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러 두 기 외국인의 기록으로 보는 인천근대 는The Korean Repository와 The Korea Review의 기록 중에서 인천과 관련한 역사와 지리, 정치, 산업과 경제, 사회와 문화 등을 초록하여 역주 번역한 것이다. The Korean Repository는 1892 년 1월에서 1898 년 12 월까지, Korea Review는 1901년 1월에서 1906년 12월까지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간 행된 월간 잡지로서, 한국 선교를 위하여 한국사회를 이해할 필요에 의 해 발간되었다. 한국의 현상을 생생하게 기록해 놓은 이들 자료는 한국에서 벌어지 고 있었던 정치적 사건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 러시아 미국 영국 등 각국과의 이해관계, 한국의 인구 신분 사회 발전상 그리고 각 지 역에 대한 기행 및 관습과 풍습 등 한국의 정치 경제 외교 사회 문화 민속 등 다방면에 걸쳐 외국인의 눈에 비친 그들의 견해를 밝혀 놓은 것이다. 서양 선교사에 의해 발간된 한국 최초의 잡지인 이들의 기록 속에 서 인천관련 자료를 찾고 선별하는 작업은 긴 시간을 필요로 하였다. 자료의 의미를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의역보다는 직역을 원칙으로 하 였고 역주를 붙여 해석상의 차이나 오류를 밝히고자 하였다. 책의 구성 또한 인천과 관련한 기사를 대상으로 하여 발췌하였기 때문에 기존의 시대적 나열에서 벗어나 주제별로 하였다. 영문서의 번역 역주라 할 수 있는 이 책은 그간 인천개항 25년 사, 인천향토지 등 일문서 자료와 인천부읍지, 부평군읍지 등 한문서 자료의 번역 역주 등과 더불어 인천의 역사와 문화를 한층 더 이해하게 해주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 생각하며, 나아가 인천 이야기 가 더욱 풍성해 질 것으로 기대한다. 2007.12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
목 차 I. 역사와 지리 5 O 제물포 5 O 강화 8 O News Calendar/ 강화 11 O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지 / 강화 12 O 제물포 15 O 실제의 한국 31 O 한강이 굽어지는 곳 38 II. 정치 42 O 팔로스 요새 42 O 갑신정변을 일으키게 한 사건들 44 O 1884 년 갑신정변 (1) 50 O 1884 년 갑신정변 (2) 57 O 슈펠트의 회고 68 O 제물포의 영국함대 73 O 회상-1894 74 O 러일전쟁 / 제물포해전 82 III. 산업과 경제 92 O 제물포항을 통한 곡물수탈 92 O 한국의 해안 무역 96 O 오쿠마 백작의 한국무역 102
O 해안 무역 104 O 한국의 무역과 상업 106 O 미국 총영사의 무역 보고서 112 O 경인철도 (1) 113 O 경인철도 (2) 115 O 경인철도 (3) 115 O 경인철도 (4) 116 O 경인철도 (5) 117 O News Calendar/ 무역 갈등 119 O News Calendar/ 방곡령 119 O News Calendar/ 기관차 구입 120 O News Calendar/ 기선회사 120 O News Calendar/ 해운업 121 IV, 사회와 문화 122 O 1892 년 제물포항의 기상기록 122 O 이츠모마루 (The Idzumo-Maru) 의 침몰 128 O 감리교 선교활동 130 O 장로교 선교활동 137 O 멕켄지 목사 141 O 말콤 의학박사 145 O 기록과 논평/ 일본인 인구와 교회 기부금 146 O 기록과 논평/ 선교회 활동 147 O 기록과 논평/ 일본인 인구조사 149 O 기록과 논평/ 우정국 개통 150 O 기록과 논평/ 윌킨슨 보고서 151 O 기록과 논평/ 중일 무역상 소식 151 O 서울에서의 콜레라 153
O 한국에서의 자전거 체험 154 O News Calendar/ 제물포 클럽 157 O 논평/ 테니스경기 158 O News Calendar/ 테니스 경기( 규칙) 158 O 테니스 경기( 제물포 승리) 159 O 전신 서비스 159 O 우편 서비스 160 O News Calendar/ 운송수단 160 O News Calendar/ 전화선 161 O News Calendar/ 조선신보 161 O 한국 소개 관련 서적/ 제물포의 변화 161 O 일본식 화폐 162 O 안투마루호 (Antu Maru) 의 난파 163 O 논평/ 수도사업 167 O 한국의 재무구조 168 O News Calendar/ 무이도의 해적 169 영문 원본 171
I. 역사와 지리 O 제물포 1) 20 세기 초의 제물포는 매우 흥미로는 화제의 장소이다. 1883 년 개항 한 이 항구도시는 한강어귀를 수비하기 위해 요새를 돌보는 군인 소작 농이 사는 부근의 군대마을과 강가 언덕 뒤편에 잘 보이지 않는 초라 한 어촌의 군집마을이 전부였으나, 16년이 지난 현재는 2만 명의 여러 국적의 사람이 사는 급속히 성장하는 도시가 되었다. 제물포의 성장은 지속적이고 거의 놀랄만한 것이었다. 초기에는 이 항구의 영역이 확장 될 징후는 없었지만, 현재 이 항구의 경계는 처음 시작된 곳 근처에 있 는 해관에서부터 2 마일까지이다. 무역은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다. 자산 은 그 가치 면에서 여러 번 배가 되었다. 통신선이 곳곳으로 개통되었 다. 여전히 항구의 성장과 개발의 가능성이 대단하고도 강력하다. 이 항구의 영역은 소문난 월계수처럼 확장하였다. 1882 년 5월 22일 슈펠트제독에 의해 서양국가와 첫 번째 조약이 이루어졌을 때, 그를 위 해 제물포 뒤편 언덕 쪽으로 막사가 설치되었다. 그곳은 현재 지방행정 관의 저택이 있는 곳인데, 그곳에서 제독은 혼자 항구 근처 작은 월미 도보다는 매력 없는 본토에 거처를 세우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 고민 을 했다. 그가 월미도에 거처를 세웠다면, 아마 이곳의 마을은 오래 전 에 바다에 버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거처를 본토에 세우는 것으로 결정했고, 이 결정은 대체로 만족스러운 선택이 되었다. 조약이 체결되 는 동안 본래의 조일조약을 조건으로 항구의 경계를 1백리까지 확장하 기로 하였다. 이렇게 되었다면 서울이 제물포의 영역에 포함되었을 것 이다. 조미수호조약이 제물포에서 체결 되었을 때, 그 경계는 만석동이 라는 작은 마을과 군인부락인 화도까지였다. 현재, 집들과 주택들로 덮 여있는 이 언덕들은, 구석구석 작은 골목길이 있었는데, 이후 그 많은 1) Korea Review, 1901년 1 월호, pp. 11-2.
길들이 제거되어졌지만, 곧 대단한 변화가 올 것이라는 조짐은 없었다. 보잘것없고 가망 없던 항구도시는 일본조계, 중국조계, 각국조계, 그리 고 한구인 거주자들이 들어서자 확장되었다. 일본인 거주지는 3개의 허가된 거주지 중에서 가장 중앙에 위치하였 고 항구의 중앙에 놓여 있었다. 일본인 인구수는 약 4500 명이었고, 일 본영사의 관할 구역 내에 있다. 이곳에 < 일본우선회사 > 와 < 오사카상선 회사> 의 사무실들이 있었고, 이들은 일본에서 한국, 또는 한국을 거쳐 중국까지의 기선을 운행하는 회사다. 튼튼한 화강암 건물의 일본제 1은 행이 여기에 있었고, 이곳에서 많은 은행 업무를 처리했다. 이곳에 또 한 일본제 18은행과 58 은행도 있었다. 현재 한강의 항구를 지나 북쪽으로 황해도 도청소재지까지 운행하는 해안노선과, 북쪽으로 진남포와 평양까지 운행하는 노선, 남쪽으로 군 산까지의 노선, 최근 이곳에서 24시간 걸리는 남쪽으로 충청도 도청소 재지인 공주까지의 노선이 개통되었다. 일본상인들은 일본의 상업적 이 익과 쌀 거래를 처리하는 무역청을 두고 있었다. 일본상인들은 항구의 수출입무역의 상당한 위치를 보유하고 있었고, 큰 이익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 항구에서 일본이 관여하는 것 중 가장 중요한 사업은 아마 도 서울- 제물포 철도의 경영이었다. 일본인 회사의 본사와 상점들이 이곳에 있었다. 이 중요한 사업은 한국에 큰 가능성을 채워주었다. 아 다치(T. Adachi) 총지배인의 효율적 지시를 받는 일본인 회사는 이 항 구와 서울외곽지역의 사람들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핵심적인 요소 가 되었다. 중국인 거주지는 항구의 서부 끝 쪽에 위치해 있고, 통(C.T. Tong) 중국 영사의 관할 구역 내에 있다. 이 항구에 거주하는 중국인 500명 의 다수가 이곳에 거주하고 있다. 이중 으뜸은 미국인 이름을 가진 진 보적 정신을 지닌 스튜어드 (E.D. Steward) 가 윤영하는 회사이다. 그가 없었다면 우리 대부분이 살아가는데 어려웠을 것이다. 이 항구에 거주 하며 인근 경작지의 소규모 채소밭을 소유한 중국인 채소 재배자가 상 당히 많았다. 이들 중 대부분이 산둥지방의 농부로, 봄이면 이곳으로
와 자신들의 토지에서 일하고, 겨울이면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이들로 인해 이 항구의 중국인 거주자의 수가 지속적으로 변동 하였다. 보통의 외국인 사회는 극동지역의 다른 항구와 거의 유사하게 구성 되어져 있다. 해관 직원, 영사들, 상인들, 그리고 선교사들이다. 이들 의 거주지는 이 항구의 동부 끝 쪽에 있고, 거리와 하수시설이 잘 설치 되어 있으며, 토지소유자들이 선택한 대표자들과 협정국의 영사의 보호 관할하에 있다. 경찰의 감독이 철저하고, 거주지의 권리가 잘 유지되고 있다. 이 항구의 사업의 선두에는 < 타운센드양행 (Townsend and Co.)>, < 세창양행 (E. Meyer, and Co.)>, 그리고 < 홈링거양행 (Holme Ringer and Co.)> 의 3 개 회사가 있다. < 세창양행 > 은 한국의 서부지역 광산구역의 광대한 지역에 대한 독일 채굴권을 맡고 있어서, 제물포로 오게 되었다. < 홈링거양행 > 은 홍콩과 상하이 은행의 대리회사로, 이곳 에 지점을 갖고 있다. 이 항구의 거대한 업체 중의 하나는 < 미국 광업 회사(The American Mines)> 회사이다. 이 광업회사는 한국의 북부지역 에 있고, 그 회사의 재무부장인 데쉴러 (D.W.Deshler) 가 본점을 맡고 있다. 한국 북부의 광산채굴권을 지닌 서부 개척회사도 이곳에 사무실 을 두고 있다. 거대한 사업체인 < 미국 광업 회사>, < 독일 광업 회사 (The German Mines)>, < 영국 광업 회사(The English Mines)>, < 홍콩 상해은행 (The Hong Kong and Shanghai Bank)> 그리고 < 경인철도 회사(The Seoul-Chemulpo Railroad)> 등 모든 회사들이 한국의 사업 부분에서 제물포를 정상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이게 전부는 아니다. 이 시기에 제조업에서 아주 흥미로운 시도가 제물포에서 시작되었다. 이전에 한국정부는 유리공장, 성냥공 장, 종이생산업체와 같은 여러 제조업 계획을 착수했었다. 이런 사업들 은 모두 서울에 위치해 있었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현 공장은 제물 포의 동부 끝 쪽 해안가에 세워졌고, 곧 민간자본으로 시작할 것이다. 제물포에 3 개의 선교회가 있다. 로마 카톨릭 선교회는 제물포항구와 그 주변지역에 훌륭한 교회건물과 항구의 여성과 어린여아들을 위해
일하는 수녀들을 위한 주거지를 갖추고 있었다. 영국선교회는 병원과 외국인과 일본인들을 위한 예배를 할 수 있는 교회를 갖추고 있다. 감 리교감독선교회는 항구의 끝 쪽에 본부를 두고 있다. 로마카톨릭 교회 와 감리교 선교회는 제물포와 인근 마을의 한국인 사이에서 많은 일들 을 처리하고 있으며, 영국선교회는 동일한 지역에서 성공적인 의료사업 을 하고 있다. 제물포의 모습에 주목해서, 이미 한국의 멋진 건물을 소유한 일본제 1 은행을 언급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곳엔 감리서가 있고, 근처에 교도 소가 있다. 이 교도소에는 수감된 범죄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곳에 짐마차와 지게를 넣어두었다. 또한 건물외관이 상당히 멋진 새 로운 제물포구락부 ( 클럽하우스 ), 구획정리가 잘되어진 공공 채소원, 영 국영사관, 그리고 수많은 멋진 주택들이 있다. 그리고 이 마을에는 잘 지어진 3 개의 영사관, 2 개의 극장, 7 개의 은행, 다수의 목욕탕, 몇 개 의 절들이 있었지만, 엄밀히 말해서 술집은 없었다. 여행객들에게 상당 히 편안한 숙소의 여러 호텔들이 있었다. 더운 여름 몇 달 동안, 기후 가 아주 서늘하고 상쾌하여, 여름을 보내기 위한 장소로 항구는 인기 있는 곳이었다. 이곳의 개척자 중 한사람인 미국목사 알렌(H. N. Allen) 은 우각현에 집을 가지고 있는데, 이곳은 눈에 띄는 건물 중 하 나이다. 최근 제물포는 여름 회합을 개최하는 인기 있는 장소였고, 이 미 이곳에서 선교회 연례회의를 두 번이나 거행하였다. 무역의 견지에서 제물포는 몇 개의 중요 중심지에 물건을 대주고 이 득을 보고 있었다. 물론 이 나라의 부는 거의 수도에 집중되어 있었지 만, 실제 한국으로 수입되는 모든 호화물품들은 제물포를 통과하였다. 뿐만 아니라, 수도와 그 인접 도시인 수원, 충청, 가평, 강화 등의 많 은 사람들은 제물포를 경유해 외국상품을 받고 있었다. 이런 외곽도시 들보다 더 중요한 도시는 송도와 해주이다. 이 두 도시는 작은 일본기 선으로 제물포에서 몇 시간 내에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O 강화2)
조선 왕조가 그 세력을 뻗쳤던 세 개의 큰 섬 중의 하나였던 강화는 비록 크기는 두 번째이지만, 울릉도나 제주도 보다 더욱 역사적인 관심 을 끌었던 장소이다. 이 섬은 169 평방 마일의 지역으로 땅은 기름지고, 인구밀도가 높았다. 이 지역은 경기 지역에 속해 있다. 섬의 산들은 숲 이 우거지고 아름다웠다. 마니산 위에는 직경이 45피트인 오래된 제단 이 있는데, 단군을 숭배하는 것으로 전해져 있다. 3) 서울과 송도에서 비슷한 거리의 강화도는 고려와 조선의 왕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도피 했던 피난처였고, 4) 역사자료를 보관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로 황실 도 서관이 위치해 있었다. 황실의 거주지가 강화읍내의 언덕위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곳으로부터 내륙본토와 바다의 모습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몽고가 침공하기 바로 전인 13 세기 중엽에, 왕은 송도에서 이곳으로 피난을 했는데, 몽고인들이 나라를 유린하고 몽고의 관리 하에서 정부 가 세워졌을 때, 왕은 이곳에서 죄수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로 부터 150 년 후, 현재의 조선왕조의 창시자가 왕이 되었을 때, 고려의 마지막 왕은 강화로 유형 보내졌었다. 17세기 전반에 만주족의 청나라가 침공했을 때도5), 황후와 궁녀들은 이 섬으로 피난을 했었다. 왕은 조약을 맺었지만, 만주족 ( 청) 이 국경을 넘자마자 그 조약을 파기했다. 청의 만주족은 더욱 큰 군대로 다시 돌 2) Korean Repository, 1895년 8 월호, pp. 285-6. 3) 마니산의 참성단을 지칭하는 것으로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제단이라 고 전한다. 강화도 마니산 정상에 있다. 참성단의 아래 기단은 둥글고, 제 단은 네모나다. 둥근 단의 직경 4.5피트의 네모난 단은 1.98m의 사각형이 다. 참성단의 조성 연대는 과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4) 강화도는 몽고의 침입이 심하던 고려 왕조 고종 19년인 1232년에 송도에 있던 서울이 옮겨와 39 년 동안이나 고려의 도읍지가 되었던 곳이다. 조선 왕조 때에도 이 섬은 피난처가 되었다. 12대 인조 때에 병자호란을 피해 조정이 강화도로 건너간 적이 있었다. 5) 병자로란으로 조선 인조 14 년(1636) 에 청나라가 침입한 난리. 청나라에서 군신( 君 臣 ) 관계를 요구한 것을 조선이 물리치자 청나라 태종이 20만 대군 을 거느리고 침략하였다. 이에 인조는 삼전도에서 항복하고 청나라에 대하 여 신( 臣 ) 의 예를 행하기로 한 굴욕적인 화약( 和 約 ) 을 맺었다.
