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보고서 2017-1 2017. 1. 26 1985-87 년개헌 대선국면과민중운동 미완의 87 년이 2017 년촛불에주는교훈 김태훈 정책교육국장 psspkth@gmail.com < 목차 > 요약 1. 왜다시 1987년인가? 2. 개헌투쟁의방향모색기 : 1985년 (1) 1985년신민당의총선승리와개헌특위제안 (2) 민중운동내주요쟁점 : 야당과의관계설정 (3) 민중운동의개헌투쟁론 : 형성과전개과정 (4) 민정당의개헌특위거부와국면전환 3. 개헌투쟁고조기 : 1986년상반기 (1) 투쟁의대중적고양 (2) 학생운동 : CA-NL (3) 노동자 농민 재야민주화운동 4. 개헌협상실패와호헌, 87년 6월항쟁 (1) 내각제협상의실패와 4.13 호헌조치까지 (2) 국본의결성배경과한계 (3) 6월항쟁과 6.29 선언 5. 87년 7-9월 : 6.29 이후노선분화와노동자대투쟁 (1) 7,8,9월노동자대투쟁의폭발 (2) 노선분화의조짐 : 군부독재종식투쟁론과군부독재타도투쟁론 (3) 개헌협상 6. 87년 10월-12월 : 선거국면노선분화와군부재집권 (1) 후보단일화논의의경과 (2) 비판적지지론 (3) 후보단일화론 (4) 독자후보론 (5) 군부재집권및사후평가 7. 총평 : 1987년의교훈과 2017년 주소 (121-865) 서울시마포구연남동 259-12 3 층전화 02-778-4001~2 팩스 02-778-4006 메일 pssp@jinbo.net 홈페이지 www.pssp.org
요약 촛불집회현장발언과언론, SNS 등에서현국면과 1987년 6월에대한비교가자주등장한다. 87년의역사를반복하지말자는취지의발언이대부분이다. 그렇다면무엇이미완인것인가? 박근혜퇴진촛불에서 1987년을불러오는담론은이지점에서현재적쟁점이된다. 우리는박근혜퇴진을외친시민주권이어떻게이어지고확장될수있을것인가라는고민에서 1987년을재평가해보고자한다. 그런의미에서 1987년에대해 왜광장에나왔던시민은곧바로역사의무대에서사라졌는가? 를물어보고자한다. 1987년 6월항쟁과 789 노동자대투쟁은갑자기분출된것이아니다. 70년대말과 1980 년서울의봄에서폭발했던민중운동이신군부에의해일시적으로억압되었다가정권중반부유화국면을계기로다시전열을재정비해다시역사의전면에등장한것이다. 이과정에서대중운동의측면에서 1985년구로동맹파업이발생했고, 이념적측면에서는사회성격논쟁이진행되면서운동의부활을상징했다. 그러나투쟁의성과는제한적이었다. 집권군부세력은 6.29선언을통해타도대상이아니라개헌협상의주체로탈바꿈하고, 개헌은정치권의밀실협상을통해직선제개헌에머물렀으며, 노태우는대선에출마해집권에성공했다. 이런평가를바탕으로 1987년의민중운동의한계와교훈을정리해보면, 정책적측면에서는민연정구상의구체화와대중적선전실패, 조직적측면에서는국본의낮은합의수준과취약한대중기반, 보수야당과의관계설정이라는측면에서는잘못된정세판단과과도한의존등을지적해볼수있다. 미완의 87년에대한평가속에서이념을형성하고과제를도출했던, 한편으로는 87년이만든제도적구성속에서물질적기반을갖춰온현재의민중운동은 87년의역사를반복하지않을수있을까. 자본주의를넘어서는대안적이념과광범위한대중운동의복원으로 87년 6월항쟁과그에이은 789 노동자대투쟁을오늘날되살려야한다는것이우리의잠정적문제의식이다. 또한그결과는 87년과달라야할것이다. 국회탄핵안가결이후투쟁의 2번째국면을열어가는것이급선무다. 박근혜의구속, 박근혜없이추진되고있는박근혜정책의폐기, 재벌총수에대한처벌등을요구하며변화의열망을이어나가야한다. 또한 87년의노동자대투쟁을상기해야한다. 광장의요구가일터와삶터로확장되면서더많은민주주의, 진정한민주주의에대한요구로심화되어야할것이다. 고착화된신자유주의적노동체계속에서착취받고배제되고있는노동자들의요구와조직화시도에주목해야한다. 새로운단계의운동은지금부터시작되어야한다. 2
1. 왜다시 1987 년인가? 2016년말박근혜대통령의즉각퇴진을요구하는촛불집회는전국적으로연인원 1천만명이참가하며민주주의의새로운역사를만들었다. 조선일보등보수진영은소위 질서있는퇴진 을통해보수재편의명분과시간을벌고자했으나, 박근혜대통령과새누리당은버티기로나섰고야당도좌충우돌, 갈팡질팡할뿐이었다. 여기에흔들리지않았던촛불집회는국회의탄핵결의를압박해탄핵결의안을실질적으로통과시키면서보수진영의시나리오를넘어서는국면을열었다. 탄핵결의안이통과된이후에도촛불은계속되고있다. 아직갈길이멀기때문이다. 박근혜의아바타황교안총리가대통령권한대행을하고있으며, 박근혜대통령은버젓이청와대에틀어박혀자기변명만반복하고있다. 헌법재판소가탄핵결의안을인용할지, 언제인용할지, 설령탄핵된다고해도차기에어떤정권이세워질지, 결정된것은아무것도없다. 설령정권이교체되어도그것이광장에나온촛불주권자들의삶과민주주의를더나은방향으로진전시킬것이라는보장도없다. 2017년에도촛불집회가현재진행형일수밖에없는이유다. 100만이넘는인파가광장에모일때마다우리는 1987년의경험을떠올린다. 촛불집회현장발언과언론, SNS 등에서현국면과 1987년 6월에대한비교가자주등장한다. 87년의역사를반복하지말자는취지의발언이대부분이다. 1987년이전의경험도호출되는데, 4.19 혁명에이은 5.16쿠데타, 서울역회군과광주항쟁 ( 신군부쿠데타 ) 까지거슬러가기도한다. 학계나정치권은이미오래전부터 87년체제 같은개념을두고논쟁을했으며, 개헌논의가나올때마다 87년헌정체계 를평가하게된다. 죽쒀서개줬다 는비유처럼많은이들이 1987년을 미완의혁명 으로평가한다. 그런데무엇을완성하지못한것인가? 박근혜퇴진촛불에서 1987년을불러오는담론은이지점에서현재적쟁점이된다. 조선일보는 87년개헌당시대선후보들의이해관계에따라 5년단임제로귀착되어제왕적대통령제의폐혜를만들고있다고평가하면서이번이야말로개헌의적기라고주장한다. 인명진목사 (87년당시국본대변인 ) 또한현재의촛불은유신의잔재를청소하는 87년항쟁의연장이라고평가했는데, 그는친박새누리당의비대위원장이되었다. 김종인이나손학규또한광장의촛불민심은절대권력대통령제의개헌이라고주장하고있다. 군사독재나유신체제의적폐라는것이다. 3
야당진영은야권분열로군부가재집권했던상황을현재에유비해보수세력재집권을경계해야한다는주장의근거로활용한다. 대통령직선제를쟁취했으나결선투표제, 연동형비례대표제, 직접민주주의를강화하는제도등에대한논의가전혀없어서노태우당선, 지역주의 기득권에의한이합집산이반복되는역사가되었음을평가한다. 한편제도적논의보다실질적으로야권후보단일화를위한정교한프로세스를만드는것이중요하다는주장도있다. 우리는박근혜퇴진을외친시민주권이어떻게이어지고확장될수있을것인가라는고민에서 1987년을재평가해보고자한다. 그런의미에서 1987년에대해우리는 왜광장에나왔던시민은곧바로역사의무대에서사라졌는가? 를물어야한다. 미완의 87년에대한평가속에서이념을형성하고과제를도출했던, 한편으로는 87년이만든제도적구성속에서물질적기반을갖춰온현재의민중운동은 87년의역사를반복하지않을수있을까. 자본주의를넘어서는대안적이념과광범위한대중운동의복원으로 87년 6월항쟁과그에이은 789 노동자대투쟁을오늘날되살려야한다는것이우리의잠정적문제의식이다. 또한그결과는 87년과달라야할것이다. 이보고서는일차적으로당시의역사를민중운동의관점으로쟁점과평가를정리해, 향후민중운동의과제를토론할때참고가될수있는자료로활용하는것을목적으로했다. 2. 개헌투쟁의방향모색기 : 1985 년 주요사건연표 - 2.12 총선. 신한민주당 ( 신민당 ) 돌풍 - 3.29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 민통련 ) 결성 - 5.23 삼민투위, 미국문화원점거농성 - 6.24 구로동맹파업 - 8.25 서울노동운동연합 ( 서노련 ) 창립 - 9월정기국회에서신민당개헌특위구성결의안제출 - 11.18 파쇼헌법철폐투쟁위, 민정당중앙정치연수원점거농성 4
