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행록을 통해 본 조선 문사의 반산 유람 신익철 1. 머리말 계주( 薊 州 ) 서북쪽에 위치한 반산( 盤 山 )은 반룡산( 盤 龍 山 )이라고도 불리는데, 북경에 도읍을 정한 명청 시대의 황제들이 경동제일산( 京 東 第 一 山 ) 이라 하며 즐겨 찾았다. 특히 건륭( 乾 隆 ) 황제 때에는 반산에 행궁( 行 宮 )이 건립되었으며, 청나라의 역대 황제는 특히 이곳을 자주 방문하였다. 한편 반산은 당대의 유명한 문장가 한유( 韓 愈 )가 친구인 이원( 李 愿 )이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고자 할 때 이를 전송하며 써준 송이원귀반곡서( 送 李 愿 歸 盤 谷 序 ) 의 배경이 되는 산이며, 명대 말기의 유명한 문장가 윈굉도( 袁 宏 道 )는 이곳을 유람하고 유반산기( 遊 盤 山 記 ) 를 남긴바 있다. 반산은 연행사들이 거쳐야 하는 노정 주변에 위치해 있으며, 한유와 원굉도 같은 대문장가가 지은 명문( 名 文 )의 배경이 되는 산이었기에 조선 시대 연행사들에게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었다. 한유의 송이원귀반곡서 는 반곡이 산수가 수려하여 은자가 거처하기에 마땅한 곳임을 말하고, 자신도 이원( 李 愿 )처럼 은거하고픈 소망을 말한 송서( 送 序 )이다. 이 글은 소동파가 당나라에는 문장이 없고, 오직 송이원귀반곡서 한 편이 있을 뿐이다 1 라고 극찬한 명문으로 고문진보( 古 文 眞 寶 ) 에도 실려 있어 조선의 사대부라면 누구나 암송하는 명문이다. 그렇지만 이 글은 은거하러 가는 이고를 전송하는 송서의 형식을 빌러 한유 자신의 불평을 토로하거나 명리를 탐하는 속인을 풍자하는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정작 반곡의 산수 형상에 대한 묘사는 매우 간략하여 서두에서 太 行 之 陽 有 盤 谷, 盤 谷 之 間, 泉 甘 而 土 肥 라고 말한 것이 전부일 뿐이다. 반곡의 형승이 널리 알려지며 조선 문인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원굉도가 유반산기(( 遊 盤 山 記 ) 를 짓게 되면서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17 세기 이후 원굉도의 1 소식, 東 坡 志 林 卷 七 歐 陽 文 忠 公 言 晉 無 文 章 唯 陶 淵 明 歸 去 來 兮 一 篇 而 已 予 亦 謂 唐 無 文 章 唯 韓 退 之 送 李 愿 歸 盤 谷 序 一 篇 而 已. 平 生 欲 效 此 作 一 文 每 執 筆 輒 罷 因 自 笑 曰 不 若 且 放 敎 退 之 獨 歩
유반산기 가 조선의 사대부에게 널리 읽혀지면서 반산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어 많은 연행사들이 이곳을 직접 유람하며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이는 조선 후기 원굉도 문학의 수용 양상과 관련해서도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이 글에서는 이의현( 李 宜 顯, 1669~1745)의 경자연행잡지( 庚 子 燕 行 雜 識 ), 이기지( 李 器 之, 1690~1722)의 일암연기( 一 庵 燕 記 ), 홍대용( 洪 大 容, 1731~1783)의 연기( 燕 記 ), 박지원의 열하일기( 熱 河 日 記 ), 작자 미상의 계산기정( 薊 山 紀 程 ), 김경선의 연원직지( 燕 轅 直 指 ) 등 반산에 대한 기록을 남긴 연행록을 대상으로 조선 문사들의 반산 유람 양상과 그 의미를 원굉도 문학의 수용 양상과 관련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2. 연행 노정과 반산의 인문지리적 특성 1720 년 연행을 떠나는 이의현에게 김대유( 金 大 有 )는 계주( 薊 州 ) 서쪽 수십 리 되는 곳에 반산( 盤 山 )이라는 산이 있는데, 몹시 기이하고 웅장하다. 일통지( 一 統 志 ) 에서는 반룡산( 盤 龍 山 )이라고 했다. 일찍이 연경( 燕 京 )에 갔을 때 여악( 閭 嶽 )과 천산( 千 山 )을 두루 보았지만 이 산이 가장 가까운데도 그대로 지나쳐서 지금까지 한이 된다. 2 라고 하며 연행길에 반산을 유람할 것을 권한다. 그렇지만 이의현은 반산을 직접 보지는 못하고, 원중랑( 袁 中 郞 )의 유기( 遊 記 )에서 꽤 험절( 險 絶 )해서 늙은 사람은 가 볼 수 없는 곳이다. 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또 바빠서 가보지 못하였으니 한탄스러운 일이다. 3 라고 하며 아쉬움을 토로한바 있다. 이 기록은 조선 후기 문사들에게 반산의 승경이 널리 알려졌으며, 원굉도의 유반산기 가 그 계기가 되었음을 알려준다. 연려실기술( 練 藜 室 記 述 ) 사대전고( 事 大 典 故 ) 부경도로( 赴 京 道 路 ) 조에 실려 있는 연행 노정에는 풍윤현( 豐 潤 縣 ) 1 백리, 옥전현( 玉 田 縣 ) 80 리, 계주( 薊 州 ) 80 리, 삼하현( 三 河 縣 ) 70 리, 통주( 通 州 ) 70 리, 북경( 北 京 ) 40 리다. 라고 되어 있는바, 북경과 2 국역 연행록선집 5, 경자연행잡지( 庚 子 燕 行 雜 識 ) 상, 민족문화추진회, 1976. 3 동상.
