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일제 말 유림의 친일 한시의 성격과 전쟁 협력의 일면 -의산( 義 山 ) 이명세( 李 明 世 )의 친일 한시를 중심으로- 한길로 (Han, Gil-Ro) 임종국의 친일문학론 (1966)이 발간되어 해방 후 최초로 친일문학 의 범주와 친일문 학인에 대한 문학적 역사적 평가가 시도되었지만 그의 성과는 주목 받지 못했다. 1 한국 문 학에 있어 친일 의 문제는 반민족행위 의 면모를 여실히 담고 있는 문학계의 굴절된 자화상과 치부를 드러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친일문학 은 해방 후 한국문 학사 서술에서 제대로 언급 되지 못했고 그저 암흑기 라는 이름으로 묻어두려는 경향이 지속되었다. 2 문인 공동체의 내상( 內 傷 )과도 같은 친일문학 을 면밀히 분석하고 해체하여 외상 후 성장 으로 전환하려는 노력은 2000년 이후에 이르러 면밀히 검토되기 시작하였 다. 3 하지만 현재까지의 친일문학 에 대한 연구는 국문문학 분야에 집중 된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가 전근대와 근대적 글쓰기 방식이 혼융되어 있었다는 점, 또 한문 글쓰기와 국문글쓰기가 각기 다른 영역에서 다른 향유 층을 기반으로 공생하고 있었다는 점 을 고려한다면 친일문학 은 한문학 을 포함하여 논의하는 것이 더 온전하다 할 수 있 다. 4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반하여, 일제 말 친일 유림이었던 의산( 義 山 ) 이명세( 李 明 世, 1893~1972)의 행적과 그가 남긴 친일 한시에 주목하려 한다. 그와 관련한 이러한 기록들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1 소설가 조정래는 한강 10 권 ( 3 부 불신시대, 169 193 면)에서 임종국의 실명과 그의 저서 친 일문학론 을 언급하기도 했다. 후에 조정래는 임종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임 선생은 그때 모든 사회 진출이 차단되어 천안에서 밥을 굶듯이 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해방 이후 모든 지식인이 친일파에 대한 연구나 언급을 철저하게 기피하고 있을 때 오직 혼자서 펜을 들 었고 친일문학론 이라는 책을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보복은 가혹하고 잔혹했습니다. (중략) 생활 고에 시달리는 구분의 비참한 모습은 친일파에게 도전한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모델케이 스기도 했습니다. (조정래, 황홀한 글 감옥, 시사인북, 2009, 382 면) 2 류보선, 친일문학의 역사철학적 맥락, 한국근대문학연구 4 권 1 호, 한국근대문학회, 2003, 9 면. 3 그 동안 축적 된 친일문학 연구 가운데 김철(외) 문학속의 파시즘 (2001),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문제연구소 계간 실천문학 의 친일문학인 42 명 명단발표, 김재용의 친일문학의 내적 논리 (2003) 협력과 저항 (2004), 한수영의 친일문학의 재인식 (2006)등은 주목할 만한 성과라 할 수 있다. 더불어 2005 년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통과로 출범한 친일반민 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의 활동 역시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4 현재까지 발표된 친일한문학 에 대한 연구는 친일 한시( 漢 詩 )를 중심으로 친일 관련 논설문에 대 한 연구가 주를 이루고 있다. 대표적으로 여규형( 呂 圭 亨, 1848 1921) 최영년( 崔 永 年, 1856 1935) 정만조( 鄭 萬 朝, 1858 1936) 장지연( 張 志 淵, 1864 1921) 박영철( 朴 榮 喆, 1879 1939) 강동희( 姜 東 曦, 1886 1964)등에 대한 연구가 있다. 아래의 논문을 참조할 것. (강명관, 장지연 시 세계의 변모와 사상, 한국한문학연구 91, 한국한문학회, 1987; 박영미, 하정 여규형 문학 일고찰, 한문학논집 21, 근역한문학회, 2003; 최영년 문학론 고찰 -친일 문학론을 중심으로, 한문학논 집 22, 근역한문학회, 2004; 한시에 표상된 근대의 풍경-정만조의 일본 기행 한시를 중심으로, 한국한문학연구, 한국한문학회, 2008; 강명관, 주체 없는 근대,-장지연론, 대동한문학 33, 대 동한문학회, 2010; 구사회 최우길, 박영철의 다산시고 와 친일시, 평화학연구 11, 세계평화통 일학회, 2010; 정은진, 무정 정만조의 친일로 가는 사유, 대동한문학 33, 대동한문학회, 2010; 김 규선, 오당 강동희의 실사적 삶과 시세계, 동양고전연구 42, 동양고전학회, 2011)
478 第 二 屆 西 太 平 洋 韓 語 教 育 與 韓 國 學 國 際 學 術 會 議 은, 일제강점기 굴절 된 유림의 면모와 함께 한문학 창작을 통한 대일 협력의 일면과 일제 의 압제를 벗어난 해방공간에서의 유림의 지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먼저, 그의 생애를 통해 일제의 하급관료에서 은행 금융업에 종사했던 그가 친일유림의 거두로 등장하게 된 배경 을 살펴보면서 일제의 동화정책에 포섭 된 친일 유림의 성격에 대해 언급해 보겠다. 나아가 그가 일제에 협력하며 작성한 친일한문학 의 문학적 수사와 특징을 살펴보면서 그의 친 일한문학이 갖는 문학사적 의의와 과제는 무엇인지 언급해 보겠다. 2. 이명세의 생애와 일제 말 친일 유림의 성격 이명세의 본관은 전성( 全 城 ), 자는 성도( 聖 道 ), 호는 의산( 義 山 )이며 창씨명은 춘산명세( 春 山 明 世 )이다. 그의 행적을 살필 수 있는 문건으로는 그의 문집 의산집( 義 山 集 ) (1972)이 있 고 친일유림으로서의 면모는 그가 활동했던 조선유도연합회( 朝 鮮 儒 道 聯 合 會 )의 기관지 유도 ( 儒 道 ) 와 경학원( 經 學 院 ) 기관지 경학원잡지( 經 學 院 雜 誌 ) 를 통해 살필 수 있다. 먼저 의 산집 에 수록된 연보를 중심으로 그의 생애를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5 그는 1893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1899년(7세) 한문향숙( 漢 文 鄕 塾 )에 들어가 기초적 인 한자를 배웠고 이어 1911년(19세) 양정보통학교 졸업, 1918년(26세) 경성법학전수학교 ( 京 城 法 學 專 修 學 校 )를 졸업하며 일제 하급관료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후 그는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청(1918) 재판소, 공주지방법원 서산지청(1920) 홍성지청(1921)에서 서기로 근무 하다가 1923년 약 5년간의 법원 근무를 마치고 퇴사한다. 그는 퇴사 후 한 달 뒤 호서은 행장대리 에 오르며 총독부 하급관리가 아닌 은행에서 일하게 된다. 6 이후로 그는 이 은행 의 서무과장(24년) 홍성지점장(27년)등을 역임하였고, 1930년에는 호서은행과 한일은행이 합병하여 만든 동일은행( 東 一 銀 行 )에서 검사역( 檢 査 役 )을 지낸다. 