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바른 기도, 건강한 목회 자주 반복하면 더 좋은, 주기도문의 이해와 적용 b 유 승 원 디트로이트한인연합장로교회 담임목사. 듀크대학교(Ph.D.,신약학). 저서로 책 한 권의 사람 : 복 있는 삶을 위한 행복한 성경 읽기, 성경에 이런 일이 등이 있다. 그러므로 의 배경 이렇게 시작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암기해 활용하는 예전( 禮 典 ) 형태의 주기도문은 산상수훈, 마태복음 6:9-13 에서 비롯됐다. 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당시의 두 가지 측 면에서의 잘못된 기도를 교정( 敎 正 )하면서 제자들에게 가 르쳐주신 기도다. 1. 기도는 관객을 향해 하는 것이 아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5절). 외식하는 자 로 번역된 휘포크리테스 는 연극 배우 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휘포크리테스 (u`pokrith,j) 는 자신을 감추기 위해 얼굴에 탈을 쓰고 연기하 는 사람이다. 배우의 행위는 자신의 행위가 아니다. 그의 참 존재는 탈에 숨겨 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속마음 은 기도할 때 자신을 지켜보는 회당의 관중들에게 향해 있 었다. 기도는 정의( 定 義 )상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기도의 방향 은 철저하게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거룩함을 빙자해 하나 님께 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연기( 演 技 )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정말 기분 나쁘다. 형식은 내게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주위 사람들 의 관심을 끄는 것이 주목적이다. 하나님은 이용당하고 있 다. 불쾌하다. 그러므로 배우의 기도는 안 된다. 신성모독의 기도가 되 지 않으려면 주위 관객을 없애야 된다. 눈길을 의식하게 만 드는 관객들을 제하면 자연스레 나와 하나님만 남는다. 나 와 하나님만 있는 곳, 그래서 내가 어떤 것도 어떤 이도 의 식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만 대면하는 곳이 타메이온 (tamiei/o,n), 곧 골방이다. 이 골방은 오직 하나님만 계신 곳이라는 의미에서 성전 의 지성소와 같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 혼자만 들어간 다. 누구와 같이 들어갈 수 없다. 그리고 그곳은 하나님께 서 가장 강력하고 진하고 분명하게 임하는 거룩한 공간이 다. 골방은 영적인 지성소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6절). 이렇게 가르치신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정말 골방을 지 으셨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그러나 새벽 해 뜨기 전에 한 적한 곳으로 가셨다(막 1:35). 골방을 찾아 가신 것이다. 세 상 사람들이 잠들어 있을 때 산에서 홀로 밤이 새도록 그 특집 35
곳에 계셨다(눅 6:12). 기도의 골방을 지으신 것이었다. 분이 의무를 다하도록 자극하는 것도 아니고 그분께서 주 주위 관객을 제하고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며 집중해서 저하시기 때문에 독촉하는 것 또한 아니다. 신자는 자신 하나님만 바라보는 시간과 공간을 만든다면 골방은 어디 을 각성시켜 하나님을 찾기 위해 기도한다. 하나님의 약 에서나 가능하다. 직장인이라면, 한 시간 일찍 출근한 샐 속을 묵상하면서 믿음을 구사하기 위해 기도한다. 자신 러리맨의 데스크는 거룩한 지성소 골방이 된다. 또한 통성 을 하나님의 가슴속에 쏟아 부음으로써 그 걱정과 근심을 기도의 현장에서 오직 하나님만 의식하며 부르짖는다면 벗기 위해 기도한다. 곧 자신과 또 다른 이들을 위해 오직 사람이 많이 모인 곳이라 할지라도 골방이 된다. 주기도는 하나님으로부터만 모든 좋은 것들을 소망하고 기대한다 관객을 의식하는 배우의 연기를 버리고 하나님만 생각하 는 것을 선언하기 위해서 기도한다 (John Calvin, Commentary 며 바라보는 골방의 기도다. on a Harmony of the Evangelists, Matthew, Mark and Luke, vol 1, Eerdmans, 1956, 314). 주기도는 진정 하나님을 향하는 참 기 2. 기도는 자기 자신을 향하는 것이 아니다 도다. 배우의 기도가 하나님 아닌 관중을 향한 것이라면 중 언부언의 기도 는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한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 하지 말라 (7절). 바 탈로게오 (battaloge,w, 중언부언)는 깊은 의미를 두지 않고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길게 늘어놓는 언어의 답답한 연장(延長) 이다. 이것은 기도가 아니라 주문(呪文)이다. 반복하고 계 속하고 오래 하면 원하는 것이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로 마 술적 요행심이다.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창조주며 주권자라는 것을 진정 믿는다면 주문하듯이 기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중언부언의 기도는 사실 자신에게 하는 기도 다. 자신의 불안함을 떨치기 위해 한 말을 또 하고 다시 하 는 식의 자기 암시나 다름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기 전에 이미 아신다고 하셨 다(8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 도 없으시니이다 (시 139:4). 