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硏 究 論 文 1920년대 후반 식민지 조선에서의 일간지를 통한 영화 홍보 양상 연구 김승구 세종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현대시 전공 modace@sejong.ac.kr I. 서론 II. 외국영화 흥행의 전반적인 상황 Ⅲ. 흥행업자의 홍보 활동 Ⅳ. 일간지 학예부의 홍보 활동 V. 결론

I. 서론 최근 들어 일제 말기 조선 영화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마치 일종의 연구 붐이라고 칭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연구자들이 이 시기 조선영화에 대한 연구 성과물을 쏟아내고 있다. 이런 현상은 일차적으로 발굴된 영화의 보급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친일 문제라는 우리 학계에서 어느 순간 뚜렷해 지기 시작한 연구 열기가 여기에 개입되었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연구들을 통해 그동안 문헌 자료로만 접할 수 있었던 영화들의 실체를 직접 확인하고 그 기술적 성과와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영화 자료를 거의 확보할 수 없어서 문헌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한계를 생각할 때, 최근의 이와 같은 연구들은 일종의 행운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에서 영화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기존의 연구들이 충분한 대답을 제시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조선영화를 둘러싼 문제들 즉 조선영화의 정체성을 둘러싼 논점들이나 영화 제작이나 영화 정책의 측면에 관심이 편중됨으로써 영화를 둘러싼 다양한 측면들 즉,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대중에게 전달되었으며 그들은 영화를 어떻게 수용하였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히 주목하지 못한 경향이 있다. 특히나 식민지 조선에서 조선영화는 영화 수용자인 대중의 입장에서는 단편적인 경험에 지나지 않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운규의 <아리랑>으로 일어난 조선영화 최초의 붐과 최초의 토키 영화 <춘향전>에서 시작되어 일제 말기 영화통제가 시작된 기간까 지를 제외하면 대중에게 조선영화는 단편적인 소구의 대상일 뿐이었다. 오히려 식민지 조선의 관객에게 영화의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각인시키고 영화의 의미를 훈육시킨 것은 외국영화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영화가 전래된 이래 20여 년 가까이 조선의 관객은 외국영화만을 볼 수 있었을 따름이다. 경성부내에서 일월 중에 영사한 활동사진 필름 일본 신파 륙십 일 권 사만 오천 여척, 구극 오십 오 권 사만 이천 여척, 서양극이 이백 구십 일 권 이십 일만 삼천 칠백 여척, 희극이 십일 권 일만 오천 륙백 여척, 합계 사백 오십 칠 권 삼십 삼만 구천 이백 오십 권인데, 이것을 리수로 환산하면 실로 그 기리가 이백 륙십 260 정신문화연구 제33권 제1호

여리요 풍속 문란 기타 관계로 금지 혹은 중간 절단을 당한 것이 열 가지나 된다더라. 1)2) 위의 기사는 朝 鮮 日 報 1925년 2월 4일자 지면에 게재된 기사로, 1월 한 달 간의 경성 시내 상영 통계를 제시하고 있다. 요즘과는 달리 편 이 아니라 권 이나 척 이라는 단위를 사용하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비록 인용 출처를 밝히고는 있지 않지만, 위의 통계가 기자 자신이 상당한 신뢰를 가진 당국에 기대서 썼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위의 자료에는 조선영화라고 불릴만한 것이 전혀 배제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을 생각해보면 비록 한 달 간의 상영 통계에 지나지 않지만, 조선영화를 전혀 볼 수 없는 달이 식민지 관객에게는 훨씬 더 많았을 것임은 충분히 상상 가능하다. 이는 조선영화의 제작 편수가 매우 적었기 때문이고, 영화상설관 3) 은 영업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외국영화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고려해야 할 것은 위의 통계가 일본영화와 서양영화로 대별되어 있기는 하지만, 당시 일본영화는 주로 일본인 전용 상설관을 통해 상영되었기 때문에 식민지 조선의 관객이 관람했던 영화는 거의 가 외국영화였다는 점이다. 물론 시간이 흐를수록 조선영화 제작 편수가 증가하고 관객들이 조선영화를 접하고 그에 호응하 는 정도는 상승했겠지만, 조선영화가 영화 관람의 대세를 형성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당시 조선영화가 상승기조에 있기는 했지만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외국영화들이 국내로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일천 구백 이십 오년도에 수입된 영화는 그 회수가 이천 사백 칠십 여권이니 전년도에 비하여는 확실히 이삼할은 증가되엇다 우미관의 신축 락성과 조선극장의 완전 계속 등으로 이러한 결과가 나오게 되엇다 미국영화는 어느 에던지 수입된 영화의 구할 이상이 항상되엇다 그리하야 구주영화는 겨우 일백 이십 여권에 지나지 못하고 나머지는 전부가 미국 것이엇다 4) 1) 二 百 六 十 里 의 활동사진필름, 朝 鮮 日 報 (1925.2.4). 2) 인용은 가급적 원문의 표기대로 하며, 가독성을 위해 띄어쓰기만 하였다. 간혹 원문에 문맥상 맞지 않는 표현이 보이나 이것도 원문을 존중한다는 차원에서 그대로 두었다. (이하 동일) 3) 본고에는 흔히 극장으로 속칭하는 영화 관람 공간에 대한 표현에 있어서 영화상설관 과 극장 을 혼용한다. 식민지 시대적 뉘앙스가 필요할 때는 영화상설관 으로, 현대적 뉘앙스가 필요할 때는 극장 으로 표현하였다. 4) 映 畵 界 의 一 年, 朝 鮮 日 報 (1926.1.1). 1920년대 후반 식민지 조선에서의 일간지를 통한 영화 홍보 양상 연구 261

1925년도 한 해의 영화계를 결산하는 기사의 서두에 해당하는 위의 인용문은 1920년대 중반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정확한 수치를 제시하지 못한 약점은 있지만, 이 기사를 통해 우리는 1924년에 비해 1925년에 외국영화의 수입 양이 이삼할 이 증가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조선인 관객을 주 대상으로 한 영화상설관의 성업에 따른 현상으로 보인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영화상설관의 안정적 운영과 영화관 신설 등으로 인해 외국영화의 수요는 계속 확대되었다. 그런데 수입영화 중 구할 이상 이 할리우드영화라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1920년대야말로 조선인 관객의 영화 경험이 할리우드영화에 정향되는 중요한 기점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할리우드영화는 급속도 로 성장하여 다양한 레퍼토리의 영화들을 전세계를 향해 쏟아내기 시작했 다. 5) 1910년대만 하더라도 할리우드영화가 이 정도의 비율로 수입되지는 않았다.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조선에는 주로 프랑스, 이태리, 독일 등 유럽 영화선진국의 영화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전시 여파로 영화 제작과 수출이 위축되자 그 자리를 할리우드영화가 채워나가 기 시작한 것이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영화 산업계는 침체 국면을 벗어나지 못했고, 그 빈 자리를 할리우드영화가 잠식해나가기 시작했 다. 6) 단적인 예로 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인 1913년 3,200만 피트였던 미국 영화의 수출이 1923년 4배, 1925년 8배로 급증하였고, 1913년 대비 1925년에는 식민지 조선을 포함한 극동,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의 미국영화 진출이 10배 가량 신장되었다. 7) 이런 사정의 여파는 국내에도 고스란히 전해져서 국내 영화 흥행업계에도 고비용을 투자한 할리우드의 장편 서사 영화가 큰 호응을 얻게 되었다.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외국영화 의 수입이 거의 차단되기 전까지 식민지 조선에서 할리우드영화는 영화의 대명사가 되어 조선인 관객의 영화 경험을 지배하는 결정적 인자가 되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식민지 조선에서 관객이 영화를 어떻게 수용했 는가를 검토하고자 할 때 그 당시 관객이 외국영화를 어떻게 수용했는가 5) 이호걸, 1920-30년대 조선에서의 영화배급, 영화 연구 41호(한국영화학회, 2009), 135쪽. 6) Geoffrey Nowell Smith 편, 김경식 외 역, 옥스퍼드 세계 영화사 (열린책들, 2005), 92-102쪽 참고. 7) 이용관 김지석, 할리우드 (제3문학사, 1992), 71-72쪽. 262 정신문화연구 제33권 제1호