아와서, 배와 대포를 가지고 또 다시 강화를 점령했고, 조선의 왕은 결 국 조약에 서명하고 중국의 청 왕조에 충성을 맹세했다. 금세기가 시작되면서 현재의 국왕이 집권할 때까지 가끔 발생했던 기독교에 대한 탄압 기간 동안, 1866 년 프랑스 신부의 살해에 대한 보 복으로 프랑스는 강화도를 유린했다. 6) 이 섬에서 프랑스군은 많은 소 중한 서적과 원본, 그리고 수많은 군 장비들과 함께 막대한 양의 고대 병장비들을 탈취해 갔다. 흥미를 끌 수 있는 장소를 말할 때, 조선왕조 초기의 역사가 보존 되었다고 전해지는 산들에 대한 언급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각각 의 산들은 강화도와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지역에 위치해 있다. 7) 몇 몇 사가( 史 家 ) 들이 조선 왕조 사건들과 이에 대한 왕의 조치에 대한 정 확한 기록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8), 이는 왕조가 사라진 이후에만 통독 6) 병인양요 : 1866 년( 고종 3) 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 탄압에 대항하여 프랑 스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을 말한다. 대원군은 병인년(1866) 정초부터 천주교 금압령( 禁 壓 令 ) 을 내려, 몇 개월 사이에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 을 비롯하여 남종삼( 南 鍾 三 ) 정의배( 丁 義 培 ) 등 한국인 천주교도 8,000여 명을 학살하였다. 7) 조선왕조실록의 보관지를 말하는 것으로, 1606 년 조선왕조는 서울의 春 秋 館 과 太 白 山, 妙 香 山, 摩 尼 山, 五 臺 山 의 5대 사고에 왕조실록을 분산하여 보관했었다. 그러나 그 후 춘추관의 왕조실록은 丙 子 胡 亂 으로 다시 소실되 었다. 조선왕조실록이 후손들에게 전해지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실록의 최대 위기는 임진왜란이었다. 조선은 전기까지 실록을 춘추관 및 충 주, 전주, 성주 등 4곳의 사고에 보관했는데 임진왜란으로 전주 사고를 제 외한 모든 사고가 불에 타 버렸다. 전쟁이 끝나자 선조는 전주사고를 근거 로 태조에서 명종까지 13대에 걸친 실록을 다시 4부씩 인쇄할 것을 명했고 춘추관에 원본을, 묘향산, 태백산, 오대산, 마니산에 등 네 곳에 새로 사고 를 설치해 보관했다. 그러나 실록의 수난은 그치지 않았다. 춘추관본은 이 괄의 난(1624) 때 불에 타 소실되었고 마니산 사고의 실록도 병자호란 때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후 마니산 본은 보수를 거쳐 정족산 사고로 옮겨졌 고 묘향산 본도 전라도의 적상산 사고로 옮겨졌다. 이후 실록은 그런대로 잘 보관되어 왔지만 일제의 침략으로 다시 위기를 맞게 됐다. 일제는 정족 산본과 태백산본을 조선총독부로 이관했다가 경성제국대 ( 현 서울대) 로 옮겼 고 적상산본은 장서각으로, 오대산본은 도쿄제국대학으로 옮겼다. 이 중 도 쿄제국대로 반출된 오대산본은 간토 대지진으로 불타버렸다. 현재 장서각으 로 옮겨졌던 적상산본은 북한에 있고 태백산본은 국가기록원에, 정족산본은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을 위해 개방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믿을 만한 자료 관리자들에 의해 이와 같은 산 정상에 4 개의 사본들이 보존 저장 되어왔다. 이러한 기록들은 자신에 대해 쓰인 내용이 자기의 비위에 맞지 않는 다고 생각한 불안한 왕의 조치로 중단되었다. 그 왕은 역사가를 사형에 처했고, 9) 그 때 이후 상당한 권위가 있는 기관인 실록청을 통하여 여 전히 일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칭찬 일색으로 보인다. 산 정상에 있는 기록 관리자의 주된 임무는 왕조의 멸망을 기다리면서, 가 끔씩 이러한 신비하고 곰팡내 나는 이 책들을 태양 빛에 노출시키는 것이었다. 기포드여사(Mrs. D. L. Gifford) O News Calendar/ 강화10) 2월 20 일 토요일, < 로얄 아시아 협회> 의 한국지사 총회가 서울 연 맹 독서실 (union reading room) 에서 개최되었다. 그 날의 신문에 트로 로프(M. N. Trollope) 목사의 글이 실렸는데, 주제는 강화에 관한 것 8) 조선왕조실록 은 기록문화유산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조 선 태조로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연월일의 순서에 따라 기록한 책으로, 완질의 분량이 1,707권 1,188 책( 약 6.400 만자) 에 이르 는 방대한 기록이면서 조선시대의 정치, 외교, 경제, 군사, 법률, 통신, 종 교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어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 려운 역사기록물이다. 9) 무오사화 : 실록청의 당상이었던 이극돈이 성종실록에 반영할 자료를 검토하 다가 사관 김일손의 사초를 본 것이 사건의 시작이었다. 평소 김일손에 개 인적인 원한이 있었던 이극돈은 김일손의 사초 중에서 세조가 단종을 폐하 고 왕위를 찬탈한 사실을 은근히 비난한 조의제문 을 들어 눈엣가시였 던 김일손과 사림파를 반역죄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결국 사건은 유자광, 이극돈 등이 사초의 내용을 연산군에게 고하면서 역시 사림파를 싫어하던 연산군이 김종직을 부관참시하고 김일손을 능지처참 하는 등 사림파들을 대거 숙청하는 것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연산군도 사초의 원본만은 보지 못 했다. 평소 나는 사초가 제일 무섭다 고 하던 연산군은 결국 사초와 관 련해서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기고 말았다. 10) Korea Review, 1901년 2 월호, p. 76.
이었다. 그는 강화도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그 곳의 지리, 역사, 민속 에 대해 박식했다. 그의 글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강화 섬의 지리와 지 형에 대해 세밀히 설명한 후, 그는 강화에 풍부하게 있는 모든 유적과 역사적 유물에 대해 기술하였고, 마지막에 그 곳 역사의 중요한 사건들 을 생생히 묘사했다. 다뉴브 강가까지의 몽고의 뜻밖의 세력의 확장에 도 불구하고, 몽고는 강화도를 공략하지 못했고, 침략 시도도 하지 않 았다. 한번 이상 몽고의 군대가 맞은편 본토에 진을 친 적이 있었고, 왕이 송도로 돌아갈 것을 강요하는 위협과 약속을 지킬 것을 권유했으 나, 몽고가 바다를 건너 간 적은 없었다. 몽고가 선박과 항해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강화는 그들의 파괴 행위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다. O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지 / 강화11) 기쁘게도 최근에, 우리는 강화에 있는 전등사와 그 근처의 유명한 마니산을 방문하였다. 전등사는 최근의 한국역사에서 현저하게 등장하 는 독특한 곳이고, 이런 이유 때문에, 또는 그 주위환경의 이례적인 아 름다움 때문에 방문할만한 가치가 있는 장소이다. 전등사는 산의 움푹 들어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 패인 곳 한쪽이 무너져 있었다. 이 장소는 강화섬 남쪽 끝 근처였고, 바람과 파도가 적절한 상황에서는 삼판선으로 제물포에서 여기까지 3 시간 걸린다. 조금 서두르면, 전등사 에서 4 시간 정도 머물고, 제물포에서 하루 만에 왕복여행을 할 수 있 다. 이 절은 절이면서 바다에 접한 요새이기 때문에, 바다에서 요새입 구까지 마음 편히 도달 할 수 있는 한 시간 거리이다. 빽빽한 숲으로 우거진 높은 산의 안식처인 전등사는 제물포에서 강화로 올 때 바다에 서 분명히 볼 수 있다. 1871 년 미국인들이 침략했던 작은 요새로부터 약 2마일 밑에 위치한 초지라 불리는 지점에 상륙하면, 낮은 언덕 위에서 서쪽으로 전등사로 난 멋진 길을 볼 수 있다. 이 길은 자전거 타기에 좋은 길은 아니지만, 11) Korea Review, 1904년 6 월호, pp. 255-6.
