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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7 한말과 식민지시기 재판제도의 변화와 민사분쟁* 재판통계의 분석을 중심으로 66) 文竣暎** 목차 Ⅰ. 서론 Ⅱ. 병합 이전의 재판제도와 재판실무의 변화 1. 민사재판 관련 법령의 전개 2. 舊 裁判所 시기의 민사재판의 실태 : 1895~1906 3. 1908년 이후 신 재판제도하의 재판실무의 변화와 일본민법의 침투 Ⅲ. 병합 이후의 민사사건과 분쟁해결시스템의 이용 실태 1. 민사사건의 양적 규모 2. 민사소송당사자의 인구 구성 3 민사소송사건의 종류 4. 민사분쟁의 처리 실태 Ⅳ. 맺음말 [국문 요약] 한국사회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갑작스럽게 그리고 타율적으로 일본의 근 대법체제의 전면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민사재판관련 통계를 이용하여 일본 민사법 및 민사사법제도와 접촉한 시기를 전후하여 민사분쟁의 양상, 민사재판의 방식, 민사 분쟁 해결제도의 이용실태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한국은 1895년에 공포한 裁判所構成法과 民刑訴訟規程을 통해 부분적으로 서구형 재판제도를 받아들였으나, 민사재 * 이 논문은 부산대학교 자유 과제 학술연구비(2년)에 의해 연구되었음 ** 부산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부교수

248 法史學硏究 第46號 판의 실질 면에서는 전통적인 詞訟이 연속되고 있었다. 일제의 국권 침탈 후 한국사회는, 明 治日本에서 20~30년에 걸쳐 일어난 법제 변화를 훨씬 짧은 시간에 겪어야 했다. 식민지 민 사사법제도에는 이른바 식민지의 특수사정을 고려하여 채용한 특별한 장치들이 담겨 있었으 나, 그러한 제도와 정책들이 외견상 어떤 두드러진 결과를 낳지 않은 것 같다. 재판통계에 의 거하면, 적어도 민사사건의 양이나 분쟁해결제도의 이용 양태, 사건처리의 결과는, 비록 몇 가 지 점에서 유의미한 차이가 없지 않지만, 매우 일찍부터 동시대의 일본의 그것과 닮아있었다. 그러나 이를 식민지 통치권력의 일방적인 정책추진의 결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본 고에서 살펴본 한말의 상황은, 한국사회 내에 이미 그만큼의 분쟁들이 생산될만한 에너지가 잠재해있었고, 새로운 제도를 신속하게 활용할 준비태세가 갖추어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민사사건이 급증하기 시작한 1906년 이후 약 10년 동안의 법과 사회의 구조적 변 동과 그 동학을 해명하는 것이 앞으로 중요한 과제라 할 것이다. [주제어] 朝鮮民事令, 民事訴訟法, 明治民事訴訟法, 裁判所構成法, 朝鮮總督府法院, 裁 判統計, 司法近代化, 植民地 民事司法制度 I. 서론 이번 심포지엄의 주제 중 하나는 민사분쟁해결시스템의 구축과 운용 실태에 초점을 맞추어 근대 민법의 초기 수용 과정을 검토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의 역사경험에서 많은 주제들이 다루어질 수 있겠지만, 이 글에서 필자는 판결자료와 재판통계자료를 활용하여 한국사회가 근대 민법과 접촉한 시기의 민사분쟁의 양상과 민사재판제도의 이용실태를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사회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일본 근대법체제의 전면적 인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한국에 근대적 민법이 도입된 것은 1912년 3월 18 일에 공포된 朝鮮民事令에 의해서이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이미 보호국기 (1905.11~1910.8)부터 민사재판, 부동산법제, 관습조사, 법학교육 등을 통해 일 본민법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있었다.1) 1894년 음력 12월 12일(양력 1895. 1) 근대초 한국에서의 일본민법 계수에 관해서는 鄭鍾休, 韓国民法典の比較法的研究 (創文 社, 1989) 제1장.

한말과 식민지시기 재판제도의 변화와 민사분쟁 24 9 1. 7.)에 종묘에 서고한 홍범14조를 통해 고종은 민법과 형법을 제정하여 인민 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것이라고 선언했으나, 이후 정부 내에서 민법제정을 위한 실질적인 조치가 취해지지는 않았다. 사회 내에서는 서양법의 일부로서 민법의 존재가 소개되고 민법제정론이 제기되었고,2) 1900년대에 들어 여러 사 립학교의 법학교육과정을 통해 초보적인 민법교육이 행해지고 있었다.3) 그러 나 근대 민법의 개념 법리 제도가 현실의 법제와 재판실무에 영향을 끼치지 는 않았다. 재판제도의 경우, 1895년 음력 3월 25일(양력 4월 19일) 법률 제1호 로 공포된 裁判所構成法과 그 부속법령을 통해 근대적 재판제도 도입을 위한 서막이 올랐다. 그러나 재판제도의 실질과 운용의 면에서는 여전히 전통적인 재판 관례와 관념이 강고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러다가 1909년 12월 23일에 새 로운 재판소구성법이 제정되고 일본인 사법관들이 새로운 재판소에 대거 임용 됨으로써 재판실무가 일변하고, 일본민법의 실무상 계수 라고 부를 만한 사태 가 전개되었고, 1912년의 조선민사령을 통해 공식적으로 일본민법이 민사에 관 한 법원으로서 확립되었다. 따라서 민사분쟁해결시스템의 운용을 통한 민법의 수용 침투라는 측면에서 1895년 이후 한국에서 전개된 상황을 정리한다면, 다 음과 같은 세 가지 시기를 가지며 전개되었다 볼 수 있다. 즉 ① 외형적으로는 근대적 재판제도의 요소가 도입된 재판제도가 채용되었으나 소송당사자 및 재 판담당자의 관념과 재판의 실질의 면에서는 전통적 요소가 강고하게 작동된 시기(1895~1906), ② 1907년 재판소구성법에 의해 새롭게 재판소가 조직되고 재판담당자가 충원됨으로써 완전히 일본화된 재판실무를 통해 일본민법이 수 용되고 민사재판규범들이 정돈 재정렬된 시기(1908~1911), ③ 조선민사령의 제정을 통해 직전 시기에서 이루어진 것을 입법적으로 정리하고 일본민법과 민사소송법이 전면적으로 적용된 시기. 한국에서는 ②의 시기의 시작과 함께 2) 독립신문 1899. 8.12., 8.14. 민법론. 3) 사립학교에서의 법학교육은 1905년에 설립된 普成專門學校, 漢城法學校 등을 통해 본격적 으로 이루어지지만, 廣興學校에서 1900년에 3년 과정의 법률과를 두고 만국공법, 민법, 형 법, 행정법, 소송법, 대명률을 교육하였다( 皇城新聞 1900. 3.16. 學員募集廣告).

250 法史學硏究 第46號 민사분쟁해결시스템의 구조, 재판담당자의 성격, 재판실무 및 재판규범의 적용 등의 측면에서 앞 시기와 급격한 단절이 이루어지고 사실상 일본과 동시대적 인 상태에 마련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전 시기의 경험은 재판소 라 는 분쟁해결기관에서 소송 을 거친 판결 의 획득이라는 형식면에서는 뒤의 시 기의 것을 미리 접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내실은 매우 달랐다. 반면 明治前期 일본의 경우 민법전 시행 전에 20여 년 동안 단계적으로 법제를 정비하고 舊慣 을 조사하고 사법관과 법률가를 양성하고 또 분쟁해결시스템에서는 민사소송 제도와 별도로 勸解 제도4)를 운영하는 등 민법시행을 위한 준비기간을 가졌다. 하지만 한국은 일본과 같은 장기간의 준비 내지 완충기간을 갖지 못한 채 일본 의 법체계를 급속하고 또 타율적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필자는 최근 몇 년 동안 1895년부터 병합 직후의 시기까지의 민사판결서 자 료를 활용하여 민사사건의 종류와 내용, 재판실무, 재판규범의 처리 및 법적 논 증의 방식 등에서 나타나는 특징과 변화를 해명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해왔다.5) 분쟁해결시스템의 활용을 통해 민법의 수용 침투라는 점에서는 시기적으로는 앞에서 언급한 ②와 ③의 시기가 중요하며, 또한 사건의 종류와 내용, 민사관습 에 대한 취급을 포함한 법원의 판결례에 대한 내용적인 분석이 가해져야 할 것 이다. 다만 식민지법원의 판결례 및 관습법의 취급에 대해 자세히 논하는 것은 필자에게 맡겨진 주제의 범위를 벗어나며 또 그에 관해서는 이미 적지 않은 선 4) 권해제도의 본호 특집 논문으로 실린 하야시 마키고(林真貴子) 교수의 글을 참고하기 바란 다. 참고로 하야시 교수의 권해 관련된 연구로는, 林真貴子, 勧解制度消滅の経緯とその論 理, 阪大法学 181(大阪大学大学院法学研究科, 1996); 紛争解決制度形成過程における 勧解前置の役割, 阪大法学 186(大阪大学大学院法学研究科, 1997); 勧解から督促手続 への変化 最も利用された2紛争解決制度の考察, 法制史研究 48(法制史學會, 1998); 勧解制度選好の要因, 近畿大学法学 51-1(近畿大学法学会, 2003) 등. 5) 필자 나름대로 ②의 시기와 관련하여 재판실무, 민사사건의 종류, 관습법의 처리 문제를 다 룬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문준영, 경성공소원 민사판결원본철을 통해 본 민사분쟁과 재 판, 법학연구 22-1(충남대학교 법학연구소, 2011); 한말의 민사분쟁과 식민지 사법권력 : 관습에 관한 재판례를 중심으로, 법학연구 52-4호(부산대학교 법학연구소, 2011); 한말 법무보좌관제도 하의 재판사무의 변화, 법학연구 39(경북대학교 법학연구원, 2012).

한말과 식민지시기 재판제도의 변화와 민사분쟁 251 행 연구가 있으므로 그것들을 참고하기 바란다.6) 이 글에서는 그 동안의 연구 에 기초하여 ①과 ②의 시기에 변화된 재판제도하에서 재판실무와 판결의 실 태를 살펴보고, 조선민사령이 시행된 ③의 시기의 분쟁해결제도의 이용 및 사 건처리에서 나타나는 양상과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아직 연구가 미진하기 때문에 일단은 공식적인 재판통계자료에 의존하여 식민지적 사법제도가 제공 하는 분쟁해결제도가 어떻게 또 얼마나 활용되고 있었는지를 확인해보고자 한 다. 따라서 이 글의 내용이 피상적 관찰에 그친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겠지만, 이질적인 법적 세계에 있던 한국사회가 일본의 근대법체계와의 초기 접촉을 거친 후에 민사쟁송의 장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은 피상적 관찰에 그칠지언정 한국사회가 일본 근대법체계를 수용하고 또 그것을 분쟁에 동원함에 있어 어 떤 내적 조건과 적응능력을 갖추고 있었는지를 파악하는 데 하나의 단서를 제 공할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이 글에서는 민사사건의 양적 규모와 함께 조정, 화해(제소전 화해, 소송상 화해), 판결 등의 분쟁해결방식의 이용도와 그 처리 결과에 주목하려 한다. 시간적 범위는 병합을 전후한 시기부터 1920년대까지가 될 것이다. 식민지 당국에 의해 도입된 민사법제와 분쟁해결제도가 작동된 이 후 어느 정도의 적응과 변화의 기간을 거쳐 형성된 일정한 양상이나 패턴을 확 인하기 위해서는 1920년대까지 관찰대상에 넣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아 울러 식민지 조선의 사례의 특징과 그 의미를 음미하기 위해 같은 시기의 일본 및 식민지 대만의 사례와 비교를 시도할 것이다.7) 6) 관습조사사업에 관해서는 정긍식 편역, 改譯慣習調査報告書 (한국법제연구원, 2000), 30~44면; 이승일, 일제의 관습조사와 전국적 관습의 확립과정 연구 관습조사보고서 의 편찬을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 67(2009). 식민지 시기 초기의 관습 관련 판례에 관한 다 수의 연구 중 근래의 법학계의 공동연구로는, 임상혁, 洞里의 당사자능력과 조선고등법원 의 관습 선언 ; 심희기, 일제강점 초기 식민지 관습법 의 형성 ; 송영민, 朝鮮高等法院判 例에 나타난 土地所有權 問題, 모두 법사학연구 28(2003). 그리고 김원태, 일제강점초기 처의 특유재산에 관한 관습법 조선고등법원 판결의 분석을 중심으로, 법사학연구 31(2005).

252 法史學硏究 第46號 Ⅱ. 병합 이전의 재판제도와 재판실무의 변화 1. 민사재판 관련 법령의 전개 갑오개혁기부터 식민지형 사법제도가 확립된 시기까지 민사재판관련 법제 를 간략히 개관하고 넘어가자. 먼저 법원조직법제는 다음과 같다. ① 1895년 4 월의 裁判所構成法(高等裁判所, 巡廻裁判所, 地方裁判所, 漢城 및 開港場裁 判所, 特別法院), ② 1897년 10월 大韓帝國이 수립된 후 1899년 5월 개정된 재 판소구성법(고등재판소를 平理院으로 변경), ③ 1907년 7월의 제3차 韓日協約 (丁未七條約)에 의해 행정과 재판을 분리시키고, 일본인을 판검사로 임용하여 사법제도를 개혁할 목적으로 1907년 12월에 제정된 새로운 裁判所構成法(大審 院, 控訴院, 地方裁判所, 區裁判所), ④ 1909년 7월의 한국의 사법 감옥사무 를 일본정부에 위탁하는 각서에 의거하여 1909년 10월에 日本勅令으로 공포된 統監府裁判所令(대심원을 高等法院으로 변경), ⑤ 병합 이후 사법기구의 정리 및 민사 형사법제를 정비할 목적으로 1912년 3월 제정된 朝鮮總督府裁判所 令(高等法院, 覆審法院, 地方法院 및 支廳). 편의상 1907년 12월의 재판소구성법에 의해 구성된 재판소를 新 재판소, 7) 만약 일본과 비교한다면 1910년 이전의 시기와 비교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메이지 전기 일본의 경우 권해 제도를 주축으로 민사분쟁이 해결되었고 통계조사 항목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적절한 비교의 대상을 찾기가 어렵다. 민법과 민사소송법이 시 행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890년대와 1900년대의 일본의 법제 상황은 분명히 병합 직후 식민 지 조선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법제도를 운영하는 당국의 정책적 관 점과 경제적 상황이 변수로 등장한다. 예를 들어, 민소법 시행 초기에 일본 사법당국은 화 해 에 의한 해결을 구습에 따르는 것으로 보고 가급적 배제하려 하였고 그에 따라 제소전 화해 건수는 물론 소송상 화해의 건수도 현격히 감소하였다. 그러다가 타이쇼(大正) 시기에 들어 점차 인식이 변화하여 1920년대에는 화해에 의한 해결 비율도 높아지는 모습을 보인 다. 식민지 조선의 사법당국자는 그 이전 시기가 아니라 같은 시기의 일본 사법당국자와 인 식과 정책적 관심을 공유하게 되고, 그 점이 제도의 입안과 운용에도 영향을 미친다. 또한 병합으로 인해 조선지역이 일본의 경제권으로 편입되어 일본의 경제정책이나 경기변동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가능성도 커졌다.

