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간 사 국악학 기초연구 활성화의 장을 마련하기 위한 국악원논문집 은 1989년 제1집을 시작으로 2004년 제16집까지 연1회 발간하였고, 잠시 중단되었던 학술지는 2008년 제17집부터 발간횟수를 연간 2회로 늘려 재발간하고 있습니다. 국악원논문집 은 공모를 통해 원고를 모집하고 편집회의를 통한 1차 심사, 분야별 전문가로 구성된 심사위원의 2차 심사를 거쳐 원고를 게재하고 있습니다. <기획논문>편에는 국립국악원 개원60주년을 기념하여 동서양의 고악보와 무보 를 주제로 개최한 국제학술회의에서 한국과 중국, 일본학자들이 발표한 논문 4편을 수 록하였습니다. 또한 <일반논문>에는 세틀형식, 정간수의 변천, 봉장취, 국악을 활용 한 음악치료 등과 관련한 다양한 논문을 담았습니다. 국립국악원 개원 60주년을 맞은 2011년, 국립국악원 국악연구실은 국악원논문 집 의 학술적 가치를 더욱 높이고자 한국연구재단의 등재후보지로 선정되기 위하 여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국악원논문집 의 지속적인 발간을 통해 국 악학 발전을 견인해 나갈 것 입니다. 국립국악원 국악연구실
國 樂 院 論 文 集 제24집 2011/Vol.24 목 차 <기획논문 1> 한 중 일 고악보와 무보 역사적 문헌으로서의 동바무보 와 시용무보 가치연구 신명숙 / 1 Research for value of dongbamubo and shiyongmubo as a historical document 복건남음( 福 建 南 音 ) 공척보( 工 伬 谱 )로 살펴본 중국 전통 음악 기보( 记 谱 )의 특징 왕야오화( 王 耀 华 ) / 27 The Characteristics of Traditional Chinese Notation as Manifested in Gongchepu Notation of Southern Fujian Music 중국 고대무보의 유존과 당대( 當 代 ) 연구실태 개관 유칭이( 刘 青 弋 ) / 81 The Preservation of Ancient Chinese Dance Notations and Current Research 메이지찬정보 는 어디에서 왔는가 테라우치 나오코( 寺 内 直 子 ) / 119 - 일본의 가가쿠 류테키보 의 다양성과 통일 Where did the notational system of Meiji sentei fu come from? - Variety and unification in ryûteki notation in Japanese gagaku
<일반논문> 해외 한국음악학 발전을 위한 국악연구실의 역할 문주석 / 145 The Role of the Gugak Research Office to Promote Oversea s Korean Musicology 유성기음반과 장시간음반에 전하는 봉장취 연구 반혜성 / 167 Research on Bongjanchwi passed down on the SP record and LP record 밖에서 본 한국의 세틀형식 -<영산회상>에 기하여 - 전인평 / 215 New Prospect of Triple Musicl Form - based on Yeongsanhoesang - 정간보( 正 間 譜 ) 1행 정간수( 井 間 數 )의 변천에 관한 연구 정화순 / 237 A Study on the Transition of the Number of Jeonggan on One Line of Jeongganbo 국악을 활용한 음악치료 연구 중 음양오행( 陰 陽 五 行 ) 관련 연구 성과 검토 조연진 / 285 The Review of Studies Based on the Yin-Yang and the Five Elements Theory in Music Therapy Studies using Korean Traditional Music <번역문> 투르크메니스탄(Turkmenistan)의 음악문화 번역 : 이용식 / 321 Turkmenistan 마크슬로빈(Mark Slobin) 외 <부 록> 국악원 논문집 발간규정 333
역사적 문헌으로서의 동바무보 와 시용무보 가치연구 역사적 문헌으로서의 동바무보 와 시용무보 가치연구 신 명 숙* 1) <국문초록> 무용은 시공간의 예술이라고 배웠지만 무용이 종이 위에서 다시 태어나 읽혀질 적 에는 재현의 의미 외에 드러나지 않은 사실들을 숨기고 있어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것처럼 긴장감과 흥미로움을 더해간다. 동바무보 와 시용무보 를 본 논제로 선택한 이유는 우선 두 무보가 종교의식에 쓰이고 있고 또한 무보를 근거로 지금까지 현행되고 있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무보 는 본래 재현을 위해 기록이지만 동바무보 와 시용무보 에서는 본래의 목적 외에 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동바무보 는 움직임이 단순하지만 독특한 상형문자를 통해서 개구리의 상징성과 춤의 기원을 시베리아 샤먼으로부터 찾을 수 있었고, 시용무보 는 고려사 악지 와 송나라 악지 문헌을 비교해서 시용무보 의 연대를 고려까지 연계시킬 수 있다. 핵심어: 무보, 시용무보, 동바무보, 종묘제례악, 일무 목 차 Ⅰ. 서 론 Ⅱ. 동바무보 Ⅲ. 시용무보 Ⅳ. 결 론 * 대진대학교 무용예술학부 교수 1
國 樂 院 論 文 集 제24집 Ⅰ. 서 론 무용은 인류의 역사처럼 오랜 세월 속에 다양하고 풍부한 무용들이 탄생되었지만 전쟁과 사회의 변화에 의해 퇴화, 소멸되는 무용들도 수없이 많았다. 그리고 많은 민족들은 자신 들만의 무용을 암각, 벽화, 회화를 통해 춤들을 표현했지만 오늘날 그 춤들을 복원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였다. 이유는 춤의 전부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관점에서 필 요하다고 보는 장면만 남겼기 때문이다. 기록의 흔적은 오늘날 각 학계분야에서 귀한 유물 과 가치를 인정 받지만 춤의 재현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아시아권의 몇몇 민족들 은 그들의 춤을 무보로 그려 몇 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춤을 계승하는 전통적인 민족들이 존재하고 있다.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인 나시족( 納 西 族 )은 민족 종교인 동바교( 東 巴 敎 ) 의 식무용을 동바무보 1) 를 근거로 지금까지 현행되고 있으며, 조선 왕들의 업적을 기리는 제례의식무용은 시용무보 를 통해 몇 백 년을 거쳐 지금까지 계승되고 있다. 이 두 개의 무보는 춤의 계승을 위한 가치 외에 무보 속에 숨겨진 많은 이야기들을 갖고 있어 역사문 헌으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보라는 단어는 중국 남송( 南 宋 ) 주밀( 周 密 : 1232-1298)의 계신잡식( 癸 辛 雜 識 ) 과 덕수궁무보( 德 壽 宮 舞 譜 ) 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덕수궁무보 의 기원은 1162년 송나라 고종(1102-1187)이 퇴임 후 덕수궁에 거주하고 있을 당시 궁중 예인들이 사용한 무보라 고 알려졌지만 실제 전해내려 오지 않는다. 다만 후에 주밀의 계신잡식 에 기록되어 있어 무보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이 무보는 9종류와 63개 무용 술어가 기록되어 있고 그 중에 대형( 隊 形 )을 알려주는 술어 2) 도 있지만 술어의 해석이 난이하고 무용이 단절되어 재현이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계신잡식 에 쓰여진 무보의 의미는 문자로 술어를 사용해서 무 용 동작과 대형을 기록한 것을 의미하고 재현을 위한 기록이 아님을 알 수 있다. 3)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요구하는 무보의 기능은 서양의 기보법(notation)처럼 무용을 재현할 수 있 는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얼굴방향, 동작, 박자, 음악, 전이도, 대형( 隊 形 ), 복식 등 무용을 위해 재현할 수 있는 모두 요소들을 상세히 표기를 하고 심지어는 영상매 1) 나시족의 동바경전에는 동바무용을 부르는 특별한 명칭은 없고 간혹 무용규정이라고 적혀있다. 그러 나 중국 학계에서는 이를 동바무보 라 부른다. 2) 타원앙아( 打 鴛 鴦 兒 ), 구배아( 龜 背 兒 ) 등등 있다. 3) 이 내용은 필자가 집필한 중국납서족동파무보연구( 中 國 納 西 族 東 巴 舞 譜 硏 究 ) (중국: 학원출판사, 2007), 37쪽에 기록된 내용을 요약한 것임. 2
역사적 문헌으로서의 동바무보 와 시용무보 가치연구 체까지 동원해서 재현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이와 같이 무보의 개념이 과거와 달리 점 차적으로 재현에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무용이 전승이외에도 실기를 바탕으로 점차 학문 적 체계를 갖추고, 인류 문화유산의 산물로 재평가 하려는 인식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동바무보 와 시용무보 는 오늘날 요구하는 무보의 조건을 다 갖추지 않았음에도 불구 하고 오랜 세월동안 계승되거나 재현할 수 있었던 역사적인 경험이 있었다. 이런 사실들은 우리에게 기록의 의미와 중요성을 강조한다. 무보가 무용의 재현을 위한 기록이었지만 문 자와 그림으로 종이위에 그려진 무보는 서양의 무보와 달리 한권의 추리소설을 읽는 것처 럼 숨어진 내용들이 찾아내고 의미를 분석하는 작업이 가능하다고 본다. 동바무보 와 시용무보 를 다루는 과정에서 몇 가지 제한점을 두고자 한다. 현재 동바 무보 는 나시족 동바교의 상형문자를 이용해서 기록되어 있고 현재 출판된 무보는 화발원 ( 和 發 源 )외 2명이 번역한 신적년세 도신무도규정( 神 的 年 歲 跳 神 舞 蹈 規 程 ), 무도내력( 舞 蹈 來 歷 ), 제십라법의도적규정( 祭 什 羅 法 儀 跳 的 規 定 ), 무도적출처화내력( 舞 蹈 的 出 處 和 來 歷 ) 의 4종류와 운남사회과학원 동바연구실에서 발간한 동파무보( 東 巴 舞 譜 ), 신수세여동파무 보( 神 壽 歲 與 東 巴 舞 譜 ) 상, 무도내력( 舞 蹈 來 歷 ) 하, 대제풍청신보호무보( 大 祭 風 請 神 保 護 舞 譜 ), 무도적출처화내력( 舞 蹈 的 出 處 和 來 歷 ) 의 5종류를 합하여 총 9종류 무보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정리해보면 내용이 중복되는 부분이 있어 실제 무보의 종류는 5종류 라고 봐도 무방하지만 국내에 소개된 무보는 극히 드물다. 국내 학술지에 소개된 나시족 관련 논문은 최근 들어 발표되고 있으며 4) 동바무보 관련 논문은 본인이 연구 발표하기도 했다. 시용무보 는 종묘에서 추는 일무를 그림과 문자(술어와 음악을 기록함)를 사용하여 만 든 조선의 유일무이한 무보이다. 이 무보에 관한 학계의 보고는 1956년 민속학보에 실린 시용무보 해제 가 있고 그 후 학문적 접근 관점에서 많은 연구가 발표되었다. 역사적 시 점에서 발표된 대표적인 논문으로 최해리는 중국의 도설적( 圖 說 的 ) 무보 형식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했고 5) 이진원은 중국 명청제공무보( 明 淸 祭 孔 舞 譜 )와 상호관련성 6) 을 설명 하였다. 이숙희는 종묘제례무의 변화를 1463년(세조9년)을 전후로 분리하여 세조 9년 이후 의 제례무 변화를 문헌기록으로 제시했다. 7) 4) 정일, 나시족 지역사회의 생성과 전통축제의 지역활성화, 비교민속학회지 제29집, 2006. 이인택, 중국 나시족 신화비교연구, 중국어문학지 제30집, 2007. 홍희, 중국 나시족 동파의 제천 및 쓰미구 의례와 신화, 한국중문학회지 제40집, 2009 등이 있음. 5) 최해리, 한국무용기록의 역사와 전망, 한국무용기록학회지 창간호, 2001. 6) 이진원, 시용무보( 時 用 舞 譜 ) 연구를 위한 중국 무보 초탐( 初 探 ), 한국무용기록학회지 제5호, 2003. 7) 이숙희, 조선조 종묘제례무의 변천소고, 한국음악사학보 제31집. 3
國 樂 院 論 文 集 제24집 복원에 관한 논문으로 김현주외 2명은 전통무보가 갖는 의미와 한계를 파악하고자 피험 자들에게 시용무보 를 복원하는 작업을 시켰는데 완벽하게 춤을 복원할 수 없었다는 주장 을 했으며 8), 김용은 종묘일무는 조선 유가 사상의 절대 아래 제작되었고 시용무보 의 그 림과 술어묘사를 현대의 창작 춤 안무 형식으로 복원시도는 잘못되었다고 반박했으며, 주 역의 원리로 복원의 가능성을 주장했다. 9) 이종숙은 시용무보 를 현행일무를 비교하여 재 현당시 잘못된 부분들을 지적하였다. 10). 그리고 미술적인 시점에서 이소영외 1인은 시용무보 에 그려진 그림을 화법으로 분석 한 결과 시용무보 는 춤사위를 직접보고 그리지 않고 춤을 잘 모르는 화가들이 그림을 보 고 나누어 그렸고 그 결과 오자와 탈자의 가능성을 암시했다. 11) 이처럼 시용무보 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제시는 무용을 재현하는데 필요한 기록과 정 확성 여부를 살펴보기 위한 것이고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연구가 미비한 것 같다. 그 이유는 시용무보 <보태평무>, <정대업무>의 원류가 고려시대 중국으로부터 왔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시대에 관련된 무용 관점의 연구는 거의 다루지 않았 기 때문이다. 동바무보 와 시용무보 는 주 핵심인 무용의 발생시기와 기록 연대가 명확치 않다. 그 리고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지만 이 무용을 추는 사람들은 제한된 신분과 조건에 의해 추 어졌기 때문에 보편화되지 못했고 또한 어떤 오류에 대해서는 수정, 보완할 수 있는 여건 이 마련되지 못해 무보와 무용이 서로 다르다는 지적도 없지 않았다. 이런 문제점을 논하 는 시기에 필자가 발표하는 주제들은 무겁고 조심스럽기까지 하다. 동바무보 와 시용무보 는 서로 상호 관계성도 없고 비교 연구 대상은 없으나 이 두 무보는 각기 다른 지역에서 무보를 통해 오랜 춤들이 지금까지 연희되고 있다는 사실이 중 요하다고 보았고, 이들 무보는 춤의 재현을 위한 가치 평가보다는 무보에 내재된 여러 가 지 사실들을 살펴봄으로서 역사적문헌의 가치로서 평가하고자 한다. 8) 김현주 유미희 최해리, 한국전통무보의 해석과 재현- 시용무보 를 중심으로, 한국무용기록학회 제4호, 2003. 9) 김용, 한국 궁중무용의 춤사위 기록법 연구, 한국사상과 문화 제33집. 10) 이종숙, 시용무보 의 무절 구조분석과 현행 종묘일무의 비교연구 (경기: 용인대학교 박사학위 논 문, 2002). 11) 이소영 조용진, 그림기법을 통해서 본 시용무보 의 제작 정황 추정, 한국사상과 문화 제21집. 4