위로와 안심을 주는 깨우침이 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필요를 이미 아시며 구하지 않아도 필요한 것을 허락하실 수 있다(마 6:32-33). 또한 우 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때 성령께서 친히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시기도 한다(롬 8:26). 그렇다면 굳이 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여기 에 기도의 신비가 있다. 칼뱅의 답변을 들어볼 만하다. 신자들은 기도할 때 하 나님께서 모르고 있는 것을 알려드리려는 것이 아니다. 그 성전 미문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 36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주기도문은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마치 배우가 하는 듯 한 기도와 중언부언으로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고 기도하 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시면서 가르쳐주신 모범 기도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가 향하는 대 상에 있다. 배우의 기도는 관객 중심의 기도다. 중언부언의 기도는 자기중심의 기도다. 둘 다 기도가 사람을 향하고 있 다는 데 문제가 심각하다. 기도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 니다. 주기도의 기본은 지극히 당연한 것을 주지시킨다. 기도 는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하 나님이 모든 것이 되며 하나님과 대화하며 궁극적으로 하 나님을 위해 그분께 아뢰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가르 쳐주신 기도는 분명하게 마음을 하나님께 모아 그분을 가 까이 계신 친밀한 아버지로 불러 그분 앞에 나아가는 것으 로 시작한다. 주기도문의 시작이다. 파테르 헤몬(Pa,ter h`mw/n), 우리 아버지! 그렇게 주기도문은 하나님 중심의 기도다. 그래서 주기 도문은 십계명과 마찬가지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여 섯 가지 간구 중 앞의 세 가지는 하나님과 관계된 것이고 뒤 의 세 가지는 제자들의 필요와 연계된 것이다. 이러한 구성 에는 마태복음 6:33의 가르침이 암시돼 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 에게 더하시리라. 전반부의 하나님에 대한 간구 세 가지는 다름 아닌 주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리고 이어지는 간구 세 가지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 면서 사는 제자들에게 필요한 이 모든 것 에 대한 합당한 요청이다. 1. 하나님을 위해(마 6:9-10)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신다. 구약의 기 도 중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경우는 없다. 물론 하나 님께서 충성된 이스라엘의 아버지라는 개념은 여러 곳에 서 발견된다(사 63:15-16; 렘 31:20; 호 11:1-4). 또한 외경과 랍비 주기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두 가지 측면에서의 잘못된 기도를 교정하면서 가르쳐주신 기도다. 그것은 기도는 관객을 향한 것이 아니며, 중언부언의 주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헌에서는 종종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했다(Sota 9.15, Yoma 8.9, 솔로몬의 지혜서 14;3, 집회서 23:1 등). 그래서 이 표 현이 예수님께만 독특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대의 유대 문헌과 비교해 볼 때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이 표현을 자주 사용해서 그들 기도의 특성이 되 게 한 것은 분명하다(막 14:36; 롬 8:15; 갈 4:6). 창조주와 주권 자 되신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시고 구원하시고 돌보아 주 신다는 의미에서 아버지시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로서 하 나님께 기도한다. 국가의 대통령이나 직장의 오너에게 부 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아들과 딸로 아바 라 부르 며 친밀하게 다가갈 수 있는 존재에게 말하는 것이 기도다. 이어지는 앞부분의 세 가지 간구는 넓게 보면 한 내용이 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그분이 피조 세계 및 인간과 구별 돼 영광을 받으심을 뜻한다. 하나님의 이름은 그분의 존재 자체다. 하나님께서 거룩 하게 구별돼 만물 위에 계시면서 주권자로 고백을 받게 되 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그분이 창조주며 왕으로서 모든 사 람이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께 합당한 경배하기를 구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는 것은 주권 자이신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이 땅에서 실현되기를 간구 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늘에서 이루어진 의미의 지 상 실현이다. 