는 중요한 고려 사항이 될 수밖에 없다. 특히 영화와 같은 대중문화예술의 경우 관객이라는 대중의 경험은 반드시 규명해야 할 사항이다. 본고에서 는 최근의 영화 연구 열기를 생각할 때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고 생각되는 식민지 조선의 영화 수용자 즉 관객의 경험 8) 을 복원하기 위한 예비 작업으로서 관객에게 영화가 전달되는 과정을 검토하고자 한다. 외국영 화가 관객에게 수용되는 매개항으로 기능했던 영화 흥행업계와 신문업계 가 당시 어떤 방식으로 관객의 영화 수용에 영향을 미쳤는가 9) 를 몇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고찰하고자 한다. 이 과정은 식민지 조선의 영화 수용 양상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매개 고리가 될 것이다. 그 중에서도 1920년대 후반을 본고의 주 논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식민지 조선에서 할리우드영화가 1930년대 중반 이후 관제적 통제가 시행되기 전 1920년대 후반에야 비로소 식민지 대중에게 자각적인 향유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를 펼치는 과정에서 주로 그 당시 일간지 자료를 활용하고자 하는 것은 그 당시 일간지가 현재와는 달리 그 종류가 제한되어 있었을 뿐더러, 일간지가 민족 문화의 공공성을 담보한 공공적 담론의 장으로 기능하고 있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영화 관련 전문 저널의 위상이 확립되지 않았던 당대에 지속적으로 공공적 담론장으로 기능했던 두 일간지의 의의에 대해서는 재고의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II. 외국영화 흥행의 전반적인 상황 1920년대 조선인 관객을 상대로 한 영화상설관은 단성사, 조선극장, 우미관이다. 이들 상설관 중에는 우미관이나 조선극장처럼 일본인이 8) 이런 방향의 접근이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 전개된 바 있다. 여성 관객에게 외국 멜로영 화가 끼친 영향을 탐구한 경우(김윤선, 멜로영화와 여성성, 여성문학연구 15집(한 국여성문학학회, 2006). 나운규나 김일해 같은 배우 수용에 미친 외국 배우의 영향을 탐구한 경우(이순진, 식민지시대 조선영화 남성 스타에 대한 연구, 영화연구 34호 (한국영화학회, 2007)). 영화담론 형성 과정에 할리우드영화가 미친 영향을 탐구한 경우 (장두식, 일상 속의 영화, 동양학 44집(단국대 동양학연구소, 2008) 정도를 꼽을 수 있다. 9) 이런 현상에 대해서는 유선영이 간단히 언급하고 지나쳤을 뿐, 그 외 연구자들은 별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유선영, 황색식민지의 西 洋 映 畵 관람과 소비의 정치, 1934-1942, 공제욱 정근식 편, 식민지의 일상 지배와 균열 (문화과학사, 2006), 442쪽. 1920년대 후반 식민지 조선에서의 일간지를 통한 영화 홍보 양상 연구 263

경영한 곳도 있지만, 조선극장처럼 경영주는 일본인이지만 조선인 상대 의 영업 특성상 조선인의 정서를 잘 파악하고 있는 조선인 지배인을 두어 운영한 경우도 있다. 10) 조선극장과 단성사는 1920년대 조선인 관객을 상대로 지속적인 영화 관람의 기회를 제공한 식민지 조선의 영화문화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상설관은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알렌상회, 모리스상회, 테일러 상회 등 외국계 배급업체나 기신양행( 紀 新 洋 行 )같은 국내의 신생 배급업 체 등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외국영화를 공급받았다. 11) 배급업자 쪽이 아무래도 흥행업자 쪽보다는 권력을 가진 편이었기 때문에 흥행업자들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중에서도 가장 불리한 점은 흔히 블록부킹(block-booking)이라고 알려진 것이다. 이는 배급업 자가 흥행업자에게 영화를 공급할 때 구사했던 전횡적인 영화판권 계약으 로, 이런 계약 하에서는 배급업자가 끼워 파는 저급영화를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계약 관행은 1920년대 미국에서도 광범위하게 벌어지던 일로, 조선의 영화 흥행업계에서도 어쩔 수 없었던 일이다. 이렇게 공급 받은 영화들은 대체로 미국의 메이저스튜디오 작품들이었 다. 영화의 제작년도를 기준으로 볼 때, 1920년대 중반에 수입 개봉된 영화들은 대체로 그 2-3년 전의 것들이었다. 이와 같은 시간적 격차는 그 당시 영화의 유통 속도가 지금처럼 빠르지 않아서 생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과정에는 중간 배급업자의 판단, 즉 비용, 관객 선호도 등 어떤 영화를 수입하는 과정에서 고려해야 할 각가지 조건들도 개입되어 있을 것이다. 개중에는 제작 당해 연도에 곧바로 수입되는 영화도 있지만, 또 개중에는 제작된 지 십여 년이 지나서야 수입되는 영화도 있었다. 이런 중에도 가장 우수한 작품은 사십 여 편에 지나지 못하엿다 이 무수한 작품을 일일이 긔록하기는 여러우나 그 중에서 특별한 몇 편에 대한 늣김을 적어보자 <십계( 十 戒 )>, <박다트의 도적>, <회장마차>, < 노틀담 의 추>, <백장미( 白 薔 10) 김려실, 일제시기 영화제도에 관한 연구, 영화 연구 41호(한국영화학회, 2009), 13쪽. 11) 일제 강점기 외국영화 배급 상황에 대해서는 유선영, 어일선이 잘 정리해놓고 있다. 유선영, 앞의 글, 444-448쪽; 어일선, 1920년대 말 영화 배급 및 상영에 관한 연구, 영화 연구 32호(한국영화학회, 2007), 213-214쪽 참고. 264 정신문화연구 제33권 제1호

薇)>, <우처(愚妻)>, <메리 라운드>, <도살자(屠殺者)>, <국민창생(國民創生)>, <암 굴왕(暗窟王)> 등 소위 미국식 백만불 영화가 왓다12) 위의 인용문은 앞에서 살펴본 1925년도 영화계를 결산하는 기사 중 일부분이다. 여기에서는 10편의 영화가 거론되고 있는데, 이 중 현재 확인이 쉽지 않은 몇 편을 제외하고 제작연도와 상영연도를 비교해보면 아래 표와 같다. 표1-제작연도와 상영연도의 차이 영화 제목 제작년도(A) 상영년도(B) C(A-B) <국민창생(國民創生)> 1915 1925 10 <우처(愚妻)> 1922 3 < 노틀담 의 추> 1923 2 <메리 라운드> 1923 2 <십계(十戒)> 1923 2 <박다트의 도적> 1924 1 <표1>에서 알 수 있듯이 제작연도와 국내 개봉연도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영화는 데이비드 그리피스(David W. Griffith)의 <국민창생>(The Birth of a Nation)이다. 무려 십 년이 지난 후에 국내에 개봉되었고, 가장 작은 차이를 보이는 영화는 라울 월시 (Raoul Walsh)의 <박다트의 도적>(The Thief of Bagdad)이다. 그 외 영화들은 2-3년의 격차를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차이들은 이후 조금씩 줄어드는 경향을 보여 1930년대에는 몇 개월밖에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경우도 생긴다. 이는 그 정도로 식민지 조선이 할리우드영화제국에 단단히 포섭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수입한 영화들은 시내 상설관에 5-7일 주기로 교체되어 상영되 었다. 지금과 비교해보면 엄청나게 빠른 주기로 영화가 상영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에 따라서 그만큼 많은 영화들이 필요했다. 물론 인기작품 의 상영 기간은 통상보다 훨씬 길었다. 특히 관객의 인기를 끈 화제작의 경우에는 재상영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1928년의 화제작이었던 프랭크 보어지즈(Frank Borzage)의 <第七天國>(Seventh Heaven)의 경우 12) 映畵界의 一年, 朝鮮日報 (1926.1.1). 1920년대 후반 식민지 조선에서의 일간지를 통한 영화 홍보 양상 연구 265

그 해 1월 28일 조선극장에서 개봉했는데, 이 작품이 인기를 모으자 이후 재상영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13) III. 흥행업자의 홍보 활동 영화상설관으로 대표되는 그 당시 흥행업자들이 자신의 상품을 홍보할 수 있는 기회는 지금과 비교할 때 대단히 제한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요즘은 언론이나 방송, 인터넷을 중심으로 다양한 방식의 홍보나 선전이 이루어지지만, 그 당시는 악대를 선두로 해서 기를 다섯 개 내지 열 개 정도 들고 브라스 밴드에 맞추어서 서울 시내를 한 번 도는 소위 마치마와리(まちまわり) 혹은 친돈야(ちんどんや) 라고 하는 가두선 전, 영화 선전 전단의 제작 및 살포 14), 그리고 일간지 광고 등이 주를 이루었다. 마치마와리 가 시공간적 제약을 가진 데 비해 일간지는 그 광범위성과 수월성으로 인해서 흥행업자들이 가장 큰 공을 들이는 홍보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전담하기 위해 영화상설관에서는 선전부서를 따로 두고 이런 계통의 업무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단성사의 경우 이구영 을 선전부 주임으로 임명하여 각종 선전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당시 선전 업무의 구체적 실상을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당해 영화상설관 에서 입수한 영화의 상영계획이 확정되면 이를 바탕으로 일간지 영화 광고 제작, 시사회 개최, 독자 관계 업무 등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 각각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1. 일간지 광고 영화 광고에 있어서 일간지 활용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 당시로서는 가장 대중적인 미디어였던 일간지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매체이기 때문에 흥행업자의 입장에서는 일간지를 활용하는 것이 가장 유력하고 수월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 당시 영화 광고는 전적으로 일간지 광고라 13) 시내 조선극장에서 재상영하랴든 뎨칠텬국은 사정으로 조선 안에 수입이 되지 못하야 후일로 연긔되엇더라 第 七 天 國 上 映 延 期, 東 亞 日 報 (1928.5.13). 14) 한국예술연구소 편,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 김성춘 복혜숙 이구영 편 (소도, 2003), 273-274쪽 참고. 266 정신문화연구 제33권 제1호

