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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영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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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30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20국,6) 동이 5국,7) 동이 29국,8) 동이 11국,9) 동이 2국,10) 동이 7국,11) 동이 11국,12) 멀리 떨어진 동이 30여국,13) 동이 7국14)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제1절 고대국가의 여명 31 으므로 거의 같은 무렵의 상황에 대한 기록일 개연성이 높다. 그런데 위의 三國志 韓傳에는 마한이 50여개의 나라로 구성되었노라고 적혀 있다. 진 晉書 四夷傳에는 동이의 馬韓이 太康 원년 2년 7년 8년 10년, 태 한과 변한에도 따로 나라가 12개씩 있다고 기록하였다.16) 마한에 속한 50 희 원년에 각각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는 기사가 있다. 辰韓도 태강 여개의 작은 나라 중 8번째에 적힌 伯濟國이 점점 커져 百濟라는 고대국가 원년 2년 7년에 각각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고 적혀 있다. 그러므 로 바뀌었다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진서 에 적힌 기록들은 3세기 말에도 로 앞서 소개한 武帝紀와 四夷傳의 기록을 맞대어보면 晉書 의 東夷 라 아직 백제국 단계에 머물렀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백제가 집권력을 강화 는 이름에는 마한과 진한이 포함되어 있는 셈이다. 한 것은 4세기에 들어선 뒤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추정은 고고학적 해석과도 대체로 일치한다. 지금까지 발견된 韓은 帶方의 남쪽에 있다. 동쪽과 서쪽이 바다로 막혀있으며 남쪽은 倭와 접하는데, 사방 4 천리 정도 된다.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馬韓, 둘째는 辰韓, 셋째는 弁韓이다. 진한은 옛날의 辰國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다. 그 백성들은 토착생활을 하며 곡식을 심고 누에치기와 뽕나무 를 가꿀 줄 알며 무명을 만든다. 각각 우두머리가 있어서 세력이 큰 자는 스스로를 臣智라고 백제유적 중 3세기 무렵에 해당하는 것은 풍납동의 세 겹으로 된 環濠와 석촌동의 고분 일부를 비롯해 서울 인근지역의 몇몇에 불과하다. 그 바깥 지역에서 발견되는 백제유적은 대개 4세기 이후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부르고, 그 다음은 邑借라고 한다. 흩어져서 산과 바다 사이에 살며, 성곽은 없다. 爰襄國 牟 충청남도 서산의 明智里古墳群은 環頭大刀를 비롯해 각종 철제 무기류가 水國 桑外國 小石索國 大石索國 優休牟 國 臣 沽國 伯濟國 速盧不斯國 日華國 古 출토된 土壙墓 무리로서, 발굴단은 4세기 무렵 백제의 중앙 정치세력으로 誕者國 古離國 怒藍國 月支國 咨離牟盧國 素謂乾國 古爰國 莫盧國 卑離國 古卑離 부터 반독립성을 유지하던 토착집단 내 유력자의 무덤으로 추정하였다.17) 國 臣 國 支侵國 狗盧國 卑彌國 監奚卑離國 古蒲國 致利鞠國 路國 兒林國 駟盧 國 內卑離國 感奚國 萬盧國 卑離國 臼斯烏旦國 一離國 不彌國 支半國 狗素國 捷 盧國 牟盧卑離國 臣蘇塗國 莫盧國 古臘國 臨素半國 臣雲新國 如來卑離國 楚山塗卑離 그와 유물 조합이 비슷한 충청남도 보령의 倉巖里土壙墓도 마찬가지 결론 을 냈다.18) 國 一難國 狗奚國 不雲國 不斯 邪國 爰池國 乾馬國 楚離國 등 모두 50여국이 있다. 충청남도 천안의 花城里19)에서도 백제문화에 익숙한 토광묘 무리가 발굴 큰 나라는 만여 家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家이니, 모두 합쳐 십여 만 戶이다. 辰王은 월지국을 조사되었다. 이곳에서는 이미 東晉에서 만든 것으로 보이는 靑磁가 수습된 다스린다.15) 바 있다.20) 이에 화성리 청자를 청주시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청자 天鷄 壺라든가 강원도 원주시의 法泉里에서 수습된 청자 양 모양 그릇(羊形器) 위의 인용문은 3세기 말엽에 편찬된 三國志 韓傳의 한 대목이다. 이어 지는 기사에 3세기 중 후반경 한반도에서 일어난 사건이 자세히 실려 있 8) 晋書 권3 武帝紀 太康 3년(282) 9월. 9) 晋書 권3 武帝紀 太康 7년(286) 8월. 10) 晋書 권3 武帝紀 太康 8년(287) 8월. 11) 晋書 권3 武帝紀 太康 9년(288) 9월. 12) 晋書 권3 武帝紀 太康 10년(289) 5월. 13) 晋書 권3 武帝紀 太康 10년 是歲. 14) 晋書 권3 武帝紀 太熙 원년(290) 2월. 15) 三國志 권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韓. 16) 辰韓 始有六國 稍分爲十二國. 弁辰亦十二國 又有諸小別邑 各有渠帥 大者名臣智 其次有 險側 次有樊濊 次有殺奚 次有邑借 有已 國 不斯國 弁辰彌離彌凍國 弁辰接塗國 勤 耆國 難彌離彌凍國 弁辰古資彌凍國 弁辰古淳是國 奚國 弁辰半路國 弁辰樂奴 國 軍彌國 弁辰彌烏邪馬國 如湛國 弁辰甘路國 戶路國 州鮮國 馬延國 弁辰狗邪 國 弁辰走漕馬國 弁辰安邪國 弁辰瀆盧國 斯盧國 優由國 弁辰韓合二十四國 大國四 五千家 小國六七百家 總四五萬戶 其十二國屬辰王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 辰王不得 自立爲王 三國志 권30 (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17) 金永培 韓炳三, 1969,`瑞山 大山面 百濟土壙墓 發掘報告a, 考古學 2. 18) 池健吉, 1977,`忠南海岸地方의 百濟古墳 二例와 出土遺物a, 百濟文化 ) 國立公州博物館, 1991, 天安 花城里 百濟墓. 20) 三上次男, 1976,`漢江地域發見の四世紀越州窯靑磁と初期百濟文化a, 朝鮮學報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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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34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1절 고대국가의 여명 35 3세기까지는 마한에 속한 작은 나라로서의 伯濟國이며, 4세기부터는 이른 軍 振武 克虞를 두었다. 6좌평은 모두 1품이고, 달솔은 2품, 은솔은 3품, 바 영역국가로서의 위용이 확연한 百濟이다. 덕솔은 4품, 한솔은 5품, 나솔은 6품, 장덕은 7품, 시덕은 8품, 고덕은 9품, 그러나 국내의 역사서 중 가장 오래된 책인 三國史記 에는 백제 역사가 조금 다르게 그려져 있다. 서기전 18년에 건국한 백제는 10여년만에 이미 서울 경기지역을 장악한 영역국가로 성장했으며, 곧이어 마한마저 병합 계덕은 10품, 대덕은 11품, 문독은 12품, 무독은 13품, 좌군은 14품, 진무는 15품, 극우는 16품이다. 2월에 영을 내려 6품 이상은 자주색 옷을 입고 은꽃으로 冠을 장식하며, 11 품 이상은 다홍색 옷을 입고, 16품 이상은 푸른색 옷을 입게 하였다. 하면서 강대한 고대국가로서 우뚝 섰다. 그리고 3세기 중엽에는 官等과 公 - 28년(261) : 봄 정월 초하루에 왕이 자주색 소매가 큰 두루마기와 푸른색 비단 바지를 입 服을 정하고 법령을 마련하는 등 각종 제도를 정비했다고 한다. 영토 확장 고, 금꽃으로 장식한 검은 비단 관을 쓰고, 흰 가죽띠를 두르고, 검은 가죽신 은 건국시조인 溫祚王 때 이루어졌고, 제도 정비는 古爾王 때 이루어졌다 는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눈에 띄는 대목을 골라내보면 다음과 을 신고 南堂에 앉아서 일을 처리하였다. - 29년(262) : 봄 정월에 관리로서 재물을 받거나 도둑질한 자는 장물의 세배를 징수하고 죽을 때까지 벼슬길에 나오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하였다. 같다. 위의 기사대로라면 백제 온조왕은 나라를 세운지 13년 되던 해에 새 도 온조왕본기 - 13년(B.C.6) : 가을 7월에 漢山아래에다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 주민을 옮겨 살게 하였 다.(천도) 읍을 건설하고 서울 경기 충청 황해도 및 강원도 일부를 영토로 삼았 다. 浿河는 지금의 대동강, 熊川은 금강, 走壤은 춘천으로 비정되기 때문이 8월에 마침내 강역을 구획하고 정하였는데, 북쪽으로는 浿河에 이르고, 남 다.29) 그리고 30여년 뒤에는 지방을 4개의 部로 나눠 다스렸으며, 휘하에 쪽은 熊川을 경계로 삼고, 서쪽은 큰 바다에 닿고, 동쪽으로는 走壤에 이르 적어도 5천명 이상의 군사를 거느린 큰 나라로 만들었다고 해야 한다. 너 렀다. 무 비약적인 성장이다. - 26년(A.D.8) : 겨울 10월에 몰래 馬韓을 습격하여 마침내 그 國邑을 병합하고, 이듬해에 는 마한 땅을 모두 흡수하였다. 온조집단은 새로운 철기문화로 무장한 채 북방에서 내려온 騎馬집단이기 - 28년(A.D.10) : 봄 2월에 맏아들 多婁를 태자로 삼고 중앙과 지방의 군사업무를 맡겼다. 에 빠른 속도로 정복활동을 벌였으며, 그로 인해 국가성장도 빨랐을 것이 - 31년(A.D.13) : 봄 정월에 나라 안의 민가를 나누어 南部와 北部로 삼았다. 라고 긍정적으로 풀이하는 견해도 적지 않다.30) 그러나 그럴 경우에도 서기 - 33년(A.D.15) : 가을 8월에 東部와 西部를 더 두었다. 8년에 마한을 병탄했다는 기사에 대해서는 내용을 대폭 수정해서 이해하 - 34년(A.D.16) : 겨울 10월에 마한의 옛 장군 周勤이 牛谷城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고 있는 실정이다. 직접 군사 5천명을 이끌고 토벌하였다. 고이왕에 대해서는 그 기사가 지니는 상징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많다. 실제로 고이왕 때 6좌평제 16관등제 공복제 법령 정비 등이 이루어졌 고이왕본기 - 7년(240) : 여름 4월에 眞忠을 左將으로 삼고 중앙과 지방의 군사 업무를 맡겼다. 다기보다 이 무렵에 국가조직이 다소 정비된 사실을 상징적으로 전하는 기 - 27년(260) : 봄 정월에 內臣佐平을 두어 왕의 명령을 알리고 보고하는 일을 맡겼다. 內頭 佐平은 창고와 재정에 관한 일을 맡고, 內法佐平은 예법과 의례에 관한 일을 맡고, 衛士佐平은 왕과 궁궐을 지키는 군사 업무를 맡고, 朝廷佐平은 형벌과 감옥에 관한 일을 맡고, 兵官佐平은 대외 군사 업무를 맡았다. 또, 達率 恩 率 德率 率 奈率 및 將德 施德 固德 季德 對德 文督 武督 佐 29) 김기섭, 2000, 백제와 근초고왕, 학연문화사, 쪽. 30) 千寬宇, 1976,`三韓의 國家形成(下)a, 韓國學報 3, 一志社. 朴燦圭, 1995,`百濟의 馬韓征服過程 硏究a, 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金秉南, 2000,`百濟 領土 變遷史 硏究a, 전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 36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사라는 것이다.31) 물론, 삼국사기 의 건국 기년을 그대로 믿으려는 입장에 제1절 고대국가의 여명 37 하자. 서는 관제 정비를 사실로 인정하기도 한다.32) 그러나 3세기 중엽의 관제 정 비는 고구려 신라에 비할 때 너무도 빠른 진전이거니와 삼국사기 의 16 관등 기사 내용이 중국에서 7세기 전반기에 편찬된 周書 異域傳의 기사 와 거의 같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고이왕 때의 6좌평 16관등 설치 기사를 泗 時代의 일을 소급 부회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33) 비류왕본기 仇首王의 둘째아들로서, 성품이 너그럽고 인자하여 남을 사랑하고, 또 힘이 세어 활을 잘 쏘 았다. 오랫동안 민간에 있었는데, 명성이 자자하였다. 汾西王이 죽자, 비록 아들이 있었지만 모 두 어려서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그래서 신하와 백성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른 것이다. 5년(戊辰, 308) 봄 정월 초하루 丙子날에 일식이 일어났다. 이처럼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사를 고스란히 믿기란 애초 불가능하다. 9년(壬申, 312) 봄 2월에 사신을 보내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질병과 고통을 위문케 하고, 후대에 일어난 사건을 반영하였거나 시기를 소급해서 적어놓은 부분이 있 홀아비 과부 고아, 혼자 사는 늙은이로서 스스로 생활할 수 없는 자에게 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초기 기사를 무한정 신빙할 수는 없으며, 상대적으로 삼국지 한전을 비롯한 중국사서에 적힌 단편적 이야기와 고고학적 조사 연구 결과에 더 많이 주목해야 한다. 곡식을 한사람 당 3섬씩 주었다. 여름 4월에 동명묘에 배알하였다. 解仇를 병관좌평으로 삼았다. 10년(癸酉, 313) 봄 정월에 남쪽 교외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지냈는데, 왕이 직접 제물로 쓸 짐승을 베었다. 13년(丙子, 316) 봄에 가물었다. 큰 별이 서쪽으로 흘러갔다. 여름 4월에 왕도의 우물물이 넘치고 그 안에서 검은 용이 나타났다. 17년(庚辰, 320) 가을 8월에 궁궐 서쪽에 활 쏘는 돈대를 쌓고 매월 초하루에 활쏘기를 익혔 1. 비류왕의 즉위 다. 18년(辛巳, 321) 봄 정월에 왕의 이복 아우[庶弟]인 優福을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백제가 고대국가로서 우뚝 서기 시작한 것이 정말 4세기라면 우리는 백 제의 제11대 比流王에 주목해야 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304 년에 즉위하여 344년에 죽을 때까지 40년간 백제를 다스렸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4세기 전반기에 백제의 비약적인 국가 성장을 앞장서서 이끌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먼저 그에 관한 기록을 유심히 살펴보도록 가을 7월에 금성이 낮에 나타났다. 나라 남쪽에서 풀무치가 곡식을 해쳤다. 22년(乙酉, 325) 겨울 10월에 하늘에서 소리가 났는데, 마치 바람과 물결이 서로 부딪치는 듯했다. 11월에 왕이 狗原 북쪽에서 사냥하여 손수 사슴을 쏘아 맞혔다. 24년(丁亥, 327) 가을 7월에 구름이 마치 붉은 까마귀가 해를 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9월에 내신좌평 우복이 北漢城을 근거로 삼아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군사 를 보내 토벌하였다. 28년(辛卯, 331)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 풀과 나무가 마르고 강물이 마르더니 가을 7월에 31) 李丙燾, 1936,`三韓問題의 新考察a, 震檀學報 6 ;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李基白, 1959,`百濟王位繼承考a, 歷史學報 11. 金哲埈, 1982,`百濟建國考a, 百濟硏究 특집호,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李基東, 1987,`馬韓領域에서의 百濟의 成長a, 馬韓 百濟文化 10, 원광대학교 마한백 제문화연구소. 32) 李鍾旭, 1977,`百濟王國의 成長a, 大丘史學 ; 1978,`百濟의 佐平-三國史記 를 중심으로-a, 震檀學報 45 ; 1994,`百濟의 建國과 統治體制의 編成a, 百濟論叢 4, 백제문화개발연구원. 33) 盧重國, 1988, 百濟政治史硏究, 일조각, 84쪽. 김기섭, 2000, 백제와 근초고왕, 학연문화사, 쪽.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이 해에 기근이 드니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30년(癸巳, 333) 여름 5월에 별이 떨어졌다. 왕궁에서 불이 나더니 민가까지 잇달아 태웠다. 가을 7월에 궁실을 수리하였다. 眞義를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겨울 12월에 우레가 쳤다. 32년(乙未, 335) 겨울 10월 초하루 乙未날에 일식이 일어났다. 33년(丙申, 336) 봄 정월 辛巳날에 혜성이 奎별자리에 나타났다. 34년(丁酉, 337) 봄 2월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예방하여 왔다. 41년(甲辰, 344) 겨울 10월에 왕이 죽었다.
20 38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이상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기재된 비류왕 관련 기사이다. 백제의 비 제1절 고대국가의 여명 39 (1)온조왕-(2)다루왕-(3)기루왕-(4)개루왕-(5)초고왕-(6)구수왕-(7)사반왕 약적인 발전을 이끈 왕에 관한 이야기라 하기엔 기사의 내용이 너무 밋밋 (8)고이왕-(9)책계왕 (10)분서왕 하고 한가롭다. 온조왕처럼 영토를 넓힌 일도 없고, 고이왕처럼 제도를 정 (11)비류왕-(12)계왕 비한 일도 없다. 순행하며 백성을 위로하고, 하늘과 땅에 제사지내고, 관리 를 임명하고, 사냥하고, 반란을 진압한 것이 40년 통치의 주요 업적이었던 (13)근초고왕-(14)근구수왕-(15)침류왕-(17)아신왕-(18)전지왕-(19)구이신왕 셈이다. 이처럼 삼국사기 의 기록은 고고학 자료와 큰 차이를 보인다. 고고학적 측면에서 볼 때 비류왕은 분명 백제가 城邑國家에서 領域國家로 비약하던 (16)진사왕 (20)비유왕-(21)개로왕-(22)문주왕-(23)삼근왕 무렵의 왕이다. 그런 만큼 비류왕본기에는 주변의 여러 나라를 정복 병합 한 이야기가 적지않이 실렸어야 한다. 그런데 영토확장과 군사력에 관한 -곤지-(24)동성왕-? 이야기는 전혀 없고 어느 시대에나 있었을 법한 평범한 이야기로만 채워진 (25)무령왕-(26)성왕-(27)위덕왕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긴 것일까? -(28)혜왕 의심을 품고 삼국사기 의 비류왕에 관한 기록을 찬찬히 살펴보면 몇가 지 불합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즉위 배경에 대한 설명이 그중 하 나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오랫동안 민간에 있다가 신하와 백성의 (29)법왕-(30)무왕-(31)의자왕 x도면 2y백제 왕위계승도( 삼국사기 에 의함)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고 적혀 있다. 분서왕이 죽자 비록 아들이 있 었지만 모두 어려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는 내용도 있다. 왕자들이 여럿 있지만 능력이 부족하므로 백성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다 는 것인데, 쿠 데타를 일으켜 왕위에 올랐다 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삼국사기 는 비류왕을 구수왕( )의 둘째아들이라고 하였다. 그 러니까 구수왕의 맏아들로서 왕위를 이어받았다가 어리기 때문에 물러 34) 난 沙伴王과는 형제인 셈이다. 언뜻 보아서는 그럴듯하다. 그래서 비류 왕은 아버지 구수왕이 죽고 형 사반이 고이왕에게 축출될 무렵 궁궐에서 쫓겨났다가 세력을 규합할만한 힘을 얻은 뒤 분서왕이 자객에 의해 살해되 자 왕위에 오른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35) 그러나 비류왕이 구수왕의 둘째아들로 나오는 계보는 사실일 수 없다. 사반왕이 고이왕에게 왕위를 넘겨준 것은 234년이고, 비류왕이 즉위한 것은 304년으로서, 두사람의 활동 시기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x도면 2y 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내용에 따른 왕실계보이다. 여기에 서 비류왕은 구수왕의 아들이므로 최소한 구수왕이 죽은 해인 234년에 는 잉태되었어야 한다. 그렇다면 비류왕이 왕위에 오른 304년 무렵에는 적어도 70세였던 셈이며, 41년간 재위하였으니 죽을 때의 나이는 최소 110세라고 할 수 있다. 당시로서는 매우 부자연스런 수명이다. 물론, 비류왕이 특별히 장수한 인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추정되는 최소 35) 박현숙, 2005, 백제의 중앙과 지방, 주류성, 78 79쪽. 34)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제2 古爾王 즉위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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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46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1절 고대국가의 여명 비류왕 때의 국가성장 백제국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세력을 확장하였고, 언제 百濟로 성장했는 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앞에서 보았듯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실린 비 류왕의 행적이 너무 한가롭기 때문이다. 더욱이 3세기 중엽의 중국 역사를 다룬 三國志 가 3세기 말엽에 쓰여 진 데 반해 3세기말 4세기초의 중국 역사를 다룬 晉書 는 唐나라 때이 던 7세기 중엽에 가서야 비로소 쓰여지는 바람에 馬韓의 백제국이 삼국시 대의 백제로 성장하는 과정이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백제의 국가성장은 3 4세기의 국제정세와 고고학적 조사 연구 결과를 통해 유 추하는 것이 지금으로선 최선의 방법이다. x사진 1y풍납토성에서 출토된 동전무늬도기(錢文陶 x사진 2y몽촌토성에서 출토된 동전무늬도 器) 기 조각 정책을 담당케 하였는데, 백제 한성도읍기의 특징적인 토기로 꼽히는 黑色 磨硏土器 直口短頸壺 直口長頸壺 등은 모두 遼寧지방의 토기문화와 연 관된 것이라고 한다.51) 백제와 진나라의 교섭을 입증하는 유물로는 동전무늬도기(錢文陶器)가 인상적이다. 동전무늬도기란 陶器의 어깨 부위에 五銖錢과 같은 동전 무늬 를 새긴 항아리로서, 중국의 삼국시기부터 東晋 때까지 3 4세기에 주로 揚子江유역에서 만든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이처럼 한정된 시기에만 잠 깐 만들어진 동전무늬도기가 夢村土城 風納土城, 홍성 神衿城 등지에서 조각난 상태로 발견되었다. 특히,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은 당시 백제의 도 성이었기에 백제와 진나라 사이의 교류에 반영된 정치적 의미가 더욱 각별 해진다. 51) 박순발, 1999,`한성백제의 대외관계a, 백제연구 30,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 양기석, 2005, 백제의 경제생활, 주류성, 210쪽. 먼저, 4세기 무렵의 백제문화에 기초한 고분 산성 주거지가 화성 마하 리52) 백곡리53), 이천 설봉산성54), 파주 주월리55), 포천 자작리56) 등 경기도 일원에 널리 분포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들 유적을 통해 개략적인 판도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 유적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백제토기가 출토되었는데, 풍납토성 몽촌토성에서 수습한 토기들과 기종 형태 재질 등이 대체로 일치한다. 이는 백제의 정치영역 내지 문화영역이 4세기 무렵에는 적어도 경기도 일 원으로 크게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4세기 전반 무렵의 국제정세에 비추어보면, 백제의 팽창이 단순히 주변 소국을 병합하는 데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제는 한군현의 옛 터전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그곳은 각종 기반시설이 잘 갖추어진 데다 외교 무역 에 종사할 인재와 재물이 많았기에 매력적인 공략 목표였다. 그러나 이미 52) 湖巖美術館, 1998, 華城 馬霞里 古墳群. 53) 韓國精神文化硏究院發掘調査團, 1994, 華城白谷里古墳. 54) 단국대학교 중앙박물관, 1999, 이천 설봉산성 1차 발굴조사보고서.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1999, 이천 설봉산성-2차발굴조사 지도위원회의 자료-. 55) 京畿道博物館, 1999, 坡州 舟月里遺蹟. 56) 경기도박물관, 2001, 포천 자작리유적 긴급발굴조사-지도위원회의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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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52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1절 고대국가의 여명 53 한번에 군사 3만명을 동원할 수 있는 백제의 가공할만한 국력이 근초고 왕 때 갑자기 생겼을리 없다. 근초고왕 때 발휘된 강력한 힘의 기반은 비류 왕 때 이미 어느 정도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4세기 초엽에 낙랑 군이 멸망하고 대방군이 쇠약해졌으며, 백제 문화권이 경기지역을 벗어날 정도로 확대되었다는 사실은 비류왕의 정치적 활동 범위가 매우 넓어졌음 을 시사한다. 4. 비류왕과 碧骨堤 많은 사람들이 근초고왕을 백제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임금으로 여기고, x사진 3y김제의 벽골제(복원) 그때를 백제의 전성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근초고왕은 비류왕의 둘째 아 들이라고 전한다. 그러니 비류왕 때를 정치적 안정이 이루어지고 경제발전 의 토대가 마련된 시기71)로 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기 록에는 이와 관련한 내용이 전혀 없다. 위의 기록에서 벽골지와 벽골제는 서로 같은 곳임을 알 수 있다. 벽골제 라면 전라북도 김제의 浦橋里에 남아있는 직선 거리 약 3km의 제방이다. 특별한 증거자료가 없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비류왕 때를 경제발전의 토 그리고 흘해왕 21년은 330년에 해당한다. 두 기록이 전하는 바는 4세기 초 대가 마련된 시기로 보는 이유는 순전히 벽골제 때문이다. 삼국사기 와 엽 김제지역에 거대한 규모의 저수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둑을 삼국유사 에는 각각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쌓게 한 사람이 백제의 비류왕이 아닌 신라의 흘해왕으로 되어 있다. 당시 신라는 경상도지역을 다 장악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였으므로, 흘해왕 三國史記 권2 新羅本紀 제2 訖解尼師今 21년 72) 처음으로 碧骨池를 만들었는데, 둑의 길이는 1,800步이다. 三國遺事 권1 王曆 訖解王 기축년에 처음으로 碧骨堤를 쌓았다. 둘레가 만7천26보이며, 이 백66보이고, 논(水 73) 田)은 1만4천70 이다. 이 벽골지를 만들었다는 기록은 명백한 잘못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잘못은 대수롭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다. 백제에서 비류왕 27년(330)에 대대 적으로 벌인 공사를 후대의 역사가들이 신라의 일인 양 잘못 기록했을 뿐 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1975년에 전라북도 김제 포교리의 碧骨堤를 발굴 조사하였다. 그 결과 제방의 높이 약 4.3m, 상변의 폭 7.5m, 하변의 폭 17.5m, 전체 길이 3km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제방의 맨 아래 炭化層에서 시료를 71) 강종원, 2002, 4세기 백제사 연구, 서경문화사, 119쪽. 72) 二十一年 始開碧骨池 岸長一千八百步. 73) 己丑始築碧骨堤 周 萬七千二十六步 百六十六步 水田一萬四千七十. 채취해 放射性炭素年代法으로 측정한 결과 ①1600±100 B.P. ②1576± 100 B.P. ③1620±110 B.P. 등 4세기 중엽에 해당하는 연대를 얻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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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60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멈추고 돌을 쌓아 표지를 삼은 다음 그 위에 올라가 좌우를 돌아다 보며 이 다음 날에 누가 다시 이곳까지 이를 수 있을까! 라는 말을 감회 어리게 할 정도였다. 또 백제는 영산강유역과 낙동강유역에도 진출하여 마한 잔여 세력과 가야제국을 제압하였다. 백제의 정지할 줄 모르고 추진되어 온 정복사업의 성과는 근초고왕 당대 의 일이었다. 근초고왕대에 절정을 이룬 백제의 정복 활동은 크게 세 방향 으로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즉, 영산강유역과 낙동강유역 그리고 예성강 유역으로의 진출이었다. 이 가운데 백제가 크게 주력한 것은 마한 지역의 제패였다. 그런 관계로 그 영역은 적어도 금강 이남에서 노령산맥 이북까 지 미쳤다. 이 때 백제의 정치적 영향력은 노령산맥을 넘어 전라남도 해변 지역까지 미칠 정도로 마한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게 되었다.85) 백제 가 이처럼 동남쪽으로는 낙동강유역과 북쪽으로는 예성강선까지 정치적 영향력을 미칠 영역을 확장하는데 소요된 기간은 369~371년까지의 단 3 년에 지나지 않은 짧은 시일이었다. 이 기간 동안 백제는 남과 동과 북으로 영토를 확대하였거니와 서쪽으로는 중국 동진과의 교섭을 통하여 그 존재 가 국제 무대에 찬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이같은 백제의 흥기와 세력 팽창 특히 그 힘의 東進은 낙동강 東岸 지역에 자리잡은 진한제국 전체의 위기 의식을 초래하여86) 신라를 중심으로 통합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백제의 단기간에 걸친 세력 팽창 배경을 계기적인 발전 과정에서 만 찾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근초고왕대 백제의 폭발적인 팽창은 계기적으 로 설명할 수 있는 사안만은 결코 아니다. 백제사상 삼국사기 에만 보더 라도 2명의 시조가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複數 시조의 존재는 2개 왕실의 존재를 상정하게 한다. 아울러 근초고왕대와 그 이전 代의 백제 왕실 계보 가 단층이 진다는 지적에 대한 일종의 해명 차원에서라도 왕실교체에 의한 정복국가론이 제기되었다. 영향권 세력 x도면 1y근초고왕대의 백제 영역도 85) 李道學, 1991, 百濟의 交易網과 그 體系의 變遷, 韓國學報 63, 76~78쪽. 86) 末松保和, 1954, 新羅史の諸問題, 138~139쪽. 61
32 62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2) 정복국가론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63 서 확인되고 있다. 그것도 하나의 사료가 아니라 계통이 서로 다른 3개의 史書에서 각각 그렇게 전한다. 먼저 자치통감 영화 2년(346) 정월조에 지금까지 제기된 백제 정복국가론 관련 논고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李道學, 1988, 百濟의 起源과 國家形成에 관한 再檢討, 韓國古代史硏究 會報 7, 한국고대 사연구회. 보면 다음과 같다. a. 처음에 夫餘는 鹿山에 거처하였는데, 百濟의 침략을 받아 部落이 衰殘해져서 서쪽으로 燕 나라 근처로 옮겼으나 방비를 하지 않았다. 燕王 은 세자 儁을 보내어 慕容軍 慕容 李道學, 1990, 百濟의 起源과 國家形成에 관한 재검토, 한국 고대국가의 형성, 민음사. 恪 慕輿根 3장군을 거느리고 17,000餘 騎로 부여를 습격하게 하였다. 儁은 가운데 거처 李道學, 1991, 百濟의 起源과 國家 發展過程에 관한 檢討, 韓國學論集 19, 한양대학교 한 하면서 지휘를 하고 군사는 모두 恪에게 맡겼다. 드디어 부여를 빼앗고 그 王 玄 및 部落 국학연구소. 李道學, 1993, 百濟 初期史에 관한 文獻資料의 檢討, 韓國學論集 23, 한양대학교 한국학 의 5萬餘 口를 사로잡아 돌아 왔다. 은 玄을 鎭軍將軍으로 삼고 딸을 妻로 삼게 하였 다.88) 연구소. 李道學, 1994, 4세기 정복국가론에 대한 검토, 한국고대사논총 6, 한국고대사회연구소. 李道學, 1995, 백제 고대국가 연구 일지사. 이상의 논고를 토대로 한 정복국가론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부여계인 만주의 백제 세력이 2차례 이동하여 지금의 서울 지역에 정착했다는 것이 다. 1차 이동은 1세기 단계로, 2차 이동은 4세기 중반 단계로 설정하였다. 백제의 국가형성 문제와 관련지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는 그 기원이라고 하겠다. 기원은 그 국가의 성격을 암시해주는 일종의 좌표 구실을 하기 때 문이다. 그런데 여러 기록을 놓고 볼 때 백제의 기원은 고구려가 아니라 부 여임이 명백하게 드러났다.87) 그런데 일제 官學者들의 주장 이래로 위의 기사에 보이는 百濟 를 고구 려의 誤記로 간주하여 왔다.89) 혹은 民族主義 史學者들에 의해서 백제의 海 上進出과 관련지어 遼西經略說의 근거로도 이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러한 해석들은 백제의 중심지를 시종 한반도로만 단정했을 때 거리 관계상 나올 수 밖에 없는 발상에 불과하다. 만약 이 기사의 史料 가치를 의심한다 면 晋書 慕容 載記(b)에 등장하는 백제 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 가? 이 곳의 백제도 誤記라고 해야만 하기 때문에 설득력이 약하다고 보겠 다. 그것도 하나의 사료가 아니라 계통이 서로 다른 사서에서 그렇게 전하 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를 단순히 誤記로만 돌리는 것은 궁색한 해 석에 불과하다. 근자에 중국 학자가 이 백제 를 말갈 7部의 하나인 伯 의 잘못된 기재로 간주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추종하는 이도 나왔다. 그런 (1) 사료에 보이는 만주 백제 데 백돌 은 7세기대인 隋唐代 이후에 등장하는 말갈의 족속 이름일 뿐 4 세기대를 무대로 하여 나타난 바 없다. 물론 이 주장은 백돌 의 음과 글자 3세기 후반에 씌어진 삼국지 동이전 한조에 의하면 마한 54개 국 가운 데 백제국이 보이고 있다. 당시 마한제국의 맹주국은 목지국이었다. 백제 국은 그 예하의 평범한 일개 국으로서 존재하였다. 그런데 동북아시아의 격동기이자 백제가 흥기하기 직전인 4세기 중엽에 그 존재가 만주 지역에 87) 이에 대해서는 李道學, 1995, 백제고대국가연구, 52~72쪽을 참조하기 바란다. 88) 資治通鑑 권97 永和 2년 정월조, 初夫餘居于鹿山 爲百濟所侵 部落衰散 西徙近燕 而不 設備 燕王 遣世子儁 帥慕容軍 慕容恪 慕輿根三將軍 萬七千騎襲夫餘 儁居中指授 軍事 皆以任恪 遂拔夫餘 虜其王玄及部落五萬餘口而還 以玄爲鎭軍將軍 妻以女. 89) 日夜開三郞, 1946, 夫餘國考, 史淵 34, 37쪽. 池內宏, 1932, 夫餘考,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 13 ; 1951, 滿鮮史硏究 上世篇 第一 冊, 460쪽.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221쪽.
