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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溪學派의 分化와 屛虎是非(Ⅱ)* 廬江(虎溪)書院 置廢 顚末 43)설 석 규** 차 례 1. 2. 3. 4. 5. 머리말 書院의 建立과 系派分化 配 追享 論議와 賜額 屛虎是非와 書院毁撤 맺음말 국문초록 이 글은 廬江(虎溪)書院의 건립에서부터 훼철에 이르는 과정을 屛派와 虎派의 역학 관계와 연관하여 검토한 것이다. 여강서원은 중국의 性理學을 계승하면서도 우리나라 先賢의 제향을 통해 한국의 독 자적 道學의 풍토를 조성하려는 李滉의 書院觀을 반영해 건립되었다. 그것은 禮安의 陶 山書院, 榮川의 伊山書院과 함께 이황의 위패를 봉안한 대표적 서원으로서의 위상을 확 보한 가운데 퇴계학의 정립과 더불어 학파의 저변을 확대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여 기에 유성룡과 김성일만 배향됨으로써 서애계와 학봉계가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양 계파는 공존을 보장하는 무대로 이 서원을 활용하면서 퇴계학파 및 남인세력의 학 문과 공론을 주도했다. 그렇지만 유성룡 김성일을 배향할 당시 爵位를 기준으로 한 位次가 적용된 것을 계기로 서애계가 상대적 우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학봉계를 자극하 * 이 논문은 2008학년도 경북대학교 신임교수정착연구비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 경북대 사학과 교수

312 退溪學과 韓國文化 第45號 는 요인이 되어 그들이 계파의 결속과 더불어 확산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계기를 마련 했다. 그들이 서인세력과 牛栗 文廟從祀 논쟁을 통해 대립을 강화함과 동시에 서애계와 세계관의 차별성을 부각하기 위한 시도를 전개한 사정이 여기에 있었다. 이에 따라 여 강서원은 虎溪書院의 賜額을 받기는 했지만, 양 계파의 차별적 경향은 쉽게 극복될 수 없었다. 그 뒤 학봉계는 李象靖을 중심으로 계파의 세계관을 재정립하며 서애계와 대등한 위상확보를 위한 노력을 전개함과 동시에 그의 제자들을 주축으로 호계서원을 장악하 기 위한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들이 김성일 유성룡의 序次변경을 시도한 데 이어 호계서원에 이상정의 추향을 시도하고 位牌遷動의 의혹을 야기하게 되는 것도 그와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그들의 시도에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서애 계가 제동을 걸고 나섬으로써 屛虎是非는 격화되었다. 결국 병호시비는 병파와 호파의 호계서원에 대한 주도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계파 간 분쟁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호계서원을 배타적으로 장악하려는 학봉계와 그것에 대한 영향력을 견지하려는 서애계의 대립으로 압축될 수 있었다. 호계서원을 매개로 한 그들의 시비는 향촌사림뿐만 아니라 대원군의 保合추진에도 불구하고 종식될 조짐 을 보이지 않았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대원군이 서원훼철령을 통해 호계서원을 철폐하 는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주제어 屛虎是非, 廬江(虎溪)書院, 西厓系, 鶴峰系, 屛派, 虎派, 保合 1. 머리말 退溪學派는 李滉이 세상을 떠난 직후부터 핵심제자들을 주축으로 系派分 化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勳戚政權의 몰락과 士林政權의 대두라는 정치 사회적 상황변화에 대응하는 퇴계학파 내부의 시각차가 작용하고 있었 다. 여기다 사림세력이 학파를 배경으로 朋黨을 결성해 대립하게 되면서 내

退溪學派의 分化와 屛虎是非(Ⅱ) 313 부적 분화가 심화되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퇴계학파가 시차를 두고 있기 는 하지만 月川(趙穆)系 惟一齋(金彦璣)系 鶴峰(金誠一)系 西厓(柳成龍) 系 寒岡(鄭逑)系 旅軒(張顯光)系뿐만 아니라 金尙憲에 연원하는 西人系 등 다양한 계파를 형성한 가운데 분화하게 되는 사정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屛論의 중심을 이루는 西厓系(屛派)나 虎論의 주축을 형성한 鶴峰 系(虎派)는 처음부터 분화된 것은 아니었다. 유성룡과 김성일은 퇴계학파의 대표적 官僚型 士林으로 조정에서 함께 활동하면서 鄭仁弘 등 北人의 君子小 人論과, 李珥 등 西人의 保合論이 극한적 대립을 보일 때 參用彼此를 통한 君 子의 調劑를 제시하며 南人의 정치적 입장을 주도했다. 또한 그들은 退溪集 의 편찬과정에서 모든 저술을 수록할 것을 주장하는 조목 등 處士型 士林들 과는 달리 정치적 상황을 고려한 선별수록을 강조하며 편집방향에 공동보조 를 취하기도 했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그들이 광해군 12년(1620) 이황이 제 향된 廬江書院에 함께 배향되는 발판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성룡과 김성일은 여강서원에 배향될 때 퇴계학의 眞 知實踐 과 道存德性 을 각각 계승한 것으로1) 평가된 바와 같이, 일찍부터 학 문경향이나 현실대응 자세에 있어 일정한 차별적 경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에 연원하는 병파와 호파의 그러한 차별성은 仁祖反正 이후 서인정권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표면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곧 호파가 서인정 권의 정통성을 부정한 가운데 그들과의 명분논쟁을 통한 정권교체를 지향한 것과는 달리, 병파는 서인정권의 기득권을 인정한 가운데 공존을 보장하는 견제체제를 유지하고자 했다. 이러한 그들의 서인정권에 대응하는 강 온의 정치적 명분은 각각 호론과 병론의 세계관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었다. 물론 병론과 호론은 표면적으로는 氣[小人]은 理[君子]의 뒤를 따르거나 제어를 받는다는 이황의 隨乘論의 세계관을 공통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극한적 1) 廬江志 권1, 原志 追祔事實 元位告由文 先生之學 兩進明誠 眞知實踐 道存德性

314 退溪學과 韓國文化 第45號 인 이분법적 대립관계를 상정하는 分對論이나, 가치분별 없는 무조건의 통합 만을 모색하는 妙合論과는 차별화를 도모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 론과 병론은 내부적으로는 理 氣의 가치론적 구분에 치중하는 分對的 隨乘 論을 확립하거나, 그것들의 유기적 관계에 비중을 두는 妙合的 隨乘論을 정립 하는 등 미묘한 시각차를 드러내고 있기도 했다.2) 서애계와 학봉계는 각각 服喪 및 從祀논쟁을 주도하는 가운데 상호 신중 론을 제기하며 비판적 견해를 제시하기는 했지만, 서인정권과의 논쟁에는 공 동으로 참여하는 결집된 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퇴계학파 내부의 계파분화에 도 불구하고 영남사림들이 남인세력으로 결속하여 서인정권에 공동으로 대응 하며 公論政治의 정립에 참여할 수 있었던 배경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러 나 그들의 현실인식과 대응자세에 있어서의 시각차는 퇴계학파와 남인의 공 동이익을 보장할 경우 잠복된 형태로 남아 있을 수 있었지만, 정치 사회적 상황변화에 따라서는 그것이 표면화할 개연성은 항상 안고 있었다. 그 소산 이 바로 屛虎是非였고, 그 시비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 바로 廬江 (뒤에 虎溪 로 賜額) 書院이었다. 사실상 병호시비는 퇴계학파의 양대 계파인 병파와 호파의 여강서원 주도 권을 둘러싼 분쟁이었던 것이다. 곧 병파와 호파는 그들의 결속과 더불어 정 치 사회적 위상을 정립하기 위해 여강서원을 공동으로 활용하면서도 계파의 상대적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 역학관계를 조성하며 시비를 전개하기에 이르 렀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병호시비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여강서원이 갖는 성격과 의미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가 전제되어야 할 필요 가 있다고 하겠다. 여기서는 그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여강서원의 건립에서 훼철에 이르는 전말과 더불어 계파 간 역학관계의 변화양상을 조명해 보고자 2) 이상의 내용은 설석규, 퇴계학파의 분화와 병호시비(Ⅰ) 屛派 虎派의 세계관 형성 과 분화, 한국사상의 재조명, 한국국학진흥원, 2007 참조.

退溪學派의 分化와 屛虎是非(Ⅱ) 315 한다. 그리하여 여강서원이 퇴계학파뿐만 아니라 병파 호파의 위상에 차지 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그것의 역사적 의미를 어떻게 부여할 수 있는지를 찾아보고자 한다.3) 2. 書院의 建立과 系派分化 주지하는 바와 같이 豊基郡守 周世鵬에 의해 건립된 白雲洞書院은 한국 서원의 효시로서, 조선시대 사림들이 서원건립 운동을 전개하는 촉매제가 되 었다. 주세붕은 중종 37년(1542) 順興의 백운동 宿水寺터에 安珦의 奉祀를 위한 晦軒祠를 건립했다가, 이듬해 향촌 자제의 교육을 겸하기 위해 朱熹의 白鹿洞學規를 모범으로 하여 書院을 창설했다. 주세붕의 서원건립은 향촌을 무대로 정치 사회적 기반을 확대하던 사림 세력의 전반적인 요구를 반영하여 추진된 것은 아니었다.4) 그러한 사실은 그 가 서원을 건립한 목적이 先賢의 德을 숭상하며 학문을 돈독히 하려는데 있 을 뿐 사림의 여론을 의식한 것이 아니라5)는 점을 강조한 데서도 엿볼 수 있다. 곧 서원건립은 향촌출신 선현의 학문과 정신의 보급을 통한 敎化에 목 적을 두고 守令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고자 하는 데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 러나 향촌에서 先賢의 학문과 정신을 계승하는 형태의 교육은 이미 鄕校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사실상 교육시설의 중복을 피하기 어 려운 측면이 있기도 했다. 안향은 이미 고을마다 세워진 향교의 文廟에 從祀 3) 17세기 廬江書院을 중심으로 한 안동사림의 동향을 비롯해 퇴계학파를 중심으로 한 영 남학파의 분화와 갈등양상에 대해서는 金鶴洙, 廬江書院과 嶺南學統 17세기 초반의 廟享論議를 중심으로, 朝鮮時代의 社會와 思想, 조선사회연구회, 1998과 17세 기 嶺南學派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8이 참고가 된다. 4) 鄭萬祚, 朝鮮書院의 成立過程 韓國史論 8, 국사편찬위원회, 1980. 5) 竹溪志 序.

316 退溪學과 韓國文化 第45號 되어 있는데 무엇 때문에 사당을 세우고, 학교가 설립되어 있는데 무엇 때문 에 서원을 세우는가6)라며 사림 일각에서 의문을 제기한 사실이 그것을 말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세붕이 서원의 건립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뒤에 李滉 도 지적하듯이 일차적으로는 향교교육의 질적 수준 저하로 인한 향촌사림으 로부터의 외면이7) 큰 작용을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림 일각의 주장처럼 향교의 존재가치가 여전히 인정되는 점에 비추어, 이는 서원건립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의도가 반영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더욱 이 주세붕이 중앙에서 파견된 관료라는 점을 감안할 때 官學의 쇠퇴를 방치 하고 새로운 교육시설을 마련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따 라서 여기에는 향촌사림의 성장에 따른 지적 욕구와 그들의 수적 증가에 따 른 향교시설의 수용능력 부족 등이 고려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나아가 거 기에는 주세붕이 훈척정권에 대한 향촌사림의 반감을 감안해 서원을 앞세워 향촌출신 선현을 매개로 한 교육을 표방함으로써, 향촌민의 긍지와 결속을 도모하는 방법으로 통치의 효율성을 도모하려는 의도도 일정부분 포함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사정이 그러했다고 할지라도 서원의 건립은 결과적으로 향촌사림 들의 사고체계가 중앙 또는 관학 일변도로 지향하던 것에서 벗어나, 향촌 내 부의 독자적 학문체계를 구축하여 자치적 기반을 강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마 련하게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 하겠다. 더구나 서원이 제향대상을 중국인 이 포함된 향교와는 달리 한국의 선현을 선택한 데다 학문적으로 연고가 있 는 향촌출신 인물을 선정한 점은, 앞으로 그것이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탈 6) 위와 같음 公旣從祀國學 達于州縣 何必立廟 旣有學校 何必別立書院 7) 退溪集 권9, 書 上沈方伯通源 若夫郡縣之學 則徒設文具 敎方大壞 士反以遊於鄕校爲 恥 其刓敝之極 可謂寒心

退溪學派의 分化와 屛虎是非(Ⅱ) 317 피함과 동시에 향촌사림의 학문적 독자성을 보장한 가운데 다양한 학문체계 의 수립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음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황이 주세붕에 이어 서원건립 운동에 적극 나서게 되는 것도 그러한 배경 과 맥이 닿아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명종 3년(1548) 10월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은 백운동서원이 향촌사림 에 끼치는 파급효과를 확인하고 서원의 국가적 공인을 통한 정당성을 확보하 기 위해 賜額을 추진했다. 그는 왕실의 외척이자 경상감사인 沈通源에게 중국 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서원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사액을 청원해 줄 것을 요 청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에 의해 領議政 李芑 등 대신들의 건의를 거쳐8) 조 정에서 紹修書院 의 扁額과 四書 五經 性理大全 등의 書冊을 내려 줌으 로써, 향촌에 향교와는 별도의 교육기관으로서 서원이 본격적으로 건립될 수 있는 명분이 확보되기에 이르렀다.9) 이같이 이황이 백운동서원의 사액을 매개로 한 서원의 건립에 적극적이었 던 것은, 명종대 尹元衡을 정점으로 한 훈척정권의 파행적 국가운영과 그에 따른 사회 경제적 피폐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도덕과 명분을 중시하는 도학 적 풍조의 보급이 시급한 과제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뒤에 李玄逸이 그의 書院에 대한 견해를 인용하고 있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이황은 서원을 건립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 적이 있습니 다. 國學과 鄕校는 科擧와 法令의 구애를 받기 때문에 書院이 尊賢 講道의 아름 다운 뜻을 오로지 할 수 있는 것과 같을 수 없다. 혹 사사로이 설립했어도 나라 의 은총을 입기도 하고 혹은 나라의 명으로 세워 사람을 선택해 가르치기도 했던 것이다. 서원의 설립은 단지 덕을 높이고 현인을 숭상하기 위해 제사로 보답하고 밝히는 목적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바라는 것은 높은 뜻을 갖고 고상한 일을 8) 明宗實錄 권10, 5년 2월 丙午. 9) 소수서원의 사액경위와 그 의미에 대하여는 鄭萬祚, 朝鮮書院의 成立過程, 韓國史論 8, 국사편찬위원회, 1980 참조.