특집 37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셨다. 하나 님의 뜻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그래서 왕 되신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 땅, 인간 가운데 이뤄질 때 하나님께 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분의 이름이 찬양을 받는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기도의 제목이며 일생을 두고 추구해야 할 삶 의 목표다. 이것이 제자들이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항 목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6:33). 2. 하나님을 위하는 우리를 생각하며(6:11-13)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는 제자는, 생존을 위해 기본적 자원이 필요하고(물질적 필요), 영적으로 하나님 앞 에서 합당한 존재가 되기 위해 죄사함을 받아야 하며(영적 필요), 각종 사회 문제와 위협으로부터의 보호가 요청된다 (도덕적 필요). 이런 것들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구할 것을 가 르치신다. 숭고한 목적의 기도를 드린 예수님께서 이어서 하나님 께 간구하는 내용이 빵 이라는 것에 초대 교부들은 많이 고민했고 결국 그들은 빵 을 신체의 보전을 위한 음식이 아 니라 하나님의 말씀 또는 성찬식의 빵 등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했다. 예수님의 본래 의도를 회복한 것은 종교 개혁자들이었다. 루터의 해석이 적절하다. 여기서 빵은 인 간 존재와 삶의 모든 필요를 포함한다. 즉, 음식, 음료, 옷, 신발, 집, 논밭, 가축, 돈, 물건, 독실한 아내와 자식들, 독 실한 하인, 독실한 정치 지도자, 좋은 정부, 좋은 날씨, 평 화, 건강, 훈련, 명예, 좋은 친구, 성실한 이웃 등, 모든 것이 해당된다고 보면 무리가 없다(루터의 소요리문답 Der Kleine Katechismus, 1529). 일용할 로 번역된 헬라어 에피우시온 (evpiou,sion)은 당시 어느 문헌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용어이기 때문에 해석자 들에게 큰 어려움이었다. 꼭 필요한(evpi+ouvsi,a), 오늘을 위 한, 또는 내일을 위한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어느 것을 취하더라도 필요 의 의미는 분명하다. 그래서 한글 성경의 일용 ( 日 用 )이라는 번역은 꽤 적절하다. 이 간구의 기본 이미 지는, 날마다 필요를 공급해주시던 광야 이스라엘의 만 나 다(출 16:4, 18-20, 26-27). 기도는 이어져 하나님의 용서를 구한다(12절). 우리는 용 서의 은혜 없이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 더구나 앞서 간구 한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감당할 자격과 능력을 갖추 기 위해서는 용서받아 정결케 되고 마음의 안정을 얻는 확 신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사 6:1-8; 눅 5:1-11; 딤후 2:19-21). 그러 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실수와 잘못을 용서해 주 시기를 구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용서를 구하도록 가르치신 것은 용서를 베 푸는 하나님 은혜의 보장이기도 하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 백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신실하고 의로우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신다(요일 1:9).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에는 작은 조건이 하나 따라 붙는 다.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된다. 그래서 주기도문 을 가르쳐주신 후 예수님께서는 네 번째 간구에 대한 특별 한 설명을 덧붙이셨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 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 지 아니하시리라 (6:14-15). 본문을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우리가 우리에 게 빚진 자들을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 하여 주소서 다. 물론 여기서 빚 은 잘못과 죄를 가 리키는 비유적 표현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을 때 우리는 그분께 빚을 진 것이다. 하나님 의 용서는 빚을 탕감해주는 것과 같다. 그렇게 탕 감을 받은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내게 잘못한 것을 용서해 그 빚 갚음을 면해주는 은혜의 자세를 가 져야 한다. 죄의 용서를 빚 의 탕감 개념으로 설명한 마태복 음 18:21-35은 주기도문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 다. 이 비유도 마태복음 6:14-15과 같은 말씀으로 마감된다. 38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18:35).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의 용서를 조건으로 한다. 용서하 는 사람이 용서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용서하는 사람이 사죄의 기도를 드릴 수 있다. 