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 서 Ⅰ부 사회 : 방학진(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 개회사 : 전기호(경희대학교 명예교수) 축사 기조강연 : 서중석(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 / 04 Ⅱ부 사회 : 허남성(한국위기관리연구소 소장) 제1주제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와 신흥무관학교-교육과정과 군사간부 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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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신흥무관학교와 항일무장독립운동

2 순 서 Ⅰ부 사회 : 방학진(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 개회사 : 전기호(경희대학교 명예교수) 축사 기조강연 : 서중석(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 / 04 Ⅱ부 사회 : 허남성(한국위기관리연구소 소장) 제1주제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와 신흥무관학교-교육과정과 군사간부 양성을 중심으로 / 12 발표 : 김삼웅(전 독립기념관 관장) 토론 : 박환(수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제2주제 1910년대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신흥무관학교 / 29 발표 : 윤경로(전 한성대학교 총장) 토론 : 김희곤(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제3주제 신흥무관학교 이후 독립군 군사간부 양성 / 46 발표 : 한시준(단국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토론 : 한상도(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제4주제 대한민국 국군의 창설과 신흥무관학교의 정통성 계승 / 62 발표 : 한용원(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수) 토론 : 노영기(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종합토론 사회 : 허남성(한국위기관리연구소 소장) 폐회 및 만찬

3 기조강연 3

4 기조강연 민족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신흥무관학교의 위상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 1. 4 신흥무관학교는 독립운동의 주요 방략이었던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을 구체화시켰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자 즉각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는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독립운동 가운데 크게 호응을 받은 것이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 건설운동이었다. 일제와 즉각적으로 무력 항 쟁을 벌이는 것은 그 의기는 장하지만 비현실적이고 무모하기 때문에, 당장에는 독립운동 및 독립군의 기본 역 량과 토대를 배양하고 강화하는데 치중해야 한다는 독립운동 방략이었다.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비밀결사나 지하투쟁 형태로 전개될 수 있었지만,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무단통치로 독 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 건설운동은 국외에서 할 수밖에 없었다.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 건설운동은 적절한 시 기가 도래하면 즉각 일제와 독립전쟁을 벌이겠다는 점에서 실력양성운동이나 준비론과 크게 다르다.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 주창자들은 일제의 침략성을 볼 때 언젠가 중국이나 미국, 러시아와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판단했고, 그래서 그때 한국이 중국 또는 러시아나 미국과 함께 일본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고 독립전 쟁을 전개해 독립을 쟁취한다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독립운동 기지 건설의 초기 활동은 을사조약 강제체결 직후부터 있었다. 이상설 이회영 이동녕 여준 등은 일 제 통감부가 설치되자 국권과 자유를 되찾을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북간도 용정에 학교를 세우기로 합의했다. 1906년 10월경 용정촌에서 문을 연 서전서숙은 민족운동 기지 건설의 효시였다. 그뒤 고종으로 하여금 이상설 등을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하도록 활동한 이회영이 1908년 이상설과 블라디보스톡에서 만났을 때 이상설 은 이회영에게 중국 미국 러시아 등이 일본을 경계하기 때문에 전운이 일어날 것이므로 이에 호응하여 조국 광 복을 기약하자 라고 말했다. 독립운동기지 건설은 비밀결사인 신민회에서도 추진했다. 신민회에는 교육과 산업, 인격도야 등 실력양성을 중 시하는 간부도 있었지만, 양기탁 이동녕처럼 적극 항일투쟁을 강조한 간부들은 국외에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 지를 건설하는 것에 기울어져 있었다. 1910년 8월 일제가 병합조약을 강제할 때 이회영 이동녕 등은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 일대를 답사하여 무관학 교를 세울 장소를 물색하고 돌아왔다.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는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 외에도 몇 군데 더 있 었다. 이상설 이승희 등은 나라가 망하기 전에 러시아와 중국 국경지대에 있는 흥개호 부근 봉밀산에 한흥동을 건설하고 한민학교를 세웠다. 이동휘와 그의 동지들은 만주 왕청현 라자구에 비밀 군사학교를 세웠다. 박용만 등 미주 동포들도 군사학교를 세워 미래의 독립군을 양성했다. 그러나 신흥무관학교만이 1911년에 설립된 이후

5 10년 동안 쉬임없이 많은 인재를 키워냈다. 특히 3 1운동 직후에는 한반도 각지와 중국 각지에서 뜻있는 많은 젊 은이들이 몰려들어 유하현 고산자에 본교를 새로 크게 지어야 했고, 통화현 쾌대무자에도 분교를 세워, 합니하 무관학교와 함께 수많은 젊은이들이 무관 교육을 받았다. 신흥무관학교가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의 중심이 된 것은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기념사업회 창 립 기념강연에서도 밝힌 바대로, 서울에서 이회영 6형제와 이동녕 이장녕 등 여러 지사와 무관, 안동에서 이상 룡 김동삼 등 혁신유림 지사, 선산에서 의병장으로 처형당한 허위의 대소가 등 쟁쟁한 인물이 많이 모였고, 망명 자들이 단결이 잘 된 데다가 이석영 같은 재력가가 있었던 점, 서간도는 산이 많고 땅이 척박한 데다가 평안도 등 지에서 이주한 주민들이 거의 다 가난한 소작농이어서 계급 분화가 약했고, 주민들의 동질성이 강했던 점이 작 용했다. 그와 함께 신흥무관학교가 왕성히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조국을 찾으려는 망명자 결사 경학사와 서간도 일 대의 주민들이 참여한 강력한 주민자치조직인 부민단, 한족회가 강력히 뒷받침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신흥무 관학교는 교장 교감 교관 교사가 학생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열정적이고 헌신적으로 무관 양성에 혼신의 힘을 다 쏟았다. 3 1운동 이후 신흥무관학교에는 일본 육사 46기로 현역 장교였던 지청천과 역시 일본육사를 나온 장교 인 김경천 신팔균 등이 최신 병서를 가지고 합세해 기세를 올렸다. 신흥무관학교가 지속적으로 명성을 갖고 영 향력을 갖게 된 데에는 주로 이 학교 졸업자로 조직된 신흥학우단의 활동에 힘입은 바가 컸다. 신흥무관학교 졸 업생들은 서간도 각지에 학교를 세우는 등 서간도에는 많은 학교가 있었다. 한 기록에는 20호 또는 몇십호만 거 주해도 소학교를 세워 의무교육이나 다름없이 이주민들 자녀를 가르쳤다고 쓰여 있다. 1914년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수년간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 건설에 매진해온 신흥무관학교 관계자, 졸업생들은 벅찬 심장의 고동을 느끼고 있었다. 드디어 고대해 마지 않았던 중일전쟁이 발발할 가능성 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연합국에 가담했고, 중일전쟁이 일어나지 않자, 혈전 준비에 모든 것을 바쳤던 신흥무관학교 관계자들과 졸업생들은 독립을 향한 찌를듯한 강렬한 의기를 소화, 조절 하기 위해, 제2 군영으로 백두산 서쪽 쏘베차에 백서농장을 세웠다. 백서농장은 신흥무관학교의 성가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 다. 김동삼을 장주로 하여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 주로 참여한 백서농장은 4년 동안 세상을 등지고 인적 미 답의 메마른 고원에서 필설로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으면서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지극히 힘들 고 고된 훈련을 했다. 이들중 채찬( 白 狂 雲 ) 등 상당수가 3 1운동 후 서로군정서에 들어갔고 통의부 참의부 정의 부에서 활약했다. 독립운동가들이 기다렸던 일본과 중국과의 전쟁은 1931년 만주사변 의 형태로 터졌다. 만주에서건 상해 등 중국관내에서건 독립운동가와 독립군은 새로이 전열을 가다듬고 독립운동 단체의 단결에 힘을 쏟았다.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에 독립운동전선은 더욱 투지를 다져나갔다. 1941년 일제가 무모하게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기 습하자 중경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즉각 일제에 선전포고를 하고 민족혁명당 등 좌파를 받아들여 광복의 기반을 튼튼히 하고 넓혔다. 2. 신흥무관학교는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암울하고 무기력했던 1910년대에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민족의식을 고 취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일제가 무단통치를 하던 1910년대 독립운동의 간고함과 만주에서 펼 쳐졌던 근대적 민족의식을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 독립운동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서 전개되었는가를 간단히 언급해둘 필요가 있다. 5

6 6 독립운동 하면 만주나 상해가 떠오를 정도로 독립운동은 국내 지하투쟁이나 비밀결사 활동을 제외한다면 주 로 국외(해외)에서 전개되었다. 인도나 베트남 등 다른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이 주로 국내에서 있었던 것을 볼 때 우리의 독립운동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영국은 인도에서 간디나 네루의 민 족(독립)운동을 용인했지만, 일제는 한국의 독립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 철저히 탄압하기만 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은 일제강점기에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등 근대사회에서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적 권리가 없었다. 그 점은 1920년대 문화통치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3 1운동이건 6 10만세운동이건 광주학생운동이건 모두다 불법이었다. 아리랑 의 주인공으로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생도였던 김산(본명 장지락)은 독립운동을 하는 한국인은 3,4개 의 국가를 가지고 있으며, 각기 다른 지역에서 선혈을 뿌리고 있다고 토로했지만, 독립운동은 만주, 산해관 안쪽 의 중국, 연해주와 시베리아, 국내, 일본, 미주 등지에서 각각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만큼 간난신고가 컸고, 그 지역 주민들로부터 언제 어떠한 위해를 받을지 알 수 없는 위험한 상황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는 점에서도 인 도 등 다른 지역의 독립운동과 크게 다르다. 지극히 어려운 상황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지만, 한국인은 독립군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참으로 대단 했다고 볼 수 있다. 세계에서 1930년대까지 독립군이 있었던 지역은 아주 드물다. 지금까지 한국인이 얼마나 어 려운 조건 속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는가를 일별했지만, 독립운동을 펼치던 시기 중에서도 가장 암담했던 시기 가 3 1운동 이전의 암흑기로 불리는 1910년대였다. 일제가 무단통치를 자행했던 국내와 거의 절연되어 있었고 어 떤 외부적 지원도 받기가 어려웠던 시기였다. 이 때문에 3 1운동 이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활발히 전개되었던 독립운동과 달리 1910년대에는 주목할만한 독립운동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 점에서도 1910년대에 한시도 쉬지 않고 무관 양성에 진력했던 신흥무관학교 는 우리 역사에서 소중한 위치에 있다. 근대적 민족의식도 1910년에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고 한국인의 독립의식에 대해 몹시 경계를 했기 때문에 국 내에서는 확대되기는커녕 오히려 크게 위축되었다. 대한제국 출범 직후 몇 종류의 애국가나 독립신문 등 언론의 논조를 볼 때 1900년 이전에도 근대적 민족의식이나 국가의식이 약하지만 있었다. 그렇지만 민족 이라는 용어가 슈미드의 연구에 따르면 1900년 이후에 등장했고, 특히 1907년을 전후해서부터 계몽운동과 관련해 많이 사용 되는 것을 보면 근대적 민족의식은 이 시기부터 신지식층 또는 애국지사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것으로 보인다. 민족의식이나 민족주의는 대한매일신보와 단재 신채호에 의해 열렬히 고취되었다. 신채호는 한국인이 항상 애국 국가 민족 이란 말을 가슴에 새겨두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그것은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그는 독사신론 이순신전 을지문덕전 최도통전 등을 지었고, 그것을 여성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한글판도 만들었다. 그는 아( 我 ) 가 확립되지 못한 채 모방을 일삼는 외국 유학생, 세계주의자, 동양평 화론자, 문화론자를 통렬히 비판했다. 그렇지만 민족의식은 1910년 일제의 강점에 의해 현저히 위축되었다. 일제 는 친일매국단체인 일진회조차 해산시킬 정도로 결사를 극도로 제한했고,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철저히 억 압했다. 3 1운동 이전 한반도는 칠흑같은 암흑의 반동시기였다. 독립이란 말을 사용할 수 없었고, 민족의식을 전 파할 수 있는 매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염상섭은 초기의 대표작 묘지송 에서 3 1운동 이전의 한국사회를 아무 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 묘지와 같은 사회, 절망이 감도는 무기력한 사회로 묘사했다.( 墓 地 頌 은 나중에 萬 歲 前 으로 제목을 바꾸었음) 지사들은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갔다. 3 1운동 이전 1910년대에 민족의식 또는 민족정신이나 동포애, 애국심은 서간도와 북간도, 연해주에서 맥을 이 어갔다. 1910년대에 만주지방은 근대적인 민족의식이 크게 위축되었던 국내와는 다르게 망명자 사회이기 때문 에 더욱 그러했지만 강렬한 민족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북간도의 경우 서전서숙의 영향을 받은 명동학교 광성학

7 교 창동학교 북일학교 등에서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교육운동을 펼치며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불어넣어주 었다.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은 거처하는 곳 어디에서건 민족지사들로부터 민족정신을 배웠지만, 특히 학교 생활은 민족의식과 연결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아침 조례시간에 애국가 제창이 끝나면 여준 교장이 양쪽 눈에 망국한 의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훈화를 하였고, 혹한에도 교사들은 홑옷에 초모를 쓰고 애국정신을 고취시켰다. 군사 교육시간은 군사시설이나 무장이 부족했기 때문에도 정신교육을 많이 했다. 신채호는 애국심을 심어주는데 역 사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고 거듭 강조했는데, 신흥무관학교 역사교재로 사용된 대동역사 를 저술한 이상룡은 역사는 국가의 체통을 보존하고 국민의 정신을 격려하는 학문이라고 역설했다.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은 나라도 없어지고 민족도 죽은 암담한 상황에서 독립의 깃발을 높이 들고 나라를 다 시 찾을 사상을 떨치게 하려면 민족의식을 제대로 갖게 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학생들은 교가 칼춤 추 고 말을 달려 몸을 단련코 / 새로운 지식 높은 인격 정신을 길러 / 썩어지는 우리 민족 이끌어내어 / 새 나라 세 울 이 뉘이뇨 를 부르며 민족적 사명감을 불태웠다. 신흥무관학교 교가는 학생들만 부른 것이 아니라 서간도 주 민들도 아이들도 즐겨불렀다. 자라나는 아이들은 신흥무관학교 교가, 용진가 와 같은 독립군가를 힘차게 부르 며 민족정신을 길렀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로 구성된 신흥학우단은 1.나는 국토를 찾고자 이 몸을 바쳤노라. 2.나는 겨레를 살리려 생명을 바쳤노라. 3.나는 조국을 광복하고자 세사( 世 事 )를 잊었노라. 4.나는 뒤의 일을 겨레 에게 맡기노라. 5.너는 나를 따라 국가와 겨레를 지키라 는 선열의 시범 다섯가지를 소리 높이 외치며 조국과 겨 레에 대해 신명( 身 命 )을 바칠 것을 다짐했다. 서간도에는 애국열, 동포애,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데 또 하나의 유력한 무기가 있었다. 신흥학우단이 신흥무 관학교와 분교, 지교, 부민단-한족회에서 견인차이자 중추신경과 같은 활약을 하게 된 데는 독립정신을 고취하 며 계몽활동을 편 미디어로서 신흥학우보의 중요한 역할이 있었다. 월간 또는 격월간으로 발간된 신흥학우보는 서간도 주민들의 교육잡지로서 주민들과 신흥무관학교, 부민단-한족회 등의 자치단체와의 관계를 공고히 하는 데 이바지했다. 서간도를 비롯해 만주에서는 민족적 상징도 발전시켰다. 신흥무관학교 교가에는 우리 우리 배 달나라 라는 말이 나오지만, 단군은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데 대단히 중요한 상징적 존재였다. 신흥학우단의 선 열의 시범 에 나오는 조국 이라는 용어는 근대적 국가 관념을 갖게 했다. 백두산은 만주에 사는 한국인에게 의미 가 큰 상징이었다. 1914년 충천하는 투지를 조절 하기 위해 제2군영으로 세워진 군영의 이름이 백두산 서쪽이라 는 뜻을 가진 백서농장 인 것도 상징적이다. 8월 29일 국치일에는 학생이건 어린아이건 노인네건 부녀자건 모두다 신흥무관학교에 모였다. 그들은 경술년 추팔월 29일은 / 조국의 운명이 다 한 날이니 / 가슴을 치고 통곡하여라 / 자유의 새 운( 運 )이 온다 는 노래를 목 이 터져라 부르며 동포애를 다졌다. 음력 10월 3일 개천절에도 신흥무관학교 운동장이 꽉 차게 모여 화려강산 동( 東 )반도는 / 우리 본국이요 로 시작하는 애국가를 부르며 기념행사를 크게 가졌다. 신흥무관학교 학생이나 신흥학우단원, 망명자와 서간도 이주민들이 항상 민족의식으로 충만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불현듯 절 망 이라는 병이 엄습하곤 했다. 만리이역에서 절망이라는 요괴와 끝없이 싸움을 벌이는 것은 전망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망명자 사회에는 쓸쓸함과 허전함, 끝없는 불안함, 애처러움과 서글픔이 고향에 대한 상념과 함께 실타래처럼 얽혀 있었다. 3. 신흥무관학교는 근대사나 민족운동사, 독립운동사, 독립군전쟁에 지울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7

8 8 신흥무관학교는 서전서숙 창설 정신을 더욱 발전시켰고, 신흥 의 앞머리 글자인 신 은 신민회를 상징하는 뜻을 가지고 있듯 신민회의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이 구체화된 것이기도 했다. 신흥무관학교는 신민회의 결의를 이어받았다는 점에서도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지만, 대한제국 무관학교와 의병의 맥을 이어받았다는 점 에서도 민족사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아관파천을 할 수밖에 없었던 나약한 나라를 새로 일으켜 세우기 위해 광무제(고종)는 1897년 국호를 대한제 국으로 바꾸고 여러 가지 개혁을 했다. 광무제는 특히 국방력의 중요성을 체험으로 뼈저리게 인식해 군제 개혁 에 국력을 기울였던 바, 시위대 친위대를 연대 병력으로, 지방 주둔 진위대를 진위대대로 개편함과 동시에 1898 년에는 제대로 된 무관학교를 통해 장교들을 육성시키고자 했다. 이때부터 일본이 노골적으로 간섭하기 이전인 1904년까지의 대한제국 무관학교가 신흥무관학교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충무공 이순신의 후예로 신흥무관학교 교장이었던 이세영은 대한제국 장교였고, 교관이었던 이장녕 이관직 김창환 양성환은 대한제국무관학교 졸업생이었다. 3 1운동 이후 가담한 신팔균은 1903년에 무관학교 속성과를 졸업했다. 신흥무관학교가 속성과와 본과를 둔 것도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이어받은 것이지만, 대한제국무관학 교 교과목이었던 전술학 군제학 병기학 축성학 지형학 위생학 마학( 馬 學 ) 외국어 중 마학 등 당시 여건상 도 저히 하기 어려운 것을 제외하고는 신흥무관학교 무관 교육과정에 넣은 것도 신흥무관학교가 대한제국무관학 교를 이어받았음을 말해준다. 주지하는 대로, 의병의 항일전쟁은 1907년 8월 대한제국군대가 해산될 때 대거 군 인들이 의병에 가담하면서 전력이 크게 확충되었다. 한 연구에 따르면 1907년 8월 이후부터 1910년까지 의병장 430명 중 군인 출신 의병장이 홍범도 연기우 민긍 호 김규식 등 87명에 이른다. 이중 장교 출신이 18명인데, 영관급 장교 3명을 제외한 위관급 장교 15명이 무관학 교 출신 장교로 생각할 수 있고, 하사관 또는 병졸 출신의 의병장들은 군대에서 위관급 장교의 통솔하에 있었 으므로, 대한제국 무관학교 출신들이 의병들의 항일전쟁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임재찬, 구한 말 육군무관학교 연구 ) 신흥무관학교 관계자나 교관, 생도들은 3 1운동 이후 독립군 활동,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3 1운 동 후 신흥무관학교와 직접 관련 있는 군대로는 의용대와 교성대가 있다. 3 1운동 직후 부민단을 확대해 조직 한 한족회와 쌍둥이단체로 탄생한 것이 군정부였다. 군정부는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지자 그것을 옹 호하였고, 명칭도 서로군정서로 바꾸었다. 서로군정서 산하에 있었던 독립군이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이 많이 가 담한 의용대이다. 의용대는 국내로 들어가 일제 경찰대와 교전하는 등 주로 유격활동을 벌였는데, 나중에 서로 군정서 등이 통합하여 통의부를 조직할 때 그 기간병력이 되었다. 교성대는 신흥무관학교 생도들로 구성되었는 데, 교관 지청천이 이끌었고, 병력은 약 4백명 정도였다. 일제가 만주에서 독립운동 근거지를 제거하기 위해 첫 번 째 중요 조치로 중 일 합동수색대 를 1920년 5월에 서간도로 출동시키자 교성대는 백두산 아래 안도현으로 이 동했다. 신흥무관학교 교관, 생도들의 독립군 활동은 청산리전쟁에서부터 본격화되었다. 1920년대에 전세계 독립전쟁 사에서 청산리전쟁과 같은 큰 규모의 전쟁은 찾아보기 힘든데, 일반적으로 청산리전쟁은 대한군정서-북로군정 서가 한 것으로만 생각하지 신흥무관학교가 깊이 관련되어 있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 1919년 8월 이후 대한군정서가 만들어질 때, 대한군정서는 많은 것을 신흥무관학교쪽이나 서로군정서에 의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흥무관학교 교관 이장녕을 참모장으로 초빙했고, 신흥무관학교 교관 이범석과 졸업생 김훈 오상세 박영희 백종열 강화린 최해 이운강 등을 교관으로 초빙하고, 신흥무관학교 교재를 공급받아 사 관연성소를 설립했다. 그뒤 신흥무관학교 교관, 졸업생들은 일선부대의 핵심직책을 맡아 청산리전쟁에서 싸웠 다. 이장녕이 참모장, 박영희가 사령부 부관 및 연성소 학도단장을, 이범석이 연성대장을 맡은 외에도 김훈 백종

9 열 강화린 오상세 이운강이 종군장교와 소대장, 학도단 제2학도대 제3구대장과 제1중대장서리, 제4중대장, 소대 장서리 등을 맡아 일본군과 싸웠고, 생도인 최해 신형섭 등 적지 않은 신흥무관학교 관련자들이 청산리전쟁에 서 일역을 맡았다. 뿐만 아니라, 지청천이 이끈 교성대는 청산리전쟁의 또 한 명의 주역인 홍범도부대의 지원을 받아 이 전쟁에 참여했다. 그 뒤 홍범도부대 약 6백명은 지청천의 교성대와 통합해서 활동하다가(총사령 홍범도, 부사령 지청천), 밀산 부근에서 서일을 총재, 김좌진 홍범도 조성환을 부총재로 해서 대한독립단이 조직되었을 때, 참모총장 이장녕, 여단장 지청천, 중대장 김창환 김경천 광선 등 군 지휘관 직책을 신흥무관학교 교관이나 졸업생이 맡았다. 독립군에서 신흥무관학교 생도와 관련자들이 활동한 사실은 이루 다 매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들은 서 로군정서 통군부 통의부 정의부 및 참의부 외에도, 조선혁명군 대한독립군 고려혁명군 등 여러 독립군 단체에서 활약했다. 특히 1940년 9월 17일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소속 군으로 광복군이 조직되었을 때, 지청천이 총사령관, 이범석이 참모장과 제2지대장, 신흥무관학교 생도였던 김학규가 제3지대장을 맡은 것은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다. 신흥무관학교 생도였고 임시정부에서 국무위원과 군무부장(국방장관)이었던 김원봉은 조선의용대원으 로 구성된 광복군 제1지대를 통할 지휘했다. 또한 1920년대에 수많은 의열투쟁을 전개해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의열단( 義 伯 또는 단장 김원봉) 단원들도 신흥무관학교를 다녔다. 1919년 11월 만주 길림성 파호문 밖에서 13 명이 의열단을 결성했을 때, 김원봉 이종암 등 8명이 신흥무관학교 생도였는데, 이들은 신흥무관학교에서 급진 파였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은 독립군 활동, 혁명사업, 교육사업에 헌신하여 남북만주, 중국 관내, 시베리아 등지에 그들의 족적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신흥무관학교가 독립운동에 끼친 자취는 1919년 2월경에 발표된 대한독 립선언서 민족대표 39인 가운데 김동삼 여준 이동녕 이상룡 이세영 이시영 이탁 허혁 등 신흥무관학교 관련 자들이 8명이나 된다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상룡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대통령제에서 국무령제로 바뀔 때 초대 국무령으로 모셔졌다. 이회영은 헤이그 밀사사건에도 관여했지만, 3 1운동 직전 고종 망명을 기획했고, 아나키스트운동의 원로로 폭탄투척에 의한 철 저항일과 상부상조에 의한 인류사회 건설에 매진했다. 이동녕은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 조직되었을 때 초대 의장이었고, 그뒤 임시정부 국무총리와 국무령, 주석, 국무위원을 역임하면서 사거할 때까지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이시영 또한 임시정부의 법무총장 재무총장과 국무위원을 역임한 임시정부의 증인이다. 김동삼은 1923년에 독립운동의 대방침을 정하고 독립운동 기구를 개편하기 위해 열린 국민대표회의 의장이었으며(부의장 안창호, 윤해), 통의부 중앙집행위원장, 정의부 참모장, 만주지역 민족유일당촉진회 위원장으로 활약했다. 윤기섭 은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이었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 의 주인공 김산으로 유명해진 장지락은 신흥무관학교 생도로 혁명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신흥무관학교 관련자들은 해방 후에도 활동이 많았다. 이중 정부에 참여한 인물들만 꼽아보자. 이시영은 초 대 부통령으로, 독립운동가답게 이승만대통령의 독주를 비판하였고, 국민방위군사건이 일어나자 항의의 표시 로 사임했다. 윤기섭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부의장을 지냈고(의장 김규식), 2대 국회의원이었다. 지(이)청천은 초 대 무임소장관과 제헌 국회의원, 2대 국회의원이었다. 이범석은 초대 국무총리이자 국방장관이었고, 자유당 창당 시 부당수였다. 신흥무관학교 초기 졸업생인 변영태는 1950년대에 외무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냈다. 이처럼 신흥 무관학교는 민족사, 독립운동사에서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커다란 자취를 남겼다. 신흥무관학교 100주년을 맞 아 군은 독립운동의 정신을 이어받는 문제를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사관학교의 경우 대한제국무관학 교 신흥무관학교의 맥을 이어받고 독립운동사 독립군사가 교육되어야 할 것이다. 9

10 10

11 발표문 11

12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와 신흥무관학교 교육과정과 군사간부 양성을 중심으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 1. 대한제국의 무관학교 최초의 장교양성기관 무관학교 12 조선왕조는 임진왜란(1592~1598)과 병자호란(1627)이라는 전대미문의 병란을 겪고, 제17대왕 효종이 집권하면 서 북벌( 北 伐 ) 계획이 추진되었다. 효종은 반청 척화파의 인물을 등용하여 북벌을 준비하면서 먼저 남한산성의 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수어청( 守 禦 廳 )의 군사력을 정비하는 한편 어영청군( 御 營 廳 軍 )을 크게 증가시켰다. 종래 약 7천 명의 3개월 근무 비상비군으로 구성되어 있던 것을 2만 1000명으로 증가시키고 국왕의 친병( 親 兵 )인 금군( 禁 軍 )을 전부 기병화( 騎 兵 化 )하는 한편 훈련도감군 어영청군의 기병도 강화하였다. 또한 의주부윤 임경업을 시켜 명나라와 함께 대청전선( 對 淸 戰 線 )을 구축했다. 하지만 청나라가 명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키면서 대륙을 지배하게 되고, 효종이 10년만에 사망하면서 북벌계획과 군사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청국이 17세기 동아 시아 최강자로 부상하게 되면서 조선의 대청 복속 관계가 심화되고, 따라서 군사력의 강화는 청국에 대한 도전 으로 인식되어 엄두도 내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청국은 19세기에 들어 구미 자본주의 세력이 급속히 밀려들 고, 아편전쟁(1840~1842) 이후 열강에 의해 불평등조약을 강요받게 되었다. 태평천국혁명 등 민중의 봉기는 열강 의 무력개입으로 압살되어 차츰 반식민지 상태로 빠져들었다.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청일전쟁 에서 청국이 패배하면서 조선은 체제위기와 함께 안보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에 앞서 고종은 1881년 일본 공사의 권고에 따라 궁궐 내에 소규모의 별기군( 別 技 軍 )을 창설했다. 5군영으 로부터 건장한 80명을 뽑아 무위영( 武 衛 營 )에 소속케 하고 이를 별기군이라 이름하였는데, 이것이 중앙에 창설 된 최초의 신식군대였다. 교관에는 서울주재 일본공사관 소속 육군 공병 소위 호리모토( 掘 本 禮 造 )를 초빙하고, 훈련은 모화관에서 실시했다. 일본인 교관에 의해 신식군사훈련을 받게 되고 이들은 황실경호부대인 무위소( 武 衛 所 )에 소속되었다. 별기군에는 신식무기를 지급하고 급료나 피복지급 등에서 구식군대보다 월등한 대우를 하 였다. 이로 인해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임오군란은 별기군과의 차별대우에서 발생했지만 결과는 비참하게 전개되었다. 3천명 병력을 이끌고 조선에 상륙한 청국의 원세개( 遠 世 凱 )는 이 난의 책임을 물어 대원군을 톈진( 天 津 )으로 납치해갔으며, 조선의 군부대 편성을 청국식으로 바꾸었다. 일본은 조선정부를 강력히 위협하여 손해배상과 제물포조약을 맺도록 했다. 이 조 약으로 일본공사관에 일본경비병이 주둔하게 되고, 일본군대가 정유재란 이후 철병한지 294년만에 공식적 으로 한반도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일본군은 1910년 한국병탄과 36년간 식민통치의 핵심적 배경이 되었다.

13 1888년 최초의 사관학교라 할 연무공원( 鍊 武 公 院 )이 설치되었다. 연무교관은 미국인 다이 준장, 커민스 대령, 리 소령 그리고 린스 테드 대령 등이 주로 담당했는데, 교육의 성과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1) 한반도에서 러시아와 일본이 어느 정도 세력균형이 이루어지고 있던 1897년 고종은 광무개혁을 추진했다. 황 제의 통치권을 강화하기 위해 군제( 軍 制 )를 근대적으로 개편하여 황제가 육ㆍ해군을 친히 통솔케 하고, 중앙과 지방 각 군대의 지휘ㆍ감독권을 가진 원수부를 창설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조처는 어디까지나 황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서 국방력이나 국가안보와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국방력이나 치안유지가 얼마나 허술했는지는 1898년 1월 5품 최웅( 崔 雄 )이 고종에게 올린 상소에서 잘 드러난다. 갑신년에 폐하가 도성을 떠나 변란을 피해 갈 때 한 명의 호위군사도 없었으며 갑오년에 일본군이 대 궐을 침범했을 때도 저지하는 군사가 한 명도 없었으며, 을미년에 대궐로 쳐들어온 역적 군사들의 화가 황후에 게 미쳤어도 저지하지 못하였습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용단을 내리시어 지휘체계를 엄정히 하여 장신 이하 지휘관으로부터 대오에 편성된 군사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군제에 따르게 하십시오. 2) 고종은 열강의 위협으로 국기( 國 基 )가 위협받게 되면서 1896년 1월 11일 무관양성기관으로 무관학교관제 (칙 령 제2호)를 반포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무관학교 설치의 관제로서 이 날을 무관학교 설치일로 볼 수 있 다. 3) 무관학교의 설치목적, 구성, 운영방법 등을 명시한 무관학교관제 는 본문 20개 조항을 포함하여 총 24조로 구성되어 있다. 교장은 군부대신에 예속케 하여 지휘체제를 갖추고, 교장을 포함하여 19명의 직원과 약간 명의 통역관을 둘 수 있도록 하였다. 1인의 교장을 정점으로 부관 1, 의관 1, 교두 1, 교관 3, 조교 8, 번역관 2, 주사 2, 전어생( 傳 語 生 ) 약간인으로 되어 있다. 4) 이와 같은 조직을 기반으로 이 해 1월 15일 군부대신은 학생모집령을 공 포하였다. 중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인민 중 년 20~30세까지의 남자. 2 체격은 신장 5척 이상 체질의 건강한 사람 3 학과는 한문으로 자기의 의견을 진술할 만한 자. 4 시험 후 급제 중 우등자는 순서에 따라 선발. 5 입학을 원하는 자의 유의 사항. 1. 수학기간은 대략 1년으로 한다. 2. 수학 중 자의로 퇴교하지 못한다. 3. 수학 중 피복과 식료는 관비이며 약간의 용전을 준다. 4. 수학 중 귀성과 휴가를 불허한다. 6 지원자는 무관학교 입학원서ㆍ이력서ㆍ호적등서를 첨부하여 관할 관찰사의 날인을 받아 군부군사국 군사 과로 제출한다. 5) 엄격한 규정에 따라 1월 11일 설립된 무관학교는, 그러나 1개월 뒤인 2월 11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 1) 이동희, 구한말의 군사제도, 한국군제사,169쪽, 공학사, ) 고종실록 권 37, 광무 2년 1월 3일. 3) 관보 4, 제 222호, 건양원년 1월 15일, 23쪽. 4) 무관학교 관제, 참조. 5) 관보 건양 원년 1월 15일 군부광고 제2호 무관학교모집령,(현대문 정리) 13

14 를 옮기는 이른바 아관파천이 발생하고, 따라서 무관학교는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1896년에 입교하 여 1897년에 참위로 임관한 장교 5명이 기록에 보이고 있다. 이들은 1896년 초부터 1897년 초까지 1년 여 기간 동 안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되나 당시 몇 명이 언제 입교하여 어디에서 언제까지 교육을 받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이 5명이 임관한 이후로 무관학교는 모든 기능이 정지된 채 유명무실해진 것은 분명하다. 6) 실질적 무관학교 200명 선발 교육훈련 초기 무관학교가 아관파천 등 정변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다가 1898년 4월 1일 군부대신 이종건이 무관학교 부활 문제를 고종에게 건의하고 재가를 받으면서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개정된 무관학교관제 가 5월 14일 칙령 제11호로 반포되었다. 이것이 실질적으로 대한제국의 무관학교다. 1896년의 관제와 비슷한 내용이었지만 몇 가지 다른 점도 있었다. 20세부터 30세까지의 연령 조항이 18세부터 27세까지로 바뀌었다. 교직원 구성은 교장 1, 부관 1, 교두 1, 교관 4, 의관 1, 번역관 1, 주사 2, 조교 10명으로 합계 21명이었다. 교관과 조교가 약간 명씩 증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무관학교 개정령이 반포되면서 다시 학도의 모집이 시행되었다 년 6월에 200명 모집인원에 1,700여 명이 지원하여 8.5대 1의 경쟁률을 보여주었다. 선발된 200명의 학도들은 이 해 6월 말에서 7월초에 입학시켜 교육ㆍ훈련에 들어갔다. 교육기간은 1년 6개월이었다. 이들의 교육기간에 몇 차 례 무관학교관제가 개정되었다. 군부대신에게 예속케하여 조정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조항과 직원의 연봉 관련, 사비( 私 費 )로 입학을 원하는 자는 50명으로 한정하는 내용 등이 포함되었다. 대한제국이 무관학교를 세운 목적은 교육강령 에 잘 나타난다. 강령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학도가 받아야 할 교육강령 1. 무관학교 교육의 목적은 학도로 하여금 초급무관이 되는데 필요한 학술을 수득케 하여 독학자습에 필요 한 소양을 교수하는데 있다. 2. 따라서 곤난급극에 때와 분규착잡한 때를 당해도 능히 이를 적요하게 처리함은 군인만 한 자가 없으므 로 장교는 군기를 유지하고 단대( 団 隊 )를 규합하여 임기응변함에 더욱 정확한 학습과 민활한 기능을 요 하기 때문에 초급무관에 필요한 기본학술을 교수하여 고상견학한 성품을 양성하고 아울러 장래 장교단 의 교육을 받으며, 혹 각과의 전문학교에 들어가며, 혹 독학자수하게 함으로써 고등학술을 연구할 수 있 는 소질을 갖추게 할 정도의 교육을 실시한다. 3. 이 같은 교육을 위하여 일과 학업의 번간도를 적의하게 배당하되 일과 학업의 묘를 얻기 위하여 강습의 순서를 정해서 시습과 연구와 학리의 요지를 소화하여 응용의 묘미를 요득하게 하는 동시에 후일 이를 능히 활용할 수 있게 한다. 4. 위의 여러 조목의 요의( 要 意 )를 달성하기 위하여 교수 및 훈육을 실시하되 교수 과목은 무술학ㆍ군제 학ㆍ병기학ㆍ축성학ㆍ지형학ㆍ외국어학(불ㆍ독ㆍ영ㆍ청ㆍ러ㆍ일)ㆍ군인 위생학ㆍ병기학 및 마학( 馬 學 )이며, 훈육 과목은 교련ㆍ마술ㆍ체조 및 검술ㆍ군용문장 및 제 근무의 훈모 등으로 규정하였다. 교관이 지켜야 할 교육강령 14 6) 차문섭, 구한말 무관학교연구, 아세아연구 50, 180쪽.

15 1. 교관이 교수하는 데 중요한 것은 그 뜻을 밝혀 마음속으로 요득하게 하고 후일 실시에 착오가 없을 능력 을 배양하는데 있으므로 교관은 마땅히 학도의 소양과 능력을 고려하여 교훈지도하고 활발한 기력을 보 유하여 주밀히 학리를 연마하고 감위한 정신과 확실한 학식을 양성하여 그 응용력의 발달을 기해야 한다. 이러기 위하여 교수는 학과 강수와 응용작업의 두 종류로 나누어 강의하되 학과는 현유한 이론을 피하고 간명적실한 첩령을 취해야 하며, 또 실물과 규범, 도화 등으로 강설의 명료와 이해의 정확을 기하여 학도 의 머릿속에 담겨지도록 해야하며 또 적용 작업은 학도의 기능에 따라 이미 배운 학과 범위 내에서 과제 를 정하여 완급 소요한 지도를 하고 학도는 자근 연구하여 이미 얻은 학식을 응용하고 천품의 양능을 발휘하여 정당하게 학리를 활용하는 길을 알게 하고, 순차로 이미 배운 학술을 들어 이를 실제에 응용하 는 법을 깨달을 수 있는 소양을 얻게 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교관은 학도가 작성한 응용작업의 답안을 수정ㆍ강평하거나, 기타 만반 기회에 겸하여 수사와 속문의 세밀한 것이라도 역시 이를 교정 수치해야 하고 필기는 반드시 필요한 것만 지적하여 시켜서 사상 의 연계로 이해를 방해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2. 교육에 있어서는 학도들이 이미 수학한 여러 과목을 교정 중보하여 초급 사관된 자가 실체 소부대를 교 도 지도할 능력을 양성하는데 있으므로 조련을 위하여 무술학 강습을 비보하고 또 기술과 함께 학도의 체육에 적합하게 전학기간을 나누어 교육하되 초급사관됨에 족한 기능을 연성하게 해야 한다. 군인정신의 강조 장교의 적부는 학식과 기능도 중요하지만 군인정신으로 학식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에 학도에게 항상 덕의 를 장려하고 정기를 고무하여 충군애국의 본의를 양성하여 군인의 지조를 도야 성장하도록 하고 또 군은 무투가 주 임무이기 때문에 군사학 교육에 있어서는 무투동작에 적도한 독단전행을 허용하며 공격정신의 발달을 장진하며 지휘통일 동작의 공동을 요구하고 장차 활발 유위한 장교가 되도록 양성한다. 7) 무관학교의 목적은 초급장교의 양성에 있었다. 따라서 교육 과목은 어디까지나 군사학 관련이 중심이 되었지 만 일반교양 과목도 포함되었다. 무관학교 교관들은 담당 과목의 책임을 맡아서 전문으로 가르쳤다. 당시 무관 학교 교관이었던 어담( 魚 潭 )은 그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모든 교관은 담당과목이 있는데 김교 원( 金 敎 元 )과 함께 군사학 과목인 병기학을 비롯하여 일반학인 산술ㆍ기하ㆍ대수 등 4개 과목을 담당하였다. 8) 학과 과목의 강의횟수와 비율은 다음과 같다. 학과 과목의 강의 횟수와 비율 9) 과목 강의 횟수 비율(%) 과목 강의 횟수 비율(%) 전술학 85회 이상 18 지형학 40회 이상 8 군제학 20회 이상 4 위생학 15회 이상 3 병기학 70회 이상 14 마 학 15회 이상 3 축성학 50회 이상 10 외국어학 200회 이상 40 7) 차문섭, 조선시대군사관계연구 재인용(정리), 316~318쪽, 단국대학교 출판부, ) 어담, 어담소장 회고록, 상권, 25쪽. 9) 육군무관학교 교칙 광무4년 전문. 15

16 각 과목의 중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전술학은 학술의 기본원칙을 강술하여 그 응용력을 구비하게 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병기학은 병종( 兵 種 )의 기능을 터득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축성학은 임시축성과 영구축성으로 나누고 도로ㆍ교량ㆍ철도 등의 교통학을 포함시켰다. 지형학은 지형의 학설ㆍ측도법 및 군사상의 지형관계를 강수하였다. 위생학은 군인위생의 대요를 알게 하는데 주안을 두었다. 마학( 馬 學 )은 승마장교에 필요한 마필의 사용ㆍ사육과 간호 등에 중점을 두었다. 외국어학은 200회 이상으로 규정되고 있으나 실제 어떤 종류의 외국어를 가르쳤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일ㆍ영ㆍ독ㆍ불어 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0) 무관학교 학생들은 초급무관이 될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구술과 필기시험을 보고 교관들의 평점을 통해 급제자와 낙제자를 갈라냈다. 낙제로 판정된 자는 퇴교를 명하고 유급된 자는 체학( 滯 學 )을 명하 였다. 11) 500여 명 배출, 항일투쟁 선봉 무관학교 생도들은 1900년 1월 19일 장연창( 張 然 昌 ) 등 128명이 무관학교 제1회 졸업시험을 통과하여 참위로 임관하였다. 이들은 1898년 7월경부터 약 200명이 과거 훈련도감 신영을 교사로 사용하는 무관학교에 입교하여 1년 6개월 동안 군사교육을 받고 128명만이 졸업시험에 합격하여 참위로 임관된 것이다. 12) 이들이 무관학교 제 1회 졸업생이다. 제1회 졸업생이 배출되자 정부는 1900년 3월 27일 칙령 제12호로 무관 및 사법관 임명규칙 을 반포하였다. 제1조, 무관 임명은 무관학교 졸업인 중에서 원수부 시험을 거친 후에 주임할 것. 제2조, 사법관 임명은 법률학교 졸업인 중에서 법부 시험을 거친 후에 서임할 것. 제3조, 군무 혹은 사법 사무에 숙달한 자는 졸업증서가 없어도 곧바로 임명할 것. 제4조, 본령은 발표일부터 시행할 것. 13) 대한제국의 무관에 임용되기 위해서는 위의 규칙 제1조에 저촉되지 않고 무관학교를 졸업한 자로서 원수부 의 시험에 합격해야만 가능했다. 14) 무관학교는 당시 청년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재정의 부족으로 사비 교육생을 입교시키는 등 편법 이 동원되기도 했지만, 존폐의 곡절을 거듭하면서도 이후 500여 명의 장교를 배출하여 대한제국의 군사력 향상에 기여하였다 ) 차문섭, 앞의 책, 320~325쪽 참조. 11) 앞의 책, 331쪽, 재인용. 12) 서인환, 대한제국의 군사제도, 153쪽 재인용, 혜안, 2000년. 13) 고종실록 권 40, 광무 4년 3월27일 : 관보 8, 제1538호, 광무4년 4월 3일. 14) 서인환, 앞의 책, 154쪽.

