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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等狀을 통해 본 조선후기 聯名呈訴와 公論 형성*) 金 景 淑**. 머리말. 인정소와 연명정소. 연명정소와 공론 형성 ) 등장과 연명인의 규모 ) 연명인의 집단성과 공론 형성 4. 맺음말 초록: 이 논문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等狀,5건을 대상으로 조선후기 연명정소 활동의 실태와 공론 형성의 특성을 분석한 글이다. 등장 은 인 이상이 연명으로 정소하는 문서로 인 정소와는 달리 다수의 관련인 들이 의견을 결집하고 단체 행동을 한 결과물이었다. 연명 정소는 8세기 후 반 이후 활성화하며 사회적 추세를 형성하였는데, 조선후기 대표적인 사회 문제에 해당하는 산송, 토지, 부세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50인 이상의 대규모 정소에서는 특히 정려 증직 관련 활동이 두드러지는 현상을 보였다. 연명 정소는 친족집단인 족인 및 문중, 서원 향교를 중심으로 한 유생, 그리 고 향촌공동체의 民人 등 세 사회집단이 주도하면서 각각 문중 공론, 유생 공론, 향촌 공론을 형성하였다. 족인들은 爲先事業을 중심으로 문중 차원에서 문중 공 론을 형성하고 대규모 정소활동을 전개하였다. 유생들은 정려 증직 등 성리학 적 사회질서의 유지와 연관된 문제를 중심으로 군현 단위의 공론을 형성하며 중대규모의 정소활동을 전개하였다. 민인들은 조선후기 최대의 시대적 과제였 던 부세 문제를 중심으로 촌락 단위에서 중소규모의 향촌 공론을 형성하였다. 이 와 같은 정소활동과 공론 형성의 특성은 조선후기 사회경제적 변동 속에서 각 사 회집단들이 당면한 사회문제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핵심어: 等狀, 呈訴, 聯名呈訴, 公論, 族人, 儒生, 鄕村社會 * 이 논문은 008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 된 연구임(KRF-008--A000) ** 조선대학교 사학과 7

8 奎 章 閣 6. 머리말 呈訴 는 民人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발생하는 각종 民願을 문서로써 국가에 요구하고 청원하는 행위를 말한다. 조선시대 정소는 所志 라고 하는 문서를 관에 제출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정소활동은 민인들이 개인적 차원에서 해결하지 못하 는 민원을 국가의 권위에 의지하고 민의를 표출하는 통로 역할을 하였다. 국가에 서는 이를 통해 민의를 파악하고 수용하여 사회문제와 갈등을 해소하고 사회 체 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聯名呈訴는 정소활동 중에서 인 이상이 연명으로 정소하는 것을 의미하며, 문 서 양식도 等狀을 사용하여 인의 단독 정소와는 구별되었다. 개인이나 단체가 스 스로의 이해와 권익을 지키기 위하여 집단을 형성하고 의사를 결집하여 전개하는 공식적인 청원활동이었다. 여기에는 이해당사자들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연합하 는 경우에서 문중, 서원 향교의 유생들, 촌락민들의 집단 행동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넓고 층위가 다양하였다. 연명정소의 실상이 그대로 반영된 등장에 대한 연구는 조선시대 국가와 民人의 소통 방식, 나아가 민의와 공론의 형성 과정과 특성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문제임에도 지금까지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조선시대 소지류 문서를 중심 으로 청원 및 소송 활동에 대한 연구가 상당 부분 진척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등장과 연명정소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한 시점에 와있다. 이와 함께 공론에 대한 시각의 확대도 요구된다. 지금까지 조선시대 공론에 대 한 연구는 주로 국가적 차원, 정치사적 관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공 ) 조선시대 소지류를 대상으로 한 주요 연구성과는 다음과 같다. 김인걸, 민장을 통해서 본 9세기 전반 향촌 사회문제, 한국사론, 990; 전경목, 조선후기 소지류에 나타나는 化民에 대하여, 고문서연구 6, 994; 조선후기 산송연구 8, 9세기 고문서를 중심으 로, 전북대 박사학위논문, 996; 한상권, 조선후기 사회와 소원제도, 일조각, 996; 김경 숙, 조선후기 산송과 사회갈등 연구,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00; 6세기 請願書의 처리절 차와 議送의 의미, 고문서연구 4, 004; 조선후기 여성의 呈訴활동, 한국문화 6, 005; 5세기 呈訴 절차와 관찰사의 역할, 역사와 현실 59, 006; 조선후기 山訟과 上 言 擊錚, 고문서연구, 008. ) 김돈, 6세기 전반 政治權力의 變動과 儒生層의 公論形成, 서울대박사학위논문, 99; 설 석규, 조선시대 유생상소와 공론정치, 선인, 00; 김동수, 書院通文의 公論性과 書院의 政治勢力化의 要因-書院通文 不漫 의 內容檢討, 역사학연구 0, 98; 김인걸, 조선후기

