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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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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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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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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초 정재연구\(수정 및 첨가\)

Transcription:

전근대시기 한국과 일본의 대마도 인식 215 전근대시기 한국과 일본의 대마도 인식 하우봉 전북대학교 사학과 교수 Ⅰ. 머리말 브루스 배튼(Bruce Batten)의 정의에 따르면 전근대의 국경에는 국경선으로 이루어진 boundary가 있고, 공간으로 이루어진 frontier란 개념이 있다. 전자 는 구심적이며 내와 외를 격리시키는 기능을 지니고, 후자는 원심적이며 내와 외를 결합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하였다. 1) 무라이 쇼스케[ 村 井 章 介 ]는 이 에 대해 전자는 선형 개념이고, 후자는 연결공간의 개념이라고 보았다. 2) 김보 한은 양자를 결합시켜 국가 간의 영역을 구분하는 경계의 주변공간을 경계영 역 이라고 규정하였다. 3) 특히 경계적 공간이란 개념은 중요하다. 이것이 근대 국민국가가 확립되면서 국경선으로 확정된다. 그럼으로써 이전에 있었던 경계 투고일: 2013년 6월 10일, 심사일: 2013년 8월 12일, 게재 확정일: 2013년 8월 30일 1) Bruce Batten, 2000, 日 本 の 境 界 前 近 代 の 國 家 民 族 文 化, 靑 木 書 店 2) 村 井 章 介, 2010, 境 界 と 地 域, 東 アジア 世 界 の 成 立, 吉 川 弘 文 館 3) 김보한, 2011, 중 근세 일본인의 조선에 대한 경계인식 고찰, 한일관계사연구 39

216 동북아역사논총 41호 인과 경계공간은 설 자리를 잃고 배제되고 말았다. 본고에서는 근세 대마도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인식을 주로 영토와 경계인 식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이 시기 대마도에 대한 한일 양국의 인식을 살펴볼 때는 근대 국민국가적 관점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다. 근대 이전의 영토 개념에는 경계의 안과 밖이라는 兩 義 性 내지 兩 屬 性 이 있으며, 안과 밖을 연 결해주는 매개자의 존재가 중요하다. 그 가장 좋은 사례가 근세의 대마도다. 고대 일본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대마도에 郡 司 를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일본 학자들은 그것을 근거로 대마도를 고대부터 일본이 정치적으로 실효적 지배를 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대마도의 경우 일본의 다른 지역만큼 선명하지 않다. 한국 측 사료는 말할 것도 없고, 일본 사서의 기록을 꼼꼼히 살 펴보면 대마도는 한국과 일본의 경계 영역에 있으며, 일본의 중앙정부로부터 반독립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무로마치막부[ 室 町 幕 府 ] 시대 의 일본은 국가적 통합력이 약했는데, 특히 서쪽 변경의 섬인 대마도는 반독립 적인 지위를 누렸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戰 國 時 代 를 거치며 강한 군사적 결집과 생산력의 확대를 실현했던 에도막부[ 江 戶 幕 府 ] 시기에는 국토와 국민 을 장악하는 힘이 무로마치막부와는 아주 달랐다. 이에 따라 경계지역과 경계 인의 활동 영역이 대폭 축소되었다. 대마도도 막부의 체제에 흡수되어 幕 藩 體 制 의 구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일본에서도 대마도의 위상이 시기에 따라 변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과 일본의 대마도에 대한 인식에도 변화가 있었다. 본고에서는 조선시대 를 중심으로 양국의 대마도 인식을 고찰하겠지만, 그 배경으로서 고대와 중세 의 대마도 인식과 개항기까지의 대마도 인식의 시간적 변화양상과 추이를 정 리해볼 것이다. 또 조선시대 대마도 인식에서 핵심적 주제인 屬 州 化 조치와 兩 屬 關 係 論 에 관해서도 양국의 연구자들의 이론을 집중적으로 검토해볼 예정 이다.

전근대시기 한국과 일본의 대마도 인식 217 Ⅱ. 고 중세의 대마도 인식 1_ 고대의 대마도 인식 기록상으로 대마도가 나오는 최초의 史 書 는 3세기 초반 중국의 三 國 志 魏 志 東 夷 傳 倭 人 條 이다. 여기에는 狗 邪 韓 國 에서 一 海 를 건너 對 馬 國 에 이른 다 라고 기술되어 있다. 대마도는 이름이 對 馬 國 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가야 와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경계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인식하였던 것 같다. 한국과 일본의 사서에서는 대마도를 어떻게 기술하였을까? 우선 그 명칭에 대해 三 國 史 記 에는 대마도 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일본 의 日 本 書 紀 에는 對 馬 國, 對 馬 島, 對 馬 洲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로 보아 한자의 음을 빌린 對 馬 란 이름이 중국의 三 國 志 이래로 널리 사용되 었던 것 같다. 古 事 記 에는 津 島 로 나와 있고, 일본서기 神 代 에는 韓 鄕 之 島 란 표현도 나온다. 이것은 이름의 뜻과 관련된 것으로서, 쓰시마[ 津 島 ] 는 한반도로 가는 배가 머무는 항구와 같은 섬 이고, 가라시마[ 韓 鄕 之 島 ] 는 한반 도로부터 사람과 문화가 건너올 때 거쳐온 섬, 혹은 한국섬 이라는 의미가 강 하다. 후자는 한반도와의 관련성이 더 강하게 표현된 것이지만 요컨대 대마도 가 한반도와 일본의 사이에 있으면서 교량적 역할을 한 섬이라는 데서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일본에서는 일본 최초의 쌀농사 재배유적지가 남아 있는 등 한반도와 규슈[ 九 州 ]의 교량적 역할을 한 지역으로 인식하고 있 다. 이 시기 대마도에는 한반도 남부에서 만들어진 금속기, 玉 器, 토기 등이 다 수 출토되고 있어 가야를 비롯한 한반도 국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음을 보 여준다. 이와 같이 대마도는 일본열도의 문화와 공통적인 요소도 있으면서도 한반도와의 활발한 인적 왕래와 이동을 배경으로 한반도의 영향을 받고 있 었다.

218 동북아역사논총 41호 1) 한국의 대마도 인식 고대 한반도와 대마도의 관계를 나타내주는 사료는 매우 적다. 三 國 史 記 신라본기 박혁거세 조에, 瓠 公 이란 사람은 그 族 姓 이 미상인 데 본래 왜인이다. 처음에 표주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온 까닭으로 호공 이라고 하였다. 4) 라는 기사가 나온다. 또 같은 책 신라본기 실성왕 조에는 왕 은 왜인들이 대마도에 營 을 설치하고 병기와 군량을 저축하여 우리를 습격하 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이 움직이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정병을 뽑아 격파하 자고 하였다. 5) 라는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신라와 대마도의 밀접한 연관성을 보여주는 기록들이다. 이 기사에 대해 조선후기에 편찬된 增 補 東 國 文 獻 備 考 에서는 호공이 대마도인으로서 신라 에 벼슬하였으니, 당시 대마도가 우리 땅이었음을 알 수 있으나 어느 시기에 저들의 땅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라고 논평하였다. 또 후자에 대해서는 만약 본래부터 대마도가 왜인의 땅에 속하였다면 그곳에 營 을 설치한 것을 신라의 역사에 기록하지 않았을 것 이라고 하여 사료분석적 입장에서 해석하였다. 다 소 막연하고 유보적이지만 대마도에 대한 영토적 연고권을 주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일본의 대마도 인식 일본 고대의 사서인 古 事 記 와 日 本 書 紀 에는 대마도의 호족을 對 馬 縣 直 으로 임명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즉 대마도는 고대부터 왜와 일본의 지배가 미치는 지역으로 정치적으로 실효적 지배를 하였다는 인식을 나타내었다. 6) 야마토 조정[ 大 和 朝 廷 ]에서는 663년 백촌강전투 이후 한반도와의 경계를 4) 三 國 史 記 권1, 新 羅 本 紀 赫 居 世 居 西 干 38년 5) 三 國 史 記 권3, 新 羅 本 紀 實 聖 尼 師 今 7년 6) 關 周 一, 2012, 對 馬 と 倭 寇, 高 志 書 院

전근대시기 한국과 일본의 대마도 인식 219 의식하는 개념이 강화되었던 것 같다. 이에 따라 665년 나당연합군의 침략에 대비해 筑 紫 에 大 野 城 을 쌓았고, 667년에는 대마도에 백제식 산성인 金 田 城 을 축조한 것이 그러한 사례다. 율령제하에서 대마도는 一 岐 島 陸 奧 出 羽 佐 渡 등과 함께 변방의 요 처[ 邊 要 ] 로 자리매김당하였다. 이에 따라 대마도는 國 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 으며, 7세기 중엽에 國 司 를 파견하였고, 서부지역의 국방과 외교를 담당하는 大 宰 府 의 관할하에 두었다. 한반도와 중국에 접한 국방상의 요충지이자 교류 의 최선단기지로서의 성격을 지녔다. 7) 이전부터의 대마도의 在 地 세력인 國 造 는 율령제하에서 郡 司 로 바뀌었다. 율령시대 후기에 國 司 제도가 변질됨에 따 라 토착세력과 연결된 在 廳 官 人 이 지방행정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헤이 안시대[ 平 安 時 代 ]의 재지세력은 卜 部 氏, 그 뒤에는 阿 比 留 氏 로 이어졌다. 8) 한국 측의 기록에 비해 일본 사서의 내용이 훨씬 구체적이고 자세함을 알 수 있다. 2_ 중세의 대마도 인식 1) 고려시대의 교류와 대마도 인식 8세기 말 통일신라와 일본의 국교가 단절된 이래 고려시대에 들어서도 양국의 관계는 정상화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양국 간의 공식적인 교류가 없었다. 그 러나 중앙정부 사이의 사절왕래는 없었지만 상인들의 교역과 표류민 송환과 같은 민간교류는 유지되었다. 이와 같은 교류는 고려중기 문종대(1047~1082) 에 들어서 활발해졌는데, 특히 대마도의 표류민 송환과 토산물 진헌이 가장 많 7) 川 添 昭 二, 1981, 中 世 九 州 の 政 治 と 文 化, 文 獻 出 版 8) 關 周 一, 2011, アジアから 見 た 日 本 の 境 界, 古 代 中 世 の 境 界 意 識 と 文 化 交 流, 勉 誠 出 版

