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울산학연구논총 ISSN 1979-9355 제 8호 Part.1 Part.2 Part.3 Part.4 울산의 공단 인접지역 자연마을의 변화상 - 울주군 청량면 화창마을을 중심으로 - 울산의 민속놀이 실태조사 울산광역시 지하보도, 문화창작공간으로서의 활용방안 연구 - 지하보도 문화와 예술을 입고 소통의 길을 찾다 - 울주 사찰 문헌자료의 조사연구
2013 울산학연구논총 제 8호
2013 울산학연구논총 제 8호 울산의 역동적인 경험과 지식을 담았습니다. 울산발전연구원장 울산은 우리나라 동해안의 작은 소도읍에서 지난 반세기 동안 산업화의 물결 속에 산업수도로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을 이끌었으며, 오늘날 세계적 인 친환경 생태문화도시로 자리매김 하였습니다. 울 산이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울산의 역사문화적인 자원이 풍부하여 시민을 하나로 결집 시킬 수 있는 바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 원을 바탕으로 울산발전연구원 울산학연구센터에서 는 울산시민으로서의 지역사회에 대한 자긍심과 애향심을 고취시킬 수 있는 과 제를 발굴하여 체계적인 연구를 진행해 왔습니다. 금번에는 센터에서는 지역의 다양한 연구 동향과 관심을 반영하여 교양 서 1편, 연구논총 4편, 자체과제 2편, 총 7편의 연구를 진행하였습니다. 교양서 시와 함께 만나는 울산의 깊은 풍경 은 울산의 매력적인 공간과 장소의 의미를 노래한 시 작품과 다양한 예술적 성과를 소개함으로써 울산의 아름다운 자연 경 관과 함께 문학적인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연구논총 8호는 울산의 공단 조성으로 많은 거주지가 사라진 현실에서 현재 남아있는 인접지역 마을의 변화상을 파악하기 위해 울주군 화창마을을 중 심으로 연구한 울산의 공단 인접지역 자연마을의 변화상, 지역의 생활과 의식 을 잘 나타내고 있는 전통적 민속놀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함으로써 울산의 특질 을 전승하는 기초로 삼고자 한 울산의 민속놀이 실태조사, 도심의 지하보도를 주변환경과 현실에 가장 적합하면서도 지속가능한 복합문화창조공간으로 재탄
발간사 생시켜 일상에 필요한 공간으로 활용할 방안을 모색한 울산광역시 지하보도, 문 화창작공간으로서의 활용방안 연구, 그리고 울산 사찰 문헌자료의 조사연구 후 속으로 울주 지역을 조사한 울주 사찰 문헌자료의 조사연구 4편을 실었습니다. 또한 산업화시대를 살아온 울산 근로자들의 생애사 는 산업화 1세대로 서 우리나라 산업 발전에 기여한 근로자로, 아버지로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생생 한 그들의 목소리로 복원하였습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 7대 광역시민으로서 살아가고 있지만 조선시대 울산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를 조선왕조실록 속 울산의 생활문화사 관련 자료를 정리하여 스토리텔링 함으로써 조선시대 울산인 의 삶을 들여다보고자 하였습니다. 금년 한해 울산학 연구과제에 참여해주신 연구자와 보다 나은 결과물을 얻기 위해 아낌없는 조언을 해주신 자문위원 및 심의위원, 그리고 항상 울산학연 구센터에 많은 관심과 격려를 보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울산시민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향토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하 기 위해서 연구 주제의 다양화 및 참여의 폭을 확대하여 보다 나은 연구가 이루 어 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아울러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지역학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연구자들뿐 아니라 시민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2013. 12
Part4 울주 사찰 문헌자료의 조사연구 Ⅰ. 울주 사찰 연혁 230 Ⅱ. 사찰 내 문헌자료 242 Ⅲ. 문헌기록 355 울주 사찰 문헌기록 목록 364 울주 사찰 소장 문화재 제작자 인명사전 371 참고문헌 379
울주 사찰 문헌자료의 조사연구 Part4 최선일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강미정 중앙문화유산보존센터 연구원 어준일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연구원 일러두기 들어가며 Ⅰ. 울주 사찰 연혁 Ⅱ. 사찰 내 문헌자료 Ⅲ. 문헌기록 울주 사찰 문헌기록 목록 울주 사찰 소장 문화재 제작자 인명사전 참고문헌
일러두기 - 이 글은 울주 지역 사찰에 대한 사찰문화에 관한 다양한 문헌기록을 종합 한 것이다. - 울주 지역 사찰에 현재 남아있는 고문서(古文書), 현판(懸板), 금석문(金 石文)과 명문(銘文), 불화(佛畵) 화기(畵記), 편액(扁額)과 주련(柱聯), 시 문(詩文) 등으로 정리하였고, 기존 간행된 보고서와 논저 등을 상호 비교 하여 탈자(脫字)와 오자(誤字) 등이 있는 부분을 각주를 달았다. - 사찰의 순서는 석남사(石南寺), 내원암(內院庵), 인성암(引聖庵), 문수사 (文殊寺), 보덕사(報德寺), 석문사(石門寺), 용화사(龍華寺), 간월사(澗月 寺), 망해사(望海寺), 밀봉암(密蜂庵), 시적사(施寂寺), 청송사(靑松寺), 굴암사(窟巖寺), 화림사(華林寺), 화장사(花藏寺), 운흥사(雲興寺) 등으 로 정리하였다. - 인물의 주석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과 한국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및 울주군에서 발간한 저서를 주로 활용하였다. - 이 책의 각주는 모두 편자가 단 것이다. - 본문의 석문(釋門)은 편집자가, 감수는 송광사 성보박물관장 고경스님과 경기 광주 우리절 동봉스님이, 울주 인물에 관한 자료는 박채은 위원님과 이상도 선생님이 가르침을 주셨다. - 사찰 내에 성보문화재의 사진 촬영을 승낙해 주신 여러 사찰의 주지스님 께 지면을 통하여 감사드리는 바이다. 226
들어가며 울주 지역 사찰의 문헌자료는 최근 문화재청과 대한불교조계종에서 현존 하는 성보문화재의 불화 화기, 건물 상량문, 현판 등의 내용을 한국의 사 찰문화재-부산 울산 경남Ⅱ 로 간행한 바가 있다. 이 글에서는 울주 지역의 사찰인 석남사(石南寺), 내원암(內院庵), 인성암 (引聖庵), 문수사(文殊寺), 보덕사(報德寺), 석문사(石門寺), 용화사(龍華 寺), 간월사(澗月寺), 망해사(望海寺), 밀봉암(密蜂庵), 시적사(施寂寺), 청 송사(靑松寺), 굴암사(窟巖寺), 화림사(華林寺), 화장사(花藏寺), 운흥사(雲 興寺) 등과 관련 문헌기록을 체계적으로 수록하였다. 사찰 내에 소장된 문헌은 불교사와 미술사 등에서 폭 넓게 이용되는 주요 한 사료이다. 특히, 불교미술사에서 조성발원문(造成發願文)과 화기는 제작 자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작가를 중심으로 미술사를 접근하는 연 구방법은 양식사적 접근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또한 불교미 술품이 제작되기 위한 경제적 기반인 시주자(施主者)가 언급되어 후원자를 이해할 수 있다. 울주 사찰에 전해오는 사적기, 현판, 화기, 조성발원문 등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게 된 연유가 여기에 있다. 본 글은 각 사찰을 방문하여 개별 문헌기록을 촬영한 후, 기존 보고서와 불화집 등의 내용을 일일이 검토하였다. 새로 검토한 문헌자료의 원문을 기 준으로 이전 보고된 내용과 다를 경우 각주로 처리하였다. 이후에 편자들은 울주 사찰에 관한 기록을 개인 문집이나 다른 지역에 소 장된 기록 등을 찾아 이번에 정리하지 못한 부분을 추가할 생각이다. 또한 원문의 번역본과 울주 불교 관련 스님과 시주자들에 관한 인명사전을 추진 할 생각이다. 아직까지 전국적으로 불교인명에 관한 자료 정리와 검색(데이 터베이스)가 구축되지 않았지만, 이러한 작업의 기초를 울주 지역부터 시작 지역으로 확대해 나갈 생각이다. 이와 같은 작업이 이루어진다면 조선시대 활동한 스님들의 삶이나 불교미술품 조성에 경제적으로 후원한 세력 등 다 양한 연구가 진행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227
울산부지도(여지도) 228
울산부지도( 嶺南地圖 추정, 1745년-1767년) 229
Ⅰ. 울주 사찰 연혁 1. 석남사(石南寺) 석남사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上北面)의 석남산(石南山)에 위치 한 대한불교조계종 제 15교구 통도사의 말사이다. 824년에 도의선사(道義 禪師)가 개창하였다고 하지만 구체적인 문헌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석남 사는 임진왜란을 겪은 후 1674년에 언양현감(彦陽縣監) 시주로, 탁령(卓 靈), 자운(慈雲) 등의 선사들이 중건하고, 1803년에 침허(枕虛), 수일(守 一) 선사가 중수하였다. 석남사는 한국전쟁 기간 중 많은 피해를 입었지 만. 1959년에 복원되기 시작하여 비구니들의 수련도량으로 그 면모를 갖 추었다. 특히 근대 석남사의 중창주인 인홍(引弘)스님은 현재의 석남사를 있게 한 분으로, 비구니 승단의 귀감이 되는 분이다. 1958년에 대웅전ㆍ극락 전ㆍ호진당 등 옛 법당을 개축하였고, 1963년에 심검당을 비롯한 침계루 ㆍ종각ㆍ상락료 등 사찰 부속건물을 신축하였다. 1976년 법희(法希) 스 님이 오도실(悟道室)을 신축하고, 2001년에 영운스님이 금당선원과 백 인당을 신축하였다. 석남사 전경 230
주요 문화재는 석남사부도(石南寺浮屠, 보물 369호)가 있으며, 9세기 경에 세워진 석남사 삼층석탑(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22호)이 있다. 연 대 824년(현덕왕 16) 내 용 도의(道義) 선사가 창건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으로 전소 1674년(헌종 15) 언양현감 강옹(姜甕)의 시주로 탁령(卓靈) 자운(慈雲) 의철(義 哲) 스님이 중창하고, 진혜(振慧) 쌍원(雙遠) 익의(益儀) 성진(性 眞) 스님이 건물 단청과 불구(佛具)를 조성 17세기 후반 정우(淨佑) 각일(覺日) 석맹(碩孟) 스님이 극락전 청풍당 청화당 향 각(香閣) 등 요사를 증축하고 희철(熙哲) 스님이 명부전을 건립 1803년(순조3년) 침허枕虛) 수일(守一) 스님이 가람 중수하고 아미타후불도와 지장 시왕도를 조성 1889년(고종 26) 독성도를 조성 1912년 우운(友雲) 스님이 가람을 중수 1950년 한국전쟁으로 대부분 가람 소실 1958년 인홍(仁弘) 스님이 대웅전 극락전 호진당 등 옛 법당을 개축 1963년 심검당을 비롯한 침계루 종각 상락료 등 사찰 부속건물을 신축 1976년 법희(法希) 스님이 오도실(悟道室)을 신축 2001년 영운스님이 금당선원과 백인당을 신축 231
2. 내원암(內院庵) 내원암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양읍 운화리 대운산 자락에 자리한 대한불 교조계종 제15교구 통도사의 말사이다. 내원암은 신라 중기에 대원사(大原 寺)의 부속암자로 고봉선사(高峰禪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고, 석남사, 문수사, 운흥사와 함께 울산 지역 4대 고찰의 하나로 꼽힌다. 대원사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이나 범우고(梵宇攷) 등에 울산군 불광산에 있다 고 적혀 있어 17세기까 지 법등을 이어온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대원사의 부속암자로 창건된 후 신라불교가 융성했던 시절, 온양 읍 일대에 있었다고 하는 사사구암(四寺九庵) 의 하나로 현재까지 그 자리 를 지키고 있다. 조선시대 중건된 전각은 1925년에 일어난 화재로 불타고, 현재 남아있는 수세전은 1927년에 새로 지었다고 한다. 덕봉(德峰) 스님이 이 무렵을 전후하여 30여 년간 사찰에 머물면서 복원불사에 힘썼다. 1993년 에 대웅전, 1994년에 수세전(壽世殿)을 새로 지었으며, 2002년에는 종선(宗 船)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지장전을 건립하고, 2003년에 삼층석탑 건립과 2004년에 2동의 요사를 신축하였다. 내원암 전경 232