33 64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65 가 백제와 닮았다는 점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구당서 와 신당서 를 전반에 부여를 직접 공격하는 일은 가능할 수도 없었다. 바꿔 말해 이 사 비롯한 여타 역사서에는 한결같이 伯 部가 汨 部 로 적혀 있으므로 논 실은 a에 보이는 백제 가 고구려 의 오기일 수 없음을 다시금 확인시켜 거로 삼기는 더욱 어렵다. 그 뿐 아니라 백돌부는 부여 중심지인 길림시의 준다. 북쪽에 소재하였다. 만약 부여가 백돌의 공격을 받았다고 하자. 부여는 남 이와 관련해 高麗에 왕실의 연원을 두고 있는 金이 고려를 압박했을 뿐 쪽으로 이동했어야 마땅하지 서쪽으로 이동해야 될 이유가 없었다. 더욱이 침공하지 않은 사실이93) 상기된다. 이것을 일반화시킬 수야 없겠지만 그 支 백돌 자체가 7세기대 이후에야 등장하므로 논거가 될 수도 없다.90) 派임을 선포한 나라가 그 祖源이 되는 국가를 군사적으로 공격하기는 어렵 그렇더라도 위에 보이는 백제 를 고구려 의 오기로 간주한다고 하면, 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영화 2년 조(a)의 부여를 북부여로 간주하면서, 그 이러한 논리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먼저 이 기사의 下限인 영화 2년인 346 곳을 침공한 백제를 고구려 로 지목한 견해는 설득력이 떨어진다.94) 따라 년은 西遷한 부여가 前燕에게 격파당한 시점이라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서 위에 인용된 백제를 고구려의 오기로만 간주하는 견해는 더욱 신중한 부여가 설령 백제가 아닌 고구려에게 몰려서 서쪽으로 이동했다고 하더라 검토가 필요하다. 도 그 시점은 이 보다 훨씬 이전이 된다. 285년에 부여는 전연의 침공을 받아 破局에 직면했다가 西晋의 지원을 만주 방면에서 백제의 움직임은 345년에 전연의 記室參軍인 封裕가 국 왕인 모용황에게 건의한 상서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도 다시금 포착된다. 받아 復國된 바 있다. 서진과 우호 관계에 있으면서 전연에 공동 대처하고 있던 국가가 고구려였다. 그러니 고구려로서는 3세기 말경에 서진의 보호 아래 있던 부여를 공격할 정황이 되지 못한다. 그런 만큼 世紀를 넘겨 4세 기 전반에 고구려가 송화강유역에 진출하여 길림시 방면에 소재한 부여를 b. 高句麗 百濟 및 宇文 段部의 사람은 모두 兵勢를 옮겼는데, 中國의 義를 사모하여 온 것 같지는 않으니 모두들 돌아갈 생각이 마음에 있습니다. 지금 戶가 10萬이나 좁은 都城 에 몰려들고 있어서 장차 국가에 큰 害가 될까 두렵습니다. 마땅히 그 兄弟宗族을 나누어 서 서쪽 경계의 여러 城으로 옮겨 이들을 恩寵으로 慰撫하고 法으로 단속하면 됩니다.95) 압박한 근거를 제시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헌에 보면 고구려가 4세기 전반에 북상했다는 하등의 기록도 발견하기 어렵다. 고구려와 전연과의 전 위의 기사는 전연의 수도인 龍城(요녕성 조양시)으로 붙잡혀 온 주변국 쟁 기사가 빈출함에도 불구하고 이 무렵 고구려와 부여 관계 기사는 일체 포로들의 처리 문제가 된다. 여기서 백제 라는 국호가 중국 사서에 처음 비치지 않고 있다. 당시 고구려는 전연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 보이는 것이다. 아울러 백제는 전연의 공격 대상 국가들이던 고구려라든지 므로 고구려가 부여를 몰아붙일 객관적인 상황이 되지도 못한다. 게다가 우문부 단부 등과 병칭되고 있다. 그러므로 웅자를 드러낸 백제는 345년 3세기대 부여의 남쪽 경계는 고구려 였지만91) 4세기대에는 선비 와접 하였다.92) 전연의 영향력이 부여에 미친 시기가 285년 이후였다. 따라서 이러한 지리 관계 기사는 285년 이후 4세기대에 접어들어 기존 부여의 남부 영역을 전연이 장악한 상태를 가리킨다. 그런 만큼 고구려가 4세기 90) 李道學, 2001, 한국고대사, 그 의문과 진실, 200~202쪽. 91) 三國志 권30 東夷傳 夫餘條, 南與高句麗 東與 婁 西與鮮卑接 北有弱水. 92) 晋書 권97 夫餘條, 南接鮮卑 北有弱水. 93) 金庠基, 1984(改訂版), 金의 始祖에 對하여, 東方史論叢, 286~287쪽. 94) 물론 본글에서 언급한 永和 2년조의 부여는 原夫餘를 가리킨다. 개로왕의 국서에서 백제 역시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에서 출원했다고 한 바 있다. 그런데 국서의 부여는 汎夫餘系 로 표기한 것일 뿐이므로 백제의 북부여 출계를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이다. 그랬기에 백제가 鹿山의 夫餘 를 몰아붙일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백제가 국호를 남부여로 바꾼 것도 그 연원이 되는 북부여를 의식한 것일 수 있다고 본다. 95) 晋書 권109 慕容 載記, 句麗 百濟及于文 段部之人 皆兵勢所徙 非如中國慕義而至 咸有思歸之心 今戶垂十萬 狹湊都城 恐方將爲國家深害 宜分其兄弟宗屬 徙于西境諸城 撫 之以恩 檢之以法 使不得散在居人 知國之虛實.
34 66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이전에 전연과의 교전 끝에 이미 상당한 숫자의 포로가 발생했음을 짐작하 게 한다. 그러한 백제의 소재지는 고구려 우문부 단부 등과 마찬가지로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67 c. 使者를 나누어 보내어 선비 오환 고구려 백제 및 薛羅 休忍 等 諸國에서 徵兵했는데 모두 따르지 않았다.97) 전연과 인접한 만주 내륙 지역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을 시사해 주는 고고학적 물증이 있다. 백제 지역에서 출토된 이들 諸國은 전진에서 연락 가능한 곳에 소재한 국가들을 가리키고 있 바 있는 선비 계통의 귀고리와 마구류의 존재가 된다. 이 중 귀고리의 경우 다. 백제 역시 고구려와 함께 그 인근에 소재했음을 알려준다. 물론 이 기 東晋을 경유한 모용선비 문물의 접촉 가능성이나 고구려와의 전쟁을 통해 록과 관련한 시점은 380년 경이다. 이 무렵에도 백제가 만주 지역에 소재 모용선비 문물의 접촉 가능성이 상정되었다. 그러나 간접 접촉을 상정하고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더구나 부락이 이들 제국에서 징병을 시도했지 있는 전자나 후자 모두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된다. 왜냐하면 동진이나 고 만 성과가 없었다. 이로 볼 때 백제의 실체는 만주 방면에서 이미 사라졌었 구려에서 선비계 귀고리가 출토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 지역을 경유 다. 그렇지만 백제는 고구려 인근의 만주 방면에 소재했다는 오랜 관념으 했으리라는 추측은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백제가 선비와 직접 접촉했을 로 인해 전진인들의 징병 대상으로 역시 인식 되었던 것 같다. 더욱이 전진 가능성을 설정해야만 타당성이 높은 것이다. 실제 선비계 마구류는 백제 과 한반도의 백제는 전혀 교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같은 상정을 가 중앙권력과 선비와의 직접 교섭에 의한 전래 가능성이 제기되었다.96) 따라 능하게 해준다. 서 이러한 고고물증 역시 백제와 모용선비간 충돌의 산물로 해석하면서, 백제의 존재를 당초 만주 지역으로 설정했을 때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또 그 밖에 백제가 만주 지역에 존재했음을 시사하는 기록이 송서 백제국 조에 보인다. 그 첫머리에 보이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그러한 물증들은 만주 백제 세력의 남하로 인해 한반도 지역에 전파된 것 으로 해석하는 게 자연스러워진다. 백제와 선비의 관련성은 5세기 중반 백제의 직제에 좌현왕과 우현왕제가 d-1. 百濟國은 본래 高驪와 함께 遼東의 동쪽 千餘 里에 있었다. d-2. 그 후 高驪가 요동을 차지하자, 백제는 요서를 차지하였다. 백제가 통치하는 곳을 晋平 郡 晋平縣이라 했다.98) 확인된데서도 방증이 된다. 주지하듯이 좌 우현왕제는 선비를 비롯한 유 목민족 국가의 직제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5세기 중반에 처음으로 백제 관 즉, 백제는 본디 고려 곧 고구려와 함께 요동군의 치소인 요양의 동쪽 천 련 문헌에 보이지만 그것은 문헌에 우연히 포착된 시점일 뿐이다. 좌 우 여 리에 소재했다고 한다.99) 물론 이 기록을 중국인의 지리관에서 비롯된 현왕제는 그 이전으로 소급시켜야 될 사안이 분명하다. 또 이는 말할 나위 없이 백제의 국가적 정체성을 암시해 주는 근거가 된다. 이와 더불어 前秦의 洛이 380년에 반란을 일으켰을 때였다. 그가 使者 를 나누어 보내어 徵兵을 요구한 국가 가운데 백제의 존재가 다음과 같이 보인다. 96) 李勳, 2005, 수촌리 고분군 출토 백제 마구에 대한 검토, 4 5세기 금강유역의 백제 문화와 공주 수촌리유적 충청남도역사문화원 제5기 정기심포지엄, 109쪽. 97) 晋書 권113 堅 上, 分遣使者徵兵於鮮卑 烏丸 高句麗 百濟及 薛羅 休忍等諸國 不從. 98) 宋書 권97 百濟國條, 百濟國 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 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晋平郡晋平縣. 99) 여기서 d-2는 백제 요서경략설의 근거가 되는 구절이다. 그런데 양직공도 에서는 백 제 가 樂浪 으로 적혀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앞의 문구인 d-1의 백제 소재지 문구와 결부지어 해석하기는 어렵다. 논자는 이것을 가리켜 양직공도 를 제작한 蕭繹이 백제 의 왕이 낙랑태수를 겸대하고 있었던 관계로 백제를 대신하여 낙랑이 진출의 주체였던 것 처럼 서술하였다 고 했다. 그러나 기실은 그 반대이다. 근초고왕이 낙랑태수라는 직함을 동진으로부터 부여받은 관계로 요서 지역으로 이동해간 낙랑을 백제로 착각한 것이다. 낙
35 68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관념적인 내용으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삼국지 고구려 조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69 (2) 만주 백제 세력의 남하와 관계된 증거 에서 그 소재지를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에 있다. 고 한데 반하여 평 양성으로 천도한 장수왕 때의 상황을 기록한 위서 고구려 조에는 요동 4세기 중반 경에 남하한 만주 백제 세력은 어떻게 해서 한반도의 백제와 남쪽 1천여 리 라고 하여 그 중심 거점의 남하를 분명히 읽고 있었다. 따라 합류할 수 있었을까? 비옥한 충적평야 지대로서 인구조밀 지역이기도 하거 서 중국 역대 정사류 가운데 백제전이 최초로 立傳되었거니와 사료 가치가 니와 고구려 세력권 밖의 첫 지역인 한강유역으로 진입한 백제세력(비류 높기로 정평이 난 송서 백제국전100)에서 백제가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 계)은 백제국(온조계) 세력권에 진입하게 되었다. 백제국이 자리잡은 서울 쪽 천여 리에 소재했다는 기록은 결코 관념적인 문구로 돌릴 수 없게 한다. 지역은, 원산에서 시작된 추가령구조곡을 타고 내려오는 말갈의 침입 루트 실제 송서 백제국전 첫머리의 본래[本] 字는 그것이 편찬되는 488년의 와, 평안도 황해도를 지나 개성으로 하여 내려오는 루트가 합쳐지는 교통 시점과는 달리 백제가 당초의 거점으로부터 이동했음을 염두에 둔 서술이 의 요충지였다. 요컨대 서울 지역은 한반도 북부의 동 서 루트가 한데 모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는 곳이었다. 때문에 만주 백제세력이 남하하면서 어느 루트를 이용하였 물론 삼국사기 에는 만주에서 백제 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고 있어 의문 든 간에 마한 판도의 북부에 자리잡은 백제국과 맞닥뜨리게 된다는 것은 이 제기될 수 있다. 고구려는 초기 발전 과정에서 주변의 비류국이나 행인 지리형세적인 측면에서 볼 때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한 결과 동 국 갈사국 황룡국 개마국 등 뿐 아니라 원시적 소국을 가리키는 那 집 계인 양 지배층은 군사적 대결보다는 타협을 모색한 결과 백제 건국설화상 단을 정복 혹은 합병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에 보이는 이 兄으로 전해진 데서 유추할 수 있듯이 종가적인 비류계 세력이 주도권을 들 국이나 나 집단은 고구려 정복사업의 편린에 불과할 것이다. 고구려의 장악하였으리라고 믿어진다. 요컨대 비류계가 온조계를 흡수한 것이다. 그 영역 팽창과 관련지어 볼 때 많은 국명들은 기록에서 누락되었으리라 생각 러니 백제사의 상층부는 먼저 한강유역에 정착했던 백제국의 역사적 경험 된다. 실제 만주 백제의 존재는 대무신왕이 비류수 상류를 지나 부여를 공 과 사실이 반영되어 일원적으로 재편집되었을 것이다. 격하기 2년 전인 A.D.19년에 백제 주민 1천여 호가 내투하였다. 라고 한 만주 지역 백제세력의 한강유역 정착은 고고학적으로도 입증된다. 서울 기사를 통해 입증될 수 있다. 요컨대 이 기사는 국내측 문헌에 실로 우연찮 의 석촌동에는 완성된 형태의 적석총인 기단식 석실적석총이 소재하고 있 게 남아있는 만주 지역 백제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된다. 그렇지 않 다. 이러한 고분양식은 동일 지역의 이전 시기에 조영된 토광묘 옹관묘 고서 이들이 한강유역의 백제 주민들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고구려 땅이 즙석봉토분 점토충전식 적석총 등과는 계통이 판이하게 다른 일종의 단 지상낙원 도 아닐진대 다른 이유도 아니고 饑荒 을 이유로 중국 군현 지 층이 진다. 또 현재로서는 서울 지역 석실적석총의 축조 상한은 4세기 후 역을 통과하면서까지 북상한 게 된다. 그러나 이들이 자국 백제보다 열악한 반을 상회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따라서 이같은 석촌동의 백제 최고지배층 풍토의 고구려로 이주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되지 않기 때문이다. 고분의 변화를 통하여 왕실교체를 상정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삼국사기 에서 근초고왕을 기점으로 그 이전과는 역사 기술상의 단층이 지고 있다는 랑이 313년에 요서로 이동해 간 것은 千寬宇, 1989, 古朝鮮史 三韓史硏究 132쪽 참 조 바란다. 요컨대 d-2는 양직공도 에서 낙랑이 주체로 적혀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앞 에 적힌 d-1의 백제 소재지 기사와 결부된 내용으로 간주해서는 안될 것 같다. 100) 姜鍾薰, 1993, 百濟 大陸進出說의 諸問題, 韓國古代史論叢 4, 412쪽. 지적도 이와 관련해 참고할 가치는 있다. 또 4세기 중반 이후 만주 지역에 서 백제의 활동이 사라진 것도 이를 반증해 준다. 아울러 석촌동 고분군 B 지역 대형토광묘와 즙석봉토분 사이에 위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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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72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73 왕 근초고왕의 전쟁수행 양식은 親征 掠奪 分配라는 유목형 군주의 그 화를 수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단순히 묘제 채용으로만 설명하기는 것과도 부합된다. 이러한 요소들은 만주 지역에서의 생존 방식이 백제에 어렵다. 그런 만큼 서울 지역 석실적석총의 출현은 앞서 제기한 근초고왕 영향을 미쳤음을 알려준다. 그 밖에 흉노와 오환의 경우 선우 妻族의 위세 대의 폭발적인 정복력의 배경과 관련지어 설명이 가능하다. 게다가 이는 110) 가 강대했다고 한다. 고구려에도 왕비족제가 있었지만 국왕의 姻族이 강 111) 한 곳은 단연 백제였다. 이러한 사회적 전통도 백제가 유목사회에 몸 담 갔던 영향으로 보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계보상의 단층과 2명의 시조의 존재를 해명해 주는 관건이 된다. 혹자는 만주 지역에 백제가 존재하였다면 삼국지 에 입전되어야만 한다 고 주장한다. 그러나 3세기 후반에 편찬된 삼국지 의 서술 단계 이전 만 한편 온조와 비류라는 2명의 시조 설화가 백제 멸망 이후, 그것도 12세 주 지역의 백제는 고구려 주변에 산재하였던 흔히 원시적 소국으로 운위되 기 삼국사기 편찬시까지 전승되었다. 이 자체가 2개 왕실의 존재를 상정 는 那 세력 정도에 머물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백제가 중국 역대 하지 않고는 납득하기 어려운 성질의 것이다. 이는 서울 지역 묘제 교체와 왕조와 외교적 교섭이나 군사적 충돌이 없었다면 입전되기 어려운 것이다. 도 연결되고 있다. 그런데 서울 지역에 4세기 후반에야 기단식 적석총이 이는 고구려의 팽창 과정에서 那 혹은 國으로 운위된 집단을 삼국사기 에 112) 출현했다는 필자의 견해에 동조하면서도 왕실 교체를 뒷받침하는 문헌 서 적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 세력이 중국 사서에는 전혀 적 근거가 삼국사기 에 없으므로 동의하기 어렵다고도 했다. 이러한 논리 기록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삼국지 에의 입전 여부는 그 세력의 규모라 라면 근초고왕대의 마한 정벌도 삼국사기 에 없으므로 취신하지 말았어 든지 중국과의 관계를 알려주는 준거는 된다. 그러나 그 존재 여부까지 결 야만 한다. 게다가 누차 지적했듯이 근초고왕대를 기점으로 한 기년상의 정지어주는 지엄한 잣대로 간주한다면 크나큰 착각이라고 하겠다.113) 단층을 비롯하여,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한반도의 약 1/3을 직접 점 유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폭발적인 힘은 자체 역량의 계기적 (3) 백제 요서경략설의 검토 발전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일종의 외적 輸血에 의한 결과로 보는 게 온 당한 해석으로 여겨진다. 그 외적 수혈은 중장 기병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 백제의 요서경략설에 대해서는 실학자들의 시기부터 연구 성과가 축적되 의 남하에 따른 왕실 교체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이와 관련해 어 왔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일일이 거론하지 않겠다. 그런데 본서의 백 무령왕릉이 그러하듯이 석촌동의 석실적석총의 출현 역시 정치세력의 변 제의 중국대륙 진출 에서 다시금 제기된 요서경략설은 기존의 연구 성과를 동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는 될 수 없다. 무령왕릉과 같은 전축분은 단 뛰어넘어 구체적으로 그 시점을 설정하였다. 385년 7~8월부터 침류왕이 2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석촌동의 석실적석총은 묘제 전반의 획기적인 변 사망하는 그해 11월 사이의 4~5개월간 백제가 요서 지역을 점령했다는 논 지이다. 침류왕은 즉위한지 1년 남짓 밖에 되지 않은 상황에서 몸소 바다를 110) 사와다 이사오 김숙경 譯, 2007, 지금은 사라진 고대 유목국가 이야기, 흉노, 125쪽. 111) 李基白, 1959, 百濟王位繼承考, 歷史學報 11, 44쪽에서 근초고왕에서 아신왕대까지 를 가리켜 王族과 王妃族의 聯合政權時代라고도 부를 수 있는 時期이다. 고 했을 정도 로 근초고왕 이후 국왕의 姻族이 득세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요소는 흉노를 비롯한 유목 민 사회의 전통과 동떨어진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112) 이도학은 서울 지역에 기단식 적석총이 출현한 시점을 1988년에 정복국가론에 의한 백 제 왕실 교체론을 제기한 이래의 많은 論戰 속에서도 4세기 후반임을 일관되게 주장했었 다. 건너는 대원정을 단행했다가 그곳에서 敗死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 러나 이러한 주장은 지나친 상상에 의존하여 비약에 비약을 거듭한 관계로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면하기는 어렵다. 이와 관련해 그 논지의 일 113) 李道學, 1995, 앞의 책, 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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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78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79 로 사회분화를 촉진시켰으리라고 본다.115) 왜냐하면 제염작업은 農閑期에 가단계를 넘어선 초기 왕조시대 이후에야 비로소 나타난다고 한다. 이러한 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므로 자연 그것은 농업에서 분리된 專業의 형태를 맥락에서 볼 때 백제가 관개와 관련된 대규모 토목공사를 단행할 정도라면 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제염업이 농업으로부터 분리된 생산형태였 집권국가로 진입하였음을 의미해 준다. 다음의 삼국사기 기사에서 알 수 던 관계로 그만큼 그들에게 공급할 잉여농산물의 생산을 필요로 하였다. 있듯이 백제는 농업생산력의 증대에 국가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 관계로 제염작업은 사회분화와 농업생산력의 발달을 촉진시키는 요 인이 되었다고 한다. 2월에 왕이 부락을 巡撫하고 농사에 힘쓰도록 권장하였다(온조왕 14년). 3월에 사자를 보내어 農桑을 권장하게 하고 급하지 않은 일로써 백성을 괴롭히는 役事를 모 두 그만 두게 하였다(온조왕 38년). 2) 水利權의 국가적 장악 2월에 國南의 州郡에 令을 내려 처음으로 稻田을 짓게 하였다(다루왕 6년). 6월에 큰 비가 10일 동안이나 내려서 漢江 물이 불어 민가가 떠내려 가거나 훼손되었다. 7 월에 유사에게 명하여 수해를 입은 田地를 복구하게 하였다(기루왕 40년). 국가가 통제하는 자원의 성격에 따라 권력 범위와 질이 달라지게 마련이 다. 특히 기본적 생존자원에 대한 통제는 여타의 것보다 더 큰 힘을 제공하 고 있다. 그러므로 인류학자들은 국가는 지배실체가 기본적 자원의 생산 2월에 有司에게 명하여 제방을 수리하게 하였다. 3월에는 영을 내려 농사를 권장하였다(구수 왕 9년). 2월에 國人에게 명하여 南澤에다 稻田을 개간하게 하였다(고이왕 9년). 과 획득에 통제를 가함으로써 나머지 주민들에게 필연적으로 강압적인 힘 을 행사하는 계층화된 사회이다. 고 정의한다. 국가사회 발전의 요체로써 기본적 생존자원의 생산과 획득에 대한 통제 가 요구된다고 한다. 그렇다고 할 때 백제 또한 이와 무관하지는 않았다. 위와 같이 백제의 농경시책과 관련한 기사가 상당히 확인되었다는 사실 은 대규모 관개시설의 축조를 생각하게 한다. 다음과 같은 벽골제의 축조 기사가 대표적이다. 백제는 소금산지의 확보와 독점적인 분급으로써 남 북한강수계 지역의 세력들을 통제하거나 영향권 내에 묶어 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 어 백제는 여타의 것에 대한 통제보다 더 큰 힘을 제공하는 기본적 생존자 원의 생산수단 을 확보 장악하고자 하였다. 이는 막대한 농업생산력을 비로소 碧骨池를 개착하니 둑의 길이가 1,800보였다(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 2 흘해니사금 21년조). 己丑에 비로소 碧骨堤를 쌓았는데, 둘레가 만 7천 26보 백66 보 水田 1만 4천70 ( 삼 국유사 왕력, 흘해니사금조). 수중에 집중시켜 국가유지의 물질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는 灌漑施設의 축 조로 나타나게 되었다. 관개시설의 축조는 토목공사에 따른 대규모 노동력 의 징발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는 집권화의 수단으로 알려지고 물론 벽골제는 신라 흘해니사금 21년(330)에 축조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다음의 기록을 통하여 검토해 보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대규모 관개는 초기 국 碧骨堤를 增築하는데, 全州 등 7州의 주민을 징발하여 공사를 일으켰다.116) 115) 三國志 권30 東夷傳 韓條에 의하면 낙랑군에 거주하는 漢人 3천 명이 진한에서 伐木 하다가 붙잡혀 노예생활을 하다가 귀환한 기사가 보인다. 이들의 벌목 동기에 관해서는 제철에 필요한 목탄의 원료를 채취하려는 데 있었던 것으로 추리되고 있지만, 소금 생산 을 위한 연료채취에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신라와 백제로부터 백성에게 이익을 주었다. 고려 顯宗 때에 이르러 옛날 모습으로 보수하였 116) 三國史記 권10 신라본기 10 元聖王 6년조.
41 80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고, 仁宗 21년(계해년)에 와서 또 增修하여 복구하였지만, 끝내 廢棄되니 識者들이 이것을 한탄 117) 하였다. 81 벽골제의 규모는 그것의 축조를 가능하게 한 백제 국가권력의 질적인 수 준과 공간적 범위를 가늠하여 준다. 벽골제의 둘레에 관하여 삼국사기 와 庚申에 무당의 말에 의하여 內侍 奉說을 보내어 金堤郡이 新築한 碧骨池의 제방을 끊게 하였 다.118) 古大堤는 碧骨堤이다(신라 흘해왕 21년에 처음 만들었는데 岸長이 1,800步이다. 本朝 太宗 15년에 다시 쌓았는데 이익은 적고 폐단은 많았으므로 곧 허물어 뜨렸다).119) 삼국유사 의 기록은 적어도 10배 가량의 차이를 보인다. 그 이유로서 아 마 전자는 初築 당시의 것을 후자는 그것이 개축된 통일신라나 고려 때의 둘레를 기록한 것이든지 아니면 誤記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할 때 벽골 제의 둘레에 관한 가장 적은 수치인 1,800步는 일단 4세기 중반 무렵에 해 위의 인용에서 보듯이 벽골제는 분명히 백제 영내인 지금의 전라북도 김 당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그 둘레의 측정 단위인 1步는 6尺이며, 제에 소재하였다. 이는 널리 의견이 모아진 사안이다. 게다가 삼국시대 신라 백제와 고신라에서의 1尺은 약 35 였다.123) 그러므로 1步는 2.1m가 되거 지역에 벽골제가 소재했다는 근거마저도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앞 니와, 1,800步는 3.78 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제방의 둘레는 약 3 정도 서 인용된 신라 흘해왕 21년조의 벽골제 기사를 백제의 그것으로 換置시킬 가 잔존하고 있는데, 후대의 증축된 부분까지 고려한다면 상당한 면적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벽골제는 4세기 중엽에 축조된 것이 된다. 그러나 백 매립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벽골제는 그 이후에 축조 그리고 전체 벽골제 土量은 161,253 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어진 되었거나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추정은 벽골제의 인공축토층 下面 다.124) 이러한 벽골제를 조사한 보고자는 1 의 흙을 파고 운반하여 다지는 의 炭化層에서 채취한 試料를 방사선 탄소 연대로 측정한 결과 모두 1600± 작업에는 1일 0.5~0.4인의 인력이 소요된다고 하면서 築堤 공사에는 연인 121) 어느 정도 뒷받침된다. 설령 그렇지 원 322,500명이 동원된 것으로 추산하였다. 이 수치는 기준이 다를 수도 않다고 하자. 그렇더라도 백제가 4세기 후반 경에 벽골제 외에도 대대적인 있겠지만 영산강유역의 대형 고분인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분과 같은 분 120) 제의 김제 지역 진출은 369년 경이 확실하므로 100 B.P.전후한 수치가 나온 데서도 관개시설의 축조에 매진했음은 분명하다. 이러한 맥락에서라도 벽골제로 상 징되는 수리 관개시설의 축조가 지닌 의미를 상정해 볼 수 있다.122) 117)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3 金堤郡 古蹟條 碧骨堤 項. 118) 高麗史 권17 仁宗 24년조. 119) 世宗實錄地理志 권151 金堤郡條. 120) 李道學, 1991, 百濟의 起源과 國家發展過程에 관한 檢討, 韓國學論集 19, 183~184 쪽. 121) 尹武炳, 1976, 金堤 碧骨堤 發掘報告, 百濟硏究 7, 76~77쪽. 122) 벽골제의 축조 시기를 근초고왕대 이전인 비류왕대가 아닌 그 이후일 가능성이 제기되 었다. 물론 충분히 가능한 주장이라고 보지만 몇 가지 선결되어야 할 문제점이 있다. 우 선 논자가 벽골제의 축조 시기를 구체적으로 통일신라 신문왕대(681~692)나 경덕왕대 (742~765)로 지목하는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단순히 고려시대의 기록에 의거 하여 4세기 무렵의 제방으로만 판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해석이다 고 했다. 그러면 단순히 고려시대의 기록에 의거한 삼국사기 에 근거한 한국 古代史像의 복원은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모순에 봉착하게 된다. 풍납동토성의 방사선탄소 연대 측정의 오 류를 벽골제에도 적용하여 그 연대 수치의 신빙성을 전면 부정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단 한 곳의 오류를 30년 전의, 그것도 대상이 다른 유구 측정에까지 소급시켜 일반화시 키는 것은 섣부른 발상이라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좀 더 광범위한 데이터를 치밀하게 제시했으면 설득력을 얻지 않았을까 싶다. 게다가 생활 유적인 城과 농경유적인 저수 시 설을 단순 비교하여 유물 출토 유무를 대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대상이 서로 맞지 않기 때문에 검토 대상으로서의 형평성이 맞지 않다. 더구나 백제 때 원상을 유지하고 있는 풍납동토성과 백제를 넘어 후대 몇 차례나 증축된 벽골제를 단순 비교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벽골제는 조사 대상도 수문의 돌기둥이 있는 2곳의 경사면에 대한 시굴 조사에 한정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사 면적을 놓고서도 2유구는 당초부터 서로 비교 가 되지 않는다. 또 벽골제 石材의 가공 기술이 4세기 무렵의 것으로 보기에는 수준이 높다고 했다. 그러나 벽골제는 후대에 여러 차례 증축되었으므로, 현재의 유구를 4세기 대로 단정하고서 부정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 아닌가 싶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할 때만이 벽골제의 始築 시기에 대한 재검토가 가능할 것으로 본다. 그러나 백제의 농경 기술과 제방 축조에 관한 빈번한 삼국사기 기사를 놓고 보자. 그럴수록 근초고왕대에 비옥한 농경지인 김제 만경평야 일대에 벽골제와 같은 수리시 설이 구축되었을 가능성은 몹시 높다. 123) 李宇泰, 1984, 韓國古代의 尺度, 泰東古典硏究 1, 29쪽. 124) 尹武炳, 1976, 앞의 글, 11쪽.