318 退溪學과 韓國文化 第45號 하는 선비들이 이곳에서 쉬고 이곳에서 공부하고 이곳에서 명분 있는 행동을 갈 고 닦으며 서로 道義를 얘기하면서 임금께서 장려하여 발탁하기를 기다리며 기량 을 키우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이 風敎와 관련 있는 일이니 어찌 중요하지 않다 고 하겠는가. 10) 이황의 書院論이 科擧를 목표로 한 治人보다 爲己를 지향하는 講明道學 과, 모범이 될 만한 先賢을 앞세워 그것을 실감하게 하는 尊崇道學 으로 압축 되는11)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 점은 그가 竹溪書院 등 전국에 건립 되고 있던 서원을 다니며 읊은 書院十詠 과12) 각종 記文 등에서도 확인되는 바이지만, 특히 그의 연고지인 禮安에 易東書院을 건립하는 과정에서도 극명 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역동서원은 安珦의 문인이자 성균관 祭酒를 역임한 禹倬을 제향한 서원으 로, 趙穆 金富弼 琴蘭秀 琴應夾 등의 주도로 李滉의 자문을 얻고 縣監 郭 趪의 지원을 받아 선조 즉위년(1567)에 건립되었다.13) 이황은 우탁에 대해 忠義大節은 하늘을 움직였고 經學에 밝았으며 進 退가 정당해 後學의 師範 이 되기 때문에 서원에 제향하기에 충분하다14)고 평가했다. 그는 서원의 명 칭을 비롯해 건물의 堂號를 직접 지을 정도로15) 이 서원에 애착을 보였는데, 선조 3년(1570) 우탁의 위패를 봉안할 때에는 제자들을 모아 놓고 心經 을 강론하기도 했다.16) 특히 그는 김부필이 여기에 程顥와 朱熹의 위패도 함께 葛庵集 別集권2, 疏 廬江書院請額及鶴峰金先生請諡疏. 鄭萬祚, 退溪 李滉의 書院論, 韓㳓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 1981. 退溪集 권4, 詩 書院十詠. 禹倬과 역동서원에 대하여는 安東大 安東文化硏究所編, 禹倬先生의 思想과 易東書院 의 歷史, 1992 참조. 14) 退溪集 권42, 記 易東書院記 先生之忠義大節 旣足以動天地撼山岳 而經學之明 進退 之正 有大過人者 則爲後學師範 可以廟食百世者 非先生而誰哉 15) 月川集 권5, 雜著 易東書院事實. 16) 月川集 年譜, 萬曆 四年 七月 陪退溪先生 與諸生會易東書院 講心經 10) 11) 12) 13)

退溪學派의 分化와 屛虎是非(Ⅱ) 319 봉안할 것을 제안하자, 두 선생이 모두 易學에 크게 공이 있는 분들이기는 하지만, 이미 이름을 易 이 동쪽으로 왔다 고 하여 易東이라 했다. 따라서 廟를 세워 尊祀함에 禹祭酒를 배향하는 것도 진실로 번성한 일이다. 더구나 院中의 일이 너무 초라하고 서원 소유의 전답도 없는 데다 典僕도 적은 형편이다. 그런데도 갑자기 이런 중요한 일을 시작했다가 뒤에 소홀하게 되면, 높이려고 하다가 도리어 낮추는 결과를 초 래할 것이니 우좨주 한 분만을 享祀하는 것이 좋겠다.17) 라며 우회적으로 반대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도학적 삶의 방식이 실감될 수 있기 위해서는 중국의 賢哲보다는 한국의 先賢을 모범으로 하는 것이 훨 씬 효율적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이후 제향자의 선정을 통한 서원운영 의 방향설정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역동서원은 그가 사 망한 뒤에도 한동안 조목 등 예안사림들이 이곳에 모여 퇴계집 의 편찬을 위한 遺稿의 수집과 정리를 진행할18) 정도로 이 지방 사림의 公論形成의 중 심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선조 7년(1574) 이황을 제향한 예안의 陶山書院과 안동의 廬江書 院이 각각 건립되면서 퇴계학의 학문적 계승과 학파의 공론형성 중심은 역동 서원에서 이들 서원으로 옮겨지게 되었다.19) 도산서원은 이황이 관직을 버리 17) 退溪言行錄 권4, 遺編 論禮. 18) 謙菴集 권2, 書 與李逢原安道(辛未) 仄聽諸公修寫先生遺稿 期以今月二十二日 所當 趨赴不暇 而母病未快未遂 下誠恨缺不可言 遺文謹收拾 若干謄寫 進呈易東諸公會席 從當 轉達廬下矣 19) 이는 이미 이들 서원이 건립되는 과정에서 예견되었던 바로서, 특히 도산서원이 건립 될 당시 김성일은 조목에게 편지로 예안에 두 개의 서원이 존립할 경우 먼저 건립된 역동서원은 필연적으로 쇠퇴할 것이라 단언하며 이는 선생도 평소 우려했던 바라고 신 중한 입장을 제시하기도 했다( 鶴峯全集 續集 권4, 書 與趙穆書). 이러한 점으로 보 건대 당시 예안사림이 부작용이 우려됨에도 불구하고 굳이 도산서원을 별도로 건립을 추진한 것은 이황과의 연고 외에도 그들 스스로 퇴계학 및 학파의 중심으로서의 위상 을 확고하게 구축하기 위한 의도가 강하게 작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20 退溪學과 韓國文化 第45號 고 향촌에 은거하며 학문에 정진할 목적으로 명종 15년(1560) 건립한 陶山 書堂 자리에 원형을 유지한 가운데 설립되었다. 이곳은 원래 陶工들이 터를 잡고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이황이 서당의 명칭을 도산 이라 했는데, 이 서 당은 龍水寺 승려인 法蓮이 착공하고 뒤에 淨一이 준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 다.20) 도산서원은 선조 3년(1570) 이황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 조목 등 예안사 림들이 주축이 되어 서당의 위쪽에 건립을 추진했다. 도산서원의 주된 기능 은 여타 서원과 마찬가지로 祭祀와 더불어 경전을 강론하는 講學과 자율적인 내면적 수신을 지향하는 藏修였다. 이에 따라 도산서원은 이황이 강학과 장 수를 위해 설립한 도산서당의 기능을 흡수함과 동시에 그의 위패를 尙德祠에 봉안하게 되면서 매년 2월과 8월 中丁日에 춘추 享祀를 거행함으로써 제사와 강학 및 장수기능을 겸비한 서원으로서의 명실상부한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거기다 선조 8년(1575) 조정으로부터 陶山書院 편액을 받은 것을 계기로 書 冊과 田畓 奴婢 등을 지원받음으로써 경제적 토대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예안현의 도산서원과 거의 동시에 안동부에 廬江書院의 건립이 추 진되었다. 선조 6년(1573) 정월 易東書院에서 退溪集 을 교정하던 사림들 이 도산서원과 별도로 이황의 위패를 봉안하는 서원을 건립할 것을 결의한21) 것이 촉매제가 되었다. 그들은 金彦璣를 院長으로 추대했고, 그의 주도로 공 사가 진행되었다. 당시 서원건립의 사정에 대해 廬江志 는 다음과 같이 전 하고 있다. 살피건대 廬江은 안동부 동쪽 30리 廬阜山 五老峯 밑에 있다. 洛江이 그 앞 을 지나고 香罏의 폭포가 그 옆에 걸쳐져 있으니 곧 白蓮寺 舊址다. 西厓 鶴峯 등 모든 선생들이 先師께서 어릴 적 이곳에서 독서했던 곳이라며 서원 건립을 창 20) 陶山書堂 建立顚末에 대하여는 惺齋集 (琴蘭秀) 권3, 記, 陶山書堂營建記事 참조. 21) 松巖集 別集, 年譜 宣祖 六年 正月 往易東書院 校李先生文集 仍論廬江書院營建事

退溪學派의 分化와 屛虎是非(Ⅱ) 321 의했다. 金惟一齋 彦璣를 추대하여 洞主로 삼고 上舍 秀才 등 10명이 공사를 담 당했다. 완공되자 祠를 尊道라 했고, 堂을 崇敎라 했으며, 樓를 養浩라 했다(院樓 의 扁額이 養浩 인 것은 星州 迎鳳書院의 것이 처음이지만 老先生의 命이 있었기 때문에 鄭逑가 그 뜻에 따라 이 樓에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22) 이같이 퇴계학파가 이황의 위패를 봉안한 복수의 서원건립을 추진하게 된 명분은 주희를 제향한 서원이 武夷 考亭 晦菴 建安 雲谷 獨峯書院 등 20여 곳에 이르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들이 도산 및 여강서원의 건립 공사가 진행되던 선조 6년(1573) 11월 사당이 없이 강학기능만 하던 榮川 의 伊山書院에 이황의 위패를 봉안한23) 것도 그 같은 맥락에 따른 것이었다. 그 결과 선조 9년(1576) 2월 13일 도산서원의 尙德祠와 여강서원의 尊道祠 에 이황의 位版을 동시에 봉안하고 釋菜禮를 행하게 되었다. 도산서원과 여강서원은 禮安縣과 安東府라는 지역적 차이는 있다고 하더 라도 퇴계학파의 공론에 의해 건립되었기 때문에 학파 내부의 分化가 반영된 것은 아니었다. 도산서원의 건립에 柳成龍 金誠一 등 안동사림들이 적극 개 입했을 뿐만 아니라, 여강서원은 예안사림인 김언기가 원장으로서 건립을 주 도하며 도산서원의 院規를 참고하여 規約을 정하는24) 성의를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여강서원이 건립된 뒤 趙穆은 동문들과 心經 學篰通辨 등 을 강론했을 뿐만 아니라,25) 이황의 位版을 봉안할 때 常享祝文을 지어 올리 기도 했다. 그는 여기서 孔 孟이 전한 心法과 程 朱가 전한 道學을 이황이 22) 廬江志 권1, 原志 立院事實. 여기서는 여강서원이 백련사의 옛터에 건립된 것으로 되어 있으나 당시 백련사는 존재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그들은 강제로 불상을 물에 던져버린 다음 백련사를 허물어 승려들도 쫓아내고 서원을 건립했다( 惟 一齋實記 권2, 附錄 行狀 先生爲洞主 撤白蓮寺 毁其佛像 投之江 僧徒初欲拒不受 旣聞先生與鶴 峰金先生來 皆惶散云 ). 23) 退溪年譜 권2, 萬曆 元年 癸酉 11月朔. 24) 惟一齋實紀 권2, 附錄 行狀 先生與同門諸先生 講求矩矱 累至陶山 與本院參正規約 25) 艮齋集 권7, 雜著 陳淸瀾學蔀通辨心圖說辨.

322 退溪學과 韓國文化 第45號 집대성했음26)을 강조하며 여강서원이 갖는 학문적 위상에 적지 않은 기대를 표시하기도 했다. 따라서 도산서원과 여강서원은 이산서원 등과 더불어 건립 초기에는 퇴계학의 학문적 동질성을 바탕으로 학파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 역 할분담을 통한 공존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표면화하지 않았지만 김언기가 安東府使 權 文海에게 여강서원 건립 및 운영의 지원을 청원하는 과정에서 퇴계학파 내부 의 분화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는 이 呈文에서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향교가 덕을 품은 선비들이 학문을 연마할 수 있는 환 경으로는 적절하지 않다는 점에 근거하여 서원건립의 불가피성을 제기함과 동시에, 서원의 지속적인 운영을 보장하기 위해 조정으로부터 扁額뿐만 아니 라 書冊 및 田土 奴婢를 지원받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청원했던 것이 다.27) 그러면서 그는 家塾 黨庠의 제도는 옛날부터 있었습니다. 지금 閭里 사이에 왕왕 學舍를 설립하는 것도 그 遺意가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府의 땅인 豊山縣의 豊嶽書院도 그 하나입니다. 그것은 동리 사람들이 세운 바의 것이지 一府人이 함께 藏修하는 26) 廬江志 권1, 原志 立院事實 常享祝文 心傳孔孟 道紹閩洛 集成大東 斯文準極 27) 廬江志 권1, 原志 立院事實 上府伯權草澗(文海)書. 廬江書院 賜額을 위해 안동부사 의 지원을 요청한 上府伯草澗書 와 동일한 내용의 편지는 金彦璣의 惟一齋實紀 뿐 만 아니라, 金璡의 5子이자 金誠一의 동생인 金復一의 遺文을 모은 南嶽逸稿 에도 廬江書院呈文 의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에 따라 누가 이 呈文을 썼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으나, 사림의 공론을 반영한 疏文이나 呈文이 공공성을 갖는 점을 감안할 때 그것은 의미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는 김언기와 김복일이 여강서원의 건 립에 대표성을 가질 정도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 는 것이다. 참고로 학봉계의 입장을 반영한 廬江顚末 에는 김복일이 製文한 것이라 주장하면서 김언기의 후손들이 이의를 제기해 논쟁이 벌어짐으로써 서로 결별하기에 이르렀다( 廬江顚末 仁, 萬曆 4年 丙子)고 전하고 있다. 이를 통해 김복일이 呈文을 起草했고, 원장인 김언기가 그것을 보완함과 동시에 追伸을 추가해 府使에게 올린 것 으로 추측해 볼 수 있겠다.