220 동북아역사논총 41호 았다. 문종대 이래 대마도와 일본 서국지역의 호족들을 통한 교역이 12세기 후반 에 이르러 進 奉 船 貿 易 으로 정례화되었다. 1169~1266년까지 100여 년 동안 실시된 진봉선 무역은 進 奉 과 回 賜 로 이루어지는 조공무역으로서 進 奉 禮 制 로 표현되듯이 제도화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일시적인 私 獻 貿 易 이 아니라 외교의례의 형식을 갖춘 공식적이고 정례적인 교역체제였다. 또 진봉 의 주체는 대마도이고 大 宰 府 가 그것을 관리 감독하고 막부는 묵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는 이 진봉선을 접대하기 위해 金 州 (김해)에 객관을 설치하였으 며, 외교문서의 수수관계는 고려의 금주방어사 대마도주, 경상도안찰사 大 宰 府 의 루트를 취하였다. 그런데 진봉선 무역은 고려후기로 오면서 약정된 무역선 외에 허가받지 않 은 사무역선이 무질서하게 내왕하고 또 일부는 해적행위도 함으로써 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러다가 元 의 침략 이후 고려가 원과 강화조약을 체결 하고 이어 여원연합군의 일본 침공이 시작되면서 진봉선 무역체제는 종말을 고하였다. 9) 이후 고려와의 교역통로를 상실한 대마도인은 왜구로 변하였다. 고려 말에 이르러 왜구 금압을 위해 고려 정부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함에 따라 정부 간 통로가 열리기는 하였다. 그러나 막부의 왜구통제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고려는 구주탐제( 九 州 探 題 )와 서국지역의 호족 및 대마도와 직접 교섭 하게 되었다. 고려사 공민왕 17년(1368)의 기사를 보면 對 馬 島 萬 戶 가 사자를 보내와 특산물을 진헌하였다. 윤7월 講 究 使 李 夏 生 을 대마도에 보냈다. 10) 라고 나와 있다. 또 같은 해 11월에는 대마도만호 다케노 소케이[ 崇 宗 經 ]가 사자를 보내어 조공하였다. 宗 經 에게 쌀 천 석을 하사하였다. 11) 라는 기사가 있다. 이로 보아 대마도주가 고려 정부로부터 萬 戶 라는 관직을 받았음을 알 수 9) 진봉선 무역체제가 종언을 고하는 1266년은 몽골로부터 일본의 入 朝 를 요구하는 詔 書 가 고려에 보내진 시점이다. 10) 고려사 세가 권41, 공민왕 17년(1368) 7월 기묘 11) 고려사 세가 권41, 공민왕 17년 11월 병오

전근대시기 한국과 일본의 대마도 인식 221 있다. 이 시기에는 대마도주가 阿 比 留 氏 에서 宗 氏 로 바뀌었는데, 위 사료에 나오는 대마도만호 崇 宗 經 은 대마도주 宗 經 茂 를 가리킨다. 12) 고려 조정은 대 마도주에게 대마도만호란 직책은 물론 왜구 금압을 위해 대가로 경제적 보상 과 함께 주었을 것이다. 13) 만일 그렇다면 대마도주의 受 職 倭 人 化 가 고려시대 에 이미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면 고려시대의 대마도 인식은 어떠하였을까? 고려사 에 따르면 고려는 선종 2년(1085) 이래 대마도주를 對 馬 島 勾 當 官 으로 불렀다. 이 점은 상당히 흥미로운 시사를 준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는 제주도의 星 主 를 耽 羅 勾 當 使 로, 一 岐 島 主 를 一 岐 島 勾 當 官 이라고 명명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구당관은 고려시대 변방지역 내지 수상교통의 요충지를 관장하는 행정책임자들에게 붙인 관직명이다. 이것을 보면 탐라, 대마도, 일기 도의 지배자에게 고려가 구당사 혹은 구당관이란 명칭을 쓴 의미를 알 수 있 다. 즉 위 세 섬을 고려의 屬 領 으로 인식하였거나 아니면 고려 정부가 대마도 와 제주도를 고려 고유의 지배질서 속에서 같은 차원으로 취급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4) 이와 같은 인식은 중기 이래 진봉선 무역체제하에서 더욱 강화되었을 것이 다. 이 체제에서의 고려와 대마도는 조공관계였다. 이어 고려 말 공민왕대에는 대마도주가 만호라는 고려의 무관직을 받았다. 양국 간에 국교가 없었는데도 대마도가 진봉선 무역이라는 형태로 고려와 통교하였다는 사실, 그리고 도주 가 고려로부터 관직을 받았다는 것은 대마도의 반독립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12) 宗 氏 家 譜 등에 나와 있는 守 護 의 계승에 관한 내용이 반드시 역사적 사실과 일 치하지 않음은 알려진 바다. 宗 經 茂 는 宗 氏 家 系 譜 에는 5 代 로 나와 있지만 宗 氏 로서는 최초로 대마도의 守 護 代 가 된 인물이고, 그 시기는 14세기 중반이다( 中 村 榮 孝, 1949, ツシマの 歷 史 的 位 置, 日 本 歷 史 19). 13) 萬 戶 는 원간섭기 고려에 생긴 관직명이다. 한편 고려사 세가 공민왕 5년 10월조 와 반역전 崔 濡, 고려사절요 공민왕 12년 6월조 등에 나오는 倭 人 萬 戶 府 의 성격도 앞으로 규명해야 할 과제다. 14) 고려적 고유질서의 의미와 성격에 대해서는 奧 村 周 司, 1979, 高 麗 における 八 關 會 的 秩 序 と 國 際 環 境, 朝 鮮 史 硏 究 會 論 文 集 16 참조.

222 동북아역사논총 41호 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고려는 대마도를 속령 내지 속주로 인식하였을 가 능성이 충분하다. 한편 고려중기 이후의 고려와 대마도 관계를 보면 조선초기의 그것과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진봉선은 조선초기 대마도주에게 허락한 歲 遣 船 과 같은 성격이며 진봉선의 접대를 위해 금주에 설치한 객관도 조선초기의 倭 館 과 마 찬가지다. 이로써 보면 조선초기 대마도 관계의 원형이 이미 성립된 것으로 여 겨진다. 인식 면에서도 후술하는바 조선초기의 對 馬 故 土 意 識 과 屬 州 意 識 이 고려시대의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둔 것이며, 그 원형은 고려시대에 형성된 것 이 아닌가 한다. 2) 일본의 대마도 인식 대마도 실권자의 변천사를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대에는 國 造 家 였 던 卜 部 氏 가 신화시대부터 율령시대까지 지배족을 형성하였고, 平 安 時 代 에 들어와서는 아비루씨[ 阿 比 留 氏 ]가 신흥세력으로 성장하였다. 1019년 여진족 의 침입( 刀 伊 의 亂 ) 때 아비루씨의 조상이 來 島 해 공을 세우고 정착하였는데, 이후 在 廳 官 人 ( 椽 官 )으로서 세력을 확장해 12세기에는 도내의 실권을 장악하 였다. 그런데 13세기에 접어들어 대마도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아비루씨가 점차 大 宰 府 의 통제에 불복하였다. 이에 1245년 12월 28일 대재부가 고레무네 [ 惟 宗 ]의 아들 시게나오[ 重 尙 ]에게 아비루를 정벌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江 戶 時 代 에 편찬된 宗 氏 家 譜 등에 따르면 1246년 1월 1일 宗 氏 는 아비루씨를 토 벌하고 全 島 를 장악하였다 한다. 15) 그 직후 고레무네는 대재부의 실력자인 少 15) 이들 기록에 따르면 宗 氏 의 선조는 安 德 天 皇 의 후예라는 설과 平 知 盛 의 후예라는 설이 있다. 그런데 長 節 子 씨는 양자 다 후대의 날조라고 보고 있다. 또 그는 1246년 宗 氏 의 아비루씨 정복설은 후대에 조작된 허구라고 하였다( 長 節 子, 2002, 中 世 國 境 海 域 の 倭 と 朝 鮮, 吉 川 弘 文 館 ). 그는 宗 氏 는 平 安 時 代 이래 大 宰 府 官 人 으 로서 九 州 에 퍼져 있었던 惟 宗 氏 의 계통이다. 라고 하였다. 그는 또 14세기 초반에 이르러 惟 宗 씨가 대마도에 진출해 점진적으로 아비루씨를 제치고 재청관인의 선 두에 섰다고 보았다. 그 가운데서 宗 氏 는 大 宰 府 재청관인 惟 宗 氏 의 한 지류인

전근대시기 한국과 일본의 대마도 인식 223 二 氏 ( 武 藤 氏 )로부터 對 馬 地 頭 代 로 임명되었다. 16) 17) 이 시기부터 대마도의 실권자로 阿 比 留 氏 대신 宗 氏 가 인정받게 되었다. 宗 氏 는 대마 在 廳 官 人 인 惟 宗 氏 가 무사화하였다고 전해진다. 18) 그들은 對 馬 守 護 쇼니씨[ 少 二 氏 ]의 地 頭 代 로 승격함으로써 아비루씨를 대신해 도내의 실 권자가 되었다. 고레무네의 아들인 地 頭 代 소 스케구니[ 宗 資 國 ]가 宗 氏 로 자 칭한 최초의 인물로서 1274년 여원연합군의 침공 때 저항하다 아들과 함께 죽 음으로써 정치적 권위를 획득하였다. 南 北 朝 時 代 에 宗 氏 는 쇼니씨를 추종하면서 九 州 의 각지를 전전하다 筑 前 州 등에 영지를 얻었다. 무로마치막부는 쇼니씨를 대신해 宗 氏 를 對 馬 守 護 로 임명하였다. 13세기 전반에 왜구가 발생한 이후 1350년부터 대규모로 바뀌고 매우 빈번 해지는데 일본 역사에서는 이를 전기왜구 라고 한다. 전기왜구는 약탈자(해적) 의 측면과 교역자[ 海 商 ]의 요소를 겸비하고 있었는데, 대마도는 전기왜구의 주 요세력이었다. 고려와 조선의 사서에 빈번히 등장하는 이른바 三 島 倭 는 對 馬 島, 一 岐 島, 松 浦 (혹은 博 多 ) 지방의 왜구를 가리킨다. 1366년(공민왕 15) 고 려 조정이 왜구 금압을 위해 사신을 파견한 이래 막부와 교섭하였는데 이것이 對 馬 의 在 廳 官 人 維 宗 氏 가 武 士 化 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長 節 子, 1987, 中 世 日 朝 關 係 と 對 馬, 吉 川 弘 文 館 ). 16) 본래 對 馬 守 護 는 少 二 氏 가 겸직했던 것인데 이때부터 惟 宗 을 對 馬 地 頭 代 로 삼아 分 治 하였다. 그 후 惟 宗 은 일곱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동생에게 대마도의 8 郡 을 나 누어 다스리게 하였다. 惟 宗 의 장자인 重 尙 은 對 馬 地 頭 代 로 임명받아 대마도의 지배자가 되었으며, 성도 惟 宗 에서 宗 氏 로 바꾸었다. 이로써 宗 氏 가 아비루씨에 이어 도내의 전역을 장악하였고, 지배씨족이 되었다. 17) 아비루씨는 본래 백제계 渡 來 人 인 蘇 我 氏 의 후예라고 한다. 그들은 고려와 무역함 으로써 부를 축적하였는데, 鎭 西 府 무인들의 질시를 받아 반역죄라는 모함을 쓰고 몰락하였다. 아비루씨는 817년부터 在 廳 官 人 인 椽 官 이 된 후 1246년까지 42대로 이어졌다. 그런데 13세기 후반 宗 氏 에게 타도된 후로는 神 事 를 담당하였다. 18) 宗 氏 는 본래 大 宰 府 官 人 으로 九 州 지역에 번성했던 惟 宗 氏 계통이다. 惟 宗 은 大 宰 大 監 으로 九 州 의 3 州 2 島 를 관장하였다 한다. 宗 氏 家 譜 에 따르면 종씨의 시조 인 判 官 知 宗 이 惟 宗 을 자기 가문의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宗 氏 家 譜 에는 종씨 의 시조가 知 宗 으로 되어 있지만 대마도에서는 重 尙 을 제1대 도주로 간주한다.

