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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정덕배-중국생활체험기.hwp

정치 2014년 9월 26일 금요일 2 朴 대통령, 캐나다 美 순방 국제사회 공감대 이끌어 유엔서 연설 위상 높여 한 加 세일즈외교 성과 박근혜 대통령이 6박7일 간의 캐나 다와 미국 순방을 성공리에 마무리하 고 26일 오전 귀국한다. 박 대통령은 이번 순방을 통해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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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F U-8 Championship 아시아학생선수권대회 0년 월 0일 금요일 한국 팀 선수단 감독= 배종필 (강화고 감독) 코치= 김학철 (서해고 감독) 코치= 장필규 (신갈고 코치) 국제대회 첫 출전, 큰 무대서 꿈 키운다 언남고 김민성-한양공고 이지성 GK 김승건

2 드라마가 그린 전통시장, 우리의 삶과 희로애락을 담아 주인공 삶의 공간됐던 한약방ㆍ짜장면 가게ㆍ야채가게의 현재 모습은? TV 드라마에는 종종 전통시장이 등장한다. 주인공의 삶의 터전이 되기도 하고 주요한 만남이 이뤄지는 장소로도 쓰인다. 전통시장을 오가는 사람들만

연번 동명 유형별 식당명 주소1 주소2 대표자 전화번호 2.6 (토) 연휴기간 운영여부 (O.X로 표기) 2.7 (일) 2.8 (월) 2.9 (화) 2.10 (수) 12 건국동 분식 피자가기가막혀 광주광역시 북구 용두동 (영암마트 맞은편 농협 건물 1 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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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 ①초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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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차 > 제1 장. 조사 개요 1 1. 조사의 목적 2 2. 조사의 설계 2 3. 조사항목 2 4. 조사 진행 3 5. 조사 응답 현황 4 제2 장. 조사 결과 분석 5 1. 결제수단 비중 6 2. 신용카드 수수료 인하율 7 3. 우대수수료 적용 상한선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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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한달 간, 씨앤앰 VOD [지상파 3사 통합월정액] 상품을 리모콘으로 가입하신 고객님 모두에게 VOD 1만원 쿠폰 을 드립니다! 씨앤앰 [지상파3사 통합월정액]이란? 지상파 3사 VOD 무제한 시청! 단 한번 가입으로 지상파 3사의 모든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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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Ⅰ. 감사의 목적 1 Ⅱ. 감사기간 1 Ⅲ. 감사실시대상기관 2 Ⅳ. 감사반의 편성 3 Ⅴ. 감사실시경과 4 Ⅵ. 주요감사실시내용(소관부처별) 6 1. 법 무 부 6 2. 법 제 처 감 사 원 헌법재판소 법 원 군사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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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N 연예가중계 랭킹쇼 언니들의 슬램덩크 빨간 핸드백 슈퍼맨이 돌아왔다 1박 2일 개그콘서트 Magazine 발행인 이준용 발행일 주소 서울시 마포구 매봉산로 45 KBS미디어센터 전화 기획 홍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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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업 보 고 서 (제 181 기) 사업연도 2012년 01월 01일 2012년 12월 31일 부터 까지 금융위원회 한국거래소 귀중 회 사 명 : (주) 신한은행 대 표 이 사 : 서진원 본 점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길 20 (전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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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저널(10월호).ok :32 PM 페이지15 DK LG전자는 최근 건설 시행사인 아이케이산업개발과 에너 또한 영흥풍력상용화단지는 수도권 내 청정에너지 공급의 지 절약형 그린 아파트 조성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 핵심적인 역할은 물론 국내 풍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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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내현 룕安 신당과 함께 낡은 진보 청산룖 정치 새정연 탈당 선언 광주 2호 보수까지 외연을 넓힘으로써 정권교체 의 희망의 싹을 틔우겠다룖며 탈당을 선 2 임 의원은 이날 국회 정론관 기자회 김동철 의원에 이어 광주 의원의 두 번 견에서 룕호남과 중도세력을 모두 품지

목 차 1.감사목적 1 2.감사기간 1 3.감사위원회 편성 1 4.감사대상기관 2 5.위원회별 감사일정(총괄) 3 6.감사진행 4 7.감사대상기관별 증인 등의 출석범위 5 8.위원회별 감사 사무보조직원 선정 6 9.감사결과 처리의견 7 10.기타 감사의견 9 11.감사


베트남_내지

18세기 클라비어 음악의 연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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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동문회소식 2011년 7월 27일 수요일 제16호 재경동문 소식 목포대 동문들의 단결과 화합 강조 재경동문 관악산 산행 목포대학교총동문회는 지난 4월7일 하당에서 30 여명의 동문 이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2011년 4월 4월 정기 이사회 이사회를 열었다. 이번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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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제회 소식 지속가능경영 위한 비전 가치 창조 총력 목돈급여, 금융소득종합과세 대상이지만 올해 부문별 연간 수익 목표 초과 달성 전망 해약 후 재 예치 활용하면 불이익 없어 제휴할인호텔 확대 등 회원생활복지도 개선 공제회 관리자 워크숍 공제회가 2010년의 성공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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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이사 등의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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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제회 소식 2011 고객만족경영대상 수상 제92회 대의원회 개최 내년도 예산안 등 심의 2009년 이어 2번째 회원 감동경영 공인 오는 28일 경주에서 평가단 패널단 통해 현장 목소리 적극 반영 한국교직원공제회는 오는 28일 경주교 육문화회관에서 제92회 대의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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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종윦윦합 인천관광공 설립 본격화 수익성 우려 덜어낼까 시, 조례 입법예고 현금 50억 하버파크호텔 출자키로 시민단체, 재정난 속 적자 예상 건전화 로드맵 공개 요구 인천관광공사 설립이 가시화됐 인천시는 11일 인천관광공사 설 립 및 운영에 관한 조례안 을 입법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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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합의금 도둑 안 맞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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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F U-18 Championship 아시아학생선수권대회 016년 6월 일 금요일 마카오 코칭스태프 설기현은 우리 친구 외국 선수단 이모저모 아시아 청소년들의 축제 무대인 제회 아시 아학생(U-18)선수권대회가 지난달 9일 막을 내렸다. 8개국 9개팀이 참가해 경주에

1 수사 경과 수사 착수 배경 신용카드 및 현금영수증 결제승인 대행 서비스업체인 밴사와 대형 가맹점 간의 리베이트 수사 과정에서,밴 수수료로 창출되는 막대한 이익을 둘러싸고 밴 업계의 경쟁이 과열되고 있다는 점에 착안 관련 비리를 집중 내사한 결과,밴 사업자 선정을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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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국적동포 수 기 집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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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사 희망의 땅에서 꿈꾸는 사람들의 이야기 동남아 국가에서 한류열풍이 강하게 불고 있다는 소식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한류열풍의 중심에는 한국 아이돌 가수와 드라마가 자리잡고 있지만, 한국 취업에 대한 열망도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고용허가제 시행 7주년에 접어들면서 한국 취업이 이제 눈물보다는 희망 으로 더 크게 다가가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간, 한국산업인력공단은 과거의 잘못된 외국인 고용 제도와 관행을 바로잡고 사용자와 외국인근로자 모두가 상생하는 제도적 환경을 만들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이 노력은 2011년 유엔공공행정상 부패 방지 및 척결분야 대상을 수상하는 등으로 대외적으로도 인정을 받고 있습 니다. 하지만, 아직 모든 사용자와 외국인근로자들의 어려움을 충분하게 해결해 주는 데는 미흡한 점이 있기도 합니다. 이는 결국 외국인근로자와 우리 사회가 함께 한마음으로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과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외국에서의 취업생활이란 그 자체가 가시밭길입니다. 이 수기집에 있는 외국인근로자들의 사연들을 보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꿈을 위해 낯선 길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 길이 희망인 것은 외국인근로자들이 혼자 걸어가고 있는 길이 아니라 따뜻한 시선으로 함께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 글들을 통해 저는 우리 사회가 외국인근로자, 사용자 그리고 모든 한국 사람들이 함께 동행하는 따뜻한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 습니다. 모쪼록 저는 이 책이 한국사회와 외국인근로자가 함께 발전하고 행복한 삶을 가꾸어 나가는 사회가 되는데 작은 밑거름이 되었으면 합니다. 희망의 땅을 찾아와 자신과 가족들의 윤택한 삶과 고국의 발전을 꿈꾸고 있는 모든 외국인근로자들에게 따뜻한 관심과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2011. 9. 한국산업인력공단 이사장 송 영 중 2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발간사 3

일러두기 본 수기집은 외국인근로자의 건설적인 생산활동 및 바람직한 고용문화 정착을 장려하기 위해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2010년 11월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체험 수기 를 공모하여 선정한 수기를 모아 발간한 것입니다.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체험 수기 공모 는 외국인근로자(E-9, H-2) 및 사용자를 포함한 모든 내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외국인근로자 부문, 사용자 부문, 그리고 일반 부문(외국인근로자의 동료 또는 봉사자 등 모든 내국인) 으로 나누어 접수받고 심사하였습니다. 총 73건의 수기가 접수되었으며, 이중 외국인근로자 부문 6작품, 사용자 부문 4작품, 일반 부문 6작품이 최종 수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본 수기집에는 이 16작품 외 높은 평가를 받은 7작품을 추가하여 총 23작품을 담았습니다. 5

차례 2 발간사 - 희망의 땅에서 꿈꾸는 사람들의 이야기 송 영 중, 한국산업인력공단 이사장 외국인근로자부문 일반부문 11 꿈은 이루어진다 (최우수작) 남닥, 몽골 103 Joy of Joey! (최우수작) 임태빈 17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한 한국, 한국어 (우수작) 반둥, 베트남 108 선생님아직도그일하고있어요? (우수작) 황유진 23 사랑하는 고국 가족을 위한 배움으로부터 변화된 삶 (우수작) 이정숙, 중국동포 117 꿍깡꿍깡 띠리리리리리 (우수작) 김은주 30 한국의 다섯 가지 특징과 나의 이야기 (장려작) 서민툰, 미얀마 127 외국인 근로자와 5년 1개월의 시간을 가지며 (장려작) 김신영 35 나의 한국 생활 (장려작) 웬후마잉, 베트남 133 하오리 여우( 好 麗 友 ) (장려작) 류화선 45 내일은 해가 뜬다 (장려작) 이명, 중국동포 141 외국인 20명이 아니라 직장동료 20명입니다 (장려작) 문강표 53 내 마음의 틈새를 찾아 류일복, 중국동포 145 나의 소중한 우리 가족 정정치 58 희망의 천국을 찾아서 사르진, 스리랑카 152 외국인 근로자를 처음 접하게 된 건 초등학생 때였습니다 박세미 64 대한민국, 꿈이 실현되는 곳 바투란 마 토네트, 필리핀 157 폼약캅반! (집에가고싶어요!) 박흥순 사용자부문 73 외국인이 팀장인 우리공장 (최우수작) 이병흥 80 우리 회사는 농산물을 재배하고 수확하는 곳입니다 (우수작) 이미화 88 우리의 친구 차나카 (장려작) 서석윤 94 외국인근로자 체험수기 응모 (장려작) 이형순 161 167 외국인근로자도 나와 같습니다 송선미 부록 6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목차 7

외국인근로자부문 외국인 근로자 부문 9

최우수작 꿈은 이루어진다 남닥, 몽골 2006년 3월 16일 몽골 울란바토르를 떠나 대한민국 인천 공항에 내리면서 한국 생활이 시작되었다. 대한민국에 취업하기 위하여 내가 알아 본 한국은 우리나라 보다 경제 및 사회발전이 훨씬 앞서간다고 했다. 비행기를 오르기 전까지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할지 궁금하였고, 호기심 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인천공항에서 여수까지 내려오는 길에 본 대한민국의 고속도로와 시외교통, 풍경은 나를 설레게 하기에 충분하였고, 처음 만나는 대중교통 서비스는 내 생각보다 엄청 높은 수준이었다. 한국에 도착하여 처음 근무했던 회사에는 그곳에 4개월 먼저 온 몽골 근로자가 1명 있었다. 그 몽골 친구는 4개월 동안 한 번도 회사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회사 밖으로 나가서 미용실, 마트, 은행 등에 가기 위해서는 한국직원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길을 잘 모르니 불안해서 꿈은 이루어진다 11

어디를 가든지 한 사람과 동행해야 해서 너무 힘들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어느 날 혼자 할 수 있다 고 마음먹고 시간을 내서 자전거를 타고 여수시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내 눈에 들어오는 한국풍경은 모든 것이 새로웠다. 어디를 가도 모두 한글로 쓰여 져 있어서 내용을 알 수 없어서 답답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야만 했기에 늘 미안하여 한글을 빨리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디에 무엇이 있고 회사 주변에는 어떤 것들이 있고 회사 주변의 길을 조금 더 알려고 자세히 보고 다녔다. 처음 마트 갔을 때는 밀가루, 소금, 물 등 구분할 줄 몰랐는데 알게 되었고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 낯선 길도 아는 길이 되었고 마트에서도 물건 사는게 쉬워졌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기계분야에 호기심이 많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여수에 있는 중고 자동차시장에 가 보았다. 거기서 보았던 많은 종류의 자동차들을 보고 마음이 흥분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충격은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바다를 보았던 것이 었다. 바다를 처음 보았을 때 기분이 매우 좋았다. 넓은 바다는 정말 신기 했다. 배를 타고 가면서 한국생활의 힘들었던 일들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 부모님에 대한 걱정을 잠깐 동안이나마 잊을 수 있었다. 회사에서 밥을 먹을 때 젓가락질 하는 것을 보고, 어디서 배웠냐면서 회사동료들이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나라에서 옛날부터 사용 했던 것 이라고 말했다. 또 어떤 때는 면도칼을 보이면서 너희 나라에도 있냐 고 물었다. 21세기 글로벌 시대인데 몽골도 글로벌 시대를 추구하는 일원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서 어디에 무엇이 있던지 우리나라도 있다고 했다. 고 설명해 드렸다. 회사 기숙사에서 지내면서 사람들 눈치가 보여서 힘들었다. 그래서 2주쯤 지나 밖에서 지내기 위해 방을 찾아 다녔다. 그렇지만 한국말도 모르고 신문도 읽을 줄도 몰랐기 때문에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방을 얻어야만 했다. 회사에서는 기숙사에서 지내기를 원했지만, 나 또한 10만원의 월세와 회사 출퇴근이 편리한 곳으로 선택해야 되었기 때문에 눈치를 보기는 했지만, 방관리비를 전액 내가 지불하면서 기숙사에서보다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왜냐하면 첫 번째는, 남의 눈치 안보고 편하게 나의 생활을 할 수 있고, 두 번째는 같이 있던 동료가 아무 때나 일어나서 떠드는 바람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고 나중에 기숙사에 입사했다고 화장실 청소담당자라고 내 이름을 화장실 문에 써 붙여 놓아서 너무 서러워 밖에 나가 살고 싶었다. 일하러 왔는데 화장실 청소라니 방을 얻어 이사 하던 날 동네사람들이 김치, 이불, 그릇을 주셔서, 부족한대로 가정에서 필요한 살림살이가 다 준비되었다. 한국 사람들은 몽골사람들처럼 착한 성격으로 비슷하게 느껴졌다. 일 년 후 근로계약이 만료되어 다른 회사로 옮기게 되었다.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다. 어려움을 조금 더 덜 수 있었다. 왜냐하면 지난 1년 동안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회사 안에서 외국인 근로자들 중에 제일 나이가 어려서 모든 사람들이 명령하고 무시했다. 우리 회사는 명절 전에 제일 바쁘고 일이 많았다. 그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고 보너스 주는데 한국 사람들은 많이 주는데 나는 제일 적게 주었다. 그때 나는 일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이것에 대해서 사장님께 말씀 드렸지만, 12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꿈은 이루어진다 13

사장님은 이런저런 이유를 말하면서 넘어 갔다. 지금도 내가 당하고 있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과 똑 같은 사람으로 취급해 달라고 오랫동안 싸웠다. 때로는 그 사람들이 나한테 시발 새끼 라고 말을 자주 할 때마다 나는 사람 취급해 달라고 오랫동안 말을 했다. 그 사람들이 이제는 나한테 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마침 그 곳에서 일요일이면 한국어 교육을 하고 있었다. 몸이 아파도 회사에서 일을 해야 했고 병원에 가서도 아픈 것을 자세히 말하지 못하고 손으로 말해야 했던 것들을 생각하며 열심히 공부해서 한국어 자격증 시험에도 합격했다. 잘 대해 준다. 또한 말 끝마다 반말하면서 이것 해, 저것 해 등 일을 시킬 때마다 내 마음이 몹시 나빴다. 나에게 무시하는 말투가 아닌, 높임말 하면 기분 좋게 일을 잘하고 다정하게 서로 잘 지낼 수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동료들은 잘 대해준다. 회식을 하면서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면서 더욱 동료들 사이에 가까워졌다. 이번 여름에 낚시를 갔었는데 가장 좋은 추억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제일 크고 좋은 고기를 잡아서 1등 했기 때문이다. 3년 기간이 끝나고 몽골 갔다 와서 한국어 문법을 제대로 배우기로 다짐했다. 몸이 아파서 회사를 쉬고 싶었지만 아픈 것을 한국말로 다 표현 하지 못하니까 회사에서는 일하기 싫어서 거짓말한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많이 힘들었지만 참고 일을 해야 했다. 병원에 가서도 아픈 곳을 말로 이야기 못하고 손이 먼저 말을 했다. 그렇게 한국말에 익숙하지 못해서 힘들던 나에게 몽골에 계신 그리운 부모님처럼 고마운 분들을 만나게 되었다. 여수외국인노동자센터, 그곳에서 만난 소장님과 국장님은 처음 만나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정말 고마웠다. 외국인노동자센터 에서 정말 많은 자유를 느꼈다. 고충 상담을 통해서 나의 아픔과 어려움을 들어주고 적극적으로 해결해 주려는 모습을 보면서 모처럼 사람대우를 한국에서 4년 6개월 동안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었고 배우는 기간이었다. 한국으로 돈 벌로 온 것은 몽골에 집을 마련하려고 왔는데 지금은 그 목적을 이루었다. 또한 새로운 꿈이 생겼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나머지 기간 동안 더욱더 열심히 일하고 있다. 한국의 웰빙 요리를 몽골에 소개하고 싶다. 한국의 요리는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한다. 그 재료를 한국분들조차도 모르는 것들이 많다. 텔레비전에서 요리강습 프로그램을 많이 보게 되는데, 그 요리법과 방법을 알고 싶어 졌다. 우리나라는 농사를 많이 짓지 않아도 자연으로부터 야생 야채, 과일 등을 풍부하게 얻을 수 있다. 웰빙 식품들이 한국도 많지만, 우리나라에는 자연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식재료들이 많다. 나는 할 수 있다면 한국에서 그 요리에 사용되는 재료에 대해서 공부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한국산업인력공단 귀국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휴일에 요리교육을 받아서 자격증도 취득하고 몽골에 귀국하여 한국에서 배운 요리를 활용하여, 몽골사람들의 식생활을 개선해 나가고 싶다. 몽골사람들은 양고기 등의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고 다양하게 음식을 먹지 않아 오래 살지 못하는 요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리학원에 등록하여 요리를 배울 14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꿈은 이루어진다 15

계획이다. 본국에 귀국하여 몽골인들에게 안전하고 다양한 먹을거리를 우수작 공급해주고 한국의 좋은 음식문화도 소개 하고 싶다 그래서 몽골사람들도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어느덧 한국어 실력이 많이 늘어서 몸이 아파서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아픈 곳에 자꾸만 손이 갔었던 내가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한 한국, 한국어 외국인노동자센터의 도움으로 이제는 마음이 담긴 한국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어서 회사에서나 생활 하는데 편해졌다.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들께 감사하고 나와 같이 한국에 처음 와서 어려움을 격고 있는 근로자들의 좋은 친구와 이웃이 되어주시길 기대한다. 노동자 센터를 통해서 만났던 한국 분들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것 같다 반드시 반둥, 베트남 한국에서 나의 꿈은 꼭! 이루어질 것이다. 화이팅!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 이름은 NGUYEN VAN DUNG입니다. 베트남어로 이름을 발음 하기 힘들어서 한국 사람들은 저를 반둥 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저의 한국이름은 반둥이 되었습니다. 저는 베트남에서 왔습니다. 한국에 온 지 6년이 되었습니다. 현재 서울에 있는 극동산업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외국인근로자들은 한국에 거주할 수 있는 체류기간이 만료되면 돈을 더 벌기 위해 불법으로 한국에 계속 있으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저는 내년 4월에 베트남에 돌아가기로 결정 했습니다. 고향에 돌아가서 예전에 포기했던 꿈을 이루겠습니다. 베트남에 돌아가기 전에 제1회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체험 수기 를 통해서 한국에서 사는 동안 체험한 것들을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16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한 한국,한국어 17

읽고 다른 외국인근로자들이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적응이 안 돼서 몸이 아프고 코피까지 났습니다. 공장에 들어가서 일을 하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한국어를 하지 못 해서 일을 빨리 못 배웠습니다. 저는 베트남에서 전문대를 졸업하기 전에 취업비자로 한국에 올 수 있는 프로그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저는 고민이 많았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후에 한국에 가서 일을 하는 것과 베트남에서 좋은 회사에 들어가서 일을 하는 것 중에 어떤 것이 좋을지 몰랐습니다. 저는 농사를 짓는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릴 때 고생을 많이 했고 부모님도 저를 키우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베트남에서 일을 하면 월급이 많지 않으니까 가족들의 생활을 모두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어려서 사회생활을 한 적도 없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았습 처음에 공장사람들은 저한테 잘 대해 줬습니다. 일도 가르쳐 주고 친절 했습니다. 그런데 몇 개월 후에 새로운 차장님이 공장에 와서 같이 일을 했습니다.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서 저한테 남들보다 많은 일을 시켰습니다. 한국어를 잘 못 하는 외국 노동자라고 놀리고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공장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 후에 취업을 하지 못해서 빵집 에서 일했습니다. 남는 시간에는 열심히 한국어를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한 달 후에 지금 다니고 있는 공장에 들어왔습니다. 한국말을 조금 잘 하게 되니까 한국친구도 사귀고 한국생활에도 적응이 되었습니다. 니다. 한국에 가서 일을 잘 하면 베트남에서 보다 월급을 많이 받을 수 있었습니다. 또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이 있지만 기계와 공구들이 많지 않아서 연습할 시간과 방법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가서 좋은 기술도 배우고 일을 하면서 한국어를 공부할 생각을 했습니다. 한국어를 배워 베트남으로 돌아오면 베트남에 있는 한국회사에 취직을할수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한국에 오기로 결정했습니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생활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음식이 입맛에 안 맞아서 못 먹었습니다.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려고 했는데 길을 잘 몰라서 못 갔습니다. 먹고 싶은 음식을 사고 싶어도 비쌀까 봐 안 샀습니다. 그래서 한 달 동안 베트남에서 가져온 말린 음식만 먹었습니다.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겨울이 되었습니다. 추운 한국 날씨에 극동산업에서 일을한지5년이 되었습니다. 베트남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으니 기계 부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하는 것이 딱 맞았습니다. 학교에서 기본적인 기술을 배웠으니까 일을 더 빨리 배웠습니다. 공장 에서 일을 하고 집에 가서 새벽까지 한국어를 공부했습니다. 공장에서 일을 잘하고 한국말도 잘하니까 사장님이 저한테 잘 해주셨습니다. 월급도 많이 주시고 1년에 한번 휴가를 받고 베트남에 갔다 오게 해 주셨습니다. 한국에 오기 전에는 한국에 대해서 아는 것들이 많지 않았지만 지금은 한국이 좋습니다. 가족이 그립고 생활이 조금 힘들지만 좋은 점도 많습 니다. 핸드폰, 인터넷, 교통수단 등은 편하고 빠릅니다. 저는 외국인 근로자로서 막 한국에 온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몇 가지 18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한 한국,한국어 19

말을 하고 싶습니다. 첫째, 공장에서 일을 하는 동안에 윗사람 말을 잘 듣고 일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기술도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사고가 나지 않도록 공장 안전 수칙을 잘 지켜야 합니다. 저도 일을 빨리 하려고 하다가 발을 다쳐서 너무 힘들었습니다. 병원에 혼자 있어서 외로웠고 몇 달 동안 발이 아파서 잘 돌아다니지 못 했습니다. 화장실 갈 때, 아침에 세수를 할 때, 샤워할 때에는 너무 불편했습니다.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해서 미안 했습니다. 그러므로 다치지 않게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둘째, 한국생활을 잘하려면 한국어를 배워야 합니다. 한국에 오기 전에 베트남에서 한국어의 모음과 자음만 배웠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처음 왔을 때 한국생활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무슨 말을 하지는 잘 몰라서 답답했고 말을 하지 못하니까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어를 열심히 배우기로 결심하고 스스로 노력했습니다. 지금은 한국말로 자신이 있게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한국어를 공부하는 비법을 알려 주고 싶습니다. 저는 처음에 베트남에서 가져온 한국어 문법책으로 혼자 문법을 공부했습니다. 근데 그렇게 책만 공부하니까 시간이 지나면 금방 잊어버렸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문법을 배운 다음에 자주 쓰고 연습을 많이 해야 합니다. 외국어를 공부할 때 제일 중요한 점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말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외국인들은 한국어를 쓸 때 틀릴까봐 한국말로 이야기를 안 합니다. 말을 하면 문법도 안 맞고 발음이 이상하게 나오니까 창피해 합니다. 그래도 말하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합니다. 공장 사람들이나 한국친구들에게 한국말로 말하면 틀려도 괜찮다고 이해해주고 바로 고쳐 줍니다. 한국말로 대화를 많이 해서 자신감을 키워야 합니다. 저는 지금 한국말을 잘 하지만 한국말 실력을 좋게 하려고 매일 한국 드라마를 봅니다. 드라마에서는 말을 천천히 하니까 따라할 수 있고 잘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또 한국 노래로 한국말을 배우고 있습니다. 노래를 들으면 재미있고 한국인들이 평소에 말하는 것처럼 발음이 나와서 좋습니다. 그리고 한국말로 대화를 할 때 모르는 것, 처음 듣는 단어들이 있으면 상대방한테 바로 물어 봅니다. 그리고 그 뜻을 알게 되면 공책에 적어놓고 하루에 10개씩 외웁니다. 셋째, 한국어를 배우면서 한국문화도 함께 배워야 합니다. 한국에서 한국풍습을 잘 알면 한국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고 싶어도 아버지랑 같이 있으면 그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다른 곳에 가서 담배를 피웁니다. 그리고 술을 먹을 때에는 술을 따르는 법과 술을 받는 법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윗사람이 술을 따르면 두 손으로 받습니다. 그리고 얼굴을 옆으로 돌린 후에 마십니다. 그런 것을 배우면 좋습니다. 한국문화와 한국풍습을 잘 알면 한국 사람을 이해할 수 있고 한국 생활이 편해집니다. 한국 드라마는 한국문화를 많이 보여주니까 텔레비전을 자주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은 봉사단체를 통해서 외국인들한테 한국문화를 가르치니까 그 단체를 참석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봉사단체에서 다른 외국인을 만나면 말이 통하지 않아도 서로 도와주고 같이 한국에 대해 공부도 할 20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한 한국,한국어 21

수 있습니다. 다른 베트남친구들을 만나면 새로운 고향 소식도 들을 수 우수작 있고 외로움도 쉽게 잊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6년이나 살았습니다. 한국에서 사는 동안에 새로 체험한 것이 많습니다. 한국에서 유명한 관광지도 여행했고 좋은 사장님 덕분에 새로운 기술도 배웠습니다. 또 한국친구들도 많이 생겨서 기쁩니다. 사랑하는 고국 가족을 위한 배움으로부터 변화된 삶 그리고 이제는 한국음식도 잘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좋은 건 한국문화와 한국어를 배운 것입니다. 저는 베트남에 돌아가서도 한국어를 계속 공부할 것입니다. 한국어 이정숙, 중국동포 학원에 다니거나 한국어 동아리를 찾아서 가입할 것입니다. 그렇게 노력 해서 좋은 한국회사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곳에서 제 실력을 보여 주고 싶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베트남에서 한국에 오기로 결정한 것은 잘한 일 같습니다. 한국에서 돈을 벌어서 부모님에게 도움을 드릴 수 있었고 한국 에서 번 돈으로 베트남에 가서 공부를 더 할 수도 있습니다. 제 꿈은 사업을 하는 것입니다. 한국회사에 들어가서 열심히 일 한 후에 나중에 제 사업을 하고 싶습니다. 한국에서 체험한 것들을 바탕으로 제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중국 용정시 출생인 나는 소위 말하는 문화대혁명 을 겪으면서 사회교육, 학교교육, 가정교육을 잘 받지 못하며 자랐고, 그러다보니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살아왔다. 지금 생각해도 입가에 웃음이 절로 난다. 입국할 때 꾀죄죄한 옷을 입고 함경도 사투리를 쓰면서 인천공항 심사대를 통과 하지 못할까봐 간이 콩알만 해져서 몸을 잔뜩 움츠렸던 모습이 바로 어제 같다. 자그만치 천만 원이란 빚을 지고 있는 맹꽁이 같은 나를 보고 언니 친구는 혀를 차며, 에구, 니가 어찌 돈 벌겠노?! 하면서 탐탁하지 않게 보았다. 처음 찾은 가게는 새로 오픈한, 직원만 80여명 되는 어마어마한 갈 비집이었다. 나는 커다란 장화를 신고 13시간 동안 밥을 하고 채소를 다듬었다. 천생 착하게 태어난 내가 죽기 살기로 일하고, 고분고분 말만 22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사랑하는 고국 가족을 위한 배움으로부터 변화된 삶 23

