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속의한국 일제의식민지배 원래식민지는한민족또는국민의일부가다른땅에이주해새롭게만든지역을의미 19세기후반이후서구열강이영토획득경쟁을하면서제국주의국가가정치ㆍ경제적목적으로군대를동원해지배하는영토를의미일본의조선강제병합이후, 정치주권을상실한조선은일본의한지방으로편입다만, 식민지조선은일본헌법이적용되지않는특수지역 ( 일본이미개한조선인에게아직은권리를부여할수없다고생각했기때문 ) 조선인은일제가요구하는것을무조건따르는의무만강요된식민지인 일본식통치이념, 민족말살의동화주의 식민지통치에는두가지방식하나는영국이인도에서실시한방식으로외국인으로취급하면서약간의자치를부여하는것. 다른하나는식민지의민족을동화시키는방식으로프랑스와일본이취한방식프랑스가알제리에서정치와행정을일원화하는정도에머물렀다면일본은민족동화를지향한다고공공연하게표방일본은식민지민족에게언어, 생활, 풍습, 제도등을이식하여일본인의일부로만들수있다고판단이때교육은동화를달성할수있는가장강력한수단 ( 일본이상당히공을들였던부분 ) 우리의입장에서민족말살을의미하는것 식민지통치의핵, 조선총독 1910년 10월일본은통감부를조선총독부로확대, 개편통감이자육군대신으로재직중이던데라우치마사타케가초대총독 1910년 10월에시행된조선총독부관제에따르면, 조선총독은육해군대장출신자만가능 ( 당시타이완총독이대장뿐만아니라중장출신자도가능 ) 8명의조선총독가운데 7명이육군대장출신이고나머지한명만이해군대장출신 ( 같은기간 15명의타이완총독중 9명이문관출신, 33명의인도총독가운데군인출신이 8명에불과 ) 조선총독은천황에직속하며필요한사항에대해천황에게직접상주 ( 타이완총독은 - 1 -
내각수상의감독을받으며수상을경유해야만천황에게상주 ) 8명의조선총독출신자가운데 4명이수상을역임조선총독은조선총독부령을제정ㆍ공포할수있는권한, 입법권, 사법권및 1910년대에는군사권까지장악 1910년대 : 군대를앞세워지배의기초를확립일본은조선의문화수준이일본에뒤처진다고보았기때문에바로일본의영토로편입하지않음. 어느정도수준에도달할때까지총독이천황의권한을대행 ( 조선통치특별주의 ) 1910년대에조선총독은통치기반을확대하고안정화시키기위해군대를전면에배치하면서엄벌주의를시행 1918년조선군사령부를용산에설치하면서주차군성격의일본군을상설부대인주둔군성격으로전환 ( 용산, 함남나남 ) 엄벌주의는조선총독의지휘ㆍ감독을직접받는경무총감담당 ( 헌병대사령관이겸직 ) 헌병이민간인의치안까지담당의병탄압, 어업단속, 산림의감시단속, 총포화약류단속, 도로의건설ㆍ유지, 국경관세, 강우량측정, 여행자보호, 위생, 일본어보급, 징세원조, 민적 ( 民籍호적 ), 묘지ㆍ장례ㆍ화장장ㆍ화약단속등다양한업무를처리이런활동을통해총독과총독부의방침이개개인에게까지관철될수있게함. 헌병경찰제는완비되지않은행정기관의부족한행정력을보완하는장치로즉결심판을할수있었고조선인에대해서는태형을처할수도있었음. 헌병경찰은 1910년 3,026명 ( 헌병 1,007명에한국인헌병보조원 2,019명 ) 이었는데, 3 ㆍ1운동이일어나기전년도인 1918년에는 7,978명 ( 헌병 3,377명, 헌병보조원 4,601 명 ) 까지증가조선특별통치주의전략은 1911년 11월부터시행된제1차조선교육령에서도잘드러남. 데라우치조선총독은오로지실용적인지식과언건한성품을배우고일본신민으로서의자질과품성을갖춘한국인을양성하는것을교육의목표로설정하고보통교육과실업교육을강조제1차조선교육령은통치효과를배가시키기위해일본어를서둘러보급하려는정책보통학교와고등보통학교 4년간각각주당 40시간과 30시간씩배정되어전체수업시간에서 37.74% 와 23.44% 의비중을차지하였는데, 조선어와한문은각각 20.75%, 10.94% 에불과한 22시간과 14시간씩만배정비판적인한국인을통치에순응하는단순하고기능적인사람으로성장시키려함이런이유로 1919년보통학교취학률은 3.7% 에불과, 대신사립학교에서근대적인교육을담당일제의탄압으로 1910년 1,973개에서 1919년 742개로줄어들었지만, 1919년보통학 - 2 -