退溪學派의 分化와 屛虎是非(Ⅱ) 323 곳은 아닌데 당초 서원이라 칭하며 조정에 아뢰어 彌屹의 寺位田을 받기에 이른 것은 지나칩니다. 지금 (여강서원은) 一府의 사람들이 건립에 동의하여 尊賢 講 道의 장소로 삼았으니 그 規劃과 處置가 어찌 일개 小縣의 村閭에서 사사로이 건 립된 것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풍악서원이) 받은 田土를 廬江에 移屬하는 것 이 마땅합니다. 대개 一府에 두 개의 서원이 있을 경우 모두 그 勢를 온전히 扶 護할 수 없기 때문에 부득불 합해야 합니다.28) 라며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는 대안 가운데 하나로 豊嶽書堂에 지급한 位田을 여강서원의 財源으로 돌리는 방안을 제시했다. 풍악서당은 당시의 관행으로는 드물게 成宗代 조정으로부터 노비와 토지를 지급받았을29) 뿐만 아니라, 明宗 代에도 서책과 더불어 토지를 지원받기도 했다.30) 따라서 풍악서당이 병산서 원의 전신으로 당시 西厓系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점을 감안하면 그의 이 呈文은 그들을 자극할 수 있는 것이었다. 뒤에 김언기의 제자인 南致利를 追享해 계파의 지분을 확보하려던 惟一齋系의 집요한 시도가 번번이 무산되 는 것도 그러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고 하겠다. 물론 권문해는 여강서원의 건립을 적극 지원하기는 했지만,31) 그 같은 요구는 수용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산서원이 1574년(선조 7), 도산 서원이 1575년(선조 8) 각각 국가적 공인과 경제적 지원을 보장하는 賜額을 받은 것과는 달리 여강서원이 편액을 하사받지 못한 사실이 그것을 뒷받침한 28) 惟一齋實紀 권1, 書 上府伯權草澗(文海). 이 내용은 편지의 말미에 追伸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惟一齋實紀 와 龍山世稿 에는 그 내용이 수록되어 있지만, 廬江 志 와 南嶽逸稿 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29) 承政院日記 252책, 숙종 2년 3월 11일 蓋我成廟朝 賜奴婢土田於楓岳書堂 明廟之 於紹修書院 宣廟之於川谷吳山書院 亦皆有特賜之擧 30) 慶尙道邑誌 安東府, 學校 屛山書院 舊有豊岳書院 在豊山縣內 明廟朝賜學田書冊 後 移建于此 31) 草澗集 附錄, 通政大夫行承政院左副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草澗先生權公行狀 明年 除安東府使 爲政廉平 尤以斅學爲先 本府虎溪書院 創於其時 公爲之盡心經紀 助其 凡役 事旣 又與一時諸公 作歌詩以相風勵

324 退溪學과 韓國文化 第45號 다. 이에 따라 서원의 운영도 사실상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그렇지만 이 서원에 대한 官衙의 지원이 지속적으로 마련되고 있었다. 金宇顒과 鄭逑가 안동부사로 재직하던 1589년(선조 22)과 1607년(선조 40)에 각각 안동부 소속 官婢 1口씩을 서원에 移屬시킨32) 것이 대표적 사례에 해당한다. 이같이 여강서원은 운영을 위한 문제를 별다른 갈등 없이 해결함으로써 안동부의 대표적인 퇴계학파의 학문 및 공론형성 중심으로서의 위상을 확보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서원운영의 주도를 위한 학파 내부의 보이지 않 는 긴장관계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1605년(선조 38) 7월 일어난 대홍 수로 인해 유실된 서원을 복원하는 과정에서도 그러한 양상을 찾을 수 있다. 당시 강원도와 경상도 지역에 집중적으로 쏟아진 폭우는 개벽 이래 처음이라 할 정도로 적지 않은 피해를 끼쳤다. 안동부도 예외가 아니어서 성내 외 백 성들의 가옥이 적지 않게 떠내려가고 官舍 客舍뿐만 아니라 映湖樓도 흔적 없이 사라지는 수재를 당했다.33) 여강서원도 樓閣과 齋室이 무너져 흙에 덮 여버렸고, 位版만 사림들의 노력으로 구해낼 수 있었다.34) 그 뒤 사림들 사이에서 여강서원 重建을 위한 논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원래의 장소는 다시 수해를 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豊山으로 옮겨 건립하자는 주장이 대두했다. 이 같은 논의에 유성룡의 개입여부는 확 인되지 않지만, 여기에는 그를 중심으로 한 서애계의 의도가 상당 부분 작용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유성룡은 자신이 거주하던 河隈도 수해를 당함 에 따라 鶴駕山 자락 西美洞에 弄丸齋를 지어 요양과 더불어 집필활동을 하 고 있었다.35) 이러한 점에 비추어 서애계의 여강서원 移建논의는 그의 후원 32) 承政院日記 252책, 숙종 2년 3월 11일 且本府之虎溪書院 乃先正臣文純公李滉妥靈 之地也 創建之後 典守無人 久爲遠近縫掖之所傷嗟矣 逮萬曆己丑 故儒臣金宇顒 來莅本府 以官婢蘭香 移屬本院 其後丁未歲 先正臣文穆公鄭逑爲府使 以官婢末介 永屬使喚焉 33) 宣祖實錄 권189, 38년 7월 乙未. 34) 廬江志 권1, 原志 重建事實.

退溪學派의 分化와 屛虎是非(Ⅱ) 325 을 발판으로 서원운영의 주도적 역할을 기대한 데 따른 것으로 추측할 수 있 겠다. 그러나 다수 사림의 동의에도 불구하고 權春蘭이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섰 다. 그는 스승의 자취가 남아있는 장소에 서원이 건립되는 것이 마땅한 법이 라 주장하면서 만약 장소를 옮겨 건립할 경우 서원은 망하고 말 것이라 극언 하기도 했다. 이에 앞서 그는 농환재를 방문해 유성룡 정경세와 함께 墨談 을 하며 경전을 辨釋하는 등 교유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서원의 풍산 移建을 반대한 것은 그가 김언기가 서당을 세워 제자를 양성 하던 佳野와 인근한 佳邱 출신일 뿐만 아니라 수해 당시 위패의 移安방법에 대해 깊숙이 관여한36) 점 등을 감안할 때 유일재계와 일정한 교감이 있었다 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사림들은 원래의 장소에 벗어나지 않되 수해의 위험이 없는 인근의 就山에 옮겨 중건하기로 다시 합의하게 되었다.37) 그리 하여 여강서원은 수해를 당한 이듬해 과거의 모습 그대로 복원되었고, 다음 해인 선조 40년(1607) 겨울 이황의 위판을 還奉하게 되었던 것이다.38) 요컨대 여강서원은 중국의 유학을 금과옥조로 수용하던 종전의 관행에서 벗어나 우리나라 선현의 학문과 정신의 계승을 통한 독자적인 道學的 학풍을 수립하려는 이황의 서원교육관을 적극 반영하여 설립되었다. 퇴계학파는 이 를 매개로 이황의 학문 정신을 정립함과 동시에 안동지역 사림의 결속을 도 모했을 뿐만 아니라 예안의 도산서원, 榮川(榮州)의 이산서원과의 긴밀한 유 대를 통해 학파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 활용했다. 이러한 그들의 노력은 당시 35) 西厓集 年譜, 萬曆 33년 9월 및 34년 3월. 36) 晦谷集 권1, 書 與某人書. 37) 晦谷集 附錄, 家狀 乙巳七月大水 廬江書院爲水所漂沒 位版僅以奉護 將謀重建 畏水 患 皆欲移建于豊山 公曰 廬江 古之白蓮社也 必建祠宇於此者 蓋推先生遺躅而設也 今若 移搆 則是廬江書院亡也 不可移他 爲書諭之于士林 士林深然之 遂答書曰 不有斯文之長 事之不是處多矣 仍重建于廬江 而移就山足爲基 蓋慮更有水患也 38) 廬江志 권1, 原志 重建事實.

326 退溪學과 韓國文化 第45號 추진되던 이황을 포함한 東方五賢의 문묘종사 운동을 위한 공론을 결집하는 데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황이 세상을 떠난 이후 대두한 퇴계학파의 분화조짐은 여기에도 반영되어 내부적인 혼선이 빚 어지고 있기도 했다. 그러한 현상은 주로 서애계와 유일재계 사이에서 벌어 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뒤에 廟宇에서의 配享과 追享을 둘러싼 학파 내부의 갈등이 확산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3. 配 追享 論議와 賜額 1) 柳成龍 金誠一 배향논의 서원의 향사를 매개로 한 퇴계학파의 본격적인 분화는 광해군 6년(1614) 예안사림들이 도산서원에 大北政權의 지원을 받아 趙穆을 從享하면서 시작되 었다.39) 조목은 15세의 어린 나이로 李滉을 찾아가 배운 이래 40여 년 동 안 학문을 전수받으며 퇴계학의 심화에 기여했다. 그러나 그는 퇴계학의 확 산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던 柳成龍과는 동문임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불 편한 관계에 있었다. 이러한 그들의 관계는 선조 40년(1607) 유성룡이 세상 을 떠났을 당시 史官이 卒記에서 유성룡은 조목 김성일과 함께 退溪의 문하에서 배웠다. 김성일은 剛毅篤實 하여 풍모가 엄숙하고 단정하였으며, 너무 곧아서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였다. 大 節이 드높다는 점에 사람들의 이의가 없었는데, 癸巳年(1593, 선조 26) 나라 일 에 진력하다가 軍中에서 사망했다. 조목은 종신토록 은거하면서 학문에 독실하고 自修하였으나, 나라에 어려운 일이 많게 되자 慷慨해 마지않았는데 지난해 세상 39) 趙穆의 陶山書院 配享顚末에 대하여는 李尙賢, 月川 趙穆의 陶山書院 從享論議 17 세기 초 嶺南士族 動向의 一端, 국민대 석사학위논문, 1998 참조.

退溪學派의 分化와 屛虎是非(Ⅱ) 327 을 떠났다. 조목은 일찍이 김성일을 낫게 생각하고 유성룡을 못하게 여겼는데, 만년에는 유성룡이 하는 일에 매우 분개하여 절교하는 편지를 쓰기까지 했다. 퇴 계 문하에서는 이 세 사람을 領袖로 삼는다.40) 라 전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들이 김성일과 함께 퇴계학파의 영수로 지목받으면서도 서로 불편한 관 계에 있게 된 것은 이황의 세계관을 공통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조목이 心學의 천착을 통해 도덕과 명분을 우선하는 원칙에 근거한 현실대응 자세를 확립한 것과는 달리, 유성룡은 心의 활용에 비중을 둔 思學을 중시하며 실용에 입각 한 삶의 철학을 확립한 것에서부터 비롯되고 있었다.41) 이러한 그들의 차별 적 경향은 處士的 삶을 지향한 조목과, 주로 중앙무대에서 관료로 활동한 유 성룡의 현실적 상황이 반영된 것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이것이 결과적으로 그들의 대립뿐만 아니라 예안 및 안동사림의 분화를 촉진하는 요인이 되었다. 조목은 退溪集 의 편찬과정에서도 유성룡과 여러 차례 갈등을 빚은 적이 있었으며, 임진왜란 당시에는 그에게 편지로 평생 동안 聖賢의 글을 읽으면 서 얻은 것이 講和로 나라를 誤導하는 것인가42)고 비난하기도 했다. 이는 당 시 主和誤國 을 내세우며 유성룡의 탄핵을 주도하던 북인(대북)세력의 주장에 동조하는 셈이 되어 유성룡이 실각하는 빌미를 제공한 것이기도 했다. 실제 조목은 정인홍이 일으킨 晦退辯斥 事件이 일어났을 때 慶尙左道 유 생들의 上疏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나설43) 정도로 대북세력과는 우호적 관 40) 宣祖實錄 권211, 40년 5월 乙亥. 41) 설석규, 퇴계학파의 분화와 병호시비(Ⅰ) 屛派 虎派의 세계관 형성과 분화, 한 국사상의 재조명, 한국국학진흥원, 2007. 42) 月川集 附錄, 嘉善大夫工曺參判月川趙先生神道碑銘 西厓在領臺主和議 乃抵書曰 相 國平生 讀聖賢書 所得只此講和誤國四字耶 43) 孤臺日錄 권4, 乙巳(1605) 12월 8일 聞江左儒生上疏 欲攻來庵先生 趙月川固禁中 止 又館中掛退溪先生行事差誤處于殿廡下云 可怪

328 退溪學과 韓國文化 第45號 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그는 李德弘의 아들 李茳의 주 도에 의해 大北政權의 지원을 받아 陶山書院에 從享되기에 이르렀던 것이 다.44) 이강은 그 공로가 인정되어 이듬해 시행된 式年試에서 甲科로 합격했 는데, 史官은 그 배경에 정권과 유착관계가 작용하고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 다.45) 이같이 대북정권이 조목의 종향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도산서원을 무대 로 그들의 세력기반을 구축하여 討逆論의 공론를 확산하려는 정치적 의도 때 문이었다. 이에 따라 도산서원은 예안사림이 중심이 된 月川系가 주도하게 되었지만, 인조반정 뒤 서인정권의 정치보복의 대상으로서 집중적인 견제를 받는 것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조목의 도산서원 從享은 안동사림의 불만을 야기하여 여강서원에 유성룡 과 김성일의 배향을 추진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김성일의 위패는 이미 1607 년(선조 40) 臨川里社에 봉안되어 있었다. 그것은 臨河縣 사림의 주도로 현 의 서쪽에 건립되어 있었으며, 1618년(광해군 10) 書院으로 승격했다. 또한 유성룡의 위패는 풍악서당이 河隈의 상류로 옮겨 명칭을 바꾼 屛山書院에 건 립된 尊德祠에 조목이 도산서원에 종향되던 해인 1614년(광해군 6) 안치되 었다.46) 이같이 김성일과 유성룡이 각각 임천서원과 병산서원에 제향된 사실은 월 천계 유일재계와는 별도로 학봉계와 서애계가 독자적 위상을 확보한 것을 선언하는 의미를 갖는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조목의 도산서원 종향은 당시 로서는 그들에게 심각한 문제로 대두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학 봉 및 서애계가 유일재계 한강계 등과 연대하여 월천계뿐만 아니라 대북세 44) 光海君日記 권84, 6년 11월 癸酉 趙穆 滉之高弟也 常以柳成龍和議爲非 又與李山海 舊交相善 故嶺南人盛言穆與成龍有隙 而非其實矣 至是 禮安人李茳等 唱言穆乃仁弘同志 從祀滉祠 故臺諫有此啓 自此安東禮安之間 多附會仁弘 得科弟爲名官者 識者爲穆恥之 45) 光海君日記 권89, 7년 4월 乙未. 46) 廬江志 권1, 原志 追祔事實.