42 82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83 묘의 토목공사에 동원된 연인원 수인 2,400명과는125) 비교가 되지 않는 대 위의 기사에서 보듯이 벽골제는 만경평야의 광범한 지역에 농업용수를 규모 役事이다. 그런데 저수지 축조에 동원된 노동력이, 농한기인 12 1 제공하였다. 동시에 벽골제에 관하여 水源은 셋이 있는데 하나는 금구현 126) 2월의 3개월간에 벽골제를 축조한다고 하자. 그러면 1일 3,600명 정도 가 투입되어진다. 그러나 이때는 冬節期이므로 언땅을 파야하는 등 작업능률이 매우 떨어 진다. 그리고 巨石으로 구축된 水門공사와 하천유출처를 막는 난공사에도 많은 노동력이 투입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벽골제 축조에 동원된 연인원 수는 상기한 수치를 훨씬 상회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모악산의 남쪽에서 나오고, 하나는 모악산의 북쪽에서 나오며, 하나는 태 인현의 상두산에서 나와 벽골제에서 만나 古阜郡의 訥堤水와 東津에서 합 128) 쳐 萬頃縣 남쪽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라는 기록을 통해 볼 때 더욱 그 러한 것이다. 그러면 백제가 벽골제와 같은 저수지를 축조하여 광활한 평야에 농업용 수를 제공하였던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백제는 369년에 복속시킨 금강 이같은 저수시설의 축조는 대규모 노동력을 조직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이남으로부터 노령산맥 이북의 신개척지가 비옥한 농경지임을 주목하였 전문화된 관리 위계조직의 발달을 시사해 준다. 동시에 다른 형태의 토목 다. 그 결과 이 지역에 대한 개척을 통하여 물적기반을 확대하고자 한 것이 공사 가령 4세기대에 가장 활발하였을 축성과 고분조영 등과 같은 役事를 었다. 이보다 늦은 시기이기는 하지만 신라가 5세기대에 접어들어 관개사 관장하는 국가 중앙조직과 전국적인 주민 동원망의 존재를 상정할 수 있 업에 대대적으로 힘을 기울인 바 있다. 백제는 역시 주민지배의 수단으로 다. 요컨대 백제 중앙권력에 의한 생존자원의 생산수단인 수리권의 장악 써 수리권을 이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럼에 따라 백제는 4세기 중반 무 은, 지방세력을 중앙으로 흡입하고 통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렵부터 수전농업의 필수적 시설인 저수시설을 벽골제뿐 아니라 지방 각지 중앙권력을 지방에 깊숙이 침투시키는 일종의 교두보 역할을 하였을 것이 에 대대적으로 축조 정비하였을 것이다. 아울러 이는 백제가 마한 영역의 다. 이와 관련해 1415년에 작성된 벽골제중수비문 을 다음과 같이 옮겨 비옥한 농경사회로 본격 진입하게 된 데 따른 조치라고 본다. 보았다. 磻溪隨錄 에 의하면 벽골제와 더불어 이른바 湖南三大堤 라고 일컬었 던 고부의 눌제와 익산의 황등제에 관해서도 조선 초기에 그 수축에 관한 제방의 길이는 60,843尺이고 제방 안의 둘레는 77,406步이다. 다섯개의 도랑을 파서 논 에 물을 대는데 논은 무릇 9,840結, 95卜이라고 하니 고적에 적혀 있는 바이다. 그 첫째 水門 을 水餘渠라고 하는데 한 줄기 물이 萬頃縣의 남쪽에 이른다. 둘째 수문을 長生渠라고 하는데 두 줄기 물이 만경현의 서쪽 潤富의 근원에 이른다. 셋째 수문을 中心渠라고 하는데 한 줄기의 건의가 잇따라 제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129)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앞 서의 제방 또한 벽골제와 거의 비슷한 무렵에 축조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나아가 백제는 수리안전답과 홍수의 피해로부터 만경평야의 전답을 안전 물이 古阜의 북쪽 扶寧의 동쪽에 이른다. 넷째 수문을 經藏渠라고 한다. 다섯째 수문을 流通渠 하게 확보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삼국유사 에서 벽골제의 수전 1만 라고 하는데 둘다 한 줄기의 물이 仁義縣의 서쪽으로 흘러 들어간다. 다섯 수문이 물을 대는 땅 4,070(結)이라는 기록은 벽골제의 축조를 통한 수전의 확대에 따른 토지 은 모두 비옥하였는데, 이 제방은 신라와 백제 때부터 백성에게 이익을 주었다. 127) 이용율의 증대를 짐작하게 한다. 요컨대 이러한 농경 지대는 수리권을 통해 공동사회를 형성한 배타적 사 125) 成洛俊, 1983, 榮山江流域의 甕棺墓硏究, 百濟文化 15, 48쪽. 126) 신라의 力役 동원은 2월을 중심으로 한 春月에 가장 잦았다고 한다(李基白, 1974, 永川 菁堤碑의 丙辰築堤記, 新羅 政治社會史 硏究, 307쪽). 127)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3 金堤郡 古蹟條. 128)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3 金堤郡 古蹟條. 129) 全榮來, 1980, 古沙夫里-古阜地方 古代文化圈 調査報告書, 23쪽. 130) 사와다 이사오 김숙경 譯, 2007, 앞의 책, 39쪽.
43 84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회였다고 한다.130) 읍락 중심의 배타적 기존 질서를 파괴시키기 위해 백제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85 정월에 영을 내려 제방을 튼튼하게 하고 안팎의 游食者를 몰아다가 歸農시켰다.131) 는 대규모 노동력을 동원한 국가적 수리시설의 축조를 단행한 것이다. 저 수지라는 수리시설의 축조는, 대규모 노동력에 대한 조직화를 수반하기 때 라고 하여 전국적으로 제방이 완비되었음을 시사해준다. 이러한 상황을 놓 문에 국가권력 주관하에 추진된 사업이었다. 백제가 저수지를 축조하는데 고 볼 때 벽골제가 축조되는 4세기 중반 이후 상당수의 저수지와 제방을 동원한 노동력 가운데는 고구려와의 전쟁이나 마한경략 등에서 확보한 전 축조 정비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결과 농업생산력의 발달을 촉진시 쟁 포로들이 대거 투입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만하지만, 지방민의 동원 켜 왕정의 물적 토대를 확고하게 다질 수 있었다. 왕정의 이같은 물적자산 이 중핵을 이루었을 것이다. 은 백제가 군사 경제적으로 중요하다고 판단한 지방의 거점에 축성한 그리고 저수지와 같은 수리시설 자체는 주민통제 특히 지방세력에 대한 魯를 통하여 중앙으로 조달되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자연 물량이 늘어나는 통제수단으로서의 효과가 컸기 때문에 국가는 그것의 관리에 각별한 관심 공납 수취물의 원활한 운송을 위한 도로망의 확장을 가져오게 마련이었 을 쏟지 않을 리 없었다. 이러한 선상에서 백제는 인구조밀 지역이기도 한 다. 백제 영역 내의 간선 도로망은 이미 소금공급을 통하여 개척되어 나갔 비옥한 농경지에 축조된 이를테면 국영 저수지의 관리와 收取 등에 필요한 겠지만, 담로체제의 시행에 따라 도로망은 정비되었을 것이며 나아가 郵驛 통치 거점을 모색하였을 것이다. 곧 저수지 인근에 성을 축조하였으리라고 의 설치도 생각하게 한다. 결국 담로는 官道 라고 하는 전국적인 도로망 생각된다. 벽골제의 남단인 김제군 부량면과 정읍군 신태인읍의 경계선상 의 확장 정비와 짝을 이루면서 거점 지역에 축조된 官城 이라고 하겠다. 에 있었던 해발 약 54m의 야산에 축조된 테뫼식 토성이 주목된다. 이 성은 그러므로 백제의 수리권 장악은 담로를 거점으로 하여 중앙 권력의 범위를 벽골제를 방비하고 동진강 하구를 따라 내륙으로 진입하는 적을 차단하는 확대시키는 요체인 동시에 지방세력을 통제하는 관건으로도 유효하게 기 목적의 방어시설인 동시에 통치 거점이기도 하였다. 이곳에 파견된 지방관 능하였다. 의 힘은 일차적으로 관개 농법에 필수적인 수리권의 장악에 연유하였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와 관련해 백제 밖의 자료이기는 하지만 신라의 朴堤上을 毛麻利叱智 라고 일컬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존칭어미인 叱智 를 뺀 毛麻利 는 못뚝의 우두머리 라는 해석이 가능하므로 수리권을 관장한 데서 비롯된 지방 官 에 대한 別稱이나 汎稱일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호칭 은 지방관의 역할 가운데 기본적 생존자원에 대한 생산수단인 수리권에 대 한 지배 비중이 컸던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겠다. 수리권과 관련한 지방 관의 역할은 삼국의 주민들이 일본열도에서 韓人池를 만들었다고 할 정도 로 뛰어난 築堤術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신라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닐 터이 다. 그러므로 백제까지 확대시키는 게 가능해진다. 6세기 전반기의 자료이 기는 하지만 백제에는 3) 대외교역망의 장악 인류학자들의 지적처럼 교역은 상업적인 의미뿐 아니라 정치적인 성격도 강하였다. 그렇듯이 교역은 국가 사회의 초기 성장에 대한 원동력의 하나 로서 부연되고 있다. 서해를 끼고 있는 한반도의 서남해변을 영역으로 하 여 성장한 국가가 백제였다. 백제는 지정학적 조건을 이용해서 광범위한 대외교역을 추진한 결과 고대 동아시아에 있어 교역권의 중심적인 위치에 자리잡았다. 백제는 중국대륙과 일본열도를 잇는 삼각교역의 중개지로 역 할하였다. 이때 백제는 내적으로는 기본적 자원에 대한 자국 영내와 영향 131) 三國史記 권26 백제본기 4 무령왕 10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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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100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101 횡악을 지목할 수 있다. 크게 가물어 왕이 漆岳寺에 가서 비를 빌었다(법 분산적인 제의권의 국가적 장악, 이를테면 복속 지역에 대한 이념 기반의 왕 2년조) 라는 기사의 칠악사가 있던 칠악 도 祭儀山岳으로 보아 좋을 국가적 통제와 확대를 시도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것 같다. 물론 이들 산악은 국왕이 직접 제사를 올린 곳인 만큼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제의산악의 존재가 확인된 이상 이러한 산악이 도성 인근에만 몰려 있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백제 중앙 권력의 영향력 확대와 맞물려 계속 늘어만 갔으리라는 것이 자 연스럽다. 이와 관련해 丙子에 사신을 보내어 渤海郡의 信物을 山陵 6개 소에 봉 헌하도록 하였다( 續日本紀 天平 2년 9월조) 庚戌에 사신을 보내어 발 5. 군사권의 장악 근초고왕은 광범위한 정복전쟁의 수행과 승리를 통하여 군사력을 독점함 으로써 권력을 한층 강화시켰다. 이와 관련하여 근초고왕 24년(369)의 다 음과 같은 기사를 주목하고자 한다. 해의 신물을 諸國의 名神社에 바쳤다( 續日本紀 天平 2년 10월조) 라는 기사가 상기되어진다. 즉, 발해 사신이 보내온 신물을 산릉이나 신사 등에 11월 漢水 남쪽에서 크게 사열하였는데, 旗幟는 모두 黃色을 사용하였다.160) 봉헌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에만 국한된 현상이라기 보다는 그 문화의 모태격인 백제에서도 외국으로부터의 珍物을 제의산악에 봉헌하였다고 보 즉, 근초고왕이 몸소 한수 남쪽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면서 모두 황색 여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천안과 원주에서 동진제 청자와 초두가 출 기치를 사용하고 있다. 황색은 음양오행설과 관련지어 살펴 볼 때 방위상 토될 수 있었던 배경은, 이들 지역은 백제가 호남과 영남 방면으로 진출하 중앙을 뜻한다. 또 황색의 기치는 전통적으로 중국의 황제뿐 아니라 국왕 는 루트에 위치하고 있는 만큼 지역적 비중을 헤아린 결과 이들 호족에게 들이 사용하였다. 고구려의 경우도 5部 가운데 왕실이 속한 계루부를 內部 賜與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와 더불어 놓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신 혹은 黃部라고 했다. 그러므로 황색은 왕이나 혹은 왕자가 속한 중부(내부) 라의 예를 원용한다면 이러한 지역에는 鎭護山岳이 설정되고는 하였다고 의 상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백제군이 정복전쟁에 승리하여 왕의 한다. 백제 영역으로서의 천안의 성거산이나 원주의 치악산 역시 제의산악 권위가 한껏 高揚된 시점에서 모두 황색 기치를 사용한 것은 어떠한 의미 으로 설정되었을 법하다. 그와 더불어 국가적 차원에서 祭需로서의 진물 를 지니고 있을까? 봉헌이 뒤따랐음은 의심할 나위 없다. 천안과 원주 지역의 고분에서 출토 전국을 구획한 5부체제하의 백제 군대의 성격은 이와 동일한 발전단계였 된 동진제 물품은,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에서 六朝時代의 중국 청자편이 던 부여에서 적의 침입이 있으면 제가들 스스로 나가 싸운다(有敵諸加自 출토된 바처럼 당초에는 성거산이나 치악산의 사당에 봉헌되었던 것으로 戰)( 삼국지 부여조) 라고 하는 형태에서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북부의 보인다. 이것이 飮福式으로 그 지역 호족들에게 分與되었고 종국에는 각자 眞果가 1천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말갈과 싸웠다는 기록 역시 진씨족을 중 의 분묘에 부장된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심으로 하는 部兵의 동원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듯이 각 部에는 독자적인 요컨대 제의공동체적인 성격에서 만은 맥이 닿고 있는 商 왕조에서, 왕 군대가 있어 그들 생활권에 대한 외침을 각각 막아 나간 것으로 보인다. 반 실 직속의 제사관이 각 지역에 파견되어 그 지역의 전통적인 제의를 대행 하였다. 그렇듯이 집권국가로의 발전을 위한 전단계 작업으로서 백제 또한 160) 三國史記 권24 백제본기 2 근초고왕 24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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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104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6. 중앙집권체제의 확립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105 정으로서 公示되었을 것이다. 비록 백제 말기의 인물에 관한 기록이지만 다음과 같은 黑齒常之墓誌銘 이 유의된다. 1) 중앙관부 조직체계의 확립 君의 이름은 常之이고 字는 恒元으로 백제인이다. 그 선조는 扶餘氏로부터 나왔는데 黑齒에 封해졌으므로 자손이 인하여 씨로 삼았다. 그 집안은 세세로 서로 이어서 달솔이 되었다. 증 백제 왕실은 지금까지의 권력 강화책을 통해 강력한 중앙 집권체제를 구 축할 수 있었다. 이러한 토대를 배경으로 백제는 내적 권력을 강화하기 위 한 체제 정비작업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동계인 舊伯濟國의 왕족과 의제 적 형제관계를 설정하여 힘을 강화시켰다. 그리고 왕권 지탱의 배경세력으 로서 왕비족제를 확립한 결과 군사적 비중이 큰 북부의 眞氏를 발탁하였 다. 그러한 배경은 일차적으로 북부의 진씨세력이 백제 발전과정에서 줄기 차게 부딪히는 말갈세력의 침공을 막으면서 성장해 왔던 점에 있었을 것이 다. 백제 왕실로서는 고구려와 대결하는 상황에서 이들의 군사적 경험이 어느 때 보다도 요구되었기 때문이었다. 백제의 왕비족제 확립은 물론 이 러한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 근본적인 목적은 왕권강 화에 있었다. 그런 만큼 그와 성격이 일면 연결되는 흉노의 경우와 관련지 어 생각해 볼 수 있다. 흉노에서는 왕족과 異姓姻族이 國事를 양분하게 함으로써 상호 견제시켜 선우에게만 권력이 집중되도록 하였다. 이같은 사례를 왕비족제가 시행되 었던 백제에 원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자. 그렇다면 백제왕은 이로써 왕권의 후원세력을 얻는 동시에 왕족 자체를 견제할 수 있어 권력 강화가 가능하였다. 이와 관련해 왕비족제의 확립 동기를 좀더 구체적으로 지목한 다면 다음과 같이 추리된다. 즉, 친족구조 내에서 王弟와 같은 왕족세력은 왕위에 대한 잠재적 권리를 보유하고 있는 존재였다. 그런 만큼 직계부자 상속제의 活着을 위해 이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姻族 세력의 역할을 확대시 켜 주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내적 지배질서의 확립은, 관등 규 161) 중앙집권체제 확립의 기반 ~ 군사권의 장악 까지는 李道學, 1995, 앞의 책, 147~207 쪽과 251~254쪽에 근거하였다. 조부의 이름은 文大이고 조부의 이름은 德顯이고 아버지의 이름은 沙次인데 모두 벼슬이 달솔 에 이르렀다. 즉, 위의 묘지명에 의하면 그 증조부에서 흑치상지에 이르기까지 역임한 최고 관등이 모두 달솔에 그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백제는 신라의 頭品制 처럼 승급의 한계가 규정된 관등체계가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관등 승급 에 관한 규정은 신라의 경우 주지하듯이 율령에 포함되었던 것으로 간주되 고 있다. 백제 역시 그러하였으리라고 짐작된다. 백제는 율령 반포로써 지 배세력간의 신분적 서열을 확립하여 국왕 중심의 일원적인 지배체제를 구 축하여 나가고자 했다. 백제는 이와 병행하여 국왕의 권력행사를 합법화 하기 위한 이념으로서 유교를 주목하였던 것 같다. 백제는 이무렵 阿直岐와 王仁이 논어 와 천 자문 을 왜에 전수하였을 정도로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그리고 대방고지에 진출하여 확보한 중국계 식자층을 통하여 유교적 소양을 지닌 인적자원을 확보하였다. 가령 博士 高興의 경우도 중국계 인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백제의 박사제도에 십분 활용되어 유교적 이념에 입각한 왕권 강화의 후원세력이 되었을 법 하다. 요컨대 근초고왕 때 박사 고흥의 존재가 확인된 이상 후일 왜에 파견되는 五經博士 醫博士 曆博士 등도 이 무렵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고구려가 율령 관료층의 확보를 위 한 국립교육기관인 太學을 설립하였듯이 백제도 율령 반포를 전후하여 국 립교육기관을 설치한 것으로 짐작된다. 박사제도는 大唐六典 에서 박사 는 관인들의 서예 산술 뭇 기예를 敎習하는 것을 관장한다 라고 하였듯 이 교육기관과 분리되기 어렵다. 그러므로 백제는 유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왕권의 행사를 정당화 했으리라고 짐작된다. 또 그러한 내용은 이들에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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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108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을 지배하는 힘을 얻고자 했다. 그럼에 따라 근초고왕은 무역기반의 확대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109 2) 지방 통치체제 에서 비롯된 대규모의 교역체계를 일원적으로 관리함으로써 권력 기반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1) 5部制의 시행과 城 이로써 얻어진 힘은 주민 지배에도 깊숙이 미치고 있다. 이는 대규모 건 조물인 분묘의 축조를 통해 가늠되어진다. 분묘 축조에는 상당한 규모의 4세기 이후 백제는 도성이 있는 중앙을 중심으로 전국을 동 서 남 노동력이 동원되기 마련이거니와 또 그것을 통하여 집권력의 정도를 유추 북 중으로 구획한 5部 체제였다. 삼국사기 에서 국내의 민호를 나누어 할 수 있다. 집권국가의 위엄과 권력집중을 상징하는 석촌동 3호분과 같은 서 남 북부로 삼았다(온조왕 31년조) 와 동 서 2부를 더 두었다(온조왕 기단식 석실적석총의 조영이 그것을 웅변한다. 석촌동 3호분은 만주 집안 33년조) 라는 기사에 보이는 4부와 국왕의 직할령인 중부를 합하면 부여 의 고구려 광개토왕릉으로 추정되는 장군총을 능가하는 동서 50.8m, 남북 나 고구려에서와 같은 5부가 된다. 5부는 전국을 단위로 한 백제의 지방편 48.4m에 달하는 대형 건조물이다. 이같은 거대 고분의 조영을 통해 조직 제 방식이었다. 된 대규모의 노동력을 관리할 수 있는 인력관리체계의 존재를 상정하는 게 전국을 구획한 5부의 범위는 삼국사기 온조왕 13년조의 영역 기사와 가능하다. 나아가 기단식 석실적석총은 재산 신분상의 분화가 심화되고 연관되므로, 북쪽은 예성강, 동쪽은 춘천, 남쪽은 금강, 서쪽은 서해를 경 한층 다양한 계층이 출현하였음을 시사해 준다. 계로 하였다. 이들 지역은 동 서 남 북 중의 5부로 편제되어 있었다. 아울러 왕릉의 축조에는 수학과 역학의 원리를 바탕으로 한 토목 건축 삼국사기 에는 이와 같은 방위명 부로 나타나지만 애초 백제의 5部名이 술이 동원되게 마련이거니와 이로써 직업분화까지 짐작하게 한다. 이는 산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고유한 부족명이 존재하다 성축조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광개토왕릉비문 영락 6년조에 의 가 행정적 성격이 강한 방위명 부로 확대 개편된 것으로 생각된다. 부체 하면 고구려에 점령된 백제의 제한된 지역에 58城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제 단계의 지방통치는, 대체적으로 재지 수장층들의 자치에 맡겨져 있었 곧 이는 4세기 말 이전에 지방지배와 관련한 대규모 산성축조가 단행되었 다. 그러나 집권국가체제가 확립되어 감에 따라 백제의 지방에 대한 통치 음을 알려준다. 다시 말해 백제의 입장에서 볼 때 대규모 노동력을 일사불 도, 간접 지배에서 중앙의 직접적인 통치체제로 전환을 보게 된다. 란하게 동원할 수 있는 공적권력을 유지시켜줄 수 있는 공납과 수취가 더 백제는 족제적인 요소의 부체제를 집권국가 형성을 위한 행정적 구역으 욱 철저히 요청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선상에서 지방지배는 한층 강고해져 로 개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근초고왕이 5부의 병권을 장악한 사실과 관 나갔으리라고 믿어진다. 련지어 볼 때 중앙집권적 체제의 강화를 뜻하는 부명의 개편은 근초고왕대 요컨대 백제는 막대한 노동력이 소요되는 토목공사를 집행하고 그 효율 의 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부명의 개칭에서 비롯된 것이라기 성을 높여 나가는 과정에서 권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아울러 그러한 통 보다는 중앙권력의 대행자로서의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직접적 제기구를 중앙에 설치하였다. 백제는 정비된 중앙관부 조직체계를 갖출 수 인 지배를 단행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조치였다. 이와 더불어 통치의 거점 있었기 때문에 집권적 국가체제의 구축이 가능하였던 것이다.163) 으로서 군사 경제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지역에 축성이 단행된 결 과 부 관하에는 통치의 거점으로서 성이 자리잡게 되었다. 성을 중심으로 163) 이상의 서술은 李道學, 1995, 앞의 책, 254~260쪽에 대체로 근거하였다. 다수의 촌락이 산재하여 있는 형태가 되겠다. 광개토왕릉비문 영락 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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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114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115 주목되는 것이 472년에 개로왕이 北魏에 파견한 사신인 私署冠軍將軍駙 위의 기록은 梁職貢圖 에 이미 적혀 있는데, 여기의 담로는 大城 을의 馬都尉弗斯侯長 餘禮이다. 왕족인 여례가 관칭한 불사후의 불사 는 지금 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 담로제의 시행 시기와 존속 기간에 관 의 전라북도 전주로 지목되고 있다. 그런데 여례의 관작을 통해 동성왕대 해서는 여러 설이 제기되었다. 그런데 사서로서 양서 에 처음 보이는 담 에 앞서 개로왕대에 왕 후 태수 등의 지방 分封이 이루어졌음을 알게 된 로체제는 웅진성천도로 인하여 5부제가 붕괴되고 정연한 지방지배 방식인 다. 동성왕대의 왕 후 태수 등의 지방 분봉이 지방지배의 강화와 밀접히 방 군 성체제가 성립되기 이전의 상황을 전해 준다고 보겠다. 왜냐하면 관계있는 만큼 개로왕대의 그것 또한 지방지배책의 일환이었음은 분명하 거점성 중심의 지방지배 방식인 담로체제는 이미 4세기 중반 이후에 시행 다. 개로왕의 전라도 지역에 대한 적극적인 경영으로 왕족 출신의 지방관 된 바 있기 때문이다. 근초고왕은 신복속지인 금강이남의 전라도 지역에 이 파견되는 성의 숫자는 증가했을 것이다. 또 그로 인해 지방민에 대한 수 거점성 중심의 통치를 하였다. 이것이 다름아닌 담로체제인 것이다. 개로 취와 노동력 동원이 한층 강화되었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렇긴 하지만 개로 왕대의 왕족인 여례가 금강이남인 전주 지역의 장관인 불사후로 분봉된 것 왕대의 전라도 경영은 그 후반에 해당되는 짧은 기간에 불과하였다. 그렇 도 왕의 자제와 종족을 파견하는 담로체제의 성격과 일치되고 있다.166) 흑 기 때문에 백제 중앙의 문화가 침투한 고고학적 물증이 영산강유역에서 확 치상지묘지명 에 의하면 그 祖先은 부여씨에서 나와 흑치에 봉해졌으므 인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고구려와의 전쟁과 토목공사에 요구되는 인 로 자손이 인하여 씨를 삼았다. 라고 하였듯이, 왕족(扶餘氏)인 흑치상지의 적 물적 자원의 확보를 위한 전라도 지역에서의 가혹한 백제왕권의 수탈 조선이 흑치 지역에 분봉되고 있는 것이야말로 담로체제의 증좌이다. 따 은 웅진성천도 후 중앙 정정의 혼미를 틈타 영산강유역 세력의 이탈을 가 라서 누차 언급했듯이 4세기 중반 이후 백제의 지방지배 방식은 5부제와 져오게 한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 거점성 중심의 이원적인 형태였음을 알게 된다. 이렇듯 담로체제의 기원은 475년에 고구려가 한성을 함락시키고 남진함에 따라 백제는 임진강에서 근초고왕대까지 소급되지만 금강이남에서 전라북도 지역에 걸친 신정복지 아산만 이북의 영토를 상실하였다. 이는 금강이북 지역의 통치방식인 5부 에 국한된 제한된 지방지배 방식이었다. 그런데 웅진성천도로 인해 5부제 제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5부제의 붕괴로 인해 아산만 이남과 가 붕괴됨에 따라 백제 중앙정부로서는 부 관하의 잔여 성들과 전라도 지 금강이북 지역에는 부 관하의 기존 성들이 지방통치의 기능을 개별적으 역의 거점이 되는 성들을 중심으로 지방통치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더 로 담당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애초 5부제로 편제되지 못했던 전라도 욱이 웅진성 초기 政情의 혼미상은 중앙권력의 약화와 지방세력의 이탈을 지역에는 개로왕대에 증가된 거점성들만이 여전히 존재하였으리라고 짐작 가져왔기 때문에 지방관이 파견되는 성의 숫자는 비교적 제한되었을 것이 된다. 이와 관련해 웅진성도읍기 백제의 지방통치 형태에 관한 梁書 의 다. 바로 이같은 특정한 시점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 양서 에 처음 보이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22개 담로의 실체라고 하겠다. 따라서 양서 의 기사를 확대 해석하여 한 성도읍기의 지방지배를 담로체제 일변도로만 간주하는 견해는 재고되어야 治所城을 이름하여 固麻라고 한다. 邑을 櫓魯라고 하는데, 중국에서 말하는 郡縣과 같은 것 할 것 같다.167) 165) 이다. 그 나라에는 22담로가 있는데 모두 子弟宗族을 이곳에 나누어 거주시킨다. 165) 梁書 권54 百濟條. 166) 李道學, 1990, 漢城後期의 百濟王權과 支配體制의 整備, 百濟論叢 2 ; 李道學, 1995, 앞의 책, 328쪽. 167) 이상의 서술은 李道學, 1990, 앞의 글, 302~310쪽에 의하였다.
59 116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3) 석촌동 고분군 출토 금제 귀고리를 통해서 밝혀진 담로제의 일면 117 석촌동 제4호분 주변에서 출토된 귀고리와 동일한 양식은 그밖에 2개 소에 서 출토되었다. 즉, 익산 입점리 1호묘와 곡성 석곡에서 출토된 귀고리가 삼국사기 만 보더라도 백제에는 온조와 비류라는 2명의 시조가 존재한 된다. 익산 입점리 것은 주환에 금실을 걸어 조금 늘어뜨린 다음 그 아랫쪽 것으로 나타난다. 동일한 사서에서 이처럼 2명의 시조가 등장한다는 것은 에 사슬을 연결하고 그 끝에 三翼形 垂下飾을 매달았다. 곡성 것은 매우 가 2개의 왕실이 존재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왕실 교체 시기는 문 는 주환에 작은 유환을 걸고 금고리 8개를 연결한 사슬 아래에 둥근 고리 헌상으로 근초고왕대를 분기점으로 해서 앞선 시기와 일종의 단층이 지고 와 큼직한 심엽형판을 매달았다. 심엽형 수하식의 가장 자리에는 각목대를 있으므로 근초고왕 직전으로 상정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4세기 부착하였다. 심엽형 수하식의 금판은 아랫 부분은 둥글게 처리하였고 각목 중 후반경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근초고왕대는 유례없는 정복 사업을 펼 대를 길게 늘어뜨려 뾰족하게 만들었다. 이와 함께 사슬과 심엽형판 사이 쳤다. 369년~371년 사이의 단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넓은 영역을 확 에 유환을 끼우는 것은 석촌동 4호분 주변에서 출토된 귀고리 보다는 발달 보했을 뿐 아니라 동북 아시아의 강국인 고구려를 꺾었을 정도로 가위 정 된 모습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170) 지할 줄 모르는 운동력을 가지고 팽창해 간 바 있었다. 이러한 강대하고도 그렇다면 백제 중앙의 분묘가 소재한 석촌동에서 출토된 귀고리와 익산 폭발적인 힘의 배경을 단순히 계기적인 발전만으로는 설명할 수는 없다. 과 멀리 곡성에서의 출토품이 동일한 계통으로 밝혀졌다면 어떠한 의미를 오히려 새로운 세력의 수혈에 따른 것이라고 본다면 그 급팽창의 요인으로 지닌 것일까? 6개 유형으로 구분되는 한성도읍기의 귀고리 가운데, 그것도 서 절대 부적절한 판단은 아닐 것이다. 백제 중앙과 직접 관련된 유형이라고 할 때 각별한 의미를 상정하지 않을 기본적으로 이러한 맥락과 입장에서 고고학적인 물증을 새롭게 발견하고 수 없다. 귀고리는 신분을 나타내는 위세품으로서의 성격을 지닌 동시에 또 새롭게 해석해 보고자 한다. 이와 관련해 위세품으로서의 성격을 띠고 하사품으로 인식되고 있다. 지방 수장들에게 백제왕이 신분을 보증해주는 있는 귀고리를 주목해 본다. 먼저 석촌동 제4호분 주변에서 출토된 귀고리 신표로서 하사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한다.171) 요컨대 이러한 귀고리 의 존재이다. 이 귀고리는 主環 3개와 이것에서부터 분리된 垂飾이 달렸 들이 한성도읍기에 백제 중앙에서의 하사품이라고 할 때 유독 왕도에서의 다. 여기서 주환 3개는 석촌동 제3호분 동쪽 고분군에서 출토된 것으로 소 그것과 연결되는 2곳 지역은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일까? 익산과 곡성 지역 168) 개되었다. 그리고 이식은 당초 86-화장유구로 알려져 있었으나 발굴자 은 중앙에서 파견한 담로체제하의 왕족에 비견되는 수장과 관련된 것으로 의 증언에 따라 석촌동 제4호분 주변으로 새롭게 정정되었다. 이 귀고리는 보인다. 반면, 여타 유형의 귀고리는 지방의 토착 수장에게 하사한 것으로 15개의 金環을 오므리고 구부려 고리를 만들고 서로 연결하여 길쭉한 금사 간주되어진다. 슬을 만들었다. 그리고 맨 밑에는 조그마한 心葉形板을 매달아 장식하였 169) 다. 최근 백제 한성도읍기의 고분에서 출토된 귀고리를 분류해 놓은 성과에 이와 관련해 익산 입점리 고분군이 소재한 일대는 일찍부터 담로의 장이 묻힌 곳이 아닌가하는 추측이 있어 왔었다. 이는 전적으로 타당한 추정으 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앞서 언급했듯이 근초고왕대 이후 백제의 담 따르면 한성도읍기 귀고리는 모두 6개 유형으로 구분된다고 한다. 그런데 168) 서울大學校博物館, 1997, 발굴유물도록, 187쪽. 169) 李漢祥, 2000, 百濟 耳飾에 대한 基礎的 硏究, 湖西史學 3, 24쪽. 170) 李漢祥, 2000, 앞의 글, 31쪽. 171) 李漢祥, 2000, 앞의 글, 41쪽 45쪽.
