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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저널(10월호).ok :42 PM 페이지50 DK 전문가 연재 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포니의 출현은 참으로 모험이었으나 한국 최초의 고유모델 개발로 포니신화 (legend of Pony) 를 만들었다. 포 니신화 는 훗날 파산에서 기아자동 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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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정덕배-중국생활체험기.hwp

정치 2014년 9월 26일 금요일 2 朴 대통령, 캐나다 美 순방 국제사회 공감대 이끌어 유엔서 연설 위상 높여 한 加 세일즈외교 성과 박근혜 대통령이 6박7일 간의 캐나 다와 미국 순방을 성공리에 마무리하 고 26일 오전 귀국한다. 박 대통령은 이번 순방을 통해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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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F U-8 Championship 아시아학생선수권대회 0년 월 0일 금요일 한국 팀 선수단 감독= 배종필 (강화고 감독) 코치= 김학철 (서해고 감독) 코치= 장필규 (신갈고 코치) 국제대회 첫 출전, 큰 무대서 꿈 키운다 언남고 김민성-한양공고 이지성 GK 김승건

2 드라마가 그린 전통시장, 우리의 삶과 희로애락을 담아 주인공 삶의 공간됐던 한약방ㆍ짜장면 가게ㆍ야채가게의 현재 모습은? TV 드라마에는 종종 전통시장이 등장한다. 주인공의 삶의 터전이 되기도 하고 주요한 만남이 이뤄지는 장소로도 쓰인다. 전통시장을 오가는 사람들만

연번 동명 유형별 식당명 주소1 주소2 대표자 전화번호 2.6 (토) 연휴기간 운영여부 (O.X로 표기) 2.7 (일) 2.8 (월) 2.9 (화) 2.10 (수) 12 건국동 분식 피자가기가막혀 광주광역시 북구 용두동 (영암마트 맞은편 농협 건물 1 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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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 ①초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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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차 > 제1 장. 조사 개요 1 1. 조사의 목적 2 2. 조사의 설계 2 3. 조사항목 2 4. 조사 진행 3 5. 조사 응답 현황 4 제2 장. 조사 결과 분석 5 1. 결제수단 비중 6 2. 신용카드 수수료 인하율 7 3. 우대수수료 적용 상한선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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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한달 간, 씨앤앰 VOD [지상파 3사 통합월정액] 상품을 리모콘으로 가입하신 고객님 모두에게 VOD 1만원 쿠폰 을 드립니다! 씨앤앰 [지상파3사 통합월정액]이란? 지상파 3사 VOD 무제한 시청! 단 한번 가입으로 지상파 3사의 모든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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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Ⅰ. 감사의 목적 1 Ⅱ. 감사기간 1 Ⅲ. 감사실시대상기관 2 Ⅳ. 감사반의 편성 3 Ⅴ. 감사실시경과 4 Ⅵ. 주요감사실시내용(소관부처별) 6 1. 법 무 부 6 2. 법 제 처 감 사 원 헌법재판소 법 원 군사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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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와 그 남자의 사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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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호 완성(출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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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업 보 고 서 (제 181 기) 사업연도 2012년 01월 01일 2012년 12월 31일 부터 까지 금융위원회 한국거래소 귀중 회 사 명 : (주) 신한은행 대 표 이 사 : 서진원 본 점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길 20 (전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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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저널(10월호).ok :32 PM 페이지15 DK LG전자는 최근 건설 시행사인 아이케이산업개발과 에너 또한 영흥풍력상용화단지는 수도권 내 청정에너지 공급의 지 절약형 그린 아파트 조성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 핵심적인 역할은 물론 국내 풍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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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내현 룕安 신당과 함께 낡은 진보 청산룖 정치 새정연 탈당 선언 광주 2호 보수까지 외연을 넓힘으로써 정권교체 의 희망의 싹을 틔우겠다룖며 탈당을 선 2 임 의원은 이날 국회 정론관 기자회 김동철 의원에 이어 광주 의원의 두 번 견에서 룕호남과 중도세력을 모두 품지

목 차 1.감사목적 1 2.감사기간 1 3.감사위원회 편성 1 4.감사대상기관 2 5.위원회별 감사일정(총괄) 3 6.감사진행 4 7.감사대상기관별 증인 등의 출석범위 5 8.위원회별 감사 사무보조직원 선정 6 9.감사결과 처리의견 7 10.기타 감사의견 9 11.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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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클라비어 음악의 연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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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동문회소식 2011년 7월 27일 수요일 제16호 재경동문 소식 목포대 동문들의 단결과 화합 강조 재경동문 관악산 산행 목포대학교총동문회는 지난 4월7일 하당에서 30 여명의 동문 이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2011년 4월 4월 정기 이사회 이사회를 열었다. 이번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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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제회 소식 지속가능경영 위한 비전 가치 창조 총력 목돈급여, 금융소득종합과세 대상이지만 올해 부문별 연간 수익 목표 초과 달성 전망 해약 후 재 예치 활용하면 불이익 없어 제휴할인호텔 확대 등 회원생활복지도 개선 공제회 관리자 워크숍 공제회가 2010년의 성공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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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제회 소식 2011 고객만족경영대상 수상 제92회 대의원회 개최 내년도 예산안 등 심의 2009년 이어 2번째 회원 감동경영 공인 오는 28일 경주에서 평가단 패널단 통해 현장 목소리 적극 반영 한국교직원공제회는 오는 28일 경주교 육문화회관에서 제92회 대의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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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종윦윦합 인천관광공 설립 본격화 수익성 우려 덜어낼까 시, 조례 입법예고 현금 50억 하버파크호텔 출자키로 시민단체, 재정난 속 적자 예상 건전화 로드맵 공개 요구 인천관광공사 설립이 가시화됐 인천시는 11일 인천관광공사 설 립 및 운영에 관한 조례안 을 입법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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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합의금 도둑 안 맞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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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F U-18 Championship 아시아학생선수권대회 016년 6월 일 금요일 마카오 코칭스태프 설기현은 우리 친구 외국 선수단 이모저모 아시아 청소년들의 축제 무대인 제회 아시 아학생(U-18)선수권대회가 지난달 9일 막을 내렸다. 8개국 9개팀이 참가해 경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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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사 경과 수사 착수 배경 신용카드 및 현금영수증 결제승인 대행 서비스업체인 밴사와 대형 가맹점 간의 리베이트 수사 과정에서,밴 수수료로 창출되는 막대한 이익을 둘러싸고 밴 업계의 경쟁이 과열되고 있다는 점에 착안 관련 비리를 집중 내사한 결과,밴 사업자 선정을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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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기 집 2011

발간사 희망의 땅에서 꿈꾸는 사람들의 이야기 동남아 국가에서 한류열풍이 강하게 불고 있다는 소식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한류열풍의 중심에는 한국 아이돌 가수와 드라마가 자리잡고 있지만, 한국 취업에 대한 열망도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고용허가제 시행 7주년에 접어들면서 한국 취업이 이제 눈물보다는 희망 으로 더 크게 다가가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간, 한국산업인력공단은 과거의 잘못된 외국인 고용 제도와 관행을 바로잡고 사용자와 외국인근로자 모두가 상생하는 제도적 환경을 만들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이 노력은 2011년 유엔공공행정상 부패 방지 및 척결분야 대상을 수상하는 등으로 대외적으로도 인정을 받고 있습 니다. 하지만, 아직 모든 사용자와 외국인근로자들의 어려움을 충분하게 해결해 주는 데는 미흡한 점이 있기도 합니다. 이는 결국 외국인근로자와 우리 사회가 함께 한마음으로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과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외국에서의 취업생활이란 그 자체가 가시밭길입니다. 이 수기집에 있는 외국인근로자들의 사연들을 보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꿈을 위해 낯선 길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 길이 희망인 것은 외국인근로자들이 혼자 걸어가고 있는 길이 아니라 따뜻한 시선으로 함께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 글들을 통해 저는 우리 사회가 외국인근로자, 사용자 그리고 모든 한국 사람들이 함께 동행하는 따뜻한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 습니다. 모쪼록 저는 이 책이 한국사회와 외국인근로자가 함께 발전하고 행복한 삶을 가꾸어 나가는 사회가 되는데 작은 밑거름이 되었으면 합니다. 희망의 땅을 찾아와 자신과 가족들의 윤택한 삶과 고국의 발전을 꿈꾸고 있는 모든 외국인근로자들에게 따뜻한 관심과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2011. 9. 한국산업인력공단 이사장 송 영 중 2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발간사 3

일러두기 본 수기집은 외국인근로자의 건설적인 생산활동 및 바람직한 고용문화 정착을 장려하기 위해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2010년 11월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체험 수기 를 공모하여 선정한 수기를 모아 발간한 것입니다.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체험 수기 공모 는 외국인근로자(E-9, H-2) 및 사용자를 포함한 모든 내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외국인근로자 부문, 사용자 부문, 그리고 일반 부문(외국인근로자의 동료 또는 봉사자 등 모든 내국인) 으로 나누어 접수받고 심사하였습니다. 총 73건의 수기가 접수되었으며, 이중 외국인근로자 부문 6작품, 사용자 부문 4작품, 일반 부문 6작품이 최종 수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본 수기집에는 이 16작품 외 높은 평가를 받은 7작품을 추가하여 총 23작품을 담았습니다. 5

차례 2 발간사 - 희망의 땅에서 꿈꾸는 사람들의 이야기 송 영 중, 한국산업인력공단 이사장 외국인근로자부문 일반부문 11 꿈은 이루어진다 (최우수작) 남닥, 몽골 103 Joy of Joey! (최우수작) 임태빈 17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한 한국, 한국어 (우수작) 반둥, 베트남 108 선생님아직도그일하고있어요? (우수작) 황유진 23 사랑하는 고국 가족을 위한 배움으로부터 변화된 삶 (우수작) 이정숙, 중국동포 117 꿍깡꿍깡 띠리리리리리 (우수작) 김은주 30 한국의 다섯 가지 특징과 나의 이야기 (장려작) 서민툰, 미얀마 127 외국인 근로자와 5년 1개월의 시간을 가지며 (장려작) 김신영 35 나의 한국 생활 (장려작) 웬후마잉, 베트남 133 하오리 여우( 好 麗 友 ) (장려작) 류화선 45 내일은 해가 뜬다 (장려작) 이명, 중국동포 141 외국인 20명이 아니라 직장동료 20명입니다 (장려작) 문강표 53 내 마음의 틈새를 찾아 류일복, 중국동포 145 나의 소중한 우리 가족 정정치 58 희망의 천국을 찾아서 사르진, 스리랑카 152 외국인 근로자를 처음 접하게 된 건 초등학생 때였습니다 박세미 64 대한민국, 꿈이 실현되는 곳 바투란 마 토네트, 필리핀 157 폼약캅반! (집에가고싶어요!) 박흥순 사용자부문 73 외국인이 팀장인 우리공장 (최우수작) 이병흥 80 우리 회사는 농산물을 재배하고 수확하는 곳입니다 (우수작) 이미화 88 우리의 친구 차나카 (장려작) 서석윤 94 외국인근로자 체험수기 응모 (장려작) 이형순 161 167 외국인근로자도 나와 같습니다 송선미 부록 6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목차 7

외국인근로자부문 외국인 근로자 부문 9

최우수작 꿈은 이루어진다 남닥, 몽골 2006년 3월 16일 몽골 울란바토르를 떠나 대한민국 인천 공항에 내리면서 한국 생활이 시작되었다. 대한민국에 취업하기 위하여 내가 알아 본 한국은 우리나라 보다 경제 및 사회발전이 훨씬 앞서간다고 했다. 비행기를 오르기 전까지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할지 궁금하였고, 호기심 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인천공항에서 여수까지 내려오는 길에 본 대한민국의 고속도로와 시외교통, 풍경은 나를 설레게 하기에 충분하였고, 처음 만나는 대중교통 서비스는 내 생각보다 엄청 높은 수준이었다. 한국에 도착하여 처음 근무했던 회사에는 그곳에 4개월 먼저 온 몽골 근로자가 1명 있었다. 그 몽골 친구는 4개월 동안 한 번도 회사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회사 밖으로 나가서 미용실, 마트, 은행 등에 가기 위해서는 한국직원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길을 잘 모르니 불안해서 꿈은 이루어진다 11

어디를 가든지 한 사람과 동행해야 해서 너무 힘들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어느 날 혼자 할 수 있다 고 마음먹고 시간을 내서 자전거를 타고 여수시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내 눈에 들어오는 한국풍경은 모든 것이 새로웠다. 어디를 가도 모두 한글로 쓰여 져 있어서 내용을 알 수 없어서 답답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야만 했기에 늘 미안하여 한글을 빨리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디에 무엇이 있고 회사 주변에는 어떤 것들이 있고 회사 주변의 길을 조금 더 알려고 자세히 보고 다녔다. 처음 마트 갔을 때는 밀가루, 소금, 물 등 구분할 줄 몰랐는데 알게 되었고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 낯선 길도 아는 길이 되었고 마트에서도 물건 사는게 쉬워졌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기계분야에 호기심이 많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여수에 있는 중고 자동차시장에 가 보았다. 거기서 보았던 많은 종류의 자동차들을 보고 마음이 흥분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충격은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바다를 보았던 것이 었다. 바다를 처음 보았을 때 기분이 매우 좋았다. 넓은 바다는 정말 신기 했다. 배를 타고 가면서 한국생활의 힘들었던 일들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 부모님에 대한 걱정을 잠깐 동안이나마 잊을 수 있었다. 회사에서 밥을 먹을 때 젓가락질 하는 것을 보고, 어디서 배웠냐면서 회사동료들이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나라에서 옛날부터 사용 했던 것 이라고 말했다. 또 어떤 때는 면도칼을 보이면서 너희 나라에도 있냐 고 물었다. 21세기 글로벌 시대인데 몽골도 글로벌 시대를 추구하는 일원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서 어디에 무엇이 있던지 우리나라도 있다고 했다. 고 설명해 드렸다. 회사 기숙사에서 지내면서 사람들 눈치가 보여서 힘들었다. 그래서 2주쯤 지나 밖에서 지내기 위해 방을 찾아 다녔다. 그렇지만 한국말도 모르고 신문도 읽을 줄도 몰랐기 때문에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방을 얻어야만 했다. 회사에서는 기숙사에서 지내기를 원했지만, 나 또한 10만원의 월세와 회사 출퇴근이 편리한 곳으로 선택해야 되었기 때문에 눈치를 보기는 했지만, 방관리비를 전액 내가 지불하면서 기숙사에서보다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왜냐하면 첫 번째는, 남의 눈치 안보고 편하게 나의 생활을 할 수 있고, 두 번째는 같이 있던 동료가 아무 때나 일어나서 떠드는 바람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고 나중에 기숙사에 입사했다고 화장실 청소담당자라고 내 이름을 화장실 문에 써 붙여 놓아서 너무 서러워 밖에 나가 살고 싶었다. 일하러 왔는데 화장실 청소라니 방을 얻어 이사 하던 날 동네사람들이 김치, 이불, 그릇을 주셔서, 부족한대로 가정에서 필요한 살림살이가 다 준비되었다. 한국 사람들은 몽골사람들처럼 착한 성격으로 비슷하게 느껴졌다. 일 년 후 근로계약이 만료되어 다른 회사로 옮기게 되었다.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다. 어려움을 조금 더 덜 수 있었다. 왜냐하면 지난 1년 동안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회사 안에서 외국인 근로자들 중에 제일 나이가 어려서 모든 사람들이 명령하고 무시했다. 우리 회사는 명절 전에 제일 바쁘고 일이 많았다. 그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고 보너스 주는데 한국 사람들은 많이 주는데 나는 제일 적게 주었다. 그때 나는 일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이것에 대해서 사장님께 말씀 드렸지만, 12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꿈은 이루어진다 13