고 할 수 있다. 상영작 광고는 보통 4면 체제 일간지에서 3면에 주로 실렸다. 이 면은 일간지 학예부가 전담해서 꾸미는 난으로 각종의 학술이 나 예술 관련 기사들이 실리는 난이다. 그 중에는 영화 관련 난이 연예란 으로 특화되어 구분된 경우도 있으나,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영화 관련 기사는 꾸준히 실렸다. 영화 광고는 영화 관련 기사의 하단에 인접해서 실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는 영화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의 눈의 동선을 고려한 배치라고 생각된다. 구체적인 예를 통해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자. 1928년 11월 7일 조선극장에서 개봉한 윌리엄 웰만(William A. Wellman) 의 <날개>(Wings)를 예로 들어 살펴보기로 하자. 東 亞 日 報 1928년 11 월 9일자 15) 3면에 상영작 광고가, 같은 신문 9일자 3면에는 이슬 이라는 관객의 영화 시사평( <날개>를 보고 )이 실렸다. 이 글은 5단에서 7단에 걸쳐 3면 오른쪽에 수록되어 있다. 3면의 기사들은 7단까지 수록되어 있고, 그 이하에는 광고가 수록되어 있다. 만약 영화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이 기사를 읽을 것이고, 그 기사를 읽고 나면 바로 그 밑에 수록되어 있는 조선극장의 상영작 광고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광고에는 두 편의 장편 영화가 개봉된다는 소식이 담겨 있다. 그 두 편은 시사평을 게재한 영화 <날개>와 <들러리 그리피스>이다. 저녁 7시 15분에 <들러리 그리피스>가 상영된 후 8시 30분부터 <날개>가 상영될 계획이다. 이 두 작품은 모두 파라마운트사(Paramount) 작품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상식과는 달리 나중에 상영할 작품이 광고에는 먼저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두 번째 상영작 <날개>가 먼저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어떻게 생각해야 될까? 이는 일종의 홍보 전략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즉 관객에 대한 광고 효과를 고려하여 화제가 될 만한 작품을 광고문에서는 앞쪽에, 그리고 실제 상영에서는 후반부에 배치한 것이다. 그 당시는 지금과 달라서 영화상설관에서 장편과 단편을 섞은 일종의 복합 상영(complex screening) 방식을 취하고 있었고, 관객도 이런 방식에 익숙해있었다. 따라서 그 날의 메인 작품은 후반부에 상영하 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첫 번째 작품은 여러 가지 면에서 두 번째 작품보다 떨어지는 작품을 배치하거나 단순히 관객의 흥미를 북돋기에 15) 1928년 11월 7일자 신문 3면에 이미 동일 광고가 게재됨. 1920년대 후반 식민지 조선에서의 일간지를 통한 영화 홍보 양상 연구 267

쉬운 희극을 배치하곤 했다. <들러리 그리피스> 16) 는 레이먼드 그리피스 (Raymond Griffith)라는 무성영화 시대의 희극 배우가 출연한 1시간 전후의 코미디 영화로, 그런 용도로 적합한 영화였다고 할 수 있다. 관객은 이 영화를 본 후 필름 교체를 위한 휴식 시간을 잠시 가진 후 러닝타임 2시간 남짓의 <날개>를 관람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저녁 상영은 11시경에 끝나게 된다. 그렇다면 이 당시 영화 광고의 양상을 실제 광고 내용 분석을 통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十 一 月 七 日 부터 超 特 別 大 興 行 今 週 의 入 場 料 椅 子 席 三 圓 階 上 大 人 一 圓 五 十 錢 小 人 八 十 錢 階 下 大 人 一 圓 小 人 五 十 錢 어린이 票 三 十 錢 大 파라마운트 一 千 萬 弗 大 雄 篇 루시엔하 드 氏 作 品 윌리암욀만 氏 監 督 空 中 戰 悲 詩 날개(WINGS)13 天 空 의 處 女 領 域 을 開 拓 한 映 畵! 壯 絶 快 絶 無 比 의 大 空 中 戰 을 題 材 로 한 映 畵, 映 畵 有 史 이래 모든 記 錄 을 粉 碎 한 空 中 의 驚 異 篇 八 時 三 十 分 頃 始 映 解 說 成 東 鎬 金 永 煥 金 肇 盛 17) 위의 인용문은 당일 조선극장 상영작 광고 중 일부를 시각적 배치를 일부 반영해 제시한 것이다. 그 당시 영화 광고는 시각적 자료를 충분히 활용할 수 없었던 관계로 주로 문구의 내용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광고의 앞부분은 상영 일시와 요금에 관한 안내로 되어 있다. 광고에 소개된 두 편이 11월 7일 개봉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요금에 관해서는 우리의 상식과는 다른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금주의 입장료 라는 문구로 보아 그 당시는 영화에 따라서 입장료가 달리 책정되 었던 듯하다. 요즘처럼 입장료가 거의 일률화되지 않고 같은 영화상설관 이라 하더라도 상영작에 따라서 달랐던 것이다. 이는 영화의 영화상설관 입고가와 입장료 사이의 수지타산을 맞추려는 영화상설관 측의 계산에 따른 것이라 하겠다. 초특별대흥행( 超 特 別 大 興 行 ) 이라는 요란한 문구가 16) 레이먼드 그리피스는 채플린이나 로이드와 같은 코믹 액션 배우였던 듯하다. 그러나 <들러리 그리피스>가 어떤 영화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레이먼드 그리피스에 대해서 는 http://www.imdb.com/name/nm0341586 참고. 17) 東 亞 日 報, 1928년 11월 9일자 3면의 광고 1단 소재. 268 정신문화연구 제33권 제1호

알려주듯이 <날개>의 입고 단가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당시로서는 거액 이었음을 추측 가능케 한다. 그 당시 할리우드의 화제작을 놓고 국내 배급업자들이 쟁탈전을 종종 벌였다는 사실 18) 은 이를 반증한다. 이는 흥행업자로서는 부득이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경쟁의 여파로 고비용을 투자한 영화나 정평이 난 감독의 작품은 매우 비싼 가격에 거래되었다. <날개>는 그 당시로서는 고예산 영화로서 항공전 신이 화제가 된 영화였다. 이런 탓에 입장료도 매우 높게 책정되었던 듯하다. 19) 또 이때의 입장료는 계상/계하 20), 대인/소인 에 따라서도 차등을 두었다. 그런데 의자석 요금 3원 은 그 당시 급료나 물가를 고려할 때, 엄청나게 비싼 요금이었다. 가장 열악한 관람 환경 즉, 1층 입석권을 사서 들어간다 할지라도 대인 기준 1원 이 필요했다면, 그 당시 영화 관람은 요즘과 달리 결코 서민의 평범한 오락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울 것이다. 여하튼 이렇게 개봉일과 요금을 안내한 후에는 상영작에 대한 정보를 제시한다. 여기에 포함되는 내용은 제작사, 제작자, 감독, 장르, 제목(원제 18) 1930년대 영화계를 결산하는 1931년 신년 벽두의 어느 글에는 대공황 이전까지 치열하 게 명화쟁탈전 을 벌였던 영화 흥행업계의 실상을 암시하는 내용이 보인다. 一 九 三 一 年 의 朝 鮮 映 畵 界 밋 興 行 界 는 어듸로가나 새 進 運 에 선 映 興 兩 界, 朝 鮮 日 報, 1931년 1월 1일자 참고. 1920년대 단성사 선전부장로 일한 바 있는 이구영도 이와 비슷한 회고를 남긴 바 있다. 한국예술연구소 편, 앞의 책, 241쪽 참고. 19) 배급 및 흥행 과정상의 과도한 쟁탈전과 이로 인한 수입 및 흥행 단가의 상승은 결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과정에서 피해를 보는 쪽은 관객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 영화감독, 시나리오 작가, 배우, 비평가를 겸하고 있었던 심훈( 沈 熏 )의 경우, 과도한 쟁탈전과 이를 보상하려는 영화 선전의 기만성에 대해서 그 당시 그 누구보다도 날카로운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의 기사를 볼 것. 最 近 의 날개 라는 寫 眞 만 하드라도 撮 影 技 巧 는 莫 論 하나 이 作 品 의 內 容 이란 우리 民 衆 으로서는 아무러한 感 銘 과 稗 益 을 주지 못할 아니라 解 說 者 가 일부러 字 幕 에도 업는 脫 線 的 敷 衍 을 달어 놋는다 하드래도 아메리카 魂 軍 用 主 義 를 朗 讀 한 한낫 反 動 映 畵 에 不 過 하는 것이다 양키 의 돈지랄이요 千 篇 一 律 인 歇 價 의 三 角 戀 愛 로 약념을 처가지고 純 全 한 機 械 작란을 해 논 映 畵 가아닌 活 動 寫 眞 을가지고서 宣 傳 이란 魔 術 을 利 用 하야 한목 돈버리를 해보려고 한다./ 米 國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하볠리를 配 給 者 가 아모리 風 을 어 놋튼리를 今 後 에 정말 조흔 作 品 이 나오면 엇더케 宣 傳 을 하려는 리를모르거니와 우리는 相 關 할 배 아니다 그러나 그네들의 돈작란이나 營 業 싸훔하는 틈에 어서 속고 돈을 앗기는 것은 아모 罪 업는 觀 衆 이다 그래서 가 삼어지는 것이요 내가 여긔 붓을 든 닭이 여긔에 잇는 것이다. ( : 확인 곤란; 밑줄: 필자) 沈 熏, 觀 衆 의 한사람으로 興 行 業 者 에게, 朝 鮮 日 報 (1928.11.17). 20) 계상/계하 는 층 구분이라고 생각된다. 요즘 보편화된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경우 단층 으로 되어 있지만, 그 식민지 시대 영화상설관의 경우 2층이나 3층 구조로 되어 있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특히 조선인 관객이 많이 찾았던 영화상설관의 경우 2층 구조였 는데, 보통 1층보다는 2층이 관람에 유리했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계상 즉 2층 입장료 가 상대적으로 높게 책정되었던 것 같다. 1920년대 후반 식민지 조선에서의 일간지를 통한 영화 홍보 양상 연구 269