두 달 뒤 그는 은행을 나 와 남창사( 南 昌 社 )(32년), 철원창고( 鐵 原 倉 庫 )(33년), 이문당( 以 文 堂 )(36년), 동문사( 東 文 社 )(39년) 등을 거치며 금융업 종사자로 활동하였다. 7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제의 하급관리로 활동하다 은행으로 자리로 옮긴 뒤 금융업에 종 사하던 이명세는 1939년 본격적으로 친일유림의 일원으로 나서게 된다. 이 시기는, 각 지방 의 유림이 내분으로 인해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자, 조선 유림을 하나로 통합하여 국민정 신 을 교육시키고 총동원체제를 효과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일제가 조선유도연합회( 朝 鮮 儒 道 聯 合 會 ) 를 결성하던 때였다. 8 조선유도연합회 결성식이었던 1939년 10월 16일 전 선유림대회( 全 鮮 儒 林 大 會 ) 에는 미나미 총독이 직접 참여하여 20분 동안 고사( 告 辭 )를 하 였고 조선군사령관 나카무라 고타로( 中 村 孝 太 郞 ),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총재 가와시마 요 시유키( 川 島 義 之 )등이 참석하는 등 일제의 핵심 관료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조선유도연합 5 이명세의 친일 행적에 관한 종합적인 기록은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에서 발간한 보고서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Ⅳ-12, 2009)와 사료집( 친일반민족행위관계사료집 ⅩⅢ, 2009) 이 있고 그의 행적과 친일의 면모를 간략히 정리한 것으로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2009)이 있다. 더불어 이명세의 친일행적과 친일 한시에 대해서는 정욱재 ( 한말 일제하 유림연 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 논문, 2008, 169 172 면)의 논문이 있다. 6 호서은행( 湖 西 銀 行 ): 1913 년 설립된 지방은행인 호서은행은 대도시 중심의 금융업이 대부분이었던 당시의 금융계의 상황과는 달리 충북 예산을 중심으로 설립한 조선 지방 금융업의 효시로 평가 받 는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허수열의 논문 ( 호서은행과 일제하 조선인 금융업, 지방사회와 지방문화 8, 역사문화학회, 2005)을 참조할 것. 7 그가 활동했던 시기의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 朝 鮮 銀 行 會 社 組 合 要 錄 ) 에 의하면 남창사, 철원창고, 보 항사 등은 부동산 경영 매매 관리 및 금전대차업, 농산물 및 부동산 매매 위탁업, 금융업과 운송업 과 관련 된 곳이고 이문당, 동문사 등은 도서 출판 및 판매업에 종사한 주식회사였다. 8 동아일보( 東 亞 日 報 ), 儒 林 大 會 三 百 儒 林 代 表 參 集, 1939.9.29, 2 면. 十 萬 의 인원을 가지고 一 千 萬 원의 재산을 옹위하고 은연한 세력을 가지고 나려온 조선유림은 이러타할 활동도 없이 시대를 등진 듯한 살림으로 지내오던 오늘 경학원( 經 學 院 )이 주최가 되어 오는 十 六 일 오전 九 시에 부민 관 강당에서 우원( 宇 垣 )총독 심전개발의 운동에 박차 맞훈 대회 이래 처음으로 전조선유림대회( 全 朝 鮮 儒 林 大 會 )를 개최하기로 했다.
일제 말 유림의 친일 한시의 성격과 전쟁 협력의 일면 -의산( 義 山 ) 이명세( 李 明 世 )의 친일 한시를 중심으로- 479 회 결성을 조선총독부 차원에서 깊이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명세는 바로 이 조선유 도연합회에 상임참사( 常 任 慘 事 )로 이름을 올리며 친일 유림의 일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한편, 그가 친일 유림에 몸을 담자 그의 직업적 행보 역시 조금 바뀌게 되는데 이후 그는 교육과 관련한 재단법인 일을 맡게 된다. 그는 재단법인 학린사( 學 隣 社 ) 상임이사(40년)와 재단법인 보학원( 保 學 院 ) 감사(41년)로 일하게 된다. 이후 그는 조선유도연합회 상임이사(41년), 성균 관을 총독부에 종속시켜 조선 식민통치구로 활용한 경학원( 經 學 院 ) 사성( 司 成 )에까지 오르며 친일유림의 거두로 부상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바로 일제강점기 이명세의 행적이다. 이명세의 삶을 통해 일제 말 친일유림 의 인적 구성과 성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일제 말 유림은 이명세처럼 비( 非 )유교적인 인물들이 주요 간부로 참여하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사실, 유림을 자신들의 통치 하에 두어 항일유림을 억제하면 서 효율적인 식민통치 조직으로 활용하고자 했던 일제 초부터 진행되었다. 그리고 일제의 유림 동화정책이 본격화 된 1920년대에 이르면 유림의 성격이 더욱 친일로 굴절되기에 이 른다. 친일유림 회원모집에 대중들은 입회만 하면 양반이 되는 줄 알고, 자기이름도 쓸 줄 모르는 사람조차 입회금 1원씩 내고 다수가 참여하기도 했다. 9 즉 점차 유림의 기준이 유 학적 소양과 덕망 에서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해 낼 능력과 경제력으로 이 행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획책한 일제의 의중은, 무엇보다 유림의 도덕적 권위 를 무너뜨리면서 그들의 계급성 만을 유지시킴으로써, 총독부에는 밀접하고 민중에는 고립 된 유림을 만 들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특히, 민중들 사이에서 유림은 여전히 지도자적 입장이었기에 이들이 항일의식을 품고 민중을 계몽하는 것을 막아야 했던 것이다. 즉 유림 이 상징하 는 학문적 도덕적 권위 를 낮추는 대신 일제 및 조선총독부에 대한 종속성 을 강화시 킴으로써 유림의 권위를 총독부에 귀속시키고자 한 것이다. 더욱이 3.1운동 이후 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 齊 藤 實, 1858~1936)가 귀족, 부호, 실업가, 교육가들에게 편의와 원조를 제공 하며 친일단체를 결성하도록 독려하면서 이러한 면모는 더욱 가중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면모는 중일전쟁 이후 대륙병참기지로서의 조선의 역할 에 주목한 일제의 의도 에 따라 더욱 구조화 되어, 일제 말에는 도지사가 각 지방의 유림회장에 임명되는 한편 군 수나 부윤 등이 지회장을 맡고 지역의 유력자들이 각기 임원으로 활동하게 되어 국내 유림 은 사실상 일제정책의 친위대로 전락하고 말았다. 반면 항일 유림 세력은 국외로 망명한 경 우를 제외하면 더욱 깊은 은거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조선 유림의 지형 은 반일인사를 철저하게 배재하는 방향으로 재구성되어 사실상 친일 유림들에 의해 장악되 고 말았다. 