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동서독지자체의교류경험과한국에대한시사점 고상두 동서독지자체의교류경험과 한국에대한시사점 고상두 * 독일의 * Ⅰ. 서론 Ⅱ. 교류협력의역사적배경 Ⅲ. 자매결연의실태와추진요인 1. 교류협력의내용과절차 2. 교류협력의특징 3. 교류협력의추진요인 Ⅳ. 지자체교류협력의성과 1. 독일통일에대한기여 2. 동독지방행정의재건에대한기여 Ⅴ. 교류협력의한계 1. 정치적차원의한계 2. 법적차원의미비점 Ⅵ. 한국에대한시사점 VII. 결론 Ⅰ. 서론독일의통일과통합에서는주민의참여가매우중요한역할을하였다. 통일은내부적통일과외부적통일이라는두가지차원으로나누연세대학교지역학협동과정교수 (E-mail: stko@yonsei.ac.kr, Tel: 02-2123-3590) 상- 145 -
IDI 도시연구 제 14 호 (2018.12) 어지는데, 내부적통일이란독일민족주의를바탕으로동서독주민들이분단상태를거부하고통일을요구하는과정이며, 외부적통일이란전승국을비롯한주변국들이동서독주민의요구를국제적으로승인하는과정을말한다. 독일의외부적통일에서는주민보다정치지도자의역할이중요하였지만, 분단을극복하고민족국가를재건하는내부적통일에서는동독주민의의지와서독주민의호응이결정적이었다 (Stent 1999, 110). 그런데독일에서이러한내부적통일이가능했던이유는오랫동안동서독간에교류협력이있었고, 그결과민족의동질성이유지되었기때문이다. 그중에서지자체간의교류협력이중요한역할을했다. 통합이론적관점에서조셉나이 (Joseph Nye) 는정치, 경제, 사회부문의통합필요성을지적하면서, 그중에서사회적통합이가장중요하다고주장하였다 (Grunert 1981, 22). 이러한맥락에서동서독의경우사회통합에가장큰기여를한주체인지자체가구체적으로어떠한역할을했는지알아보는것은매우의미있는일이라고생각한다. 그런데, 동서독의교류협력은적대국가간에약속하고실행한협력사례에속한다. 따라서다른일반적인국제교류협력사례와달리독일의경우에는그성과와함께한계점도많을것으로보인다. 그러므로이글에서는동서독간의자매결연실태에관한기술적인설명뿐만아니라, 한반도에대한시사점을얻기위해동서독자매결연의성과와한계에대해서도비판적으로고찰하고자한다. 동서독지자체교류협력에관한기존연구를살펴보면, 국내학계에서독일을단일사례로분석한글은그리많지않고, 대다수의연구는남북한의사례와비교하거나, 아니면한국사례를분석하면서동서독사례를참조하고있다. 동서독단일사례를다룬주요연구로는김태일 (2000), 한부영 (2015), 이윤진 장용철 (2017) 등의글이있고, 남북한교류협력을연구하면서독일의사례를분석하여시사점을제시한연구로는장인봉 - 146 -
동서독지자체의교류경험과한국에대한시사점 고상두 (2004) 와이한희 (2017) 등이있다. 이러한연구들이주로동서독지자체교류협력의현황과특성을소개하였다면, 본연구는그러한연구결과에더하여동서독교류협력의절차를협정문의작성, 서명, 이행등단계별로설명함으로써남북한간의사업에실질적이고구체적인도움을주고, 또한정치및법적인제약을지적함으로써예측가능한장애요인을제시하고자한다. 분단국가에서실행되는지자체간의교류협력은일반국가와는다른양상을보이기마련이다. 일반국가간에는지자체의교류협력에대한제약이별로없는편이다. 다만국제관계는중앙정부의고유업무라는점에서국가별로제약이있을수는있다. 하지만 1980년대이후전세계적으로지방정부의국제교류활동에대한정당성이강화되는추세이며, 지방외교정책이라는개념이생길정도로지자체의국제교류가활발해지고있다. 이에반해분단국의경우지자체는적극성을보이는반면에중앙정부는제한하는경향을보인다. 따라서이글은중앙과지방의역학관계속에서동서독지자체의교류협력추이를확인하는분석체계를토대로연구를진행할것이다. 이러한연구목적을위해이글은다음과같이구성된다. 첫째, 동서독자매결연의역사적인배경을살펴본다. 둘째, 체결된자매결연의실태를주요내용과절차, 특징, 추진요인등을중심으로알아본다. 특히동서독이어떠한내용으로자매결연을추진했는지를보다심도있게설명하기위하여자매결연협정문과실행사업을예시로활용한다. 셋째, 동서독자매결연사업의성과를검토한다. 교류협력이동서독의관계개선과통일에어떠한기여를했는지, 그리고통일이후동서독통합에어떠한효과를발휘했는지등을중심으로성과를평가할것이다. 넷째, 동서독교류협력의한계점을정치적, 법적차원에서밝히고자한다. 마지막결론에서한반도에대한시사점을토대로남북한의교류협력이나아가야할바람 - 147 -
IDI 도시연구 제 14 호 (2018.12) 직한방향성을제시하고, 필요과제를제안할것이다. II. 교류협력의역사적배경 동서독지자체의교류협력은 3단계과정을거쳐진행되었다. 제1단계는동서독분단부터서독사민당의브란트총리가집권하면서신동방정책을본격적으로추진하기시작한 1969년까지이다. 이기간은동서냉전시기로서서독이전독일민족에대한단독대표권을내용으로하는할슈타인 (Hallstein) 원칙을내세워동독을외교적으로인정하는국가와는수교하지않는다는정책을고수함으로써동독을외교적고립에빠트렸고, 서독의회는동독의인민의회가자유선거에의해선출되지않았으므로민주적인정통성이없다는이유로공식적인접촉과교류를거부하였다. 이러한상황에서동독은적극적으로지자체교류협력을제의하는전략을취하였다. 동독은외교적고립상태에서탈피하고동독에대한국제법적지위를승인받기위한수단으로지자체교류를활용하려고했다. 동독의이러한적극적인공세에대해서독은지자체의교류를허용하지않는입장을취했다. 심지어동독이프랑스혹은이탈리아의진보적인지자체와자매결연을맺을경우, 서독정부는이들서유럽도시와서독도시간에체결된자매결연을취소하는등의강경한외교적대응을하였다. 하지만서독의이러한태도는 1960년대동서데탕트분위기속에서서서히바뀌기시작하였다. 그리하여서독정부는 1966년 5월에발간한행정업무편람에서 동독주민과의폭넓고지속적인접촉은독일민족의동질성을회복하는데에도움이될것이다 라고언급하였다. 하지만당시서독은여전히동독을독립적인주권국가로인정하지않았기때문에, 동서독간의지자체교류협력을적극적으로허용한것은아니었다 (Von - 148 -