60 118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119 로 범위 안에 분명히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입점리 제1호분이 七枝刀 1口와 七子鏡 1面 및 각종의 重寶를 바쳤다. 이어 말하기를 臣의 나라 서쪽에 江水 석실분이라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물론 한성도읍기에 지금의 서울 지역에 가 있는데, 근원은 谷那철산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 먼 곳은 7일을 가도 이르지 못합니다. 마 석실분이 조영되었는지 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백제 땅히 이 물을 마시면 곧 이 山鐵을 채취할 수 있으므로 길이 聖朝에 바치겠습니다. 라고 말하였 다.173) 중앙의 피장자와 동일한 계통의 위세품으로서의 귀고리를 착용한 자가 익 산과 곡성의 석실분에 묻혔다. 또 이들은 중앙에서 파견된 담로체제 관련 인물이라고 할 때는 의심할 나위없이 백제 중앙에서도 석실분이 조영되었 다고 보아야만 온당하다. 지금까지 논란이 있어 왔던 이 문제에 대해 한 획 을 긋는 중요한 발견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나아가 익산 입점리 1호묘의 편년은 웅진성도읍기가 아니라 한성도읍기로 재조정하는 게 타당할 것이 위에 보이는 谷那철산에 관한 기록은 肅愼의 특산물인 靑石의 산지에 관 한 언급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연상시킨다. 그 나라의 동북쪽에 있는 산에서 산출되는 돌은 쇠를 자를만큼 날카로운데, 채취하려면 반드 시 먼저 神에게 기도하여야 한다.174) 다. 또 그렇게 지목했던 견해가 옳았음이 밝혀졌다.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본다면 곡성에서 출토된 귀고리에 대한 배경 설명 요컨대 名産의 채취 과정을 신비화시켜 놓고 있는데 모두 두려움과 권위 이 뒷따라야만 할 것 같다. 백제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그것도 일반적으로 를 지닌 兵器의 산지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谷那철산의 소재지 백제 영역이 아니었을 것으로 간주되어 왔던 전라남도 곡성에서 백제 중앙 에 관하여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전라남도 谷城으로 비정하는 견해를 따르 과 동일한 계통의 귀고리가 출토된 배경을 구명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관 고자 한다. 곡성은 백제 때 欲乃郡이다. 欲乃는 谷乃를 잘못 적어 놓았을 련해 369년 근초고왕이 南征을 통해 정복한 지역에 대한 환기가 필요할 것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한다면 欲乃는 谷那와 연결이 가능하다. 통일신 같다. 일본서기 신공 49년조에 보이는 백제의 마한경략은 고해진만 전라 라 때 이곳의 행정지명인 谷城郡( 삼국사기 권36 지리 3)이 백제의 欲乃 남도 강진에 비정될 뿐 나머지는 모두 금강이남부터 노령산맥이북 지역에 郡 보다는 谷乃郡에서 비롯되었을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土谷渾 해당된다. 즉, 369년 마한경략 이전 백제의 남쪽 경계는 금강이라고 보 을 토욕혼 으로 읽는 것처럼, 谷 은 욕 으로 발음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겠다. 금강을 남쪽 경계로 하는 백제의 영역은 삼국사기 온조왕 13년조 러므로 谷乃 는 욕내 로 발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 곡성군지 건 172) 에서 웅천을 남계로 하는 영역 기사와도 연결되고 있다. 369년에 백제는 당시 고해진이라고 불렸던 전라남도 강진 지역을 장악 치 연혁조에 보면 곡성군을 일명 욕내[浴川]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백제 때 谷那철산의 谷那 역시 욕나 로 읽었을 가능성이다. 그것은 또 욕내군 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 사실은 이 때 백제의 지배력이 전라남도 여타 지 의 욕내 와도 음운상으로도 무리없이 연결되고 있다. 더욱이 谷那 지명은 역에도 미쳤을 가능성을 심어주는 동시에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제기 일본서기 응신 8년조에서 아신왕의 이른바 無禮를 빌미로 왜가 탈환하였 해 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백제 칠지도의 産地였던 谷那鐵山의 소재지 파 다고 주장하는 지역 가운데 전라남도 해남을 가리키는 枕彌多禮 등과 함 악과 관련한 기존의 필자 견해를 확실히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관련 께 보인다. 그러므로 이곳은 현재의 전라남도 일원으로 비정할 수 있다. 한 일본서기 신공 52년조의 기사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즉, 백제인이 來朝하였다(百濟記에 이르기를 阿花王을 세웠으나 貴國에 172) 李道學, 1995, 앞의 책, 139~141쪽. 173) 日本書紀 권9 神功 52년조. 174) 晋書 권97 肅愼氏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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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122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123 운 前燕 後燕 北燕의 이른바 三燕 시기의 고분 420기를 발굴한 바 있었 분의 조성 연대를 5세기 전반으로 설정할 수 있다고 한다.181) 그렇다면 시 다. 이 가운데 라마동Ⅱ M71호 고분에서 백제와 연결되는 귀고리가 출토 간상으로 볼 때 400년 이전 백제와 후연과의 교류 가능성을 상정하는 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백제가 모용선비의 문물을 섭취할 수 자연스러워진다. 실제 백제 중앙권력과 선비와의 직접 교섭에 의해 선비계 있었던 것일까? 혹자는 백제와 선비의 관계를 문헌 기록에서 확인할 수 마구류가 백제로 수입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 바 있다. 백제 지역에서 출 없어 백제가 선비의 문물을 받아들인 경로를 추적하는 것은 難題가 아닐 토된 선비계의 귀고리와 마구류는 만주 백제와 후연간의 교류를 입증해 주 수 없다 고 했다. 그러면서 東晋을 경유한 모용선비 문물의 접촉 가능성이 는 물증으로의 해석이 가능하다. 그것이 만주 백제 세력의 남하와 관련해 나 고구려와의 전쟁을 통해 모용선비 문물의 접촉 가능성을 상정했다. 그 한반도 지역으로 전파된 것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요컨대 백제를 경유해서 러나 간접 접촉을 상정하고 있는 전자나 후자 모두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 선비 문물이 대가야에 전래되었을 가능성이다. 된다. 동진이나 고구려에서 선비계 귀고리가 출토된 적이 없었으므로, 그 그 전파 경로와 관련해 고구려 광개토왕 군대의 남정과 관련해 백제가 쪽을 경유했으리라는 추측은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백제가 선비와 직접 대가야와 손을 잡았다. 또 이것이 계기가 되어 백제에 들어온 선비 문물이 접촉했을 가능성을 설정해야만 타당성이 높은 것이다. 실제로 양자간에는 고령 지산동에 전해졌을 가능성을 제기한 바 있다.182) 그러나 선비계 백제 접촉했던 정황이 포착되고 있다.178)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4세기 중후반 비 마구류의 전파 과정은 구체적인 정황에 근거해야 될 것 같다. 이와 관련해 류계 백제세력의 남하와 결부짓는 게 무리가 없다. 아울러 대가야가 소재한 고령 지산동 고분에서 선비 계통의 마구류들이 일본서기 신공 49년조에 보이는 369년 백제의 낙동강유역 진출 기사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출토된 바 있다. 대가야가 선비와 연결될 수 있는 정치 지리적 배경은 확 인되지 않는다. 그런데 지산동 32호분과 유사한 재갈이 천안 두정동Ⅰ-5 호 목관묘에서 출토된 바 있다. 단면 5각형의 장병 등자는 원주 법천리 등 자와 유사한 형태이다. 그리고 지산동 35호분의 타원형 경판비는 천안 용 원리 108호분 경판비와 유사하다고 한다. 현재까지 드러난 자료를 통해 볼 때 대가야의 지산동 집단이 백제와 깊은 관련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백 제 지역인 두정동 고분에서 출토된 재갈의 경우 이른바 삽자루형 인수로 서 2조선으로 된 철봉의 가운데 부분이 오므라들었다가 넓어지면서 끝에 핀을 꽂아 마무리하여, 북방 지역 특히 鮮卑系 마구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 179) 다 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선비 문물이 백제를 경유해서 대가야에 전래 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 바 있다.180) 선비계 마구류가 출토된 지산동 32호 178) 李道學, 2005, 高句麗와 百濟의 對立과 東아시아 世界, 高句麗硏究 21 ; 2006, 고 구려 광개토왕릉비문 연구, 103~108쪽. 179) 成正鏞, 2002, 大伽倻와 百濟, 大加耶와 周邊諸國, 101쪽. 그리고 比自 南加羅 國 安羅 多羅 卓淳 加羅의 7國을 평정하였다. 이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古奚津에 이르러 南蠻의 침미다례를 屠戮하여 백제에 내려주었다. ( 일본 서기 신공 49년조). 위의 기사에 보이는 백제의 낙동강유역 진출은 이 지역 세력들과 본격적 으로 遭遇하면서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게 되는 일종의 큰 轉機가 되었다. 이 때 백제가 낙동강유역에 진출하여 가야제국의 교역권을 장악하였음을 시사하는 물증은 낙동강유역에서 출토된 斗가 된다. 경북 고령에서 출토 된 초두는 손잡이가 들린 채 끝에 용머리가 새겨진 형식과 손잡이가 직선 180) 姜賢淑, 2003, 考古學에서 본 4 5世紀代 高句麗와 加耶의 成長, 加耶와 廣開土大 王 金海市, 90쪽. 이와 관련해 백제가 고구려와의 전쟁을 통해 선비 문물을 접했을 것 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공간적으로 서로 떨어진 백제와 선비가 감 히 접촉할 수 없다고 단정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181) 金世基, 2003, 고분 자료로 본 대가야 연구, 233쪽. 182) 강현숙, 2003, 앞의 글, 90쪽.
63 124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125 으로 곧게 펴진 채 용머리가 없는 두 종류이다. 이는 백제 풍납동토성에서 축을 이동시켰다. 가을 7월에 왕이 평양 東쪽 黃城으로 移居하였다. 城은 출토된 2기의 초두와 각각 부합되고 있다. 풍납동토성의 초두는 중국 동진 184) 라는 기사가 그것을 말한다. 이처럼 고 지금 西京 동쪽 木覓山 중에 있다 제품으로 밝혀졌으므로, 고령에서 출토된 것 또한 동진제품이 되는 셈이 구려가 국왕의 居所를 평양 방면으로 옮기게 된 배경은 일차적으로 전연의 다. 그렇다면 가야 지역에서 동진제 초두가 출토된 배경을 생각해야만 한 침공을 받아 국내성 일대가 초토화된 데 따른 것이었다. 고구려는 당시 선 다. 그런데 영남 내륙에 위치한 고령세력이 4세기 중반 이후에 동진과 교 왕인 미천왕의 시신과 왕모와 왕비가 전연에 볼모로 잡혀 있는 상황이었 역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가야제국의 교역권까지 장악하여 동진 다.185) 이로 인해 고구려는 전연에게 구속되는 상황이었으므로 서방으로의 과의 교역을 독점한 백제왕이 分與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싶 진출은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고구려의 관심과 진출 방향이 자 다. 이는 백제 중앙세력이 원주와 천안 지역의 호족들에게 분여한 동진제 연 남쪽으로 쏠리게 된 것은 당연할 수 있다. 고구려가 出口를 남쪽으로 열 초두나 청자와 동일한 맥락에서 그 성격이 파악되어진다. 즉, 가야세력의 게 된 것이다. 이와 관련해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다음과 같은 국서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한 견제책의 일환이었을 것이다.183) 문구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백제가 369년에 낙동강유역에 진출한 후 대가야에 물품을 하사 한 사실이 물증으로써 포착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선비계 마구류는 백제를 통해 전래된 것으로 간주하는 게 온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 전래 시점도 지산동 32호분의 조성 연대 저희는 근원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先世 때부터 舊款을 독실히 존중하였으나 그 조부 釗가 경솔히 이웃과의 우호를 廢하고 몸소 많은 군대를 이끌고 우리 강토를 짓밟으므 로 저의 할아비인 須는 군사를 정비하여 기회를 따라 달려 가서 쳐서 矢石이 잠시 오가는 사이 에 쇠의 수급을 베어서 걸었습니다. 이로부터 뒤에 그들은 감히 우리를 엿보지 못하다가 馮氏 를 5세기 전반으로 설정한다고 할 때 시간적으로 보더라도 369년 근초고 가 궁할 무렵부터 그 남은 무리가 도망하여 더러운 무리가 점점 성하게 되고 드디어는 빈번히 왕의 남정과 연결짓는 게 타당하다. 침범하여 원한을 만들고 禍가 이어져서 30여년이 되었으며, 재물이 없어지고 힘도 다하여 자연 군색해졌습니다.186) 3) 영역 확장 위의 기사에 의하면 고구려와 백제는 당초 근원의 동질성으로 인해 선세 때부터 구관 즉 舊交를 도탑게 유지했다고 한다. 양국간에 구교를 유지하 (1) 고구려와의 전쟁 게 된 원인을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다는 族源의 동질성에서 찾았다. 그런 데 양국간의 우호관계가 파기된 원인을 쇠 즉 고구려 고국원왕의 백제 침 근초고왕대에 절정을 이룬 백제의 정복활동은 크게 세 방향으로 광범위 공에 두었다. 이러한 개로왕의 발언은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일종의 빌미 하게 전개되었다. 그 첫째는 전라도 지역으로의 진출이요, 둘째는 낙동강 를 찾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다 보니까 모든 책임을 고구려에 전가하려 유역에 대한 진출이며, 셋째는 황해도 방면으로의 진출이었다. 는 백제의 일방적인 주장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개로왕의 언사에 전적 백제가 동태를 예의주시하던 고구려는 343년에 평양성으로 국가의 중심 183) 李道學, 1995, 앞의 책, 193~194쪽. 184) 三國史記 권18 고구려본기 6 고국원왕 13년조. 185) 三國史記 권18 고구려본기 6 고국원왕 12년조. 186) 三國史記 권25 백제본기 3 개로왕 18년조.
64 126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127 으로 신빙성을 두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러나 백제측의 일방적인 려는 그간 느슨하게 관리하던 대방고지에 대한 영유권 확보 차원에서 대방 주장만으로 돌릴 수 없는 점도 있다. 고지 전방에 소재한 백제 雉壤을 공격했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외형상으로 이와 관련해 백제와 고구려간의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는 369년 이전의 볼 때는 고구려가 백제 영역에 선제 공격을 단행한 것이 된다. 그러나 신라 상황 인식이 필요할 것 같다. 고구려의 상대국인 백제는 366년에 신라에 와 왜를 우군으로 끌어들이고 마한 잔여 세력과 가야제국까지 장악한 백제 187) 사신을 파견해서 수교하였다. 368년에 백제는 良馬를 신라에 선물로 보 의 공격 타깃이 대방고지로 향하게 되었음은 충분히 예견되었다. 이에 대 내는 등188) 적극적으로 양국 관계를 증진시키려고 했다. 백제는 신라와 수 한 대응 차원으로 고구려는 자국이 장악하였지만 자치에 맡겼던 대방고지 교한 해인 366년에는 멀리 경상남도 창원에 소재한 탁순국에 사신을 파견 의 보호를 위해 백제의 치양을 공격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고구려로서는 하여 이곳에 와 있던 왜 사신을 자국으로 초치하여 물산의 풍부함을 과시 방어적 공격을 단행한 것이다. 요컨대 백제와 고구려는 각각 대방고지의 189)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을 통해 백제가 신라 및 왜와의 관계를 적극 적으로 강화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366 유지와 장악이라는 차원에서 최초로 서로 격돌하게 되었다. 그 관련 기사 는 다음과 같다. 년에 맺어진 백제와 왜간의 수교가 결실을 맺게 되어 369년 3월에 백제는 왜군과 더불어 낙동강유역의 가야제국에 진출하여 지배권을 확립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 때 백제는 마한 잔여 세력까지 복속시켰다.190) 요컨대 백 제는 신라 및 왜와의 수교를 기반으로 가야제국을 장악하는 일대 전기를 24년(369) 가을 9월에 고구려왕 斯由가 步騎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에 와서 진을 치고는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이 태자를 보내 군사가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를 급히 쳐서 깨뜨리고 5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는데, 그 노획들은 장수와 군사들에 게 나누어주었다.191) 마련했던 것이다. 이 처럼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백제의 급속한 영향력 확대는 대방군 고 지를 자치에 맡겼던 고구려를 크게 자극시켰을 것이다. 이 때 백제는 마한 39년(369) 가을 9월에 왕은 군사 2만 명으로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치양에서 싸웠으나 패하였다.192) 잔여 세력에 대한 장악과 가야제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을 구 축하였다. 그러한 백제의 다음 공격 목표가 대방고지 진출임은 충분히 예 위의 기사에서 고구려왕 사유 즉 고국원왕이 침공한 백제의 치양은 雉嶽 견되는 사태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고구려의 남하를 유발한 직접적인 배경 城이라고 했던 황해도 배천193)으로 비정되고 있다. 그런데 위의 기사 가운 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가 선제 공격을 시도하게 된 것은 가히 정 데 고구려본기는 백제본기의 내용을 축약한 것이다. 그러므로 치양 전투에 지할 줄 모르는 백제의 운동력에 제동을 걸기 위한 조치라고 하겠다. 고구 대한 원 사료는 백제본기 기사라고 하겠다. 전쟁에서 승리한 백제측 所傳 에만 양국의 군사적 충돌이 전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근구수왕 즉위년조에 적혀 있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그것을 187) 三國史記 권3 신라본기 3 나물니사금 11년조. 三國史記 권24 백제본기 2 근초고왕 21년조. 188) 三國史記 권3 신라본기 3 나물니사금 13년조. 三國史記 권24 백제본기 2 근초고왕 23년조. 189) 日本書紀 권9 神功 46년조. 李道學, 1991, 百濟의 交易網과 그 體系의 變遷, 韓國學報 63, 75쪽. 190) 李道學, 1995, 앞의 책, 186~197쪽. 잘 압축하여 전한다. 191) 三國史記 권24 백제본기 2 근초고왕 24년조. 192) 三國史記 권18 고구려본기 6 고국원왕 39년조. 193) 新增東國輿地勝覽 권43 황해도 白川郡條, 白川郡 本高句麗刀臘縣 一云 雉嶽城.
65 128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129 이에 앞서 고구려 국강왕 斯由가 친히 쳐들어 오매 근초고왕이 태자를 보내어 막게 하였다. 부식은 어쩌면 자신을 근초고왕대의 그것과 견주어 연상하면서 각별하게 반걸량에 이르러 싸우려 하는데 고구려인 斯紀는 본시 백제인으로 국가에서 기르는 말의 발굽 당겨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상상한다면 김부식은 신계의 관산역을 통과 을 잘못하여 상하게 하자 죄줄까 두려워 고구려로 도망쳤었다. 이에 이르러 돌아 와서 태자에 게 말하기를 비록 고구려 군사가 많기는 하지만 모두 수만을 채운 가짜 군사에 불과할 뿐입니 다. 그 중 제일 날랜 부대는 오직 붉은 깃발뿐이니 만일 그것을 먼저 깨뜨린다면 그 나머지는 해 올라가다 태자의 말자국 에 관한 이야기를 향도로 차출했던 현지 주민 들에게서 듣지 않았을까. 치지 않더라도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태자가 이 말을 좇아 진격하여 크게 이기 백제 때나 고려 때나 북상 교통로에는 변화가 없었다고 보이므로, 근구 고 달아나는 군사를 계속 추격하여 수곡성 서북에까지 이르렀을 때에 장수 막고해가 간하며 말 수 태자가 말 탄채로 올랐던 말바위라면 길가 어디 쯤에 있었을 것이다. 하기를 일찍이 도가의 말을 들으매 만족한 것을 알면 욕을 보지 않으며 그칠 줄을 알면 위태 또, 눈에 쉽게 띄었기에 향도가 지나 가면서 들려주었는 지도 모른다. 아니 하지 않다 고 하였으니 지금에 얻은 바도 많은데 어찌 더 많은 것을 바라겠습니까 하였다. 태자 가 이 말을 옳게 여겨 추격하기를 중지하였다. 즉시 그곳에 돌을 쌓아 표지를 만들고 그 위에 면 典故에 밝은 김부식이 문득 근구수 태자의 사적이 생각나서 현지 주민 올라 좌우를 돌아 보며 말하기를 이 다음날에 누가 다시 이곳까지 올 수 있겠느냐! 고 하였다. 들에게 물어 확인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어찌하였든 김부식은 이 바위를 그곳에 말 발굽같이 생긴 바위 돌 틈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태자의 말자국이라고 가리키며, 사뭇 긴장하며 또 한파에 시달리며 패잔병처럼 억지 억지 따라 부른다.194) 오는 휘하 장병들을 둘러 보면서 자고로 北軍이 南軍을 이기지 못하였다. 백제 근구수 태자의 이 말자국 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우리가 걸어 위의 기사는 369년(근초고왕 24)의 치양전투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온 길을 따라 옛적에 올라갔던 백제 군대는 평양성에서 고구려왕을 죽여 마지막 구절에 보이는 태자의 말자국 이야기는 삼국사기 저자가 직접 그 수급을 장대에 꽂지 않았던가! 지금 평양성에 박혀 있는 北徒들의 운명 목도하였거나 들었던 사실을 적어 놓은 인상이 짙다. 그렇다면 이곳과 김 도 미구에 이와 같이 될 것이다! 라고 선포하자 와 하는 함성과 더불어 군 부식과는 어떠한 인연이 있었단 말인가? 고려사 김부식전을 펼쳐 보면 대의 사기는 충천하지 않았을까? 1135년에 김부식이 元帥가 되어 평양을 거점으로 한 妙淸의 난을 진압하기 그리고 위의 인용에서 백제 장수 막고해가 근구수 태자에게 한 말은 노 위해 수곡성으로 적혀 있는 신계 지역을 통과한 적이 있었다. 이때 그가 직 자의 도덕경 에 적혀 있는 구절이다. 백제인들의 학문적 교양과 문화 전 접 보고 들은 것을, 그로부터 10년 후에 주관하여 완성시킨 삼국사기 에 반의 역량을 시사해 주는 기사라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근구수 태자가 전 이와 같이 수록하였다는 느낌이 든다. 승 기념으로 수곡성에서 돌을 쌓아 표지를 삼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김부식이 이끈 군대는 개성을 출발하여 生陽驛(中和)을 지나 寶山驛(平 이는 제왕의 업적을 과시하고 승전의 당위성을 선포하는 목적에서 세워진 山)에서 3일 동안 군대를 사열한 후 平州를 거쳐 管山驛(新溪)을 통과하여 비석의 형태였으리라고 생각되지만, 375년 고구려 군대가 수곡성을 함락 射巖驛(遂安)과 新城部曲(三登)을 거치면서 북진하였다. 당시 개성에서 평 시킨 후 파괴하였으리라고 짐작된다. 백제와 고구려의 군사적 격돌은 다음 양으로 통하는 길은 개성 평산 서흥 황주 평양으로 이어지는 통로와, 의 기사에서 보듯이 371년에도 발생했다. 개성 평산 신계 수안 상원 평양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었다. 김부 식은 후자를 이용한 것이다. 그런데 평양으로 반란군을 진압하러 가는 김 41년(371) 겨울 10월에 백제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평양성을 공격하므로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서 이를 막다가 流矢에 맞고, 이 달 23일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故國의 벌 판에 장사지냈다(백제 개로왕이 글을 魏에 보내어 말하기를 쇠의 목을 베어 梟示했다 고 했는 194) 三國史記 권24 백제본기 2 근구수왕 즉위년조. 데, 지나친 말이다).195)
66 130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년(371)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므로 왕은 이 말을 듣고 군사를 패하 가에 매복 환 요구를 거절하였다. 이는 양국간의 화친 관계가 이미 결렬되었음을 뜻 시켜놓았다가 그들이 오기를 기다려 급히 치니, 고구려 군사들은 패배했다. 겨울에 왕은 태자와 한다. 곧 373년 이전에 고구려가 신라에 손길을 뻗친 데 따른 현상으로 보 함께 날랜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침입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왕 사유는 힘을 다하여 막아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죽으므로 왕은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도읍을 漢山 으로 옮겼다.196) 아야 할 것 같다. 아마도 고국원왕 패사 이후 위기감을 느낀 고구려는 신라 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랬기에 이로써 신라가 고구려 의 영향권에 들어 간 일대 사건을 상정하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백제군은 평양성 전투에서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것이다.197) 이렇 371년 이후 백제와 고구려간의 군사적 충돌은 소강 국면에 접어들었다. 듯 369년과 371년의 2차례에 걸친 고구려와 백제간의 전투에서 고구려는 그러나 375년에 고구려는 백제의 수곡성을 공격하였는데 다음과 같이 기 일방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그런데 373년에 백제의 독산성주가 3백 명을 록되었다.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한 사건이 발생했다. 다음의 기사에서 보듯이 백제에 서 주민 송환을 요구했지만 신라는 들어주지 않았다. 18년(373) 백제 禿山城 성주가 300명을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으므로 왕이 그들을 받아들여 6部에 나누어 살게 하니, 백제왕이 글을 보내 말하였다. 두 나라가 화친을 맺어 형제가 되기를 약속했었는데, 지금 대왕께서 우리의 도망한 백성을 받아들이니 화친한 뜻에 크게 어긋납니다. 가을 7월에 백제 수곡성을 공격하였다.200) 30년(375) 가을 7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수곡성을 공격해 와서 함락시켰다. 왕이 장수 를 보내 막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왕이 다시 군사를 크게 일으켜 보복하려 하였으나 흉 년이 들어 실행하지 못하였다. 겨울 11월에 왕이 죽었다.201) 이는 대왕이 바라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바라건대 그들을 돌려 보내십시오 (왕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백성은 일정한 마음이 없다. 그러므로 생각나면 오고 싫어지면 가버리는 것은 진실 고구려는 수곡성 전투에서 이제까지와는 달리 승리하였다. 수곡성 전투 로 그렇기 때문이다. 대왕께서는 백성이 편치 않음은 걱정하지 않고 도리어 과인을 나무라는 의 승리는 당시의 역학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 이듬해 것이 어찌 이렇게 심한가? 백제에서 그 말을 듣고 다시는 말하지 않았다.198) 인 376년에도 고구려가 백제의 北邊을 침공하는202) 등 전쟁의 주도권을 장 악하였기 때문이다. 377년 10월에는 백제가 군사 3만 명을 동원해서 평양 위의 기사를 통해 373년 이전에 백제와 신라가 화친을 맺었고, 또 형제 관계를 약속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앞서 언급했던 366년과 368년의 수교 관련 사실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는 백제 근초고왕이 낙동 강유역에 진출해서 가야의 旱岐들과 화친을 맺고 형제관계를 설정한199) 사 실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소위 형제관계임에도 신라에서는 백제의 주민 송 195) 三國史記 권18 고구려본기 6 고국원왕 41년조. 196) 三國史記 권24 백제본기 2 근초고왕 26년조. 197) 이 문제에 대해서는 李道學, 2006, 高句麗의 國難과 故國原王像, 高句麗硏究 23, 19~21쪽을 참조하기 바란다. 198) 三國史記 권3 신라본기 3 나물니사금 18년조. 199) 日本書紀 권19 고구려본기 6 欽明 2년 7월조. 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 달인 11월에는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 켜 남으로 백제를 공격하였다.203) 근구수왕대의 백제는 북쪽 변경에서 고구려 군대의 침공을 막아 내었다. 377년 10월 근구수왕이 직접 이끈 3만 명의 병력은 다시금 평양성으로 진 격해 들어 갔다. 근구수왕은 6년만에 그때처럼 겨울을 이용하였다. 371년 200) 三國史記 권18 고구려본기 6 소수림왕 5년조. 201) 三國史記 권24 백제본기 2 근초고왕 30년조. 202) 三國史記 권18 고구려본기 6 소수림왕 6년조. 三國史記 권24 백제본기 2 근구수왕 2년조. 203) 三國史記 권18 고구려본기 6 소수림왕 7년조. 三國史記 권24 백제본기 2 근구수왕 3년조.
