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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AMOREPACIFIC ACADEMIC & CULTURAL FOUNDATION 국제인권발전에 대한 한국여성의 기여와 역할 * - 일본군 성노예제도 운동을 중심으로-1) 홍 성 필 연세대학교 법과대학 1. 들어가는 말 아시아 각지에서 최대 20만 명의 여성이 일본에 의하여 군대성노예로 내 몰렸던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도 62년, 피해자들의 용기있는 증언과 역사적 인 증거 앞에 일본 정부가 마지못해 개입사실을 인정한지도 14년이 지났다. 이러한 시간의 경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성노예를 둘러싼 논란과 투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근본적인 이유는 인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 * 본 연구는 태평양학술문화재단의 지원에 의하여 이루어졌음. 이 글의 완성과정에서 현장 답사, 자료조사에 도움을 준 연세대학교 법과대학원 신희석군과 이숭현 석사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 특히 신희석씨는 논문작성의 전체 과정에서 중요한 도움을 주었음을 기록 한다. 국제인권발전에 대한 한국여성의 기여와 역할 - 일본군 성노예제도 운동을 중심으로 - 295

든 국가에 의한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여성의 인권유린사례이었던 일본군 성 노예 제도에 대하여 일본이 책임회피와 사실왜곡에 급급한 태도를 바꾸지 않 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본의 태도는 비단 군대성노예 문제뿐만 아니라 징용 및 징병, 원폭 피해, 731부대의 생체실험 및 세균전 등의 사례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세계 제 2위의 경제력을 보유한 골리앗과도 같은 일본정부를 상대로 2차 대전의 피해자들과 이들을 지원하는 시민단체들은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커다란 국제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국제인권의 신장 에 기여한 분야는 바로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이다. 군대성노 예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이들의 명예와 존엄을 되찾기 위한 싸움에 불을 당긴 것은 바로 우리나라의 피해여성들과 여성 운동가들이다. 활동이 시작되던 1980년대 군대성노예는 한국에서조차 거론되지 않던 사 안이었다. 1990년대의 진상공개 이후에도 우리사회 내부에서는 이를 민족의 수치 라던가 정절 을 지키지 못한 피해자들의 잘못으로 보는 왜곡된 시각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완강한 사실왜곡 및 책임회피, 아시아여성기금이라는 얄팍한 매수 시도에도 불구하고 운동의 열기가 더해지고,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아시아 국가들, 일본, 국제 인권 NGO, UN, 미국 등 전세계에서 지지 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자, 피해자들은 자존심과 삶의 의의를 되찾고 이들을 보는 우리 사회의 시각도 바뀌어 갔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은 여느 사회운동과 마찬가지로 시 대 상황의 변화에 따라 탄력이 붙기도, 벽에 부딪히기도 하였다. 한국의 민 주화와 여권 신장, 냉전의 종식과 자민당 체제의 붕괴, 동시에 국제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르완다 제노사이드 및 보스니아 인종청소 는 전쟁 중 여성에 대한 폭력을 주요 화두로 만들었다. 1990년대 초 군대성노예 문제가 국제적 인 공론화에 성공하고 국제인권 NGO, 유엔 기관들의 보고서 및 결의들의 채택으로 이어지면서, 일본 정부의 사죄 및 배상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하였다. 그러나 기대했던 일본의 사회당이 일본 정부의 책임을 배제시키는 민간기금 형태의 아시아여성기금을 통한 위로금 지급을 추진하면서 각국의 피해자 및 지원단체들은 분열되었고 이는 운동에 깊은 상 296 여성과 사회 Woman & Society

AMOREPACIFIC ACADEMIC & CULTURAL FOUNDATION 처를 남기기도 하였다. 다른 한편, 1990년대 미국의 유대인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이 스위스,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정부들을 상대로 시작한 피해배상 소송 및 사회운동이 또 다른 자극제가 되어, 유대인 소송들을 맡았던 변호사들을 중심으로 2000 년 9월 미국 법원에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한 법정투쟁이 시작되었다. 2001 년 9.11 테러사건이 미국 사회의 관심을 대테러전과 미일 동맹으로 기울게 하여 법정운동에 커다란 장애를 초래하기도 하였고, 고이즈미, 아베 정권으로 대변되는 일본사회의 보수 우경화로 군대성노예가 역사교과서에서 삭제되는 등의 난관에 부딪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계속된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 성노예 강제동원 부인은 미국 조야에서도 비판을 받아 미국 정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한인 교포들의 적극적 활동에 힘입어, 일본 정부의 사실왜 곡 중지 및 역사교육을 촉구하는 결의가 미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한국의 여성단체들이 선도한 군대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한 역사적인 노력 은 한국, 일본, 미국, 유엔 등을 포함한 사회 일반을 변화시키고, 여성의 권 리신장에 있어서 국제인권발전사에 있어서 역사적인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 된다. 수십 년간 잊혀져왔던 2차 대전 중 인권침해 전반을 되돌아보는 기회 를 마련하였고, 유엔 등에서 전시 여성 폭력을 심각하게 살펴보는 전기를 마 련하였으며 이러한 내용은 1998년 채택된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로마협약 규정에 반영되었다. 국제노동기구(ILO)에서도 군대성노예제와 나아가 한국인 징용자의 강제노동 문제까지 매해 거론되는 주요 의제가 되었다. 미 의회에 서 군대성노예 결의안 채택을 위해 전개된 10년에 걸친 노력은 결의안의 최 종채택을 가능하게 한 한인 교포들이 미국사회에서 정치적으로 각성하고 성 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책임을 외면하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피해자와 시민사회의 운동은 시 대와 장소에 따라 다각적인 모습을 보이며 이어져오고 있다. 상술한 바와 같 이 진상규명과 공론화에서 시작된 운동은 일본 정부의 사죄, 피해자 배상, 가해자 처벌, 역사 교육 등의 요구로 이어지며, 한국, 대만, 필리핀 등의 피 해국, 일본뿐만 아니라 UN과 미국 등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고 있다. 국제인권발전에 대한 한국여성의 기여와 역할 - 일본군 성노예제도 운동을 중심으로 - 297

이 글은 먼저 국제인권사에 기여한 본 운동의 전개과정을 기록하고 종합 적으로 평가하며, 이어서 향후의 운동전개의 전망을 예측하고 바람직한 정책 적, 법률적 전망을 제시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2. 군대성노예 문제 제기 소위 위안부 의 존재는 주지의 사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인정 과정은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군대성노예의 존재는 연합군의 포로 취조 기록 등에도 나타나 있으며,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네덜란드에 의한 바타비아 전범재판에서는 인도네시아에 있던 네덜란드 여성들을 성노예화했던 일본 군 인들이 처벌되기도 하였다. 군대성노예는 전후 한일 양국의 기록, 소설, 영화 에서 발견되며 개인 차원에서 윤정옥 교수 등은 꾸준히 문제를 제기하여왔 다. 1) 일본에서는 1973년 센다 가코( 千 田 夏 光 )의 저서 종군위안부 가 나왔 고 전쟁 중 해군 중위로 복무했던 나카소네 야스히로(1982-87) 전 총리는 1978년 발간된 회고록 영원한 해군-다음 세대를 위한 이야기( 終 りなき 海 軍 若 い 世 代 へ えたい したい) 에서 필리핀 및 보르네오에 휘하 병 사들을 위한 위안소 를 설치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오키나와에서는 군대성 노예로 끌려갔던 재일교포 배봉기 씨의 사연이 1972년 재일교포들이 오키나 와에서 결성한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 에 의하여 확인되기도 하였으나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하였다. 2) 이러한 사정은 무엇보다도 전후 일본군에 의한 조직적인 자료폐기, 피해자 배상 및 가해자 처벌이 없었던 일본의 전후 1) 정진성, 일본군 성노예제: 일본군위안부문제의 실상과 그 해결을 위한 운동 (서울 :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102쪽. 2) 1972년 8월 오키나와에서 결성된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은 지금까지 40만 명이 넘는 일제 강제연행 피해자의 명부를 가지고 있으며 이 중에는 군대성노예 피해자의 이름과 본적이 기록된 명부가 있다. 오마이뉴스 2003.2.28 19:55, 이병한 일제 강제연행 피해 자 41만명 명부 공개.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09774. 298 여성과 사회 Woman & Society

AMOREPACIFIC ACADEMIC & CULTURAL FOUNDATION 처리와 이를 요구해야 할 주변 아시아 국가들의 정치 경제적 혼란, 미국과의 반공동맹, 그리고 성폭력의 피해자들을 오히려 책임의 주체로 보았던 한국 및 대만의 가부장적 유교 문화 등이 주요 원인이었다. 3) 이러한 침묵의 벽을 깬 것은 한국 피해자들과 여성 운동가들의 용기있는 행동이었다. 스스로가 근로정신대로 끌려갈 뻔 했던 개인적 경험이 있는 이 화여대 윤정옥 교수는 1980년대부터 해외 일본군 위안소 현장을 꾸준히 답사하였고, 1987년 4월 제주도에서 여성 노동자들과 민주화 운동가들의 인 권을 옹호하고 주로 일본인을 대상으로 했던 기생관광의 근절을 주장하던 한 국교회여성연합회(교회연)가 개최한 국제기생관광 세미나 에서 답사의 내용 을 발표하여 일본 여성기독교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4) 한편 1990년 1월 한 겨레신문은 윤정옥 교수의 북해도, 오키나와, 태국, 파퓨아뉴기니 취재기를 5) 보도하여 국내에서 큰 반향을 불렀일으켰다. 한편 일본 정부는 1990년 6월 6일 참의원에서 일본 정부의 조사, 사죄 및 배상 문제를 제기한 사회당 모토오카 쇼지( 本 岡 昭 次 ) 의원의 질의에 대 하여 책임을 민간업자에 돌리며 진상조사는 어렵다는 무성의한 반응만을 보 였다. 6) 이러한 일본의 태도가 알려지자 한국의 관련 단체들은 강하게 항의하 3) 정진성, 전게서 각주 3, 99-100쪽. 4) 이효재,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의 전개과정,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진상조사연구위원회(편),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상 (서울 : 역사비평사, 1997), 313쪽. 5) 한겨레신문 1990.1.4, 이화여대 윤정옥 교수 정신대 원혼 서린 발자취 취재기-훗카이 도, 한겨레신문 1990.1.21, 이화여대 윤정옥 교수 정신대 원혼 서린 발자취 취재기-오 키나와, 한겨레신문 1990.1.19. 이화여대 윤정옥 교수 정신대 원혼 서린 발자취 취재 기-타이 핫차이, 한겨레신문 1990.1.24 이화여대 윤정옥 교수 정신대 원혼 서린 발자 취 취재기-파푸아뉴기니,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편), 일본군 위안부 신문기사 자 료집 (서울 : 여성부, 2004), 45-61쪽에서 재인용. 6) 제118회 국회 참의원 예산위원회 제19호(1990년 6월 6일). 모토오카 쇼지 의원의 질의 와 기요미즈( 水 傳 雄 ) 노동성 직업안정국장의 답변 부분. http://kokkai.ndl.go.jp/sentaku/sangiin/118/1380/11806061380019c.html. 모토오카 의원은 재일교포가 많이 사는 효고현 출신으로 재일교포 차별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 의 일본인 회장으로 자료 조사를 하다가 한국인 여성 들이 등장하는 것에 의문을 가지고 위의 질의를 하게 되었다. 그는 같은 해 1984년부터 유엔에서 일본내 인권문제를 제기해온 토츠카 에츠로( 塚 朗 ) 변호사에 한국인 강제 국제인권발전에 대한 한국여성의 기여와 역할 - 일본군 성노예제도 운동을 중심으로 - 299

였으며, 일본대사관을 방문하여 일본 총리 앞으로 전달한 공개서한에서 조선 인 여성의 강제연행 사실 인정, 공식 사죄, 철저한 진상 조사, 희생자 위령비 건립, 피해자 보상, 역사교육 반영을 요구하였다. 7) 공개서한은 역시 일본에 의하여 무시되었고, 조직적인 운동의 필요성을 느낀 운동가들은 1990년 11 월 16일 교회연, 여성단체연합(여연), 전국여대생대표자협의회(여대협), 윤정 옥 교수가 조직한 정신대연구회 등 36개 국내 여성단체가 모인 한국정신대 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를 결성하였다. 정대협의 주축이 된 여성단체들은 한 국 사회에서의 민주화 및 여권신장 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교회연은 1970년대부터 산업화 과정에서 착취당하던 여성 노동자들의 생존권보장 운 동,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기생관광 근절운동에 앞장섰으며, 초기 군대성 노예 문제 제기에 적극적이었다. 여연은 공장 및 가정에서의 성폭력 문제, 1986년 부천에서 있었던 경찰의 여대생 성고문 사건 등으로 여성해방 요구 가 거세지면서 1987년 24개 국내 여성운동단체가 연합하여 조직되었다. 8) 이 렇듯 진상규명을 위한 한 학자의 꾸준한 노력과 70-80년대를 거치면서 성장 한 여성단체가 힘을 발휘하면서 운동은 탄력을 받기 시작하였다. 1991년에 들어서면서 일본 정부의 관여를 입증하는 실증적인 증거들과 증 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일본과 미국에서는 정신대원 명부를 포함한 관 련 자료들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결정적으로 동년 8월 14일 67세의 김학 순 씨가 최초로 기자회견을 열고 자신이 16세 때 군대성노예로 끌려갔었음 을 공개적으로 증언하였다. 9) 반세기의 침묵의 벽을 깬 김학순 씨의 용기있는 징용 문제의 조사를 부탁하였으며, 토츠카 변호사는 이후 국제사회에서 정대협 등과 협 력하여 군대성노예 문제를 적극 제기하고 있다. 신혜수,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 한 국제활동의 성과와 과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진상조사연구위원회(편), 일본 군 위안부 문제의 진상 (서울 : 역사비평사, 1997), 365쪽. 민주당의 중역인 모토오카 의원은 이후 일본 정부가 피해자들의 반발에도 강행한 아시아여성기금에 끝까지 반대하 며 지금도 정부 보상입법을 추진하고 있다. 7) 정신대 대책협의회의 6개 요구사항은 지금까지 군대성노예 문제해결 운동이 추구하고 있는 기본 목표를 설정하였다는 데에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이효재, 전게서 각주 6, 314-315쪽. 8) 이효재, 전게서 각주 6, 315-316쪽. 9) 한겨레신문 1991.8.15 종군위안부 참상 알리겠다/국내거주자중 첫 과거폭고 김학순씨, 300 여성과 사회 Woman & Society