동서독지자체의교류경험과한국에대한시사점 고상두 Weizsäcker 1990, 22). 이러한사실을입증하는대표적인사례를살펴보면, 같은해 12월서독도시연합회대회연설에서당시기민당과대연정을하고있던사민당의허버트베너 (Herbert Wehner) 내독부장관은동독도시와의자매결연을자제하도록권고하였다. 베너장관이독일공산당출신으로서사민당내좌파그룹에속하면서도동독에대한강경한태도를보였다는점과그가발언한시점이신동방정책의설계자인에곤바 (Egon Bahr) 가투칭연설에서그유명한 접근을통한변화 를역설한지이미 3년이지났다는점에서서독정부의입장이아직근본적으로바뀌지는않았다는것을알수있다 (Klaus 1994, 15). 동서독지자체교류협력의제2단계는 1969년부터최초의동서독자매결연이체결된 1986년까지의시기로서이제는역으로서독이동독에게적극적인태도를취하였다. 신동방정책을추진한브란트총리는동독과의지자체협력을적극지지하였다. 그는분단이장기화되면서통일이점차불가능하게느껴지는상황에서, 동서독주민간의빈번한접촉과만남이독일민족의일체감을일깨우고, 분단에서통일로한걸음씩나아갈수있도록해줄것이라고생각하였다. 이에반해, 동독정부는지자체간의자매결연이동독체제를개방하는효과를일으켜체제에부정적인영향을미칠것이라고판단하여서독의제의를거절하였다. 그대신동독은서독이외의서방국가와활발한지자체교류협력을추진하여, 국제사회에서서독과대등한국가로인정받기위한노력을하였다. 동독정부의이러한태도는이전시기에지자체교류협력을통해서독으로부터국가로인정받으려고했던자세와다른것이다. 서독의신동방정책덕분에동독은국제법적인국가로인정을받았기때문에, 서독과지자체협력을하여얻을수있는이득은미미한반면에, 교류협력이체제에가하는위협은크기때문이다 ( 김태일 2000, 139). - 149 -
IDI 도시연구 제 14 호 (2018.12) 제3단계는 1986년부터 1990년동독의붕괴까지의시기로서실질적으로동서독간에자매결연이성사되고점증한시기이다. 아이러니하게도동독은체제가붕괴되기직전약 5년동안대내외적으로서독과대등한지위를인정받았다고평가하면서체제에대한자신감을갖기시작하였고, 지자체교류에대해다시금전향적인태도로선회하였다. 그리하여 1986년에최초의도시자매결연이서독의자알루이스 (Saarlouis) 와동독의아이젠휘텐슈타트 (Eisenhüttenstadt) 간에체결되었다. 이협정이체결되기 1년전인 1985년 11월라폰텐자알란트 (Saarland) 주지사는동베를린을방문한자리에서호네커동독공산당서기장의고향인서독의자알루이스와동독도시할버슈타트와의자매결연을제안하였다. 호네커는전격적으로그제안에는동의하였지만, 약 1 년동안승인을지체한끝에결국서독에인접한할버슈타트대신아주멀리폴란드에인접한아이젠휘텐슈타트와의자매결연을승인하였다. 동독정부는최초의자매결연을예외라는단서를달고승인하였고, 추가적인서독의자매결연제안에소극적인태도를보였다. 무엇보다도동독주민의서독방문신청이급증할수있다고우려하였기때문이다. 이러한분위기때문에서독의도시연합회는회원도시에게보내는서한에서동독과의자매결연에대해과도한기대감을갖지않는것이좋을것이라고전망하였다. 하지만동독정부가연이어에랑엔과예나, 그리고노이키르헨과뤼벤의자매결연을승인하게되면서동서독교류협력에대한기대감이커졌고, 1989년 11월베를린장벽이붕괴되기까지약 300개의서독지자체가내독부에동독과의자매결연의향을표명하였는데, 실제로는두배이상의지자체가동독과의교류협력을희망했을것으로추정된다 (Der Spiegel 1986/09/01). 동독은도시자매결연초창기에는조심스러웠으나, 점차적극적인태도로변하면서, 아래와같이자매결연체결건수가 1986년 3건, 1987년 - 150 -
동서독지자체의교류경험과한국에대한시사점 고상두 17건, 1988년 27건, 1989년 15건등으로증가하여, 베를린장벽이붕괴된 1989년말까지총 62건이성사되었다. 그리고그이후로자매결연의수는폭발적으로늘어나통일이완성된 1990년 10월에는 854개, 그리고 1993년에는약 1500개로늘어났다 ( 채경석 2004, 65). 1986 3 1987 17 1988 27-151 -
IDI 도시연구 제 14 호 (2018.12) 1988 27 1989 15-152 -
동서독지자체의교류경험과한국에대한시사점 고상두 III. 자매결연의실태와추진요인 1. 교류협력의내용과절차 동서독지자체간의교류협력절차를보면양측이먼저협정문을마련하여서명한후, 연간공동계획을수립하고, 이에따라교류협력행사를진행하였다. 따라서협정문체결을통해지자체교류협력이공식적으로시작되는데, 협정문작성을위한협상과정을보면양독간의자매결연은서독보다는동독의의지에따라성사되었다는것을알수있다. 즉동독측이서독도시와교류협력을하기로결심을하게되면, 부시장을단장으로하는대표단이서독을방문하여 1차협상을한후, 이어서서독의대표단이동독을방문하여최종합의에도달하게되고, 마지막으로동독의시장이서독을방문하여협정서에서명하는절차로진행되었다. 이러한과정에서자매결연협정문안합의에여러가지어려움이있었는데, 동독측은외교문서에담을내용에해당하는상호주권의인정, 평화, 긴장완화, 군축등의정치적이슈를포함할것을원했으며, 서독측은인적교류를강조했고, 그중에서도특히교회와청소년의교류를요구했으나동독의강한반대에부딪혔다. 그리하여결국주로동독이제시한협정내용에서독이동의하는방식으로이루어졌다. 물론서독도시들은협정문을체결하는과정에서전국지자체연합회와내독부의자문을받았다 ( 한부영 2015). 대부분의교류협정문은 2쪽정도의분량이며, 서문과 3-5개의본문조항과기타부속조항으로구성되어있다. 협정문의서문에는주로동서독기본조약, 유럽안보협력회의의정산, 평화공존의원칙, 국가주권의상호인정등을언급하면서, 지자체교류협력의목적이이러한정치적가치실현에기여한다는점을강조하였다 ( 채경석 2004, 69). - 153 -