사장님은 이런저런 이유를 말하면서 넘어 갔다. 지금도 내가 당하고 있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과 똑 같은 사람으로 취급해 달라고 오랫동안 싸웠다. 때로는 그 사람들이 나한테 시발 새끼 라고 말을 자주 할 때마다 나는 사람 취급해 달라고 오랫동안 말을 했다. 그 사람들이 이제는 나한테 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마침 그 곳에서 일요일이면 한국어 교육을 하고 있었다. 몸이 아파도 회사에서 일을 해야 했고 병원에 가서도 아픈 것을 자세히 말하지 못하고 손으로 말해야 했던 것들을 생각하며 열심히 공부해서 한국어 자격증 시험에도 합격했다. 잘 대해 준다. 또한 말 끝마다 반말하면서 이것 해, 저것 해 등 일을 시킬 때마다 내 마음이 몹시 나빴다. 나에게 무시하는 말투가 아닌, 높임말 하면 기분 좋게 일을 잘하고 다정하게 서로 잘 지낼 수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동료들은 잘 대해준다. 회식을 하면서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면서 더욱 동료들 사이에 가까워졌다. 이번 여름에 낚시를 갔었는데 가장 좋은 추억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제일 크고 좋은 고기를 잡아서 1등 했기 때문이다. 3년 기간이 끝나고 몽골 갔다 와서 한국어 문법을 제대로 배우기로 다짐했다. 몸이 아파서 회사를 쉬고 싶었지만 아픈 것을 한국말로 다 표현 하지 못하니까 회사에서는 일하기 싫어서 거짓말한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많이 힘들었지만 참고 일을 해야 했다. 병원에 가서도 아픈 곳을 말로 이야기 못하고 손이 먼저 말을 했다. 그렇게 한국말에 익숙하지 못해서 힘들던 나에게 몽골에 계신 그리운 부모님처럼 고마운 분들을 만나게 되었다. 여수외국인노동자센터, 그곳에서 만난 소장님과 국장님은 처음 만나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정말 고마웠다. 외국인노동자센터 에서 정말 많은 자유를 느꼈다. 고충 상담을 통해서 나의 아픔과 어려움을 들어주고 적극적으로 해결해 주려는 모습을 보면서 모처럼 사람대우를 한국에서 4년 6개월 동안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었고 배우는 기간이었다. 한국으로 돈 벌로 온 것은 몽골에 집을 마련하려고 왔는데 지금은 그 목적을 이루었다. 또한 새로운 꿈이 생겼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나머지 기간 동안 더욱더 열심히 일하고 있다. 한국의 웰빙 요리를 몽골에 소개하고 싶다. 한국의 요리는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한다. 그 재료를 한국분들조차도 모르는 것들이 많다. 텔레비전에서 요리강습 프로그램을 많이 보게 되는데, 그 요리법과 방법을 알고 싶어 졌다. 우리나라는 농사를 많이 짓지 않아도 자연으로부터 야생 야채, 과일 등을 풍부하게 얻을 수 있다. 웰빙 식품들이 한국도 많지만, 우리나라에는 자연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식재료들이 많다. 나는 할 수 있다면 한국에서 그 요리에 사용되는 재료에 대해서 공부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한국산업인력공단 귀국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휴일에 요리교육을 받아서 자격증도 취득하고 몽골에 귀국하여 한국에서 배운 요리를 활용하여, 몽골사람들의 식생활을 개선해 나가고 싶다. 몽골사람들은 양고기 등의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고 다양하게 음식을 먹지 않아 오래 살지 못하는 요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리학원에 등록하여 요리를 배울 14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꿈은 이루어진다 15

계획이다. 본국에 귀국하여 몽골인들에게 안전하고 다양한 먹을거리를 우수작 공급해주고 한국의 좋은 음식문화도 소개 하고 싶다 그래서 몽골사람들도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어느덧 한국어 실력이 많이 늘어서 몸이 아파서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아픈 곳에 자꾸만 손이 갔었던 내가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한 한국, 한국어 외국인노동자센터의 도움으로 이제는 마음이 담긴 한국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어서 회사에서나 생활 하는데 편해졌다.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들께 감사하고 나와 같이 한국에 처음 와서 어려움을 격고 있는 근로자들의 좋은 친구와 이웃이 되어주시길 기대한다. 노동자 센터를 통해서 만났던 한국 분들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것 같다 반드시 반둥, 베트남 한국에서 나의 꿈은 꼭! 이루어질 것이다. 화이팅!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 이름은 NGUYEN VAN DUNG입니다. 베트남어로 이름을 발음 하기 힘들어서 한국 사람들은 저를 반둥 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저의 한국이름은 반둥이 되었습니다. 저는 베트남에서 왔습니다. 한국에 온 지 6년이 되었습니다. 현재 서울에 있는 극동산업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외국인근로자들은 한국에 거주할 수 있는 체류기간이 만료되면 돈을 더 벌기 위해 불법으로 한국에 계속 있으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저는 내년 4월에 베트남에 돌아가기로 결정 했습니다. 고향에 돌아가서 예전에 포기했던 꿈을 이루겠습니다. 베트남에 돌아가기 전에 제1회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체험 수기 를 통해서 한국에서 사는 동안 체험한 것들을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16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한 한국,한국어 17

읽고 다른 외국인근로자들이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적응이 안 돼서 몸이 아프고 코피까지 났습니다. 공장에 들어가서 일을 하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한국어를 하지 못 해서 일을 빨리 못 배웠습니다. 저는 베트남에서 전문대를 졸업하기 전에 취업비자로 한국에 올 수 있는 프로그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저는 고민이 많았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후에 한국에 가서 일을 하는 것과 베트남에서 좋은 회사에 들어가서 일을 하는 것 중에 어떤 것이 좋을지 몰랐습니다. 저는 농사를 짓는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릴 때 고생을 많이 했고 부모님도 저를 키우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베트남에서 일을 하면 월급이 많지 않으니까 가족들의 생활을 모두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어려서 사회생활을 한 적도 없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았습 처음에 공장사람들은 저한테 잘 대해 줬습니다. 일도 가르쳐 주고 친절 했습니다. 그런데 몇 개월 후에 새로운 차장님이 공장에 와서 같이 일을 했습니다.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서 저한테 남들보다 많은 일을 시켰습니다. 한국어를 잘 못 하는 외국 노동자라고 놀리고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공장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 후에 취업을 하지 못해서 빵집 에서 일했습니다. 남는 시간에는 열심히 한국어를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한 달 후에 지금 다니고 있는 공장에 들어왔습니다. 한국말을 조금 잘 하게 되니까 한국친구도 사귀고 한국생활에도 적응이 되었습니다. 니다. 한국에 가서 일을 잘 하면 베트남에서 보다 월급을 많이 받을 수 있었습니다. 또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이 있지만 기계와 공구들이 많지 않아서 연습할 시간과 방법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가서 좋은 기술도 배우고 일을 하면서 한국어를 공부할 생각을 했습니다. 한국어를 배워 베트남으로 돌아오면 베트남에 있는 한국회사에 취직을할수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한국에 오기로 결정했습니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생활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음식이 입맛에 안 맞아서 못 먹었습니다.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려고 했는데 길을 잘 몰라서 못 갔습니다. 먹고 싶은 음식을 사고 싶어도 비쌀까 봐 안 샀습니다. 그래서 한 달 동안 베트남에서 가져온 말린 음식만 먹었습니다.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겨울이 되었습니다. 추운 한국 날씨에 극동산업에서 일을한지5년이 되었습니다. 베트남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으니 기계 부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하는 것이 딱 맞았습니다. 학교에서 기본적인 기술을 배웠으니까 일을 더 빨리 배웠습니다. 공장 에서 일을 하고 집에 가서 새벽까지 한국어를 공부했습니다. 공장에서 일을 잘하고 한국말도 잘하니까 사장님이 저한테 잘 해주셨습니다. 월급도 많이 주시고 1년에 한번 휴가를 받고 베트남에 갔다 오게 해 주셨습니다. 한국에 오기 전에는 한국에 대해서 아는 것들이 많지 않았지만 지금은 한국이 좋습니다. 가족이 그립고 생활이 조금 힘들지만 좋은 점도 많습 니다. 핸드폰, 인터넷, 교통수단 등은 편하고 빠릅니다. 저는 외국인 근로자로서 막 한국에 온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몇 가지 18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한 한국,한국어 19

말을 하고 싶습니다. 첫째, 공장에서 일을 하는 동안에 윗사람 말을 잘 듣고 일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기술도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사고가 나지 않도록 공장 안전 수칙을 잘 지켜야 합니다. 저도 일을 빨리 하려고 하다가 발을 다쳐서 너무 힘들었습니다. 병원에 혼자 있어서 외로웠고 몇 달 동안 발이 아파서 잘 돌아다니지 못 했습니다. 화장실 갈 때, 아침에 세수를 할 때, 샤워할 때에는 너무 불편했습니다.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해서 미안 했습니다. 그러므로 다치지 않게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둘째, 한국생활을 잘하려면 한국어를 배워야 합니다. 한국에 오기 전에 베트남에서 한국어의 모음과 자음만 배웠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처음 왔을 때 한국생활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무슨 말을 하지는 잘 몰라서 답답했고 말을 하지 못하니까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어를 열심히 배우기로 결심하고 스스로 노력했습니다. 지금은 한국말로 자신이 있게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한국어를 공부하는 비법을 알려 주고 싶습니다. 저는 처음에 베트남에서 가져온 한국어 문법책으로 혼자 문법을 공부했습니다. 근데 그렇게 책만 공부하니까 시간이 지나면 금방 잊어버렸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문법을 배운 다음에 자주 쓰고 연습을 많이 해야 합니다. 외국어를 공부할 때 제일 중요한 점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말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외국인들은 한국어를 쓸 때 틀릴까봐 한국말로 이야기를 안 합니다. 말을 하면 문법도 안 맞고 발음이 이상하게 나오니까 창피해 합니다. 그래도 말하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합니다. 공장 사람들이나 한국친구들에게 한국말로 말하면 틀려도 괜찮다고 이해해주고 바로 고쳐 줍니다. 한국말로 대화를 많이 해서 자신감을 키워야 합니다. 저는 지금 한국말을 잘 하지만 한국말 실력을 좋게 하려고 매일 한국 드라마를 봅니다. 드라마에서는 말을 천천히 하니까 따라할 수 있고 잘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또 한국 노래로 한국말을 배우고 있습니다. 노래를 들으면 재미있고 한국인들이 평소에 말하는 것처럼 발음이 나와서 좋습니다. 그리고 한국말로 대화를 할 때 모르는 것, 처음 듣는 단어들이 있으면 상대방한테 바로 물어 봅니다. 그리고 그 뜻을 알게 되면 공책에 적어놓고 하루에 10개씩 외웁니다. 셋째, 한국어를 배우면서 한국문화도 함께 배워야 합니다. 한국에서 한국풍습을 잘 알면 한국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고 싶어도 아버지랑 같이 있으면 그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다른 곳에 가서 담배를 피웁니다. 그리고 술을 먹을 때에는 술을 따르는 법과 술을 받는 법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윗사람이 술을 따르면 두 손으로 받습니다. 그리고 얼굴을 옆으로 돌린 후에 마십니다. 그런 것을 배우면 좋습니다. 한국문화와 한국풍습을 잘 알면 한국 사람을 이해할 수 있고 한국 생활이 편해집니다. 한국 드라마는 한국문화를 많이 보여주니까 텔레비전을 자주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은 봉사단체를 통해서 외국인들한테 한국문화를 가르치니까 그 단체를 참석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봉사단체에서 다른 외국인을 만나면 말이 통하지 않아도 서로 도와주고 같이 한국에 대해 공부도 할 20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한 한국,한국어 21

수 있습니다. 다른 베트남친구들을 만나면 새로운 고향 소식도 들을 수 우수작 있고 외로움도 쉽게 잊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6년이나 살았습니다. 한국에서 사는 동안에 새로 체험한 것이 많습니다. 한국에서 유명한 관광지도 여행했고 좋은 사장님 덕분에 새로운 기술도 배웠습니다. 또 한국친구들도 많이 생겨서 기쁩니다. 사랑하는 고국 가족을 위한 배움으로부터 변화된 삶 그리고 이제는 한국음식도 잘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좋은 건 한국문화와 한국어를 배운 것입니다. 저는 베트남에 돌아가서도 한국어를 계속 공부할 것입니다. 한국어 이정숙, 중국동포 학원에 다니거나 한국어 동아리를 찾아서 가입할 것입니다. 그렇게 노력 해서 좋은 한국회사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곳에서 제 실력을 보여 주고 싶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베트남에서 한국에 오기로 결정한 것은 잘한 일 같습니다. 한국에서 돈을 벌어서 부모님에게 도움을 드릴 수 있었고 한국 에서 번 돈으로 베트남에 가서 공부를 더 할 수도 있습니다. 제 꿈은 사업을 하는 것입니다. 한국회사에 들어가서 열심히 일 한 후에 나중에 제 사업을 하고 싶습니다. 한국에서 체험한 것들을 바탕으로 제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중국 용정시 출생인 나는 소위 말하는 문화대혁명 을 겪으면서 사회교육, 학교교육, 가정교육을 잘 받지 못하며 자랐고, 그러다보니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살아왔다. 지금 생각해도 입가에 웃음이 절로 난다. 입국할 때 꾀죄죄한 옷을 입고 함경도 사투리를 쓰면서 인천공항 심사대를 통과 하지 못할까봐 간이 콩알만 해져서 몸을 잔뜩 움츠렸던 모습이 바로 어제 같다. 자그만치 천만 원이란 빚을 지고 있는 맹꽁이 같은 나를 보고 언니 친구는 혀를 차며, 에구, 니가 어찌 돈 벌겠노?! 하면서 탐탁하지 않게 보았다. 처음 찾은 가게는 새로 오픈한, 직원만 80여명 되는 어마어마한 갈 비집이었다. 나는 커다란 장화를 신고 13시간 동안 밥을 하고 채소를 다듬었다. 천생 착하게 태어난 내가 죽기 살기로 일하고, 고분고분 말만 22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사랑하는 고국 가족을 위한 배움으로부터 변화된 삶 23