(1) 1985년신민당의총선승리와개헌특위제안 1985년 2 12총선에서 군부통치종식 과 대통령직선제 를구호로내세운신한민주당 ( 신민당 ) 이돌풍을일으키며제1야당이된다. 관변야당이나다름없는민주한국당, 한국국민당의의석수를모두합친것보다많은의석을확보했다. 신민당은 8월전당대회를통해직선제개헌을공식당론으로정하고 9월정기국회에서개헌특위구성결의안을제출한다. 2월총선결과에대해전두환정권과민정당은내용적패배를자인하지않을수없었다. 내각개편과당직개편을통해민심을수습하고 대화정치 를표방하면서신민당을체제내화하는한편, 학원안정법제정시도를통해사회운동에대한탄압을강화한다. 개헌의민의를일축하고 현헌법에의한 88년평화적정권교체 를대대적으로선전했다. 다른한편 1985년미문화원점거농성 (5월), 구로동맹파업 (6월) 을거치며성장한학생운동, 노동자 농민운동등민중운동세력 1) 도상당한충격과고민에휩싸이게된다. 총선과정에서보여준민주화여론을어떻게이해할것인지, 여야정치권의개헌공방에대해어떤입장과자세를취할것인지를두고 80년대에이어져온조직과투쟁노선에대한논쟁이 사회운동의이념과주체형성 의문제로발전되어나가게된다. (2) 민중운동내주요쟁점 : 야당과의관계설정민중운동내개헌운동론의쟁점은신민당및재야정치세력 ( 민주화추진협의회, 민주헌정연구회, 민주산악회, 민주대학 ) 과민중운동세력간의관계설정문제였다. 야당세력과의차별성을어떻게확립하느냐는문제가주요한측면이라면부차적인측면은두세력의연대를어느선에서확립하느냐는문제였다. 이는개헌운동자체가신민당및재야정치세력이주도적으로창출한운동양식이었고, 민중운동세력은불가피하게이들정치세력의프로그램에참여할수밖에없었기때문이다. 민중운동은대부분이민우를총재로하고실질적으로는양김씨 ( 김영삼 김대중 ) 가장악한신민당 2) 및재야정치세력을부르주아민주주의세력으로파악했다. (3) 민중운동의개헌투쟁론 : 형성과전개과정 1) 변혁적이념을가지며노동자 농민 학생조직을기반으로한운동들로, 여러문건에서민족민주운동, 민중 민주화운동등으로호명되는데여기서는현재적용법에따라민중운동으로통칭한다. 2) 신민당및재야세력들에게민주화란국민에게 정부의자유선택권 을돌려주는것으로, 1979 년 10 26 사건이후신민당, 공화당, 유정회등이국회에서합의했던대통령직선제를회복하는것임. 보다정확히는빼앗긴합의를되찾는것이개헌이고그방향은직선제개헌임. 동교동계 ( 김대중 ) 는대통령직선제관철을타협할수없는목표로설정하고있었고, 상도동계 ( 김영삼 ) 는정부 여당이민주화일정을밝히고개헌에동의할것을제 1 목표로, 공식적으로대통령직선제이지만내각책임제도배제하지않는다는협상의여지가있었음. 5
1 노동운동 1985년 8월 25일 서울노동운동연합 ( 서노련 ) 은창립대회결의문에서 직선제를포함한전국민적민주개헌투쟁에총력을다한다 고선언한다. 당시민중운동세력들사이에서방향성을정립하지못하고주춤거리던상황을타개하고민주제개헌론을공식제기한것이다. 현재의민중적요구는파쇼적군부독재악법을철폐하고민중적 민주적권리를쟁취하는것이라고주장한다. 이러한 ( 민중적 ) 민주제개헌은현군사독재를타도함으로써만쟁취될수있으며, 신민당및재야정치세력과연대하되, 그연대는민중운동이우위에서서주도해야한다는논리를전개한다. 이러한논리는더욱발전한다. 9월 19일자서노련신문에서대통령직선제에그치는개헌투쟁이아니라민중이참여하는헌법제정민중의회를소집해거기에서새민주헌법을제정해야한다고주장한다. ( 민주제개헌론 -> 민중 민주개헌론 ) 민중 민주개헌론은보다구체화된다. 10월 5일, 4개노동운동단체들 ( 인천노동자복지협의회, 한국기독노동자총연맹, 안양지역노동3 권쟁취위원회, 서노련 ) 이연합하여삼민헌법 ( 민중 민주 민족통일헌법 ) 쟁취론을천명한다. 슬로건은아래와같다. 민족통일가로막는분단헌법철폐하고통일헌법쟁취하자! 민중을수탈하는예속경제철폐하고자립경제수립하는민중헌법쟁취하자! 노동자 농민 서민 학생을탄압하는군사독재물리치고민주헌법쟁취하자! - 서노련신문제4호 86년 10월 28일 이는신민당이요구하는직선제개헌이노동운동의개헌투쟁목표와분명하게다르다는것을명백히한것이다. 삼민헌법쟁취투쟁론은민주제개헌론과마찬가지로현군사독재정권타도와민중의제권리를쟁취한다는점에서는공통적이지만, 매판헌법, 분단헌법등의철폐를상징적인수준에서라도주장해민중운동의정치적목표를구체화한다는점에서차이가있고, 직선제는목표가아니라는것을분명히하는점도차이가있다. 삼민헌법쟁취론은이후일관된하나의개헌투쟁론으로노동운동권의주요부분에서자리잡아나갔다. 2 학생운동 1985 년전국학생총연맹 ( 전학련 ) 과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투쟁위원회 ( 삼민투 ) 가조직되 면서학생운동에서도개헌투쟁이시작된다. 노동운동과달리논리적정합성을둘러싼내부논 6
쟁과그에따른방향전환이두드러진다. 9~10월중순민주제개헌투쟁, 10월중순 ~11월중순의삼민헌법쟁취투쟁, 86년 2월까지파쇼헌법철폐투쟁이라는변화과정을거친다. 파쇼헌법철폐투쟁론은삼민헌법을쟁취하는것은군사독재타도투쟁, 즉현행파쇼헌법철폐투쟁과정에서계기적으로확보되는것이라는논리다. 이에따라전학련- 삼민투산하 파쇼헌법철폐투쟁위원회 (14개대학, 191명 ) 는 11월 18일가락동소재민정당중앙정치연수원점거농성을벌인다. 한편 반제론 을주장하던학생운동중일부는개헌은미제의식민지파쇼체제안정화에다름아닌것으로, 부르주아민주세력들의권력투쟁을위한정치놀음으로보았다. 당면투쟁은미국의한국시장개방요구나, IMF, IBRD 대회를초점으로하여반미자주화투쟁에집중할것을주장한다 ( 개헌투쟁무용론 ). 이러한 반제론 의일부는 86년 3월이후 직선제개헌 으로입장을급선회하면서학생운동의다수파가된다. 3 재야운동 : 민통련, 민청련, EYC( 기독교청년협의회 ) 1985년 2.12 총선을계기로재야민족민주운동의대중성과통일성을재고해야할필요성이제기되고, 1985년 3월 29일, 80년대재야운동의양대산맥이라고할수있는 < 민민협 > 과 < 민주통일국민회의 > 가통합하여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 민통련 ) 이결성된다 ( 의장 : 문익환 ). 민통련은신민당이주도하는개헌운동의문제점을인식하면서, 전두환정권퇴진이라는전제하의민주제개헌 을개헌운동의기본노선으로설정한다. 즉민통련의민주화일정은 군사독재퇴진 ( 촉구 ) - 민주제개헌 민주정부수립 이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 ( 민청련 ) 은개헌국면을 권력교체기라는특수국면 으로파악한다. 그리고운동의공간확대와대중적확산을꾀할수있는적극적계기를제공할수있도록민통련과유사한민주제개헌투쟁의전개를기본노선으로천명한다. 기독교청년협의회 (EYC) 등개신교청년운동은운동의목표를 개헌 그자체가아니라 군부독재종식과민중에의한민주주의확립 으로설정한다. 그러나개헌투쟁을간과하면대중의정서를무시하고정치세력에게대중을방기해두는것이므로실천의장기적이고근본적인방향제시와슬로건을혼동하여서는안된다고주장한다. (4) 민정당의개헌특위거부와국면전환이렇게 1985년민중운동은개헌론에대한독자적인정치적목표를설정하면서동시에군부독재퇴진 ( 타도혹은종식 ) 이라는단기적목표에서야권과연대를형성해야한다고생각했다. 노동운동과학생운동내일부세력은개헌투쟁무용론을주장하기도했다. 한편전학련, 삼 7
민투등당시공식적학생운동대표세력은 파쇼헌법철폐투쟁 을행동으로까지감행한다. 종교계민주화세력과민통련등의재야민주화세력은개헌투쟁의단초적실천활동에들어갔으며, 청년운동은개헌투쟁무용론과민주제개헌론사이에서동요하는중이었다. 이와중에 85년 12월민정당은신민당의개헌특위설치안을거부한다. 그로인해여당과야당및민중민주세력의일대접전형국이조성되면서민중운동은개헌운동의방향성에있어혼란을그대로간직한채 실천의국면 으로넘어가게된다. 3. 개헌투쟁고조기 : 1986 년상반기 주요사건연표 - 1985.12. 민정당개헌특위결의안거부 - 1986.2.4 전학련파쇼헌법철폐신년투쟁대회및개헌서명운동추진본부결성대회 - 2.12 신민당, 민추협개헌서명운동시작 - 2.24 3당대표회동 (89년헌법개정, 정부형태국민투표선택, 헌법특위설치 ) - 3.7. 김대중, 김영삼, 이민우공동발표 (86년개헌, 지자제시행, 87년가을대선 ) - 3.11 NCC 시국선언문발표 ( 직선제개헌요구 ) - 3.23 신민당 개헌추진위부산지부결성대회 - 3.30 개헌추진위전남도지부결성대회 - 4.5 개헌추진위대구시경북지부결성대회 - 5.3 개헌추진위경기도및인천시지부결성대회 (1) 투쟁의대중적고양민정당은개헌특위를거부한이후반발을탄압하려고한다. 당시운동의대중적역량은학생이었다. 86년 2월 86년전학련파쇼헌법철폐신년투쟁대회및개헌서명운동추진본부결성대회 (15개대학 1천여명 ) 를대대적으로탄압하면서정국을경색시킨다. 그러나이는오래가지않았다. 1월부터시작된종교계, 대학교수등지식인들의 시국선언운동 이끊임없이이어지고. 3월부터신민당, 민추협, 민통련의 개헌서명운동. 개헌현판식운동 이성장하기시작한것이다. 개헌현판식운동은신민당의의도와통제를벗어나광범위하고급진적인대중적투쟁을형성한다. 8
