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정치연구 제18집 1호, 2015 conducive to the correct implementation of the South Korean policy toward North Korea. keyword: China-North Korea Relations, N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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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hhttp://dx.doi.org/10.15235/jir.2015.6.18.1.241 朴 東 勛 이성환 ** 1) (중국 연변대 계명대) Piao, Dongxun Lee, Sunghwan (Yanbian University Keimyung University) 차 례 Ⅰ.서론 Ⅱ.북중관계의 전개: 정상외교를 중심으로 1. 냉전기: 포괄적 실리외교 2. 전환기의 북중관계: 실용외교, 그리고 동맹관계의 변화 3. 도약기의 북중관계: 남북 균형외교와 정상국가 관계 4. 부흥기 중국의 대북정책: 전략적 제휴관계의 복원과 한계 Ⅲ.북중관계 변화의 동인: 무엇이 북중관계를 움직이는가 1. 변화요인 2. 지속 요인 Ⅳ.시진핑 시대 중국의 대북정책과 지정학 1. 제3차 핵실험 이후의 북중관계 2. 북한의 대응 3. 시진핑 정부의 대북정책 재조정 및 평가 Ⅴ.결론 ABSTRACT This paper mainly takes the China-North Korea foreign peaks as the main line, exploring the main causes which influence the development of relationship between China and North Korea. On this basis, the paper further analyses the main features of China's policy toward North Korea during the Xi Jinping era in order to provide policy implications for the Republic of Korea. The results of study shows that although the main variables, such as concepts, politics and so on which support the "special relationship" between China and North Korea, have been weakened, the geopolitical factors are still important variables affecting the relationship between China and North Korea. China will encourage more energy and strive to create order in the peninsula. To further deepen the strategic partnership between China and South Korea is * 논문의 발전을 위해 논평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이 논문은 2013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 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13S1A3A2054749). ** 교신저자 - 241 -

국제정치연구 제18집 1호, 2015 conducive to the correct implementation of the South Korean policy toward North Korea. keyword: China-North Korea Relations, North Korea, Xi Jinping period, China's policy toward North Korea, Geopolitics 2012년 중국 시진핑 정부와 북한 김정은 체제가 등장한 이래 북중관계는 미묘한 양상을 보 이고 있다. 2012년 12월 북한이 장거리 로켓 발사와 제3차 핵실험을 단행하자 중국 정부는 이 에 대해 이례적으로 단호한 태도를 보였고, 북한도 중국에 완강한 자세를 취했다. 이러한 상황 은 중국에서 대북정책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북한에 대한 비판이 부각되었다. 1) 중국 중앙당교 발행의 학습시보( 學 習 時 報 )의 부편집장 덩위원( 邓 聿 文 )은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 (Finanical Times)에 기고한 글에서 중국은 대북정책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으며, 북한을 포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한반도 통일을 추진하는 것 이라고 주장했다. 2) 이를 기 점으로 중국학계에서는 인터넷 언론을 중심으로 북한 포용론 과 포기론 을 둘러싸고 치 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예를 들면 저장대학( 浙 江 大 學 )의 리둔치유( 李 敦 球, 전 국무원발전연구 중심한반도센터 주임) 교수가 65년의 파트너 북한을 포기할 수 없다( 不 能 抛 棄 朝 鮮 這 65 年 的 伙 伴 ) 고 주장한 3) 데 대해 남경군구( 南 京 軍 區 ) 부사령원 출신의 왕훙광( 王 洪 光 )은 중국 에서 북한포기문제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中 國 不 存 在 放 棄 朝 鮮 的 問 題 ) 는 글에서 북 한이 중국의 이익을 해치는 데 반대하는 것을 북한 포기 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고 논했 다. 4) 이들의 논쟁을 요약하면, 포용론은 북한의 지정학적 가치 및 북중 간의 전통적 우호(우의) 를 중시여겨 양국관계의 유지를 강조하며, 포기론은 현대 전쟁에서 지정학적 가치는 의미가 없 으며 북한체제의 불확실성 등을 근거로 북한이 중국의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학계의 이러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2014년 후반부터 전개되고 있는 중국의 대북정책은 현실 론에 입각하고 있다. 2014년 12월 김정일 사망 3주기에 중앙정치국원 류윈산( 劉 雲 山 )이 북한대 사관 추도회에 참석하는 등 북한과 관계개선 의지를 보이고 있다. 2013년 북한의 제3차 핵실험 이후 북중관계는 한동안 냉각기를 가진 후 현재는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 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앞으로 중국의 대북정책이 어떠한 양상을 보일 것인가에 대한 의문 이 제기된다. 북중관계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중국의 대북정책에 대해 한국학계에서도 다양한 논쟁이 전개되고 있다. 5) 그러나 양자관계 1) 이상숙, 북한 3차 핵실험 이후 중국의 대북정책 변화 평가와 전망, 주요국제문제분석 2013-26,(국 립외교원, 2013.9.11.), p.3. 2) Deng yuwen( 邓 聿 文 ). China should abandon North Korea, Finanical Times,2013.02.27. 3) 李 敦 球, 不 能 放 弃 朝 鲜 这 65 年 的 伙 伴, 环 球 时 报, 2014.11.27. 4) 王 洪 光, 中 国 不 存 在 放 弃 朝 鲜 的 问 题, 环 球 时 报, 2014.12.1. 5) 이들 논쟁은 주로 두 가지 견해로 나뉠 수 있다. 일부는 시진핑시대 대북정책이 이전과는 달리 새로운 변 화를 가져왔다고 주장하는 한편, 일부는 중국의 대북정책 변화는 단지 전술적 차원일 뿐 정책적 변화라고 - 242 -

북중관계 변화의 동인과 시진핑시대의 대북정책 의 변화를 보다 체계적이고 구조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양국관계를 규정하는 중국의 내적 동인을 파악할 필요가 있으나, 이 점이 간과되고 있는 듯하다. 지금까지의 북중관계 연구는 주 로 관계사적 측면과 행태주의적 연구가 주를 이루었다. 대부분 연구들은 행태주의 시각에서 특 정시점(또는 특정 시대)의 상황에 대한 횡단면적 분석을 중시했다. 6) 역사학적 접근에 무게를 두는 쪽에서는 양국관계의 시계열적 흐름을 서술적으로 묘사하는데 그치고, 각 시대별 비교의 시각을 간과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중국의 대북정책의 변화를 가져오는 내적 요인에 대한 분 석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북중관계는 연속과 변화라는 양면성 속에서 지속적으로 재조정되어 왔으나, 그 과정에서 중국의 내적요인이 어떻게 작용했으며, 그 동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 는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연구경향을 고려하여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우선 북중 수교 이후부터 현재까지 북중 간에 이루어진 정상외교를 주요 분석대상으로 하여 북중관계의 변화과정을 고찰한다. 이를 통해 북중관계를 규정하는 주요 변인이 무엇인지를 분석하고, 이들 변인이 시대적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고 작용했는지를 밝힌다. 나아가 이를 토대로 시진핑 시대 중국의 대북정책의 특징을 지정학적인 관점에서 분석하고, 한국의 대중국 외교 및 북한정 책에의 함의를 전망한다. 1. 냉전기: 포괄적 실리외교 중국은 냉전 체제의 형성 초기부터 일변도 ( 一 邊 倒 )의 대외정책을 추진했다. 마오쩌둥( 毛 泽 东 )은 1949년 6월 인민민주독재를 논함 ( 论 人 民 民 主 专 政 )에서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 의 국가의 통일전선을 통해 결연히 반제국주의 투쟁을 전개할 것을 선포했다. 7) 1949년 9월 공 표된 헌법적 성격을 가진 공동강령 에서도 중국은 소련을 중심으로 한 반제국주의 투쟁을 대외정책의 기조로 한다고 밝혔다. 북한은 최초로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은 국가 중 하나다. 중국은 신정권 수립 이전부터 북한 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형성왔으며, 이를 바탕으로 국제공산주의 운동 및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수준 높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제3차 국공내전시기 김일성의 중국공산당 지원, 1950년 초 약 5만 명 규모의 중국 조선인 군부대의 북한으로의 이관, 8)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그 후 대 규모 대북지원 9) 등이 이를 상징하고 있다. 그 후 북한과 중국은 냉전을 배경으로 사회주의 진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견해가 존재한다. 이에 관련해서는 이상숙, 앞의 논문, 신종호, 최근 북중관계 분석 및 2015년 전망, Online Series, 15-12(통일연구원, 2015.1.15.); 정덕구 추수룽, 기로에 선 북중관 계: 중국의 대북한 정책 딜레마 (서울: 중앙북스, 2013) 등 참조. 6) 이상숙, 북한 3차 핵실험 이후 중국의 대북정책 변화 평가와 전망, 주요국제문제분석, 2013-26(국 립외교원, 2013) 등 북중관계에 관한 대부분의 연구들이 이에 포함된다. 7) 毛 泽 东, 论 人 民 民 主 专 政 (1949.6.30). 8) 金 景 一, 解 放 军 朝 鲜 师 返 朝 始 末, 共 产 党 员 (2012, 第 9 期 ),p.57. 9) 중국은 한국전쟁 이후에도 북한에 대해 상당한 경제적 지원을 추진했다. 심지어 연이은 자연재해 및 대약 진 운동 실패로 가장 어려웠던 1960년에도 중국은 24만 톤의 식량을 북에 지원했다. 沈 志 华 董 洁, 朝 鲜 - 243 -