180 리 가량 떨어진 계주에 이르면 북경에 거의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일정상 여유가 있으면 반산을 유람하는 기록들이 많이 보인다. 4 지금의 천진시( 天 津 市 )에 속하는 반산은 북경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기에 북경 동쪽의 첫째 가는 산[ 京 東 第 一 山 ] 이라 불리며, 중국 15 명산 중의 하나로 꼽힌다. 반산은 북경에 수도를 정한 명청 시대에 역대의 황제들이 노닌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강희제 때에 정기산장( 靜 寄 山 莊 )이라는 행궁이 건축된 이래 청의 황제들은 특히 즐겨 찾은 곳이다. 5 반산은 상반( 上 盤 ), 중반( 中 盤 ), 하반( 下 盤 )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그 특이한 경관을 달리 말한다. 상반은 송승( 松 勝 ) 이라 하여 기암괴석에 뿌리내리고 자란 소나무, 중반은 석승( 石 勝 ) 이라 하여 갖가지 기기묘묘한 형상의 암석들, 하반은 수승( 水 勝 ) 이라 하여 암석과 어우러져 흘러내리는 계곡물이 각각 유명하다. 원굉도는 유반산기 의 첫머리에서 外 骨 而 中 膚 라 하여 반산의 겉모습은 골산( 骨 山 )이기에 깎아지른 바위가 위태롭게 솟아있지만 속으로는 살진 흙이 풍부하기에 과실나무가 무성하게 자란다고 했다. 6 이 말은 반산의 지리적 특성을 잘 파악한 말로 조선 문인들의 공감을 얻었던 것으로 보이니, 많은 연행록에서 원굉도의 이 말을 인용하고 있다. 기묘한 바위가 많이 있는 반산은 중국의 낯선 풍토 속에서 고국에 있는 삼각산이나 도봉산, 송악산, 월출산 등의 골산을 떠올리게 했다. 이기지는 기이한 봉우리가 겹겹이 솟아 있는 것이 대나무가 모여 있는 듯 하여 삼각산 백운대나 도봉산 4 계주의 반산 외에 연행 노정 중에는 산해관 바깥 요동 지방에도 반산역( 盤 山 驛 ) 이란 곳이 있다. 부경도로 조에는 우가장( 牛 家 莊 ) 40 리, 사령( 沙 嶺 ) 60 리, 고평역( 高 平 驛 ) 60 리, 반산역( 盤 山 驛 ) 40 리, 광녕( 廣 寧 ) 50 리, 여양역( 閭 陽 驛 ) 30 리, 석산참( 石 山 站 ) 40 리 등이 보이는데, 일부 연행록에 보이는 반산 관련 기사는 이 반산역을 말하는 것이다. 예컨대 1598 년(선조 31) 진주사( 陳 奏 使 )로 연행한 이항복( 李 恒 福 )의 조천록( 朝 天 錄 ) 에 요참( 腰 站 ), 연대( 煙 臺 )를 지나 반산관( 盤 山 館 )의 역사( 驛 舍 )에서 묵었다. 라는 기록은 곧 요동 지방의 반산역에 묵은 것을 말한 것이다. 5 1794 년(정조 18)년 연행을 마치고 돌아온 서장관 정동관( 鄭 東 觀 )이 정조에게 황제는 팔십 세 노령이지만 정력이 왕성하여 해마다 정월에는 원명원( 圓 明 園 )에 거둥하고 3 월에는 반산( 盤 山 )에 가며 초여름에는 열하( 熱 河 )에 행차하고 가을과 겨울이 바뀌는 기간에는 몽고( 蒙 古 )의 여러 번왕( 藩 王 )들을 모아서 만리 장성 북쪽 지역에서 사냥을 하는데 한 해 동안의 유람하는 날을 통틀어 계산하면 절반이 넘습니다. 라고 복명하고 있는 데에서도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6 袁 宏 道 集 箋 校 中, 甁 花 齋 集 권 5, 遊 盤 山 記 盤 山 外 骨 而 中 膚, 外 骨, 故 峭 石 危 立, 中 膚, 故 果 木 繁.