224 동북아역사논총 41호 武 家 外 交 의 시작이다. 고려는 막부뿐 아니라 大 內 氏, 今 川 氏, 九 州 探 題 등 지 역권력과도 교섭하였다. 대마도에서는 1368년(공민왕 17) 소 사다시게[ 宗 經 茂, 고려사에는 崇 宗 慶 으로 나옴]가 고려에 사절을 파견하였고, 대마도만호 등의 관직을 하사받았으며 교역을 허락받았다. 이 시기 일본의 대마도 인식은 어떠하였을까? 일본의 사서에는 대부분 중 세에도 대마도에 대한 일본의 실효적 지배가 이어진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런 데 일본 측의 사서 가운데 대마도와 한반도의 관련성을 기록한 내용이 있어 주 목된다. 대마도의 역사를 기록한 對 州 編 年 略 19) 의 범례에, 山 家 要 略 記 에 말하기 를 대마도는 고려국의 牧 이다. (옛날에는) 신라 사람들이 살았는데, 開 化 天 皇 대에 이 섬(대마도)에서 (일본 본주로) 습래해왔다. 仲 哀 天 皇 이 豊 浦 宮 에서 대 마도를 거쳐 신라를 정벌함으로써 마침내 이 섬을 얻었다. 고 하였다. 20) 라고 한 기사가 나온다. 고대부터 대마도에 신라 사람들이 살았다는 사실을 보여주 고 있다. 또 가마쿠라[ 鎌 倉 ] 시대에 편찬된 塵 袋 21) 권2에는 무릇 대마도는 옛날 에는 신라국과 같은 곳이었다. 사람의 모습도 그곳에서 나는 토산물도 있는 것 은 모두 신라와 다름이 없다 라고 하였다. 대마도가 옛날에는 신라와 같은 곳 으로서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인 면에서 동질적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19) 대마도인 藤 定 房 이 1723년 편찬한 史 書 로서 3권으로 되어 있다. 저자인 藤 定 房 의 가계는 嚴 原 八 幡 宮 의 祠 官 을 세습적으로 담당하였으며 대마도에 國 學 을 개척한 학자 집안으로 유명하다. 이 책은 神 代 로부터 집필 당시까지의 대마도사가 편년체 로 서술되어 있는데 대마도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서다. 20) 山 家 要 略 記 는 12세기 말 일본의 천태종 승려인 顯 眞 이 편찬한 것이다. 21) 鎌 倉 시대 중기(13세기 말)에 만들어진 11권의 辭 書 로서 저자는 미상이다.

전근대시기 한국과 일본의 대마도 인식 225 Ⅲ. 조선전기의 대마도 인식 1_ 조선초기의 대마도 관계 조선초기 대일정책의 기본은 남쪽 변경의 평화를 확보하는 것으로서 바로 왜 구대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왜구를 평화적 통교자 로 전환시키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조선 정부는 외교적 교섭, 군사적 대응과 회유책을 병행하였다. 그럼에도 왜구의 침략이 근절되지 않자 1419년(세종 1) 왜구의 근거지였던 대마도에 대한 정벌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5세 기 중엽에 확립된 대일통교체제는 막부와는 대등한 형식의 교린과 대마도 등 여타세력에 대해서는 羈 縻 交 隣 이라는 다원적이고 중층적인 형태를 취하게 되 었다. 특히 대마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교역상의 특권을 주면서 일본의 각종 통교자들을 통제하도록 하는 대신 조선 중심의 국제질서체계 안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이 시기 조선 정부가 대마도에 대해 시행한 受 職 倭 人 制, 受 圖 書 人 制, 歲 遣 船 정약, 歲 賜 米 豆 의 하사 등은 전형적인 外 夷 羈 縻 策 이었다. 한편 이 시기 대마도의 사정은 어떠했을까? 조선 조정의 적극적인 왜구대책으로 인해 대부분의 왜구는 통교자로 전환 되었다. 대마도의 왜구수령이었던 소다 사에몬타로[ 早 田 左 衛 門 太 郞 ]도 조선 왕조에 귀속해 수도서인이 되고 교역자로 바뀌었다. 무로마치시대 초기 대마 도 내에 기반을 확립한 인물은 쓰네시게[ 經 茂 ]의 손자인 소 사다시게[ 宗 貞 茂 ] 와 아들 소 사다모리[ 宗 貞 盛 ]다. 사다시게[ 貞 茂 ; 재위 1402~1418]는 라이벌인 仁 位 宗 氏 세력을 타도하고 정식으로 對 馬 守 護 가 되었다. 그런데 당시만 하더 라도 宗 氏 의 본거지는 여전히 筑 前 州 宗 像 郡 에 있었다. 그들은 九 州 에 20만 석의 영지를 소유하였으며, 3년에 한 번씩 대마도에 가 정무를 관장하였다. 그 러다가 15세기 초반 7대 도주 사다시게 때부터 대마도에 정착하였으며 8대 도 주 사다모리[ 貞 盛 ; 재위 1418~1452] 대에 이르러 肥 前 州 의 家 臣 들도 대마도 로 완전히 이주하였다. 사다시게는 조선 조정의 왜구 금압에 적극적으로 협조

226 동북아역사논총 41호 함으로써 82회에 걸쳐 조선과 통교할 수 있었다. 그는 조선왕조와의 관계를 이 용하여 가신과 도민을 통제하고 지배체제를 강화하였다. 아들 사다모리는 1436년(세종 18) 조선과 文 引 制 度 를 정약하고, 1441년에 고초도조어금약을 체 결하였으며, 1443년에는 癸 亥 約 條 를 체결함으로써 대조선 통교체제를 확립하 였다. 이와 같이 宗 氏 는 도항증명서인 문인의 발행권을 비롯한 조선과의 통교 권을 장악함으로써 도내의 지배기반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사다모리 대에 對 馬 國 이라는 宗 氏 領 國 體 制 를 확립하였다. 22) 1467년에는 도내의 守 護 所 도 佐 賀 에서 府 中 ( 嚴 原 )으로 옮겼다. 府 中 이 정치적 중심이라면 佐 賀 는 경 제적 중심이었다. 2_ 대마도 정벌과 속주화 문제 1) 대마도 정벌 조선초기의 적극적인 왜구대책으로 왜구가 격감하였지만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왜구의 본거지로 대마도를 가장 주시하였다. 그리 하여 고려 말 朴 葳 의 토벌 이래 태조대에도 대마도 정벌을 기획한 적이 있었 다. 23) 잔존한 왜구들에 대한 최후의 군사적 대응이 1419년(세종 1)의 대마도 정 벌이었다. 조선에서는 己 亥 東 征 이라 하고 일본에서는 應 永 의 外 寇 라고 부 르는 이 전투는 조선초기 조일관계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1419년 6월 19일 조선 조정은 三 軍 都 體 察 使 李 從 茂 이하 병력 17,000여 명을 병선 227척에 싣고 거제도를 출발해 대마도를 향하였다. 이들은 20일 대 마도의 淺 茅 灣 을 공격하여 적선 130여 척을 나포하는 등 대승을 거두고 豆 知 22) 1440년경 문서에 對 馬 島 에서 對 馬 國 으로 바뀌고 있다. 이것은 宗 氏 가 율령제의 遺 制 인 對 馬 島 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領 國 을 國 으로 인식하였음을 보여준다( 荒 木 和 憲, 2007, 中 世 對 馬 宗 氏 領 國 と 朝 鮮, 山 川 出 版 社 ). 23) 태조실록 5년 12월 3일 및 春 官 志 권3 往 征

전근대시기 한국과 일본의 대마도 인식 227 浦 에 정박하였다. 이어 이종무는 대마도주 사다모리에게 諭 書 를 보냈으나 회 답이 없자 26일 병력을 좌우 양군으로 나누어 각지를 토벌하였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는 壹 岐 島 와 上 松 의 원병과 함께 매복한 대마도군에게 朴 實 이 이끈 좌군이 패배하여 백수십 인이 전사하였다. 이후 이종무가 장기전 태세에 들어 가려고 하자 대마도주가 서계를 올려 군사의 철수와 修 好 를 간청하였다. 이에 이종무는 태풍에 대한 우려도 감안해 제재를 중단하고 7월 3일 거제도로 귀환 하였다. 己 亥 東 征 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쌍방 간에 3,800여 명의 사망자를 낸 격렬한 전투였다. 조선은 왜구의 섬멸이라는 당초목표를 완전 달성하지는 못 하였지만 왜구의 본거지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대마도 정벌의 의의로는 왜구의 근절과 함께 통교체제 확립의 계기가 되었 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사건 이후로 기해동정이후 왜구가 복속하였다 라는 인식이 일반화되었다. 24) 이와 동시에 대마도가 조선의 요구에 순응해옴으로써 세종대의 각종 통교제한정책의 실시가 가능해졌고, 조선이 외교적 주도권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마도 정벌 이후 대마도는 왜구로부터 완전히 이탈 하였으며, 조선과 일본 사이에 兩 屬 關 係 로서 일종의 중립화정책을 취하였다. 그 결과 대마도는 조일교역의 중계보급기지로서 무역 이익을 취하면서 양국외 교의 안전판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2) 대마도 속주화 문제 대마도 속주화 조치의 전말에 관해 사료를 검토해보자. 사료 1 대마는 섬으로서 본래 우리나라의 땅이다.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 24) 세종실록 12년 4월 12일