17 일제에 의해 군사력을 상실한 후로도 이들 무관학교 출신 장교들 중에 일부는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투쟁에 투신하여 그 선봉이 되었다. 박승환이 군대해산에 대해 자결로 항거한 것을 시작으로 사재합( 舍 在 洽 )이 의병장 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한 이외에도, 국외로 진출한 신팔균( 申 八 均 )이 만주에서 무장 독립군 훈련에 심혈을 기울 이고, 신규식( 申 奎 植 )이 임시정부의 법무총장, 외무총장 등으로 활약한 것은 그 대표적 사례다. 15) 2. 신흥무관학교 독립군양성소 신흥무관학교 설립 우국지사들은 나라가 망하고 국내에서 활동이 어렵게 되자 속속 국외로 빠져나갔다. 나라마다 쫓겨난 망명 자들은 자신이 인민들의 전위를 상징한다. 16) 라는 한나 아렌트의 지적대로, 이들은 망국시대 민족의 전위들이었 다. 나치 독일에 쫓겨 해외로 망명한 정치사상가 아렌트는 그 자신이 17년간 망명자로서 망명자를 인민의 전위 라 불렀다. 1909년 봄에 서울 양기탁의 집에서는 신민회 간부들의 비밀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집주인을 위시하여 이동녕 주진수 안태국 이승훈 김도희 김구 등이며, 이 회의에서 결정한 안건은 해외 독립기지 건설 건과 무관학교 설치건이었다. 한말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기에 빠지면서 애국지사들은 해외 독립운동 근거지건설을 시도하였다. 큰 줄 기의 하나는 유인석( 柳 麟 錫 )을 중심으로 하는 의병부대이고, 다른 하나는 박용만( 朴 容 萬 )이 미주에 설립한 소년 병학교, 그리고 1906년 조직된 신민회( 新 民 會 )의 해외기지 설립계획이다. 유인석은 1895년 을미의병을 일으켰으나 관군과 일본군의 반격으로 패배하면서 다시 의병을 모집하여 이듬해 2백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봉천성 관전현으로 넘어갔다. 청국군에 무장해제를 당하고 귀환한 유 인석은 1907년 북천지계( 北 遷 之 計 ) 에 따라 우리나라의 조산( 祖 山 ) 백두산을 중심으로 북간도와 서간도에 군사 기지 설치를 계획하였다. 또한 노령 연해주에 의군을 조직하여 우군영장 엄인섭과 좌군영장 안중근이 국내 진 공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국내에서 반일운동을 전개하다 투옥되기도 했던 박용만은 1905년 도미하여 1909년 6월 해외 최초의 한인군 사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를 미국 네브라스카에 세우고 군관을 양성했다. 신민회는 1910년 3월 긴급간부회의를 다시 열어 독립군기지와 무관학교 설립 등 주요 사항을 논의하였다. 이 회의에서 1 독립전쟁전략 을 최고의 전략으로 채택하고 2 국외에 독립군기지 와 그 핵심체로서 무관학교 를 설 립할 것 3일제헌병대에 구속되었던 간부들을 국외에 망명시켜 이 사업을 담당케 할 것 4 국내에 남은 간부 회원들은 이 사업을 지원하는 한편 종래의 애국계몽운동을 계속할 것 등을 결정하였다. 17) 즉 망국은 결정적 사실이 되니 국내에서는 도저히 광복운동을 할 수 없음을 지각한 이들은 이 회의에서 조 선과 인접한 만주 동삼성( 東 三 省 )에 제2의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하여 자금조달 대책의 일환으로 다음과 같은 모집금 액수를 할당하였다. 평남도 안태국 15만원, 평북도 이승훈 15만원, 황해도 김구 15만원, 강원도 주 15) 앞의 책, 158쪽. 16) 한나 아렌트 지음, 김정한 옮김, 폭력의 세기, 15쪽, 아후, ) 안도산 전서 부록 826쪽 및 도산 안창호, 50~53쪽. (요약) 17

18 진수 10만원, 경기도 양기탁 20만원, 그리하여 그 해 여름에 간부 이회영ㆍ이동녕ㆍ주진수ㆍ장유순 등을 만주로 파견하여 독립운동에 적당한 땅을 매수케하였다. 이회영 등은 남만 각지를 유력하여 답사하다가 마침내 요녕성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 지방을 선정하였다. 이 지방은 인가 드문 황량한 미개척지라 장래 발전상이 클 것을 알았 기 때문이다. 그 해 겨울 우리나라 처음으로 귀인( 貴 人 )의 만주 진출이 있었으니 이시영ㆍ이석영ㆍ이회영ㆍ이상룡ㆍ김창 환ㆍ주진수 등의 도합 6세대가 솔선하여 압록강을 건너 기설 지점에 도착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음해 (1911년) 봄을 기다려 개척 이래 인력미답의 이 황무지개척을 위하여 심혈을 바쳐서 노력하기 시작하였다. 이역 만주 황무지에서 대자연과 싸우는 이 학자들은 1911년 4월에 삼원보에다 민단적 성격을 띤 자치기관으 로 경학사 를 조직하였고, 해사( 該 社 ) 부속으로서 신흥강습소 (신흥무관학교 전신)를 설치하여 국내에서 모 여드는 애국청년들을 훈련케 하였다. 18) 지사들이 해외에서 독립운동의 둥지를 튼 것은 대개 4개 지역이 중심을 이루었다. 연해주의 성명회( 聲 明 會 )와 그 이념을 계승한 권업회( 勸 業 會 ), 북간도의 간민교육회( 墾 民 敎 育 會 )와 그를 발전시킨 간민회( 墾 民 會 ), 서간도의 경학사와 그를 이은 부민회, 그 밖의 북만주의 신한국민회 등은 그러한 결사 가운데 유명한 것이었다. 또한 하와 이와 미주의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성립된 공립협회( 公 立 協 會 )와 대동보국회( 大 同 保 國 會 ) 및 그 양자를 발전시킨 대한인국민회( 大 韓 人 國 民 會 ) 등도 중요한 것들이었다. 19) 각 지역의 독립운동기지 설치는 모두 나름대로 큰 역할을 하고, 우리 독립운동사에 불멸의 금자탑으로 남았 다. 그 중에서도 이회영 등이 중심이 되어 삼원포에 세운 신흥무관학교는 무장독립전쟁의 전사들을 길러 내는 요람이 되었다. 신흥학원과 신흥중학은 중국의 눈을 피하기 위해 붙힌 이름일 뿐이고 실제는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었다. 이회영과 그의 동지들은 본격적인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에 착수하였다. 이석영이 그동안 극심한 흉년에도 아 껴둔 돈을 꺼내어 천혜의 요새지로 알려진 신안보( 新 安 堡 ) 땅의 매입에 나섰다. 토지 매입이 쉽지 않자 이회영은 1912년 4월 1일, 매입을 허가해 달라는 청원서를 동삼성 도독( 都 督 )에게 보내었으며 7개월 뒤에야 허락을 받았다. 이회영이 이곳을 신흥무관학교 설립지로 택한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1991년 10월 이곳을 답사한 조선족 연구자 강원룡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주위가 고산준령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남북 10리나 되는 평원이 있고 그 남쪽 끝이 논밭보다 약 30미터 정 도 높게 덩실하게 언덕을 이루었는데, 언덕 위엔 20정보 가량 되는 구릉을 이루어 마치 합니하 평원 을 연 상케 했다. 군사적으로도 영락없는 요새였다. 천연 무대와 서쪽 심산이 맞붙어 있기에 실로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말할 수 있다. 20) 1912년의 이른 봄부터 이곳에 교사 신축공사가 시작되었다. 공사는 동포 주민들과 학생 교사들의 손으로 이 루어졌다. 초가을부터 내린 눈이 계속 쌓여 3월 하순까지 녹지 않고 얼음판이 된 땅을 파고 짚을 섞어 흙담을 18 18) 채근식, 무장독립운동비사, 47~48쪽, 대한민국공보처, ) 윤병석, 독립군사, 32쪽, 지식산업사, ) 김명섭, 자유를 위해 투쟁한 아나키스트 이회영, 59~60쪽, 재인용.

19 쌓는 공사였다.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공사는 진척되어 7월에야 완공되었다. 뒷날 이곳을 답사한 서중석 교수는 요새지로서 군사훈련을 시키기에 더없이 좋은 지역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야트막한 산 밑 언덕이어서 군사훈련 하기에 좋은 신흥무관학교 자리는 합니하가 주위를 거의 360도 삥 돌 아 흐르는 10정보가 훨씬 넘어 보이는 넓은 언덕빼기 들판 중에서도 남쪽 깊숙이 위치해 있었다. 따라서 3.4km 떨어진 광화진( 光 華 鎭 : 현재 지명, 중화민국시기에는 新 安 堡 임) 쪽에서는 물론이고 합니하가 흐르 는 곳에 나 있는 길가에서도 잘 보이지 않았다. 또한 합니하와 신흥무관학교가 위치한 언덕 사이는 상당 부 분이 낭떨어지 비슷하게 가팔라 삥둘러 흐르는 합니하가 마치 해자처럼 되어 있었다. 남쪽으로 10리쯤 가면 혼강이 나온다고 한다. 북쪽에 있는 광화진 뒤도 산의 연속이다. 외부로 나가는 통로를 제외하고는 전체가 산맥으로 삥둘러싸인 곳이다. 광화진에서 북서쪽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주통로인 통화 쪽 외에도 산길에 익 숙한 한국인들로서는 광화진 뒤켠에 있는 용강( 龍 崗 )산맥을 넘으면 고산자가 나오고 고산자에서 삼원포까지 는 30여km기 때문에 그쪽으로 다니기가 어렵지는 않았다고 한다. 21) 천혜의 요새지에 신흥무관학교 교사를 세운 이회영과 그의 동지들은 환희에 넘쳤다. 이제야 숙원이었던 무관 학교를 세워서 원수 일제를 무찌를 수 있는 군관을 육성할 수 있게 되었다는 감격이었다. 무관학교 다운 학교가 탄생하게 되기까지 이회영이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노력한 것은 대단히 높이 평가되 어야 할 것이다. 이동녕 이시영 이상룡 김대락 등도 정신적 물질적으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와 함께 이회영과 뜻을 같이하여 재산을 내놓은 이석영이 절대적인 공로자라고 할 수 있다. 그가 가재를 몽땅 신흥 무관학교에 바치다시피 하였기 때문에 합니하에 반듯한 교실과 강당, 기숙사가 들어설 수 있었다. 22) 신흥무관학교 교사는 이들의 피땀으로 신축되었다. 이 학교의 제1회 졸업생이자 교관이었던 원병상은 남긴 수 기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삽과 괭이로 고원지대를 평지로 만들어야 했고, 내왕 20리나 되는 좁은 산길을 오고가며 험한 산턱 돌산을 파 뒤져 어깨와 등으로 날라야만 되는 중노역이었지만, 우리는 힘드는 줄도 몰랐고 오히려 왕성하게 청년의 노래로 기백을 높이며 진행시켰다. 23) 1912년 7월 20일(양력) 낙성식을 할 때는 100여 명의 동포와 중국인 수십 명이 지켜 본 가운데 조촐하게 거행 되었다. 18개의 교실이 비밀을 지키기 위해 산허리를 따라 줄지어 있었고, 학년별로 널찍한 강당과 교무실, 내무 반에는 기능별로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였다. 훈련용 총기를 진영하는 총가( 銃 架 )도 낭하에 비치되었다. 이회영은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실질적인 주역이었지만, 과거에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발기인 이외에는 직책을 갖지 않았다. 교장은 이철영에서 이동녕 이상룡 박창화 여준 이광 등이 차례로 맡았고, 교감은 김달 윤기섭, 21) 서중석,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107쪽, 역사비평사, ) 앞의 책, 110쪽. 23) 원병상, 신흥무관학교, 신동아, 1969년 6월호, 238쪽. 19

20 학감은 윤기섭 이규봉 등이었다. 교관은 이관직 이장녕 김창환 김흥 등이다. 교사는 장도순 윤기섭 이규봉 이정규 이갑수 김석영 김순칠 이규룡 여규형 관환국(중국인) 등이다. 교관 중에 이세영 이관직 이장녕 김창환 양성환 등은 대한제국 무관학교 출신들이다. 24) 신흥무관학교에서는 군사교육은 물론 학생들의 민족정신 함양에도 주력하였다. 독립운동의 지도자를 양성 하기 위해서는 민족의식과 우리 나라의 역사 국어 지리 교육이 필요하다고 인식한 터였다. 교재를 보면 국어 문전( 國 語 文 典 ) 이 교과서로 채택되고, 국사교재로는 대한역사 유년필독 등이 사용되었다. 이들 교과서와 교 재는 1909년 국내에서 통감부가 발매금지시킨 책이다. 지리 교재는 대한신지지( 大 韓 新 地 誌 ) 와 배달족강역형세도( 倍 達 族 疆 域 形 勢 圖 ) 등이 활용되었다. 이밖에도 서전서숙과 경학사, 신흥중학교에서 교재로 채택되었던 수신 독서 한문 이화( 理 化 ) 체조 창가 중국어 물 리학 화학 도화 박물( 博 物 ) 중등용기법( 中 等 用 器 法 )등 다양한 과목을 공부하였다. 신흥학교를 비롯하여 서전서숙, 협동학교의 교과과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5) 서전서숙 협동학교 신흥학교 1 신흥학교 2 신흥학교 3 국문학ㆍ역사ㆍ지리ㆍ국제공법ㆍ풍습ㆍ경제대의ㆍ수신ㆍ산술ㆍ한문ㆍ정치학 국어ㆍ역사ㆍ지지( 地 誌 )ㆍ외국지지ㆍ수신ㆍ대수ㆍ한문ㆍ작문ㆍ미술ㆍ물리ㆍ화학ㆍ생물ㆍ동물ㆍ식물ㆍ 박물ㆍ창가ㆍ체조 국문ㆍ역사ㆍ지리ㆍ수학ㆍ수신ㆍ외국어ㆍ창가ㆍ박물학ㆍ물리학ㆍ화학ㆍ도화ㆍ체조 역사ㆍ지리ㆍ산술ㆍ수신ㆍ독서ㆍ한문ㆍ이화( 理 化 )ㆍ체조ㆍ창가ㆍ중국어 국어문전ㆍ중등교과산술ㆍ신정( 新 訂 )산술ㆍ최신고등학이과서( 理 科 書 )ㆍ교육학ㆍ대한신지지( 大 韓 新 地 誌 )초등소학독 복ㆍ초등윤리과ㆍ신선( 新 選 )박물학ㆍ중등산술ㆍ윤리학교과서ㆍ대한국사ㆍ사범교육학ㆍ신편화학ㆍ중등용기법( 中 等 用 器 法 )ㆍ중등생리학 신흥무관학교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유능한 군관을 양성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군사학술교련에 중점을 두었 다. 중등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본과와 무관훈련을 시키는 군사과로 나뉘었지만, 본과에서도 군사교련에 비중을 두고 학생을 선발할 때 반드시 건장한 자를 뽑았다. 신흥무관학교는 학생들에게 군사교련을 시키기 위해 교관 으로 대한제국 무관학교 교관 출신인 이세영ㆍ이관직ㆍ이장녕ㆍ김창환 등을 초빙하였다. 신흥무관학교의 학과는 주로 보기포공치( 步 騎 砲 工 輜 )의 각 조전( 操 典 )과 내무령( 內 務 令 ), 측도학, 축성학, 육 군형법, 육군징벌령, 위수복무령, 구급의료, 편제학, 훈련교범, 총검술, 유술( 柔 術 ), 격검( 擊 劍 ) 전술전략 등에 중점 을 두었다. 26) 군사교련의 실시에는 비용 관계로 어려움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군사훈련을 하면서 장총이나 권총ㆍ기관 총ㆍ대포ㆍ탄약 등 병기가 없어서 이론교육밖에 할 수가 없었고, 역시 경비 때문에 말을 구하기 어려워 기마훈련 을 하기 어려웠다. 그 대신 정신교육과 신체 단련에 집중하고 각종 훈련을 강화시켰다. 일본의 최근 군사교련 교 재나 각종 병서를 입수하여 교재로 활용하였다. 학생들은 수업료 등 일체의 학비를 내지 않았다. 숙식도 교내에서 공동으로 하였다. 이회영 일가와 유지들이 염출한 기금으로 운영하고, 동포 여성들이 모두 나와서 학생들의 식사준비를 맡았다 ) 서중석, 앞의 책, 119쪽(요약). 25) 서중석, 앞의 책, 120쪽. 26) 원병상, 앞의 책, 23쪽.

21 생도들 자신이 강설기를 이용하여 학교 건너편 낙천동이란 산언덕에서 허리에 차는 쌓인 눈을 헤치며 땔감을 끌어내리고 등으로 이를 날랐다. 매년 월동준비는 학생들의 자력으로 해결하였다. 27) 온갖 어려운 속에서도 교관이나 학생들은 희망에 부풀었고 열심히 공부하며 군사훈련을 받았다. 신흥무관 학교가 설립되면서 만주는 물론 국내에까지 널리 알려져 입학하려고 찾아온 젊은이들이 많았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님 웨일즈의 소설 아리랑 의 주인공 장지락(김산)이다. 다음은 15세의 소년 장지락이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간 대목이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합니하에 있는 조선독립군 군관학교. 이 학교는 신흥학교라 불렀다. 아주 신중한 이름이 아닌가! 하지만 내가 군학교에 들어가려고 하자 사람들은 겨우 15세밖에 안된 꼬마였던 나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최저 연령이 18살이었던 것이다.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아서 엉엉 울었다. 마침내 내 기나긴 순례여행의 모든 이야기가 알려지게 되자 학교 측은 나를 예외적인 존재로 취급하여 시험 을 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지리 수학 국어에서는 합격하였지만 국사와 엄격한 신체검사에서는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개월 코스에 입학하도록 허락받았고 수업료도 면제받았다. 학교는 산속에 있었으며 18개의 교실로 나뉘어 있었는데, 한 눈에 잘 띄지 않게 산허리를 따라 나란히 줄지 어 있었다. 18살에서 30살까지의 학생들이 100여명 가까이 입학하였다. 학생들 말로는 이제까지 이 학교에 들어온 학생들 중에서 내가 제일 어리다고 하였다. 학과는 새벽 4시에 시작하여, 취침은 저녁 9시에 하였다. 우리들은 군대전술을 공부하였고 총기를 가지고 훈련을 받았다. 그렇지만 가장 엄격하게 요구하였던 것은 산을 재빨리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이었다. - 게릴라 전술 - 다른 학생들은 강철 같은 근육을 가지고 있었고 등산에는 오래전부터 단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도움을 받아야만 간신히 그들을 뒤따라 갈 수 있었다. 우리는 등에 돌을 지고 걷는 훈련을 하였다. 그래서 아무것도 지지 않았을 때에는 아주 경쾌하게 달릴 수 있었다. 그날 을 위해 조선의 지세, 특히 북한의 지리에 관해서는 주의깊게 연구하였다. 방과 후에 나는 국 사를 열심히 파고들었다. 얼마간의 훈련을 받고 나자 나도 힘든 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으며, 그러자 훈련이 즐거워 졌다. 봄이면 산이 매우 아름다웠다.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으며 기대에 넘쳐 눈이 빛났다. 자유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 인들 못할소냐. 28) 신흥무관학교는 본과와 특별과가 있었다. 본과는 4년제 중학 과정이고, 특별과는 6개월과 3개월의 속성의 무 관 양성과정이었다. 무관학교 생도들의 하루 일과는 앞에서 소개한 원병상의 수기에서 생생하게 보여준다. 모든 생도들은 새벽 6시 기상나팔 소리에 따라 3분 이내에 복장을 갖추고 검사장에 뛰어가 인원점검을 받 은 후 보건체조를 하였다. 눈바람이 살을 도리는 듯한 혹한에도 윤기섭 교감이 초모자를 쓰고 홑옷을 입고 나와서 점검을 하고 체조를 시켰다. 자그마하지만 다부진 인물인 여준 교장은 겨울에도 털모자를 쓰지 않은 채 생도들의 체조 광경을 지켜보았고, 벌도 매서웠다고 한다. 활기찬 목소리, 늠름한 기상에 뜨거운 정성이 27) 안천, 신흥무관학교, 160쪽, 교육과학사, ) 님 웨일즈 지음, 조우화 옮김, 아리랑, 87~88쪽, 동녘, 1993(개정1판 7쇄). 21

22 담겨 있었다. 체조 후 청소와 세면을 마치면 각 내무반별로 나팔소리에 맞춰 식탁에 둘러앉았다. 주식은 가축 사료나 다 름없는, 윤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좁쌀이었다. 부식은 콩기름에 절인 콩장 한 가지 뿐이었다. 학생들이 얼마 나 기름기 없는 음식을 먹었는지 한 일화로 짐작할 수 있다. 1912년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낙성식 때 이석영 이 큼직한 돼지고기를 기증하자 이를 정신없이 먹은 생도들은 배탈이나 여러 날 고생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턱없이 부족한 식사와 의복에도 불구하고, 교직원은 단의( 單 衣 )와 초모를 쓰고 교육을 시켰고, 학생들은 주 린 배를 움켜쥐고 훈련에 열중했다. 29) 지도자들의 헌신에 학도들 의기충전 무엇이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 일제의 감시 속에서도 무관학교 청년들과 교관들에게 이 같은 열정과 투지를 갖게 하였을까. 조국 독립의 대명제와 더불어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하는 이회영 등 신흥무관학교를 이끈 지도자 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그 생명력이 되었을 것이다. 신흥무관학교에서는 학교 행사나 군사훈련을 시작할 때이면 애국가 를 비롯하여 각종 군가를 우렁차게 불렀 다. 작사 작곡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애국가 독립군 용진가 화려강산 동반도는 우리 본국이요 품질 좋은 단군조선 우리 국민일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우리나라 우리들이 길이 보존하세. 요동 만주 넓은 뜰을 쳐서 파하고 여진국을 멸하고 개국하옵신 동명왕과 이지란의 용진법대로 우리들도 그와 같이 원수쳐보세. 후렴 나가세 전쟁장으로 나가세 전쟁장으로 검수도산 무릅쓰고 나아갈 때에 독립군이 용감력을 더욱 분발해 삼천만 번 죽더라도 나아갑시다. 이 밖에도 각종 군가 민요 창작 노래가 불렸다. 슬프도다 우리 민족아! 오늘날 이 지경이 왠 말인가? 4천년 역사국으로 자자손손 복락하더니 22 29) 원병상, 앞의 책.

23 오늘날 이 지경이 왠 말인가? 철사주사로 결박한 줄을 우리 손으로 끊어 버리고 독립만세 우레 소리에 바다가 끓고 산이 동하겠네. 30) 신흥무관학교에서는 각급 행사와 훈련 과정에서 1910년대에 만주지역에서 독립군의 기상과 동포들의 총궐기 를 주장하는 각종 독립군가를 불렀다. 작자 미상의 독립군가 도 그 중의 하나다. 독립군가 1.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삼천리 이천만의 우리 동포들 건질 이 너와 나로다. 2. 원수들이 강하다고 겁을 낼건가 우리들이 약하다고 낙심할건가 정의의 날센 칼이 비끼는 곳에 이길이 너와 나로다. 후렴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가세 31) 봉기가 1. 이천만 동포야 일어나거라 일어나서 총을 메고 칼을 잡아라 잃었던 내조국과 너의 자유를 원수의 손에서 피로 찾아라. 30) 김명섭, 앞의 책, 71~72쪽, 재인용. 31) 이중연,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 120~121쪽, 혜안,

24 2. 한산한 우로( 雨 露 ) 받은 송백까지도 무덤 속 누워있는 혼령까지도 노소를 막론하고 남이나 여나 어린아이까지도 일어나거라 32) 일사보국정신, 일하면서 훈련 신흥무관학교의 학생들은 불타는 애국정신과 일사보국( 一 死 報 國 )의 독립정신으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 부(훈련)하는 자활자치의 운영방식이었다. 학생들은 <조국을 위해서는 항일투쟁, 모교를 위해서는 경제투쟁>이 란 슬로건 밑에 농사일도 하고 땔감을 구하기도 하면서 교육과 훈련에 맹진하였다. 경영이 점차 어려워지면서 중국인들이 버려둔 황무지를 개간하여 옥수수 콩 조 수수 등을 심어 식량을 자 급하였다. 그런가 하면 불시에 나타나서 곡식과 가축을 끌어가는 마적들의 습격에 대비하여 동포들의 마을을 경비해야 했다. 학생들을 뒷바라지 하는 동포들의 생활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합니하의 생활은 간고했다. 소금과 광목천만 시내에서 구입하고 일체는 자급자족하였다. 연도에 토비들의 습 격을 방지하기 위해 육혈포와 화승총, 퉁포총으로 무장한 독립군 30여명이 소발구와 개발구를 이끌고 소금 과 광목천을 사왔다. 독립군들은 솜바지에 무릎까지 나오는 동저고리를 입으며 울로초란 풀로 발을 감 싸고 헝겊으로 다시 감싼 후 초신을 신었다. 발 모양이 아주 둥실하고 컸는데 며칠에 한번 벗으면 그 악취 가 코를 질렀다. 33) 갖은 난관 속에서도 1912년 가을에는 신흥무관학교의 속성 특과인 군사학과정을 수료한 학생들의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변영태 성주식 강한연 등 11명이 배출되었다. 이것이 한인으로서 만주에서 군사교관을 배출한 효 시가 되었다. 한때 마적대에게 납치되었던 이영석은 중국의 군사 100여명이 출동하여 무사히 구출하였다. 중국 인 대장은 자기나라 사람들이 문명( 文 明 )치 못하여 도적들이 사방으로 횡행하여 못된 짓을 저질렀다고 이회영 에게 백배 사죄하였다. 이회영은 신흥무관학교 운영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비록 학교운영의 책임은 맡지 않았으니, 늘 그러했듯이 뒤에서 유능한 교사, 교관을 초빙하고 유지들을 설득하여 운영기금을 마련하였다. 1913년경에는 제법 사관학교 의 체제가 정비되고 진용도 갖춰졌다. 1913년의 교직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교장 - 여준 교감 - 윤기섭 학감 - 이광조 교사 - 이규봉 서웅 관화국( 關 華 國, 중국어교사) 24 32) 허은 구술, 변창애 기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77~78쪽, 민족문제연구소, ) 권영신, 이판서댁과 나의 외조부 그리고 부친, 주간금일 요녕, 김명섭, 앞의 책, 73~74쪽, 재인용.

25 교관 - 김창환 성준용 김흥 이극 생도대장 - 김창환 생도반장 - 김병상 학제는 4년제를 원칙으로 하고 6개월의 장교반과 3개월의 하사관을 교육하는 속성과를 두었다. 졸업 뒤에는 2년간 의무적으로 복무하게 하였다. 학과는 1보병 2기병 3포병 4공병 5경중의 각 병과와 6내무령 7측량학 8축성학 9육군형법 10징벌 령 11위술복무 12구급의료 13편제학 14훈련교범 15전술 등에 중점을 두었다. 술과( 術 科 )로는 연병장에서 주로 1각개교련 2기초훈련을 하고, 야외에서는 고지에서 가상적에게 3공격전과 4방어전을 하고 체육으로는 엄 동설한에 1야간도강 270리 강행군 3빙상운동 4춘추대운동 5격검 6유도 7축구 8철봉 등으로 체력을 연마시켰다. 34) 신흥무관학교 교원 일람표 35) 성 명 직 위 출 신 지 학 력 비 고 이 천 민 교 장 충남 청양 와세다 중퇴 고산자고등군사반 양 규 열 부교장 경기 양평 육군무관학교 고산자고등군사반 윤 기 섭 학감(교감) 경기 파주 보성중학교 고산자고등군사반 김 창 환 훈련감 교장서리 서울 육군무관학교 고산자고등군사반 이 청 천 교육대장(교성대장) 서울 육군무관학교 고산자고등군사반 계 용 보 교 관 평북 신흥중학 고산자고등군사반 원 병 상 교 관 강원 신흥중학 고산자고등군사반 백 종 렬 교 관 강원 회양 신흥중학 고산자고등군사반 오 상 세 교 관 경기 신흥중학 고산자고등군사반 김 경 천 교 관 함남 일본육군사관학교 고산자고등군사반 김 승 빈 교 관 - - 고산자고등군사반 손 무 영 교 관 경기 신흥중학 고산자고등군사반 신 팔 균 교 관 충북 진천 육군무관학교 고산자고등군사반 김 성 노 교 관 서울 신흥중학 고산자고등군사반 이 장 령 훈련감ㆍ교장 충남 천안 육군무관학교 합니하초등군사반 성 준 용 교관ㆍ학도대장 서울 신흥강습소 합니하초등군사반 박 영 희 교 원 충남 부여 신흥중학 합니하초등군사반 오 광 선 교 관 경기 용인 신흥중학 합니하초등군사반 홍 중 락 교 원 - 신흥중학 합니하초등군사반 이 범 석 교 관 서울 신흥중학 운남육군강무학교 홍 종 린 교 관 - 신흥중학 운남육군강무학교 신흥학우단으로 정신 이어져 신흥무관학교는 졸업생이 늘어나면서 이들을 조직화하는 신흥학우단 을 결성하였다. 교장 여준, 교감 윤기섭 34) 원병상, 앞의 책, 236~237쪽. 35) 박환, 서북 간도지역 한인 독립운동단체 연구, 59쪽, 박사학위 논문,

26 과 제1회 졸업생 김석 강일수 이근호 등이 발기하여 조직한 것으로 교직원과 졸업생은 정단원이 되고 재학생 은 준단원이 되는 일종의 동창회와 비슷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명칭을 다물단 ( 多 勿 團 )이라 했다가 학우단 으로 고쳤다. 신흥학우단의 목적과 사업은 다음과 같다. 신흥학우단의 목적 혁명대열에 참여하여 대의를 생명으로 삼아 조국광복을 위해 모교의 정신을 그대로 살려 최후의 일각까지 투쟁한다. 중요사업 1. 군사 학술을 연구하여 실력을 배양한다. 2. 각종 간행물을 통하여 혁명이념의 선전과 독립사상을 고취한다. 3. 민족의 자위체를 조직하여 적구( 敵 狗 ) 침입을 방지한다. 4. 노동강습소를 개설하여 농촌청년에게 초보적 군사훈련과 계몽 교육을 실시한다. 5. 농촌에 소학교를 설립하여 아동 교육을 담당한다. 36) 신흥학우단은 졸업생이 증가함에 따라 서간도 독립운동의 핵심체로 성장하였다. 그들은 모교의 교명에 따라 2년간은 의무적으로 복무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그 대부분은 독립군에 편입되었으나, 여기에 편입되지 않은 졸 업생들도 각 곳에 흩어져서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만주의 독립운동 중에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이 들어있지 않 은 적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 영향력은 막대하였다. 37) 신흥무관학교는 학생이 늘고 사기가 높아가고 있었으나 그늘진 부분도 있었다. 경영이 그만큼 어려워진 것이 다. 이회영 일가의 돈도 바닥을 드러냈다. 그래서 택한 것이 이관직과 장도순을 국내로 파견하여 자금을 모아 오게 하였다. 두 사람은 합니하를 출발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장도순은 박중화의 집에, 이관직은 안확의 집에 묵으면서 알 만한 인사들을 만나 자금을 요청했지만 모금이 쉽지 않았다. 그동안에 민심도 변하고, 무엇보다 총독부의 엄한 통치와 사찰에 후환이 두려워 선뜻 돈을 내놓으려 하지 않 았다. 장도순은 1개월 뒤에 만주로 돌아가고, 이관직은 국내에 남아서 장기적으로 자금을 모으기로 하였다. 38) 신흥출신들, 무장투쟁 지도자로 활동 신흥무관학교는 10년 동안 통칭 3,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것으로 연구되었다. 1912년 가을에 속성 특과 로 11명을 배출한 것을 시작으로 매년 속성과 본과의 졸업자가 1,2백 명 씩이었다. 여러가지 상황으로 매년 졸업 자 수는 일정하지 않았으며, 신흥소중학교와 신흥무관학교 또 이들과 연계되는 학교와 기관도 많았다. 1919년 3ㆍ1운동 이후 신흥무관학교가 새로운 출발을 하기 전까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학생 수를 알아 26 36) 원병상, 앞의 책, 238~239쪽. 37) 신용하,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 118쪽, 을유문화사, ) 이관직, 우당이회영실기, 158쪽.