잘 들으면 만사 OK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분초를 다투는 시각에 종종 뭔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을 때가 많았다. 생소한 물건과 명칭은 수십 가지이고 모두가 바빠서 쩔쩔매는데 마음마저 약해서 감히 무엇을 물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내 앞에 일도 벅찼지만 쓸모없는 여자 란 말이 듣기 싫어서 짬짬이 어깨 너머로 훔쳐 배우고, 잠깐씩 거들어 주면서 모르는 것을 물어보곤 했다. 일하면서 톳나물, 재첩? 하면서 열 번, 스무 번씩 곱씹다가고, 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리고 아무리 머리를 짜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면 다시 쓸고, 씻고, 닦는 허드렛일을 도와주고 은근슬쩍 묻고 또다시 외우곤 하였다. 밤에는 팔이 너무 아파서 잘 수가 없어 벽에 팔을 기대어 놓을 지경이 됐지만, 그래도 매일 바뀌는 야채이름과 조리법을 부지런히 적어 놓았다. 쉬는 날은 일부러 백화점이나 마트에 가서 각가지 과일, 야채, 생선 종류의 이름을 익히고 적어오기도 했다. 그로부터 2개월이 지나니 한국 식당에서 3년 일한 동포언니는 나보다 아는 거 더 많네! 하면서 혀를 찼고,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참모님은 정숙 씨만 있으면 일이 저절로 돼요! 라고 하며 좋아하셨다. 첫 달 월급부터 세종대왕님이 10명 더 오셨다! 그런 칭찬에 뭐가 빠지는 줄도 모르고 일을 배워 나간 덕에 지금까지 음식 때문에 별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며 일했고 칭찬도 많이 들었다. 본래 식당일이 적성이 아닌데다 체력도 바닥이 나서 앉았다 일어만 서도 사방이 뱅글뱅글 돌아가는 듯 어지러웠다. 그래서 그때부터 나는 입주가정부 일을 하고 있다. 강남의 어린 꼬마들이 캔디 주세요., 치킨 먹고 싶어요. 또는 애기 아빠가 브러시 주세요. 하면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여 어리벙벙한 얼굴을 하였다. 게다가 가전과 생활용품 모두가 꼬부랑 글로 씌어져 죽으라는지 살라는지 알 수가 없었다. 친절하고, 예스! 만하면 장땡일 줄 알았는데 아무 것도 모르니 스스로 죄인이 된 것 같았다. 새로운 문화와 환경에 동화되지 않고서 일을 잘 한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체험하였다. 하루는 아파트 앞에서 애를 업어 재우는데 buffet 라고 커다랗게 글을 쓴 냉동차가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애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듯 웅얼웅얼 외우며 다시 집에 올라가서 기억을 더듬으며 종이에 적어 놓고 나중에 찾아보니 뷔페 였고, 손님이 음식을 손수 갖다먹는 식사란 걸 알게 되었다. 또 하루는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한 가게를 지나는데 내추럴 이 라고 씌어 있었다. 종이에 적어서 외래어 사전으로 자연의, 천연의 란 것을 찾아보고 나서야 마음이 편했다. 언젠가 한 번은 애를 데리고 좀 멀리 나갔는데 내가 그토록 이름을 알고 싶어 하던 나무에 메타세쿼이아 라 적혀있고, 나무에 관한 설명이 있었다. 책가방 메고 지나가던 학생에게서 종이와 펜을 빌려 휘갈겨 베껴 적었다. 그렇게 생소한 단어, 길거리 간판, 눈에 보이는 모든 외래어를 알아 가기 시작했다. 그걸 찾느라고 사전을 하나하나 사다보니 세 권이나 되었다. 모 교회에서 가르치는 주일 영어교육 프로그램에 밤이고 낮이고 빠지지 24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사랑하는 고국 가족을 위한 배움으로부터 변화된 삶 25

않고 참가하였다. 덕분에 1년 만에 일상에서 쓰이는 외래어를 거의 알게 되어 얼음에 박 밀듯이 소통하고 생활하게 되었다.(지금은 애 앞에서 THE kids TIMES 를 보는 흉내도 낸다.) 온갖 정성을 다하여 애들을 돌보았고, 한 달에 두 번인 휴가도 오갈 데가 없으니 돈과 상관없이 일을 하였다. 참으로 열심히 일하였기에 처음엔 시답지 않게 대하던 까다로운 주인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되었다. 우리 동포 형제자매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주인의 도움과 허락으로 애를 재우고 난 다음 밤 10시부터 컴퓨터로 2,400여 개의 외래어(사전에 근거하여)를 모아서 동포들이 알아두면 편리한 외래어 단어집 을 만들기 시작했다. 주인에게 감사한 마음에 낮엔 팽이처럼 쉴 사이 없이 일하면서 거의 한 달여 밤을 지새우고 나니 머리는 한 줌씩 빠지고, 얼굴은 새카 맣게 되었지만 내 사랑하는 고국을 위하여 용기를 낼 수 있었고, 마칠 수 있었다. 물론 거기에 전 세계 정보량의 95%가 국제어가 된 영어로 씌어 있습니다. 영어가 통용되는 글로벌 시대입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애들도 일상에서 영어를 사용합니다. 조만간 우리들의 평균수명은 90세가 될 것입니다. 남은 몇 십 년을 남에게 무시당하며 까막눈, 귀머거리 로살고 싶지는 않겠죠?! 알차게 살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외래어를 배우십시오! 시작이 절반입니다! 고 하면서 많이 나누어 주었다. 공장에서 제품이 잘못 나오면 폐품으로 버리면 되고, 농사를 잘못 지으면 일 년만 망치는 것이지만, 자라나는 애들은 나라와 가정의 기둥 이기 때문에 아이들의 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맞벌이 부부들은 어린아이를 우리에게 맡기고 아침에 나갔다가 밤늦게 들어오기 때문에 애들의 건강, 인성, 교육이 우리의 몫이 되었다. 가사도우미는 이러한 막중한 책임을 요하는 직업이다. 프로페셔널로 일하려면 세상을 잘 알고, 지식을 두루 섭렵해야 애들의 존중을 받을 수 있고, 또 잘 가르치고 잘 키울 수 있다. 나는 가정부로서 10년을 일하면서도 TV와 철저히 담을 쌓으며 지냈고, 흔한연속극한편본적이없다. 완벽증과 결벽증에 가까운 성격 이라 음식 준비와 청소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남은 자투리 시간 이면 애들에게 책을 읽어 주어서 선생님 한 번 안 청하고 한글을 깨우치게 하였다. 다섯 살 된 애가 이모, 차 몰 줄 알아요? 라고 물었을 때, 지금은 못하지만 이제 배울 거야! 약속한다! 고 한 애와의 약속대로, 재입국으로 중국에 있는 동안 운전면허증을 따기도 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핸들을 잡고 싶어 자동차 운전전문학원에 가서 학원등록비를 내고 일요일마다 도전하여 2종과 1종 보통면허를 취득 하였다. 비록 교육비로만 한국 돈으로 135만원이나 들었지만 여러 가지로 많은 것을 배웠고, 그만한 가치가 있던 시간이었다. 지금은 애와 학원을 오가면서 차에 대한 온갖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운전을 배운 보람을 느낀다. 처음엔 돌잡이 애의 아침부터 저녁까지 물, 우유, 주스 몇 cc, 김 몇 장, 밥, 죽, 등 얼마 먹이냐고 적어 놓게 하고, 감시하던 주인이 이제는 나를 소중한 식구로 인정해준다. 재입국하기 전 중국에 돌아갈 때는 전셋집 26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사랑하는 고국 가족을 위한 배움으로부터 변화된 삶 27

에서 살면서도 150만 원이란 큰돈을 쥐어 주셨다. 이모 없으면 우리 애는 어떡해? 누가 이모처럼 따뜻이 보살피며 글까지 가르칠 수가 있어요? 중국 갔다 빨리 와야 해요, 네? 하면서 눈물을 보이는 애 엄마를 보니 나도 눈물이 났다. 열심히 일하고 배우면서, 서로 사랑하고 챙겨주며 살아 가는 우리에게 그새 가족 같은 끈끈한 정이 생겼다. 학교 다니는 애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숙제 좀 하렴! 이 아니고 시간만 나면 애 앞에서 닥치는 대로 읽고 쓰고 하면서 본을 보여 주는 것이다. 아이는 내가 밤마다 자격증을 따려고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보고 꼭꼭 체크한다. 나는 그런 애가 기특하여 국가공인 한자급수인증시험 성적표를 보여주었다. 야, 이모 짱이다! 4급이 100점, 3급도 94점을 맞았고, 그럼 2급도 90점 넘어 맞을 수 있다고요? 하고 내 목을 끌어안으면 나는 큰일이나 한 듯 어깨를 으쓱하며 고것 맞고 뭐, 니가 더 짱이지! 하면서 얼굴에 뽀뽀를 해준다. 애가 키득거리며 이모, 우린 가족이니까 이모도 또 1급 시험 보고, 나처럼 최우수가 돼야 해요? 라며 다짐을 받는다. 옛-썰! 우린 같게 생긴 가족이니까 이모도 점수 잘 맞겠습니다! 하고 오늘까지도 함께 먹고, 자고, 가르치고, 학교 보내고, 마중가고 애와 함께 호흡하면서, 예절바르고 씩씩하고 명랑한 애들로 키워왔다. 애의 장래가 곧 가족과 한국의 미래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단순한 가정부 가 아닌, 내 사랑하는 고국의 가족, 그 엄마가 되어 가족 모두가 사회에서 의젓이한몫다할수있도록온갖정성을다하여일하였다. 이제는, 꾀죄죄한 옷을 입고 함경도 사투리를 쓰며 두려운 눈길로 대한민국 네거리를 살피던 내가 아니다. 사랑하는 고국과 고국에서 만난 가족은 내가 쏟은 정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나한테 안겨 주었다. 세련된 옷도 많이 사입고 다니며, 연길에다가 집도 장만했다. 노인복지사 자격증 같은, 이런 저런 자격증도 많이 땄고, 방송에도 글들이 나갔으며, 신문에 부지런히 글을 올리며 세상을 논하기도 한다. 그런 나를 두고 언니의 친구는 네가 용 됐구나! 한다. 아니에요, 아직 멀었어요. 더 잘해야죠, 뭐! 라고 대답하며 쑥스럽게 웃었지만, 나는 내 고국가족의 사랑 속에서 애와 함께 배우고, 일하며 사랑하며 사는 삶이 너무나 만족스럽고 자랑스럽다. 거수경례로 애와의 약속을 정중히 받아들인다. 나는 정말 극진한 모성애로 애들을 키웠다. 주체할 수 없는 엄마의 사랑에다 내가 건강하고 살집도 좋아서인지, 아니면 음식에 온갖 정성을 쏟아서인지 애들마다 건강하고 씩씩하게 잘 자라서 병치레 한번하지 않았다. 애들의 안전에도 각별한 신경을 썼고, 끝없는 질문에도 기꺼이 즐겁게 대답해 주었다. 28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사랑하는 고국 가족을 위한 배움으로부터 변화된 삶 29

장려작 하지만 언제나 모든 일에 바쁘게 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실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에 빨리 해야 되는 일들이 있지만, 빨리 할 한국의 다섯 가지 특징과 나의 이야기 필요가 없는 일들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무조건 빨리 문화 로 바쁘게 일하기보다는 천천히 하는 문화도 중요합니다. 둘째, 맵고 짠 한국 음식 한국에 처음 왔을 때 힘들었던 것은 음식이었습니다. 미얀마에서는 제가 먹고 싶은 음식들을 마음껏 먹을 수 있지만 한국에서는 내 입에 안 첫째, 한국인의 언어문화 빨리 서민툰, 미얀마 제가 한국에서 가장 많이 듣고 처음 배웠던 말은 빨리 였습니다. 한국인들이 항상 하는 말, 일할 때도 빨리 빨리, 먹을 때도 빨리 빨리 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왜 모든 일에 빨리하라고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이상한 문화라고 생각했습니다. 미얀마에서는 식사할 때 빨리 먹어 라고 말하면 기분 나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한국에 지내다보니 빨리 라는 말이 더 이상 이상하지 않고, 저도 빨리 빨리 말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유럽여행을 갔다왔다고 하는 한국 사람이 유럽 사람들은 천천히 먹고, 일해도 천천히 해서 재미없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서로 다른 환경 서로 다른 문화 차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맞는 음식을 먹으니까 너무 힘들었습니다. 힘들게 일하고 맵고 짠 한국 음식과 김치를 매일 먹어야 해서 어려웠지만 저는 한국에 있을 동안 한국 음식을 맛있게 먹어야 된다고 마음먹고 생활했습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된다. 는 말처럼 이제는 미얀마음식보다 한국음식이 제 입에 맛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김치가 없이는 밥을 못 먹습니다. 특히 전라도 김치가 저에게 가장 입에 맞는 맛있는 김치입니다. 김치 종류가 무척 많이 있지만 전라도 김치는 다른 김치와는 다르게 좀 맵고 짜지만 특별 하게 맛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미얀마와 다른 사계절 날씨 더운 나라 미얀마에서 온 저는 한국에서 눈이 오는 것을 신기하게 보면서 기뻐했던 날이 저의 추억 속에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날씨가 추워서 감기 걸렸던 날들이, 따뜻한 옷을 사려고 동대문 시장 갔던 날들이. 30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한국의 다섯가지 특징과 나의 이야기 31

