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국제정치와 전쟁 10강 제국 을 향한 무모한 질주: 미국-유럽-일본의 제국주의 공세의 현 상황 (1) 리비아 전쟁과 아프리카 재식민지화 박찬식 교수 1
4. 제국 을 향한 무모한 질주: 미국-유럽-일본의 제국주의 공세의 현 상황 1) 리비아 전쟁과 아프리카 재식민지화 (10강, 11강) 2) 중동에서의 확전(1): 시리아 (12강) 3) 중동에서의 확전(2): 예고된 과녁 이란 (13강) 4) 미국의 태평양 귀환과 전운이 고조되는 동아시아 (14강) 5) 중남미: 저강도 전쟁? (15강) 5. 새로운 제국주의의 특징: 제국적 제국주의 6. 21세기 제국주의의 모순과 전망 리비아 사태의 중요성 오바마 정권 등장 이후 시작된 첫 전쟁 부시-네오콘만 물러가면 되는 게 아니었다. 오바마 등장 이후 스마트파워 전략과 다자주의에 의해 재구축된 제 국주의: 나토를 중심으로 결속한 가운데 유럽(프랑스, 영국)을 앞세 움. 유럽: 문제는 몫이었지 제국주의적 침략 반대가 아니었다. 새로운 모델의 창출 내부에서의 무장반란->내전->대규모 희생->인도주의적 개입 UN을 통한 형식적 결의와 나토의 군사행동 미디어의 왜곡과 진보/좌파의 혼란 극대화: 반제반전운동의 붕괴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왜곡된 언론보도의 극치: 진보언론도 진보세력 대부분 인도주의적 개입 지지 반제/반전에 적극적이었던 서구 및 국내 좌파들까지도 동조 2
이른바 아랍의 봄 2010년 12월 튀니지에서 노점상 청년이 부패한 경찰의 단속에 항의 하여 분신자살한 것을 계기로 반정부 시위 확대: 군부의 중립에 따 라 벤 알리 대통령 사우디로 망명. 2011년 1월 25일부터 이집트에서 반독재 시위가 벌어져 2월 11일 무바라크 퇴진. 2011년 12월~2012년 2월 사이에 알제리, 수단, 모로코 등 아프리 카나라들과 요르단, 오만, 사우디, 레바논, 이라크, 바레인, 쿠웨이트 등으로 시위 확산. 독재와 부패, 인권침해와 더불어 경기침체와 실업, 빈부격차, 식량 가격 급등 등 사회경제적 요인들이 작용. 그러나 리비아의 경우는 튀니지, 이집트 등과는 전혀 다른 양상과 성 격 시위 발발: 초기부터 폭력적 양상으로 전개 2012년 2월 15일 제2도시 벵가지에서 투옥된 인권변호사 페티 타 르벨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 발생. 경찰 및 친정부 시위대와 충돌 로 38명 부상. 리비아 정부는 변호사를 석방하고 16일에는 수감 중인 리비아 이슬 람 전투집단 구성원 110명 석방도 발표. 16일에도 시위는 계속되고 다른 도시로도 확산. 친정부 세력도 전국 적으로 시위. 분노의 날 로 명명된 17일 트리폴리를 비롯하여 여러 도시로 확산: 특히 동부지방의 벵가지, 아즈바디아, 알 바이다, 다나 등. 시위는 진원지인 벵가지에서도 천여 명 수준 정도였으나 공공건물 방화 등 폭력적인 양상을 띠면서 해산과정에서 사상사 발생. 3
시위에서 무장봉기로 18~20일 사이 시위 더욱 폭력적으로 격화: 곳곳에서 관공서, 경찰 서, 방송국 등이 불타고 벵가지에서는 수천의 시위대가 법원을 점거 하고 왕정 시절의 국기 게양. 폭탄 차량으로 군 기지를 공격하자 군 이 발포, 시위대 다수 사망. 북서지방에서는 바르카 이슬람토후국 이라는 그룹이 무장 봉기, 군 인 4명을 살하고 항구를 공격, 70여 대의 군용차량 탈취. 트리폴리에서도 시위대가 방송국 등을 장악하고 내무부와 인민위원 회 청사, 경찰서 등 방화. 군은 기관총, 박격포, 무장헬기로 시위대를 공격했다고 보도됨. 18일부터는 사실상 무장봉기의 양상. 20일 가다피 차남이 국영TV에서 시위진압의 실수 일부 시인하고 헌법 제정 등 정치개혁 용의 밝힘. 아울러 탱크 등이 반정부 시위대 에 장악되었다며 내전 발발 경고. 무장봉기에서 내전으로: 일주일만에! 