27 볼 수 있는 자료를 검토해보자. 필자를 알 수 없는 제9항 백서농장사( 白 西 農 庄 史 ) 에 따르면 1915년 이 농 장에 들어온 사람들은 385명이다. 이 숫자는 거의 정확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385명에는 신흥무관학교 졸업자뿐만 아니라, 신흥학교 분ㆍ지교 졸업자와 노동강습회 이수자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지만 단단히 각오 하고 독립군에서 중견 역할을 하기 위하여 병농( 兵 農 )학교에 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대 부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1915년 봄 이전 신흥무관학교 졸업자는 3백 명 이상일 것이라고 추정 하여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39) 일제는 3ㆍ1독립항쟁 이후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는 한국독립군을 뿌리 뽑는 것이 조선에서 지배체제의 안정을 이룩할 수 있다고 판단, 이 지역에 일본군을 파견하여 대대적인 학살 작전을 전개하였다. 또한 중국 관헌에 압 력을 가하여 한국인의 무장독립운동을 방해하고, 토족세력인 마적단을 조종하여 습격ㆍ납치ㆍ학살을 자행하면 서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하여 각급 민족운동단체들은 위기에 직면하였다. 그동안 신흥소중학교와 신흥무관학교는 만주 일대는 물론 노령에까지 수십 개의 학교와 연계하면서 지방 청 년들의 군사훈련에 힘썼다. 각 지역에서 이름을 달리하는 많은 소중학교가 설립되었지만 뿌리는 대부분 신흥소 중학교와 신흥무관학교에서 기원하였다. 신흥무관학교에서 배출한 졸업자는 3,500여 명으로 추산되는 데, 더 정확한 자료는 앞으로 연구과제가 되고 있다. 신흥무관학교 관련 학교들의 학생 수는 더욱 추산하기 어렵다. 조선주차헌병대 사령부에서 조사한 자료에 의 거할 경우 통화현과 유하현에 있는 대다수의 학교와 학생수 및 그밖의 지역(북간도지방 포함)학교 학생수의 상당수가 신흥무관학교와 관련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어, 축소된 점도 감안할 때, 대충 2천 명 안팎으로 추산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숫자는 재학생 전체일 것이기 때문에 졸업생 수는 그것의 3배 안팎이 될 것이다. 40)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만주지역과 중국 관내에서 항일 독립운동의 중핵이 되었다. 1919년 11월 만주 길림 성에서 폭렬투쟁 을 선언하면서 조직된 의열단의 핵심멤버가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다. 단장 김원봉을 비롯하 여 강세우ㆍ권준ㆍ김옥ㆍ박태열ㆍ배중세ㆍ서상락ㆍ신철휴ㆍ윤보한ㆍ이성우ㆍ이종암ㆍ이해명ㆍ최동윤ㆍ한봉근ㆍ한봉인 등이다. 의열단은 최초 발기 13명에서 1924년에는 단원이 약 70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부산경찰서ㆍ밀양경찰서ㆍ총독 부폭파사건, 황옥( 黃 玉 )경부사건, 종로경찰서ㆍ동양척식회사ㆍ도쿄 니쥬바시( 二 重 僑 ) 폭파사건을 비롯하여, 그 외 에도 16건의 의열투쟁을 실행하여, 독립운동의 금자탑을 이루었다. 만주지역의 대표적인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서로군정서( 西 路 軍 政 署 )는 1919년 4월 한족회와 통합하여 무 장항쟁을 전개하였다. 독판 이상룡, 부독판 여준, 정무청장 이탁, 군정청장 양규열, 참모장 김동삼, 교관 지청 천ㆍ신팔균ㆍ김경천 등 간부 대부분이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다. 이들 외에 신흥중학교와 신흥무관학교 출신 으로 한족회와 서로군정서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인사는 권계환ㆍ김동식ㆍ김중한ㆍ김우권ㆍ김철ㆍ김하성ㆍ김학 규ㆍ박명진ㆍ백광운ㆍ백기환ㆍ신용관ㆍ오광선ㆍ이덕수ㆍ이병철ㆍ현기선ㆍ강화진ㆍ김춘식ㆍ박영희ㆍ백종열ㆍ오상세ㆍ이 운강ㆍ최해 등이다. 39) 서중석, 앞의 책, 131쪽. 40) 앞과 같음. 27

28 신흥중학교와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또한 1922년 만주 봉천성 환인현에서 조직된 통의부( 統 義 府 )에 참여 하여 주요 역할을 하였다. 이천민은 군사위원을 맡아 직접 무장투쟁을 주도하고, 자치행정기구에도 여러 명이 참여하였다. 1923년 만주 통화현에서 조직된 참의부( 參 議 府 )에는 백광운이 참의장 겸 제1중대장으로서 무장투쟁을 지휘 하였다. 이 외에 1925년 만주 영안현에서 조직된 신민부( 新 民 府 ), 1929년 만주에서 조직된 국민부 등 만주일대의 무장투쟁 단체에는 어김없이 신흥학교와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참여하고 중심이 되었다.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와 같은 해 10월의 청산리전투는 지청천ㆍ이범석 등 신흥무관학교 교관 출신들이 항일 대첩 을 주도하였다. 신흥학교 출신들은 1940년 중국 중경에서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조직된 항일무장부대 광복 군의 창설에도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지청천ㆍ김학규ㆍ김원봉ㆍ이범석ㆍ권준ㆍ신동열ㆍ오광선 등이다. 광복군 총사 령 지청천ㆍ참모창 이범석, 제1지대장 김원봉ㆍ제3지대장 김학규 등 모두 신흥무관학교 간부들이었다. 신흥무관 학교는 무장독립운동의 사관을 육성한 요람이었다. 28

29 1910년대 독립군기지 건설운동과 신흥무관학교 윤경로 전 한성대학교 총장 1. 머리말 금년 6월이면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주년을 맞이한다. 치열했던 한국근현대사의 역사성을 일별할 때 어느 한해도 역사적으로 지나칠 수 있는 해가 없지만 2011년 올해의 가장 의미 있는 역사성은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주년 기념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점에서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고 오늘 발표회를 갖는 학술대회를 비롯한 여러 행사를 준비한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라 하겠다. 우리가 특별히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주년을 주목하는 것은 이 학교가 지니고 있는 민족사적 의미와 함께 역사적 현재성을 주목하기 때문 이다. 다시 말해 신흥무관학교는 현재의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 를 찾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는 문제의식을 갖 고 있기 때문이다. 본 발표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배면에 놓고 신흥무관학교가 태동되기까지 설립 배경과 그 여정을 재구성하 는데 목적이 있다. 즉 신흥무관학교가 어떠한 배경과 조건에서 중국 서간도 유하현에 첫 자리를 틀게 되었는 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당시의 정치사회적 현상, 곧 1910년대 집단적 국외이주 실상을 구명하고자 한 다. 다음으로는 이러한 배경에서 동시에 진행된 독립운동가들의 망명과 그들이 국외에 구축하려했던 국외독 립운동 기지건설 운동을 총체적으로 요약 정리하고자 한다. 끝으로 이글의 주된 관심사인 신흥무관학교 설립 의 인적 물적 토대에 대해 천착해보려 한다. 최근 들어 신흥무관학교 및 그와 관련된 연구가 큰 진척을 보았다 1) 따라서 새로운 사실을 구명한다는 일 은 용이한 일이 아니기에 본 발표는 기왕의 연구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이를 재구성하는 수준임을 밝힌다. 또한 신흥무관학교가 1911년 6월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에서 신흥강습소 로 설립되기까지로 제한하고자 한다 년대 항일운동의 변화와 해외이주 물결 항일민족운동 상의 1910년대는 큰 변화를 보인다. 1905년 을사늑결로 사실상 국권상실에 처하자 실추된 국권 1) 신흥무관학교에 관한 대표적인 연구로는 박환, 만주지역의 신흥무관학교, 만주한인민족운동사연구, 일조각, 1991 ; 서중석, 신흥무관학교와 망 명자들,역사비평사, 2001 ; 이덕일, 이회영과 젊은 그들 역사의 아침, 2009 ; 김광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민족혁명가 윤기섭, 역사공간, 2009 등을 비롯해 여러 편의 논문과 관련 회고록 등이 있다. 이 발표문은 이상의 연구업적에 의존해 작성하였다. 29

30 회복을 위한 여러 모양의 구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이 전국규모로 전개되었다. 이 두 계열이 추구하는 목적은 동일하였으나 운동양태는 달랐다. 전자가 사회계몽 및 실력양성론적이었다면 후자는 무장투쟁론적이었다. 그러나 1910년에 접어들어 일제에 의한 국권강점이 눈앞에 닥쳐오면서 애국계몽 계열과 의병운동 계열은 공히 국권 완전상실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독립전쟁론( 獨 立 戰 爭 論 ) 곧 국외독립군기지 건설운동론으로 합일되었다. 여기에는 1909년을 전후하여 일제가 획책한 무자비한 토벌작전 등으로 국내에서 더 이상 항일투쟁을 전개할 수 없게 되었던 점 또한 한 요인이었다. 따라서 그동안 무장투쟁을 전개했던 의병계열 만이 아닌 애국계몽운동 진영 에서도 독립전쟁론이 구체적으로 거론되었던 것이다. 일제 측 또한 이 시기부터 애국계몽단체와 그 구성원에 대한 감시를 더욱 강화하였다. 조선반도 의 병합 과정 에 예상되는 한인들의 저항이 애국계몽단체와 그 구성원들을 중심으로 전개될 것으로 예견했기 때문이다. 일제 의 한국강점 직전인 1910년 7월 경무총감 아카시( 明 石 元 二 郞 )의 아래와 같은 훈시내용은 이 점을 잘 말해준다. 원래 조선인민은 (중략) 학문을 좋아하여 관리가 되기를 희망하나 견실한 실업에는 나아가기를 원하지 않는 다. 이러한 풍조는 국가변천 시기에는 더욱 심하여 다수의 인민이 공부한 문학.법률학이 국가의 수요공급을 넘어서고 있어 학식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지위를 얻지 못하는 인재가 다수 있다. 이들 실의자가 곧 불평분자 가 된다. (중략) 불평분자가 폭도로 나타나는 것은 제압하기 쉬우나 곤란한 것은 비밀결사의 발생인 것이다. 2) 위에서 말하는 불평분자 란 곧 학식을 갖춘 반일 민족진영 인사들을 지칭한다. 이러한 유식인 불평분자 가운 데 폭도, 즉 의병의 봉기는 쉽게 진압할 수 있으나 문제는 드러나지 않은 비밀결사라는 것이다. 한편 이들을 가리 켜 위험분자 라고도 하며 이들을 사회여론을 대단한 형세로 확대시켜 나갈 수 있는 세력으로 보았다. 요컨대 일 제는 한국 강점의 마지막 장애물로 애국계몽단체를 지목하였으니, 강점 이후 이들이 비밀결사로 변화했을 때 상 정될 수 있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해 우려를 표했던 것이다. 일제측이 조선병합 을 목전에 두고 애국계몽계열을 마지막 장애물 로 지목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즉 장인환, 전명운의 스티븐스 사살(1908.3),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 이재명의 이완용 살해기도 ( ) 등 사건이 연이어 돌발하였는데 이 사건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들 모두는 해외의 공기 를 마 신 애국계몽계열의 서북계 기독교인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3) 따라서 일제측은 이들 애국계몽계 반일세 력을 주목하게 되었고 이들을 조선병합 의 마지막 장애물 로 지목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안명근사 건과 양기탁보안사건 등에서 부분적으로 확인되었다. 4) 또한 우리가 잘 아는 105인사건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일 제의 조작으로 국내민족세력을 한줌에 제거하려한 대탄압사건이었다. 5) 이렇듯 독립운동사적 관점에서 1910년대 국내사정은 매우 어두웠다. 말하자면 국내에서는 더 이상 항일국권 회복운동을 전개하기가 힘들게 되었다. 1910년 8월 일제의 국권강점 후 초대 총독부 경무총감 겸 헌병사령관이 자 105인사건을 조작한 장본인이었던 아카시( 明 石 元 二 郞 )는 훗날 조선병합 후의 일제의 식민통치를 한마디로 기포성산 ( 碁 布 星 散 )의 무단통치 방법이었다고 자랑하였다. 6) 말하자면 바둑판에 무수히 깔아놓은 바둑알 모 30 2) 小 森 德 治, 明 石 元 二 郞 ( 上 ), 臺 北 臺 港 日 日 新 報 社, 1928, 452쪽. 3) 윤경로, 한국근대사의 기독교사적 이해, 역민사, 1992, 쪽. 4) 윤경로, 105인사건과 신민회연구, 일지사, 1990, 쪽. 5) 위의 책, 9쪽. 6) 小 森 德 治, 明 石 元 二 郞 ( 上 ), 452쪽.

31 양, 가을 하늘에 무수히 떠있는 별들 모양 조선반도 전 지역에 헌병대와 경찰서를 배치하는 무단통치를 실시하 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조선반도 전지역을 창살없는 감옥화 곧 병참국가(Garrison State)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 러한 상황에서 항일독립투쟁을 벌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국내 항일운동 세력은 애국계몽계나 의병계열이나 모두 국외 곧 해외로 눈을 돌려 국외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나서게 되었다. 북간도, 서간도 등 만주지역으로의 한인이주의 역사는 18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한인들의 간도 지역으로의 이주가 급격하게 촉발된 계기는 서북지방을 휩쓸었던 이른바 기사년( 己 巳 年 ) 곧 1869년 대재해( 大 災 害 )였다. 즉 년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에 몰아친 대흉년으로 초근목피의 연명을 위해 대규모의 이주가 단행되었다. 7) 이렇게 시작된 간도지역으로의 이주 물결은 이후 더욱 심화되어 북간도로의 이주는 함경북도인이, 서간도로의 이주는 평안북도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894년 실시한 재만 한인동포 출신지 조사에 따르면 대상인원 65,000명 가운데 함북출신이 32,000명, 평북출 신이 14,400명이었고 1904년 통계에는 78,000 명중 함북출신이 32,000명 평북 출신이 23,500명에 달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8) 1987년 현재 요령성 거주 조선족이 198,000명, 흑룡강성 거주 조선인이 430,000여명, 길림성 일대 조 선족이 1,104,000여명으로 총 1,700,000여명의 조선족이 동북3성에 거주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9) 후술하듯 신흥무관학교가 개교 1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무려 3,500여명에 달하는 수많은 독립군을 양성 훈련 시킬 수 있었던 것도 이와 같은 한인들의 인적토대가 일찍이 간도지역에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할 것 이다. 1905년 외교권의 박탈로 사실상 국권상실 위기에 처한 이래 국외 특히 서간도 북간도지역으로의 이주 물결 은 일종의 사회현상 모양 대규모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국내에서의 항일운동이 한계에 부딪치자 의병 장 출신들과 애국계몽계 지도부의 국외독립군기지 건설을 목적으로 한 이주도 이어졌다. 10) 또한 생활고에 고통 을 받던 일반 농민층의 국외로의 집단이주 역시 이 시기에 진행되었다. 11) 국외로의 이주현상은 국내 인구변동에 까지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으니, 서울의 경우 1908년 현재 190,000명이었던 인구가 1년 뒤인 1909년 9월에는 150,000명으로 40,000명이나 줄어들었다 한다. 12) 1년 사이에 20%의 인구가 감소되었다는 사실은 이 시기 국외로 의 대규모 집단 이주 현상을 잘 시사해준다 하겠다. 이러한 대규모의 집단이주 현상이 이 시기 집중적으로 추진된 배경과 요인에는 당시 국외에서 발행되고 있던 동포신문들의 영향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이해된다. 당시 미국 한인사회에서 간행되고 있던 대표적 동포신문인 <신한민보>에 해외로의 이주를 촉구하는 논설을 자주 볼 수 있다. 이 중 한 두 예를 들어보면 <신한민보> 1909년 9월 29일자에 < 靑 年 回 心 曲 >이라는 제목 하에 아래와 같은 당시 해외이주와 관련되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 는 노래가사가 실려있다. 이 노래 말 내용에서 당시 분위기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먼저위에 손을 언고 / 갈곳이야 만타만은 / 노예양셩 나 실허 / 7) 요녕인민출판사, 조선족백년사, 1981, 2-3쪽 8) 윤병석, 1910년대 국외항일독립운동 I (만주 러시아),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12-13쪽. 9) 천수산, 길림성에로의 조선족 이주, 길림조선족, 17쪽. 10) 신용하, 앞의 책, 쪽 ; 의병단체에 의한 서북간도와 러시아 연해주 일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은 1907년부터 이미 있었다. 의병 장출신 류린석은 1907년 7월에 60여 명의 문하인과 함께 연해주로의 이주를 계획한 바 있다(강재 언, 한국의 근대사상, 한길사, 1985, 쪽 참조). 11) 현주환, 한국류민사 ( 上 ), 흥사단출판부, 1976, 쪽 참조. 12) <신한민보> 1909년 9월 8일자 내보( 內 報 ) 중 日 增 韓 減 이란 제목에 경시총감 환산듕쥰이가 잇슬 조사한 바에 의하면 서울 인구가 19만명이 더니 근일에 일인에게 생활을 졈졈 빼앗기고 디방으로 밀려내어 최근 됴사 바를 통계하면 15만명이 넘지 못하더라 라는 기사가 보인다. 31

32 / 가쟈가쟈 멀리가쟈 / 변 발션 야 / 금의환양 목도삼고 / / 나 가오 나 가오 / 영융예비 러가오 / 지금가면 언제오 / / 우지마오 동포들 / 잘잇거라 잘잇거라 / 춘 월에 다시보쟈 / 13) 이밖에도 같은 신문 같은 날짜 기사에 내출양래 ( 來 出 洋 來 ) 라는 제하에 오시오! 오시오! 외국으로 나오시 오! 라며 국내에 남아 있는 동포를 가리켜 집에 들어온 호랑이를 잡으려 하지 않고 스스로 죽기를 기다리는 지아비 에 비유하며 외국으로의 망명을 적극 권하였다.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망명할 나라까지도 제시하면 서, 일본에도 많이만 간다면 나쁠 것은 없으나 보다 좋은 곳으로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미국, 중국 등이 좋다 고 하였다. 14) 국외로의 망명을 권유하는 <신한민보>, <대동보> 등 해외에서 발간되고 있던 동포 신문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국내에 배포되어 큰 영향을 미쳤다. 즉 서울의 기독교청년회(YMCA)와 경신학교, 평양의 대성학교 등에 송부된 해외 동포신문들은 각 지방으로 보내져 널리 회람되었다. 또한 한 번 회람된 신문은 다시 다른 지방으로 보내져 일매의 신문지가 전전해서 능히 수십백천인이 목영( 目 映 )하고 있다 고 했다. 15) 이렇듯 국외로의 이주를 권하고 이에 따라 국외로의 이주현상이 일종의 사회현상 모양 확산되어가자 국내에서 발행되던 대표적 민족지인 <대한 매일신보>는 국외 이주동포에게 고하노라 는 제하의 논설을 통해 근자 한국동포 중 자유공기와 문명산천을 찾는 해외이주자가 급증하고 있다 고 하면서 국외이주를 오리려 자제할 것을 아래와 같이 촉구하기도 하였다. 오호라 국외 이주 동포여 동포가 국외이주를 작 이 果 然 何 必 要 를 因 인가 (중략) 동포는 試 思 라 此 內 地 가 아모리 獄 과 如 되 차는 오히려 동포의 四 千 載 成 守 조국이며 此 內 地 가 아모리 爐 와 如 되 此 는 오히려 二 千 萬 尊 居 하는 조국이니 동포가 설혹 好 經 營 을 抱 고 此 祖 國 을 離 야 국외에 住 시에도 如 茶 如 錦 고국산천을 拜 別 고 族 異 俗 異 殊 域 風 霜 에 流 離 에 반다시 한이 骨 에 切 며 淚 가 臆 에 함 야 不 忍 의 정을 不 禁 지어 何 事 로 絲 身 穀 復 苟 命 逃 生 을 爲 야 祖 國 을 脫 와 如 히 棄 고 국외로 류출 야 생 야 無 國 의 孤 民 이 되며 死 야난 異 地 의 殘 鬼 가 되리요. 16) 말하자면 우리 조국이 아무리 지옥 과 같고 화로 와 같다 하더라도 4천년의 역사와 2천만이 거주하고 있는 조 국을 떠나려는 것은 나라없는 고아백성이 되는 것이고 죽어서는 이역 땅의 귀신이 되는 것이니 무분별한 해외로 의 이주는 삼가해 줄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국외이주를 무조건 반대한다는 입장은 아니었다. 단순히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서 이주하는 것은 찬성할 수 없으나 국가와 민족의 장래 이익과 번영을 목적으로 한 이주는 결 코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 논설은 다음과 같이 끝맺고 있다. 오호 동포여 동포가 국가민족의 사상으로는 국외이주를 혹작( 或 作 )할 32 13) < 新 韓 民 報 > 1909년 9월 29일 字 (152 號 ) 14) 위의 주. 15) 國 友 尙 謙, 不 逞 事 件 으로 본 朝 鮮 人, 1912, 高 麗 書 林 (영인본), 1912, 쪽. 16) <대한매일신보> 1910년 4월 14일자 론설 <국외 이주동포에게 고하노라>.

33 지언뎡 일신( 一 身 ) 일가( 一 家 )의 관념으로 국외이주를 작( 作 )지 말지어다 17) 3. 독립운동가들의 망명과 해외 독립군기지 건설운동 이상에서 보듯 1910년대를 전후하여 국외로의 집단이주 물결이 사회현상 모양 진행되는 과정에 항일 독립지 도자들의 국외로의 망명 또한 강고하게 추진되었다. 독립운동 투사들의 망명지 또한 매우 다양하였는데 대체로 러시아 지역과 중국 동북지역 그중에서도 북간도와 서간도지역을 독립운동 근거지와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한 적합한 지역으로 정했다. 이중 이 글에서는 북간도와 서간도 지역, 특히 신흥무관학교와 관련 깊은 지역으로 제 한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북간도 경우 일찍이 국망을 예견한 이상설( 李 相 卨 ), 이동녕( 李 東 寧 ), 정순만( 鄭 淳 萬 ), 여준( 呂 準 ) 등이 1906년 부터 용정촌( 龍 井 村 )에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착수하였다. 18) 이들은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하여 1906 년 8월경에 용정촌에 정착하여 민족주의 교육의 요람이 된 서전의숙( 西 甸 義 塾 )을 열었다. 19) 이어 북만주 밀산부 ( 密 山 府 )에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나섰다. 밀산부 독립운동 기지는 헤이그 사행 후 블라디보스토크로 간 이상설 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新 韓 村 )의 한민( 韓 民 )회장 김학만( 金 學 萬 )을 비롯한 정순만, 이승희( 李 承 熙 ) 등이 중 심이 되어 1909년 여름부터 추진하였다. 밀산부 봉밀산( 蜂 密 山 ) 일대는 중국과 러시아 접경 지역이자 한인들이 대거 집단이주하고 있어 지리적인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이곳에 한민학교( 韓 民 學 校 )를 건립하여 교육과 독립군 양성에 나섰다. 한민학교가 개설된 1910년을 전후하여 용정촌과 봉밀산 일대에 한인들이 대거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1910년 9월부터 1911년 12월까지 1년 3개월 동안 이 일대에 이주한 한인수가 17,000여명에 달했던 것 은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잘 말해준다. 20) 1913년 1월 북간도지역의 한인 자치단체이자 독립운동을 도모하기 위 한 결사체인 간민회( 墾 民 會 )가 이곳에 결성되었던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한편 이 시기 북간도 일대, 곧 연길, 화룡, 왕청, 훈춘, 안도 등 5개현에 158개의 한인학교가 생겨났고 이들 학교 의 학생 수가 3,800여명에 이르렀다. 21) 즉 서전의숙을 비롯해 명동학교( 明 東 學 校 ), 창동학교( 昌 東 學 校 ), 광성학교 ( 光 成 學 校 ) 그리고 정동학교( 正 東 學 校 ), 대전학교( 大 甸 學 校 ), 북일학교( 北 一 學 校 ) 등이 당시 북간도지역에서 독 립운동 투사들을 양성한 교육으로 오랜 기간 존속한 대표적인 민족학교였다. 22) 서간도 한인이주 역시 19세기 이후 대규모로 진행되었는데 그중 1831년 서간도 임강현( 臨 江 縣 ) 모아산( 冒 兒 山 ) 북방으로 한인 두 가정이 이주한 것이 시초였다고 한다. 23) 1903년 5월 현재 서간도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 수 는 장백, 임강, 집안, 통화, 환인, 관전, 단동 등지에 속한 32개 면에 총 9,754호에 45,600여명에 달하는 한인 이주 민들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서간도로의 한인 이주는 1905년 이후 더욱 급증하였는데 이는 정치적 망명으로서의 독립운동가들의 집단적인 이주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후술하는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토대를 마련한 이회영 ( 李 會 榮 ), 이상룡( 李 相 龍 ) 일가의 집단이주를 비롯 독립운동가들이 서간도를 근거지로 삼으려 했던 것도 이러한 17) 위의 주. 18) 윤병석, 1910년대 서북간도 한인단체의 민족운동, 국외 한인사회와민족운동, 일조각, 1990, 15-16쪽. 19) 윤병석, 1910년대 국외항일운동I,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16-17쪽. 20) 연변인민출판사, 조선족력사, 1986, 280쪽. 21) 윤병석, 위의 책, 17-18쪽. 22) 위의 주. 23) 위의 주. 33

34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상룡에 의하면 1913년 서간도를 포함한 봉천성 관내에만 286,000여명의 이주한인 들이 거주 24) 할 만큼 1910년대 초 서간도지역은 이미 대규모의 한인촌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초기 이들의 생활은 매우 열악하고 고통스러웠다. 한인들의 이주가 늘어나자 청국정부는 이 지역에 군 대와 관리를 파견하여 한인들에게 수리세, 문턱세, 고용세, 굴뚝세, 소금세 등 터무니없는 30여 종에 달하 는 잡세를 강요하였고 지주들은 3-4할이 넘는 고율의 소작료를 착취하는 실정이었다. 25) 뿐만 아니었다. 변발호 복( 辮 髮 胡 服 )과 청국으로의 입적을 강요받는 치욕을 참으며 머리를 땋아 올리고 중국옷으로 변장( 變 裝 )해야 하 는 등 심적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26) 이러한 악조건에서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서간도지역 한인사회는 안정을 찾기 시작하였다. 초기 황무지 개 간 작업에서 점차 수전농( 水 田 農 ) 곧 벼농사가 자리를 잡아갔기 때문이다. 1840년대 이후 혼강( 琿 江 )유역을 중 심으로 시작된 벼농사가 점차 확대되어 년대부터 통화현 일대 소택지와 늪지를 개간하여 벼농사를 시작 한 것이 성공을 거둔 것이다. 이후 통화현의 상전자, 하전자, 소만구, 그리고 유하현의 삼원포, 신변의 왕청문, 안 동의 당산성 등으로 확대되어 벼농사가 서간도 일대의 경제적 기반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따라서 서간도 일대에 한인촌은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후술하는 유하현 삼원포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게된 것도 이러한 배 경과 무관하지 않았다. 한인들에 의해 수전농이 발전한 유하현과 고산자( 孤 山 子 ), 대우구( 大 牛 溝 ) 일대와 경상 도 출신의 한인들이 무순을 거쳐 왕청문( 旺 淸 門 ), 두도구( 頭 道 溝 ) 등지에 대거 이주하였던 것도 이 지역에 일찍 부터 한인들이 수전농을 일구어 성공했기 때문이다. 27) 독립운동가로서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 일대를 가장 먼저 답사한 인물은 백범 김구( 金 九 )였다. 그는 1895년 김 형진( 金 亨 振 )과 함께 삼원포를 두 차례 답사하였다. 28) 그 뒤 1896년 유인석( 柳 麟 錫 )이 제천의병 계열의 70-80명 동지들을 이끌고 통화현 오도구( 五 道 溝 )에 집단 망명하면서 독립운동기지로 자리 잡았다. 29) 유인석에 의하면 이곳은 토지가 매우 비옥하여 한 사람이 경작하면 열 사람이 먹을 수 있고 1년을 경작하면 3-4년을 먹을 수 있 는 곳으로 이곳에 와있는 한인 중에는 가끔 의기있는 자가 있어 더불어 일을 도모할만한 독립운동을 준비하 기에 적지( 適 地 )였다고 한다. 30) 이러한 적지( 適 地 )에 본격적인 국외독립군 기지건설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려 했던 세력은 신민회 지도부였고 그 중심에 양기탁( 梁 起 鐸 )이 있었다. 이와 관련해 먼저 <양기탁보안법위반사건> 판결문의 일단을 보자. 양기탁은 청국영토로 자유의 천지라고 믿는 서간도에 단체이주를 기획하여 조선본토로부터 상당한 자력 ( 資 力 )이 있는 다수의 사람들을 동지( 同 地 )에 이주시키고 토지를 매입하여 그곳에 보내어 민단( 民 團 )을 조직 하고 학교와 교회를 세우고 더 나아가 무관학교( 武 官 學 校 )를 설립하여 문무쌍전교육( 文 武 雙 全 敎 育 )을 실시 하여 기회를 틈타서 독립전쟁을 일으키고자 하였다.(중략) 동년(1910년) 11월 하순 동지 이동녕( 李 東 寧 )이 서 간도 시찰을 마치고 돌아오자 동인과 임치정( 林 蚩 正 ) 집에서 회합을 갖고 서간도에 관한 사정을 상세하게 들었다. 동년 12월 중순 피고(양기탁) 집에 김구, 김도희, 안태국, 주진수 등의 동지들이 모여 서간도 이주방 34 24) 이상룡, 석주유고, 고려대학교 출판부, 1973, 쪽. 25) 연변인민출판사, 앞의 책, 217쪽. 26) 조동걸, 백하 김대략의 망명일기 한국근현대사학회 월례발표회논문집, 2000, 안동대학교, 14쪽. 27) 현규환, 한국유이민사 (상), 쪽. 28) 백범김구전집편찬위원회, 백범김구전집 3, 1999, 쪽. 29) 윤병석, 앞의 책, 24쪽. 30) 유인석, 與 同 門 士 友 書, 소의신편, 국사편찬위원회, 1975, 26쪽.

35 법을 강구했다. 31) 일제 당국에 의해 작성된 판결문 내용이라는 점에 유념해야겠으나 위의 내용을 양기탁 본인도 시인한 바 있 다. 32) 양기탁을 중심으로 추진된 신민회 지도부의 국외독립군 기지건설 계획은 1910년 8월 국권강점을 전후하 여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 같다. 양기탁은 1910년 4월까지만 해도 조국이 아무리 지옥과 같고 화로와 같다 하더 라도 4천년의 역사와 2천만이 거주하고 있는 조국을 떠나려는 것은 나라없는 고아백성이 되는 것 이라며 국외로 의 망명을 자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우려하던 국망( 國 亡 )이 현실화되자, 그동안 뜻을 같이해온 동지들과 회합을 갖고 서둘러 국외이주와 독립군기지 건설운동에 나섰던 것이다. 때마침 동지 이동녕이 앞서 서간도 일대를 돌아보고 왔기에 더욱 속도를 내었다. 그러나 문무쌍전교육( 文 武 雙 全 敎 育 )을 겸비한 무관학교를 국외에 세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막대한 자 금이 필요했다. 이 부분과 관련된 앞서의 판결문 내용과 김구의 회고담을 함께 참고할 만하다. <A> 동지( 同 地 ) 통화현( 通 化 縣 ) 부근에 토지를 매입하여 조선 본토로부터 1인당 1백원 이상의 금전 휴대가 가능한 이주자를 모집하여 동지에 이주시켜 앞서 말한 계획을 실행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국권회복을 꾀 할 뜻을 설유하여 회합자 일동이 찬성한 후 각기 출신지를 표준삼아 김구는 황해도 일원, 안태국( 安 泰 國 )은 평안남도 일원, 주진수( 朱 鎭 洙 )는 강원도 일원 피고(양기탁) 및 임치정은 경기도 기타의 서간도 이주자를 권 유 모집하는 담당자로 정하였다. 이렇게 해서 얻은 이주민은 서간도에 선발이주지로 예정된 이동녕 집에 보 낼 계획을 세우고 임치정 등과 같이 그 모집에 종사하여 목적수행에 노력한 자이다 33) <B> 서울에서 양기탁의 이름으로 비밀회의를 할 터이니 출석하라는 통지가 왔기로 나도 출석하였다. 그 때 양기탁의 집에 모인 사람은 주인 양기탁과 이동녕, 안태국, 주진수, 이승훈( 李 承 薰 ), 김도희( 金 道 熙 ) 그리고 나 김구였다. 이 회의 결과는 이러하였다. (중략) 만주에 이민계획을 세우고 또 무관학교를 창설하여 광복전 쟁에 쓸 장교를 양성하기로 하고 각도 대표를 선정하니 황해도에 김구, 평안남도에 안태국, 평안북도에 이승 훈, 강원도에 주진수, 경기도에 양기탁이었다. 이 대표들은 급히 맡은 지방으로 돌아가서 황해, 평남, 평북은 각각 15만원, 강원은 10만원 경기도는 20만원을 15일 이내로 판비하기로 결정하였다. 나는 경술 11월 아침 차로 서울을 떠났다. 34) 우선 <A> 내용서 통화현 일대에 독립군양성 무관학교 설립을 위해 1인당 1백원 이상의 금전 휴대가 가능한 이주자들을 모집하기로 하고 이주자 모집과 군자금 모금 책임자로, 김구(황해도), 안태국(평안남도), 주진수(강원 도), 그리고 양기탁과 임치정(경기도)을 정하였다고 한다. <B> 역시 같은 내용이나 <A>에 없는 이승훈과 김도희 가 보이며 이들을 무관학교 창설 각도 대표로 기술되어 있다. 특히 <B>에서 주목되는 내용은 황해, 평남, 평북은 각각 15만원, 강원은 10만원 경기도는 20만원의 무관학교 설립 준비금을 15일 이내에 판비하기로 결정했다는 대 목이다. 우리는 위의 내용에서 양기탁을 중심한 신민회 지도부에서 서간도 일대에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한 구 31) 양기탁보안법위반사건, 雩 崗 梁 起 鐸 全 集 제3권, 우강양기탁선생기념사업회,2002, 226쪽. 32) <양기탁 경성지방법원 제11회 공판시말서>, 양기탁외 122인 모사미수사건 (제59권); 윤경로, 105인사건과 신민회연구, 261쪽. 33) 양기탁보안법위반사건, 雩 崗 梁 起 鐸 全 集 제3권, 2002, 226쪽. 34) 김구, 白 凡 逸 志, 삼중당,1983, 151쪽. 35

36 체적인 방안이 논의되었을 뿐만 아니라 각도 별로 군자금 모금을 할당하여 총 60만원의 거금을 모아 광복전 쟁에 쓸 장교 양성을 위한 무관학교 를 세우려했다는 점이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거액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상당한 거금을 그것도 보름 만에 조성하려 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지만 아무튼 이상의 내용에서 우리는 당시 국외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해서는 60여만원의 거금이 요했다는 점도 엿볼 수 있다. 이 점에서 후술하는 이석영, 이회영 6형제가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위해 40만원의 거금을 괘척한 사실이 갖는 의미와 무게를 새삼 인식하 지 않을 수 없다. 4.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인적 물적 토대 1)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인적토대 신흥무관학교가 문을 연 것은 1911년 5월 14일(양력 6월 10일)이다. 35)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인적토대는 크게 보아 아래와 같은 세 그룹에 의해 거의 동시적으로 이루어졌다 할 수 있다. 첫 그룹은 이회영( 李 會 榮 )을 중심한 상동청년학원( 尙 洞 靑 年 學 院 )과 그 인맥을 꼽을 수 있다. 1903년 상동교회( 尙 洞 敎 會 ) 내에 결성된 엡윗청년회, 곧 상동청년학원에는 당시 민족의식이 강고한 애국청년들이 몰려들었다. 1898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강제 해 산되고 이승만( 李 承 晩 ), 이상재( 李 商 在 ), 김정식( 金 貞 植 ), 유성준( 兪 星 濬 ) 등 지도급 인사들이 체포 구금되자, 일반 회원들은 대거 상동교회의 전덕기( 全 德 基 ) 목사 36) 를 찾았다. 여기에 앞서 체포 구금되었던 지도급 인사들이 곧 풀려나자 이들까지 합세함으로 당시 상동청년학원의 위세는 더욱 높아갔다. 한마디로 당대 최대 규모의 애국청 년들의 집합소가 된 것이다. 당시 상동청년회 안에는 위의 인사들 외에도 박용만, 정순만, 남궁억, 이동휘, 양기탁, 신채호, 최광옥, 안태국, 이준을 비롯한 윤치호, 이상설, 이회영, 이시영, 유일선, 손정도, 장지연, 이종호, 노백린, 이갑, 최남선, 장도빈, 최성 모, 이필주, 김진호, 이동령, 조성환, 김구 등 열혈 애국청년들이 경향각지에서 몰려들어 이른바 상동파 ( 尙 洞 派 ) 민족운동가 진지( 陣 地 )를 결성하였다. 37) 이들 가운데는 훗날 친일파로 훼절한 인물도, 입장과 노선을 달리한 인 사도 있지만 당시 이들의 마음은 하나였다. 이렇듯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상동파 라는 민족운동 진지가 결성될 수 있었던 것은 전덕기 목사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38) 그리고 이러한 당시 애국지사들의 총집결지이자, 민족운동의 산실이었던 상동청년 학원의 학감 역할을 이회영이 맡고 있었다. 39) 바로 이상에서 언급된 인물들을 중심으로 1907년 2월 안창호( 安 昌 36 35) 김대락, 西 征 錄,27쪽(1911년 5월 14일자(음) 일기에 往 見 學 校 方 以 是 日 下 午 開 學 이라 되어있다. 36) 전덕기 목사는 1875년 서울출신으로 9세 때 부모를 잃고 숯장사로 생계를 유지하던 중 1892년 상동교회를 설립한 미국 선교사 스크랜튼(W.B. Scranton)를 만나 그 밑에서 공부하여 1902년 전도사 자격으로 상동청년학원을 이끌었으며 1907년 목사안수를 받고 정동교회를 이끌어가던 중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당한 후 1914년에 별세하였다( 이성삼, 감리교와 신학대학교, 1977, 310쪽 ; 윤춘병, 전덕기목사와 민족운동, 한 국감리교회사학회, 1996, 9-11쪽 ; 윤경로, 신민회창립과 전덕기, 한국근현대사의 성찰과 고백, 한성대학교출판부, 2008, 참조). 37) 전택부, 한국기독교청년운동사, 정음사, 1973, 79-84쪽; 장석영, 華 泉 回 顧 錄, 익문사, 1976, 51쪽 ; 송길섭, 민족운동의 선구자 전덕기목사, 상동교회, 1985, 59쪽; 윤춘병, 전덕기목사와 민족운동, 한국감리교회사학회, 1996, 17-21쪽. 38) 윤경로, 신민회의 창립과 전덕기, 한국근현대사의 성찰과 고백, 한성대학교출판부, 2008, ) 이은숙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 정음사, 1974, 13쪽; 이관직, 우당 이회영 약전, 을유문화사, 1985, 147쪽 ; 이정규, 우당 이회영선생 약전, 又 觀 文 存, 삼화인쇄출판부, 1974, 30쪽.

37 浩 )가 미국에서 귀국하는 계기를 맞이해 동년 4월 비밀결사체인 신민회( 新 民 會 )가 결성되었던 것이다. 40) 다시말 해 귀국 2개월 만에 신민회라는 비밀결사 조직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국내에 위와 같은 상동파 라는 인적토대와 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41) 그러나 이상의 상동파 인사들 모두가 신흥무관학교 설립운동에 투신한 것은 아니다. 또한 이상에서 언급된 상동파 인물들이 신민회원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없지 않으나 이 문제는 본 주제에 벗어나므로 다른 기회로 돌 리기로 한다. 아무튼 이상의 상동파 인물들 중 이회영, 이시영( 李 始 榮 ) 6형제를 비롯한 이동녕( 李 東 寧 ) 등이 직 접 이 일에 나섰으니 그 과정을 요약하면 이러하다. 이회영 6형제 곧, 건영( 健 榮 ), 석영( 石 榮 ), 철영( 哲 榮 ), 시영, 호영 ( 頀 榮 ) 6형제가 대소가 50-60명을 이끌고 압록강 국경을 넘은 때가 1910년 12월 30일이다. 42) 이른바 삼한갑족( 三 韓 甲 族 )의 명문으로 대대로 내려오던 상당한 사회경제적 기득권을 포기하고 후술하듯 6형제 모두의 전 재산을 일시에 처분하고 망명길에 나선 것이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과연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이같은 어려운 결단을 행동에 옮기게 했던 것일까.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해 우리는 이 역사적인 일을 견인한 이회영의 남다른 현실인식과 역사의식에 대한 이해 가 먼저 요구된다. 우당( 友 堂 ) 이회영이 본격적으로 애국운동과 국외독립운동 기지 건설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 것은 1905년 11월 을사늑결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을사늑결의 획책을 반대하며 민영환( 閔 泳 煥 ), 조 병세( 趙 秉 世 ) 등이 자결하고 연이어 조약파기를 주창하는 격앙된 통곡과 상소의 물결이 전국적 규모로 일어났 다. 그러나 이회영은 통곡과 분노만으로 나라를 구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이상재( 李 商 在 ) 등과 협의하여 자신 의 가산( 家 産 )을 팔아 그 자금으로 나인영( 羅 寅 永 ), 기산도( 奇 産 度 ) 등과 연락을 취하며 이완용 등 을사오적( 乙 巳 五 賊 ) 암살을 꾀하는 등 43) 적극적인 반일구국운동에 뛰어 들기 시작하였다. 동생 이시영에게 관직에서 물러 나 구국의 길에 나서는 것이 나라를 잃은 벼슬아치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권고하였던 것도 바로 이 때였다 고 한다. 44) 이어 그는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李 相 卨 ), 이위종( 李 瑋 鍾 ) 이준( 李 儁 ) 대표를 파견하는 일을 주선 45) 하는 동시에 장기적인 구국운동의 방안으로 국외독립운동 기지건설 모색에 나섰다. 이동녕, 여준( 呂 準 ), 장유순( 張 裕 淳 ), 유완무( 柳 完 懋 ) 등과 협의하여 선정한 지역은 본국과의 거리, 교포의 규모와 정착상황 그리고 러시아와의 거리 등을 참작하여 용정촌을 근거지로 결정 46) 할 만큼 일찍부터 국외독립운동 기지건설 계획을 세 워나갔다. 이회영이 국망이 눈앞에 다가 선 1910년 8월 이동녕과 함께 장유순, 이관직( 李 觀 稙 )을 대동하고 압록 강을 건너 안동(단동)을 거쳐 훗날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 횡도천( 橫 道 川 ) 등 남만주 일대를 직접 답사함으로써 그의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47) 말하자면 우당 이회영은 국권이 일제에 강점당한 비통한 현실 을 직면하고 누대로 나라의 중요한 벼슬을 지낸 삼한갑족의 집안 출신으로 나라와 운명을 함께 하는 것이 도 리 ( 喬 木 世 臣 )라는 판단에서 죽을지언정 왜적 밑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차스럽게 도모할 수 없다 는 각오와 40) 신민회 창립 날자에 대해서 여러 설이 있으나(윤경로, 105인사건과 신민회연구, 일지사, 1990, 180쪽 참조) 여기서는 신용하 주장에 따른다(신용 하,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 을유문화사, 1985, 25쪽). 41) 신용하, 위의 책, 18쪽; 윤경로, 105인사건과 신민회연구, 일지사, 1990, 쪽. 42) 이은숙, 위의 책, 17쪽; 이정규, 위의 책, 147쪽; 이관직, 우당 이회영 약전, 을유문화사,1985, 147쪽 등에 출발 날짜가 다소 다르게 되어있으나 여기 서는 서중석,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역사비평사, 2001, 37쪽 주장을 따른다. 43) 이정규 이관직, 우당 이회영 약전, 을유문화사, 1985, 29-30쪽. 44) 위의 주. 45) 우당의 헤이그밀사사건 관련 부분에 관해서는 서중석, 앞의 책, 28-30쪽 참조. 46) 이정규 이관직, 앞의 책, 30-31쪽. 47) 이정규 이관직, 위의 책, 144쪽. 37

38 신념에서 망명의 길을 결단하고 국외 독립군기지 건설운동에 나설 것을 결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 의 확고한 의지와 결단을 형제들에게 제의하고 이에 5형제 모두로부터 동의를 받고 50여명의 권속들과 함께 드 디어 1910년 12월 30일 압록강을 넘어 망명길에 오른 것이다. 48) 익히 알려진대로 우당의 10대조 어른은 조선조 선조 때 오성대감 으로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던 재상 백사( 白 沙 ) 이항복( 李 恒 福 )이었고 청렴 강직했던 영의정 이종성( 李 宗 城 )이 5대조이며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 李 裕 元 )이 부친의 사촌이었고 부친 이유승( 李 裕 承 ) 또한 의정부 좌찬성( 左 贊 成 ),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아우 이시 영 역시 일제의 국권강탈 직전까지 평남관찰사와 한성재판소장을 역임하는 등 한마디로 명문 갑족이었다. 이렇 듯 흔치 않은 삼한갑족의 권속 모두가 기존의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민족의 독립쟁취를 목적으로 망명길에 오 른 가문은 오로지 우당 이회영 형제뿐이었다. 49) 1910년 12월 권속 50-60명이 남대문, 용산, 장단 등지로 각각 분 산하여 신의주, 안동(단동)을 지나 목적지인 회인현(현 환인현) 횡도천( 橫 道 川 )에 이듬해 1월 말에 도착하였다. 이 때 모습과 심정을 독립운동가의 아내 이은숙은 이렇게 회고하였다. 부모지국을 버린 망명객들이 무슨 흥분이 있으리요. 그러나 상하없이 애국심이 맹렬하고 왜놈의 학대에서 벗어난 것만 상쾌하고 장차 앞길을 희망하고 환희만으로 지나가니 차호( 嗟 乎 )라. 조국을 이별한지 일망( 一 望 ) 이 되는데 무정한 광음은 송구영신의 신해년(1911)이 되었다. (중략) 안동현서 횡도촌은 5백리가 넘는지라. 입춘이 지났어도 만주 추위는 조선 대소한( 大 小 寒 ) 추위 비( 比 )치도 못하는 추위이다. 노소없이 추위를 참고 새벽 4시만 되면 각각 정한 차주( 車 主 )는 길을 재촉해 떠난다. 채찍을 들고 어허 소리하면 여러 말들이 고 개를 치켜들고 으흥 소리를 하며 살같이 뛴다. 우당장(이회영)은 말을 자견( 自 牽 )하여 타고 차와 같이 강판 에서 속력을 놓아 풍우( 風 雨 )같이 달리신다. 나는 차안에서 혹 얼음판에서 실수하실까 조심되었고 6-7일을 지독한 추위를 좁은 차속에서 고생하던 말을 어찌 다 적으리오 50)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인적토대의 두 번째 그룹은 이상룡( 李 相 龍, )과 김대락( 金 大 洛, ) 황 호( 黃 澔, ) 일문과 김동삼( 金 東 三, ) 등 안동( 安 東 )지역 혁신유림계( 革 新 儒 林 系 ) 지사 그룹이 다. 51) 이상룡 등 안동일대 혁신유림과 지사들은 1910년 말 강원도 신민회 지회장 52) 으로 알려진 경북 울진 출신 주진수( 朱 鎭 洙 )를 통해 신민회의 국외독립운동 기지 건설 계획을 전해 듣고 이 계획에 쾌히 참여할 것을 결의하 였다고 한다. 53) 이때는 마침 김대락의 아우인 김효락( 金 孝 洛 )의 맏아들 김만식( 金 萬 植 )과 김동삼 2인이 1910년 가을 만주지역을 돌아보고 귀국한 때인지라 신민회 계획 참여를 쉽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안동지역 지사 중 맨 먼저 망명길에 오른 것은 김대락과 그 일족이었다. 1910년 12월 24일 김대락은 만삭임부 인 손녀 손부를 포함하여 종질, 당질, 증손자 등 권속들을 이끌고 안동 고향을 떠나 이듬해 1월 6일 서울을 출 발하여 같은 달 15일에 횡도천에 도착하였다. 54) 그리고 이어 김정묵( 金 定 黙 ), 김병달( 金 秉 達 ), 김규식( 金 圭 植 ), 김 38 48) 서중석, 앞의 책, 51쪽, <주> 56 참조. 49) 조동걸, 白 下 金 大 洛 의 망명일기( , 쪽 ; 서중석, 앞의 책, 36쪽. 50) 이은숙, 가슴에 품은 뜻 하늘에 사무쳐 ( 西 間 島 始 終 記 ), 인물연구소, 1981, 49-50쪽. 51) 서중석, 앞의 책, 46-47쪽. 52) 윤경로, 105인사건과 신민회연구, 일지사, 124쪽, < 대한신민회 국내 조직 현황표>(1911). 53) 권상규, 行 狀, 石 州 遺 稿, 고려대학교 출판부, 1973, 335쪽. 54) 김희곤, 만주벌 호랑이, 김동삼, 지식산업사, 2009, 56쪽. ; 횡도천 도착 날짜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서중석, 앞의 책, 46쪽).