이명세 역시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유림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일제의 하급관 료에서 은행계 금융업에 종사하다 이내 친일유림으로 활동한, 일제에 의해 발굴되고 양성 된 친일유림이라 할 수 있다. 일제는 이미 조선조가 구축해 놓은 중앙집권제를 더욱 강력한 군국주의로 환원시켜 보다 효율적인 착취와 통제를 기하기 위해 관료체제를 새롭게 구축하 였다. 이러한 구조는 사실상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배재를 더욱 구조화하는 것이었지만 오 히려 흡입력이 강한 소용돌이로 작용하여, 친일성향의 지식인에게는 식민지라는 거대한 감옥 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이에 상당 수의 지식인들은 친일 로 이탈하여 일제 지배에 대한 자발적 협력의지 를 드러내고 이들의 정책을 충실히 이 행하고 대중을 설득할 능력 을 제시하고 입증함으로써 이러한 구조 속에 편입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 하에 유림으로 편입된 이명세와 같은 인물들은 일제의 비호 하에 조선 유림계의 주요 인물로 부상하게 된다. 반면 항일 유림들의 목소리는 더욱 낮아졌고 향촌 내 에서의 지배력도 축소되어, 해방 후에도 이를 쉽게 만회하지 못하고 말았다. 10 9 금장태. 현대 한국유교와 전통,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49 면. 10 김창숙은 해방 공간에서 일제에 의해 도나 군의 재산으로 빼앗겼던 향교의 재산을 국가로부터 환 원 받아 성균관을 다시 세워야 함을 역설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성균관은 원래 국가가 경 영한 국학( 國 學 )이었다. 왜정 때 경학원( 經 學 院 )으로 개칭하여 대제학 부제학 사성 등 직책을 두고 친일파 중에서 유림의 이름을 훔친 자들로 채워 놓았었다. 8.15 이후 미 군정청에서 신앙의 자유를 선언하여 경학원은 유교인의 자치 기관으로 군정이 상관할 바 아니라 하였다. 친일파들은
480 第 二 屆 西 太 平 洋 韓 語 教 育 與 韓 國 學 國 際 學 術 會 議 우리가 그를 주목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유림계가 해방 후 일제협력의 잔재를 씻고 새롭게 유림이 거듭나고자 노력할 때, 이승만 독재세력과의 협력을 통해 이를 막아선 대표 적인 인물로 재등장했기 때문이다. 해방공간에서 이명세는 재단법인 성균관 상임이사를 맡으면서 독립운동가 김창숙 등이 중심으로 된 조선유도회총본부 와 전면적으로 대립하 게 된다. 11 이는 재단법인 성균관 과 유도회총본부 의 대립이었지만, 사실상 일제를 거쳐 유림계를 장악한 친일세력과 새롭게 결성 된 반( 反 )친일세력간의 대결이었다. 12 해방공 간에서 벌어진 김창숙과 이명세의 대립은 결국, 일제가 남긴 유림 분열정책의 결과였다. 즉 강제병합 직후부터 유림을 회유해 온 일제가 남긴 불행한 유산 중 하나인 것이다. 이 분규 를 통해 유림은 조직의 내부 결속력이 무너지는 것은 물론, 커다란 사회적 지탄을 받으며 급격한 쇠퇴의 길로 접어들고 만다. 다시 말하면 해방 후 유림은 내 외적으로 청산해야 할 일제의 불행한 유산들에 의해 역으로 청산되면서, 새롭게 거듭 날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만 것이다. 3. 친일 한시의 성격과 전쟁협력 논리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일제강점하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 2조 17 호에 의거 이명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했다. 위원회는 이명세는 조선유도연합회의 상임참사, 상임이사, 경학원 사성으로 활동하며, 일제의 침략전쟁과 징병제 실시를 찬양하고 일제의 고위관료를 칭송하는 한시를 작성하는 등 일제의 식민통치에 적극 협력하였다 라고 하며 결정 사유를 밝혔다. 13 위원회가 일제 협력의 근거로 제시한 한시( 漢 詩 )는 총 5수이다. 그의 시는 조선유도연합회 상임참사에 오른 뒤인 42년부터 44년에 걸쳐 창작되었는데, 크 게 일제의 관료들을 업적을 칭송하는 시와 일제의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찬양하는 내용으로 구분할 수 있다. 아래에서는 그가 남긴 일제 협력 한시의 내용을 분석하는 한편 협력에 동 원된 문학적 수사에 주목하고자 한다. 더불어 일제 지배와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된 명분과 논리적 근거는 무엇인지 살펴보겠다. 14 이에 성균관을 자기들 소굴로 만들어 날뛰었다 (김창숙, 김창숙문존, 심산사상연구회, 성균관 대출판부, 2001, 414 415 쪽) 11 김창숙의 심산유고( 心 山 遺 稿 ) 에는 이명세와 관련한 시 3 수가 있다 ( 八 월 九 일 고등법원에서 성 균관 재단 이명세 최석영 등의 성균관 문묘 고적보존비 횡령협장사건을 재심한 결과 또 무죄로 판 결되어 놓아준 소식을 듣고, 성균관 명륜당이 친일파 민족반역자에게 점거된 것을 한탄한다, 이명세 최석영 윤우경에게 부침 ) 이 가운데 성균관 명륜당이 친일파 민족반역자에게 점거 된 것을 한탄한다 에서 심산은 을미(1955)년 7 월 성균관재단 상무란 자 이명세 최석영 등이 반 민족자 윤우경 이명구 등과 어울려 윤우경을 끌어들여 성균관유도회총본부 부위원장직에 추대하 려고 우경에게 거금 팔천만원을 요구하여 유도회 사업자금으로 기증하고 나에게 6,7 회나 받도록 협박했으나 나는 시종 대의로써 그것을 굳이 거절했다. 이때부터 그들은 나를 원수와 같이 보고 죽이려 하였다 고 밝혔다. (김창숙, (국역)심산유고( 心 山 遺 稿 ), 국역심산유고간행원회,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2001, 167 168) 12 독재 권력과 손잡은 이들은 심창숙 계열의 정통파를 몰아내고 유도회총본부를 장악하여 후에 이승 만과 자유당을 위해 정부통령 선거대책위(1956) 가 세웠고 이듬해에는 이승만을 유도회 총재로, 이기붕을 최고고문으로 추대하기도 했다. (김석원, (유도회 성균관) 수난약사, 성균관, 1962; 조 한성, 1950 년대 중후반기 유도회사건 연구, 성균관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02 참조) 13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 2 조 제 17 호, 일본제국주의의 통치기구의 주요 외곽단체의 장 또는 간부로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 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14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협력을 근거로 이명세의 친일 한시를 조사하여 수록한 것 을 연대순으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新 嘉 坡 陷 落 日 志 喜 ( 儒 道 1 호, 1942), 2) 奉 餞 南 總 督 閣 下 ( 奉 餞 南 總 督 閣 下, 1942), 3) 奉 餞 大 野 總 裁 閣 下 ( 奉 餞 大 野 總 裁 閣 下, 1942), 4) 祝 徵 兵 制 實 施 ( 祝 徵 兵 制 實 施, 1943), 5) 追 悼 山 本 元 帥, ( 儒 道 5 호, 1943).