교수가 484 개교에머물고있던현황을본다면한국인들은사립학교교육을선호 문화통치 의시작 1919년 3ㆍ1운동이발생, 3ㆍ1운동은군사적지배라는일본식팽창방식이처음으로거부당한저항일본은자신들의통치정책이수정되어야함을인식하였는데, 한국인의만세시위의이유를헌병경찰제의폭력성에서찾음헌병경찰제를폐기하고문관도조선총독이될수있게하는등문관중심의 내치 ( 內治 ) 동화 를실천하였는데이것을 문화통치 라는말로구체화하나는본국에서시행되는법률과명령을조선에서도가능하면시행하도록한다는점으로점진적으로본국과조선을일치시키는정책곧궁극적으로동화를달성한다는것다른하나는, 무단통치의상징인헌병경찰제를폐지하고보통경찰제를실시하며문화통치를시행한다는점으로헌병경찰을보통경찰로전환시키면서경찰력을대폭보강하여 1920년보통경찰이 1만 8,376명에이를정도조선총독부는조선어신문과잡지를발행할수있게하여 << 동아일보 >>, << 조선일보 >> 와 << 개벽 >> 등이창간집회도허가함으로써노동운동과농민운동이활성화될수있는합법공간이만들어지기도함. 문화통치는한국인의강력한저항에대응하는지배전략이면서한국인사회의여론주도층을회유하고친일파를적극육성하는정책조선총독부는핵심적인친일인물에게계급과사정에따라각종친일단체를만들도록하고, 농민을통제하기위해다양한정책을시도도평의회와부ㆍ면협의회를설치하여일부지역에서는선거제를통해의원을선발 ( 상층자산가들에게만선거권부여, 자문기관이었기때문에지방자치와는다른것 ) 일부조선의지식인들은이에호응하여민족개조론, 조선자치론, 참정권을주장문화통치는회유의대상이될수없는상대는철저히배재하는통치방식내외에서일본의지배에정면으로맞서싸우는사람에게 제령 7호 ( 정치에관한범죄처벌에관한제령, 1919) 를적용하여탄압항일운동이더욱강화되자본국에서시행되던 치안유지법 (1925) 를조선에도적용훈춘사건을통해만주로군대를출병시킨일본군은 1920년 10월한국인을무차별적으로살해한 경신대참변 ( 간도참변 ) 을일으키고 1925년에는미쓰야협정 ( 만주에서한국인독립운동가를체포하면이를반드시일본영사관에넘길것, 일본은독립운동가를인계받는동시에그대가로상금 ( 賞金 ) 을지불할것, 장쭤린은상금중의일부를반드시체포한관리에게주도록할것등을규정한협정 ) 을체결하여독립군의활동을철저히봉쇄 - 3 -
조선총독부는문화통치의일환으로 1922년 4월제2차조선교육령을제정새로운교육정책은민족별로학교를구분하지않고일본어를사용할수있는지에따라학교선택권을주겠다는내선공학을시행학제도일본과같아야한다는취지에서보통학교는 4년에서 6년으로, 고등보통학교는 4년에서 5년으로, 여자고등보통학교는 3년에서 4년또는 5년으로수업연한을연장보통교육과실업교육만이아니라전문교육, 대학교육, 실업교육도실시하고사범학교도설치제2차조선교육령은 3ㆍ1운동이후급속히고조되고있던한국인사회의교육열을어떠한형태로든관리하기위해실시된측면한국인보통학교재학생은 1918년당시 8만명정도였지만, 1921년 15만 9천명, 1929년 44만 3천명으로급증조선총독부는이때에일본어교육시간을더늘려언어동화교육을강화했기때문에 1920년대후반에이르면한국인학생들이항일시위를하는과정에서 한국인본위의교육제도를확립하라, 식민지노예교육제도를철폐하라 고주장을하기도함. 