等狀을 통해 본 조선후기 聯名呈訴와 公論 형성 9 론은 사회 집단 내 구성원들이 의사결정 과정을 통하여 합의한 의견을 말한다. 여 론이 구성원들 사이에 존재하는 다수의 의견이라면 이 여론이 구성원들의 논의와 합의 과정을 통하여 공론화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 사회에서 공론의 형성은 그 범주를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따라 다양한 층위를 지닌다. 국가적 차원에서의 정치적 공론, 향촌에서 사족층의 공론, 마을 단위의 洞中 공론, 장시에서는 상인들 의 공론, 들판에서는 농민들의 공론, 가족 친족에서는 문중의 공론 등 다양한 집 단, 다양한 성격의 공론들이 공존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연명정소의 매체인 등 장은 공론 형성의 결과물로서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지금까지의 국가적, 정치적 차원의 공론에서 한 단계 나아 가 사회적 또는 공동체적 차원의 공론으로 연구 시각을 확대하여 연명정소에 반 영된 다양한 층위의 공론 형성을 검토하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본고에서는 규장 각한국학연구원에서 간행한 고문서 6~6에 수록된 등장 문서를 분석하여 조 선후기 연명정소 활동의 실태와 공론 형성의 특성을 파악하고자 한다. 이를 통하 여 조선후기 사회경제적 변동 속에서 각 사회집단들이 당면한 사회문제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공동체적 차원의 공론 형성이 가지 는 역사적 의미를 이해하는 데 토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인정소와 연명정소 조선시대 정소 문서인 소지류에는 상언, 단자, 상서, 발괄, 원정, 의송, 소장, 청 원서, 소지 등 다양 문서 양식들이 포함된다. 이들은 정소인의 신분 및 정소 단계 에 따라 구별되어 사용되는 경향이 있었다. 유서필지 에 의하면 상서와 단자는 양반 사족층이 정소할 때 사용하는 문서 명칭이었으며, 발괄과 원정은 凡人의 문 서양식으로 특히 하층민들이 선호하였다. 관찰사, 암행어사 등 상급 기관에 정소 할 때는 의송, 국왕에게 정소할 때는 상언과 격쟁원정을 사용하였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간행한 고문서 6~6에는 소지류 문서 5,5건이 수 록되어 있다. 이들 자료는 조선시대에 생산된 소지류 문서의 일부에 불과하며 시 여론과 정치: 公論政治 의 지속과 단절, 朝鮮의 政治와 社會, 집문당, 00. ) 김경숙, 조선후기 산송 소지류의 문서 양식과 분류, 규장각 5, 00 참조.

0 奎章閣 6 < 도표 > 인정소와연명정소의문서양식 정소인문서양식 인정소 연명정소 미상 총합계 상언 5 5 0 의송 4) 군현정소 단자상서의송 4 단자원정의송 단자의송 4 발괄의송 8 0 상서의송 50 9 4 원정의송 5 5 의송 59 85 44 합계 88 9 58 단자 58 76 57 상서 4 6 발괄 55 4 7 594 원정 90 0 복합 5) 9 0 소장및청원서 8 소지및기타,4 546 7,004 합계,596 907 7 4,540 총합계,989,5 7 5,5 기적으로도 8세기후반이후에집중되어있다. 문서생산자또한특정가문소장고문서에비하여비교적다양한분포를보이지만여전히사족층의비중이높다는한계성도존재한다. 때문에이를통해조선시대사회상을대표하고일반화하는데는한계가있을수밖에없다. 그러나본자료는특정목적하에특정집단을대상으로수집한결과물이아니며수적으로도방대하다는특성을지닌다. 따라서자료적한계성을고려하면서조선후기시대적추이를파악하는데는무리가없을것이다. 분석대상자료를중심으로조선후기연명정소의실태를파악하기위하여먼저 인정소와비교검토하는단계를거쳤다. < 도표 > 은 인정소와연명정소의문서양식에나타나는차이점을비교한결과이다. 문서양식에대한명칭은한문서내 4) 의송 은문서에의송이기록되지않았어도관찰사, 암행어사등에정소한경우는모두포함하였다. 5) 복합 은단자와상서, 상서와발괄등단자, 상서, 발괄, 원정이복합적으로기록된경우이다.

等狀을통해본조선후기聯名呈訴와公論형성 에도복합적으로혼재하는경우가많은데, 소지와단자 ( 또는상서, 발괄, 원정, 의송등 ) 가동시에나타날경우에는단자 ( 상서, 발괄, 원정, 의송등 ) 로분류하였다. 6) < 도표 > 에의하면연명정소는,5건으로전체정소활동의.8% 에달하였으며, 상서 6건, 의송 9건, 단자 90건, 발괄 6건, 원정 건, 상언 5건등의순서로나타났다. 세부적으로살펴보면, 차정소기관인군현정소에서는연명정소가 907건 (0.0%) 으로전체적인양상보다다소적게나타났다. 신분적으로는사족층의정소문서인상서가전체 6건중 인정소 4건 (5.8%), 연명정소 건 (74.%) 로연명정소에집중되는현상을보였고, 단자는전체적인양상과비슷하게나타났다. 반면凡人정소에해당하는발괄, 원정은특히 인정소에집중되는현상을보였는데, 발괄은 594건가운데 인정소가 55건 (9.%) 인데비해연명정소는 4건 (5.7%) 에불과하였고, 원정도 0건중 인정소가 90건 (89.%) 에달하였다. 관찰사등상급기관에정소하는의송은전체 58건가운데 인정소 88건 (66.8%), 연명정소 9건 (.%) 로전체적인양상보다다소높게나타났다. 최종단계인국왕에게정소하는상언은 인정소 5건 (6.7%), 연명정소 5건 (8.%) 으로연명정소에집중되었다. 종합적으로볼때, 연명정소는전체정소활동의 0~0% 에달하였는데군현단위의 차정소기관에서상급기관으로올라갈수록연명정소의비중이상승하는현상을보였다. 신분적으로는양반사족층의문서라고할수있는상서와상언은연명정소의비중은높게나타난반면하층민이선호한발괄과원정은 인정소에집중되었다. 이는 차정소기관에서상급기관으로올라가는과정에서정소활동이집단적경향을띠고있음을의미한다. 또한연명정소가사족층에서높게나타나는현상은전통사회에서양반사족층이다수의의견을결집하고집단행동으로표출되는연명정소를적극이용하였음을의미하며, 여기에는집단의식과이를뒷받침하는사회경제적여건이반영된결과로파악된다. 다음으로연명정소의연대별추이를살펴보면 < 도표 > 와같다. 도표에의하면연명정소는 8세기후반부터등장하고있어 인정소에비하여시기적으로늦게나타나고있음을확인할수있다. 물론연명정소가 8세기후반 6) 소지는가장일반적인정소문서의명칭이며다른문서양식들을아우르는범칭으로도사용되었다. 때문에문서의특성을반영하는측면이미약하여분류항목에서제외하였다.