개헌현판식운동과 5.3인천항쟁 신민당은 85년 12월 개헌특위 설치에 실패하자, 1천만명 개헌서명운동 과 개헌현판식 집회 등의 원외투쟁에 돌입한다. 이는 개헌운동의 대중적 투쟁국면을 창출하였다. 폭발 적인 대중열기로 개헌현판식 집회는 신민당의 제한적이고 행사 중심적 의도를 뛰어넘어 현판식 집회를 대중적 정치운동의 광장으로 발전시킨다. 자발적으로 집회에 참석한 대중의 숫자만도 연인원 약 50~70만 명에 달했고 전국의 각 지역에서 골고루 참여했다. 학생 이외의 노동자, 농민, 도시서비스직 종사자 등 하층계급 의 폭넓은 참여가 있었다. 광주집회 때 69명이 연행되는데, 대학생은 12명, 무직 24명, 음식점 및 다방 종업원 12명, 운전기사 등 근로자 4명, 산업 및 회사원 10명, 농민 7명 이었다. 집회에 참석한 군중들의 요구는 신민당의 직선제 개헌 요구(청원)를 뛰어넘어 군사독재 타도하고 민주정부 수립하자/ 민주헌법 쟁취하자) 로 결집되었다. 반미투쟁은 광주 미문 화원 앞 시위에서부터 고개를 들어, 대구에서 뚜렷해지고, 인천에서는 주류를 형성한다. 워커 미국대사는 신민당에게 공개적으로 우려를 표명하기까지 한다. 그 결과 신민당과 민중운동의 분리현상이 나타나는데 5.3 인천집회 때 특히 선명해진다. 오후 2시에 열릴 예정이었던 신민당의 개헌추진위 경인지부 결성대회와 상관없이 학생들 로 구성된 1만 대오는 12시부터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고, 오후 1시부터는 본격적인 가두 투쟁을 진행했다. 오후 2시에는 시위대가 민정당 사무실에 화염병을 투척, 방화했고, 오 후 4시경에는 주안 사거리에서 경찰차를 탈취해 경찰병력에 밀어붙이는 격렬한 시가전이 있었다. 시위는 밤 10시경까지 시내 곳곳에서 계속되었다. 이에 정부와 여당은 전면적인 탄압과 이데올로기 공세로 방향을 잡는다. 신민당 지도부 뿐만 아니라 김영삼 김대중 역시 일단 항쟁주체와 자신들을 분리하려는 데 혈안이 된다. 김대중의 비반미, 비폭력, 비용공 이라는 기준이 등장한 것도 이 때다. 민중운동은 민통 련의 문익환, 이부영, 장기표 등과 서노련의 김문수 등이 모두 구속되며 심대한 타격을 입는다. 버스정류장을 바리케이트로 설치하는 시위대(좌), 당시 현장 상황을 보여주는 그림(우) (2) 학생운동 : 민민투-자민투 9
1 민민투의제헌의회 (CA) 소집론 86년 5월이후 NL의입장을기회주의적, 개량주의적운동관이라고비판하면서 파쇼하의개헌반대, 혁명으로제헌의회 라는슬로건으로내걸고전면에부상한다. 학생운동권에서는자민투에대립되는민민투를조직한다. 민민투는처음 헌법제정민중의회 (CPA) 슬로건을제시했으나 CA론으로전개되면서 CA노선의학생운동투쟁조직이된다. 입장은아래표와같다. 헌법국면 ( 체제변혁의지 ), 혁명적정세 ( 경제모순첨예화, 지배구조 분열, 대중투쟁격화 ) 정세 당면투쟁과제 당면혁명은어떤세력, 어떤계급이투쟁을지도하는가에따라두방향으로귀결될것. 1) 노동자계급헤게모니에의한 혁명의결정적승리 2) 자유주의부르조아지의헤게모니에의한 혁명의유산, 자유주의적인개혁 민족민주헌법쟁취 -> CPA -> CA 제헌의회소집투쟁은혁명의승리를위해, 민중의정치적행동을통일시키는유일하고올바른경로. 헌법문제는헌법자체를바꾸는문제가아니라전민중적주권의행사방식문제. 제헌의회소집은민중의군사정권에대한혁명적투쟁의선언이며, 미국으로부터완전한자주화선언이며, 자유부르조아들의타협과개량 적음모에대한폭로. 2 자민투의직선제개헌론투쟁이고조되는 5월이되면서학생운동의자민투 (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 ) 로대표되는 NL( 민족해방 ) 노선은그동안개량적이라는비판으로제대로제기되지못한직선제개헌론을전면화한다. 식민지 한국땅에서는개량의여지가없기때문에직선제쟁취를민중의힘으로쟁취할수있다면, 직선제라는제도를혁명적관점에서이용할수있다고주장한다. 정세와과제에대한주요입장을정리해보면아래표와같다. 정세 개헌국면 -> 제국주의의한반도권력재편기 변혁의결정적시기가아니라준비기 당면투쟁과제 전두환세력의고립을통해파쇼지배질서를동요, 약화시키고미제의 파쇼체제재편을서두르도록강제하는투쟁. 반미자주화투쟁, 반파쇼민주화투쟁, 조국통일촉진투쟁 개헌투쟁은반파쇼민주화투쟁이며민주적제권리투쟁 3 헌법제정민중회의 (CPC) 론 10
86년 5월이후학생운동과노동운동일부에서꾸준히존재, 성장해온노선이다. 초기민민투의 CPA와유사하다. CPA의일부가 CA를비판하며독자적변혁이론체계를갖춘 CPC계열로정착된다. 현재의개헌국면을 군사파쇼가중간층포섭을위해개량전술을향해치닫는시기 로인식하고지배세력이기층민중을기만하고있다고본다. 그러나 CA의노선에도비판적이었다. 일방적폭로와견제로혁명과개량을민중에게구별시키고혁명적길을제시한다는초조감속에서제휴대상인야당의무력화만외치고있다 고비판한다. 보수야당세력내부에존재하는진보적측면에대한지지와반동적부분에대한철저한폭로 를통해민중진영의영향력을증대해야한다고주장한다. 4 당시변혁론논쟁에대한사후평가 3) NL은대중의자주적요구와지향에의거해야한다고주장하면서대중의관점과활동가의관점을서로배타적으로정립했다. 따라서전술은대중이현재원하고있는것을파악하여그것을체계화, 정식화시키는것을의미하게된다. 초기에개헌투쟁무용론을전개하다가 85년하반기 직선제개헌론 으로선회한다. 그러나 NL의투쟁 3대영역론 ( 반미자주화투쟁, 반파쇼민주화투쟁, 조국통일촉진투쟁 ) 은각투쟁들사이의연관과상호전화의문제가간과된채투쟁들의나열에머물뿐이다. 민주화투쟁이자주화투쟁으로어떻게전화되는지해명되지않는다. NL의대답은제국주의가근원적인적이므로투쟁을하다보면투쟁의성격이전화된다는것이다. 6월민주화투쟁에서나타난직선제개헌론을넘어서는대중의자주성에대한요구는, 개헌이반제투쟁의계기라는 NL의주장이허구였음을입증해준다. 한편 CA의제헌의회소집슬로건은투쟁과정에무력했다. 변혁운동내선도적정치투쟁론의한계를반복했고, 당시전선의성격을추상적으로이해해정세에적합하지않은전술슬로건을제시했다. 무차별한가두대중에변혁을호소하는방식으로, 변화하는계급역관계속에서특정한계기를포착하여풍부하게변혁의과제를설명했어야했다. 결국대중의사회심리적조건과정치전선의성격을변화시키지못하고그과정에서오히려고립되어버린다. 특히 87년 6월투쟁은 국본 의구도를뛰어넘어전개되었음에도대안적정치적태도를정립하지못했던전술적경직성은정책능력의부재에서기인했다. (3) 노동자 농민 재야민주화운동 3) 87 년이후형성된 PD 그룹의입장을반영했다고볼수있을 현실과과학 그룹의전효관 (1990) 의평가를소개한다. 11
1 노동운동서노련은 86년상반기임금인상시기를맞이하여개헌투쟁을임금투쟁과병행하여전개할것을천명한다. 86년 2월 7일결성된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 인민노련 ) 도서노련과연대를설정한다. 임금인상시기의정치투쟁을 생활임금쟁취와삼민헌법쟁취 로이끌어온서노련과인민노련은 5월들어본격적인개헌투쟁에돌입한다. 신민당개헌현판식집회를신민당의의도와는달리 민중들의손으로 차원높은반군사독재투쟁으로발전시켰다고자평했다. 5.3인천항쟁의여파로가혹한탄압을받게된다. 한편 5.3인천항쟁에서 반제반파쇼노동자투쟁위원회 ( 반반노투 ) 명의의유인물도살포되었는데이를계기로서노련과인민노련을중심으로하는 삼민헌법쟁취투쟁론 과반반노투의 헌법제정민중회의소집투쟁론 이대립하는양상을띠기시작했다. 2 농민운동농민운동은 86년운동방향을기존의농민권익쟁취투쟁에서한단계높여 군사독재종식 과 반외세민족자주화투쟁 으로발전시키는데중점을두었다. 개헌운동을이운동의발전을위한계기적투쟁으로설정한다. 농민운동의개헌투쟁은 86년상반기에중심투쟁이되지는못했으나 농민운동의정치투쟁화의매개가되었다 고평가되었다. 3 재야민주화운동민통련은 85년에설정한민주헌법쟁취투쟁을전개했다. 주요목표는군사독재의퇴진과아울러민주헌법의쟁취이고, 실천적과제는군사독재와현행헌법의반민주, 반민중, 반민족성을폭로하며, 군사독재의퇴진을촉구하는강력한투쟁을전개하는것이다. 대안은민주헌법과민주정부의수립을선전하며, 강력한연대운동의틀을형성하는것이다. 이러한실천과제의수행을위해서대통력직선제를주슬로건으로하자는견해를비판하고, 삼민헌법에대해서도이념적목표를당면투쟁의슬로건으로채택한것이라고비판하면서, 모든주장들이포괄적으로담겨진여러갈래로통일을지향하는 열린틀로서의헌법 을주장한다. 12
4. 개헌협상실패와호헌, 87 년 6 월항쟁 주요사건연표 - 1986.5.27. 민정당헌법특위참여선언 ( 연내개헌추진 ) - 5.29 노태우-이민우회담 - 6.3 전두환-이민우회담 - 6.6 부천서성고문사건 - 6.9 노태우 개헌 5원칙 서울대생 200여명, 이원집정부제기도분쇄및민족민주운동탄압규탄대회 서울대총학생회장권한대행황이수군, 신민당중앙당사농성 ( 직선제개헌관철, 신민당일각내각책임제주장에대한신민당공개입장천명요구, 서울대생 761명개선제개헌서명부전달 ) - 6.19 문익환목사구속기소 - 6.24 임시국회 헌법개정특위구성결의안 ( 민정, 신민, 국민공동발의 ) 의결 - 6.30 서울대민민투, 자민투상부조직원 6명검거, 39명긴급수배. - 7.30 헌법개정특위발족 - 9.6 < 월간말 >, 부천서성고문사건언론보도지침폭로 - 9월말신민당헌법개정특위탈퇴 - 10.28 건대항쟁 (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 발족식을 공산혁명분자 로몰아 1,525명연행, 1,290명구속 ) - 10.30 평화의댐건설발표 ( 북한이금강산댐터뜨릴것이라전쟁분위기조장 ) - 12.24 이민우구상발표 ( 선민주화조치- 후내각제개헌찬성 ) 직선제개헌파 (YS,DJ) 반발 - 1987.1.12 전두환신년국정연설 ( 여야합의개헌못할경우중대결단내릴수있다 ) - 1.15 박종철열사사망, 박종철군고문치사조작 - 2.7/3.3 박종철군추모대회 / 고문추방민주화대행진 - 4.7 YS, DJ 등 74명국회의원신민당탈퇴선언 - 4.13 호헌조치 ( 개헌논의중단, 88년 2월새정부선출뒤개헌 ) - 4.21 통일민주당창당 - 5.20 청주교정의구현사제단, 박종철고문사망사건이조작되었음을발표 - 5.27 호헌반대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 국본 ) 결성 - 6.9 이한열, 최루탄에뒷머리를맞음 - 6.10 박종철군고문치사조작 은폐규탄과호헌철폐국민대회 24만명참여 - 6.10-6.15 명동성당농성 - 6.18 최루탄추방대회 50여만명참여, 경제시위통제포기 13
