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 咸 陽 上 林 숲의 歷 史 的 意 義 김 정 기* 1) 咸 陽 上 林 숲 은 孤 雲 崔 致 遠 선생이 時 務 十 條 상소(894년) 직후, 천령( 天 嶺 ㆍ 高 山 峻 嶺 이 櫛 比 한 지금의 咸 陽 }군 太 守 (894 898)로서 선 정을 베풀 때 조성한 우리나라 最 古 최대 규모의 防 風 防 災 護 岸 林 이며 천연기념물 제154호(1962. 12. 3. 지정)이다. 溫 帶 南 部 落 葉 闊 葉 樹 林 의 性 狀 을 지닌 학술상 매우 가치 있는 숲이며 낙엽활엽수림으로서는 유 일한 天 然 記 念 物 이며 국가유산이다. 上 林 과 下 林 (현재 없음)을 합해서 大 館 林 이라 했다. 1120여 년 전, 최 치원은 함양읍을 관통한 渭 川 을 외각으로 돌려 농경지 홍수피해를 막 는 제방을 길게 쌓아 방풍림을 조성, 허물어지지 않게 했다. 이것이 지 금의 上 林 숲 이다. 상림 숲 한가운데에는 물( 水 )을 대기 위한 폭 2-4m의 실개천도 만들어 가뭄에 대비했다. 지금은 이 실개천은 구름다 리(지금은 호미 다리)라 하여 건너다닐 수 있다. 함양 상림 숲은 최치원 太 守 가 손수 智 異 山 과 白 雲 山 에서 여러 樹 種 의 활엽수를 캐어다가 조성했으며, 면적이 20.6만m2나 되며, 서나무, 졸 참나무, 갈참나무 등 114종 20,000여 그루의 수목들이며 200년 된 것도 있다. 상림 숲은 구전설화도 많은 곳이다. 燕 岩 朴 址 源 은 學 士 樓 記 에서 백성들은 孤 雲 선생의 인품을 신격화 할 정도로 존경의 念 을 갖고 있었으며, 그리고 文 昌 侯 崔 先 生 神 道 碑 (상림 숲) 에 함양에서 많은 賢 人 이 배출됨은 선생이 끼친 어진 풍속 * 동아대학교 생명공학과 명예교수
336 石 堂 論 叢 61집 의 敎 化 가 百 世 까지 남아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라는 내용들을 적고 있는 것은, 上 林 숲의 後 光 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40여 년 전(1964) 필자가 咸 陽 農 業 高 等 學 校 校 監 으로 있을 때, 군민 들의 흠모를 받고 있던 崔 致 遠 太 守 이야기가 새롭기만 하다. 이러한 提 言 을 전제로 하여 咸 陽 上 林 숲의 歷 史 的 意 義 를 서술 하려한다. 孤 雲 崔 致 遠 은 왜 은둔했을까? 1) 人 百 己 千 의 각오로 12세 때 唐 나 라에 유학한 엘리트 학자 최치원에 대한 국내파 소인들의 질시였을까? 그리고 2) 최고운의 經 學 理 念 이 말기신라사회의 불교이념에 맞지 않아 서였을까? 唐 나라의 그 어려운 벼슬도 버리고 꺼져가는 조국 신라에 애국하겠다고 早 期 귀국했는데도, 그리고 신라의 국운은 그때 아직도 40년이나 더 남아있었는데도 왜 서둘러 은둔의 길을 결행했을까. 孤 雲 崔 致 遠 연구를 하면할수록 더욱더 그 까닭이 의문으로 남았었다. 필자가 참고한 저명 교수들의 20편 가까운 문헌들에도, 上 林 숲 을 거론한 논문들은 없었다. 하지만 필자는 달랐다. 최치원의 行 狀 을 시기 별로 분석해보면, 상림 숲 은 분명 孤 雲 에게는 사고( 思 考 ㆍ 隱 遁 )의 일 대 전환점이 된 계기가 되었다고 사료되었다. 孤 雲 崔 致 遠 은 왜 隱 遁 했을까? 라는 문제제기에서 崔 孤 雲 은 隱 遁 한 것이 아닐 것이다 라는 가설을 설정하여, 논제 咸 陽 上 林 숲의 歷 史 的 意 義 를 고찰하였다. 李 佑 成 1)교수의 논문 南 北 國 時 代 와 崔 致 遠, 李 源 均 2)교수의 孤 雲 崔 致 遠 의 生 涯 와 四 山 碑 銘, 그리고 鸞 朗 碑 序 에 특별한 의의를 부여한 金 戊 祚 3)교수의 孤 雲 의 思 想 과 文 學 등에서도, 咸 陽 上 林 1) 李 佑 成, 南 北 國 時 代 와 崔 致 遠, 창작과 비평 10-4, 창작과 비평사, 1975. 2) 李 源 均, 孤 雲 崔 致 遠 의 生 涯, 1997 ; 孤 雲 의 思 想 과 文 學, 坡 田 韓 國 學 堂 編, 新 知 書 院, 1997. 3) 金 戊 祚 외, 孤 雲 의 思 想 과 文 學, 坡 田 韓 國 學 堂, 新 知 書 院, 1997.