IDI 도시연구 제 14 호 (2018.12) 협정문본문에는상호합의한교류협력사업을열거하면서세부내용을설명하고있는데, 주요한교류사업으로문화, 예술, 체육분야등이명시되었다. 이들분야중에서도대부분의협정서에서가장중점적으로명시된사업은문화행사이다. 여기에는전시회, 음악회, 영화상영, 작가초청강연등이있는데, 이러한유형의문화교류는특히 1986년동서독정부간에문화협정이공식적으로체결되면서더욱활성화되었다. 두번째로빈번한사업은정책간담회로서지방행정업무에관한의견및경험교환을하는것이다. 간담회주제로는도시계획, 건축, 도심개발, 문화재보존, 환경교통문제등이다. 세번째는체육교류사업으로서청소년또는지역주민이참여하는볼링, 축구, 탁구팀을교환하였다. 네번째로는동독의요구로평화대회를개최하였다. 평화증진을위한주민토론회, 어린이미술경진대회, 여성토론회등이여기에해당한다. 평화대회의목적은평화이슈에관한의견을교환하고, 주민들의평화의식을고취시킨다는것이다 (Bundesministerium für Innerdeutsche Beziehungen 1986, 254). 부속조항에는예를들어양측의교류협력은언제든지취소할수있다는내용을담고있는데, 동독은종종이조항을서독에대한압력수단으로활용하였다. 비근한예로, 동독의고타는 1988년에잘츠기터와자매결연을맺은후, 잘츠기터에소재한동독인권조사처의폐쇄를지속적으로요구하면서관계단절을협박하였다. 또한포츠담은서독본의한스다니엘스 (Hans Daniels) 시장이동독정부의인권운동가체포에대해비판적인언급을했다는이유로교류협력을오랫동안지체시켰다. 협정문이체결되면, 이에기반하여양측은매년공동연간계획을수립하였는데, 이계획에의해문화공연, 정책간담회, 체육교류, 평화대회등의사업이실행되었다. 최초의자매결연사례인자알루이스와아이젠휘텐슈타트의연간계획을보면, 4월에는동독대표단이 9월에는서독대표단이정책간담회를위해상대도시를방문하였다. 대표단의인원은 9명 - 154 -
동서독지자체의교류경험과한국에대한시사점 고상두 으로제한되었다. 이것은지자체기관간의교류협력이고, 주민이참여하는교류사업으로는양측이각 30명의문화공연단을상대도시의가장큰축제에우정출연시키기로합의하였다. 또한유엔의해를맞이하여평화를위한시민토론회를개최하기로합의하였다 (Bundesministerium für Innerdeutsche Beziehungen 1986, 255). 이러한상호방문행사에소요되는비용분담은상호주의원칙에따라협정문에명기하였다. 그방식은대체로방문측이여비를부담하고, 초청측이체재비를부담하는것이다. 특히이러한상호주의적비용분담원칙은최초의동서독자매결연이체결된 1986년에때맞춰동서독정부간에합의된문화교류협정에공식적으로명문화됨으로써모든관련사업에서더욱구속력을가지게되었다. 2. 교류협력의특징 동서독의자매결연은몇가지흥미로운특징을보이고있다. 첫째, 먼저대도시간에체결되었고, 차츰소도시로확대되었다. 그이유는동독의경우비교적생활수준이높은대도시가자매결연의주축이되었으며, 동독의 14개도청소재지가모두서독과자매결연을맺었다. 다만동베를린은서독과자매결연을맺지않았으며, 그대신인근의포츠담이서독의수도인본과자매결연을맺었다. 1988년초에접어들면서자매결연은중소도시로확대되기시작하였고, 베를린장벽붕괴이후에는군단위의자매결연도이루어졌다 (Winters 1999, 449). 둘째, 1989년까지성사된 62개의자매결연협정에서명한서독의지자체를집권정당별로보면사민당이집권하고있는도시가 41개로압도적으로많고, 기민 / 기사당은 15개에불과하다. 해당기간에서독의정당구도에서기민 / 기사당이사민당보다우월했다는점에서볼때, 동독정부가이 - 155 -
IDI 도시연구 제 14 호 (2018.12) 념적적대감이덜한사민당을선호하였다는것을알수있다. 최초의도시자매결연도서독사민당의라퐁텐자알란트주지사의제안으로성사되었던것이다 (Hüttmann 2011, 2). 셋째, 자매결연은역사적, 경제적, 문화적공통성에기초하여이루어지는경우가많았다. 한자동맹에속하였던항구도시인뤼벡과비스마르, 킬과슈트랄준트, 브레멘과로스톡의경우에는역사적배경이중요하게작용하였고, 가톨릭이강한도시라는종교적배경에의해에르푸르트와마인츠가자매결연을하였고, 이차대전에의해크게파괴되었던함부르크와드레스덴, 뉘른베르크와게라, 루드빅스하펜과데사우는전쟁피해의아픔을안고있는도시라는공통점을가지고있다. 산업적공통성이자매결연의계기가된경우로는석탄철강도시인딜링엔과호이어스베르다, 신발산업도시인코른베스트하임과바이센펠트, 국제박람회도시인하노버와라이프치히가있다. 대학간의자매결연이도시간자매결연으로발전된사례로칼스루에와할레가있고, 접경도시간의사례로는호프와플라우엔이있다. 3. 교류협력의추진요인 동서독간에지자체자매결연이성사되고추진된데에는네가지요인이중요하게작용하였다. 이들영향요인중에서가장결정적인요인은국제정치적인변화이다. 1985년봄에고르바초프가소련공산당서기장이되면서동서냉전구도에변화가일어나기시작하였다. 1985년 11월고르바초프가주최한소련공산당중앙위원회최고회의는지방수준의국제협력을공식적으로허용하였고, 이러한결정은소련의영향권에있던동독의태도변화에도영향을끼쳤다. 그리하여이틀후서독의라퐁텐주지사가동베를린을방문하여최초의동서독자매결연을제안했을때, 호네커 - 156 -
동서독지자체의교류경험과한국에대한시사점 고상두 의호의적인승낙을받을수있었던것은종주국소련의개혁정책때문이었다 (Pawlow 1990, 27). 지자체교류협력에긍정적인영향을미친두번째영향요인은 1987년 9월에이루어진호네커의서독방문이다. 이방문은제4차정상회담으로서그동안서독은동독과 3차례정상회담을하였으나, 동독을대등한국가로인정하지않는다는원칙에따라양국수도에서만난적이없었다. 하지만, 1987년에는호네커서기장을서독의수도본으로초청하여정상회담을하였으며, 동독의국기가게양되고, 동독의국가가연주되는등의전상국빈방문의형태로이루어졌다. 이회담에서동서독정상은공동성명에서지자체간의교류협력을지지한다는입장을밝혔다 ( 고상두 2001, 106). 세번째로동독이지자체교류협력에긍정적인태도를취하게된계기는동독의국내정치적인상황변화이다. 1987년이후동독에서는주민들의정치적불만이점차커지기시작하였고, 반체제인사들도늘어났다. 이러한상황에서동독정부는지자체교류협력이일종의불만배출기능을하고, 주민들이제기하는서독으로의자유통행요구를어느정도충족시킬수있을것으로보았다 (Klaus 1994, 28). 마지막영향요인으로는지자체자매결연을대서독평화공세의기회로활용하려는동독정부의인식변화이다. 동독지도부는서독과의교류협력행사에서동독체제에대한정치적선전을널리할수있는기회를찾았다. 이러한차원에서자매결연협정문에평화공존등과같은정치적이슈를명시하였고, 동독의대표단들은서독으로출발하기전에평화공세방안에관한교육을받았다. 다시말하자면, 동독정부의정책노선에대한서독주민의이해도를높이고, 동독의평화애호주의를널리확산시키도록지시를받은것이다 (Pawlow 1990, 37). - 157 -
