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군 기타 유적 목록 번 호 유적명 소재지 유 적 종 류 비 고 1 강화동종 강화읍 관청리 1040 기타 2 북관운묘 강화읍 관청리 706 묘 3 성공회강화성당 강화읍 관청리 250 기타 사적 제 424호 4 고려고종왕릉 강화읍 국화리 산180 묘 사적 제 224호 5 황선신묘 강화읍 대산리 산122 묘 6 남관운묘 강화읍 신문리 532-1 묘 7 동관제묘 강화읍 신문리 467 묘 8 유일충묘 강화읍 월곶리 산16-1 묘 9 황형택지 강화읍 월곶리 242 기타 10 윤집택지 강화읍 월곶리 615-1 기타 11 황형사당 강화읍 월곶리 대묘동 665-1 묘 12 황형묘 및 신도비 강화읍 월곶리 대묘동 665-1 묘 13 고려왕릉지 선원면 냉정리 산11 묘 14 조요용묘 선원면 물우리 산70-52 묘 15 철종외가묘 선원면 냉정리 산70-46 묘 16 철종외가 선원면 냉정리 264 가옥 17 고려 가왕릉 선원면 연리 능골 산 17 묘 18 광성보 순절묘단 불은면 덕성리 산11 묘 19 허유전묘 불은면 두운리 산297 묘 20 고경신묘 불은면 두운리 87-1 묘 21 이규보묘 길상면 길직리 산115 묘 22 강화온수리성공회 길상면 온수리 505 근대건축 23 방식 묘 화도면 문산리 산431 묘 24 기우제단지 화도면 문산리 산64-1 기타 25 선두포구 화도면 사기리 119-24 포구 26 이건창생가 화도면 사기리 167-3 가옥 27 참성단 화도면 흥왕리 산42-1 사묘 28 이건창묘 양도면 건평리 655-1 묘 29 곤릉 양도면 길정리 산75 묘 사적 제371호 30 진강장지 양도면 길정리 산179 기타 31 석릉 양도면 길정리 산182 묘 사적 제369호 32 가릉 양도면 능내리 산16-2 묘 사적 제370호 33 전신생가지 양도면 인산리 산446-1 가옥 34 예천군 이천묘 양도면 조산리 산64-1 묘 35 송세영묘 양도면 하일리 산68 묘 36 김취려묘 양도면 하일리 산70 묘 37 정제두묘 양도면 하일리 산65 묘 38 정유성묘 양도면 하일리 산65 묘 39 권개묘 양도면 하일리 66-4 묘 (1)강화동종 ( 江 華 銅 鐘 ) 소재지 : 강화읍 관청리 1040 유적현황 : 원래는 강화읍 관청리 高 麗 宮 址 內 江 華 留 守 00 이란 현판이 있는 정면 3
칸 측면 2칸의 무출목 이익공의 건물안에 있었으나 현재는 강화역사관에 소장되어 있다. 명 문에 의하면 이 銅 鐘 은 朝 鮮 肅 宗 37년(1711) 강화유수 尹 趾 完 이 주조하였으며 그 후 강화 유수 閔 鎭 遠 이 三 郞 城 에서 다시 주조한 것이다. 銅 鐘 의 전체적인 모양은 반구형이다. 이 종 은 용뉴에 음통이 없이 쌍용으로 장식된 점, 종신을 상하로 나누는 횡선대가 표현된 점 등 으로 보아 경기도 양주의 보광사종(1364)과 함께 중국종 양식을 따른 대표적인 조선후기 범종이라 할 수 있다. 고려궁터 안에 있는 성문을 여닫는 시각을 알리던 종이다. 숙종 11년 강화유수 윤지완이 주조한 것을 후에 강화유수 민진원이 정족산성에서 다시 주조한 종이라도 한다. 같은 종을 두 번씩이나 주조한 까닭이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1차 주조에서 실패했을 가능 성이 크다. 높이 186.5m, 밑지름141cm, 두께15cm이며 총 중량은 3,912kg인 종이다. 고려 궁터 진입로인 김상요 선생 순의비 자리에 있는데 1977년 궁터를 정화하면서 진품은 갑곶 리 강화역사관으로 옮기고 모조품은 이곳에 두었다. 정상부는 반구형 중앙에 쌍룡이 좌우로 향하게 조각되어 있으나 한국종의 특색인 음통이 없는 것이 기이하게 여겨진다. 종몸 가운 데로 두 줄의 띠가 비교적 거칠게 가로질러 드러난 것도 고려시대 종주조법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점이다. 어깨 부분에는 유곽대가 꽃무늬로 장식되어 있고 그 안에 연꽃이 새겨져 있다. 종 아랫부분에 당좌가 없이 명문만 새겨져 있는 것도 드문 예이다. 명문은 숙종 37년 신묘년에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종구에는 화문으로 문양대가 설치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솜씨가 간결하고 꾸밈이 없어 조선시대의 문화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나 주조 의 흔적은 다소 거칠고 수준은 평이함에 그치고 있다. 고종3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 탈해 가려다 실패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경기남부와 남한강, 돌베개, 2000, 한국문화유산답사회 (2)북관운묘 ( 北 關 雲 廟 ) 소재지 : 강화읍 관청리 706 유적현황 : 고려궁지에서 강화산성북문으로 가는 길에서 왼편 마을길로 약 100m 가량 내려가면 北 關 雲 廟 가 위치한다. 사당 안에는 관운장을 모시고 있다. 關 雲 廟 라고 현판이 걸 려 있는 소슬삼문 뒤로 정면 3칸, 측면2칸의 건물이 남아있는 납도리집이다. 측면 2칸 중 전면에 퇴를 내었으나 툇마루는 없고 바로 분합문으로 마감했다. 겹처마를 한 팔작집으로 회벽마감을 하고 석간주 칠을 했다. 강화읍사무소 왼쪽에는 뒤로 올라가는 도로에서 궁골주택 사이 골목을 따라 올라가는 길에 위치한다. 현재 무속인이 거처하는 가정집 내에 외삼문과 묘당이 있다. 북관제묘에 있는 간이 안내판에 의하면 강화산성의 수문장 윤희보가 건립한 것이라고 한 다. 외삼문은 관제묘 라는 현판이 걸려있으며 1906년에 중건되었다고 전한다. 묘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납도리 팔작집인데 측면 2칸중 전면은 툇간을 내었으나 현재 툇마루는 없 고 분합문으로 마무리하였다. 아무런 현판도 없는 묘당은 최근에 보수를 한 듯 측면의 하부 를 붉은 벽돌로 마감하였다. (3)성공회강화성당 소재지 : 강화읍 관청리 250
유적현황 : 강화초등학교 정문에서 소로를 따라 약 120m 떨어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朝 鮮 光 武 4년(1900) 대한성공회 초대주교인 코프에 의해 건립된 것이다. 강화성당은 전통적 인 한옥구조물과 서양의 기독교식 건축양식을 절충해서 지은 것으로 겉모양은 전통 한옥이 지만, 내부 구조는 기독교의 전통 예배공간인 서양식으로 꾸민 것이다. 성당은 전체가 4동 의 건물로 이루어져있다. 앞에는 소슬삼문과 담장이 이어져 성당권역 전체를 두르고 있다. 성당 정면 4칸, 측면 10칸의 1층과 1층과 귀고주가 2층의 귀기둥이 되는 한 칸물린 2층의 건물이다. 지붕은 궁궐에서 보이는 양성을 하였으며 용마루의 양 끝에 십자가를 세우고 용 머리도 장식을 했다. 정면에는 주련까지 달아 한식목조건물의 형식을 따랐으나 주련의 내용 은 성경관련 내용이다. 광무 4년 대한성공회 초대 주교인 코프 주교에 의해 건립되었다. 1889년 코프 씨가 영국 에서 한국주교로 서품을 받으면서 대한성공회의 역사는 시작된다. 코프 씨는 7년 뒤인 1896년 6월 강화에서 한국인 신자에게 세례를 주고 그로부터 4년 후 대한성공회로서는 가 장 먼저 강화에서 이 성당을 건립했다. 강화성당은 전통적인 조선 한옥 구조물에 서양의 기독교식 건축양식을 수용해 지은 것으로 동서양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겉모양은 영락없는 전통 조선집에 사찰양식인데 내부구조는 기독교의 전통 예배공간인 서양식으로 꾸민 것이다. 정교하고 반듯하게 크고 작은 돌을 차분히 엇물려 비교적 높은 석축으로 축대를 쌓고 마치 공궐을 담처럼 단출하게 담을 둘렀다. 성당의 입구인 솟을삼문 역시 한옥의 빗장문인데 정 문에도 곁문에도 빛바랜 태극무늬가 선명해 요즘 어디서도 보기 드문 모습을 연출한다. 문 만 보면 마치 어느 단군 사당엘 들어서는 기분이다. 그러나 정문 안으로 들어서면 마치 오래 된 사찰에 온 느낌이다. 커다란 사찰양식의 범종 과 종각이 있고 본채 건물이 길게 꽁지를 빼고 서있다. 4칸의 짧은 면을 정면으로 삼고 10 칸의 긴 면을 측면으로 삼은 것이 퍽 색다르다. 본채 앞면에슨 내리쓴 주련이 기둥마다 걸려 있는데 영락없이 사찰의 모습을 본뜬 것이다. 이층집에 팔작지붕을 이루고 천성전이라는 편액을 달았는데 이 역시 사찰의 대웅보전 편액 이 놓인 자리이다. 다만 앞지붕 꼭대기에 십자가를 꽂은 것이 외관상 다르게 보이는 점이 다. 성당 내부는 바실리카 건축 양식에 충실해 측면10칸 중 8칸은 예배실, 나머지 2칸은 성 의실 등으로 구성했다. 기독교 건축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다. 경복궁을 건축한 목수가 이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경사지의 대지를 석축으로 쌓고 입구 와 계단, 외삼문 내삼문 성당 사제관을 모두 동남향을 배치하여 배의 모양을 이루고 있다. 전체의 외부 공간 구성은 그대로 구릉지에 형성된 사찰의 가람배치를 따르고 있는데 어디에 서도 무리한 솜씨를 보이지 않고 있다. 더구나 본채 건물 왼쪽 마당에는 수령 몇백년 족히 되었을 우람한 보리수나무가 두 그루가 서 있어 더욱 사찰 분위기가 짙다. 이 건물의 구성 요소들은 모두 초창기의 한국 성공회선교사들이 토착화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사료이다. 경기남부와 남한강, 돌베개, 2000, 한국문화유산답사회 (4)고려고종왕릉 ( 高 麗 高 宗 洪 陵 ) 소재지 : 강화읍 국화리 산180 유적현황 : 국화리 학생야영장에서 계곡을 따라 난 길에서 약 150여m를 오르면 산하가
관망되는 곳에 洪 陵 이 위치하고 있다. 홍릉의 좌향은 남향이며, 동서 12m, 남북 60m의 묘 역이 조성되어 있다. 곡장은 만들지 않고, 용미를 조성하였다. 석물은 혼유석과 함께 문인상 4구가 좌우로 놓여 있다. 혼유석은 근 현대에 만들어 놓은 것으로 보인다. 고려 23대 고종의 능이다 고종의 이름은 철, 초명은 진질 자는 대명 천우이다. 시호는 안 효이고 1310년에 총헌이 중시되었다. 강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원덕태후 유씨이고 비는 제21대 희종의 딸인 안혜태후 유씨이다. 홍릉은 청소년수련원에서 약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수련원 사무실에서 약 50m 올라가면 우측에 재실이 있다. 내삼문 3칸 측면2칸으로 만들어졌는데 맞배지붕으로 되 어 있다. 내삼문이 동행인데 비하여 북향쪽으로 향하고 있다. 능역은 3단면으로 되어 있다. 1단에는 능이 있는데 봉분 뒤는 활개를 크게 하고 그 안에 봉분을 만들었다. 봉분 좌측에 자연으로 된 호석이 봉분이 덮힌 채 남아 있다. 1970년대 조 사에는 호석이 12중에서 3개 정도만 남아 있다고 하였고 지금도 3개 정도만 보인다. 기존 조사에서 봉분 좌우에 석수가 각각 1구씩 배치되어 있다고 하였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상계 봉분 앞에 계체석을 놓고 그 아래 급경사의 언덕 아래에 다시 계체석을 놓고 중계를 만들었다. 중계에는 묘표가 2개 있다. 묘표는 월두형으로 대석은 묻혀서 보이지 않는다. 2 기 모두 중앙에 고려고종홍릉( 高 麗 高 宗 洪 陵 ) 이라 쓰여 있다. 묘표 앞에 새로 만든 상석이 있다. 향로석 좌측 바로 옆에는 자연으로 된 상석이 있다. 상석 좌우에는 각각 2쌍씩 문인 석이 있다. 고려후기에서 조선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복두형이다. 홑은 약간 좌측 으로 기울어져 잡고 있다. 그 앞에 정자각이 있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지만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망주석과 장명등은 없다. (5)황선신묘 ( 黃 善 身 墓 ) 소재지 : 강화읍 대산리 산122 유적현황 : 유적은 黃 善 身 旌 門 에서 동쪽으로 약 200m 가량 떨어져 있는 곳이다. 묘역은 北 山 의 북쪽 끝자락에 위치하며, 모역에는 모두 3기의 묘가 안장되어 있는데 墓 의 정면에 있는 묘비에는 故 忠 臣 平 海 黃 公 之 墓, 배면에는 在 乙 所 五 月 日 이라 음각되어 있다. 묘의 서 쪽으로 묘비가 1기 있다. 조선중기 무신인 황선시의 묘역이다. 본관은 평해 자는 사수이다. 1597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정에 이르렀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다음해인 1637년 1월 청나라 군사가 강화를 공격 하자 강화부중군의 직책으로 강화유수 정신 충청수사 강진혼 천총 구원일 등과 함께 강화의 연미정에 주둔하여 적을 방어했으나 중과부적으로 갑곶진에서 전사하였다. 뒤에 병조참의로 추증되었고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특히 1792년에 충렬을 기려 자손들에게 벼슬을 주었다. 묘역은 북산의 끝자락에 위치하며 황선시 충신정문에서 동쪽으로 약 200m 가량 떨어진 곳이다. 묘역에는 모두 3기의 묘가 안장되어 있는데 동쪽 위쪽에 1기, 그로부터 약 10m 아 래에 2기가 나란히 안장되어 있다. 그 좌우로 문인석과 망주석이 1상씩 있고 봉분의 앞쪽으 로 혼유석과 상석 향로석이 갖추어져 있다. 묘역은 곡장없이 쌍분으로 된 원형봉분으로 되어 있다. 봉분 중앙에는 장방형 대신에 우러 두형 비신이 있다. 묘표 앞에 계체석을 놓고 그 앞에 상석과 행로석이 있다. 행조석 앞 좌 우에는 문인석과 6각기둥 형태의 망주석이 있다.