원한다면 편의를 위해 자전거를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느긋하게 3 마일을 걸으면 요새의 입구로 통하는 가파른 언덕 기슭에 이른다. 평탄 한 나무 없는 언덕에 난 길을 오르고 있으면, 그리 높지 않은 것만 제 외하고는, 서울에서 제물포사이의 말을 타고 달렸던 길을 연상시킨다. 길 양편에 두 개의 가파른 산의 돌출부가 있고, 이를 따라 대문 오 른쪽과 왼쪽에 총안( 銃 眼 ) 이 있는 성벽이 둘러싸고 있는 장소가 있다. 이 지점은, 섭정 대원군의 명령으로 그 해에 9명의 로마 카톨릭 목사가 처형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로즈제독의 지휘하의 원정대가 그 섬을 급 습하였을 때인 1866 년 프랑스인이 불운한 패배를 경험했던 장소이다. 그런 상황에서 프랑스 당국이 원정단을 한국에 보낸 것은 이상한 건 아니지만, 이 문제를 끝내지 못한 것은 불운이다. 왜냐하면 비공개된 사건으로 한국정부가 모든 외국강국에 도전할 능력이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5년 후 미국이 그 동일한 곳 근처의 작은 요새를 점 령했지만 한국 정부를 항복시키지 못하고 물러났던 동일한 사건 역시 이와 같았다. 1866 년 프랑스가 이 섬의 북부에 상륙했고, 강화도의 마을을 점령했 다. 12 마일 떨어진 사찰에 한국군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160명의 군대 가 더운 10 월에 그쪽으로 행군해 갔다. 그들은 그들이 만나게 될 군대 의 수와 질과,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주의하지 않았다. 사실, 북쪽지역에 용감한 국경지방주민으로 구성된 5 천의 한국군인이 있었고, 훈련과 시설이 부족했지만, 동일한 외국군대의 수에 대항해 지킬 수 있 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프랑스 군인이 성문을 향해 가파른 언덕위로 행군해 갔지만, 성문에 도착하기도 전에, 양쪽 편 언덕위에서부터 그들은 소총과 대포세례를 받았고, 5분도 안 되어 그들은 어찌할 수없이 걸을 수도 없게 부상을 당했다. 이때 주변에 흩어져 있는 나무 몇 그루 있었고, 성문 밑으로 몸을 숨길만한 곳이 있었다. 승산이 없기는 했지만 전투를 금방 포기하 지 않으려했던 용감한 프랑스 군인들은 이 자연적인 방어물 뒤로 피신 하려고 했다. 그러나 원정의 목적은 분명 성취되지 못했다. 그래서 후
퇴명령이 났다. 사망자와 부상자가 한국군의 사격을 맹렬히 받으며 언 덕 아래로 이송되었고, 주둔군이 있는 곳을 향한 절망적인 후퇴의 행군 이 시작되었다. 한국 측이 이들을 쫓아 요새 밖으로 떼 지어 나왔고, 그들과 맞서기위해 나온 강력한 프랑스군이 없었다면, 아마도 전체 160 명의 군사들 모두가 희생되었을 것이다. 한국인들은 강철포탄을 다 쓴 경우를 대비하여, 돌로 된 상당히 많 은 대포포탄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우리는 이 절에서 두 개의 특별한 포탄을 확보하였다. 공 모양으로 깎여진 이 포탄은 지름이 약 4인치이 고,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골짜기를 가로질러 수도원 뒷면에는 가까이하기 어려운 화강암 바위 산인 마니산이 있었다. 마니( 魔 尼 ) 산 이름의 한자는 이 산의 고대 한국 말 이름을 그대로 한문으로 옮겨 적은 것이 분명하다. 이 산은 이 섬에 서 제일 높은 봉우리이며, 그 꼭대기에는 수 세기 동안 단군단 또는 참성단 이라고 알려진 거친 자연석을 쌓아놓은 곳이 있다. 가파른 언덕을 1 시간 오르면 가장 오래된 이 유적인 참성단을 만나게 된다. 성 벽 안쪽에 일종의 광장이 있고, 이곳은 20피트 크기의 정사각형모양의 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곳의 서쪽 편의 성벽을 형성하고 있는 쪽에 아무런 접착물도 사용하지 않고 돌로 만 쌓여진 8피트 정도 높이의 자 연석판으로 된 돌계단의 넓은 단열이 있다. 이 돌계단을 오르면 제단의 상단이 보이고, 이는 담 바닥으로부터는 8 피트 높이이고, 다른 3면은 바닥으로부터 약 12 피트 높이다. 그 상단은 정확히 20피트의 정사각형 이다. 상단부의 겉 표면은 거칠거칠한데, 이는 반달리즘 ( 유물파괴 ) 을 겪었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들이 돌을 많이 던져서, 그 제단은 예전처 럼 그렇게 높지 못하다고 알려졌다. 정부가 이를 보수하기 위해 돈을 쓴다는 것이 역사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면, 지금의 구조물은 1 세기전의 모습이 전혀 아닐 것이다. 이 제단의 어떤 부분은, 특히 보다 견고한 토대의 경우에는, 매우 오래되어, 산 자체만큼 오래 그곳에 있 었던 듯 보인다. 단군은 기원전. 2300 년부터 기자시대인 기원전 1122 까지 한국을 통치했다고 믿어진다. 그러나 사적을 고찰해보면 그는 기
원전 1193년에서 기원전 1122 까지 군림했다고 추측되기도 한다. 단군 에 관한 것이 사실이라면, 기자시대 이전의 원주민 지배자의 왕조를 언급하는 것일 것이다. 단군의 무덤은 평양의 동쪽인 강동지역에 아 직도 있으며, 그 주변은 410 피트이다. 전설에 의하면, 기원전 2265 년에, 처음으로 강화에서 제사를 지냈다. 전등사가 위치한 요새는 삼 랑( 三 郎 ) 즉 세 아들 이라 불리며, 전설에 의하면 단군의 3아들이 세웠다고 한다. 이 제단에 어떤 비문도 새겨져 있지 않다는 것은 이것이 아주 오래 되었다는 부분적인 증거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기자시대 이후에 만들어 졌다면, 그 원형에서든 복구된 것이든 분명 비문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 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특히 이 구조물의 어떤 부분이, 아주 오래되었다는 것에 감명을 받을 것이다. O 제물포 12) 1883 년 6월 16일 제물포 항은 외국인들의 무역과 거주를 위해 개방 하게 되었고, 11월 3 일에는 세관이 업무를 개시하게 되었다. 이것은 일 본과의 조약 협의문에 부합하는 것으로 일본정부는 강화도 조약(1876 년 2월 26 일) 의 4관과 5관 조항에서 일본 상인을 위한 한국에 합법적 인 화물 수송지로 부산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나머지 거명되지 않은 두 개의 항구를 한국의 동해안과 서해안에 설정하는 예비조항을 정한 바 있었다. 13) 1876 년 8월 24일 추가조항에서 부산이외의 두 개의 항구 12) Korean Repository, 1897년 10 월호, pp. 374-84. 13) 모두 12개조의 내용으로 된 강화도 조약의 4, 5 관 조항은 다음과 같다. < 제4 관> 조선국 부산 초량진에는 일본 공관이 있어 오랫동안 양국 인민의 통상 구역이 되어 있다. 이제 마땅히 종전의 관레와 세견선 등의 일을 혁파 하고 새로 만든 조약에 의거하여 무역 사무를 처리하도록 한다. 또한, 조선 국 정부는 따라 제5관에 기재된 2개 항구를 열어 일본국 인민의 왕래 통상 함을 들어주어야 한다. 이곳에 대지를 임차하고 가옥을 지으며, 혹 이곳에 거주하는 조선 인민의 가옥을 임차함에 있어서도 각기 그 편의에 맡긴다. < 제5 관>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의 연해 중 통상에 편리한 항구 2 개처를 택하여 20 개월 이내에 개항한다.
에 대한 유일한 언급은 6관 조항에 나타난 묘지와 관련된 것이었고 여 전히 항구가 구체적으로 거명되지는 않았지만, 한동안 일본은 부산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1882 년 제물포는 서해안의 개항장으로 명백하게 명시되어 있 고, 아직 제물포 개항에 대한 공식적인 합의문이 없었지만 미국과의 통 상조약을 협의한 슈펠트 제독(Admiral Shufeldt) 이 위협적인 기근이 발생할 경우, 곡물 수출을 금지하는 권리를 한국정부에 이행하는 조항 에서 이미 제물포항의 개항에 대해 언급한바 있다고 전해진다. 조약문 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쌀이나 빵의 재료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은 인천(Jinchuon) 의 개항장으로부터 수출이 금지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14) 1882년 5월 22 일에 조약 협상이 이루어졌지만, 서울에서 1883년 5 월 19 일에 이르기까지 조약이 법적으로 비준되지는 않았다. 1882 년 6 월 6 일에 영국을 대표한 윌레스 (Geo Osmanney Willes) 부제독이 한국 과의 인천조약을 체결했는데 15), 그것은 정확히 미국과의 조약내용을 베껴 쓴 것으로 인천의 개항장에 대한 내용을 축어적으로 담고 있다. 이 조약은 영국정부에 만족스럽지 못한 것으로 법적으로 비준되지는 않았지만, 1883 년 11월 26일 서명된 서울 조약에 이르게 했고 1884 년 4월 28 일 서울에서 비준서를 교환하게 되었다. 이 조약의 4번 조항의 첫 번째 내용은 제물포라는 이름이 명시되었는데, 이로써 외국과의 조 약에서 제물포 항구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미국이 조약을 비준할 시간을 갖고, 영국이 명백한 사항에 대해 구 체적인 조약사항으로 진척시키고 있는 동안, 일본은 제물포 서해안의 14) 조미수호통상조약 :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면 서 미국은 종래의 무력 시위를 통한 방식 대신에 일본의 우호적 알선에 의한 평화적인 방법으로 그 방향을 전환하여, 제너럴 셔먼호의 행방을 찾기 위해 조선에 온 적이 있는 슈펠트 제독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 15)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있자 당시 천진에 있던 영국공사 웨이드(Thomas Wade) 는 영국 정부와 이미 협의해 두었기 때문 에 한국과의 조약 교섭 알선을 이홍장에게 요청한다. 이홍장은 조영간에 체결될 조약은 기본적으로 조미조약과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에 불과했다.
개항장의 위치를 확실히 해 두는 필요한 법적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 었다. 일본을 대표한 서울의 일본인 공사관인 하나부사와 한국정부를 대표한 이유원과 김홍집이 제물포에서 만나서, 제물포의 개항을 위한 비준안을 마련했고, 1882 년 8월 30일 당시 서명을 하게 된 제물포조약 조항을 협상했고, 그 비준안의 교환이 10월 31일 동경에서 행해지게 되 었다. 16) 이 조약은 2년 동안 개항장 조약을 한국의 50리에 제한을 둔다는 것 으로 확정을 했고, 그 이후 그 한계를 100리까지 확장을 한다는 것이 다. 이와 같이 수도 서울이 다른 조항에 의해서도 개방은 되지 않았지 만, 서울이 제물포에서 100 리 이내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이 조항으 로 수도를 개방하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50리 제한은 일본 대신 다 케조에 (Takazoye) 와 한국 외무국의의 국장인 민영목 사이에 1883 년 7 월(25 일) 에 논의가 되어 동의서에 의해 공식적으로 명문화 되었다. 제 물포 항구는 동으로 안산, 시흥 과천의 지역, 북서쪽에 양천과 김포지 역, 북쪽으로 강화지역을 포함하게 되었다. 이 협약은 제물포에 일본의 16) 1882 년( 고종 19) 임오군란 ( 壬 午 軍 亂 ) 으로 발생한 일본측의 피해보상문제 등 을 다룬 조선과 일본 사이의 조약으로 본조약 6 개조와 수호조규속약 ( 修 好 條 規 續 約 ) 2 개조로 이루어져 있다. 임오군란으로 공사관이 불타고 1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일본측은 하나부사 요시모토 [ 花 房 義 質 ] 공사편에 군함 4 척, 수 송선 3척에 1개 대대의 병력을 보내어 8월 12일 제물포에 상륙하여 조선에 대하여 임오군란의 책임을 묻고 사후처리의 협상을 요구하였다. 일본정부는 당초 하나부사 공사에게 1 조선정부의 공식사과, 2 피해자가 족에 대한 부조금 지급, 3 범인 및 그 배후자의 처벌, 4 손해배상, 5 경 우에 따라 거제도나 울릉도를 할양받을 것, 6 조선측이 무성의하면 무력으 로 인천을 점령할 것 등의 훈령을 내리는 등 강경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때 마침 임오군란을 수습한다고 조선에 와 있던 청나라의 관료 마건충( 馬 建 忠 ) 의 중재로 조선측의 전권대신 이유원 ( 李 裕 元 ), 부관 김홍집 ( 金 弘 集 ) 과 일본 측의 하나부사 공사 사이에 협상이 성립되어, 1882년 7월 17 일( 양력 8월 30 일) 본조약 6 개조와 수호조규속약 ( 修 好 條 規 續 約 ) 2 개조를 조인하였다. 즉, 조선정부는 8월 27 일 봉조하 ( 奉 朝 賀 ) 이유원 ( 李 裕 元 ) 을 전권대신으로, 공조참판 김홍집 ( 金 弘 集 ) 을 부관으로 임명하여 제물포에서 일본과 회담하도 록 했다. 회담은 8월 28일 오후부터 인천 앞바다에 정박중인 일본군함 히 에이[ 比 叡 ] 함상에서 진행되었다. 8월 30일 일부만이 수정된 채로 일본측 요구안이 타결되었고, 본조약과 수호조규속약을 조인했다.
현재의 토지사용권을 허가해 주는 1883 년 9월 30일의 협약으로 잇달아 이어졌다. 이처럼 제물포 개항을 이끈 협상은 약 7년의 기간에 걸쳐서 행해졌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기 계약에서 이 항구로 알려져 있는 인천읍내 의 Jinchuen( 진추엔 ) 과 Jenchuen( 젠추엔 ) 이란 말은 제물포를 지칭하 지만 이곳은 가장 가까운 항구시설로부터 4마일 떨어져 있기 때문에 통행이 용이하지 않았다. 처음에 바다를 마주하면서 위치한 현재의 시 ( 市 ) 지점이 있기 전, 일본의 무역상들은 자신들의 무역을 위해, 이 구 역에 오기는 했어도 자주 방문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현재 외국인 공 동묘지 근처인 만석동에 그들의 본부를 두었다. 한 동안 일본 상인들은 사금을 채취할 목적으로 주로 정크선을 타고 입국을 했다고 전해진다. 슈펠트 (Shufeldt) 제독이 조약을 체결할 당시에, 현재의 제물포의 대 도시 지역에는 단지 몇 채의 초라한 어촌이 있었다. 미국의 조약 협상 이 이루어진 장소는 현재 해관의 세무사의 주택 주변의 언덕 면 이었 다고 전해진다. 17) 장소의 위치가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로 즈섬( 월미도 ) 에 외국의 자치구를 정하려는 것이 제독의 구상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계획은 결코 실현될 수 없었던 제독에 대한 풍문 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처럼 개방을 한 제물포항은 강화만(Gulf Imperatrice) 18) 어구와 한 강 입구사이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곳은 국가의 수도에 가장 가까운 항 구라는 사실 때문에 그 중요성을 가늠할 수 있다. 사실 나중에 살펴보 겠지만, 조약 조항으로 외국인 거주지로 공식적으로 개방되기 전 수세 기 동안 제물포는 서울과 관련성을 지녀왔다. 서울에 갈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아름다운 시골을 가 로지르는 26 마일의 육로로 가는 것과 조랑말, 달구지, 자전거, 인력거 나 가마로 이동 가능한 도로를 통해서 가는 것이지만, 우기( 雨 期 ) 때는 사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한강이 범람해서 서울 근처의 일부도로가 수 17) 현재의 파라다이스 호텔 주변을 지칭한다. 18) 강화도와 본토 사이에 위치한 만( 灣 )