지금 다시 생각하면 웃기기도 합니다. 날씨에 맞는 옷을 입는 방법도 배우는 데 오래 걸렸습니다. 더운 여름만 좋아하고 가을은 싫어했던 제가 이젠 여름이 되면 가을이 빨리 돌아오면 좋겠다. 라는 말도 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사계절은 색색의 옷을 갈아입는 선물과 같습니다. 1년 내내 더운 여름 날씨만 알다가 봄과 가을 겨울을 만나면서 새로운 사계절 날씨를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넷째, 한국어 의사소통의 어려움 저는 처음 한국에 올 때, 많은 준비를 하고 오지 않아서 한국말을 하나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일할 때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해 마음을 말할 수 없었고 기술을 배우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되는지 물어볼 수 없어서 일하는 속도가 느렸습니다. 함께 이야기 하고 싶어도 단어를 많이 모르고 문장을 만들지 못해서 소통하기 힘들었고, 같이 일하는 한국 사람들과도 불분명한 말 때문에 기분이 나쁜 문제도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매일 3시간은 한국어 공부하겠다는 생각하고 공부했습니다. 일 끝나고 공부를 함께 하는 것은 매우 피곤했지만, 점점 한국말로 이야기할 수 있는 내용이 많아졌고, 언어 소통의 답답함이 풀리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한국 교회에 나가면서 한국말을 더 많이 배울 수 있었고, 일요일 오후에는 AFC에서 하는 한국어 교실에 출석해서 활용에 대해 검토받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우연한 기회에 친구에게 소개를 받아 한국인 친구를 만나, 스카이프로 영어와 한국어로 대화를 하면서 한국어에 대한 흥미 느낄 수 있습니다. 언어 공부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의 차이를 알 수 있으며, 한국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다섯째, 피부색에 따라서 차별 선진국과 후진국의 국력 차이에서 오는 인종차별과 부당대우를 겪으면서 서러움을 겪기도 하며 한국 사람들에 대한 선입견을 갖게 되었 습니다. 미국인들만 좋아하고, Asia사람들은 싫어하는 한국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뭐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유를 잘 모르지만 우리는 다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땅에서 사는 이주민, 우리도 피부 색깔 좀 다르지만 모두 똑같은 귀한 사람입니다. 공장에서 일하면서 생활하니까 탐욕스러운 사장님 때문에 슬프던 날, 울었던 밤들이 많습니다. 항상 말로만 약속하고, 기분에 따라서 행동 하고 말하는 한 사람 때문에 한국 사람은 나쁘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추운 날씨에도 따뜻한 마음으로, 친절한 미소로 따뜻하게 해주신, 희망을 주신, 도와주신 한국 교회 사람들이 있어서 한국 사람이 좋다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한 사람의 실수 때문에 그 나라 사람들 모두 나쁘 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마치며 서로 이해해 주면서 행복하게 일을 함께 할 수 있는데 저뿐만 아니라 32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한국의 다섯가지 특징과 나의 이야기 33

다른 나라 사람들을 이해 못 해주는 사람들 때문에 울었던 날들도 많습 니다. 한국말과 한국문화에 대해서 전혀 모르기 때문에 너무 힘들고, 따뜻한 마음으로 힘을 주는 가족이 없는, 친절한 친구도 없는 저에게는 제 이불이 장려작 나의 한국 생활 눈물과 슬픔을 덮어주고 따뜻하게 해준 친구였습니다. 자기의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를 떠나서 한국에 일하러 온 외국 사람 들을 이해해주고, 친절하게 해주고, 서로 도와주고 함께 일을 하면 우리 모두 얼마나 행복할까요. 서로 이해해주고, 도와주고, 잘못한 것은 서로 용서합시다. 웬후마잉, 베트남 그리고 우리의 사랑을 서로 나누어주면서 우리가 사는 이 대한민국, 그리고 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더 멋지게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에 온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5년이나 지났다니, 시간이 그렇게 빨리 갈 줄 몰랐다. 한국에 온 것은 2005년 4월이었는데 몇 년 동안 한국에 살다 보니 한국은 나의 두 번째 고향이 되었다. 가끔씩 처음 왔을 때를 다시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하다. 나는 밝은 미래를 위해서 가족하고 떨어져서 돈을 벌려고 한국에 왔지만, 문화차이, 음식, 언어 등 때문에 한국생활에 적응하기 무척 어려웠다. 지금은 한국에서 오랫동안 살다보니 익숙해져서 재미가 있다. 그 동안 기쁜 일과 슬픈 일도 많이 겪었고, 그것들은 지금 까지도 잊지 못한 추억이 됐다. 2005년 4월 말에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고 인천국제공항에 이른 아침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려서 본 한국에 대한 첫 인상은 크고 아름다운 현대적인 인천국제공항과 거기서 근무 34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나의 한국 생활 35

하는 친절한 직원들이었다. 도착한 후 베트남 대사관에서 나온 사람과 버스로 KOILAF라고 부르는 센터로 향했다. 그때 한국 날씨가 봄이라고 했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겨울인 것 같았다. 우리나라의 더운 날씨와 다르게 그렇게나 추울 줄 몰랐다. 버스 창밖으로 보니 나무들이 잎이 다 떨어졌고 여기저기 푸른 통나무만 남았다.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넘어서야 겨우 센터에 도착했다. 상담자가 그러는데 3일 동안 센터에 머무른 베트남 노동자와 몽골 노동자가 있다면서 안내를 했다. 센터에서는 노동자가 한국생활, 회사생활 등에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취업교육과 안전규칙, 은행, 병원, 전화, PC방을 이용하는 방법 등을 가르쳤다. 센터에서 3일 만에 드디어 사장님을 만났다. 우리를 데려가려고 오신 사장님을 만난 다음에 회사로 갔다. 벌써 5년이 됐는데 지금까지도 첫 만남이 눈에 선하다. 나는 한국말이 서툴렀고, 또 사장님을 처음 만날 때 어떻게 인사하는지 몰라서 그냥 웃으면서 머리만 숙였다. 게다가 집으로 걸어가면 15분쯤 걸렸다. 회사에서 처음 시작한 일이 인사하는 것이다. 인사하기는 커녕 한국말을 하나도 모르니까 그냥 머리만 숙였다. 그날 밤에 너무 힘들었는데 집도 낯설고 걱정이 되어서 그랬는지 늦어도 잠을 자지 못 했다. 그렇게 내일 새 인생이 시작되려나, 나쁜 길에 빠지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걱정하면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일찍 일어났고 긴장한 마음으로 회사에 갔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다 새로워서 배워야 했는데 실수가 많아서 욕을 많이 먹었다. 아마 지금까지 한국에 사는 날 중에서 그 날이 제일 힘든 날이었다. 그 날이 지금까지 잊지 못 하는 추억이 됐다. 돈이 없어서 한 달 동안 사장님께서 주신 김치와 밥만 먹어서 정말 고생했다. 첫 월급을 받은 날이 가장 기쁜 날이었다. 월급을 받은 날 비로소 돈을 버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 경험에 비춰보니 외국인들이 문화차이, 음식, 언어 등 때문에 한국생활에 적응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가는 길에 사장님이 물어봐도 뜻을 몰랐지만 망설이지 않고 네 라고 대답했다. 대답 듣던 사장님이 깜짝 놀라면서 웃으셨다. 2시간쯤 차를 타고 집에 도착했다. 우리가 사는 집은 아파트였고 지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시설이 좋고 깨끗한 편이었다. 나는 처음에 외국인들이 다 좋은 집에 산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숙소에 가보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컨테이너에 사는 친구도 있었고 주택에 사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좋은 집에 사는데 컨테이너에 사는 친구가 혹시 겨울이 되면 어떻게 사나 걱정도 됐다. 집에 도착하자 짐을 정리하고 나서 회사로 이동했다. 집부터 회사까지 나라마다 문화가 달라서 문화차이 때문에 생긴 일이 많다. 우리나라 베트남과 한국은 옛날에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문화가 비슷 하기도 하지만 차이점도 있다. 바로 사람을 부르는 방식이다. 한국 사람은 호칭이 엄청 많아서 나이, 성별, 지위 등에 따라서 사람을 부르는 것도 다르다. 처음에는 몰라서 회사 동료를 부를 때 이름만 불렀다. 하지만 그 사람이 기분나빠하면서 그렇게 부르면 안 된다고 했다. 물어봤더니 회사 에서 지위가 높은 사람을 부를 때는 직함과 님 을 붙여서 부른다고 했다. 36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나의 한국 생활 37

예를 들어서 사장님, 부장님, 과장님 등을 부르고 동갑이라면 이름만 부르지 말고 씨 를 붙여서 부르는 것이 더 좋다고 했다. 한국 사람들과 많이 국인데 냄새는 이상하지만 몸에 아주 좋다. 한국음식은 처음에는 이상 하고 매워서 못 먹지만 자주 먹다 보면 익숙해진다. 얘기해 보니까 호칭어가 아주 많은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한국 사람은 뭐든 지 다 빨리 하는 것 같다. 밥도 빨리 먹고, 운전도 빨리 하고 일도 빨리 하는 것이다. 처음에 회사에 들어 왔을 때는 한국 사람들이 그렇게 일을 빨리 하는 것을 몰라서 정말 힘들었다. 일을 하는 동안 우리를 직접 관리하시는 부장님께서 옆에서 빨리 해라 라고 하시며 재촉했기 때문에 너무 피곤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한국에서 오랫동안 살다 보니 이제는 한국문화가 익숙해져서 즐겁게 살고 있다. 여러분도 외국에 나가서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면 얼마나 힘든지 아시죠? 나는 지금은 한국음식이 맛있어서 즐겨 먹지만 처음에는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 거의 못 먹었다. 왜냐하면 한국음식은 아주 맵기 때문 이다. 한국 사람들은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것 같다. 김치, 떡볶이, 닭갈비, 매운탕 등 매운 음식은 중류가 아주 많다. 왜 그렇게 한국 사람은 매운 음식을 잘 먹느냐고 물어 봤더니 한국 날씨가 너무 추워서 매운 음식을 먹으면 몸이 뜨거워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못 먹어서 많이 고생 했는데 한국에서 산 지 벌써 5년이나 되어서 지금은 매운 음식을 아주 잘 먹는다. 내가 좋아하는 매운 음식으로 김치가 있다. 김치는 배추, 고춧 가루, 양념 등으로 만드는데 간단한 재료로 만들지만 건강에 좋다고 해서 즐겨 먹는다. 한국 음식은 대부분 맵지만 맵지 않은 맛있는 음식도 있다. 그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이 바로 청국장이다. 청국장은 된장으로 만드는 한국에 온 외국인들은 문화나 음식 때문에도 생활하기 힘들지만 가장 힘든 것은 한국말로 대화하는 것이다. 한국에 살면서 한국말을 못 하면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아무리 말을 하고 싶어도 말을 못 하거나 하더라도 잘 못해서 답답한 경우가 아주 많다. 지금은 한국에 오려면 노동자들이 한국말 자격증을 따야 하는데 몇 년 전에는 나처럼 자격증이 없어도 한국에 올 수 있었다. 내가 한국에 오기 전 베트남에서 2주일 동안 한국말을 배웠는데 안녕하십니까?, 네, 몰라요 밖에 몰랐다. 그래서 회사에서 일을 할 때도 생활을 하기가 정말 힘들었다. 처음에 회사에서 일을 할 때에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다 배워야 되는데 한국말이 서툴러서 아무리 설명해도 알아듣지 못하거나 잘 못 알아들은 경우가 많았다. 알아들을 수 없으니 아는 사람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 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실수한 것이 많았다. 일을 잘 하면 괜찮지만 실수하거나 불량품이 생기면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자신 때문에 불량품이 생기거나 자기가 잘못하면 물론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하지만 잘 했는데도 다른 것 때문에 불량품이 생겼을 때에는 어떻게 관리자에게 설명 해야 되는지,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고 하고 싶어도 설명하지 못 했다. 나처럼 이러한 일을 겪은 외국인들이 많은 것 같다. 그리고 처음에는 한국 38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나의 한국 생활 39

말을 모르니까 외국 사람에게 힘든 일이나 위험한 일을 시키곤 했다. 힘든 일이나 위험한 일을 했는데도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거나 늦게 받은 사람이 많지만 사장님께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 싸우거나 일을 고의로 그만두는 일이 자주 생기기도 한다. 회사에 처음 들어왔을 때에는 야근을 하는 작업자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 사장님은 나에게 계속 야근을 하라고 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몇 개월 동안 야간작업을 계속 하게 됐다. 야간에 일할 때는 함께 일을 하는 베트남 친구도 없고 중국사람 몇 명하고 한국사람 몇 명만 있었다. 그 때는 한국 말이 서툴러서 동료와 같이 얘기할 수도 없고 베트남 친구랑 모국어로 얘기할 수도 없어서 정말 괴롭고 외로웠다. 그때는 가족이 떠올라서 향수 병이 걸렸다. 일을 계속해서 말을 할 수가 없어서 벙어리가 되는 줄 알았다. 야간작업을 계속했고, 드디어 월급을 받는 날이 왔다. 월급을 받았는데 깜짝 놀랐다. 이보다 더 많이 받아야 하는데 왜 그렇게 적게 받았는지 이해가 안됐다. 사장님께 여쭤보고 다시 말하려고 했는데 한국말을 못 해서 한참을 지나서야 설명했다. 설명을 듣던 사장님이 알아듣고 자기가 잘못 계산한 것을 알아서 다시 돌려줄 거라고 하였다.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우리 기숙사에 인터넷이 있어서 처음에는 인터넷 으로 한국말을 배웠다. 베트남 사람을 위해서 한국생활을 하면서 필요한 것을 알려주기 위해 만든 홈페이지를 통해 한국말을 배울 수 있었고 한국 문화나 한국 생활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일단 쉬운 것을 배우고 모르는 것은 포럼에서 찾아보기도 하고 한국 사람에게 묻기도 했다. 열심히 배웠더니 한국어 실력이 어느 정도 늘어났다. 또 홈페이지를 통해서 주말 마다 한국어를 무료로 가르쳐 주는 한국외국인력지원센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주말에 거기에 가서 공부하기로 결정했다. 들뜬 마음으로 기다렸다가 드디어 그날이 왔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또 걸어가는데 한 시간 반이 넘게 걸렸다. 거기에 가 봤더니 한국말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에 대해 모국어로 상담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다행이 그날이 개강이라서 수업을 신청하고 시험을 보고 나서 나에게 맞는 수업을 들었다. 2시간 동안 공부하고 나서 센터에 온 베트남 친구들과 얘기해보니 여기에 베트남 동호회가 있다고 하여 그 동호회에 참가했다. 평일에 회사에서 일을 하고, 주말마다 친구를 만나는 대신에 친구 에게 같이 센터에 가서 공부하자고 했다. 지금까지 거기에서 공부한 지 벌써 3년이나 됐는데 친절하고 잘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들 덕분에 한국어 일을 할 때뿐만 아니라 생활을 할 때도 한국말을 모르니까 한국생활을 하면서 실수한 적이 많이 있었다. 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 아파서 약국에 갔는데 증상을 잘못 설명해서 약을 잘못 사기도 했다. 그래서 한국말을 공부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꼭 배워야겠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공부 실력이 점차 좋아졌다. 인터넷으로 공부하기도 하고 주말에 센터에 가서 공부하기도 하고 모르는 단어를 당할 때마다 가지고 다니는 수첩에다가 메모한 다음에 꼭 사전에서 찾거나 아는 한국 사람이나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께 여쭤 보았다. 처음에는 한국말을 잘하지 못했지만 열심히 공부 40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나의 한국 생활 41