39 병만( 金 秉 萬 ) 등 의성 김씨 일가 150여명이 약간의 시차를 두고 횡도천에 집합하였다. 55) 김대락 일행이 안동을 출발한 지 일주일 후 이어 이상룡과 그 권속이 뒤를 이었다. 1911년 1월 6일 아침 이상룡 은 떠나기에 앞서 선조들의 위패를 모셔놓은 임청각( 臨 淸 閣 )에서 예를 올린 후 남은 가족들에게 집안일을 부탁 하고 저녁 무렵에 행장을 수습하여 홀연히 문을 나서니 여러 일족들의 눈물을 뿌리는 전송을 받으며 56) 임청각 문을 홀로 나섰다. 이후 추풍령까지 걸어서 열차 편으로 서울에 도착한 그는 그곳서 함께 떠날 권속들과 합류하 여 신의주를 거쳐 1911년 1월 27일 발거( 跋 車 ) 곧 눈썰매 수레를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이때 이상룡의 아우 봉희 ( 鳳 羲 )를 비롯한 아들 준형( 濬 衡 ), 손자 병화( 炳 華, 大 用 ), 조카 문형( 文 衡, 光 民 ) 등 고성 이씨 권솔 30여 가구가 함께하였다. 57) 국망의 슬픔과 분노를 가슴에 품고 차라리 이 머리가 잘릴지언정 어찌 내 무릎을 꿇어 그들의 종이 될까 보냐 라는 비장한 심정으로 살을 에어내는 칼보다 날카로운 삭풍 58) 을 뚫고 망명길에 올랐다. 59) 이후 안동지역에서 뒤를 이어 망명길에 오른 애국지사들이 무려 100여 가구 1천명에 달했다고 한다. 60) 국내 동남쪽 멀리 떨어져있는, 그것도 대표적인 척사위정론( 斥 邪 衛 正 論 )의 보루( 堡 壘 )이자 보수적 유림세력이 강한 안동지역에서 이렇듯 국외 독립군기지 건설을 목적으로 대규모의 국외이주가 가능했던 소이는 과연 무엇 일까. 참으로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익히 알려진대로 안동지역에서는 구한말 수많은 의병장을 배출했을 뿐 만 아니라 단일지역으로는 독립운동가를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이다. 61) 보수적인 안동지역에서 이상룡 등 다수의 혁신유림과 수많은 진보적 독립운동가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1907년 세워진 협동학교( 協 東 學 校 )의 영향이 지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62) 안동 내앞마을 의성 김씨 문중서당 인 가선서당( 可 山 書 堂 )을 보수하여 의성 김씨 대종가 종손인 김병식( 金 秉 植 )이 학교설립에 앞장서고 김후병( 金 厚 炳 )의 재정적 후원으로 협동학교가 1907년에 개교하였다. 그러나 협동학교 설립 초기에는 유림측의 반대가 적 지 않았다. 백하( 白 下 ) 김대락도 처음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석주( 石 洲 ) 이상룡도 적극 지지하는 입장은 아니 었다고 한다. 63) 그러나 김씨 대종가의 종손이 학교를 세워 교장에 취임하고 지금까지의 구학문에서 볼 수 없었 던 세계지리, 수학, 물리, 화학, 생물, 상업 등 새로운 신식학문을 가르치는 동시에 애국심과 독립정신을 고취시키 는 학습내용이 알려지면서 점차 반대 여론이 잦아들었다. 또한 가르치는 선생과 학생들의 열정이 주위를 감동 시켰던 것 같다. 설립 초기 협동학교 교사로 활동한 인물은 잘 알려진 김동삼을 비롯해 교장 김병식, 교감 박태 훈, 교사 이관직, 박준서, 김진황 그리고 1907년에 이미 대한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한 류인식 등이었다. 64) 마침 협 동학교가 설립되던 1907년 이 시기는 서울을 비롯한 경향각지에 애국계몽계 신식학교들이 대거 생겨나던 시기 와 맞물렸던 점도 이 학교가 발전할 수 있었던 한 이유라 할 것이다. 마치 극과 극은 통한다 는 말과 같이 안동지 55) 김희곤, 앞의 책, 54-61쪽. 56) 이상룡, 西 徙 錄, 石 州 遺 稿 57) 김희곤, 위의 책, 58쪽. 58) 이상룡, 27일 渡 江, 石 州 遺 稿, 쪽. 59) 채영국, 서간도 독립군의 개척자, 이상룡, 역사공간, 2007, 쪽. 60) 이 때 안동지역 출신으로 뒤를 이어 망명길에 오른 인물은 도산면 토계출신의 이원일과 그 가족 그리고 이동화, 이기호, 이원박 등과 훗날 김동삼의 맏며느리가 된 이해동 그리고 무실 전주 류씨인 류인식과 그 가족 등이었다.(김희곤, 앞의 책, 58-59쪽). 61) 김희곤, 안동의 독립운동사, 안동시, 1999, 참조. 62) 위의 책 ; 조동걸, 안동유림의 도만경위와 독립운동의 성향, 쪽; 김동원, 일송 김동삼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7집,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1993, 쪽 ; 김희곤, 앞의 책, 참조. 63) 그러나 이상룡이 1908년 대한협회 본회의 요청에 따라 이듬해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조직하고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와 유사한 대중집회가 여러 차례 열리고 시민사회 와 의용병 양성 이라는 일종의 향병조직 및 독립군 양성이라는 군대조직론이 거론되면서 이상룡의 사상에 큰 변화와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김희곤, 앞의 책, 지식산업사, 2009, 46-48쪽). 64) 김희곤, 위의 책, 41쪽; 박걸순, 류인식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인물총서2), 지식산업사, 2009, 74쪽. 39

40 역은 매우 보수적이면서도 매우 진보적인 양면성을 지닌 흔치않은 곳으로 수많은 걸출한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독특한 지역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세 번째 인적토대를 이룬 그룹은 강화학파 계통의 개신유학파 이건승( 李 建 昇 ), 정원하( 鄭 元 夏 ), 홍승헌( 洪 承 憲 ) 등을 꼽을 만하다. 65) 이건승 등 위 3인은 강위( 姜 瑋 ), 김택영( 金 澤 榮 ), 황현( 黃 玹 )과 가까이 지내며 양명학자 로서 심학( 心 學 )의 의미를 강조하였던 영재( 寧 齋 ) 이건창( 李 建 昌 )이 여러 번 유배 끝에 고향 강화도에 낙향했 을 때 따라왔다고 한다. 66) 이건승은 바로 이건창의 아우였다. 정원하는 고종대 사간원 대사관과 이조참판, 그리 고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으나 나라가 망하자 모든 관직을 내놓고 서둘러 주변을 정리한 후 북행길에 올라 만주 횡도천에 다른 일행보다 먼저 자리를 잡았다. 67) 홍승헌은 충북 진천( 鎭 川 ) 사람으로 홍문관 교리와 수찬을 지 낸 구한말 관료 출신이었으나 역시 국망을 당하자 강화도 양명학파에 합세하여 이건승과 함께 북행길에 올랐 다. 이들은 더 이상 식민지 땅에 몸을 둘 이유가 없다는 판단 하에 1910년 10월 2일 개성 성서역에서 북행열차에 몸을 실고 다음날 밤 신의주에 도착하였다. 신의주 사막촌( 四 幕 村 )에서 압록강 강물이 얼기를 한달 가까이 기 다리다 그해 12월 초하루 새벽에 압록강을 건너 안동현에 도착했다. 그들이 횡도천에 도착한 것은 12월 7일이었 다. 68) 이날 먼저 와 있던 동지 정원하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69) 이상에서 보듯 회인현 횡도천이라는 작은 마을에 서울의 우당 이회영 일가, 안동의 김대락, 이상룡 일가, 충청 도 진천 출신의 홍승헌, 강화도의 이건승 등 전국각지에서 애국계몽계열 및 사대부 출신 개신유학자들과 양명 학자들이 집결하였다. 70)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인적 토대를 이룬 이상의 3개 그룹 71) 은 지역을 달리하고 있지만 이들간에는 세교가 얽혀있는 가족들 72) 이었다는 지적과 같이 이들 문중 간에는 오래전부터 소론( 少 論 )이라는 당파적 동일성과 양명학이라는 학문적 동질성을 지니고 있었다. 73) 약간의 시차를 두고 회인현 횡도천 마을에 도착한 위의 3개 그룹의 독립운동 지사들과 그 일행은 달포정도 그곳에 머문 후, 1911년 2월 초순 경 삼원포 시내에서 서북쪽으로 약 5Km 정도 떨어진 추씨( 鄒 氏 ) 집성촌( 集 姓 村 )인 추가가( 鄒 家 街 )로 옮겨 본격적인 독립운동 기지 마련에 나섰다. 74) 추가가 마을은 앞으로는 넓은 평야가 펼 쳐있고 뒤쪽에는 대고산( 大 孤 山 )이 우뚝 서있어 독립운동기지로 매우 적합한 곳이었다. 1896년 제천의병장 유인 석이 의병 재기 목적으로 찾았던 통화현 오도구와도 멀지 않은 곳이었다. 드디어 이들은 1911년 5월 14일(양력 6 월 10일) 고조선과 고구려의 정기가 깊게 서려있는 추가마을의 한 옥수수 창고에 신흥강습소 라는 이름으로 신 흥무관학교를 태동시켰던 것이다. 2) 신흥무관학교 태동의 물적토대 40 65) 이덕일, 우당 이회영의 아나키즘 수용배경에 관한 연구, 우당 이회영일가 망명 100주년 기념학술대회 발표 논문, 2010, 43-45쪽. 66) 이덕일, 이회영과 젊은 그들, 역사의 아침, 2009, 30-31쪽. 67) 이덕일, 위의 책, 38쪽. 68) 민영규, 강화학 최후의 광경, 우반, 1994, 32-34쪽. 69) 이덕일, 위의 책, 역사의 아침, 2009, 30-31쪽. 70)이덕일, 우당 이회영의 아나키즘 수용배경에 관한 연구, 우당 이회영일가 망명 100주년 기념학술대회 발표 논문, 2010, 45쪽. 71) 이글에서는 신흥무관학교의 인적토대로 이회영 일가와 이상룡 등 안동그룹, 강화도 그룹 등 3개 그룹으로 단순화 시켰으나 신흥무관학교를 견인한 인적 구성은 위의 3개 그룹 외에도 수많은 인적토대에 의해 10년 동안 독립운동 지도력이 양성될 수 있었다. 이에 관해서는 박환, 만주지역의 신흥무 관학교, 史 學 硏 究 제40호; 서중석, 이덕일, 김희곤 등 기존연구 참조. 72) 민영규, 앞의 책, 34쪽. 73) 이덕일, 위의 논문, 45쪽. 74) 서중석, 앞의 책, 37쪽.

41 이제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물적토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앞서 언급한대로 조직을 견인하며 유지하기 위 한 조건 중 인적토대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물적토대이다. 아무리 뜻이 가상하고 의기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아도 조직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한 물적토대의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1907년 4월 비밀결사체로 조직된 신민회원 가운데 안창호, 양기탁 등 중앙 지도부 간부를 제외한 지방회원과 간부급 임원들 대부분이 상공업 종사자들 중심으로 되어 있다. 이는 신민회 조직을 장기적이며 지속적으로 유 지하기 위해서 물적 공급의 항시적 담보를 의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컨대 미곡상, 객주업, 유기업, 유기상, 매약상 등 소규모의 자산가를 비롯해 당시 자본금만 9천원이 넘는 잡화상( 雜 貨 商 ) 곧 상무동사( 商 務 同 事 )와 협 성동사( 協 成 同 事 )의 운영자였던 양준명( 梁 濬 明 ), 평양에서 2만원의 거금으로 오늘날의 호텔에 해당하는 객주업 ( 客 主 業 )을 운영하던 윤성운( 尹 聖 運 ), 평북 철산( 鐵 山 ) 출신으로 안창호( 安 昌 浩 )가 대성학교( 大 成 學 校 )를 창설할 때 3,000원을 희사하였던 대금업자( 貸 金 業 者 ) 오희원( 吳 熙 源 ),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대지주 가문 출신인 임경엽 ( 林 冏 燁 ) 등, 이들의 재산은 적어도 5천원에서 수만원에 해당하는 토착 재력가들이었다. 75) 신민회는 이러한 재력 가들을 조직의 임원과 회원으로 영입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신민회 조직과 활동의 물적토대 마련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신민회 활동의 물적토대 구축에 기여한 대표적 인물은 남강( 南 崗 ) 이승훈( 李 承 薰 )이다. 그 는 유기상( 鍮 器 商 )으로 시작하여 당대를 대표하는 토착자본가로 이름이 높았다. 76) 그런 그가 개항이후 일본의 경제적 침투가 강고해지자 이에 대응할 목적으로 이른바 관서자문론( 關 西 資 門 論 )을 제창하면서 여러 토착자본 을 규합한 것도 신민회의 물적토대 마련과 무관하지 않았다. 77) 즉 서북지방의 토착적 민족자본가들을 주주로 모아 평양에 마산동 자기회사( 磁 器 會 社 )를 설립하였던 것도 향후 전개할 신민회 활동의 물적토대 마련에 주요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익히 알려진 대로 신민회의 장기적 목표는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는데 있었다. 따라서 신흥무관학교 와 같은 독립군 양성사업은 신민회가 주도적으로 추진하려 했던 주요사업의 하나였다. 78) 1909년 봄 양기탁( 梁 起 鐸 ) 집에서 신민회 간부 비밀회의가 있었고 그 자리에서 독립군기지건설과 군관학교 설치안을 결의 79) 하고 이 일 추진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함에 따라 참석자들에게 모금 금액을 할당하기도 하였다. 80) 그러나 안명근사건 과 양기탁보안법사건 그리고 105인사건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으로 신민회의 장기적인 독립운동 구상은 위 기에 봉착했다. 특히 가장 큰 문제가 국외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한 물적토대 마련이 어렵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계획대로 추진되었으니 이 일을 가능케 한 것이 이회영 일가가 전 재산을 투여하는 일대 괘거의 용단이 있었으니 그 경위는 아래와 같다. 국외독립운동기지 건설 계획이 어려움에 처하자 신민회 측은 곧 자금조달 방안 모색에 나섰고 그 과정에 이 회영과 이시영 형제를 먼저 만났던 것 같다. 신민회의 국외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적극 추진했던 양기탁과 이회영 은 상동청년학우회 시절부터 기맥( 氣 脈 )을 나누었던 사이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81) 이회영 형제의 주선으로 당 75) 윤경로, 105인사건 연루자들의 사회경제적 성격과 활동, 105인사건과 신민회연구, 쪽 참조. 76) 김도태, 남강 이승훈,기독교문사, 1950 참조. 77) 윤경로, 위의 책, 쪽; 윤경로, 105인사건에 연루된 상공업자들의 활동, 한국사연구 (56), 참조. 78) 양기탁은 105인사건 공판에서 무관학교 일에 대해서는 내가 일한합병 당시 계획한 것으로서 그 일(양기탁보안법위반사건)과 지금의 이 일(사내총 독모살미수사건)과는 별개의 것이다. 나는 그 일의 죄로 지금 囚 衣 를 입었을 뿐이다 는 진술에서 보듯 신민회가 국외 무관학교 건설을 추진하려했 음을 인정하였다.(<양기탁 <경성지방법원 제11회 공판시말서>, 양기탁외 122 人 모살미수사건(제59권); 윤경로, 앞의 책, 261쪽. 79) 최근식, 무장독립운동비사, 민족문화사, 1985, 47쪽. 80) 위의 주. 81) 송길섭, 민족운동의 선구자 전덕기목사, 상동교회, 1985, 59쪽. 41

42 시 상당한 재력가인 형 이석영( 李 石 榮 )을 접촉하게 되었던 것 같다. 82) 이석영이 당대 재력가로 알려진 것은 그가 고종 때 함경도관찰사를 거쳐 좌의정과 영의정 등 요직을 두루 거친 이유원( 李 裕 元 )의 양자로 입적하여 그의 재 산을 상속받았기 때문이다. 83) 이유원은 대원군 하야 후 고종이 친정( 親 政 )을 시작할 때 영의정에 올라 우의정 박규수( 朴 珪 壽 )와 함께 문호개방을 추진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후 수차에 거쳐 청국을 오가는 등 요직을 두루 걸친 그는 수 만석에 이르는 재산과 토지를 지니고 있었던 당대의 대부호였다고 한다. 그러면 그의 재산은 얼마 나 되었을까. 이와 관련해 <매천야록>( 梅 泉 野 夜 )의 다음과 같은 내용이 주목된다. 이유원의 호는 귤산이며 양주 가오곡에 그의 별장이 있다. 그곳은 서울서 80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말로는 그 양주 별장에서 서울까지 80리길을 내왕하면서 남의 논두렁이나 밭두렁 길을 한 조각도 밟지 않고 서울로 올 수 있을 정도로 광대했다고 한다 ( 裕 元 號 橘 山 別 墅 在 楊 州 之 嘉 梧 谷 距 京 師 八 十 里 時 稱 其 所 往 來 八 十 里 皆 其 田 畔 路 不 踏 他 人 片 地 甚 言 其 占 田 之 廣 也 ) 84) 80리 떨어진 양주 별서에서 서울에 이르는 길에 남의 땅을 한조각도 밟지 않고 내왕할 만큼의 토지를 소유하 고 있었다니 그 규모가 얼마나 광대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만하다. 그리고 그의 양주 별장에는 정원 안에 숲을 꾸며놓고 화석을 모아 놓았는데 근세까지 이런 절경은 미처 구경조차 못할 정도의 것이었다 ( 園 林 花 石 之 勝 近 世 所 未 有 )고 한다. 85) 한말비사( 韓 末 秘 史 )에 담긴 내용이지만 당시 지방에 있던 황현( 黃 玹 )에게까지 전해져 기록 으로 남은 것으로 보아 결코 과장된 것만은 아닌듯 하다. 아무튼 이렇듯 상당한 재산이 1888년 이유원이 사망하 자 양자인 석영에게 넘어갔고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아우 회영과 시영이 형 석영을 설득하고 이를 흔쾌히 받아 들여 그가 소유하고 있던 상당한 토지재산과 이회영 등 5형제의 재산을 투척한 것이 신흥무관학교 태동의 결정 적인 기반이 되었다 할 것이다.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은 당시 정황을 여러 형제분들이 일시에 합력하여 만주로 갈 준비를 하였다. 비밀리에 답과 가옥 등 부동산을 방매하는데 여러 집이 일시에 방매를 하느라 이 얼마나 극난하리오. 그때만 해도 여러 형제 집이 예전 대가( 大 家 )의 범절로 남종여비가 무수하여 하속( 下 屬 )의 입을 막을 수 없는데다 한편 조사는 심 했다 86) 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급하게 처분하려니 제값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급하게 처분한 재산금액 이 당시 돈으로 40만원이었다고 한다. 87) 당시 쌀 한섬에 3원 정도였으니 이를 오늘의 쌀값으로 환산해보면 무려 600억원을 상회하는 거금에 해당한다. 88) 후술하듯 신흥무관학교 설립초기인 경학사와 신흥강습소 시절 학교재정은 전적으로 이석영에 의존하였다고 한다. 89) 韓 民 3호 <서간도 초기 이주와 신흥학교시대 회고기>에 李 石 榮 의 功 이라는 제목아래 서간도 이주의 先 進 者, 그 중에서도 신흥학교의 유일한 공로자가 이석영씨인 것을 아는 자가 적다. 그는 巨 萬 의 재산 전부를 이 82) 韓 民, 3호, 쪽 ; 박환, 만주지역의 신흥무관학교, 史 學 硏 究, 제40호, 쪽. 83) 이유원은 친 아들로 수영( 秀 榮 )을 두었으나 어려서 죽고 후사가 없어서, 이조판서 이유승( 李 裕 承 )의 아들 이석영( 李 石 榮 )을 양자로 삼았다. 84) 역주 매천야록 (상권), 문학과지성사, 2006, 88쪽. 85) 위의 주. 86) 이은숙, 가슴에 품은 뜻 하늘에 사무쳐 ( 西 間 島 始 終 記 ), 46-47쪽. 87) 서중석, 앞의 책, 쪽 ) 당시 윤치호의 재산이 20만원으로 매년 쌀 추수량 만도 7천석이 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당시 40만원은 상당한 자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윤경로, 앞의 책, 95-96쪽) 89) 박환, 만주지역의 신흥무관학교, 사학연구 (제40호), 368쪽.

43 주 동포의 구제와 신흥학교의 경영에 다 소비했다 90) 는 회고와 증언에서 보듯 이석영의 괘척( 快 擲 )이 신흥무관 학교 설립에 결정적인 물적토대가 되었다 할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해 좀더 구체적인 증언을 들어보자. 신흥무관 학교 교관으로 복무하던 이관직( 李 觀 稙 )은 그의 회고기인 우당이회영실기 에서 신흥무관학교 설립에서의이석 영의 역할을 아래와 같이 회고하고 있다. 그는(이석영) 만주에서 살게된 뒤에도 많은 지사들의 여비를 지급하였고 이동녕에게는 집과 땅을 사서 기부 함으로써 만주생활을 전담하였다. 그리고 신흥학교 창립시에도 우당선생의 바라는 바에 따라 학교의 건축 과 설립유지 등 제 비용을 희사하였다. 그가 만일 학교설립의 자금을 내놓지 않았다면 우당선생의 오랜 소 원이던 군관학교도 설립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91) 한편 우당 이회영은 위의 증언에도 언급되고 있듯 독립군 군관학교 설립을 오래 전부터 꿈꾸어왔던 것 같다. 과연 이회영은 언제부터 이러한 계획을 세웠고 이 일을 위해 구체적으로 준비한 흔적은 없는 것일까. 이 점과 관 련해 1896년부터 개성 인근 풍덕( 豊 德 )지방에 삼포농장( 蔘 圃 農 場 )과 목재상을 경영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92) 말하자면 이회영은 1890년대 말부터 장차 국외 독립운동 기지건설을 위한 자금 확보, 곧 물적토대를 마 련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인식하고 그때부터 이미 준비에 나섰던 것이 아니가 싶다. 비록 이 사업은 일 본인들의 농간과 노략질로 손해를 보았지만 법적 투쟁을 전개하여 일본인의 부당성을 밝혀낸 쾌사 로 주위로부 터 찬양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93) 삼한갑족의 자제로 마땅히 관직생활을 할법한데 그는 이를 마다하고 평민들 이 하는 목재상과 인삼농장에 뛰어들어 일찍부터 군자금 마련에 나섰던 것 같다. 그가 이와 같은 남다른 생각 과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젊은 시절 이상설( 李 相 卨 )과 교류하며 받은 영향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상설은 1905년 11월 36세의 젊은 나이에 의정부 참찬에 오른 후 을사늑결을 막기 위해 자결까지 시도했던 애국자로서 이 일이 좌절되자 1906년 4월 망명길에 나섰는데 이에 앞서 이회영의 집에서 이동녕, 여준( 呂 準 ), 장유순( 張 裕 純 ) 등과 밀회를 갖고 향후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 계획을 세울 만큼 이상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의기투 합했던 동지였다. 94) 1890년대부터 이상설과 기맥( 氣 脈 )을 맺은 이회영은 그 때부터 이미 관직에 나아가기보다 사회변혁과 변화에 관심을 보였다. 나는 본래 벼슬을 원하지 않은 사람이며 불평등한 신분제도도 본래 반대하던 사람이다. 독립을 하자는 것도 나 개인의 영화를 위한 욕심에서가 아니라 전체 민족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행복을 누릴 수 있기 위 해서이다. (중략) 그러므로 나의 생각이 무정부주의와 공통된다 하여 나에게 사상적 전환을 하였다하는 의견에 나는 수긍할 수 없다 95) 고 하였듯 그는 일찍부터 매우 진보적인 혁명가적 기질을 타고났던 것 같다. 그가 종들에게 경어를 사용했으며 종국에는 그들을 종의 신분에서 해방시켜 준 일이며 청상과부가 된 누이 동생의 재가를 위해 여동생의 가짜 장례식을 치러가면서까지 개가시킨 사실 그리고 그가 훗날 다물단( 多 勿 90) 韓 民,3호, 180쪽; 박환, 위의 논문, 쪽. 91) 이정규 이관직, 앞의 책, 176쪽. 92) 위의 책, 쪽. 93) 이 때 내장원경( 內 藏 院 卿 ) 이용익( 李 容 翊 )은 이 일을 고종황제에게 아뢰자 고종황제는 이회영이 재상이었던 그의 선조 백사( 白 沙 ) 이항복과도 같 은 기풍이 있으니 참으로 뽑아 쓸만하다 고 하며 탁자부 대신에게 어명을 내려 주사로 임명하도록 하였다고 하나 관직에는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이 관직, 위의 책, 122쪽). 94) 뿐만 아니라 이회영과 경주 이씨 본관이 같고 또한 양가 문중이 소론( 少 論 ) 집안으로 사상적으로도 당시로서는 비주류에 해당하는 양명학적인 입 장을 취한 남다른 관계였다. 95) 이정규 이관직, 앞의 책, 88-89쪽. 43

44 團 )의 단원으로 활동한 것, 뿐만 아니라 기존의 제도화된 정치적 권력과 사회적 권위를 부정하는 아나키스트 (Anarchists) 96) 가 되었던 점 등을 감안할 때 그의 성품은 태생적으로 혁명아적 기질을 지닌 인물로 보아 크게 틀 리지 않을 것이다.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자금 마련을 위한 원대한 통큰 목적을 위해 당시 권문세가의 후손 신 분에 매이지 않고 목재상과 인삼밭 경영에 뛰어든 결단도 그의 남다른 기질의 단면을 잘 말해준다 하겠다. 한편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물적토대와 관련해 이상룡, 김대락, 황호, 김동삼 등 안동( 安 東 )지역 혁신유림계( 革 新 儒 林 系 ) 지사들이 망명하면서 준비한 자금 또한 상당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누대로 고성 이씨 가문을 이어 온 이상룡은 16세기 초 13대 조상인 이명( 李 洺 ) 대부터 18세기 초 이시성( 李 時 成 ) 대에 이르는 9대에 걸쳐 모아진 재산이 대대로 이어져 선대 묘지를 모신 도곡 주변과 임동( 臨 東 ), 임북( 臨 北 )지역 일대에 상당한 토지와 재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1895년 전기의병 때와 1905년 이래 수년간의 의병기병 때 수만냥을 기부할 수 있었던 것도 상 당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97) 이상룡은 임청각을 떠나기 전 조상의 제사와 친척들의 생 활을 위한 논밭 얼마를 남겨 놓고 나머지 모두를 처분하여 독립군 기지 건설에 내놓았다고 한다. 98) 이밖에도 안 동지역 망명인들이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투척한 물적토대 또한 상당하였을 것이다. 1911년 5월 14일(양력 6월 10일) 유하현( 柳 河 縣 ) 삼원포( 三 源 浦 ) 추가가( 鄒 家 街 )에 경학사( 耕 學 社 )와 신흥강습 소가 설립은 이상에서 보듯 수많은 인적, 물적 기반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무 관학교의 본격적인 활동은 1912년 통화현( 通 化 縣 ) 합니하( 哈 泥 河 )로 옮기면서 펼쳐지기 시작한다. 4. 맺는말 이상에서 신흥무관학교가 1911년 6월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에 태동하기까지 경위를 개관하였다. 신흥무관학 교 설립에 관한 지금까지의 축적된 연구 성과에 의존해 재구성해 본 이 글은 먼저 국권이 일제에 강탈당하던 1910년대의 국내외 정세변화를 이 시기 일종의 사회현상과 같이 진행되었던 국외로의 이주물결 에 주목하여 분 석했다. 그 중에서도 이 시기 간도지역으로 집중되었던 대규모의 집단이주 실상을 재구성해 보았다. 1860년대부 터 시작된 간도지역으로의 한인들의 이주현상은 1910년대 이르러서는 일종의 시회현상 모양 이주물결을 이루었 다. 따라서 이 지역 일대에 상당한 규모의 여러 한인촌이 형성되었다. 동시에 이 시기 국내 여러 지역의 독립운동 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목적으로 이 지역으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양기탁을 중심으로 한 신민회 지도부에 의해 서간도 지역에 독립군기지 건설을 추진하려 했던 구체적인 경위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 글의 주된 관심은 1910년 말부터 이듬해 초엽까지 독립군기지 건설을 목적으로 유하현 삼원포에 망명한 3그룹에 초점을 두었다. 그리고 신흥무관학교가 이후 10년간 약 3,500명의 독립군을 지속적으로 양성 할 수 있었던 요인을 인적토대와 물적토대라는 시각에서 접근해 보았다. 앞서 보았듯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기 틀을 마련한 첫 번째 인적토대는 이회영 6형제를 중심한 서울지역 애국계몽계열의 인적자원이었음을 재확인 하였다. 그리고 그 인적 자원의 배양기관으로 상동청년학원을 주목하였다. 또한 신민회 조직이 1907년 4월 안 창호 귀국 직후에 가능할 수 있었던 것도 상동청년회로 대표되는 상동파 라는 인적자원과 조직이 있었기 때문 이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석연치 않은 문제는 과연 이들 대부분이 신민회 회원이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44 96) 아나키스트로서의 이회영의 면모에 관해서는 이덕일, 이회영과 젊은 그들, 역사의 아침, 2009 참조. 97) 채영국, 서간도의 독립군의 개척자 이상룡, 역사공간, 2007, 89-91쪽. 98) 위의 주.

45 다. 그동안 신민회 실체에 관한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신민회 창립시기와 그 조직의 규모 그리고 조직원이 구체적으로 누구였는지에 대해서 논란의 여지가 많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향후 연구가 좀더 진척될 필요 가 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인적자원으로 이상룡, 김대락, 김동삼 등으로 대표되는 안동지역의 개신유림 출신 및 애국계몽계열의 인물들을 주목하였다. 그리고 어떻게 안동이라는 보수성향이 강했던 경상도 지역 인사들이 이역만리 중국 서간 도까지 망명길에 올랐으며 그렇게 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하게 되었는가를 1907년 안동에 세워진 협동학교를 중 심으로 이루어진 안동파 개신유림들에 초점을 맞추어 개진하였다. 그러나 역시 이것만으로는 미진한 감이 없지 않다. 안동출신으로 현재까지 독립유공자로 포상받은 인물이 330명에 달한다는 점에 유념할 때 안동지역이 지 니고 있는 특성 곧 그 지역의 역사적 지역적 그리고 사상사적 천착이 좀 더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인적토대로서의 셋째 그룹으로 이건승, 정원하, 홍승헌 등 강화도, 충청도 출신들로 이루어진 소론계의 양명학 파 유림출신들을 중심으로 약술했다. 이밖에 경기도 출신의 윤기섭( 尹 奇 燮 ) 등 여타 다른 지역 출신들에 대해 기술하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아쉬운 것은 신흥무관학교의 태동에서부터 10년간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이면의 인적토대인, 이름도 빛도없이 만난의 고통을 감래하며 뒷바라지를 한 여성 들의 헌신을 전혀 언급하지 못한 점이다. 향후 이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를 기대한다. 끝으로 인적토대와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유지하기 위해 상당한 자금이 요했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것 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 초점을 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의식에 비해 보다 진전된 자금의 출처와 규모 등을 천착하지 못한 점 또한 아쉬움이 아닐 수 없다. 단지 <매천야록>에 기술되어 있는 이석영의 소유토지가 양주에 서 서울까지 오는 80리 길을 남의 논두렁과 밭두렁을 밟지 않을 만큼의 양주 땅과 별장 을 소유한 대부호였다 는 전거를 소개하는 정도에 그치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나머지 5형제의 재산과 이상룡 일가로 대표되는 안동지역 인사들의 자금투척도 상당할 것으로 상정될 때 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사실도 구명되었으면 한다. 이상에서 언급한 신흥무관학교 태동의 주역들을 한마디로 어떻게 지칭하면 좋을까. 근대 이전의 올곧은 불 사이군 ( 不 事 二 君 )의 정신을 내연화( 內 燃 化 )하여 현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로 외연화( 外 延 化 )한 인물들이라 부 르면 어떨까. 45

46 신흥무관학교 이후 독립군 군사간부 양성 한시준 단국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1. 머리말 한국의 독립운동은 일제가 침략할 때부터 시작되어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한국독립운동 에는 전략이 있었다. 한국독립운동의 핵심적인 전략은 독립전쟁론 이었다. 독립전쟁론 이란 일제가 세력팽창을 계속할 것으로 내다보고, 민족의 군대인 독립군을 양성하였다가 일제가 중국 소련 미국 등과 전쟁을 하게 될 때, 이들과 함께 대일전쟁을 전개하여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략에 따라 추진된 사업이 독립군 양성이었다. 독립군을 양성하는 사업은 경술국치 직후부터 추진 되기 시작하여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독립군을 양성하는 사업으로 가장 먼저 설립된 것은 신흥무 관학교였다. 경술국치 직후인 1911년 李 會 榮 李 東 寧 李 相 龍 등 신민회 인사들이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에 독립 운동기지를 건설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흥무관학교는 설립 이후 1920년에 이르기까지 합니하 고산자 등으로 옮겨다니며 10여년 동안 3천 5백여명에 달하는 독립군을 양성하였 다. 1) 신흥무관학교는 한국의 독립운동 전략을 충실하게, 또 가장 오랜기간 동안, 그리고 가장 많은 성과를 내었 던 상징적이고 대표적인 사례였다. 신흥무관학교에 이어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사업은 여러 곳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그리고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하여 일제가 패망할 때까 지 추진되었던 독립군 양성사업을 정리하는 일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이해하는데 있어 귀중한 연구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신흥무관학교에 이어 일제 패망 때까지 독립운동전선에서 추진되었던 독립군 간부 양성사업을 정리 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는 한국의 독립운동 전략을 명확히 밝히는 작업인 동시에, 한국근현대사에서 군사간부 양성의 맥락을 정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신흥무관학교에 이어 어떠한 세력이 어떤 방법으로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였는지를 1920년대, 1930년대, 1940년대의 각 시대별로 정리하고자 한다 년대 독립군 군사간부 양성 46 1) 신흥무관학교의 설립과 이를 통한 독립군 양성에 대해서는 박환의 만주지역의 신흥무관학교 ( 滿 洲 韓 人 民 族 運 動 史 硏 究, 일조각, 1991)이란 논문 을 비롯하여, 만주지역 독립운동을 다룬 많은 연구에서 언급되었다. 그리고 신흥무관학교의 전반을 다룬 서중석의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역사 비평사, 2001)이란 저서가 발표되기도 하였다.