67 132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의 평양성 진격에 대한 경험이 주효하게 작용했으리라고 본다. 땅이 얼어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133 (2) 마한 영역의 점령 붙는 겨울은 기병을 앞세운 신속한 기동력을 발휘할 수 있으므로 보급 등 에 만전을 기한 후 선제 공격한 측에서 기선을 제압하여 승부를 일찍 낼 수 근초고왕이 마한에 대한 정복전을 개시하기 전의 영역 범위는 어떻게 될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특히 삼국사기 의 같은 해인 소수림왕 7년 10월 까. 이는 다음과 같은 삼국사기 온조왕 13년조 기사에 대한 이해가 선결 조에 의하면 눈이 오지 않았고 우레가 있었고 민간에 전염병이 돌았다 라 되어야 할 것 같다. 고 하였다. 눈이 오지 않았음은 일단 기병 부대의 전진에 장애 요소가 없음 을 가리키므로, 기병전에 매우 유리한 여건이 조성되었음을 뜻한다. 그리 고 민간에 전염병이 돌았음은 고구려의 민심이 흉흉함을 가리킨다. 이것을 8월에는 마한에 사신을 보내어 遷都를 알리고 疆場을 畵定하였는데, 북쪽은 浿河에 이르고, 남쪽은 熊川에 限하고, 서쪽은 大海에 이르고, 동쪽은 走壤으로 끝났다.204) 틈타 근구수왕은 대규모 기습전을 감행한 것이다. 이때의 전과는 기록에 보이지 않으므로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불과 한 달 뒤인 11월에 고구려 군 대가 침공해 왔다고 하므로, 일대 반격임을 알겠다. 근구수왕대의 전쟁 기 사는 이것이 끝이다. 이후 백제는 내부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379년 3월에 백제 는 양자강 이남의 동진에 공식 사절을 파견하였으나 해상에서 모진 바람을 만나 되돌아 온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근구수왕이 외교적 노력으로 써 활로를 트려는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게다가 백제의 대고구려전은 국력의 소모를 가져왔을 터이다. 여기에 한발과 전염병이 겹쳐 주민들의 생활은 궁핍에 빠졌다. 국가에서 官穀을 풀어 굶주린 백성들의 배를 채워 주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흙비가 내린다든지, 땅이 깊이가 다섯 길, 폭이 3 길이나 되서 갈라졌다가 3일만에야 다시 붙는 일이 생겼다. 또 해무리가 3 겹으로 둘러지거나 궁중의 큰 나무가 저절로 뽑혀졌다. 흉년과 천재지변으 여기서 패하는 예성강, 대해는 서해를, 주양은 춘천으로 비정되고 있다. 문제는 웅천의 위치이다. 삼국사기 동성왕 13년조의 웅천의 물이 불어 왕도의 200여家가 떠내려 가고 잠겼다. 라고 한 기사의 웅천 은 온조왕 13년조의 그것과 동일한 강을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웅천은 지금의 금강 이 분명하다. 웅천을 안성천으로 비정한 견해는 타당성을 잃었다. 요컨대 백제는 북쪽 국경을 예성강으로 남쪽 국경을 금강으로 하는 영역을 확보한 것이 된다. 이러한 영역 범위를 명시하고 있는 온조왕대의 기사는 후대 사 실의 소급 架上이므로 그 시기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 주 목되는 것은 일본서기 신공 49년조의 다음과 같은 백제의 마한 경략 기 사이다. 그리고 비자발 남가라 록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의 7국을 평정하였다. 이에 군대를 옮 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에 이르러 남만의 침미다례를 도륙하여 백제에 내려주었다. 이에 그 로 인한 흉흉한 인심은 근수왕으로 하여금 다시금 군대를 일으킬 만한 여 왕 肖古 및 왕자 貴須 역시 군대를 이끌고 와서 모였다. 그 때 (比利 中布彌支半古四邑)이 자 유를 주지 못하였다. 고구려의 경우도 378년(소수림왕 8)에는 한발이 들어 연 항복하였다. 이에 백제왕 부자 및 荒田別 木羅斤資 등이 함께 意流村(지금 州流須祇를 말한 백성들이 서로를 잡아 먹었다고 할 정도로 식량 사정이 악화되었다. 같은 다)에서 만나 서로 기쁨을 나누었다. 禮를 두텁게 하여 보냈다. 오직 千熊長彦이 백제왕과 함께 해 9월에는 거란이 북쪽 변경을 침공해 와 8개 부락을 함락시키는 사건이 백제국에 이르러 支山에 올라 맹세하였다. 다시 古沙山에 올랐다. 205) 발생하였다. 고구려의 국력이 자연 북쪽으로 쏠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요컨 대 양국간의 이러한 국내외 사정이 복합되어 더 이상의 군사적 충돌이 없 었다. 204) 三國史記 권23 백제본기 1 온조왕 13년조. 205) 日本書紀 권9 神功 49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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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136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137 인정이라는 차원에서 지배권을 확립하는 선에서 그쳤다. 백제는 영산강유 고 볼 때 철기와 각궁은 고구려나 만주 지역의 백제 모두 공유하였으리라 역의 마한제국을 군사적으로 제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영토적 복속을 단 고 짐작되어진다. 그런데 이러한 장비로 무장한 백제세력이 한반도 중부 행하지 않았다. 이는 영산강유역의 마한제국을 가야와 동격으로 취급할 수 지역에 등장하였다. 이 자체는 보병전 단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을 밖에 없는 일종의 圈域의 차이가 필시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 금강 이남의 마한사회가 견지해온 기존의 세력 균형 관계를 일순에 깨뜨렸 에 백제는 영산강유역 세력에 대한 외교권을 차단하는 동시에 공납적 지배 을 것이다. 군사력에 있어서 현저한 우위에 있었을 백제의 입장으로서는 를 단행하는 선에서 머물렀던 것 같다. 요컨대 백제의 활발한 대외정복 활 타협을 통한 공존관계를 모색하였을 수 있다. 그러나 무력을 수반하는 정 동이 가져다 준 막대한 富는 대내적으로 백제 집권력 강화의 토대가 되었 복전에 끌리기 마련이었을 것이다. 다. 나아가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기 위하여 종래와 다른 새로운 수취체계 와 지배질서의 창출이 시급히 요청되었다. 그러면 백제의 신속한 영역 확장과 마한제국에 대한 지배권 장악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그 지형적 조건이 험준한 산악지대가 아니라 대부분 야산이 나 광활한 평야 지역이었으므로 기동성 위주의 기마전에는 適地였던 점이 (3) 정복전에 승리한 배경 유리하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즉, 평원 광야가 편평하게 서로 이어져 있으 면 이곳은 車騎를 사용하는 땅으로 보병 10명이 기병 1명을 당하지 못한다 4세기 중반 이후 만주 지역의 백제가 한반도 중부 지역으로 남하하여 한 三峯集 陣法). ( 고 할 정도로 기병전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지형이었다. 강유역으로 진입하였다. 또 이 세력은 동계였던 백제국을 흡수하였음을 앞 이 점은 가야제국이 분지라는 폐쇄적 지형에 소재하고 있던 관계로 통합이 에서 밝혔다. 서울 지역에서 4세기 후반부터 완성된 형태의 적석총인 기단 진척되지 못하였던 것과 대비된다. 식 석실적석총이 출현한 사실도 그렇거니와 근초고왕을 기점으로 그 이전 물론 마한제국은 247년에 중국군현과의 전투에서 패하기는 하였다. 그 과는 역사 기술상의 단층이 지고 있는 점도 그 증좌이다. 또 4세기 중반 만 러나 대방태수 弓遵을 전사시킬 정도의 전투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 주 지역에서 백제의 활동이 사라진 것도 이를 반증할 수 있다. 므로 마한제국의 군사력이 근본적으로 취약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때의 백제세력은 만주 지역에서 부여 전연 등과 교전 경험을 가졌다. 또 그 패전으로 마한제국은 구심력을 상실하고 연맹의 해체, 바꿔말해 내적 분열 로 인해 중장기병 중심의 정복전 수행능력을 갖추었으리라고 판단된다. 이 로 인한 힘의 空洞 상태가 4세기 중엽까지 지속되었다. 그런 관계로 백제 러한 추정은 부여 영역이었던 길림성 유수현 노하심 유적에서 출토된 甲 의 공격에 결집된 힘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각개 격파된 것으로 간주된다. 類를 비롯한 마구류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206) 부여를 서쪽으로 밀어 붙이 이와 더불어 백제에 유리하게 전개된 국제적 상황의 추이에서도 그 요인을 기까지 하였던 백제 또한 이같은 전투장비를 구비하지 않았다고는 생각하 찾을 수 있다. 예컨대 4세기대에 접어들어 마한에 일정한 통제력을 행사해 기 어렵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경우만 하더라도 2세기 단계에 鐵騎라는 이 온 중국군현이 고구려에 타멸되었다. 고구려 역시 전연의 强襲으로 폐허가 름의 중장기병이 존재하였다. 게다가 백제는 북방 유목민족인 勿吉의 주된 된 왕도 환도성의 복구 작업과 先王의 시신과 왕모 왕비를 송환받는 일에 兵器로서 기병전에 쓰여졌던 角弓을207) 사용하였다. 전투반경과 역량을 놓 부심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 영향권에서 백제의 이탈과 발흥에 제동을 206)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앞의 책, 123~164쪽 참조. 207) 北史 권94 勿吉傳. 백제의 각궁 사용은 日本書紀 권9 神功 46년조를 참조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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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140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3절 백제의 천하 인식 141 통치할 수 있다는 권리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주몽왕의 사망을 하늘이 위의 기사는 백제의 역할을 마치 왜가 그렇게 한 것처럼 기재한 것이라 황룡을 보내어 맞아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모티브를 채용하여 서술하였다. 고 한다.218) 그러나 기실은 백제의 마한경략을 가리키고 있다. 그 경략은 지 이는 천손의 소임인 국가 창건의 위대한 사업을 마무리짓자 자신의 本鄕인 금의 전라남도 해남 서부 지역으로 추정되는 침미다례219) 정벌로써 마무리 하늘로 돌아 갔음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 시조 생애의 시작과 끝을 되고 있다. 그런데 백제가 영역적 지배가 아니라 貢納的 지배의 대상으로 215) 천 과 연결시키고 있다. 설정한 영산강유역의 침미다례를 南蠻 으로 일컫고 있음은 주목되는 사 실이다. 남만 이라는 표현은 사서 편찬시의 인식이 일차적으로 반영된 것 이겠다. 그러나 그와 같이 불려진 세력이 백제에 복속되지 않은채 마한경 2) 천하관의 설정 략 이후에도 존속하였다.220) 이러한 점을 생각할 때 이는 四夷의 중심에 자 리잡았다는 천하관과 관련짓는 게 가능하다. 즉, 백제는 중화적인 천하관 광개토왕릉비문 이나 모두루묘지 에서 자국인 고구려를 세상의 중심 으로 인식하는 四海 천하관이 강하게 표출되고 있음은 두루 알려진 사실 이다. 때문에 고구려와 동계이거니와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백제 또한 천하 관이 존재했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는 백제의 건국초기 국토 개 척에 관한 역사 서술과 더불어 근초고왕이 중심 을 의미하는 黃旗 를백 제 군대 전체에 사용한 다음의 기사에서 알 수 있다. 11월 漢水 남쪽에서 크게 査閱하였는데, 旗幟는 모두 黃色을 사용하였다.216) 즉, 백제 왕자의 통치권이 직접 미치는 공간을 세상의 중심으로 인식하 였던 것이다. 그런 만큼 근초고왕은 자신의 통치권 내의 무력 을 皇軍 으로 분류하게 하는 우월감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사방의식은 배타성을 지닌 채 확대되면서 천하관으로까지 발전하였다. 백제의 천하관이 근초고 왕 당대에 확립되었음은, 다음과 같은 마한 경략 기사를 통해 짐작된다. 그리고 比自 南加羅 國 安羅 多羅 卓淳 加羅의 7國을 평정하였다. 이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古奚津에 이르러 南蠻의 彌多禮를 屠戮하여 백제에 내려주었다. 217) 215) 松原孝俊, 1992, 神話學から見た 廣開土王碑文, 朝鮮學報 145, 1~54쪽. 216) 三國史記 권24 백제본기 2 근초고왕 24년조. 217) 日本書紀 권9 神功 49년조. 을 빌어 노령산맥 이남의 마한 잔여세력을 남만이라는 멸칭으로 일컬은 것 이다.221) 이러한 사실은 백제가 남만뿐 아니라 여타의 四方的 夷名도 설정 하여 그 중심에 군림한다는 인식을 지녔음을 알려준다.222) 동시에 자국 중 심의 사방관념에서 주변 국가를 저급하게 취급함으로써 우월성을 내세우 는 천하관의 발로라고 하겠다. 이같은 추정은 무령왕릉 매지권 에서 天子 의 죽음에나 사용되는 崩 자가 표기된 데서 확고부동하게 입증된다. 최근 의 연구 성과에 의하면 무령왕비의 장례에는 중국 대가야 영산강유역 왜 등 적어도 4곳에서 조문 사절과 함께 조문용 제의품을 보내왔다는 사실 218)千寬宇, 1978, 復元加耶史, 文學과 知性 봄호 ; 1991, 加耶史硏究 23~26쪽. 219) 李道學, 1991, 百濟의 交易網과 그 體系의 변천, 韓國學報 63, 76~79쪽. 220) 李道學, 1991, 앞의 글, 77~78쪽. 221) 일본서기 에는 東夷 西戎, 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일본서기 가 편 찬될 때는 일본적인 천하관의 확립을 생각하게 한다. 그렇지만 南蠻 彌多禮 의 南蠻 을 倭를 기준으로 한 천하관에서 파생된 것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남만은 정 벌의 주체인 백제를 기준으로 하여 볼 때 그 남부에 거주하는 주민을 가리킴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222) 이러한 천하관은 고구려는 말할 나위 없거니와 신라에도 나타나고 있다. 삼국유사 황 룡사 9층탑조에 의하면 文殊菩薩이 중국에 유학 온 신라의 慈藏律師에게 不同東夷共工 之族 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共工 은 본래 堯舜시대의 四兇의 하나로서 흉폭했다는 족속을 가리키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야만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 고 할 때 이 문구는 비록 문수보살의 말을 빌어 이야기하고 있지만 신라인들은 동이 야 만족하고는 같지 않다 라고 하는 의미로서 독자적인 세계관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신라 중심의 천하관은 진흥왕순수비문 에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다든지 朕 이나 巡狩 와 같은 황제적인 용어를 사용한 데서도 뒷받침된다.
72 142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3절 백제의 천하 인식 이 밝혀졌다. 백제의 위세를 엿볼 수 있는 면면이 아닐 수 없다. 143 때 황제국은 조공국의 수장에게는 자국의 관작을 除授하고 있다. 그러한 일단 세상의 중심에 자리잡았다는 天孫國 의식은 주변 제국들을 低級하 내 외신 관계의 실례는 백제에서 다음과 같이 포착된다. 4월에 탐라국이 게 일컫게 했다. 동이 등과 같은 사방 오랑캐 호칭이 그것이다. 보다 중 225) 방물을 바치자 왕이 기뻐하여 使者에게 은솔 벼슬을 주었다 여기서 탐 요한 것은 이러한 우월감이 정치적인 행위로써 발휘될 때 현실적인 위상을 라국은 백제 통치권 밖의 세력이었지만, 백제에 대한 조공 의무를 이행해 갖게 된다. 천손국과 주변 국가간의 외교적 관계가 된다. 광개토왕릉비 야할 대상이었다. 탐라가 공부를 바치지 않자 동성왕이 무진주까지 친정하 문 에 나타나듯이 朝貢 관계로써 나타나고 있다. 기록에는 보이지 않지 여 그것을 再開시킨데서 확인된다.226) 요컨대 문주왕이 탐라국의 사자에게 만 황제적 위상을 확보했던 백제나 신라의 경우도 上下 조공 관계로서 주 자국의 관등을 제수하는 행위는 분명히 외신 관계의 설정을 뜻한다. 백제 변 小國들 위에 군림하였다고 생각된다. 백제의 경우 탐라로부터 貢賦 즉 는 이때 탐라국 사신에게만 불쑥 제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백제는 탐라 조공을 받았고, 한 때 斯羅 즉 신라를 비롯한 가야제국을 衛星國으로 거느 국왕을 비롯하여 일련의 제수가 있었다. 또 그러한 선상에서 백제는 탐라 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양직공도 에는 백제 곁의 소국들을 旁小國有 국 사신에게 제수를 하였다고 보겠다. 실제로 백제에 복속된 耽羅國主는 叛波 卓 多羅 前羅 斯羅 止迷 麻連 上巳文 下枕羅等附之 라고 백제 좌평의 官號를 稱하였다. 또 그러한 관계를 臣屬 이라고 하였기 때 기재하였다. 이는 백제 곁에 소재하면서 부용된 9개의 소국 명단이 되겠는 문이다.227) 데, 일종의 위성국가를 말한다. 여기서 반파 는 경상북도 고령 지역의 가 야를 가리킨다. 탁 은 일본서기 에 등장하는 卓淳國으로 보이는데, 경상 남도 창원에 소재하였다. 다라 는 경상남도 합천에 소재했다. 전라 는 이와 관련해 백제 왕 후 태수들의 分封 지역을 다음과 같은 表로 작성 해 보았다. x표 1y왕 후 태수들의 분봉지역 그 위치를 押督國이 소재한 경상북도 경산으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분명하 국내 분봉지 지 않다. 사라 는 신라를 가리킨다. 지미 와 마련 은 그 소재지를 알 수 面中王(광주 광역시) 西河太守(山西省 汾陽縣) 없다. 상사문 은 上己文의 잘못된 기재로 보이는데, 전라북도 임실 일대 都漢王(전남 고흥) 廣陽太守(河北省 隆化縣) 八中侯(전남 나주) 朝鮮太守(河北省 盧龍縣) 阿錯王(전남 신안) 廣陵太守(江蘇省 揚州市 西北) 邁盧王(전북 옥구) 淸河太守(山東省 淸河縣) 弗斯侯(전북 전주) 帶方太守(遼寧省 義縣 北) 邁羅王(전남 장흥) 樂浪太守(遼寧省 義縣 北) 223) 로 비정되고 있다. 하침라 는 전라남도 강진으로 지목되어진다. 3) 외신 관계의 설정 주지하듯이 황제국은 주변국들과 外臣 관계를 설정해 놓았다. 자국 영역 224) 내의 주민들은 內臣을, 주변의 조공국은 外臣의 범주에 속하게 된다. 이 223) 이에 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李道學, 1998, 양직공도와 중국의 고대한국의 유이민, 中國洛陽文物名品展, 208쪽. 224) 이에 관한 논의는 金翰奎, 2000, 古代 東아시아 世界秩序의 構造的 特性, 東아시아 歷史의 還流, 3~23쪽을 참조하기 바란다. 中王(전북 김제) 弗中侯(전남 보성) 225) 三國史記 권26 백제본기 4 문주왕 2년조. 226) 三國史記 권26 백제본기 4 동성왕 20년조. 227) 三國史記 권6 신라본기 6 문무왕 2년조. 국외 분봉지 城陽太守(河南省 泌陽縣 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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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148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고 대만해협을 지나 필리핀 군도까지 항로를 연장시켰다. 필리핀 군도는 제3절 백제의 천하 인식 149 였다.233) 이러한 요소들이 백제 대왕체제의 배경이 된 것이다. 黑齒國으로 알려졌던 곳이다.231)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된 흑치상지 묘지석에 의하면 그 가문은 부여씨 왕족에서 나왔지만 흑치 에 分封된 관 계로 그 지명을 따서 氏를 삼았다고 한다. 왕족을 지방의 거점에 파견하여 통치하는 담로제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백제는 다시금 항로를 확장시켜 2. 만물의 집결처로서의 백제 인도차이나 반도에까지 이르렀다. 백제는 지금의 캄보디아를 가리키는 扶 南國과 교역하였다. 그리고 백제는 북인도 지방의 모직물을 수입하여 倭에 1) 동남 아시아 지역으로의 교역권 확대 선물하기까지 했다. 모두 6세기 중반에서 7세기 중반경의 일이었다. 이러 한 항해 루트 덕분에 성왕대의 승려인 謙益이 중인도에서 佛經을 가져 올 수 있었다. 동아시아의 모든 물산은 백제로 집중되었다. 백제 땅에는 남방 鳥類인 공작과 앵무새, 그리고 건조 지대에 서식하는 낙타, 초원의 목축인 羊 등과 백제는 천하만물의 집결처로서의 위상을 과시하였다. 우선 6세기대 당시 백제는 동남아시아에 이르는 항로를 개척했다. 성왕대의 승려 겸익은 항로 를 통해 중인도에 들어가 불경을 얻어 귀국하였다. 이는 미륵불광사 사적 기 의 다음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같은 진귀한 동물들이 서식하였다. 물산 뿐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수서 백제조에 보면 (그 나라 사람들에는) 신라 고구려 왜인 등이 섞 여 있으며, 또한 중국인도 있다 고 하였다. 그랬기에 백제는 고구려의 69 미륵불광사사적에 이르기를 백제 성왕 4년 丙午에 사문 겸익이 마음 속으로 맹세하여 律을 구하기 위해 航海로써 中印度 常伽那大律寺에 이르렀다.234) 만 호 보다 많은 76만 호를 거느린 大國의 위용을 자랑하게 되었다.232) 이러한 환경 속에서 백제는 多種族 국가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백제 조 정의 요직에는 중국인이나 왜인들까지 기용되었다. 가령 성왕 때 전국의 5 方 가운데 하나인 東方의 장관인 東方令에 왜 조정의 物部莫奇武連이라는 귀족이 임명되었다. 또 나솔 관등의 物部奇非와 같은 인물을 비롯하여 백 제 조정에는 많은 왜계 관료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그리고 西河太守에 임명된 馮野夫를 비롯하여 將軍號를 지닌 王茂와 張 그리고 543년에 백제가 부남국 곧 메콩강 하류 유역과 그 삼각주를 거점 으로 한 지금의 캄보디아 지역의 재물과 노비 2口를 왜에 선물한235) 기사가 보이고 있다. 이는 554년 백제가 왜에 보낸 물품 가운데 양모를 주성분으 로 하는 페르시아의 직물로서 북인도 지방에서 산출되는 의 존재가236) 확인되는 점에서도 입증된다. 탑등은 페르시아의 Taptan Tapetan의 漢 音 표기였다.237) 부여씨 왕족이었던 흑치상지의 조상이 분봉되었던 흑치가238) 지 塞 그리고 陳明과 같은 인물들은 모두 중국계이다. 요컨대 백제 조정에서 는 왜인과 중국인들이 고위직에 있었던 게 확인되었을 정도로 열린 사회 231) 이와 관련해 노중국은 黑齒 의 위치를 백제 때 今勿이었던 충남 덕산으로 비정하는 견 해를 취했다. 232) 李道學, 1991, 앞의 글 ; 李道學, 1999, 百濟의 交易과 그 性格, STRATEGY21, 54~98쪽. 233) 李道學, 2002, 중 고등학교 국사교과서 서술의 문제점과 백제사 인식, 살아 있는 백제 역사를 찾아서, 15~16쪽. 234) 李能和, 1918, 朝鮮佛敎通史 上篇, 聖王 31년조 備考. 235) 日本書紀 권19 欽明 4년조. 236) 李龍範, 1969, 處容說話의 一考察, 震檀學報 32 ; 1989, 處容硏究論叢, 258쪽. 237) 日本書紀 권19 欽明 15년 12월조, 又奏 臣別遣軍士萬人 助任那 幷以奏聞 今事方急 單船遣奏 但奉好錦二匹 一領 斧三百口 及所獲城民 男二女五名. 238) 黑齒常之墓誌銘, 其先出自扶餘氏 封於黑齒 子孫因以爲氏焉.
76 150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3절 백제의 천하 인식 151 금의 필리핀으로 비정되고 있는 사실도239) 이와 무관하지 않다.240) 그 밖에 해 남방 문물을 흡수했다는 견해는 억측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말 해남 군곡리 패총에서 출토된 管玉이 동남아시아製라는 지적 역시 백제와 았다. 이들 지역간의 교류를 분명히 해 준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적색의 유리 이와 관련해 백제와 인도 및 인도 차이나 지역과의 교역을 암시해 주는 구슬을 무티사라(Mutisalah) 구슬로 간주하며 태국을 중심한 동남아시아 물증을 제시함으로써 그것은 구체적인 사실로 확인된다. 우선 코끼리의 존 241) 産으로 지목하고 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소다 유리는 印度나 스마투 재를 꼽을 수 있다. 백제인들은 코끼리의 존재를 불경을 비롯한 불교의 영 라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확인된다고 한다.242) 그 밖에 무령왕릉에 향이 아니라 실견했다. 이는 백제금동대향로에서 코끼리 위에 사람이 봇짐 서 출토된 방격규구신수문경 문양에는 특이한 용모의 인물상이 등장하고 을 지고 올라 탄 모습을 통해 유추가 가능하다. 이처럼 코끼리를 탈것, 즉 있다. 이러한 풍모는 고대 한국과는 관련이 없는 베트남과 같은 남방으로 운송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광경은 동남아시아 지역에 실제 가 보아야만 243) 부터의 영향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백제가 중국의 선박을 이용해서 중인도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백제는 중국에서 진귀한 물산을 수입해서 왜에 선물하였으리라 재현할 수 있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正倉院 北倉에는 의자왕이 왜 조정의 실권자인 藤原鎌足에게 선물한 바둑함과 바둑돌 그리고 바둑판이 전하고 있다. 는 막연히 선입견에 기댄 주장도 있다. 그런데 675년 정월에 大學寮 諸學 여기서 銀製 바둑함 뚜껑에는 코끼리 문양이 나타나고 있다. 역시 백제 生 陰陽寮 外藥寮 및 舍衛國女 墮羅의 女 백제왕 善光 신라 仕丁 등 인들이 코끼리의 존재를 접했을 가능성을 심어준다. 실제 바둑함 속에 담 244) 이 捧藥 및 珍異한 물건을 진상하였다 는 기사가 주목된다. 정월 초하루 긴 白 黑 紅 紺色의 4종류로 된 총 516개의 바둑돌 가운데 홍색과 감 에 천황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행사에 등장하는 사위국은 인도의 사위국 색은 재료가 상아이다.245) 게다가 익산 왕궁평성 탑에 부장되었던 금제 금 이다. 타라는 태국 메남강 하류의 왕국 가운데 하나로 지목하는 데는 이견 강경판은 상아로 만든 각필로 새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이 없다. 그런데 이들 나라가 675년 이전에 왜와 교류한 적이 없다. 다만 점들은 백제인들이 동남 아시아 지역과 교역한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된 분명한 것은 당시 인도를 비롯한 인도 차이나 諸國이 일본열도에 이를 수 다. 동시에 백제인들이 제작한 물건 속에 등장하는 코끼리像의 성격이 밝 있을 정도의 항해술이 담보되었다는 것이다. 즉, 675년에 인도를 비롯한 혀지게 되는 것이다. 인도 차이나 제국이 왜에 사신을 보낸 것은 백제의 동남 아시아 교역 체계 가 백제 멸망 후 왜에 넘어 간 사실을 가리킨다. 나아가 백제가 중국을 통 李道學, 1991, 百濟 黑齒常之 墓誌銘의 檢討, 鄕土文化 6, 19~37쪽. 239) 梁嘉彬, 1962, 魏志朱儒國(今琉球) 裸國(今台灣)黑齒國(今菲律賓)考, 大陸雜誌 特刊 第2輯, 337~344쪽. 240) 黑齒를 충남 예산군 德山으로 비정하는 견해를 따르는 盧重國에 대한 비판은 李道學, 2004, 書評, 백제부흥운동사, 韓國史硏究 124, 276쪽을 참조하기 바란다. 241) 李仁淑, 1993, 한국의 고대 유리, 81~82쪽. 242) 公州大學校, 1991, 百濟 武寧王陵, 252~253쪽. 243) 尹武炳, 百濟武寧王陵と藤ノ木古墳, 古代史國際シンポジウム硏究報告集, 6쪽. 244) 日本書紀 권29 天武 4년 춘정월 丙午朔條. 이와 더불어 백제가 왜 조정에 보냈거나 왜 사신이 백제에서 받아간 선 물 가운데 다음과 같은 동물의 존재가 주목을 끈다. 백제가 낙타 1 마리, 노새 1 마리, 양 2 마리, 흰꿩 1 마리를 바쳤다( 일본서기 推古 7년 (599)조). 백제로부터 돌아와 앵무 1 쌍을 바쳤다( 일본서기 齊明 2년(656)조). 백제로부터 돌아와 낙타 1 마리, 당나귀 2 마리를 바쳤다( 일본서기 齊明 3년(657)조). 245) 東京國立博物館, 1981, 特別展 正倉院寶物, 그림 奈良國立博物館, 1982, 正倉院展, 82~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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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154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3절 백제의 천하 인식 155 수 있다. 예컨대, 백제의 영향력은 북으로는 고구려를 껑충 뛰어넘어 몽골 이 먼저 착수한 것은 대영제국의 식민지와 자치령의 출품 자체를 대영제국의 전시로서 챙기는 고비사막 일대까지, 남으로는 일본열도를 훨씬 지나 아열대 지역에 깊숙이 일이었다. 이들 식민지에는 동인도 세일론 몰타 아프리카 서해안 희망봉 캐나다 모리타 미치는 등 종횡무진의 무궁한 雄姿를 보이고 있다. 실제 백제는 요하 서쪽 니 영국령 기아나 버뮤다 제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수정궁을 찾은 사람들은 최신 산업 기계의 전시에 결코 뒤지지 않는 강렬한 인상을, 이들 식민지 전시를 의 유목국가인 後燕과의 연계를 통해 고구려를 압박하기도 했다.252) 그 뿐 통해 받았던 것이다. 실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제국 이 대서양의 몰타나 포클랜드, 황금해안 아니라 백제는 勿吉과 함께 고구려를 협공하려고 했을 정도로253) 백제의 외 이나 모리타니 등 광범한 지역까지 보유하고 있음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대영제국의 풍 교 반경은 일반의 상상을 뛰어넘어 멀리 목단강유역까지 미치고 있었다. 요로움 과 영국 국민의 우월성 이 식민지 전시를 통해서 입증 되었던 것이다.254) 요컨대 백제가 왜에 선물한 동물 가운데 백치는 백제왕이 천하를 통치하는 聖世와 융성을 과시하기 위한 表象으로서는 단연 그 압권이었던 것이다. 마찬 가지로 백제가 왜에 선물한 진귀한 동물들은 국가의 위상을 과시하 그러므로 백제의 천하관과 결부지어 왜에 선물한 이러한 동물들의 성격을 는 천하관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이 세상 끝가는 데까지 미치는 백제의 해석해야 되지 않을까 한다. 국력을 생생하게 전달해 주는 수단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大英博物館에서 수장하고 있는 유물의 범위는 전 세계에 걸 쳐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다. 이는 세계 곳곳에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 국의 손길과 발길이 미치고 있음을 뜻한다.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주최했 3. 칠지도의 명문 해석과 그 성격 던 만국박람회의 경우도 이와 동일한 성격을 지녔다고 하겠다. 마찬 가지 로 세계의 물산이 집결된 백제에서도 그 같은 국가의 위상과 세력 범위를 과시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백제는 진귀한 동물들을 1쌍 1) 칠지도에 대한 시각 이나 1마리 정도를 왜에 선물하였다. 이것은 교역품이 아니라 국가적 위상 과시라는 정치적 의도가 강했음을 뜻한다. 이와 관련해 박람회가 지닌 의미를 박람회장 속의 식민지 라는 다음 글 을 소개함으로써 환기시키고자 한다. 일본 奈良縣 天理市에 소재한 石上神宮 안의 禁足地 부근 神庫에는 엄중 하게 封印된 나무 상자에 특이한 형태의 칼 한자루가 봉안되어 있다. 길이 74.9 의 鍛鐵로 만든 양날 칼인데 몸체 좌우로 가지칼이 세 개씩 뻗어 있 다. 해서 모두 7개의 칼날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七支刀라는 이름이 붙었 박람회 시대는 동시에 제국주의 시대였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19세기 중반부터 초입 다. 그런데 칠지도는 여느 칼과는 달리 칼몸의 앞뒷면에 모두 61자의 명문 까지 지구 전체에서 증식해 가던 이 자본주의의 스펙터클은 무엇보다도 제국주의의 거대한 디 이 전아한 書風으로 金象嵌되어 있거니와 외곽은 가는 金線으로 둘려져 스플레이 장치였다. 박람회는 테크놀로지의 발전을 국가 발전으로, 즉 제국의 확장이라는 길로 일체화시키면서, 그런 가운데 대중의 욕망을 끌어 안았던 것이다. 이러한 박람회와 제국주의의 결합은 이미 1851년 런던 만국박람회 때부터 나타났다. 런던 만국박람회의 개최에 앞서 주최측 있다. 칠지도의 존재는 일본서기 신공 52년(372)조에 보인다. 즉,백제의 근 초고왕이 사신인 久 를 통하여 칠지도 1口와 七子鏡 1面 및 각종의 重寶 252) 李道學, 2005, 高句麗와 百濟의 對立과 東아시아 世界, 高句麗硏究 21, 378~379 쪽. 253) 魏書 권100 勿吉傳. 254) 요시미 순야 著 이태문 譯, 2004, 박람회, 근대의 시선, 210쪽.