만장봉 같았다. 산의 높이는 우리나라의 삼각산과 견줄 만하며 7, 넓게 퍼지고 이리저리 중첩된 산세는 송악산에 견주면 갑절은 되었다. 8 라고 하여 바위 봉우리가 솟아 있는 모습이나 산 높이가 삼각산과 도봉산을 떠올리게 하며, 겹겹이 퍼진 산세는 개성의 송악산을 떠올리게 한다고 하였다. 아울러 반산 정상에는 요동석( 搖 動 石 )이라는 바위가 있어 손으로 밀면 움직인다고 하는데, 이를 두고 우리나라 월출산의 동석( 動 石 )에 견주기도 하였다. 9 이처럼 수려한 바위 봉우리가 겹겹이 솟아있는 반산의 경관은 고된 여정의 피로를 가시게 하였으니, 김경선은 숲의 무성함과 천석( 泉 石 )의 아름다운 경치가 요동, 심양 이후 처음 본 것 같아 마음과 눈이 갑자기 후련하여졌다. 10 라고 말하고 있다. 연행록 에는 반산의 유명한 사찰로 소림사( 少 林 寺 )를 들고 있으며, 이를 유람한 기록도 적잖게 남아있다. 현재 천진시 반산에 대한 소개를 보면 반산에는 허다한 사찰이 있었는데 지금은 대부분 폐사되었고, 천성사( 天 成 寺 ) 만송사( 萬 松 寺 ) 운조사( 雲 罩 寺 ) 천상사( 千 像 寺 ) 등이 있다고 한다. 11 이 중에서 천성사가 가장 규모가 크며 당대에 건립되었는데, 경내에 8 각 13 층 부도탑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작자 미상의 계산기정( 薊 山 紀 程 ) 에는 절 문으로 해서 동쪽으로 한 석탑( 石 塔 )에 이르니 탑은 13 층에 8 각으로 되었고, 경( 磬 )을 달았는데 그 7 삼각산 정상인 백운대의 높이가 836.5m 이고, 반산의 최고봉인 괘월봉의 높이가 864.4m 이니 두 산의 높이가 엇비슷하다고 하겠다. 8 一 庵 燕 記 권 2, 奇 峰 疊 立 若 攢 竹 如 三 角 之 白 雲 臺 道 峯 之 萬 丈 峯. 山 高 可 比 我 國 三 角 而 全 體 之 盤 踞 重 疊 比 松 岳 倍 之. 계산기정( 薊 山 紀 程 ) 권 4 에서도 이 산의 산세는 우리나라 송악산( 松 岳 山 )과 비슷하다. 봉만( 峯 巒 )이 첩첩이 둘러져 있어 원굉도( 袁 宏 道 )의 기문( 紀 文 )에 이른바 밖에는 뼈요 안은 살졌다.[ 外 骨 而 中 膚 ] 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1804 년 2 월 4 일 기사)라고 하여 반산을 송악산에 견주고 있다. 9 燕 行 日 記 산꼭대기에 큰 돌 하나가 있는데, 흔들면 문득 움직여서, 우리나라 월출산( 月 出 山 )의 동석( 動 石 )과 같았다. (1712 년(숙종 38) 12 월 24 일 기사). 10 국역 연행록선집 10, 연원직지( 燕 轅 直 指 ) 권 5, 회정록( 回 程 錄 ), 1833 년(순조 33) 2 월 9 일 기사. 11 http://www.yododo.com/area/detail/1-01-26-01-4242 참조.
소리가 은은하며 높이는 열 길이나 된다. 12 라고 하여, 8 각 13 층 탑을 구경한 사실을 말한 것으로 보면 어떤 연유로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천성사가 곧 소림사임을 알 수 있다. ( 도판 1 참조 ) 아울러 대부분의 연행록 에는 반산팔경( 盤 山 八 景 ) 이라 하여 자개봉( 紫 盖 峯 )ㆍ등운봉( 騰 雲 峯 )ㆍ선석령( 仙 石 嶺 )ㆍ낭갑석( 狼 甲 石 )ㆍ투한교( 投 閒 橋 )ㆍ장방 석( 帳 房 石 )ㆍ능각석( 菱 角 石 )ㆍ홍룡지( 紅 龍 池 )를 꼽고 있다. 연행록 에 따라서는 반산팔경 을 소림팔경( 少 林 八 景 ) 이라고도 부르며, 혹은 원굉도가 말한 반산팔경이라고도 하였다. 그런데 정작 원광도의 유반산기 에는 현공석( 懸 空 石 ) 천문개( 天 門 開 ) 홍룡지 등의 경관을 언급하고 있을 뿐, 반산팔경 혹은 팔경 이라는 말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원굉도의 기문이 널리 알려지면서 원굉도가 반산팔경을 말한 것으로 오인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원굉도의 기문 내용을 여러 차례 정확히 인용하면서 반산을 유람한 이기지는 소림사에 요양 차 와있는 호세도( 胡 世 圖 )란 선비를 만나 그의 방에서 대화를 나누면서 벽상에 소림팔경이라 써놓은 것을 보았다고 하였는데, 13 일암연기 기록의 신빙성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소림팔경이란 명칭을 정확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3. 