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원논문집 ( 인문 사회과학편 ) 제 51 집 1 호 (2012) 西洋에서의自然法論의生成, 發展및影響에관한硏究 金相容 * 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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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원논문집 ( 인문 사회과학편 ) 제 51 집 1 호 (2012) 139-216 西洋에서의自然法論의生成, 發展및影響에관한硏究 金相容 * 초록 - 139 -

2 金相容 : 차 례 - 140 -

西洋에서의自然法論의生成, 發展및影響에관한硏究 3 개설 자연법론일반 - 141 -

4 金相容 - 142 -

西洋에서의自然法論의生成, 發展및影響에관한硏究 5-143 -

6 金相容 - 144 -

西洋에서의自然法論의生成, 發展및影響에관한硏究 7-145 -

8 金相容 - 146 -

西洋에서의自然法論의生成, 發展및影響에관한硏究 9-147 -

10 金相容 - 148 -

西洋에서의自然法論의生成, 發展및影響에관한硏究 11-149 -

12 金相容 - 150 -

西洋에서의自然法論의生成, 發展및影響에관한硏究 13-151 -

14 金相容 - 152 -

西洋에서의自然法論의生成, 發展및影響에관한硏究 15-153 -

16 金相容 - 154 -

西洋에서의 自然法論의 生成, 發展 및 影響에 관한 硏究 17 Ⅱ. 자연법론의 생성 1. 그리스 역사의 발전 원인과 결과 槪觀 자연법 사상의 생성과 관련한 그리스의 역사는 아테네와 페르샤간에 일어난 페르샤 전쟁을 그 시발점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스는 일찍부터 여러 개의 도시 국가(polis)를 형성되었으며 도시국가 중에서 가장 앞선 도시국가가 바로 아테네였다. 아테네를 중심한 그리스는 BC 490에서 BC 479년사이에 페르샤의 침입으로 시작 된 전쟁을 치루었다.26) 그 전쟁이 바로 페르샤 전쟁이었다. 이 페르샤 전쟁에서 거대 한 왕정국가였던 페르샤에 대항해서 조그만 도시국가였던 아테네가 승리를 거두었다. 페르샤 전쟁의 승리로 아테네는 물질적인 풍요를 향유하게 되어 그 넘쳐나는 富로 페 르샤와의 전쟁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파르테논神殿을 BC 447년에서 BC 438년에 걸 쳐 건립하였다.27) 이와 함께 수많은 외부사람들이 풍요로운 富의 도시국가였던 아테 네로 유입되어 들어왔다. 그리고 페르샤 전쟁에 승리한 아테네국가의 권력자들은 아테네의 통치를 위한 지식 과 지혜, 즉 철학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지배자의 지식의 필요성을 채워준 사람들이 바로 당시의 떠돌이 지식인(Wanderlehrer)들이었던 소피스트들이었다.28) 이와같이 아테네로 유입된 외부인들은 아테네가 그들이 살던 과거의 도시와는 다른 국가이고 異國인 아테네에서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전승국가인 아테네의 취향에 맞는 주장들을 하였다. 그들이 바로 소피스트들로서 대표적인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 (Protagoras: BC 485-415)는 만물의 척도는 인간이다(Der Mensch ist das Maß aller Dinge)라고 하였다.29) 이러한 소피스트들의 주장은 객관적이고 보편적 인 세계를 부인하고 현재의 지배자의 지배질서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주장으로서 점차 26) 아테네와 페르샤간의 전쟁은, BC 492년에 제1차 페르샤 전쟁이 일어났고, BC 490년에 제2 차 페르샤 전쟁이, 그리고 BC 480년에 제3차 페르샤 전쟁이 일어났다. 아테네는 제3차 페르 샤 전쟁에서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 27) 파르테논신전 건축을 시작한 당시의 아테네 통치자는 페리클레스(Perikles: BC 500-429)이 었다. 페리클레스의 통치의 시대에 소피스트인 Protagoras는 물론 Sokrates도 펠리클레스에 자문을 하였다. 28) Matthias Vogt, Philosophie: Von der Antike bis zur Gegenwart (Netherlands, Rebo International b.v., 2008), S. 37. 29) Stig Strömholm, Kurze Geschichte der abendländischen Rechtsphilosophie (Göttingen, UTB Vandenhoeck & Ruprecht, 1991), S. 29.. - 155 -

18 金相容 - 1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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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金相容 - 158 -

西洋에서의 自然法論의 生成, 發展 및 影響에 관한 硏究 21 은 당시의 권력자의 명령, 통치를 바로 정의라고 옹호하면서 권력자의 취향에 맞는 주 장을 하였던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소피스트들이 활동하고 권력자들이 소피스트들 의 주장에 의존하였던 시대의 아테네는 질서가 흐틀어지고 점점 타락하고 쇠퇴해 질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문란하고 타락하고 쇠퇴해져 가는 아테네를 구하기 위해서는 소피스트들의 궤변에 대항 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상가들이 나타나야 만 하였다.45) 이러한 시대의 부름에 등장한 철학자, 사상가들이 바로 그리스의 3台星 이었다. 3. 초기 자연법 사상가들과 그들의 주장 (1) 소크라테스와 그의 주장 소피스트들에 의하여 아테네가 정신적 혼란상태에 빠져있을 때에 소크라테스는 그 러한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보편적인 가치의 세계가 있음을 젊은이들에게 가르쳤다. 그는 아테네 출신으로서 對話하는 방법으로 아테네 시민으로 하여금 자신을 깨닫고 자 신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존재임을 깨우치려고 하였다. 그는 대화의 상대방에게 질문 하고 답하는 소크라테스 방법론(socratic method)으로 자신이 누구인지에 관한 깨 달음에 이르도록 하였다. 그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의 세계가 존재함을 주장하고 그 진리의 세계를 깨닫도록 하였던 것이었다. 그는 정의란 무엇인가, 지혜란 무엇인 가, 선이란 무엇인가 등을 물었다. 이러한 물음과 답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그는 내가 누구이며, 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46) 그는 결국에는, 나는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 뿐이다 (Ich weiß, dass ich nichts weiß)라는 궁극에 도달하였다.47) 그리고 그는 진리를 깨닫도록 젊은이들 을 가르쳤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가르침으로 그는 강자의 의사 내지 명령이 법이라고 주장한 당시의 권력자에 영합한 소피스트들의 주장에 대항하였던 것이었다.48) 그러나 그는 당시의 권력자와 영합한 소피스트들로부터 당시의 아테네 국가의 神에 45) 정의롭고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새로운 사상과 철학은 시대가 혼란스럽고 혼탁할 때에 뜻있 는 사상가들에 의하여 배태되어 탄생하는 것이다. 페르샤 전쟁에서 승리한 아테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46) Horst Poller, Die Philosophen und ihre Kerngedanken: Ein geschichtlicher Überblick (München, Horst Poller Verlag, 2007), S. 67.. 47) Vogt, a. a. O., S. 45. 48) 소피스트들은 修辭에 능하고 犬儒的(cynical)이었다(Vgl., Ninian Smart, World Philosophies (London, Routledge, 2000), S. 132). - 159 -

22 金相容 대하여 不敬(Missachtung)의 죄를 범하고 젊은이들을 誤導하였다는 죄로 사형에 처 해졌다. 그의 친구들은 도망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소크라테스는 그의 삶의 목적은 진 리의 추구에 있었으며, 법이 좀 異常하다고 하여 그 법을 따르지 않기로 하는 것은 그 가 평생동안 실천해 왔던 진리를 위한 善行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는 이유로 죽음을 받 아드렸다.49)50) 그리하여 그는 결국 진리의 순교자, 자연법 사상의 첫 순교자가 된 것이었다고 평가된다. 이와같이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끝까지 고수하다가 불의의 세력 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위한 순교자이기 때 문에 철학사에 길이길이 기억되는 것이라 이해된다. (2) 플라톤과 그의 주장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로서 소피스트들의 진리와 정의의 相對化의 궤변에 대 항하였다. 플라톤은 이데아론으로 객관적, 보편적인 진리를 주장하고, 당시의 민주정 이 타락한 衆愚政의 국가질서를 비판하고 나라의 지배자들이 철학자들일 것을 내용으 로 하는 이상국가(Politeia)를 주장하였다.51)52) 플라톤은 BC 387년에 오늘날 대학 의 최초의 前身으로 평가되는 아카데미니아53)(Akadêminia)를 설립하여 이데아론를 講論하였다.54) 그는, 이데아는 이상세계로서 물질적인 존재와는 다르나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이며, 정의로운 세계이며, 물질적이지도 않으며, 볼 수도 없으며, 잡을 수도 없지만 이성 (Vernunft)에 의하여 인식될 수 있는 세계라고 하였다.55) 그리고 그는 2원론적 사고 에 의하여 현실세계와 이데아의 세계의 2개의 세계가 각각 별도로 존재하며,56) 현실 49) Vogt, a. a. O., S. 43. 50) 이는 결국 법이 자기의 사상세계에 반한다고 하여 국가가 제정한 그 법을 따르지 않고 도망을 가면, 그것은 자기가 평생토록 국가를 위하여 선행을 실천하여 왔는데 그러한 자기의 평생의 국가를 위한 善한 삶을 스스로 否認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죽음을 받아드린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소크라테스는 그가 추구하고 가르쳐 왔던 진리를 그의 평생동안 간직하고 그것을 지키 기 위하여 죽음을 받아드린 것이었다. 또한 소크라테스가 살기 위하여 도망을 갔더라면 그것 은 그가 주장하였던 진리를 부인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51) Vogt, a. a. O., S. 50. 52) 플라톤은 귀족정치를 이상적인 국가통치질서라고 주장하였다. 53) 이 아카데미니아는 유럽최고의 대학이면서 동시 세계최초의 학술원(Wissenschaftliche Akademie)이기도 하다. 아카데미니아는 천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존속하였으나, AD 529년 동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대제에 의하여 閉鎖되었다. 54) 플라톤의 강론법은 변증법, 즉 문답식(Dialog)으로 이루어졌다. 55) Vogt, a. a. O., S. 51. 56) 이와같은 플라톤의 2원론적인 세계관은 중세의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의 관계에 가장 적절히 - 160 -

西洋에서의 自然法論의 生成, 發展 및 影響에 관한 硏究 23 세계는 이상세계인 이데아의 세계를 목적으로 하여 이데아의 세계로 향하여 움직이는 관계에 있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현실세계는 이상세계의 그림자라고 하였다. 그리고 현실세계는 이데아의 세계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을 때에 정의로운 세계가 된다고 하였 다. 이러한 사고는 이데아 세계의 질서가 자연법적인 세계이고 현실세계의 질서는 실 정법의 세계로 법의 2원화의 결과를 낳은 것이다. 또한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에서 인정되는 善을 위한 강제는 정당하다고 하였다.57) 선을 위한 강제는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정당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그는 이러한 이데아론에 입각하여 소피스트들의 懷疑論, 상대주의에 대항하였다. 즉, 소피스트들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이데아(形相)가 존 재한다고 답하였다. 이러한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理想主義(idealism)의 遠流를 이룬 다.58) 그리고 존재한다고 해도 알 수가 없다는 소피스트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이성 (logos)를 제시함으로써 경험을 넘어서는 인식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마지막으로 알 수 있다고 해도 전달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하여는 모든 사람들이 이성을 공유한다는 생각을 제시함으로써 응답하였다.59)60) 플라톤은 법과 국가생성의 필연성에 관하여, 인간은 자기의 생존을 위하여 생존에 필요한 것을 충족시켜야 하는 필요의 존재이며, 이러한 인간의 자연적인 필요를 혼자 만으로써는 다 채울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공동체를 구성하게 되며, 이러한 공동체의 궁극적인 형태가 국가라고 하였다.61) 인간의 필요가 충족되면 국가는 안정되며, 필요 를 충족하기 위한 각 계층의 인간의 교육, 노동 등이 국가에 의하여 행하여져야 한다 고 하였다. 이 때에 고려되어야할 것은 평등으로서, 평등하게 교육, 노동이 행해져야 한다고 하였다. 이와같이 인간은 다른 사람과 더불어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살아야 한 다. 따라서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어 질서있게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법과 국가는 필 수불가결하다고 하였다. 적용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중세의 기독교 세계는 플라톤의 2원론적 세계관이 지배한 시대였 다.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는 기독교는 대중을 위한 플라톤주의이다(Das Christentum ist Platonismus für das Volk)라고 하였다(Vgl., Vogt, a. a. O., S. 55). 57) Kaufmann, Hassemer(hrsg.), a. a. O., S. 39. 58) 이정우, 전게서, 208면. 59) 상게서, 208면. 60) 플라톤의 이러한 이데아철학은 그 후 서구철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중세이 이르 러 형상의 존재는 신의 창조로, 이성을 통한 인식은 신의 啓示로, 이성의 공유는 神國으로 변 형되었다. 근대에 와서는 형상은 법칙 또는 구조로, 이성은 합리성, 주체성으로, 이성의 공유 는 합리성 또는 주체성의 공유로 변형되었다(이정우, 전세서, 208면 참조). 61) Naucke, Harziger, a. a. O., Rn 34. - 161 -