국제정치연구 제18집 1호, 2015 영 내 각종 이슈들에 대한 협력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이 시기 북중관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요인은 최고지도자의 리더십이다. 중국의 한국전쟁 참여 과정을 살펴보면, 지도부의 다수가 한국전쟁 참전에 소극적이었으나 마오쩌둥 은 반제국주의 투쟁의 일환으로 항미원조 ( 抗 美 援 朝 )를 결정했다. 사회주의의 이념과 김일 성과의 개인적 관계가 크게 작용한 결과였다. 중국의 한국전 참전에는 중국의 국가안보를 중심으로 한 현실적 이해도 무시할 수 없다. 중국 의 한국전 참전은 사회주의 진영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마오쩌둥의 정치적 고려뿐만 아니라, 10) 한국전쟁 참전 결정이 1950년 10월 이후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안보적 관점이 중요하게 작용했 음을 알 수 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유엔군이 반격을 시작한 이후에야 중국은 한 국전 참전을 결정했다. 유엔군의 북진이 중국의 안보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 중 소 갈등이 심화된 이후 중간지대론을 제시하면서 미국과 관계 개선에 나선 것도 안보위협을 해소 하기 중국의 외교전략이다. 북한도 중소갈등의 틈새에서 표면적으로는 중립을 견지하는 듯하였으 나, 실질적으로는 경쟁구도를 이용하여 양국으로부터 지원을 유도했다. 11) 1961년 7월에 체결된 조소우호합작호조조약 및 중조우호합작호조조약 이 그것이다. 요약하면 공산주의 이데올 로기의 공유라는 이념적 기반위에 국가안보라는 국익이 양국관계를 규정했다고 볼 수 있다. <표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념 논쟁이 치열했던 1960년대 초중반 정상외교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으나, 이 시기 양국은 정치, 경제, 군사 등 폭 넒은 범위에서 전반적으로 밀접한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빈번한 정상외교를 통해 중미, 중일, 남북관계 등 공통 관 심사를 상시 조율하면서 전략적, 포괄적 동맹관계를 유지한 것이다. <표 1> 북중 지도자의 상호 방문(1953-1975) 일시 주요인물 내용 1953.11 김일성 방중 중조경제 문화합작협정 체결, 혈맹관계 강조 1954.9 김일성 방중 중국 건국일 기념행사 참석 1955.8 朱 德 중국 부주석 방북 8 15광복절 행사 참석 1958.2 周 恩 來 중국 총리 방북 중국지원군 철수 결정 1958.11,12 김일성 2차례 방중 반제투쟁, 사회주의진영 결속 강조 1959.9 김일성 방중 중국 건국일 기념 행사, 1960.5 김일성 방중 미 영 프 소 4자 정상회담 무산 관련 논의, 흐루시초프 노선 반대입장 표명 1961.7 김일성 방중 중조우호합작호조조약 체결 战 后 重 建 与 中 国 的 经 济 援 助 (1954 1960), ; 中 共 党 史 研 究 (2011, 第 3 期 ), pp.48-58. 10) 沈 志 华, 抗 美 援 朝 战 争 决 策 中 的 苏 联 因 素, 当 代 中 国 史 研 究 (2000, 第 1 期,), pp.28-39. 11) 한국전쟁직후부터 1960년 4월 1일까지 북한은 사회주의 진영으로부터 약 16.38억 달러의 무상원조를 받았 다. 이 가운데 소련과 중국의 지원액은 각각 43.17%와 30.75%였다. 또 1960년 10월 13일 중국은 북한의 7 개년 계획을 지지하면서 4.2억 위안의 차관을 제공했고, 러시아는 같은 해 12월 24일 7.6억 루블에 상당하 는 채무를 변제해줬다 沈 志 华 (2000), pp.30-35. - 244 -

북중관계 변화의 동인과 시진핑시대의 대북정책 1970.4 周 恩 來 총리 공식 방북 주총리 12년만의 방북, 문혁이래 양국관계 복원의 차원, 연합성명 발표 1970.10 김일성 비공식 방중 답방의 차원, 국제공산주의운동 및 각국 공산당관련 의견 교환 1971.7 周 恩 來 비공식 방북 키신저 방중 및 중미 대화 결과 통보 1971.11 김일성 비공식 방중 키신저 2차 방중결과, 중국 UN합법적 지위, 린뱌오 '9.13' 사건 등 1972.3 周 恩 來 비공식 방북 닉슨대통령 방중, 중미 연합성명 등 1972.8 김일성 비공식 방중 7.4남북동성명 관련 통보 1972.10 김일성 비공식 방중 중일담판, 중국과 연방독일간 수교, 베-미 회담 등 결과 통보 1973.10 김일성 비공식 방중(심양) 국제문제, 아시아 및 한반도 문제 의견교환 1975.4 김일성 공식 방중 양국관계 공고화, <연합성명>발표 2. 전환기의 북중관계: 실용외교, 그리고 동맹관계의 변화 1978년 11기 중앙위원회제3차전체회의(3중전회)를 계기로 중국의 대외정책은 큰 변화를 가 져온다. 중국은 전통적 계획경제에서 중국식 개혁ㆍ개방정책으로 전환했으며, 외교정책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개혁ㆍ개방을 표방한 덩샤오핑( 鄧 小 平 )은 시대 상황에 대한 인식과 사회발전에 대한 이해 등에서 마오쩌둥과 근본적 차이를 보였다. 마오쩌둥은 지속적인 계급투 쟁( 不 断 革 命 )을 통해 상부구조의 변혁과 사회발전을 추구했으나, 덩샤오핑은 경제발전을 통한 하부구조의 변혁에 주목했다. 이른바 생산력 해방론 ( 解 放 生 産 力, 發 展 生 産 力 )을 주창하면 서 경제성장에서 공산주의의 정당성의 토대를 구축하고자 했다. 덩샤오핑의 사회주의사회 발 전의 동력에 대한 인식은 대외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군사적 안보보다는 평화와 경제발전을 대외정책의 기조로 삼았다. 12) 제1세대 지도부가 강조했던 세계혁명의 시대를 벗어나 탈냉전 이후의 국제사회는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고 있으며, 전쟁은 미연에 방지할 수 있기 때문에 평 화와 경제성장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덩샤오핑의 인식은 이념 중심의 대외정책을 수 정하고 경제 중심의 실용주의 외교로 연결되었다. 또 장기적 전략적 이익을 위해서는 이념 및 국력의 차이를 불문하고 상호 존중과 평등 관계 를 유지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13) 종래 사회주의 국가들이 중시했던 국제적 이익보다 자국 의 이익을 우선하는 대외정책으로의 근본적 변화를 의미했다. 개혁ㆍ개방 이후 중국외교는 탈 이념의 실용주의적 성격을 띠면서 경제발전을 위한 안정된 국제환경 및 전략 공간을 확보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중국의 전환기(1978-1992)적 대외정책의 변화는 대북정책에도 변 화를 가져왔다. 냉전체제의 틀을 탈피하고 이념 중심의 외교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경제발전을 위한 주변정세 안정이라는 측면에서 한반도 정세의 안정과 평화를 강조했다. 덩샤오핑은 마오가 제시한 제3세계론을 바탕으로 북한과의 전통적 우호관계를 지속하면서 12) 鄧 小 平, 鄧 小 平 文 選 第 3 卷 ( 北 京 : 人 民 出 版 社, 1993), p.105. 13) 蕭 詩 美, 鄧 小 平 戰 略 學 ( 北 京 : 當 代 世 界 出 版 社, 2004), p.320. - 245 -