관립중등학교설립을최대한억제했으며한국인이설립한사립전문학교의학력을일본본토에서는인정하지않음으로써고등교육의활성화를억제 1924년에는경성제국대학을설립하여조선에거주하는일본인자녀들과한국인의고등교육에대한열기를흡수, 한국인입학자는전체입학정원의 1/3로제한되었으나한국에서근대적학문이시작되는계기 경제공황과조선안정화대책 1929년세계대공황이발생공황은조선의쌀가격을하락시키고농민경제를더욱궁핍하게만들면서농민층의몰락을가속화 1930년전체농가의절반가량, 소작농가의 70% 가량이봄이되면굶어야하는처지노동자와농민의파업과소작쟁의가급속히증가이런상황은일본의조선통치가다시불안정해지는배경조선총독부는농민의반발을미리방지ㆍ회유하여농촌사회를안정시키고자 1932년부터농촌진흥운동을추진 1932년조선소작조정령, 1934년조선농지령을제정하여소작농에대한지주의과도한수탈을억제하고중간관리자인마름을행정기관에서직접통제조선총독부는한국인의사상을철저히통제 1930년 ~1935년사이에 사상사건 으로체포된사람이약 2만명에달할정도 1936년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을제정하여독립운동가의전향을강요하고이를거부하는사람에게사상범이라는이름을붙여감시 전쟁과민족말살정책 ( 황국신민화 ) - 4 -
1937년 7월일본이중국본토를침략하면서조선은본격적인대륙병참기지로서의역할을요구받게됨. 미나미지로조선총독은내선일체를전면에내세웠는데, 내선일체란천황을중심으로동아세계에가족국가를건설할수있다는 국민적신념 을조선에서실천하는것내선일체는한국인으로서의의무에충실하라는메시지로, 조선의물자와사람을최대한전쟁에동원하기위해조작된이데올로기 1937년 10월 황국신민의서사 를제정 1938년 4월부터제3차조선교육령과육군특별지원병제를실시미나미총독이만든 황국신민의서사 는천황의백성으로서자격을갖추는데필요한가장기본적인태도를규정한것성인용 1. 我等ハ皇國臣民ナリ 忠誠以テ君國ニ報ゼン 2. 我等皇國臣民ハ互ニ信愛協力シ 以テ團結ヲ固クセン 3. 我等皇國臣民ハ忍苦鍛錬力ヲ養イ以テ皇道ヲ宣揚セン 1. 우리는황국신민 ( 皇國臣民 ) 이다. 충성으로서군국 ( 君國 ) 에보답하련다. 2. 우리황국신민은신애협력 ( 信愛協力 ) 하여단결을굳게하련다. 3. 우리황국신민은인고단련 ( 忍苦鍛鍊 ) 하여힘을길러황도를선양하련다. 아동용 1. 私共ハ 大日本帝國ノ臣民デアリマス 2. 私共ハ 心ヲ合ワセテ天皇陛下ニ忠義ヲ盡シマス 3. 私共ハ 忍苦鍛錬シテ立派ナ強イ國民トナリマス 1. 우리들은대일본제국의신민 ( 臣民 ) 입니다. 2. 우리들은마음을합하여천황폐하에게충의를다합니다. 3. 우리들은인고단련 ( 忍苦鍛鍊 ) 하고훌륭하고강한국민이되겠습니다. 조선총독부는수업과학교생활에서조선어사용을금지시키고일본어만쓰도록강요교육내용도천황에대한충성만이애국이고천황을위해죽는것은영광이므로언제든지자신을버릴수있는사람을길러내는데중점일본은그과정에서여성노동력까지동원했고, 일부여성을일본군 성노예 로만들었음. 한국인이천황의충성스러운백성임을증명해보이는길은일본군대에적극지원하고, 전쟁물자의모집에동참하며, 징용등노동력동원에적극참여하는것조선총독부는한국인의충성의식을더욱내면화하기위해궁성요배를실시하고전국에신사를건설하여신사참배를강요하는한편, 1940년 2월부터창씨개명이라는일본식성명제를실시한글을사용하는잡지와신문이황국신민화를방해하는가장암적인존재라고판단하여 1940년에기관지인 << 매일신보 >> 를제외한모든간행물을폐간전시체제기로들어선 1938년 10월에는한국인의정신개조를사회조직속에서체계적 - 5 -