윈굉도의 유반사기 와 일암연기 계산기정 의 반산 유람기 원굉도의 유반산기 는 1599 년 그의 나이 32 세 때 지어졌으며, 병화재집( 甁 花 齋 集 ) 권 5 에 수록되어 있다. 원굉도는 당시 국자감 조교( 國 子 監 助 敎 )의 관직을 맡아 북경에 머물고 있었는데, 시간을 내어 북경 부근의 반산을 유람하고 이 작품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글의 말미에 함께 유람한 사람은 소잠부( 蘇 潛 夫, 소유림), 아우 소수( 小 修, 袁 中 道 ), 승려 사심( 死 心 ) 보방( 寶 方 ) 적자( 寂 子 )이다. 이곳의 관장이면서 전에 와본 12 국역 연행록선집 8, 계산기정( 薊 山 紀 程 ) 권 4, 1804 년 2 월 4 일 기사. 여기에서는 반산의 그 밖의 사찰로 만송사( 萬 松 寺 ) 운조사( 雲 照 寺 ) 혜인사( 慧 因 寺 ) 등이 있다고 하였다. 13 연행록선집보유( 燕 行 錄 選 集 補 遺 ) 上, 일암연기 권 2, 又 書 少 林 八 景 於 壁 上 紫 盖 峯 騰 雲 峯 仙 石 嶺 ㆍ 狼 甲 石 ㆍ 投 閒 橋 ㆍ 帳 房 石 ㆍ 菱 角 石 ㆍ 紅 龍 池.
사람은 계주자사( 薊 州 刺 史 ) 종군위( 鍾 君 威, 鍾 起 鳳 )이다. 14 라고 한데서, 계주자사 종기봉의 안내로 몇몇 친우들과 함께 반산을 유람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유반산기 는 성령설을 주창한 원굉도의 사상적 지향이 반영된 작품으로 작자의 개성적 정감이 잘 발휘된 소품문( 小 品 文 )이다. 장대복( 張 大 復 )은 전편을 평하여 말하기를 園 石 公 遊 盤 山 記 如 春 花 美 女, 婉 媚 多 風 이라 하여, 봄꽃이나 미녀와 같이 완미한 풍치가 많다고 하였다. 유반산기 에서 작자의 정감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은 기암절벽이 많은 반산을 오르면서 길을 인도하는 승려와 극도로 위험한 곳을 만나면 웃음소리를 내기로 약속하였기에 웃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모두 간담이 서늘해졌다고 하며, 목숨을 걸지 않으면 어찌 이처럼 기이한 경관을 볼 수 있겠느냐고 한 부분이다. 15 진계유( 陳 繼 儒 )는 惡 得 有 此 奇 觀 也 라는 대목에 대해 열자가 바람을 몰아 훨훨 날아다닌 것은 진실로 쾌활한 일이지만 지금 목숨을 건다고 한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다.( 得 列 子 御 風, 翩 然 行 此, 方 爲 快 事, 若 判 命 則 太 險 矣 ) 라는 익살스런 평을 붙이고 있다. 기존의 산수유기에 비해 개성적 정감이 잘 표현된 유반산기 는 조선 후기 사대부 문인에게 널리 읽혀졌고, 배경이 되는 반산이 연행 길에 위치해 있기에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어 많은 연행록에 그에 관한 기사가 보인다. 그렇지만 실제로 반산을 유람한 기록은 그다지 많이 보이지 않는데, 앞의 이의현의 언급처럼 여정이 바빠 그대로 지나친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반산을 유람한 경우에도 대개 중반( 中 盤 )에 있는 소림사를 유람하는데 그친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산을 두루 유람하며 자세히 기록으로 남긴 것은 이기지의 일암연기 와 작자 미상의 계산기정 에 보이는데,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이기지는 1720 년 정사인 부친 이이명( 李 頤 命 )의 자제군관( 子 弟 軍 官 ) 신분으로 연행하였는데, 당시 31 세의 나이로 지적 호기심이 왕성한 청년 문사였다. 16 그는 9 월 16 일 북경으로 향하는 길에 반산을 유람하고 기문을 남겼는데, 여기에서 원굉도의 14 錢 伯 城 箋 校, 袁 宏 道 集 箋 校 中 ( 上 海 古 籍 出 版 社, 1979 년) 689~690 면. 偕 游 者, 曰 蘇 潛 夫 小 修 僧 死 心 寶 方 寂 子. 其 官 于 斯 而 以 舊 雅 來 者, 曰 鍾 刺 史 君 威. 15 先 與 導 僧 約, 遇 絶 嶮 處, 當 大 笑, 每 聞 笑 聲, 皆 膽 落. 世 上 無 判 命 人, 惡 得 有 此 奇 觀 也? 16 이기지는 북경에 머물 때 천주당에서 만난 서양 선교사와 깊이 교류하며 서학( 西 學 )에 상당한 영향을 받으며 문화적 충격을 겪는데, 이에 대해서는 필자가 이기지의 일암연기 와 서학 접촉 양상 ( 동방한문학 29 집, 동방한문학회, 2005.)에서 소개한바 있다.