IDI 도시연구 제 14 호 (2018.12) IV. 지자체교류협력의성과 1. 독일통일에대한기여 동서독지자체교류협력의긍정적인효과라면독일통일에기여했다는점이다. 물론이러한효과는긴시간이지난후에나타났지만, 지속적인접촉을통하여민족동질성을유지하는사회적통합노력이정치적통일로연결될수있을것이라는서독정부의구상이결국결실을거두게된것이다. 더구나독일의통일이흡수통일형태로가능했던이유는인적교류를통해동독주민들에게자유민주주의와부유한서독의실체를확인시켜줌으로써서독체제로통일하고싶게만들었기때문이다 ( 이한희 2017, 230). 서독은지자체교류협력사업을직접적으로독일통일을달성하는데에유리하게활용하려는의도는없었지만, 1950년대이후성공적으로진행된프랑스와의화해협력경험이동서독에도적용될수있을것이라고기대하였다. 독일과프랑스의경우에는지자체수준에서추진된장기적인인적교류와상호방문이양국협력과유럽통합에크게기여하였던것이다 (Röper 1989, 40). 다시말하자면, 동서독지자체간의자매결연이직접적으로통일을가져온것은아니다. 독일통일의결정적인요인은국제정세의변화, 서독정부의정치적결단등이다. 하지만동서독교류협력이최소한통일을위한토양을마련하는데에는기여를하였다. 이러한사실은베를린장벽붕괴이후동독주민들을대상으로실시한설문조사에서잘드러나고있다. 통일에대한동독주민의태도를조사한여론조사에의하면, 서독과의자매결연을맺은도시주민이다른도시주민보다통일에대해긍정적인시각을보여주고있는것이다 (Lisiecki 1996, 110). 동서독의지자체교류협력은독일의통일을공고화하는데에도기여하 - 158 -
동서독지자체의교류경험과한국에대한시사점 고상두 였다. 베를린장벽이붕괴한직후많은동독주민들은서독과의통일을원했다기보다, 동독의독자적인개혁과존립을기대하였다. 동서독간에는여전히편견이존재하였고, 동독주민들은통일이후의삶에대한두려움과우려가있었다. 하지만, 국경개방이후폭발적으로늘어난서독방문이그러한심리적장애를제거하는데에중요한기여를한것이다. 장벽붕괴이후동독주민의서독방문은자매도시를중심으로조직되었다. 서독측은동독의자매도시시민들을초청하는데에재정및행정적으로많은지원을하였다. 함부르크는특별열차를편성하여약 1,000명의드레스덴시민을초대하였고, 바이마르시민 2,000명은 30대의버스로자매도시인트리어를방문하였다. 거의모든자매도시가이러한방식으로수십만명의동독주민을초청하였다. 자매결연덕분에동독주민들이매우수월하게대규모로서독을방문할수있었던것이다 (Lisiecki 1996, 107). 동서독국경이열리고자유통행이허용된이후에는그동안제한적으로이루어졌던인적교류가체육, 문화, 청소년, 교육등다양한분야에서본격적으로이루어졌다. 즉지자체교류협력의진정한취지인자유로운인적교류와방문이장벽붕괴이후부터가능해진것이다. 1990년 10월 3일독일통일의날은동서독자매도시가서로보다긴밀한협력을시작하는계기가되었다 (Manfred Klaus 1994, 1). 서독의도시연합회는통일의날기념식을준비하는지자체를대상으로설문조사를한결과응답한 140개도시중에서 40개도시가동독의자매도시와함께기념행사를할것이라고답했다 (Calabretta 2015, 2). 지자체간교류협력은통일이후에도동서독지역간의사회통합에기여하였으나, 1990년대중반이후부터점차시들해졌다. 특히양지역주민들의마음속에있던심리적장벽이점차사라지면서독일에서의자매결연은그의미를잃기시작하였고, 동서독간의교류협력관계는공간적으로확장되어유럽의화해와협력에기여하고있다. 예를들어에랑엔과예나는 - 159 -
IDI 도시연구 제 14 호 (2018.12) 러시아의블라디미르 (Vladimir) 와삼각협력으로확대되어독일과러시아 의인적교류를활성화하고있다 (Liffers 2010). 2. 동독지방행정의재건에대한기여 통일이후동서독지역의교류협력은양적으로크게늘어났을뿐만아니라, 질적으로도과거의형식적이고상징적인수준을넘어서서실질적인관계로발전하였다. 통일이후동독의경제재건이가장시급하였지만, 동독의지방행정도빠른시일내에체계화되어야했고, 이를위해외부의도움이필요하였다. 동독에서는중앙집권체제의유산때문에지방행정인프라가매우미흡하였다. 통일로인하여동독은갑작스럽게민주주의와지방자치로전환을하게되었고, 새로운조직, 절차, 기구, 법규정등이필요하였다. 이러한상황에서서독의지자체는동독지역의지방행정조직구축에커다란기여를하였다. 그리고때때로중앙정부의동독지역재건정책에서자매지자체의입장을대변하기도하였다 ( 한부영 2015). 서독이동독을위해제공한행정지원은 3가지범주로나눌수있는데, 재정적지원, 행정인력의지원, 업무지식의지원이다. 서독의지자체는이러한유형의지원을통해동서독의행정통합을달성하는데에크게기여하였다. 첫째, 재정지원이란동독의지자체를위해제공한각종물품과금전을말한다. 여기에는주로지방병원등을위한재정적후원, 지방문화시설에대한지원, 오더와엘베지역의홍수등과같은자연재해에대한지원등이있다. 서독의본은포츠담에게인도주의적물품을지원했는데, 병원과요양원을위한휠체어, 수술용침대, 일회용주사기, 의료진가운, 붕대등각종의료물품을지원하였다. 서독의신델핑엔 (Sindelfingen) 은동독의자매도시병원을위해후원금을모아돕는사업을하였고, 뉘른베르크는통 - 160 -
동서독지자체의교류경험과한국에대한시사점 고상두 일의날기념음악회수입을동독의자매도시인게라의시립극장에기부하였다 (Calabretta 2015, 3). 둘째, 인력지원이란서독의행정요원을동독에파견하여지방행정실무와교육을제공하는것이다. 1990년에서 1994년까지통일이후 5년간약 5,000명의서독지방공무원들이동독으로가서행정업무를지원하였다. 이들은대부분지방고위공무원으로서동독에몇달씩파견되었다 ( 이윤진 장용철 2016, 48). 뤼벡의경우에는시의인사부장과재정부장이자매도시인비스마르에가서지방행정실무교육을제공하였다. 셋째, 업무지식지원이란자문과세미나등으로행정노하우를제공하는것이다. 이러한지원을통해서서독의지자체는행정규범을소개하고, 고용계약과예산계획등의공용문서작성요령에관한도움을제공하였다. 그리하여서독의지방행정체제가동독지역에이식되는데에중요한역할을하였다. V. 교류협력의한계 1. 정치적차원의한계 동독정부는지자체교류협력을정치적인목적으로활용하려는의도가강했다. 그리하여지자체교류협력을외교적수단으로활용하였고, 그결과국가적목표가지자체의사업목표보다우선시되었다. 지자체협정문을보면그러한정치적의지를쉽게발견할수있는데, 서문에서평화와군축등의목표가친선우호등의목표보다항상먼저기술되었다. 그리고평화공존, 헬싱키협약정신, 동서독기본조약등을언급함으로써동서독관계를국제화시키려고노력하였다. 시간이지날수록협정문에서동독이요 - 161 -