咸 陽 上 林 숲의 歷 史 的 意 義 / 김정기 337 숲 을 거론하지 않았다. 註 : 聖 住 寺 朗 慧 和 尙 白 月 葆 光 塔 碑 銘 의 殿 下 恕 粟 饒 浮 秕, 念 桂 飽 餘 香 의 句 節 을, 전하께서는 내용이 부실한 이 사람을 헤아려주시고( 孤 雲 선생의 自 謙 ), 계수나무는 말라서도 香 氣 가 넘쳐나듯 大 師 의 德 香 을 생각하시어 ( 指 大 師 德 香 ) 라고 訂 正 해 두었다. Internet에는 念 桂 飽 餘 香 이란 句 節 을 계수나무는 香 氣 만 많지 알맹이( 實 )가 없듯이( 孤 雲 선생의 自 謙 으로 解 釋 ) 라고 桂 木 의 特 性 을 몰라 誤 譯 되어 있었다( 筆 者 4)가 指 摘 하고 姜 尙 伯 선생이 訂 正 ). 나는 누구인가 에서 沈 慶 昊 高 麗 大 교수 5) 는 桂 苑 筆 耕 序 에서 전어 시 죽어시( 饘 於 是 粥 於 是 ) 즉 여기서 된죽도 먹고 여기서 묽은 죽 도 먹었습니다. 라는 자서전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쓴 사람이 崔 致 遠 이라고 서술하고 있을 뿐, 최치원의 역사의식 에서 최경숙 교 수 6) 도, 崔 致 遠 의 哲 學 思 想 에서 崔 英 成 7)교수도, 桂 苑 筆 耕 集 의 文 獻 學 的 照 明 에서 柳 鐸 一 8)교수 등 논자 모두가 咸 陽 上 林 숲 을 거론하 지는 않았다. 其 他 文 獻 ( 博 士 碩 士 論 文 30 篇, 學 界 報 告 論 文 130 餘 篇, 文 獻 10 餘 篇 ) 등 에서도 咸 陽 上 林 숲 에 관련된 논고는 없었다. 孤 雲 崔 致 遠 은 왜 은둔했을까? 이 難 題 의 고찰을 위한 가장 근접한 論 題 咸 陽 上 林 숲의 歷 史 的 意 義 를 설정하여, 관련 주요문헌 조사 와 아울러 현지답사 및 구전설화 등을 조사한 결과, 함양군민들의 최치 원 太 守 에 대한 信 仰 에 가까운 절대 존경과 신망 그리고 최치원 太 守 4) 金 正 基, 孤 雲 崔 致 遠 의 人 間 과 思 想, 2006. 5) 沈 慶 昊, 나는 누구인가, 서정시학, 2009. 6) 崔 敬 淑, 崔 致 遠 의 歷 史 意 識, 孤 雲 의 思 想 과 文 學, 坡 田 韓 國 學 堂, 新 知 書 院, 1997. 7) 崔 英 成, 崔 致 遠 의 哲 學 思 想, 아세아문화사, 2001. 8) 柳 鐸 一, 苑 筆 耕 集 의 文 獻 學 的 照 明, 孤 雲 의 思 想 과 文 學, 坡 田 韓 國 學 堂, 新 知 書 院, 1997.