한말과 식민지시기 재판제도의 변화와 민사분쟁 253 그 이전의 것, 즉 1895년 및 1899년의 재판소구성법에 의해 조직된 재판소를 舊 재판소로 부르겠다. 舊 재판소 시기의 민사절차에 관한 법령으로는 1895 년 4월에 제정된 民刑訴訟規程(법부령 제3호) 및 같은 해 5월의 執行處分規則 (법부령 8호), 廷吏規則(법부령 9호) 등의 법령과 법부에서 시시 때때로 발한 훈 령 등이 있다. 보호국기에 들어서 재판소구성법이 일부 개정되고 1907년부터 각 재판소에 배치된 일본인 법무보좌관이 재판사무를 지도 감독하였는데 1907년 6월에는 民事刑事에 관한 건(1907.6), 訊問刑에 관한 건(1907.6) 등에 의 해 상소절차가 정비되고, 군수의 재판권한이 축소되었으며, 민형사상 고문제도 가 폐지되었다. 신 재판소의 개청에 즈음하여 종래의 민형소송규정이 폐지되고 民刑訴訟規則(1908.7), 民事訴訟期限規則(1908.7), 非訟事件手續規則(1908.10) 등이 민사절차법이 공포되었다. 이 법령들은 통감부재판소 설치 후(1909.10)에 도 한국인의 소송사건에 적용되었다. 병합 후에는 1912년 조선민사령에 의해 일본 민사소송법을 비롯한 일본 법령이 의용되고 민사절차상 식민지적 특례가 마련되었다. 1895년의 民刑訴訟規程은 모두 44개조로 된 민 형사절차에 관한 규정으로, 민사절차에 관해서는 始審裁判所 절차와 上訴裁判所의 절차로 나누어 간략히 규정하고 있다. 민형소송규정에 의해 종래의 재판관례가 전면 폐지된 것은 아 니었다. 그러나 민형소송규정은 근대적인 소송제도를 모델로 삼아 초보적이지 만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장치들을 갖고 있었다. 민사에 관해서 논하면, 민사절 차를 형사절차와 분리하고 그 절차를 법규로 정한 점, 소송당사자의 신분 지 위에 관계없이 代人에 의한 소송대리가 허용된 점, 訴狀 答書 判決書 執 行命令書 등 새로운 서면이 도입되고 그 기재양식이 제시된 점, 이유를 붙인 판결서 작성을 의무화하여 판결의 내용 및 판단근거의 제시를 명확화 객관화 한 점, 근대적인 심급제도 도입의 관점에서 상소절차를 정비한 점, 재판집행의 방법 및 절차에 관한 규정을 둔 점(그 세부는 정리규칙에서 정해짐) 등을 지적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체제 및 중앙 지방의 행정제도가 갖는 한계로 인해 새로운 제도들이 완전히 관철되지는 못하였다. 정부에서 신식 제도의 시

254 法史學硏究 第46號 행을 독려하기는 했지만, 행정으로부터의 재판사무의 분리, 재판사무의 전문화 는 진척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관찰사와 군수가 담당한 지방재판에서는 전통적 인 사송의 재판 관식이 사라지지 않았다. 민사상의 구금과 고문, 재판과정에서 권세 촉탁 뇌물의 개입 등의 문제도 충분히 개선되지 못하였다. 1908년의 民刑訴訟規則은 신 재판소의 개청(1908.8)에 발맞추어 마련한 새로 운 소송절차법이다. 通則 62개조, 民事訴訟手續 79개조, 刑事訴訟手續 39개조 로 되어 있으며, 일본의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을 축약하여 소송사건을 처리 하는 데 필요최소한의 규정으로 이루어져있다. 특히 제2장 민사절차에 관한 규 정 중 2/3에에 해당하는 52개조가 執行 에 관한 규정들이고, 집행을 위해 債務 者를 留置하는 제도가 1909년 10월까지 시행되기도 했다. 2. 舊 裁判所 시기의 민사재판의 실태 : 1895~1906 1) 1895년 재판소구성법 체제하의 민사판결 이제 구 재판소 시기의 민사분쟁의 양상과 민사재판의 실태를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신식 재판제도의 도입 이후 어떤 종류의 민사사건이 얼마나 발생하 고 있었을까? 아쉽게도 이 시기에는 공식적으로 집계된 재판통계가 없다.8) 현 존하는 민사판결서철을 활용하여 개략적으로 민사사건의 양과 추이를 파악하 는 데 만족해야 한다.9) 그나마도 漢城(府)裁判所의 민사판결철이 비교적 잘 보 8) 공간된 통계연보에 한국인의 민형사사건에 관한 재판통계가 실리는 것은 1909년도 統監府 統計年報 부터이다. 그해 11월 統監府裁判所가 사무를 개시하였다. 9) 법원도서관 간행한 舊韓末 民事判決集 (전 52권, 2007)에는 고등재판소 평리원, 한성(부)재 판소, 경기재판소, 한성 인천의 일본영사관의 민사판결서들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법원도 서관 홈페이지 구한말 민사판결문 서비스(http://khd.scourt.go.kr/main/index.jsp)를 통해 법원기 록보존소에 소장된 1918년까지의 각급 법원의 민사판결서철을 검색하고 원문이지미를 열람 할 수 있다. 다만 전산화 작업이 완료되지 않아 누락된 것들이 있으며 경상 전라지역 등의

한말과 식민지시기 재판제도의 변화와 민사분쟁 255 존되어 있어서 통계분석의 자료로 활용할만하다. <그림 1>은, 1896년부터 1907년까지 漢城(府)裁判所의 민사판결서의 수, 그리고 事件名을 참고하여 사 건의 종류와 그 비율을 나타낸 것이다.10) <그림 1> 漢城(府)裁判所의 판결사건수 및 소송명칭별 비율 판결건수의 추이를 보면, 신식 재판제도 시행 초기보다 사건수가 감소하였 다가 1905년을 기점으로 크게 증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1897~1898년에 판결 건수가 감소한 데에는, 1897년 9월 이전에 한성재판소가 경기도까지 관할하다 것들은 서비스되지 않고 있다. 10) 한성(부)재판소의 사건통계는, 법원도서관 간행한 舊韓末 民事判決集 (전 52권)(법원도서 관, 2007)에 수록된 판결들의 사건명을 집계한 것이다. 사건명은 원래 판결서에 적혀 있는 것이 아니라 민사판결철에 첨부된 판결목록에 기재된 것이다. 접수 판결 당시에 사건부가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신 재판제도 시행 후에 판결서철을 정리하고 판결목록을 만들면 서 재판소서기 등이 적절한 사건명을 붙인 것이라 추측된다.

256 法史學硏究 第46號 가 경기재판소가 설치됨에 따라 종래 한성재판소에서 다루던 사건들이 경기재 판소에로 빠져나간 탓도 있을 것이다. 재판소구성법이 개정된 1899년에 다시 사건수가 증가하였다가 1900년에 급감하여 1904년까지 연간 200건 안팎에 머 물고 있다. 1900~1904년간 사건수가 적었던 것은 정권의 보수화, 러일전쟁, 한 성재판소의 한성부와의 잦은 합설과 분리에 따른 재판업무의 斷續 등에 영향 을 받은 바가 없지 않을 것 같으나, 앞으로 세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판결서가 일부 유실되었을 수도 있지만, 판결수의 수 자체가 훗날에 비해 적다. 현존하는 자료로는 얼마나 많은 사건이 접수되었는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판결 서에 기재된 사건번호를 가지고 이영록 교수가 추정한 바에 따르면, 1896~1897년에는 한성재판소에서 연간 1천 건 이상이, 1900~1904년에는 연간 200~300건 정도가 접수된 것으로 보인다.11) 추정방법에 약간 의문은 있으나 일단 이 추정치를 받아들인다 해도 공식통계가 확인되는 시기에 비해 사건수 가 턱없이 적다. 물론 이 시기에는 공식적인 분쟁해결제도로 사회 내의 분쟁들 을 흡수하여 처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미비한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할 것이다. 의미심장한 것은, 1905년부터 사건수가 증가하여 1906년에는 전년에 비해 두 배 이상 증가하였다는 것, 그리고 1906~1907년은 우메 겐지로(梅謙次 郞)의 법률고문 부임(1906년 6월), 재판제도의 일부 개정(같은 해 ), 부동산법조 사, 법무보좌관의 배치(1907년 1월) 등 일련의 시정개선작업이 벌어지던 시기이 기도 하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한성(부)재판소에서 취급된 소송사건의 종류를 보면, 금전관계 소 송이 압도적으로 많다. 개별 소송사건으로는 債訟이 가장 많고, 田畓訟, 家舍 訟, 그리고 각종 물품의 대금에 관한 소송도 비교적 많다. 山訟 사건의 판결건 수가 생각 외로 적다. 한편 토지 가옥에 관한 사건 중에는 상속 이혼 입 양 파양과 얽힌 분쟁들이 일부 있으나, 가족 신분관계의 확인, 이혼이나 파양 11) 이영록, 한말 외국인 대상 민사재판의 구조와 실태 : 한성(부)재판소의 민사판결을 중심 으로, 법과 사회 41(2011), 185~86면.

한말과 식민지시기 재판제도의 변화와 민사분쟁 257 자체만 다룬 판결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각 사건 종류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다른 기회로 넘기기로 하고,12) 여기에서는 한성재판소의 판결서 문안에서 나타 나는 판결의 특징을 몇 가지 언급하기로 한다. 앞서 말했듯이 이 시기의 재판에서는 재판서류 및 재판절차상에 변화가 있기 는 하였으나 여전히 구래의 재판관행과 관념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를 민사의 法源과 관련하여 살펴보자. 먼저, 당시의 민사법규의 불비 및 분쟁의 성격을 반 영하는 것이지만, 민사판결에서 성문법규가 인용된 예는 극히 드물다. 토지 관 련 판결서 중에는 단 2개가 盜賣, 二重賣買에 관한 법규정을 거론하였다.13) 참 고로 가옥 관계 소송의 판결문에서는 간혹 법문상의 5일의 退限, 즉 토지 가옥 을 매매하였다가 조건 없이 되돌리는 還退가 가능한 기간을 언급한 것이 있 다.14) 절대 다수의 판결들은 특별히 법규에 대한 언급이 없이 증서나 계약의 이 행 여부 혹은 불법행위의 존부를 확인하는 것으로 해결되었고, 일부 판결서들 에서는 理 혹은 事理 를 들면서 시비를 가리기도 했다. 이 경우 판결문에는 조선시대의 판결문에서와 같이 理所當然, 於理當然, 於理不當, 於理未穩, 以理 言之, 揆以事理, 從理歸正 등의 표현이 쓰인다. 또한 극히 소수의 사건이지만, 宅心不良 이라고 하며 당사자의 마음가짐을 비난하거나, 骨肉相爭 사건에서 는 風化, 敦睦之誼, 倫理 등을 논하며 당사자를 訓戒하는 경우도 있다. 특기할만한 것은 적어도 1905년 이전의 토지관계 소송의 판결서에서 사안 해결을 위한 관습의 존부를 확인하거나 무엇이 관습인지를 선언하는 식으로 12) 필자는 조만간 토지 가옥 소송의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를 학계에 보고할 것이다. 외국인과 의 교섭사건에 관해서는 이영록, 앞의 글(주 11)을 참고하기 바란다. 13) 한성재판소, 1902. 4.30.선고, 광무6년民제360호 사건(畓價訟) 판결에서 大典會通 刑典 田宅 條에 있는 (도매당한 원소유자에게 물건을 반환한) 도매의 매수인(盜買者)은 盜賣한 자에게 그 가액을 징수한다는 규정이, 한성재판소, 1905.7.14.선고, 광무9년民제329호 사건(畓訟) 판 결에서는 부동산 二重賣買와 관련하여 刑法大全(1905년) 제636조 즉 物件은 先매수인에게 귀속시키고, 代金은 後매수인에게 반환한다는 규정. 14) 한성부재판소, 1898.11. 2.선고, 광무2년民제188호; 한성재판소, 1905.6.21. 광무9년민제492호; 평리원, 1905. 6.30.선고, 광무9년민제1505호; 한성재판소, 1905. 7.26.선고, 광무9년민제422호 등.