연 대 신라중기 내 용 대원사(大原寺)의 부속암자로 고봉선사(高峰禪師)가 창건 1919년 칠성계 조직하여 칠성각 불사 1925년 덕봉(德峰) 스님이 30여 년간 사찰에 머물면서 복원불사 1993년 대웅전 신축 1994년 수세전(壽世殿) 신축 2002년 종선(宗船) 스님 지장전을 건립 2003년 3층석탑 건립 2004년 2동의 요사 신축 3. 인성암(引聖庵) 인성암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해운산 자락에 위치한 대한불교조 계종 제 14교구 범어사의 말사이다. 신라시대에 지어진 사찰이라 전하지만 구체적인 문헌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주요 문화재로는 2007년 11월에 지정 된 신중도와 석조보살좌상이 시도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4. 문수사(文殊寺) 문수사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면 문수산(文殊山) 자락에 자리한 대한 불교조계종 제 15교구 통도사의 말사이다. 문수산은 원래 영축산(靈鷲山)으 로 불렀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지금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고려와 조선전 기에 문헌이 남아있지 않고, 1799년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 에 언급되 어 있다. 또한 통도사 성보박물관으로 소장된 칠성도가 1855년에 조성되어 당시에 불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문수사는 근래 들어 1984년 청하(淸 霞) 스님이 신격호(辛格浩)와 신도들의 시주로 대웅전과 보현대ㆍ범종루 등 을 신축하였다. 233
보덕사 전경 5. 보덕사(報德寺) 보덕사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725-1번지 가지산 자락에 자 리 잡고 있는 한국불교태고종 사찰이다. 보덕사는 신라 고찰로 석남사의 암 자인 동인암이 현 위치로 이전하여 신축한 후, 보덕사로 개칭한 비구니 사 찰이다. 동인암의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 문무왕의 경순 공주가 수 도 치료한 곳으로 왕명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임진왜란 기 간 중에 석남사와 함께 전소된 것을 1807년에 석봉대사(石峯大師)가 중수 하였다. 6. 석문암(石門庵) 석문암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 활천리 산17번지 활천마을 북쪽에 있는 서당골 입구에 위치한 대한불교법화종에 속한다. 석문암은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사찰터에 1935년에 김조작 보살이 창건하고 1941년에 서활운 화상이 세웠다. 234
용화사 전경 7. 용화사(龍華寺)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천전리 118번지 천전마을 가운데 위치한 대한 불교조계종 제 15교구 통도사의 말사이다(도4). 일명 천전불당(川前佛堂)이 라고 하는데, 현재 건물은 1976년에 중창되었다. 8. 간월사(澗月寺)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 505번지 간월산(肝月山)에 있는 사찰 터에 지역민들이 중창하였다. 이 사찰은 간월산의 이름을 따라 간월사(肝月 간월사 전경 235
寺)라고 하였다. 신라시대의 고승 자장(慈藏)이 630년대 초반 당나라로 유 학가기 전에 창건하였다고 전하지만 유학하고 귀국한 뒤 통도사를 짓기 전 에 창건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창건 초에는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지만, 잦 은 왜구의 침략으로 인하여 차츰 파괴되었다. 1635년에 명언(明彦)이 중건 하고 1673년 여러 종류의 불경을 간행하였지만 1836년에 큰 흉년으로 인해 폐사되었다. 이 사지는 1984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학술조사를 실시하 였다. 간월사지 삼층석탑은 무너져 있던 것을 근래에 탑재를 모아 복원한 것으로 1997년 10월에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 5호로 지정되었다. 9. 망해사(望海寺) 울산광역시 울주군(蔚州郡) 청량면 영취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망해사(望 海寺)는 이 지역을 대표하는 사찰 가운데 하나이다. 망해사의 창건은 삼 국유사(三國遺事) 에 헌강대왕이 개운포(開雲浦)에 놀러 갔다가 동해의 용 왕을 위하여 영취산 동쪽에 절을 창건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875년부터 885년 사이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한말의 문신 이유원(李裕元 : 1814~1888)이 엮은 임하필기(林下筆記) 에 헌강왕(憲康王)이 학성 망해사 전경 236
(鶴城)에 나가 놀 때,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끼어서 길을 잃었다. 일관(日官) 이 이것은 동해의 용이 조화를 부린 것이니 좋은 일을 행해서 풀어야 한 다. 라고 아뢰었다. 그리하여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용을 위하여 절을 세우 도록 명령을 내리자 구름이 걷혀 이 포구를 개운포(開雲浦) 라고 하였다. 그러자 용왕이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어가(御駕) 앞에 나타나 왕의 덕을 칭 송하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 가운데 한 아들이 어가를 따라 서울 로 들어왔는데, 이름을 처용 이라 하였다. 라고 쓰여 있다. 이 사찰은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에 구체적인 문헌기록이 남아있지 않지 만, 사찰 터에서 발견된 글씨가 새겨진 명문 기와 중에 가정이십삼년갑진 (嘉靖二十三年甲辰) 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어 1544년에 건물에 기와를 올 렸음을 알 수 있다. 1831년에 간행된 울산부읍지(蔚山府邑誌) 에 망해 사는 신라 말에 창건되었다. 로, 1861년에 간행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에도 사찰 이름이 적혀 있지만, 1899년에 간행된 읍지에 폐사(廢寺)된 것으 로 적혀 있다. 따라서 19세기 후반까지 망해사는 법맥(法脈)이 유지되었음 을 알 수 있다. 그 후 망해사는 1957년에 김영암(金影庵) 스님이 남암산의 동쪽에 위치 한 영취산(靈鷲山) 망해사 터에 불당(佛堂)을 세워 중창하였다. 1960년에 황수영 동국대학교 교수님의 지도를 받아 방치되어 있던 석조부도를 정비하 여 1963년에 보물 제 173호로 지정받았다. 그리고 1966년에 삼성각을, 1967년에 북요사를, 1971년에 남요사를, 1974년에 범종각을, 1991년에 대 웅전을 건립하였다. 10. 밀봉암(密蜂庵)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 양등 734번지에 위치한 밀봉암은 대한불교조계 종 제 15교구의 통도사의 말사이다. 밀봉암은 신라 혜덕왕(慧德王) 때 창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수 백년간 남아있던 빈 터에 1863년 윤양조 스님이 중창하였다. 이후 1883년에는 천태각(天台閣)을 창 건하였다고 한다. 현재 대웅전은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매몰된 것을 1964년에 중창한 것이다. 237
밀봉암 전경 11. 시적사(施寂寺) 시적사(施寂寺)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천성산에 자리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 15교구 통도사의 말사이다. 시적사는 원효가 세운 관음사 터에 1955년에 오종수가 조그마한 암자를 창건한 후,1) 인수하여 통도사로 재산 등기를 하였다. 시적사에는 부도 2기가 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시적사 전경 1) 시적사 내 안내판 참조. 238
청송사 전경 12. 청송사(靑松寺) 청송사(靑松寺)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면 율리 남암산 아래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통도사의 울산포교당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 에 俱在文殊山 이라 기록되어 있어 그 위치를 짐작 할 수 있고, 울산읍지(蔚山邑誌) 에는 在文殊山南見古蹟, 울산읍지 (蔚山邑誌) 에는 在文殊庵南五里今廢具有石塔 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사찰은 혜명지안(1920 1994) 스님이 폐사지에 누님인 대덕화보살, 보원회 회원인 진정수, 이중호와 복원 불사의 초석을 다지고, 그의 제자들이 사찰 전각의 건립과 정비를 마무리하였다. 13. 굴암사(窟巖寺)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송대리 397-1번지 화장산 정상 동남쪽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한국불교태고종 사찰이다. 창건연대는 미상으로 언양읍지 굴암사 전경 239
화림사 전경 (彦陽邑誌) 에는 화장암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때 폐사되었다가 1951년에 중창하여 선약사라 하였다 이후 1967년에 중수하면서 다시 굴암사로 개칭 하였다. 14. 화림사(華林寺) 울산 울주군 삼남면 교동리 468번지에 위치한 한국불교태고종 사찰이다. 15. 화장사(花藏寺)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 송대리 392번지에 위치한 화장사는 제 15교구 통도사의 말사이다. 성마을과 언양성당 중간에 있으며 1938년 원광경봉 스 화장사 전경 240
님에 의해 창건되었다. 요사채는 일제강점기에 건축된 사찰의 전형적인 모 습을 보여주고 있는 근대 건축물로 가치가 있다. 용사채의 기와와 문의 형식 등은 전통적인 창호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16. 운흥사(雲興寺)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고연리 1699-1번지 천성산에 자리 잡고 있는 운흥사는 신라 진평왕 때 창건,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를 넘겨 그리고 조선의 영조 때까지 현존하였다. 1749년(영조 25) 출간한 학성지(鶴城 誌) 에 폐사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외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운흥사 관련 기록이 있고, 사명대사도 이곳에서 활동 했다고 한다. 학술조사 결과 금당지, 온돌 건물지, 수조 등의 유물이 발견되 었다. 운흥사에서 간행되었던 총 19종의 불서 중 경판 15종은 현재 양산 통도 사 성보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운흥사지 부도는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 호로 지정되어 있다. 운흥사지 부도 241
Ⅱ. 사찰 내 문헌자료 1. 석남사(石南寺) 1) 고문서(古文書) (1) 언양석남사대웅전불량헌토천복록2) 彦陽石南寺 大雄殿佛糧獻圡薦福錄序 我 佛現於天笁而以慈乳養育 羣 品入滅後其法中流於中華末 布於鰈域崇其道尙其方者或舍 燭或施金帛或指田圡甚者斷臂燃 身鳴哹天不言焉而四時不武佛不 (1쪽) 焉而愛慕日至稽其出爾及爾之 說必乎世 生 舍香燭施金帛指田 圡斷其臂燃其身或救衆生或供 諸佛菩薩焉維石南寺羅 辟師道義 草劍而兵燹之所惱聳 塔層宇入於蔦蘿之中澗水靑山 依然碧石之間縣大夫姜公應石忍(2쪽) 其荒庭廢閣煙滅人稀舍財以搆其 宝招僧以奉其佛向所謂布施之道尤 證於此也一日寺之人指佛粮薦福 錄亦予曰寡䓁之寺蒙此以保而儒 2) 35.8 28.8. 242 언양석남사대웅전불량헌토천복록
混序於亾石稽又况每整儀 䖏散 稱有感忍 助郁惟怖可正不予曰升 佛之德也浩 磨測人之舍施者石吝(3쪽) 其田圡金帛吾䓁之識像於佛而又像 於施石乳厥緖此卷之無容今亦床 何散避乎從其言拔華注名以貽 乎可畏尔 崇禎紀元後三癸亥3)端陽月上澣 智峯門人月荷戒悟謹誌(4쪽) 獻圡芳御 霽月堂大師 和伯 覺靈 﨑巖堂大師 再淳 覺靈 涵月堂大師 德輝 覺靈 寒溪堂大師 信黙 覺靈 慶巖堂大師 敬印 覺靈 鴻波堂大師 學諶 覺靈(5쪽) 晴月堂大師 秋演 覺靈 賢虗堂大師 雪眼 覺靈 鰲巖堂大師 妙嚴 覺靈 智峯堂大師 巨磯 覺靈 取雲堂大師 菊明 尊靈 南坡堂大師 天宇 尊靈 濸坡堂大師 守坦 尊靈(6쪽) 桂庵堂大師 遇岸 覺靈 月荷堂大師 戒悟 覺靈 언양석남사대웅전불량헌토천복록 3) 崇禎紀元後三癸亥는 1863년이다. 243