AMOREPACIFIC ACADEMIC & CULTURAL FOUNDATION 발언을 시작으로 다른 피해자들과 일본 관계자들의 증언이 나오기 시작하였 다. 10) 11월에는 진상규명과 피해자들 소송 지원을 위하여 재일교포 여성 20 명이 모여 종군위안부 문제 우리 네트워크 를 결성하였다. 11) 이어서 김학순 씨를 비롯한 군대성노예 피해자 3명을 포함한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소속 징용 피해자 35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준비하여 1991년 12월 6일 도쿄 지방재판소에 제기하였다. 이렇듯 계속 들어나는 증거,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증언과 사죄 및 배상 요구에도 일본 정부는 자신들의 관여를 입증하는 자료는 없다는 입장을 고수 하였다. 12) 가토 관방장관은 정부조사를 지시했다가 내부 반발이 일자 다시 철회하는 촌극까지 연출하였다. 13) 이에 분노한 정대협은 1992년 1월 8일 주 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 일본 정부의 책임이행을 요구하며 첫 수요 집회를 벌였으며 이는 1,000회를 넘어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마침내 일본 정부는 1992년 1월 11일 주오대( 中 央 大 ) 요시미 요시아키 ( 吉 見 義 明 ) 교수가 방위청 사고에서 군의 관여를 입증하는 문건을 찾아 발 표하자,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4) 그러나 미야자와 총리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편), 전게서 각주 7, 64-66쪽에서 재인용. 10) 경향신문 1991.11.27 나는 조선여인 사냥꾼이었다 /정신대징용 일 요시다씨 속죄의 발언, 한국일보 1991.11.29. 한인 정신대 강제동원 일 군관계자 첫 증언, 한국정신 대문제대책협의회(편), 전게서 각주 7, 67-69쪽에서 재인용. 11) 세계일보 1991.11.3 일 거주 남북한 여성 20명/ 정신대 진상규명회 조직, 한국정신대 문제대책협의회(편), 전게서 각주 7, 67쪽에서 재인용. 12) 대표적으로 1991년 12월 6일 정부기관이 관여했다는 자료를 발견하지 못했다 는 가토 고이치( 加 藤 紘 一 ) 관방장관의 기자회견. 동아일보 1991.12.7 일 정부 정신대와 무관 망언/가등관방,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편), 전게서 각주 7, 72쪽에서 재인용. 13) 조선일보 1991.12.13 일, 정신대 조사방침 번복/관방장관, 노동성 반발에 내가 착각,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편), 전게서 각주 7, 73-74쪽에서 재인용. 14)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정부 관여가 없다던 가토 관방장관은 1992년 1월 13일 조 선반도 출신의 이른바 종군위안부 여러분이 체험한 고통을 생각하면 가슴이 막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며 종군위안부 문제에 구 일본군이 관여했다고 생각되는 자료가 방 위청에 발견됐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이 사실을 엄숙히 받아들인다 는 담화를 냈다. 한국일보 1992.1.15 일 정부 정신대 사죄담화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편), 전게 서 각주 7, 79-80쪽에서 재인용. 국제인권발전에 대한 한국여성의 기여와 역할 - 일본군 성노예제도 운동을 중심으로 - 301

동년 1월 17일 방한 중 국회연설에서 일본군의 관여를 시인하고 사과의 뜻 을 표했으나, 진상조사 이외에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며 법적인 문제 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에 의하여 해결되었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동시 에 비난여론을 의식한 듯 정치적 해결에 관한 언급과 함께 위자료 지급 가 능성을 내비치기도 하였다. 15) 한편, 한국뿐만 아니라 대만, 중국, 필리핀, 네 덜란드의 피해 여성들이 중언이 나타나면서 1992년 8월 서울에서는 피해국 여성대표 회의가 개최되었다. 16) 더불어 1992년 2월 군대성노예운동은 국제 법률가위원회(ICJ), NGO인 국제교육개발(IED)을 통한 유엔인권위원회에서의 의제화 노력,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지원을 통한 UN에서의 공론화노력으 로 이어졌다. 17) 그 결과 1992년 5월 인권전문가들로 구성된 UN인권소위원 회 18) 는 네덜란드의 테오 반보벤(Theo van Boven) 교수 19) 가 조사를 위임하 15) 이효재, 전게서 각주 6, 317-318쪽; 동아일보 1992.2.5 일, 정신대배상 검토/가등 관방 밝혀, 동아일보 1992.2.20 정신대 보상 문제 내각서 검토계획, 서울신문 1992.2.21 일, 정신대 보상 일축/ 어떤 문서발견돼도 이미 끝난 사항,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 회(편), 전게서 각주 7, 94쪽, 100-101쪽에서 재인용. 16) 세계일보 1992.2.7 정신대, 일 육군대신이 통괄/도조에 20명 증원파견 요청, 한겨레 신문 1992.3.13 종군위안부 아시아 각국 확산, 동아일보 1992.7.22 화란여성도 위 안부 동원 /일지 보도/자바 등지서 35명 강제연행, 중앙일보 1992.8.10 정신대문제 피해 6개국 공동대처/오늘 아주 여성대표 연대회의 개최, 세계일보 1993.2.21 말레이 시아도 정신대 첫 폭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편), 전게서 각주 7, 95쪽, 104-105 쪽, 111쪽, 119-120쪽, 136쪽에서 재인용. 17) 한겨레신문 1992.2.9 정신대/국제 연론화 추진 활발/대책협의회-가정법률상담소 적극 활동, 국민일보 1992.2.18 정신대 문제/유엔에 고발/국제민간단체, 한겨레신문 1993.2.14 정대협 유엔인권위 참석/세계교회협의회 대표자격 얻어, 한국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편), 전게서 각주 7, 97-100쪽에서 재인용. 18) 정식 명칭은 유엔 차별방지 및 소수자보호 소위원회(UN Sub-Commission on Prevention of Discrimination and Protection of Minorities). 유엔 인권위원회(UN Commission on Human Rights. 2006년 Human Rights Council로 전환) 산하 소위로 1999년 인권증진 및 보호 소위원회(Sub-Commission on the Promotion and Protection of Human Rights)로 개칭. 정부 대표들로 구성된 인권위원회와는 달리 각 국의 인권 전문가로 구성되어 있다. 19) 당시 중대인권침해 피해자의 배상권리에 관한 특별보고관(Special Rapporteur on the Right to Reparation to Victims of Gross Violations of Human Rights)이었으며 이전 에 유엔 인권센터(United Nations Centre for Human Rights: 유엔 사무국에서 인권을 302 여성과 사회 Woman & Society

AMOREPACIFIC ACADEMIC & CULTURAL FOUNDATION 고, 일본, 한국, 북한, 필리핀 등에서 실태 조사를 벌인 ICJ 조사단은 1993 년 5월 일본 정부가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중간보고서를 제출하였 다. 20)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일본 법원에서의 소송도 계속되어 1993년 4월 필리핀 피해자들과 재일교포 피해자인 송신도 씨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 을 제기하였다. 적극적인 운동흐름과 대조적으로 한국 정부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1992년 1월 일본 정부의 관여가 증명되면서 여론에 따라 군대성노예 배상 요구를 결정했던 한국 정부는 7월경 다시 1965년 한일협정에 따라 배상을 요구하기는 어렵다는 종래의 입장으로 돌아왔다. 21) 진상조사도 1992년 7월 31일 중간보고서 를 낸 이후로는 정부 차원의 조사는 없었다. 22) 1993년 3 월 13일 김영삼 대통령은 피해자들이나 지원단체와는 아무런 협의없이 도 덕적 우위를 가지고 새로운 한일관계 정립에 접근 하기 위하여 일본 측의 진상규명과 사과가 중요하며 물질적 보상은 필요하지 않다고 발표하였다. 23) 동 발표는 손해배상 소송과 UN 등에서 벌이고 있던 캠페인에 역행하는 것 이었고, 명확한 배상책임의 규명 없이 진상규명과 사죄 등이 이루어지기 어 렵다는 상식을 감안할 때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24) 이러한 정황에도 불구 담당하던 부서로 1997년 유엔개혁의 일환으로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실(Office of the United Nations High Commissioner for Human Rights)과 통합되었다) 소장을 지내며 아르헨티나 군부독재하의 실종 문제 비판에 앞장섰다. 20) 대한매일 1993.5.27 정신대 강제연행 노역/일 정부에 전적인 책임, 한겨레신문 1993.8.22 유엔 정신대 직접조사/인권소위/특별보고관 임명결의안 채택키로, 한국정 신대문제대책협의회(편), 전게서 각주 7, 145쪽, 159-160쪽에서 재인용. 21) 국민일보 1992.1.21 일에 정신대 배상 요구/정부 결정, 중앙일보 1992.7.9 일에 종 군위안부 배상청구/정부차원선 안할방침/오재희 주일대사 밝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 의회(편), 전게서 각주 7, 109-110쪽에서 재인용. 22) 정신대문제실무대책반, 일제하 군대위안부 실태조사 중간보고서 (서울 : 정신대문제 실무대책반, 1992). 군대성노예 피해자 규모, 사망률, 일본군이 사용하던 항생제나 콘 돔을 생산하던 기업에 대한 미흡한 진상규명은 미국에서의 소송에도 어려움으로 작용 하였다. 한우성, [포커스]끝나지 않은 전쟁: 미국에서 진행중인 일본군 위안부 및 징 용 소송에 대한 보고서, 당대비평, 통권 제13호(2000.12), 93-136쪽. 23) 조선일보 1993.3.14 종군위안부 보상 문제 관련/ 물질적 요구 안해 /김 대통령 밝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편), 전게서 각주 7, 140쪽에서 재인용. 국제인권발전에 대한 한국여성의 기여와 역할 - 일본군 성노예제도 운동을 중심으로 - 303

하고, 한국 정부는 이후 국내여론에 밀려 군대성노예 피해자들을 위한 지원 정책을 내놓기 시작하였다. 25) 일본정부는 1992년 1월 직접관여를 인정한 후에도 계속적으로 문제축소와 책임회피에 급급하였다. 피해자 배상도 한일 협정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 다는 논리로 책임을 회피하려 하였고, 후일 사회당이 강행하여 피해자들을 우롱하고 운동단체들을 분열시킨 국민기금안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안들을 검 토하기 시작하였다. 26) 1992년 7월 6일 가토 관방장관은 중간조사결과 발표 에서 정부조사로 발견된 127건의 문서를 공개하며 정부의 관여는 인정하면 서도 강제동원은 입증문서가 없다며 간접적으로 부인하였다. 27) 이 날 발표된 24) 물론 일본이 금전 보상을 통하여 도의적, 법률적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는 인식이 작 용하였고, 실제 이러한 우려는 후일 아시아여성기금이라는 형태로 현실화되었다. 25) 국민일보 1993.3.30 정신대피해자 지원확정/1백35명에 월15만원씩/정부 4월 국회 제 출, 대한매일 1993.6.2 정신대 에 국민주택/정부, 우선 공급키로, 한국정신대문제대 책협의회(편), 전게서 각주 7, 141쪽, 145쪽에서 재인용. 26) 국민일보 1992.7.4 일 정부 정신대 기금 검토/생계지원으로 배상대체, 조선일보 일, 정신대보상 재단 검토/정부서 기금전액 출자 한국에 설치, 한겨레신문 1992.9.2 일본 정신대 위로기금 추진/정대협 등 국내단체 큰 반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편), 전게서 각주 7, 106-107쪽, 117쪽, 124-125쪽에서 재인용. 27) 1992.7.6 한반도 출신자의 소위 종군위안부문제에 관한 가토 내각관방장관 발표( 朝 鮮 半 島 出 身 者 のいわゆる 軍 慰 安 婦 問 題 に する 加 藤 閣 官 房 長 官 表 ) http://www.mofa.go.jp/mofaj/area/taisen/kato.html. 문헌자료만을 증거로 인정하고 수백 명에 이르는 피해자의 증언은 무시하는 일본의 일 방적인 태도는 역사적 중거의 해석에 관한 상식에 반하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베를린 함락까지 치열한 전투가 계속된 나치 독일과는 달리, 일제는 1945년 8월 15일 천황의 항복 선언으로부터 9월 2일 미군이 일본 본토에 진주하기까지 2주 동안 전쟁 범죄 증거의 인멸에만 집중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군대성노예뿐만 아니라 731부대, 강제징용 자료 등도 대부분이 파괴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군대성노예의 관여입증 자료는 1992년에야 발견되었으며, 일본정부는 여전히 731부대의 생체실험, 세균전을 입증할 문서가 없다는 이유로 공식적인 사실인정을 거부하고 있다. 심지어 교육과학성 은 올해 10월 교과서 검정에서 2차 대전 말, 일본군에 의한 오키나와 민간인의 집단자 살 강요를 삭제하면서 이를 입증하는 증거는 없다고 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분개한 오 키나와 현의회 의장이 전쟁 중 일본군이 자신에게 독약이 든 주먹밥을 주며 동생들에 게 먹이라고 했던 사실을 밝히기도 하였다. 다행히 외국인 피해자들의 증언은 무시해 버리는 일본의 보수 정치인들도 같은 일본인인 오키나와인들에 대해서는 쉽사리 망언 을 내뱉지 못하고 있다. 304 여성과 사회 Woman & Society