奎 章 閣 6 <도표 > 인정소와 연명정소의 연대별 추이 시기 정소인 인정소 7C 전반 7C 후반 8C 전반 8C 후반 9C 전반 9C 후반 0C 초 간지 4 7 5 64 500 89,949 60 6 0 연명정소 미상 총합계 4 7 6 5 4 77 499 미상 총합계 8,989 75,5 4 7,688 4 5,5 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자료에 따르면 연명정소는 고려 말에도 확인되고 있으며, 599년 경주부 안강현 양좌동 사는 대소민들이 연합하여 경주 부윤에게 올린 등장도 확인된다.7) 그러나 이러한 개별적인 사례에서 한 단계 발 전하여 사회적 현상, 사회적 추세를 형성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시기일 것으로 추 정된다. 9세기 들어서면서 연명정소가 급증하고, 간지 연대가 대체로 8세기 후반에서 9세기의 문서임을 고려할 때 더욱 그러하다. 결국 연명정소는 조선후 기 정소의 한 흐름을 형성하면서 활성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8) 연명정소의 활성화는 조선후기 정소활동이 증가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사회현 상으로 이해된다. 조선후기 사회경제적 변화를 바탕으로 다양한 사회 문제들이 발생함에 따라 사회 갈등은 급증하고 민인들의 국가에 대한 청원활동도 활성화되 었다. 이들은 民願, 民隱으로 표출되고 있었는데 연명정소는 특정 사회집단이나 공동체의 민원, 민은을 해결하기 위한 공식적인 통로였다고 추정된다. 그렇다면 연명정소는 년 중 어느 시기에 주로 전개되었을까? <도표 >은 문서 에 기록된 정소 날짜를 기준으로 작성한 챠트로 정소활동의 계절별 추이를 잘 보 여준다. 전체 5,5건 가운데 정소날짜 또는 정소인원을 확인할 수 없는 76건을 제외하고 5,05건을 분석 대상으로 하였다. <도표 >에 의하면, 전체적인 정소활동은 ~월에 정점을 이룬 후 월 이후로 는 점차 하향 곡선을 그리다가 6월에 최하점을 기록하고 다시 상승하기 시작하여 0~월 사이에 다시 정점에 이르는 추세를 보인다. 이는 정소 활동이 농사철이 시작되기 전에 집중되었다가 농번기에 해당하는 5~7월에는 침체하고 가을 추수 7)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서집성 -경주손씨 편, 安康縣良佐洞居民等狀, 997. 8) 이는 규장각 소장 고문서가 8세기 이후 문서에 집중되어 있는 자료적 특성에서 연유한 현 상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가설을 일반화하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연구의 축 적이 필요할 것이다.

等狀을 통해 본 조선후기 聯名呈訴와 公論 형성 <도표 > 인정소와 연명정소의 정소시기별 분포 600 557 550 558 55 5 5 500 450 448 460 47 445 4 49 400 97 68 50 50 7 인정소 연명정소 총합계 04 00 75 7 50 6 00 54 50 06 00 9 6 95 75 7 0 97 59 55 50 90 0 월 월 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0월 월 월 * 윤달은 본달에 포함. 예) 윤월 월 후 다시 활성화하여 동절기에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의미한다. 계절적 영향이강 하게 나타난 것은 경국대전 의 停訟 조항에서 연유한다. 즉 춘분 이후부터 추분 이전까지는 농사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하여 국가에서 소송을 중단하여 聽理하지 않았다.9) 따라서 해당 시기동안 정소활동 또한 격감하는 현상을 보인 것이다. 부분적으로 살펴보면, 인정소는 전체적인 정소활동의 시기별 추세와 거의 일 치하는 현상을 보이는 반면 연명정소는 비교적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다. 인정 소가 5~7월 사이에 깊은 골을 형성한 데 반하여 연명정소는 골의 깊이가 상대적 으로 완만한 데에 따른 결과이다. 이는 연명정소가 인정소에 비하여 停訟의 제약 을 덜 받고 년 전시기에 걸쳐 고르게 행해졌음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도표 4>에서는 정소 내용을 중심으로 인정소와 연명정소를 비교 검 토하였다. 정소 내용은 기본적으로 고문서 의 주제 분류를 그대로 적용하면서 유사한 주제는 그룹화하였다.0) 9) 경국대전 刑典 停訟, 外方詞訟 務停後務開前(以春分日爲務停 秋分日爲務開). 0) 부세에는 신역 호역, 잡역 잡세, 전결세, 진상 공물을 포함시켰고, 어전 주인권에는 어 전과 주인권을 포함하였다. 기타에는 고문서 의 기타 중에서 분류 항목에 포함시킬 수 있 는 문서들은 포함시킨 나머지를 배치하였고, 고문서 에서 독립되어 있던 임면 정사는 기

4 奎章閣 6 < 도표 4> 인정소와연명정소의내용별분포 정소내용 인정소 연명정소 미상 합계 가사 0. 0.0 0.0 0. 견실물 도적 8 0. 0.0 0.0 8 0. 관개, 보 4 0.. 0.0 7 0. 노비 8.0 0.0.7 8.6 무고, 옥송 76.9 9 0.8 0.0 85.7 부세 565 4. 65 4.7 5. 74 4.4 분동 0.0 8 0.7 0.0 8 0. 산송,84. 544 48.4 8.,8 5.5 서원사우향교 6 0.4 8.6 0.0 4 0.7 어전주인권 66.7 5 0.4 8. 74.4 우마응호 6.6 7 0.6 5.5 75.5 장시 7 0..0 0.0 8 0. 정려 증직 5 0.4 7 5. 0.0 86.6 족보 0.0 6 0.5 0.0 7 0. 채무 4 8. 8.6 8. 45 6.7 토지,084 7. 65 5.8 8.6,57.5 풍속 토색 89. 5. 0.0 04.0 환곡 진휼 96.4 49 4.4.7 46.8 기타 99 5.0.9 0.0 0 4. 총합계,989건 00.0%,5건 00.0% 7건 00.0% 5,5건 00.0% < 도표 4> 에의하면, 전체적인정소활동은산송,8건 (5.5%), 토지,57건 (.5%), 부세 74건 (4.4%), 채무 45건 (6.7%) 등의순서로전개되었다. 분석대상자료가 8,9세기에집중되어있는점을감안할때, 조선후기정소활동이산송, 토지, 부세문제를중심으로전개되었으며이들은곧조선후기사회가당면하고해결해야할시대적과제였음을의미한다. 이러한사회문제는연명정소의경우에도그대로반영되어산송 544건 (48.4%), 부세 65건 (4.7%) 과관련된정소활동이활발하게전개되었다. 그런데이와함께연명정소에서두드러지는특징은정려 증직관련정소활동이 7건 (5.%) 으로산송, 부세를뒤이었으며토지문제 (65건, 5.8%) 보다활발하게전개되었다. 인정소에서정려 증직이 0.4% 에불과한것과는다른양상이었다. 토지문제는사적이해관계에얽힌사안으로 인정소의비중이높은반면정려 증직은단체활동 타에포함하였다.