역사적 문헌으로서의 동바무보 와 시용무보 가치연구 Ⅱ. 동바무보 1. 동바무보 의 기원 중국 문헌에 모사이( 摩 沙 夷 ), 모시에만( 磨 些 蠻 )등으로 기록된 나시족( 納 西 族 ) 12) 은 현재 중국 윈난성과 쓰촨성, 티벳 지역에 분포되어 살고 있는 중국소수민족이다. 이 민족의 선 조들은 고대 중국 서북지역에서 살았던 고저강( 古 氐 羌 )민족의 한 지류이다. 진한( 秦 漢 )시대 에 한족( 漢 族 )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남하로 이동하기 시작하였고 당( 唐 )대부터 이 지역 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현재 살고 있는 나시족 지역의 주변에는 다른 소수민족 이족( 彝 族 ), 장족( 藏 族 )들과 밀 접한 지역이 있고 또한 차마고도의 경유지로 바이족[ 百 族 ], 타이족[ 傣 族 ]등과의 문화 접촉 이 가능하여 나시족은 자신의 고유하고 독특한 동바교( 東 巴 敎 )를 탄생시켰다. 동바란 산과 마을에서 경을 읽는자, 지혜로운 자 라는 뜻으로 사제를 부르는 나시어( 納 西 語 )이다. 동 바교의 기원은 나시족의 원시종교와 투판[ 土 蕃 ]의 본교, 라마교, 한족의 불교, 도교 등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종교 13) 또는 샤머니즘과 본교의 혼합물 14) 이라고 한다. 따라서 나시족 은 모든 사물에 영( 靈 )이 존재한다는 다신 숭배와 선조들을 신으로 모시는 등 복잡한 신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동바교의 또 하나의 특징은 동바상형문자의 사용이다. 이 문자는 약 7세기경에 만들어졌지만 중국의 상형문자와 다르고 문자의 이용도 사제자로 제한되어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쓰고, 읽고, 사용하고 있다. 상형문자로 기록한 동바경전에는 나시족 선조들의 업적과 투쟁, 전쟁, 신화, 민속, 천문역법, 종교의식절차 등등이 기록되어 있다. 1930년대 이 지역을 조사한 중국학자들에 의하면 동바는 나시족의 문화를 계승한 지식인으로 사회적인 지위가 높아 통치자의 옆에서 참모 역할을 하였으며, 신에게 기도를 드리고 귀신을 물리치고 점을 칠 수 있는 종교사제 역할, 병을 치료하는 의사의 역할 15) 도 담당했으며 동바들이 추는 무용은 민간무용에도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19세기 중엽 중국 청나라 당시 서양의 학자, 탐험가들은 중국 전 지역을 다닐 수 있는 12) 모소족, 모시족 등의 명칭이 중화인민공화국 탄생과 함께 나시족으로 통칭되었다. 13) 화지무( 和 志 武 ), 동바교화동파문화( 東 巴 敎 和 東 巴 文 化 ), 동바문화논집( 東 巴 文 化 論 集 ) (중국: 운남 인민출판사( 云 南 人 民 出 版 社 ), 1991), 19쪽. 14) 이국문( 李 國 文 ), 인신지매( 人 神 之 媒 )-동바제사면면관( 東 巴 祭 司 面 面 觀 ) (중국: 운남인민출판사( 云 南 人 民 出 版 社 ), 1993), 14쪽. 15) 홍희, 중국 나시족 동바의 <제천>및 <쓰미구>의례와 신화, 중국문학연구 제40집, 253-4쪽. 5
國 樂 院 論 文 集 제24집 특권을 왕조로부터 허락 받아냈다. 서양인으로 동바경전을 처음 접한 사람은 프랑스 전도 사 페르 데스고딘(Pere Desgodins)이며 그후 러시아 등 여러 국가에서 관심을 보였고 미 국의 식물학자 록(J.F.Rock)은 쓰촨성 현지 탐험을 통해 많은 동바경전을 수집하여 미국에 가져갔고 은퇴 후 동바경전을 연구하여 출판도 했다. 당시 서양과 중국학자들이 연구한 동 바경전에는 동바무보 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중국은 5, 60년대 공산주의와 문화대혁명의 악순환을 겪으면서 전통문화에 대한 비판의 식이 거세게 일어났고 종교 문화의 종사자들은 자아비판과 처형으로 되돌아왔다. 이를 본 목격자들은 모든 것들을 무관심,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문화대혁명을 일으킨 사인방의 처 벌과 함께 중국은 1978년 개혁 개방화 정책을 선언하였고 서서히 보이지 않은 변화가 시 작되었다. 1980년 10월 북경에서 전국소수민족무용좌담회가 개최되었고 56개 민족의 무용 자료 수집에 관심을 집중했다. 중국 리장현 나시족 자치구는 도서관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구석에 쌓여진 동바경전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경전들이 어떤 계기로 이곳에 놓여 졌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문화대혁명 당시 분서를 위해 수집된 고서들의 일부분으로 추측하 고 있다. 쌓인 경전을 분류하다가 새로운 경전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신의 년세. 도신무도 규정( 神 的 年 歲. 跳 神 舞 蹈 規 程 ), 동바무도내력( 東 巴 舞 蹈 來 歷 ) 이다. 1981년 윈난성 사회 과학원은 이 경전을 동바들과 조사하면서 동바교 의식에 쓰이는 무보라는 사실을 알게 되 었고, 1984년 3월 9일자 신화사보도에 의해 동바무보 발견을 공식화했다. 당시 현존하는 노동바( 老 東 巴 )들은 동바무보 에 대해 들은 적도 본적도 없다고 했지만 폭넓은 조사를 통해 동바무보 는 동바들 중에 최고인 대동바( 大 東 巴 )만 사용하는 경전이 고 커다란 의식을 거행할 적에 이 무보를 근거로 의식무용을 관여한 사실을 뒤늦게 알려졌 다. 중국 사회과학원은 이 경전을 동바무보 라고 명했고 동바무보 의 출판과 연구, 의식 무용을 재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16) 동바무보 의 내용을 분류하면 무용의 기원에 관한 무용, 신의 이름으로 추는 무용, 법 기를 들고 추는 무용, 동물신으로 추는 무용 등 4가지 무용 항목이 있다. 그중 무용기원에 관한 무보는 4개가 있고, 신의 이름으로 추는 무보는 48종류의 137개의 무보가 있으며 법 기를 들고 추는 무보는 2종류의 4가지 무보가 있다. 동물신으로 추는 무보에는 14가지 동 물들과 52개 무보가 전해지고 있어 무보의 수는 총 197개 이다. 17) 16) 신명숙, 상형문자( 象 形 文 字 )로 기록된 신적년세.도신무도규정( 神 的 年 歲. 跳 神 舞 蹈 規 程 ) 무보 해제 한국무용기록학회지 제2호(서울: 한국무용기록학회, 2002), 157-8쪽의 내용을 요약한 것임. 17) 신명숙, 중국 납서족동파무보연구( 納 西 族 東 巴 舞 譜 硏 究 ) (중국: 중국학원출판사, 2007), 180쪽. 6
역사적 문헌으로서의 동바무보 와 시용무보 가치연구 동바무보 를 나시어로 춰무(ts'o mu)라고 하는데 이 의미는 무용의 규범 혹은 무용의 조식( 調 式 )이라는 뜻이다. 가로 30cm, 세로 8cm의 크기의 종이위에 상중하로 칸을 나누고 서체방향은 왼쪽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기록한다. 겉표지에는 경전의 제목을 적는다. 무보 에는 3가지,, 기술방법이 있다. 첫 번째 부호는 첫 시작을 알리거나 또는 새로운 무용이 시작되는 것을 말한다. 두 번째 부호는 쉼표 역할과 마찬가지로 다음 동작이 진행, 연결된다는 것을 알린다. 세 번째 부호는 새로운 무용의 시작 혹은 무용이 마쳤다는 의미 로 쓰인다. 이런 무보의 형식은 동바무보 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에 살고 있 는 시판인[ 西 番 人 ]의 경전에도 유사한 형식을 쓰고 있고 더 나아가 인도 오리사주에서 발 견된 종려나무 재질의 무보는 상중하로 칸을 나누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동바무보 상형문자 술어는 많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이해를 위한 간략한 상형문자를 소 개한다. 무용 동작을 4가지로 신체부위, 방향, 동작, 숫자로 분류해보았다. <표1> 동바무보에 사용되는 상형문자의 신체별 분류 신체부위 상형문자 상형문자 한글 발 손 나시어발음 khw la 방향 상형문자 위 정각 오른쪽 왼쪽 앞 뒤 gə tæ l uæ kæ mæ 동작 상형문자 걷다 가다 떨다 움추리다 흔들다 추다 thv dzi tsi do do ts'o 들어올리다 돌다 날아가다 총총걷다 밟다 밟다 lv ts'o ze dziythvy zər zər 7
國 樂 院 論 文 集 제24집 숫자 상형문자 하나 둘 셋 십 백 dw ni si tsər ci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동바무보 에서 사용하는 상형문자 술어는 인체와 자연의 형상을 모방한 문자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림을 보듯 상상을 한다면 무보를 읽고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며 동바무용도 쉽게 익힐 수 있을 것이다. 동바무보 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문자를 다시 살펴보도록 한다. 2. 동바무보 의 가치 1) 무용의 상형문자와 무용의 기원 ts'o: 추다. 춤 동바문자의 무용과 관련된 표기는 매우 흥미롭다. 사람이 양손을 벌린 채 위로 반원모양을 그리고 있고 양다리는 기마자세로 뛰고 있는 모습이다. 이 모습은 정지상태가 아니라 위로 뛰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고 이런 동작들 이 무용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예를 들어 동바무보 의 무용기원설에서 알 수 있다. 인류 가 살았던 풍요롭고 화려하고 광활한 이 땅에서 무용은 다음과 같은 기원과 유래가 있다. (인류의 무용은)황금 큰개구리의 도약하는 모습에서 계시 받아 기원되었다 18). 이 신화를 근거로 도약하는 개구리 모습을 묘사한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무용모방설로 설명한다면 개구리의 가능성도 배재할 수도 없지만 동바교와 개구리 관계를 설명할 수 있 어야 이 주장에 설득력을 가진다. 개구리와 관련된 내용들을 살펴보면 토템의 전설, 창세 기전설, 전통복식에 그려진 전설, 다산( 多 産 )과 관련, 점술( 占 術 )과 관련된 전설, 기우와 관련된 전설, 동물 모방에 의한 움직임 등이 있지만 19) 이 기능들이 동바교와 동바무용의 관련설을 말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다시 말해 개구리는 보여지는 하나의 형태일 뿐 개구리 가 상징하는 그 어떤 것이 있다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한국 삼국사기 에 기록된 동 부여의 금와신화를 보면 역시 개구리와 관련되었다. 그렇다면 개구리와 무용은 어떻게 설 명을 해야 설득력을 가질 수가 있을까? 18) 신수세여동파무보( 神 壽 歲 與 東 巴 舞 譜 ) 상 (중국: 운남 사회과학원 출판사, 1987). 19) 신명숙, 중국 납서족동파무보연구( 納 西 族 東 巴 舞 譜 硏 究 ) (중국: 중국학원출판사, 2007), 216-20쪽. 8
역사적 문헌으로서의 동바무보 와 시용무보 가치연구 시베리아 샤먼이 의식을 할 적에 사용하는 대표적인 무구( 巫 具 )의 북에는 다양한 모습의 개구리 그림이 그려져 있다. 20) 필자는 최근에 비교민속학회 주최로 바이칼 지역에 샤만과 함께 조사하던 중에 개구리와 관련을 물었더니 가장 큰 능력을 가진 샤먼을 지칭한다는 대 답을 듣게 되었다. 결국 동바무용의 기원은 샤먼의 의식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좋은 실례 라고 볼 수 있다. 2) 술어의 독특한 형태 tsi: 떨다 1 동바무보 술어 중에 떨다 가 있다. 일반 생활에 서 떤다는 의미는 공포를 느끼거나, 몸에 열이 날 때, 춥거나 불안할 적에 보여주는 외형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여기서 쓰이는 무용 동작의 떨다 의미는 일상생 활 동작과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다. 의식무용을 하다가 갑자기 떠는 동작은 어떤 상황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일까? 샤만의식중 신과 무당이 접촉될 적에 외형적으로 표출되는 독특한 동작을 행하는데 바로 떨림 동작이다. 떨림 동작은 어깨 혹은 손 등 외형적인 모습에서도 확인이 되는데 신이 내 렸다는 표시는 천왕대 혹은 신대의 떨림으로 나타난다. 신이 내리면 신대를 잡고 있는 마 을 주민이 갑자기 몸을 떨게 되는데 이로 인해 천왕대 혹은 신대도 함께 떨리게 된다. 잎 이 무성한 대나무가 떨리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는데 이 소리는 신의 강림을 의미하는 효과적인 음향이다. 21) 상형문자의 떨림 동작은 동바무용의 기원과 깊은 관련이 있다. zər: 밟다 2밟는다는 상형문자는 2가지로 기록하였다. 하나는 땅을 밟는 모습과 또 하나는 땅 밑에 귀신이 누워있어 발로 밟아버리 는 모습이다. 즉 발로 귀신을 밟아 다치게 하거나 혹은 죽인다는 의미는 곧 재앙을 물리친 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아시아 강신무들의 춤사위를 보면 대체로 발동작들이 활발하 거나 혹은 뛰는 동작, 급회전 등을 많이 행한다. 이 동작을 강신무의 특징적 춤사위 해석으 로 인식하고 있지만 내면적인 의미로는 발로 귀신을 밟거나 혹은 죽여서 다시는 다른 귀신 들도 접근을 막고 나쁜 짓을 못하게끔 하는 행위는 외형적인 춤사위 특징으로 보인다. 20) 최지성 역, 시베리아 샤만 (서울: 민음사, 1988). 21) http: //folkency.nfm.go.kr/minsok/search.jsp. 9