IDI 도시연구 제 14 호 (2018.12) 구하는정치적용어는줄어들었지만, 그렇다고서독이요구하는주민참여와인적교류가강조된것도아니다. 자매결연사업은동독공산당최고지도자의결정사안이었다. 자매결연도시의선택에서최종승인까지호네커서기장이직접결재하였으며, 최초의자매결연이체결된도시또한자신의고향이었다. 그는동베를린의자매결연을거부하였다. 그리고, 서독이동독주민의독자적인국적권을인정할것과잘츠기터에있는동독인권조사처를폐쇄할것을요구하는내용을자매결연협정문에담을것을지시하였다 (Von Weizsäcker 1990, 50). 자매결연을체결하고실행하는모든과정은동독의비밀경찰인슈타지의감시와통제하에진행되었다. 동서독지자체간에합의된협정문은사전검토되었고, 동독참가단의선발에는슈타지의승인이필요했다. 그리하여서독에잔류할의사가없고, 동독을위한정치적인선전에능한체제순응적인주민만이선발될수있었다. 예술단에참가하는단원들은소속단체의 1차승인을받아야하며, 체제비판적인예술인은배제되었다. 그리고서독의퇴폐적인예술에물들지않을것을교육받았다. 동독의참가단은단체로호텔이나공공숙박시설을이용하였으며홈스테이는허용되지않았다. 그리고슈타지요원이동행하여참가단의언행을감시하였다. 당연히서독의동독방문단도슈타지의감시를받았다 (Gornig 1990, 154). 동서독간의접촉은항상지자체기관을통해공식적으로이루어졌다. 주민단체간의직접접촉과연락은허용되지않았다. 동독의대표단은소규모이며정치간부에의해구성되었다. 상호교류행사는연간 3-5회정도로제한되었으며, 매우형식적이고의전을강조함으로써자유로운개인적접촉과의견교환의가능성을최소화하였고, 교류행사에관한언론보도또한극히제한하였다. 그리하여, 동서독간의교류협력은공식예방의수준을크게벗어나지못하였다 (Klaus 1994, 37). 슈타지에게지자체교류협력사업은대서독첩보작전의통로로이용할 - 162 -
동서독지자체의교류경험과한국에대한시사점 고상두 수있는좋은기회였다. 하지만그러한기회를적극적으로활용하지는않은것으로보인다. 통일후공개된슈타지내부문서에의하면최고책임자인에리히밀케 (Erich Mielke) 는지자체교류협력사업을실행하는과정에서서독주민을비공식첩보원으로포섭하는시도를금지하는명령을내렸다. 아마그이유는동독정부가서독과의꾸준한관계개선노력에서보여주고있는선의가훼손될것을우려한것으로보인다 (Herbstritt 2007, 240). 동서독자매결연의정치적한계는독불자매결연과비교하면확연하게나타난다. 서독은연합국의통치하에있던 1948년에이미프랑스와의지자체공동연합회의에서양국민의화해협력을위해노력하기로약속하였다 (Münch 2006, 203). 그이후양국지자체간의교류협력이급증하였다. 1990년에독일과프랑스간에 2,100개의협정이있었던반면에, 1989 년에동서독은 62개에불과하였다. 물론독불간의협정은 40년의성과이고, 동독은 4년에불과하다는차이가있다. 하지만, 참여인원이라는관점에서볼경우, 여전히큰차이를보이고있다. 1989년에약 4,000명의동서독주민이교류협력행사에참여한반면에, 독일과프랑스는 1979년한해에 332,760명이참여하였다 (Woesler 2006, 413). 질적인평가에서도독불교류협력에서는청소년의참여가 60% 에이르며, 청소년캠프, 청소년신문과라디오의공동제작, 홈스테이등의다양한프로그램이있었다. 하지만동서독의경우에는청소년교류가거의성사되지못하였고, 슈베린과부퍼탈의자매결연에서는협정문에아예청소년교류행사개최를명시하지못하였다. 반면에평화와군축심포지엄은상대적으로활발하였고, 동서독의고위장성들이서로만나는기회도마련되었다 (Zimmermann 1989, 705). - 163 -
IDI 도시연구 제 14 호 (2018.12) 2. 법적차원의미비점 동서독간의자매결연이국제적교류협력에해당하는지에관해오랫동안법적논란이있었다. 이러한논란은동독이외국에해당하는지에관한논쟁과연관된다. 만일서독에게동독이외국이라면동서독의지자체교류협력은국경을뛰어넘는성격을가지기때문에국제법적인행위에해당하는것이다. 그리고서독헌법에서외교정책권한에관한규정에해당하는 32조에의하면대외관계사무는연방정부의권한이다. 즉지자체는국제조약을체결할수있는주체가아니며, 중앙정부만이그러한권한을부여받고있는것이다. 그러므로만일동서독이국제적관계라면서독의지자체는동독과의교류협력협정문을작성할때, 국제법적인구조와형식을갖추고있는지등에관하여외교부의검토와자문을받을필요가있다. 하지만서독의연방헌법재판소가동독을외국으로간주해서는안된다는판결을내림으로써그에관한논쟁은종식되었고, 동서독자매결연은국제사무가아니라는결론이내려졌다. 따라서동서독의지자체협정은국제조약의기본요건을따르지않고있다. 왜냐하면국가간협약이아니라지자체간협약이기때문이다. 그대신지자체는공공기관으로서공적인대외업무를수행할권한은있다. 하지만그러한권한이두개의독일국가상황에서법적제약을받고있는것이다. 왜냐하면동서독이특수관계에있기때문에상호간의자매결연을국내적공공사무로도볼수없기때문이다. 다시말하자면동서독도시간의교류협력은서독내도시간의교류협력과성격이다르다는것이다. 게다가동서독의지자체가해당국가에서누리는법적지위가서로다르기때문에상호교류협력행위에제약이발생할수밖에없다 (Gornig 1990, 155). 동독에서는민주적중앙집중제의원칙에따라공산당의결정은정치국과중앙위원회에서이루어지며, 이러한당의결정은헌법이나인민의회 - 164 -
동서독지자체의교류경험과한국에대한시사점 고상두 의결정보다상위에있다. 공산당이모든국가기관의정점에있는것이다. 지자체의법적권한을보면 1949년 10월헌법에는그나마지방의자치권이명시되었으나, 1952년 7월개정헌법에서지방은사회주의국가권력의도구로규정되면서완전히공산당의통제하에놓이게되었다. 이러한이유때문에동서독의교류협력은자치권을가진서독의지자체와독자적인결정이제한된동독지자체간의관계속에서진행되어온것이다 (Gornig 1990, 167). 이러한배경때문에자매결연협정문은정치적의무는있지만, 법적강제력은없는의향서로간주된다. 즉상호간에특별히합의한사항에대해서만효력을발휘하는것이다. 일종의신의성실 (bona fides) 의원칙을따르는협약이며, 정치적인협력의지의산물이라고보아야한다 (Schnakenberg 1990, 373). 그러므로자매결연협약에대해중앙정부는책임을지지않고, 개별지자체가책임지는것이다. 하지만서독은연방국가로서사회문화부문은지방의고유사무에해당하므로연방내독부의승인이나허가없이동독지자체와의자매결연을독자적으로결정할수있는반면에, 동독은당중앙에종속되어있기때문에상호간에자발적이고자유로운교류협력에제약이생기는것이다 ( 심익섭 1992, 274). VI. 한국에대한시사점 독일의지자체교류협력사례는실행과정상의몇가지한계를보여주면서우리에게필요한극복과제를제시하고있다. 무엇보다도서독의입장에서동독의지자체와자매결연협정을체결하는것이그리쉽지는않았다. 중앙집권적동독에서호네커공산당서기장의결정이중요하였던것처럼, 우리의경우에도김정일혹은김정은등의최고지도자와연관성이 - 165 -
