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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여기서 朝 鮮 思 想 通 信 이 식민본국과 피식민지 사이에 놓여 있는 재조선일본인의 어떤 존재론적 위치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식민본국과 피식민지의 Contact Zone 에 위치한 재조선일본인들은 조선이라는 장소를 새로운 아이덴티티의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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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이용복 간단히 알아본다. 이어 고조선 강역에서 발견된 다양한 유적과 발굴된 당시의 청동 기 유물을 통하여 천문학적 의미를 알아보고자 한다. 특히 청동기 유물에 나타난 문양을 통하여 천문학적 요소나 흔적을 알아보고자 한다. II. 고조선의 역사 고려( 高 麗 )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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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 延 世 醫 史 學 제11권 제1호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이었던 신창희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 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의 생애에 관한 개략적인 소개가 있었지만, 1) 여전히 많은 부분이 확인되지 않은 실정이다. 본고 또한 여전히 짧고 소략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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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맹자( 孟 子 )가 말하였다. 본심( 本 心 )을 기르는 데는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맹자] 우산( 牛 山 )의 나무들이 아름다웠었는데, 큰 나라의 교외에 있어서 도끼로 남벌하였다. 그러니 그 산이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이것은 밤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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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로서의 근대일본자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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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Transcription:

博 物 館 紀 要 20 2005. 12. 檀 國 大 學 校 石 宙 善 紀 念 博 物 館

목 차 기조강연 三 國 鼎 立 期 漢 江 流 域 占 有 의 意 義 정영호 5 논 문 高 句 麗 의 南 進 와 國 原 城 ( 忠 州 ) 신형식 7 5~6세기 百 濟 의 北 界 梁 起 錫 23 5~6세기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경영 서영일 53 휘 보 구입 및 받은 도서 목록 - 3 -

기조강연 三 國 鼎 立 期 漢 江 流 域 占 有 의 意 義 1)정 영 호 漢 江 을 차지하는 나라가 한반도의 覇 權 을 장악할 수 있다는 말은 일찍부터 力 說 해오 는 歷 史 的 인 말이다. 그러므로 5세기에 이르면서 三 國 은 서로 漢 江 流 域 을 차지하려고 전 력을 기울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8백리 漢 江 주변을 일찍부터 차지하고 있었던 나라는 百 濟 이다. 그러므로 충청북도 丹 陽 郡 의 赤 城 內 에서 百 濟 의 토기가 발견 조사되었고 忠 州 塔 坪 里 7 層 石 塔 주변에서도 百 濟 의 기와편이 발견 조사된 바 있다. 그러나 백제는 蓋 鹵 王 21 年 (475)을 기하여 漢 江 流 域 을 高 句 麗 에게 빼앗기고 충청남도 熊 津 쪽으로 도읍을 옮겨 錦 江 流 域 에서 세력을 정비하게 되었다. 한편 高 句 麗 는 長 壽 王 15 年 (427) 平 壤 으로 遷 都 한 뒤, 본격적인 남하정책을 취하여 王 42 年 (454)에 신라 북변을 침공하였으며 王 63 年 (475)에는 百 濟 의 도읍지인 漢 城 을 함락, 漢 江 下 流 를 장악하였다. 이후 高 句 麗 는 漢 江 以 南 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경기도 利 川 에 南 川 縣 을 두고 丹 陽 에는 赤 城 縣 을 두었으니 당시의 三 國 史 記 관계기록과 특히 유적 유물의 발견조사, 예컨대 利 川 의 雪 峰 山 城, 丹 陽 의 赤 城 碑 와 加 隱 巖 山 城, 陰 城 의 望 夷 山 城, 忠 州 의 中 原 高 句 麗 碑 와 國 原 城 治 址 등을 들 수 있겠다. 新 羅 는 6세기에 들면서 북방경략에 힘을 쏟아 竹 嶺 과 鳥 嶺 을 넘어 漢 江 流 域 을 점유하 기 시작하였으니 三 國 史 記 의 관계기록과 丹 陽 의 赤 城 碑 등이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高 句 麗 의 남하정책은 漢 江 流 域 에서 그치지 않고 漢 江 일대를 점유한 여세로 錦 江 에까 단국대 - 5 -

지 이르렀던 것으로 당시의 문헌기록과 여러 유적 유물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예컨대 충주의 鳳 凰 里 磨 崖 半 跏 像 佛 菩 薩 像 群 과 老 隱 面 出 土 建 興 五 年 丙 辰 銘 金 銅 光 背 와 淸 原 飛 中 里 의 石 佛 坐 像, 燕 岐 郡 全 義 縣 高 麗 山 城 과 淸 原 芙 江 의 蓋 蘇 文 城 과 주변의 山 城, 그리고 이곳에서 출토되고 있는 高 句 麗 유물들 三 國 史 記 의 관계기록을 들 수 있다. 특히 陽 原 王 10 年 (554) 겨울에 百 濟 의 熊 川 城 (지금의 공주)을 공격하였으며 이때에 錦 江 이 無 氷 이었다는 기록과 燕 岐 誌 에 蓋 蘇 文 城 在 芙 蓉 山 上 高 句 麗 泉 蓋 蘇 文 築 城 于 此 習 騎 射 云 至 今 有 形 址 "라는 기록은 그대로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으로 현재도 당시 의 山 城 이 잘 남아 있다. 百 濟 는 475년에 熊 津 으로 도읍을 옮긴 뒤 聖 王 16년(538)때에 이르러 다시 泗 泌 城 으로 遷 都 하여 錦 江 下 流 만을 장악하고 있었으니 漢 江 流 域 의 패권다툼은 新 羅 과 高 句 麗 의 문 제였다. 新 羅 는 일찍이 2세기에 鳥 嶺 과 竹 嶺 을 開 道 하였다고 하나 6세기 중엽에 竹 嶺 을 넘어 高 句 麗 의 赤 城 을 점령할 때 까지 주목할 만한 北 方 經 略 과 漢 江 流 域 에로의 進 出 은 밝혀진 바가 없다. 그러나 이후 곧 眞 興 王 14 年 (553)에 한강일대를 차지하여 新 州 를 설치하고 金 武 力 장 군을 軍 主 로 임명하였으며 王 15 年 (554)에는 百 濟 의 聖 王 을 생포, 살해함으로써 錦 江 中 流 의 패권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당분간은 高 句 麗 와 新 羅 의 대립이 각축이 계속되었 던 바 新 羅 가 眞 平 王 51년(629)에 淸 原 北 二 面 釜 淵 里 의 高 句 麗 娘 臂 城 을 함락함으로써 高 句 麗 는 퇴각하였으며 이후 新 羅 는 漢 江 流 域 의 패권을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르게 된다. 이상 5~6세기를 중심한 三 國 間 의 패권다툼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았는바 더욱 상세 하고 중요한 내용들은 앞으로 발표할 여러 석학들에게 기대해야 할 것이다. 주옥같은 玉 稿 를 정리하여 오늘 이 자리에서 발표할 여러 학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바이다. - 6 -

高 句 麗 의 南 進 와 國 原 城 ( 忠 州 ) 1)신 형 식 목 차 1. 동북아시아에 있어서 고구려의 위상 2. 고구려의 남진과 國 原 城 3. 결어 - 고구려의 남진과 한강 1. 동북아시아에 있어서 고구려의 위상 고구려는 우리 역사상 가장 힘있던 나라로 수 당과 맞서 한반도를 지켜준 나라였 고, 만주와 연해주지역까지 지배한 당당한 제국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을지문덕( 乙 支 文 德 )과 연개소문( 淵 蓋 蘇 文 )의 자랑스런 용맹을 기억하고 있다. 당 태종은 645년(보장왕 4년)에 내린 교서( 敎 書 )에서 지금 천하가 다 평정되었으나, 오직 요동( 高 句 麗 )만 복종하지 않고 있다. 그의 후손 들이 군사의 강성함을 믿고 신하들과 모의하여 싸움을 유도하므로( 導 以 征 討 ) 전쟁은 바야흐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짐이 친히 그를 쟁취하여 후세의 걱정을 없애려 한다 ([신당서] 권 220, 열전 145 동이 <고려>). 이화여대 명예교수, 상명대 교수 - 7 -

라고하여 고구려가 그들에게 얼마나 괴로운 나라 였음을 실토하고 있다. 이때 양국간의 쟁처( 爭 處 )가 된곳은 요동( 遼 東 )이었다. 요동은 고구려가 서진할 때 먼저 장악한 곳이며, 중국이 동진할때 거쳐야 하는 요충( 要 衝 )이었다. 요동은 원래 중국 땅인데 수( 隋 )나라가 4번이나 군대를 출동하였으나 취하지 못하였 다. 내가 지금 정벌하려는 것은 중국( 唐 )을 위해서는 원수를 갚는 것이며(수의 패배에 대한 복수)고구려를 위해서는 부군( 父 君 )의 치욕(영류왕 피살)을 씻게 할뿐이다. 지금 4방을 전부 평정했는데 고구려만 정벌치 못했음으로 내가 늙기 전에 사대부의 힘을 빌어 이(요동)을 취하려 한다 ( 삼국사기 권 21, 보장왕 3년조). 에서도 당의 입장을 알수가 있다. 그러나 이곳을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쉽사리 차지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당의 고관( 蔚 州 刺 史 )인 이군구( 李 君 球 )가 고구려와 같은 작은 나라에게 무엇 때문에 힘을 기울여( 大 軍 派 遣 ) 정벌하려고 하는 가? 설령 그 나라를 정벌한다면 그 곳에 군대를 파견해서 지켜야 할텐데 군대를 적게 보내면 위엄이 서지 않고, 군대를 많이 파견하면 사람들이 모두 불안해할 것이다. 그 러면 천하( 唐 )가 군비 지출로 피폐해진다.(상동) 라고 하여 고구려를 치는 것은 치지 않는 것만 못하고, 고구려를 멸하는 것은 멸하지 않 는 것만 같이 못하다고 하여 고구려 정벌을 반대하기까지 하였다. 중국은 소위 그들의 천하관( 天 下 觀 )으로 사방은 곧 자신의 속방으로서 천하이며, 변방 으로서 만국( 萬 國 )은 중국의 은혜로 편안해진다 ( 詩 經 )는 허망된 망상을 자랑으로 여긴 다. 따라서 중국과 그 주변은 태양과 뭇별과의 관계 로 설명하면서 중국과 그 주변나라 (고구려를 포함하여)는 격( 位 相 )이 다르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자신의 지방정권( 屬 國 )인 고구려가 그 상전( 唐 )이 보는 앞에서 요하( 遼 河 )를 따라 방어선인 천리장성을 쌓는데 방 관하고 있어야 했는가. 1) 또한 자기의 지방정권을 정벌하기 위해 당 태종은 장안( 長 安 :서 안)뿐 아니라 전국각지에서 군사를 징발하였을까하는 의구심과 함께 거란 선비 말갈 족까지 동원하고 있었으니 고구려는 당의 지방정권이 아니라 당당한 경쟁국이었다. 1) 천리장성은 영류왕 14년(631)에 시작하여 16년간에 걸쳐 완성한 부여성(북: 農 安 )으로부터 비사성 (남: 大 連 )까지의 장성이다. 이 성에는 회덕 개원 심양 해성 영구까지 하변로( 河 邊 路 )가 있어 생활필수품(농산물 해산물)의 운반 역할도 하였으며, 주요 거점으로 신성(심양) 백암성(등탑) 요 동성(요양) 안시성(해성) 건안성(영구) 비사성(대련) 등이 있다. - 8 -

고구려는 이와 같이 당나라와 맞선 동방의 강국이었다. 비록 고대의 외교 형태인 조공 ( 朝 貢 )을 통해 중국과 교섭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러한 조공관계 속에서 국가의 정체 성( 正 體 性 )과 독립성( 獨 立 性 )은 결코 상실된 일이 없었다. 당나라는 수나라의 고구려 정 벌실패로 고구려에 붙들려 있는 포로와 전쟁에서 희생된 유골의 송환 및 경관( 京 觀 :수나 라 전사자를 거두어 만든 큰 무덤)의 철거를 공식으로 요구하였으며, 이때 교환된 국서 ( 國 書 )에 다만 수나라 말기에 병난이 연달아 일어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원한은 깊어진 채 풀지 못하였다. 이제 두나라가 서로 통화하여 간격이나 차이를 둘 이유가 없다.( 但 隋 氏 季 年 連 丙 構 難 多 歷 年 歲 怨 曠 不 申 今 二 國 通 和 義 無 阻 理 구당서 권 199 상 열 전 149 상 동이<고려>) 라하고 있음을 보아 두 나라는 상하관계가 아니었다. 따라서 일찍이 동천왕 7년(233: 吳 의 嘉 和 2년)에 손권( 孫 權 )은 사굉( 謝 宏 )을 고구려에 보내어 왕을 선우( 單 于 :흉노의 왕) 로 봉한 사실은 2) 고구려가 중국을 괴롭힌 흉노족과 같이 공포의 대상이었음을 보여준 다. 이때 중국( 吳 )은 고구려에 막대한 예물( 衣 物 珍 寶 )을 바치기까지 하였다. 3) 이와 같이 고구려는 중국의 동진( 東 進 )을 막고 한반도의 생활권을 보호함으로써 백 제 신라가 성장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으며, 한반도의 안전에도 기여하였다. 동시 에 고구려가 동방의 강자로 군림하였음으로 북방의 몽골 말갈족이나 서방의 돌궐 위 글, 남방의 토욕혼( 吐 谷 渾 ) 토번( 吐 蕃 ) 등 변방세력이 성장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강국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고구려는 지리적으로 불리한 여건을 갖고 있었다. 산악지방으로 농토가 거의 없었음으로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도 식 량이 부족한 ( 雖 力 佃 作 不 足 以 實 口 腹 : 삼국지 권 30)나라였음으로 습속에 절약정신이 투철하였다. 더구나 주변(중국 부여 옥저 동예)에 여러나라가 있어 항상 국가적 시련 이 있었음으로 고구려는 일찍부터 상무정신( 尙 武 精 神 )과 국민적 단결이 요구되었다. 이 러한 고구려의 성격에 대해서 장도빈( 張 道 斌 :산운, 1888~1963)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엄격한 법률, 무예( 武 藝 ), 기마사궁( 騎 馬 射 弓 ), 용검투창( 用 劍 投 槍 )의 교육, 국민의 단 2) 신형식 최규성 편, 고구려는 중국사인가 (백산자료원, 2004) p. 183 3) 삼국지 권 47 吳 主 傳 2. - 9 -