포함), 러닝타임, 간략한 내용 소개, 상영시간, 해설자 등이다. <날개>의 경우에 보이는 특징을 살펴보면 이렇다. 이 영화의 제작사가 파라마운트 라는 사실을 소개함에 있어서 大 자를 붙여서 大 파라마운트 라고 한 점이다. 그 당시 영화 광고는 超, 大, 特 등 최고급 수사를 상투적으로 덧붙이기를 즐겨 했는데, 이것도 이런 관행의 일종이라 할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최고급 수사밖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그리고 제작사를 소개한 후 일천만불대웅편( 一 千 萬 弗 大 雄 篇 ) 이라고 해서 이 영화의 제작비가 천만불임을 알리고 있다. 이처럼 제작비용을 내세워 영화를 홍보하는 방식은 그 당시 외국영화 흥행업자들이 종종 사용했던 것이다. 그 당시 조선 무성영화의 편 당 제작비가 불과 5천 원 정도에 불과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천만 불이라는 금액은 관객의 상상을 뛰어넘는 수치임에 분명한데, 그들은 이 문구를 광고에 삽입함으 로써 독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려고 했던 것이다. 제작비를 홍보의 한 수단으로 지금껏 오랫동안 사용해 온 국내 영화 흥행업계의 관행을 생각하면 이런 관행이 고예산 할리우드영화기 시작된 1920년대에 이미 국내에 정착된 것이라는 점은 다소 놀라운 부분이다. 이후 제작자와 감독 이름이 소개되지만 이는 홍보 효과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특히 영화 선택의 한 요소로 인식되는 감독 이름은 그 당시만 해도 큰 호소력을 가지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데이비드 그리피스나 세실 데밀(Cecil B. DeMille) 같은 할리우드 감독에 대한 지명도는 어느 정도 있었지만 일부 식자층을 제외하고는 감독 이름보다는 배우 이름이 영화 선택에 있어서는 훨씬 중요한 고려 사항이었다. 이후 영화의 제목이 소개되는데, 제목은 다른 문구와는 달리 호수가 크고 진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제목 앞에 이 영화의 특징을 단적으로 제시한 문구가 붙어있다는 점이다. <날개>의 경우 공중전 비시( 空 中 戰 悲 詩 ) 라고 되어 있다. 이는 이 영화가 1차 세계대전 당시 공중전 장면을 스펙터클하게 묘사하고 있는 전쟁 영화임과 동시에 전장의 우정과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멜로드라마적인 요소를 함께 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 문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제목 뒤에는 제목과 같은 방식으로 13 이라는 문구가 삽입되어 있다. 이는 이 영화의 러닝타임을 표시하는 권수라고 생각된다. 미국 개봉 당시의 러닝타임(139-141분)보 270 정신문화연구 제33권 제1호

다는 짧아 보이는데, 이는 검열에서 삭제된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후 이 영화의 내용 전반을 소개하는 압축된 문구들이 보이는데, 여기서 도 공중전( 空 中 戰 ) 에서 비롯되는 스펙터클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2. 시사회 개최 앞에서는 1920년대 당시 흥행업자의 선전 방식 중 대표적인 것인 일간지 영화 광고에 대해서 다소 장황하게 살펴봤다. 그러나 일간지 영화 광고는 선전 업무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외에도 몇 가지 방법으로 영화 선전이 이루어졌다. 물론 이들 방법도 일간지와 일정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위에서 잠시 언급하고 지나친 바 있지만, 그 당시에 이루어진 또 하나의 방법은 시사회 개최이다. 영화 시사회란 보통 영화 제작사나 수입사가 개봉 이전에 일반 관객을 상대로 영화에 대한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 개최하는 상영회를 말한다. 이런 기회를 통해서 영화의 개봉 시기를 조정하거나 영화 홍보 전략을 수정하기도 한다. 그런데 식민지 시대의 시사회는 요즘과는 다른 면이 있다. 일단 상영 주체면의 차이다. 식민지 시대에는 영화 제작사나 수입사 가 아니라 흥행업자 즉 영화상설관에서 주최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차이점은 시사회의 목적상의 차이이다. 식민지 시대에는 개봉 시기 조정이나 홍보 전략 수정과 같은 목적보다는 일단 개봉 일자를 확정해 놓은 영화를 홍보하는 데 주목적이 있었다는 점이다. 또 일반 관객을 상대로 한 이벤트성 시사회는 없었고 관계자들을 초청한 비공개 시사회가 대부분이었다. 시사회의 초청 대상자는 아마도 다방면의 사회 저명인사, 각 일간지 학예부 기자 등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차이점 외에는 요즘과 별다른 차이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그 당시 시사회가 영화 선전에 활용되는 방식이다. 시사회의 초청 대상자 중 영화 선전에 있어서 가장 큰 파급력을 가진 사람은 아무래도 일간지 학예부 기자일 것이다. 물론 사회 저명인사 의 파급력도 없지는 않겠지만 그 당시 영화의 사회적 위상이 그다지 높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인사가 지면을 통해서 해당 영화를 상찬하지 않는 이상 영화 선전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21) 오히려 1920년대 후반 식민지 조선에서의 일간지를 통한 영화 홍보 양상 연구 271

영화 기사를 담당하는 학예부 기자야말로 영화 선전에 훨씬 큰 파급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식민지 시대에 영화가 처음부터 주목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1920년 대 이후 할리우드영화가 급속히 국내에 유입되면서 대중의 주목을 받고 되었고, 신문업계도 지면 확장과 독자 확보를 통해 사세 확장에 나서게 되었다. 이처럼 영화 흥행업계와 신문업계 양자의 필요에 따라서 일간지 지면에서도 영화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게 되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고정적인 섹션도 없이 단편적인 기사를 수록하다가 이후 고정적인 섹션을 배치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지면들을 메우는 기사들은 외국통신사로부 터 입수한 것과 직접 취재한 내용, 그리고 배급업자나 흥행업자로부터 제공받은 자료에 기반한 내용이었다. 특히 외국영화의 경우 직접 취재가 불가능한 특성상 점증하는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힘든 측면이 있었다. 그래서 흥행업자에 대한 의존이 절실했다. 이러한 필요에 따라서 학예부 기자들은 흥행업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특히 개봉 영화에 대한 정보가 필요한 시점에서 개최되는 시사회는 해당 영화에 대한 정보 입수의 유력한 경로라고 할 수 있다. 흥행업자가 제공하는 시사회를 통해서 실물을 체험할 수 있었고, 그 외 영화 설명 대본이나 스틸 등 각종 관계 자료까지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확보된 유무형의 자료는 영화란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영화 기사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부분은 신작 영화 소개란이다. 그 당시 신작 영화의 소개는 주로 해당 영화가 개봉되는 날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소개 기사의 경우 대체로 인상적인 스틸 한 컷과 기사로 이루어졌다. 사정에 따라서는 자세한 소개 기사가 빠진 채, 간략한 캡션 (스틸 컷 설명)이 덧붙은 스틸 한 컷으로 영화 소개를 대신한 경우도 있다. 스틸 컷의 크기는 일정치 않은데, 이는 해당 면 편집과 관련된 사정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흥행업자의 로비와 관련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소개 기사가 첨부된 경우라 할지라도 그 기사는 흥행업자의 선전 자료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21) 이광수가 <트레이더혼>이라는 영화를 보고 신문지상에 감상평을 게재한 적이 있다, 春 園, 映 畵 트레이더혼 본 感 想, 東 亞 日 報 (1932.5.17), 그러나 이는 극히 드문 예이고, 대부분은 단순한 관람에 그친 경우가 많았던 듯하다. 272 정신문화연구 제33권 제1호