IDI 도시연구 제 14 호 (2018.12) 있는도시와교류협력사업을선정하여접근하는전략이필요하다. 또한남북한간에자매결연협정의체결에성공하더라도, 교류협력행사는형식에치우치게되고, 주민간의진정한인적교류는제한될수있다. 따라서교류협력사업이남북한의사회통합에큰효과를발휘하기위해서는청소년교류와체육교류를적극적으로추진할필요가있다. 독일의경우에는이들사업이동독의반대에직면하였지만, 우리의경우에는이들사업을사회문화교류의역점사업으로활용할필요가있다. 그리고남북한간의체육교류에사회인, 학생, 청소년선수들이참여하는대중적인행사를추진하여, 체육교류의접촉면을확대할필요가있다. 그런데남북한지자체교류협력의과거실적과미래계획을보면, 경협이상당한비중을차지하고있다. 특히남한의지자체들은북한과지역특산물을교역하는등지역경제활성화의방안으로교류협력을활용하려고한다. 하지만현재와같이북한에대한국제사회의제재가당분간지속될가능성이높은상황에서, 북한과의협력에서경제분야를강조하게되면외부제약에의해지자체교류협력이동력을잃을수있다. 따라서동서독의사례와같이중앙정부는경제분야의협력을맡고, 지자체는비경제적분야에집중하는특성화된역할분담이필요하다고본다. 서독의지자체는사회문화부문에서는교류협력의자율성을가졌다. 반면에우리의 남북교류협력법 은지자체의주도적역할을제한하고있다. 동법제2조는교류협력의주체를주민으로규정하고있으며, 이에따르면지자체는통일부가인가한법인이나시민단체를통해대북사업을추진할수밖에없으며, 실체가모호한대북사업단체에의존하는부작용도발생할수있다 ( 이한희 226). 따라서우리의경우현행법을개정하여지방자치단체가독자적으로혹은통일부와동반자적관계에서대북사업을추진할수있도록할필요가있다. 비용분담에서는상호주의원칙을따르는것이교류협력의지속성을높 - 166 -
동서독지자체의교류경험과한국에대한시사점 고상두 이는길이다. 동서독은사회문화교류를위한모든협정에서초청자측은현지비용을, 방문자측은여비를부담하는것으로규정하고있다. 우리의경우에도남북한지자체교류가퍼주기비난을받지않기위해서동일한비용분담의원칙에합의하고이를엄격히지켜야할것이다. 이러한태도를견지하는것이지자체교류협력에대한우리국민들의지속적인지지를확보하는데에도움이되기때문이다. 그리고남북한간에상호비용분담의균형이잘준수되고있는지를감독하는위원회를설치하고, 주기적으로감독결과를납세자인국민들에게보고하는제도적장치를마련할필요가있다. VII. 결론 이글에서는동서독지자체교류협력의실태와역사적배경을살펴보고, 한반도에대한시사점을얻는데도움이될수있는성과와한계에대하여검토하였다. 동서독의도시간자매결연을역사적관점에서고찰하면, 냉전시기에는동독이적극적이었으나, 데탕트시기에는서독이적극적이었고, 그결과 1986년최초의자매결연이체결된이후대체로동독이원하는방향으로교류협력사업이진행되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서독으로서는나름대로의성과를얻었고, 동시에한계를절감해야했다. 동서독자매결연의성과를검토한결과, 민족통일에직접적으로기여한것은아니지만, 장기적으로통일에유리한사회적기반을조성하는효과를발휘했으며, 베를린장벽의붕괴이후통일을불가역적으로만드는데에일조를하였다. 이러한관점에서우리의경우에도남북한중앙정부수준의교류협력을보완하는차원에서지방수준의도시간자매결연을적극적으로추진할필요가있다. 이러한노력은민족의동질성을높여서장기 - 167 -
IDI 도시연구 제 14 호 (2018.12) 적으로는보다원활한통일을이루는데에도움이될것이다. 또한동서독의자매결연은통일직후빠른시일내에동독의행정을재건하는데에기여하였다. 즉서독지자체의재정적, 인적, 그리고전문지식의지원이동서독행정통합에큰도움이되었던것이다. 남북한의지자체교류협력사업은 1998년제주도에서민관이협력하여북한에감귤보내기운동을벌여추진한것이최초이다. 이후 10년동안각지자체는자체의남북협력기금을조성하고전담부서를만들어북한과다양한분야에서교류협력사업을추진하였다. 예를들어경기도는북한의결핵환자치료사업과농축산분야에서의협력사업을하였고, 강원도는북강원도지역에서산림병해충퇴치를위한공동방제사업을실시하였다. 하지만 2008년금강산관광객피격사건과 2010년천안함사건이발생한후단행된 5 24 조치에의해북한방문, 교역, 투자, 지원등이금지되었고, 이와함께지자체의남북교류협력사업도중단되었다. 최근남북한간에대화와협력의분위기가조성되면서많은지자체들이북한과의교류협력에관심을가지고노력을기울이고있다. 독일의사례가보여주는것처럼한국에서지자체의교류협력이한반도의통일과통합에기여하기위해서는무엇보다도남북한주민들이최대한많이참여할수있는사업을기획하고추진할필요가있다. 이처럼지자체의교류협력이주민참여형으로진행될때, 중앙정부에서추진하는국가간교류협력사업과차별되는의미를갖게될것이다. 투고 ( 접수 ) 일 : 2018.10. 8. 심사 ( 수정 ) 일 : 2018.10.31. 게재확정일 : 2018.12.10. - 168 -
