수도경찰대를 중앙국민학교에 설치하여, 반군을 적발 및 처단하였는데, 제5연대 대대장 김종원 대위는 일본도를 가지고 직접 참수하기도 하였다. 국방부 전사편찬 위원회, 뺷한국전쟁사 : 해방과 건군( )뺸(제1권), 1967, 471쪽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5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덕 참모총장에게 반군의 봉기 가능성, 무기고 관리, 통신체계 등 한국군이 취해야 할 조 치를 제시했다. 90) 진압군은 여순지역의 탈환작전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치안유지와 반 군협력자 색출을 위한 최소 병력을 탈환지역에 남겨두고, 지리산과 백운산 등지로 들어 간 반군을 추격해 소탕하는 작전에 돌입했다. 91) [지도 7, 8] 미 군사고문단 10월 25일 24시, 26일 27일 상황 지도 92) 25일 24시 사령부가 순천시내에 설치되었고, 백운산과 지리산부근에서 3ㆍ4ㆍ12ㆍ15가 추격전을 벌이고 있다. 26일ㆍ27일 여수는 완전 탈환되었고, 보성지역은 4연대 1대대가 장악했고, 고흥지역은 3연대 3대대ㆍ6연대 1대대가 토벌작전 중이다. 이에 진압군의 조직도 재편되었다. 1948년 10월 30일 반군토벌전투사령부는 호남방면 전투사령부(사령관 원용덕 대령)로 개편되었다. 호남방면전투사령부는 관할지역을 지리 산을 기준으로 북지구와 남지구로 구분하였으며, 북지구는 원용덕 대령이 겸임하였다. 93) 북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제2여단장 원용덕 대령)는 사령부를 남원에 설치하고, 휘하에 제2여단 소속 제2연대ㆍ제6연대의 1개 대대ㆍ제15연대의 1개 대대와 제3연대를 배속하 였다. 94) 남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제5여단장 김백일 중령)는 사령부를 순천에 설치하 89) From Task Force Roger To Commanding General, PMAG ( ), Operations Journals 1948 RG 554, Box 9. 90) W.L. Roberts To Col. Chai ( ), W.L. Roberts 문서철, p ) 노영기, 여순사건과 구례 여순사건 직후 군대의 주둔과 진압을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제68호, 2005, 45쪽. 92) NARA, USAFIK, Adjutant General Section, RG554 Records of 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Supreme Commander, Allied Powers and United Nations Command, General Correspondence(Decimal Files) , A1 1378, Reports (2). 93)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 : 해방과 건군( ) (제1권), 1967, 479쪽. 94) 제3연대는 김백일이 지휘하는 당시 제5여단 소속이었으나, 제3연대 주둔지가 남원이었던 까닭에 전투ㆍ 순천지역 여순사건 523

52 제3권 고, 제4연대ㆍ제15연대의 1개 대대와 제12연대의 2개 대대를 배속시켜 토벌작전을 진행 했다. 남ㆍ북 지구의 전투지경선은 섬진강 구례 압록 삼지 옥과(옥천) 담양 고창 (고부)을 연결하는 선95)이었다. 이어 1949년 3월 1일 호남방면전투사령부가 호남지구전 투사령부(약칭 호전사, 사령관 원용덕 대령)와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약칭 지전사, 사령 관 정일권 준장)로 개편되었다. 나. 진압군경의 반군 협력자 와 좌익혐의자 색출 지방좌익이 반군에 가담하면서, 여순사건은 14연대 반군과 진압군 간의 전쟁을 넘어섰 다. 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의 배후로 공산주의자들을 지목하며 모든 문제를 공산주의, 좌익세력에게 돌렸다.96) 따라서 진압군은 14연대 반란군과 민간인을 구별하지 않았고, 민간인들이 조금이라도 의심되면 사살했다.97) 미국 소식통들은 정부군은 공산주의 봉기에 협력했다는 의심이 조금이라도 드는 사람은 사살하고 다녔다 고 보고했다.98) 여순지역이 재탈환되자 군경은 계엄 상태에서 가장 먼저 반란군과 이에 가담한 협력자 를 철저하게 색출하는 작업에 나섰다. 반란군 및 협력자 색출작업은 2단계로 진행되었다. 제1단계로 진압군은 전 시민을 국민학교 같은 넓은 공공장소에 집결시켜 주로 외모(머리 가 짧은 자, 군용팬티를 입은 자, 손바닥에 총을 든 흔적이 있는 자 등)와 경찰관ㆍ청년단 원ㆍ학련생ㆍ우익요인 등의 적발을 통해 반군과 협조자를 색출해냈다.99) 반군의 즉결처분에 가담하거나, 짧은 점령기간 동안 발생했던 인민재판 때 처형에 앞장 섰다고 적발된 자는 즉석에서 곤봉ㆍ개머리판ㆍ체인 등으로 무참하게 타살100)되거나 총살 을 면치 못했으며, 나머지는 따로 수용되어 재심사를 받거나 계엄군이나 경찰에 넘겨져서 심문과 재판을 받았다.101) 제2단계 작업은 제1단계에서 애매하다고 판단된 자와 그 후 작전활동에 있어서는 제2여단 원용덕의 지휘를 받았다. 또 제12연대는 제2여단 소속이나 제5여단 김백일 의 지휘를 받았다. 국방부 군사편찬위원회, 뺷국방사뺸1, 1984, 쪽. 95)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뺷대비정규전사( )뺸, 1988, 77쪽. 96) 김수자, 대한민국수립직후 민족주의와 반공주의의 형성 과정, 뺷한국사상사학뺸25권, 2005, 380쪽. 97) 김득중, 뺷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뺸,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논문, 2004, 147쪽. 98) Bruce Cumings, Korea's Place in the Sun: a modern history, W.W. Norton & Company, 1997(브루스 커밍스, 김동노 외 옮김, 뺷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뺸, 창비, 2001, 313쪽). 99) 순천시사편찬위원회, 뺷순천시사-정치사회편뺸, 1997, 782쪽. 여수의 경우, 서국민학교에 끌려온 여수 시민 들은 3일 동안 조사를 받았다. 선휘성 채록, 이계유 구술, 뺷지역민이 체험한 여순사건뺸녹취록1, 국사편찬 위원회, 2006, 3쪽. 100) 특히 여수에서 5연대 장교 김종원은 일본도를 이용한 즉결참수로 악명이 높았다. 서중석, 뺷이승만과 제1 공화국뺸, 역사비평사, 2007, 48쪽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5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고발된 혐의자를 대상으로 행해졌으며, 이들은 재심사 혹은 심사를 받아 즉석에서 총살되 거나 군경에 이첩되었고 그렇지 않으면 석방되었다. 이 과정은 수개월간 계속되었다.102) [사진 5, 6] 점령과 소집 주민들이 거리로 나와 손들고 서 있는 가운데 진압군이 거리를 수색하고 있다. 칼 마이던스( )/<LIFE> 진압군은 반군협력자 색출을 위해 주민들을 학교에 집결시켰다. 칼 마이던스( )/<LIFE> 10월 23일 순천을 장악한 군경은 시민들을 북국민학교에 모이게 했다.103) 이곳에서 본 격적인 반군가담자 심사 가 시작되었다.104) 혐의를 벗기 위해서라도 시민들은 운동장에 나와야만 했다. 당시 순천농림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김정만도 반군의 지시로 보 101) 당시 조선민족청년단 단원으로 반군협조자 색출작업에 참가한 참고인 최은 손가락 총에 지목을 당 한 사람들 중 몇은 즉결처분을 하고 나머지는 군법회의에 회부됐다고 했다. 참고인 최 면담보고 서( ). 102) 안종철, 전남지방의 정치상황과 여순사건, 뺷여순사건 논문집뺸, 여수지역사회연구소, 2006, 95쪽. 취재기 자였던 김기오는 당시 순천에 합동조사국이 설치되었고, 헌병대장으로 있던 김인경 대위(육사 2기생)가 조사국장을 맡았다고 말했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팀, 여수 14연대 반란 녹취록 ( 방영), 김기오 증언, 216쪽. 103) 당시 순중 2학년으로 북국민학교 협력자 색출작업을 목격한 권준표는 손가락으로 지목만 당하면 그 자 리에서 바로 군경이 사살했다고 증언했다.(순천문화원, 학생이 겪은 여순사건-권준표, 뺷순천이야기뺸, 2004, 9쪽.) 순천 진압작전을 목격한 김관수는 북국민학교에서 반군협조자 색출을 하다 운동장이 좁아 순 천 농림학교로 옮겼다고 말했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팀, 여수 14연대 반란 녹취록 ( 방영), 김관수 증언, 147쪽. 104) 참고인 황 면담( ); 참고인 최 면담보고서( ); 참고인 신 녹취록 ( ). 순천지역 여순사건 525

54 제3권 초를 서다 진압군에게 붙잡혀 북국민학교로 끌려갔다. 그는 진압군이 군산에서 온 12연 대105)라고 말했다. 팬티만 남기고 옷을 모두 벗은 채, 북국민학교 후원에 2 3일간 억류 되어 있던 그는, 교실에서 취조를 당하던 이들 중 여럿이 총살당하는 듯 총소리가 난무했 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진압군은 혐의가 뚜렷한 이들을 교실에서 끌고 나와 학교 운동 장에 모여 있는 사람들 중 동조자를 지목 하게 했다.106) 이른바 손가락 총 이었다. 한편 순천사범학교 사범과 4학년(20세)으로 북국민학교에서 당시 상황을 목격한 참고인 정영 호는 다음과 같이 했다. 거기는 아주 지옥이었어. 갔더니 사람이 많이 모여 있었어요. 칼빈으로 막 쏴 죽이더라 고. 끌려온 사람한테 앉아 있는 사람 중 반란군협조자를 골라내라고 그러더니 지목당한 사 람을 옆으로 끌고 가서 쏴 죽였어요. 손가락질 지목을 당한 사람은 가차 없이 사람들 있는 앞에서 칼빈 총으로 쏴버렸어요. 내 눈으로 그걸 봤어요. 군인도 있고 경찰도 있었어요. 한 열댓 명 죽은 거 봤어요. 칡백나무 부근에서 쏴 죽여서 그 나무 아래로 밀어 넣더라고. ( ) 옆으로 지나가면서 이 사람이라고 하면 항의고 뭐고 없이 죽여버리니까. 내가 얼굴이 안 알 려져서 살아남은 거겠지요.107) 위의 처럼 진압군과 경찰은 초등학교 운동장에 시민들을 수용하여 반군협력자를 적발하기 시작했다.108) 누가 가담자 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은 없었고, 경찰, 우익요원, 청년단원 등 반군 치하에서 가장 피해를 많이 입었던 집단들이 색출 및 적발심 사를 담당했다.109) 이때 심사는 주로 외모, 고발, 개인적 감정에 의한 모략, 강요된 자백에 근거를 두었기 때문에 무고한 사람이 처벌받는 수가 많았다.110) 군경은 노인과 부녀자들을 운동장 모퉁 이로 가게 한 뒤, 20 30대 남자들에게는 옷을 벗고 팬티만 입게 했다. 순천을 점령한 군 반군협력자 색출작업에는 제2ㆍ3ㆍ4ㆍ12ㆍ15연대 등 대다수의 진압군이 참여했다. 김정만 구술, 선휘성 채록, 뺷지역민이 체험한 여순사건뺸녹취록1, 국사편찬위원회, 2006, 8쪽. 참고인 정영호 ( ). 당시 제2연대 1대대 2중대장으로 진압작전에 참가한 중위 설재련(薛在連)도 발가벗긴 사람들로 당시 북 국민학교가 꽉 찼다고 말했다. 설재련 증언록, 뺷한국전쟁 증언록뺸, 군사편찬연구소 소장. 109) 참고인 황은 다음과 같이 했다. 목사, 전도사 등 이런 사람들이 민족진영 사람들을 가려내고, 가려진 그 사람들 보고 반군에 가담한 자를 색출해내라 했어요. 그들이 손짓을 하면 그 해당되는 사람들 을 동천 건너 봉화산 골짜기에 데려다가 무참히 죽였어요. 참고인 황 면담( ). 110) 이기봉, 뺷빨치산의 진실뺸, 다나, 1992, 148쪽. 실례로 당시 현장 취재기자였던 김기오는 반군에게 밥을 해 줬다는 이유로 총살당할 위기에 놓은 한 여인을 합동조사국 국장에게 아는 사람이라고 하여 살려주었을 정도로 협조자 색출과 처벌은 자의적으로 집행되었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팀, 여수 14연 대 반란 녹취록 ( 방영), 김기오 증언, 217쪽. 105) 106) 107) 108)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5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경은 이때 이미 14연대에 가담한 혐의자 22명을 사형한 후였다.111) 이 시신 옆에서는 5천 여 명의 심문이 진행 중이었다. 한 신문은 일본군 철모를 쓴 경관 한 명이 혐의자를 취조하 고 있으며, 학교 교정 담 뒤에서는 부녀자들이 매 맞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사진 7, 8] 반군 협력자 색출 순천농림중학교에서 진압군이 반군협력 혐의자의 옷을 벗긴 채 취조하고 있다. 칼 마이던스( )/<LIFE> 경찰이 순천 북국민학교에서 반군협력 혐의자를 취조하고 있다. 칼 마이던스( )/<LIFE> 다음은 순천농림중학교 4학년으로 북국민학교 반군협력자 색출작업을 목격한 참고인 장의 이다. ( ) 길에서 학생들을 잡아와서 경찰들에게 인계를 하고 군인들은 갔어요. 고개를 들라 고 해서 개머리판으로 때리면서 3일 동안 같이 활동한 놈을 지목하라고 했어요. 우물우물 하면 개머리판으로 막 때렸어. 그 많은 사람 중에 누가 누군지 모르니까 아무나 손가락질 을 하는 거야. 그 자리에서 지명을 당하면 옷을 팬티만 남기고 다 벗기고 끌고 가 죽였어. 2 3일 전 수많은 경찰관이 죽은 것에 대한 보복이었지. 경찰들 몇 십 명이 죽어버리니까 이성을 잃은 거야. 그때 잡혀간 학생들은 하나도 못 살았어. 지목당한 사람보고 또 다른 사 람을 지목하라고 그랬어요. 이것만 떼어놓고 보면 경찰이 죄를 진 거지만, 그 당시에는 그 111) 반란지구 답사기, 동광신문( ). 사살은 북국민학교에서 50m 떨어진 매곡동 현 고속버스터 미널 부지에서 이루어졌다. 참고인 박 통화보고서( ). 순천지역 여순사건 527

56 제3권 랬어요. 전남청 부청장112)이라는 사람이 검은 안경을 쓰고 와가지고는 우리 앞에서 이를 갈면서 너희들 싹 다 죽여버리고 싶다고 말했어요. 통신망도 없고, 정확한 증거도 없고, 감 정만으로 경찰들이 많은 사람들을 죽였어.113) 장의 처럼 동조자 지목을 주저하는 사람은 가차 없이 폭행을 당했다. 강압적 인 분위기 하에서 협력 혐의가 없는 시민이라도 운수가 나쁘면 다른 사람의 착각이나 개 인감정에 의해서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었다.114) 그러나 운동장에 모인 그 많은 혐의자 중 누가 과연 실제로 반군에 협조했는가를 적확하게 골라낼 수 있는 사람은 사실상 없었 다. 살아남은 경찰은 사건 당시에는 숨어 있었거나, 탈출했거나,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 지한 경우였기 때문에 민간인 반군협조자를 일일이 구별해낼 수 있는 증거를 가지고 있 지 못했다.115) 증거도 없이 심증만으로 이루어진 색출 때문에 시민들은 공포에 사로잡혔 다. 결국 당시 호박잎 하나라도 반군에 준 사람 은 모두 혐의자로 몰렸다.116) 당시 조선 일보 취재기자로 순천에 급파된 유건호는 순천의 살풍경을 이렇게 전했다. ( ) 그곳은 순천 북국민학교 교정이었다. ( ) 주로 청년들만 모아놓은 곳이 있는가 하 면 남녀학생들만 모인 곳, 또 팬츠만 입고 벌벌 떨고 있는 벌거숭이 집단도 있다. 경찰대가 구분해 놓은 곳이다. ( ) 심사 중인 그룹 앞에는 경찰관에게 끌려나온 사람이 충혈된 눈으로 이 얼굴 저 얼굴 을 번갈아 훑어보면서 누군가를 찾고 있고 웅크리고 앉아서 떨고 있는 사람들은 고개를 숙 인 채 그 시선을 피하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 얼굴을 들었다가 그와 시선이 마주쳐서 저 놈이다 손가락이 가리키기만 하면 끝장이 나는 것이다. ( ) 읍민들이 수용되어 있는 북국민학교 교정 남쪽에서 탕, 탕, 탕 카빈 총소리가 울렸다. 언제 파놓았던 것인지 구덩이가 패어져 있는 앞에 손을 뒤로 결박당한 청년 5명이 서 있고 약 10m 떨어진 거리에서 5명의 경찰관이 총격을 가했다. 제2탄, 제3탄이 계속 발사되었다. 그 총살은 계엄사령관의 명에 의한 것이라 했고,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벌거숭이들은 모 112) 당시 제8관구 경찰청 부청장은 최천(崔天)이었다. 그는 제주도 경찰국장( )을 지 낸 뒤 제8관구 경찰청 부청장으로 이임해 온 터였다. 이후 경북 경무과장( ), 경남 경찰국장( )을 지냈다. 김득중, 이승만 정부의 여순사건 대응과 민중의 피해, 뺷여 순사건 자료집뺸, 여수지역사회연구소, 1999, 61쪽. 113) 참고인 장 면담보고서( ). 114) 당시 순천학생연맹 감찰부장으로 반군협력자 색출과정에 관여한 황은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을 빨갱이 라면서 몰아 부치면 잘못했다고 비는 사람도 많았을 정도였다 고 증언했다. 순천문화원, 여순사건, 뺷순 천이야기뺸, 2004, 22쪽. 115) 김득중, 뺷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뺸,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논문, 2004, 153쪽 116) 순천시사편찬위원회, 내가 겪은 여순사건-김(여), 뺷순천시사-정치사회편뺸, 1997, 818쪽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5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두 일단 폭도로 인정된 자들이다.( )117) 진압 이후 순천의 살벌한 광경은 다른 신문보도나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 ) 순천 이외에 있는 농업학교 뜰에는 웃옷을 벗은 천여 명의 군중이 수심이 가득한 얼 굴로 앉아 있고 이들 생명을 우려하여 찾아온 가족들의 울음소리가 이곳저곳에서 터지고 있다. 들은 바에 의하면 국군이 순천 소란 시에 시내에서 반란군에 가담한 혐의자로 체포한 것을 경찰에 인도하여 취조하는 것이라 한다. 이들 중에 반란군에 가담하여 경찰과 우익간 부를 살상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외 20명의 좌익간부는 24일 상오 이미 경찰에서 총살형 을 집행했다고 한다.( )118) 반란치하와 진압시의 잔혹한 협조자 색출로 순천에서만 사망자 1,134명, 행방불명자 818 명, 전파가옥 13동 등의 피해를 낼 정도로 그 참혹함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읍내는 가는 곳마다 시체더미요, 시체를 물어뜯은 수많은 개들이 미쳐 뻘건 눈빛으로 돌아다니는 바람에 진압부대는 이 개들부터 처치해야 할 정도였다.119) 우익청년단체원들도 반군협조자 색출과정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청년단원들은 이미 경찰과 함께 순천으로 진입하는 반군과 교전을 벌인 바 있고, 또한 여수와 순천에서 많은 희생자를 냈기 때문에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120) 진압군이 순천에 진입할 때, 길 안내를 하며 들어온 청년단원들은 반군협조 혐의 민간인들을 색출하고 취조하는 등 경찰 과 군인 옆에서 거의 동일한 역할을 수행했다.121) 진압작전을 조직한 핵심인물인 임시군사고문단의 제임즈 하우스만(James Hausman) 조차 본국에 올린 보고에서 순천경찰이 본격적으로 복수하러 나섰고, 수감포로와 민간 인들을 처형하고 있다. 여러 명의 친 정부 민간인들이 이미 살해되었으며 시민들은 우 리가 적만큼이나 나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며 여론의 악화를 우려할 정도였다.122) 또 117) 유건호, 뺷전환기의 내막뺸, 조선일보사, 1982, 149쪽. 118) 사건 발생 4일 후의 순천 현지보고, 대동신문( ); 계엄령 선포된 반란지의 거리표정, 세계 일보( ). 119) 이기봉, 뺷빨치산의 진실뺸, 다나, 1992, 148쪽. 120) 황은 동지를 죽인 좌익들을 내 눈이 뒤집혀 집집마다 잡으러 다녔는데 복수를 못 했다 고 했 다. 참고인 황 면담보고서( ). 121) 황은 순천시내에서 경찰들이 오히려 학련본부에 와서 정보를 많이 얻어갔다 며, 학생들의 활약이 경찰보다 더 많았고, 세력도 대단했다 고 증언했다. 순천문화원, 여순사건, 뺷순천이야기뺸, 2004, 22쪽; 참고인 황 면담보고서( ); 김득중, 뺷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뺸,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논문, 2004, 154쪽. 122) Special Agent no. 9016" 보고서인 Yǒsu Operation, Amphibious Stage," G-2 Intelligence 순천지역 여순사건 529

58 제3권 한 하우스만과 함께 한국군 작전참모로 진압을 주도한 백선엽 총사령부 정보국장도 훗날 펴낸 회고록에서 당시의 순천 상황을 곳곳에서 즉결처분이 잇따르고 한동안 살벌한 분 위기가 순천을 지배했다 고 말했다.123) 다. 순천지역 민간인 희생과정 1) 순천시내권 희생사건 순천 진압 후 시내에는 진압군으로 꽉 찼다. 선제 공격부대인 제12연대 2ㆍ3대대, 제3 연대 1대대, 제2연대 1대대, 제4연대 2대대, 기갑부대, 전투사령부 등이 있었고, 경찰부 대들이 진주하여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124) 반군협조자 색출을 시작했다. 참고인 최 에 따르면, 색출된 반군협조 혐의 민간인들은 군경의 취조를 받은 후 혐의만으로 순천 시 외 야산에서 구덩이를 파고 총살당한 후 매장됐다.125) 10월 23일에는 순천지청 검사 박 찬길과 순천인민위원회 부위원장, 순경 한 명, 남녀학생 등 모두 22명이 총살되었다.126) 당시 광주지방검찰청 차석검사였던 박찬길의 죄목은 반군에 협조하여 인민재판소 재판 장을 지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혐의는 후일 근거 없이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 다.127) 그가 총살된 진짜 이유는 경찰이 검거한 좌익인사를 법규정대로 처리하면서 빚어 진 경찰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조만식의 제자이고 기독교도였던 박찬길은 엄격한 법의 Summary no. 166, 1948년 11월 5일 12일; USFIK file, box 76/96, Roberts가 PMAG에 보 내는 1950년 10월 25일자 문서; message from Hausman," 1950년 10월 25일. Bruce Cumings, Korea's Place in the Sun: a modern history, W.W. Norton & Company, 1997(브루스 커밍스, 김동 노 외 옮김, 뺷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뺸, 창비, 2001, 313쪽에서 재인용). 123) 백선엽, 뺷실록 지리산뺸, 고려원, 1992, 쪽. 이 대목은 정부 공식기록에서도 확인된다. 국방부 전 사편찬위원회, 뺷한국전쟁사 : 해방과 건군( )뺸(제1권), 1967, 464쪽. 124)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뺷한국전쟁사 : 해방과 건군( )뺸(제1권), 1967, 464쪽; 사사키 하루다 카, 뺷한국전비사 건군과 시련뺸(상권), 병학사, 1977, 쪽. 125) 참고인 최 면담보고서( ); 참고인 최 통화보고서( ). 순천시내 부역자 색출 의 주체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당시 조선민족청년단 단원으로 북국민학교 부역자 색출작업에 참여했 던 참고인 최은 군인들이 시민들을 경찰에게 인계했고, 반군협조자 색출작업은 경찰이 담당했다고 했다. 그러나 순천철도국에서 근무한 참고인 신은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15연대 군인들이 북국 민학교에 민간인들을 잡아와 말 몇 마디하고 그냥 쏴 죽였다고 했다. 참고인 최 면담보고서 ( ); 참고인 신 녹취록( ). 126) 반란지구 답사기, 동광신문( ). 당시 순천농림중학교 교장이 남긴 일기를 보면 24일에는 최 천의 지휘 하에 일제조사가 있었고 오후에 5명이 총살당했다고 한다. 25일에는 총살형이 없었고, 오후 5 시 혐의자 전부를 경찰서로 이송한 뒤에는 군인이 주둔했다. 한편 권승렬 법무부장관의 국회보고에서는 같은 보고임에도 불구하고 총살일자가 23일 오전과 24일 오전 두 가지로 나와 있다. 권승렬 법무부장관, 뺷국회속기록뺸제5회 제13차, 쪽. 127) 권승렬 법무부장관ㆍ윤치영 발언, 뺷국회속기록뺸제5회 제14호, 282쪽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5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기준에 따라 좌익사건을 처리하곤 했는데, 좌익척결에 앞장섰던 경찰은 박찬길이 가벼운 형벌로 좌익을 처리하자 그를 좌익검사 로 여겼던 것이다. 128) 경찰은 여순사건을 기화로 삼아 박찬길에게 보복을 감행했다. 129) 당시 광주지방검찰청 순천지청장 출신 참고인 윤 은 (사건 당시) 숨어 지내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박찬길 검사는 억울하게 죽었다 고 했다. 130) 한편 1949년 이후 순천시내권은 토벌작전부대의 주요 주둔지로서 토벌군 각 연대가 주 둔하거나 작전을 펼쳤다. 국군 제15연대와 4(20)연대는 순천지구의 주력부대로 남국민 학교, 주암면, 황전ㆍ월등면 등지에 주둔하며 빨치산 동조 민간인들을 연행 및 구금하고 사살하였다. 순천경찰서 경찰들도 반군협력자를 색출ㆍ연행하여 조사한 뒤, 즉결처형하거나 군법회 의에 회부했다. 순천 대한청년단 단장으로 반군협조자 색출과정에 깊이 관여한 황우수는 25일(24일로 추정됨) 북국민학교에서 12명을 가려내 인근 농고에서 총살했다고 증언했 다. 131) 참고인 황도 (경찰이) 북국민학교에서 색출된 여 명의 좌익협조자 혐의자들을 동천 건너 봉화산 죽두봉 골짜기에서 무참히 사살했다고 했다. 132) 당시 순천경찰서 사찰과 형사였던 김봉운은 국군 12연대가 반란군 혐의자 30명을 용수동 수 원지에서 총살했다고 말했다. 133) 순천시내권 사건은 목격(전문) 참고인이 부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각 읍면과 는 달리 도시화가 진척되어 지역공동체 자체가 유지ㆍ계승되기 어려운 조건에 기인한다. 순천시내권의 피해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순천 진압 이후 벌어졌던 반군협력 자 색출과정에서 희생된 경우와, 1948년 10월 말부터 이듬해까지 벌어진 토벌작전과정 에 희생된 경우가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 행방불명되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이 편재한다. 매곡동 집단희생사건은 순천 진압과정에서 벌어진 대표적인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이다. 128) 김득중, 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논문, 2004, 176~177쪽. 129) 당시 순천경찰들과 함께 반군가담 혐의자 색출에 적극 관여한 한청단장 황우수는 여순사건 전부터 경찰 이 박찬길을 죽이려고 이를 갈고 있었다 면서, 그의 경우는 경찰에게 밉보여 죽음을 당한 것 이라고 말 했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팀, 여수 14연대 반란 녹취록 ( 방영) 황우수 증언, 141쪽. 130) 참고인 윤 면담보고서( ). 131)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팀, 여수 14연대 반란 녹취록 ( 방영) 황우수 증언, 141쪽. 132) 참고인 황 면담보고서( ). 133) 김석학ㆍ임종명, 광복 30년 제2권, 전남일보사, 1975, 200~201쪽. 순천지역 여순사건 531

60 제3권 매곡동 집단희생 사건 조사결과, 매곡동 사건은 1948년 10월 22일 순천 탈환작전 과정에서 국군 12연대 3대대 (이유성 대위 지휘)와 3연대 2대대(조재미 대위 지휘)가 민간인들을 반군협조 혐의 등을 이유로 매곡동 매산여고 부근에서 집단사살한 사건이다. 134) 참고인 박기일 135) ㆍ황종권 136) ㆍ이명식ㆍ김정애, 신청인 우채규 137) 의 을 종합하 면, 1948년 10월 22일 오후 7시경 철모에 흰 띠 두른 12연대 군인들이 집에 들이닥쳐 아무도 없냐고 소리를 질렀다. 순천중학교 학생이었던 우영철(직다-6382, 19세)이 내다 보자 너 나와! 해서 끌려갔다. 다음날 아침 동네주민들 다수가 그 군인들에게 죽었다. 진압군은 우영철, 황인주(직다-6419, 연령미상), 서평촌(직다-6419, 연령미상), 김옥순 (직다-6419, 연령미상), 황하연(직다-6419, 연령미상), 황종은(직다-6419, 연령미상), 방광수(직다-6419, 연령미상), 김용환(직다-6419ㆍ8267ㆍ9939, 22세), 안태현(직다 -6419ㆍ7165, 47세), 김삼수(직다-7165, 42세), 안종만(직다-7165, 17세), 안선자(직 다-7165, 15세), 나(직다-6419, 이름ㆍ연령미상), (직다-6419, 성명ㆍ연령 미상), (직다-6419, 성명ㆍ연령미상), (직다-6419, 성명ㆍ연령미상), (직다-6419, 성명ㆍ연령미상), (직다-6419, 성명ㆍ연령미상), (직다 -6419, 성명ㆍ연령미상), (직다-6419, 성명ㆍ연령미상), (직다-6419, 성명 ㆍ연령미상), (직다-6419, 성명ㆍ연령미상), (직다-6419, 성명ㆍ연령미상), (직다-6419, 성명ㆍ연령미상), (직다-6419, 성명ㆍ연령미상), (직다 -6419, 성명ㆍ연령미상) 등 26명의 주민들을 매산중학교 담길(현재 매곡동 성서신학원 134) 당시 매곡동 부근에서 탈환작전을 벌였던 3연대 2대대 소속 이등병 소총수 최동옥은 순천 진입 시 소위 자위대원을 생포하여 약 30명을 총살했다고 증언했다. 3연대와 같이 22일 순천시내에 진입한 12연대 3대 대 9중대장 송호림은 9중대가 순천 중앙에 들어가서 농업학교 근방까지 갔다고 증언했다. 여기서 농업학 교는 순천농림중학교를 말한다. 농림학교와 매곡동의 거리는 불과 300m 정도다. 최동옥 증언록, 한국 전쟁증언록, 군사편찬연구소 소장; 송호림 증언록, 한국전쟁증언록, 군사편찬연구소 소장. 한편, 신 청인 김정애는 1948년 10월 22일경 매곡동에 국군 백두산호랑이부대가 들어와 총살했다고 했다. 이 는 5연대 김종원 부대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나, 5연대는 10월 22일 순천에 들어오지 않았다. 신청인 김정 애 ( ). 135) 25구의 시신을 수습했던 박기일은 시신마다 페니실린 병에다 이름을 적어넣어, 신원 확인을 하려고 했다 고 회고했다. 매장장소는 현 삼풍그린파크 2차 아파트 뒤편 매곡동 경노당 뒤편이라고 했다. 진실화해위 는 충북대 박물관과 함께 2008년 7월 28일부터 8월 8일까지 매곡동 참고인 박기일이 주장하는 장소에 대 한 유해발굴을 실시했다. 그 결과 유해는 발굴되지 않았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 관련 08년 유해발굴 중간보고회 자료집, 민간인 집단희생 유해발굴 조사단, 2009, 85쪽. 136) 황종권은 사살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참고인 황종권 통화보고서( ). 137) 우채규는 희생자 우영철의 연행과정을 직접 목격했다고 했다. 신청인 우채규 (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6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정문 아래쪽 20여 미터 지점)에서 사살했다. 138) 이 가운데 당시 군청 축산계장이던 안태 현과 그 아내 김삼수, 중학교 6학년이었던 안종만, 그 여동생 안선자 등 신청인 안금자의 일가족이 모두 몰살됐다. 신청인 안금자의 이다. 전 간호사를 했어요. ( ) 저 혼자 갑자기 충격을 받아 정신이 없었고,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왔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몇 년 동안 정신이상이 된 듯 아파서 아무 일도 못했습니다. 139) 매곡동 사건 희생자 가운데 김용환(직다-8267ㆍ9939ㆍ6419)의 경우, 희생자의 연행 을 목격한 신청인 김정애의 에 따르면, 1948년 10월 22일 회사원 김용환이 오전 숙 직을 하고 귀가하는 길에 진압군에게 연행되어 매곡동에서 사살되었다. 140) 26명의 시신 수습현장을 목격한 참고인 김용기의 이다. 그때가 초가을 10월 어두울 때였어요. 사살현장을 보진 못했지만 총소리가 막 들렸는데. 그 이튿날 죽은 사람들 시신을 수습하는 걸 봤습니다. 다른 시신들은 가마니에 싸서 묻었는 데 김용환의 시신은 마침 집에 할머니가 돌아가실 경우에 대비해 준비해둔 관에 넣어 다른 시신들과 같이 묻었어요. 묻은 곳이 당시 선교사 땅하고 일반 사람들 땅하고 경계가 되는 지점인데, 철조망에서 불과 4 5미터 지점이었어요. 지금 가보니 현장이 완전히 바뀌어서 찾을 수 없었어요. 141) 참고인 박는 사건 다음날 아침 매곡동 매산중학교 담벼락 느티나무 부근에 시신 이 늘어져 있던 것을 목격했다 고 했다. 142) 조사결과, 매곡동 집단희생사건의 희생자 는 26명으로 알려져 있으나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희생자는 12명이었다. 143) 조곡동 이봉권(직다-7782, 29세)의 경우, 희생자의 시신을 목격한 신청인 이용권, 참 고인 김연식ㆍ김용래의 을 종합하면, 1948년 10월 24일(음 ) 12연대 군인 2 3명이 조곡동 마을에 와 젊은이들을 마을회관에 소집했다. 신청인 이용권도 회관으로 나가려는 차, 밖에서 총소리가 났다. 부랴부랴 달려갔더니 집 근처 골목에서 모친과 동생 이 형 이봉권의 시신을 부여잡고 울고 있었다. 옆에는 무엇을 잘못했는지 사병이 장교에 138) 참고인 김용기 통화보고서( ); 신청인 우채규 ( ). 139) 신청인 안금자 ( ). 140) 신청인 김인중 ( ); 신청인 김정애 ( ). 141) 참고인 김용기 통화보고서( ). 142) 참고인 박 통화보고서( ). 143) 이 사건은 진실규명대상자 26명을 대표 신청한 사건이었다. 희생 확인된 12명을 제외한 나머지 이름을 알 수 없는 14명은 제적등본 및 관련 참고인을 확보할 수 없어, 진실규명이 불가능했다. 순천지역 여순사건 533

62 제3권 게 혼이 나고 있었다. 그때는 이미 마을회관 앞에 모인 청년들 가운데 반군협조 혐의자가 없어, 12연대 장교가 모두를 귀가시킨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사병이 우발적으로 주민 1 명을 사살하여 혼이 나고 있던 것이다. 그 1명이 이봉권이었다. 144) 특히 조곡동은 순천 탈환작전 시 민가를 향한 진압군의 발포로 인해 사망한 경우도 있 었다. 희생자의 사망을 목격한 참고인 김정수ㆍ김학용ㆍ정영철ㆍ정영호의 에 따르면 1948년 10월 23일 아침 정영자(미신청인, 10세)가 순천시내로 진입한 진압군의 총에 맞 아 즉사했다. 145) 참고인 정영철의 이다. ( )총소리가 멀리 시내 쪽(장대다리 쪽)에서 계속 들려왔으며 점점 가까이 크게 들려오 면서 순식간에 저의 집 앞까지 들려왔고 갑자기 저의 집에 총탄이 날아왔으며 유리창이 깨 지는 소리가 나더니, 벽을 뚫은 총구멍에서 흙먼지들이 튀였고 우리 가족 모두는 죽는 줄 알고 부엌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었는데 갑자기 나의 한쪽 팔꿈치가 따뜻하여 옆을 보니 나의 동생 영자가 귀 뒤쪽 머리에 총을 맞아 피가 쏟아져 나와 나의 몸을 적시면서 죽어 있 었습니다.( ) 146) 석현동 황천식(직다-2626, 30세)의 경우, 참고인 정순심의 에 따르면, 1948년 11월 15일(음 ) 순천시내에 구경을 간다고 나가, 순천경찰서로 연행된 뒤 사살되었다. 147) 오림동의 경우, 희생자의 연행과정을 목격한 신청인 신희종의 에 따르면, 1948년 10월 하순경 헬멧에 흰 띠를 두른 진압군이 들이닥쳐 사람들을 모두 도사초등학교로 소 집했다. 신태수(직다-1781, 31세)는 자택에서 경찰 3명에게 연행되어 도사초등학교로 끌 려갔다. 마을주민들 중 신태수만 순천경찰서로 이송되었다. 한 달 뒤 1948년 11월 말(음 10월 말) 경찰들이 신태수를 비롯하여 같이 끌려온 사람들을 트럭 2 3대에 나눠 실어 현 이수중학교 부근 죽도봉 공동묘지에서 집단으로 사살한 뒤 시신을 소각했다. 148) 참고인 김보례의 에 따르면, 순천 진압작전 시 경찰에게 쫓기던 용당동 거주 허종 순(직다-3435, 25세)이 1949년 3월 7일경(음 2. 8.) 체포되어, 서면 구랑실재 골짜기에서 144) 참고인 김연식 통화보고서( ); 참고인 김용래 통화보고서( ); 신청인 이용권 ( ). 145) 참고인 김정수 통화보고서( ); 참고인 김학용 진통화보고서( ); 참고인 정영철 진 술( ); 참고인 정영호 ( ). 146) 참고인 정영철 ( ). 147) 참고인 정순심 통화보고서( ). 신청인 황방자는 2005년 7월 1일 순천경찰서에 부친 황천식의 소재 파악을 의뢰했다. 그 결과, 황천식이 여순사건 관련자로 전남 광주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회신을 받았다. 순천경찰서, 사건처리상황통지, ) 신청인 신희종은 총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신청인 신희종 (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6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집단으로 사살되었다.149) 당시 미군 G-2 기간보고서는 1949년 3월 7 일 서면에서 군경토벌대가 반군 한 부대를 공격해 반군 1명 사살에, 1명 생포, 칼빈총 1정 을 노획했다고 적고 있다.150) 순천 진압 후 반군협력자 색출과정에서 일제하 민족해방운동가의 가족도 피해를 입었다. 순천 탈환 후 1948년 10월 31일경 진압군이 저전동에 들이닥쳐, 집집마다 사람들을 끌어내 트럭에 실었다. 최명순(직다-10095, 28세)도 군인에게 연행되어 트럭에 실렸다. 이후 끌려간 사람들과 함께 죽도봉에서 진압군에게 사살되었다. 신청인 장우수는 부친 장남현의 성향이 모친의 죽음과 관련이 있지 않겠느냐 며 죽은 아버지 때문에 산 어머니가 죽었다 고 했다.151) 여순사건 당시 학생들의 참여가 컸던 만큼, 진압 후 교육계의 피해가 적잖았다. 교사들 은 학생에 대한 관리감독을 소홀했다거나, 좌익선동을 했다는 혐의로 사살되었다. 순천 행정동 71번지에 살던 중학교 수학교사 이상호(직다-3381, 24세)는 여순사건 당시 군경에게 연행되어 살해되었다.152) 매산중학교 교사 최창수(미신청, 23세)ㆍ김옥태(미신청, 31세)의 경우, 참고인 박 의 에 따르면, 1948년 여순사건 당시 12연대 진압군이 들어온 직후 순천경찰서로 연행된 뒤 서면 압곡리 구랑실재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사살되었다. 사건 직후 어머니 고옥랑이 최창수의 시신을 수습했다.153) 저전동의 경우, 일본고등음학학교(현 일본국립 음악원) 출신 순천여중 음악교사 김생옥(미신청, 30세)이 광주에서 개인음악회를 준비하 다 순천경찰서의 출석요구를 받고 출두했다. 김생옥은 좌익선동을 했다는 혐의로 ) 참고인 허보례 통화보고서( ). 경찰자료에는 허종순이 사살된 자 로 기재되어 있다. 순천경찰서, 뺷사실조사서뺸, 1980.; 순천경찰서, 뺷보안기록회보조회서뺸, ) HQ, USAFIK, 뺷G-2 Periodic Report뺸( )(주한미군 정보일지) 제7권, no. 1085,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1989, 360p. 151) 저전동에 살던 장남현은 일제시기 광주학생운동에 호응, 부산지역 학생운동을 조직하여 실형을 산 인텔 리 출신 민족해방운동가였다. 신청인 장우수가 국가보훈처로부터 제공받아 제출한 포상자 공적 에 는, 장남현이 월 말경 부산 제2공립상업학교 재학 중 광주학생의거에 호응하여 동맹휴교를 강행 하기 위한 일환으로 격문 수천 통을 만들어 학교 교실과 부산시내에 살포하였으며, 에는 조선 방직주식회사 동맹파업 활동에 참여하여 격문 150매를 작성, 동월 21일 부산시내에 살포하는 등의 활동 을 하다 被逮되어 징역 10월을 받은 공적이 인정되므로 건국포장에 해당하는 분으로 판단됨 이라고 기재 되어 있다. 국가보훈처, 포상자 공적, ; 신청인 장우수 ( ).; 참고인 장여자의 에 따르면, 장남현은 해방 후 정치활동과는 거리를 둔 채, 오로지 생업에만 몰두하다, 1947 년 지병으로 사망했다. 참고인 장여자 통화보고서( ) 152) 참고인 정기태 통화보고서( ). 153) 매산중학교 교장 김형모는 사건 직후 학생들을 모아놓고 최창수, 김옥태 두 교사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울먹이며 말했다고 한다. 한편 최창수의 시신은 구랑실재에 가매장된 후 1960년 전남 함평의 선산으로 이장됐다. 참고인 박 ( ); 참고인 최 면담보고서( ); 참고인 이 면담보고서( ); 참고인 박 통화보고서( ). 순천지역 여순사건 535

64 제3권 년 10월 31일 죽도봉 골짜기에서 사살되었다. 154) 순천 행동 71번지에 살던 정기홍(직다-3382, 26세)은 여순사건 당시 4연대에게 연행되 어 살해되었다. 155) 가곡동의 경우, 여순사건 당시 회사원 한석기(직다-8279, 40세)가 출근 후 행방불명되 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156) 덕월동 참고인 최홍수의 에 따르면, 여순사건 당시 덕월동에 살던 홍성표(직다 -9895, 23세)는 동네친구인 14연대 군인 오기석 상사와 주막에서 술을 마시다, 장난삼아 오기석의 총을 쏴보았다. 총소리 듣고 인근 도사지서에서 반군이 출현했다며 출동, 총을 쏜 홍성표를 잡으려 했다. 겁을 먹은 홍성표는 도주했다. 도피생활을 하던 홍성표는 모친 의 설득 끝에 자수했다. 경찰은 모친에게 자수하면 살려준다는 회유를 한 상태였다. 살려 준다던 경찰은 1948년 가을 홍성표를 송치재(소련재)에서 사살했다. 157) 1948년 10월 20일 아침, 반군이 여수에서 통근열차를 이용하여 순천까지 진입했던 까 닭에, 기차를 징발당한 철도국 공무원들도 반군협조자로 몰려 피해가 컸다. 동외동 참고 인 조윤남의 에 따르면, 1948년 10월 23일 순천이 진압된 후 순천철도국 공무원 신원 문(직다-9929, 17세)이 출근한 후 순천역에서 순천경찰에게 사살되었다. 며칠 뒤 얼굴을 간신히 알아보고 순천역에서 시신을 수습했다. 158) 덕암동의 경우, 1948년 11월 20일경 순천경찰은 순천철도국 기관사 장환봉(직다-1026, 29세)을 체포하여, 철도국 창고에 한 달간 감금했다. 1948년 11월 30일경 군경이 장환 봉 외 감금되어 있던 30 40명을 조곡동 죽도봉에서 사살 후 시신을 소각했다. 159) 한편,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무혐의처분을 받아 귀가하던 중에 잠복 중인 군인들에 게 사살당한 사건도 있었다. 동외동에 살던 이계수(직다-9925, 26세)는 1948년 11월경 순 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귀가 중 현 순복음교회 앞 도랑가에서 잠복 중인 군인들에게 불시검문 받다 사살되었다. 160) 154) 참고인 유혜량 ( ). 155) 참고인 정기태 통화보고서( ). 신청인 정기순은 희생자 정기홍이 1947년 민주청년동맹결성식 에 참가하는 등의 사회의식이 있었고, 이런 과거 행적이 문제가 된 것 같다고 했다. 신청인 정기순 ( ). 156) 신청인 김양희는 희생자 한석기의 아들인 남편도 아버지의 일에 대해선 입을 열지 않는다고 했다. 신청인 김양희 ( ). 157) 참고인 최홍수 통화보고서( ). 158) 참고인 조윤남 통화보고서( ). 159) 참고인 진점순 ( ). 160) 희생자 이계수가 연행되는 것을 목격한 신청인 김순덕은 수습해온 이계수의 시신을 목격했다고 했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6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경찰의 가혹한 고문에 못 이겨 말한 허위자백 때문에 친인척이 사망하는 사건도 있었 다. 안풍동 참고인 차점덕의 에 의하면, 여순사건 당시 순천시 안풍동 월평마을에 살 던 정병현이 좌익활동에 가담했다. 진압 후 경찰이 정병현의 집을 수색했다. 경찰은 정병 현의 소재를 물으며, 아내 이복남을 고문했다. 이복남은 고문에 못 이겨, 남편이 옆 수동 마을 종친 정순현(직다-8057, 37세)ㆍ정계현(직다-8057, 27세)의 집으로 피신했다고 말했다. 1949년 7월(음 6월)경 순천 안풍동 159번지 정순현의 집에 순천경찰서 경찰이 들이닥쳐 집안을 수색했다. 경찰은 놀란 정순현, 정계현을 몽둥이로 마구 구타하면서, 정 병현의 소재를 추궁했다. 별 소득이 없자, 경찰은 철수했다. 두 사람은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지만, 한 달 뒤 정순현이 먼저 사망했다. 사인은 장파열과 과다출혈이었다. 두 달 뒤 정계현도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161) 1950년 1월 2일(음 ) 순천경찰서 경찰들이 순천시 와룡동에 살던 백학선(직다 -9937, 24세)을 연행했다. 경찰들은 백학선을 이틀 동안 감금한 뒤, 와룡동 늘너리 골짜기 에서 마을주민들과 함께 사살했다. 162) 1949년 11월 19일(음 ) 15연대가 풍덕동에 살던 장종환(직다-1421, 34세)을 연행 했다. 장종환은 장대다리에서 포승줄에 손과 몸을 묶인 채 트럭에 실렸다. 희생자가 끌려 가는 광경을 목격했던 누이 장혜자에게 장종환은 눈물을 지었다. 트럭에는 50여 명 정도 가 갇혀 있었다. 트럭은 죽두봉 상봉에서 멈췄다. 장종환 등 50여 명이 집단으로 사살되 었다. 그날 저녁, 아들의 연행 소식을 듣고 시신이라도 수습한다고 집을 나간 장용암(직 다-1421, 63세)도 군경에게 살해되었다. 163) 장천동에서는 1948년 10월경 순천경찰서 경찰이 김유섭(미신청, 31세)을 순천시 장천 동 구 성카톨릭병원 앞 자택에서 연행한 뒤 살해했다. 164) 조사결과, 순천시내권 희생자는 1,200여 명으로 추산 165) (<표 3> 참조)되나 미신청을 포함한 진실규명대상자 수 총 47명 가운데, 진실화해위원회가 희생사실을 확인한 사람은 다. 신청인 김순덕 ( ). 161) 참고인 차점덕 통화보고서( ). 162) 신청인 백영묵 ( ). 경찰자료에는 백학선이 사살된 자 로 기재되어 있어, 신청인 이 주장하는 사건일자와 일치한다. 순천경찰서, 사실조사서, 1980; 순천경찰서, 보안기록조회회보서, ) 참고인 장혜자 통화보고서( ); 신청인 장광수 ( ). 164) 참고인 김관 통화보고서( ). 165) 진실화해위원회는 신청인과 참고인의 속에서 언급되는 피해인원을 근거로 별도의 시내/읍 면별 피해 추산치를 산출했다. 신청(참고)인의 기억에만 의존하여 된 피해인원을 직접적으 로 신뢰하긴 어려워, 잠정적인 피해규모를 가늠하는 근거로만 활용했다. 순천지역 여순사건 537

66 제3권 32명이다. 1명은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순천시내권 희생자 신원 확인 결과와 주요 사 건의 희생장소 및 추산치는 아래 <표 2>, <표 3>과 같다. <표 2> 순천시내권 희생자 신원 확인 연 번 희생자 이름 성별 당시 나이 거주지 사건 번호 경찰 자료 참고인 시신수습 여부 확인 근거 제적 등본 확인 유족회 희생자 명단 기타 확인 / 추정 여부 장환봉 ( 張 環 峰 ) 장용암 ( 張 龍 岩 ) 장종환 ( 張 鍾 桓 ) 신태수 ( 申 泰 秀 ) 황천식 ( 黃 千 植 ) 이상호 ( 李 祥 昊 ) 남 29 남 63 남 34 남 31 남 30 남 24 7 정기홍 남 허종순 ( 許 鍾 順 ) 우영철 ( 禹 榮 哲 ) 남 25 남 19 시신이 순천시 덕암리 1026 불에 타 재를 수습 순천시 풍덕동 순천시 풍덕동 공무원 인사기록 카드 확인 1421 확인 1421 확인 시신이 순천시 오천동 1781 불에 타 재를 수습 순천시 석현동 2626 순천시 순천면 순천시 순천면 확인 순천 경찰서 민원처리 통지서 (사망추정) 확인 3381 확인 3382 확인 순천시 사망 용당동 3435 신고 안 됨 순천시 매곡동 황인주 (황인주) 남 66 순천시 매곡동 서평촌 (서평촌) 확인 6382 확인 6419 확인 여 확인 12 김옥순 (김옥순) 여 확인 13 황하연 여 확인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6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희생자 이름 성별 당시 나이 거주지 사건 번호 경찰 자료 참고인 시신수습 여부 확인 근거 제적 등본 확인 유족회 희생자 명단 기타 확인 / 추정 여부 14 황종은 남 확인 15 방광수 남 확인 중앙병원 간호사 부 중앙병원 간호사 모 중앙병원 간호사 언니 남 6419 불능 여 6419 불능 여 6419 불능 19 나씨 딸 여 6419 불능 20 나씨 사위 남 6419 불능 불능 불능 불능 불능 불능 불능 불능 불능 불능 30 안태현 남 김삼수 여 안종만 남 17 순천시 매곡동 와 중복신청 순천시 매곡동 와 중복신청 순천시 매곡동 와 중복신청 확인 확인 확인 순천지역 여순사건 539

68 제3권 연 번 희생자 이름 성별 당시 나이 거주지 사건 번호 경찰 자료 참고인 시신수습 여부 확인 근거 제적 등본 확인 유족회 희생자 명단 기타 확인 / 추정 여부 33 안선자 여 이봉권 ( 李 奉 權 ) 정순현 ( 鄭 順 鉉 ) 남 29 남 37 순천시 매곡동 와 중복신청 순천시 조곡동 7782 순천시 안풍동 (사망 일자 일치) 확인 확인 7865 확인 36 정계현 ( 鄭 桂 鉉 ) 남 27 순천시 사망 안풍동 7865 신고 안 함 확인 37 김용환 ( 金 容 煥 ) 남 23 순천시 6419,9939 매곡동 8267 와 중복신청 확인 38 한석기 ( 韓 碩 基 ) 남 40 순천시 가곡동 8279 추정 39 홍성표 ( 洪 聖 杓 ) 남 23 순천시 덕월동 9895 확인 40 이계수 ( 李 啓 洙 ) 남 26 순천시 동외동 9925 확인 41 신원문 ( 申 元 文 ) 남 17 순천시 동외동 9929 확인 42 백학선 ( 白 學 先 ) 남 24 순천시 와룡동 9937 확인 43 최명순 ( 崔 明 順 ) 여 28 순천시 저전동 확인 44 최창수 ( 崔 暢 洙 ) 남 23 순천시 매곡동 미신청 신고 안 됨 매산고 경력 증명서 확인 45 정영자 ( 鄭 榮 子 ) 여 10 순천시 조곡동 미신청 (사망 일자 일치) 확인 46 김생옥 ( 金 生 鈺 ) 남 30 순천시 순천여학 교 관사 미신청 확인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6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희생자 이름 성별 당시 나이 거주지 사건 번호 경찰 자료 참고인 시신수습 여부 확인 근거 제적 등본 확인 유족회 희생자 명단 기타 확인 / 추정 여부 47 김유섭 ( 金 有 燮 ) 남 31 순천시 장천동 미신청 확인 총계 총 47명 (확인 32명/추정 1명/불능 14명) 연 번 1 희생장소 희생자 수 희생시기 가해주체 지역 장소 세부 추산치 확인 순천 시내권 2 순천 시내권 3 순천 시내권 4 순천 시내권 5 순천 시내권 죽도봉 골짜기 (조곡동 둑실마을 안골) 생목동 수박등 공동묘지 둑실 5길 주변 일대 (정원 넥스빌, 금강메트로빌 아파트 지역) 현 이수중학교 (생목동 24번지) 및 인근 생목현대아파트, 금호타운아파트, 벽산아파트 일대 북국민학교 현 순천북초등학교 (매곡동 425-1) 순천농림 중학교(강당 뒤편 논) 매곡동 (매산길) 현 국립순천대학교 (중앙로 413, 매곡동 315) 현 매산중학교 담장 6 순천 시내권 기타 지역 순천경찰서 등 개별 사건 장소 총계 <표 3> 순천시내권 주요 희생장소와 희생자 수 1948년 10월 1949년 1948년 10월 1949년 1948년 10월 1948년 11월 1948년 10월 1948년 11월 1948년 10월 1948년 10월 1949년 12월 국군, 순천 경찰서 경찰 국군, 순천 경찰서 경찰 2연대ㆍ12연 대ㆍ15연대 ㆍ순천경찰 국군 2연대ㆍ 3연대ㆍ 4연대ㆍ12연 대ㆍ15연대 국군 12연대ㆍ 3연대 국군, 순천경찰서 경찰 비고 약 400명 166) 6명 167) 일제강점기부 터 경찰사격장 약130명 168) 5명 169) 순천철도 관계자 집단사살 후 시신 소각 약 100명 170) 1명 171) 반군협조 혐의자 심사 약 500명 172) 5명 173) 26명 174) 12명 175) ) 외 다수 20명177) 약 1200명 49명178) 순천지역 여순사건 541

70 제3권 2) 승주읍 희생사건 1985년 쌍암면에서 승격된 승주읍은 조계산과 인접해 있고, 분지였던 까닭에 피해가 잇따랐다. 승주읍 희생사건은 크게 두 가지로 유형화된다. 빨치산들의 보급투쟁 으로 인 한 피해와 도피에 따른 피해가 그것이다. 두 피해는 서로 연동되어 있다. 군경이 빨치산 에게 밥을 해주었다는 이유로 민간인을 사살하자, 이를 보고 신변에 위협을 느낀 마을주 민들이 산으로 피신, 결국 사살되었던 것이다. 누구나 반군협조 혐의를 받아 사살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목격한 마을주민들은 산으로 피신했고, 군경에게 발각되어 사살되었다. 승주읍은 여순사건 이후 1949년 초까지 황전ㆍ월등에 주둔했던 12연대와 1949년 4월 이후 외서ㆍ벌교에서 토벌작전을 벌인 15연대의 관할지에 속했다. 12연대와 15연대 군 인들은 거주 민간인들을 현지에서 사살하거나, 연행 및 고문한 뒤 불법적으로 사살했다. 쌍암지서 경찰들도 반군협조 혐의가 있는 민간인들을 연행하여 고문 및 취조한 후 불법 적으로 사살했다. 황전지서 주임으로 근무하다 쌍암지서 주임으로 부임해 온 임상기는 주민들을 가혹하게 대해 원성이 자자했다. 179) 먼저 구강리의 경우, 해방 이후 해남 출신 윤씨가 1년에 2 3번 마을에 와 며칠씩 묶 으면서 청년들에게 강연을 하곤 했다. 마을청년들은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 그 청년들은 166) 참고인 황 면담보고서( ). 167) 순천시내 거주 4명(직다-1026, 직다-1421, 직다-10095, 미신청 (김생옥)), 순천시내 이외 거주 2명(직다 -1353, 직다-1394). 168) 참고인 신 녹취록( ); 신청인 양병옥 ( ); 신청인 신희종 ( ); 신청인 이기화 ( ); 신청인 한재임 ( ). 169) 순천시내 거주 1명(직다-1781), 순천시내 이외 거주 4명(직다-1350, 직다-1422, 직다-9946, 직다-2246). 170) 반란지구 답사기, 동광신문( ); 참고인 신 녹취록( ); 신청인 이기화 ( ). 171) 순천시내 이외 거주 1희생자 명(직다-2400(주암면 거주)). 172) 참고인 유근춘, 한국전쟁 증언록, ( ); 참고인 정 ( ). 173) 순천시내 이외 거주 희생자 5명(직다-1341, 직다-3002, 직다-4050, 직다-7267, 직다-7505). 174) 신청인 위계룡 ( ); 참고인 김용기 통화보고서( ); 신청인 유채규 ( ). 175) 순천시내 거주 26명 (직다-6382, 직다-6419 확인 6명, 직다-7165 확인 4명, 직다-8267(직다-9939와 중복 신청). 직다-6419 불능 14명.). 176) 신청사건 중 순천시내 기타 지역에서 희생된 것으로 확인/추정된 수. 177) 순천시내 거주 희생자 16명(직다-1424, 직다-3381, 직다-3382, 직다-8279(추정), 직다-2626, 직다-7782, 직다-7865(확인 2), 직다-9925, 직다-9929, 직다-9937, 직다-3435, 직다-9895, 미신청 3(최창수, 정영자, 김유섭)), 순천시내 이외 거주 희생자 5명(직다-8366(확인 3), 직다-9104, 직다-8861). 178) 총 확인 수 = 순천시내 거주 확인 32명 + 순천시내 이외 거주 확인 17명. (순천시내 거주 총 47명(확인 32, 추정 1, 불능 14), 순천시내 이외 거주 총 17명(확인 17)). 179) 임상기는 한국전쟁 당시 휴가 나온 해병대에게 살해되었다고 전해졌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7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지방좌익활동에 가담했다. 180) 여순사건 당시 마을에 온 반군이 주민들에게 밥을 해달라고 하자, 마을구장과 반장들 은 해코지가 두려워 밥을 해주었다. 그러나 1949년 3월 6일(음 2. 7.) 이웃마을인 사제마 을을 포위한 12연대가 마을주민들에게 사제마을 구장 유흥두 집이 어디냐며 들이닥쳤다. 유흥두는 위협을 느끼고 도망가다 사살되었다. 12연대는 사제마을 반장 박태석을 체포한 뒤, 태촌마을 파수병들의 안내를 받아 태촌마을 반장 최동두(직다-4926, 28세)의 집에 쳐 들어왔다. 그리하여 사랑방에 자고 있던 최동두와 박태석을 묶어 쌍암지서로 연행했다. 다음날 1949년 3월 7일(음 2. 8.) 새벽 승주읍 서평리 뒷산인 서정재에서 총소리가 났다. 아침 9시경 면 장터 다녀오던 김천연이 집에 와 12연대가 최동두를 서정재에서 죽였다고 말해주었다. 181) 서정재 고개 도로변에서 최동두, 박태석의 시신이 수습됐다. 182) 두월리에서도 반군에게 밥을 해주었다는 이유로 민간인들이 지서경찰에게 사살되었다. 희생자의 연행과정을 목격한 신청인 김태옥의 에 따르면, 여순사건 당시 두월리 무 도마을에 산사람들이 내려와 밥을 해달라 하여 해코지할까 두려워 마을사람들이 밥을 해 줬다. 1949년 2월 12일(음 ) 쌍암지서 경찰들은 반군에게 밥을 해줬다는 이유로 김만옥(직다-9957, 26세)ㆍ김옥기 등 마을주민 4명을 쌍암지서로 연행했다. 모진 고문 과 구타가 이어졌다. 다음날 1949년 2월 13일(음 ) 쌍암지서 경찰들은 김만옥과 김옥기 등 끌려간 4명을 지서에서 살해했다. 인부들이 말이 끄는 수레에 김만옥, 김옥기 시신을 실어 수습해왔다. 183) 한편, 승주읍 유흥리에선 딸을 겁탈하려던 경찰을 가로막던 어머니가 사살당하는 사건 이 있었다. 참고인 조현규의 에 따르면, 1949년 8월 11일(음 ) 마을의 남자들이 나무를 베러 산에 간 사이 쌍암지서 순경들이 마을에 들어와 주민을 소집했다. 경찰이 집 집마다 돌며 남아 있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유흥리 463번지 참고인 조의 집에 순경이 들어와 어머니 장순심(직다-10091, 41세)을 집 밖으로 나가라고 위협했다. 딸의 위험을 직감한 장순심이 순경을 가로막았다. 순경이 모녀에게 총을 쏘았다. 장순심은 현 180) 참고인 조 ( ). 181) 신청인 최종우 ( ). 경찰자료에는 최동두가 6ㆍ25 당시 남로당원으로 부역타가 사살된 자 로 기재되어 있으나, 특이사항에 대상자의 부역사실이 불확실하다고 적고 있어, 이를 신뢰하기는 어렵다. 순천경찰서, 사실조사서, ) 신청인 최종우는 여러 곳에 총상을 입은 희생자 최동두의 시신을 목격했다고 했다. 신청인 최종우 ( ). 183) 신청인 김태옥은 김만옥, 김옥기의 연행과정과 시신을 목격했다. 김태옥이 제출한 제적등본에는 희생자 김만옥이 1949년 2월 14일 쌍암면 두월리 524번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신청인 김태옥 진 술( ). 순천지역 여순사건 543

72 제3권 장에서 즉사했고, 딸 조는 다리에 장애를 입었다. 피해 참고인 조의 이다. 그때가 49년 음력으로 7월 여름 더울 때였어요. 제가 열여섯 살이었는데. ( ) 마을엔 노 인들하고 여자들만 있었는데, 산판일에 안 나간 남자들이 있는지 찾으러 왔다고 나중에 들 었어요. 우리 집에는 어머니와 저만 있었는데 순경 한 명이 집에 들어왔어요. 마당에서 순 경이 어머니만 나오라고 어머니를 밀어냈어요. 어머니가 저만 남겨두고는 못 나가겠다고 마당에서 버텼어요. 그러니까 그 순경이 어머니를 총으로 쐈어요. 그리고 제가 서 있었는데 저를 한 방 쐈어요. 저는 총을 맞고 쓰러졌어요. 오른쪽 허벅다리에 맞았는데 총알이 살을 뚫고 나갔어요. ( )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나서 한참 질뚝질뚝 걸었어요. 음력 7월에 어 머니가 죽었는데 음력으로 4월생인 막내동생이 있었어요. 100일도 안 된 아기였는데 어머 니가 죽고 나서 젖을 못 먹어 그해 음력 11월에 죽었어요. 저를 쏜 그 사람 얼굴을 기억 못 해요. 검은색 경찰 옷을 입었는데. 제가 서 있다가 총에 맞고 쓰러졌는데. 어떻게 됐는지 정 신도 없고 기억도 안 나요. 184) 남강리의 경우 참고인 지진종ㆍ지영일의 을 종합하면, 누군가 마을에 반군이 숨겨 놓은 총이 있다고 쌍암지서에 신고를 했다. 1949년 1월 26일(1948. 음 ) 쌍암지 서 경찰이 저동마을 구장 지채종(직다-8121, 28세)을 총을 숨겨두었다는 이유로 연행했 다. 이후 쌍암지서 경찰들이 지채종을 승주읍 서평리 서정마을 원모퉁에서 사살했다. 185) 남강리 남정마을에 살던 김종필(직다-9905, 29세)이 1949년 9월 말경(음 8월 초) 마을 회관에서 산사람들에게 잡혀갔다. 그 후 10월 초(음 8월 중순경) 작은할아버지 댁을 거쳐 쌍암지서에 자수했다. 그날 저녁 쌍암지서 경찰들이 낙안면 목촌리 조산마을 뒤 야산에 서 김종필을 사살했다. 희생자 김종필의 지인이 현장을 목격하여 평사리 화목 거주 숙부 에게 연락해 1949년 10월 13일(음 ) 시신을 수습했다. 186) 도평리의 경우, 참고인 신형우ㆍ신복순의 에 따르면, 여순사건 당시 백현마을 임방 기와 임판규가 좌익활동에 가담했다. 순천경찰은 그 둘이 있으니 백현마을은 폭도 마 을 이라며, 주민들을 무차별 연행했다. 신창우(직다-9942, 26세)도 순천경찰들에게 연행 되어, 5일 동안 순천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 이후 무혐의로 쌍암지서로 이송했는 데, 쌍암지서 주임의 명령으로 1948년 12월 3일(음 ) 사살되었다. 경찰서에서 집 184) 참고인 조 면담보고서( ); 신청인 조기원 통화보고서( ). 185) 참고인 지진종 통화보고서( ); 참고인 지영일 통화보고서( ). 신청인 지정애가 제 출한 제적등본에는 희생자 지채종이 1948년 12월 28일 오후 9시 서면 남강리 1091번지에서 사망한 것으 로 기재되어 있다. 신청인 지정애 통화보고서( ). 186) 참고인 김주태 통화보고서(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7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으로 연락이 와, 누이동생 신복순, 신형우가 시신을 수습했다. 187) 신창우가 사망한 후 마을의 젊은이들이 쌍암지서로 끌려가 봉변을 당하는 상황에서 신 창우의 동생 신현우(직다-9943, 20세)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친구 4 5명과 야산에 은 거했다. 1949년 1월 말(음 12월 말경) 12연대는 승주읍 도정리 축내마을 노고치산에서 신현우를 발각하여 사살했다. 희생자의 누이동생 신복순, 신형우가 수소문하여 노고치산 에서 시신을 수습했다. 188) 승주읍 도정리에 살던 이덕심(직다-9263, 34세)은 여순사건 당시 산 중에 거주하고 있다 는 이유로 1949년경 1월경 마을주민과 함께 월등지서에 잡혀가 당일 고문으로 사망했다. 189) 두월리는 반군에게 밥을 해줬다는 이유로 12연대와 쌍암지서 경찰들이 마을주민들을 그 자리에서 사살하거나, 고문하여 살해했다. 참고인 김종태의 에 따르면, 1949년 2 월 5일(음 1. 8.) 저녁 마을에 반군이 들어와 자고 다음날 오전에 간 일이 있었다. 다음날 2월 6일(음 1. 9.) 아침 12연대가 마을에 들이닥쳐 주민들을 두월리 두얼2구 마을 논 앞으 로 소집했다. 전날 반군에 밥을 해준 김점수(직다-6289, 38세) 등 4명을 주민들이 보는 앞 에서 사살했다. 사살현장은 신청인의 집 바로 아래 논이었다. 시신은 바로 수습되었다. 190) 석흥리 이영오(직다-2795, 30세)의 경우, 참고인 이행수ㆍ한상출의 에 따르면, 1948년 12월 19일(음11.19.) 낙안 금산리 오리밭골 골짜기에 잠복 중이던 군경이 집으 로 오던 이영오를 반군으로 착각하여 사살했다. 191) 신청인 이홍재는 수습된 희생자 이영 오의 시신을 직접 목격했다. 192) 신전리 김복개(직다-9940, 37세)의 경우, 1948년 10월 말경 쌍암지서 경찰들이 승주읍 신전리에 살던 김복개 등 주민들을 반군에 동조했다는 혐의로 죽학리 대수골 마을회관 앞으로 끌고 가 사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193) 죽학리의 경우, 사살현장을 목격한 죽학리 참고인 이인례ㆍ최정운의 에 따르면, 187) 참고인 신복순 통화보고서( ); 참고인 신형우 통화보고서( ). 경찰자료에는 신창우 가 에 사살된 자 로 기재되어 있다. 순천경찰서, 사실조사서, ) 참고인 신복순 통화보고서( ); 참고인 신형우 통화보고서( ). 경찰자료에는 신현우가 6ㆍ25 당시 면 연락책으로 활약하다 에 사살된 자 로 기재되어 있으나, 특이사항에 는 부역사실 유무가 불확실하다 고 나와 있다. 부역사실 유무가 불확실 했음에도 사살이 이루어졌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순천경찰서, 사실조사서, ) 신청인 조찬익 통화보고서( ). 190) 참고인 김종태 통화보고서( ). 191) 참고인 이행수 통화보고서( ); 참고인 한상출 통화보고서( ). 192) 신청인 이홍재 ( ). 193) 신청인 김동석 ( ). 순천지역 여순사건 545

74 제3권 1949년 8월 9일(음 ) 저녁 빨치산 몇 명이 죽학리마을에 들이닥쳐, 주민들을 장복 철 집에 소집했다. 주민 30 40명이 모이자, 빨치산이 연설을 시작했다. 밖에선 반군의 출동 정보를 미리 알고 있던 쌍암지서 경찰들이 장복철의 집을 포위하고 있었다. 잠시 후 경찰이 장복철의 집을 급습했다. 주민들 일부는 겁을 먹고 뒤란으로 피했다. 경찰들은 도 주하는 이들을 무차별 사살했다. 최경심(직다-1524, 31세)ㆍ이소유(직다-4075, 28세) ㆍ강인호의 부인 ㆍ남평수의 어머니 ㆍ남득수의 어머니 등 5명 중 배를 맞은 이소유 등 세 명은 즉사했다. 최경심 등 2명은 살았다가 병원으로 옮겼으나, 다음날 8월 10일(음 ) 사망했다. 빨치산은 2명 사살되었다. 194) 조사결과, 승주읍 희생사건 진실규명대상자 13명 가운데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 인한 사람은 총 12명이며, 1명은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승주읍 희생자 신원 확인 결과 와 주요 희생장소 및 희생자 수는 아래 <표 4>, <표 5>와 같다. <표 4> 승주읍 희생자 신원 확인 연 번 희생자 확인 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시신 제적 유족회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수습 등본 희생자 기타 번호 자료 여부 확인 명단 여부 최경심 ( 崔 敬 心 ) 이영오 ( 李 永 五 ) 이소유 ( 李 小 臾 ) 최동두 ( 崔 東 斗 ) 김점수 ( 金 点 秀 ) 지채종 ( 池 采 鍾 ) 김종필 ( 金 鍾 弼 ) 여 31 남 30 여 28 남 29 남 38 남 28 남 28 승주읍 죽학리 승주읍 석흥리 승주읍 죽학리 승주읍 구강리 1524 확인 2795 확인 4075 확인 4926 확인 승주읍 두월리 6289 (사망일 자 일치) 승주읍 남강리 승주읍 남강리 8121 (사망일 자 일치) 확인 확인 9905 확인 194) 참고인 이인례 통화보고서( ); 참고인 최정운 통화보고서(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7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희생자 연 번 확인 근거 참고인 시신 수습 여부 제적 등본 확인 확인 추정 확인 확인 9957 (사망일 자 일치) 확인 확인 이름 성별 당시 나이 거주지 사건 번호 8 이덕심 (이덕심) 여 34 승주읍 도정리 김복개 (金福介) 남 37 승주읍 신전리 신창우 (申昌雨) 남 26 승주읍 도평리 신현우 (申炫雨) 남 20 승주읍 도평리 김만옥 (金萬玉) 남 26 승주읍 두월리 13 장순심 (張巡心) 여 41 승주읍 유흥리 총계 경찰 자료 유족회 희생자 명단 확인 / 추정 여부 기타 총 13명 (확인 12명/ 추정 1명) <표 5> 승주읍 주요 희생장소와 희생자 수 연번 1 희생 장소 지역 장소 승주읍 기타 지역 세부 희생시기 가해주체 국군 12연대 승주읍 서평리 뒷산 1949년 서정재 고재, 승주지서 등 1월 1949년 12월 쌍암지서 경찰 총계 희생자 수 추산치 확인 13명195) 외 다수 12명 13명 외 다수 12명 비고 3) 서면 희생사건 서면은 광양, 구례, 순천을 잇는 길목에 위치, 반군과 진압군의 주요 이동경로였던 까닭 에 지역 주민의 피해가 컸다.196) 특히 구랑실재는 순천에서 광양으로 넘어가는 주요 교통 195) 승주읍 희생자 수(승주읍 거주 14, 확인 13, 추정 1). 196) 서면은 순천지역 여순사건과 관련하여 가장 많은 사건이 접수된 곳이다. 순천지역 여순사건 547

76 제3권 요지였다. 또한 서면지역은 백운산과 인접해 있어 빨치산토벌을 위해 오랫동안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전쟁기까지 민간인 희생이 이어졌다. 한편, 일제하부터 농 민조합운동이 활발했던 역사적 배경은, 군경이 서면을 좌익의 근거지로 판단하게 하는 요인이 되어 더 큰 피해를 낳았다.197) 여수순천 탈환작전이 벌어진 10월 20일부터 24일까지 서면에는 제3연대 2ㆍ3대대, 4 연대 2개 중대, 12연대 1ㆍ3대대, 15연대 1대대가 진압작전을 펼쳤고, 진압이 마무리된 1949년부터는 제15연대 2대대가 서면 판교리 부근에 주둔하면서 반군협조나 반란가담 등의 혐의로 민간인들을 연행 및 구금하고 사살하였다. 서면지서 경찰들도 반군협력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서면 거주 민간인들을 구타한 뒤 지서로 연행하여, 고문 및 취조하거나 구금 뒤 사살하였다. 서면지서 주임 안198) 과 학구출장소 소장 구199)은 그 과정에서 직접적인 사살 지시를 내린 인물로 평가되 고 있다. 실제 서면지역 신청인들의 대다수가 가해자로 서면지서 경찰, 특히 안을 지 목하고 있다.200) 이러한 은 경찰 참고인 조사에서도 확인된다. 서면지서 한청단원과 의경으로 활동했던 황ㆍ배ㆍ서는, 지서주임 안이 많은 사람들을 잡아 엄하게 다뤘고, 서면 사람들을 많이 죽였다고 했다.201) 자기 비위에 맞지 않고 눈에 거슬리면 공산당으로 몰아 죽였고, 선평리 구장 허만관도 반군에 협조했다고 죽였다고 말했다.202) 이에 대해, 참고인 안은 그런 사실이 없다 며, 본인은 지역주민을 보호 하려 노력했다 며 본인과 관련된 에 대해 전면 부인했다.203) 학구지서 주임 구도 반군협력 혐의자를 가혹하게 처리했다. 서면 학구파출소 의경 197) 참고인 안 녹취록( ); 참고인 장 면담보고서( ). 198) 참고인 안의 과 그의 인사기록을 종합하면, 그는 평안도 용천 출신으로 1946년 봄에 월남하여 서면 광산부근 사택에서 생활하면서 서북청년단으로 활동했다. 이후 1948년 6월 9일 순경으로 임명되어 해남서, 순천서에서 근무하다 여순사건이 터지자, 순천시내 향림사 부근으로 피신했다. 순천이 진압된 10 월 28일경 순천서로 돌아와 사찰형사주임을 맡다, 1948년 11월 29일 경사로 승진되면서 서면지서 주임 으로 발령받았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강원지방경찰청에 안의 경력증명을 의뢰했다. 안은 5ㆍ16 군사쿠데타 이듬해인 62년 의원면직했다. 군부의 강요에 의한 면직이었다고 안은 했다. 강원지 방경찰청, <요청자료 송부>, 경무과-6642( ). 199) 구은 참고인 조사과정에서 당시 서면 면장이었던 장인 유영채가 반군에 의해 희생되어, 적개심에 불 탔다고 했다. 학구출장소 부임 전 구은 별량면 지서주임을 지내면서 별량지역 민간인 희생과정 에 깊숙이 개입했다. 참고인 구 통화보고서( ); 참고인 구 녹취록( ). 200) 신청인 정재종 통화보고서( ); 신청인 송순심 ( ); 신청인 박영규 ( ); 신청인 이상호 ( ). 201) 참고인 서 ( ). 202) 참고인 황 녹취록( ); 참고인 배 녹취록( ). 203) 참고인 안 녹취록(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7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으로 구과 함께 근무한 참고인 서는 구례로 가는 길목인 송치재에서 전기통신 망 파괴가 잦자, 학구지서 주임 구이 젊은 사람들을 많이 잡아서 죽였다 면서, 한번 은 장척마을 주민 윤두한을 반군에 밥을 해줬다는 혐의로 학구마을에서 장척마을로 가 는 중간지점에서 즉결처분했다 고 했다. 당일 서는 학구마을에 있었는데 이튿날 들어서 알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204) 윤두한과 관련하여, 참고인 구은 자신의 지시로 부하 경찰들이 윤두한을 사살했다며, 즉결처분을 시인했다. 본인은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 하려고 했으나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205) 안과 구이 거론된 사건 들은 여순사건 당시 혐의의 사실 여부보다는, 지역 치안책임자의 개인적인 판단이나 감 정 또는 모함이 더 중요한 사살이유가 될 수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조사결과, 서면지역의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은 희생자 수와 유형에서 몇 가지 특징을 보인다. 대규모 집단희생사건 변복 등의 기만술 동원 대살 등이 그것이다. 서면 판 교리와 용계산에서 1949년에 걸쳐 주둔 부대와 지서경찰에 의해 도합 100여 명 이상의 피해자를 낸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이 벌어졌다. 서면에 주둔한 15연대 2대대와 광양에서 출동한 15연대 1대대는 반군 및 빨치산으로 변복한 후 이를 착각한 주민들을 무차별 사 살했다. 또한 반군협조자 혐의로 이미 사살되거나, 사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일 가족을 찾아 몰살하기도 했다. 서면 판교리 노은마을 희생사건 판교리 노은마을 희생사건 은 1949년 3월 19일(음 ) 서면지서 경찰에게 인계받은 반군혐의 민간인들을 서면 판교리 주둔 15연대 2대대가 주둔지 부근에서 집단으로 사살 한 사건이다. 206) 조사결과, 약 100여 명의 주민들이 사살된 것으로 추정되나, 진실위원회 에서 확인된 희생자는 정태구(직다-6384, 19세), 김홍연(직다-6385, 24세) 2명이다. 참고인 정막례의 에 따르면, 운평리 용당마을에 거주했던 지방좌익 정민택의 부탁 으로 정민택 동생 정을 비롯하여 마을주민 정태구, 김홍연, 김봉기, 김영두가 반군에 게 쌀을 갖다준 일이 있었다. 운평리 용당마을 뒷산은 노은마을 산과 연결되는 반군들의 근거지였다. 1949년 3월 18일경(음 경) 서면지서 주임 안과 경찰들은 양씨마을 204) 참고인 서 ( ). 205) 참고인 구 녹취록( ). 206) 미군 G-2 기간보고에는 1949년 3월 25일 1개 국군 소대가 생포된 반란군들의 안내를 받아 순천에 있는 반란군 거점을 공격했다. 반란군 6명이 사살됐다 고 기술되어 있다.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 )(주한미군 정보일지) 제7권,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1989, 419p. 순천지역 여순사건 549

78 제3권 초상집 문상 중인 정태구, 정, 김봉기, 김영두, 김홍연 등을 구타한 뒤 연행했다. 인근 월곡마을에서 체포되어 끌려온 정운용과 함께였다. 그들은 지서에서 하루 감금되어 있다 가, 3월 19일경(음 경) 서면 판교리 노은마을 뒷산에 주둔했던 15연대 2대대에 인계 되었다. 15연대는 노은마을 뒷산에서 같이 끌려온 판교리 주민 100여 명과 함께 정, 정태구, 김홍연, 김봉기, 김영두를 사살했다. 정용운은 총알이 빗맞아 죽은 척해 기적적으 로 살아남아, 당시 현장을 증언한 뒤 몇 년 전 사망했다.207) 민간인들을 15연대에 2대대 에 인계한 경찰 책임자로 지목된 참고인 안은 이 사건에 대해 있을 수 없는 일 이라 며, 해당 사건 자체가 사실무근 이라고 전면 부인했다.208) 그러나 서면지서 한청단원으 로 안과 함께 근무한 참고인 배은, 서면 사람들 100여 명이 서면 판교리 노은마 을 야산에서 주둔부대에게 사살됐다고 했다.209) 용계산 계곡 집단희생사건210) 서면지역의 대표적인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인 용계산 계곡 사건은 1949년 9월 24일에 서 26일(음 )에 걸쳐 주둔 부대인 국군 15연대 1대대와 서면지서 경찰들이 서 면 구상ㆍ흥대ㆍ연동마을 주민들을 반군에 협조했다는 혐의로 집단으로 사살한 사건이 다. 일부 신청인들은 당시 가해부대를 3사단 백골부대라고 지목하고 있으나, 조사결과 이 사건의 가해군경은 15연대 1대대ㆍ2대대, 서면지서 경찰인 것으로 드러났다. 한편, 15연대는 1949년 9월 26일(음 8. 5.) 서면지역 외에도 인접한 월등면 양지맷골에서 주 민들을 집단으로 사살했다.211) 용계산 계곡 집단희생사건에는 특히 일가족이 몰살된 경우가 많았다. 특히, 국군 15연 대는 반란가담ㆍ반군협력 혐의를 받아 사살되거나, 사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가 족을 색출하여 몰살했다. 15연대는 반군에게 죽은 군인들에 대한 보복으로, 서면 구상리 ㆍ흥대리ㆍ판교리 거주 민간인들을 학살했다.212) 이는 반군협력자 가족 살해로서 대살 207) 참고인 정막례 통화보고서( ); 신청인 정하용 ( ). 신청인 정하용이 제출한 제적등본 상에는 1949년 2월 20일 서면 판교리 390번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한편, 신청인 김성기가 제출한 제적등본에는 희생자 김홍연이 1949년 3월 23일 서면 판교리 산 미상번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신청인 김성기는 희생자 김홍연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김성기 ( ). 208) 참고인 안 녹취록( ). 209) 참고인 배 녹취록( ). 배이 안을 기억한다고 말하자, 안은 배이 누군 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참고인 안 녹취록( ). 210) 조사결과, 용계산 계곡은 서면 구랑실재 뒤 구상리 안골 골짜기, 혹은 앵기산 깊은 골짜기로도 불린다. 본 보고서에서는 지명의 구체성을 위해 용계산 계곡으로 표기했다. 211) 월등 양지맷골 사건 참조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7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 代 殺 )로 볼 수 있다. 여순사건은 진압부터 토벌까지 일종의 보복전이었다. 용계산 계곡 사건은 1949년 9월 24일에서 26일(음 )에 3일에 걸쳐 일어났고 사살은 24일과 26일 자행됐다. 먼저, 참고인 문덕심의 에 따르면, 1949년 9월 24일(음 8. 3.) 15연대 군인들은 구상 마을에 거주했던 일가족 박임석(직다-5302, 56세), 정현순(직다-5302, 50세), 박영구(직다 -5303, 21세), 사촌 박태윤(다-6653, 24세)을 용계산 계곡에서 사살했다. 213) 반군가족이라 는 것이 이유였다. 박임석 일가족 살해 후, 3일 동안 구상리, 대흥리, 판교리에서 민간인 을 대상으로 한 사살이 시작되었다. 다음날 15연대는 인근마을인 세동마을로 향했다. 세동마을에서 15연대는 변복이라는 기만술로 마을주민들을 농락했다. 신청인 박정석의 에 따르면, 조계산 방향으로 도주 하던 14연대 반군이 구상리 세동마을 거주 박상교(직다-3001, 48세)에게 밥을 해달라 해, 어쩔 수 없이 동네사람 몇 명과 쌀을 거둬 밥을 해준 일이 있었다. 1949년 9월 25일(음 8. 4.) 반군 복장의 군인들이 밥해준 은혜를 갚고자 한다며 마을에 당도했다. 서면에 주둔했 던 15연대가 협력자를 색출하기 위해 빨치산으로 변복하여, 마을로 들어온 것이다. 그들 은 마을구장을 속여 결국 밥을 해준 박상교의 집을 알아냈다. 박상교의 연행과정을 목격 한 신청인 박정석(당시 16세)의 이다. ( )비가 많이 오는 저녁 10명 내외의 산사람 행색을 한 사람들이 마을에 와 강 반장 212) 신청인 김용순 ( ). 신청인 김용순은 15연대가 주민들을 사살하면서, 20여 명의 동료 를 죽인 반군에 대한 보복이라고 말한 것을 나중에 들었다고 했다. 이와 관련하여 15연대 1대대 1중 대 소속 참고인 정는 1949년 9월 18일 15연대 1대대본부가 주둔했던 광양 서국민학교가 반군들의 습 격을 받아, 20여 명의 피해를 입은 일이 있었다고 했다. 참고인과 신청인의 을 종합하면, 빨치산 의 습격을 받은 15연대 1대대는 반격에 나서, 사건발생 6일 만인 1949년 9월 24일 서면지역에 당도했다. 광양 서국민학교와 서면은 불과 4km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위치해 있다. 참고인 정 통화보고서( ). 213) 참고인 문덕심 통화보고서( ); 신청인 공복덕(직다-5302) ( ); 신청인 공복 덕(직다-5303) ( ); 신청인 문덕심 ( ). 신청인 공복덕이 제출 한 제적등본에는 박임석과 정의 사망일시ㆍ장소가 1949년 9월 5일 서면 구상리 산 109번지로 기재 되어 있고, 박영구는 1949년 9월 30일 서면 학구리 산 미상번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참 고인과 신청인들이 주장하는 사건일시는 1948년 음력 8월 3 5일로, 이는 양력으로 9월 24 26일이다. 1949년 9월 30일로 기재된 박영구를 제외하고, 나머지 9월 5일로 기재된 희생자들의 희생일자와 9월 24 26일은 차이가 있는데, 신청인들은 제적등본상의 사망일자가 사건일자와 일치한다고 주장하고 있 다. 사건 전 해였던 1948년에 음력과 양력이 정확히 한 달 차이였던 점, 1949년은 윤달이 있던 해로 7 월이 두 번 있던 점 등을 혼동하여 음력 8월 5일을 양력 9월 5일이라고 착각한 듯하다. 한편, 서면 면사 무소에 확인했으나, 사망장소로 등재된 구상리 산 109번지가 용계산 계곡 골짜기를 의미하는지는 확인 할 수 없었다. 순천지역 여순사건 551

80 제3권 이라는 사람의 집에 들렀어요. 예전에 밥을 해줘 고마워 은혜를 갚겠다고 하며 당시 밥을 해준 사람들을 알려달라고 한 거지. 완벽히 속은 강반장은 박상교와 두 사람의 집을 알려주 었고, 그 사람들은 부친 박상교와 이성삼씨를 집에서 끌어내 동네 마당에 꿇어앉혀 놓았어 요. 그 사람들은 날이 새자 우리 집에만 불을 지른 뒤, 군복으로 갈아입고 이성삼씨를 집에 보내주는 거라. 그러고는 부친 박상교와 이웃 구상마을에서 연행된 여자들을 포함한 23명 을 백운산 가는 앵기산 깊은 골짜기214)로 끌고 갔어. 그 다음날부터 작은아버지 두 분이 앵 기산에 부친을 찾으러 가 3일 만에 머리에 총을 맞은 부친 박상교의 시신을 찾았어요. 칡넝 쿨에 묶어 지게에 짊어지고 왔어요. 당시 죽은 사람은 23명인데 우리 마을은 부친 1명이었 고, 거의 100호가 넘는 큰 마을인 구상마을사람들이 대부분이었어요. 죽은 사람들은 30 40미터 간격으로 사람이 찾기 힘든 곳에서 총에 맞아 죽어 있었고, 몇 명인지는 모르겠지 만 여자들은 모두 옷이 벗겨진 채, 음부를 총에 맞아 죽어 있다고 숙부에게 들었어요. 개중 에 처녀도 있었다고 했어요.215) 같은 날인 1949년 9월 25일(음 8. 4.) 흥대리에서도 변복을 하고 나타난 15연대는 두 부 류로 나눠 작전 을 진행했다. 먼저 일부는 회의를 소집한다고 마을주민들을 동원했다. 나 머지 일부는 협박과 회유를 통해 밥을 해달라면서 마을주민들을 모았다. 15연대를 진짜 반군이라 착각하여 시키는 대로 회의에 나온 사람들과, 협박에 못 이겨 밥을 해준 사람들 모두 다음날 사살되었다. 당시 초등학생으로 사건을 목격한 참고인 박신호는 만약 밥을 해주었다면 부친도 꼼짝없이 돌아가셨을 것 이라며 다음과 같이 했다. 그때가 첫 벼를 베서 햅쌀로 밥을 지어먹은 때예요. ( ) 제가 초등학교 때인데, 그날 저 녁에 반군 행세를 한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왔어요. 마을에 각 집집마다 찰 정도로 많았어 요. 회의를 소집한 군인은 몇 안 되었어요. 우리 집 밑에 집에서 회의를 한다고 했어요. 마 을구장 박계호씨를 시켜서 회의에 참가할 사람들을 모으라고 했어요. 그때 군인들이 우리 집에도 와서 우리 아버지한테 밥을 해달라고 했어요. 저도 기억해요. 그런데 아버지가 보니 까 이 군인들이 반란군 같지 않았어요. 반란군치고는 숫자가 너무 많았어요. 아버지가 우리 집에 내 새끼들만 5명인데 밥을 못 해주고 있다고 사정을 했어요. 그러자 군인이 영감 쏴 죽인다 고 했어요. 지금도 그 말이 생생해요. 그래도 아버지가 거절을 했어요. 그랬더니 군 인들이 공손하게 인사를 하면서 가더군요. 그러니까 (국군이 인용자) 반란군처럼 행세를 한 거예요. 만약 아버지가 밥을 해줬거나, 회의에 나갔다면 아버지도 화를 당했을 거예요. 그래서 그날 회의에 참석한 서면 사람들을 군인들이 너희들은 공산당이라며 구상리 용계산 214) 조사결과, 앵기산 깊은 골짜기는 용계산 계곡 골짜기와 같은 지명으로 확인됐다. 215) 신청인 박정석 (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8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문바위(문처럼 생긴 바위) 216) 뒤로 끌고 가 사살했어요. 74명이 죽었어요. 서면 흥대리 연 동부락에서만 박계호, 박정호(박계호 동생), 박선호, 박현석 4명이 죽었어요. 서면 구상리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고 들었어요. 여순사건이 나고 이듬해 일입니다. ( ) 군인들은 그날 하루를 머무르고 철수했습니다. 217) 서면 흥대리에 거주했던 박계호(직다-5010, 28세), 박현석, 박정호(직다-5011, 23세), 박 선호(직다-5920, 22세)가 이날 회의에 참가했고, 이 때문에 이들은 다음날 1949년 9월 26 일(음 8. 5.) 15연대에게 집을 소각당한 뒤, 용계산 계곡 골짜기에서 사살되었다. 218) 여기 에는 반군협조 혐의자 박영옥(직다-3733, 21세)의 모친 남동산(직다-3734, 59세)과 아내 임병순(직다-3734, 20세)도 집을 소각당한 뒤 끌려와 사살됐다. 219) 참고인 박정근의 에 따르면, 박영옥은 순천농림중학교 축산과 학생회장으로 여순사건 당시 학교연설 중 경찰에게 연행되어 이미 사살되었다. 220) 구상리에 살던 정일천(다-3735, 27세) 일가족도 용계산 골짜기에서 몰살당했다. 참고인 정병길의 이다. 여순사건이 나고 나서 다음해 가을 때쯤 되어 반란군이 서면 구상리에 내려와서는 사랑 방에 잠자던 사람들 5명을 용계산으로 끌고 가버렸는데, 그 이튿날 경찰들이 와서 어젯밤 끌려간 놈들은 모두 반란군들이라고 하면서, 5명의 집에 불을 질러버리고 그 가족들은 마 을 안 안골 골짜기로 끌고 가서는 모두 총살하였던 것입니다. 그때 정일천 일가족 8명이 죽 었어요. 221) 참고인 정병길에 따르면, 15연대가 구상리 거주하는 신청인 정인순의 부친 정일천, 모 친 송삼덕(다-3735, 25세), 조부 정임조(연령 미상), 조모( 祖 母, 성명ㆍ연령 미상), 그리고 작은아버지 정병학(연령 미상), 작은어머니(성명ㆍ연령 미상), 임산부 고모(미신청, 성명 ㆍ연령 미상) 등 일가족 8명을 순천시 서면 구상리 마을 안골 골짜기에서 사살했다. 15연 216) 용계산 문바위는 용계산 계곡과 같은 장소이다. 217) 참고인 박신호 통화보고서( ); ( ). 218) 신청인 박양근 ( ); 신청인 박병준 ( ). 신청인 박양근은 아버 지 박계호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박양근ㆍ박병준이 제출한 제적등본상에는 박계호, 박 정호가 1949년 9월 5일 구상리 산 109번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1949년은 윤달이 있는 해여서, 7월이 두 번 있었다. 신청인과 참고인 박신호가 주장하는 희생일자는 정확 히 일치한다. 219) 신청인 박정순 ( ); 참고인 박정근 통화보고서( ). 220) 참고인 박정근 통화보고서( ); 신청인 박정순 ( ). 221) 참고인 정병길 ( ). 순천지역 여순사건 553