결심, 기사수렵( 騎 射 狩 獵 )의 풍속, 정의 근면의 국민성, 강건한 애국심, 그리고 남녀의 상무정신( 대고구려사 국사원, p. 102) 등으로 설명하고 있어 우리국사에서 고구려를 제하면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도 고구려는 출발부터 여러 부족의 연합으로 이룩된 나라였음으로 부족간의 융합과 타 협이 요구되었다. 일찍부터 고구려는 부족장회의( 諸 加 會 議 )에서 왕을 선출하고 범법자 ( 犯 法 者 )를 합의 처리하는 전통이 바로 이를 뒷받침하고 있었으며, 국민적 단합을 위한 정월보름의 패수물놀이 (가)와 3월3일의 사냥대회 (나)가 이를 보여준다. (가) 해마다 정월초(보름)에 패수에서 물놀이를 하는데 왕이 가마를 타고 화려한 옷을 갖추고 이를 구경한다. 놀이가 끝나면 왕은 옷을 물속에 던지는데 놀이꾼들이 두 패로 나뉘어 그것에다 돌과 물을 던지면서 떠들고 쫓아 다니기를 두세번 되풀이 하고 끝힌다.( 수서 권 30, 동이전<고구려>) (나) 고구려는 매년 3월 3일에 낙랑언덕에서 사냥을 한다. 이날 잡은 산돼지 사슴 등 으로 하늘과 산천신에 제사를 지낸다. 이 때 왕은 신하와 5부 병사들과 사냥을 나갔다.( 삼국사기 권 45, 온달전) 이러한 기록에서 볼 때, 고구려왕은 고관과 5부족 병사들과 함께 사냥을 하면서 하늘 과 산천에 제사하고 단합을 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군민( 君 民 )이 함께 즐기는 축제인 동 시에 중국과 같이 하늘의 자손 4) 으로서 당당한 천손민족의 긍지와 멋을 나타내고 있었 다. 이것이 고구려인의 천하관( 天 下 觀 )이었다. 5) 그러므로 고구려는 일찍부터 중국과 다른 전통과 의식을 갖고 있었다. 국동대혈( 國 東 大 穴 )을 통한 천신의 제사는 물론 개국신화에 나타난 영웅 전승적 의미 는 고구려인의 긍지로 나타날 수 있었다. 6) 고구려는 끝까지 중국의 정치제도(3성 6부)를 수용하지 않았 으며, 어려운 여건(빈번한 전쟁과 긴 겨울)을 이겨내면서, 노래와 유희를 즐기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중국인들과 달리 고구려인들은 특히 청결한 것을 좋아했으며 4) 고구려인들의 천손민족 의식은 삼국사기 에 주몽( 朱 蒙 )이 해모수( 天 帝 )의 아들의 아들이라고 하였 고, 삼국유사 ( 王 曆 )에도 단군의 아들로 표시하고 있다. 광개토왕 비문에도 天 帝 之 子 로 되어 있다. 5) 노태돈, 5세기 금석문에 보이는 고구려인의 천하관, ( 한국사론 17, 1979), pp.25~27. 양기석, 4~5세기 고구려왕자의 천하관, ( 호서사학 11, 1983) pp. 50~70. 6) 김두진, 고구려 개국 신화의 영웅 전승적 성격, ( 국사관논총 62, 1995)참조. 서영대, 고구려왕실 시조신화의 유형, ( 이충희선생화갑논총 1997)참조. - 10 -

가 윗사람에게는 무릎을 꿇고 절한다.( 남사 권 79) 나 부모와 남편의 상( 喪 )에는 3년, 형제상에는 3개월의 복을 입는다.( 북사 권 94) 다 혼례시에는 남자의 집에서는 돼지고기와 술을 보낼 뿐 재물을 보내지 않는다. 만약 재물을 보내는 사람은 수치로 여긴다.( 수서 권 81) 와 같이 예의범절이 깍듯하였다. 부모에 대한 효심은 호동( 好 童 :대무신왕의 아들)이 자신 을 미워했던 왕의 원비( 元 妃 )의 모함에도 불구하고 부친을 위한 효심에서 자살한 사실에 도 역력하였다. 특히 결혼시에 혼납금( 婚 納 金 )이 없던 미풍양속은 중국과 근본적으로 달 랐다. 그리고 현실에서 내세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진혼의식( 鎭 魂 意 識 )으로 씨름 을 통해 승천하는 짙은 종교의식을 잊지 않았다. 7) (가) 그 나라 사람들은 노래하고 춤추기를 좋아한다. 모든 촌락에서는 밤만되면 남녀 들이 한곳에 모여 서로 노래를 즐겼다. 성격이 깨끗하고 밝으며 자기집에서 술을 빚어 먹기를 좋아한다.( 삼국지 권 30, 위서 동이전<고구려>) (나) 당태종은 추위나 동상( 凍 傷 )에 시달리다 회군( 班 師 )을 명하였다. 이때 성안에서는 소리를 죽이고 깃발을 높혔으며, 성주( 城 主 )는 성위에 올라가 손을 모아 절을 하 여 하직하였다 ( 구당서 권 199 < 上 > 열전 145 < 上 > 동이) 와 같이 빈번한 전쟁의 참화와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낙천적인 여유와 멋을 잊지 않았으 며, 자신을 60여일이나 괴롭힌 안시성전투( 安 市 城 戰 鬪 )에서 패퇴하는 당군에게 손을 흔 들며 고이 보내준 아량에서 엿볼 수 있다. 2. 고구려의 남진과 國 原 城 고구려의 영토확장은 국초부터 주변 소국( 小 國 )의 병합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따라서 서쪽으로는 요동( 遼 東 )을 확보하여 중국의 동진( 東 進 )을 막고, 북쪽으로는 중국세력과 연 7) 전호태, 고구려벽화연구 (사계절, 1999) p. 105. 신형식, 고구려사 (이대출판부, 2003) p. 266. - 11 -

결된 부여(만주지역)를 합방하는 일이 필요하였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고조선의 전통을 이어온 대동강유역 ( 平 壤 )을 차지하는 동시에 한반도의 허리 역할을 하는 한강유역을 확 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8) 그러나 고구려 발전과정에서 우선 전제되어야 할 것은 중국과의 투쟁에서 나타나는 서방과 북방문제였다. 그 중에서도 요동문제 였다. 대표적인 철 생산지인 이곳은 한 중 간의 쟁처( 爭 處 )로서 관구검( 毌 丘 儉 )의 침입(244)이후 국난을 맞았으나 미천왕 12년(311) 의 서안평( 西 安 平 )진출로 요동을 확보함으로써 남방진출의 단초를 마련할수 있었다. 따 라서 미천왕 14년(313)의 낙랑축출( 樂 浪 逐 出 )이 가능하였으나 전연( 前 燕 : 慕 容 氏 )의 침 입과 전진( 前 秦 )과의 연합등 복잡한 양상이 계속되었다. [지도 1] 한반도북부(북한)의 고구려산성 8) 공석구, 고구려 영역확장사 연구 (서경문화사, 1998). 노태돈, 고구려사연구 (사계절, 1999). 이인철, 고구려 대외정복연구 (백산자료원, 2000). 신형식, 고구려사 (이대출판부, 2003). 이성제, 고구려의 서방정책 연구 (국학자료원, 2005). - 12 -

위의 [지도 1]에서 보듯이 고구려는 남방진출을 국가적 방향으로 정하고 내륙 해양 두방면으로 진출을 꾀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성곽배치는 평양천도 이후에 이룩된 것이 지만, 결국 평양천도를 위한 사전준비는 이러한 성곽배치로 결실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광개토왕( 廣 開 土 :391~413)의 정복사업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그의 7 방향(비문)에 나타난 정복지도 결국은 북방보다 남방진출에 초점이 두어져 9) 광개토왕의 남녁진출의 최종목표를 짐작케 한다. 이러한 사실은 백제 근초고왕 ( 近 肖 古 王 :346~375) 의 도전에 대한 반발이며, 고국원왕(333~371)의 패사에 대한 보복으로도 짐작이 간다. [지도 2] 장수산성 일대의 고구려 유적 이러한 백제의 북진은 어디까지나 고국원왕의 남진으로 이룩된 남평양(황해도 신원군 9) 박성봉, 광개토호태왕기 고구려 남진의 성격( 한국사 연구 17, 1979) pp. 25~27 서영수, 광개토왕릉비문의 정복기사재검토< 上 >( 역사학보 96, 1982) p.17 서영수, 광개토왕릉비문의 연구사적검토( 고구려 연구, 1995) p.173 윤명철, 광개토왕의 대외정책과 동아지중해 질서재편( 군사 30, 1995) 참조 - 13 -

아양리:장수산성)의 설치가 문제였다. 10) 이미 고국원왕은 전연과의 심각한 투쟁을 막 기 위한 배후세력(군량미확보, 병력의 수요충족)을 마련하려는 일련의 조치로 황해도의 곡창지를 주목한 것이다. 대중항쟁의 경제적 배경을 마련하기 위해 재령( 載 寧 ) 은율( 殷 栗 ) 수안( 隧 安 )등지의 철광과 농산물확보가 급선무였다. 특히 재령강 서흥강 남대천 등의 곡창지의 지배와 개발은 고구려 발전의 큰 몫을 할수 있었음으로 고국원왕은 바로 이이곳에 남평양을 두고 남진의 전진기지로 삼는 동시에 평양천도( 平 壤 遷 都 )의 가능성 을 타진한 것이다. 남평양은 황해도(남) 신원군 아양리와 재령강 건너편의 월당리 일대로 장수산(745m) 의 남쪽으로 10km(둘레)의 도시 (포곡산성)이다. 따라서 백제의 근초고왕이 이곳에서 고 국원왕을 패사시킨 사실을 주목할만 하다. 장수산성은 남북통로의 길목인 황주-봉산-해주로 연결되는 교통요지로서 아양리를 보 호하는 곳이다. 따라서 남평양은 내륙과 해양방어를 함께 할 수 있어 고구려 남진의 전 초기지가 되었다. 이곳에서 발견된 고구려 유물(와당)과 장수산성 남쪽의 아양리와 월당 의 도시유적(건물지와 무더떼)은 남평양의 도시유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11) 이러한 제 려간의 갈등은 광개토왕의 남정으로 일단락되었다. 광개토왕은 북방으로 비려( 裨 麗 :395), 숙신( 肅 愼 :398), 후연( 後 燕 :407), 그리고 동부여(410)를 정복하는 동시 에 백제(398), 가야(400), 그리고 대방(404)등 남방진출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남방진출은 한강유역(하류)을 확보하여 대제 라전의 주도권을 잡는 동시에 바다 로의 진출을 통해 서해를 장악하려는 정책인 것이다. 12) 이것은 중국의 동아질서( 東 亞 秩 序 )에 대한 과감한 도전으로서 고구려 중심의 세계관을 위한 첫 시도인 것이다. 13) 한강유역(하류)에로의 진출은 남평양설치를 계기로 적극화되었다. 고국양왕 8년(391) 에 신라의 실성( 實 聖 )을 인질로 삼아 신라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한 광개토왕은 즉위하자 마자 한강하류의 요충인 관미성( 關 彌 城 )을 함락시켰다. 백제는 이미 진사왕( 辰 斯 王 ) 2년 (386)에 그 북방에 관방( 關 防 )을 설치하면서 고구려의 남하에 대비하였으나 우세한 수군 10) 손영종, 고구려사, (과학백과사전 종합출판사, 1990) pp.83~188 11) 채희국 전제헌, 신원장수산성을 찾아서( 고고민속 1966-1). 안병찬, 장수산일대의 고구려 유적 유물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0-2). 서일범, 북한의 고구려산성(신형식(외)편, 고구려산성과 해양방어체제연구 백산자료원, 2000) p.177 12) 윤명철, 광개토왕의 대외정책과 동아지중해 질서재편 ( 군사 30, 1995) 윤명철, 고구려 발전기의 해양활동능력에 대한 검토 (이인철 교수 정년논총, 1995) 13) 노태돈, 금석문에 보이는 고구려인의 천하관 ( 한국사론 17, 1979) 양기석, 고구려 왕자의 천하관 ( 호서사학 11, 1983) - 14 -

을 동원한 고구려는 서해의 관문를 장악한 것이다. 이러한 해안지역의 확보는 내륙방향 의 방어체계가 마련됨으로서 백제세력을 양분한데서 가능해졌다. 특히 연천군 일대 (임 진강 유역)의 은대리성( 隱 垈 里 城 ), 당포성( 堂 浦 城 ), 호로고루( 瓠 蘆 古 壘 ), 칠중성( 七 重 城 )등 과 양주군 일대의 천보상 소래산 보루군, 그리고 한강하류의 아차산 용마산 보루군 등은 하천과 교통로를 연결하는 관방체제( 關 防 体 制 )를 이루어 한강 임진강 유역을 확 보한 것이다. 14) 따라서 삼국사기 (본기)에는 391년-394년간에 고구려와 백제사이의 치열한 전쟁기록 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패수( 浿 水 :예성강)를 중심으로 한 양국간의 대결을 나타낸 것 으로 결국 396년(영락6)의 백제 (아신왕)의 정벌이다. 以 六 年 丙 申 王 躬 率 水 軍 討 伐 殘 國 王 威 赫 怒 渡 阿 利 水 遣 刺 迫 城 獻 出 男 女 生 口 一 千 人 細 布 千 匹 跪 王 自 誓 從 今 以 後 永 爲 奴 客 이것이 광개토왕비문의 내용이다. 15) 그러나 광개토왕은 이곳을 고구려 영토로 삼은 것 이 아니라 將 殘 主 弟 幷 大 臣 十 人 旋 師 還 都 하여 무력시위를 하고 있었다. 이어 398년(영락8)의 帛 愼 土 谷 정벌이 연해주지방이 아니라 강원도북부( 濊 )일대라 면, 16) 결국 고구려의 남진을 보다 공고히 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이어 영락9년의 다음 기사 즉 百 殘 違 誓 与 倭 和 通 王 巡 下 平 壤 而 新 羅 遣 使 白 王 云 倭 人 滿 其 國 境 潰 破 城 地 以 奴 客 爲 民 歸 王 請 命 太 王 恩 慈 矜 其 忠 誠 先 遣 使 還 告 以 密 計 14) 경기도 박물관 임진강 경기3대 하천 유역 종합학술조사 1. (2000) 단국대 매장문화재연구소, 연천 은대리성 지표 및 시 발굴조사 보고서 (2004)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경기도 연천군 군사유적지표조사보고서 (1995)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양주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1998)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연천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1998)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연천호로고로 (2001) 한양대 박물관, 파주시의 역사와 문화유적 (1999). 백종오 신영문, 고구려 유적의 보고 경기도 (경기도박물관, 2005). 15) 광개토왕의 백제정벌기사가 고구려 본기에는 광개토왕 41년(394)에 실려 있으나, 백제본기에는 아 신왕 4년(395)에 나타나 있다. 16) 濱 田 耕 策, 高 句 麗 廣 開 土 大 王 碑 文 硏 究 ( 고대조선과 일본 1974) 참조. 王 健 群, 好 太 王 碑 硏 究 (1984) p.170. 이도학, 광개토왕릉비문에 보이는 전쟁기사의 분석( 광개토호대왕릉비연구 100년 1996) p.758. - 15 -