국제정치연구 제18집 1호, 2015 양국의 중요 사안에 대한 전략적 협력의 틀을 유지하고자 했다. <표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북 중의 고위층 상호 방문은 계속되었으며, 문화대혁명 이후 마오에 대한 평가 등 국내 문제를 비 롯하여 한반도 문제, 중미 중일 관계 정상화를 위한 비밀협상 등 중대 사안에 대해 양국은 긴밀 한 관계를 유지했다. 11기 3중전회를 앞두고 화궈펑( 華 國 峰 ), 덩샤오핑이 북한을 방문했다. 1983년에는 김정일의 노작( 勞 作 ) 14) 이 중국 언론에 보도되고, 그의 비공식적 중국 방문이 이루어지는 등 북한의 권력 승계에 관련한 교류도 진행되었다. 이러한 양국의 전통적 관계 위에서 덩샤오핑의 실용주의가 대북정책에 반영되었다. 덩샤오 핑은 마오쩌둥 시기의 비합리적 원조를 지양하고 국내실정에 부합하는 원조를 대북지원의 원 칙으로 삼았다. 1982년 김일성 방중 때 이루어진 1억 달러의 경제원조 이후,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중국의 대북원조는 대폭 축소되었다. 대외관계에서도 일본, 미국과의 국교정상화 이후 한국을 비롯한 제3세계 국가들과 적극적으로 관계 개선을 하기 시작했다. 15) 같은 맥락에 서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주창하면서 균형있는 한반도정책을 추진했다. 1983년 덩샤오 핑은 미 국방장관과의 회담에서 북한의 무력통일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같은 해 북한 군사대표단과의 회담에서 중국은 한반도 정세의 안정을 희망한다 는 입장을 표명했다. 16) 1985년 북한 방문에서 이루어진 김일성과의 회담에서는 국제법에 따라 국제문제를 풀어가야 하며 전쟁을 일으키면 손해 라며 한반도정세의 안정을 주문했다. 17) 그 외에도 중국은 개혁ㆍ개방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소개하면서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고자 했다. 김일성 방중 시 덩샤오핑이 직접 스촨( 四 川 ) 지역 방문에 동행했다. 1983년 김정일 방중 때, 후야오방( 胡 耀 邦 ) 총서기는 그의 칭다오( 靑 島 )와 난징( 南 京 ) 방문에 동행했으며, 중앙정치국 원 후치리( 胡 启 立 )는 상하이( 上 海 )와 항저우( 杭 州 ) 방문을 수행을 하고 개방의 성과를 자세히 설명했다. 이러한 김정일의 중국 방문이 1984년 북한의 대외 무역과 합영법 관련 정책을 수립 하는 데 기반이 되었다고 한다. 18) <표 2> 북중 지도자의 상호 방문(1978-1989) 일시 주요인물 내용 1978.5 華 國 峰 중앙군위 주석 방북 양국의 형제 우의( 友 誼 )관계의 강화를 강조 1978.9 鄧 小 平 방북 1979.4 김일성 비공개 방문 중국 당면형세 소개, 중일, 중미 정상화 비밀회담 내용 통보 북의 자주평화통일 노선 지지, 덩의 방미 관련 내용 논의 14) 노작 ( 勞 作 )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김정은 제1비서의 저서와 담화 등을 가리킨다. 15) 1980년대 초반부터 중국은 이미 한국에 대해 문은 닫으나, 빗장은 잠그지 않는 정책을 구사하기 시작 했고, 1983년 중국 민항기 납치사건을 계기로 공식접촉이 있은 후, 중국은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에도 대표단을 파견했다. 16) 杨 昭 全 孙 艳 姝, 当 代 中 朝 中 韩 关 系 史 ( 下 )( 吉 林 文 史 出 版 社,2013), p.588. 17) 杨 昭 全 孙 艳 姝 (2013), p.589. 18) Ilpyong J. KIm, "China in North Korean Foreign Policy, in Samuel S. Kin(ed.), North Korean Foreign Relations: n the Post-Cold War Era(Hong Kong: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 246 -

북중관계 변화의 동인과 시진핑시대의 대북정책 1980.10 국가주석 李 先 念 방북 국제형세 및 양국 북중 우의 강조 1981.4 김일성 비공식 방중 국내상황, 국제형세 논의, 모택동 평가 논의 1981.12 赵 紫 阳 총리 방북 1982.4 邓 小 平, 胡 耀 邦 비공식 방북 1982.9 김일성 공식 방중 (리종지 북총리와 회담)국내상황, 국제형세, 우호관계 논의 중미관계, 홍콩회귀, 국내상황, 남조선문제, 비동맹운동 등 논의 11기3중전회, 12기전당대회 결과 소개, 중국건설노선 설명. 중소, 중미, 중일관계 논의 1983.6 김정일 비공식 방중 青 岛, 南 京, 上 海, 등 방문. 邓 小 平 국내 경제발전상황 소개 1983.9 김일성 비공식 방중 국내 상황, 중미, 중소관계 설명 1984.5 胡 耀 邦 총서기 방북 국제문제 논의, 한반도정세의 안정 강조, 북의 연방제통일 방안 및 남ㆍ북ㆍ미 3자회담 지지 1984.11 김일성 비공식 방중 양국 공동관심사 논의 1985.5 胡 耀 邦 총서기 비공식 방북(신의주) 1985.11 김일성 비공식 방중 1986.10 李 先 念 국가주석 방북 1987.5 김일성 공식 방중 양국 공동관심사 논의 邓, 법제를 통한 국제문제 해결 강조. 전쟁 발발 손해 발언. 국제형세, 양자관계 논의, 우호관계 세세대대 전승 강조 88올림픽 공동개최 지원 요청. 등 경제 및 정치 개방 강조 1988.9 杨 尚 昆 국가주석 방북 양자우호관계, 한반도정세, 국제문제 논의, 북한의 자주ㆍ평화통일, 민족대단결 3대원칙과 연방제 통일방안 지지 1989.4 赵 紫 阳 총서기 방북 국내 및 국제관심 사안, 한반도정세 등 논의 1989.11 김일성 비공식 방중 국내 및 공동관심사 논의. 중국 제3대 지도부 소개. 사회주의 견지 강조. 북의 자주평화통일, 한반도정세 완화 등 지지. 북, 중국의 개혁개방 지지. 3. 도약기의 북중관계: 남북 균형외교와 정상국가 관계 1993년 국가 주석에 선출된 중국의 제3세대 지도부 장쩌민( 江 泽 民 ) 정부는 탈냉전을 배경으 로 출범했다. 천안문 사태와 구소련 붕괴는 중국에 적지 않은 충격이었고, 국내외적으로도 중 국적 사회주의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증폭했다. 중국은 국제사회의 제재로 고립되고 이데 올로기 논쟁이 재점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중국은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의 건설과 주변 환경의 안정을 축으로 한 대외정책을 추진한다. 장쩌민은 1993년 방미를 계기로 중미관계의 개선에 나섰고, APEC, 상해협력기구(SCO), 아세안지역포럼(ARF) 등 다자협력기구 에도 적극 참여했다. 안정 우선 19) 을 전제로 신중한 대외정책 20) 을 기본 방침으로 설정 19) 천안문사태를 전후하여 등소평은 안정 우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中 国 的 问 题, 压 倒 一 切 的 是 需 要 稳 - 247 -