82 제3권 대는 사랑방에서 자다 반군에 끌려간 5명 중 머슴살이하던 삼촌 정씨(이름ㆍ연령 미상)가 있으니 너희들은 모두 반란군가족 이라며 임산부를 비롯한 일가족 모두를 사살했다.222) 판교리 참고인 이양의ㆍ이찬의ㆍ이항의의 을 종합하면, 1949년 9월 26일(음 8. 5.) 15연대가 판교리 평남정마을로 들어와 구장 김팔호에게 좌익분자의 집이 어디냐고 위협했다. 김팔호가 이기호, 송기충, 박홍기의 집을 지목했다. 15연대는 그 집에서 자던 이들을 끌어내고 집에 불을 지르고, 판교리 446번지 뒤편에서 끌고 온 사람들에게 구덩 이를 파게 한 뒤 그 구덩이에 밀어 넣었다. 15연대 군인들은 동료 20여 명을 죽인 반군 에 대한 보복이라며 이군보(직다-6868, 42세)와 박우남(직다-6868, 43세)은 사살했고, 이점례(직다-6868, 2세)는 돌로 찍어 죽였다.223) 참고인 이기창의 에 따르면, 송칠귀(직다-1352, 56세)의 일가족도 이날 사살되었 다. 1949년 9월 26일(음 8. 5.)밤 10시경 15연대는 송칠귀, 이효심(직다-1352, 42세), 김임 순(직다-1352, 26세)을 기동마을 보 인근 언덕에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넣고 생매장했다. 세 살짜리 막내 송기화(직다-1352, 3세)도 구타를 당한 뒤, 살해되었다. 15연대는 송칠귀 의 아들 송정섭이 반군에 가담했다는 이유를 들어, 그 가족을 살해했다. 사건 전 송정섭 은 군경에 의해 사살되었다.224) 같이 희생된 공재권(직다-1381, 44세)의 가족도 비슷한 경우였다. 참고인 정현종의 진 술에 따르면, 15연대는 반란군협조 이유로 흥대리 거주 공재권, 만삭 임산부 오연심(직다 -1381, 37세), 당숙모 등 마을주민 19명을 서면 용계산 계곡 골짜기에서 사살했다. 신청인 공준모의 에 따르면 동네어른들이 시신을 수습하러 갔을 때 태아가 오연심의 배 밖 으로 튀어나온 채 죽어 있었다.225) 사건 전 공재권의 형 공종모가 반군 식량을 산으로 운 반해줘 도피 중에 있던 것이 화근이었다.226) 222) 참고인 정병길 ( ). 당시 7살이었던 신청인 정인순은 사건을 전혀 기억 못 할 뿐만 아니라, 가족의 이름조차 모르고 살았다고 했다. 가족이 몰살당해 고아로 자란 신청인은, 호적에 홀 로 등재되어 있다. 부친의 본적을 알길 없어 신청인이 제출한 제적등본에는 신청인의 부친이 정명 미상 (鄭名未詳)으로 기재되어 있다. 참고인 과정에서 언급된 정임조 및 조모(祖母)는 제적등본상 신원을 알 수 없어, 미신청 희생자로 확인할 수 없었다. 신청인 정인순 ( ). 223) 참고인 이양의 통화보고서( ); 참고인 이항의 통화보고서( ); 참고인 이찬의 통화 보고서( ). 신청인 김용순이 제출한 제적등본상에는 희생자 이군보가 1949년 8월 4일 오전 서 면 판교리 246번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신청인 김용순은 희생자 이군보, 박우남, 이점례의 시신을 친인척 이건우(사망)가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김용순 ( ). 224) 참고인 이기창 통화보고서( ). 225) 신청인 공준모 면담보고서( ). 226) 이후 서면지서에 자수한 공종모는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서면 경찰들에 의해 서면 학구 3거리 현 순천 운전면허장 자리에서 수용된 사람들과 집단으로 사살됐다. 참고인 정현종 통화보고서( ); 참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8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신청인과 참고인의 을 종합한 결과, 구상리, 판교리, 흥대리의 주민들이 포함된 이 사건의 희생자 수는 100여 명으로 추정되나, 진실화해위원회가 확인한 희생자는 22명이다. 흥대리 정기석(직다-1368, 37세)의 경우, 참고인 정기성의 에 따르면, 순천 진압 후 인 1948년 10월 말경에 마을사람들과 같이 진압군에게 끌려간 뒤, 서면지서에서 취조를 받았다. 1948년 11월 14일경 군경이 정기석을 순천시 서면과 광양시 봉강면 경계 다리 근 처에서 사살했다. 친척들이 시신을 수습했다. 227) 양두남(직다-2329, 48세)의 경우, 1949년 10월 5일(음 ) 아침 15연대가 양두남 등 30여 명을 소집시켜 안골 계배나무골 발치로 끌고 가 사살했다. 228) 판교리 배형회(직다-9120, 20세)의 경우, 참고인 이기창의 에 따르면, 순천경찰이 1949년 2월 20일경 서면 판교리 거주 배형회 외 8명을 순천경찰서로 연행하여, 1949년 7 월 4일(음 6. 9.) 서면 학구리 송치재(대구실재)에서 사살했다. 229) 판교리 거주 박기래(직다-9121, 22세)는 여순사건 당시 밤에 반군이 와서 끌고 가려 해 산으로 도망갔다 내려왔는데 부재를 의심한 경찰에게 쫓겨 다시 산으로 도주했다. 먹을 것을 구하러 마을에 내려왔던 박기래는 토벌대에게 체포되어 1949년 1월 10일 지본리 산 에서 사살되었다. 230) 한편, 서면지역 희생자 중에는 공무원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먼저, 참고인 박영 규의 에 의하면 선평리에 살던 서면 면장 정기영(직다-1360, 41세)은, 여순사건 당시 시내 평화여관에 피신해 있었다. 진압 후 부임한 안 지서주임은 창고물품이 없어졌 다며 면장, 구장 등의 책임을 물어, 정기영에게 사표를 강권했다. 순천시 보도연맹 결성대 회로 여순사건 관련자 전원을 집합시킨 1949년 11월 20일, 서면 판교리 주둔 15연대 군인 들이 서면지서에 연행된 면장 정기영 등 12명을 주둔지 앞 골짜기에서 사살했다. 231) 정기 영 사퇴종용에 대해, 참고인 안 지서주임은 사실무근이라며 부인했다. 232) 선평리 정인택(직다-1354, 36세)의 경우, 1949년 11월 10일경 철도국 직원 정인택이 서 고인 공형모 통화보고서( ). 227) 참고인 정기성 통화보고서( ). 228) 참고인 이병철 통화보고서( ); 참고인 정현종 통화보고서( ). 229) 참고인 이기창 통화보고서( ). 230) 참고인 이기창 통화보고서( ). 신청인 박병도가 제출한 제적등본 상에는 박기래가 1949년 1월 10일 서면 지본리 야산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어, 신청인ㆍ참고인이 주장하는 희생일자와 일치한다. 231) 참고인 박영규 ( ). 신청인은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정재종 통화보고서 ( ). 232) 참고인 안 녹취록( ). 순천지역 여순사건 555

84 제3권 면지서로 출석하라는 통보를 받고 동네사람 4명과 출두했다. 서면지서에서 취조를 받은 이들은 주임 안에 의해 서면에 주둔한 3사단 군인들에게 신병이 인계되었다. 연행 한 달 뒤 12월 10일경 3사단 군인들은 주둔지 부근인 판교리 노은마을 앞 노은고지 골짜기 에서 정인택 등 11명을 사살했다. 233) 각 마을별 구장들의 피해도 컸다. 구상리마을 구장이었던 김용수(직다-3615, 34세)는 1948년 12월 16일(음 ) 서면 구상리에서 진압군에게 끌려간 뒤 살해됐다. 234) 선평 리의 경우, 참고인 김동수는 1949년 7월(음 6월) 초 서면지서 주임 안이 출두명령을 내려 선평리 구장 허갑진(직다-1357, 30세)이 같은 동네 사람 5명과 출석했고 5일 후 1949년 7월 2일(음 6. 7.) 경찰들이 지서에 잡혀 있던 30여 명과 함께 허갑진을 트럭에 태 워 순천 서면 압곡상리 야산(구상리 야산)에서 사살한 뒤 매장했다 며 사살현장에서 살 아남은 허진구에게 전해 들었다 고 했다. 또한 허진구의 증언으로 30여 구의 시신이 수습됐다 고 덧붙였다. 235) 1950년 1월 8일(1949. 음 ) 서면지서 경찰은 구장회의를 빌어 각 마을 구장들을 소집한 뒤, 지서주임 안이 이들을 판교리 노은마을에 주둔했던 15연대에 인계했다. 15연대는 이들을 주둔지에서 1km 떨어진 판교리 노은마을 월치재 인근 노은고지(지본고 지)에서 박병구(직다-1351, 28세), 주평마을 이장 박정규 등 12명을 사살했다. 236) 당시 광 양경찰로 서면에 거주했던 참고인 배은 판교리 출신 박병구가 억울하게 죽었다면서, 그때 10여 명이 같이 죽었다고 당시 사건에 대해 증언했다. 237) 선평리는 서면의 넓은 들판 가운데 있는 마을로, 구례에서 순천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위치하여 진압군의 작전이동로에 해당되었다. 선평리 거주 김원기(직다-1367, 27세)의 경 우, 1950년 1월 9일(1949. 음 ) 서면 판교리에 주둔한 15연대 군인들이 김원기 등 12명을 논치고개에서 살해 후 매장했다. 238) 한편, 선평리는 허씨 집성촌 239) 으로 희생자의 상당수가 허씨이다. 당시 동산국민학교 5 학년으로 상황을 또렷하게 기억하는 참고인 허삼례의 에 따르면, 1948년 10월 22일 233) 참고인 정숙정 ( ). 신청인 정남두가 사망하여, 신청인의 아들 정숙정을 참고인으로 조사했다. 234) 신청인 김영기 ( ). 신청인 김영기(직다-3615)의 경우, 제출한 제적등본상의 사망일자 와 신청인이 주장하는 희생일자가 일치했다. 235) 참고인 김동수 통화보고서( ). 236) 참고인 황계순 통화보고서( ). 237) 참고인 배 면담보고서( ). 238) 참고인 박영규 통화보고서( ); 신청인 김천일 ( ). 239) 참고인 허삼례 통화보고서(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8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순천농림고등학교 학교간부 허영구(직다-7953, 19세)가 시내에 구경 간다고 나갔다가 군 경에게 살해되었다.240) 1948년 10월 24일 허규범(직다-1353, 21세)은 친구 허만욱과 총소리를 듣고 시내에 갔 다가 경찰에게 잡혀 순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허규범은 주소를 거짓으로 말했다고 4일간 취조 및 고문을 당한 뒤, 10월 28일 순천 둑실골짜기(현 죽도봉 골짜기, 경찰서에서 1km 지점)에서 72명과 함께 순천경찰서 경찰들에게 사살되었다.241) 허만우(직다-3614, 26세)의 경우, 1948년 12월 26일(음 ) 경찰이 허만우 등 20여 명을 연행하여 황전면 비촌리 야산에서 사살하였다.242) 순천농림중학교 3학년 허필동(직다-1355, 19세)의 경우, 1949년 6월경 마을사람들 5명 과 같이 묶인 채 트럭에 실려, 서면 구상리 야산에서 약 50명과 함께 경찰에게 집단사살 되었다. 사건현장에서 총을 빗맞아 생존한 허진구는 마을로 생환했다.243) 허필동의 둘째 형인 순천철도국 직원 허필윤(미신청, 31세))은 1949년 12월 8일경(음 경) 밤 자 택에서 서면지서 경찰들에게 서면지서로 연행된 뒤 3 4일 뒤 지서 뒤 논두렁에서 경찰 에 사살되었다.244) 모함으로 숨어 다니던 허만두(직다-1357, 25세)는 1949년 3월 초순경 서면지서로 연행 되어 고문 받은 후, 경찰에게 사살되었다.245) 희생자 허정년(직다-1348, 24세)의 경우, 시신을 수습한 참고인 허우정의 에 따르 면, 1949년 6월 30일(음 6. 5.) 저녁 무렵 서면지서 경찰들이 허정년을 지서로 연행하여 3 4일 동안 구타 및 취조한 뒤 7월 4일(음 6. 9.) 허정년 등 70여 명을 차에 태운 뒤 서 면 학구 삼거리 부근 야산 현 순천자동차학원 자리에서 집단으로 사살했다. 참고인 허우 정이 시신을 수습했다.246) 구상리는 광양과 경계를 이룬 순천 서면의 가장 동쪽에 있는 구랑실 분지의 서쪽 마을 참고인 허삼례 통화보고서( ); 신청인 허남석 ( ). 신청인 허문범 통화보고서( ). 신청인 허수길 ( ). 참고인 허신행 통화보고서( ); 참고인 김동수 통화보고서( ). 신청인 허선행은 현 장에서 살아온 허진구가 자신은 다른 사람들이 총에 맞아 쓰러질 때 자신도 같이 쓰러지면서 죽은 척하 고 있다가 살아났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현장에서 신청인의 할머니와 아버지 허필성이 허필동의 시신 을 수습했다. 허진구는 2003년에 사망했다. 에서 신청인은 희생자 허필동의 이름을 허필윤으로 잘못 말했다. 신청인 허선행 ( ). 244) 허필윤의 형인 허필성과 허필윤의 부인이 그 시신을 수습했다. 참고인 허신행 통화보고서( ); 신청인 허선행 ( ). 245) 참고인 김동수 통화보고서( ); 신청인 허채구 ( ). 246) 참고인 김동수 통화보고서( ). 240) 241) 242) 243) 순천지역 여순사건 557

86 제3권 로 구상, 마륜, 세동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구상리에서는 전술한 용계산 계곡 집단희생사 건의 희생자가 많았다. 당시 17세로 서면 구상리에 거주한 참고인 박홍규의 에 따르면, 1949년 11월경(음 10.경) 반군이 같은 마을 박태숙(다-6653, 21세)을 강제로 짐을 지게 해 데려간 뒤, 군경 에게 살해되었다. 247) 운평리의 경우, 참고인 위경엽은 남편 정추택(직다-1361, 28세)의 사살 광경을 직접 목 격했다. 248) 위경엽의 이다. 반란사건 나고 이듬해 봄입니다. 1949년 음력으로 3월 12일 아침에 갑자기 서면지서 경 찰들이 우리 집으로 와서 남편을 서면지서로 데려갔습니다. 지서에서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인 1949년 음력으로 3월 13일 아침에 저희가 아침밥을 해서 지서에 갔는데 경찰들이 남편을 산으로 데려갔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집에 왔는데 월곡마을 뒷산, 우리 집에서 보이는 덴데 멀지 않아요. 우리 집에서 그 골짜기가 다 보여요. 거기에서 경찰들이 남편하고 죽평마을 사람 대제씨란 분을 총으로 쏴 죽였어요. 멀지 않아서 제가 다 봤습니 다. 그래서 경찰들이 가고 바로 저와 시아버지, 저희 작은아버지 셋이 가서 남편 시신을 수 습해 월곡마을 공동묘지에 묻었습니다. 249) 1949년 4월 15일 오후 6시경 서면지서 주임 안과 경찰들이 운평리 월곡마을에 살 았던 정순원(직다-3885, 23세), 송기봉(직다-3886, 32세), 송기찬(직다-3882, 21세)을 반군 에 협력했다는 혐의를 들어, 서면지서로 연행한 후 15연대에 인계하여 동산리 산정마을 과 월산마을 사이 계곡에서 사살했다. 250) 희생자 송기찬의 아내로 시신을 목격한 참고인 김소근의 이다. ( ) 시아버님이 그날 현장에 있던 경찰인지 군인인지한테 들었다는데, 사람들을 바위 위에 올려놓고 총을 쐈대요. 총을 쏜 건 광양에서 온 백골부대 군인들이었다고 시아버지가 그랬어요. 그런데 (군인들이 총을 쏘기 전) 우리 집 양반이 잠깐 중지하라고 했대요. 그리고 는 사방으로 절을 하더래요. 부모님한테 절을 드린다고. 자기들이 죽여놓고 참 아까운 사람 247) 참고인 박홍규 통화보고서( ); 신청인 문덕심 ( ). 248) 경찰자료에는 정추택이 1949년 4월 6일 서면 동산리 월산부락 뒷산에서 아군에 사살된 자라고 기재되어 있어, 신청인이 주장하는 장소와 일시가 거의 일치한다. 순천경찰서, 보안기록조회회보서, ) 참고인 위경엽 통화보고서( ). 250) 참고인 송점섭 통화보고서( ); 참고인 송규연 통화보고서( ). 그날 밤 마을에서 울음 소리가 났고, 수습되어 집 마당에 놓인 피투성이 아버지 송기봉의 시신을 신청인 송순심이 목격했다. 신 청인 송순심 (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8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이 죽었다고 말을 하더래요. ( ) 시신을 봤더니 바로 명치를 한 군데 맞고 총알이 등을 뚫 었어. 남편 손을 잡아보니 손이 따뜻했어.251) 판교리의 경우, 참고인 강서봉의 에 따르면 서면 판교리 거주 순천 매산중학교 학생 최승수(직다-6650, 19세), 최승모(직다-6650, 17세)가 1949년 10월 18일경 글을 잘 쓴다는 이유로 반군에게 끌려가 산속에서 삐라 작성을 했다. 이후 서면지서 경찰들에게 체포된 최승수, 최승모는 구타와 고문 끝에, 서면 용담골 뒤 대장굴 부근에서 사살되었다.252) 1949년 5월 9일(음 ) 서면지서 경찰들이 판교리 옆 톳골 마을에 이르는 고갯길에 서 최순식(직다-7784, 28세)을 반군으로 여겨 사살했다.253) 2일 뒤 톳골마을 주민들이 알 려줘 시신을 수습했다.254)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949년 6월경(음 5월경) 서면지서 경찰이 집에 들이닥쳐 최순식의 동생 최운식(직다-7785, 23세)을 연행했다. 반군동조 혐의를 받 고 있던 형 최순식 때문이었다. 참고인 허정업은 시동생의 연행을 목격했다. 이후 서면지 서 경찰들은 최운식을 사살한 것으로 추정된다.255) 참고인 허정업은 한 달 사이에 남편과 시동생을 잃었다. 운평리의 경우, 참고인 최진홍의 에 의하면, 빨치산들이 운평리 죽동마을에 살았던 최진숙(직다-8365, 20세)에게 동조하라 협박을 했고, 서면지서 경찰은 이를 알고 최진숙 을 잡으러 다녔다. 최진숙은 며칠 산에 은신하다가 경찰에게 발각돼, 1949년 8월 20일경 운평리 죽청 뒷산 중턱에서 사살되었다.256) 운평리에선 소개되어 지서 앞에서 잠을 자고 마을로 돌아가던 구장을 반군으로 착각하 여 사살한 경우도 있었다. 희생자의 시신을 목격한 참고인 장삼남의 에 따르면, 1949 년 여름 서면 운평리는 빨치산의 잦은 출몰로 마을사람들이 지서 앞으로 소개되어 노숙 을 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서면지서 경찰들이 마을 앞으로 뛰어가던 죽동마을 구 장 최진옥(미신청, 당시 31세)을 반군으로 착각하여 사살했다. 장삼남은 당시 13살로 학 251) 참고인 김소근 면담보고서( ); 신청인 송영종이 제출한 제적등본상의 사망일자와 신청인ㆍ 참고인이 주장하는 희생일자는 정확히 일치한다. 신청인은 친지들과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 인 송영종 통화보고서( ). 252) 참고인 강서봉 통화보고서( ); 신청인 정종채는 희생자 최승수, 최승모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정종채 ( ). 253) 참고인 정운식 ( ). 254) 참고인 정운식 ( ); 참고인 허정업 통화보고서( ); 신청인 최병선(직다 -7784), ( ). 255) 참고인 허정업 통화보고서( ); 신청인 최병선(직다-7785) ( ). 256) 참고인 최진홍 통화보고서( ); 참고인 이재근 통화보고서( ). 순천지역 여순사건 559

88 제3권 교 파하는 길에 희생자 최진옥의 시신을 목격하였다. ( )총 맞아서 얼굴이 이만큼 부었더라고요. 달려가는 걸 쐈으니까 뒤에 어딘가를 총에 맞은 거 같더만. 외숙모가 울면서 외삼촌(최진옥 인용자)을 부축하니까 입에서 피가 철철 흘렀어요. 257) 운평리 최진영(직다-7866, 27세)의 경우, 참고인 최진홍의 에 따르면, 1949년 11월 경 서면지서 경찰들이 운평리 죽동마을에 살았던 최진영을 연행하여 고문한 뒤, 1949년 11월 19일경 지본리 뒷산에서 끌려온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살했다. 258) 1949년 12월 9일(음 ) 서면지서 경찰들이 서면 운평리 거주 김정기(직다-9114, 당시 33세)를 집에서 연행하여 3일 동안 취조와 고문을 한 뒤, 1949년 12월 12일(음 ) 서면 죽청마을 곰바굴 계곡에서 10여 명과 함께 사살했다. 259) 압곡리의 경우, 참고인 박영규의 에 따르면, 배학선(직다-1358, 27세) 등 마을사람 12명은 서면지서로 출두하라는 경찰의 통보를 받고, 1950년 1월 9일(49년 음 ) 지 서에 갔다. 지서 경찰은 배학선 등 12명을 서면 판교리 노은고개에 주둔하던 15연대에 인 계했고, 3사단 군인들은 주둔지 인근 고개에서 배학선 등 12명을 사살 후 매장했다. 260) 시신을 현장에서 직접 수습한 신청인 배금엽은 다음과 같이 했다. 그때가 음력 11월경이에요. ( ) (집나간 지 인용자) 한 달이 넘어도 오빠 소식이 없었 어요. 마을사람들이 하는 말이 오빠가 행방불명되고 한 달 지났을 때 판교리 노은마을 논치 재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총소리가 났다는 걸 누가 들었댔어요. 거기에 사람들 시신이 있 다고 했습니다. 부모님과 남편이랑 저, 오빠 각시가 시신을 찾으러 갔는데, 달포를 헤매다 찾았어요. 시체들이 엉켜 있었어요. 시신들을 떼어놓으려니 막 옷도 헤지고. 오빠 각시가 오빠 시신을 알아보고 찾았어요. 12명이 죽었어요. 서면지서장 안이 지시를 해서 지서 257) 참고인 장삼남 ( ). 258) 참고인 최진홍 통화보고서( ). 신청인 최택철은 희생자 최진영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 다. 신청인 최택철 ( ). 259) 참고인 정운식 ( ); 신청인 김영주 ( ). 신청인은 시신을 수습했다 고 했다. 신청인이 제출한 제적등본상에는 희생자 김정기가 1949년 10월 20일 오전 5시 서면 운평리 37번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신청인은 사망일자가 제적등본과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사건일자 음력 10월 20일이 제적등본에 양력 10월 20일로 기재되어 있는 것은, 음양력을 구분하지 않고 10월 20일로 사망신고를 했을 가능성과, 음력 10월 20일로 신고했으나, 기입과정에서 양력으로 환산되지 못하고 바로 10월 20일로 기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신청인 김영주의 제적등본은 희생자의 사 망일자와 비교적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260) 참고인 박영규 통화보고서(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8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에 잡은 오빠랑 다른 사람들을 차에 실어서 논치재로 데려가 구덩이를 파놓고 경찰들이 죽 였다고 들었어요. 261) 여순사건 당시 압곡마을에는 반군을 피해 경찰 2명이 마을대숲으로 숨어들었다가 뒷산 으로 도망간 일이 있었다. 지방좌익들은 압곡마을 거주 박호지(직다-9111, 21세)를 대동 하여 경찰을 쫓았고, 산에서 체포하였다. 당시 세무서원으로 형편이 좋아 좌익들 집회에 자주 불려나갔던 박호지, 정동선(직다-9114, 당시 19세), 장은 마을대표 3인으로 경찰 에 대한 사형집행 참관인 란에 서명했다. 여순사건 진압 뒤, 군경이 압곡마을 주민들을 소집해 반군협조자들을 색출했다. 박호지와 정동선은 위협을 느껴 뒷산에 숨었다. 1948년 11월 20일경 군경토벌작전 과정에서 체포된 박호지, 정동선은 당일 저녁 나머지 1명의 참 관인 장씨(이름 미상)와 함께 서면지서로 연행되었다. 박호지는 강요에 의한 것이라 항변 했으나, 지서 경찰은 그가 서명한 문서를 제시했다. 구타와 고문이 이어졌고, 결국 사망했 다. 경찰들은 박호지를 지서 밖으로 끌어내 확인사살했다. 11월 22일 지서에서 연락이 와, 시신을 수습했다. 시신에는 고문과 구타, 총상의 흔적이 있었다. 262) 두 달 뒤 정동선이 군 산에서 사살되었다고 서면지서에서 연락이 왔다. 263) 지본리는 경주 김씨들의 집성촌으로 일제하 순천지역 사회운동가이자, 해방 이후 순천 군 인민위원장을 지냈던 김기수의 고향이었다. 264) 희생자의 동네친구였던 참고인 황계윤 의 에 따르면, 지본마을에 거주했던 김희곤(직다-3002, 18세)은 해룡면 신대리 어머 니 댁에 나무를 해주고, 1949년 4월 14일(음 ) 돌아오던 길에 반란군을 만나고 온 것 이라며 토벌대에 의해 순천농림중학교로 연행되었다. 그곳에는 지본리 주민들과 다른 면 사람들도 많았는데, 일부는 풀려나고, 김희곤을 포함한 일부는 순천농림중학교 옆 산 밑 공터에서 사살되었다. 265) 청소리의 경우, 1948년 11월 30일(음 ) 오후 반군들이 집으로 와 황전면 평 촌리 가는 길을 안내해달라며 청소리에 살던 김철중(직다-1366, 24세)을 데리고 갔 다. 김철중은 다음날 귀가했다. 1948년 12월 1일(음 ) 아침 서면지서 경찰들이 261) 신청인 배금엽 통화보고서( ). 262) 참고인 박정애 통화보고서( ) 신청인 박철근이 제출한 제적등본 상의 사망일자는 1948년 11월 20일로 신청인과 참고인이 주장하는 사건일자와 정확히 일치한다. 263) 참고인 박정애 통화보고서( ); 신청인 박철근 ( ); 신청인 정동우 ( ). 264) 참고인 조창환 통화보고서( ); 신청인 박철근 ( ). 265) 참고인 황계윤 통화보고서( ); 신청인 김종길 ( ). 순천지역 여순사건 561

90 제3권 김철중을 비롯한 마을주민 최봉채, 최상문 등을 연행했다. 빨치산을 도와줬다는 혐 의였다. 1948년 12월 4일(음 ) 서면지서 경찰들은 이들을 순천경찰서로 이송했 고, 그 후 경찰은 순천지역 산골짜기에서 김철중, 최봉채, 최상문 등을 집단으로 사 살했다.266) 진압군경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단지 기분만으로 민간인을 사살한 경우 도 있었다. 참고인 윤정한의 에 따르면, 서면사무소 공무원 양경식(직다-1350, 26세)은 1948년 11월 20일 출근길에 경찰 약 10명이 마을 앞에서 주민 9명을 몽둥이로 구타하 는 것을 목격했다. 경찰 한 명이 너도 반군동조자지? 하며 구경하던 양경식을 덩달아 폭행했다. 경찰은 양경식 등 10여 명을 철삿줄로 묶어 서면지서로 연행하여 칼빈총 개 머리판으로 구타했다. 이후 10여 명은 순천경찰서로 이송되어 취조실에서 5일 동안 고 문당했다. 1948년 11월 25일경 순천경찰은 양경식과 수감되어 있던 또 다른 이들이 포함된 30여 명을 생목동 공동묘지(현 이수중학교 부근)에서 사살했다. 시신은 소각ㆍ 처리되었다.267) 1949년 9월 28일(음 8. 7.경) 군인들이 청소리에 들어와 마을사람들을 연행하고 집에 불 을 질렀다. 소각하던 군인들이 구경하던 마을소년 서병중(직다-3369, 12세)을 간 큰 놈이 라며 사살했다.268) 조사결과, 서면 희생자는 400여 명으로 추산(<표 7> 참조)되나, 진실화해위원회가 신 원을 확인한 사람은 총 63명이다. 신원 확인 결과와 주요 희생장소와 희생자 수는 아래 <표 6>, <표 7>과 같다. <표 6> 서면지역 희생자 신원 확인 희생자 연 번 1 확인근거 이름 성별 당시 나이 거주지 사건 번호 허정년 (許正年) 남 24 서면 선평리 1348 경찰 참고인 자료 시신수습 여부 제적 등본 확인 유족회 희생자 명단 확인 / 추정 기타 여부 확인 266) 참고인 김순모 통화보고서( ); 신청인 김선문 ( ). 267) 참고인 윤정한 통화보고서( ); 신청인 양병옥 ( ). 순천경찰서에서 작성한 뺷사실조사서뺸에는 양경식이 사살된 자라고 기재되어 있으나, 특이사항에는 부역사실 유무가 불 확실하다고 적고 있다. 순천경찰서, 뺷사실조사서뺸(1980). 268) 참고인 김순모 통화보고서( ); 참고인 서중석 통화보고서(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9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2 3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제적 유족회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시신수습 등본 희생자 기타 번호 자료 여부 확인 명단 여부 양경식 ( 楊 炅 植 ) 박병구 ( 朴 炳 球 ) 남 26 남 28 시신이 불에 서면 죽평리 1350 타 재를 가져옴 서면 판교리 (사망일자 일치) 확인 1351 확인 4 송칠귀 ( 宋 七 貴 ) 남 56 서면 판교리 1352 확인 5 이효심 ( 李 孝 心 ) 여 42 서면 판교리 1352 확인 6 김임순 ( 金 壬 順 ) 여 26 서면 판교리 1352 확인 7 송기화 ( 宋 基 和 ) 남 3 서면 판교리 1352 확인 8 허규범 ( 許 圭 凡 ) 남 21 시신이 서면 선평리 1353 불에 타 재를 수습 (사망일자 일치) 확인 9 정인택 ( 丁 仁 澤 ) 남 36 서면 선평리 1354 사망신고 안 됨 확인 10 허필동 ( 許 弼 同 ) 남 19 서면 선평리 1355 확인 11 허갑진 ( 許 押 震 ) 남 32 서면 선평리 1357 확인 12 허만두 ( 許 萬 斗 ) 남 26 서면 선평리 1357 사망신고 안 됨 확인 13 배학선 ( 裵 學 善 ) 남 29 서면 압곡리 1358 확인 14 정기영 ( 鄭 基 榮 ) 남 41 서면 흥대리 1360 사망신고 안 됨 확인 15 정추택 ( 鄭 樞 澤 ) 남 28 서면 운평리 1361 확인 16 김철중 ( 金 喆 中 ) 남 24 서면 청소리 1366 확인 17 김원기 ( 金 源 基 ) 남 27 서면 선평리 1367 확인 순천지역 여순사건 563

92 제3권 연 번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제적 유족회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시신수습 등본 희생자 기타 번호 자료 여부 확인 명단 여부 정기석 ( 鄭 基 碩 ) 공재권 ( 孔 在 權 ) 오연심 ( 吳 連 心 ) 양두남 ( 梁 豆 男 ) 박상교 (박상교) 김희곤 ( 金 熙 坤 ) 서병중 ( 徐 丙 中 ) 허만우 ( 許 萬 佑 ) 김용수 ( 金 容 洙 ) 박현석 ( 朴 現 錫 ) 박영옥 ( 朴 永 玉 ) 남동산 ( 南 東 山 ) 임병순 ( 林 炳 順 ) 정일천 (정일천) 남 37 남 45 여 38 여 48 남 48 남 18 남 46 남 26 남 34 남 33 남 18 여 59 여 20 남 27 서면 흥대리 1368 확인 서면 흥대리 1381 (사망일자 일치) 서면 흥대리 1381 (사망일자 일치) 서면 흥대리 서면 구상리 확인 확인 2329 확인 3001 확인 서면 지본리 3002 사망신고 안 됨 서면 청소리 3369 (사망일자 일치) 서면 선평리 3614 (사망일자 일치) 서면 구상리 3615 (사망일자 일치) 서면 흥대리 3616 (사망일자 일치) 서면 구상리 서면 구상리 서면 구상리 서면 구상리 확인 확인 확인 확인 확인 3733 확인 3734 확인 3734 확인 3735 확인 32 송삼덕 ( 宋 三 德 ) 여 25 서면 구상리 3735 확인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9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제적 유족회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시신수습 등본 희생자 기타 번호 자료 여부 확인 명단 여부 송기찬 ( 宋 基 贊 ) 정순원 ( 鄭 順 源 ) 송기봉 ( 宋 基 琫 ) 박계호 ( 朴 桂 浩 ) 박정호 ( 朴 政 浩 ) 박선호 ( 朴 繕 浩 ) 박임석 ( 朴 壬 錫 ) 정현순 ( 鄭 玄 順 ) 남 21 남 24 남 32 남 28 남 21 남 22 남 56 여 50 서면 운평리 3882 (사망일자 일치) 서면 운평리 3885 (사망일자 일치) 서면 운평리 3886 (사망일자 일치) 서면 흥대리 5010 (사망일자 일치) 서면 흥대리 5011 서면 흥대리 (사망일자 일치) 확인 확인 확인 확인 확인 5290 확인 서면 구상리 5302 (사망일자 일치) 서면 구상리 확인 5302 확인 41 박영구 ( 朴 永 求 ) 남 21 서면 구상리 5303 (사망일자 일치) 확인 42 정태구 ( 鄭 泰 龜 ) 남 21 서면 운평리 6384 (사망일자 일치) 확인 43 김홍연 ( 金 烘 淵 ) 남 24 서면 운평리 6385 (사망일자 일치) 확인 44 최승수 ( 崔 昇 壽 ) 남 19 서면 판교리 6650 확인 45 최승모 ( 崔 昇 模 ) 남 17 서면 판교리 6650 (사망일자 일치) 확인 순천지역 여순사건 565

94 제3권 연 번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제적 유족회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시신수습 등본 희생자 기타 번호 자료 여부 확인 명단 여부 박태윤 ( 朴 泰 允 ) 박태숙 ( 朴 泰 淑 ) 이군보 ( 李 羣 甫 ) 박우남 ( 朴 禹 南 ) 이점례 (이점례) 최순식 ( 崔 順 植 ) 최운식 ( 崔 雲 植 ) 최진영 ( 崔 鎭 永 ) 남 24 남 21 남 42 여 43 여 2 남 28 남 23 남 27 서면 구상리 서면 구상리 6653 확인 6653 확인 서면 판교리 6868 (사망일자 일치) 서면 판교리 서면 판교리 서면 운평리 서면 운평리 서면 운평리 확인 6868 확인 6868 확인 7784 확인 7785 확인 7866 확인 54 허영구 (허영구) 남 19 서면 선평리 7953 확인 55 최진숙 ( 崔 鎭 淑 ) 남 20 서면 운평리 8365 확인 56 박호지 ( 朴 浩 志 ) 남 21 서면 압곡리 9111 (사망일자 일치) 확인 57 정동선 ( 鄭 東 善 ) 남 19 서면 압곡리 9113 확인 58 김정기 ( 金 正 基 ) 남 33 서면 운평리 9114 확인 59 배형회 ( 裵 炯 檜 ) 남 20 서면 판교리 9120 확인 60 박기래 ( 朴 錤 來 ) 남 22 서면 판교리 9121 (사망일자 일치) 확인 61 최진옥 ( 崔 鎭 玉 ) 남 31 서면 운평리 미신청 확인 62 허필윤 ( 許 弼 允 ) 남 31 서면 선평리 미신청 확인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9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63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제적 유족회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시신수습 등본 희생자 기타 번호 자료 여부 확인 명단 여부 김옥태 (김옥태) 남 31 서면 선평리 미신청 확인 총 63명(확인 63명) 연 번 <표 7> 서면 주요 희생장소와 희생자 수 희생 장소 희생자 수 희생시기 가해주체 지역 장소 세부 추산치 확인 비고 1 서면 판교리 노 은마을 월 치재 인근 노은 고지 (지본고지) 삼양식품 순천지점 뒷 산(판교리와 지본리 경 계, 월치재 우측) 약 7 부 지점 골짜기 1949년 3월 국군 15연대 서면지서 경찰 사건 당시 약 120명 269) 9명 270) 정상에 군부 대 주둔 2 서면 송치재 순천-구례간 17번 국 도 송치터널 1948년 10월 1949년 국군 12연대 월등지서 경찰 5명 271) 외 다수 2명272) 3 서면 서면 용계 산 안골 4 서면 대구실재 5 서면 구랑실재 6 서면 기타지역 계룡재 남쪽 비봉산 상 봉 좌측 안골 골짜기의 좌측 둔턱 학구3거리 남서쪽 약 150미터 지점, 현 순천 자동차 전문학원 뒤 언 덕 포장도로 우측 서정 수 씨 농장 출입문 주변 언덕 서면 압곡리 산 일대 야산 및 골짜기 (서면 압곡리 뫼골 우 측 골짜기) 서면지서 등 개별 사건 장소 1949년 9월 1948년11월 1949년 12월 1948년 11월 1949년 12월 1948년 10월 1950년 국군 15연대 서면지서 경찰 서면지서 경찰 주암지서 경찰 순천경찰서 경 찰 서면지서 경찰 주암지서 경찰 순천경찰서 경 찰 서면지서 경찰 국군 약 150명 273) 20명 274) 우측에 비봉 산 상봉, 좌측에 씨래 바구 약 80명 275) 3명 276) 철길은 현 재 비닐하 구 학구역 우스 자리 30여 명 외 다수 277) 5 278) 현재 남원- 광양 간 도로 건설 공사 중 31명 외 다수 279) 총계 약 400명 70명 280) 31명 순천지역 여순사건 567

96 제3권 4) 월등면 희생사건 순천과 구례가 연결되는 솔재는 여순사건과 한국전쟁기 소련재로 불렸다. 빨치산들의 출몰이 잦았던 까닭이었다. 솔재 너머 좌측 산악지대에 위치한 월등면은 비교적 여순사 건의 피해가 많지 않은 곳으로 알려졌으나, 진실화해위원회에 접수된 신청건수는 21건으 로 서면지역 다음으로 많은 건수를 보였다. 큰박골 사건은 월등면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이웃 황전면에서 연행된 주민들도 이곳으로 끌려와 사살되었다. 큰박골 사건 월등면 큰박골 사건은 1948년 11월 26일 국군 제12연대ㆍ월등지서 경찰들이 월등면 신월리ㆍ계월리 거주 민간인들을 반란동조 및 반군협력 등의 혐의로 월등면 농선리 큰박 골에서 집단으로 사살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2개리와 최소 6개 이상의 마을에서 거의 269) 참고인 배 녹취록( ); 참고인 이기창 통화보고서( ); 신청인 배금엽 통화보 고서( ); 신청인 정하용 ( ); 신청인 김성기 ( ); 신청인 최택철 ( ). 270) 서면 거주 희생자 9명(직다-1351, 직다-1354, 직다1358, 직다-1360, 직다-6384, 직다-6385, 직다-7866, 직 다-9121). 271) 참고인 최홍수 통화보고서( ); 신청인 김영수 통화보고서 ( ); 참고인 이행수 ( ). 272) 서면 이외 거주 희생자 2명(직다-9895, 직다-7951). 273) 참고인 허신행 통화보고서( ); 참고인 박신호 통화보고서( ); 참고인 박신호 조 서( ); 참고인 김동수 통화보고서( ); 신청인 허채구 ( ); 신청인 공준모 ( ); 신청인 공형모 조소( ); 참고인 정현종 통화보고서( ); 신청인 문덕심 ( ); 신청인 공봉덕 ( ); 참고인 정운식 조 서( ); 신청인 김영주 ( ). 274) 서면 거주 희생자 20명 (직다-1355, 직다1357, 직다-1381(확인 2), 직다-2329, 직다-3001, 직다-3616, 직 다-3733, 직다-3734(확인 2), 직다-3735(확인 2), 직다-5010, 직다-5011, 직다-5290, 직다-5302(확인 2), 직다-5303, 직다-6653, 직다-9114). 275) 신청인 허동환 ( ) 참고인 김동수 통화보고서( ); 참고인 이기창 통화보고서 ( ); 신청인 배형철 ( ); 신청인 정종원 ( ). 276) 서면 거주 희생자 2명(직다-1348, 직다-9120), 서면 이외 거주 희생자 1명(직다-1424). 277) 참고인 박 통화보고서( ); 신청인 김선문 ( ); 신청인 최덕용 ( ); 참고인 김봉조 통화보고서( ); 참고인 홍말례 통화보고서( ). 278) 서면 거주 희생자 2명(직다-1366, 미신청 김옥태), 서면 이외 거주 희생자 3명(직다-3435, 직다-9906, 미 신청 최창수). 279) 서면 거주 희생자 30명(직다-1352(확인 4), 1357, 직다-7785, 직다-9111, 직다-9113, 미신청 허필윤, 직다 -1361, 직다-1368, 직다-3369, 직다-3382, 직다-3385, 직다-3386, 직다-6288(확인 3), 직다-6650(확인 2), 직다-6653, 직다-7953, 직다-3615, 직다-7784, 직다-8365, 미신청 최진옥, 직다-1350, 직다-1353, 직다 -3002, 직다-3614), 서면 이외 거주 1명(직다-1422). 280) 서면 거주 희생자 확인 63명 + 서면 이외 거주 희생자 확인 7명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9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12연대와 지서 경찰은 마을을 급습하여 주민들을 소집한 뒤, 혐의자들을 구타하여 연행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른바 군경합동작전 이었 다. 효과적인 색출을 위해 병력은 여러 개 마을에 분산배치되었다. 체포되거나 연행된 사 람들을 빠르면 몇 시간 안에, 늦어도 3일 안에 사살하였다. 순천 황전ㆍ월등지역에서 12 연대가 자행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은 큰박골 사건만이 아니었다. 여순사건 당시 의용단 동원부장이었던 참고인 박의 에 따르면, 1948년 11월경 12연대가 월등지서에 와, 반군협조 혐의로 지서에 감금되어 있던 마을사람들을 지서 앞에서 사살하여, 본인을 비롯한 의용단원들이 시체를 치웠다고 했다. 281) 먼저 계월리의 경우, 참고인 권구댁과 신청인들의 을 종합하면, 1948년 11월 25일 (음 ) 반군이 들어와 월등면사무소에 불을 질렀다. 반군들은 월등면 계월리에 살 던 제갈숙(직다-1400, 19세)ㆍ이희철(직다-1408, 31세)ㆍ권성옥(직다-1411, 37세) 등 마을 젊은이들에게 월등면사무소 주변 경계를 서게 했다. 다음날 11월 26일(음 ) 새벽 (반군은 퇴각하고), 보초 서던 마을청년 5명은 귀가했다. 마을 누군가가 이를 목격 하고 월등지서주임 조금동에게 신고했다. 11월 26일 오전 조금동 등 월등지서 경찰들과 12연대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와 반군에 협조한 이들을 수색했다. 유복암(직다-1397, 41 세), 윤우암(직다-1407, 36세), 김용배(직다-1409, 37세), 제갈숙, 이희철, 권성옥 등 9 명의 젊은이들은 동네 앞 들판에서 군경에게 장작과 긴 소총 등으로 구타를 당했다. 12 연대와 지서경찰은 이들을 월등지서로 연행했다. 연행 뒤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오 후, 월등지서 경찰과 12연대가 제갈숙, 이희철, 권성옥 등 6명과 황전면 주민들 44여 명 을 월등면 농선마을 큰박골에서 집단으로 사살했다. 사건 당일 월등지서는 제갈숙의 가 족에게 시신을 찾아가라 통보했다. 282) 한편, 같은 날 계월리 중천마을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당시 13살로 희생자의 연행을 목격한 신청인 제갈덕모의 에 따르면, 1948년 11월 26일(음 ) 아침, 월등지서 경찰 4 5명이 마을에 와 주민들을 모두 소집했다. 경찰들은 제갈아지(직다 -1401, 22세)와 그의 당숙 제갈길세를 비롯한 청년들을 구타한 뒤, 총으로 위협하여 월 등지서로 연행했다. 인근 마을 젊은이들도 이미 연행된 뒤였다. 당일 저녁 제갈아지의 모 281) 참고인 박 ( ) 282) 참고인 권구댁 통화보고서( ); 신청인 권종국 ( ). 신청인 제갈종과 이양기 는 희생자 제갈숙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제갈종, ( ); 신청인 이양기 ( ). 신청인 유순호는 연행된 지 일주일 정도 지난 1948년 11월 초 마을사람들의 연락 을 받아, 희생자 유복암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유순호 ( ) 순천지역 여순사건 569

98 제3권 친이 지서로 밥을 가져갔는데, 경찰은 이미 오후 4시경 양지맷골에서 사살했다고 심드렁 하게 말했다. 다음날 월전중학교에서 월등면 방향으로 3 400m 방향에 있는 큰박골에 가보니 사람들이 나뉘어 사살되어 있었다. 283) 신월리의 경우, 참고인 김효수ㆍ허일순ㆍ정기상의 을 종합하면, 1948년 11월 23 일 밤 5 6명의 반군이 신월리 율지마을에 들어와 저녁밥을 지으라고 협박했다. 해코지 가 두려워 마을구장 허순조(직다-8782, 당시 33세)와 그의 아내가 밥을 해주었다. 다음 날 11월 24일 월등지서 경찰들이 와서 반군에 협력했다고 허순조를 월등지서 유치장으 로 연행해 2일 동안 고문했다. 당시 지서에는 40여 명의 주민들이 잡혀 있었다. 그 무리 속에는 신월리 신월마을 구장 정기선(직다-8857, 29세)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난 23일 경찰이 마을에 급습해 월등면 각 마을의 구장들과 사상이 의심되는 몇 명의 주민들을 연 행하는 과정에 구장인 그도 끌려왔다. 1948년 11월 24일 오후 황전면에 주둔했던 12연 대 군인들이 지서에 찾아와 12연대 군인들은 월등면에서 끌려온 주민 수십 명을 월등지 서 앞마당에 2줄로 세운 뒤 뒤돌게 했다. 각 마을 구장들을 끌어내 반군협조자를 지목하 라는 것이었다. 정기선도 끌려 나왔다. 12연대 군인들은 칼빈 개머리판으로 내리치며, 빨 갱이나 협조자를 골라내라고 다그쳤다. 한 명도 없다고 하자 군인들은 정기선을 마구 구 타하며, 다시 지서 안으로 끌고 갔다. 이틀 뒤인 11월 26일 월등지서에 다시 국군 12연대가 들어와 경찰에게 뭔가를 물어본 뒤, 유치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끌어내 월등지서 앞마당에 2줄로 세웠다. 한 줄은 석방 되어 귀가했고, 한 줄은 등에 사형자 라고 씌어졌다. 그 줄에는 월등지서로 출두하라는 말을 듣고 온 황만수(직다-1395, 33세)ㆍ김복종(직다-1396, 29세)도 있었다. 방앗간에 서 일하다 새벽에 귀가한 그들은 반군으로 간주되었다. 12연대 군인들은 이들을 트럭에 태운 뒤, 월등면 큰박골로 가서 집단으로 사살했다. 허 순조의 사촌형 허쌍조는 11월 26일 사형자라는 글씨가 등에 적힌 채, 트럭에 타고 끌려가 는 사촌동생 허순조의 겁먹은 표정을 목격했다. 당일 월등면 희생자는 35명이고, 그중 신 월리 출신은 허순조ㆍ정기선ㆍ황만수ㆍ김복종을 비롯해 남상효(미신청, 20세) 284) ㆍ김욱 종ㆍ정일조ㆍ정학영ㆍ강정원ㆍ남용길 도합 10명이다. 285) 이상을 종합하면 1948년 ) 신청인 제갈덕모는 희생자 제갈아지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제갈덕모 ( ). 284) 참고인 남홍우 통화보고서( ). 285) 참고인 김효순 통화보고서( ); 참고인 정기상 통화보고서( ) 참고인 허일순( ). 신청인 허기는 희생자 허순조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허기 (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9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월 26일 12연대 군인들과 서면지서 경찰들에 의해 사살된 월등면 계월ㆍ신월리 희생자 는 총 40명으로 추정되나, 조사결과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총 12명이다. 계월리는 백운산 줄기 송치재 부근으로 빨치산이 자주 출현했던 지역이라는 점에서 사 건의 한 배경이 되고 있다. 1949년 11월 중순경 경찰이 박재정(직다-1405, 23세)을 계월 리 야산에서 사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286) 계월리 거주 김성균(직다-1404, 27세)은 여순사건이 나고 반군의 강압에 못 이겨 심부 름을 한 일이 있었다. 1950년 1월 4일(1949. 음 ) 김성균은 집에서 밥을 먹던 중 인 기척에 도망가다 얼마 못 가 쫓아온 한청단원들에게 붙잡혔다. 김성균에게 반군협조 혐 의를 두었던 한청단원들은 그를 구타하고 돌로 내리쳤다. 누나 김성순이 집에서 비명소 리를 듣고 가보니 동생 김성균은 머리에 피를 흘리고 죽어 있었다. 287) 농선리의 경우, 참고인 이연순의 에 따르면 1949년 1월 9일(1948. 음 ) 밤 월등지서 경찰이 월등면 농선리 장선마을에 살던 이기찬(직다-1412, 40세)ㆍ이삼근(직 다-1413, 35세)ㆍ이정철(직다-7640, 36세)을 밤에 불러내 월등면 산성마을 지나 나오 는 작은 지사골 논에서 사살했다. 다음날 이철섭의 모친이 밥을 해 월등지서로 찾아가던 길에 시신들을 현장에서 발견하여, 이웃 이기찬의 아내에게도 알려주었다. 288) 월용리의 경우, 참고인 이순남의 에 따르면, 1948년 11월 18일 밤 자택에서 자던 중 경찰 정보원 박성심이 데려온 의용경찰 2명과 같이 이복석(직다-1398, 36세)을 농협창 고(현 황전 하나로마트 자리)로 연행했다. 이틀 정도 가둔 뒤 경찰은 10월 18일 다른 사 람들 4 5명과 같이 쇄정으로 끌고 가 사살했다. 현장에 가보니 이복석 등 4 5구의 시 신이 발견됐다. 이복석은 복부에 2발 총상을 입고 누워 있었다. 289) 여순사건으로 숙부 이봉증 등 월룡리 주민들이 살해되자, 이기증(직다-1334, 50세)은 신변에 위협을 느껴 집을 나갔다. 1949년 1월 9일 경찰은 월등면 태안사에서 이기증을 체 포하여 월등지서로 연행했다. 같은 날 월등면 갈전리 야산에서 마을에서 같이 끌려간 이 들과 사살되었다. 290) 286) 신청인 박종대 ( ). 287) 참고인 이운재 면담보고서( ); 신청인 김재홍 ( ); 참고인 김성순 통화보고 서( ). 신청인 김재홍은 희생자 김성균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288) 참고인 이연순 통화보고서( ); 신청인 이순애 ( ); 신청인 이영섭 ( ); 신청인 이철섭 ( ). 신청인 이순애ㆍ이영섭ㆍ이철섭은 희생자 이 기찬ㆍ이삼근ㆍ이정철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289) 참고인 이순남 통화보고서( ); 신청인 이광섭 ( ). 290) 신청인 이진휘는 희생자 이기증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이진휘 ( ). 순천지역 여순사건 571

100 제3권 1948년 12월 20일(음 ) 밤 월등지서 경찰들이 월용리에 살던 이봉주(직다-1402, 19세)를 연행했다. 다음날 아침 운곡마을 한청단원 장영철이 이봉주가 밤에 죽었다고 알 려줬다. 월등면사무소 앞 죽봉산 아래 논 도랑가에서 다른 2명과 함께 사살된 채 발견되 었다. 291) 군경의 빨치산토벌 과정에서 월등면 공무원들도 피해를 입었다. 1948년 10월 22일 월 등면사무소 공무원 박인규(직다-1406, 28세)가 근무 중 군인들에게 연행되어, 순천 방향 으로 가는 열차에 실려 간 뒤,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내 한정례가 양수정이라는 곳 에서 열차에 타는 남편 박인규을 목격했다. 292) 조사결과, 월등면 희생자는 총 약 70명 외 다수(<표 9> 참조)로 추산되나, 월등면 진실 규명대상자 21명 가운데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사람은 총 19명이고, 2명은 희 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원 확인 결과와 주요 희생장소 및 희생자 수는 아래 <표 8>, <표 9>와 같다. <표 8> 월등면 희생자 신원 확인 연 번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시신 제적 유족회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수습 등본 희생자 기타 번호 자료 여부 확인 명단 여부 이기증 ( 李 奇 增 ) 황만수 ( 黃 萬 壽 ) 김복종 ( 金 福 鍾 ) 유복암 ( 兪 福 岩 ) 이복석 ( 李 福 石 ) 제갈숙 ( 諸 葛 淑 ) 남 50 남 33 남 30 남 41 남 36 남 19 월등면 월용리 1334 확인 월등면 신월리 1395 (사망일자 일치) 월등면 신월리 월등면 계월리 월등면 월용리 월등면 계월리 확인 1396 확인 1397 확인 1398 확인 1400 확인 291) 신청인 이항근은 희생자 이봉주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이항근 ( ). 292) 신청인 박종대 (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0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총 계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시신 제적 유족회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수습 등본 희생자 기타 번호 자료 여부 확인 명단 여부 제갈아지 ( 諸 葛 可 只 ) 이봉주 ( 李 鳳 柱 ) 김성균 ( 金 晟 均 ) 박재정 ( 朴 載 汀 ) 박인규 ( 朴 仁 奎 ) 윤우암 ( 尹 又 巖 ) 이희철 ( 李 熙 哲 ) 김용배 ( 金 容 培 ) 권성옥 ( 權 性 玉 ) 이기찬 ( 李 基 贊 ) 이삼근 ( 李 三 根 ) 이정철 ( 李 正 哲 ) 허순조 ( 許 淳 祖 ) 정기선 ( 鄭 淇 銑 ) 남상효 ( 南 相 孝 ) 남 22 남 19 남 27 남 23 남 28 남 36 남 31 남 37 남 29 남 40 남 35 남 36 남 33 남 29 남 20 월등면 계월리 월등면 월용리 월등면 계월리 월등면 계월리 월등면 계월리 월등면 계월리 월등면 계월리 월등면 계월리 월등면 계월리 월등면 농선리 월등면 월용리 1401 확인 1402 확인 1404 확인 1405 추정 1406 추정 1407 확인 1408 확인 1409 확인 1411 확인 1412 확인 1413 확인 월등면 월용리 7640 (사망일자 일치) 월등면 신월리 8782 (사망일자 일치) 월등면 신월리 확인 확인 8857 확인 월등면 신월리 미신청 (사망일자 일치) 총 21명 (확인 19명/ 추정 2명) 확인 순천지역 여순사건 573

102 제3권 연 번 <표 9> 월등면 주요 희생장소와 희생자 수 희생 장소 희생자 수 희생 시기 가해주체 지역 장소 세부 추산치 확인 비고 1 월등 면 농선리 큰박골 월전중학교(농선리 108-3) 서남쪽 1km 지점 농곡마을 앞산 하단부 매실밭 1948년 11월 26일 월등지서 경찰, 국군 12연대 약 40명 293) 12명 294) 삼양 산업 현장 우측에 건물 위치 2 월등 면 기타 지역 월등지서 등 개별 사건 장소 1948년 10월 1949년 12월 월등지서 경찰, 국군 약 30명 295) 외 다수 12명296) 총계 약 70명 외 다수 24명 297) 5) 황전면 희생사건 황전면은 구례와 인접해 있고, 지리산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지리적인 이 유로, 지역주민의 의사와 상관없이 공비토벌작전의 대상이 되어 피해가 많았다. 여순사건 진압 후 황전에는 국군 12연대와 15연대ㆍ20(4)연대가 진주ㆍ주둔하면서, 공비토벌작전을 벌였다. 12연대는 1948년 11월 경 구례읍에 주둔하면서 황전지역을 비 롯한 구례까지 일상적인 토벌작전을 벌였다. 15연대는 1949년 상반기에 황전ㆍ월등지역 에 주둔했다. 15연대가 원대복귀한 후 20(4)연대가 1949년 하반기 황전ㆍ월등지역에 주 둔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빨치산유격대는 1949년 10월 초부터 1950년 2월 말까지 순천 곡성 경계인 봉두산과 구례 경계인 용서폭포 뒷산 까바구산(별봉산 동주리봉) 부근, 조계산 부근, 백운산 부근에 걸쳐 주둔했다. 298) 293) 신청인 권종국 ( ); 참고인 김효수 통화보고서( ). 294) 월등면 거주 희생자 12명 (직다-1395, 직다-1396, 직다-1397, 직다-1400, 직다-1401, 직다-1407, 직다 -1408, 직다-1409, 직다-1411, 직다-8782, 직다-8857, 미신청 남상효). 295) 신청인 이진휘 ( ); 신청인 이항근 ( ); 참고인 황제연 통화보고서 ( ). 296) 월등면 거주 희생자 9명(직다-1400, 직다-1334, 직다-1402, 직다-1404, 직다-1405(추정), 직다-1412, 직다 -1413, 직다-7640, 직다-1406(추정)), 월등면 이외 거주 희생자 3명(직다-9263, 직다-1792, 직다-9116). 297) 월등면 거주 희생자 21명(확인 19, 추정 2), 월등면 이외 거주 3명(확인 3). 298) 지리산지구경찰대총지휘본부가 1950년 발간한 전투상보 에 일자별로 실린 敵 情 要 圖 - 人 民 遊 擊 軍 第 2 兵 團 에는 단기 4282(1949)년 10월 1일부터 4283(1950)년 2월 28일까지의 인민유격대 제2병단의 주둔지 가 10일 간격으로 표시되어 있다. 1949년 10월 10일의 경우, 인민유격대 제2병단은 순천 곡성 부근과 순 천 구례 부근에 무장 70명, 비무장 20명이 산개해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지도상의 이 지역은 순천-곡성 경계인 봉두산과 순천-구례경계인 용서폭포 뒷산 까바구산(별봉산 동주리봉) 부근으로 추정된다. 智 異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0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한편, 국군 12연대ㆍ15연대ㆍ20(4)연대는 황전면에서 반군협조나 반란동조 혐의자를 연행 및 구타ㆍ고문한 뒤 사살했다.299) 또한 취조와 조사가 끝나지 않아 지서에 구금중 인 주민들을 지서 앞으로 끌어내 사살하기도 했다. 황전지서 경찰들도 반군협력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황전면 거주 민간인들을 구타 한 뒤 지서로 연행하여, 고문 및 취조하거나 구금 뒤 사살하였다. 한편, 황전면지역의 피 해가 컸던 이유에는 황전지서주임 임상기의 영향이 컸다.300) 황전면지역 신청인들의 상 당수가 가해자로 황전지서 경찰, 특히 임상기를 지목했다.301) 월등면 망룡계곡 사건 황전지역의 대표적인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은 1948년 11월경 황전지서 경찰들이 황학 리 주민들을 빨치산동조 혐의로 월등면 망룡계곡에서 집단으로 사살한 사건이다. 참고인 김창순의 에 따르면, 1948년 11월 1일경 황전지서 경찰들이 황학리 발산마 을 주민들을 집결시킨 뒤 일부는 그 자리에서 사살하고, 일부는 황전지서로 연행했다. 그 후 월등면 망룡마을 옆 골짜기에서 오인권(직다-1331, 27세) 등 70여 명을 집단으로 사살 했다.302) 신청인과 참고인의 을 종합해볼 때, 전체 희생자 수는 70여 명으로 추정되나, 진실 화해위에서 확인한 희생자는 1명이다. 양지맷골 사건 황전면과 월등면의 경계에 자리한 골짜기 양지맷골에서 황전ㆍ월등면 민간인들이 가 장 많이 죽어나갔다. 이른바 양지맷골 사건이다. 이 사건은 여순사건 진압 이후 1948년 10월말부터 1949년 9월까지 12연대와 황전ㆍ월등지서 경찰들이 반군협력 또는 반란가 담 등의 혐의로 거주 민간인들을 집단적으로 처형한 사건이다. 참고인ㆍ신청인의 과 조사결과 등을 종합해볼 때, 이 사건의 희생자는 황전면과 월등면에 걸쳐 총 90명으로 山地區警察隊總指揮本部, 敵情要圖, 뺷戰鬪祥報뺸(檀紀 ), 內務部 治安局, ) 12연대는 구례 문척면ㆍ구례읍 등지에 주둔하면서 황전면에 출동하여 토벌작전을 벌였다. 진실화해위 원회, 구례지역 여순사건 조사결과보고서, ; 참고인 서 ( ). 300) 임상기는 황전지서 주임으로 역임한 후 쌍암지서 주임으로 전근을 가, 그곳에서도 민간인 집단희생사건 에 깊숙이 관여했다. 301) 신청인 김태옥 ( ). 302) 참고인 김창순 통화보고서( ); 참고인 오영순 통화보고서( ). 경찰자료에는 오 인권이 사살된 자라고 기재되어 있다. 순천경찰서, 뺷보안기록조회뺸(1979)ㆍ 뺷사실조사서뺸 (1980). 순천지역 여순사건 575

104 제3권 추정되나, 진실화해위원회가 확인한 황전면 희생자는 5명이다. 월산리의 경우, 참고인 허기주의 에 따르면, 황전지서 경찰들이 평소 수상히 여기 던 조씨(이름 미상)를 찾았다. 지서 경찰은 조씨의 딸을 구타하여 아버지 조씨가 월산리 자은마을로 갔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지서경찰은 월산리 자은마을에 와서 주민들을 소집 했다. 주민들 손바닥을 일일이 검사한 지서경찰은 허전(직다-6974, 25세)의 손이 곱다며 반란군 종자라고 몰아세웠다. 경찰은 누명을 벗고 싶으면 한청에 가입하라고 강요했다. 허전은 거부했다. 다음날 지서로 불려가 모질게 매질을 당한 뒤 귀가했다. 며칠 후 1948 년 11월 25일(음 ) 지서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지서에 가보니 경찰들이 구금돼 있 던 민간인들을 지서 앞 트럭에 강제로 태우고 있었고, 허전도 그 트럭에 실렸다. 트럭은 양지맷골로 향했다. 경찰들은 끌려온 사람들을 다시 폭행하기 시작했다. 허전과 함께 25 명이 사살되었다. 303) 여순사건 당시 황전면 죽청리 좌익활동가 김영운이 동네주민 고재옥(직다-1403, 26세) 을 명부에 죽청리 청년단장으로 기재했다. 빨치산이 도주한 자리에서 관련 명부를 발견 한 15연대는 이를 황전지서 경찰에게 넘겼다. 황전지서 경찰들은 명부에 기재된 사람들 을 모두 체포했다. 고재욱도 1949년 9월 25일(음 8. 4.) 황전지서로 연행됐다. 다음날, 9월 26일(음 8. 5.) 황전지서 경찰들은 월등면 농곡마을 앞산 현 월전중학교 옆 양지맷골에서 고재욱과 연행된 황전면 민간인 50여 명에게 구덩이를 파게 한 뒤 사살했다. 옆 골짜기에 는 월등면 민간인들도 동일하게 사살되었다. 304) 참고인 이용수는 황전지서 경찰이 주민 들을 양지맷골로 끌고 가는 것을 목격했고, 이후 총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다. 305) 사건발생 며칠 전, 황전지서 경찰이 죽평리에 와 1949년 9월 26일(음 8. 5.) 오전까지 수 평리, 괴목리로 소개하라고 명령했다. 소개를 안 한 집은 모두 반군으로 간주, 소각해버리 겠다고 위협했다. 죽평리 주민 최경식(직다-6535, 28세)은 짐을 꾸렸다. 알고 지내던 수평 리 고광출에게 우마차를 빌려 수평리 면소재지로 부지런히 짐을 옮겼다. 황전지서 경찰 은 우마차의 짐을 의심하여 최경식과 고광출을 지서로 연행했다. 1949년 9월 27일(음 8. 6.) 오후 3시경 황전지서 경찰 10여 명이 최경식과 고광출을 비롯한 황전면 다른 주민들 40여 명을 양지맷골로 끌고 갔다. 경찰들은 이들을 매질하면서 빨치산의 어떤 심부름을 303) 참고인 허기주 통화보고서( ); 신청인 허치성은 사살당한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현장에 가보 니 죽은 25명 중 희생자 허전이 위에 엎드려 죽어 있었다고 했다. 작은어머니와 어머니 둘이서 교대 로 시신을 지고 와 울면서 매장했다고 말했다. 신청인 허치성 통화보고서( ). 304) 참고인 이용수 통화보고서( ); 참고인 고두석 통화보고서( ); 참고인 고재문 통화 보고서( ) 305) 참고인 이용수, 통화보고서(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0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했는지 불라했다. 끌려온 주민들이 혐의를 부인하자, 경찰 무리 가운데 한 명이 전원 총 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40여 명을 사살했다. 마을사람들이 총소리를 들었다. 306) 1949년 12월 12일(음 ) 오전 황전지서 경찰 4 5명이 황학마을 김길동(직다 -6536, 35세)의 집에 들이닥쳤다. 반군동조자 김길동 나오라고 하면서 지서로 연행했다. 끌려간 지서에서 구타와 고문이 이어졌다. 가족들이 밥을 넣어주었다. 3일째 되는 12월 15일(음 ), 지서 경찰이 더 이상 밥을 넣을 수 없다고 말해, 발길을 돌렸다. 이날 오후 황전지서 경찰은 김길동과 황전면에서 연행된 다른 20여 명을 함께 양지맷골로 끌 고 갔다. 무리 안에는 남녀가 뒤섞여 있었다. 경찰들은 빨치산에 동조한 사실을 인정하라 며 매질을 가했다. 다들 동조한 사실이 없다고 하자, 경찰 한 명이 전원 총살 명령을 내렸 다. 20명이 사살되었다. 307) 황학리의 경우, 희생자의 시신을 수습한 참고인 남맹희의 에 따르면, 1948년 11월 17일 낮에 순천경찰서 경찰 2명이 황학리 자택에서 하재규(직다-9116, 25세)를 연행했다. 며칠 지나 하재규는 황전지서로 이송되었다. 며칠이 지난, 1948년 12월 1일 밤 월등면 장 선마을 야산에서 총소리가 울렸다. 황전지서 경찰들이 사살한 것이었다. 다음날 12월 2일 장선마을 야산에서 하재규 등 시신들 3구가 발견되어 시신을 수습했다. 하재규는 연행될 때 입은 옷 그대로 보름 만에 시신이 되어 누워 있었다. 308) 황학리 거주 김병수(직다 -7951, 28세)는 1948년 11월 초 순천경찰서에 연행된 후 석방되었다. 그와 평소 관계가 좋지 않던 한청단원들이 김병수의 자택으로 찾아와 1948년 11월 10일 김병수 등 5명을 송치재에서 사살했다. 김병수의 동생 김학수(직다-7951, 20세)는 1949년 11월 빨치산에 끌려간 뒤 이후 군경에게 살해되었다. 309) 황전면의 공무원들과 마을구장들도 군경의 토벌작전에서 피해를 입었다. 참고인 장정 자ㆍ장영자ㆍ장경재ㆍ이용호의 을 종합하면, 1948년 10월 30일 황전면사무소에서 306) 참고인 이용수 통화보고서( ); 참고인 고두석 통화보고서( ); 참고인 고재문 통화 보고서( ). 신청인 최용식이 직접 양지맷골에서 희생자 최경식의 시신을 수습했으며, 총알이 박힌 피투성이 시신에는 멍자국이 선명했다고 했다. 307) 참고인 김옥암 통화보고서( ); 참고인 김병화 통화보고서( ). 신청인 김병태는 어 머니가 직접 희생자 김길동의 시신을 수습했고, 훗날 경찰이 사살했다고 순천경찰서에 다니는 지인에게 들었다고 했다. 한편, 신청인 김병태가 제출한 제적등본에는 희생자 김길동이 1948년 10월 25일 오 후 7시 황전면 황학리 552번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신청인 김병태 ( ). 308) 참고인 남맹희 통화보고서( ). 309) 참고인 이행수 ( ); 참고인 김병래 통화보고서( ); 참고인 김옥암 통화보 고서( ). 김병수의 부인 정명순은 사건현장에서 김병수 등 시신 5구를 확인하고 시신을 수습 했다. 신청인 김영수 통화보고서 ( ). 순천지역 여순사건 577

106 제3권 구례방향 세 번째 집 앞 건너편에서 군인토벌대가 속옷차림 사람들을 군용트럭 몇 대에 싣고 갔다. 행렬의 마지막 차량이 면사무소 앞에서 섰다. 괴목리에 살던 면사무소 공무원 장석남(직다-1394, 32세)이 책을 들고 나오다 군인토벌대에 체포되어, 트럭에 실려가 조 곡동 둑실마을 죽도봉 계곡에서 연행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사살되었다.310) 1948년 11월 초(음 10월 초) 월산리마을 구장 허길성(직다-1333, 31세)은 반군동조 혐 의로 순천농고 학생들에게 연행되어, 지서에 구금되었다. 지서에 인계된 그는 11월 10일 (음 ) 경찰에게 고문을 당한 후 사살되었다. 지서 경찰이 부친 허길성을 고문하다 끝내 사살하는 광경을 목격한 참고인 허충례의 이다. 여순사건 나던 해 1948년 음력 10월 초였습니다. 낮에 학생들이 떼로 집에 와서 아버지 를 황전지서로 데려갔습니다. ( ) 저는 며칠 동안 저녁마다 황전지서로 아버지 밥을 드리 러 면회를 갔습니다. ( ) 지서 안에서 경찰복 입은 이들이 아버지 코에 고춧가루 물을 붓 고 고문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좌익활동을 했냐고 바른대로 말하라고 경찰들이 고문했습니 다. 아버지가 연행되고 며칠 후인 1948년 음력 10월 10일 저녁에 제가 면회를 갔는데( ) 지서 앞에 냇가가 있었습니다. ( ) 경찰이 ( ) 총으로 쏴 죽였습니다. 저는 지서 앞 냇가 건너편에서 아버지가 그렇게 총에 맞아 죽는 걸 보았습니다.311) 1949년 7월 29일 군 토벌대가 마을에 반군이 들어온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금평리 교동마을 반장 손형수(직다-7270, 31세)를 구례 간전면 또는 문척면 부대 주둔지 로 연행하여, 대창으로 척살했다.312) 서면 구상리ㆍ흥대리ㆍ판교리의 경우처럼, 황전면에서도 토벌대와 지서 경찰들은 빨치 산 입산 혐의자가 거주했던 마을(집)에 대한 소각과 그 가족에 대한 대살(代殺) 및 구타 를 자행했다. 반군 습격에 대한 보복의 일환이었다. 황전면 모전리에 거주했던 이영수(직다-3490, 25세, 이명 이봉수)는 면사무소 직원 이 주호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다. 어느 날 여자들과 머슴 이영수만 있던 이주호의 집에 빨 치산들이 들이닥쳐 식량과 의복을 가져갔다. 3일 뒤 빨치산들은 다시 이주호의 집엘 들러 잡은 소를 이영수에게 괴목리까지 운반하라고 시켰다. 이영수는 구타와 협박에 못 이겨 소를 끌어주었다. 다음날 점심 한청단원들이 마을로 들어와 주민들을 마을 동산으로 소 310) 참고인 장정자 통화보고서( ); 참고인 장영자 통화보고서( ); 참고인 장경재 통화 보고서( ); 참고인 이용호 통화보고서( ). 311) 참고인 허충례 통화보고서( ). 312) 참고인 손덕례 통화보고서( ); 참고인 손덕순 통화보고서( ). 신청인 손승상은 희 생자 손인수, 손인갑의 시신을 증조부가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손승상 (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0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집하여 남자들을 구타했다. 특히 신청인 김용출의 남편 이윤수는 빨치산의 짐을 날라준 이영수의 형이라는 이유로 무차별로 구타를 당했다. 동생 이영수는 한청단원들에게 연행 되어 황전지서에 3일 간 감금되었다. 1948년 12월 9일경(음 경) 한청단원들이 모전 리 이윤수의 집에 불을 지르면서, 12월 8일(음 경) 이영수가 본황 뒷산 골짜기에서 사살되었으니 확인하라고 말했다. 313) 황전 모전리 내모전 마을에 살았던 황종무가 좌익활동 후 반군에 가담하여 입산한 일 이 있었다. 1948년 12월경(음 11월경) 황전지서 경찰들이 마을에 와 반군 마을이라며 불 을 지르고, 황종무의 사촌 황종부(직다-1792, 24세) 등 젊은이들 15명을 연행하여 황전지 서 지하유치장에 구금했다. 다음날 황종부를 제외하고 연행된 주민들 모두가 석방되었다. 감금 후 며칠이 지났을 때, 토벌대가 반군의 습격을 받은 일이 있었다. 토벌대는 그 보복 으로 1948년 12월 13일(음 ) 해질녘에 황종부 등 5 6명을 죽내리 공동묘지 인 근 야산에서 사살했다. 314) 1948년 11 12월경 진압군인들이 황전면 선변리 거주 최인규(직다-6646, 23세), 최 진규(직다-6646, 18세) 등 마을청년들을 연행하여 살해하였다. 315) 군 토벌대는 가족의 죽음에 항의하는 민간인도 그 자리에서 사살했다. 1949년 7월 29일 동생 손인수가 토벌대에게 대창으로 척살 당하자 큰형 손인갑(직다-7270, 33세)이 토벌 대 주둔지인 구례 간전면으로 달구지를 가지고 시신을 수습하러 갔다. 동생의 참혹한 시 신을 목도하고 감정이 복받친 손인갑은 토벌대 군인들에게 왜 내 동생을 죽였느냐고 항 의했다. 12연대 군인들은 그 자리에서 손인갑을 사살했다. 316) 조사결과, 황전면 희생자 가운데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사람은 총 16명이다. 신원 확인 결과와 주요 희생장소 및 희생자 수는 아래 <표 10>, <표 11>과 같다. 313) 신청인 김용출 ( ). 신청인 김용출은 황전지서 경찰 또는 괴목 한청단원들이 가해자이 고, 시신은 바로 수습했다고 했다. 한편, 신청인은 자신의 집이 타버려 경제적으로 어려운 곤궁한 삶 을 살았다고 했다. 314) 참고인 황제연 통화보고서( ). 신청인 황종은은 사건 당일 연락이 와 희생자 황종부의 시신을 수습했고, 내모전 마을에서는 황종부만 사살되었다고 했다. 315) 참고인 이점순 통화보고서( ). 316) 참고인 손덕례 통화보고서( ); 참고인 손덕순 통화보고서( ). 순천지역 여순사건 579

108 제3권 <표 10> 황전면 희생자 신원 확인 연 번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제적 유족회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시신수습 등본 희생자 기타 번호 자료 여부 확인 명단 여부 오인권 ( 吳 仁 權 ) 허길성 ( 許 吉 星 ) 장석남 ( 張 錫 楠 ) 고재옥 ( 高 在 玉 ) 황종부 ( 黃 鍾 涪 ) 이영수 ( 李 永 洙 ) 최경식 ( 崔 敬 植 ) 김길동 ( 金 吉 童 ) 최인규 ( 崔 仁 奎 ) 최진규 ( 崔 珍 圭 ) 손인갑 ( 孫 仁 甲 ) 남 27 남 31 남 32 남 26 남 24 남 25 남 28 남 35 남 23 남 18 남 허전 남 손형수 ( 孫 亨 洙 ) 김병수 ( 金 炳 洙 ) 김학수 ( 金 學 洙 ) 하재규 ( 河 在 奎 ) 남 31 남 28 남 20 남 25 황전면 황학리 황전면 월산리 황전면 괴목리 황전면 죽청리 황전면 모전리 황전면 모전리 황전면 죽청리 황전면 황학리 황전면 선변리 황전면 선변리 1331 확인 1333 확인 1394 타 재를 시신이 불에 가져옴 확인 1403 확인 1792 확인 3490 확인 6535 확인 6536 확인 6646 확인 6646 확인 황전면 금평리 6891 (사망일자 일치) 황전면 월산리 황전면 금평리 황전면 황학리 황전면 황학리 황전면 황학리 확인 6974 확인 7270 확인 7951 확인 7951 확인 9116 확인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0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총 계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제적 유족회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시신수습 등본 희생자 기타 번호 자료 여부 확인 명단 여부 총 16명 (확인 16명) <표 11> 황전면 주요 희생장소 및 희생자 수 연 번 희생장소 희생 희생자 수 가해주체 지역 장소 세부 시기 추산치 확인 1 월등면 농선리 양지맷골 2 월등면 망용리 보름터골 3 황전면 기타 지역 총계 순천월전중학교(농선 리108-3) 서남쪽 약 500m 지점 농곡마을 앞산 골짜기 상단부 망용마을 버스승강장 에서 망용보건소 지 나 마봉산 방향으로 약 500m 지점 우측 보름터골로 진입, 약 50m 지점 현 매화밭 황전지서, 구례 간전 면 등 개별 사건 장소 1948년 10월 1949년 12월 1948년 11월 1일 1948년 12월 1949년 12월 12연대 순천경찰서 경찰, 황전지서 경찰 황전지서 경찰 순천경찰 국군 3연대 비고 현장 위편 언덕 우 약 110명 317) 3명 318) 측에 김해 김씨 김 종순의 묘지 위치 다수 319) 1명 320) 에 정진양씨 묘지 위치. 현장은 과거 골짜기 초입 좌측 에 논이었음 약 30명 321) 14명 322) 약 140명 외 다수 18명323) 317) 신청인 고화석 ( ); 신청인 최용식 ( ); 참고인 이용수 통화보고서 ( ); 참고인 김옥암 통화보고서( ); 참고인 김병화 통화보고서( ); 신청 인 김병태 ( ). 318) 황전면 거주 희생자 3명(직다-1403, 직다-6535, 직다-6536). 319) 신청인 오광호 ( ); 참고인 김창순 통화보고서( ); 참고인 오영순 통화보고 서( ). 320) 환정면 거주 희생자 1명(직다-1331). 321) 참고인 정점례 면담보고서( ); 신청인 허수길 ( ).; 참고인 황제연 통화보고 서( ); 신청인 김영수 통화보고서 ( ). 322) 황전면 거주 희생자 12명(직다-1333, 직다-3490, 직다-6646(확인 2), 직다-7951(확인 2), 직다-6974, 직다 -1394, 직다-1792, 직다-6891, 직다-7270, 직다-9116), 황전면 이외 거주 희생자 2명(직다-3614, 직다 -9105). 323) 황전면 거주 희생자 16명(확인 16명) + 황전면 이외 거주 희생자 2명. 순천지역 여순사건 581

110 제3권 6) 해룡면 희생사건 해룡면은 여순사건 진압 이후 특경대ㆍ15연대ㆍ해룡지서 경찰들이 반란동조 및 반군 협력 혐의자들을 연행하여 취조 및 고문한 뒤 사살하였다. 해룡면에서 피해가 가장 큰 곳 은 도롱으로 이곳은 인민위원회 면책인 강인수가 살던 곳 324) 이었다. 다음으로 피해가 큰 곳은 용전으로 좌익이 일제시대 때 면서기였던 임정택의 사촌동생들을 임정택 대신 사살 했다. 이에 임정택은 순천에 있던 진압군 12연대에 이 사실을 통보하고 12연대는 용전의 좌익들을 사살했다. 도롱리의 경우, 1948년 11월경 도롱리에 살던 방용규(직다-1422, 18세)ㆍ방영규(직 다-1422, 15세) 형제는 여순사건 당시 괜한 화를 입을까 우려하여 당시 여천군 율촌면 외가로 피신해 있었다. 해룡경찰은 방용규 형제가 피신해 있다는 점에 혐의를 두고 모친 인 이호두를 잡아다 고문하여 형제의 귀가를 종용했다. 1948년 11월 중순경 집에 돌아 온 방용규, 방영규는 곧바로 해룡지서로 연행되었다가, 순천경찰서로 이송되었다. 15일 정도 감금된 후, 1948년 11월 말경 큰형 방용규가 먼저 덕암동 현 이수중학교 부근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집단으로 사살됐다. 그 후 순천경찰은 동생 방영규를 순천-광양 경계 산골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집단으로 사살했다. 325) 특히 해룡면 도롱리에선 순천경찰이 좌익활동 혐의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친인척들 을 대살하기도 했다. 참고인 김학연의 에 따르면, 1949년 늦가을 토벌대가 사촌이 좌익활동 혐의자라는 이유로 해룡면 도롱리에 살던 강길수(직다-8366, 22세)ㆍ강종훈 (직다-8366, 19세)ㆍ방봉애(직다-8366, 18세)를 해룡지서로 연행하여 구타와 고문을 가한 뒤, 유치장에서 사살했다. 326) 도룡리 참고인 한정택ㆍ강남수의 을 종합하면, 해룡면 도롱마을 이장 추형량(직다 -9098, 27세, 이명 추규봉)이 여순사건 당시 좌익에 연루되었다. 순천 진압 이후 반군협 력 혐의자들의 가족들도 피해를 보던 시절이라, 추형량의 친척인 추석순(직다-9096, 25 세)ㆍ추기선(직다-9097, 28세)ㆍ추기운(직다-9097, 26세) 3명은 산에서 숨어 지냈다. 1948년 12월 5일(음 ) 추기선, 추석순, 추기운은 도롱마을 뒷산 너머 용전리 쪽 나 무 아래에서 숨어 있는 것을 밭에 일하러 온 도롱리 설씨가 목격했다. 설씨는 순천경찰서 324) 신청인 방경규 ( ). 325) 동생 방영규는 구금 기간 동안 모친에게 편지를 해, 형 방용규가 어디론가 먼저 끌려갔다고 말했다. 참고 인 한정택 통화보고서( ); 참고인 강남수 통화보고서( ). 326) 참고인 김학연 통화보고서( ); 신청인 강남수는 희생자들이 경찰특공대에 연행되는 걸 목격했 다. 신청인 강남수 (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1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경찰이었던 친척 정학기에게 이들을 신고했다. 순천경찰서 경찰이 현장에 출동, 그 자리 에서 추기선, 추석순, 추기운을 사살했다. 327) 추형량의 동생 추인수(직다-9095)는 해룡 면 상삼리 논에서 마을사람 7명과 함께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한편, 추형량은 당시 친척 집을 전전하며 숨어 지내다가 1949년 1월 25일(1948. 음 ) 토벌대에게 연행되 어, 상삼리 논에서 사살되었다. 328) 상내리 참고인 손병휘의 에 따르면, 여순사건 당시 상내리에 살면서 철도청 순천 사무소에 근무했던 양회주(직다-8861, 26세)는 순천 진압 후 반군동조자로 분류되어 동 료 3 4명과 함께 경찰에 쫓기고 있었다. 순천 조례동 법원 뒤편 산에 토굴을 파고 은둔 하던 1949년 2월 7일(음 ) 동료 한 명이 순천 자기 집에 갔다가 가족들 설득으로 자수했다. 은신처는 누설되었다. 1949년 2월 7일(음 ) 순천경찰은 양회주와 동료 들을 현장에서 사살했다. 329) 1948년 11월경 반군이 용전마을을 급습하여 면서기 이영재를 살해했다. 그 후 정복 경 찰들이 마을에 들이닥쳐 주민들을 소집했다. 김두표(직다-9104, 22세)를 비롯한 주민들은 구타당한 뒤 도사지서로 연행됐다. 김두표는 순천경찰서로 이송되었다가 경찰에게 살해 당했다. 330) 여순사건 때 도롱리 윤씨가 반군에 합류하여, 용전마을 사람들을 선동했다. 반군들은 일제시기부터 용전마을 사람들을 괴롭혀 온 면사무소 임정택을 죽이려다가, 잘못 알고 임정택의 동생을 죽였다. 1948년 가을 진압군이 용전마을에 들어와 마을 앞 논에 주민을 소집했을 때 임정택은 평소 자신을 미워했던 사람들을 모두 좌익으로 몰았다. 진압군은 최창열(직다-9906, 20세) 등 27 28명 젊은이들과 옆 마을 신월부락 사람 1 2명 포함 30여 명을 마을 뒷산으로 끌고 갔다. 이후 이들은 광양 가는 길목 구랑실재에서 사살되 었다. 331) 임정택은 훗날 마을에 내려온 백운산 빨치산들에게 사살되었다. 332) 여순사건이 진압된 1948년 10월 말경 해룡지서 순경이 용전리 719번지에 살던 이기신 (직다-9946, 22세)과 마을청년들을 연행하여 고문 및 취조한 뒤, 순천경찰서로 이송했다. 327) 신청인 추환열은 희생자 추기선ㆍ추석순ㆍ추기운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추환열 조 서( ); 신청인 추환열 ( ). 328) 참고인 한정택 통화보고서( ); 참고인 강남수 통화보고서( ). 329) 참고인 손병휘 통화보고서( ). 신청인 양희승은 희생자 양회주의 시신을 순천시 조례동 법원 둿산에서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양희승 ( ). 330) 참고인 김도엽 통화보고서( ) 참고인 김봉조 통화보고서( ). 331) 참고인 김봉조 통화보고서( ); 참고인 홍말례 통화보고서( ). 332) 참고인 김봉조 통화보고서( ). 순천지역 여순사건 583

112 제3권 신청인 이기화가 순천경찰서로 동생 이기신을 몇 번이나 만나러 갔으나, 면회는 허락되 지 않았다. 이기화는 면회를 갔을 때, 감금된 사람들을 순천시 생목동 부근 공동묘지(현 이수중학교 부근)에서 사살할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경찰은 순천경찰서에 감금된 이 들 중 일부는 형무소로 보내고, 이기신을 포함한 윤부리ㆍ신판식ㆍ김봉열ㆍ최동열ㆍ이덕 열ㆍ서보연ㆍ윤용한ㆍ조기홍ㆍ조기홍ㆍ이충규ㆍ김공수ㆍ최창열ㆍ이기수ㆍ김두열ㆍ김두 표ㆍ추영환 등 25명을 순천 생목동 부근 공동묘지(현 이수중학교 부근)에서 사살했다. 신청인 이기화는 1948년 11월경 생목동 부근 공동묘지(현 이수중학교 부근)에서 이루 어진 사살현장을 목격했다. ( )순천경찰서로 동생(이기신) 면회를 갔더니 잡혀온 사람들을 순천시 생목마을 부근 야산 공동묘지에서 총살을 한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생목동 공동묘지에 몰래 따라가보니까, 50명 이상 사람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손은 뒤로 나무에 묶고 줄을 세워서 경찰인지 군인들인지 모르지만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총으로 쏘아 죽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생목동 공동묘지에서 제 동생이 그 자리에 총살되었는지는 보지를 못했습니다. ( ) 333) 월전리의 경우, 해룡지서 경찰 허부성이 14연대 반군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대살을 자 행했다. 1948년 11월 26일(음 ) 참고인 양회택은 형 양회정(직다-7076, 27세)의 시 신을 직접 목격했다. ( ) 둘째형 양회문은 14연대 반란군으로 당시 대전형무소에 수감 중이었습니다. ( ) 그 날 형님은 마당에서 추곡수매를 위해 나락가마니를 묶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마을사람들을 마을 앞 논에 모이라고 경찰들이 총을 쏘아댔다고 합니다. 그래서 형님 양회 정도 나갔는데 곧 해룡지서 경찰 허부성이가 형님을 집으로 끌고 오더니 온몸을 총으로 여 러 발을 쏘아 돌아가시게 했다고 합니다. 둘째형님 가족이라는 이유로 총을 쏘았다고 합니 다. 허부성은 술로 찌들어 난폭하게 해 사람들이 피했는데 그날도 술에 취해 미친개 같았다 고 합니다.( ) 334) 중흥리의 경우, 참고인 안양수ㆍ박종성의 에 따르면, 1948년 11월 20일(음 ) 오전 순천경찰서 경찰 허부신 등이 승주군 어업조합에 근무하던 김학모(미신청, 37 세)를 승주군 해룡면 중흥리 증흥마을 옆 당산나무 앞에서 인민위원장 역임 혐의로 사살 333) 참고인 김봉조 통화보고서( ); 신청인 이기화 ( ). 신청인 이기화는 생목동 집단사살장소를 또렷하게 기억한다고 했다. 334) 참고인 양회택 (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1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했다. 1948년 12월 초(음 11월 초) 순천경찰은 백채선, 강형수 등 우익인사들의 신고를 받고 김학모의 부친 김현조(미신청, 62세, 호적상 김사현)를 마을의 좌익책임자 혐의로 연행했다. 1948년 12월 24일(음 ) 순천경찰 허부신은 김현조를 중흥리마을 선착 장으로 끌고 와 사살했다. 335) 1948년 10월 말경 밤에 소총과 죽창을 든 사람들이 증흥리에 쳐들어와 지태석(직다 -9118, 20세) 등 5명을 해룡지서 방면으로 끌고 간 뒤, 살해하였다. 336) 용전리 거주 정영철(직다-9105, 18세)은 1948년 늦가을 조사를 받으러 옆집 사람과 함 께 용전지서로 연행된 뒤 사살되었다. 337) 조사결과, 해룡면 희생자는 30명으로 추산되나 이 가운데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 인한 사람은 총 19명이다. 신원 확인 결과와 주요 희생장소 및 희생자 수는 아래 <표 12>, <표 13>과 같다. <표 12> 해룡면 희생자 신원 확인 연 번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시신 제적 유족회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수습 등본 희생자 기타 번호 자료 여부 확인 명단 여부 1 방용규 ( 房 鏞 圭 ) 남 18 해룡면 도롱리 1422 확인 2 방영규 ( 房 泳 圭 ) 남 15 해룡면 도롱리 1422 확인 3 양회정 ( 梁 會 正 ) 남 27 해룡면 월전리 7076 확인 4 강길수 ( 姜 吉 洙 ) 남 23 해룡면 도롱리 8366 확인 5 강종훈 ( 姜 鍾 勳 ) 남 20 해룡면 도롱리 8366 확인 6 방봉애 ( 房 鳳 愛 ) 여 19 해룡면 도롱리 8366 확인 335) 참고인 안양수 통화보고서( ); 참고인 박종성 통화보고서( ); 참고인 김양휘가 제 출한 제적등본에는 희생자 김학모가 1948년 10월 20일 오전 7시, 희생자 김현조는 1948년 11월 25일 오 전 10시 중흥리 187번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참고인 김양휘, ( ) 336) 참고인 정삼신 통화보고서( ); 참고인 김길홍 통화보고서( ). 337) 참고인 김부순 통화보고서( ); 참고인 이기화 통화보고서( ). 순천지역 여순사건 585