國 樂 院 論 文 集 제24집 hwhw: (나선형으로) 돌다 3나선형의 상형문자는 바로 이해가 가능하다. 그러나 무용에서 나선형은 자주 사용하는 동선이 아니다. 시계바늘이 도는 방향 으로 움직이는 문자는 공작새가 날아가는 모습의 형상을 묘사한 것이다. 공작새는 나시족 과 무관하지만 남쪽 타이족의 토템으로 섬기는 신성한 동물로 여기고 있다. 동바무보 에 공작새의 등장은 외래문화의 수용이라고 본다. 이외에도 동바무보 에는 연극적인 요소도 있다. 예를 들어 실존인물이며 동바교의 창시 자인 알려진 딩바시루의 일생을 묘사한 움직임이 무보에 기록되어 있다. 탄생장면에서 모친 이 분만하는 동작을 표현하고, 성장해서 수행하는 모습, 수행 중에 악신과 사투하는 장면을 그리는 등 딩바시루의 업적을 기리면서 악귀를 몰아내는 장면까지 연출되는 과정은 실제 의 식에서는 제사장의 장소를 신성하게 만드는 의례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동물신 이름으로 추는 무용에서는 동바들이 동물장식도 하지 않고 독특한 동물 동작만으로 춤을 춘다. 동바무용이 매우 단순하고 짧게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무용종류들이 많아 전문가도 전 과 정을 암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더구나 동바무보 에는 악기 구성과 선율, 박자도 알 수 없고 이 무용이 독무 혹은 군무로 춰야하는지, 움직임의 속도가 빠른지 아니면 느린 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 무보를 기록 할 당시 동바들은 음악 없이 의식을 거행하 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바들이 음악을 기록 하지 않았던 이유는 동바무용이 단지 오락 무 용이 아니라 신성한 경전으로 여기기 때문에 기록이 된 것으로 보았다. 또 하나의 사실은 종교음악의 발달과정을 살펴보면 제사를 지낼 적에 읊는 주문이 점차적으로 음의 고저로 바뀌면서 선율이 생기고 종교 음악이 완성되는데, 동바교는 모든 의식들이 노래 없이 주문 혹은 경을 읽으며 진행되고 있어 초기 종교모습을 가지고 있으며 악가무의 기원과 발전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곳으로 보인다. 동바무용을 출 수 있는 대동바는 자격제한이 있으며 또 동바무용은 마을의 큰 제사가 있을 때만 행하기 때문에 평상시 동바무용을 볼 기회가 흔치 않다. 이런 제약 때문에 무보를 탄생시키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어떤 이유든 상형문자로 기록한 동바무보 의 가치는 보여주는 무용연희보다 무 보 속에 내재된 많은 기록과 내용들이 무용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기 때문에 더 가치가 있다고 본다. 10
역사적 문헌으로서의 동바무보 와 시용무보 가치연구 Ⅲ. 시용무보 1. 시용무보 의 기원 시용무보 는 조선시대 종묘제례 의식에 쓰이는 문헌이다. 종묘제례는 국가의 중요한 대 사였기에 어떤 왕조도 이 일과 관계되는 행사들을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특히 조선 초기 세종과 세조의 종묘제례에 관한 여러 가지 업적은 조선의 500년 역사를 이끄는 초석이 되 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종묘제례의식에는 악가무가 함께 이루어지는 성스러운 의식이 지만 이 의식의 원조는 중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중국 고대사회에 존재했던 하 상 주나 라의 선조들을 기리는 제사와 아악은 중국 역사의 변천과 새로운 국가 탄생에 의해 이어져 왔고 송대에 와서는 대성신악 혹은 아악이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종묘제례의식의 악가무가 재정비되었고 후대 명대, 청대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송 휘종이 만든 대성신악은 이웃나라 고려에도 영향을 미쳤고 약 천 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국에서 종묘제례악을 듣고 볼 수가 있다. 오랜 세월동안 전수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많은 설명이 첨부되어야 하겠지만 우선적 으로 선조들의 역사적인 기록과 시용무보 의 발간이 가장 큰 도움이라고 설명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시용무보 에 대한 가치를 논할 적에 먼저 송나라부터 수입된 초기 아악에 대한 연구가 먼저 토론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어 의문점들이 한둘이 아니다. 먼저 중국 송나라 문헌과 고려 문헌에는 대성아악에 대한 기록들이 조금 남아 있어 양국간의 문화 교류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1) 종묘제례악의 수입 고려 예종(재위: 1105-1122)은 직위 8년 만에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악을 수입하려고 했다. 1113년 9월 안직숭은 왕의 명령을 받고 북송에 공관으로 파견되었다. 1114년 6월 에 귀국하면서 중국 휘종의 조서와 함께 새로운 악기 공후, 박판, 비파, 쟁 등 악기와 악 보를 가져왔지만 조서 내용에는 대성악을 보내지 않았다고 명시되어 있다. 6월에 안직숭( 安 稷 崇 )이 송나라에서 돌아왔다. 황제가 왕에게 새 악기와 악보[ 譜 訣 ]를 주고 조서에 이르기를, 음악이란 천지와 함께 유행하는 것으로 국가에서 덕을 쌓은 지 백년 만에 야 일어나고, 공을 이룬 다음에야 지어지는 것이다. 선왕의 덕택이 없어지면서부터 예가 폐 지되고 음악이 무너져서 주나라로부터 지금까지 계승하지 못하였다. 짐이 여러 성인의 기업 11
國 樂 院 論 文 集 제24집 을 이어받아 성대한 덕과 아름다운 공적을 길이 생각하여 뜻을 잇고 사업을 계속하여 음악 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이에 유사에게 명하여 몸으로 도( 度 )를 삼고, 도( 度 )를 말미암아 솥[ 鼎 ]을 만들며 음악을 지어 천지와 종묘에 올리니 봉황새도 때를 맞추어 나왔다. 대개 지 금 음악이 옛 음악과 같으니 짐이 지금 음악을 폐지하지 않는 바이다. 그 정아( 正 雅 )한 소리 를 지금 음악에 넣어서 천하에 반포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화합하게 한다. 경( 卿 )은 외방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의를 사모하여 내조하였다. 사신이 이르러 새 음악을 듣기를 원하므로 그 성심을 가상히 여겨 이렇게 내려주노라. 대성악( 大 晟 樂 )의 정아한 소리는 아직 여기에 들어 있지 않다. 라고 하였다. 22) 예종은 중국 송에서 창제된 대성아악의 정보를 익히 알고 있어서 고려사신 안직숭을 통 해 수입하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예종은 1115년 7월 대성아악을 다시 수입하기 위해서 신하를 파견했고 이 때 예종은 특별한 당부를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부상서 왕자지( 王 字 之 )와 호부시랑 문공미( 文 公 美 )를 송 나라에 보내어 사은하고, 겸하여 물품을 바치며 이어 진사 김단( 金 端 ) 견유저( 甄 惟 底 ) 조석( 趙 奭 ) 강취정( 康 就 正 ) 권적( 權 適 ) 등 5명을 보내어 태학(중국)에 들어가 공부하게 하였다. 23) 이달 모일에 문덕전( 文 德 殿 )에 나아가 조하( 朝 賀 )하옵고, 물러와 객성( 客 省 ) 막문( 幕 門 )에 있 노라니 관반( 館 伴 ) 모관( 某 官 ) 모가 마침 성지( 聖 旨 )를 유시( 諭 示 )하러 오고, 태사( 太 師 ) 노 국공( 魯 國 公 ) 채경( 蔡 京 )이 성지( 聖 旨 )를 받들어 전하려고 고려에서 악( 樂 )을 익히는 사람이 지금 와서 연악( 燕 樂, 宴 樂 과 같다)을 보고 있는데, 이는 대성아악( 大 晟 雅 樂 )을 익히는 것만 못하다는 말씀이었나이다.(생략) 신등이 고려를 떠나 올적에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훈시하시 기를 특별한 만남을 인연하여 사사로운 간청을 올릴지어다. 24) 22) 六 月, 安 稷 崇, 還 自 宋, 帝, 賜 王 新 樂 器 及 譜 訣, 詔 曰, 樂 與 天 地 同 流, 百 年 而 後 興, 功 成 而 後 作, 自 先 王 之 澤, 渴, 禮 廢 樂 壞, 由 周 迄 今, 莫 之 能 述, 朕, 嗣 承 累 聖 基 緖, 永 惟 盛 德 休 烈, 繼 志 述 事, 告 成 厥 功, 乃 詔 有 司, 以 身 爲 度, 由 度, 鑄 鼎 作 樂, 薦 之 天 地 宗 廟, 羽 物 時 應, 夫 今 之 樂, 猶 古 之 樂, 朕 所 不 廢, 以 雅 正 之 聲, 播 之 今 樂, 肇 布 天 下, 以 和 民 志, 卿, 保 有 外 服, 慕 義 來 同, 有 使 至 止, 願 聞 新 聲, 嘉 乃 誠 心, 是 用 有 錫, 大 晟, 雅 正 之 聲, 猶 不 在 是. 高 麗 史 節 要, 卷 之 八. 23) 遣 吏 部 尙 書 王 字 之, 戶 部 侍 郞 文 公 美, 如 宋 謝 恩, 兼 進 奉, 仍 遣 進 士 金 端, 甄 惟 底, 趙 奭, 康 就 正, 權 適 等 五 人, 赴 大 學. 高 麗 史 節 要 卷 之 八. 24) 今 月 某 日 詣 文 德 殿 朝 賀 退 就 客 省 幕 門 舘 伴 某 官 某 說 諭 適 來 太 師 魯 國 公 蔡 京 奉 傳 聖 旨 習 樂 人 今 來 閱 燕 樂 莫 若 習 大 晟 雅 樂 者 東 文 選 卷 三 十 五 12
역사적 문헌으로서의 동바무보 와 시용무보 가치연구 왕자지는 이미 송나라를 (1113년 9월-1114년 6월) 다녀왔고 문공미 25) 도 요나라를 다 녀온 사신으로 두 사람 모두 북방외교에 경험 많은 사신이었다. 예종은 이 두 사람을 고려 대표로 송의 휘종에게 답례물품과 함께 보낸 것이다. 그런데 병부시랑 임존( 林 存 )도 대성 아악을 위해 송에서 활동한 기록이 있다. 임존은 고려에서 출발하기 전 예종이 지시한 특 별한 만남의 인연 에 대해 많은 생각과 행동을 고려했을 것이고 결과 송나라 재상 채경( 蔡 京 )을 만난 것으로 기록되었다. 송의 휘종이 문화예술에 심취하고 있는 동안 채경은 재상 으로 정치의 모든 권력을 한손에 잡은 인물이다. 26) 당시 채경의 힘과 권력은 상상을 뛰어 넘는 정도의 능력을 가졌을 것이고 임존은 외교적인 노력으로 예종이 원하는 대성아악 수 입에 일조를 했을 거라는 생각을 유추할 수 있다. (중략) <대성연악( 大 晟 燕 樂 )>과 변두( 籩 豆 ) 보궤( 簠 簋 ) 존뢰( 尊 罍 ) 등 그릇도 하 사하시고, 심지어는 예모전에서 고려 사신을 위해 연회까지 베풀었다. 27) 휘종은 자신이 만든 대성아악을 전국에 학습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또한 고려도 대성아악 을 배우기를 원했기에 윤허를 했다. 그리고 이를 기념으로 예모전에서 큰 연회를 베풀었는 데 이는 고려사 악지 기록에 송조가 그들의 신악을 예모( 睿 廟 )에서 하사했다 는 기록과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왕자지와 문공미는 약 1년 동안 머문 후 1116년 6월경 다시 고려로 돌아오면서 휘종의 조서와 의복, 은그릇, 대성신악, 악기. 악보 등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해 10월 예종은 친 히 건덕전에 나가 대성아악의 연주를 들었다. 누군가 송나라부터 수입된 악기들로 약 4개월간 연습을 했었고 건덕전에서 연주했다는 사실은 의문점들을 가지게 한다. 우선 악기를 연주한 사람이 송의 악인인지 아니면 고려 악인인지 알 수가 없을뿐더러 송의 악인들이 고려에 와서 가르쳤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 다. 이러한 의문점에 몇 가지 가설을 생각해본다면 첫째, 재 교습을 위해 다시 중국을 방 문하는 경우 두 번째, 대성아악과 관련된 문헌 혹은 개인 습작보 등으로 연습을 하지 않았 을까 생각을 해본다. 그런데 이를 증명할 수 있는 기록이 중국에 남아 있다. 25) 문공인( 文 公 仁 ) 혹은 문공언( 文 公 彦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26) 후대 역사학자들이 평가하는 채경은 중국 역사상 대표적인 간신 혹은 탐관오리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27) < 政 和 > 中, 升 其 使 爲 國 信, 禮 在 < 夏 國 > 上, 與 < 遼 > 人 皆 隸 樞 密 院 ; 改 引 伴 押 伴 官 爲 接 送 館 伴. 賜 以 大 晟 燕 樂 籩 豆 簠 簋 尊 罍 等 器, 至 宴 使 者 于 < 睿 謨 殿 > 中. 宋 史 卷 487 列 傳 高 麗. 13