47 1)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사간부 양성 (1) 육군무관학교 설립 신흥무관학교에 이어 독립군 간부를 양성한 것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로 약칭)였다. 1919년 4월 11 일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임시정부는 정부의 조직과 체제를 갖추는 한편, 독립운동에 대한 방안도 마련하였다. 이러한 독립운동 방안의 하나로 군무부 산하에 육군무관학교를 설립하여 군사간부를 양성한 것이다. 임시정부가 마련한 독립운동의 방안은 군대를 편성하여 일제와 독립전쟁을 전개한다는 것이었다. 그 방향은 크게 세 가지였다. 하나는 군대의 편제와 조직에 관한 법규를 마련한 것이고, 둘째는 만주와 연해주지역에 군구 를 설치하여 병사를 모집한다는 것이며, 셋째는 육군무관학교를 설립하여 군사간부를 양성한다는 것이었다. 이 러한 계획은 1919년 12월 18일 大 韓 民 國 陸 軍 臨 時 軍 制 大 韓 民 國 陸 軍 臨 時 軍 區 制 臨 時 陸 軍 武 官 學 校 條 例 로 발표되었다. 2) 육군무관학교를 설립하여 군사간부를 양성한다는 계획이 육군무관학교조례 였다. 육군무관학교조례 의 핵심은 군무부 산하에 육군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초급 군사간부를 양성한다는 것으로, 모두 27개 조항으로 구 성되어 있다. 주요 내용은 중등 이상의 학력을 가진 만 19세 이상 30세 미만의 대한민국 남자를 입학시켜 12개 월 동안 교육을 실시하고 졸업생은 參 尉 로 임명하여 근무토록 한다 는 것이고, 校 長 副 官 敎 官 學 徒 隊 長 學 徒 隊 副 官 學 徒 隊 中 隊 長 學 徒 隊 區 隊 長 主 計 軍 醫 書 記 를 둔다는 것 등이다. 임시정부는 육군무관학교조례 에 의해 육군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육군무관학교는 1920년 초 군무부 직속 으로 설립되었고, 3) 군무부 직원들이 교육과 운영을 직접 담당하였다. 군무부 차장 金 羲 善 이 교장, 군무국장 都 寅 權 이 학도대장, 참사 黃 學 秀 가 교관을 맡아 교육과 훈련을 담당한 것이다. 4) 교장을 비롯한 교관들은 모두 대 한제국 군인출신들이었다. 김희선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활동 하였던 인물이고, 5) 도인권은 대한제국 군대의 특무조장 출신이며, 황학수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제1회 졸업 생이었다. 6) 무관학교의 교육은 6개월 과정으로 운영되었고, 모두 3기생을 모집하여 훈련하였다. 제1기생은 1920년 초 개 교와 더불어 훈련이 시작되었다. 학도들은 6개월 동안 육군예식 보병조전 사행교범 체조교범 지리 지형학 축 성학 병기학 전술학 군제학 등을 배웠고, 그해 6월 8일 張 承 祚 朴 承 根 黃 薰 姜 泳 翰 李 賢 秀 등 19명이 졸업하 였다. 7) 제2기생은 1920년 6월 1일에 입교하여 그해 12월 24일에 졸업하였다. 제2기생은 李 昌 實 金 麟 模 를 비롯하여 모 두 24명이었다. 제2기생 졸업식은 당시 상해에 도착한 李 承 晩 대통령과 孫 貞 道 임시의정원 의장을 비롯하여 3백 2) 한시준 편, 大 韓 民 國 臨 時 政 府 法 令 集, 국가보훈처, 1999, 쪽. 3) 육군무관학교의 설립과 개교 일자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독립신문 1920년 6월 10일자에 보도된 제1회 졸업식 기사에서 民 國 二 年 初 에 0000를 設 하고 라 되어 있고, 6개월 과정으로 훈련을 마친 제1회 졸업생들의 졸업식이 1920년 5월 8일에 있었다( 意 義 깊흔 0000 第 一 回 卒 業 式 ). 이로 보면 육군무관학교는 1920년 1월에 개교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4) 大 韓 民 國 臨 時 政 府 公 報 제17호(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 2005, 96쪽). 5) 金 亨 燮, 金 亨 燮 大 佐 回 顧 錄, 고려서림, 1987, 203쪽. 6) 한시준, 夢 乎 黃 學 秀 의 생애와 독립운동, 史 學 志 31( 宋 炳 基 교수정년퇴임기념호), 1998, 540쪽. 7) 獨 立 新 聞 1920년 6월 10일자. 意 義 깊흔 0000 第 一 回 卒 業 式 大 任 을 負 하고 立 하는 十 九 의 勇 士. 47

48 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霞 飛 路 康 寧 里 2호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8) 이어 제3기생을 모집하여 훈련에 들어갔 다. 제3기생은 1921년 5월에 입교한 것으로 나타나 있지만, 도중에 폐교되면서 이들은 졸업하지 못하였다. 임시정부에서 설립한 육군무관학교는 2기생을 배출한 후, 제3기생 훈련 중에 폐교되었다. 그 이유나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군무부 차장으로 교장을 맡고 있던 김희선의 변절이 커다란 요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희 선은 제2기생들이 훈련받고 있을 때 일제에 투항하였다. 당시 군무총장 盧 伯 麟 이 비행사 양성을 위해 미국에 가 있었던 현실에서, 그는 임시정부의 군사총책임자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이러한 인물이 일제에 투항함으로써 임시정부는 물론이고, 무관학교도 커다란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경제적인 어려움도 작용하였다. 임시정부는 무관학교를 설립하였지만, 이를 운영하는 재정적 뒷받침을 하 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제1기생 졸업식 때 교장 김희선이 본교가 처음 설립될 적에 아무 예산도 없었소. 그러나 다행히 각 방면으로 원조를 받아서 무사히 소정한 기간대로 업을 마치고 졸업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고 한 말이 그것을 짐작케 한다. 정부의 예산이 아닌, 일부 인사들의 원조에 의해 무관학교가 운영된 것이다. 교장 김희선이 떠난 후, 都 寅 權 과 黃 學 秀 가 교장과 교관을 맡아 무관학교를 이끌어갔다. 이들은 제2기생을 훈 련하여 1920년 12월 24명의 졸업생을 배출시켰다. 이어 제3기생을 모집하여 훈련에 들어갔지만, 무관학교는 운영 난을 이기지 못하고 폐교되고 말았다. (2) 비행사양성소 설립 임시정부는 육군무관학교를 설립하는 것과 더불어 비행사양성을 추진하였다. 비행사양성은 1920년 1월 국무 원 포고를 통해 독립전쟁을 선포한 후 적극 대두되었다. 그 방향은 비행기를 구입하여 비행대를 편성한다는 것 과 비행사를 양성한다는 것으로 추진되었다. 비행기를 구입하는 문제는 실현되지 않았지만, 비행사를 양성하는 사업은 군무총장 주도하에 실행되었다. 군무총장 盧 伯 麟 이 미국에서 비행사양성소 설립을 추진하였다. 노백린은 1920년 1월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 여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총무와 재무를 맡고 있던 郭 林 大 金 鍾 林 등을 비롯한 재미한인들과 만나 군인양성 계획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미주지역 한인들은 군인양성계획에 적극적인 지원의지를 표명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1920년 2월 20일 군단 설립을 발기하였는데, 이때 장차 설립될 군단에서 비행사를 양성하기로 의견을 모은 것이다. 9) 비행사양성을 추진하기로 한 데는 김종림을 비롯한 한인들의 역할이 컸다. 특히 김종림은 캘리포니아 윌로우 스라는 곳에 4백여만평에 달하는 농장에 벼농사를 지으며 쌀의 왕 이라 불리고 있던 인물이었다. 10) 그가 재정적 지원을 약속하였고, 비행사양성을 위해 2만 달러와 40에이커에 달하는 토지를 제공한 것이다. 그리고 대한인국 민회에서도 재정적 후원을 약속하였다. 또 미국 각지의 비행학교에서 비행술을 연마하는 한인청년들이 적지 않았던 것도 비행사양성을 추진할 수 있 는 기반이 되었다. 미국에 이주한 한인청년 중 이조지(Lee George)는 제1차세계대전 당시 미국공군으로 유럽전 투에 참가한 적이 있었고, 11) 샌프란시스코 레드우드 비행학교에는 韓 章 鎬 李 用 根 李 超 李 用 善 吳 林 河 張 炳 勳 등 6명이 비행훈련을 받고 있었다. 이외에도 필라델피아 비행학교에서 노정민, 리버사이드 비행학교에서 朴 樂 48 8) 獨 立 新 聞 1921년 1월 1일자. 陸 軍 武 官 學 校 第 二 回 卒 業 式. 9)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노백린의 생애와 독립운동, 2003, 122쪽 ; 新 韓 民 報 1920년 2월 24일자, 한인비행학교 설립. 10) 정제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비행사양성과 공군창설 계획,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80주년기념논문집 하, 국가보훈처, 1999, 39쪽. 11) 新 韓 民 報 1918년 12월 26일자. 한인비행가 이조지씨.

49 善, 디트로이트 비행학교에서 禹 炳 玉 이 수선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12) 노백린은 김종림 등과 함께 비행사양성을 위한 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미국인들의 반대에 부딪히 기도 했다. 한국인들을 일본인과 동일하게 간주하고 있던 캘리포니아의 미국인들이 비행사양성 사업에 대해 장 차 백인사회의 안전에 방해가 될 것이라며 강력하게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우선적으로 이들의 불안을 해소시킬 필요가 있었다. 노백린은 미국 기자들을 만나 한인청년들에게 장차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얻는데 도움 이 될 필요가 있는 비행술을 가르치기 위함 이라며, 13) 미국인들을 설득하였다. 노백린은 학생 모집, 교관 초빙, 비행기 구입 등을 추진하면서, 비행사양성 사업을 준비하였다. 학생은 미국 비 행학교에서 훈련받고 있는 학생들을 모집하기로 하고, 레드우드 비행학교를 찾아갔다. 당시 이 학교에는 한장호 이용선 이초 이용근 장병훈 등의 한인학생들이 있었다. 노백린은 이들과 만나 협조를 구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추천을 받아 레드우드 비행학교에서 교관으로 활동하고 있던 브라이언트(Frank K. Bryant)를 교관으로 초빙하 였다. 14) 학생의 모집은 1920년 3 1절 행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새크라멘토에서 개최된 3 1절 행사에 레드우드 비행학교 에서 훈련받고 있는 학생들과 교관으로 초빙한 브라이언트의 축하비행을 계획한 것이 그 방법이었다. 이 계획은 그날 비가 많이 내려 취소되었지만, 비행사양성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20여명이 지원하였다. 15) 학생이 모집되자 훈련을 시작하였다. 김종림의 부인이 캘피포니아주 정부 교육국에 청원하여 폐교되었던 퀸 트 플리트학교 건물을 임대하였고, 이곳에서 비행기를 구입하기 전에 기초적인 훈련을 시작한 것이다. 16) 훈련은 1920년 3월부터 실시되었고, 비행술 외에 무선통신 비행기 수선학 영어 등을 교육하였다. 학생들의 교육과 훈련을 실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비행기를 구입하고 훈련시설을 마련하는 등 비행사양 성소 설립을 준비해 나갔다. 비행기는 김종림의 재정적 후원으로 1920년 6월과 7월에 모두 3대의 비행기를 구입 하였다. 구입한 비행기는 複 葉 單 發 機 인 커티스 제니 형이었다. 그리고 김종림의 농장이 있던 윌로우스에 활주로 막사 격납고 등을 건설하여, 훈련시설도 갖추었다. 17) 교관, 학생, 비행기, 훈련장 시설 등이 갖추어지자 정식으로 비행사양성소를 개교하였다. 개교식은 1920년 7월 5일, 2백여명의 한인들이 참가한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군무총장 노백린과 감독 郭 林 大 의 연설, 비행사 6 명의 소개, 그리고 교관 브라이언트와 오림하가 축하비행을 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18) 이로써 임시정부 군무총 장 주도하에 미국 캘리포니아 윌로우스에서 비행사를 양성하기 위한 비행사양성소가 설립된 것이다.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한 이후, 이를 유지 운영하기 위한 방안도 마련하였다. 비행사양성을 후원하기 위해 飛 行 家 養 成 社 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비행가양성사 장정과 취지서를 제정한 것이다. 그 취지서에 우리는 혈전에 공급하기 위하여 우선 헌신하는 청년들을 모아 비행술과 무선전신법을 실습케 하는 바 이 사업에 뒤를 돕기 위하여 비행가양성사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그 장정을 만들어 우리 동포에게 널리 고하오 12) 新 韓 民 報 1920년 6월 15일자. 필업한 비행가 제군. 13) 앞의 노백린의 생애와 독립운동, 쪽. 14) 앞의 노백린의 생애와 독립운동, 134쪽. 15) 1920년 5월 19일자로 盧 伯 麟 이 국무총리 李 東 輝 에게 보낸 서신(윤병석 편, 誠 齋 李 東 輝 全 集,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8, 63-64쪽). 16) 新 韓 民 報 1920년 3월 19일자. 비행학교 생도의 집합. 17) 정제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비행사양성과 공군창설 계획, 41쪽. 18) 新 韓 民 報 1920년 7월 15일자. 한인비행학교의 개교식. 49

50 니 누구든지 혈전의 필요를 깨닫거든 속히 본사에 참가하여 군사의 준비로는 유일무이한 이 사업으로 하여 금 우리나라에 많은 공이 되게 하시기를 바라나이다 19) 라 하여, 비행사양성사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비행사양성소를 유지 운영한다고 하면서, 동포들이 적극 참가하 여 이를 후원하자고 하였다. 비행사양성소는 비행사 양성을 위해 강훈련을 실시하였다. 학생들은 모두 막사에서 숙식하며 훈련을 받았고, 비행술 무선전신학 비행기 수선학 등에 대해 집중적인 교육이 이루어졌다. 3월부터 훈련을 시작한 학생들이 훈 련을 마치고 졸업하였다. 이들의 졸업식은 비행사양성소가 정식으로 개교한 이틀 후인 7월 7일에 이루어졌다. 졸 업생은 우병옥 오림하 이용선 이초 등 4명으로, 이들이 제1회 졸업생이었다. 이들은 이미 레드우드 비행학교 등 에서 비행훈련을 받았던 학생들로, 졸업과 더불어 교관으로 채용되었다. 그러나 비행사양성소는 오래 유지되지 못하였다. 교장 노백린은 개교 직후인 1920년 7월 16일 군무총장으로 부임하기 위해 상해로 떠났다. 20) 그가 떠나면서 감독 곽림대를 선임하여 학교 운영을 맡도록 하였다. 그러나 곽 림대도 1920년 9월 최윤호와 함께 켄터키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윌로우스를 떠났다. 21) 이것도 한 요인이 되었을 터이지만, 문제는 재정적인 압박 때문이었다. 비행사양성소의 재정적 지원을 전담하 고 있던 김종림이 1920년 11월초 추수기에 대홍수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것이다. 이로써 재정적 지원이 계속되지 못하였고, 학교 운영이 어려워졌다. 비행기가 고장나도 이를 수리할 비용이 없어 방치해야 했고, 교관과 학생들은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다. 22) 2) 중국의 군관학교를 통한 군사간부 양성 (1) 운남강무당과 기타 군관학교 군사간부를 양성하는 방법의 하나는 중국의 각종 군관학교에 한인청년들을 입학시켜 군사훈련을 받게 하는 것이었다. 1920년을 전후하여 중국대륙에는 각 지방 군벌들이 각종 군관학교를 설립하여 군사간부를 양성하고 있었다. 한국청년들도 이러한 중국의 군관학교에 입교하여 군사훈련을 받은 것이다. 그 대표적인 곳 중 하나가 雲 南 講 武 堂 이었다. 운남강무당은 唐 繼 堯 가 운남성 昆 明 에 설립한 군관학교이다. 1907년 개교하였던 운남강무당은 일시 중단되었 다가 1912년 운남강무학교로 개칭하였고, 신해혁명에 참여한 민주혁명전사 를 양성하는 신식군관학교였다. 23) 당 계요는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귀국하던 도중 한국에 들러 한국인민은 亡 國 之 民 이 아니다. 반드시 조만 간 구제가 있을 것 이라며, 한국의 처지에 대해 동정과 신뢰심을 갖고 있던 인물이었다. 한인청년들이 운남강무당에 입교하여 군사훈련을 받고 군사간부가 되었다. 그 계기는 당계요와 신규식이 각 별한 교분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 크게 작용하였다. 대한제국 육군 장교였던 신규식은 1911년 상해로 망명하여 혁명문학단체인 南 社 와 비밀결사인 新 亞 同 濟 社 등에 참여하여 활동하면서 중국의 혁명인사들과 밀접한 관계 50 19) 新 韓 民 報 1920년 8월 12일자. 비행가양성사 취지서. 20) 앞의 노백린의 생애와 독립운동, 173쪽. 21) 新 韓 民 報 1920년 9월 9일자. 병학을 공부하려는 학생들. 22) 新 韓 民 報 1921년 5월 5일자. 비행학생을 도웁시다. 23) 한상도, 韓 國 獨 立 運 動 과 中 國 軍 官 學 校, 문학과 지성사, 1994, 48쪽.

51 를 맺고 있었다. 24) 신규식은 당계요에게 한인청년들이 운남강무당에 입교하여 군사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교섭한 것은 1910년대 부터였다. 1916년 가을 李 範 奭 을 비롯한 4명을 입교시킨 것이다. 25) 이들이 첫 입학생이었다. 이범석은 여운형을 따라 상해로 와서 신규식의 집에 머물고 있다가 그의 주선으로 운남강무당에 입학하였고, 2년 6개월 후인 1919 년 3월 기병과를 졸업하였다. 26) 운남강무당을 졸업한 후 이범석은 서간도로 가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을 맡기도 하였다. 1919년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운남강무당으로의 입학은 계속되었다. 당계요는 임시정부의 소개 나 증명서를 소지한 자는 자신이 경영하는 군관학교에 계속 받아들였다고 한다. 확인할 수 있는 입학생들만 보 아도, 1921년에 李 俊 植 金 冠 五 安 敬 根 李 希 淵 崔 允 東 文 一 民 李 彙 錫 金 魯 源 孫 鎭 國 李 俊 洙 李 又 白 등이 입학하였고, 27) 1923년에도 金 宗 鎭 이 입학하였다. 28) 운남강무당을 졸업한 한인청년들은 대부분 한국독립운동에서 군사간부로 활동하였다. 이범석이 서간도에 있 는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또 북간도의 북로군정서에서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하였음은 잘 알려져 있다. 이외에 이준식은 1920년대 만주의 正 義 府 와 조선혁명당에서 군사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임시정부가 1940년 창설한 광복군에서 총사령부 참모처에서 활동하였고, 김관오 역시 만주의 한국 독립군과 임시정부의 광복군에서 활동하였다. 운남강무당 외에도 한인청년들이 중국 각지역에 있는 군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다. 1922년 12월 한국노 병회에서 李 東 健 金 世 錚 成 俊 鏞 羅 錫 疇 姜 明 奎 宋 虎 聲 李 景 材 金 基 德 등 10여명을 하남성에 있는 邯 鄲 軍 事 講 習 所 에 입교시켜 군사훈련을 받도록 하였고, 1923년에는 河 北 省 督 軍 吳 佩 孚 의 후원을 얻어 崔 天 浩 蔡 君 仙 ( 蔡 元 凱 ) 趙 錫 九 朴 熙 坤 등이 낙양강무당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29) (2) 황포군관학교 1920년대 한인청년들이 군사간부로 양성된 대표적인 곳은 黃 埔 軍 官 學 校 였다. 황포군관학교는 孫 文 이 국민혁 명에 필요한 군사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1924년 6월 광동성 珠 江 의 황포에 설립한 것으로, 정식 명칭은 중국국민 당육군군관학교이다. 30) 황포에 위치하고 있어 흔히 황포군관학교라고도 한다. 교장은 장개석이었다. 한인청년들이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은 신규식이 손문과 교섭한데서 비롯되었다. 신규식은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로 1921년 10월 호법정부 대총통인 손문과 회견할 때, 임시정부 승인문제와 아울러 한국학생을 중화민국 군관학교에 수용해 줄 것을 요청한 일이 있었다. 31) 이에 대해 손문은 중국의 각 군관학교에 한국학생 들을 받아들이도록 지시하였고, 32) 이후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하면서 한국학생들을 입교하도록 하였다. 황포군관학교에 한인청년들이 입학한 것은 제3기생부터였다. 3기는 1924년 12월에 선발하였는데, 車 廷 信 李 24) 辛 勝 夏, 睨 觀 申 圭 植 과 中 國 革 命 黨 人 과의 관계, 김준엽교수화갑기념 중국학논총, 1983, 617쪽. 25) 閔 弼 鎬, 睨 觀 申 圭 植 先 生 傳 記 ( 申 圭 植 저, 민병하 역, 韓 國 魂, 박영사, 1978, 쪽). 26) 李 範 奭, 우둥불, 사상사, 1971, 475쪽. 27) 韓 相 禱, 金 九 의 韓 人 軍 官 學 校 운영과 그 입교생, 한국사연구 58, 1987, 85쪽. 28) 李 乙 奎, 是 也 金 宗 鎭 先 生 傳, 韓 興 印 刷 所, 1963, 24쪽. 29) 金 喜 坤, 韓 國 勞 兵 會 의 결성과 독립전쟁준비방략, 윤병석교수화갑기념 한국근대사논총 (지식산업사, 1990), 913쪽. 30) 황포군관학교는 개교 당시에 중국국민당육군군관학교였고, 이후 국민혁명군중앙군사정치학교(1926년 2월), 국민당혁명군관학교(1928년 5월), 국민혁명군황포군관학교(1929년 9월) 등으로 불리웠다. 그리고 1930년에는 남경의 중앙육군군관학교로 흡수되었다. 31) 閔 弼 鎬, 韓 中 外 交 史 話, 韓 國 魂, 177쪽. 32) 水 野 直 樹, 黃 埔 軍 官 學 校 と 朝 鮮 の 民 族 解 放 運 動, 朝 鮮 民 族 運 動 史 硏 究 6, 不 二 出 版, 1990, 46쪽. 51

52 빈 鄭 聖 哲 劉 鐵 山 등 4명이 입학하였다. 33) 이들의 입학은 임시정부의 주선에 의해 이루어졌다. 임시정부의 조소 앙과 박찬익이 장개석의 지시로 입교생을 모집하고 있던 陳 果 夫 에게 이들을 소개하여 입학시켰다. 34) 이들이 황 포군관학교 첫 입교생이었다. 이후 매기마다 한인청년들이 입교하였다. 제4기에는 의열단원들이 대거 입학하였다. 의열단은 1919년 길림에서 창립되어 암살 파괴활동을 위주로 한 의 열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단체로, 1926년 3월 단장 金 元 鳳 을 비롯한 24명이 입학한 것이다. 35) 이어 제5기에 申 岳 朴 始 昌 張 興 金 浩 元 朴 禹 均 安 維 才 張 翼 陳 甲 壽 潘 海 亮 등 9명이, 제6기에는 安 載 煥 宋 旭 東 吳 尙 善 崔 文 鏞 金 貞 文 金 恩 濟 등 7명이, 제7기에는 李 石 이 입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황포군관학교의 입교는 광주에 있는 본교만이 아니라, 각 지역에 있는 분교를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황포군관 학교는 국민당 관할지역이 확대되면서 여러 지역에 분교를 설립하였는데, 이 중 武 昌 에 설립된 武 漢 分 校 (정식 명 칭은 중앙군사정치학교무한분교)에 많은 한인청년들이 입교하여 훈련을 받았다. 특히 무한분교에는 특별반을 설치하여 한국학생들을 받아들였다고 하며, 그 숫자가 2백명 가까이 되었다고 한다. 36) 학생들이 입교한 것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이 교관으로 복무하기도 하였다. 러시아어 교관인 吳 成 崙 을 비롯 하여 少 校 隊 附 蔡 元 凱, 구대장 崔 秋 海 ( 崔 庸 健 ) 李 逸 泰 安 應 均, 기술주임 楊 寧 ( 楊 林 ), 기술조교 吳 明 등이 그들 이다. 이들이 황포군관학교에 복무하게 된 경위는 분명치 않지만, 대부분 중국의 군관학교 출신들이었다. 楊 寧 은 운남강무당 출신이고, 채원개는 낙양군관학교 출신이며, 오성륜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하 고 러시아 교관으로 부임하여 복무하였다. 이와같이 황포군관학교에는 제3기 이래 많은 한인청년들이 입교하여 군사훈련을 받았고, 교관으로 복무한 한인들도 있었다. 입교한 한인학생의 숫자는 최소한 2백여명 이상이었고, 이들은 중국인 학생들과 똑같은 교육 과정과 기간을 거쳤다. 교육기간은 매기마다 일정하지는 않았지만, 보병과 포병과 공병과 정치과에 들어가 6개 월에서 1년간의 교육을 받고서 졸업하였다. 졸업 후의 진로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중국군으로 복무한 것이다. 이들 중에는 재학시절 광동지방의 반혁명세력이나 陳 炯 明 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학생군으로 동원되기도 하였고, 1926년 7월 교장인 장개석이 국 민혁명군 총사령이 되어 北 伐 을 개시하면서 대부분 북벌전에 참여하였다. 이를 통해 실전경험을 쌓기도 하였지 만, 이들 중 상당수는 1927년 12월 광주봉기에서 희생을 당하기도 하였다. 다른 하나는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사례로 제4기생들을 들 수 있다.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원들은 졸업 후 조선혁명간부학교,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로 이어지는 독립운동 세력의 주축을 이루 었다. 이외에 權 晙 朴 始 昌 등 황포군관학교에서 교관으로 활동하다가 중국군으로 복무한 경우도 있었다 년 독립군 군사간부양성 1)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52 33) 第 3 期 同 學 姓 名 籍 貫 表 (광동혁명역사박문관, 黃 埔 軍 校 史 料, 1982, 쪽). 34) 蕭 錚, 韓 國 光 復 運 動 之 鱗 爪 (추헌수, 資 料 韓 國 獨 立 運 動 3, 연세대 출판부, 1975, 571쪽). 35) 金 榮 範, 朝 鮮 義 勇 隊 硏 究,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 1988, 473쪽. 36) 현룡순 외, 조선족백년사화, 료녕인민출판사, 1984, 32-33쪽.

53 1930년대에 들어와 한국독립운동자들에 의해 직접 군사간부 양성사업이 추진되었다. 그 중 하나는 조선혁명 군사정치간부학교였다. 이는 金 元 鳳 이 의열단원들의 군사훈련을 위해 설립한 것이었다.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북경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중국과의 합작을 통한 항일무장투쟁의 진 로를 모색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교섭한 것이 三 民 主 義 力 行 社 였다. 藍 衣 社 로 더 잘 알려진 삼민주의역행사는 중국국민당의 비밀조직으로, 김원봉과 4기 동기생인 藤 傑 康 澤 과 5기생인 干 國 勳 등 황포군관학교 출신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김원봉은 이들과의 교섭을 통해 재정적 지원을 얻게 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한중합작으로 군 관학교를 설립하여 조선혁명에 필요한 전위투사를 양성한다 는 방침을 결정하고, 1932년 10월 남경에서 간부학 교를 설립하였다. 37) 간부학교의 설립은 극비리에 추진되었다. 일제에게 알려질 경우 중국측과 분쟁의 우려가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학교의 정식 명칭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로 하였지만, 표면적으로는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간부 훈련반 제6대로 하여 중국의 군사교육기관인 것처럼 하였다. 간부학교는 의열단에 의해 독자적으로 운영되었다. 교장은 의열단장인 김원봉이었고, 그 조직은 비서 겸 교관 王 現 之 ( 李 英 駿 ), 군사조 : 李 東 華 金 鐘 權 晙, 정치조 : 金 政 友 ( 朴 建 雄 ) 왕현지 韓 一 來, 총무조 : 李 集 中 畢 性 初 (중국인), 隊 附 室 : 申 岳 盧 乙 龍 李 哲 浩 등이었다. 이들은 김원봉과 함께 의열단의 간부들이었고, 또한 황포군 관학교를 졸업한 군사간부들이었다. 간부학교는 1932년에서 1935년까지 운영되었고, 모두 3기생을 배출하였다. 1932년 10월 20일 남경 교외의 湯 山 善 祠 廟 에서 개교하면서 제1기생 26명이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어 1933년 9월 16일에 제2기생으로 55명, 1935년 4월 1일 제3기생으로 44명을 입학시켜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교육기간은 6개월이었고, 3기에 걸쳐 모두 125명의 군사간부를 배출하였다. 38) 간부학교를 졸업한 졸업생들은 대부분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은 각종 특무공작의 임무를 띠고 국내와 만주지역에 파견되었으며, 의열단의 조직확대와 입교생 모집 등의 활동도 병행하고 있었다. 이들의 활동에 따라 의열단의 조직이 크게 확대되었고, 의열단은 주요한 독립운동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특파공작원 중 절반에 가까운 인원이 일제에 의해 검거되는 등 많은 인적 손실을 입기도 하였다. 간부학교를 통한 군사간부 양성은 의열단의 조직이 확대 강화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또한 김원봉 의 위상과 입지를 강화시키는 데도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제1기와 제2기의 졸업생을 비롯하여 교육 중에 있던 제3기생 전원이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으로 입당하여, 김원봉의 세력기반이 된 것이다. 39) 1930년대 중반 이후 중국관내지역 독립운동전선에서 김원봉이 주요 지도자로 부각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인적 기반이 크게 작 용하였다. 또한 이들은 한국독립운동의 주요한 군사적 인재로서 독립군의 간부가 되어 활동하였다. 1938년 10월 민족혁 명당의 주도로 결성된 조선의용대는 바로 이들을 주축으로 하여 편성되었고, 1940년대에는 조선의용군과 한국 광복군의 중견간부로 역할하게 된다. 2) 낙양군관학교 37) 軍 官 學 校 事 件 の 眞 相 ( 韓 洪 九 李 在 華 편, 韓 國 民 族 解 放 運 動 資 料 叢 書 3, 경원문화사, 1988, 쪽). 38) 한상도, 金 元 鳳 의 朝 鮮 革 命 軍 事 政 治 學 校 의 운영과 그 입교생, 韓 國 學 報 57, 1989, 쪽. 39) 김영범, 1930년대 의열단의 항일청년투사 양성에 관한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 1989, 480쪽. 53

54 1930년대 군사간부를 양성하는 또다른 사업은 낙양군관학교를 통해 추진되었다. 이는 金 九 가 주도하였다. 1932년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의거를 계기로 중국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게 되자, 김구는 이를 기반으로 낙 양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립하여 군사간부를 양성하였다. 낙양군관학교를 통한 군사간부 양성은 김구와 장개석과의 면담이 그 계기가 되었다. 김구는 1933년 봄 장개 석과 면담을 가졌고, 이 때 군사간부 양성에 대한 협의가 이루어졌다. 이 과정을 김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선생이 백만 금을 허하시면 이태 안에 일본 조선 만주 세 방면에 폭동을 일으켜 일본의 대륙침략의 다리 를 끊을 터이니 어떻게 생각하시오 하고 써보였다. 그것을 보더니 이번에는 장씨가 붓을 들어 請 以 計 劃 書 詳 示 라고 써서 내게 보이기로 나는 물러나왔다. 이튿날 간단한 계획서를 만들어 장주석에게 드렸더니(중략) 특무공작으로는 천황을 죽이면 천황이 또 있고 대장을 죽이면 대장이 또 있으니, 장래의 독립전쟁을 위하 여 무관을 양성함이 어떤가 하기로 나는 이야말로 不 敢 請 이언정 固 所 願 이라 하였다. 40) 김구는 특무공작에 대한 지원을 요구하였으나, 장개석은 무관양성을 제의한 것이다. 장개석의 지원을 얻은 김 구는 그 실무 책임자인 陳 果 夫 와 협의, 하남성 낙양에 있는 중국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에 군사간부 양성을 위 한 특별반을 설치하였다. 정식 명칭은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낙양분교 제2총대 제4대대 육군군관훈련반 제17 대이다. 41) 당시 낙양분교에는 제16대까지 편제되어 있었고, 제17대는 한인청년들을 교육하기 위해 특별히 편제한 것이었다. 이를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이라고 한다. 낙양군관학교는 김구의 주도하에 운영되었다. 중국측에서는 재정적 지원과 장소를 제공한 것이었다. 김구는 만주에서 한국독립군 총사령으로 활동하던 李 靑 天 을 비롯하여 李 範 奭 吳 光 鮮 趙 擎 韓 尹 敬 天 등을 교관으로 초빙하였다. 그리고 이들에게 교육과 훈련을 담당하게 하는 한편, 학생보호계에 安 恭 根, 生 徒 系 에 安 定 根 을 임 명하여 운영을 총괄하도록 하였다. 42) 지청천 이범석 오광선 등 교관들 대부분은 신흥무관학교 출신 또는 교관 이었던 인물들이었다. 김구는 군사간부 양성을 위해 입교생들을 모집하였다. 입교생의 모집은 상해 북경 천진 만주 등지에서 이루 어졌고, 그 중에는 지청천이 중국관내로 이동하면서 데리고 온 한국독립군 출신들이 많았다. 그리고 한인애국 단을 중심으로 한 김구계열의 청년들을 비롯하여, 김원봉 계열의 학생들을 데려오기도 하였다. 낙양군관학교는 입교생들이 모집되면서 개교하였다. 개교는 1934년 2월에 이루어졌고, 모두 92명이 입교하여 훈련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한인교관들에 의해 전술학 병기학 통신학 정치학 등의 학과와 무술 검술 사격 체 육 등을 술과의 교육을 받았다. 이들의 교육은 1년여 동안 이루어졌고, 1935년 4월 9일 62명이 졸업하였다. 43) 낙양군관학교는 1회 졸업생을 배출한 후 폐교되었다. 학교운영을 둘러싸고 갈등과 대립이 빚어진 것도 원인이 되었지만, 일제가 중국정부에 낙양군관학교의 폐쇄를 요구한 것이다. 낙양군관학교의 설립과 운영을 파악한 일 제는 남경주재 일본영사를 통해 중국정부에 지원중지와 폐쇄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중국정부에서는 일제와의 분쟁을 우려하여 페쇄하게 되었다 ) 金 九, 백범일지,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1971, 쪽. 41) 한상도, 金 九 의 한인군관학교의 운영과 그 입교생, 한국사연구 58, 1987, 90쪽. 42) 金 九 一 味 の 動 靜 に 關 する 件 ( 金 正 柱, 朝 鮮 統 治 史 料 8, 한국사료연구원, 1971, 859쪽). 43) 洛 陽 軍 官 學 校 卒 業 生 一 覽 表 (백범김구선생전집편찬위원회, 白 凡 金 九 全 集 4, 1999, 쪽).

55 낙양군관학교가 폐쇄된 후, 군사간부 양성은 남경에 있는 중앙육군군관학교로 이어졌다. 김구는 낙양에서 철수시킨 학생들 중 金 仁 盧 泰 俊 安 椿 生 高 時 福 崔 德 新 金 東 洙 등을 중국의 중앙군관학교에 입학시켰다. 이 들이 중앙군관학교 10기생들이다. 이들 외에도 朴 基 成 陳 春 浩 등이 11기로 입학하였고, 趙 仁 濟 盧 福 善 申 松 植 등이 12기로 광동분교에서 졸업하였으며, 兪 海 濬 (15기) 朴 英 俊 (17기) 등을 비롯하여 중앙군관학교와 각 분교에 서 적지 않은 한인청년들이 군사교육을 받았다. 낙양군관학교 졸업생들은 대부분 독립운동에서 활동하였다. 졸업생들은 김구 지청천 김원봉 계열로서, 이 들이 주도하는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게 된다. 김구 계열은 한국국민당청년단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중 일전쟁 이후 지청천 계열과 연합하여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를 결성하였고, 임시정부의 광복군 창설에 근간 이 되었다. 그리고 안춘생 조인제 등은 중국군으로 복무하다가 광복군이 창설되면서 광복군의 간부로 활동하 게 된다. 3) 성자군관학교 1930년대 군사간부를 양성한 또 하나는 성자군관학교이다. 성자군관학교는 江 西 省 星 子 縣 에 소재하고 있던 중앙육군군관학교의 분교였다. 원래 장개석이 중국공산군을 토벌하기 위해 설립한 것이었는데, 중일전쟁이 일 어나자 항일역량을 증대시킨다는 목적하에 예비역 장교를 소집하여 재교육시키고 있었다. 여기에 한인청년들이 입교하여 군사훈련을 받은 것이다. 성자분교는 민족혁명당이 주도하였다. 일제의 정보자료에는 김원봉과 김구는 각지에서 자파 청년당원들을 모집하여 83명이 남경으로 집결하였다고 하여, 김원봉과 김구에 의해 추진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44) 그러나 입 교생 중 김구 계열의 청년들의 거의 없으며, 졸업 후 이들의 진로를 보아도 민족혁명당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민족혁명당에서 주도하였다는 것은 金 學 鐵 의 글에서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조선민족혁명당에서는 정세의 요구에 의해 군사간부를 배양하고자 90여명의 청년들을 선발하여 국민당에서 꾸린 강서성 성자현의 중앙육군군관학교 특별반에 보냈다. 그 중 조선청년전위동맹 성원이 20여명이었고, 50여명의 길림성 청년들 가운데서 연변출신이 33명이었으며, 그 외는 요녕성의 단동 심양 흥경 청원 개원 등지의 청년들과 흑룡강성의 주하 하얼삔 오상 해륜 동흥 등 현의 청년들이었다. 그 외 조선에서 온 청년 들도 몇 명 되었다. 45) 민족혁명당은 1935년 7월 한국독립당, 의열단을 비롯한 5개 단체가 통일전선체로 결성한 정당이었다. 이후 한 국독립당 인사들을 비롯하여 참여하였던 단체의 인사들이 탈당하면서,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의열단계가 주도 하고 있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이들은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남경에서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 운영하 였고, 세력을 확대해나가고 있었다. 조선민족혁명당에서는 군사간부를 배양하기 위해 청년들을 모집하는 사업을 계속 추진하였다. 崔 昌 益 을 중 심으로 한 조선청년전위동맹이 단체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은 채 이미 개별적으로 입당해 있었고, 46) 이외에도 중 44) 在 支 朝 鮮 義 勇 隊 の 情 勢 (고등법원검사국사상부, 思 想 彙 報 22호, 1940, 158쪽). 45) 김학철, 항전별곡, 301쪽. 46) 김영범, 朝 鮮 義 勇 隊 硏 究, 480쪽. 55

56 국 각지에서 청년들을 모집한 것이다. 길림성에서 50여명을 비롯하여 요녕성의 단동 심양, 흑룡강성의 주하 하 얼삔 등지에서 청년들을 모집하였고, 그 숫자가 90여명이었다. 모집된 90여명은 1937년 12월 1일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성자분교 특별훈련반 제4중대에 입교하였다. 특별훈 련반이란 중국군 예비역 장교를 재훈련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 중 제4중대에 편입한 것이고, 이들은 중국군 예 비역 장교들과 함께 훈련을 받았다. 훈련이 시작된 지 한달이 안돼 일본군이 남경을 점령하게 되면서, 이들은 湖 北 省 江 陵 으로 옮겼다. 강릉으로 이전한 후, 이들은 독립중대로 편성되었다. 중대장과 소대장을 비롯한 중국인 일부만을 남긴 채, 1938년 3월 1일자로 제4중대는 한국인 학생들 중심의 독립중대로 편제를 바꾼 것이다. 이에 따라 교관을 비롯한 간부진도 한국인으로 교체되었다. 당시 교관은 尹 世 冑, 王 雄 ( 金 弘 壹 ), 韓 斌 이었고, 周 世 敏 은 중대지도원을, 李 益 星 과 최경수가 소대장을, 그리고 중앙군관학교 10기 11기생들인 葉 鴻 德 李 哲 重 李 志 剛 趙 烈 光 李 世 永 등이 견습교관을 맡았다. 47) 성자군관학교의 한인청년들은 6개월 동안 훈련을 받았다. 이들이 훈련을 마칠 무렵 민족혁명당의 김원봉을 비롯하여 신익희 최창익 등이 찾아왔다. 이들은 학생들에게 졸업식을 거행한다는 것을 통보하고, 1938년 5월 19 일 학생대표들을 참석시킨 가운데 민족혁명당 제3차 전당대표대회를 개최하였다. 졸업생들을 당원으로 참여시 키기 위한 절차였다. 이로써 이들은 졸업과 동시에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들은 졸업식을 거행한 후, 漢 口 로 이동하였다. 당시 한구에는 민족혁명당 본부가 있었다. 졸업생 전원은 김 홍일의 인솔하에 6월 2일 한구에 도착하였다. 이후 이들은 두 갈래로 갈라졌다. 1938년 10월 10일 민족혁명당이 주도하여 朝 鮮 義 勇 隊 를 창설하면서 그 주요 구성원이 되었다. 그리고 최창익 金 學 武 등 49명은 당의 지도노선 에 불만을 품고 탈당하여 朝 鮮 靑 年 戰 時 服 務 團 을 결성하였다 년대 독립군 군사간부 양성 1) 한국청년훈련반 1940년대에도 군사간부 양성사업이 추진되었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주도한 한국청년훈련반이 그 하나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羅 月 煥 李 何 有 金 東 洙 金 仁 李 在 賢 등 무정부주의 계열의 청년들이 1939년 11월 중경 에서 결성한 군사조직이었다. 48) 전지공작대는 결성 직후 섬서성 서안으로 옮겨 활동하였고, 서안에서 한국청년 훈련반을 설치하고 군사간부를 양성하였다. 한국청년훈련반(이하 한청반으로 약칭)은 교육 훈련 대상으로 보면 둘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전지공작대 대원들의 교육 훈련을 위해 설치한 한청반이다. 전지공작대는 서안으로 이동하여 중국 제34집단군의 胡 宗 南 사 령관의 협조를 얻어 중앙전시간부훈련단 제4단 내에 한청반을 설치하고, 대원 16명이 입교하여 군사훈련을 받았 다. 49) 중앙전시간부훈련단은 전시하에 급격히 소요되는 군사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중국의 군사교육기 관으로, 여기에 한청반을 설립한 것이다. 이들은 1940년 2월부터 7월까지 6개월 동안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들이 56 47) 김학철, 항전별곡, 쪽. 48) 한시준, 韓 國 光 復 軍 硏 究, 일조각, 1993, 70쪽. 49) 李 在 賢, 韓 國 光 復 軍 제2지대의 太 行 山 敵 後 工 作 (1), 光 復 제96호, 1991년 6월 15일자.