2월 21일부터 리비아는 사실상 내전 상태 돌입: 시위대는 반군으로 성격이 변하고 벵가지, 토브룩 등의 도시를 무력으로 장악. 리비아 동부 키레나이카 지역은 반군의 해방구가 됨. 트리폴리에서도 총격 전이 벌어졌으나 정부군이 통제. 베네수엘라로 망명했다는 소문에 대응해 가다피는 21일 이후 몇 차 례 국영TV에 나와 결사항전을 선언. 2월 23일 반군이 동부 벵가지, 토브룩 외에 미스라타 등 중부지역과 사하브 등 남부지역을 장악하고 24일에는 트리폴리 서쪽 자위야에 서 교전이 벌어져 100명 이상 사망. 25일 트리폴리 외곽에서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고 가다피가 녹색광 장 건물 옥상에 나타나 석유를 사수하고 리비아의 독립과 영광을 지켜내자 고 연설. 4
무장봉기에서 내전으로 법무장관 무스타파 압둘 잘릴, 내무장관 압둘 파타 유니스가 시위 진압에 항의하여 퇴진, 반정부 세력에 참여하고 유엔 부대사를 비롯, 영국, 인도, 미국, 인도네시아, 중국, 방글라데시, 폴란드 및 아랍연 맹 대사 등 외교관들이 사임하고 반군에 가담. 2월 27일 벵가지에서 사임한 전 법무장관 압둘 잘릴이 이끄는 리비 아 과도국가위원회 설립: 반정부세력 결집하고 3월 5일 군사위원회 를 설립하여 체계적인 군사행동에 들어감. 정부군은 전국적인 공습 과 더불어 친정부 시민들에게 무기 지급하며 맞섬. 내전으로부터 나토의 군사적 침공으로: 불과 한 달만에! 2월 20일 미국은 리비아 정부가 평화적인 시위대에 치명적인 폭력 을 행사하고 있다고 규탄하는 성명 발표. 휴먼 라이츠 워치 민주주의를 위한 국가원조기금 등 24개 국제 NGO들은 리비아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전쟁범죄에 해당하는 잔학 행위를 벌이고 있다며 유엔 안보리를 통한 개입 촉구. 2월 22일 국제형사재판소, 가다피와 그 아들 등 기소 결정. 2월 24일 오바마 대통령은 리비아 정부의 폭력 진압을 비난하면서 취할 수 있는 모든 방안을 준비하라고 지시. 유엔 안보리는 강경진 압을 규탄하는 언론발표문 의결. 2월 26일 유엔 안보리 가다피와 핵심세력들의 재산동결과 국제형사 재판소 조사 포함하는 결의 1970 통과. 3월 10일 프랑스 정부 과도국가위원회를 유일 합법정부로 인정. 5
나토의 침공과 가다피 정권의 붕괴 3월 정부군, 대대적인 반격으로 벵가지 인근까지 장악. 3월 17일 유엔 안보리: 비행금지구역 을 설치하고 시민들을 보호 하기 위하여 외국의 점령(지상군)을 제외한 모든 필요한 수단 사 용을 승인하는 결의1973 채택. 상임이사국인 중국 러시아와 브라질 인도 독일 기권) 3월 19일 프랑스 공군 벵가지 주변에 전투기 배치. 미국과 영국은 잠수 함에서 리비아 전역에 토마호크 미사일 발사하여 리비아 대공방어망 파괴하고 반군 장악지역에 대한 정부군 공격 차단. 3월 31일 나토가 작전권 인수. 대대적인 공습으로 리비아군 무력화. 공 습 외에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요르단, 카타르, 아랍에미레이트의 특수부대 투입, 트리폴리 등에서 지상작전 수행. 나토군 개입 이후 5개월여 전투가 계속된 후 8월 23일 집중 공습으로 트리폴리 함락. 10월 20일 시르테 함락과 함께 가다피 총격 사망. 리비아 마그레브(해가 지는 곳): 아랍세계의 서쪽.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남유럽과 마주 국토 대부분이 사막. 인구 640만의 작은 나라 6
16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1911년 이탈리아-투르크 전쟁 이후 이탈리아 지배 하에 있다가 2차 대전 후 영국, 프랑스의 분할통치 거쳐 1951년 독립. 이탈리아 지배 하에 있던 세 지역(트리폴리타니아, 페잔, 키레나이카) 이 리비아 연합왕국으로 가장 큰 동부 키레나이카 지역 사누시 교단(이슬람 수피즘계열)의 지도자였던 이드리스1세가 국왕으로. 각 지역은 지리적, 역사적으로 독립적: 하나의 정치체로 뭉쳐본 적 없고1960년대까지도 독자적 정체성 유지. 3대 부족(가다파족, 와르팔라, 주와야)을 중심으로 14대 부족이 있 고 여기서 갈라진 500개의 크고 작은 부족으로 나뉘어 대립. 가다피 집권 이후 가다파족 등 서부가 주도: 그러나 도시화와 유목 종족에 대한 지원으로 지역/부족간 갈등이 다소 완화. - 7