114 제3권 연 번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시신 제적 유족회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수습 등본 희생자 기타 번호 자료 여부 확인 명단 여부 7 양회주 ( 梁 會 炷 ) 남 26 해룡면 상내리 8861 확인 8 추인수 (추인수) 남 25 해룡면 도롱리 9095 확인 9 추석순 (추석순) 남 17 해룡면 도롱리 9096 확인 10 추기선 ( 秋 基 善 ) 남 28 해룡면 도롱리 9097 확인 11 추기운 ( 秋 基 雲 ) 남 26 해룡면 도롱리 9097 확인 12 추형량 ( 秋 炯 亮 ) 남 27 해룡면 도롱리 9098 확인 13 김두표 ( 金 斗 杓 ) 남 22 해룡면 용전리 9104 확인 14 정영철 ( 鄭 泳 喆 ) 남 18 해룡면 용전리 9105 확인 15 지태석 ( 池 泰 錫 ) 남 20 해룡면 중흥리 9118 사망신고 안 함 확인 16 최창열 ( 崔 昌 烈 ) 남 20 해룡면 용전리 9906 확인 17 이기신 ( 李 起 新 ) 남 22 해룡면 용전리 9946 확인 18 김현조 ( 金 鉉 祚 ) 남 62 해룡면 중흥리 미신청 (사망일 자 일치) 확인 19 김학모 ( 金 學 模 ) 남 37 해룡면 중흥리 미신청 (사망일 자 일치) 확인 총계 총 19명 (확인 19명)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1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표 13> 해룡면 주요 희생장소와 희생자 수 희생장소 연 번 지역 1 해룡면 장소 세부 희생시기 희생자 수 가해주체 1948년 10월 순천경찰서 경찰 기타 해룡면 월전 마을 앞 해룡지서 경찰 말 지역 논 등 개별 사건 장소 1949년 1월 용전지서 경찰 추산치 확인 비고 약 40명 19명339) 외 다수338) 총계 약 40명 외 다수 19명340) 7) 상사면 희생사건 상사면은 여순사건 당시 좌익세가 강해, 주민들이 좌익에 협조하는 분위기도 일부 있 었다고 전해졌다.341) 14연대 반군에 의해 순천이 점령당하자 순천과 가까운 상사지역의 지서 경찰들은 몸을 숨겼고 남로당의 활동가들은 면사무소가 있는 흘산리에 모여서 인민 위원회를 구성했다.342) 순천 진압 후 15연대와 상사지서 경찰들이 반군협조 혐의자들을 연행하여 취조 및 고 문하거나 집단적으로 사살했다. 특히 마을주민들을 마을회관에 소집해놓은 뒤, 청장년을 따로 붙잡아두고 구타와 고문을 한 뒤 사살하는 방식을 보였다. 한편, 산간지역인 상사면에서는 군경이 입산한 사람들을 찾아내기 위해 가족들을 볼모 로 잡거나 사살하는 경우도 많았다. 희생자의 시신을 목격한 신청인 지득례의 에 의 하면, 여순사건 당시 반군이 용계리마을에 와 밥을 해달라 강요했다. 해코지가 두려웠던 주민들은 두세 번 밥을 해준 일이 있었다. 며칠이 지나고 진압군은 동네 가운데 논으로 주민들을 소집하여 반군에게 밥을 해주고 도망간 놈들을 찾아내라며 고문했다. 마을구장 이었던 지득권(직다-5053, 23세)은 이미 피신한 상태였다. 진압군은 지득권의 어머니와 동생인 신청인 지득례를 상사면 도월리 큰마을에 있는 주둔지로 연행하여 구타ㆍ고문했 338) 신청인 최덕용 ( ); 참고인 한정택 통화보고서( ); 참고인 강남수 통화보고 서( ); 참고인 정삼신 통화보고서( ); 참고인 김길홍 통화보고서( ). 339) 해룡면 거주 희생자 확인 19명(직다-7076, 직다-9095, 직다-9096, 직다-9097(확인 2), 직다-9098, 직다 -9118, 미신청 김현조, 미신청 김학모, 직다-1422(확인 2), 직다-9946, 직다-8366(확인 3), 직다-9104, 직 다-8861, 직다-9105, 직다-9906). 340) 해룡면 거주 희생자 19명, 확인 19명. 341) 신청인 박외규 ( ). 342) 참고인 정삼신 통화보고서( ); 참고인 김길홍 통화보고서( ). 순천지역 여순사건 587

116 제3권 다. 진압군은 지득례의 귀 가까이 공포를 쏘며 위협했다. 그럼에도 모친이 끝내 입을 열 지 않자, 진압군은 상사지서에 자수하면 책임지고 용서해준다고 회유했다. 이 말을 믿은 모친은, 아들 지득권을 비롯하여 같이 은신했던 지한모, 지만형 등 청년들을 설득하여 1948년 11월 13일(음 ) 상사지서로 데려갔다. 아들은 청년들과 함께 모친의 눈 앞에서 유치장에 갇혔다. 내일 오라는 말만 믿고 모친이 지서를 나선 그날 밤 9 10시 무렵, 지서 부근에서 총소리가 났다. 모친과 신청인 지득례가 새벽녘 부랴부랴 지서에 가 보니 지서 앞 논바닥에 아들 지득권과 지한모, 지만형 등이 죽어 있었다. 343) 오곡리에 살던 박선규(직다-7009, 37세)ㆍ박윤규(직다-7009, 24세)ㆍ박득규(직다 -7010, 22세)는 형제지간으로 큰형 박선규는 소작을 100마지기 줄 정도로 부유했다. 집 안 내 당숙, 증조부가 좌익 혐의를 받아 형무소에 끌려가자, 화를 입을까 두려웠던 박선 규는 산으로 숨어들었다. 1949년 2월 12일(음 ) 군경이 운동산(은산)에서 큰형 박 선규를 발각하여, 그 자리에서 사살했다. 둘째 박윤규는 순천 진압 후 군경에게 살해되었 다. 셋째 박득규는 순천 진압 후 진압군에게 사살됐다. 넷째 박윤규는 친구 만나러 나갔 다가 반군으로 착각한 진압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344) 오곡리는 개인적인 인연과 좌익세가 강했던 당시 분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빨치산의 심부름을 해줬다가 화를 입은 경우가 많았다. 여순사건 당시 오곡리 거주 정종수가 입산을 하여, 동생 정종신(직다-8057, 21세), 형제지간인 박병렬(직다-9896, 34세)ㆍ박병기(직다 -9897, 27세), 또 다른 형제지간 박병근(직다-9893, 당시 23세)ㆍ박병두(직다-9894, 18세)가 빨치산의 심부름을 해준 일이 있었다. 순천이 진압되고, 이들 4명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피신했다. 박병두는 1948년 11월 5일경 상사면 비촌리 운동산에서 체포되어 현장에서 상사지 서 경찰들에게 사살되었다. 박병근은 오곡리 375번지에서 은신하다 11월 10일(음 ) 발각되어 상사지서 경찰들에게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박병렬은 오곡리 183번지 대밭에 작은 토굴을 하고 은거하다, 1948년 11월 18일에서 19일경(음 ) 상사지서 경찰들에게 발각되어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345) 한편, 1949년 4월 19일(음 ) 몰래 집에 들른 정종신과 박병기를 상사지서 정보원 조일환이 발견하여 신고했다. 상사지서로 연행된 정종신, 박병기 는 당일 지서에서 맞아죽었다. 346) 343) 신청인 지득례 ( ). 경찰자료에는 지득권이 사살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날짜 는 음력의 오기인 듯하다. 순천경찰서, 사실조사서, ) 참고인 박삼규 통화보고서( ); 참고인 박남규 통화보고서( ) 신청인 박종현은 상사 지서 둿 산에서 총 맞아 죽었다고 마을주민들이 알려줘 희생자 박선규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박종현 ( ). 345) 참고인 김가월 통화보고서( ); 참고인 박병춘 통화보고서(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1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도월리에서는 경찰토벌대의 구타와 고문을 못 이겨 말한 허위자백 때문에 마을주민들 이 죽었다. 도월리 참고인 방종섭ㆍ박춘근ㆍ전일수의 을 종합하면, 1949년 6월 2일 (음 5. 6.) 새벽 경찰토벌대는 산에 꼴 베러 갔던 최정호(직다-1433, 12세), 박춘길(9세) 을 잡아 반군이 어디서 잤느냐고 물으며 구타했다. 매질을 못 이겨 전덕상(직다-1427, 34세)의 집에서 잤다고 말했다. 경찰토벌대 20여 명이 마을에 와서 마을회관 앞에 주민 들을 소집했다. 경찰토벌대는 참고인(신청)인 전일수의 집 뒤에서 전덕상을 구타한 뒤 코 에 물을 붓고 고문했다. 누가 반군의 밥을 해주었는지를 말하라는 것이었다. 경찰토벌대 의 매질에, 견디다 못한 전덕상은 주민 이름 몇 명을 말했다. 박명구(직다-1428, 35세) ㆍ구장 방기현(직다-4927, 48세)ㆍ김점례(직다-1433, 47세)ㆍ최정호ㆍ전덕상 등 5명이 전덕상의 집에서 무릎 꿇려진 채로 포박되어 구타당했다. 방기현은 의자에 묶인 채로 맞 았다. 박춘근ㆍ방종섭이 그 광경을 목격했다. 최정호와 김점례는 모자지간이었다. 참고인 황대연의 에 따르면, 큰아들 최채용(직다-1433, 27세)이 반군에게 산으로 끌려간 후 로, 머슴살이하던 넷째아들 최정호(직다-1433, 12세)도 큰형을 도운 전력이 있었다.347) 아들 둘이나 좌익에 동조했다고 토벌대는 최정호와 김점례를 죽창으로 내리쳤다. 김점례 의 막내아들 신청인 최두용은 울면서 이 현장을 목격했다. 신병은 다음날 6월 3일(음 5. 7.) 순천경찰서로 이송됐다. 6월 4일(음 5. 8.) 순천경찰은 전덕상, 박명구, 방기현, 최정 호, 김점례 등 5명을 순천 땅 고개재 공동묘지에서 집단으로 사살했다.348) 최정호와 김 점례가 죽고, 둘째 최덕용(직다-1433, 25세)은 이모네로 밥을 얻어먹으러 가다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 딸 최덕심(직다-1433, 20세)ㆍ셋째형 최창용(직다-1433, 19세)도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349) 9남매 중 5남매가 죽었다. 도월리 거주 일본유학파 방윤섭(직다-5288, 20세)은 여순사건 당시 순천시 옥천동 외가 에 머무르고 있었다. 1948년 10월 23일 우연히 시내에 나갔다가 마산 15연대에 연행되 346) 참고인 김가월 통화보고서( ); 참고인 박병춘 통화보고서( ); 참고인 양수남 통화보고서( ). 신청인 정대연과 박외규는 희생자 정종신ㆍ박병기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진 술했다. 신청인 정대연 ( ); 신청인 박외규 ( ). 347) 참고인 황대연 통화보고서( ). 348) 참고인 방종섭 통화보고서( ); 참고인 전일수 통화보고서( ); 참고인 박춘근 통화보고서( ) 신청인 전일수ㆍ박춘근ㆍ방종섭은 희생자 전덕상ㆍ박명구ㆍ방기현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전일수 ( ); 신청인 박춘근 ( ); 신청인 방종섭 ( ). 349) 참고인 황대연의 에 따르면, 먼저 최두용의 부친 최재동은 1949년 초 상사지서 경찰들에게 구타 뒤 연행되어 목포형무소에서 수감 중 전쟁이 발발하자 살해됐다. 큰형 최채용도 결국 1949년 조계산 토벌작 전에서 사살되었다고 전해졌다. 신청인 최두용은 희생자 김점례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말했다. 참고인 황 대연 통화보고서( ); 신청인 최두용 ( ). 순천지역 여순사건 589

118 제3권 어 옥천동 수돗가 앞에서 5 6명과 함께 사살됐다.350) 도월리 마을일을 맡았던 김화현(직다-9917, 34세)이 1949년 2월 초(음 1월 초) 순천경 찰서에서 나오라 해, 출두했다. 1949년 2월 6일(음 1. 9.) 경찰서에서 트럭에 실려 나갔 다. 1주일 뒤 승주에서 주암 가는 접치재 골짜기에서 김화현 등 4 5명 시신이 수습되었 다. 당일 접치재에서 사살된 사람은 20여 명이다.351) 1949년 2월 1일(음 1. 4.)경 도월리 거주 박홍기(직다-8786)는 경찰에게 연행되어 순천 과 광양 경계 위치인 성 가롤로병원 근처에서 사살되었다.352) 마륜리 참고인 장석기ㆍ최재식의 을 종합하면, 1949년 3월 19일 빨치산들이 이선 권(직다-3837, 16세)을 강제로 끌고 산으로 갔다. 그 후 빨치산 한 사람이 자수하면서, 위치를 군경에게 알려주었다. 1949년 10월 20일 이선권은 도월리 미곡부락 뒷산에서 군 경에게 사살되었다.353) 여순사건 당시 용계리마을에는 14연대 반군이 들어왔다. 14연대 반군이 소집한 회의에 지방좌익들은 마을구장 최석호(직다-1429, 37세)에게 참석과 협력을 강요했다. 최석호 는 회의에 참석했다. 1948년 10월 말경 상사지서 경찰들이 모임에 참석한 최석호ㆍ최한 호ㆍ오재열ㆍ최구삼 등을 상사지서로 연행했다. 이들 4명의 신병은 순천경찰서로 인계되 었다. 최석호는 순천경찰서에서 고문을 당하다 사망했고, 나머지 세 명은 목포형무소로 이송된 후 행방불명되었다. 최석호의 부친 최귀명과 동생 최영호가 순천경찰서에 면회를 갔더니, 정문 게시판에 최석호가 사망했다는 공고문이 붙어 있었다.354) 1949년 1월 3일(1948. 음 ) 상사지서 경찰 4 5명이 응령리 248번지 금곡마을 에 살던 이준평(직다-9920, 35세)을 자택에서 상사지서로 연행했다. 지서 경찰은 반란에 350) 신청인 방종섭 ( ). 351) 참고인 김정욱 통화보고서( ). 신청인 김영인은 두개골에서 총알이 발견되었다고 했다. 신청인 김영인 ( ). 352) 참고인 최기호 통화보고서( ) 박홍기의 당숙이 현장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시신을 발견해 박홍기의 모친이 그 시신을 수습했다. 신청인 최미자 ( ). 353) 참고인 장석기 통화보고서( ); 참고인 최재식 통화보고서( ). 지리산지구경찰대총 지휘본부가 1950년 발간한 뺷전투상보뺸1949년 10월 10일자 敵情要圖-人民遊擊軍 第2兵團 을 보면 빨치 산 8연대가 조계산 부근에 주둔하고 있었다. 열흘 뒤 1949년 10월 20일자 特別監視哨要圖 를 보면 조계 산 부근이 특별감시구역으로 설정되어 있다.(智異山地區警察隊總指揮本部, 敵情要圖, 뺷戰鬪祥報뺸(檀紀 ), 內務部 治安局, 1950) 따라서 경찰토벌대 또는 군 토벌대가 이 지역에 특 별감시작전을 펼쳤을 가능성이 있다. 사건장소인 상사면 도월리는 조계산 기슭으로 상사호에 인접해 있 어, 지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위치했다. 신청인은 당시 토벌대가 토벌작전을 벌였다고 했다. 신청 인 이후권 통화보고서( ). 354) 참고인 최영호 통화보고서( ); 신청인 최낙선 ( ). 경찰자료에는 최석호가 사살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순천경찰서, 뺷사실조사서뺸,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1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동조한 사실을 불으라며 구타와 고문을 자행했다. 일단 귀가조치를 한 지서 경찰은 다음 날 이준평을 다시 지서로 불러내, 반군에게 식량을 제공했다며 몽둥이로 구타했다. 지서 경찰들은 당일 이준평을 상사면 동백마을 뒷산으로 끌고 가 사살했다. 355) 수도경찰대도 반군협조 혐의 민간인을 연행하여 취조 및 고문한 뒤, 사살했다. 흘산리의 경우, 1948년 11월 5일(음 ) 11시경 집 앞 개울 건너에 수도경찰대가 트럭을 타고 공포를 쏘며 나타나, 보리밭을 갈고 있던 송태은(직다-4974, 35세)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송태은이 가려고 하자, 모친이 옷이나 챙겨 입고 가라고 했다. 송태은은 금방 오겠지요 하고 개울 건너 트럭 앞으로 갔다. 수도경찰대는 송태은을 트럭에 태우고 가버렸다. 사흘이 넘도록 송태은이 돌아오지 않자, 모친이 순천경찰서로 찾아 나섰다. 마을 최씨가 송태은과 같이 감금되어 있었다며, 경찰서 팽나무 아래서 고문을 당했다고 말해주었다. 송태은은 연신 나는 억울하다 고 하소연했 다고 했다. 경찰서엔 송태은이 없었다. 모친이 애타게 주위를 찾자, 한 경찰이 1948년 11월 7일경(음 ) 조곡동 죽도봉에서 수도경찰대가 사살했다고 말했다. 356) 오곡리 참고인 김성문ㆍ심영구의 을 종합하면, 1948년 11월 18일(음 ) 오 전 10시경 상사지서 경찰, 의용경찰 10여 명이 서촌마을로 들어와 서촌마을-오곡마을 사이 논으로 주민들을 집결시켰다. 청장년만 따로 모아 구타하며 반군의 심부름을 했는 지를 추궁했다. 다른 이들을 돌려보내고 김태구(직다-1392, 24세)만 연행하여, 오곡마을 에서 상사지서로 가는 중간지점인 서당골에서 사살했다. 357) 1948년 11월 20일(음 ) 상사지서 경찰과 한청단원들 30여 명이 상사면 오곡마을 사람들을 회관 앞으로 소집하여, 마을 청장년들을 구타했다. 오곡마을 구장 박재규(직다 -1423, 24세)와 반군협조자로 의심되는 오경옥ㆍ오승용ㆍ오도환ㆍ오자열ㆍ최금동 등을 끌고 가 구타와 고문했다. 오곡마을 공산당 두목이 누구냐고 취조했다. 1948년 11월 21 일(음 ) 박재규 등 6명을 여수군법회의로 이송하기 위해 순천역을 거쳐 여수역으 로 내려가던 중 역 앞에서 박재규가 사망했다고 상사지서 경찰 김두홍이 전해주었다. 358) 한편, 진압군은 정체를 숨기고 질문하여, 반군이라고 착각하게끔 유인하여 잘못 대답하 면 바로 사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1948년 10월 23일(음 ) 오곡리 거주 오연근(직다 -5729, 41세)이 오곡마을 산에서 솔씨를 따다 눈을 다쳐 시내 병원엘 갔다 돌아오는데 시 355) 참고인 조숭례 통화보고서( ). 경찰자료에는 이준평이 불상연월에 사살되었다 고 기재되어 있다. 순천경찰서, 사실조사서, ) 신청인 송갑수 ( ). 357) 참고인 김성문 통화보고서( ); 참고인 심영구 통화보고서( ). 358) 참고인 박 녹취록( ). 순천지역 여순사건 591

120 제3권 내 경계가 삼엄해 땅고개 방향으로 오다가 옥천동에서 일행 오기연과 함께 흰 띠 두른 진 압군에게 잡혔다. 진압군은 김일성이 좋은가, 이승만이 좋은가라고 물었다. 오연근은 반 군인줄 알고 김일성이 좋다고 했다. 오연근과 오기연은 옥천동 정수장에서 시내 방향으 로 m 거리의 작은 공터에서 사살되었다.359) 조사결과, 상사면 희생자는 약 90여 명으로 추산(<표 15> 참조)되는데, 이 가운데 진실 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사람은 총 28명이다. 신원 확인 결과와 주요 희생장소 및 희 생자 수는 아래 <표 14>, <표 15>와 같다. <표 14> 상사면 희생자 신원 확인 희생자 연 번 확인근거 이름 성별 당시 나이 거주지 사건 번호 경찰 자료 참고인 1 김태구 (金泰求) 남 24 상사면 오곡리 1392 확인 2 박재규 (朴在圭) 남 24 상사면 오곡리 1423 (사망일자 일치) 확인 3 전덕상 (全德相) 남 34 상사면 도월리 박명구 (朴明九) 남 35 상사면 도월리 최석호 (崔石鎬) 남 37 상사면 용계리 김점례 (金点禮) 여 47 상사면 도월리 최채용 (崔彩鎔) 남 27 상사면 도월리 최덕용 (崔德鎔) 남 25 상사면 도월리 1433 유족회 제적등본 희생자 확인 명단 확인 / 추정 여부 시신 수습 여부 기타 확인 확인 확인 확인 확인 확인 359) 신청인 오수만이 제출한 제적등본에는 희생자 오연근이 1948년 10월 23일 상사면 오곡리 664번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신청인 오수만 (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2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시신 유족회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제적등본 수습 희생자 기타 번호 자료 확인 여부 명단 여부 9 최덕심 ( 崔 德 心 ) 여 20 상사면 도월리 1433 확인 10 최창용 ( 崔 昌 鎔 ) 남 19 상사면 도월리 1433 확인 11 최정호 ( 崔 廷 鎬 ) 남 12 상사면 도월리 1433 확인 12 이선권 ( 李 先 權 ) 남 16 상사면 마륜리 3837 확인 13 방기현 ( 方 琪 現 ) 남 48 상사면 도월리 4927 확인 14 송태은 ( 宋 泰 銀 ) 남 35 상사면 흘산리 4974 확인 15 지득권 ( 池 得 權 ) 남 23 상사면 용계리 5053 확인 16 방윤섭 ( 方 允 燮 ) 남 20 상사면 도월리 5288 (사망일자 일치) 확인 17 오연근 ( 吳 連 根 ) 남 41 상사면 오곡리 5729 (사망일자 일치) 확인 18 박선규 ( 朴 先 圭 ) 남 37 상사면 오곡리 7009 확인 19 박윤규 ( 朴 允 圭 ) 남 24 상사면 오곡리 7009 확인 20 박득규 ( 朴 得 圭 ) 남 22 상사면 오곡리 7010 확인 21 정종신 ( 鄭 宗 臣 ) 남 21 상사면 오곡리 8057 확인 22 박홍기 ( 朴 洪 紀 ) 남 27 상사면 도월리 8786 확인 순천지역 여순사건 593

122 제3권 연 번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시신 유족회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제적등본 수습 희생자 기타 번호 자료 확인 여부 명단 여부 23 박병근 ( 朴 炳 根 ) 남 23 상사면 오곡리 9893 확인 24 박병두 ( 朴 炳 斗 ) 남 18 상사면 오곡리 9894 확인 25 박병렬 ( 朴 炳 烈 ) 남 34 상사면 오곡리 9896 확인 26 박병기 ( 朴 炳 箕 ) 남 27 상사면 오곡리 9897 확인 27 김화현 ( 金 和 鉉 ) 남 34 상사면 도월리 9917 확인 28 이준평 ( 李 晙 坪 ) 남 35 상사면 응령리 9920 확인 총계 총 28명 (확인 28명) <표 15> 상사면 주요 희생장소와 희생자 수 연 번 지 역 희생장소 희생자 수 희생시기 가해주체 장소 세부 추산치 확인 비고 1 상 사 면 우산보 인근 보장골 우산보에서 상사호 길 건 너 동쪽으로 약 300미터 지점, 상사호길(상사면사 무소 방향) 우측 현 공작 가든(예식장) 뒤편(동쪽 방향)약 100미터 떨어진 야산 골짜기 우산보에서 동쪽으로 약 250미터 지점, 공작 가든 좌측 현 상사참숯가마 찜질방 (흘산리 1-3) 건 물 뒤(약 5미터 이격) 골 짜기 1948년 1949년 1948년 1949년 국군, 순천경찰서 경찰 국군, 순천경찰서 경찰 약 30명 360) 약 30명 361) 보장골1. 현재 행정구역 상 순천시 덕월 동으로 편제 보장골2. 현재 골짜기로 좌우로 콘크리 트 작업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2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지 역 희생장소 희생자 수 희생시기 가해주체 장소 세부 추산치 확인 비고 상사호길(상사면사무소 방향) 우측 현 솔가든 및 자라농장 뒤편으로 약 50미터 떨어진 야산 골짜 기 하단부 1948년 1949년 국군, 순천경찰서 경찰 다수 362) (추정 불가) 보장골3. 현 솔가든 뒤 민 가에서 우측 후 방 작은 골짜기 2 상 사 면 기타 지역 상사지서 등 개별 사건 장소 1948년11월 1949년 11월 상사지서 경찰 국군 약 30명 363) 28명 364) 총계 약 90명 외 다수 28명365) 8) 별량면 희생사건 별량면은 남서쪽으로는 순천시내와 연결되고 서쪽으로는 벌교와 고흥으로 이어지는 곳에 위치한다. 북으로는 상사면과 낙안면이 산악으로 이어졌으며 남으로는 갈대가 유명 한 순천만이 둘러싸고 있다. 중앙의 면소재지를 중심으로 순천과 벌교를 잇는 4차선 2번 국도가 면의 중앙을 가로지르는데, 도로의 북쪽은 조계산 자락으로 연결되고 남쪽은 논 과 바다로 이어져 비교적 평탄한 지역이다. 여순사건의 피해상황은 2번 국도의 남과 북을 중심으로 뚜렷하게 구분되는데 산으로 연결된 북쪽 지역에서 피해가 많았다. 1948년 11월 7일경(음 경) 별량지서 경찰 4 5명이 금치리 대치마을 앞들로 마을주민들 을 소집했다. 경찰들은 청장년들을 몽둥이로 패면서 반군협조사실을 말하라고 했다. 몇몇이 매질에 못 이겨 밥을 해줬다고 하자, 한상범(직다-9934, 38세)ㆍ윤종석ㆍ안정수ㆍ이명우 등 5명을 별량지서로 연행하여, 당일 운천마을 뒷산 공동묘지에서 사살했다. 사살장소에 가보니 시신 5구가 줄지어 쓰러져 있었고, 한상범은 가슴에 두 군데 총상을 입고 죽어 있었다. 366) 360) 참고인 허 면담보고서( ); 참고인 조 면담보고서( ). 361) 참고인 허 면담보고서( ); 참고인 조 면담보고서( ). 362) 참고인 허 면담보고서( ); 참고인 조 면담보고서( ). 363) 참고인 허 면담보고서( ); 참고인 조 면담보고서( ); 참고인 박 녹 취록( ); 신청인 박종영 통화보고서( ); 신청인 지득례 ( ). 364) 상사면 거주 희생자 28명, 확인 28명(직다-1392, 직다-1423, 직다-1433(확인 6), 직다-5053, 직다-8057, 직다-9897, 직다-1427, 직다-1428, 직다-4927, 직다-3837, 직다-7009(확인 2), 직다-9893, 직다-9894, 직 다-9896, 직다-7010, 직다-9920, 직다-1429, 직다-4974, 직다-5288, 직다-5729, 직다-8786, 직다-9917). 365) 상사면 거주 희생자 28명, 확인 28명. 366) 신청인 한영섭은 사살현장에서 희생자 한상범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한영섭 순천지역 여순사건 595

124 제3권 1949년 2월 4일(음 1. 7.) 별량지서 주임 구 등 경찰들이 반군협조자 황인성을 끌고 대룡리 대동마을로 들어왔다. 마을주민들을 소집한 뒤, 마을에 숨은 반군 윤씨를 체포해 협조자가 누군지 고문했다. 윤씨가 저항하자 경찰들이 그를 사살했다. 경찰이 황인성에 게 협조자를 지목하라고 하자, 황인성이 이상연(직다-1385, 24세)ㆍ박기영(직다-1389, 36세)ㆍ박기선ㆍ박두석 등 마을사람 4명을 지목했다. 별량지서 경찰들은 이들을 연행하 여 다음날 1949년 2월 5일(음 1. 8.) 별량지서 인근 공동묘지에서 사살했다. 367) 금치리 대치마을 젊은이들이 연이어 끌려가서 화를 입자, 윤석봉(직다-9935, 26세)은 별량면 대룡리 대동마을 처가에 은신했다. 1949년 3월 6일(음 2. 7.) 군경 20여 명이 마을 에 나타났다. 윤석봉은 대동마을 야산으로 도망갔으나, 이내 사살되었다. 368) 1950년 2월 14일(음 경) 경찰 20여 명이 금치리 금동마을에 와 옆집 아저씨 와 얘기 중이던 박성일(직다-1431, 31세)을 무슨 얘기했느냐며 끌고 갔다. 다음날 2월 15일(음 경) 별량지서 경찰들이 박성일과 한혹수ㆍ한기태를 별량지서로 연행해 고문한 뒤, 별량역 뒤에서 사살했다. 369) 대룡리에선 구장 선출을 놓고 마을이 두 패로 나뉘어, 한쪽이 한쪽을 반군동조자로 모 함하는 일도 있었다. 참고인 이종옥의 에 따르면, 1949년 초 별량면 용안마을 구장 자리를 두고 이봉주와 이경노가 대립했다. 정기영(직다-8362, 41세)은 이경노를 지지했 다. 이봉주가 이경노와 정기영 등을 남로당이라고 별량지서(주임 강원홍)에 허위신고하 여, 순천경찰서에 수차례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풀려난 일이 있었다. 순천 진압 후 별량 지서 의용경찰 김종주가 친구 사이인 정기영ㆍ이완옥ㆍ이범주를 연행하여 별량지서로 호송했다. 이완옥의 처 정순엽이 간청해 순천 효천고등학교 건너편 외고개 주막집(현 대 룡리 778번지)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김종주가 담배 피는 사이 이완옥ㆍ이범주 둘은 산 으로 도주했고, 효천고 앞 논으로 도망치던 정기영만 총에 맞아 붙잡혔다. 온야마을 뒤 광대골재에서 인부를 불러 끌고 가 별량지서 김종주가 사살했다. 370) 1950년 2월 5일( ) 별량면 대룡리에 살던 이재선(직다-8363, 63세)이 대룡리 산 139번지 과수원 오두막에서 자다가, 별량면 한청단(단장 박종태)과 별량지서 경찰들이 벌인 토벌작전 과정에서 사살되었다. 371) ( ). 367) 참고인 황병연 통화보고서( ). 368) 신청인 윤석진 ( ). 신청인 윤석진은 희생자 윤석봉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369) 참고인 한성재 통화보고서( ); 참고인 한이석 통화보고서( ). 370) 참고인 이종옥 통화보고서(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2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덕정리의 경우, 1948년 11월 6일(음 ) 별량지서 경찰들이 반군에게 밥을 해주었다는 혐의로 상삼마을 거주 최병주(직다-4383, 25세)를 연행하여 별량면 석현리 저수지 야산에서 사살했다. 372) 봉림리의 경우, 순천 진압이 되기 전까지 봉림리마을은 행정공백상태였다. 1948년 11월 초순 별량지서 경찰(주임 김동진)과 서북청년단이 마을에 들어와 주민들을 정동식의 집으로 소집했다. 정동식은 입산한 반군 두목으로 별량면장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정동식의 집에서 주민들 한 사람씩 경찰과 서북청년단이 취조했다. 매질을 하면서 남로당 가입 여부를 물어, 뚜렷한 혐의점이 없으면 귀가시켰다. 3 4일 후 경찰이 새벽에 집으로 찾아와 김홍열 (직다-9101, 36세, 이명 김철수)을 별량지서로 연행했다. 1948년 11월 7일(음 ) 지서 옆에 거주하던 행정대서였던 최문식씨 부인이 당일 오전 집으로 와, 김홍열의 모친에게 새벽녘에 지서에 있던 11명이 묶인 채 운천리 공동묘지 쪽으로 끌려갔다고 말했다. 당일 오후 작은아버지가 운천리 공동묘지 돌고개재에 가보니 김홍열 등 시신 10구가 누워 있었다. 같이 끌려갔던 박영호는 기적적으로 살아 도주했다. 박영호의 증언에 따르면, 지서에 감금되 어 있는 중에 보성에서 폭동이 일어났다는 전화를 받고, 감금된 사람들을 그대로 두면 안 된다고 해서 바로 사살했다. 그날 죽은 10명 중에 한 명은 여성이었다. 373) 송학리 참고인 황인석의 에 따르면, 1949년 2월 4일(음 1. 7.) 별량지서 경찰들이 설을 쇠러 송학리 장학마을에 온 순천역 철도공무원 황인만(직다-9532, 21세)을 연행하 여 송학리 장학마을 부근 공동묘지 골짜기 야산에서 사살했다. 며칠 뒤 큰 당숙이 별량지 서에 가서 물어보니, 지서 경찰은 장학마을 부근 공동묘지에서 사살했다고 말했다. 374) 조사결과, 별량면 희생자들 가운데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사람은 총 10명이 다. 신원 확인 결과와 주요 희생장소 및 희생자 수는 아래 <표 16>, <표 17>과 같다. 371) 신청인 이종옥은 사건 다음날 음력 12월 20일에 직접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이종옥 ( ); 참고인 한충석 통화보고서( ). 372) 참고인 정제현 통화보고서( ); 참고인 최병조 통화보고서( ). 373) 참고인 박영모 통화보고서( ); 참고인 김 면담보고서( ); 참고인 김길수 통화 보고서( ). 신청인 김채문은 희생자 김홍열의 시신을 김와 김길수가 수습했다고 했 다. 신청인 김채문 ( ). 374) 참고인 황인석 통화보고서( ). 신청인 황동하는 희생자 황인만의 시신을 가족들이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황동하 ( ). 순천지역 여순사건 597

126 제3권 <표 16> 별량면 희생자 신원 확인 연 번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시신 제적 유족회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수습 등본 희생자 기타 번호 자료 여부 확인 명단 여부 이상연 ( 李 相 連 ) 박기영 ( 朴 基 英 ) 박성일 ( 朴 聖 一 ) 최병주 ( 崔 炳 周 ) 정기영 ( 鄭 基 永 ) 이재선 ( 李 在 先 ) 김흥열 ( 金 興 烈 ) 황인만 ( 黃 仁 滿 ) 한상범 ( 韓 相 範 ) 윤석봉 ( 尹 錫 奉 ) 남 24 남 36 남 31 남 25 남 26 남 63 남 36 남 21 남 38 남 26 별량면 대룡리 별량면 대룡리 별량면 금치리 별량면 덕정리 별량면 대룡리 별량면 대룡리 별량면 봉림리 별량면 송학리 1385 확인 1389 확인 1431 확인 4383 확인 8362 확인 8363 확인 9101 확인 9532 확인 별량면 사망 금치리 9934 신고 안 함 별량면 금치리 확인 9935 확인 총계 총 10명 (확인 10명) 연 번 희생장소 희생자 수 희생시기 가해주체 지역 장소 세부 추정 확인 1 별량면 서자골 공동묘지 <표 17> 별량면 주요 희생장소와 희생자 수 봉림리 돌고개재 인근 운 천 저수지에서 남쪽으로 약 200미터 지점. 봉림리 봉덕 뒷산 서자골 좌측 공 동묘지 초입 둔턱 1948년 11월 1949년 2월 별량지서 경찰 비고 약 15명 외 다수 375) 4명 376) 사건 당시에 도 공동묘지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2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2 희생장소 지역 장소 별량면 기타 지역 세부 희생시기 가해주체 희생자 수 추정 확인 별량지서 등 개별 사건 1948년 11월 별량지서 약 15명 외 장소 경찰 다수377) 1950년 1월 6명378) 약 30명 외 다수 10명379) 총계 비고 9) 낙안면 희생사건 낙안면은 벌교와 인접해 있어 여순사건 당시 좌익과 반군의 활동이 활발했다.380) 낙안 지서와 면사무소가 수시로 습격을 당했고, 교전 과정에서 낙안읍성 낙민루가 소각되기도 했다. 신전마을 사건은 낙안면의 대표적인 집단희생사건이다. 빨치산을 보살펴주었다는 이유로 신전마을 주민 22명이 집단으로 사살됐다. 신전마을 사건 금산리 신전마을에서 15연대는 빨치산 소년 문홍주(14세)를 치료해줬다는 이유로 1949 년 10월 8월(음 ) 마을주민 22명을 집단으로 사살하고 시신 및 가옥을 소각했다. 이 른바 신전마을 사건이다. 참고인 손삼순ㆍ홍동호ㆍ장홍석ㆍ김복심ㆍ김이곤ㆍ이형희ㆍ정달막ㆍ조선효의 을 종합하면, 1949년 상반기 쌍암(현 승주읍) 남정리 출신 소년 문홍주가 허벅지에 총상을 입은 채, 빨치산들과 함께 신전마을로 내려왔다. 빨치산들은 문홍주를 마을주민들에게 맡기면서 제대로 치료해주지 않을 경우 가만두지 않겠다며 협박했다.381) 후환이 두렵기 도 했고, 문홍주가 어려 안쓰러웠던 마을주민들은 십시일반 보살펴주었다. 사건관련 생 375) 참고인 황병연 통화보고서( ); 신청인 박희원 ( ); 신청인 이상호 ( ); 참고인 김 면담보고서( ); 신청인 김채문 ( ). 376) 별량면 거주 희생자 4명 (직다-1385, 직다-1389, 직다- 9101, 직다-9934). 377) 신청인 박복구 ( ); 참고인 한성재 통화보고서( ); 참고인 한이석 통화보고 서( ); 참고인 정제현 통화보고서( ); 참고인 최병조 통화보고서( ). 378) 별량면 거주 희생자 6명(직다-1431, 직다-4383, 직다-8362, 직다-8363, 직다-9532, 직다-9935). 379) 별량면 거주 희생자 10명. 380) 참고인 김이곤 통화보고서( ). 381) 참고인 김이곤 통화보고서( ); 참고인 이형희 통화보고서( ); 참고인 장홍석 통화보고서( ); 신청인 홍동호 ( ). 신청인 손삼순ㆍ홍동호, 참고인 김 이곤ㆍ이형희는 사건현장을 직접 목격했다. 순천지역 여순사건 599

128 제3권 존자 신청인 홍동호는 당시 마을에서 제일 형편이 나아 문홍주를 집에서 치료해주었다고 했다.382) ( )저희 집에서 어머니 아버지께서 치료를 해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절룩거리는 문홍주와 함께 (제가 인용자) 소를 몰고 같이 마을로 들어왔던 기억도 납니다.( )383) 이후 총상이 다 나은 문홍주는 마을을 떠나 승주에서 약국을 운영하던 조부를 만나러 관등마을을 지나다 동네아이들과 시비가 붙었다. 문홍주가 홧김에 반군을 데려와 다 죽 여버리겠다 고 엄포를 놓았다. 그 앞을 지나던 서정수가 그 얘길 듣고 문홍주를 끌고 와 경찰서에 넘겼다.384) 15연대는 문홍주를 취조 및 고문하여, 총상을 입고 내려온 신전마을 에서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5연대는 문홍주를 신전마을로 끌고 가, 마을 주민들을 마을 공터로 소집했다. 군인들은 한 명이라도 도망가면 다 죽여버리겠다고 위 협했다. 주민들이 모이자, 군인들은 이 마을이 빨갱이활동을 했고, 공산당을 도왔다 며, 구장을 비롯한 몇 명을 묶어놓고 마구 때렸다. 구장이었던 시아버지 위형량이 구타당하 는 모습을 지켜 본 손삼순의 이다. 시아버님을 신작로 옆 또랑에 넘어뜨린 뒤에 총으로 질근 질근 밟았어요. 총으로 마구 때렸지. 사정없이. 죽일 데가 어디에 있을 것이여. 끌어내면 살아. 기가 막혀.(한숨) 그리고 끌어낸 다음에 빨갱이 짓을 불으라고 했는데 뭐 한 일이 있어야지 불지. 그러니까 다시 또 랑에 밀어 넣고 총으로 또 밟았어요. 그러고는 또다시 끌어내고 시아버님이 추우니까 피워 논 모닥불 앞에서 벌벌 떨더라고.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어요.( )385) 15연대는 문홍주에게 너를 치료해주고 보살펴준 이들을 지목하라며 개머리판으로 때 렸다. 망설이던 문홍주는 자신을 치료해주고, 옷을 빨아주고, 약, 올벼쌀, 누룽지, 홍시감 등을 준 사람들을 지목했다. 문홍주의 손가락 총 에서 학살이 시작되었다. 어머니의 등에 업히기를 꺼려해 자신도 모르게 기적적으로 생존한, 신청인 홍동호의 이다. 1949년 음력 8월 17일 첫새벽에 군인들이 마을에 불을 지르고, 마을주민들을 집결시켜 앉혀놓고 신작로 옆 도랑에 2 3명을 넣어 밟으며 고문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문홍주를 382) 신청인 홍동호 ( ). 383) 신청인 홍동호 ( ). 384) 지창환, 순천 KBS 여순사건 60년 특별기획 잃어버린 기억 녹취록, ( 방영), 장홍석 증언, 16쪽. 385) 신청인 손삼순 (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2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데리고 등을 들고 집결한 마을주민의 얼굴을 비추면서 마을주민들을 가려내는 모습을 보았 습니다. 가려낸 사람들을 부락에 들어가는 길 한쪽에 모아놓자, 먼동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군인 지휘관이 가려낸 분들을 마을로 데리고 들어가라고 지시하는 소리를 들었고, 이에 군 인들이 앞에서 인솔하고 뒤에서 밀어 이분들을 마을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이때 어머니 께서는 당신 집이 불타지 않은 것을 보시고, 우리는 살게 되니까 등에 업고 집으로 가자 하 시면서 업어주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왜 그랬는지 모르게 어머니께 업히지 않겠다 고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저는 당시 동이 틀 무렵 모닥불을 피워놓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마을입구 신작로에 계속 있었는데, 마을에 들어간 후 얼마 되지 않아, 10분도 안 돼서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요란하게 났고, 저희 집이 활활 불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동이 트고 환해지자, 제가 집으로 갔습니다. 집에는 새까맣게 타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들이 저희 집 마당에 널려 있었습니다. 3살 먹은 저의 동생은 타버린 상태에서 창자가 배 밖으 로 터져 나온 상태였습니다. 부모님 시신의 얼굴은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에서 시신에 기름을 뿌리고 태운 것 같았습니다. 당시 집에 큰 개가 있었는데, 시신을 뜯어먹고 있어서, 그 개를 다른 마을로 줘버렸습니다.386) 또랑 옆 구멍에 숨어 간신히 살아난 신청인 손삼순은 당시 마을에 교전이나 좌우익 갈 등은 없었다며 단지 그 문홍주라는 애를 치료해준 게 죄라면 죄 라고 말했다. 손삼순의 이다. 근데 자식 같은 애를 부모심정에 어떻게 나 몰라라 할 것이요. ( ) 동네 학교 뒤편 신작 로로 마을사람들을 모았어요. 몇 명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모아놓고 문홍주가 마을사 람들을 가리키면서 누구는 감을 주고, 누구는 밥을 주고, 누구는 뭐해주고 그러면서 발로 차서 사람들을 골라냈어요.387) 강재수(직다-324ㆍ1378ㆍ1379, 다-324ㆍ1378, 57세)ㆍ강옥순(직다-324ㆍ1378, 12세)ㆍ김대례(직 59세)ㆍ홍목침ㆍ정선례ㆍ홍일순ㆍ홍재호ㆍ위형량388)(직다-1374, 68 세)ㆍ조정순(직다-1375, 38세)ㆍ이삭심(직다-1375, 4세)ㆍ김용기(직다-1376, 25세)ㆍ 이공월(직다-1377, 43세)ㆍ강양수(직다-1379, 42세)ㆍ조성림(직다-1380, 46세)ㆍ정달 막ㆍ조선효ㆍ박옥란(직다-1948ㆍ1970,14세)ㆍ이장순(직다-1948ㆍ1970, 41세) 등 지 386) 신청인 홍동호 ( ). 387) 신청인 손삼순 ( ). 388) 경찰 자료에는 위형량이 여순사건 당시 세포위원으로 사살된 자 라고 기재되어 있으나, 특이사 항에 부역사실 유무가 불확실하다 고 기재되어 있다. 다시 말해, 이는 부역사실 유무가 불확실한데도 사 살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순천경찰서, 뺷사실조사서뺸, 순천지역 여순사건 601

130 제3권 목된 22명은 빨치산으로 몰려 마을에서 제일 큰 홍동호의 집에서 집단으로 사살됐다. 홍목침(직다-1373, 45세)ㆍ정선례(직다-1373, 32세) 부부는 세 살짜리 아들 홍재호 (직다-1373, 3세)와 딸 홍일순(직다-1373, 17세)과 함께 불타 죽었다.389) 특히 강재수, 강옥순, 김대례와 조성림, 정달막, 조선효, 손삼순도 한 식구였다. 아버지 는 약을, 어머니는 올벼쌀을, 딸은 누룽지를, 아들은 홍시를 주었다고 죽였다. 고모는 빨 래를, 삼촌은 잠잘 방을 줬다고 죽였다. 조정순은 4살배기 딸 이삭심을 등에 업은 채 총을 맞았다. 엄마 품에서 젖을 빨던 갓난 아들도 함께 즉사했다.390) 이장순과 박옥란은 모녀 사이였다. 1948년 11월 30일(음 ) 머슴 찾으러 집 밖에 나선 이장순의 시아버지 박노은(직다-1948ㆍ1970, 53세)을 토벌대가 반군으로 여겨 사살한 일이 있었다. 시아버 지가 죽은 지 1년 만의 일이었다. 손삼순의 이어지는 이다. 자기들은 안 죽을라고 싸우고 안 다녀요. 우리도 살라고 걔를 치료해준 것인데 안 도와 주면 죽인다고 해서 말이시. 살라면 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인데.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조사 도 안 하고 죽인 것이 말이 되냐 말이여. 무슨 죄가 있으면 피해불지, 나왔것소. 죄가 없는 나를 어쩌겠냐는 생각에 나온 것이제. 그때는 경찰들도 산에 들어가기 겁을 냈어요. 산사람 들 때문에 무서워서. 경찰도 그런데 마을사람들이 어떻게 지냈겠소. 말 한마디라도 거역하 면 죽음을 당하는데 어찌 살겠소.391) 신전마을 주민들을 사살한 토벌대는 시신 위에 기름을 뿌리고 집에 불을 붙였다. 참고 인이자 신청인 손삼순은 살아남은 주민들은 넋을 잃었다 며, 시신 타는 냄새가 하늘을 덮었다 고 말했다. 32가구가 살던 신전마을은 어느새 잿더미로 변했다. 참고인 장홍석은 한동안 옆 마을 사람들이 시신 타는 냄새에 먼 길을 돌아다녔다 고 말했다.392)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결과, 신전마을 사건으로 총 22명의 주민들이 희생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낙안면 상송리에선 주민이 모함 한마디에 사살되는 사건도 있었다.393) 1948년 10월 25일 (음 ) 마을에 진주한 3연대 장교가 조영철394)과 같은 일본육사 동기라며 상송리에 389) 지창환, 순천 KBS 여순사건 60년 특별기획 잃어버린 기억 녹취록, ( 방영), 장홍석 증언, 16쪽. 390) 지창환, 순천 KBS 여순사건 60년 특별기획 잃어버린 기억 녹취록, ( 방영), 장홍석 증언, 16쪽. 391) 신청인 손삼순 ( ). 392) 지창환, 순천 KBS 여순사건 60년 특별기획 잃어버린 기억 녹취록, ( 방영), 장홍석 증언, 16쪽. 393) 참고인 김 통화보고서( ). 394) 신청인 조영의 에 따르면, 조한송의 아들 조영철은 일본 육사를 나와 여수수산학교 영어교사를 하다,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3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살던 조한송(직다-7642, 47세)이 돼지를 잡고, 음식을 장만하여 집을 나섰다. 조한송이 집을 나간 지 반나절 만에 그가 죽었다는 전갈이 왔다. 아내와 딸들(신청인 조영자)이 낙안지서로 가보니 지서 앞 고목나무 밑에 조한송 등 시신 7구가 가마니에 쌓여 있었다. 조한송과 사이가 안 좋던 김창표의 부인이 조한송을 인민위원장이라고 모략했기 때문이었다. 3연대 장교가 마을을 떠나자, 낙안지서 경찰들은 별도의 조사 없이 조한송 등 6명을 사살했다. 395) 이틀 뒤 3연대는 마을에 다시 나타나 청장년을 낙안국민학교에 소집하여 일일이 호명 했다. 조동식이 호명에 일어나자, 벌교읍 소화다리 밑으로 끌고 가 사살했다. 군인들이 찾 던 조동식과 동명이인이었다. 396) 옥산리의 경우, 1948년 10월 말경 진압군이 조한상(직다-9911, 26세)을 반군에 동조했 다는 혐의로 사살했다. 397) 목촌리 한관섭(직다-2246, 19세)의 경우, 여순사건 당시 한관섭은 행동도립병원 앞 이 발소에서 일했다. 한관섭은 순천 진압 후 3일 만인 10월 25일 26일 사이 경찰에 의해 순천경찰서로 연행됐다. 조사 후 열흘 만에 석방되었다. 그 뒤 금곡동 의용단원의 모략으 로 다시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순천경찰은 1948년 11월경 현 이수중학교 부근 죽두봉 골짜기에서 한관섭을 비롯한 60여 명을 일렬로 세워 사살했다. 사살 뒤 경찰은 미리 구 해둔 장작을 이용해 시신을 소각했다. 398) 희생자의 시신을 수습한 참고인 나기동의 에 따르면, 누군가의 밀고로 1948년 12 월 2일 새벽 낙안지서 경찰 3 4명이 수정마을 집으로 들이닥쳐 구장 나성환(직다 -1371, 32세)을 지서로 연행했다. 지서 경찰은 3일 동안 나성환을 구타 및 고문한 뒤, 12월 7일 낙안면 검암리 소재 공동묘지에서 사살했다. 머리에 총을 맞고 다른 마을 사람 들과 같이 죽어 있는 나성환의 시신을 마을사람들이 발견하여 수습했다. 399) 또한 수정마을에선 집 안으로 숨어 들어온 빨치산 때문에 피해를 입은 경우도 있었다. 여순사건 당시 진압군에게 끌려갔다. 여수수산학교 학생들이 반군에 동조한 까닭이었다. 등에 사형수라 는 낙인까지 찍힌 채, 죽음의 문턱에 있던 그는, 육사친구인 진압군 지휘관의 도움으로 살았다. 순천고에 서 근무하다 53세에 사망했다. 신청인 조영 ( ). 395) 참고인 조영자 통화보고서( ). 신청인 조영은 희생자 조한송의 시신을 낙안지서 앞에서 수습했 다고 했다. 신청인이 제출한 제적등본에는 희생자 조한송이 1948년 10월 25일 오후 3시 승주군 낙안 면 상송리 76번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신청인 조영 ( ). 396) 참고인 조영자 통화보고서( ); 참고인 김훈 통화보고서( ). 397) 신청인 조동진 통화보고서( ). 398) 한관섭이 연행되는 걸 목격한 신청인은 한관섭 시신이 불태워져 시신을 수습할 수 없었다고 했다. 신청인 한재임 ( ). 399) 참고인 나기동 통화보고서( ). 순천지역 여순사건 603

132 제3권 희생자 김인석(직다-1415, 27세)의 사살광경을 직접 목격한 참고인 유옥례의 이다. 1948년 음력 11월 28일 낙안면 목촌리 수정마을 주변에 빨치산이 출현하여 경찰토벌대 와 추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빨치산 2명이 마을로 들어와 김인석의 집 뒤 짚 단에 숨었다. 경찰토벌대가 이를 발견하여 현장에서 사살했다. 경찰토벌대는 방에 있던 남 편 김인석과 내게 빨치산에게 밥을 해주지 않았느냐고 추궁했다. 그런 일 없다고 김인석이 말하자, 경찰토벌대가 바로 그 자리에서 사살했다. 나는 아들인 신청인 김영기를 안고 있다 는 이유로 사살 안 했다.400) 창녕리의 경우, 사건현장을 목격한 신청인 신대우와 참고인 손막동ㆍ이상문의 을 종합하면, 1949년 2월 11일(음 ) 낮 반군이 별량지서를 습격하고 상사면 기동마을 뒤 재를 넘어 낙안면 창녕마을을 통해 도주했다. 진압군이 마을로 추격을 했다. 저녁을 먹고 있을 무렵, 진압군이 마을주민들을 회관으로 소집했다. 군인 3명이 신복동(직다-9902, 39세) 에게 반군을 봤느냐 물었다. 못 봤다고 말하자 군인 셋이 개머리판으로 집단 구타했다. 상처가 심해, 다음날 2월 12일 정월 보름날 신복동은 순천시내 고산병원에 입원하여 두 달 동안 치료를 받았으나, 1949년 4월 6일 결국 사망했다.401) 조사결과, 낙안면 희생자는 40여 명으로 추산(<표 19> 참조)되나 이 가운데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사람은 총 23명이다. 신원 확인 결과와 주요 희생장소 및 희생자 수는 아래 <표 18>, <표 19>와 같다. <표 18> 낙안면 희생자 신원 확인 희생자 연 번 당시 거주지 나이 이름 성별 1 강재수 (姜裁秀) 남 58 2 김대례 (金大禮) 여 60 3 강옥순 (姜玉順) 여 12 확인근거 사건 번호 324 낙안면 (1378 금산리 중복신청) 324 낙안면 (1378 금산리 중복신청) 324 낙안면 (1378 금산리 중복신청) 경찰 자료 확인 / 추정 여부 참고인 시신수습 여부 제적 등본 확인 유족회 희생자 명단 확인 확인 확인 기타 400) 신청인 김영기는 희생자 김인석의 시신을 현장에서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김영기 조 서( ). 401) 참고인 손막동 통화보고서( ); 참고인 이상문 통화보고서( ). 신청인 신대 우는 희생자 신복동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신대우 (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3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제적 유족회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시신수습 등본 희생자 기타 번호 자료 여부 확인 명단 여부 나성환 ( 羅 成 煥 ) 홍목침 ( 洪 木 沈 ) 정선례 ( 鄭 善 禮 ) 홍일순 ( 洪 一 順 ) 홍재호 ( 洪 在 鎬 ) 위형량 ( 魏 瑩 良 ) 조정순 ( 趙 正 順 ) 이삭심 ( 李 朔 心 ) 김용기 ( 金 容 基 ) 이공월 ( 李 空 月 ) 강양수 ( 姜 陽 秀 ) 조성림 ( 趙 成 林 ) 김인석 ( 金 仁 錫 ) 박노은 ( 朴 魯 銀 ) 이장순 ( 李 長 順 ) 남 32 낙안면 목촌리 1371 확인 남 45 낙안면 금산리 1373 (사망일 자 일치) 여 32 낙안면 금산리 1373 (사망일 자 일치) 여 17 남 3 남 67 여 38 낙안면 금산리 여 4 낙안면 금산리 1373 (사망일 자 일치) 낙안면 금산리 1373 (사망일 자 일치) 낙안면 금산리 1374 (사망일 자 일치) 낙안면 금산리 확인 확인 확인 확인 확인 1375 확인 1375 확인 남 25 낙안면 금산리 1376 (사망일 자 일치) 여 43 낙안면 금산리 남 56 낙안면 금산리 여 47 남 27 확인 1377 확인 1379 확인 낙안면 금산리 1380 (사망일 자 일치) 낙안면 목촌리 남 53 낙안면 금산리 여 41 낙안면 금산리 확인 1415 확인 1948/ / 1970 확인 (사망일 자 일치) 확인 순천지역 여순사건 605

134 제3권 연 번 총 계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제적 유족회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시신수습 등본 희생자 기타 번호 자료 여부 확인 명단 여부 박옥란 ( 朴 玉 蘭 ) 한관섭 (한관섭) 조한송 ( 趙 漢 松 ) 신복동 ( 申 福 同 ) 조한상 ( 趙 漢 相 ) 여 14 낙안면 금산리 1948/ 1970 남 19 낙안면 시신이 불에 목촌리 2246 타 재를 수습함 남 47 남 39 낙안면 창녕리 남 27 (사망일 자 일치) 낙안면 상송리 7642 (사망일 자 일치) 낙안면 옥산리 확인 확인 확인 9902 확인 9911 확인 총 23명 (확인 23명) 연 번 희생 장소 희생자 수 희생 시기 가해주체 지역 장소 세부 추정 확인 1 낙안면 금산리 신전마을 2 낙안면 기타 지역 <표 19> 낙안면 주요 희생장소와 희생자 수 낙안북초등학교 뒤 편 금산리 신전마을 159번지(주택) 낙안면 검암리 공동 묘지, 낙안지서 등 1949년 10월 1948년 10월 1949년 9월 국군 15연대 낙안지서 경찰 비고 22명 402) 16명 403) 신청인 사건 당시 홍동호 자택 약 20명 외 다수 404) 9명 405) 총계 약 40명 외 다수 25명 406) 402) 신청인 손삼순 ( ); 신청인 홍동호 ( ); 참고인 김이곤 통화보고서 ( ); 참고인 이형희 통화보고서( ); 참고인 장홍석 통화보고서( ). 403) 낙안면 거주 희생자 16명(직다-324(확인 3, 직다-1378과 중복신청), 직다-1373(확인4), 직다-1374, 직다 -1375(확인 2), 직다-1376, 직다-1377, 직다-1379, 직다-1380, 직다-1948(확인 2, 직다-1970과 중복신청)). 404) 신청인 최동숙 ( ); 신청인 김영기(직다-1415) ( ); 신청인 박일규 통화보고서( ); 참고인 조영자 통화보고서( ); 신청인 신대우 ( ); 신청인 조동진 통화보고서( ); 신청인 한재임 ( ); 신청인 이홍재 ( ); 참고인 김주태 통화보고서(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3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10) 외서면 희생사건 외서면은 일제 때 공출로 민중들의 수탈과 탄압이 심했던 지역이며 해방 이후 박재상 외서면 인민위원장(송광면 장안리 출신)을 중심으로 인민위원회가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인민위원장 박재상은 외서면 수직마을 출신인 김용고를 조직책으로 하여 외서면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외서면 희생자들은 박재상과의 인간적인 인연 때문에 화를 입었다. 이후 체포된 박재상은 외서초등학교 교정에서 우익 가족들에 의해 공개사살되었다고 전해진 다. 407) 수직마을은 14연대가 백운산과 지리산에 입산하기 전에 2개월간 주둔했다. 한편, 15연대 1대대 소속 참고인 강의 에 따르면, 15연대 1대대 1중대가 산골 가용재부락에서 반군 두목을 잡아, 다른 부락주민들과 함께 외서국민학교에서 사살한 일 도 있었다. 외서면 반군협조 혐의자는 15연대에 의해 면소재지로 끌려가 처리되었다. 408) 15연대는 송광면 오룡리, 구표리, 대흥리 일대의 빨치산 보급투쟁로를 차단하기 위해 위 3개 마을을 전부 소개했고, 주민들은 외서면 쌍율로 이주해 생활했다. 409) 외서면 금성리 참고인 안귀엽ㆍ이상근ㆍ박상래ㆍ권대연의 을 종합하면, 1948년 12월 21일(음 ) 토벌대가 외서면 금성마을로 들어와 마을회관으로 주민들을 소집 했다. 젊은이들을 외서지서로 연행해 반군협조자를 불으라며 취조 및 고문했다. 매를 못 이긴 누군가가 이기담(직다-1335, 23세)ㆍ안두영(직다-1336, 23세)ㆍ이상근(직다 -1337, 40세)ㆍ박상래(직다-1338, 39세) 4명을 지목했다. 토벌대가 4명을 외서면 금성 리 월평마을 도가집 옆 도로변에 세워놓고 토벌대 소대장의 지시로 수십 명 토벌대가 칼 빈 총을 발포했다. 안두영은 빗맞아 뒷논 방향으로 도주하여, 마을 민가에 숨었다. 그러 나 쫓아온 토벌대에 다시 체포되어 사살되었다. 410) 반용리 참고인 김기태의 에 따르면, 1949년 4월 3일(음 3. 5.) 군인토벌대가 마을에 들이닥쳐 마을주민들을 소집했다. 김용태(직다-10593, 31세) 등 마을청년 9명을 인근 외 서면 도신리 마을 뒷산으로 끌고 가 집단으로 사살했다. 411) 405) 낙안면 거주 희생자 7명(직다-1371, 직다-1415, 직다-1948, 직다-7642, 직다-9902, 직다-9911, 직다 -2246), 낙안면 이외 거주 희생자 2명(직다-2795, 직다-9905). 406) 낙안면 거주 희생자 총 23명(확인 23명) + 낙안면 이외 거주 희생자 2명(확인 2명). 407) 참고인 김 면담보고서( ). 408) 참고인 강 통화보고서( ). 409) 참고인 박기재 통화보고서( ). 410) 참고인 안귀엽 통화보고서( ); 참고인 이상근 통화보고서( ); 참고인 박상래 통화 보고서( ); 참고인 권대연 통화보고서( ); 신청인 이강원 통화보고서( ); 신청인 이춘형 ( ); 신청인 박병찬 ( ). 411) 참고인 김기태 통화보고서( ); 신청인 김양곤이 제출한 제적등본상 사망일자는 1949년 3 순천지역 여순사건 607

136 제3권 김영모(직다-1382, 47세) 등의 경우, 참고인 김의 에 의하면, 1949년 3월 5 일 김영모ㆍ김용연(직다-1390, 27세) 등 마을사람 8명이 밭일을 하고 있었다. 대마삼을 심기 위해 퇴비를 지게로 나르는 중 벌교 토벌대가 나타나 반군 짐을 나른다고 김영모, 김용섭, 김용연 등 8명과 그 아내들을 구타했다. 누군가 항의하자 김영모, 김용섭, 김용연 등 8명을 반용리 수직마을 앞 논에서 집단으로 사살했다. 412) 월암리 구장 박유만(직다-1384, 40세)은 1948년 12월 17일(음 ) 반군에게 끌려갔다. 이후 아내는 감시 대상이 되었고, 외서지서 경찰과 토벌대에게 연행되어 남편의 소재를 불으라며 고문당했다. 박유만은 송광면과 주암면 경계 모후산에서 군경에게 사살되었다. 413) 월암리 거주 박기옥(직다-1383, 48세)은 여순사건 당시 인민위원장 박재상과의 친분으 로 입산했다. 이후 아내가 외서지서에 끌려가 고문당했다. 하산한 박기옥은 1949년경 외 서지서에 자수했다. 이후 풀려나 농사짓고 살다가 1949년 11월(음 10월)경 외서지서로 연 행되어 곧바로 순천경찰서로 이송되었다. 순천경찰서 경찰이 박기옥을 묶어 아내와 신청 인이 거주하던 순천 유지 염동탁 집으로 데려와 돈을 요구했는데, 염동탁이 거절했다. 이 후 행방불명되어 사살되었다. 414) 장선리 참고인 김규수ㆍ임영호의 을 종합하면, 1948년 12월 16일(음 ) 대 전마을에 살던 이수개(직다-9918, 19세)가 새벽 꿩약을 놓으려고 바가지에 왕겨를 담아 마을 산밑 밭으로 갔다. 산에서 잠복근무하던 토벌대가 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착각해 쫓아왔다. 이수개는 겁이 나 집 방향으로 달아났다. 이수개는 집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장산리 358번지에서 결국 사살되었다. 415) 조사결과, 외서면 희생자 가운데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사람은 총 10명이다. 신원 확인 결과와 주요 희생장소 및 희생자 수는 아래 <표 20>, <표 21>과 같다. 월 5일로 참고인ㆍ신청인이 주장하는 사건일자와 일치했다. 신청인 김양곤 ( ). 412) 참고인 김 면담보고서( ). 신청인 김용석ㆍ염금순은 희생자 김영모, 김용섭, 김용현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김용석 ( ); 신청인 염금순 ( ) 413) 참고인 박기재 통화보고서( ). 414) 참고인 박무평 통화보고서( ). 415) 참고인 김규수 통화보고서( ); 참고인 임영호 통화보고서( ). 신청인 김동호는 희 생자 이수개의 시신을 사건현장에서 바로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김동호 (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3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표 20> 외서면 희생자 신원 확인 연 번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시신 제적 유족회 수습 등본 희생자 번호 자료 여부 확인 명단 기타 여부 이기담 ( 李 起 淡 ) 안두영 ( 安 斗 榮 ) 이상근 ( 李 相 根 ) 박상래 ( 朴 相 來 ) 김영모 ( 金 永 模 ) 박기옥 ( 朴 基 玉 ) 박유만 ( 朴 有 萬 ) 김용연 ( 金 容 淵 ) 이수개 ( 李 守 介 ) 김용태 ( 金 容 台 ) 남 23 남 23 남 40 남 39 남 47 남 29 남 40 남 27 남 19 남 31 외서면 금성리 외서면 금성리 외서면 금성리 외서면 금성리 외서면 반용리 외서면 월암리 외서면 월암리 외서면 반용리 외서면 장선리 1335 확인 1336 확인 1337 확인 1338 확인 1382 확인 1383 확인 1384 확인 1390 확인 9918 확인 외서면 반용리 (사망일 자일치) 확인 총계 총 10명 (확인 10명) <표 21> 외서면 주요 희생장소와 희생자 수 연 희생장소 희생자 수 희생시기 가해주체 번 지역 장소 세부 추정 확인 1 외서면 반룡리 수직마을 앞 논 1949년 3월 벌교 토벌대 8명 416) 2명 417) 2 외서면 도신리 송곡재 (배나무골)뒷산 송곡재, 반월로(수직마을 진입 전 약 2킬로 미터 지점)에서 북서쪽으로 보이는 정상 철탑 밑 능선 1949년 4월 토벌군인 10명 418) 1명 419) 비고 순천지역 여순사건 609

138 제3권 연 번 희생장소 희생자 수 희생시기 가해주체 지역 장소 세부 추정 확인 3 외서면 기타 지역 월평마을 도로변 등 개별 사건 장소 1948년 11월 1949년 12월 외서지서 경 찰, 순천경찰 서 경찰, 국군 7명 420) 외 다수 7명 421) 비고 총계 약 25명 외 다수 10명422) 11) 주암면 희생사건 내운마을 출신 김용길이 처가인 오산으로 이주해 오면서부터 주암면에서 좌익활동이 전개됐다 고 알려져 있다. 423) 김용길은 주암면 인민위원장과 전라남도 유격대 부사령관을 역임해 좌익 거물로 지목됐고, 이로 인해 주암면 주민들은 좌익 가담 여부와 무관하게 피해를 당했다. 424) 행정리 접치재 사건은 주암지역의 대표적인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이다. 한편, 반군의 순천 점령 이전인 1948년 10월 20일 아침 주암리 출신 순천농림중학교 2학년 최춘우(직다-2400, 20세)가 시내 하숙집에서 등교하다 순천경찰에게 연행되었다. 경찰은 최춘우 를 시내 북국민학교로 끌고 가, 이미 끌려온 사람들과 함께 아침 9시경 살해한 것으로 추정된다. 425) 416) 참고인 김 면담보고서( ); 신청인 김용석 ( ); 신청인 염금순 ( ). 417) 외서면 거주 희생자 2명(직다-1382, 직다-1390). 418) 참고인 김 면담보고서( ). 419) 외서면 거주 희생자 1명(직다-10593). 420) 참고인 안귀엽 통화보고서( ); 참고인 이상근 통화보고서( ); 참고인 박상래 통화 보고서( ); 참고인 권대연 통화보고서( ); 신청인 이춘형 ( ); 신 청인 박병찬 ( ); 참고인 박무평 통화보고서( ); 참고인 박기재 통화보고서 ( ); 신청인 김동호 ( ). 421) 외서면 거주 희생자 7명(직다-1335, 직다-1336, 직다-1337, 직다-1338, 직다-9918, 직다-1383, 직다-1384). 422) 외서면 거주 희생자 총 10명, 확인 10명. 423)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범국민대책위원회,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실태보고서, 한울아카데미, 2006, 434쪽. 424) 참고인 정봉균 통화보고서( ); 참고인 정동한 통화보고서( ); 참고인 정 ( ); 신청인 정종원 ( ). 425) 하숙집 주인이 희생자 최춘우의 연행과정을 목격했다고 신청인 최익우는 했다. 신청인 최익우가 제 출한 순천농림중학교 제적부에는 희생자 최춘우가 4281년(1948년) 10월 20일 사망에 의해 제적 처분되었 다고 기재되어 있다. 제적등본상에는 1948년 10월 20일 오전 9시 순천군 주암면 주암리 700번지에서 사 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희생일시는 일치했다. 신청인 최익우 (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3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행정리 접치재 사건 접치재 사건은 1948년 12월 17일 승주에서 주암 가는 길목인 행정리 접치재에서 주암 지서 경찰들이 반군동조 혐의 민간인들을 집단으로 사살한 사건이다. 접치재는 조계산과 모후산의 연결지점이어서, 빨치산협조 혐의로 피해가 컸다. 대광리 거주자 이덕행(직다 -8856, 22세)은 여순사건 당시 좌익활동을 하여 산에 은거하던 사촌매제에게 밥을 날라 주다, 경찰에게 발각되어 도주했다. 1948년 12월 17일(음 ) 주암지서에 자수했다. 이후 주암지서 경찰들이 이덕행을 포함하여 지서에 감금된 이들을 주암면 접치재로 끌고 가 사살했다. 426) 조사결과와 참고인과 신청인의 을 종합하면, 희생자는 35명으로 추 정되나, 진실화해위원회가 확인한 희생자는 5명(3명은 주암, 2명은 승주읍 거주자)이다. 복다리의 경우, 참고인 오치웅의 에 따르면, 오종호(직다-9922, 31세)는 1948년경 주 암 저수지 공사에 동원되어 일했다. 1948년 겨울 빨치산들이 인부 숙소로 와 짐을 나르라고 위협했다. 해코지할까 두려워 짐을 날라주었다. 이후 주암지서 주임 황영환과 경찰들에게 연행되어, 7일 간 취조 및 고문을 당했다. 지서에는 주암면 요곡리에 살던 형제 한광수(직다 -9433, 37세), 한익수(직다-9433, 24세)도 감금되었다. 한광수, 한익수 형제도 1948년 12월 중순경(음 11월 중순경) 주암면 행정리 저수지 공사 일에 동원되었다가, 주암지서로 연행되 어 며칠 동안 감금되었다. 1948년 12월 17일(음 ) 새벽녘에 주암지서 경찰들이 오종호ㆍ한광수ㆍ한익수를 비롯한 감금된 사람들을 주암면 승주에서 주암 가는 길목인 행 정리 접치재에서 집단으로 사살했다. 427) 당일 저녁 친척들이 아직 살아 있던 오종호를 발 견하여, 접치재에서 걸어서 한 시간 거리인 복다리까지 데려왔으나, 바로 숨졌다. 428) 복다리 이문휴(미신청, 35세)의 경우, 피신하다 1949년 11월 1일(음 9. 21일) 조계산 송 광사 뒷산 계곡에서 토벌대에게 사살되었다. 429) 요곡리의 경우 참고인 정봉균ㆍ정동한ㆍ정의 을 종합하면, 1949년 12월경(음 11월 초) 오산리 당산나무 아래 잔치가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요곡리에 살던 정 귀남(직다-1424, 33세), 정병남도 함께였다. 주암지서 주임 황영환과 지서 경찰들이 정 귀남과 정병남을 연행했다. 약 일주일간 고문 및 취조가 잇따랐다. 이후 순천경찰서로 이 426) 참고인 이건총 통화보고서( ). 427) 참고인 한광수 통화보고서 ( ) 신청인 한상순이 제출한 제적등본에는 희생자 한광수, 한익수 가 1948년 11월 17일 주암면 행정리 불상번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어, 사건일자와 일치한다. 신청인 한상순은 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한상순 ( ). 428) 참고인 오치웅 통화보고서( ). 참고인 박형기 통화보고서( ) 신청인 오정권은 집에 서 숨을 거둔 희생자 오종호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오정권 ( ). 429) 참고인 이병도 ( ). 순천지역 여순사건 611

140 제3권 송되어 1950년 1월 3일(음 ) 경찰들이 대구실재에서 사살했다. 430) 조사결과, 주암면 희생자는 30명 외 다수로 추산(<표 33> 참조)되나 이 가운데 진실화 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사람은 총 6명이며, 1명은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원 확인 결과와 주요 희생장소 및 희생자 수는 아래 <표 22>, <표 23>과 같다. <표 22> 주암면 희생자 신원 확인 연 번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시신 제적 유족회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수습 등본 희생자 기타 번호 자료 여부 확인 명단 여부 1 정귀남 ( 鄭 貴 男 ) 남 33 주암면 요곡리 1424 확인 2 최춘우 ( 崔 春 宇 ) 남 20 주암면 주암리 2400 (사망일자 일치) 학교제적 증명서 (사망일자 일치) 추정 3 이덕행 ( 李 德 行 ) 남 22 주암면 대광리 8856 확인 4 한광수 ( 韓 光 洙 ) 남 37 주암면 요곡리 9433 (사망일자 일치) 확인 5 한익수 ( 韓 益 洙 ) 남 24 주암면 요곡리 9433 확인 6 오종호 ( 吳 宗 鎬 ) 남 31 주암면 복다리 9922 확인 7 이문휴 ( 李 文 休 ) 남 35 주암면 창촌리 미신청 확인 총계 총 7명 (확인 6명 / 추정 1명) 430) 참고인 정봉균 통화보고서( ); 참고인 정동한 통화보고서( ); 참고인 정 ( ); 신청인 정종원 (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4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표 23> 주암면 주요 희생장소와 희생자 수 연 번 희생장소 희생자 수 희생시기 가해주체 지역 장소 세부 추정 확인 비고 1 주암면 행정리 접치재 주암면과 승주읍 경계 지역인 접치재 정상 인근 구 호남 고속 도로(광주 방향) 좌측 현 조계 산 등산로 입구(장군봉 방향) 산행로 표지판 앞 둔턱 1948년 12월 주암지서 경찰 약 30명 431) 4명 432) 2 순천 일대 기타 지역 서면 구랑실재, 순천북초 등학교, 조계산 송광사 뒷 산 등 1948년 10월 1949년 12월 순천경찰서 경찰, 국군 약 3명 외 다수 433) 3명 434) 총계 약 30명 외 다수 7명 435) 12) 송광면 희생사건 송광면도 조계산과 인접해 있어 여순사건 당시 피해가 많았다고 전해졌으나, 진실화해위원 회에 접수된 사건건수는 1건이다. 참고인 지성엽의 에 따르면, 장안리 마을회관 뒤 대밭으로 반군이 들어왔다며 송광지서 경찰들이 주민들에게 대나무를 치게 했다. 장안리에 살았던 박동련(직다-2278, 66세)도 대를 치러 나왔는데, 냇가 건너 외서면 지원 토벌대가 산 밑 대밭 쪽으로 내려가라고 손짓하여 내려왔다. 내려가던 박동련을 토벌대가 사살했다. 436) 조사결과, 송광면 희생자 중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사람은 총 1명이다. 신원 확인 결과와 주요 희생장소 및 희생자 수는 아래 <표 24>, <표 25>와 같다. 431) 참고인 이, 면담보고서( ); 참고인 이건총, 통화보고서( ) 432) 주암면 거주 희생자 4명(직다-8856, 직다-9433(확인 2), 직다-9922) 433) 신청인 정종원, ( ); 신청인 최익우, ( ); 참고인 이병도, ( ) 434) 주암면 거주 희생자 3명(직다-1424, 직다-2400(추정), 미신청 이문휴) 435) 주암면 거주 희생자 7명, 확인 6명, 추정 1명. 436) 참고인 지성엽, 통화보고서( ) 순천지역 여순사건 613

142 제3권 <표 24> 송광면 희생자 신원 확인 연 번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시신 제적 유족회 수습 등본 희생자 번호 자료 여부 확인 명단 기타 여부 1 박동련 ( 朴 東 連 ) 남 66 송광면 장안리 2278 (사망일자 일치) 확인 총계 총 1명 (확인 1명) <표 25> 송광면 주요 희생장소와 희생자 수 연 번 희생 장소 희생자 수 희생 시기 가해주체 지역 장소 세부 추정 확인 비고 1 송광면 기타 지역 개별 사건 장소 1948년 12월 토벌대 1명 외 다수 437) 1명 438) 총계 1명 외 다수 1명 13) 기타 지역 순천지역 여순사건과 관련하여 인근 지역의 주민들도 순천지역에서 연행되어 사살되었다. 특히 순천이 교육중심지였던 까닭에 순천지역으로 유학 온 인근 지역 출신 학생들의 피해가 많았다. 희생자와 함께 반군협력자 색출과정을 겪었던 신청인 송철현의 에 따르면, 순천 탈환 뒤 1948년 10월 23일 저녁 12연대 군인들이 청장년들을 북국민학교에 소집했다. 고흥군 두원면 성두리 출신으로 순천농고 6학년생이었던 송임석(직다-7267, 22세)도 그 자리에 있었다. 12연대 군인들은 소집된 젊은이들에게 눈을 감으라고 한 뒤, 반군협력자 보고 동조자를 지목하라고 시켰다. 12연대 군인들은 지목된 이들을 건물 뒤로 끌고 가 사살했다. 1948년 10월 24일 아침 신청인 송철현은 석방이 되어, 송임석과 헤어졌다. 당 437) 참고인 지성엽 통화보고서( ). 438) 송광면 거주 희생자 1명(직다-2278)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4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일 오전 12연대 군인들이 송철현 등 청장년 수십 명을 석현동 향림사 뒷골 골짜기에서 사살했다.439) 1948년 10월 22일경 구례군 산동면 계천리 출신 순천농고 재학생 최석호(직다-4050, 19세)가 등교했다가 12연대 진압군에게 연행되어 순천시 석현동 소재 향림사 수로 제방에서 사살됐다.440) 곡성군 옥곡면 오지리 출신으로 곡성에서 순천까지 기차로 통학했던 순천중학교 5학년 정대룡(직다-10652, 19세)은 여순사건 당시 등교 후 연행되어 군경에게 살해됐다.441)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 출신으로 매산중학교 3학년 박이만(직다-9959, 21세)은 휴학생 으로 1949년 2월경 순천시내 자취방으로 돌아갔는데, 며칠 후 부친이 집주인에게 물어보 니 순천경찰서 경찰들이 박이만을 연행했다고 말해주었다. 이후 박이만은 살해되었다.442) 여순사건 당시 나주군 다도면 방산리 출신으로 순천농고 재학생 윤달헌(직다-7505, 21 세)은 등교한 후 군경에게 사살되었다.443) 여순사건 당시 보성군 벌교읍 벌교리 출신으로 순천농림중학교 2학년생 여두원(직다-1341, 18세)은 1948년 10월 25 26일경 제복 입은 사람들이 끌고 온 트럭에 태워져, 이후 살해되었다.444) 화순군 남면 사평리 출신으로 순천농림중학교 5학년생 민계식(직다-6267, 18세)은 여 순사건 당시 학교에 나가 며칠간 집에 안 들어왔다. 며칠 뒤 하숙집 아줌마가 군인들이 민계식을 포함한 학생들을 포승줄에 묶어 끌고 가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후 군인들은 민 계식을 구랑실재로 끌고 가 사살한 후 소각하였다.445) 여순사건 당시 여수시 여천군 삼일면 회치리 덕암부락에 살던 주두신(직다-6572, 19세), 주성창 (직다-6572, 22세)은 피신하여 순천 해룡면 하사리 친척집에 숨었다. 1948년 11월 17일 군인들과 경찰들이 해룡면 친척집을 급습하여, 주두신과 주성창을 인근 산으로 끌고 가 사살했다.446) 여순사건 당시 순천도립병원 원장이 반군들에게 협조했던 일이 있었다. 순천 탈환 후 신청인 송철현 ( ). 참고인 전영섭 ( ). 참고인 정대춘 통화보고서( ). 참고인 박이철 통화보고서( ); 참고인 박대수 통화보고서( ); 참고인 박대식 통화 보고서( ); 신청인 박이관 ( ). 443) 참고인 윤금순 통화보고서( ). 신청인이 제출한 순천농고 학적부에는 희생자 윤달헌이 1949년 2월 22일 장기결석으로 제적처분 받은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444) 참고인 박문길 통화보고서( ); 참고인 여복만 통화보고서( ); 신청인 여두성 ( ). 445) 참고인 민문식 통화보고서( ). 446) 신청인 주주원은 채무관계로 갈등을 빚던 채무자가 주두신의 집안을 좌익집안이라고 허위신고하여 사살되었 다고 주장했다. 신청인 주주원, ( ). 주복신은 지리산으로 도망갔다가 토벌작전 때 사살되 었다고 전해졌다. 참고인 정두화, 통화보고서( ); 참고인 최병선, 통화보고서( ) 439) 440) 441) 442) 순천지역 여순사건 615

144 제3권 1948년 10월 25일 순천도립병원에 온 진압군들이 의사 정옥기(직다-10834, 25세) 등 의사 들과 식모, 병원사람들을 연행하여 이후 살해했다.447) 고흥군 대서면 남정리에 살던 정맹현(직다-3362, 21세)은 1949년 초 설을 쇠고 머슴살 이하던 집에서 조계산 빨치산들에게 끌려갔다. 송개순과 혼인한 지 3일만의 일이었다. 정 맹현은 1949년 봄 조계산에서 진압군에게 살해됐다.448) 조사결과, 기타 지역 희생자 중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사람은 총 11명이다. 신원 확인 결과와 주요 희생장소 및 희생자 수는 아래 <표 26>, <표 27>과 같다. 조사결과, 순천지역 여순사건 민간인 희생사건과 관련한 (미)신청된 진실규명대상자는 총 269명 이고, 이 가운데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250명이었다. 시내권과 읍(면)별로 희생사실이 확인된 인원은 순천시내권 32명, 승주읍 12명, 서면 63명, 월등면 19명, 황전면 16명, 해룡면 19명, 상사면 28명, 외서면 10명, 낙안면 23명, 주암면 6명, 송광면 1명, 별량면 10명, 기타 11명이다. <표 26> 기타 지역 희생자 신원 확인 희생자 연 번 확인근거 경찰 참고인 자료 시신 수습 여부 유족회 제적등본 희생자 확인 명단 확인 / 추정 여부 이름 성별 당시 나이 거주지 사건 번호 1 여두원 (呂斗元) 남 18 보성군 벌교읍 벌교리 정맹현 (丁孟鉉) 남 21 고흥군 대서면 남정리 3362 (사망일자 일치) 확인 3 최석호 (崔錫澔) 남 19 구례군 산동면 계천리 4050 확인 4 민계식 (閔季植) 남 18 화순군 남면 사평리 6267 (사망일자 일치) 확인 5 주두신 (朱斗新) 남 19 여수시 여천군 삼일면 화치리 6572 확인 기타 확인 447) 참고인 백준기, 통화보고서( ) 448) 참고인 박동근ㆍ정하천의 에 따르면 동강면 송강마을 출신으로 좌익활동을 하다 자수한 박학주가 정맹현의 사망사실을 전해주었다. 참고인 박동근, 통화보고서( ); 참고인 정하천, 통화보고서(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4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시신 유족회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제적등본 수습 희생자 기타 번호 자료 확인 여부 명단 여부 주성창 ( 朱 成 錩 ) 송임석 ( 宋 任 錫 ) 윤달헌 ( 尹 達 憲 ) 박이만 ( 朴 以 萬 ) 정대룡 ( 鄭 大 龍 ) 정옥기 ( 鄭 鈺 基 ) 남 22 남 22 남 21 남 21 남 19 남 25 여수시 여천군 삼일면 화치리 고흥군 두원면 성두리 나주군 다도면 방산리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 곡성군 옥곡면 오지리 광양군 옥곡면 묵백리 6572 확인 7267 확인 7505 사망신고 안 함 순천대 학적부 제적 처분 확인 9959 확인 확인 확인 총계 총 11명 (확인 11명) <표 27> 기타 지역 주요 희생장소와 희생자 수 연 번 희생장소 희생자 수 희생시기 가해주체 지역 장소 세부 추산치 확인 비고 1 순천 일대 기타 지역 개별 사건 장소 1948년 10월 1949년 12월 국군 12연대 순천경찰 11명 외 다수 449) 11명 450) 총계 11명 외 다수 11명 449) 신청인 송철현, ( ); 참고인 전영섭, ( ); 참고인 정대춘, 통화보고서 ( ); 참고인 박이철, 통화보고서( ); 참고인 박대수, 통화보고서( ); 참고 인 박대식, 통화보고서( ); 신청인 박이관, ( ); 참고인 윤금순, 통화보고서 ( ); 신청인 여두성, ( ); 참고인 민문식, 통화보고서( ) 순천지역 여순사건 617

146 제3권 이상의 사건을 관련 장소별로 정리하면 [그림 1], [그림 2], <표 28>과 같다. [그림 1], [그림 2]에 표기된 아라비아 숫자는 <표 28>의 연번과 동일하다. [그림 1] 순천지역 여순사건 주요 집단희생장소와 가해주체(외곽)451) 450) 순천시 이외 지역(구례군, 고흥군, 보성군 등) 거주 희생자 11명(직다-1341, 직다-3362, 직다-4050, 직다 -6267, 직다-10834, 직다-6572(확인 2), 직다-7267, 직다-7505, 직다-9959, 직다-10652) 451) 지도 제공: 순천시청(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4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그림 2] 순천지역 여순사건 주요 집단희생장소와 가해주체(시내권)452) 2여단 하교대 2연대1대대 3연대1대대 3연대2대대 12연대3대대 ④순천농림중 ③순천북교 ⑤매곡동 ①죽도봉 2여단 5여단 4연대 남국교 경찰서 ②생목동 4(20)연대 중앙국교 12연대 본부 연대3대대 벌교방면 452) 지도 제공: 순천시청( 순천지역 여순사건 619

148 제3권 <표 28> 순천지역 여순사건 주요 집단희생장소 연 번 희생장소 희생규모 희생시기 가해주체 지역 장소 세부 추정 확인 비고 1 순천 시내권 죽도봉 골짜기 (조곡동 둑실마을 안골) 현 조곡교(구 동순천 다리) 를 동쪽으로 건너 봉화터 널 길 좌측 둑실 5길 주변 일대(정원 넥스빌, 금강메 트로빌 아파트 지역) 1948년 10월 1949년 국군, 순천경찰서 경찰 일제강점기 약 400명 6명 부터 경찰사 격장 2 순천 시내권 생목동 수박등 공동묘지 순천역에서 북쪽 약 700미 터 이격, 현 이수중학교(생 목동 24번지) 및 인근 생목 현대아파트, 금호타운아파 트, 벽산아파트 일대 1948년 10월 1949년 국군, 순천경찰서 경찰 약 130명 5명 순천철도 관 계자 집단사 살 후 시신 소 각 3 순천 시내권 현 순천북초등학교(매곡동 북국민학교 425-1) 1948년 10월 1948년 11월 2연대ㆍ12연 대ㆍ15연대ㆍ 순천경찰 약 100명 1명 반군협조 혐 의자 심사 4 순천 시내권 순천농림 중학교 (강당 뒤편 논) 현 국립순천대학교(중앙로 413, 매곡동 315) 1948년 10월 1948년 11월 국군 2연대ㆍ3연 대ㆍ4연대ㆍ 12연대ㆍ 15연대 약 500명 5명 5 순천 시내권 매곡동 (매산길) 매산중학교 정문에서 매산 길을 따라 난봉산 방향으 로 약 200미터 떨어진 매 산중학교 담장 끝 부분 1948년 10월 국군 12연대ㆍ 3연대 26명 12명 담장에 남은 일부 혈흔에 현재 녹색 페 인트 표시 6 서면 구랑실재 남해고속도로(부산 방향) 좌측(동북방향) 서면 압곡 리 산 일대 야산 및 골짜기 (서면 압곡리 뫼골 우측 골짜기) 1948년 11월 1949년 12월 서면지서 경찰 주암지서 경찰 순천경찰서 경찰 약 30명 외 다수 5명 현재 남원- 광양 간 도로 건설 공사 중 7 서면 대구실재 학구3거리에서 남서쪽으 로 약 150미터 지점, 현 순 천자동차전문학원 뒤 언덕 포장도로 우측 서정수 씨 농장 출입문 주변 언덕(구 학구역 철길 맞은 편 언덕) 1948년 11월 1949년 12월 서면지서 경찰 주암지서 경찰 순천경찰서 경찰 약 80명 3명 구 학구역 철 길은 현재 비 닐하우스 자 리이며, 서정 수 씨 농장 출 입구 너머로 세인중공업 공장이 보임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4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희생장소 희생규모 희생시기 가해주체 지역 장소 세부 추정 확인 비고 8 서면 판교리 노은마을 월치재 인근 노은고지 (지본고지) 지본리에서 지방도 840(청 소길)을 따라 북쪽 판교리 방향으로 진입, 도로 우측 삼양식품 순천지점 뒷산 (판교리와 지본리 경계, 월 치재 우측) 약 7부 지점 골 짜기 1949년 3월 국군 15연대 서면지서 경찰 사건 당시 정 약 120명 9명 상에 군부대 주둔 9 서면 서면 용계산 안골 흥대리 버스승강장에서 구 상 비봉길을 따라 북쪽(광 양 봉강 방향)으로 약 3킬 로 미터 지점, 계룡재 남쪽 비봉산 상봉 좌측 안골 골 짜기의 좌측 둔턱 1949년 9월 국군 15연대 서면지서 경찰 약 150명 20 명 우측에 비봉 산 상봉, 좌측 에 씨래바구 10 월등면 농선리 큰박골 현 월전중학교(농선리 108-3) 에서 서남쪽 1킬로미터 지점인 농곡마을 앞산 하단부 매실밭 1948년 11월 26일 월등지서 경찰 국군 12연대 약 40명 12명 현장에서 북 쪽으로 약 200미터 지 점 농로 사이 로 농곡천이 흐르며, 현장 우측에 삼양 산업 건물 위치 11 월등면 농선리 양지맷골 현 순천월전중학교(농선리 108-3)에서 서남쪽 약500 미터 지점 농곡마을 앞산 골짜기 상단부, 농곡마을 회 관에서 남쪽으로 약 1킬로 미터 지점 골짜기 상단부 1948년 10월 1949년 12월 12연대 순천경찰서 경찰 월등지서 경찰 황전지서 경찰 약 110명 3명 현재 현장 위 편 ( 골짜기 끝) 언덕 우 측에 김해 김 씨 김종순의 묘지 위치 12 월등면 망용리 보름터골 망용마을 버스 승강장에서 망용보건소를 지나 마봉산 방향으로 약 500미터 지점 에서 우측 보름터골로 진 입하여 약 50미터 지점에 있는 현 매화밭 1948년 11월 1일 황전지서 경찰 다수 1명 골짜기 초입 좌측에 정진 양 씨 묘지 위 치, 현장은 과 거에 논이었 음 13 상사면 우산보 인근 보장골 우산보에서 상사호 길 건 너 동쪽으로 약 300미터 지점, 상사호길(상사면사 무소 방향) 우측 현 공작가 1948년 1949년 국군, 순천경찰서 경찰 다수 (추정 불가) 보장골1. 현재 행정구 역상 순천시 덕월동으로 순천지역 여순사건 621

150 제3권 연 번 희생장소 희생규모 희생시기 가해주체 지역 장소 세부 추정 확인 든(예식장) 뒤편(동쪽 방 향)약 100미터 떨어진 야 산 골짜기 편제 비고 우산보에서 동쪽으로 약 250미터 지점, 공작 가든 좌측 현 상사참숯가마 찜 질방 (흘산리 1-3)건물 뒤 (약 5미터 이격) 골짜기 1948년 1949년 국군, 순천경찰서 경찰 다수 (추정 불가) 보장골2. 현재 골짜기 로 좌우로 콘 크리트 작업 상사호길(상사면사무소 방 향) 우측 현 솔가든 및 자 라농장 뒤편으로 약 50미 터 떨어진 야산 골짜기 하단 부 1948년 1949년 국군, 순천경찰서 경찰 다수 (추정 불가) 보장골3. 현 솔가든 뒤 민가에서 우 측 후방 작은 골짜기 14 낙안면 금산리 신전마을 낙안북초등학교 뒤편 금산 리 신전마을 159번지(주 택) 1949년 10월 국군 15연대 22명 16명 사건 당시 신 청인 홍동호 자택 15 별량면 서자골 공동묘지 봉림리 돌고개재 인근 운 천 저수지에서 남쪽으로 약 200미터 지점으로 봉림 리 봉덕 뒷산 서자골 좌측 공동묘지 초입 둔턱, 현 백 일홍 밭 뒤편 봉분 3개 위 치 지점 1948년 11월 1949년 2월 별량지서 경찰 약 15명 외 다수 4명 사건 당시에 도 공동묘지 16 외서면 도신리 송곡재 (배나무골)뒷산 송곡재, 반 월로(수직 마을 진입 전 약 2킬로 미터 지점)에서 북 서쪽으로 보이는 정상 철 탑 밑 능선 1949년 4월 토벌군인 10명 1명 17 주암면 행정리 접치재 주암면과 승주읍 경계 지 역인 접치재 정상 인근 구 호남 고속도로(광주 방향) 좌측 현 조계산 등산로 입 구(장군봉 방향) 산행로 표 지판 앞 둔턱 1948년 12월 주암지서 경찰 약 30명 외 다수 4명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5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3. 사건 조사결과 가. 사건규모와 희생자 신원 1) 희생자 수 여순사건 발생 직후인 1948년 11월 1일 전라남도 보건후생국에서는 순천지역의 사망자 가 1,134명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453) 진실화해위는 순천지역 여순사건으로 인한 민간인 희생 중 1948년 10월 말부터 1950년 2월까지 군경에 의한 희생자 수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한편, 순천시에서 1948년 10월 말에서 1950년 2월까지 군경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진실 화해위원회에 신청된 여순사건 건수는 총 203건, 진실규명대상자는 총 258명이었다. 또한 진실규명신청 기간 중에 접수하지 못하여 추후에 진실규명을 요청한 미신청 희생자 유족 은 총 9명, 그들이 주장하는 희생자는 10명이었다. 그리고 신청(참고)인의 속에서 언 급된 미신청 1명의 희생자가 포함되어, 순천지역 여순사건과 진실규명대상자는 총 269명 이다. 조사결과, 진실화해위원회는 신청된 진실규명대상자 258명 가운데 불능 14명과 추정 5 명을 제외한 239명의 희생사실을 확인하였다. 또한 미신청 희생자 11명 전원의 희생사실 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진실화해위원회는 (미)신청사건 도합 총 250명의 희생사 실을 확인하였다. 한편, 진실화해위원회는 순천경찰서가 작성한 자료에서 순천지역 여순사건 관련 사살 자 로 기재된 189명의 희생사실도 추가적으로 확인하였다. 이상을 종합하면, 순천지역 여순사건 관련 군경에 의한 희생자는 대략 2,000여 명 정도 로 추산 454) 되지만, 전체 희생자 수는 파악할 수 없다. 순천지역 여순사건과 관련하여 진 실화해위원회가 희생사실을 확인한 (미)신청된 희생자는 439명이며, 희생자로 추정되는 사람은 총 5명이다. 453) 호남신문, ) 진실화해위원회가 본 사건의 신청인 및 참고인 을 바탕으로 순천지역 여순사건 희생자 수를 추산한 결과, 총 희생규모 2,060명으로 파악되었고, 오차범위를 고려하면 대략 2,000명으로 추산된다. (=총계 추 산치 합 중복 계산된 희생자 수 31.) 중복 계산된 희생자 수 31명은 각 면별 희생자 총수에서 해당 면 이외 지역 희생자 수를 더한 값이다. ( 순천시내 : 순천시내 이외 거주 17명 서면 : 7 월등면 : 3 황전면 : 2 낙안면 : 2.) 순천지역 여순사건 623