258 法史學硏究 第46號 당해 판결이 규준으로 삼은 규범을 제시한 예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 자체 가 당시에 불문의 관습적 규범이 부재하였다거나 재판담당자가 관습적 규범을 무시하였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소송당사자의 청구와 항변, 재판소의 판단의 배경에는 일반적 규칙으로서 양해되고 있는 불문의 규범에 대한 인식 이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며, 그것은 관행 내지 관례를 통해 올바른 규범 내지 事理로서 사회 속에서 반복적으로 승인되어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관습적 규범들이 제정법과 대비되는 독자적인 범주의 法源으로서 아니 라, 事理(오늘날의 용어로는 條理)와 분리되지 않는 불문규범으로서 인식되었 다 할 것이며, 따라서 제정법규가 부재한 사안에서 특정한 관습을 法源으로서 확인하고 그에 재판소의 판단을 구속시키는 방식으로 판결이 행해진 것은 아 니었다. 이와 관련하여 가옥관계 소송에서는 1900년의 평리원 판결 중에서 세 입자가 허물어진 가옥을 수리한 경우, 임대차가 종료하면 집주인은 세입자에게 가세금(家貰金)과 함께 수리비를 지급하는 것이 여항의 통규 (閭港通規)라고 하였지만,15) 수리비 지급에 관한 다른 판결에 이와 같은 말이 있지는 않았다. 적어도 사안의 성질이 단순한 사건에서 판결이 제시한 결론들은 훗날 민법 규정이나 관습으로 확인된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아 보인다. 그러나 책임을 가 리고 논증하는 방식이 반드시 오늘날의 그것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매매나 금전대차, 채무보증 관계에서 다수인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경우에 그러한 경향 을 보인다. 한편 이영록 교수는, 이중매매에 관한 몇몇 판결을 분석하여 권리 와 의무의 확정이 오늘날에 비해 훨씬 관계적이며 상황 의존적으로 결정되었 으며, 분절적이기보다 종합적 해결을 도모한 특징이 발견된다 고 하였는데,16) 필자 역시 어음양도에 관한 구 재판소의 일련의 판결을 일독하여 비슷한 결론 에 도달한 바 있다.17) 그리고 왕궁이 개재한 사안에서 事理가 평등하게 관철되 15) 평리원, 1900. 4.26.선고, 광무4년 제12호(家屋訟) 판결. 16) 이영록, 광무 건양기 부동산 이중매매 및 이중전당에 관한 연구 고등재판소 및 평리원 판결을 중심으로, 법사학연구 44(2011), 134면. 17) 문준영, 한말의 민사분쟁과 식민지 사법권력 : 관습에 관한 재판례를 중심으로 (주 5), 33면.

한말과 식민지시기 재판제도의 변화와 민사분쟁 259 지 못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왕족이 개재한 사안에서 당해 왕궁의 책임을 추급하지 못하고 다른 당사자들로 하여금 손실을 분담하게 한 것이다.18) 구 재판소 시기의 판결문들을 보면 그 분량, 이유 부분 기재의 충실성에서 판사가 누구냐에 따라 편차가 심하다. 물론 1905년을 전후하여 판결서는 양 질 면에서 개선되는 모습을 보인다. 그 동안의 실무 경험이 축적되고 신식법학 교육을 받은 자가 판사로 임용되기 시작했으며, 1907년부터는 일본인 법무보좌 관이 재판에 관여하였다.19) 1906~1907년의 판결문에서도 종전과 같은 理 를 언급하는 것도 있지만, 비록 개념 사용이 부정확하거나 본래의 맥락과 동떨어 져 있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親權, 意思表示, 無權代理, 危險負擔, 擔保責 任, 特定物債權 등을 거론하며 사안을 논단하거나, 賣買慣例, 商慣, 地方 의 慣例, 慣習 등에 대해 언급하는 것들도 있다. 2) 재판 과 판결 중심의 분쟁해결방식? 구 재판소 시기의 민사분쟁해결시스템에서는 그 구조 및 종국의 방식 면에 서 주목할 점이 있다. 메이지 초기 일본에서는 민법과 민사소송법이 시행되기 전에는 분쟁당사자가 소송을 제기하는 얻는 방법도 있었으나 실은 많은 사건 들이 조정과 유사한 권해 에 의해 해결되었다. 1875년의 권해제도의 도입 특히 1883년의 권해전치제도의 실시 이후 권해로 해결되는 사건이 소송사건 수보다 18) 대표적인 예가 고등재판소, 1897.5.29. 선고, 建陽元年 제22호 사건 판결이다. 소유자 A의 토지 가 恩彦宮의 宮土로 混入되었다가 은언궁 B C D로 전전 매도된 후, 소유자 A가 D에 대해 반환을 청구한 사건이다. 원칙적으로는 D가 토지를 A에게 반환하고, 그 토지의 價額은 D가 C에게, C가 B에게, B는 은언궁에게 각각 추징해야 한다. 하지만 고등재판소는 궁토편입 당시의 토지측량의 과실 여부를 밝히기 어렵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은언궁에 責徵 하는 것 이 타당하지 않다고 하면서, 事理 에 비추어 보건대, A와 D는 각각 토지의 1/2씩 가지고, B와 C는 각각 토지가액의 1/8을 D에게 지급하여 D가 받아야 할 1/2의 토지가액의 절반을 B와 C 가 각각 分半하여 지급하라는 취지 본건을 영구히 타결함이 가하다고 판결하였다. 19) 법무보좌관 시기의 판결서 및 재판사무의 변화에 대해서는 문준영, 한말 법무보좌관 제도 하의 재판사무의 변화 (주 5), 441~454면.

260 法史學硏究 第46號 훨씬 많아졌다. 그와 함께 소송사건의 경우 1880년대 초까지는 절반 이상이 熟 議解訟 즉 화해 로 해결되었으나 勸解前置制度 실시 이후 판결 이 내려지는 비율이 점차 증가하였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정부는 다종 다양의 이해대립 으로 분출하는 인민의 에너지를 제도 내에서 해결하는 방법으로서 권해제도를 구사하였고, 권해제도의 도입에 의해 분쟁이 권해를 경유함으로써 취사선택되 어 재판에서는 법적 분쟁에 관해 판결을 내리는 것이 가능해고 있었다는 점에 서 권해제도는 서구형 재판의 도입을 뒷받침했다고 평가된다.20) 그러나 한국에 서는 1895년에 신식 재판제도가 도입되었지만 일본에서와 같이 분쟁해결방식 의 다변화가 추구되지는 않았다. 이 점에서 1895년 민형소송규정에는 주목할 점이 있다. 즉 같은 규정이 민사 재판의 終局에 관해 오로지 判決 만 언급하고 있으며, 소송 과 판결 이외의 방식으로 분쟁을 처리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1908년의 민형소송규칙의 경우 제85조에서 和解를 하고자 하는 자는 상대방의 거소 주소를 관할하는 區裁判所에 화해를 위해 상대방의 호출을 신청할 수 있다고 하고, 제86조에서는 재판소는 소송이 어떤 정도에 있음을 물론하고 화 해를 勸諭할 수 있다고 하여, 제소전 화해 와 소송상 화해 의 근거규정을 마 련하였다.21) 1895년의 재판소구성법 및 민형소송규정이 일본인에 의해 입안되 었다는 점,22) 메이지 초기 일본의 과도기적 재판소제도를 모델로 삼고 있었던 점, 메이지 초기 일본에서 권해 제도가 크게 활용되었던 점 등에 비춰볼 때, 일본의 권해 와 유사한 쟁송처리방법이나 화해 에 대한 관심이 민형소송규정 에 나타나지 않는 점은 조금은 의아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해해 조정과 유 20) 山中永之佑 編, 新 日本近代法論 (法律文化社, 2002), 208~209면. 21) 재판상의 쟁송 해결의 방법으로서의 화해는 민형소송규칙 시행 전에 이미 채용되고 있었다. 법무보좌관제도 시행 후 인천항재판소의 민사판결서철에는 다수의 구두변론조서 가 있는 데, 명칭은 구두변론조서 이지만 실질은 화해조서 이고 그 서식과 문투도 일본의 예를 따 르고 있다. 문준영, 한말 법무보좌관제도 하의 재판사무의 변화 (주 5), 446~447면. 22) 문준영, 법원과 검찰의 탄생 (역사비평사, 2010), 200~207면.

한말과 식민지시기 재판제도의 변화와 민사분쟁 261 사한 쟁송처리방법 자체를 배제할 의도는 없었다 할 것이다. 그렇지만 민형소 송규정이 조정 화해 유사의 분쟁해결에 대해 함구한 데에는 근대적 재판제도 에서는 재판과 판결에 의한 해결이 원칙이라고 보는 입안자의 관념이 강하게 작용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관념은 민형소송규정이 나온 시점 즉 민사소 송법이 시행되고 있었고 권해 등에 의한 해결은 구식으로 여기고 있던 일본의 사법당국이나 법률가들의 생각과도 통했을 것이다.23) 민형소송규정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었던 간에 더 중요한 것은 실제로 민 사분쟁이 어떻게 처리되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흔히 전통유교사회에서의 재 판에서는 和를 중시하였다 하고 공동체 내부의 자치적인 분쟁해결이 도모되었 고, 또 조선시대 후기에는 수령들이 私和 를 권유하는 일이 있었다고 말해진 다.24) 하지만 갑오개혁 이후 정부가 발한 법령이나 훈령 등에서 화해 조정 유 사의 방법으로 쟁송을 처리하는 것을 권장한 예는 발견되지 않는다. 물론 분명 이 소송진행 중에 판사가 화해를 권유하거나 당사자들이 서로 양보하여 화해 23) 일본에서는 민사소송법(1890) 시행 이후 권해제도를 대체하는 제도로서 제소전 화해와 독촉 절차가 도입되었으나, 제소전 화해는 초기에 잠깐 활용되고 곧 이용건수가 격감하여 1912년 에는 거의 이용되지 않는 제도가 되었다. 1880년대 초까지 숙의해송 의 비율도 매우 높았으 나 민사소송법 시행 직후에는 소송상의 화해 건수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민소법 확립 이 후에는 화해를 낡은 가치관에 기초한 분쟁해결방법으로서 혐오하고 소송에 이른 사건은 될 수록 판결로 종결시키자는 실무의 노력이 있었다고 지적된다. 菅原郁夫, 司法統計から見 た民事裁判の槪要, 林屋礼二 管原郁夫 林真貴子 編, 統計から見た明治期の民事裁判 (信山社, 2005), 34면. 제소전 화해절차의 낮은 이용도는 1910년대에도 이어지는데, 1924년 이후 신수건수가 급증하여 1933년까지 급증하였다. 민소법 성립 이후 화해에 의한 해결을 배제하는 경향이 컸으나, 타이쇼기(大正期)에 들어 자본주의 발전에 수반한 모순들의 해결 방법으로서 다시 이용되기에 이른 것으로 추측하는 견해도 있다. 그렇지만 제1심 소송사건 에서는 화해의 비율은 여전히 낮았다. 菅原郁夫, 司法統計から見た大正 昭和戰前期の 民事訴訟 非訟裁 調停, 林屋礼二 管原郁夫 林真貴子 田中亜紀子 編, 統計から見 た大正 昭和戦前期の民事裁判 (慈學社, 2011), 42~43면. 24) 조선후기에는 사소한 일로 소송하는 民習으로 인해 소송건수가 급증하자 地方首領들이 사 화를 장려하는 모습이 나타났다고 한다. 19세기 牧民書 중에도 사화의 권유를 언급하는 것 도 있다. 그러나 田民訟(토지 노비소송)에서는 사회에 의한 타협보다 어느 한편이 승소할 때까지 지속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趙允旋, 朝鮮後期 訴訟 硏究 (국학자료원, 2002), 277~278면.

262 法史學硏究 第46號 하는 일이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의 재판소의 보고서나 신문기사에서는 소송진행 중 당사자 간의 私和 로 사건이 타결되었거나, 사화 에 의한 타결을 재판소에 대해 당사자가 요구하거나, 당사자 일방이나 재판소 측에서 당사자에 게 私和를 강요한 사례도 발견된다.25) 그러나 이러한 사례 중에는 민사에 관한 것도 있지만 대개 형사사건에서 당사간의 합의에 의해 형사소추나 처벌을 면 하거나 감형을 받고자 한 것들이다. 이러한 사화 는 관의 公決 에 대비되는 당사자 간의 합의를 의미하고, 적어도 범죄사건에 관한 한 대명률과 형법대전 은 일단 관에 고소한 사건을 피해자와 가해자가 사사로이 화해하거나 화해하 게 하는 것을 처벌하고 있었다.26) 민사소송의 진행 중에 사화에 의한 해결이 시도되는 일도 있었다. 필자가 살 펴본 토지분쟁에 관한 민사판결서 중에는 피고가 이전 소송에서 私議打訟하라 는 판결에 따라 사화한 적이 있다고 주장한 사례,27) 피고가 소송 중에 원고에게 사화를 요청한 사례,28) 이전 소송에서 일족간의 소송을 종중의 협의로 타결하라 (隨宗議妥結)는 판결이 내려진 사례가 있다.29) 그리고 판결문을 읽어보면, 문언 상으로는 판결 이 내려지고 패소한 당사자에게 어떤 급부를 명하고 있지만, 그 배경에 화해나 조정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것도 있고,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관계적이며 상황 의존적인 법적 사고가 작용하여 원고의 당초 청구와 달리 당 사자들에게 절반씩 손실을 분배한 사례도 몇 몇 있다. 그러나 판결서들의 문언 에 근거하는 한, 절대 다수의 판결들이 事理와 법을 논하며 결론을 제시하고 당 25)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시스템(http://db.history.go.kr)의 <각사등록 근대편>의 法 部來案, 司法稟報(乙)에서는 사화를 언급한 24개의 재판소의 보고 조회 질의가 검색된다. 신문기사로는 독립신문 1899.11.17. 억륵샤화 ; 황성신문 1898.11. 9. 잡보 落點圖謀 ; 198.2.15. 잡보 僞造誣訴 ; 1899. 9.20. 잡보 申商路訴 등.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가온 고신 문검색서비스(http://www.kinds.or.kr). 26) 형법대전 제278조. 大明律 刑律 雜犯 私和公事. 27) 한성재판소, 1898. 3. 8.선고, 광무2년민제25호 판결. 28) 한성재판소, 1905. 4.21.선고, 광무9년제302호 판결. 29) 평리원, 1899.11.16.선고, 광무3년제41호 판결.