이 기사들은 대체로 소개하고자 하는 영화의 경개( 梗 槪 : 줄거리), 관람 포인트, 상영 극장 안내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신문 기사의 특성상 일반 영화 광고처럼 요란한 문구를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그 실체를 들여다보면 흥행업자의 선전문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점은 특히 소개 기사들의 말미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1이 영화는 구라파에서 제일 미인이라는 평이 잇는 나타리, 고반크 양과 미남아로 유명한 코, 카트렌 과 니코라스, 코린 이 출연한 것인대 그 내용은 미녀를 중심으 로 여러 가지의 쟁투와 갈등이 왕궁 안에 이러난 것을 우리 눈 압헤 여실히 보이는 것이다 서양 귀족계이나 궁중의 비밀을 이 영화에서 볼 수 잇다 그러나 장면마다 활동의 긴장한 맛이 여름에 보기는 가장 뎍당한 심심치 안흔 작품이다(밑줄: 필자) 22) 2 如 何 間 이 映 畵 에 藝 術 的 價 値 는 엇더한지 알 수 업다마는 世 上 사람의 만은 歡 迎 을 바든 것도 當 然 한 일이오 더구나 아메리카 나 日 本 사람들에 더욱이 깃거할 것이 아닐가 생각한다(밑줄: 필자) 23) 3그러나 전쟁영화로서는 그 제작상으로 보아 다른 전쟁영화의 그 수준 우헤 설 수 잇다는 것만은 말해 둔다. 여러 가지로 보아 주머니의 여유만 잇스면 한 번 은 보아야 할 영화다(밑줄: 필자) 24) 위의 인용문들은 그 당시 일간지에 게재된 영화 소개 기사들의 후반부 다. 1은 빅토르 츄안스키(Viktor Tourjansky)의< 美 王 子 >(Le prince charmant, 1925) 25), 2는 킹 비더(King Vidor)의<, 파레이드>(The Big Parade, 1925) 3은 일간지 광고를 다룰 때 살펴본 바 있는<날개>를 다루고 있다. 1은 그 당시 영화 소개 기사의 전형적인 예에 해당하는 것인데, 이보다 더 유심히 살펴보아야 할 것은 2와 3이다. 2의 필자는 훗날 화가이자 일간지나 잡지의 삽화가로 유명해진 정현웅( 鄭 玄 雄 )이다. 그가 쓴 글은 엄밀한 의미에서 학예부 기자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 소개를 대신하는 위상을 가지고 있는 글이기에 신문사 자체의 글이라고 보아도 될 듯하다. 그는 자신이 본 영화가 어떤 예술적 가치를 22) 映 畵 印 象, 朝 鮮 日 報 (1926.7.11). 23) 정현웅,, 파레드 를 보고, 東 亞 日 報 (1927.12.11). 24) 夕 影, 印 象 記 날개 를 보고 映 畵 와 宣 傳 을 말함 特 히 美 國 戰 爭 映 畵 에 對 하야, 朝 鮮 日 報 (1928.11.9). 25) http://www.imdb.com/title/tt0155052 참고. 1920년대 후반 식민지 조선에서의 일간지를 통한 영화 홍보 양상 연구 273

가진 것인지는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는 모순되게 그는 이 영화가 사람들의 환영을 받은 것도 당연하다고 말하면서 그 근거도 뚜렷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정현웅 의 이 글은 영화평이라고 하기에는 자기주장을 뚜렷하게 제시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인데, 이는 고보( 高 普 ) 재학생 26) 관객으로서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글의 독자들 은 이 글을 통해 이 영화가 미국이나 일본에서 인기를 끈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비록 적임자는 아니었지만 일개 학생의 혼란스런 감상을 지면에 게재한 것은 그 나름으로 이 글이 소개 기사로서 의 기능을 할 수 있다고 신문사 측에서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3은 안석영( 安 夕 影 )의 글로서 이 글을 쓸 당시 그는 조선일보사의 학예부장으 로 있었는데, 그는 <날개>가 가진 전쟁영화로서의 우수한 점을 지적하고, 이 영화를 한 번 은 보아야 할 영화 로 추켜세우고 있다. 이처럼 영화 소개 기사는 사내외 인원을 막론하고 씌어졌다. 누구 썼는가에 무관하게 모든 기사는 대체로 독자로 하여금 소개된 영화를 보도록 하는 목적으로 씌어지고 있었다. 이는 기사의 게재 시기가 개봉 시기와 맞춰져 있다는 사실에서 충분히 짐작된다. 특히 흥행업자가 주최하는 시사회를 통해 미리 영화를 본 이의 시사평이 이런 역할을 많이 했다. 필명으로 발표된 경우가 많아서 그 글들의 필자를 누구라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평범한 일반관객의 평도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다수는 학예부 기자와 그와 친분이 있는 문화예술계 인사일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27) 이는 그 당시 시사회가 비공개로 진행된 전문가 26) 그 당시 정현웅은 경성제2고보 학생이었다. 27) 특히 1928-1929년에 주로 활동한 R 生, 1931-1934년에 주로 활동한 인돌 은 그 대표적 인 경우이다. 인돌은 서항석의 필명이라서 그 글들이 기자의 입장에서 씌어진 것을 알 수 있는데, R 生 은 그 정체를 확인하기 쉽지 않다. 아래는 R 生 과 인돌 이 그 당시 발표한 글의 목록이다. 이외에도 이슬, CH 生, H 生, X 生, YW KY 生 RC 生, H 生, K 生, HS 生, AB 生, 鐘 路 通 人 등이 필명으로, 심훈( 沈 熏 ), 이경손( 李 慶 孫 ) 등은 실명으로 영화평을 게재한 바 있다. <R 生 >(1928-1929) 라보엠, 東 亞 日 報 (1928.6.22); 라모나, 東 亞 日 報 (1928.9.13); 劍 俠 時 代, 東 亞 日 報 (1928.10.26); 썬와이스 의 試 寫 를보고, 東 亞 日 報 (1928.12.12); 이 트 를 보고( 朝 劇 에 上 映 中 ), 東 亞 日 報 (1928.12.23); 연예 시사평 空 中 으로가 면 과 그립든날 을 보고, 東 亞 日 報 (1929.1.11); 연예 엉클톰스,케빈 을 보고, 東 亞 日 報 (1929. 4. 19). 274 정신문화연구 제33권 제1호

시사회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일반 관객이 미리 영화를 보고 시사평을 쓸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들 기사의 경우 일부 부정적인 의견이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기사의 말미는 해당 영화의 장점을 부각시 키고, 안석영의 경우처럼 한번 은 그 영화를 보라고 말하면서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IV. 일간지 학예부의 홍보 활동 1. 관객 반응의 조직화 영화는 그 어떤 예술보다 수용자의 반응이 중시되는 분야라고 할 수 있다. 흥행 실적으로 표현되는 관객의 반응에 기반해서 영화 제작업자 는 제작 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이는 영화에 있어 비단 제작뿐만 아니라 흥행에도 해당하는 사항이다. 만약 어떤 영화상설관이 대중의 불만을 시정할 만한 의사가 없다면 영화상설관의 생존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좀 더 넓게 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모든 영역이 이러하다. 특히 영화 제작의 부진으로 영화 흥행업이 영화산업의 중요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던 식민지 조선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흥행업자의 입장에서는 일정 기간의 흥행 실적을 분석함으로써 향후 흥행 계획을 세울 수도 있겠지만, 보다 직접적으로 관객의 목소리를 수용할 만한 루트가 필요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루트의 역할을 했던 것이 일간지 지면을 통해 발표된 관객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관객 반응이라고 하면 다소 추상적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그것은 관객이 영화상설관의 시설, 상영 방식, 영화 내용 등 영화 전반에 대해 가진 감정이나 의견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처럼 인터넷 홈페이지 가 활성화되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영화상설관이 관객의 목소리를 접할 수 있는 적절한 루트를 가질 수 없었다. 그런 반응을 수용할 수 있는 <인돌>(1931-1933) 朝 劇 서 開 封 될 異 敎 徒 를 보고, 東 亞 日 報 (1931.1.9); 니 나, 페트로쁘나 를 보고, 東 亞 日 報, (1931.2.24); 西 部 戰 線 異 狀 업다 를 보고, 東 亞 日 報 (1931.4.1); 新 映 畵 佛 토비스, 토키 巴 里 의 집웅밋, 東 亞 日 報 (1932.1.12); 新 映 畵 貴 重 한 學 術 的 報 告 콩고릴라 를 보고, 東 亞 日 報 (1933.2.22); 試 寫 評 新 세실,B,데밀 의 名 作 暴 君 네로를 보고, 東 亞 日 報 (1933.3.30). 1920년대 후반 식민지 조선에서의 일간지를 통한 영화 홍보 양상 연구 275