(6)남관운묘 ( 南 關 雲 廟 ) 소재지 : 강화읍 신문리 532-1 유적현황 : 신문리 합일 초등학교에서 남서쪽으로 약 200m 가량 가면 유적을 확인 할 수 있다. 南 關 雲 廟 는 朝 鮮 高 宗 21년(1884) 판관 吳 上 俊 이 창건하였으며, 관운장을 모시고 있다. 北 關 雲 廟 와 마찬가지로 關 帝 廟 라는 편액이 있는 소슬삼문뒤에 사당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초각이 좋은 초익공으로 궁익공을 하고 있다. 사고석과 전돌로 방화장을 두르 고 있으며, 수장재에 소로가 매우 촘촘하게 놓여 있는 팔작집으로 합각부의 장식도 미려하 다. 원래의 위치는 술감마을에 있었다고 하나 명성황후의 시주에 의해서 이곳에 지어졌다고 전한다. 강화읍 신문리 5332-1번지에 있으며 동관제묘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남관제묘는 1884년 판관 오상준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입구에는 동과제묘와는 마찬가지로 금잡인 이라는 금표가 세워져 있다. 입구는 외삼문으로 구성되었는데 관제묘 라는 현판이 걸려 있 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오른편에 요사가 잇고 정면에는 현성전 이라는 편약이 걸린 묘당이 있 으며 묘당의 왼쪽 뒤편에는 콘크리트 건물인 대성전이 있다. 현성전은 광무8년갑진중하중건 이라는 편액의 기록으로 보아 1904년 중건된 건물임을 알 수 있고 정면 3칸, 측면 3칸의 초익공팔작집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합각부의 장식도 수 려하고 용마루에서 내려오는 귀마루와 내림마루가 만나는 곳에는 용두를 두어 장식하고 있 다. 건물의 각 기둥에는 주련이 걸려 있으나 마모되어 그 내용을 알기 어렵다. 내부에는 내진을 설치하고 닫집을 두어 관우상을 봉안하고 있다. 관우상은 목조로 이루어 진 의상이다. 전체적으로 검붉은색 띄고 있으며 갑옷이 조식되어 있으나 현재는 도포가 입 혀졌다. 또한 머리에는 금색 사모를 쓰고 있으며 손에는 지팡이가 있는데 지팡이의 끝에는 매조로 장식되었다. (7)동관제묘 ( 東 關 帝 廟 ) 소재지 : 강화읍 신문리 467 유적현황 : 東 關 帝 廟 는 신문리 합일초등학교의 뒤편 시가지 內 에 위치하고 있다. 關 羽 를 신앙하기 위해 건립한 묘당으로 이러한 묘당은 16세기 후반 明 으로부터 유입되었으며 1598년 우리나라 최초로 숭례문 밖에 남관운묘가 세워지게 되었다. 동관제묘는 朝 鮮 高 宗 22년(1885) 馬 女 人 이 창건한 문묘이다. 제묘의 입구에는 잡인의 출입을 금하는 禁 雜 人 의 표석이 세워져 있고, 이를 지나면 묘당으로 들어서는 외문이 있는데 외문은 삼문형식을 취 하고 있다. 삼문을 들어서면 왼편으로 좌향이 북쪽으로 놓인 정면 3칸, 측면 2칸의 忠 聖 殿 이 있다. 충성전은 1960년에 세워진 건물로 관운장, 유현덕, 장비를 모시고 있다. 동관제묘는 1885년 마여인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관제묘에 들어서는 외삼문 앞에는 금 잡인 이라는 금표가 세워져 있다. 외삼문은 조성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동헌랑묘 라 는 현판이 걸려 있고 안쪽에는 관우와 백마 흑마가 각각 짝을 이룬 그림이 걸려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충성전 이라는 편액이 걸린 묘당이 있다. 충성전은 팔작지붕의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이며 1960년 중건하였다고 전한다. 내부는 1883년에 만들어진 위진사해고금일인 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관운장을 비롯하여 유비현덕과 장비 등이 모
셔져 있다. (8)유일충묘 ( 劉 一 忠 墓 ) 소재지 : 강화읍 월곶리 산16-1 유적현황 : 연미정 앞으로 난 해안도로를 따라 약 1km 가량 가다보면 우측으로 월곶황토 집이라는 음식점이 있다. 유적은 이 음식점의 우측 도로변 야산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묘역은 劉 氏 일가의 묘역에 자리하고 있는데, 가운데 있는 쌍분을 중심으로 정면에는 墓 碣 이 있고, 그 앞으로 좌우에는 향로석과 상석, 그 앞으로 망주석과 석인상이 각각 1기씩 배 치되어 있다. 묘갈의 배면은 마모되어 쓰여진 글의 내용은 알 수 없다. 좌측 석인상의 크기 는 높이 150cm, 견폭 20cm 두께 35cm 우측 석인상 높이 162cm, 견폭 19cm 두꼐33cm 이다. 좌측 망주석의 높이 135cm, 두께 24cm, 우측 망주석의 높이 150cm, 두께22cm이다. (9)황형택지 ( 黃 衡 宅 址 ) 소재지 : 강화읍 월곶리 242 유적현황 : 현재 燕 尾 亭 서쪽아래 공터에 위치해 있는 곳으로,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을 뿐 다른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黃 衡 宅 址 는 삼포왜란 당시 전라좌도 방어사로 있으면서 큰 공을 세운 黃 衡 이 낙향하여 거처하던 곳이다. 현재 터의 중앙에는 1996년 宗 中 會 에서 세운 裝 武 公 黃 衛 將 軍 宅 址 碑 가 있고, 그 주변에서는 기와편이 다수 수습된다. 조전 중기 무신 황형의 옛 집터이다. 선생의 자는 언평, 본관은 창원으로 성종11년 무과 및 진현시에 급제하고 1486년 무과 중시에 장원급제 하였다. 이후 혜사진 첨절제사, 훈련도 정, 의주목사, 회령부사, 함경도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점치중추부사가 되었다. 중종 5년 삼포왜란시 전라남도 방어사로 재표에서 적을 크게 무찔렀다. 중종 7년 함경도 지방에 서 야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고 평안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공조판서 이르렀다. 시호는 장무이며 왕이 그의 공을 찬양하여 연미정을 하사하여 이곳 월곶리 만년 을 보냈다고 한다. 택지는 월곶진을 설치한 뒤 관아로 사용하다가 지금은 논밭으로 변하였으며 후손들이 파손 된 비를 다시 세웠다. (10)윤집택지 ( 尹 集 宅 地 ) 소재지 : 강화읍 월곶리 615-1 유적현황 : 黃 衡 사당에서 연미정으로 가는 農 路 변 논 가운데 비석이 있는데, 이 뒤가 尹 集 의 宅 地 이다. 현재 이 일대는 상당기간 경작이 이루어져 지표상의 택지의 규모를 밝히기 힘든 상태이다. 碑 의 규모는 높이 117cm, 폭 50cm, 두께 19cm 정도이며 忠 臣 故 學 士 尹 集 宅 地 라고 쓰여있다. 윤집선생은 별시 문과에 급제한뒤 설서, 이조정랑, 부교리에 이어 교리로 있을때 병자호란 이 일어나자 적과의 화의를 반대하여 중국 심양으로 잡혀가 온갖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척 화의 소신을 주장하다가 척살되었다. 세상에서는 오달재, 홍익한과 함께 삼학사로 불리며 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선생이 살던 집의 흔적은 없어지고 밭으로 변했으며 대리석으로만 된 비석이 전하고 있다. 비석 전면에는 충시고학사 윤집택지라고 쓰여 있다. (11)황형사당 ( 黃 衡 祠 堂 ) 소재지 : 강화읍 월곶리 대묘동 665-1 유적현황 : 강화농협종합영농센터 위쪽으로 약 50여m 떨어진 지점에 소로가 나온다. 이 소로를 따라서 약 1.5km를 더 가면 좌측에 黃 衡 祠 堂 이 위치한다. 사당 뒤로는 000를 비롯 한 黃 氏 일가의 묘소가 자리하며 야산의 말단부 평지에 위치하고 있다. 사당의 우측 산등에 는 황형묘가 있다. 건물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출입문은 삼문이며,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가옥이다. 사당의 좌측에는 높이 270cm, 폭80cm의 黃 衡 新 道 碑 가 있다. (12)황형묘 및 신도비 ( 黃 衡 墓 및 新 道 碑 ) 소재지 : 강화읍 월곶리 대묘동 665-1 유적현황 : 강화농협종합영농센터 위쪽으로 약 50여m 떨어진 지점에 소로가 나온다. 이 소로를 따라서 약 1.5km를 더 가면 좌측에 黃 衡 祠 堂 이 있고, 북서쪽으로 약 20m 떨어진 위 치에 黃 衡 墓 가 있다. 墓 는 합장묘로 향좌측의 봉분 앞에 세워져 있다. 황형은 삼포왜란 당 시 좌통방어사로서 큰 공을 세웠는데, 그와 관련된 사당, 택지 및 연미정 등이 가까운 곳에 소재한다. 1621년(광해군 13년)에 경기도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에 건립된 황형( 黃 衡 )의 신도비이다. 비의 찬자는 윤방이고 서자는 윤제이며 제액은 김상용이 전서로 썼다. 비문에 의하면 황형(1459 1520년)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창원, 자는 언평이고, 아버지는 선공감정 예헌이며 어머니는 사헌부감찰 남인보의 딸이다. 1480년(성종 11년) 무 과에 급제하고 상서원판관이 되어 내승(을 겸직하였다. 1486년 무과중시에 장원으로 급제, 평안도우후, 유원과 혜산진의 첨절제사로 나갔다. 그 뒤 계속 증직하여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1510년(중종 5년)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방어 사가 되어 제포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르고 그 곳 경상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512년에는 평안도 변방에서 야인이 반란을 일으키자 순변사로 나가 이를 진압하였고, 이어서 평안도 함경북도의 병마절도사를 거쳐,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장무이다. 황형 개인의 행적 및 가계는 물론 조선 중종떄 삼포왜란과 평안도 변방의 야인의 반란 등의 일련의 대외관계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비문이다 판독문 黃 衡 神 道 碑 黃 衡 神 道 碑 有 明 朝 鮮 國 正 憲 大 夫 工 曹 判 書 兼 五 衛 都 摠 府 都 摠 管 知 訓 鍊 院 事 贈 諡 莊 武 公 黃 公 神 道 碑 銘 幷 序 我 外 高 祖 考 莊 武 公 府 君 旣 卒 之 一 百 有 二 載 曾 孫 參 議 公 得 誌 石 於 幽 墟 之 側 乃 以 懸 繂 之 文 屬 不 肖 昉 曰 吾 祖 事 業 靡 不 聞 而 去 世 旣 遠 今 誰 復 有 以 此 事 累 之 者 願 子 勉 之 况 吾 先 故 斬 石 未 文 其 卒 之 者 不 在 吾 子 孫 乎 昉 誠 不 敢 以 不 文 辭 謹 按 公 姓 黃 諱 衡 字 彦 平 系 出 昌 原 府 麗 朝 佐 理 功 臣 壁 上 三 韓 三