退溪學派의 分化와 屛虎是非(Ⅱ) 329 력과의 차별을 분명하게 하는 유리한 장치가 될 수 있었다. 또한 그것은 여 강서원에 김성일과 유성룡을 배향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는 것이기도 했다. 만약 그들이 조목의 도산서원 종향에 민감하게 대응하면서 김성일 유성룡의 여강서원 배향을 추진할 경우 대북세력이 廢母論을 앞세워 배타적 전권체제 를 강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칫 정치적 오해를 유발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여강서원의 건립과 운영을 주도하면서도 계파의 실질적인 위상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던 유일재계를 비롯한 여타 사림들의 동의를 얻어 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기도 했다. 유성룡과 김성일의 여강서원 배향을 위한 논의는 광해군 11년(1619) 비 로소 제기되었다. 그 같은 논의를 공식적으로 제기한 것은 당시 院長이던 金 奉祖였다. 그는 유성룡도 평소 서원난립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을47) 뿐만 아 니라, 안동의 한 府에 여강 임천 병산의 3개소의 서원이 난립하는 것은 적 절하지 않다48)는 이유를 들어 두 사람의 배향의 불가피성을 내세웠다. 물론 여기에는 여강서원과 별개로 임천서원과 병산서원이 운영되는 것은 김성일과 유성룡이 이황과 대등한 위상을 갖는다는 오해를 야기함과 동시에 안동지역 퇴계학파의 결속에도 저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인식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 서애계와 학봉계가 공동으로 여강서원을 배타 적으로 주도하겠다는 의도와 맞물려 있기도 했다. 김성일 유성룡의 여강서원 배향을 위한 김봉조의 시도는 물론 사림 일각 의 견해를 반영한 것으로 독단적인 판단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 사실이 알려지자 반대여론도 만만하지 않았는데, 金允安 金允思 형제가 앞 47) 鶴湖集 권3, 書 答屛山洞主申立夫(之信) 當初吾意必主合享者 平日慣聞先生以本府書 院之多爲憂 故不欲以先生之事 反傷先生之志 48) 鶴湖集 권4, 附錄 行略 安東舊有廬江書院 廟享退溪李先生 後來又爲西厓鶴峯兩先生 立廟于屛山臨川等地 遠近諸先生咸以爲一府三院 事理未妥 且兩先生旣摳衣於溪門 宜合享 廬江

330 退溪學과 韓國文化 第45號 장서 반대를 주도하고 나섰다. 그들의 주장의 근거는 유성룡의 위패를 여강 서원으로 옮길 경우 병산서원의 廟宇가 비워지게 되어 자연 훼철의 운명을 맞을 수밖에 없다49)는 데 있었다. 이에 난감해진 김봉조가 鄭經世에게 그 전 말을 설명하며 동의를 얻어내고 정경세가 다시 김윤안 등을 설득하며 반대여 론을 잠재우는50) 과정을 거쳐 이듬해 광해군 12년(1620) 11월 배향이 이 루어지게 되었다.51) 그런데 이 과정에서 몇 가지 주목되는 점이 나타나고 있었다. 우선 병산 서원과 같은 처지에 있던 임천서원에서는 위패를 옮기는 문제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병산서원 원장이던 申之信이 신중한 태 도를 보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임천서원 원장 鄭佺은 김봉조와 함께 배향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나선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52) 다음으로 김성일과 유 성룡의 여강서원 배향이 제기되었을 때 金守一의 아들이자 김성일의 조카인 金涌이 金彦璣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李滉에게서 배운 南致利를 함께 배향하자 며 제안하고 나선 사실이다. 학봉계로 분류될 수 있는 그가 惟一齋系의 대표 적 인물이었던 남치리의 배향을 제기한 배경에는 申之信을 비롯해53) 金允 安 金允思 형제 등과의 교감이 작용하고 있었지만, 이는 그가 사망함으로써 49) 東籬集 年譜, 泰昌元年 11月 屛山撤廟移奉廬江遣子基厚往參(初先生聞西厓鶴峰從祀 廬江之議起 先生與松陰公 以屛祠毁撤 有持重之意 ) 50) 愚伏集 권11, 書 與金而得而靜. 51) 鶴湖集 年譜, 泰昌元年 11월 配享西厓鶴峯兩先生于廬江書院(東籬金公兄弟投單廬江 以先生首發合享之論 多有未安之語 愚伏移書東籬 曉以所重有在 不得不已之意 士論始得 歸一 至是移奉位版) 52) 溪巖日錄, 庚申(1620) 10月 10日 八月旬間 孝一孝仲輩 會議于安東鄕校 勒令移之 刻日以定 而配享之說 已潛盛於其中矣 主張者 金孝一昆弟鄭壽甫金子瞻 而外挾鄭江陵金 驪州爲籍 然猶未敢顯播於人 53) 당시 병산서원 원장인 申之信은 일찍이 金彦璣가 세운 佳野書堂에서 배운 적이 있다. 이에 따라 그의 이름은 김언기의 제자 189명의 명단에도 포함되어 있는데( 惟一齋實 記 권2, 附錄 門人錄), 이는 그가 惟一齋系를 실질적으로 주도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짐작하도록 하는 것이다.

退溪學派의 分化와 屛虎是非(Ⅱ) 331 무산되었다. 그렇지만 유성룡 김성일의 배향이 결정된 뒤 김윤안 김윤사 형제가 다시 그것을 제기하고,54) 이후에도 지속적인 논의가 전개될 정도로 이 문제는 퇴계학파의 가장 큰 현안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같이 임천서원이 병산서원과 달리 김성일 유성룡의 배향에 적극적이었 던 점, 학봉계의 김용이 남치리의 배향을 제기한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학 봉계는 당시 계파의 역학관계에 있어 서애계와 비교해 상당히 열세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실제 김성일은 중앙과 향촌을 왕래하면 서 활발한 활동을 통해 퇴계학파의 핵심적인 역할의 한 축을 담당하기는 했 지만, 그가 선조 26년(1593) 임진왜란의 와중에 세상을 떠난 이후 계파형성 을 위한 토대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안동지역의 퇴 계학파는 주로 유성룡을 중심으로 한 서애계로 수렴되고, 유일재계가 여강서 원을 무대로 일정한 기반을 확보하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비록 학봉계가 臨川里社에 김성일의 위패봉안으로 결속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기는 했지만, 서애계의 鄭經世, 유일재계의 金得硏과 같이 계파의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 는 인물을 배출하지 못함으로써 취약한 단면을 드러내기는 마찬가지였던 것 이다. 鄭佺이 임천서원의 廟宇가 비게 되는 부담을 감수하고라도 김성일의 위패 를 여강서원으로 옮기는데 동조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해볼 수 있다. 곧 이황이 제향된 여강서원에의 김성일 배향은 퇴계학파의 한 축으로서 학봉 계의 위상을 강화하는 발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월천계가 조목의 도 산서원 종향을 통해 입지를 확보한 것에서도 충분히 검증된 것이었다. 그러 나 이에 앞서 해결해야할 과제는 우월한 입지를 확보하고 있는 서애계의 동 54) 東籬集 年譜, 泰昌 元年(1620) 11月 與松陰公發南賁趾先生祔享廬江之議(先是 雲川 金公涌 聞西厓鶴峰合祔江院之議 曰 南賁趾以溪門高弟 宜在從祀之列 不可不幷議也 不幸 是年 雲川卒逝 未及遂意 至是 先生更申此議)

332 退溪學과 韓國文化 第45號 의와 더불어 여강서원을 선점하고 있는 유일재계와 타협을 이루는 일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김성일뿐만 아니라 유성룡의 여강서원 배향이 함께 추진되고, 거기에 김용이 남치리의 배향을 제기한 사실은 전혀 우연이라 할 수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여강서원을 무대로 입지를 구축함과 동시에 서애계 유일재계와 대등한 위상을 확보하려는 학봉계의 시도에 대해 서애계의 반발도 만만하지 가 않았다. 물론 김윤안이 주도한 그들의 반발은 廟宇의 공백에 따른 병산서 원의 폐허화를 우려한 데서 나온 것이기는 했지만, 소요에 가까울 정도로 반 대여론이 대두한55) 사실은 사안이 거기에 국한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일이 라 하겠다. 또한 정경세의 설득에 의해 배향이 결정되었다고 하지만, 그 과 정에서 남치리가 제외된 데에는 서애계의 입김이 적지 않게 작용했을 개연성 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서애계와 친밀한 관계에 있으면서도 처가가 있는 佳邱에 寓居하며 유일재 계와도 교유관계를 유지했던 김윤안이 김용에 이어 남치리의 배향을 다시 추 진하고 나선 사정도 거기에 있었다. 곧 그가 유성룡 김성일의 여강서원 배 향을 반대한 것은 유일재계를 의식한 측면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들의 배 향이 대세를 이룬 뒤 남치리의 배향을 재차 제기한 것은 유일재계의 입지를 보장해주기 위한 의도가 작용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도 역시 수용되지 않음으로써 여강서원에는 일단 김성일과 유성룡만 배향되는 것으로 가닥이 잡히게 되었다. 한편 남치리의 여강서원 배향무산은 서애계의 결속양상과 더불어 사회적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은 유성룡의 위패가 여강서원으로 옮겨진 뒤 비게 된 병산서원의 사당에 그의 위패를 새로이 봉 55) 鶴湖集 권4, 附錄 行略 且兩先生旣摳衣於溪門 宜合享廬江 間有異議者 以舊廟還撤爲 非 譁然不已

退溪學派의 分化와 屛虎是非(Ⅱ) 333 안하는 양상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이 역시 김윤안 김윤사 형제가 주도하 였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는 곧바로 반대여론에 부닥쳤다. 한 고을에서 동일 인물의 위패를 복수의 서원에 봉안하는 그 같은 疊享은 우리나라에서는 선례 가 없었기 때문이었다.56) 이에 따라 그들은 鄭經世에게 자문을 구하였고, 그 는 중국의 小縣에 불과한 婺源 建陽에 주희를 제향한 사우가 2개소씩 존재 하는 사례를 제시하며 지지를 표명함과 동시에 향촌사림의 공론을 수렴하는 과정을 거칠 것을 충고했다.57) 그 결과 인조 7년(1629) 유성룡의 위패가 여강서원과는 별도로 병산서원 사당에도 봉안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런데 서애계가 유성룡의 병산서원 疊享을 추진하는 동안 임천서원에 김 성일의 위패를 봉안하려는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이로 인해 임천 서원은 급속하게 조락해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비록 그 사이에 重修가 간헐 적으로 이루어지기는 했지만,58) 사당이 비어있는 데다 講學마저 제대로 이루 어지지 않음에 따라 서원으로서의 기능은 거의 상실하다시피하게 되었다. 영 조 27년(1751) 안동부사로 재직하던 尹光紹가 향교와 서원의 교육장려를 위 해 규범을 만들 당시 서원에 정원을 배당할 때 임천서원이 제외된 것에서 도59) 그러한 상황을 살필 수 있다. 이는 학봉계가 여강서원에만 주력함에 56) 東籬集 年譜, 天啓 元年(1621) 10月 以西厓先生改享屛山事 作書于鄭愚伏(先生與松 陰公 發改享本源之議 遠近士林 皆以疊設一鄕 大有持重之議 先生兄弟 以是作簡相議于愚 伏 ) 57) 愚伏集 권11, 書 答金而得而靜 近更考朱子實記 則婺源建陽 皆是一小縣 而皆有朱子 祠二所 前例可據 而豐山物力 又可以守護 如得兩存 善莫大焉 此中士友之意 亦多如此 故 頃於三院長書中 幷及此意矣 大抵此是士林公共之事 非一縣一家私事 切願平心察理 勿 求己勝 使斯文盛擧速得停當幸甚幸甚 그렇지만 정경세는 1612년(광해군 4)경 靑城書 院에 權好文과 함께 金誠一 제향논의가 있었을 때 임천서원에 그의 위패가 안치된 사 실을 들어 疊享의 우려를 제기한 적이 있다( 愚伏集 권13, 書 答安東士友 抑鶴峯旣 祀於臨河 則一境之內 似不必重設 如何如何 ). 58) 蒼石集 續集 권6, 上梁文 臨川書院重修上梁文. 임천서원은 그 뒤에도 사당을 비운 상태로 존속하고 있었으며, 1856년(철종 7) 김성일의 위패를 다시 봉안하면서 재기 의 기회를 마련했지만 조정의 서원훼철 정책으로 인해 사라지게 되었다.

334 退溪學과 韓國文化 第45號 따라 임천서원이 문중서원으로 명맥만 유지한데 따른 결과이기는 했지만, 서 애계와 비교해 그들의 사회 경제적 기반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단면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 같은 학봉계의 한계가 결과적으로 그들이 유일재계 대신 서애계와 연 대를 선택하여 여강서원을 무대로 계파의 토대를 구축하는 촉매제가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아울러 그것은 두 사람의 위패를 사당에 봉안하면서 대두 한 위차문제에 대해 그들이 서애계의 주장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정리 하면서 별다른 갈등 없이 해결하게 되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 된다. 1620년(광해군 12) 유성룡과 김성일의 여강서원 배향이 결정된 뒤에도 몇 가지 해결해야 할 현안이 제기되었다. 첫째는 그들의 配享에 대한 안동 및 예안사림의 공론화를 이루는 일이었다. 사실 그들의 여강서원 위패봉안을 從享으로 할 것인지 配享으로 할 것인지는 상당한 고민 가운데 하나였다. 종 향과 배향은 主享이 마련된 廟宇에 追享하는 것은 동일한 의미를 갖지만, 배 향에 비해 종향이 상대적으로 낮은 격으로 간주된다는 점에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조목이 도산서원에 從享되어 있는 사실을 감안해 월천계의 동의를 포 함한 공론화를 의식한다면 종향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서애 학봉계의 월천계에 대한 상대적 우위를 전제로 한 차별화를 위해서는 배향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여강서원 원장 金奉祖와 병산서 원 원장 申之信, 임천서원 원장 鄭佺이 정경세의 자문을 근거로60) 배향을 결 59) 素谷遺稿 권13, 福州錄 興學規範. 당시 안동의 지역별 거점 서원과 배당된 정원은 다음과 같다. 虎溪書院(20명, 東先 東後 臨縣 臨北 臨南 臨東 臨西 吉安), 屛山書院(20명, 豐縣 豐北 豐南 豐西 南後), 三溪書院(20명, 乃城), 靑城書院 (12명, 西先 西後 北先 北後), 勿溪書院(8명, 甘泉), 道淵書院(10명, 春陽), 龜 潭書院(10명, 一直). 60) 당시 정경세는 두 사람의 위상에 비추어 配享이 당연하다면서도 내부의 반발을 의식해 소홀하게 처리할 문제가 아니라며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결정할 것을 주문했다( 愚伏