가장 유력한 루트는 아무래도 가장 대중적인 미디어로 존재한 일간지였는 데, 일간지 역시 이러한 영화 흥행업계의 욕구와 자신들의 욕구가 맞아떨 어져 영화란의 확충에 힘을 쓰게 되었다. 그 일환으로 구상된 것이 관객 반응의 일간지 게재인데, 이런 개념의 관객 반응이 일간지 지면에 최초로 소개된 것은 1910년대 每 日 申 報 에서부터였으나 28), 3대 민간지 가 탄생한 1920년대 초반에는 자취를 감추었다가 1920년대 중반에 다시 활성화된다. 朝 鮮 日 報 1926년 7월 11일자에는 학예부 기자가 아닌 일반 관객의 다양한 반응이 처음 소개되고 있다. 1 美 王 子 는 긔대하더니만치는 나의 욕망을 만족식혀 주지는 안앗지만 역시 참 됴흔 영화다 풀래슈 박크는 가장 자미잇섯다( 淸 進 洞 方 屋 ) 2 山 一 키 혹시의 인듸안 복색은 어색하기 이 업다 그러나 그런 점이 우리 키군을 조화하게 되는 점이 아닐가 생각한다( 는 판독 곤란: 인용자) 3 대관절 계림영화협회 산채왕은 언제나 완성이 되는지 알고 십다 이래서는 조선영화계는 언제던지 비판 상태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淸 州 서 石 乭 이) 4 여름이 되엿스니 통쾌한 희활극대회를 여러 다오 그러치 안으면 더워서 구경할 수가 업슴니다 각 상설관에 희망함니다 각 극장 음악부에 희망한다 제발좀 케케묵은 곡목은 집어치고 생긔가 잇는 새 곡목을 사다가 음악이고 무엇이고 하지 아느랴거든 집어치우는 것이 어! 사진 지 볼 자미가 업드라(K 生 ) 5 음악을 드르려 가는 것이 아니라 사진보러가는 것이 근본이니만큼 반주악은 관객의 귀에 거실니지 안코 영화 장면과 전혀 됴화가 되어야 할 것이다( 忠 信 洞 薛 ) 1 5는 동일 지면에 실린 다양한 관객 반응이다. 대체로 글 말미에 주소와 성명을 붙이고 있는데, 개중에는 주소나 성명만, 성명이라 하더라 도 익명에 가까운 필명만 첨부한 경우도 보인다. 이는 실명으로 불만을 제기한다는 일의 거북함을 피하고자 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채롭다. 1, 2는 영화 관람 후 그 영화에 대한 느낌을 표명한 것이고, 3은 제작 중인 영화가 언제쯤 개봉될 것인지를 28) 每 日 申 報 에 독자의 의견이 실리기 시작한 시점은 1914년이었다. 1914년 10월 28일 자 [독쟈긔별]란에는 觀 客 이라는 익명의 독자 의견이 아래와 같이 게재되었다. 이 번 우미관에셔 영 진 즁 다셧권 금 션은 참 활비극입듸다요 구경군도 만코 요 한번 구경 만 여요. 276 정신문화연구 제33권 제1호

묻는 것이다. 그리고 4, 5는 영화상설관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 4에서는 여름을 맞이하여 희활극( 喜 活 劇 ) 즉 코믹 액션 영화를 많이 상영해 달라거나 영화의 반주 음악에 신경을 써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이런 반응들을 통해서 그 당시 영화관의 사정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더워서 영화를 보기에 몹시 힘들다는 것, 그러니 영화라도 신나는 것으로 틀어달라는 것이다. 1920년대 중반 식민지 조선의 영화관 들은 대형 선풍기와 난로와 같은 열악한 냉난방 시설밖에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29) 특히 그 당시 관객은 추위보다 더위에 더 약했던 것인지 겨울보다 여름에 영화관을 덜 찾았던 듯하다. 그래서 흥행업계가 비수기 인 여름의 흥행을 위해서 절치부심했다는 기사도 간혹 보인다. 30) 냉난방 이 잘된 요즘의 영화관과는 다른 그 당시만의 풍속도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4, 5 모두 음악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 무성영화 상영 시 변사와 더불어 악대는 필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영화 궁전(movie palace)이라고 불린 동시대의 미국 영화관에서라면 대규모 규성의 관현악 단 급의 악대가 영화마다 새로운 반주를 선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31), 식민지 조선의 영화관에서는 그럴 만한 여유는 없었다. 이 글의 필자는 불과 서너 명으로 이루어진 단출한 구성은 양해할 수 있었지만, 영화의 교체와는 무관하게 항상 동일한 악곡만을 연주하는 행태는 양해할 수 없었던 듯하다. 변사의 연행과는 달리 악대의 연행에 대해서는 고구할 자료가 거의 없는 상황이라 정확한 이야기는 불가능하지만, 음악에 불만 을 제기한 관객들의 이야기에 기대보면 그 당시 악대는 영화의 교체에 따라 새로운 레퍼토리의 반주를 선보이지는 못했던 듯하다. 또 5의 지적처럼 영화의 흐름과 조화되지 않은 반주의 문제도 식민지적 후진성의 문제로 수렴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겠다. 비록 단편적인 지적들이긴 하지만, 일부 관객의 참여로 이루어진 29) 김승구, 식민지 조선에서의 영화관 체험, 정신문화연구 110호(한국학중앙연구원, 2008), 14-15쪽. 30) 해마다 녀름철이 되면 는 듯한 더위에 각 극장이 모다 한산하야 칠월 팔월의 두 달은 실로히 흥행계의 귀문( 鬼 門 )이라 하야 흥행업자의 가슴을 압흐게 하는 터인데 금년에 들어서도 벌서 시내 각 극장은 극도의 한산긔( 閑 散 期 )에 들어 특작품을 상영하 여도 관객이 극장의 반도 못되는 형편으로 각 극장주들은 관객을 흡수하기에 매우 머리를 알는 모양이라고 炎 署 로 各 劇 場 閑 散, 朝 鮮 日 報 (1928.6.30). 31) Geoffrey Nowell Smith 편, 앞의 책, 233-234쪽 참고. 1920년대 후반 식민지 조선에서의 일간지를 통한 영화 홍보 양상 연구 277

이와 같은 관객 반응의 조직화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상품 수용자로서 관객이 제작, 배급, 흥행 등 상품 제공자에게 제시한 요구들의 표명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관객 반응이 일간지상에 표면화된 이후 신문사에서는 관객 반응의 게재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는 영화 관련 독자 투고를 촉구하는 광고의 형태로 표면화된다. 印 象 극이나 영화에 관한 판들의 인상이니 극히 간단히 는 요령 명요히 불편무당 히 쓰되 십사 자 일행 십오 행 이내로 子 體 分 明 히 用 紙 는 原 稿 用 紙 希 望 조선 연예게의 관한 판들 모든 희망이니 극히 간단히 요령 명요히 불편부당히 쓰되 십사 자 일행 오십 행 이내로 子 體 分 明 히 用 紙 는 原 稿 用 紙 不 平 극게와 영화게에 대한 불평 혹은 극장에 대한 불평이니 극히 간단히 는 요령 명요히 불편무당히 쓰되 십사 자 일 행 십행 이내로 子 體 分 明 히 用 紙 는 原 稿 用 紙 32) 최초로 관객 반응의 조직화에 나선 곳은 동아일보사이다. 위의 인용문 은 동사가 1927년 1월 21일자 지면에 게재한 광고 전문이다. 연예기고환 영 투고종류급방법( 演 藝 寄 稿 歡 迎 投 稿 種 類 及 方 法 ) 이라는 제하의 이 광고문은 독자 투고를 모집하는 종류를 인상, 희망, 불평 으로 구분하고 있다. 인상 은 극이나 영화를 본 소감을, 희망 은 조선의 연극계나 영화계 에 대해 바라는 바를, 불평 은 영화상설관에 대한 것을 포함한 조선연예계 전체에 대한 불만을 담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 광고는 투고의 종류뿐만 아니라 작성 요령까지도 제시하고 있다. 투고의 분량은 십사자 일행 십행이내 즉 140자에서 십사자 일행 오십행 이내 즉 700자로 투고의 종류마다 차별화하고 있다. 특히 희망 에 700자 기준을 적용하고 불평 에 140자 기준을 적용한 것에는, 불평 보다는 희망 을 더 많이 피력해달라는 영화계 안팎의 주문이 담겨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자수 규정 외에 극히 간단히 는 요령명요히, 그리고 불편부당히 작성할 것, 그리고 글씨는 분명하게 하고, 용지는 원고지를 이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첫 광고치고는 독자에게 상당히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32) 演 藝 寄 稿 歡 迎 投 稿 種 類 及 方 法, 東 亞 日 報 (1927.1.21). 278 정신문화연구 제33권 제1호