잘 들으면 만사 OK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분초를 다투는 시각에 종종 뭔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을 때가 많았다. 생소한 물건과 명칭은 수십 가지이고 모두가 바빠서 쩔쩔매는데 마음마저 약해서 감히 무엇을 물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내 앞에 일도 벅찼지만 쓸모없는 여자 란 말이 듣기 싫어서 짬짬이 어깨 너머로 훔쳐 배우고, 잠깐씩 거들어 주면서 모르는 것을 물어보곤 했다. 일하면서 톳나물, 재첩? 하면서 열 번, 스무 번씩 곱씹다가고, 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리고 아무리 머리를 짜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면 다시 쓸고, 씻고, 닦는 허드렛일을 도와주고 은근슬쩍 묻고 또다시 외우곤 하였다. 밤에는 팔이 너무 아파서 잘 수가 없어 벽에 팔을 기대어 놓을 지경이 됐지만, 그래도 매일 바뀌는 야채이름과 조리법을 부지런히 적어 놓았다. 쉬는 날은 일부러 백화점이나 마트에 가서 각가지 과일, 야채, 생선 종류의 이름을 익히고 적어오기도 했다. 그로부터 2개월이 지나니 한국 식당에서 3년 일한 동포언니는 나보다 아는 거 더 많네! 하면서 혀를 찼고,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참모님은 정숙 씨만 있으면 일이 저절로 돼요! 라고 하며 좋아하셨다. 첫 달 월급부터 세종대왕님이 10명 더 오셨다! 그런 칭찬에 뭐가 빠지는 줄도 모르고 일을 배워 나간 덕에 지금까지 음식 때문에 별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며 일했고 칭찬도 많이 들었다. 본래 식당일이 적성이 아닌데다 체력도 바닥이 나서 앉았다 일어만 서도 사방이 뱅글뱅글 돌아가는 듯 어지러웠다. 그래서 그때부터 나는 입주가정부 일을 하고 있다. 강남의 어린 꼬마들이 캔디 주세요., 치킨 먹고 싶어요. 또는 애기 아빠가 브러시 주세요. 하면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여 어리벙벙한 얼굴을 하였다. 게다가 가전과 생활용품 모두가 꼬부랑 글로 씌어져 죽으라는지 살라는지 알 수가 없었다. 친절하고, 예스! 만하면 장땡일 줄 알았는데 아무 것도 모르니 스스로 죄인이 된 것 같았다. 새로운 문화와 환경에 동화되지 않고서 일을 잘 한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체험하였다. 하루는 아파트 앞에서 애를 업어 재우는데 buffet 라고 커다랗게 글을 쓴 냉동차가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애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듯 웅얼웅얼 외우며 다시 집에 올라가서 기억을 더듬으며 종이에 적어 놓고 나중에 찾아보니 뷔페 였고, 손님이 음식을 손수 갖다먹는 식사란 걸 알게 되었다. 또 하루는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한 가게를 지나는데 내추럴 이 라고 씌어 있었다. 종이에 적어서 외래어 사전으로 자연의, 천연의 란 것을 찾아보고 나서야 마음이 편했다. 언젠가 한 번은 애를 데리고 좀 멀리 나갔는데 내가 그토록 이름을 알고 싶어 하던 나무에 메타세쿼이아 라 적혀있고, 나무에 관한 설명이 있었다. 책가방 메고 지나가던 학생에게서 종이와 펜을 빌려 휘갈겨 베껴 적었다. 그렇게 생소한 단어, 길거리 간판, 눈에 보이는 모든 외래어를 알아 가기 시작했다. 그걸 찾느라고 사전을 하나하나 사다보니 세 권이나 되었다. 모 교회에서 가르치는 주일 영어교육 프로그램에 밤이고 낮이고 빠지지 24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사랑하는 고국 가족을 위한 배움으로부터 변화된 삶 25

않고 참가하였다. 덕분에 1년 만에 일상에서 쓰이는 외래어를 거의 알게 되어 얼음에 박 밀듯이 소통하고 생활하게 되었다.(지금은 애 앞에서 THE kids TIMES 를 보는 흉내도 낸다.) 온갖 정성을 다하여 애들을 돌보았고, 한 달에 두 번인 휴가도 오갈 데가 없으니 돈과 상관없이 일을 하였다. 참으로 열심히 일하였기에 처음엔 시답지 않게 대하던 까다로운 주인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되었다. 우리 동포 형제자매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주인의 도움과 허락으로 애를 재우고 난 다음 밤 10시부터 컴퓨터로 2,400여 개의 외래어(사전에 근거하여)를 모아서 동포들이 알아두면 편리한 외래어 단어집 을 만들기 시작했다. 주인에게 감사한 마음에 낮엔 팽이처럼 쉴 사이 없이 일하면서 거의 한 달여 밤을 지새우고 나니 머리는 한 줌씩 빠지고, 얼굴은 새카 맣게 되었지만 내 사랑하는 고국을 위하여 용기를 낼 수 있었고, 마칠 수 있었다. 물론 거기에 전 세계 정보량의 95%가 국제어가 된 영어로 씌어 있습니다. 영어가 통용되는 글로벌 시대입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애들도 일상에서 영어를 사용합니다. 조만간 우리들의 평균수명은 90세가 될 것입니다. 남은 몇 십 년을 남에게 무시당하며 까막눈, 귀머거리 로살고 싶지는 않겠죠?! 알차게 살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외래어를 배우십시오! 시작이 절반입니다! 고 하면서 많이 나누어 주었다. 공장에서 제품이 잘못 나오면 폐품으로 버리면 되고, 농사를 잘못 지으면 일 년만 망치는 것이지만, 자라나는 애들은 나라와 가정의 기둥 이기 때문에 아이들의 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맞벌이 부부들은 어린아이를 우리에게 맡기고 아침에 나갔다가 밤늦게 들어오기 때문에 애들의 건강, 인성, 교육이 우리의 몫이 되었다. 가사도우미는 이러한 막중한 책임을 요하는 직업이다. 프로페셔널로 일하려면 세상을 잘 알고, 지식을 두루 섭렵해야 애들의 존중을 받을 수 있고, 또 잘 가르치고 잘 키울 수 있다. 나는 가정부로서 10년을 일하면서도 TV와 철저히 담을 쌓으며 지냈고, 흔한연속극한편본적이없다. 완벽증과 결벽증에 가까운 성격 이라 음식 준비와 청소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남은 자투리 시간 이면 애들에게 책을 읽어 주어서 선생님 한 번 안 청하고 한글을 깨우치게 하였다. 다섯 살 된 애가 이모, 차 몰 줄 알아요? 라고 물었을 때, 지금은 못하지만 이제 배울 거야! 약속한다! 고 한 애와의 약속대로, 재입국으로 중국에 있는 동안 운전면허증을 따기도 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핸들을 잡고 싶어 자동차 운전전문학원에 가서 학원등록비를 내고 일요일마다 도전하여 2종과 1종 보통면허를 취득 하였다. 비록 교육비로만 한국 돈으로 135만원이나 들었지만 여러 가지로 많은 것을 배웠고, 그만한 가치가 있던 시간이었다. 지금은 애와 학원을 오가면서 차에 대한 온갖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운전을 배운 보람을 느낀다. 처음엔 돌잡이 애의 아침부터 저녁까지 물, 우유, 주스 몇 cc, 김 몇 장, 밥, 죽, 등 얼마 먹이냐고 적어 놓게 하고, 감시하던 주인이 이제는 나를 소중한 식구로 인정해준다. 재입국하기 전 중국에 돌아갈 때는 전셋집 26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사랑하는 고국 가족을 위한 배움으로부터 변화된 삶 27

에서 살면서도 150만 원이란 큰돈을 쥐어 주셨다. 이모 없으면 우리 애는 어떡해? 누가 이모처럼 따뜻이 보살피며 글까지 가르칠 수가 있어요? 중국 갔다 빨리 와야 해요, 네? 하면서 눈물을 보이는 애 엄마를 보니 나도 눈물이 났다. 열심히 일하고 배우면서, 서로 사랑하고 챙겨주며 살아 가는 우리에게 그새 가족 같은 끈끈한 정이 생겼다. 학교 다니는 애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숙제 좀 하렴! 이 아니고 시간만 나면 애 앞에서 닥치는 대로 읽고 쓰고 하면서 본을 보여 주는 것이다. 아이는 내가 밤마다 자격증을 따려고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보고 꼭꼭 체크한다. 나는 그런 애가 기특하여 국가공인 한자급수인증시험 성적표를 보여주었다. 야, 이모 짱이다! 4급이 100점, 3급도 94점을 맞았고, 그럼 2급도 90점 넘어 맞을 수 있다고요? 하고 내 목을 끌어안으면 나는 큰일이나 한 듯 어깨를 으쓱하며 고것 맞고 뭐, 니가 더 짱이지! 하면서 얼굴에 뽀뽀를 해준다. 애가 키득거리며 이모, 우린 가족이니까 이모도 또 1급 시험 보고, 나처럼 최우수가 돼야 해요? 라며 다짐을 받는다. 옛-썰! 우린 같게 생긴 가족이니까 이모도 점수 잘 맞겠습니다! 하고 오늘까지도 함께 먹고, 자고, 가르치고, 학교 보내고, 마중가고 애와 함께 호흡하면서, 예절바르고 씩씩하고 명랑한 애들로 키워왔다. 애의 장래가 곧 가족과 한국의 미래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단순한 가정부 가 아닌, 내 사랑하는 고국의 가족, 그 엄마가 되어 가족 모두가 사회에서 의젓이한몫다할수있도록온갖정성을다하여일하였다. 이제는, 꾀죄죄한 옷을 입고 함경도 사투리를 쓰며 두려운 눈길로 대한민국 네거리를 살피던 내가 아니다. 사랑하는 고국과 고국에서 만난 가족은 내가 쏟은 정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나한테 안겨 주었다. 세련된 옷도 많이 사입고 다니며, 연길에다가 집도 장만했다. 노인복지사 자격증 같은, 이런 저런 자격증도 많이 땄고, 방송에도 글들이 나갔으며, 신문에 부지런히 글을 올리며 세상을 논하기도 한다. 그런 나를 두고 언니의 친구는 네가 용 됐구나! 한다. 아니에요, 아직 멀었어요. 더 잘해야죠, 뭐! 라고 대답하며 쑥스럽게 웃었지만, 나는 내 고국가족의 사랑 속에서 애와 함께 배우고, 일하며 사랑하며 사는 삶이 너무나 만족스럽고 자랑스럽다. 거수경례로 애와의 약속을 정중히 받아들인다. 나는 정말 극진한 모성애로 애들을 키웠다. 주체할 수 없는 엄마의 사랑에다 내가 건강하고 살집도 좋아서인지, 아니면 음식에 온갖 정성을 쏟아서인지 애들마다 건강하고 씩씩하게 잘 자라서 병치레 한번하지 않았다. 애들의 안전에도 각별한 신경을 썼고, 끝없는 질문에도 기꺼이 즐겁게 대답해 주었다. 28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사랑하는 고국 가족을 위한 배움으로부터 변화된 삶 29

장려작 하지만 언제나 모든 일에 바쁘게 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실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에 빨리 해야 되는 일들이 있지만, 빨리 할 한국의 다섯 가지 특징과 나의 이야기 필요가 없는 일들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무조건 빨리 문화 로 바쁘게 일하기보다는 천천히 하는 문화도 중요합니다. 둘째, 맵고 짠 한국 음식 한국에 처음 왔을 때 힘들었던 것은 음식이었습니다. 미얀마에서는 제가 먹고 싶은 음식들을 마음껏 먹을 수 있지만 한국에서는 내 입에 안 첫째, 한국인의 언어문화 빨리 서민툰, 미얀마 제가 한국에서 가장 많이 듣고 처음 배웠던 말은 빨리 였습니다. 한국인들이 항상 하는 말, 일할 때도 빨리 빨리, 먹을 때도 빨리 빨리 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왜 모든 일에 빨리하라고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이상한 문화라고 생각했습니다. 미얀마에서는 식사할 때 빨리 먹어 라고 말하면 기분 나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한국에 지내다보니 빨리 라는 말이 더 이상 이상하지 않고, 저도 빨리 빨리 말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유럽여행을 갔다왔다고 하는 한국 사람이 유럽 사람들은 천천히 먹고, 일해도 천천히 해서 재미없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서로 다른 환경 서로 다른 문화 차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맞는 음식을 먹으니까 너무 힘들었습니다. 힘들게 일하고 맵고 짠 한국 음식과 김치를 매일 먹어야 해서 어려웠지만 저는 한국에 있을 동안 한국 음식을 맛있게 먹어야 된다고 마음먹고 생활했습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된다. 는 말처럼 이제는 미얀마음식보다 한국음식이 제 입에 맛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김치가 없이는 밥을 못 먹습니다. 특히 전라도 김치가 저에게 가장 입에 맞는 맛있는 김치입니다. 김치 종류가 무척 많이 있지만 전라도 김치는 다른 김치와는 다르게 좀 맵고 짜지만 특별 하게 맛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미얀마와 다른 사계절 날씨 더운 나라 미얀마에서 온 저는 한국에서 눈이 오는 것을 신기하게 보면서 기뻐했던 날이 저의 추억 속에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날씨가 추워서 감기 걸렸던 날들이, 따뜻한 옷을 사려고 동대문 시장 갔던 날들이. 30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한국의 다섯가지 특징과 나의 이야기 31

지금 다시 생각하면 웃기기도 합니다. 날씨에 맞는 옷을 입는 방법도 배우는 데 오래 걸렸습니다. 더운 여름만 좋아하고 가을은 싫어했던 제가 이젠 여름이 되면 가을이 빨리 돌아오면 좋겠다. 라는 말도 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사계절은 색색의 옷을 갈아입는 선물과 같습니다. 1년 내내 더운 여름 날씨만 알다가 봄과 가을 겨울을 만나면서 새로운 사계절 날씨를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넷째, 한국어 의사소통의 어려움 저는 처음 한국에 올 때, 많은 준비를 하고 오지 않아서 한국말을 하나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일할 때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해 마음을 말할 수 없었고 기술을 배우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되는지 물어볼 수 없어서 일하는 속도가 느렸습니다. 함께 이야기 하고 싶어도 단어를 많이 모르고 문장을 만들지 못해서 소통하기 힘들었고, 같이 일하는 한국 사람들과도 불분명한 말 때문에 기분이 나쁜 문제도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매일 3시간은 한국어 공부하겠다는 생각하고 공부했습니다. 일 끝나고 공부를 함께 하는 것은 매우 피곤했지만, 점점 한국말로 이야기할 수 있는 내용이 많아졌고, 언어 소통의 답답함이 풀리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한국 교회에 나가면서 한국말을 더 많이 배울 수 있었고, 일요일 오후에는 AFC에서 하는 한국어 교실에 출석해서 활용에 대해 검토받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우연한 기회에 친구에게 소개를 받아 한국인 친구를 만나, 스카이프로 영어와 한국어로 대화를 하면서 한국어에 대한 흥미 느낄 수 있습니다. 언어 공부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의 차이를 알 수 있으며, 한국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다섯째, 피부색에 따라서 차별 선진국과 후진국의 국력 차이에서 오는 인종차별과 부당대우를 겪으면서 서러움을 겪기도 하며 한국 사람들에 대한 선입견을 갖게 되었 습니다. 미국인들만 좋아하고, Asia사람들은 싫어하는 한국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뭐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유를 잘 모르지만 우리는 다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땅에서 사는 이주민, 우리도 피부 색깔 좀 다르지만 모두 똑같은 귀한 사람입니다. 공장에서 일하면서 생활하니까 탐욕스러운 사장님 때문에 슬프던 날, 울었던 밤들이 많습니다. 항상 말로만 약속하고, 기분에 따라서 행동 하고 말하는 한 사람 때문에 한국 사람은 나쁘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추운 날씨에도 따뜻한 마음으로, 친절한 미소로 따뜻하게 해주신, 희망을 주신, 도와주신 한국 교회 사람들이 있어서 한국 사람이 좋다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한 사람의 실수 때문에 그 나라 사람들 모두 나쁘 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마치며 서로 이해해 주면서 행복하게 일을 함께 할 수 있는데 저뿐만 아니라 32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한국의 다섯가지 특징과 나의 이야기 33

다른 나라 사람들을 이해 못 해주는 사람들 때문에 울었던 날들도 많습 니다. 한국말과 한국문화에 대해서 전혀 모르기 때문에 너무 힘들고, 따뜻한 마음으로 힘을 주는 가족이 없는, 친절한 친구도 없는 저에게는 제 이불이 장려작 나의 한국 생활 눈물과 슬픔을 덮어주고 따뜻하게 해준 친구였습니다. 자기의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를 떠나서 한국에 일하러 온 외국 사람 들을 이해해주고, 친절하게 해주고, 서로 도와주고 함께 일을 하면 우리 모두 얼마나 행복할까요. 서로 이해해주고, 도와주고, 잘못한 것은 서로 용서합시다. 웬후마잉, 베트남 그리고 우리의 사랑을 서로 나누어주면서 우리가 사는 이 대한민국, 그리고 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더 멋지게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에 온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5년이나 지났다니, 시간이 그렇게 빨리 갈 줄 몰랐다. 한국에 온 것은 2005년 4월이었는데 몇 년 동안 한국에 살다 보니 한국은 나의 두 번째 고향이 되었다. 가끔씩 처음 왔을 때를 다시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하다. 나는 밝은 미래를 위해서 가족하고 떨어져서 돈을 벌려고 한국에 왔지만, 문화차이, 음식, 언어 등 때문에 한국생활에 적응하기 무척 어려웠다. 지금은 한국에서 오랫동안 살다보니 익숙해져서 재미가 있다. 그 동안 기쁜 일과 슬픈 일도 많이 겪었고, 그것들은 지금 까지도 잊지 못한 추억이 됐다. 2005년 4월 말에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고 인천국제공항에 이른 아침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려서 본 한국에 대한 첫 인상은 크고 아름다운 현대적인 인천국제공항과 거기서 근무 34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나의 한국 생활 35

하는 친절한 직원들이었다. 도착한 후 베트남 대사관에서 나온 사람과 버스로 KOILAF라고 부르는 센터로 향했다. 그때 한국 날씨가 봄이라고 했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겨울인 것 같았다. 우리나라의 더운 날씨와 다르게 그렇게나 추울 줄 몰랐다. 버스 창밖으로 보니 나무들이 잎이 다 떨어졌고 여기저기 푸른 통나무만 남았다.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넘어서야 겨우 센터에 도착했다. 상담자가 그러는데 3일 동안 센터에 머무른 베트남 노동자와 몽골 노동자가 있다면서 안내를 했다. 센터에서는 노동자가 한국생활, 회사생활 등에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취업교육과 안전규칙, 은행, 병원, 전화, PC방을 이용하는 방법 등을 가르쳤다. 센터에서 3일 만에 드디어 사장님을 만났다. 우리를 데려가려고 오신 사장님을 만난 다음에 회사로 갔다. 벌써 5년이 됐는데 지금까지도 첫 만남이 눈에 선하다. 나는 한국말이 서툴렀고, 또 사장님을 처음 만날 때 어떻게 인사하는지 몰라서 그냥 웃으면서 머리만 숙였다. 게다가 집으로 걸어가면 15분쯤 걸렸다. 회사에서 처음 시작한 일이 인사하는 것이다. 인사하기는 커녕 한국말을 하나도 모르니까 그냥 머리만 숙였다. 그날 밤에 너무 힘들었는데 집도 낯설고 걱정이 되어서 그랬는지 늦어도 잠을 자지 못 했다. 그렇게 내일 새 인생이 시작되려나, 나쁜 길에 빠지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걱정하면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일찍 일어났고 긴장한 마음으로 회사에 갔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다 새로워서 배워야 했는데 실수가 많아서 욕을 많이 먹었다. 아마 지금까지 한국에 사는 날 중에서 그 날이 제일 힘든 날이었다. 그 날이 지금까지 잊지 못 하는 추억이 됐다. 돈이 없어서 한 달 동안 사장님께서 주신 김치와 밥만 먹어서 정말 고생했다. 첫 월급을 받은 날이 가장 기쁜 날이었다. 월급을 받은 날 비로소 돈을 버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 경험에 비춰보니 외국인들이 문화차이, 음식, 언어 등 때문에 한국생활에 적응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가는 길에 사장님이 물어봐도 뜻을 몰랐지만 망설이지 않고 네 라고 대답했다. 대답 듣던 사장님이 깜짝 놀라면서 웃으셨다. 2시간쯤 차를 타고 집에 도착했다. 우리가 사는 집은 아파트였고 지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시설이 좋고 깨끗한 편이었다. 나는 처음에 외국인들이 다 좋은 집에 산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숙소에 가보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컨테이너에 사는 친구도 있었고 주택에 사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좋은 집에 사는데 컨테이너에 사는 친구가 혹시 겨울이 되면 어떻게 사나 걱정도 됐다. 집에 도착하자 짐을 정리하고 나서 회사로 이동했다. 집부터 회사까지 나라마다 문화가 달라서 문화차이 때문에 생긴 일이 많다. 우리나라 베트남과 한국은 옛날에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문화가 비슷 하기도 하지만 차이점도 있다. 바로 사람을 부르는 방식이다. 한국 사람은 호칭이 엄청 많아서 나이, 성별, 지위 등에 따라서 사람을 부르는 것도 다르다. 처음에는 몰라서 회사 동료를 부를 때 이름만 불렀다. 하지만 그 사람이 기분나빠하면서 그렇게 부르면 안 된다고 했다. 물어봤더니 회사 에서 지위가 높은 사람을 부를 때는 직함과 님 을 붙여서 부른다고 했다. 36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나의 한국 생활 37

예를 들어서 사장님, 부장님, 과장님 등을 부르고 동갑이라면 이름만 부르지 말고 씨 를 붙여서 부르는 것이 더 좋다고 했다. 한국 사람들과 많이 국인데 냄새는 이상하지만 몸에 아주 좋다. 한국음식은 처음에는 이상 하고 매워서 못 먹지만 자주 먹다 보면 익숙해진다. 얘기해 보니까 호칭어가 아주 많은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한국 사람은 뭐든 지 다 빨리 하는 것 같다. 밥도 빨리 먹고, 운전도 빨리 하고 일도 빨리 하는 것이다. 처음에 회사에 들어 왔을 때는 한국 사람들이 그렇게 일을 빨리 하는 것을 몰라서 정말 힘들었다. 일을 하는 동안 우리를 직접 관리하시는 부장님께서 옆에서 빨리 해라 라고 하시며 재촉했기 때문에 너무 피곤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한국에서 오랫동안 살다 보니 이제는 한국문화가 익숙해져서 즐겁게 살고 있다. 여러분도 외국에 나가서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면 얼마나 힘든지 아시죠? 나는 지금은 한국음식이 맛있어서 즐겨 먹지만 처음에는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 거의 못 먹었다. 왜냐하면 한국음식은 아주 맵기 때문 이다. 한국 사람들은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것 같다. 김치, 떡볶이, 닭갈비, 매운탕 등 매운 음식은 중류가 아주 많다. 왜 그렇게 한국 사람은 매운 음식을 잘 먹느냐고 물어 봤더니 한국 날씨가 너무 추워서 매운 음식을 먹으면 몸이 뜨거워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못 먹어서 많이 고생 했는데 한국에서 산 지 벌써 5년이나 되어서 지금은 매운 음식을 아주 잘 먹는다. 내가 좋아하는 매운 음식으로 김치가 있다. 김치는 배추, 고춧 가루, 양념 등으로 만드는데 간단한 재료로 만들지만 건강에 좋다고 해서 즐겨 먹는다. 한국 음식은 대부분 맵지만 맵지 않은 맛있는 음식도 있다. 그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이 바로 청국장이다. 청국장은 된장으로 만드는 한국에 온 외국인들은 문화나 음식 때문에도 생활하기 힘들지만 가장 힘든 것은 한국말로 대화하는 것이다. 한국에 살면서 한국말을 못 하면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아무리 말을 하고 싶어도 말을 못 하거나 하더라도 잘 못해서 답답한 경우가 아주 많다. 지금은 한국에 오려면 노동자들이 한국말 자격증을 따야 하는데 몇 년 전에는 나처럼 자격증이 없어도 한국에 올 수 있었다. 내가 한국에 오기 전 베트남에서 2주일 동안 한국말을 배웠는데 안녕하십니까?, 네, 몰라요 밖에 몰랐다. 그래서 회사에서 일을 할 때도 생활을 하기가 정말 힘들었다. 처음에 회사에서 일을 할 때에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다 배워야 되는데 한국말이 서툴러서 아무리 설명해도 알아듣지 못하거나 잘 못 알아들은 경우가 많았다. 알아들을 수 없으니 아는 사람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 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실수한 것이 많았다. 일을 잘 하면 괜찮지만 실수하거나 불량품이 생기면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자신 때문에 불량품이 생기거나 자기가 잘못하면 물론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하지만 잘 했는데도 다른 것 때문에 불량품이 생겼을 때에는 어떻게 관리자에게 설명 해야 되는지,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고 하고 싶어도 설명하지 못 했다. 나처럼 이러한 일을 겪은 외국인들이 많은 것 같다. 그리고 처음에는 한국 38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나의 한국 생활 39

말을 모르니까 외국 사람에게 힘든 일이나 위험한 일을 시키곤 했다. 힘든 일이나 위험한 일을 했는데도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거나 늦게 받은 사람이 많지만 사장님께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 싸우거나 일을 고의로 그만두는 일이 자주 생기기도 한다. 회사에 처음 들어왔을 때에는 야근을 하는 작업자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 사장님은 나에게 계속 야근을 하라고 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몇 개월 동안 야간작업을 계속 하게 됐다. 야간에 일할 때는 함께 일을 하는 베트남 친구도 없고 중국사람 몇 명하고 한국사람 몇 명만 있었다. 그 때는 한국 말이 서툴러서 동료와 같이 얘기할 수도 없고 베트남 친구랑 모국어로 얘기할 수도 없어서 정말 괴롭고 외로웠다. 그때는 가족이 떠올라서 향수 병이 걸렸다. 일을 계속해서 말을 할 수가 없어서 벙어리가 되는 줄 알았다. 야간작업을 계속했고, 드디어 월급을 받는 날이 왔다. 월급을 받았는데 깜짝 놀랐다. 이보다 더 많이 받아야 하는데 왜 그렇게 적게 받았는지 이해가 안됐다. 사장님께 여쭤보고 다시 말하려고 했는데 한국말을 못 해서 한참을 지나서야 설명했다. 설명을 듣던 사장님이 알아듣고 자기가 잘못 계산한 것을 알아서 다시 돌려줄 거라고 하였다.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우리 기숙사에 인터넷이 있어서 처음에는 인터넷 으로 한국말을 배웠다. 베트남 사람을 위해서 한국생활을 하면서 필요한 것을 알려주기 위해 만든 홈페이지를 통해 한국말을 배울 수 있었고 한국 문화나 한국 생활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일단 쉬운 것을 배우고 모르는 것은 포럼에서 찾아보기도 하고 한국 사람에게 묻기도 했다. 열심히 배웠더니 한국어 실력이 어느 정도 늘어났다. 또 홈페이지를 통해서 주말 마다 한국어를 무료로 가르쳐 주는 한국외국인력지원센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주말에 거기에 가서 공부하기로 결정했다. 들뜬 마음으로 기다렸다가 드디어 그날이 왔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또 걸어가는데 한 시간 반이 넘게 걸렸다. 거기에 가 봤더니 한국말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에 대해 모국어로 상담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다행이 그날이 개강이라서 수업을 신청하고 시험을 보고 나서 나에게 맞는 수업을 들었다. 2시간 동안 공부하고 나서 센터에 온 베트남 친구들과 얘기해보니 여기에 베트남 동호회가 있다고 하여 그 동호회에 참가했다. 평일에 회사에서 일을 하고, 주말마다 친구를 만나는 대신에 친구 에게 같이 센터에 가서 공부하자고 했다. 지금까지 거기에서 공부한 지 벌써 3년이나 됐는데 친절하고 잘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들 덕분에 한국어 일을 할 때뿐만 아니라 생활을 할 때도 한국말을 모르니까 한국생활을 하면서 실수한 적이 많이 있었다. 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 아파서 약국에 갔는데 증상을 잘못 설명해서 약을 잘못 사기도 했다. 그래서 한국말을 공부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꼭 배워야겠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공부 실력이 점차 좋아졌다. 인터넷으로 공부하기도 하고 주말에 센터에 가서 공부하기도 하고 모르는 단어를 당할 때마다 가지고 다니는 수첩에다가 메모한 다음에 꼭 사전에서 찾거나 아는 한국 사람이나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께 여쭤 보았다. 처음에는 한국말을 잘하지 못했지만 열심히 공부 40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나의 한국 생활 41

해서 지금은 어느 정도 한국 사람과 함께 편하게 얘기하는 편이다. 한국 어를 이해할 수 있어서 생활을 하면서 당하는 어려운 일을 극복할 수 있고 그래서 재미있고 보람이 있다. 한국말을 잘하는 것은 자기에게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도와 줄 수도 있다. 얼마 전에 아는 동생이 사장님과 말다툼을 하는 일이 있었다.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월급 때문에 사장님과 갈등이 생겼다고 했다. 자세히 알아보니까 이번 달부터 노동법에 따라서 기본 월급이 올랐 는데 사장님이 전에 계산하던 것에 따라 계산했기 때문에 월급을 잘못 주셨다. 사장님이 잘못 계산했지만 동생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몰라서 오해가 생겼다. 그래서 내가 동생의 사장님께 다시 설명해 주자 설명을 알아들은 사장님이 아! 내가 잘못 했구나! 라고 하면서 다시 계산해주기로 약속했다. 동생을 도와 줄 수 있어서 기뻤다. 하지만 알아듣는 사장님이 있는 반면 설명해도 모르는 척하는 사장님도 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차라리 도와주는 외국인력지원센터에 부탁하는 것이 더 낫다. 또 아무리 한국어를 공부하고 싶어도 못 하는 사람이 많다. 왜냐하면 배울 데가 없기 때문이다. 알아보니까 도시는 괜찮지만 시골이나 먼 지방에 가면 한국어를 가르치는 곳이 거의 없다고 한다.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 위해서 내가 다니는 센터 같은 곳이 더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한국말을 배우는 것을 통해 한국 문화도 알고 생활도 어려운 점이 없어져서 정말 좋았다. 하지만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더 어렵다. 평일에는 회사에서 일을 하고 주말에는 한국어를 공부하러 센터에 간다. 시간이 참 빠르다. 한국에 온 날부터 3년이 지나 노동계약이 끝나고 베트남으로 돌아갔다가 1달 후 다시 한국에 왔다. 돌아가기 전날 몇 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한 식구들과 친척들을 다시 만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들떴다. 그래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한국에 다시 와서 그대로 다니고 있던 회사에서 일을 했는데, 최근 1년 전에 나는 회사를 옮겼다. 모두 알다시피 그때 세계적으로 경기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망하거나 일자리가 적어진 회사가 많았다. 예외 없이 내가 다니고 있었던 회사도 이런 위기를 겪고 있었다. 회사를 살리기 위해 우리 사장님이 여러 방법을 쓰셨다. 그 한 방편으로 2교대를 하는 대신 3교대로 하라고 시키셨다. 2교대에서 3교대로 바뀌면 우리 생활이 바뀔 뿐만 아니라 근무시간도 줄게 된다. 그래서 우리 외국인들이 심하게 반대하고 설명했는데 소용없었다. 어쩔 수 없이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정 했다. 경기가 안 좋기 때문에 사람을 뽑는 회사보다 일자리를 찾는 사람이 더 많아 취직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다 라는 말처럼 취직하기가 어려웠다. 일자리를 계속 찾았는데 3주일 넘어서야 겨우 새로운 일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한 날은 매우 힘들었다. 왜냐하면 새 일은 머시닝 센터라고 부르는데 전에 하던 일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계속하다 보니 더 재미있고 더 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회사에서 작업을 하는 동안 여유가 생기면 일에 대한 책을 읽었고, 물론 모르는 것이 훨씬 많지만 모르는 것이 생기면 아는 사람에게 자세히 물어 봤다. 책을 읽고 나서 하니까 3개월 만에 간단한 쉬운 제품을 만들 42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나의 한국 생활 43