152 제3권 2) 희생자의 신원과 특징 진실화해위원회는 희생자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먼저 진실규명 신청이 접수된 희생자와 미신청 희생자 유족이 주장하는 희생자 명단을 중심으로, 여순사건순천유족회에 가입된 유족들이 주장하는 희생자 명단과 여순사건 순천유족회의 자체 희생자 조사 명단을 종합 하여 비교하였다. 455) 또한 사실조사서 ㆍ 보안기록회보조회서 (순천경찰서, 1980ㆍ 2006)에 등재된 여순사건 당시 희생사실과 희생자의 이름을 파악하여 희생자 신원 확인 에 반영하였다. 456) 다음으로 참고인과 목격자 조사를 통해, 희생사실을 확인하고, 희생자 의 시신수습 여부를 파악하여 확인 근거로 삼았다. 기타 제적등본에 기재된 사망시기 또는 장소가 조사내용과 일치하는 52명의 경우, 이를 희생자 신원을 확인하는 데 참고하였다. 이와 같이 본 조사에서는 경찰자료 기재 여부, 참고인 및 목격자 유무, 시신수습 여부 등을 주요 근거로 삼아 희생자를 확인 또는 추정 하였다. 또한 신청인이나 참고인이 사 건을 직접 목격하거나 시신을 수습하여, 그 이 매우 일관되며 상황이 구체적일 경우 에는, 신청인 또는 참고인 을 신뢰하여 희생자를 확인 하였다. 본 조사에서 희생사실과 신원이 확인되어 희생자로 확인된 250명과 희생사실을 추정 할 수 있는 희생추정자 5명의 명단은 <표 2 27> 각 읍면별 희생자 신원 확인 과 같다. 한편, (미)신청사건을 제외하고 순천경찰서 보안기록조회회보서 (1979), 사실조사서 (1980)에 기재되어, 순천지역 여순사건 희생자로 확인된 인원은 총 189명이고 명단은 [별첨 12]와 같다. 457) 이상을 종합하면, 진실화해위원회가 희생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희생자는 총 439명이다. 본 조사에서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 439명의 연령별ㆍ성별ㆍ면별 분포상황을 아래 <표 30>ㆍ<표 31>ㆍ<표 32>로 정리했다. 455) 사단법인 여순사건순천유족회는 2000년에 발족하여, 2008년 11월 현재 127명의 회원과, 148명의 희생자 명단을 보유하고 있다. 여순사건순천유족회는 매년 정기적으로 여수와 구례 등 다른 지역 유족회와 함께 합동위령제를 지내고 있으며, 여순사건 당시 순천지역 민간인 희생자의 명단 및 신원과 희생 관련 내용 을 지속적으로 수정 및 보완하여 관리해오고 있다. 따라서 여순사건구례유족회의 회원 명부와 자체 조사 결과인 희생자 명단은 일정하게 신뢰할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여순사건순천유족회, 여순사건 희 생자 순천유족회 회원명부 ( ); 여순사건순천유족회, 유족회 운영경과보고서 ( ). 456) 경찰자료의 성격과 해제에 대해서는 본 보고서 I-3-다. 자료조사 참조. 457) 보안기록조회회보서 에 기재된 순천지역 여순사건 관련 사살자 는 82명이고, 사실조사서 에 기재된 사살자 는 205명이다. 도합 287명 가운데 진실규명대상자(38명)와 두 자료에서 중복된 인원 및 국민보보 도연맹 사건과 전국형무소재소자 사건, 기재 오류 등을 제외하여 최종 189명의 희생사실이 추가로 확인 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189명 가운데 소재가 파악된 10명에 대해 전화탐문을 벌인 결과, 10명 모두 순 천지역 여순사건 관련 피살자로 확인되었다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5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표 29> 희생자의 연령별 분포 연령대 10대 이하 10대 20대 30대 40대 50대 이상 계 희생자(수) 비율(%) 순천경찰서 자료에 기재된 사살자 1명 연령 미상으로 제외함. 희생자 추정 5명, 진실규명 불능 14명은 통계에서 제외함. <표 30> 희생자의 성별 분포 성별 남 여 계 희생자(수) 비율(%) 순천경찰서 자료에 기재된 사살자 17명 성별 불명. <표 31> 희생자 면별 분포 지역명 순천시 승주읍 낙안면 별량면 상사면 서면 송광면 외서면 월등면 주암면 해룡면 황전면 불명 기타 계 희생자 (수) 비율 (%) 기타 : 순천 이외 지역에 거주했으나, 순천에서 희생됨. 희생자의 연령별 분포를 보면, 전체 439명 가운데 20대와 30대가 319명으로 73%를 차 지하였다. 성별 분포를 보면, 남자가 91.4%로 희생자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는 가장 활 동적인 시기의 청년 남성이 민간인 희생의 주요 대상이었음을 보여준다. 경찰 참고인 황 은 여순사건 당시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많았다 면서, 대부분이 마을의 장정들이었 다 고 했다. 458) 최다 희생지역인 서면의 경우 학구지서 주임 구이 잦은 전기통 458) 참고인 황 면담보고서( ). 순천지역 여순사건 625

154 제3권 신망 파괴를 이유로 들어 젊은 사람들을 많이 죽였다고, 경찰 참고인 서가 했 다. 459) 젊은이들은 진압군에 의해서도 반군협조 혐의자 내지 잠재적 적대세력 으로 지목 되어 현장에서 집단총살되는 예가 있었으며, 460) 군경에 연행되어 취조 및 고문을 거친 후 즉결처분되는 경우도 많았다. 한편, 10대 이하의 희생자는 5명으로 반군협력 혐의자의 가 족들이었다. 면별 분포의 경우 총 12개 읍ㆍ면 가운데 서면에서 20.6%에 해당하는 90명의 가장 많 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이는 서면이 백운산과 인접해 있고, 광양과 구례로 가는 길목인 까닭에 반군의 이동통로로 이용되었고, 국군 15연대에 의해 발생한 판교리 노은마을 사 건과 용계산 계곡 골짜기 사건의 희생자가 많았던 점에 기인한다. 서면에서는 반군이 근 거지로 삼았던 지역이 많았고, 이에 서면 사람들이 군경과 반군의 중간에 놓이게 되면서 다른 면에 비해 희생자가 많았다고 판단된다. 서면에 이어 상사면, 순천시, 황전면, 낙안 면, 월등면, 외서면, 해룡면, 주암면 등의 순으로 희생자가 많았다. 순천 서면에 주둔했던 15연대 소속 참고인 윤은 작전지역 마을에서 반군협조 혐 의자들을 인근 야산에 데려가 구덩이를 파고 총살한 후 매장했다 면서, 군인들이 반군에 게 희생당하자 보복심리가 강하게 작용했다 고 고백했다. 또한 반군협조 혐의만으로 즉 결총살된 억울한 민간인들이 많았다 고 했다. 461) 또한 일제시기부터 농민조합운동 등 사회운동이 활발했던 서면의 역사적 배경과 순천인민위원회 위원장인 김기수의 고향 이라는 점 등도 서면의 희생자 수가 많았던 원인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462) 나. 피해이유 지금까지 정부와 군경은 여순사건을 공산반란 또는 폭동으로 규정하면서, 당시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본 사건 당시 양민과 폭도를 구별하기 어 려웠으나, 주로 민간 폭도 를 처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463) 특히 순천은 여순사건이 영향 을 미친 전남 동부지역(여수ㆍ순천ㆍ구례ㆍ광양ㆍ보성ㆍ고흥ㆍ곡성ㆍ화순 등) 가운데 진 실화해위원회에 접수된 신청건수가 가장 많은 지역에 속했다. 이는 다른 지역의 미신청인 들을 고려하더라도, 좌우익 양쪽에 의한 인명피해가 큰 편에 속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459) 참고인 서 ( ). 460) 유건호, 전환기의 내막, 조선일보사, 1982, 149쪽. 461) 참고인 윤 ( ). 462) 참고인 안 녹취록( ). 463)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 : 해방과 건군( ) (제1권), 1967, 463쪽 참조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5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순천지역의 인명피해가 큰 이유는 반군 점령 당시의 경찰 피해 지방좌익의 우익에 대한 살해 행정의 공백 무차별적인 진압작전 경찰과 우익의 보복 등을 들 수 있다. 먼저 순천에서는 결과적으로 경찰관과 우익인사들의 피해가 여수보다 많았는데, 이는 사건 당시 벌어진 반군과의 교전 패배도 한몫했다. 특히 10월 20일 오전에 벌어진 반군과 경찰의 전투 과정에서 대다수의 경찰이 숨졌다. 경찰병력이 인근 지역으로부터 급히 지 원됐음에도 반군과의 첫 전투에서 기백 명이 죽는 패배를 당했다. 경찰 방어선이 급속히 무너지고 순천이 반군의 장악 하에 들어가면서 미처 피하지 못했던 타 지역 경찰관들도 반군에게 발견되어 사살됐다. 464) 반군의 순천 점령 이후 수백 명의 경찰관이 전투에서 전 사했거나 반군들에게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465) 한편, 좌우익 갈등의 심화도 순천의 피해를 증폭하는 요인이 되었다. 좌ㆍ우익이 비교 적 공존했던 여수에 비해, 순천은 좌ㆍ우익 갈등의 정도가 심했다. 순천은 전통적으로 우 익세가 강했으나, 동시에 좌익의 결집력도 강했다. 466) 1946년 우익진영이 군수와 경찰 서장을 지내면서 좌익에 대한 총검거가 이루어졌고, 좌익은 우익에 대한 테러에 나서는 등 해방 이후 순천의 좌우익은 반목과 갈등을 거듭했다. 467) 이러한 갈등의 양상은 반군 이 순천을 점령한 1948년 10월 20일 이후 지방좌익들로 하여금 그동안 자신들을 억압한 우익세력을 살해한 한 원인이 되었다. 당시 순천 대한청년단 단장 황우수는 순천시내 구 경찰서 앞에 청년단과 경찰의 시신이 즐비했을 정도로 좌익의 보복이 심했다고 말했 다. 468) 결과적으로 좌익의 보복은, 순천 진압 후 경찰과 청년단을 위시한 우익세력이 지 역주민을 대상으로 다시금 보복을 하게하는 악순환을 낳았다. 반군 치하 행정공백도 한 원인이 되었다. 반군 치하에서 여수는 거의 7일간 행정이 초 보적인 수준으로나마 진행된 반면, 순천은 행정을 실시할 물리적 시간이 없었다. 행정이 장악되지 못한 부문에서 사적 보복이 자행되었다. 당시 미군 자료에는 순천지역에서 인 464) 김득중, 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논문, 2004, 87쪽. 당시 순천경찰서 사찰계에서 근무한 박은 경찰 지원병력이 순천 지리에 어두워 더 많은 희생을 불러왔다고 말했다. 선휘성 채록, 박 구술, 지역민이 체험한 여순사건 녹취록1, 국사편찬위원회, 2006, 7쪽. 465) 10월 27일자 영국 외무성문서에는 미 외교관 보고를 인용하여 300명의 경찰과 비공산주의자 시민들이 반군에게 학살되었다고 적고 있다. ( The American Vice-Consul at Kwangju has reported that the rebels have butchered over 300 police and non-communist civilians. )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 국사 자료집ㆍ한국관계 영국외무성문서10 17권, 1994, 272쪽. 진압군 측은 400여 명의 경찰관이 사살 당한 것으로 추산했다. 육본 정보참모부, 공비연혁 1, 1971, 205쪽. 466) 순천시사편찬위원회, 순천시사-정치사회편, 1997, 733쪽. 467) 참고인 황 면담보고서( ). 468)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팀, 여수 14연대 반란 녹취록 ( 방영), 황우수 증언, 14 1~142쪽. 순천지역 여순사건 627

156 제3권 민재판이 실시된 것으로 보고469)되어 있으나, 초보적인 행정조차 실시되지 못한 순천에 서 인민재판 형식을 갖춘 반동우익과 경찰에 대한 처단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순천지역 에서 인민재판이라고 알려진 것은 지방좌익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진압군이 들어오기 직전, 두려움을 느낀 봉기 가담 인물들이 사감(私感)에 의해 처단한 것이었다.470) 여순사 건 당시 입산하여 구철 이라는 이름으로 1954년 5월까지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군사2부장 을 지낸 심명섭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일 아침까지 당성이나 정치성이 부족한 세포요원들이 앞장선 무분별한 살상이 있었다. 살상의 주된 표적은 공무원, 경찰과 그의 가족, 서북청년단 등이었다. 그러나 민간 인에 대한 살상도 상당수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은 경륜이 짧고, 세상이 곧 바뀌리 라는 지극히 단순한 사고의 결과로 보인다. 이는 민심을 이반시키고 돌아서게 함으로써 정 치성의 부재에 의한 또 하나의 명백한 해당행위를 한 셈이었다. 당시 순천경찰서 뒤뜰에는 (현재 금강호텔, 기업은행 자리) 주검이 쌓여갔고 곳곳에서 주검이 목격되었다.471) 다음으로 민간인을 상대로 한 무리한 진압작전을 지적할 수 있다.472) 순천 진압 당시 하우스만을 비롯한 백선엽 등 현지 지휘관들은 애초 여수ㆍ순천 탈환작전보다는 반군들 을 쫓아 지리산권 공비토벌작전에 주력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출범 2달 만에 위기에 봉착한 이승만 정부는 하루라도 속히 여수ㆍ순천의 탈환을 지시했다. 반란 확산 에 대한 미국의 우려도 순천ㆍ여수의 진압을 재촉했다.473) 당시 진압작전을 주도한 백선엽은 사실 23일 무렵 순천읍에는 총과 죽창으로 무장한 469) 국립경찰은 반란군이 순천에서 이른바 인민재판 을 열어 모든 경찰과 그 가족들을 즉석에서 처벌하는 상태라고 보고했다. L-5기를 통한 미국 관찰자에 의한 이후 보고도 경찰서 운동장에서 수많은 경찰과 여 성들의 시체를 볼 수 있다고 언급하여 이를 확인했다. G-3 Section, X X IV Corps, 뺷 HISTORY OF THE REBELLION OF THE 14TH REGIMENT OF THE KOREAN CONSTABULARY뺸. 470) 김득중, 뺷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뺸,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논문, 2004, 85 87쪽. 수치의 과장 이 있겠으나, 당시 현장 취재기자는 지방좌익과 반군이 300여 명의 경찰관을 사살했다고 적고 있다. 유건 호, 뺷전환기의 내막뺸, 조선일보사, 1982, 152쪽. 471) 순천시사편찬위원회, 내가 겪은 여순사건-심명섭, 뺷순천시사-정치사회편뺸, 1997, 814쪽. 472) 진압 작전 시 반군과 지방좌익의 치열한 저항을 강조하는 정부 공식기록은 무리한 진압작전을 합리화하 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473) 미 임시고문단장 로버츠는 송호성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정치적,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순천과 여수는 조속히 수복돼야 한다. 반군들로부터 이 지역들을 회복해야 도덕적이고 정치적으로 큰 선전적 가치가 있 는 승리를 얻을 것이다. 따라서 당신은 이 두 도시를 수복하는 데 작전상 최고의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 다 고 말했다. W.L. Roberts To General Song Ho Seung, Letter of Instruction ( ), 뺷W.L. Roberts 문서철뺸, p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5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치안대, 민애청원 등의 좌익단체원이나 좌익학생들만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진압군에게 큰 위협이 될 수는 없었다 고 말한 바 있다.474) 진압군은 반란군 주력이 이미 탈출한 상 황을 파악하고도, 그에 맞는 적절한 작전을 전개하지 않은 채, 시급한 점령 필요성에만 치중해 민간인을 상대로 무리한 진압작전을 진행한 셈이 되고 말았다.475) 당시 진압작전 을 목격한 참고인 이는 진압군이 순천에 들어와 길거리에 있는 민간인들을 무차별 적으로 총살하는 경우가 많았다 면서, 당시 시내 중심지에서는 특정한 집단학살장소가 있어서 거기서만 학살된 것이 아니라, 시내 곳곳의 후미지고 으슥한 장소이면 거의 학살 장소였다 고 했다. 또한 참고인은 진압군이 들어온 지 2 3일 후에도 진압군을 반 군으로 오인하여 환영하는 농민들이 많았는데, 이들을 모두 사살했다 고 덧붙였다.476) 실례로 진압군이 여수를 점령하였을 때 체포된 사람 가운데 반군은 단 10명에 불과했 고 나머지 5백 명은 시민이었다.477) 이러한 점 때문에 작전사령관 김백일 중령은 체포된 혐의자를 골라내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고충을 토로하였다. 백선엽은 나는 지금도 그렇 게 많은 빨갱이 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순가담자의 대부분은 핵심 좌익계 인물들 의 선전과 현실적인 신변의 위협 속에서 나름대로 살 길을 찾아 나섰던 것으로 보고 있 다 고 하였다.478) 마지막으로 순천지역에서 민간인의 피해가 컸던 이유로 경찰과 우익의 보복을 들 수 있다. 순천 진압 후 군경은 반군협조자에 대한 색출작업을 벌였다. 반군 치하에서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집단들인 경찰, 우익요원, 청년단원 등이 색출 및 적발심사를 담당하였 다.479) 당시 북국민학교 반군협조 혐의자 색출과정을 목격한 참고인 장은 제8관구 경찰청 부청장이 모여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맘 같아선 너희들을 다 죽여버리고 싶다 며 이를 갈았다고 말했다. 복수심에 사로잡힌 군경은 객관적이고 공정한 심사를 할 수 없었 다. 군용팬티를 입거나,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반군협력자로 몰려 사살되었다. 이처럼 주 로 외모, 고발, 개인적 감정에 의한 모략, 강요된 자백에 근거를 두었기 때문에 무고한 사 474) 백선엽, 뺷실록 지리산뺸, 고려원, 1992, 180쪽. 이러한 은 당시 진압작전에 참가했던 백을 비롯한 군 참고인과 이를 목격한 일반 참고인의 에서도 확인된다. 475) 김득중, 이승만 정부의 여순사건 대응과 민중의 피해, 뺷여순사건 자료집뺸,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쪽. 476) 참고인 이 면담보고서( ). 477) 설국환, 반란지구 답사기, 뺷신천지뺸, 1948년 11월호. 478) 백선엽, 뺷실록 지리산뺸, 고려원, 1992, 192쪽. 479) 참고인 황용운은 다음과 같이 했다. 목사, 전도사 등 이런 사람들이 민족진영 사람들을 가려내고, 가려진 그 사람들보고 반군에 가담한 자를 색출해내라 했어요. 그들이 손짓을 하면 그 해당되는 사람들 을 동천 건너 봉화산 골짜기에 데려다가 무참히 죽였어요. 참고인 황용운 면담보고서( ). 순천지역 여순사건 629

158 제3권 람이 처벌받는 수가 많았다. 480) 당시 반군협력자 색출작업과 토벌작전에 참가했던 참고 인 황은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을 빨갱이라고 몰면 잘못했다고 싹싹 빌던 경우가 많 았다 고 증언했다. 481) 순천지역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한 군경과 우익의 반군협력자 색출 은 1949년 말까지 이어졌다. 한편, 참고인 가운데 일부는 희생자들이 반란에 가담하거나 협력한 남로당원, 지방폭 도, 빨갱이 였다고 주장하며, 가해의 정당성과 불가피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12연대 부연 대장 백은 체포된 민간인들은 대부분 남로당원으로 남로당의 지시를 받았다 고 진 술했다. 482) 경찰 참고인 안은 죽은 사람들 중에는 골수 좌익 가담자가 많이 포함되 어 있었다 고 했다. 483) 그러나 이에 대해 신청인과 참고인이 주장하는 피해이유는 사뭇 달랐다. [별첨 11]은 신청인이 주장하는 피해이유와 그 구성비를 정리한 것이다. [별첨 11]에서와 같이, 신청 인들이 주장하는 피해이유는 다양하나 대체로 반군과의 관련성 여부에 집중되어 있다. 그 내용은 반군협조 혐의(141건, 56.7%), 좌익 및 입산자가족ㆍ동료 [대살( 代 殺 )](35건 14%), 무고와 모략(25건, 10%), 변복으로 유인(13건, 5.2%), 연행 및 피해이유 모름(13 건, 5.2%), 등교 및 학교근무 [사살](14건, 5.6%), 보복(5건, 2.1%), 고문 및 허위자백(3 건, 1.2%) 등이었다. 피해이유는 몇 가지 범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 가장 일반적인 이유로 반란군협조 혐의를 들 수 있다. 숙식이나 식량제공, 노무동원, 반군과의 연락이나 반군은닉 등이 해당 되었다. 특히 반군가담 혐의로 인해 살해되었다고 주장한 희생자 수가 50여 명, 약 20% 에 달하고 있다. 여기에는 순천 진압과정에서 사살된 순천시내권 희생자가 상당수 포함 되어 있다. 순천은 반군이 3일 동안 점령했던 이른바 적성지역 으로 순천시내의 거주하 던 민간인들은 잠정적인 반군 가담자 로 간주되었다. 484) 가장 많은 53명의 신청인들이 피해이유로 반군에게 숙식 및 식량제공 혐의를 들었다. 신청인들은 이에 대해 당시 반군의 이동이나 활동지역에 거주했던 주민들은 반군의 강요 를 거부할 수 없었고, 이에 반군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참고인 김 480) 이기봉, 빨치산의 진실, 다나, 1992, 148쪽;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팀, 여수 14연대 반란 녹취록 ( 방영), 김기오 증언, 217쪽. 481) 참고인 황 면담보고서( ); 순천문화원, 여순사건, 순천이야기, 2004, 22쪽. 482) 참고인 백 ( ). 483) 참고인 안 녹취록( ). 484) 참고인 백 (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5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관은 다음과 같이 했다. 시계방을 운영하던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던 편이었는데 14연대가 도움을 요청 했다. 요구를 거절하면 개죽음을 당하니 어쩔 수 없이 밥을 해주었다. 순천이 진압된 후 순 천경찰들에게 연행되어 순천 성동국민학교 옆 공터에서 사살됐다.485) 사실상 이들은 넓은 의미에서 반군활동지역 또는 군경작전지역에 거주했다는 이유만 으로 희생된 셈이다. 다음으로 좌익 및 입산자가족 또는 동료라는 이유로 대살(代殺)되었다는 이 무려 14%에 달하고 있다. 당시 대살이 횡행했다는 점은 참고인 에서도 나타난다. 상사지 서 의용경찰로 근무한 참고인 이은 서북청년단이 척살을 하는 등 잔인했으며, 그중 2명은 가족을 대살하는 등 악행을 일삼았다 고 했다.486) 실례로 상사면 도월리에서 피해를 입은 신청인 최두용은 9남매 중 본인을 비롯하여 4 남매만 살고 5남매가 부모와 함께 죽었다. 큰형이 반군에게 끌려 산으로 간 뒤 가족이 죽 음을 당했다. 신청인 최두용의 이다. 여순사건이 난 후 큰형이 산에 끌려간 뒤 경찰들이 와서 집에 불을 질러서 이 집 저 집 전전했어요. 이후 경찰들이 와 부친을 물에 처넣고 밟고 때린 다음 끌고 갔어요. 며칠 후에 광주형무소로 끌려가, 6ㆍ25가 터지자 죽었어요. 모친은 부친 면회를 갔다 온 지 얼마 지 나지 않아 경찰들에게 죽창으로 맞아 왼쪽 팔을 잘린 채, 사살됐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형은 이모네 집으로 밥을 얻어먹으러 가는 길에 지서 앞에서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죽었 고, 다른 형제들도 경찰한테 죽었어요.487) 무고 및 모략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는 답변도 10%가 나와, 비교적 높은 수치를 보였다. 사실 순천 진압 후 반군협조 혐의자 심사과정에서 진압군경은 혐의의 사실 여부보다는 주로 외모, 고발, 개인적 감정에 의한 모략, 강요된 자백에 근거를 두었기 때문에, 무고한 사람이 처벌받는 수가 많았다.488) 이러한 사실은 신청인이나 참고인의 에서도 확인 485) 486) 487) 488) 참고인 김관 통화보고서( ). 참고인 이 면담보고서( ). 신청인 최두용 통화보고서( ). 이기봉, 뺷빨치산의 진실뺸, 다나, 1992, 148쪽. 실례로 당시 현장 취재기자였던 김기오는 반군에게 밥을 해 줬다는 이유로 총살당할 위기에 놓은 한 여인을 합동조사국 국장에게 아는 사람이라고 하여 살려주었을 정도로 협조자 색출과 처벌은 자의적으로 집행되었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팀, 여수 14연 대 반란 녹취록 ( 방영), 김기오 증언, 217쪽. 순천지역 여순사건 631

160 제3권 된다. 경찰 참고인 이은 무고와 사적 감정에 따른 손가락질로 연행되어 피해 본 사 람들이 많았다 고 했다.489) 유족 가운데 5.2%는 진압군이 변복을 하여 반군으로 착각하게 만든 뒤 사살했다며, 이 것이 큰 피해이유였다고 말했다. 국군 15연대는 1949년 9월 서면에서 반군협조자를 색출 한다는 명목 아래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한 변복작전을 감행했다. 진압군을 반군이라 착 각한 주민들은 협조자로 몰려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유족 가운데 5.6%(14명)는 가족들이 등교와 학교 근무 중에 목숨을 잃었다고 답변했다. 여순사건 당시 학생들의 참여가 컸던 만큼 교육계의 피해도 잇따랐다. 다. 가해주체와 지휘ㆍ명령체계 신청인과 참고인 그리고 군경의 기록을 조사한 결과, 여순사건 직후인 1948년 10월 말 부터 1950년까지 순천지역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의 직접적 가해주체는 사실상 이후 토벌 군으로서 명성이 높아진 국군 제2여단 예하의 제2연대ㆍ제3연대와 제5여단 예하의 제4 연대ㆍ제12연대ㆍ제15연대, 순천경찰서 소속 경찰로 확인되었다. 1) 가해주체 가) 국군 제2연대 참고인 및 신청인들은 국군 제2여단 예하 제2연대가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초까 지 순천남국민학교 부근과 순천도립병원에 분주(分駐)하여, 토벌작전을 진행하는 과정에 서 불법적으로 민간인을 집단으로 사살했다고 주장했다. 여순사건이 발발하자 대전 주둔 제2연대 일부 병력이 20일 열차로 남원역에 도착, 트럭에 나눠 타고 순천으로 향했다. 순천시내 대부분을 진압군이 장악한 21일 남국민학교에 2여단 사령부가 설치되었다.490) 한편, 제2여단 소속의 하사관교육대(하교대)491)도 남원-곡성-구 례를 거쳐 순천에 도착하여 진압작전에 참가했다.492) 하교대는 제일 먼저 순천에 진입, ) 참고인 이 면담보고서( ). 490)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뺷한국전쟁사 : 해방과 건군( )뺸(제1권), 1967, 463쪽. 하우스만은 2여단 사령부에 200여 명의 병력이 배치됐다고 증언했다. 2여단 군수참모로 2연대 연대장을 역임한 함 병선은 호남지구전투사령부가 순천군청에 설치됐다고 증언했다. 하우스만 증언록, 함병선 증언록, 뺷 한국전쟁증언록뺸, 군사편찬연구소 소장. 491) 하사관교육대는 2연대와 3연대 병력 200여 명이 1개 중대로 편성되어, 순천ㆍ여수에서 진압작전에 참 가한 뒤, 1948년 11월 2일 해체했다. 참고인 서 면담보고서( ). 492) 이윤 증언록, 뺷한국전쟁증언록뺸, 군사편찬연구소 소장; 이윤, 뺷진중일기뺸, 여문각, 2001, 39 45쪽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6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년 10월 22일경부터 10월말까지 순천농림중학교에 주둔하며 토벌작전을 벌였다. 493) 2여단사령부에 근무했던 박은 여순사건 발발 후 약 2 3개월 정도 순천남국민학 교와 지리산 일대에 주둔했다 면서, 반군과 반군협조 혐의 민간인을 잡아 법절차 없이 사형에 처했다 고 했다. 494) 남국민학교에 주둔했던 2대대 소속 참고인 이도 순천 진압 당시 민간인을 잡아다 죽여서 구덩이에 파묻었다는 얘길 들었다 며 그때 죽 은 사람이 많았을 것 이라고 말했다. 495) 1대대 하사였던 정은 순천농림중학교에 주둔하면서 순천시가에 들어가 수색을 해서 잡은 것이 한 70명 되었다 며, 그들을 분대 별로 나누어 한 사람당 세 사람씩 총살을 시켰다 고 증언했다. 496) 한편, 순천농림중학교에 주둔한 2여단 예하 하사관교육대 중대장 서은 수색작전 을 전개하면서 반군협조 혐의자를 연행하여 도망자 등 일부는 사살했다 며 그중 일부는 타 부대에 인계했다 고 했다. 497) 2여단 하교대 일등병 하사였던 이윤은 순천 진압 후 반군 300여 명을 사살했다 고 말했다. 498) 이에 대해 서은 당시 순천에서 이러한 대규모 반군 사살 전과는 없었다 면서, 있었다면 분명 상당수의 비무장 민간인 피해자가 포함되어 있을 것 이라고 했다. 499) 이상을 종합하면, 순천 진압작전부터 1949년 초까지 국군 제2여단 소속 제2연대는 일부 3대대 부대원들을 포함한 주력 1대대ㆍ2대대를 중심으로 순천시내 민간인을 연행해 남국민 학교, 순천농림중학교에서 고문 및 취조한 후 건물 뒤편에서 사살한 것으로 판단된다. 나) 국군 제3연대 여순사건이 발발하자 남원까지 기차로 이동, 1948년 10월 21일 학구에 도착한 제3연대 병력 136명은 제12연대와 함께 순천 진압작전을 벌였고, 500) 1948년 10월 말까지 순천 농림중학교와 순천철도국 등에 주둔하면서, 순천시내와 벌교ㆍ낙안ㆍ해룡ㆍ고흥지역 토 벌작전을 벌였다. 501) 1948년 이후에는 3연대(연대장 함준호) 1대대(대대장 박승일)가 493) 참고인 서 ( ); 참고인 서 면담보고서( ); 참고인 서 면담보고서 ( ). 494) 참고인 박 통화보고서( ). 495) 참고인 이 통화보고서( ). 496) 정수정 증언록, 한국전쟁증언록, 군사편찬연구소 소장. 497) 참고인 서국신 ( ); 참고인 서국신 면담보고서( ); 참고인 서국신 면담보고 서( ). 498) 이윤 증언록, 한국전쟁증언록, 군사편찬연구소 소장. 499) 참고인 서 ( ); 참고인 서 면담보고서( ); 참고인 서 면담보고 서( ). 500) 하우스만 증언록, 한국전쟁증언록, 군사편찬연구소 소장. 순천지역 여순사건 633

162 제3권 하동방면에 주둔하면서, 순천지역 토벌작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502) 참고인 및 신청인들 은 이 과정에서 제3연대가 불법적으로 민간인을 집단사살했다며 가해주체로 지목했다. 1대대 2중대 3소대에 근무했던 참고인 김은 순천농림중학교에 주둔하면서 반군에 게 짐을 운반해주는 등의 반군에 협조한 혐의를 받고 있는 민간인을 색출 및 연행했다 면서, 중대장 및 간부들이 조사한 후, 선임하사가 분대원을 이끌고 구덩이를 파서 사살 한 뒤 매장했다 고 했다. 503) 같은 2중대 의무대 소속 참고인 안은 진압 후 군이 민간인의 차량과 운전수를 강제로 징발했는데, 징발에 응하지 않은 운전수를 즉결처분했 다 면서 당시에 반군 및 반군협조 민간인을 즉결총살했다 고 했다. 504) 2대대 7중대 소속 참고인 박은 순천농림중학교에 주둔하며 수색작전 중 국군을 반군으로 오인한 민간인이 골목에서 나오면, 체포하여 속옷 차림으로 데리고 다녔다 면 서 이를 본 다른 부대 지휘관(육사5기로 기억)이 불편하고 번거롭게 뭐 하러 데리고 다 니느냐며 총살하라고 하여 순천에서 여수로 가는 길 뒷산에서 모두 총살했다 고 했 다. 또한 참고인은 순천 진압 후 헌병대와 CIC가 반군협조 혐의 민간인을 색출하여 처 리 했다 며 반군협조 혐의 민간인을 색출하면 조사ㆍ재판 없이 즉결처분하는 경우가 많 았다 고 밝혔다. 505) 박과 같은 2대대 소속 최동옥은 순천 진압 후 소위 자위대원을 생포하여 약 30명을 총살했다 고 증언했다. 506) 순천철도국에 주둔한 2대대 5중대 소속 일등병 전는 순천에서 학교에 주민들을 모아놓고 반군협조 혐의자 심사 후 즉결처형했다 고 했다. 507) 전와 같은 5중대 소속 인사계 주임 특무상사 한는 지휘관이 반군 출현 정보를 입수하면, 중대장 및 소대장 인솔 하에 순천, 구례, 곡성, 광양, 남원, 운봉, 순창, 산청, 함양, 안의 등으로 반군 토벌작전을 전개했다 면서, 순천, 구례, 광양 등 토벌작전지역 부락에서 반군에 협조한 주민들을 즉결처분했다 고 밝혔다. 508) 501) 참고인 전 통화보고서( ); 참고인 박 통화보고서( ); 한경수 증언록, 한 국전쟁증언록, 군사편찬연구소 소장. 이후 3연대 주력부대는 구례로 이동하여, 산동면 원촌리 원촌국민 학교에 주둔하면서 구례지역 민간인들을 불법적으로 고문 및 취조한 뒤 사살했다. 진실화해위원회, 구 례지역 여순사건 진실규명결정서, 쪽. 502) 참고인 서 ( ); 참고인 서 면담보고서( ); 참고인 서 면담보고 서( ); 참고인 김 통화보고서( ). 503) 참고인 김 통화보고서( ). 504) 참고인 안 녹취록( ); 참고인 안 통화보고서( ). 505) 참고인 박 통화보고서( ). 506) 최 증언록, 한국전쟁증언록, 군사편찬연구소 소장. 507) 참고인 전 통화보고서( ). 508) 참고인 한 면담보고서(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6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한편, 지휘관의 성향에 따라 민간인 희생이 갈렸다. 참고인 한는 5중대장 김용이 소지했던 일본도로 많은 민간인을 즉결처분 했다 면서, 목을 그냥 내리친 뒤, 피 묻은 일본도를 바-카에 닦았다 고 말했다. 한는 순천 진압작전 후 구례 산동에서 김용을 만났을 때, 김용과 장교들이 순천지역 민간인 즉결처분에 대해서 언급했다 면서, 이때 한 가 김용에게 좌익 및 반군협조 혐의가 확인되지 않은 애매한 사람들을 죽이지 말고, 반군협조 혐의를 제대로 확인하여 처리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고 말했다. 또 참고인 한 는 김용이 남원에서 휘하 병사 5명을 일본도로 참수하려는 것을 말렸다 고 밝혔다. 509) 그리고 2대대장은 조재미였지만 실권은 5중대장 김용이 쥐고 있었다 면서, 김용은 조재 미의 통제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했다 고 말했다. 510) 이처럼 김용이 연대 내 위상 이 높았던 이유에 대해 한경수는 김용이 3연대 숙군에 앞장서 비판적인 성향의 군인을 가혹하게 처리했기 때문 이라고 설명했다. 511) 김용의 무차별적인 민간인 살상에 대한 진 술은 다른 군 참고인의 에서도 확인된다. 순천농림중학교 주둔 당시 2대대 5중대 4소 대 소속 이병으로 시내를 돌며 반군 및 반군협조자 색출작전을 벌였던 유은, 5중대 장 김용이 군복과 사복 입고 잡혀온 5 6명에 대해 좌익이라며 사살명령을 내렸는데, 다 들 머뭇거리자 본인이 직접 20연발 자동소총으로 사살했다고 말했다. 또, 순천에서 고흥 으로 이동 중 순천 낙안면지서 인근을 지나는데, 주민들이 반군으로 인식하고 환영하자, 5중대장 김용이 직접 낙안면 주민들을 잡히는 대로 길가에서 총살하고 일본도로 목을 베 어 죽였다고 했다. 512) 이상을 종합하면, 순천 진압작전 이후 1949년 초까지 국군 제5여단 소속 제3연대 1대대 와 2대대 부대원들은 순천농림중학교와 순천철도국에 주둔하면서 순천 거주 민간인을 불 법적으로 사살하거나, 연행하여 고문 및 취조한 후 북국민학교, 순천역, 낙안면 등지에서 불법적으로 사살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 국군 제4(20)연대 순천 탈환작전은 12연대 2개 대대와 3연대 1개 대대를 주력부대로 하여 진행되었다. 513) 509) 한 증언록, 한국전쟁증언록, 군사편찬연구소 소장. 김용은 1947년 4월 소위로 임관했으며, 황해 도 출신으로 중국(북경)에서 교육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용 장교자력표, 자료 조회 결과 회신 (진실위-정치석 외 85명) (육군기록정보관리단 보존활용과-8143, ). 김용은 한국전쟁에서 살 아남아, 충북에서 거주하다 10여 년 전 사망했다. 참고인 한경수 면담보고서( ). 510) 참고인 유 면담보고서( ); 참고인 유 통화보고서( ). 511) 김용은 대대장 조재미도 빨갱이 라고 할 정도로 극단적인 반공주의자였다. 한 증언록, 한국전쟁 증언록, 군사편찬연구소 소장. 512) 참고인 유 면담보고서( ); 참고인 유 통화보고서( ). 순천지역 여순사건 635

164 제3권 4연대는 2개 대대로 나뉘어, 1대대는 5여단 참모장 오덕준 중령의 지휘하에 보성을 경유 하여 10월 22일 순천에 진입했고, 다른 1개 대대는 학구를 중심으로 순천 서쪽 월등ㆍ황 전지역에서 반군 및 반군협조 혐의자 색출작업을 벌인 후 순천시내에 진입했다. 이후 20 연대로 개편된 4연대는 1949년까지 순천 및 지리산 일대에서 토벌작전을 벌였다. 514) 참 고인 및 신청인들은 이 과정에서 4(20)연대가 불법적으로 민간인을 연행하여 취조 및 고 문한 뒤 사살했다고 주장했다. 보성에서 별량면을 통해 순천에 진입한 4연대 1대대 4중대 소속 참고인 조은 여순사건 당시 순천지역에서 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가 많았다고 인정했다. 본인이 속한 광주 4(20)연 대나 마산 15연대가 순천, 보성, 담양, 장성 등 진압 및 토벌작전 과정에서 반군에게 식량 등을 제공한 마을을 포위해,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포함한 마을주민 전부를 모이게 하여 사살한 일이 있었다 고 했다. 이러한 사살은 소대장이나 중대장 등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졌다 고 말했다. 515) 1대대 2중대와 20연대 2대대 8중대 소속 참고인 전은 부대원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는 경우이거나, 중대장이나 소대장이 지시하면 어쩔 수 없이 즉결처분을 할 수밖에 없었다 며, 작전 중 전우가 사망하면 분노가 생겨 보복으로 즉결처분했다 고 했다. 516) 1대대 2중대 2소대 상등병 김은 순천 진압 후 반군협력 자 색출시 여성 반군을 잡아서 즉결처분한 것은 많지만, 어떻게 다 이야기할 수가 있겠냐 고 말했다. 517) 순천남국민학교에 주둔했던 2대대 6중대 2소대 소속 참고인 임은 국군과 반군 모두 민간인을 많이 희생시켰다며, 주로 지역 주민들이 손가락질을 하는 등 반군협조 관계를 제보하여 희생당했다 고 증언했다. 마을이장 등이 국군에게 반군협조 관계를 제보하면 정보과에서 조사하기도 했으며, 이 과정에서 민간인들이 억울하게 군경에게 끌려가 조사나 재판 없이 즉결처형당하는 등 죄 없는 민간인이 학살당한 경우가 있었다 고 했다. 518) 2대대와 5여단 513) 제4연대는 14연대 반군의 근간부대로서 병력 일부가 반란군에 합류하는 등 사상적으로 불순하다고 판단 되어, 배제된 것이었다.(안종철, 전남지방의 정치상황과 여순사건, 여순사건 논문집,여수지역사회연 구소, 2006, 81~82쪽,) 4연대 2대대 6중대 2소대 소속 참고인 임은 취침 중 2대대 본부 근무자가 인 민 드림 이란 책을 읽어보라 하고 다시 회수해갈 정도로 4연대 내부에 좌익이 많았다고 말했다. 2대대 부관, 5중대장, 8중대장이 좌익이었으며, 2대대 정보계통에도 좌익이 많았다면서, 그중 2대대 5중대와 8 중대가 반군에 합류했다고 말했다. 참고인 임 ( ) 514) 1948년 11월 20일 제4연대는 해체되어 제20연대로 개칭되었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 : 해방과 건군( ) (제1권), 1967, 290쪽. 515) 참고인 조 ( ). 516) 참고인 전 ( ). 517) 김 증언록, 한국전쟁증언록, 군사편찬연구소 소장. 518) 참고인 임 (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6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병참수송부 소속 참고인 정은 순천 진압 후 1개 대대 약 300명이 순천에서 여수로 이동 중, 5 6명의 주민들이 적기를 흔들며 환영하자, 지휘관이 모두 사살하고 지나갔다 고 증언했다. 주로 여수와 순천을 왕래했으며, 순천, 구례, 곡성, 남원, 광양, 보성, 고흥, 하동, 산청지역 토벌을 위해 병력을 수송했다며, 수색 및 작전지역에서 군이 조사와 재판 없이 민간인을 즉결총살한 경우가 많았다 고 말했다. 작전 후 민간인을 조사하여 처형한 경우도 있었고, 한 부락에서 수십 명씩 군과 경찰에 의해 즉결총살되었으며, 억울한 죽음이 많았다 고 했다.519) 4연대본부 정보과 소속의 일등중사 참고인 전은 4(20)연대가 순천 풍덕동 옛 펄 프공장에 주둔하면서 반군협조 혐의자 색출작업을 벌였고, 당시 억울하게 즉결처분당한 사람이 많았다 고 했다.520) 1대대 3중대 3소대 소속 참고인 김도 4연대를 포함 한 군경이 반군협력 혐의 민간인들을 조사나 재판 없이 즉결처형했다 고 말했다.521) 5여단 통신중대 소속으로 4(20)연대 3대대에 파견된 참고인 최는 순천시 풍덕동 옛 펄프공장에 연대본부와 함께 주둔하면서, 경찰이 반군협조자를 연행하면 군경이 취조 했고, 혐의가 인정되면 순천 시외 야산에서 구덩이를 파고 총살한 후 매장했다 고 말했 다. 1회 10여 명 정도를 즉결총살했으며, 참고인은 순천에서 민간인 즉결처분을 3회 이 상 목격했다 고 증언했다. 중대장 급에서 즉결처분을 지시, 총살을 명령했으며, 당시 재 판은 없었다 고 했다.522) 같은 대대인 3대대 10중대 분대장 하사 김은 토벌시 대 개 수색대는 전향할 가치가 없는 포로를 굉장히 많이 죽였고, 반군협조 혐의 민간인, 소 위 요시찰인물들을 여자고 남자고 할 것 없이 무자비하게 죽였다 고 말했다. 또한 산중 에서 총성을 내면 수색대 위치가 발견되니까, 장교들이 일본도로 목을 쳐서 죽였고, 악질 적인 동네는 불을 질러버리는 등 엉터리 같은 전투를 했다 고 증언했다.523) 1대대 3중대 3소대 소속 참고인 김의 에 따르면, 당시 중대마다 2명 정도씩 정 보과나 특무대 요원을 배치하여 정보를 수집했다. 정보요원들이 정보를 수집하여 중대장 ㆍ대대장에게 보고하면 그 정보에 따라 토벌작전을 진행했다.524) 519) 520) 521) 522) 523) 524) 참고인 정 ( ). 참고인 전 ( ). 참고인 김 ( ). 참고인 최 면담보고서( ); 참고인 최 통화보고서( ). 김 증언록, 뺷한국전쟁증언록뺸, 군사편찬연구소 소장. 4연대는 순천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민간인을 불법적으로 살해했다. 불갑산 토벌작전 중 함평 해 보면 산골부락에서 정보요원들의 보고에 따라 40여 호 정도 되는 마을사람들을 논에 집합시켰다. 논에 말뚝을 박아 반군과 연락을 하고 식량을 제공했다는 동네처녀를 잡아 말뚝에 묶었다. 일본도로 그 처녀 의 목을 베어 죽이고, 전시효과를 위해 그 광경을 주민들에게 보게 했다. 또 화순에서는 반군 심부름을 순천지역 여순사건 637

166 제3권 이상의 참고인 을 종합하면, 제5여단 예하 국군 제4(20)연대는 순천 진압작전과 1949년 토벌작전 과정에서 순천남국민학교와 풍덕동 옛 펄프공장, 황전ㆍ월등면 등지에 주둔하면서 별량면ㆍ순천시내ㆍ황전면ㆍ월등면 등지 마을을 수색하고 소개했다. 이 과정 에서 4연대는 민간인들을 주둔지로 연행하여 고문 및 취조한 뒤, 사살한 사실이 확인된다. 라) 국군 제12연대 순천 진압 후 국군 12연대 장병 전원은 순천 탈환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공로로 1계급 특진이 주어졌다. 525) 12연대는 1948년 10월 하순과 1949년 상반기 순천시내와 구례읍에 주둔하며 순천시내, 황전 월등지역에서 반군토벌 및 반군협력자 색출작전을 벌였다. 12연대 부연대장 백은 순천과 여수를 탈환해야 서울시민이 안심하는 정치적 효과를 노려, 본인 의 강한 부대가 진압작전에 투입되었다며, 순천 탈환작전에 대해 자평한 바 있다. 526) 실제로 12연대는 순천ㆍ여수 진압작전의 선공( 先 攻 )부대였다. 각종 보급과 군수물자 지원이 먼저 이루어졌고, 순천 진압작전에 동원된 기갑연대는 12연대에 배치되어 작전을 수행했다. 527) 특히 1대대 대대장 허은 여순사건에서 800명을 포로로 잡았다는 것은 12연대가 전부 했을 것이고, 여순반란 주력부대의 섬멸은 12연대가 전부 다 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528) 신청인 및 참고인들은 국군 제12연대가 위와 같은 선공작전과 토벌작전을 벌이는 과정 에서 민간인을 연행하여 고문 및 취조한 뒤 불법적으로 사살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부연 대장 백이 지휘한 12연대를 백 부대 로 지칭하며 가해주체로 지목하였다. 3대대 12중대 3소대 참고인 이는 순천 진압시 작전 성과로 대대에 희생자 목을 베어 보고했다 고 했다. 순천 북쪽 산골마을 민간인 3명을 잡았는데 소대장이 소대 에서 가장 온순한 사람으로 참고인을 지목해 즉결총살을 명령했다 고 증언했다. 또한 가 장 용감한 군인 한 명에게 술을 먹여 민간인을 즉결 한 다음 그 목을 카빈에 착검한 대검 으로 잘랐으며, 잘린 목을 어깨에 메고 시내에 들어와 작전 전과로 보고했다 고 했 다. 그 희생자는 반군이 아니었고 반군에 협조했다는 민간인이었다 고 증언했다. 529) 2대대 8중대 소속 참고인 오는 3일 동안 순천에서 공포탄을 쏘며 집집마다 수색 을 했고, 촌락에서 도망치는 사람들을 즉결사살 했다 고 했다. 530) 오와 같은 중 해주었다는 혐의로 억울한 민간인을 살해한 일도 있었다. 참고인 김 ( ). 525) 장창국, 육사졸업생, 중앙일보사, 1984, 324쪽. 526) 백 증언록, 한국전쟁증언록, 군사편찬연구소 소장. 527) 백 증언록, 한국전쟁증언록, 군사편찬연구소 소장. 528) 허 증언록, 한국전쟁증언록, 군사편찬연구소 소장. 529) 참고인 김 ( ); 참고인 김 통화보고서(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6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대인 8중대 4소대 소속 참고인 한은 반군과 격전을 할 때 민간인 희생이 많았다 고 증언했다. 한창규의 에 따르면, 순천 작전 시 시가전을 벌여 20여 명의 반군가담 혐 의자를 잡았고, 북한 출신의 20대 중반 6중대장 이동호가 2대대 병력이 보는 앞에서 일본 도로 그중 두목격인 1명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531) 2대대 6중대 소속 참고인 고는 순천여학교에 주둔해 며칠 지났을 때, 여학생 1명을 잡아와서 차로 양쪽 다리를 묶어서 찢어 죽였으나, 무슨 이유였는지는 듣지 못했다 고 진 술했다. 532) 한편, 순천 진압 후 국군 12연대가 순천 관내에서 민간인을 불법적으로 사살했다는 사 실은 경찰 참고인 에서도 확인된다. 월등면 의용단 동원부장으로 활동한 참고인 박 는 1948년 11월경 12연대가 월등면에 와 반군협조 혐의로 지서에 감금되어 있던 마 을사람들을 지서 앞에서 즉결처분하는 것을 목격했다 고 증언했다. 참고인 및 의용단이 시체를 치웠다고 했다. 533) 황전지서 한청단원으로 활동했던 참고인 서는 참고인 의 조카 서홍석이 14연대에 입대해 반란사건 뒤 산에서 피신하던 중 자수하면 살려준다 는 말에 1948년 말 구례에 본부를 두고 황전면 덕림리로 출동한 12연대에게 자수를 했으 나, 구례로 끌려가 사살됐다고 했다. 534) 이상을 종합하면, 국군 제12연대(2대대ㆍ3대대)는 순천 탈환작전의 선공부대로서 1948년 10월 하순과 1949년 1월 순천농림중학교, 풍덕동 펄프공장, 구례읍 등에 주둔하 면서, 순천시내ㆍ황전면ㆍ월등면 등지에서 마을을 수색하고 소개했다. 이 과정에서 제12 연대는 북국민학교와 주둔지로 민간인을 연행하여 취조한 후 인근 죽도봉, 순천농림중학 교, 양지맷골 등지에서 사살하였다. 또한 이들은 마을을 수색하고 소개한 후, 마을 인근 에서 민간인을 사살하기도 했다. 특히 12연대 지휘관들은 부대에서 소심한 부하에게 담 력을 길러준다는 명분으로 즉결처분을 지시하거나, 대담한 부하에게 목을 베라고 한 뒤 총에 걸고 다니게 하는 등 가해행위의 양상이 극히 잔인하고 비인도적이었다. 마) 국군 제15연대 참고인 및 신청인들은 국군 제15연대가 1948년 11 12월경과 1949년 상반기 순천 530) 참고인 오 통화보고서( ). 531) 참고인 한 통화보고서( ). 532) 참고인 고 통화보고서( ). 533) 참고인 박 ( ). 534) 참고인 서 녹취록( ). 순천지역 여순사건 639

168 제3권 남국민학교, 순천농림중학교, 풍덕동 옛 펄프공장, 주암호 부근 등지에 주둔하면서 순천 전 지역을 대상으로 반군협력자 색출작업과 빨치산토벌작전을 벌였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부락을 소각하고, 민간인들을 집단적으로 사살했다며 15연대를 가해주체로 지 목했다. 특히 15연대 참고인의 중에는 15연대가 혐의자의 친인척들에게 혐의자를 척살하 도록 교사한 대목이 있어 15연대 가해행위의 수준을 가늠케 한다. 1949년 4월 순천농림중 학교에 주둔했던 1대대 1중대 1소대 소속 참고인 전의 에 따르면, 15연대 1대 대가 1949년 봄 순천 황전면 괴목의 산골부락(20 30여 호, 집성촌)에서 반군협조 혐의 자를 색출했다. 반군협조 혐의자가 혐의를 부인하자, 혐의자와 두 가족 모두(5 6명 정 도)를 마을 앞에 모아놓았다. 그러고는 그들과 친척 관계인 부락주민들로 하여금 대검이 착검된 M-1으로 두 가족 모두를 직접 척살하게 했다. 당시 대대장(이소동)이 연대장(유 춘근)에게 무전으로 보고한 후 중대장(육사7기 또는 8기)에게 척살을 지시했다. 한번은 순천남중학교 한 교실 천장에서 총기가 발견되자, 담임교사(광양 출신 여교사)를 광양국 민학교로 데려가 주민들을 모아놓고,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 즉결총살했다. 당시 즉 결총살당한 여교사는 죽기 직전 울 밑에 선 봉선화 라는 노래를 불렀다. 535) 같은 1중대 소속 참고인 강도 1대대 1중대가 순천 외서면 산골 가용재 부락에서 반군 두목을 잡아, 외서국민학교에 다른 부락주민들과 함께 모아놓고 총살했다 며 외서 면 반군협조 혐의자는 면소재지로 끌려가 처리되었다 고 했다. 536) 강과 같은 1 중대 소속인 참고인 정도 부락을 수색하여 중대장ㆍ소대장 지시에 따라 반군협조 혐의자를 즉결총살했다 며 즉결처분의 근거는 계엄령이었고, 당시 계엄령으로 인해 무 법 상황에서 작전했다 고 했다. 537) 1대대 2중대였던 참고인 진도 반군협조 민 간인을 사살했다 며 민간인에 대한 즉결처분을 인정했다. 538) 1대대 4중대 참고인 김은 지역 주민들의 경우, 반군이 강제로 협조를 강요하여 억 울한 경우가 많았다 며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을 것 이라고 했다. 539) 김과 같은 중대의 참고인 이는 순천지역 토벌작전 시 부락을 수색하여 반군 협조 혐의자를 수십 명씩 현지에서 즉결총살했다 며 당시 계엄령 하이므로 민간인 즉결 535) 참고인 전 통화보고서( ). 536) 참고인 강 통화보고서( ). 537) 참고인 정 통화보고서( ). 538) 참고인 진 통화보고서( ). 539) 참고인 김 통화보고서(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6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처분이 빈번히 발생했다 고 했다. 540) 주암호 인근에 주둔했던 2대대 6중대 참고인 이는 순천 주암면 마을주민이 반군 이 부락에 들어와 식사하고 있다는 정보를 제보했다. 우리 부대는 즉시 출동하여 부락을 포위한 뒤, 반군을 사살했다. 그러고는 반군협력 혐의자로 지목된 주민들을 지서로 연행 했다. 다른 곳에서도 색출 과정은 동일했다. 연행된 반군협력 혐의자들은 보통 5 6명 정 도였다. 지서로 연행된 후에는 군이 현지 사정을 잘 모르므로 경찰이 처리하거나, 연대 정보과로 넘긴 경우도 있었다 고 했다. 541) 1949년 3월 주암면 요곡리로 처음 작전 을 나간 2대대 6중대 1소대 소속 참고인 정은 곡성 석곡면에서 민간인 반군협조 혐 의자 10여 명을 연행하여 구덩이를 파고, 총기에 대검을 착검하여 척살한 후 매장하는 것을 목격했다 며 광양 지계부락에서는 부락주민들을 살해하고 부락을 소개한 후 완전 히 소각했다 고 했다. 또한 즉결처분 지시는 소대장이나 중대장 등 지휘관으로부터 내려왔고, 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많았다 고 덧붙였다. 542) 한편, 2대대 12중대 소속 참고인 김는 반군협조자 사살 뒤에 손가락, 귀, 목을 잘 라서 허위로 전과를 보고했다 며 부락을 수색하여 반군협조 혐의자를 색출하면 바로 즉 결총살했다 고 했다. 543) 보성-벌교-율어-외서 등지에서 토벌작전을 벌인 3대대 11중대 소속 참고인 윤은 순천 등 작전지역에서 중대장 및 소대장 명령으로 반군협력 혐의자를 즉결총살했다 면 서, 작전지역 마을에서 반군협조 혐의자들을 인근 야산으로 데려가 구덩이를 파게 해 총 살한 후 매장했다 고 말했다. 그리고 이는 반군에게 패배한 군인들의 보복심리가 강하게 작용한 결과였다 면서, 당시 반군협조 혐의만으로 즉결총살된 억울한 민간인들이 많았 다 고 했다. 참고인은 반군에게 협조했다는 혐의로 경찰에게 구타, 폭행, 총살당하 는 경우도 많았다 고 덧붙였다. 544) 순천 진압 후 국군 15연대가 순천 관내에서 민간인을 불법적으로 사살했다는 증언은 다른 연대 소속의 군 참고인과 경찰 참고인 에서도 확인된다. 순천철도국 철도경찰 로 근무했던 참고인 신은 순천 진압 후 이틀 정도 지나 마산 15연대의 경상도 사투 리를 쓰던 군인들이 들어왔고, 이들이 북국민학교에 많은 민간인들을 잡아다 앉혀놓고 540) 참고인 이 통화보고서( ). 541) 참고인 이 ( ). 542) 참고인 정 통화보고서( ). 543) 참고인 김 통화보고서( ). 544) 참고인 윤 ( ). 순천지역 여순사건 641

170 제3권 말 몇 마디하고 그냥 쏴 죽였다 고 했다. 545) 4(20)연대 본부 정보과 소속 참고인 전 은 여순사건 당시 순천에 주둔할 때, 15연대가 무고한 양민을 살해했다는 제보를 듣 고, 15연대 헌병 하사관에게 찾아가, 군인이 민간인에게 잘못하면 국민에게 불신당하고 파면당한다고 경고한 적이 있다 고 했다. 546) 황전지서 한청단원 출신 참고인 서는 12연대 철수 후 1949년 봄 경상도 사투리 를 쓰던 마산 15연대 1개 중대 약 100명의 병력이 황전면 회룡마을에 두 달 간 주둔했 다 고 말했다. 또, 1949년 초봄 15연대 군인들이 덕림리 화평마을 서정팔과 신기마을 정병찬을 좌익들과 내통했다며 회룡리 신기마을 옆 공동산 공동묘지에서 사살했다 고 했다. 547) 4연대 1대대 4중대 소속 참고인 조은 마산 15연대가 4연대와 함께 순천, 보성, 담 양, 장성 등 진압 및 토벌작전지역에서 반군에게 식량 등을 제공한 마을을 포위한 뒤, 부 녀자와 아이들까지 포함한 마을주민 전부를 모이게 하여, 많은 주민들을 집단으로 사살 한 일이 있었다 고 했다. 548) 연대 정보과 소속 정보조사관(3급문관) 정은 생포 공비는 8할 이상이 강제 입산 또는 혈연관계로 동조한 자들이었다 면서, 160여 명의 주민을 현지에서 체포해 신문했 으나 은거지를 말해주지 않아, 주민의 동조 경향과 연대 수용 제한을 고려해 대부분 현지 에서 즉결처리 했다 고 말했다. 549) 이상을 종합하면, 국군 15연대는 순천 탈환 이후부터 1949년에 걸쳐 순천남국민학교, 순천농림중학교, 풍덕동 옛 펄프공장, 주암면ㆍ황전면 등지에 주둔하면서 순천 전 지역 을 대상으로 마을을 수색하고 주민을 소개했다. 그 과정에서 민간인들을 연행한 뒤, 부락 을 소각했다. 또한 연행된 민간인들을 불법적으로 집단사살했다. 특히 15연대는 친인척 들에게 반군협조 혐의가 있는 민간인들을 척살하도록 교사하거나, 민간인을 살상하여 귀, 목, 손가락 등을 잘라 허위로 전과를 보고하는 등 가해행위의 양상이 매우 잔악했다. 545) 참고인 신 녹취록( ). 546) 참고인 전 ( ). 547) 참고인 서 녹취록( ). 548) 참고인 조 ( ). 549) 정은 당시 경찰이나 토벌부대로는 치안유지에도 급급한 형편이고, 사상적으로 국민이 양분된 실정 은 민족적 대비극이었다고 증언했다. 정 증언록, 한국전쟁증언록, 군사편찬연구소 소장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7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바) 순천경찰서 경찰550) 신청인들은 순천경찰서 소속 경찰도 민간인을 연행하여 구금ㆍ고문ㆍ취조한 후 불법 적으로 사살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순천경찰서 경찰 및 한청단원ㆍ의용단원 ㆍ향토방위대 출신 참고인 에서도 확인된다. 실례로 순천 탈환 후인 1948년 10월 25일, 순천경찰은 12명 정도의 사람들을 순천농림중학교(현 순천대) 교정으로 끌고 가 한 줄로 세워놓고 총살했다.551) 한편, 순천지방법원에 본부를 두고 있던 작전사령부가 빨치산토벌을 위해 11월 1일 구 례로 이동하자, 수도경찰청 소속의 특경대가 순천지역의 치안을 담당했다. 특경대는 순 천 외곽지역인 별량ㆍ해룡면 이외에도 광양 도사면과 여수 율촌 등지에서도 반군 및 반 군협력자 색출을 실시552)했고, 주암에는 전북경찰청에서 파견된 응원대553)가 주암지역 의 반군 및 협력자 색출을 진행했다. 사건 당시 순천경찰서 외무반장이었던 박은 헌병과 경찰이 북국민학교에서 색출 된 부역혐의자들을 인근 이수중학교나 순천농림중학교로 끌고 가 살해했다 고 말했다.554) 순천경찰서 순경으로 근무했던 박은 반란군협조자와 지방좌익들을 체포하면 순 천경찰서 사찰계 형사들이 취조ㆍ고문했다 면서 고문의 방법은 고춧가루를 물에 타 코 에 붓거나 전기고문을 가했다 고 했다. 박의 증언에 따르면 취조 후 사찰계 형 사들이 즉결처분 결정을 내렸고, 순천경찰서 서장의 결재가 나면 즉결처분했다.555) 본서 사찰계의 취조 및 고문과 서장 결재로 집행된 즉결처분에 관한 증언은 다른 경찰 참고인의 에서도 확인된다. 고문 및 취조 후의 처리에 대해서 순천경찰서 사찰대원으 로 활동한 참고인 박는 남로당 세포 등 지방좌익들은 형무소로 보내거나, 사찰과장이 총살 결정을 하면 서장에게 보고해 결재를 받고 즉결처분했다 며, 지서 단위에서는 사찰 550) 순천진압 후 순천경찰서에는 헌병대가 주둔했다. 함병선 증언록, 뺷한국전쟁증언록뺸, 군사편찬연구소 소장. 551) 이기봉, 뺷빨치산의 진실뺸, 다나, 1992, 149쪽. 이날 광주지검 순천지청 박창길(朴昌吉) 검사도 총살당했다. 반군과 내통했다는 죄목이었다. 그는 경찰관의 독직사건 수사를 원칙대로 처리해, 경찰과 갈등을 빚어오 던 차였다. 순천 대한청년단 단장 황우수는 당시 경찰이 청년단에게 와 박창길 저놈을 어떻게 해버리자 는 소리를 늘 했고, 좌익이 아닌데 경찰한테 미움을 사서 죽음을 당했다고 말했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팀, 여수 14연대 반란 녹취록 ( 방영), 황우수 증언, 141쪽. 552) 세계일보, ; 평화일보, 관련자료 및 참고인의 파악이 어려워, 수도경찰청 소속 특 경대와 전북경찰청 파견 응원부대의 실체는 규명되지 못했다. 553) 뺷제헌국회 속기록뺸제1회 89호( ). 554) 선휘성 채록, 박 구술, 뺷지역민이 체험한 여순사건뺸녹취록1, 국사편찬위원회, 2006, 11쪽. 555) 참고인 박 녹취록( ); 참고인 최 면담보고서( ). 순천지역 여순사건 643

172 제3권 계 담당 직원이 를 받아 순천경찰서로 넘기면, 경찰서에서 재조사하여 구금한 뒤, 총 살하거나 형무소로 넘기는 과정을 거쳤다 고 말했다. 사살 집행에 대해서는 사찰계 형사 가 따로 마련된 사형장소에서 집행했으며, 그곳은 경찰이라도 갈 수 있는 사람들이 제한되 었다 고 했다. 556) 주암면 향토방위대 소속 참고인 정는 위와 같은 (고문 및 취조 형무소 이송 또는 즉결처분 결재 즉결처분) 과정을 거쳐 집행된 즉결처분을 종종 목 격했으며, 때로는 직접 집행했다 고 했다. 처형은 주로 조계산 부근에서 이루어졌으 며, 서면지서 주임 안, 광주경찰국 경감 구서칠 등도 처형명령을 내렸다 고 말했다. 557) 주암지서 사찰대 소속 참고인 조도 지역의 반군협력 혐의 민간인들을 사찰계 형사들 이 취조 후 사실상 사찰계 형사들이 유ㆍ무죄를 결정했다 고 증언했다. 이에 따라 지서 주임이 사살 결정을 하면 상부에 보고하여 결재를 받은 후 집행했다 고 했다. 558) 한편, 서면지서 주임을 지내면서 서면지역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에 깊숙이 관여한 참고 인 안은 본인이 가해자로 지목된 사건에 대해 전혀 사실무근 이라며 당시에 민간 인을 즉결처분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고 하면서도, 질문이 이어지자 당시 억울하 게 죽은 사람들이 있다면 가슴 아픈 일 이라며 간접적으로 본인의 책임을 인정했다. 559) 월등면 의용단 동원부장으로 토벌작전에 참가했던 박는 지방 좌익 혐의자를 검거 하면 죽일 사람은 죽이고, 취조해서 순천서로 인계했다 고 했다. 취조방법에는 구타, 폭행, 전기고문이 동원되었다. 지사골재 560) 에서 빈번하게 행해진 처형은 지서주임 조금 동의 지시로 안수천, 백석기 경사가 지휘했다 고 말했다. 561) 대한청년단 단원으로 해룡지서에 근무했던 장도 반란군협조 혐의자를 검거하여 지서에 인계하면 지서 경찰들이 취조했다 면서, 지서 경찰들이 혐의자를 구타와 폭행 및 물 고문했다 고 했다. 562) 조선민족청년단원과 순천경찰서 작전계장을 지낸 참고인 최은 1948년 10월 23일 북국민학교에서 벌어진 반군협조자 색출작업을 경찰이 벌였다 고 말했다. 손가락 총으 로 지목하면 그 사람 중 몇은 즉결처분하고 나머지는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며, 즉결처분 은 정보과에서 담당했다 고 했다. 563) 556) 참고인 박 녹취록( ). 557) 참고인 정 ( ). 558) 참고인 조 녹취록( ). 559) 참고인 안 녹취록( ). 560) 지사골재는 월등지서에서 대략 직선거리로 7.5Km에 위치해 있다. 561) 참고인 박 ( ). 562) 참고인 장 면담보고서(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7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월등면 의용단 동원부장으로 활동한 참고인 박는 월등지서 지시로 지방좌익 반군 토벌작전에 동원되었다 며, 반군협조자들을 잡으면 지서에서 죽일 사람은 죽이고, 취조 해서 넘길 사람은 순천경찰서로 넘겼다 고 했다. 564) 송광지서 의경 출신 참고인 김 은 즉결 처형은 지서 주임과 지서 차석 등 책임자들이 결정했으며, 산에 갔다가 잡 혀서 순천경찰서로 간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고 했다. 지서에서 순천경찰서로 넘기면 순천경찰서에서 총살을 많이 했다 고 증언했다. 참고인은 또, 죽일 사람들은 밤 에 몰래 데려가 총살을 한 뒤, 지서 주임이 상부에 집행을 보고 했으며, 송광지서에서는 송광 좌익을 많이 잡아 성과가 좋았다 고 했다. 565) 승주읍 한청단원으로 활동했던 참고인 한는 경찰과 함께 나간 관내 토벌작전에서 지방폭도들과 반란군협조자들을 검거하여 쌍암지서로 연행하면, 지서 경찰들이 취조했다 고 했다. 566) 순천경찰이 민간인을 연행하여 고문 및 취조한 뒤 불법적으로 사살한 사실 은 진압군으로 참가한 군 참고인의 에서도 확인된다. 4연대 1대대 4중대 소속 참고인 조은 진압 후 경찰이 반군협력 혐의자를 색출하여 왕지동 산봉우리(현재 산 밑에 교회 가 있음)에서 몇 십 명을 사살한 후 매장했다 면서, 여순사건 당시 경찰이 민간인들을 상사 면 우산보(현재 우산보산장 인근 골짜기)에서 즉결처형하여 매장했다고 경찰 출신 허 등의 지인을 통해 알게 되었다 고 했다. 상사면 우산보에서 경찰이 저녁 무렵 사살하면 다음날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하는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 면서, 여순사건 당시 경찰은 주민 들을 잡아 구타는 물론이고, 전기고문이나 고춧가루 물을 코에 붓는 고문을 하는 등 심한 피해를 주었다 고 허이 말했다고 조은 전했다. 567) 상사지서 의용경찰로 근무한 참고 인 이은 반군협력 혐의로 연행된 사람들이 사살당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면서, 주로 집단사살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3 4명 사살했다 고 했다. 한번은 지서 유치장에 감금 된 사람들을 나가라고 내보낸 후, 이들이 인근 냇가 막다른 곳에 이르렀을 때, 지서 주임의 사격명령으로 사살한 적이 있다 고 말했다. 그는 특히 서북청년단이 척살을 하는 등 잔인했 다 며 그중 2명은 가족을 대살하는 등 악행을 일삼았다 고 밝혔다. 568) 군의 경우처럼 경찰 지휘관의 성향이나 재량에 의해 민간인에 대한 즉결처분이 남용되 563) 참고인 최 면담보고서( ). 564) 참고인 박 ( ). 565) 참고인 김 녹취록( ). 566) 참고인 한 ( ). 567) 참고인 조은 일제 때 경찰들이 해방이 되고 나서도 활보하여 지역민들이나 군인들 모두 경찰에 대한 감정이 나빴다고 했다. 참고인 조 ( ). 568) 참고인 이 면담보고서( ). 순천지역 여순사건 645

174 제3권 기도 했다. 서면 학구출장소 의경 출신 참고인 서는 안 서면지서장이 치안유지 상 사람들을 많이 잡아 죽였다 고 증언했다. 지서 주임 안의 지휘를 받은 한청단원 배도 안 지서장이 서면 사람들을 지서로 잡아들여 많이 죽였다 면서, 자기 비 위에 맞지 않고 눈에 거슬리면 공산당으로 몰아 죽였다 고 했다. 배은 실례로 선평리 이장 허만관도 안이 부역으로 몰아 죽였다 고 밝혔다. 569) 이에 대해 참고인 안은 그런 사실이 없다 며 당시 자신에게는 민간인을 즉결처 분할 권한이 없었다 고 본인의 책임과 관련된 부분에 대해 전면 부인했다. 570) 참고인 서는 이동 요충지였던 송치재에서 전기통신망 파괴가 잦자, 서면지서 학구출 장소 소장 구이 젊은 사람들을 많이 잡아서 고문했다고 했다. 서는 구이 장척마을 주민 윤두한을 반군에 밥을 해줬다는 혐의로 학구마을에서 장척마을로 가는 중간 지점에서 즉결처분했다 면서, 즉결처분권의 근거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즉결처분권이 당시 순사들에게 있던 것은 사실이었고, 그래서 윤두한을 그렇게 죽일 수 있었다 고 말했다. 571) 한편, 별량지서 주임, 서면지서 학구출장소 소장, 황전지서 용림출장소 소장을 지내면서 부임지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에 깊이 관여한 참고인 구은, 본인이 가해자로 지목된 사 건들에 대해, 치안확보를 위해 불가피했던 일 이라면서도 군경이 혐의가 있는 민간인을 기소하지 않고 즉결처분한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였다 고 했다. 또 본인은 즉결처분 을 자제하려고 했는데 쉽지 않았다 면서, 자신의 즉결처분행위 대부분을 시인했다. 572) 이상을 종합하면, 순천경찰은 순천 진압 이후 1949년 하반기까지 관내에서 반군토벌 및 반군협력자 색출작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민간인들을 본서나 읍면별 지서로 연행하여 고문 및 취조한 뒤, 해당 관내에서 불법적으로 사살한 사실이 확인된다. 2) 가해주체의 지휘ㆍ명령체계 가) 군의 지휘ㆍ명령체계 여순사건 진압군의 지휘ㆍ명령체계는 크게 3차례 개편되었다. 1차로 육군 총사령부는 여수 제14연대 반란 직후인 1948년 10월 21일 반군토벌전투사령부(사령관 송호성 준장)를 설치하고, 휘하에 2여단(여단장 원용덕 대령)과 5여단(여단장 김백일 중령)을 배속시켜 본격 적인 반군진압작전에 착수했다. 제2여단에는 대전 제2연대 1개 대대, 마산 제15연대(최남근 569) 참고인 배 녹취록( ). 570) 참고인 안 녹취록( ). 571) 참고인 서 ( ). 572) 참고인 구 녹취록(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7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중령) 1개 대대, 대구 제6연대(연대장 김종갑 중령) 1개 대대, 군산 제12연대(부연대장 백 소령) 2개 대대가, 5여단에는 광주 제4연대(연대장 이성가 중령) 3개 대대, 전주 제3연대 (부연대장 송 소령) 2개 대대가 배속되어 여순ㆍ순천 탈환작전을 전개했다. 573) 또한 반군토벌전투사령부에서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정일권 대령, 정보국장 백선엽 중령, 정보과장 김점곤 소령 등이 참모로서 사령관을 보좌하면서 진압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574) 이들은 국방부장관 이범석과 직접 협의하며 반군진압작전을 실질 적으로 지휘한 것으로 판단된다. 반군토벌사령부의 지휘ㆍ명령체계는 <표 32>와 같다. <표 32> 반군토벌전투사령부의 지휘ㆍ명령체계( ) 575) 반군토벌전투사령부 (사령관 : 육군 총사령관 송호성 준장) 제2여단 사령관 : 원용덕 대령 제5여단 사령관 : 김백일 중령 비행대 김정렬 대위 수색대 강필원 대위 2연대 6연대 12연대 15연대 3연대 4연대 2차 개편은 1948년 10월 27일 여수를 탈환하고 이루어졌다. 반군토벌전투사령부는 호 남방면전투사령부(사령관 원용덕 대령)로 개칭되어 본격적인 토벌을 개시했다. 10월 30 일 육군 총사령부는 호남방면전투사령부를 남지구전투사령부(김백일 중령)와 북지구전투 사령부(원용덕 대령)로 분할하여 각각 순천과 남원에 사령부를 두었다. 576) 호남방면전투 573) 사사키 하루다카, 한국전비사 - 건군과 시련 (상권), 병학사, 1977, 332쪽. 574) 사사키 하루다카, 한국전비사 - 건군과 시련 (상권), 병학사, 1977, 329~336쪽; Bruce Cu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ume Ⅱ(The Roaring of the Cataract ),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0, 264p. 575) 국방부 역사일지 ; 육본정보참모부, 공비연혁, 1971, 206쪽;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 : 해방과 건군( ) (제1권), 1967, 459쪽;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대비정규전사, 1988, 35쪽. 576) 육군본부전사감실, 공비토벌사, 1954, 27~28쪽; 육본정보참모부, 공비연혁, 1971, 238쪽. 순천지역 여순사건 647

176 제3권 사령부 시기에 순천은 남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김백일 중령)의 관할에 속했다. 577) 제2 여단(여단장 원용덕 대령) 예하 국군 제15연대 1개 대대와 제5여단(여단장 김백일 중령) 예하 국군 제4연대ㆍ12연대ㆍ15연대 1개 대대가 순천에 주둔하며 각각 제5여단과 제2여 단의 지휘 아래 토벌작전을 수행했다. 시기 진압군의 지휘ㆍ명령체계는 <표 33>과 같다. <표 33> 호남방면전투사령부의 지휘ㆍ명령체계( ) 578) 호남방면전투사령부 579) (사령관 : 제2여단장 원용덕 대령) 북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 제2여단장 원용덕 대령) 남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 제5여단장 김백일 중령) 2연대 3연대 6연대 15연대 (1개 대대) 4연대 9연대 12연대 15연대 (1개 대대) 1948년 11월 30일 호남방면전투사령부가 해체된 이후, 1949년 3월 1일 3차로 호남방면 전투사령부가 호남지구전투사령부와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로 개편ㆍ강화되었다. 호남지 구사령관에는 원용덕 준장이 임명되었고, 예하에 제20연대(광주 주둔, 제4연대 개칭) 3개 대대, 여수 제15연대 1개 대대(순천 주둔), 남원 제3연대 1개 대대를 배속하였다. 지리산지 577) 당시 남북지구의 전투지경선은 섬진강-구례-압록-삼지-옥과(옥천)-담양-고창(고부)을 연결하는 선이었 다. 육군본부전사감실, 공비토벌사, 1954, 27~28쪽; 육본정보참모부, 공비연혁, 1971, 238쪽;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대비정규전사, 1988, 77쪽; 국방부 역사일지. 578) 국방부 역사일지 ; 육본정보참모부, 공비연혁, 1971, 238쪽;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 : 해방과 건군( ) (제1권), 1967, 475쪽;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대비정규전사, 1988, 77쪽. 579) 육본정보참모부 1971년 펴낸 공비연혁 에는 호남방면전투사령관에 송호성 준장이 임명된 것으로 나오 나, 당시 신문은 호남방면전투사령관을 원용덕으로 적고 있다. 특히 1948년 11월 5일 전투사령부 참모장 위대선은 기자회견 자리에서 호남방면전투사령관은 원용덕이라고 밝힌 바 있다. 본 보고서는 당시 신문 보도를 준용하여 호남방면전투사령관을 원용덕이라고 판단했다. 육본정보참모부, 공비연혁, 1971, 238 쪽; 동광신문, ; 호남신문,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7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구사령관에는 정일권 준장이 임명되었고, 예하에 제3연대 제3대대(남원 주둔, 대대장 : 한웅 진 대위), 부산 제5연대 1개 대대(함양 주둔), 서울 제9연대 1개 대대(화개장 주둔), 대전 제19연대 1개 대대, 제1독립유격대대(진주 주둔, 김용주 소령)를 배속하였다. 580)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는 1949년 3월부터 이른바 춘계 토벌 을 단행했다. 동 사령부는 예하 대대를 구례, 남원, 화개장, 하동, 진주, 산청 등지에 배치하여 토벌지역을 할당하고, 각 지역에 있는 반군을 지리산으로 모는 작전을 펼쳤다. 581) 순천지역 토벌작전은 호남지구전투사령부가 지휘했다. 호남지구전투사령부는 광주에 주둔하고 있던 제5여단이 1949년 5월 12일부로 사단으로 승격되고 원용덕 준장이 사단장 으로 보직 변경되어 호전사 사령관을 겸직하면서 반군토벌작전을 계속 수행했다. 582) 호 남지구전투사령부의 지휘ㆍ명령체계는 <표 34>와 같다. <표 34> 호남지구전투사령부의 지휘ㆍ명령체계( ) 호남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 육군준장 원용덕) 3연대 15연대 20연대(4연대 개칭) 결과적으로 순천은 반군토벌사령부(1948년 10월 20일 10월 30일), 호남방면전투사 580) 육군본부전사감실, 공비토벌사, 1954, 27~28쪽; 육본정보참모부, 공비연혁, 1971, 238쪽; 국방부 전사 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 : 해방과 건군( ) (제1권), 1967, 479쪽;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대 비정규전사, 1988, 82쪽. 한편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의 참모들은 다음과 같았다. 작전참모 : 공국진 대 위 정보참모 : 이유성 대위 군수참모 : 박종민 대위 인사참모 : 이극성 대위. 사사키 하루다카, 한 국전비사 건군과 시련 (상권), 병학사, 1977, 389쪽. 1949년 4월 18일 지리산지구전투사령관 정일권 준 장은 서울로 복귀하였고, 제3연대장 함준호 대령이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49년 9월 28일에는 김백일이 지휘권을 인수하여 지리산지구 추계토벌을 진행하였고, 1950년 1월 25일까지 지리산지구의 토벌을 완료 함으로써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는 해체되었다. 1950년 2월 5일 호남 일대에 선포되었던 계엄령이 해제 되었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 : 해방과 건군( ) (제1권), 1967, 482쪽. 581) 사사키 하루다카, 한국전비사 건군과 시련 (상권), 병학사, 1977, 388~390쪽. 582)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대비정규전사, 1988, 93쪽. 순천지역 여순사건 649

178 제3권 령부(1948년 10월 30일 11월 30일), 호남지구전투사령부(1948년 3월 1일 1949년 5 월 9일)로 이어지는 토벌작전 시기의 주요 작전 대상지였다. 진압 초기 여단장들과 1949년 호전사ㆍ지전사는 육군참모총장ㆍ국방부장관의 지휘를 받았고, 최종적으로는 대통령의 명령을 받았다. 583) 한편, 미군은 임시군사고문단(로버츠 준장)을 중심으로 본 사건 당시 반군진압작전에 직접 관여하였다. 이러한 지휘ㆍ명령체계를 정리하면 <표 35>과 같다. (1) 국군 제2연대의 지휘ㆍ명령체계 조사결과, 국군 제2연대 소속 1대대ㆍ2대대ㆍ3대대가 본 사건의 진압작전과 민간인 사살에 관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국군 제2연대장 함병선은 여순사건 당시 연대 및 대 대 정보과 장교를 통해 민간인을 연행하거나 취조하도록 명령하였다. 대대 정보과는 군 주둔지로 연행된 민간인을 직접 취조ㆍ고문하였으며, 즉결 대상자를 결정하였다. 정보 과는 즉결처분 대상자가 결정되면 대대장을 거쳐 연대장에게 보고하였으며, 즉결처분 명령이 떨어지면 대대장은 각 중대장과 소대장에게 사살을 명령했다. 584) 한편 2여단사령부에서 근무했던 참고인 박은 당시 여단사령부 정보참모와 연대 정보과의 권한이 막강했다 면서, 연대에서 반군과 반군협조자를 잡으면 여단사령부 정 보참모가 조사하여 사형 결정을 내렸고, 법절차 없이 여단장 결재 후 사형에 처했다 고 했다. 585) 이를 통해 최종적으로 제2연대장 함병선은 계엄사령관 겸 제2여단장 원용 덕의 재가를 얻어 민간인 임의처형 을 집행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본 사건에서 가해부대인 국군 제2연대의 지휘ㆍ명령계통은 반군토벌사령부(사령 관 송호성 준장) 남방면전투사령관(제2여단장 원용덕) 지구전투사령관(원용덕 겸임) 2연대장 함 제1대대장 현로 확인되었다. 586) 당시 국군 제2연대의 지휘ㆍ명 령체계를 정리하면 <표 36>과 같다. 583) 진압군이 순천을 점령한 1948년 10월 23일 이승만 대통령은 경고문을 발표했다. 남녀아동까지라도 일일 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라 는 대통령의 명령 은 진압군이 반군동조 혐의자들을 혐의만으로 제거 할 수 있는 명분으로 작용했다. 584) 참고인 유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했다. 정보과 군인들이 부락에 가서 좌익 협조 여부를 수사한 뒤 수상하다고 판단되는 이들을 잡아와서 조사를 하여 즉결을 결정하는 식이었고, 본인이 속한 부대에 배정되었습니다. 즉결처분이니 약식재판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참고인 유, 면담보고서( ) 585) 참고인 박, 통화보고서( ) 586) 조재미 장교자력표 ㆍ 김용 장교자력표, 자료 조회 결과 회신(진실위-정치석 외 85명) (육군기록정 보관리단 보존활용과-8143, ); 한경수 증언록, 한국전쟁 증언록, 군사편찬연구소 소 장; 참고인 서, (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7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표 35> 순천지역 여순사건 당시 진압군의 지휘ㆍ명령체계 제2연대 (연대장 함) 제2여단 (여단장 원용덕) 북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원용덕) 반군토벌전투사령부 (사령관 송호성) 호남방면전투사령부 (사령관 원용덕) 제12연대 (연대장백인기ㆍ백 ㆍ송) 제2여단 (여단장 원용덕) 남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김백일) 반군토벌전투사령부 (사령관 송호성) 호남방면전투사령부 (사령관 원용덕) 제2여단 (여단장 원용덕) 반군토벌전투사령부 (사령관 송호성) 제15연대 (연대장 신ㆍ김윤 ㆍ송) 남북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원용덕ㆍ김백일) 호남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원용덕) 호남방면전투사령부 (사령관 원용덕) 육군본부 587) (참모총장 이응준) 국방부 장관 (이범석 ㆍ 신성모) 대통령 (이승만) 제5여단 (여단장 김백일) 반군토벌전투사령부 (사령관 송호성) 3연대 (연대장 함) 북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원용덕) 호남방면전투사령부 (사령관 원용덕) 호남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원용덕) 육군본부 588) (참모총장 이응준) 4(20)연대 (연대장 이ㆍ위ㆍ 박) 제5여단 (여단장 김백일) 남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김백일) 호남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원용덕) 반군토벌전투사령부 (사령관 송호성) 호남방면전투사령부 (사령관 원용덕) 육군본부 589) (참모총장 이응준 587) 1948년 11월 30일 국군조직법에 따른 편제이다. 순천지역 여순사건 651

180 제3권 <표 36> 순천지역 여순사건 당시 국군 제2연대의 지휘ㆍ명령체계 북지구 전투사령관 원용덕 연대장 이 ( ) 연대장 함 ( ) 1대대 현 2대대 3대대 현석주 최석용 (2) 국군 제3연대의 지휘ㆍ명령체계 조사결과, 국군 제3연대 소속 1대대와 2대대가 본 사건의 진압작전과 민간인 사살에 관 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국군 제3연대장 함준호는 여순사건 당시 연대 및 대대 정보과 장교나 특무대를 통해 민간인을 연행하거나 취조하도록 명령하였다. 대대 정보과와 특무 대는 군 주둔지로 연행된 민간인을 직접 취조ㆍ고문하였으며, 즉결 대상자를 결정하였 다. 정보과와 특무대는 즉결처분 대상자가 결정되면 대대장을 거쳐 연대장에게 보고하였 으며, 즉결처분 명령이 떨어지면 대대장은 각 중대장과 소대장에게 사살을 명령했다. 590) 이러한 사실은 사건 당시 3연대 소속이었던 참고인들의 에서도 확인된다. 3연대 2 대대 5중대 특무상사로 근무한 참고인 한는 학교를 비롯한 주둔지로 주민을 연행하 거나 소집하면, 전주 및 남원특무대 하사관이 와서 전기고문하며 취조했다 고 했다. 특무대원과 중대장 및 소대장이 협의하여 총살대상자를 결정한 뒤 몇 십 명씩 검은 천 588) 1948년 11월 30일 국군조직법에 따른 편제이다. 589) 1948년 11월 30일 국군조직법에 따른 편제이다. 590) 참고인 유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했다. 정보과 군인들이 부락에 가서 좌익협조 여부를 수 사한 뒤 수상하다고 판단되는 이들을 잡아와서 조사를 하여 즉결을 결정하는 식이었고, 본인이 속한 부 대에 배정되었습니다. 즉결처분이니 약식재판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참고인 유 면담보고서(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8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을 눈에 두르고 주둔지 뒷산에서 구덩이를 파고 사살했다 고 했다. 591) 또한 주둔지 가 아닌 경우와 특무대 조사가 없는 경우, 현지 지휘관 주도로 현지에서 바로 조사하여 처형했다 고 말했다. 그는 즉결처분 관계는 조재미 대대장에게 보고되었다 고 덧붙였다. 3연대 2대대 소속 참고인 박도 순천 진압 후 헌병대와 CIC가 반군협조 혐의 민간인 을 색출하여 즉결처분했다 고 했다. 592) 1대대 2중대 3소대 소속이었던 김은 작전지역에서 정보원이나 부락주민을 통해 장교들이 정보수집(밀고, 정보원 배치)을 하여 반군에게 짐을 운반해주는 등의 반군협조 민간인을 색출했다 고 말했다. 이들을 연행해 중대장 및 간부들이 조사하고, 즉결 결정 이 난 후 사살했다 고 했다. 593) 1대대 3중대 소속 참고인 김는 민간인들에 대한 즉결처분은 대대장-중대장-소대 장으로 이어지는 상부명령에 의해 집행됐다 고 했다. 594) 3연대 2대대 소속 참고인 박은 당시 군의 민간인 처리에 관한 아무런 교육이나 지침이 없어, 그저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면서, 민간인들에 대한 불법적인 사살이 상부의 명령에 의 한 것임을 인정했다. 595) 2대대 통신병이었던 참고인 전은 함준호 연대장이 조재미 대대장에게 명령을 내 릴 때는 작전주임이나 정보주임을 통해 구두로 직접 지시했다 고 하였다. 596) 한편, 3연대 2대대 5중대 특무상사ㆍ인사계 주임 출신 참고인 한는 같은 소속 5중대장 김용이 토벌작전을 나가 중요 전과를 많이 올렸고, 그로 인해 2대대장 조재미보다 실권 이 더 막강했다 고 증언했다. 597) 한편, 일부 진압부대의 경우, 지휘명령체계가 이원적으로 운용되기도 했다. 반군토벌사 령부 당시 2여단(원용덕 대령)에 속했던 12연대는 실질적으로 5여단 김백일 중령의 지휘 를 받았다. 3연대도 이와 비슷했다. 3연대 3대대 9중대장 서은 반군토벌작전 당시 3 연대는 2여단 소속이어서 행정적으로는 통제를 받았으나, 작전권은 지리산지구전투사령 부에 있었다 고 말했다. 또한 당시 부대별 작전구역이 있었으나, 실제 작전에서는 타 부 591) 참고인 한 면담보고서( ). 592) 참고인 박 통화보고서( ). 593) 참고인 김 통화보고서( ). 594) 참고인 김 통화보고서( ). 595) 참고인 박 통화보고서( ). 596) 참고인 전 면담보고서( ). 597) 한 증언록, 한국전쟁증언록, 군사편찬연구소 소장. 한는 김용이 3연대 내부의 좌익을 주도 적으로 색출했고, 대대장 조재미까지 좌익으로 몰려고 할 정도였다고 증언했다. 순천지역 여순사건 653