국제정치연구 제18집 1호, 2015 하고 경제건설에 집중함으로써 지역 대국으로의 도약을 지향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도약기(1989-2002)의 중국의 대북정책은 양자관계보다는 다자적 틀에서 북한 문제를 인식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경제발전을 국가 핵심목표로 설정하고 한반도의 안정과 평 화를 대북정책의 기조로 하게 된 것이다. 21) 장쩌민 집권초기, 북한에 대한 전략적 협력관계는 지속되었지만 한중수교를 계기로 중대한 변화를 맞았다. 장쩌민은 집권 직후 1990년 북한을 방문하여 양국의 전통적 우의( 友 誼 )를 강조 하고 동시에 한반도 정세의 안정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 후 동유럽 사회주의 진영의 붕괴,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한중수교 등에도 불구하고 김일성과 리펑( 李 鵬 ) 등 국가지도자들의 상 호방문은 1992년까지 빈번히 이루어졌으나, 내용적으로는 양자 관계보다는 다자적 국제관계의 틀 내에서의 논의가 많았다(<표 3>참조). 이시기 공산주의라는 이념은 더 이상 북중관계를 견인하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중국은 기존의 양국 간의 조약과 협정은 유지될 것이며 한중수교로 중국과 북 한의 관계가 변화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했지만, 북중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려는 움 직임을 보였다. 1992년까지 북중 간에 유지되어 왔던 우호가격제가 폐지되고, 대북 경제지원 규모를 줄였다. 1992년 9월 27일 노태우 대통령의 중국 방문 직전에 북한은 중앙방송 논평을 통해 제국주의에 굴복한 일부의 혁명 변절자들의 배신행위로 말미암아 최근 일부 국가에서 사회주의가 좌절되고 자본주의가 복귀하는 엄중한 사태가 빚어졌다 고 중국을 비난했다. 1994년 11월 1일 김정일은 사회주의는 과학이다 라는 논문에서 지금 사회주의의 배신자 들은 자본주의에 대해 환상을 품고 제국주의자들의 원조와 협력에 기대를 걸고 있다 고 비난 했다. 22) 한중관계의 발전과 병행하여 이념에 기반 한 북중 간의 동맹적 성격이 약화된 것이다. 이를 배경으로 한중수교 이후 약 8년 양국의 정상외교는 중단되고, 2000년 김정일의 방중을 계 기로 겨우 고위층 교류가 복원되기에 이른다. 23) 이 시기 중국의 대북정책은 다자적 틀 내에서 한반도문제를 보는 특징을 보였다. 중국은 경 제적 측면에서 중국 러시아 몽골 북한 한국 일본 등이 공동 참여하는 두만강지역개발을 통해 지 역의 평화 발전을 추구하고자 했다. 정치적 측면에서는 1996년부터 1999년까지 추진된 중ㆍ미 ㆍ북ㆍ남의 4자회담에 중국이 참여한 것이 대표적이다. 중국은 안정된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 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24) 그 이전 중국은, 제1차 북핵위기 처리과정에서 보는바와 같이, 定 没 有 稳 定 的 环 境, 什 么 都 搞 不 成, 已 经 取 得 的 成 果 也 会 失 掉 1989.2.26.); 林 伟, 重 温 邓 小 平 的 稳 定 压 倒 一 切, 中 国 共 产 党 新 闻 网 (2009.8.14). 20) 여기서는 등소평이 제시한 24자 방침 을 들 수 있다. 즉 冷 静 观 察, 稳 住 阵 脚, 沉 着 应 付, 韬 光 养 晦, 善 于 守 拙, 绝 不 当 头 21) Michael D. Swaine, The PLA and Chinese National Security Pilicy: Leaderships, Structures, Processes, China Quarterly, No. 146, Special Issue: China's Military in Tranition(June 1996), pp.360-393. 22) 김정일, 사회주의는 과학이다, 로동신문 (1994.11.4). 23) 2000년 김정일 방중시 강택민은 고위층 왕래의 유지, 국제 및 지역의 중대문제에서의 소통과 협력, 양 당 간의 소통과 교류 유지, 경협발전과 국내사정에 기준한 대북지원 유지, 청소년 간 교류 강화 등 5가지 건 의를 하게 된다. 또 전통승계, 미래지향, 선린우호, 협력강화 라는 북중관계 16자 방침을 제시했다. 搜 狐 网 : 金 正 日 历 次 访 华 回 顾, http://roll.sohu.com/20111220/n329652029.shtml(검색일: 2014.12.20). 24) 杨 昭 全 孙 艳 姝 (2013), pp.643-649. - 248 -

북중관계 변화의 동인과 시진핑시대의 대북정책 한반도 문제의 근본 원인은 북미 관계에 있다고 보고 한반도문제를 둘러싼 다자협력체제 수립 에 소극적이었다. <표 3> 북중 지도자의 상호 방문(1990-2001) 일시 주요인물 내용 1990.3 江 泽 民 주석 방북 한반도정세 완화, 자주평화통일 지지, 남북관계 개선 희망, 한중무역대표처 설립 결정 통보 1990.9 김일성 비공식 방중 동구 사회주의 붕괴 관련 논의, 김일성 한중대표처 설립 이해 표명 1991.5 李 鵬 총리 방북 남북 유엔동시 가입 관련 논의, 1991.10 김일성 공식 방중 국제정세 논의, 등소평 중국식 개방노선 소개 1992.4 杨 尚 昆 주석 방북 남북관계 개선 희망, 자주평화통일 지지, 한중 수교 문제 통보 1999.6 김영남 위원장 방중 중조우의, 한반도 안정 희망, 남북간 자주평화통일 지지 2000.5 김정일 방중 양국관계 및 개혁개방문제, 남북정상회담 등 논의 2001.1 김정일 방중 상하이 푸둥지구 시찰, 천지개벽 발언 2001.9 杨 尚 昆 국가주석 방북 북중관계 16자( 字 ) 방침 천명 4. 부흥기 중국의 대북정책: 전략적 제휴관계의 복원과 한계 중국은 2001년 WTO 가입을 배경으로 후진타오( 胡 锦 涛 )를 중심으로 하는 제4세대 지도부가 등 장했다. 제4세대 지도부는 국내적으로는 경제성장의 부작용을 극복하고 조화사회 건설을 목 표로 했다. 국제적으로는 국제사회로의 편입 및 대외의존의 심화와 함께 책임있는 대국의 지위 를 확보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이른바 평화발전론을 통해 책임있고 위협적이지 않은 대 국이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중국은 미국, 러시아 등 대국들과의 관계를 중시하면서 주변국들과 의 선린관계 구축을 우선적 과제로 삼았다. SCO, ARF 및 APEC 등 다자협력체제에 적극 참여하 고, 주변국들과 경제협력을 지속적으로 확대해갔다. 그 결과 후진타오 체제는 경제력을 토대로 중국을 G2국가의 반열에 올려놓았으며, 힘이 있을 때까지 기다린다는 도광양회 ( 韬 光 养 晦 )의 전략에서 할 말을 하는 유소작위 ( 有 所 作 为 ) 전략으로 이행할 수 있는 기반을 확립했다. 중국의 대북정책도 주변국과의 선린관계 구축이라는 측면에서 종래에 비해 적극적이었다. 경제협력을 강화하여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고, 다자간 협력체제를 통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 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향력의 한계를 드러냈 다. 후진타오 체제는 정치 외교적 측면에서 소원해진 북한과 관계를 개선하는 데 초점을 맞췄 다. <표 4>에서 보듯이,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양국 정상회담에서는 전통적 우호관계의 계승 과 고위층 왕래, 국내문제를 포함한 국제 및 지역 문제에 대한 협력이 강조되었다. 2010년 이후 중국동북지역과 북한의 경제협력 강화를 위한 고위층의 상호방문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결과 - 249 -