24 金相容 그리고 인간의 자연적 필요는 강제나 힘에 의하여 충족되어져서는 아니되며, 정의 (Gerechtigkeit)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정의 는 사람이 스스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영혼의 상태(Seelenzustand)라고 하였다.62) 또 한편으로 인간의 필요가 충족된 상태의 국가가 바로 정의의 국가이고 이러한 국가 가 정의의 본질이라고 하였다.63) 이러한 정의로운 국가를 이루어 나가는 과정과 그 유지에는 인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법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플라톤은 법과 국가는 인간세계의 질서유지와 인간의 필요의 충족을 위하여 필수불가결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인간세계의 이상적인 질서와 인간필요의 충족을 위한 국가의 이상적인 운영도 역시 이데아의 이상세계의 現象化로 이루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를 반대로 표 현하면 인간은 이러한 이상세계인 이데아를 인식하여 그것을 현실로 바꾸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것이 바로 현실세계는 이상세계를 목적 내지 목표로 하여 움직여 나가야 한 다는 것이 플라톤의 이데아론이었다. 다시 말하면, 플라톤은 현상세계는 이상세계인 이데아의 그림자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이상세계의 현실화를 위한 정치제도는 귀족정64)(Aristokratie)이 가장 이 상적이며, 이상세계 질서의 법이 바로 자연법65)이라고 이해하였으며, 그 자연법의 구 속력을 인정하였다.66) 플라톤은 이상세계인 이데아론을 주장하면서도 독특하게 사유재산의 폐지와 사생활 에 대한 통제의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여자공동체(Frauengemeinschaft) 62) Horst Poller, Die Philosophen und ihre Kerngedanken: Ein geschichtlicher Überblick (München, Horst Poller Verlag, 2007), S. 75. 63) A. a. O., Rn 40. 64) 플라톤은 국가정체의 형태로서 왕정(Monarchie), 귀족정(Aristokratie), 민주정(Demokratie) 로 나누고, 이러한 정치형태가 부패하면 왕정은 僭主政(Tyrannei)으로, 귀족정은 寡頭政 (Oligarchie)으로, 민주정은 衆愚政(Ochlokratie)가 된다고 하였다. 그는 소수의 賢者들이 통 치하는 귀족정을 가장 좋은 정치형태로 보았다. 그리고 플라톤은 인간의 4가지의 德目을 주장 하고 각 계층의 인간의 덕목을 생산자계층에는 절제와 克己(Selbstbeherrschung)가, 국가수호 자의 계층에는 용기(Tapferheit)가, 통치자의 계층에는 지혜(Weisheit)가 각각 갖추어야할 덕 목이라고 하였다(Vgl., Poller, a. a. O., S. 75; Sauter Johann, Die philosophischen Grundlagen des Naturrechts: Untersuchungen zur Geschichte der Rechts-und Staatslehre (Frankfurt/M, Verlag Sauer u. Auvermann, 1966), S. 18).이러한 각 계층의 사람들의 각 덕목의 수행으로 각 개인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영혼의 상태를 정의(Gerechtigkeit)라고 하였다(Vgl., Poller, a. a. O., S. 75). 65) 플라톤이 자연법을 정식으로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데아세계의 법이 이상적인 법이었 으므로 플라톤은 자연법적인 사고를 주장하였을 뿐이지만, 오늘날의 견지에서 보면 플라톤이 이데아세계의 법으로 주장한 법이 분명히 자연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66) Nauke, Harziger, a. a. O., Rn 63. - 162 -

西洋에서의 自然法論의 生成, 發展 및 影響에 관한 硏究 25 사상에도 반대의 입장에 서 있었다.67) (3)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주장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로서 그도 역시 뤼체움68)(Lyzeum: Lykeion)이라 는 학원을 설립하여 학문을 논하였다. 그도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이상세계인 이데아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플라톤과를 달리 이데아는 현실세계인 質料의 상위에 별개로 존재하는 形相이 아니라 質料(즉, 素材)속에 내재하면서 질료를 목적적으로 움직여 나 간다고 주장하였다.69) 다시 말하면 이데아는 현실세계와는 별개 독립의 상위세계로서 현실세계를 이끌어가는 이상세계가 아니라 현실세계 속에 존재하면서 현실을 이상세계 로 이끌어간다는 논리로 설명하였다. 따라서 현실세계와 이상세계를 2원적으로 파악하 지 아니하고 一元的으로 파악하였다. 플라톤이 이데아, 즉 이상세계를 중시한데 반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세계를 중시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현실세계를 목적지 향적 존재로 이해하였다. 더욱더 그는 현실세계는 목적지향적으로 발전(Entelechie)한 다고 하였다. 이와같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가 현실세계 속에 존재한다고 함으로써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세속화(Säkularisierung der Ideenlehre)하였다.70)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 출신으로서 활동은 아테네에서 하였으며,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으로서 활약을 하였다. 그가 이데아의 세계가 현실세계의 위에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현실세계에 내재한다고 주장한 것은, 플라톤 시대에는 아테네가 타락한 상태였기 때문에 현실의 타락한 아테네 위의 이상세계를 소망하여 플라톤이 이데아론 을 전개하였으나,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살고 있었고 그가 위하 여 일을 한 대제국이었던 마케도니아가 이상세계로서 현존하였기 때문에, 아리스토텔 레스는 이데아의 이상세계는 현실세계에 존재하면서 목적론적으로 발전해 나간다고 한 것으로 이해된다. 무엇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의 분야를 일정한 범주(Kategorie)로 나누어 세 분화하였다. 종래까지는 학문분야의 세분화없이 학문은 모두 철학으로 이해되었다. 이렇게 학문을 세분화에 의한 범주화한 것은 진리를 얻기 위한 방법이었다. 아리스토 텔레스는 학문을 논리학(Logik), 물리학(Physik), 동물학(Zoologie), 형이상학 67) Vogt, a. a. O., S. 54. 68) 뤼체움도 역시 AD 529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에 의해 아카데미니아와 함께 폐쇄되었다. 69) Naucke, Harziger, a. a. O., Rn 70. 70) A. a. O., Rn 71. - 163 -

26 金相容 (Metaphysik), 윤리학(Ethik), 정치학(Politik) 등으로 분류하였다. 이러한 학문의 범주화는 학문영역의 확장을 초래하였다. 그리고 범주론은 최상위의 범주가 본질 (Substanz)이고, 그 하위의 범주는 양, 질, 위치, 등에 따라서 세분화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범주화에 의하여 형이상학이 형성된다고 본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화와 함께 귀납적으로 논리학을 구성하였다. 특히 논리학을 아 리스토텔레스는 분석론(Analytik)이라고 하였으며, 바른 생각(richtiges Denken)을 위한 이론으로 이해하였다. 바른 사고는 정확한 개념을 필요로 하며, 정확한 개념의 정의 는 다른 사물과 구별하는 인식을 가능케 한다. 예컨대 사람은 말을 하는 생명체이다(Der Mensch ist ein sprechendes Lebewesen)라고 하면 사람과 다른 생명체와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렇게 학문영역의 세분화, 범주화와 함께 진리탐구의 방법론으 로서는 귀납법(Induktion)을 활용하였다.71)72)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는 안정(Stabilität)을 추구하며 안정은 중용을 벗어 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73) 더욱더 그는 정의는 평등이라고 하였다. 평등은 너무 많지도 않고 너무 적지도 않는 中道를 의미한다고 하였다.74)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 스의 정의론은 중도적인 것을 표준으로 하고 있으며, 중도적인 것이 인간적인 관계정 립에 가장 봉사적(dienstlich)이라고 하였으며, 중용의 정의가 필요불가결한 인간관 계의 정립에 가장 이바지한다고 하였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개념정의하였을 뿐만아니라, 정의를 평균적 정의 (iustitia communitativa: ausgleichende Gerechtigkeit)와 배분적 정의(iustitia distributiva: verteilende(austeilende) Gerechtigkeit)로 나누었다. 이러한 평균 적 정의와 배분적 정의는 모두가 평등(Gleichheit)을 이루고자 하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정의이다.75)76)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형평(Billigkeit)개념을 정립하고 이를 발전시켰다. 그는 인간이 만든 실정법은 정의롭지 못한 법이 있을 수 있으며, 그러한 不正義한 법은 형 71) Poller, a. a. O., SS. 81-82. 72) 아리스토텔레스는 귀납법을 활용한데 반하여 플라톤은 연역법을 활용하였다. 73) Naucke, Harziger, a. a. O., Rn 72. 74) Kaufmann, Hassemer(hrsg.), a. a. O., S. 42. 75) A. a. O., S. 42. 76) 이와같이 아르스토텔레스는 법의 기초이자 목적인 정의에 관하여는 논하였지만 법에 관하여 는 별로 논하지 않았다(Vgl., Stig Strömholm, Kurze Geschichte der abendländischen Rechtsphilosophie (Göttingen, UTB Vandenhoeck & Ruprecht, 1991), S. 40). - 164 -

西洋에서의 自然法論의 生成, 發展 및 影響에 관한 硏究 27 평론에 입각하여 이를 수정하여야 한다고 하였다.77) 그리하여 소크라테스에 의하여 절대화되었던 법적안정성(Rechtssicherheit)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성적인 가치척 도인 형평론에 의하여 위축되었다고 평가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정치적인 동물이라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법과 국가의 생성은 인간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필수불가결성에 있다고 파악하였다. 인간이 정치적 동물이라는 것은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 라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로 파악하는 것으로서, 그 공동체에는 질서유지를 위한 법이 필요하며, 공동체는 최종적으로 국가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노예제도를 인정하였다. 4. 스토아학파의 자연법론 그리스철학사에 있어서 자연법의 주장은 스토아(Stoa)학파에서 시작되었다고 봄이 타당하다. 스토아 학파이전에는 자연법 사상에 해당될 수 있는 법사상이 플라톤의 이 데아론에 의하여 주장이 되었지만, 정면으로 자연법을 주장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된 다. 자연법이든 실정법이든 모두 이를 법이라는 범주에 포함하여 논하였으며, 자연법 이란 개념으로 이데아 세계의 법을 자연법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스토아학파에 와서야 비로소 실정법위의 법을 자연법이라 하였다. 스토아학파 이전에는 특정의 철학자를 중심으로 그 특정인의 철학이 주장되고 그들 의 철학속에서 자연법적 사상이 존재하였음이 인정되었다. 스토아학파의 철학과 자연 법은 그리스에서 태동이 되었지만 그 실제적 역사적 결실은 로마의 공화정(공화정 전 기: BC 510-200, 공화정 후기: BC 200-27)과 元首政 時代(BC 27-283)였던 로 마법의 고전시대(원수정시대와 일치)에 로마법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소 토아학파의 철학은 사해동포주의적인 세계시민사상과 인간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그 중심내용으로 하고 있었으며, 법에서는 매우 인도주의적인 자연법을 주장하였다. 스토아는 본래 回廊이라는 뜻이며, 회랑을 따라 걸으면서 철학을 논하고 강론을 하 였기 때문에 逍遙學派라고도 한다. 스토아 학파는 그리스의 제논(Zenon: BC 340-260)이 창시하였으며 그 후 약 500년 동안 지속되었다. 스토아학파의 발전을 시대별로 구별해 보면, BC 300년 즈음에서 BC 150년 정도까지의 약 150년간을 전 77) Kaufmann, Hassemer(hrsg.), a. a. O., S. 41. - 165 -