338 石 堂 論 叢 61집 자신의 은둔을 앞둔 마지막 대민봉사 의지, 이 두 이념이 맞물려 맞아 떨어져, 그 어려웠던 咸 陽 군민들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上 林 숲 ( 護 岸 林 )이, 崔 致 遠 이 심혈을 기우려 대민봉사한 결과 이룩해졌던 것이다. 최치원은 그 어려웠던 唐 나라의 벼슬도 버리고 조기 귀국하여 꺼져 가는 조국신라에 애국하려 했지만, 고비마다 신라사회의 엄격한 세습 적인 골품제도의 장벽 9) 에 부닥쳐 아무 일도 못하고 말았다. 서라벌의 10년은 嫉 視 와 의기( 疑 忌 : 疑 心 과 忌 避 )속에서 外 交 文 書 作 成 과 왕명에 의한 撰 碑 文 이 고작이었다. 그 때 남긴 그 謝 不 許 北 國 巨 上 表 와 四 山 碑 銘 등은 112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그 진가를 나타내고 있는 셈이다. 저 유명한 謝 不 許 北 國 居 上 表 와 烏 昭 度 文 件 만해도 그러하다. 金 富 軾 도 三 國 史 記 에서 거론하지 않았던 발해 건 국사를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치원이 찬한 저 유명한 四 山 碑 銘 역시 모두가 國 寶 級 이며, 碑 文 도 또한 海 東 碑 文 의 祖 宗 이요, 禪 宗 의 歷 史 이며, 10) 또한 鸞 朗 碑 序 는 三 敎 ( 儒. 佛. 仙 )를 統 合 하여 崔 致 遠 思 想 ( 風 流 道 )에 포함시키는 論 說 도 전개하였다. 하며, 그가 東 洋 을 涉 獵 한 大 文 章 家 임을 여러 論 者 11)12) 들이 지적하고 있다. 그의 정치이념을 펼쳐보려고 많은 상소문도 올렸지만 정치경륜은 펴 보지도 못한 채, 마침내 은둔을 전재한 그리고 嘉 納 되지도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최후의 상소문을 올리게 되었다. 그것이 저 유명한 時 務 十 餘 條 이다. 지금은 그 1 條 도 알려있지 않지만 최치원의 손자 崔 承 老 (927 989) 9) 각주 2) 참고. 10) 각주 2) 참고. 11) 각주 2) 참고. 12) 金 時 晃, 孤 雲 崔 先 生 의 四 山 碑 銘 에 대하여, 孤 雲 의 思 想 과 文 學, 坡 田 韓 國 學 堂, 新 知 書 院, 1997.
咸 陽 上 林 숲의 歷 史 的 意 義 / 김정기 339 가 고려조 성종(981 997)에게 올린 時 務 策 28 條 는 祖 父 의 時 務 10 餘 條 를 쏙 빼 옮겨 확대 심화시켰을 것으로 보이며, 널리 인재를 등용하 는 과거제도의 실시, 유능한 평민의 등용 등의 항목이 들어있었을 것이 라 사료된다. 그러나 진성여왕(887 897)은 政 丞 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時 務 10 餘 條 는 이유 있다. 하여 嘉 納 은 안 했어도 육두품에 수여할 수 있는 최 고의 직분인 阿 湌 을 수여하였다. 時 務 十 餘 條 상소 후 내정개혁에 힘을 바치려 했으나, 阿 湌 에 임명(38 세ㆍ894년)되었어도 골품제 귀족정권의 권력핵심에는 참여할 수 없었 으며 13) 도리어 시기와 소외를 당한 후, 아찬의 신분을 유지하면서 마 침내 변방인 天 嶺 郡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太 守 로 쫓겨나고 말았다. 咸 陽 은 또한 後 百 濟 와의 접경지대였으니 방로태감( 防 虜 太 監 ㆍ 防 禦 使 ) 도 겸임했다. 14) 전임 天 嶺 郡 太 守 들이 이룩하지 못했던 咸 陽 郡 의 숙원사업인 上 林 숲 ( 護 岸 林 )조성을 최치원 太 守 는 어떤 의지로, 그리고 咸 陽 군민들은 왜 이때를 護 岸 林 조성의 적기로 삼았을까? 함양군민들의 민심을 고취시 킨 원동력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최치원 태수의 시대별 行 狀 에 맞추 어 고찰해보면 그 해답이 도출될 것 같다. 함양군민들은 최치원 태수가 다른 태수와는 格 이 다른 막강한 권한 을 지닌 태수임을 익히 알고 있었다. 지방관으로 나갈 때는 中 央 官 職 은 박탈하는데도 진성여왕은 최치원에게 中 央 官 職 인 阿 湌 을 그대로 유지 시켰을 뿐만 아니라 防 虜 太 監 도 겸하게 했다. 그리고 또한 서라벌 체류 10년간의 명성을 익히 듣고 있던 崔 孤 雲 의 명성, 그것은 마치 君 主 에 버금가는 절대권위에 대한 咸 陽 군민들의 존 경과 欽 仰 의 대상이었으며, 이것이 곧바로 護 岸 林 조성을 위한 군민들 13) 각주 2) 참고. 14) 각주 1) 참고.