일제 말 유림의 친일 한시의 성격과 전쟁 협력의 일면 -의산( 義 山 ) 이명세( 李 明 世 )의 친일 한시를 중심으로- 481 1) 일본 제국주의 관료에 대한 칭송( 稱 頌 )과 찬덕( 贊 德 ) 미나미 지로( 南 次 郞, 1874~1955)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6기 출신으로 1936년 2 26사건의 책임을 지고 관동군 사령관을 사임하고 예편한 후, 36년 8월 5일 제 7대 조선총독으로 부 임했다. 그는 중일전쟁을 계기로 대륙병참기지 로서의 조선의 역할을 극대화 할 내선 일체( 內 鮮 一 體 ) 를 극단적으로 지향하면서 창씨개명 황국신민화 등을 주창하며 조선의 민족혼을 말살시키는데 주력하였다. 그가 내세운 내선일체 란 결국, 조선인이 완 전히 일본인이 되어 조선인이라는 민족이 지구상에서 없어지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조선 이라는 민족이 지구상에서 없어질 정도로 일본에 동화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근대 제국주 의시대에서 창씨개명 을 도입한 국가는 일본 과 프랑스 뿐이다. 하지만 이 정책은 결과적으로 동화( 同 化 ) 정책이 아닌 반동화( 反 同 化 )정책으로 드러나 실패한, 위험부담이 상 당한 성격의 정책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나미가 이 정책을 강행 추진했다는 것은, 미나미 자신의 한계와 더불어 구조적인 폭력과 강제적 동화를 식민 지배의 원형으로 삼았던 일제 군부통치의 근본적 한계를 보여준다고 평가 할 수 있다. 이후 미나미는 42년 5월 28일부로 조선총독에서 물러나게 된다. 미나미는 사임의 소감에 서조차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 정책을 펼친 것을 긍정하면서 큰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을 아 쉬워하며 조선인들이 마지막까지 이에 동참할 것을 독려하였다. 이렇게 미나미가 퇴임하게 되자 그의 치적을 미화하고 아름답게 포장하는 일련이 작업들이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조 선유도연합회 소속 간부 129명은 미나미를 위해 전별시를 작성하여 그의 치적을 찬양하고 석별의 정을 담아냈다. 전별시 란 관원 생활을 마치고 떠나는 원로대신을 위해 후학이나 동학들이 함께 송별의 자리를 갖고, 치적과 인품을 기리며 떠난 뒤의 안녕을 기원하는 시를 작성하던 유자들의 관습이었다. 일제의 유림이었던 이들은 이러한 관습을 일제 고위관리들 에게 적용하여 미나미의 치적과 인간적 풍모를 찬양하는 도구로 활용하였다. 한편 미나미를 찬양하는 전별시를 묶어 책으로 발간했다는 사실은, 당대에도 일본 관료들과 친일유자들 사 이에서 한문 이라는 문자와 한시 가 상당한 지적 권위를 상징하는 소통의 도구였음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봉전남총독각하( 奉 餞 南 總 督 閣 下 ) 라는 시제 하에 작성된 조선유도 연합회 소속 간부 가운데 이명세의 시를 살펴보자. 미나미 총독각하를 받들어 전송하며 ( 奉 餞 南 總 督 閣 下 ) 忠 勇 勤 儉 導 我 民 幾 多 指 畫 費 心 身 終 知 萬 事 難 全 美 却 把 餘 功 讓 別 人 충용과 근검으로 우리 백성들을 인도하시며 얼마나 많이 시정 손수 지도하시다 심신이 소모되셨나 만사를 모두 아름답게 하기 어려움을 마침내 아셨기에 도리어 남은 공( 功 )을 다른 이에게 양보하셨네 시를 통해 이명세는 육군 대장 출신 미나미의 용맹함과 관리로서의 검소함을 모두 부각하 였다. 시에서 이명세는 미나미가 충용근검한 헌신적인 지도로 백성들을 인도하고 있다 고 하면서 불철주야 노력하는 근면한 미나미의 이미지를 부각시켰고, 나아가 총독으로 재임 하여 모든 일을 전미( 全 美 ) 하게 하면 안 됨을 알기에 이를 후임에게 양보한다며 극찬하 기에 이른다. 즉 그의 정치적 노력을 경탄함과 동시에 인간적이고 자비로운 면모를 부각하 는데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충용( 忠 勇 )을 부각하고 심신이 진비( 畫 費 )할 만큼의 헌신 적인 애민의 면모를 부각시키며 국가주의적 유교윤리를 기반으로 하는 찬양 논리를 통해, 용( 勇 ) 인( 仁 ) 지( 知 ) 양( 讓 )을 모두 겸비한 전인적 인간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러한 시 창작의 의도 속에는 떠나는 권력자에 대한 극존( 極 尊 )이 있지만, 곧 다가올 새로운 권력자에 대한 전충( 全 忠 ) 을 암시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었다. 미나미의 퇴임은 곧 그를 보좌한 정무총감 오노 로쿠이치( 大 野 綠 一 郞, 1887~1985)의 퇴 임이기도 했다. 오노는 군부 출신인 미나미와는 다른 엘리트 관료 출신이었다. 그는 동경제 국대학 법학과를 나와 도쿠시마현( 縣 ) 지사를 역임하고 내무성의 관료로 활동했던, 일본이 동경제국대학을 중심으로 길러낸 전형적인 엘리트 관료였던 것이다. 오노는 줄곧 내무성을 중심으로 근무하는 관료의 길을 걸어왔을 뿐, 총감으로 부임하기 전까지 조선과 인연이 없 던 인물이었다. 1932년 경시총감 취임 4일 만에 이봉창 의거 가 일어난 것이 조선과의 첫 인연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조선에 밝지 않았다. 그런 그가 정무총감으로 전격적으로 발 탁된 배후에는 2.26사건 을 책임지고 관동군사령관에서 물러나 예비역에 편입 된 후 조 선총독으로 부임하게 된 미나미가 자신을 도와줄 유능하고 믿을만한 행정가를 원했기 때문
482 第 二 屆 西 太 平 洋 韓 語 教 育 與 韓 國 學 國 際 學 術 會 議 이다. 이런 배경에서 총감으로 부임한 오노는 미나미를 도와 5년 7개월간 조선총독부 정무 총감을 지내며 조선 지배를 정책적으로 뒷받침하였다. 한편, 오노는 조선유도연합회 총재를 겸임하고 있었기에 조선유도연합회에 입장에선 각별히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기 도 했다. 오노를 송별하며 남긴 시들은 봉전남총독각하( 奉 餞 南 總 督 閣 下 ) 와 마찬가지로 봉 전대야총재각하( 奉 餞 大 野 總 裁 閣 下 ) 역시 발간되었다. 이 시집 가운데 이명세의 시를 살펴보 자. 오노 총재각하를 받들어 전송하며 ( 奉 餞 大 野 總 裁 閣 下 ) 端 居 貳 席 慮 沈 沈 況 復 時 艱 際 似 今 施 措 隨 方 俱 得 便 寇 君 借 願 一 般 心 두 번째 자리에 단정히 거하시며 생각도 깊으셨으니 하물며 다시 지금과 같은 어려운 때 만나리오 시행하고 조치하신 방책 따르니 모두 편안하여 구군 유임하길 애원했던 백성들의 마음과 하나되었네 시에서 이명세는 오노에게 2인자의 자리( 貳 席 )에 앉아 사려 깊게 생각하고 시무를 적절 히 잘 운영했다 며 찬양하였다. 더불어 그의 행정으로 인해 이러한 시절을 만나기 어렵 다 고 극찬하며 떠나는 오노의 빈자리에 대한 아쉬운 의중을 표출하였다. 특히, 그가 시행 하고 조치한 방책이 백성들의 삶을 이롭고 편하게 만들었다 칭송하고, 후한( 後 漢 ) 광무제( 光 武 帝 ) 때의 명신인 구순( 寇 恂 )의 고사를 통해 백성들이 한마음으로 오노가 떠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라며 탄복하였다. 