유반산기 를 무려 8 차례나 인용하면서 원굉도가 말한 명승처를 하나하나 확인하고 있다. 상당히 긴 장편의 유기( 遊 記 )이기에 그 중 원굉도의 기문을 인용한 대목만 제시해보면 다음과 같다. (밑줄 친 부분이 원굉도의 기문을 인용하고 있는 대목인데, 유반산기 의 원문 내용을 정확히 드러내기 위해 해당 부분에는 인용 표시를 해서 구별하였다.) 1 寺 僧 多 出 迎 者 余 問 盤 頂 白 塔 旁 寺 名 答 雲 照 寺 仍 指 諸 峰 問 名 北 邊 最 高 者 紫 盖 峰 也 西 邊 則 仙 石 臺 也. 上 方 寺 在 紫 盖 峰 之 東 而 千 年 老 松 盤 屈 石 上 如 龍 虎 狀 千 形 萬 態 不 可 盡 述. 袁 中 郞 宏 道 盤 山 記 所 謂 松 之 抉 石 罅 出 者 㠌 嶔 蛇 曲 與 石 爭 怒 其 幹 壓 霜 雪 不 得 伸 故 旁 行 側 偃 每 十 餘 丈 者 也.; 소림사 승려에게 반산 정상에 있는 절의 이름이 운조사( 雲 照 寺 )라는 대답을 듣고, 봉우리 이름을 물음. 자개봉 동쪽에 있는 상방사의 소나무가 기이한 자태라는 말을 듣고 유반산기 의 내용을 떠올림. 2 左 右 皆 石 峯 若 飛 動 天 門 開 在 紫 盖 峰 之 東 騰 雲 峰 在 懸 空 石 之 東 投 閒 橋 在 紫 盖 峰 之 腰 而 天 成 石 橋 也. 袁 記 言 其 山 高 古 幽 奇 無 所 不 極 述 其 最 者 初 入 得 盤 泉 次 曰 懸 空 石 最 高 曰 盤 頂 也. ; 소림사 승려에게 반산의 기이한 경치에 대해 소개받으면서, 유반산기 에서 반천( 盤 泉 ) 현공석( 懸 空 石 ) 반정( 盤 頂 )을 가장 기이한 것으로 꼽은 것을 말함. 3 盖 自 此 寺 之 東 沿 溪 而 上 歷 懸 空 石 上 上 方 寺 也. 問 路 則 今 日 內 不 可 回 還 云. 袁 記 又 言 懸 空 石 數 峯 一 壁 靑 削 到 地 石 粘 空 而 立 如 有 神 氣 性 情 者 亭 負 壁 臨 絶 澗 澗 聲 上 徹 與 松 韻 答 其 旁 爲 上 方 精 舍 盤 之 絶 勝 處 也. 盤 頂 如 初 筍 銳 而 規 上 爲 窣 堵 [ 원굉도전집 에는 諸 로 되어 있음] 波 日 光 橫 射 影 落 塞 外 奔 風 忽 來 飜 雲 倒 [ 원굉도전집 에는 抹 로 되어 있음] 海 住 足 不 得 久 乃 下. 迂 而 僻 且 無 石 級 者 曰 天 門 開 從 髻 石 取 道 闊 以 掌 山 石 礙 [ 원굉도전집 에는 一 로 되어 있음] 右 臂 左 履 虛 不 見 底 大 石 中 絶 者 數. 先 與 導 僧 約 遇 絶 險 處 當 大 笑 每 聞 笑 聲 皆 膽 落. 捫 蘿 探 棘 更 上 下 僅 得 度. 兩 岩 秀 削 立 太 古 雲 嵐 蝕 壁 < 色 - 원굉도전집 에 없는 글자가 추가된 것임> 皆 翠. 下 得 枰 石 方 ( 廣 - 원굉도전집 에 있는 글자가 빠진 것임) 可 几 筵 撫 松 下 瞰 驚 定 乃 笑. 世 上 無 判 命 人 惡 得 有 此 奇 觀 也. ; 현공석( 懸 空 石 )을 거쳐 상방사( 上 方 寺 )로 갈 수 있는데 오늘 중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유반산기 에서 현공석에 대해 묘사한 내용을 떠올림. 아울러
반산의 암벽 사이를 유람하면서 험절한 곳을 만나면 웃음 소리를 내라하며, 목숨을 걸지 않으면 어찌 이런 기이한 경치를 볼 수 있겠느냐는 유반산기 의 내용을 길게 인용함. 4 池 在 寺 東 百 餘 步 石 壁 下 石 池 天 成 細 而 長 三 丈 餘 廣 一 丈 深 綠 靑 紺 可 愛 玩. 水 味 甘 寒 苔 色 斑 爛 水 自 石 罅 曲 折 流 出 池 外 壁 面 大 刻 紅 龍 池 三 字. 卽 袁 記 所 云 石 泉 奇 僻 而 蛇 足 之 者 曰 紅 龍 池 也. ; 홍룡지( 紅 龍 池 )를 가서 보고, 유반산기 에서 이에 대해 묘사한 내용을 떠올림. 5 懸 空 石 左 右 數 峯 自 地 上 突 起 直 出 雲 宵 渾 身 無 一 皺 紋 瑩 潤 如 靑 玉 望 之 森 然 動 魄. 然 袁 記 所 謂 一 壁 靑 削 到 地 石 粘 空 而 立 如 有 神 氣 性 情 云 者 不 知 是 何 峯 也.(4에서 인용한 구절 중 일부를 다시 인용한 것임) ; 현공석을 직접 보고서 유반산기 에서 말한 암석이 무엇을 지칭한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함. 6 東 邊 澗 谷 深 邃 松 樹 蔥 蒨 僧 言 這 裡 多 可 觀 云. 