한말과 식민지시기 재판제도의 변화와 민사분쟁 263 사자 간의 승패를 가리고 있다. 이 점에서 많은 소송사건이 裁許 또는 판결 이 아닌 숙의해송 즉 화해로 해결된 메이지 초기 및 그 이전의 에도시대 일본의 사례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즉 일본과 비교할 때 한국의 경우, 판결 의 실질 과 성격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검토해야 할 점이 있다고 해도, 서구적 재판제도 를 받아들이기 전부터 사리에 따른 판결(從理判決), 당사자 간의 계약문언에 의 한 판결(從文券施行)의 경험을 통해 이미 판결 에 의한 분쟁해결에 익숙해있었 으며, 민사재판에서 화해 조정의 방식으로 사건을 처리하는 것이 일반화 제 도화되어 있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1895년 재판소구성법과 민형소송규정 등 새 로운 재판제도와 법령들은 판결 에 의한 종국을 원칙적인 것으로 강화하였고, 그것은 신식장정의 준행과 판결서 작성을 강조하는 정부의 조치들에 의해서도 뒷받침되었다고 할 것이다. 필자는 그것이 당시의 소송관계인이나 재판담당자 의 관념상 결코 낯설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점과 관련하여 훗날 식민지 통치당국자가 화해를 강조하는 발언의 맥락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대개 그런 발언들은 사소한 사건도 재판정에 가져오는 한국인들의 성향을 지적하며 판사 가 당사자에게 화해를 권유해야 한다는 취지이다. 아울려 화해 에 관한 총독부 법원의 재판통계를 해석할 때에도 통계상의 수치가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던 화 해 선호 경향을 보여주는 것으로 섣불리 간주해서는 안 될 것이다. 3. 1908년 이후 신 재판제도하의 재판실무의 변화와 일본민법의 침투 1908년 8월 新 재판소의 개청과 의해 행정과 분리되어 전문적 사법관이 재판 을 담당하는 근대적 재판제도가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하였다. 신 재판소가 사무를 개시한 후 소송사건은 급증하였다. 전국의 모든 심급의 재판소에서 수리 한 사건수를 기준으로 하면, 1908년 8~9월 사이에는 월평균 285건, 1909년에는 월평균 1,516건, 1910년에는 월평균 2,269건의 민사사건이 수리되었다.30) 일본인 사법관들은 사건의 증가를 한국인들이 새로운 시정을 점차 신뢰하고 있음을 보

264 法史學硏究 第46號 여주는 증거로 받아들였다. 우메 겐지로는 일본인이 공명정대한 재판을 하기 때 문에 재판사건이 격증하여 한국인들이 소송사건이 아닌 것까지 재판소로 들고 오는 실정이라고 하였다.31) 사건의 급증세는 1912~1913년까지 지속되어, 1909 년부터 1913년까지 전 심급에서 수리한 민사소송사건수는 2.3배가 증가하였다. 여기에 경찰서장이 수리한 민사쟁송조정사건, 재판소가 수리한 독촉사건을 합 한다면, 1909년부터 1913년까지 5년 사이에 사건수는 4배나 많아졌다. 한국사회는 이렇게 급증한 민사소송 사건들을 통해 바야흐로 일본민법과 소 송실무와 본격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하였다. 신 재판소는, 일본에서 裁判事務 心得 (1875년) 제3조에 취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 즉 成文法律이 없으면 慣習 에 의하고 慣習이 없으면 條理에 의해 판결을 하였다. 1908년 8월부터 1910년 12월까지 京城控訴院 및 京城地方裁判所의 민사항소사건 판결원본철을 조사 한 결과, 이 기간 동안의 京城控訴院의 531개의 판결서 중 77개(14.5%), 京城地 方裁判所의 172개의 판결서 중 15개(8.7%)에서 다종의 관례, 관습에 관한 언급 이 있고, 그 중 59개가 당해 사안에서 법률행위를 해석하거나 권리의무관계를 확정하기 위해 특정한 민사 상사 관습의 존부를 확인한 것이다. 59건의 판결 중 24건에서는 소송당사자의 관습에 대한 주장이 배척되었으며, 특정 관습이 없다고 한 판결을 제외하면 결국 관습의 존재를 확인한 것은 29건이다. 일본인 법률가의 진출과 신 재판제도의 실시와 함께 관습이 法源과 법률행위의 해석 기준으로 명확히 정립된 것은 분명하다. 다만 실제 민사 판결에서 관습이 거론 된 빈도를 볼 때 관습이 중요한 재판규범으로서 널리 활용되었다고 말하기는 30) 統監府, 統監府時代の財政, 水田直昌 監修, 友邦シリーズ 第18號 朝鮮財政金融發達史參 考資料 統監府時代の財政 朝鮮近代財政の地固め (財團法人友邦協會, 1974), 135~136면의 통계표에 의한 것이다. 다만 이를 민사소송사건의 자체의 순수한 증가분으로 볼 수는 없 다. 1908년~1909년 사이에는 區裁判所 미개청지에서 郡守가 당분간 사건을 수리 심판하 고 있었는데, 區재판소의 개청지역이 확대되면서(1908년 14개소 1909년 54개소), 종래 군 수가 수리 심판해 오던 사건들이 새롭게 재판사건으로 집계된 것도 적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31) 梅謙次郞, 韓國の法律制度に就て(下), 東京經濟雜誌 1514호(1910), 794면.

한말과 식민지시기 재판제도의 변화와 민사분쟁 265 힘들다. 신 재판소가 확인한 관습이 반드시 현실적으로 관례나 관행으로서 존 재하였던 것 또는 한국인들이 事理에 부합한다고 생각했던 것과 반드시 일치 했던 것도 아니었다.32) 왕왕 條理 로서 거론된 것들은, 실은 일본민법 민사소 송법상의 법리나 제도인 경우가 적지 않았다.33) 또한 설사 조리에 대한 언급이 없다고 하더라도, 당사자 간의 계약이나 법률행위의 해석, 법리의 전개 방식에 있어서 제정법의 불비 탓에 적용 법조를 일일이 언급하지 못할 뿐이지, 사실상 조선민사령 시행 후의 재판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소송당사자들도 승리를 얻기 위해 새로운 제도에 적응하고 또 이를 적극적으 로 활용하였다. 구 재판소하의 재판에서 代人 에 의한 소송대리가 허용되었으 나 실제 판결서를 보면 당사자에게 대인이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필자 가 경성공소원이 취급한 한국인 당사자 간의 민사사건(465건)을 조사한 바에 의 하면, 원고 피고의 78.6%가 소송대리인을 선임하였고, 소송대리인의 대부분이 변호사였으며, 변호사 중 27%는 일본인 변호사였다.34) 변호사선임 비율이 높은 것은, 직원의 대부분이 일본인인 신 재판소에서 생소한 절차에 따라 소송을 하 기 위해서 변호사에 의존해야 했던 점, 항소심 재판이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 을 것이다. 변호사의 조력은 변론의 모습을 바꿔 놓았다. 일본인 변호사와 일본 법 지식을 가진 한국인 변호사들은 의뢰인의 승리를 위해 민법, 민사소송법 등 의 개념 용어 법리를 동원하여 변론을 하였다.35) 변호사가 선임되지 않았더 32) 이 점에 관해서는 문준영, 한말의 민사분쟁과 식민지 사법권력 : 관습에 관한 재판례를 중 심으로 (주 5), 46면 이하. 33) 경성공소원의 판결 중에서 조리를 들어 판시한 예를 몇 가지 들면, 洞里는 私法上 재산권의 주체가 되며 독립한 권리능력을 가지는 法人이다(1909. 9.29, 융희2년民控제63호, 전답송), 점 유는 본권과 별도로 보호된다(1909. 3.27, 융희2년민공제150호, 분묘침해배제 청구), 동산의 선 의취득은 허용되지 않는다(1909. 5. 1, 융희2년민공제149호, 鹽價訟, 가옥임차인은 임대인에게 유익비를 청구할 수 있다(1909. 8.23, 융희3년민공제89호, 채송), 종래 관습이 없더라도 손해배 상예정계약을 체결하는 것은 적법하다(1910.11.4, 명치43년민공제182호, 손해배상 청구) 등. 34) 문준영, 경성공소원 민사판결원본철을 통해 본 민사분쟁과 재판 (주 5), 28면. 35) 일본인판사가 다수를 이루는 재판부를 상대하는 데는 일본인 변호사가 유리하게 작용할 수 밖에 없었다. 기존의 구 재판소 판결 경향과 달리 신 재판소에서 어음관습에 대한 평가가

266 法史學硏究 第46號 라도 당사자가 누군가의 도움을 얻어 일본 민법의 지식을 활용하기도 하였다.36) 경성공소원의 판결원본은 당시 재판소로 쏟아져 들어오는 사건 중에는 해묵 은 사건들이나 이미 판결이 있었던 사건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 건들에 대해 신 재판소는 訟理, 條理 를 들어 일사부재리에 반하는 주장들을 배척하였다. 또한 대전회통, 갑오개혁기의 법령, 刑法大全(1905년) 등에 산재하 는 出訴期限에 관한 규정들을 해석함에 있어서, 田宅訟에 관한 5년의 출소기 한 및 예외사유를 엄격히 적용하는 한편, 어떤 것은 이미 실효된 것(大典會通 戶典 徵債條의 債訟에 대한 1년의 출소기한)으로 보거나, 어떤 것은 실제 시행 여부가 의심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유효했던 것으로 전제하며(1895년 7월 15일 군국기무처 의안의, 지방수령 부호 등에 의해 강점 강매 당한 전택 산림을 還推하는 소송에 대한 1894년 7월부터 10년의 소송기한), 신 재판제도 시행 이 전에 발생한 사건들을 수리하기 위한 기준들을 설정해나갔다. 아울러 법령상의 각종 기한(특히 상소와 故障申請의 기한 등), 民事訴訟期限規則(1908년 8월 1 일 시행. 민법상 각종 소멸시효를 출소기한으로 정함)을 엄격히 적용하고, 구법 상의 소송기한이 경과했으나 자신에게 유리한 新法을 원용하려는 당사자에 대 해 권리위에 잠자는 자 를 거론하여 신법의 소급효를 부정하였다.37) 이와 같이 신 재판소가 일상적인 분쟁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일본 민법상의 제도와 법리가 침투하고 있었는데, 단지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 시기 경성공소 원에서 취급한 사건들에는 구 재판소 시기의 재판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사 180도 달라졌는데 그 계기가 된 한 사건에서는, 제1심에서 패소한 피고가 항소심부터 변호 사를 한국인에서 일본인으로 교체하여 승리를 거두었고, 그러자 상대방 상고심에서 일본인 변호사를 선임하였다. 문준영, 한말의 민사분쟁과 식민지 사법권력 : 관습에 관한 재판례를 중심으로 (주 5), 249면. 36) 예를 들어, 1909년 3월 27일 경성공소원이 판결한 분묘침해배제 청구소송 을 들 수 있다. 본 건은 산송 에 해당하는 사건인데, 함경북도에 거주하는 원고들(피항소인)이 그들의 조상의 묘가 있는 산국에서 임자 없는 무덤에 소유권을 주장하고 무단 벌채를 하고 원고 소유의 묘 총을 발굴한 피고(항소인)를 상대로 점유를 침해하여 부득이 그 구제를 위해 소송을 제기 한 사건이다. 문준영, 경성공소원 민사판결원본철을 통해 본 민사분쟁과 재판 (주 5), 23면. 37) 위의 글, 26~28면.

한말과 식민지시기 재판제도의 변화와 민사분쟁 267 건들이 다수 있었다. 두 가지 유형의 사건이었다. 하나는, 멀게는 십 수 년 전, 가깝게는 4~5년 전에 중앙과 지방의 관리나 세력가에게 재산을 침탈당하였다 고 주장하며 피해 회복을 요구하는 사건들, 다른 하나는, 왕실의 특수한 지위 및 정치 행정 재정 제도의 성격 그리고 징세 회계, 공용징수의 관행상 부정 과 비위가 얽혀있는 사건들이다. 이러한 사건들의 처리는 단순히 개인적 비행 이 아니라 과거의 관행과 체제 자체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었다. 특히 후자의 사건에서 신 재판소는 구제도하의 착종된 문제들을 어떤 것들은 私法的 법률 관계로 재구성하여 사안을 해결하거나,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사실상 행정재판 이라고 할 판결도 내렸다.38) 이러한 판결들은 근대적 민법 시행에 동반되어야 할 바로서 공법관계와 사법관계를 준별하고, 정부 황실과의 관계에서의 私權 의 지위를 명확히 한 것이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한국사회는 明治前期 일본처럼 법전 시행 전에 긴 시간의 과도기 를 거칠 여유도 없이 타율적으로 또한 급속하게 일본의 민사법과 司法制度를 경험하게 되었다. 조선민사령은 이미 재판실무에서 행해지고 있던 것을 법적으 로 확인하고 체계적으로 정돈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Ⅲ. 병합 이후의 민사사건과 분쟁해결시스템의 이용 실태 1. 민사사건의 양적 규모 본 장에서는 朝鮮總督府統計年報 (이하 통계연보 로 줄임)의 재판통계를 활용하여 민사분쟁 및 민사분쟁해결제도의 이용 실태를 살펴볼 것이다. 주로 민사사건의 양적 규모, 각종 분쟁해결제도의 이용도, 최종적인 처리결과에서 38) 위의 글, 60~65면.

268 法史學硏究 第46號 나타나는 특징을 살펴볼 것이다. 보호국기의 준비기간을 거쳐 병합 이후 재정 비된 민사법령체계와 사법제도에 대해 한국인들이 어떻게 반응 적응하고 있 었는지를 가늠해보기 위해서이다. 시기적으로는 병합 이후부터1920년대 말까 지이다. 병합 직후 일정한 기간을 거치고 나타난 일정한 경향을 보려고 하기 때문에 굳이 일제치하 전 시기를 살펴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1930~40 년대에는 개정된 민사소송법(1929년)이 시행되고 朝鮮小作調停令 (1932년), 朝鮮人事調停令 (1939년), 朝鮮借地借家調停令 (1940년)을 통해 일본의 동향 에 맞추어 새로운 조정제도가 실시되는 등 제도적 틀이 달라질 뿐만 아니라, 경제공황과 전시체제의 영향을 받는 가운데 민사사건수가 감소하는 등 이전과 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먼저 병합 이후 1920년대까지 전체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건들이 제기되고 처리되었는지를 보자. <그림 2> 조선에서의 민사사건수(구수+신수)(1) (1910~1942) * 조선총독부통계연보 (1910~1942)에 의해 작성한 것임.