미나미의 행정이 조선인의 삶을 이롭게 하여 백성들의 민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고 미화한 것이다. 시는 전체적으로 그의 탁월한 행정 능력을 드 높이는데 주력하였고 그 능력을 구순에 비견하며 권위를 실어주고 있었다. 미나미를 위한 시에서는 군인으로서의 의용과 선정을 행한 정치력이 강조되었다면, 오노에 대해선 2인 자 로서 성실하게 정책을 보필하고 시행하여 백성들이 크게 환영했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한편, 일제강점기에도 석전예( 釋 奠 禮 ) 는 폐지되지 않고 지속되었다. 다만 그 성격이 변질된 것이 특징이다. 일제는 1911년 6월 15일 성균관을 폐지하고 총 17개조의 경학원규 정( 經 學 院 規 定 ) 을 공포함으로써 성균관의 이름을 바꾸고 성격을 재고하는 한편 조선총독부 의 조선유림 지배정책과 민중교화를 실행할 직속기구로 만들었다. 경학원은 주로 조선인의 신민화( 臣 民 化 )와 더불어 충효( 忠 孝 )와 같은 국가주의적 유교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는 한편, 친일 유림을 양성하여 항일 유림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경학원규정 에 서 눈에 띄는 점은 바로 4조, 즉 매년 춘추에 문묘 제사를 거행하는데 제사는 조선총독의 지휘를 받아 대제학이 행하고 경학원 강사가 참여하도록 한다. 는 것이다. 일제가 석전예를 유지한 것은 유교적 전통을 이어가겠다는 외형이지만, 그 이면에는 경배 대상 자체를 일본 천황과 조선 총독을 향하게 하려는 의도가 숨겨 있었다. 이런 이유로 석전예 에는 조선 총독이 직접 참석하여 고사( 告 辭 )를 내리는 경우가 많았고 조선 총독부 고위 관료들과 경학 원 주요 간부 등 수많은 유림들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나아가 수천의 관내 중고생들 을 의무적으로 참석시켜 시국강연을 듣게 만든, 일종의 친일 신념화와 황민화 를 위한 거대한 행사로 애초부터 공자를 기리는 제사의 성격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15 이 시는 1944년 4월 6일 명륜당에서 개최한 석전예를 마치고 난 뒤 작성한 시로 당시 이명세는 경 학원 사성( 司 成 )의 자격으로 참여하였다. 석전예를 마치고 난 뒤 느낀 바를 적다 釋 奠 禮 畢 後 志 感 祀 儀 煌 煌 泮 上 春 幸 賴 斯 文 天 未 喪 제사 의식 찬란하여 성균관에 봄이 드니 다행히 하늘이 사문을 망치지 않으셨도다 15 이를 위하여, 일제는 문묘 석전 시간을 양력으로 단일화 하여 시기를 고정시켰고 문묘의 일반인 공 개를 통해 이곳을 친일유림 양성의 장을 넘어 일반인 교화의 장소로 만들었다. 나아가 이곳을 일 본식 제도를 입힌 결혼식장으로 운영하며 모든 제기를 무상제공하기도 했다. 즉 전통적 의미에서 의 성균관의 의미를 철저히 퇴색시키면서 각종 의례를 통해 조선인을 황국신민화 하는 장으로 탈바꿈 시켜간 것이다. (류미나, 전시통제기 조선총독부의 유림 정책, 역사와 현실 63, 한국역 사연구회, 2007, 323 325 면)
일제 말 유림의 친일 한시의 성격과 전쟁 협력의 일면 -의산( 義 山 ) 이명세( 李 明 世 )의 친일 한시를 중심으로- 483 朝 廷 花 木 倍 生 新 彛 倫 百 世 敍 吾 民 彛 鷺 聰 班 肅 佩 紳 風 流 儒 雅 兼 高 興 座 中 便 是 意 中 人 北 海 湥 樽 酒 不 貧 조정의 꽃과 나무 생기가 배로 거듭났고 백세의 이륜을 우리 백생에게 펼쳤다네 예식이 거행되니 예복을 입은 관료들 엄숙하여 풍류와 문아가 높은 흥취를 겸하였네 좌중이 이에 한마음 되었으니 북해에 통술 흘린데도 결코 부족타 않을지네 시에서 이( 彛 )는 제기의 일종인 가이( 斝 彛 ) 를 말하며 노( 鷺 )는 음악을 지휘할 때 쓰는 노우( 鷺 羽 ) 를 말하는 것으로 모두 예식 을 상징하는 단어이다. 그는 시를 통해 제사 가 찬란하면서도 엄숙하고 성대하게 치러졌음을 드러냈다. 더불어 산천초목과 같은 자연계 의 조화인 천리( 天 理 ) 를 언급하였고 이륜( 彛 倫 ) 과 같은 인리( 人 理 ) 또한 언급했 는데, 이는 석전예를 천리에서 인리로 연결시킴으로써 의식이 갖는 중대한 의의를 말한 것 이다. 겉으로 보면 이 시는 예식에 대한 것이지만 이 석전예를 실질적으로 주도한 자가 총 독과 일제의 고위관료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 이면에는 이러한 수사를 통해 이들의 통치 를 찬양하고 협력 의지를 보임과 동시에 지배의 당위성을 제공하려는 의도가 숨어있음을 살 필 수 있다. 이어서 풍류와 유아( 儒 雅 )가 감흥을 불러일으켜 모든 사람들이 마음이 하나 되었다 라 하며, 예식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자발적으로 깊은 감화를 입었음을 드러냈다. 이 시에서 주목할 만한 논리는 하늘이 사문( 斯 文 )을 망치지 않았다 는 표현이다. 이는 일 제 지배의 정당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유자들에게 일본 지배는 도를 망치지 않게 한 천행 ( 天 幸 ) 이라는 것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일제가 주도한 석전예는, 친일 유림을 통해 일본 통치의 정당성과 이에 대한 보은을 조장하면서 일제 관료들의 통치가 성 세임을 드러내고자 했던 황민화 정책의 일환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시가 창작된 1944년은 이명세가 처음으로 경학원 사성으로 부임한 해였다. 그는 이러한 석전예를 시를 통해 언급하면서 총독부의 선정과 포덕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한편, 성대하 게 석전예가 거행되고 있음을 통해 가혹한 착취로 점철된 일제의 통치를 성세( 盛 世 )로 미화 하였다. 여기에는 이러한 예식이 계속 이어질 수 있게끔 도와준 일제에 대한 시혜( 施 惠 )의식 이 내재되어, 일본이 아니었다면 유도( 儒 道 ) 역시 폐기되었을 것이라는 내면화 된 논리가 숨 어 있다. 이를 통해 이명세와 같은 이 시기 친일 유림들은 동아시아의 패권 뿐만 아니 라, 동아시아를 지배해 온 유가이념과 그 명분까지 일제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이 바로 일제 지배의 정당성을 내면화 한 친일 유자들의 절대적인 협력 논리였던 것이다. 2) 침략전쟁 미화와 찬양, 그리고 유교적 합리화 이명세가 친일 유림으로 활동한 약 5년(1939~1944)은 전쟁 총동원시기 다. 이 시기 일제는 전쟁완수를 위해 강제적, 폭력적 수단을 동원하여 조선인에 대한 물적 인적착취를 가장 극단적으로 실시했다. 즉 착취와 폭력, 그리고 강제적 동화 의 시스템을 통해 조선인을 전쟁터의 복판으로 내몰았던 시기였던 것이다. 이 시기 국내의 친일 지식인들은 일제의 승리와 영속적인 지배를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었다. 