國 樂 院 論 文 集 제24집 (이전에) 고려에게 아악을 주었다. 성율을 배우고 익히기를 원하기에 대성부에서는 악보사를 선택해서 다시 악보를 주었다. 28) 즉 이전에 고려에게 아악을 주었는데 이들이 다시 와서 이와 관련된 것들을 배우고 익히 기를 청했고 대성부에서는 악보사를 선택해서 악보를 줬다는 기록이다. 이는 고려가 건덕 전에서 연주한 후 5개월 지난 1117년 2월의 일이다. 아마도 예종은 건덕전에서 연주를 들 을 당시 여러 가지 부분에서 미흡한 점들을 살펴보았고 이를 보강 혹은 재교육을 위해 신 하들을 다시 중국으로 보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 기록으로 고려 대성아악의 연주 는 고려 악인이 직접 참여했을 거라는 가능성을 알려주고 있다. 두 번째는 대성아악에 관한 문헌 수입가능성을 생각한다. 송의 대성부는 1116년에 유병 ( 劉 昺 )이 저술한 연악신서 29) 를 출판했는데 이 속에는 84조와 그림이 그려져 있다. 고려 사신들이 귀국할 적에 많은 중국서적 중 연악신서 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고 이러한 가능 성은 다음 아래에서 제시할 것이다. 대성아악이 고려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투자와 시간이 필요한 것은 당연지사이겠지만 예 종은 바로 국가의 제사에 대성아악을 적용시켰고 또한 고려사 악지에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의 대성아악의 수입과 보존은 예종의 예악사상을 중시하는 정책의 한 면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대성아악을 수입하는데 공헌한 문공미와 임존은 그 후 이자겸의 반역사건에 연루 되었고 왕자지도 이자겸의 난에 휩쓸려 불행한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 이들의 운명은 마치 송의 대성아악이 금나라와 전쟁을 통해서 소멸되고 문헌상의 음악으로 존재하는 수수께끼 같은 일들이 일어나듯이 고려 대성아악의 공헌자들인 문공미, 임준, 왕자지도 이들의 몰락 으로 점점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2) 고려사 악지 에 남아있는 송의 아악 가) 악장( 樂 章 )의 안( 安 ) 의 의미 고려사 악지 의 대성아악 연주곡명을 살펴보면 <정안지곡>, <영안지곡>, <순안지곡>, <희안지곡>, <무안지곡>, <풍안지곡>, <흥안지곡>, <공안지곡> 등등 많은 악장이 기록되어 28) 中 書 省 言 高 麗 賜 雅 樂 乞 習 敎 聲 律, 大 晟 府 選 樂 譜 辭, 詔 許 敎 習, 仍 賜 樂 譜 宋 史. 29) 大 晟 雅 樂, 頃 歲 已 命 儒 臣 著 樂 書, 獨 宴 樂 未 有 紀 述 其 令 大 晟 府 編 集 八 十 四 調 並 圖 譜, 令 劉 昺 撰 以 為 宴 樂 新 書 - 송사 악서 권129, 정화 6년(1116). 14
역사적 문헌으로서의 동바무보 와 시용무보 가치연구 있는데 이 악장의 공통점은 안( 安 ) 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안 의 의미 는 음악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먼저 살펴보도록 한다. 송나라 초기 건륭원년(960년) 이월: (중략) 악장 12개의 <순>을 12개의 <안>으로 바꾼다. 이 는 <치세지음안이악>의 의미를 갖는다. 30) 송나라를 건국한 태조는 일대(창건)의 음악에는 당연히 새 이름으로 불러야 하고, 제사 와 향연에 쓰일 악장에는 새로운 가사를 넣어 과거의 의식에 따라 거행할 것을 명했다. 31)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정치 이념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대안이 필요로 했 는데 그것이 바로 고대사회에서 숭배되었던 아악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고대 국가로부터 전해지는 아악 숭배 정책은 문란해진 사회를 정화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 다. <치세지음안이악( 治 世 之 音 安 以 樂 )>은 시경( 詩 經 ) 모시서( 毛 詩 序 ) 32) 의 구절에서 등장 하는데 음악으로서 태평시대를 이끈다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즉 국가에서 행하는 제사 와 향연의 악장에 안 자를 더하는 의미는 결국 위대한 선조들과 통치자들이 새로운 국가의 운명을 태평성대로 이끌어주길 바라는 염원을 악장으로 정하고 음악연주를 통해 천지인의 감동을 기대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태조는 이전 국가에서 쓰였던 악장을 제목을 바꾼 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제천을 <고안>으로, 제지를 <정안>으로, 종묘를 <이안>으로 천지, 종묘의 등가를 <가안>으로, 황제가 헌가에 임했을 때 <융안>으로, 왕공 출입 <정안>으로, 황제가 식음 <화안>으로, 황제 가 조례, 황후가 입궁 <순안>으로, 황태자 헌현출입 <낭안>으로, 겨울 조례회의 <영안>으로, 교외묘 조두올림 <풍안>으로, 제향, 작헌, 음복 등 <희안>으로, 문선왕, 무성왕 제사 <영안> 으로, 경전, 선농 <정안>으로 바꾼다. 33) 30) 改 樂 章 十 二 順 為 十 二 安, 蓋 取 治 世 之 音 安 以 樂 之 義. 宋 史 志 第 七 十 九 樂 一. 31) 一 代 之 樂, 宜 乎 立 名 禋 享 宴 會 樂 章, 固 當 易 以 新 詞, 式 遵 舊 典 宋 史 志 第 七 十 九 樂 一. 32) 治 世 之 音 安 以 樂 其 政 和, 難 世 之 音 怨 以 怒 其 政 乖, 亡 國 之 音 哀 以 思 其 民 困. 세상이 잘 다스려질 때의 음악은 평안하면서도 즐거우니 그 정치가 고른 때문이고, 세상이 어지러 울 때의 음악은 원망스러우면서도 노여우니 그 정치가 사리에 어긋나서이다. 33) 命 儼 仍 兼 太 常 建 隆 元 年 二 月, 儼 上 言 曰 : 三 五 之 興, 禮 樂 不 相 沿 襲 洪 惟 聖 宋, 肇 建 皇 極, 一 代 之 樂, 宜 乎 立 名 樂 章 固 當 易 以 新 詞, 式 遵 舊 典 從 之, 因 詔 儼 專 其 事 儼 乃 改 周 樂 文 舞 崇 德 之 舞 為 文 德 之 舞, 武 舞 象 成 之 舞 為 武 功 之 舞, 改 樂 章 十 二 順 為 十 二 安, 蓋 取 治 世 之 音 安 以 樂 之 義 祭 天 為 高 安, 祭 地 為 靜 安, 宗 廟 為 理 安, 天 地 宗 廟 登 歌 為 嘉 安, 皇 帝 臨 軒 為 隆 安, 王 公 出 入 為 正 安, 皇 帝 食 飲 為 和 安, 皇 帝 受 朝 皇 后 入 宮 15
國 樂 院 論 文 集 제24집 제천은 <고안지곡>, 제지는 <정안지곡>, 종묘제사는 <이안지곡>,제천지 종묘등가는 <가안지 곡>, 황제임헌은 <융안지곡>, 왕공출입은 <정안지곡>, 황제식음은 <화안지곡>, 황제수조, 황 후입궁은 <순안지곡>, 황태자헌현출입은 <낭안지곡>, 정동조회는 <영안지곡> 교묘조입은 <풍 안지곡>, 제향, 작헌음복, 수조는 <희안지곡>으로 한다. 34) 송사 와 송회요집고 에 기록된 악장은 모두 12개로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다만 송사 에는 음악[ 曲 ]이라는 단어가 없고 송회요집고 에는 음악이라는 단어를 붙혀서 악장 이 곧 음악을 지칭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태조의 악장 개칭은 무용에도 영향을 미쳤다. 문무였던 <숭덕지무(( 崇 德 之 舞 )>를 <문덕 지무( 文 德 之 舞 )>로 무무인 <상성지무( 象 成 之 舞 )>를 <무공지무( 舞 功 之 舞 )>로 불렀다. 그러나 이러한 규범이 얼마동안 지속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50여년이 지난 진종( 眞 宗 1008년) 기록에는 악장의 변화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고 휘종은 흩어진 악가무를 다시 재 정비하였다. 휘종은 대성부( 大 晟 府 )를 설치하면서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노래와 인재들을 모집하였고 이 기관을 통해서 옛 음악을 정리하고 새로운 음악을 창작하여 궁중에서 필요 로 하는 음악의 수요를 맡았다. 이런 업무들은 과거 교방( 敎 坊 )에서 했던 악율을 정하고 악보를 만들고 교방을 근거로 학습하고 또한 천하에 전파하는 음악기관 35) 과 같은 것이다. 고려 태묘에 쓰인 모든 악장의 안 의 용어는 대성아악 체계로 볼 수도 있지만 원천적으로 는 송의 건국이념을 기념하기 위해 악장 개칭 변화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나) 문무와 무무 문무와 무무가 고려에 수입된 것은 1116년 대성아악과 함께 들어왔다고 고려사 악지 에 기록되어 있다. 48명이 추는 문무와 무무의 기록이 있다. 문무48명이 약과 적을 잡고 있고 무무 48명이 간과 척을 잡고 있는데 모두 육일을 이루고 있다. 문무는 표의 좌우에 각각 3일씩 나뉘어 서있고 문무를 인도하는 자 2명은 앞에서 독 為 順 安 皇 太 子 軒 縣 出 入 為 良 安, 正 冬 朝 會 為 永 安, 郊 廟 俎 豆 入 為 豐 安, 祭 享 酌 獻 飲 福 受 胙 為 禧 安, 祭 文 宣 王 武 成 王 同 用 永 安, 籍 田 先 農 用 靜 安 宋 史 志 第 七 十 九 樂 一. 34) 祭 天 用 高 安 之 曲, 祭 地 用 靜 安 之 曲, 祭 宗 廟 用 理 安 之 曲, 祭 天 地 宗 廟 登 歌 用 嘉 安 之 曲, 皇 帝 臨 軒 用 隆 安 之 曲, 王 公 出 入 用 正 安 之 曲, 皇 帝 食 飲 用 和 安 之 曲, 皇 帝 受 朝 皇 后 入 宮 用 順 安 之 曲 皇 太 子 軒 縣 出 入 用 良 安 之 曲, 正 冬 朝 會 用 永 安 之 曲, 郊 廟 俎 入 用 豐 安 之 曲, 祭 享 酌 獻 飲 福 受 胙 用 禧 安 之 曲 宋 會 要 輯 稿 樂 四 之 九 35) 徐 楓, 詞 的 傳 播, 杭 州 大 學 學 報 編 輯 部, p5, ccs.nccu.edu.tw. 16
역사적 문헌으로서의 동바무보 와 시용무보 가치연구 을 잡고 동서로 서로 마주보고 있다. 무무를 인도하는 자는 2명이 정을 잡고, 2명이 도를 잡고, 2명이 단탁을 잡고, 2명이 쌍탁을 잡고, 4명은 금순을 들고 2명은 금순을 치는 사람, 2명은 요를 잡고, 2명은 정을 잡고, 2명은 상을 잡고, 2명은 아를 잡고 헌가의 동서에 나뉘 어져 북향하여 북상부를 보고 서 있으며, 무무는 그 뒤에 있다. 36) 위 내용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문무와 무무는 육일무로 각각 48명이 참여했고 문무는 약 과 적, 무무는 간척 즉 방패와 활을 들었다. 그리고 문무와 무무를 인도하는 자들이 있는 데 문무의 인도자는 독을 잡았고 무무의 인도자는 정, 도, 탁, 순,요,상, 아 등을 잡는 다. 그리고 이들은 헌가에 서서 상호 바라본다. 이와 유사한 모습은 중국 송사 악지 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문무64명이 약과 적을 잡고 있고 무무64명이 간과 척을 잡고 있는데 모두 팔일무를 이루고 있다. 문무는 표의 좌우로 각각 4일씩 나뉘어 서있고, 문무를 인도하는 자 2명은 앞에서 독 을 잡고 동서로 서로 마주보고 있다. 무색장 2명은 독을 잡고 앞에 서서 동서로 나눈다.(무 무는 정을 잡고 앞에 있다) 무무를 인도하는 자는 2명은 정을 잡고, 2명이 도를 잡고,2명이 쌍탁을 잡고, 2명이 단탁을 잡고, 4명이 금순을 잡고, 2명이 금순을 연주하고, 2명이 정을 잡고, 2명이 상을 잡고, 2명이 아를 잡고 궁가의 동서에 서서 북향하여 북상을 보고 서 있 으며, 무무는 그 뒤에 있다. 37) 위의 내용은 휘종 정화 3년 4월(1113)에 행해졌던 기록으로 상친사이무( 上 親 祠 二 舞 )와 대조회( 大 朝 會 ) 의식을 위한 것이고 동일하게 쓰인다. 38) 살펴보면 문무와 무무 모두 팔일 무를 행했고 문무는 약과 적, 무무는 간과 척 즉 방패와 화살을 든다. 문무와 무무를 인도 하는 자와 문무와 무무의 무색장( 舞 色 長 ) 39) 역할도 등장한다. 인도자는 각각 독과 정을 잡 36) 文 舞 四 十 八 人 執 籥 翟 武 舞 四 十 八 人 執 干 戚 俱 爲 六 佾. 文 舞 分 立 於 表 之 左 右 各 三 佾. 引 文 舞 二 人 執 纛 在 前 東 西 相 向 引 武 舞 執 旌 二 人 鼗 二 人 單 鐸 二 人 雙 鐸 二 人 持 金 錞 四 人 奏 金 錞 二 人 鐃 二 人 鉦 二 人 相 二 人 雅 二 人 分 立 於 軒 架 之 東 西 北 向 北 上 武 舞 在 其 後. 高 麗 史 樂 志. 37) 文 舞 六 十 四 人, 執 籥 翟 ; 武 舞 六 十 四 人, 執 幹 戚, 俱 為 八 佾 文 舞 分 立 於 表 之 左 右, 各 四 佾 引 文 舞 二 人, 執 纛 在 前, 東 西 相 向 舞 色 長 二 人, 在 執 纛 之 前, 分 東 西 ( 若 武 舞 則 在 執 旌 之 前 引 武 舞, 執 旌 二 人, 鞀 二 人, 雙 鐸 二 人, 單 鐸 二 人, 鐃 二 人, 持 金 錞 四 人, 奏 金 錞 二 人, 鉦 二 人, 相 二 人, 雅 二 人, 各 立 於 宮 架 之 東 西, 北 向, 北 上, 武 舞 在 其 後. 宋 史 卷 129, 樂 四. 38) 上 親 祠 二 舞 之 製 ( 大 朝 會 同 ). 39) 舞 色 長 은 원문 전후를 살펴 본 결과 잘못된 표기이며 舞 色 이 맞다.( 袁 禾, 中 國 宮 廷 舞 蹈 藝 術, 상해 음악출판사, 2004), 365쪽. 17