에서 볼 때 이는 보다 적극적인 남진( 征 服 )을 위한 의지의 표현으로서 국경지대의 시찰 로 곧 있을 영락 10년(400)의 대규모 출병(신라구원)의 전단계인 것이다. 17) 신라는 奴 客 (고구려 표현)으로서 충성을 약속한 것은 이미 392(내물왕37)에 실성( 實 聖 )을, 412년(실성 왕11)에는 복호( 人 好 )를 인질로 파견한데서 예견된 사실이다. 그러나 신라는 이러한 고 구려의 군사적 통제(경주에 고구려군 주둔)에 대해 내심 반발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고구려의 압력을 벗어나려는 자립운동이 나제동맹( 羅 濟 同 盟 :433~554)이다. 18) 이를 계 기로 고구려군의 축출에 따른 고구려의 반발은 결국 소지왕( 照 知 王 )의 암살기도로 나타 났으며, 19) 지증왕의 개혁이 그 결실을 맺게 된다. 영락 10년(400)의 대규모 병력( 步 騎 五 萬 )에 의한 낙동강 유역으로의 출병은 단순한 신 라구원의 차원을 넘어 고구려 신라로 이어진 남북진영과 백제 가야 왜로 연결된 동 서진영과의 국제전으로서 20) 한반도 주도권 확보를 위한 전략이라 하겠다. 이것은 한강 유역(하류)을 차지함으로서 가능한 조치인 것이다. 우리민족이 남북으로 대립 투쟁하고 있을때 한강유역은 반드시 그들 사이의 다투 는 한 보배와 구슬같이 되었다. 이리하여 이를 장중( 掌 中 )에 오래 지닌 자는 성하고 강하며 내지는 통일의 패엄을 이루었으며, 반대로 이를 잃는 쪽은 쇠약과 패멸을 면치 못하였다. 한강유역의 득실은 국가의 흥망성쇠와 지대한 관계를 가졌던 것이다. 21) 라는 이병도( 李 丙 燾 )의 지적과 같이 잡곡위주의 경제구조를 지닌 고구려는 풍부한 벼농 사지역인 이곳을 차지하려하였고, 백제는 이 지역을 지키는 동시에 비옥한 충적평야의 개발에 국력을 집중시키지 않을수 없었다. 22) 신라역시 단양적성비 에서 보듯이 조령로 ( 鳥 嶺 路 :중추-문경)를 피하고 죽령로( 竹 嶺 路 :단양-풍기)를 통한 한강상류지역부터 확 보하면서 북진을 꾀했을 것이다. 23) 17) 서영수, 辛 卯 年 記 事 의 변상과 원상 ( 광개토호태왕릉비연구 100년 ) p.406. 18) 신형식, 신라왕위계승고 ( 유홍열박사회갑논총 1971) p.74. 19) 주보돈, 영일 냉수리비에 대한 기초적 검토 ([신라문화] 6, 2002) 참조. 정창은, 신라눌지왕대 고구려 세력의 축출과 그 배경 ( 한국고대사연구 33, 2004) 참조. 정창은, 신라소지왕대 대고구려 관계와 정치변동 ( 사학연구 78, 2005) 참조. 20) 이도학, 앞의 글 p.759. 21) 이병도, 두계잡필 (1956) p.52. 22) 신형식, 한국고대에 있어서 한강유역의 정치, 군사적 성격( 향토시물 41, 1983. 신형식, 한국고대사의 신연구 (일조각, 1984) pp.271~275. 23) 신형식, 신라의 발전과 한강 ( 한국사연구 77, 1972) p.51. - 16 -

그러나 6세기 중엽 이후 약 100년간 고구려의 남경( 南 境 )이 일정하게 확보된 것이 아 니라 진출(점령)과 후퇴(철수)가 반복되면서 그 변화가 계속되었음을 주목할 수 있다. 24) 이러한 사실은 한강이북의 신라산성들이 그 수축연대가 7세기 전반을 넘지 못하기 때문 이다. 더구나 한강이북의 고구려 보루가 고구려세력의 전진이나 후퇴와 일정한 관련을 갖고 있기 때문에, 25) 임진강일대의 보루는 대부분 고구려가 계속 운영하였다고 보인다. 이러한 고구려의 남진 과정에서 그 전초기지로서 국원성( 國 原 城 )이 부각된다. 그러나 그 설치시기에 대해서 뚜렷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설치연대의 확인에 어려움이 있다. 다 만 영락 6년(396)의 백제정벌시에 포함된 58성 가운데 아단성( 阿 旦 城 ) 고모루성( 古 牟 婁 城 )등 남한강 상류지역 ( 新 來 韓 穢 )이 포함되었음으로 이 지역에 별도( 別 都 )의 필요성을 주목할 수 있다. 26) 다만 당시는 군대를 돌려 귀환 ( 旅 師 還 都 )했음으로 고구려 군사(수 군)의 위력은 물론 그 한계를 보여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국원성 설치는 영락6년(396)으 로 보기보다는 영락10년(400)의 낙동강 유역 출병시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때 군사적 통로였던 죽령로의 의미는 나려간의 쟁처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27) <표 1> 忠 州 서남 지방의 고구려 지명 高 句 麗 新 羅 高 麗 朝 鮮 現 仍 忽 陰 城 縣 陰 城 縣 陰 城 縣 陰 城 仍 斤 內 郡 槐 壤 郡 槐 州 槐 山 郡 槐 山 道 西 縣 道 西 縣 道 安 縣 淸 安 縣 淸 安 今 勿 奴 郡 黑 壤 郡 鎭 州 鎭 州 縣 鎭 川 上 芼 縣 長 延 縣 延 豊 縣 延 豊 4세기 후반 고국원왕때 신원군(아양리)에 남평양을 설치한 고구려는 백제의 도전을 극복하고 그 수도를 유린한 후 그 여세로 국원성을 충주에 설치하는 한편 한반도지배권 을 위한 남진정책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28) 제 2의 국내성을 이곳에 둔 고구려는 수도 형태에 가까운 여러 가지 시설을 갖추었을 것이다. 이곳에 남아있는 어림( 御 林 ), 이궁지 24) 서영일, 6~7세기 고구려 南 境 考 察 ( 고구려연구 11, 2001) p.32. 25) 최종택, 경기북부지역의 고구려관방체계( 고구려연구 8, 1999)참조. 26) 이도학, 위의 글 p.105. 27) 양기석, 고구려의 충주지역진출과 경영 ( 중원문화논총 6, 2002) p.65. 28) 장준식, 고구려 국원성치지에 관한 연구 ( 단국대석사논문 1982) 참조. - 17 -

( 離 宮 址 ), 그리고 하림궁( 河 臨 宮 )등의 명칭이 갖는 의미는 고대 동방사회 (Oriental despotism)에서 보여지는 방어시설 (Defense Structure) 도로망 (Net-work of Highways) 화려한 궁궐과 사원, 그리고 거대한 분묘시설( 墳 墓 施 設 )등과 비교된다. 29) 고구려가 한강상류 및 경상도(북부)일대까지 그 세력을 확장한 사실은 <표 1>에서 보 듯이 음성( 陰 城 ) 괴산( 槐 山 )일대에서 고구려 지역이 확인되었고, 제천( 堤 川 ) 청풍( 淸 風 )일대에도 고구려 지명이 보이고 있다. 30) 더구나 순흥( 順 興 ) 어숙묘( 於 宿 墓 )의 고구려 벽화 발견이나 경북일대의 고구려지명 <표 2>의 내용에서도 고구려의 남경( 南 境 )을 짐 작할 수 있다. 31) <표 2> 慶 北 일대의 고구려 지명 高 句 麗 新 羅 高 麗 朝 鮮 現 及 伐 山 郡 岌 山 郡 興 州 順 興 都 護 府 順 興 古 斯 馬 縣 玉 馬 縣 奉 化 縣 奉 化 縣 奉 化 奈 己 郡 奈 靈 郡 順 安 縣 榮 川 郡 榮 州 買 谷 縣 善 谷 縣 禮 安 縣 禮 安 縣 禮 安 助 攬 縣 眞 安 縣 甫 城 府 眞 寶 縣 眞 寶 靑 己 縣 積 善 縣 靑 鳥 縣 靑 松 縣 靑 松 伊 火 兮 縣 綠 武 縣 安 德 縣 安 德 縣 安 德 屈 火 縣 曲 城 郡 臨 河 縣 臨 河 縣 臨 河 이러한 고구려의 한강상류지역 확보는 중원고구려비 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32) 고구 려의 위상을 엿보게 된다. 다만 이 비석의 건립시기에 대해서 408~481년까지 다양한 견 해가 보이고 있지만, 33) 이 비문을 통해 고구려는 국원성을 남진경영의 거점으로 하는 한 편,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정치적 주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400년의 낙동강유역 29) Karl WittFagel, Oriental despotism (Yale Univ. pres, 1957) pp. 34~42 30) 제천은 奈 吐 郡, 청풍은 沙 熱 伊 縣, 영월은 奈 生 郡 이었다(신형식, 한국사의 전개과정과 영토, 한 국사론 34, 2002, p.61). 31) 김정배, 고구려와 신라의 영역문제( 한국사연구 61 62, 1988) p.17. 정운용, 5세기 고구려세력의 남하( 사총 35, 1989) pp.5~8. 32) 단국대 사학회, 사학지 13 (1979). 33) 고구려연구회(편), 고구려연구 10 <중원고구려비 연구> (2000). - 18 -

출병으로 100여년간 고구려군의 경주주둔이 시작되었고, 464년(자비왕7, 장수왕 52)에 철군(축출)된 후, 34) 일부 주력은 국원성에 주둔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 충주는 남북간의 요충으로 묵호자( 墨 胡 子 )의 불교전래통로였고 광개토왕의 낙동 강출병시 거쳐간 길목이었다. 그러므로 남북간의 목구멍에 해당하는 곳 ( 咽 喉 之 地 )이며 산수와 천지의 기상이 합쳐진 곳으로 남북간의 쟁처( 爭 處 )가 된 곳이다. 35) 따라서 임진 난 때 이곳을 빼앗겨서 서울이 위태해졌던 사실은 신립( 申 砬 )의 패전에서 알 수가 있었 다. 특히 충주는 조령( 鳥 嶺 )을 넘어 문경( 聞 慶 ) 점촌( 店 村 ) 상주( 尙 州 ) 선산( 善 山 )으로 이러지는 영남로의 거점이 되기 때문에 이곳에 중원비를 세워 신라에 대한 정치적 우위 권(상하관계)을 유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신라는 영남로를 피해 의성( 義 城 ) 안동( 安 東 ) 영주( 榮 州 ) 풍기( 豊 基 )를 거쳐 죽령( 竹 嶺 )을 넘어 단양을 장악함으로서, 충주를 서쪽에서 압박하여 551년 충주를 확보 하게 된다. 36) 결국 6세기 중엽 국원성( 忠 州 )를 상실한 고구려는 신라의 북진을 저지못하 고 한강하류일대를 빼앗기게 된다. 이제 삼국의 판도는 이를 계기로 신라에게 주도권을 넘기게 되었으며, 555년 진흥왕( 眞 興 王 )은 거칠부( 居 柒 夫 )와 무력( 武 力 )등을 대동하고 북 한산(비봉)에서 이 지역의 확보를 하늘에 고하고 천은( 天 恩 )에 보답하는 제사를 올린 것 이다. 37) 이와같이 한강유역은 한반도 주도권의 향배를 결정짓는 관건( 關 鍵 )이 된다. 그러나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상실한 것은 당연히 신라의 북진에 따른 군사적 패배만 은 아니다. 당시 북방의 돌궐( 突 闕 )의 위협과 계속된 귀족의 내분에 따른 정치적 시련도 간과할 수가 없다. 38) 다만, 장수왕대의 고구려 남경( 南 境 )은 금강유역(조치원, 연기)에 까 지 이르렀고 39) 내륙으로 소백산맥을 넘어 경상도 중북부지방까지 확대되었다. 40) 즉, 충 북의 음성, 괴산, 진천, 제천, 청풍, 단양 뿐 아니라, 경북의 순홍, 봉화, 영주, 예안, 청송, 영덕일대까지 그 세력이 미치고 있었다. 41) 이러한 사실은 중원고구려비 의 신라에 대 34) 일본서기 권 14, 雄 略 天 皇 8년조. 35)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14, <충주목> 형습 및 누정. 36) 신형식, 신라의 발전과 한강( 한국사연구 77, 1992) p.41. 37) 김태식, 봉선대전, 그기년물로서의 진흥왕순수비( 백산학보 88, 2003) pp.75~90. 38) 노태돈, 고구려의 한강유역상실의 원인에 대하여( 한국사연구 13, 1976) pp.31~54. 39) 정영호, 전의고구려산성소고( 천관우환력논총 1985) 참조. 정영호, 고구려의 금강유역진출에 대한 소고( 신문사학 3, 1989) 참조. 40) 정운용, 5세기 고구려 세력권의 남한( 사총 35, 1989) 참조. 서영일, 5~6세기의 고구려 동남경고찰( 사학지 24, 1991) 참조. 공석구, 고구려 영역확장사 연구 (서경문화사, 1998). 이인철, 광개토왕비를 통해본 고구려의 남방경영( 고구려 연구 2, 1996). - 19 -

한 정치적 상하관계뿐 아니라 대외적으로 중국의 동아세계질서에 맞선 고구려 중심의 세계관 에서 나타나 있다. 42) 3. 결어 - 고구려의 남진과 한강 고구려는 만주대륙에서 성장, 발전한 나라이다. 혼하( 渾 河 :압록강지류)와 압록강유역 에서 중국과 투쟁하면서 자란 나라였다. 따라서 그 국가의 서쪽 방어선이 요하( 遼 河 )였 음으로 여기부터 수도에 이르는 지역에 2중, 3중의 방어벽을 축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광개토왕(391~413)의 대정복이후 국가의 정복사업이 남방에 주력하게 되었으 며, 특히 장수왕대 (413~491)는 북위( 北 魏 :439-~534)와의 세력균형 속에서 43) 남방으로의 농경지 확대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것은 잡곡위주에서 벼농사위주 로의 사회발전을 뜻하기 때문에 자연히 한강유역의 곡창지에 대한 영토적 야욕으로 정책방향을 돌리게 되었다. 5세기 이후 고구려의 한강유역에 대한 정복욕은 결국 백제의 정벌로 나타났으며, 신라 의 북진과 충돌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백제정벌로 남진의 주도권을 장악한 고구려는 한 강을 따라 그 세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미 4세기 후엽에 남평양을 두어 남진의 기지로 삼는 동시에 평양천도의 단초를 열게 되었다. 그러나 평양천도 (427)는 결과적으로는 만 주의 광대한 영토를 상실하게 되는 과오를 범하게 되었다. 44) 5세기초에 이르러 백제에 대한 압박은 결국 한강하류지역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따 라서 광개토왕의 낙동강유역 진출을 계기로 국원성( 忠 州 )을 설치하여 한강상류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가짐으로서 3국간의 쟁패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광개 장수 왕의 지나친 외정( 外 征 )과 한강유역의 확보(군사주둔과 정치적보호)에 출혈이 강요되어 41) 신형식, 고구려의 성장과 그 영역 ( 한국사론 34, 2002) 참조. 42) 노태돈, 5세기 금석문에 보이는 천하관 ( 한국사론 17, 1979) 참조. 양기석, 4~5세기 고구려왕자의 천하관에 대하여( 호서사학 11, 1983) 참조. 43) 노태돈, 5~6세기 동아시아 국제정세와 고구려의 대외관계 ( 고구려사연구 사계절, 1999) p.342. 44) 신형식, 고구려사 (이대출판부, 2003) p.61. - 20 -