- 6.26 국민평화대행진 140 여만명참여. - 6.29 노태우, 6.29 선언 (1) 내각제협상의실패와 4.13 호헌조치까지 86년 3월 14일미국대통령레이건은성명을통해소련의지역분쟁개입, 우방국들의미국정책동참과민주화혁명을현실로인정하면서, 인권을중시하고, 친소좌익독재정권이건반공우익독재정권이건어떤형태의독재정권에도모두반대한다 고밝혔다. 필리핀마르코스가축출된지 3주만에나온이성명은레이건의대외정책, 즉대소봉쇄과신개입주의노선의신호였다. 86년 4월 14일조지슐츠미국국무장관은캔자스주립대학연설에서극우와극좌를지적하면서민주적인중도세력의필요성을강조하고, 민주세력을권장 하는미국의정책으로경제원조, 안보지원, 외교개입등의수단이구사될수있다고밝힌다. 시거미국무성동아시아 태평양담당차관보는 민주화유도정책 을보다상세히해설한다. 이때의민주화란결국미국의전략에부합되는 비급진적인민주화 를의미하는것이다. 이러한미국의정책에발맞춰, 민정당은의원내각제 ( 혹은이원집정제 ) 로자신이주도하는개헌을통해보수대타협방안을추진한다. 4) 86년 6월 9일노태우의 개헌 5원칙 에 정부권력을 3권분립차원이상으로넓혀분산 시킨다는조항이들어간다. 그구체적표현이 이민우구상 이었다. 신민당총재인이민우가 7개항의민주화조치가선행되면내각제개헌을받아들일수있다고밝힌것이다. 이는 직선제개헌파 인김영삼 김대중의반발을불렀고, 내분으로번지면서신민당은분열된다. 5) 이렇게직선제개헌에거리를둔미국의입장, 야당의분열, 초강경탄압에자신감을얻은민정당은 4.13 호헌조치를발표한다. (2) 국본의결성배경과한계 4.13 호헌조치를단행한전두환정권은비타협적야당에노골적탄압을가했다. 이에제도권 내야당정치인까지포괄되는범국민전선형성이절박해지게되었고, 극비의작업속에서 5 4) 5.27 헌법특위참여선언을통해대중적장외투쟁이원내협상국면으로전환된것은야당의태도변화도중요하게작용함. 김대중의사면과복권을전제조건으로하던방침을철회하고, 개헌특위의과제로바꿔여야합의에의한개헌으로가는것이며, 정치인이개헌을주도하자는것 ( 김영삼 5.27 선언 ) 을의미했음. 여기에는인천 5.3 항쟁후야권과분별정립되는민중운동에대한위협, 미국의직선제개헌에대한부정적반응, 정권의강경책전환움직임등이복합적으로작용했음. 5) 당시신민당실세는김영삼 ( 신민당상임고문 ), 김대중 ( 민추협공동의장 ) 이었음. 이민우는총재이지만실권이없었는데, 개헌협상이교착되면서김영삼을총재로추대하려는움직임이있었고, 이민우구상은이러한흐름에이민우가독자적세력을구축하려는성격이있었음. 여기에이철승등이이민우구상을지지하면서갈등이더욱커지고, 결국 87 년 4 월신민당소속의원 90 명중 74 명이탈당하게됨. 14
월 27일, 민통련, 개신교, 가톨릭, 불교, 여성, 민추협과통일민주당까지포괄되는광범위한역량이결집해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 국본 ) 을결성한다. 국본은 6월항쟁을주도하게되나, 형성때부터한계를지니고있었다. 첫째, 결성당시협의기구로출범해대중에대한실질적조직기반이없었다. 예컨대, 국본의주요구성원은계급, 계층의대중적인조직을대표하는인사가아니라국민적상징성을갖는인사로구성되었다. 둘째, 국본은군부독재종식이라는당면목표외에이념적통일성이없었다. 이는국본이보수야당인민주당부터민통련까지포괄하기때문이다. 이런요인으로인해국본은이후 7,8 월노동자투쟁에소극적자세를보이는등, 그실체와요구되는위상사이에서괴리를보이게된다. (3) 6월항쟁과 6.29 선언 1987년의항쟁은박종철고문사망에대한분노에서시작되었다. 박종철의사망은 86년 5.3 인천항쟁이후전두환정권의초강경탄압이라는과정이만든사건이었다. 2.7 추도대회와 3.3 고문추방민주화대행진 ( 평화대행진 ) 도대규모경찰병력으로봉쇄한전두환은 4.13 호헌조치를통해개헌정국의조기종결을꾀했다. 6 월 9 일최루탄을맞고쓰러진이한열열사 ( 좌 ) 6 월 10 일 박종철군고문치사조작 은폐규탄과호헌철폐국민대회 에모인인파들 ( 우 ) 그러나사태는예상할수없게전개된다. 4.13 호헌조치에반대하는투쟁이거세게일어나고, 박종철고문사망사건이은폐조작되었다는폭로가전국을뒤흔든다. 6.10 박종철군고문 치사조작 은폐규탄과호헌철폐국민대회 를하루앞둔 6 월 9 일이한열이중태에빠진것은 항쟁의불꽃을활화산으로승화시킨다. 6.10 국민대회이후자발적으로발생한명동성당농 성은넥타이부대의등장과같은시민들의능동성과적극성을자극하는계기과되면서 6 월 항쟁의향방을결정지었다. 6 월 10 일부터 26 일까지거의하루도빼놓지않고, 전국각지에서 15
가투가발생했다. 학생들이시위를주도했으나, 시민들도박수와환호성을보내거나경찰에쫓기고있으면피신을도와주고, 경적을울리거나고가도로에차를세우는등적극적으로참여했다. 140여만명이참여한 6.26 항쟁은정권의진압이더이상통하지않는다는것을증명하는것이었다. 27, 28일도시위가계속된가운데 6월 29일오전민정당대표인노태우는민정당중앙집행위원회에서자신의구상을대통령각하께건의드릴작정이라면서특별선언을발표한다. 그내용은아래 8개항으로구성된다. 1. 대통령직선제개헌을통한 1988년 2월평화적정권이양 2. 대통령선거법개정을통한공정한경쟁보장 3. 김대중의사면복권과시국관련사범들의석방 4. 인간존엄성존중및기본인권신장 5. 자유언론의창달 6. 지방자치및교육자치실시 7. 정당의건전한활동보장 8. 과감한사회정화조치의단행 6.29선언이나오자국본은 이제라도국민의뜻을겸허하게받아들이기로결정한것 을환영하면서 이는오로지민주화를위해온몸으로싸워온전국민의위대한승리로서민족사에길이빛날새로운지평을열었다 고긍정적평가를발표한다. 양김도크게환영했다. 5. 87 년 7-9 월 : 6.29 이후노선분화와노동자대투쟁 주요사건연표 - 1987.6.30 통일민주당 < 헌법개정안시안마련을위한특별위원회 > 구성 - 7.5 현대엔진노조결성 - 7.16 현대미포조선노조결성신고서류탈취사건 - 8.4 국본개헌요강발표 - 8.8 현대그룹노조협의회결성 - 8.11 노동부장관 노사관계정성화를위한특별담화 - 8.19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 전대협 ) 결성 - 8.21 전두환대통령하계기자회견 우리사회에좌경사상을가진체제파괴분자들이엄연히존재하고있고또사회표면으로그모습을드러내고있다 - 8.22 대우조선이석규열사사망 16
- 8.27 국무총리, 좌경용공세력 척결을 위한 담화문 발표 모든 공권력을 동원해서 급 진좌경세력을 발본색원하겠다 - 8.28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 영결식 (1) 7,8,9월 노동자대투쟁의 폭발 6.29 선언 이후 도시 가두시위는 급격히 줄었으나 노동자 투쟁이 폭발한다. 87년 민중항쟁은 6월이 끝이 아니라 9월까지 지속된 것이다. ① 7 8월 노동자 대중투쟁기 민주노조결성과 파업투쟁을 통해 독점자본과 국가권력의 물적 토대를 근저부터 흔든 대중투 쟁이 전개된다. 6 29부터 8월 초순까지는 비교적 완만하게 투쟁이 일어난다. 울산, 부산, 창 원 등 중공업부문 노동자들의 선도적 투쟁이 두드러진다. 7월 5일 현대엔진 노조 결성을 계 기로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민주노조쟁취투쟁으로 확대되고 현대그룹노조협의회 결성으로 모아진다. 8월 중순에는 현대그룹 6개 사업장 4만 노동자들이 중장비로 무장한 대규모 가두 시위와 행진을 통해 경찰의 최루탄 난사를 무력화시킨다. 8월 초순부터 8월 말경은 파업투쟁이 정점에 이른다. 울산의 투쟁은 부산과 창원으로 확 산되고, 사실상 총파업과 같은 기세로 발전한다. 업종별로는 섬유, 전자로, 지역으로는 경남 지역에서 경북, 구미, 경인지역으로, 규모면에서는 재벌계열사에서 중소기업체로 빠르게 번져 간다. 이렇게 7월부터 9월 중순까지 3,311건의 쟁의가 발생한다. 하루 평균 40여건의 파업이 매일 새롭게 발생한 것이다. 쟁의에 참여한 노동자 수는 당시 10인 이상 상용근로자 333만 명의 약 37%인 122만 명에 달한다. 8월 19일 울산 거리를 가득 메운 현대 7개 노조 노동자들(좌) 2년간 봉쇄된 노조 사무실을 탈환한 청계피복노조. 노동3권 8시간 노동 최저생계비 쟁취 등의 구호가 보인다(우) 17