특히 중일전쟁의 전황과 아시아 태평양전쟁 개전 초 승전 소식에 회색지대에 있던 지식인들마저 현실적인 일 본의 힘을 인정하며 친일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는 친일 지식인들의 자발적 판단에 의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그 만큼 일제의 여론호도와 지식인에 대한 회유 협박도 전방위적으로 진행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중일전쟁 이전까지, 일제는 조선인의 병역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이를 시행하게 되면 본격적인 참정권 요구가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지만, 무기 를 지급 할 만큼 조선인을 신뢰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줄곧 내선일체 를 주창 하면서도 조선인에 대한 불신과 경계심 을 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중일전쟁을 계기로 병력충원 문제가 대두되자 일제는 여러 논의를 거듭한 끝에 육군특별지원병령 (1938)에 따라 조선인이 중심이 된 황병( 皇 兵 ) 을 양성하는 것으로 처음 병역제도를 도 입하게 된다. 이에 조선유도연합회를 포함한 친일 유림 단체들은 이를 적극 환영한다는 취 지의 강연과 문필활동을 가열 차게 진행한다. 이들은 이 제도를 통해 비로소 내선의 차 별 이 사라지게 되었다고 호도하면서 이에 적극 동참할 것을 주창하였다. 즉 유림은 조선 인 또한 정식 신민이 되었음을 강조하면서 이를 천황의 포덕과 시혜에 대한 충성 이라는 논리를 정당화하였는데, 이는 군국주의 파시즘과 천황제 이념을 미화하여 전쟁에 대한 유가
484 第 二 屆 西 太 平 洋 韓 語 教 育 與 韓 國 學 國 際 學 術 會 議 적 명분을 제공 하며 참여를 독려 한 것이었다. 16 이들은 전쟁 기간 동안 일제의 승전보는 크게 찬사하는 한편 패전 소식에는 결전의 의지를 독려하는 내용의 한시( 漢 詩 )와 논설문을 창작하기에 이른다. 이명세의 시를 중심으로 이러한 면모를 살펴보자. 싱가폴 함락일에 기쁨을 표하다 新 嘉 坡 陷 落 日 志 喜 殱 滅 米 英 在 眼 前 皇 軍 制 覇 海 空 權 爭 先 群 島 投 降 早 最 後 新 嘉 抵 抗 堅 入 市 功 成 紀 元 日 滿 城 人 戴 大 和 天 共 營 建 設 從 今 始 東 亞 州 民 作 一 圈 영국과 미국 섬멸 눈앞에 있음은 천황의 군대 해공권을 제패했기 때문 앞서 여러 섬들이 일찍이 투항하였건만 싱가폴은 최후까지 견고하였다네 입성의 공을 이룬 이 날을 기원하니 성에 가득한 사람들 대화혼으로 하나 된 하늘 느끼네 대동아공영을 건설 위해 지금이라도 비로소 따른다면 동아시아 주민 하나의 울타리 만드리라 이 시는 하와이 진주만 기습 (1941)에 이어 영국군을 상대로 승전한 싱가폴 함 락 (1942)을 기리는 전승가( 戰 勝 歌 )이다. 이명세는 이 두 승전이 곧 미국과 영국이 섬멸되 는 기폭제라고 보면서 승리가 목전에 있는 듯 미화하였다. 더불어 영국의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천황의 군대가 이를 격파했음을 드러내며 그 위용을 과시하였다. 또한 싱가폴 민 중에 대한 언급도 이어갔는데, 이 패전으로 비로소 대화혼 으로 하나 된 하늘아래 살 수 있게 되었다며 전쟁이 마치 싱가폴 인민들에게 큰 축복인 것처럼 미화하였다. 나아가 이제 싱가폴 인민들 역시 대동아공영 건설에 동참할 것을 주장하는 내용으로 결구( 結 句 )를 장식하였는데, 이는 서방국가와의 차별성을 드러내며 일제의 침략성을 은폐하려는 의도였다. 시에서는 이 전쟁을 일제의 침략이 아닌 대동아공영을 위해 불가피한 성격으로 보면서 영미 ( 英 美 )를 대동아 건설에 훼방을 놓는 국가로 상징하였다. 이기를 앞세운 서양에 맞서 대동 아일가( 大 東 亞 一 家 ) 를 이뤄야 함은 천황의 신민( 臣 民 )으로서 마땅한 의무임을 강조한 것이 다. 시를 관통하고 있는 협력의 슬로건은 대동아공영 이고 그 내적 명분은 바로 동일 성 이었다. 즉 대동아공영 의 당위성을 내세우면서 동일한 동아인( 東 亞 人 )인 싱가폴 인 민들 역시 일제의 지배에 적극 협력해야 함을 역설한 것이다. 이러한 동일성의 논리 는 일제가 자신들의 지배와 착취를 미화하고 은폐하며 정당화하기 위한 수사에 불과한 것이었 지만, 시에서 보이는 것처럼 친일지식인들에 의해 확대되고 재생산되며 더욱 정교하게 포장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이미 조선을 넘어 동아시아 인민들에게까지 확대되고 있었다. 산본 원수를 추도하며 追 悼 山 本 元 帥 盡 悴 捐 身 豈 取 功 舍 生 就 義 是 全 忠 一 心 一 億 無 窮 恨 盡 在 深 深 黙 禱 中 回 首 洋 南 夕 照 紅 挽 歌 凄 切 吊 英 雄 忠 魂 護 國 堅 初 志 大 業 將 看 克 有 終 진력을 다하여 몸을 던졌는데 어찌 공을 취하랴 살기보다 의를 취하였으니 이는 온전한 충성이었네 한 마음의 일억 신민 무궁히 한탄하며 마음 깊히 묵도를 다하고 있다네 머리 돌려 태평양 남해 바라보니 저녁 놀 붉게 타고 영웅을 애도하는 만가소리 처절하누나 호국의 충혼으로 초지를 굳건히 하셨으니 대업의 유종의 미 장차 능히 보리라 16 일제는 이러한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특히 언론장악에 힘썼다. 일제는 1940 년 8 월 10 일, 조선일 보와 동아일보를 폐간 시킨 후 언론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관리하게 된다. 이후 일제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이자 한글신문이었던 매일신보를 여론 선동과 조작의 최전방에 세웠다. (박수현, 일제파시즘 기(1937 1945) 매일신보 의 대중선동 양상과 논리,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9 집, 한국민족운 동사연구회, 2011 참조)
일제 말 유림의 친일 한시의 성격과 전쟁 협력의 일면 -의산( 義 山 ) 이명세( 李 明 世 )의 친일 한시를 중심으로- 485 야마모토 이소로쿠( 山 本 元 帥 ) 17 의 죽음을 추도하는 만시( 挽 詩 )이다. 이명세는 야마모토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전사를 영웅의 죽음 으로 추상( 推 尙 )하였고 그의 넋은 호국의 충혼 이라 하였다. 더불어 맹자( 孟 子 ) 의 사생취의( 捨 生 取 義 ) 사상을 끌어들여 그의 죽 음을 생에 대한 의지를 넘어선 의로운 죽음 으로 미화하였다. 일본의 침략성과 전쟁의 참혹함은 철저히 은폐한 채 의( 義 )와 충( 忠 )과 같은 국가주의 유가이념들로 죽음을 수식하고 있는 것이다. 시에서 언급 된 일억신민 은 전후 일제가 내세운 천황 면피를 위한 논리였 던 일억총참회 처럼 일본을 포함한 식민지 전체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음을 의도적 으로 보인 것이다. 중반부에는 야마모토를 생각하며 바라본 남쪽 바다에 깔린 붉은 저녁 노을( 夕 照 紅 ) 이란 수식을 통해 비장미를 더욱 증폭시켰으며, 처절( 凄 切 ) 이라는 단어로 그 슬픔을 더욱 지극하게 만들었다. 결구에서는 야마모토의 죽음의 의미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의 죽음은 대업이 장차 이루어 질 것 을 상징하여 황군( 皇 軍 )의 의로운 전쟁이 곧 승 리로 귀결 될 것이라 하였다. 