慶坡堂大師 244 志如 覺靈 慶月堂大禪師 詳奎 覺靈 石庵堂大師 宇聞 覺靈(7쪽) 歸真堂 慈運 靈駕 孤月堂 道謙 靈駕 盤月堂 德胡 靈駕 蓮坡堂 性㝎 靈駕 寧波堂 司一 靈駕 泗虗堂 景修 靈駕 嘉善 振惠 靈駕(9쪽) 嘉善 玉柱 通政 道根 通政 斗䝺 通政 彩卞 嘉善 振淸 嘉善 管奇 嘉善 椘伯(10쪽) 通政 幸賢 通政 泰稀 嘉善 就益 嘉善 慈普 嘉善 呂諶 通政 彩嚴 通政 卓雄(11쪽) 通政 道伯 嘉善 凞哲十二月初九日忘
嘉善 世雄 通政 宏屹 通政 彩眼 比丘 文湜 淨宇 性明(12쪽) 雪軒 道行 德訥 椘淨 雪湜 儀益(13쪽) 比丘 六淸 演心 振擇 䖏圓 即淳 寬鵬 偉卞(14쪽) 玉琳 次瓊 嘉善 法眼 通政 寬心 錦草 再悟 明學(15쪽) 245
嘉善 寬悟 再淑 246 朗月堂 鏡幸 靈駕 淵谷堂 璽文忘正月初二日 靈駕 通政大夫比丘 坦湜 靈駕 通政大夫比丘 敀性 靈駕 白華堂 取定 靈駕(16쪽) 靈菴堂 寬活 靈駕 通政大夫 坦海 靈駕 前紏正兼嘉善 䝺一 保體 佛岩堂 元淳三月初九日忘 比丘 尙雄 比丘 永己三月初九日忘 慶雲堂 道黙(17쪽) 豊溪堂 性真 尊靈 演沾 靈駕 近天 靈駕(18쪽) 嘉善 李泰龍兩主 通政 金時哲兩主 前巡將 金光河兩主 通政 金得化兩主 嘉善 金善明兩主 通政 尹應漢兩主 通政 李泰雲兩主(19쪽) 通政 朴善敏兩主 通政 李明山兩主
金岑同兩主 朴永男兩主 韓德成兩主 金汝英兩主 朴世邦兩主(20쪽) 金時益兩主 鄭時分兩主 金萬太兩主 許世伯兩主 張振昌兩主 宋順發兩主 徐萬龍兩主(21쪽) 居士 朗珠兩主 舍堂 信行兩主 居士 真戒兩主 舍堂 姜太一 金召吏 世至 初英(22쪽) 俊伯 通政 金時憲兩主 䖏士 崔雲 金氏 靈駕戊子三月初七日忘(23쪽) 本寺雜役革罷有功主祝願 忠淸道延豊邑府居住 己亥生李文欽 保軆 247
仰蒙佛助身登樞要緇 承 之 大願 辛未正月 日(24쪽) 本官尹秉寬殿閣窓戶紙代錢拾兩(25쪽) 淸道中洞面林塘里居住 通訓大夫柳光源施主 錢文貳兩(26쪽) 前後有功人並附 重創大功德主縣侯 姜公應尊靈 比丘 善哲 初淡 應俊 雙遠 泰珠(27쪽) 忠信 勝寶 䖏尙 凞演 管奇 椘伯 圎鑑(28쪽) 凞哲 性㝎 平和 枕虗堂大師 守一 朗月堂 248 鏡幸
幸律 彩心(29쪽) 覺信 彩玧 一聰 錦俊 管行 智俊 戒眼(30쪽) 㝎心 覺一 信岑 性真 初㝎 敏善 通政 義寬(31쪽) 決允 卓靈 碩孟 六淨 任哲 性仁(32쪽) (2) 석남사사적4) 墨書刊記 雍正八年庚戌5)仲夏中浣書記錦椘 4) 34.8 22.4. 249
改傳寫以貽後來耳 (3) 대령지大嶺志 在慶尙南道彦陽(今入蔚山郡)迦智山 (4) 가람고伽藍考 6) 石南寺 在迦智山 (5) 범우고梵宇攷 7) 石南寺 在迦智山 (6) 權相老 편, 한국사찰전집韓國寺刹全書, 1979년 石南寺 在慶尙南道彦陽(今入蔚山郡)迦智山 梵宇考 伽藍考 大嶺志 在蔚 山郡上北面迦智山 大本山通度寺本末 太古寺寺法 新羅慧德王十六年甲辰 迦 智道義禪師開刱 一九一二年壬子 友雲和尙重刱 (7) 태고사사법太古寺寺法 在蔚山郡上北面迦智山 大本山通度寺本末 5) 雍正八年庚戌는 1730년이다. 6) 영조연간(1694~1776)에 신경준(申景濬)이 각 지역에 산재한 절의 이름과 소재지를 도별 로 나누어 수록한 사찰지(寺刹誌)이다. 7) 1799년에 왕명(王命)에 의해 편찬된 사찰지(寺刹誌)이다. 250
2) 현판(懸板) (1) 석남사중창기8) 石南寺重刱記 大凡人得時而成事々待人而成功故功與事 亦不得其人與時皆不成也惟我本寺新羅 憲德王時伽智道義國師初刱而雄材華榭 碩於嶠南諸刹故扁曰碩南山名伽智亦以師號 稱焉粤在黑龍一經兵燹殿寮盡灰壊塔堆塵 而幾介殘衲木巢土處雲去鳥來逮至康凞丙 午本倅姜公膺捐其廪料而補寺募僧卓靈 等營建禪僧兩寮甲寅善哲重建大雄殿慈 運弘儀亦助然年久頹廢修葺亦未暇居僧稍 稍移住於湥寂菴以菴爲寺者久而南湖福衍審 機於殘廢不思粉身碎骨鳩財補寺修契護僧 每與圓華枕山嶺月諸師論議重建然時不 得而事未成矣今辛亥冬住持友雲湥謀於衆 亦通於官署而壬子春招工斫木寶雲董役運 海監財開拓幾百年榛莾之址殘衲弱緇櫛風 沐雨焦身磨骨而百費層鱗如于契貯金洪 爐点雪募集義金及斥土財僅爲以一防十之艱 亻葡而訖功於甲寅秋始終三年間積苦雖山毫海 墨難盡其經紀也是日住持姜友雲請余爲記 석남사중창기 而辭不獲謂住持曰古云千兵雖易得一將實 難求果乃住持之執事可求一將而得亦無宿 願焉能如是今之姜住持倘非前姜侯之重 來耶眞是功與事相待人與時而成也必矣 大正三年9)秋上浣海曇致益謹識 8) 26.3 99.8. 9) 大正三年는 1914년이다. 251
時會人名錄 住持 姜友雲 中廳 金禹永 事務 金寶雲 鄭致祚 書記 成錦鴻 金敬旭 成造 張錦岑 金敬佑 財監 梁運海 金錦仁 鐵監 金碩祚 裵得林 役監 金寶雲 李益文 別座 宋鳳儀 河性俊 供司 金斗樞 許得演 木手 吳鎔根 孫太賢 金正權 姜得眞 鐵工 張龍雲 崔省眞 老德 金枕山 金景鍾 崔圓華 黃嶺月 總費金三千三百八十圜七十五錢四厘也 (2) 석남사중창시의연록10) 石南寺重刱時義錄捐錄 下北德峴 10) 19.8 133.3. 252 石南寺 緣化廳 金一千圓 金一千圓 宗門契 金七百圓 判廳契 金八十圓 書廳契 金五十七圓 中廳契 金二百圓 魚山契 金八十五圓 丙子甲契 今五十圓 姜友雲 金十圓 석남사중창기
梁運海 金十圓 金枕山 今三圓 金禹永 金一圓 姜頌德 金十圓 黃性仁 金二圓 朴建業 金一圓 梁山郡 通度寺 金十五圓 淸道郡 雲門寺 金三圓 彦陽西部 兪氏萬善華 金十圓 徐氏淨月華 金一圓 金氏 金一圓 朴氏功德華 金二圓 方氏圓滿月 金十圓 朴氏大德華 金三圓 劉氏 金四圓 方氏 金三圓 吳正圭 金三圓 徐氏一心華 金一圓 李氏普覺華 金二十圓 李氏極樂華 金二圓 兪氏一生華 金二圓 金氏功德華 金一圓 宋斗萬 金二圓 尹氏夏生華 金二圓 李氏白蓮華 金一圓 下廂郭南 趙扶作支 金二圓 下廂藥水 姜氏本文華 金二圓 張氏達文華 金一圓 下廂蓮巖 吳氏水光華 金一圓 下廂西里 安氏解脫華 金二圓 上府下西 李氏願生華 金四圓 上府牛亭 朴氏正法華 金四圓 彦陽南部 彦陽東部 下廂東里 下廂南外里 253
上府校洞 金處文 金二圓 凡西槐亭 金氏上品華 金二圓 上府牛亭 申氏大輪行 金二圓 下廂南洞 李氏金蓮華 金一圓 農東冷泉 金氏九層華 金四圓 上府上安里 孫氏 金二圓 任氏淨生華 金二圓 朴氏 金一圓 朴氏 金一圓 金成斗 金一圓 李尙俊 金一圓 中南校洞 總計金三千三百三十圓也 大正三年甲寅11)七月日 석남사중창시의연록 (3) 석남사법당소용변물기12) 石南寺法堂所用汴物記 窃惟佛法大海中眞如寶珠其 誰能先我得之乎過去13)諸佛已得 之而超登等竗之位未來諸佛當 11) 大正三年甲寅는 1914년이다. 12) 23.3 132.2.. 13) 한국의 사찰문화재-부산 울산 경남Ⅱ 자료집, p. 213에 法 으로 읽었다. 254
得之而將證等竗之位凡此善男子 善女人以智慧爲舟以信根爲楫 涵泳於其波以後定水澄淸慧眼 徹然後庶幾可得於寶珠哉今 明徹然後廣幾可得於寶珠哉今14) 者千氏淨蓮華其人引勸於某 善男子善女人此佛前所用佛盤若 燭臺若香炉若茶器若如是等汴 物器用欣樂布施豈不欽羡哉仁者 有心灵佛先知仁者作福業鏡先 照將此信根同游於佛法大海中將有 得於眞如寶珠矣豈不美哉豈不欽 羡哉 光緖十一秊乙酉15)三月上澣 沙門南湖赫衍謹誌 引勸千氏 淨蓮華 佛盤施主 朴壽乙 燭臺施主 朴壽乙 蔚山本府 佛器施主秩 朴壽乙 文二十兩 金在連 文十五兩 석남사법당소용변물 崔早吉 文十兩 朴加石 文五兩 (4) 본사삼법당장등급보사유공기16) 本寺三法堂長燈及補寺有功記 寺之爲寺也或云在於辰韓之某世別無文 可攷然觀其黎塔之勢亦未必不爲非流 14) 한국의 사찰문화재-부산 울산 경남Ⅱ 자료집, p. 213에 한 줄의 문장을 읽지 않았다. 15) 光緖十一秊乙酉는 1885년이다. 16) 25.5 153.5. 255
浪語也已運裭以不振其 如人之溺於水火而 望其介於側者未知仁頑而可以爲授也曰有頭 陀行人其名曰鏡幸者自梁城之鷲栖山 移寓於斯內院菴己閱年所其師之言曰 層巖落水之奇待月看山之趣雖僕於 之蓬之方而也水也木之可秀可冽則亦尤於 彼也品下而俗不緣境神而天可全焉寺之 人聞斯言而感之曰山有其人山有其人吁 大雄極樂冥府三殿雖不乏絶香火而長 夜無燈 諸聖坐漆室中弟子等皆痛 切惻但而且寺雖爲小不爲牛後故本營 該邑之所属應役在於紙物而價賤物踊 役僧皆不浞於官則畏於人則拒故各房下 各名下收歛錢財以竪越給之費也此師見 其事聞其言肎出已 17)合一百一十四緍而百 四緡則得土以雜其穀貿其荏以爲三法 宇長燈之備乃錢易失而土完故也十緡 則補紙役人越給之錢師之於寺論之溺 於水火而可以爲援餓殍于塗而可以活命 也盖有勢之寺猶難况無形之寺乎又 可謂涸魚之有水也己寺有寬公非但 爲寺之腹心抑亦爲感人之功有欲報之 者也一日謂余曰幸師之功師爲如何也余 曰大也曰人有大功泯之不義吾欲云 余曰 落曰師述之余從其寬公之意而筆乎 幸師之勳揚諸壁上云爾 上之三年壬戌18)孟秋下 智峰門人 桂菴遇岸 識 17) 한국의 사찰문화재-부산 울산 경남Ⅱ 자료집, p. 213에 읽지 않았다. 18) 上之三年壬戌은 1862년이다. 256
月荷戒悟 書 大施主 郞月堂鏡幸大師 大雄殿長燈錢五十四兩價畓石員 三斗落只抻員三斗落只 極樂殿長燈錢十兩 冥府殿長燈錢四十兩價畓石員三 斗落只 紙所越給錢十兩 前施主 蓮坡堂性定大師畓抻員一斗落只 引勸化主 維那義寬 時和尙覺聰 察衆尊幸 時書記如印 본사삼법당장등급보사유공기 (5) 월하대화상유집장판각기19) 月荷大和尙遺集藏板閣記 繼 護持母至遺失焉 前集上編 海谷老人李紀淵 序文 四丈 老荷翁權溭 序讚幷 四丈 五絶五丈 五律五丈 七絶十丈 19) 26.3 76. 257
前集下篇 七律十六丈 三壇別疏 三丈 祝文 一丈 後集上篇 五古三丈 七古一丈 影讚二丈 簡牘十七丈 後集下篇 記文九丈 序文二丈 上樑文十三丈 碑銘一丈 行狀二丈 海蒼山人南基月百後序 三丈 鵝本 陳體 三丈 屛風體 三丈 蘭亭體 六丈 월하대화상유집장판각기 黃庭體 五丈 遺敎體 三丈 三藏體 三丈 簡筆體 四丈 千字草 十八丈 咸豊二年20)秋七月下弦揭 (6) 퇴운법사영탱찬서21) 退雲法師影幀贊 幷小序 燃燈有號退雲法師志於道工 於經澹泊淸淨眞箇佛家者流 其門人南湖赫衍別其室而徻其 像來余請畧干言識之苟非崇 師追慕之賞心烏能如是乎余旣 愛其師之道又佳斯人之誠於是焉 贊曰 退其跡而杖屦不及城市雲其 心而是非不到耳輪道接卅三六祖 理通百億22)化身毫不盡言圖不 20) 咸豊二年은 1852년이다. 21) 1877년, 19.7cm 45cm. 22) 한국의 사찰문화재-부산 울산 경남Ⅱ 자료집, p. 213에 憶 으로 읽었다. 258
盡神儀形彷佛面目天眞仰之 斯 敬臨之斯親一片遺影千 載不塵 歲赤牛23)端陽上澣 前敎理知縣鄭璣相24) 述 3) 금석문(金石文)과 명문(銘文) (1)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 대좌25) 묵서(墨書) 康熙十九年庚申26)閏八月日造 成安于迦氵旨山石南寺也 都畵貟 嘉善大夫 忠敏 木手 虗悟 倚戒 大 陳 立 供養主 應祥 別坐 比丘 化主 慈運 23) 赤牛 : 丁丑 24) 鄭璣相(1825~?). 조선 말기 문신. 자는 경재(敬在)이다. 본관은 초계(草溪)이고, 거주지는 경상남도 함양군(咸陽郡)이다. 문간공(文簡公) 정온(鄭縕)의 봉사손(奉祀孫)으로, 증조는 정팔복(鄭八復)이고, 조부는 정식(鄭軾)이다. 부친은 정종필(鄭宗弼)이고, 생부는 통훈대부 (通訓大夫) 행 영양현감(行英陽縣監) 정기필(鄭夔弼)이다. 외조부는 황희임(黃熙任)이고, 생외조부는 이여민(李汝敏)이다. 동생은 정현상(鄭鉉相) 정형상(鄭衡相) 정규상(鄭奎相)이다. 1865년 식년시 생원 2등 4위로 합격하였고, 1874년 증광시 문과에 병과 30위로 급제하 였다.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 언양현감(彦陽縣監),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사헌부장 령(司憲府掌令) 등을 역임하였다. 1878년 언양현감에서 물러났으나, 경상좌도암행어사 이 만직의 서계(書啓)로 벌을 받았다. 1883년 헌릉(獻陵) 등의 제사에 참여한 공로로 가자 (加資)되었다(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kr 참조). 25) 62.5 114.5 92. 이 대좌묵서는 실견할 수 없어 한국의 사찰문화재-부산 울산 경남Ⅱ 자료집, p. 209를 인용하였다. 26) 康凞十四年乙卯는 1675년이다. 259
(2) 목패(木牌) 묵서(墨書)27) 石南寺上壇 戊午五月日 (3) 전패(殿牌)28) 묵서(墨書) 守護者法守禪師 (4) 불연부재(佛輦部材)29) 묵서(墨書) 康凞十四年乙卯30)閏五 月十六日金輦畢功于 迦智山碩南寺安置 施主秩 供養丹木鍼錫周錫 兼大施主金戒善兩主 供養施主嘉善大夫 崔日上兩主 楜椒鍼錫兼施主 金鉄石保体 石子黃水塗黃荷葉 兼施主李仇萬兩主 珠玉施主 俱氏荷和 保体 布施 主 舍31)堂多丁介 布施 主 嘉善大夫 불연부재(佛輦部材) 朴厚同 灵駕 布施 主 朴順發 兩主 金戒水 兩主 27) 28) 29) 30) 31) 260 전체높이 46 패신폭 23.3, 1점, 주지실. 45.4 22 6.9. 9.5 51. 康凞十四年乙卯는 1675년이다. 한국의 사찰문화재-부산 울산 경남Ⅱ 자료집, p. 210에는 읽지 않았다.
文岩外 兩主 緣化秩 (5) 석남사견역유공비32) 正面) 縣監金公蠲 石南寺蠲役有功碑銘幷序 上之當宁一十有二年振三綱攝五倫卛六行使修身齊家治國平天下之道運掌權 度燁然周成漢文唐宗宋祖之治異世同道噲 我 皇明舊業囂 我 祖宗遺德 於是時也畿甸都鄙郡邑鄊黨士庶聞下風而望餘光者皆忻 然曰太平 万歲太平 万歲夫彦山南斗邑也縣侯金氏諱憲祖維丙午閏月下車泣知行已以仁恕治民以 公直務哀鰥寡恩浹林泉伏惟 大行仁聖刑德並流朝廷尊百司嚴萬民樂古老曰 主明臣直賈傅曰得佐下風信矣言繄孤刹羅代舊物年久人去全匪古覩兩庵對立 朝不謀夕不意 官主命遣淸㬰來抄寺伇二十一條並招老僧二三名使待令山蕈 削柿籠甲三件其中冣痼劃給永罷其他水使道東萊府使釜多大僉使虞候站用鞵 物點削或截半減給或三分一減給成節目出來爲日後實責噫年老者感極衰生飮 背面) 役有功碑銘 泣不敢拜舖年少者喜 樂 不覺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若狂酔於庭衢彼蒼 者天邈矣不遠者天尺地生我父母死矣惠我父母在矣頌曰 二南風化古今惟一詠之歌之勿剪勿伐太守之淸珠還乳出何暮之謡兩歧之實 豈徒前稱目今可說 明府來彦仁政之設民人解憂寺僧見佛凡我緇流感斯 文曰 海東沙門前行密陽表忠祠守護兼禪敎兩宗八道僧風紏正都揔攝戒悟撰 禪 敎 兩 宗 前 行 主 管 詳 奎 幹 事 月 荷 門 人 鯨 海 喜 謙 書 幷 篆 額 崇禎紀元後幾回丁未33)五月日立 32) 128.7 31.3 9.3. 33) 崇禎紀元後幾回丁未는 1847년이다. 261