28 金相容 기 스토아(altere Stoa)라고 하며, BC 150년 즈음에서 AD 50년 즈음까지의 100 년간을 중기 스토아(mittlere Stoa)라고 하고, AD 50년 즈음에서 AD 200년 즈음 까지의 250년간을 후기 스토아(jüngere Stoa)로 분류한다.78) 이 기간 중에 활동하였던 스토아 철학자로서는 그리스의 제논에 이어 로마에서는 집정관(consul)이었던 Cicero(Marcus Tullius Cicero: BC 106-AD 43), 네로황 제의 스승이었던 Seneca(BC 4-AD 65), 노예출신이었던 Epiktet(AD 55-135), 그리고 로마제국의 5賢帝중의 한 황제였던 Marc Aurel(AD 121-180) 등을 들 수 있다. 이 시기는 일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에 의하여 그리스 문화와 동양문화가 서로 교류가 이루어져 형성된 헬레니즘시대이기도 하다. 특히 Cicero는 그리스의 플라톤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스토아 철학을 로마에 알리었으며 그 중에서도 스토아 철학을 가장 강력하게 로마에 도입하였다.79) 그리스문화의 로마에의 유입은 스토아 학파에 의하여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 다. 그 이전에 로마에서 BC 450년에 12銅版法80)(즉, 12表法: lex duodecim tabularum: Zwölftafelgesetz)을 만들기 위하여 로마에서 아테네의 솔론81) (Solon)법을 탐구하러 로마의 학자가 그리스에 간 적이 있으며, 그 결과로 12표법에 는 솔론법이 그대로 로마법으로 사용된 법의 내용이 있다. 12동판법은 극히 형식을 중시하는 儀式主義的인 법률이었다.82) 스토아철학은 그 중심내용이 논리학, 물리학, 그리고 윤리학으로 구성되어 있었으 며, 그 중에서도 윤리학이 강조되었다.83) 논리학에서는 신은 세상의 창조자이며, 모 든 것들의 아버지로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이 세상을 이성적이고 목적지향적인 질서 에 의하여 구성되어 있는 이성(logos)으로 이해하였다.84) 그리고 스토아학자들에 있 78) Vogt, a. a. O., S. 64. 79) Zippelius, a. a. O., S. 48. 80) 12표법은 BC 451년에서 BC 450년에 걸쳐서 제정되었으며, 同害報復의 인정 등 형법규정이 있기는 하지만 주로 私法規定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법중에서도 당시의 공동체의 유지를 위 한 가족법과 상속법 및 부동산법과 불법행위에 관한 규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관하여는, 김상용, 법사와 법정책: 로마민법학사 중심(한국법제연구원, 2004), 4면 참조).그리고 상린 관계에 관한 12동판법의 내용은 그리스의 상린관계법을 그대로 가져와 규정한 것으로 파악되 고 있다. 81) 솔론(BC 640-560)은 BC 594년에 아테네의 집정관으로 선임되었으며, 솔론의 개혁으로 유 명하다. 솔론이 집정관으로 선임되면서 단행한 솔론의 개혁에 의하여 당시에 아테네에 효력을 가졌던 드라콘법(Drakon) 중 살인에 관한 법은 모두 페지되었으며 새로운 법률이 제정되었다. 82) Strömholm, a. a. O., S. 54. 83) Vogt, a. a. S. 64. 84) A. a. O., S. 65. - 166 -

西洋에서의 自然法論의 生成, 發展 및 影響에 관한 硏究 29 어서 철학은 무엇보다도 삶의 예술로 이해되었다. 또한 모든 것은 미리 예정되어 있으 며, 인간도 그 운명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이해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목표는 행복 (Glückseligkeit)이며 최고의 행복상태는 마음의 평안(Gemütsruhe)으로 이해하였 다.85) 善을 인간자신과 자연과의 일치상태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인간은 행복하기 위 하여 자연의 법칙에 일치되게 행동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스토아 학파는 의무 (Pflicht)를 주장하였다.86) 즉, 인간은 이성을 따르고, 내면의 신의 음성을 따를 것 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스토아 학파의 의무론이 그들의 윤리학의 중심개념이었다.87)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은 그의 이성이 그의 충동을 지배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스토아 학자였던 크리시포스(Chrysippos)는 德(Tugend)과 이성의 상관 관계를 초국가적 일반적으로 효력이 있는 자연법의 기초사상으로 만들었다.88) 그리 하여 덕스러운 삶을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것들을 경험의 기초로 한 삶과 동일시하였 다. 따라서 이는 자연과 부합하는 삶을 덕스러운 삶으로 보았으며, 이는 바로 법에 있 어서 자연법에 부합된 삶이 덕스러운 삶이라는 것이었다. 특히 스토아 학파는 인간의 사회적 의무로서 正義와 人間愛를 강조하였다. 사해동 포주의에 입각하여 노예까지도 포함하는 인간애를 주장하였다. 사해동포적인 인간애 의 강조로 당시 노예였던 에픽테트(Epiktet: AD 55-135)가 학자로서 인정되었으 며, 그는 황제인 마르크스 아우렐의 상담역을 담당하였다. 특히 로마제국에서 스토아 학파의 인간애에 기초한 사해동포주의의 영향은 로마제국의 영토내에 살던 로마시민 과 비시민의 구별을 없애고 모든 로마제국내의 사람들에게 로마시민권을 부여한 일이 었다. 로마에서는 BC 367년에 로마시민상호간의 소송을 담당한 시민담당법무관 (praetor urbanus: Stadtpraetor)제를 실시하고, BC 242년에는 로마시민과 비시 민, 비시민 상호간의 소송사건을 담당한 외인담당법무관(praetor peregrinus: Fremdenpraetor)제를 실시하여 로마시민과 비시민을 소송사건에서도 구별하고, 적 용법률도 로마시민에는 시민법(ius civile)를 비시민 상호간과 로마시민과 비시민간 에는 적용되는 법률을 만민법(ius gentium)으로 구별하였다. 그러나 스토아 학파의 사해동포주의의 사상적 영향에 의하여 BC 90년에는 율리아법에 의하여 AD 49년에 는 로스키아법에 의하여 이태리반도의 전주민에게 로마시민권을 부여하고, AD 212 85) A. a. O., S. 65. 86) 스토아 학파가 주장한 의무(Pflicht)라는 것은 인간이 행복해 지기 위하여 지켜야할 준칙으로 이해된다. 87) Vogt, a. a. O., S. 66. 88) A. a. O., S. 66. - 167 -

30 金相容 년에는 Caracalla 大帝에 의하여 로마제국의 전역의 모든 주민들에게 로마시민권이 부여되었다.89) 스토아학파에 속하는 철학자, 정치가, 또 법률가로서 후대에 크게 영향을 주었던 키 케로는 사람이 스스로를 지켜나갈 수 있기 위해서는 법적으로 잘 조직된 국가공동체내 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모든 인간적인 노력은 물론 법도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함을 목표로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90) 그러므로 공동체의 질서는 원칙적으 로 깨뜨려져서는 아니되며, 사람은 공동체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야 한다고 하였 다. 그리고 그는 법률은 인간의 두뇌로 생각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며, 사람들의 결의 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며, 명령과 금지(Gebieten und Verbieten)의 지혜로써 온 세계에 작용하는 어떤 영원한 것(aeternum quiddam: etwas Ewiges)라고 하였 다.91) 이러한 영원법은 善과 정의를 명령하고, 악과 不正義를 금지한다고 하였다. 여 기에서 선은 공동의 복지(Gemienwohl)이며, 악은 공동의 복지의 쇠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공동의 복지에 봉사하는 법만이 구속력을 갖는다고 하였다.92) 그리고 그는 자연법은 실정법에 의하여 부인할 수도 없도 제한될 수도 없다고 하였다.93) 또한 그 는 법학이 예술(Kunst)로 발전되어 갈 것을 주장하였다.94) 세네카는 모든 사람은 서로간에 친척이며, 서로 사랑할 것을 요구하였다. 에픽테트 도 마찬가지로 서로간의 사랑을 가르쳤다.95) 그리고 그는 德이란 자연질서를 사회질 서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였다.96) 이와같은 인간애를 바탕으로 하는 사해동포적이고 인도주의적이었던 스토아 학파 는 당시의 로마법의 인도주의적 발전에 큰 영향을 주어 로마법의 고전시대를 이룰 수 있게 하였으며, 또한 그 후의 로마에서 기독교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스 토아 사상과 기독교 사상과를 비교해 보면, 스토아 사상은 기독교 사상과 유사성이 있으며, 후기 스토아학자들은 기독교인이거나 기독교인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스 토아와 기독교는 상호영향을 주고 받았다.97) 기독교 사상이 스토아철학으로 받았다 89) 김상용, 전게 법사와 법정책: 로마민법학사 중심, 62면. 90) Naucke, Harziger, a. a. O., Rn 73. 91) A. a. O., Rn 73. 92) A. a. O., Rn 73. 93) Ulrich Eisenhardt, Deutsche Rechtsgeschichte, 2. Aufl.(Beck, 1995), Rn 264. 94) Strömholm, a. a. O., S. 156. 95) Kaufmann, Hassemer(hrsg.), a. a. O., S. 44. 96) Strömholm, a. a. O., S. 62. 97) Heinrich Axel Winkler, Ein Beitrag zur Geschichte des Stoicismus: Diss. Leipzig - 168 -

西洋에서의 自然法論의 生成, 發展 및 影響에 관한 硏究 31 고 판단된 주요 내용들을 살펴보면, 첫째로 신약성서의 요한복음 제1장 제1절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이는 바로 스토아 학파 의 logos(말씀, 理性)론과 유사성이 있다고 이해되며, 기독교를 이론적으로 조직화한 사도 바울(St. Paulus: Bc 5-AD 67)의 사상의 기초는 스토아 철학에 있다고 한 다.98) 둘째는 스토아 학파에서의 인간애 내지 인도주의(Humanität)와 사해동포주 의(Kosmopolitanismus)와 성서에서의 모든 사람은 형제라는 말씀과 유사성이 많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도는 자연에 의하여 주어진 제도이며, 노예를 얻 기 위하여 전쟁을 치루는 것도 정당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스토아 학파에 속하는 마르쿠스 아우렐 황제는 예리한 무기를 가지고 치루어지는 모든 劍鬪士戰鬪 (Gladiatorengeflechte)를 황제의 告示(Edikt)를 통하여 금지하였으며, 노예출신 의 스토아 철학자였던 에픽테트와 國事를 논의하였다. 이러한 스토아 학파의 인간애 와 사해동포주의사상은 스토아 학파의 보편주의(Universialismus)의 표방이며, 이 는 選民思想의 否認이며 출생, 지위에 따른 인간의 차별의 부인이었다. 이와같은 스 토아 학파의 인간애에 대한 사상은 기독교 사상과 일치한다. 셋째로 스토아 학파는 이 세상에서 여러 개의 나라를 원하지 아니하고 하나의 국가, 즉 세계국가 (Weltstaat)를 원하였다.99) 그리고 각 개인은 세계시민(Weltbürger)일 뿐이라는 사상을 펼쳤다. 세계시민으로 살아가는 넓은 마음의 자세를 세계정신(Weltgeist)이 라고 하였다. 넷째로 스토아 학파는 禁慾(Askese)을 권장하였으며, 금욕은 고요와 평화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였다. 기독교에서 금욕주의가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다섯 째로 스토아 학파는 영혼의 불멸성을 주장하고, 종말론(Eschatologie)를 주장하였 다. 이러한 스토아의 사상도 그대로 기독교의 사상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스토아 학 파에서는 인간의 부활을 인정하지는 않았으나 기독교는 부활을 인정하는 점에서는 차 이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스토아 사상들은 교회법(kanonisches Recht)에 받아드 려져 법적으로 제도화가 이루어졌다.100) 이러한 스토아 학파는 약 500년 정도 지속되었지만, 그 스토아 학파의 사상은 기독 교를 통하여 이어져 왔으며, 비록 특수한 법이긴 하지만 교회법에서 법제화가 이루어 졌다. 스토아 학파의 인간애, 인도주의, 사해동포주의는 그 모두가 인류보편의 가치로 (1878), SS. 1-2. 98) A. a. O., S. 25. 99) 이와같은 스토아학파의 세계국가 정신은 훗날 칸트(1724-1804)의 세계국가론의 주장의 사 상적 근원이 되었다. 100) Winkler, a. a. O., S. 58. - 169 -

32 金相容 서 자연법의 중심내용을 이루면서 중세 자연법 발전의 중대한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다 고 평가된다. 자연법의 가장 확실한 탄생은 스토아 학파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사상적 遠流는 이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생성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스토아학파의 법사상의 영향을 받은 로마의 고전시대의 법학자들의 법에 대한 이해 를 살펴보면, 켈수스(父 Celsus: AD 96-98에 활동, 子 Iuventus Celsus: AD 100-130에 활동)는 법은 善과 衡平의 技術이라고 하였으며, 울피아누스(Ulpianus: AD 190-223에 활동)는 법(ius)라는 용어는 정의(iustitia)에서 나왔으며, 정의는 각자에게 그의 것을 주고자 하는 항구불변의 의지라고 하고, 법의 요청은 명예가 살아 있게 하고 어느 누구도 침해하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하였다.101) 더 나아가 울피아누 스는 법학은 신의 일과 인간의 일을 분별하는 인식이며,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아 는 지식이라고 하였다.102) 또한 울피아누스는 자연법은 자연이 생명있는 모든 동물에 대한 가르침이며, 특별히 사람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며 모든 동물에 대한 공통적인 가 르침이라고 하였다.103)104) 이와같이 고전기의 로마법은 스토아철학의 영향에 의하여 크게 발전하였으며, 그 고전기의 로마법이 동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유스티니아누스 大帝(AD 482년 출생, AD 527-565년 在位)에 의하여 로마법대전 중, 학설휘찬과 법학제요로 실정법화되 었다. Ⅲ. 자연법론의 발전 1. 서양 중세와 근세의 시대적 특징 자연법론이 융성한 시기는 중세와 근세의 근대시민법전이 제정되기 전까지이다. 중 세와 근세에 자연법이 발전하였지만 중세와 근세의 자연법은 각각 그 특징적인 차이가 101) Ulpianus, D. 1. 1. 10. pr. & 1. 102) Ulpianus, D. 1. 1. 10. 2. 103) Ulpianus, D. 1. 1. 3. 104) 이와같이 법학제요, 학설휘찬에서 자연법을 규정하고 있지만, 로마법대전에서도 여전히 자연 법(ius naturale)의 정확한 관념을 이해하고 있지는 못하고 있었다고 비판하는 견해도 있다 (Vgl., Emil Erlich Hölscher, Vom Römischen zum Christlichen Naturrecht (Augsburg, Literar.Institut Haas und Grabherr, 1931), S. 18). - 170 -