AMOREPACIFIC ACADEMIC & CULTURAL FOUNDATION 자료의 일부는 몰래 삭제된 것으로 드러나기도 하였다. 28) 1993년 8월 4일 일본 정부가 1년 반동안의 조사 끝에 낸 보고서는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방 위청 자료 중 상당부분과 경찰, 노동성, 후생성 자료를 비공개로 분류하였 다. 29) 이와 함께 총리도 아닌 관방장관 담화 형식으로 나온 일본 정부의 성명은 강제징집에 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담당하였으나, 그런 경우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보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징집된 사례가 많이 있으며, 더구나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것도 있었다는 것이 밝혀 졌다 30) 는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고 전장에서 군대성노예의 집단학살 등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여 비판을 받았다. 31) 더불어 1994년 5월 당시 하타 내각의 나가노 시게토( 永 野 茂 門 ) 법무부장관의 공창발언을 비롯하여 일본 정 치인들은 꾸준히 망언을 쏟아냈다. 32) 이렇듯 제한적으로나마 사실관계는 인 정하면서도 법적 책임은 한결같이 부정하고 사죄를 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 발표되는 망언을 통해 진의를 보이는 일본의 대응방식은 이후에도 계속 반복 되었다. 33) 한편 1993년 8월에 이르러 1955년부터 지속되어 온 일본의 보수우익 자 민당 1당 체제가 막을 내리고 비자민당인 호소카와 내각이 출범하였다. Norimitsu Onishi, Okinawans protest revisions to World War II history, The International Herald Tribune, October 8, 2007. 28) 경향신문 1992.7.8 정신대 자료 삭제 공개/아사히/일 정부 군 관여부분 지워, 한국정 신대문제대책협의회(편), 전게서 각주 7, 109쪽에서 재인용. 29) 요시미 요시아키( 吉 見 義 明 ) 저, 이규태 역, 일본군 군대 위안부 (서울 : 小 花, 1998). 30) 1993.8.4 위안부 관계 조사결과 발표에 관한 고노 내각관방장관 담화( 慰 安 婦 係 調 査 結 果 表 に する 河 野 閣 官 房 長 官 談 話 ) http://www.mofa.go.jp/mofaj/area/taisen/kono.html. 31) 일본 정부의 발표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당사자는 한국 정부가 거의 유일하였다. 한국 일보 1993.8.5 본질외면 어정쩡한 시인 /일 정신대 담화/국내관련단체들 비난, 동아일 보 1993.8.5 한-일 위안부 문제 일단락 /외무부 아주국장 밝혀, 한국정신대문제대책 협의회(편), 전게서 각주 7, 152-153쪽, 155쪽에서 재인용. 32) 경향신문 1994.5.5 일 법상 정신대는 공창 망언/만행 합리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 의회(편), 전게서 각주 7, 171쪽에서 재인용. 33) 정진성, 전게서 각주 3, 220쪽. 국제인권발전에 대한 한국여성의 기여와 역할 - 일본군 성노예제도 운동을 중심으로 - 305

1993년 7월 총선에서 자민당이 과반의석을 상실하고 8개 야당이 일본신당의 호소카와 모리히로( 細 川 護 熙 ) 당수를 총리로 하는 연립정권 수립에 합의하여 전후문제해결의 희망을 갖도록 하였다. 그러나 후술과 같이 야당시절 군대성 노예 문제제기에 적극적이었던 사회당조차 여당이 된 후 아시아여성기금 (AWF)이라는 기만적인 정책을 강행하였다. 3. 일본에서의 운동 (1) 일본 시민단체들과의 연대 1992년 일본 정부의 관여 인정 이후, 초기 운동단체들에 더하여 일본부인 회의, YWCA, 아시아 여성들의 회 등의 여성단체들뿐만 아니라 교회, 노조, 시민단체들까지 운동에 합세하였다. 34) 이외에도 요시미 교수를 비롯한 역사 학자들은 1993년 7월 일본의 전쟁책임자료센터( 日 本 の 責 任 資 料 セン タ )를 만들었고, 일본인변호사연합회( 日 本 弁 護 士 連 合 )는 일본 정부의 배상을 지지하여 피해자들의 소송을 지원하고 한국 시민단체들의 일본 정부 상설중재재판소(PCA) 제소 노력 35) 에 협력하였다. 그러나 1994년 2월 정대협과 피해자들이 군대성노예 책임자들을 전쟁범죄 로 처벌할 것을 요구하는 고소장을 도쿄 지검에 제출하자, 많은 일본 단체들 이 이에 반발하였다. 36) 독일과는 달리 연합군 철수 이후 자체적인 전범 처 벌의 전통이 없는 일본인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고령인 피의자들을 기소 34) 상게서, 237-242쪽. 35)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PCA는 국제중재 기관으로 다른 국제재판소와는 달리 국가가 아닌 사인도 일방 당사자로 참가할 수 있다. 그래서 정대협을 비롯한 한국 단체들은 일본 정부와 1965년 협정과 배상의무에 관한 해석을 PCA 중재에 회부할 것을 요구하 였다. 1995년 일본 정부는 동 제안을 최종적으로 거부하였다. 36) 정진성, 전게서 각주 3, 245쪽. 306 여성과 사회 Woman & Society

AMOREPACIFIC ACADEMIC & CULTURAL FOUNDATION 하는 것에 거부감을 표명한 것이다. 37) 1995년 일본 정부의 아시아여성기금 설립 강행을 계기로 이러한 연대활동은 균열되었다. (2) 아시아여성기금 1993년 취임한 호소카와 총리는 8월 15일 전후 일본정치지도자로서는 처 음으로 침략전쟁의 사실을 인정하여 국내외에 신선한 충격을 추었다. 38) 그러 나 배상문제가 1965년 협정으로 해결되었다는 기존 일본 정부의 입장은 전 혀 변경되지 않았다. 39) 8개월 만에 단명한 호소카와 내각을 이은 하타 쓰토 무( 羽 田 孜 ) 총리는 현직 총리로는 전무후무하게 1994년 6월 10일 김학순 씨 등 군대성노예 11명과 비공식적으로 면담을 갖고 문제의 조기해결을 약 속하였다. 40) 그러나 하타 정권은 사회당의 연립정권 이탈로 두 달 만에 내 각 총사퇴를 해야 했다. 그리하여 1994년 6월 30일 이번에는 사회당, 자민 37) 독일에서는 1945년에서 1950년 사이 5,228명의 나치들이 독일 국내법원에서 유죄판결 을 받았으며, 독일내 여론이 나치 소추에 부정적이었던 1950년대에도 1957년 183명이 독일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는 등 국내법원에서의 재판이 계속 이루어졌다. Devin O. Pendas, The Frankfurt Auschwitz Trial, 1963-1965: Genocide, History, and the Limits of the Law (Cambridge,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 pp. 12-15. 그에 반하여 일본 전범의 처벌은 모두 연합국 재판부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일 본에서 일본 검찰과 법원이 직접 전범을 기소 재판한 예는 점령기간 중에도 그 이후 에도 없었다. 38) 전세계에서 상식으로 통하는 사실이 일본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지금도 자민당 홈페 이지는 호소카와 총리의 침략전쟁 인정이 잘못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Structural flaws within the Hosokawa administration were likely the indirect cause of several notable mishaps including Prime Minister Hosokawa s widely-criticized assertion at a press conference that Japan had acted as an aggressor in the Second World War (Nihon no shinryaku senso)... from Chapter 16: Period of President Kono s Leadership, A History of the Liberal Democratic Party at http://www.jimin.jp/jimin/english/history/chap16.html. 39) 128회 참의원 본회의 의사록(1993.9.24),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한국사연구소(편),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정부의 견해: 자료와 해설 (서울 : 여성부, 2002) 56-57쪽. 40) 경향신문 1994.6.10 일 정신대문제 조기해결/하타 내년까지 매듭/ 반성 사죄 선언추 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편), 전게서 각주 7, 172-173쪽에서 재인용. 국제인권발전에 대한 한국여성의 기여와 역할 - 일본군 성노예제도 운동을 중심으로 - 307

당의 연립으로 무라야마 정권이 출범하였다. 50년만의 사회당 출신 총리로 무라야마는 많은 기대를 모았다. 1990년부터 적극적으로 진상규명과 책임인 정을 요구해온 것은 모토오카 의원을 비롯한 사회당 의원들이었고, 1992년 6월 야당 시절 사회당의 다나베 마코토( 田 邊 誠 ) 위원장은 1965년 한일협정 당시 군대성노예 문제는 전혀 거론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이 새롭게 보상할 책임이 있다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었다. 41) 무라야마 정권 당시 자민당의 고노 요헤이( 河 野 洋 平 ) 총재도 1993년 관방장관 담화의 주인공으로 일본 정 계에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축에 속하였다. 그러나 무라야마 정권은 집권 초기부터 피해자들에 대한 직접 배상 대신 일본 국민의 모금으로 위로금( 見 舞 い 金 )을 지급하고 총리의 사죄 편지를 보 내는 것을 골자로 하는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아시아여성기금; AWF) 안을 추진하였다. 이는 1992년 일본이 처음으로 정부 관여를 인정하 고서 당시 미야자와 정권이 검토했던 기금안의 틀을 이어받아 정부, 국민 공 동의 모금을 통해 피해자들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자는 것으로 국가배상은 애 초부터 고려되지 않았다. 42) 결국 일본 정부에 법적 배상책임이 없다는 종래 자민당 및 일본정부의 공식견해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근본적 인식 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정책결정 과정에서 실제 논의가 되었던 것은 이 민간 기금의 수혜대상을 강제징용 피해자 등을 포함한 모든 전쟁피해자로 할 것인 지, 아니면 군대성노예 피해자로 국한시킬 것인지 여부였다. 43) 기금 추진자 들도 정치적 의지만 있었다면 국가배상도 가능하다고 인정하였으나 이는 정 치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 44) 기금의 성격도 시미즈 스미코( 水 純 子 ) 의원은 전후배상 민간기금재단 41) 한국일보 1992.6.25 일 정부 정신대 보상 책임 /다나베 사회당 위원장, 한국정신대문 제대책협의회(편), 전게서 각주 7, 105쪽에서 재인용. 42) 이가라시 고조( 五 十 嵐 三 ) 당시 관방장관의 설명. 와다 하루키, 오누마 야스아키, 시 모무라 미츠코 공편, 이원웅 역, 군대위안부 문제와 일본의 시민운동 (오름: 2001 년), 36-38쪽. 43) 아시아여성기금 추진의 주역이었던 오누마 야스아키 도쿄대 국제법 교수의 설명. 상게 서, 42-43쪽. 44) 상게서, 229쪽. 308 여성과 사회 Woman & Society