주님의 기도는 이렇게 교회를 하나님의 용서로 말미암아 서로 용서함으로써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할 수 있는 공동체 로 정의한다. 과거의 죄를 용서받았으면 앞으로는 죄와 문제 속에 들 어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13절). 인간은 물리적으 로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많이 약하다. 시험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시험에 빠지는 것을 당연시해서는 안 된 다. 예수 자신이 혹독한 시험을 거치셨기 때문에 시험의 어 려움을 잘 아신다. 그는 제자들이 그러한 시험에 빠져들어 죄를 짓지 않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 함은 말할 것도 없다. 악에서 구원해 주시길 간구함도 같은 맥락으로 봐야 할 것이다. 헬라 원문으로는 악 이 될 수도 있고 악한 자 로 볼 수도 있다. 후자가 더 본문의 내용에 어울린다. 시험하는 자는 다름 아닌 사탄 마귀이기 때문이다. 마귀는 우는 사 이스라엘의 주기도문 벽. 100여 국가의 언어로 된 주기도문이 있다. 주기도문은 하나님 중심의 기도다. 여섯 가지 간구 중에서 앞의 세 가지는 하나님과 관계된 것으로 주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고, 뒤의 세 가지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면서 사는 제자들의 필요와 관련된 것이다. 자와 같이 우리를 삼키려고 찾는다(벧전 5:8). 이에 대항하 기 위해서 항상 완전무장을 하고 있어야 한다(엡 6:11). 시험 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해야 된다(마 6:13; 26:41). 주기도, 어떻게 할 것인가? 1.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시다 주기도의 문구를 활용하기 전에, 주께서 우리가 해야 할 기도를 가르쳐주셨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주기도를 주심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라는 뜻이다. 기도해야 되기 때문에 주기도문을 주셨다.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이 땅에 살았던 인간 중에서 기도 하지 않아도 될 한 사람이 있다면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 이실 것이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성자 하나님이 시다.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이 우리 논리 로는 이해되지 않을 만큼 예수 그리스도는 기도하지 않아 도 되는 존재일 것 같다. 그런 예수께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기도하셨다. 식사할 겨를도 없이 바쁜 양반이, 그래서 죽 을 것 같은 폭풍 중에도 배 안에서 피곤해 곯아떨어지던 분 이 해가 뜨기 전에 한적한 곳을 찾아, 제자들이 다 잠든 밤 에 홀로 산에서 밤을 새며 기도하셨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의 삶을 이렇게 특집 39
정리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 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성 육신(成肉身, incarnation)의 하나님이시라도 인간 실존으로 계실 때는 아주 열심히 기도하지 않으셨다면 삶과 사역에 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실 수 없었다는 뜻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셨다. 하물며 깨지기 쉽고 약하며 악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지 않고 살고 일할 수 있겠는가. 주기도는 기도로 살며 기도로 일하시던 예수님의 마음이 담긴 그분의 기도다. 주기도문을 주심은 우리로 하여금 기 도하게 하심이다. 기도해야 된다. 기도해야만 된다. 2.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 우리가 할 일은 지극히 당연하다. 주님의 마음이 담긴 이 기도에 우리의 마음을 담아야 한다. 이 기도의 내용을 진 정한 우리의 소원으로 여기고 기도해야 된다. 즉 주기도가 추구하는 것이 우리 삶의 추구가 돼야 하며 그 추구가 하나 님을 향한 소통이고 동시에 실천이어야 한다. 주기도가 하 나님을 위한 기도라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 나라와 의의 추구여야 하고 우리의 기도는 그분의 나라와 의를 아뢰는 간구여야 한다. 주기도가 진정으로 이뤄지는 곳에는 하나님의 임재 역사가 강력하다.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요일 5:14). 이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기도 응답의 장담이기도 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 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 15:7). 주기도의 기도는 이뤄진다. 주기도에 주님의 마음이 담 겨 있기 때문이다. 주기도는 겟세마네에서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 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3.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는 애 주기도는 내가 무엇을 기도해야 좋을지 모를 때도 참 좋 절한 순종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막 14:36). 