340 石 堂 論 叢 61집 의 대열정과 총동원으로 직결되었다고 사료된다. 한편 崔 孤 雲 太 守 자신의 決 意 는 어떠했는가. 질시와 疑 忌 의 연속이 던 서라벌과는 달리, 咸 陽 에서는 知 識 人 太 守 崔 孤 雲 에 대한 존경과 흠 앙은 절대적이었으며 거의 신앙에 가까웠다. 咸 陽 太 守 는 은둔을 앞둔 마지막 봉사라는 臺 木 도 곳곳에서 감지된 다. 첫째는 咸 陽 太 守 부임 직전, 서라벌에서의 時 務 10 餘 條 의 상소였다. 유교사상의 정치이념 가운데 第 一 德 目 이라고 하는 科 擧 制 度 의 실시 등이 담겨있었을 時 務 10 餘 條 가 신라불교사회에 嘉 納 될 理 가 없었음을 太 守 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미리 心 定 해두었던 海 印 寺 계곡으 로의 隱 遁 (이 무렵의 은둔은 필히 世 俗 을 떠나 초야산간에 묻힌다는 결연한 의지가 담긴 은둔)을 전제한 것이었을 것이다. 둘째는 母 親 을 모시고 부임한 太 守 였었다. 당시 신라의 外 官 職 은 가 족을 동반하지 않는 통례였는데도 은둔하기 전의 마지막 孝 行 길로 삼 았다고 사료된다. 함양군민들의 최치원 太 守 에 대한 신앙에 가까운 절대존경과 신망 그리고 최치원 太 守 자신의 은둔을 앞둔 마지막 대민봉사의지, 이 두 理 念 이 맞물려 맞아떨어져, 그 어려웠던 咸 陽 군민들의 오랜 숙원사업 인 護 岸 林 이 이룩해졌던 것이다. 咸 陽 上 林 숲 은 분명 최치원 생애의 일대 분수령이 된 기념비적 업적이었다. 咸 陽 上 林 숲의 歷 史 的 意 義 는 崔 致 遠 太 守 에게는 실로 크다 할 수 있겠다. 방대한 護 岸 林 을 자신 있게 완공한 孤 雲 은 이 무렵 思 考 의 일대전환기를 맞이하였다. 서라벌에서 은둔한 한 지식인이 이곳 上 林 숲 에서 되살아난 것이 다. 최치원은 隱 遁 한 것이 아닐 것이다. 라고 설정한 가설 해결을 위해 考 察 한 결과 는 과연 설정한 가설 그대로인, 최치원은 隱 遁 한 것이
咸 陽 上 林 숲의 歷 史 的 意 義 / 김정기 341 아니었다. 이것이 결론이다. 최치원의 은둔은 서라벌에서 정치로부터 의 은둔이었지 민중계몽과 국토사랑마저도 은둔한 것은 결코 아니었 다. 그는 곧 바로 국토순례로 이어져, 많은 大 文 巨 作 과 저술을 남겼다. 최치원은 단순한 過 去 完 了 型 의 人 物 은 결코 아니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시대와 더불어 고민하는 지식인으로서 살아 있어, 그의 文 章 과 思 想 또한 連 綿 하게 생동하고 있다고 하겠다. 15) 한데 論 考 가 끝난 지금에도, 필자에게는 최치원 선생에 관한 의문과 迷 路 는 곳곳에서 새로이 돋아나고 있다. 나에게는 孤 雲 선생은 때로는 장엄한 선비의 모습으로, 때로는 山 川 을 순례하는 老 仙 의 모습으로 비 쳐졌으니 그것은 오랫동안 흠앙해 왔기 때문이 아닐까. 孤 雲 최치원은 알면 알수록 더더욱 알고 싶어진다. 智 異 山 의 入 山 詩 보다도 더 神 妙 하고, 伽 倻 山 의 遁 世 詩 보다도 더 玄 妙 한, 어느 靈 山 에 있을 仙 人 의 발자취를 찾아 필자의 최치원 연구는 계속될 것이다. 16) 成 三 問 은 聖 君 을 만나 訓 民 正 音 이란 大 文 化 를 創 製 하는 主 役 을 했 는데, 최치원도 聖 君 을 만났더라면 하고 아쉬워해 본다. 라고 孤 雲 崔 致 遠 의 人 間 과 思 想 17)(2006)에서 필자는 서술하고 있다. 咸 陽 上 林 숲의 天 然 記 念 物 (제154호) 指 定 (1962. 12. 3.) 事 由 : 1) 온대남부 낙엽활엽수림의 性 狀 을 지닌 學 術 上 가치 있은 숲이며 우리나라 최초 최대 규모의 防 風 防 災 護 岸 林. 2) 호안림의 역사적 유물. 指 定 事 由 1)가 특히 주목을 끄는 대목이며 자연과학도에게는 다음과 같이 확대 해석되기도 한다. 15) 각주 7) 참고. 16) 각주 4) 참고. 17) 각주 4) 참고.