동서독지자체의교류경험과한국에대한시사점 고상두 참고문헌 고상두. 2001. 적대적협력관계 : 동서독과남북한정상회담의비교분석. 협상연구 6(2): 95-110. 김태일. 2000. 동서독간도시자매결연의교훈과남북한지방사이의교류협력가능성. 통일시론 6: 135-147. 심익섭. 1992. 독일통일과정에서지방자치의역할 : 동서독지방자치단체간의교류관계를중심으로. 한국행정학보 25(4): 263-287. 이윤진 장용철, 2016. 독일통일과정과지방자치단체의역할 : 남북한통일에의함의. 북한학보 41(2): 39-60. 이한희. 2017. 지방자치단체의남북교류협력촉진을위한법적제도개선에관한연구 : 경기도사례를중심으로. 지방행정연구 31(1): 213-241. 장인봉. 2004. 남북한경제교류협력을위한도시정부의대응방안. 한국정책연구 4(1): 131-154. 채경석. 2004. 남북한지방자치단체의교류협력에관한탐색연구. 정치정보연구 7(2): 47-80. 한부영. 2015. 동서독지방자치단체교류협력사례. 지방행정 64(745): 1-2. Bundesministerium für Innerdeutsche Beziehungen. 1986. Die Entwicklung der Beziehungen zwischen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und der Deutschen Demokratischen Republik 1980-1986. Bonn: BIB. Calabretta, Costanza. 2015. Deutsch-deutsche Begegnungen. Die Städtepartnerschaften am Tag der Deutschen Einheit. Deutschland Archiv 31 Aug. http://www.bpb.de/geschichte/zeitgeschichte/ deutschlandarchiv/211058/deutsch-deutsche-begegnungen-diestaedtepartnerschaften-am-tag-der-deutschen-einheit( 검색일 : 2018년 11월 26일 ) Gornig, Gilbert. 1990. Die innerdeutschen Städtepartnerschaften, Eine rechtliche Würdigung. Maria Haendke-Hoppe et al (ed.), 40 Jahre Innerdeutsche Beziehungen, 153-178. Berlin: Duncker & Humboldt. Grunert, Thomas. 1981. Langzeitwirkungen von Städte-Partnerschaften: Ein Beitrag zur europäischen Integration. Strassbourg: N.P.Engel Verlag. - 169 -
IDI 도시연구 제 14 호 (2018.12) Herbstritt, Georg. 2007. Bundesbürger im Dienst der DDR-Spionage: Eine analytische Studie. Göttingen. Hüttmann, Jens. 2011. Den Anderen wirklich sehen, Die innerdeutschen Städtepartnerschaften vor und nach 1989. Deutschland Archiv 8 Feb. http://www.bpb.de/geschichte/zeitgeschichte/ deutschlandarchiv/54112/staedtepartnerschaften?p=all( 검색일 : 2018 년 11월 26일 ) Klaus, Manfred. 1994. Städtepartnerschaften zwischen ost- und westdeutschen Kommunen. Ein Medium des Bürgerdialogs, interkommunaler Solidarität und verwaltungspolitischer Integration. Berlin: Graue Reihe der KSPW. Liffers, Lutz. 2010. Blick/Wechsel. Deutsch-deutsche Städtepartnerschaften 1986 bis heute. In Im Blick: Deutschdeutsche Städtepartnerschaften Der Beitrag der Kommunen im Einheitsprozess, edited by Freie Hansestadt Bremen, 12-31. Bremen: Bremen Stadt. Lisiecki, Gabriel. 1996. Deutsch-deutsche Städtepartnerschaften: ihre historische Entwicklung und Bedeutung. Jena: Jena University Press. Münch, Claudia. 2006. Emanzipation der lokalen Ebene?: Kommunen auf dem Weg nach Europa. Wiesbaden: VS Verlag. Pawlow, Nicole-Annette. 1990. Innerdeutsche Städtepartnerschaften: Entwicklung, Praxis, Möglichkeiten. Berlin: Verlag Gebr. Holzapfel. Röper, Erich. 1989. Deutsch-deutsche Städtepartnerschaften-wozu und wohin? Das Recht im Amt 2: 40-45. Schnakenberg, Oliver. 1990. Innerdeutsche Städtepartnerschaften, Rechtliche Aspekte grenzüberschreitenden kommunalen Handelns. Baden-Baden: Nomos Verlagsgesellschaft. Stent, Angela E. 1999. Russia and Germany Reborn. Unification, The Soviet Collapse, and the New Europe.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Von Weizsäcker, Beatrice. 1990. Verschwisterung im Bruderland: Städtepartnerschaften in Deutschland. Bonn: Bouvier Verlag. Winters, Peter Jochen. 1999. Innerdeutsche Beziehungen. In Handbuch zur deutschen Einheit, edited by Werner Weidenfeld, 442-454. - 170 -