이 광고는 신문이 미디어로서의 기능 즉 영화와 관객의 매개체로 자임한 분명한 경우라고 하겠다. 동아일보 사의 광고에 자극 받은 바가 적지 않았던 듯, 곧이어 조선일보사에서도 비슷한 광고를 게재하게 된다. 朝 鮮 日 報 1927년 2월 17일자 지면에는 <그림1>과 같은 광고가 게재되었다. 동아일보사 광고에 비해서 한층 단 순한 면모를 보인다. 동아일보사식 그림1- 朝 鮮 日 報, 1927년 2월 17일자에 게재된 독자투고 광고 종류 구분은 없이 영화평(감상문) 한 종류에 국한되어 있고, 형식 요건 면 에서는 순국문으로 간단명료한 것 만을 요구할 뿐이다. 이러한 광고들이 실제로 독자들의 투고욕을 얼마나 자극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러한 광고들이 게재된 1927년 한 해의 지면을 살펴보면, 일반 관객의 반응이 지면에 수록된 경우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외국영화 제목의 오역에서 오는 문제를 제기한 익선동 B생( 益 善 洞 B 生 ) 의 글 33), 즉 동아일보사식 구분으로 보면 세 번째 종류인 불평 에 해당하는 글 한 편이 보일 뿐이다. 이후에도 독자 투고에 대한 광고가 몇 번 일간지 지면에 게재되는데, 종류는 동아일보사식 삼분법에서는 첫 번째 종류, 즉 인상 으로 일원화되 고, 형식적 제약은 좀 더 완화된다. 1 京 城 市 內 에 上 映 된 映 畵 의 본 印 象 을 募 集 합니다 批 評 하는 形 式 은 自 由 로 取 하시되 行 數 는 十 四 字 二 十 行 以 內 로 制 限 합니다 34) 2 연극과 영화를 감상하신 뒤에 무엇이든 늣긴 바가 잇거든 인신공격을 제하고는 써서 보내 줍시오 投 稿 規 定 一, 十 四 字 一 行 三 十 行 以 內 로 記 送 하시오 33) 이 글에서 필자인 益 善 洞 B 生 은 주로 일본영화 제목의 번역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 를 주로 지적하고 있다. 映 畵 漫 談 번역에 조금더 노럭하엿스면, 朝 鮮 日 報 (1927. 3. 18) 참조. 34) 東 亞 日 報 學 藝 部, 映 畵 印 象 募 集, 東 亞 日 報 (1927.12.11). 1920년대 후반 식민지 조선에서의 일간지를 통한 영화 홍보 양상 연구 279

一, 投 稿 는 一 切 返 還 치안습니다 一, 紙 上 에는 匿 名 할 수 잇스나 原 稿 에는 姓 名 을 明 記 하시오 35) 1에서 보이는 특징은 인상 투고의 대상이 되는 영화를 경성 시내 개봉 영화로 한정했다는 점과 투고의 분량에 있어서 종래의 종류별 기준을 폐지하고 모두 280자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2는 조선일보사의 광고로 종래의 자수 기준을 변경하여 이번 광고에서는 투고 분량에 420자 기준을 적용하고 있고, 그 외 투고문의 반환과 투고자의 성명에 관한 규정을 새롭게 첨부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성명에 관한 규정이 돋보이는데, 여기에는 익명 투고자의 투고를 제한함으로써 투고자의 글에 대한 책임성을 강화하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이런 광고에 기인한 탓인지는 몰라도 첫 광고 당해 연도 거의 보이지 않던 일반 관객의 인상 투고가 1928년 이후 지속적으로 지면에 게재된다. 거의 익명으로 발표된 이 글들은 그 의도 면에서는 순수할지 몰라도 그 글들이 신작 영화의 소개 기사를 대체하는 방식으로 게재됨으로써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관객 반응으로는 한계를 보인다. 특히나 영화에 대한 인상에 독자 투고가 제한됨으로 해서 영화계 일반에 대해서 관객이 가질 수밖에 없는 다양한 의견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한때 의욕적으로 추진된 관객 반응의 조직화가 이처럼 시간이 갈수록 그 날카로움을 잃어버리고, 다른 한편으로 관객의 목소리가 미디어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달리 질문하자면, 일간지는 왜 애초에 가졌던 관객 반응의 조직화 욕구를 서서히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이 문제는 일간지의 근대화 내지는 전문화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초창기 일간지는 영화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인적 자원도, 제도적, 물질적 역량도 갖추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다양한 자원과 역량을 결집시켜야 할 필요에 의해 지면 제작에 독자의 참여를 유도했지만, 1920년대에서 1930년대를 경과하면서 영화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갖춘 인적 자원과 이를 지면으로 수용할 수 있는 제도적, 물질적 역량이 확충되게 되었다. 이에 보조를 같이 해서 아마추어 관객에게 정향되어 있던 일간지가 차츰 관객의 참여를 일정 부분 배제하는 한편, 광고주인 영화업계와의 관계를 강화하거나 감독이나 비평가 등 영화 전문가를 35) 演 劇 과 映 畵 印 象 募 集, 東 亞 日 報 (1929.9.24). 280 정신문화연구 제33권 제1호

지면 제작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이로 인해 독자 내지 관객의 비판적 반응은 전면적으로 수용되기보다는 상업주의적 계산에 위해가 되지 않은 범위에서 부분적으로만 수용된 것이다. 2. 독자우대권 제도 앞에서는 관객 반응의 조직화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 이번에는 신문 업계가 영화업계와의 밀착 관계 속에서 취한 한층 구체적인 방법을 살펴보고자 한다.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 당시에 독자우대권 제도라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그 당시 영화란에는 영화 관련 기사나 스틸 컷 외에도 종종 독자우대권이 삽입되었다. 독자우대권은 그동안 식민지 시대 영화 연구에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부분이긴 하지만, 그 당시 영화 문화를 이해 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사항이다. 각 일간지들은 신작 영화의 소개 기사에 때때로 독자우대권을 삽입하고 있다. 36) 그 당시 지면에 삽입된 독자우 대권은 <그림2>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 은 朝 鮮 日 報 1930년 4월 12일자에 삽입된 것 으로, 게오르그 팝스트(Georg Wilhelm Pabst)의 <판도라의 상자(Die Büchse der Pandora)>의 그림2- 朝 鮮 日 報, 1930년 4월 12일자에 삽입된 독자우대권 독자우대권이다. 상하좌우 몇 개의 사각형으로 도안된 우대권 의 상단에는 조선일보사 마크가 배치되어 있다. 세로 삼등분으로 구획된 중앙에는 본보독자우 대권( 本 報 讀 者 優 待 券 ) 이라는 보통보다 약간 큰 호수의 글씨가 보이고 그 밑에는 보통 호수로 일매 삼인( 一 枚 三 人 ) 이라고 되어 있다. 이는 우대권 한 장으로 세 명까지 우대, 즉 할인을 36) 이미 1910년대에 每 日 申 報 에서부터 독자우대권 제도는 일반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이 제도가 1920년대 이후 국문 일간지들에서처럼 활발하게 시행되지는 않았는데, 이는 그 당시 영화 감상 문화가 일상문화로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생각 된다. 每 日 申 報 1918년 5월 18일자 3면에는 자사 독자를 대상으로 황금관에서 상영 중인 <미라의 비밀>이라는 영화에 대한 독자 우대할인권 이 포함되어 있다. 1920년대 후반 식민지 조선에서의 일간지를 통한 영화 홍보 양상 연구 281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모든 독자우대권이 3인까지 우대하지는 않았다. 소련 영화 <산송장>의 경우 일인 일매( 一 人 一 枚 ) 였 던 것을 보면, 흥행 성적이 좋으리라고 기대하는 영화의 경우 더 많은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우대자수를 확대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왼쪽에는 흥행물 의 제목, 할인 요금이 명시되어 있다. 왼쪽 상단에는 이 우대권을 사용할 수 있는 영화의 제목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 우대권의 경우는 극영화 <판도라의 상자>와 다큐멘터리영화일 것으로 생각되는 <세계대전>이었다. 그리고 왼쪽 하단에는 할인요금이 표시되어 있다. 할인요금은 계상 / 계하, 대인 / 소인 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런데 할인 전 요금이 명시되어 있지 않아 독자 입장에서는 얼마나 할인을 받고 영화를 볼 수 있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을 것같다. 앞에서 살펴본 <날개>의 계상 대인 요금이 1원 50전으로 책정되어 있던 것에 비하면 상당히 저렴한 요금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이는 <날개>가 1929년에 일어난 세계대공황 이전 즉, 명화 쟁탈전 으로 인한 수입 단가의 상승이 입장료에 전가되어 고액의 입장료가 횡행할 때에 상영되었던 것과는 달리, <판도라의 상자>는 공황 이후 명화 쟁탈전 이 사라지고 영화 흥행업계에서 저조한 흥행실적을 만회하고자 절치부심하던 때에 상영되 었기 때문이다. 37) 또한 비할리우드 영화의 경우 수입 단가가 할리우드영 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았던 것도 비교적 저렴한 입장료를 책정할 수 있었던 요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림3- 朝 鮮 日 報, 1930년 4월 7일자에 게재된 단성사 영화 광고 37) 一 九 三 一 年 의 朝 鮮 映 畵 界 밋 興 行 界 는 어듸로가나 새 進 運 에 선 映 興 兩 界, 朝 鮮 日 報 (1931.1.1). 282 정신문화연구 제33권 제1호