想 袁 記 所 謂 奔 泉 夭 矯 曲 折 觸 巨 細 石 皆 鬪 故 鳴 聲 徹 晝 夜 不 休 ( 유반산기 의 일부 구절을 생략함) 泉 莽 莽 行 ( 至 是 ) 落 爲 小 潭 白 石 卷 而 出 底 皆 金 沙 云 者. 從 此 澗 泝 上 皆 可 得 之 而 行 忙 不 能 尋. ; 동편 계곡이 깊고 소나무가 우거져 기이한 경치가 많다는 말을 듣고 유반산기 에서 계곡물을 묘사한 대목을 떠올림. 7 袁 記 謂 外 骨 而 中 膚 裏 面 當 有 土 山 而 爲 衆 峰 所 遮 不 可 見 矣. ; 유반산기 에서 外 骨 而 中 膚 하다는 말을 떠올리며 속에 토산( 土 山 )이 있을 텐데 여러 봉우리에 가려져 볼 수 없다고 함. 8 余 以 淸 心 丸 火 金 一 贈 雲 如 要 同 行 指 示 帳 房 菱 角 狼 甲 石 遂 與 雲 如 自 寺 前 石 臺 東 下. 하산하면서 낭갑석, 능각석, 장방석의 순으로 구경함 袁 記 所 謂 慧 石 距 上 方 百 步 纖 瘦 豊 姸 不 一 態 生 動 如 欲 語 者 想 不 誣 也 ; 하산하면서 낭갑석( 狼 甲 石 ) 능각석( 菱 角 石 ) 장방석( 帳 房 石 )을 구경하고 유반산기 에서 암석의 기이한 자태를 묘사한 대목을 떠올림. 이기지는 반산을 유람하면서 도처에서 유반산기 에서 묘사한 내용을 떠올리고 있으니, 그에게 원굉도의 기문은 반산 유람에 있어 일종의 가이드북 구실을 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기지는 원굉도의 기문을 8 차나 인용하였는데, 거의 모든 글자를 정확히 인용하고 있다. 다만 3에서 장문의 글을 인용하면서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는 글자가 보이는데, 대부분은 통용되거나 의미상 추가, 또는 생략할 수 있는 글자이다. 의미상 차이를 보일
수 있는 글자는 반산 정상을 묘사한 대목 중 上 爲 窣 堵 [ 원굉도전집 에는 諸 로 되어 있음] 波 라는 대목과 山 石 礙 [ 원굉도전집 에는 一 로 되어 있음] 右 臂 이라는 대목이다. 이 중에서 뒤의 礙 자는 원굉도집전교( 袁 宏 道 集 箋 校 ) 에서 一 小 修 本, 遺 本 作 礙 17 이라 하여, 원굉도의 동생인 원중도( 袁 中 道 )가 편찬한 원중랑선생전집( 袁 中 朗 先 生 全 集 ) 에는 一 자로 되어 있음을 교감에서 밝히고 있다. 따라서 礙 와 一 두 글자의 차이는 서로 다른 이본을 본 데서 연유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원굉도전집 에 窣 諸 波 로 된 것이 일암연기 에는 窣 堵 波 로 되어 있는데, 사리탑을 뜻하는 음역어로 窣 堵 波 가 보다 일반적인 쓰이는 글자이며, 이는 반산 정상에 있는 탑을 말하는 것이다.( 도판 2 참조 ) 이기지가 이처럼 유반산기 를 정확히 인용하고 있는 것은 유반산기 의 전문을 머리 속에 정확히 외우고 있었거나, 유반산기 를 지니고 반산을 유람하면서 글의 내용을 일일이 확인했거나, 둘 중의 하나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가 8 차나 원굉도의 기문을 인용하면서 유반산기 를 지니고 갔다는 언급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볼 때, 자신의 머리 속에 외우고 있는 내용을 자연스레 떠올린 것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기지의 반산 유람기에서 우리는 단편적이나마 18 세기 조선의 문사에게 미친 원굉도의 영향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기지는 반산을 유람하고 소림사로 내려오는 길에 정숙( 正 叔 )이란 수행원에게 먹을 갈게 해 모년 모월 조선 이모가 올라왔다. 수행원으로 한경주( 韓 景 周 ) 개천( 開 川 ), 정숙( 正 叔 )이 함께 올랐다( 某 年 某 月 朝 鮮 李 某 來 登 從 人 韓 景 周 開 川 正 叔 同 登 ) 이라고 암벽 위에 대자( 大 字 )로 쓰게 했다. 