228 동북아역사논총 41호 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부터 뛰놀기 시작하였다. 25) 사료 2 대마는 섬으로서 경상도의 鷄 林 에 예속되었던바 본시 우리나라 땅이 라는 것이 文 籍 에 실려 있어 확실하게 상고할 수 있다. 만약 빨리 깨닫고 다 휩쓸어와 항복하면 도주에게는 좋은 벼슬과 두터운 몫을 나 누어줄 것이요, 나머지 代 官 들은 平 道 全 의 예와 같이 할 것이며, 그 나 머지 무리들도 옷과 양식을 넉넉히 주어서 비옥한 땅에 살게 할 것이 다. 이 계책에 따르지 않는다면 차라리 무리를 다 휩쓸어서 이끌 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도 가하다. 만일 본국에 돌아가지도 않고 우리 나라에 항복하지도 않으면서 도적질할 마음으로 품고 섬에 머물러 있 으면 마땅히 병선을 갖추어 다시 섬을 에워싸 정벌할 것이다. 26) 사료 3 밖에서 귀국을 호위하며 우리 섬으로 하여금 귀국 영토 안의 州 郡 의 예에 따라 주의 명칭을 정하여 주고 印 信 을 주신다면 마땅히 신 하의 도리를 지켜 시키는대로 따르겠습니다. 27) 사료 4 대마도는 경상도에 예속되었으니 모든 보고나 문의할 일이 있으면 반 드시 본도의 관찰사에게 보고를 하여, 그를 통해 보고토록 하고 직접 본조에 올리지 말도록 할 것이요, 겸하여 요청한 인장과 하사하는 물품 을 돌아가는 사신에게 부쳐 보낸다. 28) 사료 1은 출정 전인 6월 9일 태종이 반포한 敎 書 다. 이에 대해 세키 슈이 치[ 關 周 一 ]는 조선왕조가 대마가 이전에 조선령이었다고 하는 인식을 최초로 보여준 것으로 대마 정벌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창출된 것이 아닐까 라고 해석 25) 세종실록 원년 6월 6일 26) 세종실록 원년 7월 17일 27) 세종실록 2년 윤정월 10일 28) 세종실록 2년 윤정월 23일

전근대시기 한국과 일본의 대마도 인식 229 하였다. 29) 대마도가 조선령이라는 이 주장이 현존하는 문서상으로는 최초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402년(태종 2)에 제작된 < 混 一 疆 理 歷 代 國 都 之 圖 >에도 대마도가 조선령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로 보아 태조대 박위의 대마도 정벌 이 후에 이미 이런 인식이 정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30) 사료 2는 대마도 정벌 후 7월 17일 병조판서 趙 末 生 의 명의로 대마도주에 게 보낸 諭 書 다. 再 征 의 논의가 수그러지면서 조선 조정은 이 유서를 보내 항 복( 捲 土 來 降 )을 하든지 아니면 일본 본주로 돌아가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 라는 강경한 입장을 전달하였다. 31) 이에 대해 도주는 9월 25일 항복을 청함과 동시에 印 信 을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는 대마도를 완전히 비우라는 조선 정부 의 요구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사료 3은 조선 조정의 유서에 대한 대마도주 사다모리의 답서로서 조선의 藩 屛 을 자임하면서 屬 州 化 를 요청하였다. 즉 대마도주는 이듬해인 1420년 윤 정월 10일 사자 時 應 界 都 ( 辛 戒 道 )를 조선에 보내 대마도민을 거제도에 이주시 키고, 조선 국내 州 郡 의 예에 따라 對 馬 州 라는 이름을 정하고, 조선에서 印 信 을 하사해달라는 등의 청원을 하였다. 사료 4는 예조판서가 대마도주에게 보낸 서계로 대마도 속주화 조치와 도 주에 印 信 을 하사하는 내용이다. 1420년 윤정월 23일 조정에서는 대마도주의 29) 關 周 一, 2011, 앞의 논문 30) 태조 이성계는 조선왕조 개창 후 1396년 원정군을 대마도에 보낸다. 이 원정군이 대마도에 상륙해 전투를 했는지에 관해서는 미상이지만 원정군 파견 직후 왜구의 우두머리들이 조선에 항복하고 입조해서 조선의 관작을 하사받고 새 이름을 받았 다. 대마도주가 조선의 신하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태조실록 5년 12월 21일 및 7년 2월 17일). 태조의 대마도 정벌 이후 대마도주나 호족들이 조선의 수직인이 되 자 조선에서는 대마도를 臣 屬 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하는 인식이 자리잡았던 것 같 다. 이런 인식이 1402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대마도를 조선의 부속도서처럼 그려 넣은 근거가 되었던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이에 관해서는 정다함, 2008, 조 선초기 야인과 대마도에 대한 번리 번병의식의 형성과 경차관의 파견, 동방학 지 141 참조. 31) 中 村 榮 孝, 1965, 朝 鮮 世 宗 己 亥 の 對 馬 征 伐, 日 鮮 關 係 史 の 硏 究 上 卷, 吉 川 弘 文 館

230 동북아역사논총 41호 요청에 따라 대마도를 경상도에 속하는 屬 州 로 하고 宗 氏 都 都 熊 瓦 ( 丸 ) 32) 라는 印 信 ( 圖 書 )을 사다모리에게 주었다. 또 이후에 대마도주는 직접 예조에 서계 를 보내지 말고 경상도관찰사를 통해 전달하도록 명하였다. 또 도주 이외의 사 절의 경우 반드시 도주의 인신이 찍힌 것만 사절로 접대하겠다고 하였다. 대마도 정벌 이후 반년에 걸친 교섭결과 이듬해 정월 1 대마도는 조선의 屬 州 로서 경상도의 관할하에 두며 경상관찰사를 통해 서계를 올릴 것, 2 요청 한 印 信 을 하사하되, 3 앞으로 대마도로부터 오는 사절은 반드시 도주의 서계 를 지참할 것 등으로 결말지어졌다. 33) 이로써 대마도는 경상도의 속주로 편입 되고 도주는 조선의 受 圖 書 人 이 되었다. 그런데 대마도의 경상도 속주화 문제는 조일 간에 외교문제로 비화되었으 며 조선 정부와 무로마치막부[ 室 町 幕 府 ] 간에 일시적인 긴장상태가 조성되었 다. 대마도 정벌의 소식이 전해지자 막부에서는 조선과 明 이 연합하여 일본을 침공한다는 流 言 이 나도는 등 긴장하였고, 조선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의심하였다. 대마도와의 사이에 전후처리 교섭이 진행되던 1419년 11월 4대 將 軍 아시카가 요시모치[ 足 利 義 持 ]가 보낸 使 僧 梁 倪 와 九 州 探 提 의 사절 이 조정에 도착하였다. 표면적으로는 大 藏 經 을 求 請 하는 것이었지만 대마도 정 벌의 진상과 조선의 정세를 탐지하려는 목적에서 파견된 사절이었다. 이에 세 종은 막부가 요청한 대장경을 回 賜 함과 동시에 宋 希 璟 을 回 禮 使 로 보내었다. 회례사 송희경이 대마도를 방문했을 때 소다 사에몬타로[ 早 田 左 衛 門 太 郞 ] 가 대마도는 少 二 殿 의 조상이 대대로 이어온 땅이며, 만일 속주로 한다면 백 전백사하더라도 싸우지 않을 수 없다 고 하면서 속주화 결정에 항의하였다. 이 에 송희경이 그것은 그대들의 요청에 응한 것일 뿐 조선이 영토적 야심이 있어 서 예속시킨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조정에 그 뜻을 알리겠다고 대답하였다. 34) 송희경은 또 막부장군에게도 대마도 정벌이 왜구 금압을 위한 것이었을 뿐 일 32) 都 都 熊 丸 은 宗 貞 盛 의 兒 名 이다. 33) 세종실록 2년 윤정월 23 34) 老 松 堂 日 本 行 錄 2월 28일 卽 事

전근대시기 한국과 일본의 대마도 인식 231 본 本 州 를 침략할 의도가 아니었음을 밝혔다. 조선과 막부의 절충을 지켜보며 지연작전을 썼던 대마도주는 이에 고무되 어 1421년 사자 仇 里 安 을 통해 서계를 보내 속주화 조치를 부정하는 내용을 전 하였다. 예조와의 문답에서 仇 里 安 은 대마가 경상도에 속한다는 것은 나로서 는 아는 바가 없다. 時 應 界 都 ( 辛 戒 道 )가 어찌 혼자 알았단 말인가. 이것은 망 언이다. 대마도는 일본의 변경으로서 대마도를 공격하는 것은 일본을 공 격하는 것이다. 35) 라고 하여 대마도의 경상도 속주화를 비판하였다. 36) 사에키 고지는 이에 대해 대마도의 경상도 귀속이 時 應 界 都 가 지어낸 말로 판명되었 다. 라고 단정적으로 해석하였다. 37) 그는 이 서계 내용만 중시해 대마도주가 인신을 받았을 뿐 속주화는 결정되지 않았고, 捲 土 來 降 도 관철되지 않아서 대 마도의 內 國 化 도 실현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대마도의 속주화 문제는 도주의 사신이 몇 차례에 걸쳐 와 요청한 사실이 조 선왕조실록 에 명백하게 나와 있다. 무엇보다 도의 사활이 걸린 문제를 도주가 몰랐다고 하는 것은 난센스다. 조선국왕의 명령에 따라 대마도주가 자발적으 로 요청하였고, 조선 조정에서는 그것을 수용해 허락함으로써 속주화가 이루어 진 것이다. 세종실록 의 기사를 보면 대마도 속주화는 명백하게 실현되었다. 또 세키 슈이치는 속주화 조치를 전후해서 무로마치막부는 간여하지 않았 다고 하면서 속주화의 의미를 축소해석하였다. 이것 또한 사실과 다소 다르다. 대마도 정벌 시에는 무로마치막부가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지만 사후에 사 절을 파견해 조선 조정의 의지를 정탐하였다. 조선 조정은 무로마치막부의 견제와 대마도주 및 호족들의 저항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대마도를 영토적으로 복속시키는 대신 도주 가 신하가 되어 변경을 지킨다는 명분과 정치적 종속관계에 만족하였다. 대마 도의 속주화는 이제까지 일본의 경계영역에 속하던 대마도가 조선의 경계영역 35) 세종실록 3년 4월 6일 36) 조선 조정에서는 서계의 내용을 문제삼아 사절을 예법대로 접대하지 않고 돌려보 냈다. 37) 佐 伯 弘 次, 2010, 조선전기 한일관계와 博 多 對 馬, 경인문화사, 177~178쪽