重 大 匡 門 下 平 章 事 檜 山 府 院 君 石 奇 之 後 曾 祖 考 諱 昌 知 平 州 事 祖 考 諱 善 慶 大 興 縣 監 贈 兵 曹 參 判 考 諱 禮 軒 繕 工 監 正 贈 兵 曹 判 書 皆 以 公 貴 判 書 公 老 無 子 後 夫 人 宜 寧 南 氏 司 憲 府 監 察 仁 甫 之 女 禱 于 海 州 首 陽 山 生 公 卽 天 順 己 卯 也 公 少 讀 書 通 大 義 旣 冠 聘 原 州 大 姓 元 甫 崑 女 元 時 守 文 川 郡 公 一 日 從 獵 有 大 豕 突 前 乃 一 箭 殪 之 元 大 驚 異 以 爲 人 各 有 才 文 武 無 二 致 遂 資 公 弓 馬 以 勸 之 未 一 年 捷 庚 子 武 科 初 補 兼 司 僕 春 秋 都 試 連 居 一 等 前 後 凡 八 輒 進 資 繼 登 進 賢 試 陞 尙 瑞 院 判 官 兼 內 乘 成 廟 召 公 問 讀 經 書 幾 何 對 以 臣 讀 四 書 二 經 上 嘉 悅 甚 敎 以 武 士 亦 須 讀 經 傳 見 聖 賢 事 業 遂 賜 書 一 秩 一 時 豔 稱 之 以 訓 鍊 院 判 官 擢 丙 午 重 試 壯 元 仍 超 折 衝 柔 遠 惠 山 兩 鎭 僉 使 時 野 人 犯 邊 殺 邊 吏 公 隨 元 帥 許 琮 以 豹 攫 將 爲 先 鋒 師 還 殿 次 蔚 地 嶺 賊 又 直 犯 後 軍 一 擊 却 之 一 軍 賴 以 全 由 訓 鍊 院 都 正 出 爲 義 州 牧 使 遷 平 安 道 虞 侯 旋 陞 嘉 善 拜 會 寧 府 使 秩 滿 入 同 知 中 樞 府 事 特 加 資 憲 歷 咸 鏡 北 道 慶 尙 左 道 兵 馬 節 度 使 以 言 者 言 遆 還 僉 知 中 樞 府 事 未 幾 三 浦 倭 夷 生 變 陷 城 堡 南 方 大 震 上 特 命 公 防 禦 使 討 公 星 夜 奔 馳 大 敗 之 斬 數 百 級 餘 衆 散 潰 爭 船 溺 海 死 者 不 記 其 數 捷 聞 上 遣 承 旨 宣 諭 仍 特 進 正 憲 就 本 道 又 除 節 度 使 爲 不 悅 者 所 中 罷 歸 俄 起 爲 中 樞 府 事 兼 五 衛 都 摠 府 都 摠 管 知 訓 鍊 院 事 時 北 虜 屢 掠 人 畜 邊 無 寧 歲 上 以 爲 憂 簡 公 巡 邊 使 以 鎭 之 公 則 示 以 威 惠 諭 以 禍 福 使 之 繫 致 亂 首 刷 還 俘 民 虜 不 敢 違 北 方 因 之 無 事 上 又 以 西 鄙 多 事 防 秋 政 急 拜 公 平 安 節 度 使 未 幾 北 虜 屯 長 莽 哈 來 朝 語 有 不 遜 廷 臣 請 其 罪 囚 之 海 島 中 上 慮 北 虜 懷 反 側 不 自 安 能 壓 伏 其 心 者 無 如 公 節 更 移 咸 鏡 北 道 節 度 使 公 倂 途 鎭 之 虜 素 服 公 威 名 聞 公 至 帖 然 不 敢 動 久 乃 以 知 中 樞 召 還 授 工 曹 判 書 有 以 爲 言 者 不 果 拜 還 知 樞 以 正 德 庚 辰 考 終 于 正 寢 春 秋 六 十 有 二 訃 聞 上 震 悼 轍 朝 賻 贈 有 加 葬 于 江 華 府 東 長 嶺 里 大 廟 洞 子 坐 午 向 之 原 禮 也 公 狀 貌 魁 梧 射 藝 絶 倫 人 望 之 儼 然 亦 知 其 爲 偉 器 華 使 王 憲 臣 一 見 嗟 異 取 囊 中 藥 物 贈 以 爲 信 由 是 中 朝 人 亦 聞 公 姓 名 申 參 判 從 濩 贈 公 詩 有 名 馳 鶴 野 之 語 此 實 錄 也 南 征 日 擧 所 嘗 論 公 者 辟 從 事 人 或 危 之 公 坦 懷 待 之 無 一 毫 幾 微 見 乎 色 至 相 得 有 過 平 昔 其 人 慙 服 曰 吾 爲 公 所 色 容 久 矣 登 建 節 臺 題 詩 有 曰 建 節 高 臺 起 大 風 海 雲 初 捲 日 輪 紅 倚 天 撫 劍 頻 回 首 馬 島 彈 丸 指 顧 中 据 此 一 詩 公 之 襟 氣 像 果 匹 所 能 窺 一 斑 乎 公 自 少 老 於 軍 陣 最 得 士 卒 心 若 壃 場 形 勢 虜 衆 强 弱 無 不 森 然 在 目 中 廊 廟 有 機 務 待 公 區 畫 邊 境 有 警 急 待 公 鎭 靜 除 西 南 北 閫 師 之 任 皆 至 于 再 國 家 倚 之 爲 長 城 者 幾 三 十 年 公 亦 知 遇 一 時 受 恩 感 每 受 命 輒 以 忘 身 徇 國 爲 己 任 一 世 皆 以 武 宗 推 之 莊 武 乃 其 易 名 也 九 原 己 矣 卽 今 建 酋 猖 獗 西 鄙 多 事 上 貽 主 上 之 憂 安 得 復 有 如 公 者 起 而 爲 將 爲 元 戎 以 掃 淸 妖 祲 於 一 擲 乎 九 重 拊 髀 之 歎 寧 獨 見 于 前 昔 鳴 呼 己 矣 公 有 丈 夫 子 五 曰 府 使 曰 琛 判 尹 曰 瑜 僉 正 曰 瑗 別 坐 贈 參 判 曰 琦 京 畿 觀 察 使 女 長 適 權 守 庸 參 奉 次 李 琮 次 李 璨 府 使 側 室 子 珉 瑀 珷 子 世 俊 世 傑 庶 出 壽 千 琛 庶 出 玉 守 玉 瑜 女 任 呂 承 旨 瑗 子 大 猷 別 官 大 受 正 郞 女 安 崇 祖 李 思 立 康 允 李 亨 運 縣 監 琦 子 大 用 參 奉 大 任 同 知 琛 取 以 爲 後 女 具 忠 淵 副 正 權 守 庸 子 緯 綸 郡 守 李 琮 子 世 成 女 元 繼 誠 府 使 李 璨 子 世 義 女 李 夢 龍 閔 思 老 珉 子 大 成 珷 子 大 仁 大 器 大 信 世 俊 子 致 溫 致 良 致 恭 直 長 致 儉 參 奉 女 朴 鳳 年 世 傑 無 子 取 致 恭 爲 後 大 任 子 致 敬 卽 參 議
公 也 女 尹 起 祥 沈 仁 禛 趙 繼 生 尹 民 逸 府 使 庶 出 致 敏 晩 男 德 男 訓 鍊 奉 事 大 猷 庶 出 恂 訓 鍊 奉 事 大 受 子 愼 惕 愼 府 院 君 女 徐 潝 大 用 子 致 誠 承 旨 致 信 縣 監 女 尹 斗 壽 領 議 政 卽 吾 先 君 子 也 李 雲 福 縣 令 德 信 正 鶴 壽 德 原 都 正 鏡 義 任 呂 子 繼 黃 繼 老 女 權 守 己 庶 尹 安 崇 祖 子 克 誠 克 信 克 逸 李 思 立 子 協 悌 康 允 子 以 仁 以 義 縣 監 以 禮 以 智 主 簿 女 鄭 雲 湖 同 知 具 忠 淵 女 李 友 益 正 郞 綸 子 應 祿 應 福 應 禧 女 李 克 寬 鄭 恮 世 成 子 壅 塢 女 高 嶷 壽 千 子 致 謹 大 成 子 鐵 致 溫 子 澤 女 李 興 男 崔 潝 致 恭 子 瀚 女 益 興 守 高 岦 朴 潛 李 頤 後 致 儉 女 高 嶸 李 恂 洪 世 敏 元 宗 義 僉 知 致 敬 子 滫 說 書 女 睦 取 善 正 言 鄭 謹 承 文 愽 士 趙 之 玏 尹 衡 甲 僉 知 尹 起 祥 子 球 璜 瑛 沈 仁 禛 子 勗 女 韓 文 斗 崔 時 遇 尹 民 逸 子 紏 女 李 長 白 任 鞏 繼 黃 子 翼 齡 鳳 齡 齡 女 黃 在 中 縣 令 宋 淵 繼 老 子 碩 齡 承 旨 齡 彭 齡 女 李 耈 俊 泥 城 正 紳 權 守 己 子 虔 愼 無 子 取 惕 子 一 皓 爲 後 縣 監 女 沈 光 世 校 理 徐 潝 子 景 霽 致 誠 子 渫 澨 潚 女 鄭 明 海 同 知 李 惟 一 佐 郞 庶 出 淪 致 信 女 柳 坡 僉 知 金 應 性 先 君 之 子 昉 判 書 暘 參 判 暉 參 判 暄 右 尹 李 雲 福 子 振 男 擢 男 縣 監 女 柳 思 璟 縣 令 德 信 正 子 弘 吾 憲 弘 女 許 寔 金 浣 申 達 道 恂 子 一 龍 訓 鍊 奉 事 鐵 子 一 虁 歷 數 諸 孫 五 世 以 下 在 世 者 亦 以 百 數 不 能 盡 記 間 作 卿 士 大 夫 咸 有 名 稱 能 繼 家 聲 不 墜 先 緖 誦 吾 祖 之 事 業 不 孰 謂 所 不 知 者 何 人 耶 以 是 觀 之 吾 外 家 福 德 之 傅 其 尙 未 艾 也 夫 銘 曰 有 丈 夫 兮 邦 之 特 如 于 如 城 兮 隱 一 敵 南 北 之 無 不 可 兮 夷 虜 屛 跡 中 外 恃 之 無 兮 夫 孰 非 公 之 威 之 德 以 將 以 相 兮 虎 也 叔 也 於 禁 於 邊 兮 頗 也 牧 也 公 亡 幾 歲 兮 公 名 如 昨 有 子 有 孫 兮 餘 慶 未 息 我 銘 以 貞 之 兮 以 詔 我 後 覺 使 千 秋 與 萬 歲 兮 知 其 爲 故 莊 武 公 之 域 玄 孫 崇 禎 大 夫 海 昌 君 尹 昉 撰 五 代 孫 禦 侮 將 軍 行 忠 佐 衛 副 司 勇 尹 祭 書 天 啓 元 年 十 月 日 崇 禎 大 夫 行 知 中 樞 府 事 金 尙 容 篆 해석문 유명조선국 정헌대부 공조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지훈련원사 증시 장무공 황공 신도비 명 병서 우리 외고조고 장무공 부군이 졸한지 102년이 되는 해에 증손 참의공이 묘소의 곁에서 지 석을 얻고, 비문을 불초 방에 부탁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조상의 사업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지만 세대가 이미 멀어졌는데 이제 와서 누구에게 이 일을 부탁하겠는가? 자네가 힘써주 게. 하물며 우리 선대에서 돌을 마련하여 놓고도 글만 새기지 못하였으니 그 일을 마치는 일은 우리 자손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니 나는 감히 글을 못한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도 없었다. 공의 성은 황씨요, 휘는 형( 衡 )이요, 자는 언평이며 창원부 출신이다. 고려조의 좌리공신 벽 상삼한 삼중대광 문하평장사 회산부원군 석기( 石 奇 )의 후손으로, 증조의 휘는 창( 昌 )이니 지 평주사요, 조의 휘는 선경( 善 慶 )이니 대흥 현감에 증 병조참판이며 고의 휘는 예헌( 禮 軒 )으 로 선공감정에 증 병조판서이니, 모두 공이 귀히됨으로써 추은된 것이다.