西洋에서의 自然法論의 生成, 發展 및 影響에 관한 硏究 33 있다. 서양의 중세는 기독교가 지배한 시기이기 때문에 신의 세계의 법인 神法으로부 터 신의 계시 또는 인간의 이성에 의하여 파악된 신법이 바로 자연법이었다. 그러나 근세는 신의 지배를 벗어나 인간이 중심이 된 시대이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의 질서 내 지 이성의 법을 자연법으로 이해하였다. 중세나 근세의 자연법은 그 근원은 다르다 하 더라도 현실세계의 법인 실정법과는 다른 초월적이고 불변의 법인 점에서는 동일하다. 먼저 중세와 근세의 시대구분을 하여 보면, 서양의 중세는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때 (AD 476)년부터 동로마제국이 멸망한 때(1453)까지 이다.105) 동로마 제국이 멸망 한 직후 1492년에는 컬럼부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가 신대륙 을 발견하고, 1517년에 루터106)(Martin Luther: 1483-1546)가 종교개혁을 시작 한 때를 근세의 출발시기로 보고 있다.107) 중세의 1000년은 신중심의 시대였으며, 학문적으로는 신학이 지배한 시대로서 그 리스에서와 같이 철학이 발전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중세철학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 기 보다는 기존 철학을 유지하고 계승하는 일에 열중하였다.108) 법적으로는 동로마제 국의 황제였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에 의하여 편찬된 로마法大全109)의 연구가 註釋 學派(Glossatoren)와 註解學派(Kommentatoren)에 의하여 진행된 시기였으며, 로 마법이 바탕이 된 교회법이 새로운 법영역으로 발전하였으며, 반대로 기독교의 신학, 그 중에서도 道德神學(Moraltehologie)이 로마법을 더욱더 순화시키고, 그렇게 순화 된 내용의 법을 교회법으로 활용한 시기였다. 서양문화의 뿌리는 그리스 철학, 기독교, 그리고 로마법이다.110) 그리고 중세의 서 105) Strömholm, a. a. O., S. 95. 106) 루터는 신의 나라와 세속의 나라는 별개의 나라라는 2왕국론(Zwei-Reiche-Lehre)을 주장 하였다. 이는 중세의 신의 지배로부터 세속국가가 벗어날 수 있는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107) 그리고 근세는 프랑스대혁명을 기점으로 하여 현대로 移轉되었다고 서양역사를 시대구분하 고 있다. 그러므로 근세는 약 300년 정도 지속이 되었다(Vgl., Vogt, a. a. O., S. 133). 108) Strömholm, a. a. O., S. 104. 109) 로마법대전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에 의하여 편찬된 公撰의 법학제요(Instutiones: 533년 편찬)와 학설휘찬(Digesta: 533년 편찬), 구칙법휘찬(Codex Repetitae Praelectionis: 534년 편찬)과 私撰의 신칙법휘찬(Novelle: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발포한 칙법으로 편찬 된 私撰의 법전임)의 4권의 법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 대이전의 로마법학자들의 학설을 모아 편찬한 학설휘찬이 가장 중요하다. 이와같이 4권의 법전을 로마법대전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1583년에 프랑스의 복고주의 로마법학자였던 고토프레두스(Dionysius Gothofredus)가 1582년에 편찬된 교회법대전(Corpus Iuris Canonici)에 대항하기 위하여서 였다. 110) Wolfgang Waldstein, Naturrecht in der europäischen Rechtsentwicklung, in: Das Naturrecht und Europa (hrsg. von Tadeusz Guz, Frankfurt/M, Peter Lang, 2007), S. 326. - 171 -

34 金相容 양에서는 기독교가 사람들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에 신학이외에는 학문이 발 전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서양의 중세철학이란 신학 그 자체였다. 그리고 학문하는 기관도 수도원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수도회는 도미니크회 (Dominikus)와 프란체스코(Franziskanerkloster)였다. 중세후기에는 대학도 설 립이 되어 대학에서 학문이 이루어졌다. 이와같이 중세는 고대에서와는 달리 학문이 특정인이 설립한 학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 으며,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중세는 근세를 열기 위한 준비기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중세의 대학의 설립과정은 1348년에 프라하대학이, 1365년에는 비엔나대학이, 1386년에는 하이델베르크대학이, 1388년에는 쾰른대학이, 1379년에는 에르푸르트 (Erfurt)대학이, 1409년에는 라이프치히 대학이, 1457년에는 프라이부르크 대학이, 1477년에는 튀빙겐 대학이, 그리고 1472년에는 트리어대학이 설립되었다.111) 근세에는 중세의 신중심의 사회를 극복할 수 있는 계기들이 형성됨으로서 신의 지 배에서 인간중심, 특히 인간이성의 발견과 존중의 시대가 되었으며, 인간의 이성의 존 중은 과학에로의 학문관심의 전환과 이로 인한 과학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었다. 그리 하여 서양근세는 과학이 발전한 시대였으며, 과학의 발전은 다시 다른 학문연구에도 영향을 주어 모든 것을 조직화하고 체계화하도록 하는 학문경향을 낳게 하였다. 법의 분야에서도 종래의 여러 법학자들의 주장을 조직화하고 체계화하는 근대민법전 편찬 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중세에는 로마의 고전시대에 그리스의 스토아학파의 법사상의 영향으로112) 로마법 학자들의 학설에 의하여 발전된 로마법이 더욱더 보편주의적이고 인도주의적인 방향 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한 보편주의적이고 인도주의적인 중세법학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로마제국에서 AD 313년에는 밀라노 칙령에 의하여 기독교가 공인되고, AD 391년에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인정됨으로써 학자들의 학문적 관심이 신학으로 바뀜으로서 로마법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신앙심이 깊었던 동 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로마법대전을 편찬함으로써 성문화된 로 마법은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로마법이 후세에 연구되고 발전되어 더욱더 인도주의적 으로 승화되어 결국에는 세계의 각 나라의 법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법사상적으 111) Handwörterbuch der Deutschen Rechtsgeschichte(HRG) Band 5 (hrsg. von Adalbert Erler, Ekkehhard Kaufmann, Berlin, Erich Schmidt Verlag, 1998), SS. 494-495. 112) 그리하여 스토아 학파를 로마법학의 어머니라고까지 한다(李太載, 法哲學史와 自然法論 (法 文社, 1984), 101면). - 172 -

西洋에서의 自然法論의 生成, 發展 및 影響에 관한 硏究 35 로도 기독교의 영향으로 자연법이 최고도로 발전한 시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중세의 법은 신법이 최고의 법이었으며 자연법의 근원은 바로 신법이었다. 근세에는 인간의 이성에 의한 합리주의가 발전하여 인간이성에 의한 법이 바로 자 연법으로 이해되고, 이성의 강조에 의하여 자연과학이 발전하게 되고 자연과학에서 발 견된 과학세계의 질서정연함을 법학에서 이를 실현하고자 하는 시대정신이 전개됨으 로써 이성에 의하여 발견된 자연법을 다시 이성에 의하여 조직화, 체계화, 실정법화를 이루게 되었다. 물론 근세의 자연법에 기초한 근대시민법전의 편찬에는 그 자연법의 조 직화, 체계화를 가능케 할 수 있는 주체가 필요하였다. 그러한 자연법의 실정법화를 담 당한 주체는 바로 근대의 중앙집권적인 절대국가였다. 이러한 시대정신과 그 시대정신 을 구현할 수 있는 근대국가의 탄생에 의하여 자연법은 실정법화될 수 있었으며, 자연법 의 실정법화에 의하여 그리스에서부터 시작된 자연법론은 그 使命을 다하게 되어 법에 있어서의 자연법 중심의 시대는 실정법위주의 법실증주의 시대로 전환되게 되었다. 2. 중세의 자연법론 (1) 기독교의 公認과 神學中心의 학문연구 그리스철학에서는 인간이 중심이 되어 이상세계를 추구하고 현실세계는 이상세계를 향하여 움직여 가거나 가야한다고 사고하였다. 자연법 사상도 자연히 이상세계의 질서 의 법사상으로 전개되어 왔다. 그리고 헬네니즘 시대가 도래하여 그리스 철학의 영향 이 미치는 영역이 확대되자 사해동포적인 사상이 대두되고, 인도주의적인 사상이 폭넓 게 퍼져 나갔다. 로마의 영토가 확장되고 로마가 대륙을 지배하면서 그리스에서 생성 된 인도주의적이고 사해동포주의적인 사상이 로마에 수용되어 로마의 사상으로 전환 됨으로써 로마제국이 수많은 異民族을 지배하면서도 그들에게 배타적이지 않고 포용 하여 모두 로마제국의 시민으로의 자격을 부여하는 조치들을 취하였다. 그로 인하여 로마의 법문화가 고도로 발달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로마法史에 있어서의 고전시대 를 이루었다. 이 시대의 로마법은 법학자들에 의한 학설법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법 학자들의 법에 대한 이해가 인도주의적인 자연법 사상에 기초하고 있었다. 기독교는 로마에 傳道가 된 후 전도 초기부터 약 300년간 심한 박해를 받았다. 로 마에 기독교를 전한 초기의 대표적인 선구자들은 사도 베드로와 바울(Paulus: AD 5-67)이었다. 그들은 모두 로마에서 박해를 받아 로마에서 순교를 당하였다. 심한 박 - 173 -