232 동북아역사논총 41호 으로 바뀌는 중대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그 후 조선 조정에서는 대마도에 대한 속주화나 내국화 조치를 더 이상 추구하지는 않았다. 원래 조선의 대마도 정벌 의 목적은 왜구의 진압이었고 대마도에 대한 영토적 지배에 있었던 것이 아니 었다. 조선 정부로서는 이것으로써 대마도가 조선의 藩 屛 으로 속령화되었다고 본 것이다. 3) 대마도 양속관계론 조선초기 정부에서는 대마도에 대해 이념적 王 領 38) 의 일부로 간주하였지만 영토적 소유권이나 실효적 지배를 도모하지는 않았다. 1419년 대마도 정벌을 전후해 일시적으로 그러한 시도를 하였지만, 세종은 더 이상의 조치를 취하지 않고 대마도주를 남쪽 변경의 평화를 지키는 藩 屛 으로 삼았다. 대마도주 宗 氏 는 일본으로서는 對 馬 守 護 로서 대마국이라는 토지의 영유 가 인정되었다. 조선에게는 수도서인으로서 조선의 外 臣 이며, 대마도와 경상 도 남방에 이르는 해역의 안전을 확보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조선에서는 정 부의 대행자로서 통교자의 자격을 심사하는 문인발행권을 도주에게 부여하였 다. 대마도주는 형식상의 수직인에 머무르지 않고, 조선 국가기구의 말단에 위 치해 임무를 수행하였다. 조선의 대마도 정책은 기미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39) 대마도주에게 도서를 주고, 동시에 조선의 직책을 주어 변방의 평화적 관리를 맡기는 방식이다. 대 38) 케네스 로빈슨은 조선시대의 영토의식에 관해 王 領 朝 鮮 과 管 轄 朝 鮮 으로 구분해 인식하였다고 보았다, 왕령조선은 이념적으로 조선국왕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으 로 조선왕조의 이상이 투영된 관념이고, 관할조선은 조선국왕의 실질적 지배가 미 친다고 주장하는 범위다. 전자는 정치적 복속 의 개념으로 대마도와 함경도 북동부 에 있는 여진족 코뮤니티가 이에 해당한다. 기미정책으로 다스려온 지역으로 영토 와는 구별되는 개념이다. 이에 관해서는 Kenneth Robinson, 1999, 朝 鮮 王 朝 受 職 女 眞 人 の 關 係 と 朝 鮮, 歷 史 評 論 592 참조. 39) 변경지역에 거주하는 이민족에 대해 그들의 자치를 인정하면서 관직을 주는 등 통 제하는 정책을 기미정책이라고 한다. 수직제도, 수도서제도, 경차관 파견 등은 대 마도에 대한 조선 조정의 기미정책의 일환이다.

전근대시기 한국과 일본의 대마도 인식 233 40) 마도주는 受 圖 書 人 이면서 受 職 倭 人 인 셈이다. 세조대에 대마도주 소 시게 모토[ 宗 成 職 ]에게 崇 政 大 夫 判 中 樞 院 事 對 馬 州 兵 馬 節 度 使 라는 관직을 수여 하였다. 41) 대마도에 파견한 사절의 명칭을 敬 差 官 으로 명명했다는 것은 대마 도를 조선의 관할이 미치는 장소로 인식하였으며, 異 國 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대마도주는 무로마치막부와 조선왕조의 양쪽 에 종속되어 있었다. 이른바 兩 屬 關 係 다. 42) 양속관계론에 대해 일본 학자의 견해를 살펴보자. 대마도의 처지에 대해 구로다 사토시[ 黑 田 智 ]는 대마도는 일본과 조선에 양속해 있으면서, 때에 따 라 접근하고 이반하면서 두 나라 사이를 떠돌고 있었다. 라고 하면서 양속관계 를 인정하였다. 43) 대마도주로서는 무로마치막부와 조선 조정 양쪽의 관계를 밀접하게 하는 것이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고하게 하는 것이며, 양국 정부의 권 위가 도내 지배의 정당성의 근거가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 였다. 한편 세키 슈이치는 양속관계라 하더라도 등질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對 馬 守 護 로서 무로마치막부와의 관계가 기본이고, 그 전제 위에 조선의 수도 서인으로서 정치적 복속을 하면서 왜구의 진압, 경상도 남해안과 대한해협의 안전 확보, 일본 측 통교사절의 통제 등의 임무를 위임받아 행하였다고 주장하 였다. 44) 그러나 실제 일본의 역사를 보면 이러한 해석이 사실과 동떨어지는 주장일 가능성이 있다. 몽골의 대마도 침입 때 일본의 조정과 가마쿠라[ 鎌 倉 ]막부는 40) 수직왜인은 조선 조정으로부터 임명장인 告 身 을 받고 관직에 해당하는 冠 服 을 받 는다. 그들은 이것을 착용하고 매년 한번 서울로 가서 국왕에게 肅 拜 禮 를 행하고 토산물을 진헌하고 回 賜 物 을 받아오는 조공의례를 하여야 했다. 41) 세조실록 7년 8월 28일 42) 조선 전기의 경우 대마도주가 서계에서 막부장군을 扶 桑 殿 下 라고 하고, 귀국의 東 藩 이라고 표현하여 일본과 조선에 양속해 있음을 밝히기도 하였다( 성종실록 23년 3월 11일). 43) 黑 田 智, 2009, なぜ 對 馬 は 円 く 描 かれたのか 國 境 と 聖 域 の 日 本 史, 朝 日 新 聞 社 44) 關 周 一, 2011, 앞의 논문, 123쪽

234 동북아역사논총 41호 대응하지 않았으며, 博 多 방어에 집중하였다. 이것은 대마도를 경계영역으로 인식하였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당시 일본의 內 는 西 國, 東 國, 九 州 만 포함되 었으며, 대마도를 비롯한 一 岐 島, 松 浦 등지의 섬은 外 ( 異 國 )의 중간지대로 서 경계영역으로 인식하였다. 45) 고려시대 대마도, 일기도 등의 경계영역에 거 주하던 영주들이 고려와의 교역을 주도하였다. 진봉선 무역의 경우에도 당시 일본이 고려와 정식 국교가 없었던 상황이었지만 대마도는 독자적으로 고려와 정기적인 무역을 행하였다. 이 점에서도 대마도의 반독립성이 드러난다. 무로 마치막부 시대에도 대마도는 반독립적인 입장에 있었다. 이 시기 대마도는 막 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지 않았다. 조선과의 무역에서도 막부와는 별도의 채널로 하였으며, 조선에서 막부로 파견한 사절을 護 行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대마도는 조선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았으며 대일외교의 창구 역할을 하였다. 한편 일본에서도 대마도를 본주와 구별하는 시각이 많았는데 임진왜란 시 도 요토미 히데요시[ 豊 臣 秀 吉 ]의 부하가 그린 < 八 道 總 圖 >라는 지도에 대마도가 조선 영토로 표기되어 있는 점도 일본인의 대마도인식의 일단을 보여주는 사 례다. 흔히 양속관계라고 하지만 조선전기의 경우 대마도는 무로마치막부보다 는 조선 정부와 더 밀접한 교류를 하였다. 3_ 조선전기의 대마도 인식과 특성 1) 한국의 대마도 인식 대마도 정벌과 속주화 조치 이후로 대마도를 조선의 속주로 간주하는 대마속 주의식은 조선전기에 면면히 계승되었다. 대마도 정벌 이듬해 일본에 회례사 로 다녀온 송희경은 대마도를 附 庸 國 내지 屬 國 으로 인식하였다. 대마도에 도 착한 후 그는 조선과 일본은 한 집안 이라고 하였고, 대마도만호 사에몬타로를 45) 김보한, 2011, 앞의 논문, 83~84쪽

전근대시기 한국과 일본의 대마도 인식 235 만나서는 같은 왕의 신하 라고 하였다. 46) 이는 당시 경상도 속주화 조치가 취 해진 상황하에서 대마속국관을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대마도 정벌 후 조정에서 일반화되었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되었던 金 誠 一 은 대마도주에게 보낸 글에서 貴 島 는 두 나라 사이에 끼어 있으며, 족하는 동으로 貴 國 을 섬기고 북 으로는 우리 조정에 순종하여 하늘을 두려워하고 사대의 공경함이 지극하였 다. 47) 라고 하였다. 즉 대마도가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양국을 다 섬겨온 사실 을 말하면서 양속관계임을 분명히 밝혔다. 1486년(성종 17) 왕명으로 편찬된 조선전기의 지리서인 東 國 輿 地 勝 覽 에 는 대마도는 일본의 대마주다. 옛날에 우리 계림에 예속되었는데 언제부터 왜 인이 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48) 라고 하였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대마도 가 일본국의 대마주라고 밝혔지만 이어 옛날 우리의 고토였다고 하고 동래부 의 부속도서로 취급하고 있는 점이다. 현실적인 관할조선 과 이념적인 왕령조 선 을 절충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 의 이 내용은 조선시대 대마인식의 기본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이후 지리지와 외교자료집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49) 또 명종대 濟 用 監 에서 제작한 < 朝 鮮 方 域 之 圖 >에는 만주와 대 마도를 우리 영토로 표시하고 있어 이 시기의 영토의식 내지 대외의식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1471년 신숙주가 편찬한 海 東 諸 國 記 에서는 日 本 國 紀 안의 한 항목 으로 대마도 를 기술하였다. 또 대마도지도에서도 日 本 國 對 馬 島 之 圖 라고 표 기하여 대마도가 일본국 소속임을 명기하였다. 영토적 소속이 일본 임을 명시 함으로써 대마속주의식에서 번병의식으로 바뀌는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객관 46) 노송당일본행록 2월 21일 到 泊 對 馬 島 東 面 船 餘 串 47) 위의 책 권4, 擬 答 對 馬 島 主 書 48) 동국여지승람 권23, 동래현 산천조 49) 신증동국여지승람 (1503)에는 대마도를 경상도 동래현 산천조에 기술하였다. 내 용에서는 대마도가 현재 일본국에 속해 있다는 현실 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같이 수록한 < 東 覽 圖 >, < 八 道 總 圖 >에서는 대마도를 조선의 부속도서처럼 그려 왕령조 선 을 표현하였다.