판서공이 늙도록 아들이 없으니 후부인인 의령 남씨 사헌부 감찰 인보( 仁 甫 )의 따님이 해주 수양산에서 기도하여 공을 얻었는데 천순 기묘년의 일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글을 읽어 그 대의를 통하였으며 관례를 치루고는 원두 대성인 원보곤( 元 甫 崑 )의 따님을 맞게 되었다. 원 씨는 그때에 문천 군수로 있었는데 공이 하루는 사냥에 따라나서게 되었다. 때마침 큰 멧돼 지가 앞으로 돌진해 오는 것을 한 화살에 맞혀 잡으니, 원군수가 크게 놀라 생각하기를, 사람이 각기 재주가 다르지만 문무가 길이 다를 수는 없다. 라고 하고는 공에게 활과 말을 주면서 권장하였다. 그 후 1년이 채 못되어 경자년의 무과에 합격하여 겸사복에 초보되었 고, 춘추의 도시에 모두 1등을 하고 그 후로도 전후하여 모두 여덟 번이나 1등을 하여 품계 가 올랐고, 이어서 진현시에도 합격하여 상서원 판관 겸 내승에 올랐다. 성종께서 공을 불러 묻기를, 경서를 얼마나 읽었느냐? 라고 하자, 대답하기를, 신은 사서 와 이경밖에 못 읽었습니다. 라고 대답하니 상께서 매우 기뻐하시며 말하기를, 무사들도 반드시 경전을 읽어 성현의 사업을 알도록 하라. 고 전교를 내리고 경서 한 질을 내리니 모 든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칭찬하였다. 훈련원판관에서 병오년 중시에 장원하여 절충장군으로 올라 유원과 예산 양진의 첨사로 나갔다. 그때에 야인(여진)들이 국경을 침범하여 우리의 관리를 죽이니 공은 원수 허종( 許 琮 )을 따라 표학장으로 그의 선봉이 되었다. 개선하여서는 울남의 영남적으로 치는 역할을 맡았는데, 또 저들의 후군을 직범하여 일격에 물리치니 전 군이 공으로 하여 득전하였다. 훈련원 도정에서 의주 목사로 나갔다가 평안도 우후로 옮겼 고, 바로 가선계에 올라 회령 부사를 배수하였다. 임기가 끝나자 동지중추부사로 들어왔으 며, 특별히 자헌에 올라 함경북도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를 거쳤는데, 언관이 체직을 논하 여 첨지중추부사로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삼포의 왜인들이 변을 일으켜 성보를 함락 하니 남방이 크게 진동하였다. 상께서는 특별히 공을 방어사로 삼고 가서 치라고 명하셨다. 공은 밤낮으로 달려가 크게 파하고 수백급을 베이니, 여중은 산궤하여 배를 서로 타려고 바 다에 빠져 죽은 자가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첩보를 듣고 상께서는 승지 를 보내서 선유가고 바로 정헌으로 올려 경상도의 관찰사로 제수하고는 절도사를 겸하게 하 였으나, 사이가 좋지 못한 자의 중상을 입어 파귀하였고, 얼마 후에는 다시 중추부사 겸 오 위도총부 도총관 지훈련원사에 기용되었다. 그때에 북쪽 오랑캐들이 누차 사람과 짐승을 노 략질하여 변방이 편할 날이 없었다. 상께서는 이를 걱정하여 공을 순변사로 삼아 진압하도 록 하였다. 공이 부임하여서는 위엄과 은혜를 보이고 화복으로 달래어 난을 일으킨 괴수를 잡아들이도록 하고 포로가 된 우리 백성들을 모조리 돌려 보내게 하니, 오랑캐들은 감히 어 기지 못하였고 북방은 그로부터 무사하였다. 상께서는 또 서비에 일이 많고 방추가 정히 급하다 여겨 공을 평안도 절도사로 제수하였다. 얼마 후에는 관북의 오랑캐 둔장 맹합이 내조하였는데 말이 불손하다 하여 조정의 신하들이 죄주기를 청하여 해도중에 가두었는데, 상께서는 오랑캐들이 불만이 있어 반심을 품을까 염 려하여, 능히 그들의 마음을 진압할 사람은 공만한 사람이 없다고 여겨 다시 함경북도 절도 사로 옮기니, 공은 배도하여 진에 이르렀다. 오랑캐들은 본래부터 공의 위명에 압복되어온 처지라 공이 왔다는 말을 듣고는 차분히 가라앉고 감히 동할 생각을 못하였다. 오랜 후에 지중추부사로 소환되어 공조 판서에 제수되었으나, 반대하는 사람이 있어 안 되었고, 지중 추부사로 돌아왔다가 정덕 경진년에 정침에서 62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부음을 듣고 상께 서는 진도하여 철조하고는 부증이 남달랐다. 강화부 동쪽 장영리 대묘동 자좌 오향의 언덕 에 장사지내니 예장이었다. 공은 생긴 풍체가 괴걸하고 활솜씨가 뛰어났으며, 보기에 벌써 엄연한 기상이 있어 위기임
을 알 수 있었다. 명나라 사신 왕헌신( 王 憲 臣 )이 한번 보고 감탄하여 낭중의 약물을 신표로 주니, 이로부터 중국 사람들도 공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신 참판 종호가 공에게 준 시에도, 이름은 치학야에도 높았다. 란 대목이 있으니 이는 실록에도 실려있다. 남정할 때에는 일 찍이 공을 논란하였던 사람을 종사관으로 천거하니 남들은 위험하다 하였으나, 공은 허심탄 회하게 대하여 일호도 그런 기색이 없었고 오히려 전보다 갑절이나 친숙하게 대하여 그 사 람이 말하기를, 나는 공에게 포용된지 오래이다. 라고 하였다. 건절대에 올라 지은 시에, 건절 높은 대에 큰 바람 일어나니 바다 구름 걷히고 햇빛만이 붉구나. 공중에 비껴서 칼 짚고 돌아보니 대마도의 총탄이 눈 앞에 있구나! 라고 하였으니 하 한 시구만 보고서도 공 의 흉금과 기상은 범인들이 조금도 규측할 수 없음을 알 것이다. 공은 젊어서부터 군진에 나아가 그 속에서 늙으면서 사졸들의 마음을 얻는데 가장 역점을 두었고, 전장의 형세와 적의 강약을 일목 요연하게 알았으며, 조정에서도 국가의 기무는 공 을 기다려 계획하였고 변경에 일으 있으면 공을 기다려 진정하여 서 남 북의 원수를 두 번씩이나 맡았고, 국가에서 장성으로 믿고 의지함이 근 30년이었다. 공 또한 일대의 지우임 을 알고는 은혜를 입음에 감격하여 매양 명을 받으면 몸을 던져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을 자 기의 소임으로 삼았고, 세상에서도 모두 무종( 武 宗 )으로 추앙하였으니, 그러기에 시호도 장 무로 내리게 된 것이다. 이제는 구원에 있으니 말해 무엇하리오 마는, 요사이 건주에는 야 인들이 창궐하고 서비에는 일이 많아져 주상께 걱정을 끼치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공과 같 은 사람이 다시 나타나 장수가 되고 원수가 되어 요사스런 무리들을 일격에 쓸어버릴 수가 있을 것인가? 구중 궁궐의 부비지탄이 어찌 전에만 있던 이야기이던가? 오호라! 이제는 부 질없은 일이다. 공에게는 장부다운 아들 다섯이 있으니 찬( 瓚 )은 부사요, 침( 琛 )은 판윤이요, 유( 瑜 )는 첨정이요, 원( 瑗 )은 별좌로 증참판이며, 기( 琦 )는 경기 관찰사이다. 장녀는 참봉 권 수용( 權 守 容 )에게, 차녀는 이종( 李 琮 )에게, 3녀는 부사 이찬( 李 璨 )에게 각기 출가하였다. 측 실자는 민( 珉 ), 우( 瑀 ), 무( 珷 )이다. 찬의 아들은 세준과 세걸이 있고, 서출로서 수천이 있다. 침의 서출은 옥수, 옥유이다. 유의 딸은 승지 임여에게 출가하였다. 원의 아들은 별관 대유와 정랑 대수요, 딸은 안숭조, 이사 립, 강윤, 현감 이형운에게 각기 출가하였다. 기의 아들은 참봉 대용과 동지 대임인데 대임 은 침의 뒤를 이었고, 딸은 부정 구충연에게 출가하였다. 권수용의 아드은 위와 군수 륜이 오, 이종의 아들은 세성이오, 딸은 부사 원계성에게 출가하였으며, 이찬의 아들은 세의요, 딸은 이몽룡, 민사로에게 출가하였다. 민의 아들은 대성이오, 무의 아들은 대인, 대기, 대신 이다. 세준의 아들은 치온, 치량, 직장 치공, 참봉 치검이오, 딸은 박봉년에게 출가하였다. 세걸은 무후하여 치공으로 뒤를 이었다. 대임의 아들은 치경이니 바로 참의공이오, 딸은 윤기상, 심인진, 조계생, 부사 윤만일에게 각기 출가하였으며 서출에는 치민, 만남, 훈련봉사 덕남이 있다. 대유의 서출 순은 훈련 봉 사요, 대수의 아들은 부원군 신과 척이오, 딸은 서흡에게 출가하였다. 대용의 아들은 승지 치성과 현감 치신이오, 딸은 영의정 윤두수 즉 본인의 선군자와 현령 이운복, 덕신정 학수, 덕원도정 경의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임여의 아들은 계황, 계로요 딸은 서윤 권수기에게 출 가하였다. 안숭조의 아들은 극성, 극신, 극일이다. 이사립의 아들은 협과 제이다. 강윤의 아 들은 이인, 현감 이의, 이례, 주부 이지요, 딸은 동지 정운호에게 출가하였다. 구충연의 딸은 정랑 이우익에게 출가하였다. 권륜의 아들은 응록, 응복, 응희요, 딸은 이극연의 딸은 정랑 이우익에게 출가하였다. 권륜의 아들은 응록, 응복, 응희요, 딸은 이극관, 정전에게 각기 출 가하였다. 이세성의 아들은 옹과 오요, 딸은 고억에게 출가하였다.