等狀을 통해 본 조선후기 聯名呈訴와 公論 형성 5 과 공론 형성이 중요하게 작용하였음을 의미한다. 결국 조선후기 연명정소 활동 은 시대적 과제인 산송, 토지, 부세 문제와 함께 정려 증직을 중심으로 전개되었 다고 할 수 있다.). 연명정소와 공론 형성 ) 등장과 연명인의 규모 본 장에서는 조선후기 연명정소 활동의 전개 방식과 특징을 파악하기 위하여 연명정소 문서인 등장에 대하여 집중적인 검토를 시도하였다. 먼저 등장의 내용 을 연명인의 규모에 따라 단계별로 구분하여 분석하였다. 분석 자료는 연명정소,5건을 대상으로 하였는데, 앞 장의 <도표 >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문서 연대 는 8세기 후반에서 0세기 초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만 상당수의 문서(75건)가 연대를 간지로 표기하여 확인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은데, 개항기 이후의 문서는 문 서양식이나 踏印 방식이 변경되어 확인 가능하므로 간지 연대는 대부분 8세기 후반~9세기 문서로 추정되고 있다. 때문에 분석 자료는 8~9세기에 집중되어 조선후기의 사회 현상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연명정소의 연명 규모를 파악하기 위하여 등장에 이름을 올린 연명인들의 숫자를 0명 단위로 나누어 도표화 하였다. <도표 5>에 의하면, 연명인의 규모는 ~0명이 606건(5.9%)으로 정점을 이룬 후 ~0명이 6건(.%), ~0명이 00건(8.8%), ~40명이 5건(4.5%), 4~50 ) 9세기 전반 영암군과 영천군의 민장치부책의 내용을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田政, 軍政, 還 政 등의 부세 및 환곡 관련 소지와 相鬪로 분류된 소송 및 사회갈등 관련 소지가 중심을 이 루어 본고에서 분석한 정소활동과 비슷한 현상을 보인다. 다만 연명정소에서 두드러지는 정 려 증직과 관련한 소지가 민장치부책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김인걸, 民狀을 통해 본 9세기 전반 향촌 사회문제, 한국사론, 990 참조). 그 원인에 대해서 는 분석 대상 지역의 특성, 시기적 우연성, 민장치부책에 등재된 민장의 제한성 등을 추정해 볼 수 있는데 좀더 검토할 필요성이 있다. ) 0세기 초에 해당하는 문서 0건은 부세 7건, 산송 건이 중심을 이루고 무고 옥송 건, 분동 8건, 서원 사우 향교 건, 우 마 응 호 건, 장시 8건, 정려 증직 5건, 채무 5건, 토지 4건, 풍속 토색 4건, 기타 건 등으로 이전 시기와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으므로 9 세기 후반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6 奎章閣 6 < 도표 5> 등장의연명인규모 650 606 600 550 500 450 400 50 00 50 00 50 00 50 0 6 7 00 70 5 6 9-0명 -0명 -0명 -40명 4-50명 5-00명 00-이상기타연명정소 명이 6건 (.%), 00명이상이 9건 (.7%) 등정소인의규모가확대될수록점차감소하는양상을보인다. 특히 ~0명의소규모단위가전체의 50% 가넘는비중을차지하여연명정소는소규모인원을중심으로전개되었음을알수있다. 그런데정소인의규모가확대될수록그래프가감소하는추세속에서도 5~00 명의대규모집단정소가 70건 (6.%) 으로앞뒤항목에비하여 ~4배정도활성화한점이주목된다. 조선후기연명정소활동은소규모인원을중심으로이루어지면서도한편에서는대규모의단위의집단활동및공론형성이한축을형성하고있었음을반영한다. 다음은연명인의규모에따라 ~0명의소규모, ~40명의중규모, 50명이상의대규모등세단계로구분하여정소내용에어떠한변화를보이는지살펴보기로한다. 첫째, ~0명이연명에참여한소규모단위의등장은총 606건으로정소내용을정리하면 < 도표 6> 과같다. 도표에의하면, ~0명의소규모연명정소의내용은주영역 4항목, 보조영역 항목등모두 6항목이등장하였다. 연명정소활동이다양한영역에서다양한내용으로전개되었음을확인할수있다. 구체적으로살펴보면, 산송 7건 (6%), 부세 87건 (5%), 토지 4건 (7%), 환곡 진휼 5건 (6%) 등이 5% 이상의비중을보이

等狀을통해본조선후기聯名呈訴와公論형성 7 < 도표 6> ~0 명의소규모연명정소내용 ) 토지 4 7% 환곡, 진휼 5 6% 족보 0% 채무 4 % 산송 7 6% 부세 87 5% 7 6% 정려, 증직등 4% 장시 4 % 우마응호 4 % 어전주인권 0% 분동 0% 서원사우향교 0% 풍속, 토색 5 % 기타 0% 관개, 보 0% 무고, 옥송 6 % 며주영역을형성하였고, 보조영역에서는정려 증직 건 (4%), 채무 4건 (%) 등이중심을이루었다. 전체적으로는산송, 정려 증직, 부세, 토지, 환곡 진휼, 채무, 서원 향교 사우등의순서로전개되었던전체연명정소와대체로유사한추세를보이고있다. 4) 다만전체연명정소에서는정려 증직이산송다음으로활발한양상을보였던반면 ~0명단위에서는부세가정려 증직보다 4배나높은비중을보이는점이주목된다. 소규모단위의연명정소는조선후기정소활동의핵심이었던산송과부세문제를중심으로전개되었음을알수있다. 둘째, ~40명의연명인으로구성된중규모단위의등장은총 5건으로정소내용을정리하면 < 도표 7> 과같다. 도표에의하면, ~40명의중규모정소내용은주영역 5항목, 보조영역 8항목등모두 항목이등장하였다. 6항목에달한소규모정소에비하여약간축소 ) 챠트는두영역으로구분하여표시하였는데, 주영역은전체 5% 이상의비중을보이는항목, 보조영역은 5% 이하의항목으로구성하였다. 이하중규모, 대규모연명정소의챠트에서도동일하다. 4) < 도표 4> 인정소와연명정소의내용별분포 참조.