면아래에 잠겨서 주변의 전 지역이 통과할 수 없을 만큼 질척거리기 때문이다. 이 도로는 우기에 폭우로 강물이 불어 급류를 건너야 하고 통행이 불가능 하지만, 몇몇 한국인들은 이러한 급류를 건너려다 생명 을 잃기도 했다. 상품들은 이 길을 통해서 거래가 되는데, 조랑말로 이 길을 통과하 는 데는 10 시간이 걸리고, 달구지로 소모되는 시간은 훨씬 늘어나서 2 일, 심지어는 3 일까지 걸린다. 중국인들은 중국에서 많이 사용되는 북 경수레 (Peking carts) 를 수입해 왔다. 일반적으로 이곳을 지나는 통행 자들은 네 명이나 여덟 명이 운반하는 가마로 4달러에서 16달러의 비 용을 지불하는데 이것은 시기나 노역자의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조랑 말은 한국인들 소유지만 말안장은 없다. 일본인들이나 중국인들은 자신 의 상품이나 짐가방을 꾸러미 형태로 싣고 그 짐 위에 타는 것을 좋아 한다. 이러한 비용은 1달러에서 3 달러이다. 서울까지의 인력거 비용은 약 5 달러이다. 자전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이 길을 이용할 수 있는 데, 해군장교들에 의해 1시간 55 분의 기록이 세워졌고, 다음으로 좋은 기록은 2시간 15 분이다. 서울로 가는 또 다른 방법은 한강을 이용하는 것이다. 한강은 한국 의 강들 중에서 가장 크고 가장 역사적인 강들 중의 하나이다. 한반도 의 동해안을 따라서 거대한 석조물처럼 솟아 있는 웅대한 산맥의 동쪽 경사면에서 시작해서, 한반도의 거의 전 영역을 따라 흐르는데, 강원도 와 경기도와 충청도 일부지역에 그 지류를 형성하고 마침내 황해에 그 진흙의 강물을 쏟아낸다. 수도 서울은 실질적으로 그 강둑에 자리 잡고 있고, 그 계곡 유역에는 가장 비옥한 지역이 놓여 있다. 제물포에 만조 가 되었을 때, 바닷물이 상승해서 작은 정크선이나 4에서 6피트의 가 벼운 뗏목 형태의 증기선을 통해서 서울로 들어올 수 있다. 서울을 지나서 작은 토착민 뗏목으로 135마일까지 항해할 수가 있는 데, 항해의 최고점은 해수면에서 780 피트에 이른다. 서울을 지나쳐서 강 유역에는 176 개나 되는 마을이 자리를 잡고 있다. 강의 어구는 삼각 주를 형성하고 있다. 제물포에서 약 25마일 지점의 강화도의 끝 부분
에서 강은 둘로 갈라지는데, 하나는 섬의 서쪽면을 굽이쳐 황해로 흐르 고, 다른 하나는 제물포의 강화만의 남쪽으로 흐른다. 1500 년 전, 이 강은 남쪽으로는 백제와 신라의 경계선의 일부를 형성하였고, 북쪽으로 는 고구려와 경계하였다. 성곽들이 한강유역에 형성이 되어, 서울 근교 의 남한산성과 북한산성, 그리고 제물포의 문학산성과 같은 산의 후미 진 곳에는 그 유적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 한강의 여울에서는 맹렬한 혈투가 벌어졌었다. 제물포와 서울 사이의 강 교역의 종점은 제물포에서 있고 서울에서 53마일 떨어져 4 마일 떨어져 있는 용산에 있었다. 수로로 이용할 경우, 제물포에서 서울까지 전체의 거리는 57 마일인데, 이것은 수로와 육로 (26 마일) 사이에 커다란 차이를 드러낸다. 이와 같은 육상으로 가는 것 과 강으로 가는 거리의 차이는 육로와 수로가 3각형을 이루는 사실에 기인한다. 즉, 육로는 직선거리의 산기슭을 따라 있지만 수로는 3각형 의 한쪽 꼭지점을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도처에 있는 커다한 여울과 사구( 砂 丘 ) 에도 불구하고 바다로부터 흘 러들어오는 거대한 조류는 바람이나 날씨에 상관없이 제물포에 기반을 둔 많은 수의 짐배들이 막대한 양의 상품을 서울에 전달가능하게 해 주고, 일본과 중국이나 한국의 정크선이나 삼판선 (sampan) 19) 이 강을 따라 서울까지 거슬러 오를 수 있게 해준다. 한강에서의 첫 정규증기선 운행은 1888 년에 시작되었다. 그 해 6월에 제물포의 어떤 기업인이 회 사를 차렸고, 오사카에서 두 척의 목선을 구입했는데, 각각의 배들은 용산 와 삼호 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20) 회사의 명칭은 삼호 19) 삼판선: 바닥이 평평한 배. 20) 소형 증기선인 삼호호( 三 湖 號 ) 와 용산호( 龍 山 號 ) 가 처음 한강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용산호는 18 톤, 조금 작은 삼호호는 13 톤 급이었다. 삼호호 는 한강에 취항한 지 3개월도 못되어 물살이 세고 간만의 차가 심한데다 가 지형이 복잡한 강화도 물목에서 운전 미숙으로 난파되고 말았다. 초 창기부터 막대한 손실을 입은 회사는 독일의 세창양행에서 차관을 얻어 독일 함부르크에서 건조한 35톤짜리 증기선 제강호 1척을 도입해 다시 투입했다. 그러나 제강호 역시 취항한 지 3개월도 못되어 역시 운전 미 숙으로 강화도 영강포에서 바위를 들이받고 크게 부서져 삼선회사는 문
호이사 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이것은 서울 종점의 토착어로 삼호, 삼가이, 삼강, 마포 등으로도 다양하게 불리어 졌다. 이듬해 에는 착강 이라는 이름이 한강 정기선의 이름으로 불리어졌고, 1888 년 9월 30일 야간에 서울에서 30마일 지점의 암초에 부딪혀서 배 가 완전히 파손되어 모든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던 시기까지 운행되었 다. 당시의 정기선 운행은 서울에서 제물포까지,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 도 마찬가지로 8시간에서 30시간이 될 것이라는 점에 비추어 다소 운 에 맡겨야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교통수단은 현재 제물포에 소재한 일 본인 회사로 넘겨졌는데 21), 매일 한 대의 증기선이 5시간 반이나 6시 간 걸리는 거리를 운행한다. 조류 시간대에 따라서 출발시간은 종종 자 정시간대에 행해지는데, 이 때문에 통행인들이 가장 불편을 겪었다. 오 하이오와 미시시피 강에서 볼 수 있는 흘수( 吃 水 ) 22)가 만이 이와 같은 운행의 해결책일 것이다. 23) 2피트인 증기선 제물포항은 성공적인 항구는 못된다. 이 항구는 내항과 외항 두 구 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월미도가 이 둘의 구분선이다. 24) 외항은 큰 을 닫고 말았다. 21) 일본우선주식회사를 지칭한다. 22) 흘수: 수면에서 바닥까지의 거리 23) 만조시에만 운행 가능하기 때문에 24) 개항당시 (1883 년) 제물포 항은 이미 개항된 부산이나 원산보다 항구로서 의 입지 여건이 매우 좋지 못했다. 서해안은 원래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대다 특히 인천은 그 차이가 10여m나 되고 더구나 해안은 모두 완만한 갯벌이 펼쳐져 있어서 간조때가 되면 갯벌이 길 게 드러나 배가 해안 가 까이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배들이 접안하자면 만조시간이 되기까지 오 랜 시간을 기다려야만 하는 등 불편이 많았다. 인천항은 크게 외항과 내 항으로 구분된다. 외항은 주로 월미도 밖의 영종도 사이에 있는 작약도와 율도에 이르는 해상으로 수심이 깊어 간만의 차와 관계없이 언제나 대형 선박이 정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외항에서 내항으로 승객이나 화물을 운 반하자면 작은 배에 다시 옮겨져서 들어와야 하기 때문에 시간과 경비가 많이 들어 매우 불편하였다고 한다. 내항은 월미도와 사도 안쪽에서 해안 에 이르는 지역으로 비교적 작은 배들이 들어와 정박했다. 개항초에는 짐 을 실은 범선들이 만조시에 내항 해안까지 들어와 짐을 풀거나 싣기도 하
배들을 위한 훌륭한 정박시설과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어서 크고 편리 하다. 그러나 착륙장까지 1 마일 거리상에 놓여 있고, 착륙장은 만조일 때만 보통 이용이 가능하다. 전함과 매우 무거운 증기선들은 여기에서 정박이 불가능하다. 부식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국토를 흐르는 한강은 수세기 동안 막대한 양의 미사( 微 砂 ) 를 흘려보내고, 이러한 미사는 항 구주변에 드넓은 퇴적층을 만들어 간조( 干 潮 ) 시에 보는 사람으로 하여 금 경탄과 넌더리를 일으키게 만든다. 내항은 강의 해협에 위치해 있고, 단지 제한된 수용시설을 갖추고 있어서 해안선의 5 척 이상이 정박할 수 없다. 때때로 이미 항구가 채워 져서 닫혔는지 하는 우려가 가끔씩 표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해관의 세 무사로 일하는 쉐니케 (J. F Schoenicke) 경( 卿 ) 은 이 지점에 대한 1886 년 연례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내항의 수로는 우리가 단지 제한적으로 이용 가능하지만, 3톤에서 820톤에 해당하는 5 척의 증기선을 한 번에 하역시킬 수 있고, 전체 2,000 톤까지 수용 가능하다. 내가 가진 걱정은 항구가 거의 쓸모없 을 정도로 미사가 쌓일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이 내가 우려하는 것 이다. 30피트 이상의 만조와 간조의 차이를 가지고 있는 조류의 물 살은 내 생각에는 그 조류의 힘으로 수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어떤 사구( 砂 丘 ) 를 이동시켜 다른 곳에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그 당시 내항의 수용력은 충분한 것이었지만, 쉐니케는 조류와 물살 로 생겨날 수 있는 가능한 영향력에 대한 적절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1888년에 배가 항구의 접근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세 개의 표지석이 설치되었다. 내항 입구 바로 월미도의 아래지점에 막대기로 물의 깊이 를 알려주는 돌로 만들어진 조류표지석이 있었다. 북쪽 전망석 (North 였으나 물 때를 잘 못 지키면 꼼짝 못하고 갯벌바닥에 얹혀있다가 다음 만조때까지 기다려 물이 들어와야 배가 뜰 수 있어서 출항에 불편함이 또 한 컸던 것 같다
Watcher Rock) 에서 9 마일 떨어진 곳에 돌 표지석이 있었고, 외항으로 부터 15 마일 떨어진 백암(White Rock) 위에 둥근 원통형으로 솟아오른 쇠로된 삼각대를 설치했다. 이러한 표지석들은 항구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제물포는 전신과 증기선으로 전 세계와의 교역이 가능하다. 한국과 일본의 전신은 부산으로 통하고 여기서 나가사키 (Nagasaki) 까지 케이 블 통신이 연결되어 있다. 또한 평양과 의주를 거쳐 북경까지 전신이 연결되어 있고, 그리고 여기서 상하이까지 케이블이 연결되어 있다. < 일본 우선회사 (Nippon Yusen Kaisha)> 와 < 오사카 상선회사 (Osaka Shosen Kaisha)> 와 < 러시아의 동양 증기선 해운 회사(Russian Steam Navigation Company in the East)> 등이 청일전쟁 이전 < 중국 상인 증기선 항해 회사(China Merchant's Steam Navigation Co.)> 가 했던 것처럼, 모두 제물포에서 증기선을 운행한다. 그리고 증기선 해로는 다 시 블라디보스톡, 고베, 상하이, 천진(Tientsin) 과 뉴츠완트 (Newchwant) 등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새 항구가 개통되었을 때, < 오사카 회사(Osaka company)> 가 여기에서 북쪽의 제물포까지 그들의 증기선을 운행할 것이라는 보도도 있었다. 해로로 제물포에서 다양한 지점에 이르는 거리는 다음과 같다. 부산까지 400 마일, 원산까지 704 마일, 블라디보스톡까지 ( 부산을 경 유해서 ) 1084 마일, 나가사키까지 직통으로 446 마일( 부산을 경유해서는 605 마일), 제푸( 芝 罘, Chefoo) 까지 290 마일, 천진까지 535 마일, 뉴츠 완트까지 535 마일, 제푸를 경유해서 상하이까지 660 마일( 직통은 약 300 마일), 나가사키와 시모노세키는 제물포에서 직통으로 48시간이 걸 리고 상하이 까지는 30 시간이 약간 넘게 걸린다. 제물포라는 이름은 한국과 관련해서 상업분배를 위한 항구 를 의 미한다. 북쪽의 평양과 남쪽의 군산은 증기선으로 24 시간 걸린다. 여기 에서 송도까지의 이동은 삼판선 ( 船 ) 으로 7 시간이 걸리고, 황해도 평산, 연안, 백천과 해주는 기상조건이 좋다면 똑같은 삼판선으로 24시간에 서 30 시간 걸린다. 수도 서울과 인접한 이와 같은 주요한 위치는 항상
이 항구를 중요한 무역 분배의 중심지가 되게 한다. 1884 년 정치적인 소용돌이와 1885 년 기근과 1886 년 콜레라는 진보의 속도를 지체하도록 만들었고, 초기에는 기업들을 마비시켰지만, 그때 이후 여기서는 꾸준 한 성장이 지속되었다. 수입품은 주로 면직물로, 회색 셔츠안감, 한랭사, 모슬린, 리노, 중 국의 남경천과 일본의 피륙제품들이었다. 비단옷감의 피륙제품이나 등 유와 성냥이 대량으로 수입되었고, 정부 전환국 ( 典 圜 局 ) 이 항구에 들어 서면서, 구리와 납과 아연이 또한 수입되었다. 쌀과 콩, 소가죽이 주요 한 수출품들이었다. 25) 1885 년 전체 무역양은 1,042,662 달러였고, 1895 년에는 6,325,724 달러로 증가했다. 세수( 稅 收 ) 는 1885 년에 79,205 달러에서 1895년에 435,509 로 증가했다. 현재 쌀은 가장 중요 한 수출품 중의 하나이고 제물포에 있는 다양한 무역회사가 대량으로 쌀을 구입해서 일본으로 보낸다. 제물포에는 커다란 두 개의 정미소가 운영되는데, 하나는 증기력으 로 작동하는 정미기계를 이용해서 운영되는 일본후원의 회사이고, 다 른 하나는 가장 진보된 기계가 장치되어 있는 < 타운센드양행 (Townsend and Co.,)> 이 운영하고 있다26). 한국과 서양 사이의 일 처리 수준의 차이는 인간의 근력에 의해서 운영되는 절구와 타작과 도리깨질에 의한 전통적인 한국의 정미 방법과 서양 정미소의 거의 완벽한 기계의 차이로 그 수확량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대부분의 이와 같은 쌀은 서부해안 지역의 경기도, 황해도, 충정도, 전라도의 네 지역에서 징수되어, 한국인 토착민의 정크선으로 운반된다. 이러 한 정크선의 약 250척이 매달 항구에 들어오고 한국인 관리의 직접적 인 감독을 받게 된다. 이러한 정크선들은 쌀을 운반하기도 하고 총체 25) 1890년 경부터 일본인들의 끈질긴 압력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하게 되면서 1897 년에 이르러 제물포항은 쌀 수출항이 되기도 했다. 쌀이 부족했던 일 본이 우리나라의 쌀을 수입하기 위한 방법으로 1896 년 인천에 ' 주식회사 인천미두취인소 ' 를 만들어 이제까지 객주를 통해 쌀을 거래하던 방식을 버 리고 일본인들이 직접 쌀을 거래 하였다. 26) 타운센드 정미소는 스팀식 정미소로서 국내 최초의 선진기계식이었다.