수천의 아들은 치근이오, 대성의 아들은 철이다. 치온의 아들은 택이오, 딸은 이흥남, 최흡 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치공의 아들은 한이오, 딸은 익흥수 고립, 박잠, 이이준에게 출가하 였다. 치검의 딸은 고영, 이순, 홍세민, 첨지 원종의에게 각기 출가하였다. 치경의 아들은 설 서 수요, 딸은 정언 목 취선, 승문박사 정근, 조지륵, 첨지 윤형갑에게 출가하였다. 윤기상의 아들은 구, 황, 영이다. 심인진의 아들은 욱이요, 딸은 한문두, 최시우에게 각기 출 가하였다. 윤민일의 아들은 규요, 딸은 황재중 송연에게 출가하였다. 임계황의 아들은 익령, 봉령, 령이오, 딸은 이구준, 이성정 신에게 출가하였다. 권수기의 아들은 건신인데 아들이 없어 족자 현감 일호로 뒤를 이었고, 딸은 교리 심광세에게 출가하였다. 서흡의 아들은 경 제이다. 치성의 아들은 설, 서, 숙, 진이오, 딸은 동지 정명해, 좌랑 이유일에게 출가하였으며, 서출 은 윤, 은이다. 치신의 딸은 첨지 유파와 김응성에게 출가하였다. 선군의 아들은 판서 방, 참판 양, 참판 휘, 우윤 훤이다. 이윤복의 아들은 진남과 현감 탁남이오, 딸은 현령 유사경 에게 출가하였다. 덕신정의 아들은 홍오, 홍헌이오, 딸은 허식, 김완, 신달도에게 출가하였 다. 순의 아들은 훈련봉사 일룡이오, 철의 아들은 일기이다. 여러 손자들을 세어보니 5세 이하로 생존해 있는 사람만도 일백인이 넘으나 다 기록할 수 없고, 간간히 경사대부도 나면서 모두 이름이 있어 능히 가성을 이어 조선의 서업을 실추함 이 없으니 우리 조상의 사업은 쇠함이 없겠다. 모를 일은 사람의 일이라고 누가 말하였던 가? 이로 보면 우리 외가의 복록의 전함은 아직 다하지 않은 것이다. 명하기를, 규규한 장부는 나라의 특(황소)이로다. 간과 같고 성과 같아서 한 적도 용납지 않았도다. 남과 북 어디인들 아니 간 곳이 있었는가? 이노는 자취를 감추었도다. 중엽의 융성함은 무엇하나 공의 위덕이 아님이 있었는가? 장수이자 정승이었으니 소호와 방숙같고 금중이나 변방을 맡지 않은 곳이 없었으니 염파와 이목 같도다. 공이 졸한지 몇해이던가? 명망은 여전하도다. 아들 두고 손자 있으니 여경은 다함이 없도다. 나는 돌에 명을 새기나니 우리 후인들에게 알리기 위함이로다. 천추만세가 되도록 고 장무공의 묘역임을 알지어다. 현손 숭정대부 해창군 윤방( 尹 昉 )지음. 5대손 어모장군 행 충좌위 부사용 윤제( 尹 祭 )는 글을 씀. 숭정대부 행지중추부사 김상용( 金 尙 容 )은 전을 함. 천계 원년 10월 일. (13)고려왕릉지 ( 高 麗 王 陵 址 ) 소재지 : 선원면 냉정리 산11 유적현황 : 강화읍에서 84변 지방도를 따라가다 보면 강화읍과 선원명의 경계지점에 찬 우물 고개가 있고, 다시 냉정리와 금월리의 경계에 대문고개가 있다. 유적은 찬우물고개와 대문고개 사이에 놓은 야산의 동남쪽에 위치한다. 그러나 당시의 유구가 남아있지 않기 때
문에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고, 다만 高 麗 史 00 에 高 麗 高 宗 24년(1237) 太 祖 와 世 祖 의 陵 을 이장하였다가, 忠 烈 王 2년(1278) 다시 開 城 府 로 이장하였다 는 기록이 있어 왕릉지 로 추정될 뿐이다. 전언에 의하면 이 일대에서 석축기단과 자기편등 유물이 수습된 바 있다 고 함으로, 대형고분이 있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14)조요용묘 ( 趙 夭 龍 墓 ) 소재지 : 선원면 물우리 산70-52 유적현황 : 선원파출소에서 불은면 방향으로 84번 지방도를 따라 오다보면 약 350m 정 도 지나 좌측으로 냉정2리 마을회관으로 가는 소로가 있다. 이 소로를 따라 약 250m 정도 더 가면 哲 宗 外 家 가기 전에 좌측으로 석인상이 세워진 묘역을 발견할 수 있다. 유적이 위 치한곳은 물우리 마을을 둘러싼 야산의 말단부에 해당한다. 봉분을 중심으로 중앙에 상석과 향로석이 놓여져 있고, 좌우 대칭적으로 석인상이 각각 1기씩 서있다. 한편 주민들 사이에 서 조씨 묘 로 불리고 있는 묘역은 동서 약 30m, 남북 약 20m의 규모이며, 가운데 봉분을 중심으로 총 7기의 묘가 더 위치하고 있다. (15)철종외가묘 ( 哲 宗 外 家 墓 ) 소재지 : 선원면 냉정리 산70-46 유적현황 : 냉정2리 마을회관 앞으로 난 소로를 따라 약 40여m를 가면 哲 宗 外 家 가 나오 는데, 이곳은 야산의 남쪽 야트막한 말단부에 위치한다. 전체적으로 남향하고 있으며 묘역 의 전체 규모는 동서 60m, 남북 20m이다. 현재 묘역에는 朝 鮮 哲 宗 의 외숙부들 묘 3기가 있다. 각 묘마다 묘비, 망주석, 상석 등의 석물을 갖추고 있다. 좌측으로부터 廉 尙 任 墓, 중앙 廉 德 石 墓, 우측의 廉 星 華 의 부부합장묘가 있다. 철종외가 묘는 철종외가에서 좌측으로 약 500m 떨어진 길 바로 옆에 있다. 묘역에는 염성 화 염덕석 염상임의 묘역이다. 묘역은 전체적으로 이중활개를 하였다. 묘역의 형태상을 보면 먼저 성화의 묘역을 조성한 뒤편 그 좌측의 빈 공간에 덕석과 상임의 묘역을 정비한 것으로 보인다. 즉 계체석이 일자의 형태를 하지 않고 ㄱ 자나 ㄴ 자 형태로 연이어 있다. 활개 역시 성화 의 묘역에서 연이은 흔적이 보인다. 3기 모두 공통적으로 묘표 음기에 용담 이란 글씨가 움 푹하게 파져서 새로 새겨 놓은 흔적이 보인다. 그것은 파평 염씨가 용담 염씨를 가칭하여 철종의 외가라고 속이기 위하여 글씨를 파령 이라고 새긴 것을 새로 정비한 것이다. (16)철종외가 ( 哲 宗 外 家 ) 소재지 : 선원면 냉정리 264 유적현황 : 哲 宗 外 家 墓 에서 동쪽으로 약 80여m 떨어져 있다. 유적은 朝 鮮 哲 宗 (재위 1849-1863)의 외숙인 000이 살던 집이다. 哲 宗 4년(1853)에 지은 이 건물은 원래 안채와 사랑채를 둔 H' 字 形 배치형식을 취하고 있었으나, 행랑채의 일부가 헐려 지금은 E' 字 形 의 몸체만 남아있다. 전형적인 중부지방의 양반집 형태로 기풍이 있으나 화려하지 않은 건물이 다.
이 집은 1853년 철종 4년에 지어진 것으로 철종의 외숙인 염보길이 살았던 가옥이다. 이 건물은 당초 안채와 사랑채를 좌우에 두는 H자형 배치를 취하고 있었으나, 행랑채 일부가 헐려 지금은 ㄷ자 모양의 몸체만 남아있다. 평면 구성은 전체적으로 경기지역 사대부 가옥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안채와 사랑채를 일자로 곧장 연결시켜 화장담으로 간단하게 구획한 게 특이하다. 당시 일반 사대부 집의 웅장한 규모와는 다르게 법도에 맞도록 고졸하게 지은 건물이다. (17)고려 가왕릉 ( 高 麗 假 王 陵 ) 소재지 : 선원면 연리 능골 산 17 유적현황 : 연리 신골에 위치해 있으며, 서산 송씨 묘역의 향좌측 숲에 위치한다. 가왕릉 은 도굴된 흔적이 있으며, 입구와 석실을 구성하는 부재가 노출되어 있다. 주위에는 나지막 한 봉분들이 확인된다. 이 일대는 묘 터로서 상당기간 매장행위가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고려 고종때 왕족이 죽었을 때 매장하고자 길이 2m 길이 1.8m, 높이 90cm의 석 실을 조성하고 석등과 옥판을 비치하였으나 풍수지리설에 배치하여 가왕릉만 설치하였는데 1910년 도굴되어 부장품은 유실되었다고 한다. (18)광성보 순절묘단 ( 廣 城 堡 殉 節 墓 壇 ) 소재지 : 불은면 덕성리 산11 유적현황 : 廣 城 堡 내에 위치하고 있는 雙 忠 碑 閣 아래에 위치한다. 모역에는 전체 7기의 무덤이 있고, 좌향은 서향이다. 비에는 辛 未 洋 擾 戰 亡 將 兵 侍 郞 殉 節 墓 壇 이라 새겨져 있다. 殉 節 墓 壇 은 辛 未 洋 擾 당시 순국한 무명용사들을 위한 무덤으로 朝 鮮 高 宗 8년(1871)에 세워 진 것이다. (19)허유전묘 ( 許 有 全 墓 ) 소재지 : 불은면 두운리 산297 유적현황 : 불은 파출소 앞으로 난 84번 지방도를 따라 오두리 방향으로 약 100m를 가 다보면 우측으로 난 소로가 있다. 이 소로를 따라 약 7000여m를 더 가면 소로가 끝나는 德 政 山 동록의 마을일대가 잘 관망되는 곳에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許 有 全 (1243-1323)은 高 麗 忠 肅 王 代 의 名 臣 으로 본관은 김해이며 忠 州 同 錄 延 의 아들이다. 고려 원종 말년에 文 科 에 급제하고. 忠 烈 王 代 여러 차례 승진하여 도첨의참리 지밀직사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충 숙왕대 駕 洛 君 에 봉해지고, 1321년에 守 僉 議 贊 成 事 에 이어 政 丞 이 되었다. 현재의 許 有 全 墓 는 1988년 한국선사문화연구소에서 발굴하여 복원한 것이다. 발굴당시 허유전 묘에서는 청 자 잔, 토기병, 엽전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고려시대 연구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묘는 전체 남동향을 하고 있으며, 묘 뒤에는 비교적 경사가 있는 곡장으로 둘러져 있다. 묘는 크 게 2단으로 나뉘어져 있다. 묘역은 1988년 6월 한국선사문화연구소 주관하에 발굴작업이 이루어져 고려시대 묘제 연 구뿐만 아니라 고려 청자잔,토기병,송 금의 엽전 등 고려시대 유물이 다수 출토되어 고려시 대 연구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묘역은 두산재 라고 하는 사당 바로 뒤편에 사각봉분 형태로 있다. 사당 입구와 사당 안 에는 많은 비석들이 있고 두산재를 들어가 오른쪽으로 가면 맞배지붕 형태의 신도문 을 지 나 그 안쪽에 묘역이 있다. 발굴 조사후 새로 정비한 관계로 잘 보존되어 있다. 전돌을 이 용하여 정사각형의 호석을 쌓아 사각봉분을 만들었다. 묘역은 3단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상 계에는 봉분이 있고 봉분 전명 중앙에 표석이 있고 그 좌우에 문비석이 있다. 표석은 사각 기둥형태로 되어 있다. 문비석은 아마 고려식 묘표의 화관석의 일종으로 보인다. 그 앞에는 앞부분만 보이는 상석 이 2개가 연이어 붙어 있다. 중계에는 계체석을 놓고 하단 좌우에는 문인석이 앞을 쳐다보 고 있는 형태이다. 문인석은 마모가 심하고 좌측 것만 본래 것이고 우측은 새로 만든 것이 다. 하계에는 아무것도 없다. (20)고경신묘 ( 高 敬 身 墓 ) 소재지 : 불은면 두운리 87-1 유적현황 : 濟 州 高 氏 사당인 永 慕 祠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두도미 마을을 둘러싼 배산 의 동남사면의 말단부에 해당한다. 중앙의 쌍분을 중심으로 묘비석, 향로석과 상석을 중심 으로 좌우 대칭으로 석인상이 배치되어있다. 향로석과 상석, 석인상은 매장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며 묘비석은 후대에 세워진 것이다. 묘비에는 贈 嘉 善 大 夫 吏 曹 參 判 濟 州 高 公 敬 身 之 墓 配 貞 夫 人 昌 寧 成 氏 之 墓 라 左 書 되었다. 하단에 근대 민묘 2기가 조성되었다. (21)이규보묘( 李 奎 報 墓 ) ㆍ소재지 : 길상면 길직리 산115 ㆍ유적현황 : 길상면에서 불은면 방향으로 84번 지방도를 따라 오다보면 좌측 길흥주유소 앞으로 사거리가 나온다. 길흥주유소 바로 옆으로 난 도로를 따라서 약 700여m를 가면 우 측으로 소로가 나오고, 이 소로 끝에 있는 구릉 위에 유적이 위치하고 있다. 李 奎 報 (1168-1241)의 본관은 黃 驪, 자는 春 卿, 호는 白 雲 居 士 止 軒 三 酷 好 先 生 이며, 시호는 文 順 이다. 高 麗 明 宗 19년(1189)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최충헌에 의해 기용된 문인이다. 고종 7 년(1220), 禮 部 郎 中 翰 林 侍 講 學 士 를 거쳐 衛 尉 寺 判 事 가 되었으나, 八 關 會 행사에서 잘못을 저질러 한때 蝟 島 로 유배되었으며, 高 宗 19년(1232) 書 省 判 事 승진하고, 이듬해 集 賢 殿 大 學 士 政 堂 文 學 參 知 政 事 太 子 少 傅 등을 거쳐 高 宗 24(1237) 門 下 侍 郞 平 章 事 監 修 國 事 太 子 大 保 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몽골군의 침입을 陳 情 表 로써 격퇴한 명문장가였다. 시 술 거문고를 즐겨 삼혹호선생이라 자칭했으며, 만년에 불교에 귀의했다. 저서에 東 國 李 相 國 集, 白 雲 小 說, 국선생전( 麴 先 生 傳 ), 8만대장경의 기원문인 大 藏 經 刻 板 君 臣 祈 告 文 등이 있으 며, 수많은 詩 를 남겼다. 현재 묘역에는 중앙의 높이 1.8m, 둘레 16m 규모인 봉분을 중심 으로 봉분 앞쪽으로 상석과 석등 각 1기씩 배열되어 있고, 그 앞쪽으로 좌우 문 무인석,망주 석이 한 쌍씩 세워져있다. 묘역은 여주이씨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1967년 후손들이 묘 역을 정화하고 재실을 복원하였다. 고려왕조의 빛나는 문사 이규보의 묘는 명당이다. 풍수지리를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그 터 가 대범하고 한없이 편안한데 어찌 명당이 아닐수 있을까. 묘역 뒤로는 푸른 잔솔이 에워싸 고 있고 먼발치 앞으로는 수령이 상당해 보이는 곧게 뻗은 소나무 대여섯 그루가 수문장처