236 동북아역사논총 41호 적이고 현실적인 대마도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전기의 대마도 인식의 유형을 정리해보면, 1 대마도가 옛날 우리나라 땅이었다는 對 馬 故 土 意 識, 2 대마도가 우리나라의 동쪽 울타리라고 하는 對 馬 藩 屛 意 識, 3 대마도가 일본 본주와는 다르다고 하는 대마구분의식으로 나 눌 수 있다. 첫째, 대마고토의식은 태종과 세종의 교서 이래로 일반화되었다. 그런데 그 근거가 문적에 분명하다고 하였지만 구체적인 증거는 약간 불확실하다. 대 마도 정벌 후 대마도가 일시 경상도의 속주로 편입되기도 하였고, 대마도 정벌 을 감행한 태종이나 중종대 삼포왜란을 진압한 黃 衡 과 같이 대마도가 우리나 라의 땅이었으므로 되찾아야 한다는 주장도 계속 존재하였다. 그러나 전체적 으로 보아 그 후 대마도가 일본의 영토가 되어 있는 현실에 대해 부정하는 것 은 아니었다. 해동제국기 나 동국여지승람 의 기사도 대마도가 현실적으로 일본땅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서술된 것이었다. 따라서 대마고토의식은 세종대 중기 이후로는 관념적인 형태로 존재하였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대마번병의식이다. 대마고토의식이 다소 관념적인 데 비해 대마번병 의식은 현실에 바탕을 둔 것으로서 조선시대 대부분의 한국인이 가졌던 대마 도관이었다. 대마도 정벌 후 대마도에 대한 영토적 지배 대신 정치적 속령화정 책으로 바꾸게 됨으로써 대마도는 일본의 소속으로 되돌아갔지만 정치적으로 조선에 종속되었다. 대마도주는 수도서인이 되어 조공무역을 하였으며 歲 賜 米 豆 를 하사받았고, 도내의 호족들은 수직왜인이 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 정부는 대마도에게 경제적 특혜를 주는 대신 조선의 울타리로서 왜구를 진압하고 통 교자를 통제하는 역할을 맡김으로써 남변의 평화를 보장받고자 한 것이다. 이 는 전형적인 외이통제책으로서 조선에서는 대마도를 조선의 東 藩 으로 인식하 였던 것이다. 50) 이에 따라 대마도의 교역선에 대해 모두 조공적 의례를 갖추도 50) 대마도 정벌 후 조선과 대마도의 주종관계가 공식화되자 대마도를 조선의 신하 혹 은 제후국을 의미하는 藩 屛 으로 표현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1433년(세종 15) 야 인 정벌 후 중외에 포고한 교서에서 島 夷 와 山 戎 을 모두 통솔하였다. ( 세종실록 15년 5월 15일)라고 한 것은 대마도와 여진이 조선의 번병이라는 인식을 공식적으

전근대시기 한국과 일본의 대마도 인식 237 록 하였다. 또 대마도에 파견한 사신의 명칭도 敬 差 官 體 察 使 招 撫 官 등 국 내의 지방관의 직명을 사용하였던 점도 대마도를 속주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 문이었다. 51) 이와 같이 대마도가 영토적으로는 일본에 속하였지만 정치적으로 는 조선의 국가질서 속에 의제적으로 편입되어 신하의 예를 갖추었기 때문에 이를 양속관계라고 한다. 셋째, 대마구분의식이다. 이것은 양속관계론과 관련되는 것이지만 조선시 대인들은 대마도를 일본 본주와 구별되는 반독립적인 존재로 인식하였다. 이 러한 사례는 많이 있다. 예컨대 대마도 정벌 시 조선 정부는 해적단의 본거지 를 토벌하는 것으로서 일본 막부로부터 환영받을 것으로 생각하였던 듯하다. 그래서 그것이 본주에 대한 침략이 아님을 九 州 探 題 에게 미리 통보하였다. 1444년(세종 26) 一 岐 島 招 撫 官 姜 勸 善 의 보고에서도 대마도에 대해 일본국 왕의 명령이 미치지 못하는 곳 이라고 하여 일본 본주와 다른 지역으로 파악하 였다. 해동제국기 에도 대마도를 일본의 8도 66주와는 별도로 기술하였다. 2) 일본의 대마도 인식 조선의 대마번병의식에 대해 대마도는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조선왕조실록 에 따르면 그들이 스스로 조선의 藩 籬 혹은 藩 屛 으로 자칭 하는 기사와 서계를 확인할 수 있다. 대마도주가 보낸 서계에서 스스로 조선의 번리나 번병으로 자칭하면서 외방의 신하[ 外 臣 ]로서 충성을 바치겠다고 하는 사례는 흔하다. 1464년(세조 10) 소 시게모토[ 宗 成 職 ]가 보낸 서계에서 저는 朝 鮮 이라는 大 國 에 대해 藩 籬 입니다. 52), 1474년(성종 5) 소 사다쿠니[ 宗 貞 國 ]가 보낸 서계에서 대마주는 귀국의 신하입니다. 라고 하였고, 또 1487년 로 내외에 밝힌 것이다. 1457년(세조 3)에는 세조가 야인과 왜인은 모두 우리의 藩 籬 이며 모두 臣 民 이다. ( 세조실록 3년 7월 29일)라고 하였다. 또 성종은 대마 도주 宗 貞 國 에 대해 우리나라의 南 藩 ( 성종실록 5년 2월 29일)이라고 하였다. 51) 한문종, 1992, 조선전기의 對 馬 島 敬 差 官, 전북사학 15 52) 세조실록 10년 6월 14일

238 동북아역사논총 41호 (성종 18) 보낸 서계에서도 영원토록 귀국의 번병의 신하로 칭하며 충절을 다 할 것입니다. 53) 라고 하여 東 藩 이라고 자임하였다. 경차관의 파견도 대마도가 조선의 번병이라는 인식하에 실시된 것이다. 경 차관의 파견은 대마번병의식을 실제 대외정책에서 실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에는 치밀하게 계산된 조선 중심의 명분론적 대외인식이 깔려 있다. 대마도에서도 조선 대마도의 수직적 위계질서를 상징하는 경차관의 의미를 충분히 알고 있었으며 수용하였다. 54) 한편 일본 측의 사료에서도 그러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歲 遣 을 약속한 것은 실로 업신여기며 주는 음식을 받아먹는 것과 같 은 것으로 일시적인 구급책에 불과합니다. 그리하여 잘못된 선례 가 생기게 되어 조선에 대해 藩 臣 의 예를 취하여 수백 년 동안 그 나라 로부터 굴욕을 받았으니 분함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55) 明 治 維 新 이후 외교개혁 과정에서 대마도 측이 메이지 정부에 올린 奉 答 書 의 한 부분이다. 여기서 대마도는 대조선 관계가 번신의 예로서 굴욕이었다 고 하였다. 이어 1868년 메이지 정부로부터 국서 전달을 지시받았을 때에는 지금의 서계부터는 조선이 주조해준 도서 대신에 일본 조정이 만들어주는 새 로운 도장을 사용하여 그들(조선)이 번신으로 우리를 대해온 오류를 바로잡아, 옛부터의 國 辱 을 씻고 오로지 國 體 와 國 威 를 세우고자 한다. 56) 라고 하면서 각오를 밝혔다. 이로써 대마도는 조선시대 조선 정부가 대마도에 취한 세견선 과 수도서제가 조공의례에 바탕을 둔 것이며, 또 대마도가 조선의 번속국이었 음을 자인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53) 성종실록 18년 2월 7일 54) 정다함, 2008, 앞의 논문, 257~8쪽 55) 朝 鮮 外 交 事 務 書 권1, 1971, 성진문화사 56) 宗 重 正 履 歷 集 권3, 明 治 원년 10월 8일

전근대시기 한국과 일본의 대마도 인식 239 Ⅳ. 조선후기의 대마도 인식 1_ 통교관계의 변화 무로마치막부 시기 반독립적인 지위를 누리며 조선과의 독자적인 통교를 하였 던 대마도는 戰 國 時 代 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예속화의 길로 들 어선다. 이어 도쿠가와[ 德 川 ]막부시대에도 초기에는 조선 외교를 전담하면서 독자적 위치를 유지하였으나 17세기 초반 幕 藩 體 制 에 편입되어 도주 소 요시 토시[ 宗 義 智 ]는 막부로부터 從 四 位 下 侍 從 對 馬 守 로 임명받았다. 물론 이 시 기에도 대마도가 조선 외교를 특수임무[ 家 役 ]로 맡아 전담한 것은 조선전기와 마찬가지다. 대마도주는 여전히 조선의 수도서인으로 세견선, 세사미두의 지 원과 왜관무역을 통한 이익으로 재정을 유지하였다. 형태적인 면에서 볼 때 조 일 양국 사이에서 양속관계라는 큰 테두리에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보면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우선 조선후기의 조일통 교체제는 전기와 같은 다원적 형태가 청산되고 막부 대마도로 일원화되었 다. 전기와 같이 여타 호족세력들의 통교가 없어짐으로써 대마도의 조선 외 교 독점성은 상대적으로 강화되었지만 막부의 감독을 받음으로써 독자성은 줄어들었다. 즉 1635년 임진왜란 이후 국교재개과정에 대마도가 자행한 國 書 改 作 事 件 이 폭로됨에 以 酊 庵 輪 番 制 가 실시되었다. 막부에서 파견된 이정암 윤번승은 조선 외교에 관한 외교문서를 감찰하였으며 통신사 호행 시에도 참 여하였다. 이와 같이 17세기 중반 이후로는 대마도의 조선 외교가 기본적으 로 막부의 감독하에 진행되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1609년 체결된 己 酉 約 條 가 이전보다 더 엄격히 통제된 것이었기 때문에 대마도는 그 부족분을 막부로부터의 지원에 의지하였다. 특히 왜관무역이 쇠퇴하는 18세기 중반부 터는 막부의 재정지원이 일상화되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조선전기에 비해 대 마도의 일본 예속화가 진전되었고, 그만큼 양속관계는 약화되어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변화로 인해 대마도가 형태적으로 조선과 일