退溪學派의 分化와 屛虎是非(Ⅱ) 335 정한 사정도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하고 참석했던 월천계와 남치리의 배향실패로 불만을 품고 있던 유일재계가 이의를 제기하 면서 享祀 당일 소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 문제는 가까스로 무마가 되기는 했지만, 퇴계학파 내부에 긴장관계가 온존하는 원인이 되었다.61) 둘째는 유성룡 김성일의 위패를 고치면서 先生 의 칭호를 쓸 것인지 여 부에 대한 일이었다. 물론 선생의 칭호는 먼저 태어난 사람 외에도 스승 또 는 도를 먼저 깨우친 사람을 지칭하며 관료집단에서는 전임자의 의미로 사용 되기도 하기 때문에 극존칭의 배타적 유일성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 만 여강서원의 경우 스승이 제향된 사당에 제자들을 배향하면서 다 같이 선 생으로 지칭하는 것은 同格으로 대우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오해를 유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金奉祖 등이 鄭經世에게 자문을 구하자 그는 주희가 南康에 濂 溪祠를 세우고 兩程을 배향하면서 제문에 각각 明道先生 程公, 伊川先生 程 公 이라 했던 것을 선례로 제시하며, 비록 사제의 대우에 차별을 두지 않은 듯 한 혐의가 있기는 하지만 후학의 존경하는 마음을 담은 것이라면 선생으 로 표현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의 견해에 의거하여 유성룡 김성일의 위판의 題面도 이황과 마찬가지로 선생의 호칭을 사용해 각각 西厓先生 柳公, 鶴峯先生 金公 을 幷書하여 안치하기에 이르렀다.62) 셋째는 유성룡 김성일의 위패를 안치하는 위치와 관련된 일이었다. 물론 그들의 위패는 배위로서 正位를 중심으로 東壁과 西壁에 안치되는 것이지만, 集 권13, 書 答問目 配享固重 施之於兩先生 則恐無過重之疑 然此是儒家莫大重事 須 博詢精思 參伍諸論以處之 不可以倥倥之言爲決也 ). 61) 유성룡 김성일의 종 배향 논의는 金坽의 溪巖日錄 에 소상하게 소개되어 있으며, 이에 관한 전말에 대한 분석은 金鶴洙, 廬江書院과 嶺南學統 17세기 초반의 廟享論 議를 중심으로, 朝鮮時代의 社會와 思想, 조선사회연구회, 1998에 상세하게 논 구되어 있어 참고가 된다. 62) 愚伏集 권13, 書 答問目 및 廬江志 권1, 原志 追祔事實.

336 退溪學과 韓國文化 第45號 통념상 동벽이 서벽에 우선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한 위패의 배치는 계파의 이해관계와 직결되는 민감한 사안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 뚜렷한 기준이 마련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때문에 학봉계와 서애계가 각기 年 齒와 爵位를 坐次의 기준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들의 주장의 배경에는 나이로는 김성일이 유성룡보다 4살 연상이라는 점과, 작위로는 영 의정을 역임한 유성룡이 감사를 지낸 김성일보다 우위라는 점이 작용하고 있 었다. 그에 관한 자문을 의뢰받은 鄭經世도 분명한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신 중한 자세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가 원래 문묘의 東 西壁은 처음부 터 序次에 따른 것이 아닌 단지 위패를 안치할 공간의 확보를 위해 마련된 것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두 사람의 위패를 모두 동벽에 봉안하는 방 안도 고려해 볼 것을 제안한 데서도 그의 고민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아울 러 그는 두 사람의 나이가 차이가 있어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하기도 어렵고 작위에 있어 거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그들이 평소 서로 처신한 것에 의거해서 序次로 삼는 새로운 기준을 찾아보는 것도 해결의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63) 부연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유보적 자세는 위차의 결정으로 인해 초래될 수 있는 파장을 우려한데 따른 것으로, 계파의 합의를 통해 해결하는 것이 후유증을 최소화 할 수 있는 방책이라 판단한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그가 여기서 두 사 람의 평소 처신을 고려할 것을 강조한 것은 이미 나이보다는 관작을 기준으 로 서차를 정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이에 앞서 靑城書院에 權 好文과 金誠一의 제향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대두한 서차논의에 대해 63) 愚伏集 권13, 書 答問目 只依文廟坐次 豈容他說 但四聖之坐 當初皆在東壁爲一行 後 因殿宇不能皆爲大間架 遂分東西坐 今奉兩先生 作一行于東壁 未知如何 然分坐亦穩 二先 生坐次先後 非後學所敢妄論 但當依二先生平日相處如何 而爲之序次爲得 況年齒相去 不 及肩隨 而爵位之相懸 又在絶席 恐無異議矣

退溪學派의 分化와 屛虎是非(Ⅱ) 337 무릇 山林에서 현실과 동떨어져 살면서 관작을 논하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이 겠습니까. 그렇지만 만약 鶴峰과 松巖의 관계에 대해 모른다면 나이를 서로 뒤로 미룬 것이 어느 정도인지 보시기 바랍니다. 평소 왕래하면서 선배로서 존중하며 동등한 교제를 하지 않았습니까. 만약 少 長의 차이가 있었다면 대등하게 행동 하며 친하게 지내는데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조의 冠爵은 역시 서 로 겸양으로 자신을 억제하도록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나이든 관작이 든 다 같이 대단히 존중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향촌에서 숭상 하는 바의 것이 비록 나이에 있지만 鄕飮酒禮에서는 작위를 동쪽에서부터 높이는 것을 준행합니다. 이는 늙은 사람을 존경하면서도 높은 사람을 높이는 뜻에서 나 온 것으로, 함께 행하면서도 서로 무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 두 분의 나이 와 관작이 차이가 있다는 사실은 마땅히 참작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두 분의 마 음이 편하도록 하는 방법을 찾는데 힘써 향촌의 논의를 합해야 대단히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동벽과 서벽이 서로 대응한다는 것은 바로 주인과 손님의 좌차를 말하는 것이니 누가 손님의 자리에 있어야 하고 누가 주인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 까. 이런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64) 라며 두 사람이 평소 6살의 나이차를 넘어 친밀한 교유관계를 유지했던 사실 에 근거해 나이보다 관작을 기준으로 한 서차에 비중을 두는 견해를 제시한 적이 있었다. 이는 나이는 많으나 處士로 일생을 마친 권호문 대신 김성일의 좌차를 우선해야 한다는 입장을 반영한 것으로,65) 그것을 유성룡과 김성일의 序次에 적용하면 그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충분히 살필 수 있다고 하겠다. 정경세의 그 같은 견해에 따라 여강서원 배향위의 서차에 관작의 기준이 적 용되어 동벽에 유성룡의 위패가, 서벽에 김성일의 위패가 안치되기에 이르렀 던 것이다.66) 64) 愚伏集 권13, 書 答安東士友. 65) 廬江志 권1, 原志 追祔事實. 그러나 청성서원에 권호문의 위패만 봉안된 점으로 미 루어 당시 合享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66) 당시 서애계에서는 서차에 나이가 적용되지 않은 또 다른 사례로 羅州의 大谷(景賢)書 院에 金宏弼(1454~1504)의 서차가 연상인 鄭汝昌(1450~1504)에 우선한 사실을 꼽기도 했다. 특히 이 서원이 1583년(선조 16) 당시 牧使였던 김성일의 주도에 의해

338 退溪學과 韓國文化 第45號 결국 여강서원에 유성룡과 김성일을 배향하기 위한 시도는 서애계와 학봉 계가 도산서원을 주도하던 월천계에 대응해 퇴계학파의 새로운 구심점을 마 련하기 위한 의도가 반영되어 있었다. 그들의 배향이 결정된 뒤 정경세가 이 황의 학문이 眞知實踐 과 道存德性 의 두 길로 나아가 밝아지고 순수해지게 되었다67)고 선언한 배경도 여기에 있었다. 이는 이황의 隨乘論的 세계관과 삶의 철학이 시대를 관통하는 합리적 현실대응 자세확립과 함께 그것을 실현 할 수 있는 도덕적 인품함양이라는 복합적 요소를 함유하고 있음을 표방하는 것이자, 그것들을 각각 계승하여 부각시킨 유성룡 김성일이 이황의 嫡傳이 라는 사실을 내 외에 천명하는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서애계와 학봉계는 학문적으로 퇴계학파를 선도함과 동시에 정 치적으로도 서인 및 노론세력에 대응한 남인세력을 주도하는 양대 산맥을 구 축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갖가지 현안에 봉착하기도 하지만 별다른 진통 없이 그것을 해결했다. 그러나 남치리의 배향을 반대하 며 유일재계를 배제한 사실과 위차에 있어 나이대신 관작을 기준으로 한 사 실은 그것이 계파의 위상이나 입지확보와 직결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표면적 인 해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비의 불씨가 되는 것이기도 했다. 2) 南致利 追享논의와 賜額 1623년 일어난 仁祖反正은 대북정권의 몰락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鄭 仁弘이 배후의 핵심인물로 지목됨으로써 南冥學派에게도 치명적인 타격을 안 건립되었다는 점이 서애계의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정경세의 자 문과 각종 선례를 토대로 작위를 기준으로 한 서차를 정당화하는 서애계의 주장에 대 해 학봉계에서 적지 않은 불만을 갖고 있었지만( 廬江顚末 仁, 萬曆 48年 庚申 遂有 厓東鶴西 當時士論 甚不韙之 ), 구체적으로 반론을 제기하고 나서지는 않은 것으로 보 인다. 67) 廬江志 권1, 原志 追祔事實 元位告由文.

退溪學派의 分化와 屛虎是非(Ⅱ) 339 겨 주었다. 또한 그것은 남명학파와 일정한 교감을 이룬 가운데 대북정권의 討逆論에 참여했던 李茳 등 예안사림 다수도 被禍되는 등 월천계 역시 서인 정권에 의해 정치적 보복의 대상이 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인조 4년 (1626)에 발생한 李有道의 杖斃事件도 그러한 상황에서 파생된 산물이었다. 李瀣의 孫子이자 李滉의 從孫으로 도산서원 원장을 맡고 있던 이유도가 관아 의 명령을 무시하고 賦役에 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경상감사 元鐸이 체포해 신문하다 사망한 사건은 서인정권의 도산서원과 월천계를 바라보는 정서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68) 그렇지만 도산서원의 대응도 만만하지 않았다. 이유도의 아들 李巖 등이 擊錚訴寃하고, 그 族人인 李弘重이 도산서원 유생들과 함께 각지에 通文을 보 내 원탁의 행위를 규탄하고 나섰던 것이다.69) 이에 따라 조정에서는 유생의 대우가 반드시 법에 의거할 필요는 없다70)는 논리를 앞세워 정치적인 해결 책을 모색하기도 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월천계가 중심이 된 예안사림이 여 전히 도산서원을 주도한 가운데 서인정권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음을 보여주 는 것이자, 도산서원이 퇴계학파뿐만 아니라 남인 정치세력의 중핵으로서 정 치 사회적 입지를 여전히 확보하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여기에다 서애계와 학봉계가 주축을 이룬 여강서원의 부상은 사실상 서인 정권에게 적지 않은 부담을 안겨주는 것이기도 했다. 비록 조목의 도산서원 從享이 여강서원에 유성룡과 김성일을 配享하며 퇴계학파의 嫡傳을 자부하는 자극제가 되었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그들 계파가 퇴계학을 매개로 한 남인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한 동질적인 기반을 토대로 협력 또는 길항관계 속에서 서인정권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발판으로 작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68) 설석규, 17세기 안동사림의 계파분화와 서원동향, 애산학보 29, 애산학회, 2003. 69) 仁祖實錄 권12, 4년 5월 己巳. 70) 仁祖實錄 권13, 4년 윤6월 丙午.

340 退溪學과 韓國文化 第45號 퇴계학파의 남인세력이 율곡 우계학파를 주축으로 한 서인세력과 文廟從祀 및 服喪을 둘러싼 공론대결을 전개하는 원동력은 이미 여기에서 마련되고 있 었던 셈이다.71) 그러나 월천계가 서인정권에 의한 탄압으로 입지가 약화된 것을 계기로 도산서원이 퇴계학파의 보편적 공론형성 중심의 위상을 확보한 것과는 달리, 여강서원의 경우 서애계와 학봉계가 유성룡 김성일의 배향을 계기로 상호 독자성을 유지한 가운데 결속을 강화하며 여타 계파의 수용을 용인하지 않는 배타적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는 南致利의 추향을 통해 입지를 확보하 려는 惟一齋系의 노력을 그들이 공동으로 대처하며 무산시킨 것에서도 극명 하게 나타난다. 남치리의 여강서원 추향은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유성룡 김성일의 배 향이 논의될 당시 이미 金涌에 의해 추진되었다. 이는 그의 갑작스런 사망으 로 무산되는 듯했으나, 유성룡 김성일의 배향이 이루어진 직후 유일재계와 일정한 교감을 유지하던 金允安 형제가 김언기의 제자로 병산서원 원장이던 申之信 등의 지지를 받아 추진하면서 재개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퇴계학파 내부의 광범한 공론화가 수반되지 않음으로써 성취되지 못했다. 그리고 3년 뒤인 광해군 15년(1623) 유일재계는 또다시 각지에 通文을 보내 남치리가 이황의 旨訣을 직접 계승한데다 조예가 정밀하고 깊어 퇴계학파의 推服의 대 상이 된다72)는 점을 앞세워 추향운동을 전개했다. 그렇지만 이 또한 仁祖反 正을 계기로 초래된 정국변화로 인해 사림의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한 채 흐 지부지하고 말았다. 남치리의 추향운동은 인조 8년(1630)에 이어 인조 12년(1634)에도 재 71) 김학수, 17세기 영남학파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8. 72) 賁趾集 권2, 年譜 天啓 3年(1623) 士林通文以爲 先生早遊退門 親承旨訣 造詣精深 函丈之所獎許 同門之所推服 今此崇奉之擧 實是士林公共之論云云

退溪學派의 分化와 屛虎是非(Ⅱ) 341 개되었다. 김언기의 아들 金得硏을 중심으로 한 惟一齋系는 南致利뿐만 아니 라 동문인 權宇를 포함하여 추향공론의 확산을 위해 적극성을 보였다. 그들 은 남치리와 권우가 서로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며 독실한 學行으로 사림의 모범이 된 점을 근거로 제시하며 추향의 공론화가 당연하다73)고 주장했다. 여기에 호응하여 金點 등이 나서서 추향을 실현하기 위한 시도를 강력히 추 진했으나, 김성일의 손자 金是樞 등이 그들을 權好文이 제향된 靑城書院에 合 享하는 대안을 제시하며 반대하고 나섰다. 이로 인해 그들 사이에 치열한 공 방전이 벌어지기에 이르렀고, 결국 상호 감정의 골만 깊게 한 채 남치리 권 우의 추향은 무산되고 말았다.74) 이같이 유일재계가 잇달아 추향운동을 전개하게 된 것은 1629년(인조 7) 병산서원에 유성룡의 위패를 다시 봉안한 것을 계기로 여강서원의 계파간 역 학관계 조정의 분위기가 조성된데 이어, 이듬해 配位인 유성룡 김성일의 위 패가 正位인 이황의 그것보다 크다는 이유 때문에 改版이 추진되는75) 등 사 당 내부의 조정이 이루어지던 상황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유성 룡의 병산서원 復享은 첩향의 혐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림의 별다른 반대 없이 성취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서애계가 여타 계파들에 비해 사회 경제 적 기반에 있어 상대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 적지 않은 작용을 하였 던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유성룡의 위패가 2개소의 서원에 봉안된 사실은 서애계가 사회적 기반을 확대하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했음을 의미하는 것이 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서애계의 결속력을 양분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으로, 여강서원에서 학봉계가 상대적으로 입지를 강화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주 는 것이기도 했다. 73) 葛峯集 권4, 書 答校中士林書. 74) 溪巖日錄 권6, 甲戌年(1634) 8月 21日 以南處士廟食 金點輩必欲從享廬江 金子瞻 輩欲合享靑城 大致相爭 仍成怨敵 75) 廬江顚末 仁, 崇禎 庚午(1630) 2月 및 旅軒集 권5, 答問目 答廬江書院.