해서 지금은 어느 정도 한국 사람과 함께 편하게 얘기하는 편이다. 한국 어를 이해할 수 있어서 생활을 하면서 당하는 어려운 일을 극복할 수 있고 그래서 재미있고 보람이 있다. 한국말을 잘하는 것은 자기에게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도와 줄 수도 있다. 얼마 전에 아는 동생이 사장님과 말다툼을 하는 일이 있었다.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월급 때문에 사장님과 갈등이 생겼다고 했다. 자세히 알아보니까 이번 달부터 노동법에 따라서 기본 월급이 올랐 는데 사장님이 전에 계산하던 것에 따라 계산했기 때문에 월급을 잘못 주셨다. 사장님이 잘못 계산했지만 동생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몰라서 오해가 생겼다. 그래서 내가 동생의 사장님께 다시 설명해 주자 설명을 알아들은 사장님이 아! 내가 잘못 했구나! 라고 하면서 다시 계산해주기로 약속했다. 동생을 도와 줄 수 있어서 기뻤다. 하지만 알아듣는 사장님이 있는 반면 설명해도 모르는 척하는 사장님도 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차라리 도와주는 외국인력지원센터에 부탁하는 것이 더 낫다. 또 아무리 한국어를 공부하고 싶어도 못 하는 사람이 많다. 왜냐하면 배울 데가 없기 때문이다. 알아보니까 도시는 괜찮지만 시골이나 먼 지방에 가면 한국어를 가르치는 곳이 거의 없다고 한다.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 위해서 내가 다니는 센터 같은 곳이 더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한국말을 배우는 것을 통해 한국 문화도 알고 생활도 어려운 점이 없어져서 정말 좋았다. 하지만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더 어렵다. 평일에는 회사에서 일을 하고 주말에는 한국어를 공부하러 센터에 간다. 시간이 참 빠르다. 한국에 온 날부터 3년이 지나 노동계약이 끝나고 베트남으로 돌아갔다가 1달 후 다시 한국에 왔다. 돌아가기 전날 몇 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한 식구들과 친척들을 다시 만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들떴다. 그래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한국에 다시 와서 그대로 다니고 있던 회사에서 일을 했는데, 최근 1년 전에 나는 회사를 옮겼다. 모두 알다시피 그때 세계적으로 경기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망하거나 일자리가 적어진 회사가 많았다. 예외 없이 내가 다니고 있었던 회사도 이런 위기를 겪고 있었다. 회사를 살리기 위해 우리 사장님이 여러 방법을 쓰셨다. 그 한 방편으로 2교대를 하는 대신 3교대로 하라고 시키셨다. 2교대에서 3교대로 바뀌면 우리 생활이 바뀔 뿐만 아니라 근무시간도 줄게 된다. 그래서 우리 외국인들이 심하게 반대하고 설명했는데 소용없었다. 어쩔 수 없이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정 했다. 경기가 안 좋기 때문에 사람을 뽑는 회사보다 일자리를 찾는 사람이 더 많아 취직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다 라는 말처럼 취직하기가 어려웠다. 일자리를 계속 찾았는데 3주일 넘어서야 겨우 새로운 일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한 날은 매우 힘들었다. 왜냐하면 새 일은 머시닝 센터라고 부르는데 전에 하던 일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계속하다 보니 더 재미있고 더 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회사에서 작업을 하는 동안 여유가 생기면 일에 대한 책을 읽었고, 물론 모르는 것이 훨씬 많지만 모르는 것이 생기면 아는 사람에게 자세히 물어 봤다. 책을 읽고 나서 하니까 3개월 만에 간단한 쉬운 제품을 만들 42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나의 한국 생활 43

수 있었다. 여러 번 새로운 제품을 세팅을 하느라고 밤늦게까지 기계와 장려작 씨름을 했다. 열심히 해서 지금은 어려운 제품도 만들 수 있다.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기술을 잘 배우고 한국말을 잘해서 한 팀을 관리하게 됐다. 힘든 일이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서 열심히 했다. 또 지금 하고 있는 내일은 해가 뜬다 기술을 배워서 베트남에 가면 도움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도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배우면 배울수록 모르는 것이 많았다. 게다가 어려운 것도 많이 생겼다. 귀국하기 전까지 한국어도 더 배워야 되고 기술도 더 배워야 되는데 한국에 살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걱정된다. 나처럼 한국말과 기술을 배우고 싶은 사람이 한국에 더 체류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명, 중국동포 현재는 평일에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기술을 배우고, 주말에 한국어를 공부하러 센터에 간다. 내년 5월까지 체류할 수 있는데 남은 시간 동안에 잘 배우려는 목표를 세웠다. 힘들지만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손님 여러분 잠시 후면 목적지인 김포공항에 도착하겠습니다. 레이 디스앤젠틀맨~. 이어서 쇠 깎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비행기가 사뿐하게 비행장에 착륙하였다. 입국심사대를 거쳐 검정가죽잠바에 스포츠머리를 한 앳된 얼굴의 남자가 한손에 쇼핑백을 들고 들뜬 표정으로 출구 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이것이 12년 전 처음 한국 올 때의 나의 모습이다. 막 짐 가지러 가려던 참에 송아지만한 셰퍼트 한 마리가 옆에 붙어서 마구 씩씩거린다. 옆에는 사복을 입은 경찰같이 보이는 두 사람이 있었다. 쇼핑백에 있는 우황 청심환이 문제인 것 같았다. 손님, 손에들고있는거잠시보여주실수 있어요? 말투가 아주 정중했다. 일일이 칼로 다 까보고서야 안심인 듯 거수 44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내일은 해가 뜬다 45

경례와 함께 보내줬다. 밖에는 음침한 날씨에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연수생으로서 나는 경기도 화성시 어느 시골에 위치한 인타르시아 라는 양말 공장에 배정되었다. 우리를 처음 맞아준 분은 그 회사 대리 라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기억하는 그 양반의 한마디 한국에 오신 것을 계면쩍게 웃으면서 음료수 이름도 모르는지라 그냥 주인보고 냉장고에 있는 사이다모양의 병을 가리키며 저거 한 병 줘요. 했단다. 목이 타는 지라 뚜껑 열자마자 벌컥 벌컥 들이켰단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은 들었 지만 내색안내고 싹 비우고 나왔단다. 슈퍼주인의 표정이 상상이 된다, 얼마나 당황했을까?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월급은 당시 대한민국 일반근로자 월급의 1/3 정도였다. 일이 고된 건 둘째치더라도 초라하기 그지없는 금액이었다. 20일 하고 그만두었다. 아니, 도망치듯 나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권 이며 모든 증빙서류는 달라고 할 엄두조차 못 내고(산업연수생이라 직장 이탈은 불법이기에) 서울로 올라왔다. 이일저일전전하다 얹혀사는 고향선배 도움으로 도로 공사일을 하게됐다. 때는한해중가장더운때라막노동을 한다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살인적인 더위에 노출되어 뜨거운 아스콘을 식기 전에 도로에 골고루 도포 하는 일이었다. 5센티가 넘는 작업화밑창이 녹아 내리는 판이었다. 중간에 쉴 수도 없는 상황, 아스콘이 식으면 더더욱 힘들어진다. 어느 날 중국에서 막 온 지 일주일 된 신참 한 명이 슈퍼 간다고 자리를 비우더니 한참만에야 나타났다. 반장님이 일은 안하고 어딜 싸돌아 다니냐? 신참 왈, 반장님, 파르스름한 병에 두꺼비그림이 그려져 있는 게 사이다 맞소? 반장님이 가까이 와서 냄새를 맡고 어메, 이눔이 술을 마셔부렸구마, 하긴 중국에선 소주가 술도 아니제, 그나저나 이 더운 날에 우짤려고? 환장허겠네 돌아서서 배꼽 잡으며 웃어댔다. 신참은 내가 스크린인쇄란 업종을 접할 때는 겨울철이라 도로공사일이 끊길 때쯤이었다. 용인의 한 문구제조 업체였다.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 아서 하면서 어깨너머로 슬쩍슬쩍 유심히 보았다. 일명 실크인쇄라고 하는 이 작업은 수작업이 대부분이다. 쓰이는 분야가 광범위한 만큼 고도의 테크닉을 요하는 작업이다. 화생방을 능가하는 화학약품냄새는 젊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직종이기도 했다. 그때 사부 말로는 이 업계에 기술자가 별로 없는 관계로 페이가 톡톡하단다. 그 말에 이거다 싶어서 틈만 나면 기술연마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당시 신설동에 자취했는 지라 용인까지 왕복 4시간거리였다. 별을 보면서 출근하고 달을 보면서 퇴근했던 나날들이였다. 2년쯤 하다가 어느 정도 됐다 싶어 무작정 퇴사를 했다. 인쇄분야에선 어디든지 저를 받아 줄 것만 같았지만 현실은 냉혹 했다. 경력도 짧지만 불법체류자란 꼬리표 때문에 쉽게 받아 주는 데가 없었다. 부지런히 벼룩시장을 뒤져서 겨우 취직 된 곳이 독산동의 통신 기기 제조업체였다. 실크인쇄기사로 취직이 된 것이다. 월급도 높고 작업양도 미안할 46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내일은 해가 뜬다 47

만큼 적었다. 참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쯤 6개월 봉급이 밀린 채 회사가 부도를 맞았다. 오늘, 내일하는 사장님의 감언이설에 약간의 생활 비만 받으며 버텨왔는데 불법체류자 신세라 어디 송사할 데도 없다. 막막한 느낌이 드는 때였다. 가슴이 답답할 때 한강둔치를 자주 찾아갔다. 오색찬란한 불빛을 머금으며 가지런히 놓여있는 저 다리들 밑으로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면 가슴이 한결 트인다. 난! 괜찬아! 다시 시작 하면돼~ 이 썩을놈아~ 주위시선에 아랑곳없이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자산을 모두 빼돌리고 얌체같이 부도를 낸 사장이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이민정(가명)이란 이름은 구청 산하에 외국인 노동자센터에서 나를 반갑게 맞아준 내 또래아가씨 이름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의 임금체불사실을 모두 털어놓았다. 별 기대를 안한 나와는 달리 상황을 꼼꼼하게 메모하더니 그 자리에서 업체사장한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묻는 것이었다. 사실 확인 뒤 몇 번을 호되게 전화독촉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작정하고 부도낸 사람인지라 별효과가 없었다. 이에 진정서를 작성하여 고소를 하면 어떠냐고 하길래 그러자고 했다. 자기가 직접 모든 서류를 작성하고 법원까지 같이 가주었다. 수속비용이 없다고 하자 서슴지 않고 사비를 털어 먼저 내주었다. 후에도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면서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이었다. 물심양면의 도움이였다, 눈물나게 고맙다는 말을 그때 쓰는 것이라고나 할까, 여하튼 중국에서는 참으로 보기 힘든 대목 이다. 무보수로 생면부지의 이방인 을 도와 자국민을 고소한다는 것은 투철한 사명감과 굳건한 원칙주의 그리고 약자를 도와야한다는 착한 마음가짐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결과적으로는 약간의 위로금만 받았지만 지금도 그 생각하면 떼인 돈보다 그 아가씨의 도움이 더 기억에 남아 가슴이 훈훈하다. 불법체류자란 꼬리표 때문에 한 직장에서 오래 일할 수가 없었다. 덕분에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다. 중국어가 되다보니 여행사에 사진사로 쫓아다녔는데, 그 코스 중에 청와대가 있는 것이었다. 불법체류자이다 보니 헌병들의 의례적인 검문에 항상 마음을 졸여야 했고, 지하철역에서 노점을 하면 단속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건설일도 종류별로 다해 봤다. 본직인 스크린인쇄도 입사와 퇴사를 반복했다. 굳이 한 가지 좋은 점을 꼽자면 실크인쇄가 워낙 분야가 많다보니 한군데서만 일한 사람 보다 여러 집을 전전한 나의 실무경험이 풍부해진 것이다. 30년 경력의 선배들과도 경험교류가 가능할 지경이다. 그러다가 한국에서 고향아가씨를 만나 결혼을 하고 귀여운 딸까지 태어났다. 그럴 때쯤 법무부에서 불법체류자 자진신고제가 발부되었다. 항간에서는 믿지 못할 법령이라고 했지만 나와 아내는 지체 없이 7년의 불체생활을 끝내고 귀국을 서둘렀다. 마음한구석은 들떠있었다. 대한 민국 만세! 라도 외치고 싶었다. 재입국 후 남양주의 가방무역업체에 취직이 됐다. 사장님이 중국에 가방제조공장을 두고 한국으로 수입해 도소매하는 직원 열 댓 명의 작은 업체다. 당시는 회사에 인쇄부서가 없어서 전부 하청으로 돌리고 있었다. 나를 영입한 것은 인쇄 업무를 자체적으로 소화를 하려는 목적에서였다. 48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내일은 해가 뜬다 49