57 한청반 제1기생들이다. 이후 또 다시 한청반이 설치 운영되었다. 제1기 출신인 전지공작대 대원들이 화북지역에서 초모해온 한인청년 들을 교육 훈련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었다. 제1기 출신들은 졸업 후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화북지역으로 들어 가 그곳에 이주해 온 한인청년들을 모집하는 초모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들의 초모활동은 일본군 제36사단이 주둔하고 있던 潞 安 을 비롯하여 新 鄕 焦 作 修 武 長 治 등지에서 전개되었고, 1940년 말에 이르면 약 1백여명에 달하는 청년들을 모집하였다. 50) 이들에 대한 교육 훈련을 위해 또 다른 한청반을 설치한 것이다. 전지공작대는 한편으로는 적후방에 들어가 초모활동을 전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초모해 온 청년들에 대 한 교육 훈련을 실시하였다. 한청반의 교육 훈련은 전지공작대 간부들이 직접 담당하였다. 대장 羅 月 煥 을 비롯 하여 金 東 洙 朴 基 成 李 何 有, 그리고 서안에 주둔하고 있던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의 黃 學 秀 趙 擎 韓 趙 時 元 등 이 이들의 교육과 훈련을 담당한 것이다. 한청반의 교육 훈련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내용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정신교육을 중요시하였다. 정신교육이 중요시 된 것은 교육대상자들이 일본군 점령지역에 이주해 있던 청년들이었기 때문이다. 정신교육은 광복군 총 사령 대리 황학수를 비롯한 총사령부 간부들이 담당하였고, 군사훈련은 나월환을 비롯한 전지공작대 간부들 에 의해 실시되었다. 한청반은 모두 3기에 걸쳐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제1기는 전지공작대 대원들이었고, 2기와 3기는 이들이 초모 해 온 청년들이었다. 제2기의 교육은 1941년 2월 15일에 시작되었다. 그 상황이 전지공작대에서 발행한 한국청 년 이란 잡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년전 이맘때 쯤, 幹 四 團 은 한 차례 한국청년들을 훈련시킨 적이 있다. 다만 당시는 훈련생의 숫자가 너무 적어 따로 한 반을 편성하지는 않았고, 훈련기간도 금년처럼 길지 않았다. 금년 제2기 한국혁명청년훈련은 작년과는 사뭇 다르다. 훈련생의 숫자가 지난해에 비해 크게 증가하여 별도의 한국청년훈련반을 편성하게 된 것이다. 훈련반 본부의 주임은 박학다식하신 周 天 佟 선생이 겸임하고, 劉 大 鈞 선생께서 부주임을 맡으셨다. 교관을 맡 고 있는 宋 壽 昌 선생은 오랫동안 한국혁명에 헌신하신 노장으로 우리 保 定 軍 官 學 校 제6기 졸업생이다. 훈련 반 대장은 3국 언어(한국 일본 중국)에 능통한 한국혁명청년 羅 月 煥 선생이다. 나 선생은 일본국내의 사정에 밝을 뿐 아니라 그간 중국 각지에서 우리 항일투쟁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한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다년간 활동하였다. 작달막하지만 단단한 몸집을 가진 나 대장은 열정으로 가득찬 분으로 그의 언행은 한국혁명건 아의 특징을 잘 나타내 보이고 있다. 나 대장은 우리 중앙군관학교 제8기 졸업생이다. 51) 제2기는 제1기보다 인원도 많았고, 기간도 길었다. 훈련반 본부의 주임과 부주임은 周 天 佟 劉 大 鈞, 그리고 보 정군관학교 6기생이 宋 壽 昌 이 교관, 중앙군관학교 8기생인 羅 月 煥 이 대장이었다. 제2기와 제3기의 교육 훈련이 실시되었지만, 그 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앞에서 인용한 글을 통해 제2기생의 교육은 1941년 2월 15일부터 실시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제3기생은 1년 반동안 훈련 을 받고 1942년 10월 1일 졸업하였다고 한다. 52) 제3기생을 배출한 이후 한청반은 폐교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5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6, 1972, 229쪽. 51) 한청반 순례, 韓 國 靑 年 제3기 1941년 6월 10일(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5, 2006, 156쪽). 52) 文 應 國 증언(1992년 8월 10일 이태원동 자택에서). 문응국은 노안에서 시계점을 경영하다가 전지공작대의 金 天 成 에게 포섭되어 서안으로 와 한청 57

58 증거는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한청반은 3기에 걸쳐 97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고 한다. 53) 한청반 졸업생들은 모두 광복군으로 편입되어 서안에 있던 제2지대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다. 1기생인 전지공 작대 대원들은 1941년 1월 광복군으로 편입하여 제5지대로 편성되었고, 1942년 4월 제5지대가 제 1 2지대와 통합 하여 새로이 제2지대로 편성되면서, 한청반 2 3기 졸업생들도 모두 제2지대로 편입하였다. 2) 한국광복군훈련반 한청반과 더불어 광복군에서 군사간부를 양성한 또 하나로 한국광복군훈련반(이하 한광반으로 약칭)이 있 다. 한광반은 安 徽 省 阜 陽 을 중심으로 초모활동을 전개하던 광복군 징모제6분처에서 설치 운영하였다. 광복군 은 창설 직후 대원들을 중국 각지로 파견하여 초모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안휘성 부양에는 金 學 奎 를 주임으로 한 징모제6분처가 파견되어 초모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징모제6분처에서 초모한 한인청년들, 그리고 일본군 을 탈출하여 찾아온 학도병을 교육 훈련시킨 것이 한광반이다. 징모제6분처는 1942년 4월부터 안휘성 부양에 거점을 마련하고 초모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부양은 일 본군과 최전선을 이루고 있던 곳으로, 일본군 점령지역인 서주 귀덕 안경 개봉 등지에서 초모활동을 전개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군으로 끌려나온 학도병들이 1944년 2월부터 일본군을 탈출하여 부양 으로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한광반은 초모된 한인청년들과 일본군을 탈출한 학도병들이 증가하게 되자, 이들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실시 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징모제6분처 주임 김학규는 중국군 제10전구 사령관인 湯 恩 伯 과 교섭, 그의 협조를 얻어 부양 근처의 臨 泉 에 있는 중앙육군군관학교 제10분교 간부훈련단에 한광반을 특설하였다. 54) 그리고 초모해 온 한인청년들과 일본군을 탈출한 학도병들을 이곳에 입교시켜 교육과 훈련을 실시한 것이다. 한광반의 입교는 일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우선 부양에 집결한 인원을 입교시켜 훈련을 실시하였고, 1944년 5월부터 교육과 훈련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55) 그리고 이후 초모되거나 탈출해 온 인원들은 곧바로 임천 으로 데려가 추가로 입교시켰다. 張 俊 河 金 俊 燁 등이 그러한 예이다. 이들은 일본군을 탈출한 후 중국군의 인 도하에 1944년 9월 10일 임천에 도착하였고, 다음날 한광반에 들어갔다. 56) 이러한 방식으로 훈련이 끝나는 그해 11월까지 한광반으로의 입교는 계속되었다. 한광반의 교육과 훈련은 징모제6분처의 기간요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내용은 군사훈련과 정신교육이 중심 이었다. 군사훈련은 중앙육군군관학교 출신인 申 松 植 을 교관으로 하여 실시되었고, 정신교육은 주임 김학규를 비롯하여 李 平 山 趙 扁 舟 등이 맡았다. 이들의 훈련은 1944년 11월에 끝났고, 입교생 전원이 졸업하였다. 당시 졸 업생은 일반 출신 15명과 학도병 33명 등 모두 48명이었다고 한다. 57) 졸업생들은 모두 광복군 대원으로 활동하였다. 48명 졸업생 중 12명은 부양에 남아 초모활동을 위한 적후공 작을 담당하였고, 1945년 6월 징모제6분처가 제3지대로 개편될 때 그 구성원이 되었다. 그리고 36명은 임시정부 58 반에 입교하였고, 1년반에 걸친 교육 훈련을 받고 1942년 10월 1일 제3기로 졸업하였다고 한다. 5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6, 338쪽. 54) 金 學 奎, 白 波 自 敍 傳 (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 600쪽). 55) 한광반의 개교 일자는 분명치 않지만, 당시 한광반에서 훈련을 받았던 金 祐 銓 은 1944년 5월부터 훈련이 실시되었다고 한다( 金 祐 銓, 韓 國 光 復 軍 과 美 國 OSS의 共 同 作 戰 에 관한 硏 究, 수촌박영석교수화갑기념 한민족독립운동사논총, 1992, 1482쪽). 56) 장준하, 돌베개, 청한문화사, 1988, 146쪽 ; 김준엽, 長 征, 나남, 1987, 213쪽. 57) 김광재, 한국광복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7, 209쪽.

59 가 있던 중경으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임시정부 내무부의 경위대, 광복군 총사령부, 서안의 제2지대로 차출 배치 되었다. 3) 군정학교 1940년대에 한국청년훈련반 한국광복군훈련반과 더불어 군사간부를 양성한 또 하나는 軍 政 學 校 였다. 한청 반 한광반은 광복군에 의해 추진된 것이었고, 군정학교는 조선의용군이 주도한 것이었다. 조선의용군은 중국공 산당 관할구역인 화북지역에서 성립된 조선독립동맹의 무장조직으로 중국공산당 군대인 팔로군 신사군과 함 께 활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선의용군이 활동지역인 延 安 太 行 山 山 東 에 군정학교를 설립하여 군사간부를 양 성한 것이다. 조선의용군이 활동하던 화북지역 일대에는 많은 한인들이 이주해 있었고, 그곳을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에는 징병 학도병 등 적지 않은 한적사병들도 있었다. 이들이 조선의용군에 참여해 오면서, 이들을 한 곳에 집결시켜 교육과 훈련을 실시하였다. 조선의용군은 이들을 군사간부로 양성하기 위해 그 활동지역인 연안 태항산 산동 등지에 군정학교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연안에 군정학교를 설치하였다. 개교는 1945년 2월 5일이었다. 코민테른의 결정에 따라 세워졌고 중국공산당 군사위원회가 직접 지도하였다고 한다. 58) 교장은 金 枓 奉 이, 부교장은 朴 一 禹 가 맡았다. 그리고 4개의 區 隊, 15개 分 隊, 병참지원조를 두었고, 대장은 朴 孝 三 이었다. 태항산의 군정학교는 섭현 하남점에 있는 南 庄 에 있었다. 이곳은 조선독립동맹 태항분맹이 있던 곳으로, 태항 분맹에서 주도하여 설립하였다. 1944년 9월부터 화북조선청년군사정치간부학교로 훈련을 실시하였고, 정식 개 교는 1945년 3월 1일에 이루어졌다. 59) 학교의 조직과 운영은 조선의용군 사령관 武 亭 의 부인이었던 金 英 淑 이 맡 고 있었다. 산동의 군정학교는 1944년 10월 1일 개교하였다. 이는 독립동맹 산동분맹에서 주도하였고, 정식 명칭은 조선혁 명군정학교 산동분교였다. 여기에는 한국을 비롯하여 중국 일본인이 참가하였고, 교장은 성자군관학교를 졸업 하고 산동분맹의 책임을 맡고 있던 李 明 (나중민)이 맡았다. 군정학교는 학생들의 수준에 따라 반을 편성하여 교육과 훈련을 실시하였다. 당시 학생들의 직업과 계층이 다양했기 때문이다. 중학 이상의 학력을 가진 학생들은 고급반, 소학교 졸업 정도의 학력을 가진 학생들은 중급 반, 소학교 졸업 미만자는 저급반으로 편성하였다. 그리고 각 반에 따라 교육내용도 달리하였다. 대체로 전술 사 격 무기 및 지뢰의 원리 진지구축 지형지물이용 등을 가르쳤다. 이외에 정치과목으로 신민주주의론 조선혁명 운동사 등의 과목도 있었다. 군정학교는 교육 훈련과 더불어 생산활동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이곳의 경제적 사정이 열악하였던 때 문이었다. 태항산 군정학교의 경우는 1945년 봄에 대대적인 생산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부 대원들은 일본인으로 가장하여 적구의 지하조직과 연계하여 소금을 운반하였으며, 태항산맥 일대에서 황무지를 개간하기도 하였다. 군정학교의 학생들은 모두 조선의용군으로 동원할 수 있는 대원들이었다. 그 인원은 연안에 약 240여명, 태 항산에 약 290명, 산동에 약 120명 정도 되었다고 한다. 60) 이들이 연안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독립동맹과 조선 58) 염인호, 조선의용군의 독립운동, 나남출판, 2001, 294쪽. 59) 염인호, 조선의용군의 독립운동, 291쪽. 60) 염인호, 조선의용군의 독립운동, 쪽. 59

60 의용군의 주요한 인적 기반이 되었고, 이들을 기반으로 화북지역 일대에서 활발한 독립운동이 이루어질 수 있 었다. 5. 맺음말 신흥무관학교에 이어 독립운동전선에서 독립군 군사간부 양성이 추진되었다. 독립군 군사간부를 양성하는 사업은 중국대륙에서, 그리고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계속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를 1920년대, 1930년대, 1940년대 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논의된 내용들을 요약 정리하면서 글을 맺고자 한다. 1920년대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그리고 중국의 각종 군관학교를 통해 군사간부를 양성하였다. 임시정부 에서는 군무부 산하에 육군무관학교를 설립하는 한편, 미국에서 군무총장 주도하에 비행사를 양성하는 사업 을 추진한 것이다. 이와함께 운남강무당 황포군관학교 귀주강무당 낙양강무당 한단군사강습소 보정군관학교 등 중국의 각종 군관학교에 한인청년들이 입교하여 군사간부로 양성되었다. 1930년대에는 독립운동 지도자들에 의해 직접 군사간부를 양성하는 사업이 추진되었다. 김원봉이 남경에 조 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하여 3기생을 배출하였고, 김구는 낙양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립하여 군사간부를 양성하였다. 그리고 민족혁명당에서는 성자군관학교에 특별반을 설치하여 중국 각지에서 모집한 청년들에 대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1940년대에는 한국광복군 조선의용군에 의해 군사간부 양성이 추진되었다. 광복군은 두 곳에서 추진하였다. 하나는 서안에 한국청년훈련반을 설치하여, 화북지역에서 초모해 온 한인청년들에 대한 교육 훈련을 실시하였 다. 다른 하나는 안휘성 부양에서 활동하던 징모제6분처가 한국광복군훈련반을 설치하여, 안휘성 일대에서 초 모해 온 한인청년들과 일본군을 탈출한 학도병들을 모아 훈련을 실시한 것이다. 그리고 화북지역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군은 연안 태항산 산동에 군정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1911년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한 이래, 독립군을 양성하는 사업은 계속적으로 추 진되었다. 지역으로는 중국 미국 등 각지에서, 시간적으로는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독립군 군사간부를 양성하는 사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독립군과 군사간부를 양성한 일이 한국독립운동의 핵심이었다는 것 을 나타내주는 것이며, 동시에 한국독립운동이 독립군을 양성하였다가 일제와 독립전쟁을 전개한다는 전략하 에 추진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남의 나라 땅에서, 또 열악한 조건하에서도 독립군과 군사간부를 양성하는 사업은 단절된 일이 없었다. 독립 운동 과정에서 이루어진 독립군 군사간부 양성은 한민족의 소중한 민족적 경험과 자산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 만 이러한 민족적 경험과 자산이 계승되지 못하고 있다. 해방 후 군사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육군사관학교를 설 립하였지만, 육군사관학교는 그 연원을 다른 데서 찾고 있는 것이다. 60 舊 韓 末 新 式 軍 隊 의 幹 部 양성기관이었던 大 韓 帝 國 陸 軍 武 官 學 校 는 원래 미육군 다이(William M. Dye) 장군 등이 교관으로 있었던 練 武 公 院 의 後 身 이라고 할 수 있으니, 고종의 군대해산령과 대한제국의 붕괴에 이은 일제의 식민통치 등으로 인한 命 脈 의 단절로 말미암아 광복 후 新 生 大 韓 民 國 國 軍 創 建 에는 아무런 連 帶 나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따라서 대한민국 陸 軍 士 官 學 校 의 淵 源 을 밝힘에 있어서 대한제국의 무관학교를 그 始 初 로 삼을 수 없다. 육군사관학교는 1946년 5월 1일 창설된 南 朝 鮮 國 防 警 備 士 官 學 校 에서부터 그 始 發 點 을 삼고 있다. 그러나

61 우리 國 軍 의 胎 動 期 에 公 的 으로 설립된 최초의 軍 幹 部 양성기관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경비사관학교의 前 身 인 軍 事 英 語 學 校 까지 소급하지 않을 수 없다. 61) 육군사관학교의 연원을 대한제국의 육군무관학교에서 찾고 싶지만, 대한제국의 붕괴와 일제의 식민통치로 인 해 단절되어 아무런 영향도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육군사관학교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육 군사관학교의 연원을 국방경비사관학교에 두고, 그것을 군사영어학교까지 소급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군도 그렇지만, 육군사관학교도 그 뿌리와 정신적 연원을 찾는데 매우 소홀하지 않았나 생각된 다. 일제식민지시기에도 민족사는 단절된 일이 없었다. 대한제국의 육군무관학교에 이어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 였고, 이후 해방을 맞을 때까지 독립군과 군사간부를 양성하는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신흥무관 학교 설립 100주년을 맞아 육군사관학교의 연원을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 을까 한다. 한민족의 역사가 단절되지 않고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본다면, 육군사관학교의 연원은 신흥무관학교 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61) 육군사관학교, 大 韓 民 國 陸 軍 士 官 學 校 30 年 史, 1978, 62쪽. 61

62 대한민국 국군의 창설과 신흥무관학교의 정통성 계승 한용원 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수 1. 서론 우리 민족은 1895년 을미사변으로부터 1945년 8ㆍ15광복에 이르기까지 의병 20년(1895~1915), 독립군 25년 (1915~1940), 광복군 5년(1940~1945) 등 50년간에 걸쳐 독립운동을 전개해야만 했다. 1) 그러나 우리나라는 독립을 전취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38선을 경계로 하여 남북이 분단되는 상황에 직면케 되었다. 그러므로 한국의 광 복사는 38선을 경계로 군사분계선이 설정되면서 시발하였고, 이 분계선이 국토의 분할선, 정치적 분단선, 민족의 분열선으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우리 민족은 숱한 파란곡절을 겪어야 했다. 2) 38선을 경계로 남한과 북한에 각각 진주한 미군과 소련군은 그들의 권력과 자금에 의해 남한군과 북한군을 창설했는데, 미군정은 남한의 치안부담을 덜기 위해 경비대를 창설한데 반해서 소민정은 북한의 혁명수출을 위 한 무장력으로서 정규군을 창설하였다. 그러므로 남북한의 군사력이 불균형을 초래하여 북한군이 남침을 자 행, 민족분단을 심화시켰다. 따라서 남과 북이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상호신뢰 회복은 물론 현대사를 보는 시각격차부터 좁혀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현대사를 비뚤어진 눈으로 보게한 것은 일제식민사관( 日 帝 植 民 史 觀 )과 민중사관( 民 衆 史 觀 )이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3) 즉 일제식민사관에 의하면 현대사의 주체는 우리의 민족이 아니라 일본의 제국주의자들이었으며, 8ㆍ15해방은 전승국인 연합국이 한국인에게 안겨다준 선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민중사관에 의하면 민족보다 민중을 역 사의 주체로 삼고 전민족이 화합해야 한다는 통일의지를 강조하기 보다는 민족내부의 갈등과 모순을 강조하고, 조국통일을 평화적 방법이 아닌 혁명적 방법으로 쟁취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현대사 를 보는 잘못된 시각은 현대사의 진실을 은폐시킬 뿐 아니라 남북한의 정통성 문제를 잘못 판별할 소지마저 있 는 것이다. 그러나 정통성 문제는 법률적인 문제나 정치적인 문제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인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인 문제 와 과학적인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정통성을 평가하는데는 조국의 광복에 어느 집단이 얼마나 기여했는가 하는 업적을 따져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우리 민족의 항일독립운동사는 1895년 이후 반세기에 걸쳐 전개되었 고, 그 운동형태와 지도이념 또한 다양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독립운동 속에는 일관된 정신이 존재하고 있었다. 62 1) 전쟁기념사업회, 현대사속의 국군 (1990), P.404 2) 이원순, 광복 50년사의 역사적 조명, 광복 50주년기념종합학술대회발표논문집 (한국학술진흥재단, 1995), PP.16~17 3) 전쟁기념사업회, 앞의 책, PP.402~403

63 그것은 바로 우리 선대( 先 代 )들의 자주독립주의와 독립전쟁주의에 바탕을 둔 독립투쟁정신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한민국국군도 선대의 국군과 의병의 독립투쟁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즉 대한민국 국군은 우리 민족 5천년사를 지킨 모든 국군과 의병의 빛나는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며, 특히 대한민국 임 시정부의 국군인 광복군의 전통을 직접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4) 1895년부터 일제에 항거하는 의병운동이 전개 되어온 가운데 1907년 8월 1일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국군이 해산되자 국군과 의병이 배합하여 의병전쟁을 일으 켰다. 의병은 국내에서 5~6년간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일제의 초토화 작전으로 인해 기지를 상실하여 북천대 장정에 오르게 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국경을 넘어 만주와 연해주로 이동한 의병부대는 토지를 개간하여 생활터전을 만들고 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운동 인재를 양성하는 한편 무기를 구입하여 부대를 재정비하고 항일전을 전개하 였다. 이처럼 의병이 활동 근거지를 만주와 연해주 등 국외로 이전할 당시 남만주 일대에는 60만명의 동포가 이 주하여 있었고, 북간도에는 130군데가 넘는 사립학교가 설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간도지방은 독립군의 양성에 적 합한 지역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므로 의병들이 이 지역에 활동 근거지를 설치하자 이에 영향을 받은 신민회도 서 간도지방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신민회의 이회영, 이상룡, 이동녕 등은 1911년 6월 10일 유하현 삼원보에 신흥무관학교를 설치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초창기에 대한제국육군무관학교 출신이면서 직ㆍ간접적으로 의병전쟁을 경험했던 양규열, 김창 환, 이청천, 이장녕, 성준용 등의 주도하에 운영되어 왔으며, 1920년 8월 폐교될 때까지 10년간에 걸쳐 3,500여명의 독립군 기간요원을 양성하여 3ㆍ1운동 후 일제히 봉기한 50여개의 독립군단에 지휘관 및 참모 요원으로 제공하 였다. 그러므로 청산리에서 대승한 1920년 이후로부터 광복군이 창설된 1940년까지 독립전쟁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자에 의하여 주도되어 왔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논문은 1의병과 독립군이 견지한 독립투쟁정신과 광복군 창설의 의의를 고찰한 연후 2국군의 창설과 관련한 인적자원 및 이념적 맥락의 분석을 통해 국군의 신흥무관학교 정통성 계승문제를 조 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기념식 거행과 관련하여 군부의 일각에서는 신흥무관학교가 전 신이고 육군사관학교가 후신이라고 보는 시각은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 우려가 있는데다가 신흥무관학교 출신 은 육군사관학교 창설에 대한 직접적인 연관성이 낮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이는 정통성의 판별기준을 잘못 적용한 데다가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역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논의야 여하튼 논 자는 대한제국국군의 해산으로부터 대한민국국군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군의 역사적 맥락을 전반적으로 조명 한 바탕 위에서 정통성 계승문제를 살펴 볼 것이다. 2. 의병ㆍ독립군의 독립투쟁정신 대한제국국군은 병력이 2만여명에 불과하여 국내의 민란을 진압할 힘 밖에 갖지 못한 군대였는데, 러ㆍ일 전 쟁 시에 일제의 압력으로 원수부를 해산당한데 이어 병력이 1만여명으로 축소되었고, 1907년 8월 1일에는 강제 해산의 비운을 맞게 되었다. 군대해산때 시위대 1연대 대대장 박승환 참령은 자기의 총으로 자신의 가슴을 쏘았 고, 그 총소리는 우리의 국군이 적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나팔의 역할을 하여 격분한 시위대 병사들은 무기고를 4) 한용원, 국군 50년 : 창군과 성장, 국방연구 제41권 제1호 (국방대학원 안보문제연구소, 1998), P.5 63

64 부수고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렸다. 그리고 서울시위대의 항전소식이 지방진위대에도 알려져 원주진위대대와 수 원진위대대 강화분견대 병사들도 봉기하였다. 원주진위대대는 대대장 대리 김덕제와 특무장교 민긍호가 비밀리에 봉기계획을 세워 무기고를 장악하고 1,200정의 소총과 40,000발의 탄환을 확보했으며, 수원진위대대 강화분견대는 초급장교인 유명규와 이준영을 선 두로 동분견대의 무기고를 습격ㆍ장악하여 무기를 확보하였다. 이러한 진위대의 봉기가 일본군의 급파로 인해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해산당한 장병들이 의병부대와 합류하여 의병부대를 지휘하거나 소규모의 의병으로 효과 적인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므로 대한제국국군이 해산된 후에는 국군과 의병이 배합한 의병전쟁이 전개되 었다. 이같은 활동을 한 대한제국 군인출신 의병장은 경기지역에 이준영(참위), 유명규(참위), 정용대(정교), 박한경(정 교), 충청지역에 오명수(부위), 이세영(참위), 한봉수(상등병), 강원지역에 김덕제(정위), 민긍호(정교), 김규식(참위), 경상도지역에 백남규(부위), 신중근(정교), 박윤중(참교), 함경지역에 홍범도(하사), 차도선(하사) 등으로 알려지고 있다. 5) 국군과 의병의 배합은 의병의 전력을 강화시키기도 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군권( 軍 權 )을 빼앗기지 않고 의병전쟁을 지속시킬 수 있는 상징적 측면을 과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08년 3월 경기도 양주에 집결한 1만여명의 국군과 의병이 서울탈환작전을 시도하는 한편, 각국 영사관에 대해 국제법상 교전단체로 승인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허위가 지휘한 서울탈환작전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일제의 군대해산으로 군권이 빼앗기지 않았음을 과시하 는 한편 의병이 정당한 독립군임도 과시하였다. 일제는 1908년 2개사단을 증파하여 초토작전을 전개했으나 실패 하였고, 이에 귀순작전과 이간작전을 구사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1909년 9월 의병 섬멸을 목표로 대토벌작전을 전개했으며, 1910년 8월 29일에는 병탄마저 강행하여 국권( 國 權 )을 빼앗아 갔다. 그러나 병탄 후 무단정치 하에서 도 의병은 독립의군부와 광복회를 조직하여 대대적인 항쟁을 지속했을 뿐 아니라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로 하 여 의병의 주도세력과 애국지사들은 국경을 넘어 만주의 간도와 노령의 연해주로 망명하여 새로운 독립군기지 를 건설하였다. 이는 국권을 상실한 가운데서도 군권을 지속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의병은 우리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대한민국국군에게 위대한 정신적 유산을 남겨주었으며, 특히 독립군의 무장투쟁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우선 독립군ㆍ광복군ㆍ대한민국국군에게 남겨준 정신적 유산은 의병정신이 라고 할 수 있는데, 의병정신은 6) 첫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결사( 決 死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모든 의병 은 죽음을 각오하고 싸움터에 나가며, 내 한 목숨 바쳐서 싸운다는 정신을 갖고 있었다. 둘째, 이기고 지는 것을 가리지 않고 싸운다는 성패불수( 成 敗 不 須 )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승패를 따져서 이기면 나아가고 지면 물러선다는 군사원칙마저 무시하고 결과에는 상관없이 옳은 것을 위해 그릇된 것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정신 이 항상 우선해 있었던 것이다. 셋째, 절대로 적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불리하면 적과 타협하거나 초지를 굽히는 것은 의병정신이 아니라 패배ㆍ항복ㆍ굴욕이라고 생각하는 정신이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의병이 독립군의 무장투쟁에 미친 영향으로는 첫째, 새로운 활동기지를 만주와 연해주에서 찾았다 는 점이다. 1910년을 전후하여 국경을 넘어 만주와 연해주로 이동한 의병부대는 유인석, 이진룡, 조맹선, 박장호, 조병준, 전덕원, 차도선 그리고 박성호, 여순근, 홍식, 황명길, 송상규 등의 부대였는데, 이들 부대들은 활동기지 를 물색하여 건설에 박차를 가하였다. 둘째, 무장투쟁기지의 경영모델을 제시한 점이다. 의병부대는 만주와 연해 64 5) 성대경, 군대해산과 정미의병, 한말의병운동의 재조명 (제3회 독립기념관 학술심포지엄, 1989), PP.24~25 6) 박성수, 의병전쟁, 현대사속의 국군 (전쟁기념사업회, 1990), PP.31~32

65 주 등지에서 토지를 개간하여 생활터전을 마련하고 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운동 인재를 양성하면서 무기를 구입, 부대를 재정비하여 항일전을 전개하는 기지 경영모델을 만들어 내었다. 셋째, 서간도지방에 민족의 부흥기지를 건설해야 한다는 최초의 주장을 제기한 점이다. 유인석의 의병진에서 서간도지방이 토지가 풍요로와 한사람이 경작하면 10사람이 먹을 수 있고, 1년을 경작하면 3~4년을 먹을 수 있 는 곳이라 는 주장을 제기했다는 것이다. 넷째, 신흥무관학교와 북로군정서의 사관연성소 교관들은 대부분 의 병활동을 통해 전투경험을 한 바 있기 때문에 무관후보생들에게 독립투쟁정신의 진수를 전수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더욱이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학교가 지정한 임무에 따라 2년간 독립군에서 복무하면서 전투유경험 지도자들로부터 지속적으로 독립투쟁정신을 전수받을 수 있었다. 이처럼 1910년 국치를 전후하여 국외로 이동한 의병부대는 독립군으로 편성되었는데, 1940년 광복군이 창설 될 때까지 독립군의 활동은 4단계로 전개되었다. 그 1단계는 1910~1920년까지로서 의병부대의 국외이동에서 청 산리전쟁까지의 시기였으며, 2단계는 1921~1923년까지로서 독립군의 연해주 이동으로부터 흑하사변을 거쳐 대 한통의부가 해체될 때까지의 시기였고, 3단계는 1924~1930년까지로 3부의 정립과 3부의 통합운동이 전개된 시 기였으며, 4단계는 1931년 이후 한ㆍ중연합군이 성립되어 연합작전을 전개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7) 독립군의 주 요간부는 도표1과 같이 대한제국국군 출신이 대종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는 도표2와 도표3에서 볼 수 있듯이 지도급인사들은 대한제국육군무관학교 출신이 대종을 이루었으나 실무급인사는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대종을 이루었다. 도표1 : 대한제국국군 출신 독립군 주요간부 성 명 계 급 성 명 계 급 성 명 계 급 성 명 계 급 노백린 정 령 이 갑 부 령 박형식 부 위 여 준 부 위 유동열 참 령 이동휘 참 령 이 탁 부 위 김좌진 참 위 신팔균 정 위 안 무 정 위 조성환 참 위 지청천 무관학교졸ㆍ일군중위 박영희 정 위 김의선 정 위 김찬수 참 위 김경천 무관학교졸ㆍ일군중위 나중소 부 위 김창환 부 위 신규식 참 위 윤기섭 부 위 황학수 부 위 (자료 :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5ㆍ6권) 도표2 : 신흥무관학교 교원 일람표 성 명 직 위 학 력 비 고 성 명 직 위 학 력 비 고 이천민 교장 고산자 고등군사반 이수 백종열 교관 신흥무관학교 고산자 고등군사반 이수 양규열 부교장 육군무관학교 고산자 고등군사반 이수 오상세 교관 신흥무관학교 고산자 고등군사반 이수 윤기섭 교감 보성중학교 고산자 고등군사반 이수 손무영 교관 신흥무관학교 고산자 고등군사반 이수 김창환 훈련감 육군무관학교 고산자 고등군사반 이수 이범석 교관 운남강무당 합니하 초등군사반 이수 지청천 교성대장 육군무관학 일본육사 김경천 교관 육군무관학교 일본육사 고산자 고등군사반 이수 오광선 교 관 신흥무관학교 합니하 초등군사반 이수 고산자 고등군사반 이수 이장녕 훈련감 육군무관학교 합니하 초등군사반 이수 7) 신재홍, 독립군의 편성과 맥락, 현대사속의 국군 (전쟁기념사업회, 1991), P.41

66 신팔균 교 관 육군무관학교 고산자 고등군사반 이수 성준용 학도대장 신흥무관학교 합니하 초등군사반 이수 원병상 교 관 신흥무관학교 고산자 고등군사반 이수 (자료 : 신재홍, 독립군의 편성과 맥락, 앞의 책, P.14) 도표3 :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주요간부 일람표 성 명 직 위 학 력 비 고 성 명 직 위 학 력 비 고 김좌진 소장 육군무관학교 참위출신 강필립 교관 러시아사관학교 나중소 교수부장 육군무관학교 일본육사 부위출신 김 관 교관 러시아사관학교 이범석 연성대장 운남강무당 박영희 학도단장 신흥무관학교 이장녕 교관 육군무관학교 부위출신 오상세 학도단장대리 신흥무관학교 김규식 교관 부위출신 백종열 연성대 종군장교 신흥무관학교 전성호 교관 흥업단에서 파견 김춘식 연성대 종군장교 신흥무관학교 (자료 : 신재홍, 독립군의 편성과 맥락, 같은 책, P.15) 그러므로 1920년 이후 무장독립투쟁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자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이들은 대부분 의병활 동으로 전투경험을 쌓은 대한제국국군 장교출신이나 중국에서 사관교육을 받은 군사경력자들의 지도를 받았 다. 그리고 고산자에는 2년제 고등군사반을 두어 고급장교를 양성하고, 합니하에는 초등군사반을 두어 3개월 과정의 일반훈련반과 6개월 과정의 후보훈련반을 두어 8) 장교교육의 내실화를 꾀하였다. 신흥무관학교 출신 오 상세ㆍ백종열 등의 경우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복무하다가 학교가 폐교된 다음 김좌진 장군의 휘하에서 1920년대에는 중대장급으로서, 1925년대에는 대대장급으로서, 1930년대에는 그 이상의 지휘관이나 참모급으로 복무하였다. 이처럼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서로군정서 뿐만 아니라 50여개의 독립군단에 지휘관 및 참모로 제공되어 1920년으로부터 1940년에 이르기까지 독립전쟁을 주도하였다. 그러므로 이 당시의 독립군의 독립투쟁정신은 의 병정신을 핵으로 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의 정신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의병전쟁의 전통을 계승하 여 일본군과 항전했던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을 중심으로 한 독립군의 활동은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사에서 중 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1940년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하자 독립군은 광복군에 편입되어 임정 산하의 통합된 국군이 되었으며, 따라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의 정신이 핵이 된 독립군의 독립투쟁정신은 광복군의 정 신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도표4에서 독립군 출신 광복군 주요간부와 이들의 신흥무관학 교와의 연계성을 제시하였다. 도표4 : 독립군 출신 광복군 주요간부의 신흥무관학교와의 연계성 성 명 광복군에서의 직책 신흥무관학교와의 연계성 비고 유동열 참모총장 겸 통수부원 임정 국무위원 임정 군사위원 이청천 총사령관 겸 군사외교단장 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 임정 군사위원 이범석 참모장ㆍ제2지대장 국내정진군 총사령관 신흥무관학교 교관 임정 군사위원 66 8) 신재홍, 앞의 글, P.13

67 김원봉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 신흥무관학교 졸업 권 준 제1지대장ㆍ고급참모 신흥무관학교 졸업 채원개 작전처장ㆍ제1지대장 낙양강무당출신 이준식 제1지대장ㆍ고급 참모 운남강무당출신 조경한 정훈처장ㆍ주계장 임정 군사위원 김학규 고급참모ㆍ제3지대장 신흥무관학교 졸업 임정 군사위원 황학수 참모장대리ㆍ부관처장 신민부 외교부위원장 김홍일 참모장 귀주강무당출신 송호성 편련처장ㆍ제1지대장 신흥무관학교 졸업 윤기섭 고급참모ㆍ부관처장 신흥무관학교 교감 오광선 국내지대 사령관 신흥무관학교 교관 (자료 :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5ㆍ6권) 3. 광복군 창설의 의의 1919년 4월 13일 상해의 프랑스 조계 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권분립 형태의 민주공화제를 지향하 면서 대본영( 大 本 營 )을 설치하여 독립전쟁에 매진하였다. 1919년 11월 5일 공포된 대한민국 임시관제 중 군사 에 관한 사항을 보면 대통령을 원수로 한 군사의 최고통치부 대본영을 설치하여 참모부에 총장ㆍ차장을 두어 군 무ㆍ용병에 관한 일체의 계획을 통솔하도록 하고, 대통령의 자문기관으로 군사참의회를 두기로 되어있었다. 그리 고 1919년 12월 18일 공포된 대한민국 육군임시군제 에 대한민국 육군임시군구제 와 임시육군무관학교조례 가 포함되었다. 9) 그러나 비록 임정이 군무부를 정점으로 서간도군구, 북간도군구, 시베리아강동군구의 3개 군사지역으로 구분 하여 군사편제를 했으나 그 지역 교포들을 충분히 통할할 수 있는 물적기반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무장독 립전쟁은 현지의 독립운동단체에서 수행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3ㆍ1 운동 발발 시부터 일군의 만주출병 시 까지 항일단체 및 독립군단은 북간도 및 북만주지방에 22개 단체와 서간도지방에 22개 단체 등 총 46개의 단체 가 있었는데, 10) 그 중에서 대한국민회 회장 구춘선, 북로군정서 독판 서일, 서로군정서 독판 이상룡, 대한청년단 연합회 안병찬, 광복군총영 영장 오동진, 대한독립군 사령관 홍범도, 한족회 회장 이탁, 대한독립단 조맹선 등은 임시정부계이거나 임정을 지지하여 명령에 따르는 단체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만주에서의 중요한 무장투쟁은 임시정부의 활동이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나 임정 의 초기의 군사활동은 임정의 물적 기반의 결여로 인해 간접적인 참여형태를 취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럼에도 만주에서의 군정부는 거의 자체적으로 군정서로 명칭을 개칭하면서까지 임정의 통할을 받으려 했는데, 이는 임정과의 통합을 기대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11) 서간도의 군정부 경우 서로군정서로 개칭하여 한족회와 함께 임시정부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렇게 되자 신흥무관학교가 서로군정서의 부속기관이 되었지만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서로군정서 뿐만 아니라 만주 전역에 산재한 50여개의 독립군단에 배치되어 9) 대한민국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 중국편(1976), PP.106~110 10) 재발굴 한국독립운동사 (한국일보사, 1987)에 의하면 독립군단이 북간도지방에 24개, 서간도지방에 23개가 존재했다 함. 11) 이연복, 광복군, 현대사속의 국군 (전쟁기념사업회, 1990), P

68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신흥학우단은 1920년대에 강력한 민족혁명단체로 부각되었을 뿐 아니라 만주지방 의 독립운동에 있어 핵심적 존재로 군림하게 되었다. 하지만 1930년대에 들어와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상해 사변이 발생한 가운데 1932년 윤봉길의사가 폭탄투척 의거를 감행하자 한국의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만주의 독 립군을 중국의 관내로 이동시키고 중국에 한ㆍ중 합작을 제의하였다. 그리고 1937년 7월 7일 중ㆍ일 전쟁이 발발 하자 한ㆍ중 합작의 가능성이 제고된 가운데 1938년 10월 10일 한구에서 중국국민당 등걸의 지원으로 조선민족 전선연맹 ( 民 線 )이 김원봉을 중심으로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자 이에 자극받은 임정 측에서는 중국정부와의 협조 하에 광복군의 창설에 착수하였다. 12) 임시정부는 광복군의 창설에 착수하면서 중국국민당의 왕정위사건을 통해 정치세력의 단합과 통일의 필요성 을 절감했기 때문에 1940년 5월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의 3당이 합당하여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 고, 이 한독당의 강령에 국방군을 편성하기 위하여 국민의무병역을 실시하고, 장교 및 무장대오를 통일훈련하 여 광복군을 편성한다 고 제시하였다. 13) 그리고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 김구의 이름으로 광복군 편성계획 서를 작성하여 중국국민당 위원장 장개석에게 제출하였다. 논리상으로 본다면 임정의 광복군 창설계획은 중국 측으로서도 환영할만한 일이었으나 실제로는 조선의용대를 지원하던 등걸 등 중국 측의 실무진이나 김원봉 일 파의 반발이 적지 않았다. 그러므로 한국독립당이 중심이 되어 진행하던 광복군 창설문제는 임정의 주관으로 옮겨져 중국어에 능통한 박찬익과 군사위원 이청천, 이범석, 유동열, 김학규, 조경한 등으로 실무진을 구성하였고, 중국정부와의 교섭편의 를 도모하기 위해 1940년 7월 20일 임정의 간부와 광복군 성립준비단이 본부를 중경으로 이동하였다. 이와 같은 한국 측의 조치는 광복군이 한국독립당의 무장군이 아니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군대라는 명분을 내세울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중국의 거물정객 서은증과 국민당 조직부장 주가화 등과의 용이한 접촉을 통해 광복군편 성계획에 대해 장개석 총통의 승인을 용이하게 획득할 수 있는 여건도 형성하였다. 14) 그 결과 임정은 1940년 9월 17일 중경의 가릉빈관에서 중국의 당ㆍ정ㆍ군의 대표와 외교사절이 참석한 가운데 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을 거행할 수 있었으며, 동 전례식을 계기로 총사령부 성립의 역사적 의의를 강조하 면서 동포들의 성원과 분발을 촉구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포고문 과 총사령부 성립의 경위와 의의 등을 알리는 한국광복군총사령부성립보고서 가 채택되었다. 우선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구, 이시영, 조성환, 송병조, 홍진, 차 이석, 조완구, 유동열, 조소앙, 지청천의 합동명의로 발표된 대한민국임시정부포고문 15) 에서는 첫째, 임정이 무장 동지들의 대립상태를 융합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외국영토에서 군사활동을 추진함에 있어 국제적 동정을 구하 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광복군 편성의 설계를 중국정부에 제출하여 양해를 얻게 되었다. 둘째, 임정은 중국정부에게 중국영토에서 한국광복군의 대일항전 행동을 공인할 것과 우리 군대에 필요조건 을 협조해 줄 것과 우리군대와 중국군대가 연합군의 형세에 따라 공동작전을 수행할 것 등을 요구하여 협조를 얻었다. 셋째, 그러므로 이제부터 군력( 軍 力 )의 확충과 군사통일의 도모 등 행동강령 5개항을 실천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다음으로 임정의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교부장의 공동명의로 된 한국광복군총사령부성립보고서 가 1940년 10월 15일 발표되었는데, 그 내용 속에는 11907년 8월 1일 일제가 국군을 해산시키자 시위대 제1연대 68 12) 신재홍, 독립군과 광복군, 민족독립운동과 국군의 맥락 (삼균학회, 1989), PP.23~24 13) 삼균학회, 소앙선생문집(상) (횃불사, 1979), PP.284~285 14) 이현희, 중경임정과 한국광복군 연구, 軍 史 제22호. P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사 3권(1967), P.113