적인 거래 협상을 하기도 한다. 제물포에는 네 개의 조계( 租 界 ) 가 있다. 27) (a) 각국조계는 한국인 무 역 감독관과 세 명의 지주들의 집정관으로 구성된 시의회의 통제를 받 는다. (b와 c) 일본 조계와 중국 조계는 각자의 영사의 감독을 받고, 이외에 (d) 한국인 부락이 있다. 1885 년 외국 조계는 146 채의 주택이 있었지만 한국부락은 단지 120 채의 주택과 700명의 인구가 고작이었 다. 1897 년에 이곳은 외국인 ( 일본인, 중국인, 만국인 포함) 의 인구는 4374 명으로 증가한 반면에 한국의 인구는 1만에서 1만5 천명으로 증가 했다. 1888년에 토지는 100 평방미터당 60 달러에 매매가 되었는데, 이 가격은 1884년의 10 배에 해당하는 가격이다. 1893년경에는 원래 가격 에서 40에서 50 배까지 가격이 형성되었다. 제물포는 큰 도시로, 예전에 수개월 동안 인천 도호부가 있는 행정 관의 도시였다. 사실 이 항구는 제물포라는 고유명칭 보다는 인천이라 는 이름으로 해외에서는 아마 더 잘 알려졌을 것이다. 仁 川 이라는 한문자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인천 이라고 읽히고 일본사람들에게는 진센 이라고 발음되는데, 이러한 진센 이라는 이름으로 제물포항 의 증기선 일정표에 등록되어 있다. 이 仁 川 이라는 한문자는 중국 인들은 젠추안 으로 발음하고, 이 항구는 조약이나 세관의 발행물에 서 이러한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인천읍내는 항구에서 동쪽으로 약 4 마일 거리에 있고 작고 볼품없는 장소이다. 그러나 이 장소에서의 거주 는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기원전 18 세기경, 고구려 왕조를 세웠던 영웅 주몽의 두 젊은 아들 27) 제물포 조계 지역은 현 중구청의 중심지인 중앙동, 송학동, 송월동, 북성 동 등 개항장을 중심으로 약 15만 여평에 이르는 지역에 자리 잡게 되었 으며, 그 후 조계 지역을 중심으로 외국인들의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고 여러 가지 관련 사업이 확장되었다. 또한 이곳에는 전국 각지에서 새로운 생업을 개척하고자 하는 내국인들이 많이 모이자 자연스럽게 답동, 화개 동, 인현동, 내동, 용동, 율목동, 화평동, 화수동, 만석동 지역에 한인 부 락을 형성하였다. 이로써 인천은 근대화의 새로운 도시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인천의 조계는 일본과 청국의 전관 조계와 서 구인들의 공동 조계가 있었다. 이 조계는 개항과 더불어 1883년부터 1914 년까지 30 여 년간 번창하였으나 한일 합방 후 모두 폐지되었다.
이 북쪽에 있는 그의 고국을 떠나서, 그들의 아버지가 나라를 세운 것 처럼, 자신들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남하하게 되었다. 직산(Chiksan) 에 정착한 동생 온조는 십제(Sipje) 왕국을 창설했다. 그러나 형 비류 는 한강어구에 자리를 잡고, 현재의 인천도호부 정면에 위치한 남쪽의 산 정상에 성과 도읍을 세웠다. 이곳을 그는 미추홀 이라 이름을 붙 였고, 그의 왕국을 미추국 이라 명했다. 성벽의 유적들이 여전히 화 관처럼 문학산의 산등성이 주변에 흩어져 있고, 그 모습은 항구나 몇 마일 떨어진 주변에서도 명백히 볼 수 있다. 오래된 성문의 덮개가 여 전히 서있고, 장관을 이루는 내부의 높은 지점에 한국인들은 봉수대를 새웠다. 비류가 죽은 후, 그의 많은 후손들은 남하해서, 직산의 온조와 합쳤 고, 이를 계기로 왕조의 이름을 십제에서 백제로 개명하게 되었고 이 백제라는 이름으로 한국역사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인천의 지명은 매소홀 로 변경되어 고려왕조시대까지 아마 유지된 것처럼 보이고, 당시에 다시 소성현 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고려의 16대 왕 인 예종(A.D. 1106-1123) 이 인천이씨의 왕비를 맞아들이게 되었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송도지역에서 강력한 관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28) 왕 비 이씨는 다음 왕인 인조의 어머니였고, 이러한 사실을 기념해서 어머 니의 출생지에 인 자를 하사해서 한강어구의 지역은 인주라 불리게 되었다. 현 조선왕조의 초기에 이 지역을 재배정하면서 인천이라는 이 름이 주어졌고, 도호부의 지역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영종지역은 현재는 사라진 관찰사직이 있었던 지역으로 40개의 지역 구를 가지고 있고 10 개의 병영지역으로 구분된다. 이 지역은 약 250 평방마일의 영역을 포함한다. 본래 남양, 안산 그리고 수원의 일부가 28) 이자겸을 지칭하는 것으로, 인천 이씨 가문에서 배출한 문신 중에서 최고 의 위치에 오른 인물이다. 둘째 딸이 예종의 비가 되자 ' 소성군 개국백' 에 봉해졌다. 예종이 죽자 왕군을 탐내던 왕제들을 물리치고 어린 인종을 왕 위에 올리며 권력을 잡았다. 금과 친교를 주장하여 전쟁을 막기도 하였고, 국사를 한 손에 쥐고 세도를 부리다가 다른 귀족들의 반발이 커지자 ' 이자 겸의 난' 을 일으켰다. 난은 실패로 돌아가고 영광에 유배되어 죽었습니다.
그 영역으로부터 줄어들지 않았다면 그 지역은 훨씬 더 넓은 것이었 다. 29) 이 지역을 가장 확장시켜 보면 남동쪽에 위치해 있는 섬인 이포 면까지 포함하는데, 이 섬은 인천읍내에서 33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이 지역도 한국의 일반적인 특징인 산이 많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제물포 주변의 경치는 아름답고, 바다와 산의 경관이 어우러지고 여기에 찬란한 일몰이 보태져서, 모든 방문객들은 그 아름다움에 경탄 을 금할 수 없다. 12마일 떨어져 있는 강화에 있는 마니산이 단지 한 발짝 떨어져 있는 것처럼 불쑥 솟아있고, 그 사이에서 서울을 감싸고 있는 관악산과 북한산은 제물포항 주변의 어떤 언덕에서도 관찰할 수 가 있다. 영종의 정상은 해발 약 450 피트이다. 아주 많은 섬들이 또한 관할권 내에 포함되어있다. 이 지역의 주생산품은 곡물과, 소금과 생선이다. 황실의 수라간 ( 水 刺 間 ) 이 이 지역에서 닭고기와 조개와 얼음을 징수했 다. 제물포 근해의 바다에 12 개의 큰 어장이 있었고, 염전산업이 꽤 성 행했다는 것은 인천지역에 허가를 받은 염전이 144개나 되었다는 사실 로부터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지역은 농사짓기에 적절하 고, 사람들은 항상 조용하고 소박하고 솔직해서 다스리기 쉽고, 반란에 대해서는 둔감하다. 물론 이러한 설명이 다른 지역으로부터 온 사람들 에게까지도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 인구조사의 날짜는 알 수 없지만 전쟁전 (ante-bellum) 으로 추측하고 있는데, 인구는 남성이 4,699 명이고 여성이 4,434 명으로 5,414 채 30) 의 집에 살았는데, 이는 각각 5채의 집으로 형성된 502동으 로 구분되었다. 각 동은 한 연장자가 있어서 자신의 보호아래 있는 주 민의 행실을 책임졌기 때문에 이 동은 일종의 행정단위였다. 전체 인구 는 이처럼 9,123 명으로 보도가 되었다. 이 지역의 인구는 1896 년 약 29) 당시의 영종은 섬뿐만 아니라 내륙의 많은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30) 수치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2,414 가 적절해 보이지만, Repository 에는 5,414 로 기록되어 있다.
300퍼센트가 증가하여 1896 년 당시의 인구조사는 14,758 명의 남성과 11,863 명의 여성으로 전체 26,661 명으로 나타났다. 당시에 매우 다양한 신분 출신의 1,546 명의 남성이 국방을 책임지게 되었고, 이러한 국방의 활동은 민중사이의 다양한 재능을 엿볼 수 있는 훌륭한 증거를 제공해 주었다. 토지세와 국세는 공개적으로 알려진 바는 없지만, 현금 가치로 20,000 달러를 넘지는 않았다. 이 지역의 최고서열은 부윤이고, 이 직책에 의해 통솔되었는데, 그는 또한 무역 감독관인 감리직을 맡고 있었다. 그는 보통 제물포의 아문 ( 衙 門 ) 지역에 머물렀다. 현재의 부윤인 강화석씨가 조선왕조가 창설된 이후 344 번째 현직에 종사한다. 긴 인명부에는 조선한국역사에서 중요 한 역할을 담당했던 많은 인명들이 나타난다. 지역적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이단상 ( 李 端 相 ) 과 150년 전 그의 뒤를 이어 공직에 종사한 그의 아들 이희조 ( 李 喜 朝 ) 였다. 이들의 명예를 기리는 현판이 관할지역의 명예의 사찰인 학산서원에 세워졌고, 전하로 군림한 대원군과 그의 파 벌에 속안 다른 사람들이 공조해서 서원이 철폐된 최근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숭배를 받았다. 이 두 지방관에 대한 전기가 지역의 자료에 부록으로 실려 있다. 5 개의 성씨 즉 하( 河 ), 공( 孔 ), 문( 文 ), 채( 蔡 ), 그리고 이( 李 ) 씨는 그 기 원을 인천에 두고 있다. 이 지역은 또한 과거에 효자비와 열녀비가 황 실의 표창으로 하사 받았지만, 이러한 기념비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 라졌다. 이 지역에는 거대한 능( 陵 ) 이나 사찰은 없다. 우리는 이미 문 학산 꼭대기 미추홀 벽 내부에 봉화대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다. 이곳 의 봉화대는 옛날에 통신을 목적으로 산꼭대기를 잇는 소재지가 연결 된 장소 중의 하나이다. 이것과 연결된 다음 봉화대 소재지는 남쪽으로 10 마일 떨어져 있는 안산의 종왕산 (Chongwang san) 위에 있다. 반면에 북쪽에 있는 다음 봉화 소재지는 수도 서울에 좀 더 가까운 부평에 있 다. 봉화대의 그 웅대한 모습과 함께 미추홀의 옛 성벽은 방문해 볼만 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제물포를 논평하면서, 황실의 전환국 ( 典 圜 局 ) 31)에 대해 언급하지 않
은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의 일반 통화는 수세기 동안 실로 중앙을 실로 꿸 수 있는 4 각형의 네모가 있는 동전으로 만들어졌다. 1883 년 서울에 서 은화를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것은 원형모양으로 옛날의 동전 처럼 각인이 새겨지고 그 중앙에 푸른 빛 에나멜칠을 하였다. 이것은 각각 15센트 30 센트, 45센트를 나타내는 세 가지 액면 단위가 적혀 있 었다. 이러한 동전은 수공( 手 工 ) 으로 행해졌는데, 에나멜칠을 하는 과 정이 너무나 비용이 많이 들어서 화폐수집가를 제외하고 결코 유통이 되지 않았다. 이어서 1884-5 년 사이에 서양의 일반적인 화폐 모양을 본 딴 동전을 제작하기 위해 서울에 완벽한 동전 주조공장이 세워졌다. 구리 동전과 단지 수천 개만이 만들어진 는 동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0.5센트 동전이 현재 통용되 그러나 그 어떤 이유로 결코 전환국은 성공적으로 운영되지 못했고, 세워진 값비싼 공장은 사용되지 않은 채 남겨졌고, 외국인 직원은 해고 되었다. 다음의 시도는 1891 년 제물포에 전환국을 설치하는 결과로 이 어졌다. 제물포 해관의 직무대행 관장인 맥 오스본 경(W. McC. Osborne) 은 1892 년 연례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 한다: 1891년 후반기에 오사카에 있는 일본 기업연합과 한국정부의 협상의 결과로 250,000 달러의 자본금으로 한국에 전환국의 설치에 대한 계 약이 이루어졌다. 원래의 의도는 서울에 전환국을 설치하고 1884-85 년에 동전주조를 목적으로 세워졌던 건물과 기계를 사용하는 것이었 다. 그러나 결국은 제물포에서 서울까지 모든 필요한 물자를 수송하 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과 비용 때문에, 그리고 서울의 수질 속에 31) 개항 이후 고종은 종래에 통용되어오던 상평통보로 대표되는 동전 이외에 금전 은전과 지폐를 동시에 유통시킴으로써 근대적 본위화폐제도를 마련 하고자 했다. 설립 당시에는 종로구 원서동 소재의 대가( 大 家 ) 를 전환국 건물로 사용했다고 전하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1885년 전환국 건 물을 현재의 남대문국민학교의 북쪽으로 생각되는 당시의 선혜청( 宣 惠 廳 ) 별창( 別 倉 ) 자리에 신축했는데, 이것이 경성전환국이다. 1892년 전환국을 서울에서 지금의 동인천동 주민자치센타 자리로 옮겼다가, 1900년 다시 용산의 군자감( 軍 資 監 ) 창고( 지금의 용산구 원효로 근처) 로 옮겼다.
있는 암모니아가 동전주조 과정과 관련해서 화학작용으로 부적절하 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젠추안 ( 제물포 ) 에 새로운 전환국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주조 건물을 세우고 서울에 있는 옛 동전 주조공장에 있는 기계들 을 제물포로 옮기는 것을 원조하기 위해서, 일본정부는 1892 년 초에 일본의 국립은행 (Specie Bank) 으로부터 25,000 달러의 금액을 한국 에 상환했는데, 그것은 약 10년 전 한국정부가 모금한 120,000 달러 의 차관에 대한 이자의 일부였다고 전해진다. 오스본씨는 계약상 요구되는 동전에 대한 설명에서, 다섯 개의 액면 가는 0.25 센트, 1 센트, 5센트와 20센트와 1달러짜리 은화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를 다음과 같이 진술 한다: 다섯 형태의 동전은 일본과의 협의에 의해 지정된 5년 기간 동안 전 체 1천 500 만 달러를 주조하며, 매년 3백만 달러어치를 첫 5년 동안 주어진 조건하에서 생산한다. 주조사업은 일본의 제 58은행의 주도 로 행해졌는데, 이 회사는 결과적으로 제물포 항구에 은행32)을 개설 하게 되었다. 빨간 벽돌로 된 이 전환국 건물은 2만 달러의 비용으 로 완성을 했고, 그 물자들은 모두 일본에서 운송해 왔고 업무는 12 월 11 일에 시작되었다. 새 시설은 일본인에 의해서 실질적으로 관리 되고 업무가 이루어졌다. 액면가가 새겨지지 않은 동전이 오사카에 조폐국에서 한동안 공급하기로 한 협정으로, 이미 (1893년 1월 28 일) 제 58은행이 오사카로부터 액면가가 없는 62,000 달러 가치의 은화와 수천달러의 가격의 액면가가 새겨져 있지 않은 5센트짜리와 동전들 을 일본에서 수입을 했기 때문에 현재의 항구에서의 업무는 액면가 를 새기는 것에 제한되어 있었다. 32) 일본58은행의 인천지점은 1892년 7 월에 개점하였다. 지상 2층 건물로 발 코니와 돔창이 특징인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다. 내부는 20평 정도의 규 모로 비교적 깨끗이 관리되고 있었다. 현재는 인천중구요식업조합이 사용 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과의 계약은 소송이 걸린 재판이 있은 후에 파기되었고 한국인들이 스스로 전환국을 운영하려고 하였다. 현재 제물포 해관이 주도해서 전환국이 운영되고 온종일 작업이 이루어진다. 1달러 은화를 주조하는 일은 한동안 중지되었지만 적은 액면 화폐의 동전은 대량으 로 발행되고 있다. 화폐생산은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았고, 알려지지 않았지만, 다음의 예상치가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1897년 9월 30일까지 의 생산결과를 망라한 것인데 다음과 같다. 1달러 은화 20,000 20센트 동전 70,000 5센트 동전 250,000 1센트 동전 590,000 1/4센트 동전 5,000 935,000 항구에 중심을 둔 사업과 사회활동 그리고 프랑스, 영국과 미국의 선 교업무에 대해서 더욱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지만, 이를 적절하게 다루 기 위해서는 현재의 논설지문을 시리즈물로 확장시켜야 할 것이다. 존스(GEO. HEBER JONES) O 실제의 한국33) 여러 개의 한국이 있었고, 여전히 존재한다. 이러한 명제가 역설적으 로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사실이다. 중국, 혹은 일본이나 자바섬 근교나 아프리카 서남단 어딘가에 위치해 있는, 잘 알려지지 않 은 한국이 있다. 반란자들과 전쟁을 벌이는 당파, 유혈의 변화로 혼란 스러운 한국이 있다. 모든 관리의 반은 중국인이고 반은 터키인인 타락 33) Korean Repository, 1895년 9 월호, pp. 345-50.