342 退溪學과 韓國文化 第45號 유일재계는 이러한 여강서원 내부의 변화된 상황을 이용하여 계파의 토대 를 구축하는 호기로 활용하고자 유성룡 김성일 위패의 改版을 계기로 추향 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는 상호 의존적 관계에서 여강 서원의 주도권을 공동으로 유지하려는 서애계와 학봉계의 집요한 반대로 인 해 실현될 수는 없었다. 서원에서의 영향력은 다소 감소했다고 하더라도 주 도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서애계와, 서애계의 일정한 양보를 발판으로 주도 권의 확대를 추구하는 학봉계가 새로운 계파의 참여를 용인하지 않는 태도를 강고하게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성일의 손자 김시추가 대안을 제시 하며 추향의 반대를 주도하고 나선 사정도 여기에 있었다고 하겠다. 여강서원에서 학봉계가 확고한 토대를 구축해가고 있는 양상은 효종 원년 (1650) 그들이 이곳을 무대로 成渾과 李珥의 文廟從祀 반대운동을 전개한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柳㮨이 疏頭가 된 영남유생 9백여 명의 牛栗 文廟 從祀 反對上疏 운동은 뒤에 학봉계가 정조 16년(1792) 李㙖를 소두로 한 思 悼世子 伸寃請願 萬人疏 운동과 더불어 그들의 대표적인 성과 가운데 하나로 규정할76) 정도로 획기적인 사건으로 평가되었다. 특히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서 서인세력의 宗匠으로 간주되는 성혼 이이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것은 단순한 학파간 이념논쟁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정권의 정통성 여부와 긴밀하 게 연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인조반정 이후 서인세력이 그들을 文廟에 종사하려 했던 것은 정권의 정통성 을 확보하기 위한 의도에 따른 것이었으며, 이를 반대한다는 것은 곧 서인정 76) 閩山集 권8, 附錄 行狀 或者以公之出處爲疑 然本事之關係 莫重多士之屬望 有在公於 此時 寧可苟且圖免 自陷於吾君不能之科哉 吾嶺一番先輩 若活齋俛庵諸先生 皆當是任 出 處之義 如此 此公之所以不得辭也 효종 원년(1650) 성혼 이이의 문묘종사를 반대하 는 영남유생 상소의 疏文을 기초한 인물이 바로 活齋 李榘이다. 당시 유생들 사이에서 는 疏文을 공모하면서 가장 과격한 내용을 선정했는데, 李時明의 그것보다 더 강력하 게 李珥의 세계관의 邪論化 경향을 논변한 것으로 평가받아 채택되었다.

退溪學派의 分化와 屛虎是非(Ⅱ) 343 권의 정통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77) 물론 퇴계학파가 이이의 理氣妙合論이 성리학의 본질에서 벗어난 邪論의 혐의가 있다며 문묘종사를 반대한 이면에는 그들의 정치적 불만이 개재해 있 었다. 곧 서인정권은 인조반정 이후 이이의 妙合論에 근거하여 保合을 내세우 며 南人의 포용을 통한 공존을 표방하면서도 그들을 배제한 채 사실상의 독 점체제를 굳혀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인의 공론을 주도하는 퇴계학 파가 李珥의 철학이 邪論의 혐의가 있다며 비판하고 나선 것은 서인정권 명 분의 정치적 이중성과 허구성을 폭로하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78) 이는 결과적으로 서인정권의 집권 자체를 부정하며 궁극에 정권교체를 지향하는 혐의를 받을 수 있는 것으로, 그들에 의한 정치보복의 반작용이 충분히 예상 되는 일이었다. 그러한 정치적 부담을 극복할 수 있기 위해서는 향촌사림의 공론에 주로 의존하여 서인정권을 견제해야 하는 남인세력에게 있어 영남사림의 공론을 결집하는 일은 무엇보다 시급하고 절박한 과제였다. 그런데 문묘종사 반대를 위한 상소운동을 위해 疏任들이 여강서원에 모여 疏廳을 설치하던 날에 맞춰 남치리를 추향해야 한다는 주장이 다시 제기되었다.79) 이는 결국 유일재계가 문묘종사 반대운동에서 요구되는 공론화에 참여하는 조건을 담보로 하여 추 향운동을 전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은 남인세력의 공론이 영남 77) 설석규, 朝鮮時代 儒生의 文廟從祀 運動과 그 性格, 朝鮮史硏究 3, 조선사연구회, 1994. 78) 설석규, 17세기 退溪學派의 朋黨認識과 公論形成, 退溪學 11, 안동대 퇴계학연구 소, 2000. 79) 百拙庵集 附錄, 行狀 當多士設疏之日 有鄕中浮議 私自角立 鬨然攻擊 將不可鎭定(時 以賁趾南公 從享退陶廟之議 一道士論 至於角立相訾) 그러나 유일재계의 남치리 추향 문제는 이날 전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廬江顚末 에는 한 해 전인 1649년(효종 즉위) 제기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廬江顚末 仁, 永曆 4年(1649) 己丑 賁趾南先生追配之議 發而旋寢), 이날 찬반논의가 비교적 차분 하게 진행되고 있는 점에서 일찍부터 논의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44 退溪學과 韓國文化 第45號 사림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데다 참여한 聯名人의 수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 에 비추어 그들의 참여여부가 종사반대 공론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이를 그들의 현안해결을 위해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남치리의 추향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인 사람은 單子를 보내온 자 를 포함해 모두 99명이었다. 여기서 그들은 비공개 圈點 대신 공개적으로 宜 從祀 不宜從祀 를 特書해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다. 이로 인해 추향에 분명한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나선 사람은 4명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추향에 찬성한 것으로 간주하여 사림의 공론화가 이루어 진 것으로 선언함과 동시에, 각 고을 주요서원에다 조만간 合祀禮를 거행할 것이라는 通文까지 발송했다.80) 이 사실이 알려지자 김성일의 손자 金是樞 와, 유성룡의 손자이자 김시추의 사위인 柳元之와 외손 李弘祚 등 학봉계와 서애계의 핵심인물들이 주축이 되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그들은 여강서 원에 보낸 通文에서 賁趾(남치리)는 老先生의 高弟이지만 당초 合享할 때 이 논의에 함께 거론되 지 않았습니다. 이는 諸賢들이 보기에 흡족하지 않은 바가 있어서가 아니라, 여강 서원의 중요한 사안이라 가벼이 논의하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己巳年間 (1629, 인조 7) 愚伏 鄭先生이 서울에 계시면서 金尼山(慶祖)과 더불어 합향과 관련한 일을 논의하면서 다시 지시하시기를 이후 여강서원의 사당문은 다시 열 수 없다. 제군들은 오직 이 뜻을 알아야 할 것이다 고 했습니다 賁趾가 이룬 것 이 깊고 얕은지, 從享에 합당한지 여부는 실로 지금의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능히 臆斷할 바가 아닙니다. 老先生의 廟門은 가벼이 열 수 없다는데 이르러서는 어리석고 지혜로움을 가릴 것 없이 똑같은 말을 하지 않음이 없습니다.81) 80) 廬江志 권2, 續志 三溪士林通本院文 士論之大相矛盾如此 而主事之人 以論議歸一通 文 貴院將擧盛禮云 何以爲歸一云也 81) 廬江志 권2, 續志 本府士林通本院文(金風雷軒 李睡隱 柳拙齋 諸公).

退溪學派의 分化와 屛虎是非(Ⅱ) 345 라며 추향과 같은 중대한 사안을 함부로 논의할 수 없다는 점과 더 이상 사당 에 위패를 봉안하지 말라는 정경세의 지시 등을 들어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추향을 위한 공론화 과정의 파행성을 집중적으로 부각했 다. 곧 공론화가 아래에서 자발적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닌 강압 에 의한 혐의가 있는 데다, 會中 인물들 가운데 사정을 모르고 참석했거나 자격이 없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욱이 99명 중 공개적으로 반 대한 4명 외에 單子만 보내고 불참한 자 14명, 병을 칭하고 돌아간 자 2명, 서명을 거부한 자 19명도 반대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이 들을 포함해 39명이 실질적으로 반대한 셈으로, 비록 찬성한 사람이 다수라 할지라도 그것으로 公論이라 간주할 수 없는 일이라 주장했다. 이같이 그들은 공론화 과정의 절차상 문제를 지적하면서 남치리의 추향자 격까지 거론하고 나섰다. 그들은 道內에 보낸 통문에서 향촌의 善士라면 향 촌에서 존경받고 나라의 善士라면 나라의 존경을 받는 법이라 전제한 뒤, 弊鄕에는 옛날 南處士가 있었으니 號는 賁趾입니다. 일찍이 老先生의 문하에 올랐고 志行을 아름답게 보여 일시에 칭해졌습니다. 불행하게도 일찍부터 세상에 서 성취함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명칭이 여러 고을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事 業이 보고들을 정도로 드러나지 못했으니 소위 一鄕에서만 존중하는 바입니다 오! 江院이 어느 정도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곳입니까. 一國이 함께 존중하는 곳 이고 萬代가 함께 우러러보는 곳입니다. 한 쪽에 치우친 식견으로 감히 一鄕의 善士를 가벼이 의논하고 合祀에 올린다는 것이 불가하다는 것은 분명하고도 분명 합니다.82) 라며 여강서원의 위상에 비추어 남치리는 추향의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지 적했다. 요컨대 남치리가 顯達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 아닌 草野에 묻혀있던 處士이기 때문에 여강서원의 위상에 비추어 추향이 불가하다는 것 82) 廬江志 권2, 續志 本府士林通道內文.

346 退溪學과 韓國文化 第45號 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추향을 주도하는 부류가 중앙에 정치적 배경을 갖지 못한 향촌의 처사형 사림이라는 점을 반영하는 것이자, 그들의 시도가 관료 형 사림의 반대에 의해 무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결국 김언기의 학풍을 계승한 안동지방 처사형 사림들은 퇴계학파의 계파 간 분화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독자적 계파를 형성하기 위한 노력을 분명히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김언기의 제자이자 이황의 제자인 남치리의 여강서원 추향을 통해 惟一齋系로서의 존재를 보장받는 한편 향촌에서의 그 들의 결속과 함께 사회적 입지를 확고하게 다지려 했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 는 퇴계학파 일각의 긍정적 평가에도83) 불구하고, 인조반정 이후 약세를 면 하지 못하고 있던 月川系에 비해 상대적 우위를 보이던 서애계와 학봉계의 집중 견제로 실현될 수 없었다. 그들이 효종 4년(1653) 남치리를 제향한 魯 林書院을 별도로 건립하고 14개 고을의 사림 3백여 명이 모여84) 세력을 과 시하게 되는 것은 그 소산이었다. 남치리의 추향실패는 서애계 학봉계가 여강서원의 주도권을 배타적으로 확보함과 동시에 안동지방 퇴계학파의 공론을 선도하게 되었음을 확인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서인정권의 집중적인 견제로 인해 위축된 도산서원에 비해 여강서원이 상대적으로 운신의 폭이 넓은 점을 감안할 때, 이는 그들이 이곳을 무대로 하여 학문적으로 퇴계학파의 범주를 확대하는 정점에 설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남인세력 공론의 중심에 서는 확고한 발판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여강서원이 성혼 이이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는 남인세력의 공론을 주도함에 따라 서인정권의 끊임없는 감 시와 규제의 대상이 되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것은 남인세력에게 있어 도산 83) 二愚堂集 권3, 書 答震峯兄 賁趾先生江院祔享事 公論已定 而似聞厓鶴兩賢子孫及若 干人 乃有異議 至於通文列邑 誠不可知也 84) 賁趾集 권2, 年譜 崇禎 二十六年(1653) 十月 奉安位版于新祠 院號曰 魯林書院 廟 號曰 景賢祠(道內十四邑士林會者三百餘人)

退溪學派의 分化와 屛虎是非(Ⅱ) 347 서원과 마찬가지로 학문적 정치적 위상을 강화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그러 한 여강서원의 위상강화의 소산으로 실현을 보게 된 것이 바로 賜額이었다. 여강서원 사액은 건립 당시부터 현안으로 대두한 최대의 과제였다. 이는 학문적으로도 국가적 공인을 받아 확고한 위상을 정립할 수 있는 첩경이 되 는 일이자, 국가의 안정적인 재정지원도 보장받을 수 있는 효율적인 방안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 원장 김언기도 서원을 건립하 는 과정에서 이미 안동부사 權文海에게 사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청원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 같이 이황의 위패를 봉안한 서원임 에도 불구하고 도산서원 이산서원은 조정으로부터 편액을 하사받은 것과는 달리 여강서원은 그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 이후에도 여강서원은 여전히 사액대상에서 제외되었는데, 이는 대북정 권과 서인정권의 보이지 않는 견제가 작용한 정치적 이유 때문으로 추측된다. 곧 대북정권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던 월천계가 도산서원을 주도한 상황에 서 여강서원은 그들에게도 사실상 견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인조반정 이후에도 서인정권이 비록 월천계에 대한 탄압과 더불어 도 산서원의 입지를 약화시키는데 주력했다고 할지라도 그에 대신해 여강서원이 입지를 강화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안동향교와 더 불어 여강서원 노비들이 원래 안동부에 소속된 官婢의 소생이라는 이유로 회 수하는85) 등 사회 및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기 위한 갖가지 방안을 모색하 기도 했다. 이는 학봉계가 주축이 되어 여강서원을 무대로 성혼과 이이의 문 묘종사 반대를 위한 남인세력의 공론을 형성한데 대한 정치적 보복의 성격이 짙은 조치로 파악되기도 한다. 85) 1653년(효종 3) 안동부사 李後天은 여강서원에 소속되어 있는 蘭香 末介 소생의 院 奴婢를 모두 官奴婢로 환속하도록 조치했다. 난향과 말개는 원래 관노비였지만 과거 金 宇顒과 鄭逑가 안동부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경제적으로 취약한 상태에 있었던 여강서 원의 지원을 위해 移屬시킨 적이 있었다( 承政院日記 252책, 숙종 2년 3월 11일).