오른쪽에는 우대권의 사용 기간과 장소가 명시되어 있다. <판도라의 상자>의 경우 4월 10일부터 13일까지 4일간으로 되어 있고, 장소는 개봉관인 단성사이다. 우대권의 사용 기간이 요즘의 관점에서는 비교적 짧은 3-4일에 지나지 않지만, 38) 한 편 영화의 상영 기간이 최의 일주일을 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독자우대권 사용 기간이 그렇게 짧게 책정된 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판도라의 상자>의 경우 <그림3>에서 알 수 있듯이 4월 7일 월요일에 개봉되었다. 일주일 단위로 상영작 교체가 이루어진다고 가정하면, 예의 독자우대권은 개봉 후반부라고 할 수 있는 10일(목)부터 13일(일)까지 사용이 가능한 것이다. 이는 개봉 후반부로 갈수록 떨어지는 객석 점유율을 높이려는 전략으로 보 인다. 그런데 이 독자우대권의 경우에 있어서 흥미로운 점은 10일부터 사용 가능한 독자우대권이 12일 지면에 삽입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가장 유력한 가능성은 애초에는 독자우대권 발행 계획이 없다가 흥행 성적이 부진해지자 흥행업자 측의 요구로 급하게 우대권을 발행하게 되었으리라 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경과한 일자를 우대권에 삽입한 것은 의아한 점이지만, 이는 이러한 내막을 감추기 위한 고육지책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독자우대권 제도는 그 당시로서는 가장 유력한 미디어 산업인 신문업계와 영화 흥행업계 상호의 필요에 의해 고안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39) 마치 오늘날 신용카드업계와 극장업계가 제휴를 맺어 신용카드 이용자를 상대로 업계가 정한 기준에 맞게 영화 할인 혜택을 주는 제도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이런 제도의 도입 배경이나 운용 실태와 관련해서 근거가 될 만한 것은 전무한 실정이 다. 따라서 이 제도의 운용 과정에서 신문사와 영화상설관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는 정확히 확인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 제도를 통해 일간지 38) 동아일보사에서 독자우대권을 제공한 바 있는 영화 <칼리바듸>의 경우 우대권 사용 기간은 3일로 되어 있다. 朝 鮮 劇 場 에서 讀 者 優 待, 東 亞 日 報 (1929.10.30)참조. 39) 이런 제도가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처음 도입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일본을 포함한 외국의 사례를 모방한 것인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확인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신문업과 영화업이 다 같이 20세기에 폭발적으로 확장된 업종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리고 식민지 시대의 제도 일반이 외국 제도의 모방의 양상을 보인다는 점을 고려할 때, 아마도 이 제도가 국내의 순수 발명품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된다. 1920년대 후반 식민지 조선에서의 일간지를 통한 영화 홍보 양상 연구 283

독자 중에는 이전보다 더 많이 영화상설관을 찾은 경우도, 그리고 영화 관객 중에는 할인혜택에 현혹되어 별로 보고 싶지도 않은 일간지를 구독한 경우도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 신문사 레코드 사 경성방송국이 그러했듯이 40) 신문사와 영화상설관의 연계성은 명백 한 것이었다. V. 결론 본고는 기존의 식민지 시대 영화 관련 연구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분야에 대한 탐구를 시도하였다. 기존 연구들이 거의 다 조선영화, 그 중에서도 제작 과정, 영화 정책, 작품에 한정되어 있고,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중간 매개 과정이나 수용 양상에 대한 이해나 식민지 시대 영화 경험의 중요한 요소인 외국영화에 대한 이해가 누락되 어 있다는 측면에 착안하였다. 이런 문제들 중에서 본고에서는 외국영화 가 수입된 이후 관객에게 전달되기까지의 과정에 한정하여 살펴보았다. 외국영화가 관객에게 전달되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는 영화 흥행업계의 활동 양상과 또한 영화 흥행업계를 비롯한 영화업계 전반의 발전과 더불어 자사의 사세 확장까지를 염두에 둔 신문업계의 활동 양상을 주로 검토하였다. 전자의 경우 당시 가장 유력한 선전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 일간지 영화 광고와 또한 이보다 덜 눈에 띠는 시사회를 검토의 매개로 삼았고, 후자의 경우는 특히 일간지 학예부를 중심으로 한 활동 양상을 검토해 보았다. 이 과정에서 독자 투고로 대표되는 관객 반응의 조직화 활동, 그리고 영화 흥행업계와의 제휴에 따른 것으로 보이는 독자우대권 제도를 매개로 삼았다. 이러한 검토를 수행한 결과 외국영화 하면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생각, 즉 수입과 상영이 일직선적 과정을 형성하리라는 추측이 당대의 실상과 부합하지 않으며, 그 과정은 영화 홍보업자들에 의한 일련의 복잡한 작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점이 본고가 얻은 성과라면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수행된 것으로 판단한 다양한 전략들이 당대의 실상과 얼마나 정확히 부합하는가 40) Michael Robinson, 방송, 문화적 헤게모니, 식민지 근대성, 1924-1945, 신기욱 마 이클 로빈슨 편, 도면회 역, 한국의 식민지 근대성 (삼인, 2007), 123쪽. 284 정신문화연구 제33권 제1호

는 실증적 자료의 뒷받침이 있어야 할 부분이기는 하다. 본고에서는 외국영화가 중간에서 어떤 매개 과정을 거쳐 관객에게 전달되었는가를 주로 1920년대를 중심으로 검토하였다. 따라서 앞으로의 과제는 이 문제를 태평양전쟁 발발 전후해서 외국영화의 전달이 원천적으 로 차단되는 시점까지 확장하여 검토하는 것, 그리고 외국영화를 당대의 관객이 어떤 방식으로 수용하고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구체적으로 검토하여 그 의미를 밝히는 것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문제는 차후의 과제로 삼고자 한다. 1920년대 후반 식민지 조선에서의 일간지를 통한 영화 홍보 양상 연구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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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요약 본고는 식민지 조선에서 외국영화가 관객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중간 매개 활동의 양상을 검토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는 종국적으로는 수용자 반응에 대한 연구로 나아가기 위한 중간 단계이지만, 그 자체로도 독립적인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는 영역이 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그 당시 영화라는 상품의 공급자와 수요자의 중간에서 일종의 유통상 역할을 했던 영화 흥행업자의 활동 양상, 그리고 흥행업자처럼 직접적이지는 않았지만 그와 비슷한 기능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는 일간지 학예부의 활동 양상을 검토해보았다. 보다 구체적인 논의로 들어가서는 일간지 영화 광고, 시사회, 관객 반응, 독자우대권 제도같은 항목을 그 매개로 삼았다. 검토의 결과, 한 편의 외국영화가 이 땅에 건너올 때부터 관객이 극장에서 감상하게 되기까지에 는 복잡하고 치밀한 매개 작용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고가 수행한 작업은 식민지 조선의 영화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기반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가진다고 하겠다. 투고일 2010. 1. 7. 수정일 2010. 2. 22. 게재 확정일 2010. 3. 5. 주제어(keyword) 식민지 조선(colonial Joseon), 일간지(newspaper), 영화 광고(film advertisement), 관객 반응(audience response), 시사회(pre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