주기도는 우리 은 기도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께서는 육신과 마음이 원 가 하는 겟세마네의 기도다. 그래서 주기도는 우리 기도의 하는 바는 십자가 죽음의 잔을 피하는 것이었지만 자신의 결론이다. 흔히 그리스도인 모임의 마무리가 주기도로 이 뜻을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기 위해 아바 아버지 (개역 개정은 뤄지는 것은 의미상 바람직하고 좋은 일이다. 우리가 하나 아빠 아버지 )라 기도하여 인류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다(막 님의 뜻을 구하는 주기도의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14:36). 주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다. 사도 요한은 우 주기도의 시작은, 번역 때문에 순서가 바뀌어 앞에 위치 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때 반드시 이뤄진다는 확신 한 하늘에 계신 이 아니다. 파테르 헤몬, 즉 (우리의)아버지 을 우리에게 심어주었다. 가 주기도를 여는 첫 단어다. 아람어를 사용하신 예수님은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40 아마 아바 로 주기도를 시작하셨을 것이고 그렇게 제자들
에게 가르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롯한 초대 교회 교인들은 아바 로 시작하는 그들의 기도에서 강 렬하고 깊은 영적 신비의 체험에 들어갔다. 부활 이전 예수님과 함께 할 기회가 없었던 사도 바울도 깊은 영적인 기도를 암시할 때마다 아바 의 부르짖음을 언 급한다. 논쟁 상황인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회상한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 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 4:6). 가 본 적 없는 로마 교회에 쓰는 편지에서도 성령을 언급하 면서 같은 영적 현상을 언급한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 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 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라고 부르짖느니라 (롬 8:14-15). 그리고 이를 염두에 두고 언급하는바 우리 내면의 성령 의 중보를 이렇게 표현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 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 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6). 다소 신비의 느낌을 전해주는 이 깊은 영성의 기도에서, 같은 단어 아바 로 시작하며 심오한 영적인 소통을 여는 주 기도문이 느껴지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본문의 주해( 註 解 )를 넘어 필자의 개인적 체험의 고백이 기도 하다.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르게 힘겨울 때 기도의 문을 열고 닫는 최고( 最 高 ), 최선( 最 善 ), 최강( 最 强 )의 기도는 역시 주기도였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를 진정으로 기도할 때,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 내 안에서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와 함께, 나를 위해, 그 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위해 중보하는 것이 느껴진다. 주기도가 일종의 관행적 복수 표현인 우리 를 담고 있기 때문에 공동체 기도로만 이해돼야 한다고 관념적으로 한 정( 限 定 )하는 것은 어리석은 속 좁음이다. 주기도는 가장 공동체적인 기도면서 동시에 가장 인격적인 개인 기도이기 도 하다. 주기도는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 기도의 문을 열고 닫는 최강의 기도다. 주님의 마음이 담긴 이 기도에 우리의 마음을 담아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한다. 4. 자주, 반복해서 주기도는 습관적으로 입에서만 맴도는 중얼거림이 되지 만 않는다면 자주 반복할수록 더 좋기만 한 기도다. 매일 새벽 기도를 마치면서 모든 교인들이 마음을 모아 이 기도를 함께 올려도, 소그룹으로 모여 많은 토론과 기도 를 거친 후 우리의 생각과 삶을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맡기 는 마음으로 진정을 담아 이 기도를 올릴 때도, 두 믿음의 남녀가 결혼식을 올리면서 이제 한 몸, 한 가족으로 하나님 의 뜻 안에서 순종을 서약한 뒤에 감동의 결단을 이 기도 에 담을 때도, 장례 현장에서 먼저 가신 분을 기억하며 남 은 사람들이 눈물 중에도 깊은 곳에서 감사와 축연으로 경 배하고 신비의 섭리에 다시 모든 것을 맡기면서 이 기도를 함께 올릴 때도, 나 홀로 나의 골방의 지성소에서 성령의 탄식과 함께 아바 아버지 를 부르며 이 기도를 할 때도, 언 제 어디서나 주기도가 진정으로 이뤄지는 시공( 時 空 )에서 는 그저 감사하고 좋으며 은혜 중에 하나님 임재의 역사가 강력하다. 주기도를 여러 경우에 많이 반복하는 것을 어색해하지 도 말고 불편해하지도 말라. 물론 주기도를 가르쳐주신 이 유였던 것처럼, 배우의 기도같이 종교적 관객을 향하거나 중언부언하는 주문처럼 뜻 없이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기 만 하다면. 특집 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