` 노동자대투쟁에대한평가 ( 안암연구실, 87 년선거평가와전망 ) 의의 한계 투쟁내용 3가지요구 ( 임금인상, 근로조건개선, 민주노조설립과어용노조퇴진 ) 가주를이뤘음. 생존권투쟁에서민주노조설립투쟁으로진일보한것. 임금인상투쟁을최저생계비쟁취투쟁으로, 민주노조건설요구를노동계급의지역적 전국적노조건설운동과노동3권및노조의정치활동자유쟁취투쟁으로승화시키지못하고단위사업장별투쟁에머뭄. 투쟁형태 조직수준 파업 농성 시위등집단행동으로시작해조직을형성한후협상에돌입하는전술적능동성발휘. ( 선투쟁후협상 ) 조직화된공세적가두시위. 지역별, 그룹별, 산업별동맹파업. 실질적 투쟁적연대를통해단위사업장을 넘은상층조직으로까지발전하진못함. 이후 국면에서각개격파. 주체형성 중공업부문, 대규모사업장, 남성노동자가운 동의중심으로부각. 파업으로단련된선진 적노동자가광범하게창출됨. 대중의자연발생적투쟁에대한지도부의지도력이허약했음. 전술형태의발전을따라잡지못함. 아울러대중도총체적계급의식에이르지는못함. 2 9 10월 민주노조파괴, 어용화, 운동의급속한냉각 8월말부터쟁의타결이쟁의발생을넘어서면서하강국면에들어간다. 7 8월투쟁이자본가와국가에게민주화의구체적내용을묻고민중의생존권을보장해줄의사를묻는것이었다면, 그대답은 9월대탄압 이었다. 8월 22일대우조선이석규열사의죽음은노동자투쟁이총자본과폭력적국가기구에맞서고있음을인식하게된계기가된다. 그러나총파업투쟁은선언에그쳤고, 일반시민의참여는극히적었다. 정부는기세를몰아대우자동차, 현대중공업을진압하고전경련을통해노동자투쟁을 순수임금투쟁을넘어선인륜파괴행위 로규정해언론에대대적으로선전한다. 이러한총공세에민중운동은제대로대응하지못했다. 9월대탄압기에투쟁은대체로세유형으로전개, 귀결된다. 첫째, 대중적기초와확고한활동가그룹이형성되지못한경우대부분무력화된다. 6.29선언이후설립된신규노조, 중소기업의경우다. 둘째, 핵심사업장의경우지도부가상대적으로약한현대중공업과현대자동차는진압당했지만, 통일의경우에는노조위원장등 6명이구속되는사태에도불구하고가두진출등을통해탄압을여론화하고노동자의힘을전국적으로결집시키는계기를만들기위해국본농성을시도하는등모범적투쟁을벌인다. 셋째, 선진적노동자의투쟁은있었으 18
나대중투쟁이이뤄지지못해농성을하는경우가있다. 10월 15일국민운동본부농성은 통일등부산창원지역 6개사업장노동자가참여해선거의장막에가려져있던노동자탄압을부각시켰다. 또한노동운동탄압에올바로대응하지못하는민족민주운동권에각성을촉구했다. 그러나파급효과는적었다. 노동운동자체의연대조차초보적수준이었다 6). < 대우조선이석규열사투쟁 > 대우조선은 1985년이후과잉중복투자와세계조선산업의퇴조등으로어려움을겪으며노동자를대규모로감원, 징계, 해고했으며 3만여명이었던노동자수는 1987년에는 1만6천여명으로줄었고, 임금은사실상동결된다. 대우조선노동자들은 87년 4월부터지속적으로노동조합결성을시도하면서 8월부터는 3천여명이파업농성에돌입하지만회사는교섭을거부한다. 이에노조는 8월 14일부터거리로진출해연일가두시위와차량시위를벌인다. 8 월 22일옥포아파트사거리에서스크럼을짜고앉은걸음으로시위를하는노동자들에게경찰은직격최루탄을난사했고, 백골단은흩어지는시위대를골목구석까지쫓아가서짓밟고옷을발가벗기는등의만행을서슴지않았다. 이와중에스물한살의대조립부외업반이석규열사가직격최루탄을맞고쓰러졌고, 병원으로옮기는도중운명한다. 이석규열사의사망소식을전해들은노동자들은대우병원영안실문을용접으로봉하고, 24시간시신을사수한다. 이소선어머니, 변호사노무현 이상수등각계인사들과국민운동본부를중심으로장례준비위원회가발족해 전국민주노동자장 으로하고, 장지는망월동묘역으로합의한다. 8월 28일, 노동자, 지역주민등 2만여명의애도속에대우조선운동장에서영결식이거행된다. 노제를지낸뒤, 영구차를앞세우고망월동묘지로향하는과정에서전두환정권은시신을탈취한다. 주변야산에잠복하고있던 2천 5백여명의전경과백골단이몰려나와장례집행위원등재야인사들의차와동문인광주직업훈련원출신들이타고있던버스창문을박살내고이들을집단구타하며강제연행한다. ( 연행자중이상수, 노무현, 박용수는구속된다.) 이어경찰은유족 3명만을태우고남원선산에가열사의시신을매장한다. 영결식날오후 6시전국적으로 ' 고이석규민주노동열사추모대회 ' 가개최될예정이었지만, 5만여명경찰의원천봉쇄로성사되지못하고전국에서밤늦게까지산발적인시위가이어진다. 전두환정권은이날전국적으로개최된추모제와관련하여 933명을연행했고, 이가운데 64명을구속했으며, 이소선등 10여명을수배한다. 또대우조선에서는해고된 3명외에추가로 7명에게몰래잠입한형사계장을구타했다는혐의로살인미수죄를적용해구속한다. 6) 당시노동자운동의뼈아픈패배와각성은전노협건설등이후노동자운동에중요한영향을미쳤다. 한예로 1988 년에만들어진 총파업가 의가사를보자. 팔칠년칠팔구투쟁을동지여기억하는가 / 거제에서구로까지족쇄깨고외쳤던날을 / 우리는뼈저린각성에드디어깨달았노라 / 천만형제단결없인노동해방없다는것을 / 나가자형제여방방곡곡대동단결로 / 말하라형제여총파업투쟁으로말하라 ( 후략 ) 19
고이석규열사영결식행렬 (2) 노선분화의조짐 : 군부독재종식투쟁론과군부독재타도투쟁론 6.29 선언이후발생한노동자대투쟁에위기감을느낀것은집권세력이아니라민주당이었다. 노동자투쟁이극우강경세력을자극해직선제를무산시킬까봐우려했다. 여야정치권은개헌협상을시급히마무리하고조속히선거분위기를조성하고자했다. 야당은이과정에서많은사항을쉽게양보한다. 선거경쟁이가시화되고후보단일화문제가부각되면서군부독재타도투쟁이김영삼과김대중중에서누가후보로적합하냐는인물비교문제로환원된다. 통일민주당의입장은 선거혁명론 인데, 김영삼계열은여야민주화공동선언을전제로하는반면김대중계열은거국중립내각구성을전제로했다는점에서, 여당 ( 전두환- 민정당 ) 에대한태도라는측면에서입장의분기가드러난다. 민중운동역시입장이분화된다. 1 군부독재종식투쟁론 - 선거를통한민선민간정부수립투쟁론군부독재종식투쟁론은현재의주체역량상군부독재를물리력으로타도하는것은불가능하므로선거에서군부독재의재집권을저지하고, 새로운민간정부를토대로반군부독재투쟁을완수하자는입장이다. 서대협- 전대협의입장이자, 국민운동본부, 민통련등재야세력노선의기초가되는입장이다. 서대협은 6.29 이후의정세를 미제가노태우를대통령에앉히려는파쇼체제재편음모 의실현과정이고, 노태우가승산이없으므로김영삼을포섭해, 보수대연합획책음모 를관철하는과정으로파악한다. 초기 범국민과도정부쟁취투쟁론 을주장하는데, 장황한설명에도불구하고, 이를쟁취할구체적조직, 구체적방식에대해서는전혀언급하지않았다. 한편 CA 등의 좌익블럭 에대해폭로의대상을자유주의적부르조아 ( 민주당 ) 로돌려서는안된다고반대한다. 대신국본을 각계각층대중역량을바탕으로한명실상부한 국민전선 으로개조해야한다고주장하며 8월 4일국본에가입하고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 전대협 ) 를 8월 19 20
일결성한다. 9월이후서대협은군부독재퇴진을선거를통한과정으로, 과도내각은선거관리를위한중립내각으로, 차기정부는민선민간정부로노선을수정한다. ( 선거를통한민선민간정부수립투쟁론 ). 이에반발해서대협내부는분화된다. 6월투쟁때부터서대협의 직선제로독재타도 구호에문제제기를하면서각대학총학생회산하에 특위 를구성하거나독자적 투쟁위원회 를구성하던그룹들이별개의서울지역청년학도비상협의회를결성하고이후후보단일화운동에참여한다. 2 군부독재타도투쟁론군부독재는선거가아니라민중의힘에의해서만종국적으로타도될수있으므로비타협적반군부독재전선을강화하는데주력하자는입장이다. 인민노련등의 범민주과도정부쟁취투쟁론 은개헌협상과헌법을노동계급의입장에서비판하고, 전국적노동자정치조직과그를축으로하는민중운동연합이혁명적방법으로군부정권을완전타도할것을주장한다. 실질적민주화, 새로운정부를담보하는과도정부를구성해새로운자주적민주정부 ( 민중민주주의정부 ) 로나아가자는것이다. 선거를부정하지는않는데, 자주적민주정부의강령적내용을선전-선동하는데주력해야한다고주장한다. 이것보다더급진적판본이학생운동 CA그룹의 임시혁명정부론 이다. 민주화는군부독재와타협, 선거에의해달성될수없으므로독재를완전히타도하고새로운정부 ( 자주적민주정부또는민중민주주의정부 ) 를건설하자는것이다. 반동부르주아 와의타협을설교하는자유주의적부르주아의동요성과기회주의성을철저히폭로하여이들을고립-무력화시키고혁명으로견인해야한다고주장했다. 당면적으로는 파쇼하개헌을분쇄하는국민투표거부투쟁 을전개하기위한 혁명적민주주의진영 구축을조직적과제로제기한다. 전국적정치신문을만드는것을구체적인실천프로그램으로제시, 9월 20일 < 선봉 > 을창간한다. (3) 개헌협상통일민주당은 6월 30일 < 헌법개정안시안마련을위한특별위원회 > 를구성하여, 개헌협상을추진한다. 이때부터야당은사실상국본에서이탈한다. 신속한개헌을위해개헌작업진행순서를 8인정치회담 개헌내용합의 국회헌특재구성 여야단일개헌안작성 국회의결 로합의한다. 이에개헌협상은비공식적정치협상회의를통해이루어지고, 국회헌특등기존의여야합의기구는법안작성과같은실무처리만을담당하게된다. 개헌협상의전과정은여야각 4인으로구성된 8인정치회담 에맡겨진다. 7) 8인정치회담은 100여개에이르는쟁점사항을토의하고협상함으로써합의를도출했으나, 주요내용은권력구조와선거규칙 21