동서독지자체의교류경험과한국에대한시사점 고상두 Frankfurt: Campus Verlag. Woesler, Dietmar. 2006. Städtepartnerschaften in neuem Licht. In Europafähigkeit der Kommunen: Die lokale Ebene in der Europäischen Union, edited by Ulrich Alemann et al., 412-433. Wiesbaden: VS Verlag. Zimmermann, Hartmut. 1989. Deutschland 1989: Probleme und Tendenzen nach vierzig Jahren Zweistaatlichkeit. In Deutschland-Handbuch, Eine doppelte Bilanz 1949-1989, edited by Werner Weidenfeld et al., 699-718. Bonn: Bundeszentrale für politische Bildung. Partnerstädte. Altel Liebe. Der Spiegel. 1986. 9. 1. http://magazin.spiegel. de/epubdelivery/spiegel/pdf/13518534( 검색일 : 2018 년 11 월 26 일 ) - 171 -
IDI 도시연구 제 14 호 (2018.12) 국문초록 동서독지자체의교류경험과한국에대한시사점 고상두 ( 연세대학교지역학협동과정교수 ) 이글은동서독의지자체교류협력의실태와역사적배경을살펴보고, 그성과와한계에대하여검토하였다. 동서독의도시자매결연을역사적으로보면, 냉전시기에는동독이적극적이었으나, 데탕트시기에는서독이적극적이었고, 그결과동서독의자매결연은대체로동독이원하는방향으로진행되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서독은일정한성과를얻었고, 동시에한계도경험했다. 동서독자매결연이독일통일에직접적으로기여한것은아니지만, 장기적으로민족의동질성을높임으로써통일에유리한사회적기반을조성하였으며, 베를린장벽의붕괴이후통일을불가역적으로만드는데에기여하였다. 또한동서독의자매결연은통일직후빠른시일내에동독의행정을재건하는데에기여하였다. 하지만독일의사례는교류협력의한계도보여주고있다. 무엇보다도동독의지자체와자매결연협정을체결하는것이쉽지않았다. 또한주민간의진정한인적교류가제한되었다. 동서독의경우, 초청자측은현지비용을, 방문자측은여비를부담하였다. 우리의경우에도남북한지자체교류가퍼주기비난을받지않기위해서는균형적비용분담의원칙에합의하고지키는것이필요하다. 주제어 : 동서독, 지자체, 교류협력, 통일, 사회통합 - 172 -
동서독지자체의교류경험과한국에대한시사점 고상두 Abstract Local Authorities Exchange-Cooperation between East and West Germany and its Implications on the Korean Peninsula Ko, Sangtu(Professor, Area Studies, Yonsei University) This article examines the historical background of exchangecooperation at the local level between East and West Germany, and its performance and limitations. From a historical viewpoint, East Germany took a positive view on the sisterhood relationship during the Cold War era, but changed it in the process of detente. The local exchange-cooperation between East and West Germany had fruitful outcomes as well as limitations. The sisterhood ties created a social basis favorable to unification by strengthening the national feeling of unity in the long term. After the fall of the Berlin Wall, the financial and human support of Western sister cities contributed to the reconstruction of the administrative structure in East Germany in a very short period. Nevertheless, the German case shows some limits in exchanges and cooperation. Above all, it was not a facile matter to conclude a sisterhood agreement with East German counterparts. Human contact was very limited. In terms of cost sharing, the hosts paid local expenses while the guests paid for their own travel - 173 -
IDI 도시연구 제 14 호 (2018.12) expenses. This balanced and reciprocal cost sharing principle should likewise be adopted in the Korean peninsula. Key words: East and West Germany, local authority, exchange and cooperation, unification, social integration - 17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