1969년 무혈혁명으로 가다피 집권: 이슬람 사회주의 체제 수립. 1977년 인민주권 확립 선언 : 자마하리아("대중의 국가")라는 독특 한 직접 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함. 1979년 혁명지도자라는 명예직함 외에 모든 공직에서 사퇴했으나 사실상 최고지도자이며 권력자로 역할.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주거와 교육, 의료 등 종합적인 사회 복지 실현. 반제국주의와 아랍민족주의 노선 미국 군사기지 철수시키고 외국자본 추방하고 석유 및 도로, 해운, 항공 등 기반시설 국유화. 1973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시 OPEC의 석유 감산 주도. 이집트, 시리아와 연방 시도: 1977년 이집트의 친이스라엘 정책에 반발하여 탈퇴. 이란과 팔레스타인 지원. 제국주의의 가다피 정권 전복 시도: 날조된 테러혐의를 이용 1986년 1월 자국내 리비아 자산 동결, 무역 금지, 리비아 거주 미국 인 철수. 3월 리비아 해안순시선 폭침, 승무원 50여 명 살해. 4월에 는 트리폴리와 벵가지 폭격, 가다피 양녀 포함 100여 명 살상. 1992~3년 유엔안보리를 통해 항공기 운항금지, 무기금수, 해외자 산 동결, 원유 관련 장비 수출입 금지 등 제재. 1996년 시르테에서 가다피가 탄 차량이 영국 M16이 고용한 저격수 에 의해 피격. 8
날조된 테러 혐의 1972년 뮌헨 올림픽 이스라엘 선수 살해: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검 은 9월단 의 범행이었으나 리비아 연루 주장. 1986년 4월 서베를린 라벨 디스코텍 폭파로 미군병사 2명과 터키 여성 1명 사망, 200여 명 부상당한 사건: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팔 레스타인 과격단체의 소행으로 결론지었으나 레이건 정부는 리비아 의 소행으로 몰아 리비아 공습. 리비아인 5명을 범인으로 처벌. 1998년에 미국과 이스라엘 정보기관이 팔레스타인인을 이용한 공 작으로 드러남. 1988년 미국 민항기 펜암103편 폭파 사건: 리비아 소행으로 단정하 고 용의자 2명 인도 요구. 가다피는 증거 제시를 요구하며 거부했으 나 군사보복 위협으로 인도. 그러나 2001년까지 이어진 재판과정에 서 증거 부실. 엉터리 재판으로 비판 받음. 개혁개방과 서방과의 화해 시도 92년 이후 UN의 경제제재와 유가하락 등으로 경제침체. 90년대 말 이후 유가상승과 더불어 점진적인 경제자유화 실시 2003년 12월 핵무기 의혹시설과 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를 모두 자진 폐기하고 국제원자력기구 등 국제기구의 사찰 요구 2003~4년 UN과 미국의 제재 해제. 2005년에는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고 2005년 공식 수교. 라이 스 국무장관은 가다피의 역사적 결단 을 높이 평가하고 이란과 북 한에 대해 대량살상무기 자진폐기를 촉구. 경제봉쇄 해제와 더불어 외국인 투자 유치 등을 통한 경제회복 추진: 석유 수입 증가와 더불어 2008년까지 높은 경제성장률. 가다피 2남 세이프 알-이슬람을 중심으로 한 유학파가 친서방 자본 주의적 개혁 주도.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