240 동북아역사논총 41호 본 사이에서 양속관계를 유지하였지만 실제에서는 막부 쪽으로 기우는 것이 었다. 2_ 조선후기의 대마도 인식과 특성 1) 통신사행원과 실학자의 대마도 인식 조선후기 대마도 인식의 전개양상을 통신사행원과 실학자를 중심으로 살펴보 도록 하자. 통신사행원들은 일본에 사행하면서 대마도에 대해 직접적인 체험을 가지 고 있었고 또 귀국 후 대부분 정부의 대일정책 결정에 참가하였던 일종의 대일 전문가 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사료 1 이 섬은 조선의 한 고을에 지나지 않는다. 태수가 圖 章 을 받았고 조정 의 녹을 먹으며 크고 작은 일에 명을 청해 받으니 우리나라에 대해 藩 臣 의 의리가 있다. 57) 사료 2 대개 이 대마도는 본래 조선의 소속이었는데 어느 나라 어느 때에 일 본으로 들어갔는지 알 수 없다. 이미 조선의 옛 땅에 살면서 대대 로 조선의 도서를 받으며, 또한 公 米 와 公 木 으로 생활하니 곧 조선의 外 服 地 다. 58) 사료 1은 1719년 기해통신사행의 제술관 申 維 翰 이 대마도주와 의례논쟁 을 하면서 말한 내용인데 대마속주의식과 藩 國 觀 이 강조되어져 있다. 사료 2 57) 海 游 錄 상권, 기해년 6월 30일 58) 海 槎 日 記 계미년 10월 28일 신해

전근대시기 한국과 일본의 대마도 인식 241 는 1763년 계미통신사행의 정사 趙 曮 이 피력한 내용인데, 기본적으로 대마고 토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대마도와의 관계에 대해서 첫째 조 선의 故 土 에 살고, 둘째 도주가 조선의 圖 書 를 받으며, 셋째 조선의 경제적 지 원으로 생활하므로 조선의 외복지라고 하여 번병의식을 나타내었다. 통신사행원들의 대마도 인식은 조선전기의 그것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오 히려 더 엄격해지는 느낌이다. 그들은 사행 중의 체험을 바탕으로 대마도에 대 해 비판적이었고, 그 역할에 대해서도 기존의 藩 屛 論 을 더 강조하였다. 그러 나 위의 사료를 통해서 보면 조선후기 대마번병의식의 핵심은 경제적 지원임 을 알 수 있다. 또 그것은 양속관계를 전제로 성립하는 것으로서 대마도가 영 토적으로 일본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음으로 전통적인 華 夷 觀 에서 벗어나 日 本 夷 狄 觀 을 부정하는 입장을 취 하였던 실학자들의 대마도관은 어떠하였을까? 여기서는 대마속국론을 둘러싼 李 瀷 과 安 鼎 福 의 논쟁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사료 1 대마도는 부용전으로 넣었습니다. 대개 대마도는 신라와 고려 이래로 국초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가 속국으로 대해왔으며 여지승람에는 옛 날 계림에 예속되었다 고 하였고, 태종이 기해년에 대마도를 정벌할 때 교서에도 대마도는 본래 우리나라의 땅이었다 고 하였으니 가히 증거 되는 바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정벌한 일은 마땅히 속국을 꾸짖는 방책 이었습니다. 59) 사료 2 내가 상고해보니 대마도는 고금이 다 본래 신라에 소속되었다 고들 말하나 三 國 史 에 그런 말이 반드시 보이지는 않는다. 60) 사료 1은 안정복이 東 史 外 傳 을 지으면서 대마도에 대해 日 本 傳 과는 59) 순암선생문집 권10, 東 史 問 答 60) 성호사설 권19, 經 史 門 征 對 馬 島

242 동북아역사논총 41호 별도로 附 庸 傳 으로 편찬하였음을 이익에게 알린 것이다. 여기서 그는 세 가 지 이유를 들어 대마속국론을 주장하였다. 사료 2는 이익이 안정복이 주장한 대마속국론의 증거에 대해 확인하는 내용이다. 이어 보낸 답장에서 그는 대마 속국론에 대해 다시 상세히 검토해보라 고 함으로써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하 였다. 61) 이에 대해 안정복은 다시 대마도가 우리 영토인 것은 문적에도 나오는 바 확실한 사실이라고 하면서 삼국사기 와 중국의 三 國 志, 北 史 에 나오 는 대마도 관련 기사를 검토하면서 대마도와 조선 관계의 밀접성과 유구성을 고증하였다. 62) 안정복은 東 史 綱 目 을 저술하면서 스승인 이익의 견해를 대 부분 수용하였으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양보하지 않고 격렬한 논쟁을 벌 였다. 이들의 후배인 정약용은 備 禦 考 권4 馬 島 事 案 에서 대마도가 지금은 일본 땅이지만 본래는 우리 영토였다는 점, 대마도의 언어 복식 등 문화가 우 리나라와 유사하다는 점, 일본의 본주인과 구별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역대 사서에 나오는 관계기사를 인용 분석하였다. 대마속국론을 둘러싼 이익과 안정복 간의 이 논쟁은 실로 흥미로운 바 있 다. 대일강경론자와 유화론자, 명분론자와 대세수용론자 간의 대립이라고 해 도 좋을 듯하다. 정약용은 직접 논쟁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대체로 안정복의 설 을 수용하였던 것 같다. 2) 지도와 지리서에 나타난 대마도 인식 조선후기의 지리서에는 조선전기의 대마도 인식이 그대로 계승되고 있는 측면 이 있는 한편으로 일본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가는 현실을 인정하는 추세로 나 61) 성호선생문집 권26, 答 安 百 順 別 紙 丁 丑. 이익은 대일유화론자로서 대마도정 벌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으며 경제적 지원을 통한 대일화평정책을 옹호하였으며, 대마속국론을 부정하는 입장이었다. 이익과 안정복의 일본 인식에 대해서는 하우 봉, 1989, 조선후기 실학자의 일본관 연구 제2장(일지사) 참조. 62) 순암선생문집 권10, 東 史 問 答 戊 寅

전근대시기 한국과 일본의 대마도 인식 243 누어진다. 전자의 사례로서 17세기 尹 斗 緖 의 < 東 國 輿 地 地 圖 >와 < 八 道 總 圖 >에는 대 마도를 조선의 영역에 그려넣어 조선전기의 유형을 계승하고 있다. 또 1765년 (영조 36)에 제작된 輿 地 圖 書 와 1822년(순조 22) 편찬된 경상도읍지 도 마 찬가지이다. 이들 지리서에는 대마도를 동래부 도서조에 수록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대개 신증동국여지승람 의 그것을 보완한 것이다. 또 많은 지도에서 대마도를 조선의 영토로 표기하고 있다. 19세기 중엽에 제작된 < 海 左 全 圖 >에 는 대마도를 조선의 영역에 가깝게 그려 양속관계에 입각해 묘사하며 대마도 를 일본과 분리해보려는 경향도 있다. 후자에 해당하는 지도도 적지 않다. 1740년 鄭 尙 驥 의 < 東 國 地 圖 >에는 대 마도에 日 本 界 라고 표기하여 일본의 영역에 속하고 있음을 밝혔다. 현실에 기초한 대마도 인식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후로 이러한 경향이 일반화된다. 1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 輿 地 圖 >에서 대마도를 日 本 界 라고 표기하였다. 2 1790년에 제작한 < 八 道 地 圖 >에서는 대마도에 日 本 地 라고 표기하였다. 3 19세기 초반에 제작된 < 輿 地 圖 >에서는 대마도가 경상도에 그려져 있지만 일본계 라고 표시하였다. 63) 한편 조선후기에는 통신사행원을 통해 일본지도가 전해지면서 매우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지도가 복사되거나 모사되었다. 이에 따라 대마도에 대한 인식도 보다 정확해진다. 64) 조선후기에서 근대로 갈수록 지도에서 대마도를 일본계 라고 표시하는 것 이 일반화되어갔으며, 대마도를 일본과의 경계로 보았다. 개화기에는 지도의 정확성이 높아졌고, 대마도가 일본 소속이며, 일본영토라는 사실이 확실하게 표시된다. 예컨대 1899년에 제작된 < 大 韓 全 圖 >와 1908년의 < 大 韓 帝 國 地 圖 > 가 그러한 예다. 65) 63) 엄찬호, 2011, 고지도를 통해 본 한 중 일의 경계인식의 변화, 한일관계사연 구 39 64) 오상학, 2009, 조선시대 지도에 표현된 대마도인식의 변천, 국토지리학회지 43 2 65) 오상학, 2009, 위의 논문, 217~218쪽

244 동북아역사논총 41호 한편 일본의 경우 일본지도가 중세에는 매우 빈약했으나 17세기부터 발전 하였다. 그들의 대마도에 대한 영유의식은 독도나 북방지역과 달리 고대 이래 로 고정적이었다. 예컨대 1785년 하야시 시헤이[ 林 子 平 ]가 제작한 < 三 國 接 壤 之 圖 >에서는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의 소유 라고 명기하였지만 대마도는 일본 과 같은 색으로 표시하여 일본땅임을 밝히고 있다. 3) 조선후기 대마도 인식의 특성 첫째, 조일관계와 대마도의 지위가 내용적으로 바뀌어감에도 불구하고 대마고 토의식과 동번의식은 그대로 계승되고 있었다. 통신사행원들과 안정복, 지리 지 등이 그러한 예다. 어떤 면에서 보면 현실과는 반대로 더 관념화되면서 심 화되는 측면도 없지 않다. 둘째, 대마구분의식의 심화를 들 수 있다. 일본의 본주와 대마도를 구분하 는 의식은 조선전기부터 있어왔지만 그것을 深 處 倭 와 對 馬 倭 의 용어로 구분 한 것은 임진왜란시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姜 沆 의 看 羊 錄 이 처음이었다. 그것은 대마구분의식이 전기보다 명확해진 것을 의미한다. 이후 안정복이 동 사외전 에서 대마도를 부용전 으로 별도로 설정한 것도 이러한 의식의 표현 이다. 1763년(영조 39) 계미통신사행의 서기 元 重 擧 는 대마도는 내국인과는 전혀 다르다. 내국인들이 항상 대마도를 오랑캐라고 부르며 사람 축에 같이 끼 워주지 않는다. 66) 라고 하였다. 또 그는 대마도가 양국 사이에서 농간을 부리 며 이득을 취하는 행태에 대해 조선과 일본 양국의 적 이라고까지 하였다. 이 는 대마도와 본주를 기본적으로 구별해서 본 인식에서 나온 것으로 양속관계 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대마번병의식과 대마구분 의식의 심화는 대마도의 달라진 위상과 태도에 대해 기존의 관념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나온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셋째, 양속관계의 약화에 따른 대마번병의식의 쇠퇴현상이다. 일본에 대한 66) 和 國 志 天 卷, 風 俗