럼 서 있는 기품이 수려하고 늠름하다. 주변의 넉넉한 기운과 어울려 한결 풍정을 돋운다. 명당이라 치장에 무심했던 것은 아닐까. 묘는 별 특징 없이 소박하다. 봉분 앞에 상석이 놓이고 석등이 하나 서 있으며 양 옆에는 망주석 한 쌍이 배치되어 있는데 그저 조출할 뿐 잔재주가 보이지 않는다. 양쪽에 서 있는 문 무인 석상은 매우 사실적이되 겸허하고 고족하 다. 전체적으로 소박한 이 석물들은 당시의 기풍을 엿볼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 묘 옆으로 재실을 갖추고 있다. ㆍ참고문헌: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경기남부와 남한강, 돌베개, 2000, 답사여행길라잡이 (22)강화온수리성공회 ㆍ소재지 : 길상면 온수리 505 ㆍ유적현황 : 길상면 소재지에서 길상파출소 우측으로 난 소로를 따라 가다 다시 좌측의 도 로를 따라 약 100여m 정도 가면 강화온수리성공회가 위치해 있다. 강화온수리성공회는 1898년 영국인 瑪 可 신부가 건립한 것으로, 사적 제424호인 성공회강화성당과 마찬가지로 합각면으로 출입구가 나 있는데, 이는 예배에 따른 평면활용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건물은 근세 서양식과 한국적 요소가 가미된 특수양식으로 정면 3칸, 측면 9칸의 소로 수장집 형식 으로 용마루의 양 끝에는 십자가가 장식되어 있다. 벽체는 적벽돌로 둘렀고 상부에 창을 내 어 처마에 가려 채광을 제한하고 있다. 이 건물의 향 우측에는 서슬삼문 형식을 변형한 2층 누각의 종각이 있는 기본적인 構 法 은 한식목가구조이다. 이 누각 또한 간결한 납도리집이 다. 본당의 내부는 高 柱 사이를 통로로 사용하고 양앞으로 퇴보를 달아 내는 7량가이다. 강화 온수리성공회 성당은 1898년 트롤로프 선교사가 사제관과 함께 건립하였다. 성당 건 축 후 영국인 외과의사 로우스가 이곳에서 진료활동을 폈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온수리 성공회 성당은 사적 제424호인 성공회강화성당과 마찬가지로 합격면으로 출입구가 나 있는 데 이는 예배에 때한 평면활용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문화재자료 제25호로 지정된 이곳 에는 성당과 2층의 종루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성당을 살펴보면 정면 3칸, 측면 9칸의 팔작집이다. 지붕의 정면과 후면의 합각부 위, 용마루 양 끝에는 십자가 장식되어 있어서 이곳이 전통양식의 건물구조를 한 기독교 계 열의 건물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벽체는 하부를 적벽돌로 둘렀고 상부 각 칸마다 목재로 창호를 내고 유리로 마감하였다. 그런데 창호가 벽체의 상부에 있기 때문에 지붕의 처마가 창호의 일부를 가리게 하여 채광 을 제한하고 있다. 벽체의 정면 역시 하부에는 적벽돌을 쌓고 상부에는 창호를 내어 마감했으나 가운데 칸에 는 목재로 정문을 내었다. 이곳을 통해서 예배실인 내부를 들어간다. 내부에는 전면에 내진을 설치하여 예배의 집례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고 그 앞으로 의자 를 내어 신도들이 앉을 수 있도록 배치하였다. 내부의 중앙에는 모두 14개의 방형고주를 설 치하여 지붕의 하중을 분산시키고 있다. 내부구조는 고주 사이를 통로로 사용하고 양옆으로 퇴보를 달아내는 7량가의 형식이다. 성당 건물의 우측에는 정면3칸, 측면1칸의 솟을삼문 형식의 종루가 있는데 원래의 정문으 로 생각된다. 종루는 전통적인 솟을삼문 형식을 많이 변형시킨 건물이다. 종루의 양쪽 칸에 는 조그마한 공간을 두어 사용하는데 벽체의 하부는 성당건물과 마찬가지로 적벽돌을 둘렀 고 상부는 회벽에 목재 창호를 내어 채광하였다. 종루의 중앙 칸은 2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데 하층은 문의 역할을 하는 공간이지만 문을 달지는 않았다. 상층은 종루로서 서양식 종이
걸려있으며 줄이 아래층으로 드리어 있어서 종을 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종루의 기본적인 가구법은 한식목조가구조이며 간결한 납도리 형식이다. 성당 앞쪽으로 3기의 비석이 있는데 1기는 터너의 기념비이고 나머지 2기는 트롤로프의 영세기념비이다.. (23)방식 묘 ( 方 軾 墓 ) ㆍ소재지 : 화도면 문산리 산431 ㆍ유적현황 : 方 軾 부부의 합장묘로서, 방식의 본관은 溫 陽 으로 咸 從 嘉 山 南 海 를 역임하였 으며 1646년 仁 祖 대 유탁이 반란을 일으키자 三 水 部 守 로 있던 그가 변을 듣고 단독 출전하 였다가 전사하였다. 봉분의 지름은 약 5,5m이고 앞쪽으로 비가 놓여 있다. 비는 높이 116cm, 폭 42.5cm 두께 17cm이다. 비좌는 높이 17cm 가로 길이 65cm 세로길이 44cm 이다. 방식묘의 봉분과 1m 떨어진 바위에는 여러 개의 성혈이 남아있다. 정면에는 有 朋 朝 鮮 忠 臣 行 三 水 部 護 府 使 兼 鎭 營 兵 馬 僉 節 制 使 贈 嘉 善 大 夫 兵 曹 參 判 兼 同 知 義 林 示 府 事 方 公 軾 之 墓 配 證 貞 夫 人 茂 長 庚 氏 祔 左, 배면에는 大 正 七 年 四 月 一 立 九 代 宗 孫 貴 0 主 務 八 代 孫 湲 라 기록되어 있다. (24)기우제단지( 祈 雨 祭 壇 址 ) ㆍ소재지 : 화도면 문산리 산64-1 ㆍ유적현황 : 天 祭 庵 宮 址 의 북서편에 위치해 있다. 기우제 단지에는 현재 샘터가 남아있는 데 궁지에서 약 60m 가량 떨어져 있다. 당시의 유구로는 우물지의 앞쪽으로 동서 길이 6m, 남북 길이 6m의 토단이 남아있다. 토단 우측으로 현재 사용하는 우물이 있으며, 그 앞 쪽으로 가로 10m, 세로 5m, 높이 60cm 내외의 단을 쌓았으나, 현재 대부분 유실된 상태이 다. 기우제단은 山 川 祭 壇 이라고도 한다. 오래전부터 가뭄 때 기우를 올리면 효과가 있다고 하는 곳이다. (25)선두포구( 船 頭 浦 口 ) ㆍ소재지 : 화도면 사기리 119-24 ㆍ유적현황 : 현재의 선두포 비석군이 있는 위치에서 선두포 수문지가 있는 곳까지 약 400m 길이의 둑이다. 船 頭 浦 는 朝 鮮 肅 宗 32년(1706) 9월 5일에 왕의 윤허를 받아 강화유 수 閔 鎭 遠 이 1706년부터 다음해까지 둑을 쌓아 막은 것으로 假 陵 浦 口 와 함께 축조하여 화 도면과 양도면을 연결시킨 대규모 토목사업이었다. (26)이건창생가( 李 建 昌 生 家 ) ㆍ소재지 : 화도면 사기리 167-3 ㆍ유적현황 : 李 建 昌 은 조선말의 문신이자 대문장가로 본관은 全 州 이며, 小 名 松 悅 이고 자 는 鳳 朝 이다. 朝 鮮 高 宗 3년(1866) 15세에 別 試 文 科 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19세에 홍문관직 벼슬을 주었다. 23세에 서장관으로 淸 나라에 가서 문장을 떨쳤
으며, 24세때 충청도 암행어사 해주 감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파당과 족친을 초월 하여 공정한 입장에서 당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기술한 명저 黨 議 通 略 이 있다. 조선후기 학자이자 문자가인 이건창은 본관은 전주 소명은 송열 자는 봉조 호는 영재이다. 정종의 후예로 이조판서 시원의 손자로 증이조참판 상학의 아들이다. 할아버지가 개성유수 로 재직할 때 유수관아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조부 시원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문장이 뛰어났으며 1866년에는 별시문좌에 병과 로 급제하였다. 1874년 약관의 나이에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가서 당대의 문장가들과 교우 하였으며 충청우도암행어사, 예문관제학, 함흥부안액사 등을 역임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여 일체의 관직을 버리고 향리인 화도면 사기리에서 일본 침략 세 력을 배척을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성품이 강직하여 병인양요때 자결한 할아버지 유지를 받들어 척양왜주의자로 일관하였다. 저서로는 명미당집 남천기 동의통략 등이 전 한다. 유적은 자연석 담장으로 둘러진 ㄱ 자형 평면을 가진 전형적인 중부지방의 민가형태로 1996년 정비로 그 모습을 일신하였다. 3칸짜리 문간채에 좌측은 방, 우측은 광을 내고 가 운데를 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명미당 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우측으로 는 두 칸짜리 안방과 좌측으로는 한 칸짜리 건너방이 있다. 안방의 앞으로는 자연석 외벌대 위에 두 칸짜리 부엌이 있고 나머지는 자연석 이벌대의 기단을 하였다. ㆍ참고문헌: 강화군, 강화문화원, 2005 강화현판집 (27)참성단( 塹 城 壇 ) ㆍ소재지 : 화도면 흥왕리 산42-1 ㆍ유적현황 : 마니산 정상에 위치하는 참성단은 정확히 언제 세워졌는지 알 수 없으나, 단 군이 축조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명칭 또한 高 麗 使 에는 塹 城 壇 또는 參 星 壇 으로 불 리고 있다. 참성단과 관련된 기록을 찾아보면 高 麗 元 宗 5년(1264)에 百 勝 賢 의 건에 따라 원종이 마니산 참성에서 친히 醋 齊 를 지냈다 는 기록이 보이고, 1530년에 편찬된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에는 참성단은 마니산 꼭대기에 있는데, 돌을 쌓아서 만들었다. 단의 높이는 10척인데 위는 모가 나고 아래는 둥글다. 위의 사면은 각각 6척 6촌이며, 아래의 둥근 것은 각각 15척이다. 이들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참성단은 최소한 고려후기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 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기능은 도교의례인 醮 祭 가 행하여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기능 은 유교사회인 조선시대까지 지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에서 상세 한 기록한 바와 같이 참성단은 마니산 정상부에 원형에 가까운 부정형의 단을 만들고 그 위 에 한 변 길이 6.6m의 장방형의 단을 쌓았다. 강화도 마니산 꼭대기에 있는 돌로 쌓은 단( 壇 ), 전설상 민족시조인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았다고 전해지는 제단이다. 참성단은 둥근 모습으로 돌을 쌓은 하단과 네모 난 모습으로 돌을 쌓은 상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둥근 하단은 하늘, 네모난 상단은 땅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런 모습은 경주의 첨성대와 비슷하다. 참성단에 관한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 에 처음 보인다. 이에 의하면, 참성단은 참성단 으로 기록되고, 세상에 전하기를 단군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석단( 石 壇 )으로서, 위는 네모지 고 아래는 둥글며, 높이는 10척, 석단 위의 네 면은 각각 6.6척, 아래 너비는 15척이라고 되어 있다. 이와 비슷한 기록은 고려사 지리지 에도 보인다. 참성단은 세월이 지나면서 허물어져서 1639년(인조17)과 1700년(숙종26)에 두 차례에 걸쳐 개수하였다고 한다.