국력이 분산됨으로서 신라에 주도권을 양도하게 된다. 결국 고구려는 한강유역의 확보 와 유지에 어려움을 받게 됨으로서 한국사에 있어서 남북의 완충지는 신라에게 넘어가 역사의 주도권은 6세기에 이르러 바뀌게 되었다. 한강유역은 한반도의 주인공 을 위한 역사적 임무를 맡은 나라에 그 소유권을 부여한다. 결국 고구려는 한강유역을 한때 차지 하였으나 그 유지와 개발에 어려움을 느껴 신라에 빼앗김으로서 한반도에서의 우위권을 신라에 양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강유역은 언제나 승리자의 편 에서 그 역사적 임무를 띄게 된다. 참고문헌 1. 단국대 사학과, 사학지 13(1979) 2. 서길수, 고구려성 (KBS, 1994) 3. 박성봉(편), 고구려 남진 경영사연구 (백산자료원, 1995) 4. 이형구(외), 고구려의 고고문물 (정신문화연구원, 1996) 5. 공석구, 고구려 영역확장사연구 (서경문화사, 1998) 6. 장준식, 신라 중원경 연구 (학연문화사, 1998) 7. 여호규, 고구려성1 2 (국방사연구회, 1998, 99) 8. 길경택, 사료를 통해 본 충주 1, 2, 3(예성문화연구원, 1999) 9. 전호태, 고구려고분벽화연구 (사계절, 1999) 10. 노태돈, 고구려사연구 (사계절, 1999) 11. 고구려연구회, 중원고구려비연구 (학연문화사, 2000) 12. 이인철, 고구려의 대외정복연구 (백산자료원, 2000) 13. 신형식, 고구려사 (이대출판부, 2003) 14. 충주문화원, 충주의 향토사 (우리기획, 1998) 15., 중원문화 16(2003) 16. 임기환, 고구려정치사연구 (한나래, 2004) - 21 -

5~6세기 百 濟 의 北 界 - 475~551년 百 濟 의 漢 江 流 域 領 有 問 題 를 중심으로 - 1)양 기 석 목 차 Ⅰ. 머 리 말 2. 武 寧 王 代 의 漢 城 回 復 Ⅱ. 漢 城 關 聯 記 錄 의 檢 討 3. 聖 王 代 의 漢 城 喪 失 과 回 復 Ⅲ. 漢 江 流 域 領 有 權 의 變 化 Ⅳ. 맺음말 1. 475 年 高 句 麗 의 漢 江 流 域 支 配 Ⅰ. 머 리 말 한강유역은 한반도의 한복판을 관통하는 오늘날의 수도 서울의 젖줄이고, 남북의 육 로교통과 동서의 수운교통을 연결하는 정치 경제 문화적 중심지로 역할하여 왔기 때 문에 고대 이래 각국이 패권을 다투는 각축전 양상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곳이다. 삼국시대에 이르러 한강유역을 가장 먼저 차지한 나라는 백제이다. 백제는 고구려계 이주민인 온조집단이 한강유역에 정착하여 나라를 세운 뒤 475년 고구려의 침공으로 왕 忠 北 大 敎 授 * 이 논문은 2005년도 충북대학교 학술연구지원사업의 연구비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This work was supported by the research grant of the Chungbuk National University in 2005). - 23 -

도 한성을 빼앗긴 후 熊 津 으로 천도할 때까지 한강유역을 500년 가까이 국가 발전의 발 판을 삼았던 곳이다. 한강유역은 475년 이후 고구려의 영유기를 거쳐 551년 聖 王 때의 북 진을 통해 잠시 백제에 의해 재탈환되었으나 553년 신라의 영유가 됨으로써 신라는 삼 국 통일의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5~6세기 한강유역의 영유를 둘러싼 삼국간의 항쟁과정에서 논란이 크 게 일고 있는 부분이 475년~551년까지 백제의 한강유역에 대한 영유 문제일 것이다. 지 금까지 475년 고구려의 백제 한성 침공 이후 백제는 한강유역을 상실하고 아산만 일대 를 경계로 하여 고구려와 한동안 대치하다가 551년 성왕때의 북진으로 실지회복을 하였 다고 보는 견해 1) 가 지배적이다. 그 근거로 삼국사기 지리지에 수록되어 있는 漢 州 ( 漢 山 州 ), 朔 州 ( 牛 首 州 ), 溟 州 ( 何 瑟 羅 州 )가 한때 고구려의 영역으로 표기되어 있는 점, 2) 그리 고 백제 성왕이 신라와 가야군과 함께 고구려를 정벌하여 한강유역의 백제 고토를 수복 했다는 日 本 書 紀 기사 3) 를 들고 있다. 1994년 이후에는 서울 아차산 일대에 대한 지표 조사를 시작으로 하여 임진강유역으로 연결되는 중간 지점에 위치한 양주군 일대에 이 르는 지역에서 상당수의 고구려의 보루유적이 확인되면서 4) 이 유적이 5세기 중반에서 6 세기 중반에 걸쳐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지배했던 사실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해 주는 것 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삼국사기 백제본기 東 城 王 代 이후부터는 漢 城 漢 山 城 등 한강 유역과 관련한 지명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어서 마치 웅진시대 후기에 백제가 다시 고구 려로부터 빼앗긴 한강유역을 재탈환한 것처럼 기술해 놓고 있어 위의 통설과는 다른 면 1) 小 田 省 吾, 朝 鮮 史 大 系 ( 上 世 史 ), 朝 鮮 史 學 會, 1928, 90쪽. 津 田 左 右 吉, 長 壽 王 征 服 地 域 考 津 田 左 右 吉 全 集 11, 岩 波 書 店, 1964, 69쪽. 이병도, 한국사 (고대편), 진단학회, 1959, 428 440쪽 ; 국역 삼국사기 (하), 을유문화사, 1977, 57쪽. 노태돈, 고구려의 한성지역 병탄과 그 지배양태 서울 한강유역을 둘러싼 삼국의 각축, 2005 서 울역사학술대회 발표요지, 2005, 29~41쪽. 2) 삼국사기 권 35, 잡지4, 지리2 및 권 37, 잡지6, 지리4 고구려에 의하면 당시 고구려의 남쪽 국경 은 아산만에서 죽령 조령과 흥해를 포함한 경상북도 일원에 이르는 지역이 고구려 영역인 것으로 기술해 놓고 있다. 3) 일본서기 권 19, 흠명기 12년. 4) 이에 관한 고고학적 조사는 다음과 같다. 심광주 윤우준, 아차산의 역사와 문화유산, 구리문화원, 1994. 토지박물관, 양주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1998. 임효재 최종택 외, 아차산 제4보루 -발굴조사 종합보고서-, 서울대박물관, 2000. 서울대 발굴조사단, 시루봉 보루유적 발굴조사 약보고, 1999. - 24 -

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대한 해석을 놓고 지금까지 대략 부정론과 긍정론의 두가지 측 면에서 여러 견해가 제시되고 있어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먼저 백제가 5세기말 이후 한 강유역에 진출한 것처럼 기록한 삼국사기 백제본기 관련 기록 자체가 신빙성이 없다는 전제하에서 한성 관련 명칭이 충남 일원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는 지명이동설 5) 과, 사비 시대에 와서 무령왕계의 왕실이 왕실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조작하였다는 무령왕 계 왕실의 조작설 6) 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삼국사기 지리지의 고구려 영유기 사와 일본서기 흠명기 관련 기사를 사료 비판 없이 그대로 인정하고 있는 점, 한성을 제외하고 水 谷 城 등과 같은 지명을 한성과 같이 모두 한강 이남 지역으로 이동시킨 것으 로 볼 수 없는 점, 그리고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백제와 고구려간에 벌어진 전쟁 기록을 모두 백제측 자료에 의거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점 등에서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반면 백제의 한강유역 관련 지명 기록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551년 성왕의 한성고토 회복작전을 재검토하는 측면에서 한성 이북으로 보는 견해 7) 와, 동성 무령왕 대의 왕권강화책에 힘입어 일시적으로 회복한 것으로 보는 한강유역 일시 회복설 8) 등이 있다. 그러나 이 견해는 특정한 사건에 따른 지명들에게만 국한하여 보았던 점, 백제의 고토회복 시기가 명시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최근 발견된 서울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보루유적과 청원 남성골유적 등에서 5~6세기의 고구려 유물과 유적이 확인된 점 등에서 보다 세밀히 검토해야 할 여지가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9) 이의 실체를 밝혀줄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의 출현 없이는 앞으로 어느 쪽의 견해이든 논란이 계속될 전망이다. 이와 같이 475년과 551년 사이의 한강유역을 둘러싼 백제, 고구려, 신라간의 항쟁과정 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적 실상이 아직 해명되지 못한 부분이 여전히 문제점으로 남아있 5) 今 西 龍, 百 濟 史 硏 究, 國 書 刊 行 會, 1934, 126쪽. 이기백, 웅진시대 백제의 귀족세력 백제연구 9, 1978, 6~7쪽. 6) 이도학, 한성말 웅진시대 백제왕계의 검토 한국사연구 45, 1984, 23~25쪽. 7) 丁 若 鏞 은 성왕대 이후 漢 城 및 漢 北 州 郡 이 고구려에 의해 일시 점령된 것으로 보았고( 여유당전서 6, 강역고 3, 한성고 및 팔도연혁총서 상 하), 韓 鎭 書 는 고구려가 한강이북지역을 점령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海 東 繹 史 續 권 8, 지리고8, 백제강역총론). 이 후 김영관은 551년 기사를 529년에 고구 려에게 상실한 高 峰 縣 을 포함한 한강유역의 6군의 땅으로 보았고( 백제의 웅진천도의 배경과 한성 경영 충북사학 11 12합집, 2000, 75~91쪽), 임범식은 한성을 지금의 재령지역으로 보고 근초고 왕대에 일시 차지하였던 고구려의 재령지역을 회복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5~6세기 한강유역사 재 고:식민사학의 병폐와 관련하여 한성사학 15, 2002, 23~35쪽). 8) 양기석, 웅진시대의 백제지배층연구 사학지 14, 1980, 22~23쪽. 박찬규, 백제 웅진초기 북경문제 사학지 24, 1991, 9) 노중국, 삼국사기 의 백제 지리관련 기사 검토 삼국사기의 원전 검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 146~147쪽 및 임범식, 앞의 글, 5~23쪽 참조. - 25 -

음을 살펴보았다. 당시 한강유역이 삼국이 교쟁하는 전략적 요충이고 삼국 문화가 융합 되는 점이지대인 점을 감안해 보면 한강유역을 무대로 한 삼국항쟁과정의 실체 파악과 그 역사적 의미를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한강유역 관련 지명에 대한 실체 파악은 물론 당시 백제와 고구려의 두나라가 처해진 대내외적 상황을 함께 검토해 보면 한강유역에 대한 지배 실상도 함께 파악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따라서 이 글은 필자가 이미 제시한 한강유역 일시 회복설을 보완하는 입장에서 보다 면밀한 문헌자료의 검토와 고고학적 연구 성과를 원용하여 475년에서 551년까지 백제의 북방 영토의 변화 과정을 살피기 위해 작성된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한성 한산성 등 한강유역과 관련한 지명 기사를 새롭게 접근해 보고, 다음으로 475년 고구려의 함성 침 공으로부터 비롯된 백제의 한강유역 상실과정을 대내외적 정치 상황과 관련하여 살펴보 고, 이어 무령왕대부터 고구려에 대해 적극적인 공세를 펴서 한강유역을 회복하는 과정 을 검토할 예정이다. 끝으로 성왕 7년(529)에 고구려의 공격으로 한강유역을 다시 상실 한 후 551년에 다시 재탈환하는 과정을 살펴 볼 예정이다. 다만 관련 기록이 절대 부족 하고 또한 같은 지명이라도 시기에 따라 다른 곳으로 비정될 수 있기 때문에 추론의 범 위를 넘기기 어려운 점에 대하여 후일에 보완을 약속하는 바이다. Ⅱ. 漢 城 關 聯 記 錄 의 檢 討 백제가 475년~551년까지 한강유역을 과연 지배하고 있었는가를 살펴보기 위해 먼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는 漢 城 과 관련한 지명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A-1 봄 정월에 도읍을 옮겼다. 가을 7월 한강 서북에 축성하고 漢 城 民 들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온조왕 14년) 2 아신왕은 枕 流 王 의 元 子 로 처음에 漢 城 別 宮 에서 출생하였다. (아신왕 즉위년) 3 가을 9월에 고구려왕 巨 璉 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서울 漢 城 을 포위하 였다.(개로왕 21년) 4 개로가 재위한지 21년에 고구려가 쳐들어와서 漢 城 을 에워쌌다.(문주왕 즉위년) - 26 -

5 여름 5월에 高 木 城 의 남쪽에 두 개의 목책을 세웠고, 또 長 嶺 城 을 축조하여 말 갈에 대비하였다. 겨울 10월에 고구려 장수 高 老 가 말갈과 더불어 漢 城 을 공격 하고자 하여 橫 岳 아래에 진군하여 주둔하였다. [무령]왕은 군사를 보내 싸워 이를 물리쳤다.(무령왕 7년) 6 봄 2월에 [무령]왕이 漢 城 으로 행차하여 佐 平 因 友 와 達 率 沙 烏 등에게 명령을 내려 漢 北 의 주군의 백성으로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雙 峴 城 을 쌓게 하였 다. 3월에 漢 城 으로부터 돌아왔다.(무령왕 23년) 위의 기사에서 보이는 漢 城 은(A-1~4) 백제 한성시대의 왕도를 의미하는 용어임에는 틀림이 없다. 여기서 漢 城 은 삼국사기 온조왕 즉위년의 慰 禮 城 으로, 日 本 書 紀 雄 略 紀 20년에 인용된 百 濟 記 에는 尉 禮 로도 표기되어 있는데 책계왕 즉위년(286)에 수리 한 바 있는 지금의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을 지칭한다. 475년 고구려에게 공격을 받아 빼앗긴 백제의 왕도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웅진시대에 들어와서 무령왕대에 국한하여 한 성이란 지명이 다시 등장하고 있어서(A-5, 6) 그 진위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그런데 무령왕대에 백제가 고구려와 말갈과 전투한 지점이 高 木 城 長 嶺 城 橫 岳 雙 峴 城 등인데 이 전투 지점의 현재 위치를 살펴보면 무령왕대의 한강유역 확보 여부가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高 木 城 은 온조왕 22년 8월에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여 牛 頭 城 과 함께 축조된 성인데 고구려의 功 木 達 縣 으로 지금의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에 비정된 다. 10) 長 嶺 城 은 고목성과 함께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여 쌓은 것으로 보아 고목성 남쪽 방면 어느 지점으로 보인다. 당시 말갈의 침입로가 馬 首 柵 11)에서 고목성을 거쳐 횡악으 로 침입하는 루트이었는데 多 婁 王 代 의 말갈 침입루트와 동일하였음을 알 수 있다. 12) 이 를 근거로 하여 무령왕대의 영역이 한성시대의 영역관을 투영한 것이라 하여 부정하는 견해가 있으나, 13) 이 루트가 말갈의 상시적인 주요 백제 공격로이었음을 감안해 보면 같 은 맥락의 기사라 하여 이를 부정할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다음 橫 岳 은 大 東 地 志 한성 부 산수조에 의거해 볼 때 서울 삼각산에 비정된다. 이곳은 負 兒 嶽 으로 칭하기도 하였는 데 백제 왕이 자주 전렵행사를 하고 기우제를 지내는 것으로 보아 14) 백제 한성시대 神 10) 천관우, 삼한의 국가형성(하) 한국학보 3, 1976 봄, 120쪽. 11) 무령왕 3년(503)에는 말갈이 마수책을 불태우고 고목성에 침공한 바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 령왕 3년 9월). 12) 말갈의 마수성 침입기사는 다루왕 3년과 7년이었고 고목성에 침입한 기사는 다루왕 3년이었다. 13) 이도학, 앞의 글(1984), 23~25쪽. 14) 한성시대에 횡악에서 전렵이나 기우제를 지낸 기사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다루왕 4년 9월, 진사 왕 7년 8월, 아신왕 11년 여름에 보이고 있다. - 27 -