석남사견역유공비 전, 후 현후이공휘문흠견역보사유공불망비 전, 후 (6) 현후이공휘문흠견역보사유공불망비34) 正面) 寺古斯羅 官役浩繁 我侯之蒞 削除公役 百無一支 寺敗僧離 一見齎咨 招集闍梨 縣侯李公諱文欽蠲役補寺有功不忘碑 時有慶坡 失心補弊 懋猗休德 功德被碣 力修舊基 寺得扶持 有寺無之 千載永思 背面) 光緖元年乙亥35)三月日慧雲沙門擎天謹銘 (7) 함월당덕휘대선사탑비36) 正面) 含月堂德輝大禪師塔 背面) 34) 93.8 25.7 9.1. 35) 光緖元年乙亥는 1875년이다. 36) 총고 102 비신 86.5 34 18. 262
함월당덕휘대선사탑비 전, 후 監役南湖堂赫衍 乾隆六年辛酉37)三月日立 乙酉四月日改立 (8) 함월당덕휘대선사탑38) 含月堂德輝大禪師塔 (9) 제월당화백대선사탑비39) 正面) 霽月堂和伯大禪師之塔 背面) 乙酉四月日改立主事南湖赫衍 乾隆六年辛酉40)三月日立 37) 38) 39) 40) 함월당덕휘대선사탑 乾隆六年辛酉는 1741년이다. 총고 195, 탑신폭 74.8. 총고 114.5, 비신 96 33.5 20.5. 乾隆六年辛酉는 1741년이다. 263
제월당화백대선사탑비 전, 후 제월당화백대선사탑 (10) 제월당화백대선사탑41) 霽月堂和伯大禪師塔 (11) 시암당세위대사탑42) 矢岩堂世位大師 (12) 선교양종지봉당거기대사탑비43) 正面) 禪敎兩宗智峰堂巨磯大師塔 背面) 시암당세위대사탑 41) 총고 221.5, 탑신폭 74.5. 42) 총고 171, 탑신폭 63.8. 43) 총고 133, 비신 116.5 46.5 16.4. 264
崇 禎 紀 元 後 三 壬 戌 4 4 遇 天 戒 守 弟 岸 宇 迅 一 子 孫 演 太 如 戒 開 悟 誼 第 俊 有 印 戒 戒 可 演 快 上 仁 䝺 成 沾 一 佐 ) 三 月 日 立 志 慕 義 德 開 益 洪 成 初 秋 彦 敏 都 監 義 寬 片 手 戒 元 和 萬 開 楽 尙 守 演 初 覚 捴 (13) 선교양종지봉당거기대사탑45) 禪敎兩宗智峰堂巨磯大師塔 선교양종지봉당거기대사탑비 전, 후 선교양종지봉당거기대사탑 44) 崇禎紀元後三壬戌는 1802년이다. 45) 총고 312.5, 탑신폭 57.3 이다. 265
4) 불화 화기(佛畵 畵記) (1) 아미타회상도(阿彌陀會上圖)46) 향좌) 향우) 嘉慶三年戊午47)七月日 山中抶 通度寺王各軸同時 智峯 巨機 成奉安于石南寺 蒼波 守坦 燈庵 南坡 天宇 施主壬申生朴致太兩主 比丘慕仁伏爲 緣化抶 西峯堂 仁摠 良工比丘 月荷 比丘 敍淨 恩師 德初 靈駕 良允 婆蕩施主善女兩主 性旭 鄭氏靑蓮桂保體 体閑 腹藏施主善女庚申 國盛 朴氏法性保體 尙曄 引勸孫一浩保體 供養主比丘 若鵬 壐卞 有彦 壐文 別座比丘 永 義寬 鐘頭 定 時和尙 永守 幸初 書記 勝意 奉供 信奎 直歲 覺摠 大都比丘 勝岑 三保 性覺 有 持殿 有還 主庵 智峯 巨機 本庵抶 月荷 戒悟 宥還 儀弘 46) 132.5 149.8. 47) 嘉慶三年戊午는 1798년이다. 266 戒悟 老德抶 證師 振虛堂 㪷閑 誦呪比丘 宇岸
尙初 演寬 官俊 日希 敬天 幻如 成彦 開誼 演沾 敬沾 德信 勸旭 有旻 定允 必用 快允 日元 아미타회상도 화기 267
아미타회상도 화기 (2) 지장보살도(地藏菩薩圖)48) 嘉慶八年癸亥49)五月一奉安于彦陽伽智山石 南寺冥府殿證明蒼波守坦枕虛守一愚岩玄曄誦 呪充玘性旻普眼持殿惠黙戒 奉齊性旿善活 戒曄龍眠比丘指溳性 幸悟永潭琯甫 成戒 成 采彦 會彦性 儀千 就曄益 旻勝活 英智閑贊曄忕安有玉如性 學誼 甚 希永瞻檀越秩設辦大施主釜山居善信女金 氏庚申生定明伏 先父金萬夏灵駕祖金五顯灵駕 曾祖金儀俊灵駕外祖崔錫灵駕己丑生朱國 伏爲 亡父朱鳳 灵駕祖父朱世根灵駕率子國相保体子 己酉生觀碩戊午生觀 辛酉生觀 同里居甲申生 氏保体又伏爲亡父鄭弘 灵駕亡家夫金淂世靈 駕長子丙午生金 大保体次子甲寅生金生潤保体 處士庚辰生定信伏爲亡父朴弼載灵加生母乙巳生 韓氏保体各發願施主保等体 薦靈駕時僧統朗元 都監儀 維那書記 48) 162 199.5, 양산 통도사 성보박물관 소장, 이 화기는 실견할 수 없어 한국의 사 찰문화재-부산 울산 경남Ⅱ 자료집, p. 209 인용하였다. 49) 嘉慶八年癸亥는 1803년이다. 268
(3) 독성도(獨聖圖)50) 崇貞記元51)後光緖 十五年己丑52)臈月日 奉安于彦陽縣 伽智山石南寺大 雄殿 緣化秩 證明 性允 誦呪 法定 金魚 鳳奎 別座 耿旻 都監 性允 施主秩 機張西部㞐住 독성도 朴氏淨滿月 保体 東部居 盧琪浚 保体 西部居 金珉浚 保体 海蒼居 朴今枝兩主 保体 化施主 梵魚寺居 독성도 화기 丙辰生寬學 保体 本寺秩 住持 赫衍 三綱秩 僧統 定閑 書記 道鶴 50) 97.7 76. 51) 記元은 紀元의 誤字이다. 52) 崇貞紀元後光緖十五年己丑은 1889년이다. 269
三甫 典永 願以此功德 皆共成佛道53) 朴庚祚 平生所願 (4) 산신도(山神圖)54) 同治二年癸亥55) 七月初四日造成 本庵奉安于 此庵也 證明比丘 月庵 奉祐 誦呪比丘 誓度 元贊 魚畵比丘 兼施主右道 陜川海印寺 璟雲 性奎 化主比丘 산신도 鶴峯 奉寬 供養主比丘 徫寬 53) 이하 朴庚祚 平生所願 은 글씨체가 달라 후에 적은 것으로 보인다. 54) 89.8 68.5. 55) 同治二年癸亥는 1863년이다. 270
(5) 신중도(神衆圖) 同治二年癸亥56)七月初四 日 嶺左彦陽縣 面伽智山石南寺神 衆畵帧新造成 奉 安于 大雄殿 緣化秩 證明 月庵 奉祐 誦呪 誓度 元贊 金魚秩 鏡潭 性奎 戒玉 신중도 德華 琯日 奉佛 光日 都監 智月 快成 內別座 海溟 致一 外別座 比丘 敬 供養主比丘 性 淨桶信士 智 慧雲 擎天 南湖 性衍 下持殿 海溟 致一 三綱 和尙 德初 書記 時聞 山中大德秩 東坡 彩㭲 鶴峯 奉寬 東峯 閏希 羅雲 雷谷 益願 智月 快成 龍谷 載鶴 上持殿 典座 時律 前啣秩 通政 戒洪 通政 道善 化主兼同參合 院大衆等 56) 同治二年癸亥는 1863년이다. 271
5) 편액(扁額) ① 대웅전(大雄殿) ② 천태각(天台閣)57) ③ 천태실(天台室) ④ 심검당(尋劍堂) ⑤ 강선당(講禪堂) ⑥ 청화당(淸和堂) ⑦ 호진당(護眞堂) 己酉七月日改粉58) ⑧ 영봉헌(靈峯軒) ⑨ 종루(鐘樓) ⑩ 정토문(淨土門) 阮堂 金正喜印 대웅전 편액 천태각 편액 천태실 편액 심검당 편액 강선당 편액 청화당 편액 57) 낙관이 있다(卞 ). 58) 己酉는 1849년이다. 272
호진당 편액 영봉헌 편액 종루 편액 정토문 편액 6) 기타 (1) 동경(銅鏡)59) 藤原吉政 (2) 인장함(印章函)60) 宗正 동경 印信 인장함 동경 탁본 인장 59) 근대, 황동, 지름 23.9 두께 0.4, 1점, 주지실 60) 조선후기, 나무ㆍ황동, 전체높이 18 지름 18, 1점, 주지실 228 273
(3) 인장(印章) 일괄(一括) 彦陽郡石南寺住職印61) 石南寺住職章 遠 寺住持印 (4) 비사리구시62) ① 銘文 肝越寺 槽 ② 墨書 肝月寺 비사리구시 2. 내원암(內院庵) 1) 고문서(古文書) (1) 태고사사법太古寺寺法 內院庵 古址慶尙南道蔚山郡溫陽面佛光山 大本山梵魚寺本末 (2) 權相老 편, 한국사찰전집韓國寺刹全書, 1979년 內院庵 古址慶尙南道蔚山郡溫陽面佛光山 大本山梵魚寺本末 61) 6.4 4.5 4.5. 62) 조선후기, 나무, 전체길이 626 최대폭 82, 1점, 경내 274 太古寺寺法
2) 현판문(懸板文) (1) 내원암흥복기63) 內院庵興復記 義捐錄 李龍守 金七円 孫東澤 金二円 劉昌錫 金二円 崔命駿 金五円 林翌相 嚴洪鎭 金鍾得 金三円 金聖鶴 嚴啓永 李玄洛 金二円 金琪錫 盧錫松 李玎洛 金演洙 吳萬根 李七洛 朴願極華 金三円 吳海根 李享洛 高基龍 金二円 尹泰元 李盛洛 金相勳 姜夢祚 李文範 金喆碩 朴贊允 宋孝三 金鉄岩 李三杰 金直茁 金寪伊 崔相洙 安相道 金信奎 金康泰 嚴白壽 金聲建 金成悳 李杰伊 金應水 朴鳳鎬 金五円 李東杰 全景贊 朴海龍 金二円 李海文 黃義洙 金三円 朴成龍 李極烈 黃漢洙 金二円 劉泰山 李仁植 朱萬石 趙東圭 李玉元 張永柱 李保蓮華 金三円 李漢初 張鳳九 吳聖道 金二円 鄭相和 金三十円 尹斗贊 金三円 朴敬一 盧聖洙 金五円 尹昌植 金二円 金相謙 徐洪碩 尹昌根 朴應祥 63) 38 69.5. 275
吳翼泳 金三円 趙泰元 尹炳夏 趙聖祚 韓根述 徐寅圭 米二斗 車興龍 金五円 徐秉基 米二斗 歲在戊辰64)仲春上浣 背面墨書]65) 二 十一字 都是計 내원암흥복기 (2) 내원암흥복시임원록66) 內院庵興復時任員錄 住持姜喚松堂廣昕 佛尊 金仁柱 財務員 金玟泰 有司 盧璣見 嚴石鎭 朴昌鎬 鄭東華 會計員 金學泰 工事人 嚴羽鎭 내원암흥복시임원록 歲在戊辰67)仲春節 64) 戊辰은 1928년이다. 65) 배면 묵서는 실견할 수 없어 한국의 사찰문화재-부산 울산 경남Ⅱ 자료집, p. 206 인 용하였다. 66) 30.5 40.5. 67) 戊辰은 1928년이다. 276
(3) 칠성각창건기68) 七星閣創建記 蔚之南萊之北有一大雲山可謂絶勝之名區也東有 龍遊谷西有鶴伴巖兩峰之間又有佛光山其下又 有一小庵名曰內院其爲創立者自羅麗以來計其年 數則不可以周知也何幸是年遠近僉君子與本庵 第二世住持比丘梵海漢雨一心同力各出義金刱立七 星法閣朝夕奉祝以爲乎萬古香火勿贊焉 世尊應化二千九百四十六年己未69)南至月上浣 前主事金龍澤 謹識 訣曰 天以雲漢星斗爲文地以山川草木爲文而 人之文六經禮樂是也大而性理氣數 之說小而萬物懺悉之事無不由文而 稧員氏各秩 前都正 金種遠 嚴夏鎭 皇甫讚 前敎官 具然睦 姜永祚 金種祐 嚴東鎭 皇甫洹 盧方于 前議官 金玟泰 嚴石鎭 皇甫相 盧文善 金庚泰 嚴景鎭 皇甫洋 趙台安 金鶴泰 嚴贊鎭 皇甫灢 尹秉運 金希泰 嚴輔永 安奉國 尹鳳守 金守泰 嚴圭永 金讚奎 金海生 金康泰 嚴金永 金性泰 金珼澤 全主事 金佑泰 嚴贊永 崔海駿 金種凞 金石泰 嚴乙永 崔海應 金道植 金鎰泰 嚴俊永 崔庚得 金善伊 金石鳳 嚴在永 崔春根 金惠天 金榮淳 嚴武卿 崔盛福 金先方 68) 29.5 112.2. 69) 世尊應化二千九百四十六年己未는 1919년이다. 277
278 禹在龍 嚴浩鎭 崔慈得 金且方 鄭淵銖 吳鎭根 崔學周 金삭부리 閔泳滿 吳佑根 崔周鳳 金石守 前參書 鄭基鎬 吳海根 崔琪英 姜刹見 前參奉 鄭商建 吳涇根 金南奭 姜鳳周 鄭商馥 吳萬根 朴學文 姜相權 鄭尙喜 吳德根 朴成殷 鄭永福 鄭商祚 吳相根 朴用浩 鄭仁綱 鄭東華 吳鳳根 朴凡壽 金在坤 鄭時華 金永棒 朴基植 田龍俊 鄭宰華 盧仁九 朴應相 金龍水 鄭琫華 金永錫 朴渭得 金成守 前議官 朴宗默 朴聖琪 朴鳳鎬 金在文 前主事 朴基默 朴聖學 朴七元 金直 朴相默 朴聖範 朴萬德 黃菊煥 朴弘默 金東柱 朴大恩 金鍾淳 朴志憲 林炳曄 朴基完 吳仁度 朴志華 金汞魯 林秉祚 孔萬道 朴志命 申容均 朴在春 金道根 朴琪贊 申彩均 朴錫柱 曺周五 朴琪洪 申又龍 盧浩準 車龍巖 前議官 金佐性 申鉉五 李文榮 李賢末 盧敬完 申源周 徐快元 都泰根 盧錫弼 申泰和 金錬周 都佑根 盧錫柱 申龍伊 金出伊 金成得 盧錫根 申鳳根 金末述 安性發 盧錫松 金喆斗 文德浩 吳鎭泳 盧振祥 崔夢仁 秋斗七 韓璜 盧永善 曺小德 金萬根 盧得準 朴種孝 李鍾絅 金岐東 盧敬龍
朴昌鎬 李龍學 金如玉 盧有仙 朴小道 李奎洛 金宗金憲 林鎭列 朴準華 李守天 金允滿 李錫峰 前參奉 盧璣見 李鍾浩 金周爕 朴每鳳 尹斗贊 李致俊 金元浩 朴云守 前議官 徐相煥 李養林 徐洪正 梁英伯 李根守 李東燮 尹周伯 李石龍 李鍾魯 李富春 金熺準 朴君玉 池成壽 李斗植 禹性斗 金三龍 金洪曄 李源伊 張鳳九 崔勳執 金春萬 李法里 張鳳基 盧更道 金奉奎 李錫俊 金昌栞 金龍壽 李붓더리 金斗石 朴仁俊 具日五 嚴柱桭 金周奉 前參奉 姜永歡 金守根 通故云文者貫道之器也 後面墨書 九 里三字 칠성각창건기 279
(4) 칠성각건축급불사투성금동참질70) 七星閣建築及佛事投誠金同參秩 崔慶月華 金八十圓 李一念華 金十円 李鍾絗 金四十五円 李正念華 金十円 李鍾魯 金四十五円 金滿心華 金十円 朴宗黙 金四十円 嚴本心華 金十円 金佐性 金三十円 金性念華 金十円 吳鎭根 金貳十円 徐滿月華 金十円 嚴石鎭 金貳十円 申徃生華 金十円 尹斗贊 金貳十円 李一心華 金十円 金永魯 金貳十円 崔山陽月 金十円 鄭寅達 金貳十円 李淸凉華 金十円 金山南 金貳十円 林西浦月 金十円 金道植 金貳十円 李極念行 金十円 朴淨心華 金貳十円 金昌栞金 貳十円 金和振 金十円 盧璣見 金十円 鄭商建 金十円 崔海應 金十円 朴觀烈 金十円 崔海九 金五円 朴琪贊 金五円 朴琪洪 金五円 朴富根 金壹円 趙壬出 金壹円 大正八年己未71)十二月二十九日 70) 23 41. 71) 大正八年己未은 1919년이다. 280 칠성각건축급불사투성금동참질
(5) 칠성각중수서(七星閣重修序)72) 七星閣重修序 南瞻部州須彌山一脉特起於恒沙之西 是爲元寂也元寂一脉又起於扶桑之東 是爲佛光山也溯其源之所自來開 一蓮花道場曰內院庵也庵之爲名 抑或古昔聖神刱此而命名儼然 佛像倚於卓上累閱木龜㥘運 未甞不有灵異之驗故齋沐者 並臻且攬夫洞口石壁神剜鬼刻 奇岩恠石層 羅立飛流瀑㳍白 虹斜掛雲山一區盡化爲錦繡圖 칠성각중수서 畵天下之大觀於斯盡矣以之而犻抎 于蔚南之名區也此庵之泯於世 亦宜矣盖此七星閣地方有志信徒刱 建者也近久陰陽代謝風雨摧磨屋 宇渗漏垣墻頹圯見者咨嗟聞者嚧 戱車氏化德華亦爲化中之衆生 甞懷普済之願力忘其勞苦鳩財 僝功幸懶僉君子之布施改其瓦修 其垣怳愡一樣若曙日重光矣古之有 行今或承之今之有行後亦繼之雖千 万斯年庶斯閣之永始永終與天地 無窮云爾 歲在乙亥73)暮春上浣 金鶴泰撰 住持 裵幻海 佛尊 孫在德 化主 車化眞華 72) 23.2 148. 73) 乙亥는 1935년으로 추정된다. 281
金淸蓮華 捐義秩 282 金述祥 金五円 鄭且萬 金二円 朴昌洙 四円 李海相 朴英 三円 李長春 朴明 李元達 尹壽讚 黃在萬 金在龍 洪巳仲 李基道 車聖茁 鄭成吉 金敎學 白相奇 金度河 金守五 金相宅 尹寧守二円五十錢 金相燦 尹鳳一 金讚佑 尹北述 金盤石 尹璇東 金福守 尹乭伊 安秉奭 尹鳳大 禹載銑 金潤澤 車庚成 金元善 車鎔德 崔孟植 孫宇得 李聖洛 徐廷大 具周善 二円 吳應度 尹鳳浩 金相洙 尹鳳文 李相茁 金彰律 洪在陳 金斗和 禹海龍 金敬善 孫龍出