고려와 조선왕조는 때때로 이곳에서 도교식 제전행사인 초제(별에 대한 제사)를 거행하기 도 하였다. 조선후기에는 단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참성단을 단군시대의 종교와 관련 시켜 이해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예컨대, 18세기 중엽 이종휘는 수산집 의 동사 에서 참성단을 단군시대의 종교인 신교의 제단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는 그때까지 써오던 참성단 ( 塹 星 壇 )을 참성단( 塹 城 壇 )으로 바꿔 썼는데, 이는 이곳에서의 제사가 별과 관계가 없다는 뜻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단군을 적극적인 신앙대상으로 이해하지는 않았 으므로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삼랑성과 아울러 강화도 고적의 하나로 이해하 고 그 보존에만 주로 신경을 써왔다. 참성단이 민족의 성지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한말 일제시대 단군을 숭배하는 대종교가 성립한 이후이다. 이때부터 강화도는 단군시대 정치중심지의 하나로 인식되고, 참성단의 네 모난 상단과 둥근 하단은 각각 땅과 하늘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었으며, 마니산은 음 [땅]과 양[하늘]이 만나는 신성한 수중산으로 이해되었고, 마니산 기슭에 단군사당이 건립 되었다. 참성단을 민족성지로 서술한 기록으로는 김교헌의 신단실기, 북애자의 규원 사화, 대야발 단기고사, 그리고 대종교중광 60년사 등이 있다. 8 15 민족광복 후 대종교의 영향을 받아 개천절이 제정되면서 이에 따라 참성단도 민족의 성지로 이해하는 전 통이 그대로 이어졌다. 그래서 민족제전인 전국체전행사가 열릴 때에는 이곳에서 성화를 채 화하는 것이 지금까지 관례로 이어져 오고 있다. 참성단이 과연 단군의 제천단인지는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강화도에는 청동기시대에 축 조된 거대한 고인돌(지석묘)이 있고, 단군과 연관된 전설이 오래전부터 내려오고 있어서 상 고시대에 이곳에 무시못할 정치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상고시대에는 하 늘에 대한 제사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으므로 아마도 참성단은 이 시기부터 제천단으로 축조 이용해오다가 삼국시대 이후 도교가 들어오면서 별에 대한 제사도 아울러 행하여 온 것으로 짐작된다. (28)이건창묘( 李 建 昌 墓 ) ㆍ소재지 : 양도면 건평리 655-1 ㆍ유적현황 : 寧 齊 李 建 昌 은 조선말의 문신이자 대문장가로 본관은 全 州 이며, 小 名 은 松 悅 이고 자는 鳳 朝 이다. 1866년 15세에 別 試 文 科 에 병과로 급제, 23세에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가서 문장을 떨쳤으며, 24세 때 충청우도 암행어사, 해주 감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는 黨 議 通 略 이 있는데 이는 파당과 족친을 초월하여 공정한 입장에서 당쟁의 원인과 기 술한 명저이다. 현재 화도면 사기리와 옹진군 북도면 모도리 선착장에는 그 치세를 기리기 위한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묘역은 마을 뒤편 언덕에 있다. 봉분은 활개를 이중으로 장식하고 그 안에 봉분을 조성하 였다. 묘역에는 비석이나 상석도 없이 봉분만 있다. (29)곤릉( 坤 陵 ) ㆍ소재지 : 양도면 길정리 산75 ㆍ유적현황 : 유적이 위치한 곳으로는 덕정산 줄기의 가장 남쪽 능선에 위치하는 곳으로, 앞쪽으로는 길정저수지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곤릉은 高 麗 康 宗 의 妃 인 元 德 太 后 柳 氏
의 陵 으로 1974년 보수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원덕태후는 종실 信 安 候 城 의 딸로 강종과는 12촌간이며, 강종 1년에 왕비로 봉해졌으며 소생을 고종이 있다. 고려 강종(재위 1211 1213)의 부인인 원덕태후 유씨의 무덤이다. 원덕태후는 고종의 어 머니로 강종 1년(1212)에 왕비가 되고 연덕궁주라 하였다. 뒷날 원덕태후는 추대되고 1253 년에 정강의 시호가 더해졌는데, 언제 사망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석물은 없어졌 고 봉분과 무덤을 둘러싼 담도 무너졌던 것을 197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손질하여 고쳤다. 능은 전체적으로 3단으로 되어 있다. 봉분과 석축, 곡장은 붕괴되고 석조물은 없어진채 폐 허가 된 것을 1974년 복원 정화하였다. 본래 묘역은 고려후기 왕실 묘제를 따라 문 무인석 이 있다고 전해지지만 현재는 묘표만 남아있다. 상단에는 곡장을 자연으로 돌렸다. 그 안에 원형 봉분이 있다. 봉분 앞에는 계체석이 있다. 중계에 중앙에는 작은 월두형 묘표가 있는데 묘표에는 고려원덕태후곤릉( 高 麗 元 德 太 后 坤 陵 ) 이라 새겨져 있다. 하계에 있는 망주석이 특이한데 본래 하계 좌측 흩어져 있는 난간석 의 일종으로 보이는 것을 보수공사 과정에서 망주석으로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30)진강장지( 鎭 江 場 址 ) ㆍ소재지 : 양도면 길정리 산179 ㆍ유적현황 : 진강산과 덕정산 사이에 난 계곡에는 완만한 산사면이 형성되어 있는데 진강 산의 서록 산능선에서 석릉아래에 까지 1m 내외의 토담이 연결되어 있다. 이 토담의 정상 부에서 산중턱의 파평윤씨지묘 까지의 구간은 높이 50cm 폭 50cm 다시 그 아래에서 석릉 입구까지 높이 1.5m내외, 폭 1m내외의 토담이 남아있다. 鎭 江 場 은 말을 방목하였던 목장 으로서 조선시대 군마의 확보를 위해 설치된 곳이었다. 김용희 (73세 길정리 곤릉부락 거 주)씨에 의하면 예부터 馬 城 이라 불렸고, 이 안에서 말을 키웠다고 한다. 양도면 도장리 뒷산으로 짐작된다. 이곳에서 좋은 말이 산출되었다 하여 저명한데 그 가운 데 벌대총은 효종의 애마였다는 전설이 알려지고 있다. 그 전설인즉 다음과 같다. 강황의 진강산 남쪽에는 한 샘이 있었는데 이 샘으로 인하여 명마가 났다고 한다. 조선조 효종께서 자주 강화의 방위설비를 살피러 왕래 하였는데 그때마다 이명마가 강을 건너 효종 을 모시고 강화에 들러 순행을 하다가 저녁이면 강을 건너 서울 대궐까지 왕을 모시어다 드 리고 혼자 돌아오곤 하였다. 효종은 기뻐하며 말이름을 벌대총이라 명명하면서 말하기를 누구든지 배총이 죽었다라고 하는 사람은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왕 의 행차를 모시고 그날 일을 끝마치고 강화로 돌아오는 길에 김포 양천지방에서 이르러 갑 자기 졸도한 채 일어나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그런데 양천군수는 이 사실을 발설하였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하겠기에 알릴 수 없어 3일간이나 머뭇거리다가 상감을 배알하고 먹지 않 은지 3일이요, 누워서 일어나지 못한지 3일입니다. 라고 아뢰었더니 효종이 크게 놀라면서 그러면 벌대총이 죽었다는 말이냐 라고 슬퍼하시며 하늘이 짐을 버리시는구나 하고 눈믈 을 흘렸다고 한다. 이때부터 매우 애타게 난처한 일을 당하면 양천원님 죽은말 지키듯한 다 라는 고사가 생겼났다고 한다. ㆍ참고문헌: 강화사 강화문화원, 2004, 강화도의 맥 (31)석릉( 碩 陵 ) ㆍ소재지 : 양도면 길정리 산182