36 金相容 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박해를 극복해 나가고 박해가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기독교인의 수는 더 늘어만 갔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이르면 이미 로마제국의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도 기독교들이었다. 그리하여 콘스탄티누스대 제는 기독교인들의 지원이 없이는 더 이상 로마를 통치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하고, AD 313년에 로마에서의 기독교를 공적으로 인정하였다. 그 후로부터 기독교 신앙은 합법적으로 용납되고 기독교인들은 로마황제의 통치에 적극 지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AD 391년에는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결정되어 교회가 황제의 비호를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이 기독교의 공인과 국교인정에 의하여 기독교가 로마시민의 삶의 기본이 되고, 로마의 통치도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행하여짐으로써 학자들은 종래의 법학연 구에서 신학연구로 학문연구의 중심이 바뀌게 되었다. 그 결과로 법학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되고, 신학의 연구는 활성화하게 되었다. 기독교가 공인되고 국교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 초기에는 교회의 조직이 정비되지 아니하여 신학연구도 교회조직의 미비로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그럼으로써 자연히 이름있는 신학자도 배출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조직이 체계적으로 갖추 어 짐으로써 신학연구의 선구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이 바로 敎父哲學者 (Patristiker)들이었다. 교부철학자들은 교회의 조직화와 체계화를 위한 신학연구와 함께 그것을 법으로 규율하는 법의 조직화와 체계화도 함께 연구하였다. 또 한편으로 교회가 조직화를 하기 위해서는 그 조직화를 확실히 하기 위한 법이 필 요하였다. 그러나 교회가 스스로 법을 만들어 교회를 조직화하기 보다는 교회는 발전 된 로마법을 받아들여서 그 로마법을 교회의 조직화를 위한 규범으로 삼았다. 그리하 여 교회는 로마통치에 지원을 하고, 교회는 로마법을 교회로 받아드리고 황제의 보호 를 받으면서 성장 발전을 하여 왔다. 그리고 교회가 조직화되고 나서는 교회의 권력이 강해지고 세속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상태로 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교회 자체의 법인 교회법(kanonisches Recht)이 형성되고 교회법전이 편찬되고 교회재 판이 이루어지게 되어 교회법이 또 하나의 새로운 법영역이 되었다.113) 교회법은 근본적으로 로마법을 기초로 하고 기독교사상, 특히 도덕신학에 의하여 순화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교회법은 사회적 약자보호의 내용을 담고 있으며, 특별히 인도주의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대가 흐르면서 교회법이 다 113) 교회법의 생성과 발전에 관하여는, 김 상용, 法史와 法政策: 게르만法史, 敎會法史, 獨逸民 法學史 중심 (한국법제연구원, 2005), 125-189면 참조). - 1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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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金相容 문연구의 입장이 달랐다. 도미니크 수도회는 신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중시하 는 主知主義(Intellektualismus)에 입각하고 있었으며, 프란체스코회는 인간의 의 사, 결정을 중시하는 主意主義(Voluntarismus)에 입각하고 있었다. 그들의 연구방 법은 개념을 정의하고 그것을 敎義化(Dogma)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렇게 제도화된 수도원과 대학에서 학문을 하였기 때문에 중세의 철학을 스콜라 철학 (Scholastik)이라 한다. 스콜라 철학의 중심은 신학연구였으며, 기독교의 교리를 확 고한 信念 내지 信條로 도그마하는 방법으로 연구를 하였다. 그리고 중세에는 기독교의 시대이긴 하였지만 고대 그리스의 철학을 배척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 사상의 조화를 이루고자 하였다. 그 결과로 교부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의 철학에 터잡아 신학을 탐구하였으며,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더욱 심화시키고 기독교 사상과 조화를 이루고자 하였다.114) 특히 중세의 교부철학자들은 기독교 사상이 고대 그리스 철학과 배치되지 않음을 강조 하였다. 그리므로 고대 그리스 철학은 기독교 시대에도 그 근본사상으로 계속 이어져 왔다. (2)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영구법, 자연법 및 人定法의 관계정립 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과 철학 개관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AD 354-430)는 북아프리카, 지금의 알 제리 지역의 출신으로서 그리스의 플라톤철학을 바탕으로 하여115) 중세 기독교 시대 의 이상주의 철학을 펼친 교부철학자(Patristiker)였다.116)117) 아우구스티누스는 위대한 신학자이자 철학자이었으며 중세는 기독교가 지배한 시대였기 때문에 그의 死 114) 이 정우, 전게 세계철학사, 601면. 115) 아우구스티누스가 영향을 받은 플라톤 철학은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us) 철학이었다. 신플라톤주의 철학은 로마제국이 동서로마로 나누어지기 전에 융성하였던 철학으로서 로마에 서 정신적 지주가 흔들리기 시작한 2세기 이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고대 플라 톤의 사상을 이어받은 철학이다. 신플라톤주의 창시자는 삭카스(Ammonios Sakkas: AD 175-242)이었으며, 대표적인 신플라톤주의자는 플로틴(Plotin: AD 204-270)이었다. 플로 틴은 세계를 단계적으로 구성하여, 최상위에는 그 개념을 정의할 수 없는 唯一者(Das Eine) 가 있고, 그 유일자의 충만함(Überfluß)에 의하여 그 유일자의 하위에 정신(Geist), 현실세계 의 영혼(Weltseele), 感知할 수 있는 현실세계(wahrnehmbare Welt)가 생성되어 있다고 하 였다(Vgl., Vogt, a. a. O., SS. 82-87). 116)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에서 암브로시우스(Ambrosius: AD 340-397) 主敎를 만났으며 그 로부터 성서를 바울의 시각에서 읽을 것을 권유받았다(Vgl., Poller, a. a. O., 143). 117) 이와같이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의 영향을 받아 중세적인 이상주의를 추구하였다. - 176 -

西洋에서의 自然法論의 生成, 發展 및 影響에 관한 硏究 39 後 근 1000년 동안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대학자가 나오지 않았다.118)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론의 이데아론을 받아드려 그것과 기독교신학의 도그마를 결 합시켰다.119) 그는 진리의 본질은 신의 영원한 이데아에 있다고 하였으며, 신이 곧 진리이고 모든 것의 근원은 신이라고 하였다.120) 신은 인간에 의하여 인식되거나 파 악될 수 없으며 신은 그 스스로 계시될 뿐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기독교의 3위일체론 (Dreieinigkeit)도 계시에 의하여 인간이 알게 된 것이며, 인간의 이성에 의하여 이 해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121) 그는, 신은 진리이므로 진리의 빛(lux veritas)은 이 데아의 인식을 가능케 하는 신의 권능에서 방출되는 형의상학의 빛으로서 그것이 곧 신의 계시(Offenbarung)라고 이해하였다.122) 그는 또 시간(Zeit)을 분석하여 현재만이 존재하며, 따라서 신은 영원한 현재라고 하였 다. 그러므로 신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이 없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123) 그리고 신은 인간을 완전하게 만들지 않았으며, 인간에게 일정한 자유의지를 부여 함으로써 죄와 악에 빠지게도 하고 그것들과 투쟁하게도 하는 존재로 창조하였다고 하 였다. 그리고 신은 역사를 총체적으로 주관할 뿐이며, 개개의 일들이 어떻게 벌어질 것인가에 대해서는 인간에게 자유의 여백을 주었다고 이해하였다.124) 또한 그는 악이 란 신의 不在라고 하였다.125) 그는 인간은 신의 은총인 자비(Barmherzigkeit)에 의해서만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 고 하였다. 그리고 또한 그는 신의 은총에 의해서 비로소 인간은 선행을 할 수 있다고 하였다.126) 물론 그는 신의 은총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원죄(Erbsünde)를 부인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리고 그는 예정설 (Vorherbestimmung: Prädestination)과 신의 은총(Gnade)론으로 그의 반대철학 자들에 대항하였다.127) 이와같이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것의 근원을 신에서 구하였다. 118) Stig Strömholm, Kurze Geschichte der abendländischen Rechtsphilosophie (Göttingen, UTB Vandenhoeck & Ruprecht, 1991), S. 91. 119) 이와같이 아우그스티누스는 그리스 로마의 문화와 기독교를 결합시키려고 하였다(Vgl., Strömholm, a. a. O., S. 87). 120) Poller, a. a. O., S. 144-145. 121) A. a. O., S. 145. 122) 이정우, 전게 세계철학사, 606면. 123) 상게서, 609면. 124) 상게서, 609면. 125) Vogt, a. a. O., S. 99. 126) Ninian Smart, World Philosophies(London, Routledge, 2000), S. 153.. 127) Vogt, a. a. O., S. 96. - 177 -

40 金相容 아우구스투스는 교회와 국가간의 관계에 관하여 교회가 국가의 우위에 있다고 하였 다.128) 그리고 교회는 현실세계의 神國의 상징으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국가와 교회 의 관계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은 중세의 황제와 교황간의 권력다툼의 시기에 항상 원용된 정치이론이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러한 철학은 당시의 영국의 수도승이면서 인간의 의지 내지 의 사(Wille)를 강조하였던 펠라기우스(Pelagius)와는 대립하는 관계에 있었다. 펠라기 우스는 인간은 善과 惡사이에서 이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사와 능력이 있다고 하였 으며, 신의 은총이 없어도 도덕적인 완전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였다.129) 아우구스투 스는 이러한 페라기우스의 주장에 반대한 대표자였다. 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연법론 아우구스티누스의 법의 세계는 스토아 학파의 세계이성, 세계법의 중세의 유신론 적 변형(theistische Umbildung)이었다.130) 아우구스티누스는 법을 영구법(lex aeterna: ewiges Recht), 자연법(lex naturalis), 그리고 人定法(lex humana)으 로 나누었다. 영구법은 이 세상을 생성되게 하고, 그 움직임을 결정하며, 이 세계의 필 수적인 질서를 담고 있는 不變의 법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영구법을 신의 세계의 법 으로서 스스로 영원히 존재하는 법으로 이해하였다. 영구법은 신의 세계인 신국의 법 이라 할 수 있다. 자연법은 인간의 이성에 의하여 인식된 영구법이었다. 인간은 영구법을 모두 인식 할 수는 없으며 부분적으로만 인식할 수 있을 뿐이라고 이해되었다. 이러한 자연법은 인간을 위한 세계법으로 이해되었다.131) 영구법과 자연법은 그 내용에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며 자연법의 하위에 있는 법도 아니며, 인간의 이성에 의하여 파악된 신법을 자연법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자연법이 절대적 기속력을 가지며, 인정법을 구속 지 배하는 것은 자연법이 인간의 이성에 의하여 파악된 神法으로서 神性을 가졌기 때문이 라고 하였다.132) 128) A. a. O., S. 153. 129) Strömholm, a. a. O., S. 88. 130) Johann Sauter, Die philosophischen Grundlagen des Naturrechts:Untersuchungen zur Geschichte der Rechts- und Staatslehre (Frankfurt/M, Verlag Sauer u. Auvermann, 1966), S. 58. 131) Naucke, Harziger, a. a. O., Rn 82. 132) 이 태재, 전게 법철학사와 자연법론, 108면. - 178 -

西洋에서의 自然法論의 生成, 發展 및 影響에 관한 硏究 41 인정법은 인간을 위하여 특정한 역사적 상황과 그 특정한 역사적 상황속에서의 개 별적인 사건에 관하여 영구법과 자연법을 구체화(Konkretisierung)한 법으로 이해 되었다.133) 그리고 인정법은 限時法(lex temporalis)으로서 일정한 특정의 시간내 에서만 요구하고 금지하는 법이라고 하였다.134) 이러한 인정법은 실정법으로 나타나 며, 연구법과 자연법에 反할 때에는 잘못된 법이라고 하였다.135) 不正義한 인정법은 법일 수 없으며, 정의롭지 못한 국가는 강도집단(Räuberband)이나 마찬가지라고 하 였다.136)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러한 자연법론은 기독교 사상에 기초한 자연법이었다. 그리하 여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적 자연법론의 개척자가 되었다.137) 이러한 아우구스티 누스의 자자연법론은 스토아 학파에서 이미 정립한 자연법과 인정법의 체계에 신법인 영구법을 최상위에 올려 놓음으로서 영구법, 자연법, 인정법의 체계를 구축하게 되었 던 것이었다.138) (3)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von Aquin)에게 있어서의 자연법과 실정법의 관계정립 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계승 아우구스티누스가 신학의 諸原理들을 정립한 후 중세의 긴긴 시간은 그의 신학과 철학의 지배하에서 커다란 변화없이 계속되었다. 신이 정신세계와 세속세계를 지배하 고, 신학이 철학을 지배하던 시대에는 上下의 위계질서가 형성되어 새로운 사고의 전 환을 가져오기가 힘들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로 중세는 큰 변화가 없는 시대의 계속 이었다. 신의 지배질서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신의 지배질서의 법제화에 의한 실행이 필 요하였다. 그 결과로 신의 지배의 대행자인 교부와 교회의 역할과 治理를 취한 질서는 교회법으로 제도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중세에 철학은 크게 발전하지 못하 였지만 신학과 교회법은 발전하였다. 중세에는 철학이 신앙을 지탱하기 위한 필요한 것 정도로 생각되었다. 이는 바로 신학과 철학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교회법은 로마법을 根本素材로 하였다. 그러한 교회법은 로마법을 성서의 가르침과 133) Naucke, Harziger, a. a. O., Rn 83. 134) Kaufmann, Hassemer(hrsg.), a. a. O., S. 49. 135) A. a. O., Rn 83. 136) A. a. O., Rn 83. 137) Bernd Rüthers, Rechtstheorie(Beck, 1999), Rn 424. 138) Zippelius, a. a. O., S. 61. - 179 -