한말과 식민지시기 재판제도의 변화와 민사분쟁 269 <그림 3> 조선에서의 민사사건수 (2) (1910~1930) * 조선총독부통계연보 (1910~1930)에 의해 작성한 것임. <그림 2>는 병합 이후 접수한 제1심 民事訴訟事件, 提訴前 和解 申請事 件, 督促事件 그리고 경찰서장이 접수한 民事爭訟調停事件의 추이를 나타낸 것이다. <그림 3>은 1930년까지 독촉사건을 제외한 사건의 연도별 접수건수 를 나타낸다. 민사소송 사건수는 병합 이전 시기의 급증세를 이어받아 1913년 까지 가파른 상승세를 보인다. 이후 완만한 하향추세를 보이다가 1919년에 저 점을 찍고 1920년부터 1927년까지 다시 사건수가 급증하였다. 특히 1920년대 후반 민사사건이 급증하자 총독부 법무국장 마쓰데라 다케오(松寺竹雄)는 여 러 가지 요인이 중첩되어 어느 정도는 부득이 한 점이 있다고 하면서도 지금과 같은 현상은 완전히 병적 이라고 진단하였다.39) 병합 직후의 사건 증가세와 1920년대의 사건 증가세는 그 성격이 달랐을 것으로 추측된다. 1910년대의 사 건 증감 추이는 통감부 시기 및 병합 직후의 정치 경제 사회변동에 따라 발

270 法史學硏究 第46號 생한 사건들이 일거에 법원으로 밀려들었다가 그것이 어느 정도 해소되자 안 정적인 추세로 접어든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따라서 병합 이전의 추세의 연속선 위에서 당시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1920년대 이후의 사건수 추이는 병합 이전과는 달라진 사회경제적 조건과, 민사법령체계 및 사 법제도에 대한 경험 위에서 전개되고 있다고 할 것이다.40) 따라서 재판통계를 통해 우리가 보려고 하는 것들에서 1910년대와 1920년대 사이에 어떤 유의미한 차이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병합 이전과 이후를 관통하는 어떤 공통 적인 양상이나 패턴이 존재하고 있다고 추측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반대로 중요한 차이가 나타난다면, 병합 이후의 식민지 법 경험을 거쳐 새로운 양상이 나 패턴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1913년 이후 가장 많이 이용된 것은 독촉절차이다. 독촉절차는 조선민사령 에 의해 일본 민사소송법이 의용된 후에 비로소 도입된 것이다. 정점에 달했던 1931년에 독촉사건수는 제1심에 접수된 민사소송사건의 3.6배에 달하였다. 반 면 민사쟁송조정제도와 제소전 화해절차는 시행 초기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활 발하게 활용되지 않았다. 민사쟁송조정제도는 대만의 제도를 모델로 삼은 것으 로, 경찰서장이 민사쟁송을 조정할 수 있게 한 제도였다. 그러나 대만의 제도와 비교하면 조선의 민사쟁송조정제도는 사법당국의 기대를 온전히 담기에는 제 도적 한계가 있었다. 지방법원지청이 설치되지 않은 지역에서 그것도 대체로 區裁判所의 관할에 속하는 경미한 민사분쟁에 한하여 경찰서장이 조정을 할 수 있었다. 결국 조선의 민사쟁송조정제도는 지방법원지청의 증설과 더불어 이 용도가 급감하여 마침내는 유명무실화되었다.41) 39) 松寺竹雄, 1929, 年々殖える朝鮮人の犯罪, 朝鮮及滿洲 1929年 1月號. 40) 1919년에 사건수가 감소하는 것이 일견 3 1운동의 여파와 관계가 있을 것 같지만, 나중에 볼 <그림 4>, <그림 5>에서 조선, 일본, 대만의 사건증감 추이가 유사한 것을 보면, 반드시 3 1운동과 같은 조선만의 특수한 정치정세만 사건감소의 요인으로 꼽기는 힘들 것 같다. 41) 1935년 6월 개최된 各道警察部長會議에서는 이 제도를 이용하는 예가 거의 없고 유명무실 해졌기 때문에, 제도를 개정하여 강제력을 부여하지 않을 바에는 아예 폐지하자는 건의도 나왔다. <昭和十一年六月 道警察部長會議 意見希望事項>(1936), 91~92면, 警務局, 昭和十

한말과 식민지시기 재판제도의 변화와 민사분쟁 271 <그림 4> 인구 1천 명당 민사사건수의 추이(조선 대 일본) * 일본통계 출처 : 最高裁判所事務総局, 明治以降裁判統計要覧 (1970). 20면. ** 일본(제1심소송사건)=通常訴訟+證書 爲替訴訟+假押留 假處分+特別訴訟+公示催告+其他 訴訟外의 申請 *** 조선(제1심소송사건)=民事訴訟事件+假押留 假處分事件 **** 조정사건 : 조선=민사쟁송조정사건 일본=차지 차가조정사건(1922年~)+소작조정사건(1924年~)+상사조정사건(1926年~) 이제 앞의 두 그림에서 확인한 민사사건의 양적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제1심 법원에 유입된 민사사건수를, 비슷한 시기의 일본과 대만의 민사사건수 와 비교하여 가늠해보자. <그림 4>는 일본과 조선에서 인구 1천 명당 제1심 민사소송사건 그리고 조정사건을 포함한 민사사건수(전년 이월사건과 본년 접 수사건 합계)를 계산한 것이다.42) 一年 道警察部長會議 會議資料, 국가기록원 조선총독부기록물(마이크로 필름번호 : 88-634, 관리번호 : CJA0002455). 42) 일본의 인구당 사건수는 最高裁判所事務総局, 明治以降裁判統計要覧 (1970), 17면, 20면 의 통계표에 의거하여 산출한 것이다. 표의 일본의 제1심소송사건수에는 通常訴訟 외에, 證 書 爲替訴訟, 假押留 假處分 소송, 特別소송, 公示催告, 기타 재판소에 대한 소송외의 신청 건수가 포함된 것이다. 좀 더 정확한 비교를 위해서 조선의 제1심 소송사건에도 가압 류 가처분사건수를 가산하였다. 조정사건수는, 조선의 경우 민사쟁송조정사건이고, 일본은

272 法史學硏究 第46號 일본과 조선의 인구대비 사건수를 비교하면, 일본이 조금 더 많다. 인구 1천 명당 제1심사건수(조정사건 제외)가 가장 적은 때, 일본은 2.5명(1910년), 조선은 2.0명(1910년)이었고, 가장 많은 때 일본은 5.8명(1928년), 조선은 4.8명(1927년) 이었다. 두 지역 간 인구대비 사건수의 차이는 1.2명을 넘지 않는다. 일본의 사 건수에는 통상소송 외의 사건들도 포함된 점, 자본주의경제가 더 진전된 점을 감안한다면, 두 지역 사이에 그다지 현격한 차이가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주목 되는 점은 조선에서의 인구대비 사건수가 병합 직후에 이미 일본에 근접하였 고 일본의 사건수를 앞질렀던 때도 있다는 것이다. <그림 5> 인구 1천 명당 민사사건수의 추이(조선 대 대만) * 臺灣日治時期統計資料庫(http://tcsd.lib.ntu.edu.tw)에서 제공되는 臺灣總督府 編, 司法事務集計表, 臺灣現住人口 統計 의 해당 연도 통계에 의한 것임. <그림 5>는 대만과 조선의 인구 1천 명당 민사사건수를 비교한 것이다.43) 차지차가조정(1922년부터), 소작조정(1924년부터), 상사조정(1926년) 사건을 수리한 건수이다. 43) 대만의 인구 및 재판통계는, 國立臺灣大學校 도서관 홈페이지에 링크된 臺灣法實證日治時

한말과 식민지시기 재판제도의 변화와 민사분쟁 273 인구대비 민사소송사건수에서는 조선이 줄곧 앞서지만, 민사쟁송조정사건을 합치면 대만이 더 많다. 대만에서는 지방청장이 수리한 민사쟁송조정사건이 법 원이 수리한 제1심 민사소송사건보다 좀 더 많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림 8> 참고). 이와 같이 민사분쟁 처리를 위한 제도적인 틀은 조금 달랐지만, 그 이용실태, 민사소송사건수의 증감 추이, 인구대비 사건수 등의 면에서 조선은 일본과 외 관상 유사한 모습을 갖고 있다. <그림 4>에 근거할 때, 조선에서 일본보다 특 별히 더 소송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할 근거는 없어 보인다. 또한 1915 년 6월에 개최된 재판소 검사국감독관 회의에서 고쿠부 산가이(國分三亥) 사 법부장은 건송은 조선인의 다년의 습성 이라고 말했지만,44) 일본의 일본인과 비교하여 조선인이 더 남소건송의 경향이 있었다고 볼 객관적 근거는 없어 보 인다.45) 소송 빈도만 놓고 따진다면 후술하는 바와 같이 오히려 조선의 일본인 들이 조선인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소송을 제기하고 있었다. 다만 조선인 의 경우 새로운 민사법규나 소송제도에 익숙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일본인 사 법관의 눈에는 조선인들이 재판거리가 못되는 일로 소송을 하는 경우가 많다 고 비춰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 해소될 것이 었고, 나중에 보겠지만 조선인의 소송율이나 소송제도 이용방식에서 어떤 두드 러진 특징을 발견하기는 힘들다. 한편 해방 후의 민사소송빈도와 비교를 하면, 1910~1920년대가 민사본안사 건 총수는 물론이고 인구대비 사건수에서도 1950~1960년대를 능가하고 있다. 期資料庫의 臺灣日治時期統計資料庫(http://tcsd.lib.ntu.edu.tw)에서 관련 통계자료를 검색하여 작성한 것임. 44) 大正四年六月 裁判所及検事局監督官会議 国分司法部長官 注意事項, 朝鮮総督府法務局法務課, 自明治四十一年至昭和十三年裁判所及検事局監督官会議 総督訓示及法務局長注意事項集, 91면. 45) 반면 1907년 6월 13일 한국에 초빙한 일본인 사법관에게 행한 연설에서는 이토 히로부미 통 감은, 한국민에게는 아직 건송의 폐가 없다 고 언급하였다. 友邦協會 編, 友邦シリーズ 第4號(資料) 朝鮮における司法制度近代化の足跡(朝鮮司法界の往事を語たる座談會記錄) (財 團法人友邦協會, 1976), 49면.

274 法史學硏究 第46號 전 심급에서 1년간 접수된 민사소송사건수로 총인구수를 나눈 것으로 소송율 을 계산하면, 1910년 468명당 1건으로 출발하여 1913년에 372명당 1건에 이르 고 이후 소송율이 감소하여 400명대를 유지하다가, 1920년 369명당 1건을 거쳐 1923년 296명당 1건으로 200명대에 진입하였고, 1927년에는 257명당 1건을 기 록하였다. 민사소송사건수는 병합 이후의 첫 번째 피크인 1913년에 41,593건이 이르렀고, 1925년에는 7만 건을 넘어서서 1927년에 74,416건에 달하였다. 반면 1950년대에 사건 수가 가장 많았던 1959년에도 31,000건을 조금 넘었고 소송율 은 인구 800명당 1건에 그쳤다. 60년대에는 연간 약 3만 건이 접수되고 소송율 도 점증하였으나 1966년에 인구 513명당 1건 정도였으며, 1975년에 인구 378명 당 1건의 비율을 기록하였다.46) 즉 1970년대에 들어서야 식민지시기의 소송율 수준에 겨우 근접하였다. 따라서 1950~1960년대의 현상에 터 잡아 함병춘이 제시한 소송기피 문화론 은, 이미 많은 비판을 받아 왔지만, 전통시대에 시간적으로 더 근접한 1910~1920년대에 소송이 급증한 원인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더욱 설득력을 잃는다 할 것이다. 하지만 현대 한국인의 법 불신 태도가 일제의 억 압적 통치에서 양성되었다고 논하는 것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일제에 의해 운 용된 사법제도는 합리적 분쟁처리기관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오히려 법원의 이용을 기피하게 만들었다고 쉽게 말해버릴 수도 없다.47) 식민지적 사법제도의 46) 해방 이후의 소송율은 이철우, 1920~30년대 전라남도 순천 지방의 사법기구와 분쟁, 사회 와 역사 제62권(2002), 107면. 같은 곳에서 1920~30년대 순천지역의 인구대비 소송율이 1950~60년대의 소송율보다 높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민사소송율은 1980년대들에 급격히 증 가하여 2002년에는 100건을 초과할 정도가 되었다. 그 원인에 대한 논의를 포함하여 자세한 것은 김도현, 한국의 소송과 법조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7), 35면 이하. 한편 일본의 경우도 1945년 이전의 사건수가 그 이후보다 결코 적지 않았다. 더 흥미로운 것은 1875년(明治8)부터 1899년까지 민사소송 제1심 신수건수의 추이를 보면, 1875년의 신수건수(권해사건을 제외한 것임)가 32만3,588건으로 1985년의 신수건수에 필적할 정도로 많았다는 점이다. 당시의 일본 인구는 현재의 3분의 1 남짓이지만, 소송건수는 거품경제 붕괴 이전에 최고의 수치에 달한 1985년의 사건수에 근접하였다. 林屋礼二, 明治期民事裁判の近代化 (東北大學出版會, 2006), 125면, 149~150면은 그 이유에 관해서 1883년에 정점에 달한 디플레이션의 영향, 민사 소송과 권해제도의 상호 관계, 권해이용을 촉진시킨 요소들 등등의 측면에서 논하고 있다.

한말과 식민지시기 재판제도의 변화와 민사분쟁 275 구조와 성격의 측면에서는 이러한 지적이 타당하지만, 그 사법제도 하에 舊 재 판소 시기는 물론이고 1950~1960년대를 훨씬 웃도는 사건수 및 법원의 이용도 와 대면하기 때문이다. 2. 민사소송당사자의 인구 구성 앞에서 본 것은 어디까지나 사건의 총량을 살펴본 것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는 사건당사자들의 인구구성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알아볼 것이다. 아래의 <표 1>은 모든 심급의 법원에 접수된 민사소송사건을 당사자의 민족 국적별 로 집계한 것이다. 인구구성상 당연히 조선인 간의 사건이 압도적으로 많고, 조 선인 대 일본인의 사건, 일본인 간의 사건과 같이 일본 그 뒤를 잇고 있다.48) 병합 직후와 비교하면 일본인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일본인이 당사자인 소송 사건의 비율이 조금 커지고 있다. 외국인이 당사자인 사건의 비율은 극히 미미 하였다.49) 47) 상술하면, 일제 강점기에 새로 도입된 근대 사법제도는 일제의 식민통치 수단으로 이용되었 기 때문에 합리적인 분쟁처리 제도라기보다 법적 의무를 강제하기 위한 국가권력의 일부분 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따라서 분쟁처리를 위한 법원 이용은 억제되고 점차 재판이용을 기 피하는 경향이 심화되었다는 것이다. 황승흠 분쟁과 질서의 법사회학 (성신여자대학교 출 판부, 2005), 344면. 48) 같은 기간에 민사쟁송조정사건의 신수사건에서는 조-조 사건이 82.5%, 조-일 사건이 13.7%, 일-일 사건이 1.6%, 기타 외국인이 당사자가 된 사건(<표 1>의 조-외, 일-외, 외외, 조-일-외 사건)이 2.2%를 차지하였다. 제소전 화해사건에서 조-조 사건은 76.8%, 조일 사건은 12.3%, 일-일 사건은 10.4%, 나머지 사건은 0.5%였다. 49) 통계연보 에 의하면, 1911년 조선의 인구는 14,055,869명, 그 중 조선인은 13,832, 376명 (98.4%), 일본인은 210,689명(1.5%), 외국인은 12,804명(0.1%)이다. 1929년의 인구는 19,331,061 명, 조선인은 18,784,437명(97.2%), 일본인은 488,478명(2.5%), 외국인은 58,146명(0.3%)이다. 이 기간 연평균 인구증가율은, 전체 인구는 1.8%, 조선인 인구는 1.7%. 일본인 인구는 4.8%, 외 국인 인구는 8.8%이다. 참고로, 외국인 가운데는 중국인이 절대 다수이고, 중국인을 제외한 외국인 인구는 대상 기간 중 가장 많았던 1929년에도 1,474명에 불과하였다.