ㆍ유적현황 : 碩 陵 은 高 麗 熙 宗 의 陵 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01년 석릉에 대한 발굴조 사를 실시하였다. 碩 陵 은 高 麗 熙 宗 의 陵 이다. 희종은 神 宗 의 장남이며 이름은 政, 자는 不 피, 시호는 誠 孝 로, 靖 宣 太 后 의 소생이며 妃 는 成 平 王 后 王 氏 이다. 희종은 당시 실권자였던 최충헌을 제거하는데 실패하여 희종 7년에 폐위되어 강화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高 宗 24년 8월에 승하하여 이곳에 묻히게 되었다. 발굴 전의 석릉은 1976년 일부 정비한 것으로 석축 위에 북동서 3면을 돌로 曲 墻 을 쌓은 후 그 안쪽으로 봉분을 만들었으며, 봉분앞에 高 麗 熙 宗 碩 陵 라고 쓰여진 묘비석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석인상이 1기씩 있었다. 문인상은 두부와 신부가 분리되어 있었던 것을 최근에 접합시켜 놓았다. 고려 희종(1169 1237)의 능이다. 희종은 신종의 장남으로 이름은 영, 자는 불피, 시호는 성효이다. 어머니는 정선태후 김씨이며 비는 성평왕후 왕씨이다. 희종은 1204년에 즉위하였 다. 즉위의 공으로 최충헌을 문하시중 진강군 개국후에 봉하였는데 횡포가 심하자 왕은 내 시 왕준명 등과 함께 그를 제거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을 실패하여 희종 7년(1211)에 폐위 되었고, 강화교동에 와 있다가 고종 24년(1237) 8월에 승하하여 이곳에 안장되었다. 조선 현종 때 강화유수 조복양이 찾아내어 다시 무덤을 쌓았는데, 그 뒤 석물도 부서지고 무너진 무덤을 1974년 손질하여 고쳤다. 묘표 좌측에 고려후기에서 조선전기로 보이는 문 인석이 있다. 우측 문인석은 우측 곡장 앞부분에 계체석을 세워 임시로 머리부분만 세워 놓 았다. 주위에는 난간석과 계체석 등이 흩어져 있다. 묘표 앞부분에 계체석을 놓고 그 앞에 정자각이 있던 흔적이 보인다. 석릉 주변에는 최근에 고려시대 귀족의 무덤이라 생각되는 돌방무덤(석실분)들이 많이 발 견되었다. (32)가릉( 嘉 陵 ) ㆍ소재지 : 양도면 능내리 산16-2 ㆍ유적현황 : 가릉은 高 麗 24대 元 宗 의 妃 順 敬 太 后 의 陵 이다. 순경태후 金 氏 는 莊 翼 公 若 先 의 딸로 慶 州 出 身 이다. 高 麗 元 宗 3년 靜 順 王 后 에 追 封 되고 1274년 忠 烈 王 이 즉위하자 順 敬 太 后 에 追 尊 되었다. 능의 봉분은 붕괴되고 석조물은 파괴되어 폐허로 있던 것을 1974년 현재의 모습으로 보수 정비하였다. 고려 원종(재위 1259 1274)의 왕비 순경태후의 무덤이다. 순경태후는 장익공 김약선의 딸로서 고종 22년(1235) 원종이 태자가 되자 태자비인 경목현비가 되었으며, 다음해에 충 렬왕을 낳았다. 지금의 자리에는 고종 31년(1244)경 사망한 뒤 모신 것으로 짐작한다. 고려 원종 3년(1262) 정순왕후로 추대되고 충렬왕이 즉위(1274)하여 순경태후로 높여졌다. 무덤 주변의 석물은 부서져 없어졌고, 봉분도 무너진 것을 197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손질하여 고쳤다. 능은 능내리 마을을 지나 약 500m 산으로 가면 있다. 능은 전체 3단으로 되어 있고 상계 부분의 봉분은 활개없이 원형봉분만 있는 상태이며 곡장 대신 봉분 주위에 계체석으로 능역 을 표시해 놓았다. 원래 봉분에 복토 작업을 한 관계로 석수가 봉분 뒤편에 머리모양만 보 인다. 중계에는 묘표와 좌우에 각각 문인석이 있다. 묘표는 중앙에 있으면 원두형이다. 묘표 에는 고려왕가릉( 高 麗 王 嘉 陵 ) 이라 새겨져 있다. 기존 조사에서 문인석은 좌우에 각각 2쌍 씩 있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한쌍만 있다. 문인석은 홑대를 약간 좌측으로 비켜 잡고 있으며 고려후기 조선전기 양식이다. 하계에는 자연석으로 신도 형태만을 만들어 놓았다.
(33)전신 생가지( 全 信 生 家 址 ) ㆍ소재지 : 양도면 인산리 산446-1 ㆍ유적현황 : 全 信 生 家 址 터는 모두 헐려서 유적의 흔적을 찾아보기가 불가능하다. 全 信 의 본관은 星 州 全 氏, 高 麗 말 병부상서이며 조선초의 勸 農 使 였다. 이방원과 동문수학한 사이 로 후에 이방원이 太 宗 가 되어 입조시키려고 방문까지 하였으나 不 事 二 君 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태종과 오고간 서신에서 그의 인품을 엿볼 수 있다.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율서면 전제리에 있었다 하나 실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34)예천군 이천묘( 蘂 川 君 李 篟 墓 ) ㆍ소재지 : 양도면 조산리 산64-1 ㆍ유적현황 : 묘역은 朝 鮮 제3대왕인 太 宗 의 次 子 인 孝 寧 大 君 의 次 子 瑞 原 君 의 제 四 者 인 蘂 川 君 李 篟 과 配 位 縣 夫 人 陰 城 朴 氏 의 합장묘이다. 봉분 중앙 상석을 중심으로 묘표와 좌 우에 석인상이 세워져 있다. 묘표는 매장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것과 이장할 때의 것이 좌 우로 배치되었다. 촤측의 표묘 정면에 朝 鮮 彰 義 大 夫 蘂 川 君 李 篟 之 墓 라고 음각되어 있고 우 측의 것은 정면에 縣 夫 人 陰 城 朴 氏 之 墓 라고 음각되었다, 예천군은 세종 27년 서울 태생으 로 諱 는 篟 이다. 縣 夫 人 陰 城 朴 氏 는 府 使 繼 徐 의 딸이다. 묘소는 금천고을 삼성산금불암 선 산에 禮 葬 하였으나, 일제강점기인 1940년 경성부의 도시확장으로 1941년 5월 6일에 종중 의 결의에 의하여 현재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35)송세영묘( 宋 世 永 墓 ) ㆍ소재지 : 양도면 하일리 산68 ㆍ유적현황 : 전언에 의허면 일명 송씨 묘 라고 전해져왔다고 한다. 봉분을 중심으로 가운 데 묘갈이 있고 좌우로 석인상이있는데 좌측의 것은 쓰러져 있다. 묘갈 전면에는 彰 信 校 尉 o 忠 o 副 詞 o 宋 世 永 之 墓 라고 새겨져 있다. 후면에도 음각되어 있으나 마모되어서 내용은 알수 가 없다. 우측의 석인상은 頭 部 가 파손된 흔적이 있으며 토사에 약간 뭍혀있다. 좌측의 석 인상은 쓰러져 있다. (36)김취려묘( 金 就 礪 墓 ) ㆍ소재지 : 양도면 하일리 산70 ㆍ유적현황 : 金 就 礪 는 高 麗 高 宗 때의 武 臣 으로 본관은 彦 陽 이며, 시호는 威 烈 이다. 음서로 등용된 東 宮 衛 을 거쳐 대장군이 되었다. 1216-1218년 거란의 침입을 진압하고 1219년에 는 의주에서 일어난 반란을 평정하였다. 參 知 政 事 判 戶 部 事 을 거쳐 1228년에는 守 太 尉 中 書 侍 郞 平 章 事 判 兵 部 事 가 되었으며 그 뒤 시중이 되었다. 1234년 강화에서 서거하니 고종이 친히 빈소에 나가 조의를 표하고, 3일간의 정사를 중지하였다 한다. 1969년에 묘지석이 발 견되어 이후 후손들에 의해 잘 관리 되고 있다. 양도면 하일리 진강사 서쪽에 있다. 김장군은 고려 고종때의 무관으로 시호는 위열이며 본
관은 언양이니 음관으로 정위에 임명된 후 동궁위를 거쳐 장군이 되어 동북계를 진압한 후 대장군이 되었다. 1216년 거란병이 쳐들어 온 것을 무찌르고 1218년 또 쳐들어 온 것을 평정하고 또한 의 주반란을 토평하는 등 국가에 공로가 많아 판변부사 시중이 되었다. 성품이 강직하고 청백 하여 군기가 엄정하고 부하를 아꼈으며 전투에는 기발한 계교를 써서 큰 공을 세운 장군이 다. 1234년에 강화에서 서거하니 고종은 친히 조의를 표하고 관리로 하여금 3일간 휴업케 하였다. 1969년 묘지석이 발견한 후 묘소를 가꾸게 되었다. ㆍ참고문헌: 강화사 강화문화원, 2004, 강화도의 맥 (37)정제두묘( 鄭 齊 斗 墓 ) ㆍ소재지 : 양도면 하일리 산65 ㆍ유적현황 : 묘역에는 2개의 묘소가 있는데, 앞의 것이 鄭 尙 徵 墓, 뒤의 것이 鄭 齊 斗 의 묘이 다. 鄭 齊 斗 는 본관이 延 日, 자는 士 仰, 호는 霞 谷 이다. 朝 鮮 英 祖 때의 학자로 漢 城 府 출신이 다. 포은 정몽주의 후손으로 일찍히 陽 明 學 에 심취하여 그 이해체제를 확립하여 江 華 學 派 를 성립시킨 인물이다. 좌항은 남향으로 봉분 앞쪽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상이 각 1쌍씩 서있고 우측으로 묘비가 있다. 정제두묘의 비문은 申 大 羽 가 짓고 徐 榮 輔 가 썼다. 정제두 묘역은 양도면 하일리 62-5번지 길 바로 옆에 있다. 아버지 상징 묘역 바로 뒤에 있다. 묘역은 활개없이 용미만 길게 되어 있고 그 앞에 원형봉분이 있다. 봉분 앞에서 혼유 석 상석 향로석이 있다. 상석은 계체석을 좌우로 하고 그 중간에 놓여 있는데 큰 받침돌을 놓고 그 위에 상석을 놓았다. 향로석 앞부분은 파손된 상태이다. 하계부분에는 좌우에 민무 늬로 된 상단에 띠를 2개 두른 망주석과 금과조복에 양관을 한 문인석이 있다. 신도비는 상 석 좌측에 전면을 향해 있다. (38)정상징묘( 鄭 尙 徵 墓 ) ㆍ소재지 : 양도면 하일리 산65 ㆍ유적현황 : 정제두묘 앞에 위치하고 있다. 鄭 尙 徵 은 양명학자 정제두의 부친이자 朝 鮮 顯 宗 代 우의정을 지낸 鄭 維 成 의 아들이다. 비의 전면에는 贈 崇 祿 大 夫 議 政 府 左 贊 成 兼 判 義 禁 府 事 五 衛 都 府 都 管 成 均 進 士 鄭 尙 徵 墓 贈 貞 敬 夫 人 韓 山 李 氏 左 라 새겨져 있다. 향로석은 곤충문양 을 돋을새김 되어 있다. 묘역은 현재 후손에 의해 잘 관리되고 있다. 정상징의 묘역은 정제두 묘역 바로 앞에 있다. 정경부인 한산 이씨와 합장묘로 활개없이 용미만 길게 되어 있다. 원형봉분 앞에는 혼유석 상석 사각 향로석이 있다. 혼유석은 밑부분 이 보이지 않으며 상석은 계체석을 좌우로 그 중간에 큰 받침돌을 위에 놓여 있다. 하계에 는 향로석 앞 좌우로 문관 조복이지만 양관이 아닌 화관을 한 문인석이 있다. 상계 우측에 는 측면으로 서 있는 묘표가 있다. 묘표는 화강암으로 된 민무늬 대석에 각호패형의 비신 으로 되어 있다. 길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 새로 세운 숭모비가 있다. (39)권개묘( 權 愷 墓 ) ㆍ소재지 : 양도면 하일리 66-4 ㆍ유적현황 : 權 愷 묘 앞쪽으로 접하여 鄭 謹 鄭 維 成 의 묘역이 자리하고 이다. 묘의 좌향은 남
동향 하여고, 봉분의 지름은 5.5m이다. 묘의 앞 정면에는 묘표가 있는데, 앞면에는 奉 正 大 未 行 戶 曺 左 郞 權 愷 之 墓 라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