8 奎章閣 6 < 도표 7> ~40 명의중규모연명정소내용 정려, 증직등 46 9% 서원사우향교 0 7% 토지 9 6% 환곡, 진휼 5 % 기타 7 5% 산송 44 9% 부세 5% 0 % 풍속, 토색 % 장시 % 우마응호 % 분동 % 관개, 보 % 무고, 옥송 % 된경향은보이지만여전히다양한내용으로정소활동이전개되었음을알수있다. 이들중주영역은정려 증직 46건 (9%), 산송 44건 (9%), 부세 건 (9%), 서원 사우 향교 0건 (7%), 토지 9건 (6%) 등으로구성되어있다. 소규모정소와비교하여가장큰변화상은정려 증직이산송보다활발하게전개되어가장높은비중을보였고, 서원 사우 향교또한보조영역에서주영역으로진입하였다는점이다. 반면산송은그비중이절반으로축소되어 (6% 9%) 정려 증직다음에위치하였다. 전체정소, 전체연명정소에서가장활발하게전개되었던문제가산송이었음을고려할때, 산송이정려 증직에자리를내어준것은중요한의미를지닌다. 이밖에도환곡 진휼이주영역에서보조영역으로축소된것도주목되는현상이다. 부세와토지문제는큰변동없이비슷한양상을유지하였다. 셋째, 50명이상의연명인으로구성된대규모단위의등장은총 5건으로정소내용을정리하면 < 도표 8> 과같다. 도표에의하면, 50명이상의대규모정소내용은주영역 항목, 보조영역 7항목등모두 9항목으로전체적인항목이축소되는경향이지속되었다. 또한중규모에서주영역에있던부세, 서원 사우 향교, 토지등이보조영역으로축소되고정려 증직, 산송의 항목만주영역에남았다. 대규모정소활동은정려 증직과같은특정문제로집중되었음을알수있다.

9 等狀을 통해 본 조선후기 聯名呈訴와 公論 형성 <도표 8> 50명 이상의 대규모 연명정소 내용 환곡, 진휼 % 풍속, 토색 % 기타 % 정려, 증직 등 70 80% 6% 산송 6 7% 토지 % 어전 주인권 % 서원 사우 향교 % 부세 % 이상을 종합하면, 조선후기 대표적인 사회 문제에 해당하는 산송, 부세, 토지, 정려 증직 등이 연명정소에서도 중심을 이루며 정소 규모에 따라 서로 다른 양 상을 띄었다. 산송은 소규모 정소에서 대규모 정소에 이르기까지 고르게 분포하 였으나, 정소인의 규모가 커질수록 그 비중은 점차 감소해갔다. 반면 정려 증직 은 중규모 정소에서 부각되기 시작하여 대규모 정소에서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이루며 활성화하였다. 부세와 토지 문제는 소규모 및 중규모 정소를 중심으로 전 개되었으며, 소규모 정소에서는 이 외에도 환곡 진휼 문제 또한 중요한 위치를 점하였다. 산송, 부세, 토지, 환곡 진휼 등 사적 이해관계와 관련된 문제들이 중소규모 정 소활동에 집중된 현상은 직접적인 이해당사자들이 중소규모 단위로 집단 활동을 전개하였음을 뜻한다. 이들 중 산송이 중소규모에서 대규모 정소에까지 고르게 분포한 것은 조상의 분묘와 관련된 爲先事業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한편에서는 분묘의 직계 자손들을 중심으로 개인적 차원의 정소활동을 전개하였고, 다른 한 편에서는 문중 조직이 배경이 되어 수십 명 또는 백여 명이 넘는 족인들의 의사를 결집하여 대규모 정소활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정려 증직도 위선사업의 일환이었으나 개인적 이해관계를 넘어서 향촌사회의 공론 형성이 결정적인 작용을 하는 사안이었다. 때문에 정려 증직은 소규모의 개인 연합보다는 면리와 군현, 나아가 도내 및 각도 연합에 이르기까지 수십 명에 서 수백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양상을 보였다. <도표 5> 등장의 연명인 규모 에 서 정소인의 규모가 확대될수록 그래프가 감소하는 추세 속에서도 5~00명의 대

40 奎 章 閣 6 규모 집단 정소가 앞의 항목에 비하여 두드러지게 활성화된 현상을 보인 것도 이 때문으로 파악된다. ) 연명인의 집단성과 공론 형성 이상에서 연명인의 규모에 따른 정소 내용과 특징을 단계별로 분석하였다. 이 에서 한 단계 나아가 연명인의 성격을 파악함으로써 조선후기 공론 형성의 인적 배경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먼저 분석 자료인 등장,5건을 대상으로 연명인들 의 성격을 정리하여 도표화하였다. <도표 9>에 의하면, 족인 및 문중 등장이 566건(50.%)로 과반수를 넘었고, 향 촌공동체의 민인 등장이 5건(.%), 유생 등장이 8건(6.%) 등으로 주영역 을 구성하고 있다. 이 외에 기타에는 향리 관속, 농민 둔민 작인 雇民 등, 상 인 貢人, 군인, 백정, 승려, 囚獄人, 노비, 宅奴 등 다양한 사회 집단들이 등장하 였다. 사회 계층 전반적으로 이해당사자를 중심으로 한 연명정소가 폭넓게 행해 지면서도 특히 상위 그룹이 전체의 9%를 점유할 정도로 이들에게 집중되는 현 상이 강하였다. 이는 문중 및 족인, 향촌 민인, 유생들이 주도적으로 연명정소 활 동을 추진하면서 집단 내의 공론 형성을 이루어낸 결과라고 하겠다. 이들 세 사회집단을 중심으로 정소내용 및 참여 특징을 분석함으로써, 집단별 로 공론 형성과 정소활동의 성격을 검토하기로 한다. <도표 9> 등장의 연명인 성격 노비 6 향촌공동체 5 유생 8 군인 8 기타 4 宅奴 0 동민 백정 향리 관속 8 수옥인 6 승려 7 상인 공인 족인 및 문중 566 농민 둔민 작인 雇民 등 9 기타 5