國 樂 院 論 文 集 제24집 으며, 무무는 도, 탁, 순, 정, 상, 아를 잡고 궁가에 서서 북쪽을 바라본다. 보다 쉽게 비교를 하기 위해 고려와 송나라의 문무, 무무를 표로 그려보았다.<표2> <표2> 고려사 악지 와 송사 악지 기록 비교 고려사 악지 문무48명이 약과 적을 잡고 있고 文 舞 四 十 八 人 執 籥 翟 무무 48명이 간과 척을 잡고 있는데 武 舞 四 十 八 人 執 干 戚 모두 육일무을 이루고 있다. 俱 爲 六 佾 문무는 표의 좌우에 각각 3일씩 나뉘어 서있고 文 舞 分 立 於 表 之 左 右 各 三 佾 문무를 인도하는 자 2명은 引 文 舞 二 人 앞에서 독을 잡고 執 纛 在 前 동서로 서로 마주 보고 있다 40) 東 西 相 向 무무를 인도하는 자는 引 武 舞 2명은 정을 잡고 執 旌 二 人 2명이 도를 잡고 鼗 二 人 2명이 단탁을 잡고 單 鐸 二 人 2명이 쌍탁을 잡고 雙 鐸 二 人 4명이 금순을 잡고 持 金 錞 四 人 송사 악지 문무64명이 약과 적을 잡고 있고 文 舞 六 十 四 人, 執 籥 翟 무무64명이 간과 척을 잡고 있는데 武 舞 六 十 四 人, 執 幹 戚 모두 팔일무를 이루고 있다. 俱 為 八 佾 문무는 표의 좌우로 각각 4일씩 나뉘어 서있고 文 舞 分 立 於 表 之 左 右 各 四 佾 문무를 인도하는자 2명은 引 文 舞 二 人 앞에서 독을 잡고 執 纛 在 前 동서로 서로 마주보고 있다. 東 西 相 向 무색장 2명은 앞에서 독을 잡고 동서로 나눈다. 舞 色 長 二 人, 在 執 纛 之 前, 分 東 西 (만일 무무경우에는 앞에서 정을 잡고 있다) ( 若 武 舞 則 在 執 旌 之 前 ) 무무를 인도하는 자는 引 武 舞 2명은 정을 잡고 執 旌 二 人 2명이 도를 잡고 鞀 二 人 2명이 쌍탁을 잡고 雙 鐸 二 人 2명이 단탁을 잡고 單 鐸 二 人 2명이 요를 잡고 鐃 二 人 18
역사적 문헌으로서의 동바무보 와 시용무보 가치연구 고려사 악지 2명이 금순을 치는사람 奏 金 錞 二 人 2명이 요를 잡고 鐃 二 人 2명이 정을 잡고 鉦 二 人 2명이 상를 잡고 相 二 人 2명이 아를 잡고 雅 二 人 헌가의 동서에 나뉘어져 分 立 於 軒 架 之 東 西 북향하여 북상부를 보고 서 있으며 北 向 北 上 무무는 그 뒤에 있다 武 舞 在 其 後 송사 악지 4명이 금순을 잡고 持 金 錞 四 人 2명이 금순을 연주하고 奏 金 錞 二 人 2명이 정을 잡고 鉦 二 人 2명이 상을 잡고 相 二 人 2명이 아를 잡고 雅 二 人 궁가의 동서에 서서 各 立 於 宮 架 之 東 西 북향하여 북상을 보고 서 있으며 北 向 北 上 무무는 그 뒤에 있다 武 舞 在 其 後 중국 춘추좌전( 春 秋 左 傳 ) 에 천자( 天 子 )는 팔, 제후( 諸 侯 )는 육, 대부( 大 夫 )는 사, 사 ( 士 )는 이를 한다( 天 子 用 八, 諸 侯 用 六, 大 夫 四, 士 二 ). 라고 하여 팔일무, 육일무, 사일무 이일무라고 부르는 일무가 생겼고 주례( 周 禮 ) 에 정악현의 위치는 왕은 궁현, 제후는 헌 현, 향대부는 판현, 사는 특현으로 한다( 正 樂 縣 之 位, 王 宮 縣, 諸 侯 軒 縣, 鄕 大 夫 判 縣, 士 特 縣 ). 라고 하여 천자는 궁현으로 동서남북 4면에 배열하고, 제후는 헌현으로 3면에 배열 하고, 향대부는 판현으로 2면에 배열하고, 사는 특현으로 1면에 악기 배열을 하는 형식을 갖춘다. 일무와 악현의 배열 방식은 이미 고대에서 기초를 다져놓았고 약 천 여년이 지난 송나라와 고려는 모두 이런 사상을 기초로 문무와 무무의 형식을 만들어 따랐다. 다시 말 해 송나라는 황제의 지위로 팔일무와 4면에 악기를 배열했고, 고려는 제후의 지위로 육일 무에 삼면에 악기를 배열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고 문무와 무무에 사용하는 의물과 의물 을 들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는 같다. 이러한 동일성은 악가무의 전수와 보존을 위해 특별 한 관리와 기록(문헌)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예종이후 약 300여 년이 지난 고려사 악지 에 기록되었고 이 기록이 중국 대성아악과 내용이 같다는 사실은 40) 고려사 악지 헌가악기( 軒 架 樂 器 )에 무색장은 2개의 은두장자를 잡는다.( 舞 色 長 執 銀 頭 杖 子 共 二 條 ) 기록 을 근거로 무색장이 있었음을 보이지만 친사등가헌가( 親 司 登 歌 軒 架 )에는 없어 기록이 빠진걸로 보인다. 19
國 樂 院 論 文 集 제24집 중국으로부터 아악과 관련된 문헌 수입이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휘종의 문무와 무무가 연희된 기록은 1113년 4월경이고, 고려 예종은 1116년 8월 18 일에 대성악과 문무의 춤을 시행하라고 했고 정식 관람한 시기는 1116년 10월 13일로 기 록되어 있다. 즉 송나라의 대성아악은 연희 된지 약 3년 만에 고려에 수입되었고 대성아악 을 수정 보완을 통해 완벽한 대성아악을 고려에 정착되었다고 본다. 3) 종묘제례악의 변천과 기록 예종이 아끼던 대성아악도 서서히 변화가 시작되었다. 의종15년(1161) 고려의 유신과 그릇된 악사가 임의로 아악의 연주순서를 바꾸었을 뿐 아니라 일부에 쓰인 무구의 숫자를 변경하였고 명종18년(1188) 2월 당시 왕립음악악기관의 악공이 다른 부서에 소속되었기 때문에 음악에 전념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대성아악의 전승에 변화가 일어났다. 41) 또 명 종18년(1188년)이후에는 종묘제례 제향 절차 중 초헌에는 아악을 했지만 아헌( 亞 獻 )과 종 헌( 終 獻 ) 절차에는 향악으로 연주되는 변화가 생긴다. 42) 명종은 대성아악을 복원하기 위해 서 온을 송나라에 보내 무의( 舞 儀 )를 배워오도록 했지만 그 배움이 불확실해 가르치지 못 했다. 휘종의 대성아악은 북송의 멸망으로 소멸되었고 남송도 대성아악을 따르지 않았다. 그것은 북송 멸망의 원흉이 휘종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를 배우려하지 않았다. 서온이 방문한 곳은 북송이 아니라 남송이었고 이미 이곳도 대성아악보다는 부담 없이 듣고 노래할 수 있는 서민적인 잡극이 성행하고 있는 중이였다. 고려도 외적의 침입 으로 인해 혼란에 빠졌고 정치경제의 불안으로 제례악 거행이 쉽지 않았다. 종묘제례악의 대 재정비는 조선 세종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런 재정비는 그 동안 중국식의 의례에서 조선의 의례로 변모하는 계기가 되었다. 박연( 朴 堧 )은 악률의 조법과 악기의 개 보수 및 조성, 공인들의 복식, 문무, 무무외에도 악에 관련된 기타 모든 제도적 측면을 두루 개선하도록 했으며, 이후의 악무와 관련된 제 도는 이를 기준으로 세종실록 오례 에 적용됨은 물론 조선조 향사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 친다. 그리고 세종은 다음과 같은 사항을 윤허했다. 첫째, 문무와 무무인의 자격기준, 둘 째, 일무의 장소와 무위, 셋째, 문무와 무무의 지휘 넷째, 무인 및 악공의 관복제정, 다섯 째, 학습과 상벌이다 43). 이 5가지 개선안을 보면 세종이전에 종묘제례악을 맡은 사신들과 41) 송방송, 증보 한국음악통사 (서울: 민속원, 2007), 188쪽. 42) 송방송, 위의 책, 185-8쪽. 43) 이종숙, 시용무보 의 무절 구조분석과 현행 종묘일무의 비교연구 (경기: 용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33쪽. 20
역사적 문헌으로서의 동바무보 와 시용무보 가치연구 악인들의 역할이 나태함과 혼란에 빠져 있었고 조상에 대한 효와 예의 사상을 찾을 수 없 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세종은 종묘와 연회를 위해 새로운 아악 <정대업> <보태평> 을 만들었고 세조는 이 음악을 종묘제례악에 적용시켰다. 세종, 세조때 종묘제례악은 이전 과 달리 왕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관심으로 인해 나름대로 체계를 갖추고 수정, 수행하는 일들이 많아졌다. 예를 들어 세조 10년(1464) 1년 동안의 국가적인 제사와 연회행사에 <정대업>과 <보태평>이 16번씩 연희된 기록이 이런 사실을 말해준다. 44) 성종은 과거 왕들의 노력으로 수정, 보완해오던 종묘제례악과 궁중 악가무를 또 다시 수정, 교정한 후 문헌으로 남기고자 1493년 악학궤범 이 편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복원사업에도 불구하고 외세정세의 불안과 전쟁, 사건 등으로 인해 연주자의 부족 혹은 악기손실, 화재 등 종묘제례악을 수시로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다시 복원할 때에도 옛 모습을 갖추지 못했다. 시악화성 에서 음악을 복원할 때 무법( 舞 法 )을 알지 못하여 명 나라의 무법을 구하여 썼고, 한자리에 서서 손만 움직이는 춤은 대개 여기에서 말미암 은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이때의 춤이 종묘일무를 뜻하는지, 아악의 일무를 뜻하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변화가 있었던 것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45) 이러한 종묘제례악의 끊 임없는 변화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받아들이는 통치자가 있는 반면에 이런 현상을 걱정하고 선왕들의 공헌을 기억하며 예와 효를 다하고자 하는 시대의 통치자는 기록을 남겨 뜻을 알리고자 하였다. 4) 시용무보 의 형식과 내재적 의미 종묘제례악에 쓰이는 <보태평> <정대업>의 무용을 그려놓은 시용무보 는 필사본으로 조선의 유일한 무보이다. 아쉽게도 이 책은 첫 발간연대와 저자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남 아있지 않다. 무보의 크기는 34.5 51.5cm이며 재질은 한후지( 漢 厚 紙 )를 사용했다. 무보의 형식은 한 면을 4행으로 나누고 1행을 다시 6개의 정간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각 행간에는 좁은 두 칸에 궁상하보( 宮 上 下 譜 )의 악보를 적었고 넓은 여백에는 춤의 동작과 함께 한자로 44 개의 술어를 병기하여 기록했다. 춤추는 사람은 남자이며 복식은 <보태평> <정대업> 모두 상하가 연결된 남색 옷에 붉은 띠를 띠고 검은색 신발을 신었다. 관모는 <보태평>은 진현 관( 進 賢 冠 ), <정대업>은 주황색 피변( 皮 弁 )을 착용하고 있어 궁중 무복의 모습을 엿볼 수 44) 이종숙, 위의 논문, 62쪽. 45) 김종수 이숙희, 역주시악화성 433쪽. 영조실록 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있음. 21
國 樂 院 論 文 集 제24집 있다. 일무는 <보태평> <정대업>의 아악에 맞추어 의식무를 추는데 세조실록악보 를 근 거로 <보태평>에는 <희문( 熙 文 )>, <기명( 基 命 )>, <귀인( 歸 仁 )>, <형가( 荊 軻 )>, <즙녕( 蕺 寜 )>, <융화( 隆 化 )>, <현미( 顯 美 )>, <용광( 龍 光 )>, <정명( 貞 明 )>, <대유( 大 揄 )>, <역성( 繹 成 )> 등 11곡이 있으며 <정대업>에는 <소무( 昭 武 )>, <독경( 篤 慶 )>, <탁정( 濯 征 )>, <선위 ( 宣 威 )>, <신정( 神 定 )>, <분웅( 奮 雄 )>, <순응( 順 應 )>, <총유( 寵 緌 )>, <정세( 靖 世 )>, <혁정 ( 赫 整 )>, <영관( 永 觀 )> 등 11곡이 있다. 학자들은 시용무보 를 다양한 시각에서 관찰한 결과 출판연대를 세조이후 혹은 영 정 조 무렵으로 보고 있어 조선 궁중 문화와 예술을 꽃피웠던 왕들의 업적으로 연결시키는 것 은 당연지사라고 본다. 시용무보 는 이름 자체가 명확히 무보라고 명시되어 있어 대부분 학자들은 춤의 재현 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어 논하고 있지만 무보를 다른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더 큰 내재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2. 시용무보 의 가치 고대 사회에서 의복은 그 사람의 관직 혹은 신분을 말해주지만 시용무보 에 그려진 무 원의 무복은 특별한 장식이 없다. 묘사해보면 겉옷은 파란계통의 둥근 옷깃에 소매통이 넓 고 겉옷 길이가 거의 바닥까지 내려져 있고 허리에는 붉은 끈으로 맨 후 앞으로 길게 늘어 져 있다. 그리고 머리엔 모자와 검은 신이 약간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보태평무>에는 약 적의 의물을 들고 있고 <정대업>무에는 간 척을 들고 있다. <보태평> <정대업>과 관련된 복식 기록은 세종 당시 이미 두 가지 유형을 입고 있다. 하나는 종묘, 영녕전에 입었던 옷 으로 문무복은 남색의 겉옷과 붉은 허리띠를 입었다 는 기록과 세종조 회례연에서 무무복 에 표문대구고( 豹 文 大 口 袴 )와 기량대( 起 粱 帶 )를 착용했다 는 기록이 있다. 남색의 겉옷과 붉은 허리띠는 시용무보 의 무복과 비슷해서 시대적으로 세종과 연결할 수 있지만 표문 대구고 와 기량대 의 착용기록은 중국 송의 문헌에서 찾을 수 있다. 무무66명, 그 중에 2명은 생을 잡는다. 기타 무인들은 무변( 武 弁 )과 평범한 두건을 쓰고, 붉 은 비단에 금으로 구분한 큰 소매와 흰 천에 입 벌리고 있는 표범 무늬, 붉은 명주로 만든 배자, 갑옷위에 금장식하고, 날아오르는 뱀 같은 기양대를 매고, 검은 신발을 신는다. 46) 46) 武 舞 六 十 六 人, 內 人 二 執 旌 其 舞 幷 服 武 弁, 平 口 幘, 金 支 緋 絲 布 大 袖, 白 布 豹 文 大 口, 蓋 襠 緋 絲 布 裲 襠, 甲 金 飾, 錦 騰 蛇 起 梁 帶, 鳥 皮 靴 宋 會 要 輯 稿. 22