182 제3권 대 작전지역에서도 작전했다 고 했다. 598) 참고인 안은 1대대와 2대대가 교대로 작전을 나갈 당시 대대장에게 즉결권이 있 었으나, 계엄사령관 원용덕에게 재가를 얻어 총살을 집행했으며, 상부의 지시가 없이 대 대장 본위로 즉결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고 하였다. 599) 이를 통해 최종적으로 제 3연대장 함준호는 계엄사령관 겸 제2여단장 원용덕의 재가를 얻어 민간인 임의처형 을 집행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본 사건에서 가해부대인 국군 제3연대의 지휘ㆍ명령계통은 반군토벌전투사령부 (사령관 송호성 준장) 제5여단장(김백일 중령) 제3연대장 함(연대정보과 김ㆍ 유) 제1대대장 박(중대장 양ㆍ박)ㆍ제2대대장 조(중대장 김ㆍ 조ㆍ김ㆍ박수ㆍ박)ㆍ제3대대장 한(중대장 김ㆍ서ㆍ김 ㆍ지)로 확인되었다. 600) 당시 국군 제3연대의 지휘ㆍ명령체계를 정리하면 <표 37>과 같다. (3) 국군 제4(20)연대의 지휘ㆍ명령체계 조사결과, 국군 제4(20)연대 소속 1대대ㆍ2대대ㆍ3대대가 순천 탈환작전과 잇따른 반 군토벌작전 과정에서 민간인들을 불법적으로 사살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국군 제4(20)연 대장 이성가ㆍ위대선ㆍ박기병은 여순사건 당시 연대 및 대대 정보과를 통해, 반군 및 반 군협조자를 연행하거나 취조하도록 명령하였다. 대대 정보과는 군 주둔지로 연행된 반군 포로 및 민간인을 직접 취조 및 고문한 뒤 즉결 대상자를 결정하였다. 즉결처분 대상 자가 결정되면 대대장을 거쳐 연대장에게 보고하였으며, 연대장의 즉결처분 명령이 떨 어지면 대대장은 각 중대장과 소대장에게 사살을 명령했다. 이러한 사실은 사건 당시 4(20)연대 소속이었던 참고인들의 에서도 확인된다. 1대 대 3중대 3소대 참고인 김은 당시 중대마다 2명 정도씩 정보과나 특무대요원을 배 치하여 정보를 수집했고, 정보요원들이 정보를 수집하여 중대장ㆍ대대장에게 보고하면 그 정보에 따라 토벌작전을 진행했다 고 했다. 601) 토벌작전 과정에서 연행된 민간인 598) 참고인 서 ( ); 참고인 서 면담보고서( ); 참고인 서 면담보고 서( ). 여순사건 당시 진압군은 서로를 반군으로 오인하여 전투를 벌이는 등 촌극을 빚었다. 이는 군복의 차이가 없는 데서 오는 시각적 착각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각 부대 간의 유기적인 작전공유 가 이루어지지 못한 채, 타 부대의 작전구역을 넘나들며 토벌작전을 벌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599) 참고인 안 면담보고서( ). 600) 조재미 장교자력표 ㆍ 김용 장교자력표, 자료 조회 결과 회신(진실위-정치석 외 85명) (육군기록정 보관리단 보존활용과-8143, ); 한 증언록, 한국전쟁 증언록, 군사편찬연구소 소 장; 참고인 서 (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8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표 37> 순천지역 여순사건 당시 국군 제3연대의 지휘ㆍ명령체계 호남지구 전투사령관 북지구 전투사령관 원용덕 ( ) 원용덕 ( ) 연대장 함 ( ) 부연대장 송 ( ) 1대대 박 2대대 조 3대대 한 (한) 들은 다시 정보과에서 취조했다. 연대본부 정보과 소속 참고인 전은 연행된 이들 대 다수는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 농민들이 많았다 고 했다. 이들에 대한 즉결처분은 지 휘관, 특히 연대장의 성향에 따라 가능했고 당시 분대장급 이상에게 즉결처분권이 있었 다 고 했다. 602) 2대대 8중대 소속 참고인 전은 즉결처분 지시는 중대장이나 소대장으로부터 내려왔 으며, 지휘관들은 의심스러우면 무조건 총살하라고 명령했다 고 했다. 603) 4연대 2대대 와 5여단 병참수송부 소속 참고인 정은 대대장ㆍ중대장ㆍ소대장 지시에 따라 반군협조 혐의만으로 조사나 재판 없이 즉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면서, 다른 지침이나 교육은 없었고 단지 지휘관 지시에 따랐다 고 했다. 604) 이로 인해 연대본부에 보고 없이 현장 지휘관의 지시나 명령에 의해서 사살되거나, 사병의 자의적인 판단으로 살해되는 경우도 많았다. 한편, 군경은 사회ㆍ경제적 지위에 따라 즉결처분을 선별적으로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인 전은 지역 중견인물이나 지식층 등 연대 차원에서 처리하기 곤란한 거물급 601) 참고인 김 ( ). 602) 참고인 전 ( ). 603) 참고인 전 ( ). 604) 참고인 정 ( ). 순천지역 여순사건 655

184 제3권 들은 광주사령부로 이송했다 고 했다. 605) 결국 본 사건에서 가해부대인 국군 제4(20)연대의 시계열적 지휘ㆍ명령계통은 반군토 벌전투사령부(육군준장 송호성) 호남방면전투사령관(제2여단장 원용덕) 남지구전투사 령관(김백일 중령) 제4연대장 이ㆍ위ㆍ박 제1대대장 유(중대장 김 ㆍ유)ㆍ제2대대장 이(중대장 김ㆍ배)ㆍ제3대대장 오(중대장 김 )ㆍ정보주임 김 대위ㆍ문 중위ㆍ모병장교 김으로 확인되었다. 당시 국 군 제4(20)연대의 지휘ㆍ명령체계를 정리하면 <표 38>와 같다. <표 38> 순천지역 여순사건 당시 국군 제4(20)연대의 지휘ㆍ명령체계 호남지구 전투사령관 남지구 전투사령관 원용덕 ( ) 김백일 ( ) 이 ( ) 연대장 위 박 ( ) ( ) 1대대 유 2대대 이 3대대 오 (4) 제12연대의 지휘ㆍ명령체계 제12연대 1ㆍ2ㆍ3대대도 본 사건의 순천 탈환작전과 민간인 살해에 관여한 것으로 확 인되었다. 백 부연대장은 순천 탈환작전 시 강경진압을 주도하여 많은 민간인들의 피해를 낳았고, 진압 이후에는 북국민학교에서 벌어진 반군협조 혐의자 색출작업과 그에 605) 참고인 전 (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8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따르는 즉결처분을 직접 지휘하였다. 참고인 김은 학구 앞에서 60미리 박격포 3문을 설치해놓고 부연대장 백이 순천시내로 발포하라 명령해 7 8발을 쏘고 들어갔다 고 했다. 같은 대대 참고인 하 도 시내 동쪽에서 쏜 박격포로 순천에 진입했다고 했다.606) 당시 반군은 이미 광양 등 외곽지대로 도주한 상태였고, 순천읍에는 총과 죽창으로 무장한 치안대, 민애청 원 등의 좌익단체원이나 좌익학생들만이 남아서 큰 위협이 될 수 없던 상황이었다.607) 12연대 하사관교육대 선임하사였던 성찬호는 백은 ( ) 전쟁통이니까 강력히 부 하를 통솔하는 것은 좋지만, 부하이건 시민이건 빨치산이 되었건 구분 없이 죽인다 이겁 니다. 너 빨치산 갖다 주었지, 이러면서, 너 밥 갖다 주었지? 밥 갖다가 주었습니다. 그러 면 빵! 쏘고 그 사람이 그런 식으로 하는 것입니다 라고 했다.608) 또한 당시 제12연대 2대대 5중대장이었던 임은 당시 백이 즉결처분권을 부하 장교들에게 위임하였고, 일부 장교들이 즉결처분 을 남발하여 문제가 되었다 고 말했다. 임은 휘하 장교들에게 즉결처분권을 위임한 백을 찾아가 즉결처분을 남용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다 고 했다.609) 일부 장교들의 즉결처분 남용과 인명 경시 풍조는 3대대 소속 참고인의 에서도 확 인된다. 3대대 11중대 2소대 이는 소대장이 일종의 담력훈련으로 소대에서 가장 온 순한 사람을 지목해, 민간인에 대한 즉결처분을 지시했다 고 했다.610) 즉결처분이 만연한 상황에서 상관의 명령을 어기고 혐의자를 살려준 경우도 있었다. 3대대 12중대 3소대 김은 순천로터리에서 잡힌 반군 혐의자 3명에 대해 즉결처분하라는 명령을 받고, 살려달라 애원하는 이들을 수수밭으로 데려가 공포 18발을 쏜 뒤 도망가게 했다 고 했다. 제12연대 1ㆍ2ㆍ3대대는 백 지휘하에 직접 민간인 사살에 참여하였다. 3대대 11 중대 2소대 이는 순천에서 작전할 때 여학생들이 오빠, 국군 아저씨 하면 무조건 죽여라, 현장에서 즉시 사살하라 고 한 중대장의 명령을 기억하고 있었다.611) 민간인 즉결처분을 주도했다는 비판에 대해 백은 위원회에 출두하여 당시 12연대 606) 하 증언록, 뺷한국전쟁 증언록뺸, 군사편찬연구소 소장. 607) 백선엽, 뺷실록 지리산뺸, 고려원, 1992, 180쪽. 608) 성의 증언에 따르면 백은 민간인을 담력 훈련을 위한 총검술 시범 대상으로 이용하기도 했고, 시체를 전시하여 주민 정신교육 을 시켰다고 한다. 성 증언록, 뺷한국전쟁 증언록뺸, 군사편찬연구소 소장. 609) 임에 따르면, 같은 중대에 황해도 출신으로 대부호의 아들이었던 정 소위가 즉결처분을 남용하 여 자신과 갈등을 빚었다고 말했다. 참고인 임 ( ). 610) 참고인 이 면담보고서( ). 611) 참고인 이 면담보고서( ). 순천지역 여순사건 657

186 제3권 는 민간인을 처리하지 않았다 면서, 본 사건 당시 현지 지휘관에게 즉결처분권이 부여되 지 않았다 고 했다. 또한 자신은 민간인에 대해 즉결처분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면 서 가해 명령 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612) 제12연대 부연대장 백 본인이 비록 부인하고 있으나, 그와 함께 작전을 수행했던 대부분의 참전군인이나 목격자들은 그가 휘하 지휘관들에게 민간인을 즉결처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고, 또한 직접 민간인 사살을 지시했다고 증언하는 것을 볼 때, 백이 민 간인 집단희생 과정에 개입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12연대가 당시 순천지역에서 행한 민간인 살해는 12연대 부연대장 백에게 상당한 지휘 책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본 사건 당시 12연대의 지휘관은 연대장 백인기ㆍ부연대장 백이었으며, 이들은 직접 순천에 주둔하면서 민간인 사살을 지휘ㆍ명령하였다. 백은 백인기 연대장 사망 이후 연대를 지휘했으며, 백이 제17연대장으로 전출된 이후 송석하가 12연대장으로 부임했다. 송석하 연대장은 12연대 잔류 병력을 지휘하며 1949년 1월까지 작전을 수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613) 따라서 순천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사건의 연대 단위 지휘 책임은 백( 이전)ㆍ백( )ㆍ송 연대장( )에게 있었으며, 직접적으로는 일선 부대원을 이끈 대대장과 중대장에게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제12연대는 남지구전투사령관인 제5여단장 김백일의 지휘 아래 있었다. 결국 본 사건에서 가해부대인 국군 제12연대의 지휘ㆍ명령계통은 반군토벌전투사령부 (육군준장 송호성) 호남방면전투사령관(제2여단장 원용덕) 남지구전투사령관(제5여단 장 김백일) 제12연대장 백ㆍ백ㆍ송 1대대장 허 614) (중대장 송ㆍ조 ㆍ김ㆍ이) 615) ㆍ2대대장 김 616) (중대장 김ㆍ안ㆍ전ㆍ임, 대대 부관 이) 617) ㆍ3대대장 이 618) ㆍ연 619) (중대장 황명) 620) 로 확인되 612) 참고인 백 ( ) 백은 1999년 MBC와의 인터뷰에서 여순사건 당시 직접 민간인 을 사살한 적이 없다고 말했으나, 추궁이 이어지자 역정을 내며 말한다. (민간인을 인용자) 쐈다 할지라 도 이거는 죄가 안 됩니다. 왜? 즉결처분권이 있어. (중략) 공산당이다, 이상하다, 그래서 쐈다. 그러면 그 건 죄가 안 걸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팀, 여수 14연대 반란 녹취록 ( 방영). 613) 참고인 오 녹취록( ). 614) 허은 1948년 11월 30일까지 1대대장으로 복무했다.( 제12연대로 전출, 제5여단 으로 전출, 제2여단으로 전출, 잠정( 暫 定 )특별부대 전출.) 허 장교자력표, 자 료 조회 결과 회신(진실위-정치석 외 85명) (육군기록정보관리단 보존활용과-8143, ). 615) 허 증언록, 한국전쟁 증언록, 군사편찬연구소 소장. 616) 자력표에 따르면 제2대대장 김은 2여단으로 전출되는 1948년 11월 20일까지 제2대대장을 했 다.( 제12연대 전출, 대위 진급, 소령 진급, 제2여단 전출, 수도사단 전출.) 김 장교자력표, 자료 조회 결과 회신(진실위-정치석 외 85명) (육군 기록정보관리단 보존활용과-8143,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8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었다. 당시 국군 제12연대의 지휘ㆍ명령체계를 정리하면 <표 39>과 같다. <표 39> 순천지역 여순사건 당시 국군 제12연대의 지휘ㆍ명령체계 남지구 전투사령관 김백일 백 ( ) 연대장 백(대리) ( ) 송석하 ( ) 1대대장 허 2대대장 김 3대대장 이 연 (5) 국군 제15연대의 지휘ㆍ명령계통 조사결과, 국군 제15연대 1대대ㆍ2대대가 순천지역 민간인을 집단적으로 사살한 것으로 드러났다. 진압 후 순천경찰서에 연대본부를 설치한 15연대는 호남방면전투사령부가 해체되 는 1948년 11월 말까지 순천 전역을 대상으로 토벌작전과 반군협조자 색출과정을 벌였다. 그 이듬해인 1949년 3월 1일 호남ㆍ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의 개편에 맞추어, 여수에 주둔하던 병력이 다시 순천에 집결, 본격적인 토벌과 색출작업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15연대 정보과는 공비활동 정보, 반군 및 협조 혐의자들에 대한 고문 및 취조, 노획장비와 문서 분석을 담당했 617) 김 증언록, 한국전쟁 증언록, 군사편찬연구소 소장; 참고인 임 ( ). 618) 김 증언록, 한국전쟁 증언록, 군사편찬연구소 소장; 사사키 하루다카, 한국전비사 - 건군과 시련 (상권), 병학사, 1977, 337쪽. 619) 연는 1948년 12월 12일까지 12연대에서 근무했다. ( 제12연대 전출, 총사령부 전출, 국방부 파견, 국방부 전출, 소령 진급). 연 장교자력표, 자료 조회 결과 회신(진실위-정 외 85명) (육군기록정보관리단 보존활용과-8143, ). 620) 참고인 임 ( ). 순천지역 여순사건 659

188 제3권 다. 621) 특히 연행된 민간인들에 대한 유ㆍ무죄를 판단하여, 즉결처분 결정을 내렸다. 1대대 1중대 1소대 전는 반군협조 혐의자로 잡힌 사람들은 민간인이 많았으며, 이 들을 연대 정보과에서 조사 및 취조한 후 사단 군법회의로 인계하거나 즉결했다 고 했다. 622) 1대대 4중대 김은 반군의 경우는 사단본부로 인계했고, 지역주민의 경우는 대대본부에서 취조 및 조사 처리했다 고 했다. 623) 2대대 6중대장 김는 1949년에 들어서 반군토벌작전 명령이 하달되어 순천지역 반 군토벌작전을 전개했으며, 이 과정에서 체포한 반군협조 혐의자를 연대본부 정보과에 인 계하여 심문하고 극형에 처하기도 했다 고 했다. 624) 특히 반군협조 혐의자를 사살한 뒤 손가락, 귀, 목 등을 잘라서 전과 보고를 하는 부대 분위기는 민간인 집단희생으로 이어졌다. 한편 15연대 민간인 살해의 배경에는 보복심리도 작용하고 있었다. 3대대 11중대 윤은 군인들이 반군에게 죽자, 보복심리가 강하게 작용하여, 반군협조 혐의만으로 즉결총살된 억울한 민간인들이 많았다 고 했다. 625) 연대장 윤춘근은 반군협조자 색출작전과 민간인 살해를 직접 지휘하고 지시했다. 1대대 1중대 전의 에 따르면, 1949년 봄 순천 괴목의 산골부락에서 색출한 반군협조 혐의자들(두 가족)이 혐의를 부인하자, 총으로 위협하여 친인척 관계인 마을주민들이 그들을 척살하게 했다. 대대장 이소동이 연대장에게 무전으로 보고한 후 중대장에게 지시하여 일어난 일이었 다. 626) 2대대 6중대 1소대 정은 즉결처분 지시는 소대장이나 중대장 등 지휘관으로부터 내려왔고, 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많았다 고 했다. 627) 3대대 11중대 윤도 순천 등 작전지역에서 중대장 및 소대장 명령으로 반군협력 혐의자를 즉결총살했다 고 했다. 628) 따라서 순천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사건의 연대 단위 지휘 책임은 신(대리 )ㆍ김( )ㆍ윤( )ㆍ송 연대장( )에게 있었으며, 직접적으로 는 일선 부대원을 이끈 대대장과 중대장에게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제15연대는 남 ㆍ북지구전투사령관 제2여단장 원용덕과 제5여단장 김백일의 지휘 아래 있었다. 621) 정 증언록, 한국전쟁 증언록, 군사편찬연구소 소장. 622) 참고인 전 통화보고서( ). 623) 참고인 김 통화보고서( ). 624) 참고인 김 통화보고서( ); 참고인 김 통화보고서( ). 625) 참고인 윤 ( ). 626) 참고인 전 통화보고서( ). 627) 참고인 정 통화보고서( ). 628) 참고인 윤 (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8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결국 본 사건에서 가해부대인 국군 제15연대의 지휘ㆍ명령계통은 반군토벌전투사령부(육 군준장 송호성) 호남방면전투사령관(제2여단장 원용덕) 남ㆍ북지구전투사령관(제5여단 장 김백일ㆍ제2여단장 원용덕) 광주 5사단(사단장 원용덕) 제15연대장 신ㆍ김ㆍ 윤ㆍ송 1대대장 이ㆍ양ㆍ김(중대장 백ㆍ김)ㆍ2대대장 최 (중대장 김)ㆍ하교대 교육대장 조ㆍ연대부관 김 중위로 확인되었다. 당시 국군 제15연대의 지휘ㆍ명령체계를 정리하면 <표 40>과 같다. <표 40> 순천지역 여순사건 당시 국군 제15연대의 지휘ㆍ명령체계 남ㆍ북지구 전투사령관 김백일, 원용덕 신(대리) ( ) 연대장 김 ( ) 윤 ( ) 송 ( ) 1대대장 이 2대대장 최 3대대장 최 나) 경찰의 지휘ㆍ명령체계 조사결과, 제14연대 반란사건 이후 순천지역 경찰은 군과 경찰의 이중의 지휘ㆍ명령계 통 하에서 활동했다. 순천지역 계엄사령관 순천경찰서장으로 이어지는 지휘라인과 전남 경찰청(제8관구경찰청) 순천경찰서장으로 하달하는 계통이었다. 계엄지구에서는 계엄사령관의 지휘하에 해당 경찰서가 병력을 제공하였고, 진압군에 체포된 자들을 경찰서에 유치하였다. 별량ㆍ월등ㆍ서면ㆍ황전지서에서 주임과 출장소장 으로 근무한 참고인 구은 당시 군대가 넘버원이어서 무슨 명령이든 내릴 수 있었 순천지역 여순사건 661

190 제3권 다 며, 경찰들은 당시 계엄상황으로 군의 지휘를 받았다 고 했다. 그는 또한 반군 및 반군협조자를 잡으면 본서(사찰계, 서장)를 거쳐 15연대(연대장, 정훈장교)에 이를 보 고하고 조치하라 는 지시를 받아 즉결처분했다 고 했다. 결국 경찰서장은 계엄사령 관의 명령을 받고서야 이들을 즉결처분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고 밝혔다. 629) 이러한 에 비추어보면 연행된 민간인을 순천경찰서로 이송하여, 사찰계에서 취조한 후 최종적으로 계엄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즉결처분 이 결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630) 또한 순천경찰서는 경찰 내부의 지휘ㆍ명령계통에 따라 좌익 및 반군에 협조한 혐의를 지닌 민간인을 처리 631) 했으며, 상급기관인 전남경찰국에도 그 내용을 보고하였다. 632) 광양경찰서 경찰로 근무한 참고인 배도 반군협조 혐의 민간인에 대한 즉결처분 결정은 지서 주임이 임의로 할 수 없고, 순천(광양)경찰서 사찰계 및 정보과에서 지시를 받아야만 했다 고 했다. 633) 그러나 지서 차원에서 보고 없이 이루어진 사살도 적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참고인 이 은 지서 주임이 자체적으로 판단하여 사살에 처하는 경우도 많았다 고 했 다. 634) 지서에서 이뤄진 사살은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경우보다 자의적이고 임의적이었던 경우가 많았다. 서면지서 주임 안과 학구출장소 소장 구의 경우처럼, 반군의 출 현 빈도뿐만 아니라, 각 지서 책임자의 성정 또한 지역 주민의 안위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한편, 순천경찰서는 사찰계 형사들을 각 지서에 파견하여, 마을청년단을 통한 정보수집 과 협조자 색출에 나서기도 했다. 상사지서 의용경찰로 근무한 참고인 이은 순천경 찰서에서 사찰형사(사복) 1명을 각 지서에 파견했고, 각 지서 주임이 교육시켜 부락마다 2명의 정보원(청년단원)을 배치, 정보를 입수했다 고 말했다. 또한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 로 지서에서 부락을 수색했고, 색출된 반군협조 혐의자를 지서로 연행하여, 엄청난 구타 와 전기고문을 해 세포 및 조직구성을 취조했다 면서, 부역자 명단에 기재한 후 협력사실 을 부인할 경우 순천경찰서로 이송 후 처형했다고 했다. 635) 629) 참고인 구 녹취록( ); 참고인 구 통화보고서( ). 630) 구례의 경우, 백은 경찰서장에게 좌익을 철저히 색출하라고 지시했으며, 경찰이 사살한 보고를 받은 일이 있다고 증언했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팀, 여수 14연대 반란 녹취록 ( 방영). 631) 참고인 최 ( ); 참고인 장 면담보고서( ); 참고인 박 ( ); 참고인 박 ( ); 참고인 한 ( ); 참고인 정 ( ); 참고인 박 녹취록( ); 참고인 조 녹취록( ); 참고인 김 녹취록( ); 참고인 배 녹취록( ); 참고인 문 녹 취록( ); 참고인 이 면담보고서( ); 참고인 배 면담보고서( ). 632) 참고인 박 ( ). 633) 참고인 배 면담보고서( ). 634) 참고인 이 면담보고서( ). 635) 참고인 이 면담보고서(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9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또한 제8관구경찰청(전남경찰국)도 자체적으로 토벌대를 조직하여 순천을 비롯한 전남 동부지역 반군토벌작전과 반군협력자 색출작업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인 구 은 제8관구경찰청이 예하 각 서와 지서별로 인원을 차출하여, 의용경찰로 경찰전투사령 부를 조직했다 고 했다. 특히 이 부대는 순천ㆍ광양ㆍ구례지역에서 반군협조 혐의 민간인들을 아무런 조사도 없이 즉결처분했다 고 덧붙였다.636) 본 사건 당시 순천경찰서장은 변(邊, )ㆍ양(梁, )ㆍ손(孫, )ㆍ이 (李, )이었다.637) 그리고 당시 제8관구경찰청장(전남경찰 국장)은 김(金, )ㆍ김(金, )이었다.638) 또 참고인조사와 자료조사에서 드러난 제8관구경찰청 부청장 최천(崔天) 도 순천 진압작전과 반군협조자 색출과정에서 무자비한 행위로 이름을 떨쳤다. 참고인 을 통해, 순천경찰서 소속으로 순천지역 민간인들을 연행하여 고문 및 취조, 불법적인 집단사살에 관여한 경찰로는 서면지서 주임 안, 황전지서 용림출장소 소장 구, 순천경찰서 순경 이, 월등지서 주임 조, 월등지서 경사 안ㆍ백 등이 확인되었다. 순천경찰서에서 연행과 취조를 담당한 사찰계 경찰로는 계장 박ㆍ배639)와 사찰계 경찰 정, 사찰대원 박, 주암면 사찰대원 조 등이 확인되었다. 당시 반군토벌 업무를 담당하여 사찰과보다 권한이 강했다는 경비과 과장 윤도 참고인 에서 언급되었다.640) 순천경찰서 순경 출신 참고인 박은 사찰주임이 경찰서장에게 사형집행자 명단을 보고했고, 서장이 전남경찰국으로 상신하고, 전남경찰국에서 결정한 뒤 사형을 집행했다 고 했다.641) 순천경찰서 작전계장 출신 참고인 최은 작전 나갔다 와서 결과보 고를 하면, 적극적으로 반군협조자를 색출하라는 내용의 도경찰국의 지시가 있었다 고 했다.642) 이는 제8관구경찰청(전남경찰국)이 사살을 명령하고 지휘했으며, 사살에 관 636) 참고인 구 녹취록( ); 참고인 구 통화보고서( ). 637) 전남지방경찰청에서 펴낸 뺷전남경찰사뺸에는 손( ), 변( ), 양계원( ), 손( ), 이 ( )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본 보고서는 순천경찰서 뺷경무기본대장뺸을 기준으로 했다. 순천경찰서, 역대서장명부, 뺷경무기본대장뺸; 전남지방경찰청, 뺷전남경찰사뺸, 1992, 960쪽. 638) 전남지방경찰청, 뺷전남경찰사뺸, 1992, 905쪽. 639) 순천경찰서 사찰계장 배갑수는 한국전쟁 당시 전남경찰토벌대 대장을 역임했다가 2004년 사망했다. 참 고인 조 ( ). 640) 참고인 이은 연행된 민간인에 대한 즉결처분을 계엄령 하이므로 재판도 없이 순천경찰서 반군토벌업 무를 담당하는 윤 경비과장이 주도하여 결정했다고 했다. 참고인 이 면담보고서( ). 641) 참고인 박, ( ) 642) 참고인 김, ( ) 순천지역 여순사건 663

192 제3권 해 보고받았다는 점을 말해준다. 다만 경찰 최상급기관인 내무부 치안국이 민간인 사살명령을 직접 내렸거나 이에 관해 보고받았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무부 치안국은 명령계통상 지휘 및 관리 책 임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643) 당시 순천경찰서의 지휘ㆍ명령체계는 다음 <표 41>과 같다. <표 41> 순천지역 여순사건 당시 순천경찰의 지휘ㆍ명령체계 반군토벌사령부 사령관 : 송호성 준장 남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 김백일 중령 호남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 원용덕 준장 제8관구 경찰청 (전남경찰국 ) 김 김 ( ) ( ) 순천경찰서 서장 변 양 손 이 ( ) ( ) ( ) ( ) 643) 1948년 11월 4일 치안국이 설치되고, 동년 11월 18일 지방행정기구직제공포에 따라 각 시ㆍ도 경찰국 이 설치되면서, 경찰조직의 지휘감독체계를 내무부로 일원화하는 과정이 진행되었다. 치안국이 내무부 산하로 되면서, 각 시ㆍ도 경찰국은 시장ㆍ도지사의 통제를 받게 되었으나, 실질적으로 경찰조직은 치안 국장 경찰국장 경찰서장으로 이어지는 계통으로 운영되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경찰업무가 시장ㆍ도지 사를 통하지 않고, 치안국장과 경찰국장 간의 지시와 보고를 통해 이루어졌다. 1949년 4월 4일 이효석 내무부장관은 경찰행정을 일시적으로 경찰국장에 일임하도록 각 도지사에 공문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 은 그간 대통령령으로서 종래 경찰청이 경찰국으로 기구가 개편되어 도지사가 경찰의 최고책임자로서 경찰권을 가지게 되었다. 여태껏 사무상으로 지방도청에 지시가 없었는데 4월 4일 비로소 내무부장관으 로부터 도지사에게, 치안국장으로부터 경찰국장에게 각각 공문이 통달되었는데 그 내용은 (1) 현 사태에 비추어 경찰의 임무가 군과 흡사하므로 기밀 보지에 있어 경찰국장에 일임할 것, (2) 또한 경찰행정의 특 수성에 비추어 경찰관의 인사문제와 경리문제도 경찰국장에 일임할 것, (3) 그러나 이상의 조치는 당분 간의 것이므로 원칙적으로 각도의 경찰 책임자는 도지사임을 인식하여 행정의 관계를 확립할 것 이었다. 부산일보,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9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라. 가해의 위법성 여부 1) 연행과 조사과정 본 사건 과정에서 군경당국은 사건 관련자들을 체포하기 위하여 민간인을 연행하여 구 금하고 조사하였다.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형태의 위법행위가 자행되었다. 군경은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연행하여 조사하였다. 진압군은 토벌작전 지역에서 일 정한 심사나 조사 없이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연행하였다. 군경의 무차별 연행에는 대 통령 이승만과 정부의 강경한 진압 방침이 영향을 끼쳤다. 당초 토벌사령부 내에선 어떤 비용을 들이더라도(at all cost) 여수와 순천은 탈환돼야 한다는 방침이 형성되었다.644) 또한 이는 순천ㆍ여수를 비롯한 인근 지역에서 반군협조자를 처벌한다며 민간인들을 상 대로 즉결심판을 자행하는 원인이 되었다. 반란에 협조했다는 혐의를 씌우는 것은 쉬웠 으나 혐의자로 몰린 사람이 그렇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웠다. 그것은 목 숨을 건 방어였다.645) 사건 당시 토벌작전과 반군협조 혐의자 색출작업에 참여했던 군경들도 당시의 연행과 조사과정에 문제가 많았으며, 이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이들이 많았다고 말하고 있다. 3 연대 2대대 특무상사 출신 참고인 한의 이다. 적법한 조사와 재판과정이 없었으며, 총살당한 주민들 대부분 반군과 직접 관련 없는 양 민으로 억울한 죽음이 많았다.646) 3연대 1대대 2중대 3소대에 근무했던 김은 반군협조 혐의자들을 잡아 1회에 7 8명 정도 총살했는데, 총살당한 사람들 중에는 실제 좌익활동을 하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좌익활동과 관계없는 억울하게 총살된 민간인이 많았다 고 했다.647) 참고인 임 도 민간인들이 억울하게 군경에게 끌려가 조사나 재판 없이 즉결처형당하는 등 억울한 민간인이 학살당한 경우가 있었다 고 했다.648) 참고인 전은 반군들이 총으로 644) 국방부 총참모장 채병덕 대령은 10월 22일 기자회견에서 병력을 집중시켜 압박섬멸전의 공격을 시작했 다고 발표했다. 이 같은 신속하고 강경한 진압 방침은, 10월 24일 이후 반군의 주력부대가 입산한 상황 에서 순천ㆍ여수의 시민들을 상대로 한 무차별적이며 무리한 진압작전을 낳았다. 노영기, 여순사건과 육군의 변화, 뺷전남사학뺸제22집, 2005, 264쪽. 645) 김득중, 뺷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뺸,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논문, 2004, 154쪽. 646) 참고인 한 면담보고서( ). 647) 참고인 김 통화보고서( ). 648) 참고인 임 ( ). 순천지역 여순사건 665

194 제3권 위협하며 강제로 짐을 운반하라고 하고 입산을 강요해서 나중에 잡힌 경우는 아주 억울 한 사람들이었다 면서 반군이 경찰을 죽인 일이 있었기에, 그 유가족들의 보복 감정으 로 인해 억울하게 희생되었던 것 이라고 말했다. 649) 반군에게 동지를 잃고 적개심에 사 로잡혔다던 참고인 황조차, 당시 군경의 무차별적인 연행과 취조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고 할 정도였다. 650) 이러한 무리한 연행과 조사에 따른 즉결처형은 당시부터 진압군경 내부에서 논란이 되 었다. 당시 토벌작전에 참가한 참고인 황은 경찰이 지서별로 전과를 올리려고 반란 군협조자를 무리하게 잡아들이곤 했다 면서 서면 구랑실재에서는 지서 경찰이 추측만으 로 주민들을 잡아 취조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을 보다 못한 그는 억울한 사람을 관제 공산당으로 만들지 말라고 지서 경찰에게 항의하기도 했다. 651) 4연대 연대 본부 정보과 소속 참고인 전도 당시 순천에 주둔할 때, 15연대가 무고한 양민을 살 해했다는 제보를 듣고, 15연대 헌병 하사관에게 찾아가, 군인이 민간인에게 잘못하면 국 민에게 불신당하고 파면당한다 고 경고했다. 652) 한편, 군의 경우 부대원들의 출신지가 지역 주민을 대하는 태도를 결정하기도 했다. 4 연대 1대대 소속 참고인 전은 15연대 부대원들이 주로 경상도 출신이어서 순천, 보 성, 벌교, 광양 등의 지역 사정을 몰라 반군협조 혐의자라 생각되면 바로 조사나 재판 없 이 무조건 즉결총살하는 일이 많았다고 했다. 653) 무차별 연행에 이어진 조사과정은 자연스럽게 비인도적인 취조와 고문을 동반했다. 군 경당국은 연행한 민간인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불법적인 고문을 자행했다. 당시 14연대 반군들에게 급식을 제공한 혐의로 순천경찰서에 연행된 한 여성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나는 4살 난 아이와 함께 순천시내로 잡혀왔다. 나중 아이는 시아버지를 통해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나는 당시 임신 중이었다. 또 다른 나의 아이와 갇힌 셈이었다. 순천경찰서에서 예의 정기주씨를 먼발치에서 보았다. 뒤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는 그곳 에서 고문으로 죽었던 걸로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잔인할 정도로 고문이 가해졌다. 그 주된 이유는 부역활동의 내용과 부역가담자를 불라고 하는 것이었다.( ) 654) 649) 참고인 전 ( ). 650) 참고인 황 면담보고서( ); 참고인 황 ( ). 651) 참고인 황 면담보고서( ); 참고인 황 ( ). 652) 참고인 전 ( ). 653) 참고인 전 (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9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순천경찰서 순경으로 근무한 박은 반군협조 혐의자와 지방좌익들을 체포하면 순 천경찰서 사찰계 형사들이 고문부터 했다 면서, 전기고문이나 고춧가루 물을 코에 붓기, 구타 등을 번갈아 했다 고 말했다.655) 당시 순천경찰서 안에는 고문실이 따로 있었다. 순 천경찰서 사찰대원으로 근무한 박의 이다. 엄지손가락 양쪽에 전기선을 감고 전화기로 돌려 전기고문을 하거나, 거꾸로 매달아 코 에 고춧가루 물을 붓는 고문을 했어요.656) 연행한 민간인에 대한 고문과 구타는 지서에서도 이루어졌다. 순천 황전지서 의경으로 근무한 문는 연행된 민간인을 유치장에 가두고 알고 있는 사람들을 불도록 회유하 다, 말을 안 들으면 구타하고 고문도 했다 고 말했다.657) 서면지서 한청단원으로 근무한 황도 지서 안에서 구타와 고문이 만연했다고 했다.658) 다음은 상사면 한청단원 이의 이다. 지서에서 부락을 수색했고, 색출된 반군협조 혐의자를 지서로 연행하여, 엄청난 구타와 전기고문을 해 세포 및 조직구성을 취조했습니다. 그러고는 부역자 명단에 기재한 후 협력 사실을 부인할 경우 순천경찰서로 이송했지요. 그 후에는 처형됐을 겁니다.659) 군도 반군협조 혐의 민간인들을 고문했다. 15연대 소속 참고인 정은 6중대가 보성 군 복내면 한 부락에 주둔할 때, 반군이 중대를 습격한 일이 있었는데 다음날 장교들이 부락주민들을 연행하여 가혹하게 구타 및 고문했다 고 말했다.660) 연행과 조사과정이 자의적이었던 까닭에 그 처리 또한 자의적이었다. 순천경찰서 외무 반장 박은 반군협력자 분류 심사에서 경찰에게 잘 보인 사람은 살아남고, 잘못 보인 사람은 사살되었다 고 증언했다.661) 잘못 보인 사람은 뇌물을 제공하여 잘 보일 수 있었 654) 익명을 요구한 그녀는 전주형무소에서 아이를 낳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형무소 재소자들이 집단희 생되던 시점에 형무소장과 목사의 도움으로 살아남았으나, 피난통에 아들을 잃었다. 어미를 살리고 아들 은 죽었다. 순천시사편찬위원회, 내가 겪은 여순사건-김(여), 뺷순천시사-정치사회편뺸, 1997, 쪽. 655) 참고인 박 ( ). 656) 참고인 박 녹취록( ). 657) 참고인 문 녹취록( ). 658) 참고인 황 녹취록( ). 659) 참고인 이 면담보고서( ). 660) 참고인 정 통화보고서( ). 661) 선휘성 채록, 박 구술, 뺷지역민이 체험한 여순사건뺸녹취록1, 국사편찬위원회, 2006, 11쪽. 순천지역 여순사건 667

196 제3권 다. 참고인 이은 연행자의 가족이 면장 및 국민회장을 동원하여 제발 살려만 달라 고 지서 주임에게 선처를 부탁하면서, 금품을 건네는 경우가 많았다 면서 소ㆍ돼지를 잡아 접대하는 등 지서 주임에게 바치는 상납품이 끊이지 않았다 고 했다. 참고인은 이들 대부분은 무고와 사적 감정으로 당한 손가락질로 연행되어 피해를 본 사람들이었 다 고 덧붙였다. 662) 이런 경찰의 행태는 우익진영 내에서도 비난을 받았다. 참고인 황 은 우리는 토벌하면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경찰들은 목숨이 아까워 가지도 않 고, 편안히 앉아서 뇌물이나 받아먹고 해서 자꾸 미운 생각이 들었다 고 말했다. 663) 4연대 소속 참고인 전은 순천경찰서 인근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총소리가 났으 며, 여기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민간인이 많았다 면서 순천, 보성, 벌교 등지에서 당시 경 찰이 마을이장에게 누가 반군에게 식량 등을 제공했는지 물어보면, 마을이장이 평소에 마음에 들지 않았던 주민을 지목하여 경찰이 억울한 주민을 총살한 경우가 많았다 고 말 했다. 한편, 순천지역 학생연맹도 사상 있는 학생들을 잡아서 자체 처단했다 며, 이 과 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억울하게 희생시켰다 고 했다. 664) 이러한 은 당시 군경당국이 민간인들의 반군가담이나 협조 여부를 구체적으로 확 인하지 않고 단지 신고만으로 살해하기도 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3연대 1대대 본부에 근 무했던 참고인 안은 즉결처형된 사람들이 대부분은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다 고 진 술하였다. 665) 이 같은 행동은 생존을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군경에 의해 살해된 민간인 중에는 반군과 관계없이 억울하게 희생된 경우가 많았음을 나타낸다. 2) 토벌작전에 따른 소개와 소각 군경당국은 토벌작전 과정에서 반군의 활동이나 보급품 이동경로에 위치해 있는 민간 인 거주 부락을 소개하거나 소각하였다. 군경의 토벌작전 과정에서 마을 소개와 소각은 가장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군경 참고인들도 토벌작전 과정에서 소 개와 소각이 이루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고 하였다. 15연대 2대대 6중대장 출신 참고인 김는 송 연대장 당시, 백운산지역 산간 오 지의 부락을 소개하여 산 밑으로 이주시켰다 면서, 소개 지역을 전략촌으로 설정하여 대 나무로 울타리를 치고, 주민들을 산 밑으로 소개했다 고 말했다. 그리고 부대는 고지에 662) 참고인 이 면담보고서( ). 663) 참고인 황 면담보고서( ); 참고인 황 ( ). 664) 참고인 전 ( ). 665) 참고인 안 면담보고서(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9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올라가서 주둔했고, 산 밑에는 경찰이 있어 무전으로 상호 연락하는 등 경찰의 보조를 받 으며 반군 포위작전을 전개했다 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부락 소각은 없었으나, 소개 주 민을 위한 대책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고 했다. 666) 한편, 서면 학구파출소 의경 출신 참고인 서는 진압군이 아무런 주민 대책도 없이 현장에서 바로 마을 소개나 소각을 명령했다 고 하였다. 667) 순천 황전지서 의경 출 신 참고인 곽는 여순사건 당시 진압군이 황전면 회룡마을 여덟 동네 전체를 소개했 다면서 집을 태우는 동네도 있었다 고 말했다. 소개 전 마을이장이 와서 어느 마을에서 어느 마을까지, 며칠까지 소개하라고 통보하는 방식이었고, 이주 대책은 없었다 고 했다. 결국 소개 후 각자 알아서 살아야 했다. 668) 상사면 의용경찰 출신 참고인 이도 여순사건 당시 서면ㆍ월등면ㆍ황전면 등에서 소개가 있었다 고 밝혔다. 669) 참고인 양 태교는 1949년 9월 24일(음 8. 3.)경 경찰이 죽청리마을에 와서 이틀 뒤인 9월 26일(음 8. 5.) 오전까지 수평리, 괴목리로 마을을 소개하라고 명령했다 며, 소개 안 하면 무조건 반란군으로 간주하고 소각하겠다고 위협했다 고 했다. 670) 참고인 정두화는 1948년 11월 8일(음 ) 화치리 덕암부락에 진압군 수도방위사령 부 군인 20명이 와 주두신의 집을 소각하고 일가족을 사살했다 고 했다. 671) 참고인 김효수는 1948년 11월경 철모에 흰 띠를 두른 12연대 군인 3명이 월등면 신월리 서당마 을 거주 입산자 안상옥의 집을 불태우러 갔다 면서 이윽고 돌아온 군인들이 빨갱이 가 족들이니 군인들에게 부탁을 해도 모자랄 판에, 한 놈이 난리를 치니 빨갱이 가족들이 미 워 가족 모두를 집에 넣고 방화했다고 말한 것을 들었다 고 했다. 김효수는 실제로 군인들이 반군동조 혐의자 안상옥의 형이 집을 방화하는 군인들에게 강하게 저항하자, 그의 아내와 아버지를 집에 가두고 집을 방화하여 3명 모두를 불태워 죽인 적이 있다 고 덧붙였다. 672) 참고인 이항의는 1949년 9월 26일(음 8. 5.) 15연대 1대대가 마을로 와 이 장 김팔호에게 좌익분자 집이 어디냐고 위협했다. 김팔호가 이기호, 송기충, 박홍기의 집 을 지목하자, 그 집에 자던 이들을 끌어내고 집을 소각했다. 그러고는 구덩이를 파게 해 서 모두 사살했다 고 했다. 673) 9남매 가운데 5남매를 잃은 신청인 최두용은 1949년 666) 참고인 김 통화보고서( ); 참고인 김 통화보고서( ). 667) 참고인 서 ( ). 668) 참고인 곽 녹취록( ). 669) 참고인 이 면담보고서( ). 670) 참고인 양태규 통화보고서( ). 671) 참고인 정두화 통화보고서( ). 672) 참고인 김 면담보고서( ). 순천지역 여순사건 669

198 제3권 6월 1일(음 5. 5.) 상사지서 경찰들이 모친 김점례를 연행한 뒤 빨갱이 집안이라며 집에 불을 질렀다 면서, 그로 인해 살아남은 5남매는 오갈 데 없이 친척집과 식모살이 등으로 이산가족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았다 고 울먹였다. 674) 이러한 은 군경의 소각과 소개가 사전계획이나 사후대책 없이 무리하게 진행되었 으며, 그에 따라 반군과 주민들의 연계를 차단하려는 토벌작전이 주민들의 생존기반을 박탈하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3) 계엄령 발포와 실시 본 사건 당시 군경은 민간인 살해의 법적 정당성을 (1) 1948년 10월 22일 발포된 계 엄령과 동년 11월 1일 전남ㆍ북 일원으로 확대 실시된 계엄령, (2) 동년 11월 6일 제8관 구경찰청에서 발포한 포고, (3) 군의 즉결처분권 에서 찾고 있었다. 먼저 계엄령의 위법성 여부에 관하여 살펴보면, 본 사건 당시 헌법에 대통령의 계엄선 포권을 규정하고 있으나, 계엄법 자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즉, 1948년 7월에 제정ㆍ공포 된 대한민국 헌법 제64조에서는 대통령의 계엄선포권을 규정하였다. 675) 그러나 그에 따 른 계엄법은 1949년 11월 24일에 법률 제69호로 제정ㆍ공포 676) 되었기 때문에, 본 사건 당시 계엄령은 법률에 근거하지 않은 채 선포 및 적용되었다. 따라서 당시 계엄령은 법령 선포의 일반적 요건도 갖추지 못하였다. 677) 또한 당시 한국군 내부에서도 계엄령 자체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678) 이러한 사실은 미 임시군사고문단장인 로버츠 준장이 1948년 12월 1일 국방부 참모총장에게 문서로 내린 지시에서도 나타난다. 679) 673) 참고인 이항의 통화보고서( ). 674) 신청인 최두용 ( ). 675) 동 조항에 의하면 대통령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한다 고 하여 계엄의 종류, 선포, 요 건과 효력 등을 전적으로 법률에 위임하였다. 즉, 계엄은 헌법에 근거하여 제정된 법률에 의하여 발동된 다는 특성을 지닌다. 676) 대한민국정부공보처, 관보 호외, ) 김순태, 제주4ㆍ3민중항쟁 당시의 계엄에 관한 고찰, 민주법학 제14호, 1998; 김창록, 1948년 헌 법 100조 4ㆍ3계엄령을 통해 본 일제법령의 효력, 법학연구, 부산대학교, 당시 신문에서 는 11월 1일 확대 실시된 계엄령에 대해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미연방지책 이라고 보도하였다. 경향신 문, 당시 육군참모장 정일권은 1948년 10월 26일 담화에서 금번 폭동지구에 실시된 계엄 령은 작전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후처리를 적절히 하기 위한 것 이라고 했다. 이는 당시 계 엄령의 목적이 계엄을 선포해야 할 일반적 요건에 해당되지 않고, 적절한 사후처리 였다는 점을 말해준 다. 678) 진실화해위원회가 조사한 군 참고인 45명 중 계엄령에 관해 13명이 을 했는데, 이 가운데 10명이 계 엄령의 발포 자체에 대해서 몰랐다고 했고, 발포 및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한 경 우는 1명에 불과했다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9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특히 계엄령 발포는 공포 주체와 절차에 큰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계엄령은 순천 을 진압하던 1948년 10월 22일, 현지 사령관인 제5여단장 김백일에 의해 처음 내려졌 다. 680) 그리고 진압군이 순천을 완전히 점령하고 여수를 공격하기 시작한 10월 25일, 계엄령은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대통령령 제13호로 공포되었다. 681) 이에 따라 호남 방면전투사령관은 10월 26일자로 여수ㆍ순천지구에 임시계엄을 고시했다. 11월 1일에 는 호남방면전투사령관 원용덕에 의해 계엄령이 여순지구에서 전남ㆍ북으로 확대되었 다. 682) 이승만 대통령은 10월 22일 발표에서 현지 사령관에 의한 계엄령을 인정하는 형식을 취했다. 683) 때문에 당시 국회에서도 계엄령 발포의 절차적 문제, 먼저 계엄령이 국회의 동의 없이 선포되었다는 점이 문제점으로 제기되었다. 당시 정부는 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을 부인하 다가 외신 684) 에 보도된 뒤에 해당 지구사령관에 의해 계엄령이 선포되었음을 인정하는 조치를 취했다. 685) 그러나 계엄령은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해당 지구사령관이 선포할 수 있는 것이므로 지구사령관 단독으로 계엄령을 선포했다는 사실은 정부가 계엄령에 대한 절차적 규정을 무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계엄법이 없는 상황에서 내려진 계 엄령이 헌법 제57조의 대통령 긴급명령이나 제64조의 계엄령에 해당하는지에 대해 논란 이 제기되었다. 686) 679) 로버츠는 이 지시에서 계엄령 문서를 동봉하여, 한국군 지휘관들이 계엄령에 대해 숙지하도록 하였다. Matial Law, , RG338 : Records of US Army Commands, Entry : PMGA( ) and KMGA( ), Box ) 계엄령의 주요 내용은 (1) 오후 7시부터 오전 7시까지 통행금지 (2) 옥내외 집회 일절 금지 (3) 유언비어 를 만들어 민중을 선동하는 자는 엄벌 (4) 반도를 은닉하거나 반도와 밀통하는 자는 사형 (5) 반도의 무 기와 기타 군수품을 은닉하는 자는 사형 등이었다. 사사키 하루다카, 한국전비사 - 건군과 시련 (상권), 병학사, 1977, 354쪽. 681) 대한민국정부공보처, 관보 제10호, ) 김득중, 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 성균관대 박사논문, 2004, 260~262쪽. 683) 이에 대해 경향신문에 발표된 기사는 다음과 같다. 전남지방의 국군 반란사건에 관하여 이대통령은 22 일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여수는 오늘 아침 복구되었고 다른 곳도 불원 복구될 것이다. 계엄령을 내 렸다고 외국에서 전보가 들어오고 있는데, 사령관이 내린 것은 해당지구에만 내린 것이다. 그리고 다른 지방에서 지하공작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도 있는데, 정부와 나라를 파괴하려는 자는 이 나라에서는 살지 못할 것이다. 경향신문, ) Korea units seal insurgent in south peninsula mountains, Christian Science Monitor, ) 국제신문ㆍ조선일보ㆍ경향신문ㆍ동광신문, ) 당시 유성갑 의원은 국회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제헌헌법 제64조 대통령은 법률에 의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한다 이것이 계엄령에 대한 조문입니다. 이 계엄령을 내는 데 있어서는 법률에 정해 놨느냐 안 정해놨느냐는 이것을 말씀할 뿐이지 긴급명령과 같은 것이니까 국회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는 것은 조금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어 계엄법이 제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시대 에 쓰던 법률을 그대로 답습 한 계엄령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대한민국국회속기록 제92호( 순천지역 여순사건 671

200 제3권 일반적으로 계엄은 국가의 위협이 있거나 전쟁 상황에서 행정권 또는 사법권을 군대에 이관하고 헌법에 보장된 개인의 기본권 일부를 제한하는 긴급수단이다. 687) 계엄 상황에 서도 행정과 사법은 계엄법에 준거하여 운위되어야 한다. 그러나 본 사건 당시 비록 계엄 사령관에게 행정권과 사법권이 주어졌으나, 이를 실행할 수 있는 관련 법령이나 규정은 없었다. 이는 현지에서 지역 사령관이 계엄령을 자의적으로 판단, 해석하고, 반군협력자 라는 단순한 혐의만으로 민간인을 불법연행 및 구금하거나 사살 또는 처형하는 근거가 되었다. 본 사건 당시 발포된 계엄령의 절차적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계엄포고문의 내용과 이 에 근거한 군경의 비무장 민간인 살해는 위법적인 조치였다. 설사 국가의 비상사태 하에 서 법률의 제정을 기다릴 여유가 없어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발포 된 계엄령의 내용에는 분명한 내재적 한계가 있어야만 한다. 즉, 계엄령은 엄격한 요건 하에서 필요한 최소 지역에 국한하여 발령되어야 하고, 그 내용 또한 국민의 생명권 등 기본권의 본질적인 부분을 침해할 수 없다. 일제하의 계엄령도 일정한 범죄에 한정하여 민간인을 군사재판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하였을 뿐, 민간인을 재판 없이 살해할 수 있도 록 허용하지는 않았다. 688) 또한 1949년 여순사건 후 제정된 계엄법의 내용을 보더라도, 법률 자체에서 관련 범죄 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이를 위반할 시 군법회의에서 재판하도록 하여, 계엄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는 권한의 한계를 분명히 했다. 689) 그러나 본 사건 당시 발포된 계 엄포고문은 이러한 계엄령의 일반적인 한계를 벗어나, 재판 없이 민간인을 총살에 즉 결 690)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따라서 본 사건 당시 계엄령의 발포 절차의 문제가 용인된 다 하더라도, 이러한 내용의 계엄포고를 근거로 군경이 비무장 민간인을 재판 없이 처형 하거나 살해한 사실은 명백한 위법행위였다. 본 사건의 법적 정당성 문제에서 군이 발포한 계엄령 자체의 위법성도 논란이 되지만, 계엄령 아래에서 이루어진 경찰의 포고와 군의 즉결처분 도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먼저 전남ㆍ광주지역을 관할하던 제8관구경찰청장 김병완은 11월 6일 발포한 포고문에 30.), 706쪽. 687) 김철수, 헌법학개론, 2005, 1230쪽; 권영성, 헌법학원론, 2005, 969쪽; 백윤철ㆍ김상겸, 6ㆍ25전 쟁 전후 계엄업무 수행체계, 민군관계 관련사건 연구 논문집,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05, 241쪽. 688) 김순태, 제주4ㆍ3민중항쟁 당시의 계엄에 관한 고찰, 민주법학 제14호, 1998, 272~274쪽. 689) 대한민국정부공보처, 관보 호외, ) 동광신문,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0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서 반란군 폭도 불온분자를 은닉한 자 는 물론 신고하지 않은 자, 식사, 의류, 금품을 제 공한 자 를 총살 또는 기타 형에 처할 것을 포고하였다.691) 이 포고문은 지역이나 대상을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관련 법적 근 거나 규정도 없이, 총살 또는 기타 형에 처 한다고 선포하였다. 또한 이 포고는 신고하 지 않은 자 를 비롯하여 총살 또는 기타 형에 처 할 수 있는 대상이나 범위가 과도하게 광범하고 포괄적이어서 혐의나 의심만 가지고 민간인을 사살 또는 처형할 수 있는 문제 점을 안고 있었다. 더욱이 포고령에 따른 법적 절차나 규정이 부재했기 때문에, 자연히 반군 출몰지역에 거주하거나 반군에 협조한 것으로 의심받는 민간인을 임의로 살해하는 것을 정당화할 위험을 지니고 있었다. 4) 민간인 즉결처분 의 근거와 실제 계엄령 아래에서 군이 행사한 즉결처분 은 민간인 살해나 처형을 정당화하는 주요한 근거였다. 일반적으로 즉결처분은 혐의자를 정식으로 재판에 회부하지 않는 행정조치를 의미한다. 일제시기 경찰은 조선인의 사소한 범죄에 대해 즉결처분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해방 후에 그 위법성이 문제가 되어 1946년 1월 2일 폐지되고, 대신 특별재판소 치안관이 즉결처분권을 행사하는 형태로 바뀌었다.692) 군에서도 이와 비슷한 직결(直決)처분권이 있었다. 육군본부는 한국전쟁 발발 후인 1950년 7월 25일 총참모장 정일권의 이름으로 공 포한 작전훈령 제12호에서 분대장급 이상에게 직결처분권을 부여하였으나,693) 이는 전장 에서 상관의 명령 없이 이탈한 군인에게 해당하는 조항으로 민간인에게는 적용할 수 없 다. 이때의 직결처분권도 그 위법성이 논란이 되어 1951년 7월 10일자로 폐지되었다.694) 여순사건이 발생한 직후인 1948년 10월 22일 5여단장 김백일이 선포한 계엄령에는 비 록 반도와 밀통 또는 반도를 은닉한 사람 등에 대해, 군법에 의하여 사형 기타에 처 한 다고 밝혔지만, 계엄령 위반자에 대한 재판 없는 처형, 즉 즉결이나 총살은 언급되지 않 았다.695) 691) 본관은 치안을 확보키 위하여 관하 주민에게 左와 여히 포고함 1. 何人을 막론하고 차제에 은닉 소지한 무기는 즉시 경찰관서에 납부를 명함 2. 반란군 폭도 불온분자를 은닉커나 혹은 신고치 않은 자는 역시 폭도로 인정함 3. 식사, 의류, 금품을 제공한 자 亦同 4. 右條 중에 위반한 자는 총살 또는 기타 형에 처함. 뺷동광신문뺸, ) 서울신문, ; 조선일보, ) 육군본부, 육군본부 작전훈령 제12호, 뺷한국전쟁사료뺸제65권, 1988, 38쪽. 694) 육본훈령 제191호 직결처분권 취소에 관한 건 ( ), 뺷한국전쟁사료뺸제65권, 1988, 쪽. 695) 사사키 하루다카, 뺷한국전비사 - 건군과 시련뺸(상권), 병학사, 1977, 354쪽. 순천지역 여순사건 673

202 제3권 본 사건과 관련하여, 군의 즉결처분 의 기원은 1948년 11월 1일 호남방면전투사령관 겸 계엄사령관인 원용덕이 발표한 계엄포고문에서 비롯된다. 원용덕은 1948년 11월 1일 발 표한 포고문에서 전라남ㆍ북도는 계엄지구이므로 사법과 행정 일반은 자신이 독할( 督 轄 ) 한다고 선언하면서 관ㆍ경ㆍ민에 대해, (1) 관공리는 직무에 충실, (2) 20:00시부터 05:00시까지 야간통행 금지, (3) 국군 주둔시 또는 반도 번거 접근지역에서 대한민국기 를 게양, (4) 불규남루( 不 規 襤 褸 )한 국기 게양시 국가 민족에 대한 충실이 부족하다고 인 정, (5) 반란분자 혹은 선동자는 즉시 근방 관서에 고발, (6) 폭도나 폭도의 무기ㆍ금전 등을 은닉하지 말 것, (7) 군사행동을 추호라도 방해하지 말 것 등을 철저히 준수할 것을 명령하고, 이를 위반하는 자는 군율에 의하여 총살에 즉결(진하게 처리-인용자) 한 다 696) 고 공고하였다. 원용덕이 계엄포고문에서 밝힌 총살에 즉결 한다는 내용은 군이 계엄지구에서 민간인 을 즉결처분 할 수 있는 권한, 실제로는 처형이나 총살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의 근거가 되었다. 당시 본 사건 진압작전에 참여하였던 군 참고인 가운데 일부는 군의 민간인 즉 결처분 이 계엄령에 법적 근거를 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12연대 연대본부 작전 선임하 사로 근무했던 참고인 김은 즉결처분권이란 육군참모총장이 전시 상황에서 지휘관 들에게 생사여탈권을 위임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697) 12연대 2대대 5중대장이었던 임 도 즉결처분 명령은 현지 사령관이 포고한 계엄령에 근거해 있었다 고 하였다. 698) 당시 즉결처분 은 군이 법적 절차나 재판 없이 민간인을 임의적으로 살해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699) 군이 본 사건의 진압작전 과정에서 즉결처분 에 의해 민간인을 살해한 사 실은 당시 공식 기록에서도 일정하게 방증된다. 비록 시기적으로 나중의 일이지만, 본 사 건 발생지역에서 즉결처분 에 따른 민간인 살해는 국회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1949년 10 월 5일, 제14차 국회 본회의에서 민국당의 조영규 의원은 여순사건 당시는 소위 즉결처 분이라는 명목으로 많은 사람이 처단되었으며, 현재도 삼남지대에서 실시 되고 있다고 지적함으로써, 즉결처분 의 법적 근거와 한계 가 논란이 되었다. 700) 또한 1949년 1월 8 일 호남지구 헌병사령관 김인경 대위는 작전지구가 아닌 각 지방에서 극소수의 반도 또 는 폭도를 즉결처분한 예가 있다 고 지적하면서, 앞으로 이러한 사실이 있으면 당사자는 696) 동광신문, ) 참고인 김 ( ). 698) 참고인 임 ( ). 699)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팀, 여수 14연대 반란 녹취록 ( 방영). 700) 동아일보ㆍ경향신문, ㆍ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0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물론 책임자까지 엄벌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701) 이러한 담화는 계엄지구인 작전지 구에서는 즉결처분 이 있었으며, 이는 문제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법적 정당성 여부를 떠나 본 사건 발생지역인 순천을 비롯한 계엄지구ㆍ 작전지구에서 계엄령에 근거한 즉결처분 이 적에 협력한다고 간주된 민간인 처형과 살해 의 방법으로 일반적으로 적용되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본 사건에서 2연대ㆍ3연대ㆍ4연대 ㆍ12연대ㆍ15연대 소속 군 참고인이나 경찰 참고인 가운데 군 지휘관 일부는 즉결처분 을 부인하고 있다. 12연대 부연대장으로 순천 진압작전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던 백은 12연대 군인들은 즉결처분권 이 없었으며, 민간인 즉결처분 명령을 받은 적도 없다고 진 술하였다. 702) 반면, 12연대 2대대 5중대장으로 진압작전에 참여했던 임은 당시 즉 결처분권 이 있었으며, 민간인에게 행사되었다 고 하고 있다. 또한 2연대ㆍ3연대ㆍ4 연대ㆍ5연대ㆍ12연대ㆍ15연대 출신 군 참고인 대부분과 일부 경찰 참고인도 즉결처분 권 에 근거해서 민간인 살해가 일반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인정하고 있다. 703) 계엄령에 따른 즉결처분권 의 존재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군의 민간인 즉결처분 은 여 러 가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즉결처분 은 법적 요건과 정당성을 결여하고 있었다. 먼저 1948년 11월 1일의 계 엄포고문에 근거하더라도, 즉결총살은 군율 에 따르도록 규정되었으나, 군율도 적시하 지 않았다. 나아가 민간인을 즉결처분, 곧 총살하는 과정에서 당시 민간인에게 적용할 수 있는 관련 법령을 따르지 않았다. 당시 정부는 군사에 관련 있는 범죄에 대해서는 군민 을 막론하고 군법에 준거하여 처단 한다는 방침을 밝히면서 계엄지구에서 이른바 반도 701) 한성일보, ) 참고인 백 ( ) 그러나 백은 다른 증언에서는 계엄령 하에서 즉결처분권이 있 었지만, 민간인을 즉결처형한 사실은 없다고 증언했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팀, 여수 14연 대 반란 녹취록 ( 방영). 703) 참고인 서 ( ); 참고인 박 통화보고서( ); 참고인 서 ( ); 참고인 서 ( ); 참고인 서 면담보고서( ); 참고인 김 통화보고서( ); 참고인 한, 면담보고서( ); 참고인 유, 면담보고서 ( ); 참고인 유 통화보고서( ); 참고인 전 통화보고서( ); 참고인 박 통화보고서( ); 참고인 전 ( ); 참고인 김 ( ); 참고인 조 ( ); 참고인 전 ( ); 참고인 최 면담보고서( ); 참고인 최 통화보고서( ); 참고인 이 면담보고서( ); 참고인 전 통화보고서( ); 참고인 강 통화보고서( ); 참고인 진 통 화보고서( ); 참고인 이 통화보고서( ); 참고인 이 ( ); 참고인 정 통화보고서( ); 참고인 김 통화보고서( ); 참고인 윤 조 서( ); 최 증언록, 김 증언록, 김 증언록, 한국전쟁 증언록, 군사편찬연구 소 소장. 순천지역 여순사건 675

204 제3권 들에 대한 고등군법회의를 설치하였다. 704) 비록 나중의 일이지만, 1949년 10월 국회에서 여순사건 당시 즉결처분의 명목으로 많은 사람이 처단된 것이 논란이 되자, 당시 법무부 장관 권승렬은 즉결처분이라는 것은 잘못된 것이므로 조사 중 에 있으며, 재판을 받지 않고 총살집행을 받았다는 것은 법의 위신상 큰 문제 라고 답변하였다. 705) 정부도 즉결 처분의 법적 요건이나 절차적 정당성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였던 것이다. 본 사건에서 많은 민간인들은 반군에 협조한 혐의로 재판절차를 거치지 않고 사살당했 다. 이러한 내용은 군 참고인 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2여단 하사관교육대 중대장 으로 근무했던 서은 순천 주둔 당시 군에 의해 민간인이 억울하게 희생되었음을 인 정한다고 했다. 당시는 군이 마음대로 사살하는 무법이어서 즉결처형이 많았다고 진 술했다. 또한 순천 외곽 지역에서 경찰이 많은 민간인을 즉결처분했다고 말했다. 706) 군 참고인 유(3연대 2대대 5중대 4소대 출신)은 총살대상자들은 주로 반란군에 협조했 다는 혐의로 잡혀온 마을 민간인들이었으며, 즉결처분이므로 약식재판은 없었다 고 하였다. 유은 또 군 정보계가 부락에 가서 수상한 이들을 잡아와서 조사를 한 뒤 약 식재판 없이 즉결처분하는 식이었다 고 했다. 707) 4연대 2대대와 5여단 병참수송부 소속 참고인 정은 광양에서 순천농림중학교로 병력 및 물자를 운반하러 들어왔다 면서, 철모에 흰 띠를 두른 진압군이 민간인들을 총살시키는 광경을 목격했다 고 했다. 그는 진압군이 민간인 수백 명을 운동장에 집결시켜 놓고 반군협력 혐의자를 색출했다 며, 누가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지목하였 고, 군인 10여 명이 운동장 앞쪽 학교 담 안 밭두렁에서 속옷만 입고 손이 묶인 민간인 40 50명을 일렬로 세워놓고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총살시켰다 고 말했다. 당시 조사 나 재판에 대해, 그런 것은 없었고, 색출되면 무조건 총살되었다 고 밝혔다. 가해부대 에 대해선 총살을 집행한 군인들의 소속은 모르겠으며, 군기대는 아니었다 고 덧붙였 다. 708) 민간인에 대한 즉결처분은 경찰 참고인의 에서도 확인된다. 경찰 참고인 황 도 진압작전 초기 군인들이 초등학교에 사람들을 집결시킨 뒤, 한 사람이 손가락 총으로 지목하면 즉결처분 하는 식이었다 면서, 면별로 전과를 올리려고 추측만으로 704) 동광신문, ) 동아일보, ) 참고인 서 ( ); 참고인 서 면담보고서( ); 참고인 서 면담보고 서( ). 707) 참고인 유 면담보고서( ). 708) 참고인 정 (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0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행하여 조사 없이 죽였다 고 하였다. 사상이나 사실관계를 구별하는 절차는 없 었다 고 덧붙였다. 709) 즉결처분에 따른 민간인 살해는 군 작전의 편의성 차원에서도 주요하게 고려되었다. 당시 군은 사건 관련 민간인의 이송과 처리로 인한 불편함 때문에 즉결처분권을 행사하 기도 했다. 3연대 2대대 5중대 소속 한는 순천시내 수색작전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연행된 반군협력자나 좌익을 호송하려면 병력과 보급이 필요하기 때문에, 작전 효율 및 편의를 위해 현지에서 바로 즉결처분했다 고 했다. 710) 본 사건에서 민간인 사살과 관련된 즉결처분의 지휘ㆍ명령계통과 그에 따른 권한은 분 명하지 않다. 다만, 참고인 을 종합하면, 즉결처분 명령이 대개 연대장 711) 이나 중 대장, 712) 소대장 713) 단위에서 내려진 것으로 드러나, 최소한 지휘관 이상 수준에서 결정 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육군본부 정보과장이었던 참고인 김은 계 엄 당시 현지 사령관은 즉결처분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고 강조하면서 당시에도 군법 회의 회부 없는 즉결처분은 명백한 불법 이었다고 지적했다. 3연대 참고인 서의 경 우, 토벌작전에 지장이 있어 빨갱이 를 즉결처분했다고 하면 문제되지 않았다 면서, 즉결처분은 연대본부까지 보고할 사안이 아니었고, 현장에서 즉결처분하고 서면보고도 아닌 구두보고 정도로 하면 되는 일이었다 고 했다. 그러나 대규모 즉결처분의 경 우, 대대장과 연대장에게 보고해야 했다 고 했다. 714) 이처럼 즉결처분 이 최소한 소대장 이상이나 연대장 그리고 계엄사령관의 명령에 근거 해 있다 하더라도, 본 사건에서는 일반적이고 광범하게 행사되었다. 즉결처분 의 주체는 위로는 연대장에서부터 군 헌병대와 정보과 요원, 그리고 일반사병에 이르기까지 광범위 하였다. 715) 이러한 사실은 군의 즉결처분 이 일정한 원칙이나 기준 없이 자의적으로 이 루어졌음을 의미한다. 709) 참고인 황 면담보고서( ); 참고인 황 ( ). 710) 참고인 한 면담보고서( ). 711) 참고인 김 ( ). 712) 참고인 임 ( ). 713) 참고인 이 면담보고서( ). 12연대 2대대본부 출신 참고인 박에 따르면, 대대본부 부관 이 동호 소위는 구례중앙국민학교로 연행된 민간인에 대해 조사 없이 즉결처분 명령을 내렸다. 참고인 박 면담보고서( ). 714) 참고인 서 ( ); 참고인 서 면담보고서( ); 참고인 서 면담보고 서( ). 715) 참고인 강 면담보고서( ); 참고인 양 ( ); 참고인 이 면담보고 서( ). 순천지역 여순사건 677

206 제3권 당시 순천지역에서 공식적인 즉결처분의 장소는 주로 구랑실재, 조곡동 죽도봉, 생목동 공동묘지, 양지맷골 등이었다. 716) 2여단사령부에 근무했던 박은 반군과 반군협조 혐 의 민간인을 잡아 여단사령부 정보참모의 사형결정으로, 여단장 결재 후 법절차 없이 사 형에 처했다 고 했다. 717) 군의 즉결처분 에 따른 민간인 살해는 작전상 불가피한 요소가 아니었으며, 현지 지휘 관의 재량에 따라 차이가 컸다. 4(20)연대본부 정보과 소속 참고인 전은 연행된 이 들에 대한 즉결처분은 지휘관, 특히 연대장의 성향에 따라 가능했다 며 당시 분대장급 이상에게 즉결처분권이 있었다 고 말했다. 718) 이러한 을 종합하면, 군의 즉결처분 은 지휘ㆍ명령계통 수준에서 통제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휘관 개인 수준에서 민간인 살해의 방법으로 자의적으로 활용ㆍ남용되었 다고 볼 수 있다. 즉결처분 이 광범위하게 행사되었다는 것은 당시 군이 의심 가는 민간 인을 아무런 절차 없이 살해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토벌작 전의 명분 아래 불법적으로 사실상의 학살이 자행되었음을 말해준다. 마. 유족의 피해 순천지역 여순사건 유족들은 하루아침에 죽은 가족을 가슴에 묻으며, 질곡 많은 삶을 살아왔다. 유족들은 가족들의 죽음 이후 정신적ㆍ경제적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유족들은 부모와 형제, 친척을 잃은 박탈감 속에서 정신적인 후유증을 겪었으며, 평범한 가족생활을 영위하지 못했다. 719) 유족 가운데에는 어머니가 눈앞에서 사살되고 자신도 총상을 입어 불구가 된 경우도 있었다. 720) 본 사건으로 인한 가족의 희생은 곧바로 가족의 해체로 이어지기도 했다. 유족 가운데 는 아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돌아오는 길에 심리적 충격으로 쓰러져 죽은 일도 있었다. 721) 임신한 상태에서 고문을 당해 태어난 자식이 후유증을 앓기도 했다. 722) 남편을 잃은 아내 716) 참고인 장 통화보고서( ); 참고인 장 통화보고서( ); 참고인 장경재 통화 보고서( ); 참고인 이용호 통화보고서( ); 참고인 윤정한 통화보고서( ); 참고인 김봉조 통화보고서( ). 717) 참고인 박 통화보고서( ). 718) 참고인 전 ( ). 719) 신청인 안금자 ( ); 신청인 방종섭 ( ). 720) 참고인 정점례 면담보고서( ). 721) 참고인 박희원 통화보고서( ). 722) 참고인 김관 통화보고서(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0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와, 자식을 잃은 어머니가 그 뒤 화병으로 죽은 가족을 따라갔다.723) 남편을 잃은 슬픔을 가슴에 간직한 채 젊은 부인은 재가했고, 유복자와 어린 자식들은 성장기에 부모 없는 설 움과 아픔을 감수하며 살아야 했다.724) 가족 모두를 잃은 자식들은 고아로 자라 피폐한 삶을 살았다.725) 대다수의 유족들은 가장의 상실로 인한 경제적 빈곤이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고 호소하고 있다. 가장과 장남의 죽음으로 하루아침에 집안의 생계가 곤경에 처하는 등 살 아남은 이들은 혹독한 가난에 직면해야 했다.726) 어린 자녀들도 제대로 학교교육을 받지 못하고 바로 막노동 일을 하는 등 어린 나이에 가족을 위해 타지로 나가 생활전선에 뛰어 들어야만 했다.727) 자식들에게 남겨진 재산이 친인척과 동네사람들에 의해 갈취되기도 했다.728) 경제적으로 빈곤했고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상급학교 진학이나 좋 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했다.729) 교육과 취업의 기회가 제한되 면서, 가난은 자연스레 대물림되었다. 막노동꾼 유족의 아들이 포크레인 기사가 되었고, 식모살이 유족의 딸이 식당일을 다녔다.730) 유족들은 사회적으로도 빨갱이의 자식 또는 불순분자의 자식 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 723) 신청인 박종대 ( ). 724) 신청인 허택 통화보고서( ). 신청인 지정애는 부친의 죽음으로 생계를 책임진 어머니가 자신 을 큰아버지 댁에 맡겨, 하루에 고구마 하나를 먹으며 겨우 연명했다 고 눈물지었다. 참고인 조는 모친의 죽음으로 백일 된 막내동생이 젖을 못 먹어 죽었다 고 말했다. 신청인 지정애 통화보고서( ); 참고인 조 면담보고서( ). 신청인 김영기는 어머니가 재가해 할머니 밑에서 자 랐다 면서 가난해서 배우질 못했다 고 말했다. 신청인 김영기(직다-1415) ( ). 725) 신청인 정인순 ( ); 신청인 안금자 ( ). 진실화해위원회는 신청인 정인순에게 전화를 걸어 사건에 관해 문의했으나, 신청인은 울먹이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신청인 최두 용은 유족의 피해를 묻는 질문에 9남매 가운데 5남매가 죽었다 며, 남은 형제들은 전국 각지로 뿔뿔이 흩어져 머슴살이나 식모살이로 연명했다 고 울먹였다. 신청인 최두용 ( ). 726) 신청인 김용출 ( ); 신청인 최종우 ( ); 신청인 최용식 ( ); 신청인 김용순 ( ); 신청인 정수환 ( ); 신청인 신대 우 ( ); 신청인 최두용 ( ); 신청인 허택 통화보고서( ); 신청인 정재종 통화보고서( ); 신청인 박종영 ( ). 727) 신청인 김영기(직다-3615)는 부친의 부재로 집안이 기울어 초등학교도 못 나왔다고 깊은 한숨을 지었다. 신청인 김영기 ( ); 신청인 이양기 ( ); 신청인 최두용 ( ); 신청인 허택 통화보고서( ); 신청인 박종대 ( ). 728) 신청인 이진휘 ( ). 729) 신청인 이양기 ( ); 신청인 박종대 ( ) 신청인 허택 통화보고서 ( ); 신청인 황정수 ( ). 730) 포크레인 일 다니는 40대 아들이 막노동 일하는 아버지께 아버지는 왜 저를 공부를 안 시켰느냐 고 울 면서 따졌다. 늙은 아버지는 집안형편이 어려워 나도 배우질 못하지 않았느냐 며 같이 울었다. 신청인 이양기 ( ). 신청인 박종대는 본인은 국민학교도 제대로 못 나왔고, 어머니는 남의 집 식모살이를 했다 며 지난 세월이 너무도 모질었다 고 울었다. 신청인 박종대 ( ). 순천지역 여순사건 679

208 제3권 며 살아왔다. 이러한 사회적 차별과 냉대는 어린 시절에 그치지 않고 성장하여 사회에 진 출할 때도 커다란 장애가 되었다. 유족들은 해외 출국, 취직이나 승진, 사관학교 입학 및 공무원시험, 기타 일상생활 등에서 신원조회나 연좌제로 인한 여러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했다.731) 어떤 유족은 이러한 사회적 차별의 장벽을 절감하고 취업을 포기하거나, 학업과 꿈을 접었다.732)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일도 있었다.733) 일부 유족들은 이러한 사회적 차 별을 면해보고자 각고의 노력을 하거나 편법을 동원해야 했다.734) 유족들은 한국사회의 반공주의 하에서 사회구성원, 혹은 시민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사실상의 이등국민으로 살아왔다. 유족들은 본 사건 이후 요시찰인 이나 관찰보호자 또 는 사살자(처형자) 연고자 로 등재되어 국가의 감시와 통제대상이 되었다. 일례로 전라남 도경찰국은 각 관할경찰서에 1969년 12월 한국전쟁 전후 사살자 유자녀들의 동향 을 감 시하여, 불순분자와의 접선 사실 및 친목계 등 조직사항을 철저히 내사 하라는 지시를 내 렸다.735) 순천경찰서 사찰형사주임과 서면지서 주임으로 근무한 참고인 안에 따르면, 순천경찰서는 순천 진압 이후부터 사살자명부 와 부역자명부 를 작성하여 관리하기 시작 했다.736) 본 사건 이후 유족들은 이러한 명부에 사살자 의 가족이나 연고자 로 기재되어, 731) 참고인 김관 통화보고서( ); 신청인 박철근 통화보고서( ); 신청인 공준모는 현역으 로 입대, 논산훈련소에서 전방으로 자진 지원을 했다. 자신의 출생성분을 지우기 위해 더 열심히 군생활 을 하리라 맘먹은 그였다. 그러나 군 인사담당자가 말했다. 넌 빨갱이 가족이라서 안 돼. 신청인 공준모 ( ). 732) 신청인 권종국은 유족의 피해를 묻는 질문에 아버지가 죽어 취업은 일치감치 포기하고 농사를 지었다 고 말했다. 신청인 권종국, ( ). 신청인 김영수는 황전국민학교를 1등으로 졸업하고 우 수한 성적으로 순천중고를 다녔다. 어느 날 면 서기하던 동네어른이 니가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빨간 줄 이 있어서, 공무원이나 좋은 직장에 다니기 힘들다 고 말해, 방황도 하고 괴로워했다. 이후 생선 소매업 으로 진로를 바꿨다. 아버지를 잃고 모친은 행상으로 입에 풀칠만 했다. 신청인 김영수 통화보고서( ); 신청인 송기충 통화보고서( ). 733) 신청인 양병옥 ( ); 참고인 정숙정 ( ). 734) 신청인 박종영은 16살에 홀로 상경해, 구두닦이를 하면서 검정고시로 중학교를 졸업했다. 신청인 박종영 ( ). 참고인 김관은 부친의 죽음으로 형이 취직시험에 떨어지자 어머니가 돈을 써서 해결해주었다 면서, 본인도 공무원시험 때 신원조회 때문에 낙방하니까 돈을 써서 합격하게 해주었다 고 말했다. 참고인 김관 통화보고서( ). 735) 사살자 가족 동향 감시 철저 지시 (전남경찰국 정보 , ). 전라남도 각 경찰서에서는 이에 의거하여 사살자 및 그 가족들의 명부를 작성 및 관리하면서, 유족들의 동향을 감시하고, 이를 전 남경찰국에 보고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1969년 12월 8일 전남 진도경찰서는 전남경찰국에서 하달 받은 문서와 같은 내용으로 관할지서에 사살자 가족의 일람표 를 작성하여 비치하고 진도경찰서에도 보 고하라고 지시했다. 사살자 가족 동향 감시 철저 (진도경찰서 정보 , ). 이에 진도경 찰서의 각 지서에서는 사살자 와 그 연고자 의 인적사항 및 동향을 기재한 명부를 작성하여 진도경찰서 에 보고하였다. 사살자 가족 동향 감시 철저 (각 지서, ). 736) 참고인 안은 순천경찰서의 사살자명부, 부역자명부 가 순천 진압 이후부터 곧바로 작성ㆍ관리되 어 왔다고 했다. 참고인 안 녹취록(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0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경찰 등 공안기관의 사찰대상이 되었다.737) 본 사건의 조사에서 드러난 유족들의 공통된 소망은 무고하게 죽은 가족들의 억울함을 규명하여 명예를 회복하고, 이로써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는 것이었다. 유족들은 희생자들 의 진실이 밝혀져 살아남은 가족으로서 도리를 다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Ⅲ. 결론 및 권고사항 1. 결론 가. 강재수(姜裁秀, 직다-324) 외 438명은 여순사건 직후인 1948년 10월 말부터 1950년 2월까지 순천시내, 승주읍, 서면, 월등면, 황전면, 상사면, 해룡면, 주암면, 외서면, 낙안 면, 별량면 등 순천시 일대에서 국군 제2연대(1ㆍ2대대)ㆍ제3연대(1ㆍ2대대)ㆍ제4(20) 연대(1ㆍ2대대)ㆍ제12연대(1ㆍ2ㆍ3대대)ㆍ제15연대(1ㆍ2대대) 소속 부대원, 그리고 순 천경찰서 경찰에 의해 불법적으로 집단사살됐다. 나. 국군 제2연대는 1대대ㆍ2대대를 중심으로, 순천 진압작전부터 1949년 초까지 순 천시내 민간인을 연행해 북국민학교, 순천농림중학교에서 고문 및 취조한 후 북국민학교, 순천농림중학교 건물 뒤편에서 집단사살했다. 다. 국군 제3연대 1대대와 2대대 부대원들은 순천 진압작전 이후 1949년 초까지 순천농 림중학교와 순천 철도국에 주둔하면서 순천 거주 민간인을 불법적으로 사살하거나 연행 하여 고문 및 취조한 후 북국민학교, 순천역, 낙안면 등지에서 위법적으로 사살했다. 라. 국군 제4(20)연대(1ㆍ2대대)는 순천 진압작전과 1949년 토벌작전 과정에서 순천 남국민학교와 풍덕동 옛 펄프공장, 황전ㆍ월등면 등지에 주둔하면서 별량면ㆍ순천시내ㆍ 황전면ㆍ월등면 등지에서 마을을 수색하고 소개했다. 이 과정에서 4연대는 민간인들을 주둔지로 연행하여 고문 및 취조한 뒤 사살했다. 마. 국군 제12연대(2대대ㆍ3대대)는 1948년 10월 하순, 1949년 1월 순천농림중학교, 737) 신청인 권종국 ( ). 실례로 순천경찰서에서 작성한 뺷사실조사서뺸(1980), 뺷보안기록조 회뺸(1979)에는 사살자 연고자의 현재의 동향과 국가에 공헌도 및 현재 사상 동향 항목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대상자의 직계가족은 없으나 형(兄) (한자이름) 19..년생 외 5명의 가족이 주소지에서 영농 충실하면서 새마을사업 등 국가 시책에 호응하고 생업에 충실함. 생업에 종사하며 현 국가시책에 적극 순응. 순천지역 여순사건 681

210 제3권 풍덕동 펄프공장, 구례읍 등에 주둔하면서, 순천시내ㆍ황전면ㆍ월등면 등지에서 마을을 수색하고 소개했다. 이 과정에서 제12연대는 주둔지와 북국민학교ㆍ황전지서 등지로 민 간인을 연행하여 취조한 후, 인근 순천농림중학교ㆍ양지맷골 등지에서 사살하였다. 또한 이들은 마을을 수색하고 소개한 후, 마을 인근에서 민간인을 사살했다. 특히 12연대 지휘 관들은 부대에서 소심한 부하에게 즉결처분을 지시하거나 대담한 부하에게 목을 베라고 한 뒤 총에 걸고 다니게 하는 등의 가해행위를 했다. 바. 제15연대(1ㆍ2대대)는 순천 탈환 이후부터 1949년에 걸쳐 순천남국민학교, 순천 농림중학교, 풍덕동 옛 펄프공장, 주암면ㆍ황전면 등지에 주둔하면서 순천 전 지역을 대 상으로 마을을 수색하고 주민을 소개했다. 그 과정에서 민간인들을 연행한 뒤 부락을 소 각했다. 또한 연행된 민간인들을 불법적으로 집단사살했다. 특히 15연대는 친인척들에게 반군협조 혐의가 있는 민간인들을 척살하도록 교사하거나, 민간인을 살상하여 전과를 허 위보고하는 등의 가해행위를 했다. 사. 한편, 순천경찰서 경찰은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말까지 사찰계를 중심으로 관 내 반군토벌 및 반군협력자 색출작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민간인들을 본서나 읍면별 지 서로 연행하여 고문 및 취조한 뒤 해당 관내에서 불법적으로 사살했다. 아. 조사결과,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모두 439명이다. 희생자는 강재수( 姜 裁 秀, 직다 -324ㆍ1378), 김대례( 金 大 禮, 직다-324ㆍ1378), 강옥순( 姜 玉 順, 직다-324ㆍ1378), 장 환봉( 張 環 峰, 직다-1026), 오인권( 吳 仁 權, 직다-1331), 허길성( 許 吉 星, 직다-1333), 이 기증( 李 奇 增, 직다-1334), 이기담( 李 起 淡, 직다-1335), 안두영( 安 斗 榮, 직다-1336), 이 상근( 李 相 根, 직다-1337), 박상래( 朴 相 來, 직다-1338), 여두원( 呂 斗 元, 직다-1341), 허 정년( 許 正 年, 직다-1348), 양경식( 楊 炅 植, 직다-1350), 박병구( 朴 炳 球, 직다-1351), 송 칠귀( 宋 七 貴, 직다-1352), 이효심( 李 孝 心, 직다-1352), 김임순( 金 壬 順, 직다-1352), 송 기화( 宋 基 和, 직다-1352), 허규범( 許 圭 凡, 직다-1353), 정인택( 丁 仁 澤, 직다-1354), 허 필동( 許 弼 同, 직다-1355), 허갑진( 許 押 震, 직다-1357), 허만두( 許 萬 斗, 직다-1357), 배 학선( 裵 學 善, 직다-1358), 정기영( 鄭 基 榮, 직다-1360), 정추택( 鄭 樞 澤, 직다-1361), 김 철중( 金 喆 中, 직다-1366), 김원기( 金 源 基, 직다-1367), 정기석( 鄭 基 碩, 직다-1368), 나 성환( 羅 成 煥, 직다-1371), 홍목침( 洪 木 沈, 직다-1373), 정선례( 鄭 善 禮, 직다-1373), 홍 일순( 洪 一 順, 직다-1373), 홍재호( 洪 在 鎬, 직다-1373), 위형량( 魏 瑩 良, 직다-1374), 조 정순( 趙 正 順, 직다-1375), 이삭심( 李 朔 心, 직다-1375), 김용기( 金 容 基, 직다-1376), 이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1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공월( 李 空 月, 직다-1377), 강양수( 姜 陽 秀, 직다-1379), 조성림( 趙 成 林, 직다-1380), 공 재권( 孔 在 權, 직다-1381), 오연심( 吳 連 心, 직다-1381), 김영모( 金 永 模, 직다-1382), 박 기옥( 朴 基 玉, 직다-1383), 박유만( 朴 有 萬, 직다-1384), 이상연( 李 相 連, 직다-1385), 박 기영( 朴 基 英, 직다-1389), 김용연( 金 容 淵, 직다-1390), 김태구( 金 泰 求, 직다-1392), 장 석남( 張 錫 楠, 직다-1394), 황만수( 黃 萬 壽, 직다-1395), 김복종( 金 福 鍾, 직다-1396), 유 복암( 兪 福 岩, 직다-1397), 이복석( 李 福 石, 직다-1398), 제갈숙( 諸 葛 淑, 직다-1400), 제 갈아지( 諸 葛 可 只, 직다-1401), 이봉주( 李 鳳 柱, 직다-1402), 고재옥( 高 在 玉, 직다-1403), 김성균( 金 晟 均, 직다-1404), 윤우암( 尹 又 巖, 직다-1407), 이희철( 李 熙 哲, 직다-1408), 김용배( 金 容 培, 직다-1409), 권성옥( 權 性 玉, 직다-1411), 이기찬( 李 基 贊, 직다-1412), 이삼근( 李 三 根, 직다-1413), 김인석( 金 仁 錫, 직다-1415), 장용암( 張 龍 岩, 직다-1421), 장종환( 張 鍾 桓, 직다-1421), 방용규( 房 鏞 圭, 직다-1422), 방영규( 房 泳 圭, 직다-1422), 박재규( 朴 在 圭, 직다-1423), 정귀남( 鄭 貴 男, 직다-1424), 전덕상( 全 德 相, 직다-1427), 박명구( 朴 明 九, 직다-1428), 최석호( 崔 石 鎬, 직다-1429), 박성일( 朴 聖 一, 직다-1431), 김점례( 金 点 禮, 직다-1433), 최채용( 崔 彩 鎔, 직다-1433), 최덕용( 崔 德 鎔, 직다-1433), 최덕심( 崔 德 心, 직다-1433), 최창용( 崔 昌 鎔, 직다-1433), 최정호( 崔 廷 鎬, 직다-1433), 최경심( 崔 敬 心, 직다-1524), 신태수( 申 泰 秀, 직다-1781), 황종부( 黃 鍾 涪, 직다-1792), 박노은( 朴 魯 銀, 직다-1948ㆍ1970), 이장순( 李 長 順, 직다-1948ㆍ1970), 박옥란( 朴 玉 蘭, 직다-1948ㆍ1970), 한관섭(직다-2246), 박동련( 朴 東 連, 직다-2278), 양두남( 梁 豆 男, 직다-2329), 황천식( 黃 天 植, 직다-2626), 이영오( 李 永 五, 직다-2795), 박상교(직다 -3001), 김희곤(직다-3002), 정맹현( 丁 孟 鉉, 직다-3362), 서병중( 徐 丙 中, 직다-3369), 이상호( 李 祥 昊, 직다-3381), 정기홍(직다-3382), 허종순( 許 鍾 順, 직다-3435), 이영수 ( 李 永 洙, 직다-3490), 허만우( 許 萬 佑, 직다-3614), 김용수( 金 容 洙, 직다-3615), 박현석 ( 朴 現 錫, 직다-3616), 박영옥( 朴 永 玉, 직다-3733), 남동산( 南 東 山, 직다-3734), 임병순 ( 林 炳 順, 직다-3734), 정일천(직다-3735), 송삼덕( 宋 三 德, 직다-3735), 이선권( 李 先 權, 직다-3837), 송기찬( 宋 基 贊, 직다-3882), 정순원( 鄭 順 源, 직다-3885), 송기봉( 宋 基 琫, 직다-3886), 최석호( 崔 錫 澔, 직다-4050), 이소유( 李 小 臾, 직다-4075), 최병주( 崔 炳 周, 직다-4383), 최동두( 崔 東 斗, 직다-4926), 방기현( 方 琪 現, 직다-4927), 송태은( 宋 泰 銀, 직다-4974), 박계호( 朴 桂 浩, 직다-5010), 박정호( 朴 政 浩, 직다-5011), 지득권( 池 得 權, 직다-5053), 방윤섭( 方 允 燮, 직다-5288), 박선호( 朴 繕 浩, 직다-5290), 박임석( 朴 壬 錫, 직다-5302), 정현순( 鄭 玄 順, 직다-5302), 박영구( 朴 永 求, 직다-5303), 오연근( 吳 連 根, 순천지역 여순사건 683