等狀을통해본조선후기聯名呈訴와公論형성 4 족인등장과문중공론족인등장은 566건으로전체연명정소 (,5건) 의절반을넘는다. 그가운데내외친이연합으로올린 건을제외한나머지 56건이모두동성족인또는문중인들이연합하여제출한것이다. 이처럼동성족인들의연명정소활동이활발하게전개된것은조선후기성리학적사회질서에기초한종법질서의확립과문중활동의활성화를배경으로하였다. 족인등장의특징을파악하기위하여연명규모별로정소내용을검토하면 < 도표 0> 과같다. 도표에의하면, 족인등장은 ~0인이 4건 (7.6%) 으로소규모연명인에집중되어있고, ~0인 66건, ~0인 4건, ~50인 7건, 50인이상 5건등연명규모가확대될수록감소하는추세를보인다. 정소내용은산송이 484건 (85.5%) 이대다수를차지하며그외에토지, 부세, 정려 증직, 족보, 채무등각종문제들이다양하게등장하였는데, 대부분 ~0인의소규모정소에집중되었다. 이들 ~0인의소규모등장은문중차원의공론형성과정을거쳤다고단정하기는어려울것이다. 소규모정소의내용이산송, 토지, 무고 옥송, 채무, 풍속 토색등분쟁성소지와부세, 환곡 진휼등개인적차원의민원에집중된다는사 < 도표 0> 족인등장의연명규모와정소내용 연명인 ~0 ~0 ~0 ~40 4~50 5~00 00인내용인인인인인인이상 기타 합계 무고 옥송 부세 0 0 산송 45 56 4 4 5 484 서원 사우 향교 우 마 응 호 장시 정려 증직 9 0 족보 6 채무 6 7 토지 8 6 5 풍속 토색 환곡 진휼 기타 총합계 4 66 4 4 4 5 566

4 奎 章 閣 6 실 또한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다. 소규모 정소는 문중의 공론 형성의 결과라기보 다는 분쟁과 개인적 민원을 해결하기 위하여 관련 족인들 몇 사람이 개인적 차원 에서 연합하여 정소 활동을 전개한 결과로 파악된다. 이와 달리 산송, 족보 등의 문제는 50인 이상의 대규모 정소활동이 전개되고 있 는 점이 주목된다. 특히 산송은 ~0인의 소규모 정소에서 대규모 정소에 이르기 까지 단계별로 모두 나타났다. 산송은 사적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소송이지만 조 상의 분묘에 관한 문제였고 가문의 사회적 위상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었다. 때문 에 한편에서는 이해당사자 몇 사람이 개인적 차원에서 연합하여 정소활동을 전개 하였지만 한편에서는 문중 차원에서 爲先과 孝를 명분으로 족인들을 결집하여 대 규모 정소활동을 전개한 양상도 띠고 있었다. 족인들의 대규모 정소 활동에는 문중공론이 전제되었다. 수십 명의 연명인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개인적 이해관계를 넘어서 같은 족인, 문중인으로서 참여할 수 있는 명분과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했다. 따라서 문중 차원의 공론 형성과 대규 모 정소활동은 산송, 족보 등과 같이 조상과 관련된 爲先活動이나 문중 자체적으 로 해결하지 못하는 중대사로 한정되었다. 그런데 <도표 0>에서 정려 증직은 위선과 가문의 중대사임에도 소규모 정소 활동에 그치고 있다. 정려 증직은 문중의 중대사이지만 관에서 향촌 공론을 요 구하였으므로 문중 공론을 넘어서 향촌사회에서의 공론 형성이 주요 관건이었다. 따라서 문중 차원의 대규모 정소활동보다는 서원이나 향교와 연대하여 향촌사회 의 공론을 형성하는데 주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② 유생 등장과 유생 공론 유생 등장은 8건으로 전체(,5건)의 6.%에 달한다.5) 이들 유생 등장의 특징을 파악하기 위하여 연명 규모별로 정소내용을 정리하여 <도표 >을 작성하 였다. 도표에 의하면, 유생 등장의 연명인 규모는 ~0인의 소규모보다는 0인 이상 의 중 대규모 경향을 강하게 띤다. 특히 50인 이상의 대규모 정소가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정소 내용은 정려 증직(47건, 80.%)과 사원 사우 향 5) 유생 등장에는 문서에 정소인을 유생으로 표기한 건, 유생 표기가 없는 70건을 포함하였 다. 표기가 없는 경우에는 정소 내용에 근거하여 사적인 문제는 제외하였고, 문서의 기재 방 식도 함께 고려하였다.