42 金相容 신학에 의하여 정립된 원리들로 수정, 보완하고,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여 형성된 새로 운 법영역이었다. 교회법은 로마법을 바탕으로 하였지만 그 내용을 신학, 그 중에서도 도덕신학에 의하여 수정하고 순화된 새로운 법영역이었다. 이러한 교회법의 형성은 교 회법학자들에 의한 교회법연구의 집대성에 의하여 이루어진 법영역이었다. 교회법은 교회재판을 통하여 실행되었다. 더욱이 교회재판은 세속의 일반인에게도 재판권을 미 치게 되어 세속법의 변화를 가져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139) 그리하여 서양의 현대법 의 역사적 뿌리는 로마법과 게르만법 이외에 교회법이라는 새로운 법영역이 있다.140) 이와같이 로마법은 고대에는 스토아학파의 인도주의와 사해동포주의의 영향을 받아 자연법적으로 발전하고, 다시 중세는 기독교 사상에 의하여 더욱더 자연법적으로 발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로마법은 볼로냐 법학교를 시작으로 하여 대학에서 연구되고 가 르쳐 졌으며, 중세의 대학에서는 로마법과 교회법의 양법이 가르쳐 지고, 소송사건에 대하여 법원이 대학의 의견을 묻는 제도(Aktenversendung)에 의하여 로마법을 기 독교 사상과 교회법의 영향을 받아 더욱더 자연법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중세의 학문은 수도원에서부터 이루어졌다. 즉, 수도원이 학문을 하는 학교로서의 기능을 담당한 것이었다. 수도원에서의 학문연구의 주된 분야는 신학이었지만 신학자 들이 신학뿐만아니라 철학도 법학도 함께 연구하였다. 이러한 중세의 수도원을 중심한 학문연구의 흐름을 스콜라 철학(Scholastik)이라 한다.141) 스콜라 철학은 9세기 신학자였던 에리우게나(Eriugena: 810-877)에 의하여 성 립하게 되었다.142) 그러나 본격적인 스콜라 철학의 시작은 에리우게나에서 200년이 상의 세월이 지난 聖안셀무스(St. Anselmus: 1033-1109)에서 비로소 이루어졌 139) 서양 중세에 교회법원이 설치된 것은 1231년이었다(이정우, 전게 세계철학사, 690면 참조). 140) 그러나 法史에서는 교회법이 서양의 현행법의 역사적 뿌리의 하나라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지 아니한다. 그것은 중세에는 교회권력이 세속의 권력을 지배하고 교회법이 세속의 법사건에 도 적용되었기 때문에 근세에 들어와서 근대 절대국가가 교회권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결과로 교회법은 현재의 서양 세속법의 역사적 뿌리의 하나로 다루지 않으려는 경향 을 보이고 있다(김상용, 敎會法의 理解와 硏究의 必要性, 大韓民國學術院通信(Monthly Newsletter,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Republic of Korea), 제200호,2010. 3. 1), 2-4면 참조). 그것은 전적으로 정치적 이유에서 이다. 그러나 현재의 서양법의 내용에 이미 교회법의 내용이 들어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프랑스 혁명이후에는 세속의 권력자들 이 교회권력으로 벗어나기 위하여 교회재산을 몰수하고, 교회와 政敎協約(Konkordat)을 체 결하여 정교분리를 실현하고 이러한 정교분리는 오늘날의 헌법적 원리의 하나로 헌법에서 明 定하게 되었다. 141) 스콜라(Schola)는 학교 의 의미로서 서로마제국의 칼大帝(742-814)가 각지에 신학원 (scholastici)을 설립하여 그곳에서 학문연구를 하게 한데서 유래한다. 142) 이정우, 전게 세계철학사, 676면. - 180 -

西洋에서의 自然法論의 生成, 發展 및 影響에 관한 硏究 43 다.143) 중세 스콜라 철학 전시대를 구분해 보면, 8세기에서 11세기에 이르는 기간 이 초기 스콜라시대(Frühscholastik)이었으며, 12세기에서 13세기의 기간이 스콜 라 철학이 가장 발달한 스콜라철학의 盛期(Hochscholastik)이었으며, 14세기에서 15세기의 기간은 스콜라철학이 쇠퇴한 후기 스콜라시대(Spätscholastik)였다.144) 스콜라철학에서의 방법론은 하나의 개념 또는 제도를 정립하면 그것을 敎理化 내지 믿음으로 만드는 방법이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개념 또는 제도를 정립하면 그것을 절대화하여 확신을 가지게 하는 방법론으로서 중세 기독교 사상의 교리화에 이바지한 방법론이었다. 그러므로 스콜라철학에서는 반대나 비판을 허용하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를 용납하지 아니하려는 방법론에 입각해 있었다. 따라서 스콜라 철학은 기 독교 사상의 공고화에는 이바지 하였으나, 진리의 발견에는 소홀히 함으로써 학문의 발전을 봉쇄하는 결과를 낳았다. 중세의 기독교 사상의 공고화와 교회법의 발전에 스 콜라 철학이 기여하였기 때문에 중세는 큰 변화없이 신학과 교회법의 시대를 이루어 장기간 계속되어온 것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von Aquin: 1225-1274)는 스콜라철학의 盛期의 신학 자로서 아리스텔레스의 철학은 받아드려 기독교 신학과 철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기독 교 사상을 아리스토철학에 의하여 발전시켰다. 그러므로 중세는 아우구스티누스가 플 라톤의 이데아 사상으로 기독교 사상을 정립한 데 반하여,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기초하여 기독교 사상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었다. 이와같이 중세 철학은 그리 스 철학을 기초로 하여 기독교 사상으로 변화시켰으며, 반대로 기독교 사상은 그리스 철학, 다시 말하면 서양의 전통사상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중세 스콜라철학자들이 정립하여 서양의 문화가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가 자연히 결합되어 발전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평가하기 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을 정당한 (richtig) 것으로 받아들였다.145) 그리고 그는 믿음(Glauben)과 앎(Wisse)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양자는 모두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며, 신앙적 진리 (Glaubenswahrheit)가 이성적인 진리(vernünftige Wahrheit)보다 더욱더 완전 하다고 하였다.146)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태리의 나폴리 출신으로서, 모든 운동은 잠재태로부터 현실태 143) 상게서, 678면. 144) Vogt, a. a. O., S. 103. 145) A. a. O., S. 116. 146) A. a. O., S. 116. - 181 -

44 金相容 로의 운동으로 이해하고, 우주에는 다른 것들을 움직이지만 그 자신은 움직이지 않는 순수 현실태, 즉 궁극의 原動者가 존재하여야 하며, 그 궁극의 원동자가 곧 神이라고 하였다.147) 그러므로 신은 모든 운동의 궁극적인 현실태이자 모든 운동의 원인이며, 모든 우발적 운동의 필연적 근거라고 하였다. 이와같이 아퀴나스는 신은 세계의 궁극 적인 근거이고 가치이며 최상의 목표이고 善이라하고 하였다. 따라서 세계는 궁극적으 로 신의 뜻, 신의 섭리에 의해 움직인다고 하였다.148) 그런데 그러한 모든 운동의 원 인자인 신은 현실세계의 저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모든 현상 속에 존재한 다고 이해하였다. 그것은 바로 신은 모든 사물속에서 그 본질로서 존재한다는 것이었 다. 즉, 사물은 素材(Materie)이고, 신은 형상(Form)이라는 것이었다.149) 다시 말 하면 모든 자연, 즉 신의 피조물은 그 자체 목적을 갖고 있다고 이해하였다.150)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지향적 존재(Entelechie)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드린 것이었 다. 특히 그에게는 신의 피조물인 인간은 그 자체 목적을 갖고 자기 완성을 지향하는 목적지향적 존재로 이해되었다.151) 신은 인간을 그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하였기 때문에, 인간은 신앙을 통해서 신에 관 하여 인식할 수 있다고 하였다.152) 그리고 인간의 최종 목표는 영원한 행복이며, 그 인간의 영원한 행복은 인간 자신에 의해서는 이룰 수가 없으며, 신의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하였다.153) 그리고 그는 인간의 덕목은 믿음(Glaube), 사랑(Liebe) 그 리고 소망(Hoffnung)이라고 하였다.154) 이러한 인간의 덕목의 실현을 위하여 국가 는 그 조건인 평화와 복지를 제공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인간은 정치적 동 물, 즉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조직화된 공동체내서만 신이 원하는대로 살아갈 수 있 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와같이 국가는 그 구성원에게 평화와 복지를 제공하는 것 이 과제이며,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는 신의 은총에 의해서 얻을 수 있는 영원한 행복 이기 때문에 국가는 신의 은총을 베푸는 교회를 따라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敎皇 (Papst)은 皇帝(Kaiser)의 위에 있다고 하였다.155) 147) 이정우, 전게 세계철학사, 705면. 148) 상게서, 706면. 149) Vogt, a. a. O., S. 117. 150) Strömholm, a. a. O., S. 107. 151) A. a. O., S. 107. 152) Vogt, a. a. O., S. 117. 153) A. a. O., S. 118. 154) A. a. O., S. 118. 155) A. a. O., S. 119. - 182 -

西洋에서의 自然法論의 生成, 發展 및 影響에 관한 硏究 45 아퀴나스는 도미니크 수도회156)의 소속이었다. 1309년에 이르서는 아퀴나스의 이 러한 주장들이 도미니크 수도회의 공식적인 이론으로 선언되었으며, 1879년에는 가 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철학으로 선언되었다.157)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신의 세계는 절 대선의 세계이며, 현실세계의 인간은 신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신의 은 총에 의해서 그 절대선의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아퀴나스는 신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영원한 존재이고, 인간은 그의 세계를 인식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이와같이 신의 세계가 보편적인 존재이며, 현실세계의 개별적 인간은 신의 은 총에 의해서만 행복을 누릴 수 있으며, 신의 세계에 대하여는 인간의 인식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는 인식론을 主知主義(Intellektualismus)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아퀴나스의 주지주의에 대해 이 세상에는 보편적인 것은 존재하지 아니하며 개별적인 것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이 현실세계의 선과 악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선과 악을 결정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한 반대의 견해가 주장되었다. 먼저 이 세상에는 보편적인 것은 존재하지 아니하며 개별적인 것만이 존 재한다는 견해를 주장한 사람들을 唯名論者(Nominalist)라 하고, 보편적이고 객관적 인 도덕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선과 악을 결정하였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견해 를 主意主義(Voluntarismus)라 한다. 이러한 주의주의는 프란체스코 수도회158)를 중심으로 발전되었으며, 스코투스, 오캄 등이 대표적인 주의주의자들이다. 스코쿠스는 신은 오직 의지일 뿐이며, 그러한 의지의 결과가 세계질서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타자로서의 원인을 가지지 아니하는 제1능동인이 존재하며, 그 존재가 곧 신이라고 하였다.159) 오캄은 학문의 영역과 신앙의 영역을 구별하였다.160) 그리고 그는 실재 하는 것은 오로지 개체들 뿐이며, 그 외 모든 것들은 다 思惟의 산물일 뿐이라고 하였 다.161) 또한 그의 견해는 오로지 모세의 10계명만을 자연법으로 인정한 루터의 자연 법에 대한 견해로 이어졌다.162) 아퀴나스는 이러한 주의주의의 주장에 대해, 존재가 당위에 우선하듯이 인식이 의 사에 우선함을 주장하였다.163) 156) 도미니크 수도회는 1215년에 聖도미니쿠스(Dominikus: 1170?-1221)에 의해 설립되었으 며 토마스 아퀴나스가 대표적인 인물이며, 주지주의(Intellektualismus)의 입장에 있었다. 157) Vogt, a. a. O., S. 119. 158) 1209년에 聖프란체스코(Francisco d Assisi: 1182-1226)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159) 이정우, 전게 세계철학사, 710면. 160) Strömholm. a. a. O., S. 111. 161) 이정우, 전게 세계철학사, 714면. 162) Kaufmann, Hassemer(hrsg), a. a. O., S. 54. - 183 -