국제정치연구 제18집 1호, 2015 적으로 중국은 북한의 핵개발 의도를 확인하는데 실패했다. 양국 간의 협력강화 노력에도 불구 하고 중국은 북한에 대한 영향력의 한계를 실감하게 된 것이다. 경제협력은 무역과 대북투자 중심에서 공동개발을 통한 협력관계를 지향했다. 2009년 중국 정부는 중국 두만강지역 협력개발계획 강요( 中 國 圖 們 江 區 域 合 作 開 發 規 劃 綱 要 - 以 長 吉 圖 爲 開 發 開 放 先 導 區 ) (2009.8.31)와 랴오닝 연해경제벨트 발전규획( 遼 寧 沿 海 經 濟 地 帶 發 展 規 劃 ) (2009.7.1)을 비준하면서 북한에 공동개발을 제안했다. 북한이 이에 적극 호응하면서 나선(나진, 선봉) 및 신의주-황금평 공동개발에 합의했다. 중국이 북한과의 경협을 강화한 데에는 대북지원 형태의 변화와 함께 북한 경제의 자생력을 키 우고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 내려는 의도가 있었다. 후진타오는 정상회담을 통해 이례적으로 경제 중심노선, 대외개방, 사회주의 건설 등 국정운영 경험을 김정일에게 거론했고, 원자바오( 温 家 宝 ) 총리도 기꺼이 개혁ㆍ개방 경험을 소개 할 의사가 있음 을 밝혔다. 25) 김정일이 중국 경험에 대한 진일보된 연구 라는 입장을 표하면서도 개혁 개방을 수용하지는 않았으나, 26) 국경지역 공 동개발을 위한 협력은 진전을 보였다. 그러나 2012년에 들어와 북중경협은 갈등이 표면화했다. 중 국 정부는 북한과의 공동개발에 기업의 참여를 적극 권장했으나 투자여건이 충분치 않은 북한의 상황 등을 고려한 기업들은 투자회수가 빠르고 수익률이 높은 자원 개발에 더 관심을 가졌다. 중 국의 북한에 대한 경협이 지하자원 개발에 치중 하면서 북한의 불만을 누적시킨 것이다 <표 4> 북중 지도자 상호 방문(2002-2012) 일시 주요인물 내용 2004.4 김정일 비공식 방중 2005.10 후진타오( 胡 锦 涛 ) 국 가주석 방북 북중우의 강화, 상호신뢰 및 교류협력 강화, 6자회담 공동 추진 후진타오 4대 건의: 고위층의 왕래 및 소통강화, 교류 확 대, 경협을 통한 공동발전, 협력강화를 통한 공동이익 수 호; 새로운 형식, 새로운 사고, 새로운 내용 으로 북중 관계 전면적 발전. 대화와 협상을 통한 비핵화 입장 표명 2006.1 김정일 비공식 방중 전통우의 강조, 협력 성과 긍정, 6자회담 공동노력 공감 2009.10 温 家 宝 중국 총리 방 북 2010.5, 10 김정일 비공식 방중 전통우의 강조, 경제기술협력 협정 체결, 한반도 비핵화 및 6자회담 논의 전통우의 세세대대 전승, 전략적 소통, 양국 중대사안, 치 당치국( 治 黨 治 國 ) 경험(개혁개방) 등 공동 관심 분야에서의 소통, 북측 민생개선 노력 긍정, 한반도 비핵화 및 6자회 담 논의 후진타오 체제는 역대 지도부에 비해 북한 핵문제에 적극적이었다. 그 이전 중국은 표면적으 로는 한반도 비핵화를 강조했으나 실질적으로는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안정적 주 변 환경을 배경으로 경제발전에 매진하려는 후진타오는 북핵문제로 나타날 수 있는 한반도 정 25) 南 海 网 : 金 正 日 能 否 带 回 改 革 开 放, http://www.hinews.cn/news/system/2011/06/08/012686821.shtml(검 색일: 2014.12.21). 26) 新 华 网 : 朝 鲜 会 改 革 开 放 吗?,http://www.people.com.cn/GB/32306/33232/11577732.html(검색일: 2014.12.21). - 250 -

북중관계 변화의 동인과 시진핑시대의 대북정책 세의 불안정성을 해소해야 했다.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무력이나 과도한 압박이 한반도 정세에 불안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화와 협상을 통한 문제해결을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방법으 로 인식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체제의 안정을 우선하면서 한반도의 위기상황을 관리해야 한다. 북한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한편 대화와 협상을 통해 북한의 안보와 핵문제를 동시에 해 결하는 이른바 포괄적 해결방식 이다. 중국이 6자회담에 적극적이었던 이유이다. 북한의 제2차 핵실험 이후 중국의 대북정책은 한반도의 안정을 전제로 대북영향력 확대 북 미관계 개선 북한체제 연착륙 한반도의 평화 조성이라는 로드맵에 따라 전개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7) 북핵문제가 정체되고 국제사회의 대북제재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중국은 북 한과의 정치 경제 협력을 강화하여 북한 체제의 안정과 점진적 변화를 유도하는 데 정책적 중 점을 두었다. 냉전기 중국과 북한은 특수한 유대관계를 유지했다. 공통의 이념을 기반으로 한 세계관과 역 사관, 반제국주의 투쟁 등을 통한 혈맹적 동지관계는 결코 훼손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 다. 그러나 탈 냉전기에 들어서면서 국제 환경의 변화, 지도부의 세대교체, 상이한 발전노선 등 은 혈맹관계에 질적 변화를 가져온다. 종래의 전통적 우의에 대한 관성은 있지만 지도자 간의 인적 유대는 사라졌으며, 이념 국제관 발전관 등에서 북한과 중국은 차이를 노정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북중관계의 변화는 중국의 정책 변화에 기인하는 측면이 강하다. 구체적으로 북중 관계의 변화 요인을 살펴보자. 1. 변화요인 (1) 국내 요인: 이념적, 인적 유대의 약화 오랜 기간 쌓아온 혁명 1세대 간의 우의는 중국의 세대교체에 따른 실용주의 노선의 채택으 로 그 기반을 상실하게 되었다. 북중의 제1세대 지도자들은 항일투쟁, 국공내전, 한국전쟁을 거 쳐 냉전기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혁명적 우의 를 쌓아왔다. 이러한 유대는 이념적 괴리 등도 극복할 정도로 강력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에 걸쳐 북한과 중국의 혁명 원로 지도자들의 연이은 사망으로 양국 지도부의 전통 인맥은 약화되기 시작했다. 1992년 한중 수교를 계기로 양국관계는 냉각기를 맞았다. 장쩌민-김정일 시대에 김정일이 두 차례 중국을 방문했으며, 장쩌민이 한 차례의 방북에 그쳤다는 사실은 전통적 인적관계의 약화를 잘 보여준 다. 이러한 인적 유대의 약화는 국익이나 이념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양국의 정치적 통로가 상실되었음을 말한다. 중국의 탈이념화와 실용주의 노선도 양국 간의 이념적 정치적 연대를 약화시켰다. 중국의 실 용주의는 북한만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었으며 마오쩌둥의 통치이념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27) 이에 관해서는 박동훈 강용범, 중국의 대북정책 논리와 북중관계, 국제문제연구,제11권 제3호 (2011), pp.117-136. 참조. - 251 -