法史學硏究 第46號 276 <표 1> 당사자의 민족 국적별 민사소송사건수(전 심급, 신수)의 추이 구분 1910 1911 1913 1915 1917 1919 1921 19 23 1925 1927 1929 평균 新數 朝-朝 朝-日 日-日 朝-外 日-外 外-外 朝-日-外 計 20,773 1,797 1,659 84 50 3 0 24,366 0.0% 百分比 85.3% 7.4% 6.8% 0.3% 0.2% 0.0% 新數 27,551 2,257 2,015 128 57 7 100% 32,015 百分比 86.1% 7.0% 6.3% 0.4% 0.2% 0.0% 0.0% 100% 新數 31,949 3,174 3,145 187 72 9 3 38,539 百分比 82.9% 8.2% 8.2% 0.5% 0.2% 0.0% 0.0% 100% 新數 28,348 4,681 3,448 238 69 20 1 36,805 百分比 77.0% 12.7% 9.4% 0.6% 0.2% 0.1% 0.0% 新數 27,810 3,668 3,351 135 60 5 百分比 79.4% 10.5% 9.6% 0.4% 0.2% 0.0% 0.0% 100% 新數 29,012 3,757 2,233 117 34 6 2 35,161 百分比 82.5% 10.7% 6.4% 0.3% 0.1% 0.0% 0.0% 100% 新數 41,765 7,430 3,092 241 55 12 1 52,596 百分比 79.4% 14.1% 5.9% 0.5% 0.1% 0.0% 0.0% 100% 新數 40,745 8,181 5,805 255 99 28 2 55,115 百分比 73.9% 14.8% 10.5% 0.5% 0.2% 0.1% 0.0% 100% 新數 46,057 7,735 5,886 270 89 19 2 60,058 百分比 76.7% 12.9% 9.8% 0.4% 0.1% 0.0% 0.0% 新數 50,380 8,780 6,101 244 86 22 百分比 76.8% 13.4% 9.3% 0.4% 0.1% 0.0% 0.0% 100% 新數 47,565 7,744 4,876 169 56 15 2 60,427 100% 35,029 100% 65,613 百分比 78.7% 12.8% 8.1% 0.3% 0.1% 0.0% 0.0% 100% - 79.6% 11.5% 8.3% 0.4% 0.15% 0.03% 0.002% 100.0% * 조선총독부통계연보 에 의해 작성한 것임. <표 1>과 <그림 6>은 조선인간 사건(이하 조-조 사건이라 함), 조선인과 일본인간 사건(이하 조-일 사건), 일본인간 사건(이하 일-일 사건)의 증감비율 을 보기 위해 1910년부터 1929년까지 20년간의 연평균 증가율 그리고 5년 단위 의 연평균 증가율을 조사한 것이다. <표 1>에 따르면, 조-조 사건은 연평균 4.5%씩 증가하였는데, 조-일 사건의 연평균 증가율은 8.0%, 일-일 사건의 경 우 5.8%이다. <그림 6>으로 재정리한 5년 단위별 증감율의 진폭도 조-일 사건

한말과식민지시기재판제도의변화와민사분쟁 277 < 그림 6> 당사자민족별민사소송사건 ( 신수 ) 의연평균증감률 과 일-일 사건이 조-조 사건보다훨씬넓게나타난다. 이는일본인구가증가함에따라조선인 일본인간의접촉이증가하고있음을보여주면서, 동시에 조-일, 일-일 사건수가경기변동에더민감하게반응하고있었음을시사한다. 그렇다면이러한사건들은조선인, 일본인, 외국인의각인구군내에서어느정도빈발하고있었을까? < 표 2> 는당사자양쪽또는당사자중한쪽이조선인, 일본인, 외국인인사건수를계산한후, 전체인구및각인구군내에서 1만명당사건수를각각산출한것이다. 조선의전체인구 1만명당연평균 26.9건의소송사건이전심급법원에새로접수되었다. 조선인과일본인이당사자인사건에한정해서말하면, 조선인내에서는조선인 1만명당 조-조 사건은 21.7건, 조-일 사건은 3.3건이제기되었다. 일본인내에서는 일-일 소송이일본인구 1만명당연평균 109.6건, 조선인을상대로한 조-일 소송은연평균 153.2건이발생하였다. 즉조선인이당사자가된소송사건이일본인이당사자가된사건보다총량적으로는 4~5배많

278 法史學硏究 第46號 <표 2> 민족 국적별 인구군내 소송사건의 발생 빈도 전체 인구 1만 명당 조선인 1만 명당 일본인 1만 명당 전체 사건 (전 심급, 신수) 朝-朝 朝-日 조선인 사건 전체 1911 22.8 19.9 1.6 1912 25.1 21.7 2.0 1913 24.9 21.1 1914 23.0 1915 1916 외국인 1만 명당 日-日 朝-日 일본인 사건 전체 外-外 외국인 사건 전체 21.6 95.6 107.1 205.5 5.5 150.0 23.7 106.4 118.6 227.1 1.8 85.0 2.1 23.3 115.8 116.9 235.4 5.2 156.2 18.4 2.7 21.3 115.0 147.1 264.6 8.9 148.1 22.6 17.8 2.9 20.8 113.5 154.2 270.0 11.7 191.8 20.9 16.9 2.3 19.2 104.9 117.8 224.7 8.3 102.7 1917 20.6 16.7 2.2 19.0 100.8 110.3 212.9 2.6 104.7 1918 20.5 17.1 2.1 19.3 78.8 105.1 185.8 5.2 89.9 1919 20.5 17.3 2.2 19.6 64.4 108.4 173.9 3.0 80.4 1920 24.8 20.6 3.2 23.9 68.5 157.6 227.5 4.4 89.0 1921 30.1 24.5 4.4 29.0 84.1 202.1 287.7 4.6 119.1 1922 27.7 21.6 4.0 25.8 116.5 178.9 296.5 5.6 73.1 1923 30.8 23.4 4.7 28.2 144.0 203.0 349.5 8.0 109.6 1924 33.7 26.1 4.7 31.0 149.4 201.7 353.3 8.4 100.1 1925 31.6 24.8 4.2 29.2 138.6 182.1 322.8 4.0 80.1 1926 33.2 26.4 4.3 30.9 131.8 181.8 315.6 4.9 81.0 1927 34.3 27.0 4.7 31.9 134.1 193.0 329.0 4.3 68.6 1928 32.7 26.3 4.2 30.6 119.3 166.3 287.3 2.4 50.8 1929 31.3 25.3 4.1 29.5 99.8 158.5 259.5 2.6 41.6 평균 26.9 21.7 3.3 25.1 109.6 153.2 264.7 5.3 101.1 * 출처 :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의 인구 및 사건통계에 의해 작성한 것임. ** 신수합계 = <표 1>의 신수 합계. *** 조선인 사건 전체 = <표 1>의 朝-朝, 朝-日, 朝-外, 朝-日-外의 합계. 일본인 사건 전체= <표 1>의 日-日, 朝-日, 日-外, 朝-日-外의 합계. 외국인 사건 전체= <표 1>의 外-外, 朝-外, 日-外, 朝-日-外의 합계. 지만, 각 인구군 내에서 소송당사자가 발생한 빈도는 일본인 쪽이 조선인 쪽보 다 10배 이상 많았다. 그리고 조선인 당사자 중 13%가 일본인을 상대하였다면, 일본인 당사자 중 58%는 조선인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의 일본인들 가운데 소송당사자가 된 비율은 <그림 4>에서 본 같은 시기 일본의 인구대비

한말과 식민지시기 재판제도의 변화와 민사분쟁 279 사건수보다 훨씬 높다. 조선에서 일본인이 차지한 사회 경제적 지위나 조선인 과의 경제적 관계상 그만큼 일본인이 민사소송사건에 관계될 가능성 상대적으 로 더 많았을 것이다. 각 인구집단별로 상세하게 작성된 재판통계가 있다면, 각 인구집단별 분 쟁 양상과 분쟁해결제도의 이용실태 그리고 조선인에게서 나타나는 분쟁과 법동원 양상의 특징을 더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통계 연보 로는 조선인 일본인 외국인의 당사자인 사건의 접수건수와 처리건 수를 총량적으로 알 수 있는 데 불과하다. 병합을 전후한 시기의 통계연보 를 보면 민족 국적을 구분하여 세부 항목별로 재판통계가 작성되었으나, 1912~13년을 지나면 당사자의 민족 국적이 구분된 상세한 통계자료는 더 이상 통계연보 에 수록되지 않는다. 이 점 때문에 각 인구집단별로 상세한 분석을 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 3. 민사소송사건의 종류 다음의 <표 3>은 제1심 소송사건의 종류별 신수와 그 비율을 정리한 것이 다. 통계연보 를 통해서는 그 세부적인 구성내역을 알 수 없다. 일본의 자료를 참고로 하면 각각의 사건 종류의 명칭은 다툼의 대상이 된 물건 자체 혹은 그 가액의 인도, 반환, 지급 등을 목적으로 한 사건을 포괄한다 할 것이다.50) 만약 50) 같은 시기 일본의 재판통계는, 사건 종류가 금전, 토지, 건물 선박, 미곡, 물품, 증권, 인사, 雜事로 구분되어 있었다. 금전 사건은, 금전대차, 매매대금, 외상금, 地代, 가옥임대료, 손 해배상 사건 등이, 토지 사건에는 토지의 소유 매매 소작 임대차 저당, 토지경계 등과 관련하여 토지의 인도 반환, 소유권확인, 토지등기에 관련된 사건, 미곡 사건은 미곡의 매매 소비대차 임치 및 소작 등과 관련하여, 계약미곡, 소작미곡, 임대료미곡 등의 인 도 반환 등이 문제된 사안이다. 건물 선박 사건으로 분류된 것 중 건물에 관한 것은 건 물의 소유 임대차 저당 등과 관련하여 건물의 인도 반환, 건물의 건축 수선 철거, 소 유권 확인 기타 등기에 관한 사건이다. 물품 사건은 물품의 매매 대차 임치 등과 관련하

280 法史學硏究 第46號 각 사건별로 세부 항목의 구성분포를 알 수 있다면, 관련 분쟁의 내역과 분쟁 종류의 변화 추이를 더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나 아직 그런 정보를 담은 자료를 입수하지 못하였다. 이 부분은 앞으로 통계원표, 판결원본철, 사건 부등을 발굴하여 분석하여 보완해야 할 할 것이다.51) 또한 매우 아쉽게도 통 계연보 로는 당사자의 민족 국적별로 어떤 종류의 사건이 얼마나 제기되었는 지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따라서 지금으로서는 윤곽 정도를 파악하는 것으 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다만 당사자의 인구구성상 조선인들 간의 소송사건의 종류를 대체로 반영한다 할 것이다. <표 3> 제1심 민사소송사건(신수)의 종류별 건수 年度 1911 1913 1915 1917 金錢 建物 墳墓 借地 借家 小作 關係 土地 米穀 18,992 4,198 1,513 499 837 440 67.7% 15.0% 5.4% 1.8% 3.0% 1.6% 22,414 6,871 1,677 642 894 595 63.4% 19.4% 4.7% 1.8% 2.5% 1.7% 25,516 4,275 1,032 539 167 541 物品 人事 證券 船舶 其他 總計 180 249 1,137 28,072 0.6% 0.9% 0.1% 4.1% 100% 414 251 1,535 35,327 1.2% 0.7% 0.1% 4.3% 100% 398 130 1,745 34,375 0.4% 0.1% 74.2% 12.4% 3.0% 1.6% 0.5% 1.6% 1.2% 22,110 4,257 2,116 612 66 927 695 67.8% 13.1% 6.5% 1.9% 0.2% 2.8% 2.1% 62 27 34 32 27 0.2% 0.1% 5.1% 100% 1,730 32,602 5.3% 100% 여, 물품의 인도 반환 소유 등이 문제된 사안이다. 인사 사건은 家督相續, 이혼, 인지, 입 양, 파양, 후견, 친족회 등에 관한 사건이다. 증권 사건은 株券, 事證書, 公債證書, 恩級 및 연금증서, 債券, 어음, 수표, 帳簿 기타 서류에 관한 사건이다. 雜事 사건은 가압류 가처분, 강제집행, 사해행위 취소, 무효 확인, 계약확인, 청구이의, 보존신청 등의 사건을 포함한다. 林屋礼二 管原郁夫 林真貴子 田中亜紀子 編, 統計から見た大正 昭和戦前期の民事 裁判 (慈學社, 2011), 55면 이하. 다른 항목들은 조선의 재판통계상의 항목과 거의 일치한다 고 생각되지만, 일본의 잡사 사건을 조선의 기타 사건으로 일대일 대응시키기는 곤란하다. 조선의 통계에는 민사소송사건 내에서 기타 로 분류한 것이기 때문이다. 51) 이철우 교수는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의 사건부를 활용하여 순천 지방의 분쟁의 종류와 성 격, 처리결과를 상세히 분석한 바 있다. 논문에서 정리된 각 분쟁의 종류와 내용은 <표 3> 의 각 항목의 내역 및 구성을 추측하는 데 참고가 된다. 이철우, 앞의 글(주 46), 109~119면.