역사적 문헌으로서의 동바무보 와 시용무보 가치연구 그리고 이보다 더 오래전 오대십국( 五 代 十 國 )도 같은 복식을 입었다는 기록 47) 이 있다. 표범은 용맹과 영웅을 상징하는 동물이고 무무 복식에 동물 문양 사용은 여러 의미를 내포 하한 상징성을 설명하고자 한 것이고 또 기양대의 착용 또한 외래 복식 문화인 것이다. 조선 세종 종묘, 영녕전에 행해졌던 <보태평> <정대업>의 복식과 시용무보 복식이 같 고 조선 세종 회례연 무복이 송나라의 무무와 연계성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시용무보 의 무복도 중국 송나라 혹은 더 이전의 국가들과 연관된 복식이라고 가정한다면 아마도 시용무보 에 그려진 무원의 동작은 송나라 대성아악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본다. 물론 현 시용무보 에 그려진 음악은 세종이 창안한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지만 세종이 무용을 만들었거나 혹은 안무, 제작했다는 기록이 없다는 사실은 역으로 생 각한다면 대성아악의 무용 동작에 큰 변화 없이 전승되지 않았을까하는 가정도 해 볼 수 있다.(여기서 무무의 대형변화는 제외함) 고려 때 들어온 대성아악이 음악에서는 악장과 악기들의 음계가 부정확하고 소리가 흩어 져 새로운 음률과 새 음악의 창작 작업은 필연적인 현상이겠지만 무용은 특별한 리듬의 급 조변화만 없다면 동작은 박자의 느려지고 빨라지는 속도에 맞추어서 원래 춤을 추는 일은 어려운 경험이 아니다. 세종 때 창안된 <보태평> <정대업>의 음악이 새로운 악장일지라도 그 음악에 옛 무용동작으로 움직일 수 있다면 무용은 옛 형태로 남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악학궤범 의 <보태평> <정대업>의 끝나는 부분에서 만일에 절차가 다 끝나지 않았을 경 우에는 곧 거듭 역성을 연주하여 춤춘다 48) 는 기록과 만일에 절차에 있어서 끝나지 않았 을 때에는 곧 거듭 영관을 연주하여 춤추고, 끝나면 음악이 그치고 대금십통을 친다 49) 는 기록은 음악과 무용의 끝나는 부분이 서로가 맞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고 악무를 종 결시키기 위해서 무용이 마치면 음악을 마친다는 기록은 무엇을 암시하는 것일까? 또 다른 사례는 악학궤범 이나 혹은 궁중 그림 속에 그려진 남무들의 무복 겉옷 길이 를 보면 대부분 무릎아래까지 내려오고 오피리를 신은 모습까지 보여주고 있다. 쉽게 풀이 한다면 시용무보 에 그려진 무복의 길이는 거의 땅에 닿고 조선 남자 무복에는 오피리 신 발이 다 보일 정도로 겉옷 길이가 짧다는 점도 놓칠 수 없는 비교 대상이다. 중국 명나라 때 발간된 무보와 청나라 때 발간된 무보의 무인 복장은 그 시대의 복장을 입고 춤추는 모 습으로 그려져 있다. 시용무보 도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면 당연히 조선의 남자 무 인을 모델로 삼아 묘사하는 것이 당연지사이지만 시용무보 에 그려진 무복은 조선 이전의 47) 武 舞 人 服 弁, 平 巾 幘, 金 支 緋 絲 大 袖, 緋 絲 布 裲 襠, 甲 金 飾, 白 練 蓋 襠, 錦 騰 蛇 起 梁 帶, 豹 文 大 口 布 袴, 鳥 皮 靴 舊 五 代 史 卷 144. 48) 장사훈, 한국전통무용음악 (서울: 일지사, 1979), 178쪽. 49) 장사훈, 위의 책, 181쪽. 23
國 樂 院 論 文 集 제24집 복장으로 보이고 더 나아가 처음 대성아악이 수입될 때 들어온 당시의 무복과 연계 가능성 도 배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고려사악지 의 기록과 송사악지 의 문무 무무의 내용이 거의 같고, 송나라는 대성아악을 보급하기 위해 연악신 서 를 출판한 기록이 있으며, 고려 예종의 대성아악에 대한 표의는 조선시대에도 더 엄격 히 격식화되어 행해졌음을 알 수가 있다. 시용무보 의 무용은 고려시대의 무용으로 볼 수 있고 송으로부터 수입당시 그려진 무보라는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종이 위에 그려진 시용무보 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그 이상의 오랜 세월을 시공간에서 존재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Ⅳ. 결 론 무용은 시공간의 예술이라고 배웠지만 무용이 종이 위에서 다시 태어나 읽혀질 적에는 재현의 의미 외에 드러나지 않은 사실들을 숨기고 있어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것처럼 긴장 감과 흥미로움을 더해간다. 동바무보 와 시용무보 는 양국간의 역사적인 교류 혹은 문화 접촉이 없는 나라들이고 무보를 구성하는 형식과 체계에서도 서로상호간의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두 민족은 오래전부터 무보를 사용했고 오랜 역사를 통해서 자 신만의 문화와 전통을 계승해왔으며 변화와 단절의 긴 터널시간에도 그들의 문화를 다시 재현 하려는 의지는 지배 계층자들의 깊은 관심과 전문가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 을 알게 되었고 더 나아가 사소한 기록까지 남기는 작업들이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 일인 지 무용전공자 입장에서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이제 이 두 무보들은 각 민족들의 문화가 아닌 인류의 문화로서 재평가를 받아야 하고 그 결과는 후세의 영광으로 이어진다면 현재 우리는 어떤 창조적인 문화를 창출하고 있는지 또 는 종이위의 무보가 아닌 컴퓨터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무보 기술이 어떤 새로운 무용을 안 무, 기록할 수 있는지 미래의 무용을 이제 우리 스스로에게 화두를 던질 때가 왔다고 본다. 24
역사적 문헌으로서의 동바무보 와 시용무보 가치연구 <참고문헌> 고려사절요 8권. 구오대사. 144권. 동문선 35권. 동파문화논집( 東 巴 文 化 論 集 ). 송사 악서 129권. 송회요집고. 신수세여동파무보( 神 壽 歲 與 東 巴 舞 譜 ) 상. 김 용. 한국 궁중무용의 춤사위 기록법 연구. 한국사상과 문화 제33집. 김종수 이숙희, 역주시악화성 433쪽. 김현주 유미희 최해리. 한국전통무보의 해석과 재현- 시용무보 를 중심으로. 한국무용기록학회 제4호. 2003. 송방송. 증보 한국음악통사. 서울: 민속원, 2007. 신명숙. 상형문자( 象 形 文 字 )로 기록된 <신적년세. 도신무도규정( 神 的 年 歲. 跳 神 舞 蹈 規 程 )> 무보 해제. 한국무용기록학회지 제2호. 2002.. 중국 납서족동파무보연구( 納 西 族 東 巴 舞 譜 硏 究 ). 중국: 중국학원출판사, 2007. 이국문. 인신지매( 人 神 之 媒 )-동파제사면면관( 東 巴 祭 司 面 面 觀 ). 운남인민출판사( 云 南 人 民 出 版 社 ), 1993. 이소영 조용진. 그림기법을 통해서 본 시용무보 의 제작 정황 추정. 한국사상과 문화 제21집. 이숙희. 조선조 종묘제례무의 변천소고. 한국음악사학보 제31집. 이인택. 중국 나시족 신화비교연구. 2007. 이종숙. 시용무보 의 무절 구조분석과 현행 종묘일무의 비교연구. 용인대학교 박사학 위논문, 2002. 이진원. 시용무보( 時 用 舞 譜 ) 연구를 위한 중국 무보 초탐( 初 探 ). 한국무용기록학회 지 제5호. 2003. 장사훈. 한국전통무용음악. 서울: 일지사, 1979. 정 일. 나시족 지역사회의 생성과 전통축제의 지역활성화. 비교민속학회지. 2006. 최지성 역. 시베리아 샤만. 서울: 민음사, 1988. 최해리. 한국무용기록의 역사와 전망. 한국무용기록학회지 창간호, 2001. 홍 희. 중국 나시족 동파의 제천및 쓰미구 의례와 신화. 한국중문학회지. 2009.. 중국 나시족 동바의 <제천>및 <쓰미구>의례와 신화. 중국문학연구 제40집. 25
國 樂 院 論 文 集 제24집 <Abstract> Research for value of dongbamubo and shiyongmubo as a historical document Shin myungsook (Prof. Daejin Univ.) When a dance is read on paper, it represents only a meaning of re-creation though we've learned that a dance is an art of space time. Therefore reading of dance makes us feel interest in it like reading a mystery story. The reason why I chose dongbamubo and shiyongmubo as my subject are that they have been used in a religious ceremony and continuously performed until now. Originally, mubo is a record for re-creation but I can find some features on each of them. dongbamubo has simple movements and a symbol of frog found from hieroglyphist which originated from Xiamen, Siberia. shiyongmubo could be extended to Goryeo dynasty comparing akji of Goryeo dynasty to China Song dynasty. Key words: notation( 舞 譜 ), shiyongmubo( 時 用 舞 譜 ), dongbamubo( 東 巴 舞 譜 ), Jongmyoakjaerae ( 宗 廟 樂 祭 禮 ), ilmu( 佾 舞 ) 26
복건남음 공척보로 살펴본 중국 전통 음악 기보의 특징 복건남음( 福 建 南 音 ) 공척보( 工 伬 谱 )로 살펴본 중국 전통 음악 기보( 记 谱 )의 특징 왕야오화( 王 耀 华 )* 1) 번 역** 2) 현경채( 玄 璟 彩 )*** 3) <국문초록> 복건성의 대표적인 음악 남음( 南 音 )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음악이다. 이 음악은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의미 있는 음악 유산 갖고 있으며, 동시에 중국의 대표적인 음 악 장르이다. 복건남음은 음악적인 중요성과 함께 기보법에 있어서도 상당히 중요하 다. 이는 복건남음의 공척보 연구가 곧 중국전통음악기보법의 일부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본고에는 복건남음( 福 建 南 音 ) 공척보( 工 伬 谱 )를 통해 중국 전통 음악 기보( 记 谱 )의 특징이 연구되었다. 음높이와 시가( 時 價 )의 기보에 관 한 연구를 비롯하여, 보간강번( 谱 简 腔 繁 )과 골보육강( 骨 谱 肉 腔 ), 그리고 복건남음과 중국전통음악기보법의 음악학적 의미를 재조명하였다. 핵심어: 복건남음( 福 建 南 音 ), 공척보( 工 伬 谱 ), 중국 전통음악, 기보법, 중국 * 복건사범대학 교수 ** 원문을 번역하면서 고유명사는 편의상 한국식 발음의 한글로 표시하고 괄호 안에 중국 원문을 제시 하였다. 번역을 하면서 부연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역자주 를 달았다. *** 영남대학교 강사, 국악방송 전문 진행자 27
國 樂 院 論 文 集 제24집 목 차 Ⅰ. 음높이와 시가( 時 價 )의 기보 Ⅱ. 보간강번( 谱 简 腔 繁 )과 골보육강( 骨 谱 肉 腔 ) Ⅲ. 복건남음과 중국전통음악기보법의 음악학적 함의( 涵 意 ) 복건성의 대표적인 음악 남음( 南 音 )은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이 음악은 유구한 역사만 큼이나 의미 있는 음악 유산 갖고 있으며, 동시에 중국의 대표적인 음악 장르이다. 복건남 음은 복건성 남부 지방의 천주( 泉 州 ), 하문( 厦 门 ) 및 그 주변의 각 현과 장저우( 漳 州 ) 일대 에 많이 연주되었으며, 또한 민남어( 闽 南 語 ) 1) 을 사용하는 대만( 台 湾 )을 비롯하여, 홍콩, 마카오 지역과 오문등지구( 澳 门 等 地 区 ), 재동남아민남적화교( 在 东 南 亚 闽 南 籍 华 侨 ), 화인취 거구야심위류행( 华 人 聚 居 区 也 甚 为 流 行 ), 남음제료단독연창( 南 音 除 了 单 独 演 唱 ), 연주지외( 演 奏 之 外 ), 환피운용우( 还 被 运 用 于 ), 대만, 홍콩, 마카오와 동남아 민남어 지역의 화교를 중 심으로 주로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넓게 유포되어 연주되는 음악이다. 남음은 단독으 로 노래되거나 연주되는 방식으로 연행되는 것 외에, 이원희( 梨 园 戏 ) 2) 고갑희( 高 甲 戏 ) 3), 그리고 천주( 泉 州 )의 목우희( 木 偶 戏 ) 4) 와 타성희( 打 城 戏 ) 5) 등의 지방극과 연형극에서도 두루 사용되는 음악이다. 복건 남음의 공척보는 특정 한자를 사용하여 약속된 음높이를 표시하는 음높이 악보로 전문적인 용어로는 고정명표음체계( 固 定 名 标 音 体 系 ) 속하는 기보법이며, 중국전통음악의 기보법의 특징을 큰 부분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1) 역자주, 민남어( 闽 南 語 )는 주로 복건( 福 建 )성 남부 광동( 广 东 )성 동부 대만( 台 湾 ) 전 지역에서 쓰이는 중 국어의 한 종류이다. 2) 역자주, 이원희( 梨 园 戏 )는 복건( 福 建 )성 남부와 대만( 台 湾 ) 등지에서 유행하였던 중국 전통 지방극이다. 3) 역자주, 고갑희( 高 甲 戏 )는 지방 전통극의 일종으로 복건( 福 建 )성 천주( 泉 州 ) 하문( 厦 门 ) 장주( 漳 州 ) 와 대만( 台 湾 ) 등지에서 유행했다. 4) 역자주, 목우희( 木 偶 戏 )는 천주 일대에서 유행한 나무인형극으로 팔다리에 줄을 매고, 그 줄을 움직여 춤을 추게 하는 연희이다. 5) 역자주, 타성희( 打 城 戏 )는 천주 일대의 종교적인 민속활동에서 기원되었으며, 종교예술의 색채가 짙 은 음악극의 한 종류이다. 28