국제정치연구 제18집 1호, 2015 제2세대 지도부의 사고방식과 연관되어 있다. 마오쩌둥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사회주의 진영 내 국가관계를 규정하는 기본 원칙으로 삼았으나, 덩샤오핑은 국제적 이익 보다는 국가 이익을 우선하는 대외정책을 추진했다. 국내적으로는 이념논쟁보다는 시장경제체제 확립을, 대외적으로는 국익우선 을 원칙으로 하여 적극적으로 제3세계 국가들과 관계를 개 선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국내 실정에 따른 대외원조 원칙으로 대북원조 규모를 대폭 축소 했으며, 한국과의 관계 정상화도 추진할 수 있었다. 개혁ㆍ개방을 추진하고 한국과 수교를 한 중국은 북한에게 사회주의의 배신자, 수정주의자로 비쳐졌다. 28) (2) 양자 간 요인: 전략적 협력관계의 약화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1992년 한중수교와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수년 간 북중 간 정 상외교가 중단되고, 기존의 정치, 외교적 통로가 막히게 되었다. 이를 반영하여 2000년대에 들 어서, 특히 제2차 북핵위기 이후 중국은 양국 지도부 간의 신뢰를 강화하기 위해 고위급 왕래, 국내문제를 포함한 중대 사안에 대한 소통, 국제 및 지역 문제에 대한 협력을 강조했다. 그러 나 한중수교 전후의 일련의 과정을 보면 북중관계는 상호 불신이 누적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북미관계가 중요한 시점에 이른 만큼 한중수교를 좀 늦추어 달라 29) 는 김일성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노태우 정권 말기 서둘러 한국과 수교를 했다. 한중수교와 거의 동 시에 중국이 청산결제방식( 记 账 贸 易 )을 현금결제 방식으로 전환하여 30) 북한의 불만을 야기했 다. 2000년대에 들어 중국이 정상외교를 통해 협력과 소통의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2006년에는 북중 정상회담 직후 북한은 제1차 핵실험을 단행했다. 자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핵 실험을 강행한데 대해 중국은 북한을 정면으로 비난했으며, 북한은 자신들의 체제안보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을 중국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2009년 이후에도 정상외교와 경 제협력을 추진했으나, 경협의 세부적 문제에서 갈등을 빚고, 2013년 북한은 또 다시 제3차 핵 실험을 강행했다. 한중수교 이후 북한은 자신들의 안전을 더 이상 중국에 의지할 수 없으며, 체제의 안전을 위해 핵개발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3) 국제적 요인: 국제적 영향력 확대와 한반도에 대한 개입 의지 증대 경제성장에 따른 국력증대로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과 개입이 강화되었다. 중국은 개 혁 개방 이후 경제대국으로 부상하면서 국제적 위상도 높아졌다. 중국은 국력 신장에 상응하는 책임 있는 대국( 負 責 任 大 國 ) 으로서의 국제적 영향력 제고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1990년대 중국의 대북정책은 도광양회 ( 韜 光 養 晦 )의 정책기조 로 소극적이고 신중한 것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중국의 태도에 변화가 나 타났다. 경제협력을 통해 북한체제의 안정과 변화를 유도하고자 했으며, 핵 개발을 반대하면서 유엔안보리의 대북 제재 결의에도 동참했다. 북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6자회담 개최도 적극 28) 김정일, 사회주의는 과학이다, 로동신문 (1994.11.4.). 29) 延 静, 1992 年 钱 其 琛 秘 访 朝 鲜, 领 导 文 萃 (2011, 第 1 期 ), p.96. 30) 林 今 淑, 现 代 朝 鲜 经 济 ( 延 边 大 学 出 版 社,2011), p.311. - 252 -

북중관계 변화의 동인과 시진핑시대의 대북정책 주선했다. 이러한 중국의 정책변화에는 북한의 독립자주의 외교원칙을 훼손하고 내정에 간섭 한다는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중국은 북핵문제에 대해 국제사회에 대국으로서의 책임 있는 자 세를 보여야할 필요가 있었다. 또 그것이 보다 큰 범위에서 중국의 국익에 부합하는 것이다. 경제성장을 배경으로 한 이러한 정책의 다양화가 중국의 대북정책 변화의 동력이 된 것이다. 2. 지속 요인: 지정학적 요인 마지막으로 북중관계의 지정학적 변수에 대해서이다. 어느 한 국가의 지리적인 위치나 지정 학적 조건은 그 나라의 대외정책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중요하다. 한반도는 해양세력과 대륙세 력이 충돌하는 이른바 림랜드(rimland) 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역사적으로 강대국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중국의 대외전략에서 한반도가 중요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한반도는 중국 의 대외정책뿐만 아니라 국내 정치에도 직접 영향을 미치는 문호( 門 戶 ) 의 역할을 해왔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전개된 일련의 전쟁이 중국의 정권 존립에 영향을 미쳤다는 한반도의 지정 학적 가치가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조선반도는 강대국들의 갈등을 부추길 수도, 해소할 수 도 있는 지역 31) 이라는 지정학적 인식이다. 특히 동북아의 국제적 역학구도가 재편되면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는 더욱 강조되고 있 다. 미국의 동북아지역에서의 정책 목표는 특정 패권국가의 출현을 저지하는 것으로, 중국에 대한 견제를 의미한다. 이를 위해 미국은 한반도를 지렛대로 하여 동북아 역내의 주도권 강화 에 나섰다. 한반도 위기상황을 이용하여 한미 미일 동맹을 강화하고, 한미일 삼각협력을 강화 하려 하고 있다. 한반도를 대외 영향력 확대의 중요 기점의 하나로 삼고 있는 중국으로서는 부 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며, 북한의 가치가 보다 중요해졌다. 중국의 탈 미국화 정책과 미국 의 아시아 재군형정책이 충둘하면서 북한의 전략적 가치가 커지게 된 것이다. 32) 물론 북한도 이를 알고 있으며, 지정학적 인식에서 출발한 중국의 대북정책을 북한이 역이용하는 측면도 있 다. 이러한 측면에서 중국의 북한에 대한 영향력 행사에는 일정한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는 측 면이 있다. 중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하는 것 등이 그 예이다. 이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탈냉전이후 북중관계는 질적 변화를 가져왔다. 이념적, 정치 적, 지도자 개인의 유대관계가 퇴색되면서 전통적 우의( 友 誼 ) 기반이 약화되었다. 반면에 여전 히 냉전 구조가 남아 있는 한반도의 특성상, 중미 간 경쟁 구도가 심화되면서 북한의 지정학적 가치는 오히려 더 커졌다. 또 국력 증대와 함께 국제정치 체제의 변수가 중국의 대북정책에 미 치는 영향이 커지면서 1990년대 후반에 들어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개입의지도 심화되었다. 반 면에 북한의 지정학적 가치의 증대는 중국의 대북한정책의 한계로 작용하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게 되었다. 중국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 북한의 돌발적인 독자적 군사행동이 빈번하 게 발생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31) "격동의 동북아시아, 조일합의를 둘러싼 국제정세, 조선신보 (2014.7.2). 32) 김홍규, 시진핑 시기 중국외교와 북중관계, JPi정책포럼 2015-04(제주평화연구원, 2015,04),p.8. - 253 -