聖 之 所 의 하나였을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雙 峴 城 의 위치는 현재 알 수 없지만 아신왕 7년(398) 3월에 축조 기사가 처음 나오고 개로왕 15년(469) 10월에 수리한 기사가 참고 된다. 이때에는 쌍현성 수축 기사와 함께 靑 木 嶺 에 큰 목책을 설치하여 북한산성의 군사 를 나누어 지키게 한 것으로 보아 북한산성 이북 청목령인 개성 부근으로 추정된다. 이 러한 비명 비정과는 달리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에 지명이동설에 따라 한성 주민들은 현 재 천안시 직산의 사산성 일대로 사민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15) 이를 따르기 는 어렵다고 본다. 475년 고구려군에 의해 한성이 함락되었을 때 한성 주민 8천명이 고 구려에 끌려갔기 때문에 한성에 남아 있었던 주민들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문주왕 2년(476)에 한성 부근에 거주하고 있던 주민들을 소개시켜 차령산맥 이남의 대두 산성으로 사민시켰던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보면 삼국사기 에 보이는 한성은 백제의 왕도임에는 틀림이 없으며, 무령 왕대에 고구려 및 말갈과 전투한 지점이 한강유역의 이북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백제가 한강유역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무령왕대의 한성 은 삼국사기 에 의거해 볼 때 지명이동설에 따라 한강 이남 지역으로 변경되었을 가능 성은 적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漢 山 城 은 어느 곳에 비정될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위의 기사에 의하면 한산성 관련 기사는 웅진시대에 동성왕대에 국한해서 나타나고 있어 한성 관련 기사가 집중적으로 나오는 무령왕대와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기존의 견해는 한산성과 한성을 같은 곳으로 이해하여 지금의 서울을 지칭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16) 그런데 한산 성은 한성과는 달리 시기에 따라 다른 곳으로 비정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대 이전의 한산(성) 관련 기사와 비교하여 한산성의 위치를 살펴보기로 하자. B-1 [그들은] 드디어 漢 山 에 이르러 負 兒 嶽 에 올라가 살만한 곳을 바라보았다.(백제 시조 온조왕) 2 가을 7월에 漢 山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慰 禮 城 의 민가들을 옮겼다.(온조 15) 삼국유사 권 1, 왕력1 백제, 都 慰 禮 城 一 云 蛇 川 今 稷 山. 직산의 위례성은 웅진 천도 이후 옮 겨진 한성으로 보고 진씨의 세력 기반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이기백, 앞의 글, 15쪽). 16) 필자도 이러한 인식하에서 논지를 전개해 왔으나(앞의 글(1980), 22~23쪽), 한성과 한산은 서로 다 른 지역인 것으로 수정한다. 따라서 동성왕과 무령왕대의 한성 회복 사실은 무령왕과 성왕대 초 기대에 국한시켜 이해하고자 한다. - 28 -

왕 13년) 3 여름 4월에 두 성 [ 圓 山 城 과 錦 峴 城 ]이 항복하자 그 백성들을 漢 山 북쪽으로 옮 기니 마한은 드디어 멸망하였다.(온조왕 27년) 4 가을 10월에 남옥저의 仇 頗 解 등 20여 가가 斧 壤 에 귀순하니 왕이 이들을 받아 들여 漢 山 서쪽에 안치하였다.(온조왕 43년) 5 왕이 漢 山 에서 사냥을 하다가 신비로운 사슴을 잡았다.(기루왕 27년) 6 여름 4월에 왕이 漢 山 에서 사냥을 하였다.(개루왕 4년) 7 봄 2월에 北 漢 山 城 을 쌓았다.(개루왕 5년) 8 9월 內 臣 佐 平 優 福 이 北 漢 城 을 근거로 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군사를 발동 하여 토벌하였다.(비류왕 24년) 9 서울을 漢 山 으로 옮겼다.(근초고왕 26년) 10 봄 2월에 漢 山 에 절을 세우고 10인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침류왕 2년) 11 가을 11월에 왕은 浿 水 의 싸움을 보복하려고 친히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漢 水 를 건너 靑 木 嶺 밑에서 머물렀다. 큰 눈을 만나 병사들이 많이 얼어죽자 군 을 돌려 漢 山 城 에 이르러 군사들을 위로하였다.(아신왕 4년) 12 3월에 雙 峴 城 을 쌓았다. 가을 8월에 왕이 장차 고구려를 치려고 군사를 내서 漢 山 북쪽의 목책에 이르렀다.(아신왕 7년) 13 봄 3월에 왕이 漢 山 에서 사냥을 하였다.(비유왕 29년) 위의 기사에서 보면 A-1의 漢 山 은 백제가 하남위례성으로 천도를 단행한 온조왕 14 년 정월 이전의 기사로서, 서울의 삼각산 일대로 비정되는 負 兒 嶽 (A-1)을 포함하는 북 한산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이곳 한산은 백제초기부터 왕도 위례성의 주민들이나, 항복해 온 마한의 圓 山 城 과 錦 峴 城 의 주민들과 南 沃 沮 의 仇 頗 解 주민들을 사민시켜 조성한 지 역으로 A-2,3,4 왕도인 하남위례성 즉 한성과는 구별되는 다른 지역인 것으로 볼 수 있다. A-5,6,13의 한산은 횡악과 함께 한성시대 백제 왕들의 주요 전렵지이었으며, 이곳 북쪽에 북한산성을 축조하여 A-7,8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한산과 왕도 한 성의 북쪽지역을 방어하는 관방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A-9의 한산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근초고왕 26년(371) 평양성 전투에서 고구려의 故 國 原 王 을 전사시킬 정도로 전승을 거둔 직후에 이루어진 일이다. 이에 대해 근초고왕이 고구려의 내침에 대비하여 연접한 인근 산성으로 대피한 일시적인 조치로 이해하고 있는데, 17) 이 견해를 따르면 한산은 위 와 같이 강북 북한성(산) 일대가 아니라 강남 광주 춘궁리 일대로 비정되고 있다. 그런데 17) 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375쪽. - 29 -

이와는 달리 三 國 遺 事 에서는 북한(산)성으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되어 있다. 18) 위처럼 국초에 한산이 북한산 일대에 있었던 점을 감안해 보면 백제 근초고왕은 371년 전투의 승리로 인하여 고구려의 남평양을 확보함에 따라 북방 경영에 보다 유리한 한강 이북 북 한성으로 일시적이나마 도읍을 옮긴 것이 아닐까 한다. B-10에서는 침류왕 원년에 불교 가 수용된 이래 침류왕 2년(385) 한산에 절을 창건하여 불사를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하 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산이 백제의 初 傳 佛 敎 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A-11, 12는 阿 莘 王 代 에 고구려 광개토왕대의 적극적인 남진 공세에 대비하기 위해 한산이 군 사상 주요 거점지역으로서 기능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으로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는 한산(성)은 한성시대에 왕도 한성과는 구별 되는 지역으로 한성과 연접해 있는 왕도권역에 해당하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웅진시대에 들어와서 한산(성)은 어느 곳에 해당하는지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통해 검 토해 보자. C-1 가을 9월에 말갈이 漢 山 城 을 습격하여 깨뜨리고 300여 집을 사로잡아 돌아갔 다.(동성왕 4년) 2 봄에 [동성]왕이 사냥을 나가 漢 山 城 에 이르러 군사와 백성을 위문하고 10일만 에 돌아왔다.(동성왕 5년) 3 漢 山 사람으로 고구려로 도망해 들어간 자가 2천 명이었다.(동성왕 21년) 위 기사에 의하면 웅진시대에 한산(성)에 관한 기사는 거의 동성왕대에 집중적으로 나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동성왕대의 한산(성)은 말갈이 침공해 오는 루트상에 위치하 고 있었으며 [C-1], 동성왕이 사냥하는 전렵지로서 일정한 군사가 주둔 [C-2]하고 있었 던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한재로 인하여 굶주린 한산 사람 2천 호가 고구려로 집단 유망해 간 것을 보면 [D-3] 한산은 고구려와 접경지역에 있었음이 짐작된다. 그러 면 웅진시대 한산(성)의 위치를 알아보기 위해 동성왕대 당시 축성 지점과 고구려 및 말 갈과의 전투를 벌린 지점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동성왕대에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축성한 지점은 牛 頭 城 (486), 沙 峴 城 과 耳 山 城 (490), 沙 井 城 (498), 加 林 城 炭 峴 (501)이다. 이들 지명은 다소 견해차가 있지만, 그 중 우 두성은 대동지지 권 5 한산 성지조에 의하면 충남 한산의 乾 芝 山 城 에 비정된다. 무령 18) 삼국유사 권 2, 기이편, 남부여 전백제 및 왕력편 第 十 三 근초고왕. - 30 -

왕이 牛 頭 城 에 이르러 扞 率 解 明 에게 명하여 동성왕을 시해한 苩 加 일파를 토벌케 한 일 이 참고 된다. 沙 峴 城 은 충남 공주시 정안면 廣 停 里 山 城 에 비정되는데 19) 이곳은 차령을 넘어 공주지역에 진입하는데 요충지이다. 耳 山 城 은 충북 괴산군 도안면 尼 聖 山 城 으로, 20) 沙 井 城 은 대전 중구 사정동으로, 21) 加 林 城 은 충남 부여 임천면의 성흥산성으로, 22) 炭 峴 은 충남 금산군 진산면 교촌리 숯고개로 23) 각각 비정된다. 이처럼 동성왕대 축성 지점을 살펴보면 충남 한산 공주 부여 금산, 대전, 충북 괴산으로 거의 차령산맥 이남 지역 에 걸쳐 분포한 것으로 드러난다. 다음으로 동성왕대에 고구려와 전투를 벌린 지점은 한산성 [C-1, 482], 薩 水 와 犬 牙 城 (494), 雉 壤 城 (495)으로 나타난다. 484년에는 신라의 북변으로 표기된 母 山 城 아래에서 신라가 백제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를 격퇴한 일이 있었다. 24) 그러면 한산성을 제외하고 나제동맹군이 고구려와 전투를 벌린 지점을 살펴보자. 薩 水 는 삼국사기 권 34, 잡지 지리1에 의하면 신라 상주 삼년산군에 속한 薩 買 縣 으로 충북 괴산 청천면이나 청원 미 원일대로 비정되며, 犬 牙 城 은 경북 문경 부근으로 보는 설 25) 이 있으나 당시 고구려와 나 제동맹군이 충북 청원 미원 - 보은선에서 벌어진 점을 고려하면 보은 일대로 추정된 다. 26) 母 山 城 은 충북 진천의 대모산성으로, 雉 壤 城 은 근초고왕 24년(369)조에 의거해 볼 때 황해도 白 川 지역과 동일한 곳으로 볼 수도 있으나 당시의 전황을 고려해 볼 때 충청 도 일대의 어느 지점으로 추정되지만 지명은 미상이다. 이처럼 동성왕대에 나제동맹군 이 고구려와 전투를 벌린 지점은 거의 진천-증평-청원 미원-보은선인 중부 내륙지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정세 여하에 따라 이 교통로를 따라 일진일퇴의 공방전 이 벌어지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동성왕대에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하기 위해 축조된 산성이나 나제동맹군과 고 구려간의 전투 지점이 주로 차령산맥 이남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점을 고려해 보 19) 井 上 秀 雄, 朝 鮮 城 郭 一 覽 朝 鮮 學 報 104, 1982, 150쪽. 20) 민덕식, 고구려 도서현성고 사학연구 36, 1983. 21) 성주탁, 대전지역 고대산성고 백제연구 5, 1974, 116쪽. 22) 이병도, 앞의 책(1977), 401쪽. 23) 성주탁, 백제 탄현 소고 -김유신장군의 백제 공격로를 중심으로- 백제논총 2, 백제문화개발연 구원, 1990. 24)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마립간 6년 가을 7월. 25) 이병도, 앞의 책(1977), 400쪽. 26) 당시 신라와 고구려간의 전투가 보은 삼년산성을 모기지로 하여 보은-청원-진천선에서 벌어진 점 을 고려하면 견아성은 보은 창리의 주성산성이나 산성리의 함림산성에 비정될 수 있다(양기석, 신 라의 청주지역 진출 신라 서원소경 연구, 서경, 2001, 35쪽). - 31 -