79 156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3절 백제의 천하 인식 를 바쳤다 라는 기사가 그것이다. 이렇듯 문헌에 기재된 칠지도의 실물이 (앞면) 泰 四年 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 七支刀 百兵宜 供후王 作 이소노가미 신궁에 봉안되어 있는 자체가 경이로운 일이었다. 일본 학자들 (뒷면)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 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157 의 입장에서 볼 때 칠지도는 왜를 백제의 종주국인 것처럼 서술한 일본서 기 의 신뢰도를 높여주는 부동의 물증으로 이용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이같은 선입견을 깔고서 칠지도 명문을 해석하였던 만큼 고대 일본이 가야 지역을 2백년간 지배하였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의 한 근거로까지 자의 적으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칠지도 연구의 심화에 따라 기존 해석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었다. 칠지도에 관한 지금까지의 견해는 크게 네 가지로 나뉘어진다. 첫째, 칠 지도를 백제로부터의 헌상품으로 간주하는 백제 헌상설, 둘째, 칠지도는 일본제라고 생각하는 위작설, 셋째, 칠지도는 백제의 우위를 드러낸다는 백제 하사설, 넷째, 칠지도의 배후에 東晋의 존재를 지적하는 동진 하사설 로 구분할 수 있다.255) 이러한 견해는 그 타당성 여부를 떠나 칠지도의 비중 이 동아시아 세계에 있어서 매우 크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처럼 칠지도 연구에서 상존하고 있는 합일되지 않는 다양한 논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 해서는 그 명문에 대한 합리적인 재검토가 요망된다. 칠지도는 명문의 판독을 둘러싸고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본글에 서는 기존 이 방면의 연구 성과를 충분히 반영하였다고 판단되는 山尾幸久 의 석문256)과 나라국립박물관에서 간행한 특별전 발굴된 고대의 在銘遺 258) 및 X線 촬영결과물인 復元七支 寶,257)와 칠지도와 석상신궁의 神寶 刀 를 참조하여 다음과 같은 釋文을 작성했다. 2) 表面 銘文의 검토 (1) 연대 문제 칠지도의 명문 가운데 가장 논의가 분분하였던 부분의 하나는 표면 첫머 리의 泰 四年 月十六日丙午正陽 이라는 구절에 보이는 年號이다. 이 연호가 구명된다면 칠지도의 성격을 둘러싼 윤곽이 어느 정도 모습을 드러 낼 수가 있기 때문에 각별히 주목되어 왔다. 그런데 연호인 泰 의 에 관해서는 본디 始 初 등의 문자가 거론되기도 하였지만259) 福山敏 男이 비정한260) 이래 현재 和 로 거의 굳혀졌다고 생각되므로 이것을 취하 기로 한다. 그렇다고 하면 이는 泰和 라는 연호가 되는데, 삼국 중 고구려 와 신라가 독자의 연호를 사용하였으므로, 백제 역시 그러하였을 개연성은 배제하기 어렵다. 그러나 백제에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선뜻 따르기 어렵다. 翰苑 백제조에 의하면 그 기년은 별도의 호 칭이 없다. 다만 6갑의 숫자를 차례[次第]로 삼는다 라고 하였다. 백제에서 는 紀年을 표시하는데 특별한 연호없이 육갑 간지만 사용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무령왕릉매지권 이나 사택지적비문 그리고 창왕사리감명문 과 같은 백제의 금석문에도 연호 사용이 확인되지 않는다.261) 그러므로 泰和는 백제의 연호라기 보다는 중국의 연호일 가능성이 높다. 255) 神保公子, 1973, 七支刀硏究の步み, 日本歷史 第301號, 50쪽 참조. 칠지도의 백제 헌상설은 福山敏男 榧本杜人 西田長男 三品彰英, 위작설은 藪田嘉一 郞, 백제 하사설은 金錫亨 李丙燾 李進熙 孫永鐘 藤間生大 坂元義種 上田正昭, 동진 하사설은 栗原朋信 등이 대표적이다. 256) 山尾幸久, 1989, 古代の日朝關係, 171~172쪽. 257) 奈良國立博物館, 1989, 特別展 發掘された古代の在銘遺寶, 36~38쪽. 258) 奈良國立博物館, 2004, 七支刀と石上神宮の神寶, 7~9쪽. 鈴木勉 何內國平, 2006, 復元七支刀. 이와 관련한 중국 왕조의 연호로는 金의 泰和(1201~1208)가 있지만, 연 259) 李進熙, 1980, 廣開土王碑と七支刀, 44~45쪽. 260) 福山敏男, 1951, 石上神宮の七支刀, 美術硏究, 158쪽. 261) 이러한 문헌 기록이나 물적 자료는 웅진성 사비성 도읍기(475~660)에 국한되므로, 그 이전인 한성 도읍기의 연호 사용 여부까지 구속하는 근거로서 유효하지는 않다. 그러므 로 한성 도읍기의 연호사용 가능성을 배제하기는 어려운데, 문제는 독자 연호의 사용이 냐 중국 연호의 채용이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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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162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3절 백제의 천하 인식 163 요가 극심하였기 때문이다. 가령 문주왕의 피살(477), 병관좌평 해구의 반 장검의 길이는 일본열도의 그것들과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동경국 란, 가야제국의 이탈 그리고 왜에서 귀국한 연유한 동성왕의 즉위 2년 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5세기대 가야계 명문환두대도의 길이는 약 ) 이같은 백제의 국내외적 이거니와283) 5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분에서 출 인 여건으로 볼 때 오히려 칠지도헌상설도 가능해진다. 그러나 칠지도 헌 토된 철검의 길이는 93.9 인 점이284) 이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따라서 칠 상 가능성은 후술하겠지만 그 명문의 내용과 크게 어긋나기 때문에 결국 지도의 길이는 5세기대 한반도의 그것과 전혀 연결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북위 연호설은 따를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아울러 칠지도 명문의 후왕 도 그 연대 설정의 기준으로서 도검 길이가 더 이상 이용되기는 어렵다고 하 5세기 중반 이후에 시행된 백제의 후왕제도와 연결지을 수 없는 길상구에 겠다. 그 밖에 칠지도와 형상이 비슷한 듯한 갈고리槍이 출토되는 신라 고 (480)이 되는 등 왕권이 불안정한 시점이었다. 279) 때문에 이 역시 북위 연호설이 타당하지 않음을 일깨워 준다. 분의 편년을 기준으로 해서 그 제작 연대를 548년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 그 밖에 후王 의 字體는 後漢鏡과 吳鏡에서도 확인되므로 적어도 후한대 으나 따르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 견해는 고고학적 시각에서만 국한되어 이래로 사용되어 동진의 劉韜墓誌銘 과 王興之夫婦墓誌銘 그리고 劉宋 도출된 결론이거니와 실제 칠지도와 갈고리창은 형상적으로도 연결시키기 불과하다. 280) 의 劉懷民墓誌銘 에도 보인다. 그런데 반하여 281) 에는 人 邊이 있는 侯 로 표기되고 있다. 북위의 崔敬邕墓誌銘 이로써도 칠지도가 북위의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騎兵을 말에서 끌어 내리는데 사용된 갈고리 창 은 칠지도와는 用途마저 다르다.285) 태화 4년(480)에 제작되지 않았음을 시사받게 된다. 반면 이는 칠지도 명 문 연호의 동진 태화 가능성을 한층 증대시켜 준다. (2) 侯王 문제와 表面 명문의 해석 한편 일본열도에서 5세기 중엽 이후 6세기 전반에 걸치는 고분에서 출토 되는 장검의 길이가 칠지도의 길이 74.9 에 크게 벗어나지 않은 대략 73 칠지도 제작 주체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단서가 되는 자료로서 표면의 내외인 점에 근거하여, 칠지도의 369년 제작설에 의문을 제기하는 견해 宜 供侯王 이라는 문구가 주목되어 왔다. 여기서 供 을 供供 혹은 282) 도 있다. 그러나 성격이 다른 異形刀劍인 칠지도와 일반 장검의 길이를 으로 판독하였을 때 聖德大王神 復供 으로 판독하기도 하였다.286) 供供 비교하여 그 제작연대 추산의 근거로 삼는다는 것은 당돌하다는 느낌마저 鐘銘 의 恭恭孝嗣 의 恭恭 을 供供 과 동일한 뜻으로서 禮儀가 바르 준다. 왜냐하면 제작주체가 동일하지도 않은 백제의 칠지도와 일본열도에 다 혹은 恭遜하다 는 의미의 형용사로 파악되기도 한다.287) 그러나 復 서 출토된 도검을 비교한다는 것도 그러하거니와, 기실 5세기대 한반도계 278) 李道學, 1985, 漢城末 熊津時代 百濟 王位繼承과 王權의 性格, 韓國史硏究 合輯, 20~23쪽. 279) 神保公子, 1975, 앞의 글, 44~49쪽. 280) 王靖憲主 編, 1986, 中國美術全集 書法篆刻編 2, 魏晋南北朝書法, 41쪽 119쪽 130 쪽. 281) 王靖憲, 1986, 앞의 책, 129쪽. 물론 西晋末의 塼銘에서 侯 字 표기가 확인되고 있으나 그보다 고급 명문에 속하는 金 石銘에서는 東晋末까지 후 字 표기가 통용되었다. 282) 森浩一, 1979, 鐵劍文字に古墳文化のとこに位置するか, 鐵劍文字に語る, 135~136 쪽. 283) 早乙女雅博 東野治之, 1990, 朝鮮半島出土の有銘環頭大刀, MUSEUM 467 2月 號, 4~11쪽. 284) 國立光州博物館, 1988, 羅州潘南古墳群綜合調査報告書, 221쪽. 285) 칠지도의 제작 연대를 6세기대로 내려잡기도 하지만, 翰苑 의 기록뿐 아니라 무령왕 릉매지권 과 같은 금석문에서도 연호의 사용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泰 연 호를 백제 연호로 간주한다는 것은 설을 내기 위한 설 이라는 지적을 모면하기 어렵다. 286) 復供 으로 판독하는 견해는 다음의 논고가 대표적이다. 村山正雄, 1979, 七支刀 銘字調査の一端, 三上次男頌壽紀念 東洋史 考古學論集, 169~370쪽. 山尾幸久, 1989, 앞의 책, 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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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166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3절 백제의 천하 인식 167 는 길상적인 내용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復 에는 奏請 의 뜻이 있는 바296) 은 백번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로 해석된다. 또한 百兵 請하여 후왕으로 나아가는 게 마땅하다. 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의 兵 은 兵器의 뜻이지만, 길상구인 만큼 兵害의 뜻으로 받아 들이면 좋 297) 復 에는 安 의 의미 즉, 안정 편안의 뜻도 보인다. 그러므로 이 보다 을 것 같다. 百 은 많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모든 으로 받아들인다 는 순조롭게 후왕으로 나아가는 게 마땅하다(가능하다). 로 풀이하는 게 면 이 구절은 모든 병해를 물리칠 수 있다 로 해석된다.301) 요컨대 이 구절 그 길상적인 성격에 맞는 해석으로 여겨진다. 302) 은 劉曜의 銘文劍에 보이는 뭇 독을 제거한다(除衆毒) 라는 의미와 동 따라서 이 구절의 논의와 관련하여 종래부터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던 宜 供侯王 의 供 은, 바친다 헌상한다 는 해석은 무리가 있다. 일한 길상구이다. 그 다음 구절은 이미 해석한 대로이며, 표면 말미의 판독 되지 않은 글자가 많은 作 은 船山古墳 철검의 말미에 적힌 명문 혹은 왕후제라는 신분질서의 관점에서 대왕인 백제왕이 후왕인 왜왕에게 303) 칼을 하사한다는 의미의 수여하다 공급하다 등으로도 해석되지 않음 그러므로 이 문구는 아무개가 (이 칼을) 제작하였다 로 해석할 수 있다. 을 생각할 때 칠지도 제작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을 알게 되었다. 기실 칠지도의 표면은 연호와 결락된 제작자명을 제외하 고는 모두 길상구에 불과하다. 더욱이 그 표면에는 供 의 주체가 명시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헌상이든 하사로 해석하든 이 문구만 3) 裏面 명문의 검토 가지고서는 모두 무의미한 논쟁이라 하겠다. 그 밖에 供 供供 으로 판독한 후 恭恭 과 같은 의미로 파악한 견해298) 또한 재고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예의 바른 후왕에 마땅하다 는 해석은 전후 문맥상 돌연한 느낌 을 주는 관계로 어색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검토한 내용과 관련지어 칠지도 표면의 나머지 명문을 해석하 고자 한다. 그러면 泰 四年 月十六日丙午正陽 은 태화 4년 5月 16일 칠지도의 이면은 다음과 같이 크게 3단락으로 구분되어지는 구조문이다. 그러므로 구조적인 분석을 시도할 때 그 해석이 순조로워진다. A. 先世以來未有此刀 B. 百濟王世 奇生聖音故 C. (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병오 정양이 된다. 정양 은 태양이 정남방에 높이 떠오르는 시각인 낮 12 시를 가리키고 있다.299) 즉, 하루 중 火氣가 가장 盛한 낮 시간인 정오를 말 위와 같은 구조문으로 파악한다면 A는 과거에 칠지도가 없었다는 것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造百練 七支刀 의 百練 은 百居易의 詩나300) 東大 B는 백제왕이 칠지도를 얻게 된 유래를, C는 칠지도를 제작한 목적을 적고 寺古墳에서 출토된 中平銘 철검이라든지 稻荷山鐵劍 명문뿐 아니라 그밖 있다. 그러므로 A와 B는 상관관계가 있는 대구문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의 刀銘에도 段造와 관련한 뜻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 B의 결과이자 결론이 C인 것이다. 여기서 A는 별반 이견 없이 선세 이래 296) 諸橋轍次, 1956, 앞의 책 4권, 903쪽. 297) 諸橋轍次, 1956, 앞의 책 4권, 903쪽. 298) 佐伯有淸, 1977, 앞의 책, 22~26쪽. 299) 宮崎市定, 1983, 謎の七支刀, 85쪽. 300) 桂馥, 禮樸 권8 古鏡文 ; 朱金城 箋校, 1988, 白居易集箋校 1, 上海古籍出版社, 204~205쪽. 301) 李道學, 1990, 百濟 七支刀 銘文의 再解釋, 韓國學報, 60쪽 75쪽. 302) 晋書 권103 劉曜載記. 303) 作刀者名伊太 書者張安也 (奈良國立博物館, 2004, 앞의 책, 45~46쪽). 그런데 七支 刀의 作 에는 部名+官等名+人名이 들어갈 수가 없어서 칠지도 제작자의 이름 이 기입되어 있지 않았으리라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銀釧銘에 庚子年二月多利作大夫人分二百川主耳 라고 적힌 바타당성 없는 추론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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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174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出 字形 鹿角形 금관을 착용한 신라왕이 사제적 성격이 농후하였다.325)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단순한 그 외양의 상호 유사성에만 그치지 않는다 제3절 백제의 천하 인식 175 한 양자의 형태는 칠지도의 그것과 연결되므로 칠지도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깊은 시사를 준다. 도도는 동방의 산상에 있는 천하의 가장 높은 나무라고 한다. 그 꼭대기 고 판단되어진다. 신라 금관과 같은 樹木形 관모 양식의 계통은 시베리아 제민족의 생명의 326) 나무인 世界樹에서 찾고 있다. 그렇다면 칠지도 형상의 계통 또한 세계 에 천계가 앉아 있다. 도도 밑에는 兩位 天神이 있어 천하의 귀신을 관제하 였다고 한다. 천신은 천상의 주재자이고, 천계는 補助靈으로서 天界 여행 수에서 구하여 무리가 없게 된다.327) 세계수는 나무 꼭대기에 한 마리의 새 의 사자라고 하겠다. 이러한 도도는 우주의 軸으로서 광명과 가 앉아 있는 모습인데 반하여 칠지도는 새만 없을 뿐이지 그것과 동일한 을 가진 신앙 대상으로 보인다. 산꼭대기의 나무는 천상계와 지상계를 잇 양식이라고 하겠다. 는 축으로 생각되었다.331) 이처럼 우뚝 솟은 산상의 도도와 형태가 연결되 이러한 세계수는 샤마니즘적인 祭儀圈에 분포하고 있는 신앙의 대상인 데, 중국의 漢代에도 존속하였다고 하므로328) 그 성격을 분명히 읽을 수 있 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桃都라는 神樹에 관한 玄中記 의다 음과 같은 기록이 주목된다. 邪의 기능 는 칠지도는 단군신화의 신단수와 같은 애니미즘적 신앙의 대상을 도검으 로 형상화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면 백제에서는 세계수 정상에 앉아 있는 새를 어떻게 인식하였을까? 북방민족들 사이에서 崇信의 대상이었거니와 백제의 別號가 鷹準 혹은 鷹 遊였던332)점을 생각한다면 매[鷹]로 인식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추 東方에는 桃都山이 있는데, 산상에는 한 그루의 큰 나무가 있다. 도도라고 이름하는데 가지 가 서로 3천리 떨어져 있다. 나무 위에는 天鷄가 앉아 있는데 해가 처음 나와 비출 때, 이 나무 의 천계가 곧 울면 천하의 닭들이 모두 따라서 운다.329) 위의 기사에 보이는 도도는 시베리아의 제민족 사이에서 신앙의 대상이 었던 세계수임을 짐작하게 된다. 양자간에는 세계수의 꼭대기에 앉아 있는 새가, 도도에는 닭으로 구체화된 차이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도도의 형태 는 중국 河南省 濟源縣에서 출토된 前漢 후기에 제작된 陶製品에 보이고 있다.330) 그런데 이것이 세계수와 동일한 형태인 데서도 입증이 된다. 이러 325) 金秉模, 1985, 한국인의 발자취 ; 1992, 앞의 책, 171~182쪽. 326) カ-ルンシエ 大林太良 譯, 1974, 朝鮮古代のシヤマンの冠, 古代學硏究 73, 14~15쪽. 327) 李道學, 1990, 百濟 七支刀 銘文의 再解釋, 韓國學報 60, 82쪽, 註 63) ; 1991, 百 濟 集權國家形成過程 硏究, 138~140쪽. 328) カ-ルンシエ 大林太良 譯, 1974, 앞의 글, 17쪽. 329) 諸橋轍次, 1956, 大漢和辭典 6, 324쪽, 東方有桃都山 山上有一大樹 名曰 桃都 枝相 去三千里 上有天鷄 日初出時照 此木天鷄卽鳴 天下鷄皆隨之. 330) 李鐵, 1989, 漢畵文學故事集, 173~175쪽. 桃都에 관한 설명은 이 글을 참조하였다. 정은 북방적인 세계수 신앙과도 잘 연결이 되는 것이다. 샤먼은 우주의 축 인 桃都를 통하여 천상계 왕래를 하면서 지상적인 것을 천상에, 신적인 것 을 인간에 전해 준다고 믿어졌다.333) 평양의 麒麟窟傳說에서도 고구려 주몽 왕이 기린마를 타고 천상과 지상을 왕래하였다고 한다.334) 따라서 이러한 맥락에서 유추한다면 칠지도는 백제왕이나 그 메신저인 매가 천상을 오르 내리는 계단 역할을 상징한 것으로 보여진다. 중국 신화에서 建木이라는 神樹는 하늘과 땅 사이를 오르내리기 위한 하늘의 사다리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建木은 사람들에게 天地의 중심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다.335) 331) 金秉模, 1992, 앞의 책, 171~172쪽. 332) 帝王韻記 권下 百濟紀, 或號南扶餘 或稱鷹準. 三國遺事 권4 皇龍寺九層塔條, 第一層日本 第二層中華 第三層吳越 第四層托羅 第五 層鷹遊 第六層靺鞨 第七層丹國 第八層女狄 第九層穢貊 에 보이는 鷹遊 가 백제의 別稱 인 鷹準임은 의심할 나위 없다. 333) 金烈奎, 1977, 韓國 神話와 巫俗硏究, 26쪽. 334) 李道學, 1990, 平壤 九梯宮의 性格과 그 認識, 國學硏究 3, 229 ~234쪽. 335) 徐朝龍, 1998, 三星堆 中國古代文明の謎, 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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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181 제2장 백제의 중국 대륙진출 제1절 요서지역 진출 1. 관계 기사의 검토 중국 남북조시대에 남조의 한 나라였던 宋(420~479)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宋書 가 전해지고 있다. 이 책에는 당시 송나라와 교류한 주변 국 가의 사정을 전하는 부분이 夷蠻 열전의 형태로 들어 있는데, 그 가운데 에는 百濟國傳도 있다. 그 첫 머리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내용의 기사 가 실려 있다. A. 백제국은 본래 高驪(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었다. 그 후 고려가 遼東 을 차지하자 백제는 遼西를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백제가 통치한 곳은 晉平郡 晉平縣이라 하였다.1) 한반도 서남부에 자리 잡고 있던 백제가 바다 건너 중국 대륙의 요서 지 역을 점령하고 일정 기간 통치를 실행하였다는 것이다. 워낙 간략한 내용 이어서 이를 통해 진출의 구체적인 시기와 동기 성격 등을 제대로 파악하 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사실을 전하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송서 의 이 기사는 백제사의 입장에서 볼 때 대단히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송나라의 뒤를 이어 南齊(479~502)라는 나라가 잠시 섰다가 곧 梁 (502~557)으로 넘어갔는데, 이 양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梁書 의 백제전 에도 다음과 같은 기사가 들어 있다. 1) 宋書 卷97 列傳 57 夷蠻 東夷 百濟國.
92 182 제2장 백제의 중국 대륙진출 B. 그 나라(백제)는 본래 句驪(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晉(265~420)나라 시 제1절 요서지역 진출 183 5) 까 걱정됩니다. 기에 구려가 이미 요동을 공격하여 차지하자 백제 또한 遼西 晉平 두 郡의 땅을 점거하 고 百濟郡을 설치하였다.2) 진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晉書 의 모용황 載記에 실린 이 기사는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前燕의 왕 모용황에게 그 참모인 봉유가 345년 무렵 시정의 이 역시 백제의 요서 진출 사실을 전하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보아 위에 서 인용한 송서 의 기록과 같은 맥락의 내용이다. 다만 송서 와 비교할 때, 백제의 진출이 이루어진 시기를 진나라 시기 라고 확정하고 있는 것 과 진출 지역을 요서군 과 진평군 의 두 군으로 언급한 것, 그리고 백제 가 설치한 군의 명칭을 百濟郡 으로 적고 있는 것 등이 차이점이다. 이들 두 사서 외에 남조의 역사를 요약한 南史 와 唐나라까지의 중국 역 대 왕조의 제도와 지배 권역 등을 정리한 通典 에도 백제의 요서 진출과 관련된 기록이 있다.3) 그렇지만 이들은 양서 의 기록을 거의 그대로 옮겨 놓은 정도이므로, 특별히 주목할 것은 없다.4) 한편 위의 기사들처럼 백제가 요서 지역에 진출했음을 직접적으로 전하 는 것은 아니지만, 유추를 통해 백제의 진출 사실을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이 있다. C. 慕容 의 기실참군인 봉유가 간언하였다. 句麗(고구려)와 백제 및 우문부와 단부의 사 람들은 모두 전쟁으로 인해 강제로 끌려온 자들이지 중국인들처럼 義를 사모하여 온 자 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모두들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 십 만여 호에 이르러 도성을 비좁게 할 정도로 많으니, 장차 우리나라에 큰 해가 되지 않을 개혁을 논하며 올린 상소문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봉유는 당시 전연의 수도인 龍城(현 중국 요녕성 조양시)에 붙잡혀 온 주 변 세력의 포로들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여기서 백제 의 포로가 함께 거 론되고 있다. 이는 곧 345년 이전의 어느 시기에 백제와 전연 사이에 전쟁 이 벌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 장소가 어디였는지 확 실하게 알 수 없으나, 말을 잘 다루던 유목 민족인 모용씨의 군대가 바다를 건너 한반도 중부의 백제 영역까지 침략을 감행했을 가능성보다는, 이전부 터 해상 활동에 익숙해 있던 백제의 군대가 모용씨의 본거지가 있었던 요 서 방면으로 출병함으로써 전쟁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더욱 높다고 봄이 합 리적이다. 사료 C와 연관되는 기사가 중국 역대 왕조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술한 資治通鑑 에도 보이고 있다. D. 앞서 부여는 鹿山에 자리잡고 있다가, 백제의 침략을 받아 부락이 쇠산해졌다. 그래서 서 쪽으로 燕(전연)에 가까운 곳으로 근거지를 옮겼는데, 연에 대해서 전혀 방비를 하지 않았 다. 이에 연왕 모용황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모용군, 모용각, 모여근 세 장군과 함께 1만 7천 기병을 이끌고 부여를 습격하도록 하였다. 드디어 부여를 멸망시키고 그 왕 玄과 부락 5만여 구를 포로로 하여 귀환하였다.6) 2) 梁書 卷54 列傳 48 諸夷 東夷 百濟. 3) 南史 卷79 列傳 69 夷貊 下 百濟 ; 通典 卷185 邊防 1 東夷 上 百濟. 4) 通典 의 기록을 보면, 백제의 진출 지역인 요서와 진평 두 군의 위치에 대해 지금(당나라 시기)의 柳城과 北平 사이이다. 라는 세주가 붙어 있다. 저자인 杜佑가 붙인 것으로 여겨지 는 이 세주에 의할 때, 당나라 때의 유성군과 북평군 일대가 백제의 진출 지역이었다고 생 각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세주는 곧바로 받아들이기에는 주저되는 점들이 많다. 과연 두 우가 얼마나 정확한 지식을 갖고 이러한 주석을 붙였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두우는 당 나라 때의 유성군을 과거의 요서군 으로, 북평군을 전대의 右北平郡 으로 생각하였는데, 후자 즉 우북평군이 곧 양서 기록 등에 보이는 진평군 이라고 판단하여 이런 주석을 달 아놓은 듯하다. 그의 이런 지리 인식은 앞으로 좀더 생각해 볼 여지는 있지만,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서기 346년의 사정을 전하는 이 기사는 그간 부여 멸망 관련 기사로도 많은 주목을 받아왔는데, 백제의 요서 지역 진출과도 매우 관련이 깊은 기 사이다. 이 기사에 의하면, 부여는 전연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기 이전에 이 5) 晉書 卷109 載記 9 慕容. 6) 資治通鑑 卷97 晉紀 穆帝 永和 2年 正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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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186 제2장 백제의 중국 대륙진출 제1절 요서지역 진출 거쳐, 438년 무렵에는 북중국의 패자 北魏에게 지배권이 넘어갔다. 요서 지역을 장악했던 이들 유목민족 왕조는 하나 같이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 고 있었으며, 따라서 백제가 이들의 영역을 침략하고서 군을 설치했다는 12) 것은 도저히 믿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187 백제군 등의 지명이 여타 사서나 지리서의 어느 곳에서도 확인되지 않는 다는 것도 불신론의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16) 이와 함께 지난 세기 후반에 새로 알려진 다음과 같은 자료도 요서 진출 불신론을 확장시키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들이 대체로 정황론 에 입각한 불신론이었다면, 사 료적 측면에서의 문제 제기, 즉 전거론 에 토대를 둔 불신론도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E. 백제는 옛 東夷 馬韓에 속해 있었는데, 晉나라 말기에 駒驪(고구려)가 요동을 공략하여 차 지하자, 樂浪 이 또한 요서 진평현을 차지하였다.17) 우선 백제의 요서 지역 진출을 전하고 있는 사서들이 모두 중국 측 사서 라는 사실에 착목하여 사료 자체의 신뢰성에 의문을 표하는 경우가 있었 다. 즉 관련 기사가 중국 측 사서에서만 보이고 우리 측 사서인 삼국사기 나 삼국유사 등에는 보이지 않으므로, 사실로 믿기 어렵다는 주장이다.13) 중국 측 사서 가운데서도 주로 남조의 역사를 기록한 책에만 나오고, 북 조의 역사를 적은 책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요서 진출의 사실성을 의 심하는 논거의 하나가 되었다.14) 백제가 군사적으로 진출했다고 전해지는 요서 지역은 실상 남조의 나라들과는 멀리 떨어져 있던 반면 북조 영역 내 에 들어 있었는데, 진출이 있었다면 당연히 관련 사실을 전해야 할 북조 측 의 사서에서는 정작 나오지 않고, 요서 지역의 사정에 어두웠을 남조 측의 사서에서만 거론되는 것은 무엇인가 착오에 의한 것이 아닐까 의심하는 것 이다.15) 뿐만 아니라 백제가 요서 지역에 진출한 시기로 양서 에 전해지는 진나 라 시기의 역사를 기록한 진서 에 구체적으로 그 실상을 알려주는 언급이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과 송서 와 양서 에 나오는 진평군 진평현 혹은 이 기사는 6세기 전반 양나라의 簫繹이 제작한 화첩인 梁職貢圖 에나 오는 것인데, 요서 진출의 주체가 백제가 아닌 낙랑 이라고 적혀 있다. 이 를 근거로, 실제 요서 지역으로 건너간 세력은 낙랑이며, 4세기 전반에 한 반도 서북부의 낙랑군이 고구려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요서 지역의 모용 씨 세력에게 귀부한 사실이 남조의 사관들에게 잘못 전해져, 마치 백제가 요서 지역에 진출했던 것인 양 오해가 생긴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18) 논자에 따라서는 양직공도 의 이 기사를 진나라 말기에 고구려가 요동 과 낙랑을 공략하여 차지하자, (백제가) 또한 요서 진평현을 차지하였다. 는 식으로 띄어읽기를 달리 하여, 낙랑은 고구려에 의해 공략당한 객체이 고 요서 진출의 주체는 숨어 있는 전체 문장의 대주어 백제 로 보기도 한 다.19) 그렇지만 문맥상으로 보면 낙랑을 요서 진출의 주체로 보는 것이 아 무래도 순리이다. 이럴 경우, 양직공도 에 보이는 낙랑 의 요서 진출 관 련 기사는 그동안의 막연한 긍정론을 반박할 수 있는 자료로서 활용될 여 지가 충분히 있다. 이처럼 정황론적 관점에서나 전거론적 관점에서 백제의 요서 진출을 부 12) 那珂通世, 1895, 앞의 글, 33쪽. 和田博德, 1951, 앞의 글, 91~92쪽. 13) 和田博德, 1951, 앞의 글, 91쪽. 金廷鶴, 1981, 앞의 책, 221~222쪽. 14) 金毓, 1940, 앞의 책, 20쪽. 和田博德, 1951, 앞의 글, 91~92쪽. 15) 남조 사관의 착각에 의해 요서 진출 사실이 사서에 잘못 들어갔을 가능성은 근래에 들어 유원재 김기섭 여호규 등에 의해 거듭 제기되었다. 정하는 논의들이 결코 만만치 않게 제기되어 있다. 여기에 덧붙여서, 그동 16) 和田博德, 1951, 앞의 글, 92쪽. 17) 梁職貢圖 百濟國使條. 18) 兪元載, 1989, 앞의 글, 110~111쪽. 19) 김세익, 1967, 앞의 글, 464쪽(김정배 엮음, 1991, 북한의 우리고대사 인식(Ⅱ), 대륙 연구소 출판부, 재수록본을 활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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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214 제2장 백제의 중국 대륙진출 같은 기록이다. 제1절 요서지역 진출 215 머물며 다스리다가, 후연의 공격을 받아 백제로 돌아오지 못하고 마침내 적의 칼날에 생을 마감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F. 모용농이 영지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여암 형제를 목베어 죽였다. 나아가 고구려를 정벌 하여 요동과 현토 두 군을 수복하고, 용성으로 돌아와 주둔하였다.41) 이러한 사태의 전개는 무엇보다도 백제에게 재앙에 가까운 엄청난 충격 을 던져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백제를 이용하여 북방의 고토를 회복하려던 꿈을 가졌던 동진도 큰 실망과 좌절감에 휩싸였을 것이다. 반대로 후연으 이것은 385년 11월에 벌어졌던 후연 모용농의 여암 토벌 및 요동 수복 사건에 관해 서술한 것인데, 이제까지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 하나를 전하고 있다. 그것은 곧 여암과 형제 관계에 있던 어떤 인물이 모용농에 의해 함께 참살되었다는 것이다. 처음 여암이 거병했을 때의 상황을 기록 한 부분에서는 그와 행동을 같이 하는 형 또는 아우 가 따로 있었다는 내 용이 없다.42) 그런데 여암의 패망을 전하는 위의 사료에서는 그의 형 또는 아우 가 점거의 또 다른 주역이었던 것처럼 나오고 있는 것이다. 미지의 이 존재는 과연 누구였을까? 여암과 같은 성을 가진 동진의 낙랑태수, 즉 백 제의 침류왕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것일까? 처음 백제에서 요서 파병이 결정될 때, 논란의 핵심은 과연 성공할 수 있겠느냐 였을 것이다. 그 같은 상황에서 침류왕은 파병에 반대하는 불만 세력을 잠재우기 위해서도 그 스스로가 직접 진두지휘하는 모습을 보일 필 요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중요한 전쟁에 왕이 親征을 행하는 것은 할아버지인 근초고왕과 아버지인 근구수왕으로부터 내려오는 일종의 관행 이기도 했다.43) 결국 백제의 침류왕은 패기만만하게 자신이 직접 나서서 바다를 건너 요 로서는 요서 지역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영역 내의 지배권을 확고히 다질 수 있는 계기를 얻었을 것이다.44) 이후 백제는 한반도 내에서의 세력 경쟁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팽 팽하게 전개되던 고구려와의 공방전이 서서히 막을 내리고, 고구려의 공격 에 일방적으로 밀리는 양상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침류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진사왕은 즉위 직후 바로 고구려에 대한 방비책 마련에 나섰 으나,45) 고구려의 침공은 시간이 흐를수록 거세졌다. 특히 고구려에서 광개 토왕이 등장한 이후에는 더욱 궁지에 내몰리게 되었다. 바다 건너 왜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동안은 칠지도의 명문에 나타난 바와 같은 백제 우위의 관계가 유지되어 왔겠지만, 더 이상 고자세적 외교 가 먹혀들기는 힘들게 되었을 것이다.46) 왜의 군사적 원조를 받아야 할 필 요성이 점증함에 따라 이러한 양상은 더욱 심화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요서 진출의 실패는 백제로 하여금 동진과 그 뒤를 이은 남조의 국가들에게 자신들을 最惠國으로 대우해 주도록 요구할 수 있 는 명분을 제공한 것이기도 하였다. 우리는 당신들을 위해 많은 피를 흘렸 고, 그 와중에서 왕마저 희생당하기도 했다. 그러니 당신들이 우리를 홀대 서 지역을 공략하고, 그곳에 진평군 진평현을 설치한 다음 몇 개월에 걸쳐 41) 晉書 권123 載記 ) 물론 애초 거병 기사에서 거론하지 않았을 뿐, 실제로 무읍에서 거병을 함께 한 형제가 있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때에는 언급되지 않았는데 패망 관련 기사에서만 그 형 제 가 등장한다는 것은 처음에 다른 장소에서 거병하여 여암과 합세했을 가능성을 강하 게 제기하는 것일 수 있다. 43) 고구려 정벌에 직접 나섰던 수 양제와 당 태종의 사례는 역사상 저명하지만, 바로 383년 에 동진 정벌을 시도했던 전진의 왕 부견도 친정에 나섰던 것이며, 고구려의 광개토왕도 396년 백제 공략에 수군을 이끌고 친정을 행하였다. 44) 후연의 모용수는 요서와 요동 정벌이 마무리된 직후인 385년 12월에 中山에 도읍을 정하 고, 이듬해 정월 황제의 위에 올랐다. 45)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3 진사왕 2년조(386)에는 나라 안의 사람으로 나이 15세 이상 을 징발하여 고구려의 침략을 막기 위해 청목령과 팔곤성, 서해를 잇는 關防을 설치하였 다는 기사가 보인다. 46) 일본서기 권10 응신천황 3년조에는 백제의 진사왕이 일본의 천황에게 예를 잃어서 紀 角宿 등 4인을 파견하여 그 무례함을 질책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 그동안의 고자세를 지키려는 백제 측과 새로운 관계 설정을 요구하는 일본 측의 마찰을 반영하는 기사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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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218 제2장 백제의 중국 대륙진출 제2절 산동 오월지역 진출 219 준을 대폭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해외 식민지 개척과 장기간 지만 신라는 중국에 정성을 다해 사대해 왔음을 강조하면서 신라 사신의 에 걸친 지배 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백제사의 전개 과정에서 요서 진출 여행에 편의를 제공해 줄 것을 부탁하는 내용이다. 외교 문서이므로 당연 의 역사적 의미를 올바로 자리매김해야 할 때이다. 히 연대기적 기록에 비해 수사적 과장과 왜곡이 들어갈 여지가 많지만, 아 예 없었던 사실이 날조되어 기록되지는 않았을 터이다. 따라서 일단 이 기 강종훈(가톨릭대학교) 사는 신라 지식인과 당나라 지배층 사이에서 고구려와 백제에 관해 공유되 던 지식이 일정하게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위의 기사에서 거론된 吳는 오늘날 중국 강소성 지역, 越은 절강성 지역 에 있었던 춘추전국시대의 나라 이름이다. 둘 다 양쯔강 하류의 남쪽 지역 제2절 산동 오월지역 진출 에 해당된다. 그리고 幽는 지금의 북경 일대에 설치되어 그 주변 지역을 포 괄한 주의 명칭이었고, 燕 역시 유주가 두어진 지역의 옛 왕조 이름이었다. 齊는 산동반도 지역에 있었던 왕조를 가리키며, 魯 또한 산동반도 서남부 1. 관계 기사의 검토 에 존재했던 나라의 이름이었다. 종합해 보면, 북쪽의 요하 유역으로부터 발해만을 낀 중국의 동북부 해안 지대와 산동반도 일대, 그리고 그 남쪽으 백제의 중국 대륙 진출에 대해서는 앞서 살펴본 요서진출설말고도 지금 까지 자주 거론되어 온 것이 하나 더 있다. 이른바 산동 오월진출설 이 그것이다. 로 양쯔강 하류 이남 지역에 이르는 광대한 범위가 고구려와 백제의 침탈 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최치원의 이러한 주장은 아무래도 과장이 많이 섞였을 수 있다. 그렇지 산동 오월진출설은 백제가 산동반도 일대와 양쯔강 하류 지역에도 군사 만 중국 왕조와 육지로 연접해 있던 고구려가 서쪽의 요하 유역과 발해만 적으로 진출했다는 주장인데, 일단 관련 사료로 어떤 것들이 있는지 하나 일대를 침탈한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고, 앞 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씩 살펴보도록 하자. 백제가 幽 燕 으로 표현될 수 있는 요서 지역을 바다를 건너 공략한 것 도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그 나머지 지역들, 즉 齊 魯 吳 越 로 G. 태사시중에게 올린 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중략)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 시절에 강한 군대가 백만이었는데, 남으로는 吳 越 지방을 침범하고 북으로는 幽 燕 齊 魯의 47) 땅을 소란하게 하여 중국의 큰 좀이었습니다. 표기된 지역들의 경우 고구려와 백제 가운데 어느 쪽이 진출했을지 문제가 되겠지만, 미리부터 백제를 배제해야 할 이유는 없다. 결국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에 실린 위의 기사를 통해, 백제가 요서 지 역뿐만 아니라 산동반도로부터 양쯔강 이남에 이르는 중국의 동부 해안 지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에 실린 이 기사는 본래 당나라의 태사시중에게 보낸 글의 일부로서, 과거에 고구려와 백제는 중국을 늘 괴롭히는 존재였 대에도 진출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제기해 볼만하다. 한편 중국 北齊(550~577)의 역사를 기록한 北齊書 에 보이는 다음의 기사도 백제의 산동반도 진출과 긴밀하게 관련되는 것으로 거론되어 왔 47) 上大師侍中狀云 (중략) 高麗百濟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 三國史記 권46 ( 列傳 6 崔致遠). 다.