46 金相容 나. 아퀴나스에게서의 자연법론 아퀴나스는 근본적으로 법과 도덕을 동일시하였으며,164) 또한 법칙(Gesetz)와 법 (Recht)도 동일한 것으로 다루었다.165) 그리고 법은 이성에 의한 인식이며, 주의주 의자들에 있어서와 같이 법을 의지 내지 의사의 표현으로 이해하지 아니하였다.166) 더 나아가 그는 법의 목표는 인간의 행복과 복지에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법은 이러 한 인간의 공동선을 지향하였을 때에 실질적인 법(real law)인 법의 성격을 갖게 된 다고 하였다.167) 아퀴나스는 법을 신법(lex divina), 자연법(lex naturalis), 인정법(lex humana) 으로 분류하였다. 신법은 절대적, 객관적, 추상적인 법이며, 완전 그 자체인 법이며 永久 한 법이라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신법은 모든 도덕원칙의 초월적 기초이었다. 자연법은 선은 행하고 악은 피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법으로서 인간이 지켜야할 법이며, 자연법은 인간의 신법에의 참여에 의하여 인간이 인식한 신법이며, 인간의 행동은 언제나 신의 행위에 향하고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자연법을 인간의 의무와 권리에 관한 기본적 인 記述(account)이자 정당화(justification)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인정법은 자연법 에 기초하는 법이지만 변경될 수 있으며, 환경과 시간에 따라서 다양할 수 있다고 하였 다.168) 그러나 인정법은 명령과 제재에 의하여 인간이 선한 행동을 함에 익숙해 질 수 있도록 그 내용이 규정되어야 한다고 하였다.169) 그리하여 인정법은 자연법을 그대로 실정화하기도 하고, 자연법을 구체화하기도 하며, 실정법의 흠결을 자연법으로 보충하 기도 한다고 하였다. 이는 모든 인간을 보다 덕스럽게 하는데 법의 목적이 있다는 것이었 다. 그리고 자연법에 반하는 실정법은 법이 아니며, 不正義한 실정법도 법이 아니라고 하였다.170) 163) Georg Stadtmüller, Das Naturrecht im Lichte der geschichtlichen Erfahrungen (Recklinghausen, Verlag Bitter & Co., 1948), S. 16. 164) Emil Erlich Hölscher, Vom Römischen zum Christlichen Naturrecht,(Augsburg, Literar.Institut Haas und Grabherr, 1931), S. 71. 165) A. a. O., S. 72. 166) Elders SVD Leo, St. Thomas's Doctrine of the Natural Law, in: Das Naturrecht und Europa (hrsg. von Tadeusz Guz, Frankfurt/M, Peter Lang, 2007), S. 68. 167) A. a. O., S. 69. 168) Wolfgang Waldstein, Naturrecht in der europäischen Rechtsentwicklung, in: Das Naturrecht und Europa (hrsg. von Tadeusz Guz, Frankfurt/M, Peter Lang, 2007), S. 71. 169) A. a. O., S. 73. 170) Kaufmann, Hassemer(hrsg), a. a. O., S. 50. - 1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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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金相容 특징은, 첫째로 국가의 법질서는 부인할 수 없고 포기할 수 없는 법과 도덕간의 결합 관계위에서 정립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기독교적 자연법에서는 법은 가치구속적인 규범으로 파악하였다. 둘째로 기독교적 자연법론은 국가가 법률을 제정함에 있어서 성 서에서 제시하고 있는 기본가치를 출발점으로 할 것을 요구하였다. 성서의 가르침 중 에서도 국가가 존중해야할 기본가치는 모든 인간의 평등한 존엄성이었다. 그리하여 기독교적 자연법론의 역사적 과제는 국가의 권력자로 하여금 국가의 법질 서가 도덕적으로 정당할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그리고 기독교적 자연법론은 극히 예 외적인 경우에 비인간적인 독재자에 대한 저항을 법적으로 정당화하여 혁명권을 인정 하였다.178) 기독교적 자연법론에서는 혁명권의 근거를 성서의 사도행전 제5장 29절 의 사람은 사람보다는 신을 따라야 한다 (Man muß Gott mehr gehorchen als den Menschen)에서 찾았다. 한편으로 오늘날은 중세와 그 후의 기독교 신학적 자연법론에 대한 반대의 견해도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첫째로는 기독교 자연법론은 존재(Sein)로부터 당위(Sollen) 를 도출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는 학문적으로 입증할 수 없다고 반박한다.179) 둘째로 기독교적 자연법론은 오로지 믿음을 가진 사람만을 확신 시킬 뿐이며, 신앙을 전제로 할 뿐이라고 반박한다. 셋째로 자연법의 내용도 법원에 의하여 이를 적용하면 법적구속력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는 자연법으로서 법적구속력 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법관실증주의(Richterpositivismus)의 다름이 아니다. 그러므로 굳이 이를 자연법이라고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넷째로 기독교적 자연법론 은 자연법론에 입각하여 현행법을 비판한다. 그 비판은 법정책적 요구에 불과하며, 이 때의 자연법의 援用은 정의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고 한다.180) 이러한 기독교적 자연법론에 대한 비판에 의하여 독일에서는 1965년 즈음이래로 기독교적 신학적 자연법론은 완전히 사라지고 그 효력을 상실한 상태에 있다고 한 다.181) 이와같은 기독교적 신학적 자연법론에 대한 비판의 견해는 인간의 이성과 의 지를 너무 강조하는 법사상의 표현이라 생각한다. 인간은 인간을 스스로 창조하지 못 하였다.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은 불완전하다. 기독교적 신학적 자연법론은 자연법을 인간이 인식한 신법으로 이해하고 그 자연법은 완전한 법으로서 178) Bernd Rüthers, Rechtstheorie(Beck, 1999), Rn 442. 179) A. a. O., Rn 443. 180) A. a. O., Rn 443. 181) A. a. O., Rn 432. - 186 -

西洋에서의 自然法論의 生成, 發展 및 影響에 관한 硏究 49 인간의 양심을 통하여 인간행동에 대하여 구속력을 갖는다. 인간이 만든 실정법은 완 전치 못하다. 실정법은 자연법에 의하여 보충되고, 보완되고, 수정되어야 법으로서의 효력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법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실 정법 중에는 이러한 법의 궁극의 목적에 배치되는 법이 적지 아니하다. 자연법은 신의 뜻이기도 한 인간의 궁극의 목표인 인간의 행복을 위한 신의 법이다. 그리고 인간이 행복하려면 탐욕이 아니라 신의 세계로 돌아가 신의 형상을 회복하려는 겸손이 법에서 도 역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법이 바로 신학적 자연법이라 생각한다. 3. 근세의 자연법론 (1) 신중심의 시대에서 인간중심의 시대로의 발전 신중심의 중세는 모든 것의 중심역할을 신이 담당하고 인간의 학문은 신학이 주를 이루고 법도 기독교적 자연법이 구속력을 가진 시대였다. 그리고 세속의 권력 보다는 교회권력이 강한 시대로서 교황이 황제보다 우위에 있는 시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에 의한 역사발전의 도모는 그 역할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중세의 신중심의 시대도 인간의 이성과 의지의 시대로 전환될 수 있는 계기 가 마련되었다. 그 始發은 1492년 컬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함으로써 인간의 의지의 중요성이 인식되는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고, 결정적으로는 신의 의사에 도전하는 1517년의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이었다. 종교개혁은 신에게 인간이 면죄부를 파는 행 위가 신의 의사인지를 물음으로써 시작되어 교황의 절대권력의 중세에 인간이 도전을 한 것이었으며, 그 도전은 인간의 의사에 의하여 신의 의사에 터잡은 교회의 행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계기로 인간의 이성과 의지가 중요시되는 시 대로 전환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근세는 인간의 이성의 강조로 인간이 지각할 수 있 는 것만을 진리로 받아드리는 시대가 되었다.182) 사상적으로 중세에는 신이 만든 질서가 주를 이룬데 반하여, 근세에는 인간의 이성 에 의하여 정립된 질서가 신에 의한 질서를 대신하게 되었다. 자연법도 인간이 인식한 신법이 자연법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에 의하여 발견한 법을 자연법으로 이해하게 되었 다. 그리고 근세에는 중앙집권적인 절대국가(즉, 절대왕정)에 의한 억압적 통치가 행 하여짐으로써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국가성립의 이론이 주장되었다. 그리하여 근세의 182) Vogt, a. a. O., S. 175. - 187 -

50 金相容 자연법론에서는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고 평화로운 목가적인 자연상태에서 살았으 나, 강자가 나타나 인간을 지배하는 현상에 대해 사회계약론을 정립하여 인간이 보다 자유롭고 평화롭에 살 수 있기 위하여 지배자에게 국가통치의 권한을 移讓함으로서 국 가가 성립하고, 국가(즉,지배자)는 인간을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할 의무를 부담하며, 그렇지 아니할 때에는 폭군을 제거할 수 있다는 저항권 내지 혁명권을 인정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은 천부인권으로 생명권, 자유권, 소유권을 가지며, 그 러한 천부인권은 국가는 물론 신도 이를 존중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근세의 자연법은 한편으로는 중세의 신중심의 시대와 사회를 극복 해체하고 새로운 인간중심 의 시대와 사회를 열기 위하여 매우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내용을 담게 되었다. 그리고 중세에는 주장되지 아니하던 새로운 내용의 자연법이 주장되었다. 천부인권 론이 주장되고 절대군주에게 집중되어 있던 국가권력을 권력분립론에 의하여 국가기 관별로 분리하여 귀속시킴으로써 천부인권을 보장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고자 하였다. 이와같은 근대의 인간중심의 사회로의 전환과 혁명권을 인정하는 자연법론으로의 시대의 변화는 프랑스에서와 같이 절대왕정을 시민혁명을 통하여 전복하고 근세 시민 국가를 건설하거나, 프러시아제국에서와 같이 국왕이 인민을 보살피는 방향으로의 계 몽주의적 왕정으로 전환을 하거나, 미국에서와 같이 식민지인민들이 종주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전개하여 독립국가로 전환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와 시민국가의 탄생은 그 사상적 바탕이 되었던 근세 자연법론에 근거한 천부인권을 문서로 남기게 되었다. 근세자연법에 입각한 대표적인 문서가 영국 의 권리장전(1689), 미국의 독립선언(1776), 프랑스의 인권선언(1789) 등이었다. 또한 영국에서는 자연법론의 영향을 받아 형평법원인 帝室法院(Court of Chancery: 14게기 중엽-1875)이 설립되었으며,183) 그 法源으로 衡平法(law of equity)이 형성되어, 그 형평법은 시민법의 엄격성을 형평(equity)의 이념에 의하여 순화하였다.184) 183) 영국에서 首相(Chancellor)의 형평법에 의한 판결은 초기에는 수상이 국왕의 이름으로 하였 으나, 1349년 에드워드 3세의 명령으로 수상에 의한 재판이 공식적으로 승인되었다. 그리 고 1474년부터 수상은 국왕의 이름으로 판결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판결하였다. 그리고 형평법원은 1875년에 법원조직법(Judicature Act)의 시행에 의하여 나누어져 있던 법원을 통합함으로써 보통법원과 함께 폐지되었다(Vgl., P. V. Baker, P. St. J. Langan, Snell's Equity, 29th Ed.(London, Sweet & Maxwell,1990), pp. 8, 12). 184) Stadtmüller, a. a. O., S. 24. - 188 -

西洋에서의 自然法論의 生成, 發展 및 影響에 관한 硏究 51 한편 私法分野에 있어서 중세에는 로마법이 교회법의 기초가 되고 또 교회법의 원 리가 로마법에 영향을 주어, 로마법은 여전히 사법의 근본법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로마법은 교회법학자들에 의하여 연구 발전되고 기독교 사상에 의하여 순화되었다. 근 세에는 이렇게 발전된 로마법이 대륙에 계수되어 대륙의 보통법이 되었다. 보통법이 된 계수된 로마법은 근대 자연법론에 의하여 학문적으로 더욱더 연구 발전되어 쓰여진 이성(ratio scripta)으로 받아들여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의 시민국가 내지 계몽 적 왕정국가에서는 쓰여진 이성을 시민법전으로 편찬을 하였다. 그것은 인간의 권리가 천부인권으로 인정됨으로써 그것을 성문화하여 시민들이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법적장치를 마련하여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의 결과물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으로 제정된 근대민법전은, 프로이센一般州法(1794), 프랑스민법전(1804), 오 스트리아민법전(1811) 등이었다. 이와같이 근세의 자연법론의 결과는, 공법적으로는 인권선언 내지 독립선언으로 문 서화되고, 사법적으로는 근대민법전의 제정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자연법론에 근거한 근대민법전의 제정으로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시작된 자연법 사상이 중세를 거쳐 근세 에 구체적인 제정법으로 실정법화되었다. 그리하여 고대에서부터 생성된 자연법론은 역사적 사명을 다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 다음 부터는 실정법화된 자연법의 해석과 적용에 학문적 중심을 두게 되는 법실증주의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185) 오늘날은 자연법론의 주장은 약화되었지만 오늘날까지 보다 좋은 법의 시대로 법의 역사를 발전시킨 법사상은 자연법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자연법론의 발전에 의하여 오늘날 각국은 국민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근대법전을 갖게 된 것이었다. 결국 자 연법론에 의하여 인간은 보다 자유롭고 평등하고 행복한 사회에 살 수 있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2) 근대자연법론 전개과정에서 나타난 諸思想들 근대자연법론의 발전은 인간이성의 자유로운 발현을 인식하고 인정함으로써 시작되 었다. 인간이 신의 지배하에 있던 중세에는 인간의 이성의 자유로운 발현을 인정할 수 없었다, 신중심에서 인간중심으로 시대의 변화가 일어남과 함께 근세의 사상세계는 고 대의 재생인 復古主義186)(Humanismus)가 나타나 근세 초기의 사상가들은 고대의 185) 물론 법실증주의 사상은 고대의 소피스트들로부터 시작이 되었다. 186) 復古主義를 人本主義라고도 한다. 복고주의 내지 인본주의는 중세에서와 같이 저세상 (Jenseitigs)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이세상(Diesseits)에 더 관심을 두는 사상으로서 - 189 -