수 있었다. 여러 번 새로운 제품을 세팅을 하느라고 밤늦게까지 기계와 장려작 씨름을 했다. 열심히 해서 지금은 어려운 제품도 만들 수 있다.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기술을 잘 배우고 한국말을 잘해서 한 팀을 관리하게 됐다. 힘든 일이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서 열심히 했다. 또 지금 하고 있는 내일은 해가 뜬다 기술을 배워서 베트남에 가면 도움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도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배우면 배울수록 모르는 것이 많았다. 게다가 어려운 것도 많이 생겼다. 귀국하기 전까지 한국어도 더 배워야 되고 기술도 더 배워야 되는데 한국에 살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걱정된다. 나처럼 한국말과 기술을 배우고 싶은 사람이 한국에 더 체류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명, 중국동포 현재는 평일에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기술을 배우고, 주말에 한국어를 공부하러 센터에 간다. 내년 5월까지 체류할 수 있는데 남은 시간 동안에 잘 배우려는 목표를 세웠다. 힘들지만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손님 여러분 잠시 후면 목적지인 김포공항에 도착하겠습니다. 레이 디스앤젠틀맨~. 이어서 쇠 깎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비행기가 사뿐하게 비행장에 착륙하였다. 입국심사대를 거쳐 검정가죽잠바에 스포츠머리를 한 앳된 얼굴의 남자가 한손에 쇼핑백을 들고 들뜬 표정으로 출구 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이것이 12년 전 처음 한국 올 때의 나의 모습이다. 막 짐 가지러 가려던 참에 송아지만한 셰퍼트 한 마리가 옆에 붙어서 마구 씩씩거린다. 옆에는 사복을 입은 경찰같이 보이는 두 사람이 있었다. 쇼핑백에 있는 우황 청심환이 문제인 것 같았다. 손님, 손에들고있는거잠시보여주실수 있어요? 말투가 아주 정중했다. 일일이 칼로 다 까보고서야 안심인 듯 거수 44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내일은 해가 뜬다 45

경례와 함께 보내줬다. 밖에는 음침한 날씨에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연수생으로서 나는 경기도 화성시 어느 시골에 위치한 인타르시아 라는 양말 공장에 배정되었다. 우리를 처음 맞아준 분은 그 회사 대리 라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기억하는 그 양반의 한마디 한국에 오신 것을 계면쩍게 웃으면서 음료수 이름도 모르는지라 그냥 주인보고 냉장고에 있는 사이다모양의 병을 가리키며 저거 한 병 줘요. 했단다. 목이 타는 지라 뚜껑 열자마자 벌컥 벌컥 들이켰단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은 들었 지만 내색안내고 싹 비우고 나왔단다. 슈퍼주인의 표정이 상상이 된다, 얼마나 당황했을까?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월급은 당시 대한민국 일반근로자 월급의 1/3 정도였다. 일이 고된 건 둘째치더라도 초라하기 그지없는 금액이었다. 20일 하고 그만두었다. 아니, 도망치듯 나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권 이며 모든 증빙서류는 달라고 할 엄두조차 못 내고(산업연수생이라 직장 이탈은 불법이기에) 서울로 올라왔다. 이일저일전전하다 얹혀사는 고향선배 도움으로 도로 공사일을 하게됐다. 때는한해중가장더운때라막노동을 한다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살인적인 더위에 노출되어 뜨거운 아스콘을 식기 전에 도로에 골고루 도포 하는 일이었다. 5센티가 넘는 작업화밑창이 녹아 내리는 판이었다. 중간에 쉴 수도 없는 상황, 아스콘이 식으면 더더욱 힘들어진다. 어느 날 중국에서 막 온 지 일주일 된 신참 한 명이 슈퍼 간다고 자리를 비우더니 한참만에야 나타났다. 반장님이 일은 안하고 어딜 싸돌아 다니냐? 신참 왈, 반장님, 파르스름한 병에 두꺼비그림이 그려져 있는 게 사이다 맞소? 반장님이 가까이 와서 냄새를 맡고 어메, 이눔이 술을 마셔부렸구마, 하긴 중국에선 소주가 술도 아니제, 그나저나 이 더운 날에 우짤려고? 환장허겠네 돌아서서 배꼽 잡으며 웃어댔다. 신참은 내가 스크린인쇄란 업종을 접할 때는 겨울철이라 도로공사일이 끊길 때쯤이었다. 용인의 한 문구제조 업체였다.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 아서 하면서 어깨너머로 슬쩍슬쩍 유심히 보았다. 일명 실크인쇄라고 하는 이 작업은 수작업이 대부분이다. 쓰이는 분야가 광범위한 만큼 고도의 테크닉을 요하는 작업이다. 화생방을 능가하는 화학약품냄새는 젊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직종이기도 했다. 그때 사부 말로는 이 업계에 기술자가 별로 없는 관계로 페이가 톡톡하단다. 그 말에 이거다 싶어서 틈만 나면 기술연마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당시 신설동에 자취했는 지라 용인까지 왕복 4시간거리였다. 별을 보면서 출근하고 달을 보면서 퇴근했던 나날들이였다. 2년쯤 하다가 어느 정도 됐다 싶어 무작정 퇴사를 했다. 인쇄분야에선 어디든지 저를 받아 줄 것만 같았지만 현실은 냉혹 했다. 경력도 짧지만 불법체류자란 꼬리표 때문에 쉽게 받아 주는 데가 없었다. 부지런히 벼룩시장을 뒤져서 겨우 취직 된 곳이 독산동의 통신 기기 제조업체였다. 실크인쇄기사로 취직이 된 것이다. 월급도 높고 작업양도 미안할 46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내일은 해가 뜬다 47

만큼 적었다. 참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쯤 6개월 봉급이 밀린 채 회사가 부도를 맞았다. 오늘, 내일하는 사장님의 감언이설에 약간의 생활 비만 받으며 버텨왔는데 불법체류자 신세라 어디 송사할 데도 없다. 막막한 느낌이 드는 때였다. 가슴이 답답할 때 한강둔치를 자주 찾아갔다. 오색찬란한 불빛을 머금으며 가지런히 놓여있는 저 다리들 밑으로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면 가슴이 한결 트인다. 난! 괜찬아! 다시 시작 하면돼~ 이 썩을놈아~ 주위시선에 아랑곳없이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자산을 모두 빼돌리고 얌체같이 부도를 낸 사장이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이민정(가명)이란 이름은 구청 산하에 외국인 노동자센터에서 나를 반갑게 맞아준 내 또래아가씨 이름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의 임금체불사실을 모두 털어놓았다. 별 기대를 안한 나와는 달리 상황을 꼼꼼하게 메모하더니 그 자리에서 업체사장한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묻는 것이었다. 사실 확인 뒤 몇 번을 호되게 전화독촉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작정하고 부도낸 사람인지라 별효과가 없었다. 이에 진정서를 작성하여 고소를 하면 어떠냐고 하길래 그러자고 했다. 자기가 직접 모든 서류를 작성하고 법원까지 같이 가주었다. 수속비용이 없다고 하자 서슴지 않고 사비를 털어 먼저 내주었다. 후에도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면서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이었다. 물심양면의 도움이였다, 눈물나게 고맙다는 말을 그때 쓰는 것이라고나 할까, 여하튼 중국에서는 참으로 보기 힘든 대목 이다. 무보수로 생면부지의 이방인 을 도와 자국민을 고소한다는 것은 투철한 사명감과 굳건한 원칙주의 그리고 약자를 도와야한다는 착한 마음가짐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결과적으로는 약간의 위로금만 받았지만 지금도 그 생각하면 떼인 돈보다 그 아가씨의 도움이 더 기억에 남아 가슴이 훈훈하다. 불법체류자란 꼬리표 때문에 한 직장에서 오래 일할 수가 없었다. 덕분에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다. 중국어가 되다보니 여행사에 사진사로 쫓아다녔는데, 그 코스 중에 청와대가 있는 것이었다. 불법체류자이다 보니 헌병들의 의례적인 검문에 항상 마음을 졸여야 했고, 지하철역에서 노점을 하면 단속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건설일도 종류별로 다해 봤다. 본직인 스크린인쇄도 입사와 퇴사를 반복했다. 굳이 한 가지 좋은 점을 꼽자면 실크인쇄가 워낙 분야가 많다보니 한군데서만 일한 사람 보다 여러 집을 전전한 나의 실무경험이 풍부해진 것이다. 30년 경력의 선배들과도 경험교류가 가능할 지경이다. 그러다가 한국에서 고향아가씨를 만나 결혼을 하고 귀여운 딸까지 태어났다. 그럴 때쯤 법무부에서 불법체류자 자진신고제가 발부되었다. 항간에서는 믿지 못할 법령이라고 했지만 나와 아내는 지체 없이 7년의 불체생활을 끝내고 귀국을 서둘렀다. 마음한구석은 들떠있었다. 대한 민국 만세! 라도 외치고 싶었다. 재입국 후 남양주의 가방무역업체에 취직이 됐다. 사장님이 중국에 가방제조공장을 두고 한국으로 수입해 도소매하는 직원 열 댓 명의 작은 업체다. 당시는 회사에 인쇄부서가 없어서 전부 하청으로 돌리고 있었다. 나를 영입한 것은 인쇄 업무를 자체적으로 소화를 하려는 목적에서였다. 48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내일은 해가 뜬다 49

출근 첫날 사장님이 남양주 진건읍의 어느 큰 창고로 데리고 갔다. 100평, 80평짜리 두 동이었다. 나의 일터라는 것이었다. 일꾼은 나 하나, 창고에는 수입한 가방들로 꽉차있었다, 창고 안에 허름한 컨테이너 박스 하나, 그 안에 책상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나의 작업실인 셈이었다. 설비, 재료 전무한 상태였다. 사장님은 3일 후 출고할 인쇄시방서 몇 장만 남겨놓고 휑하니 가버렸다. 회사에서 받은 첫 인쇄 작업이니만큼 납품 기일을 못 맞추면 결과는 상상이 안 됐다. 사장님의 일종의 테스트 같기도 했다. 나는 그 길로 을지로 재료상가로 달려갔다, 세심하게 준비한 리스트 3명이 할 일을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며 다 했는데 왜 그러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때 그 나날들은 혼신의 힘을 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출퇴근 할 때도 머릿속엔 온통 업무내용뿐이다. 고진감래 라고 6개월 만에 파격적으로 과장으로 승진하고 월급도 전에 하고 비교 되지 않을 정도로 올랐다. 열심히 한 것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렇게 모든 열정을 쏟아 부으니 운도 따라오나 보다, 중국 베이징에 사놓은 상가하고 아파트가 천정부지로 값이 뛰어버린 것이다. 살 때만 해도 별 볼 일 없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아내 얼굴이 매일 싱글벙글한다. 지금은한채더사자고난리다. 대로 최소한의 비용으로 작업에 필요한 설비, 도료들을 하나하나 구입 했다. 전에 하던 작업하고 다르다 보니 막히는 데가 많았다. 재료상 사장님 들한테 겸손하게 여쭤보고, 아는 선배님들한테 귀찮다 싶을 정도로 전화문의를 했다. 창고로 돌아오자마자 팔을 걷어붙이고 구석구석 깨끗이 청소를 했다. 나서 이리저리 뒤엉켜 있는 가방박스들을 칼라별로 넘버별로 차곡 차곡 한눈에 찾을 수 있게끔 정리정돈을 했다. 속속들이 도착한 설비들을 작업편리성을 고려하면 설치했다. 점심 같은 건 먹을 생각조차 없었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밤을 새다시피 하며 인쇄테스트를 했다. 인터넷에서 모든 작업에 관한 자료들을 일일이 체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삼 일째 되던 날 깔끔하게 완제품에 인쇄된 가방들이 곱게 포장되어 택배차에 실릴 때, 지켜보던 사장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어렸다. 최소한 이쯤 되면 나의 이야기도 해피엔딩으로 끝나야 하지만 어찌 12년의 한국생활을 이 몇 장으로 다 쓸 수 있단 말인가. 이방인이라고 무시한다고 해서 흠씬 두들겨 패고 치료비 물어준 일이며, 지하철에서 검문당해서 도망간 일들이며, 사장님 하고 중국 출장 갔다가 협상대표들하고 대판 싸운 일들이며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용기를 잃지 않고 자신감을 가지고 끈기 있게 도전한 매 한순간들이 그나마 지금 나의 아주 작은 성과를 이루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나의 시각에서 본 대한민국은 단일민족의 특성이라고 할까?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까? 자기하고 다른 모습이나 언어, 행동을 하는 사람을 배척하고 경계하는 경향이 있다. 근래에 이주노동자들이 부쩍 늘어난 상황이다. 그중에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오는 이들이 적지 않다. 대한민국 50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내일은 해가 뜬다 51

아름다운 도시건설에는 이들이 역군이라도 과언이 아니다, 주위에 이런 사람들이 약간 이해 안 되는 말이나 행동을 하더라도 문화차이라 생각 하고 너그럽게 봐주고 수용해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한국에 계신 동포들, 이주노동자 여러분 지금껏 내가 봐온 내 마음의 틈새를 찾아 대한민국은 극히 인간미가 넘치고 근면한 사람들이 주류다. 약간의 차별 처우를 한다고 무작정 불평, 불만을 늘어놓을 것이 아니라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꾸준히 자신을 업그레이드시키며 예의바르게 행동하면 분명히 대우가 달라질 것이다. 세상을 원망하기 전에 자신부터 돌아 보라 는 말같이 말이다. 류일복, 중국동포 지치고 힘들어도 올바른 소신을 갖고 당당하게 모든 고난들과 맞서 라고 말하고 싶다. 왜? 내일의 태양은 분명히 찬란하게 떠오르기 때문 이다. 드디어 구멍 이 내 근시안에 잡히기 시작했다. 바늘귀보다 더 가는 틈새로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것은 내가 GP(검사조)로 편입된 지 꼭 일주일만이였다. 처음에 나는 내 근시안 때문에 틈새를 찾아내지 못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안경을 바꿔 써보기도 하고 틈새 가까이 눈을 대고 크게 뜨고 들여다보기도 했다. 1년 선배인 한국 아줌마는 척척 잘도 찾아냈다. 나는 어깨너머로 아무리 봐도 보이지 않는데, 그녀는 내게 안보여, 안보이냐고 하면서 계속해서 들이대며 물었고 그 얼굴에는 피곤해 하는 기색이 역력 했다. 그 틈새 찾기는 내가 GP일을 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였다. 그 기본 과정을 마쳐야만 나는 본격적으로 합격품을 선별하는 작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52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내 마음의 틈새를 찾아 53

그 때문에 내 마음은 조급해져만 갔고 그 불빛을 찾아내려고 무작정 헤맸던 것 같다. 불빛, 아니 그것은 불빛이 아니었다. 서광을 향한 내 마음의 밝음이었다. 인내와 정성으로 착실하게 일에 임하지 않으면 캄캄한 어둠뿐이라는 마음가짐을 가지게 된 것은 내가 틈새로 하얀 빛을 발견하고 부터였다. 그 때 비로소 나는 내 마음이 일터에 적응하려 힘쓰고 참답게 일하려는 자세를 갖게 된 것 같아 어깨가 으쓱해졌고 또 뿌듯했다. 처음 내가 이 검사 조로 건너올 때 다들 나를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직접 기계를 만지는 일도 아니고, 무거운 짐을 나르는 것도 아니고, 다 완성된 제품을 확인만 하는 비교적 쉬운 작업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실제로 겪어보지 않았기에 모르고 하는 이야기들이었다. 수많은 각각의 제품들이 우리 손을 거쳐나가야 했고, 또 그 모든 제품들이 우리 검사 조를 거쳐나가야 한다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었다. 만 개 생산 자랑 말고 한 개 불량 방지하자 는 큰 표어가 공장 실내 바로 정면에 압도적으로 붙어있다. 불량품이 하나라도 빠져나가게 되면 나 한사람이 야단맞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회사의 이미지 추락과 더불어 용접의 노력이 없이는 틈새가 생길 수밖에 없기에 실수를 줄이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틈새는 결코 반갑지 않다. 회사의 손실이 커지기 때문에, 불량 하나라도 줄이기 위해 회사는 매주 불량 방지 장려책으로 사원들을 격려하기도 한다. 브레이크 불량품은 마지막 흐름 단계인 우리 검사조의 마술 부리는 손놀림을 피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지 못한다. 하나하나 완제품 박스에 집어넣다 말고 미심쩍어 불량품을 다시 집어 낼 때 나는 섬뜩함을 느끼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대로 차바퀴에 장치한다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사고를 불러올지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는 일이다. 일본의 도요타도 고장 난 브레이크 때문에 한 때 커다란 물의를 빚지 않았던가. 사람의 마음자세가 불량이면 그 사람이 만드는 제품도 불량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는 GP로서 불량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의 마음가짐에 달려있고 생각한다. 맡겨진 일에 책임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 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흠 없는 완제품과 정품만 있게 될 것이고, 그는 기필코 아름다운 서광의 빛을 맞이하게 되리라. 큰 손실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견고한 둑의 작은 틈새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메우지 않고 방심하다가 홍수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면 더 큰 비용과 수고가 드는 것처럼 불량품 하나가 가져오는 부작용은 상당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층 한 층 쌓아 가는 노력 없이 아파트가 완성될 수 없고, 불에 태우고 녹이고 지지는 중국 한글 신문사에 다닐 때 나도 현대차를 운전해본 적이 있다. 그 때는 한국인들이 왜 그토록 현대차에 애정을 가지는지 미심쩍게 생각 했었는데, 한국에 와서야 그 궁금증이 풀렸다. 차 기능보다 더 우선시 되었던 바로 향토애 덕분이었다. 54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내 마음의 틈새를 찾아 55

오늘에 이르러 내가 현대차 로고가 새겨진 브레이크를 생산하는 회사에서 근무하게 되니 벅찬 감동을 느낀다. 가정 살림을 윤택하게 하고 또 영화 속 에서나 볼 수 있는 멋진 차를 사기 위해 한국에 일하러 건너 왔는데, 운 좋게도 첫 직장이 현대그룹 계열사 회사라니.. 중국에서는 사무실 책상에 앉아 키보드나 두드리고 영업취재나 다니면서 월급을 바라고 시간을 때웠던 내가 비록 규율은 엄하지만, 일한 만큼 알찬 소득을 거둘 수 있는 회사에서 일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없다. 그 나라에 가면 그 나라에 조장님은 한국생활이 나한테 참 맞는 모양이야. 하시며 흐뭇한 미소를 짓기도 한다. 반달 같은 브레이크에 검사했다는 하얀 점을 찍으면 영락없이 눈을 그려 넣은 물고기모양 같다는 생각을 한다. 행복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보이지 않던 틈새의 점과 선을 찾아내면 서부터 매일 만지고 나르는 딱딱한 철 부품도 싱싱하게 살아 움직이는 물고기 같다는 생각을 하는 나처럼, 당신도 어디서든지 신나게 일하는 노동의 맛을 뿌듯하게 느끼게 될 때 비로소 삶이 즐겁고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는 일이 가능해질 것이다. 맞는 노래를 부르라는 말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편한 중국 기자 생활을 버리고 왜 한국에 와서 이 고생을 사서 하냐며 이상하다는 듯 질문을 던진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 같이 10시간 이상 서서 일하는 것이 장난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나는 고생스러운 것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 당당하다. 이 직장이 어떻습니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현장 일을 통해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삶을 살게 되니 좋고, 일하면 일한 대로 거둘 수 있는 것도 정말 뿌듯한 일입니다. 하고 대답한다. 더더욱 기쁜 것은 즐거운 마음으로 일에 임하니 한국에서 만난 고향 친구나 친척들이 내 얼굴색이 많이 좋아졌다고 말하는 것이다. 소화 불량으로 늘 배가 더부룩했었는데, 더는 약 신세를 지지 않으며, 환절기만 되면 종아리 부분에 심했던 가려움증이 말끔히 사라진 것이다. 우리 56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내 마음의 틈새를 찾아 57

풍족한 나라로 알려져 있고, 한국은 5000년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온 국가 라고 알고 있으며, 우리나라보다 경제 문화적으로 발전하여 보다 많은 희망의 천국을 찾아서 것을 배울 수 있고, 무엇보다도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나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아무리 좋은 취업을 해도 월 15~20만원(하루 8시간 근무 기준)정도를 버는 데 비해 한국에서는 월 100~150만원의 월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한국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아내의 패물을 팔아서 한국에 나갈 비행기 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두 달 동안 학원을 다니면서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어 시험에 응시하고 합격하여 사르진, 스리랑카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스리랑카에서 한국에 취업하러 온 사르진이라고 합니다. 나이는 32살입니다. 가족관계는 결혼해서 아들 둘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 경상남도 김해시 안동에 있는 일흥금속이라는 회사에서 4년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자동차 부품과 압력 밥솥 뚜껑을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기공사 일을 했었는데, 쓰나미 가 발생하고 나서, 일자리도 없어졌고, 국가적으로도 내전 상태가 심각해져서 이웃 동네에 가기도 두려웠습니다. 또한 반군들이 젊은 사람을 납치하기 때문에 더더욱 두려웠습니다. 그리하여 가정형편이 갈수록 나빠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외국에 가서 돈을 벌겠다고 결정했습니다. 어디로 갈지 고민하다가 한국이라는 나라를 선택했습니다. 제가 취업을 하기 위해 한국을 선택한 이유는 서남아 및 동남아 국가에 있는 젊은 사람들에게 한국은 잘 살고 그 후 저는 코리안 드림을 마음에 품고, 지난 2006년 9월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한국에서 도착해서 보니, 우리나라 후배들 8명이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한국인들과 의사소통이 잘되지 않아서 많이 불편했습니다. 한국 분들이 쓰는 말을 이해를 못하였습니다. 제가 온 곳은 경상도 사투리 쓰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표준어만을 공부했던 저에게는 사투리가 이해되지 않았고, 그래서 일요일마다 시내에 있는 외국인 쉼터의 한글교실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사투리도 배웠 습니다. 한국어 단어 하나하나씩 배워서 알게 되는 재미와 그 행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젓가락 쓰는 문화도 생소하였지만 배우게 되었습니다. 또 방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청결 문화도 배웠습니다. 그런데 저의 종교는 이슬람교라서 입에 맞는 할랄 음식(이슬람 율법에 따라 58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희망의 천국을 찾아서 59

도살 조리된 육류 음식)도 없어서 저는 생선과 야채를 직접 찾아서 먹게 되었습니다. 한국 음식 중에서 된장찌개, 김치, 특히 라면을 먹을 때는 김치가 없으면 허전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한국인의 입맛을 나도 모르게 따라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의 생활이 더욱 익숙해질수록 한편으로는 자꾸 집이 그립고 엄마도 보고 싶고, 아내와 아들도 보고 싶어졌습니다. 하루에 5~6번 전화를 하면서 많이 울기도 했습니다. 처음 와서 6개월 동안은 참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러다 나름대로 공부가 잘 되어서 3개월째부터는 의사소통도 쉬워 졌고, 여러 가지 도움을 받게 되고, 회사에 있는 동료들과도 친밀해졌습 니다. 회사 영업부 기사님들과의 관계가 좋아져서 농담을 하기도 하고, 속마음도 많이 알게 되었고, 제 고민도 많이 들어 주었습니다. 특히 몸이 많이 아플 때 약을 사주었던 동료 한국인 아주머니가 너무나 고마웠고, 명절날 음식을 챙겨준 식당 아주머니들의 따뜻한 배려에 감사했습니다. 피부색이 달라도 친구가 될 수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한국에 와서 처음 배웠던 말은 안녕하세요. 와 한국인들에게 꼬리표처럼 붙어 다니는 빨리빨리 라는 말이었습니다. 또 가장 신기했던 말은 밥 먹었어? 라는 인사입니다. 밥 먹는 시늉까지 하며 이 말을 건네는 한국인 동료들을 보며, 저는 한국인들은 밥이 그렇게 좋은가?, 혹시 나한테 밥 사달라는 내 생활을 걱정해 주는 이 말이 세계에서 가장 멋진 인사말이라고 생각 합니다. 처음에 한글을 배우기 전에는 한국 사람들이 외국인 또는 다른 나라 문화에 대한 이해심이 부족하다고 느꼈는데, 한국에서 계속 생활 하면서 제 생각이 짧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인은 따뜻하며, 정이 많고, 친절하고 남을 배려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쁘고, 슬픈 일을 신명나는 노래 한 가락으로 풀어버리는 민족인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한국은 4계절이 뚜렷하여, 계절마다 변하는 자연의 모습에 많은 감동을 느낍니다. 예를 들어 우리 뒷산인 김해 신어산 은 봄에는 노란빛, 여름에는 초록빛, 가을에는 붉은빛, 겨울에는 하얀빛 이렇게 네 가지 빛을 느끼면서 한국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지나 어느덧 1년이 지나 한국에 왔을 때 들었던 비용을 다 갚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번 돈은 내가 우리나라에 가져가야할 돈이라 생각 하고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함부로 돈을 쓰지 않았으며, 부지런히 모았 습니다. 다른 동료들은 기분이 좋다, 혹은 집이 그립다는 이유로 술도 마시고, 여자도 사귀었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가끔 한 번씩은 동료들과 같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고 파티도 합니다. 파티를 하다가 스리랑카 노래를 부르면서 함께 어울려져 추는 춤은 타국에 있다는 외로움을 잠시나마 잊게 합니다. 뜻인가 하면서 궁금해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어가 바로 그 인사말입니다. 저는 식사를 할 수 있었는지 제 몸을 걱정해 주고, 배고파서 힘든 건 아닌지 걱정해 주고, 매일 제대로 먹고 있는지, 그렇게 2년이 지나서 지금은 우리나라에 집도 사고, 땅도 사게 되었 습니다. 지금 생각해 봐도 무척 뿌듯함을 느낍니다. 그러다 한국에 온 지 60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희망의 천국을 찾아서 61

3년이 되었고, 회사에서 계약한 기간이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부지런하고, 성실한 모습을 좋게 여겨 회사와 다시 연장 계약을 하였습 니다. 또다시 3년 동안 더 일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습니다. 재계약 전에 3달 동안 휴가를 받고 우리나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보고 싶었던 부모님, 아내, 자식을 보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가족 들은 제가 살이 많이 빠졌다고 고생이 많다고 하며, 다시 한국에 가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하지만 난 가족을 위해서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모처럼 나를 생각해준 가족을 위해서 국내 열심히 일하면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최선을 다하고 있는 한국 분들을 위해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주고 싶습니다. 제가 받은 배려와 친절을 갚을 수 있게 말입니다. 제가 한국을 떠나서도 제2의 고향인 한국을 응원하고, 한국을 널리 알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한국인들도 저와 같은 외국인 들에게 한걸음만 다가와 관심과 배려를 가져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의 작은 소망이 있다면, 앞전에 일어났던 천안함 사건 과 연평도 교전 같은 분쟁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남과 북이 평화스럽게 통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제가 우리나라에 휴가 왔을 때는 내전이 끝났기 때문에 국내 여행을 자유롭게 다녀 올 수가 있었습니다. 좋아하는 가족 항상 대한민국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스리랑카인 사르진 들을 보고 나도 무척 기분이 좋았습니다. 휴가기간 3개월도 다 끝나고 한국 대사관에 가서 재입국 허가(비자)를 받고, 아쉬워하는 가족들을 남겨두고 저는 한국에 다시 들어왔습니다. 이제는 한국말도 많이 유창해져서 타 회사에 다니는 스리랑카 친구 들의 어려움을 많이 도와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몸이 몹시 아픈데 표현을 못하는 친구를 위해 병원에 가서 의사 선생님께 통역도 해드리고, 치료를 위한 방법들을 가르쳐 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경찰서에 가서도 스리랑카 친구들이 문제가 있을 때 통역을 해주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거의 한 달에 두세 번쯤 통역을 해달라는 전화가 오곤 합니다. 앞으로 2년이라는 기간이 남았는데, 남은 기간 동안 하고 싶은 일은 62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희망의 천국을 찾아서 63

이방인 이었습니다. 처음 맛보게 되는 식사에서, 우리는 모든 한국음식들과 함께 처음 대한민국, 꿈이 실현되는 곳 으로 김치 를 맛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처음에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김치 역시 우리가 매일 먹는 식사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한국말은 거의 알지 못하는 채로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고용주 및 상사, 특히 우리의 동료들과 소통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이들 역시 우리와 소통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을 바투란 마 토네트, 필리핀 겪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보디랭귀지가 서로를 이해하는 데 일상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들과 매일 함께 지내면서 이들의 언어를 조금씩 내가 어렸을 때, 대한민국은 단지 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꿈이 실현된다면 우리의 기도에 응답을 해주신 것이고 우리의 소망을 들어 주신 것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이 빠르게 진행되어 국가의 노동력을 지원하기 위해 외국으로부터 더 많은 근로자를 필요로 할 때에 드디어 기회가 왔습 니다. 젊은이들이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을 부양하기 위해 더 많은 수입을 바라게 됨에 따라, 우리는 주저 없이 그 기회를 잡고 전혀 다른 문화, 다른 언어, 다른 날씨, 다른 음식 그리고 그 밖에 많은 다른 점들을 가지고 있는 나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 수많은 차이점으로 인해, 우리가 처음 대한 민국에 첫 발을 내딛었을 때, 우리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들에게 완전한 알게 되기까지 매우 힘들었습니다. 물론 영어를 말할 수 있는 일부 한국인들도 있습니다. 적어도 자기 소개를 할 수 있는 만큼의 실력이 된다면 서로 이해하는 데에 매우 도움이 됩니다. 우리 중 일부는 친절하고 마음이 따뜻한 고용주와 동료들을 만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반면 일부는 잔인하고 매정한 고용주와 동료를 만나는 불운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상황에 당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 모두와 같이 한국인들도 모두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고용노동부와 산업인력공단에서 우리가 회사와 업무 분야 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과 문제들에 대해 많은 지원을 해주는 사실은 참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기후에 적응하는 것도 역시 우리에게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입니다. 64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대한민국,꿈이 실현되는 곳 65