한 한국이 있다. 모든 사람들이 거짓말쟁이로 그들 중 정직한 사람이 거의 없는 불행한 한국이 있다. 그리고 보물과 황금이 쏟아져 나오는 묘와 황금의 관( 棺 ) 을 찾는 모험가들의 한국이 있다. 한국의 특파원들은 단지 1달의 연구를 통해서 나이든 거주민들이 입 증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사실들을 알 수가 있다. 평판을 갈구하는 한 국작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한국인들의 정원은 연꽃으로 푸르고 돌다리 가 뻗어있고 작은 호수들로 꾸며져서 풍경을 만드는 정원사로서의 일본 을 넘어선다. 마지막으로, 분노와 비탄으로 가득 찬 물병을 언어 의 수사학을 통해서 배출하고 정화하는 은둔자의 한국이 있다. 이러한 몇 가지 사실들이 한국에 존재해 왔고, 몇 가지는 여전히 그 대로 남아 있다. 이와 같은 체념의 한국인들이 있고, 이러한 체념의 의 지가 지속되면, 운명이 작은 묘비만을 남긴 채, 조용한 멸망의 장례식 을 제공하지 않을까 우리는 두려워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풍경에 머물 러 즐기는 유람이 아무리 즐거운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현실의 한국 을 흘긋 보면서, 그 옆을 스쳐 지나갈 뿐이다. 현실의 한국은 산이 많다는 것이다. 북쪽의 백두산에서 남쪽 제주도 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전경( 全 景 ) 을 이루고 있는데, 그것은 우주의 신 성한 작가의 걸작 중의 하나이다. 눈이 덮이고, 구름이 정상을 감싸고 있는 산들, 풍부한 곡물과 아름다운 부락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계곡, 멀리서 막 코일에 감기는 줄처럼 보이는 굽이치는 강물, 그리고 휙휙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새들, 단음절로 울어대는 까마귀와 뻐꾸기, 하늘 에서 노래하지만 지상에 사는 종달새들, 도처에 산들은 우뚝 솟아 있 다. 전 국토에 대해 언급할 때 평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은 없다. 거대한 산과 작은 산들, 언덕들, 둔덕들과 작은 고개들, 그리고 성곽이 나 궁전과 같은 건물에서부터 막 솟구칠 준비를 하고 있는 호랑이에 이르기 까지 온갖 알아볼 수 있는 형상들이 존재하는 산이 있다. 그리 고 이러한 산중에는 고창한 세월과, 풍부한 석탄, 철광석, 납, 황금들 이 가득 차 있고 그 경사면과 정상에는 사자( 死 者 ) 의 무덤이 있다. 현 재 한국의 산들이 주로 사용되는 것은 죽은 이들을 위한 분묘들이다.
한국은 아름다운 풍경으로 가득 차 있다. 일본에서 막 유람 온 많은 관광객들은 제물포에서 서울에 이르는 강 길에 대해 황홀경에 빠져든 다. 눈이 온 이후 두 장소 사에의 길은 겨울 풍경으로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가장 까다로운 사람도 만족시킬만한 풍경들이 동, 서, 남, 북으 로부터 방문객을 기다린다. 해변의 행락지나 산의 은거지를 찾는다면 한국은 모든 사람들의 요구를 만족시킬 만큼 풍부한 장소가 있다. 현재 한국에서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개발이다. 우리는 해변의 행락지이든 산의 은거지이든 매료시킬만한 곳이 아니면 고급스런 호텔 이 없다는 것으로 변명할 수 있을 만큼 사치스러운 상태에 도달해 있 지만, 우리에게 전달된 넋두리에서 우리는 고급스런 호텔이 우리의 무 수한 행락지 에서 여전이 부족하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풍부한 물리적인 자원이외에 한국은 쾌적한 기후를 가지고 있다. 러 시아의 차지 다쁠레( Charge d'aflaires ) 의 작가 웨버(C. Waeber) 경 이 쓴 한국의 기후에 관한 가장 흥미롭고 가치 있는 문서에 따르면, 서 울과 제물포의 평균기온은 화씨 54 도이다. 여름에는 서울이 75.6도이 고 제물포가 73.9 도이다. 그리고 겨울에 서울은 33.1 도이고 항구( 제물 포) 에서는 34.3 도이다. 한 해의 가장 불만족스런 때는 소위 말하는 장마기간 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변덕스럽고 불확실한 요소로 1887 년 서울에서 전체 강수량이 14.91 인치였을 때인 8월 달에 가장 큰 곡물수확을 거두어 들 였다. 1888년과 89년 7월에 폭우는 각각 12.23인치와 14.37 인치였다. 1890 년 폭우가 6월에 있었고 11.17 인치였다. 그때 이후 매년 비슷한 변 화를 보여주고 올해 폭우는 8 월에 발생할 것이다. 보통 5,6월과 9,10 월 이 한국을 방문하기에 가장 좋을 때이고, 방문객들은 이때 올 계획을 세워야 한다. 한해를 거주할 장소로써 한국 전역은 매력적인 기후를 가 지고 있다. 한국인들. 한국인의 가장 뚜렷한 특징 중의 하나는 친절이다. 그들은 사람들의 결점에 대해 관대하다. 한국인이라면 나태한 친구나 친척들이 그에게 의지하는 것을 허용해서 그들 스스로 재산을 탕진할 수도 있다.
한국에는 일본이나 중국에서 볼 수 있는 거지들이 없다. 왜냐 하면 가 장 비천한 한국인이라도 굶주림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가 있기 때문이 다. 가난이 전역에 퍼져 있고, 불행과 범죄와 태만으로 막 집을 나서면 진퇴양난에 빠져서 시간을 허비 하는 수많은 계층이 생겨났지만 그러 나 그들은 용케도 이를 극복했다. 여기서 가난이란 단지 부족한 것에 불과했다. 사랑하는 가족이 굶주 리는 것을 막기 위해 절망적으로 빵을 훔치는 사람에 대한 서양이야기 가 한국에는 없다.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의 가난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 고 있는데, 이런 생각은 한국의 일부 하류계층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인종적인 편견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계층의 사람들의 결점과 실패를 과장해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대다수 한국 사람들은 거지가 될 처지에 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사 람들이 부유하게 산다는 것은 아니다. 이와는 별도로 그들은 궁핍을 다 룰 줄 안다는 것이다. 30 년 전 풍요로울 때, 대로( 大 路 ) 를 따라서 여행 객에게 무료로 음식을 제공해 주는 것이 관습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것이 한국인의 전형적인 아량이다. 가난할 때는 부족한 것이 없다는 사 실에서 한국인의 관대한 친절은 당연한 것이고, 이처럼 거지계층이 없 는 아시아 국가가 존재하는 것이다. 온정과 친절은 서로 닮은 미덕이다. 우리는 외국인들과의 관계에서 가장 구별되는 한국인의 특성으로 온정을 꼽는다. 우선 악한 품성이 전 혀 없다는 것이다. 보통의 한국인들은 외국의 제도나 관습에 대한 생각 과는 상관없이 다정하고, 외국인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호의적이다. 한 국을 벗어나 더욱 멀리 갈 필요가 없을 정도의 천박함이나 경멸적인 비천함이 한국인에게는 없다. 그렇지만 모든 이러한 것들은 우리 서구 인들과 50 년 동안 접촉을 하면 변질될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외국 인이 당연히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이다. 현재나 과거 몇 년 동안, 한국 대중이 지니고 있는 감정은 온정으로 부터 나온 일종의 친절이었다. 한국인들 사이에 보통 돈 문제로 소음이 나 분쟁이 생겨난다고 할지라도, 타고난 온정으로 항상 좋은 결실을 맺
어 왔고, 만약 쌍방이 분쟁이 일어나 제 3자에게 조정을 호소하는 경우 가 생기면, 십중팔구는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피하기 위해 양측 이 다 옳고, 양측이 지체 없이 타협을 한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본질적인 온정과 친절로 인해, 한국은 국제적인 접촉을 촉진시킬 수 도 있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한국이 일단 국제관계에 발을 들여 놓을 때, 한국에 대한 거대한 가치가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온 정과 친절 때문에 한국은 국제적인 유대관계에 있어서, 바람직한 일원 이 될 수 있다. 실제의 한국은 현재 전환기에 놓여 있다. 모든 것이 현재의 틀을 형 성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의 시각에서조차도 과거의 가치는 파 괴되고 있고, 현재와 미래는 모두 순탄치 않다. 자연의 돌은 문명의 옷 을 입어야 하고, 자연의 목제( 木 製 ) 는 잘 연결해서 한국의 정서에 맞도 록 끼워 맞추어져야 한다. 사람들은 새로운 관습을 익혀야 한다. 이 모 든 것들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현재의 개혁을 비웃고 ( 행동이 아 닌) 문서상의 어떠한 개혁도 없다 고 외치는 사람들은 현명하지 않다. 결코 비현실적인 것이 아닌 종이 위에서의 개혁이 한층 나은 것이다. 개혁은 종이 위에 있다. 종이로부터 국왕의 봉인과 친서가 탄생하고 그러므로 이것들이 바로 국토의 실제적인 법률이 된다. 개혁 작업을 한 지 채 1 년도 되지 않았는데, 몇몇 사람들은 주저 없이 실패 라고 외 친다. 왜냐하면 은유적으로 말해서, 우리의 표범에는 아직 많은 반점들 이 남아 있고, 우리의 이디오피아인들은 아직 본성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찬성하는 사람이나 반대하는 사람이나 똑같이 개혁의 요소로 서 시간이란 요인을 간과해 왔다. 6개월이나 2년 만에 개혁조치에서 실제적인 것을 요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아이가 이 기간 동안에 나 6피트 16 피트가 자라도록 요구하는 부모와 같다. 그리고 옆에 서서 아이가 자라지 않아서 불평하는 것은 똑 같이 비난 받아야 할 짓이다. 한국은 전환기에 있다. 한국은 기회를 잡는 것뿐만 아니라, 시간이 필요하다. 위대한 작업은 단지 시작되었을 뿐이다. 앞에 펼쳐진 가까운 길은 확실하지만, 여전히 약간은 고독한 길이다. 지원( 支 援 ) 과 지적인
평가의 부족으로 개혁이 고통을 겪는다. 추측컨대, 한 국가는 최소한 위로 솟아오르려 몸부림을 친다. 이 국가는 좀 더 높고 나은 수준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다. 한국이 거기에 도달할 때까지 숨을 죽이며 지켜볼 관객이 결코 필요하지는 않지만, 또한 흥분을 해서 얻어 질 수 있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전환의 시간은 필연적으로 불만족스런 시간이다. 현재 한국의 현실이 그러하지만, 누가 이처럼 절망적인 상황 이 되었을 때, 숨죽이고 있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현실의 한국은 현재 자원( 資 源 ) 이 개발되지 않은 상태에 있다. 때때 로 한국은 자원 없는 국가로 대표되어 왔고, 주변에서 관찰자가 무심코 본다면, 한국에 대해서 쉽게 이와 같은 인상( 印 象 ) 을 갖게 될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멋진 도시인 서울에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튼튼하다는 인상을 주는 기업은 단 한 개도 없다. 일본이나 중국에서 찾을 수 있는 시설과 비교해서 가장 자부심을 갖는 사업장이 한국의 어디에도 없으 며, 단지 말 한필 키우는 마구간이 전부이다. 대상( 大 商 ) 조차도 주로 중국, 일본 또는 서구에서의 수입에 의존한다. 토착제품은 매우 조잡하 고 단순한 것뿐으로 무역세계에서 거의 거래가 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상업시설이나 제품의 부족으로 한국은 가난에 찌들고 자원 없다는 인 상만을 남겨 준다. 이와 같은 인상은 잘못된 것이다. 한국의 자원은 현재 사용되고 있 지 않고, 개발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자원은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활력과 한국의 땅과 바다가 지닌 가능성에 놓여 있다. 우선, 한국 인의 활력으로 말할 것 같으면 현재 단지 활동을 멈추고 수면상태에 있을 뿐이다. 한국의 무역과 상업분야를 관리해야 하는 몇몇 우수한 인 재와 젊은이들은 형편없는 교육현실 때문에 잘못된 길에 들어서서, 잘 못된 사회적인 업무로 활동이 마비되어 잠시 수줍은 활동정지 상태에 서 발걸음을 늦추고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교육받지 못한 상태이다. 그들은 아직 숙련된 직 업이 없어서, 자신의 활력으로 사회에 변화를 줄 수 없다. 이와 같은 활력은 단지 양식과 생필품들을 얻는 것에만 충분히 발휘되고 있을 뿐
이지만, 그러나 그들에게 기계를 도입하게 만들고 교사를 소개해 보라. 그들에게 자기( 子 器 ) 를 제조하는 방법을 가르쳐보라. 그들에게 옷을 만 드는데 필요한 면화를 가지고 천을 짜도록 하라. 그들의 산야에서 철을 채취하고, 그것을 일용품으로 바꾸도록 하라. 그들에게 향상된 생활의 필수품이나 사치품들을 만들도록 하라. 이런 것들을 그들에게 시도하도 록 하면 우리는 부( 富 ) 로 전환시킬 수 있는 막대한 에너지가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하루나 1 년 또는 한 세대에 걸쳐서, 이루어질 수 있다 고 믿지는 않는다. 우리는 현재 이러한 시도 자체가 성공을 거둘 수 있 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한국인들 스스로가 향상되고 좀 더 복잡 하고 광범위한 생활양식의 요구에 대한 압력을 느낄 때, 그들은 스스로 그와 같은 요구를 제공할 수 있는 시도에 성공하게 될 것이다. 한국의 제조업은 머지않아 발전할 수 있지만, 그것은 한국적인 수요품목에서 그 첫 번째 개발품이 나올 것이다. 우리는 한국인의 활력이 나중에 제 조업에 사용될지는 모르지만, 현재 말을 타기에 충분한 만큼의 가마꾼 을 양성해서 가마를 타는 특권을 유지하는 데에만 쓰이는 낭비되는 에 너지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경탄할 만한 일들이 성취될 것 이고, 에너지가 쌓이게 될 것이다. 현재 이러한 한국인의 활력은 단지 담배를 연기로 변화시키는 데에만 쓰이고 있고, 한국인들이 휴식만을 취해서 다른 사람들은 이들 한국인들이 바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한국의 천연자원은 앞에서 언급한 광산들이 있다. 이 광산들은 탐사 되고 그 가능성을 측정해야만 한다. 아마 이러한 광산이 지나치게 과대 평가된 것일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잘못된 예측은 종종 일어날 수 있는 것이고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명쾌하게 드러나야 한다. 이전의 사설에 서 우리는 한국인이 주로 단순히 쌀의 수확에만 의존하는 것을 언급한 적이 있고, 면화나 비단, 과일과 곡물 등의 의존도를 다각적으로 늘여 갈 것을 권장하고 있다고 주장했었다. 산업적인 조건이 좋지 않다면 이 에 지장을 받지 않고 이와 같은 농사의 경영에 일손을 돌릴 수 있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있고, 또한 농사 경작이 가능한 충분한 땅이 있다.