결국 야마모토의 전사를 애도하면서도, 조선인 사이에서 일어 날 패전에 대한 불안과 염려 그리고 독립의지를 종식시키는 한편 마지막까지 조선인의 참여 와 협력을 장려하고자 했던 일제의 의도를 충실히 표현하고자 한 그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야마모토의 죽음을 초지( 初 志 )를 지킨 것 이라 미화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군인정신을 고양하려는 의중을 드러내기도 했다. 중일전쟁에 이어 아시아 태평양전쟁으로까지 확전되면서 전세가 갈수록 불리해지자 일제 는 1942년 5월 8일 징병제를 실시키로 결정하고, 43년 3월 1일 징병제를 공포하였으며, 43 년 8월 1일 징병제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징병제로 연행된 조선인들은 집단행동을 방지하기 위해 엄격하게 분산 입대와 배치의 원칙을 세워, 집단적 반항과 탈주 등의 정보 교환을 원 천적으로 봉쇄했으며 전투에서는 항상 첨병의 역할과 선두 행동을 강요받았다. 조선유도연 합회는 이러한 징병제 실시를 축하하는 시집을 발간하여 일제의 조치를 대대적으로 환영하 고 경하할 일이라 칭송하였다. 18 이와 관련한 이명세의 시를 살펴보자. 징병제 실시를 축하하며 祝 徵 兵 制 實 施 連 年 北 伐 又 南 征 此 際 新 徵 半 島 兵 外 內 均 霑 恩 一 體 先 後 相 應 義 同 聲 在 家 倍 覺 生 男 重 爲 國 當 思 死 敵 輕 無 憾 吾 儕 仍 有 願 遄 憾 戰 亂 反 昇 平 해를 이어 북쪽을 토벌하고 또 남면을 정벌함에 이 사이 새로운 징병제 반도의 병사에까지 이르렀네 내지와 외지 한 몸으로 여겨 균등히 은혜주시니 앞뒤가 서로 응하며 의로운 함성 함께 외친다네 집안에서 아들 난 것은 귀중한 일임을 깨달아 나라 위해 적과 싸우다 죽는 일 가엽게 여겨야 할지니 우리들은 거듭 원하는 바는 다른데 없고 하루빨리 전란에서 되려 평화 얻기만을 바랄 뿐이라네 친일단체들은 일제의 징병제 실시를 열렬히 환영하는 시국강연 및 문필활동에 참여하였고, 또한 일제의 강요와는 무관하게 국방헌금을 통해 전쟁에 협력하며 조선인들의 참여를 독려 했다. 문제는 이들이 일제에 헌납한 모든 자금이 결국 민중의 고혈을 통해 얻은 것이라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이들의 행위는 조선인의 저항과 반발을 무마하거나 봉쇄시키기 위해 어 떠한 논리를 전개할지 고민하고 있던 일제에게는 매우 절실한 것이었다. 이들의 활동을 통 해 강제성을 최소화 하면서 자발성을 유도할 수 있도록 여론을 선동하려던 일제의 의도가 실현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상당수의 친일지식인들은 일제의 승전을 확신하고 있 었기에 승전 이후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위하여, 경쟁적으로 전쟁협력에 뛰어들며 자신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알리고 친일신념화를 널리 증명하고 있었다. 반면 일제에 의한 국가적 착취, 그리고 친일인사들에 의한 착취로 조선 민중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 가고 있었다. 17 산본원사( 山 本 元 帥, 1884~1943): 태평양전쟁의 주역인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1941 년 연합함대사령 관에 취임하여 1941 년 12 월 7 일의 진주만 공격을 계획하고 함대를 지휘했다. 이후 1943 년 4 월 18 일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전 후 전사하였다. 18 경기도 유림은 징병제 실시 8 일 뒤인 1943 년 8 월 9 일 부민관에서 성전완수에 협력을 맹세하고 징병제실시를 감사하는 결의를 선양하는 대회를 갖기도 하였다. ( 매일신보, 1943.8.9, 聖 戰 完 遂 에 協 力 盟 誓 儒 林 層 의 決 意 鞏 固 徵 兵 制 實 施 感 謝 決 意 宣 揚 京 畿 道 儒 林 大 會 盛 大, 3 면)
486 第 二 屆 西 太 平 洋 韓 語 教 育 與 韓 國 學 國 際 學 術 會 議 이러한 배경에서 창작된 위 시에서, 이명세는 일제의 침략전쟁을 정벌( 征 伐 )'이라 하며 전쟁의 명분이 황군( 皇 軍 )에 있음을 드러냈다. 더불어 연이어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한 폐해 는 은폐시킨 채 징병제는 내외( 內 外 )의 차이를 온몸으로 겪은 조선인이 비로소 받게 된 일 종의 시혜인 것처럼 미화하였다. 이렇게 조선인과 일본인이 비로소 한몸( 一 體 ) 이 되었다 고 외치는 것은, 배재와 차별을 은폐시킨 채 전쟁완수에 이를 때까지 조선인에게 책임과 의 무를 강제하려는 것이었다. 결구에서는 전쟁은 전쟁을 위한 것이 아니라 평화 에 있음을 드러내며 징병제의 참여는 평화에 일조하는 것이라고 미화하였다. 조선인 청년들을 전쟁터 에 내보내기 위한 징병제 실시를 축하하는 이 시에서, 조선인이라는 존재는 일본의 승전에 온몸으로 기여해야 하는 그리고 일본의 승전을 절실히 여겨 몸소 헌신해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결국 징병제 참여는 공동체의 안정된 삶과 평화를 지향하는 의로운 행위로, 조선인 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은 남아를 둔 모든 가정은 자식들을 독려하여 전쟁터에 내보내고 징병된 이들은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싸우는 것뿐임을 드러내고 있다. 일제가 가미카제( 神 風 )를 편성하며 내세운 논리가 재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어린 시절 한학을 익히고 일제가 설립한 보통 전수학교를 나와 일 제의 하급 관리로서 활동하다 금융계로 옮겨 활동했던 그는, 일제의 패망의 그림자가 점차 짙어지던 일제 말엽부터 본격적인 일제의 유림 으로 활동하였다. 주요 친일단체 간부로 활동하며 일제의 통치를 찬양하고 그들의 지배정책을 미화하는 작업의 일선에 나선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한문으로 작성한 다수의 한시를 남겼는데, 그의 시는 전통시대의 한시 미학을 대부분 상실한 채 노골적으로 일제의 정책을 홍보하고 일본인 고관을 칭송하고 있었다. 결 론적으로 이명세와 같은 이 시기의 유림은 의리( 義 理 ), 명분( 名 分 ) 을 앞세운 전통시대와 의 단절을 알리며 조선총독부의 힘 과 개인의 실리 를 앞세워 반민족 행위로 점철된 행보를 이어가던 일제의 유림으로 지내다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4. 맺음말 20세기는 흔히 한문학의 종언 의 시대로 한문학이 임종 을 고한 시점이요, 그에 따 라 새로운 문학지형이 탄생한 변화의 시기였다. 시 창작 언어와 시를 창작하고 향유하는 계 층인쇄매체의 지형이 변화하면서 한시 는 도태되기 시작하였다. 검열의 문제마저 겹치면 서 이 시기의 한시는 시국과 관련 없는 경물( 景 物 )시나 일본 제국주의와 식민 지배를 찬양 하는 시( 詩 )들로 명맥을 유지할 뿐이었다. 