AMOREPACIFIC ACADEMIC & CULTURAL FOUNDATION 법안 을 통해 전후 독일의 방식대로 책임의 주체를 정부로 하여 돈을 내도록 하고 개인, 기업도 기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을 제안하였다. 45) 그러나 특별법 제정은 없었고 일본 정부의 책임도 모호하게 처리되었다. 애초에 무 라야마 정권은 일본 적십자사(일적)에 피해자 위로금 지급을 맡기려 하였으 나 논란 많은 일에 휘말리기를 원치 않았던 일적이 이를 거절하자 신규 사 업체설립으로 방침을 전환하였다. 46) 그리하여 1995년 7월 국민기금 이라는 명목 하에 일본국민의 모금을 군대성노예 피해자들에게 전달하고 일본정부가 사무국 운영비 및 의료복지사업을 담당함을 내용으로 하는 재단법인 아시아 여성기금 이 발족하였다. 이후 일본 정부는 일관되게 군대성노예 문제를 아 시아여성기금으로 대처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47) 아시아여성기금에는 사회당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와다 하루키( 和 田 春 樹 ) 교수, 오누마 야스아키( 大 沼 保 昭 ) 국제법 교수 등 사할린잔류 동포 지원, 재 일교포 지위개선에 나섰던 일본의 소위 진보 지식인들마저 가세하여 많은 이 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아시아여성기금 지지자들의 논리는 1965년 한일협정 으로 일본의 법적 배상책임은 소멸되었고, 특별법을 통한 선택적 보상은 연 립정권 파트너인 자민당과 외무성, 대장성 등의 반대라는 국내정치 현실 앞 에서 불가능하였으며, 고령의 피해자들에게 지원을 주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 이었다. 민간기금이라는 형태에 대해서도 오히려 국민기금 으로서 국민 개 개인이 공공적 책임을 지는 것이라는 그럴 듯한 주장을 펼쳤다. 48) 45) 상게서, 54-55쪽. 46) 국민일보 1995.3.2 비난받을 일을 왜 /일적, 위안부 민간기금사무국역 거부, 국민일 보 1995.3.30 종군위안부 민간기금 일 정부서 사업체설립,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 회(편), 전게서 각주 7, 186-189쪽에서 재인용. 일본적십자사는 과거 1959년에서 1962 년 사이 재일교포 10만 명의 북한 귀국사업 을 맡은 전력이 있다. 47) 133회 중의원 내각위원회(1995.8.23)에서 공산당 소속 마츠모토 젠메이( 松 本 善 明 ) 의원 배상문제 질의에 관한 노사카 고켄( 野 坂 浩 賢 ) 관방장관의 답변. 마츠모토 의원은 민간 기금에 의한 보상이 국가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딱하니까 돈을 냅시다( 家 の 責 任 を 果 たすということよりはお の 毒 だからお 金 を 出 しましょう) 라고 하는 것으 로 국가의 책임이라기보다는 자선사업 같은 것( の 責 任 というよりも 慈 善 事 業 のよう なもの) 으로 피해자들이 납득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였다. 회의록 원문은 아래 사이 트에서 확인 가능: http://kokkai.ndl.go.jp/sentaku/syugiin/133/0020/main.html. 국제인권발전에 대한 한국여성의 기여와 역할 - 일본군 성노예제도 운동을 중심으로 - 309

그러나 이는 여러 가지 면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오누마 교수도 인정하 듯이 국가배상은 정치적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위 기의식을 느낀 일본의 보수우익 세력이 역사의 시계를 다시 되돌리기 위해 파상공세를 벌인 것에 반하여 사회당, 진보지식인의 대응은 너무나 무기력하 였다. 49) 일본은 1952년 연합군 통치가 끝나자마자 군인연금을 지급하기 시작하여 이제는 해마다 전범들을 포함한 옛 군인들에게 연간 1조엔 이상의 연금을 지급하고 있다. 50) 유괴범, 강간범, 살인범에게는 연금을 주면서도 피해자에게 는 배상을 부인하는 왜곡된 현실을 지적하며 일본 국민에 국가배상 지지를 호소하는 일본 정치인은 거의 없었다. 이는 사회당이 각계의 반발을 무릎 쓰 고 1994년 11월 피폭자 원호법 51) 을 제정한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이다. 고령 의 피해자들을 위해 기금이 불가피하다는 주장도 기금 설립이 사전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발표된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상의 주장이 일본 사회의 다테마에(겉내) 라면 혼네(속내) 는 아시아 여성기금이라는 무리수를 통해서라도 국제사회에서 더 이상 일본의 위상이 실추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공감대였다. 일본에 대한 국제적 비판에 대한 이들의 신경질적 반응은 아시아여성기금을 옹호하는 과정에서 나온 오누마 교수의 다음 발언에서 확인된다: 48) 오누마 교수의 설명. 와다 하루키 외, 전게서 각주 44, 47-48쪽. 49) 보수우익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아래 (5) 일본 보수우익의 반격 참조. 50) 오마이뉴스, 강지은 2005.8.29 A급전범 등 구 일본군 연금 연간 1조엔 이상: 일본, 식 민지에겐 배상도 연금도 모르쇠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77361. 51) 원자폭피폭자에 대한 원호에 관한 법률( 原 子 爆 被 爆 者 に する 援 護 に する 法 律 ). 기존 의 원자폭탄피해자의 치료등에 관한 법률( 原 子 爆 被 爆 者 の 療 等 に する 法 律 ) 및 원 자폭탄피폭자에 관한 특별조치에 관한 법( 原 子 爆 被 爆 者 に する 特 別 措 置 に する 法 律 )을 대체하였다. 피폭자들을 다른 일본인 전쟁피해자들과의 형평성 문제 때문에 반 대가 있었으나 사회당 주도로 제정되었다. 그러나 국가보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 고 있고 일본의 전쟁책임을 명확히 하지 않은 점 때문에 대해 피해자 단체로부터 비 판을 받았다. 1994.12.9 신원호법에 관한 원수폭금지 일본국민회의( 原 水 爆 禁 止 日 本 民 議 )의 견해( 新 援 護 法 に する 原 水 禁 の 見 解 ) http://www.gensuikin.org/data/engoho.html 하단. 310 여성과 사회 Woman & Society

AMOREPACIFIC ACADEMIC & CULTURAL FOUNDATION... 아시아여성기금 이전에 정부와 시민이 모금해서 전후책임 문제를 해 결하는 포괄적인 기금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한 것은 저 나름대로 4 반세기에 걸쳐 이 문제를 연구하고 운동을 해 온 결과 정부만을 책망해 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흔히 멍청한 의원이 반 동적인 발언을 해서 일본의 국익을 해친다고 하지만 그런 의원을 뽑는 것은 우리들 국민입니다. NGO 가운데는 전혀 자기와 상관없다는 듯이 일본 정부를 국제적인 자리에서 비판하는 독선적인 행동도 적지 않습니 다. 이것은 일본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조 첨가) 52) 일본인 활동가들이 자국 정부의 태도를 비판하는 것은 일본인으로서 책임 감을 통감하고 책임인정, 피해자 배상의 의무를 확인하려는 노력임에도 불구 하고, 이들의 활동을 독선적인 행동 이라 규정하는 것은 발언자의 편협된 국 가관과 빗나간 애국심 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정작 일본인으로서 부끄러 워해야 할 것은 일본 정부가 피해자들의 의지에 반하여 국가책임을 모호하게 만든 기만적 아시아여성기금의 추진이다. 이렇듯 보편적 인권과 상식은 국가 주의 앞에 매몰되었다. 기금 설립 이후 몇몇 의원들은 군대성노예의 진상규명 을 위한 정부내 조사기관을 설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별다른 진전이 없 었다. 53) 또한 일본 정부는 돈을 미끼로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출신 군대성노예 피해자 4명에게 입막음을 요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54) 이렇듯 일본 정부가 아시아여성기금 설립 이후, 진실은폐에 전념한 것은 기금이 어디까지 나 국제사회의 비난을 피해보기 위한 임시방편이었음을 보여준다. 아시아여성기금의 실제 운용도 상식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아시아여성기금 은 2000년 6월까지 민간모금액이 4억 8,500만 엔, 정부예산 지원이 12억 52) 와다 하루키 외, 전게서 각주 44, 46쪽. 53) 참의원에서는 덴 히데오( 田 英 夫 ) 의원, 중의원에서는 이시이 고키( 石 井 紘 基 ) 의원이 중 심이 되어 법안이 추진되었다. 한겨레신문 1996.6.13 위안부 진상조사기관 입법 추진/ 일 의원들 곧 국회에 제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편), 전게서 각주 7, 213쪽에서 재인용. 54) 국민일보 2001.8.25 日, 中 거주 韓 人 위안부 매수 기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편), 전게서 각주 7, 302쪽에서 재인용. 국제인권발전에 대한 한국여성의 기여와 역할 - 일본군 성노예제도 운동을 중심으로 - 311

엔으로 정부예산이 민간모금의 2배가 넘어 국민기금 이라 보기 힘들고 오히 려 일본정부가 책임을 피하면서 할 일은 했다는 식으로 주장하기 위해 벌인 자선사업이라는 인상을 남긴다. 55) 2002년 국회질의에서는 의료복지 지원사 업으로 나간 정부예산 13억 엔 중에 4억 엔이 아무 관련이 없는 정부개발원 조(ODA) 예산에서 편법으로 지출된 것으로 밝혀지는 등 직접배상을 피하기 위해 각종 변칙수법이 동원되었다. 56) 또한 해당국 정부와 지원단체에서 피해 자들의 신원을 파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시아여성기금은 인도네시아에서 는 양로원을 짓는 등 형식적인 의료복지사업만을 실시하였으며 중국, 북한 등의 피해자에게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아시아여성기금안은 큰 부작용을 낳았다. 아시아여성기금 본질이 일본 정 부의 책임회피임을 간파한 한국, 대만 등지의 피해자들과 지원단체들은 피해 자들을 정당한 배상의 대상이 아닌 인도주의적 자선사업의 대상으로 보는 기 금에 일찌감치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다. 57) 그러나 생활고에 시달리던 일부 피해자들은 어쩔 수 없이 아시아여성기금의 돈을 받았으며, 이들과 나머지 피해자들, 지원단체 사이에 심각한 갈등까지 야기되었다. 한국 및 대만 정부는 일본정부를 상대로 아시아여성기금의 활동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아시아여성기금에서 돈 을 받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같은 금액의 지원금을 피해자들에게 지급하기 시 55) 149회 참의원 총무위원회(2000.8.9)에서 요시카와 하루코( 吉 川 春 子 ) 의원의 질의에 대 한 나카가와 히데나오( 中 川 秀 直 ) 관방장관의 답변 내용. 회의록 원문은 아래 사이트에 서 확인 가능: http://kokkai.ndl.go.jp/sentaku/sangiin/149/0002/main.html. 56) 154회 참의원 내각위원회(2002.3.19)에서 요시카와 의원의 질의에 대한 사토 시게카즈 ( 佐 藤 重 和 ) 외무성 관방심의관의 답변 내용. 회의록 원문은 아래 사이트에서 확인 가 능: http://kokkai.ndl.go.jp/sentaku/sangiin/154/0058/main.html. 57) 피해자들 사이에 존경을 받았던 강덕경 씨는 한 모임에서 위로금을 받느니 죽는 게 낫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내 뜻을 안다 고 하여 좌중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그러자 국민기금안을 설명하기 위하여 참석했던 와다 하루키 교수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 니 이내 평상시의 목소리로 그렇습니까? 여러분들은 반대인 게로군요. 하지만, 저는 합니다. 교육을 위해서(そうですか 皆 さんは 反 なんですね けど 私 はやります 育 のために ) 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많은 기금 추진자들은 피해자들을 자신들 의 정치적 구상을 위한 부차적 존재 정도로 여겼다. 재일교포 여성들의 우리여성 네 트워크 양진자 씨 인터뷰 2006년 9월. 312 여성과 사회 Woman & Society

AMOREPACIFIC ACADEMIC & CULTURAL FOUNDATION 작하였다. 58) 그 결과, 이미 아시아여성기금을 받았던 피해자들은 배신자 취급을 받으며 떨어져 나와 살아야 했고, 자국 정부의 지원을 받았지만 몰래 아시아여성기금으로부터도 돈을 받은 피해자들은 마음의 짐을 얹게 되었다. 이렇듯 일본 정부의 기만적인 아시아여성기금으로 가장 큰 상처를 입은 것은 다름 아닌 군대성노예 피해자들이었다. 일본의 운동단체들은 아시아여성기금 찬반을 놓고 분열에 직면하였다. 일 본의 단체들은 정대협과 같은 운동의 구심체가 없고 성향에 따라 느슨한 연 대를 이루고 있었다. 재일교포들이 주축이 된 우리여성 네트워크 같은 경 우 고민 끝에 반대로 가닥을 잡았고 이외에도 상당수의 단체들이 아시아여성 기금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하였다. 반면 김학순 씨 등이 포함된 태평양전쟁 유족회 소송을 지원하던 전후책임을 확실히 하는 회( 後 責 任 をハッキリ させる ), 일본부인회의, 주요노조를 비롯하여 사회당과 관련이 있던 많 은 단체들은 아시아여성기금 지지로 돌아섰다. 이들 단체는 기금 지지가 어 디까지나 피해자들을 위해서라 주장하지만 이들 역시 속내는 일본인으로서 일본에 대한 국제적 비판을 잠재우려 했던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떨치기 힘들다. 59) (3) 일본 법원에서의 배상소송 이렇듯 진보적이라 여겨지던 사회당조차도 아시아여성기금을 내놓는데 그 치자, 피해자들은 일본 법원에서의 배상소송에 주목하게 되었다. 일본 사법부 에서의 2차 대전 관련 손해배상 소송의 역사는 매우 길다. 1950년대부터 일 58) 한국일보 1997.4.14 대만, 국대위안부 우선보상 계획/막 7천불씩... 차후 일 정부에 청구, 경향신문 1998.4.21 종군위안부 정부 보상금 지급 결정/각의 배상청구 않기 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편), 전게서 각주 7, 258쪽에서 재인용. 정부의 지원이 없던 필리핀 피해자들 상당수는 생활고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기금의 돈을 받게 되 었다. 59) 정진성, 전게서 각주 3, 247쪽. 이렇듯 아시아여성기금을 놓고 피해자 및 그 지원단체 들이 분열되면서 일본 정부는 10년을 벌었다는 지적도 있다. 고령의 피해자들이 사라 져가는 현실을 생각하면 이는 대단히 유감이다. 국제인권발전에 대한 한국여성의 기여와 역할 - 일본군 성노예제도 운동을 중심으로 - 313