等狀을통해본조선후기聯名呈訴와公論형성 4 < 도표 > 유생등장의연명규모와정소내용 연명인 -0인 -0-0 -40 4-50 5-00 00인내용인인인인인이상 기타 총합계 무고 옥송 부세 산송 서원 사우 향교 6 4 6 정려 증직 5 4 4 55 5 47 토지 풍속 토색 환곡 진휼 기타 4 8 총합계 5 9 7 7 8 60 6 8 < 도표 > 유생등장의연명규모와지역적범위 연명인 -0인 -0인 -0인 -40인 4-50인 5-00 00인지역인이상 기타 총합계 면리유생 7 군현유생 4 8 8 6 5 0 군현연합 4 7 도내유생 7 4 6 도연합 서원 향교 5 4 4 6 총합계 5 9 7 7 8 60 6 8 교 (6건, 8.7%) 에집중되었으며, 그외의항목들은매우미약하였다. 이는유생들이정려 증직및사원 사우 향교와관련된문제를중심으로대규모로의견을결집하고공론을형성하여연명정소활동을전개하였음을의미한다. 그렇다면유생공론이형성되는지역적범위는어떠할까? 이를파악하기위하여연명인의범위를면리, 군현, 군현연합, 도내, 도연합, 서원향교로분류하여 < 도표 > 를작성하였다. 도표에의하면, 유생등장은면리유생 건 (6.0%), 군현유생 건 (7.6%), 도내유생 6건 (8.7%) 등으로군현단계의공론형성이가장활성화되어있음을확인할수있다. 정소규모는면리유생은 ~0인, 군현유생및군현연합은 50인이상, 도연합은 00인이상으로지역적범위가확대될수록정소규모도대규모화

44 奎 章 閣 6 하는 양상을 보였다.6) 이상을 종합하면 유생 등장은 군현 단위의 중, 대규모로 수십 명 이상의 공론을 형성하며 전개되었으며, 내용적으로는 정려 증직 및 사원 사우 향교와 관련 된 문제가 중심을 이루었다. 이들 사안은 향촌사회의 성리학적 사회질서의 유지 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유생 공론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③ 민인 등장과 향촌 공론 민인 등장은 5건으로 전체(,5건)의.4%에 이른다. 여기에는 문서에 지역 명+民人等(居民等, 洞民等, 大小民) 등으로 향촌공동체 차원에서 제출한 것으로 확인된 등장만을 포함하였다. 촌락 내의 이해당사자들로 구성된 사적인 등장은 제외하였다.7) 민인 등장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대부분 洞民, 村民, 里民, 面民 등 촌락 단계에서 작성되었다는 점이다.8) 유생 등장이 군현 단계에서 사족층을 중심으로 공론 형성이 이루어졌다면 민인 등장은 촌락 단계에서 小民 또는 大小民 연합으 로 향촌 공론이 형성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향촌 공론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하여 연명 규모별로 정소내용을 정 리하면 <도표 >과 같다. 도표에 의하면, 민인 등장은 ~0인의 소규모가 05건(4.7%), ~0인 44건 (7.5%), ~40인의 중규모가 49건(9.4%) 등으로 40인 이하의 중 소규모가 중심 을 이루었다. 향촌 공론이 주로 촌락 단계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대규모 경향의 유생 공론과 달리 중 소규모의 경향을 띠는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문서에 民人 等 으로만 표기하고 연명인을 기재하지 않아 정소규모를 파악할 수 없는 기타 항목도 4건에 달하였다. 정소 내용은 부세 문제가 0건(4.7%)으로 가장 많았고 산송(5건, %), 환 곡 진휼이 건(8.%)으로 뒤를 이었다. 9세기에는 환곡도 부세화하는 경향을 보이는 점을 고려할 때 부세 문제에의 집중도는 더욱 높아진다. 향촌 공론은 조선 6) 도내 유생은 ~0인의 비중이 가장 높아 군현 유생보다 규모가 축소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각 군현의 대표자 중심으로 연명이 행해진 때문이다. 7) 촌락내 사적인 연합은 <도표 9> 등장의 연명인 성격 에서 기타 항목에 포함하였다. 8) 민인 등장은 군현 연합으로 정소한 건과 충청도 서산군 대소민이 수령의 仍任을 요청한 등장(규고 6-~6) 외에는 대부분 촌락 단계에서 제출되었다.

45 等狀을 통해 본 조선후기 聯名呈訴와 公論 형성 <도표 > 민인 등장의 연명 규모와 정소 내용 연명인 내용 -0인 -0인 -0인 -40인 4-50인 관개 보 4 부세 49 6 0 분동 4 산송 7 어전 주인권 우 마 응 호 장시 정려 증직 채무 6 5 토지 4 5 기타 44 05 00인 이상 기타 총합계 6 5 0 8 4 5 풍속 토색 환곡 진휼 총합계 7 5-00 인 7 5 5 0 4 0 5 8 4 5 후기 향촌의 최대 현안이었던 부세 문제에 집중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와 함께 풍속 토색, 토지, 장시, 관개 보, 분동 등 향촌의 사회문제들이 다양하 게 반영되어 있다. 한편, 문서에는 정소인을 대소민 이라고 명기한 경우도 55건(.8%)이 확인되 는데 이들 중 8건이 부세 문제로 확인된다. 대소민이라 표기하지 않은 문서가 모 두 大民 중심으로 연명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소민 등장은 향촌 공론의 포괄 성과 설득력을 더욱 강하게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현상이다. 또한 동 민 대표들이 제출한 등장도 5건 확인되는데, 이들도 모두 부세문제에 집중되었 다(부세 5건, 환곡 진휼 건). 이상을 종합해 볼 때, 조선후기 향촌의 공론은 조선후기 최대의 시대적 과제였 던 부세 문제를 중심으로 촌락 단계에서 중 소규모로 형성되어 民意를 표출하고 民隱 해결을 위한 향촌공동체의 역할을 활성화시키는 주요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46 奎 章 閣 6 4. 맺음말 等狀 은 조선시대 정소문서의 하나로 인 이상이 연명정소할 때 사용하는 문서 이다. 이는 인 정소와는 달리 관련자들을 모아 의견을 결집하고 결의한 내용을 문서로 작성하고, 참여자들이 문서에 이름을 기록하는 여러 단계의 과정이 요구 되었다. 등장은 문서 장으로 남아있지만 공론 형성의 각 단계들이 총체적으로 반 영되어 나타난 최종 결과물이었다. 본고에서는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간행한 고문서 6~6에 수록된 등장,5건을 분석대상으로 조선후기 연명정소의 실태와 공론 형성의 특성을 검토하 였다. 등장은 조선후기 정소활동의 0~0%의 비중을 보이며 활성화하였는데, 차 정소기관인 군현 단계에서 상급기관으로 갈수록 그리고 신분적으로는 양반 사족 층에서 등장의 비중이 높게 나타났다. 계절적으로는 인정소와 달리 停訟 규정의 영향을 덜 받고 연중 전시기에 걸쳐 고르게 분포하였다. 연명정소의 내용은 조선후기 대표적인 사회 문제에 해당하는 산송, 토지, 부세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정소 규모에 따라 차이를 보였다. 산송은 ~0인의 소규모 정소에서 50인 이상의 대규모 정소에 이르기까지 고르게 분포하였으며 부 세, 토지 및 환곡 진휼 문제는 중소규모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반면 정려 증 직은 ~40인의 중규모 정소에서 대두하기 시작하여 대규모 정소에서는 가장 핵 심적인 문제로 부각되었다. 부세, 토지, 환곡 진휼 등 사적 이해관계와 관련된 문제들이 중소규모에 집중 된 현상은 직접적인 이해당사자들을 중심으로 사적 차원의 집단 활동을 전개하였 음을 뜻한다. 산송은 조상의 분묘와 관련되어 위선의식이 강하게 작용하였기 때 문에 직계 자손들을 중심으로 한 중소규모에서 문중 조직이 주도하는 대규모 정 소활동까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정려 증직 또한 위선사업의 일환이었으나 향 촌사회의 공론 형성이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으므로 소규모의 개인 연합보다는 군 현 및 도를 아우르는 대규모 연명활동이 중심을 이루었다. 연명정소는 친족공동체인 문중 및 족인, 서원 향교를 중심으로 한 유생, 그리 고 향촌공동체의 민인 등 세 사회집단이 주도하면서 각각 문중공론, 유생공론, 향 촌공론을 형성하고 있었다. 족인들은 토지, 부세, 환곡 진휼 등 분쟁성 및 개인적 차원의 민원은 이해당사자들이 사적인 차원에서 연합하였으나 산송, 족보 등 위