출근 첫날 사장님이 남양주 진건읍의 어느 큰 창고로 데리고 갔다. 100평, 80평짜리 두 동이었다. 나의 일터라는 것이었다. 일꾼은 나 하나, 창고에는 수입한 가방들로 꽉차있었다, 창고 안에 허름한 컨테이너 박스 하나, 그 안에 책상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나의 작업실인 셈이었다. 설비, 재료 전무한 상태였다. 사장님은 3일 후 출고할 인쇄시방서 몇 장만 남겨놓고 휑하니 가버렸다. 회사에서 받은 첫 인쇄 작업이니만큼 납품 기일을 못 맞추면 결과는 상상이 안 됐다. 사장님의 일종의 테스트 같기도 했다. 나는 그 길로 을지로 재료상가로 달려갔다, 세심하게 준비한 리스트 3명이 할 일을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며 다 했는데 왜 그러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때 그 나날들은 혼신의 힘을 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출퇴근 할 때도 머릿속엔 온통 업무내용뿐이다. 고진감래 라고 6개월 만에 파격적으로 과장으로 승진하고 월급도 전에 하고 비교 되지 않을 정도로 올랐다. 열심히 한 것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렇게 모든 열정을 쏟아 부으니 운도 따라오나 보다, 중국 베이징에 사놓은 상가하고 아파트가 천정부지로 값이 뛰어버린 것이다. 살 때만 해도 별 볼 일 없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아내 얼굴이 매일 싱글벙글한다. 지금은한채더사자고난리다. 대로 최소한의 비용으로 작업에 필요한 설비, 도료들을 하나하나 구입 했다. 전에 하던 작업하고 다르다 보니 막히는 데가 많았다. 재료상 사장님 들한테 겸손하게 여쭤보고, 아는 선배님들한테 귀찮다 싶을 정도로 전화문의를 했다. 창고로 돌아오자마자 팔을 걷어붙이고 구석구석 깨끗이 청소를 했다. 나서 이리저리 뒤엉켜 있는 가방박스들을 칼라별로 넘버별로 차곡 차곡 한눈에 찾을 수 있게끔 정리정돈을 했다. 속속들이 도착한 설비들을 작업편리성을 고려하면 설치했다. 점심 같은 건 먹을 생각조차 없었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밤을 새다시피 하며 인쇄테스트를 했다. 인터넷에서 모든 작업에 관한 자료들을 일일이 체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삼 일째 되던 날 깔끔하게 완제품에 인쇄된 가방들이 곱게 포장되어 택배차에 실릴 때, 지켜보던 사장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어렸다. 최소한 이쯤 되면 나의 이야기도 해피엔딩으로 끝나야 하지만 어찌 12년의 한국생활을 이 몇 장으로 다 쓸 수 있단 말인가. 이방인이라고 무시한다고 해서 흠씬 두들겨 패고 치료비 물어준 일이며, 지하철에서 검문당해서 도망간 일들이며, 사장님 하고 중국 출장 갔다가 협상대표들하고 대판 싸운 일들이며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용기를 잃지 않고 자신감을 가지고 끈기 있게 도전한 매 한순간들이 그나마 지금 나의 아주 작은 성과를 이루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나의 시각에서 본 대한민국은 단일민족의 특성이라고 할까?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까? 자기하고 다른 모습이나 언어, 행동을 하는 사람을 배척하고 경계하는 경향이 있다. 근래에 이주노동자들이 부쩍 늘어난 상황이다. 그중에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오는 이들이 적지 않다. 대한민국 50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내일은 해가 뜬다 51

아름다운 도시건설에는 이들이 역군이라도 과언이 아니다, 주위에 이런 사람들이 약간 이해 안 되는 말이나 행동을 하더라도 문화차이라 생각 하고 너그럽게 봐주고 수용해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한국에 계신 동포들, 이주노동자 여러분 지금껏 내가 봐온 내 마음의 틈새를 찾아 대한민국은 극히 인간미가 넘치고 근면한 사람들이 주류다. 약간의 차별 처우를 한다고 무작정 불평, 불만을 늘어놓을 것이 아니라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꾸준히 자신을 업그레이드시키며 예의바르게 행동하면 분명히 대우가 달라질 것이다. 세상을 원망하기 전에 자신부터 돌아 보라 는 말같이 말이다. 류일복, 중국동포 지치고 힘들어도 올바른 소신을 갖고 당당하게 모든 고난들과 맞서 라고 말하고 싶다. 왜? 내일의 태양은 분명히 찬란하게 떠오르기 때문 이다. 드디어 구멍 이 내 근시안에 잡히기 시작했다. 바늘귀보다 더 가는 틈새로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것은 내가 GP(검사조)로 편입된 지 꼭 일주일만이였다. 처음에 나는 내 근시안 때문에 틈새를 찾아내지 못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안경을 바꿔 써보기도 하고 틈새 가까이 눈을 대고 크게 뜨고 들여다보기도 했다. 1년 선배인 한국 아줌마는 척척 잘도 찾아냈다. 나는 어깨너머로 아무리 봐도 보이지 않는데, 그녀는 내게 안보여, 안보이냐고 하면서 계속해서 들이대며 물었고 그 얼굴에는 피곤해 하는 기색이 역력 했다. 그 틈새 찾기는 내가 GP일을 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였다. 그 기본 과정을 마쳐야만 나는 본격적으로 합격품을 선별하는 작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52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내 마음의 틈새를 찾아 53

그 때문에 내 마음은 조급해져만 갔고 그 불빛을 찾아내려고 무작정 헤맸던 것 같다. 불빛, 아니 그것은 불빛이 아니었다. 서광을 향한 내 마음의 밝음이었다. 인내와 정성으로 착실하게 일에 임하지 않으면 캄캄한 어둠뿐이라는 마음가짐을 가지게 된 것은 내가 틈새로 하얀 빛을 발견하고 부터였다. 그 때 비로소 나는 내 마음이 일터에 적응하려 힘쓰고 참답게 일하려는 자세를 갖게 된 것 같아 어깨가 으쓱해졌고 또 뿌듯했다. 처음 내가 이 검사 조로 건너올 때 다들 나를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직접 기계를 만지는 일도 아니고, 무거운 짐을 나르는 것도 아니고, 다 완성된 제품을 확인만 하는 비교적 쉬운 작업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실제로 겪어보지 않았기에 모르고 하는 이야기들이었다. 수많은 각각의 제품들이 우리 손을 거쳐나가야 했고, 또 그 모든 제품들이 우리 검사 조를 거쳐나가야 한다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었다. 만 개 생산 자랑 말고 한 개 불량 방지하자 는 큰 표어가 공장 실내 바로 정면에 압도적으로 붙어있다. 불량품이 하나라도 빠져나가게 되면 나 한사람이 야단맞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회사의 이미지 추락과 더불어 용접의 노력이 없이는 틈새가 생길 수밖에 없기에 실수를 줄이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틈새는 결코 반갑지 않다. 회사의 손실이 커지기 때문에, 불량 하나라도 줄이기 위해 회사는 매주 불량 방지 장려책으로 사원들을 격려하기도 한다. 브레이크 불량품은 마지막 흐름 단계인 우리 검사조의 마술 부리는 손놀림을 피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지 못한다. 하나하나 완제품 박스에 집어넣다 말고 미심쩍어 불량품을 다시 집어 낼 때 나는 섬뜩함을 느끼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대로 차바퀴에 장치한다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사고를 불러올지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는 일이다. 일본의 도요타도 고장 난 브레이크 때문에 한 때 커다란 물의를 빚지 않았던가. 사람의 마음자세가 불량이면 그 사람이 만드는 제품도 불량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는 GP로서 불량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의 마음가짐에 달려있고 생각한다. 맡겨진 일에 책임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 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흠 없는 완제품과 정품만 있게 될 것이고, 그는 기필코 아름다운 서광의 빛을 맞이하게 되리라. 큰 손실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견고한 둑의 작은 틈새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메우지 않고 방심하다가 홍수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면 더 큰 비용과 수고가 드는 것처럼 불량품 하나가 가져오는 부작용은 상당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층 한 층 쌓아 가는 노력 없이 아파트가 완성될 수 없고, 불에 태우고 녹이고 지지는 중국 한글 신문사에 다닐 때 나도 현대차를 운전해본 적이 있다. 그 때는 한국인들이 왜 그토록 현대차에 애정을 가지는지 미심쩍게 생각 했었는데, 한국에 와서야 그 궁금증이 풀렸다. 차 기능보다 더 우선시 되었던 바로 향토애 덕분이었다. 54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내 마음의 틈새를 찾아 55

오늘에 이르러 내가 현대차 로고가 새겨진 브레이크를 생산하는 회사에서 근무하게 되니 벅찬 감동을 느낀다. 가정 살림을 윤택하게 하고 또 영화 속 에서나 볼 수 있는 멋진 차를 사기 위해 한국에 일하러 건너 왔는데, 운 좋게도 첫 직장이 현대그룹 계열사 회사라니.. 중국에서는 사무실 책상에 앉아 키보드나 두드리고 영업취재나 다니면서 월급을 바라고 시간을 때웠던 내가 비록 규율은 엄하지만, 일한 만큼 알찬 소득을 거둘 수 있는 회사에서 일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없다. 그 나라에 가면 그 나라에 조장님은 한국생활이 나한테 참 맞는 모양이야. 하시며 흐뭇한 미소를 짓기도 한다. 반달 같은 브레이크에 검사했다는 하얀 점을 찍으면 영락없이 눈을 그려 넣은 물고기모양 같다는 생각을 한다. 행복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보이지 않던 틈새의 점과 선을 찾아내면 서부터 매일 만지고 나르는 딱딱한 철 부품도 싱싱하게 살아 움직이는 물고기 같다는 생각을 하는 나처럼, 당신도 어디서든지 신나게 일하는 노동의 맛을 뿌듯하게 느끼게 될 때 비로소 삶이 즐겁고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는 일이 가능해질 것이다. 맞는 노래를 부르라는 말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편한 중국 기자 생활을 버리고 왜 한국에 와서 이 고생을 사서 하냐며 이상하다는 듯 질문을 던진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 같이 10시간 이상 서서 일하는 것이 장난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나는 고생스러운 것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 당당하다. 이 직장이 어떻습니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현장 일을 통해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삶을 살게 되니 좋고, 일하면 일한 대로 거둘 수 있는 것도 정말 뿌듯한 일입니다. 하고 대답한다. 더더욱 기쁜 것은 즐거운 마음으로 일에 임하니 한국에서 만난 고향 친구나 친척들이 내 얼굴색이 많이 좋아졌다고 말하는 것이다. 소화 불량으로 늘 배가 더부룩했었는데, 더는 약 신세를 지지 않으며, 환절기만 되면 종아리 부분에 심했던 가려움증이 말끔히 사라진 것이다. 우리 56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내 마음의 틈새를 찾아 57

풍족한 나라로 알려져 있고, 한국은 5000년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온 국가 라고 알고 있으며, 우리나라보다 경제 문화적으로 발전하여 보다 많은 희망의 천국을 찾아서 것을 배울 수 있고, 무엇보다도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나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아무리 좋은 취업을 해도 월 15~20만원(하루 8시간 근무 기준)정도를 버는 데 비해 한국에서는 월 100~150만원의 월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한국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아내의 패물을 팔아서 한국에 나갈 비행기 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두 달 동안 학원을 다니면서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어 시험에 응시하고 합격하여 사르진, 스리랑카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스리랑카에서 한국에 취업하러 온 사르진이라고 합니다. 나이는 32살입니다. 가족관계는 결혼해서 아들 둘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 경상남도 김해시 안동에 있는 일흥금속이라는 회사에서 4년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자동차 부품과 압력 밥솥 뚜껑을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기공사 일을 했었는데, 쓰나미 가 발생하고 나서, 일자리도 없어졌고, 국가적으로도 내전 상태가 심각해져서 이웃 동네에 가기도 두려웠습니다. 또한 반군들이 젊은 사람을 납치하기 때문에 더더욱 두려웠습니다. 그리하여 가정형편이 갈수록 나빠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외국에 가서 돈을 벌겠다고 결정했습니다. 어디로 갈지 고민하다가 한국이라는 나라를 선택했습니다. 제가 취업을 하기 위해 한국을 선택한 이유는 서남아 및 동남아 국가에 있는 젊은 사람들에게 한국은 잘 살고 그 후 저는 코리안 드림을 마음에 품고, 지난 2006년 9월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한국에서 도착해서 보니, 우리나라 후배들 8명이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한국인들과 의사소통이 잘되지 않아서 많이 불편했습니다. 한국 분들이 쓰는 말을 이해를 못하였습니다. 제가 온 곳은 경상도 사투리 쓰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표준어만을 공부했던 저에게는 사투리가 이해되지 않았고, 그래서 일요일마다 시내에 있는 외국인 쉼터의 한글교실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사투리도 배웠 습니다. 한국어 단어 하나하나씩 배워서 알게 되는 재미와 그 행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젓가락 쓰는 문화도 생소하였지만 배우게 되었습니다. 또 방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청결 문화도 배웠습니다. 그런데 저의 종교는 이슬람교라서 입에 맞는 할랄 음식(이슬람 율법에 따라 58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희망의 천국을 찾아서 59

도살 조리된 육류 음식)도 없어서 저는 생선과 야채를 직접 찾아서 먹게 되었습니다. 한국 음식 중에서 된장찌개, 김치, 특히 라면을 먹을 때는 김치가 없으면 허전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한국인의 입맛을 나도 모르게 따라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의 생활이 더욱 익숙해질수록 한편으로는 자꾸 집이 그립고 엄마도 보고 싶고, 아내와 아들도 보고 싶어졌습니다. 하루에 5~6번 전화를 하면서 많이 울기도 했습니다. 처음 와서 6개월 동안은 참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러다 나름대로 공부가 잘 되어서 3개월째부터는 의사소통도 쉬워 졌고, 여러 가지 도움을 받게 되고, 회사에 있는 동료들과도 친밀해졌습 니다. 회사 영업부 기사님들과의 관계가 좋아져서 농담을 하기도 하고, 속마음도 많이 알게 되었고, 제 고민도 많이 들어 주었습니다. 특히 몸이 많이 아플 때 약을 사주었던 동료 한국인 아주머니가 너무나 고마웠고, 명절날 음식을 챙겨준 식당 아주머니들의 따뜻한 배려에 감사했습니다. 피부색이 달라도 친구가 될 수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한국에 와서 처음 배웠던 말은 안녕하세요. 와 한국인들에게 꼬리표처럼 붙어 다니는 빨리빨리 라는 말이었습니다. 또 가장 신기했던 말은 밥 먹었어? 라는 인사입니다. 밥 먹는 시늉까지 하며 이 말을 건네는 한국인 동료들을 보며, 저는 한국인들은 밥이 그렇게 좋은가?, 혹시 나한테 밥 사달라는 내 생활을 걱정해 주는 이 말이 세계에서 가장 멋진 인사말이라고 생각 합니다. 처음에 한글을 배우기 전에는 한국 사람들이 외국인 또는 다른 나라 문화에 대한 이해심이 부족하다고 느꼈는데, 한국에서 계속 생활 하면서 제 생각이 짧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인은 따뜻하며, 정이 많고, 친절하고 남을 배려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쁘고, 슬픈 일을 신명나는 노래 한 가락으로 풀어버리는 민족인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한국은 4계절이 뚜렷하여, 계절마다 변하는 자연의 모습에 많은 감동을 느낍니다. 예를 들어 우리 뒷산인 김해 신어산 은 봄에는 노란빛, 여름에는 초록빛, 가을에는 붉은빛, 겨울에는 하얀빛 이렇게 네 가지 빛을 느끼면서 한국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지나 어느덧 1년이 지나 한국에 왔을 때 들었던 비용을 다 갚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번 돈은 내가 우리나라에 가져가야할 돈이라 생각 하고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함부로 돈을 쓰지 않았으며, 부지런히 모았 습니다. 다른 동료들은 기분이 좋다, 혹은 집이 그립다는 이유로 술도 마시고, 여자도 사귀었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가끔 한 번씩은 동료들과 같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고 파티도 합니다. 파티를 하다가 스리랑카 노래를 부르면서 함께 어울려져 추는 춤은 타국에 있다는 외로움을 잠시나마 잊게 합니다. 뜻인가 하면서 궁금해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어가 바로 그 인사말입니다. 저는 식사를 할 수 있었는지 제 몸을 걱정해 주고, 배고파서 힘든 건 아닌지 걱정해 주고, 매일 제대로 먹고 있는지, 그렇게 2년이 지나서 지금은 우리나라에 집도 사고, 땅도 사게 되었 습니다. 지금 생각해 봐도 무척 뿌듯함을 느낍니다. 그러다 한국에 온 지 60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희망의 천국을 찾아서 61