한말과 식민지시기 재판제도의 변화와 민사분쟁 1919 1921 1923 1925 1927 1929 18,984 5,860 3,189 856 61 1,085 690 58.5% 18.1% 9.8% 2.6% 0.2% 3.3% 2.1% 35,997 5,587 1,893 1,228 95 911 775 73.4% 11.4% 3.9% 2.5% 0.2% 1.9% 1.6% 36,064 5,750 2,262 1,640 72 896 1,001 69.9% 11.1% 4.4% 3.2% 0.1% 1.7% 1.9% 35,246 8,133 2,723 1,454 922 924 773 1,469 63.0% 14.5% 4.9% 2.6% 1.6% 1.7% 1.4% 2.6% 37,766 10,378 2,016 1,751 817 872 676 1,535 76 30 0.2% 0.1% 76 50 0.2% 0.1% 98 31 0.2% 0.1% 52 28 0.1% 0.1% 90 25 1,632 281 32,463 5.0% 100% 2,436 49,048 5.0% 100% 3,793 51,607 7.3% 100% 4,225 55,949 7.6% 100% 5,382 61,308 61.6% 16.9% 3.3% 2.9% 1.3% 1.4% 1.1% 2.5% 0.1% 0.0% 8.8% 100% 35,302 9,383 1,580 1,567 764 617 526 1,455 213 4,121 55,580 63.5% 16.9% 2.8% 2.8% 1.4% 1.1% 0.9% 2.6% 0.4% 0.1% 7.4% 100% 52 * 조선총독부통계연보 의 해당 연도의 통계에 의해 작성한 것임. ** 통계연보 에서 분묘 항목은 1924년까지, 차지 차가, 소작 항목은 1925년부터 집계되었음. *** 굵은 글씨는 사건수가 많은 상위 3개를 표시한 것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금전소송이 가장 많고 토지소송과 더불어 전체 신 수의 80% 이상을 차지하였다. 이러한 사건 종류별 구성비는 舊 재판소 시기 및 보호국기와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만약 금전사건이 주가 되는 독촉사건까지 계산에 넣으면, 민사사건 중 압도적 다수가 금전관계 사건이었다. 1910년대에 비교적 사건수가 많은 사건들, 즉 금전, 토지, 미곡, 건물, 물품, 인사, 분묘, 기 타 사건의 연평균 증감률을 계산하면 <표 4>와 같다. <표 4> 주요 종류의 사건의 연평균 증감률 기간 전체 金錢 土地 米穀 其他 建物 物品 人事 墳墓 1912-1914 6.0% 6.8% 8.0% -8.6% 13.8% 5.0% 12.3% 25.8% -21.8% 1915-1919 -1.4% -7.1% 8.2% 32.6% -1.7% 12.3% 19.0% 14.7% -22.3% 1921-1924 5.1% 2.1% 10.3% 14.5% 15.3% 19.7% -0.8% 22.7% -9.7% 1925-1929 -0.2% 0.0% 3.6% -12.7% -0.6% 1.9% -9.2% -0.2% 전 기간 3.9% 3.5% 4.6% 0.2% 7.4% 6.6% 1.0% 12.3% * 조선총독부통계연보 의 해당 연도의 통계를 기초로 계산한 것임. ** 굵은 글씨는 해당 기간에서 증감률이 큰 3개 항목을 표시한 것임. -18.7%

282 法史學硏究 第46號 다른 항목에 비해 금전사건의 기간별 증감률은 전체 사건의 증감율과 가장 비슷하다. 1915~1919년에 금전사건이 감소한 것은, 이 시기 분쟁당사자 중 상 당수가 독촉절차로 눈을 돌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토지와 건물 사건은 전 기 간에 걸쳐 감소세 없이 증가하였다. 미곡사건의 부침이 가장 심하고 1910년대 에는 전체사건의 증감추세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미곡 사건의 경우 작 황, 경기변동, 투기 분위기에 민감하게 반응할 여지가 있다. 1910년대 말에 미 곡사건이 급증한 점을 볼 때, 1차 세계대전 후의 호경기와 함께 온 물가앙등, 특히 일본의 쌀 소동(1918년)의 여파로 조선 쌀이 대량 반출되고 매점매석이 이 루어짐으로써 수급 불안이 발생하고 쌀값이 폭등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52)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전통적으로 債訟, 田宅訟과 더불어 3대 소송의 하나로 불렸던 山訟 즉 분묘사건이 1913년부터 급감하고 있는 것,53) 반대로 人事사건이 크게 증가하는 것이다. 분묘소송의 경우 토지 임야조사사업에 의한 소유 이용관계의 정리와 확인, 산림 묘지 관련 법제의 정비 등에 의 해 분쟁요인 자체가 감소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인사사건의 급증세는 상속, 이혼, 입양 등에 관한 분쟁이 종래의 관습적 규범에 의한 규율이나 가족질서 내에서 해결되지 못하고 법원으로 유입되는 사건이 많았음을 뜻한다. 특히 총독부 법무과에서 작성한 조선인간의 이혼소송 (1918년)이라는 자료상의 수치에 의거하면,54) 처의 남편에 대한 이혼소송이 당시의 인사사건소송의 절 반 정도를 차지한 것으로 추정된다. 매일신보는 1911년에는 여권의 발달(女 52) 쌀 소동의 배경과 여파에 대해서는, 孫禎睦, 日帝强占期 都市社會相硏究 (一志社, 1996), 66~78면. 53) 1925년 이후 분묘사건 항목이 없어진 것은, 분묘 관계 분쟁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사건수 가 급감하여 독자적 항목으로 집계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평가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54) 司法部法務課, 朝鮮人間の離婚訴訟, 朝鮮彙報 1918年2月, 112면. 이에 따르면 협의이 혼 건수는 1910년 3,869건에서 1916년 9,668건으로 급증하였다. 남편에 대한 처의 이혼소송 수리건수는 1910년에 22건에 불과하였으나 1911년 67건, 1912년 129건, 1913년 200건, 1914년 212건, 1915년 202건, 1916년에는 296건에 이르렀다.

한말과 식민지시기 재판제도의 변화와 민사분쟁 283 權發達) 로서 이혼소송에 대해 찬성하였으나 1913년에는 부자간 소송과 이혼 소송의 증가에 대해 근일 신풍조가 조선에 들어와서 진정한 신문명과 진정 한 권리사상을 배우지 못하고 공연한 망상 으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으로서 개탄하였다.55) 이러한 변화 속에서 조선총독부 당국의 인식도 변화하였다. 관습조사보고서 에서 협의이혼 및 재판상 이혼의 형태는 조선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 반면,56) 1915년에는 민적처리상 협의이혼을 인정하고, 1918년 4 월 11일의 조선고등법원 판결은 조선의 관습에 의하면 부부는 남편의 동의 하에 협의 이혼할 수 있다고 판결하였다.57) 협의이혼이 드물지만 종래의 사 회관행으로서 존재한 것인지 혹은 사회변화에 따라 형성된 신 관습 58)이었 는지는 좀 더 검토할 여지가 있지만, 아무튼 이혼소송의 증가와 그에 대한 총독부 당국의 관습에 대한 인식변화를 통해 조선민사령에 의해 구분지어진 일본민법과 조선인의 관습 사이의 간극이 점차 좁아지고 있었다. 그것은 재 산법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민사령이 시행된 지 불과 10년 후 京城 覆審法院 부장판사 요시다 헤이지로(吉田平治郞)는, 조선인 상호의 법률행위 에 관해서는 조선인의 관습에 의하도록 하고, 일본민법상의 물권 외에 관습 상의 부동산물권을 인정한 조선민사령 제10조와 제12조는 조만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일본민법 제92조(사실인 관습에 관한 규정)와 朝鮮民事令 제10조 사이의 차이는 단순히 관념상 구별에 그치고 실제 적용상 차이가 없 을 뿐만 아니라, 민법상의 물권의 종류 효력을 달리하는 부동산물권관습의 55) <每日申報> 1913. 5.30. 親族相訟의 惡習. 56) 정긍식 편역, 改譯慣習調査報告書 (한국법제연구원, 2000), 323~326면. 57) 1910년대의 협의이혼 사건의 증가 및 그에 대한 총독부 당국의 인식과 대응에 관해서는, 이 승일, 조선총독부 법제정책 (역사비평사, 2010), 190~192면. 구한말 민사판결집 에는 재판 상 이혼이나 협의이혼 자체가 쟁점인 사례는 없다. 다만 이혼 사유는 불명하지만 남편과 처 첩이 이이(異離)한 후 재산문제로 다툰 사례가 몇 건 발견된다(한성부재판소 1898.9.15. 광무2년제315호, 家舍價 소송; 한성부재판소 1902.11.29. 광무6년민제227호, 家舍價에 관한 건; 한성재판소 1904.8.13. 광무8년제297호 家舍 什物 소송 등). 58) 위의 책, 193면.

284 法史學硏究 第46號 예는 극히 드물고 설령 있다고 해도 민법물권편의 관습의 효력을 인정한 개 별 규정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59) 4. 민사분쟁의 처리 실태 1) 민사쟁송조정사건과 제소전 화해사건의 처리 여기에서는 다양한 분쟁처리시스템으로 유입된 사건들은 어떻게 처리되었 으며 거기에서 어떤 특징을 볼 수 있는지를 살펴보겠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조선에서의 인구대비 사건수는 일본의 그것과 비슷 할 정도로 많았다. 이는 일본에 비해 판사수는 약 1/2, 변호사수는 약 1/5 정 도였던 조선에서 일본과 거의 대등한 수의 사건을 처리하였다는 말이 된다. 조선민사령이 만들어낸 사법제도는 사건처리에 상당한 효율성을 갖고 있었 다. 1929년 조선고등법원장 요코타 고로(橫田五郎)는, 조선민사령 개정에 관 한 사법관회의 석상에서 각국에서 소송지연의 방지가 큰 문제가 되고 있고 그 점에서 영국이 가장 발전하였으나 조선민사령은 그보다도 우수하다 고 자평하였을 정도였다.60) 실제로 같은 시기 심리기간 및 사건처리 비율을 비 교하면 조선총독부법원이 일본의 재판소보다 심리기간이 더 짧고 미결사건 도 훨씬 더 적었다. 식민지적 사법제도의 제반 특질은 식민지통치당국이 본국에서보다 훨씬 제약된 자원 내에서 사건처리의 효율을 높이고자 한 것에서 비롯되고 있었 59) 吉田平治郞, 朝鮮に於ける慣習と民事法規との関係, 司法協会雑誌 2-4(1923), 6~10면. 상세한 설명은, 鄭鍾休 앞의 책(주 1), 108~109면. 60) 昭和四年九月 部長 上席判事 裁判長会同ニ於ケル横田高等法院長講話, 法務局 民事 係, 昭和四年九月 部長 上席判事 裁判長会議ニ關スル書類, 국가기록원 조선총독부기 록물(마이크로필름번호 : 86-688, 관리번호 : CJA0004035).

한말과 식민지시기 재판제도의 변화와 민사분쟁 285 다. 민사쟁송조정제도의 목표도 그러한 것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의 법률사상이 유치하여 본래 재판을 하지 않을 만한 사항에 관해서도 왕왕 무 익한 분쟁이 발생하여 재판소에 제출되면 판사의 말 한 마디에 의해 화해로 완료하는 사건이 적지 않다 하며,61) 이 제도가 민도에도 부합할 뿐만 아니라 사건의 간소화와 신속에 기여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민사쟁송조 정제도는 지방법원지청 미개청지에 제공되는 변칙적인 제도에 머물렀다. 이 점은 다음의 <그림 7>, <그림 8>에서도 여실히 확인된다. <그림 7>에 의 하면, 제도 시행 후 몇 년 동안 비교적 많은 사건이 처리되었으나 조정 성립 율이 50%를 넘지 못하였다. 전반적으로 조정 성립율은 40% 안팎에 불과하였 고 나머지는 조정이 성립하지 않거나 도중에 취하되었다.62) 반면 <그림 8> 과 같이 대만에서의 조정 성립율은, 1904년 이후에는 70% 안팎이고 조정불 성립 및 취하율도 조선보다 낮았고, 민사쟁송조정으로 처리된 사건수가 제1 심 민사소송사건 기제건수보다 많았다. 대만에서 민사쟁송조정제도는 처음 에는 지방법원지청이 없던 3개 廳에서 시작하였으나(1904. 2. 율령 제3호) 1912년 4월에 모든 廳長이 민사쟁송조정 및 그 집행을 취급할 수 있게 하였 다(1912. 7. 율령 제2호). 61) 1910(明43).12.7, 犯罪卽決例,民事爭訟調停ニ關スル件, 辯護士規則, 公文類聚, 請求記號 : 2A-11-類1108, 일본국립공문서관 소장 문서. 62) 민사쟁송조정사건의 감소가 곧바로 민사분쟁에 관한 대민업무가 경찰관서의 손에서 떠났음 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1920년대 들어 일본에서는 경찰의 민중화 를 표방하면서 경찰의 대 민봉사활동을 확대하여 경찰주재소에 人事相談所를 설치하여 정신 직업 고용 감화 보호 위생 주택 공장 등에 관해 상담활동을 벌였고 도시지역에서는 주택임대차 분쟁에 관한 상담이 다수를 점했다. 조선에서도 이러한 노선을 본받아 각 경찰관서에 인사상담소를 설치하였는데, 그 업무사항을 보면 가족 사회생활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각종 분쟁과 민원사 항이 포함되어 있다. 문준영, 한국의 형사사법과 민사분쟁형 고소사건 구한말과 일제 강 점기의 경험, 법학연구 48-1(부산대학교 법과대학 법학연구소, 2007), 1417~1418면.

286 法史學硏究 第46號 <그림 7> 민사쟁송조정사건의 기제유형별 비율 (조선) * 조선총독부통계연보 에 의해 작성한 것임. <그림 8> 민사쟁송조정사건의 기제유형별 비율(대만) * 臺灣日治時期統計資料庫(http://tcsd.lib.ntu.edu.tw)의 臺灣總督府, 司法事務集計表에 의해 작성한 것임.