면 한산(성)은 한성시대와는 달리 충청도 지역에 소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 하여 다음 기사가 주목된다. D-1 2월에 大 豆 山 城 을 수리하고 漢 北 의 민호를 이주시켰다.(문주왕 2년) 2 봄에 좌평 解 仇 가 恩 率 燕 信 과 함께 무리를 모아 大 豆 城 을 근거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중략) 연신이 고구려로 달아나자 그 처자를 잡아다가 웅진 저자 에서 목을 베었다.(삼근왕 2년) 3 가을 9월에 大 豆 城 을 斗 谷 으로 옮겼다.(삼근왕 3년) 위의 기사에서 백제가 고구려의 침공으로 어쩔 수 없이 웅진으로 천도함에 따라 한강 이북에 거주하던 민호들을 새로 수리한 대두산성에 옮겨 살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D- 1). 475년 당시 고구려는 주로 한성에 거주하던 주민 8천 명을 데리고 철군한 상태였기 때문에 한성은 거의 폐허화된 상태나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웅진으로 천도한 문주왕은 왕도 주변의 한산에 살고 있었던 주민들을 대거 대두산성에다 옮겨 새 삶의 터 전을 마련토록 조치를 취한 것이다. 三 斤 王 때 대두성에서 兵 官 佐 平 解 仇 가 恩 率 燕 信 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아(D-2) 대두성이 해씨세력의 근거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해씨세력은 진씨세력과 함께 한성시대에 북부에 속하였다. 해씨 세력의 기반이 된 한산 의 주민들이 웅진 천도때에 대두성에 함께 사민되었음이 쉽게 짐작된다. D-3에 의하면 해구의 난이 평정된 후에는 대두성의 주민들은 해구의 난에 연루되어 豆 谷 으로 강제 사 민된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斗 谷 은 C-3의 경우처럼 고구려와의 접경지역에 위치하 고 있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차령산맥 이남의 어느 지점일 것 같으나 분명치 않다. 27) 이 러한 점을 고려해 보면 대두성이나 두곡은 웅진시대에 사민으로 인하여 그 고유한 명칭 이외에 한산(성)으로도 불리워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대두성의 위치가 동성왕대 에 한산성의 위치를 비정하는데 관건이 될 수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다음의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이 참고된다. E-1 7월에 大 豆 山 城 을 축조하였다.(온조왕 27년) 2 가을 7월에 蕩 井 城 을 쌓고 大 豆 城 의 민가들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온조왕 36년) 27) 두곡을 지금의 공주 두곡역이나 서천의 두곡역으로 보기도 하지만(천관우, 삼한의 국가형성 한 국학보 3, 1976 봄, 130쪽), 고구려와의 접경지역임을 감안할 때 이 견해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 32 -

위 기사에서 대두산성이 축조된 후에 충남 온양으로 비정 28) 되는 蕩 井 城 이 축성되고 이곳에다 대두성의 민호들을 사민시켜 거주케 한 것으로 보아 두 성은 교통로상 근접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을 고려할 때 대두산성은 현재 아산일대로 추 정된다. 29) 해구의 난 진압된 이후에 대두성의 주민들은 고구려와의 접경지역인 두곡으 로 강제 사민된 것이다. 따라서 동성왕대의 한산(성)에 관련한 기사들은 무령왕대와는 달리 한강 북쪽 지역이 아니라 차령산맥 이남의 고구려와의 접경지역인 한산(성)을 의미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는 한성과 한산(성)의 용례를 검토한 결과 한성과 한산(성)은 구별하여 사용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한성은 백제의 왕 도를 나타낸 것으로 위치상의 변화없이 한강유역에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무령왕 대의 한성 관련 기사는 그 역사성을 인정해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한산(성)은 한성시대 에는 한강 북쪽의 북한산(성) 일대를 의미하다가 웅진 천도 이후 한산의 민호들이 대두 산성과 두곡에 사민된 연유로 해서 차령산맥 이남의 고구려와의 접경지역을 한산으로 지칭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Ⅲ. 漢 江 流 域 領 有 權 의 變 化 1. 475 年 高 句 麗 의 漢 江 流 域 支 配 475년 장수왕이 이끄는 고구려 3만 대군은 백제의 왕도 한성을 공략하여 왕성을 함락 시킨 후 개로왕을 사로잡아 죽이고 8천여 명의 포로를 이끌고 철수하였다. 이로서 백제 는 개로왕 뿐 아니라 태후 왕자들이 고구려군에게 몰살당하였고, 왕도 한성을 포함한 28) 탕정성은 현재 아산시 읍내동산성으로 비정된다(유원재, 백제 탕정성 연구 백제논총 3, 백제문 화개발연구원, 1992). 29) 대두산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1 燕 岐 說 (천관우, 삼한의 국가형성(하) 한국학보 3, 일지사, 1976, 132쪽, 2 牙 山 水 漢 山 城 說 (이기백, 앞의 글, 12쪽), 3 아산 靈 仁 山 城 說 (유원재, 앞의 글, 참조) 등 이 있다. - 33 -

한강유역 일대를 모두 고구려에게 상실당하게 되었다. 이에 관한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 기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F-개로가 즉위한지 21년에 고구려가 쳐들어 와서 한성을 에워쌌다. 개로는 성문을 닫 고 스스로 굳게 지키면서 文 周 로 하여금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문주 가 군사 1만 명을 얻어 돌아오니 고구려 군사는 비록 물러갔지만 성은 파괴되고 왕은 죽었으므로 드디어 왕위에 올랐다. (중략) 겨울 10월에 서울을 熊 津 으로 옮겼다.(문주왕 즉위년) 위 기사에 의하면 백제가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고 한성을 상실한 후 文 周 가 왕위에 즉위한 후 웅진으로 천도한 내용의 기사가 실려져 있다. 이 기사대로라면 장수왕이 이끄 는 3만의 고구려군이 한성을 불시에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살해한 다음에 백제 주민 8천 명을 포로로 삼고 곧바로 철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어 문주가 신라 구원병 1만 명을 데리고 도착하였을 때에는 고구려군이 이미 철수한 뒤였고 왕성 또한 파괴된 상태였다. 문주가 신라 구원병을 데리고 도착하여 왕위에 오른 곳은 한성이었으며 10월 에는 웅진으로 천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어쨌든 475년 고구려의 백제 공격으로 인하여 이후 한성을 포함한 한강유역은 일단 고구려의 지배하로 들어간 것으로 해석된다. 나아가 삼국사기 지리지에 고구려 영역 으로 표기되어 있는 기록에 의거하여 이때 고구려는 아산만과 경북 영일만 일대까지 영 역을 확대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 의문 을 제기하고 백제가 한강유역을 계속 영유하고 있었다는 견해가 있다. 30) 그 근거로 고구 려군이 한성 공함 직후에 포로 8천 명을 데리고 바로 철수한 점, 한성을 통치하기 위한 어떤 제도적 장치가 없었다는 점, 한성지역이 대부분 초토화되어 고구려가 영토로 삼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는 점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475년 고구려군이 한성 함락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의 병력을 남긴 채 대부분의 주력부대는 곧바로 철수한 것으로 보인다. 한강 유역과 중서부지역의 고구려유적이 둘레 200m이하의 것이 전체의 65%를 차지하고 있는 점 31) 이 참고 된다. 고구려군이 한성지역을 지키기 위해 주둔한 곳은 몽촌토성과 아차산 30) 다소 견해의 차이는 있지만 백제가 계속 한강유역을 영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는 박찬규, 앞의 글, 51~52쪽 및 임범식, 앞의 글, 28쪽을 참조할 것. 31) 심광주, 남한지역의 고구려 유적 고구려의 유적과 유물 (고구려연구회 편, 고구려연구 12), 학 - 34 -

일대의 보루성인 것 같다. 475년 한성 공함 당시 풍납토성은 사료 F의 성은 파괴되었다 란 기사에서 보듯이 고구려의 공격으로 폐허화된 상태였고 대신 고구려의 군대가 온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몽촌토성에 일정 기간 동안 주둔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때 몽촌 토성에 주둔한 고구려군은 한강 이북의 전략 거점지역과 연결하기 위하여 처음에는 아 차산과 용마산, 그리고 양주일대에 걸쳐 극히 일부 지역에 소수의 보루성을 설치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한강유역의 보루성유적에서 출토한 고구려토기가 대략 5세기 후엽에서 6 세기 중엽으로 편년되기 때문이다. 32) 고구려군은 남천한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파죽지 세로 금강유역인 청원과 대전지역에까지 남하하여 한동안 금강 對 岸 의 백제 왕도 웅진 을 공제하기 위해 고구려 최전방 기지를 건설한 것으로 보인다. 33) 그러나 남성골유적의 규모가 대략 270~360m 정도에 불과한 것을 미루어 보면 소규모 병력이 주요 교통로를 따라 전략적 요충에 주둔하고 있을 정도의 거점 지배형태를 갖춘 것으로 추정된다. 보루 성유적에서 출토된 고구려토기가 양식상 변화양상이 뚜렷하지 않고 거의 6세기 중반대 에 집중되어 있는 점이나, 보루성유적 유구의 개축 흔적이 거의 없는 점으로 보아 고구 려군이 장기간에 주둔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34) 그러면 고구려군의 주력부대가 한성 공함 직후에 바로 철수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대외적인 요인인 北 魏 및 勿 吉 과의 일련의 긴장 관계에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35) 당시 북위 문명태후는 헌문제의 후궁 청혼 문제를 둘러쌓고 고구려 장수왕과 갈등을 야기하 고 있었는데 이 와중에서 북위 사신 程 駿 을 구속하는 사건 36) 에까지 비화되었다. 그리고 당시 송화강 유역의 亞 城 일대에서 발흥한 勿 吉 이 북위에 조공관계를 맺고 여러 차례 고 구려와 분쟁을 일으킨 일이 있었다. 延 興 년간(471~476)에는 물길이 수로를 통해 백제와 연, 2001, 485쪽. 32) 이 보루성 유적에 대하여 5세기 중반~6세기 중반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최종택, 고고학상으로 본 고구려의 한강유역 진출과 백제 백제연구 28, 1998, 140~158쪽), 반면 그 중심연대를 6세기 중반으로 낮추어 보는 견해도 있다(박순발, 고구려토기의 형성에 대하여 백제연구 29, 1999, 14~16쪽). 33) 고구려군의 진출루트는 중간지대에서 고구려유적이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어 분명치는 않으나 대 략 세가지 루트가 상정된다. 하나는 천안을 거쳐 청원 남성골에 이르는 루트이고, 또 하나는 <중 원고구려비>가 있는 國 原 城 에서 금강 지류인 미호천을 따라 청원에 이르는 루트, 또 다른 것은 이천-장호원-진천-청원에 이르는 루트 등이 예상된다. 34) 심광주, 앞의 글(2001), 487쪽. 35) 475년 고구려의 한성 공략전에 대한 대외적 동향에 대해서는 노태돈, 고구려의 한성 지역 병탄과 그 지배 양태 서울 한강유역을 둘러싼 삼국의 각축, 2005 서울역사학술대회 발표요지, 2005, 30~33쪽을 참조. 36) 魏 書 권 60, 程 駿 傳 및 권 100, 고구려전. - 35 -

연결하여 고구려를 협공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여 북위의 지원을 요청한 바 있었다. 37) 이러한 북위와 물길의 심상치 않는 공세에 직면한 고구려는 백제에 대해 장기전을 펴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리고 475년 전투가 신라에까지 확대되기를 원치 않은 것 으로 보인다. 신라는 450년 悉 直 의 고구려 변장 살해사건을 계기로 하여 고구려와 점차 적대관계로 들어선데다가 백제와 연합할 경우 고구려가 단기간에 백제를 응징하려는 소 기의 목적에 차질이 생길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구려가 처한 대외적 일련의 긴장관계로 인하여 475년 백제 한성 공략전은 백제를 멸망시켜 영토지배를 도모하기보다는 단기간의 전격적인 작전을 벌려 백제를 제 압하는 효과를 겨냥한 작전으로 볼 수 있다. 38) 이 작전은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된 것 같 다. 道 琳 이란 승려를 미리 백제에 보내 개로왕에게 신임을 얻은 뒤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리게 하여 백제의 국력을 낭비케 하려는 反 間 之 計 가 활용되었다. 공격 지점은 백제의 다른 지역보다도 백제를 단기간에 타격을 입히는데 효과가 큰 왕도 한성을 목표로 하여 전광석화처럼 전개되었다. 북성인 풍납토성을 화공책을 써서 공략하여 이를 초토화하였 고 이어 남성인 몽촌토성을 공격하자 개로왕은 도망치다가 고구려군에게 사로잡혀 阿 且 城 으로 끌려가 살해되었다. 개로왕이 살해된 阿 且 城 에는 고구려 병력이 주둔해 있었는 데 아차산 보루성유적이 이때부터 설치되어 있었던 것 같다. 고구려가 475년 이후 한동안 한강유역을 영유하고 있었다는 또하나의 근거가 한강유역 의 고고 자료인 서울 몽촌토성 유적 구의동유적 아차산 일대의 보루유적과 청원 남성 골유적이다. 한강유역과 중서부지역의 고구려 유적 조사 현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89년 夢 村 土 城 39) 6차 조사에서는 3.1 3.7m 가량의 범위에서 ㄱ자형의 온돌 고래와 굴뚝시설이 확인되었는데 이러한 온돌건물터는 集 安 東 大 子 遺 蹟 의 고구려 후기 건축지 와 관련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1988~89년 조사를 통해 광구장경사이용을 비롯한 37) 魏 書 권 100, 물길전. 38) 일본서기 권 14, 웅략기 20년 겨울조에는 고구려가 한성을 함락시킨 이후 고구려 장군들이 백제 를 추격하여 멸망시킬 것을 요청하였으나 장수왕이 백제와 왜와의 관계를 들어 이를 중지시킨 기 사가 있다. 물론 왜의 역할이 사실과 다르게 강조된 측면이 있어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이 부분을 제외하고는 이러한 장수왕의 백제 멸망에 대한 의도를 엿보는 데에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39) 김원용 외, 몽촌토성-동북지구발굴보고, 서울대박물관, 1987 ; 몽촌토성-동남지구발굴조사보 고, 서울대박물관, 1988 ; 몽촌토성-서남지구발굴조사보고, 서울대박물관, 1989. 몽촌토성발굴조사단, 정비 복원을 위한 몽촌토성발굴조사보고서, 1984 ; 몽촌토성발굴조사보고 서, 1985. - 36 -