으로담보하기위한조치로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결성하고이를강화하기위해농산어촌진흥운동까지흡수ㆍ통합하여 1940년대 10월에국민총력조선연맹을결성두연맹에는조선에주둔해있던일본군현역또는예비역장교들이고문, 참여 ( 參與 ), 지도위원, 사무국총장또는차장등으로직접참가황국신민화정책에따르기를거부하는사람들은사회로부터철저히배제하고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 (1936.12),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 (1941.2) 등을근거로철저한감시와재교육특정한혐의가없는데도예비검속을통해사회로부터격리일본은 1942년 9월전쟁국면을효율적으로이끌며넓어진제국의영역에 대동아 를건설하고외교를일원화시키기위해대동아성이라는통일기구를설치조선과타이완의총독부에관한사무를내무대신이총괄하고, 총독부의업무가운데각성의업무에해당되는사항은각성의대신에게감독을받도록하는조치로가시화 ( 내외지행정일원화 - 조선통치특별주의는사실상폐기 ) 새로운조치는황민화의도달수준에따른결단이아니라불리해지고있던전쟁상황때문에취해진것이었으므로식민지조선에서구체화되는데는한계가명확전황이불리해질수록일본으로서는필요한물자와사람을더많이동원해야만했고한국인으로서는일상생활이더욱어려워질수밖에없었기때문조선총독부는부족한노동력을만회하고신속히동원하기위해서 관알선, 모집에이어 1939년부터징용제를실시학교교육을중단시키고학생을노동력으로동원동원이강화될수록태업, 탈출등의행동이빈번하게나타났고, 전쟁이빨리끝나기를바라는염전사상이확산조선총독부의최후의정책은 1945년 2월부터 본토결전 을위해한반도전체를전쟁기지화하는것특히제주도, 한반도남서해안, 함경도일대에서는수많은주민과징병자들이그지역에서전쟁기지를만드는데동원미군이한반도의어느곳에라도상륙했다면한국인도미군의총알받이로나서도록일본군에게강요받았을것 일제의수탈 토지조사사업의배경과본질 조선총독부가시행한경제정책의목적은일본의자본주의발전에보조역할을하도록만드는것조선은일본에필요한식량과공업원료를공급하고일본공산품을소비하는식민지시장으로전락 - 6 -
세금을안정적으로거두어식민지지배에필요한재정을확보하기위해강제병합직후 토지조사령 을공포해실시한토지조사사업은이러한식민지경제정책의기반작업토지조사사업은 1918년까지약 2,000만엔이라는거액을들여계속했는데, 소유권조사를통해납세자들을분명히했음등기제도를시행하면서토지소유권을법적으로보호하는근대적토지소유권을확립토지거래가활발해지고토지가은행대출의담보물로안정적으로이용되면서산업자본이형성될수있는조건도마련근대적토지소유권의확립은예로부터토지에대한경작권을보호받아오던소작농의입지를크게약화조선왕조와대한제국도양전量田을시행토지의번지, 위치, 등급용도, 면적소유자등을조사한양안量案을해당읍ㆍ면, 도와중앙의호조에각각한부씩보관하고, 양안을기초로소유자의변화와수확량을조사하여세금을결정조선왕조의양전은고려말에 78만여결結의토지를파악한것에서시작되어이후 171만여결로증가당시관습에서는실소유자인양반이양안에자기이름을명기하는것이점잖지못하다고여겨노비이름이나가명등을사용한경우많았음. 하지만문제가발생하는경우는거의없었음. 관의인증절차없이개인이작성한재산관계문서인 깃기 를주고받는것으로매매가성립개항후일제가철도부설을위하여수용한토지를정부가보상할때도가명또는차명으로등재된토지에대한원소유자의권리를인정할정도광무양전은변화되는상황에따라전통적관습을토대로근대적토지소유제도로개혁해재정을확보하고자 1898~1904년에시행된것광무양전은지역범주를넘어전국단위로확대된토지상품화추세를반영해서사적인토지거래를법적으로확인해거래상불안요인을없애려한것개항장거류지 10리밖에서외국인의토지소유를금지시키는반외세적인성격모든토지의소유권에대한국가의법인을꾀한광무양전은이전시기의양안과질적으로달랐고, 조선총독부가시행한 조선토지조사사업 의목적과같은것광무양전에서는여전히가명이나차명이사용되었고, 면적표기에서토지수익에대한객관적평가가떨어지는전통적인결부제를사용그러나절대면적단위인두락斗落도함께표기외국인에게는지계발급을금지했기때문에당시불법적으로자행되던일본인들의토지잠매를막는일도가능일제의입장에서대한제국광무양전의성과는불편한것 ( 조선의방식이익숙하지않음.) - 7 -