국제정치연구 제18집 1호, 2015 2012년 11월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18차 전당대회와 2013년 3월에 개최된 12기 전국인민대표 대회(전인대)를 통해 시진핑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제5세대 지도부가 구성되었다. 대북관계에 서 시진핑 정부는 혈맹국가였던 북한이 중국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미사일 발사 및 제3차 핵 실험을 강행하는 등의 사정을 배경으로 등장했다. 중국의 입장에 대한 고려 없이 실적 쌓기에 만 급급한 김정은 체제에 대해 시진핑 정부는 어떻게 대처해 왔는가를 검토한다. 1. 제3차 핵실험 이후의 중국의 대북정책 앞에서 지적했듯이, 후진타오 체제 후기에 들어 중국은 전통적 우의의 계승 및 신뢰 강화를 통해 북한과의 관계 복원 의지를 보였다. 중국은 한반도 정세의 안정, 북한체제의 연착륙(개 혁 개방)에 우선순위를 두고 대북협력을 강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 지도부의 교체와 함께 2012년부터 양국관계에 불협화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2012년 11월 제18차 당대표대회 를 통해 당총서기에 오른 시진핑은 같은 달 30일 정치국원 리지엔궈( 李 建 國 )를 특사로 파견하 여 김정은에게 친필 서한을 전달하는 등 관계 개선의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북한은 회담 이튿 날인 12월 1일 로켓 발사 계획을 발표하고, 12월 12일 이를 행동에 옮겼다. 2013년 1월 23 일 중국은 유엔 안보리 2087호 대북제재결의안에 찬성함으로써 북한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다. 북한이 제3차 핵실험을 강행하자 중국은 유엔 관련 결의를 엄격히 준수할 것 을 선언하고, 3월 7일에는 유엔 안보리 2094호의 대북결의안에 재차 찬성하고 결의 내용의 전면적 이행을 강조했다. 그 후 4대 국유은행과 북한 무역결제은행 간의 금융거래를 중단하고, 불법혐의가 있 는 계좌를 폐쇄하는 등 강경조치를 취했다. 2013년 5월 김정은이 최룡해를 특사로 파견하면서 유화적 태도를 보였지만 중국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최룡해는 방중 사흘째인 2013년 5월 24일 오후에야 겨우 시진핑과 면담 할 수 있었다. 회담에서 최룡해가 중조우의의 중요성을 강조한데 대해 시진핑은 중국의 한반 도 비핵화 목표에 대한 입장은 확고하다, 정세가 어떻게 변화든 관련국들은 한반도 비핵 화, 평화와 안정, 대화와 협상을 통한 문제해결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33) 종래와 는 다르게 한반도 비핵화를 최우선시 하고 있음을 명확히 한 것이다. 2013년 12월, 친중파로 알려진 장성택이 숙청되면서 북중관계는 경색되었다. 2014년 2월 17 일 중국 외교부 부부장 일행의 방북 이후로 양국 간의 고위급 인사 교류마저 잦아들었다. 2014년 9월 북한정권 수립 66주년을 맞아 시진핑 국가주석이 김정은 제1위원장에 보낸 축전도 2013년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우호 관계를 강조하는 표현이 빠지고, 34) 심지어 전통계승, 미 33) 习 近 平 会 见 金 正 恩 特 使 崔 龙 海, 中 国 外 交 部 : http://www.fmprc.gov.cn/mfa_chn/gjhdq_603914/gj_603916/yz_603918/1206_604114/xgxw_604120/t1043542.sh tml(검색일: 2014.12.22). 34) 중국이 2013년부터 북에 보낸 축전에는 기존의 형제적 인민 이라는 표현에서 형제적 이라는 용어 - 254 -

북중관계 변화의 동인과 시진핑시대의 대북정책 래지향, 선린우호, 협조강화 라는 양국관계를 상징하는 16자( 字 ) 방침도 삭제되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시진핑-김정은 시대에서 양국관계의 복원 가능성은 불투명하다. 김정일 사 망과 북중 경협의 핵심인 장성택의 처형 등으로 전통적 우의를 유지할 수 있는 인적 기반이 취 약해진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오히려 과거의 끈끈한 혈맹관계를 벗어나 양국의 갈등이 장 기화되는 듯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2. 북한의 대응 한편, 북한은 2013년 초반부터 유엔 제재에 강력히 반발하면서 한반도에서 긴장을 극대화시 켰다. 중국이 한반도 정세의 안정을 전제로 6자회담 등 대화와 협상을 통한 한반도 비핵화를 주장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국방위원회 성명을 통해 9 19공동성명과 6자회담의 사멸 및 정전협정의 백지화를 선언하고 추가 핵실험의 가능성까지 내비쳤다. 북한의 이러한 태도는 그 것이 미국을 향한 것이라 해도 한반도 정세의 안정과 비핵화를 추진해온 중국의 한반도 정책 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2013년 3월 31일 북한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개최하고, 경제건설과 핵무력 건설을 병진시켜 사회주의 강성국가 건설위업의 최후승리를 앞당겨 나갈 데 대하여 라는 이 른바 병진노선 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시진핑 주석의 한국방문 전날인 2014년 7월 2일, 조선신보 는 격동의 동북아시아, 조일합의를 둘러싼 국제정세 라는 논설을 통해 조선 반도는 강대국들의 갈등을 부추길 수도, 해소할 수도 있는 지역 이라 강조하면서 북한의 지정 학적 가치를 부각시켰다. 또 2014년 리수용 외상은 유엔 총회 발언에서 강권과 전횡 이라는 용어로 안보리의 제재를 비판하면서 중국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북한의 이러한 불만은 행동으로 옮겨졌다. 2013년 말 중국에 우호적인 장성택을 처형함을써 북중관계는 경색되었으며, 중국과 관계가 악화된 일본과도 수교교섭을 재개했다. 일본인 납치문 제에 대해 북한이 최종적으로 해결할 의사를 표명 하면서 2014년 5월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북일 국장급 회의에서 이른바 5.29합의문이 발표되었고, 35) 일본은 대북제재를 일부 해제하는 방 침을 발표했다. 북일관계의 개선은 비핵화 관련 6자회담 당사국에게는 충격이었다. 특히 댜오위 다오 문제, 역사인식문제 등으로 중일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이 일본에 대 한 접근을 통해 중국을 견제하려는 제스처를 취했다는 점에서 중국에게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북한의 외교 다변화는 6자회담의 주요 당사국인 러시아도 포함되었다. 2014년부터 최룡해, 김영남, 리수용 등 북한 고위급 인사가 연이어 러시아를 방문했다. 이에 대해 푸틴 대통령은 2014년 5월 북한의 구소련 채무를 90%(109억 달러) 탕감하고, 나머지 11억 달러는 20년에 걸쳐 북한의 보건과 교육, 에너지 분야에 재투자하기로 협의했다. 그 외, 양국은 경제통상 과학기술 가 삭제되었으며, 김일성, 김정일 및 조선로동당 령도 라는 문구가 조선로동당 령도 로 바뀌었다. 2012년에 사용된 조선이 모든 분야에서 더욱 큰 성과를 이루기를 축원한다 는 문구가 2013년부터는 나라의 경제 및 사회발전에서 새롭고 보다 큰 성과 로 바뀌었다. 중국이 북한의 핵문제를 의식한 변화 로 보인다. 35) 日 本 外 務 省 : http://www.mofa.go.jp/mofaj/files/000040352.pdf - 255 -