반산 유람의 흥취에 한껏 취한 조선의 청년 문사의 모습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반산을 떠나오면서 이기지는 소림사 백탑을 바라보면서 소림사 백탑이 산허리에 우뚝 솟아있는데, 마치 사람이 머리를 쳐들고 서서 들판의 떠나가는 이를 바라보며 정이 남아 있는 듯 했다. 말 위에서 자주 머리를 돌려 쳐다보다가 모습이 보이지 않자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18 라고 하여 그 아쉬움을 토로하였다. 1720 년 이기지 이후에 1765 년 홍대용( 洪 大 容 ), 1798 년 서유문( 徐 有 聞 ), 1833 년 김경선( 金 景 善 ) 등이 반산을 유람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반산의 17 錢 伯 城 箋 校, 袁 宏 道 集 箋 校 中, 上 海 古 籍 出 版 社, 690 면. 18 일암연기 권 2, 少 林 白 塔 亭 亭 立 山 腰 如 人 仡 立 望 大 野 行 人 似 有 情 焉. 馬 上 頻 頻 回 顧 失 之 悵 然.
소림사를 유람하는데 그쳤으며, 그 기록 또한 소략한 편이다. 이에 비해 1804 년의 연행 기록인 작자 미상의 계산기정( 薊 山 紀 程 ) 은 반산을 두루 유람하고 이를 자세히 기록으로 남겼는바, 이를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반산 소림사를 유람하는 대목이다. 담장 수백 보 뒤에 큰 사찰이 산을 등지고 있는데, 단청이 찬란하고 실내가 정결하여 자못 산방( 山 房 )의 정취를 자아낸다. 사찰 밑에 2 개의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전면에 새겨진 것은 모두 건륭 황제의 어제시( 御 製 詩 )이다. 절 문으로 해서 동쪽으로 한 석탑( 石 塔 )에 이르니 탑은 13 층에 8 각으로 되었고, 경( 磬 )을 달았는데 그 소리가 은은하며 높이는 열 길이나 된다. 돌사다리로 올라가 탑신( 塔 身 ) 전면에 서서 보니 밑에는 광야이고, 뒤에 고봉( 高 峯 )을 지고 있어 시야가 더 없이 아득하고 마음은 자연 상쾌하다. 대개 이 산에 3 반( 盤 )이 있는데, 이것이 중반( 中 盤 )이라 한다. 다시 사찰로 돌아와 들어가니 승려 한 사람이 있어 매우 친절하게 맞아준다. 그 승려의 이름과 호를 물었더니 이름은 자지( 子 志 ), 호는 항의( 恒 義 )이며, 강서 무주부( 江 西 撫 州 府 ) 사람이라. 한다. 탁상에 청록색 자기( 磁 器 )의 찻종[ 茶 鍾 ]이 있는데, 반산소림사( 盤 山 少 林 寺 ) 다섯 글자를 넣어서 구운 것이다. 승려는 찻종을 주면서 말하기를 귀국에 돌아가 친구들에게 반산에 놀 때 중 아무개를 만났는데 이 찻종을 주더라. 고 하면 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소. 하기에, 나 또한 반산 두 자가 좋아서 그것을 받고 부채[ 扇 ], 환약( 丸 藥 ) 등을 선물했다. 19 현재 천성사로 불리는 소림사 바위에 새겨진 건륭 황제의 어제시와 8 각 13 층 석탑을 구경하고 돌아온 일행에게 자지( 子 志 )란 이름의 소림사 승려는 반산소림사( 盤 山 少 林 寺 ) 란 글자가 새겨진 찻종을 선물한다. 일행은 답례로 부채와 환약 등을 선물했다고 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때 소림사 승려에게 받은 찻종에 대한 이야기가 1829 년 연행한 박사호( 朴 思 浩 )의 연계기정( 燕 薊 紀 程 ) 에 보인다는 점이다. 박사호는 반산을 유람하고 돌아온 부사 일행이 원굉도의 기문에 나오는 반산의 절경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 나서, 내가 지난날 추양( 秋 陽 ; 당시 사행의 서장관이었던 徐 長 輔 를 말함)의 서실( 書 室 )에서 찻종 하나를 보았는데, 청실 빛깔[ 靑 糸 色 ]에 가는 글자로 19 국역 연행록선집 8, 계산기정( 薊 山 紀 程 ) 권 4, 1804 년 2 월 4 일 기사.