15개 기종 329개체분의 고구려토기가 출토되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475년 고 구려의 한강유역 진출 이후 몽촌토성이 고구려군에 의해 한동안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 다. 이 유적은 출토된 고구려토기에 의거해 볼 때 475년 한성 함락 무렵의 것으로 편년 된다. 40) 九 宜 洞 遺 蹟 41)은 직경 14.8m, 둘레 46m 정도의 석축을 쌓고 그 내부에 직경 7.6m의 수 혈을 파고 건물을 세운 형태이다. 석축부에는 두 개의 雉 가 구축되어 있으며, 수혈 내부 에는 벽체를 따라 기둥구멍과 배수시설 및 온돌이 확인되었다. 이 유적에서는 많은 양의 토기류와 철기류가 출토되었다. 철기류는 화살촉 1,300여 점을 포함하여 긴 칼 창 도 끼 등과 보습 가래 쇠스랑 등과 같은 농구류가 출토되었으며, 토기류는 광구장경사이 옹류를 포함한 19개 기종 369점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은 1976년과 77년 조사시에 백제 고분으로 보고되었으나 유적의 입지조건이나 규모, 구조 및 형태로 보아 인근 아차산 용마산 일대의 보루성과 같은 성격으로서 고구려의 한강유역 지배시 기능하였던 군사유 적임이 판명되었다. 고구려 보루유적은 아차산 용마산 일대와 양주군 일대에서 임진강유역에 이르는 지 역에 분포하고 있다. 42) 아차산과 용마산 일대의 보루성들은 400~500m 정도의 간격으로 능선 줄기를 따라 2줄로 배치되어 있다. 이 보루성은 봉우리를 중심으로 원형 또는 장타 원형의 토루를 만들고 토루 밖으로는 다듬은 할석으로 석축을 쌓아 보강한 형태를 하고 있다. 보루에는 雉 가 시설되며, 내부의 건물에는 온돌, 배수로, 집수시설을 갖추고 있다. 이 보루성에는 소규모의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어서 행정적 측면보다는 주요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단기간의 군사적 거점 기능을 가진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를 통해 고구려 의 한강유역 지배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이 유적은 구의동유적과 함께 5세기 중엽~6세기 중엽으로 보고 중심연대를 5세기 중엽으로 보는 견해 43) 와 5세기 후반~6세기 중엽으로 보고 중심연대를 6세기 중엽으로 보는 견해 44) 가 있다. 청원 남성골유적은 충북 청원군 부용면 부강리 남성골의 해발 106m의 야산 정상부와 40) 김원용 임효재 박순발, 몽촌토성-동남지구발굴조사보고, 서울대박물관, 1988. 41) 화양지구발굴조사단, 화양지구 유적발굴조사보고, 1977 ; 화양지구 유적발굴조사보고(제2차), 1977. 최종택, 한강유역 고구려토기 연구 한국고고학보 33, 1995, 34~36쪽 ; 고고학상으로 본 고구 려의 한강유역진출과 백제 백제연구 28, 1998, 141~146쪽. 42) 남한지역의 고구려 유적 분포에 대해서는 심광주, 앞의 글(2001), 453~492쪽을 참조. 43) 최종택, 한강유역 고구려토기 연구 한국고고학보 33, 1995, 69~70쪽. 44) 박순발, 고구려토기의 형성에 대하여 백제연구 29, 1999, 14~16쪽. - 37 -

사면에 걸쳐 둘레 270~360m의 산성유적이다. 최근 발굴조사 결과 45) 유적의 양상은 환호, 목책, 성벽 등이 이중 방어구조로 이루어졌으며, 그 가운데 굴립주건물터와 원뿔대 모양 의 저장구덩이, 온돌건물지, 가마터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외곽 내부의 구들집터는 고 구려식 온돌유적이며 가마터에서는 고구려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토기류는 고배와 개배 편의 백제토기가 소수 발견되며, 아울러 甕 類, 장동호류, 호류, 시루류, 동이류 등 고구려 계 토기류가 함께 출토되었다. 이 토기는 사립이 혼입되어 니질의 태토를 사용한 점, 사 이장경호 사이장경옹류와 같은 한강유역의 고구려 보루성에서 출토한 토기와는 차이가 있다. 철기류는 철촉과 주조철부가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사두형 철촉은 아차산 4보루유 적, 중국 환인의 五 女 山 城 과 집안의 丸 都 山 城 등과 관련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 유적 은 고구려토기 편년에 따라 아차산보류유적보다 빠른 5세기 후반으로 편년된다. 그밖에 진천 대모산성에서 고구려토기인 흑색마연토기 1점이 출토되었고, 46) 대전 월 평산성에서 직구호와 장동호 등 고구려토기편이 출토되어 47) 고구려 세력의 南 限 을 시시 해 주고 있으나 청원 남성골유적을 제외하고는 수량이 적어 유적의 성격과 편년을 규명 하는 데에는 자료의 보완이 필요하다. 이상으로 고구려는 475년 한성 공략전의 승리로 말미암아 동성왕대까지 한동안 한성 을 포함한 한강유역을 장악하였고 나아가 아산만 일대까지 세력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삼국사기 35권과 37권 지리지에 고구려의 영역으로 표기된 漢 州 관할의 군현들은 사 실 그대로가 아닐지라도 일시적이나마 고구려 영유기의 사정을 반영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이에 의하면 중서부지역에 있어서 고구려 세력의 南 限 은 충주( 國 原 城 ), 괴산( 仍 斤 內 郡 ), 진천( 今 勿 奴 郡 ), 안성( 皆 次 山 郡 ), 직산( 蛇 山 縣 ), 화성( 唐 城 郡 )에 걸쳐 있어 대략 차 령산맥을 경계로 하여 남천한 백제와 대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475년 고구려가 영유한 한강유역과 중서부지역을 어떠한 형태로 지배하였을 까? 물론 이를 직접적으로 알려주는 문헌 기록이나 고고 자료는 거의 없는 편이다. 위의 삼국사기 지리지의 기록처럼 군현 설치를 통해 지방관을 파견하여 통치하는 형태의 일사불란한 행정체계는 아니었을 것이다. 고구려의 통치 방식이 영역 지배보다는 母 基 地 에서 교통로를 따라 교두보나 거점을 마련하는 전략적 거점지배방식을 취한 것으로 45) 차용걸 외, 청원 남성곡 고구려유적, 충북대박물관 조사보고 제104책, 2004. 46) 차용걸 노병식, 진천 대모산성 지표조사보고서, 충북대 호서문화연구소, 1996, 84쪽. 47) 이한상, 대전 월평산성 출토 고구려토기 학산 김정학박사 송수기념논총 한국고대사와 고고학, 2000, 605~622쪽. - 38 -

보이기 때문이다. 즉 소규모 병력으로 거점을 확보하면서 유사시 기마병에 의한 신속한 공격이 가능한 보루 위주의 공격형 관방체제를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한강유역의 고구 려 보루성유적들이 比 高 200m 이하인 경우가 68%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대부분 소규 모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졌다. 48) 이에 비하여 황해도 일대에는 대규모의 고구려성들이 분포하고 있어 대조를 이룬다. 장수산성을 중심으로 수양산성, 비봉산성 등 둘레 2km~10 km에 이르는 대규모의 성들이 20~40km 정도의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대규모의 성들은 군사적 기능 이외에 행정적 기능을 수행하는 행정 치소로서 기능하였을 것이다. 이곳에는 守 事 라는 관리가 파견되어 주요 교통로상에 있는 여러 작 은 성이나 보루성을 통제하여 해당 관할지역 내의 치안 유지는 물론 백제와 신라지역에 서의 작전을 지휘하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守 事 는 <중원고구려비>에 보이는 古 牟 婁 城 守 事 나 < 冉 牟 碑 >에 보이는 北 扶 餘 守 事 와 같이 일정 방면의 교통로를 통해 주변 세력 을 통할하는 지방관 겸 군사지휘관의 기능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중원고구려 비>에 의하면 고모루성수사는 于 伐 城 - 國 原 城 - 古 牟 婁 城 으로 연결되는 종적인 관방체계를 지휘하는 위치에 있었을 것으로 본 견해가 참고된다. 49) <광개토왕릉비>에도 고모루성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모루성수사와 같은 대규모 성을 관리하는 지방관이 한성 으로 통하는 임진강과 한강유역의 여러 작은 보루성을 관할하는 형태로 한강유역을 통 치하였을 것이다. 한강유역과 중서부지역에 군사적인 성격의 청원 남성골유적과 같은 작은 성과 보루성유적을 제외하고 행정적 기능을 반영해 주는 유물 유적이 거의 발견되 지 않는 것도 이러한 고구려의 거점지배방식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한성의 경우 475년 한성 공략전으로 인해 왕도의 기반시설이 거의 황폐화되었고, 476년 한강 북쪽의 한산 주민들을 대규모로 아산의 대두산성으로 사민시킨 결과 거의 왕도의 기능이 상실 된 폐허나 다름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것이다. 고구려가 475년 한성을 영유하고 있었더라 도 이미 전쟁으로 폐허화된 백제의 옛 도읍지 한성을 지배하기 위해 행정치소를 설치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소규모의 병력을 전략적 거점지역에 주둔시켜 관할지역 내 의 치안 유지와 예상되는 백제의 반격에 대해 즉각적인 초동 대처를 도모하려 한 것이 아닐까 한다. 48) 심광주, 앞의 글(2001), 485~487쪽. 49) 서영일, 중원고구려비에 나타난 고구려 성과 관방체계 중원고구려비연구 (고구려연구회 편, 고 구려연구 10), 학연, 2000, 509~511쪽. - 39 -

2. 武 寧 王 代 의 漢 城 回 復 무령왕대에 들어와 고구려와 전투를 벌리거나 또는 한성과 관련한 기사를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사에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G-1 (즉위년) 겨울 11월에 達 率 優 永 을 보내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水 谷 城 을 습격하였다. 2 (2년) 겨울 11월에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변경을 쳤다. 3 (3년) 가을 9월에 말갈이 馬 首 柵 을 불태우고 高 木 城 으로 나아가 공격하였다. 왕 은 군사 5천명을 보내 이를 쳐서 물리쳤다. 4 (6년) 가을 7월에 말갈이 쳐들어와서 高 木 城 을 깨뜨리고 6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5 (7년) 여름 5월에 고목성의 남쪽에 두 개의 목책을 세웠고, 또 長 嶺 城 을 축조하 여 말갈에 대비하였다. 겨울 10월에 고구려 장수 高 老 가 말갈과 함께 漢 城 을 공격하고자 하여 橫 岳 아래에 진군하여 주둔하였다. 왕은 군사를 보내 싸워 이 를 물리쳤다. 6 (12년) 가을 9월에 고구려가 加 弗 城 을 습격하여 빼앗고, 군사를 옮겨 圓 山 城 을 깨뜨렸는데 죽이거나 약탈한 것이 매우 많았다. 왕이 용맹스러운 기병 3천 명 을 거느리고 葦 川 의 북쪽에서 싸웠다. 고구려사람들은 왕의 군사가 적은 것으 로 보고 만만히 여겨 陣 을 치지 않았다. 왕은 기묘한 계책을 내어 급히 쳐서 이를 크게 격파하였다. 7 (21년) 이보다 앞서 [백제]는 고구려에게 격파당하여 쇠약해진지가 여러 해였다. 이때에 이르러 表 를 올려 여러 차례 고구려를 깨뜨려 비로소 우호를 통하였으 며 다시 강국이 되었다. 고 일컬었다. 8 (23년) 봄 2월에 왕이 漢 城 으로 행차하여 佐 平 因 友 와 達 率 沙 烏 등에게 명령 을 내려 漢 北 의 주군의 백성으로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雙 峴 城 을 쌓게 하 였다. 3월에 漢 城 으로부터 돌아왔다. 위의 기사에서 두드러진 현상은 백제가 무령왕대(501~523)에 이르러 종전과는 달리 고구려에 대해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웅진 천도 후 백제는 내부의 정 정 불안으로 인하여 고구려에 대해 한동안 수세적 입장에 놓여 있었다. 東 城 王 代 (479~501)는 고구려가 세력균형을 위해 신라와 백제를 교대로 침공하는 현상이 나타났 다. 494년 고구려가 薩 水 原 - 犬 牙 城 에서 신라를 포위 공격을 한 일과 495년 고구려가 백 - 40 -

제의 雉 壤 城 에 침공해 들어온 일이 이러한 사례에 해당한다. 이러한 백제는 고구려의 파 상적인 남진 공세에 대하여 신라와 공동으로 대응하면서 기존의 동맹관계를 군사동맹과 결혼관계로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이로써 동성왕대의 나제 양국은 고구려의 남진을 충북 진천 [모산성]-청원 미원 [살수원]-보은 [견아성]선에서 어느 정도 저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무령왕대에 들어와서는 삼국 관계는 다소 변화된 양상을 맞게 된다. 신라는 지 증왕의 즉위를 계기로 대외 문제보다는 대내적 체제 정비에 몰두하게 되었다. 순장의 금 지와 우경의 실시(502), 신라 국호의 제정과 중국식 왕호의 사용(503), 주군제 실시(505) 등 일련의 제도 정비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신라는 대고구려 관계에서 소극 적인 자세로 전환하게 되었다. 반면 백제는 남천 이후 대내적 정정 불안으로 인해 한동 안 고구려에 대해 수세적이었던 입장을 견지하였으나 이제부터 공세적인 자세로 전환한 것이다. 무령왕 2년(502) 11월 달솔 우영( 優 永 )이 거느린 5천의 백제군이 고구려의 水 谷 城 을 선제공격한 것이다[G-1, 2]. 50) 백제의 이러한 자세 변화는 백가의 난을 평정한 이 후 전쟁을 통해 귀족세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조처의 일환으로 보인다. 의자왕 이 즉위초의 정변을 수습한 후 신라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獼 猴 城 등 40여 성을 빼앗은 사례가 이에 해당된다. 51) 이러한 백제의 공세에 대해 고구려는 주된 공격의 목표를 신라에서 백제로 바꿔 대대 적인 반격에 나섰다. 고구려는 부용세력인 말갈까지 동원하여 백제의 동 북쪽 변경지 대인 마수성과 고목성에 침입하여 백제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즉 503년 9월에 말갈 이 馬 首 柵 을 태우고 高 木 城 에 침공해 오자 백제는 5천의 군사를 보내 이를 격퇴시켰다 [G-3]. 그 뒤 506년 7월에 말갈이 다시 고목성에 쳐들어와서 6백여 명의 백성들에 대해 살상을 가하자 이듬해 백제는 고목성 남쪽에 두 개의 성책을 세우고 또한 長 嶺 城 을 축조 하여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였다[G-5]. 이어 고구려의 장군 高 老 가 말갈과 함께 漢 城 을 치려고 橫 岳 에 주둔하고 있을 때 백제가 이를 격퇴하였다[G-5]. 512년 9월에는 고구려 가 加 弗 城 과 圓 山 城 을 차례로 공파하여 살육을 자행하고 있을 때 백제가 이를 葦 川 북쪽 에서 대파시킨 바 있었다[G-6]. 이후 고구려의 백제 공격이 한동안 주춤하게 되자 무령 50) 사료 1은 고구려본기에 문자명왕 12년(503)조에 보이고 있고, 사료 2는 문자명왕 11년(502)년조에 각각 기재되어 있어 사료 1이 고구려본기의 기사보다 2년 빠르게 기재되어 있다. 두 기사는 같은 11월에 벌어진 전투였고, 백제가 고구려를 공격한 면에서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사료 1과 2의 기사는 동일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사료 2가 고구려본기와 같은 시기로 기재되어 있기 때 문에 결국 사료 1은 502년 기사로 수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여겨진다. 51)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2년 가을 7월. - 41 -