겨울, 봄, 여름 및 가을의 4계절이 있어 우리들 중 대부분은 감기, 열, 독감과 같은 질병에 걸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또한 다행스러운 일은 정부 에서 국민과 국내 법적 근로자에게 제공해주는 의료보험 혜택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의료보험카드를 가지고 병원 및 모든 의료 기관에 제출을 하면, 병명이 무엇이든 한국인과 동일한 혜택을 받게 됩니다. 기후 변화로 인해 병에 걸리거나, 업무상으로 인해서도 그렇습니다. 또 가끔은 치료를 필요로 할 수 있는데, 의료보험은 항상 이에 유용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족들로부터 먼 한국에서 다른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같은 곳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제2의 가족이 됩니다. 물론 우리에게 친절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가 가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이해 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큰 위안이 됩니다. 또 이 분들께 우리가 집에서 멀리 떨어진 타국 에서 우리가 더 강해지고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 주셨던 것에 감사드립니다. 뿐만 아니라, 올해 대한민국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함께 외국인 노동자들이 미래에 근로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능력뿐만 그렇습니다. 우리는 고향에서 매우 먼 외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우리가 겪게 되는 고통과 어려움들을 잊고 하루에 8~12시간 동안 일합니다. 그 돈은 우리가 우리가족의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 쓸 돈입니다. 거의 매일밤 우리는 우리 가족과 우리가 얼마나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우리는 그들을 매우 그리워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눈물을 닦고 다시 웃습 니다. 우리가 흘리는 눈물과 땀방울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과 필수적인 것 등을 채워 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걸려오는 전화 한통과 행복한 목소 리를 들을 때면 우리의 외로움을 달래며 다시 일할 에너지를 얻습니다. 우리가 힘을 얻어 더욱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그들을 더 행복하게 해 주고자 하는 이유뿐입니다. 아니라 우리가 현재 일하고 있는 회사에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무료 직업 훈련을 시켜주는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더욱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학교를 그만두고 일을 하게 된 우리와 같은 노동자들에게 이것은 또 하나의 좋은 기회입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은 진실로 합법적 노동자들에게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들이 열려있는 곳입니다. 1953년 전쟁이 끝난 뒤 아무 것도 없던 땅에서 살아남아 우뚝 일어 선 이 나라와 그 국민들이 놀랍지 않습니까? 한국인들의 조국에 대한 애국심과 사랑이 이 나라를 다시 일으킨 핵심 요소인 것 같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을 보십시오. 그들이 지금 그들의 모습과 그 나라를 일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했는지 상상이 가시나요? 아마도 그것은 국민들이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데에 도움이 되로 결정한 데에 따른 결실임에 틀림없습 니다. 우리 중 거의 모두가 알다시피, 대한민국은 가장 발전된 기술이 66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대한민국,꿈이 실현되는 곳 67

들어온 국가들 중 하나입니다. 이에 따라 그 제품 역시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이 매우 높습니다. 각 나라의 노동자들은 양적으로뿐만 아니라 제품의 품질에 대해서도 훈련을 받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나라의 경제와 기술을 세우는 데에 일부 공헌했다는 사실에 매우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하지만 현재 남한과 북한의 두 한국 사이에 전쟁의 기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꿈이 끝나게 될까요?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두려워서 고향으로 곧 가버릴 것인지 묻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결정해야 한다면 누군가에게는 농담으로 들릴 수도 있겠 지만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의 갈림길이 있습니다. 정부가 우리에게 무기를 나눠 준다면, 우리는 여기에 머물러 전쟁에 참여하고 우리가 매일 생활하며 눈물과 기쁨 아픔을 느꼈던 이 곳 한국을 위해 싸울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고향을 위해서도 말입니다. 우리가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또 다른 고향으로 여긴 이 곳, 우리의 제2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이 곳, 그리고 세상에 이렇게 외칠 것입니다. 꿈이 실현되는 곳, 한국이여 영원 하라. 68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대한민국,꿈이 실현되는 곳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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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작 외국인이 팀장인 우리공장 이병흥 저희 주식회사 명원테크 평택안중공장에는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중국, 필리핀에서 온 시급제 직원들이 10여명 있습니다. 올 2월 금융권 에서 근무하다 이곳 (주)명원테크 부사장으로 발령을 받아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현대. 기아자동차 협력회사라 자동차부품을 만들고 있어 대형프레스와 용접로봇들이 24시간 주야로 쿵쾅 쿵쾅 지지직~소리를 내면서 일을 하는데 일하는 직원들의 표정은 한국인 외국인 할 것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일을 하고 있더군요. 식사할 때도 그렇고 쉬는 시간에도 일을 할 때도 그렇고, 정말 일하는 로봇 같기만 했습니다. 그들 눈에는 제가 어려운 것도 있었겠지만, 하얀 얼굴에 말쑥한 모습이 자기네들하고는 다른 세계의 사람쯤으로 생각되어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던 한 달여쯤 인도네시아 외국인이 팀장인 우리공장 73

에서 온 도딕이란 친구와 제 차를 함께 타는 기회가 생겨 뜨문뜨문한 말투로 인사를 하고 서로에 대한 상투적인 말을 하게 되었답니다. 어디서 왔는지 몇 살인지 가족들은 몇 명인지 왜 한국에 오게 되었는지 그러던 중 전 그 친구의 눈빛에 잠깐 스치는 강렬한 빛을 보았습니다. 조금만 버티면 된다. 이 고생도 잠깐이면 된다. 라는 각오에 찬 눈빛을 말입니다. 그런 표정을 뒤로 한 채 서로의 길로 헤어지고 또 그렇게 무표정한 얼굴로 근무를 하던 그 친구를 보게 되었습니다. 정말 우리 회사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생기도 없고 그냥 1960년대 우리나라 공장의 직공들처럼 피곤에 지치고 저임금에 척박한 환경에서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와 반둥이란 도시에서 2년간 근무한 경험이 있는 저로선 그 나라의 현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친숙해 여기저기 뒹굴고 있는 기계들과 원자재들을 치우고 깨진 유리창들을 임시방편으로 비닐로 씌우고 납품물건들을 랩으로 다시 포장을 하고 겨우 납품차에 실어 보내고 나서야 한 숨을 돌리게 되었답니다. 아마 그 친구들이 오지 않았다면, 그냥 근무시간이 아니니까 잠을 청했다면 회사는 납품뿐만 아니라 태풍의 피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더 큰 피해를 보았을 것입니다. 정말 우스운 얘기지만 평소 내국인 노동자들과는 많은 대화와 회식자리를 가지면서 우의를 다졌지만 그날 달려온 내국인 노동자들은 단 한 명도 보이질 않았답니다. 마음 한 편이 씁쓸했습니다. 늦은 아침 식사를 하면서 그 친구들의 모습이 어찌나 고맙고 평소 내가 알고있는편견은온데간데없이사라지고 그 시간에 잠든 동료들을 모두 깨워서 공장으로 달려 와준 그 친구들이 정말 가족처럼 느껴졌답니다. 질려고 몇 차례 시도를 해 보았는데 그다지 큰 진전은 없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는 회식도 하고 소주도 같이 먹고 대화도 자주 그러던 몇 개월이 지난 9월 어느 날, 평택지역의 전기가 모두 정전이 되고 바람에 회사 지붕이 날아가고 공장 문들이 내동댕이쳐질 정도의 큰 태풍이 불어 왔습니다. 휴대폰 기지국마저 파손되어 통신도 두절되고 일반전화 역시 마비가 된 상태였습니다. 그 시간이 새벽 4시 정도였는데 비바람소리와 천둥소리에 놀라 깨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공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이미 공장엔 인도네시아 출신의 도딕, 수워노, 아리 스와 스리랑카 출신의 세나랏, 니산타, 사만다, 헤랏 등 외국인 노동자 들이 나와서 야간근무자들과 수습을 하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침까지 하게 되었는데 그 친구들이 왜 그렇게 말도 없고 표정도 무표정 하고 그랬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답니다. 그 이유는 첫 번째가 내국인들은 저희회사 직원이고 외국인들은 아웃소싱업체의 직원이다 보니 내국인들이 팀장을 하고 있어서 자기들은 항상 내국인 팀장의 눈치를 보면서 근무를 하다 보니 그런 표정을 가지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내국인 팀장은 내국인 직원들에겐 기술과 편의를 많이 제공하는 대신 외국인 직원들에겐 잡일과 허드렛일을 주로 시켰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팀장 눈에 벗어나면 더 힘든 근무를 한다고 합니다. 그 사연을 알게 되니 이건 아니 74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외국인이 팀장인 우리공장 75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맴 돌았답니다. 직책상으로 공장장, 생산부장, 품질부장, 각 팀장들이 있는 회사 조직에서 하루아침에 체계를 바꾸고 부사장이 공장 내부의 소소한 것까지 관여를 한다는 건 결코 쉽게만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낙하산처럼 등장한 부사장이 기존 회사구조를 마음대로 바꾼다면 반발이 생겨서 회사 운영에 지장을 줄 건 자명한 일이라 신중하게 생각하기로 하였습니다. 책임질 거냐 고 하길래 겁이 나서 그냥 있었는데 이러다가 회사에 큰일 나겠다 싶어 용기를 내서 저에게 온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도딕을 데리고 공장으로 가서 공장장에게 수리도구를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친구가 수리할 때까지 아무도 간섭하지 말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최대한 지원하고 도와주라고 강한 어조로 지시를 내렸습니다. 사실 나 역시 걱정도 되고 과연 그 실력이 될까 싶었지요. 일본으로 수리를 보내서 가지고 들어오면 중고로 팔아도 되고 다시 우리가 사용 그러던 중 공장 로봇용접라인에 원인 모를 고장이 나서 생산라인이 멈추게 되는 큰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생산부장도 품질부장도 라인의 팀장도 전혀 그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A/S를 불러 보았지만 일본 제품이고 수입회사 역시 부도가 나서 천상 다른 회사의 제품으로 새로 구입해야 하는데 그 시간도 2주 이상이 걸린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같은 자동차 부품회사 납품에 차질이 생기면 현대. 기아자동차의 생산에 큰 차질이 생겨서 계약서상 회사에 큰 손해가 오게 되는 절박한 상황이었 답니다. 회의의 회의를 거듭해도 또렷한 대안이 없는 탓에 고민을 하고 있는데 도딕이란 친구가 제방으로 들어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떠듬떠듬한 말투로 부사장님 제가 한 번 로봇 수리를 해보고 싶습니다. 라고 하면서 씨이익~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수줍게 웃는 게 아니겠습니까? 팀장한테 말했더니 더 고장이 나면 어떻게 할 거냐고, 해도 되는데 잘못 손댔다가 이도 저도 못한 상황이 발생하면 여간 난감한 상황이 아닐 거라 생각 했지만 그 친구를 처음 봤을 때의 강렬한 눈빛과 태풍이 몰아칠 때 그 친구의 애사심에 감동한 터라 고쳐보겠다는 수줍은 미소를 보니 저 친구는 뭔가 할 수 있겠다고 믿음이 있었습니다. 한 시간 두 시간 시간이 흐르고 오전에 시작한 수리는 저녁이 되어서도 끝나지가 않았습니다. 다른 직원들은 퇴근을 하고 난 내방에서 그 친구가 끝났다는 말을 듣고 싶어 저녁 12시가 넘도록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마 공장장이나 부장들 팀장들은 내가 한 행동에 어느 정도 반감이 있었을 겁니다. 20년, 30년 이 계통에서 기름밥 먹은 자기들도 못하는 걸 후진국의 젊은 사람이 그것도 잡일이나 하는 주제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부사장은 뭘 믿고 저러는 거냐고 말입니다. 공장장도 부장들도 모두 퇴근한 새벽 1시 난 조용히 공장을 들여 다보았습니다. 도면을 펼쳐들고 온 몸엔 땀을 흘리면서 골똘히 수리에 76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외국인이 팀장인 우리공장 77

몰두하는 도딕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집중을 하던지 내가 쳐다보는 것조차 모르고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난 방해 될까 싶어 조용히 내방으로 돌아 와서 서류를 보다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 내 옆에 있다는 느낌이 들어 눈을 떴는데 내 옆에는 얼굴에 땀과 얼룩 으로 범벅이 되어서 환~하게 웃고 있는 도딕이 서 있었습니다. 부사장님 무시하면 그 사람들이나 현지 사람들이나 서로에게 도움이 되질 않는 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외국인 100만 명 시대가 왔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을 이방인 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고 그 사람들과 어울려지고 동화 하면서 살아야 우리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 했으면 좋겠습니다. 다 고쳤어요. 얼마나 반가운 소리인지 나도 모르게 도딕을 힘껏 껴안고 빙글빙글 방안을 돌았습니다. 그리고 공장으로 가서 힘차게 소리를 내면서 작동을 하고 있는 로봇의 모습을 보았지요. 얼마나 감동이었는지 작업대기자들을 불러 생산라인을 가동시키고 도딕과 늦은 식사를 했지요. 다음날 회사는 발칵 뒤집혔지요. 공장장들과 부장들, 팀장들은 출근을 해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질 못하더군요. 어찌나 기분이 묘하던지 하마 터면 웃을 뻔 했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회사 전체 인사이동이 있었습니다. 저는 과감히 도딕을 팀장으로 추천을 하고 사장님께 결제를 받아 내서 발령을 했습니다. 정식 직원으로 말입니다. 도딕이 팀장을 맡은 다음부터 저희 회사 외국인 근로자들의 모습은 언제 그랬냐 싶게 환하게 웃고 다니고 생산성도 올라 가고 불량품도 현저하게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외국인과 내국인 들도 서로 얘기하고 회식하고 정말 이제는 내외국인 구별을 할 수 없을 만큼 한 가족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후진국 사람들이라고 편견을 가지고 78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외국인이 팀장인 우리공장 79

우수작 입구에서 큰소리로 말하며 90도인사를 하여 웃음을 안겨주기도 했었다. 우리 회사는 농산물을 재배하고 수확하는 곳입니다 진을 필두로 우리는 네팔과 태국, 몽골 등 여러 나라의 근로자를 신청하여 받게 되었다. 그들을 맞으려고 연수원으로 가서 데리고 올 때면 먼 타국으로 돈을 벌겠다고 부모와 형제, 가족을 떠나서 낯설고 생소한 이곳 까지 오게 된, 그들의 새로운 곳에 대한 두려움과 혼자 남겨진 외로 움이 그대로 전해져서 마음이 참 짠하니 아프기도 하였었다. 그래서 더욱 그들이 이곳에서의 생활에 적응을 잘 하여, 기간을 다 채우고 고국으로 이미화 돌아가길 누구보다도 더 원하고 원했었다. 저마다 개성들이 다 달라서 활달하고, 붙임성이 있는 아이들은 그래도 우리 회사는 농산물을 재배하고 수확하며, 또한 수확한 농산물을 세척하여 포장, 공급하는 영농조합 법인이다. 일의 특성상 근무환경이 열악한 까닭에 한국인 근로자를 고용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운 실정이다. 처음 외국인 근로자를 신규로 신청하고 언어나, 문화가 달라서 적응을 잘 할 수 있을지 염려가 많이 되었다. 지금도 맨 처음 입국한 진을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우리와 인연을 맺게 된 진을 데리러 연수원을 갔을 때가 생각난다. 커다란 두 눈에 똘망똘망한 모습의 진은 베트남에서 온 아이였다. 나이가 갓 스물을 넘긴 앳된 모습이었지만, 후에 알게 되었지만 그때 벌써 임신한 부인이 있었다고 한다. 진은 성격이 무척 밝고, 활달하였다. 인사성도 어찌나 밝았던지, 점심을 먹으려고 들어간 식당에서 안녕하세요 라고 적응을 잘하는 편이었지만, 소심하고, 외로움을 많이 타는 아이들은 무척 이나 힘들어 하였다. 네팔에서 남자 한 사람과 여자 한 사람을 각각 신청 하여 받았었다. 여자아이는 다른 나라 사람들과도 곧 잘 친해지고, 적응을 하였는데, 남자아이는 너무 힘들어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집에 돌아가고 싶어서 우는 모습을 보며 함께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들 조차도 마음이 아파서 위로하고, 용기를 주었지만, 끝내 견디지 못하고 돌아가겠다고 우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애처로웠던지, 함께 근무했던 외국인 근로자들은 남의 일 같지가 않았던지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에게 십시일반 돈을 거두어 여비를 보태주었다는 소식을 나중에 전해 듣고 그들의 따스한 마음에 우리 자신이 부끄러웠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새롭게 들어오고, 또한 그렇게 다른 곳으로 가기도 하면서, 80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우리 회사는 농산물을 재배하고 수확하는 곳입니다 81

어느 새 외국인 근로자와의 생활도 익숙하여졌고, 그들과의 대화도 비록 짧은 단어들의 조합이지만 소통이 되게 되었다. 한국의 김밥을 유난히 모두들 좋아해서, 아이가 소풍을 가는 날이면 정작 아이는 한 줄도 먹지 않는 김밥을 오십 줄은 족히 싸서 그들에게 나누어 주어 맛있게 먹으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기쁨 또한 생기게 되었다. 함께 근무하는 한국인 근로자들 또한 태국의 파파야를 좋아하게 되어서, 먹고 싶다고 얘기하면 오이를 채 썰고, 국수를 삶고, 젓갈과, 고추를 빻아서 버무려, 매워서 땀을 흘리면서도 함께 먹으며 즐거워하게 되었다. 주었다. 베트남에 가서 가족을 만나고 돌아오라고 하였더니 연신 귀에 입이 걸려 있다.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함께 준비해 주기도 하였고, 한국인 근로자들도 진의 휴가소식을 듣고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너도 나도 가족들에게 갖다 주라고 라면이며 김이며, 필요한 것들을 선물해 주어 진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해 주었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사모님 감사합니다 를 연신 하며 공항으로 향하던 진은, 베트남에 도착해서도 전화해서 감사 합니다를 연발하였다. 가족을 만나고 돌아올 때엔 양 손에 우리들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베트남 술과, 베트남 꿀을 가지고 와서 고마운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어느 새 우리는 각 나라의 문화에 조금씩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바다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진을 생각해서, 그 해에는 야유회를 바닷가로 정해서 가기도 하였었다. 정말 외국인근로자도 데리고 가느냐고 몇 번 이나 물어보고, 아이처럼 좋아라 하던 진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차안 에서 그동안 배운 한국가요를 부르고,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함께 공놀이도 하고, 모처럼 함께 어린아이처럼 뒹굴며 보냈던 잊을 수 없는 즐거운 하루였다. 그러는 사이 진에게는 예쁜 딸아이가 태어나게 되었고, 고향에서 보내주는 사진을 함께 돌아가면서 보며 여자아이인데도 진을 쏙 빼닮은 모습을 보며 같이 기뻐해주기도 하였다. 봄에 파종이 끝나고, 가을에 수확하기까지 여름은 비수기라 한가한 편이다. 그래서 딸이랑 부인을 보고 싶어 하는 진에게 여름 한 달간 휴가를 주며 인사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진을 시작으로 한 사람씩 고향을 다녀오겠다고 하였다. 그동안 헤어져 있던 가족들을 진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새삼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 던지, 그렇게 한사람씩 교대로 고향을 다녀오는 바람에 한국인 근로자들 사이에는 어느새 선물 또한 정해져서 하게 되는 룰이 생겨버렸다. 서로 다르게 해주면 아이들이 서운해 할까봐 라면이면 라면, 김이면 김, 이렇게 각자 정해놓고 선물을 해 주게 되었고, 그들 또한 다녀오면서 그 나라의 과자며, 손으로 뜬 작은 손가방 같은 선물들을 가져와 서로 나누어 주고, 함께 기뻐해 주는 정겨운 모습들이었다. 가끔 TV를 통해 외국인 근로자 들을 학대하거나 업신여기는 모습을 보면 그렇지 않고, 한 가족처럼 지내는 우리 회사 직원들이 얼마나 고맙고, 또 마음이 흐뭇했는지 모른다. 네팔에서 온 앙칸두는 여섯 남매의 맏이로 아직 어리지만 당차고 82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우리 회사는 농산물을 재배하고 수확하는 곳입니다 83

야무진 아이다. 동생들을 위하여 묵묵히 힘든 일도 참 열심히 하는 아이다. 인터넷으로 동생들과 연락하며, 모은 돈을 꼬박꼬박 집으로 송금하는 효녀이기도 하다. 그런 앙칸두의 어머니가 암이라고 연락이 왔다. 수술을 했는데 옆에서 간호해 줄 사람이 없다고 한다. 동생들은 학교에 가고, 어리고 해서 돌봐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한다. 서둘러 출입국관리사무소에 가 서류를 작성해서 신고하고 앙칸두를 출국시켰다. 엄마가 회복할 동안 간호하고 또 어린 동생들을 돌보며 지내다가 기간이 되어 돌아왔을 땐, 그 어린 마음이 얼마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참 마음이 아팠던 적이 있다. 보며, 수줍음을 많이 타고, 내성적인 성격이라 적응을 하지 못하면 어쩔까 염려했었던 것이 기우였음을 깨닫는다. 나 혼자 늦게까지 남아서 정리를 해야 할 일이 생기면, 기숙사로 들어가지 않고 조용히 함께 있으며 일을 도와주는 참 마음이 따스한 아이이다. 들어가라고 해도 괜찮아요. 라고 하며 옆을 지켜주는 그 마음이 참 고맙고 이쁜 아이. 그래서 더 탐나고, 붙들고 싶은 아이이다. 앙칸두,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기간이 끝날 때 까지 여기 있다가 고향으로 가.. 네.. 수줍게 웃으며 대답한다. 네팔은 버스가 흔치 않아서인지, 아니면 앙칸두의 집이 외진 곳이어 서인지, 이곳에서 가지고 간 선물들을 들고 여섯 시간을 걸어서 집으로 갔었다는 얘기를 듣고 우리 모두 할 말을 잊고 말았다. 그것들을 어떻게 다 들고 여섯 시간을 그것도 평지도 아닌 산길을 걸어서 갔을까.. 손으로 다 들지도 못했을 텐데.. 언니가 왔다고 기뻐할 동생들의 모습을 생각 하며, 그 많은 선물들을 끙끙대며 들고 그 산길을 걸어서 갔을 앙칸두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 왔다. 스물두 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가족을 생각하고, 자신을 희생하며, 열심히 일 하는데 모든 것이 풍족하고, 넉넉한 우리들은 희생이나, 사랑보다, 원망과 불평이 더 많았던 모습을 떠올리며 오히려 어린 앙칸두를 통하여 가족 사랑을 배우게 되었다. 힘든 일도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감당하며, 태국 이나 베트남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고, 한국 사람들과도 잘 지내는 모습을 좀 한가한 여름이면 각 나라의 음식들이 점심상에 올라오곤 한다. 태국의 파파야, 베트남의 야채들을 라이스페이퍼에 싸서 튀겨서 소스에 찍어서 먹는 음식(이름을 가르쳐 주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지만 무척이나 맛이 있었던 음식이었다)과 네팔의 쌀가루를 반죽하여 튀긴 마치 우리 나라의 꽈배기같이 생겼지만 조금은 까칠한 그런 맛을 내는 튀김들 이런 음식들은 한국 사람들도 잘 먹어서 그런지 시간이 날 때면 서로 해서 갖다 주어 즐겁게 먹기도 한다. 또 태국의 쌀국수를 우리나라의 잔치국수 처럼 육수를 내어 말아서 먹는 것도 있는데, 약간 독특한 맛이 나서 몇 번 먹어본 사람들은 좋아하는데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거북해 하기도 한다. 외국인 근로자들 덕분에 이곳에 근무하는 한국인 근로자들은 다양한 나라의 음식을 접하고 맛 볼 수 있게 되었다. 음식을 통하여 더욱 가까워 84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우리 회사는 농산물을 재배하고 수확하는 곳입니다 85

지고 친해지기도 한 것 같다. 점심시간이면 이거 맛있어요 라며 뭔지 모를 것을 가지고 와서 슬그머니 꺼내 놓는다. 그러고는 우리가 맛보고 어떻게 반응하는지 바라보고 있다. 음. 괜찮아 맛있는걸. 그러면 함빡 웃으며 가는 아이들. 락은 성격이 참 밝고 시원한 귀엽게 생긴 태국에서 온 아이이다. 태국에 여섯 살 난 동생이 있다고 하였다. 그 어린 동생은 전화만 하면 언니 이것 사와요. 저것 사와요 한다고 하며 어린 동생 때문에 머리 아파요 하며 고개를 저어댄다. 그래서 돈 많이 벌어야 한다고. 어린 동생 에게 언니노릇하기 위해서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철이 든 그런 모습들을 보면 대견스럽기도 하다. 얼마 전엔 그동안 정이 듬뿍 들었던 태국의 자니를 고향으로 돌려 보냈다. 외국인들 사이에도 큰언니처럼 다독이고, 살뜰하게 살펴주던 자니는 사춘기 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귀국하게 되었다. 늘 웃음이 그 얼굴에서 떠나지 않은 성격이 참 좋은 아이였는데. 돌아간다고 했을 때 모두들 참 많이 아쉬워하였었다. 자니가 태국에 들어간 후 전화를 해서 한국사람 참 좋아요 한다. 한국에 대해 그렇게 따스한 감정을 가지고 갈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안 좋은 추억과 기억을 가지고 가서 한국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고 들었는데 전화 해서 첫 마디가 한국사람 좋아요, 한국 좋아요 여서 고맙고, 마음이 뿌듯하기도 했었다. 태국 오면 꼭 전화하고, 들르라고 보고 싶어요, 그리고 그 넉넉한 웃음이 그립고 보고 싶었다. 볶음밥보다는 잡채밥을 더 좋아하는 아이들, 김치만두보다는 고기 만두를 좋아하고, 불고기를 좋아하고, 김밥과 한국의 김치를 좋아하는 아이들. 함께 오래도록 있고 싶은데, 기간이 지나면 돌아가야 한다는 아쉬움에, 헤어져야 한다는 아쉬움에 그들의 체류기간 만료일이 하루하루 다가올 때마다 아쉬움은 그 만큼 더 커져만 간다. 다행히 체류기간을 연장할 수 있게 되어 조금 더 함께 있을 수 있게 되었지만, 같은 나라가 아닌 까닭에, 돌아가면 다시는 못 만난다는 생각 때문인지 마음 한구석이 아려오는 것은 여전하다. 생김도, 언어도, 그리고 문화도 다 다른 나라들에서 이곳으로 와서 어느 새 정이 듬뿍 들어버린 가족 같은 사람들. 세세하게 그 말을 다 알아 들을 수는 없지만, 이제는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알게 된 사람들. 이제는 한국의 명절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고, 김장을 하는 것도, 또 파종할 시기와 수확할 시기를 알아서 함께 걱정하기도, 함께 서둘기도 하는 사람들. 그들이 함께 해 준 까닭에 힘들고 어려운 농사일 또한 웃으며 할 수 있어 더욱 고맙고 고마운 사람들. 우리의 마음에 잔잔한 웃음을 덤으로 안겨준 고마운 이들에게 그들의 마음에도 한국을 생각하고, 한국의 사람들을 생각할 때에 아름답게 기억될 수 있도록 함께 하는 시간동안 더욱 사랑과 이해로 보듬어 나아가야겠다. 사랑해요 라며 아쉽게 전화를 끊고 나서도 그 소리가 귓전에 맴돈다. 86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우리 회사는 농산물을 재배하고 수확하는 곳입니다 87

장려작 우리 회사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른 회사로 옮긴 외국인 근로자 여러 명의 1년 치 건강보험료 백삼십 만원을 한꺼번에 징수당하여 항의를 해보았 우리의 친구 차나카 으나, 회사관리 소홀로 인한 회사 책임이라는 답변밖에 들은 게 없는 터였다. 건강보험은 선택사항이라는 외국인 법무법인 팀의 말을 믿은 우리 실수였다. 처음부터 건강보험공단에 문의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러던 2009년 따스한 봄날 차나카가 자꾸 머리에서 열이 난다고 했다. 열이 나니까 온몸에 기운이 없고 힘이 빠질 테고. 차나카는 동네 의원을 여러 번 다녔는데도 차도가 없었다. 그러다가 혼자서 길병원에 서석윤 종합검진을 했는데 간수치가 너무 높아서 치료를 받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병원비가 약 백만 원 가량 든다고 했다며 입원해야 2008년 2월 18일부터 지금까지 우리 회사에서 근무하는 올해 27살 된 차나카는 막 임신한 사랑스런 아내를 고향인 스리랑카에 두고, 코리안 드림을 이루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건너온 새신랑이었다. 고향에는 어릴 때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어 하루 종일 누워있는 누이와 어머니가 계신 다고 했다. 쌍꺼풀진 커다랗고 새까만 눈과 오뚝한 코를 가진 차나카는 우리 나라 최고의 미남 장동건 못지않은 외모를 자랑한다. 기다란 곱슬머리를 묶고 일하는 멋진 모습을 보자면 흐뭇한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차나카도 처음엔 여느 외국인들처럼 건강보험료 내는 것을 무척 아까워했다. 한 푼이라도 더 아껴서 고향에 보내고자 하는 맘을 모르는바 아니어서 마안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건강 보험료를 내지 않고 있다가 한다고 했다. 실로 너무나 부담스런 금액이었다. 부랴부랴 우리 부장님 께서 차나카를 데리고 우리 회사근처에 위치한 평소 잘 알고 계시던 나은 병원 과장님께 부탁을 했다. 우리 회사 외국인 근로자인데 잘 좀 치료해 달라고 하면서 나은 병원 과장님께서는 차나카의 처지가 딱해선지 선뜻 도와주겠다고 하셨고 보름동안 꼬박 병원에 입원해서 집중적으로 간치료를 받은 다음 건강보험을 적용시켜 36만원만 결제하게끔 처리해 주셨다. 이렇게 주위에서 도와주시니 차나카도 한국의료보험을 신뢰하고 한 달에 삼 만원하는 보험료를 더 이상 아까워하지 않게 되었다. 하루는 이가 아파서 가까운 치과에 갔다. 우리는 치과에 전화해서 외국인 근로자니까 돈 조금만 들게 잘 치료를 부탁드렸고 젊은 의사선생님 께선 너무나 친절하셨다. 신경치료도 하고 한 달 정도 다녔더니 이젠 다 88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우리의 친구 차나카 89