에집중되었을뿐, 실질적인민주화의제는모호하게정의되거나제외되었다. 여당은협상과정에서헌법전문, 선거권연령문제, 대통령선거법과선거관리위원회법을통한여당프리미엄최대화에관심을가지는한편, 대통령의피선거권자격요건중국내거주기간규정 삭제 ( 김대중출마가능 ), 부통령제신설거부 ( 단일화방해 ) 등김영삼 김대중의통합유인을최소화하려고했다. 야당또한양김중한명이크게타격입을가능성이높은부통령제, 4년중임제를배제했다. 결선투표제에대해서는아예인식조차하지못했다는평가가있다. 개헌협상의의제분석 ( 조계원, 2005) 내 용 이해가걸린중심의제 전문의규정 보안처분요건, 선거연령 대통령임기 부칙의선거일정 실질적으로논의되지않은의제 기본권보장의확대 국정감사권부활 대통령권한의축소 대법원장, 대법관, 법관의선입방법 헌법재판소신설, 헌법소원도입 한편국본은개헌의기초가되는 헌법개정요강 ( 개헌요강 ) 을만드는데도 1개월이상소요한다. 7월 13일국본산하에헌법개정특별위원회가설치되지만이는 개헌협상에임하는여야가국민의여망에부응 하도록촉구하는 자문조직 이었을따름이지, 이를관철시키기위한운동조직은아니었다. 8월 4일국본출범이후최초로전국총회가개최되어독자적인개헌요강을발표한다. 그러나전국총회의주요방침은 선거혁명론, 즉야당을통한민간민선정부의출범이주요목표가되었다. 독자적인개헌요강의위력은사실상반감될수밖에없었다. 결국국본의개헌요강은여야협상에서무시되었고, 10월 27일국민투표를통과한헌법개정안은 10월 29일공포된다. 7) 김영삼은당내에서차지하고있는입지를활용하기위해민정당과의정치협상회의를 2 대 2 로구성하려했으나, 자신에게불리할것을우려한김대중의문제제기로 4 대 4 로변경된다. 여당에비해야당은정치협상회의에대한준비가부족했다. 계파별로 2 명씩대표를구성하는데역할분담도, 협상내용에대한준비도없었다. 실제협상에서민주당보다민정당이유리한위치를차지하게된요인이다. 22
여야정당개헌안과국본개헌요강의비교 ( 김대영, 2006) * 6. 87 년 10 월 -12 월 : 선거국면노선분화와군부재집권 주요사건연표 - 10.10 김영삼출마선언 - 10.11 김대중출마선언 - 10.12 민통련김대중후보비판적지지결정 - 10.29 개헌안공포 - 11월노동관계법개정안통과 ( 노조설립요건일부완화 ) - 11.5 가톨릭농민회후보단일화촉구회장단삭발단식농성돌입 - 11.12 김대중평민당창당 - 11.12 백기완선생대통령후보임시추대위결성 - 11.18 백본, 민주연립정부수립공식입장채택 - 11.20 김대중선생단일후보범국민추진위원회 ( 김추위 ) 결성 - 11.23 군정종식단일화쟁취국민협의회 ( 국협 ) 결성 - 12.10 백기완-김영삼회동 - 12.11 백기완-김대중회동 - 12.16 대통령선거. 노태우당선 23
(1) 후보단일화논의의경과 6.29 선언이후김대중이 8월 8일통일민주당상임고문으로입당할때까지는후보단일화에대한낙관론이압도했다. 1983년김영삼의단식투쟁으로민주화운동추진협의회 ( 민추협 ) 가결성되고, 86년 11월김대중은불출마선언을하는등양김씨가서로양보하겠다는공언을지속해왔기때문이다. 또한 1956년대선에서조병옥과신익희, 1967년윤보선과유진오, 1971 년김대중과김영삼처럼야당은대선을앞두고극적으로단일화를성사시킨전통을갖고있었다. 그러나 87년선거에서단일화가능성은오히려점차악화된다. 국본은후보단일화과정을양김씨에내맡겨, 반군부독재투쟁의구심을제대로형성하지못했다. 9월 7일정책협의회에서후보단일화 3대원칙 ( 후보는단일화돼야하고, 방식은합의에의해, 시기는가급적빨리 ) 을정립했으나, 동교동계반발로문서화하지못한다. 9월 21에공식입장으로 10월 5일까지합의에의한단일화 를발표했으나촉구의수준을벗어나지못했다. 뒤늦게나마대중투쟁의강화라는관점으로국민들에게단일후보결정을위한판단근거를제공하기위해 10월 3일국민운동본부주최 < 시국대강연회 > 를시도하였으나, 김영삼이불참한다. 그후재야세력의김대중지지분위기를강하게느낀김영삼이 10월 10일기습적으로공식출마를선언하고, 다음날김대중도출마의사를밝힌다. 10월 12일마지막토론에서국본은 단일화는꼭이룩되어야한다 는원칙적입장만합의한다. 이렇게국본은대선국면이본격화되면서특정후보를지지해단일화를이루어낼수없고, 그렇다고독자적으로후보를낼수도없는처지에빠진다. 거국중립내각과선거감시운동을내세웠으나국민적호응을얻지못하고, 대선후부정선거규탄을통해운동의불씨를되살리려는시도도실패로돌아간다. 한편 10월 12일민통련이김대중에대한 비판적지지 입장을결의하면서노선분화가전면화된다. 민중운동세력은 비판적지지 ( 비지 ), 후보단일화 ( 후단 ), 독자후보 ( 독후 ) 로나뉘어졌고, 각노선은부분적으로동원할수있는조직역량을기초로여러전술을남발한다. (2) 비판적지지론 1 정세인식민통련은 민중과함께민중적요구에기초하여 6월투쟁을계승하는범국민적후보의승리 가필요하고, 그런범국민적후보로상대적으로진보적이고민족민주운동진영과가까운김대중을적극견인해서군부독재종식투쟁을성과있게전개해선거에승리할수있도록지원하며, 그투쟁의성과를조직적으로수렴해민주운동연합구축의토대로삼아야한다고주장 24
한다. 차기정부에참여해자주적민주정부로나아가는민주연합정권을꾸려나가야한다고주장한다. 현정세를미국에의해주도되는친미보수연합구축의시기로규정하고, 미국이친미보수야당김영삼의집권과보수대연합을통해한국에대한지배를항구화시켜나갈것이라고보았다. 이에추상적인단일화촉구보다는현실적이고구체적인대안 ( 김대중지지 ) 을통해세력균형을무너뜨릴필요가있다고판단하게된다. 이런논리의연장선에서전대협의경우비판적지지가아니라전폭적지지가필요하다고주장한다. 2 실천김대중이출마의사를밝힌바로다음날인 10월 12일민통련중앙위는비판적지지를결정하고 13일 범국민후보로김대중고문을추천한다 는성명을발표한다. 그근거는첫째, 민중운동이독자적정치세력화를성취하고보수야당과동등한입장에서민주연립이나제휴를추진하기어려운조건이므로민중운동과가까운후보를선택해지지하고진보적요구와정책을관철시켜나가야한다는것과둘째, 민주당내에서후보단일화가어려워지고있으므로, 재야의힘을한쪽으로몰아줘야한다는것이다. 민통련등 비지 세력은한편으로군정종식을위한반노태우투쟁, 다른한편으로는양김씨간상호비방금지및대동단결공동투쟁을제의하고, 지역감정해소를위한결의대회를개최한다. 그러나김대중은당내경선을통한단일화를거부하고동시무소속출마후대세에따른단일화를주장하고, 김영삼은대통령후보지명전당대회를강행할뜻을분명히밝힌다. 결국 11월 9일민주당전당대회에서김영삼이후보로결정되고, 김대중은 11월 12일평민당을창당하고후보출마를공식화한다. 11월 10일서대협신문과 11월 16일민통령성명은 지지세가약한후보의용퇴를통한막판후보단일화 가이룩되어야한다는내용이실렸고, 11월 20일 김대중선생단일후보범국민추진위원회 ( 김추위 ) 를결성한다. 이후노태우당선저지투쟁 ( 광주학살및 12.12 쿠데타진상규명대회 ) 을전개하는한편김대중의상대적진보성을선전했다. 12월 9일서대협과김추위공동으로범국민후보로김대중씨를확정한다는선포대회를가진다. 국협과백선본이주도한막판후보단일화움직임에대해서도실질적도움이될수없다고판단한다. 12월 11일김대중이비상정치회담을정식으로거부하자재야 75개단체는이를지지하는공동성명서를채택한다. 12월 13일보라매유세에서열기는절정에이르러김대중지지자들은김대중의당선에대한확신을가졌다. (3) 후보단일화론 25
1 정세인식미국이선택할가능성이있는방안들은 (1) 노태우의집권 (2) 야권과군부의타협 (3) 강경군부의쿠데타로분류해볼수있는데 (1) 을일차적목표로추진하고있다고보았다. (2) 도고려될수있으나군부독재가범국민적투쟁에의해고립화되기까지는결코군부독재를포기하지않을것이라고보았다. 민중운동이 6.29의기만성을정확히폭로해내지못함에따라중산층, 자유주의세력이이탈하고기층민중의광범위한투쟁도정치적요구를담아내지못한생존권요구투쟁에머무르고있다. 따라서현재대중들의상태는선거일정자체를거부할정도는아니지만선거를통해서라도군부독재를퇴진시키겠다는염원은갖고있다고보았다. 한편민중운동은아직대중세력이아니고, 대중에게객관화되어있는역량도아니므로비토권을행사 ( 반-노태우 ) 하고도덕적명분을세우는범위에서영향력을미쳐야한다고생각했다. 2 실천민통련의비판적지지결정이후민통련가맹단체중 6개단체는즉각의문을표시하고총회소집을요구한다. 계훈제씨등민통련회원 44명은그날바로다수결에의해내려진특정후보지지표명은바람직하지못하다 고성명을발표한다. 10월 21일가톨릭농민회 ( 가농 ) 가성명서를발표하고, 10월 31일각계민주인사 122인이성명을발표한다. 가농은 11월 5일회장단삭발단식농성에돌입하면서 11월 13일 < 군부독재종식을위한후보단일화쟁취대회 > 를이끌어냈고, 이를계기로 11월 23일에 < 군정종식단일화쟁취국민협의회 ( 국협 )> 를결성한다. ( 청년분과는 < 구속청년학생협의회 ( 구청협 )>) 같은날국협발기인중하나인백기완이독자후보로후보자등록을해, 국협결성식장에서 독자후보는공작정치에놀아나는것이다 라는비판이나오기도한다. 한편학생-노동운동에서는서울대총학생회가 11월 13일에성명을냈고, 11월 18일 < 노태우반대연합전선으로총집결하자 > 는유인물이노동운동권에서나온다. 국협은대중집회를두번개최하고, 기관지 단결 을호외를포함해세차례발행한다. 12월 1일연세대집회에서 1,500여명참석했고 12월 6일집회에는단일화추진 13개단체와함께 5,000여명참석한다 8) ( 같은날대학로에서백기완선본유세에 10만여명이참석했다 ). 부문별로는서울노동조합운동연합 ( 서울노련 ), 인천지역노동자연합준비위원회 ( 인준위 ) 등이 11월 23일 노동자선대위 를구성하고 11월 29일 군부독재종식을위한시국강연회 8) 단일화추진 13 개단체는다음임. 국본노동자위, 국본부천지부, 노동자선대위, 서울지역청년학도비상협의회, EYC, 구청협, 기독교도시빈민선교협, 천주교도시빈민사목협, 전국대학원생연합회, 전국농민협회, 서울민통련, 가농, 인천해고노동자협의회. 26