等狀을 통해 본 조선후기 聯名呈訴와 公論 형성 47 선활동과 문중 중대사는 문중 차원에서 爲先과 孝를 명분으로 족인들을 결집하여 문중 공론을 형성하고 대규모 정소활동을 전개하였다. 유생들은 정려 증직 및 사원 사우 향교와 관련된 문제 등 향촌사회의 성리학적 사회질서의 유지와 관 련된 문제를 중심으로 군현 단위에서 중대규모로 수십 명 이상의 공론을 형성하 였다. 민인들의 향촌공론은 부세 문제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였다. 유생 공론이 군 현 이상을 지역 범위로 하였다면 향촌 공론은 촌락 단계에서 중 소규모로 형성 되어 民意를 표출하고 民隱 해결을 위한 향촌공동체의 역할을 활성화시키는 주요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상에서 각 사회집단들의 정소활동과 공론 형성의 특성을 보았는데, 이들은 조선후기 사회경제적 변동 속에서 그들이 당면한 사회문제와 갈등을 해결하기 위 한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조선후기 각 사회 집단 및 공동체들의 공론 형성의 역사 적 의미를 보다 심도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고의 통계 분석 결과를 토대로 앞으로 공론의 역사적 개념과 구체적인 형성 과정, 각 사회 집단들이 내세운 공론 의 상호 관계, 공론에 대한 처리방식 등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요구된다고 하겠 다. 논문투고일(00. 4. ), 심사일(00. 5. 8), 게재확정일(00. 6. 7) 참고문헌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고문서 6~6, 998~00.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서집성 -경주손씨 편, 997. 김경숙, 조선후기 산송과 사회갈등 연구,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00. 김경숙, 조선후기 산송 소지류의 문서 양식과 분류, 규장각 5, 00. 김경숙, 조선후기 山訟과 上言 擊錚, 고문서연구, 008. 김 돈, 6세기전반 政治權力의 變動과 儒生層의 公論形成, 서울대박사학위논 문, 99. 김동수, 書院通文의 公論性과 書院의 政治勢力化의 要因-書院通文 不漫 의 內容 檢討, 역사학연구 0, 98.

48 奎 章 閣 6 김인걸, 민장을 통해서 본 9세기 전반 향촌 사회문제, 한국사론, 990. 김인걸, 조선후기 여론과 정치: 公論政治 의 지속과 단절, 朝鮮의 政治와 社會, 집문당, 00. 설석규, 조선시대 유생상소와 공론정치, 선인, 00. 전경목, 조선후기 산송연구 8, 9세기 고문서를 중심으로, 전북대 박사학위 논문, 996. 전경목, 조선후기 소지류에 나타나는 化民에 대하여, 고문서연구 6, 994. 한상권, 조선후기 사회와 소원제도, 일조각, 996.

等狀을통해본조선후기聯名呈訴와公論형성 49 Abstract The Significance of Deungjang ( 等狀 ) in Filing Joint Petition and Drawing Collective Consensus Kim Kyeongsook This study analyzes the reality of filing petitions jointly and the characteristics of public opinion during the late Chosun dynasty by examining,5 pieces of Deungjang ( 等狀 ) paper which are owned by The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Deungjang is a petition filed by more than two people. Unlike the oneperson-filing petition, these joint petitions can be seen as a product of collective efforts to gather opinions and organize group actions. Joint petitions were usually filed by three social groups clan ( 族人 ), confucian scholars ( 儒生 ) of local confucian temples, and the commoners of the local communities, by whom public opinions were formed in various levels of society. Clan groups were interested in the ancestor-related affairs such as conflicts on ancestral grave sites and family genealogies, and thus endeavored to draw an agreement within a particular clan concerning those issues. Confucian scholars joint petitions were focused on the issues such as commemoration and decoration that were essential in sustaining neo-confucian ideology and social order. Their arguments formed public opinions of local scholars. Commoners tackled tax issues and contributed to the formation of villages public opinions about it. In this sense, the acts of filing petitions and thereby drawing a consensus within groups could be said to result from each group s collective efforts to resolve social problems and conflicts in the turmoil of great socio-economic changes during the late Chosun period. Keywords: Deungjang ( 等狀 ), Filing Petition, Joint Petition, Collective Consensus, Public Opinion, Clan, Confucian Scholars, Local Communit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