111 220 제2장 백제의 중국 대륙진출 제2절 산동 오월지역 진출 H. 武平 2년(571) 정월 무인일에 백제왕 餘昌(위덕왕)을 使持節 都督 東靑州刺史로 삼았다.48) 221 충성이 일찍부터 두드러졌고 공무에 힘썼으므로 이제 行龍 將軍 帶方太守로, 양무는 뜻과 행동이 깨끗하고 공무를 등한히 하지 않았으므로 이제 行建威將軍 廣陵太守로, 회 이 기사는 6세기 중후반에 중국 화북 지방의 동부를 장악하고 있던 북제 가 백제의 위덕왕에게 작호를 수여한 사실을 전하는 것이다. 위덕왕이 받 매는 뜻을 세움이 주도면밀하여 누차 성과를 거두었으므로 이제 行廣武將軍 淸河太守로 50) 각각 임시 제수하였습니다. ② 建武 2년(495), 모대가 사신을 보내어 (중략) 또 표를 올려 말하였다. 신이 보낸 은 작호 속에 들어 있는 사지절 도독 과 자사 는 황제로부터 일정 지역의 行龍 將軍 樂浪太守 兼 長史 慕遺와 行建威將軍 城陽太守 兼 司馬 王茂, 그리고 兼 參 군사권과 행정권을 위임 받은 존재를 가리킨다. 이는 곧 위덕왕이 북제로 軍 行振武將軍 朝鮮太守 張塞, 行揚武將軍 陳明 등은 관직에 종사하면서 사사로움을 잊 부터 東靑州 라는 지역의 지배권을 공식 인정받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고 오로지 公務에만 힘써, 위급함을 보면 목숨을 던지고 어려움에 처해서는 자신을 돌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말하는 동청주 가 과연 어디인가이다. 靑州 는 고대로 산동 지방에 대한 중국 측의 고유 명칭이었다. 동청주는 청주의 동 쪽 지역을 의미할 것이니, 산동반도의 동부 지역 어느 곳일 가능성이 자연 보지 않았습니다. 이제 臣의 사신된 임무를 맡아 험한 파도를 헤치고 바다를 건너가 그 지극한 정성을 다하니 실로 그 관작을 올려주어야 마땅하옵니다. 각각 임시로 行職을 서임하였사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聖朝께서는 특별히 정식 관작으로 제수하여 주소 51) 서. 히 제기된다. 실제로 남조의 송나라 명제 泰始 연간(465~472)에 산동반도 동남부에 동청주 라는 행정 구역이 일시적으로 설치되기도 했다. 그렇다 I-①, ②는 5세기 말 백제의 동성왕이 두 차례에 걸쳐 남제에 사신을 보 면 위의 기사는 백제의 위덕왕이 이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북제로부터 확 내면서, 힘든 사행의 임무를 맡은 사신단의 노고를 참작하여 그들의 관작 49) 보한 사실을 전하는 기사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하다. 사료 G에서 어느 을 올려달라고 주문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백제의 사신들이 정도 가능성을 탐색해 보았던 백제의 산동반도 진출이 이 기사를 통해 조 廣陽 朝鮮 帶方 廣陵 淸河 樂浪 城陽 등 중국의 동해안 지대 여러 금 더 구체적으로 확인되는 셈이다. 곳에 설치된 바 있는 郡들의 태수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52) 여 이밖에 중국 남조의 한 나라였던 南齊(479~502)의 역사를 기록한 남제 서 에도 백제의 중국 동부 해안 지대 진출을 시사하는 기록들이 남아 있다. 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겠으나, 일단 백제가 이 지역들 을 실제로 자기 영역으로 삼고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될 수 있다.53) 이와 관련하여 같은 남제서 백제전과 여타 사서에 보이는 다음의 기록 I-① (백제왕) 牟大(동성왕)가 또 表를 올려 말하였다. 臣이 보낸 行建威將軍 廣陽太守 兼 長 들도 백제의 산동반도 진출을 시사하는 것으로 주목받아 왔다. 史인 高達과 행건위장군 朝鮮太守 兼 司馬인 楊茂, 그리고 行宣威將軍 兼 參軍인 會邁 등 3인은 뜻과 행동이 청량하고, 충성스러움이 일찍이 드러나서 지난 태시 연간에 宋朝 에 사신을 다녀온 바 있는데, 이번에도 신의 사신된 임무를 맡아 험난한 파도를 헤치고 바다를 건너갑니다. 그 지극한 정성을 생각한다면 마땅히 그들의 관작을 올려주어야 하 옵기에, 선례에 따라 각자에게 行職을 假授하였습니다. (중략) 고달은 변방에서의 48) 武平二年 春正月 (중략) 戊寅 以百濟王餘昌爲使持節都督東靑州刺史 北齊書 권8 ( 後主 紀). 이 기사는 三國史記 卷27 百濟本紀 5 威德王 18년조에 전재되어 있다. 단 三國史記 에는 東靑州諸軍事 라는 직함이 추가되어 있다. 49) 方善柱, 1971, 百濟軍의 華北進出과 그 背景, 白山學報 11, 3~4쪽. 50) 牟大又表曰 臣所遣 行建威將軍廣陽太守兼長史 臣高達 行建威將軍朝鮮太守 兼司馬 臣楊 茂 行宣威將軍兼參軍 臣會邁等三人 志行淸亮 忠款夙著 往泰始中 比使宋朝 今任臣使 冒涉 波險 尋其至效 宜在進爵 謹依先例 各假行職 (중략) 達邊效夙著 勤勞公務 今假行龍 將軍 帶方太守 茂志行淸壹 公務不廢 今假行建威將軍廣陵太守 邁執志周密 屢致勤效 今假行廣 武將軍淸河太守 南齊書 卷58 ( 列傳 39 東夷 百濟國). 51) 建武二年 牟大遣使 (중략) 又表曰 臣所遣 行龍 將軍樂浪太守兼長史 臣慕遺, 行建武將軍 城陽太守兼司馬 臣王茂 兼參軍行振武將軍朝鮮太守 臣張塞 行揚武將軍 陳明 在官忘私 唯 公是務 見危授命 蹈難弗顧 今任臣使 冒涉波險 盡其至誠 實宜進爵 各假行署 伏願聖朝特 賜除正 南齊書 卷58 ( 列傳 39 東夷 百濟國). 52) 이들 중국 군현의 5세기 당시의 위치에 관해서는 方善柱, 1971, 앞의 글, 9~10쪽 참고. 53) 方善柱, 1971, 앞의 글.
112 222 제2장 백제의 중국 대륙진출 제2절 산동 오월지역 진출 223 J-① 이 해에(490년: 인용자주) 魏虜 가 또 기병 수십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 그 국경 백제였다. 주지하다시피 5세기 말 당시 백제와 북위는 고구려 및 서해를 에 쳐들어갔다. 牟大가 沙法名 贊首流 解禮昆 木干那 등을 보내어 군사를 이끌고 사이에 두고 서로 격절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북위가 백제의 영역까지 쳐 오랑캐 군대를 치게 하여 크게 이겼다.54) ② (永明 6년: 488) 魏 가 군사를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다가 백제에게 패하였다.55) ③ 永明 2년(484) 魏虜 가 백제를 정벌하여 백제왕 弁都(牟大의 오기로 사료됨)를 크게 56) 격파하였다. 들어왔다면, 그것은 곧 고구려의 영역을 통과한 것이거나 바다를 건넌 것 이거나 둘 중 어느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가 북위의 대군으로 하여 금 자국의 수도가 있는 한반도 서북부를 통과하게 했다는 것은 개연성이 매우 희박하다. 그렇다면 북위가 백제의 영역을 침범한 것은 바다를 통해 위의 기사들은 480년대와 490년대에 백제가 魏虜 또는 魏 와 전쟁 서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을 벌였음을 전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魏虜 는 남제서 의 일반적 용례에 그러나 이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즉 수군이 아닌 의할 때 당시 남조와 대립 관계에 있던 북위를 지칭하며, 魏 역시 그러 騎兵 수십만으로 백제를 공격했다는 J-①의 기사를 보면 북위가 바다를 하다. 각각의 기사를 대조해 보면, J-①은 490년, J-②는 488년, J-③은 484년에 해당하는 것으로 전하고 있어 일단 전쟁의 시기가 다르고, J- 건너와 백제를 공격했다는 것이 합리적으로 이해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 러면 육로를 통해서도 아니고 해로를 통해서도 아니라면, 도대체 북위는 어떻게 백제를 공격했다는 말인가? ① ②가 백제의 승전을 전하고 있음에 반해 J-③은 북위의 승리를 전하 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북위가 침입한 백제의 영역이란 한 고 있다는 점에서 전쟁의 결과도 달리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어쨌든 이 기 반도 서남부의 백제 본토가 아니고 중국 대륙에 설치된 백제의 군이었으리 사들을 신빙한다면, 백제와 북위 사이에 몇 차례 전쟁이 있었던 것은 분명 라는 추정이다.57) 이것은 위 사료를 분석할 때 얻을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하다고 해야겠다. 결론 가운데 하나가 된다. 전쟁이 벌어지게 된 배경이나 동기는 전혀 알 수 기사 내용에 따르면, 침략을 감행한 쪽은 북위였고 그것을 막아낸 쪽은 없고, 북위가 침범한 중국 대륙 내 백제의 영역이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도 말하기 어렵지만, 앞서 살펴본 사료 H 등과 연결 짓는다면 산동반도 일대 54) 是歲 魏虜又發騎數十萬 攻百濟 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 贊首流 解禮昆 木干那 率衆 襲擊虜軍 大破之 南齊書 卷58 ( 列傳 39 東夷 百濟國). 55) 魏遣兵擊百濟 爲百濟所敗 資治通鑑 卷136 ( 齊紀 2 武帝 永明 6년). 三國史記 권26 百濟本紀 東城王 10년조에도 魏遣兵來我 爲我所敗 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것은 백제측의 전승에 입각한 것이라기보다는 위의 資治通鑑 기사를 피아만 바 꾼 채 해당연도에 옮겨 실은 것으로 사료된다. 56) 永明二年 魏虜征之 大破百濟王弁都 建康實錄 卷16 ( 齊 下 列傳 東夷 百濟). 建康實錄 은 唐의 許嵩이 편찬한 20권의 역사서로 建康에 수도를 둔 吳에서 陳에 이르 는 육조의 事蹟을 기록한 책이다. 당 숙종 至德 원년(756) 이후에 완성된 것이라 한다(田 中俊明, 1981, 南齊書 東夷傳の缺葉について, 村上四男博士和歌山大學退官記念 朝鮮 史論文集, 214쪽). 그 백제전의 내용을 살펴보면, 백제가 馬韓이 아닌 弁辰에서 나온 나 라라고 하고, 484년 당시의 백제왕인 동성왕의 이름을 牟大가 아닌 弁都라고 적고 있다. 이러한 내용상의 오류와 편찬 시기가 비교적 떨어진다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그 사료적 가치는 그다지 높지 않다고 여겨진다. 에 혹시 있었을 수 있는 백제 영역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일단 해볼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기사들은 백제가 어느 시기엔가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한 중국의 동해안 일대를 점령하고 군현을 설치했을 가능성을 엿보게 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요서진출설과 마찬가지로 이 산동 오월진출설에 대 해서도 그간 많은 학자들이 회의를 품어왔다. 그럼 절을 바꿔서 그 불신의 논거로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57) 김세익 김상기 방선주 이명규 등이 이렇게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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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264 제3장 고구려 남진과 백제의 정치변동 영락 6년(396)조에는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백제의 58城 700村을 공파 제1절 고구려 남진과 백제의 대응 265 내용을 비교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하고, 수도 한성을 포위하여 阿莘王의 항복을 받아낸 사실을 기록하고 있 먼저 삼국사기 에 나타난 4세기 후반에 고구려와 백제의 공방전의 흐름 다.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및 백제본기에도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 을 이해하기 위하여, 고구려본기 및 백제본기에 나타난 고구려와 백제 대 기사는 다수 기록되어 있는데, 비문의 백제 정벌 기사와는 그 기년이나 내 외관계 기사를 종합 정리하면 다음x표 1y 과 같다. 용에서 일정한 차이가 있다. 즉 비문에는 영락 6년에만 고구려의 백제 공 격 기사가 기술되어 있으나, 고구려본기 및 백제본기에는 광개토왕 즉위년 x표 1y고구려와 백제의 전투 표 (백제 진사왕 8년)에서 8년(백제 아신왕 8)까지 양국의 충돌이 9회의 기년 기사로 분산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는 물론 양 자료가 갖는 성격의 차이에서 비롯한다. 즉`광개 본기 출전 기사 서기 고구려 369 故國原王 39 토왕비문a 에서는 그 때까지 백제와의 전쟁에서 얻은 성과를 영락 6년에 일 괄적으로 기록하는 서술법을 취한 것이다.64) 사실 비문은 광개토왕의 위훈 371 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여러 가지 서술법을 최대한 발휘하고 있기 고국원왕 41 백제 접전 지역 공격주체 내용 원전기사 近肖古王 24 雉壤(半乞壤) 고구려 兵2萬 水谷城 백제본기 근초고왕 26 浿河 고구려 백제본기 근초고왕 26 平壤城 백제精兵3萬 평양성 함락 백제본기 고구려본기 때문에,65) 일정 기간 백제와의 전쟁에서 얻은 모든 성과를 광개토왕의 업적 373 근초고왕 28 으로 부각시키기 위해서 광개토왕 親征 시의 성과로 기술하였을 것으로 짐 375 小獸林王 5 근초고왕 30 水谷城 고구려 백제본기 작된다. 이처럼 광개토왕비 의 기사는 서술상의 한계가 있지만, 삼국사 376 소수림왕 6 近仇首王 2 백제 北鄙 고구려 (백제본기) 소수림왕 7 근구수왕 3 平壤城 백제兵3萬 (백제본기) 소수림왕 7 근구수왕 3 고구려 (백제본기) 기 에는 전하지 않는 이 시기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는 사 료라는 점에서 유의된다. 377 그런데 광개토왕비 와 삼국사기 라는 양 자료의 차이는 단지 정벌전의 시간상 차이만이 아니다. 전쟁의 결과로서 당시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영 386 의 이름을 일일이 밝히고 있다. 이는 당시 고구려인들이 58성의 공벌이 갖 는 의미를 남다르게 인식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삼국사기 에 전하는 내용을 보면 이와는 다른 정황이 드러난다. 따라서 이점에서도 양 자료의 64) 武田幸男, 1978, 廣開土王碑文辛卯年條の再吟味, 古代史論叢 上, 50~84쪽. 65) 이러한 기술 태도는 유명한 신묘년조 기사에서도 확인된다. 여기서 辛卯年은 391년으로 광개토왕이 왕위에 오른 永樂 1년이다. 즉 이전의 사정과는 관계없이 대왕의 치세 동안의 업적만을 드러내는 기술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백제본기 백제 靑木嶺-八坤城-西海 백제본기 관방 설치 辰斯王 2 역의 변화에서도 차이가 있다. 예컨대 영락 6년의 성과는 백제로부터 58城 700村을 공파한 것이었으니, 비문에는 장황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58성 靑木嶺축성 故國壤王 3 (백제본기) 고구려 고구려 南鄙 백제 389 고국양왕 6 진사왕 고국양왕 7 진사왕 6 都坤城 백제 백제본기 廣開土王 1 진사왕 8 石峴城 고구려兵4萬 석현성등 10성함락 백제본기 광개토왕 1 진사왕 8 關彌城 393 광개토왕 2 阿莘王 2 關彌城 백제軍士1萬 백제본기 광개토왕 3 아신왕 3 水谷城 백제 백제본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3 (백제본기) 관미성 함락 고구려 築國南七城 고구려본기 (백제본기) 고구려본기
134 266 제3장 고구려 남진과 백제의 정치변동 본기 출전 기사 서기 고구려 광개토왕 백제 아신왕 4 제1절 고구려 남진과 백제의 대응 267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關彌城을 쳐서 함락시켰다. 접전 지역 공격주체 내용 원전기사 A-(고)광개토왕 1년(392) 가을 7월에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10성을 함락시켰다. 겨울 10월에 백제 關彌城을 쳐서 함락시켰다. 그 성은 사면이 깎은 듯 가파르고 바닷물 浿水 백제본기 백제 아신왕 4 백제 兵7千 靑木嶺주둔, 폭설로 회군 백제본기 398 아신왕 7 백제 399 아신왕 8 에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왕은 군사를 일곱 방향으로 나누어 공격한 지 20일만에야 함 락시켰다. 漢山北柵진주, 정벌 중지 백제본기 백제, 고구려정벌계획 백제본기 * 출전 기사는 고구려본기와 백제본기 중 기사가 있는 왕대의 기년만 기재. 는 공격주체를 표기하고, 원전기사는 기사의 원전계통을 판단함.( )는 불분명 B-(백)아신왕 2년(393) 가을 8월에 왕이 武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關彌城은 우리 북 쪽 변경의 요충지이다. 지금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으니 이는 寡人이 분하고 애석하게 여 기는 바이다. 경은 마땅히 마음을 써서 설욕하라. 드디어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 의 남쪽 변경을 칠 것을 도모하였다. 무가 몸소 사졸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면 서 石峴城 등 다섯 성을 회복하려고 먼저 관미성을 포위하였으나, 고구려 사람들은 성문 위x표 1y 을 보면 총 14번에 걸쳐 고구려와 백제의 충돌이 벌어지고 있 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12건의 기사는 양 본기에 모두 나타나는 공유 기사 을 닫고 굳게 지켰다. 무는 군량 수송이 이어지지 못하므로 이끌고 돌아왔다. B-(고)광개토왕 2년(393) 가을 8월에 백제가 남쪽 변경을 침략해 왔으므로, 장수에게 명하 여 막게 하였다. 이다. 이렇게 고구려본기와 백제본기에 보이는 동일한 내용의 기사에서 어 느 본기의 기사가 原典 자료에 의해 찬술된 것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392년 고구려의 관미성 함락 기사는 고구려본기의 기사가 훨씬 자세하 즉 본기의 동일 기사는 계통이 다른 양국의 전승 자료가 각각 별개의 원전 기 때문에 얼른 보면 고구려본기의 자료가 原典 계통으로 판단하기 쉽다. 이 될 가능성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는 한 본기를 구성하는 자료를 원전으 그러나 이어지는 393년 아신왕이 관미성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보면 관미 로 해서, 다른 본기에는 주어와 객어만 바꾸어 기사의 내용을 그대로 혹은 성에 대한 매우 자세한 기록으로서, 이는 백제본기가 원전 계통인 자료임 약술하는 예가 일반적이다. 그런데 어느 기사가 원전 자료에 의한 것인지 은 분명하다. 따라서 392년의 관미성 기사도 백제본기의 자료 계통일 가능 의 여부는 기사 내용의 상세함으로 판단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동일한 내 성을 검토해야 한다. 더욱 앞의x표 1y 에서 보듯이 양국의 공유 기사중에서 용이라고 하더라고 구체적인 기사 내용에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경우에는 백제본기 기사가 원전 자료인 경우가 많은데, 유독 이 392년의 관미성 기 서로 다른 계통의 원전에 의한 것으로 보고자 한다. 다만 기사의 내용이 동 사만을 고구려 계통 기사로 이해하는 것도 어딘지 자연스럽지 않다. 따라 일한 경우에는 원전의 계통을 판단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기준을 가지고 서 392년 고구려의 관미성 함락 기사 역시 백제 계통 자료에 의거한 것으 이 공유 기사의 원전 계통을 따져본 결과를 위x표 1y 에 밝혔다. 로 파악하고자 한다. 다만 392년 393년의 關彌城 관련 기사는 좀 유의할 필요가 있다. 삼 국사기 의 관련 기사는 다음과 같다. 이처럼 앞의 표에 보이는 기사의 원전 계통을 판단한 결과 삼국사기 본 기의 양국 관계 기사(369~399)를 전해주는 총 12건의 공유 기사 대부분이 백제의 전승 자료에 의거하였다고 볼 수 있다. 즉 삼국사기 본기의 백제 A-(백)진사왕 8년(392) 가을 7월에 고구려 왕 談德이 군사 4만 명을 거느리고 북쪽 변경 을 침공해 와서 石峴城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군사를 부리는 데 능하다 는 말을 듣고 나가 막지 못하니 漢水 북쪽의 여러 부락들이 다수 함락되었다. 와 고구려의 전쟁 기사는 백제측 자료를 原典으로 하는 편찬 기록이다. 따 라서 삼국사기 본기 기사를 이해할 때에는 그것이 백제의 시각을 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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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272 제3장 고구려 남진과 백제의 정치변동 제1절 고구려 남진과 백제의 대응 273 있다. 그리고 이후 백제가 고구려와의 충돌한 기사는 분명하게 보이지 않 가 水谷城과 浿水에서 벌어졌다는 삼국사기 의 본기 기사를 연관시켜 볼 는다. 물론 이후 비문에 등장하는 倭의 존재를 통해 백제의 전략을 짐작해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영락 6년 백제정벌전 기사의 경우도 그러하듯이, 이 볼 수 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영락 9년의 신라 침공이나 14년의 대방계 대방계 전투 기록도 기년에는 차이가 있지만 결국 같은 역사적 맥락에서 침공에서 백제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음이 분명한데도, 비문에는 主敵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비문의 404년 대방계 전투 기사는 곧 삼국사 로 倭만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당시 고구려의 天下觀을 반영한 기 본기의 394년과 395년에 수곡성 패수 등 예성강 지역에서 벌어진 전 서술 방식으로, 백제는 이미 고구려의 천하질서에 편입된 속민으로 간주하 투로 이해되며, 이전의 전선으로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하려는 백제의 전략 면서, 고구려의 천하를 어지럽히는 존재로 倭만을 지목하고 있는 당시 고 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구려인의 인식을 반영한 결과로 보인다. 비문의 경우에 396년(영락 6)의 58성 상실 및 404년(영락 14)의 대방계 396년의 패배 이후 백제는 군사적 협력 대상으로 倭를 한반도 내로 동원 전투라는 흐름은 삼국사기 본기에서는 392년의 관미성과 한수 이북 영 하여, 399년(영락 9)에는 고구려 영향권의 확대를 견제하기 위하여 신라를 역 상실에서 이후 394년의 수곡성 전투, 395년의 패수 전투가 벌어지는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고구려의 신속한 군사 개입으로 실패로 전황의 맥락과 상통하는 바가 있다. 돌아가고 말았다. 이때 고구려의 출병은 비록 광개토왕의 親征은 아니었지 만, 5만의 대군을 파견한 것으로 보아 한반도내에서 백제를 견제하고 주도 한편 이후 고구려와 백제의 전투와 관련해서 검토할 기사는 영락 17년조 (407) 기사이다. 권을 장악하려는 상당히 의욕적인 출병임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는 신라를 구원하여 자국의 세력권 내로 편입시키는데 그치지 않 고, 낙동강유역의 가야지역까지 진출하여 백제의 우군인 가야와 왜를 격파 17년 丁末에 왕께서 敎하여 보군과 마군 도합 5만명을 보내어 合戰하여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하였다. 노획한 (적병의) 갑옷이 만여 벌이며, 군수물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또 沙溝城, 婁城, 住城 城 城을 공파하였다.70) 하여 백제를 고립시키려는 작전을 구사하였던 것이다. 이 작전은 성공을 거두는 듯하였으나, 요동지역의 정세 변동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하였다. 이 17년조 기사에는 정벌 대상이 결락되어 있어, 그 대상을 누구로 보느 냐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지만 백제로 보는 견해가 다수이다.71) 이 기사 400년(영락 10)에 왜군이 帶方界를 공격하자 광개토왕은 군대를 이끌고 를 대백제전으로 보는 주된 근거로는 위 기사의 沙溝城이 백제본기 전지 이를 격파하였다.69) 이 전투 역시 왜군을 동원하여 직접 고구려 帶方 지역 왕 13년조의 沙口城에 비정되고, 또 婁城의 婁 는 영락 6년의 대백제전 을 공격하여 일어난 것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광개토왕비 에 의하면, 396 때에 공파한 성이름에 흔히 보이고 있듯이 한반도계 지명이라는 점을 들 년 백제의 항복 이후에도, 백제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왜군을 끌어들이 수 있다. 는 등 다양한 외교 전술을 구사하면서 고구려와 치열하게 대립하였음을 알 그런데 이 기사에서도 다른 對倭戰의 기사와 마찬가지로 斬煞蕩盡 이라 수 있다. 그런데 이 대방계 공격 기사와 관련해서는 앞서 394년과 395년의 전투 69) 광개토왕비, 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 石城 連船 王躬率 從平穰 鋒相遇王幢要截 刺倭寇潰敗斬煞無數. 70)`광개토왕비a, 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 [王]師 (四方)合戰, 斬煞 蕩盡. 所獲鎧鉀一萬餘領, 軍資器械不可稱數. 還破沙溝城, 婁城, [住]城, 城, 城. 71) 이기동, 1987, 앞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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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276 제3장 고구려 남진과 백제의 정치변동 제1절 고구려 남진과 백제의 대응 277 우선 비문에 이 58성의 이름을 모두 밝힌 것으로 보아, 이 58성의 획득 3) 永樂 6년조 58城의 위치와 고구려의 신영역 을 매우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이는 58성이 당시 중요 전략적 위치를 본 절에서는`광개토왕비a 에 기술되어 있는 396년에 고구려의 대 백제 차지하는 지역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58성에 대한 개별 지명 비정이 거의 앞장에서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략이나마 그 지역적 범주만이라도 살펴보고자 한 검토한 바와 같이 삼국사기 본기 기록에 의하면 광개토왕 초년에는 고구 다. 한편 영락 6년에 정복한 58성 중 상당수의 성에서 수묘인연호가 차출 려가 백제를 압박하여 영역을 차지하는 형세였으나, 점차 백제가 반격을 되고 있다. 양 기사에 나타나는 58성과 신래한예 차출 지명을x표 2y 로만 시도하여 대체로 개성에서 임진강을 잇는 2차 방어선은 충분히 확보한 듯 들었다. 77) 전을 통해 획득한 지역 58성의 위치가 어디인가를 검토하자. 한 정황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서는 백제의 반격 이전에 즉 고구려가 백제 영역을 최대한 x표 2y영락 6년조 58성과 수묘인연호조의 신래한예 차출 지명 확보한 상황을 보여주는 영락 6년조 기사에서 고구려가 차지한 영역 범위 영락 6년조 58성 수묘인연호조 신래한예 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그동안 이에 대한 논란 역시 적지 않았 1. 寧八城 19. 而耶羅(城) 沙水城 다. 먼저 58城의 위치를 언어학적인 유사함을 근거로 위치 비정을 시도한 2. 臼模盧城 20. ( )城 牟婁城 78) 연구가 있으나 취하기 어렵다. 또 58성을 예성강에서 한강 이북의 지역 37 豆比鴨岑韓 3. 各模盧城 21. 於(利)城 에 한정하는 견해도 있으나, 58성을 배치하기에는 너무 좁은 지역이라는 4. 幹 利(城) 22. 城 점에서 의문이다. 왜냐하면 58성 중 31개의 성에서 수묘인연호가 차출되 求底韓 5. 城 23. 豆奴城 舍 城韓穢 고 있음을 보면 일종의 행정단위의 성임을 알 수 있는데, 이에 어느 정도 6. 閣彌城 24. 沸 古(模)耶羅城 16 대응시킬 수 있다고 추정되는 통일신라기 이 지역 군현의 수는 58개에 크 7. 牟盧城 25. 利城 게 못미치기 때문이다. 한편 이 58성의 위치를 예성강에서 임진강 사이와 8. 彌沙城 26. 彌鄒城 경기만 일부, 그리고 남한강 상류지역에 소재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 阿旦城 雜珍城 10/13 9. 舍 城 27. 也利城 巴奴城韓 10. 阿旦城 28. 太山韓城 臼模盧城 2 各模盧城 3 79) 80) 81) 데,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대체로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77) 이 절의 서술은 임기환,`광개토왕비에 보이는 백제관련 기사의 검토a를 주로 참조하 였다. 78) 酒井改藏, 1955, 好太王碑面の地名について, 朝鮮學報, 57~60쪽.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381~382쪽 이에 대한 비판은 이기동, 1987, 앞의 글 참조. 79) 盧重國, 1986, 漢城時代 百濟의 地方統治體制, 邊太燮華甲紀念論叢, 147쪽. 80) 58城 중 31城이 수묘인연호의 차출단위가 되고 있음은 이들 城이 조세 수취등 지방 통치 행정을 담당하는 행정단위의 城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盧重國은 58성을 700村과 관련을 맺고 있는 지역단위의 城으로 파악하고 있다(1986, 앞의 글, 142쪽). 81) 李道學, 1988, 永樂 6年 廣開土王의 南征과 國原城, 손보기停年紀念論叢, 92~97쪽. 勾牟客頭 9 (炅)古城 客賢韓 11. 古利城 29. 掃加城 12. 利城 30. 敦拔城 幹 利城 雜珍城 31~32. 城 彌(鄒)城 奧利城 33. 婁賣城 也利城 27 豆奴城 23 奧利城 14 牟水城 15. 勾牟城 34. 散(那)城 16. 古(模)耶羅城 35. (那)旦城 須鄒城 17~18. (頁) 城 36. 細城 百殘南居韓
140 278 제3장 고구려 남진과 백제의 정치변동 영락 6년조 58성 제1절 고구려 남진과 백제의 대응 수묘인연호조 신래한예 37. 牟婁城 50. 古牟婁城 38. 于婁城 51. 閏奴城 39. 蘇灰城 52. 貫奴城 40. 燕婁城 析支利城 54. (曾) (城) 42. 巖門 城 55. 盧城 43. 林城 56. 仇天城 44~46. 57~58. 穰城 47. [利]城 48. 就鄒城 49. 拔城 太山韓城 農賣城 閏奴城 古牟婁城 城 味城 就咨城 穰城 散那城 那旦城 勾牟城 於利城 比利城 細城 년조는 혹 공취의 시간 순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짐작한다. 물 론 이 경우에도 고구려군대가 활용한 교통로의 정황도 함께 반영되어 있을 것이니, 공취순이라고 하더라도 당연히 교통로와 지역적 범위라는 기준도 함께 반영되어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어쨋든 58성의 획득은 고구려의 군사 행동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며, (48) 따라서 58성의 위치와 범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당시 고구려군의 남하 경 36 서해안 일대로 이어지는 경로이며, 다른 하나는 수곡성-(철원)-(포천) 등 로를 추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일단 고구려와 백제가 초기에 주되게 충돌한 지점인 雉壤(배천), 水谷城 (신계)은 각각 예성강의 하류와 상류 지역으로서 고구려와 백제 지역을 연 결하는 2개 경로의 거점들이다. 즉 하나는 치양-청목령(개성)-관미성 등 으로 이어지는 내륙 경로를 상정할 수 있다. 그런데 영락 6년조의 58성의 기재 순과 수묘인연호조 신래한예 차출성 그런데 광개토왕의 즉위 초에는 과거의 예성강 일대보다는 그 전선을 남 의 기재 순에는 일정한 차이가 있다. 이는 서로 다른 기준에 의해 기술되었 하하여 일단 지금의 개성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의 북방 요 음을 뜻한다. 그러면 그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새인 청목령 일대를 어느 정도 확보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이후 고구 먼저 수묘인연호조에서 구민 차출지역의 기술순은 교통로와 지역을 기준 려군이 이용한 주 경로 역시x표 1y 을 보면 서해안 경로인 듯하다. 그런데 으로 구분되어 있다.82) 따라서 같은 수묘인연호조에 기술되어 있는 신래한 개성을 경유하는 서해안 남하 경로 역시 구체적으로는 다시 2개 경로로 나 예 차출지역의 기술 순도 구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교통로와 지역에 따른 누어 볼 수 있겠다. 것으로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한다. 하나는 개성에서 장단을 거쳐 瓠蘆河나 七重河를 건너 積城을 통하여 양 그렇다면 수묘인 연호조와 상당히 다른 영락 6년조의 58성 기술 순은 적 주를 지나 중랑천이나 왕숙천을 끼고 남하하는 경로이다. 이 경로는 강을 어도 교통로와 지역에 따른 기술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58성을 정리한 건너기 쉬우며, 동서로 가로막힌 지형적 장애물이 없는 등 지형상의 이점 x표 2y 를 보면, 삼국사기 에 광개토왕 1년에 공취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 때문에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고 생각된다. 실제 이 경로에는 현재에도 아 는 關彌城(6)이 초반부에 기술되어 있고, 인천으로 비정되는 彌鄒城(26)은 차산과 도락산 일대에 산재해 있는 보루성 유적 등 고구려의 군사 유적이 중반부에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지금의 원주 지역으로 비정되는 古牟婁城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어, 뒷시기까지 고구려군이 이용하는 중요 경로였음 (50)은 그 지리적 위치상 상대적으로 가장 뒤늦게 공취하였을 것으로 추정 을 확인할 수 있다. 후에 신라가 서울 지역을 장악한 뒤에는 이 경로의 거 되는데, 58성의 후반부에 기술되어 있다. 이러한 점에서 유추하자면, 영락 점으로 아차산성을 축조하였다. 둘째는 개성에서 임진강 하구를 도하하여 파주를 지나 서울로 바로 남하 82) 임기환, 1987, 고구려 초기의 지방통치 체제, 박성봉교수 회갑기념논총. 하는 경로이다. 이 경로는 개성에서 서울에 이르는 최단거리이지만, 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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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284 제3장 고구려 남진과 백제의 정치변동 제2절 집권세력의 교체와 왕권의 약화 역으로 추정된다. 400년(영락 10)의 신라구원전에 동원된 5만의 고구려군 285 제2절 집권세력의 교체와 왕권의 약화 의 주 남하 경로도 바로 이 지역이었을 것이다. 58성과 지리지의 군현을 곧바로 대응시키는데 무리가 없지는 않지만, 그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는 유효하리라 본다. 앞에서 설정한 지역의 郡의 수는 551년에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이 한강 상류와 하류지역의 16郡을 탈취한 사실에서도 방증된다. 즉 진흥왕 12년에 신라는 竹嶺 이북에서 高峴(지금의 강원도 철령) 이남의 10郡의 땅을 차지 87) 하였다고 한다. 또 일본서기 에는 당시 백제의 聖王이 고구려 平壤을 공 격하여 6郡의 영토를 회복하였다고 전한다.88) 1. 전지왕 즉위 이전까지의 정치적 상황 고구려는 4세기 중 후반 前燕의 팽창으로 인해 요동 진출이 어렵게 되 자 한반도 중남부 지역으로 진출을 모색하였다.89) 이러한 정세의 변화는 당 시 마한의 잔여 세력을 통합하는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던 백제에게 커다란 위협으로 대두하였다. 따라서 백제는 고구려의 남침에 대비하기 위하여 근 즉 551년에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은 고구려의 16郡을 차지한 것이다. 물 론 396년(영락 6)에 고구려 광개토왕이 공벌한 지역과 백제 신라의 연합 군이 탈취한 16군에는 지역적 차이가 있다. 그러나 396년에 고구려가 차지 초고왕 21년(366)90)과 23년(368)91) 두 차례에 걸쳐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 여 화친관계를 수립하고 있다. 그렇다면 신라가 백제와 화친관계를 맺은 이유는 무엇일까? 한 예성강~임진강 일대지역과 551년에 백제 등이 정복한 한성 이남의 경 기도 일대 지역 郡의 수를 상쇄시킨다면 대체로 일치시켜도 무방하지 않을 여름 4월에 왜의 군사가 대거 이르렀다. 왕이 듣고서 대적할 수 없을까 두려워 풀로 허수아 비 수천 개를 만들어 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서 토함산 아래에 나란히 세워 두었다. 그리고 용 까 생각된다. 이렇게 볼 때 영락 6년조의 기사에 의한다면 광개토왕대 고구려는 한강 하류의 한강 이북지역과 남한강 북한강의 중상류 지역을 모두 장악한 것 맹한 군사 1천 명을 부현의 동쪽 들판에 숨겨 놓았다. 왜인이 자기 무리가 많음을 믿고 곧바로 나아가자 숨어 있던 군사가 일어나 불의에 공격하였다. 왜군이 크게 패하여 달아나므로 추격하 여 그들을 거의 다 죽였다(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 3 내물니사금 9년). 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임기환(서울교육대학교) 그것은 위 기록에서 보듯이 당시 신라가 왜와 가야의 침략에 시달리고 있었음을 주목해야 하겠다. 따라서 신라가 백제와 화친을 맺는다면, 백제 방면의 안정을 가져와 왜와 가야의 침략에 전력을 기울일 수 있기 때문이 라 하겠다. 한편 왜에도 사신을 보내어 밀월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은 일 본서기 를 통해 알 수 있다. 87) 삼국사기 권44 열전 4 居柒夫傳, 王命居柒夫 居柒夫等乘取竹嶺以外 高峴以內十郡. 88) 일본서기 권19 欽明天皇 12년조, 是歲 百濟聖明王 討平壤 凡六郡之地 遂復故地. 89) 盧重國, 1981, 高句麗 百濟 新羅의 力關係變化에 대한 一考察, 東方學志 제28집,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59~60쪽. 90) 春三月 遣使聘新羅 三國史記 권24 ( 百濟本紀 2 近肖古王 21년). 91) 春三月丁巳朔 日有食之 遣使新羅 送良馬二匹 三國史記 권24 ( 百濟本紀 2 近肖古王 23년).