복건남음 공척보로 살펴본 중국 전통 음악 기보의 특징 Ⅰ. 음높이와 시가( 時 價 )의 기보 음높이를 구분하는 표기법으로서의 악보 시스템은 공척보에 있어서 중요한 포인트이며, 중국전통음악의 기보법에 있어서도 음의 높낮이를 명확하게 구분하여 일정한 원칙으로 규 정하는 것은 일반적인 악보 구성 원리로서도 중요한 점이다. 보통 악보에서 표기하고자 하 는 음의 높이(혹은 절대음, 혹은 상대음)는 언제나 정확해야하며, 또한 자세하게 기보되어 야하다는 기본 명제가 있다. 복건남음에서 사용된 공척보 속의 악보 체계에 사용된 음높이 부호(혹은 문자)는 비파 연 주에 있어서 손가락 지법과 상관관계가 있다. 비파 운지법과 괘를 집는 자리는 한자( 漢 字 ) 로 표기되고, 그것이 바로 고정된 음 높이이며, 복건남음의 공척보에서 음높이를 나타내는 한자로 통용된다. 복건남음의 기본 악보에 사용되는 문자는 尺 (chē처로 읽는다)를 비롯하 여 工, 六,, 乙 등이며, 이 기호(혹은 문자)에 해당되는 음의 높이는 바로 c1, d1, e1, g1, a1 에 해당 된다. 앞에 나열된 음렬들은 중간음역에 해당되는 악보이다. 이것 보 다 한 옥타브 높은 음을 구분하여 표기하는 방법으로는, 복건남음 공척보에서 사용하는 기 본적인 문자 앞에 亻 (인변) 을 더하여 표시하는데 기본 한자의 좌측에 붙인다. 예를 들어 伬,,,, 로 표기한다. 두 옥타브 높은 음은 彳 (두인변) 로 구분하여 표시하며 기본적인 공척보 문자 좌측에 붙인다. 예를 들어,,,, 은 기본음보다 두 옥타브 높은 음에 해당된다. 반대로 중간음역보다 한 옥타브 낮은 음군( 音 群 )은 해당음 마 다 다르게 표기한다. 예를 들어 乙 음은 下 표기하고, 음은 士 로 표기한다. (일반적으 로 음을 8도 아래로 내린 음은 士 로 표기하지만, 어떤 경우는 옥타브 아래음도 그냥 로 표기되는 경우도 있다.) 乙 음과 을 제외하고 나머지의 옥타브 내린 음을 구분할 때는 艹 (초두) 공척보 문자 위쪽에 붙여준다. 예를 들면, 와 같다. 이상에 기술한 공척보에 사용되는 문자에 해당되는 음 높이를 5선보로 비교하여 제시하 면 <악보 1>과 같다. 29
國 樂 院 論 文 集 제24집 <악보 1> 복건남음의 공척보 기본 문자와 음 높이 복건남음의 공척보는 기본 음고를 표기할 때 사용하는 문자 외에도 반음을 올리고 내리 는 변화에 대한 기호도 있다. 1. 贝 자를 와 尺 의 좌측에 붙어 부가적으로 사용하는데 이것은 반음을 내리는 것 에 대한 약속으로, 로 악보 속에서 표기한다. 2. 부가적으로 사용하는 贝 표, 등 올려진 반음을 제자리로 돌릴 때에는 음높이에 해당하는 문자 옆에 正 자를 더해서, 등으로 표기한다. 3. x 부호가 六, 伬 의 좌측에 붙은 것은, 사공관( 四 空 管 ) 6) 의 六, 라는 것을 나 타내며, 이것은 오공관( 五 空 管 ) 7) 의 六, 伬 와 비교해서 반음이 더 높은 음으로 해석 된다. 이것은 복건남음의 공척보에서 六, 伬 로 기보한다. 여기에서의 부가적인 부호 는 아래에 제시한 와 함께 민간숫자기호인 에서 온 것으로, 그것들은 각각 사공관( 四 空 管 ), 오공관( 五 空 管 ) 의 특구한 악보 시스 템을 축약해서 기보로 사용한 것이다. 4. 반대로 부호가 六, 伬 좌측 상단에 붙었을 때는, 오공관( 五 空 管 )의 六, 伬 을 지칭하는 것이고, 사공관( 四 空 管 )의 六, 伬 보다 반음 낮은 음이며, 실제 악보에 서는 六, 伬 로 기보한다. 6) 역자주, 사공관( 四 空 管 )은 한국의 4관청과 같은 의미로 해석 될 수 있다. 7) 역자주, 오공관( 五 空 管 )은 한국의 5관청과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30
복건남음 공척보로 살펴본 중국 전통 음악 기보의 특징 5. 비파 지투( 指 套 ) 8) 음악 <첩신수금( 妾 身 受 禁 )>의 첫 번째 마루(1절 혹은 첫 번째 곡) 의 이조 십팔비화( 二 调 十 八 飞 花 ) 중에서 처음의 7번째 마디에서의 공척보 乙 의 글자는 모연수일( 毛 延 寿 一 ) 이라고 부르며, 특별히 로 기보하는데, 이것은 원래의 공척보 상의 乙 보다 반음 높은 음이다. 6. 연주법에 덧붙어 장식하는 打 尺 은 악보에서는 로 기보되고, 실제 연주에서는 리라는 기호로 이해된다. 로 연주한다. 악보 상에서 알 수 있듯이 扌 부호는 사실상 반음 올 이상과 같이 반음을 올리는 임시표를 다음의 <악보 2> 에 정리하여 제시 하였다. <악보 2> 복건남음의 반음 올림 임시표 기호와 서양악보 이상 위에 기술된 복건남음의 기보법상에 제시된 음높이 부호에 상용된 문자들은 남음 비파의 줄의 순서를 비롯하여 비파 연주에서 사용되는 음의 위치에 해당 되는 괘의 자리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기보에서 사용되는 부호를 비롯한 다양한 표현 기법 등은 남음 비파의 줄의 순서를 기호 로 표시되어 공척보 상세히 기보된다. 예를 들어 모현 ( 母 线 : 네번째 줄)은 악보 좌측에 母 자를 쓰고, 세 번째 줄은 악보는 좌측에 川 을, 두 번째 줄은 위쪽에 入 을 기록하 여 구체적인 현을 상세하게 구분한다. 자현 ( 子 线 : 첫 번째 줄)은 음표에 해당하는 문자 와 같아서 음높이에 해당하는 문자로 함께 사용한다. 아래에 <그림 1>로 비파 줄과 괘 의 위치, 그리고 복건남음의 공척보 악보에 사용되는 문자의 예를 제시했다. 8) 역자주, 지투( 指 套 )는 비파를 연주할 때의 손가락 사용법을 표기한 비파음악 모음곡을 지칭하는 것으 로 투곡( 套 曲 ) 또는 지투( 指 套 ) 라고도 한다. 31
國 樂 院 論 文 集 제24집 <그림 1> 복건남음 비파 음 위치도 이상과 같이 이러한 음높이를 나타내는 문자는 음높이 악보로서의 특징을 담고 있으며, 당연히 중국 한족( 漢 族 )언어가 갖고 있는 4성 성조( 声 调 )의 언어적 특징과 음악의 체계와 관련이 있다. 즉, 중국 한족언어의 성조의 높낮이는 한자가 갖고 있는 뜻의 작용에 영향을 받는다. 때문에 이러한 중국 언어와 성조가 서로 만나는 과정에서 음고( 音 高 ), 음색( 音 色 ), 강약의 변화 등을 갖추게 된다. 예를 들어 중국어 표준말 중 높낮이와 관련 있는 4성은 다 음과 같은 선율의 곡조를 만들어 낸다. 32
복건남음 공척보로 살펴본 중국 전통 음악 기보의 특징 <악보 3> 중국어 4성 성조( 中 国 汉 语 四 声 声 调 ) 이와 같이 언어가 갖고 있는 성조와 같은 개념의 선율의 멜로디 라인에 관련된 것은 소 리를 형성하는 것 중의 음색( 音 色 )과 상대적이며, 힘의 강세의 변화 등등에 나타난다. 이러 한 상관관계의 작용에서 만들어진 중국 전통음악은 다양한 악보체계를 찾아내어 적절한 자 신만의 기보 방법을 구축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복건남음 비파 악보 중에서의 탄 ( 弹 ), 도( 挑 ), 륜( 轮 ), 음( 吟 ), 노( 猱 ), 대( 带 ), 수( 擞 ), 타( 打 ) 등의 연주수법( 演 奏 手 法 )이 다른 비파보에서는 척( 摭 ), 제( 提 ), 구( 勾 ), 탑( 搭 ), 요지( 摇 指 ), 불( 拂 ), 소( 扫 ), 살현( 煞 弦 ), 교현( 绞 弦 ) 등 연주수법으로 재해석되어 기보되면서, 음고와 힘의 강세, 음색의 변화 등에 관련된 기보법으로 구체화 되었다. 복건남음의 공척보는 음의 시가( 時 價 ) 기보에 있어서는 불편한 악보이고, 대부분의 중국 악보 시스템은 음의 시가( 時 價 )를 표기 하는 데는 원칙적으로 소홀한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음의 시가( 時 價 )를 기록하기 위한 흔적은 단위 개념은 음악 혹은 음악이 진행되는 과정에 서 음의 시간적인 척도를 담아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복건남음의 기보법에는 요박 기호( 撩 拍 记 号 )를 사용하여 박자를 표기한다. 박( 拍 ) 은 강박( 强 拍 )을 의미하는데 중국의 극음악( 劇 音 乐 혹은 戏 曲 音 乐 )에서 판( 板 ) 의 의미와 같은 개념이다. 요( 撩 ) 는 약박( 弱 拍 ) 에 해당하고, 희곡음악( 戏 曲 音 乐 )의 안( 眼 ) 과 같은 약박의 개념과 상통한다. 7요박( 七 撩 拍 ) 은 시작은 강박으로 하여 약박이 일곱인 박자 개념이고, 3요박( 三 撩 拍 ) 은 시작은 강 박으로 하여 약박이 셋인 박자 개념이며, 일이박( 一 二 拍 ) 은 두박이다. 그 외에도 첩박 ( 叠 拍 ) 등의 박자개념의 용어로 음악을 구분하여 기보한다. 이러한 박자개념 외에도 리듬개 념과 같은 세분화된 음악의 미세한 박자 기보법은 남음비파( 南 音 琵 琶 )의 연주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비파 연주법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한자용어와 기보법의 개념이 결합되어 독 창적인 리듬개념의 기보법이 정착되었다. 예를 들어 연지류( 摙 指 类 ) 기법 중 점도거도류 ( 点 挑 去 倒 类 ), 갑선류( 甲 线 类 ), 낙지류( 落 指 类 ), 장식성지법류( 装 饰 性 指 法 类 ), 그 외에 도 연지류( 摙 指 类 )의 전연( 全 摙 ), 점연( 点 摙 ), 창연( 抢 摙 ), 관연( 贯 摙 ) 등, 이러한 비 파의 연주 기법이 복건남음 박자개념의 기보법에 중요 키워드가 되었다. 전연( 全 摙 ) 기법 에서는 오른 손 검지와 엄지가 연속적으로 뜯고 튀기는 점조( 点 挑 ) 주법이 박자개념에 사 용되는 예인데, 강하게 뜯는 것( 重 )과 가볍게 탄주하는 것( 轻 ), 천천히 완만하게( 缓 ), 혹은 33
國 樂 院 論 文 集 제24집 급하게 타는 것( 急 ) 등이 모두 포함된다. 그리고 마지막 일점( 一 点 ) 은 소( 箫 ) 9), 현( 弦 ) 10) 및 노래[ 唱 声 ]의 시작이 포인트가 되는 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제시한다면 다음과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점연( 点 摙 ) 은 먼저 식지( 食 指 )로 일점( 一 点 ) 치면 호흡을 맞추는 것이고, 재연( 再 摙 ) 은 퉁소, 이현( 二 弦 ) 및 노래에 따라서 수성가락으로 연주하라는 신호 이며, 창연( 抢 摙 ) 은 빠르게 반박을 붙이는 것[ 快 摙 半 拍 ]이다. 관연( 贯 摙 ) 은 한 박자 안에 서 식지와 모지가 한 번 뜯고 한번 튕기는 것[ 一 点 一 挑 ]의 두 번 반복으로 4개음을 연주하 는 박자개념이다. 점( 点 ), 도( 挑 ), 거도( 去 倒 ) 기법 등의 종류에서도 박자개념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점( 点 ) 은 식지로 자연스럽게 현을 튕기는 것으로 이것의 음의 시가( 時 價 )는 반 박자이다. 만약에 다른 손가락으로 연주하라는 분지기호( 分 指 记 号 ) 가 있다면 이것은 한 박자로 해석 해야한다. 도( 挑 ) 는 엄지손가락으로 현을 튕겨 올리는 주법이고 이것의 음의 시가( 時 價 )는 반 박자이다. 여기에도 만약 분지기호( 分 指 记 号 ) 가 있다면 한 박자로 해석해야 한다. 거 도( 去 倒 ) 는 집게 손가락로 뜯고, 엄지손가락으로 튕겨 올리는 연주기법이며 음의 시가( 時 價 )는 한 박자이다. 긴거도( 紧 去 倒 ) 는 거도( 去 倒 ) 와 같으나 속도는 두 배정도 빠르고 음 의 시가( 時 價 )는 반 박자이다. 분지( 分 指 ) 는 집게손가락으로 가볍게 뜯고 나서 엄지손가락 으로 천천히 튕겨 올리는 주법이며, 박자는 거도( 去 倒 ) 보다 두 배 늘어난다. 전지( 战 指 ) 는 집게손가락과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뜯고, 나서 각각을 한 번 튕겨 올리는 주법이고, 이것의 음의 시가( 時 價 )는 한 박자이다. 마지막 점일하( 点 一 下 ) 의 박자는 반 박자이다. 전지( 颠 指 ) 는 전지( 战 指 ) 와 전반적으로 비슷하지만 속도가 두 배로 빠르게 연주하는 주법이다. 채지( 采 指 ) 는 즉 두 번의 긴거도( 紧 去 倒 ) 이며 음의 시가( 時 價 )는 한 박자이다. 반도( 半 跳 ) 는 반 박자 안에서 먼저 식지 손가락으로 살짝 줄을 건드리는 연주 후에, 다시 반 박자 안에서 한 번 튕겨 연주하는 것으로, 이 단계를 합치면 한 박자가 된다. 전도( 全 跳 ) 는 반 박자 안에서 먼저 식지 손가락으로 살짝 줄을 건드리는 연주 후에, 다시 반 박 자 안에서 한 번 튕겨 연주하고, 마지막에 반 박자 안에서 식지로 가볍게 연주하는 주법이 다. 전지( 剪 指 ) 는 반 박자 안에서 식지 손가락으로 빠르게 스치며 연주학고, 엄지 손가락 으로 역시 빠르게 튕겨 올리며( 急 挑 )는 주법이다. 갑선( 甲 线 ) 은 본음( 本 音 )을 한옥타브 내린 음이다. 자선( 子 线 ) 위의 을( 乙 ) 음은 갑 선( 甲 线 ) 을 식지로 이선( 二 线 )의 하( 下 ) 음을 사용하는 것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엄지 9) 역자주, 소( 箫 )는 세워서 부는 퉁소 계통의 악기이다. 10) 역자주, 현( 弦 )은 이현( 二 弦 )으로 한국의 해금과 같은 종류의 악기이다. 34
복건남음 공척보로 살펴본 중국 전통 음악 기보의 특징 손가락의 갑삼선( 甲 三 线 ) 혹은 사선( 四 线 ) 의 옥타브 아래음을 연주한다. 연주할 때는 엄 지손가락으로 줄을 눌러 소리를 낸다. 갑선( 甲 线 ) 은 여러 가지 변화형식이 있다. 긴갑선 ( 紧 甲 线 ) 은 갑선( 甲 线 ) 과 같으나 연주 속도가 두 배 빠르다. 접성( 接 声 ) 은 퉁소와 이현 ( 二 弦 )을 사용하며 노래 부를 때 쓰는 주법으로, 첫 음을 낸 다음 반 박자 쉬고 두 번째 음과 세 번째 음이 연속으로 출현되는 세 박자 개념이다. 직관( 直 贯 ) 은 접성( 接 声 ) 과 같 으나 첫 음 후 쉬지 않고 세 박의 음을 계속해서 연속적으로 연주하는 박자 개념이다. 구 갑( 钩 甲 ) 은 삭지 손가락으로 올려서 뜯고, 엄지손가락으로 갑선( 甲 线 )을 누르는 데 주법으 로 악보에 자주 쓰이는 주법중 하나이다. 낙지( 落 指 ) 는 윤지( 抡 指 ) 라고도 하며 쾌낙지( 快 落 指 ) 와 만낙지( 慢 落 指 ) 의 구분이 있 있는데, 쾌낙지( 快 落 指 ) 는 오른손의 새끼 손가락에서 시작하여 무명지, 중지, 식지 순서로 네 개의 음을 연주하는 주법이다. 식지 손가락 연주 할 때는 빠르게 엄지 손가락으로 튕겨 올려야 한다. 모두 다섯 음을 반 박자 안에서 연주해야하는 박자 개념의 주법이다. 만낙지 ( 慢 落 指 ) 는 연주법상으로 볼 때 쾌낙지( 快 落 指 ) 와 거의 같다. 다만 속도에서 비교적 느릴 뿐이며 속도차이 때문에 음 하나하나를 분명하게 연주할 수 있다는 주법이다. 장식성지법( 装 饰 性 指 法 )은 바로 장식음을 연주할 때의 수법이다. 장식성 지법에는 단타 척( 单 打 尺 ) 을 비롯하여 쌍타척( 双 打 尺 ), 말육( 抹 六 ), 반범( 半 凡 ), 전범( 全 凡 ) 등이 있 다. 단타척( 单 打 尺 ) 은 왼쪽 식지 손가락으로 먼저 정패척( 定 贝 尺 )을 누르고 무명지로 전 척( 全 尺 )을 누르며, 오른 식지 손가락은 곁에서 살짝 스치고, 왼손은 무명지를 이용하여 강 하게 세 번을 쥐어뜯는 주법이다. 음의 시가( 時 價 )는 한 박자이며 그 안에서 주법을 마무 리 해야된다. 쌍타척( 双 打 尺 ) 은 왼손 식지 손가락으로 정패척( 定 贝 尺 )을 누르고, 무명지로 전척( 全 尺 )을 누르며, 오른손 식지 손가락에 기대 한 번 스치고, 무명지로 한 번 잡아 뜯 은 후, 식지로 다시 한 번 건드리는 주법이다. 무명지는 연속 세 번 뜯어야 하는 이 주법 은 두 박자의 박자개념이다. 말육( 抹 六 ) 은 왼손 식지 손가락으로 육( 六 ) 을 누르고, 무명 지로 를 짚으며, 오른 손 식지에 기대어 살짝 건드리고, 왼손 무명지로 음( 音 )을 잡는 주법으로 반 박자 안에서 해결해야하는 주법이다. 반범( 半 凡 ) 은 두 음이 서로 연결되게 식지 손가락을 아래로 누르고 엄지손가락을 튕기는 주법으로 반 박자 안에서 해결해야 하 는 주법이다. 단, 첫 음은 반드시 원음보다 낮은 음이어야 한다. 전범( 全 凡 ) 은 오른손 식 지를 이용하여 아래로 한번 튕기는 주법으로 반 박자 개념의 주법이다. 엄지를 위로 하고 집게손가락을 아래로 하여, 각각 빠르게 튕기는데 반 박자 안에서 해결해야하는 주법이다. 엄지손가락이 위로 한 번 들어 튕기는 주법을 네 번 반복하는 경우는 두 박자 안에서 연주 해야하는 주법이다. 그러나 4음중 제3음은 반드시 원음보다 낮은 음이어야 한다. 35