348 退溪學과 韓國文化 第45號 현종 7년(1666) 柳世哲을 疏頭로 하여 영남유생 1,100여 명의 유생이 연명해 宋時烈의 禮論을 집중 공박한 議禮疏 운동이 병산서원을 무대로 전개 된 것도 그러한 상황의 소산으로 파악된다. 곧 이 상소운동을 주도한 서애계 는 종사반대 운동 이후 서인정권의 집중 감시대상이 된 여강서원에서의 공론 형성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疏廳을 병산서원으로 옮기기에 이르렀 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서애계가 禮說을 근간으로 한 그들의 독자적 세계관을 부 각하면서 학봉계와 일정한 차별성을 부각하려는 의도도 포함된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학봉계가 여강서원을 무대로 성혼 이이의 문묘종사 반대 운동을 주도하면서 서인정권의 정통성을 부정하며 정면으로 대립하는 양상을 보여준 것과는 달리, 그들이 병산서원을 중심으로 영남사림의 공론을 형성한 가운데 서인세력과 정치적 현안을 두고 대토론을 전개하며 견제관계를 유지 하려는 모습이 그것을 반영한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서애계와 학봉계가 각각 병산서원과 여강서원을 거점으로 독자적 세계관을 정립하며 계파의 확산을 위해 경쟁함으로써 屛論 虎論으로 양립하는 단초를 열게 되었지만, 당시 서 인과 남인세력이 첨예한 정치적 대립을 전개하는 가운데 처한 여강서원의 정 치적 성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 같이 여강서원이 집권 서인세력에 대응해 정권교체를 지향하는 정통성 시비를 전개하는 공론형성의 선봉에 서며 정치적 역학관계에 깊숙하게 개입 되어 있는 한 賜額을 통한 국가적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 었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세력이 집권하고 있는 동안 여강서원 사액운동이 거의 전개되지 않은 사정도 여기에 있었다. 이로 인해 여강서원 사액은 현종 이 사망하기 직전인 1674년(현종 15) 단행한 甲寅換局으로 서인정권이 무너 지고 남인세력이 집권하는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것을 계기로 비로소 추진되 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退溪學派의 分化와 屛虎是非(Ⅱ) 349 여강서원의 사액은 숙종 2년(1676) 안동생원 李亘 등의 상소에 의해 이 루어지게 되었다. 그들의 상소에 대해 왕이 禮曹로 하여금 검토를 지시했으 나, 예조에서는 도산 이산서원 등과 더불어 疊額의 혐의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그러나 왕은 이황이 우리나라의 儒宗으로서 문묘에 배향되었 다고 하나 先鄕인 안동에 사액의 조치가 없었던 것은 전범에서 벗어나는 것 이라는 이유를 들어 사액을 허용하도록 명령했다.86) 이에 따라 여강서원에 虎溪書院 의 편액이 내리게 되었고, 호계서원은 국가의 공인과 지원을 받으며 안정된 운영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여강서원 청액을 위해 柳元之 李玄逸 柳世鳴 金恁이 각각 疏文 을 지은 것으로 나타나는 점으로 미루어, 이긍 등의 사액운동은 최소한 4차 례에 걸쳐 서애계와 학봉계가 공동으로 참여한 가운데 전개한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그렇지만 유원지와 유세명의 소문은 이황의 학문적 업적을 부각하 며 유학을 존중하고 학문에 진력하는 풍조를 고양하기 위해 사액이 불가피하 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주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87) 이에 반해 이현일의 소문은 사액과 더불어 김성일의 諡號를 내려줄 것을 청원하는 내용으로 구성 되어 있으며,88) 김임의 소문은 여강서원과 더불어 寧海의 英山書院 사액을 청원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89)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서애계가 여강서원 사액을 지원하는 형식으로 참여 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학봉계는 이를 매개로 계파의 위상을 강화함과 동시 에 저변의 확대를 지향하는 양상을 살필 수 있다. 물론 당시 김성일의 追諡 86) 87) 88) 89) 廬江志 권2, 續志 宣額事實. 拙齋集 권3, 疏 廬江書院請額疏 및 寓軒集 권3, 疏 廬江書院請額疏 참조. 葛庵集 別集권2, 疏 廬江書院請額及鶴峰金先生請諡疏. 野庵集 권2, 疏 廬江英山書院請額疏. 英山書院은 처음 향촌자제의 교육을 목적으로 書堂으로 건립되었으나, 1655년(효종 6) 李時明이 주도하여 李滉을 주향으로 하고 金 誠一을 배향한 사당을 건립한 것을 계기로 조정의 승인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했다.

350 退溪學과 韓國文化 第45號 와 영산서원 사액은 성취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는 결국 여강서원이 조정 에서 호계서원으로 편액이 내려진 이후 학봉계가 주도적 위치를 확보하기 위 한 노력을 경주하리라는 것을 예고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되는 부분이라 하겠다. 요컨대 여강서원에 남치리의 추향이 무산된 사실은 퇴계학파 가운데 서애 계와 학봉계가 유일재계 등 여타 계파를 배제하고 공동의 주도권을 확보하게 되었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학봉계가 주축이 되어 여 강서원을 무대로 성혼 이이의 문묘종사 반대를 위한 남인세력의 공론을 형 성한 것을 계기로 그들의 입지가 상대적으로 강화되는 양상을 보여주게 되었 다. 그들이 서원의 사액운동을 전개하면서 김성일의 추시뿐만 아니라 영산서 원의 사액을 동시에 추진한 배경이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서애계가 병산서원을, 학봉계가 호계서원을 무대로 각각 계파의 세계관과 더불어 공론 을 형성함에 따라 屛論과 虎論을 기반으로 屛派와 虎派가 양립하는 토대가 구축되기에 이르렀다. 4. 屛虎是非와 書院毁撤 1) 虎派의 서원주도와 屛虎是非 호계서원은 남인세력의 집권을 계기로 조정으로부터 사액을 받게 됨으로 써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 도산서원과 더불어 퇴계학파의 대표 적 서원으로서의 위상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호계서원의 사액이 換局의 산물이라는 사실은 정국변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으리라는 점을 예 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숙종 6년(1680) 庚申換局과 숙종 20년 (1694) 甲戌換局을 거치며 西人에 이어 老論의 집권체제가 강화되면서 그것

退溪學派의 分化와 屛虎是非(Ⅱ) 351 의 위상이 약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숙종 15년(1689) 己巳換局 으로 남인세력이 한때 다시 집권하기는 했지만, 호계서원의 역할과 위상은 더 이상 강화될 수가 없었다. 더구나 英祖와 正祖가 蕩平政局을 운영하면서 소외된 영남사림의 慰諭策 으로 도산서원의 위상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함에 따라 호계서원의 입지는 상 대적으로 좁아지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영 정조는 文風의 興起와 士氣의 振作뿐만 아니라 탕평책의 성공을 위해 각 정파 및 학파의 대표적 서원에 香 과 祭文을 보내 추모의식을 행하는 致祭(賜祭)를 자주 활용했다. 조정에서 이황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치제하라는 왕의 지시에 따라 禮官이 도산서원에 파견되어 제사를 지낸 것은 광해군 6년(1614) 조목이 종향될 당시가 처음이 었다. 그 뒤 인조반정 이후 서인세력이 집권하고 있는 동안 도산서원 치제는 행해진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영조 9년(1733)을 시작으로 영조 32년 (1756), 정조 5년(1781), 정조 9년(1785), 정조 16년(1792), 정조 20년 (1796) 각각 행해지게 되었다.90) 그 같은 양상은 도산서원이 광해군대 대북세력과 우호적 관계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인조반정 이후에는 퇴계학파를 주축으로 한 남인세력의 거점이 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동안 서인정권에 의해 집중 견제의 대상이 되고 있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에 따라 도산서원은 이황의 대표적 藏修處이자 퇴계학의 명실상부한 근원이라는 위상이 무색할 정도로 역할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퇴계학파의 세계관에 근거한 남인세력의 공 론형성은 주로 여강서원이 병산서원과 역할분담을 통해 주도하게 되었다. 그 러나 여강서원도 사액 후 서인정권의 견제로 인해 위축되는 양상을 보임에 90) 이 가운데 1733년, 1756년, 1781년, 1785년, 1792년에 행한 致祭를 기록한 日記 가 合綴된 채로 남아 전하고 있다. 이 자료는 표지를 제외한 82면 분량의 행서로 씌 어져 있으며, 면 당 9행, 각 행 25자 내외로 구성되어 있다(한국국학진흥원 소장 도 산서원고서 賜祭日記 (ks0069-1-02-00062)).

352 退溪學과 韓國文化 第45號 따라 퇴계학파는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독자적 위상을 유지하는 데 적지 않은 곤경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영조와 정조의 도산서원 치제는 퇴계학의 학문적 正體性을 제고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남인세력의 정치적 부활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도산서원이 퇴계학파의 명실상부한 구심점으로 새롭게 자리매김 하게 되었음을 선언하는 의미를 갖는 것이기도 했다. 정조 16년(1792) 3월 奎章閣 閣臣이자 左副承旨인 李晩秀가 예관으로 파견되어 도산서원에 치제하 면서 제사에 모인 7천여 명의 유생을 대상으로 試士를 행한데91) 이어, 윤 4 월 李㙖를 소두로 한 영남유생 10,057명이 참여하여 思悼世子 伸寃을 請願 한 최초의 萬人疏를 捧入하게 되는92) 것은 그러한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당시 정조가 영남은 나라의 근본이 되는 곳으로 절박할 때마 다 의지할 수 있어 기대가 다른 곳에 비교할 바가 아니라93)며 깊은 신뢰를 표시한 것도 그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되는 것이다. 도산서원에 대한 군주들 의 배려는 그 뒤에도 이어졌는데, 순조 16년(1816)과 헌종 5년(1839) 행 해진 치제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도산서원이 치제를 통한 군주의 지원을 바탕으로 학문적 정치적 위상을 확고하게 정립하게 되는 것은 상대적으로 虎溪書院의 상징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기도 했다. 곧 도산서원이나 호계서원이 다 같이 李滉 을 주향으로 하는 사액서원이라 할지라도 도산서원이 퇴계학파의 대표성을 견지하는 한 호계서원은 자연 부차적 성격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퇴계학파 전반의 공론은 도산서원에 결집되기에 이르렀고, 호계서원 91) 이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한국국학진흥원 편, 국역 조선시대 서원일기 (2007)에 수록된 도산서원 치제시 일기 (강정서 역) 참고. 92) 정조대 영남사림의 동향과 만인소 봉입의 전말에 대하여는 李樹健, 正祖朝 嶺南萬人 疏, 嶠南史學 1, 영남대 국사학과, 1985에 상세하게 구명되어 참고가 된다. 93) 正祖實錄 권34, 16년 윤4월 乙未.