본의 원폭 피폭자, 중국 전쟁고아 귀환자 등의 일본인 피해자들은 자국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 왔다. 60) 한국인 피해자 중에도 피폭 자인 손진두 씨가 1970년 치료를 위해 일본으로 밀항했다가 체포되어, 1972 년 10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원폭증 치료를 위해서 필요한 피폭자건강수첩 의 발급을 거부한 후코오카현 지사를 상대로 원폭수첩각하처분취소소송을 제 기하였다. 대만의 군인군속들도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외국인들에 의한 일본군 성노예 소송을 포함하여 일본을 상대로 한 배상소 송은 1990년대에 들어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은 1991년 12월 6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제기된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 자보상청구소송의 원고 총 41인 중 9명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를 시작으로 현 재까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이 일본에서 제기한 소송은 총 10건에 이른다. 이 중 9건이 최고재판소에서 패소가 확정된 상태이며 가장 최근 제기된 중국 해남도 전시성폭력피해사건 소송만이 도쿄지방재판소 기각결정 후 도쿄고등재 판소에서 계류 중이다. 10건의 사건들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배상소송의 내용 가) 아시아태평양전쟁희생자 보상청구 판결 61) 군대성노예 피해자가 일본을 상대로 제기한 최초의 소송이다. 이 소송에는 전 군인군속 피해자들이 함께 제소를 하였으며, 처음에는 군대성노예 피해자 가 김학순 외 3명이 참가했다가 이후 6명이 더 추가되어 총 9명의 군대성노 예 피해자와 32명의 군인군속이 원고였다. 소송은 1991년 12월 6일 시작되 60) 대표적으로 피폭자들이 1955년 자국민을 피폭으로부터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일본 정 부의 책임을 묻는 소송을 제기하였다. 8년 후인 1963년 내려진 도쿄 지방재판소의 1 심 판결은 원폭이 헤이그 조약의 위반이라 하면서도 개인의 배상 자격이 없다며 소를 기각했다. 원고의 이름에서 시모다( 下 田 ) 판결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1996년 국제사법 재판소(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가 핵무기 사용의 위법성 여부에 대한 권고적 의 견(advisory opinion)을 내릴 때까지 이 문제를 다룬 유일한 사법부의 결정이었다. 61) 最 高 裁 判 所 平 成 15 年 (オ) 第 1895 ( 判 例 時 報 1879 58 頁 ), 최봉태, 일본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본군 군대성노예 재판의 현황과 과제, 일본군 군대성노예 문제에 대한 법적 해결의 전망 (2000년 일본군성노예전범여성국제법정 총서, 2001) 참고. 314 여성과 사회 Woman & Society

AMOREPACIFIC ACADEMIC & CULTURAL FOUNDATION 었으며, 헤이그조약 등 국제법과 국제관습법상 인도에 반한 죄, 국가가 적극 적으로 관여한 고용관계라는 사실로부터 신의칙에 기한 안전배려의무 위반, 일본 민법상 불법행위, 입법부작위가 주장되었다. 2001년 3월 26일 도쿄지 방재판소는 국제법상 국가에 대한 개인의 청구권 부정, 특정되는 의무내용과 의무위반에 해당하는 사실입증의 결여로 인한 안전배려의무 부인, 전쟁 당시 국가의 권력작용 행위에 관한 민법상 불법행위 구성의 불인정, 입법부작위 의무 부인 등을 이유로 원고의 청구를 기각하였다. 원고측은 항소하였으나 2003년 7월 22일 도쿄고등재판소가 내린 2심 역시 비슷한 이유로 원고 패 소 판결을 내렸다. 2004년 11월 29일 최고재판소 상고가 기각되면서 소송은 막을 내렸다. 나) 부산 군대성노예 여자근로정신대 공식사죄 등 청구소송 62)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중 동원된 군대성노예 3명과 근로정신대원 7명이 일본 정부의 사죄와 손해배상을 청구한 소송으로 10건의 군대성노예 소송 중 유일하게 1심에서 일부승소 판결을 받은 의미 있는 판결이다. 1992년 12월 25일 야마구치( 山 口 ) 지방법원 시모노세키( 下 ) 지부에 제소된 이 소송에서 원고 측은 카이로선언, 포츠담선언, 일본 헌법 전문 및 9조로부터 도출되는 도의적 국가로서의 의무 에 근거해 일본의 국가배상법, 민법에 근거한 공식 사죄와 손해배상, 2차 대전 당시의 메이지 헌법에 근거한 생명신체자유에 대 한 손실보상, 입법부작위에 대한 국가배상, 아울러 전후책임을 부정하는 발언 들에 의한 명예침해에 대한 국가배상을 요구하였다. 1998년 4월 27일 선고된 1심 판결은 도의적 국가이어야 할 의무 성립을 부정하였고, 메이지 헌법은 전후 개헌으로 효력을 상실하였으며 당시 명시적인 법률규정이 없었으며, 공 식사죄는 정치적 재량의 부분으로 사법부가 개입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입법부작위에 있어서는 기존 판례에서 말하는 입법내용이 헌법의 일의적 문언에 위반됨에도 불구하고 국회가 입법을 시행하지 않는 경우 외에 62) 山 口 地 方 裁 判 所 下 支 部 平 成 4 年 (ワ) 第 349 ( 判 例 時 報 1642 24 頁 ), 島 高 等 裁 判 所 平 成 10 年 (ネ) 第 278 ( 判 例 時 報 1759 42 頁 ), 최봉태, 전게논문, 관부판결을 지원하는 회 ( 釜 裁 判 を 支 援 する )(http://www.kanpusaiban.net/) 참고. 국제인권발전에 대한 한국여성의 기여와 역할 - 일본군 성노예제도 운동을 중심으로 - 315

도, 일본 헌법질서의 근간이 되는 가치에 관계되는 기본적 인권의 침해를 초 래하는 경우에 예외적으로 국가배상책임이 발생한다고 판시하였다. 그리고 일본 헌법질서의 근간이 되는 가치에 관계되는 기본적 인권의 침해를 초래하 는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국가배상법상 위법[이며] 강제군대성노예제도는 나치 의 만행에 준하는 중대한 인권침해[로서] 내각 관방장관의 조사결과 발표에 관한 담화가 나온 1993년 8월 4일 이후 시급하게 특별입법을 행할 헌법상의 의무가 있었다 고 하여 입법부작위를 인정, 장래 입법에 의한 피해회복이 있 을 것을 고려하여 피해자에게 손해배상으로서 각 30만엔 지급을 명령하였다. 원고, 피고는 모두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하였고 2심인 히로시마 고등재판 소는 2001년 3월 29일 예상대로 원심을 뒤엎고 나머지 원고 주장은 물론이 고 입법부작위에 의한 국가책임도 부인하는 판결을 내렸다. 2심 재판부는 입 법행위가 원칙적으로 입법부의 재량적 판단에 맡겨져야 하며, 입법부작위 책 임은 기존 판례대로 입법내용이 헌법의 일의적 문언에 위반됨에도 불구하고 국회가 입법을 시행하지 않는 경우에만 발생한다고 하였다. 최고재판소는 2003년 3월 25일 상고불수리 결정을 내렸다. 시모노세키 배상판결은 군대성노예제 자체에 대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을 인정하지 않았고 배상을 명하지 않았다는 점 등에서 매우 제한된 것이었 다. 그러나 보수적인 일본 사법부의 풍토에서 그러한 제한된 승소 판결조차 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으며 이는 피해자들과 이들을 지원하는 시민단체에 자 극을 주었다. 이를 계기로 일본의 소송지원 변호사들과 NGO들은 시모노세 키 판결을 살리는 회( 下 判 決 を 生 かす ) 라는 네트워크를 결성하였으며 이는 현재까지 일본군 성폭력 재판 지원 연락회 로 활동하고 있다. 다) 필리핀 군대성노예 손해배상 청구소송 63) 필리핀 군대성노예 손해배상 청구소송은 2차 대전 중 일본군이 점령한 필리핀에서 군대성노예로 끌려가 피해를 입은 필리핀 여성 46명(그 중 12명 은 재판 중 사망)이 손해배상을 요구한 소송이다. 1993년 4월 2일 도쿄 지 63) 東 京 地 方 裁 判 所 平 成 5 年 (わ) 第 5966, 同 年 (わ) 第 17575, 東 京 高 等 裁 判 所 平 成 10 年 (ネ) 第 5167 참고. 316 여성과 사회 Woman & Society

AMOREPACIFIC ACADEMIC & CULTURAL FOUNDATION 방재판소에 제기되었으며, 원고들은 국제관습법, 인도에 반한 죄 위반에 근거 한 손해배상, 필리핀 및 일본 민법에 근거한 손해배상을 주장하였다. 1998년 10월 9일 내려진 1심 판결은 개인이 국제법을 원용하여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없으며, 원고들이 주장한 인도에 반한 죄를 비롯한 국제관습법의 성립을 부정하고, 필리핀 및 일본법에서 민법상 불법행위는 국가의 공적 권력작용의 경우에는 사법인 민법의 적용을 받지 않아 국가무답책이 성립하며, 제척기간 이 지났다고 하여 모든 손해배상청구를 기각하였다. 도쿄 고등재판소의 2000 년 12월 6일 판결 및 뒤이은 최고재판소 판결도 위의 근거에 따라 모든 청 구를 기각하였다. 라) 재일한국인 군대성노예 사죄보상소송 64) 원고 본인이 위험을 감수하고 실명으로 소송을 진행하기를 희망하여 원고 의 이름을 따 송신도 재판으로도 불린다. 1922년생인 송신도는 16세 때 집 을 나와 혼자 살아가던 중, 전지에 가서 일하면 혼자 먹고 살 수 있다는 한 조선인 여성의 말에 넘어가 중국으로 갔다. 그러나 실제 자신이 어떤 일을 하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얘기도 듣지 못 하였으며 중국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위안소 로 끌려갔다. 65) 2차 대전 중 7년여에 걸쳐 중국에서 군대성노예로 일본 군인들에 의해 강간당하였으며 1945년 종전 후 일본 군 인을 따라 일본에 왔으나 버려진 후 재일조선인의 도움으로 미야기현에서 살 게 되었으며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92년 당시 군대성노예였던 사람들의 제 보 핫라인 전화를 통해 시민단체들과 송신도 할머니가 만나게 되어 소송의 의지를 확인하고 1993년 4월 5일 도쿄지방재판소에 제소하였다. 원고는 군대성노예 강요 및 전후 50여 년간 피해자를 방치한 것이, 노예 64) 東 京 地 方 裁 判 所 平 成 5 年 (わ) 第 6152, 東 京 高 等 裁 判 所 平 成 11 年 (ネ) 第 5333, 最 高 裁 判 所 平 成 13 年 (オ) 第 315, 재일 군대성노예재판을 지지하는 회( 在 日 の 慰 安 婦 裁 判 を 支 える ) http://www.geocities.co.jp/wallstreet/7486/saiban/keika.html 참고. 65) 당시 여성을 군대성노예로 데려갈 때 흔히 쓰였던 방법이다. 대만인 전 군대성노예 손 해배상소송으로 연결된 부녀구제기금회 가 핫라인을 통해 처음으로 연락해온 카오 바 오쥬( 高 珠 )씨 역시 광동에 가서 일본군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라고 동사무소 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국제인권발전에 대한 한국여성의 기여와 역할 - 일본군 성노예제도 운동을 중심으로 - 317