를개최한다. 학생운동은서울대, 연세대, 인천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가단일화투쟁을결의하고, 12월 1일양김씨집농성, 12월 2일양당사농성에들어가 5일에양당총재면담을한다. 김대중은대의에는동의하나단일화방법으로합동유세나 TV토론을고집하였고김영삼은미온적태도를보였다. 12월 8일에는 10여개대학학생 1,400여명이양당사, 양김씨집에서농성을한다. 국협은 12월 1일단일화기본원칙을발표하고재야인사를포함하는중재위를구성한다. 양당부총재와회동해중재안을제시했으나성사되지않았고, 이에노동자선대위는협상이밀실이아니라대중이보는앞에서이뤄져야한다고비판한다. 그리하여 13개단체와백기완선본 ( 백본 ) 공동명의로비상정치회담이제안되고, 국협이이를추인하게된다. 그러나 12월 10일사전합의없이백기완씨가김영삼씨와전격회동해비상정치협상안에합의하고, 12 월 11일백기완- 김대중회동에서김대중은거부를하게된다. 같은날오후 6시백기완, 계훈제, 김영삼 3자회동이있었으나원칙적수준의합의에그쳤다. 12월 12일에는노태우의부정선거음모를분쇄하는반노투쟁을벌이기위해, 야당, 백후보, 국협, 김추위, 13개단체연합, 이렇게 6자연락기구를결성하자는제안을한다. 그러나민통련과김추위는 13개단체연합과국협, 백본은인정할수없다. 모두국본에들어가자 고응답한다. (4) 독자후보론독자후보론은 7-8월에부분적으로제기되다가 11월들어서면서세력을확보해간다. 후보단일화에대한의구심, 민중의정치세력화에대한관심, 일부운동단체들의김대중지지결의에대한반발등이작용했다. 독자후보론은 (1) 백기완씨를중심으로한선거운동본부상층부 (2) 범CA계열 ( 선봉 그룹 ) (3)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 인민노련 ) 의 3가지흐름이결합된것이다. (1) 의독자적논리는불분명하므로범CA계와인민노련의정세인식과실천을중심으로정리한다 9). 1 정세인식범CA계는 6.29 선언의 개량성 을강조한반면, 인민노련은 개량적측면 과 성과적측면 을동시에평가한다. 민중의대규모투쟁이거둔첫승리라는점에서성과지만, 부르주아질서내권력경쟁의길이열리면서민주당과중간층이전선에서이탈하여개량의길로치닫고있다는것이다. 범CA계는당면전술슬로건으로 임시혁명정부와민중민주공화국수립 을내걸고, 자 9) 범 CA 의경우 선봉 1-4 호에서선거전술논리를전개하는데, 경인지역민족민주학생연맹 ( 기관지 민족민주선언 ), 성균관대구속청년학생동지회 ( 기관지 일치단결 ) 등이비슷한논조였다. 노동운동에서도출처미상혹은 민중해방노동자투쟁위원회 ( 민해노투 ) 명의로된유인물이많다. 27
유주의자들과차별성을명확히하려는모든세력을최대한광범위하게포괄 하는 민중연합 결성을주장하며선거를위한 혁신정당 의필요성을제기한다. 개헌국민투표는반대했지만선거국면에서는민중후보를추대해야한다고주장한다. 현상적으로투쟁의빈도와격렬성이줄어들고있으나, 경제적정치적으로계급대립이심화되고있으므로, 파쇼와의일대결전이불가피하다고보았다. 선거시기에민중정당 ( 일정타협하선전-선동수행할합법조직 ) 과혁명적민주주의자연합 ( 정파들의반합법조직 ) 을결성해야한다고주장했다. 인민노련은 6월창립후기관지 노동자의길 과보고서형태의소책자 정세와실천 을발간한다. 10월중순제반문제에대한이견으로일부가탈퇴해인천지역노동자연합준비위원회 ( 인준위 ) 를결성하는데, 정세와실천 2호가이쟁점을다룬다. 인민노련의입장은사퇴가능한독자후보론이다. 민주당, 중간층, 국본은개량의환상에빠져진정한정치세력화를수행하지못하고, 대중은직선제를통해서라도군부독재를퇴진시키려는염원을가지고있다. 따라서전면적이고포괄적인정치선동, 기층민중생존권투쟁지원-지도를통해기층민중과밀접히결합해 ( 반 ) 합법공간을과감히창출해개량의한계를대중적으로폭로해야한다. 독자후보로출마해원칙적비판을가하되, 민주진영전체대통령후보단일화도동시에중요한것으로보았다. 2 실천초기독자후보론은호응이없었다. 그러나이석규노동열사추모집회가좌절되면서정당결성 ( 진보대중당 ( 가 ) 결성임시준비위원회 ) 을통한출마가본격논의되기시작한다. 한편범CA는국민투표거부 ( 직선제가아니라임시혁명정부 ) 입장에서민중정당 -민중후보전술로전환한다. 인민노련은애초부터직선제를활용한다는관점이었는데운동진영이비지로급격히경사되는것을보면서독자후보를모색하게된다. 이들의결합을통해 백본 이결성된다. 초기백선생의미사면복권상태문제때문에제정구씨를후보로추대하자는주장도있었다. 제정구씨가이를사양한뒤 11월 12일 < 백기완선생대통령후보임시추대위원회 >( 위원장이애주교수 ) 가결성되어양심수전원석방과사면복권쟁취위한시한부단식농성에들어간다. 11월 13일정부에서백기완선생의사면, 복권을발표하고 11월 18일민주연립정부수립을공식입장으로채택한다 10). 출마의이유를첫째, 민중이주도해서참다운민주정권을쟁취하기위해서둘째, 민중이 10) 민주연립정부를두고다양한입장이논쟁이됨. 비지세력과분명한선을긋는제휴를주장하는쪽과민중을정치세력으로부각시키는것만으로도진보성이있다고보는쪽으로심화. 분명한선을긋는제휴를주장하는쪽은다시비민주적헌법개정을제시하려는측과개별강력으로조건제시해야한다는입장으로나눔. 시기를두고도달랐음. 28
주체가되어연대를도모할때만명실상부한민중적단일화를쟁취할수있기때문이라고밝힌다. 김추위는김대중추종운동으로, 국협은소극적단일화전술로평가해민중운동내파문이일어난다. 실제학생운동에서비지에동조하던학생의이탈이가시화되고민중후보추대위에참가한대학이급증한다. 이후시국대강연회 (11/29), TV유세 (12/3), 대학로 10만집회 (12/6) 로이어지면서자신감을가지고국협과함께비상정치협상회의를제안하며단일화압력을가했으나, 김대중은시간을끌면서태도를분명히밝히지않는다. 내부적으로사퇴여부와그방법을둘러싼논쟁과정에서합의에이르지못한채결국백기완선생은돌발적으로사퇴기자회견을하게된다. (5) 군부재집권및사후평가 12월 16일대통령선거의결과는투표율 89.2%, 노태우후보 36.6%, 김영삼후보 28.1%, 김대중후보 27.0%, 김종필후보 8.1% 였다. 개표내내이순위는바뀌지않았다. 군부세력은이렇게선거를통해재집권한다. 민정당의인기가최하위에달했던 85년 2.12 총선때민정당득표율이 35.3% 였으므로친여고정표는어느정도예측이가능한것이었다. 그러나김대중은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이같이나오면표가분산될것이라는 4파전필승론, 김영삼은단일화가유리하지만 4파전으로가도 85년총선처럼바람을타면당선가능하다는 4파전불사론 이팽배했다. 헛된기대였음이판명되었다. 민중운동의무능과분열은더욱뼈아팠다. 이미양김은 7,8월개헌협상과정에서독자출마를염두에두고있었으나민중운동진영은막연한낙관속에서양김에대한호소에머물렀고, 뒤늦게 10월대중투쟁의강화라는관점에서단일화를촉구하였으나이미기층민중역량은침체되고, 후보간인물비교경쟁으로관점도후퇴되고말았다. 여기에민통련의섣부른김대중비판적지지선언은논란과분열을촉발시켜서남은역량마저분산시켰다. 87년선거평가와전망 ( 안암연구소, 88년 3월발행 ) 은각노선에대해다음과같이사후평가한다. 첫째, 비판적지지 운동은 전폭적지지 형태로나타나통일전선전술의우편향을명확히보여준다 11). 또한통일전선원칙 ( 선민족민주운동통일, 후범민주세력단결 ) 에어긋나는행태였다. 한쪽을지지해세력균형을깨뜨리고민주연합전선을보다강화할수있다는주장도증명되지않았다. 둘째, 후보단일화추진운동은범민주연합전선강화라는과제를옳게선정했으나전술운용에서실패했다. 정부여당이지역차별감정을노골적으로조장하는 11) 민통련이통일된입장을마련하는조정역이아니라성급하게특정전술을결정하면서운동의분열을재촉하고, 보수정치세력에게주도권도넘겨줬다는평가도있음. 재야운동권지원에조급한쪽은양김이므로민족민주운동은대중투쟁력복원에총력을기울이며선거통일전선을구축하고, 정책토론회, 대중집회를통해양김이보다진보적정책을내놓도록만들었어야했다는것임. 29