3년이 되었고, 회사에서 계약한 기간이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부지런하고, 성실한 모습을 좋게 여겨 회사와 다시 연장 계약을 하였습 니다. 또다시 3년 동안 더 일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습니다. 재계약 전에 3달 동안 휴가를 받고 우리나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보고 싶었던 부모님, 아내, 자식을 보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가족 들은 제가 살이 많이 빠졌다고 고생이 많다고 하며, 다시 한국에 가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하지만 난 가족을 위해서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모처럼 나를 생각해준 가족을 위해서 국내 열심히 일하면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최선을 다하고 있는 한국 분들을 위해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주고 싶습니다. 제가 받은 배려와 친절을 갚을 수 있게 말입니다. 제가 한국을 떠나서도 제2의 고향인 한국을 응원하고, 한국을 널리 알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한국인들도 저와 같은 외국인 들에게 한걸음만 다가와 관심과 배려를 가져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의 작은 소망이 있다면, 앞전에 일어났던 천안함 사건 과 연평도 교전 같은 분쟁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남과 북이 평화스럽게 통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제가 우리나라에 휴가 왔을 때는 내전이 끝났기 때문에 국내 여행을 자유롭게 다녀 올 수가 있었습니다. 좋아하는 가족 항상 대한민국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스리랑카인 사르진 들을 보고 나도 무척 기분이 좋았습니다. 휴가기간 3개월도 다 끝나고 한국 대사관에 가서 재입국 허가(비자)를 받고, 아쉬워하는 가족들을 남겨두고 저는 한국에 다시 들어왔습니다. 이제는 한국말도 많이 유창해져서 타 회사에 다니는 스리랑카 친구 들의 어려움을 많이 도와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몸이 몹시 아픈데 표현을 못하는 친구를 위해 병원에 가서 의사 선생님께 통역도 해드리고, 치료를 위한 방법들을 가르쳐 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경찰서에 가서도 스리랑카 친구들이 문제가 있을 때 통역을 해주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거의 한 달에 두세 번쯤 통역을 해달라는 전화가 오곤 합니다. 앞으로 2년이라는 기간이 남았는데, 남은 기간 동안 하고 싶은 일은 62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희망의 천국을 찾아서 63

이방인 이었습니다. 처음 맛보게 되는 식사에서, 우리는 모든 한국음식들과 함께 처음 대한민국, 꿈이 실현되는 곳 으로 김치 를 맛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처음에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김치 역시 우리가 매일 먹는 식사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한국말은 거의 알지 못하는 채로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고용주 및 상사, 특히 우리의 동료들과 소통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이들 역시 우리와 소통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을 바투란 마 토네트, 필리핀 겪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보디랭귀지가 서로를 이해하는 데 일상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들과 매일 함께 지내면서 이들의 언어를 조금씩 내가 어렸을 때, 대한민국은 단지 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꿈이 실현된다면 우리의 기도에 응답을 해주신 것이고 우리의 소망을 들어 주신 것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이 빠르게 진행되어 국가의 노동력을 지원하기 위해 외국으로부터 더 많은 근로자를 필요로 할 때에 드디어 기회가 왔습 니다. 젊은이들이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을 부양하기 위해 더 많은 수입을 바라게 됨에 따라, 우리는 주저 없이 그 기회를 잡고 전혀 다른 문화, 다른 언어, 다른 날씨, 다른 음식 그리고 그 밖에 많은 다른 점들을 가지고 있는 나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 수많은 차이점으로 인해, 우리가 처음 대한 민국에 첫 발을 내딛었을 때, 우리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들에게 완전한 알게 되기까지 매우 힘들었습니다. 물론 영어를 말할 수 있는 일부 한국인들도 있습니다. 적어도 자기 소개를 할 수 있는 만큼의 실력이 된다면 서로 이해하는 데에 매우 도움이 됩니다. 우리 중 일부는 친절하고 마음이 따뜻한 고용주와 동료들을 만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반면 일부는 잔인하고 매정한 고용주와 동료를 만나는 불운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상황에 당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 모두와 같이 한국인들도 모두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고용노동부와 산업인력공단에서 우리가 회사와 업무 분야 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과 문제들에 대해 많은 지원을 해주는 사실은 참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기후에 적응하는 것도 역시 우리에게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입니다. 64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대한민국,꿈이 실현되는 곳 65

겨울, 봄, 여름 및 가을의 4계절이 있어 우리들 중 대부분은 감기, 열, 독감과 같은 질병에 걸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또한 다행스러운 일은 정부 에서 국민과 국내 법적 근로자에게 제공해주는 의료보험 혜택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의료보험카드를 가지고 병원 및 모든 의료 기관에 제출을 하면, 병명이 무엇이든 한국인과 동일한 혜택을 받게 됩니다. 기후 변화로 인해 병에 걸리거나, 업무상으로 인해서도 그렇습니다. 또 가끔은 치료를 필요로 할 수 있는데, 의료보험은 항상 이에 유용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족들로부터 먼 한국에서 다른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같은 곳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제2의 가족이 됩니다. 물론 우리에게 친절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가 가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이해 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큰 위안이 됩니다. 또 이 분들께 우리가 집에서 멀리 떨어진 타국 에서 우리가 더 강해지고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 주셨던 것에 감사드립니다. 뿐만 아니라, 올해 대한민국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함께 외국인 노동자들이 미래에 근로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능력뿐만 그렇습니다. 우리는 고향에서 매우 먼 외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우리가 겪게 되는 고통과 어려움들을 잊고 하루에 8~12시간 동안 일합니다. 그 돈은 우리가 우리가족의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 쓸 돈입니다. 거의 매일밤 우리는 우리 가족과 우리가 얼마나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우리는 그들을 매우 그리워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눈물을 닦고 다시 웃습 니다. 우리가 흘리는 눈물과 땀방울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과 필수적인 것 등을 채워 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걸려오는 전화 한통과 행복한 목소 리를 들을 때면 우리의 외로움을 달래며 다시 일할 에너지를 얻습니다. 우리가 힘을 얻어 더욱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그들을 더 행복하게 해 주고자 하는 이유뿐입니다. 아니라 우리가 현재 일하고 있는 회사에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무료 직업 훈련을 시켜주는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더욱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학교를 그만두고 일을 하게 된 우리와 같은 노동자들에게 이것은 또 하나의 좋은 기회입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은 진실로 합법적 노동자들에게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들이 열려있는 곳입니다. 1953년 전쟁이 끝난 뒤 아무 것도 없던 땅에서 살아남아 우뚝 일어 선 이 나라와 그 국민들이 놀랍지 않습니까? 한국인들의 조국에 대한 애국심과 사랑이 이 나라를 다시 일으킨 핵심 요소인 것 같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을 보십시오. 그들이 지금 그들의 모습과 그 나라를 일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했는지 상상이 가시나요? 아마도 그것은 국민들이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데에 도움이 되로 결정한 데에 따른 결실임에 틀림없습 니다. 우리 중 거의 모두가 알다시피, 대한민국은 가장 발전된 기술이 66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대한민국,꿈이 실현되는 곳 67

들어온 국가들 중 하나입니다. 이에 따라 그 제품 역시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이 매우 높습니다. 각 나라의 노동자들은 양적으로뿐만 아니라 제품의 품질에 대해서도 훈련을 받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나라의 경제와 기술을 세우는 데에 일부 공헌했다는 사실에 매우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하지만 현재 남한과 북한의 두 한국 사이에 전쟁의 기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꿈이 끝나게 될까요?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두려워서 고향으로 곧 가버릴 것인지 묻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결정해야 한다면 누군가에게는 농담으로 들릴 수도 있겠 지만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의 갈림길이 있습니다. 정부가 우리에게 무기를 나눠 준다면, 우리는 여기에 머물러 전쟁에 참여하고 우리가 매일 생활하며 눈물과 기쁨 아픔을 느꼈던 이 곳 한국을 위해 싸울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고향을 위해서도 말입니다. 우리가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또 다른 고향으로 여긴 이 곳, 우리의 제2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이 곳, 그리고 세상에 이렇게 외칠 것입니다. 꿈이 실현되는 곳, 한국이여 영원 하라. 68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대한민국,꿈이 실현되는 곳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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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작 외국인이 팀장인 우리공장 이병흥 저희 주식회사 명원테크 평택안중공장에는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중국, 필리핀에서 온 시급제 직원들이 10여명 있습니다. 올 2월 금융권 에서 근무하다 이곳 (주)명원테크 부사장으로 발령을 받아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현대. 기아자동차 협력회사라 자동차부품을 만들고 있어 대형프레스와 용접로봇들이 24시간 주야로 쿵쾅 쿵쾅 지지직~소리를 내면서 일을 하는데 일하는 직원들의 표정은 한국인 외국인 할 것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일을 하고 있더군요. 식사할 때도 그렇고 쉬는 시간에도 일을 할 때도 그렇고, 정말 일하는 로봇 같기만 했습니다. 그들 눈에는 제가 어려운 것도 있었겠지만, 하얀 얼굴에 말쑥한 모습이 자기네들하고는 다른 세계의 사람쯤으로 생각되어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던 한 달여쯤 인도네시아 외국인이 팀장인 우리공장 73

에서 온 도딕이란 친구와 제 차를 함께 타는 기회가 생겨 뜨문뜨문한 말투로 인사를 하고 서로에 대한 상투적인 말을 하게 되었답니다. 어디서 왔는지 몇 살인지 가족들은 몇 명인지 왜 한국에 오게 되었는지 그러던 중 전 그 친구의 눈빛에 잠깐 스치는 강렬한 빛을 보았습니다. 조금만 버티면 된다. 이 고생도 잠깐이면 된다. 라는 각오에 찬 눈빛을 말입니다. 그런 표정을 뒤로 한 채 서로의 길로 헤어지고 또 그렇게 무표정한 얼굴로 근무를 하던 그 친구를 보게 되었습니다. 정말 우리 회사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생기도 없고 그냥 1960년대 우리나라 공장의 직공들처럼 피곤에 지치고 저임금에 척박한 환경에서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와 반둥이란 도시에서 2년간 근무한 경험이 있는 저로선 그 나라의 현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친숙해 여기저기 뒹굴고 있는 기계들과 원자재들을 치우고 깨진 유리창들을 임시방편으로 비닐로 씌우고 납품물건들을 랩으로 다시 포장을 하고 겨우 납품차에 실어 보내고 나서야 한 숨을 돌리게 되었답니다. 아마 그 친구들이 오지 않았다면, 그냥 근무시간이 아니니까 잠을 청했다면 회사는 납품뿐만 아니라 태풍의 피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더 큰 피해를 보았을 것입니다. 정말 우스운 얘기지만 평소 내국인 노동자들과는 많은 대화와 회식자리를 가지면서 우의를 다졌지만 그날 달려온 내국인 노동자들은 단 한 명도 보이질 않았답니다. 마음 한 편이 씁쓸했습니다. 늦은 아침 식사를 하면서 그 친구들의 모습이 어찌나 고맙고 평소 내가 알고있는편견은온데간데없이사라지고 그 시간에 잠든 동료들을 모두 깨워서 공장으로 달려 와준 그 친구들이 정말 가족처럼 느껴졌답니다. 질려고 몇 차례 시도를 해 보았는데 그다지 큰 진전은 없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는 회식도 하고 소주도 같이 먹고 대화도 자주 그러던 몇 개월이 지난 9월 어느 날, 평택지역의 전기가 모두 정전이 되고 바람에 회사 지붕이 날아가고 공장 문들이 내동댕이쳐질 정도의 큰 태풍이 불어 왔습니다. 휴대폰 기지국마저 파손되어 통신도 두절되고 일반전화 역시 마비가 된 상태였습니다. 그 시간이 새벽 4시 정도였는데 비바람소리와 천둥소리에 놀라 깨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공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이미 공장엔 인도네시아 출신의 도딕, 수워노, 아리 스와 스리랑카 출신의 세나랏, 니산타, 사만다, 헤랏 등 외국인 노동자 들이 나와서 야간근무자들과 수습을 하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침까지 하게 되었는데 그 친구들이 왜 그렇게 말도 없고 표정도 무표정 하고 그랬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답니다. 그 이유는 첫 번째가 내국인들은 저희회사 직원이고 외국인들은 아웃소싱업체의 직원이다 보니 내국인들이 팀장을 하고 있어서 자기들은 항상 내국인 팀장의 눈치를 보면서 근무를 하다 보니 그런 표정을 가지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내국인 팀장은 내국인 직원들에겐 기술과 편의를 많이 제공하는 대신 외국인 직원들에겐 잡일과 허드렛일을 주로 시켰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팀장 눈에 벗어나면 더 힘든 근무를 한다고 합니다. 그 사연을 알게 되니 이건 아니 74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외국인이 팀장인 우리공장 75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맴 돌았답니다. 직책상으로 공장장, 생산부장, 품질부장, 각 팀장들이 있는 회사 조직에서 하루아침에 체계를 바꾸고 부사장이 공장 내부의 소소한 것까지 관여를 한다는 건 결코 쉽게만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낙하산처럼 등장한 부사장이 기존 회사구조를 마음대로 바꾼다면 반발이 생겨서 회사 운영에 지장을 줄 건 자명한 일이라 신중하게 생각하기로 하였습니다. 책임질 거냐 고 하길래 겁이 나서 그냥 있었는데 이러다가 회사에 큰일 나겠다 싶어 용기를 내서 저에게 온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도딕을 데리고 공장으로 가서 공장장에게 수리도구를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친구가 수리할 때까지 아무도 간섭하지 말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최대한 지원하고 도와주라고 강한 어조로 지시를 내렸습니다. 사실 나 역시 걱정도 되고 과연 그 실력이 될까 싶었지요. 일본으로 수리를 보내서 가지고 들어오면 중고로 팔아도 되고 다시 우리가 사용 그러던 중 공장 로봇용접라인에 원인 모를 고장이 나서 생산라인이 멈추게 되는 큰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생산부장도 품질부장도 라인의 팀장도 전혀 그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A/S를 불러 보았지만 일본 제품이고 수입회사 역시 부도가 나서 천상 다른 회사의 제품으로 새로 구입해야 하는데 그 시간도 2주 이상이 걸린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같은 자동차 부품회사 납품에 차질이 생기면 현대. 기아자동차의 생산에 큰 차질이 생겨서 계약서상 회사에 큰 손해가 오게 되는 절박한 상황이었 답니다. 회의의 회의를 거듭해도 또렷한 대안이 없는 탓에 고민을 하고 있는데 도딕이란 친구가 제방으로 들어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떠듬떠듬한 말투로 부사장님 제가 한 번 로봇 수리를 해보고 싶습니다. 라고 하면서 씨이익~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수줍게 웃는 게 아니겠습니까? 팀장한테 말했더니 더 고장이 나면 어떻게 할 거냐고, 해도 되는데 잘못 손댔다가 이도 저도 못한 상황이 발생하면 여간 난감한 상황이 아닐 거라 생각 했지만 그 친구를 처음 봤을 때의 강렬한 눈빛과 태풍이 몰아칠 때 그 친구의 애사심에 감동한 터라 고쳐보겠다는 수줍은 미소를 보니 저 친구는 뭔가 할 수 있겠다고 믿음이 있었습니다. 한 시간 두 시간 시간이 흐르고 오전에 시작한 수리는 저녁이 되어서도 끝나지가 않았습니다. 다른 직원들은 퇴근을 하고 난 내방에서 그 친구가 끝났다는 말을 듣고 싶어 저녁 12시가 넘도록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마 공장장이나 부장들 팀장들은 내가 한 행동에 어느 정도 반감이 있었을 겁니다. 20년, 30년 이 계통에서 기름밥 먹은 자기들도 못하는 걸 후진국의 젊은 사람이 그것도 잡일이나 하는 주제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부사장은 뭘 믿고 저러는 거냐고 말입니다. 공장장도 부장들도 모두 퇴근한 새벽 1시 난 조용히 공장을 들여 다보았습니다. 도면을 펼쳐들고 온 몸엔 땀을 흘리면서 골똘히 수리에 76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외국인이 팀장인 우리공장 77