212 제3권 직다-5729), 민계식( 閔 季 植, 직다-6267), 김점수( 金 点 秀, 직다-6289), 우영철( 禹 榮 哲, 직다-6382ㆍ6419), 정태구( 鄭 泰 龜, 직다-6384), 김홍연( 金 烘 淵, 직다-6385), 황인주 (황인주, 직다-6419), 서평촌(서평촌, 직다-6419), 김옥순(김옥순, 직다-6419), 황하연 (황하연, 직다-6419), 황종은(황종은, 직다-6419), 방광수(방광수, 직다-6419), 안태현 (안태현, 직다-6419ㆍ7165), 김삼수(김삼수, 직다-6419ㆍ7165), 안종만(안종만, 직다 -6419ㆍ7165), 안선자(안선자, 직다-6419ㆍ7165), 최경식( 崔 敬 植, 직다-6535), 김길 동( 金 吉 童, 직다-6536), 주두신( 朱 斗 新, 직다-6572), 주성창( 朱 成 錩, 직다-6572), 최인 규( 崔 仁 奎, 직다-6646), 최진규( 崔 珍 圭, 직다-6646), 최승수( 崔 昇 壽, 직다-6650), 최승 모( 崔 昇 模, 직다-6650), 박태윤( 朴 泰 允, 직다-6653), 박태숙( 朴 泰 淑, 직다-6653), 이군 보( 李 羣 甫, 직다-6868), 박우남( 朴 禹 南, 직다-6868), 이점례(직다-6868), 손인갑( 孫 仁 甲, 직다-6891), 허전(직다-6974), 박선규( 朴 先 圭, 직다-7009), 박윤규( 朴 允 圭, 직다 -7009), 박득규( 朴 得 圭, 직다-7010), 양회정( 梁 會 正, 직다-7076), 송임석( 宋 任 錫, 직다 -7267), 손형수( 孫 亨 洙, 직다-7270), 윤달헌( 尹 達 憲, 직다-7505), 이정철( 李 正 哲, 직다 -7640), 조한송( 趙 漢 松, 직다-7642), 이봉권( 李 奉 權, 직다-7782), 최순식( 崔 順 植, 직다 -7784), 최운식( 崔 雲 植, 직다-7785), 정순현( 鄭 順 鉉, 직다-7865), 정계현( 鄭 桂 鉉, 직다 -7865), 최진영( 崔 鎭 永, 직다-7866), 김병수( 金 炳 洙, 직다-7951), 김학수( 金 學 洙, 직다 -7951), 허영구(직다-7953), 정종신( 鄭 宗 臣, 직다-8057), 지채종( 池 采 鍾, 직다-8121), 김용환( 金 容 煥, 직다-8267ㆍ9939), 정기영( 鄭 基 永, 직다-8362), 이재선( 李 在 先, 직다 -8363), 최진숙( 崔 鎭 淑, 직다-8365), 강길수( 姜 吉 洙, 직다-8366), 강종훈( 姜 鍾 勳, 직다 -8366), 방봉애( 房 鳳 愛, 직다-8366), 허순조( 許 淳 祖, 직다-8782), 박홍기( 朴 洪 紀, 직다 -8786), 이덕행( 李 德 行, 직다-8856), 정기선( 鄭 淇 銑, 직다-8857), 양회주( 梁 會 炷, 직다 -8861), 추인수(직다-9095), 추석순(직다-9096), 추기선( 秋 基 善, 직다-9097), 추기운 ( 秋 基 雲, 직다-9097), 추형량( 秋 炯 亮, 직다-9098), 김흥열( 金 興 烈, 직다-9101), 김두표 ( 金 斗 杓, 직다-9104), 정영철( 鄭 泳 喆, 직다-9105), 박호지( 朴 浩 志, 직다-9111), 정동선 ( 鄭 東 善, 직다-9113), 김정기( 金 正 基, 직다-9114), 하재규( 河 在 奎, 직다-9116), 지태석 ( 池 泰 錫, 직다-9118), 배형회( 裵 炯 檜, 직다-9120), 박기래( 朴 錤 來, 직다-9121), 이덕심 (직다-9263), 한광수( 韓 光 洙, 직다-9433), 한익수( 韓 益 洙, 직다-9433), 황인만( 黃 仁 滿, 직다-9532), 박병근( 朴 炳 根, 직다-9893), 박병두( 朴 炳 斗, 직다-9894), 홍성표( 洪 聖 杓, 직다-9895), 박병렬( 朴 炳 烈, 직다-9896), 박병기( 朴 炳 箕, 직다-9897), 신복동( 申 福 同, 직다-9902), 김종필( 金 鍾 弼, 직다-9905), 최창열( 崔 昌 烈, 직다-9906), 조한상( 趙 漢 相,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1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직다-9911), 김화현( 金 和 鉉, 직다-9917), 이수개( 李 守 介, 직다-9918), 이준평( 李 晙 坪, 직다-9920), 오종호( 吳 宗 鎬, 직다-9922), 이계수( 李 啓 洙, 직다-9925), 신원문( 申 元 文, 직다-9929), 한상범( 韓 相 範, 직다-9934), 윤석봉( 尹 錫 奉, 직다-9935), 백학선( 白 學 先, 직다-9937), 신창우( 申 昌 雨, 직다-9942), 신현우( 申 炫 雨, 직다-9943), 이기신( 李 起 新, 직다-9946), 김만옥( 金 萬 玉, 직다-9957), 박이만( 朴 以 萬, 직다-9959), 장순심( 張 巡 心, 직다-10091), 최명순( 崔 明 順, 직다-10095), 김용태( 金 容 台, 직다-10593), 정대룡( 鄭 大 龍, 직다-10652), 정옥기( 鄭 鈺 基, 직다-10834), 최창수( 崔 暢 洙, 미신청), 정영자( 鄭 榮 子, 미신청), 김생옥( 金 生 鈺, 미신청), 김유섭( 金 有 燮, 미신청), 최진옥( 崔 鎭 玉, 미신청), 허필 윤( 許 弼 允, 미신청), 김옥태(미신청), 김현조( 金 鉉 祚, 미신청), 김학모( 金 學 模, 미신청), 이 문휴( 李 文 休, 미신청), 김관선( 金 寬 善, 미신청), 김남곤( 金 南 坤, 미신청), 김남수( 金 南 洙, 미신청), 김덕상( 金 德 相, 미신청), 김도수( 金 道 秀, 미신청), 김동길( 金 東 吉, 미신청), 김동 석( 金 東 錫, 미신청), 김동섭(미신청), 김문수( 金 汶 洙, 미신청), 김복동( 金 福 同, 미신청), 김 복수( 金 卜 壽, 미신청), 김봉옥( 金 奉 玉, 미신청), 김삼용( 金 三 用, 미신청), 김상규( 金 相 圭, 미신청), 김상근( 金 尙 根, 미신청), 김상석( 金 相 錫, 미신청), 김성권( 金 聖 權, 미신청), 김승 옥( 金 勝 玉, 미신청), 김영수( 金 永 水, 김영모ㆍ 永 模, 미신청), 김영식( 金 永 植, 미신청), 김영 한( 金 永 漢, 미신청), 김영호( 金 永 鎬, 미신청), 김오묵( 金 五 默, 미신청), 김용순( 金 用 淳, 미 신청), 김우현( 金 禹 鉉, 미신청), 김재환( 金 在 煥, 미신청), 김종실( 金 鍾 實, 미신청), 김중기 ( 金 重 基, 김동기ㆍ 東 基, 미신청), 김탁모( 金 鐸 模, 미신청), 김태모( 金 泰 模, 미신청), 김택모 (미신청), 김한동( 金 漢 東, 미신청), 김현수( 金 現 洙, 미신청), 김홍만( 金 烘 萬, 미신청), 남병 수( 南 炳 洙, 미신청), 남병화( 南 炳 化, 미신청), 남종태( 南 鍾 泰, 미신청), 문동원( 文 東 元, 미 신청), 문의준( 文 義 俊, 미신청), 문태준(미신청), 박가오( 朴 佳 五, 박양선ㆍ 良 善, 미신청), 박경호( 朴 京 浩, 미신청), 박기열( 朴 基 烈, 미신청), 박기조( 朴 奇 祚, 미신청), 박대규( 朴 大 圭, 미신청), 박병문( 朴 炳 文, 미신청), 박병은( 朴 炳 殷, 미신청), 박병태( 朴 炳 泰, 박병록ㆍ 炳 彔, 미신청), 박병호( 朴 炳 浩, 미신청), 박봉민( 朴 鳳 玟, 미신청), 박성춘( 朴 成 春, 박꺼꾸리, 미신 청), 박영천( 朴 永 天, 미신청), 박용규( 朴 容 圭, 박명규ㆍ 明 圭, 미신청), 박우동( 朴 佑 同, 박호 동ㆍ 浩 同, 미신청), 박재규( 朴 再 圭, 박재규ㆍ 在 圭, 미신청), 박적석( 朴 積 錫, 미신청), 박종 대( 朴 鍾 大, 미신청), 박태현( 朴 泰 鉉, 미신청), 박현래( 朴 鋧 來, 미신청), 박형동( 朴 炯 東, 미 신청), 박형래(미신청), 박호순( 朴 浩 淳, 미신청), 방무길( 方 武 吉, 미신청), 배병문( 裵 炳 文, 배재문ㆍ 在 文, 미신청), 서덕용( 徐 德 用, 미신청), 서문석(미신청), 서종오( 徐 鍾 午, 미신청), 서홍석(미신청), 선병률( 宣 炳 律, 미신청), 선병문( 宣 炳 文, 미신청), 선병우(미신청), 선복 순천지역 여순사건 685

214 제3권 환( 宣 福 煥, 선복안ㆍ 福 安, 미신청), 선쌍수( 宣 雙 洙, 미신청), 선화근( 宣 和 根, 미신청), 손일 권( 孫 日 權, 미신청), 손일문( 孫 日 文, 미신청), 신경우(미신청), 신래휴( 申 來 休, 미신청), 신 설우( 申 雪 雨, 미신청), 안경환( 安 敬 煥, 미신청), 안귀섭( 安 貴 燮, 안병섭ㆍ 秉 燮, 미신청), 안 기호( 安 琪 鎬, 미신청), 안봉우( 安 琫 右, 미신청), 안봉주( 安 奉 柱, 미신청), 안봉준( 安 琫 準, 미신청), 안삼종( 安 三 鍾, 미신청), 안순동( 安 詢 同, 미신청), 안점수(미신청), 안창섭( 安 昌 燮, 미신청), 양전( 楊 槇, 미신청), 양태승( 梁 太 昇, 양태승ㆍ 泰 勝, 미신청), 이태근 (미신청), 오경옥( 吳 景 玉, 미신청), 오기수( 吳 基 洙, 미신청), 오기주(미신청), 오순용( 吳 順 龍, 미신 청), 유영찬( 劉 永 贊, 미신청), 유익상( 劉 翊 相, 미신청), 유일상( 劉 日 相, 미신청), 유일준( 兪 日 濬, 유낙준ㆍ 樂 俊, 미신청), 유장렬( 柳 長 烈, 미신청), 유장효( 劉 長 孝, 미신청), 윤대준( 尹 大 俊, 윤대로ㆍ 貸 露, 미신청), 윤상현( 尹 商 鉉, 미신청), 윤선종( 尹 善 鍾, 미신청), 윤영학( 尹 永 學, 미신청), 이강철( 李 康 哲, 미신청), 이경모( 李 京 模, 미신청), 이경의( 李 京 義, 미신청), 이금년(미신청), 이기홍( 李 起 洪, 미신청), 이만석( 李 萬 石, 미신청), 이분년( 李 分 年, 이피우 ㆍ 皮 佑, 미신청), 이옥재( 李 玉 宰, 미신청), 이용기( 李 鏞 基, 이용규ㆍ 龍 圭, 미신청), 이윤갑 ( 李 允 甲, 미신청), 이윤만( 李 允 萬, 미신청), 이의윤( 李 義 允, 미신청), 이장석( 李 長 碩, 이의 순ㆍ 義 順, 미신청), 이정호( 李 貞 鎬, 미신청), 이종배( 李 鍾 培, 미신청), 이종태( 李 鍾 泰, 미신 청), 이진철( 李 鎭 徹, 미신청), 이채동( 李 彩 同, 미신청), 이춘기(미신청), 이팔형( 李 八 炯, 미 신청), 이형순( 李 珩 順, 이형태ㆍ 亨 泰, 미신청), 임경주( 林 敬 周, 미신청), 임병익( 任 炳 翊, 미 신청), 임종환( 林 鍾 環, 미신청), 임혁동( 任 赫 東, 미신청), 장공수( 張 公 洙, 미신청), 장귀수 ( 張 貴 洙, 미신청), 장기태( 張 基 台, 미신청), 장길수( 張 吉 水, 미신청), 장당규( 張 鎕 奎, 미신 청), 장문종( 張 文 鍾, 미신청), 장사종( 張 四 鍾, 미신청), 장양호(미신청), 장운석( 張 云 錫, 미 신청), 장재석( 張 在 錫, 미신청), 장치옥( 張 致 鈺, 미신청), 전경민( 全 敬 珉, 미신청), 정갑래 ( 鄭 甲 來, 미신청), 정관삼(미신청), 정귀의( 鄭 貴 義, 미신청), 정규현( 鄭 圭 鉉, 정기현ㆍ 基 鉉, 미신청), 정기택( 丁 基 澤, 미신청), 정동안( 鄭 東 安, 미신청), 정병학( 鄭 炳 學, 미신청), 정양 택( 鄭 良 澤, 미신청), 정연균( 鄭 連 均, 정영균ㆍ 永 均, 미신청), 정영임( 丁 永 任, 미신청), 정영 화( 鄭 瑛 和, 미신청), 정용선( 丁 龍 善, 미신청), 정용호( 鄭 鏞 浩, 미신청), 정종화( 鄭 宗 和, 미 신청), 정현지( 鄭 泫 知, 미신청), 제갈도금( 諸 葛 道 金, 미신청), 조경섭( 趙 敬 燮, 미신청), 조 경술( 趙 京 述, 미신청), 조규조( 趙 圭 祚, 미신청), 조삼훈( 趙 三 勳, 미신청), 조수영( 趙 秀 永, 미신청), 조학섭( 趙 學 燮, 미신청), 지만동( 池 萬 烔, 미신청), 지만형(미신청), 지유섭( 池 有 燮, 미신청), 지한모( 池 漢 模, 미신청), 차상렬( 車 相 烈, 미신청), 최규관( 崔 奎 寬, 미신청), 최규삼( 崔 圭 三, 최규동ㆍ 圭 東, 미신청), 최상문(미신청), 최성용( 崔 成 鎔, 최성호ㆍ 成 鎬, 미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1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신청), 최일삼( 崔 日 三, 미신청), 최택림( 崔 澤 林, 미신청), 최평호( 崔 坪 鎬, 최평현ㆍ 坪 鉉, 미 신청), 최학철( 崔 學 澈, 최학철ㆍ 學 喆, 미신청), 최한용( 崔 漢 鎔, 최한호ㆍ 漢 鎬, 미신청), 하 정대(미신청), 한경수( 韓 敬 壽, 한경수ㆍ 京 洙, 미신청), 한인수( 韓 仁 洙, 미신청), 허낙구( 許 洛 九, 미신청), 허동규( 許 東 圭, 미신청), 허만관( 許 萬 寬, 미신청), 허만홍( 許 萬 洪, 미신청), 허정구( 許 貞 九, 미신청), 허태광( 許 泰 光, 미신청), 황영재( 黃 榮 在, 미신청) 등 총 439명으 로 확인되었다. 조사결과, 1948년 10월 말에서 1950년 2월까지 순천지역 여순사건에서 군경에 의한 민 간인 희생자 수는 약 2,000여 명 정도로 추산되지만, 정확한 피해규모는 파악할 수 없다. 다만, 진실화해위원회가 희생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희생자는 439명이며, 이 사건으로 희 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희생추정자는 5명이다. 바. 본 사건 희생자의 연령별 분포를 보면, 전체 439명 가운데 20대와 30대가 319명으 로 73%를 차지하였다. 성별 분포를 보면, 남자가 91.4%로 희생자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는 가장 활동적인 시기의 청년 남성이 민간인 희생의 주요 대상이었음을 보여준다. 면 별 분포에서는 순천시내권과 10개 읍면 가운데 서면과 상사면, 시내권에서 44.6%에 해당 하는 204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서면이 백운산과 인접해 있고, 광양과 구례로 가는 길목인 까닭에 반군의 이동통로로 이용되었고, 국군 15연대에 의해 발생한 판교리 노은 마을 사건과 용계산 계곡 골짜기 사건의 희생자가 많았던 점에 기인한다. 서면에서는 반 군이 근거지로 삼았던 지역이 많았고, 이에 서면 사람들이 군경과 반군의 중간에 놓이게 되면서 다른 면에 비해 희생자가 많았다고 판단된다. 사. 군경 참고인 가운데 일부는 희생자들이 반란에 가담하거나 협력한 남로당원, 지방 폭도, 빨갱이 였다고 주장하며, 가해의 정당성과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본 사건 당시 반군활동지역에 거주했던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반군에게 협조하 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에 놓여 있었다. 신청인들이 주장하는 피해이유는 대체로 이를 반 영하듯 반군과의 관련성 여부에 집중되어 있다. 첫째는 가장 일반적인 반군협조 혐의로 서 숙식이나 식량제공ㆍ노무동원ㆍ반군과의 연락이나 반군은닉 등이 대표적이었다. 여기 에는 반군이 활동한 작전지역에 거주한다는 이유로 희생된 경우도 포함된다. 둘째는 반 군에 가담한 혐의로 희생당한 경우이다. 이러한 경우 가담 혐의로 지목되었다는 추정만 있을 뿐, 구체적인 가담 사실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군경의 가해는 자의적인 성격이 강했다. 셋째는 본 사건 자체와 무관한 대살( 代 殺 )로, 바로 좌익 및 입산 순천지역 여순사건 687

216 제3권 자가족 또는 동료라는 이유로 희생된 경우이다. 이밖에도 연행이유와 피해이유를 모르거 나 무고와 모략, 고문으로 희생된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당시 군경이 민간인을 자의적이 며 무리하게 연행 및 취조하고 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 본 사건의 가해주체는 국군 제2연대(1ㆍ2대대)ㆍ제3연대(1ㆍ2ㆍ3대대)ㆍ제4(20) 연대(1ㆍ2대대)ㆍ제12연대(1ㆍ2ㆍ3대대)ㆍ제15연대(1ㆍ2ㆍ3대대) 소속 부대원 그리고 순천경찰서 경찰로 확인되었다. 국군 제2연대의 지휘ㆍ명령계통은 반군토벌전투사령부(사령관 송호성 준장) 제2여단 장(원용덕 대령) 제2연대장 이 제1대대장 박로 확인되었다. 국군 제3연대의 지휘ㆍ명령계통은 반군토벌전투사령부(사령관 송호성 준장) 제5여단장(김백일 중령) 제3연대장 함 제1대대장 박ㆍ제2대대장 조ㆍ제3대대장 한로 확인되 었다. 국군 제4(20)연대의 지휘ㆍ명령계통은 반군토벌전투사령부(육군준장 송호성) 호 남방면전투사령관(제2여단장 원용덕) 남지구전투사령관(김백일 중령) 4연대장 이 ㆍ위ㆍ박 제1대대장 유ㆍ제2대대장 이ㆍ제3대대장 오으로 확인 되었다. 국군 제12연대의 지휘ㆍ명령계통은 반군토벌전투사령부(육군준장 송호성) 호 남방면전투사령관(제2여단장 원용덕) 남지구전투사령관(제5여단장 김백일) 제12연대 장 백ㆍ백ㆍ송석하 1대대장 허ㆍ2대대장 김ㆍ3대대장 이ㆍ연 로 확인되었다. 1949년 3월 1일 이후에는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정일권)가 구례 지역에서 작전을 지휘하였다. 국군 제15연대의 지휘ㆍ명령계통은 반군토벌전투사령부 (육군준장 송호성) 호남방면전투사령관(제2여단장 원용덕) 남ㆍ북지구전투사령관(제5 여단장 김백일ㆍ제2여단장 원용덕) 광주5사단(사단장 원용덕) 제15연대장 신ㆍ 김ㆍ윤ㆍ송 1대대장 이ㆍ양ㆍ김ㆍ2대대장 최ㆍ3대대장 최으로 확인되었다. 결국 본 사건은 현지 토벌작전 지휘관의 명령 아래 발생했지만, 최종적인 감독 책임은 국방부 그리고 대통령 이승만과 국가에 귀속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순천지역 경찰은 이중의 지휘ㆍ명령계통 하에서 활동했다. 하나는 순천지역 계엄 사령관 순천경찰서장, 다른 하나는 제8관구경찰청(전남경찰국) 순천경찰서장으로 하 달되는 계통이었다. 본 사건 당시 순천경찰서장은 변ㆍ양ㆍ손ㆍ이이었 다. 그리고 당시 제8관구경찰청장(전남경찰국장)은 김ㆍ김이었다. 경찰 최상급 기관인 내무부 치안국이 본 사건과 관련하여 직접 명령을 내렸거나 보고받았는지는 확인 할 수 없지만, 지휘 및 관리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1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자. 본 사건 과정에서 군경당국은 본 사건 관련자를 체포하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민간 인에 대한 무차별적 연행, 불법적인 취조와 고문, 자의적인 심사와 분류에 따른 살해 등 여러 가지 형태의 불법행위를 자행하였다. 본 사건에서 군경이 작전 과정에서 민간인을 살해한 근거는 계엄령에서 비롯된다. 그 러나 본 사건 당시 계엄령은 계엄법이 부재한 상황에서 공포되었고, 비록 계엄사령관에 게 행정권과 사법권은 주어졌으나, 이를 실행할 수 있는 관련 법령이나 규정은 없었다. 본 사건 당시 현지 지역 사령관은 계엄령에 대한 자의적인 판단 아래, 민간인을 반군협력 자라는 혐의만으로 불법적으로 연행하여 살해하였는데, 이는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는 계엄령의 일반적 한계를 벗어난 위법적인 행위였다. 계엄령 아래에서 이루어진 군의 즉결처분권 은 민간인 살해나 처형을 정당화하는 주요 한 근거였으나, 법의 일반적 요건이나 정당성을 결여하고 있었다. 계엄포고문에서 즉결처분은 군율 에 따르도록 규정하였으나, 민간인을 즉결처분, 곧 임의처형하는 과정에서 관련 법 조항을 따르지 않았다. 본 사건에서 군경당국은 법적 통 제를 받지 않고 작전의 편의성이나 효율성만을 고려하여 즉결처분 을 남용하였다. 이에 많은 민간인들은 반군에 협조한 혐의만으로 재판절차를 거치지 않고 사살당했으며, 이는 즉결처분 이 사실상 학살이었음을 말해준다. 2. 권고사항 이 사건에 대하여 진실이 규명되었으므로 화해를 위한 국가의 조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가. 명예회복 조치 1) 국가의 사과 국가는 여순사건 당시 반란군토벌이라는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국민의 생명과 재 산을 보호해야 하는 군인과 경찰이 다수의 비무장 민간인들을 불법적으로 살해한 것에 대해 희생자 유족들에게 사과하는 것이 필요하다. 순천지역 여순사건 689

218 제3권 2) 위령사업 지원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위령제 봉행 등 유족들이 희생자에 대한 위령사업을 할 수 있 도록 지원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3) 가족관계등록부 정정 희생자들의 가족관계등록부를 검토한 결과, 대부분 사망일시ㆍ장소가 잘못 기재되어 있고, 특히 희생자의 유복자로 태어나 출생신고를 할 수 없어 다른 사람의 가족관계등록 부에 편입되어 있는 사례도 있다. 국가는 유족들이 원할 경우 법적 절차를 통해 가족관계 등록부에 대한 정정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 재발방지를 위한 조치 1) 역사기록 정정 및 수록 국가는 본 사건의 민간인 희생 관련 내용을 정부의 공식 간행물, 역사교과서, 군ㆍ경찰 발간 자체 간행물, 순천지역 향토사 등에 추가하거나 잘못 기술된 부분을 수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국정교과서 국사 와 검인정 한국근ㆍ현대사 등 현행 중ㆍ고교 교과서에 여순 사건 당시 민간인 집단희생 등 관련 내용을 적극적으로 기술하여 올바른 역사교육이 이 루어지도록 한다. 2) 평화인권교육 강화 국가는 군인과 경찰, 공무원을 대상으로 전쟁 중 민간인 보호에 관한 법률과 국제인도 법 교육을 실시하는 등 전시인권교육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국가는 초ㆍ중ㆍ 고등학교 학생 등을 대상으로 평화인권교육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1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별 첨] 사건 번호 신청인 일 장소 강병화 신청인 자택 장경자 진실화해위원회 오광호 허택 이진휘 이강원 안귀엽 이춘형 박병찬 여두성 허동환 양병옥 박영규 순천시 황전면사무소 진실화해위원회 진실화해위원회 진실화해위원회 순천YMCA 순천YMCA 순천YMCA 보성군 벌교읍사무소 순천시청 순천시청 순천시 서면사무소 송기충 진실화해위원회 [별첨 1] 신청인 조사상황 형태 주요 내용 통화 1949년 8월경 강재수, 김대례, 강옥순 등이 낙안면 금산리 보고서 신전마을에서 군인들에게 사살됨(1378과 중복신청) 1948년 11월 30일경 군경이 순천철도국 기관사인 아버지 장환봉 등 30 40명을 조곡동 야산에서 사살 후 시신 소각함 1948년 11월경 경찰들이 할아버지 오인권 등 70여 명을 월등 면 망룡마을 옆 골짜기에서 사살함 통화 1948년 12월 28일경 아버지 허길성이 황전지서로 연행되어 보고서 살해당함 1949년 1월 9일 경찰이 아버지 이기증 등을 월등면 갈전리 야산에서 사살함 통화 1948년 음력 11월 21일 토벌대가 아버지 이기담 등 4명을 외서 보고서 면 금성리 월평마을 도로변에서 사살함 통화 보고서 1948년 음력 11월 21일 토벌대가 아버지 안두영 등 4명을 외서 면 금성리 월평마을 도로변에서 사살함 1948년 음력 11월 21일 토벌대가 아버지 이상근 등 4명을 외서 면 금성리 월평마을 도로변에서 사살함 1948년 음력 11월 21일 토벌대가 아버지 박상래 등 4명을 외서 면 금성리 월평마을 도로변에서 사살함 1948년 10월 25일경 경찰들이 순천농림중학생이던 형 여두원 등을 순천대 근처에서 트럭에 태워간 이후 살해되었음 1949년 음력 6월 9일 서면지서 경찰들이 큰아버지 허정년 등 70여 명을 서면 학구 삼거리 부근 야산에서 사살함 1948년 11월 25일경 경찰이 서면 서기였던 숙부 양경식 등 30여 명을 순천시 생목동 공동묘지 부근 산골짜기에서 사살 후 시신 소각함 1949년 음력 11월 20일 서면 판교리 노은마을에 주둔한 군부 대가 노은마을 월치재에서 아버지 박병구 등 12명을 사살함 아버지 송정섭이 군경에게 살해됨. 이후 1949년 음력 8월 5일 서면 판교리 노은마을에 주둔한 군인들이 할아버지 송칠귀, 할머니 이효심, 어머니 김임순, 동생 송기화 등을 판교리 기동 마을 앞 보 입구에서 살해함 순천지역 여순사건 691

220 제3권 사건 번호 신청인 일 장소 허문범 진실화해위원회 형태 주요 내용 통화 1948년 양력 10월 28일 순천시 죽도봉 골짜기에서 순천경찰 보고서 서 경찰들이 형 허규범 등 70여 명을 사살함 정남두 순천시 서면사무소 1948년 12월 10일경 서면 판교리 노은마을에 주둔한 군인들이 큰아버지 정인택 등 11명을 판교리 노은마을 앞 골짜기에서 사살함 허선행 순천시 별량면사무소 1949년 음력 6월 8일 서면지서 경찰들이 작은삼촌 허필동 등을 서면 구상리 야산에서 사살함 허채구 순천시 서면사무소 1949년 음력 6월 초 서면지서 경찰들이 아버지 허갑진 등 30 여 명을 서면 압곡리 야산에서 사살함. 숙부 허만두는 1949년 3월 초 서면지서로 연행되어 경찰들에게 고문 받은 뒤 사살됨 배금엽 진실화해위원회 정재종 진실화해위원회 정태영 진실화해위원회 1949년 음력 11월 21일경 서면 판교리 노은 고개 주둔하던 3사 통화 단 군인들이 서면지서에 연행된 서면 압곡리 거주 오빠 배학선 보고서 등 12명을 서면 판교리 노은마을 인근 고개에서 사살함 1949년 11월 20일경 서면 판교리 노은마을 노은 고지에 주둔 통화 하던 3사단 군인들이 서면지서에 연행된 서면 선평리 거주 보고서 정기영 등 12명을 노은마을 앞 골짜기에서 사살함 통화 1949년 3월 13일 서면지서 경찰들이 서면 동산리 산정마을 보고서 뒷산에서 서면 운평리 거주 아버지 정추택 등 2명을 사살함 김선문 구례군청 1948년 음력 11월 1일 아버지 김철중 등 마을주민들이 서면지 서 경찰들에게 연행되어 11월 4일 순천경찰서로 이송, 이후 서면 구랑실 골짜기에서 사살됨 김천일 진실화해위원회 1949년 음력 11월 21경 서면 판교리 노은마을 인근 논치고개 통화 에 주둔한 군인들이 아버지 김원기 등 12명을 논치고개에서 보고서 살해 후 매장함 정현종 순천시청 1948년 11월 14일경 군경이 순천시 서면과 광양시 봉강면 경 계 다리 근처에서 아버지 정기석을 사살함 최동숙 순천시 낙안면사무소 낙안지서 경찰들이 시아버지 나성환 등을 1948년 12월 7일 낙안면 검암리 소재 공동묘지에서 사살함 홍동호 순천시 낙안면사무소 1949년 음력 8월 17일 군인들이 낙안면 신전마을 신청인 집 옆에서 아버지 홍목침, 어머니 정선례, 누나 홍일순, 남동생 홍재호 등 22명을 사살 후 시신 소각함 손삼순 순천시 낙안면사무소 1949년 음력 8월 17일 군인들이 낙안면 신전마을에서 시아버 지 위형량 등 22명을 사살 후 시신 소각함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2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사건 번호 신청인 일 장소 남인심 순천시 낙안면사무소 형태 주요 내용 1949년 음력 8월 17일 낙안면 신전마을에서 시어머니 조정순 과 4살 된 아이 이삭심 등 주민 22명이 군인들에게 사살된 후 시신 소각됨 김영곤 진실화해위원회 통화 1949년 음력 8월 17일 군인들이 낙안면 신전마을에서 작은아 보고서 버지 김용기 등 22명을 사살 후 시신 소각함 박종열 순천시 낙안면사무소 1949년 음력 8월 17일 군인들이 낙안면 신전마을에서 어머니 이공월 등 22명을 사살 후 시신 소각함 강병화 진실화해위원회 1949년 음력 8월 17일 군인들이 낙안면 신전마을에서 강재 통화 수, 강옥순, 김대례 등 22명을 사살 후 시신 소각함(324와 중 보고서 복신청) 강질용 순천시 낙안면사무소 1949년 음력 8월 17일 군인들이 낙안면 신전마을에서 아버지 강양수 등 22명을 사살 후 시신 소각함 장홍석 순천시 낙안면사무소 1949년 음력 8월 17일 군인들이 낙안면 신전마을에서 어머니 조성림 등 22명을 사살 후 시신 소각함 공준모 광양시청 1949년 음력 8월5일 군경토벌대가 서면 흥대리마을에 와 아 버지 공재권, 어머니 오연심, 당숙모 등 마을주민 19명을 서면 구랑실 안골계곡에서 사살함 김용석 순천YMCA 1949년 3월 5일 벌교토벌대가 아버지 김영모 등 외서면 반용 리 주민 7명을 수직마을 앞 논에서 사살함 박균호 순천YMCA 산으로 끌려간 아버지 박기옥이 외서지서로 자수 후 석방. 이후 다시 1949년 11월경 외서지서로 연행, 순천경찰서로 이 송된 뒤 사살됨 박정수 순천YMCA 1948년 음력 11월 17일 외서면 월암리 마을이장 아버지 박유만 이 반군에게 끌려간 이후 군경에게 사살됨 이상호 순천시 별량면사무소 1949년 음력 1월 8일 별량지서 경찰들이 형 이상연 등 마을주 민 4명을 별량지서 인근 공동묘지에서 사살함 박희원 순천시 별량면사무소 1949년 음력 1월 8일 별량지서 경찰들이 아버지 박기영 등 마을주민 4명을 별량지서 인근 공동묘지에서 사살함 염금순 순천 YMCA 1949년 음력 3월 5일 벌교토벌대가 큰시숙 김용연 등 8명을 반용리 수직마을 앞 논에서 사살함 순천지역 여순사건 693

222 제3권 사건 번호 신청인 일 장소 김종철 장옥자 황정수 김효수 유순오 이광섭 제갈종 제갈 덕모 이항근 고화석 김재홍 박종대 박종대 순천시청 순천시청 순천시 황전면사무소 순천시 황전면사무소 구례군청 순천시 황전면사무소 순천시 황전면사무소 순천시청 순천시청 순천시 황전면사무소 순천시 황전면사무소 순천시 황전면사무소 순천시 황전면사무소 형태 주요 내용 1949년 음력 10월 18일 상사지서 경찰들이 아버지 김태구를 연행해 상사면 오곡마을에서 상사지서로 가는 중간 지점에서 사살함 1948년 10월 30일 군인들이 황전면 면사무소 직원 아버지 장석남 등을 트럭에 태우고 조곡동 둑실마을 죽도봉 계곡에서 사살함 1948년 음력 10월 26일 군인들이 아버지 황만수 등 월등지서 에 연행된 50여 명을 월등면 농곡마을 앞산(현 월전중학교 옆. 양지맷골)에서 사살함 1948년 음력 10월 26일 군인들이 아버지 김복종 등 월등지서 에 연행된 50여 명을 월등면 농곡마을 앞산(현 월전중학교 옆. 양지맷골)에서 사살함 1948년 음력 10월 26일 군인들이 아버지 유복암 등 월등지서 에 연행된 50여 명을 월등면 농곡마을 앞산(현 월전중학교 옆. 양지맷골)에서 사살함 1948년 10월 18일 경찰이 아버지 이복석 등 5명을 연행해 월 등면 장선리 쇄정지역에서 사살함 1948년 음력 10월 26일 월등지서 경찰들이 삼촌 제갈숙 등 월등면 계월리 청년 6명을 연행해 월등면 농곡마을 양지맷골 에서 사살함 1948년 음력 10월 26일 월등지서 경찰들이 삼촌 제갈아지 등 월등면 계월리 청년 약 5명을 월전중학교 부근 양지맷골에서 사살함 1948년 음력 11월 20일 형 이봉주가 월등지서로 연행되어 월 등면사무소 앞 중봉산 아래 논 도랑가에서 사살됨 1949년 음력 8월 5일 경찰들이 아버지 고재옥 등 민간인 50여 명을 월등면 농곡마을 앞산 현 월전중학교 옆 양지맷골에서 사살함 1949년 음력 11월 16일 반군에게 끌려간 형 김성균이 월등면 계월리 집에서 밥을 먹다 경찰에게 잡혀 집 근처에서 사살됨 1949년 11월 중순경 반군에게 끌려간 삼촌 박재정이 월등면 계월리 야산에서 경찰에게 사살됨 1948년 10월 22일 군인들이 월등면사무소 근무 중이던 아버 지 박인규를 연행해 순천 방향 열차에 태워간 뒤 사살함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2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사건 번호 신청인 일 장소 윤계배 진실화해위원회 형태 주요 내용 통화 1948년 음력 10월 26일경이 월등면 계월리 거주 작은아버지 보고서 윤우암 등이 월등면 농곡마을 양지맷골에서 군경에게 사살됨 이양기 순천시 황전면사무소 1948년 음력 10월 26일 군경이 아버지 이희철을 월등지서로 연행해 월등면 농곡리 앞산 계곡인 양지맷골에서 이희철 등 40여 명을 사살함 김주곤 권종국 이순애 이영섭 김영기 장광수 방경규 순천시 황전면사무소 순천시 황전면사무소 여수시청 여수시청 순천시 낙안면사무소 광주시 북구청 순천시청 박종영 진실화해위원회 정종원 전일수 박춘근 최낙선 순천시청 순천시청 순천시청 순천시 서면사무소 1948년 음력 10월 26일 경찰들이 아버지 김용배를 월등지서로 연행 후 김용배 등 40여 명을 월등면 농곡마을 양지맷골에서 사살함 1948년 음력 10월 26일 군경이 아버지 권성옥 등을 월등지서 로 연행해 당일 월등면 농곡마을 앞산 양지맷골에서 권성옥 등 40여 명을 사살함 1948년 음력 12월 11일경 경찰이 아버지 이기찬 등 3명을 연행 해 월등면 산성마을 지사골 논에서 사살함 1948년 음력 12월 11일경 경찰이 아버지 이삼근 등 3명을 연행 해 월등면 산성마을 지사골 논에서 사살함 1948년 음력 11월 28일 낙안면 목촌리 수정마을 아버지 김인 석 집 뒤로 반군이 숨어들어와 경찰이 추궁하다 집 마당에서 김인석을 사살함 1949년 10월 31일 음력 9월 29일경 군경이 순천시 풍덕동 자 택에서 아버지 장종환을 연행해 50여 명과 함께 트럭에 태워 죽두봉산 상봉에서 사살함. 직후 할아버지 장용암이 아버지 를 찾으러 간 뒤 살해당함 1948년 11월경 순천경찰서에 맏형 방용규와 작은형 방영규가 연행됨. 방용규 등은 경찰에게 순천시 덕암동 현 이수중학교 주변에서 집단사살됨. 방영규는 순천-광양 경계 산골에서 사 살됨 통화 1948년 음력 10월 21일 상사면 오곡마을 이장 아버지 박재규 보고서 등 6명을 경찰이 상사지서로 연행해 고문하여 살해함 1949년 음력 11월초 아버지 정귀남이 주암지서로 연행되어 순천경찰서로 이송됨. 11월 15일경 서면 구랑실재에서 사살됨 1949년 음력 5월 8일 상사지서로 연행된 아버지 전덕상 등 4명 이 상사지서 뒤편 땅고개재 공동묘지에서 군경에게 사살됨 1949년 음력 5월 8일 상사지서로 연행된 아버지 박명구 등 4명 이 상사지서 뒤편 땅고개재 공동묘지에서 군경에게 사살됨 1948년 10월 말 아버지 최석호가 상사지서 경찰들에게 연행 되어 순천경찰서로 이송되어 사살됨. 1948년 음력 11월 5일 순천경찰서 정문 게시판에 최석호 사망했다는 공고문을 가족 들이 확인. 순천지역 여순사건 695

224 제3권 사건 번호 신청인 일 장소 박복구 최두용 순천시 별량면사무소 순천시 별량면사무소 박중환 진실화해위원회 신희중 황종은 박종혁 (1970과 동일사 건 신청) 박일규 (1948과 동일사 건 신청) 한재임 박준옥 공형모 최익우 황방자 이홍재 순천시청 순천시 황전면사무소 , 진실화해위원회 진실화해위원회 순천시청 순천시청 부산시 사상구청 남원시청 진실화해위원회 순천시청 형태 통화 보고서 통화 보고서 주요 내용 1949년 음력 12월 29일 별량지서 경찰들이 아버지 박성일 등 3명을 지서로 연행해 고문 뒤 별량역 뒤에서 사살함 큰형 최채용이 강제로 산에 끌려가 1949년 조계산 토벌작전 시 사살됨. 1949년 음력 5월 6일 어머니 김점례 등 4명이 상사 지서로 연행되어 5월 8일 상사면 흘산마을 땅고재 중턱에서 사살됨. 어머니 사망 뒤 둘째형 최덕용이 상사지서 앞에서 경찰에게 사살됨. 누나 최덕심, 셋째형 최창용, 막내형 최정호 도 경찰에게 사살됨 1949년 음력 7월 15일 승주읍 죽학리마을에서 경찰들이 어머 니 최경심 등 5명을 사살함 1948년 음력 10월 말 순천경찰서에 연행된 아버지 신태수 등 이 현 이수중학교 부근 공동묘지에서 경찰들에게 집단사살됨 1948년 음력 11월 13일 경찰들이 큰형 황종부 등을 황전지서 로 연행해 황전면 죽내리 공동묘지 인근 야산에서 사살함 1948년 음력 10월 30일 아버지 박노은이 낙안면 금산리 신전 마을 앞 밭 입구에서 경찰이 반란군으로 오인하여 사살함. 1949년 음력 8월 16일 군인들이 낙안면 금산리 신전마을에서 어머니 이장순, 누나 박옥란 등 22명을 사살 후 시신 소각함 1948년 음력 10월 30일 아버지 박노은이 낙안면 금산리 신전 마을 앞 밭 입구에서 경찰이 반란군으로 오인하여 사살함. 1949년 음력 8월 16일 군인들이 낙안면 금산리 신전마을에서 어머니 이장순, 누나 박옥란 등 22명을 사살 후 시신 소각함 1948년 음력 10월경 큰오빠 한관섭이 순천경찰서에 연행되어 60여 명과 함께 이수중학교 자리(죽두봉 밑)에서 사살됨 할아버지 박동련이 1948년 음력 11월 22일 토벌대의 오인사격 으로 송광면 장안리 대밭 위 할아버지 움막 앞에서 사살됨 1949년 음력 8월 14일 승주군 서면 흥대리 주민 어머니 양두 남 등 30여 명을 군인들이 소집시키고 흥대리마을 배나무골 발치에서 사살함 1948년 10월 22일 순천농림중학교 학생 형님 최춘우가 오전 등교 중 경찰에 연행되어 순천시내 초등학교로 끌려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살됨 통화 1948년 음력 10월 보름경 아버지 황천식이 순천시내에 구경 보고서 을 간다고 나갔으나 순천경찰서로 연행된 뒤 사살됨 1948년 음력 11월 19일 군경이 큰형님 이영오를 낙안면 금산 리 오리밭골 골짜기에서 사살함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2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사건 번호 신청인 일 장소 박정석 김종길 순천시청 순천시청 형태 주요 내용 1949년 음력 8월 5일 군인들이 아버지 박상교 등 서면 구상리 주민 22명을 구상리에서 백운산 가는 방향인 용계산 골짜기 에서 사살함 1949년 음력 3월 18일경 순천경찰서 경찰들이 경찰서에 연행 된 작은아버지 김희곤 등을 순천농림중학교(현 순천대) 옆 산 아래 공터에서 사살함 정동현 고흥군 대서 면사무소 고흥군 대서면 남정리 월등마을 거주 형 정맹현이 좌익들에게 끌려간 후 1949년 봄 조계산에서 진압군에게 살해됨 서길석 진실화해위원회 정기순 정기순 허순자 김용출 허수길 김영기 박영자 박정순 박정순 여수시청 여수시청 순천YMCA 순천시 황전면사무소 순천YMCA 순천시청 순천YMCA 광양시청 광양시청 정인순 광양시 광양읍사무소 이후권 진실화해위원회 통화 1949년 음력 8월 7일경 서면 청소리 거주 작은아버지 서병중 보고서 이 마을 소각 중 군인들에게 사살됨 형부 이상호가 순천 어느 중학교 수학교사로 순천시 순천면 행정 71번지 거주 중 군경에게 살해됨 1948년 10월 말 진압작전 중 군경이 순천면 거주 사촌오빠 정기홍을 잡으러 집으로 오자 정기홍이 도주, 이후 살해됨 1949년 음력 2월 8일 아버지 허종순 등이 서면 구상리 구랑실 골짜기 토굴에서 경찰에게 체포되어 그 자리에서 사살됨 1948년 음력 11월 8일경 시동생 이영수가 반란군에 협조한 이유로 황전지서로 연행 뒤 황전면 모전리 본황 마을 뒷산에 서 사살됨 1948년 음력 11월 26일경 아버지 허만우 등 20여 명이 경찰들 에게 연행되어 황전면 비촌리 야산에서 사살됨 1948년 음력 11월 16일 아버지 김용수가 서면 구상리에서 진 압군에게 끌려간 뒤 사살됨 1949년 음력 8월 5일 아버지 박현석 등이 군인들에게 서면 구상리 용계산 문바위 뒤에서 사살됨 1948년 10월경 순천농림중학교 축산과 학생회장 아버지 박 영옥이 여순사건 직후 교정에서 연설 중 경찰에 연행된 뒤 사살됨 1949년 음력 8월 5일 군인들이 서면 구상리 구랑실 뒤 안골 (용제골)에서 할머니 남동산, 어머니 임병순 등 서면 구상리 주민 97명을 사살함 1949년 가을 경찰들이 아버지 정일천, 어머니 송삼덕 등 가족 들을 서면 구상리 안골 골짜기에서 주민 100여 명과 함께 사 살함 통화 반군에게 끌려간 형 이선권이 1949년 10월 20일 토벌작전 시 보고서 상사면 도월리 미곡마을 뒷산에서 토벌대에게 사살됨 순천지역 여순사건 697

226 제3권 사건 번호 신청인 일 장소 송영종 진실화해위원회 정운산 진실화해위원회 송순심 최석근 한일상 순천시청 구례군 산동면사무소 순천시 승주읍사무소 최봉규 진실화해위원회 최종우 방종섭 송갑수 박양근 박병준 지득례 방종섭 박점덕 순천시청 순천시청 순천시청 순천시 흥덕동사무소 진실화해위원회 진실화해위원회 순천시청 순천시청 형태 주요 내용 통화 1949년 4월 15일 아버지 송기찬 등 서면 운평리 마을청년 3명 보고서 이 서면 동산리 야산에서 백골부대에게 사살됨 1949년 4월 15일 아버지 정순원 등 서면 운평리 월곡마을 주 통화 민 3명이 서면 동산리 산정마을과 월산마을 사이 계곡에서 보고서 경찰에게 사살됨 1949년 4월 15일 아버지 송기봉 등 서면 운평리 청년 3명을 서면지서 경찰들이 연행해 서면 동산리 야산에서 사살함 1948년 10월 22일경 순천시 석현동 소재 순천농림중학교 뒤 행림사 수로 제방에서 구례군 산동면 계천리 거주 순천농고 재학 중인 형 최석호가 12연대 진압군에게 연행된 뒤 사살됨 1949년 음력 7월 14일 할머니 이소유 등이 승주읍 죽학리마을 에서 경찰에게 사살됨 승주군 별량면 덕정리 거주 아버지 최병주 등 5명이 1948년 통화 음력 10월 6일 별량면 석현리 저수지 야산에서 지서 경찰들에 보고서 게 사살됨 1949년 음력 2월 8일 승주읍 구강리 태촌마을 반장 아버지 최동두 등 2명이 경찰들에게 쌍암지서로 연행되어 승주읍 서 평리 뒷산(서정재 고재) 도로변에서 사살됨 1949년 음력 5월 8일 상사지서로 연행된 아버지 방기현 등 4명이 상사지서 뒤편 땅고개재 공동묘지 입구에서 군경에게 사살됨 1948년 음력 10월 5일 경찰들이 상사면 흘산리 거주 아버 지 송태은을 집 부근 논에서 순천경찰서로 연행해 고문 후 사살함 1949년 9월 4일 경찰토벌대가 반란군으로 위장해 아버지 박 계호 등 서면 흥대리마을 주민 5명을 회의에 참석하게 한 뒤, 1949년 9월 5일 서면 구상리 문바위 뒷산에서 박계호 등 5명 을 사살함 1949년 음력 8월 5일 경찰들이 서면 구상리 문바위 뒷산에서 할아버지 박정호 등 마을청년 4명을 사살함 1948년 음력 10월 13일 오빠 지득권이 반란군에 밥을 해준 이유로 은신하다 상사지서에 자수, 당일 상사지서 앞 논에서 경찰에게 사살됨 1948년 음력 9월 20일경 마산 15연대가 순천시 옥천동에서 형 방윤섭 등 6여 명을 연행해 순천시 옥천동 수돗가 앞에서 사살함 1949년 음력 8월 4일 아버지 박선호 등이 서면 흥대리 뒤 용계 산 골짜기에서 백골부대에게 사살됨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2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사건 번호 신청인 일 장소 공봉덕 순천시청 형태 주요 내용 1949년 음력 8월 3일 시할아버지 박임석, 시할머니 정현순 이 서면 구상리와 광양 경계 석사리 골짜기에서 군인들에게 사살됨 공봉덕 순천시청 1949년 음력 8월 3일 작은시아버지 박영구 등 3명이 서면 구상리와 광양 경계 석사리 골짜기에서 군인들에게 사살됨 오수만 순천YMCA 1948년 음력 9월 21일 옥천동 정수장 인근 공터에서 군인들이 아버지 오연근 등 2명을 사살함 민병일 광주시 북구청 1948년 여순사건 당시 전남 화순군 남면 사평리 출신으로 순 천시내 하숙하던 순천농림중학교 학생 숙부 민계식이 다른 학생들과 포승줄에 묶여 끌려간 뒤 사살됨 서원배 순천시 서면사무소 1949년 음력 1월 9일 승주읍 두월리마을 앞 논에서 진압군이 아버지 김점수 등 주민 4명을 반란군에 밥을 준 혐의로 사살함 우채규 순천시청 1948년 10월 22일 진압군이 삼촌 우영철 등 주민들을 현 매곡 동 성서신학교 정문 아래 담벼락에서 사살함 정하용 순천시청 1949년 음력 2월 20일경 서면 판교리 노은마을 뒷산 골짜기에 서 주둔 군인들이 작은아버지 정태구 등 100명을 사살함 김성기 순천시청 1949년 음력 2월 20일경 서면 판교리 노은마을 뒷산 골짜기에 서 군인들이 작은아버지 김홍연 등을 사살함 위계룡 순천시청 통화 1948년 10월 23일경 진압군이 황인주 등 주민 26명을 순천시 보고서 매곡동 성서신학원(매산여고 아래) 정문 부근에서 사살함 최용식 순천시 황전면사무소 1949년 음력 8월 6일 경찰들이 큰형님 최경식 등 황전지서에 연행된 황전면 주민 40여 명을 황전면 월전중학교 옆 양지맷 골에서 사살함 김병태 순천시 황전면사무소 1949년 음력 10월 26일 경찰들이 아버지 김길동 등 황전지서 에 연행된 20여 명을 황전면 월전중학교 옆 양지맷골에서 사 살함 주주원 여수시 오동동 낙원모텔 1948년 음력 11월 17일경 군경이 순천시 해룡면 하사리 뒷산에 서 할아버지 주두신과 작은아버지 주성창을 사살함 이희자 순천시 황전면사무소 1948년 여순사건 발생 후 황전면 선변리 거주 사촌시숙 최인 규, 시숙 최진규가 진압군에게 연행된 뒤 살해됨 정종채 구례군청 1948년 10월 순천 매산중학교 학생들이던 손위처남 최승수, 최승모가 반란군에게 끌려갔다 돌아온 뒤 경찰이 서면지서로 연행하여 서면 용담골 뒤에서 사살함 순천지역 여순사건 699

228 제3권 사건 번호 신청인 일 장소 문덕심 신청인 자택 형태 주요 내용 서면 구상리 거주 사촌시동생 박태윤이 1949년 음력 8월 3일 석사리 골짜기에서 군인들에게 사살됨. 서면 구상리 거주 사 촌시동생 박태숙은 1949년 음력 10월경 반란군이 강제로 짐 을 지게 해 데려간 뒤 살해됨 김용순 여수시청 1949년 음력 8월 5일 토벌대가 시아버지 이군보, 시어머니 박우남, 시누이 이점례 등을 서면 판교리 평남정 봇물 부근에 서 사살함 손은기 순천시 황전면사무소 황전면 금평리마을 이장인 손인기가 구례군(문척면 또는 간 전면)에 주둔하던 군부대에게 끌려가 칼에 찔려 살해됨. 3일 뒤인 1949년 음력 7월 3일 손인기의 형인 할아버지 손인갑이 동생 시신을 찾으러 구례 주둔 군부대에 가 항의를 하다 군인 들에게 척살됨. 증조부가 시신수습함 허치성 진실화해위원회 1948년 11월 25일 황전면 황전지서 뒤산 농곡 뒷산에서 황전 통화 면 월산리 거주 아버지 허전 등 25명을 황전지서 경찰들이 보고서 사살함 박종현 신청인 자택 1949년 음력 1월 15일 아버지 박선규가 도피 중 상사면 운동산 에서 군경에게 사살됨. 작은아버지 박윤규는 1948년 늦은 가 을 국군 토벌 때 상사면 오곡리에서 사살됨 박종현 신청인 자택 1949년 음력 1월 말경 작은아버지 박득규가 상사면 흘산리 뒷산에서 군경에게 사살됨 양재순 순천YMCA 1948년 음력 10월 26일경 아버지 양회정이 해룡면 월전리 자 택에서 경찰에게 사살됨 안금자 여수시청 1948년 양력 10월 22일 매곡동 거주 아버지 안태현, 어머니 김삼수, 오빠 안종만, 동생 안선자 등 주민 27명이 현 매산여 고 담벼락 길에서 군인들에게 사살됨 송철현 광주시 북구청 1948년 10월 25일 사촌형 송임석이 군인들에게 순천농림중학 교 옆 순천시 석현동 향림사 뒤 골짜기로 끌려가 이후 살해됨 손승상 순천시 황전면사무소 1949년 7월 29일 황전면 금평리 교동마을 반장 아버지 손형수 가 구례군 간전면 인근 주둔 부대로 끌려가 척살됨 윤세인 나주시청 1948년 10월 여순사건 당시 순천농림중학교에 숙부 윤달헌이 전남 나주군 다도면 방산리 거주 중 순천시내에 하숙하며 순 천농림중학교에 재학 중 1948년 10월 여순사건 일어나고 학 교에 다니다 살해됨. 사건 당시 학생들이 많이 잡혀갔다고 들음 이철섭 순천시청 1948년 음력 12월 11일경 경찰들이 월등면 월용리 거주 아버 지 이정철 등 3명을 자택에서 연행해 월등면 화지마을 지사골 제(현 장영선 목장 앞)에서 사살함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2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사건 번호 신청인 일 장소 조영 순천시청 형태 주요 내용 1948년 음력 9월 25일 큰아버지 조한송 등 7명이 모략으로 낙안지서 앞에서 진압군에게 사살됨 이용권 순천시청 1948년 양력 10월 24일 12연대 군인이 형 이봉권을 조곡동 집 골목에서 사살함 최병선 순천시청 1949년 음력 4월 12일 경찰들이 아버지 최순식을 판교리 옆 텃골 마을 고갯길에서 반란군으로 오인해 사살함 최병선 순천시청 1949년 음력 5월 경찰들이 작은아버지 최운식을 서면 운평리 자택에서 서면지서로 연행한 뒤 살해함 정영주 순천시청 1949년 음력 6월경 아버지 정순현과 삼촌 정계현이 순천시 안풍동 수동마을 자택에서 구타당해 사망함 최택철 김영수 허남석 정대연 순천시청 진실화해위원회 순천시청 순천시청 지정애 진실화해위원회 김정애 김양희 정수환 이종옥 최진동 여수시청 여수시청 순천시 별량면사무소 순천시 별량면사무소 순천시청 1949년 11월 19일경 삼촌 최진영이 서면 운평리 자택에서 경 찰들에게 서면지서로 연행되어 지본리 뒷산에서 다른 주민들 과 함께 사살됨 1949년 음력 11월 10일 황전면 황학리 거주 아버지 김병수 등 5명을 한청단원들이 송치재로 데려가 사살함. 작은아버지 김학수는 1949년 11월 반군 강압에 끌려간 뒤 살해됨 1948년 순천농림고등학교 학교 간부 삼촌 허영구가 여순사건 당시 시내 학교에 가야 한다고 나갔다가 살해됨 1949년 음력 3월 21일 아버지 정종신이 상사지서로 연행되어 상사지서 뒤편에서 경찰에게 사살됨 1948년 음력 12월 28일 승주읍 남강리 거주 지채종이 마을이 통화 장이란 이유로 군경에게 승주읍 서평리 서정마을 원모퉁이란 보고서 곳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살됨 1948년 양력 10월 22일 군인들이 회사 숙직 후 귀가하는 김 용환을 주민 26명과 함께 매곡동 매산여중 담벼락 길에서 사 살함 시아버지 한석기가 회사원 순천시 가곡동 거주 중 여순사건 당시 출근한 뒤로 살해됨 1949년 음력 2월 6일경 아버지 정기영이 별량지서 경찰에게 연행되어 별량면 온야마을 뒤 야산(운천 뒷산, 광대골재)에서 사살됨 1949년 음력 12월 19일 아버지 이재선이 별량면 대룡리 용안마 을 과수원 오두막에서 자다가 한청단원과 별량지서 경찰들에 게 사살됨 1949년 양력 8월 20일경 형 최진숙이 산에 은신 중 경찰에게 체포되어 서면 운평리 죽청 뒷산 중턱에서 사살됨 순천지역 여순사건 701

230 제3권 사건 번호 신청인 일 장소 강남수 광양읍사무소 허기 최미자 이건찬 정창조 양희승 추환열 추환열 추환열 추환열 순천시청 순천YMCA 부산시 사상구청 순천시 황전면사무소 순천YMCA 순천YMCA 순천YMCA 순천YMCA 순천YMCA 형태 주요 내용 1949년 늦가을 해룡면 도롱리 거주 큰형 강길수, 둘째형 강종 훈, 큰형수 방봉애가 사촌형 해룡면 도롱리 좌익책임자란 이 유로 경찰에게 순천경찰서로 연행되어 고문, 살해됨 1948년 양력 11월 26일 진압군이 당숙 허순조 등 월등지서에 연행된 약 35명을 월등면 농곡리 건너편 양지맷골에서 사살함 1949년 음력 1월 4일경 상사면 도월리 거주 시아버지 박홍기 가 순천-광양 경계 성가롤로병원 근처에서 경찰에게 사살됨 1948년 음력 11월 17일 아버지 이덕행이 좌익 혐의로 주암지서 에 자수, 경찰들이 지서에 수용된 이들을 주암면 행정리 접치 재에서 사살함 1948년 양력 11월 26일 월등지서에 연행된 큰아버지 정기선 등 수십 명이 월등면 농곡리 건너편 양지맷골에서 군인들에게 사살됨 1949년 음력 1월 10일 큰아버지 양회주가 순천시 조례동 법원 뒷산에서 은신 중 경찰에게 현장에서 사살됨 1948년 음력 11월 5일 작은아버지 추인수 등이 해룡면 상삼리 의 논에서 특경에게 사살됨 1948년 음력 11월 5일 막내작은할아버지 추석순 등이 해룡면 도롱리 마을 뒷산에서 경찰에게 사살됨 1948년 음력 11월경 오촌 당숙 추기선, 추기운이 해룡면 도롱 리 마을 뒷산에서 은신 중 경찰들에게 사살됨 해룡면 도롱리 마을이장 아버지 추형량이 1948년 음력 12월 27일 경찰에게 끌려간 뒤 살해됨 김채문 순천시 별량면사무소 1948년 음력 10월 7일 별량지서에 연행된 아버지 김흥열 등 주민 11명이 별량면 운천리 공동묘지(돌고개재)에서 사살됨 위귀순 순천YMCA 1948년 11월 남편 김두표 등 주민들이 해룡면 용전리에서 경 찰에게 도사지서로 연행, 순천경찰서로 이송된 이후 살해됨 정용택 순천시청 1948년 늦가을 작은아버지 정영철이 용전지서로 연행된 이후 살해됨 박철근 순천시청 1948년 11월 20일경 큰아버지 박호지가 경찰에게 반군협조 혐의로 서면지서로 끌려가 고문으로 사망, 확인사살됨 정동우 순천시청 1948년 음력 11월경 경찰들이 서면 압곡리에서 정동선 등 3명 을 서면지서로 연행, 두어 달 뒤 정동선을 군산에 데려가 죽였 다고 서면지서에서 연락이 옴 김영주 순천시청 1949년 음력 10월 23일 서면지서 경찰들이 할아버지 김정기 등 10여 명을 서면 죽청마을 곰바굴 계곡에서 사살함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3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사건 번호 신청인 일 장소 하정래 순천시청 형태 주요 내용 1948년 양력 12월 1일경 경찰이 괴목지서에 수감된 할아버지 하재규 등 3명을 월등면 장선마을 인근 야산에서 사살함 지봉연 여수시청 1948년 10월 말경 큰아버지 지태석 등 5명이 해룡지서 방향으 로 연행된 뒤 살해됨 배형철 순천시청 1949년 2월 20일경 큰형 배형회 등 서면 주민 9명이 순천경찰 서로 연행된 뒤 살해됨. 음력 6월경 대구실재에서 수감된 이 들을 경찰이 사살했다고 들음 박병도 순천YMCA 1949년 1월경 작은아버지 박기래가 산으로 피신 중 서면 지본 리 야산에서 토벌대에게 사살됨 조찬익 진실화해위원회 여순사건 당시 1949년 1월경 쌍암면 도정리 거주 어머니 이덕 통화 심이 산에 거주하다 마을주민과 함께 경찰들에게 월등지서로 보고서 연행되어 당일 고문 받다 사망함 한상순 부산시 사상구청 1948년 음력 11월 17일 아버지 한광수와 숙부 한익수가 승주군 주암면 행정리 접치재에서 경찰들에게 사살됨 황동하 광주시 북구청 1949년 2월경 별량 경찰들이 아버지 황인만을 연행해 별량면 송학리 장학마을 부근 공동묘지 골짜기에서 사살함 박대수 순천시청 1948년 음력 10월 10일 큰아버지 박병근이 순천경찰서 경찰 들에게 체포되어 상사면 오곡리에서 사살됨 박대수 순천시청 1948년 음력 11월 5일 작은아버지 박병두가 상사면 비촌리 운동산에서 경찰에게 체포되어 현장에서 사살됨 홍용석 순천시청 1948년 가을 경찰들이 큰삼촌 홍성표 등을 송치재에서 사 살함 박외규 순천시청 1948년 11월 2일경 상사면 오곡리 거주 큰아버지 박병렬이 상사지서 경찰에게 사살됨 박외규 순천시청 1949년 음력 3월 25일 아버지 박병기가 산으로 도피한 뒤, 상사지서 경찰에게 연행되어 지서에서 고문 받고 사망 신대우 순천시청 아버지 신복동이 1949년 음력 3월 8일 순천 낙안면 창녕리마 을 골목에서 진압군부대에게 구타당해 사망 김세태 순천시청 1949년 음력 8월 22일 아버지 김종필이 반군에게 산으로 끌려 간 뒤 쌍암지서에 자수했으나 당일 지서 경찰에게 낙안면 평 사리 조산마을 뒤 야산에서 사살됨 최덕용 순천시청 1948년 가을 진압군이 해룡면 용전마을에 들어와 삼촌 최창 열 등 30여 명을 마을 뒷산으로 끌고 간 뒤 살해함 조동진 진실화해위원회 통화 1948년 10월경 낙안면 옥산리 거주 아버지 조한상이 군경에 보고서 게 살해됨 순천지역 여순사건 703

232 제3권 사건 번호 신청인 일 장소 김영인 순천시청 형태 주요 내용 1949년 음력 1월 9일 순천경찰서 경찰이 승주에서 주암 가는 접치재 골짜기에서 할아버지 김화현 등 약 5명을 사살함 김동호 순천YMCA 1948년 음력 11월 16일 외삼촌 이수개가 외서면 장선리 대전 마을 집 근처에서 잠복 중 토벌대에게 반군으로 오인되어 사 살됨 이광하 순천시청 1948년 음력 12월 6일 경찰이 아버지 이준평을 상사지서로 연행해 상사면 동백마을 뒷산에서 사살함 오정권 순천YMCA 1948년 음력 11월경 할아버지 오종호 등 30여 명이 주암지서 로 연행된 뒤 지서 경찰들에게 주암면 접치재(승주에서 주암 가는 길목)에서 사살됨 김순덕 순천시청 1948년 11월경 시동생 이계수가 순천경찰서에서 석방되어 귀 가 중 현 순천시 동외동 순복음교회 앞 도랑가에서 경찰에게 사살됨 신홍근 순천시청 1948년 10월경 진압군이 들어온 직후 철도국 직원 삼촌 신원 문 등이 철도역에서 사살됨 한영섭 순천시 별량면사무소 1948년 음력 10월 7일경 아버지 한상범 등 5명이 별량지서로 연행되어 경찰에게 별량면 운천마을 공동묘지에서 사살됨 윤석진 순천시 별량면사무소 1949년 음력 2월 7일 군인들이 형 윤석봉을 별량면 대룡리 야산에서 사살함 백영묵 광양읍사무소 1949년 음력 11월 14일경 순천시 와룡면 거주 아버지 백학선 등이 경찰에게 연행되어 와룡리마을 뒷산에서 사살됨 김인중 순천시청 1948년 10월 22일경 삼촌 김용환이 매곡동 자택에 귀가 중 광주에서 온 진압군에게 잡혀 매산여고 정문 앞에서 20여 명 과 함께 사살됨 김동석 경남 양산시 웅상읍 서창동 사무소 1948년 10월 말경 승주군 쌍암면 신전리 거주 형 김복개 등 이 승주읍 죽학리 대수골부락 마을회관 앞에서 경찰들에게 사 살됨 신만식 순천시청 1948년 음력 11월 3일 아버지 신창우가 승주지서장 명령으로 승주지서 앞마당에서 사살됨 신만식 순천시청 1948년 음력 12월 말경 삼촌 신현우가 승주읍 도정리 축내마 을 노고치산에서 토벌대에게 사살됨 이기화 순천시 해룡면사무소 1948년 11월경 동생 이기신 등이 순천경찰서로 연행된 뒤 순 천시 생목동 공동묘지에서 사살됨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3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사건 번호 신청인 일 장소 김태옥 박이관 순천YMCA 고흥군청 조기원 진실화해위원회 장우수 김양곤 정대환 정영기 광주보훈병원 제주특별자치도 2청사 광주시 북구청 광양읍사무소 형태 주요 내용 1949년 음력 1월 16일 형 김만옥이 쌍암지서로 연행되어 경찰 에게 고문당해 쌍암지서에서 사망.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 거주 순천 매산중학교 학생 형 박이 만이 1949년 구정 뒤 순천 자취집으로 돌아간 뒤 군경에게 살해됨 통화 1949년 음력 7월 17일 승주읍 유흥리 거주 할머니 장순심이 보고서 당시 쌍암지서 순경에게 유흥리 자택에서 사살됨 1948년 양력 10월 31일경 순천시 저전동 거주 어머니 최명순 이 군인들에게 연행되어 집단사살됨 1949년 음력 3월 5일 순천시 외서면 반용리 거주 아버지 김용 태 등 9명이 외서면 도신리마을 뒷산에서 군인들에게 사살됨 곡성군 옥곡면 오지리 거주 정대룡은 순천중학교에 기차로 통학, 여순사건 당시 학교에 간 뒤 군경에게 살해됨 1948년 10월 25일경 순천도립병원 의사로 근무 중이던 광양 군 옥곡면 묵백리 거주 형 정옥기가 병원 직원들이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병원 직원들과 함께 진압군에게 사살됨 순천지역 여순사건 705

234 제3권 연 번 1 성명 소속/계급 일 장소 황 ( 黃 ) 순천 학생연맹 (이하 학련) 감찰부장 [별첨 2] 경찰 관련 참고인 조사상황 순천시청 앞 백록다방 여수시청 형태 면담 보고서 ㆍ 주요 내용 ㆍ민간인 처형: 300명을 죽두봉 골짜기에 가서 처형을 했음. 공산 당에 가담을 했다고 하면 바로 처형해버렸음. 황전면 지리산 일 대에서 활동할 당시는 그 주변 마을이 한 마을당 30 40명이 거주하던 마을 일곱 개 도합 400여 명을 처단한 것으로 생각되 고, 광양과 하동 일대에서도 같은 사유로 각 100여 명 정도 처단 된 사실을 알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누가 처단되었는지 알지 못함 ㆍ북국민학교 부역자 색출: 12연대가 진압하러 들어와서 백인 가 백인가 연대장으로 있으면서 순천을 탈환. 그 당시 시민 들을 순천 북국민학교 교정으로 몰아내 부역자 색출. 그곳에서 (공산당이 아닌 것으로 인정된) 민족진영 사람들, 즉, 목사, 전도 사 등 이런 사람들이 민족진영 사람들을 가려내고 그 사람들보고 반군에 가담한 사람들을 가려내라 함. 그 외 우익단체인 대한청 년회, 학생연맹, 국민회 사람들 나오라고 하여 좌익이나 반군에 가담한 사람들을 색출해내라 함. 그들이 손짓을 하면 그 해당되 는 사람들을 동천 건너 봉화산 골짜기에 데려다가 무참히 죽임. 그 당시 약 여 명 되었음. 트럭으로 다섯 내지 여섯 트럭 데려가서 처형을 했다고 들음. 당시 자신은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직접 보지는 못했고,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음 ㆍ억울한 희생: 정규훈련을 안 받은 일반 공비들을 귀순자로 해서 잡기도 했음. 면별로 전과를 올리려고 지서별로 반란군협조자 잡아들이고 했을 수도 있음. 서면 구랑실재 같은 경우는 추측으 로 잡아다 취조하고 그랬음. 경찰보고 억울한 사람 공산당 만들 지 말라고 말도 했음. 그 당시 무참하게 억울하게 죽은 사람도 참 많이 있었음.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기를 바람 ㆍ우익 희생: 초대회장 김의 동생이자 우리 동지인 김봉식이 반란군 세력에게 죽었음. 내 눈이 뒤집혀 집집마다 잡으러 다녔 는데 복수 못 함 ㆍ토벌작전: 진압이 끝난 이후에도 잔비들이 야습을 했음. 그 당시 에는 15연대가 지금 한신아파트(풍덕동 소재) 자리에 주둔했음. 3대대장 이소동이랑 같이 토벌작전에 참가. 백운산, 지리산도 나가고 그랬음. 학교도 안 가고 군대도 안 가고 군복 얻어 입고 같이 다녔음. 토벌작전이 없으면 지서에 지원 나감. 전남 순천시 황전면 뒷산 지리산 일대, 전남 광양시 다압면 및 진월면 일대, 즉 섬진강 남쪽 일대, 그리고 경남 하동군 화개사 뒷산 등지에서 활동. 현재 순천시 이마트(중앙국민학교 밑) 건너편에 주둔하고 있던 15연대 3대대(대대장: 이소동 소령), 1대대(지휘관 이름 기 억 못 함)의 지휘를 받았음. 1948년 10월부터 1950년 6ㆍ25전 까지 토벌작전 참여 ㆍ경찰에 대한 반감: 경찰들이 미웠음. 우리는 전쟁터에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경찰들은 목숨 아까워 가지도 않고, 여기서 편안히 월급 받아먹고 있고, 뇌물 받아먹고 자꾸 미운 생각이 들었음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3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성명 소속/계급 일 장소 형태 주요 내용 2 윤 ( 尹 ) 광주지검 순천지청장 자택 면담 보고서 ㆍ여순사건 당시: 반란군이 점령한 3일 동안 금곡동 검찰 직원 집 골방에 숨어 지내 시내 상황 전혀 모름. 당시 듣던 말로는 반란군 들의 사형명부 1호에 내가 올라 있다고 들었음. 그래서 가족과 피신했음. 고로 반란 당시의 구체적 상황 모름 ㆍ군법회의: 계엄령 하의 군법회의 부분도 관여하지 않아 잘 모름. 군경합동수사본부가 일 처리를 했지, 당시 검찰은 어떤 역할도 안 했음 ㆍ박찬길 검사 사건: 박찬길 검사 사건도 나중에 들어서 알았음. 억울하게 죽었음 3 최 ( 崔 ) 조선민족 청년단 단원 ㆍ 순천경찰서 작전계장 (경위) 자택 면담 보고서 ㆍ사건 당시 청년단 활동: 반란 사건이 났을 때는 청년단활동을 하여 경찰과 같이 작전을 나감. 잡아서 정보과로 인계. 조선민족 청년단이라고 나중에 순천시장했던 서정욱씨가 그 당시 단장. 파란색 제복 착용. 철모는 안 쓰고 모자 착용. 엠원 칼빈 738) 사용. 좌익분자들을 색출해서 정보과에 인계하면 거기서 심사를 해서 조치. 청년단은 반란군협조 혐의가 있는 자를 정보과 인계. 황전, 월등, 서면, 낙안, 광양, 백운산, 순천시내 토벌 나감. 사전 정보수 집을 하여 좌익활동을 한 사람들을 검거. 황전 열두내골이 많이 잡혔고, 월등도 많이 갔음 ㆍ북국민학교 부역자 색출 : 10월 23일 북국민학교에서 반란군협 조자 색출과정 참여. 군인들은 시민들을 데려와서 인계하고 가고 반란군 색출작업은 경찰이 했음. 손가락 총으로 지목하면 그 사 람들 중 몇은 즉결처분을 하고 나머지는 군법회의에 회부하고 그랬어 ㆍ처형: 정보과가 수집을 해서 죽여서 우리는 잘 몰라. 회색분자들 을 다 색출하는 거지 ㆍ경찰 근무: 49년 상반기 여수경찰서에 예속돼서 근무를 했지. 경찰서로 끌고 와 정보계에 넘기고 그랬지. 49년도 초에 경위로 특채 작전계장 역임. 내가 왜정 때 만주하사관학교에 가서 졸업 을 하고 만주군 오장 근무. 작전을 한 사람이 드물었는데 작전 경험이 있어 해방 후 경위로 특채 ㆍ민간인 희생: 여순사건 때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함 ㆍ사찰계: 우리가 잡아서 사찰계로 인계하면 그쪽에서 즉결처분을 했음. 즉결처분을 직접 본 적은 없고, 나중에 얘길 들어서 알았음 ㆍ토벌작전: 마을에 작전을 나가면 적세에 따라 인원을 맞춰서 나 감. 적게 나갈 때는 의경을 포함해서 7 8명이 나가고, 많게 나갈 때는 십여 명 이상씩 나감 ㆍ상부의 지시: 작전 나갔다 와서 결과보고를 함. 상부의 지시가 있었음. 적극적으로 반란군협조자를 색출하라는 내용의 지시. 억울하게 죽은 사람도 많이 있을 것임 순천지역 여순사건 707

236 제3권 연 번 성명 소속/계급 일 장소 4 장 대한청년단 단원 매곡동 주민센터 형태 면담 보고서 주요 내용 ㆍ사건 당시 활동: 한청단원으로 해룡지서 입초근무, 지방폭도 검 거, 지서 인계 ㆍ좌익 선무공작: 반란 사건 당시 지방좌익들이 서울을 비롯해 전 국에서 군인들이 봉기를 일으켜 해방이 되고 있다고 선동. 이제 좌익세상이 되었구나 하고 여겨 아무것도 모르던 이들이 좌익활 동 합류. 그래서 억울한 죽음이 더 많았음 ㆍ서면 좌익지도자 김기수: 일제 때부터 좌익활동하다 징역살이한 서면 김기수를 기억함. 해방 이후 순천군 인민위원장 역임. 반란 때 가담, 월북했음 5 박 ( 朴 ) 월등면 의용단 동원부장 월등면 송천리 경로당 ㆍ의용단 및 지서활동: 마을의 정보수집이 주 임무, 반란군 출몰 보고. 마을 젊은이들은 모두 가입했음. 월등지서 지시로 지방좌 익 반란군 토벌작업에 동원되었음. 잡으면 지서에서 죽일 사람은 죽이고, 취조해서 순천서로 인계. 전기고문 목격 ㆍ월등면지서 앞 학살 : 48년 11월경 12연대가 와 반란군협조 혐의 로 지서에 감금되어 있던 마을사람들을 지서 앞에서 처형 목격. 본인 및 의용단이 시체를 치웠음. 누가 지시했는지는 모르겠음 ㆍ지사골재 학살: 반란 후 지사골재에서 처형 빈번. 월등지서 경찰 들이 사람들을 트럭에 태워 지사골재로 가는 것 목격. 조금동 지서주임, 안수천, 백석기 경사 등이 지휘 6 박 ( 朴 ) 순천경찰서 순경 자택 녹취록 ㆍ사건 초기 반군과 교전: 반란군이 여수에서 순천으로 올라오자 장대다리에서 반군과 전투하다 인근 산으로 도피, 한 달 정도 큰집에서 토굴 파고 숨어 살았음 ㆍ순천경찰서 안 취조 및 고문: 반란군협조자와 지방좌익들을 체포 하면 순천경찰서에서 사찰계 형사들이 고문해 취조와 고문을 했 음. 전기고문을 하거나 고춧가루 물을 코에 붓거나 구타했음 ㆍ취조 후 즉결처분: 취조 후 사찰계에서 즉결처분 결정을 내림. 순천경찰서 서장이 즉결처분 결재를 하면 즉결처분했음. 집행은 경찰기동부대가 했음. 참고인 본인도 기동부대였으나 즉결처분 해본 적은 없음 7 한 ( 漢 ) 승주읍 한청단원 승주읍 사무소 ㆍ쌍암지서 취조: 쌍암면(승주읍) 구당리 강촌마을, 연동마을에 지 방 폭도들이 많아서 경찰들과 한청이 출동했음. 지방좌익들을 잡아서 쌍암지서로 연행해 경찰들이 취조 8 정 ( 鄭 ) 주암면 항토방위대 자택 ㆍ사건 당시 활동: 토벌작업 동원됨. 주암지서, 주암 창촌출장소 근무 ㆍ지서 경찰: 반란 때는 황전 주임인데 49년도에 주암 주임으로 온 황영환이라고 사람을 많이 죽여 별명이 황몽댕이였음. 이북 출신 안경덕 경사가 사람을 많이 죽였음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3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성명 소속/계급 일 장소 형태 주요 내용 8 정 ( 鄭 ) 주암면 항토방위대 자택 ㆍ반란군 및 지방좌익 즉결처분: 본서에선 사찰계가 취조 및 전기 고문 담당. 서장 결재로 즉결처분. 즉결하는 것 매일 목격. 수는 날마다 다름. 조계산 골짜기에 가서 종종 집행. 본인도 집행 참여. 지휘했던 경사, 경위들 이름은 몰라. 서면 주임 안경덕이 직접 집행했다고 들었음. 광주경찰국 경감 구서칠이 직접 처형명령을 내렸음 ㆍ요곡리 사건 관련: 요곡리에서 죽은 이들(이호두, 이호진, 정동 균, 이경옥, 정귀남, 정병남 등)에 대해 들어서 알고 있음. 정귀남 은 시신을 못 찾아 밤나무를 깎아 초혼제를 지냈음. 정동균은 주암지서 순경 구인우가 처형한 뒤 유족에게 장소(등계산, 지금 복다리 골프장)를 알려줘 시신수습했음. 우리 동네 이경옥이라고 밤에 보급투쟁 왔다가 둔대라는 곳에서 주암지서 경찰한테 총살 당했다고 들었음 9 서 ( 徐 ) 서면 학구파출소 의경 순천 중앙동 문화인쇄소 ㆍ안경덕 서면지서장 및 구 소장: 안경덕 서면지서장이 치안 유지상 사람들을 많이 잡아 죽이고 했음. 이동 요충지였던 송치 재에서 전기통신망 파괴가 잦아 학구파출소 소장 구이 젊은 사람들을 많이 잡아서 고문했음 ㆍ서면 죽평마을 피해: 좌익 근거지 정혜사 주변 판교리, 구상리, 압곡리마을이 피해가 컸음 ㆍ마을 소각 지침과 주민 대책: 진압군이 마을 소개나 소각 시 현장 에서 바로 명령했음. 주민 대책은 없었음 ㆍ취조 과정: 순천경찰서에선 사찰계가 취조. 각 지서에서는 담당 순사들이 사람을 배정받아 취조했음 ㆍ즉결처분: 구이 학구마을에서 장척마을로 가는 중간 지점에 서 장척마을 주민 윤두한을 반군에 밥을 해줬다는 혐의가 있어서 즉결처분 했음. 당일 참고인은 학구마을에 있었는데 직접 보진 못하고 이튿날 알았음. 즉결처분권은 당시 순사들에게 다 있어서 윤두한을 그렇게 죽일 수 있었음. 즉결처분 근거는 모름 10 박 순천경찰서 사찰대원 자택 녹취록 ㆍ사찰대원 임무: 정식 경찰이 아니었음. 순천경찰서 사찰계 형사 들을 보조해 지방좌익들 세포조직을 파악, 체포하는 일 했음 ㆍ사찰계 형사: 순천경찰서 관할 주암면 창천파출소에서 사찰계 정찬엽 순경과 근무 ㆍ취조 과정: 연행된 이들을 순천경찰서에서 사찰계 형사들(순경 급)이 취조. 기록 사항에 가담 정도가 약하다, 강하다 기록했음 ㆍ고문: 순천경찰서 안에 고문실이 따로 있었음. 엄지손가락 양쪽 에 전기선을 감고 전화기로 돌려 전기고문을 했음. 거꾸로 매달 아 코에 고춧가루 물을 붓는 고문했음 ㆍ즉결처형 결정: 조사 후 남로당 세포 등 지방좌익들을 형무소로 보내거나 사찰과장이 총살 결정을 하고 순천경찰서장에 보고해 승인을 받음. 지서에서는 사찰계 담당 직원이 를 받고 순천 경찰서로 넘기고 경찰서에서 재조사, 구금한 뒤 총살하거나 형무 소로 넘겼음 순천지역 여순사건 709

238 제3권 연 번 성명 소속/계급 일 장소 형태 주요 내용 10 박 순천경찰서 사찰대원 자택 녹취록 ㆍ사살 집행: 집행도 사찰계 형사가 했음. 사형장소가 따로 있었음. 경찰이라도 갈 수 있는 사람들이 제한되어 있어서 기억하는 사형 장소는 없음 ㆍ진압군: 마산 15연대가 당시 순천시내 순천농림중학교에 주둔했 음. 20연대가 광주에 주둔하며 순천을 오고갔음 ㆍ백골부대: 토벌작전을 같이 하고 있었음. 서면 판교리 청소골이 산으로 둘러싸인 반군 기지였는데 그곳과 맞닿은 곳인 서면 판교 리 앞(노은마을)에 백골부대가 주둔하면서 토벌작전을 했음. 외 지 군인들 부대였음 ㆍ특무대: 진압 뒤 순천경찰서에 특무대 군인들이 있었음. 특무대 군인들을 목격했음. 군복을 입고 계급 표시는 없었음. 정보 임무 를 했음 11 조 주암지서 사찰대원 자택 녹취록 ㆍ연행 및 취조: 지서로 연행된 이들을 사찰계 형사들이 취조. 유죄 무죄 여부를 사찰계 형사들이 결정 ㆍ사살 집행 관련: 서울 6사단이 반군들을 잡아 어느 야산에서 사살 했다고 들음 ㆍ사살 결정: 사살계 형사들이 취조 후 지서 주임이 결정하고 상부 에 보고했음 ㆍ특무대 관련: 당시 순천시내에 특무대원 군인들이 있었음. 군복 도 입었고 보통 사복을 입고 다녔음 12 김 송광지서 의경 자택 녹취록 ㆍ의경활동: 반군과 지방좌익을 지서로 연행하고 순천경찰서로 넘 기는 일 했음 ㆍ취조: 송광지서에 조사담당 형사들이 조사를 해 순천경찰서로 넘겼음. 곽순동 순경을 기억함 ㆍ즉결처형 관련: 즉결처형은 지서 주임과 지서 차석 등 책임자들 이 결정. 산에 갔다가 잡혀서 순천경찰서로 간 사람들은 돌아오 지 못했음. 지서에서 순천경찰서로 넘기면 순천경찰서에서 총살 을 많이 했음. 죽일 사람들은 밤에 몰래 데려가 총살을 하고 지서 주임이 상부에 집행을 보고했음. 송광면 좌익을 많이 잡아 송광 지서에서는 성과가 좋았음 13 신 순천철도국 근무 자택 녹취록 ㆍ순천북국민학교 사살: 순천 진압 후 이틀 정도 후 마산 15연대 경상도 사투리 쓰던 군인들이 들어왔음. 15연대 군인들이 북국민 학교에 민간인들을 잡아와 앉혀놓고 말 몇 마디하고 그냥 쏴 죽였음. 참고인은 현장에서 빠져나왔음. 많은 사람들이 죽었음 ㆍ생목동 공동묘지 사살: 1948년 11월경 생목동 공동묘지(현 이수 중학교 옆)에서 순천경찰서 경찰 10여 명이 연행된 사람들 20 30명을 세워놓고 사살하는 것을 목격함. 죽은 사람들 중 철도국 직원들도 있었음. 생목동 공동묘지가 당시 총살장이었음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3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성명 소속/계급 일 장소 형태 주요 내용 14 황 서면지서 한청단원 ㆍ 순천 철도경찰 자택 녹취록 ㆍ마을 소개: 서면 청소골에 많은 반군들이 주둔한단 이유로 경찰 이 서면 판교리 노은마을 주민을 선평리로 소개했음 ㆍ백골부대 관련: 서면 판교리에 외지 사람들 부대인 백골부대가 주둔해 좌익가담자들을 다 모아놓고 판교리마을 앞에서 사살했 다고 들었음 ㆍ민간인 사살: 판교리와 구상리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고 들었 으나 자세한 장소는 모름 ㆍ민간인 취조: 반군에 협조한 이들과 지방폭도들을 지서에서 조사 후 순천경찰서로 넘겼음. 지서 안에서 구타 등 고문도 했음 ㆍ반군 시신 활용: 서면지서 경찰들이 반란군 한 명을 잡아 죽인 뒤 서면지서 앞에 시신을 나무에 묶어 세워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보여줬음 ㆍ안 서면지서장: 안 서면지서장일 때 한청단원으로 일했 는데 안은 많은 사람들을 잡아서 엄하게 다뤘음 ㆍ보도연맹원 사살: 전쟁이 나자 서면 구랑실재에서 경찰들이 보도 연맹원들을 소집해 모두 사살했음 15 배 서면지서 한청단원 서면 선평리 노인회관 녹취록 ㆍ한청 전투원: 안 서면지서장 휘하에서 경찰들과 함께 반란 군 근거지였던 서면 청소골 골짜기 등지로 전투에 나감 ㆍ연행 및 취조: 경찰들이 지서로 잡아온 사람들을 지서 안에서 구타하고 조사, 순천경찰서로 넘김. 서면 선평리에서 반란군들이 경찰들을 죽였고 여순사건 뒤 1년 정도 뒤 경찰들이 서면 선평리 사람들을 부역가담자라며 많이 죽였음 ㆍ서면지서 즉결처분: 지서에서 즉결처분하는 일이 많았음. 사람들 모르게 밤에 즉결해서 목격한 적은 없음 ㆍ진압부대: 당시 15연대가 들어왔음 ㆍ백골부대 목격: 백골부대는 당시 서면 판교리에 주둔. 외지 군인 들로 국방색 군복을 입었고 철모 바깥에 뼈 비슷한 마크를 붙이 고 다녔음. 먼발치에서 본 적 있음 ㆍ안 서면지서장: 안 지서장이 서면 사람들을 많이 지서 로 잡아들여 죽였음. 자기 비위에 맞지 않고 눈에 거슬리면 공산 당으로 몰아 죽였음. 선평리 이장 허만관이 부역했다고 몰려 안 한테 죽었음. 서면 사람들 100여 명이 서면 판교리 노은마 을 야산에서 백골부대에게 사살됐다는 얘기를 들어봤음 16 문 순천시 황전지서 의경 자택 녹취록 ㆍ의경활동: 경찰들 보조를 하고 반란군과 지방폭도들을 잡으러 다녔음. 이북 출신 양 형사와 같이 산으로 작전 다녔음. 마을에 비밀로 배치한 연락책이 지서로 정보를 알려줬음. 순천시 삽재에 서 반군 2명을 잡아 황전지서로 연행 후 순천경찰서로 이송했음 ㆍ지서-본서 보고: 작은 일이라도 지서에 무슨 일이 있다면 상부 순천경찰서에 보고해야 했음 순천지역 여순사건 711

240 제3권 연 번 성명 소속/계급 일 장소 형태 주요 내용 16 문 순천시 황전지서 의경 자택 녹취록 ㆍ취조 및 처리: 황전지서로 연행된 이들은 지서 근무하는 형사들 이 취조했음. 유치장에 가두고 알고 있는 사람들을 자수하게끔 회유하고 말 안 들으면 구타하고 고문도 했음. 반란군 중 머리 꽤나 쓰는 사람들과 사상이 강한 사람들은 지서에서 순천경찰서 로 넘겼음 ㆍ아군 간 살해: 황전면 괴목리 뒷산으로 잠복근무 나가서 말을 잘 안 듣는 의경들, 건방진 의경들을 잠자는 사이 사살하고 반란 군이 죽였다고 했던 경우가 있었음 17 곽 순천시 황전지서 한청단원 ㆍ 황전지서 의경 자택 녹취록 ㆍ황전지서 한청활동: 49년 11월까지 황전지서 용림출장소에서 한 청단원 및 의경으로 근무. 한청은 경찰들과 지방좌익들 체포. 군인들에게 길을 인솔. 의경으로는 회룡리고지에서 근무하고 순 천경찰서 소속 기동대로 덕유산과 지리산토벌작전을 나갔음 ㆍ사살 집행: 황전면 용림마을 앞 도로 건너편 산에 산사태로 자연 적으로 구덩이가 파인 곳에서 경찰들이 사상가들, 지방좌익들 수명을 사살했음 ㆍ황전면 회룡리마을 소개: 여순사건 나고 황전면 회룡마을 여덟 동네 전체를 소개했음. 집을 태우는 동네도 있었음. 소개 전 마을 이장이 와서 어느 마을에서 어느 마을까지, 며칠까지 소개하라고 했음. 이주 대책은 없었음. 소개 후 각자 알아서 해야 했음 18 서 황전지서 한청단원 자택 녹취록 ㆍ황전지서 한청활동: 여순사건 나고 석 달 동안 황전지서 회덕파 출소에서 보초 근무와 지방좌익들을 체포하는 일을 했음. 파출소 에는 경찰 10명, 한청 20여 명이 근무했음 ㆍ사살 집행: 지방좌익 한 명을 잡아 회덕파출소로 연행했음. 파출 소 안에서 순경들이 조사를 하고 악질이라 해서 경찰들이 황전면 덕림리 미초마을 뒷산에서 사살했음. 현장은 목격 못 함. 회룡리 산영마을에서 반란군이 매복해서 경찰들 수명을 죽였음. 그 일 이후 경찰들이 보복으로 산영마을 이장 정 아무개를 반란군과 내통했다고 사살했음 ㆍ진압군 12연대: 48년 말 12연대가 구례에 본부를 두고 황전면 덕림리로 출동했음. 조카 서홍석이 14연대에 입대해 반란사건 뒤 산에서 피신하던 중 자수하면 살려준다는 말에 자수를 했으나 12연대가 구례로 끌고 가 사살했음 ㆍ진압군 15연대: 12연대 철수 후 49년 봄에 마산 15연대 1개 중대 약 100명 병력이 황전면 회룡마을에 두 달간 주둔했음. 경상도 사투리를 쓰던 군인들이었음. 1949년 초봄 회룡마을에 주둔하던 15연대 군인들이 덕림리 화평마을 서정팔과 신기마을 정병찬을 좌익들과 내통했다고 회룡리 신기마을 옆 공동산 공동묘지에서 사살했음. 가족들이 시신수습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4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성명 소속/계급 일 장소 19 이 ( 李 ) 상사면 대한청년단 ㆍ 상사지서 의용경찰 순천시 와룡저수지 인근 형태 면담 보고서 주요 내용 ㆍ반군의 상사면 진입: 순천시내(동회동ㆍ죽도봉 냇물ㆍ동순천역 등 시내에서 희생자 많았음: 죽도봉에서 경찰 시신 26구 수습) 상사면, 처음에 반군 3명 정도가 상사면으로 들어오는 것을 직접 목격, 이후 지방좌익이 가세(대표인물: 이효, 최규광, 임이 상사면에서 지도급, 최규광은 친구인 면장 이낙평이 보증하여 자수하였으나 행불됨), 참고인은 외삼촌댁 벽장에 피신함 ㆍ상사면에서 반군과 지방좌익의 활동: 상사면 성재귀(극) 면장ㆍ 김 부면장ㆍ상사면 대한청년단장 백학성의 부인 등 지역유 지를 머슴들이 중심이 되어 칡으로 묶고 눈알을 빼는 등 살상, 백학성 소유 양조장 근무자 김성기는 반군이 대검으로 난자하여 상사지서에 버렸으나, 도망쳐서 생존함. 기타 순천경찰서 순경 선형수가 구례경찰서에서 동원되어 작전하다가 사망, 윤순식의 형이 순경으로 사망함 ㆍ상사면 출신 14연대 군인: 김학동(소위 임관, 반군에 가담하였다 여수에서 자수, 국군에 재입대), 백학림(하사관)은 상사면에 거주 하다가 2007년 사망 ㆍ상사면 노동부락: (이씨 집성촌)에서 부역자 및 자수자 많았으며, 운동산ㆍ옥녀봉에서 반군이 자주 출몰하고 폭도도 많이 체포함 ㆍ상사지서: 지서 주임으로 조권패 경사(일본군 장교 출신, 호남 출신), 박석중 주임(한국전쟁 이후, 여수 출신)이 기억남. 여순사 건 당시 정규경찰관 2명 배치 ㆍ상사면 대한청년단: 승주군에는 방위대, 각 면에는 대한청년단 조직. 상사면 단장 백학성(국민회장), 감찰부장 정용규, 조직부장 김경수, 훈련부장 정달병, 참고인은 훈련조교 ㆍ순천경찰서 기동대: 반군 및 빨치산과 전투, 기동대장 윤용기(= 경비과장, 경감), 3개 소대(소대장 경사 3명) ㆍ반군협력자 색출 및 처리: 순천경찰서에서 사찰형사(사복) 1명 파견, 상사지서 주임이 교육시켜 부락마다 2명의 정보원(청년단 원)을 배치 정보 입수 지서에서 부락 수색 반군협조 혐의자 체포 및 지서 연행 엄청난 구타와 고문(전기고문 등)을 통한 조사(조사내용: 주로 세포 및 조직구성 관련) 부역자 명단에 기재 협력사실 시인할 경우 훈계 및 교육, 부인할 경우 순천경 찰서 이송(이송 후 처형 가능) ㆍ순천경찰서로 이송(이송 후 처형 가능)된 경우: 생존하여 귀향한 사람들도 있었으며, 형무소로 가거나 행불되어 안 돌아온 사람들 도 있었음. 가족이 면장 및 국민회장을 통해 처형시키지 말라고 지서 주임에게 선처를 부탁하기도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금품수 수가 많았음. 소ㆍ돼지를 잡아 대접하는 등 지서 주임에게 매일 대접이 끊이지 않았음. 무고와 사감으로 인한 손가락질에 의해 연행되어 피해본 사람들 많았음 ㆍ반군협력자 사살: 반군협력 혐의로 연행된 사람들 사살당하는 광경 목격, 주로 집단사살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3 4명 사살하 는 광경 목격, 지서 유치장에 감금된 사람들을 나가라고 내보 낸 후, 이들이 인근 냇가 막다른 곳에 이르렀을 때, 지서 주임 순천지역 여순사건 713