반산소림사( 盤 山 小 林 寺 )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20 라고 하여 예전에 서장보의 서실에서 보았던 찻종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박사호가 서장보의 서실에서 보았던 반산소림사 란 글자가 새겨진 푸른색 찻종은 1804 년 연행한 이들이 받은 찻종과 똑같은 종류의 것으로 보인다. 1804 년 계산기정 의 저자가 받은 찻종 바로 그것이 서장보에게 전해졌을 가능성도 없진 않겠지만, 그보다는 반산을 유람하는 연행사절들에게 일종의 기념품처럼 반산소림사 란 글자가 새겨진 찻종을 선물로 주는 일이 빈번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찻종을 선물 받은 계산기정 의 작자는 이어서 원굉도가 기문에서 언급한 천문개( 天 門 開 ) 등운봉( 騰 雲 峯 ) 투한교( 投 閒 橋 ) 반천( 盤 泉 ) 현공석( 縣 空 石 ) 반정( 盤 頂 ) 상 방사( 上 方 寺 ) 등을 떠올리고 나서, 반산팔경 중에 오늘 볼 수 있는 곳을 묻는다. 소림사 승려에게 자개봉과 등운봉은 올라갈 수 없다는 말을 듣고, 계산기정 의 작자는 홍룡지를 구경하고 나서 산길을 내려오면서 석승( 石 勝 ) 으로 유명한 중반( 中 盤 )의 기묘한 바위들을 구경한다. 석벽 사이에 대망( 大 蟒 )이 나는 듯한 큰 바위가 있는데 이는 대망석( 大 蟒 石 )이라 하며, 호랑이가 앉은 것 같은 바위가 있는데 이는 호석( 虎 石 )이라 하며, 연꽃같이 3 각형으로 되어 1 각은 땅에 묻히고 양각( 兩 角 )은 공중을 향하고 있어 그 크기가 집채만 한 것이 있는데 이는 능각석( 菱 角 石 )이라 한다. 사람이 모자를 쓴 것처럼 생겨 석대( 石 臺 ) 위에 높이 서 있는 것이 있는데 이는 모석( 帽 石 )이라 한다. 꼽추처럼 구부리고 빗겨 서서 석문( 石 紋 )이 난 것이 있으니 이는 낭갑석( 狼 甲 石 )이라 한다. 혹은 모나고 혹은 둥글며 혹은 뾰족하고 혹은 펑퍼짐하여 무슨 모양이라 해야 될지 모르겠다. 모두 각양 각색이다. 원( 袁 )의 기문 에 이른바 혜석( 慧 石 )이 살아서 말하려는 것 같다.[ 慧 石 生 動 如 欲 言 ] 함은 과연 옳은 말이다. 맨 밑에 장방석( 帳 房 石 )이 있는데 이 돌은 마치 바둑판 같아 너비와 길이는 모두 두 길이 넘고, 높이는 한 길이나 되며, 석면( 石 面 )은 갈아 놓은 것처럼 판판하다. 그 위 네 귀에는 구멍이 뚫려 장주( 帳 柱 )를 세울 만하기 때문에 장방( 帳 方 )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이 돌 위에 올라앉아 20 국역 연행록선집 9, 연계기정( 燕 薊 紀 程 ), 1829 년 2 월 6 일 기사.
행궁( 行 宮 )의 전경을 굽어보니, 층마다 나는 것 같다. 그 복판에 정전( 正 殿 )이 있는데 이는 단청을 하지 않았다. 21 대망석( 大 蟒 石 ) 호석( 虎 石 ) 능각석( 菱 角 石 ) 모석( 帽 石 ) 낭갑석( 狼 甲 石 ) 장방석( 帳 房 石 ) 등 기기묘묘한 형상의 바위들을 보고난 작자는 혜석( 慧 石 )이 살아서 말하려는 것 같다.( 慧 石 生 動 如 欲 言 ) 고 한 원굉도의 말을 수긍하고 있다. 여기에서 보았다는 기암 중에 능각석과 장방석은 특별히 반산팔경에 꼽히는 것들이다. 장방석에 앉아 굽어보았다는 행궁은 곧 정기산장( 靜 寄 山 莊 )을 말하며, 작자는 산을 내려와 행궁을 보려고 문지기에게 간청했으나 황제가 오는 28 일에 행차하기에 금혼( 禁 閽 )이 엄해서 허락을 받지 못한다. 계산기정 의 작자 역시 반산을 떠나면서 종일 올라가 구경하고 돌아와도 아쉬운 생각이 있어 지나온 곳을 다시 돌아보았다. 산허리에 사람이 서 있는 것 같은 흰 탑이 수십 리를 지나와도 오히려 은연히 보인다. 22 라고 하여, 반산 소림사의 백탑이 사람처럼 서 있다고 하며 아쉬움을 표하고 있다. 4. 맺음말 21 동상. 22 동상.
도판 1 天 成 寺 和 万 佛 舍 利 塔 ( 少 林 寺 8 각 13 층 탑) 도판 2 반산 정상의 백탑( 白 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