몰두하는 도딕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집중을 하던지 내가 쳐다보는 것조차 모르고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난 방해 될까 싶어 조용히 내방으로 돌아 와서 서류를 보다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 내 옆에 있다는 느낌이 들어 눈을 떴는데 내 옆에는 얼굴에 땀과 얼룩 으로 범벅이 되어서 환~하게 웃고 있는 도딕이 서 있었습니다. 부사장님 무시하면 그 사람들이나 현지 사람들이나 서로에게 도움이 되질 않는 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외국인 100만 명 시대가 왔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을 이방인 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고 그 사람들과 어울려지고 동화 하면서 살아야 우리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 했으면 좋겠습니다. 다 고쳤어요. 얼마나 반가운 소리인지 나도 모르게 도딕을 힘껏 껴안고 빙글빙글 방안을 돌았습니다. 그리고 공장으로 가서 힘차게 소리를 내면서 작동을 하고 있는 로봇의 모습을 보았지요. 얼마나 감동이었는지 작업대기자들을 불러 생산라인을 가동시키고 도딕과 늦은 식사를 했지요. 다음날 회사는 발칵 뒤집혔지요. 공장장들과 부장들, 팀장들은 출근을 해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질 못하더군요. 어찌나 기분이 묘하던지 하마 터면 웃을 뻔 했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회사 전체 인사이동이 있었습니다. 저는 과감히 도딕을 팀장으로 추천을 하고 사장님께 결제를 받아 내서 발령을 했습니다. 정식 직원으로 말입니다. 도딕이 팀장을 맡은 다음부터 저희 회사 외국인 근로자들의 모습은 언제 그랬냐 싶게 환하게 웃고 다니고 생산성도 올라 가고 불량품도 현저하게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외국인과 내국인 들도 서로 얘기하고 회식하고 정말 이제는 내외국인 구별을 할 수 없을 만큼 한 가족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후진국 사람들이라고 편견을 가지고 78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외국인이 팀장인 우리공장 79

우수작 입구에서 큰소리로 말하며 90도인사를 하여 웃음을 안겨주기도 했었다. 우리 회사는 농산물을 재배하고 수확하는 곳입니다 진을 필두로 우리는 네팔과 태국, 몽골 등 여러 나라의 근로자를 신청하여 받게 되었다. 그들을 맞으려고 연수원으로 가서 데리고 올 때면 먼 타국으로 돈을 벌겠다고 부모와 형제, 가족을 떠나서 낯설고 생소한 이곳 까지 오게 된, 그들의 새로운 곳에 대한 두려움과 혼자 남겨진 외로 움이 그대로 전해져서 마음이 참 짠하니 아프기도 하였었다. 그래서 더욱 그들이 이곳에서의 생활에 적응을 잘 하여, 기간을 다 채우고 고국으로 이미화 돌아가길 누구보다도 더 원하고 원했었다. 저마다 개성들이 다 달라서 활달하고, 붙임성이 있는 아이들은 그래도 우리 회사는 농산물을 재배하고 수확하며, 또한 수확한 농산물을 세척하여 포장, 공급하는 영농조합 법인이다. 일의 특성상 근무환경이 열악한 까닭에 한국인 근로자를 고용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운 실정이다. 처음 외국인 근로자를 신규로 신청하고 언어나, 문화가 달라서 적응을 잘 할 수 있을지 염려가 많이 되었다. 지금도 맨 처음 입국한 진을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우리와 인연을 맺게 된 진을 데리러 연수원을 갔을 때가 생각난다. 커다란 두 눈에 똘망똘망한 모습의 진은 베트남에서 온 아이였다. 나이가 갓 스물을 넘긴 앳된 모습이었지만, 후에 알게 되었지만 그때 벌써 임신한 부인이 있었다고 한다. 진은 성격이 무척 밝고, 활달하였다. 인사성도 어찌나 밝았던지, 점심을 먹으려고 들어간 식당에서 안녕하세요 라고 적응을 잘하는 편이었지만, 소심하고, 외로움을 많이 타는 아이들은 무척 이나 힘들어 하였다. 네팔에서 남자 한 사람과 여자 한 사람을 각각 신청 하여 받았었다. 여자아이는 다른 나라 사람들과도 곧 잘 친해지고, 적응을 하였는데, 남자아이는 너무 힘들어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집에 돌아가고 싶어서 우는 모습을 보며 함께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들 조차도 마음이 아파서 위로하고, 용기를 주었지만, 끝내 견디지 못하고 돌아가겠다고 우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애처로웠던지, 함께 근무했던 외국인 근로자들은 남의 일 같지가 않았던지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에게 십시일반 돈을 거두어 여비를 보태주었다는 소식을 나중에 전해 듣고 그들의 따스한 마음에 우리 자신이 부끄러웠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새롭게 들어오고, 또한 그렇게 다른 곳으로 가기도 하면서, 80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우리 회사는 농산물을 재배하고 수확하는 곳입니다 81

어느 새 외국인 근로자와의 생활도 익숙하여졌고, 그들과의 대화도 비록 짧은 단어들의 조합이지만 소통이 되게 되었다. 한국의 김밥을 유난히 모두들 좋아해서, 아이가 소풍을 가는 날이면 정작 아이는 한 줄도 먹지 않는 김밥을 오십 줄은 족히 싸서 그들에게 나누어 주어 맛있게 먹으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기쁨 또한 생기게 되었다. 함께 근무하는 한국인 근로자들 또한 태국의 파파야를 좋아하게 되어서, 먹고 싶다고 얘기하면 오이를 채 썰고, 국수를 삶고, 젓갈과, 고추를 빻아서 버무려, 매워서 땀을 흘리면서도 함께 먹으며 즐거워하게 되었다. 주었다. 베트남에 가서 가족을 만나고 돌아오라고 하였더니 연신 귀에 입이 걸려 있다.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함께 준비해 주기도 하였고, 한국인 근로자들도 진의 휴가소식을 듣고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너도 나도 가족들에게 갖다 주라고 라면이며 김이며, 필요한 것들을 선물해 주어 진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해 주었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사모님 감사합니다 를 연신 하며 공항으로 향하던 진은, 베트남에 도착해서도 전화해서 감사 합니다를 연발하였다. 가족을 만나고 돌아올 때엔 양 손에 우리들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베트남 술과, 베트남 꿀을 가지고 와서 고마운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어느 새 우리는 각 나라의 문화에 조금씩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바다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진을 생각해서, 그 해에는 야유회를 바닷가로 정해서 가기도 하였었다. 정말 외국인근로자도 데리고 가느냐고 몇 번 이나 물어보고, 아이처럼 좋아라 하던 진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차안 에서 그동안 배운 한국가요를 부르고,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함께 공놀이도 하고, 모처럼 함께 어린아이처럼 뒹굴며 보냈던 잊을 수 없는 즐거운 하루였다. 그러는 사이 진에게는 예쁜 딸아이가 태어나게 되었고, 고향에서 보내주는 사진을 함께 돌아가면서 보며 여자아이인데도 진을 쏙 빼닮은 모습을 보며 같이 기뻐해주기도 하였다. 봄에 파종이 끝나고, 가을에 수확하기까지 여름은 비수기라 한가한 편이다. 그래서 딸이랑 부인을 보고 싶어 하는 진에게 여름 한 달간 휴가를 주며 인사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진을 시작으로 한 사람씩 고향을 다녀오겠다고 하였다. 그동안 헤어져 있던 가족들을 진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새삼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 던지, 그렇게 한사람씩 교대로 고향을 다녀오는 바람에 한국인 근로자들 사이에는 어느새 선물 또한 정해져서 하게 되는 룰이 생겨버렸다. 서로 다르게 해주면 아이들이 서운해 할까봐 라면이면 라면, 김이면 김, 이렇게 각자 정해놓고 선물을 해 주게 되었고, 그들 또한 다녀오면서 그 나라의 과자며, 손으로 뜬 작은 손가방 같은 선물들을 가져와 서로 나누어 주고, 함께 기뻐해 주는 정겨운 모습들이었다. 가끔 TV를 통해 외국인 근로자 들을 학대하거나 업신여기는 모습을 보면 그렇지 않고, 한 가족처럼 지내는 우리 회사 직원들이 얼마나 고맙고, 또 마음이 흐뭇했는지 모른다. 네팔에서 온 앙칸두는 여섯 남매의 맏이로 아직 어리지만 당차고 82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우리 회사는 농산물을 재배하고 수확하는 곳입니다 83

야무진 아이다. 동생들을 위하여 묵묵히 힘든 일도 참 열심히 하는 아이다. 인터넷으로 동생들과 연락하며, 모은 돈을 꼬박꼬박 집으로 송금하는 효녀이기도 하다. 그런 앙칸두의 어머니가 암이라고 연락이 왔다. 수술을 했는데 옆에서 간호해 줄 사람이 없다고 한다. 동생들은 학교에 가고, 어리고 해서 돌봐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한다. 서둘러 출입국관리사무소에 가 서류를 작성해서 신고하고 앙칸두를 출국시켰다. 엄마가 회복할 동안 간호하고 또 어린 동생들을 돌보며 지내다가 기간이 되어 돌아왔을 땐, 그 어린 마음이 얼마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참 마음이 아팠던 적이 있다. 보며, 수줍음을 많이 타고, 내성적인 성격이라 적응을 하지 못하면 어쩔까 염려했었던 것이 기우였음을 깨닫는다. 나 혼자 늦게까지 남아서 정리를 해야 할 일이 생기면, 기숙사로 들어가지 않고 조용히 함께 있으며 일을 도와주는 참 마음이 따스한 아이이다. 들어가라고 해도 괜찮아요. 라고 하며 옆을 지켜주는 그 마음이 참 고맙고 이쁜 아이. 그래서 더 탐나고, 붙들고 싶은 아이이다. 앙칸두,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기간이 끝날 때 까지 여기 있다가 고향으로 가.. 네.. 수줍게 웃으며 대답한다. 네팔은 버스가 흔치 않아서인지, 아니면 앙칸두의 집이 외진 곳이어 서인지, 이곳에서 가지고 간 선물들을 들고 여섯 시간을 걸어서 집으로 갔었다는 얘기를 듣고 우리 모두 할 말을 잊고 말았다. 그것들을 어떻게 다 들고 여섯 시간을 그것도 평지도 아닌 산길을 걸어서 갔을까.. 손으로 다 들지도 못했을 텐데.. 언니가 왔다고 기뻐할 동생들의 모습을 생각 하며, 그 많은 선물들을 끙끙대며 들고 그 산길을 걸어서 갔을 앙칸두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 왔다. 스물두 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가족을 생각하고, 자신을 희생하며, 열심히 일 하는데 모든 것이 풍족하고, 넉넉한 우리들은 희생이나, 사랑보다, 원망과 불평이 더 많았던 모습을 떠올리며 오히려 어린 앙칸두를 통하여 가족 사랑을 배우게 되었다. 힘든 일도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감당하며, 태국 이나 베트남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고, 한국 사람들과도 잘 지내는 모습을 좀 한가한 여름이면 각 나라의 음식들이 점심상에 올라오곤 한다. 태국의 파파야, 베트남의 야채들을 라이스페이퍼에 싸서 튀겨서 소스에 찍어서 먹는 음식(이름을 가르쳐 주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지만 무척이나 맛이 있었던 음식이었다)과 네팔의 쌀가루를 반죽하여 튀긴 마치 우리 나라의 꽈배기같이 생겼지만 조금은 까칠한 그런 맛을 내는 튀김들 이런 음식들은 한국 사람들도 잘 먹어서 그런지 시간이 날 때면 서로 해서 갖다 주어 즐겁게 먹기도 한다. 또 태국의 쌀국수를 우리나라의 잔치국수 처럼 육수를 내어 말아서 먹는 것도 있는데, 약간 독특한 맛이 나서 몇 번 먹어본 사람들은 좋아하는데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거북해 하기도 한다. 외국인 근로자들 덕분에 이곳에 근무하는 한국인 근로자들은 다양한 나라의 음식을 접하고 맛 볼 수 있게 되었다. 음식을 통하여 더욱 가까워 84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생활 수기집 우리 회사는 농산물을 재배하고 수확하는 곳입니다 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