시점 (10월중순 ) 을놓치고 11월말에이르러서야본격적실천해돌입했다. 게다가상층교섭또는도덕적결단이라는비대중운동적방법에의존하려는입장이주도적이었다. 마지막으로독자후보론역시의도와현실의부조화가있었다. 민족민주운동의선전의폭을넓히고, 민중정당건설의정당성을확보하는의의는있으나일정하게검열된민중후보가아닌일부분에의해강변된민중후보운동은소수자운동의범위를넘을수없었다. 민주연합정부도 87년선거국면의주체적조건에서는선전구호이상의의미를가질수없었다. 각진영에서선거후내놓은평가도음미해볼가치가있다. ( 비판적지지론을폈던민통련내일각 ) 내부입장을정리하지못한상당수단체와반대의사를분명히했던 4개단체의의사를존중하고특히더많은반대세력의태동을미리예견하여전체민족민주세력의입장을종합해나가기위한형식과절차를끈기있게밟아나갔어야했다. 비판적지지가단일화의유일무이한방법론이아니었음은곧증명되었다. 또하나의방안은독자후보론으로나타난민주연립정부제안 동참하는후보에대한비판적지지 의방안이었다. 이런방안이검토되지못했던것은 1 김대중으로단일화에대한막연한낙관론의팽배, 2 독자후보세력, 특히민민투계열에대한누적된불신감, 3 전략전술수립의미성숙성, 4 문익환, 백기완씨등의미사면복권을타파하려는적극성의부재에기인했다. ( 독자후보운동을펼친제헌의회그룹 ) 보수양당에민주연립정부를제안할때구체적이고명확한협정조건, 즉민주연립정부구성과임무와정책안을상세하게제시하지못했다. 민연정수립운동에대중적힘을불어넣게위해서도민족민주운동의최소강령을적극선동하여대중을전취하고보수양당의불철저성을선명히폭로하면서대중의힘에의해양자를견인해야했다. (1988년 3월, < 기사연리포트5: 대통령선거투쟁 >.) 7. 총평 : 1987 년의교훈과 2017 년 (1) 1987년의교훈 1987년 6월항쟁과 789 노동자대투쟁은갑자기분출된것이아니다. 70년대말과 1980년서울의봄에서폭발했던민중운동이신군부에의해일시적으로억압되었다가정권중반부유화국면을계기로다시전열을재정비해다시역사의전면에등장한것이다. 이과정에서대중운동의측면에서 1985년구로동맹파업이발생했고, 이념적측면에서는사회성격논쟁이진행되면서운동의부활을상징했다. 30
그러나투쟁의성과는제한적이었다. 집권군부세력은 6.29선언을통해타도대상이아니라개헌협상의주체로탈바꿈하고, 개헌은정치권의밀실협상을통해직선제개헌에머물렀으며, 노태우는대선에출마해집권에성공했다. 투쟁을통해 1987년하반기개헌-선거국면을열었던광장의민중이실제개헌과정에서배제되고, 선거에서군부독재를종식시키지도못하고, 후보도단일화시키지못했던이유는무엇일까? 1987년에서평가해보아야할것은첫째, 7월에서 9월에이르는과정에서는낙관적전망속에서 2단계투쟁국면을열지못했던점이다. 국본으로모였던민중운동진영이 6월투쟁의제한적성과를도약대로삼아 2단계투쟁국면을열기위해서는명확한정세인식과투쟁, 조직노선에관한광범위한합의가전제되어야했다. 6.29의양면성에대한공통의평가와폭로를통해야당과차별적인민중운동의노선을확립하고, 7,8,9월노동자대투쟁을통해분출되어나오는민중의생존권적요구, 사회경제적요구와결합해그요구를직선제개헌을넘어선보다넓고근본적인사회적변화를요구하는투쟁으로모아나가는기획이필요했다. 그러나 6.29 선언이후민통련과노동자운동, 학생운동세력은스스로새로운국면을열어낼만큼충분한동원력을형성하는데어려움을느꼈다. 7월부터 8월까지정점에이르렀던노동자대투쟁은 9월부터탄압을받기시작하는데민중운동은국가의폭력적탄압및용공좌경척결공세에효과적으로대응하지못했다. 또한국본은독자개헌요강을성안했으나어떤직접적영향력도행사하지못했다. 국본은결성때부터이념적으로통일되어있지도않고, 대중운동을충분히포괄하지도못했고, 6월투쟁과정을주도하는과정에서도조직력을기반으로했다기보다대중투쟁의장을마련해주는것으로자기역할을해왔기때문이다. 1987년의두번째평가지점은선거국면에서분열되고역량의한계를보였다는점이다. 7,8,9월노동자대투쟁의동력을상승시키지못한후과라고볼수도있다. 10월정치권의밀실협상개헌이이뤄진후양김이분열했던것과평행하여민중운동도입장이점점더분화되기시작했고, 대통령선거가가까워질수록오히려간극은더커졌다. 결국비판적지지를통한김대중당선, 후보들의결단에의한단일화압박, 독자후보출마를통한민주연립정부구성중그어떤노선도원했던성과를거두지못했다. 1987년의선거국면에서나타난노선분화는표면적으로는전술슬로건과세력연합에대한판단의차이였으나, 이는국면에따라유동적일수밖에없었다. 1986년개헌투쟁국면부터간극이발생한정세판단과과제에대한이해의차이야말로결정적인영향을미쳤다고볼수있다. 노선분화그자체가문제가아니라노선이분화될수밖에없었던조건을분석하는것이더욱중요하다. 사후적으로볼때독자후보를통한민주연립정부구성안이야말로민중운동의독자성을 31
강화하는동시에군부독재종식을위한보수야당들과의연대를성사시키는방안이었다. 그러나독자후보전술을구사한백본은민연정구상을구체적으로설계하지못하는한계를가지고있었고, 후보의대표성도미약했으며, 일부는선도적정치투쟁론의한계를반복했다. 이런평가를바탕으로 1987년의민중운동의한계와교훈을정리해보면정책적측면에서는민연정구상의구체화와대중적선전실패, 조직적측면에서는국본의낮은합의수준과취약한대중기반, 보수야당과의관계설정이라는측면에서는잘못된정세판단과과도한의존등을지적해볼수있을것이다. 물론 1987년이민중운동의종말은아니었다. 노동조합을비롯해계급조직을건설하기위한노력이지속적으로전개되어조직적결실을맺기도했고 (1990년 1월전노협건설 ), 민족민주전선을강화하기위한노력이전개되고 (1989년 1월전민련발족 ), 여러논란끝에합법정당건설도현실이되었다 (1990년 11월민중당창당 ). 또한군부파시즘에대항한학생운동과노동현장이전을거쳐형성된지식인집단과민주노조운동으로부상한선진노동자집단을전국적단일대오로규합하고이념과강령, 규율로무장한혁명세력으로단련시키기위한하나의계획으로서, 사회주의적이념지향을지닌노동자정당건설이추진된다. 어찌보면 1987 년이후에야진정한의미에서민중운동이독자적정립을모색하게된것이다. (2) 1987년과 2017년이제다시 2017년으로돌아오자. 2016년 11-12월연인원천만의촛불집회는국회의대통령탄핵안가결을강제했다는성과를공동의경험으로만들었다. 탄핵안가결이후집회의인원은줄어들고있고, 아직헌법재판소의판결은나오지않았으나조기대선이될것이라고모두가믿고있는상황이다. 현재민중운동은 1987년이후형성된시민운동과함께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으로결집해집회를주관하고있다. 2016-2017 년과 1985-1987 년은여러가지유사점을가지고있다. 우선권력에서배제된야당세력이국면을주도했다. 1987년의야당은 6월항쟁을여야간개헌논의로수렴했고, 2017년의야당 ( 비박계바른정당을포함해 ) 은즉각퇴진과구속을요구하는촛불을대통령탄핵안가결로수렴했다. 또한 1987년과 2016년모두민주주의에대한강력한열망이광장의목소리를가득채웠다.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은 87년국본과마찬가지로공통의합의지점이매우협소하고, 촛불을대표하는위상이아니라광장을열어주고, 광장에모인이들의목소리를직접적으로들려주는역할을해왔다. 물론이러한유비는한계를가질수밖에없다. 당시의경제상황은 3저호황시기였으나, 현재는장기침체속에서 2008년이후최대의경제위기를앞두고있다. 또한 1987년직선제 32
개헌이라는포지티프한요구가중심이었다면 2016년에는박근혜퇴진이라는네거티브한요구가중심이다. 1987년의지배계급은 협상된이행 ( 직선제개헌과 3당합당, 김영삼정권등장 ) 과신자유주의적개혁으로대응했으나 2017년의지배계급은 1987년체제의전환이라는구호만무성할뿐그실제내용에대해서는어떠한합의와비전도가지고있지못하다. 최근정치권의개헌논의도권력구조에대한논의에만머물러있다. 아직박근혜가퇴진을한것도, 퇴진을하지않은것도아닌이때, 여전히많은이들이향후한국사회가나가야할바를묻고있는공간에서민중운동의역할은무엇일까. 앞서살펴본것처럼 1987년과 2017년을단순히비교할수는없으나주체적조건이당시보다낙관적인것또한아니다. 부패이슈가중심이되고있고문재인지지로대변되는야당을통한정권교체에대한기대가높은반면, 광장의촛불이어떤요구를만들고자기조직화할것인지가시화되지는않는다. 따라서국회탄핵안가결이후투쟁의 2번째국면을열어가는것이급선무다. 박근혜의구속, 박근혜없이추진되고있는박근혜정책의폐기, 재벌총수에대한처벌등을요구하며변화의열망을이어나가야한다. 또한 87년의노동자대투쟁을상기해야한다. 광장의요구가일터와삶터로확장되면서더많은민주주의, 진정한민주주의에대한요구로심화되어야할것이다. 고착화된신자유주의적노동체계속에서착취받고배제되고있는노동자들의요구와조직화시도에주목해야한다. 새로운단계의운동은지금부터시작되어야한다. 본보고서는 1985년부터 1987년까지민중운동내부에서형성된논리와노선에주목하면서현재의운동에주는시사점을중심으로살펴보았다. 당시에분출되었던다양한사건과요구, 사회성격논쟁으로대표되는이론적쟁점, 주요한정치적사건에있어서정치인들의역할등에대해서는자세하게다루지않았다. 올해 1987년 30주년이되는만큼보다풍부한평가가나오기를기대해본다. < 끝 >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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