52 金相容 그리스 사상의 연구로 회귀하였다. 그것은 고대에서는 인간의 자유가 인정된 시대였기 때문에 근세 초기의 학문의 관심이 고대로 되돌아 간 것이었다. 그리하여 로마법의 연 구도 복고주의로 돌아가 로마법의 原典의 연구로 연구중심이 바뀌게 되었다.187) 로마 법의 원전의 연구는 주석학파, 주해학파에 의하여 연구 발전된 로마법이 원전과 부합 하는 지를 다시 점검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장래의 로마법의 발전방향을 재정 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그 후에 로마법이 보다 이성적이고, 보편적인 법으로 발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근대의 자연법론은 이성법(Vernunftrecht)으로 발전하게 되었다.188) 인 간은 이성적 존재이며, 이성의 질서는 神도 이를 인정하여야 한다는 확신이 확산되고, 이성의 질서는 중세의 신의 질서를 대체하는 질서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인간의 이성 도 고대의 賢者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인정되었던 상태를 벗어나고, 또한 중세의 신의 이성에 의하여 인간의 이성이 지배를 받던 시대를 벗어나 모든 사람을 다 이성적 존재 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인정할 수 있는 사상적 기초가 되 었다. 그리고 법의 효력의 근거도 이성에 의한 결정이라는 것으로 옮겨 갔다. 인간은 이와같이 모두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인민의 사회계약에 의하여 국가가 성립하였다는 사회계약설이 주장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사회계약설에 의하여 근대 시 민국가가 탄생할 수 있었다. 근대 시민국가는 시민이 국가의 주인인 사회로서 그러한 시민국가는 국민 모두가 이성적 존재라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할 수 있는 것이었 다. 그리고 사회계약에 의하여 인민은 국가의 통치권력을 지배자에게 이양하면서 그 지배자가 비이성적인 不正義한 권력행사를 하였을 때에는 그 지배자를 제거할 수 있다 는 저항권 내지 혁명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근대 자연법론의 전개에 있어서 국가의 과제는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시 민)으로 하여금 자유와 평등 그리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데 있다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국왕이 국가가 아니라, 시민이 국가의 주인인 主權在民思想이 인정되는 방향으로 시대가 변천하였다. 그러나 주권재민사상에 입각한 근대 시민국가는 프랑스 에서와 같이 혁명에 의하여 舊體制를 전복하고 시민국가를 실현한 나라도 있으며, 독 근세의 인본주의하에서는 신에 대한 歸依가 그 효력을 상실하게 되었다(Vgl., Vogt, a. a. O., S. 136). 187) 이와같이 고대에 이미 근세철학의 싹이 터 있었다(Vgl., J.M. Kelly, A Sort History of Western Legal Theory(Oxford, Clarendon Press, 2003), p. 13). 188) 이성법은 1600년에서 1800년 사이에 크게 융성하였다. 이 기간을 이성법의 시대라 한다 (Vgl., Eisenhardt, a. a. O., Rn 262). - 1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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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金相容 이와같이 근세의 자연법론은 인간의 이성에 바탕을 두고서 신의 지배로부터 인간이 해방되고, 이성의 발현에 의한 법을 자연법으로 파악하고, 그 이성법에서는 인간의 생 명권. 자유권, 평등권, 사소유권 등을 천부적인 권리로 인정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천 부적인 권리는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권리이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의 권리를 보장하 기 위하여 인간은 사회계약에 의하여 국가를 만들고, 과학의 세계에서와 같이 법도 질 서정연한 체계를 구축하고, 천부적인 권리를 확실하게 보장하기 위하여 근대 시민법전 제정의 결과를 낳았다. 근대시민법전의 제정으로 자연법론은 그 所任을 다하였다. 이 러한 근대 자연법론은 근대에 와서 형성되었지만 그 역사적 뿌리는 고대에 두고 중세 를 지나 더욱 발전된 법사상으로서 자연법론의 역사적 계속의 연속과정에서 근대의 시 대정신에 부합되게 형성된 법사상이었다. 더 나아가 근대 자연법론의 중심과제는 인간의 이성의 존중과 인간의 천부적인 권 리의 보장과 보호에 있었다. 이러한 자연법론에 의한 인간의 천부적인 권리의 보호를 위한 제도로서 권력분립의 이론이 주장되었다. 이는 국가의 권력이 국왕에게 집중되었 던 절대왕정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국가조직원리였다. (3) 근세 자연법론자들과 그들의 주장. 가. 그로티우스와 그의 자연법론 그로티우스(Hugo Grotius: 1583-1645)은 근세 자연법은 처음으로 개척한 자연 법론자이다. 그는 모든 법을 인간의 본성(Natur des Menschen)에서 도출하였으며, 자연법을 이성의 명령(dictatum rectae rationis)로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 연법을 신의 세계에서 구하지 아니하고 인간의 이성에서 구하였다. 그리하여 그에게 있어서의 자연법은 인간의 이성법이었다. 인간의 이성법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 라도 유효하다고 하였다.190) 이성법은 모든 인간의 법의 기초이자 척도이며, 불변적 이고 영원하다고 하였다.191) 또한 그는 인간의 이성은 자연법의 인식근거라고 하였 다. 그리하여 그는 중세의 기독교의 신학적 자연법론에서 인간이성에 의한 자연법론으 로 자연법을 세속화(Säkularisierung)하였다.192) 그로티우스는 인간은 사회적이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189) Ulrich Eisenhardt, Deutsche Rechtsgeschichte, 2. Aufl.(Beck, 1995), Rn 273.. 190) Rüthers, a. a. O., Rn 447. 191) A. a. O., Rn 447. 192) Strömholm, a. a. O., S. 149. - 192 -

西洋에서의 自然法論의 生成, 發展 및 影響에 관한 硏究 55 그는 인간은 평화롭고 질서있는 공동생활을 추구하는 사회적 존재로 이해하였다.193) 그리하여 그는 자연법이란 인간의 사회적인 삶에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인식되는 이성 에 근거한 규범의 총체로 이해하였다. 그러한 규범의 총체인 자연법중에서도 최고의 자연법 원칙은 체결된 계약은 지켜야 한다(pacta sunt servanda)는 법원칙이라고 하였다.194) 더 나아가 그는 사람은 타인의 재화를 계약없이 함부로 취해서는 아니되 며, 그가 타인에 가한 손해를 塡補하여야 하며, 다른 사람에 대하여 폭력을 행사해서 는 아니되며, 그가 범한 행위에 대한 懲責으로 형벌을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195) 그리고 그로티우스는 그의 대표적인 저작으로 전쟁과 평화의 법 (1623)을 저술하 였다. 그 저술에서 그는 인간이성에 기한 보편적인 자연법을 발전시켰을 뿐만아니라 그러한 보편적인 자연법에 기초하여 국제법도 발전시켰다.196) 특히 그는 전쟁법에 큰 영향을 주었다.197) 그리하여 그는 전쟁이 위법적인 공격에 대하여 방어가 그 목적일 때에 그 전쟁은 정당하다고 주장하였다.198) 나. 록크와 그의 자연법론 록크(John Locke: 1632-1704)는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 다.199) 그리고 록크는 모든 인식(Erkenntnisse)은 경험(Erfahrung)에서 나오며, 인간은 천부적으로 인식의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보았다.200) 그러한 천부적인 인식능력은 바로 인간의 이성이었다. 그리고 록크에게 있어서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의 이성에 내재하는 양심 (Gewissen)으로 이해하였다. 신은 계시에 의해서도 인식될 수 있지만, 그 계시는 이 성에 따라서 판단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록크는 기독교의 이성에의 부합 (Vernunftgemäßigkeit)을 주장하여 모든 종교는 이성과 부합할 때가 최선이라고 하 였다.201) 그리고 그는 기독교에서의 가르침은 자연법이며 또한 이성법이라고 하였 다.202) 그리고 이러한 자연법은 문자화되지 않고 공포되지도 않지만 인간의 이성에 193) Kaufamnn, Hassemer(hrsg.), a. a. O., S. 58. 194) A. a. O., S. 58. 195) A. a. O., S. 59. 196) Strömholm, a. a. O., S. 150. 197) A. a. O., S. 153. 198) Zippelius,a.a. O., S. 132. 199) Poller, a. a. O., S. 218. 200) A. a. O., S. 219. 201) A. a. O., S. 219. - 193 -

56 金相容 의해서 알 수 있으며, 구속력을 갖는다고 하였다.203) 더 나아가 록크는 그의 사고와 정치적 경험에 근거하여 모든 종교에 있어서의 관용 (Toleranz)을 주장하였으며, 관용은 록크의 철학사상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의 관용의 주장은 교회와 정치의 분리, 신앙의 자유선택에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록크의 정치사상에 있어서 국가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에 기초하고 있 다. 그는 홉스와는 달리 자연상태에 관하여 만인이 만인에 대하여 투쟁하는 상태로 이 해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상태로 이해하였다. 자연상태에서는 인간은 자연법의 한계내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허가를 받거나 의사에 의존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소유물을 처분할 수 있고 자신의 인격을 실현할 수 있다고 하였다.204) 그리하여 록크는 자연상태를 인간이 평화롭게 함께 살아가며 이성 이 지시하는 행동이 가능한 지배가 없는 상태(herrschenhaftloser Zustand)로 이 해하였다.205) 그리고 자연상태에서는 인간은 자기보존의 의무와 타인에 대한 불가침 의 의무를 진다고 하였다.206) 또한 록크는 인간의 노동에 의하여 취득한 재화에 대한 사소유권을 인정하였다. 사 소유권을 인정함으로써 인간은 경제적인 독립을 유지할 수 있으며, 경제적 독립은 인 간의 이성의 발현을 가능케 한다고 하였다.207)208) 그는 역사상 처음으로 사소유권을 인권으로 파악하였다.209) 그러나 그는 사소유권에도 한계가 있으며, 생존에 필요한 한도내에서만 사소유권이 인정된다고 하였다. 록크는 개인은 그의 자유와 소유권을 혼자서는 효과적으로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인 간은 계약을 체결하여 자기의 권리의 일부분을 공동체에 양도하였다고 이해하였다. 그 공동체는 국가이며, 국가는 구성원인 인간의 생명과 자유와 소유권을 보장하고 보호하 여야 한다고 하였다.210) 그리고 그는 이러한 자유, 평등, 생명, 사소유권을 천부인권 202) A. a. O., S. 219. 203) Jennifer Koch, Naturzustand- und Naturrechtsgedanken im politischen Denkens John Lockes (München, GRIN Verlag, 2009), S. 12. 204) A. a. O., S. 5. 205) A. a. O., S. 6. 206) A. a. O., S. 13. 207) Poller, a. a. O., S. 220. 208) 록크가 사소유권을 주장한데 반하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는 사소유 권 때문에 불평등이 발생하였다고 주장하고 사소유권을 없앨 것을 주장하였다(Vgl., Strömholm, a. a. O., S. 195) 209) Poller, a. a. O., S. 220. 210) A. a. O., S. 220. - 1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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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金相容 인 장애를 제거할 것을 가르쳐야 한다고 하였다. 즉, 자연법은 다른 사람을 자극하지 않게 하고 평화를 깨뜨리지 않도록 정의롭게 살도록 가르쳐야 하며, 정치학는 다른 사 람에게 도움을 주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외부적인 폭력행사로 부터의 공포와 策略 (List)을 제거하고 예의바른 생활방식을 가르쳐야 하며, 경제학은 인간의 마음의 평 안의 부족을 없애기 위하여 부족한 것을 제거하고 필요한 것을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 고 하였다.230) 또한 그는 정치와 법에서의 가치척도는 황금율에 있다고 하였다. 즉 정치에 있어서 는 적극적인 황금율로서, 다른 사람이 너에게 하여 주기를 바라는 것 같이 너도 그 사 람을 위해서 그와 같이 행하라 라고 하고, 법에 있어서는 소극적 황금율로서 다른 사 람이 너에게 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이 너도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지 말라 라고 하였다.231) 이러한 황금율이 토마지우스의 학문세계에서는 모든 행위의 기준으로 제 시되었다. 그리고 토마지우스는 인간의 의사의 인식에 대한 우위를 주장하고, 형법과 형사절 차법의 인간화(Humanisierung)를 위하여 그의 당시까지도 유럽에 행하여졌던 魔女 信仰, 魔女裁判, 火刑에 대하여 투쟁하였다.232) 그러나 토마지우스는 그의 계몽주의와 자연법사상으로 인하여 로마법과 교회법을 비판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는 로마법과 교회법이 본질적으로는 자연법 적이라고 평가하면서도, 독일의 고유법을 자연법으로 받아들여 독일 고유법으로써 私 法을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다.233) (다) 볼프 볼프(Christian Wolff: 1679-1754)는 자연법(Naturrecht)은 인간의 본성과 사물의 본성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자연적인 법(natürliches Recht)이라고 하였다. 자연법은 인간의 행동을 지도하며, 인간의 완성(Vervollkommung)에 봉사하는데 있 다고 하였다.234) 그는 또한 윤리를 자연법으로 이해하였다.235) 그리고 볼프에게 있 어서는 자유와 평등은 자연상태의 표현이었다.236) 230) A. a. O., S. 170. 231) Kaufamnn, Hassemer(hrsg.), a. a. O., S. 62. 232) Strömholm. a, a. O., S. 182. 233) Eisenhardt, a. a. O., Rn 277. 234) Strömholm, a. a. O., S. 183. 235) Sauter, a. a. O., S. 178. - 19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