69 대대장 박승환의 자결총성이 선전포고의 나팔이 되어 국군과 의병이 배합, 일제와 혈전을 벌렸는데 10여년간 우 리의 남녀노유 50만이 죽고 적군 또한 무수히 섬멸되었다. 그러므로 국군 해산의 날이 곧 독립전쟁 개시의 날이 요 광복군의 창립의 날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일제의 강압으로 비록 국권은 상실했지만 군권은 빼앗기지 않고 의병, 독립군, 광복군으로 군맥( 軍 脈 )을 유지하면서 대일항전을 계속해왔다는 것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2해산된 국군이 의병과 배합하여 조직한 광복 군이 5~6년간 국내에서 혈전을 전개하다가 활동무대를 상해, 동삼성, 해삼위, 호놀루루, 샌프란시스코 등지로 분산이동하여 대일항전을 계속하였고, 동삼성의 신흥학교와 호놀룰루의 병학교와 운남의 사관학교는 1919년 이전 한국광복군의 기간부대 양성소가 되어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광복군이 실제로 1940년에 창설되었지만 그보다 33년 전인 1907년에 이미 창군되어 일제와 전쟁을 치루어 왔기 때문에 한국의 군맥은 일제의 침략에 의 해 단절되지 않았다는 민족사관( 民 族 史 觀 )을 천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환언하면 군맥의 단절은 곧 국맥의 단절이요 나아가 민족사의 맥이 끈긴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국군과 의 병이 배합한 정미의병은 국군병사들이 일제의 군대해산에 반대하고 의병으로 변신했기 때문에 한ㆍ일간의 국가 대 국가의 전쟁으로 변화시켰음을 부각시킨 것이다. 나아가 광복군은 국토와 주권을 완전 광복하여 민주공화 국을 건설함과 동시에 민족의 통일독립을 실현해야 할 소명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광복군은 파괴와 건설의 임무 가 주어졌는데, 16) 파괴면에서는 1일제의 각종 침략기구의 박멸, 2일제에 추수하는 세력의 숙청, 3재래의 악 풍ㆍ오속의 타파 임무를 수행하고, 건설면에서는 1정치ㆍ경제ㆍ교육의 균등제도 수립, 2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 가 간의 평등한 지위 실현, 3세계인류의 화평과 행복을 위한 협력의 촉진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부가하여 광복군은 직접 국토수복작전을 성공시킴으로써 승전후 국토의 분할문제가 제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17) 이러한 맥락에서 임정은 광복군의 창설을 계기로 광복군이 국토와 주권을 완전 광복해 야 할 광복군, 민주공화국을 건설해야 할 혁명군, 민족의 통일독립을 유감없이 실현해야 할 통일군으로 성장하 기를 기대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1941년 12월 진주만의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대일선전 포고문을 발표한 임정은 전열의 정비ㆍ강화를 위해 1942년 4월 20일 국무회의에서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를 한국 광복군으로 합편키로 결의하고, 5월 13일 국무회의에서 광복군에 부사령관직을 증설키로 의결함에 따라 군사적 통일이 실현될 수 있었다. 도표5 : 창군의 정통 인맥 (자료 : 현대사 속의 국군 (전쟁기념사업회, 1990), P.241 독립군 출신 광복군 주요간부 광복군 출신 대한민국국군 주요간부 광복군 출신 대한민국국군 주요간부 성 명 직 책 성 명 직 책 성 명 직 책 유동열 참모총장 황학수 부관처장 이준식 군단장 이청천 총사령관 김홍일 참모장 오광선 호국군여단장 이범석 참모장ㆍ제2지대장 송호성 고급참모ㆍ제5지대장 안춘생 육사교장 김원봉 부사령관ㆍ제1지대장 오광선 국내지대 사령관 채원개 여단장 권 준 고급참모ㆍ제1지대장 이범석 국방장관 박영준 정훈감 채원개 작전처장ㆍ제1지대장 최용덕 국방차관 장 흥 관구부사령관 이준식 고급참모ㆍ제1지대장 김홍일 군단장 김 신 공군참모총장 김학규 고급참모ㆍ제3지대장 송호성 호국군사령관 최덕신 군단장 조성환 군무처장 권 준 수도경비사령관 16) 삼균학회, 앞의 책, PP.206~222 17) 같은 책, P

70 뒤이어 임정은 사회주의정당들과 연대를 강화하여 조신민족혁명당, 조선혁명자연맹, 조선민족혁명자통일동맹 등을 임정에 참여시킴으로써 정치적 통일도 성취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임정은 민족연합 정부로서의 면모를 갖 출 수 있게 되었다. 끝으로 광복군의 창설은 도표5에서 볼 수 있듯이 독립군의 지도자들이 광복군의 주요간부 로 발탁되어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을 뿐 아니라 이들 광복군 주요인사 중 상당수는 광복후 대한민국국군의 창 설에 참여하여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상에서 논자는 의병ㆍ독립군이 견지한 독립투쟁정신과 광복군 창 설의 의의를 고찰하여 선대의 국군과 의병의 전통부터 확인하였다. 이제 논자는 대한민국국군의 창설과 신흥 무관학교 정통성의 계승에 관해 살펴보려고 한다. 4. 대한민국국군의 창설 대한민국국군의 창군과정은 1민족자생의 창군운동과정, 2미군정의 경비대 창설과정, 3대한민국 정부의 국군창설과정 등 3단계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창군운동과정에서 국군의 이념과 정신이 형성되고, 경비대 창설 과정에서 국군의 조직과 훈련이 이루어짐으로써 국군창설과정에서 정신과 조직의 변증법적 통일을 성취할 수 있었다. 따라서 창군운동과정과 경비대 창설과정은 국군창설의 준비과정에 해당하는 것이다. 일제의 강압으로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국군이 해산되자 그림1 과 같이 일부는 독립전취론 을 견지하고 독립투쟁전선의 광복 군으로 활약하였고, 다른 일부는 독립준비론 을 견지하고 반독립투쟁전선의 일본군 및 만주군으로 복무했으나 그들은 해방공간에서 함께 만나 창군운동을 전개하였다. 창군운동과정에서 독립투쟁전선의 광복군출신들이 대중적 지지를 받게 되자 일본군 및 만주군출신들도 광 복군을 모체로 국군을 편성해야 한다 는데 공동의 동의 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경비대를 창설하면서 민족자생의 군사단체들을 해체시키자 창군운동세력은 분열되었다. 즉 광복군을 모체로 국군을 편성해야 한다 는 중견층의 명분론과 경비대는 장차 국군이 될 것 이라는 소장층의 실리론으로 분열되어 소장층은 제도권 내 의 경비대에 입대했으나 중견층은 제도권 밖에서 참전동지회 (육ㆍ해ㆍ공군출신동지회의 전신)를 결성하여 국군 이 창설되기를 기다렸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국군이 창설되자 경비대가 국군에 편입되 고, 육ㆍ해ㆍ공군출신동지회 회원들이 국군에 입대함으로써 창군운동세력은 다시 대한민국국군으로 합류하였 다. 18) 그림1 : 창군과정의 전개 독립투쟁전선 (전취론) 참전동지회 (명분론) 대한제국국군 창군운동 대한민국국군 반독립투쟁전선 (준비론) 경비대 (실리론) 70 18) 한용원, 국군50년 : 창군과 성장, 앞의 책, PP.5~6

71 광복이 되자 고국으로 돌아온 군사경력자들은 경력과 연고 관계를 중심으로 군사단체를 조직하여 건군의 초 석이 되고자 했는데, 당시 민족의 구심점을 제시할만한 뚜렷한 주도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우후죽순격으로 난립 되어 1945년 11월 미군정청에 등록된 군사단체의 수효는 30여개에 달하였고, 19) 이들 군사단체들은 1946년 1월 21일 미군정법령 제28호에 의해 해산될 때까지 이합집산을 거듭하였다. 이는 당시 남한에 인민공화국과 치안대 를 중심으로 한 자생적 권력기구와 미군정과 군정경찰을 중심으로 한 점령군 권력기구가 병존하고 있었고, 정치 세력도 인공중심론 을 내세운 좌익세력과 임정봉대론 을 내세운 우익세력으로 분열된 데서 비롯되었다. 창군운 동의 전개양상은 광복군의 국내지대(사령관 오광선) 편성과 조선임시군사위원회(위원장 이응준)를 비롯한 군사 단체의 결성으로 나타났다. 20) 군사단체가 결성되자 헤게모니의 장악을 위한 경쟁이 없지 않았으나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사회의 해방공간에 서는 독립투쟁세력이 헤게모니를 갖는 현상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는 국군준비대(총사령 이혁기)와 학병동맹(위 원장 왕익권)의 간부들이 군사단체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1945년 9월 27일 재경 12개 군사단체 대표자회 의를 개최하고 통합된 조선군사준비위원회 를 결성하려고 했을 때 광복군 지대측이 임정의 법통을 계승하기 위해 조선 대신 대한 으로 명칭을 정하자고 주장하자 대부분의 군사단체 대표들이 이에 동조한데서 여실히 드 러났다. 21) 뿐만 아니라 일본군과 만주군의 장교출신들을 포함한 창군운동요원들이 광복군 국내지대의 편성에 참여함으로써 광복군 모체론 을 행동으로 실증한 데서도 드러났다. 22) 그리고 결성된 군사단체 중에서는 내분현상도 드러났다. 조선국군준비대에서는 1945년 12월 4일 대전에서 조 선국군준비대 남조선전체대회 (위원장 전향)를 개최하고 무조건 광복군에 합류키로 한다 는 성명이 발표되었으 며, 23) 조선학병동맹에서는 간부노선에 반기를 든 요원들이 동맹을 탈퇴하여 학병단을 조직하였다. 아무튼 이러 한 창군운동은 광복 후의 국군사를 미군정의 경비대가 아닌 민족자생의 창군운동단체로부터 시작하게 만든 역사적 의의를 지니는 것이다. 24) 한편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정부수립을 예비하는 목적을 가진 미군정은 국방을 위한 준비작업을 가장 우선적인 임무 중 하나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미ㆍ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될 시점에서 소련의 오해 소지가 있는 군대를 조직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미군정의 경비업무를 담당할 25,000명 규모의 경비대를 창 설키로 하였다. 그러므로 아놀드(A.V.Arnold) 군정장관은 1945년 11월 20일 각 군사단체 간부 120여명을 초청하여 앞으로 남 한에 경비대를 창설할 계획인데 미국식에 의해 조직ㆍ훈련되기 때문에 우선 군사영어를 교육하는 기관을 만들 어 간부를 양성할 계획이니 각 단체에서 유능한 사람을 추천해주기 바란다 고 당부하였다. 25) 미군정의 군무국 에서는 당초 군사영어학교에 일본군ㆍ만주군ㆍ광복군 출신 장교 및 준사관 중에서 중등학교 이상을 졸업하고 영 어에 대한 기초지식을 구비한 자를 선발하여 입교시키되, 일본군 출신 20명, 만주군 출신 20명, 광복군 출신 20 명으로 균형을 유지하고 소장경력자에 한해 선발함으로써 파벌조성을 방지코자 하였다. 이렇게 해서 군사영어 학교가 출범한 가운데 하지 장군은 3성조정위원회에 한국군 50,000명의 창설계획을 건의했다가 3성조정위원회 로부터 1945년 12월말 한국의 정규군은 한국이 독립할 때 창설될 문제 라는 통고를 받고 경비대 창설계획을 19) 육군사관학교,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30년사 (1977), P.60 20) 창군전사 등에서는 이들 군사단체들을 사설군사단체 로 보고 있지만 창군운동단체 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임. 21) 민주주의 민족전선, 해방조선 1 (1946), P ) 광복군 국내지대 편성에 만주군출신 장석윤ㆍ강문봉, 일본군출신 이영순ㆍ최경록ㆍ김영환ㆍ안광수 등이 참여, 간부로 발탁되었음. 23) 육군본부, 창군전사 (1980), PP.290~291 24) 한용원, 국군50년 : 창군과 성장, 앞의 책, P.10 25) 육군본부, 앞의 책, PP.303~304 71

72 1946년 초로 앞당겨 시행하였다. 1946년 1월 15일 미군정의 경비대가 창설되자 일본군 및 만주군 출신 소장층은 미군정의 소장층 충원정책에 힘입었을 뿐 아니라 경비대가 장차 국군이 될 것 이라는 실리론에 따라 경비대에 입대하였다. 그러나 광복군 출 신들은 주력이 중국에 머물고 있는 상황에서 법통성을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고, 일본군 및 만주군 출신 노장 층과 중견층 간에는 자숙론과 명분론이 확산됨으로써 이들은 경비대를 외면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따라서 그 들은 군사단체가 해산된 후 제도권 밖에서 참전동지회 의 이름으로 국군이 창설되기를 기다리며 친목을 유지하 였다. 뱀부(Bamboo) 계획으로 알려진 경비대 창설계획은 국방사령관 고문 이응준의 계획안이 수용되어 26) 1946 년 1월 15일 서울의 제1연대 창설을 시작으로 하여 1946년 4월 1일 춘천의 제8연대가 창설됨으로써 착수를 완료 했는데, 각 연대에 파견할 미군의 부대편성 및 훈련조 요원은 장교 2명, 사병 4명으로 편성하되, 사병은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자를 1명씩 배치하였다. 27) 한편 경비대 창설계획이 앞당겨져 장교의 수요가 급증하자 1945년 12월 5일 설치된 군사영어학교는 1946년 4 월 30일 해체되고 1946년 5월 1일 경비사관학교가 설치되었다. 군사영어학교에는 200명이 입교하여 110명이 임관 했는데, 임관자를 출신별로 보면 일본군 출신 87명(일본육사 출신 13명, 학병 출신 68명, 지원병 출신 6명), 만주 군 출신 21명, 광복군 출신 2명으로 불균형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임관자 110명 중 78명이 장성으로 승진하여 군 의 리더십을 장악했을 뿐 아니라 예편한 후에도 정치ㆍ경제ㆍ사회 등 분야에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28) 그리고 경 비사관학교에는 제1기생으로부터 제6기생에 이르기까지 1,254명의 간부를 배출했는데, 29) 입교자들의 성분을 보 면 제1기로부터 제4기까지는 대체로 환국이 늦어졌거나 개인적 사유로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지 못한 군사경력 자들이 대종을 이루었으며, 제5기는 민간인을 공개모집 했는데도 합격자의 2/3가 이북출신이었고, 제6기는 각 연대 우수 하사관과 병사 중에서 모집했는데도 대부분이 월남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1946년 10월에 발생한 추수폭동으로 인해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된 좌익인사들이 경비대에 입대하여 경비대 내의 좌익분자들과 연계됨으로써 1947년부터 경비대에 좌익조직이 확대ㆍ강화되어 1948년 제주 4ㆍ3사건, 여순 10ㆍ19사건, 대구반란사건과 1949년 강ㆍ표대대 월북사건이 발생하였고, 그 결과 경비사관학교 각 기별 임관 자의 7% 수준이 숙청되었다. 30) 추수폭동은 미국정부에도 큰 충격을 주어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이관시키고 주 한미군도 철수시키자는 의견을 대두되게 하였다. 트루먼행정부는 제2차 미ㆍ소공동위원회의 재개 문제가 결렬되 자 주한미군을 3년 이내에 철수시키기로 결정하였고, 미군정이 주한미군의 철수에 대비하여 경비대를 25,000명 으로부터 50,000명으로 증강시키는 계획을 입안ㆍ건의하자 1948년 4월 합동참모본부(JCS)는 이를 승인하였다. 그 러므로 경비대는 사상문제와 리더십 문제가 심각한 가운데서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5개여단 15개연 대로 성장하였다. 31) 정부수립을 앞두고 서북청년회나 대동청년단 등 청년단체의 간부들은 경비대 내의 좌익분자들을 구실로 삼 거나 광복군 모체론 을 내세워 경비대의 전면해산을 국군 재조직의 선행조건으로 해야 한다고 정계에 압력을 넣 었다. 그러나 정계에서는 경비대가 미군정의 한국화 작업의 산물일 뿐 아니라 민주군대로 육성되었음을 감안하 72 26) 이응준, 회고90년 : 1890~1981 (선운기념사업회, 1982), PP.241~242 27) Robert K. Sawyer, Military Advisors in Korea : KMAG in Peace and War (Washinton : USOCMH, 1962), PP.15~16 28) 한용원, 창군 (박영사, 1984), P.74 29) 같은 책, P.82 30) 같은 책, PP.121~132 31) 같은 책, P.98

73 여 국군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경비대의 결함인 리더십문제와 사상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군사경 험이 풍부한 육ㆍ해ㆍ공군출신동지회 회원들과 반공ㆍ반탁운동에 앞장섰던 우익청년단 단원들을 충원ㆍ보강시 켜 체질적 개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임정 등 민족진영에서는 경비대의 광복군 개조론 이, 광복군 출신 중진 간에는 경비대의 국방군으로의 개편론 이 제기되었는데, 1947년 4월에 귀국하여 대동청년단을 육성시 키고 있던 이청천 장군은 1947년 9월초 하지 장군에게 서한을 보내 경비대를 참전동지회 및 대동청년단과 혼합 편성하여 국방군으로 개편하자고 역설하였다. 32) 대한민국 정부는 남조선과도정부의 행정이양절차 에 의해 경비대를 대한민국국군에 편입시키되, 33) 첫째, 국 방부 초대 장ㆍ차관(장관 이범석, 차관 최용덕)을 광복군출신으로 임명하여 국군이 광복군의 독립투쟁정신을 계 승토록 했을 뿐 아니라 육사교장을 광복군 출신인 최덕신ㆍ김홍일ㆍ이준식ㆍ안춘생 등으로 연속적으로 보직하 여 생도들에게 광복군의 후예로서 자부심을 갖게 했으며, 둘째, 군의 리더십을 확립하기 위해 광복군 출신 김홍 일ㆍ이준식ㆍ안춘생 등과 일본군 출신 김석원ㆍ백홍석ㆍ유승열 등 중진군사경력자들을 육사 7기특기와 8기특기로 경비대시절에 배출된 장교의 수만큼 충원하였고, 셋째 군의 사상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광복군의 수뇌들이 육성 한 청년단(광복청년회, 조선민족청년단, 대동청년단 등) 단원들과 이북에서 월남한 우익청년회(서북청년회, 대동 강동지회 등) 회원들을 육사 정규7기로부터 10기에 이르기까지 경비대 시절에 배출된 장교의 3배수 만큼 입교시 켰다. 그러나 이같은 간부육성정책의 추진이 육군사관학교에서도 경비사관학교에서와 마찬가지로 간부후보생학 교(OCS)로 운용되어 왔기 때문에 34) 정규군으로의 체질개선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더욱이 미군정이 경 비대를 비이념적 집단으로 만들기 위해 불편부당과 기술주의를 강조한 데다가 20대가 대종을 이룬 경비대의 간 부들이 이에 매몰되어 경비대의 존재가치를 공산주의자에 대항할 무장력으로 인정치 않고 있었다. 35) 그리고 미 국정부는 주한미군 철수 후 군사원조를 실시하는데 있어서 외부의 군사적 공격이 아닌 내부의 혼란을 치유하 는데 필요한 경제원조에 중점을 두게 되었고, 이에 군사력도 소규모 국경충돌 내지는 치안유지에 적합한 방어형 성격의 한국군 건설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36) 이러한 상황에서 경비대는 체질개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부대훈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37) 신생 한국군에 편입되어 정규군 역할을 수행하는 처지였고, 신생한국 군은 비록 정규군으로 창설되었으나 미국의 대한군사목표로 인해 군사원조가 제한됨으로써 전면적인 국가적 분쟁에 대처할 수 있는 수준으로 육성시킬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군이 6ㆍ25전쟁에 직면했기 때문에 초전에 제대로 된 역할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 그러 므로 한국군 제3군단은 1951년 5월에 중공군의 집중공격을 받고 붕괴되어 유엔군전선 전체에 치명적인 결과를 빚었다. 따라서 미8군사령관 밴플리트(James A. Van Fleet) 장군은 한국군이 중공군의 대공세에 직면할 때 공황 상태에 빠지는 것은 한국군의 장교단 및 간부들의 리더십 결여에 기인하며, 이는 한국군의 전투효율성을 향상 시켜야만 극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는 한국군의 리더십 결여는 미국정부가 한국군 을 정규군이 아닌 경비대로 육성했을 뿐 아니라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하여 군사적 지원에 인색했던 32) G-2 Summary, HQXXIV Corps : ~14 33) 육군본부군사감실, 육군역사일지 : 1945~1950, 1954, P ) Robert K. Sawyer, op. cit., PP.81~82 (육군사관학교 미군책임고문관 Grant 소령은 실질적인 육사로 전환시키기 위해 한국군장교들에게 5주간 의 교관교육을 시켜보았음.) 35) 한용원, 한국군의 특성과 개혁방향, 21세기 한국정치의 발전방향 (서울대학교출판부, 2009), P )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6ㆍ25 전쟁사 1 (2004), P ) Robert K. Sawyer, op. cit., PP.73~74 73

74 때문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전시중임에도 한국군의 실질적인 재편성을 추진키로 하였다. 38) 그런데 그는 한국군의 재편성을 추진함에 있어 화력부족 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중점을 두어 포병화력의 증강과 기갑 부대의 창설로 해결을 기도하였다. 그리고 클라크(Mark W. Clark) 유엔군사령관은 인력의 증강을 통해서 한국군의 전력을 획기적으로 증강시 키되, 한국군을 65만명으로 증강시키면 유엔군을 점차적으로 한국에서 철수시키려 기도하였다. 더욱이 1953년 한ㆍ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어 한국군은 미군이 보유한 최신예 장비를 보유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1954년부터 1960년까지 총 9,186명의 장교를 미국에 파견하여 첨단 군사지식과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1950년대 후반기에 미국군대는 미국 내에서도 가장 현대적이고 능률적인 조직체로서 미국정부는 물론 민간인들도 군대식 기술과 경영방식을 도입하려고 노력하는 상황이었다. 39)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군은 한ㆍ미상호방위조약에 힘입어 미군 의 현대식 무기 및 장비와 군사기술 뿐 아니라 현대식 기획ㆍ관리제도와 노하우도 받아 들였다. 그러므로 한국전 쟁을 통한 한국군의 재편성은 한국군을 현대전 수행능력을 갖춘 정규군으로 변모시켰음은 물론 1950년대 말 에 한국사회에서 가장 현대적이고 능률적인 조직이 되게 만들었다. 40) 그러나 이러한 발전방향과는 다르게 미군 사고문관들은 한국군 장교들을 친미적이고 기능적인 적응의 전문가로 만들고자 하였다. 따라서 미군사고문관들은 경비대의 조직과 육성과정에서 검증된 군영 및 경비사 출신 장교들의 성장을 뒷받 침하기 위해서 경비대 시절에는 한국군 장교들에게 영어지식과 미군장교들과의 긴밀한 관계유지가 군사경력을 성공적으로 쌓는데 필수적인 요소라고 인식하게끔 작용했으며, 한국군 시절에는 군사지원을 무기로 하여 무능 하고 유해한 인물들을 제거하도록 인사정책에 간여하고, 경비대 시절부터 키워온 장교들을 민주국가의 군사지 식을 습득한 자 라고 하여 보호해주었다. 41) 이처럼 미군사고문단의 비호를 받은 군사영어학교 출신 임관자와 경 비사관학교 출신 임관자는 제5공화국이 수립될 때까지 군의 수뇌부를 형성했을 뿐 아니라 전역 후에도 박정희 군부정권의 비호를 받아 정계ㆍ관계ㆍ재계의 요직을 차지하였고, 특히 군영 출신은 창군동우회를 결성하여 경비 대 모체론 을 고수하였다. 42) 5. 정통성 계승의 문제 한국의 현대 민족독립운동사를 보는 시각은 대체로 민족사관, 식민사관, 민중사관 등 3가지가 있고, 국군사 를 보는 시각도 광복군 모체론, 경비대 모체론, 미제 용병론 등 3가지가 있다. 43) 민족사관에 의하면 한민족은 1895년부터 1945년까지 50년간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여 광복을 쟁취했다는 것이며, 민족독립운동사를 의병 독립군 광복군으로 이어지는 흐름에 정통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국군의 정통성과 관련하여 주류를 형성하는 논리는 광복군이 국군의 정신적 모체(광복군 모체론)라는 것인데, 이에 의하면 광복군은 의병과 독립군의 후신 으로서 정통ㆍ합법적 군대일 뿐 아니라 대한민국국군의 정신적 모체이므로 군맥은 의당 대한제국국군 의병 74 38) 나종남, 한국전쟁 중 한국육군의 재편성과 증강, 1951~53, 군사 제63호(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 PP.213~263 39) Morris Janowitz, The Professional Soldier (Glencoe : Free Press, 1960), P.2 40) 한용원, 남북한의 창군 (오름, 2008), P ) Robert K. Sawyer, op. cit., PP.60~66 42) 한용원, 한국의 군부정치 (대왕사, 1993), P ) 육군본부, 국군의 맥 (1992), PP.488~489

75 독립군 광복군 대한민국국군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국가와 그 기구인 군대는 정통성을 공유한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이 3ㆍ1운동정신을 이어받은 임시정부의 법통 을 계승한 것이 분명한 이상 대한민국국군이 임시정부의 국군이었던 광복군의 정통성을 계승한 것은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44) 대한민국국군이 광복군의 정통성을 계승한다고 함은 국군의 전통이 의병 독 립군 광복군으로 이어지는 민족독립운동의 선상에 있고, 특히 임시정부의 국군인 광복군의 맥락과 일치한다 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대한민국국군의 정통성 계승문제에 관한 논의는 당위론적 차원이 아 닌 사실적인 차원에 의거하되, 1창군의 인적 자원과 이념적 맥락이 광복군의 전통과 갖는 상관관계부터 고찰 한 연후에 2창군과정에서 발현된 국군의 광복군 정통성 계승을 위한 노력과 국군의 정통성 계승을 기피 내지 저해시킨 여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창군의 인적 자원과 이념적 맥락 미군정의 경비대를 창설하는데 주역을 담당했던 군사영어학교출신들이 지난 50년간 한국군의 창군요원으로 자처해왔다. 그러나 하지장군은 한국의 국방을 위한 준비작업이 미군정이 수행해야 할 우선적 임무 중 하나로 인식하여 50,000명 규모의 한국군 편성계획을 입안하여 3성조정위원회에 건의했으나 3성조정위원회가 부정적 반응을 보이자 1945년 11월 20일 맥아더(MacArthur) 장군으로부터 이미 시행을 지시받은 바 있던 경비대를 창설 키로 하였다. 이렇게 해서 남한에 경비대가 창설되게 된것이나 군영출신들은 창군동우회를 결성하여 경비대 모 체론 을 고수하였고, 이는 군영 출신이 1968년까지, 경비사출신이 1980년까지 군의 수뇌부를 형성함으로써 반론 의 여지를 봉쇄시켜왔다. 국군의 인적 자원은 대별하여 광복군 출신ㆍ일본군 출신ㆍ만주군 출신 등 군사경력자들과 더불어 광복군의 수뇌들이 육성한 청년단의 단원들과 월남한 우익청년회의 회원들 중심의 민간인입대자들로 구성되었다. 이는 미군정시 정부가 수립되면 국군이 된다 는 신념으로 육성된 경비대가 국방부훈령 제1호( )에 의해 국군 에 편입되었을 뿐 아니라 해방직후 창군운동을 전개했던 중진군사경력자들과 광복군 수뇌들이 육성한 청년단 단원들 그리고 월남한 우익청년회 회원들이 대거 건군의 초석이 되겠다 는 신념으로 신생 대한민국국군에 입대 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창군요원의 범위는 군영출신으로부터 육사 10기생까지로 산정(즉 군영 출신, 경비사 1기~6기, 육사 7기~10기)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또한 그렇게 산정해야만 경비대 시절에 주류를 형성했 던 일본군출신이 민간인입대자들로 인해 점차 희석되어 육사 10기가 임관했을 때(장교단 5,400여명)에는 1/5이하 의 수준으로 축소됨으로써 45) 면모가 일신된 신생 국군을 그려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군내에 일본군 출신이 희석되어야 도표6에서 볼 수 있듯이 독립군 출신 광복군 주요인사이면서 국군 창설에 기여한 주요인사들의 역할이 부각되는 국민의 군대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항일투쟁의 과정에서 대 한제국국군 출신이 독립군의 주요간부로 활약하였고, 독립군 출신이 광복군의 주요간부로 활약했으며, 광복군 출신이 경비대의 상징적 지위인 통위부장과 경비대총사령관을 역임했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국군의 상징적 존재 인 국방장관, 국방차관 그리고 주요간부로 등장하였다. 이는 국권회복의 자주독립정신이 의병ㆍ독립군ㆍ광복군 을 거쳐 대한민국국군에 분명히 계승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일 뿐 아니라 독립군 출신이 광복군과 대한민국국군 44) 한용원, 3ㆍ1독립운동과 국군의 정통성, 국방저널, 통권제279호 (국방부, ), P.22 45) 한용원, 국군, 앞의 책, P

76 의 창설에 공통된 정통 인맥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도표6 : 독립군출신 창군의 주요인사 성 명 광복군에서의 역할 국군창설에서의 역할 성 명 광복군에서의 역할 국군창설에서의 역할 유동열 참모총장 겸 통수부원 통위부장 채원개 작전처장ㆍ제1지대장 여단장 대동청년단 육성 김홍일 참모장 군단장 이청천 총사령관 겸 군사외교단장 국방군 개편안 제의 조성환 군사특파단장ㆍ군무부장 대한민국군사후원회총재 이범석 참모장 겸 제2지대장 초대 국방장관 경비대총사령관 송호성 편련처장ㆍ제5지대장 국내정진군총사령관 조선민족청년단 육성 호국군사령관 김원봉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 중앙육군군관학교교장 오광선 낙양군교교관 호국군여단장 권 준 제1지대장ㆍ고급참모 수도경비사령관 국내지대사령관 광복청년회 육성 이준식 제1지대장ㆍ고급 참모 육군사관학교장ㆍ육군대학총장 (자료 : 육군본부, 국군의 맥 (1992), P.457) 한편 미군정은 경비대를 비이념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불편부당과 기술주의를 강조했지만 경비대는 혼란된 해 방정국의 축소판을 면할 수가 없어 이념의 대결장이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제1연대 제1대대 소요시에 빨갱 이 노랭이 같은 놈 몰아내자 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여기에서 빨갱이 같은 놈은 공산주의자를, 노랭이 같은 놈은 미국편에 서서 자주성을 상실한 자를 가르킨 것이었다. 조소앙선생은 광복군창설시에 광복군이 국토와 주권을 완전 광복해야 할 광복군, 민주공화국을 건설해야 할 혁명군, 민족의 통일독립을 유감없이 실현해야 할 통일군 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하여 46) 광복군이 이념적으로 자주독립주의, 민주공화주의, 민족통일주의를 지향할 것을 강조한 바 있었다. 그런데 해방정국에서 경비대에 입대한 자들이나 대한민국국군에 입대한 자들이 다같이 광복 군의 후예 가 된다는 합의된 인식 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광복군의 무형의 자산인 자주독립정신을 계승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에 군부에서도 장병들에게 광복군의 후예라는 긍지를 심어주기 위해 육군사 관학교 교장에 광복군출신을 연속적으로 임명하고 육군정훈감도 광복군출신 송면수, 박영준 등으로 연속 임명 하여 광복군의 독립투쟁정신을 본받게 하였다. 이는 반세기에 걸쳐 전개한 우리 민족의 항일독립운동사가 비록 그 운동형태와 지도이념은 다양했으나 일관된 정신ㆍ고유한 특성이 존재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 민족의 독립 정신은 어떤 조건부 독립에도 타협하지 않는 자주독립주의였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력으로 일제를 추방 한다는 독립전쟁주의를 지향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47) 다음으로 독립운동진영에서 조소앙, 박은식 등은 대동단결선언을 통해 주권민유론( 主 權 民 有 論 )에 입각한 공 화정의 수립을 제안하였고, 48) 조소앙은 삼균주의( 三 均 主 義 )를 정립하여 건국의 기본이념으로 삼았으며, 광복군 은 혁명군으로서 민주공화주의를 지향하여 왔다. 그러나 광복 후 국군을 창설할 때에 군부반란사건이 야기되었 고, 따라서 군의 리더십에서는 숙군작업과 정훈교육을 통해 군의 반공주의를 강화시켰다. 한편 볼세비키혁명 후 독립운동진영이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로 분열됨에 따라 운동의 목표가 국권회복 으로부터 통일독립 으로 변화 되어갔다 ) 삼균학회, 앞의 책, PP.283~287 47) 전쟁기념사업회, 앞의 책, P ) 조동걸,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1917년 대동단결선언, 삼균주의논선 (삼성출판사, 1990), P.195

77 이에 이청천, 박찬익 등 임정의 군사관계자들은 광복군총사령부를 성립시키면서 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하고 우리가 해방이 될 것은 명약관화한데, 우리가 군사행동으로 우군들과 피를 흘려 본토에 상륙하지 못하면 해방 된 조국은 어느 시기까지 주도권이 외국에게 있고 우리에게 없게 될 위험성이 있다 고 판단했는데, 이는 훗날 사 실로 나타나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정부와 국군의 자격으로 입국할 수 없게 되었다. 49) 그리고 초창기의 국군은 광복군의 독립 투쟁정신을 좌표로 설정했으나 6ㆍ25전쟁 후 정치적 지배세력이 항일세력으로부터 반공세력으로 변화됨에 따라 반공이념이 부각된 반면, 통일이념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6ㆍ25전쟁을 계기로 하여 우리 사회의 이데올로기 지형이 우편향적 지형으로 변화된 데다가 50) 정치적 지배세 력이 항일세력으로부터 반공세력으로 변화됨에 따라 군부 내에서도 반공주의가 강화되어 실재적 이데올로기화 하였고, 따라서 자유민주주의의 헌법 및 경쟁규칙(game rule)을 위주로 하는 절차적 이데올로기는 쇠퇴되어갔 다. 51) 그러므로 국군은 민주화와 통일의 시대를 맞아 절차적 이데올로기를 회복시키는 한편 통일이념과 통일자 생력을 제고시켜야 할 것이다. 창군과정에서 정통성 계승 노력 국군이 창설되자 광복군 모체론에 공동의 동의를 하고 있던 육ㆍ해ㆍ공군출신동지회 회원들이 대거 입대하 여 광복군의 독립투쟁정신을 계승하려고 노력하였고, 이는 독립운동세력이 정치적 지배세력으로 등장했기 때 문에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광복군의 국군자격으로의 귀국을 끝내 불허함에 따라 1946년 5월 7 일 광복군복원선언서 를 발표하고 6월 하순 집단 귀국한 광복군 출신들은 대부분 청년운동에 투신하였다. 그 러나 통위부장과 경비대총사령관이 광복군 출신으로 임명되자 광복군 출신의 경비대 입대자는 늘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경비대 내에서는 통위부장과 경비대총사령관을 중심으로 광복군 개조론 이 제기되었고, 경비대 밖에서는 이청천 장군 등을 중심으로 국방군으로의 개편론 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광복군 모체론 에 공동의 동의를 하고 있던 육ㆍ해ㆍ공군출신동지회 회원들과 광복군 수뇌들이 육성한 청년단원들이 국군에 입대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다수 국민의 의사 를 반영하여 초대 국방장관과 차관을 광복군 출신으로 임명하 여 국군이 광복군의 독립투쟁정신을 계승토록 하는 한편, 육사교장과 육군정훈감을 광복군 출신으로 임명하 여 국군장병들에게 광복군의 후예 라는 긍지를 심어주고자 했다. 그리고 광복군 출신인 초대 국방장관 이범석 장군이 국방부훈령 제1호( )에서 경비대를 국군에 편입 시킨다 고 표현한 것이나 국군의 정신은 광복군의 독립투쟁정신을 계승토록 한다 고 천명한 것도 당시의 국민 정신과 시대정신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창군과정에서는 국군이 광복군의 정통성을 계승 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게 드러나는데, 이는 해방정국에서 독립운동세력이 명분을 가지고 제대로 된 역할 을 수행하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발현된 것이라고 보여진다. 성장과정에서 정통성 저해 여건 그러나 6ㆍ25전쟁 후 반공세력이 득세하고 항일세력이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자 국군의 광복군 정통성 계승 노 49) 이현희, 앞의 글, P ) 강정구, 한국전쟁의 충격, 광장 (1991, 여름), P.29 51) 아모스펄무터, 군부정치 (인간사랑, 1985), PP.21~25 77

78 력이 약화 내지 변질되었다. 52) 더욱이 국군은 성장과정에서 군영출신의 헤게모니시대(1945~1968), 경비사 출신의 헤게모니시대(1968~1980), 신군부의 헤게모니시대(1980~1996)가 전개됨으로써 제도적 군부에 민족사적 정통성을 제고시키기 곤란한 여건이 형성되었다. 미군정이 경비대를 창설 시에 경비대에 반이념적ㆍ친직업주의적 성향을 제고시킨 데다가 전통군대의 명맥을 역사적으로 이어온 광복군 출신을 도외시하고 일본군 출신을 골간으로 하 여 경비대를 창설하였다. 그러므로 경비대는 창군에서 가장 중요한 정신적 요소를 결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53) 그리고 미군정이 경비대의 간부를 충원시킴에 있어 출신배경이 다양한 가운데서도 쉽게 조화를 이룰 수 있도 록 20~30대의 젊은 층을 선발했기 때문에 이들(군영 출신들)은 군에 더 머물고자 하여 후견의식을 결여한 행위 양태를 시현하였다. 국군 창설시 군수뇌부를 형성했던 군영 출신들이 견지했어야 할 후견의식은 자신들이 오래 군요직에 몸담아 후진들이 성장할 기회를 박탈하는 것보다는 그들이 경험한 바를 후진들에게 전수해주고 조기 에 사회의 역군이 되는 것이어야 했다. 54) 그러나 국군창설시 군수뇌부를 형성한 군영 출신들은 미군사고문단의 지원을 받아 자리를 보존하는데 급급하였다. 나아가 군영 출신의 헤게모니시대와 경비사 출신의 헤게모니시대는 구군부의 헤게모니시대(1961~1979)와 중 첩되어 민족사적 정통성을 훼손시킨 정도가 더 심하였다. 5ㆍ16세력은 제3공화국의 헌법을 제정하면서 1948년의 헌법전문에서 선언한 기미 3ㆍ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라는 임시정부의 정통성 부분을 삭제하고 3ㆍ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 이라는 표현만 남기고 4ㆍ19의거와 5ㆍ16혁명의 이념에 입각하여 라는 표현을 새로 추가시켰고, 이는 1972년의 유신헌법이나 1980년의 제5공화국 헌법에 그대로 지속되어 오다가 6ㆍ10민주항쟁 후 제6공화국 헌법 제정 시에 비로소 3ㆍ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라고 바로 잡았다. 이를 감안한다면 정통성이 없는 군부정권이 임시정부의 법통성 계승을 의 도적으로 기피했을 가능성마저0 배제할 수 없는데, 이는 제3공화국 헌법 초안을 작성한 최고위원 9명이 군영 출 신을 비롯한 경비대 출신들로서 일제식민사관 의 신봉자인 동시 경비대 모체론 의 신봉자였음에 비추어본다면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55) 6. 결론 정통성은 법에 해당하는 라틴어 legitimus로부터 나왔다고 하는데, 중세적 의미에 있어 legitimus는 관습과 절 차에 부합하는 것이었으나 근세에 와서 정통성은 법률에 따르되, 합의와 동의에 의존하는 개념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정통성은 감정적ㆍ평가적 차원의 것이지 수단적ㆍ도구적 차원의 것이 아닌 것이다. 즉 정통성은 형이 상학( 形 而 上 學 )적 차원의 것이지 형이하학( 形 而 下 學 )적 차원의 것이 아니라고 인식되고 있다. 대한민국국군이 창설되자 초대 국방장관 이범석 장군은 국군의 정신적 지표를 광복군의 독립투쟁정신을 계 승하는데 둔다고 천명하였다. 대한민국국군은 1907년 일제가 대한제국국군의 해산을 강요하자 이에 항거하여 제1의 창군인 의병, 제2의 창군인 독립군, 제3의 창군인 광복군으로 군맥을 이어오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한 전통 을 계승하여 광복 후 제4의 창군으로 탄생한 셈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한민국국군은 광복군의 정신을 직접 78 52) 한용원, 한국의 군부정치 (대왕사, 1993), P ) 한용원, 창군, P ) 같은 책, PP.207~208 55) 한용원, 한국의 군부정치, PP.71~72