孫石奇 金萬行化 文萬五 車泰奎一円二十五錢 文成允 車方子 金鶴奇 車時方子 張石哲 車三方子 金信奎 金柄武一円五十錢 金福元 林奇化 金在燮 林海德 崔次乭 李春香 方福律 (6) 칠성각중수가입계원의연질74) 七星閣重修 加入契員義捐秩 住持 裵幻海 化主 車花悳化 金靑蓮化 崔奉植 金龍述 金益勳 金碧初 金永棒 姜奇俊 朴萬守 金永植 姜大佑 朴千守 金慶七 姜大星 嚴學永 朴贊河 朴宗泰 朴且福 李圭澈 朴周先 崔榮圭 辛靈俊化 朴相烈 議官 姜膺秀 崔福根 鄭成謨 姜大淑 尹鳳圭 金鎭佑 姜大鋧 千百植 李石奉 姜大 朴圭錫 劉德珍 74) 1935년, 30.5 186. 283
284 金龍獜 申眞鳥 金己允 嚴千永 嚴保 金正石 盧漢守 金相來 李龍得 李基浩 崔善悟 徐石岩 李昌奎 嚴世永 徐文甲 李元奎 安壽祥 申得龍 崔福律 李鍾浩 朴昌洙 崔福善 李鳳雨 劉性寬 朴成洪 李龍雨 鄭煥悳 金斗龍 金斗植 嚴相鎭 金光玉 徐丙奎 嚴光鎭 金允守 劉奉立 嚴良鎭 金今鳳 金斗植 嚴士永 金永郁 崔周翊 徐正守 康元石 裵文植 徐守方 金泰世 金鉼圭 朴在用 徐萬守 文有澤 朴次根 裵宗壁 劉洪祚 嚴大永 劉基出 劉德明 嚴賢永 千炳杰 嚴周學 金成河 安世元 金學鳳 李萬甲 金守鳳 金榮福 金鎭暿 禹性一 金成福 嚴乭扶 禹俊喆 姜達龍 柳寅琥 金相甲 李正達 李特伊 金鐠河 曺永允 金鳳珍 韓在甲 金次祥 朴仁德 吳相吾 嚴柱道 安尙鎬 李鳳壽 孫次守 嚴柱龍 林守烈 申鉉培 金東植 林浩烈 孫鎭根 申丁必 申鉉大 李元洛 金壽鳳
申鉉鳳 成榮烜 金華望 趙東奎 姜學守 金一山 尹法明化 盧榮九 金一道 張永煥 鄭富加 李採環 朴大覺化 禹吉閏 鄭慶華 金鳳圭 孫源弼 劉馥根 金外千 朴發心化 金榮一 洪在守 朴萬道 張萬福 洪鍾龍 李仁昊 金萬今 姜正道 朴榮泰 吳聖度 姜泰煥 孫浩中 吳龍守 李相基 孫浩元 嚴柱哲 李元宇 李東方朔 嚴柱東 辛致根 安尙祚 嚴奎變 朴敬茁 李庚洛 嚴昌變 朴斗祥 李氏 申鉉周 朴東石 兩 金賢德 金元伊 李東變 金泰浩 白相元 李東大 沈宣淑 李君玉 具洪祚 申道均 李石弼 李錫允 申守均 具九品化 李鳳洛 朴宗來 金守玉 李在道 朴相來 金善心化 申鉉植 徐宗植 朴甲洙 申鉉達 徐東植 吳日鎬 孫浩連 金末鳳 李壬榮 金益周 金仁九 金益順 金洪九 歲在乙亥暮春上浣 285
칠성각중수가입계원의연질 (7) 칠성계원75) 七星稧員 李完植 盧五福 金榮斗 安其俊 李尙俊 安秉龍 李尙萬 安秉其 嚴庚得 安文雄 嚴柱澤 金萬大 嚴庚仁 金甲得 嚴良燮 朴且連 嚴圭燮 朴金錫 朴鉉植 朴信子 金鎭澤 盧英坤 閔丙用 皇甫淳 崔榮涬 張碩福 崔龍圭 車鳳儀 崔俊圭 車其俊 崔鎭五 尹漢守 崔鎭元 吳德用 崔誠重 李雲杰 李東華 金其用 李五作 李宗贊 車尙俊 盧凡用 鄭成洛 吳朔拂 盧在和 盧貞淑 75) 18 132.5. 286 칠성계원
朴光字 朴永周 嚴英用 金化永 李永根 朴相旭 崔浩圭 崔甚圭 崔太圭 崔ヒロシ 金東一 金長列 金用出 金用贊 李庚洛 李東浩 李太浩 李東一 金泰永 金贊圭 金永圭 金鍾弼 金鎭河 金鎭永 金淸進 金石奉 金元經 梁有敦 金好經 劉太寬 金遇經 金在文 金源會 金在元 金輝一 金在善 金成一 都今石 禹大允 都壽石 鄭成龍 金曾根 徐採植 徐己俊 宋孝珍 盧奉伊 金擇玹 沈福仙 鄭基出 鄭明基 鄭相基 朴命福 尹孝重 徐在龍 鄭末連 裵他官 裵宗官 裵花子 李九萬 嚴德龍 287
288 張佑德 朴成振 朴成道 朴圭業 徐江雲 徐振泰 徐振杰 徐浩用 黃明奎 黃善甲 黃善茂 黃善榮 黃善吉 黃順子 嚴寅永 嚴柱成 嚴柱石 金亨洙 金信洙 李圭泰 具東昊 李靖泰 劉香根 崔榮植 金士烈 金再烈 金永吉 金充庫 孫永錫 禹性祚 徐哲乭 徐且乭 金能伊 金二萬 金一浩 朴富有 朴圭奉 金峰鐵 文季萬 李東宰 李廷煥 朴相矩 劉萬福 李末順 金連經 李贊雨 李相德 李相烈 金成福 金知明 金知九 李鉉雨
(8) 계원씨명질76) 稧員氏名秩 黃惠峰 朴仁翰 崔戌生 李梵海 金聖浩 金佑洪 金在龍 金周曄 金琪寬 盧聖洙 姜先植 李矴洛 金相勳 金奉吉 金仁秀 李樹達 鄭德贊 崔海泰 鄭奇龍 金斗甲 姜壽植 尹鶴鳳 金在鳳 金東萬 尹仁王 申泰昊 쇠 李根蘢 崔石根 李乭文 李漢宗 金盘錫 嚴泗鎭 趙更浩 李樹鶴 崔待林 孫喜德 徐鎭德 朴朔弗 孫守德 金性律 徐鎭榮 孫作之 田仁徹 崔榮鎬 禹璟允 金龍河 金道根 禹柄俊 徐鳳守 金輔根 尹承殷 嚴甲鎭 鄭海根 金通寶 韓君贊 鄭東根 吳仁根 安德黙 鄭東壽 趙釗方 盧根準 姜夢祚 鄭之義 盧松萬 姜晟河 金古海 盧成萬 李先祚 安仁泰 李鍾日 李成榮 朴周喜 李在好 淸信女稧員氏名秩 崔慶月華 朴淸淨花 李鍾學 鄭淸淨華 李竗蓮花 金永祚 崔相振 金甲壽 76) 20.6 95. 289
崔妙蓮華 金性蓮花 金庚泰 李圓覺月 徐善心花 金春植 李大德華 金寶明臺 盧守萬 朴淨心華 徐永華 朴長根 申萬善花 孫善心華 朴星到 李德順花 車河德華 裵鍾佑 朴金剛華 李淸淨華 李善官 李上品華 鄭善心華 吳鍾煥 安宋伊 安仁泰 朴 烈 崔圭壽 崔達順 金渭泰 金鳳喜 盧錫根 金兩今 金洪燁 鄭性順 韓守甲 金上品行 朴開喆 李中品行 朴道翰 朴下品行 化主 崔慶月華 朴壽淂 朴大淸淨 有司 嚴石鎭 宋孝三 趙光明月 車相律 金春喜 盧錫仁 椽化秩 金相憲 住持 李梵海 安德鎭 都監 黃惠峰 禹廷舜 別供 全東煥 崔孟植 木手 嚴羽鎭 李實瑾 文性云 己未南至月上浣 背面墨書] 合 三斤 290
계원씨명질 3) 편액(扁額) (1) 내원암(內院庵)77) 內院庵 歲在戊辰上浣 鄭淵銖 謹刻 (2) 칠성각(七星閣)78) 내원암 편액 鄭淵銖刻施 歲在己未五月上浣 前主事 金龍澤 謹書 (3) 염화실(拈花室) 歲在辛未上浣金星山書79) 77) 28.2 84.5. 78) 1919년 추정, 22.5 60.3. 79) 1931년 추정, 31 89.6. 291
3. 인성암(引聖庵) 1) 고문서(古文書) (1) 태고사사법太古寺寺法 引聖庵 在慶尙南道蔚山郡西生面海雲山 大本山梵魚寺本末 2) 현판문(懸板文) (1) 인성암중수서문80) 引聖菴重修序文 菴於嶺不云乎海雲而以引聖爲名 意必有實蹟之如何而新羅後二千 年以末漏記失傳愈遠愈久然而㡬 腐而㡬興者斯菴以形勝特 也峰巒 四圍窩然一局平鋪山腰盤旋左右如鳳 垂雙翼而水石之秀䴡松檜之森直長在 四時之景則到此者塵襟灑落真物外之一 片靈境而志道者可樓之䖏也考其所 剏與東萊之梵魚寺相爲前後爲則剏旣 古而局且窄矣匆受風雨不知㡬歷滄桑 而棟老祿杇重建之役最莫㥯於此時故 昨歲秋住持碧虗慨然發歎失心倡謀以興 復斯菴爲己任願風一號信竅皆響鳩乃 若干穀帛召工蕫役破旧冩新棟宇之 輪奐門房之巧密於旧制增其三間又聞新 鍾鳴閣穿山賢㢤師乎特以區 爲佛之心 普收信男信女率成大功自非願力强於內神 80) 1927년, ① 33.5 192.5 ② 33.5 192.5. 292
衹相於外豈能如是耶於乎菴上之靑山不 頹菴下之流水不竭庶㡬斯師之功德與 諸君子之芳啣共留於海雲山水之間而 無窮矣 歲在丁卯小春東萊鄭寅洛記 化 主 前叅奉 李奎玹 幼學 金永善 幼學 朴時榮 金鎔俊 申大允 張仁相 鄭淳朝 洪在瀚 朴斗燦 鄭普慧 朴寅杓 施 主 梵魚寺 金貮百五拾圎 金秉友 金四圎 無上稧中 金五拾圎 朴寬珠 李奎玹 金五拾圎 金敏友 申大允 金貮拾圎 牟容秀 金參圎 李秉錫 金拾壹圎 洪文燮 金周曄 金拾圎 朴斗燦 韓永權 崔尙得 朴寅杓 崔祥善 洪在瀚 金仁坤 李馨雨 金德辰 李健會 金五圎 李仲植 張仁相 崔榮萬 金教洽 朴炳弼 韓章淳 黃敬鶴 洪鍾熙 崔命俊 洪在健 李圭祚 金景熙 朴允杓 293
朴永達 林翌相 朴得善 金琪周 李德五 林庚達 趙性謨 金文培 金秉郁 金斗申 金今鳳 崔正晩 金南奭 崔聖達 李鍾絅 朴達述 都良杓 緣化 李文儀 木工 韓章淳 鄭錫一 金四圎 洪在健 韓律伊 土工 吳應悟 宋東奎 供司 金鳳鎬 住持 李碧虗 인성암중수서문 현판 (2) 인성암중수시주질 西生里 金琪福 金貮圎 金永善 辛義浩 金持平 韓順五 鄭琪伯 秋永周 張應斗 294 大松里 鄭錫友 金貮圎 韓守萬
朴春根 林扶得 金斗洙 池冨彦 金永奐 李鍾律 韓用甲 鄭錫奎 朴庠彧 金龍得 崔氏 以上 羅士里 李嶙會 金貮圎 李周會 李善會 鄭萬運 朴文琪 金琪秀 宋有煥 金鎔俊 文守田 崔喜鳴 李秉文 朴甲縯 河三俊 金正翰 朴德守 金德浩 朴命炷 金正五 李富彦 李玉根 以上 韓彦伊 李秉銀 金壹圎 韓小乭 李尙會 李祥根 新岩里 鄭英朝 鄭元業 金貮圎 金永珠 李孟浩 金生水 鄭吉祥 朴英泰 以上 孫萬心 金壹圎 李義安 李富榮 李正道 李長茁 李方友 蔣萬千 金仁洙 崔祥東 鄭致根 295
朴仁埰 朴淳伯 宋道允 金敬達 張武晟 尹寕守 鄭正龍 金祥根 崔英鎮 許炷 郭千萬 金斗龍 尹次乭 以上 李成龍 金壹圎 朴英埰 文萬五 洪次燮 朴鶴鳳 孫英鎬 孫英俊 以上 鄭寅玹 禾山里 金蓮牙 以上 金教學 金壹圎 鎮下里 韓相五 金貮圎 姜鳳俊 金彦奎 龍里 朴萬植 金貮圎 朱寅錫 崔相龍 朴英錫 以上 黃元五 廉在玹 金壹圎 金鍾河 李在彦 崔大鳳 許璿 宋祥奎 金英澤 田允坤 韓善伊 296 金根伊 渭陽里 崔翰玹金貮圎 朴東鎮 崔海駿 李東茁 崔態景 金斗源 以上 金東乭 江陽里 金任守 朴東植 金貮圎
申義植 李圭八 韓希俊 朴作之 許德鵬 金龍沅 金今喆 金斗星 許五碼 李億伯 兪源珠 林周元 朴雲夏 金海生 朴雲周 金永述 尹俊澤 鄭錫玟 洪億燮 金晟洙 金大彦 韓守龍 張容汎 以上 李鶴卿 以上 尹相澤 金壹圎 金德順 金相福 牛峰里 朴學道 金貮圎 朴用化 金仁壽 朴琪萬 申義明 林聖述 許大門 李元生 許福善 以上 朴久佛 禾亭里 朴賛植 洪在憲 金貮圎 林聖淑 洪尙吉 裵宗奎 洪在政 盧仁五 朴仁翰 金没登 許哲 以上 唐月里 李基出 金貮圎 朴聖弼 金泓魯 金鎔鎬 韓東洙 297
金圭晤 洪英燮 洪在甲 洪在永 洪在晋 姜居實 許增 朴乭作 林泰鎬 宋松春 以上 梨津里 洪時燮 以上 金盛瑀 金貮圎 洪在現 金壹圎 李萬伊 洪浩伊 崔內淑 洪在奎 崔必鳳 洪珉燮 黃道先 金没東 鄭周植 朴琪鎬 韓德範 韓氏上品 以上 黃城里 朴尙錫 金貮圎 金次鎬 尹永煥 黃鳳茁 朴達云 許玧 黃鶴鳳 金斗鉒 以上 張奉書 明山里 崔尙壽 韓栢愚 金貮圎 韓貞愚 林萬奉 韓相彦 同 李錫元 以上 方魚里 金德守 金貮圎 南倉里 金正泰金貮圎 인성암중수서문 현판 298
(3) 칠성탱화독시주81) 七星幀畵獨施主 李圭玹 申氏一品華 兩主 子 根守 鍾魯 鍾大 孫 珍雨 칠성탱화독시주 현판 樟雨 戊辰三月日 住持 李碧虗 (4) 독성탱화시주82) 獨聖幀畵施主 朴雲周 李氏 兩主 子 石龍 石弼 戊辰三月日 住持 李碧虗 독성탱화시주 현판 81) 1928년 추정, 24 45. 82) 1928년, 21 35.6. 299
3) 금석문(金石文)과 명문(銘文) (1) 금고(金鼓)83) 引聖庵 梵鐘施主記 西生面鎭下里 李圭鉉 子根守 鐘魯 鐘大 孫珎雨 溫山面江陽里 住持 李碧虛 金周曄 子湳斗 孫述祥 鱗奎 碩奎 淳奎 炳奎 墨書] 西生面西生 車珠餔 83) 1928년 추정, 지름 60.4 두께 14. 300 금고
4) 불화 화기(佛畵 畵記) (1)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84) 향우) 향좌) 世尊應化二千 韓聖彦 朴仁杓 己未85)十一月日 洪順俊 張善學 慶南蔚山郡 朴春根 梁明守 西生面海雲山 金相守 安氏宝蓮華 引聖庵造成 韓先伊 金東乭 九百肆十六年 于仍奉安于 姜福允 本庵 禾亭里 緣化秩 證明比丘 海曇 金氏觀音行 誦呪比丘 應聲 東萊郡鼎冠面達山里 住持比丘 寶輪 宋秉烈87) 金魚比丘 玩虎86) 藍院比丘 道根 供司比丘 普演 茶角行者 鳳鎬 施主秩 鎭下里 溫山面江陽里 林炳奭 洪秉浩 洪秉守 吳甲根 黃道鶴 黃敬鶴 尹俊澤 金氏福德月 李奎鉉 鄭錫玟 金海生 辛億銖 申大允 金琪澤 辛卯生金氏 李未東 金鎔俊 朴河彦 李圭八 黃斗鶴 鄭普慧 金光平 李鎭俵 朴雲周 張祥重 崔相得 金衡亘 李道也只 朴卿黙 朴奎福 朴雲達 朴福龍 84) 97.1 135.8, 양산 통도사 성보박물관. 301
金成汶 金南斗 李守千 兪元茁 李雲海 李有福 朴學文 韓文守 唐月里 李氏円覺月 金 魯 金永俊 金仁壽 宋松春 金性奎 牛峯里 金東先 金春根 金春坤 朴 伊 金斗甲 桂守 三 里唐月 李聖 金文述 溫陽面三光里 朴智和 溫陽云化里 金和晋 李鍾 府 金名寬 釜山佐 洞 85) 世尊應化二千九百肆十六年己未는 1919년이다. 86) 완호스님은 1869년 부산 동래(경남 동래군 동래면 복천동 202번지)에서 태어났다. 스님 의 속명은 낙현(洛現)으로, 출가후 법명으로도 쓰였다. 법호는 완호(玩虎)이다. 정희(定熙) 라는 호를 사용한 예도 있다. 입산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유작 가운데 첫 작품이 1914 년 2월 20일 쌍계사 통영포교당의 지장도, 신중도, 칠성도(3점) 등 5점이 있어 그 이전에 출가했을 가능성이 높다. 불화를 그리려면 상당기간 그림을 배우고 수행정진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제자인 시찬(施讚, 1899~?)스님 행장에 1914년 4월8일 양산 군 통도사에서 완호낙현 선사에게 축발(祝髮, 출가를 의미하는 용어)하고 라는 기록이 있 는데, 상좌를 둘 정도이면 이미 오래전에 출가했을 가능성이 높다. 제자로 단청기능보유 자인 월주덕문스님에 대한 문화재청 보고서에는 양완호는 1890년 궁중 도화서 화원이 주관했던 합천 해인사 불사에 관련되었다 고 기록되어 있다. 때문에 10대 무렵에 이미 불화 공부를 시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87) 한사에는 采秉烈 로 읽었다. 302
영산회상도 화기 (2) 신중도(神衆圖)88) 光緖十 張世周 李氏 兩主 九 率子永壽 府海 甘二建 聖 率子在五 緣 李枝連 證明 鄭氏 兩主 一波 率子 成俊 閏伊 池鳳鱗 金氏 兩主 別 率子桂 都監 柳 檜峰志五 龍洞里居住 88) 1890년 추정, 105.2 106,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7호. 303
化主 朱漢柱 比丘 翔佑 率子璡伊 孫子引 施主秩 蓮山里居住 本府西生面生 李馨振 外里居住 林氏 兩主 乾命朴道 公南里居住 坤命許氏 趙性徽 兩主保軆 金氏 兩主 率子 永祚 率子 祚壬祚 金哲 城北里居住 率子根植 乾命 朴斗 溫北面新 侍母崔氏 金光洙 身保軆 黃氏 亡父朴圭洙 率子周 同里居住 上府面江亭 金衡基 朴聖球 聖 鄭氏 兩主 率子得玉遠 溫南面羅士 侍母黃氏 居住 機張 崔鳳林 金 郭氏 姜 兩主 率子 신중도 화기 304 兩主