상태 또는 예속상태에 있지 않을 자유를 보장한 1926년 노예금지조약, 강제 노동금지에 관한 조약(ILO29호), 추업을 행하기 위해 부녀매매를 금지하는 국제조약, 인도에 반하는 죄 등의 국제법과 민법, 국가배상법 등 일본 국내 법에 위반되며, 전후 군대성노예제도 책임자 처벌 의무의 위반, 입법부작위, 일본 국회 등에서 군대성노예제도에 대한 일본군의 관여사실 및 강제연행사 실을 부정하는 발언에 의한 원고의 명예훼손을 등에 대한 손해배상과 사죄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1999년 10월 1일 도교 지방재판소는 국제관습법 성립 부정, 국제법에 근거한 개인의 손해배상청구권 부정, 당시 법에 따른 국가의 권력적 작용 행위에 대한 사인의 국가손해배상 청구불가(국가무답책), 입법부 작위 부정을 이유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2000년 11월 30일 선고된 도쿄고등재판소의 2심 판결도 거의 비슷한 근 거를 들어 원고의 청구를 기각하였다. 다만 2심 판결은 1심 판결과는 달리 일본의 강제노동조약과 추업조약 일부 위반을 인정하였고, 민법상 불법행위 책임도 인정하였다. 그러나 제척기간 만료를 이유로 손해배상은 부정되었다. 즉 한일 청구권협정 발효일 및 조치법 시행일인 1965년 12월 18일을 일본 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의 제척기간 기산일로 봐서 이미 20년의 제척기간 만료로 소멸했다고 판시하였다. 66) 2003년 3월 28일 최고재판소에서 최종 기 각되었다. 마) 네덜란드 전포로 민간억류자 손해배상청구 판결 67) 2차 대전 중 네덜란드령이었던 인도네시아에서 포로수용소 및 민간인억류 자수용소에서 받은 학대 등을 이유로 네덜란드인 포로 6명 및 군대성노예피 해자 1명이 1994년 1월 25일 손해배상청구를 도쿄 지방재판소에 제기하였 다. 헤이그조약, 제네바조약 및 국제관습법 위반을 주장한 원고측 주장에 대 해 1심 판결은 피해사실을 군대성노예 사례 포함하여 모두 인정하였고 그것 66) 최봉태, 일본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본군 군대성노예 재판의 현황과 과제, 일본군 군대 성노예 문제에 대한 법적 해결의 전망(2000년일본군성노예전범예성국제법정총서, 2001) 참고. 67) 東 京 地 方 裁 判 所 1994 年 (わ) 第 121, 藤 田 久 一 ㆍ 鈴 木 五 十 三 ㆍ 永 野 貫 太 編 と 個 人 の 利 ( 日 本 評 論 社, 1999) 참고. 318 여성과 사회 Woman & Society

AMOREPACIFIC ACADEMIC & CULTURAL FOUNDATION 이 헤이그 조약 및 제네바조약의 각 조항에 대한 위반행위라는 것 역시 인 정하였다. 또한 헤이그조약 3조가 손해를 입은 개인의 구제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까지 인정하였다. 그러나 어떤 조약이 국내법에 의해 보완, 구체화라는 특정 조치를 취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개인의 권리의무관계를 규율하는 것으로서의 국내재판소에 적용가능하다고 하기 위해서는... 당해 조약에 개인의 국가에 대한 청구권의 내용이 명확하게 있어야 한다 고 하여 결국은 개인은 국제법에 근거한 청구 권 주체가 될 수 없다며 청구를 기각하였다. 2001년 10월 11일 도쿄 고등 재판소가 내린 2심 판결은 1심 판결보다도 후퇴하여 전쟁법규가 개인청구권 을 인정하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점조차 인정하지 않고 원고 패소 판 결을 내렸다. 2004년 3월 30일 최고재판소의 상고불수리로 최종 기각되었다. 바) 중국인 군대성노예 손해배상청구소송 1차 68)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은 중국 각지에서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 섬멸작전에 들어가 산서성( 山 西 省 ) 지방에서는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이 지방 의 여성들을 끌고가 성노예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1972년 9월 중일 공동성 명에 의해 양국간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지고, 1978년 10월 중일 평화조약에 의해 전쟁상태가 공식적으로 종결되기까지 이와 같은 군대성노예 피해사실을 공론화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1990년대 중반부터 중국 군대성노예 피해자들은 일본에서 소송을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69) 그 계기는 산서성 지방 에서 초등학교 선생으로 있던 張 兵 가 성폭력 피해여성 侯 冬 蛾 을 만나 피 해경험을 이야기하여 산서성의 군대성노예 피해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으며, 68) 東 京 高 等 裁 判 所 平 成 13 年 (ネ) 第 3775, 最 高 裁 判 所 平 成 17 年 (オ) 第 985,중국인전쟁피 해자의요구를 지지하는 회(http://www.suopei.org/saiban/ianfu/index.html), 각 판결문. 69) 한국, 대만, 중국을 비롯하여 특히 가부장적 사회분위기가 강한 나라의 군대성노예 피 해여성들은 성폭력을 당한 것을 수치심으로 여기고 발설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내외부 적 압박을 받기 때문에 피해사실 자체가 알려지지 않아 왔다. 중국 역시 이러한 점도 작용했겠지만, 문화혁명 시기 군대성노예였다는 사실 자체가 일본군 내통자로 몰릴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비밀로 해야 하던 요인도 있었다고 한다. 2006. 9. 25 WAM(Women s Active Meuseum on War and Peace) 사무국장 와타나베 미나( 渡 美 奈 ) 인터뷰 참고). 국제인권발전에 대한 한국여성의 기여와 역할 - 일본군 성노예제도 운동을 중심으로 - 319

1994년 결성된 중국인 전쟁피해 배상청구사건 변호단(단장 오야마 히로시( 尾 山 宏 ))의 조사로 산서성에서 다수의 피해 여성들이 확인되어 소송을 제기한 것이었다. 피해여성 李 秀 梅 劉 面 煥 陳 林 桃 周 喜 香 의 4인은 각 2300만엔의 손 해배상과 주요 신문사에 사죄광고를 요구하는 소송을 1995년 8월 7일 도쿄 지방법원에 제기하였다. 70) 원고들은 피해사건 당시 15, 16세의 미혼자 혹은 20, 21세의 기혼자였으며, 팔로군 출신도 있었다. 이들은 일본군에 연행되어 감금, 폭행, 강간을 당하였고, 가족들이 돈을 마련하여 일본군에 상납하거나, 팔로군 등에 의해 구출되어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2001년 5월 30일 도쿄 지방재판소는 이들의 피해사실을 부인하여 청구를 기각하였다. 2004년 12월 15일 내려진 도쿄 고등재판소의 2심 판결 은 피해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국제관습법인 헤이그조약 위반에 대한 원고측 주장은 개인이 국제법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이유로, 민법상 불법행위는 공 법적 행위이므로 당시 법으로는 손해배상청구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국가무답 책의 법리로, 그리고 불법행위였다 하더라도 제척기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배 상청구는 기각하였다. 다만, 1972년 중일공동성명에 의한 중국국민 개인의 손해배상청구권은 포기된 것으로 해석되지 않는다고 하여 1972년 이후 손해 배상청구권이 포기된 것이라는 주장을 부정한 점은 눈에 띈다. 이후 최고재 판소에 상고하였으나 2007년 4월 27일 불수리 결정이 내려졌다. 사) 중국인 군대성노예 손해배상청구소송 2차 71) 중국인 군대성노예 1차 소송에 이어 郭 喜 翠, 侯 巧 蓮 2명에 의하여 제기 되었으며 그 피해사실 및 배경은 전술한 내용과 유사하다. 2002년 3월 29일 도쿄 지방재판소는 국제법을 원용한 개인의 청구권 부정, 국가무답책의 법리, 제척기간 경과, 입법부작위 부정으로 청구를 기각하였다. 민법상 손해배상 청 70) 이를 중국인 군대성노예 1차 소송으로 부른다. 이후 연이어 1996년 2월 23일 郭 喜 翠, 侯 巧 蓮 의 2인이 동일법원에 동일한 취지로 소송을 제기하였는데 이를 중국인 군대성노 예 2차 소송으로 부른다. 71) 東 京 高 等 裁 判 所 平 成 14 年 (ネ) 第 2621 最 高 裁 判 所 平 成 17 年 ( 受 ) 第 1735 중국인전쟁 피해자의요구를 지지하는 회(http://www.suopei.org/saiban/ianfu/index.html) 참고. 320 여성과 사회 Woman & Society

AMOREPACIFIC ACADEMIC & CULTURAL FOUNDATION 구권의 발생은 인정되었으나 중일 평화조약에 의하여 소멸되었다고 판시하였다. 2005년 3월 18일 내려진 도쿄 고등재판소의 2심 판결은 그 전 해의 1차 소송 판결보다 더 퇴보한 것으로 여겨진다. 72) 즉, 가해행위가 어떤 권한이나 명령에 따라 행해진 것이 아니므로 국가공권력의 행사가 아니라 국가무답책 의 법리가 적용될 여지없이 민법상 불법행위로 봐야 하며 피해자들이 주장하 듯이 일본정부의 정책으로 일본의 조직적 불법행위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하 여 일본군 군대성노예 제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나아가 가해행위에 의해 중국이라는 국가 혹은 국민의 일본에 대한 민법 상 손해배상청구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것이 1952년 일본이 중화 민국(대만)과 체결한 평화조약에 의해 포기되었다고 주장하였다. 73) 2007년 4 월 27일 최고재판소는 중일전쟁 수행 주 발생한 중화인민공화국 국민에 대 한 일본국 혹은 그 국민 및 법인에 대한 청구권은 중일공동성명 5항에 의해 재판상 소구할 권능을 잃었다 는 이유로 원고측 청구를 기각하였다. 아) 산서성 성폭력피해자 손해배상청구소송 74) 산서성의 성폭력피해자 10여 명이 각 2000만엔의 손해배상과 사죄문을 요구하며 1998년 10월 30일 도쿄지방재판소에 제소하였다. 원고측 주장 및 판결은 중국인 군대성노예 1차 소송과 유사하였고, 2003년 4월 24일 내려진 1심 판결과 거의 동일한 내용인 2005년 3월 31일 도쿄고등재판소 판결은 일본군의 가해행위를 인정하였으나, 그 가해행위의 성격이 공적 성격인 것이 기 때문에 국가무답책의 법리를 원용하여 손해배상청구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72) 3.18 判 決 をうけて 慰 安 婦 訴 訟 弁 護 大 森 典 子 (http://www.suopei.org/saiban/ianfu/second/318.html) 참고. 73) 이는 당시 중국을 대표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중화민국(대만)과 중화인민공화국(중 국) 중 당시 일본이 중화민국(대만)과 체결한 조약을 의미하는데, 이는 당시 중화인민 공화국이 중국 대륙을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반면 중화민국은 대만 섬만을 지배하 고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부당한 것으로 보이며, 1972년 중일 공동성명의 취지를 부정 하는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3.18 判 決 をうけて 慰 安 婦 訴 訟 弁 護 大 森 典 子 (http://www.suopei.org/saiban/ianfu/second/318.html) 참고.) 74) 東 京 高 等 裁 判 所 平 成 15 年 (ネ) 第 2878, 最 高 裁 判 所 平 成 17 年 (オ) 第 1290 참고. 국제인권발전에 대한 한국여성의 기여와 역할 - 일본군 성노예제도 운동을 중심으로 - 321

중국을 준거법으로 볼 수 있다는 원고 측 주장은 부인하였으며, 헤이그 조약 등 국제법에 대해서도 국가에 대한 개인의 청구권을 부정하였다. 이후 최고 재판소에 상고하였으나 2005년 11월 18일 불수리 결정이 나왔다. 자) 대만인 군대성노예 손해배상청구소송 75) 대만에서 사회적으로 군대성노예 문제가 제기된 것은 1992년이었다. 대만 군사령부에서 육군성 앞으로 군대성노예 50명을 보르네오로 보내므로 도항을 허가해달라는 전보 등이 방위청 도서관에서 발견되었고, 대만 언론이 이를 크게 보도한 것이다. 그 후 소녀 성매매 문제 등을 다루는 여성인권 단체인 부녀구제기금회가 핫라인을 개설하여 대만에서 전 군대성노예 피해자들을 찾 기 시작하였다. 제일 처음 응한 것이 카오 바오쥬( 高 珠 )씨였다. 76) 그 후 핫라인을 통해 연락이 온 것은 대만인 41명, 중국인 2명, 선주민 14명으로 총 57명이었다. 이는 1,200-2,000명이라는 대만의 조사에 비하면 극소수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족 등에게 그 사실이 알려질 것이 두려워서 신청을 취소한 사람들도 있어서 최종적으로 군대성노예문제를 세상에 알리기 위한 활동에 참가한 것은 42명이었다. 1999년 7월 14일 9명의 군대성노예 피해자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사죄배 상소송을 제기하였다. 이 중 4명이 본명을 밝혔고 5명은 밝히지 않았다. 특 히 본명을 밝히지 않은 5명 중 4명이 선주민으로 이는 선주민 사회에서 다 른 남자와 성관계를 맺은 여성은 죽임을 당하는 관습이 있기 때문이었다. 77) 2002년 10월 15일 도쿄지방재판소는 인도에 반한 죄가 국제관습법임을 인정하면서도 개인의 국제법 원용 불가 원칙을 고수하였고, 민법상 불법행위 책임은 국가무답책 법리와 제척기간 경과를 이유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책임 자 불처벌의 위법성 역시 부정하였다. 2004년 12월 3일 도쿄 고등재판소도 75) 東 京 地 方 裁 判 所 平 成 11 年 (ワ) 第 15638, 東 京 高 等 裁 判 所 平 成 14 年 (ネ) 第 5850, 대만 전 군대성노예 재판을 지원하는 회(http://www.jca.apc.org/taiwan-ianfu-support/) 참고. 76) 일본에서 군대성노예관련 운동에서 한국인 군대성노예 피해자들을 할머니(하루모니, ハルモニ) 라고 부르는 것과 같이 대만 군대성노예 피해자들을 대만어로 할머니를 뜻 하는 아마( 阿 ) 라는 단어를 쓴다. 77) 재판이 진행되면서 이 중 2명은 사망하였으며, 또 다른 2명은 재판정에서 본명을 밝혔다. 322 여성과 사회 Woman & Society