일본인들이통감부에가장먼저요구한것이자기소유라고주장하는땅에대한법적소유권을일본식으로인정해달라는것통감부에서는 토지가옥증명규칙 ( 개항장밖의외국인토지소유금지규정을삭제, 1906) 과 토지가옥소유권증명규칙 ( 일본인들이불법적으로소유한부동산에대해법적권리를주기위한것, 1908) 을통해일본인들의불법적토지소유를 합법화 일본인의조선 진출 을촉진하고이미와있던일본인의재산권을보장해줄법적장치를마련하기위한것일본이조선을완전히강점한뒤에는일본인에게안정적이고자유로운토지투기를유도하고소유권을보장하는제도적장치를마련해야했기때문에, 자신들이주체가된토지조사를다시실시 조선토지조사사업 의결과, 조선총독부재정수입에서지세 ( 地稅 ) 가 2배가까이급증대한제국이산업화재원으로구성했던지세수입이식민통치비로유용되어결국조선사회의생산적발전을가로막게된것광무양전이외국인의토지소유를금지하고대한제국의근대화기반을마련하기위한것이었다면, 조선총독부의토지조사는이금지규정을없애고경작권, 개간권, 도지권, 입회권 1) 등농민의관습적권리를부정함으로써일본인들의토지확대에장애가되는요인을없애는것이었으며저미가, 저임금정책을위한식민통치의재정기초로설정또하나, 1918년 5월부터시행된 임야조사사업 을통해한반도임야의 60% 가국유림으로창출되었다는것을주목 삼림법 (1908.1) 이래 조선임야조사령 (1918.5) 에이르는과정에서, 특히 삼림법 은임야자원을함께이용해오던지역공동체의입회권을부정국유림의상당부분이일본인에게불하되었다. 1923~1942년간에국유림은 949만정보 (59.8%) 에서 533만정보 (32.8%) 로, 사유림은 534만정보 (33.6%) 에서 969만정보 (59.6%) 로바뀌어국유림불하를통한사유림이급증국유화된토지는식민자본주의의 개발-수탈 의틀로서일본인농장이확대되는주요배경조선총독부가조선사람의농지 40% 를빼앗아갔다는것은사실이아니지만이말을임야를포함한토지로바꾸면사실이됨. 누구를위한 산미증식 인가 일본에서는 19세기말이래공업화가진전되면서농촌인구감소, 소득상승으로식량소비가늘어나쌀폭동까지일어날정도 1890년대이후항상적인쌀수입국저임금체제를유지하기위해서뿐만아니라, 대외침략에수반되는군량을확보하기 1) 한지역에사는주민이그지방관례나법규에의해일정한산림, 황무지, 늪, 못따위에서공동으로이익을얻을수있는권리 - 8 -
위해서라도쌀수입은중대사안일제가병합이전부터조선을값싼쌀공급지로설정한것도이때문조선에서는당연히쌀의수출량증가분이생산량증가분보다훨씬많았음총생산량에대한수출량비율이 1910년대의 10% 선에서 1920년대에 40% 를넘었고, 1935년에는 53% 쌀생산은늘었지만 1인당쌀소비량은 1912년 0.77석에서 1926년에 0.53석, 1936년에는 0.38석으로감소이시기조선인의식생활소비유형은쌀과잡곡의비율이 1대 2.5정도로잡곡비중이높았음. 이런상황에도불구하고많은쌀이일본으로수출될수있었던것은고율의소작료 (50%) 때문지주가납부해야하는지세나각종잡비외에빚의이자까지더하면 70~80% 이상을부담 1920년대말전국적으로확산된혁명적농민조합의요구사항중하나가 소작료 4할 식민지지주제는대지주층과식민지금융기구사이의수직적질서를바탕으로한조선총독부의쌀증산정책과그에따른지주-소작관계를총칭하는개념조선총독부는지세율을일본보다훨씬낮은 1/5정도로책정하여대지주에게유리한경영환경을제공, 영세지주건대지주건지세의세율이동등함 1910년대를지나 