342 石 堂 論 叢 61집 闊 葉 樹 種 이 116종이나 된다는 부분이다. 動 物 같으면 약육강식이란 먹이사슬의 형성 때문에 다양한 종류가 좁은 울타리에서 공동생활 하 는 것이 불가능하다. 식물은 동물의 약육강식 즉 길항작용( 拮 抗 作 用 ㆍ Antagonism)과는 달리 오히려 相 助 作 用 (synergy)이 形 成 된다. 咸 陽 上 林 숲에서 樹 木 상호간의 相 助 作 用 (synergy)은, 첫째, 土 壤 養 分 吸 收 면에서 그러하다. 多 量 要 素 는 樹 種 모두 吸 收 競 合 이 있겠지만 微 量 要 素 는 樹 種 마다 吸 收 量 과 成 分 을 달리하니 同 一 수종보다 異 種 樹 木 을 植 栽 하는 것이 植 生 에 유리하다. 이 부분은 崔 致 遠 太 守 가 진두지휘하여 白 雲 山 과 智 異 山 에서 다양한 수종을 移 植 했다는 금호미의 說 話 를 뒷받침하는 대목 이기도 하다. 둘째, 植 物 에는 連 理 枝 現 象 이 있다. 樹 木 의 가지들이 樹 種 따위와는 무관하게 서로 엇물려 相 助 共 生 하는 이 현상은 樹 種 이 다양할수록 더욱 유리한 법이다. 다양한 수종일수록 木 根 의 伸 張 形 態 또한 다양하여 때로는 垂 直 으로 때로는 水 平 으로 뻗어 토양을 공고히 하니 호안림의 절대기능인 土 壤 硬 度 가 증대되어 防 風 效 果 가 발휘된다 하겠다. 그렇게 되면 단단히 굳 어진 토양에 어떻게 齧 齒 類 (쥐)나 兩 棲 類 (개구리)가 棲 息 하겠는가. 동 물의 먹이사슬이 형성되지 못해 爬 蟲 類 (뱀)가 서식하지 못한다는 결과 이다. 이 부분은 설화로만 전해지는 崔 致 遠 太 守 의 討 巳 檄 文 (뱀이야 물러 가라. 앞으로는 나타나지 말라)을 뒷받침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咸 陽 上 林 숲의 歷 史 的 意 義 / 김정기 343 孤 雲 崔 致 遠 像 ( 咸 陽 上 林 숲) 咸 陽 上 林 숲의 歷 史 的 意 義 란 論 考 에서 필자는, 서라벌에서 은둔한 知 識 人 崔 致 遠 은 이 곳 咸 陽 上 林 숲 에서 되살아난 것 이라고 했다. 咸 陽 上 林 숲
344 石 堂 論 叢 61집 함양 상림 標 石 최치원 선생 신도비
咸 陽 上 林 숲의 歷 史 的 意 義 / 김정기 345 저자의 이력 김정기( 金 正 基 ). 아호 : 목원( 牧 園 ) 현재 : 동아대학교 명예교수 1949 : 진주중학교 6년 졸업 1953 :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화학과 졸업 1960 : 미국 Oklahoma주립대학교 대학원 농교육학석사 1970 : 동아대학교 대학원 농학박사 1954 1964 : 진주농림고등학교 교사 1954 1962 : 지주농과대학 강사 1964 1965 : 함양농업고등학교 교감 1965 1993 : 동아대학교 농과대학 교수 동아대학교 농과대학장, 교무처장, 대학원장 엮임 국민훈장 동백장(1986) 등 수상 專 攻 外 著 述 : 牧 園 隨 想 -내가 헤쳐 걸어온 歷 程 -(2008. 3.) 우리 집 어른들 추억(2001), 孤 雲 崔 致 遠 의 人 間 과 思 想 {2003(초판) 2010(7판)}, 佛 像 에세이(2007). 초판 4판 釜 山 鳳 巢 會 誌 ( 創 刊 號 ) 編 輯 (2006) 松 年 公 實 錄 (2010). 松 年 公 實 記 抄 (1999), 우리 家 庭 의 寫 眞 100 選 (2012. 4.) 咸 陽 上 林 숲의 歷 史 的 意 義 ( 論 文. 2012. 5.)
346 石 堂 論 叢 61집 저자의 저서 논문집 그리고 편집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