한말과 식민지시기 재판제도의 변화와 민사분쟁 287 <그림 9>와 같이 제소전 화해신청사건도 민사쟁송조정사건과 비슷한 감소 추세를 보인다. 병합 초기에는 연간 11,000건 안팎이 처리되었으나, 화해가 성립 한 비율은 50%에도 미치지 못했다. 조선민사령 시행 이듬해인 1913년부터 화해 사건의 수는 급감하였고 화해 성립율이 높아지고 있다. 이는 초기에는 화해의 가망이 별로 없는 사건들도 제소전 화해절차로 유입되었음을 말해준다. 일본에 서도 민사소송법 시행 후 제소전 화해절차의 이용도가 급감하였다. 한편 통계 연보 에 의하면, 민사쟁송조정사건과 화해사건 모두 1913년부터 금전사건과 미 곡사건이 현저히 감소하였다. 금전과 미곡 사건은 일상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사 건으로 어찌 보면 이들 제도의 주된 표적라고도 할 수 있으나, 실제 이용도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아마도 더 편리한 독촉절차로 발길을 돌렸을 것이다. <그림 9> 제소전 화해 신청사건 처리건수 및 결과 * 조선총독부통계연보 에 의해 작성한 것임. 1910년대 전반 재판소에 대한 총독훈시 및 司法部長의 주의사항에서는, 재 판사무의 신속을 도모하고 남소건송의 폐습을 교정하기 위해 화해 의 권유가

288 法史學硏究 第46號 강조되고 있었다. 특히 1915년 고쿠부 산가이(國分三亥) 사법부장은 건송은 조 선인의 다년의 습성이라고 하며, 당사자가 화해를 신청하지 않은 때라도 화해 를 시도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당사자에게 事理를 말하고 利害를 諭示하여 화해 또는 취하 등의 조치에 의해 사건을 종결하라고 하였 다.63) 그러면 이러한 주문은 얼마나 실제 소송사건의 처리에 반영되었을까? 2) 제1심 민사소송사건의 처리결과 <그림 10> 제1심 민사소송 기제사건의 종국구분별 비율(조선) * 조선총독부통계연보 의 해당 연도의 통계에 기초하여 계산한 것임. 63) 1912년 5월, 1914년 5월 재판소 및 검사국감독관 회의석상에서의 寺内総督 訓示. 朝鮮総督 府法務局法務課, 自明治四十一年至昭和十三年裁判所及検事局監督官会議総督訓示及法務局長 注意事項集, 13면, 22면; 1915년 6월 国分 司法部長官 注意事項, 같은 책, 91쪽. 이토 히로부 미도 화해의 장려를 區裁判所 운영 및 구재판소판사의 인선방침과 결부 지었다. 즉 1909년 4월 11일 일본사법성에게 개최된 사법관회동에서 이토 통감은 한국의 구재판소는 법률 에 정통한 사람보다 오히려 상당한 경함을 쌓고 인민이 쟁의 소송을 화해하도록 힘으로 쓰며 일면에는 한인에게 재판이 무엇인가를 주지케 할 수 있는 인물을 목하 제일 필요로 한다 고 하였다. 友邦協會 編, 앞의 책(주 45), 55면.

한말과 식민지시기 재판제도의 변화와 민사분쟁 289 <그림 10>은 제1심 민사소송사건의 각 종국 유형별 비율을 나타낸 것이다. 결석판결을 포함하여 판결에 의한 종국의 비율이 초기 약 56%였다가 조금씩 높아져서 1920년대에는 60%를 넘어섰다. 전체 종국 중 결석판결은 약 28%에서 출발하여 1920년대에 40%를 넘어섰고, 판결에 의한 종국 중 결석판결의 비율 도 70%에 가까워졌다. 각 연도의 결석판결건수와 결석판결에 대한 이의( 故障 事件 ) 건수로 보면, 결석판결에 대한 이의는 1915년 이후 35% 내외를 유지하 였다. 한편 전체 종국 중 25~30%는 취하에 의한 것이고, 10% 내외는 소송상 화해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수치는 같은 시기 일본에서의 사건처리결과와 비 교하여 어떻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림 11>은 민사소송법 시행 직후 1891년부터 개정 민사소송법이 시행된 1929년까지 일본의 지방재판소 제1심 및 區재판소에서 접수한 제1심 민사사건 의 종국구분별 비율의 추이를 정리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기제사건수에는 가압류 가처분, 공시최고, 소송 외의 신청 등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일대일 비교하는 데 약간 문제가 있다. 일본이 조선보다 판결의 비율이 낮고 기타 의 비율이 상당히 높은 것도 그 때문이라 할 것이다. 문제가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지만, 차이를 약간 보정하기 위해 <그림 10>과 <그림 11>의 기초가 된 통 계에서 기타 항목을 제외하고 종국유형별 비율을 재계산한 것이 <표 5>이 다. 조선과 일본에서의 판결 화해 취하의 비율 만을 비교 검토하는 데에는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290 法史學硏究 第46號 <그림 11> 제1심 기제사건의 종국구분별 비율(일본) * 林屋礼二 管原郁夫 林真貴子 編, 統計から見た明治期の民事裁判 (東京 : 信山社, 2005), 90면, 108면; 林屋礼二 管原郁夫 林真貴子 田中亜紀子 編, 統計から見た大正 昭和戦前期の民事裁判 (東京 : 慈學社, 2011), 111면, 130 면에 의해 작성한 것임. ** 기타 판결 에는 抛棄 認諾에 의한 판결, 기타 에는 소장반려 건수가 포함되어 있다. <표 5> 일본 조선 제1심 기제사건의 종국구분별 비율 판결에 의한 종국 일본 조선 판결에 의한 종국중 결석판결 일본 조선 취하 일본 화해 조선 일본 조선 1891 63.2% 45.0% 21.8% 15.0% 1895 63.1% 44.7% 31.0% 6.0% 1900 64.5% 49.5% 32.9% 2.5% 1905 63.2% 49.5% 33.7% 1910 57.3% 56.5% 52.9% 49.4% 36.7% 30.4% 6.0% 13.1% 1911 56.4% 57.6% 53.2% 53.0% 36.4% 29.1% 7.2% 13.3% 1912 55.6% 57.4% 55.1% 57.5% 35.6% 30.4% 8.8% 12.3% 1913 54.5% 60.1% 57.5% 56.8% 34.9% 28.5% 10.6% 11.4% 1914 54.1% 62.1% 57.8% 57.7% 33.2% 26.5% 12.7% 11.4% 1915 55.0% 61.6% 58.3% 59.3% 32.3% 26.1% 12.7% 12.2% 3.1%

한말과 식민지시기 재판제도의 변화와 민사분쟁 1916 52.4% 59.2% 58.8% 60.0% 35.0% 28.8% 12.5% 12.0% 1917 50.7% 57.6% 57.9% 62.1% 37.4% 30.1% 11.8% 12.2% 1918 47.9% 57.5% 57.3% 63.6% 39.1% 31.5% 13.0% 11.0% 1919 49.5% 59.4% 54.6% 63.5% 37.8% 31.3% 12.7% 9.3% 1920 49.8% 61.9% 58.2% 66.4% 37.3% 29.7% 12.9% 8.4% 1921 51.7% 63.1% 61.4% 67.2% 34.0% 27.6% 14.3% 9.4% 1922 52.6% 63.4% 62.7% 66.6% 32.3% 26.3% 15.1% 10.3% 1923 53.3% 64.0% 64.5% 66.5% 32.4% 25.1% 14.2% 10.9% 1924 53.2% 63.6% 63.1% 67.1% 31.6% 26.1% 15.2% 10.4% 1925 53.5% 62.9% 62.4% 68.0% 31.0% 27.3% 15.6% 9.8% 1926 53.5% 63.1% 61.4% 68.5% 30.3% 26.7% 16.2% 10.1% 1927 53.6% 63.5% 62.0% 70.2% 30.4% 26.7% 16.0% 9.8% 1928 52.9% 63.9% 63.1% 69.1% 31.1% 27.1% 16.0% 9.0% 1929 51.9% 63.1% 45.5% 63.9% 31.2% 27.4% 17.0% 9.4% 291 * 각 항목의 비율은, 기타 를 제외하고 판결, 취하, 화해 건수에 의해 구한 것임. <표 5>에 따르면, 판결에 의한 종국의 비율은 조선이 일본보다 높고 1910년 대 말부터는 10% 정도 차가 난다. 조선에서 결석판결의 비율이 일본보다 높은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조선에서 결석판결이 비정상적으로 많 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64) 취하의 비율은 반대로 일본이 조금 높다. 소송 상 화해로 종결된 사건의 비율은, 1910~1913년에는 조선이 높았으나 그 이후 에는 일본이 높다. <그림 11>은 일본에서 민사소송법 시행 후 소송상 화해에 의한 종국비율이 감소했다가 大正年間에 들어오면서 조금씩 그 비율이 높아지 고 있음을 보여준다.65) 통계작성 기준의 차이 때문에 단순 비교는 곤란하지만, 64) 1929년 개정된 민사소송법에서는 결석판결제도가 폐지되었는데, 그 해에 일본의 결석판결 비율이 낮아진 것도 그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개정 민소법의 시행에 맞추어 1929년 5월 제령 제6호로 조선민사령을 개정하였으나 제34조에서 지방법원 단독사건에서 결석판결을 할 수 있는 근거규정을 마련하였다. 65) 참고로, 대만의 경우, 1910년~1929년간 제1심 민사소송기제사건에서 화해의 비율은 평균 4.7%로 일본과 조선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대만의 경우, 민사쟁송조정사건이 소송사건만 큼 많았고, 기제사건 중 調 의 비율이 70%에 달하였음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292 法史學硏究第 46 號 병합직전 직후의시기를제외하면조선이일본보다판결에의한종국의비율이높으나그안에결석판결이더많이포함되어있었고, 일본에서는판결의비율은조선보다낮은대신취하와화해의비율이더높은것으로나타나고있다. 사건의종류나성격을따져볼필요가있지만, 조선이일본보다판결의비율이높고소취하와화해의비율이낮은것은식민지적재판제도가더신속하면서도효과적으로사건을처리할수있었던것과도관련이없지않을것이다. 다음으로사건종류에따라종결된방법을살펴보자. < 표 6> 는 1910년대사건수에서수위를차지하고있던금전, 토지, 미곡사건과, 이시기상반된추세를보여준인사, 분묘사건이제1심에서어떻게종결되었는지를정리한것이다. 개략적인윤곽만제시하기위해서 1911년부터 1919년까지 9년간의평균치를표시하였다. < 표 6> 주요사건의종국구분별비율 (1911~1919 년, 평균 ) 판결 구분 결석판결 판결 소계 취하 화해 기타 금전 37.8% 21.3% 59.1% 27.7% 12.6% 0.7% 미곡 36.4% 20.7% 57.1% 30.7% 11.9% 0.3% 토지 30.5% 29.4% 59.9% 30.8% 8.9% 0.5% 인사 7.6% 50.0% 57.7% 38.9% 1.8% 1.6% 분묘 21.3% 32.9% 54.2% 32.7% 12.8% 0.3% 금전사건과미곡사건에서는결석판결의비율이상대적으로높고, 화해로종결된사건의비율도비교적그렇다. 혈육간분쟁인인사사건에서는결석판결과화해의비율이현저히낮고취하된사건의비율이가장높다. 분묘사건에서도결석판결의비율이상대적으로낮은대신, 취하와화해로끝난사건도적지않다. 각사건의성격과소송에임하는당사자의자세를잘보여준다할것이다. 이상의통계들은소송당사자의민족과국적을구별하지않은것이다. < 표 7> 은조선총독부법원이취급한 조-조 사건, 조-일 사건, 일-일 소송사건에

한말과식민지시기재판제도의변화와민사분쟁 293 서각종국유형의비율을정리한것이다. 1911년 ~1926년도의관련통계가없기때문에, 병합이후의변화양상을연속적으로관찰할수는없다. 참고를위해 1930년, 1935년, 1940년의수치를추가하였다. 연도당사자종국합계 1909 1910 1927 1928 1929 1930 1935 1940 < 표 7> 조선인 일본인의제 1 심민사소송의기제사건의종국구분별비율 결석판결 (A) 기타판결 (B) 종국구분별비율 비고 취하화해기타 A+B A/(A+B) 조 - 조 2,784 25.6% 23.9% 37.9% 12.1% 0.4% 49.5% 51.7% 조-일 262 29.0% 33.6% 25.2% 11.5% 0.8% 62.6% 46.3% 일-일 277 39.0% 24.9% 18.4% 13.4% 4.3% 63.9% 61.0% 조 - 조 20,454 26.6% 28.0% 31.4% 12.9% 1.1% 54.6% 48.7% 조-일 1,758 33.4% 34.4% 20.5% 11.1% 0.6% 67.7% 49.3% 일-일 1,672 35.2% 24.4% 24.1% 14.2% 2.0% 59.6% 59.1% 조 - 조 45,998 43.0% 19.7% 28.2% 8.5% 0.7% 62.7% 68.7% 조-일 7,956 47.5% 17.6% 21.1% 13.0% 0.8% 65.0% 73.0% 일-일 5,570 50.4% 12.7% 21.1% 14.7% 1.1% 63.1% 79.9% 조 - 조 46,310 42.6% 20.4% 28.5% 7.9% 0.6% 63.0% 67.6% 조-일 7,411 47.4% 18.3% 21.5% 12.0% 0.8% 65.7% 72.1% 일-일 5,045 50.4% 13.6% 20.3% 14.5% 1.2% 64.0% 78.8% 조 - 조 45,107 38.8% 23.3% 28.5% 8.3% 1.1% 62.1% 62.4% 조-일 7,457 43.0% 20.7% 22.2% 12.8% 1.2% 63.7% 67.5% 일-일 4,838 45.2% 17.7% 21.7% 13.5% 1.9% 62.9% 71.8% 조 - 조 42,446 30.8% 30.1% 27.3% 9.1% 2.8% 60.9% 50.6% 조-일 7,377 35.5% 25.3% 23.3% 14.1% 1.8% 60.8% 58.4% 일-일 4,648 37.0% 23.1% 21.3% 16.8% 1.7% 60.2% 61.6% 조 - 조 37,990 34.2% 20.7% 24.7% 12.6% 7.8% 54.9% 62.4% 조-일 5,290 32.1% 19.1% 21.8% 20.5% 6.5% 51.1% 62.7% 일-일 3,018 33.8% 17.4% 22.3% 23.5% 3.1% 51.2% 66.0% 조 - 조 37,579 38.8% 17.5% 23.3% 13.5% 6.8% 56.3% 68.9% 조-일 3,649 32.1% 18.3% 24.1% 20.2% 5.2% 50.4% 63.6% 일-일 1,319 25.9% 21.7% 24.9% 23.5% 3.9% 47.6% 5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