(3) 칠성도(七星圖)89) 世尊應化二 千九百五十 住持 碧虛載宣 五年戊辰四 茶角 聖讚 月二十七日 供司 鳳鎬 慶南蔚山郡 施主 李圭玹 西生面海雲 申一品華 山引聖庵七 李德順華 星幀畵成就 根守 奉安于本庵 崔鏡月華 緣化秩 鍾魯 證明 一鳳敬念 李普靈 誦呪 慧雲敬允 鍾大 金魚 玩虎定喜90) 珍雨 德文 小雨 칠성도 화기 89) 1928년, 104 162. 90) 주83 참조. 305
(4) 독성도(獨聖圖)91) 世尊應化二 金魚 玩虎定喜 千九百五十五 德文 年戊辰四月二 茶角 致俊 十七日慶南 供司 鳳鎬 蔚山郡西生面 施主 朴雲周 引聖庵獨聖 李氏 幀畵成就奉 石龍 安于本庵 金氏 緣化秩 證明 一鳳敬念 住持 碧虛載宣 化主 誦呪 慧雲敬允 (5) 산신도(山神圖)92) 世尊應化二千 誦呪 慧雲敬允 九百五十五年戊 金魚 玩虎定喜 辰四月二十七日 德文 慶南蔚山郡 茶角 致俊 西生面引聖庵 供司 鳳鎬 山王幀畵成就 施主 李根安 奉安于本庵 緣化秩 證明 一鳳敬念 崔鏡月化 住持 碧虛載宣 化主 산신도 화기 91) 1928년, 97 69.5. 이 화기는 실견할 수 없어 한국의 사찰문화재-부산 울산 경남Ⅱ 자료집, p. 216 인용하였다. 92) 1928년, 86 77. 306
5) 편액(扁額) (1) 인성암(引聖菴)93) (2) 칠성각(七星閣)94) (3) 독성각(獨聖閣)95) (4) 산령각(山靈閣)96) 인성암 편액 칠성각 편액 독성각 편액 산령각 편액 4. 문수사(文殊寺) 1) 고문서(古文書) (1) 태고사사법太古寺寺法 在蔚山郡靑良面淸凉山 大本山梵魚寺本末 93) 94) 95) 96) 조선말~근대, 25 45.5. 30 80. 20 42.5. 20 43. 307
(2) 權相老 편, 한국사찰전집韓國寺刹全書, 1979년 文殊庵 在慶尙南道蔚山郡文殊山 梵魚寺本末 梵宇攷 在蔚山郡靑良面淸凉山 大本山 太古寺寺法 (3) 조성발원문(造成發願文)97) 阿彌陀佛新造像與塗金 獨辦大施主畵師比丘指演 伏爲亡父學生李夢世靈駕 亡慈母徐氏靈駕恩師和俊98) 靈駕同生上品蓮花之大願 (4) 불상 연기문(佛像 緣起文)99) 緣起 조성발원문 丁未100)六月初二日奉安于 祱玄堂 此祇林卽羅代古刹亦四聖人游101)化 之場也中間興廢與時無常丙申大無 之後各散僧徒復集而僅守一寮矣 去丙午春主人灵峰禪師重修玄堂 今春請布雲法師設華嚴大會三夏 仍作空花佛事玄堂龕上主佛及 普德庵主佛改金新興寺上室之主 佛本寺南庵之主佛長安寺主佛 불상 연기문 本寺香爐殿願佛石窟庵主佛 97) 韓紙朱書로, 규격은 10.2 9 이고, 현재 양산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98) 慶北 永川市 銀海寺 巨祖菴 羅漢殿 靈山會上圖 화기는 乾隆五十年丙午九月日新畵成靈山 敎主 釋迦牟尼佛左右補處諸菩薩今于畢 竟奉安于永川八公山銀海寺巨祖菴羅 漢殿 指演伏惟 亾恩師和俊靈駕 緣化秩 證明 快一 良工 指演 으로 나와 있어 1786년은 스승이 돌아가신지 3년이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99) 16 43.5, 양산 통도사 성보박물관. 100) 한국의 사찰문화재-부산 울산 경남Ⅱ 자료집, p. 208에는 丁未를 1787년으로 보았 지만, 畫員으로 참여한 松巖大圓은 19세기 중반에 활동한 작가이기에 한 1847년으로 수 정되어야 할 것이다. 101) 한국의 사찰문화재-부산 울산 경남Ⅱ 자료집, p. 208에 㳺 로 읽었다. 308
改粉又本寺說玄堂後 佛幀 興寺上室後佛幀長安寺神衆幀 普德庵山靈幀同時新畵成亦造 二十二領當是時也諸山禪伯八 衲子雲臻而共成無爲佛事於斯 葉可謂佛日增輝也伏願 隨喜一會大衆及與一切水陸衆生 同登覺岸者 都監 大洪 불상 연기문 證明 布雲閏褧102) 別座 定話 大雲奉冾 誦呪 戒念 金魚 松巖大圓 化主 徹虛慈愚 供養主 志守 持殿 慈庵震玄 片手 石庵勝云 文星 永說 (5) 황초복자 묵서(黃綃幅子 墨書) 陁幅 103) 磯 證 明 臣 巨 謹 封 102) 한국의 사찰문화재-부산 울산 경남Ⅱ 자료집, p. 208에 布雲閏 로 읽었다. 103) 거기(巨磯)는 호가 지봉(智峯)이고, 양산 영축산 통도사에 거주하던 스님이다. 그와 관 련된 기록은 1792年에 조성된 양산 通度寺 掛佛圖에 山中大德으로 언급되어 불상에서 발 견된 황초복자는 조성 당시의 것으로 여겨진다. 309
2) 불화 화기(佛畵 畵記) (1) 석가모니후불도(釋迦牟尼後佛圖)104) 향우) 世尊應化二千九百四十八年辛酉105)三 月 日 106) 證明 比丘 慧溟大仁 誦呪 比丘 金城讚允 持殿 上律 金魚 比丘 雪鶴世弘 片手 世昌 比丘 景元 鍾頭107) 沙彌 祥樂 茶角 沙彌 供司 鶴奎 又三鋼 영산회상도 화기 化主 比丘 檜城壹悟 住持 比丘 枕松裕莢 三綱 監院 比丘 信海裕修 書記 桂玉 향좌) 施主秩...108) 104) 173.8 177,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6호, 양산 통도사 성보박물관. 105) 1921년이다. 106) 인위적으로 삭제된 부분이다. 그런데 1921년 3월에 경남 통영 安靜寺 甘露幀 畵記에는 世尊應化二千九百四十八年辛酉三月日迦葉庵 甘露幀新造成移安于統營郡光道面碧鉢山安 靜寺 誦呪比丘 金城讚允 持殿上律 金魚比丘 雪鶴世弘 出草 世昌 比丘景元 鍾頭沙 彌祥樂 으로 적혀 있어 제작연도와 불화승 및 연화질에 속한 스님들의 소임이 같은 것으로 보아 안정사에서 이운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07) 한국의 사찰문화재-부산 울산 경남Ⅱ 자료집, p. 208에 108) 인위적으로 세 명의 이름과 거주지를 훼손하였다. 지운 부분에 희미하게 統營郡 으로 적혀 있다. 世尊應化二千九百四十八年辛酉는 鐘頭 로 읽었다. 310
... 淸信女 乙巳生...蓮華 率女 戊辰生 金氏富善 外孫子 己丑生 黃永浩 丙申生 大善 丙午生 斗元 外孫婿 朴氏 黃氏 兩主 親弟 壬子生 宋奇祚 具氏 兩主 侄子 庚戌生 斗碩 丁巳生 斗龍 영산회상도 화기 淸信女 乙巳生 宋氏玉蓮華 伏爲 亡親父母宋少龍金氏兩位 靈駕 亡祖父母宋氏劉氏兩位 靈駕 亡外祖父母金氏丁氏兩位 靈駕 亡兄夫婦文會善宋氏兩位 靈駕 亡弟夫婦柳處東宋氏兩位 靈駕 亡侄子宋福俊 靈駕 亡媤父母金弼贒柳氏兩位 靈駕 亡祖父母金氏朴氏兩位 靈駕 亡外祖父母柳氏具氏兩位 靈駕 亡家夫金覺眞 靈駕 亡女息 盡業 靈駕 亡媤三寸金弼寬 靈駕 亡媤叔金道治 媤侄成五 靈駕 亡外三寸柳哲根 外四寸洪植 靈駕 亡媤四寸夫婦鄭善拂金氏兩位 靈駕 亡姨叔父母金良仁金氏兩位 靈駕 311
(2) 지장보살도(地藏菩薩圖)109) 향우) 光緖十九年110) 證明比丘 持殿比丘翠 誦呪比丘草 金魚比丘 都監比丘 化主信女111) 지장보살도 화기 향좌) 施主 曺 112) 坤金氏 109) 불화의 畵記는 법명을 적은 부분을 인위적으로 훼손하였다. 규격은 113.5 155.1 이 고,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양산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110) 1893년이다. 111) 한국의 사찰문화재-부산 울산 경남Ⅱ 자료집, p. 208에 112) 한국의 사찰문화재-부산 울산 경남Ⅱ 자료집, p. 208에 光緖十九年은 312 女 를 읽지 않았다. 曺夏 로 읽었다.
(3) 칠성도(七星圖)114) 聖上卽位七年乙卯113)八月 日 性鑑 新畵成 遇文 緣化秩 善稀 證明比丘 奉佑 漢坤 誦呪比丘 永善 比丘 敏洪 比丘 越鵬 施主秩 大施主本府沈道根 盧尙㙫 金魚比丘 善和 徐正元 比丘 道成 鄭在誠 供養主比丘 性閑 宋采珪 比丘 先一 河基澤 本庵秩 崔得周 籌室比丘 宥默 化主 金化春 比丘 萬淳 都監 徐佑臣 比丘 丈洪 金 氏 持殿 尙彦 張 氏 善悟 金 氏 性彦 金 氏 大喆 朴 氏 遇定 칠성도 화기 聖上卽位七年乙卯는 113) 1854년이다. 114) 규격은 102 135.9 이고,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6호로, 양산 통도사 성보박물 관에 보관 중이다. 314 313
5. 보덕사(報德寺) 1) 불화 화기(佛畵 畵記) (1)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115) 佛紀二千九百六十八年116) 月 日 蔚山郡上北面石南寺東仁庵 地藏幀畵 一軸奉安于 證明比丘 寶明堂 持殿比丘 影松堂 誦呪 東根 茶角比丘 信悟 供司比丘 月松 지장시왕도 金魚比丘 淸庵堂 化主 比丘 頌德117) 施主 淸信士 盧炳轍 지장시왕도 화기 (2) 신중도(神衆圖)118) 蔚山郡伽智山石南寺東仁庵 神將幀畵一軸奉安于 會主比丘 寶月 115) 132 159.7. 116) 1941년이다. 117) 한국의 사찰문화재-부산 울산 경남Ⅱ 자료집, p. 209에 118) 105.6 126. 佛紀二千九百六十八年는 松德 으로 읽었다.
證明比丘 友雲 持殿比丘 影松 誦呪比丘 信悟 茶角比丘 斗祚 供司比丘 漢大 金魚 比丘 淸庵 化主比丘尼 頌德 施主 신중도 東萊郡龜浦面龜浦里 淸信女 洪長順 佛紀二千九百七十年119)元月 日 釜山市東大新洞 鄭肯模 신중도 화기 (3) 독성도(獨聖圖)120) 七星幀佛事時同 爲造成奉安于同處 緣化所名啣已著 于七星山王兩幀故煩 不再記然出草則 比丘 文性 化主 比丘尼 義永 독성도 화기 施主秩 119) 佛紀二千九百七十年은 1943년이다. 120) 89.5 63.8. 315
(4)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121) 緣化秩 證明 鏡峰靖錫 住持 寶月正律 持殿 惺月漢祚 誦呪 友月孟道 供司 信悟 金魚 月洲德文 化主 頌德 施主 金聲永 秋大覺華 兩主 河永淳 金正信行 河一文 兩主 金大慈行 金병수 朴大善華 尹순영 朴大光明 趙홍순 吳綠泳 具小福 수월관음도 佛紀二九八一年甲午122) 六月十四日 觀音菩薩幀畵 一軸 奉安于 蔚山郡伽智山 石南寺東仁庵 121) 규격은 119 129.8 이다. 이 불화는 앞에 유리장 안에 들어간 관음보살좌상이 있어 확인을 하지 못하여 한국의 사찰문화재-부산 울산 경남Ⅱ 자료집, p. 208의 내용을 인 용하였다. 122) 1954년이다. 佛紀二九八一年甲午는 316
2) 편액(扁額) (1) 관음전(觀音殿)123) 觀音殿 관음전 편액 3) 금석문(金石文) 등 (1) 범종(梵鍾)124) 統營邑貞梁里 癸巳生 林徹圭 壬寅生 朴氏優曇華 戊寅生 林鍾生 安靜寺 獅子庵 (2) 취산(鷲山) 필筆 초서(草書) 범종 老山老水125) 노산노수 123) 29 60. 124) 근대, 청동, 전체높이 59 입지름 33.5, 1구, 대웅전. 125) 50.5 155, 鷲山 金九河(1872~1965) 書. 317
6. 석문암(石門庵) 1) 불화 화기(佛畵 畵記) (1) 32조사도(三十二祖師圖)126) 京城府司諌町不二城法輪寺 大本山金剛山楡岾寺京城布教所進呈 (2) 성불도(成佛圖)127) 成佛圖의 緣起 本圖는 李朝宣廟時西山大師계옵셔 創製된 것입니다 四聖 六凢을 一圖中에 羅列 되 聲聞緣覺은 略하엿고 但浄土回向 을 主로 하야 大字念佛로 構成한 것입니다 外六趣內三門으로 順 序를 作하엿는대 六趣의 輪廻도 部分的이고 더욱이 三門漸次는 꼭 그와 갓흔 階段이 잇는 것 아니며 모도가 佛教의 名詞를 表示할 다름입니다 우리 佛弟子가 本圖를 다만 年中行事로만 執行 하지말고 日用四威儀內에 此를 頻數히 보128)시여서 現世에 福種子를 만 리난 同時 한가지 彌陁大願海로 드러가게 하십시다 執行方法 우리 佛教四部大衆은 二人으로부터 十八세지 限度로하고 各其本 尊佛牌을 內定하야 一齊히 人趣에 모서노코 南無阿彌陁佛 六字가 씨여 잇는 三箇方木을 던져 進行호되 左記修件을 遵守함 事 記 一. 本尊聖號는 釋迦, 彌勒, 文殊, 普賢, 觀音, 勢至, 金剛, 除障, 地藏, 準提, 十位大聖으로 定함 二. 執行할 時一同이모다 敬虔한 誠意로 南無阿彌陁佛을 齊唱 126) ① 54.5 58 ② 36.6 58.8 ③ 36.4 59 ④ 36.8 58.5 ⑤ 55.4 58.7. 127) 86.7 58. 128) 한국의 사찰문화재-부산 울산 경남Ⅱ 자료집, p. 214에 '모 로 읽었다. 318
하난 中方木箇를 圖上에 던지며 各其自己進行에 何位에 간 것을 明記함 三. 方木을 한번 던져 二三種이 發見될지라도 最尊位로 進하나니 假令 入山에 二佛一陀가 同時에 낫하날지라도 二佛을 取하고 一陀을 捨함 四. 本位에 記載하여 잇는 外에 佛陀等字가 雖二佛三佛을 發見할 지라도 此無用에 歸함 但 南無阿彌佛陀四字는 雜이라 함 五. 會貟의 餘裕가 잇는 同時는 引禮師二人을 指定하야 한 사람은 各人의 本尊聖號를 運行씩이고 한사람은 念佛木鐸을 치계함 六. 會貟의 遇怠로 因하야 卽决䖏分의 條件은 如左 甲 徑截門全部와 圎頓門中十住以上과 念佛門中下品下以 上과 六趣中三惡途는 本位에不動하고 越一次施行함 乙 天趣는 修羅로 八部는 傍生으로 人趣(四洲을 含함)는 地獄으로 갓다가 越一次返本함 但 遇怠條件은 如下 (一) 方木이 圖外로 러질 時 (二) 進行節次詐欺가 發見된 時 (三) 雜談과 戯諕을 하거나 又는 怒氣가 發見된 時 (四) 進行時吸烟等 非禮를 敢行함이라 佛紀二千九百六十三年 丙子129) 季夏日 京城府司諌町楡岾寺布教所 無佛頭陀 謹書 외곽) 京城府貫鐵町二百十七番地 京城府貫鐵町二百十七番地 印刷者 金音桓 印刷所 寶音齋印刷所 129) 佛紀二千九百六十三年 丙子는 1936년이다. 319
2) 기타 (1) 법계증서130) 法階證書 第六0號 原籍 道 郡 面 洞 現住 慶尙北道 慶州郡 陽北面 寺 洞 祇林寺 氏名 徐梧雲 年 月 日 生 右者本末寺 法第六十二條ニ依リ法階選試 ニ敎宗大禪 法階ニ合格シタルヲ 以テ玆ニ證書ヲ授與ス 昭和十六年131)四月八日 慶尙北道慶州郡陽北面含月山 朝鮮佛敎曹溪宗大本山祇林寺 住持 九山鶴友 (2) 조선불교조계종본사설봉산석왕사금강계단수계첩 (朝鮮佛敎曺溪宗本寺雪峰山釋王寺金剛戒壇受戒牒)132) (3) 도첩(度牒)133) 度牒 (第二五七號) 原籍 慶南蔚山郡下廂面蓮岩里 住持 慶北慶州邑路東里祇林寺教堂 鄭漢溟 苐三徒弟 徐桂雲 大正三年十一月日生 130) 131) 132) 133) 320 19.1 26.7. 昭和十六年는 1941년이다, 1942년에 작성된 戒牒으로, 규격은 80 46.5 이다. 25.7 36.1.