1925년까지쌀값상승률이다른물가상승률보다높아대지주층에게토지가집중 1918년토지조사사업이완료될당시농가호수의 3% 에불과한지주가전체경지의 50% 를차지했고, 소작농가는 77% 1930년에는지주총수 10만여호중 30정보이상의대지주가 4.8% 였는데총소작지는 23% 소작료를현물로받고종자선택부터포장까지생산과정전체를지배하는지주의경우시세에따라유리한가격에쌀을팔수있었지만, 소작인을비롯한빈곤층은팔수있는미곡도적고, 현금이급했기때문에추수직후시세가가장낮은시기에쌀을판매농촌사회는지주층과소작농으로의극심한양극화현상 1914~32년간소작농은 106만여호에서 155만여호로급증했고, 자작농은 57만여호에서 47만 6천여호로, 자소작농은 91만 1천여호에서 74만 3천여호로격감자작농가의 18%, 자소작농가의 37%, 소작농가의 67% 가보릿고개를넘길수없는춘궁민도시주변부에서빈땅을파서거적때기로지붕을만들어사는토막민 ( 土幕民 ) 은일제시기에처음나타난빈민층화전민의수와화전면적은 1928년에 120만여명 ( 인구의 6%), 40만여정보나될정도 - 9 -
조선총독부는 1920년과 1926년두차례에걸쳐 산미증식계획 을시행일차적인이유는 1918년일본에서시베리아출병을틈타매적매석등으로쌀값이폭등하자쌀폭동이일어나안정적인쌀공급이무엇보다중요했기때문값이싼동남아산도있었지만, 일본인들입맛에맞지않았고일본의국제수지악화를낳을수있기때문에조선에서증산정책을추진조선총독부의 조선산미증식계획요강 (1926) 을보면일본의연간쌀소비량 6,500만석가운데일본내생산이 5,800만석에불과한데다, 일본인구가매년 70만명씩늘어날것이므로일본의식량문제를해결하기위해서는조선의미곡증산이급하다는내용의상황판단산미증식계획은토지개량사업과농사개량사업으로구분되는데, 토지개량사업은관개 ( 농경지에물을인공적으로공급하는것 ) 개선, 밭을논으로바꾸는지목전환, 개간이나간척을통한경작지확장등농사개량사업의핵심은일본식개량농법보급품종개량과비료증가를통해수확량을증대시키는것이었는데, 사실생산력향상이라기보다밭농사를희생시켜논농사에노동과비용투하를집중하는것산미증식계획을통해쌀의생산량은 1.4배증가한반면, 반출량은 5배증가세계대공황 (1929~1933) 을전후한무렵조선쌀의일본반출량은 500~900만석에달해일본으로수입되는쌀의 60~70%, 일본내소비량의 10% 에달하는규모쌀단작형식민지지주제가확대되었고, 지주와총독부의유착은더욱강화일제의중국침략이후조선은식량공급처로서다시중요 1939년에는대가뭄으로수확고가절반일제말기로가면서식량증산에필수적인노동력, 적절한시비, 자금과농기구공급이절대적으로부족해식량생산이감소증산정책이노동력에만크게의존했기때문결국식량통제를통해소비를강제로줄이는정책이실시 ( 조선미곡주식회사령 과 조선미곡배급조정령 ) 식량배급조합을설립해식량배급제를실시공출제도는처음에는 과잉지역의과잉수량, 즉쌀이남는곳의쌀에대한자발적공출을장려한다는명목으로시행그러나 1942년산미곡부터 조선식량관리령 (1943) 을적용하여자가소비량을제외한모든식량으로확대부락책임공출제, 사전할당제, 농업생산책임제등은공출량할당을채우기위한제도공출과강제동원은조선의마지막진을빼는결과를가져왔고, 지주건농민이건생산의욕을감소시킴. 일제의조선인강제동원 - 10 -