한국의 긴 해안선을 따라 각 지점에 어획량은 충분하다. 부산의 어획량 은 작년에 1 백만 달러를 생산했다고 전해진다. 해안을 따라서 다양한 지점에서도 똑 같은 어획양이 한국인에게 주어지지 않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O 한강이 굽어지는 곳34) 제물포 주변 약 20마일 부근 한강의 양쪽 언덕에서 서로 마주하고 우뚝 선 두 개의 절벽 주변에서 한강은 갑자기 좁아지고 굽어진다. 이 러한 좁은 지역까지 한강은 강폭이 넓다. 이 좁은 지역을 지나면 다시 넓고, 평온하고 육지로 둘러싸인 만( 灣 ) 으로 통해서 다시 넓어진다. 처 음으로 이 강에 온 여행객에게는 보통 이와 같은 인상을 갖게 된다. 조 류가 강물너머 굴곡지점 주위의 좁은 협곡에서 배를 쏜살같이 지나게 할 때, 배에 탄 사람들은 높은 물길위에서 해변사이에 반마일 이상 확 장된 부풀어 오른 드넓은 강폭을 보게 된다. 반면에 저 멀리서 앞쪽의 강화와 통진 언덕들은 물의 가장자리를 낮추게 만들어, 양동이 속에 강 물을 부딪쳐서 가두어두는 것처럼 보인다. 환상은 완벽하다. 지금까지 뿜어져 나온 거대한 양의 물은 여기에서 좁은 협곡을 통해 서 굉장한 속도로 쏟아 부어, 물은 소용돌이치고, 바위와 여울위에서 뒤틀리고, 구불구불한 협곡의 가장자리에 물결을 일으킨다. 외국인들은 이곳을 강화급류라고 이름을 붙였다. 한국이름으로는 영어로 손돌해협 이라 번역될 수 있는 손돌목 35) 이다. 여기에 이야기 하나가 얽혀 있다. 중략 당대의 조선왕조의 창시자가 전라도 지역의 계룡산에 자신의 정부의 터를 세우는 것이 본래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다른 지역을 찾으라는 초 자연적인 경고가 있어서, 제물포를 경유해서 북쪽으로 한양( 현재의 서 34) Korean Repository, 1895년 7 월호, pp. 241-3. 35) 강화와 김포사이 수로에 위치하며 물살이 빠르고 소용돌이가 심하여 배가 조난당하기 쉬운 위험한 지역
울) 에 닿아, 이곳이 적절한 곳이라고 판단했다. 36) 제물포에 대한 가장 초기의 역사적인 언급은 없지만, 당시에 서울은 제물포의 교외에 위치 해 있다고 언급하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항구에 도착했을 때, 왕은 강을 통해서 선택된 장소를 따라 계속 이 동하기로 결심했다. 수도 서울( 한양) 까지 육상으로 가는 것에 대해서 황실이 왜 무시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없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생각하 면 당시에 비가 와서, 땅이 젖었을 때, 길이 분명치 않고, 미끄러지기 쉬워서, 왕은 그의 추종자들에게 서울까지 27마일의 언덕 경사면을 가 도록 요청하는 것에 대해 너무 염려 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 일 행은 강을 통해 이동했고, 이렇게 제물포 뱃사공에 대한 숭배가 탄생하 게 된 것이다. 진흙투성이 강둑 위를 강행하지 않고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지금처 럼 당시에도 배를 끌어 줄 선원이 필요했다. 민담이 전하듯이, 제물포 의 뱃사공은 황실의 짐배의 경로를 조종하기 위해 고용되었다. 이 뱃사 공의 이름은 손돌( 孫 乭 ) 이었다. 마침내 황실 일행이 채비를 하고 프랑 스어로 염하( 鹽 河, salt river) 이라고 알려진 한강위에 첫 출항을 하게 되었다. 그 일행들이 여울에 닿을 때까지 모든 것은 순조로웠다. 황실 의 짐배가 넓은 수면으로부터 쏜살같이 지나칠 때, 국왕은 가상의 만 ( 灣 ) 으로부터 헛되이 앞쪽으로 나 있는 수로를 발견했다. 앞에서 묘사 하듯 앞쪽에 수로가 있다는 느낌이 너무나 완벽해서, 뱃사공이 강물의 언덕너머를 통해서 흐른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이를 확인하기를 원했다. 왕은 배를 멈출 것을 명하고 절벽위로 올랐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 다. 그 후, 황실의 뱃사공이 무엇인가 심각하게 잘못을 하고 있고, 어 쩌면 배반의 위협의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서, 그 뱃사공에 대한 조사 36) 태조 2 년에 태조가 직접 공주 계룡산( 鷄 龍 山 ) 아래를 도읍지로 예정하고 친히 계룡산의 형세를 보고는 계룡산에 신도 건설을 명하였다. 그러나 경 기좌우도관찰사 하륜( 河 崙 ) 의 상언에 따라 중지되었다. 이때 하륜이 신도 안( 新 都 安 ) 을 새로운 도읍지로 반대한 이유는 남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동 서북 지방과 교통이 불편하며, 풍수적으로 쇠퇴하고 패망할 땅이라는 이 유 등이었다.
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크게 분노한 왕은 이 불행한 뱃사공의 처형을 명했고 그 선고는 즉시 행해졌다. 황실 일행은 자신들이 경로를 찾아야만 했고, 그들은 저 너머에 수 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유 없이 서둘러 뱃사공 손돌을 처형한 것에 대해서 왕은 정말로 크게 슬퍼했다. 그렇지만, 그가 죽었 기 때문에 실수를 치유하기에는 너무나 늦었다. 피가 떨어지는 그의 몸 체와 절개된 머리가 절벽위로 끌어 올려졌다. 세상에 그 어떤 것도 그 의 시신을 결합해서 생명을 가져 올 수는 없었다. 황실의 힘이 닿는 데 까지 모든 보상을 해 주었지만, 이처럼 슬픈 운명을 맞이한 충성스런 뱃사공은 권력의 허식과 사건 을 지닌 채, 절벽위에 묻히게 되었다. 그가 죽은 후 명예가 그에게 쏟아졌고, 한편으로 그는 숭배의 대상이 되어, 그의 영혼은 이 협곡을 안내하는 신으로 선택되었다. 사자숭배 ( 死 者 崇 拜 ) 의 자연적인 성취물인 영웅숭배는 한국에서 한때 유행했다. 손돌을 기리는 사당37)이 왕실비용으로 만들어졌고, 지방 관 리들은 정규적으로 이곳에 제물을 바쳤고, 아래쪽 빠르게 흘러가는 급 류에도 그의 이름이 붙었다. 그래서 그 절벽이 서 있는 한 그리고 물이 그 옆을 지나는 한, 사람들은 틀림없이 제물포의 이 뱃사공의 이름을 기억해서, 황실의 실수에 대해서 정당하고 인간적인 국왕의 참회를 증 명할 것이다. 몇 년 전 나는 이 유명한 장소를 방문했다. 이 죽은 영웅의 무덤이 강을 오르고 내리는 여행객들이 볼 수 있는 절벽 저 끝 쪽에 선명하고 분명하게 서 있었다. 요새( 要 塞 ) 로 사용할 목적인 성벽이 절벽위에 있 고 38), 그 안쪽에 무덤이 있고 작은 둔덕위에 손돌의 사당이 있었는데, 그것은 8평방피트의 공간에 높이 7피드의 이엉으로 덮여진 나뭇가지와 진흙으로 된 보잘 것 없는 구조물이었다. 말하자면, 다소 서툰 인물화 가 손돌의 초상으로 의도된 벽면위에 칠해져 있었는데, 그 밑에는 소원 37) 현재는 사라졌지만, 뱃사공에게 제사를 지내며 배의 안전을 기원하던 곳이 다. 38) 광성보이다
을 비는 봉헌물을 담아두기 위한 긴 선반이 있었다. 이처럼 사당 역할 을 하는 구조물은 최근에 세워진 것이다. 본래의 구조물은 아마 30년 전 반( 反 ) 영웅숭배 기간 동안에 사라졌는데, 당시 한국역사에 가치가 있었던 수많은 사찰들이 파괴되었다.
II. 정치 O 팔로스 요새39)40) 총포가 언제 발사될까? 1871 년 5월에 미국의 전투함 함대가 한국과 의 조약을 협상하기 위해 한강에 나타났다. 그러나 한국도 미국도 분쟁 을 피할 수도 있는 각자에게 필요한 필수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 았다. 쌍방은 서로의 관습과 풍습, 그리고 정서의 틀을 무시했다. 말뚝 의 울타리 위에 있는 고양이처럼 신중하게 걸어가야 할 장소에서 양측 은 중국 상점의 황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전략의 부족으로 분쟁이 촉 진되고 있었다. 미국은 강을 조사하기 위해 한국 방어선 내에 탐사단을 보냈고, 한 국은 그들에게 총포를 발사했다. 이것은 폭발의 불똥이었다. 약 700명 의 원정대가 함대로부터 전투 채비를 갖추고 있었고, 현재 우뚝 솟아있 는 유명한 절벽 41) 까지 강을 거슬러서 그 방향을 재촉했고 한국인에 대 한 비통한 복수로 그 힘을 발휘하면서 그 발길을 거슬러 올랐다. 42) 강 쪽을 내려다보면 한국인들은 다가오는 미해군을 막고자 했던 요 39) Korean Repository, 1895년 7 월호, pp. 245-6. 40) 한국사에는 신미양요의 광성보전투로 알려져 있는 지역으로, 현재 몇 장 의 사진이 당시의 참혹한 전투를 보여준다. 여기서 팔로스는 미국의 전함 으로 광성보 전투에 투입된 네 개의 전함중의 하나이다. 41) 손돌목을 지칭 42) 1871년 미국의 포함 2척과 기정 4척으로 구성된 탐측대가 강화해협을 천 천히 거슬러 올라오고 있던 순간, 갑자기 손돌목 포대에서 엄청난 양의 포탄이 날아왔다. 손돌목 포격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대대적인 감화도 침 공 작전을 감행했다. 미국은 압도적인 무력을 바탕으로 초지진을 함포로 초토화시킨 다음, 초지진과 덕진진을 점거하고 광성보로 쳐들어갔다. 강화 수로의 가장 중요한 근거지이자 난공불락의 자연 요새로 알려진 광성보에 는 어재연이 이끄는 최정예 부대가 있었지만, 수륙 양면에서 한 시간 이 상 동안 포격을 당하고 난 후 쳐들어온 미군에게 조선부대는 속수무책이 었다.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 帥 字 旗 ) 는 약탈되어 현재 미국 해군사관학교 에 보관중에 있다.