AMOREPACIFIC ACADEMIC & CULTURAL FOUNDATION 비슷한 논지로 청구를 기각하였고 2005년 2월 25일 최고재판소가 최종적으 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과정에서 군대성노예 피해자들은 포럼, 집회, 사진전 등을 통해 조금 씩 자기치유와 자기긍정의 과정을 거쳐나갔으며, 2000년 여성국제전범법정에 참가하였으며, 현재도 국내외에서 증언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차) 해남도 전시성폭력피해 사건소송 78) 해남도는 홍콩 남쪽에 위치한 섬으로 1939년에서 1945년까지 일본의 동 남아시아 침략을 위한 기지와 식료, 광물자원 수탈 거점이 되었다. 당시 해 남도에는 섬의 군사기지화를 위해 섬주민을 비롯하여 조선, 중국, 대만으로부 터 강제연행된 사람들이 강제노동에 동원되었으며, 일본이 상륙한 다음 달인 1939년 3월부터 위안소 가 설치되어 해남도 여성을 비롯하여, 일본인, 조선 인, 대만인 여성이 성노예로 끌려왔다. 일본군에 의한 성폭력은 군대성노예 뿐만 아니라 취사를 담당하게 한 後 勤 服 務 隊 여성에 대한 성폭력, 소탕작 전 중의 강간과 학살까지 포함한다. 2001년 7월 16일 제기된 해남도 전시성폭력피해 손해배상소송은 일본군 성노예를 비롯하여 당시 성폭력을 당한 링야친( 林 金 )을 포함한 8인의 여 성이 이러한 가해행위로 인한 신체적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 명예회복, 사죄문과 사죄광고를 요구하였다. 도쿄 지방재판소에 제기된 이 소송은 2006 년 8월 30일 기각결정이 났으며, 현재 도쿄 고등재판소에 계류 중이다. 1심 판결의 기각사유는 이전 9건의 일본군성노예 판결과 마찬가지로 국가무답책, 제척기간 경과를 그 이유로 하고 있으며, 입법부작위도 배척하고 있다. 또한 다른 판결들과 달리 이 소송에서 새로이 주장된 원고 여성들에 대한 전후 명예회복을 꾀하지 않은 행정부작위에 대하여서는 국가의 공권력 행사 에 의해 위험한 상태가 발생하였다는 선행행위가 있는 경우, 사람의 생명이 나 신체 등에 대한 극히 중대한 위험이 있는 등의 요건이 충족된 경우에는 조리에 의해 국가에 법적 의무로서의 작위의무가 인정되는 경우가 있을 수 78) 東 京 地 方 裁 判 所 平 成 13 年 (ワ) 第 14808, 중국해남도전시성폭력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네트워크(하이난Net, http://hainannet.org/hainan3_1.html) 참고. 국제인권발전에 대한 한국여성의 기여와 역할 - 일본군 성노예제도 운동을 중심으로 - 323

있으나, 본건에서는 본건가해행위에 의해 본건피해여성들이 사회적 평가의 저하가 생겼다고는 할 수 있어도 그 때문에 그 후 본건가해여성들의 사회적 평가가 새로이 저하되는 극히 중대한 위험이 있었다고는 할 수 없다 고 하 여 이를 부정하였다. 현재 하이난도 소송은 도쿄고등법원에서 2심이 진행 중이며 2007년 9월 25일 제2차 구두변론이 진행되었다. 현재 일본국내에서는 10대, 30대를 중 심으로 2005년 링야친( 林 金 )씨의 방문을 계기로 만들어진 중국해남도전 시성폭력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네트워크 (하이난Net) 등의 시민단체가 재판을 지원하고 있다. 2) 일본 소송의 평가 이상의 10여건의 소송을 통해 일본 사법부가 취하는 배상책임 부정의 논 거는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1947년 일본의 국가배상법이 제정되기 이전까지 국가의 행위 중 권 력적 작용에 의한 사인의 손해에 대한 배상책임을 인정하는 법률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1947년 이전의 손해에 대한 국가의 배상책임은 인정되지 않 는다는 국가무답책( 國 家 無 答 責 )의 법리이다. 그러나 군대성노예처럼 법적 근 거가 없는 국제법상 명백한 불법 행위에 대해서도 단순히 공적인 성격이라는 이유로 배상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이 논리는 최근 군대성노예 외의 2차 대 전 관련 손해배상 재판에서 부정되고 있다. 둘째, 각종 조약과 국제관습법은 국가와 국가 간을 규율하는 것으로 국제 법의 법주체가 아닌 개인은 이를 원용하여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없으며 본 국의 외교보호권 행사에 의해서만 간접적 구제를 받는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 이다. 즉 조약 위반에 의해 발생하는 피해는 외국인이 아니라 그 국적국에 귀속되므로 가해국은 피해국에 침해된 법익을 회복할 의무를 이행함으로서 국제법상 국가책임이 해제된다는 것이다. 조약에 의해 개인이 직접적으로 손 해배상청구를 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해당 조약에서 개인의 국가에 대한 청구 권의 내용이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에 의해 송신도 재판과 대만인 군대성노예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주장 324 여성과 사회 Woman & Society

AMOREPACIFIC ACADEMIC & CULTURAL FOUNDATION 된 강행규범, 헤이그조약, 카이로선언 및 포츠담선언 및 평화조약, 노예금지 조약, 강제노동조약, 부녀매춘금지조약, 헤이그조약, 인도에 반하는 죄 등 국 제인도법에 근거한 개인의 손해배상청구권이 부정되었다. 79) 이와 연관지어서 셋째, 국제법상 개인의 청구권이 인정되더라도 일본이 한 국 등과 체결한 전후 양자조약이 있기 때문에 국가의 청구권뿐만 아니라 국 민 개인의 청구권도 소멸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이들 조약이 재산상의 금전적 이익에 관한 것으로 군대성노예와 같은 중대한 인권침해까 지 포괄하는 것은 아니며, 특히 군대성노예의 경우 일본 정부가 1990년대 초까지 관여와 책임을 부인하여 왔으므로 수십년 전 조약에 의하여 책임이 사라졌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는 비판이 있다. 넷째로,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하더라도 이미 민법상 20년이라는 제척 기간이 지났기 때문에 청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례적으로 국 가의 감독자 책임에 준하는 불법행위 책임을 인정한 송신도 재판의 2심 판 결이 대표적인 예로, 국가의 민법상 손해배상의무를 인정하였고, 1965년 한 일 협정에는 재일한국인의 재산, 권리, 이익의 법률상 소멸이 규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한 조치로서의 입법은 공백상태였다고 하여 제소인의 손 해배상청구권을 인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한일청구권협정의 발효일 및 조치법 시행일인 1965년 12월 18일로부터 기산하여 1985년 12월 18일에 청구권이 소멸하였다고 판결하였다. 시모노세키 재판에서 인정된 입법부작위 책임의 경우에도 헌법이 채용하고 있는 의회제민주주의 제도 하에서 입법행위는 입법부의 재량에 속하는 사항 이며, 헌법의 일의적 문언을 위반하고 있는 경우에 예외적으로 입법부작위를 인정할 수 있다고 하여 사실상 배척되고 있다. 80) 이상과 같이 일본 정부 및 사법부의 법논리는 자의적이고 시대착오적이며 국제사회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81) 군대성노예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79) 이 중에는 재일 군대성노예 사죄보상청구소송(제소인 송신도) 1심과 같이 국제관습법의 성립자체를 부정하는 판결도 있었다. 또한 대만인 군대성노예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는 가해행위를 강제노동으로 본다해도 이는 개인의 임금에 속하지 않는 손해에 대한 것 까지 규정한 조약이라고 볼 수 없다고 하였다. 80) 예를 들어 관부판결, 송신도 판결. 국제인권발전에 대한 한국여성의 기여와 역할 - 일본군 성노예제도 운동을 중심으로 - 325

강제징용, 군인군속 배상소송 등에서도 일본 법원은 10년을 넘게 끄는 재판 끝에 위의 논리들을 적용하여 결국은 청구를 기각하고 있다. 82) 마지막 남은 해남도 전시성폭력사건 소송도 도쿄 고등재판소에서 2심이 진행 중이지만 일 본 이변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일본 사법부의 한계가 명 확해지면서 소송을 지원했던 일본 변호사들과 활동가들은 국회에서의 보상입 법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4) 일본 국회에서의 입법해결 노력 1995년 일본 국회에서 아시아여성기금안이 논의 되었을 때 반대의 목소리 를 냈던 것은 참의원의 모토오카 쇼지 의원과 중의원의 이시이 코키 의원 정도였다. 83) 모토오카 의원은 아시아여성기금이 발족된 이후에도, 일본 정부 가 책임을 지고 보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1998년 시모노세키 판결이 일본 정부의 입법 부작위 책임을 거론한 것은 입법 운동의 추진에 힘을 실어 주었다. 81) Seong-Phil Hong, Redressing Korean Comfort Women: Recognizing Individuals Rights to Remedies, J.S.D. dissertation, Yale Law School, 2001; Ustinia Dolgopol and Snehal Paranjape, Comfort Women: An Unfinished Ordeal (International Commission of Jurists, 1994) [hereinafter ICJ Report ]; Radhika Coomaraswamv, Report of the Special Rapporteur on violence against women, its causes and consequences (1996), UN Doc. E/CN.4/1996/53/Add. 1/Corr. 1 [hereinafter Coomaraswamy Report ]; Gay J. McDougall, Final Report of the Special Rapporteur on Contemporary Forms of Slavery: Systematic Rape, Sexual Slavery and Slavery-like Practices during Armed Conflict (1998), UN Doc. E/CN.4/ Sub.2/1998/13 [hereinafter McDougall Report ]; Amnesty International, Still Waiting After 60 years: Justice for Survivors of Japan s Military Sexual Slavery System (2005), AI Index: ASA 22/012/2005, [hereinafter Amnesty report ]. 82) 9건 모두 최고재판소에 항소하였으나 일률적으로 당해소송이 위헌을 다투는 사안이 아 니라 단지 법령위반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하여 불수리결정을 받았다. 83) 관료 및 기업 비리, 통일교 비판 등에 앞장섰던 이시이 의원은 2002년 11월 자택 앞 에서 우익단원에게 암살당하였다. 살인사건의 배후에 대해서 많은 추측이 있었으나 결 국 일본 경찰과 법원은 범인의 단독범행으로 결론지었다. 326 여성과 사회 Woman & Society

AMOREPACIFIC ACADEMIC & CULTURAL FOUNDATION 결국 모토오카 의원과 관련 활동가들의 계속된 설득으로 2000년 제1야당 인 민주당은 전시 성적강제 피해자문제 해결 촉진에 관한 법률안( 時 性 的 制 被 害 者 問 題 の 解 決 の 促 進 に する 法 律 案 ) 을 당안으로 채택하여 제 출하였으며 사민당, 공산당은 별도의 보상법안을 제출하였다. 이후로 야3당은 7차례에 걸쳐 공동으로 보상입법안을 제출하여 2002년에는 법안이 참의원에 서 심의되기도 하였다. 84) 이러한 움직임에 많은 야당 의원들이 국가보상의 필요성에 공감하며 지지를 호소하였다. 85) 법안 추진자들의 전략은 참의원에 서 먼저 법안을 통과시킨다는 것으로 총 265석(과반 123석) 중 80명의 지 지를 확보하였으나 이 가운데 자민당 소속 의원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 에 2007년 7월 참의원 선거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86) 이 선거에서 각료 스 캔들과 국민연금기록 상실 등으로 지지율이 극히 떨어진 아베 총리의 자민당 이 창당 이래 처음으로 참의원 제1당 자리를 민주당에 내주는 참패를 당하 였다. 총리를 선출하는 중의원은 여전히 지난 2005년 선거에서의 압승으로 자민당이 3분의 2가 넘는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으나 민주당이 참의원을 장악하면서 정권을 놓고 일전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특히 참의원에서 법안 을 통과시킬 수 있는 민주당이 참의원에서의 보상법안 채택을 추진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보상입법안은 그 내용에 있어서 일본의 국가 책임을 명시하지 않은 등 미 흡한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시아여성기금과 같은 민간단체가 아 닌 일본정부가 직접 군대성노예 피해자들에 대해 보상을 한다는 점에서 진일 보하며 이를 통하여 일본 정부가 책임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따 84) 민족시보 2002.8.11(982호)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법안 첫 심의 http://www.korea-htr.com/kr/981990/kr98208tg.htm. 85) 예를 들어, 154회 참의원 내각위원회(2002.3.20)에서 오카자키 토미코( 岡 崎 トミ 子 君 ) 의원은 복지나 의료 서비스는... 피해국도 할 수 있고 민간에서도 할 수 있지만, 명 예의 회복 또는 정의의 회복, 이는 가해국측밖에 절대로 할 수 없다 고 지적하고 전후 일관되게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2001년 노예노동 피해자들에게 100억 마 르크의 보상기금 설치법을 제정한 독일의 예를 들며 일본 정부의 행동을 호소하였다. 회의록 원문은 아래 사이트에서 확인 가능: http://kokkai.ndl.go.jp/sentaku/sangiin/154/0058/main.html. 86) 아리미츠 켄 인터뷰 2006.9. 국제인권발전에 대한 한국여성의 기여와 역할 - 일본군 성노예제도 운동을 중심으로 - 327