退溪學派의 分化와 屛虎是非(Ⅱ) 353 은 서애계와 학봉계가 학파의 주도적 계파로서 공동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 만 유지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서애계가 병산서원을 주된 무대로 하여 결속하는 동안 호계서원 에는 학봉계가 상대적으로 강화된 영향력을 행사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 다. 물론 여기에는 서애계가 豊山을 중심으로 한 안동의 서부지역 사림을 주 축으로 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학봉계는 臨河를 중심으로 동부지역 사림을 포괄하고 있는 데다, 병산서원과 호계서원이 안동의 서부와 동부 양극에 위 치하고 있어 거리상 서애계의 호계서원 출입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던 지정 학적 원인도 작용하고 있었다.94) 이에 따라 학봉계는 호계서원을 배경으로 계파의 세계관을 재정립함과 동시에 정치 사회적 결집을 위한 토대를 본격 적으로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중심에는 李象靖과 그 문인들이 자리 잡 고 있었다. 17세기 이후 서애계는 柳元之 柳世鳴 柳後章 柳台佐 柳光睦 등으로 이어지는 家學을 배경으로 퇴계학의 正體性을 보장하는 이론적 심화에 주로 매진하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그러한 경향의 저변에는 율곡학과의 차별화를 통해 비교우위를 확고하게 유지하려는 의도가 작용하고 있었지만, 상호 논쟁 을 통해 학문 및 이념의 접점을 모색하려는 의지 역시 없지 않았다. 이에 따 라 그들은 서인세력과 학문적 논쟁을 전개하면서도 정치적 갈등을 최소화하며 상호 공존과 견제를 위한 방안을 마련하는 양상을 보여 주게 되었던 것이다. 그에 비해 학봉계는 張興孝 李玄逸 李象靖 南漢朝 柳致明 등으로 이 어지는 학맥을 발판으로 퇴계학의 實踐性을 위한 논리적 개발에 집중하는 차 별적 양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여기에는 퇴계학의 시대적 합법칙성을 전제로 94) 현재의 호계서원은 임하댐 건설로 인해 댐 입구로 移建되어 있다. 여기서 병산서원까 지의 거리는 약 40km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풍산 풍천에 주로 분포된 서애계가 100여 리나 떨어진 임하에 자리 잡고 있던 호계서원을 집단적으로 출입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따랐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354 退溪學과 韓國文化 第45號 남인의 세계관을 현실에 반영해 정국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의지가 반영되어 있었다. 그들이 李珥의 理氣心性論을 邪論으로 규정한 가운데 서인세력과 공 론대결을 전개하고, 이현일이 1694년(숙종 20) 甲戌換局의 와중에 서인세력 의 탄핵을 받아 실각하는 등 정치적 기복을 겪게 되는 사정도 여기에 있었 다.95) 그러나 이상정이 퇴계학파의 理氣心性論을 종합적으로 정리해 理氣彙編 을 저술하는 과정에서 理 氣의 分開와 渾淪을 포괄적으로 수용하는 相須相 待說을 제시하게 되면서96) 학봉계의 현실인식과 대응자세는 다소 완화되는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물론 그러한 배경에는 정치세력의 調劑를 골자로 한 英 正祖의 蕩平策과 보조를 같이하려는 의지가 작용하고 있었지만, 정계에 서 소외된 남인세력에 우호적 자세를 보인 正祖의 즉위를 계기로 한 그들의 정국주도에 대한 기대가 반영된 측면도 있었다. 그의 조카 李㙖가 壬午義理를 제기한 영남만인소를 주도하게 되는 것도 그와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이러 한 그들의 행보는 결국 퇴계학파 남인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향촌에서 계파의 결속을 통한 공론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학봉계가 이상정을 정점으로 학풍을 재정립하며 호계 서원을 발판으로 결속할 수 있는 매개가 되었다. 이상정은 退溪書節要 를 편찬하며 퇴계학의 본질을 구명하기 위한 토대를 구축할 뿐만 아니라, 이황 이 김성일에게 써준 題金士純屛銘 의 의미를 해석하여 屛銘發揮 를 저술한 데 이어 聯芳世稿 와 더불어 鶴峰集 續集 편찬을 주도함으로써 학봉계의 세계관을 정립하려는 시도를 보였다. 이는 서애계가 유성룡의 학문을 토대로 95) 설석규, 퇴계학파의 분화와 병호시비(Ⅰ) 屛派 虎派의 세계관 형성과 분화, 한 국사상의 재조명, 한국국학진흥원, 2007. 96) 금장태, 퇴계학파의 리기론, 철학사상 13, 서울대철학사상연구소, 2001.

退溪學派의 分化와 屛虎是非(Ⅱ) 355 독자적 세계관을 정립한 것과 비교해 학봉계의 이론적 체계가 상대적으로 취 약한 것으로 판단한데 따른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여기에는 그가 김성일이 이황에서 연원하는 旨義를 내밀하게 單傳했다97)고 선언한 바와 같이 거기에 는 계파의 정통성을 보장받으려는 의도도 함축되어 있었다. 아울러 그는 蘇湖 의 高山書堂뿐만 아니라 泗濱 虎溪 魯林書院 등지에서 近思錄, 大學, 太極圖說 등을 講論하며 계파의 저변을 확대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 다. 이로써 서애계의 屛論과 비견되는 학봉계의 虎論이 湖學을 배경으로 이론 적 기반을 갖추며 새롭게 정립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98) 더구나 정조 20년(1796) 추진된 金誠一 柳成龍 鄭逑 張顯光 四賢의 문묘종사 운동의 과정에서 벌어진 序次是非는 학봉계가 호계서원 운영을 주 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당시의 종사운동은 星州 善山을 비롯한 경 상우도 지역의 사림들이 주도했다. 그들은 정구와 장현광의 문묘종사 운동을 추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자 김성일과 유성룡을 포함해 공동으로 종사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안했다. 여기에 서애계 학봉계가 동의하여 종사운동이 추진 되었는데,99) 疏本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정구 장현광의 이름이 김성일 유 성룡의 앞에 있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에 대해 학봉계와 서애계가 항의하여 年歲를 기준으로 정함으로써 김성 일 유성룡의 이름이 앞으로 옮겨지기는 했지만 그들의 서차는 그대로 두었 다. 여기에 서애계가 다시 이의를 제기했지만, 年歲를 우선해야 한다는 원칙 을 고수하는 경상우도 사림과 학봉계의 강력한 주장에 밀려 실현되지 못했 97) 大山集 권44, 序 鶴峰先生續集序 退陶老先生 倡明絶學 以啓斯道之傳 一時及門之士 與被成德達材之化 而鶴峯金先生 蚤歲聞道 亟蒙師門之奬詡 卒得其淵源授受之旨 其單傳 密付之意 蓋有諸子所不能與聞者也 98) 권오영, 조선후기 유림의 사상과 활동, 돌베개, 2003. 99) 廬江顚末 仁, 純祖大王 乙丑 冬 先是 江右士林 以寒旅兩先生請廡事 累次叫閽 至承 溫批 奧在正廟丙辰 幷請鶴厓兩先生

356 退溪學과 韓國文化 第45號 다.100) 그러자 서애계는 서차를 바꾼 학봉계의 처사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서차시비가 재발하는 순조 5년(1805)까지 10년 동안 호계서원을 출입하지 않게 되었고,101) 그것이 학봉계가 호계서원 운영을 주도하며 호파의 토대를 구축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학봉계의 호계서원을 무대로 한 호파의 형성과 운영의 주도는 서 애계를 배제한 배타적인 방향으로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호계서원이 이황을 주향으로 하고 유성룡과 김성일을 배향하고 있는 한 학문적 계보화도 그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다시 말해 서애계와 학봉계는 다 같 이 이황에서 유성룡 김성일로 연결되는 계보를 학파의 적통으로 간주한 가 운데 거기에서 각각의 세계관을 토대로 분화되었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 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학봉계가 호계서원을 중심으로 결속하며 호 파를 형성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서애계의 영향력이 사라진 것을 의미하 는 것은 아니었다. 이황을 중심으로 유성룡 김성일의 위패가 여전히 봉안되 어 있는 한 호계서원은 병파와 호파의 공존을 보장하는 정점에 자리 잡고 있 었던 것이다.102) 100) 뒤에 서애계는 당시 경상우도 사림들이 後厓鶴 先寒旅 라 한 것을 바로 잡기 위해 年 歲를 제기함으로써 鶴厓를 쓰도록 용인한 것일 뿐 두 사람의 서차를 바꾸는 데 동의 한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廬江志 권2, 續志 請西厓鶴峰兩先生陞廡發論時事實 屛山士林通本院文 丙辰年間 下邑儒生 肆發後厓鶴先寒旅之論 故欲矯其枉 而以年歲序 次曰鶴厓寒旅而已 生等初未嘗深省 而至於近日 則事面自別金溪之人 ). 101) 廬江志 권2, 續志 請西厓鶴峰兩先生陞廡發論時事實 今湖門諸人 創爲先鶴後厓之說 其爲乖謬駭妄 得罪於先賢 已無可論 由是而馴致 金溪人喜 其阿好而附合於湖門 河上人 憤其駭妄 而謝迹於江院 凡十年 102) 병파의 입장을 반영한 廬江志 에는 학봉계를 호파로 표현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 며 대부분의 사안이 김성일의 후손들인 金溪人 내지 이상정의 제자들인 湖門 에 의 해 의도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는 물론 병파와 호파가 균형을 이룬 역학관계를 유지하되 계파간 전면적인 대립으로 극한적인 사태에 이르는 것을 예방 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으로 파악된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특정인의 농간이 퇴계학파 의 분열을 획책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각함으로써 호계서원에서의 그들의 영향력이 훼손되는 상황을 차단하려는 목적도 일정 부분 개재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退溪學派의 分化와 屛虎是非(Ⅱ) 357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봉계는 호계서원의 주도권 장악을 통해 퇴계학파의 대표적 위상을 확보하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그 같은 그들의 시도에 서애계 가 제동을 걸고 나섬으로써 병파와 호파의 대립구도가 설정되어 屛虎是非를 전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결국 19세기 병호시비는 기본적으로 호계서원 에서의 발판을 토대로 주도적 위상을 확고하게 구축하려는 학봉계와, 역학관 계의 균형을 유지한 가운데 영향력을 견지하려는 서애계의 입장이 충돌하면 서 빚어진 鄕戰으로 규정할 수 있다고 하겠다. 호계서원이 병호시비의 중심 에 서게 되는 사정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사실 병호시비는 순조 5년(1805) 호계서원이 주축이 되어 유성룡 김성 일 정구 장현광을 문묘에 배향하기 위한 상소운동을 재차 추진하는 과정에 서 학봉계가 김성일과 유성룡의 序次를 바꾼 사실이 확인되면서 본격화했 다.103) 물론 학봉계는 서차변경의 명분으로 정조대 金麟厚를 문묘에 종사할 당시 年歲를 반영해 먼저 배향된 사람들의 위패 앞에 배치한 사례를 근거로 제시하기는 했지만, 그 근저에는 김성일의 확고한 위상정립을 통해 호계서원 에서의 상대적 우위를 확인하려는 정서의 일단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판 단된다. 아울러 서애계가 거기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선 사실 역시 호계서 원에서의 유성룡 김성일의 位次와 서원의 사액을 청원할 당시 소본의 序次 를 근거로 제시했으나, 그 저변에는 호계서원에서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 려는 그들의 의도가 함축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 같은 상황은 그들이 순조 12년(1812)부터 李象靖의 호계서원 追享을 103) 학봉계는 순조 5년(1805) 영남사림들이 四賢의 문묘종사 청원상소를 위해 上京하여 疏廳에서 疏本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柳喆祚가 序次가 바뀐 사실을 발견해 폭로한 것 을 序次是非의 발단으로 전하고( 廬江顚末 仁, 純祖大王 乙丑 冬) 있으나, 서애계에 서는 순조 6년(1806) 호계서원에서 한 명의 士人이 兩賢의 종사청원을 위한 通文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序次를 바꾸어 기록한 것이 발단이 된 것으로 설명하고( 廬江志 권2, 續志 請西厓鶴峰兩先生陞廡發論時事實) 있다.

358 退溪學과 韓國文化 第45號 비롯해 位牌薦動 여부와 大山實記 발간 등을 둘러싸고 첨예한 갈등을 벌인 것에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104) 이는 이상정의 추향을 매개로 호계서원 에서 배타적 입지를 구축하려는 학봉계의 시도에 대해 서애계가 제동을 걸고 있는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곧 학봉계는 이황으로부터 유성룡 김 성일로 연결된 학통을 이상정이 수렴했다는 점을 앞세워 호계서원이 명실상 부한 그들의 거점이라는 사실을 표방하며 퇴계학파 최대의 계파로서의 위상 을 확고하게 다지는 데 궁극적 목표를 두고 있었다.105) 그러나 호계서원에 유성룡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한 그것은 서애계의 묵인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그들이 이상정의 학통을 유성룡과 김성일에 연결시켜 서애계 의 불만을 일정 부분 해소하려는 모습을 보였다고는 하지만, 서애계를 배제 해 호계서원을 배타적으로 독점하려 한다는 의혹을 불식하기는 충분하지 않 은 것이었다. 서애계가 학봉계의 이상정을 앞세운 일련의 호계서원 장악시도에 제동을 걸게 되는 배경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특히 문묘종사 운동의 과정에서 학봉 계가 주도한 서차의 변경이 위차의 변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의혹은 서애 계의 불안을 증폭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계파의 위상을 역전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그들의 호계서원에서의 완전한 도태 와 맥을 같이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퇴계학파의 주도적 계 파로서의 위상을 견지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서애계로서는 학봉계의 그 같은 시도가 좌시할 수 없는 일로서, 서애계가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들의 갈등과 대립이 장기화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렇지만 이미 서애계가 학봉계와 위패천동 여부를 둘러싼 시비를 두고 104) 이들 시비에 관한 개괄적인 내용은 申奭鎬, 屛虎是非に就いて 靑丘學叢 1-3, 1931을 참고. 105) 권오영, 유치명학파의 형성과 위정척사 운동, 조선후기 유림의 사상과 활동, 돌 베개, 2003.

退溪學派의 分化와 屛虎是非(Ⅱ) 359 屛虎之論 등으로 표현하고 있는 사실은106) 호계서원이 학봉계에 의해 주도 되는 현실을 사실상 인정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는 계파의 차별 화된 현실인식과 대응자세의 방향이 각각 병산서원과 호계서원을 무대로 屛 論과 虎論으로 정립되고, 그것을 토대로 계파의 공론을 형성하며 병파와 호 파의 구도가 설정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호시비에 호계서원이 쟁점으로 부각하게 되는 것은 그것에 대한 배타적 독 점을 통해 확고한 세력기반을 구축하려는 학봉계와, 기득권의 유지를 통해 계파간 세력균형을 도모하려는 서애계의 보이지 않는 역학관계가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병호시비는 호계서원을 학봉계가 주도하는 것이 용인된 가운데 서애계가 유성룡의 위패도 봉안된 점에 근거하여 그들의 배타적 독주 를 견제하는 형태로 전개되고 있었던 셈이다. 2) 大院君의 保合추진과 書院毁撤 高宗의 즉위와 더불어 執政한 興宣大院君은 王室의 위상 및 기능강화를 통한 강력한 개혁의 추진으로 조선왕조의 질서를 재정립하는 데 심혈을 기울 였다. 그 신호탄이 바로 景福宮의 중건이었다. 조선왕조 건국의 상징적 의미 를 지닌 경북궁의 중건은 국가운영의 주체가 戚族이 아닌 王室이라는 사실을 표방하는 것으로, 安東金氏와 豊陽趙氏의 척족에 의한 勢道政權에 정면 대응 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는 그동안 전횡을 일삼던 척족세력을 권력에서 배제하는 대신 강력한 왕권을 토대로 한 전제군주 국가체제로 전환 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었다. 그가 유명무실하게 운영되던 宗親府의 기 능을 정비해 군주 및 자신의 친위조직으로 활용함과 동시에, 戚族의 권력기 반인 備邊司의 권한을 대폭 議政府에 이양한 것도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106) 廬江志 권2, 續志 請西厓鶴峰兩先生陞廡發論時事實 而廟變出 屛虎之論 遂至乖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