242 제3권 연 번 성명 소속/계급 일 장소 19 이 ( 李 ) 상사면 대한청년단 ㆍ 상사지서 의용경찰 순천시 와룡저수지 인근 형태 면담 보고서 주요 내용 의 사격명령으로 사살한 적이 있음. 그러나 상사지서에서는 대 규모 집단사살은 거의 없었다고 기억됨. 서북청년단 2명이 잔 인했음. 서북청년단들은 대검으로 척살을 많이 함. 이북 출신들 은 가족을 대살하는 등 가혹하게 처리함. 억울한 죽음이 많았 음. 사살 후 가족에게 통보하여 밤에 가족들이 시신수습함. 죄 질이 악질인 경우, 시신을 전시하기도 함 ㆍ상사면 집단희생장소: 상사 우산포 보정산 골짜기 (확인 결과, 정확히 우산보 인근 보장골로 추정)에서 경찰이 트럭 1대에 사람 들을 가득 싣고 가, 실려 간 사람들이 스스로 구덩이를 파게 한 뒤 사살하는 것을 목격함. 직후에 수해가 나서 시신수습이 어려 웠을 것이라고 기억함. 그러나 이 사건의 발생시기가 여순사건 당시인지 한국전쟁 당시인지는 불확실함(순천시민연대 피해실 태보고서에는 여순사건 당시인 것으로 조사됨) ㆍ서면 구랑실재: 구랑실재에서 민간인 희생자 많았음(선암산-모 후산-무등산 길목) ㆍ여순사건 당시 순천경찰서의 민간인 처형 지휘ㆍ명령계통: 계엄 령 하이므로 재판도 없이 순천경찰서 반군토벌업무를 담당하는 경비과장(윤용기, 구례 간전면 술도가집 사위)이 주도하여 결정 함. 서장 참석 하에 경비과장이 주도하여 과장들이 모여 회의를 통해 결정 지서 주임에게 하달함. 사찰계는 정보수집ㆍ체포ㆍ 조사를 관장했고, 경비과장이 사찰계장보다 더 권한이 강했음. 또한 비무장 민간인 사살 시 조사는 했으나, 재판절차 없었으며, 주임이 판단하여 사살에 처하는 경우도 있었음 ㆍ소개 관계: 상사면에서는 한국전쟁 시 소개가 많았으며, 여순사 건 당시 서면ㆍ월등면ㆍ황전면 등에서 소개가 있었음 ㆍ군 관계: 여순사건 당시 15연대가 순천 뒷골(뒷산, 죽도봉)로 밀 고 들어와 작전, 광양 방면 주둔. 20 배 ( 裵 ) 광양경찰서 경찰 자택 면담 보고서 ㆍ반군 및 지방좌익 관계: 광양 봉강에서 백운산으로 이동, 광양에 서 면사무소 방화했으며, 백운산에서 광양경찰서 습격함. 서면 추동마을 출신 김채중(부친이 부면장 지냄)이란 사람이 지방좌익 의 주도급으로서 농민들에게 식량 제공 및 부역 강요. 김채중은 서면지서에 체포되었으나 지서장 안이 잘 봐주어 풀려났다 가, 한국전쟁 시 다시 나타남 ㆍ서면지서: 지서주임 안(경사, 이북 출신), 이봉길 순경(광양 출신, 서면 삼장 근처 거주)이 많은 사람을 죽임 ㆍ반군협조 민간인: 당시 사상을 지니고 행동한 사람들은 소수, 대부분 아무것도 모르는 농민들이 공산당 및 지식층의 말을 듣고 이끌려 간 경우도 많았고,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산에 강제로 끌려가서 남아 있게 되었음 ㆍ반군협조 민간인 즉결처분: 체포 지서에서 조사 순천경찰서 사찰계 조사 형무소 이송 또는 처형 ㆍ반군협조 민간인 즉결처분 명령: 지서 주임 임의로 할 수 없고, 순천(광양)경찰서 사찰계 및 정보과에서 지시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4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성명 소속/계급 일 장소 형태 주요 내용 20 배 ( 裵 ) 광양경찰서 경찰 자택 면담 보고서 ㆍ순천에서 여순사건 진압 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으나, 구체적으로는 모름 ㆍ서면 보도연맹원 학살 관계: 서면지서장 안이 보도연맹원 많이 학살. 여순사건 당시 좌익에 조금이라도 협조했으면 무조건 보도연맹에 가입시켰으며, 한국전쟁 직후 안 지서장의 주도 로 지본 권래산에서 보도연맹원 10여 명(순천시민연대 피해실태 조사보고서에서는 7명 정도로 조사)이 학살되었음. 이 중에서 판교리 출신 박병구라는 사람이 억울하게 희생되었음. 순천 보도 연맹원 학살은 전라남도경찰국 이상에서 학살 지시가 있어서 이 루어졌으며, 광양도 동일했음 ㆍ군 관계: 순천지역은 15연대 작전한 것으로 들음 21 구 ( 具 ) 별량지서 주임 ㆍ 서면지서 학구출장소 소장 ㆍ 황전지서 용림출장소 소장 진실화해 위원회 자택 통화 보고서 ㆍ 녹취록 ㆍ경력: 여순사건 발발 후 순천 별량지서, 월등지서, 서면 학구출장 소, 황전지서 용림출장소 각 지서에서 3 4개월 근무. 이후 소위 로 임관하고 전쟁이 남 ㆍ주둔 부대: 여순사건 당시 15연대가 당시 백운산과 지리산 일대 를 관할했음. 15연대 부대는 당시 황전지서 옆 산에 주둔. 별량지 서 근무 시 15연대 송요찬 연대장이 별량지서를 방문 ㆍ좌익 체포 및 사살: 황전지서 용림출장소 근무 시 전남도 남로당 간부 박경석 일당을 백운산 골짜기에서 생포했음. 15연대에 보고 하니 정훈장교 송 모 대위가 조치 하라는 명령이 내려와 황전지 서 인근 산에서 사살. 좌익이 많던 서면 학구, 장척마을을 조사해 당시 장인어른을 살해한 좌익인사 장척마을 이장 윤두한을 체포, 장척마을 인근 야산에서 부하를 시켜 사살함 ㆍ보고 체계: 좌익 체포 시 순천경찰서 박달중 사찰계장에게 보고, 손석민 순천경찰서장에 보고, 손 서장은 15연대에 보고하라고 했음. 15연대에 전화로 보고하면 송 모 정훈장교가 송요찬 연대 장이 조치하라는 명령 내렸다 고 지시. 이를 손 서장에 다시 보고 하고 직원들에게 지시해 박경석 일당 등을 사살했음 ㆍ즉결처분 명령: 15연대가 즉결처분 명령을 내렸음. 치안 확보를 위해 즉결처분은 불가피했지만 민간인을 기소도 하지 않고 즉결처 분한 것은 불법행위였음. 본인도 즉결처분을 자제하려 했지만 치안 확보를 위해 쉽지 않았음. 군부대의 명령이기에 집행해야 했지만 15연대의 즉결처분 명령 자체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함 22 안 ( 安 ) 순천경찰서 사찰형사 주임 ㆍ 서면지서 주임 녹취록 ㆍ근무지: 서면지서 주임으로 근무 중 여순사건 발발. 1948년 10월 말부터 서면지서 주임으로 2 3년 근무. 당시 손석민 순 천경찰서장 재직. 사변 후 남원경찰서 조사계장을 거쳐 51년 경위 때 강원도로 발령. 5ㆍ16 군사쿠데타 직후 사찰계 경찰 들이 전부 잘리면서 본인도 경찰직을 그만 둠 ㆍ서면지서 상황: 반군이 조계산, 학구, 용계산으로 이동하면서 출몰, 서면은 요지여서 지서에 경찰 10여 명, 의경 포함 총 30 여 명 근무 순천지역 여순사건 715

244 제3권 연 번 성명 소속/계급 일 장소 형태 주요 내용 22 안 ( 安 ) 순천경찰서 사찰형사 주임 ㆍ 서면지서 주임 녹취록 ㆍ주둔 부대: 15연대 본부가 순천역전 앞 당시 펄프공장에 주둔. 15연대 송요찬과 친했음. 송요찬이 서면지서 자주 방문. 15연 대 2대대 8중대가 서면지서에 중대본부를 두고 토벌작전을 다 녔음. 2연대 부대가 순천에 들어왔음. 그 부대가 두석 달 같이 있었음. 박종석 8중대장은 철저해서 민간인과 접촉을 하지 않 았음 ㆍ좌익 체포: 마을 좌익세포들을 잡으면 처형하지 않고 포섭해 정보원으로 활용했음. 적 출몰하면 보고가 들어와 본인이 군부 대에 보고. 적 병력이 적으면 지서에서 조치, 숫자가 많으면 15연대 8중대가 출동했음. 용계산이 요지여서 집중적인 매복 작전했음 ㆍ처리: 군인들은 반군을 잡으면 연대본부로 넘겼음. 순천시내 순 천제지회사에 15연대 정보과가 주둔해 경찰들이 그곳으로 연 행하기도 했음. 경찰들은 본서로 넘겼음. 본서에서 취조 후 전 주교도소로 이송. 서면 죽평리마을에서 조직책 박모씨를 죽평 리 뒷산에서 사살. 좌익인사 죽평리마을 이장은 체포 후 지서 에서 본서로, 본서에서 전주형무소로 넘겼고 전쟁 시 처형당함 ㆍ백골부대: 여순사건 이후 6ㆍ25 사변 전 백골부대 1개 중대가 서면 거쳐 광양으로 넘어갔음. 백골부대 중대장과 공비토벌작 전에 대해 얘기함. 백골부대는 소문이 좋지 않았으나 지휘관계 상 심하게 하지 말라고 할 수 없었음. 쌍암에 주둔하다 구상리 에서 광양으로 이동 중인 백골부대가 민간인 한 명에게 공산 당 공 자를 보여줌. 모른다고 대답하자 사살했음 ㆍ즉결처분 관련: 서면지서 근무 시 즉결처분한 적 없었음. 당시 경찰에게 즉결처분 권한이 없었음. 사법절차 없이 즉결처분했다 면 불법. 15연대 연대장은 즉결권이 있어서 15연대가 사람들을 죽였다는 말을 들었음. 15연대가 즉결권 행사 시 위법을 따진다 면 당시 토벌을 하지 못했음. 당시에 위법한 일이 좀 있었음. 잡은 반군은 사살 전 보고할 필요 없이 현장에서 바로 사살하고 작전 중 적 사살했음으로 보고하면 됐음. 즉결처분은 경찰들도 본서 차원에서 하지 못하고 6ㆍ25 후퇴할 때 경찰체계가 무너질 때 학구역 대구실재에서 있었음 ㆍ계엄령: 계엄령 지침이 내려왔음. 민간인 절대 보호 내용. 지침상 즉결권이 경찰에게 없었음. 지침은 전남경찰국장이 사령관이라 국장이 내리고 서장이 확인하는 수순 ㆍ경찰 작성 명부: 순천경찰서는 사살자 명부, 부역자 명부 를 순천 진압 직후 작성해 관리 738) 칼빈: 칼빈 소총은 M1총과 같이 미군의 개인화기였다. 칼빈은 M1보다 작고 짧았다. 해방 후 경찰에게는 칼빈총이 지급되었다. 칼빈 사거리는 350m, M1 사거리는 2,700m이다. 화력은 M1이 칼빈보다 월등했다. M2는 기관총처럼 연발로 발사된다. 일본군이 쓰던 총은 38식과 99식이 있다. 순천문화원, 여순사건, 순 천이야기, 2004, 19쪽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4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별첨 3] 국군 제2연대 출신 참고인 조사상황 연 번 성명 (연령) 당시 소속 일 장소 형태 내용 1 박 (84) 2여단 사령부 진실화해 위원회 통화 보고서 ㆍ당시 계급 및 보직: 2여단사령부 모병관(일등상사), 대전 2연대와 함께 여순사건 진압작전 참가 ㆍ부대이동과 작전: 대전 전주 남원 순천 지리산토벌작전, 약 2 3개월 정도 순천과 지리산 일대에 주둔, 진압 및 토벌작전. ㆍ반군 및 반군협조 혐의자 처리: 반군과 반군협조자를 잡은 후 여단사 령부 정보참모가 조사하여 사형 결정을 내리면, 법절차 없이 여단장 결재 후 사형에 처했음. 여단사령부 정보참모와 연대 정보과의 권한 이 막강했음 2 김 (84) 연대 본부 진실화해 위원회 통화 보고서 ㆍ부대 이동과 작전: 대전 남원 구례 순천 여수. 남원에서 3연대 에 합류해 작전함 ㆍ지휘관: 원용덕이 2여단 창설한 후 호남지구사령관이 되었음. 2연대 장 최덕신, 소대장 조시형, 2여단 CIC 안두희(소위) 3 최 (78) 2대대 진실화해 위원회 통화 보고서 ㆍ부대이동과 작전: 공주 대전역 순천역 여수 지리산토벌(구례 ㆍ남원 등지), 순천 국민학교에서 하루 묵고, 순천에서 부대 경계근무. 순천국민학교 교실 두 군데에 꽉 찰 정도로 사람들이 죽어 있었음 ㆍ즉결처분: 2연대가 현지에서 직접 민간인 즉결처분을 하지는 않았 음. 그런데 연대에서 반란군인지 모르겠는데 여수 사람들을 대전 유성까지 싣고 가서 산에서 총살시켜 파묻었다고는 들은 바 있음 ㆍ지휘관: 함병선과 전부일 4 이 (80) 5 조 (81) 6 김 (81) 2대대 2대대 1중대 2대대 5중대 진실화해 위원회 진실화해 위원회 진실화해 위원회 통화 보고서 통화 보고서 통화 보고서 ㆍ부대이동과 작전: 공주 대전역 순천 여수 백운산(광양), 지리 산(구례ㆍ남원) 일대 토벌작전 ㆍ작전 지시: 2연대 병력은 흰 띠를 두른 철모를 쓰고서 밤낮으로 최일 선에서 작전, 지휘관 지시에 따라 산간마을에서 직접 반군 추격과 소탕작전 ㆍ즉결처분: 대전에 복귀해서 진압 당시 좌익을 잡아다 죽여서 구덩이 에 파묻었다고 하는 것을 동료들끼리 서로 얘기함 ㆍ부대이동과 작전: 순천 진압 시 군산 12연대와 공동작전을 벌임. 순천 국민학교에서 주둔하였음. 1중대 동료 이계원 ㆍ부대이동과 작전: 대전 여수 순천 지리산 토벌. 연대병력 400 여 명이 순천으로 이동함. 순천 국민학교에서 야간에 습격받아 부대원 일부가 희생됨. 1주일 정도 지나 남원으로 이동하여 지리산 일대 토벌작전 전개 ㆍ지휘관: 5중대장 전부일 순천지역 여순사건 717

246 제3권 연 번 성명 (연령) 당시 소속 일 장소 형태 내용 7 이 (78) 2대대 5중대 3소대 진실화해 위원회 통화 보고서 ㆍ부대이동과 작전: 대전 남원 구례 순천. 연대에서 대대급이 출 동, 순천 못 가서 습격당해 구례로 후퇴했다가, 다시 순천에 들어가 1개월가량 주둔했다고 들음. 당시 소대장 이 전사함 8 이 (85) 2대대 8중대 진실화해 위원회 통화 보고서 ㆍ부대이동과 작전: 천안(1대대) 대전 광주역 여수(2대대) 순천 천안. 10월 20일 기차로 광주역에 도착해 4연대와 합동작전. 순천 경찰서에서는 1주일가량 주둔 ㆍ반군협조 민간인 처리: 순천경찰서에서는 반군협조 혐의자를 처벌하 지는 않았던 것 같고, 헌병이 인도해 오면 정보과에서 취조하였음. 여학생들이 반군 연락병 역할을 함. 당시 계엄령 하에서 즉결처분 소식을 들으면 기분이 좋지 않았음 ㆍ진압군 표시: 순천경찰서에서 헬멧에 백골 을 그리고 다니는 백골부 대를 직접 보았음. 또 헬멧에 얼굴 그림을 그리고 있던 다른 부대가 18연대라고 당시 들었음. 본인의 2연대는 헬멧에 페인트로 2연대 라 고 썼음. 수색대(기갑연대)도 들어와 있었음 ㆍ지휘관: 연대장 함병선, 8중대장 이재중 9 오 (81) 3대대 진실화해 위원회 통화 보고서 ㆍ부대이동과 작전: 대전-순천-지리산토벌작전(구례, 남원, 운봉 등)-대전, 제주토벌작전. 대전에서 열차로 순천역 도착. 순천역 주변 에 경찰들 죽어 있었음. 도착한 다음에는 산 밑으로 옮겨 주둔했다가, 순천 국민학교에서 두어 달 주둔함. 시가전 때 주민들을 볼 수 없었고, 당시 억울하게 죽은 사람 많았음. 입산 반군들을 산 쪽으로 추격함 ㆍ반군협조 혐의 민간인 처리: 반군들에 밥 해주거나 하는 반군협조 혐의자들이 있었지만, 군인이 민간인을 상대하지는 않고, 경찰들이 취급하였음 ㆍ지휘관: 함병선 연대장, 전부일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4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별첨 4] 국군 제3연대 출신 참고인 조사상황 연 번 성명 (연령) 당시 소속 일 장소 형태 내용 1 서 (84) 2여단 하사관 교육대 (중대장) ㆍ 3연대 3대대 9중대 (중대장) 진실화해 위원회 ㆍ 진실화해 위원회 ㆍ 진실화해 위원회 ㆍ 면담 보고서 ㆍ당시 계급 및 보직: 중위ㆍ대위, 2여단 하사관교육대 중대장 3연 대 3대대 9중대장 ㆍ2여단 하사관교육대: 2연대와 3연대 병력으로 구성, 200여 명 규모 1개 중대로 편성, 교장 송석하, 중대장 서(서용락, 육사3 기), 소대장 장인걸(육사5기)ㆍ박치옥(육사6기)ㆍ이우신(육사6 기, 이판교) ㆍ2여단 하사관교육대, 2연대, 3연대가 순천 진압작전 참가, 2여단 하사관교육대가 제일 먼저 순천에 진입하여 10월 22일경부터 순 천농림중학교에 주둔, 순천 진입 시 반군의 저항이 거의 없었음 ㆍ3연대의 순천 진압 및 토벌작전: 1대대 (양찬우 1중대장), 2대대(유 근춘 중대장)를 진압작전 중에 목격. 1949년 순천지역 반군토벌작 전에는 3연대 1대대(대대장 박승일, 1중대장 양찬우, 박종길ㆍ박 경호 소대장)가 하동 화개에 주둔하면서 참가했음 ㆍ2여단 하사관교육대 출신인 이윤의 진중일기 에 나오는 순천에 서 반군 300여 명을 사살한 전과는 없었으며, 그러한 대규모 반군 사살 실적에는 분명 상당수의 비무장 민간인 피해자가 포함되어 있었을 것임 ㆍ순천지역 민간인 즉결처분: 순천에서 수색작전 전개하며 반군협조 혐의자 연행하여 도망자 등 일부는 사살 및 일부는 타 부대에 인계 함. 순천 주둔 당시 군에 의해 억울한 민간인이 희생되었음을 인정 함. 당시는 군이 마음대로 사살하는 무법이어서 즉결처형이 많았 음. 순천 외곽 지역에서는 경찰이 많은 민간인을 즉결처분하였음 ㆍ여순사건 당시 민간인 즉결처분: 학교에 민간인을 수용하고 우익 단체나 경찰이 반군협조 혐의자를 지목하고, 고문을 가하여 혐의 가 있다고 판단되면 한 번에 20 30명씩 즉결처형했음. 부락 내 부의 사감으로 반군협조자 라고 지목되면 즉결처분되는 경우가 많았음. 당시는 무법 상황이고 토벌작전에 지장이 있고 반군협조 혐의가 있어 즉결처분했다고 하면 문제되지 않으므로, 대대장ㆍ 연대본부에 보고하지 않고 중대장ㆍ소대장 판단으로 현장에서 즉 결처분하고 구두보고하면 되었음. 그러나 대규모 즉결처분의 경 우, 대대장과 연대장에게 보고해야 했음 ㆍ계엄령 관계: 당시 군인들은 계엄령 하에서는 군인들이 마음대로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현지 지휘관이 마음대로 할 수 있었음 ㆍ반군토벌작전 당시 3연대는 2여단 소속이어서 행정적으로 통제 받았으나, 작전권은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에 있었음. 당시 부대 별 작전구역이 있었으나, 실제 작전에서는 타 부대 작전지역에서 도 작전함 2 김 (80) 연대본 부 진실화해 위원회 통화 보고서 ㆍ당시 계급 및 보직: 이등중사, 연대장 및 부연대장 운전 담당 ㆍ이동경로: 순천 여수 전주(연대본부) 지리산 ㆍ3연대 지휘관: 송석하 부연대장, 양찬우ㆍ유근춘 중대장 순천지역 여순사건 719

248 제3권 연 번 성명 (연령) 당시 소속 일 장소 형태 내용 2 김 (80) 연대본부 진실화해 위원회 통화 보고서 ㆍ3연대 순천 진압작전: 12연대가 먼저 순천 진입, 3연대 2대대 참 가, 3연대 연대본부(10여 명 정도)는 순천시내 도로변 주둔, 순천 시내에서 시가전 전개, 순천역 앞과 순천경찰서 앞에서 경찰과 민간인 시체 목격 3 김 (77) 3연대 1대대 2중대 3소대 진실화해 위원회 통화 보고서 ㆍ당시 계급 및 보직: 하사, 보병 ㆍ1대대 지휘관: 1대대장 박승일, 1중대장 양찬우, 2중대장 이 중위(일본군 출신), 3중대장 박종길 ㆍ주둔지: 구례경찰서, 하동 화개 담배창고 옆 지서 등 ㆍ작전 지역: 구례, 곡성, 하동, 함양, 산청 등 지리산 일대에서 중대 별로 작전 ㆍ반군협조 민간인 즉결처분: 정보원이나 주민을 통해 장교들이 정 보수집(밀고, 정보원 배치) 반군협조 민간인을 색출 및 연행 중 대장 및 간부들이 취조 선임하사가 분대원을 이끌고 구덩이를 파서 총살하고 매장함. 1회에 7 8명 정도 총살, 총살당한 사람들 중에는 좌익활동과 관계없는 억울한 민간인이 많았음 ㆍ즉결처분 인식: 총살당한 사람들을 반군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한 당연한 조치라고 생각했음 ㆍ계엄령 인식: 계엄령 선포 사실을 알고 있었음 4 안 (80) 5 김 (81) 6 한 (85) 3연대 1대대 2중대 3연대 1대대 3중대 3연대 2대대 5중대 참고인 자택 ㆍ 진실화해 위원회 진실화해 위원회 서울 종로3가 아사녀다방 녹취록 ㆍ 통화 보고서 통화 보고서 면담 보고서 ㆍ3연대 의무대 소속 의무병, 1대대 파견되어 작전 ㆍ지휘관: 2중대장 이소동 소위 ㆍ이동경로 : 전주 구례 순천 여수 전주 구례 ㆍ작전 지역: 순천, 구례, 남원, 함양, 산청, 거창, 안위 ㆍ순천지역 민간인 즉결처분: 민간 차량 및 운전수 강제 징발, 징발 에 응하지 않은 운전수 즉결처분함. 반군 및 반군협조 민간인을 즉결총살함 ㆍ이동경로: 순천 여수 지리산지구(구례) 산청ㆍ함양 ㆍ1대대 지휘관: 대대장 박승일, 1중대장 양찬우, 3중대장 박종길, 3중대 선임소대장 나봉균 ㆍ순천 진압작전: 중대별ㆍ소대별로 시가전을 벌이며 수색작전, 큰 저항 없이 행군하며 수색, 어느 학교에 주둔 ㆍ민간인 즉결처분 지시: 상부 명령(대대장-중대장-소대장) ㆍ계엄령 관계: 계엄령 선포 사실 몰랐음 ㆍ당시 계급 및 보직: 특무상사, 5중대 인사계 인사주임 ㆍ3연대 2대대 이동경로 : 남원 순천 벌교ㆍ고흥 여수 지리 산지구 ㆍ3연대 지휘관: 연대 정보과 김시곤, 유근창(육사2기, 생존), 2대대 장 조재미, 5중대장 김용(중국 국민당군 출신, 육사3기)ㆍ박병옥, 6중대장 김응록(육사3기), 지정풍(육사6기) ㆍ순천 진압작전과 민간인 즉결처분: 2대대(주로 5ㆍ6중대) 순천시 내 수색작전 전개, 반군협력자나 좌익을 체포하면, 이들을 후송하 기 위한 병력과 보급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작전 효율 및 편의를 위해 바로 총살함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4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성명 (연령) 6 한 (85) 당시 소속 3연대 2대대 5중대 일 장소 서울 종로3가 아사녀다방 형태 면담 보고서 내용 ㆍ지리산지구토벌작전과 민간인 즉결처분: 남원과 구례 산동에 주둔 하면서, 지휘관이 반군 출현 정보 입수하면, 중대장 및 소대장 인솔 하에 구례, 곡성, 순천, 광양, 남원, 운봉, 순창, 산청, 함양, 안의 등으로 반군토벌작전을 전개. 구례, 순천, 광양 등 토벌작전 지역 부락에서 반군에 협조한 주민들을 즉결처분함. 구례 산동 등 지리산 일대에서 많은 민간인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반군에게 협조했다가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실을 인정함 ㆍ민간인 즉결처분 과정: 주둔지(학교 등)로 주민 연행ㆍ집합 특무 대 취조(전주 및 남원특무대 하사관이 와서 전기고문하며 취조) 특무대원과 중대장 및 소대장이 협의하여 총살대상자 결정 몇 십 명 씩 검은 천을 눈에 두르고 주둔지 뒷산에서 구덩이를 파고 총살. 적법한 조사와 재판과정이 없었으며, 총살당한 주민들 대부 분 반군과 직접 관련 없는 양민으로 억울한 죽음이 많았음. 주둔지 가 아닌 경우와 특무대 조사가 없는 경우, 현지 지휘관 주도로 현지에서 바로 조사하여 처형하였음. 즉결처분 관계는 조재미 대 대장에게 보고되었음 ㆍ군 내외 좌익 색출: 5중대장 김용은 참고인에게 지리산작전을 못 가게 하고, 남원과 구례 산동에서 군 내외 좌익 색출 및 보급업무를 담당하게 했음. 참고인은 열차 등에서 군인과 민간인을 수색하여 좌익을 색출했고, 헌병대와 경찰에 인계하여 조사하게 함. 이 과정 에서 실제 좌익이 아닌 억울한 군인과 민간인이 많았음을 인정함 ㆍ5중대장 김용: 일본도 소지, 순천에서 많은 민간인을 즉결처분했 음. 참고인이 순천 진압작전 후 구례 산동에서 김용을 만났을 때, 김용과 장교들이 순천지역 민간인 즉결처분에 대해서 언급했음. 이때 참고인은 김용에게 좌익 및 반군협조 혐의가 확인되지 않은 애매한 사람들을 죽이지 말고, 반군협조 혐의를 제대로 확인하여 처리해야 한다고 말했음. 또한 김용이 남원에서 휘하 병사 5명을 일본도로 참수하려고 하는 것을 목격함 7 유 (79) 3연대 2대대 5중대 4소대 참고인 자택 ㆍ 진실화해 위원회 면담 보고서 ㆍ 통화 보고서 ㆍ당시 계급 및 보직: 이등병, 보병 ㆍ2대대 이동경로: 남원(원 주둔지) 순천(3일 정도) 고흥(4일 정 도) 구례 및 지리산 ㆍ2대대의 순천 진입: 남원에서 여순사건 발발 직후 4 500여 명이 순천에 진입 ㆍ2대대 순천 주둔 기간 및 장소: 순천역에서 약 1km 정도 떨어진 도로변에서 3일 정도 주둔 ㆍ3연대 지휘관: 연대장 함준호, 부연대장 송석하, 2대대장 조재미, 5중대장 김용, 6중대장 김응록. 5중대장 김용은 좌익에 대한 극도 의 혐오감을 지녔으며, 2대대장 조재미의 통제를 받지 않고 독자 행동을 많이 함. 5중대 선임하사 신 일등상사(3연대 1기) ㆍ순천 진압작전: 5중대가 시내를 돌며 색출 작전 ㆍ순천지역 민간인 즉결처분: 순천에서 군복과 사복 입은 사람들 5 6명을 연행, 5중대장 김용이 이들이 좌익들이라며 순천 도로 변 도랑에 일렬로 세우고 총살하라고 명령. 사병들이 머뭇거리자 순천지역 여순사건 721

250 제3권 연 번 성명 (연령) 당시 소속 일 장소 형태 내용 7 유 (79) 3연대 2대대 5중대 4소대 참고인 자택 ㆍ 진실화해 위원회 면담 보고서 ㆍ 통화 보고서 김용이 직접 20연발 자동소총으로 연발사격, 연행된 사람들을 총 살함. 순천에서 고흥으로 이동 중, 낙안면지서 인근을 지나는데, 주민들이 반군으로 인식하고 환영하자, 5중대장 김용이 직접 주민 들을 잡히는 대로 길가에서 총살하고 일본도로 목을 베어 죽임 ㆍ민간인 즉결처분 및 계엄령에 대한 인식: 당시 병사들은 즉결처분 을 당연하다고 여김. 계엄령 선포는 몰랐음 ㆍ기타: 당시 순천철도역 근무자들은 대부분은 우익 성향, 반군이 순천철도관사에서 사살을 했다고 들음 8 전 (78) 3연대 2대대 5중대 진실화해 위원회 통화 보고서 ㆍ당시 계급 및 보직: 일등병, 통신병 ㆍ5중대장: 송일순 김용 ㆍ2대대 순천 주둔: 순천역 근처 건물 ㆍ순천 진압 관련: 순천시내에 반군협조 민간인이 많았으며, 그들이 길을 다르게 가르쳐주어 작전에 혼선이 있었음. 순천시내에 학생 들로 보이는 민간인 시체들이 널려 있었음 ㆍ순천지역 민간인 즉결처분: 순천에서 학교에 주민들을 모아놓고 반군협조 혐의자 심사 후 즉결처형한 사실을 들었음. 당시 군이 즉결처분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기억됨 ㆍ계엄령 관계: 계엄령 선포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몰랐음 9 박 (78) 3연대 2대대 7중대 진실화해 위원회 통화 보고서 ㆍ당시 계급 및 보직: 일등병, 보병 소총수 ㆍ이동경로: 남원(2대대), 여순사건 발발 2 3일 후 비상소집 구례 순천(3일간 진압작전) 여수(14연대 주둔지 진주) 곡성 및 지 리산반군토벌(남원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 ㆍ지휘관: 소대장 지정풍(육사 6기) ㆍ순천 진압작전: 순천 외곽 산에서 포위 및 봉쇄작전, 해질 무렵 순천에 들어가 40분 정도 교전, 순천경찰서 앞에서 가마니에 덮여 있는 경찰관과 민간인 시체 목격, 순천농림중학교에서 주둔(약 2 3일간 주둔, 타 부대도 함께 주둔함). 순천에서 1개 대대당 1분대 씩 차출하여 선발소대로 1개 소대(소대장 육사 6기 지정풍)를 편 성, 기갑연대와 함께 여수로 진입함 ㆍ순천지역 민간인 즉결처분: 순천에서 국군을 반군으로 오인한 민 간인이 골목에서 나오면, 체포하여 속옷 차림으로 데리고 다니다 가, 타 부대 지휘관(육사 5기로 기억)이 불편하고 번거롭게 뭐 하러 데리고 다니느냐고 총살하라고 하여 순천에서 여수로 가는 길 뒷산에서 모두 총살함. 순천 진압 후 헌병대와 CIC가 반군협조 혐의 민간인 색출하여 처리함. 반군협조 혐의 민간인을 색출하면 조사ㆍ재판 없이 즉결처분하는 경우가 많았음 ㆍ민간인 즉결처분 인식: 당시 순천시내에 좌익으로 보이는 민간인 이 많아, 생존을 위해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으며, 지휘관의 명령 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음. 당시 군의 민간인 처리에 관한 아무런 교육이나 지침도 없었으며, 억울한 민간인 희생자가 많았음 ㆍ계엄령 관계: 계엄령 선포 사실을 몰랐음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5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별첨 5] 국군 제4연대 출신 참고인 조사상황 연 번 성명 (연령) 당시 소속 일 장소 형 태 내용 1 전 (81) 4(20) 연대본 부 정보과 순천시 무공수훈자 회 사무실 ㆍ당시 계급 및 보직: 일등중사, 연대본부 정보과 작전정보(G-2) 및 반군 포로 심문 담당 ㆍ4(20)연대 이동경로: 광주 광양 광주 순천( ) 광주 화순(1949) ㆍ4(20)연대 주둔지: 연대 전투지휘소(CP)가 순천 풍덕동 옛 펄 프공장 자리 ㆍ4(20)연대 작전 지역: 초기에 순천 서쪽 평야 지대 중심, 이후 순천을 중심으로 지리산지역(월등면ㆍ황전면 포함, 산청, 함 양, 남원 등지) ㆍ4(20)연대 지휘ㆍ명령체계: 제5여단장 김백일 연대장 박기 병 2대대장 이문호 5중대장 김남근, 7중대장 배명중(육사 3기), 20연대 정보주임 김종환 대위, 문연섭 중위, 기타 모병장 교 김재명 중위 ㆍ순천 탈환작전: 3연대ㆍ4연대ㆍ12연대ㆍ15연대 등 5개 연대 작전, 송치재에서 3연대 부연대장 송석하가 반군에게 당함. 월등 면ㆍ황전면은 처음에 15연대가 작전하고, 이후 20연대가 들어감 ㆍ군 정보계통의 역할: 작전정보(G-2)를 담당했으며, 반군 포로 를 취조했음. 포로라고 잡혀온 사람들 중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 농민들이 많았고, 이들은 실제 포로들이라 볼 수 없었음. 당시 순천에 CIC와 HID가 분명히 있었음 ㆍ반군협력 혐의자 색출: 반군 추격 중에 반군에게 피해를 입은 경찰과 우익 가족이 지목한 경우, 군에서 직접 가각호호 수색하 여 색출함 ㆍ반군협력 혐의자 취조: 군인들에게 직접 잡혀온 경우에만 취조 를 했으며, 직접 정보과에서 취조함. 반군협조 및 가담 동기를 주로 물었으며, 답변은 주로 계급 없고 차별 없는 평등사회, 빈부격차 없는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었음. 관대하 게 대해주면 다 이야기해주는 경우가 많았음. 명부를 따로 작성 하지 않고 바로 처리함. 경찰에서도 자체적으로 취조하고 처리 했으며, 경찰은 관련 명부를 작성했다고 들었음 ㆍ반군협력 혐의자 처리: 억울하게 잡혀온 양민들의 경우, 석방시 키기도 했음. 순천에서 두루마기 차림을 한 노년의 도당 부위원 장이라는 사람이 잡혀왔는데, 연대장의 재가를 얻어 살려준 적이 있음. 지식층 등 거물급이면 처리가 곤란하여 광주사령부 로 보냄. 취조 후 경찰에 넘긴 사람들도 있었음. 경찰관 살해 등 죄가 큰 사람들은 고등법원이 있는 타 지역으로 이송함 ㆍ민간인 즉결처분: 반군협조 혐의 민간인의 경우, 억울하게 즉결 처분당한 사람이 많았음. 반군이 생명을 위협하며 강제로 협조 및 입산을 강요한 경우, 아주 억울하게 희생된 주민들이었음. 반군이 경찰을 죽인 일이 있었기에, 경찰 유가족들이 보복 감정 으로 억울한 민간인을 많이 희생시킴 순천지역 여순사건 723

252 제3권 연 번 성명 (연령) 당시 소속 일 장소 형 태 내용 1 전 (81) 4(20) 연대본 부 정보과 순천시 무공수훈자 회 사무실 ㆍ민간인 즉결처분의 사례: 당시 순천에 주둔할 때, 15연대가 무 고한 민간인을 살해했다는 제보를 듣고, 15연대 헌병 하사관 (일등중사 편)에게 찾아가, 군인이 민간인에게 잘못하면 국민에게 불신당하고 파면당한다고 경고한 적이 있음 ㆍ민간인 즉결처분의 근거와 지휘ㆍ명령계통: 계엄포고문 이후 세부지침이 하달되어, 생포를 위주로 하라고 지시함. 즉결처분 은 지휘관, 특히 연대장의 성향에 따라 가능했음. 당시 분대장 급 이상에게 즉결처분권이 있었음 ㆍ즉결처분의 위법성: 조사를 통한 확인 없는 즉결처분은 분명히 위법임 ㆍ미군의 개입: 20연대에 미 군사고문관 대위 근무 ㆍ당시 계급 및 보직: 이등병, 보병 ㆍ순천 작전: 사건 발발하자 4연대 1대대 각 소대별로 우수 병력 120명을 차출, 1개 선발 중대 구성하여 10월 20일 정오 무렵 순천으로 투입. 당시 반군이 순천 산악지역을 점령한 상태였고, 순천역전 부근 방천에서 경찰과 함께 매복함. 반군이 산에서 내려오면 사격하여 교전함. 당시에는 반군이 무엇이었는지도 몰랐음 ㆍ4연대의 반군 합류: 순천에서 4연대 지휘관 및 선배들이 반군 과 조우하자, 일부가 반군과 악수를 하며 합세. 하급 병사들은 순천에 지휘관도 없이 남아 있게 됨 ㆍ12연대의 순천 진입과 반군 혐의: 12연대가 순천에 진입하자 같은 진압군이라고 총에 손수건을 매고 환영하였으나, 12연대 는 잔류 4연대 군인들에게 총을 들이대고 공포를 쏘며 방천 앞에 꿇어앉히고 무장해제시킴. 12연대는 순천에 잔류한 4연 대 군인들을 반군으로 취급, 학교 교실에 14연대 군인들과 함께 구금, 구타ㆍ고문하며 취조함 ㆍ여순사건 당시 민간인 희생: 순천에서 14연대 군인들이 시내에 돌아다니며 경찰관을 사살하였고, 반군은 순천역 앞 방천으로 경찰관을 끌고 가 사형시킴 ㆍ4연대 지휘관: 박기병 부연대장 ㆍ계엄령 관계: 계엄령 선포 사실 몰랐음 2 김 (80) 4연대 1대대 1중대 참고인 자택 (광주광역시) 면담 보고서 3 김 (80) 4연대 1대대 3중대 3소대 ㆍ 5사단 사령부 법무부 순천시 연향동 주공아파트 경로당 ㆍ당시 계급 및 보직: 하사, 3소대 선임하사 ㆍ4연대 지휘관 및 동료: 박기병 (부)연대장, 위대선 연대장(장흥 유치 전투에서 사망), 1대대장 유정택 대위(평북 박천 출생, 일본군 장교 출신), 3중대장 김형재 중위(육사 4기)ㆍ유창수, 3소대장 현덕진ㆍ김종호 소위, 3중대 하사 장철수(전남 화순 거주, 육군 준위 예편), 3대대 10중대 하사 김은동(4연대 하사 관교육대 동기, 전남 나주 출신), 5사단 법무부 유후열(전남 영암 출신) ㆍ4연대 1대대 3중대 진압경로: 오전 병력 약 140 명이 이동, 남광주 화순 보성 순천(별량), 다른 부대는 옥 과 곡성 구례 학구 순천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5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성명 (연령) 당시 소속 일 장소 형 태 내용 3 김 (80) 4연대 1대대 3중대 3소대 ㆍ 5사단 사령부 법무부 순천시 연향동 주공아파트 경로당 ㆍ반군에 의한 체포와 순천경찰서 구금: 참고인은 3소대 선임하 사로서 별량에서 순천시내로 선두에서 이동 중 반군 2명에게 잡혀 순천경찰서로 연행됨 ㆍ반군 점령 당시 순천경찰서 상황: 당시 순천경찰서 마당에 진압 군 40 50명 정도 잡혀 있었고, 진압군 장교들은 순천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됨. 얼마 후 반군 부사령관(14연대 이 일등 상사)이라는 사람이 경찰서 단상에 서서 연설을 했는데, 그는 참고인의 고향(광양) 지인이었고, 참고인을 따로 당시 반군 지 휘부 사무실인 순천경찰서장실로 불러 참고인에게 반군에 합 류할 것을 제안함. 당시 반군 지휘부에는 반군 부사령관 포함 3명이 있었음 ㆍ진압군의 순천 진입과 반군의 입산: 진압군이 순천경찰서에 근접하니 반군 부사령관이 참고인에게 지리산으로 입산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함. 반군은 참고인에게 순천경찰서에 잡혀 있는 진압군 포로 중 병사들은 함께 데리고 갈 것이고, 유치장 에 구금된 진압군 장교들을 참고인에게 총살시키라고 지시하 며 유치장 열쇠와 소총 및 탄약을 지급함. 그러나 참고인은 유치장에 구금된 4연대 3중대장 김형재, 3소대장 김종호, 성명 불상의 소위 3명을 죽이지 않고 풀어줌. 이후 참고인은 백운산 아래인 광양 동곡까지 3 4시간 동안 반군을 뒤따라갔고, 광양 동곡에서 다리 밑에 숨어 있다가 쫓아온 진압군에 합류. 진압군 중 4연대 1대대장 유정택이 보였고, 1대대는 계속 반군을 추격. 순천에서 며칠 있다가 광주4연대로 복귀했고, 이후 반군토벌 작전에 투입됨 ㆍ반군의 입산 경로: 순천 광양 옥룡ㆍ동곡 백운산 섬진강 지리산 ㆍ순천 주둔 진압부대: 참고인이 순천에 돌아왔을 때, 4연대가 작전 진행. 며칠 있다가 4연대가 광주로 철수, 군산 12연대가 4연대의 작전 인계함 ㆍ순천에서 반군협조 혐의자 색출과 처리: 경찰 사찰계와 군 방첩 대ㆍ정보과ㆍ헌병 정보수사요원들(사복 차림)이 반군협조 혐 의자를 색출하여 순천경찰서 유치장(방 4개 정도 규모)에 구금 시키는 것을 목격. 순천경찰서 인근에서 총소리가 많이 났으며, 총소리가 날 때마다 사람이 죽는다고 생각함. 후에 군경이 반군 협력 혐의자들(민간인)을 조사ㆍ재판 없이 즉결처분했다고 들 었음. 당시 조사는 했을 수 있어도 재판은 없었음. 순천시내 특히 군청 주변에서 많은 민간인 시체를 보았으며, 반군에 의해 죽은 사람보다 진압군에 의해 죽은 사람이 더 많다고 들었음 ㆍ민간인 즉결처분의 위법성 인식 여부: 당시 참고인은 반군협조 행위를 조사한 결과로서 처형하므로 즉결처분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음 ㆍ계엄령 선포: 알지 못했음 순천지역 여순사건 725

254 제3권 연 번 성명 (연령) 당시 소속 일 장소 형 태 내용 3 김 (80) 4연대 1대대 3중대 3소대 ㆍ 5사단 사령부 법무부 순천시 연향동 주공아파트 경로당 ㆍ반군토벌작전과 민간인 즉결처분: 당시 중대마다 2명 정도씩 정보과나 특무대요원을 배치하여 정보수집, 정보요원들이 정 보수집하여 중대장ㆍ대대장에게 보고, 정보에 따라 토벌작전 진행. 그 과정에서 반군협조 혐의 민간인을 조사와 재판 없이 총살하거나 일본도로 참수한 사례가 많이 있었음 4 조 (81) 1대대 4중대 전남 순천시 왕지동 에바다 기도원 ㆍ당시 계급 및 보직: 이등중사, 4연대 수송부 배차계 ㆍ4(20)연대 지휘관: 4연대장 이한림 소령, 위대선 소령(전사), 연대장 대리 조암 소령, 20연대 부연대장 김 ㆍ4연대의 순천 진압: 1차로 10월 20일경 4연대 전 중위(육 사 3기)가 대대장 권한을 위임받고 4연대 진압군 병력을 임시 편성하여 순천중학교 주둔을 목표로 출동. 이들이 순천에서 14연대와 만나자, 14연대 장병들과는 서로 잘 아는 선후배 동 기 사이이므로 지휘계통 소멸됨. 2차로 10월 22일경 GMC 12 대 정도의 4연대 병력이 박기병 부연대장 인솔 하에 주암ㆍ송 광을 거쳐 학구삼거리(굴다리 철교)로 집결되어 14연대와 대 치. 이때 참고인은 운전병으로 병력 수송하며 목격함. 박기병 부연대장이 14연대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교전이 시작되었고, 교전 과정에서 농민들 일부가 희생됨. 14연대 부상자 10명 정 도를 차량에 싣고 송광면사무소에 임시로 설치된 야전병원으 로 후송. 22일 저녁까지 전투하다가 광주로 철수. 다시 광주에 서 4연대 병력을 대규모로 싣고 보성ㆍ벌교 방면에서 순천으 로 진입하여 순천중학교(현 순천고등학교)에 주둔. 죽도봉 근 처 천변에 경찰들 시체가 있었던 것을 목격함 ㆍ반군진압 및 토벌작전 당시 민간인 희생: 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가 많았음을 인정함. 광주4(20)연대나 마산 15연대가 순천, 보성, 담양, 장성 등 진압 및 토벌작전 지역에서 반군에게 식량 등을 제공한 마을을 포위해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포함한 마을주 민 전부를 모이게 하여, 많은 주민들을 희생시킨 일이 있었음 ㆍ여순사건 당시 순천지역 민간인 집단희생장소: 진압 후 경찰이 반군협력 혐의자를 색출하여 몇 십 명을 사살한 후 참고인이 현재 거주하는 에바다기도원에서 남동방향으로 1km가 안 되 는 지점의 왕지동 산봉우리(현재 산 밑에 교회가 있음)에 매장 했다고 들었음. 1958년경 여순사건 당시 경찰로 근무했던 허 등의 사람들이 여순사건 당시 상사면 우산보(현재 우산보산 장 인근 골짜기)에서 경찰이 민간인들을 즉결처형하여 매장했 다고 참고인에게 말해 줌. 허은 상사면 우산보에서 경찰이 저녁 무렵 사살하면 다음날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하는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고 말했음. 상사면 우산보는 여순사건 때부터 한국전쟁 시기까지 계속해서 집단학살당한 장소였음. 상사면 흘산리 당촌부락에서 주민들이 좌우로 나누어져 서로 보복전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5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성명 (연령) 당시 소속 일 장소 형 태 내용 4 조 (81) 1대대 4중대 전남 순천시 왕지동 에바다 기도원 을 벌여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고 들었음 ㆍ민간인 희생 관련 지휘ㆍ명령: 소대장ㆍ중대장 등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 민간인을 즉결처분함. 지휘관들은 농부가 논에서 피를 뽑다보면 나락도 뽑게 되는 법이라고 말하는 등 군 작전 과정에서 민간인이 희생될 수 있다고 여겼음 ㆍ계엄령 인지 여부: 당시 계엄령 관계는 몰랐음 ㆍ민간인 즉결처분의 위법성 인식: 당시 일부 군인들은 민간인 즉결처분이 위법하며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하고 가책을 느꼈음. 교전 중에 반군을 사살했다면 그렇게 괴로워하지 않았을 것이며, 민간인을 조사나 재판도 없이 바로 즉결총살하니 죄의식이 생겼던 것임. 그러나 일부 군인들은 원래 군인이 사람 을 죽이는 집단인데, 뭘 그리 괴로워하냐고 말하기도 하였음 ㆍ여순사건과 경찰: 여순사건 당시 경찰은 주민들을 잡아 고문 (전기고문, 고춧가루물 코에 붓기 등) 및 구타하고 심한 피해를 주었음. 경찰관 중에서도 고약한 사람들이 있어서 고문을 하는 등 악행을 많이 함 ㆍ여순사건 관련 지인: 경찰 출신 배갑수(일제 때부터 경찰, 전라 남도 토벌대장, 3년 전 작고) ㆍ당시 계급 및 보직: 이등병, 보병 소총수 ㆍ4연대 지휘관: 5여단 사령관 김백일, 연대장 박기병, 2대대장 김, 6중대장 김 중위 ㆍ여순사건 당시 4연대 상황: 4연대 내부에 좌익이 많았음. 2대 대 부관, 5중대장, 8중대장이 좌익이었으며, 2대대 정보계통에 도 좌익이 많았음. 2대대 5중대와 8중대가 반군에 합류함 ㆍ순천 진압작전: 광주에서 출동하여 학구(추정)에서 반군과 교 전함. 순천시내에는 못 들어감. 2대대 5중대와 8중대가 반군에 합류하여 2대대 6중대와 7중대도 사상적으로 의심을 받아 순 천 진압작전을 지속하지 못하고 여수로 갔다가 광주로 복귀함 ㆍ반군토벌작전: 구례, 곡성, 남원, 산청 등 지리산지구 ㆍ반군진압 및 토벌작전 당시 민간인 희생: 국군과 반군 모두 민간인 을 많이 희생시킴. 주로 지역 주민들이 손가락질을 하는 등 반군협 조 관계를 제보하여 희생당함. 마을이장 등이 국군에게 반군협조 관계를 제보하면 정보과에서 조사하기도 했으며, 이 과정에서 민간인들이 억울하게 군경에게 끌려가 조사나 재판 없이 즉결처 분당하는 등 억울한 민간인이 학살당한 경우가 있었음 5 임 (83) 4연대 2대대 6중대 2소대 참고인 자택 (광주광역시) 6 전 (79) 4연대 1대대 2중대 ㆍ 14연대 ㆍ 4(20) 연대 2대대 8중대 동여수 노인복지회관 (전남 여수시 국동) ㆍ당시 계급 및 보직: 일등병, 중대 연락병ㆍ서무계 ㆍ14연대 반란 관련: 14연대 군인들이 여수 신월리 연병장에 모여 있다가 시내로 빠져나감. 좌익사상을 가진 군인들은 얼마 안 되었 고, 대부분 반란인지도 모르고 가자는 대로 따라 나감. 10월 20일 새벽 순천행 열차를 타고 순천에 도착하여 반란이 일어난 것을 알게 됨. 10월 20일 오전에 4연대가 이미 순천에 진입하여, 14연대 가 순천역에 못 미쳐서 하차함. 하차 후 일부는 14연대 반군을 따라 갔고, 참고인을 포함한 10명 미만의 병력만 4연대에 자수함 순천지역 여순사건 727

256 제3권 연 번 성명 (연령) 당시 소속 일 장소 형 태 내용 6 전 (79) 4연대 1대대 2중대 ㆍ 14연대 ㆍ 4(20) 연대 2대대 8중대 동여수 노인복지회관 (전남 여수시 국동) ㆍ4연대 편입: 10월 20일경 4연대에 자수하여 4연대 1대대 2중 대를 따라 순천 서면 쪽으로 감. 10월 23일경 순천 진압 후 순천 남국민학교(4연대 주둔, 연대본부) 2층 4연대 정보과에서 2 3일 정도 조사 받음. 조사 후 4연대 2대대 8중대에 편입됨. 순천남국민학교에는 15연대와 경찰토벌대가 함께 주둔 ㆍ반군협력 혐의자 처리 관계: 순천경찰서 인근에서 밤낮을 가리 지 않고 총소리가 났으며, 여기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민간인이 많았음. 순천, 보성, 벌교 등지에서 당시 경찰이 마을이장에게 누가 반군에게 식량 등을 제공했는지 물어보면, 마을이장이 평소에 마음에 들지 않았던 주민을 지목하여 경찰이 억울한 주민을 총살한 경우가 많았음 ㆍ군에 의한 민간인 희생 관계: 15연대에 의한 민간인 희생이 많았음. 15연대 부대원은 주로 경상도 출신이어서, 순천, 보성, 벌교, 광양 등지에서 지역 사정을 몰라 반군협조 혐의자라 생각 되면 조사나 재판 없이 무조건 즉결총살하는 일이 많았음 ㆍ4(20)연대의 민간인 즉결처분: 부대원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는 경우이거나, 중대장이나 소대장이 지시하면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는 경우였음. 또한 작전 중 전우가 사망하면 분노 가 생겨 보복으로 즉결처분함 ㆍ4(20)연대의 민간인 즉결처분 지시: 중대장이나 소대장이 의심 스러우면 무조건 총살하라고 지시함 ㆍ기타 순천지역 민간인 희생사건: 순천지역 학련 조직이 사상 있는 학생들을 잡아서 자체 처단했다고 들었음. 이 과정에서 학련이 많은 사람들을 억울하게 희생시켰다고 함 ㆍ반군토벌작전: 20연대 2대대 8중대에 편입, 호남지구 및 지리 산지구 반군토벌작전 시에도 민간인 즉결총살이 있었고, 억울 하게 죽은 사람이 많았음 6 전 (79) 4연대 1대대 2중대 ㆍ 14연대 ㆍ 4(20) 연대 2대대 8중대 동여수 노인복지회 관 (전남 여수시 국동) ㆍ계엄령 선포 관계: 알지 못했음 ㆍ민간인 즉결처분의 위법성 인식: 생존을 위한 것이었고, 지휘관 지시에 의한 것이었기에 당시 위법하다고 생각하지 못했음. 현재는 위법했다고 생각함 7 정 (81) 4연대 2대대 ㆍ 5여단 병참부 수송부 참고인 자택 (광주광역시 남구 월산동) ㆍ당시 계급 및 보직: 이등병, 운전병 ㆍ순천 진압작전: 4연대 병력을 싣고 순천 학구삼거리로 이동, 순천시내에 진입 못 함. 학구에 있다가 순천-광양 간 도로 경비. 광양에 진입하여 광양경찰서 앞 도로에 주둔하면서 진압 작전 전개. 순천으로 진입하여 순천농림중학교로 감 ㆍ순천농림중학교 민간인 희생사건 목격: 광양에서 순천농림중 학교로 들어왔는데, 철모에 흰 띠를 두른 진압군이 민간인들을 총살시키는 광경 목격함. 진압군이 민간인 수백 명을 운동장에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5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7 성명 (연령) 정 (81) 8 황 9 최 당시 소속 4연대 2대대 ㆍ 5여단 병참부 수송부 4연대 3대대 10중대 1소대 5여단 통신 중대 (20연대 3대대 파견) 일 장소 참고인 자택 (광주광역시 남구 월산동) 전남 여수시 충무동 참고인 자택 인근 참고인 자택 ㆍ 진실화해 위원회 형 태 면담 보고서 면담 보고서 ㆍ 통화 보고서 내용 집결시켜놓고 반군협력 혐의자를 색출. 누가 사람들을 손가락 으로 지목하였고, 군인 10여 명이 운동장 앞쪽 학교 담 안 밭두 렁에서 속옷만 입고 손이 묶인 민간인 40 50명을 일렬로 세 워놓고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총살시킴. 당시 조사나 재판 같은 것은 없었고, 색출되면 무조건 총살되었음 ㆍ기타 민간인 희생: 4연대 1개 대대 약 300명이 순천에서 여수 로 이동 중, 5 6명의 주민들이 적기를 흔들며 환영하자, 지휘 관이 모두 사살함 ㆍ반군토벌작전과 민간인 즉결총살: 여수와 순천을 왕래했으며, 순천, 구례, 곡성, 남원, 광양, 보성, 고흥, 하동, 산청지역 토벌 을 위해 병력을 수송함. 작전 지역에서 군이 조사와 재판 없이 민간인을 즉결총살한 경우 많았고, 작전 후 조사하여 처형한 경우도 있었음. 한 부락에서 수십 명씩 군경에 의해 즉결총살되 었으며, 억울한 죽음이 많았음 ㆍ당시 군의 민간인 인식: 밖에 돌아다니면 반군과 관계가 있다고 의심하여 사살함 ㆍ군의 즉결처분 인식과 위법성: 계엄령이나 전시 하에서 지휘관 (대대장ㆍ중대장ㆍ소대장) 지시에 따라 반군협조 혐의만으로 조사ㆍ재판 없이 즉결처분할 수 있다고 생각함. 계엄령 하 민 간인 즉결처분에 관한 지침ㆍ교육은 없었고, 단지 지휘관 지시 에 따라 행동함. 민간인 즉결총살은 위법했음 ㆍ4연대 지휘관: 연대장 이한림, 10중대장 김석준, 1소대장 이 소위 ㆍ반군토벌작전: 무주, 구례, 광양, 보성, 벌교, 담양, 함양, 마천, 거창에 서 작전하였으며, 반군 및 반군협조 혐의자를 체포하는 것을 목격 ㆍ백골부대: 3사단 18연대의 별칭으로 한국전쟁 발발 후 인민군 과 교전 시 다대한 공적을 세움 ㆍ당시 계급 및 보직: 하사, 통신병 ㆍ작전 지역: 순천, 여수, 광양, 강진, 장흥, 보성, 벌교 ㆍ지휘관: 5사단장 백 ㆍ4(20)연대 순천 주둔: 3대대(약 500명) 순천시내 국민학교에 주둔, 당시 반군은 거의 진압됨 ㆍ반군토벌작전 시 민간인 즉결처분: 토벌과정에서 경찰에 의해 서 좌익이 색출되고, 군인과 경찰이 취조를 하고 즉결처형했음 ㆍ순천지역(순천시내) 민간인 즉결처분: 순천시내에서 경찰이 연행 군과 경찰에 의한 취조 혐의 인정되면 순천 시외 야산에서 구덩이를 파고 총살한 후 매장. 1회 10여 명 정도를 즉결총살했으며, 참고인은 순천에서 민간인 즉결처분을 3회 이상 목격함. 중대장 급에서 즉결처분을 지시하고, 총살을 명령함. 당시 재판은 없었음 ㆍ민간인 즉결처분에 대한 인식: 반군협조자 및 좌익이므로 당연 히 즉결처분이 가능했다고 생각함 ㆍ계엄령 인식: 계엄령 선포 사실과 당시 계엄령에 반군협조 시 총살에 즉결한다는 내용도 알고 있었음 순천지역 여순사건 729

258 제3권 [별첨 6] 국군 제12연대 출신 참고인 조사상황 연 번 성명 (연령) 당시 소속 일 장소 형 태 내용 1 백 (85) 12연대 진실화해 위원회 녹취록 ㆍ당시 계급 및 보직: 소령, 부연대장 ㆍ부대이동과 작전: 군산에서 12연대 1대대, 3대대 1천여 명 병력 을 데리고 광주 도착, 계엄령 소식 들음. 김백일의 공격 명령 받고 순천과 여수 진압함. 백운산 구례 심원 화개장으로 반군 추격 후 군산으로 복귀함 ㆍ지휘ㆍ명령체계: 12연대는 2여단 소속으로 원용덕 2여단장 지 휘를 받았으나, 전투 경험이 있는 5여단장 김백일의 명령이 더 중요했음 ㆍ작전 수립: 광주에서 백, 김백일이 광주에 파견된 미 임시 군사고문관 브라운 소령과 협의해 진압작전 수립 ㆍ반군협력 혐의자 처리: 순천에서 반군과 좌익 관련자는 여단 헌병들이 연행, 민간인은 경찰로 보냄. 여단에서 헌병을 1개 소대 병력 정도 파병 ㆍ계엄령: 여순사건 진압 당시 계엄령 선포 관련 문서는 없었고, 방송도 못 들었음. 광주에서 여단장을 만나 계엄령 선포 얘기를 들었음 2 홍 (79) 12연대 본부 수송부 진실화해 위원회 통화 보고서 ㆍ당시 12연대 본부 수송부 소속, 스리쿼타에 부연대장 백을 태우고 진압작전을 위해 군산 광주 순천 여수 등으로 이동 ㆍ부대이동과 작전: 군산-광주-순천-여수-함양-구례 등 지리 산토벌작전. 연대 전체가 순천-여수-함양-구례로 이동한 것 으로 기억함. 순천에 본인의 12연대 외에 대전 2연대, 전주 3연대, 광주 4연대, 마산 15연대 등이 진압작전 전개. 순천에 2 3일가량 머물렀으며, 이동하면서 주둔해 주둔지는 잘 모름 ㆍ즉결처분: 순천 진입할 때 벌써 다른 연대가 주둔해 있으면서, 시내 입구 오른쪽 학교(농림중학교 추정)에서 민간인 15명을 나무에 묶어놓고 총살하려고 준비하는 것을 목격함. 총살 여부 는 그곳을 지나쳐서 못 봤고, 인민공화국 깃발이 나무에 묶여 있었는데 그때 처음 보았음 ㆍ서북청년단: 서북청년단 사람들이 지서를 장악하고서 치안 등 경찰업무를 담당했음. 이들은 완장만 차고 있지 민간인 복장 그대로였음 3 황 (78) 12연대 본부 수송대 진실화해 위원회 통화 보고서 ㆍ부대이동과 작전: 군산 광주 화순 순천 여수 구례. 부 연대장 백 지휘 아래 선발대로 출동 ㆍ지휘관 : 12연대 수송관 김현옥 중위 4 조 (77) 12연대 의무중 대 진실화해 위원회 통화 보고서 ㆍ부대이동과 작전: 군산 순천(군용차량) 여수 구례(지리산 토벌작전). 의무중대는 신설단계여서 중대원 45명 중 20명이 출동해 순천 등지에서 부상자 치료업무 담당. 2주 정도 순천시 내에 천막을 치고 야전병원 설치 ㆍ지휘관: 의무중대장 김(대위)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5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성명 (연령) 당시 소속 일 장소 형 태 내용 5 이 (79) 12연대 1대대 1중대 진실화해 위원회 통화 보고서 ㆍ부대이동과 작전: 군산 광주 순천 여수 구례 광양(백 운산). 부연대장 백 인솔로 순천 출동. 순천 인근 산악 고 지에 배치되었다가 순천 시가전 전개. 순천시내에 경찰로 보이 는 시체들이 많이 있었음 ㆍ백골부대: 18연대가 백골부대이며, 북한 출신 월남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성질이 고약했음 6 박 (78) 12연대 2대대 본부 진실화해 위원회 통화 보고서 ㆍ부대이동과 작전: 군산 광주 순천 하동 구례(지리산토 벌작전). 여순사건 발발 시 12연대 전체가 광주에서 집결한 후 2대대 병력은 순천 출동. 순천 외곽 산으로 진입해 시가전 벌이 면서 진압하고, 2 3일 정도 주둔. 시가전 때 반군의 저항이 심하지 않았음 ㆍ지휘관: 2대대장 김희준, 대대본부 부관 및 소대장 이동호 소위 7 고 (78) 12연대 2대대 6중대 진실화해 위원회 통화 보고서 ㆍ부대이동과 작전: 군산 광주 송정리 구례 순천 여수 송정리 군산. 순천여학교에 주둔함. 순천 진압은 3연대, 대구 6연대, 12연대 출동 순이었다고 들었음. 2대대 8중대가 중화기 중대로서 전투 시 선두에서 박격포를 쏘고, 6중대가 대개 후방 에서 전투하였음 ㆍ민간인 학살 관계: 순천여학교에 주둔해 며칠 지났을 때, 여학 생 1명을 잡아와서 차로 양쪽 다리를 묶어서 찢어 죽였으나, 무슨 이유였는지는 듣지 못하였음 8 오 (77) 12연대 2대대 8중대 진실화해 위원회 면담 보고서 ㆍ부대이동과 작전: 군산-순천-여수-군산, 구례ㆍ곡성 일대 토 벌작전. 여순사건 발발 직후 12연대 2대대 4개 중대 약 600명 이 순천 도착. 순천에 도착할 때까지 특별한 교전은 없었음. 당시 순천시 천변에 경찰 시신이 약 15구 정도 있었음. 3일 동안 순천에서 공포탄을 쏘며 집집마다 수색을 했고, 촌락에서 도망치는 사람들을 사살함 ㆍ지휘관: 2대대장 김희준, 8중대장 안재진 9 한 (74) 12연대 2대대 8중대 4소대 진실화해 위원회 통화 보고서 ㆍ부대이동과 작전: 군산 광주 순천 여수 구례 토벌작전. 순천 학교에서 이틀 주둔했는데, 학교 앞에 뽕나무가 있었 음. 순천 작전 시 시가전을 벌여 20여 명의 반군을 잡았고, 그중 두목격인 1명을 6중대장 이동호(2대대 부관, 20대 중반, 북한 출신)가 2대대 병력이 보는 앞에서 일본도로 목을 베었음. 순천에서는 대구 6연대가 순천에 출동해 왔다고 들었음 ㆍ민간인 희생 관련: 반군과 격전을 할 때 민간인 희생이 많았음. 반군도 지휘관만 좌익사상을 가졌고, 병사들은 그런 의식이 없어서 대부분 전세가 불리하면 항복함. 항복한 반군들은 연대 정보과에 인계했는데, 많게는 30명씩 잡았음. 민간인의 경우, 군인이 취급하지 않고 경찰에 인계했음 ㆍ지휘관: 6중대장 이동호(북한 출신의 20대 중반, 2대대 부 관) 순천지역 여순사건 731

260 제3권 연 번 성명 (연령) 당시 소속 일 장소 형 태 내용 10 이 (78) 12연대 3대대 11중대 2소대 참고인 자택 면담 보고서 ㆍ부대이동과 작전: 군산 순천 여수 구례. 여순사건이 나자 바로 순천 출동해 순천 외곽 경비. 순천시내를 포위하다가 다른 부대와 합세해 부근 산에서 매복했고, 시내로 들어갔음. 중대 단위로 출동해 순천에서 1주일 동안 작전 ㆍ민간인 즉결처분: 순천 작전 시 작전 성과로 대대에 희생자 목을 베어 보고함. 순천 북쪽 산골마을 민간인 3명을 잡아 소대 장 명령 하에 소대에서 가장 온순한 사람으로 참고인을 지목해 즉결총살을 시켰음. 또한 가장 용감한 군인 한 명에게 술을 먹여 즉결한 민간인의 목을 칼빈에 착검한 대검으로 잘랐으며, 잘린 목을 어깨에 메고 시내에 들어와 작전 전과로 보고함. 희생자는 반군이 아니었고 반군에 협조했다는 민간인이었음 ㆍ작전 지시: 순천에서 중대장이 지시하기를, 여학생들이 오빠, 국군 아저씨 하면 무조건 죽이라고 명령을 했음. 현장에서 쏘라는 지시를 내렸음 11 김 (78) 12연대 3대대 12중대 3소대 참고인 자택 ㆍ 진실화해 위원회 조 서 ㆍ 통화 보고서 ㆍ부대이동과 작전: 군산 광주 순천 여수 구례ㆍ곡성ㆍ함 양ㆍ거창 등지 지리산지역 토벌작전. 광주역에 내리니 차량들 대기시켜놓고 병력 실어 순천으로 이동함. 순천 초입에서 총소 리 듣고 하차해, 1대대는 우측, 2대대는 좌측, 3대대는 중앙에 서 공격해 들어갔음. 순천에서 4일 정도 작전하며, 소대별로 분산되어 시내에 주둔. 순천경찰서 한 귀퉁이에 경찰 시체가 더미로 쌓여 있었음. 로터리에는 불에 그슬린 경찰들 시체가 즐비했음 ㆍ즉결처분: 참고인이 순천 시가전을 벌일 때, 다른 연대 소속 소령이 어느 로터리에서 트럭에 태웠던 광주 4연대 소속 반군 3명을 내리게 한 후 참고인에게 총살시키라고 명령함. 참고인 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이들을 수수ㆍ조밭으로 데려가 공포 18발을 쏘아 도망가게 했고, 그 소령에게는 임무 완수 보고를 하였음 ㆍ백골부대: 순천에서 시가전 중에 백골부대가 줄줄이 다니는 것을 오며가며 본 것으로 기억함. 12연대가 팔에 태극기 문양을 그려 넣어 다녔는데, 백골부대는 팔과 헬멧에 백골 마크를 새겨 서 백골부대라고 불렀음 ㆍ반군 포로 처리: 순천 대로변에서 반군 수백 명을 포위해 연초 (담배)창고에 옷을 벗겨서 구금함 ㆍ지휘관: 12중대장 황명(3기) 12 박 (81) 12연대 3대대 9중대 화기 소대 진실화해 위원회 통화 보고서 ㆍ부대이동과 작전: 군산 광주 순천 여수 구례 군산 구례 토벌작전. 순천에 있는 학교에 대대본부가 주둔, 중대 별로 작전. 화기소대가 선두에서 기관포와 기관총으로 공격. 수색 시 반군협조 혐의자 체포하면 상부로 인계했음 ㆍ지휘관: 화기소대장 박천(소위, 북한 출신)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6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별첨 7] 국군 제15연대 출신 참고인 조사상황 연 번 성명 (연령) 당시 소속 일 장소 형 태 내용 1 김 (84) 2대대 6중대 (중대장) 진실화해 위원회 ㆍ 진실화해 위원회 통화 보고서 ㆍ당시 계급 및 보직: 중위, 2대대 6중대장 ㆍ15연대 지휘관: 연대장 김현수 윤춘근 송요찬, 1대대장 이 소동(일본군 출신), 2대대장 최석락(일본군 출신), 6중대 소대 장 박 소위ㆍ배 소위ㆍ중대부관 송기현(육사 특8기, 한국전쟁 시 평양전투에서 부상) ㆍ15연대 주둔지: 여수 신월리 순천시내 풍덕동 펄프공장 자리 순천 주암 주암호 인근 ㆍ15연대 반군토벌작전: 여수 주둔 시 1ㆍ3대대 반군토벌작전 전개. 2대대는 여수 신월리에 주둔했으며, 1949년에 들어서 반군토벌작전 명령이 하달되어 반군토벌작전 참가. 15연대는 주로 순천(순천시내 펄프공장 자리, 순천 주암 주암호 인근)에서 주둔하며 작전함. 작전 지역은 순천, 광양, 구례, 하동, 화순 등이었으며, 1ㆍ2대대가 함께 주로 중대 단위로 출동하여 작전함 ㆍ6중대 작전 및 주둔지: 6중대는 순천 주암에서 연대본부를 경 비하고 반군토벌을 위한 잠복작전 전개. 광양과 하동(화개장, 쌍계사)에 주둔하며 지리산과 백운산토벌작전을 전개. 화순지 역에서도 잠복작전 전개함. 주로 산간 높은 곳에 중대본부를 설치하고, 각 소대를 고지에 분산 배치하여 반군의 보급투쟁을 차단하는 잠복작전을 전개함 ㆍ반군 및 반군협조자 처리: 체포 시, 연대본부 정보과에 인계하 여 심문하고 극형에 처하기도 함. 반군협조자 중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 의사를 표시하면, 반군 관련 정보수집 목적으로 활용 하는 경우도 있었음 ㆍ민간인 피해 관계: 당시 송요찬 연대장이 군의 민폐를 근절하라 고 지시, 작전 시 부락에서 유숙하지 못하게 하여, 고지에 주둔 하게 되고, 군기가 엄격해졌음. 15연대에서 민간인 즉결처분 관계는 듣지 못하였음 ㆍ군의 즉결처분권: 한국전쟁 당시에는 있었으나, 한국전쟁 이전 에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함. 연대 차원에서 즉결처분 권한을 부여했을 가능성은 있음 ㆍ백운산지역 소개 작전: 송요찬 연대장 당시, 백운산지역 산간 오지의 부락을 소개하여 산 밑으로 이주시킴. 소개지역을 전략 촌으로 설정하여 대나무로 울타리를 치고, 주민들을 산 밑으로 소개, 부대는 고지에 올라가서 주둔함. 산 밑에는 경찰이 있어 무전으로 상호연락하는 등 경찰의 보조를 받으며 반군 포위작 전을 전개함. 부락 소각은 없었다고 기억됨. 소개 주민을 위한 대책이 있었는지는 모름 ㆍ계엄령 관계: 선포 사실을 알았으나, 계엄령에 관한 세부 교육 이나 지침은 없었음 순천지역 여순사건 733

262 제3권 연 번 성명 (연령) 당시 소속 일 장소 형 태 내용 2 정 (81) 연대 본부 참고인 자택 (전남 여수시 충무동) 면담 보고서 ㆍ당시 계급 및 보직: 이등병, 공병 ㆍ여수 신월리 15연대 입대, 입대 당시 교관, 선배 및 고참들은 모두 경상도 출신 ㆍ15연대 순천 주둔: 1949년 1월 입대 시에는 여수 신월리 주둔 1949년 4월 이후 순천으로 이동하여 주둔 및 작전 1950년 (전쟁 발발 전) 전주로 이동. 순천에서 주둔지는 펄프공장 자리, 주둔지 주변에 반군의 침입을 차단하기 위한 호를 만들어 물을 채워놓았음 ㆍ15연대(순천 주둔 시) 작전 지역: 순천시내에 있으면서, 순천, 광양, 벌교, 구례, 하동 등으로 작전 ㆍ광양 사건: 15연대 순천 주둔 시 반군이 광양을 습격 순천에 서 15연대 출동, 순천에서 광양으로 넘어가는 고개에서 15연대 선발 병력 몰살됨 3 전 (79) 1대대 1중대 1소대 진실화해 위원회 통화 보고서 ㆍ당시 계급 및 보직: 이등병, 보병 소총수 ㆍ15연대 이동경로 및 주둔지: 마산, 시 1ㆍ2대대 출동 시 하동 도착(하동국민학교 주둔) 광양 고개에서 전투 화개장 경비 하동 복귀(순천, 광양, 화개, 조 계산, 백운산, 지리산 작전) 월 말 겨울 순천시내 주둔(연대본부: 순천경찰서, 병력: 순천남중 또는 여중) 여수 신월리(14연대 주둔지) 순천(연대본부: 풍덕동 펄프공장 자리, 1대대: 광양서국민학교) ㆍ1대대 작전 지역: 순천, 광양, 구례, 하동, 산청, 함안, 조계산, 백운산, 지리산 ㆍ15연대 지휘관: 연대장 최남근ㆍ최내현ㆍ윤춘근 중령, 1대대 장 이소동(일본군 출신), 1중대장 조시형 ㆍ지휘ㆍ명령 관계: 마산 주둔 시 대구 3여단이 지휘, 순천 주둔 시 광주 5여단(5사단)이 지휘함 ㆍ반군협력 혐의자 처리: 백운산, 조계산 등에서 교전 당시 도망 치는 반군 무리에는 비무장 민간인이 많았음. 포로 중에도 민간 인이 많았으며, 연대 정보과에서 조사 및 취조한 후 사단 군법 회의로 인계하는 등의 조치를 취함 ㆍ민간인 즉결처분의 사례: 15연대 1대대가 1949년 봄 순천 황전 면 괴목의 산골부락(20 30여 호, 집성촌)에서 반군협조 혐의 자를 색출했으나 혐의를 부인하자, 반군협조 혐의자와 그 가족 (2집) 모두(5 6명 정도)를 마을 앞에 모아놓고, 그들과 친척 관계인 부락주민들로 하여금 대검이 착검된 M-1으로 2집 가족 모두를 직접 척살하게 함. 당시 대대장(이소동)이 연대장(윤춘 근)에게 무전으로 보고한 후 중대장(육사 7기 또는 8기)에게 척살을 지시함. 순천남중학교 한 교실 천장에서 총기가 발견되 자, 담임교사(광양 출신 여교사)를 광양국민학교로 데려가 주 민들을 모아놓고,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 즉결총살함. 당시 즉결총살당한 여교사는 죽기 직전 울밑에선 봉선화 라는 노래 를 부름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6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성명 (연령) 당시 소속 일 장소 형 태 내용 4 이 (79) 1대대 1중대 진실화해 위원회 통화 보고서 ㆍ당시 계급 및 보직: 일등병, 보병 통신병 ㆍ1949년 초 여수 신월리(14연대 주둔지)에서 15연대 일부가 주 둔하며, 부대 재편 작업, 신병 모집 및 훈련 ㆍ작전부대 및 지역: 15연대 1대대와 2대대가 순천지역을 포함한 지리산, 백운산 지대에서 토벌작전 ㆍ15연대 연대본부: 순천 펄프공장 자리 ㆍ1대대본부: 광양읍, 화개 담배창고 ㆍ1중대본부: 옥룡면, 다압면 ㆍ15연대 지휘관: 연대장 윤춘근, 1대대장 최석락, 2대대장 이소동 5 강 (84) 1대대 1중대 진실화해 위원회 통화 보고서 ㆍ당시 계급 및 보직: 일등병, 보병 ㆍ1대대 주둔지: 광양 ㆍ1대대 지휘관: 대대장 양병완, 김인수, 1중대장 백원용 ㆍ1대대 토벌작전 지역: 지리산, 조계산, 전남 일대 ㆍ15연대의 민간인 즉결처분: 15연대가 순천 외서면 산골 가용재 부락에서 주동급 반군협조 민간인을 체포하여, 외서국민학교 에서 체포된 반군협조자와 부락주민들을 모아놓고 총살함. 외 서면에서 당시 반군협조 혐의자는 면소재지로 끌려가 처리됨 ㆍ기타: 20연대가 순천지역에서 토벌작전함 6 정 (79) 1대대 1중대 ㆍ 2중대 1소대 진실화해 위원회 통화 보고서 ㆍ당시 계급 및 보직: 하사, 2중대 1소대 1분대장 ㆍ15연대 주둔지: 여수 신월리 순천역 근처 펄프공장 ㆍ1대대 본부: 광양 서국민학교, 3대대: 벌교 주둔 ㆍ지휘관: 하사관교육대 교육대장 조시형, 9중대장 은석표 ㆍ작전 지역: 1949년 5월 이후 순천지역 전역, 광양, 지리산, 백운산 ㆍ주요 사건: 반군의 광양 다압면 기습으로 다압면 내리에서 1개 소대 거의 전멸, 반군의 광양서국민 학교(1대대본부) 기습 ㆍ작전 시 부락 소개: 부락에 반군 연락책이 존재하여 부락을 완전 소개 및 방화하며 작전 ㆍ민간인 즉결처분: 부락 수색하여 중대장ㆍ소대장 지시에 따라 반군협조 혐의자 즉결총살함. 즉결처분의 근거는 계엄령. 당시 계엄령으로 인해 무법 상황에서 작전함 7 진 (81) 1대대 2중대 진실화해 위원회 통화 보고서 ㆍ당시 계급 및 보직: 이등중사, 통신병 ㆍ15연대 주둔지: 순천 펄프공장 자리 ㆍ지휘관: 연대장 김현수(벌교 출신), 2중대장 김성열 소위(육사 특임7기) ㆍ작전 지역: 백운산, 광양 방면 ㆍ민간인 즉결처분: 반군협조 민간인 즉결총살했음 순천지역 여순사건 735

264 제3권 연 번 성명 (연령) 당시 소속 일 장소 형 태 내용 8 김 (80) 1대대 4중대 진실화해 위원회 통화 보고서 ㆍ당시 계급 및 보직: 일등병, 보병 ㆍ1대대 본부: 광양, 1대대 대부분은 광양에 주둔하며 지리산 작 전, 일부가 순천으로 진입하여 주둔함 ㆍ1대대 작전 지역: 각 중대별로 순천, 광양, 구례, 곡성, 보성, 벌교, 하동에서 토벌작전 ㆍ반군 및 반군협조 혐의자 처리: 반군의 경우, 사단본부로 인계, 지역 주민의 경우, 대대본부에서 취조 및 조사 후 처리함. 지역 주민들의 경우, 반군이 강제로 협조를 강요하므로, 억울한 경우 많았음 9 이 (78) 1대대 4중대 진실화해 위원회 통화 보고서 ㆍ당시 계급 및 보직: 하사, 보병 소총수 연대장 당번병 ㆍ15연대 지휘관: 연대장 최내현(여수 신월리 주둔 시)ㆍ김현수 중령, 4중대 1소대장 김효근 소위 ㆍ15연대 주둔지: 여수 신월리 순천 ㆍ1대대 4중대 주둔지: 광양 진월국민학교 ㆍ작전 지역: 순천 전역, 광양(진월, 진상 등), 지리산, 백운산 ㆍ민간인 즉결처분: 순천지역 토벌작전 시, 부락 수색하여 반군협 조 혐의자 수십 명씩 현지 즉결총살함. 당시 계엄령 하이므로 민간인 즉결처분이 빈번히 발생했음 10 이 (80) 2대대 6중대 참고인 자택 (전남 순천시 저전동) ㆍ당시 계급 및 보직: 이등병, 보병 ㆍ15연대 지휘관 및 동료: 2대대 6중대장 김(광복군 출신), 고참 및 선배들은 거의 경상도 출신 ㆍ15연대 주둔지: 연대본부는 순천 풍덕동 펄프공장 자리, 2대대 는 순천과 광양 등 인근 여러 지역 ㆍ15연대의 반군토벌작전: 참고인은 입대 후 여수 신월리에서 훈련, 1949년 4월부터 승주ㆍ주암ㆍ황전ㆍ월등ㆍ송광ㆍ쌍 암 등 순천 전역과 구례, 하동, 지리산, 덕유산, 조계산, 백운산, 모후산 등지에서 작전. 대대가 경찰지서에 주둔하고 중대별로 작전 전개. 참고인 소속 6중대는 주로 순천 주암에 주둔하며 작전. 순천 황전, 특히, 송치재에 반군이 많았음. 황전 송치재로 출동하다가 반군에게 기습을 당한 적이 있음 ㆍ반군협력 혐의자 색출 및 처리: 순천 주암에서 부락주민이 반군 이 부락에 들어와 식사하고 있다는 정보를 제보, 부락을 포위하 여 반군을 사살하고, 반군협력 혐의자로 지목된 주민들을 지서 로 연행. 다른 곳에서도 색출 과정은 동일. 연행된 반군협력 혐의자들은 보통 5 6명 정도, 지서로 연행된 후에는 군이 현 지 사정을 잘 모르므로 경찰이 처리함. 또는 연대 정보과로 넘긴 경우도 있었음 ㆍ계엄령 관계: 몰랐음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6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성명 (연령) 당시 소속 일 장소 형 태 내용 11 정 (78) 2대대 6중대 1소대 진실화해 위원회 통화 보고서 ㆍ당시 계급 및 보직: 일등병, 6중대 척후병 ㆍ15연대 지휘관: 2대대장 최석락(광복군 출신), 6중대장 김 (광복군 출신), 1소대장 송 중위 ㆍ1949년 작전: 3월 순천 주암면 요곡부락으로 처음 출동한 이후 순천 전역, 광양, 구례, 하동 등에서 반군토벌작전. 특히, 순천 송광사, 선암사, 조계산, 모후산 등에서 중대별로 작전 ㆍ1950년 작전: 1월 구례 간전면 계족산 주둔, 구례읍 봉성산에 2대대 본부 주둔(병력은 구례중앙국민학교 주둔, 6중대는 토지 파도리 주둔)하며 남원 방면으로 작전. 1950년 당시 연대본부는 전주 ㆍ반군협조 혐의자 처리: 부락 수색은 주로 경찰이 담당함. 반군 이 중대 습격한 후 장교들이 부락주민들을 연행하여 가혹하게 구타 및 고문하기도 함 ㆍ민간인 즉결처분: 즉결처분 지시는 소대장이나 중대장 등 지휘 관으로부터 내려왔고, 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많았음 ㆍ계엄령 선포: 알고 있었음 ㆍ당시 계급 및 보직: 이등병, 보병 ㆍ15연대 지휘관 및 동료: 연대장 최, 연대부관 김재규 중위, 7중대장 서 소위, 7중대 선임하사 이 이등상사, 이등병 백 ㆍ순천 진압작전: 당시 일등병, 15연대 6, 7, 8중대가 제일선으로 이동, 마산 부산진역 화물열차 3 4량이 이틀에 걸쳐서 순 천역에 도착. 출동 당시 여순사건 발생 여부와 출동 목적지는 알지 못하고 이동함. 순천역에서 한두 시간 대기 후 차량으로 40분 정도 이동하여 어느 국민학교에 주둔. 주둔 국민학교에서 소대별ㆍ분대별로 출동하여 작전. 밤마다 총소리를 많이 들음 ㆍ순천 진압 시 타 부대 관계: 15연대 주둔 국민학교에 2연대도 주둔, 경찰토벌대 1개 중대 규모 주둔. 12 신 (77) 2대대 7중대 참고인 자택 (전남 여수시 안산동) 13 성 (80) 2대대 8중대 ㆍ 연대 군기대 진실화해 위원회 통화 보고서 ㆍ당시 계급 및 보직: 이등병, 보병 군기병 ㆍ15연대 이동경로 및 주둔지: 마산 하동(하동국민학교 주둔) 고흥 순천(연대본부) ㆍ2대대 순천 주둔지: 순천시내 ㆍ15연대 군기대 주둔지: 순천역 인근 건물 ㆍ15연대 군기대: 순천시내 순찰, 좌익 체포 및 군기 단속 ㆍ15연대 군기대 관계자: 정 계장(일등상사), 김 3계장 (일등상사, 경비 및 순찰 담당) 14 김 (80) 2대대 6중대 진실화해 위원회 통화 보고서 ㆍ당시 계급 및 보직: 하사, 보병 ㆍ순천 진압작전: 1대대 참가 ㆍ지리산, 백운산 토벌작전 참가: 백운산 작전 시 전남지역에서 작전 및 숙영 ㆍ허위 전과 보고: 반군협조자 사살 뒤 손가락, 귀, 목을 잘라서 전과 보고 ㆍ민간인 즉결처분: 부락 수색하여 반군협조 혐의자 색출하여 즉결총살함 순천지역 여순사건 737

266 제3권 연 번 성명 (연령) 당시 소속 일 장소 형 태 내용 15 윤 (82) 3대대 11중대 참고인 자택 (광주광역시 북구 중흥동) 조 서 ㆍ당시 계급 및 보직: 이등병, 보병 ㆍ15연대 관련: 본래 마산 주둔, 마산 1개 대대가 여수 신월리로 들어와 15연대 모병, 선배와 고참들은 대부분 경상도 출신 ㆍ15연대 지휘관: 5사단장 백, 3대대장 안 ㆍ15연대 반군토벌작전: 전남 여수에 주둔, 순천, 구례, 곡성, 하 동, 광양(옥룡) 등 백운산ㆍ지리산 일대 작전 ㆍ15연대 순천 주둔지: 대대ㆍ중대 단위로 국민학교에서 몇 주 정도 주둔 ㆍ반군토벌작전 시 민간인 즉결처분: 순천 등 작전 지역에서 중대 장 및 소대장 명령으로 반군협력 혐의자를 즉결총살했음. 작전 지역 마을에서 반군협조 혐의자들을 인근 야산에 데려가 구덩 이를 파고 총살한 후 매장함. 군인들이 반군에게 희생당하자, 보복심리가 강하게 작용했음. 반군협조 혐의만으로 즉결총살 된 억울한 민간인들이 많았음. 반군에게 협조했다는 혐의로 경찰에게 구타, 폭행, 총살당하는 경우도 많았음 ㆍ민간인 즉결처분의 근거: 계엄령 하에서 군인이 하급 군인은 물론 민간인도 조사와 재판 없이 즉결처분할 수 있다고 알고 있었음. 즉결처분 지시는 주로 중대장과 소대장으로부터 하달 됨. 계엄령이 선포되었으니 즉결처분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음 [별첨 8] 기타 군 관련 참고인 조사상황 연 번 성명 소속 조사일시 조사장소 내용 1 백 ( 白 善 燁 ) 육군본부 정보국 정보국장 군사편찬 연구소 ㆍ진압작전: 미 임시군사고문단과 정보를 공유했지만, 실제로 한 국군이 진압작전을 세웠음. 부대의 이동과 작전을 경찰 정보와 각 지구 사령부에서 내려오는 정황을 듣고 광주사령부에서 조 율, 국방부 장관에게 상황 보고. 이승만 대통령과 미군 모두 반란을 빨리 진압해야 한다고 공통적으로 인식함 ㆍ계엄령: 각 지구 사령관이 자체 판단으로 선포함 2 김 ( 金 點 坤 ) 육군본부 정보국 정보과장 자택 ㆍ민간인 희생: 1948년 11월 구례읍 습격 사건에서 12연대 전과 보고(반군 203명 사살, 남로당원 450명 체포)는 과장, 여기에 민간인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함 ㆍ즉결처분: 계엄 당시 현지 사령관은 즉결처분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 당시에도 군법회의 회부 없는 즉결처분은 명백한 불법 이었음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6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성명 사건 관련성 1 장 ( 張 正 東 ) 순천농림 학교 4학년 ㆍ 당시 순천시내 상황 목격 일 장소 호남신학 대학 커피숍 [별첨 9] 일반 참고인 조사상황 형태 주요 내용 면담 보고서 ㆍ22일 순천시내 상황: 군산에 있는 12연대가 아군과 합류하기 위해 도착했다고 했음. 그러곤 사람들에게 손들라고 하더니 몸 수색을 하여 탄피가 나온 사람들을 그 자리에서 많이 죽였음. 나머지는 트럭에 타라고 함. 그 차는 북국민학교로 갔음. 그때까 지 군인들인지 반란군인지 몰랐음. 완장차고 다녔던 사람들은 팬티만 입혀놓고 어디로 데려 가버렸음 ㆍ북국민학교 부역자 색출: 그 사람들은 그때 거의 다 죽었을 것 임. 나이 많은 군인이 학생들 들어라, 유인물을 읽었음. 계엄령 을 운운하면서 계엄령이라는 것은 전시에 대통령께서 선포한 내용이라고 말함. 진압군이라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음. 그런 정보가 없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것임. 경찰들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음. 오후 3시쯤 광주에 새로 모집해서 훈련 중인 경찰학교 학생들이 왔음. 지방경찰들은 하나도 없었음. 그날 하루를 북국민학교에서 지새움. 경찰이 고개를 들라고 해서 개 머리판으로 때리며, 3일 동안 같이 활동한 놈을 지목하라고 함. 우물우물하면 개머리판으로 막 때림. 그 많은 사람 중에 누가 누군지 모르니까 아무나 손가락질을 함. 그 자리에서 지명을 당하면 옷을 팬티만 남기고 다 벗기고 끌고 가 죽였음. 2 3일 전 수많은 경찰관이 죽은 것에 대한 보복이었음. 경찰들 몇 십 명이 죽어버리니까 이성을 잃었음. 그때 잡혀간 학생들은 하나 도 못 살았음. 지목당한 사람보고 또 다른 사람을 지목하라고 그랬음. 이것만 떼어놓고 보면 경찰이 죄를 진 거지만, 그 당시 에는 그랬음. 전남청 부청장이라는 사람이 검은 안경을 쓰고 와가지고는 우리 앞에서 이를 갈면서 너희들 싹 다 죽여버리고 싶다고 말했음. 통신망도 없고, 정확한 증거도 없고, 감정만으로 경찰들이 많은 사람들을 죽였음 ㆍ월등 양지맷골 사건: 1948년 10월 29일 월등면 집으로 오다가 군인들이 인부들을 데리고 터를 닦고 있었음. 저녁에 기관총소 리가 났음. 그 다음날 황전사람들이랑 월등사람들이 많이 죽였 음. 저녁에 터를 닦고 사람들을 끌고 가서 죽인 부대가 12연대임 2 3 조 ( 趙 東 殷 ) 유혜량 ( 劉 惠 良 ) 쌍암국교 5학년 ㆍ 시신 목격자 미신청인 ㆍ (희생자의 며느리) 참고인 박 자택 광주 남구 충현원 ㆍ쌍암지서 주임 임: 아주 고약한 놈, 그놈 때문에 마을사람 여럿 죽었음. 강촌마을 조동진도 그놈이 쏜 총에 죽음 ㆍ구강리 해남 윤씨: 윤씨가 1년에 2 3번 마을에 와 마을청년들 에게 좌익사상 전파. 그래서 구강리가 쌍암면의 모스크바라는 말을 듣게 됨. 구강리 강촌마을에서 죽은 이들은 대개 좌익활동 했거나 그들의 가족이었음 ㆍ사건요지: 일본국립음악원 출신으로 엘리트였던 시아버지 김생 옥(당시 30세, 순천여중 음악교사)이 경찰에게 조사를 받으러 간 뒤 1948년 10월 31일 순천시 죽두봉 골짜기에서 사망. 동생 의 사망으로 인텔리였던 두 형이 월북. 희생자의 아들인 남편은 요시찰인으로 분류되어 경찰에게 때마다 시달렸음 순천지역 여순사건 739