證 戒 阿 闍 梨 晴 昊 獃 惺 證 戒 阿 闍 梨 道 明 完 悟 維 那 昭 和 十 七 年 壬 午 五 月 十 三 日 證 戒 阿 闍 梨 道 庵 亘 賢 教 授 阿 闍 梨 石 頭 厚 根 引 禮 比 比 比 比 比 丘 丘 丘 丘 丘 朝 鮮 慧 東 尙 喜 重 佛 明 浩 容 宗 玄 敎 曺 溪 宗 本 末 寺 釋 王 寺 住 持 金 山 右 漢 牒 松 給 付 受 戒 弟 子 徐 桂 雲 傳 戒 和 尙 阿 闍 梨 映 湖 鼎 鎬 世 尊 紀 元 二 千 九 百 六 十 九 年 壬 午 五 月 十 三 日 羯 磨 阿 闍 梨 性 海 性 安 次 傳 幻 應 坦 泳 律 師 次 傳 映 湖 鼎 鎬 矣 受 戒 日 各 給 受 戒 牒 一 度 隨 身 佩 帶 庸 修 三 學 能 報 四 㤙 幸 殊 甚 焉 照 驗 施 行 湏 知 戒 牒 者 沿 及 印 度 漢 地 東 土 戒 燈 相 承 皆 可 攷 也 且 省 不 錄 以 近 古 雪 坡 尙 彦 律 師 爲 宗 祖 傳 于 白 坡 亘 璇 律 師 次 傳 枕 溟 翰 醒 律 師 證 戒 阿 闍 梨 晦 明 日 昇 今 於 世 尊 紀 元 二 千 九 百 六 十 九 年 壬 午 五 月 十 一 日 爲 始 向 三 日 間 敬 受 比 丘 具 足 戒 及 菩 薩 大 戒 戒 自 雪 山 高 源 證 戒 阿 闍 梨 聖 谷 敬 潤 證 戒 阿 闍 梨 滿 空 月 面 籍 靡 意 在 越 若 於 有 斯 志 矣 心 玆 受 者 者 咸 聞 南 者 安 法 邊 利 郡 無 釋 邊 王 七 寺 辯 設 賛 金 之 剛 莫 戒 窮 壇 千 敬 聖 請 仰 律 之 師 無 里 映 際 曩 湖 可 依 鼎 謂 鎬 真 傳 佛 授 之 戒 母 法 生 是 諸 以 導 求 師 戒 妙 弟 藥 子 之 王 能 治 衆 病 入 道 之 要 證 戒 阿 闍 梨 漢 岩 重 遠 更 無 別 法 以 心 性 圎 淨 故 名 爲 戒 以 寂 而 常 照 故 名 爲 般 若 以 心 本 寂 滅 故 名 爲 涅 槃 此 是 如 来 最 上 之 乘 祖 師 西 來 之 詳 夫 戒 學 者 建 千 聖 之 地 生 萬 善 之 基 開 甘 露 門 入 菩 提 路 經 云 衆 生 受 佛 戒 即 入 諸 佛 位 欲 知 佛 戒 者 但 是 衆 生 心 朝 鮮 佛 敎 曺 溪 宗 本 寺 雪 峰 山 釋 王 寺 金 剛 戒 壇 受 戒 牒 321
조선불교조계종본사설봉산석왕사금강계단수계첩 釋文 右人이 出家하야 上報四恩 下濟三途할 志願으로 依師得 度하얏기 玆에 度牒을 授與함 昭和十三年134)八月十四日 朝鮮禪敎兩宗大本山 慶北道慶州郡含月山祇林寺 住持 金擎林 7. 용화사(龍華寺) 1) 고문서(古文書) (1) 태고사사법太古寺寺法 龍華寺 在慶尙南道蔚山郡上北面龍華山 大本山通度寺本末 (2) 權相老 편, 한국사찰전집韓國寺刹全書, 1979년 龍華寺 在慶尙南道蔚山郡上北面龍華山 大本山通度寺本末 2) 불화 화기(佛畵 畵記) (1) 신중도(神衆圖)135) 향좌측 곽) 應化世尊二千九百五十七年136)塗粉佛事時 134) 昭和十三年은 1938년이다. 135) 93 100. 현재 양산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36) 應化世尊二千九百五十七年는 1930년이다. 322 太古寺寺法
하단 곽) 昭和五年 庚午四月 日蔚山郡 上北面竈 巖山龍華 寺神衆幀 畢功安于 本寺 緣化秩 住持比丘 具元植 金魚信士 朴萬晟 鐘頭 具甲鏞 供司 比丘尼 朴宇一137) 金氏 靑蓮花 化主秩 朴氏 善慈花 兪氏 正觀花 吳氏 淨土花 李氏 大覺花 願以此功德 普及於一切 我等與衆生 當生極樂國 137) 한국의 사찰문화재-부산 울산 경남Ⅱ 자료집, p. 215에 朴守一 로 읽었다. 323
(2) 칠성도(七星圖)138) 昭和十年139)旧二月初九 日新畵成于蔚山 郡上北面龍華寺 仍奉安于本寺 緣化秩 證明比丘 致益 誦呪比丘 一露 持殿比丘 甲俊 金魚比丘 奉圓 供司比丘 甲龍 淨桶沙彌 甲周 化主住持 元植 化主秩 信士 鄭讚宥 信女 吳淨土華 劉萬善華 朴大蓮華 安普賢行 朴大覺心 金正功心 孫極樂華 崔金蓮坮 施主秩 鄭讚宥 朴萬千 崔福萬 李奉赫 李福東華 洪永植 吳應根 安孝式 朴肯守 洪元奉 李鳳梧 權千守 138) 규격은 103.5 108 이고, 현재 양산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139) 1935년, 103.5 108, 양산 통도사성보박물관. 324
朴祥瑞 孫世讚 吳寀伊 吳亨根 金載馥 徐錡泳 成忠甲 朴聖祚 金興澤 朴寀出 安三岩子 朴永讚 金南順 金彩鳳 李鳳祚 鄭一連 林相禹 申元柱 尹景祚 李末守 李大業 金任俊 盧愛淑 吳永煥 李順伊 禹千石 李命世 權得守 金任述 洪先奉 金明鎭 崔應述 吳泰根 朴永求 韓在浩 金甲同 姜在福 李石岩 朴貴東 李求俊 吳石根 朴容圭 朴小鳳 全貴出 金宗模 金德三 全在圭 鄭九龍 宋文吉 崔福同 崔南守 崔春俊 徐小龍 李珠澤 申聖佑 裵奉律 辛福善 梁泰壽 全順玉 金義闢 兪鍾烈 兪龍邦佑 兪昌祚 金海東 金守東 金敎澈 金應相 金南必 金生坤 姜邦佑 姜文相 姜德相 姜庭相 325
郭法界相 盧判邦佑 全玉伊 兪敬伊 金興石 金大蓮花 河奉澈 金福壽 玄基奉 玄奎錫 金載千 崔鳳來 朴琫先 崔辛出 崔文出 金敎斗 成萬祚 朴昌業 金貴澤 申根業 申鎭浩140) 李德根 車深守 吳德根 桑原 崔命蘭 崔壽蘭 朴末岩 李鍾甲 朴命祚 朴春根 朴樹益 成春萬 辛石鍾 孫讚祚 鄭在學 鄭龍雨 李閏伊 徐鳳林 徐周植 權宜景 嚴肯相 梁正浩 朴氏 甲申生 坤黃氏 吳碩珍 宋在述 吳洹根 金又蓮 朴仁煥 盧東求 崔達龍 崔益生 辛根守 申長洙 朴氏 寶蓮花 梁氏 本心華 金長澤 劉文鍾 金永彩 宋琪列 金曰仙 金鎭漢 金景得 金元在 朴德出 崔奉述 金鳳順 金鳳得 金鳳蘭 孔武龍 140) 한국의 사찰문화재-부산 울산 경남Ⅱ 자료집, p. 215에 新鎭浩 로 읽었다. 326
우측 곽] 吳熾煥 安聖坤141) (3) 산신도(山神圖)142) 道光二十 甲辰143)六月 山靈幀 白雲 化主 比丘 良工 供養 3) 편액(扁額) (1) 용화전(龍華殿)144) (2) 북극전(北極殿)145) 용화전 편액 141) 142) 143) 144) 145) 북극전 편액 한국의 사찰문화재-부산 울산 경남Ⅱ 자료집, p. 215에 읽지 않았다. 68.8 55. 1844년이다. 26.5 68. 32 61. 道光二十 甲辰은 327
4) 금석문(金石文) (1) 석부재(石部材)146) 佛紀二九八三年丙申147) 十月二十七日立柱 彦陽上北 姜基周 住持 徐寳城 姜文相 鄭寅玉 金大信行 李鎭武 林實根 卞顯燦 金玉求 8. 간월사(澗月寺) 1) 시문(詩文) (1) 간월사기(澗月寺記) - 수오선생문집(睡聱先生文集) 有客入招提境,詰澗上樹曰,樹老矣,是名爲鉢羅樹乎,樹下有以大年爭者,鳥 與大衆獼猴也,鳥言樹以 (087) 糞子生而長如許,於是鳥爲最大有頃,長風從鷲嶺來,溪流有聲,白月 146) 석부재의 명문은 판독이 어려워 한국의 사찰문화재-부산 울산 경남Ⅱ 자료집, p. 215을 인용하였다. 147) 佛紀二九八三年丙申는 1956년이다. 328
揚輝,鳥驚而鳴於澗中,夫水與月生於有生之初者也,鳥安得爭爲長,唐人詩云, 月出驚山鳥,時鳴春磵中,或以是夫寺,以磵月名,寺亦古矣,世言,此寺地靈之奮 越乎通度者,如人之心肝,故題以肝越友雲,以爲無稽,而取義於溪月淨人心之 語,其亦透夫三明四智之義乎,是寺蓋新羅眞德王朝,慈藏國師之所創,慈藏之 錫,自終南雲際寺,先住乎此,再至于通度,今佛頭骨舍利奉安處,卽此寺丹土所 塡,地靈之著異可驗,剙設之年,實在唐貞觀中, (088) 而廢於壬辰倭亂,重於萬曆崇禎之間,蓋明彦,三明, 玉環,大珠,眞淨, 普悟六上人之力,今去崇禎亦遠矣, 鯨棟將頹,龍像欲泣,今甲戌,山之大德鵬 雁,與籌室定宇協謀,而倡檀越心,普悟而法堂復新志眞淨,而鍾閣重修,始于正 槪之辰,訖于祠源之月,若鬼傭而非人役也,其廢也,殆同萬曆之季,其興也,有若 崇禎之末,然則雁之幹事,宇之用力,與明彦輩六上人功德,同歸於無量無邊,其 色身雖殊,心法一般,師是空門不壞之身,轉輪往來者也,抑惟寺之興廢有數,成 毁在人,余聞流而不腐者水也,虧而復盈者月也,蘇 (089) 軾有言,水以日流故不朽,月以日行故能明,日流日行者,乃自然不息之理,而 此理之著於物,在乎人者, 儒家所謂誠一,而佛家所謂善心成實者也,苟以誠實 一心,作相傳之印板,懼明月之將虧,而圖流水之不腐,則何患乎廢而不興,毁而 不成也,寺名之取義於澗月者,殆以是,夫雁師索余記甚勤,書以歸, (2) 간월사답청련구(澗月寺踏靑聯句) - 염수헌문집 (念睡軒文集) 澗月寺踏靑聯句[崔伯益 李汝寬 從兄咸仲 齊會 ] (澗月寺踏靑聯句 [崔伯益 李汝寬 從兄咸仲 齊會 ] ) 澗月千年寺 春風三月時[伯益 ]長郊十里遠 層嶠短笻移[汝寬 ]探勝 前期在 踏靑此日宐[咸仲 ]雩風追古點 洋曲托今期[雲翼 ]谷邃靑雲 鎻 山高麗日遲[伯益 ] 鶴淵湍水瀉 霓洞石虹奇[咸仲 ]吟苦㤀疲倦 襟 開覺 052 爽夷[汝寬 ]遠岑春似畫 㴱谷路如絲[雲翼 ]疎磬能牽興 短筒欲寫詩 [伯益 ]雲收蔥嶺露 桃綻武陵疑[咸仲 ] 山古知棲鷲 巖奇似伏龜[汝 寬 ]扶笻尋寺盡 捫葛坐樓危[雲翼 ]水語閒仙碓 花心惱子規[伯益 ]樹 329
陰侵檻近 㙮影轉庭欹[咸仲 ]衲白迎騷客 金黃坐葉尼[汝寬 ] 茶斟浮葉 粥 樵倚爛柯碁[雲翼 ]羅國浮屠在 貞觀棟宇支[伯益 ]採宐商嶺紫 時 正山梁雌[咸仲 ]灘急魚難縱 石危岸欲持[汝寬 ]㴱㴱庵寂歷 藹藹樹參 差[雲翼 ] 雲拖山谿黑 日斜客意疲[伯益 ]斑荆論管鮑 㪅僕和壎箎[咸 仲 ]喚鳥催人返 鳴簫代葉吹[汝寬 ]宗元文巧 053 柳 巢老耳淸箕[雲翼 ]無酒難巵倒 披肝托劒知[伯益 ] 樹㝠迷石逕 煙起占村離[汝寬 ]佳會誠非偶 勝遊㪅屬誰[咸仲 ]韶光難繪畫 幽興足 唔咿[雲翼 ]一席談今古 三春惜別離[伯益 ]歸尋鳴閣臥 (3) 丁時翰의 山中日記 (前略) 一九日 庚寅陰 寺中饋食 食後發行十五餘里 過彦陽城外及驛村 欲見肝月寺 洞口仙遊巖石 迷失道 過栗發村 至仙遊洞 9. 망해사(望海寺) 1) 고문서(古文書) (1)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三國遺事 卷第二 紀異 第二) 처용랑 망해사(處容郞 望海寺) 第四十九 憲康大王之代 自京師至於海內 比屋連墻 無一草屋 笙歌不絶 道路 風雨調於四時 於是 大王遊開雲浦[在鶴城西南 今蔚州] 王將還駕 晝 歇於汀邊 忽雲霧冥曀 迷失道路 怪問左右 日官奏云 此東海龍所變也 宜行 勝事以解之 於是勅有司 爲龍刱佛寺近境 施令已出 雲開霧散 因名開雲浦 東海龍喜 乃率七子 現於駕前 讚德獻舞奏樂 其一子隨駕入京 輔佐王政 名 曰處容 王以美女妻之 欲留其意 又賜級干職 其妻甚美 疫神欽慕之 變爲人 夜至其家 竊與之宿 處容自外至其家 見寢有二人 乃唱歌作舞而退 歌曰 東 330
京明期月良 夜入伊遊行如可 入良沙寢矣見昆 脚烏伊四是良羅 二肹隱吾下 於叱古 二朕隱誰支下焉古 本矣吾下是如馬於隱 奪叱良乙何如爲理古 時神 現形 跪於前曰 吾羨公之妻 今犯之矣 公不見怒 感而美之 誓今已後 見畫公 之形容 不入其門矣 因此 國人門帖處容之形 以僻邪進慶 王旣還 乃卜靈鷲 山東麓勝地置寺 曰望德寺 亦名新房寺 乃爲龍而置也 又幸鮑石亭 南山神現 舞於御前 左右不見 王獨見之 有人現舞於前 王自作舞 以像示之 神之名 或 曰祥審 故至今國人傳此舞 曰御舞詳審 或曰御舞山神 或云 旣神出舞審象 其貌 命工摹刻 以示後代 故云象審 或云霜髥舞 此乃以其形稱之 又幸於金 剛嶺時 北岳神呈舞 名玉刀鈐 又同禮殿宴時 地神出舞 名地伯級干 語法集 云 于時山神獻舞 唱歌云智理多都波都波等者 蓋言以智理國者 知而多逃 都邑將破云謂也 乃地神山神知國將亡 故作舞以警之 國人不悟 謂爲現瑞 耽樂滋甚 故國終亡 제49대 헌강대왕(憲康大王)의 시대에는 서울부터 바닷가까지 집이 즐비 하고 담장이 서로 이어져 있었으며, 초가집이 단 한 채도 없었다. 풍악과 노 랫소리가 길에서도 끊이질 않았고 비바람이 사계절에 순조로웠다. 이 당시 대왕이 개운포(開雲浦)[학성(鶴城) 서남쪽에 있는데 지금의 울주(蔚州)이 다.]에 놀러 갔다가 돌아오려고 하던 참이었다. 낮에 물가에서 쉬고 있었는 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길을 잃어버렸다. 이상하게 여겨 주변 신하들에게 물었더니, 천문을 담당한 관리가 아뢰었다. 이것은 동해 용의 조화입니다. 마땅히 좋은 일을 해서 풀어야 합니다. 그래서 신하에게 명해 용을 위하여 이 근처에 절을 지어주도록 하였다. 명을 내리자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흩어졌다. 그래서 이름을 개운포(開雲浦)라고 하였다. 동해의 용이 기뻐하며 곧 일곱 아들을 데리고 왕의 수레 앞에 나타나서 덕을 찬미 하며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리고 그 아들 중 하나가 왕을 따라 서 울에 들어와서 왕의 정치를 보좌해주었으니, 그 이름을 처용(處容)이라고 하였다. 왕은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삼아주고 그의 마음을 잡아두려고 하 였다. 그래서 또 급간(級干)의 벼슬도 내렸다. 처용의 아내는 너무나 아름다웠으므로 역신(疫神)이 그녀를 흠모하였다. 그 래서 사람으로 변신하여 밤중에 처용의 집으로 가서 몰래 그 여자와 잤다. 처용이 밖에서 집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 331
고는 곧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다가 물러갔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서라벌 밝은 달밤 밤늦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구나.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뉘 것인가. 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은 것을 어찌하리오. 바로 그때 역신이 형체를 드러내고 처용 앞에 꿇어앉아 이렇게 말하였다. 제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지금 범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공이 화를 내지 않으시니 감동하여 아름답게 여깁니다. 맹세컨대 지금 이후로 공의 모습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그 문에는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 일로 인해 나라 사 람들이 문에 처용의 모습을 그려 붙여 나쁜 귀신을 물리치고 경사스러운 일 을 맞아들이게 되었다. 왕이 서울로 돌아온 뒤에 곧 영취산 동쪽 경치 좋은 곳에 터를 잡고 절을 지었으니 망해사(望德寺)라고 한다. 그리고 또 신방사 (新房寺)라고도 하니, 곧 용을 위해 세운 절이다. 왕이 또 포석정(鮑石亭)에 행차하였는데, 남산(南山)의 신이 왕 앞에 나 타나서 춤을 추었다. 주변의 신하들은 보지 못하였고 왕만이 볼 수 있었다. 어떤 사람(신)이 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왕도 몸소 그 춤을 추어서 그 춤의 모습을 신하들에게 보여주었다. 신의 이름이 혹은 상심(祥審)이라 고도 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나라 사람들이 이 춤을 전해오는데, 어무상심 (御舞詳審) 혹은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고도 한다. 어떤 사람은, 이미 신이 나와서 춤을 출 때 그 모습을 자세히[審] 본떠서[象] 장인에게 명해 똑같이 조각하여 후대에 보여주었기 때문에 상심(象審) 이라 한다고도 하였다. 혹은 상염무(霜髥舞)라고도 하니, 이것은 곧 모습에 따라 부른 이름이다. 왕이 또 금강령(金剛嶺)에 행차했을 때 북악(北岳)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 332