國 樂 院 論 文 集 제24집 감반( 减 半 ) 은 부호, 으로 구분하여 표시한다. 악보 중에서 어떠한 연주법이든지간에 만약 에 이 감반( 减 半 ) 부호의 표시가 가 붙어 있다면, 연주 속도는 두 배로 빨리 연주해야 한다. 이상 위에서 설명한 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복건 남음( 南 音 )의 공척보에서의 대부분의 박자개념은 비파지법( 琵 琶 指 法 ) 중 점( 点 ), 도( 挑 ), 거도( 去 倒 ), 연지( 摙 指 ), 갑선( 甲 线 ), 윤지( 抡 指 ) 를 기초로 하여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중국 전통기보법 중에서 음의 시가( 時 價 )의 특징을 정하는 중요한 원칙은 중국어의 성조 ( 声 调 )와 중음언어( 重 音 语 言 )가 갖고 있는 서로 다른 특징과 관련이 있다. 뿐만 아니라 동 시에 유가사상( 儒 家 思 想 )의 사회인륜( 社 会 人 伦 )에 있어서의 극기평형( 克 已 平 衡 )을 강조하 는 것과도 관계가 있으며, 또한 도가사상( 道 家 思 想 )의 초연물외( 超 然 物 外 )와 상외지상( 象 外 之 象 )을 추구하는 것과도 긴밀한 관련이 있다. 만약에 중음언어( 重 音 语 言 )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영어와 성조언어( 声 调 语 言 )의 대표적 인 언어인 중국어 등, 세계 언어에서 전형적인 의미를 지닌 두 종류의 언어라고 할 때, 중 음언어( 重 音 语 言 )는 경중( 轻 重 )의 순환( 循 环 )을 강조하므로 음악요소에 있어서 박자와 리듬 이 특히 중요시되며 강약의 고르게 분포되는 특징이 있다. 이와 상반되는 개념체계를 갖고 있는 성조언어( 声 调 语 言 )는 음악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있어서의 음고( 音 高 ), 음색( 音 色 ), 강약의 변화를 강조하는 동시에, 그 강약의 변화도 엄격하지 않다. 박자 개념의 기준이 되 는 판( 板 ) 과 자( 字 )는 동일한 개념의 관계로 볼 수 있지만, 이러한 순환( 循 环 ) 중의 글자 를 중음( 重 音 )으로 변화시키지는 않고, 글자의 성조( 声 调 )로 인해 생겨난 멜로디의 운율감 도 판안( 板 眼 ) 으로 고르게 나타났다고 해서, 이것이 강약으로 서로 고르게 나타나지는 않 는다. 판안( 板 眼 )은 결코 강약신호의 경계를 나타내는 표시가 아니며, 그것이 선율에 대한 관련성의 정도는 언어의 성조현상에 의하여 순화되기도 한다. 이것은 마치 고문( 古 文 )에 구두점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석된다. 악구( 乐 句 )와 악구사이에 명확한 구분과 박자의 표시가 없는 것은 매우 당연한 현상이 된 것이다. 따라서 연주수법을 악보화 하는 과정에 서 음악으로 표현되는 여러 요소 즉, 음고( 音 高 ), 음색( 音 色 ), 음의 강약변화를 분별해서 기록한다. 물론 동시에 연주 수법을 부호화 하여 음악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악보화 하고, 박자의 개념을 악보화 하면서도 표기되어야 하다는 데에는 의견 일치를 보지만, 모 든 음악을 완벽하게 악보화 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중국의 수묵화( 水 墨 画 )가 자연의 모든 것을 정확하게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는 것과 일맥이 상통한 다. 중국 전통 음악의 악보에서 판에 박은 듯 세밀하게 모든 음악을 정확한 박자개념으로 조금의 빈틈도 없이 종이위에 재현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명나라 주권( 朱 权 )의 신기비보( 神 奇 秘 谱 ) 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36
복건남음 공척보로 살펴본 중국 전통 음악 기보의 특징 상권( 上 卷 )의 태고신품( 太 古 神 品 ) 16곡( 一 十 六 曲 )은 옛 사람이 만든 것이며, 그들이 16곡에 대한 비밀에 대해서 전하지 않았기에 뜻을 알려주는 말이 없다. 하지만 여기에 통한 사람은 얻을 수 있가. 이것은 금도( 琴 道 )로서 음악만 전할뿐 악보와 글로서는 전해지지 않았다. 고 로 혜강( 嵇 康 ) 11) 은 평생을 연구했지만 역시 전수하지는 않았고, 백아( 伯 牙 )는 현을 다시는 연주 않았는데, 이는 금음악을 아무렇게나 전수하여 다른 이를 그르치려 하지 않음이었다. 上 卷 太 古 神 品 一 十 六 曲 乃 太 古 之 操, 昔 人 不 传 之 秘, 故 无 点 句, 达 者 得 之, 是 以 琴 道 之 来 传 曲 不 传 谱, 不 传 句, 故 嵇 康 终 其 身 而 不 传, 伯 牙 绝 其 弦 而 不 鼓, 是 琴 不 妄 传 以 示 非 人 故 也. 12) 여기에서 말하는 음악만 전하고 악보는 전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세한 악보 를 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금의 악보는 음악을 잊을까 우려되어 준비한 것이고, 연주하는 사람들을 위한 전용이여서, 그때부터 악보에 판안( 板 眼 ), 구두점을 찍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악보 에 별다른 설명을 전하지 않는 습관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금( 琴 )을 배우려고 큰 마음을 쓰는 하는 사람은 악보 속에는 없으나 스승과의 수업으로 전수받거나, 혹은 박자개 념과 세밀한 음악적인 표현을 스스로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되어, 금곡( 琴 曲 )의 판안 板 眼 에 대해서 알게 되고, 음악에서의 구두점의 배치를 몸으로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소위 신기 비보( 神 奇 秘 谱 ) 중에 거론한 통달하는 자가 얻게 된다 는 것이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 것이 다. 이러한 자연스럽게 정해지는 박자개념은 형성되는 과정에서 유가사상( 儒 家 思 想 )이든 아니면 도가사상( 道 家 思 想 )이든 간에 모두 각기 여러 면으로 영향을 주었다. 유가( 儒 家 )에 서는 중용지도( 中 庸 之 道 )를 주장하며, 중화지미( 中 和 之 美 )적인 미학관( 美 学 观 )을 제창하고, 사회 인륜의 극기평형( 克 已 平 衡 )과 행위에 있어서의 규율을 잘 지키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는 문화심리의 측면에서 박자의 균형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기본박자와 기보에 있어서의 리듬형태(일종의 기본박자 규칙)의 운용을 추구하게 된다. 도가( 道 家 )는 세속에 구속되지 않고 초연한 것을 강조하며, 형상 밖의 형상을 추구하고 심리적 리듬의 자유로움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는 중국음악의 박자개념으로 하여금 대체적인 틀의 안 정적인 기초위에서 유연하게 융통성 있는 자유를 허용하였다. 기보법 중의 박자의 정형화 에 대한 상반되는 개념이며, 이를 위해 충분한 여지를 남겨준 것이다. 유가와 도가, 이 두 사상의 영향은, 중국전통음악의 독특한 박자 개념의 사유체계의 방식과 기록형태를 형성하 게 되었다. 이는 중국 전통 음악의 박자개념으로 하여금 평형을 유지면서도, 정확한 박자 11) 죽림칠현 중 한 사람으로 저명한 琴 艺 家 이자 철학가이다. 12) 明 朱 权, 神 奇 秘 谱, 中 央 音 乐 学 院 民 族 音 乐 研 究 所 据 明 刊 本 影 印 ( 北 京 : 音 乐 出 版 社, 1956), 2쪽. 37
國 樂 院 論 文 集 제24집 개념은 염두에 두지 않고 리듬의 분위기 혹은 정취에 대한 것에 무게 중심을 두게 되었다. 그것은 분명하고 정확한 기능적인 강약 반복의 박자 개념에 입각한 것이 아니고, 마음과 정신세계가 중요한 심리상의 감정적인 미학에 입각한 것이다. 이것은 중국 전통 악보 시스 템에 있어서 중요한 철학으로 자리 잡았고, 음고와 시가( 時 價 )의 기보체계로 끊어질 듯 단 절되지 않고 이어져 내려왔다. 이는 리듬과 박자 개념에 유연하고 탄력적으로 적용되어 기 운생동( 气 韵 生 动 )의 음악으로 중국 전통 음악 기보법의 분명한 특징을 형성하였다. Ⅱ. 보간강번( 谱 简 腔 繁 )과 골보육강( 骨 谱 肉 腔 ) 중국 전통 음악 기보법에서는 일반적으로 간략한 방식으로 악보를 기록하지만, 연주과정 에서는 오히려 정교하게 꾸미고, 살을 붙여 연주하게 된다. 이것을 보간강번( 谱 简 腔 繁 ) 이 라고 한다. 복건남음( 福 建 南 音 )의 악보에는 비파음위( 琵 琶 音 位 )와 연주수법( 演 奏 手 法 )만 기록되어 있고, 선율의 핵심적인 부분인 골격음만 표시되어 있어서, 사실상 노래를 부르거 나 연주하는 과정에서 윤색을 가하거나, 즉흥적으로 잔가락을 넣어 연주자의 음악적인 능 력을 심분 발휘할 수 있고, 또한 응당 그래야 한다. 때문에 이러한 비파 악보를 지골( 指 骨 ) 이라고 부른다. 즉, 손가락으로 연주하는 지법과 골격음, 강보관계( 腔 谱 关 系 )를 간략하 게 기록한 골보육강( 骨 谱 肉 腔 ) 악보이다. 악보가 골격음의 틀을 기록함에 있어서 마치 사 람의 몸속의 뼈대만 추려서 담아낸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여기에 살을 붙여 풍부하고 매끄 럽고, 화려하게 노래하는 것은, 마치 뼈 위에 적당히 풍만하고 균형이 잘 잡힌 피와 살이 올려진 사람의 몸과 같은 것이다. 복건남음( 福 建 南 音 )의 노래와 연주 중, 7음음계의 처리 에 있어 비록 각 관문( 管 门 ) 13) 의 기보법 중 기본악보에는 모두 5음음계의 골격음만 기록 되어 있지만 14), 실제로는 노래 선율과 퉁소( 洞 箫 ), 이현( 二 弦 )의 연주에 있어서 변궁( 变 宫 ) 과 변치음( 变 徵 音 )이 자주 나타난다. 골격악보에 상응하는 노래와 퉁소, 이현( 二 弦 )의 연주 에 있어서 풍부하고 다채로우며, 부드럽고 완곡하게 들리는 것은, 골격악보에 살을 올려 연주하는 것 이다. 골보육강( 骨 谱 肉 腔 ) 에서는 변궁( 变 宫 ), 변치( 变 徵 )를 첨가하는 여러 방 식으로 나타기도 하거나, 혹은 장3도 음정을 쌓거나 하는 방법으로 기본 골격음에 살을 붙 13) 역자주, 관문( 管 门 )은 연결고리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한국의 돌장과 같은 개념이다. 14) 오공관( 五 空 管 )이 G궁( 宮 ) 계통과 c궁( 宫 ) 계통의 종합은 예외이다. 38
복건남음 공척보로 살펴본 중국 전통 음악 기보의 특징 이기도 한다. 15) 골격음에 살을 붙이는 방법에는 꾸밈음을 더하는 장식적인 방법을 비롯하 여 윤강성( 润 腔 性 ), 대체성( 代 替 性 )으로 노래 선율과 퉁소, 이현( 二 弦 )의 연주 및 비파의 연주 사이에 옆으로 혹은 위와 아래로 7음과 6율( 六 律 ), 5성 으로 자유롭게 멋을 부리는 것 등이 있다. 옆으로 살을 붙이는 예로는 노래 선율을 비롯하여 퉁소, 이현의 선율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5음음계를 주요 골격으로 하여, 사이에 변궁( 变 宫 ), 변치( 变 徵 ) 넣거나 혹 은 7음으로 5음음계를 장식하여, 멜로디 라인을 더욱 부드럽고 섬세하게 만드는 것이다. 종( 纵 )적으로는 위와 아래에 멋을 부리는 것은 비파, 삼현( 三 弦 )의 5음음계 선율을 연주하 는 기본적인 골격라인에 노래와 퉁소, 이현이 각각의 독특한 변주형식( 变 奏 形 式 )으로 변궁 ( 变 宫 )와 변치( 变 徵 )가 첨가하는 형식으로 멋을 내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기본골격에 종 적으로 멋을 더한 곡조는 마치 구름이나 물이 유유히 흘러가듯 순창하고 우아하며 아름답 다. 이 두 가지가 서로 결합하여 마치 아름다운 옥이 합친 듯, 진주를 꿰어 놓은 듯 빛이 나고, 뼈와 살이 서로 붙어 있듯이 강함과 부드러움이 서로 조화를 이루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아래 <산험준( 山 险 峻 )>의 한 단락을 예로 들어 비파의 기본적인 악보와 노래선율의 관계에 대해서 비교해 보았다. <악보 4> 복건남음 음악 <산험준( 山 险 峻 )> 중 한 단락 15) 자세한 내용은 福 建 南 音 唱 腔 旋 法 中 的 多 重 大 三 度 并 置, 王 耀 华 刘 春 曙, 福 建 南 音 初 探 ( 福 建 : 人 民 出 版 社, 1990), 42-58쪽에 수록되어 있다. 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