라서 2002년 10월 대만 입법원, 2003년 2월 한국 국회, 2005년 1월 필리핀 하원 외무위원회가 법안의 제정을 지지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87) 미국 하원 에서의 일본군 성노예제 결의안 채택을 주도하고 있는 마이크 혼다 의원도 지 난 5월에 있었던 인터뷰에서 이 법안의 채택에 대한 기대를 표시하였다. 88) 그러나 법안에 대해서는 민주당 내 극우 성향 의원들로부터 반대가 있으며, 자민당에서 찬성이 전혀 없기 때문에 실제 채택까지는 난항이 예상된다. 일본에서 입법 운동은 노조, 변호사 등 남성 활동가들이 그 주축이 되고 있으며 여성단체들과는 성향 차이로 따로 진행되고 있다. 89) 이렇듯 성향 차 이로 동일한 목적을 가진 집단들의연대가 원활하지 못한 것은 일본 시민운동 의 아쉬운 점이라 할 수 있다. (5) 일본 보수우익의 반격 1993년 8월 고노 담화로 일본 정부가 군대성노예 문제 관여와 강제성을 87) 민단신문 2005.3.2 전 위안부 에 대한 사죄와 보상 법안, 참의원에 다시 제출 http://www.mindan.org/kr/newspaper/read_artcl.php?newsid=3384. 88) Kinue Tokudome: Are you aware that there are people in Japan who have been trying hard for many years to resolve the Comfort Women issue? For example, opposition parties in the Diet have introduced a bill several times since 2000, without success, seeking a government apology and compensation to the victims. Mike Honda: I know of those people. I am aware that they have several times introduced a resolution or bill to acknowledge, apologize and compensate Comfort Women. I hope that those politicians who are working for resolution of the Comfort Women issue can figure out the way to get it passed. I understand that this is a frustrating struggle for them. But they have to have 51% to succeed. I think that s why my attention is towards the public, asking them to look at this and tell their politicians to do something. It s important, so important because these women are going to die and they should not die without being satisfied by an apology. The Japanese people understand honor more than anybody else, don t they? Japan Focus에 2007.5.31 게재된 인터뷰에서 발췌 (http://japanfocus.org/products/details/2438). 89) 양진자, 김은식 및 아리미츠 켄 인터뷰 2006.9. 328 여성과 사회 Woman & Society

AMOREPACIFIC ACADEMIC & CULTURAL FOUNDATION 인정하고 뒤이어 집권한 호소카와 총리가 8월 15일 일본의 침략전쟁과 식민 지지배를 솔직히 사과하는 성명을 내자 일본의 보수우익은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특히 무라야마 총리가 1995년 패전 50주년을 맞아 국회에서 전쟁사죄 국회결의 를 채택하려 하자 보수우익 진영은 총공세에 나섰다. 당 시 국회에서 과거사를 둘러싼 논쟁이 오가고 있는 사이 보수진영은 자민당 체제 하에 수십 년간 보수세력이 공고한 조직력을 구축해 놓은 지방에서 운 동을 개시하였다. 1970년대 이시다 카즈토( 石 田 和 外 ) 전 최고재판소(우리의 대법원 겸 헌법 재판소에 해당) 재판소장이 세운 영령에 답하는 회( 英 にこたえる ) 90),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 日 本 を 守 る 民 議 ) 91) 등은 1994년 가을부터 1995년 여름까지 전국을 순회하며 지방 사람들의 보수, 민족주의 정서에 호 소하여 전쟁사죄 국회결의 저지 500만인 서명 캠페인을 벌이고, 26개 현의 회(일본의 43현 중 60% 초과), 90개 시촌 의회에서 전몰자 추도감사 결의 를 채택하게 하는 기염을 토하였다. 92) 이로써 일본의 풀뿌리 민주주의는 보 수우익의 굳건한 보루임이 증명되었고, 이러한 지방에서의 바람몰이에 힘입 어 자민당 보수파는 사회당에서 제시했던 국회결의 초안을 크게 약화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93) 그에 반하여 사회당과 진보세력의 대응은 1995년 옴진리 교 지하철 테러사건, 고베지진 때의 대응만큼이나 무능하고 무기력하여 지지 90) 1976년 설립되었으며 A급전범을 포함한 순국 영령 들을 마땅히 추모해야 한다고 주 장. 일본내 모든 현에 지방본부가 있으며, 공식회원 수가 현재 120만 명에 이른다. 91) 1978년 원호( 元 )법제화 실현국민회의 로 시작하여 이듬해 원호법( 元 法 : 쇼와, 헤 이세이 등 일왕의 연호를 법으로 정립)이 제정되자 명칭을 변경. 1997년 5월 다른 보 수단체와 결합하여 일본회의( 日 本 議 ) 를 결성. 아베 신조, 아소 타로 등 정치인, 언 론인, 관료, 기업인들이 회원으로 있는 현재 일본의 최대 보수우익 단체이다. 92) 우파세력의 교과서공격에 관한 연표 1994~95년 사이트: http://www.jca.apc.org/~tomo/kyokasho/1994-95.html. 93) 정식명칭 역사를 교훈으로 평화에의 결의를 새로이 하는 결의( 史 を 訓 に 平 和 への 決 意 を 新 たにする 決 議 ). 1995.6.9 중의원 의원 502명 중 251명 출석, 230명 찬성(기립 표결)으로 채택. 이렇듯 결의를 재적의원의 반도 지지하지 않았던 것은 자민당 보수의 원들의 완강한 반대, 지나친 결의안 수정에 대한 사회당 및 공산당 의원의 반발 때문 이었다. 때문에 연립정권은 참의원 표결은 아예 포기하였다. 국제인권발전에 대한 한국여성의 기여와 역할 - 일본군 성노예제도 운동을 중심으로 - 329

여론 확산에 실패하였다. 94) 1996년 총선 참패로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는 바 람에 보수우익의 독주를 막는 역할조차 할 수 없도록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94년 5월 하타 내각의 나가노 법상이 공창 망언 으로 11일만에 경질되고 그 해 8월 무라야마 내각의 사쿠라이 신( 井 新 ) 환경청장관이 태평양전쟁을 침략전쟁이 아니라 해방전쟁이었다고 발언한 후 사임하는 등, 약속이라도 한 듯 일본 정치인들의 주기적 망언은 계속되었다. 또한 역사교과서에서 군대성노예 관련 기술이 배제되도록 압력을 가하였 다. 1992년 1월 18일 일본 정부의 군대성노예제 관여 인정 직후 있었던 방 한 중, 미야자와 총리는 자국 수행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이 문제를 다음 세대에 정확히 전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교육은 분명히 전하는 일의 한가지 다. 교과서 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 이라고 말하며 유야무야 처리하 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95) 그러나 이후 일본 정부의 행보는 다분히 기망적인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처음에는 모든 역사교과서에서 군대성노예에 관한 기술을 넣도록 하였다. 96) 역시 보수세력은 막강한 지방의 조직력을 동원하여 현의회들이 군대성노예 기술 삭제를 요구하는 결의를 채택하는 걸로 시작하여 국회에서 우익 성향의 의원들이 삭제를 주장하였다. 97) 이러한 보수우익의 노력이 주효하여 일본군 94) 사회당으로서는 남아공식 진실화해위원회라던가, 훗날 2007년 2월 미 하원 소위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국회내에서 피해자 공개증언회를 추진하여 동정, 반성 여론을 조성할 수 있었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면 피해자측의 요구를 전격적으로 받아들여 상설중 재재판소(PCA)에서의 국제중재에 회부, 중재결정에 따르기로 하는 결단을 내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봤듯이 편협된 국가주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개인의 인권보다는 일본의 국제적 위상에 집착하던 이들의 성향을 감안할 때 보수세력과의 원칙없는 정치적 타협으로 귀착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95) 한국일보 1992.1.18. 일 역사교육 수정 방침/미야자와 회견/정신대등 정확히 전해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편), 전게서 각주 7, 84-85쪽에서 재인용. 96) 대한매일 1993.5.12 일 내년 고교 교과서 일본사/ 정신대 수록 허가/문부성, 한국정신 대문제대책협의회(편), 전게서 각주 7, 143-144쪽에서 재인용. 97) 대표적으로 중학교 교과서에서 종군위안부 및 삼광작전 등에 대한 기술 삭제를 요 구하는 오카야마 현의회 진정서(1996.12.19), 이바라키현 의회에 제츨된 위안부 삭제 청원서(1997.6.19),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한국사연구소, 전게서 각주 39, 67-68 쪽, 92-94쪽에서 재인용. 330 여성과 사회 Woman & Society

AMOREPACIFIC ACADEMIC & CULTURAL FOUNDATION 성노예에 관한 기술은 4년마다 있는 검정을 거치면서 계속 완화되어 2005년 4월 8일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에서는 위안부 라는 용어조차 다 삭제되었다. 이는 앞서 2004년 11월 27일 나카야마 나리아키( 中 山 成 彬 ) 문부과학상이 교과서에서 종군위안부, 강제연행 등의 표현이 줄어든 것은 정말로 잘 된 일이라 했을 때 이미 예견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베 총리 또한 1990년 대부터 이미 일본의 전도와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들의 모임 이라 는 역사왜곡 모임의 사무국장을 맡았고, 총리 취임 후에도 협의의 강제성 은 없었다는 발언으로 국내외에서 비난을 받고 미 하원에서 결의안이 채택되 는데 거꾸로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여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인물이다. 이러한 역사 왜곡에 대하여 일본의 시민단체들은 강력히 반발하고 있으나 일 본 사회와 언론의 무관심 속에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4. 국제사회에서의 운동 고노 관방장관과 미야자와 총리의 일본군 관여 시인 직후부터, 정대협은 국제여론의 환기를 위하여 UN에서의 공론화계획을 세웠다. 정대협은 1992 년 2월 26일, UN의 1503 절차 98) 에 따라 차별방지 및 소수자 보호 소위원 회(Sub-Commission on Prevention of Discrimination and Protection of Minorities)에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청원하였다. 99) 한편 국제법률가위원회 (ICJ) 위원인 이태영 가정법률상담소 소장은 1992년 1월 제네바에서 열린 창립 40주년 행사에서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제기하며 일본의 손해배상을 주장하여 관심을 모았다. 100) 이러한 움직임에는 토츠카 에츠로( 塚 朗 ) 98) 정식 명칭은 Procedure for dealing with communications relating to violations of human rights and fundamental freedoms. 개인이 중대하고 지속적인 인권침해 사실 을 진정할 경우 인권소위는 해당 사안에 관한 조사를 실시하도록 되어있다. 99) 국민일보 1992.2.26. 정신대 문제 유엔에 호소/대책협 투쟁연/사죄 배상 청원서 제 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편), 전게서 각주 7, 102쪽에서 재인용. 국제인권발전에 대한 한국여성의 기여와 역할 - 일본군 성노예제도 운동을 중심으로 - 331

등 일본인 변호사들이 적극 동참하였다. 물론 군대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운동을 벌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한 일본 정부의 반대 로비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 제는 지금 당장 전세계에서 무수히 많은 인권유린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반세기 전의 인권문제를 거론할 필요성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이는 1990년대 에 들어서야 유엔에 가입하였고 인권탄압으로 인한 국제적 지탄에서 벗어난 한국의 실정을 감안하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정대협을 비롯한 군대성노예 지원운동단체들은 일본 정부가 사실은 폐, 책임회피에만 급급하고 한국 정부가 소극적 자세를 견지하는 상황에서 일찌감치 국제사회로 눈을 돌렸고 이러한 선구적 노력은 이후 수년간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1990년대 국제사회는 인권, 특히 그 중에서도 여성 인권에 대한 자각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져 있었고, 르완다 제노사이드와 구유고 인종청소 와중에 발생한 여성에 대한 만행은 국제사회의 전시 여성인권유 린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켜, 자연히 2차 대전 중 있었던 가장 심각한 여성인 권침해 사건인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공분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 서 활동가들은 다른 국제적인 인권NGO들의 지원과 격려를 받으며 UN, ILO를 무대로 적극적인 문제제기에 나설 수 있었다. (1) UN에서의 운동전개 UN의 인권보호체제의 중심인 유엔인권위는 2006년 유엔 인권이사회 (Human Rights Council)로 전면 개편되기 전까지 경제사회이사회 (Economic and Social Council) 산하 위원회로 위원회 회원국의 대표들로 구성되어 있다. 형식적으로는 인권위 밑에 있지만 활동면에서는 독립적인 인 권소위원회는 각국 출신 인권전문가들로 구성되어 회원국의 인권상황을 감시 하는 역할을 하였다. 인권위 산하에는 주제별 및 지역별 실무회의(Working Groups) 및 특별보고관(Special Rapporteurs)을 두어 전문성을 도모하였다. 100) 한겨레신문 1992.2.9. 정신대/국제 여론화 추진 활발/ 대책협의회 가정법률상담소 적극 활동,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편), 전게서 각주 7, 97-99쪽에서 재인용. 332 여성과 사회 Woman & Socie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