새 경계선을 볼 수 있다. 몇 개의 유탄들이 그들의 방어선으로부터 그 들을 쓸어버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쌓여 있었다. 저 멀리 강의 오른쪽 둑 위에 진흙 속에 묻혀 있는 미국 함대가 남기고 간 배들이 있는데 ( 한 국인들은 이를 안개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총포 를 평평한 진흙의 갯벌로부터 단단한 평지까지 옮기는 데 애를 먹었었 다. 그리고 바로 근처에 체포된 사람이 진술했던 광성보 요새(Fort Duconde) 라 불리어는 작은 요새가 있는 절벽이 솟아 있고, 이 뒤쪽에 는 야간 진지가 있다. 여기에 선원들과 해병들이 일요일인 다음날을 기 다리면서 팔베개를 하고 잠들어 있었다. 작전은 일찍 시작했다. 오른쪽 둑으로 행진해 오르면서, 처음에 점령 한 요새는 모노카시 (Monocacy) 요새43)라 이름을 붙였다. 그것은 큰 저항 없이 정복되었다. 손돌의 절벽을 따라서, 요새로 덮인 높은 언덕 이 있었는데, 그것은 언덕의 돌출부의 지맥을 따라서 분지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 분지는 요새보다 낮았고, 손돌의 무덤으로부터 돌을 던지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하고 바다의 가장자리로 통했다. 미국인들은 그 요새에서 한국인들이 생활하는 것을 발견했다. 여기 서 미국인들은 집결해서 적을 쫓아내야 한다는 결단을 내렸다. 총탄과 포탄에 그들에게 쏟아졌다. 한국의 요새는 구멍이 뚫렸지만, 여전히 그 들은 고집스럽게 물러나지 않았다. 수병( 水 兵 ) 들이 여기서 명령에 따라 대열을 갖추었다. 한국인들이 고함을 치는 가운데, 미군들은 강한 화력 에 직면했지만, 성곽 위나 꼭대기 요새의 구멍 난 곳을 통해서, 언덕위 로 돌진했다. 육박전이 벌어졌고, 살육은 끔찍했다. 한국인들은 미 해병에 항복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미 해 병들을 죽일 듯이 덤벼들었지만 그것은 헛된 노력이었다. 수병들은 요 새로부터 그들을 분지 쪽으로 내몰았다. 한국인들이 굴복을 하지 않았 기 때문에, 이곳은 도살장이 되었다. 그들은 정오까지 싸웠고, 그 때 쯤에 최후의 한국인들이 살해 되거나 마지못해 절망적인 죄수가 되었 다. 그러나 그 전투에서 매키 중위(Lieutenant Mckee) 가 치명적인 부 43) 강화 초지진을 지칭. Monocacy 는 침공한 미국의 군함중의 한척의 이름
상을 입었고 그를 기념해서 이 요새는 매키요새 (Fort Mckee) 로 불리어 지게 되었다. 손돌의 절벽위에 있는 요새가 전투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교전을 기록한 지도에서 그곳이 팔로스 요새 로 이름 이 붙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요새는 파괴되었고, 그 요새에 있는 많은 것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내가 서있는 장소에 있었다는 대포는 아 마 그 당시에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무덤과 사당과 요새가 있었던 이 오래된 절벽에서 대 포가 사라지고, 이 절대적인 힘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과 기독교 의식 의 순교자들, 그리고 불필요하고 아무런 결실도 없었던 후회스런 행위 에 대해서 전통만이 이를 기념하고 있을 뿐이다. O 갑신정변을 일으키게 한 사건들 44) 본 기사의 목적은 내 생각에 1884 년 갑신정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 었고, 이를 가능하게 한 사건들을 환기시키려는 것이다. 이들 사건들은 1866년 당시 카톨릭 사제들과 원주민 신도들을 무참하게 학살하고 살 해했었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45) 이 사건으로 유럽인들의 관심 이 처음으로 한국에 쏠리게 되었다. 이때까지 이 작은 국가인 한국에 대한 종주권은 중국이 약간 소유하 고 있었지만, 이 학살로 인해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그 이유는 중국이 이에 대한 시정을 요청받았기 때문이다. 북경의 외무국 (Tsungli- Yamen) 46) 은 한국에 대한 이러한 책임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한반도 와의 모든 관련성을 부인했다. 그러나 동시에 중국은 프랑스 정부가 한국에 원정대를 급파해서 한국을 응징하려는 프랑스 국왕에게 은밀 하게 경고를 보냈다. 이 작은 사건은 한국과 중국 사이에 견고한 유 44) Korean Repository, 1897년 3 월호, pp. 95-8. 45) 카톨릭 사제들을 처형했던 병인박해 사건 46) 통리기아문으로 불리어지는 외무를 담당하는 부서
대관계를 갈라놓는 분열의 원인이었다. 이것은 한국과 중국사이의 분 열의 시작 이었다. 이것이 한국이 거의 500년 동안 조공을 바쳐왔던 보호국가인 중국의 힘과 의지에 대한 한국의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발 단이 되었다. 1867 년 프랑의 실수와 로즈제독 (Admiral Roze) 휘하의 해군 원정 대 47) 가 실패한 것에 대해 세부적으로 말할 필요는 없다. 한국 사람들 이 프랑스 해군의 도발에 저항한 이후 그들은 자신의 중요성을 자연적 으로 믿게 되었고, 최소한 어느 정도는 중국의 충고와 그들의 세력을 의문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중국에 대한 감정은 불운의 미국 스쿠너 범선인 < 제너럴 셔 먼 호(The General Sherman)> 가 불에 타고, 그 승무원들이 학살을 당 하고 평양에서 쫓겨남으로써 한층 고조되었다. 48) 이 또한 1866 년에 벌 어졌다. 범선의 파괴로 미국은 1871 년 로저스 제독(Admiral Rogers) 휘 하의 미국의 해군원정대 즉 시위대를 한국에 파견하게 되었다. 프랑스 원정대는 변명의 여지가 있었다. 그것은 상황이 허용하는 한 재빨리 편 성했기 때문에 일어난 가혹한 잘못된 조치였다. 그러나 미국의 한국침공은 주의 깊고 신중하게 계산된 냉엄한 계획 47) 병인양요 : 1866 년( 고종3 년) 에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 사건에 대한 프랑스군 의 침입 사건. 1866 년초에 대원군은 천주교 금압령( 禁 壓 令 ) 을 내리고 프랑 스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도 수천 명을 학살하였다. 이를 병인박해 또는 병인사옥( 丙 寅 邪 獄 ) 이라 한다. 이 박해때 프랑스 선교사는 12명중 9명이 잡혀 처형되었으며, 3 명은 화를 면하였는데 그중 리델(Ridel) 은 중국으로 탈출하여 주중 프랑스 함대 사령관 로즈(Roze) 에게 박해 소식을 전하면서 보복 원정을 촉구했다. 프랑스 공사 벨로네(Bellonett) 는 조선은 사전에 청국의 승인을 받고 병인박해를 단행하였으므로 ' 청국은 병인사옥의 공범 자' 라고 청국 정부를 규탄하면서, 조선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고 로즈 제독 에게 조선에 응징 원정을 결행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원정에 나선 프 랑스는 결국 양헌수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정족산성에서 패배하고 물러나 게 된다. 48)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 년 음력 7월 12 일, 양력 8월 21 일) 은 대동강에 침 입하여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던 미국 상선( 商 船 ) 제너럴셔먼호 (General Sherman 號 ) 를 평양 군민( 軍 民 ) 들이 반격하여 불에 태워버린 사 건이다.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었다.
이었고, 앞서의 원정대이후 오랜 시간을 계획을 한 것이었으며, 미국인 들은 더욱이 이전에 프랑스의 재난의 경험을 목격했었다. 그러므로 그 들이 한국인들에 의해 겪은 원정실패와 모욕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 다. 49) 이와 같은 외세의 침공을 여러 차례 성공적으로 물리친 한국인들은 이미 알려진 것 보다 더 영리하고 우월한 국민들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자연히 한국이 중국에 예속되어 있다는 충성스런 유대관계가 느슨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중국은 이러한 사실을 재빨리 알게 되었고, 안전한 보호 장치로 한 반도를 유지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 다. 이러한 목적으로 1875 년 상업과 무역에 대한 규정이 양국사이에 맺어졌고, 무역 감독관 겸 관리자가 한국에 보내졌으며 본부를 서울에 두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중국은 1874 년 조약을 체결해서 부산에 무역 의 거점을 설치한 일본인들에 의해 시도될 수 있는 그 어떤 행위도 방 지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이 중국과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생각했다. 또한 중국은 서울에 그 감독관을 주재하 게 함으로써 1867 년 러시아가 보여준 한국인들에 대한 관심의 균형도 무너뜨릴 수 있고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예방조치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한국인 관료들 사이에 불만이 있고 결과적으로 이들 관료들이 -- 1880 년 러시아의 협박에 의해 초 래되었지만, -- 서양열강들과 총체적인 외국무역과 조약으로 나라를 개방하도록 왕을 유인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중국은 아마 이러 한 한국의 입장이 한국과의 관계에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조역열강들의 야심과 경쟁 또한 충분히 보호를 받아서, 동시에 한, 두 국가 즉, 일본과 러시아와 같은 국가들의 야심을 보장하 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한국역사의 새장이 49) 신미양요( 辛 未 洋 擾 ) 는 고종 8년인 1871년 6월 10 일( 음력 4월 23 일) 에 발생 한 조선과 미국 간 전쟁으로, 전투에서 미국이 승리했으나 결국 목적한 통 상조약 체결은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고, 조선은 이를 계기로 쇄국정책을 더욱 고수하게 되었다.
펼쳐졌다. 중국은,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이홍장 (Li-Jung Chang) 은 자 신의 목적을 촉진하기 위해 한국이 미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것에 찬성 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그는 미국과 멀리 떨어져 있는 한국과의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미국 정부에 의해서 위임을 받은 슈펠트 준장 (Commodore Shufeldt) 에게 계약을 체결하도록 독려했다. 그러나 그 현명한 총독( 이홍장,Li-Jung Chang) 은 외국열강과의 체결로 자연적으 로 수반될 수 있는 결과를 간과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협상이 시 작되었고 1882 년에 한국은 미국과의 조약을 맺고 되었고, 이어서 곧 유럽 국가들과도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대표자들이 미국에 보내졌 고, 조약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개화당의 핵심이 되어 1884 년 정변을 준비하게 되었다. 외세에 대한 한국의 새로운 태도는 전적으로 한국에게나 조약 열강 에게나 완전히 만족스런 것은 아니었다. 서명된 조약들은 건전한 기반 위에서 체결되지 못했다. 한국과 외국사이의 상호관심과 무역 교류는 오히려 해로운 결과를 가져왔는데, 어떤 경우는 한국의 관리들이 소유 하고 있었던 작은 이익조차도 없애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편 몇몇 열강들은 진보사상을 선호하는 사람들을 기꺼이 도울 준비를 하고 있 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졌다. 서구의 국가들은 그들이 중국의 율법에 종속되어 있는 왕국과 조약 을 체결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들 열강들은 중국이 한국을 그 광대 한 영역의 일부, 그렇지만 복잡한 사건들을 일으키는 자신의 영토의 일 부로 간주한다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마침내 1884 년 갑신정변이 발발하기 전, 한 가지 사건을 말할 필요 가 있다. 나는 이미 1882 년 미국의 대표자들과 한국의 대표자들 사이 에 조약협상이 시작되었다는 것과 중국의 정책적으로 도와주고 중국의 승인과 함께 이러한 조약체결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언급한 바 있다. 한국은 피상적이지만 자유로운 결정권이 지니고 있었으며, 협상을 수행하도록 임명된 몇몇 관료들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지니고 있었는
데, 그것은 한국이 이미 독립국이고, 그들 스스로 급진주의자들로서 개 화당의 지도력을 떠맡아야 하고, 외국국가들 행사하는 이익만큼이나 한 국의 이익을 수호하는 것이 특별한 의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 들이 순수한 동기에 의해 행동을 벌였든, 아니면 그들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비열한 동기로 행동을 벌였든, 왕비의 가족에 대한 희 생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한국이 독립국이라는 기초위에서 협상이 체결되자마자, 중국은 이전 에 한국에서 발생했던 천주교인 박해 때문에 한국에 대한 어떠한 책임 도 거부했던 연유로 한국이 외국국가와의 협상에서 독립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했다는 것이, 중국의 큰 실수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미 국과의 조약에서 중국이 종주권을 가진 국가라는 구문을 삽입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지만, 슈펠트 준장은 이를 즉시 거부했다. 이것은 중국 에게 큰 실망감을 주어서, 비록 정확하게 중국이 원하는 바대로 이루어 지지는 않았지만, 한국이 여전히 중국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주장으로 바꾸었다. 한국정부는 이러한 주장을 받아 들였고 매년 조공을 계속해 서 보내게 되었다. 1882 년 6 월( 만약 내 자료가 정확하다면 14 일에) 한국 측에서의 정책 의 변화 때문에 임오군란이 일어났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임오군란은 대원군과 그와 마찬가지로 한국이 외국과 교류해야 한다는 개방정책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에 의해서 주도 되었다. 이들은 또한 의 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왕비의 힘이 커지는 것에 영향을 받았지만, 외 무정책에 대한 반발이 그 폭동의 구실이었다. 50) 그러나 그 폭동은 충 분한 힘이 없었고 몇몇 일본 공사관의 반대에 부딪쳤고, 일본 공관원들 에 쫓겨 그들 중 14 명은 살해되었고, 나머지는 해안으로 도망치거나 도 피함으로서 그 목적은 실패했다. 왕비 자신도 또한 생명의 위협에 놓여 있었다. 왕비를 독살하는 것이 계획이었지만, 사제로 가장하고 있었던 왕족인 민영익의 도움으로 왕비는 안전하게 북한산으로 피신을 했고 50) 임오군란 ( 壬 午 軍 亂 ). 1882 년( 고종 19) 6 월 일본식 군제( 軍 制 ) 도입과 민씨 정권에 대한 반항으로 일어난 구식군대의 군변( 軍 變 ) 이었다.
그곳에서 숨어 지낼 수 있었다. 이러한 사건은 부분적으로 중국이 예상하고 있었다. 그해 8월 초에 5,000 명의 군병력이 한국에 급파되어 직선거리로 제물포 동남쪽 18마 일, 그리고 서울로부터 약 40 마일에 위치한 마삼포에 주둔해 있었다. 제물포 보다는 마삼포를 중국이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서구인들도 알 수 없는 중국외교 전략의 많은 의문중의 하나이다. 나는 당시 중국 상인회사의 증기선들이 위에 언급한 곳에 착륙에서 군대와 무기와 탄약과 보급품을 한국으로 운반했다고 생각한다. 보내진 보급품이 너무 부족해서 최선을 다해 군대가 보급품을 확보하려했다는 인상을 주었다. 캠프가 설치된 후, 약 1,500 명의 군인들이 위안 스카이 (General Yuan)의 지휘로 수도에 도착해서 그들의 본부를 세우게 되었 다. 1882년 임오군란은 이 왕국의 정치에 한줄기 소나기를 퍼부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것은 3 일 동안 지속되었지만, 대원군이 정부의 정권 을 잡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보통 이와 같은 나라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것처럼 민씨 가문과 다른 많은 씨족 관리들이 살해되었다. 몇 몇 사람들은 산으로 안전하게 피신을 했고, 몇몇 사람들은 국경을 건너 만주나 시베리아로 도망을 했으며, 몇몇 사람들은 부산을 경유해서 일 본으로 갔다. 일본으로 도피한 사람 중에는 김옥균과 서광범이 있었다. 7월 군란이 있기 전 서울에 있는 일본인 대표부는 개화당의 지도자 들의 정신과 이들의 목적의식에 공감하고 있었다는 것은 추측 가능하 다. 약 14명의 한국 젊은이들이 군사교육을 받기 위해 일본에 보내져서 일본으로부터 한국군대 교관으로 데려올 참이었다. 일본 정부도 또한 한국에 군대를 보냈다. 약 700명이 제물포에 착륙 했다. 그들 중에 200 명은 공관 경계병으로 서울에 보내졌다. 제물포에 몇 달 동안 머문 후, 군대는 일본을 향해 떠났다. 김옥균과 서광범은 다시 한국에 돌아왔는데, 김옥균은 변장을 하고 서울에 들어왔지만 왕 이 대원군의 감호 하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오래 머물지 않고 제물포 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