일본근대의특징은 1871년류큐침략이후 1945년패전때까지 70여년이상끝없이침략과전쟁을도발하면서전개되었다는것전쟁의범위가일본의능력을넘어서면서조선은물자ㆍ자금ㆍ인력의수탈지역강제동원은인간의생명과존엄성자체를짓밟은충격적인반인륜적행동이라는점에서매우심각한것강제동원은 1939년부터모집, 관알선, 징용, 근로보국대형식의노동력강제동원, 지원병ㆍ학도병ㆍ징병등병력동원, 군속ㆍ군부 ( 軍夫 ) ㆍ일본군 위안부 등군관련동원등으로구분한반도내에서각종명목으로동원된노동자수는연인원 600만명이상, 일본이나전쟁지역으로동원된노동자수는 139만이상, 군인ㆍ군속 36만이상, 일본으로동원된노동자는최소 70만이넘고, 군위안부는적어도 10만여명에이른것으로추산조선인강제동원은일본국가가기업과함께주도하고조선총독부가실행기구가되어실시한야만적범죄행위일제는 1937년중일전쟁을계기로일본내에서징병을실시, 일본내노동력이유출되면서그중에서도노동조건이나쁜광산부터노동력부족해지는현상발생야마구치현의 70여중소탄광이휴업을우려할정도의노동력부족현상으로일본정부에조선인노동자 이입 을허가해줄것을요구이런요구에따라 1939년부터강제동원이시작일제는먼저조선인노동자통제기구인 중앙협화회 (1939.6) 를세워 치안대책 을마련하고 국민징용령 (1939.7) 에따라후생성ㆍ내무성ㆍ조선총독부의 조선인노무자내지이주에관한건 (1939.7) 을제정하였다. 그리고정무총감이 조선인노동자내지이주에관한건 (1939.9) 을발포함으로써일본의석탄, 금속광산, 토건업을위한 모집 명목의강제동원이시작 1941년일본에서는 중요산업단체령 (1941.8) 에따라해당업계에대한인적ㆍ물적자원의우선투입과이익보장을요구하는기업통합체 통제회 가조직되어물동계획을기획ㆍ입안ㆍ수행 모집 은일본기업이후생성 2) 의허가를얻어대리인을통해모집하는방식이었다. 그러나금품수수가따르고경찰의힘이있어야모집이가능했기때문에관의 알선 은필수적모집단계부터할당인원을채우기위해강제동원방식으로진행 조선인노동자모집요강 을보면 1시국산업종사로국가에공헌한다는자각, 2도항후정해진훈련소에서훈련, 3직장이동금지, 4협화사업단체가입후회원증소지, 5주소변경시 5일내에협화사업단체에제출, 6일본의생활풍습에순응하고일본인이혐오하는행위금지, 7일본어사용, 8협화사업단체간부, 경찰관, 직업소개소원의 2) 1938 년 1 월에내무성에서분리ㆍ설치된인적자원관리전담부서. 후생성이추진한후생정책은장기적으로인구의출생ㆍ사망관리를통한인구증식을목표로하였고, 단기적으로는전쟁에필요한노동력과병력동원을위해제국인구의위생과보건증진으로체력을향상시키고일본정신을강화시키는것을목표로했다. - 11 -
지시에복종등을강조강제동원은식민정책과큰가뭄등으로경제파탄에빠진조선인들에게돈을벌수있다는거짓선전을하고, 관-경찰ㆍ면직원의위압적 권유 와천황의전사가되면민족차별에서벗어날수있다고선전한 황민화 정책등이어우러져강행된것관알선 은지방관청이필요경비관리는물론, 직접할당인원을모아사업주에게인도하는방식으로서, 동원의모든과정을조선총독부가책임징용은도지사가노동자를모아항구로인솔하여조선총독부가사업주에게인계하는방식조선인들은일본에도착한뒤군대식훈련을받고민족차별과폭력을감내하면서위험도가높은작업장에집중배치되어공휴일반납이일상화된강제노동에혹사, 홋카이도탄광에서는 1년노동일이 311일언어불통에따른구타등만성적폭력과살인적노동강도로사망률도대단히높았다. 한자료를보면 1939년 0.21%, 1940년 0.73%, 1941년 1.24% 로증가미불임금을받는것도포기하고생명을건탈주가속출탈주율은강제동원 1년만인 1940년말에 18.7% 나되었고, 노동강도가높은탄광은 20.9%, 1943년말에는 33.3% 탈주하다잡혀 3~6개월갇혀있다가원래사업장으로돌아오면기다리는건폭력이었고, 사망에이르는경우도있었음. 탈주자의급증은고된강제노역과구타, 차별외에도약속한것과달리임금이너무적거나애국저금등각종강제저축이임금의대부분을차지하여소득효과가없었기때문각종명목의 헌금 도강요 36만여명에이르는군인ㆍ군속의미불임금을추정하면당시화폐로 3억 7천만엔 ( 현재가치로수조원이상 ) - 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