이 시대의 한문학은 김태준이 종언을 고( 告 )하 기에 앞서 결산보고서가 나와야 할 시기 라 했던 것처럼 이미 종언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 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변화 된 환경에도 불구하고 한문학은 일제의 비호 아래 친일의 도구 로서 위유( 僞 儒 )들에 의해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었다. 이들 친일 유림에 의해 창작된 일련의 한문학에 있어 재도( 載 道 ) 의 도( 道 )는 일제의 황도( 皇 道 ) 로 대체되어 일제 침략을 찬양하고 미화하는 이념으로 변경된 것이다. 문학성과 더불어 작자의 도덕적 권위를 중히 여겼던 조선 한문학의 전통이 일제 강점이라는 현실과 만나 조금씩 변형되기 시작한 것이다. 즉 암묵적으로 유지해 온 한문학 작품과 작자의 도덕성 문제가, 점차 별개의 문제로 분리되어 인식되기에 이른 것이다. 근대 이후 진행된 한문학 의 배제는, 근대라는 보편적 이념을 담아내고 나아가 독립된 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더 나아가 민족 공동체 구성을 위해 의도적으로 배제되어야 했었다. 이 과정에서 한문학은 점차 생명력을 잃어가며 고립되었고 타자화 되었으며 박제화 되어갔다. 일제는 이러한 분위기를 십분 활용하였다. 일제는 친일 유림을 양성하기 위해 유 림의 계급적 권위 와 동시에 자신들이 전유했던 문학이었던 한문학의 권위 를 십분 인정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내의 한문학은 일본제국주의를 찬양하고 그 들의 이념을 재생산하고 포장한 작품들이 점차 주류가 되기에 이른다. 식민지의 역사 는 과거사이지만. 식민지 이후 는 현대사이다. 식민지 이후 의 현대 한문학사를 쓰기 위 해, 식민지 시기 한문학에 대한 연구는 좀 더 면밀하게 분석되고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까지 동아시아 국가들에 있어 친일문학 은 민족이라는 경계를 크게 넘지 못한 채 자국을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중국 측 연구자들은 관련 작가나 작품이 중국현 대문학의 전체 규모에 비추어 아주 적다 는 이유와 친일문학은 문학이 아니다 라는 시 각으로 이 분야를 다소 소홀히 하는 편이다. 즉 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친일문학에까지 할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최근 국내 친일문학에 대한 연구 성과가 많이 축적되었지 만 우리의 상황이 이런 중국과 크게 다르다고 하기엔 이른 측면이 있어 보인다. 현재 동아
일제 말 유림의 친일 한시의 성격과 전쟁 협력의 일면 -의산( 義 山 ) 이명세( 李 明 世 )의 친일 한시를 중심으로- 487 시아는 서로 다른 이름으로 일제협력문학 을 명명하고 있다. 대만은 황도( 皇 道 )문학, 중국은 한간( 漢 奸 )문학, 한국은 친일( 親 日 )문학 이라 하며 서로 다른 기억의 구조를 통해 일제 협력 문학을 바라보고 있다. 일본 군국주의를 찬양한 동아시아 각국의 자국어 문 학에 대한 명칭은 다소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공통문자였던 한문학 은 이와 약간 성격을 달리한다는 점에서 좀 더 깊은 검토를 필요로 한다. 일제협력 한문학에 관한 동아시아 공통의 이름( 共 名 ) 과 각국에 맞는 올바른 이름( 正 名 ) 에 대한 논의는 차후 과제로 미뤄두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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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말 유림의 친일 한시의 성격과 전쟁 협력의 일면 -의산( 義 山 ) 이명세( 李 明 世 )의 친일 한시를 중심으로- 489 [abstract] A study on 'Pro-Japanese Literature' has started to make an exhaustive review, since 2000, with the beginning of Pro-Japanese Literary Criticism made by Lim Jong-guk. It is a stern reality that a study on 'Pro-Japanese Literature' has been solely focused on 'Korean Literature', up to now. A profound discussion on 'Pro-Japanese Korean Literature' is not made, as yet. In this regard, this research thesis studied about Pro-Japanese Chinese poems written by Lee Myeong-sei(1893-1972), as his pen name and undertaking his mission as a Pro-Japanese Confucian Scholar, during the end of the Japanese occupation of Korea. In the end of the Japanese occupation of Korea, Lee became a major leader in the 'Federation of Chosun Confucianism' and 'Gyeonkhakwon', well-known as the pro-japanese Confucian Society, and carried out his duties to write and teach pro-japanese literary works by worshiping and advocating the Japanese imperialist aggression. Such as this, he showed a very cooperative attitude to support Japan. In response to his pro-japanese activities, 'the Fact-Finding Committee of Pro-Japanese Collaborators' branded Lee as a 'Pro-Japanese collaborator'. As an typical example, the six Pro-Japanese Korean poems were composed from 1842 until 1944. These pro-japanese Korean poems composed by Lee pose an important significance and task in that these poems symbolize and reflect the two factors of the Korean literature distorted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of Korea and standing in modern Eastern Asian regions. Key Word: Lee,Myeong-sei, Euisanjip, Pro-Japanese Chinese poem, Federation of Chosun Confucianism, Gyeonghak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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