79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서로군정서뿐만 아니라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여러 개의 독립군단에 지휘 관 및 참모 요원으로 제공되어 1920년부터 1940년까지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가 1940년에 광 복군을 창설하자 독립군은 광복군에 편입되어 임정 산하의 통합된 국군이 되었으며, 따라서 신흥무관학교 출 신들의 정신이 핵이 된 독립군의 독립투쟁정신은 광복군의 정신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정통성의 판별 기준 한국사회에서 정통성은 합법성(legitimacy)으로 보는 시각과 올바른 계통(orthodoxy)으로 보는 시각으로 양분 되고 있다. 그러나 정통성은 법에 해당하는 라틴어 legitimus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합법성으로 보는 시각이 더욱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정통성의 판별기준과 관련하여 과거 동양에서는 인치( 人 治 )를 중시하고 서 양에서는 법치( 法 治 )를 중시하여 정통성의 개념이 동양에서는 최고통치자의 실체 또는 의지에, 서양에서는 관습 및 법률에 두는 경향이었다. 그러나 근세이후 동ㆍ서양 공히 법치국가의 정당성이 국민다수의 동의에 근거하게 되고, 법 또한 인간협정의 산물 로 인식됨으로써 56) 정통성의 개념은 공동의 동의 내지 합의된 인식 으로 이해되 었으며, 따라서 정통성은 legitimacy로 인식하는 경향으로 보편화되었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는 정통성의 논쟁과 관련하여 논쟁을 부정시하는 시각과 긍정시하는 시각으로 양분 되고 있는데, 정통성 논쟁을 부정시하는 시각은 정통성을 orthodoxy 개념으로 보는 측에서 나오고 있다. 그들 은 정통성이란 독존적이고 배타적인 권위를 과시하는 가치개념 이기 때문에 정통성 논쟁은 당파성을 띤 이데 올로기 논쟁을 촉진시키거나 화합보다 편가르기를 조장할 우려가 있다는 주장을 제기한다. 하지만 정통성을 legitimacy 개념으로 보는 측에서는 정통성 개념이 전제시대에는 배타적 권위를 과시하는 가치개념 으로 사용되 었지만 민주시대에는 정의와 사랑을 공유한 도덕감정 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정통성 논의를 긍정시하는 입장에 선다. 그러므로 정통성 논쟁은 전제사회의 타도논리에서처럼 정통을 살리고 이단을 척결하는 방식 으로 진행할 것이 아니라 민주사회의 공존논리에서 처럼 정( 正 )과 부정( 不 正 )은 가리되 사랑으로 포용하는 방식 으로 진행해 야 할 것이다. 이는 마치 원효대사가 화쟁론에서 시시비비를 따져 그 본질이 같다는 것을 규명하도록 강조한 것과 같은 맥 락인 것이다. 따라서 남북한의 정통성 논쟁도 법적ㆍ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논쟁이 아니라 역사적ㆍ과학적 논쟁으 로 해야 하고, 시시비비를 따져 그 본질이 같음을 규명, 동포애로써 포용하는 방향으로 전개해야 할 것이다. 신흥무관학교 정통성의 계승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1920년대로부터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만주지역에서 독립전쟁을 주도하였다. 그 러므로 독립군의 독립투쟁정신은 의병정신을 핵으로 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의 정신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 다. 신흥무관학교는 첫째, 신민회의 방략에 의해 1911년 6월 10일 유하현 삼원보에 설립되었고, 1920년 8월 폐교 될 때까지 10년 동안 쉬임없이 3,500여명의 독립군 기간요원을 양성하였다. 둘째,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군사 교관이 대한제국의 무관출신이면서 의병전쟁의 경험을 지녔던 김창환, 성준용, 김흥, 이극 등이었는 데다가 졸 56) 메스트르(J.M.C. de Maistre)는 법률이 자연권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협정의 산물로 보았음. 79

80 업 후 최소한 2년간 교명( 校 命 )으로 독립군에 배치되어 복무해야했기 때문에 57) 독립투쟁정신을 철저히 전수받 을 수 있었다. 셋째, 부민단이 신흥학교를 통해 양성한 문무인재는 신흥학우단을 결성하여 보다 효과적으로 서간도지역을 중요한 독립운동기지로 편성해왔을 뿐 아니라 여러 독립군단에 지휘관과 참모요원으로 배치되어 1920~1930년 대에 독립전쟁을 주도하였다. 넷째,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의 독립군활동은 청산리전쟁에서 본격화되었는데, 이는 김좌진 장군이 대한군정서를 만들 때 신흥무관학교 교관 이장녕을 참모장으로, 이범석을 연성대장으로 초 빙하는 등 전열을 정비한 데다가 이청천 장군이 이끈 신흥무관학교 교성대가 홍범도부대의 지원을 받아 청산리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신흥무관학교 관련자들이 청산리 대승 에 공헌한 바가 컸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흥무관학교의 민족사적 공헌을 따져볼 필요가 있는데, 신흥무관학교의 민족사적 공헌으 로는 첫째, 독립군 연합부대의 청산리 대승에서 볼 수 있듯이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의 훌륭한 지휘와 결사적 참 여가 1920년 후의 독립전쟁을 좌우하여 왔고, 둘째, 신흥무관학교는 1910년대의 10년 동안 한시도 쉬지 않고 무 장독립투쟁의 역군( 役 軍 )을 길러낸 군관학교로서 민족독립투쟁사를 빛나게 하였으며, 셋째, 신흥무관학교 출신 들이 1920년대에 본격적으로 독립군에 참전하게 됨에 따라 항일독립군이 만주지역에서의 유격전과 한반도지역 에서의 국내진공을 병행 추진할 수가 있었다 58) 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주도했던 독립군은 1940년 9월 17일 광복군이 창설되자 광복군에 편입되어 임정 산 하의 통합된 국군이 되었다. 그러므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의 정신이 핵이 된 독립군의 독립투쟁정신은 광복 군의 정신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따라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의 정신이 핵을 이룬 광복군정신이 대한민국 국군의 정신으로 계승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조소앙 선생은 광복군성립보고서를 통해 일제에 의해 단절 된 역사를 광복군의 창설에 의해 연속된 역사로 재해석 한 바 있었는데, 이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제국주의 국가 의 식민지배로부터 광복한 우리는 역사적 정통성을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중심이 된 독립군의 활동에서 찾으 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의 역사는 선대( 先 代 )의 지혜 및 행동거지의 총화( 總 和 )인 동시에 절차탁 마의 산물로 인정되기 때문에 군인이나 군관련자의 역사인식이 잘못되었다면 그것은 군에 몸담았던 자들의 일 차적 책임임을 통감해야 할 것이다. 59) 80 57) 한국일보사 편, 재발굴 한국독립운동사 (1987), P.99 58) 이현희, 임정과 이동녕 연구 (일조각, 1990), PP.147~148 59) 한용원, 국군의 창설과 정통성 계승, 현대사속의 국군, P.52

81 토론문 81

82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와 신흥무관학교 토론문 박환 수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본고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와 신흥무관학교를 교육과정과 군사간부 양성을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잘 정 리하여 시대적 상황과 설립 지역이 다른 두 학교를 올바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기존의 연구성과들 이 이들 무관학교를 각각 개별적으로는 다루고 있으나 두 무관학교를 하나의 논문으로 묶은 것은 처음이라 학 문적으로도 큰 성과라고 볼 수 있다. 본 연구를 통하여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의 정신과 교육과정, 군사간부 양성, 졸업생 등이 후대에 어떻게 계승 발전되었는가를 심층적으로 밝힐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는 글이 아닌가 보여진다. 특히 신흥무관학교의 경우 무관학교의 건립, 지도자들의 헌신, 일사보국정신으로 일하면서 훈련받는 모습, 교 원들, 그리고 졸업생들의 향배에 대하여도 보다 쉽고 감동적으로 이해하는데 기여한 글이라고 판단된다. 더구나 기존에 나온 많은 연구성과들을 효율적으로 잘 소화하여 신흥무관학교의 특징과 특질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글이라고 짐작된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와 신흥무관학교에 대하여 충분히 잘 서술한 글이므로 이에 대하여 특별한 질문이나 의문점은 없다. 다만 본 주제와 관련하여 앞으로 좀 더 주목했으면 하는 부분에 대하 여 필자의 생각을 몇 자 정리하는 것으로 토론에 대신할까 한다. 우선 신흥무관학교 등에서 활동한 주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주목하지 못했던 인물들에 대하여 좀 더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특히 본 주제와 관련하여서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인 이세영, 이관직, 이장녕, 김창환, 양성환 등 여러 인물들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신흥무관학교에서 학생들을 독립군으로 양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 인물들에 대하여 아는 바가 별로 없다. 또한 이들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아닌 것으로 판단되어 학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최근 <<국민보>> 등 여러 자료를 살펴보니, 그동안 주목하지 못한 김창환이 신민회에 참여하여 만주로 망명하 였으며, 윤기섭 등과 함께 신흥무관학교가 어려운 시절, 인내로서 무관학교를 유지한 대표적 인물로서 기사화된 것을 보았다. <한민> 12호 (1937년 3월 1일자)에서는 그가 얼마나 오랜 세월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였는가 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김창환은 잊혀진 독립운동가로서 우리 앞에 서 있다. 앞으로 잊혀진 영웅들에 대한 관 심과 연구가 보다 활성화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참조로 김창환의 순국기사를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82 기사제목 : 秋 堂 金 昌 煥 先 生 別 世 이월 십이일 남경 객창에서 뇌일혈 병으로 불행히 별세. 저간 남경에 와서 계시던 추당 김창환 선생은 二 月 十 二 日 상오 구시 반에 뇌일혈로 혼도되어 인사불성이 된 채로 당지의 모 병원에 입원하여 응급 치료를 하였으나 효험이 없이 그날 하오 십시 십오분에 불행히 별

83 세하여 十 五 日 하오 일시에 당지 모 묘지에 장례하였는데 향년이 육십오 세이시다. 추당 선생은 본시 경성 출생으로 이십오 세 때에 장교가 되어 시위대에서 십년간 복무하다가 을사년 보호 조약이 체결되어 나라가 장차 망하게 되는 것을 보고 곧 군대에서 나와 이동영 전덕기 이상설 씨들과 결탁 하여 구국 운동에 참가하고 당시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과도 연락하여 활동하다가 경술년 합방까지 된 후 에는 서간도로 가서 신흥학교에서 군사교육사업에 종사하였고 삼일운동 이후에는 군사 운동에 진력하여 서 로군정서의 요임을 띠고 군대를 영솔하고 백두산과 압록강 일대에서 맹렬히 활동하다가 일인의 직접 출병 으로 인하여 서북간도에 있던 군대들이 모두 중동선 연안에 집합되었는데 여기에서는 김규식 김좌진 홍범 도 이청천의 각 군대가 연합하여 다시 독립군을 편성할 때에도 선생이 역시 요임을 띠고 자유시까지 갔다가 러시아 군대에게 무장해제를 당한 뒤에는 다시 서간도로 돌아와 통의부 군대의 총 사령이 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동족 간에 알력이 생겨서 살육까지 생기게 되매 드디어 직임을 사면하고 북만에 가서 홍진 이청 천 씨들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였던 바 九 一 八 만주사변 이후 무장동지를 영솔하고 이청천과 함께 중 국의용군과 연합하여 각지에서 항일운동에 종사하며 고생을 많이 하였다 한다. 그러다가 선생은 수년전 모 지에 와서 활동하고 있다가 불행히 병마에 걸려 한 많은 최후를 맞았는데 본국에는 그의 부인과 두 아들이 간곤한 생활을 하고 있다 한다.(사진은 고 김창환 씨) 둘째,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제국의 군인으로서 활동하다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 개한 대표적인 인물로서 신흥무관학교의 신팔균 외에 김혁과 황학수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대한제국 육 군무관학교 졸업생들로 만주지역의 항일독립운동을 이끌었다. 특히 김혁의 경우 북로군정서 사관학교 졸업식 에 참여하여 축사를 하였으며, 신민부 성동사관학교의 교장으로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황학수의 경우 그의 회 고록을 남겨 대한제국 무관학교 졸업 당시의 감격을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신흥무관학교 외에 대한제국 육군 무관학교 출신들의 독립군 양성을 위한 노력과 전투에서의 수많은 공로들이 좀 더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셋째, 신흥무관학교의 교육과정과 군사간부 양성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인물로서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 신이 아닌 인물로 윤기섭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최근 한시준의 연구성과에 따르면, 윤기섭은 보성중학교 출신으 로 군사훈련을 담당하면서, 교과목의 교재를 직접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兵 書 는 윤기섭이 일본병서 와 중국병서를 구하여 번역하고 그 중에서 새로운 병서를 만들어 사용하였으며, 특히 口 令 을 통일시켰다 라는 기록이 있다. 당시 윤기섭이 만든 교재는 전하여지고 있지 않지만, 그는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할 때인 1924년에 군무부 편집위원장을 맡고, 步 兵 操 典 이란 책을 편찬한 일이 있다. 이로 볼 때, 윤기섭은 비록 대한제국 무관학교 출신은 아니나 독립군 양성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즉 무관학교 출신이 아니면서 교육 과정과 독립군 양성에 기여한 여러 인물들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앞으로 이들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넷째. 신흥무관학교의 경우 이회영 이시영 육형제와 이동녕 여준 윤기섭 김창환 등 여러 인물들이 큰 기여 를 하였다. 그런데 무관학교는 주민들의 동의와 노력, 지원들이 있을 때 보다 발전할 수 있다. 경학사 부민단 한 족회 등 주요 자치단체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 단체들의 지도자였던 허 혁 이상룡 김대략 등 여러 인사들의 지원도 중요하였다고 보여진다. 또한 주민의 다수가 평안도 출신들이었으 므로 이들의 기여 또한 크다. 신흥무관학교는 바로 이들 인사들의 입체적인 노력에 의하여 다수의 독립군을 배 83

84 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한다. 앞으로 종합적이고 총제적인 연구가 이루어졌으면 좋을 듯 하다. 다섯째, 신흥무관학교에 대한 다양한 자료의 발굴이 필요할 것 같다. 지난 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 구소에서 미주지역에서 수집한 <<신흥교우보>> 제2호(1913년 9월 15일)를 공개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신흥교우 단이 1913년 5월 6일 창단되었다는 사실도 새롭게 밝혀졌다.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다. 기존에도 국가보훈처 등에 서 이회영 이상룡 관련 당안자료를 발굴하여 통화현 합니하 지역의 신흥무관학교 설립과정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또한 최근에는 이상룡의 <<석주유고>>를 안동독립기념관에서 번역 발간하여 이상룡과 그와 교 류한 다양한 인물들에 대하여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앞으로도 김대락의 <<백하일기>>를 비롯하여 관련 자료들의 번역과 수집이 보다 활발히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아울러 서중석 교수가 신흥무관학교 연구를 집대성한 이후에, 이덕일 등이 양명학 등 새로운 시각 속에서 독립군 기지건설과 관련된 연구를 한 것은 이 분야 연구를 또 다른 시각에서 검토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여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앞으로 일본측 및 중국측 자료 의 수집 정리와 우리측 자료의 발굴 등을 통하여 새로운 연구 방법론과 시각을 통하여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 길 기대한다. 끝으로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으로 추정되는 많은 인물들이 있으나 객관적 사료들이 없어 이를 입증하지 못하 는 경우가 있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신흥무관학교에 대한 자료수집과 연구가 보다 활성화되어 신흥무관학 교의 전체적인 모습이 보다 빨리 밝혀지길 바라며, 후손들의 아픔을 덜어주게 되기를 기대한다. 84

85 1910년대 독립군기지 건설운동과 신흥무관학교 토론문 김희곤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1.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이를 기리는 학술회의에 이 발표는 주제 가운데서도 핵심 부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른 주제들도 모두 중요한 것이지만, 무엇보다 이 주제가 핵심이라고 여긴다. 발표자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1910 년대에 항일운동의 변화 추세와 함께 나라 밖으로 이주하는 물결을 논증하고, 이어서 독립운동가의 망명과 독 립군 기지 건설운동을 다루었으며, 끝으로 신흥무관학교가 세워질 수 있는 인적ㆍ물적 토대를 설명하고 있다. 이 연구는 만주라는 지역을 나라 되찾는 디딤돌로 삼으려던 독립운동가들의 시대적인 인식을 한 눈에 보여준 다. 1890년대 이래 그러한 추세가 점차 강화되고, 끝내 나라를 잃었을 때 그곳으로 향했던 바람과 물결을 정리해 냈다. 이어서 약속의 땅 유하현 삼원포로 가는 과정, 경학사와 신흥강습소 세우기, 이를 지탱해 나가는 데 기여 한 인물을 그려냈다. 주로 이회영 일가를 비롯한 서울권역의 인물들, 이상룡을 중심한 안동문화권의 인물들을 그 중심에 두었다. 그러면서 이들의 활동과 역할에 대해 전근대적인 불사이군의 정신을 내연화하여 현대의 노블 리스 오블리주로 외연화시킨 인물이라 평가하고 있다. 2. 전반적으로 논지의 내용을 부정하거나 이견을 제시하기는 힘들다. 이 학술회의가 연구자만 참석하는 치열한 논쟁의 장이 아니라 기념하는 학술회의인 만큼 토론도 거기에 맞추어 진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다. 따라서 다음의 토론 내용은 신흥무관학교를 제대로 기리기 위해서는 이러한 분야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하고, 논의도 있어야 할 것이라는 부분을 중심으로 말하려 한다. 첫째, 나라를 잃을 때, 만주에 눈길을 모았던 추세에 대한 설명에서 세 가지를 더 생각해보자. 하나는 발표 내 용에서 1890년대 만주지역 한인의 통계를 제시하면서 평북과 함북 출신이 가장 많은 것으로 이야기했다. 지역 으로 보면 국경선에 가까운 지역 사람들의 이동은 자연스럽다. 논리성을 가지려면 이보다 먼 거리에서 이동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중요할 수 있다. 의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1908년 12월 신돌석이 살해당하기 직전에 그는 만주로 갈 계획을 세웠다. 영덕이라는 먼 곳에서, 그것도 계몽운동가가 아니라 의병장이 만주 망명을 생각하던 추세까지 고려해야 한다. 둘째로, 교통로의 변화에 따른 망명 추세도 살펴봐야 한다. 멀리 경북 북부지역 사람들 의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새로운 교통로인 경부선(1905.1)과 경의선(1906.4) 철도 개통과 이를 통한 이동 추세를 감 85

86 86 안해야 한다. 그렇다고 철도 연선에 있는 지역 인물들이 교통이 편리해졌다고 모두들 망명한 것은 아니다. 세 번 째로 고려해야 할 것이 바로 독립운동을 목적한 망명자들의 집단이다. 서울 상동교회 관련 인물들만큼이나, 안 동문화권으로 말해지는 경북 북부지역 인사들의 집단 망명과 활동은 두드러졌다. 일본 문건에는 이상룡ㆍ김대 락 등이 유인하는 바람에 치열한 배일선인들이 연이어 그 땅으로 달아났고, 그 땅에 경상도파 중심의 일대세력 이 구축되었다거나, 다시 이주를 선동하여 그 열기가 점차 도내 전체 군으로 전파되었다거나, 1911년 중 이주자가 2,500여명이고, 증가추세를 보인다. 고 적었다.(류시중ㆍ박병원ㆍ김희곤, 국역 고등경찰요사, 선인, 2010, 81쪽) 1890 년대나 1904년의 이주자 통계를 갖고 바로 인적 토대가 형성되었다고 보기보다는 1910년 망국 직후의 통계치를 추적하는 작업이 있어야 하겠다. 이와 함께 이주자와 망명자를 분리해서 보는 눈이 필요하다. 동포들이 많이 거 주한다고 독립군을 조직하는 충분조건이 갖추어진 것은 아니다. 항일투쟁을 갖춘 인물들의 계획과 목표를 분 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좋겠다. 둘째, 이 발표에 신흥무관학교 자체에 대한 내용이 보완되면 좋겠다. 사실 기념 학술회의 전체 구성에 맞춘다면, 이 발표는 1910년대 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려는 나라 안팎 의 전반적인 추세와 함께 신흥무관학교 자체에 좀 더 초점을 맞추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물론 설립까지만 다룬 다고 서론에서 밝혔지만, 그렇게 한정시키면 100주년을 기념하기에 미흡하다. 창설과정에 대한 치밀한 분석이나 운영과정에 대한 연구는 모두 불완전한 상태다. 물론 자료의 한계가 가장 큰 이유다. 그런데 실제 처음부터 무 관학교 성격을 가진 것인지, 아니면 강습소에서 무관학교로 단계적으로 발전한 것인지, 이에 대한 정리가 있어 왔지만, 사실 아직은 막연한 추정으로 설명되는 부분이 많은 편이다. 언제부터 무관학교라는 이름을 붙일 만큼 성격이 바뀌었는지, 또 언제까지 그렇게 평할 만큼 유지되었는지 증명해 보이는 일이 연구자의 몫이다. 중국군과 경찰이 들이닥쳐 조사를 벌일 때, 이 학교가 군대를 양성하는 기관이 아님을 누누이 해명하던 사료 들은 양면성을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중국인들 사이에 한국 독립군을 기른다고 알려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는 절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손사래 치던 장면이다. 내 나라가 아닌 곳에서 벌이는 활동이니 만큼 당연하게 나타 나는 현상이지만, 100년을 기념하려면 좀 더 설득력 있게 증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또 주역들이 무관학교 설립에 대한 사전 지식을 얼마나 갖추었는지도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이상룡이 망 명 직전에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이끌면서 정치운동만이 아니라 團 練 制 라는 민병조직을 구상했던 것이 만주 현 지에서 어떻게 접목시켜 가는지도 눈여겨 볼 부분이다. 셋째, 이 발표에서 신흥무관학교가 세워지는 인적ㆍ물적 토대에 대한 언급이 돋보인다. 주된 무게는 이회영의 인식과 활동, 이석영의 재원 조달에 가장 큰 무게를 두면서, 이상룡을 비롯한 안동문화권 인사들의 재원 조달 내용도 보태고 있다. 그런데 학교가 출범한 이후에 독립군기지 운영을 위해 계속되던 지원 라인을 추적하는 일 도 중요하다. 신흥무관학교는 홀로 존재한 것이 아니다. 국내와 만주를 연결하는 핏줄이 있었기 때문에 유지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1910년대 광복회를 살펴보면, 그 목적이 만주지역 독립군기지 유지와 후원에 맞춰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박상진이 이곳을 돌아보고 광복회를 조직한 뒤, 상점과 여관을 이어서 나라 안팎을 잇는 연결망을 만든 사실이나,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친일부호를 공격하고, 사람을 확보하여 만주로 보내는 일은 신흥무관학교 운영 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 장승원 공격팀이 출발하던 곳이 이상룡의 거점이던 안동 도곡마을 이종영의 집이었다. 1920년에 들어 일제에 검거된 경북지역의 의용단도 사실상 서로군정서를 비롯한 간도 지역의 독립군기 지를 지원하는 일을 맡은 비밀조직이다. 따라서 신흥무관학교 운영과 유지에 대한 지원 라인을 좀 더 큰 틀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넷째, 신흥무관학교의 운영과정에 대한 논의가 조금 더 필요하다. 학교를 세우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이회

87 영은 1913년 국내로 잠입했다가 붙잡혀 옥고를 치른 뒤, 북경으로 가서 활동하였다. 따라서 그 뒤로 본격적으로 무관학교가 꾸려지는 데는 이석영과 이상룡만이 아니라 다양한 인물들의 피와 땀이 들어갔다. 실제로 1910년대 중반 이후 학교가 문을 닫을 때까지 시차를 두고 주도하는 인물과 그 역할을 차분하게 따져보는 것도 필요하다 고 생각한다. 누구의 공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제 이 학교의 존재가치와 역할가치를 제대로 규명하자 면, 이러한 작업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섯째, 신흥무관학교를 말하자면 당연히 백서농장을 연결시켜야 한다. 이 학교를 졸업한 청년들을 묶어 연성 훈련 과정을 거치는 부대 조직이 백서농장이므로, 당연히 신흥무관학교의 연장선상에서 언급해야 할 조직이고, 더구나 1910년대의 중요한 군사조직이기 때문이다. 장주를 맡은 김동삼과 주역들에 대한 연구가 있어왔지만, 아 직도 남은 과제가 많다. 3. 신흥무관학교 100주년을 기리는 학술회의를 맞아 두 가지 의미를 찾아본다. 하나는 이 학교가 그 앞서부터 펼쳐진 독립운동의 맥락을 만주지역으로 연결시켜 새로운 장을 만든 고리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만주지역에서 펼쳐진 한국독립운동의 역사를 만들어낸 중요한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발표 가운데서도 1910년대, 곧 신흥무관학교가 세워지고 존재한 시기에 대한 논의가 가장 무게를 갖는다고 여긴다. 좀 더 많은 논의가 필요 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87

88 신흥무관학교 이후 독립군 군사간부 양성 토론문 한상도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1. 이범석이 운남강무당을 졸업한 후,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부임하였다는 사실에서는 다음과 같은 개연성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동기나 배경에서, 어떤 루트로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가게 되었을까 하는 점이 다. 첫째, 이범석이 운남강무당 재학 시기에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부임하는 실마리가 만들어졌을 수도 있을 것 이고, 둘째, 운남강무당 졸업 후 상해로 와서, 한인독립운동진영이라는 범주 안에서 어떤 인연으로(내지는 연유 로)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주선한 개인이나 단체가 있었을 것이다. 후자에 무게를 둘 경우, 이는 당시 신흥무관학교가 있던 서간도 독립운동진영과 상해 독립운동진영과의 연계 (내지는 소통)관계가 가동되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으로도 발전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안창호일기 에는 내 개인의 의사나 군인 양성과 新 興 學 校 구제책을 성심으로 진력하려 하는 바 이다. 그러나 現 今 정부의 재정이 지출을 실행치 못하거니와, 경제력이 발전되는 대로 곧 실행하리라 라는 기록 ( 안창호일기 1920년 1월 20일, 朱 耀 翰 편, 安 島 山 全 書, 삼중당, 1963, 629쪽)을 비롯하여, 수립 직후 임정과 서 간도지역 독립운동진영과의 관계를 암시하는 기록이 적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개연성을 단서로 하여, 좀 더 적극적으로 이범석의 신흥무관학교 교관행의 배경과 동기에 접근 해 본다면, 이 시도는 나아가 해외독립운동진영이 가동하고 있던 네트워크의 범주를 재음미하는 작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 또 독립운동 과정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받아들이고 있던 신흥무관학교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는 사실로 써, 먼저 일제기관에서 安 谷 春 ( 安 鳳 生, 安 椿 生?-토론자) 으로 추정하는 필자가 쓴 글( 一 記 者, 西 間 島 초기 이주 와 新 興 學 校 시대 회고기, 韓 民 3호( ), 社 會 問 題 資 料 硏 究 會 편, 思 想 情 勢 視 察 報 告 集 3, 京 都 : 東 洋 文 化 社, 1976, 176~181쪽)에서는 88 적에게 빼앗긴 국토를 되찾기 위한 원동력을 배양하기 위해 설립되어, 또 그것만이 실력양성의 성적을 거둔

89 新 興 學 校 가 초기에는 많은 배척을 받아가면서 저곡소( 貯 穀 所 )에서 시작하였던 그 참담함과 고심을 회고한 다면, 실로 감개무량하다. 이러한 입장에서 아동을 교육시켜 투사를 양성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고 하는 참된 마음 외에, 당시 그들에 게는 아무 것이 없었다. 이 학교에는 보통교육을 하는 原 班 과 군사교육을 하는 特 別 班 을 두었는데, 당시 교무를 담당했던 인물은 張 憲 順 李 圭 鳳 張 道 順 李 長 寧 李 景 爀 등 제씨이다. 三 源 浦 에서 학교의 기초를 닦고, 그 후 삼원포에서 7 里 거리인 哈 蜜 河 ( 通 化 )로 옮겨, 토지를 매입하여 주택 과 교사를 건축함으로써, 그 기초를 공고히 하고 규모를 확장했다. 이 때 부터 呂 準 尹 起 燮 金 昌 煥 李 靑 天 梁 奎 烈 李 世 永 등이 校 務 를 맡아 전력을 다 함으로써, 학교 출신자가 800명에 이르렀는데, 成 周 寔 金 勳 吳 光 善 등도 모두 이 학교 출신이다. 만주 기타 각 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는 투사 중에는 이 학교 출신자 가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어, 왜적도 이 학교를 질시하였다. 서간도 이주의 선구자 그 중에서도 新 興 學 校 의 유일한 공로자는 李 石 永 씨인 것을 아는 사람은 적다. 그 는 巨 萬 의 재산 전부를 이주동포 구제와 新 興 學 校 경영에 투자했다. 그는 본래 국내에서 累 代 의 巨 族 으로 서 호화로운 생활을 했지만, 亡 國 의 恨 으로 고국을 떠나 이역에 와서 재산 전부를 사용한 후, 극도로 곤란 한 생활을 하면서도, 한 번도 원망이나 후회의 기색이 없이, 태연하게 晩 年 을 지내다가, 2년 전 上 海 에서 굶 어죽는 처지가 되었다. 또 금년 5월 11일 미망인도 상해에 있는 그의 조카집에서 돌아가셨다. 그의 장자 李 圭 駿 씨는 多 勿 團 단장이었지만, 노년에 石 家 莊 에서 돌아가셨다. 라고 적었다. 이와 함께 1937년에 간행된 조선민족혁명당의 기관지 앞길 4호~14호에 혁명성지 순례 : 간도 신흥학교 회 상 글이 11차례 연재되어 있는 사실을 소개할 수 있다. 革 命 聖 地 천여 명 朝 鮮 健 兒 가 復 讐 의 劍 을 갈던 곳 이라 는 부제가 암시하듯이, 독립운동의 성지 이자, 독립군 양성의 메카 로서 그 가치를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신흥무관학교 가 독립운동 과정에서, 한인독립운동가들의 기억과 동경의 대상으로 존재하였 음을 알려준다. 자신이 참여하고 있는 독립운동의 가치와 의미를 신흥무관학교 라는 역사성에서 이끌어 내려 했다는 얘기이다. 향후 이런 사실이 첨가되면, 설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신흥무관학교의 역사성이 보다 구체적 으로 되살아 날 수 있을 것이다. 향후 적극적인 자료 발굴 작업 등을 통해, 사실의 구체화 및 체계화 작업을 통해 비로소 신흥무관학교의 역 사성을 재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육군사관학교의 연원 찾기 작업 또한 소정의 결실을 맺을 수 있으리라 는 희망을 말씀드리면서, 저의 토론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89

90 대한민국국군의 창설과 신흥무관학교의 정통성 계승 토론문 노영기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 90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 나라를 되찾고자 머나먼 이국 땅에서 풍찬노숙( 風 餐 露 宿 )을 마다하지 않으시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셨을 선열들의 이상과 의지를 생각하니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그 분들의 뜻을 되새겨보는 이러한 뜻 깊은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어 크나큰 영광입니다. 더욱이 오랜 세월 동안 대 한민국 국군의 창설과 변천과정을 연구해오시면서 중요한 성과물을 내주신 한용원 선생님의 토론을 맡게 되어 감개무량합니다. 그동안 한용원 선생님께서 해오신 한국 현대사 연구, 그중에서도 대한민국 국군의 창설과 변천 및 정치화 과 정 등에 대한 연구들의 의의에 대해서는 굳이 이 자리에서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한용원 선생님의 연구 성과를 통해 많은 점을 시사 받은 후학이자 토론을 맡은 자의 도리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겠 기에 몇 가지 의문 나는 사항을 중심으로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토론을 대신하겠습니다. 우선, 몇 가지 의문을 제출하기에 앞서 이 논문의 의의를 간단하게 정리해보았습니다. 정통성 문제는 법률적 인 문제나 정치적인 문제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인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인 문제와 과학적인 문제 라며 정통성을 평가하는데는 조국의 광복에 어느 집단이 얼마나 기여했는가의 업적을 따져보는 것이 타당할 것 이라는 한선생 님의 지적에는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특히 100년 전 나라를 되찾을 수 있는 군대를 양성코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셨던 애국 선열들의 자주독립주의와 독립전쟁주의에 바탕을 둔 독립투쟁정신이 대한민국 국군에 어떻게 계승되었는가를 논증하신 이 논문의 문제의식에 대해서도 동감합니다.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에서 한용원 선생님은 의병과 독립군이 견지한 독립투쟁정신이 광복군에 계승된 점을 그 활동과 인적 연계성을 중심으로 고찰하셨습니다. 즉 신흥무관학교의 정통성이 이후 독립군과 광복군에 어 떻게 계승되었는가를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의 활동과 그 인맥으로 살펴보고, 의병-독립군-광복군 이라는 군맥 의 계승이라는 측면을 규명하시며 정통성의 문제를 검토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독립군의 군맥을 이은 광복군의 정통성이 대한민국 국군에 계승된 점, 아울러서 광복군의 정통성이 이후 굴절되는 과정을 실증적으로 규명하 셨습니다. 한용원 선생님은 이 논문에서 정통성 계승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일제시기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그리고 한국전쟁과 군부의 정치참여기에 이르기까지의 폭넓은 시기를 역사적으로 논증하셨습니다. 이렇 듯 국군의 정통성의 문제를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제기하고, 그 계승과 굴절의 측면을 종합적으로 검토했다는 점에서 이 논문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몇 가지 점에서 아쉬움이 남기에 몇 가지 생각해볼 문제를 제기해보았습니다. 한용원 선생님은 1 통위부장과 경비대총사령관이 광복군 출신으로 임명되자 광복군 출신의 경비대 입대자가 늘어난 점, 2 이후 경비대 내에서의 광복군 개조론 과 경비대 외부의 국방군으로의 개편론 이 제기되는 과정을 거치며 광복군 수뇌

91 부가 육성한 청년단원들이 국군에 입대한 점, 3 초대 국방부 장 차관에 광복군 출신을 임명한 점, 4 육사 교 장과 육군 정훈감에 광복군 출신들을 임명하여 국군 장병들에게 광복군의 후예 라는 긍지를 심어준 점 등을 근거로 창군과정에서 국군이 광복군의 정통성(독립군의 독립투쟁정신)을 계승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드러난다 고 평가하고 계십니다. 기본적으로 토론자는 이 같은 평가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는 의문들 중의 한 가지는 미군정의 통위부장과 국방경비대 총사령관에 임명된 유동열 과 송호성의 위상과 역할은 무엇이었을까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미군정기에 대한 평가의 문제와 관련한 것입니 다. 지금으로 치면 국방부 장관과 육군참모총장 격인 직위에 있었던 분들의 역할이 규명되어야 할 것입니다. 물 론 유동열 통위부장이 그 직책에 취임한 이후 광복군 출신들 중 많은 분들이 경비사관학교를 거쳐 경비대의 주 요 간부에 임명된 점이 주목됩니다. 그렇지만, 광복군 출신들이 국방경비대에서 얼마나 지휘권을 행사하였는가 는 별개의 문제일 것 같습니다. 현실적으로 통위부를 비롯하여 국방경비대의 각 연대에는 미군 고문관들이 상 주하며 감독하는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지휘권이 제한된 것은 아닌지 고려해봐야 할 것입니다. 이 것은 미군정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듯이 광복군 출신들의 지휘권도 인정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 때문에 제기하는 의문입니다. 둘째, 한용원 선생님은 육해공군출신동지회 의 회원들에 주목하셨습니다. 그런데, 토론자의 개인적 견해로는 이 단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의문입니다. 물론 이 단체의 회원들이 광복군 모체론 에 동의하고 있었다는 점 이 주목되지만 해방 직후 자주독립의 대의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즉 해방 직후 독립투쟁정신을 계승하려는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광복군 모체론 에 동의하지 않았는가 의문입니다. 주로 일본군이나 만주 군 출신들이 단체의 주축을 이루었고 회장 또한 일본군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단체를 광복군 수뇌부가 육성한 청년단체와 비슷하게 평가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용원 선생님께서는 대한민국 국방부 초대 장 차관과 국군의 주요 간부에 광복군 출신들이 등장한 점을 국권회복의 자주독립정신이 의병 독립군 광북군을 거쳐 대한민국 국군에 분명히 계승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일 뿐 아니라 독립군 출신이 광복군과 대한민국 국군의 창설에 공통된 정통 인맥이었음을 보여주는 것 으로 평가 하셨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평가에 이의가 없습니다. 국군의 의식과 그 주요 인맥이 정통인맥이었다는 점 은 동의할 수 있지만 이것이 실제로 국군에 얼마나 적용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입니다. 광복군 출신들이 국방부 장 차관에 임명되기는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신성모 장관(1949년 3월)과 장경근 차관(1950년 4월)으로 교체되 었습니다. 1) 이 같은 상징적인 지휘부의 변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의문입니다. 다음으로 초기 군대의 위상과 관련하여 대한민국 국군의 지휘권과 군대 문화에 미친 영향이 어느 정도 되었 을지 고려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한용원 선생님께서 광복군의 정통성이 계승되지 못한 점을 미군정기와 6.25전쟁후 정치적 세력의 변화(항일세력으로부터 반공세력으로 변화)로부터 지적하고는 계십니다. 그렇지만, 단 순히 국군의 세력 변화만이 아닌 국군의 지휘관들이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들이 상대적으로 많은 상태에서 대한민국 국군 내부에 존재했던 일본군의 문화나 잔재가 어떻게 남아 있었는가도 설명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 다. 이 점은 대한민국 국군 창설 초기의 지휘부를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들이 장악한 점과 같이 고려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국군의 창설 초기 지휘권의 문제가 고려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대한민국 국군 창설 초기의 정훈 교육 외에 국군의 교범은 상당 부분이 일본군(예를 들어 일본군의 보병조전 )이나 미군의 교 범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점은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고민입니다. 한용원 선생님의 고 1) 이 중에서도 장경근은 일제 식민지 시절 판사를 지냈고 내무부차관 시절인 1949년 6월 반민특위 해산에 앞장선 인물입니다. 91

92 견을 듣고 싶습니다. 한용원 선생님은 6.25전쟁 후 정치적 지배세력이 반공세력으로 변화하면서 반공이념이 부각된 반면, 통일이념 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고 평가하셨습니다. 그런데, 토론자의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여순10.19사건 이후 숙 군이 강화되는 과정을 거치며 국군 내부에서 반공주의가 부각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정치권력도 반공화되는 과정에서 국군의 이념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이것이 이후 38도선 충돌과 6.25전 쟁을 거치며 보다 강화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시 말하면, 대한민국 국군 내부에서 반공이념이 정착되는 과 정과 관련하여 그 시원을 어디에 둘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여순10.19사건을 거치며 국군 내부의 독립투쟁정신을 계승하려는 분위기는 가라앉고, 이를 대신하여 반공이념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것은 앞서 제기한 지휘권의 변화와도 관련된 문제로 여겨집니다. 한용원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전체적으로 의병-독립군-광복군으로 이어지는 정통성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후 국군에까지 인맥에서나 이념 으로나 계승되었다는 한용원 선생님의 논문에는 크게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신흥무관학교의 설립 과 졸업생들의 활동이 독립투쟁정신으로 계속되어 광복군에 계승되었고, 더 나아가서 자주독립국가를 지키는 대한민국 국군에 발전적으로 계승되었습니다. 100년 전 나라를 되찾으려 했던 선열들의 의로운 뜻을 오늘에도 되돌이켜보고 더욱 발전적으로 계승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강조하시고 새롭게 국군의 정통성 문제를 제기하신 한용원 선생님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며 부족한 토론을 마치겠습니다. 설혹 토론자가 이 논문을 오독 한 점에 대해서는 한용원 선생님과 여러 선생님들께서 너그럽게 양해해 주시기를 바라며 이만 맺겠습니다.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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