268 제3권 연 번 성명 사건 관련성 4 장삼남 ( 張 三 南 ) 미신청인 ㆍ (희생자의 조카) 일 장소 형태 주요 내용 ㆍ사건요지: 1949년 여름경 외삼촌 최진옥(당시 32세, 농부)이 광주 북구청 소개를 당해 지서에서 잠을 자고 오전에 귀가하던 중 순천시 서면 운평리 서면지서 부근에서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 5 정영철 ( 鄭 榮 喆 ) 미신청인 ㆍ 희생과정 목격자 전남 구례읍 봉남리 정영호 자택 ㆍ사건요지: 1948년 10월 23일 오전 8 9시경 순천시 조곡동 153번지 자택 부엌에서 중앙초등학교 2 3학년에 재학 중인 여동생 정영자(당시 10살)가 진압군이 쏜 총에 맞아 사망. 바로 옆에서 사건 목격. 순천역 앞 조그만 개울가에서 반란군이 경찰 을 잡아다가 세워놓고 총으로 쏴 죽이는 걸 봤음. 아마 10월 21일 정도 되었을 거야. 부모님이 운영했던(살림집과 붙어 있 는) 구멍가게 앞에 인공기가 붙어 있어서 총을 쏜 것 같음. 제적 등본상 사망일자와 사건일자 일치 6 미신청인 ㆍ 북국민학 정영호 교 ( 鄭 榮 鎬 ) 반군협조 혐의자 색출 목격 자택 ㆍ사건요지: 1948년 10월 23일 오전 8 9시경 순천시 조곡동 153번지 자택 부엌에서 중앙초등학교 2 3학년에 재학 중인 여동생 정영자(당시 10살)가 진압군이 쏜 총에 맞아 사망. 바로 옆에서 사건 목격. 제적등본상 사망일자와 사건일자 일치 ㆍ북국민학교 부역자 색출: 거기는 아주 지옥이었음. 칼빈으로 막 쏴 죽였음. 끌려온 사람한테 앉아 있는 사람 중 반란군협조자 를 골라내라고 그러더니 지목당한 사람을 옆으로 끌고 가서 쏴 죽였음. 손가락질 지목을 당한 사람은 가차 없이 사람들 있는 앞에서 칼빈 총으로 쏴버렸음. 내 눈으로 목격했음. 군인도 있 고, 경찰도 있었음. 한 열댓 명 죽은 거 봤음. 칡백나무 부근에서 쏴 죽여서 그 나무 아래로 밀어 넣었음. 밤까지 여러 번 색출을 해도 안 걸린 사람은 그 다음날 귀가조치 김양휘 ( 金 良 輝 ) 김관 ( 金 寬 ) 이병도 ( 李 炳 道 ) 10 남홍우 ( 南 烘 祐 ) 미신청인 (희생자의 아들) 미신청인 (희생자의 아들) 미신청 (희생자의 아들) 미신청 (희생자의 조카) 전남 순천시 덕암동 자택 진실화해위 원회 순천시청 진실화해 위원회 통화 보고서 ㆍ사건요지: 1948년 10월 말경 승주군 해룡면 중흥리 증흥마을 옆 당산나무 앞에서 승주군 어업조합에 근무하던 부친 김학모 가 인민위원장 역임 혐의로 순천경찰에 의해 총살당함. 1948년 11월 중순경 승주군 해룡면 중흥리 선착장 앞에서 조부 김현조 (김사현)가 아들의 좌익활동을 지원했다는 혐의로 순천경찰에 의해 총살당함. 허부신이라는 경찰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고 들 었음 ㆍ사건요지: 순천시 장천동 거주 아버지 김유섭(당시 31세)이 순 천경찰서 경찰들에게 연행되어 1948년 10월 말경 순천시 성동 초등학교 옆 공터에서 사살됨 ㆍ사건요지: 주암면 창촌리 거주 아버지 이문휴(당시 35세)가 오 산마을 잔치에 다녀온 뒤 1949년 음력 9월 21일 조계산 송광사 뒷산에서 경찰토벌대에 사살됨 통화 보고서 ㆍ사건요지: 월등면 신월리 거주 큰아버지 남상효(당시 21세)가 1949년 11월 20일경 경찰에게 월등지서로 연행, 고문 후 월전 중학교 뒷산에서 집단사살됨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6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성명 사건 관련성 11 박 ( 朴 贊 濟 ) 매산중학 교 교사 희생사건 및 순천시내 권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일 장소 순천시청 ㆍ 형태 주요 내용 ㆍ 통화 보고서 ㆍ사건 당시 매산중학교 2학년 재학, 황전면 봉덕리 거주, 전 매산 고등학교 교사 ㆍ사건요지: 매산중학교 교사 최창수ㆍ김옥태 희생사건 관련 : 12연대 진압군이 순천에 진입한 직후 매산중학교에 가서 수학 교사 최창수와 학생과장 김옥태가 순천경찰서로 연행되어 2 3일 구금된 후 서면 압곡리 구랑실재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군인에 의해 집단총살되었음. 구랑실재에서 최창수의 어머니가 최창수의 시신을 찾았고, 희생장소 인근에 가매장했다가 1960 년도에 함평으로 이장함. 최창수는 반군에게 협력한 적이 없으 며, 조사나 재판도 없이 무고하고 억울하게 희생되었음 ㆍ매곡동 매산등 집단희생사건 목격: 매산중학교 돌담장에서 군 인들에 의해 민간인 20여 명 이상이 희생됨. 사건 다음날 매산 중학교 인근 매산등에서 20여 구 이상의 시신이 놓여 있는 광경 을 목격함 ㆍ순천시내 민간인 집단희생 관련: 진압군이 순천 북국민학교에 서 주민들을 심사한 후 학교에서 북서쪽으로 약 200m 정도 이격된 논(현 순천고속버스터미널 자리)에서 반군협조 혐의 민 간인을 집단사살함. 당시 순천에서 군경에 의해 억울하게 학살 당한 민간인이 많았음 12 허 상사면 우산보 보장골 집단희생 목격자 면담 보고서 ㆍ사건 당시부터 현재까지 상사면 흘산리 거주 ㆍ상사면 토벌 진압군: 국군 제15연대 ㆍ우산보 보장골 집단희생 관련: 여순사건 진압 후 순천경찰서에 연행 및 구금된 민간인 다수(상사면 지방좌익 포함)가 2 3대 트럭에 실려 우산보 보장골(일명 보쟁이골, 희생장소 2곳)로 끌려오면, 15연대와 경찰이 합동작전으로 이들을 사살하였음. 이러한 민간인 사살은 여러 차례 이루어졌고, 사살 후 비가 많이 와 썩은 시신이 골짜기에서 밀려 내려 당시 길가에 널려 있었음. 희생자 중에는 상사면 이외 타 지역 출신이 있었음. 상사면 출신 은 그 가족이 순천경찰서에서 정보를 입수, 희생자 의복으로 시신을 확인 및 수습하여, 보장골 인근에 가묘를 만들었다가 후에 이장함. 타 지역 출신 희생자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해, 당시 여우들이 그 시신을 물고 다녔음. 당시 지방좌익 및 반군협 조 혐의 민간인들은 순천경찰서로 연행 및 구금된 후, 일부는 서면 구랑실재에서, 일부는 상사면 우산보 보장골에서 집단희 생 당함. 사건 당시 보장골은 현재와는 달리 나무가 거의 없어, 평지에서 희생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음 ㆍ우산보 보장골 집단희생장소 1: 현 공작가든예식장 (순천시 덕 월동 번지)에서 동쪽으로 약 100m 떨어진 골짜기로 순 천시 덕월동으로 편제, 골짜기 좌측 언덕에서 민간인을 사살하 여 골짜기로 떨어지면 흙으로 덮어 매장했음 ㆍ우산보 보장골 집단희생 장소 2: 현 공작가든예식장 좌측(상사 면사무소 방향) 상사참숯가마찜질방 (상사면 흘산리 1-3) 건물 뒤편 골짜기, 순천경찰서에 구금되었던 민간인들이 트럭으로 순천지역 여순사건 741

270 제3권 연 번 성명 사건 관련성 12 허 13 조 (81세) 14 장 (74세) 15 이 (75세) 상사면 우산보 보장골 집단희생 목격자 상사면 우산보 보장골 집단희생 (전문) 월등면 망용리 보름터골 (전문) 주암면 접치재 (목격) 일 장소 상사면 우산보 인근 형태 주요 내용 면담 보고서 면담 보고서 면담 보고서 면담 보고서 실려와 골짜기 아래 평지에 내린 후, 사살현장까지 손이 묶인 채 열을 지어 걸어 올라와 사살당함 ㆍ상사면 소개: 반군토벌을 위해 노동ㆍ봉래부락 등 산간부락을 흘산리로 소개시킴 ㆍ1950년대부터 순천시 거주, 상사면에서 개인 사업 ㆍ1960년경 이낙평(전 상사면장)과 허(당시 경찰)이 우산보 산 장(현 솔가든) 뒤편 언덕에서 참고인과 함께 식사를 하며, 식사 장소에서 우측으로 약 5m 이격된 우측 골짜기 하단부에서 여순 사건 당시 민간인 다수가 즉결처분 당했다고 말해줌 ㆍ여순사건 토벌 당시 참고인이 20연대 소속일 때, 국군 제2연대 가 순천 서면을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가 토벌작전을 전개했고, 당시 서면에서 많은 민간인이 군경에 의해 희생당했다고 군인 들로부터 들었음 ㆍ순천시 조곡동 둑실마을(죽도봉 골짜기):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경찰사격장이 있었으며,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당시 순천경찰서 구금자 즉결처형장소 ㆍ보름터골 사건 관련: 발생시기는 음력 10월 정도였고 추웠으며, 희생자 중에는 월등면 이외 타 지역 사람들이 많았음 ㆍ보름터골 사건현장 위치: 월등면 망용리 마봉산 남서쪽에 위치, 마봉산 약수터에서 약 150m 이격된 보름터골. 망용마을 버스승 강장(망용마을 입구)에서 망용보건지소를 지나 마봉산(황전면) 방향으로 약 500m 진입한 (구) 군도(현재 사용 안 함)에서 우측 (남동 방향)으로 보름터골 골짜기를 따라 약 50m 들어간 매화 나무밭. 보름터골 초입 좌측에 정진양 씨의 묘지 위치. 사건 당시 현장은 논이었음 ㆍ사건 당시부터 현재까지 주암면 행정리 접치마을 거주 ㆍ주암면 접치재 사건 관련: 사건 전 군경과 반군 사이에 2회 정도 교전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군경 측 사상자가 있었음. 1949년 초봄, 주암지서 경찰(지서 주임 일명 황몽둥이 )이 행정저수지 공사 인부를 반군협조 혐의(저수지 인근 인부용 식당에서 반군 에 협조했다는 혐의)로 연행하여 트럭에 싣고 주암면과 승주읍 의 경계 지역이며 현재 조계산 산행로 입구 인근인 접치재에 가서 구덩이를 파고 11명 이상의 민간인을 사살함. 당시 행정저 수지 공사 인부들은 거의 주암면 주민들이었으나, 일부 타 지역 인부들도 있었음. 희생자 중 접치마을 거주 오종호ㆍ하쌍수가 있었고, 생존자로는 김영철이 있었음. 주암지서에서 시신을 수 습하라고 연락이 와서 마을에서 접치재로 올라가 시신을 수습 했고, 접치마을 오종호가 총상을 입고 실려 온 것을 목격함. 오종호는 얼마 후 총상으로 인해 집에서 사망함. 시신수습을 못 한 희생자가 많았음. 희생자들은 대부분 생계를 위해 행정저 수지 공사장에서 일하다가, 반군과 협력했다는 의심을 받아 경 찰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당함. 이후에도 접치재에서 지속적으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7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성명 사건 관련성 일 장소 형태 주요 내용 15 이 (75세) 주암면 접치재 (목격) 면담 보고서 로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있었음. 시간이 지나 어느 정도 질서가 잡힌 후 학살이 줄어들었음 ㆍ행정저수지 위치: 국도 22번(등계산 및 세정골을 바라보는 서쪽 방향) 좌측, 저수지에서 약 30m 우측에 인부용 식당 자리 위치 ㆍ접치마을 및 경찰 관련: 당시 마을에 입산자나 반군협조자는 없었음. 마을에 반군이 많이 출몰하여 경찰에 신고해도 경찰은 반군은 제대로 잡지 못하고 마을주민들만 괴롭힘. 당시 경찰은 매우 난폭하게 주민들을 다루었음. 마을주민들이 경찰부대에게 돌아가며 숙식을 제공했으며, 당시 경찰이 마을에 들어와 이장 에게 사람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는데, 찾을 수가 없으면 발에 총을 쏘는 경우도 있었음. 주암지서 주임 일명 황몽둥이 는 군 복을 입고 다녔으며, 마을 인근 고지에 경찰이 주둔(지서에서 황중렬 파견)했고, 경찰부대(중대장 김평순 경위)가 주둔하기도 했음 ㆍ행정리 접치마을 소개: 창촌마을로 가을에서 겨울까지 소개되 었다가 다음 해 봄에 마을로 돌아옴. 군경의 소개 대책은 전혀 없었음 ㆍ기타 주암면 민간인 희생 관련: 이종석이 주암면 오산리에서 반군 회의에 참석했다는 혐의로 경찰지서에 연행되어 광천지서 에서 사살됨. 최우규의 아들(최덕건)이 경찰토벌대 활동, 반군 이 최우규와 며느리를 연행하여, 며느리를 마을 뒤 약 700m 정도 지점에서 사살하려 하자, 최우규가 며느리 대신 자신을 쏘라 하여 최우규가 반군에 의해 사살됨 16 김 (73세) 외서면 도신리 배나무골 뒷산 송곡재 (전문) 외서면 반용리 및 도신리 면담 보고서 ㆍ도신리 배나무골 뒷산 송곡재 사건: 1949년 3월 5일 경찰토벌 대 1개 중대(약 70 80명)가 수직마을 주민들을 마을 앞 논에 집합시키고, 입산했다가 자수한 사람들을 나오라고 하자, 수직 마을 주민 7 8명이 나감. 경찰토벌대가 이들 수직마을 주민 7 8명과 도신마을 주민들을 도신마을(배나무골) 뒷산 송곡재 로 끌고 가 사살함. 희생자 중 수직마을 거주 김용고, 김용연, 김용태가 포함되어 있었음 ㆍ송곡재 현장 위치: 도신리 도신마을 뒤 배나무골 뒷산으로 일명 송곡재 라고 불리며, 외서면 반월로(수직마을 입구에서 월평 방향으로 약 2km 이격 지점) 도상에서 남서방향으로 보이는 산 정상의 철탑 밑 능선이 사건현장임 ㆍ외서면 좌익책임자 박재상 관련: 반용리 수직마을에 거주, 전남 도당위원장이었다고 알고 있음. 여순사건 당시 군경의 토벌작 전이 진행되자 가용마을에 토굴을 파고 처와 함께 숨어 지내다 가 주민 제보에 의해 발각, 경찰 1개 중대가 박재상을 추격 및 체포하여 외서국민학교 교정에서 공개 총살함. 박재상의 처는 도망치다가 목을 매어 자살함. 박재상의 딸은 전북 김제저수지 인근에서 체포되어 총살당함 순천지역 여순사건 743

272 제3권 연 번 성명 사건 관련성 17 김 (77세) 별량면 돌고개재 인근 서자골 공동묘지 (목격) 일 장소 형태 주요 내용 면담 보고서 ㆍ직다-9101(신청인 김채문, 희생자 김홍열) 관련: 참고인의 형 김홍열은 1948년 11월 초 경찰에 의해 지서로 연행되어 유치장 에 감금되었음. 1948년 11월 7일 새벽 김홍열을 포함한 지서에 구금된 주민 11명이 돌고개재 공동묘지(서자골 공동묘지) 쪽으 로 끌려갔다는 지서 인근 거주 주민의 말을 들었고, 같은 날 오후 돌고개재 인근 서자골 공동묘지에 가서 김홍열을 포함한 시신 10구를 목격함. 김홍열의 시신을 직접 수습하였고, 시신들 은 모두 가슴에 총상을 당한 상태였으며, 이 중 1구는 여자의 시신이었음. 서자골 공동묘지로 끌려간 11명 중 1명(박, 최 근 사망)은 도주하여 생존했고, 그에 따르면 보성에서 별량지서 로 폭동이 일어났다고 전화가 온 후 별량지서 경찰이 지서에 구금된 주민들을 서자골 공동묘지로 끌고가 사살했음 ㆍ서자골 공동묘지 사건현장 위치: 별량면 봉림리 산 60-1, 별량 면 돌고개재 정상에서 서쪽으로 약 200m 지점 및 운천저수지 에서 남쪽으로 약 200m 지점인 봉림리 봉덕 뒷산 서자골 하단 부. 현재 서자골 아래 백일홍밭 바로 뒤 공동묘지 시작 지점으로 봉분 3개 위치. 사건 당시에도 공동묘지였음 18 박 순천 시민연대 진상조사 위원장 (전문) ㆍ22. 순천시 전역 면담 보고서 ㆍ서면 용계산 골짜기(구상리 안골) 사건현장: 서면 흥대리 버스 승강장에서 비봉길을 따라 광양(봉강) 방향으로 약 3km 진입 지점의 골짜기 좌측 풀밭이며, 진입 방향 우측에 비봉산과 골짜 기 및 개울이 위치, 개울 좌측에 위치한 풀밭이 사건현장으로 사건 당시 17 18구의 총살당한 시신이 발견됨. 현장에서 광양 (봉강) 방향으로 다시 약 3km 이격 지점(계룡재 남쪽)에서 5명 의 시신이 추가로 발견되었음. 당시 임신 9개월 정도의 여성(신 청인 공준모의 모친)이 사살당하여, 시신수습 시 태아가 사망한 채 여성의 몸 밖으로 나와 있었음 ㆍ서면 구랑실재 사건현장: 서면 압곡리 산 111-1, 남해고속도로 인근 압곡리 뫼골 인근 야산으로 현재 공사 중이며, 공사현장에서 세로로 된 흰색 수로가 구랑실 골짜기로 사건현장으로 추정됨 ㆍ서면 대구실재: 학구삼거리에서 승주로로 진입(대구리-승주읍 방향), 진입 방향 좌측 현 순천자동차학원(서면 대구리 56번지) 인근 콘크리트 포장도로로 진입하여 순천자동차학원에서 약 50m 이격된 언덕 지점으로 콘크리트 포장도로 우측 서정수 씨 농장 입구 일대, 학구삼거리에서 남서쪽으로 약 150m 이격 된 지점이며 좌측에 과거 학구 철길 자리에 현재 비닐하우스가 들어서 있음. 사건 당시 인근에 학구 철길과 굴다리가 있었음 ㆍ학구역 및 학구 전투: 학구역은 과거 구례-남원ㆍ승주-주암- 광주ㆍ순천-광양으로 통하는 순천 북부의 중요 교통 관문, 여 순사건 발발 직후 국군 제4연대 1개 대대가 학구로 진입하여 학구 방면으로 북상한 반군과 교전, 학구역 인근에서 반군을 패퇴시킴. 반군이 학구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전세가 역전되어 반군이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고, 진압군은 순천으로 진입하여 순천 탈환작전을 전개함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7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성명 사건 관련성 18 박 순천 시민연대 진상조사 위원장 (전문) 일 장소 ㆍ22. 순천시 전역 형태 주요 내용 면담 보고서 ㆍ순천역 및 광양삼거리 인근: 당시 철도중심지로 철도병원, 철도 관사 등 철도시설이 많았고, 철도관계자가 인근에 많이 거주했 음. 순천역은 반군이 진출한 첫 번째 지역으로, 반군은 1948년 10월 20일 오전 순천역에 도착, 순천에 파견된 홍순석 중대와 합류, 광양삼거리와 동천 제방에 배치된 경찰과 교전한 후 순천 시내로 진격했음 ㆍ생목동 수박등 공동묘지 사건현장: 현 이수중학교 정문 오른쪽 부근(당시 공동묘지, 현재 인근에 현대아파트ㆍ벽산아파트 위 치), 순천 진압 당시 진압군은 철도원ㆍ철도관계자ㆍ시내권의 반군협조 혐의자 사살하여 집단학살 후 시체를 겹겹이 쌓아 장 작불로 소각 처리함. 시체 소각은 여러 차례 있었음 ㆍ장대다리와 동천 제방: 현 순천교, 인근에 장대마을(예전 군 지 휘소)이 있었으며, 반군과 경찰 사이에 최초로 접전이 벌어진 장소. 순천 진압 후 민간인 시신을 늘어놓았으며, 장대다리 주변 에서 민간인 사살도 있었음 ㆍ조곡동 둑실마을(죽도봉 골짜기): 현 조곡교(구 동순천다리)를 동쪽으로 건너, 봉화터널길 좌측 둑실5길 주변 일대(정원넥스 빌, 금강메트로빌 아파트 지역) ㆍ동순천역: 조곡교(구 동순천다리) 인근 현 순천주류(주) 창고 자리(뒤편에 동순천중앙교회 위치), 사건 당시 순천의 주요 관 문, 반군 사령부 설치 ㆍ순천경찰서: 현 시티관광호텔(순천시 남내동 22-24) ㆍ법원: 현 삼성생명 자리(순천 행동우체국 우측), 반군 점령 당시 법원 인근에서 경찰 및 우익인사 처형 ㆍ호남은행(이후 조흥은행): 현 순천시 중앙동 중앙사거리 신한은 행 자리, 진압 당시 특별조사국 설치 장소, 지하실은 취조실로 서, 당시 순천 국회의원이었던 황두연 의원도 호남은행 지하실 에서 취조 당함 ㆍ매곡동 매산중학교: 순천 진압 당시 난봉산에서 군인들이 고구 마를 캐먹으며 마을로 진입, 주민들이 군인들을 쳐다보자 주민 들을 모아 매산중학교 돌담장에 세워놓고 약 22명을 총살함. 사건현장은 현 매산중학교 정문에서 난봉산 방향으로 매산길을 따라 약 200m 이격된 매산중학교 담장 끝부분, 매산여고 정문 에서 매산중학교 정문 방향으로 약 50m 이격 지점. 현재 박형 규 등대선교회 선교사가 부친 박기일 옹의 증언에 따라 사건 당시 주민들의 핏덩어리가 묻었던 매산중학교 담장 일부를 파 란색 페인트로 표시해 둠. ㆍ순천북국민학교: 현 순천북초등학교(매곡동425-1), 진압군이 반군협조 혐의자 심사하여, 일부는 순천농림중학교에서, 일부는 조곡동 둑실마을에서, 일부는 서면 구랑실재에서 집단처형함 ㆍ순천농림중학교: 현 국립순천대학교(중앙로 413,매곡동 315), 당시 경찰 임시사령부 설치, 농림중학교 강당 뒤 논에서 북국민 학교에서 색출된 반군협조 혐의자를 처형함. 현재 정확한 희생 장소는 알 수 없음 순천지역 여순사건 745

274 제3권 연 번 성명 사건 관련성 일 장소 형태 주요 내용 19 우 순천지역 근대건축 연구가 ㆍ 통화 보고서 ㆍ풍덕동 펄프공장 (15연대 주둔지): 일제 강점기에 설립된 순천 제지 펄프공장을 말하며, 제1공장은 순천역 남서쪽 현 삼립공업 사 자리, 제2공장은 현 풍덕동 금호아파트ㆍ한신아파트 자리 임. 1948년 당시 제1공장은 운영되어 설비시설이 많았으나, 제2 공장은 운영되지 않고 단지 공장부지 예정지였음 ㆍ순천농림중학교 강당: 현 순천대학교 대학원 건물 자리로 추정, 사건 당시 강당 인근에 논밭이 있었다고 추정됨 20 김 (55세) 순천대 시설과 (전문) ㆍ 통화 보고서 ㆍ주요 경력: 1965년부터 순천북중학교 및 순천농림고등전문학 교(구 순천농림중학교, 현 순천대학교) 재학 1975년부터 순천 농림전문학교(구 순천농림중학교, 현 순천대학교) 교직원 근무 현 순천대학교 시설과 근무 ㆍ1976(1977)년경 순천농림전문학교 당직 근무 시, 나이 많은 교 직원들으로부터 들은 바, 여순사건 당시 순천농림중학교 강당 인근 에서 진압군경이 민간인을 사살한 장소를 알게 됨 ㆍ순천농림중학교 민간인 집단희생장소: 1976년 순천농림전문학 교 재직 당시 순천농림중학교 강당 뒤편 언덕과 강당 좌측 도랑 으로, 당시 해당 도랑과 언덕은 모두 학교 경계 지역(귀퉁이)이 었음. 언덕은 약 2m 이상 되었으며, 언덕 위편은 모두 논과 밭이었음. 도랑은 학교 경계를 따라 흐르고 있었음. 현재 순천대 학교 대학원 건물이 농림중학교 강당 위치와 거의 일치하며, 사건현장은 현 대학원 건물 북서쪽 끝부분(사건 당시 강당 뒤편 언덕)과 대학원 건물과 기숙사 건물 사이 지역(사건 당시 강당 옆 도랑)에 해당됨 21 이 (77세) 직다 희생과정 목격자 월등면 계월리 면담 보고서 ㆍ직다-1404(신청인 김재홍) 희생자 김성균 관련: 일제 강점기 남양군도에서 군속으로 근무했다가 해방 직후 귀환 ㆍ월등면 대한청년단(이하 한청): 월등지서에 집결하여 지서 경찰 의 지시에 따라 활동함. 마을주민들은 야경단에 소속되어 밤마 다 순찰 및 경비를 섬 ㆍ직다-1404 희생과정(참고인 목격): 월등면 한청단원들이 희생 자가 반군에 협조한다고 의심, 희생자 집 주변에 잠복했다가 집에 들어가자 희생자가 집에서 도망쳐 나옴. 희생자가 사건현 장(마을 입구 신작로)까지 오자 마을에서 나오던 한청단원 5 6명이 희생자를 몽둥이로 구타, 희생자가 기절하자 돌로 희생자 의 머리를 찍어 타살시켰으며, 개가 희생자 시신에서 나오는 피를 빨아먹었음 ㆍ가해주체: 월등면 한청단원들로 계월마을 출신은 아니었으며, 주로 면소재지(대평리) 사람들이었음 ㆍ가해이유: 반군협조 혐의로 추정됨 ㆍ희생장소: 월등면 이문리 내동마을 초입에서 동쪽으로 약 500m 지점, 내동마을 진입로에서 좌측 현재 전신주( 월등391 ) 에서 동쪽으로 약 2m 이격 지점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7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성명 사건 관련성 22 이 (77세) 매산중학교 교사 희생사건 및 순천시내권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일 장소 진실화해 위원회 형태 주요 내용 면담 보고서 ㆍ사건 당시 순천시 중앙동 법원 인근 거주, 매산중학교 2학년 재학 ㆍ반군의 순천 점령: 당시 참고인의 집 앞인 법원 앞이 반군이 경찰 및 우익을 처형하는 장소였음. 반군이 무법적이고 무자비 했음 ㆍ진압군의 순천 진압작전: 진압군도 똑같이 무자비했음. 진압군 이 순천시내에 들어와 조사 및 증거 확보와 재판 없이 길거리에 있는 민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총살하는 경우 많았음. 당시 진 압군은 구체적 조사 및 증거와 재판 없이 의심스러우면 무조건 즉결처분했음 ㆍ순천 학련조직: 당시 학련이 매우 나빴음. 학련에는 주로 이북 출신 학생들이 많았으며, 남한 출신 학생들은 학업을 소홀히 하는 불량한 학생이 많았음. 학련은 자기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 면 무조건 끌고 가 구타했으며, 참고인도 학련에게 끌려갔다가 구타당하고 풀려난 적이 있었음. 순천 진압 당시 무법 상황에서 학련 학생들이 죄 없는 민간인들을 길거리에서 무차별적으로 연행, 법절차와 증거 없이 사감으로 많은 민간인들이 죄 없이 끌려가서 학살당하는 경우가 많았음. 학련본부는 과거 순천시 내 법원 인근 대성여관 뒤편에 있었으며, 학련 소속으로 순천 사범학교 황과 서재홍이 기억나며, 양자 모두 가혹하게 민 간인을 대했음 ㆍ매산중학교 교사 최창수ㆍ김옥태 희생사건: 수학교사 최창수, 학생과장 김옥태(이북 출신)는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최창수는 당시 순천 중앙교회 집사, 당시 매산중학교는 기독교인이 아니 면 교사로 채용하지 않음)이자 엄격하면서도 존경받는 교사였 음. 당시 반군의 순천 점령 시, 1차 제거대상은 경찰 및 경찰관계 자, 2차 제거 대상은 지주 및 교회 목사, 3차 제거 대상이 이북 출신 월남자였음. 따라서 최창수ㆍ김옥태 교사는 반군의 제거 대상으로서 반군에 협력할 이유가 전혀 없었음. 단, 두 교사 모두 엄격하여 체벌을 하는 경우가 있었음. 특히, 최창수 선생의 경우, 사건 직전 학련 학생 중 한 명(주암면 거주)이 흡연을 하여 체벌을 하였고, 김옥태 선생도 학련 학생을 많이 혼냈음. 사건 직전 최창수 선생에게 체벌당한 주암면 거주 학련 학생(성 명은 기억 불가)이 조사나 증거 없이 무차별적으로 반군협력 혐의자를 색출하러 다녔고(이 학생은 후에 반군에게 사살당함), 진압 군경에게 두 교사를 반군에 협력했다고 허위 고발했다고 추정함. 두 교사는 진압군경에 의해 연행되어 행불되었고, 후에 순천경찰서에 구금되어, 2 3일 후 서면 구랑실재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집단총살당했다고 들었음. 순천 진압 후 당시 매산중학교 김형모 교장과 박영률 선생이 학생들을 모아놓고 최창수ㆍ김옥태 교사의 억울한 희생사실을 알려주었음. 불과 며칠 사이에 이북 출신 월남자와 기독교 집사가 반군에 가담할 수는 없었다고 판단되므로, 두 교사의 희생은 무고와 모략에 의한 것이었다고 추정함 순천지역 여순사건 747

276 제3권 연 번 성명 사건 관련성 22 이 (77세) 매산중학교 교사 희생사건 및 순천시내권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일 장소 진실화해 위원회 형태 주요 내용 면담 보고서 ㆍ순천시내 민간인 희생사건 목격: 순천중학교(현 순천고등학교) 앞에서 군인 2명이 집안 친척인 이상열(당시 17 18세) 외 민간 인 2명을 끌고 가는 광경을 목격, 참고인이 따라가 보니 군인들 이 순천중학교 서남쪽 인제동과 남정동 경계지역 공동묘지로 이들을 끌고 올라간 후 참고인은 총소리 3 4방을 들음. 얼마 후 군인 2명만 내려와서, 참고인이 총소리가 난 장소로 가보니 연행된 3명이 사살되어 그 자리에 매장되었음. 얼마 후 이상열 의 모친으로부터 전해 들은바, 당시 매곡동 순천도립병원 옆에 진압군 탄약고가 있었고, 이상열이 친구들과 함께 군인이 있다 고 이 부근에 가보자고 하며 갔음. 군인이 이들에게 오라고 하자 이상열과 친구들이 도망쳤고, 군인들이 이들을 붙잡아 연행하 여 인제동과 남정동 경계지역 공동묘지에서 사살한 것임. 당시 진압군 병사들 중에는 16 18세 정도의 나이 어린 병사들이 많았고, 이들 어린 병사들이 이성적인 판단력을 보유하지 못했 다고 생각함 ㆍ매곡동 진압군 탄약고 관련: 당시 순천도립병원(현 순천의료원) 뒤편(북국민학교 방향으로 현 매곡1길 부근)에 진압군 탄약고가 있었고, 진압군은 탄약고 주변에서 웅성거린 민간인들을 반군 첩자가 탄약고를 탐지한다는 의심만으로 집단사살하여 젊은이 들이 억울하게 많이 죽었음 ㆍ순천지역 민간인 집단희생사건 관련: 순천시내에서 인제동 공 동묘지는 목격, 북국민학교ㆍ매곡동 매산중학교 돌담장ㆍ순천 농림중학교ㆍ죽도봉 골짜기 등에서 다수의 민간인들이 조사 및 증거와 재판 등 법절차 없이 즉결처분 당했다고 들었음. 당시 순천에서 억울하게 죽은 민간인이 너무 많았음. 진압군이 들어 온 지 2 3일 후에도 진압군을 반군으로 오인하여 환영하는 농민들이 많았으며, 진압군은 이들을 모두 사살했음. 특히, 순천 시내권(중앙동, 매곡동 등)에서는 특정한 집단학살장소가 있기 도 했지만, 진압군이 주둔하고 있다가 지나가는 민간인을 불러 반응이 없거나 도망치면 잡아서 인근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 사살하는 등 무차별적ㆍ산발적으로 다수의 민간인들을 학살했 음. 따라서 중앙동 및 매곡동 등 구 시내 중심지에서는 특정한 집단학살장소가 있어서 거기서만 학살된 것이 아니라, 시내 곳 곳의 후미지고 으슥한 장소이면 거의 학살장소였다고 할 수 있 음. 당시 진압군경은 조사와 재판 없이 의심스러우면 무조건 민간인들을 즉결처분했음 ㆍ진압군 본부: 중앙동 사거리 구 호남은행(조흥은행, 현 신한은 행) 자리에 위치, 참고인이 사건 당시 여기서 사람들이 취조 받고 나오는 모습을 목격함 ㆍ15연대 주둔지: 풍덕동 펄프공장 자리로, 현재 순천역 인근 역전 공원과 남산로 사이에 위치 ㆍ연좌제 관련: 1960년대 초 육군본부 정보국 신원보안과 신원보 안장교(소령)로 근무, 당시 개인별 신원존안카드 작성 및 관리, 군 장성 중 몇 사람도 신원에 문제가 있어 2급 비밀취급인가가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7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성명 사건 관련성 22 이 (77세) 매산중학교 교사 희생사건 및 순천시내권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일 장소 진실화해 위원회 형태 주요 내용 면담 보고서 나오지 않을 정도로 신원기록 및 연좌제 관리가 철저했고, 연좌 제로 인해 억울한 사람들이 많았음. 5.16쿠데타 후 신원기록관 리에 관한 문제제기가 있어 대대적으로 한 차례 정리했고, 계속 문제가 제기되어 후에 연좌제를 폐기하게 됨. 신원기록과 연좌 제로 인해 억울한 사람들이 매우 많았음 ㆍ순천지역 여순사건과 명예회복: 순천지역 여순사건 당시 반군 과 진압군경 양측에 의해 광범하게 무차별적인 민간인 학살이 벌어지고, 사람들의 선입견으로 순천 시민 전체에게 여순사건 의 이미지가 드리워져 순천 시민 모두가 피해자라고 할 수 있음. 따라서 특정인의 희생사실 확인 및 명예회복보다 순천 시민 전 체의 피해와 억울함을 밝히고, 순천 시민 모두의 명예를 회복시 키는 방향으로 조사가 추진되기를 바람 23 최 (75세) 매산중학교 교사 희생사건 및 순천시내권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진실화해 위원회 면담 보고서 ㆍ사건 당시 매산중학교 2학년 재학, 순천시 금곡동 거주 ㆍ매산중학교 교사 최창수ㆍ김옥태 희생사건: 당시 매산중학교 교사들은 모두 강직한 성품이었음. 수학교사 최창수, 학생과장 김옥태(이북 출신)는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최창수는 당시 순천 중앙교회 집사, 당시 매산중학교는 기독교인이 아니면 교사로 채용하지 않음)이자 엄격하면서도 존경받는 훌륭한 교사였음. 순천 진압 후 당시 매산중학교 김형모 교장과 박영률 선생이 학생들을 모아놓고 울먹이시며 최창수ㆍ김옥태 교사의 억울한 희생사실을 알려주었음 ㆍ한국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순천 매산중학교에 주둔, 순천사진관 에서 순천 여순사건 당시 사진을 다량 발견했음. 주로 반군을 환영하는 시민들과 군중집회 광경을 담는 등 반군 점령 당시 사진들이었으며, 후에 순천사진관 주인이 반군협조자였다고 들 음. 그러나 전방에서 근무할 당시 정모참모에게 사진을 모두 압수당함 ㆍ여순사건과 순천: 순천 시민들은 모두 여순사건의 피해자임. 사건 당시 반군과 진압군에 의한 피해도 있지만 후에 순천 시민 들에게 여순사건의 이미지가 드리워져 그로 인한 직ㆍ간접적 피해가 많았음. 순천지역 여순사건에 관한 진실규명이 너무 늦 었다고 판단됨 ㆍ연좌제 관련: 한국전쟁 당시 11사단 9연대 소속 학도병으로 공비 토벌작전 참가, 구례, 곡성, 광양 옥룡, 경북 봉화 등지에서 군경 에 의한 민간인 피해자가 많이 발생하는 것을 목격함. 과거 해외 업무(여권심사)를 담당했는데, 많은 호남 출신자들이 신원조회 에 걸려 외국에 나가지 못함. 참고인은 해당자들에게 면장과 지서장이 발급하는 신원에 문제없다는 증명서를 제출하게 하여 해외 진출 및 유학이 가능하도록 해준 적이 있음. 보이스카웃 사무총장 재직 시절, 국민학교 교장선생님들의 반공교육을 위해 대만 견학을 준비, 견학을 준비한 교장선생님의 약 80% 정도가 신원조회에 문제가 생겨, 관계기관(치안본부ㆍ중앙정보부ㆍ외 무부ㆍ문교부) 책임자들의 서명을 얻어 출국을 가능하게 해줌 순천지역 여순사건 749

278 제3권 연 번 성명 사건 관련성 일 장소 형태 주요 내용 24 박 (77세) 매산중학교 교사 희생사건 및 순천시내권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통화 보고서 ㆍ사건 당시 매산중학교에 재학 ㆍ매산중학교 교사 최창수ㆍ김옥태 희생사건 관련: 진압군경이 순천을 탈환한 후 최창수 교사에게 평소 체벌을 당한 학련 소속 학생이 사감으로 무고한 최창수 교사를 반군협조자로 고발했다 고 추정되며, 최창수 교사는 이북 출신 월남자 김옥태 학생과장 과 함께 끌려가 적법한 조사도 받지 못하고 서면 압곡리 구랑실 재에서 억울하게 학살당했음 ㆍ매곡동 매산등 희생사건: 순천 진압 직후 순천농림중학교 주둔 군인들이 매산중학교 돌담장에서 23 24명 정도의 민간인을 총살하였다고 들었음 ㆍ기타 순천시내권 민간인 집단희생사건: 순천 진압 후 2 3일 후 순천중학교(현 순천고등학교) 앞 길(현 순천고등학교와 종합 사회복지관 사이의 길)에서 가마니로 덮여진 40 50여 구의 시신을 목격함. 당시 시신이 군인 복장은 아니었고, 민간인 시신 이라고 생각했음 ㆍ순천농림중학교: 진압군 15연대 주둔했음 ㆍ순천 학련 관련: 당시 사상 있는 학생들이 학련본부로 끌려가서 구타당함. 당시 학련본부는 대성여관(현 중앙사거리 농협 인근) 옆에 있었음 25 김 월등면 가족 대살 및 주거지 방화 전문 월등면 신월마을 입구 면담 보고서 ㆍ여순사건 당시 18세로 월등면 한청단원, 월등지서에서 급사로 근무하며 가해군인이 가해과정을 말하는 것을 직접 들음 ㆍ월등면 가족 대살 및 주거지 방화 사례: 1948년 11월경 신청인 이 월등지서 급사로 있을 때, 철모에 흰 띠를 두른 군인 3명이 월등면 신월리 서당마을 거주 입산자 안상옥의 집을 불태우러 간다고 들었음. 군인들이 돌아와서 빨갱이 가족들이니 군인들 에게 부탁을 해도 모자를 판에, 한 사람이 난리를 치니 빨갱이 가족들이 미워서 가족을 모두 집에 넣고 방화했다고 말하는 것 을 들었음. 실제로 군인들은 안상옥의 형이 집을 방화하는 것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하자 가족 3명(안상옥의 아버지, 안상옥의 형: 안점박우로 불렸으며 당시 30세 정도로 환자였음, 안점박우 의 아내)을 집에 가두고 집을 방화하여 3명 모두 불태워 죽임. 입산자 안상옥은 행방불명되었으며, 안점박우의 아기는 어머니 가 불에 타 죽어 수유가 불가하여 아사함. 당시 군인들은 12연대 로 기억됨 ㆍ월등면 큰박골 집단희생사건 경위 목격: 여순사건 뒤 월등지서 경찰이 새벽에 신월마을에 찾아와 마을주민 중 청년 남자 전체 를 마을입구 논에 집합시킨 후 무차별 구타하고 집안 친척들끼 리 서로 뺨을 때리게 하며 반군협조 여부ㆍ입산자 유무ㆍ반군 유무 등을 추궁함. 이후 마을청년 남자들을 월등지서로 연행하 여 구타 및 고문하며 취조하고 유치장에 구금함. 군이 월등지서 에 와서 구금된 주민들이 죄가 있냐고 묻자 월등지서장 조금동 이 구금된 마을주민들이 죄를 지었다고 함. 그러자 군인들이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7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성명 사건 관련성 25 김 26 김 월등면 가족 대살 및 주거지 방화 전문 월등면 가족 대살 및 주거지 방화 목격 일 장소 월등면 신월마을 입구 월등면 신월마을 입구 형태 주요 내용 면담 보고서 면담 보고서 구금된 마을주민들을 GMC에 실어 월등면 큰박골로 끌고 가집 단사살함 ㆍ계엄령 관계: 당시 계엄령이 선포되어 군인과 경찰이 사람을 죽여도 문제되지 않는다고 여김 ㆍ여순사건 당시 초등학생 ㆍ월등면 가족 대살 및 주거지 방화 사례: 여순사건 당시 1948년 11월경 군인들이 월등면 신월리 서당마을 거주 입산자 안상옥의 가족 3명(안상옥의 아버지, 안상옥의 형: 안점박우로 불렸으며 당시 30세 정도로 환자였음, 안점박우의 아내)을 집에 가두고 집을 방화하여, 안상옥의 가족 3명이 모두 불에 타 죽었고, 참고 인이 가족 3명의 불에 탄 시신을 목격함. 안점박우의 아기는 어머니가 불에 타 죽어 수유가 불가하여 아사함 ㆍ월등면 큰박골 집단희생사건 경위 목격: 여순사건 뒤 월등지서 경찰이 새벽에 신월마을에 찾아와 마을주민 중 청년 남자 전체 를 마을입구 논에 집합시킨 후 무차별 구타하고 집안 친척들끼 리 서로 뺨을 때리게 하며 반군협조 여부ㆍ입산자 유무ㆍ반군 유무 등을 추궁함. 이후 마을청년 남자들을 월등지서로 연행, 군인들이 구금된 마을주민들을 월등면 큰박골로 끌고 가 집단 사살함 [별첨 10] 군사편찬연구소 소장 한국전쟁 증언록 조사상황 연 번 성명 소속/ 계급 1 함 ( 咸 ) 2여단 군수참모, 2연대 연대장ㆍ 대령 조사일 조사장소 해외개발공사 주요 내용 ㆍ이동경로: 서울-전주-남원-구례-순천-여수(여단 군수참모), 운봉(2 연대장) 지리산토벌 ㆍ지휘명령체계: 호남지구 전투사령부 총사령관 송호성, 부사령관 원용 덕, 여수지구 전투사령관 송석하 ㆍ주둔지: 순천군청(호남지구 전투사령부), 순천경찰서(헌병대) 2 설 ( 薛 ) 2연대 1대대 2중대장 ㆍ 중위 육군본부 G-4 ㆍ부대이동과 작전: 2중대장으로서 중대를 무장해 대전역(자동차 이 동)-남원(기차)-순천(자동차) 이동. 본인은 사령부 이동하는 것을 호 위함. 순천에서 시가지 소탕전을 벌이다가 구례 이동. 1949년 1월 중순 경 제주도 작전 출동 ㆍ지휘ㆍ명령체계: 연대장 이명재, 여단장 원용덕, 장갑차 대대장 박도 룡. 사령부 사령관 송호성, 부사령관 원용덕 ㆍ진압작전: 오후 3시경 순천 북쪽으로 들어갈 때 시가전이 한창 진행 중. 순천 북국민학교 옆인데 거기에 사람들 발가벗겨서 초등학교에 가득 차 있었음. 밤이 되어 남국민학교인가 시내 중심지대로 들어가서 산 밑에 사령부 설치. 남국민학교에 들어갔는데 시가지에 시체가 늘어 졌고, 불에 타서 죽은 시체도 있었음 순천지역 여순사건 751

280 제3권 연 번 성명 소속/ 계급 2 설 ( 薛 ) 2연대 1대대 2중대장 ㆍ 중위 조사일 조사장소 육군본부 G-4 주요 내용 ㆍ포로 처리: 원용덕은 광주로 가고 본인은 순천에서 경비대장을 하면서 시가지 소탕전을 전개하고 포로를 잡아다가 법무부에 넘겨주는 헌병 역할을 함. 그 후 군기병이라는 것이 와서 넘겨줌 3 정 ( 鄭 ) 2연대 1대대, 2사단 하사관학교 ㆍ 하사 사단 28연대 ㆍ부대이동과 작전: 이리-남원(1박)-구례군청(계엄령 선포)-순천 입구(1 개 중대 편성, 3연대 1개 중대 합류)-순천농림중학교-순천 진압-여수 점령, 이후 2개월간 지리산토벌을 하다가 제주도 출동. ㆍ총살과정: 순천시가에 들어가 수색을 해서 잡은 것이 한 70명 되었고 그것을 분대별로 나누어 총살을 시켰는데, 한 사람당 세 사람씩임 ㆍ주둔지: 14연대 병력이 많아서 순천 시가지 밖에서 1박을 하고 10월 22일 여명에 완전히 점령해 도립병원에 있었음 ㆍ지휘관: 2사단 하사관학교장 겸 3연대 부연대장 송석하가 출동 지휘 4 장 ( 張 ) 2연대 1대대 4중대ㆍ 일등병 제33사 ㆍ부대이동과 작전: 남원역에 내려 트럭을 타고 순천으로 들어감. 다시 여수로 들어가 여수초등학교에서 여학생들하고 민간인들을 수용해 10일간 주둔. 이후 백운산, 지리산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제주도로 토벌을 감 5 이 ( 李 ) 2연대 1대대, 2여단 하교대 ㆍ 일등병, 하사 ㆍ이동경로: 이리(2여단 2, 3, 12연대 하교대)-전주-남원-곡성-구례- 순천-여수. 11월 17일 여수지구 비상계엄 해제 후 여수-보성-곡성-전 주-대전 복귀 ㆍ부대이동과 작전: 2여단 소속 하교대(2, 3, 12연대) 입교. 10월 20일 남원으로 출발(임실 3연대 3대대, 남원국민학교 하교대 300명, 12연대 부대원). 21일 남원-곡성-구례-순천 이동(하교대원, 3연대, 12연대, 2연대 요원). 22일 순천 완전 탈환(여학생 연락원 1명 체포, 연락문 압수, 모자에 백색 띠, 국군 완장 착용, 순천 뒷산 부락 포위, 반군 300명 사살, 순천시가 모습 비참, 시체 산재). 23일 여수 이동 6 윤 ( 尹 ) 2연대 3대대 11중대 ㆍ상사 차량재생창 ㆍ부대이동과 작전: 대전에서 추계연습을 하다가 순천으로 내려감(대대 장 현석주). 이후 구례, 남원에서 전투. 반란사건 진압은 약 한 달간 했으며 훈련이 안 되어서 고통을 많이 겪음 ㆍ지휘명령체계: 연대장 대리 이명재, 3중대장 이두교(중위, 전사) 7 한 ( 韓 ) 3연대 2대대 5중대 인사계 국방부 ㆍ작전지역: 2대대는 순천으로 들어가서 순천, 벌교, 고흥으로 가고, 1개 내지 2개 소대 병력이 여수로 들어감 ㆍ지휘명령체계: 대대장이 조재미지만 실권은 5중대장 김용이 쥐고 있으 며, 3연대 빨갱이를 다 잡음. 이 사람이 칼을 가지고 다녔는데 모가지를 그냥 쳐가지고 바-카에 닦음. 사병들 웬만하면 모두 빨갱이로 몰려 명 정도가 숙청됨 8 최 ( 崔 ) 3연대 2대대 ㆍ 일등병 소총수 합참대학 ㆍ부대이동과 작전: 순천 진입 후 소위 자위대원을 생포하여 약 30명 총살. 이후 농업학교에서 자고, 벌교로 이동함. 순천경찰서 옆 과수원에 서 사격을 받았는데, 거기에서 적들을 잡아 총살시킴 ㆍ지휘관: 중대장 박봉수(중위, 육사 3기)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8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성명 소속/ 계급 한 ( 韓 ) 유 ( 柳 ) 이 ( 李 ) 박 ( 朴 ) 3연대 3대대장 ㆍ 대위-소 령, 2기 3연대 3대대 12중대장 ㆍ 중위, 3기 4연대 연대장 4연대 부연대장, 연대장 대리 ㆍ 소령 조사일 조사장소 서울 세종로 재향군인회 자택 자택 주요 내용 ㆍ부대이동과 작전: 3대대 11중대(중대장 김봉삼 중위, 3기)가 첫 출동. 대대장 부임 열흘째여서 김영모 전 대대장이 인솔해 같이 여수, 순천 점령작전 전개. 11중대가 순천 학구, 여수, 구례 문수리에서 작전. 4연 대와는 구례에서 작전. ㆍ부대이동과 작전: 순천은 처음에 나가서 적의 화력이 세기 때문에 첫 날은 점령 못 하고 그 다음날 오후 1, 2시경에 점령함. 순천농림중학교 에 죽은 시체가 남자, 여자, 어린애 등 약 500구가 있었음. 다음 날 새벽에 여수로 향할 때 서울에서 기갑차가 2대 내려왔음. 여수를 점령 하고서 여수 무슨 국민학교에서 한 달 동안 주둔하고 있다가, 지리산으 로 들어갔음 ㆍ이동경로: 여순사건 당일 서울-장성-광주-순천 학구-보성-광양- 광주 ㆍ작전 보고: 서울에서 광주로 내려오던 중 장성에서 여단 법무장교를 만났는데, 그는 여수반란으로 연대는 다 나가고 광주에 병력이 없어서 3연대로 응원 요구하러 가는 중이라고 함. 광주 도착 당시 4연대 잔여 병력은 500명. 대대장, 중대장이 없어서 본부중대가 중심이 되어 출동 ㆍ작전 지시: 학구에서 싸움 시작. 토벌사령관 송호성 지시로 이성가(연 대장)는 보성으로 가서 반군 소탕, 박기병(부연대장)은 여수로 가서 소탕 ㆍ군법회의: 반란군 군법재판(재판장 양정수)에 이성가가 여단 참모장으 로서 여단장 대리로 참석했는데, 여단장 김상겸(대령)이 부하 재판에 입회하기를 거부한 때문. 10명이 즉결처분당할 때, 6 7명이 대한민 국만세 부르고, 나머지가 인민공화국만세 불렀다고 함 ㆍ지휘명령체계: 토벌사령관 송호성, 부연대장 박기병(소령), S-3 박노규 ㆍ이동경로: 광주-학구-구례-남원(3연대 인솔차)-전주-남원-학구- 광양-여수-광주-나주-광주 ㆍ미군 관련: 연대 미군 고문관한테 갔더니 모든 것은 당신 권한이니까 나는 도와준다고 함 ㆍ작전 지시: 미군 협조를 얻은 후에 연대 장교들과 경찰의 보고를 받음. 1개 중대를 편성해서 대대장 인솔로 선발대를 5시 반쯤 보냄. 경찰 부총장 최천을 시켜 경찰 일부를 출발하게 함. 본인은 학구로 가라고 했는데 이 사람들은 그리 가면 위험하다고 해서 보성 벌교로 해서 순천으로 갔는데, 한 10시쯤 도착했다는 보고 받음 ㆍ작전 보고: 서울에 보고한 후 윤길순 참모부장과 정일권이 비행기로 광주 4연대 도착해 전부 보고함 ㆍ작전 수립: 연대장 이성가의 재가를 얻어 주력에 1개 대대를 두고 나머 지 3개 대대 중에서 2개 대대를 본인이 인솔해서 그때 저녁 6시에 트럭으로 출발해 아침 4시경 학구 도착. 학구에서 14연대 1개 중대 병력의 포로를 잡아 광주로 보냄. 순천 진입 전, 3연대 송석하 지휘 선발대의 학구 합류가 늦어 남원-전주-남원으로 가 3연대 인솔해 학구 도착. 3연대, 4연대에 12연대 일부 병력이 학구에서 호남지구 순천지역 여순사건 753

282 제3권 연 번 성명 소속/ 계급 12 박 ( 朴 ) 4연대 부연대장, 연대장 대리 ㆍ 소령 조사일 조사장소 자택 주요 내용 전투사령관 김백일의 명령을 받음 ㆍ부대이동과 작전: 마산 15연대 최남근 부대가 광양에서 반란군에 합류 했다고 광양을 탈출해 온 경찰과 서북청년대원 등 우익진영의 정보를 얻음. 상부 지시로 4연대 2개 중대를 편성해 광양 진주. 일부 병력, 백 지휘하에 순천 공격해 포로 300명 잡아 김백일 사령부에 넘겨 줌. 이후 여수 공격 중 4연대 나주 파견부대의 광주 습격 첩보를 받고 나주에서 진압 후 광주로 원대복귀함 ㆍ지휘명령체계: 호남지구 전투사령관 김백일 13 김 ( 金 ) 4연대 1대대 2중대 2소대 ㆍ 상등병 육군본부 전사편찬 위원회 ㆍ부대이동과 작전: 여순사건 당시 밤에 비상 걸려 1대대 2중대 일부 병력 순천으로 이동. 순천 각 경찰서에서 방어하다 반란군에 밀려 일부 는 오성지구로 이동, 다른 일부 병력은 학구 방면으로 이동해 방어. 본인은 학구 방면으로 이동해 학구 철로변 방어함. 학구에서 반란군과 전투, 반란군 순천으로 퇴각. 이후 학구-광양-백운산 이동해 적 추적. 여수 완전 함락 후 본대로 철수함 ㆍ즉결처분: 여자 반란군을 잡아서 직결처분했다든지 이런 것은 많지만, 어떻게 다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까? 14 김 ( 金 ) 4연대 3대대 10중대 분대장 ㆍ 하사 육군본부 ㆍ이동경로: 광주-순천-광양-지리산 토벌 ㆍ부대이동과 작전: 야간 비상소집해 작전계획도 없이 완전무장해 순천 이동해 새벽 도착. 1개 대대 전부 출동해 시내 진입. 오후에 시가전을 벌이지만, 전투다운 전투는 못 하고 반군들은 후퇴함. 순천시내 집이 무너지고 거리마다 피바다. 수상한 사람은 모조리 잡아들임. 이후 광양 이동해 백운산, 지리산지구토벌작전 ㆍ포로 처리: 토벌 시 대개 수색대는 전향될 가치가 없는 포로는 굉장히 많이 죽였음. 부역혐의 민간인, 소위 요시찰인물들을 여자고 남자고 할 것 없이 무자비하게 죽임 ㆍ즉결처분: 수색대의 선임하사관일 때 산중에서 총성을 내면 수색대 위치가 발견되니까, 장교들이 일본도로 목을 쳐서 죽임. 악질적인 동네 는 불 질러버림. 엉터리 같은 전투를 당시에 했음 15 김 ( 金 ) 20연대 부연대장 ㆍ 중령 자택 ㆍ작전 수립: 여순사건 때 비행기로 광주에 도착. 광주 4연대가 엉망이 되어서, 서울에서 헌병 1개 소대를 데려다 사령부 경비를 세워 백 과 함께 작전을 시작함. 박정희가 작전참모를 하고, 본인이 정보참 모를 함 16 백 ( 白 ) 12연대 부연대장, 연대장 인천 ㆍ부대이동과 작전: 주암-학구-순천 시가전-백암산. 14연대 반란에 4 연대, 3연대의 일부가 합류를 해서 12연대가 출동. 주암, 학구에서부터 김지회 주력하고 접촉전을 벌이고 순천에서 시가전 ㆍ작전수립: 순천 함락 시 반란군과 국군을 식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국군 은 하얀 띠를 맸음. 학구에서 8시에 작전을 벌여 전투 후 순천을 오후 4 5시경 함락. 순천과 여수를 탈환해야 서울시민이 안심하는 정치적 효과를 노려, 본인의 강한 부대가 진압작전에 투입되었음. 본인에게 기갑연대가 배치되어, 정세진 부대와 37mm M-6 12대, 캬리바 50 8대 등이 지원되었음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8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성명 소속/ 계급 허 ( 許 ) 김 ( 金 ) 김 ( 金 ) 12연대 1대대 대대장 (전 3연대 3대대 11중대장) ㆍ 2기 12연대 2대대 대대장 ㆍ 대위, 2기 12연대 2대대 8중대 조사일 조사장소 서울 조폐공사 육군본부 주요 내용 ㆍ직위: 3연대 3대대 11중대장에서 군산 12연대를 창설해 1대대장으로 있었음 ㆍ부대이동과 작전: 처음에 2대대가 출동하고, 이어 1대대, 3대대 순으로 나갔음. 본인은 지리산을 맡았고, 2대대와 3대대가 여수 쪽에서 들어 오는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순천으로 향했음. 4연대와 12연대가 순 천을 포위해 반란군을 소탕했음. 당시 3연대는 남원에 있어서 순천에 투입되지 않았음. 이후 지리산으로 빠진 반란군 소탕하러 지리산 등지 에서 작전 ㆍ진압작전: 12연대와 4연대가 순천지구를 전부 작전을 같이 했으니까, 12연대가 순천 소탕전은 전적으로 책임을 졌음. 여순사건에서 800명 을 포로로 잡았다는 것은 12연대가 전부 했을 것임. 여순반란 주력부대 의 섬멸은 12연대가 전부 다했음 ㆍ직위: 2대대장으로서 여순사건의 원인은 경비대-경찰 간 알력보다 부대에 뿌리박고 있었던 공산조직에 있었음. 12연대 내에도 공산당 조직이 있었음 ㆍ작전 지시: 사단장 원용덕(대령)이 12연대 연대장은 1대대와 함께 군산 에 남고, 백 부연대장이 2대대와 3대대 2개 대대를 지휘해 순천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림 ㆍ부대이동과 작전: 군산-이리-전주-순천 학구. 열차에서 내려서 자동 차로 학구에 갔는데, 산 밑에 있는 경찰지서에서 내림. 순천시내에 인민공화국기가 집집마다 달려 있었고 학구지서 근처에도 인공기가 붙어 있었음 ㆍ진압작전: 학구 앞에서 60미리 박격포 3문 설치해놓고 부연대장 백 이 순천시내로 발포하라 명령해 7 8발 쏘고 들어갔음. 순천으로 들어가 시가를 절반으로 나누어서 이유성 3대대는 높은 산을 맡고, 본인의 2대대는 시가전을 맡았음 ㆍ이동경로: 순천-광양-순천-여수-순천, 구례ㆍ함양 등 지리산 토벌 작전 ㆍ부대이동과 작전: 출동 첫날 순천농림중학교 쪽으로 전진해서 동천 강을 건너 산으로 올라갔지만 반군을 못 봤음. 12연대 주력부대가 광양 방향으로 추격했다가 돌아와 순천농림중학교에서 숙영함. 다음날 광 양으로 이동한 후 사흘 뒤 다시 순천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고 연대가 순천중앙국민학교에 주둔함. 여수로 이동해 시가전을 벌인 후 출동 7일 만에 다시 순천으로 왔는데, 시내에 많던 시체들이 정돈되고 전기가 들어오고 술집에서는 노랫소리가 들렸음. 다음날 구례로 이동 해 지리산토벌작전을 벌임 ㆍ경찰의 민간인 고문 및 사살: 8관구 전남경찰이 12연대를 따라다니며 순천에서 주민들을 심사함. 경찰이 팬티만 입은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하는 장면을 목격했는데, 이들이 고문에 못 이겨서 뛰는지 아니면 실제 반란가담자인지는 알 수 없었음 ㆍ기갑연대: 출동 첫날 서울에서 내려온 기갑연대 장갑차가 순천농림중학 교로 들어왔음. 장갑차가 해가 질 무렵 기관총을 쏘면서 시가전을 했음 ㆍ지휘관 : 중대장 안재진 순천지역 여순사건 755

284 제3권 연 번 성명 소속/ 계급 조사일 조사장소 주요 내용 20 하 ( 河 ) 12연대 2대대 육군본부 G-4 ㆍ진압작전: 순천 진입 시 시내 동쪽에서 박격포로 공격해 점령. 이후 광양에서 하동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무전기가 없어서 공군 L-5기에서 문서통을 던져주었음 21 진 ( 振 ) 12연대 12중대 ㆍ 일등병 ㆍ이동경로: 군산역-이리-순천 ㆍ진압작전: 처음 산에 배치해 있다가 여명에 순천시내에 들어갔는데, 9사단 30연대 벌써 우익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학살함. 경찰서에 갇힌 우익계 사람들을 끌어냈음 22 송 ( 宋 ) 12연대 3대대 9중대 중대장 ㆍ 대위 국방대학원 ㆍ부대이동과 작전: 군산-이리-광주-순천-여수-구례-군산. 기관사를 칼빈으로 위협해 광주로 이동했고, 자동차를 타고 순천 출동. 2대대는 산에 올라가 있고, 3대대는 다른 산에 있고, 9중대는 중앙에 들어가서 농업학교 근방까지 갔다가 포위당함. 오후 6시쯤 반군과 대치해 포로 187명 잡았음. 이후 순천 점령 과정에서 인민재판 광경 목격하고, 남쪽 에 남중학교인가 하는 학교에 진출해 순천 점령. 김백일이 L-19를 환영하며 태극기를 흔들었으며, 순천지구 방위사령군이 됨 ㆍ작전 지시: 연대장이 밤에 불러서 이리로 가서 박격포를 받고 아침에 병력을 받아 출동하라고 했음. 부연대장 백이 2대대와 3대대 지휘 23 박 ( 朴 ) 13연대 중대장 ㆍ 3기 육군본부 G-2 ㆍ진압작전: 온양 13연대에서 1개 대대를 편성해 본인은 중대를 이끌고 소탕전 참가. 여수ㆍ순천 일대에서 반군들과 열흘쯤 싸우고, 보성으로 이동해 보성지구 전투사령부를 만들어 1년 가까이 토벌함 24 김 ( 金 ) 14연대 전 연대장 서울 필동 ㆍ직위: 14연대 2대 연대장인데, 전임자가 시원찮아서 14연대가 공산당 소굴이 되었음. 4연대 기간요원이 14연대를 만들었는데, 영암사건에 가담한 사람들이 모여 공산당 단체가 된 것임. 본인이 다 쫓아내서 1개 연대가 1개 대대밖에 안 되었고, 공산당 애들이 중앙에 올라가 모략을 해서 본인이 14연대장에서 쫓겨났음. 김지회가 처음에는 그렇 게 나온 애가 아니었어요. 큰 인물이 아닌데 공산당 애들이 선동한 거지. 25 오 ( 吳 ) 14연대 전 연대장 서울 충무로 ㆍ직위: 14연대 이영순, 김익열에 이어 3대 연대장 부임. 사병 3,000명, 장교 50명 미만, 소대장은 거의 하사관이었음. 본인은 여순사건 때 서울에서 구속 상태였음 26 이 ( 李 ) 14연대 부연대장 ㆍ 군사 영어학교 신도호텔 ㆍ직위: 14연대 부연대장으로서 14연대 반란은 좌익의 계획적인 행동이 었는데, 바로 다음날 많은 인민공화국기를 가지고 나온 데서 그렇게 판단함. 여수반란사건은 참혹했음. 그때 14연대 장교가 20명 있었는 데, 살아난 장교는 7 8명밖에 안 되었음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8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성명 소속/ 계급 27 박 ( 朴 ) 14연대 5중대 중대장 대리, 소대장 ㆍ 소위, 6기 조사일 조사장소 KAL 인천중공업 주요 내용 ㆍ직위: 14연대 반란 당시 경찰이 일본 해군을 동원해서 오는데 장교들은 믿을 수 없다, 그러는데 장교들이 저지를 반대한다, 다 죽여라 그래서 장교들이 많이 죽었음. 본인은 방광에 총상을 입고 여수에 있는 순천도 립병원에서 치료함 28 김 ( 金 ) 14연대 1대대 부관, 2대대 7중대장 ㆍ 5기 한전 사무실 ㆍ직위: 본인이 출동대대인 1대대 부관으로 있다가, 명령을 받고 출동 준비를 할 때는 2대대 7중대장으로 있었음 ㆍ민간인 희생: 진압 등 전쟁 정리를 할 때 애매한 양민을 학살했다는 것을 느꼈음 ㆍ군법회의 및 사살 집행: 나중에 군법회의를 했는데 민주주의 군대에서 는 있을 수도 없고 반란군이 지나갈 때 밥 한 덩어리 주어도 혐의를 받았음. 여학생들이 동원해서 밥을 갖다가 주는데 무슨 죄가 됩니까. 학교 간부나 그 밥을 해준 중에 나중에 12연대가 다 들어와서 혐의자를 연병장에 집어넣고 간단한 고발에 의해서 너는 50년, 너는 종신형, 그리고 그 자리에서 총살을 다 시켰음. 애매한 사람 많이 죽였습니다. 물론 초창기이기 때문에 그렇겠지만 지금 생각하면 뼈가 저려요. 꿈에 도 놀랄 정도입니다. 그 후에 6ㆍ25 전쟁을 쭉 해보았지만 그렇게까지 비참한 전쟁을 보아온 일이 없고 그래서 여순반란사건 얘기를 함부로 안 해요. 자꾸 그 생각이 나서 여학생들 꽃 같은 학생들이 다 죽었습니 다. 29 정 ( 鄭 ) 15연대 정보과 정보 조사관 ㆍ 3급문관 한국전사실 ㆍ직위: 1948년 10월 연대 정보관(3급 문관)으로서 공비활동 정보, 생포 공비의 현지 신문 및 분류, 노획장비와 문서의 분류 및 분석, 현지 정보 지원을 위한 지리산 및 백운산 등지 작전부대 방문 ㆍ작전시기 및 작전지역: 1948년 10월부터 1949년 4월까지 호남지역에 서 산간마을은 입산 공비가 없는 곳이 없었음. 이들은 마을주민과 직접 혈연관계여서 주민 신고는 전혀 기대할 수 없었으며, 우익청년이나 인사들의 제보는 제한되어 정보 판단에 애로가 컸음 ㆍ즉결처분: 생포 공비는 8할 이상이 강제 입산 또는 혈연관계로 동조한 자들인데, 약 160여 명을 현지에서 체포해 신문했으나 은거지를 말해 주지 않고 주민의 동조 경향과 연대 수용 제한을 고려해 대부분 현지에 서 처리했음. 경찰이나 토벌부대로는 치안유지에도 급급한 형편이고, 사상적으로 국민이 양분된 실정은 민족적 대비극이었음 30 김 ( 金 ) 15연대 인사계 선임하사 ㆍ 일등중사 육군본부 G-3 ㆍ부대이동과 작전: 여순사건 이후 김현수 부연대장이 연대장 대리로서 여수로 배를 타고 상륙해서 옛 14연대가 있던 자리에 연대본부를 옮김. 며칠 안 있어 순천으로 옮겨 순천지방법원에 주둔. 여수순천지구 사령 관이라고 해서 광양, 보성, 벌교, 남원, 고흥 지구에서 소탕 순천지역 여순사건 757

286 제3권 연 번 성명 소속/ 계급 31 차 ( 車 ) 15연대 2대대 5중대 3소대ㆍ 이등중사 조사일 조사장소 CIC 본부 주요 내용 ㆍ진압작전: 1949년 말 15연대장 송요찬 재직 시 순천 진압을 나감. 그 때 CIC가 창설되었는데, 연대에서 차출되어 근무 32 김 ( 金 ) 15연대 2대대 6중대장 육군본부 ㆍ토벌작전: 지리산, 백운산, 화순 모후산, 순천 주암 등 호남지구 공비 토벌 ㆍ지휘관: 토벌작전 시 15연대장 김현수, 윤춘근, 송요찬, 최영희, 조재 미, 김안일, 김진휘 ㆍ마을 소개 등 작전 수립: 송요찬 연대장 재직 시 공비토벌을 몇 단계로 나눠서 진행함. 최초 단계는 우선 산간벽촌에 있는 주민들을 큰 대로변으 로 이동시키는 선무활동을 함. 산간벽지마을은 유일무이한 공산폭도들 의 보급선이 되기 때문에 이곳을 1 2달가량 소개시켰음. 다음 단계는 선무활동 기간 중에 A마을, B마을 등 공비 출몰 루트를 통계로 잡았음. 그래서 주암 조계산의 공비 연락 루트를 차단하고 아지트를 포위해 4명을 포로로 잡았고, 이 연락 루트를 역이용하는 작전을 펼쳤음 33 은 ( 殷 ) 15연대 3대대 9중대장, 1대대장ㆍ 중위-대 위 7기 특별 국방부 전사편찬 위원회 한국전사실 ㆍ작전시기: 여순사건 당시 3대대 9중대장으로서 보성-벌교-율어-외 서 등지에서 토벌작전. 1949년 11월 이후 1대대장으로서 순천 황전면 괴목에서 주둔해 경비. 1950년 2월 초순경 괴목과 곡성을 오가며 작전 34 이 ( 李 ) 15연대 3대대 9중대 2소대장 ㆍ소위, 8기 특별 한국전사실 ㆍ작전시기 및 작전지역: 1949년 4월 육사 8기로 15연대 소대장 부임. 5월 고흥ㆍ나주, 6월 구례 지리산 일대, 7월 벌교, 11월 광양 백운산 등지에서 작전. 1950년 3 4월 보성, 송광사, 승주에서 토벌. 3월 16일 오전 5시경 공비 70명이 아침밥을 지어달라고 강요하였다는 송 광사 주지의 신고로 출동해 공비 20여 명 살해 35 오 ( 吳 ) 5여단 사령부 참모장 대동 공업사 ㆍ직위: 5여단사령부 참모장으로서 제주도로 파견할 여수 14연대 1개 대대를 정돈하러 갔다가, 야간에 14연대장 박승훈으로부터 반란 보고 를 받음. 14연대 본부를 거쳐 해군 경비정을 타고 총사령부로 이동. 이후 4연대 병력을 수습해 보성 점령 ㆍ지휘명령체계: 육본 정보국장 백, 총사령관 송호성, 광주지구 전 투사령관 김백일, 5여단장 김상겸 36 박 ( 朴 ) 이범석 국방장관 전속부관 자택 ㆍ직위: 이범석 국방장관 전속부관으로 광주 도착. CAC 사령부 자리에 병원이 있었는데, 거기에 부상한 사람들을 수용함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8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성명 소속/ 계급 조사일 조사장소 주요 내용 37 하우 미 군사고문 단 ㆍ 대위 하우스만 사무실 ㆍ작전 수립: 하우스만은 서면 답변을 통해, 여수작전 기동부대 명단에서 순천지역에는 제2여단 본부(원용덕 대령 지휘) 200명, 헌병(한신 대 위) 50명, 제3연대(양찬우 중위) 136명 등의 병력이 동원되었다고 증 언함 순천작전 기동부대 명단( ) 지역 부대 동원 병력 지휘관명 순천 제2여단 본부 헌병 제3연대 원용덕 대령 한신 대위 양찬우 중위 38 김 ( 金 ) 공군비행 대 ㆍ 대위-소 령 자택 ㆍ작전시기 및 작전지역: 여수ㆍ순천에 반란이 나서 10시에 명령을 받 고, 12시에 10대 편대로서 이동. L-4의 항속거리가 짧기 때문에 일단 전주비행장에 내렸다가 광주에 가서 여수ㆍ순천 정찰을 하고, 또 수류 탄을 공중에서 떨어뜨리는 등 여러 가지 육군 작전에 협력 ㆍ작전 수립: 비행기를 잘 보존하기 위해서 경험이 많은 사람의 순서로 하여, 오점석, 전명섭, 박희동, 강호륜, 최희, 신유협, 본인이 지휘했음 ㆍ미군 관련: 당시 10대의 L-4 활동이 진압에 크게 기여하기 때문에 미군에서는 급거 10대를 추가했는데, L-4는 항속거리가 짧아서 L-5 를 주기로 결정함. 여순사건 도중에 L-5 2대가 추가되었고, 한 달 후에 10대가 와서 20대의 비행기 편제됨 39 김 ( 金 ) 공군비행 대 ㆍ 대위-소 령 자택 ㆍ작전 지시: 육군본부에서 10시쯤 육군항공대는 즉시 총기를 동원해서 광주에 도착해 육군 작전에 협력하라는 긴급명령을 내림 ㆍ부대이동과 작전: 본인이 조종사 선정, 정비사 선정, 작전에 필요한 여러 가지를 준비함. 불과 한 시간 반 후에 편대를 지어서 여의도비 행장을 떠나서 전주를 경유해 광주에 도착함. 약 2주일 동안 정찰업 무, 연락업무 등 작전. 인민재판을 하고 있는 곳에 수류탄을 터뜨리 기도 함 ㆍ작전 수립: 본인, 이근석, 박희동, 신유협, 오정석, 전명섭, 최희 등이 지휘함. 처음에는 고참 조종사만 갔고, 이후 장성환, 김신, 강호륜에 이어 민영락, 신연우, 이상중, 김성룡, 김두만 등이 합류함. L-4 6대가 제일 처음 광주에 도착하고, 4대는 전주에 남았다가 그 다음날 광주에 왔음 ㆍ진압작전: 여순사건 때 비행기에서 김신, 장성환 등이 수류탄을 떨어뜨 림. 바주카포를 달려고 하다가 못하고 수류탄을 떨어뜨렸음 40 김 ( 金 ) 공군비행 대 ㆍ 대위-소령 자택 ㆍ작전시기 및 작전지역: 여순사건 15일 정도 참가. 오점석 등 조종사들 이 여수ㆍ순천 일대 인민재판 광경 목격. 태극기 그린 비행기가 상공을 배회하자 국군이 가까이 온다며 인민재판이 없어졌고, 인민재판에서 가까스로 살아날 수 있었다는 얘기가 많이 있었음 순천지역 여순사건 759

288 제3권 연 번 성명 소속/ 계급 조사일 조사장소 주요 내용 41 백 ( 白 ) 육군 정보국장 ㆍ 중령 자택 ㆍ육군수색단 및 육군수색학교 설치: 육군수색단( , 소령 이용문)은 제1여단 수색대로 발족해, 10월 20일 여순사건에 출동했으며, 11월 25일 수색단을 거쳐 12월 5일 기갑단(기갑연대)으로 개편됨. 육군수색학교( , 소령 김용주)는 제1여 단에서 발족해 12월 6일 독립제1대대를 편성해 훈련하다가, 서울유격 대로 명명하고 여순사건에 출동 42 김 ( 金 ) 수색학교 독립1대대 대대장 ㆍ 소령 자택 ㆍ수색학교 창설(유격대 양성): 백 정보국장 지시로 대대격의 수색 학교 창설. 각 부대에서 유능한 장교와 병정을 차출, 훈련시켜 수원으 로 보냄. 수색학교 창설 목적은 국방장관 이범석과 정보국장 및 본인이 수색학교에서 훈련시켜 북한에 보내 내란과 소란을 시키고 교통을 마 비시키기 위한 것임. 교육은 교량ㆍ철도ㆍ도로 및 화차ㆍ기관차 파괴 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임. 최초 3개 중대로 하다가 마지막에는 사복 입은 1개 중대를 더 포함시킴 [별첨 11] 신청인이 주장하는 피해이유 연번 피해이유 희생자수(명) 비율(%) 비고 숙식 및 식량 제공 혐의 53 1 반군협조 혐의 반군가담 혐의 50 노무 동원 혐의 35 기타(반군 출몰지역 거주 등) 반군가담 혐의에는 진압 당 시 시내권 희생자 상당수 포 함 소계 좌익 및 입산자가족ㆍ동료 [대살( 代 殺 )] 무고 및 모략 변복으로 유인 [살해] 연행 및 피해이유 모름 등교 및 학교 근무 [사살] 보복 고문 및 허위 자백 총계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8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별첨 12] 순천지역 여순사건 희생자 신원 확인(경찰 자료 기재자) 연번 성명 한글 한자 이명 희생자 신원 1 김관선 金 寬 善 남 성별 생년월일 본적 직업 조회 보안기록 (1979) 승주군 황전면 모전리 90 확인근거 사실 조사서 (1980) 확인 여부 농업 2 김남곤 金 南 坤 남 승주군 송광면 낙수리 농업 3 김남수 金 南 洙 남 김덕상 金 德 相 남 승주군 상사면 도월리 504 승주군 상사면 도월리 449 농업 농업 5 김도수 金 道 秀 남 승주군 송광면 낙수리 농업 6 김동길 金 東 吉 남 김동석 金 東 錫 남 승주군 월등면 망용리 463 순천시 와룡동 231 농업 농업 8 김동섭 승주군 별량면 금치리 김문수 金 汶 洙 남 김복동 金 福 同 남 김복수 金 卜 壽 남 김봉옥 金 奉 玉 남 김삼용 金 三 用 남 김상규 金 相 圭 남 김상근 金 尙 根 남 김상석 金 相 錫 남 김성권 金 聖 權 남 승주군 주암면 오산리 394 승주군 외서면 화전리 429 승주군 월등면 농선리 16 승주군 낙안면 용릉리 420 승주군 주암면 창촌리 391 승주군 서면 구상리 승주군 낙안면 동내리 329 승주군 상사면 도월리 97 승주군 월등면 송천리 638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순천지역 여순사건 761

290 제3권 연번 성명 한글 한자 이명 희생자 신원 18 김승옥 金 勝 玉 남 김영수 金 永 水 김영모 ( 永 模 ) 성별 생년월일 본적 직업 조회 보안기록 (1979) 남 김영식 金 永 植 남 김영한 金 永 漢 남 김영호 金 永 鎬 남 김오묵 金 五 默 여 김용순 金 用 淳 남 김우현 金 禹 鉉 남 김재환 金 在 煥 남 김종실 金 鍾 實 남 김중기 金 重 基 김동기 ( 東 基 ) 남 김탁모 金 鐸 模 남 김태모 金 泰 模 남 김택모 김한동 金 漢 東 남 김현수 金 現 洙 남 김홍만 金 烘 萬 남 남병수 南 炳 洙 남 승주군 황전면 모전리 432 승주군 상사면 용암리 392 승주군 황전면 수평리 335 승주군 월등면 농선리 10 승주군 외서면 도신리 459 승주군 황전면 수평리448 승주군 주암면 행정리 1002 승주군 상사면 용암리 405 승주군 낙안면 용릉리 1구 순천시 와룡동 483 승주군 서면 운평리 405 승주군 상사면 용암리 62 승주군 상사면 용암리 62 승주군 상사면 용암리 62 확인근거 사실 조사서 (1980) 확인 여부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승주군 송광면 낙수리 농업 승주군 주암면 복다리 379 승주군 서면 운평리 451 승주군 서면 흥대리 131 농업 농업 농업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9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번 성명 한글 한자 이명 희생자 신원 36 남병화 南 炳 化 남 성별 생년월일 본적 직업 조회 보안기록 (1979) 승주군 서면 압곡리 898 확인근거 사실 조사서 (1980) 확인 여부 농업 37 남종태 南 鍾 泰 남 문동원 文 東 元 남 문의준 文 義 俊 남 승주군 황전면 황학리 992 승주군 낙안면 내운리 36 승주군 낙안면 동내리 407 농업 농업 농업 40 문태준 승주군 낙안면 동내리 박가오 朴 佳 五 박양선 ( 良 善 ) 남 승주군 황전면 수평리 165 농업 42 박경호 朴 京 浩 남 박기열 朴 基 烈 남 박기조 朴 奇 祚 남 박대규 朴 大 圭 남 박병문 朴 炳 文 남 박병은 朴 炳 殷 남 승주군 서면 구상리 74 승주군 황전면 수평리 729 승주군 주암면 풍교리 211 승주군 상사면 용암리 393 순천시 조곡동 423 순천시 조곡동 423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48 박병태 朴 炳 泰 박병록 ( 炳 彔 ) 남 순천시 덕월동 620 농업 49 박병호 朴 炳 浩 남 박봉민 朴 鳳 玟 남 승주군 서면 판교리 332 승주군 황전면 수평리 353 농업 농업 51 박성춘 朴 成 春 박꺼 꾸리 남 승주군 황전면 모전리 449 농업 52 박영천 朴 永 天 남 순천시 남정동 농업 순천지역 여순사건 763

292 제3권 연번 성명 한글 한자 이명 53 박용규 朴 容 圭 박명규 ( 明 圭 ) 희생자 신원 성별 생년월일 본적 직업 조회 보안기록 (1979) 남 승주군 상사면 도월리 481 확인근거 사실 조사서 (1980) 확인 여부 농업 54 박우동 朴 佑 同 박호동 ( 浩 同 ) 남 승주군 상사면 마륜리 109 농업 55 박재규 朴 再 圭 박재규 ( 在 圭 ) 남 승주군 상사면 용암리 398 농업 56 박적석 朴 積 錫 남 박종대 朴 鍾 大 남 박태현 朴 泰 鉉 남 박현래 朴 鋧 來 남 박형동 朴 炯 東 남 승주군 황전면 수평리 357 승주군 서면 청소리 489 승주군 상사면 초곡리 744 승주군 서면 판교리 361 순천시 와룡동 467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61 박형래 순천시 와룡동 박호순 朴 浩 淳 남 방무길 方 武 吉 남 승주군 서면 압곡리 442 승주군 낙안면 옥산리 25 농업 농업 64 배병문 裵 炳 文 배재문 ( 在 文 ) 남 승주군 황전면 수평리 446 농업 65 서덕용 徐 德 用 남 승주군 상사면 도월리 320 농업 66 서문석 승주군 황전면 덕림리 서종오 徐 鍾 午 남 승주군 서면 흥대리 322 농업 68 서홍석 승주군 황전면 덕림리 선병률 宣 炳 律 남 선병문 宣 炳 文 남 승주군 외서면 화전리 433 승주군 외서면 화전리 439 농업 농업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9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번 성명 한글 한자 이명 희생자 신원 71 선병우 선복환 宣 福 煥 선복안 ( 福 安 ) 성별 생년월일 본적 직업 조회 보안기록 (1979) 남 선쌍수 宣 雙 洙 남 선화근 宣 和 根 남 손일권 孫 日 權 남 손일문 孫 日 文 남 신경우 신래휴 申 來 休 남 신설우 申 雪 雨 남 안경환 安 敬 煥 남 안귀섭 安 貴 燮 안병섭 ( 秉 燮 ) 남 안기호 安 琪 鎬 남 안봉우 安 琫 右 남 안봉주 安 奉 柱 남 안봉준 安 琫 準 남 안삼종 安 三 鍾 남 안순동 安 詢 同 남 안점수 승주군 외서면 도신리 377 승주군 외서면 도신리 361 승주군 외서면 화전리 431 승주군 외서면 화전리 451 승주군 주암면 복다리 415 승주군 주암면 복다리 415 승주군 별량면 송기리 44 순천시 오천동 192 순천시 400 조곡동 승주군 낙안면 이곡리 316 승주군 낙안면 이곡리 329 승주군 낙안면 이곡리 342 승주군 낙안면 이곡리 342 승주군 낙안면 이곡리 339 승주군 낙안면 이곡리 342 승주군 낙안면 이곡리 316 승주군 낙안면 이곡리 316 승주군 별량면 금치리 1067 확인근거 사실 조사서 (1980) 확인 여부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순천지역 여순사건 765

294 제3권 연번 성명 한글 한자 이명 희생자 신원 89 안창섭 安 昌 燮 남 성별 생년월일 본적 직업 조회 보안기록 (1979) 승주군 낙안면 이곡리 394 확인근거 사실 조사서 (1980) 확인 여부 농업 90 양전 楊 槇 남 승주군 서면 죽평리 325 농업 91 양태승 梁 太 昇 양태승 ( 泰 勝 ) 남 승주군 상사면 도월리 505 농업 92 이태근 승주군 외서면 신덕리 오경옥 吳 景 玉 남 오기수 吳 基 洙 남 승주군 상사면 오곡리 623 순천시 야흥동 38 농업 농업 95 오기주 승주군 상사면 용계리 오순용 吳 順 龍 남 유영찬 劉 永 贊 남 유익상 劉 翊 相 남 유일상 劉 日 相 남 승주군 상사면 오곡리 658 순천시 와룡동 527 승주군 월등면 신월리 98 승주군 월등면 신월리 110 농업 농업 농업 농업 100 유일준 兪 日 濬 유낙준 ( 樂 俊 ) 남 승주군 황전면 평촌리 248 농업 101 유장렬 柳 長 烈 남 유장효 劉 長 孝 남 승주군 낙안면 내운리 410 승주군 황전면 평촌리 558 농업 농업 103 윤대준 尹 大 俊 윤대로 ( 貸 露 ) 남 승주군 황전면 모전리 45 농업 104 윤상현 尹 商 鉉 남 윤선종 尹 善 鍾 남 윤영학 尹 永 學 남 승주군 서면 죽평리 380 승주군 낙안면 이곡리 37 승주군 월등면 대평리 207 농업 농업 농업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9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번 성명 한글 한자 이명 희생자 신원 107 이강철 李 康 哲 남 성별 생년월일 본적 직업 조회 보안기록 (1979) 승주군 황전면 모전리 51 확인근거 사실 조사서 (1980) 확인 여부 농업 108 이경모 李 京 模 남 이경의 李 京 義 남 순천시 삼거동 159 순천시 삼거동 129 농업 농업 110 이금년 순천시 삼거동 이기홍 李 起 洪 남 이만석 李 萬 石 남 승주군 서면 청소리 611 승주군 낙안면 금산리 161 농업 농업 113 이분년 李 分 年 이피우 ( 皮 佑 ) 남 순천시 삼거동 285 농업 114 이옥재 李 玉 宰 남 승주군 낙안면 동내리 234 농업 115 이용기 李 鏞 基 이용규 ( 龍 圭 ) 남 승주군 월등면 계월리 552 농업 116 이윤갑 李 允 甲 남 이윤만 李 允 萬 남 이의윤 李 義 允 남 승주군 황전면 수평리 466 승주군 주암면 창촌리 승주군 상사면 봉래리 550 농업 농업 농업 119 이장석 李 長 碩 이의순 ( 義 順 ) 남 승주군 상사면 봉래리 618 농업 120 이정호 李 貞 鎬 남 이종배 李 鍾 培 남 이종태 李 鍾 泰 남 이진철 李 鎭 徹 남 순천시 저전동 157 승주군 황전면 모전리 521 승주군 상사면 마륜리 201 승주군 월등면 농선리 9 농업 농업 농업 농업 순천지역 여순사건 767

296 제3권 연번 성명 한글 한자 이명 희생자 신원 124 이채동 李 彩 同 남 성별 생년월일 본적 직업 조회 보안기록 (1979) 승주군 송광면 낙수리 확인근거 사실 조사서 (1980) 확인 여부 농업 125 이춘기 승주군 해룡면 용전리 이팔형 李 八 炯 남 승주군 주암면 광천리 191 농업 127 이형순 李 珩 順 이형태 ( 亨 泰 ) 남 승주군 상사면 도월리 503 농업 128 임경주 林 敬 周 남 임병익 任 炳 翊 남 임종환 林 鍾 環 남 임혁동 任 赫 東 남 장공수 張 公 洙 남 장귀수 張 貴 洙 남 장기태 張 基 台 남 장길수 張 吉 水 남 장당규 張 鎕 奎 남 장문종 張 文 鍾 남 장사종 張 四 鍾 남 승주군 상사면 용계리 327 승주군 서면 죽평리 344 순천시 풍덕동 1059 승주군 서면 죽평리 346 순천시 용당동 560 순천시 오천동 397 승주군 월등면 농선리 21 승주군 황전면 금평리 321 승주군 서면 압곡리 502 승주군 월등면 신월리 110 승주군 월등면 신월리 111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139 장양호 승주군 서면 비월리 장운석 張 云 錫 남 승주군 월등면 농선리 43 농업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9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번 성명 한글 한자 이명 희생자 신원 141 장재석 張 在 錫 남 성별 생년월일 본적 직업 조회 보안기록 (1979) 승주군 월등면 농선리 496 확인근거 사실 조사서 (1980) 확인 여부 농업 142 장치옥 張 致 鈺 남 전경민 全 敬 珉 남 정갑래 鄭 甲 來 남 승주군 월등면 신월리 121 승주군 황전면 황학리 104 순천시 장천동 150 농업 농업 농업 145 정관삼 승주군 상사면 용암리 정귀의 鄭 貴 義 남 승주군 외서면 금성리 532 농업 147 정규현 鄭 圭 鉉 정기현 ( 基 鉉 ) 남 승주군 서면 죽평리 388 농업 148 정기택 丁 基 澤 남 정동안 鄭 東 安 남 정병학 鄭 炳 學 남 정양택 鄭 良 澤 남 승주군 낙안면 내운리 73 승주군 상사면 쌍지리 745 승주군 황전면 회룡리 1075 승주군 서면 운평리 410 농업 농업 농업 농업 152 정연균 鄭 連 均 정영균 ( 永 均 ) 남 승주군 황전면 회룡리 896 농업 153 정영임 丁 永 任 여 정영화 鄭 瑛 和 남 정용선 丁 龍 善 남 정용호 鄭 鏞 浩 남 정종화 鄭 宗 和 남 순천시 조곡동 480 승주군 황전면 모전리 94 승주군 낙안면 내운리 73 승주군 상사면 오곡리 199 승주군 황전면 모전리 94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순천지역 여순사건 769

298 제3권 연번 성명 한글 한자 이명 희생자 신원 158 정현지 鄭 泫 知 남 성별 생년월일 본적 직업 조회 보안기록 (1979) 승주군 황전면 모전리 94 확인근거 사실 조사서 (1980) 확인 여부 농업 159 제갈도 금 諸 葛 道 金 남 승주군 월등면 계월리 468 농업 160 조경섭 趙 敬 燮 남 조경술 趙 京 述 남 조규조 趙 圭 祚 남 조삼훈 趙 三 勳 남 조수영 趙 秀 永 남 조학섭 趙 學 燮 남 지만동 池 萬 烔 남 승주군 주암면 오산리 929 승주군 황전면 선변리 457 승주군 주암면 풍교리 298 승주군 황전면 선변리 72 순천시 야흥동 434 승주군 주암면 풍교리 192 승주군 상사면 용계리 913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167 지만형 승주군 상사면 용계리 지유섭 池 有 燮 남 지한모 池 漢 模 남 차상렬 車 相 烈 남 최규관 崔 奎 寬 남 여천군 율촌면 신풍리 1039 (순천시 장천동 201 거주) 승주군 상사면 용계리 937 승주군 황전면 회룡리 775 승주군 상사면 응령리 504 농업 농업 농업 농업 172 최규삼 崔 圭 三 최규동 ( 圭 東 ) 남 승주군 상사면 용계리 900 농업 173 최상문 남 승주군 서면 청소리 258 농업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9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번 성명 한글 한자 이명 174 최성용 崔 成 鎔 최성호 ( 成 鎬 ) 희생자 신원 성별 생년월일 본적 직업 조회 보안기록 (1979) 남 승주군 상사면 용계리 693 확인근거 사실 조사서 (1980) 확인 여부 농업 175 최일삼 崔 日 三 남 최택림 崔 澤 林 남 승주군 월등면 신월리 283 승주군 황전면 평촌리 229 농업 농업 177 최평호 崔 坪 鎬 최평현 ( 坪 鉉 ) 남 승주군 상사면 용계리 620 농업 178 최학철 崔 學 澈 최학철 ( 學 喆 ) 남 승주군 상사면 용암리 404 농업 179 최한용 崔 漢 鎔 최한호 ( 漢 鎬 ) 남 승주군 상사면 용계리 644 농업 180 하정대 승주군 별량면 금치리 한경수 韓 敬 壽 한경수 ( 京 洙 ) 남 승주군 월등면 신월리 260 농업 182 한인수 韓 仁 洙 남 허낙구 許 洛 九 남 허동규 許 東 圭 남 허만관 許 萬 寬 남 허만홍 許 萬 洪 남 허정구 許 貞 九 남 허태광 許 泰 光 남 황영재 黃 榮 在 남 승주군 주암면 풍교리 523 승주군 서면 선평리 473 승주군 황전면 죽청리 657 승주군 서면 선평리 561 승주군 서면 선평리 541 승주군 서면 선평리 556 승주군 서면 압곡리 504 승주군 서면 압곡리 431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순천지역 여순사건 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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