나았다고 했다. 스리랑카에선 이빨이 아프면 치료하지 않고 무조건 뽑아 버린다고 했다. 한국 병원 정말 좋아요. 이젠 하나도 안 아파. 떠올랐다. 차나카가 타국에서 느낄 외로움을 달래 주고자, 고향에 한번 다녀오면 어떻겠냐고 물어보았다. 차나카의 강렬한 눈빛이 움직였다. 사랑하는 아내와 태어난 지 6개월쯤 된 예쁜 딸 세하라카 윈디는 인터넷 시도 때도 없이 아픈 데가 다 낫자 웃으면서 열심히 근무하던 차나카 앞에 이번엔 고향 친구가 나타났다. 자기 회사로 오라면서 한 달에 180만 원을 주고 보너스도 3달에 한 번씩 주니까 월급 많이 주는 회사로 오라는 것이었다. 그사이 아이 아빠가 된 차나카에겐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차나카는 갑자기 회사를 결근하고, 우리 회사를 그만 두겠다고 했다. 총각 들과는 다르게 처자식이 있는 몸이라 그런지 책임감이 남다르고 남들 보다 5분 일찍 나와서 생산 준비를 하고 재단기도 남의 도움 없이 자유 자재로 다룰 줄 아는 차나카를 남의 회사로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는 차나카를 보내 줄 수 없다고 했다. 차나카는 밤새 친구들과 에서 사진으로만 보았지 실제로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터였다. 고향에 보내주면 계속 우리 회사에 근무하겠노라 했다. 우리는 차나카 어머니와 아내에게 줄 화장품 선물과 세하라카 윈디의 원피스와 투피스를 준비 해서 선물로 보내주었다. 한 달간 무더운 스리랑카에 가서 사랑하는 가족을 만나고 돌아온 후 그렇게 좋아하던 술도 끊고, 헬스클럽에 등록해서 근육질 몸매를 만들기에 힘썼다. 초콜릿 복근을 만들어 준다고 선전하는 코코아 건강보조제를 거금 십 만원이나 주고 구입해서 복용하고, 롱 헤어스타일을 짧은 스포츠로 정돈하는 등 즐겁게 한국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술을 마시고 며칠 동안 무단결근을 했다. 그리고 보고 들은 대로 곧장 고용노동부를 찾아가서 어려움을 호소했다. 차나카는 여기서는 너무 머리가 아파서 일 할 수 없다고 상담을 했다. 그러자, 고용노동부 직원이 전화 와서 근로자가 근무환경이 안 맞아서 그만두겠다는데 왜 근로자의 의견을 무시하느냐고 하면서 당장 고용해지서에 도장을 찍어 주라고 외국인편을 들어주었다. 정말이지 어찌나 황당했는지 내국인들도 회사를 그만 둘 땐 다른 사람을 뽑을 때까지 기다려줘야 하는 게 상식인데 당장 고용해지서에 도장을 찍으라니 다시 차나카를 만나서 기본급을 올려 주겠다고 설득하고 달래 봐도 소용이 없었다. 그 때 갑자기 좋은 생각이 우리는 똑똑한 차나카가 너무 맘에 들었다. 그래서 가끔 점심시간에 한국통신 국제전화를 이용할 수 있게끔 아내와 전화 통화를 할 수 있는 특권도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SK브로드밴드 기업 전화 사업팀에서 전화가 왔다. 국제 전화료가 너무나 싼 에스케이 인터넷 전화로 바꾸면 전화료가 많이 절약되니까 이번 기회에 한번 바꿔 보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차나카에게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아서 SK인터넷 전화로 통신사를 바꾼 다음 전화기 한 대를 차나카의 컴퓨터에 연결해 주었다. 아내 목소리를 듣고 힘내서 더 열심히 회사 일을 하라는 뜻이었다. 90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우리의 친구 차나카 91

차나카는 무척 고마워하면서 감사합니다. 를 연발했다. 우리는 차나카에게 좋은 선물이 된 인터넷 전화에 감사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전화요금 고지서가 나왔다. 인터넷 전화 열흘 사용료가 70만원이나 나온 것이었다. 우리는 혼비백산하여 에스케이 기업 전화국에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문의를 했다. 분당 50원이라고 선전한 것은 스리랑카 같은 나라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미국이나 일본 같이 인터넷 망이 잘 발달된 나라의 경우에 해당하는 경우이며 SK는 국제전화를 걸때 005로 걸어야 하는데 차나카는 우리가 처음 가르쳐준 001로 전화번호를 눌러서 분당 적용 요금이 이천원이 넘은 것이었다. 만약 005로 걸었으면 분당 960원 정도 라는 부가 설명과 함께. 선물 한 사람이 바로 우리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차나카와 우리 회사는 반반씩 폭탄 요금을 정리하기로 했고 차나카는 전화비 내느라 친구에게 생활비를 빌렸고 결국 전화기를 반납하기에 이르렀다. 부장님, 나 이제 전화 필요없어요 하면서. 차나카 정말 미안해. 진짜 이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말이야... 차나카의 꿈은 하나밖에 없는 딸을 대학까지 교육시켜 훌륭한 어른 으로 키우는 것이라 했다. 우리나라의 교육열 높은 여느 젊은 아빠랑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딸아이의 사진을 국제우편으로 여러 장 받아서 방에 걸어두고 고향집에 컴퓨터를 사준후매일화상통화를 한다 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우리는 급히 지난 달 요금 말고 이번 달 국제 전화요금을 어렵게 조회해 보았다. 20일간 국제통신 요금은 160만원 이었다. 처음에 하루에 한, 두 번 아내와 어머니 목소리를 듣다보니 너무 좋아서 하루에 수십 번을 통화한 것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통화하고 휴식시간, 점심시간, 저녁에, 그리고 밤에 아! 그래서 요즘 차나카의 이제 고향에 가지도 않고 매일 아내를 볼 수 있으니 열심히 일해서 돈만 많이 벌면 된다고 했다. 하느님! 우리 회사가 잘 되서 차나카에게 많은 월급과 보너스를 지불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 표정이 그리 밝고 웃음이 떠나질 않은 것이었다. 마치 옆에 있는 것처럼 미주알 고주알 통화하며 기뻐했을 차나카를 생각하니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론 어찌할 바를 몰랐다. 230만원의 폭탄 요금 앞에 우리 모두는 망연자실했다. 고객센터에 차나카! 우린 너를 정말 사랑한단다. 아빠를 닮아 예쁜 눈을 가진 세하라카 윈디야. 너는 정말 좋은 아빠를 두었단다. 전화해 항의도 하고 부탁도 해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차나카는 미안 하다고 했지만 차나카의 잘못만도 아니었다. 요금이 저렴하다고 전화기를 92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우리의 친구 차나카 93

장려작 외국인을 깔보고 무시 하는 듯한 말투와 행동도 그 요인이 된 것 같습니다. 셋째, 한국인들에게는 친근함의 표시이지만 외국인들에게는 거부감이 외국인근로자 체험수기 응모 드는 신체적 접촉, 특히 머리를 건드리는 등의 행동이 거슬렸다고 합니다. 넷째, 관련 노동법 및 근로기준법에 의거한 합리적인 임금체계 미비 및 이해부족으로, 정당한 대가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불만요인이 있었 습니다. 그로 인한 크고 작은 다툼이 그간에 불만으로 누적되어 오다가 제가 부임하기 얼마 전에는 급기야 고용노동부 등 관련기관에 이의제기를 이형순 하며 퇴사처리 요청을 하는 사태에 까지 이르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 니다. 관련민간단체에서도 현장조사를 나와 확인 작업을 하기도 했다고 필리핀 현지공장 설립준비 차 방문했던 수빅베이 지역에서 6개월 하였습니다. 정도의 필리핀 상주근무를 마치고 귀국한 2007년 7월 1일,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아 저희 현장에 근무하고 있던 필리핀근로자들과 처음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외국인근로자들과 현장관리자들의 말을 각각 들으며 종합 해서 정리해보니 다음과 같은 문제점 및 오해들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 습니다. 첫째, 한국어에 서투른 입장이라 의사소통에 어려움은 물론 작업 지시 등 업무적인 진행도 원활하지 못하게 되어 효율적인 관리가 어려웠 습니다. 둘째, 경상도 특유의 무뚝뚝한 말투와 큰소리로 말하는 것에 거부감은 물론 때로는 욕설로 오해하여 모욕감을 느끼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조금은 늦은 감이 있었지만, 그간 반복되고 누적되어 왔던 문제점 들을 해소하고자 개별적 면담을 통해 필리핀 근로자들과 대화를 시도 하였습니다. 설사 그들이 회사를 떠나게 되더라도 오해가 되는 부분은 풀어주고 싶었고, 또한 그들이 잘못 알고 있던 부분들에 대해서도 설명이 필요했습니다. 이미 식어버린 마음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는지 대다수 떠나게 되었지만 그 대신 외국인근로자를 위한 새로운 매뉴얼을 구축한 것은 또 다른 수확이었습니다. 우선 영어로 소통할 수 있는 제가 외국인근로자 담당자로 자리하고 있기에 수시로 고충상담 및 건의사항을 들어줄 수가 있었고, 매뉴얼 적용에 94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외국인근로자 체험수기 응모 95

의한 합리적인 인센티브 시스템 등으로 근무의욕을 더욱 고취시키게 되었 습니다. 정기적인 숙소 방문을 통한 인간적인 교류도 이해증진에 도움이 되었으며, 애로사항 해결 및 개인용무에 대한 심부름 등으로 신뢰도 쌓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개선상황 및 화합의 분위기는, 이후 새로 입사하는 외국인근로자들은 물론 기존의 내국인 근로자들에게도 크고 작게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분위기는 좋은 소문을 낳아서, 타 업체로부터 도움을 요청받는다거나 외국인관리에 대한 자문을 해주는 일도 종종 발생하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마침 홀로 울산에 급히 내려 왔었던 터라 저의 숙소가 마땅치 않아서 한동안 필리핀 근로자숙소에서 함께 기거하며 생활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업무적인 대화가 아닌 인생과 미래, 가족, 사랑 그리고 꿈 등을 얘기하고 또한 그들의 고귀한 희생에 대해서 격려하는 등 정신적인 의식 함양에도 노력함으로서 자연스럽게 그들과 인간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필리핀 현지에서 생활했던 6개월여의 경험도 그들을 이해하고 또한 그들과 교류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음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짧은 실력의 필리핀 원주민 언어(따갈로그)를 곁들이며 나누는 대화로 웃음꽃을 피우 기도하고 가족얘기 특히 아이들 근황을 나누며 서로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습니다. 저 또한 홀로 외국생활을 많이 해 온 경험이 있는지라 동병 상련으로 마음을 나누기가 더 쉬웠던 게 아니었던가 하고 생각해봅니다. 현재 11명의 필리핀근로자 중에 말로 라는 근로자가 있는데, 할아 버지가 6.25 참전용사이셨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대단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끔 전 직원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칭찬해주었습니다. 그 후 말로 가 휴가를 가서 할아버지께 그 이야기를 전해드리니 매우 기뻐하시고 감동하시더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참전용사이신 할아버지는 유감스럽게 작년에 세상을 떠나셨지만 한국 에서 그를 기억하고 있음을 생전에 알려드린 것으로 마음을 달랩니다. 아울러 말로 에게는 현장에서 리더의 역할인 팀장의 보직을 줌으로서 사기를 높여주었습니다. 팀장은 별도의 수당도 지급되므로 현실적인 이익도 있지만, 본인 자신도 큰 책임감으로 더욱 열심히 작업에 임하며 팀원들을 잘 통솔하여서 작업능률 향상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필리핀근로자 끼리 팀을 조직하였기 때문에 대화에 문제가 없어서 효율 적인 작업진행을 할 수가 있고 작업속도 또한 향상되었습니다. 선배인 말로 의 일사불란한 업무처리와 책임감은 후배 필리핀근로자들의 충실한 작업수행으로 이어져 생산성향상은 물론 기술향상에도 이바지하고 더욱이 이런 모습들이 다른 외국인근로자들에게도 귀감이 되어 롤 모델이 되는 효과도 누리게 된 것 같습니다. 주어진 업무에 어느 정도 숙련이 되면 공정별로 다양한 임무를 부여함으로서 다른 부서의 작업도 경험하게 하여, 유사시 다른 부서로 지원을 나갈 수 있게 주기적인 로테이션도 시행 합니다. 아직까지는 무급휴가를 실시하고 있지만 오랜 객지생활로 인한 휴식 96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외국인근로자 체험수기 응모 97

차원에서 희망자에 한해서 매년 4주정도의 본국 휴가를 허락하는데, 재정적인 부담을 고려하여 항공권을 포함한 총 경비를 가불처리해 주고 장기분할로 매월 갚아 나가도록 협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준비와 제반 행정업무는 제가 하며 본인 요청시 출국공항까지 회사차량으로 이동하는 서비스를 하고 있습니다. 또 자랑하고 싶은 것은 이직자 없이 현재 장기근무자가 대다수라는 것입니다. 제가 부임한 이후 지금까지 입사한 필리핀근로자가 총 12명 이었는데 가족과의 합류로 캐나다 이민신청을 한 1명을 제외하고는 현재 11명 모두 계속 연장계약을 하면서 저희회사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법적 으로 허용된 체류기간을 저희회사에서 다 채우고 떠나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겠습니다. 외국인근로자들이 처음 생활하게 될 회사가 곧 한국의 얼굴로 기억될 테니 더욱 그렇습니다. 외교관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 합니다. 손님을 맞이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도와주러 온 협력자를 대하듯 따뜻한 마음으로, 나아가서 우리의 형제를 대하듯이 그들을 품어준다면 그리하여 그들을 감동시킨다면 회사의 발전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대한 민국이 그들의 감동과 함께 아름답게 아로 새겨지며 번영으로 화답할 것입니다.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현재까지, 많은 도움을 주신 고용노동부 울산 지청, 울산고용센터, 한국산업인력공단,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큰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 바입니다. 그들에게 아름다운 기억으로 그리하여 친구로 남을 대한민국을 위하여! 우리의 선배님들이 오래 전 외국에서 건설근로자로 일하며 겪었던 수많은 어려움들을 지금의 외국인근로자들의 고충과 함께 겹쳐서 생각해 봅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 물 한 모금, 내밀어 잡아 주는 손, 사랑의 시선 등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또 기억에 새겨짐을 우리는 잘 압니다. 다문화사회가 시작된 우리나라에서 외국인근로자를 대하는 시선들이 앞으로는 많이 달라지겠지만 아직 부족한 게 많은 우리의 환경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마음이기에 그 마음을 먼저 열어야 하겠습니다. 잘 준비된 잔치도 손님이 없으면 소용이 없듯이 아무리 법적 장치와 제도가 잘 되어 있더라도 외국인근로자를 고용하는 업체에서 그 소명을 잘 감당해야 98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외국인근로자 체험수기 응모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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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작 Joy of Joey! 임태빈 조이는 살이 찌면 안 된다면서 항상 녹차를 마신다. 그는 녹차가 효과가 있다고 했다. 조이의 부인은 네 명이다. 필리핀에서는 무슬림인 경우, 일부다처제가 인정된다고 하니 아마도 조이는 무슬림인가보다. 조이는 우리 공장에서 일한 지 사 년째인 외국인 근로자다. 2009년엔 출입국법 개정 전이라, 필리핀에 돌아갔다가 재입국했다고 했다. 조이는 작달막한 키에 배가 나온 모습이 마치 할리우드 배우 대니 드 비토를 닮았다. 조이와 함께 일하는 레로이는 호리호리한데다가 파퀴아오나 옹박같은 날렵한 스포츠맨 같은 체형인지라, 조이는 대조효과로 좀 더 통통해 보였다. 나는 인사관리자다. 우리 회사는 지하의 생산설비와 4층의 사무실이 한 빌딩에 함께 있는 작은 중소기업이다. 4층의 사무실에서 지하의 공장 Joy of Joey! 103

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내린다. 입사한 지 이제막일년이지난초보 티를 갓 벗은 관리자이다. 아직도, 기계나 공장 일은 눈에만 익숙할 뿐이다. 외국인 근로자들을 만났을 때에 제일 처음 든 생각은 난 외국어를 잘 못하는데, 말을 어떻게 하지? 였다. 외국인 근로자들이 많다는 이야 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생산현장에서 근무하는 외국인 근로자들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필리핀,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 중국 등 다양한 국적을 가진 외국인근로자 분들과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을까 했었다. 하지만, 외국인 근로자 분들은 생각보다 한국말을 잘 했다. 의사소통이 힘들지도 모른다는 고민은 그저 기우에 불과했다. 게다가 삼년 이상 일하신 분들은 한국어 뿐 아니라, 일에서도 베테랑다운 숙련된 모습을 보였다. 조이와는 달리, 안절부절 하는 모습이었다. 조이는 핸드폰이 문제라고 했다. 자꾸 필리핀에서 들어오는 메시지가 수신이 안된다며, 내게 핸드폰 대리점을 가자고 했다. 핸드폰 대리점에서는 무슨 문제인지 모르겠다며 통신사에 확인하라고만 할 뿐, 명확한 답변을 주지 않았다. 통신사에서 상담전화를 받는 일은 더욱 힘들었다. 상담사는 본인이 아니면 안내가 힘들다는 내용과 새로운 사람을 연결해주겠다는 내용을 반복할 뿐이었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조이의 외국인 등록번호와 한국말이 서툴다는 이야기를 반복해 끝내 외국인 전담부서와 통화를 이끌어냈고, 조이는 영어를 하는 직원과 얘기를 나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첩첩산중이었다. 결국, 힘들게 받아낸 필리핀으로부터의 문자 메시 지는 그의 아내가 지금 병원에 있다는 매형의 메시지였다. 조이는 그런 사정일 것을 짐작이라도 했는지 그렇게 필사적이었나 보다. 심각한 표정 매일 아침마다 현장에서 조이를 만날 때면, 조이는 내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다. 나 역시 고개를 숙여 답례를 했다. 슬며시 짓는 조이의 미소가 모든 것이 어색한 내게 큰 힘이 되었다. 조이는 친절했다. 물론, 레로이 역시 그랬다. 어느 날, 조이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는 지갑 속의 사진을 내게 보여 주었다. 사진 속엔 조이와 그의 아내 사진이 있었다. 그의 아내 역시 조이를 닮아 선한 인상이었다. 조이는 곧 그 아내가 딸을 낳을 거라고 했다. 나는 그녀가 참 예쁘다며 딸도 예쁠 것 같다고 했다. 물론 진심이었다. 출근하자마자, 야간 근무를 마친 조이가 나를 찾았다. 평소 때의 으로 한참을 통화한 그는 지갑을 펼쳤다. 예의 그 아내의 사진이 보였다. 나우 마이 베이비 헤드 업사이드 다운. 내 귀엔 그의 영어가 단어로만 들려왔다. 하지만, 단어의 조합으로 그의 아이가 거꾸로 들어섰다는 이야기인 줄은 알았다. 비록, 미혼의 이십 대 남성이지만, 지금까지 보아온 수많은 드라마의 덕이었다. 그런 일들이 있을 때, 가족들의 걱정이 얼마나 큰지, 아이 엄마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 드라마는 그리고 있었지만, 그 모든 드라마에서 보여준 많은 배우들의 표정보다 조이의 표정이 훨씬 더 실감나게 느껴졌다.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저 멀리, 필리핀에서의 일인지라 조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104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Joy of Joey! 105

그를 지켜보는 나 역시 아무 것도 해 줄 수가 없었다. 나는 조용히 조이의 어깨를 안았다. 사십이 가까운 조이였지만, 조이는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조용한 말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말이 어떤 말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이 기도소리임은 느끼고 있었다. 그는 그의 신에게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아내와 아이의 건강을 말이다. 나 역시 그를 안은 채로 기도했다. 조이의 기도를 들어달라고, 또 그 아이가 부디 무사히 세상의 빛을 볼 수 있기를 기도 했다. 기독교인인 내가 기도를 드린 신은 조이가 기도한 신과는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같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같았다. 이 기도가 신에게 닿아 그 가호와 은총이 바다 건너 필리핀에서 고통을 겪고 있을 조이의 아내와 이 세상에 발 딛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그 아이에게 전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조이의 눈물이 바닥으로 녹고 있는 고드름마냥 뚝뚝 떨어졌다. 조이는 내게 연신 Thank you. 를 말하며 그의 자리로, 지하의 생산 현장으로 돌아갔다. 아마 퇴근 준비를 할 것이다. 기숙사로 돌아가 오지 않는 잠을 청하겠지. 나 역시 4층에 있는 내 위치로 돌아와야만 했다. 다음 날 아침, 어제의 야근 때문이지 조금 늦게 회사에 도착했다. 평소 같으면 이미 퇴근했을 조이가 1층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조이는 나를 보더니 밝게 웃었다. 그리고 내게 다가와 내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다시금 Thank you 를 연발하는 것이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의 손을 잡고 미소지었다. 그를 수심에 빠뜨렸던 일이 잘 처리되었나 보다 할 뿐이었다. 조이가 핸드폰을 내게 건넸다. 그의 매형이 보낸 메시지엔, 그의 아내는 스물 네 시간의 긴 진통을 이겨냈고, 아이도 무사하고, 아내도 무사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메시지 속에는 손을 한껏 오므리고 입을 삐쭉 내민 채 천사 같은 모습으로 자고 있는 아가의 사진이 있었다. 조이의 기뻐하는 눈을 보면서 조이에게 말을 건넸다. 정말 다행이에요. 다행? 다행. Very lucky. No. No. Very joyful. 몇 번이고 다시 Thank you 를 남발하는 조이를 보고 하늘을 한 번 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참 다행이라고. 그 날은 일이 제법 밀려 퇴근이 늦었다. 퇴근을 할 때 조금 일찍 나온 조이와 마주쳤다. 역시나 걱정했던 대로 눈의 모세혈관이 터져, 붉은 눈이 었다. 내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조이 역시 평소처럼 고개를 숙여 인사를 나눴다. 지하로 내려가는 조이에게 상황을 묻고 싶었지만, 혹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을까봐 차마 용기가 안 났다. 106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Joy of Joey! 107

우수작 오지가 않았습니다. 그렇게 외국인 근로자 상담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 날, 선생님 아직도 그 일 하고 있어요? 다소 왜소한 체격의 한 스리랑카 친구가 센터에 방문하였습니다. 그 친구의 이름은 고마르였는데, 상당히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어서, 직감적으로 무언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외국인 근로자 상담 통역을 위한 인프라가 잘 갖추어져 있는 편이지만, 제가 일을 처음 시작했던 2005년 당시에는 통역서비스를 해 주는 지원센터나 콜센터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영어나 한국어를 황유진 전혀 모르는 외국인 근로자가 방문을 하면 손짓 발짓을 다 동원하여 의사 소통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날도 고마르라는 스리랑카 친구와 제가 처음 외국인 근로자 상담 관련 일을 시작한 곳은 충북 진천에 있는 충북 외국인노동자센터(비영리민간단체)였습니다. 센터가 위치한 충북 진천과 인근의 음성군 일대는 충청북도에서 외국인이 가장 밀집된 지역으로서 도시에 비해 인구밀도도 낮고 젊은 사람들도 별로 없어서 주말이나 공휴일, 심지어 평일에도 읍내의 주요 번화가나 터미널 주변에는 한국 사람보다 외국인 근로자들이 더 북적대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일을 시작할 당시, 센터의 상담 담당자가 이미 오래 전에 일을 그만 둔 터라, 관련 업무에 대해서 조언해 주는 사람도 없었고, 대학 원에 다니면서 시간제 형식으로 일을 했기에 상담 업무의 전문성을 갖출 수도 없었습니다. 가끔 혼자 출입국 관리법이나, 근로기준법, 상담 매뉴얼 등을 뒤적거리며 공부하기는 했지만, 워낙 생소한 분야라 머리에 잘 들어 손짓 발짓을 다 동원하여 겨우 상담을 했는데, 대충의 상담 내용은, 현재 근무하는 회사의 사장님이 일을 빨리 하지 않는다고, 머리를 때렸는데 이를 이유로 사업장을 변경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상담을 하는 사람이 흥분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가장 기본적인 사항임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저 때렸다는 말에 분노하였고 곧바로 회사에 전화하여 사장님과 언쟁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고마르에게는 내일 아침 짐을 싸서 회사를 나오라고 했습니다. 고마르, 내일 가방 갖고 센터로 와요, 오케이? 고마르는 제가 사장님과 언성을 높여가며 통화하는 모습에 다소 통쾌 했는지 얼굴 표정이 이내 밝아졌고,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면서 돌아갔습니다. 108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체험 수기집 선생님 아직도 그 일 하고 있어요? 109

그리고 고마르는 다음 날 정말 짐을 싸서 센터로 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사업장 변경을 하려고 하니, 난감하기만 했습니다. 이런 경우 사업장 변경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여기 저기 물어보다가 외국인들이 사업장을 변경하려면 고용지원센터로 가야 한다는 말만 듣고, 무작정 고마르와 시외버스를 타고 관할 고용센터로 향했습니다. 고용센터에 가서, 회사 에서 근무 중 폭행을 당했으니 무조건 사업장 변경을 해 달라고 요청할 작정이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관할 고용센터에 도착해서 외국인 근로자 담당자와 만나게 되었는데 아뿔싸. 고마르의 체류 자격이 산업연수생이었던 것입니다. 담당자가 말하길, 이 친구는 산업연수생이기에 고용센터는 사업장 변경에 관여할 수 없으니 관련 송출업체에 문의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고용허가제로 일원화 되어 있지만, 그 때는 산업연수생 제도와 고용허가제가 병행해서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외국인 근로자의 체류 자격에 따라, 사업장 변경을 담당하는 곳도, 관련 절차도 달랐는데, 저는 그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그것만 몰랐던 것이 아니라, 한심하게도 외국인등록증에 적혀 있는 체류자격 영문 약자도 이해하지 못하여 고마르의 체류 자격이 산업연수생이라는 것도 파악하지 못했던 겁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저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송출업체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연락하는지, 도대체 뭐하는 곳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습 니다. 누군가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어디에 물어봐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고마르, 미안해요, 여기가 아니에요, 다른 곳에 전화해 봐야 된데요 제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고마르는 그저 무표정 하게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습니다.(스리랑카 사람들은 긍정의 표현을 할 때 고개를 양 옆으로 흔듭니다) 그렇게 고마르와 저는 시외버스를 타고 다시 센터 사무실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외버스를 타고 오고 가는 중에도 고마르와 저는 손짓과 몸짓으로 사업장 변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말이 통하지 않으니 여간 힘들고 답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무튼 센터에 도착하여 다른 외국인 관련 센터로부터 송출업체 전화번호 목록을 팩스로 받았고 송출업체 여러 곳에 전화하던 중, 고마르가 소속된 송출업체 담당자와 어렵게 통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되돌아온 결과는 무조건 사업장 변경 불가였습니다. 사실, 상해진단서나 폭행 관련 증거도 없이, 손으로 머리를 한 대 건드린 정도를 가지고 경찰서에 고소하기도 난감했습니다. 그리고 송출업체 담당자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길, 고마르가 만일 고소할 경우, 문제만 더 복잡해 지고 고마르에게 아무 도움 될 것이 없으니 진정으로 근로자를 위한다면, 사업장에서 이탈 신고가 들어오기 전에 빨리 사업장으로 돌려보내 그 곳에서 일을 하도록 안내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이러한 부당한 처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고, 이 분야에 경험도 없기에 섣불리 나섰다가 고마르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함부로 행동하기도 망설여졌습니다. 그래서 어찌할지 몰라 난감한 표정으로 고마르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 110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선생님 아직도 그 일 하고 있어요? 111

는데 그런데 갑자기 이 친구가 웃으면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 다시 회사 가요 일해요 괜찮아 저기 같이 가, 선생님 뜻밖의 말에 저는 약간 놀랐습니다. 회사에 다시 가요? 괜찮아요? 사장님 때리면 어떻게 해요? 사장님 안 때려. 내가 일 잘해. 비자 없어. 이거 불법. 안 좋아. 고마르는 욕을 좀 먹더라도 이렇게 마음대로 사업장을 나온 것에 대해서 사장님께 용서를 구하고 그 회사에서 다시 일을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도 회사를 이탈하여 불법이 될 바에야 회사에 복귀하는 것이 최선이라 여겨, 고마르와 함께 회사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회사에 가서 사장님을 만났습니다. 사장님은 고마르와 저를 보자마자 마치 이렇게 될 것을 예상했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고마르 왔어? 어때? 나가 돌아다니니까 힘들지? 그냥 여기서 일해 그리고는 저에게도 말을 건넸습니다. 아이고, 좋은 일 하십니다. 그래도 그렇게 일 처리를 하면 안 되죠 저도 사장님에게 분명히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어제 일은 죄송합니다. 하지만 스리랑카 사람들은 머리를 건드리는 것을 아주 싫어하니까 앞으로는 조금 조심해 주십시오. 사장님은 연세가 지긋하신 분이었는데, 얘기를 나누어 보니 성격이 약간 급하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그렇게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고마르는 회사를 무단결근한 것에 대해 사장님께 용서를 구하며 이곳에서 계속 일을 하겠다고 했고, 우리의 사과에 이내 마음이 풀렸는지, 사장님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고마르가 그 회사에서 계속 일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모든 것이 불만족스럽고 못마땅하기만 했습니다. 하루 전까지 외국인의 인권 운운하며 갑론을박 논쟁하던 사람이 회사까지 찾아와 용서를 구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내일 당장 짐을 싸서 나오라고 고마르에게 큰 소리 친 것 치고는 결과가 너무나 초라했기 때문입니다. 사장님과의 짧은 대화가 끝이 난 후, 저는 고마르와 함께 기숙사로 가서 고마르가 가방을 푸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가방에 넣었던 짐을 다시 빼서 정리하다 보니, 고마르가 짐을 쌀 때의 마음이 생각나서, 더더욱 저의 마음은 불편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짐 정리가 끝나갈 무렵, 고마르가 뜻밖에도 고맙다고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저기, 일요일, 나 나와요 센터. 그러나 저는 도움이 못 되어 부끄럽기만 했고, 고마르의 얼굴을 차마 볼 수가 없었습니다. 기숙사를 나서면서도 혼자 회사에 남게 되는 고마르 에게 미안한 마음에 제대로 인사도 건네지 못한 채, 몰래 빠져나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주에 고마르가 또 센터를 찾아왔습니다.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고마르의 표정이 매우 밝았고, 한 쪽 손에는 음료수 한 박스가 들려져 있었습니다. 저는 문제를 제대로 해결해주지 못해서 너무나 부끄럽기만 했는데 고마르는 연신 저에게 고맙다고 말하면서 음료수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고마르는 무지하나마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112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선생님 아직도 그 일 하고 있어요? 113