전근대시기 한국과 일본의 대마도 인식 245 재인식을 주창하였던 이익이 대마속국론에 대해 부정한 것도 변화하는 국제관 계의 현실과 대마도의 위상을 수용하자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조엄이 대마 도를 조선의 외복지 라고 한 것도 이전보다는 영유의식이 약화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Ⅴ. 맺음말 본론에서 조선시대 한국인의 대마도 인식을 대마고토의식, 대마번병의식, 대 마구분의식으로 나누어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조선시대에 와서 체계화되지만 고대로부터의 역사적인 유래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사실을 논증하였다. 특히 조선전기의 대마도 인식은 고려시대 중기 진봉선무역체제 하에서의 조공적 관계와 고려 말 대마도주의 수직왜인화 등을 통해 생긴 것으로 추정하 였다. 여기에 대마도 정벌 후 일시적이나마 대마도가 경상도의 속주로 들어왔 다는 사실, 또 대일통교체제상 대마도가 조선의 국제질서 속에서 藩 臣 으로 의 제되면서 편입되었던 사실 등을 통해 이러한 대마도 인식은 체계화되었다. 조 선 정부는 대마도에게 대일외교의 창구를 맡기는 대신 수도서제와 수직왜인제 를 실시하였고, 세견선과 세사미두를 지원해주었다. 이러한 방식은 전형적인 외이기미책의 형태다. 이에 따라 조선은 대마도가 비록 영토적으로 일본에 소 속되기는 하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조선의 번속국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이러한 대마도 인식은 明 治 維 新 이후 일본의 왕정복고와 외교 일원화 조치에 따라 대마도가 사실상 해체당함으로써 일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대마번병의식은 현실적 의미를 잃어갔다. 근대에 들어와 특히 일본의 국내정세의 변화에 따라 조선과 대마도의 관계 는 일변하였다. 1854년 미일수호조약 이후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도쿠가 와막부는 종래 대마도에서 대행하고 있던 조선 외교와 무역을 직접 관장하려

246 동북아역사논총 41호 고 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혼란 속에 이 조치는 결행되지 못하고 메이지 정부 의 과제로 넘어가게 되었다. 1868년 明 治 維 新 후 성립된 신정부는 당연히 외 교권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1869년 版 籍 奉 還 이 이루어져 對 馬 藩 은 嚴 原 藩 으로 개칭되었다. 동시에 대마도주의 조선 외교권은 신정부에 강제적으로 접수당하였고, 이해 9월 외무성 관리가 대마도에 파견되었다. 이 어 1871년 廢 藩 置 縣 에 따라 대마도는 나가사키현[ 長 崎 縣 ] 부속의 일개 지방행 정단위로 편성되었다. 또 메이지정부의 외교일원화 조치에 따라 대마도의 특 수임무[ 家 役 ]인 조선 외교에 관한 제 업무도 1872년 모두 외무성으로 옮겨졌 다. 이어 부산왜관이 접수되었으며 수도서제와 세견선이 폐지되었다. 67) 이러 한 일련의 조치에 따라 조선시대 조일 간의 전통적인 교린체제는 완전히 붕괴 되었으며 조선 정부는 대마도와 어떠한 관계를 맺을 여지가 없었다. 이에 따라 조선의 대마번병의식은 현실감을 잃게 되었다. 이 시기에 와서 는 대마도와 일본 본주를 구분할 수가 없었고, 대마도와의 별다른 관계 설정도 없었다. 당연히 대마번병의식을 나타내는 기록도 급격히 사라져갔다. 1908년 (순종 2)에 편찬된 증보동국문헌비고 를 보면, 대마도에 대해 지금 비록 일 본 땅이 되었으나 본래 우리나라 지방에 속했던 까닭에 우리나라의 故 事 가 많 으므로 아울러 기록한다. 라고 하였다. 68) 여기에는 대마도 영유에 대한 문제에 서 차분하고 공정한 자세를 유지하면서도 대마고토의식, 조선과의 문화동질 성, 일본 내 대마도의 이질성, 경상도 속주화 문제 등이 고루 표현되어 있으며, 대마도를 여전히 동래부의 부속도서로 취급하고 있어 대마번병의식을 계승하 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와서 대마번병의식은 현실적인 의미를 거의 상실하 였으며 잔영과 같이 의식의 바닥에 침전되어갔을 뿐이다. 67) 이 과정과 의미에 대해서는 荒 野 泰 典, 1987, 明 治 維 新 期 の 日 朝 外 交 體 制 一 元 化 問 題 ( 日 本 前 近 代 の 國 家 と 對 外 關 係, 吉 川 弘 文 館 )와 玄 明 哲, 1995, 幕 末 明 治 初 對 馬 藩 처리에 대한 고찰 ( 일본역사연구 2) 참조. 68) 증보동국문헌비고 권32, 輿 地 考 關 防 海 防 條 南 海 東 萊 府

전근대시기 한국과 일본의 대마도 인식 247 참고문헌 高 麗 史 高 麗 史 節 要 交 隣 志 老 松 堂 日 本 行 錄 東 國 輿 地 勝 覽 東 槎 錄 三 國 史 記 三 國 志 星 湖 僿 說 星 湖 先 生 文 集 順 庵 先 生 文 集 輿 地 圖 書 朝 鮮 王 朝 實 錄 增 補 東 國 文 獻 備 考 通 文 館 志 退 溪 全 書 海 東 諸 國 記 海 游 錄 海 槎 錄 海 槎 日 記 和 國 志 古 事 記 對 州 編 年 略 日 本 書 紀 宗 氏 家 譜 山 家 要 略 記 宗 重 正 履 歷 集 塵 袋 나종우, 1996, 한국 중세 대일교섭사 연구, 원광대학교출판부 李 領, 1995, 東 シナ 海 における 麗 日 關 係 史 の 硏 究, 東 京 大 學 博 士 學 位 論 文 하우봉, 1989, 조선후기 실학자의 일본관 연구, 일지사 한일관계사연구회, 1996, 독도와 대마도, 지성의 샘 關 周 一, 2012, 對 馬 と 倭 寇, 高 志 書 院 長 節 子, 1987, 中 世 日 朝 關 係 と 對 馬, 吉 川 弘 文 館 長 節 子, 2002, 中 世 國 境 海 域 の 倭 と 朝 鮮, 吉 川 弘 文 館 佐 伯 弘 次, 2010, 조선전기 한일관계와 博 多 對 馬, 경인문화사 川 添 昭 二, 1981, 中 世 九 州 の 政 治 と 文 化, 文 獻 出 版 荒 木 和 憲, 2007, 中 世 對 馬 宗 氏 領 國 と 朝 鮮, 山 川 出 版 社 黑 田 智, 2009, なぜ 對 馬 は 円 く 描 かれたのか 國 境 と 聖 域 の 日 本 史, 朝 日 新 聞 社 Batten, Bruce, 2000, 日 本 の 境 界 前 近 代 の 國 家 民 族 文 化, 靑 木 書 店 김보한, 2011, 중 근세 일본인의 조선에 대한 경계인식 고찰, 한일관계사연구 39 엄찬호, 2011, 고지도를 통해 본 한 중 일의 경계인식의 변화, 한일관계사연구 39 오상학, 2009, 조선시대 지도에 표현된 대마도인식의 변천, 국토지리학회지 43 2 정다함, 2008, 조선초기 야인과 대마도에 대한 번리 번병의식의 형성과 경차관의 파 견, 동방학지 141 한문종, 1992, 조선전기의 對 馬 島 敬 差 官, 전북사학 15 현명철, 1995, 幕 末 明 治 初 對 馬 藩 처리에 대한 고찰, 일본역사연구 2 關 周 一, 2011, アジアから 見 た 日 本 の 境 界, 古 代 中 世 の 境 界 意 識 と 文 化 交 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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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시기 한국과 일본의 대마도 인식 249 [ABSTRACT] Changing Views on Tsushima between Joseon and Japan in the Pre modern Period Ha Woobong This article examines the concepts of boundary and border between Japan and Korea in the pre modern period. The pre modern views on Tsushima between Joseon and Japan should differ from a modern concept of territory in a nation state because the nation state is a modern phenomenon. The concept of territory in the pre modern period was not clearly established, thus the boundary of territory demanded an intermediary that connected the interior and the exterior of the territory. Tsushima was exemplary in terms of the intermediary role. Tsushima was located in a borderland between Joseon and Japan, and held a quasi independent status from the Japanese central authority. However, Tsushima s status went through changes. Whereas Tsushima held a quasi independent status in the Muromachi period, its status of independence diminished in the Tokugawa period. In other words, Tsushima also became part of the system of the bakufu (shogunate) and domains (J. bakuhanseido) in the Tokugawa period. In other words, the status of Tsushima in Japan changed, and, accordingly, the view of the Joseon court toward Tsushima also changed. In this paper, as I examine perceptions of Tsushima between Joseon and Japan, I systematically categorize the development of perception on

250 동북아역사논총 41호 Tsushima from time to time in the historical context. Also, by examining the theories of scholars in the field of Korean Japanese relations in both the Republic of Korea and Japan I investigate the main causes of the shifting views on Tsushima, that is, a policy of vassalage and a policy of making an intermediary role between Joseon and Japan. For a better understanding, I deconstruct the perceptions of Koreans toward Tsushima in the Joseon period into three patterns: the perception of Tsushima as a homeland; the perception of defending Tsushima domain; and the perception of distinguishing Tsushima as a separate entity from Japan. Also I attempt to prove that although three different perceptions of Tsushima were systemized in the Joseon period, those perceptions derived from ancient history and the island s relations with Korea. In particular, Joseon s perception of Tsushima was systemized based upon two important facts: that Tsushima became a vassal of Gyeongsang Province after the subjugation of Tsushima in the early Joseon period and that Tsushima became Joseon s vassal for friendly relations between Joseon and Japan in the context of the Chinese world order. As a result, the Joseon court considered Tsushima as Japan s territory, but as a vassal of Joseon. Keywords Views on Tsushima (대마도인식), Subjugation of Tsushima (대마도정벌), Policy of vassalage (속주화조치), Intermediary role between two parties (양속관계), Perception of Tsushima as a homeland (대마고토의식), Perception of defending Tsushima domain (대마번병의식), Perception of distinguishing Tsushima as an entity separate from Japan (대마구분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