국제정치연구 제18집 1호, 2015 협력위원회 재개 및 러북 기업인 협의회 설립 등 호혜적인 경협을 한층 확대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36) 북한의 이러한 행동은 과도하게 편중된 중국 의존을 해소하고 국제적 고립을 타개 하기 위한 것이지만, 북중관계의 악화는 중국에 상당한 전략적 비용(부담)을 안겨줄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었다. 3. 시진핑 정부의 대북정책 재조정 및 평가 북한의 제3차 핵실험을 계기로 한 양국의 갈등 심화에도 불구하고, 2014년 말부터 중국의 대 북태도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2014년 12월에 류윈산( 劉 雲 山 ) 중국 정치국 상무위 원이 북경의 주중 북한 대사관의 김정일 추도식에 참석했고, 며칠 뒤 평양에서 양국은 2015 년 체육교류협정서 를 체결했다. 정치, 외교적 관계가 경색되더라도 민간분야의 협력의 틀은 유지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양국은 상대방의 존재가 서로에게 이익이라는 인식하에 직접적인 충돌보다는 양국관계를 관리하려는 것이다. 또한 중국 외교부는 2015년 1월 8일 김정은 생일에 보낸 축전에서 전통계승, 미래지향, 선린우호, 협력강화 라는 16자 방침 을 다시 거론하 고, 북중 간 전통적 우호협력관계 발전을 희망하는 메시지를 전하면서 북중관계의 안정적 관리 가능성을 내비쳤다. 그 후 2015년 3월 대외연락부 부부장 출신인 리진쥔( 李 進 軍 )이 북한 주재 대사로 교체되면서 적극적으로 대화 분위기를 조성하려 했다. 리진쥔 대사는 3월 30일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 위원장과의 면담에서 상호존중, 평등상대, 구동존의( 求 同 存 异 ), 협력공영 의 원칙하에 북중 관계의 지속적이고 안정적 발전을 시사했다. 4월21일, 리룡남 북한 대외경제상과의 회담에서는 최근 들어 중국이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일대일로( 一 帶 一 路, (One Belt And One Road) 의 구상과 비전을 설명하면서 시범적 항목을 비롯한 북중경협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4월 29 일, 북한 보건상이자 북중 우호협회 중앙위원장인 강하국과의 면담에서는 양국 간 의료위생 분 야 협력을 비롯한 민간외교의 발전을 희망했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중국의 대북정책이 일 시적인 초조기 ( 焦 虑 期 )를 거치고 새로운 조정기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2012년에 이후 북중 간에 갈등이 심화된 것은 사실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중미 간의 역 학관계가 변화하면서 미국의 중국 견제가 강화되고, 2010년 천안함 사태와 연평도 포격사건은 미국의 동아시아 개입의 구실을 제공한 측면이 있다. 중국은 향상된 국제적 위상을 고려하여 국제 사회의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이 북한 편향적 정책 을 구사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2013년부터 2014년 중반까지 중국은 북한의 추가적 핵도발을 저지하는데 노력했다. 다른 한편으로 국제무대에서는 대북제재에 대해 신중 과 형평 을 강조하면서 과도한 대북제재에는 반대 입장을 견지했다. 한미일에 대해서도 북한이 6자회담 등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의 자세를 보이는 만큼, 북한의 입장을 수용할 것을 요구했다. 37) 이러 36) 고재남, 러북 관계의 긴밀화 동향과 전략적 함의, 주요국제문제분석 2015-14((국립외교원, 2015.5. 26.), pp.90-11. 37) 社 评 : 韩 美 日 须 积 极 回 应 朝 鲜 的 转 变, 环 球 时 报 (2013. 5. 25), http://opinion.huanqiu.com/editorial/2013-05/3968861.html (검색일: 2015.03.24) - 256 -

북중관계 변화의 동인과 시진핑시대의 대북정책 한 점을 고려할 때, 중국의 대북 정책은 한미일의 요구처럼 북한의 목을 조이는 것이 아니라 목을 아프게 해서 북한을 비핵화 로 유도하려는 데 목표를 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2014년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중국의 대북정책에 새로운 변화 조짐이 보이고 있다. 일대일로 라는 글로벌 전략을 추진하면서 미중 간의 경쟁이 본격화함에 따라 중국의 주변 환경 재편에 대한 필요성이 높아졌다. 한반도가 환태평양 지역과 유라시아를 연결하는 중요한 축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 지정학적 가치는 높아질 수 밖에 없다. 한편 동북아 역내에서 는 중일 간의 지역패권 경쟁이 전략적 차원에서 장기화 국면에 들어섰고, 한미일 3국 공조체제 도 강화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를 배경으로 한 북한의 외교 다변화 정책 내지는 중국 흔들기 는 적어도 북한을 여전히 전략적 자산(Strategic Asset)으로 간주하는 중국 내 지정학 파들의 주장에 설득력을 더해 주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중국의 대북한정책은 포용론과 포기론 의 딜레마 속에서 유동적인 상황을 맞고 있다고 하겠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북중관계는 수십 년 간의 기간을 거치면서 상당한 부 분에서 변화를 가져왔다. 첫째, 이념적, 정치적, 개인적 유대관계가 퇴색하면서 전통적 우 의 의 기반이 약화되었다. 둘째, 신흥대국으로서의 중국과 미국의 경쟁 구도가 고착되면서 한 반도(북한)의 지정학적 가치가 높아지고 있다. 셋째, 중국은 경제성장에 따른 자신감과 대외정 책의 다양화를 통해 자기 나름의 논리로 한반도문제를 풀어나가려고 한다. 한국이 중국 변 수 를 소홀히 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주목할 점은 2013년 이후 중국과 한반도의 3자 관계에 중요한 변화 및 추세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한중관계는 신뢰와 제도를 바탕으로 협력의 범위가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고, 이에 반해 북중관계를 뒷받침 할 수 있는 요소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면서 향후 한중관계에 대한 시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가 높아질수록 북한 체제의 안정이 더욱 필요해 진다.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경쟁이 심화될수록 중국 내 전통파의 목소리가 커질 것이고 북중관계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날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환경을 변화시 킬 수 없다면 다음과 같은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중국은 실패국가(북한) 를 비호함 으로써 안보이익을 얻을 수 있지만, 그로 인해 실추되는 대국으로서의 이미지 손상에 대한 비 용도 함께 감수해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중국은 대북정책의 딜레마에 빠져있다고 할 수 있 다. 따라서 중국은 북한 포용론과 포기론이라는 양 극단보다는 새로운 형태의 양국관계를 구상 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은 중국의 대북 포용론 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한중관계의 틀 속에 서 북중관계 및 남북한 관계를 모색하는 모멘텀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한중 간의 포괄적 협력관계를 적극 구축해 나갈 필요가 있다. 말을 듣고 행동을 보라( 听 其 言 而 观 其 行 )는 중국 속담처럼 한중양국은 실질적인 행동을 통해 공통의 정체성과 목표를 구성해 나 가야 할 것이다. - 2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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