었는데, 옥도령(玉刀鈐)이라고 한다. 또 동례전(同禮殿)에서 연회를 베풀 때 지신(地神)이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이를 지백급간(地伯級干)이라고 하였다. 어법집(語法集) 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 당시 산신이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불렀는데, 지리다도파도파(智理多都 波都波) 등의 말을 한 것은, 대체로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이 미리 알고 많이 도망갔으므로, 도읍이 장차 파괴될 것이라. 라고 말한 것이라 한 다. 이것은 곧 지신과 산신이 나라가 망할 줄 미리 알았기 때문에 춤으로 경고를 한 것이다. 하지만 나라 사람들은 이 뜻을 깨닫지 못하고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났다고 여기어서 더욱더 환락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결국 나라 가 망하고 말았다. (2) 임하필기 제38권 해동악부(海東樂府) 처용가무(處容歌舞)148) 봄날 학성에서 놀던 신라의 왕 / 鶴城春日讌羅王 신룡을 한 개의 향으로 감동시켰네 / 感動神龍一炷香 처용가를 부르고 처용무를 추면서 / 處容歌是霜髯舞 오색 옷 입고 오방으로 벌여 서네 / 五色殊容處五方 헌강왕(憲康王)이 학성(鶴城 지금의 울산(蔚山))에 나가 놀 때 갑자기 구 름과 안개가 끼어서 길을 잃었다. 일관(日官)이 이것은 동해의 용이 조화를 부린 것이니 좋은 일을 행해서 풀어야 한다. 고 아뢰었다. 그래서 유사(有 司)에게 명하여 용을 위해 절을 세우도록 하니, 영을 내리자마자 구름이 걷 혔으므로 이내 그 포구를 개운포(開雲浦) 라고 이름하였다. 그러자 용이 일 곱 아들을 거느리고 어가(御駕) 앞에 나타나 왕의 덕을 칭송하며 노래를 부 르고 춤을 추었다. 그 가운데 한 아들이 어가를 따라 서울로 들어왔는데, 이 름을 처용 이라 하였다. 일명 상염(霜髯) 이다. 148) 한국고전번역원 김동주 선생님의 번역본이다. 333
(3) 가람고伽藍考 149) 望海寺 (4) 범우고梵宇攷 150) 望海寺 在靈鷲山 (續)新羅憲康王遊開雲浦東海龍率七子見於前其一卽處 容王建寺于此寓淫龍之意 (5) 전불심인부종수교영암당대종사지비 (傳佛心印扶宗樹敎影庵堂大宗師之碑) 影庵大宗師의 俗名은 壽泰이시니 예로 부터 산세 좋기로 이름난 蔚山郡 三南面 屯基里에서 서력 기원 一九二五년 三월 十 八일에 金海 金氏 종환거사와 光州盧氏玉 順女史의 삼남이녀 중 막내로 태어나셨다. 스님은 과거 전생으로부터 佛緣이 깊었던 지 어릴 때부터 어머니 노씨부인을 따라 가 까운 文殊庵을 찾곤하다가 이윽고 출가할 인연을 맞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당시 문 수암에 주석하던 龍溟대화상을 은사로 득 도하니 그 때의 나이가 十三세이셨다. 이후 전불심인부종수교영암당대종사지비 七년간 용명화상의 문하에서 이력을 밟고 나이 이십세에 조국의 광복을 맞 이하니 그것을 인연으로 文殊山과 마주선 南巖山 옛 정터에 草屋을 세우고 이름을 光復庵이라 하였다. 一九五七년에는 남암산의 동쪽에 위치한 靈鷲 山에 폐사지로 이름만 남아있던 望海寺 옛 터에 새로 불당을 조성하니 新 羅이래 천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망해사가 傳燈의 명맥을 다시 잇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스님은 一九六0년 고고학자인 황수영선생을 도와 망해사지에 도괴되어 있던 부도 두 기를 정비하여 세웠으니 一九六三년에는 이 부도들 149) 영조연간(1694~1776)에 신경준(申景濬)이 각 지역에 산재한 절의 이름과 소재지를 도 별로 나누어 수록한 사찰지(寺刹誌)이다. 150) 1799년에 왕명(王命)에 의해 편찬된 사찰지(寺刹誌)이다. 334
이 모물 一七三호로 지정되었다. 나아가 一九五七년에 본당을 건립한 후, 一九六六년에 삼성각, 一九六七년과 一九七一년에는 북요사와 남요사를 각 각 건립하고 一九七四년에는 범종각을 건립하는 등 사찰의 면모를 이루는 데 전력을 다 하였다. 한편으로 一九七0년부터 진입의 확충에 힘을 써서 국 도에 망해사에 이르는 길을 확장하게 되는데 전 구간의 부지를 지주로부터 매입하여 도로를 확장함으로 사찰을 방문하는 신도들은 물론이고 오랜 세월 동안 좁은 농로를 이용하던 지역민들의 통행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스님은 평소 신도들을 대하는데 있어서 항상 웃음을 머금고 부드럽게 대하여 스스 로 和顔愛語를 실천하셨다. 지난날 남암산 광복암에서부터 인연이 된 시도 들이 망해사에서 스님을 지속적으로 따랐을 뿐 아니라 이후 대대로 망해사 와 인연을 이어 가게 된 것이 모두 영암대종사의 法化에 기인한 것이리라 스님은 종단의 일에도 솔선하셨다. 一九七0년 韓國佛敎太古宗의 창종과 함 께 태고종 울산분원의 중심적인 역할을 자임하여 종단사찰의 화합과 발전에 진력하셨으니 그러한 덕분으로 오늘날 태고종 울산종무원이 있게 되는 기틀 을 이루었다 한편으로 종단에서 실시하는 법계고시에도 응시하여 一九七五 년에는 大德法戒를 품수하셨으며 金剛經 한 편을 모두 암송하실 정도로 평 소의 수행에도 남다른 바가 있었으니 실로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 는 중생을 교화하는 대승승가의 일원으로서 본분을 지키는데 소홀함이 없도 록 노력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스님의 타고난 천성과 자질 그리고 노력에도 불구하고 생로병사라는 중생의 업보를 피하실 수는 없어서 세수 四十九세 되는 해에 갑자기 병마를 맞게 되고 이후 三년을 투병하시다가 一九七七년 一월 四일에 세수 五十二세 법랍 三十九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셨다. 스님께 서 열반하신지 삼십여 성상이 흘러 오늘에야 스님을 기리는 부도와 비를 세 우게 되니 만시지탄을 금할 수 없으나 이로써 그 옛날 왕의 명으로 절을 지 어 동해용을 鎭撫하던 망해사의 본래 모습을 복원하고 이후로 불조의 혜명 이 끊임없이 이어져 지역의 대중을 위한 안식처가 되도록 불사를 완성하고 자 발원하신 스님의 유지를 기억하고 받들어 행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佛紀二五五0年丙戌(西紀2006年)陰四月二四日 335
韓國佛敎太古宗 總務院長 雲山 謹撰 역대 화주 시주자 沙門 東惺 謹書 신행단체 上佐 寺中秩 昌潤 住持 寶光 慧學 노옥순 김육산 문장호 최경달 박봉순 불교복지연구소 소장 윤현숙 김위조 김용이 임인섭 이말복 최순이 선우회 총무 이무애행 외 일동 總務 智圓 이임선 안귀순 대각월 김연순 김장춘 복지부 간사 정수연행 외 일동 敎務 禪雨 오임선 김세이 한숙자 이금순 최성관 합창단 단장 임대각월 외 일동 書記 金榮武 지심행 방문성 이순이 김태용 김귀탁 化主 李法蓮華 정성희 노분출 표동대 양재복 최복자 院主 閔錦珠 임봉기 엄용출 심필수 이말순 2) 불화 화기(佛畵 畵記) (1) 자수수월관음도(刺繡水月觀音圖)151) 奉安于 通度寺 普雨 佛紀二千 九百六十 七年152)十月日 자수수월관음도 화기 (2) 신중도(神衆圖)153) 佛紀二千九百七十 五年戊子154)五月五日 奉安于蔚山 靑良面南阿 山光復庵 151) 152) 153) 154) 336 105.3 118. 佛紀二千九百六十七年은 1940년이다. 92 66. 佛紀二千九百七十五年戊子은 1948년이다. 신중도 화기
證明比丘 鏡峯 誦呪比丘 壽泰 金魚比丘 何說 化主 化主 施主秩 3) 명문(銘文) (1) 명문와 嘉靖二十三年甲辰 명문와, 1544년, 울주 망해사 10. 밀봉암(密峰庵) 1) 扁額 (1) 천태각(天台閣)155) 천태각 현판 155) 25 59. 이 글씨는 鷲山 金九河(1872~1965) 스님의 글씨이다. 337
11. 시적사(施寂寺) 1) 고문서(古文書) (1) 지장보살좌상 묵서(地藏菩薩坐像 墨書)156) 丁巳 化 二 千 九 百 四 十 四 年 玩 虎 157) 世 尊 應 造 成 석조지장보살좌상 156) 世尊應化二千九百四十四年은 1917년이다. 이 지장보살의 總高 20.2, 膝幅 12.5 이다. 157) 이 불상을 만든 완호에 관해서는 문년순, 佛母 梁玩虎의 生涯에 대한 再考, 항도 부산 26, 부산광역시 시사편찬위원회, 2010, pp. 1~48을 참조할 만하다. 338
12. 청송사(靑松寺) 1) 고문서(古文書) (1) 가람고伽藍考 158) 靑松寺 府西二十五里俱在文殊山 (2) 범우고梵宇攷 159) 靑松寺 在文殊山 2) 금석문(金石文) (1) 서응당진협대사탑160) 瑞應堂 眞冾大師 서응당진협대사탑 (2) 우바이백화당낭옥부도161) 優婆夷白花堂朗玉 우바이백화당낭옥부도 158) 영조연간(1694~1776)에 신경준(申景濬)이 각 지역에 산재한 절의 이름과 소재지를 도 별로 나누어 수록한 사찰지(寺刹誌)이다. 159) 1799년에 왕명(王命)에 의해 편찬된 사찰지(寺刹誌)이다. 160) 서응당진협대사탑은 전체높이 222 탑신폭 83,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 3호이다. 161) 우바이는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 upāsikā를 음사한 것이다. 흔히 근사녀(近事女), 청신 녀(淸信女)라고 번역하는데, 출가하지 않고 在家에서 부처의 가르침에 따르는 여자 신도 를 의미한다(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339
13. 굴암사(窟巖寺) 1) 금석문(金石文) (1) 제화장암명 석편(題花藏巖銘 石片)162) 題花藏巖163) 山拱羅都立水 朝蔚海流花 藏巖下佛無言 坐千秋 知縣 徐益輔164) 嵗乙丑165)夏座首安 兵校金 제화장암명 석편 戶長金載 166) 162) 41 31.5 이다. 163) 徐益輔의 題花藏巖 는 山拱羅都立 水朝蔚海流 / 花藏巖下佛 無言坐千秋(산은 신라 의 도읍지를 떠받치며 서 있고 물은 울산 바다를 조현(朝見)하며 흐르네 화장암 아 래의 부처는 말없이 천년을 앉아 있네. (성범중, [한시 속의 울산 명소]들판에 우뚝 선 화장산 천지사방 끝없이 펼쳐져(20)화장산(花藏山)과 화장굴, 경상일보, 2011.1.13. http://www.ks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8926 참조) 164) 徐翼輔(1821~미상). 조선 후기 문신. 자는 公勵이다. 본관은 大丘이며, 거주지는 한양 이다. 증조는 徐命奎이고, 조부는 徐在修이며, 부친은 通訓大夫 行平壤府庶尹 徐有民이 다. 외조부는 박시복(朴時復)이다. 그는 1843년 식년시 진사 3등 39위로 합격하였고, 1848년 증광시 문과에 병과 4위로 급제하였다. 관직은 弘文館應敎, 弘文館修撰, 副司 果, 禮曹參議, 彦陽縣監 등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868년 언양현감을 지내면서 관청의 수리비로 자신의 녹봉 수천 냥을 직접 희사(喜捨)하기도 하였다. 1907년 가선 대부(嘉善大夫) 내부협판 겸 홍문관학사(內部協辦兼弘文館學士)에 추증되었다.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kr 참조). 165) 徐益輔는 고종 갑자년(1864년)에 언양현감으로 부임하여 무진년(1868년)에 서울로 돌 아가기 때문에 乙丑은 1865년이다. 166) 座首安 兵校金 戶長金載 는 蔚山金石文, 울산광역시 문화원연합회, 2013, pp. 430~431을 참조하였다. 340
2) 기타 (1) 李頀卿,167) 花藏巖 大巖開室藥泉流 曾說桃花暎郡樓 片石尙存羅代佛 無言含笑度千秋 (2) 金正默,168) 登花藏山 陟彼西山意浩然 四通眼界遠無邊 於今於古奇觀處 以去以來數百年 城外城中閻撲地 川南川北水連天 僧歸花落知何日 寂寂窟巖鎖暮烟 (3) <울산읍지>(1934년본) 화장굴(花藏窟) 169) 화장굴은 화장산 꼭대기에 있다. 신라시대에 왕이 병이 있었는데, 점치 는 자가 도화(桃花)가 효험이 있다고 하였다. 때는 얼어붙은 겨울인지라 천 기를 보는 자가 남방으로 가면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곧 이 산에 가서 찾도록 하였더니 굴속에 한 그루의 복사꽃이 활짝 피어 있는 것이 보 여서 꽃이 핀 곳으로 가서 보니 바로 비구승이었는데, 이름을 물으니 도화라 고 하였다. 마침내 함께 말을 타고 가니 왕이 보고 크게 기뻐하더니 병이 곧 나았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다. 염천(廉泉)은 화장굴 가운데에 있다. 물은 돌 틈에서 흘러나오는데, 그것 을 마시는 사람이 깨끗하지 못하면 샘에서 냄새가 나거나 마르기 때문에 그 렇게 부른다. 옥천(玉泉)이라 부르기도 한다. 167) 이 시는 언양 출신의 여류시인 구소 이호경(李頀卿 1894~1991년)가 쓴 화장암 이 다. 큰 바위 속에 집을 열어 약수가 흐르는데 일찍이 말하기를 복사꽃이 고을의 다락을 비추었다네 조각난 돌에는 아직도 신라시대의 부처가 남아서 말없이 미소를 머금고 천 년을 지내고 있네(성범중, [한시 속의 울산 명소]들판에 우뚝 선 화장산 천지사방 끝없이 펼쳐져(20)화장산(花藏山)과 화장굴, 경상일보, 2011.1.13 인용). 168) 김정묵은 1894년에 태어나 1974년 사망하였다(성범중, [한시 속의 울산 명소]들판에 우뚝 선 화장산 천지사방 끝없이 펼쳐져(20) 화장산(花藏山)과 화장굴, 경상일보, 2011.1.13 인용). 169) 성범중, [한시 속의 울산 명소]들판에 우뚝 선 화장산 천지사방 끝없이 펼쳐져(20) 화 장산(花藏山)과 화장굴, 경상일보, 2011.1.13 인용. 341
14. 화림사(華林寺) 1) 불화 화기(佛畵 畵記) (1) 칠성도(七星圖)170) 檀紀四二八六年171) 癸巳六月十五日 畵成于本寺 仍而奉安 緣化秩 證明比丘 雪岩 倚典 칠성도 會主比丘 東圓 重熙 誦呪比丘 暎湖 泰英 金魚比丘 住持172)比丘 道峰 丙辰生 金慶得 己未生 金泰辰 己未生 朴泳芸 施主秩 化主 辛酉生 趙氏大覺華 孔張玉 壬寅生 金氏慈蓮華 崔氏上品華 吳氏上品華 林命順 170) 91.5 131.8. 171) 檀紀四二八六年은 1953년이다. 172) 한국의 사찰문화재-부산 울산 경남Ⅱ 자료집, p. 217에 持殿으로 읽었다. 342
15. 화장사(花藏寺) 1) 현판문(懸板文) (1) 제화사종각(題花寺鍾閣)173) 藍 岡 申 星 杓 1 7 4 鼓 千 家 睡 醒 曉 鍾 聲 來 生 久 廢 玆 鄕 希 警 求 後 福 不 無 檀 越 願 宮 古 蹟 鳴 盡 是 雲 師 岩 窟 今 猶 滴 貝 葉 花 山 藏 在 道 通 明 甘 泉 羅 代 高 僧 桃 以 名 此 秋 觀 吳 胄 泳 一 覺 來 天 聽 本 無 聲 衆 生 儒 彿 道 殊 成 則 多 驚 㥘 願 借 慈 航 濟 世 曉 鷄 鳴 堪 憐 苦 海 稱 奇 遊 客 翫 鍾 如 醒 古 菴 新 歷 史 明 窟 可 桃 僧 去 後 認 山 名 寺 題 花 寺 鍾 閣 ) 2) 불화 화기(佛畵 畵記) (1) 칠성도(七星圖)175) 佛紀貳千九百六 拾四年 化主比丘 臥雲敬印 施主秩 昭和拾貳年丁丑176) 崔商鳳 一月七星幀畵 李極樂華 造成于蔚山郡 子 晉澤 兩主 173) 19.5 54.5 (이 현판은 조사자가 사찰을 방문하였지만, 확인하지 못하여 한국의 사찰문화재-부산 울산 경남Ⅱ 자료집, p. 217 한국학중앙연구원 유지복선생님이 교열하 신 것을 인용하였다). 174) 藍岡 申星杓는 포은선생이 언양에서 즐겨 찾던 경승지를 찾아 추모하면서 작천정에 圃隱泳歸後千 丰起一樓銀盤 皆白石玉水自 紅流覓句修蘭 日飛觴泛菊秋 花時明月夜 疑 이라는 시판을 남겼다. 175) 111.5 221. 3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