자신을 위해서 땀 흘리며 안절부절 했던 한국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위안 이자 큰 힘이 되었나 봅니다. 그 후로도 몇 번 더 고마르는 센터에 방문했었고, 그 다음 해 중순 즈음에 인천에 있는 회사로 간다며 잠깐 한 번 센터 사무실에 다녀간 뒤로 소식이 없었고, 그 때 그 사건도 저의 기억 속에서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헤어진 지 5년이 다 되어가는 얼마 전, 고마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이거 충북외국인센터 선생님 번호 맞아요? 나, 고마르에요, 스리랑카 사람, 옛날 충북 진천 있었어, 기억나요?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잊지 않고 전화해 준 사실만으로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고마르는 체류기간 3년 만료로 출국 후 재입국하여 또 3년 가까이 일을 했고 이제 체류기간이 얼마 남지 않아 완전히 스리랑카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이제 집도 장만 했으니 이번에 가면 결혼도 하고 다시 한국에 들어오지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동안 한국어 실력도 많이 늘었는지 대화하는데 별다른 어려 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문득 고마르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아직도 그 일 하고 있어요? 여기서 그 일 이란 당연히 외국인 근로자 상담 관련 일을 말합니다. 예, 아직도그일하고있어요, 지금은충북에서 하지 않고, 얼마 전까지 안산에 있다가 지금은 천안에서 일하고 있어요. 와~ 선생님, 진짜 좋아요., 한국 사람들 많이 친절하고 좋아요. 선생님, 나중에 꼭 스리랑카 오세요., 그리고 선생님 그 때 너무 고마웠습니다. 고마르의 고맙다는 말은, 저에게 이 세상에 꼭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와 계속해서 이 일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선언해 주는 느낌이었습니다. 또한 외국인근로자들이 정녕 필요로 하고 바라는 것은, 문제 자체의 해결 보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자세와 친절함이라는 것,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 단순한 사실을 다시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 의미 에서 고마움을 느껴야 할 사람은 바로 나였습니다. 사실, 외국인 근로자 상담이라는 것이 누구하나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스트레스 받을 때도 많지만, 수많은 외국인 친구들과의 우정, 도움을 주었을 때 느끼는 보람, 그리고 그 어떤 외교관보다 더 많은 외국인들을 만나며 대한민국의 품격을 높이고 이미지를 개선하는데 기여하고 있다는 자부심은 외국인 근로자 상담일을 하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마르를 만난 이후로 저는 무엇보다 의사소통의 필요성을 절감 하여, 스리랑카 근로자들을 위한 한국어 교실을 시작하였고, 스리랑카 근로자들에게 일방적으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제 자신도 그들에게 스리랑카 언어(싱할라어)를 정말 열심히 배웠습니다. 저는 교사인 동시에 학생이었습니다. 수업하는 매 시간, 제가 가르치는 것보다 배우는 것이 더 많았습니다. 그 결과, 얼마 전까지 안산이주민통역지원 114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선생님 아직도 그 일 하고 있어요? 115

센터에서 스리랑카 통역으로 근무할 수 있었고, 현재는 천안외국인 우수작 근로자지원센터에서 상담팀장 업무 외에 스리랑카 통역 일도 겸해서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스리랑카 근로자들을 위한 한국어 교실은 안산을 거쳐 지금은 천안에서 계속 진행 중에 있는데, 매주 20명 꿍깡꿍깡 띠리리리리리 이상의 스리랑카 근로자들(대부분이 입국한지 1년 이내인 근로자들)이 출석하여 함께 공부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미래를 장담할 수는 없지만, 몇 년이 흐른 후에 또 다른 누군 가의 외국인근로자가 전화하여 선생님, 아직도 그 일 하고 있어요? 라고 물을 때 예, 아직그일하고있어요 라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기를 바랄 김은주 뿐입니다. 스리랑카 친구와 함께 시외버스를 타고 고용센터와 사업장을 오가 면서도 힘든 줄 몰랐던 그 열정 스리랑카 친구와 손짓, 몸짓으로 대화를 시도하던 그 마음 처음 그 열정, 그 마음, 그대로 간직한 채 대한민국의 민간 외교관이라는 자부심으로 꿍깡꿍깡 띠리리리리리 기계는 밥(전기)만 주면 제 할 일을 하겠다고 열심히 돌아가고, 작업 자는 원료를 내리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현장내부에 계시는 작업자 분들은 각자 맡은 업무를 부지런히 하시고 난 만나는 사람들마다 문안인사를 올리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저의 출근길 하루 일과는 이렇게 활기차게 시작됩니다. 저의 회사는 생활용품에 필요한 플라스틱의 1차 가공품인 원자재 (재생용 수지 칩)를 생산하는 제조업을 합니다. 몇 년 전 외환위기(IMF)와 경제여파로 원자재의 시장경기가 불황일 때도 있었지만 차츰 차츰 경기가 회복되고 시장이 활성화 되면서 원자재의 수요도 많이 증가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인력도 많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제조업은 116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꿍깡꿍깡 띠리리리리리 117

사람들이 다소 꺼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조업을 운영하시는 사장님들은 언제나 인력난으로 마음고생이 심하십니다. 그러던 차에 한국산업인력공단으로부터 단비 같은 기쁜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우리와 같이 인력난으로 고생해야했던 사업장들이 이제는 내국인이 아닌 외국인 근로자도 채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안내문이었 습니다. 우리 회사로서는 정말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회사의 노력과 공단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덕분에 2008년 2월경 드디어 첫 외국인 근로자 수디야르를 맞이하게 됩니다. 처음 면접 볼 때의 수디야르 모습을 생각해보면 웃음부터 납니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오는 소처럼 어깨는 축 쳐져 기운이 하나도 없어보였고, 눈동자의 초점은 어디를 봐야 할 지 몰라 몹시도 떨었습니다. 일은 그 다음 문제고, 과연 이 외국인이 한국생활에 잘 적응할 지 걱정이 앞섰습니다. 사장님께서도 외국인 채용 이라는 어찌 보면 과감한 도전을 하셨기 때문에 겉으로 내색을 안 해서 떨어진 것입니다. 다행히 가벼운 찰과상에 그치긴 했지만,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사고는 언제나 방심한 순간에 일어납니다. 작업자들은 항상 안전에 유념하고, 회사는 깨끗하고 안전한 작업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하여 끊임 없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회사의 이러한 노력은 클린사업을 하게 되면서 빛을 발하게 됩니다. 이 제도의 취지는 공장 내부 작업환경을 개선해 주는 사업인데, 클린 사업에 선정된 사업장에서는 자 부담금과 이 제도를 주최 하는 공단 측에서 나머지 금액을 보조해 주는 좋은 제도였습니다. 이 사업을 하고난 후 우리 회사는 작업 전과는 달리 몰라보게 깨끗해 졌고, 같은 업종에 종사하시는 분들이 오셔서 현장내부를 보시고는 혀를 내 두를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제조하는 공장이 이렇게 깨끗하게 관리된 곳은 처음 본다고 감탄하면서 말입니다. 이 순간 보람을 느낍니다. 작업 환경이 개선된 후로는 작업자들의 삶의 질도 많이 향상되었습니다. 그렇지 속으론 걱정과 우려가 엄청 컸을 것입니다. 나날이 회사가 번창해가면서 2008년 3월경에 두 번째 외국인 티사를 그러나 차츰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이러한 우려감은 기대감 으로 바뀌어졌습니다. 그 이유인 즉 스디야르의 변화된 모습이 많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회사생활도 빨리 적응하는 것 같고, 업무처리 능력도 처음 보다는 많이 좋아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변화들에 희망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외국인 채용에 성공했다는 자신감이 생겨버린 것도 잠시 사고는 터졌습니다. 수디야르가 원료를 투입하던 중 발을 그만 헛디뎌서 바닥에 맞이하게 됩니다. 외모만큼이나 일할 때도 성급하지 않고 참 차분합니다. 본국에는 아내와 두 살배기 아들이 있는데 돈을 벌기위하여 머나먼 한국 땅으로 왔다고 합니다. 사장님께서 본국으로 휴가를 보내준 적이 있는데 인천공항에서 콜롬보까지 가는데 꼬박 하루정도가 걸렸다고 합니다. 이런 쉽지 않은 도전을 한 티사가 전 참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었 습니다. 118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꿍깡꿍깡 띠리리리리리 119

티사는 처음 한국에 들어올 때는 숫자 1, 2, 3, 4와 아빠, 엄마와 같은 기본적인 언어들만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직은 대화도 서툴고 내국인 들이 하는 말도 잘 못 알아듣고, 말의 속도까지 빨라서 이해하는데 어려 움이 참 많았다고 합니다. 빨리 빨리에 익숙한 한국인과는 달리 스리랑카 사람들은 대체로 느긋한 경향이 있습니다. 그건 아마도 자기네들이 살아온 습관이 몸에 배였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됩니다. 티사는 이러한 상황에 굴하지 않고 한국인 동료에게 여러 차례 자신의 애로사항과 현재의 상황 들을 설득력 있게 설명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작업자도 문화적인 차이를 이해하고서 작업할 때 너무 빨리 빨리 재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언어는 학원에 등록해서 열심히 배웠다고 합니다. 틈틈이 공부하다가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사장님이나 나에게 꼭 물어보았습니다. 지금은 다샤나와 겔룸은 2008년 9월에 같이 입사한 친구들입니다. 다샤나는 춤추길 좋아하고 모든 일에 적극적입니다. 겔룸 또한 수줍음은 많지만 손재주가 참 뛰어난 친구입니다. 다샤나가 춤에 소질이 있다는 것은 회식을 하면서 알았습니다. 노래방을 간 적이 있는데 화려한 조명에 신나는 노래가 나오자 다사냐는 자신의 몸을 주체하지 못 했습니다. 춤추는 모습은 가히 환상적이었습니다. 겔룸은 원료(일명: 떡)를 가지고서 멋진 장식품을 잘 만듭니다. 하회탈 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말입니다. 겔룸의 손재주에 박수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지금 그 장식품은 1호기 기계 벽면에 걸어두었습니다. 볼 때마다 겔룸에게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최고라고 말해줍니다. 그러면 겔룸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살며시 웃습니다. 한국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한국어를 잘 구사합니다. 본인 말에 의하면 99%의 한국어를 습득했다고 자신만만해 합니다. 한국은 종교가 참 다양한 나라입니다. 불교, 기독교, 천주교 등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종교들도 참 많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스리랑카에서 불교는 국민의 약 70%가 믿을 정도로 자국의 역사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는 주류 종교입니다. 불교가 공립학교의 의무 과목이기도 하고요 종교의 영향 탓인지 스리랑카의 인사법도 한국과는 많이 다릅니다. 우리는 두 손을 모은 후 45도 고개 숙여 인사하지만, 스리랑카는 양손을 서로 맞대고 고개 숙여 인사한다고 합니다. 외국인들은 한국사람 인사법이 너무 예의 있어서 새삼 놀라웠다고 합니다. 외국인 근로자도 어느새 4명으로 증가하게 되었고 회사도 전반적 으로 잘 운영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난데없이 일 잘하던 외국인 2명이 회사와의 근로계약기간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회사를 그만 둔다고 말한 것입니다. 회사로서는 황당 그 자체였습니다. 퇴사하는 이유도 두 명 모두 개인사정으로 그만 두는 것이었습니다. 정에 약한 사장님은 외국인 두 명 다 붙잡지 않고 제 갈길 가라고 보내주었습니다. 하지만 회사로서는 큰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난 사방팔방으로 사람 구하느라 진땀을 뺐습니다. 구인광고도 내보고, 외국인 명단리스트를 받아서 해당 외국인에게 전화도 수십 차례 했습니다. 120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꿍깡꿍깡 띠리리리리리 121

하지만 나의 생각과는 달리 사람이 좀처럼 구해지지 않았습니다. 현장 에서 일하시는 작업자 분들도 이러한 상황에 적잖이 놀란 듯 보였습니다. 티사와 다샤나 또한 평소에 잘 웃고 활발했었는데 갑작스레 친구를 보낸 것에 표정이 많이 어두웠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이 흘러가던 중에 티사의 도움을 얻어 랄을 채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행운은 늘 우리 곁에 있나봅니다. 랄은 입사할 당시만 하더라도 총각이었는데 2010년 9월경 본국에 한 달간 다녀온 후, 아저씨가 되어서 한국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한 달 동안에 덜컥 결혼을 하고 돌아온 것입니다. 스리랑카에서는 결혼날짜를 정하면 꼭 그 날에 결혼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만약, 그 날짜에 결혼을 못할경우40년 동안 결혼하지 못하고 혼자 살아야 한다는 희한한 전설이 내려온다고 합니다. 랄이 출국 전 당시만 하더라도 사무실에 얼마나 들락날락 했는지 모릅니다. 결혼날짜는 이미 잡혔는데 회사 측에서 언제 출국하라는 답변이 없으니 랄로서는 얼마나 애가 탔을 지 짐작이 갑니다. 더군다나 티사에게 스리랑카의 희한한 결혼 전설을 듣고 나서부터는 랄의 이러한 모습이 웃기면서도 한편으론 안쓰러웠습니다. 힘들 정도로 줄기와 잎 상태가 몹시도 파릇파릇해 보였습니다. 속으로 그런 외국인들이 참 기특해서 다샤나에게 물었습니다. 세상에나~ 다샤나, 고추랑 상추 심을 생각을 어떻게 한 거예요? 다샤나의 대답이 배꼽을 잡게 만듭니다. 은주, 고추랑 상추 돈 주고 사먹을 필요 없어. 조그마한 박스에 씨 뿌리고 물주면 지들이 알아서 잘 자라요. 이렇게. 다샤나의 대답을 들으며 한국 아줌마 다 됐구나 싶었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회상하면 웃음부터 납니다. 후문에 의하면 잘 키워서 채소 반찬 거리로 먹었다고 합니다. 일도 잘하고 놀기도 엄청 좋아하는 다샤나가 한국생활하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안산에 살고 있는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서 밥도 먹고 쇼핑을 한 적이 있는데 마음에 드는 옷이 있어서 사려고 점원 에게 물어봤다가 도로 내려놓고 온 적도 있다고 합니다. 옷이 너무 비쌌 다고 합니다. 한번은 마트에 생필품을 사러갔다가 비쌌지만 꼭 써야하는 물건이라서 몇 번을 고민한 끝에 구입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5만원 주고 살 옷을 스리랑카에서는 1만 5천원만 주면 살 수 있고, 스리랑카에서 1천 5백원만 주면 살 라면을 한국에서는 4천원을 하루는 옥상에 산책하러 올라갔다가 희한한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외국인 자신들이 살고 있는 기숙사 정문 옆쪽에 조그마한 텃밭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 텃밭에서는 고추며 토마토 등 채소들이 무럭 무럭 광합성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남정네들이 키운 채소라고는 믿기 줘야지만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따지고 보니 한국에서의 한 달 생활비가 55만원에서 60만원 든다는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스리랑카에서는 한 달 생활비가 5만에서 10만원 사이면 충분하다고 합니다. 참고로 스리 랑카 월급은 대략 15만원이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일하면 이 금액의 10배를 122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꿍깡꿍깡 띠리리리리리 123

받아가니 외국인들이 한국 땅으로 눈을 돌려 일하러 많이들 오나 봅니다. 스리랑카 정부 또한 외국인들이 타국에서 맘 편히 일할 수 있도록 좋은 기회를 제공해 준다고 합니다. 적이 있습니다. 동생 결혼식을 잘 치러서 고맙다고 사장님 선물을 사왔 습니다. 스리랑카의 상징물 코끼리가 그려진 멋진 장식품이었습니다. 직접 수공예 한 값진 선물이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다샤나는 나의 선물도 잊지 않고 사왔습니다. 내게는 해질 무렵의 해변 가에 야자수 나무가 한국에서 피 땀 흘려 번 돈으로 본국에 처음 집을 지은 사람이 바로 티사랍니다. 직접적으로 집을 볼 수는 없으니 아내가 다 지은 집의 설계 그려진 멋진 조각품이더군요. 마음이 느껴지는 선물이라 고맙게 잘 간직 하고 있습니다. 도면을 팩스로 보내준 적이 있습니다. 멋진 2층집이었습니다. 티사는 너무 감격에 겨워서 기쁨의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 모습이 다른 외국인들 눈에는 동경의 대상이 되었나 봅니다. 티사를 본보기로 다른 외국인들도 이곳에서 열심히 일하면 멋진 집과 차를 살 수 있겠다는 꿈과 희망을 가진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후로 다른 외국인들도 정말 돈을 헛되이 쓰지 않고 매월 초 은행으로 향합니다. 자신의 꿈을 위해서 말입니다. 이렇게 취업 성공기도 많지만 몇 가지 우려되는 부문들도 종종 발생할 수 있습니다. 외국인들이 그리움에 지쳐 술이나 담배와 같은 기호식품에 의지하거나 심하게는 중독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점들도 한국 땅에서 일하는 모든 외국인들이 잘 극복해야 할 과제일 것입니다. 보다 현실적으로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러한 외국인들의 애로사항을 생각하셔서 사장님은 매월 쌀을 지급하고 필요한 생필품을 자주 사주십니다. 외국인들도 그러한 고마움을 알고서 감사의 인사를 합니다. 지난번에 다샤나가 여동생 결혼이 있어서 본국에 휴가 겸 다녀온 우리 회사에서 근무하는 외국인들은 참 착합니다. 그리고 타인에 대한 고마움과 은혜를 겉으로 표현할 줄 아는 친구들입니다. 티사는 2011년 3월경이면 본국으로 출국하게 됩니다. 멋진 2층 집에 차까지 준비해 둔 티사는 본국에 돌아가면 운송업을 시작할 거라면서 힘찬 포부를 말했습니다. 랄은 미스너스(일종이 대형마트)를 차려서 운영한다고 했습니다. 총각이신 외국인 4명은 결혼을 해서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본국에서 사장님 소리를 듣는 게 꿈이라고 했습니다. 다샤나는 시멘트 돌을 판매 하는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님이 될 것이며, 결혼해서 아이는 둘을 낳을 거라고 했습니다. 자리트와 바산느도 랄처럼 미스너스를 차려서 운영 한다고 했고, 씨넷은 가구점을 운영하는 사장님이 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아직 나이가 어려서 결혼 생각은 없지만 본국에 19살 난 여자 친구는 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외국인들이 한국 땅에 발을 내디뎠을 때에는 모험심과 기대 124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꿍깡꿍깡 띠리리리리리 125

심도 있겠지만 분명 꿈과 희망도 갖고 왔을 것입니다. 이 여정을 등산 장려작 하는 것에 비유해보면 쉬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산에 오를 때 한 걸음씩 내딛는 그 순간들이 처음이라는 기대 감에 재미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론 시련과 고통도 같이 동반한다는 외국인근로자와5년1개월의시간을가지며 것을 알고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오르는 도중에 이걸 계속 올라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도 엄청 많을 것입니다. 그러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정상에 오르면 기쁨의 환성을 지르며 즐겁 고 행복해합니다. 제가 입사하고서 쭉 보아온 우리 외국인들은 이러한 역경들을 잘 김신영 헤쳐 나가고 있습니다. 국내에서 일하는 모든 외국인분들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본국으로 돌아가셔서 그들의 멋진 꿈의 날개를 다셨으면 좋겠 습니다. 저 또한 활기찬 내일을 기대하면서 오늘도 즐겁게 퇴근합니다. 제가 (주)유진에 입사한지도 5년하고도 1개월이 넘었습니다. 입사할 때부터 다수의 외국인 근로자가 근무하고 있었는데, 저는 처음부터 외국인 관련 업무를 담당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담당 업무가 아니었기 때문에 솔직히 관심도 없었고, 생산 현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와 얘기 할 일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부끄럽게도 이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외국인 담당자가 후임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이직을 하게 되어 제가 외국인 업무를 인수인계 받았고 지금까지도 담당하고 있습니다. 5년 이상을 외국인 근로자와 함께 한지라 재미있는 일들도 많았고 제가 외국인 근로자를 보는 시선도 많이 바뀌게 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126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외국인 근로자와 5년 1개월의 시간을 가지며 127

외국인 근로자들이 전하는 따뜻한 정 2008년도에 유가환급금이라는 정부 지원이 있었습니다. 베트남 외국인 근로자 한 분만 부득이하게도 우체국에 가서 직접 현금으로 받아 와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업무시간에 다녀올 수는 없고 점심시간은 짧고 결국은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외국인 근로자와 제가 같이 우체국에 다녀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동네 마트에서 차를 세워달라고 하더라고요. 미안하고 고마웠던지 포도와 박스로 된 음료수 그리고 남자 직원 주라고 담배를 건네주었습니다. 그것들을 받는데 많이 민망했습니다. 받은 유가환급금 20여만 원 중에서 몇 만원을 저희 때문에 써버린 거였 으니까요. 외국인 근로자도 고마운 마음을 이렇게 표현해주는구나 하며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들었지만 감사히 받았답니다. 2010년 8월에는 캄보디아 외국인 근로자가 캄보디아에 본인 집을 짓는다며 약 한 달간 캄보디아에 다녀왔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니 책상 한 편에 검은 봉지가 있었고 뭔가 들어있는지 두툼해 보였습니다. 봉지를 열어보니 빨강, 녹색, 검정, 흰색의 반팔티셔츠가 들어있었습니다. 캄보디아 근로자가 선물로 사온 거였습니다. 사이즈도 골고루, 색상도 다양하게 저도 하나 집어 들었답니다. 나중에 들었는데 티셔츠 하나가 우리나라 돈으로 2,000원이라고 하더라고요. 이렇게 질도 좋고 디자인도 괜찮은데 2,000원이라니 잠시 놀랐습니다. 오리지널 외국 티셔츠를 선물 받은 기쁨에 여름 내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했답니다. 본국에 돌아갔다가 동료 직원들 생각해서 사온 캄보디아 근로자의 마음이 어찌나 예쁘던지 당장 가서 고맙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환하게 웃으시며 지나가시는데 저까지 기분이 좋아졌고 이 사람들도 마음을 전하는 게 내국인과 별 차이가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답니다. 외국인 근로자들과 어울리기 2009년 많은 인원의 캄보디아 외국인 근로자들이 근무처 변동으로 입사했습니다. 기존에 일하던 외국인 근로자와는 다르게 한국말도 잘했고 저보다 연령이 적은 근로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누나, 누나 그러는데 처음엔 영 어색하더니 자주 들으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고마워요 외국인들! 어느 날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식당 아주머니가 아가씨 이거 먹어 하시면서 저한테 방금 나온 따끈따끈 바삭바삭 누룽지를 주셨 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조용히 주방 안에서 들리는 어눌하고 수군거리는 말, 아가씨 아니고 아줌마인데. 그 목소리의 정체는 저와 입사가 거의 비슷하고 외국 근로자 중에서 제일 얘기를 많이 하고 장난도 많이 치는 태국 근로자분이셨답니다. 아가씨와 아줌마의 차이를 아는 건지. 그걸 그 자리에서 콕 집어서 얘기하고 싶으셨는지, 식당 안에 있던 식사 중이던 사원들은 박장대소 했답니다. 그래서인지 그 뒤로 외국인 근로자들이 아줌마, 아줌마 말하는데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더 친근감 있게 들렸습 니다. 얼마 전 회사 단합 등산 및 족구대회에서는 어찌나 모두들 아줌마, 아줌마의 힘 외쳐대던지 내국인들까지도 그렇게 부르니 약간은 민망하고 128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외국인 근로자와 5년 1개월의 시간을 가지며 129

창피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한데모여 즐겁게 어울려지는 분위기가 무척 즐거웠습니다. 참고로 저는 결혼한 지 얼마 안돼서 그렇게 많이 아줌마 처럼 보이지는 않는 답니다. 저만의 생각일수도 있지만요. 외국인 근로자들에 대한 마음의 변화 저는 집이 멀어서 대중교통을 많이 이용하는데 반대편 정거장에서 두 명의 외국인이 버스 번호며 시간을 물어왔습니다. 예전 같으면 몰라요 하고 그냥 뒤돌아섰을 텐데 회사 근로자들 생각하니까 회사 근로자들 한테 하는 것처럼 손짓 발짓하며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고 버스 안에서는 옆자리에 앉은 외국인이 핸드폰을 빌려달라고 하는데 선뜻 빌려주게 되더라고요. 이분도 답례로 풍선껌을 주셨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제가 괜히 대견하고 이렇게 외국인들에 대한 마음이 많이 달라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05년 9월에 태국 외국인 근로자 4명이 입사했습니다. 저는 그보다 약 한 달 뒤에 입사했습니다. 3년 만기가 되어 3명은 재고용하고 1명은 군대를 가야한다며 만기 출국을 했답니다. 만기 출국하는 외국인 근로자 에게 왜 다시 안 돌아오느냐고 물으니 총 쏘는 행동을 하며 군대에 가야 한다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진짜인지 거짓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간 서운한 게 아니었습니다. 송년회 때나 회식 때면 항상 입가에 손을 얹고 저보고 웃는 게 예쁘다고 하셨던 근로자였는데 이제 다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많이 서운했습니다. 저에게는 입사 동기나 마찬가지인 근로자였거든요. 3년 만기 된 나머지 3명이 다시 돌아왔을 때는 어찌나 반갑던지 한층 더 큰 목소리로 반기고 있는 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외국인 근로자들의 서로 생각해주는 마음 캄보디아 외국인 근로자가 여권연장을 하고 사무실에 알려주지 않아서 변경신고를 2달이나 늦게 한 적이 있습니다. 14일내에 출입국 사무소에 변경 신고를 해야 하는데 이미 많이 늦었고 출입국사무소와 통화를 해보니 벌금이 나올 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출장소가 아닌 대전 출입국사무소에 가서 직접 신고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외국인 근로자한테 설명을 해주고 벌금에 대해서 어렵게 말을 꺼냈더니 전혀 이해를 못하셨습니다. 무언가 변경되면 신고해야한다는 생각 자체를 못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출입국사무소에 가서 상황을 잘 얘기해보겠다고 하고 나서는데 다른 외국인이 누나, 잘 좀 말해줘요, 벌금 안 나오게 해줘요. 우리 친구에요 이렇게 절 불러 세우더라고요. 같이 생활한지 1년도 안된 사람들이 서로 생각해주는 것을 보니 마음이 많이 찡했습니다. 외국인 근로자들과 함께 나누는 정 솔직히 지금 회사에는 외국인 근로자가 많이 있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저희 회사의 경우 내국인 근로자들은 1년 아니 1달도 안하고 그만두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외국인 근로자들은 내국인에 비해 1년 이상 근무처 변동 없이 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력 변동이 심하면 숙련도도 130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외국인 근로자와 5년 1개월의 시간을 가지며 131

떨어지고 생산 효율성도 낮아지고 여러모로 생산 활동에 지장을 초래 장려작 하게 됩니다. 그래서 현재 외국인 근로자들이 꾸준히 내국인과 화합하여 일해 주는 것이 고맙기만 하답니다. 현장에 내려가면 종이 한 장에도 이건 뭐예요? 이거해주세요. 집에 1달만 갔다 올게요, 비행기 티켓 좀 알아봐 하오리 여우( 好 麗 友 ) 줘요. 송금해 주세요. 현장에 내려가면 들들들 볶이긴 하지만. 그래도 기분 나쁜 것보다 도와주고 싶고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지금의 제 모습이네요. 타국에 나와서 어려움도 많고 본국의 가족들도 그리울 테지만 이렇게 본인에게 맡겨진 일을 열심히 해주고 내국인들과 수다를 떨고 장난을 치며 한데 어울리는 모습을 보면 (주)유진의 사원들 모두가 가족 류화선 같고 인간다운 정을 느끼기도 한답니다. 지난 2008년 여름, 아내의 출산 예정일이 가까워오면서 부쩍 늘어난 이번 기회로 5년이라는 시간동안 함께 해 온 외국인 근로자들과의 추억이 새록새록 피어나네요. 큰 사건이 있었거나 큰 감동을 주는 경험은 아니었지만 소소한 생활에서 생겨나는 조그마한 정이 현재 외국인 근로 자에 대한 생각을 많이 바뀌게 했고 지금은 오히려 고마운 마음도 생겼 습니다. 외국인 근로자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걸, 함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걸 많은 사람들이 알아가길 바람으로 저의 이야기를 마칩니다. 전화는 가족들보다도 대부분 베트남, 스리랑카, 필리핀 친구들의 전화 였다. 선생님 애기 언제 나와요?, 아빠 닮으면 안 되는데?, 형수님 똑같으면 좋겠어요, 선생님 큰딸은 부자 만들어 준대요, 애기 나오면 술 사야죠. 모두들 제 일 같이 즐거워해 주었다. 8월 17일 딸아이가 태어 나고 가장 먼저 조리원을 찾은 것 역시 베트남 친구 응웬반흥 과 스리랑카 닐락샤 선생님이었다. 응웬반흥은 거봉포도를 한 상자 사들고 찾아 왔고, 닐락샤 선생님은 내복 한 벌을 구해 왔다. 응웬반흥은 딸아이가 2.65Kg으로 작게 나온 것을 많이 걱정해줬고, 닐락샤 선생님은 아빠가 된 것을 부러워했다. 1년이 지나고 돌잔치를 132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하오리 여우 133