왕은 한성 지역에 대한 경영에 착수하게 되었다. 무령왕 말년인 523년 2월에 무령왕은 한성에 위무적인 성격을 가진 순행을 하면서 좌평 因 友 와 달솔 沙 烏 등에게 명하여 雙 峴 城 을 쌓게 한 다음 왕도로 귀환하였다[G-8]. 그런데 무령왕대에 들어와서 주목되는 현상은 백제와 고구려군이 한강 유역과 그 북 쪽인 임진강과 예성강 일대를 중심으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점이다. 위 사료 G에 보이 는 지명은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다음과 같이 비정할 수 있다. 水 谷 城 은 현재 황해 도 신계 지역으로 비정되며, 馬 首 柵 은 고구려의 馬 忽 郡 으로 경기도 포천 일대이며, 高 木 城 과 長 嶺 城 은 연천 일대로, 漢 城 과 橫 岳 은 서울지역으로 각각 비정된다. G-6에 보이는 加 弗 城, 圓 山 城 과 葦 川 은 서로 인접한 지역으로 보이는데 52) 어느 곳인지 알 수가 없다. 이처럼 무령왕 5년까지는 백제와 고구려 및 말갈간의 전투가 대략 서울과 그 북쪽 임진 강과 예성강 일대에서 벌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령왕대의 기사에 대하여 475~551년까지 고구려의 한 강유역 지배를 신뢰하는 입장에서 부정하는 견해가 지배적이지만 앞 장에서 서술한 바 와 같이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 기사는 고구려본기 문자명왕대의 기사에서도 함 께 기재되어 있는데 고구려본기의 대백제전투 기사가 모두 백제본기에 의거한 것이 입 증되어야 부정하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다. 그리고 백제본기의 다른 기사는 신뢰하면서 도 이 시기의 영역관련 기사만을 부정하는 입장은 엄정한 사료 비판에도 어긋나는 일이 다. 그리고 앞에서 서술하였듯이 한성은 백제본기의 용례에 의거해 볼 때 백제의 왕도를 지칭하고 있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한성이 함락당한 이후 한강유역 일대는 475년 의 전쟁으로 파괴되고 민호의 사민으로 거의 도성 기능을 상실한 지역이 되었으며, 이곳 에는 고구려군이 주둔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소규모의 고구려군이 성이나 보루성에 주 둔하여 치안 유지와 백제 침입에 대비하는 정도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곳은 전술 적으로 경기병을 동원하여 고구려 및 말갈군과 단기전을 치르는 교쟁지역이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주목되는 현상은 고구려 및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동북쪽 변경지역 의 요충에다 축성 사업을 벌리고 있는 점이다. 무령왕 7년(507)에 말갈의 상시적인 침입 로인 고목성에 두 개의 목책을 설치하고 이어 그 부근 장령성에 성곽을 축조한 것이다 52) 가불성의 위치는 1 경기도 加 平 說 (김종권, 완역 삼국사기, 선진문화사, 1963, 432쪽), 2 충북 沃 川 說 ( 조선전사 3 중세편,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1, 157쪽)이 있으며, 원산성은 1 경북 예천 용궁설(천관우, 앞의 글, 128쪽), 2 충남 금산군 북부면 마전리설( 조선전사 3, 157쪽)이 있다. 그 리고 위천을 서산으로 보는 설도 있다(김종권, 앞의 책, 432쪽). 이 3곳은 인접한 지역이기 때문에 어느 설을 취해도 거리상의 문제가 생긴다. - 42 -

[G-5]. 무령왕 23년(523)에는 국가적인 관심하에서 쌍현성을 대대적으로 축조하는 공역 을 벌리고 있다[G-8]. 축성 대상지역은 연천과 개성 이남 지역으로 백제의 북쪽과 동북 쪽의 변경 지역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507년 이전과는 다른 면을 보여준다. 예성강 유역 인 수곡성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백제의 영역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475년 이후 예성강유역 이남지역에서 차령산맥 이북 지방은 당시 삼국이 정세 여하에 따라 백제와 고구려간에 빈번히 전투를 벌리던 교쟁지역이었다. 그러나 변경 지역에 성 곽을 축조하는 일은 영역화 작업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 507년의 축성 사업은 백제가 고 목성 일대를 영역화하는 단초적 의미에서 주목된다. 53) 백제는 변경 요충에다 축성 사업 을 벌려 산성 중심의 지배 거점을 확보하고 이를 군사적 성격을 가진 지방 행정조직으로 개편하는 동시에 이 지역에서 강고하게 잔존해 오던 재지세력의 세력 기반을 해체시키 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507년에 곧바로 고구려 및 이에 부용된 말갈 의 침입을 받는 것으로 보아 동북방면의 영역화작업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512년에도 고구려군과 전투를 치루고 있다. 어쨋든 507년이 계기가 되어 한강 동북쪽의 변경지역에 대한 영역화 작업을 착수하는 단초가 된 것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523년 에는 무령왕 자신이 한성에 행차하여 한강 북쪽의 요충인 쌍현성을 축성함으로써 한강 유역에 대한 안정적인 지배를 관철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한성에 행차한다는 것은 한 성이 이제 명실공히 백제의 영역이 되었음을 대내외적으로 천명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 서 백제가 475년 한강유역을 상실한 이후 507년을 기점으로 하여 한강유역에 진출하여 이에 대한 영역화 작업을 점진적으로 착수하였다가 523년 전후에는 한강유역을 다시 안 정적으로 회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무령왕대에 이르러 다시 한성 고토를 회복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대내적으 로 무령왕대에는 신진세력의 증대된 권한을 견제하면서 신 구세력간의 세력균형을 유 지하는 가운데 왕권의 안정을 추구해 나갔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하에서 왕족을 중용하 여 친정체제의 기반을 다지고 지방의 거점지역인 22개의 檐 魯 에 子 弟 宗 族 으로 지칭되 는 왕족들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중앙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최고 관등인 좌평 제를 개편하여 확대된 신 구귀족세력들을 통제해 나갔다. 또한 무령왕 10년(510)에는 제방의 축조와 정비 및 유민 귀농책을 실시하여 호남평야의 개발과 경제 기반을 확충하 고자 하였다. 대외적으로는 512년 이래 중국 남조 梁 에 사신을 보내 국교를 강화하여 왕 53) 신현종, 6세기 전반 백제의 한강유역 진출과 대외관계, 서울대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6, 28쪽. - 43 -

권의 정통성 확보는 물론 양의 선진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대내적 체제 정비에 박차를 가 하였다. 그 결과 백제 무령왕은 521년 양으로부터 寧 東 大 將 軍 의 관작을 받게 되는 등 고 구려와 대등한 지위를 인정받았다. 이때 梁 에 보낸 국서에서 백제가 천도 후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제 고구려를 공파하여 다시 강국이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G-7]. 이러한 대 내외적 안정화 시책을 통해 백제 국력이 어느 정도 회복하게 되었고 이것이 밑바탕이 되 어 한강유역을 회복하게 된 배경이 아닐까 한다. 3. 聖 王 代 의 漢 城 喪 失 과 回 復 성왕대에는 정세 변화 여하에 따라 한강유역의 영유권에 변화가 생기는데 한강유역이 재탈환되는 551년까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타난 관련 기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H-1 (즉위년) 가을 8월에 고구려 군사가 浿 水 에 이르렀다. 왕은 左 將 志 忠 에게 명령 하여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싸우게 하여 이를 물리쳤다. 2 (7년) 겨울 10월에 興 安 [안장왕]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와서 북쪽 변 경의 穴 城 을 함락하였다. [왕]은 좌평 燕 謨 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五 谷 의 벌판에서 막아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는데 죽은 자가 2천여 명이 되었다. 3 王 逢 縣 또는 皆 伯 이라 한다. 漢 氏 미녀가 安 藏 王 을 만난 곳이므로 王 逢 이라고 이름하였다.(권 37, 지리4 漢 山 州 ) 達 乙 省 縣 미녀가 높은 산마루에서 봉화를 피워 안장왕을 맞이한 곳이므로 후에 高 烽 이라고 이름하였다.(권 37, 지리4 한산주) 4 (18년) 가을 9월에 왕은 장군 燕 會 에게 명령하여 고구려의 牛 山 城 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5 (26년) 봄 정월에 고구려 왕 平 成 [양원왕]이 濊 와 모의하여 漢 北 의 獨 山 城 을 공격하였다. 왕은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 왕은 장군 朱 珍 에게 명 령하여 갑옷 입은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떠나게 하였다. 주진이 밤낮으로 길 을 가서 독산성 아래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와 한번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6 (28년) 봄 정월 왕은 장군 達 己 를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 道 薩 城 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3월에 고구려 군사가 金 峴 城 을 포위하였다. - 44 -

위의 기사에서 사료 H-1은 聖 王 즉위년에 고구려가 침입해 오자 백제가 浿 水 에서 고 구려군을 물리친 기사인데 이때 백제가 동원한 병력수가 무려 1만 명 정도인 것을 감안 해 보면 대규모 전투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고구려와 전투를 벌린 패수는 여러 견해 가 있지만 성왕 7년(529)에 고구려와 접전을 벌린 혈성과 오곡이 한강 이북 지역이고 보 면 일단 예성강 일대로 비정된다. 다음 H-2의 북쪽 변경으로 표기된 교전지점 穴 城 은 고구려의 穴 口 郡 으로 현재의 강화군에 비정되며, 五 谷 은 고구려의 五 谷 郡 으로 현재의 황해도 서흥으로 비정된다. 이 기사는 삼국사기 지리지에 보이는 고구려의 王 逢 縣 과 達 乙 省 縣 에 대한 유래를 기록한 사료 H-3와 관련 있어 보인다. 왕봉현은 현재 경기도 고양시 행주 내 외동이고 달을성현은 현재의 고양시 관산동에 비정되는데 고구려 안장 왕과 한씨 미녀와의 일화를 남기고 있다. 이 기사는 安 藏 王 때(519~530) 고구려군이 고양 시 일대에 군사적으로 진출하는 과정을 모티브로 해서 생성된 설화로 볼 수 있다. 두 기 사는 안장왕때의 일로서 시기가 일치하고 또 혈성과 왕봉현이 서로 인접한 지역이라는 점에서 같은 맥락의 기사일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가정이 옳다면 529년 사건을 다음과 같이 재구성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즉 성왕 7년(529) 10월에 안장왕이 이끄는 고구려가 대군을 세 방면으로 나누어 백제에 침공하였는데, 본진은 오곡원(서흥) 방면으로 진격해 들어가고, 별동부대는 백제의 혈성(강화)과 왕봉현(고양시 일대)에 각각 진격해 들어가 측면 돌파를 시도하자 이에 좌평 燕 謨 가 거느린 백제의 3만 대군은 오곡원에서 고구려 군에게 대패하여 2천여 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529년의 전역에는 3만 에 이르는 백제군이 동원되어 2천여 명의 사상자가 난 것으로 보아 고구려와 백제 두 나 라 간의 벌어진 대규모 전투였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백제의 완패로 끝난 것이다. 전 투지점이 거의 서울 일원에서 벌어진 만큼 백제는 이 전투로 한강유역 일대를 고구려에 게 다시 빼앗겼을 가능성이 다음의 사료에서 엿보인다. 다음 사료 H-4는 사비천도(538) 직후에 벌어진 전투인데 백제가 고구려의 牛 山 城 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여기서 우산성의 우산 이란 명칭은 여러 곳이 있어 위 치는 미상이지만 고구려의 牛 岑 縣 으로 보아 현재 황해도 금천면 우봉면에 비정하는 견 해 54) 가 있다. 그런데 우산성을 황해도 금천으로 볼 경우 다음의 독산성 전투기사와 지리 적으로 맞지 않게 된다. 사료 H-5 548년의 獨 山 城 전투기사는 일본서기 권 19 흠명기 9년 4월조의 馬 津 城 전투에 인용된 註 에 정월 辛 丑 에 고구려가 군대를 이끌고 馬 津 城 54) 김병남, 백제 성왕대의 북방 영역 변화 한국사연구 120, 2003, 68쪽. - 45 -

을 포위하였다. 고 기록한 마진성과 같은 지역으로 볼 수 있다. 백제 멸망 후 당이 설치 한 주현명에 馬 津 縣 本 孤 山 이라 한 것으로 보면 馬 津 은 孤 山 즉 獨 山 과 같은 명칭 임을 알 수 있다. 연대가 동일하고 명칭도 같기 때문에 이 기사는 일본서기 의 마진성 전투기사와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독산성은 현재 충남 예산에 비정된다. 다 만 H-5에서 漢 北 으로 표기하고 있어서 한강이북지역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성왕 26년 이후 나제동맹군이 고구려군의 침입에 대하여 차령산맥 일대 충청도 일원에서 공 동 작전을 수행한 사실을 고려해 보면 독산성은 예산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漢 北 이란 표기는 한강유역에서 아산으로 移 置 된 한산의 북쪽지방이란 뜻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이 전투에서 백제는 신라에 구원 요청을 하여 고구려와 이에 부용된 말갈의 침입 을 격퇴시키고 있다. 사료 H-6의 고구려의 道 薩 城 과 백제의 金 峴 城 에서 려제 양국의 군대가 공방전을 벌 리는 기사이다. 이후에 진전된 기사가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1년(550)에 나온다. 이에 의하면 신라는 두나라가 지친 틈을 타서 이찬 異 斯 夫 가 이끄는 신라군이 두 성을 공취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도살성과 금현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많은 이설이 있으나 도살성은 증평의 이성산성으로, 55) 금현성은 충남 연기군 전동면의 금성산성에 56) 비정할 수 있다. 이상에서 보듯이 성왕대에 백제와 고구려가 전투한 지점을 살펴보면 패수(예성강), 혈 성(강화), 오곡(서흥), 왕봉현과 달을성현(고양시), 우산성(우봉?), 독산성(예산), 도살성(증 평), 금현성(연기)로 나타난다. 그런데 540년의 우산성 전투는 그 위치가 불명이지만 529 55) 도살성의 위치에 대하여 1 음성의 백마령설(신채호, 조선상고사 Ⅰ, 동서문고, 1977, 270~272 쪽), 2 천안설(이병도, 앞의 책, 1977, 57쪽), 3 충북 괴산군 증평의 尼 聖 山 城 과 진천군 초평면 영 구리의 頭 陀 山 城 일대로 보는 견해(민덕식, 고구려 도서현성고 사학연구 36, 1983, 9쪽) 등이 있다. 그런데 천안지역은 고려 태조때 비로소 천안도독부가 설치된 곳이었고, 백제 성왕때 한강하 류 지역에 진출하는 데 전략적 요지이기 때문에 신라가 이를 공취할 경우 백제의 반발이 크게 예 상된다. 또한 신라의 화령로와 추풍령로를 통한 북진이 청주지역을 경유한 점을 고려할 때 증평 이성산성설이 보다 설득력을 가진다. 道 薩 城 은 고구려가 현재 충북 괴산군 증평이나 청안 일대에 설치한 道 西 縣 의 관할이었다. 56) 金 峴 城 의 위치를 1 충남 연기군 전의의 金 城 山, 金 伊 山 城 說 (이병도, 앞의 책, 57쪽), 2 고구려때 今 勿 奴 郡 으로 보아 鎭 川 說 (민덕식, 앞의 글, 47쪽) 등이 있으나, 진천은 6세기 중반 당시 고구려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적당치 않다. 연기군 전동면의 金 城 山 城 은 전의에서 공주로 통하는 길목에 위 치한 금성산(424m)에 있는 석축산성으로 백제계 토기편과 기와편이 수습되고 있는데, 증평에서 청 원 옥산을 거쳐 금강의 한 지류인 미호 천변을 따라 연결되는 통로가 있다. 최근에는 인근 지역 인 청원 남성골유적에서 고구려 유물과 유적이 조사되기도 하였다. - 4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