안산에서 했을 때 19개국의 사절단들(?)이 우리 아이의 생일을 축하 했다. 센터에서 만나는 베트남, 몽골, 태국,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네팔 등의 친구들과 안산에서 이런 저런 일들로 만난 니제르, 라이베리아, 에티 오피아 등의 친구들까지 찾아와 주었다. 어디서 들었는지 베트남 근로자 응웬 반타이랑 친구들은 두 돈짜리 돼지 금반지 를 선물로 가져왔고, 메모지에 최고로 예쁘다 라는 말도 적어 주었다. 외국인근로자센터 실무자로 이들을 만난 게 벌써 4년이다. 한국어를 배우겠다고 찾는 사람들, 일하다 손가락이 잘려 산재 상담을 받으러 온 센터에서 몽골 외국인근로자를 만나면서 알게 된 사실이 몇 가지 더 있다. 몽골은 전체 면적이 한국의 7배가 조금 넘는데 전체 인구가 한국의 인천 인구보다 적은 290만 명 정도라는 사실이다. 또 몽골의 남자들은 술을 너무 좋아해서 자주 취해 있다는 것과 한 10살쯤은 대충 친구 먹을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또 290만 명 모두가 칭기즈칸의 후예라는 자부심이 대단해서 그 누구 앞에서도 당당하고 거침없다는 사실과 무슨 문제든 부딪혀 보고 실패하면 미련 없이 떠나는 모습도 알게 됐다. 유목 민의 습성이 정확하게 반영된 모습이라고 유추해 보면서 웃어본다. 친구들, 결혼식을 하고 싶은데 장소를 알아봐 달라는 친구들, 여러 이유들로 나를 찾는 사람들은 내게 늘 좋은 친구였다. 친구들 중에는 스리랑카 근로자들이 많은 편이다. 처음 센터에 근무 하면서 매년 4월에 열리는 스리랑카 알룻 아우르뜨 라는 행사를 준비 2000년이었던 것 같다. 제대 후 복학을 앞두고 아파트 현장에서 중국동포 아저씨 한명을 만난 적이 있다. 사십이 다된 분이었는데 나와는 생각도 비슷하고, 유쾌한 분이었다. 손이 빨라 일도 잘하는 분이었는데 3달 월급이 밀려 있다는 소릴 들은 적이 있었다. 워낙 밝은 분이어서 구체적으로 묻거나 하지 못했었다. 주위에 서른 살, 스물 두 세 살 먹은 젊은 인부들이 있었는데 중국동포 아저씨를 대할 때 반말 비슷하게 대했던 것 같다. 얼마 전에 가볍게 웃으며 본 영화 청담보살 에 승원(임창정)의 대사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몽골에는 백차선 도로가 있대요. 몽골의 드넓은 초원과 사막을 빗대어 한 말일 테지만 정말 재밌고 신비롭기까지 했다. 하면서 반월공단, 시화공단의 스리랑카 근로자들을 만났다. 사만타, 니샨타, 코살라 등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눈이 적당히 쏘옥 들어가 신이 내린 조각 미남 들 같았다. 그때 반월공단의 한 공장에 가서 커다란 대문을 함께 만들기도 하고, 행사 진행비 마련을 위해 이곳저곳 함께 다니기도 해서 였다. 늦게까지 가죽 만드는 공장과 목재공장에서 일하고 일 끝나면 한 친구 공장 옥상에 모여 행사 준비를 했었다. 행사 당일에는 광주, 대구, 부산, 의정부, 김포 등에서 7천여 명의 스리랑카 근로자들이 모였었다. 그때 스리랑카 독립협회 라는 국내 거주 스리랑카 근로자들의 커뮤니티도 알게 되었고 관련해 일을 돕기도 했었다. 이후에 안면도 1박2일 캠프도 함께 하고, 가을 스리랑카 대통령배 크리켓 대회 진행을 돕기도 했었다. 134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하오리 여우 135

안산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에서 언어지원팀으로 함께 일했던 닐락샤 선생님이 워낙 활동적이고 정이 많은 사람이어서 친구들의 일터를 자주 찾았고 동행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가졌다. 비디오카메라를 잘 다뤄 커뮤니티에서 촬영을 도맡아 하는 친구 락말은 두고 온 여자친구 때문에 걱정이 많았다. 키도 크고 잘생긴데다 성격도 좋은 친구인데 여자친구가 자신을 기다리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끊이질 않았었다. 다행히 한 해 후에 스리랑카에 다녀왔고 서둘러 결혼식을 마치고 허니문 베이비까지 만들어 두고 왔다. 이제 아내 걱정에 딸아이 걱정까지 늘었지만 더 밝아지고 여유로워지기까지 했다. 목재공장에서 일하는 사랏(35세)도 오래도록 기억될 좋은 친구다. 우리끼리는 O형이어서 성격도 좋고 여자도 더 많이 좋아한다고 농담을 하곤 하는데 밝아도 너무 밝다. 일하던 공장에 처음 입사할 때는 스리랑카 근로자 혼자였는데 사장님과 한국 동료 직원들이 사랏을 너무 좋게 봐서 나중에 스리랑카 친구들 7명이 함께 일하게 될 정도였다. 주위의 친구들이 어려운 상황에 처한 것도 쉽게 넘어가는 스타일이 아니다. 자주 센터 상담 팀에 전화를 걸어 선생님들을 귀찮게 하기도 했다. 당시 상담팀 선생님 으로 계셨던 이 선생님도 사람을 좋아하는데다 어려운 것을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이라 밤늦게 술자리를 만들어서라도 만나고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문제를 해결해 주곤 했었다. 베트남 친구들이 주위에 유난히 많다. 반월공단에 근무하는 응웬 반흥은 나하고 맘이 잘 맞기도 하고, 조금은 수줍어하면서도 리더십이 있어 주위에 인맥이 상당히 넓다. 일하는 기숙사에 자주 가서 라면도 끓여 먹기도 하고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다. 정왕동 쪽에서 자취를 하는 응웬 반타이는 센터에서 한국어 공부만이 아니고 (사)다문화열린사회 에서 주최했던 대학생과 함께하는 다문화캠프에도 참여하고 얼마 전 제주도 여행도 함께 했었다. 아내에게 형수님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싸이월드 미니홈피 방명록에 자주 들러 글을 남긴다. 형수님이랑 애기랑 베트남에 꼭 초대하고 싶다고 여러 번 이야기 한다. 베트남의 꽃미남 중의 하나 응웬만컹은 얼마 전에 베트남에 들어가 결혼식을 하고 왔다. 결혼식 전 피로연은 시흥관광호텔 옆 고깃집 2층을 전세내서 성대하게 치렀다. 거의 100여명의 친구들이 찾아와 소고기랑 맥주파티를 열었다. 한국어 선생님도 초대됐고, 나 역시 빠질 수가 없었다. 영어도 잘하고,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는 응웬만컹은 베트남에 돌아가면 선생님이나 지방 공무원을 하게 될 것 같다. 공부를 해서 대학의 교수역할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베트남에 돌아가 한국인 대상 관광 가이드를 하고 싶어 하는 반다오, 제주도 나이트클럽에 가서도 많은 한국인 친구들 사이에서도 돋보일 정도로 춤도 잘추고 귀여운 외모를 가진 뚜이융도, 한국에서 베트남 여자 친구를 만나 한 웨딩홀을 빌려 결혼식을 올리고 틈틈이 대전, 전라도, 부산 등 함께 여행하기를 좋아하는 전국 뛰엔도 모두들 내 소중한 친구들 이다. 이미 이 친구들은 나와 내 딸아이에게 외국인이 아니다. 동생이고 삼촌이며 이모다. 한국에서 New Devisa, Maheswara 등의 인도네시아 밴드를 결성 136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하오리 여우 137

하고 여러 커뮤니티 행사 때마다 공연을 이끄는 아르토노는 나와 동갑 내기 인도네시아 근로자이다. 언젠가 외국인등록증을 본 적이 있는데 1978년으로 나보다 어리게 되어 있어서 이게 뭐냐고 따졌더니 어렸을 때 부모님이 호적을 잘못 올린 것이란다. 안산 지역에 중국동포 다음으로 인도네시아 근로자가 많다. 인도 네시아는 1만 3천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의 특성상 각 지역별로 수 없어 아내와 아이 셋을 두고 온 태국 친구 등 사연 많고 복잡한 이야기 들을 지닌 친구들을 수도 없이 만났다. 일하다가 손가락 두 개를 잃어버린 친구, 한국에서 적응하기가 어려워 마시기 시작한 술에 중독되어 버린 친구, 말 농장에서 일하다가 말의 뒷발에까지 채인 친구 등 여태 내가 만난 친구들은 수수하고, 때 묻지 않은 각 나라의 기둥인 청년들이었다. 지역색이 뚜렷하다. 나라의 국시가 Binneka Tunggal Ika, 다양함 안에서의 하나 인 것만 봐도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호남 향우 회와 같은 지역 모임들이 참 많다. 스코와티, 푸트라 클라나 등 지역이름을 딴 모임들이 많고, 이슬람교가 88%인 나라로 종교적인 모임도 많은 것 같다. 또 노래와 춤을 좋아하고 축구를 좋아하는 나라의 특성도 어김 없이 나타난다. 스리랑카 밴드와 비슷하게 클라이맥스가 없는 노래가 쭉 이어져도 모임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일어나 우리나라 아리랑 춤 비슷한 춤을 추며 즐거워한다. 아르토노는 이런 커뮤니티 모임을 조율하기도 하고, 안산센터 뿐 아니라 지역의 공공기관과 커뮤니티 연계 등의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수줍어하면서도 인맥과 모임을 조율해내는 능력을 보면 리더십이 대단하다. 그동안 만나온 친구들 중에는 스리랑카의 손석희(?), 태국의 설경구 (강철중)(?), 태국의 닉쿤 동생(?) 등 다양한 친구들이 많다. 현지에서 국영방송 PD를 하다 온 친구, 의학공부를 마칠 즈음에 집안 사정이 너무 어려워 의사 되는 것을 미뤄 두고 온 친구, 경찰생활에도 가정을 꾸려 갈 이들은 얼마 머물다 간다. 붙잡고 싶고, 곁에 두고 싶어도 돌아가야 한다. 한국보다 그 나라가 못내 그리운 그 나라의 젊은이인 것이다. 이들은 국내 중소기업 현장에 머물고 있는데, 요즘 들어 여러 여건들이 좋아졌다 고는 해도 여전히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좋은 사장님을 만나기고 힘들고, 지하철이나 한국의 명소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도 아직까지는 차갑고 낯설 때가 많다. 이들은 아직까지 노동력 으로만 인식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센터에서 이들을 오랫동안 만나온 나로서는 나와 내 사랑하는 국민 모두가 이들을 적어도 사람 으로 나아가 베트남, 스리랑카, 태국, 네팔, 인도네시아의 내일을 짊어질 아름다운 청년 들로 생각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대한민국의 20~30대 청년들이 이 나라의 내일을 이끌어 간다고 한다면 지금 우리가 만나는 외국인 근로자들은 각 나라 내일의 주역이 될 사람들이라는 것을 쉽게 생각해볼수있다. G20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친 대한민국의 사람의 문화적 성숙의 정도도 역시 G20 혹은 우리가 138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하오리 여우 139

기대하는 G7에 걸맞게 되기를 희망한다. 아울러 중소기업 현장도 이 나라 장려작 젊은 청년들도 몇 년이고 가서 일하고 싶을 정도의 비전과 가치, 나아가 근로자 재교육도 병행해 장밋빛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일터로의 전환이 중요하다고 본다. 외국인20명이아니라직장동료20명입니다 중국에 수출되는 오리온 초코파이의 이름이 하오리 여우 라는 것은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일이다. 좋은 친구 라는 뜻으로 달콤 하고 부드러운 초코파이의 특성을 잘 표현한 것 같다. 내가 안산외국인력 지원센터 직원으로 근무하는 동안 만난 외국인근로자들은 나의 좋은 친구 였고, 앞으로 오래도록 삶을 나누고 싶은 하오리 여우 다. 아직은 문강표 낯설고, 이런 친구들을 만나보지 못한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좋은 친구가 많이 생겨나기를 희망해 본다. 회사에서 외국인을 관리한 지 벌써 5년이 되어갑니다. 대학 졸업 하고 첫 직장에서 우리와 다른 피부색에 냄새까지 색다른 이들을 접하고 선 처음에는 이러면 안 되는데.. 라고 자책하면서도 적지 않은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아마 선입관이라는 무서운 녀석이 제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현재에는 회사에 종업원 200명에 20명의 외국인이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이들은 제 눈에 동생 같고, 형 같은 사람들 입니다. 저는 외국인들의 극복사례보다도 한국인들의 외국인근로자들에 대한 의식고취가 더욱 시급하다고 여기며 펜을 듭니다. 140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외국인 20명이 아니라 직장동료 20명입니다 141

나라별로 보면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태국, 중국, 방글라데시 등 거쳐 간 친구들과 현재 거주중인 친구들까지 수십 명의 친구들이 정말이지 작은 지구촌을 방불케 할 만큼 많이 기숙사에서 거주하며 동고동락을 하는 곳입니다. 파키스탄 친구들 세 명이 입사했을 때 정말 막막했습니다. 첫째로 언어가 큰 장벽이었고, 둘째로는 의식주 중에 식의 문제가 상당히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당시 50명 정도의 중소기업에서 파키스탄어는 고사하고 그나마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손짓발짓 보디랭귀지를 통해서 묻고 답하고 가르치고 보통일이 아니더군요. 그래도 그나마 다른 부분은 시간이 해결해 줬지만 한국식 백반에 김치, 된장찌개는 당분이 높은 음식 위주의 그들에게는 힘든 시도였으며, 시도를 해도 밥과 국에 설탕 범벅을 해야 겨우 먹는 시늉을 하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아! 참. 우선 우리 회사 사장님이 어떤 분인지 말씀을 안 드렸네요. 이런 유행어가 있죠. 사장님 나빠요 예전 나쁜 업체 사장님들을 빙자한 어떤 개그맨의 유행어인데요. 회사 밖에 없을 겁니다. 항상 밥심으로 일을 하는데 얘들 밥을 안 먹이면 안 된다고 측은지심이 가득하신 분이다 보니 이번 파키스탄 식사 문제는 정말 심각한 문제였 습니다. 여러 회사에 알아도 보고 물어도 봤지만 딱히 답이 없었습니다. 대부분 회사에서는 근로자가 알아서 한다더군요. 요컨대 밥도 굶고 그냥 저냥 때우면서 일하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단행한 것이 바로 적응기간 외부 식대 지원이었습니다. 하루 중 중식을 제외한 조식, 석식을 근처 파키스탄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지원해주고 조건으로 중식을 꼭 한국 밥을 먹도록 시도하게 하는 것 그렇게 해서 천천히 한국 식사에 적응을 하게 하는 것 그것이었습니다. 결과는 백점 만점에 백점은 아니었지만 구십 점은 될 정도였습니다. 그 인원들이 한국식 음식에 대한 거부감을 많이 줄여서 어느 정도는 식사를 하는 수준에 이르렀으니까요. 지금은 그때 그 세 명이 3년을 만료하고 2명은 고향으로 돌아가 잘 결혼하고 농사를 짓고 있다더군요. 한명은 재고용해서 아직 저희 회사 직원으로 문제없이 잘 다니고 있습니다. 그 정반대로 사장님 정말 좋아요 가 내국인, 외국인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말들입니다. 지금이야 오래되어서 많이 낡기도 되고 했지만, 기숙사 제공, 식사 제공, 거기에다가 기숙사 내에 2층 침대에 캐비넷, 에어컨, 케이블방송을 연결한 텔레비전에 DVD플레이어까지 설치되어 있는, 그리고 사계절 동안 냉방과 방한 모두 확실한 곳은 우리 혹자는 말합니다. 외국인은 급여가 싸고, 복지혜택을 신경을 안 써도 되고, 또 힘든 일을 시켜도 되어서 그런 게 없으면 의미가 없다고요.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예전 중동, 독일, 미국 등 세계각지로 돈 벌러 다니던 게 불과 30년이 지나지 않은 현실에서 그들의 모습에서 과거의 142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외국인 20명이 아니라 직장동료 20명입니다 143

우리 아버지, 어머니, 삼촌의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파키스탄, 태국, 인도네시아 모두 이제는 제게 스스럼없고 저 또한 그들에게 스스럼없이 임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의지할 것 없는 한국에 혼자 와서 3일간의 교육 후에 인계받으러 제 차를 타고 오는 그 순간부터 나의 소중한 우리 가족 마치 어머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묻고 손길이 꼭 가야하는 아기처럼 그들은 그 순간 먼저 알게 된 제게 많은 것을 묻고 의지합니다. 어느 순간 저는 그들이 제 가족이 된 것 같고 그들이 고향에 대한 향수로 그리워할 때 다독여주고 힘을 내게 해주는 그런 존재가 된 게 참으로 의미 깊고 이들의 삶을 이해하게 해주었습니다. 정정치 곱슬머리에 까만 피부의 그들이 힘든 업무 후에 냄새를 피우며 올라 와도 웃으며 와락 안아줄 수 있는 그런 마음이 지금의 제게는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족이라고 생각해주시고 한 명 한 명 귀중한 존재로 소중 하게 아껴주십시오. 작은 상처라도 나서 다칠라치면 병원에 혼자 쓸쓸히 입원해있는 친구들을 많이 봤습니다. 이방인이니까 힘든 일을 시켜도 된다가 아니라, 가족을 떠나 있는 그들을 집 떠나 군대 간 아들을 대하듯 걱정하고 아껴서 몸성히 보내는 우리가 되어야 좋은 인연이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더 이상 우리 회사 직원에서 외국인이 20명, 내국인이 180명이 아니라 저희 동료가 200명입니다. 좀 더 넓은 포용력으로 그들을 대하는 대한민국이 되길 바라며, 오늘도 모두들 파이팅입니다. 티엔 차에 장식해 놓은 액세서리 인형들이 너무 예쁜데, 누나도 좀 만들어 주면 안 돼? 퍽 날씨가 추운데, 피죽도 못 먹은 사람처럼 옷을 그렇게 얇게 입고 다니다 감기 걸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두꺼운 옷 좀 입으렴. 무로드 씨 축하해요. 고향에 좋은 집을 사셨다면서요? 타국에 와서 열심히 일하고 저축한 보람이 있으시겠어요. 어르신, 제가 준 커피가 제일 맛있다고 하더니, 언제 맘이 그렇게 변해 버렸어요? 생금 언니한테 이야기 들으니, 언니 커피가 제일 맛있 다고 했다면서요? 변심하면 안돼요? 첸민카이, 안전모 왜 착용 안하고 일하지? 첸민 왈, 우리 누나는 잔소리 쟁이 말 많아 너무 너무 많아. 고향에 계신 할머니 같애. 144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나의 소중한 우리 가족 145

정오 12시가 되면 한명도 빠짐없이 우리 근로자 식구들의 모든 얼굴 들을 보게 된다. 일일이 한명씩 호명을 해가며 서로 눈인사와 함께 안부를 물어가며 식권을 가지러 온다. 지금은 이렇게 서로 장난도 치고 웃지만, 한 가족으로 지내기까지 무려 일 년여 기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이름을 몰라 천천히 식권을 나눠 주는 날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쳐다보며 몇몇 근로자들은 손에 있는 식권을 휙 낚아채며 가져가 버렸다. 또 이상하게도 모두가 한결 같은 얼굴에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정말 사표를 내고 싶은 충동을 하루에도 몇 번이고 나의 뇌리 속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스트레스 때문에 몸무게만 서서히 빠지기 시작하였다. 하염없이 계속해서. 2009년 회계 관련 업무를 보던 난 참으로 신기한 곳에서 근무를 한 느낌을 받았었다. 선박 제조업, 외국인 근로자분들의 각양각색의 얼굴들. 10여년의 직장생활을 접고 육아문제 때문에 3년을 아이와 생활하다 다시 한 번 사회에 도전장을 냈다. 40을 바라본 나로선 나름대로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세월은 거스를 수 없듯이 이력서를 내는 곳마다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이유인즉, 나이 제한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의 숨은 능력을 알아주신 분이 지금의 사장님이었다. 이것이 인연의 시작이다. 오히려, 젊은 아가씨보단 아주머니들이 일도 열심히 해주고, 무엇보다 이 사업장 하고 어울릴 것 같아 저를 선택하셨다 한다. 사실, 난 사무실의 업무적인 일만 최선을 다해서 일하면 되겠다는 편한 마음으로 입사를 했다. 입사 첫날 사업장 환경은 너무나 열악하였다. 내가 생각한 사무실과는 180도 다른 작업환경, 고작 책상에 PC와 책상, 전화기, 팩시밀리 이게 고작이었다. 정오가 되면 식권을 가지러 오는 외국인 근로자들, 땀에 절어 아침에 씻고 왔는지도 모를 정도의 악취,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를 쳐다보는 경계의 눈초리에 근무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어김없이 오늘도 근로자들은 날 쳐다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았다. 한 달이 되어갈 무렵, 한 근로자가 시간이 맞질 않는다고 작업일보를 휙 던지며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기세처럼 하더니, 작업도 안하고 휙 숙소로 가버린 것이다. 너무 당황스럽고 황당했다. 사실 업무는 힘들어도 나름 극복해 가며 할 수 있겠지만, 서로 생각이 다르다 보니, 이해하려 들지도 않는다. 이제 더 이상 나도 근무할 맘이 없어졌다. 그리고 다음날 난 두 달 만에 사표를 제출했다. 사장님께서도 처음으로 이 사업을 하고 있는 일이라며 저까지 가버 리면 그만 접고 싶은 마음이라면서 간곡히 부탁하셨다. 그날 저녁 난 내 자신에게 질문을 하며 기도를 했다. 그리고 사장님께 자세히 들어보니, 날 잡아먹을 것처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는 건 이방인 으로서 너무나 외롭고 힘들게 일을 하면서 인격적으로 부당하게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라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단지, 외국인 이라는 편견 때문에 말이다. 순간 괜한 애국심이 발동하였다. 이대로 물러서면 저 외국인 근로자들은 한국에 와서 설령 돈을 벌어 146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나의 소중한 우리 가족 147

가더라도 본국에 가서는 좋은 소릴 결코 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 또한 현재 외국인의 편견을 가지고 있는데, 외국인 근로자들도 내 맘과 같으리라는 동질감을 순간 느끼게 되었다. 다음날부터 상대가 날 쳐다보든 안쳐다보든 매일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얼굴과 이름을 매치시키는데 전력투구한 결과, 한 달 만에 우리 근로자 식구들의 모든 이름을 외울 수 있었다. 점심식사 후 작업이 시작 되기 전 일일이 커피를 끊여 주며 눈인사를 하며 말을 건넸다. 말을 하든 안하든 간에 설마라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난 동물원의 원숭이 같은 대접을 받고 말았다. 조건이 썩 좋지만은 않다. 하지만 근무하며 지켜보니 제일 중요한 것이 사업주와 근로자의 믿음과 신뢰를 쌓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많은 임금을 주지는 못한 형편이라 외국인을 고용했지만, 인격적으로 존중 하며 한 가족처럼 지내보자고 자신 있게 이야기 했다. 믿고 의지할 수 있도록 서로 노력해보자며, 서로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사업장에서도 어느새 서서히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허구한 날 근무시간이 맞질 않는다고 떠들어 대더니, 점점 긍정의 눈으로 바라 보기 시작하며, 상대를 적대시하던 눈빛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하였다. 결국 내가 마음의 문을 여니, 상대방도 마음의 문을 연 것이었다. 일부 외국인 근로자분들은 다른 곳으로 이직을 하였다. 훨씬 나은 하지만 두어 달이 지날 무렵, 한 근로자분이 슬그머니 핸드폰 속에 있는 자기 와이프와 자녀를 보여주었다. 너무나 예쁘고 사랑스럽게 보였다. 또 그 다음날, 다른 외국인이 누나, 껌. 하며 내 앞에 슬그머니 내밀었다. 순간 노력의 결과는 반드시 얻어지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 했다. 신랑과 상의 끝에 한 외국인을 우리 집에 초대하여 식사 대접을 하였다. 짧은 한국어의 실력이었지만, 짤막한 대화는 소통되었다. 보디 랭귀지와 함께. 우리 사업장에 오기 전 안산에 있는 곳에서 근무를 했는데 일부 내국인 에게 갖은 욕설과 함께 체불된 임금도 아주 어렵게 받았다고 한다. 타국에 와서 실제로 서로 믿고 일을 하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며, 본인의 고충을 토로했다. 물론, 우리 사업장도 조그마한 소규모 업체여서, 근로 근로조건이었기에 잡을 수도 없었지만, 한편으론 나도 매사에 불평불만인 근로자와는 근무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외국인 근로자들도 문제점이 없지만은 않다. 문화적 환경요인으로 서로 생각하는 방식이 다를 수는 있다고는 볼 수 있다. 하지만 기술력을 몇 개월 습득하면 다른 곳으로 이직을 해버린다. 마치 당연한 것처럼, 사업장은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직업학교가 아닌데 말이다. 다른 곳에서 이직해 오신 분들도 3개월 근무해 놓고선 8개월 근무했다고 거짓말을 한다. 좋은 시급을 받으면 끝이라는 고정관념들, 어디서부터 하나하나 실타래를 풀어야 될지 산 넘어 산인 것 같았다. 일대일 개인 면담을 하기 시작했다. 한국에 와서 전혀 다른 곳에서 새로운 기술을 익히는 일은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 148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나의 소중한 우리 가족 149

곳에서 기술을 익히면 서서히 시급도 올라갈 것이고, 고정적으로 월급 받아서 고향에 보내주면 고국에 있는 식구들 또한 보탬이 될 것이며, 고국에 갈 때도 기술력이 향상되어 취업할 때 도움도될수있을거라는등등의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았다. 자꾸 이직을 하면, 또 다른 기술력 습득해야 하는 기타 여러 가지 불편한 점 등도 함께 설명하면서 말이다. 올해는 엄청 무더웠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이젠 추워서 몸이 움츠러든다. 오늘도 공단 굴뚝에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기계가 시끄럽게 돌아가고 있다. 우리 외국인 근로자분들도 가벼운 아침 인사를 나누며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2년이란 기간이 지난 지금은 다들 기술력이 상당히 발전하였다. 이제는 서로 믿고 눈치 보지 않아도 알아서 스스로들 열심히 일들을 해준다. 내국인들 보다 더욱더 열심히 일하신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이제 우리 사업장에 있는 외국인 근로자들은 다른 곳에 옮겨 가는 걸 싫어한다. 한 캄보디아 친구는 외국인 고용 법령이 바뀌어 등록할 조건이 되질 않았다. 다른 사업장은 가고 싶지가 않고 우리 사업장에서 근무하게 해 달라고 어찌나 때를 쓰던지, 한편으로 굉장히 기뻤지만, 미안했다. 그동안 노력한 결과가 외국인들의 입소문으로 소문이 났던 모양 이다. 사업장 형편이 어려워 풍족하게 챙겨주질 못하지만, 맘으로 항상 같은 식구처럼 대해준 결과인가 보다. 그래도 여전히 한 가지 고민이 있다. 사업장에 일감이 줄여들어 근로자 들의 많은 인센티브를 줘야 하는데 걱정이다. 어차피 이분들이 한국에 온 목적은 열심히 일을 해서 목돈 만들어 고국에 가서 여유로운 삶을 살고자 온 건데, 생각처럼 일이 수월하게 풀리지 않는 것 같아 맘이 상하다. 사장님의 안색이 밝지가 않으니 말이다. 150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나의 소중한 우리 가족 151

그러던 어느 날 외국인 근로자분께서 월급을 올려달라며 폭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저희 집에서는 합법적인 외국인 근로자분들만 외국인 근로자를 처음 접하게 된 건 초등학생 때였습니다 고용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외국인 근로자 나짓 아저씨와의 첫 만남 이었습니다. 처음 외국인 근로자 나짓 아저씨를 봤을 때는 겉모습만으로도 문화적 차이가 크다고 느꼈습니다. 얼굴색이며 식습관, 언어의 차이 등. 좋지 않은 사건 때문에 외국인 근로자 분들께 안 좋은 편견을 가지고 박세미 있던 그때 나짓 아저씨와 처음 마주 하게 되었습니다. 외국인이라는 낯선 조건과 생각의 차이 때문에 외국인 아저씨를 뭐라고 불러야할지, 그를 제가 외국인 근로자를 처음 접하게 된 건 초등학생 때였습니다. 당시 화훼 업에 종사하시는 부모님께서는 여름이건 겨울이건 사계절 내내 일손이 많이 필요하셨습니다. 하지만 시골에서 일할 수 있는 젊은 근로자를 구하기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젊은 근로자를 구했다 하더 라도 얼마 버티시지 못하고 그만두기 일쑤였습니다. 이 때문에 한국인 근로자들의 임금은 비싸져가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중 부모님께서는 외국인 근로자를 고용하게 되었습니다. 일손이 부족한 터라 불법외국인 노동자를 잠깐 고용하게 되었습니다. 잠자리가 마땅치 않아서 몇 달 동안 집에 같이 살게 되었는데 자꾸 도난사고가 발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물증도 없이 의심부터 할 수 없기에 그냥 넘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떻게 대해야하는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특히, 그때는 불법외국인 근로자들이 한참 늘어 날 때였습니다. 불법 외국인 근로자들이 갑자기 늘어난 탓에 몇몇 외국인의 관련된 범죄도 많이 늘어나게 되고 한국인 고용자들 역시 불법으로 들어온 외국인 근로 자란 이유하나만으로 사람으로써는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하는 분들을 신문이나 뉴스로 많이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서로에 대해 좋은 인식 보다는 좋지 않은 인식이 늘어날 때였습니다. 불법외국인 근로자들 때문에 합법적으로 들어온 외국인근로자들마저 안 좋은 시선을 받으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또한 알게 모르게 얼굴색이 다른 인종에 대한 차별하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같이 생활하며 겪어보니 외국인 근로자와 우리의 차이는 152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외국인 근로자를 처음 접하게 된 건 초등학생 때였습니다 153

얼굴색이 다르다는 것, 겨우 이것뿐이었습니다. 언어적 차이 역시 처음 에는 서로 간단한 인사정도도 힘겨울 정도였지만, 몇 년이 지나니 서로 간단한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을 만큼 수월해졌습니다. 살아온 환경만 달랐을 뿐, 그들과 우리의 차이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소수의 외국인근로자에게 받은 선입견으로 모든 외국인을 보려 했던 제 자신마저 부끄러워졌습니다. 가진 제자신이 부끄러워졌습 니다. 처음 나짓 아저씨와 마주 했을 때는 편견과 호기심만으로 그들을 바라봤었습니다. 하지만 같이 생활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들을 아줌마, 아저씨 라고 부르게 되고 얼굴색만 다를 뿐 전혀 외국인이라는 인식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3~4년이 지나자 외국인 근로자들도 일할 때 자기집 일처럼 열심히 하며 사명감을 갖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부모님들도 역시 예전엔 농장을 비워두고 하루라도 집을 떠나기를 불안해하셨지만, 나짓 아저씨 덕분에 마음 놓고 외출을 하실 수 있게 되셨습니다. 첫 월급 줄 때가 되어서 같이 외식을 하게 되었는데 한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나짓 아저씨께서는 낯선 한국 음식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김치, 고추장 등 매운 음식을 잘 먹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뿌듯합니다. 지금은 세월이 많이 흘러서 제 나이가 나짓 아저씨가 처음 저희 집에 일하러 온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내가 느끼던 나짓 아저씨는 그냥 당연히 남의 나라에 돈 벌기 위해 일하러 온 외국인 아저씨일 뿐이었습 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대부분의 외국인 근로자들이 우리나라에 일하러 오는 그 나이가 되니 다른 나라에 혼자 돈을 벌기 위해 왔다는 게 얼마나 두렵고 외로웠을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당시 그들을 하찮게 생각하고 더 이해해주며 잘해주지 못해서 너무 죄송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자신의 나라 에서 일하는 것만으로도 힘들고 지칠 나이인데, 다른 나라까지 와서 일을 한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다시 한 번 더 생각하게 됩니다. 이제는 어린 외국인 근로자,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 니다. 자신의 조국에 남아있는 부모님이나 동생들, 다른 가족 들을 위해 큰 짐을 짊어지고 자의반 타의반 한국행을 택했을 그들을 생각하니, 그들의 대한 인식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수고 해 준덕에 저는 더욱더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부모님께 저보다는 그들이 더 도움이 되고 있었습니다. 어느새 그들은 우리의 가족처럼 되었습니다. 어느 날 부모님께서는 가족들도 보지 못한 채 오랫동안 저희 집에서 일해 온 나짓 아저씨를 가엾게 여기고 아저씨를 위해 자신의 나라인 스리 랑카에 가서 가족들을 보고 올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나짓 아저씨는 고마운 마음에 돌아오시는 길에 코끼리 모형의 장식품 두 개를 사오셨 습니다. 스리랑카에서 코끼리는 좋은 뜻이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비싼 선물은 아니었지만 빈손으로 올 수도 있었는데, 뜻하지 않은 선물과 우리를 생각한 그 마음만으로도 값비싼 선물보다 더욱더 가치 있는 선물이 되었 154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외국인 근로자를 처음 접하게 된 건 초등학생 때였습니다 155

습니다. 지금껏 많은 외국인 근로자분들이 저희 집에서 일해 주셨지만 특히, 나짓 아저씨는 우리가족들에게는 더욱더 각별합니다. 이제 아저씨께서는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실 때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힘든 일도 싫어하는 기색 없이 잘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폼약캅반! (집에 가고 싶어요!) 박흥순 집에 돌아가고 싶어요. 빨리 집에갈수있게도와주세요! 지난 8월 무더운 여름이 한풀 꺾인 어느 날 아침에 태국근로자 한 사람이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안산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를 방문했습니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던 태국 근로자 P씨는 한국에 도착한지 일주일로 지나지 않았지만 한국에서의 삶이 두려움과 공포로 가득해 있었습니다. 태국 언어지원 직원과의 상담을 통해서 태국 근로자가 짧은 며칠이지만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글쎄, 금요일 저녁에 컨테이너로 만든 기숙사에 저를 혼자 있게 하고는 한국 직원들은 모두 퇴근해 버렸어요. 먹을 거라곤 라면 몇 개만 던져주고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가버렸습니다. 열심히 돈을 벌어서 돌아갈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한국에 왔던 P씨는 156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폼약캅반(집에 가고 싶어요!) 157

희망과 부푼 꿈보다는 공포와 불안에 떨어야했습니다. 한국어 시험을 치르고 고용허가를 받고 경기도 파주의 한 공장에 취업한 태국 근로자 P씨는 컨테이너 기숙사에서 혼자 금요일부터 주말까지 온갖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시간을 보내야했습니다. 그리고 연락을 취할 수 있는 태국의 다른 근로자로부터 안산센터를 소개받고 화요일 오전에 불쑥 찾아왔 습니다. 지금 당장 태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주세요! 제발 집에 가고 싶어요! 이 젊은 태국 근로자는 코리안 드림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지난 주말을 혼자서 두려움에 떨어야했던 기억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태국 근로자 P씨의 사정을 듣고 보니 어이가 없기도 하고 또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이 근로자의 사정을 듣는 내내 15전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제 기억과 오버랩이 되고 있었습니다. 저도 1995년 말에 영국 버밍엄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 미래를 향한 도전과 열정으로 제 마음은 들떠있었 습니다. 하지만 도착했던 영국의 환경은 녹녹치 않았습니다. 오후 4시가 되면 어두워지는 영국의 겨울은 습도를 지닌 추위가 뼛속 깊이 파고들었고 낯선 환경에서의 적응은 한국에서 상상했던 것과는 정반대였습니다. 떠듬떠듬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정도였기 때문에 영국 사람들은 상대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 곳에서 잘 적응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힘을 내서 저녁을 해 먹었습니다. 준비해간 깻잎 통조림에 구운 김과 함께 밥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또다시 깻잎과 김과 함께 밥을 먹었습니다. 이렇게 3일을 먹다 보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아는 사람도 없고, 먹는 것도 변변치 못했고, 의사소통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더 이상 유학 생활을 지속할 수 없었습니다. 유학을 떠난 지 일주일만에 집에 전화를 걸어서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했습니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은 제가 걱정이 되었는지 빨리 돌아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런던에서 학교 선배를 만나고 한국 사람들을 소개받고, 한국 음식이 가득 한 식탁을 대하고 힘을 내서 유학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안산 센터에 상담을 왔던 태국 근로자 P씨도 사정은 다르지만 저와 비슷한 경험을 했던 것 같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고, 음식도 입에 맞지 않는 낯선 환경에서 혼자 버려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며칠간의 기억을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태국 언어지원 직원의 친절한 안내를 받고 마음의 안정을 찾았던 태국 근로자 P씨는 안산센터 내에 있는 쉼터에 2주 정도 머물러 있으면서 태국에서 온 다른 근로자들과 어울려서 한국 생활의 노하우도 전수받고 다른 일터를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근로자가 처음에 도착해서 머물렀던 파주에 있는 사업장의 담당 자는 처음에는 어이가 없어했지만 안산센터의 상담 직원들의 설명과 설득 으로 사업장 이동에 동의해 주었습니다. 태국 근로자 P씨는 안산 센터의 쉼터에 머물러 있으면서 센터 근처의 고용센터에서 알선을 받아 지금은 시흥에 있는 사업장에서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다시 안산 센터를 찾은 태국 근로자 P씨는 한국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태국에서 온 다른 근로자들과 어울려서 한국에서의 코리안 드림의 꿈을 158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폼약캅반(집에 가고 싶어요!) 159

키워나가고 있습니다. 고용허가제로 한국에 오는 근로자들은 거의 모두 코리안 드림을 꿈꾸고 찾아옵니다. 다양한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한국 사회로 이주해 오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더 풍요롭고 안정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외국인근로자도 나와 같습니다 외국인근로자들이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하고, 그들이 일하는 일터에서 즐겁게 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외국인근로자와 사업주 그리고 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가 하나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 아침에도 환한 얼굴로 센터를 찾아 온 한국 사업장의 담당자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안산 센터의 쉼터에 머물고 있던 송선미 네팔 근로자를 화성에 있는 사업장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서 왔다고 기쁘게 말하는 얼굴을 대하면서 안산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에서 일하는 보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고용허가제 아래에서 외국인근로자와 사업주가 모두 윈-윈(Win-Win)할 수 있는 조화와 공존을 위해서 외국인근로자 지원센터의 일원으로서 힘을 보태고 있는 것이 큰 기쁨이라 할 것입니다. 한 15년 전 외국인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에 살던 나는 왜 우리 동네에 왜 외국인이 필요했는지도, 그들은 단지 한국에 돈을 벌고 꿈과 희망을 가지고 온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도 잊어버린 채 외국인들만 보면 무서 워서 도망을 가는 게 일이였습니다. 학교가 끝나 집에 가는 길에 어이, 학생~ 이라고 한국어로 부르는 소리인데도 정말 괴물이나, 이상한 사람이 부르는 것처럼 뒤도 안돌아보고 뛰어 집으로 갔습니다. 어느 날은 외국인이 버스정류장에서 학생 의정부로 가요? 나 의정부 지리 좀 가르쳐 줄래요? 하고 조금은 어색한 한국어로 부탁하면서 물어보는데 이 외국인이 나를 납치 하나? 이런 생각까지 하며 먼저 버스에 태운 후 버스기사님! 그냥 가세요. 라고 하며 다음 차를 탄 적도 있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외국인은 어렵고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60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외국인 근로자도 나와 같습니다 161

2004년 10월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고용허가제라는 업무를 시작 했습니다. 고용허가제란 사용자의 인력난을 해소해주고 외국인근로자 에게는 한국에 입국하는 부담을 줄여줄 수 있는 합법적인 제도로, 서로가 WIN-WIN 할 수 있는 제도이고, 이 제도를 통해 사장님은 외국인근로자를 고용할 수 있어서 좋고 외국인근로자는 한국에 입국해 꿈과 희망을 갖고 본국에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다는 이론만을 안 채 고용허가제를 홍보 하고 안내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왜 사장님은 힘들게 외국인을 고용해야 하는지, 외국인은 왜 힘든 공장에서 일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사용주를 위한 고용허가제와 외국인근로자를 위한 고용허가제에 대한 일을 하였 습니다. 그리고 내국인과 동등한 대우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사장님께 외국인근로자 고용하기 힘드시죠? 그래도 외국인근로자는 보험을 가입해 주셔야 하며, 내국인과 동등한 대우를 해주셔야 합니다. 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하며 사업주가 신청한 외국인근로자의 도입 업무를 하였습니다. 처음 외국인근로자를 위한 업무를 시작한 일이 외국인근로자의 보험금을 신청해주는 업무였는데, 처음에는 외국인근로자가 사무실에 오면 나도 모르게 목소리도 작아지고 소극적으로 대응했습니다. 잘 알아 듣지도 못하겠는 한국어로 퇴직금, 1년 근무했어요. 라고 하면 아~ 네 라면서 신청서를 내밀고, 외국인근로자들에게 이거 쓰시고 주세요. 라고 한국말로만 얘기를 했지만, 외국인근로자가 나의 말을 듣고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일을 겪으면서, 점차 조금씩 용기도 생기고 두려움도 줄어 들어 나는 외국인이 물어볼 만한 문장들을 미리 영작하여 책상 위에 붙여 놓고 외국인근로자에게 설명하고, 안내문을 주었습니다. 외국인근로자를 위한 업무를 하면서 만난 외국인근로자들이 점점 다른 친구들에게 나를 알려주었고, 나는 사무실에 오는 외국인근로자에게 꼭 좋은 회사 찾으 세요., 꼭 집에 가세요. 라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나에게 외국인근로자가 근무하는 회사에 찾아가서 한국에 입국하여 향수병이나 언어의 고충과 한국에 제도에 대해 어려워 하는 근로자들에게 안내하고 상담하는 업무가 맡겨졌습니다. 사무실에서 외국인근로자를 만나는 것도 나에겐 너무 힘들었는데, 사무실이 아닌 회사 에서 외국인근로자를 만나야 한다니, 그건 나에게 무척이나 스트레스가 되었습니다. 외국인근로자를 만나면 통역에게 먼저 인사를 시켰고, 외국 인근로자가 무서워서 내가 해주고 싶던 이야기들을 전하기보다는 빨리 사무실로 가야한다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그런데 외국인근로자를 한 명 한명만날때마다, 아, 이 친구들은 참 힘들겠구나. 라는 생각에 측은한 마음이 생겼고, 아무것도 모른 채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고생하는 외국인 근로자를 보면서 빨리 돈 벌어 돌아가야 할 텐데. 한국에서 조금 더 안전한 곳에서 근무하면 좋을 텐데. 라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들어도 외국인근로자는 여전히 나에게 너무 먼 나라의 사람들 이였습니다. 통역이 없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그런 사람들이라고, 한없이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다가서지 않아도 외국인근로자들이 나에게 다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사람이 162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외국인 근로자도 나와 같습니다 163

에요? 우리말 할 줄 알아요? 우리나라 가봤어요? 한국 너무 좋아요. 라고 하면서 묻고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나 또한 자연스럽게 외국인근로자와 대화를 하게 되고, 다른 외국인근로자를 만나도 예전보다는 따듯하게 웃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렇게 외국인근로자가 외국인 이라는 생각이 조금씩 줄어들고 외국인근로자의 마음을 많이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나에게 외국인근로자에 대한 생각을 확 바꿔준 일이 있었습니다. 몽골 외국인근로자가 약간 추운 날 너무 두꺼운 잠바를 입고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제 외국인근로자는 나에게 어려운 사람도, 먼 나라의 이상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들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한국을 배우고, 나와 같이 한국의 발전을 위해 함께 할 동료입니다. 나도 외국인근로자를 동료라고 이해 하는 데만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지만, 우리 모두가 조금만 따듯한 마음 으로 친구와 같은 마음으로 다가간다면 외국인근로자도 우리에게 마음을 열고, 그러면 조금 더 따듯한 한국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있어서, 몽골에서 왔는데, 왜 이렇게 두껍게 입었어요? 몽골은 더 춥잖아요. 라고 물어보니, 웃으면서 나도 사람이에요. 라고 얘기를 하는데, 처음 으로 외국인근로자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외국인근로자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고, 똑같다는 사실을 외국인근로자와 관련된 업무를 5년 넘게 하면서 처음으로 알았고, 그 한마디가 나를 너무나 부끄럽게 했습니다. 항상 외국인근로자는 힘든 사람이고, 어려운 사람 이고, 도와줘야 하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지, 나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 했던 적이 없었다는 사실도 너무나 충격적이었습니다. 한국에 있는 20만 명의 외국인근로자 모두가 똑같은 사람이고, 우리와 같이 본인의 미래와 가정 그리고 국가를 위해 일하러 온 근로자였습니다. 조금 먼 나라에서 조금은 다르게 생겼을 뿐이지, 나의 친구이고, 나의 동생이고, 나의 동료 였습니다. 외국인근로자와 함께 하면서도 나는 외국인근로자를 친구고 같은 곳을 바라보며 미래를 준비하는 나와 같다는 사실을 아는데, 5년이라는 164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외국인 근로자도 나와 같습니다 165

부록 부록 167

고용허가제란? 사 내퇴 근직 로연 복금 지제 기도 금 국내 인력을 구하지 못한 중소기업 등에 외국인근로자를 합법적으로 고용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는 제도 도입업종 - 제조업 : 상시근로자 300인미만 또는 자본금 80억원이하 - 건설업 : 모든 건설공사 발전소, 제철소, 석유화학 건설현장의 건설업체 중 건설면허가 산업환경설비인 경우에는 적용제외 - 서비스업 : 건축폐기물처리업, 재생용 재료수집 및 판매업, 냉장 및 냉동 창고업 등 - 농축산업 : 작물재배업, 축산업, 농산물 선별 건조 및 처리장운영업, 농업관련 서비스업 - 어업 : 연근해어업, 양식어업, 소금채취업 인력도입국가 ( 11. 6 현재) - 필리핀,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태국, 베트남, 몽골, 우즈베키스탄, 파키스탄, 캄보디아, 방글라데시, 네팔, 키르기스스탄, 미얀마, 동티모르, 중국 (15개국) 일반외국인근로자 고용절차 내국인구인노력 사업주 고용부 고용센터 외국인고용허가신청 사업주 고용부 고용센터 고용허가서 발급 고용센터 사업주 근로자 선정 및 근로계약 체결 사업주 근로자 사증발급인정서 발급 발급신청 지정대행기관 또는 사업주 외국인근로자 입국 및 취업교육 한국산업인력공단 및 지정교육기관 사업장 배치 부록 169

한국산업인력공단 수행업무 - 한국어능력시험 - 외국인근로자 기능수준평가 - 외국인근로자 구직자 명부작성 관리 - 근로계약서 체결대행 외국인근로자 고용 온라인 신청 - 외국인근로자를 인터넷으로 편리하게 고용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 외국인근로자 고용신청 대행여부는 사업주가 선택할 수 있으며, - 사업주가 직접 인터넷을 통해 고용신청을 희망할 경우, 한국산업인력공단은 신청 방법을 안내해드립니다. - 입국계획 수립 - 해외 송출기관 외국인력 송출업무 지원 - 사업주 및 외국인근로자 교육 훈련 지원 - 특례고용허가제에 의한 외국인(H-2) 취업교육 - 사업장내 고용체류지원 및 통(번)역 지원서비스 제공 - 체류기간 만료 외국인근로자 귀국지원 외국인근로자 고용관련 대행 수수료 서비스 내용 근로자 도입위탁 - 근로계약 체결, 출입국 지원 등 각종 신청대행 (입국전) - 내국인 구인신청 - 고용허가제 발급(재발급) 신청 - 사증발급인정서 신청, 수령 (입국후) - 외국인근로자 고용변동 신고 - 체류기간 연장신청, 재고용신청 등 수수료 사용자 직접신청 대행기관 지정신청 한국산업인력공단 위탁처리 지정 대행기관 처리 40,000원 40,000원 - 61,000원 (사업주 직접신청 상담 지원) (대행기관 3년) 편의제공 - 통역지원, 고충상담 및 처리 - 외국인근로자 업무외 질병 및 상해 수습지원 등 - 전용보험가입 및 지급신청 무료 72,000원 (대행기관 3년) 공통 : 취업교육비 별도(제조업 : 184,000원, 농축산업/건설업/어업 : 204,000원) 지정 대행기관 : (제 조 업) 중소기업중앙회 02)2124-3311~6 (농축산업) 농협중앙회 02)2080-5591~8 (어 업) 수협중앙회 02)2240-3302~3 (건 설 업) 대한건설협회 02)3485-8200 신청 후 외국인근로자 도입 진행정보는 인터넷(www.eps.or.kr)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상담문의 한국산업인력공단 외국인력상담센터 1577-0071 사업장 소재지 관할 한국산업인력공단 지부/지사 170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부록 171

사업주 교육 및 외국인근로자(체류자격 E-9) 교육훈련 과정(직종) 훈련실시 관할 지부/지사 과정(직종) 훈련실시 관할 지부/지사 경기북부지사, 경기지사, 경인지부, 광주지역본부, 머시닝센터 경기지사 사업주 외국인근로자 고용관리 교육 외국인근로자 고용 사업주에게 우수한 고용 및 관리기법 교육을 통해 안정적인 기업 기초직무 (제조업) 대구지역본부, 서울남부지사, 서울지역본부, 성남지사, 전남지사. 충남지사, 충북지사, 포항지사 선박제조 목포지사 운영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된 교육입니다 교육 개요 전기용접 경남지사, 광주지부, 대구지부, 부산남부지사, 부산지역본부, 울산지사, 충남지사, 포항지사 수배전반조립 경기북부지사 - 교육구성 : 5시간(1일 5시간) - 교육내용 : 고용허가제의 이해, 외국인근로자와의 바람직한 고용관계, 출입국 관리법, 외국인근로자 노무관리기법, 산업재해 예방교육 - 접수 및 교육장소 : 사업장 소재지 관할 한국산업인력공단 지부/지사 - 접수방법 : 방문, 팩스, 우편을 통해 사전 교육신청 - 문 의 : 한국산업인력공단 지부/지사 또는 국번없이 1577-0071 지게차운전 컴퓨터활용 강원지사, 경기북부지사, 경인지역본부, 성남지사, 전남지사, 포항지사 경기북부지사, 경기지사, 경북지사, 경인지역본부, 광주지역본부, 대구지역본부, 대전지역본부, 부산남부지사, 부산지역본부, 서울남부지사, 서울동부지사, 서울지역본부, 성남지사, 전남지사, 충남지사, 충북지사, 포항지사 자동차보수도장 자동차차체수리 CNC선반 CO 2 용접 대전지역본부 대전지역본부 경기지사 부산남부지사 목포지사 포항지사 교육이수에 따른 인센티브 자동차정비 경기북부지사, 경기지사, 경남지사, 경인지역본부, 대전지역본부, 부산지역본부, 성남지사 굴삭기운전 경인지역본부 - 고용고용부 사업장 지도점검 1회 면제(교육일로부터 1년) 재직 외국인근로자 직업능력개발훈련 고용허가제로 입국하여 산업현장에서 재직중인 외국인근로자의 사업장 적응력 강화 및 기업의 생산성 향상을 지원하기 위한 훈련입니다 훈련 개요 - 훈련구성 : 48시간(1일 4~8시간, 주말교육) - 훈련기간 : 11년 5월~11월 - 접수 및 교육장소 : 지역별로 선정된 63개 전문교육훈련기관 - 접수방법 : 방문, 팩스, 우편을 통해 사전 훈련신청 - 문 의 : 한국산업인력공단 지부/지사 또는 국번없이 1577-0071 사업장변경 외국인근로자 취업적응 교육 사업장 변경을 신청한 일반외국인근로자(체류자격 E-9, 변경신청일로부터 1년 미만 인자)의 취업적응 교육을 통해 안정적인 국내 취업생활을 지원하는 교육입니다 교육 개요 - 교육구성 : 1일 4시간(고용허가제의 이해, 신바람나는 직장생활, 대인관계와 문제해결 등) - 신청기간 : 사업장변경 신청기간 또는 재취업일로부터 1년이내 - 접수 및 교육장소 : 사업장 소재지 관할 한국산업인력공단 지부/지사 - 접수방법 : 방문, 팩스, 우편을 통해 사전 교육신청 - 문 의 : 한국산업인력공단 지부/지사 또는 국번없이 1577-0071 172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부록 173

귀환 외국인근로자 기능 창업훈련 취업활동기간 만료 외국인근로자(체류자격 E-9)가 본국 귀국 후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기능교육 및 창업을 지원하는 훈련입니다 훈련 개요 - 훈련구성 : (한국내 교육) 40~80시간(1일 3~6시간, 주말교육) (베트남 현지 교육) 80~240시간(1일 4~8시간, 매일교육) - 훈련기간 : 11년 6월 ~ 11월 - 훈련대상 : 고용허가제로 입국하여 합법체류 중인 재직근로자 중 12. 4. 30까지 취업활동기간이 만료되는 근로자(체류자격 E-9) - 접수 및 교육장소 : 지역별로 선정된 전문교육훈련기관 - 접수방법 : 방문, 팩스, 우편을 통해 사전 훈련신청 - 문 의 : 한국산업인력공단 지부/지사 또는 국번없이 1577-0071 고용체류지원서비스 안내 의사소통 언어지원 서비스 - 통역지원을 통한 사업장내 갈등 조정, 언어소통 등 애로 해결 - 현장 직무 및 안전교육 등 직장교육 통역지원 - 급여명세서, 안전수칙, 기숙사 이용수칙(서식) 관련 통번역지원 서비스 신청 안내 - 신청비용 : 무료 - 가능언어 : 필리핀, 태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몽골, 스리랑카, 캄보디아, 파키스탄, 우즈 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네팔, 방글라데시, 미얀마, 동티모르, 중국(15개국) - 신청방법 : 전화 1577-0071 또는 홈페이지 (http://www.returnjob.or.kr)에서 신청 담당직원과 상담 후 3일 이내 통역원 사업장 방문 구분 훈련 직종(과정)명 훈련시간 비 고 국내 교육 베트남 현지 교육 굴삭기 운전 40H 기초과정 용접(전기, CO 2) 80H 기초과정+심화과정 컴퓨터 수리 40H 기초과정 자동차 정비(경정비) 80H 기초과정+심화과정 한국어 통역 80H 기초과정+심화과정 미용 80H 기초과정+심화과정 생산관리 80H 뷰티창업 240H 고용행정 지원 서비스 행정기관에 따라 사안별 신고기한이 상이하기 때문에 서비스 신청기한 내에 한국산업 인력공단(1577-0071)에 사전 문의 신규고용 행정지원 (신청기한 : 국내입국 후 7일 이내) 외국인등록증 발급 관련 절차 및 제출 서류 안내 고용허가제 4대 전용보험(출국만기, 귀국비용, 상해, 보증보험) 가입절차 및 제출서류 안내 4대 사회보험(고용, 산재, 의료, 국민연금) 가입절차 및 제출서류 안내 고용변동 행정지원 (신청기한 : 고용변동 또는 근로계약 만료 7일전) 고용변동 등 신고절차 및 제출서류 안내 근로자 사업장 변경 신고 절차 및 제출 서류 안내 외국인근로자 고용허가기간 연장 등 신고절차 및 제출서류 안내 174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부록 175

취업기간 만료 행정지원 (신청기한 : 취업기간 만료 2개월 전) 취업알선 절차 재고용 허가 절차 및 제출서류 안내 출국예정 외국인근로자 임금 청산 절차 안내 출국예정 외국인근로자 해당 보험금 청구 절차 안내 구인업체 < 리턴잡 사이트 접속> 취업희망자 외국인근로자 본국 한국기업 취업알선 채용등록 구직등록 기업회원가입 채용공고 신청 개인회원가입 구직표 등록신청 귀국지원 서비스 안내 한국산업인력공단은 체류기간이 만료되는 외국인 근로자들의 자발적인 귀국과 본국에서의 안정적인 정착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성공적 기능창업 귀국예정자 보험금 청구 귀국자 취업 귀국자 커뮤 귀환설명회 교육 취업알선 안내 알선 니티 운영 취업알선(리턴잡 온라인상) 면접지원(해외 EPS센터) 귀국자 커뮤니티 운영 성공적으로 귀국한 외국인근로자등의 커뮤니티를 구축하여, 간담회 개최, 인터넷 카페 운영, 한국소식지 발송, 고용허가제 사전교육 강사 위촉 등의 활동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귀국 전(성공적 귀국준비 지원) 귀국 후(본국정착지원) 취업알선 서비스 리턴잡 사이트(http://www.returnjob.or.kr)를 통해 해외진출 한국기업과 귀국 근로자를 연결하는 취업알선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상담문의 한국산업인력공단 외국인력상담센터 1577-0071 리턴잡 사이트 http://www.returnjob.or.kr 본부 고용체류지원팀 02-3271-9435~6 취업알선서비스 신청자격 해외구인업체 : 현지에서 본사 또는 지사/공장을 운영중인 한국기업 구직자 : 귀국근로자, 귀국예정자(체류기간 만료 3개월이내) 176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부록 177

한국산업인력공단 지부/지사 주소 및 연락처 기관명 주 소 전 화 번 호 서울지역본부 서울 마포구 백범로31길21 (공덕동 370-4) 02-3274-9624~6 서울동부지사 서울 광진구 뚝섬로 32길 38(자양4동 63-7) 02-2024-1736,1738 서울남부지사 서울 영등포구 버드나루로 110(당산로 121-102) 02-6907-7121~6 강 원 지 사 강원 춘천시 원창고개길 129(동내면 학곡리 101-24) 033-248-8508 강 릉 지 사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방동길 60(방동리 649-2) 033-650-5722 부산지역본부 부산 북구 금곡대로 441번길 26(금곡동 1877) 051-330-1830,1834 부산남부지사 부산 남구 신선로 454-18(용당동 546-2) 051-620-1935 울 산 지 사 울산 남구 번영로 173(달동 572-4) 052-265-9297 경 남 지 사 경남 창원시 성산구 두 대로 237(중앙동 105-1) 055-212-7233,7236 대구지역본부 대구 달서구 성서공단로 213(갈산동 971-5) 053-580-2364~6 경 북 지 사 경북 안동시 서후면 학가산 온천길 42(명리 406-1) 054-840-3014 포 항 지 사 경북 포항시 북구 법원로 140번길 9(장성동 1370-11) 054-278-7704 경인지역본부 인천 남동구 남동서로 209(고잔동 625-1) 032-820-8653~7 경 기 지 사 경기 수원시 권선구 호매실로 46-68(탑동 906) 031-249-1243~7 경기북부지사 경기 의정부시 추동로 140(신곡동 801-1) 031-850-9133~4 성 남 지 사 경기 성남시 수정구 성남대로 1217(수진동 4554) 대한도시가스(주)건물 4~5층 031-750-6232~5 광주지역본부 광주 북구 첨단벤처로 82(대촌동 958-18) 062-970-1752~4 전 북 지 사 전북 전주시 덕진구 유상로 69(팔복동 2가 750-3) 063-210-9206 전 남 지 사 전남 순천시 평화로 67(조례동 480) 061-720-8525 목 포 지 사 전남 목포시 영산로 820(대양동 514-4) 061-284-1953 제 주 지 사 제주 제주시 동광로 85(일도2동 361-22) 064-729-0726~7 대전지역본부 대전 중구 서문로 25번길 1(문화동 165) 042-580-9161,9191 충 북 지 사 충북 청주시 흥덕구 1순환로 394번길 81(신봉동 244-3) 043-279-9016~7 충 남 지 사 충남 천안시 서북구 천일고1길 27(신당동 434-2) 041-620-7671~2,7619 한국산업인력공단 홈페이지 : www.hrdkorea.or.kr 리턴잡 홈페이지 : www.returnjob.or.kr 외국인력상담센터 : 1577-0071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발 행 일 : 2011. 9 초판 발 행 : 한국산업인력공단 편 집 : 외국인력국 고용기획팀 주 소 : 서울 마포구 백범로31길 21 전 화 : (02) 3271-9422 홈페이지 : www.hrdkorea.or.kr 인 쇄 : 문원사 (02) 739-3911~5 ISBN 978-89-5923-566-7 03040 < 비매품 > c본 책의 어느 부분도 발행인의 승인없이 무단복제시는 저작권법에 위배됩니다. 178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