144 286 제3장 고구려 남진과 백제의 정치변동 斯摩宿 를 卓淳國에 보내었다(사마숙녜는 어떤 성씨의 사람인지 모른다). 이 때 탁순왕 末錦 旱岐는 사마숙녜에게, 갑자년의 7월에 백제인 久, 彌州流 莫古 세 사람이 우리 나라에 와 서, 백제왕이 동방에 일본이라는 귀한 나라가 있음을 듣고 우리들을 보내어 그 나라에 조공하 게 했습니다. 만약 신들에게 길을 통하도록 가르쳐 준다면 우리 왕이 반드시 君王에게 덕이 있 제2절 집권세력의 교체와 왕권의 약화 287 견도 액면 그대로 인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서 가야를 매개로 신라 왜와의 관계를 추구하고 있었고, 왜도 철의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서 가야에서 내 다고 할 것입니다 라 하였다. 이 때 구저 등에게 전부터 동쪽에 귀한 나라가 있다고 들었지만 륙 지역으로 진출하려 하고 있었다. 따라서 백제의 왜 조공 때문이 아니라 아직 왕래한 적이 없어 그 길을 알지 못한다. 바다가 멀고 파도가 험하여 큰 배를 타야 겨우 통 양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탁순을 매개로 접촉했을 가능성은 크다. 특히 사 할 수 있을 것이니 비록 길을 안다 하더라도 어떻게 도달할 수 있겠는가 라 하였다. 그러자 구 마숙녜의 종자를 파견했을 때 백제가 철정을 주었다는 사실은 이를 입증하 저 등이 그렇다면 지금은 갈 수 없겠습니다. 그렇지 않고 가려면 다시 돌아가서 배를 갖춘 뒤 고 있다고 하겠다.92) 에 가야 하겠습니다 라 하고 만약 귀한 나라의 사신이 오면 반드시 우리나라에도 알려 주십시 오 라고 하고 돌아갔다 고 하였다. 이에 사마숙녜는 종자 爾波移와 탁순인 過古 두 사람을 백제 이 시기 백제와 왜의 통교에 관해서는 대체적으로 사실로 인정되고 있 국에 보내어 그 왕을 위로하였다. 이 때 백제 초고왕은 매우 기뻐하며 후하게 대접하고, 다섯가 다. 예를 들어 斯摩(麻)는 백제의 借音字法에 의한 표기로 보이므로 이 인 지 빛깔의 綵絹 각 1필과 角弓箭 및 철정 40매를 이파이에게 주었다. 또 보물창고를 열어 여러 명은 백제계 사료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고,93) 그의 종자 이파이란 이름도 가지 진기한 것들을 보여주며 우리나라에는 이같은 진기한 보물들이 많이 있다. 귀한 나라에 매우 구체적이어서 단순히 조작의 산물이라고는 할 수 없다. 또 백제가 이 바치고자 하나, 길을 알지 못하여 마음만 있을 뿐 따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사자에게 부쳐서 바친다 고 하였다. 이에 이파이가 일을 받들고 돌아와서 志摩宿 에게 보고했다. 바로 탁순으로부터 돌아왔다( 일본서기 권9 신공기 46년). 파이에게 준 물품이 구체적으로 거론되어 있는 점과 특히 그 중의 철정은 그 당시 왜가 가장 필요로 하던 물품이었다는 점에서 사실적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위 기록은 백제의 구저 미주류 막고 등 3인이 탁순에 가서 그 말금한 한편 이 시기 백제와 왜의 접촉은 서로 어떤 목적에서 이루어졌던 것일 기와 만나는 백제와 탁순과의 접촉, 왜의 사마숙녜가 탁순에 가서 말금한 까? 먼저, 백제의 경우는 대고구려 전쟁의 수행을 위해 배후를 이루고 있 기와 만나는 大和 정권과 탁순과의 접촉, 사마숙녜가 종자 이파이를 백제 는 신라 가야, 나아가 왜 중국과의 관계도 확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에 파견해서 근초고왕과 만나는 대화정권과 백제와의 접촉 등의 세 부분으 313년 낙랑 314년 대방의 멸망94)은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그동안 존재하 로 구성되어 있다. 였던 일종의 완충 지대의 소멸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양국의 긴장이 고조 탁순왕이 백제 사신인 구저 등에게 한 말을 보면 탁순은 왜에 대해 들어 알고는 있으나 아직 통교가 없었기에 가는 길을 잘 모른다고 한다. 이에 따 되면 될수록 백제로서는 배후 안정을 꾀할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져 갔기 때문이다. 른다면 사마숙녜의 탁순 방문은 왜와 탁순의 최초의 공식 통교가 되는 셈 반면 왜는 고대 국가로 성장해 감에 따라 선진문물의 수요가 증대하였 이다. 하지만 이 기사에는 사마숙녜의 탁순 방문 목적에 대해선 언급이 없 고, 특히 철 자원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있었다. 종래 가야로부터의 수입 고 탁순왕의 이야기를 들은 후 백제로 종자를 파견한 사실만 언급되고 있 은 수요 감당에 충분치 않게 되었다. 이에 그 공급처를 한반도 내륙 지역으 다. 이것은 백제 사신의 탁순 방문 목적이 왜에 대한 조공이란 사실을 전제 로 할 때에만 가능한 이야기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백제의 왜 조공 목적 운운이 사실이 아니라면 사마숙녜의 탁순 파견 이야기도 백제 사신의 왜 조공에 맞춰서 설정된 것임을 의미하게 된다. 사마숙녜 종자의 백제 파 92) 문동석, 1997, 4세기 백제의 가야 원정에 대하여-철산지 확보 문제를 중심으로-, 국 사관논총 제74집, 국사편찬위원회, 231~251쪽. 93) 三品彰英, 1962, 日本書紀朝鮮關係記事考證 上, 吉川弘文館. 94) 建興元年 遼東張統據樂浪 帶方二郡 與高句麗王乙弗利相攻 連年不解 樂浪王遵 說統帥其 民千餘家歸 爲之置樂浪郡 以統爲太守 遵參軍事 資治通鑑 卷88 ( 晋紀 10 孝愍 上).
145 288 제3장 고구려 남진과 백제의 정치변동 제2절 집권세력의 교체와 왕권의 약화 289 로도 확대할 필요성이 생겼는데 이것이 백제와의 통교 요인으로서 작용하 사망,98) 이어서 나타나는 진사왕의 변칙적인 왕위계승,99) 그리고 진사왕의 였고 볼 수 있다. 행궁에서 죽음100) 등 왕위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일련의 내분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백제와 왜 가야의 긴밀한 관계는 신라에게 위협으로 작용하였던 것 같다. 백제는 대외적으로 고구려의 적극적인 남하 공세에 수세적인 입장에서 대응을 펼치고 있었다. 즉 근구수왕은 태자 때에는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아래 기록에서 보듯이 즉위 이듬해부터는 고구 ① 가을 7월에 청목령에 성을 쌓았다. 독산성 성주가 300명을 거느리고 신라로 달아났다 려의 침략을 받고 있다. 삼국사기 권24 ( 백제본기 2 근초고왕 28년). ② 백제 독산성 성주가 300명을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으므로 왕이 그들을 받아들여 6부에 나누어 살게 하니, 백제 왕이 글을 보내 말하였다. 두 나라가 화친을 맺어 형제가 되기를 약속했었는데, 지금 대왕께서 우리의 도망한 백성을 받아들이니 화친한 뜻에 크게 어긋납 니다. 이는 대왕이 바라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바라건대 그들을 돌려 보내십시오. 대답 하여 말하였다. 백성은 일정한 마음이 없다. 그러므로 생각나면 오고, 싫어지면 가버리는 ① 2년 겨울 11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에 쳐들어 왔다(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2 근구수 왕 2년). ② 3년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쳤다. 11월에 고구려 가 쳐들어 왔다(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2 근구수왕 3년). 것은 진실로 그렇기 때문이다. 대왕계서는 백성이 편치 않음은 걱정하지 않고 도리어 과 인을 나무라는 것이 어찌 이렇게 심한가? 백제에서 그 말을 듣고 다시는 말하지 않았다 삼국사기 권3 ( 신라본기 3 내물니사금 18년). 위 사료에서 보듯이 신라는 373년 禿山城主의 항복을 계기로 백제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고구려와 화친관계를 맺어 백제에 대항하였던 것 같다. 이는 신라가 377년에 고구려에 도움을 받아 前秦에 사신을 파견하고 있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겠다.95) 신라가 친고구려적 입장을 취하게 된 배 고구려와의 공방전은 진사왕 즉위 초기부터 계속되다가, 진사왕 8년에는 광개토왕의 대대적인 침략을 받아 북경의 요새인 관미성이 함락되었다. ① 2년 8월에 고구려가 쳐들어 왔다(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3 진사왕 2년). ② 5년 가을 9월에 왕이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침입하여 약탈하였다(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3 진사왕 5년). ③ 6년 9월에 왕이 달솔 진가모에게 명령하여 고구려를 쳐서 도곤성을 함락시키고 200명을 사로잡았다(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3 진사왕 6년). 경은 김씨계 내물왕이 고구려를 배경으로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 때문이 ④ 8년 가을 7월에 고구려 왕 담덕이 군사 4만 명을 거느리고 북쪽 변경을 침공해 와서 석 었다. 즉 내물왕은 고구려에 밀리고 있는 백제보다는 강성한 고구려와 연 현성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군사를 부리는 데 능하다는 말을 듣고 나가 결을 가지는 것이 왕권을 강화하는데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다는 것이다.96) 따라서 이 시기 국제관계는 고구려 신라 연합 대 백제 가야 왜 연합의 막지 못하니 한수 북쪽의 여러 부락들이 다수 함락되었다.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관미성 을 쳐서 함락시켰다(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3 진사왕 8년). 대결 시기대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97) 한편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엽에 이르는 기간은 백제의 국내 정치에서 도 격동의 시기였다. 먼저 대내적으로 침류왕의 재위 2년 만의 갑작스럽 95) 春 高句麗 新羅 西南夷 皆遣使入貢于秦 資治通鑑 권104 ( 晋紀 孝武帝 太元 2년). 96) 盧重國, 1981, 앞의 글, 59~60쪽. 97) 盧重國, 1981, 앞의 글, 60~65쪽. 98)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2 침류왕 2년. 99) 진사왕이 어린 조카 아신의 왕위를 빼앗은 것은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3 진사왕 1년 近仇首王之仲子 枕流之弟 爲人强勇聰惠 多智略 枕流之薨也 太子少 故叔父辰斯卽位 의 기사와 일본서기 권9 신공기 65년 百濟枕流王薨 王子阿花年少 叔父辰斯奪立爲王 를 통해서 알 수 있다. 100)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3 진사왕 8년.
146 290 제3장 고구려 남진과 백제의 정치변동 제2절 집권세력의 교체와 왕권의 약화 291 이와 같이 고구려와 전투에서의 계속되는 패전과 고구려와 신라의 연결 이와 같이 변칙적으로 즉위하였던 진사왕은 빈번한 토목공사 등을 실시 이라는 국제관계의 변화는 백제의 위기의식을 가중시켰으며, 이는 국내 정 하여 왕권을 신장하고자 하였다. 진사왕 2년에는 고구려와 이에 부용된 말 치에도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고구려와의 급박한 상황 전개 때문인지 갈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그 북쪽 국경지대인 청목령에서 서해안에 이 삼국사기 에는 이 시기의 대내적인 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는 극히 제한 르는 곳까지 15세 이상의 민력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축성 사업을 벌였으 되어 있으나, 진사왕 즉위와 죽음을 통해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며,102) 동왕 7년에는 궁전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그 부속시설들을 호화스 럽게 꾸미는 등 토목공사를 일으켜 왕실의 위엄을 과시하려 하였다.103) 또 ① 진사왕은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이요 침류의 동생이다. 사람됨이 굳세고 용감하고 총명하 고 어질었으며 지략이 많았다. 침류왕이 죽자 태자가 어렸기 때문에 숙부 진사가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3 진사왕 즉위년). ② 백제 침류왕이 죽었다. 왕자 阿花가 어렸으므로 숙부 辰斯가 왕위를 빼앗아 즉위하였다 일본서기 권9 ( 신공기 65년). 한 狗原 강화도 횡악 등 서울 근교 지역에서 사냥을 빈번히 실시하였 다.104) 이는 국왕으로서의 군사통수권을 확인하여,105) 대고구려전을 독려하 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무모한 토목공사의 실시와 특히 진사왕 8년(392) 고구려군의 대 ③ 백제의 진사왕이 왕위에 있으면서 貴國의 天皇에게 예의를 잃었으므로, 紀角宿 羽田矢 규모 공세로 인해 그 북방의 요새인 관미성을 상실하는 등 대고구려전에서 代宿 石川宿 木 宿 를 파견하여 그 무례함을 책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국 의 충격적인 패배는 백제의 지배세력간에 동요를 일으켰다. 이는 진사왕 에서는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 기각숙녜 등은 아화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일본 서기 권10 응신기 3년). 삼국사기 에서는 침류왕의 사후 원자 아신이 어리기 때문에 침류의 아 우인 진사가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101) 그렇지만 일본서기 에서는 진사 가 태자 아화에게 돌아가야 할 왕위를 찬탈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응 신 3년(392)조에 백제가 진사왕을 죽이고 아신왕을 옹립하였다는 기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겠다. 결국 진사왕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즉위하였음을 알 수 있다. 101) 이기백은 진사왕의 왕위계승이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상속원칙의 전화과정에서 빚어 진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며(李基白, 1959, 百濟王位繼承考, 歷史學報 제11집, 18~20 쪽), 노중국은 진사에 의한 왕위찬탈 배경을 침류왕의 불교공인에 따른 지배세력 사이의 갈등이 작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盧重國, 1988, 百濟政治史硏究, 일조각, 131~137쪽). 한편 양기석은 태자가 연소하여 정사를 돌볼 수 없는 비상시기이기 때문에 왕위계승이 부자상속이 아닌 형제상속이 이루어 졌다고 보고 있다(梁起錫, 1990, 百濟專制王權成立過 程硏究, 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74~78쪽). 그러나 진사왕의 즉위는 지속적으로 추진 되고 있던 고구려의 위협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 위협의 극복이란 명분 에서 즉위한 진사왕도 계속된 패전으로 인하여 정권의 정당성을 상실하였을 것이다. 그것이 진사왕의 죽음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와해시키는 결과가 되었고, 그 자신도 재위 8년 만 에 죽고 말았다. 진사왕의 죽음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에서는 구원으로 田獵을 나갔다가, 그곳의 북궁에서 薨去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106) 일본서기 에서는 진 사왕이 살해된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진사왕은 어떤 모종의 정변에 의 해 희생되었을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다.107) 아신왕의 즉위에 대해 삼국사기 아신왕 원년 즉위조에는 침류왕의 맏 아들이다. 처음 한성의 별궁에서 태어났을 때 신비로운 광채가 밤에 비치 102)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3 진사왕 2년. 103)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3 진사왕 7년. 104) ① 冬十月 獵於狗原 七日及返 삼국사기 권25 ( 백제본기 3 진사왕 6년). ② 秋七月 獵國西大島 王親射鹿 八月 又獵橫岳之西 삼국사기 권25 ( 백제본기 3 진사 왕 7년). ③ 冬十月 高句麗攻拔關爾城 王田於狗原 經旬不返 삼국사기 권25 ( 백제본기 3 진사 왕 8년). 105) 김영하, 1988,`삼국시대 왕의 통치형태 연구a,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58~60쪽. 106)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3 진사왕 8년. 107) 李道學, 1990, 漢城後期의 百濟王權과 支配體制의 整備 百濟論叢 제2집,, 288~291 쪽.
147 292 제3장 고구려 남진과 백제의 정치변동 제2절 집권세력의 교체와 왕권의 약화 293 었다. 장성함에 뜻과 기개가 빼어났으며, 매 사냥과 말 타기를 좋아했다. 다는 전갈을 받고 귀국길에 오르고 있을 때 큰 아우인 훈해가 일시 섭정을 왕이 죽었을 때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숙부 진사가 왕위를 이었는데 8년에 하면서 태자 전지의 환국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때 작은 아우인 설례가 왕 108) 죽자 즉위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 응신기 3년의 위계승의 원칙을 무시하고 자의로 형 훈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였으나, 기사에 의하면 진사왕의 죽음 이후 그를 왕위에 앉힌 주체는 기각숙녜 등 한성 사람 해충과 그의 지지세력에 의해서 진압되었고, 이어 전지가 왕위 으로 나온다. 따라서 일본서기 의 기사대로라면 아신왕은 왜의 문책사에 에 오르게 되었다. 전지왕의 즉위과정에서 백제의 지배세력은 전지 옹립파 의해 옹립된 셈이 된다. 와 설례 지지파로 나뉘어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전자의 경우 훈해로 대 그러나 왜에 의한 옹립은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기각숙녜를 위시한 왜 표되는 일부 왕족과 전지가 귀국할 때에 그를 호위하였던 100명의 왜군 및 인 등은 실존성이 의심스러운 존재이다. 그리고 아신왕의 옹립 자체가 진 해충으로 대표되는 세력을 들 수 있다. 반면 설례의 지지세력은 구체적으 사왕의 왜에 대한 무례의 문책 행위로 행해진 것으로 서술되어 있지만, 진 로는 알 수 없다. 사왕의 사망은 왜와 무관한 것이었다. 따라서 백제가 진사왕을 죽였다 고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할 사실은 전지 지지세력들 가운데 해씨 가문이 표현은 정변의 결과였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고, 그 결과 이루어지는 아 전지왕대를 기점으로 크게 부상되고 있다는 점이다.109) 한성인 해충은 전지 신왕의 즉위 역시 진사왕을 암살한 세력에 의해 행해졌을 것이다. 왕의 옹립에 기여한 공로로 달솔의 관등에 조 1천석을 지급받고 있었으 이와 같은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지배세력 간에 갈등은 아신왕이 죽고 전 지가 즉위하는 과정에 다시 분출되었다. 며,110) 그리고 이후 해씨 가문은 전지왕 3년의 정치세력 개편시 해수와 해 구가 중용됨으로써 성세를 나타나게 되었다.111) 해씨는 본래 진씨와 같이 부체제 해체를 전후하여 왕권과의 결합을 통해 아신왕 재위 3년(394)에 태자에 책립되었다. 그 6년(397)에 왜국에 볼모로 갔다가, 14년 (405)에 왕이 돌아가매 왕의 둘째 아우 訓解가 섭정을 하며 태자의 환국을 기다리었는데, 막내 아우 禮가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전지가 왜에서 부음을 듣고 곡읍하며 귀국하 기를 청하니 왜왕이 병사 100인으로써 호송하였다. 국경에 이르매 한성인 해충이 와서 고하기 를 대왕이 돌아가자 왕제 설례가 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니, 원컨대 태자는 경솔히 서 지배세력으로 기능하고 있었다.112) 그런데 근초고왕 이후 좌장과 같은 국가의 주요직은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진씨 가문에게 있었던 것으로 여 겨진다. 그러나 근구수왕 즉위 이듬해부터 계속되어진 고구려의 남하에 따 른 대외적인 위기는 해씨 가문이 다시 부상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들어가지 마소서 라고 하였다. 전지는 왜인을 머물러두어 자위하며 海島에 의거하여 기다리더 침류왕 사후 진사왕의 변칙적 즉위, 고구려의 적극적인 남침공세의 강 니 國人이 설례를 죽이고 전지를 맞아 즉위케 하였다(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3 전지왕 즉 화, 진사왕의 피살로 이어지는 당시 백제의 내외적인 정치정세의 불안은 위년). 위 기록은 전지왕 즉위 과정의 분쟁을 보여주고 있다. 아신왕이 죽자 왜 에 인질로 체류하고 있던 태자 전지가 8년 만에 귀국의 길에 오르게 되었 다. 그런데 전지왕의 즉위과정에 또 다시 왕위계승 분쟁이 발생하였다. 즉 아신왕의 맏아들로서 차기 왕위계승권을 가진 태자 전지가 아신왕이 죽었 108)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3 아신왕 원년. 109) 이기백은 이 시기 해씨 가문의 등장을 해씨왕비족 시대로 표현하고 있다(李基白, 1959, 앞의 글, 31~35쪽). 그러나 해씨가 왕비족인지에 대하여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명확 한 기록이 없다. 그리고 왕비족이란 개념은 부체제적 설명 요소이므로, 집권적 지배체제 가 확립된 이후의 시기를 설명하기에는 부적절한 용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왕비족 개 념으로 당시의 정치상황를 이해하는 것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110)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3 전지왕 2년. 111)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3 전지왕 3년. 112) 文東錫, 1996, 4~5世紀 百濟政治體制의 變動, 韓國古代史硏究 9, 한국고대사학회, 208~210쪽.
148 294 제3장 고구려 남진과 백제의 정치변동 왕족은 물론 지배세력간의 대립과 갈등을 야기시켰을 것이다. 지배세력들 제2절 집권세력의 교체와 왕권의 약화 295 분담시켜 국정을 운영하고자 하였다. 사이의 구체적인 동태를 파악할 수는 없지만, 진사왕대에 진가모가 병관좌 그런데 백제 진사왕대부터는 대외적으로 고구려 광개토왕의 적극적인 남 평이었고, 아신왕대에 좌장 진무는 외삼촌으로서 각기 병권을 장악하고 있 하공세에 밀려 아래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아신왕대에도 예성강, 임진 었던 점을 감안해 보면 이 시기에 진씨의 정치적 영향력이 보다 강화된 것 강 유역에서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으로 볼 수 있으며, 이를 기반으로 왕위계승 분쟁에도 크게 관여했을 것으 로 여겨진다. 이러한 진씨세력의 역할 증대는 점차 왕권이 쇠미해지는 현 상을 초래하게 되었다. 진사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아신왕은 먼저 왕권의 정통성을 과시하 ① 2년 가을 8월에 왕이 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관미성은 우리 북쪽 변경의 요해지 이다. 지금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으니 이는 과인이 분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바이다. 경은 마땅히 마음을 써서 설욕하라. 드디어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칠 것을 도모하였다. 무가 몸소 사졸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면서 석현성 등 다서 고 지배세력간의 결속을 다지기 위하여 시조묘인 동명묘에 배알함과 동시 성을 회복하려고 먼저 관미성을 포위하였으나, 고구려 사람들은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 에 범부여족 사회에서 거행되던 전통적인 의례인 제천사지를 남단에서 거 다. 무는 군량 수송이 이어지지 못하므로 이끌고 돌아왔다(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3 행하였다. 동명묘 제사는 한성시대에만 나타나고 있는 현상113)으로 왕은 시 조에 대한 제사뿐만 아니라, 당시의 천지제사를 주관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제전을 왕이 주제함은 동명의 후예로서의 신성한 권위를 과시함으로써 자신의 지배권위를 인정받고 권력을 강화 하고자는 것이었다.114) 아신왕 2년). ② 3년 가을 7월에 고구려와 수곡성 밑에서 싸워 패배하였다(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3 아신왕 3년). ③ 4년 가을 8월에 왕이 좌장 진무 등에게 명령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고구려 왕 담덕 이 친히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패수 가에 진을 치고 막아 싸우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 아신왕은 이어 즉위 3년에 원자 전지를 태자로 조기 책봉하여 왕위계승 하여 죽은 자가 8천 명이었다. 겨울 11월에 왕은 패수의 싸움을 보복하려고 친히 군사 7 상의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였고, 庶弟인 홍을 내신좌평에 임명하여 천 명을 거느리고 한수를 건너 청목령 밑에서 머물렀다. 큰 눈을 만나 병사들이 많이 얼 왕실의 기반을 다지고자 하였다.115) 그리고 외삼촌인 진무를 좌장에 임명하 여 병마권을 위임함으로써 내정은 왕족, 병권은 진씨세력에게 각각 역할을 어죽자 군을 돌려 한산성에 이르러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3 아 신왕 4년). ④ 6년에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百殘國을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3자 불명)하여 영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사조성 아단성 고 113) 三國史記 百濟本紀에 보이는 東明廟 기사는 다음과 같다. ① 夏五月 立東明王廟 삼국사기 권23 ( 백제본기 1 온조왕 1년). ② 春正月 謁始祖東明廟 春二月 王祀天地於南壇 삼국사기 권23 ( 백제본기 1 다루왕 2년). ③ 夏四月 大旱 王祈東明廟乃雨 삼국사기 권24 ( 백제본기 2 구수왕 14년). ④ 春正月 謁東明廟 삼국사기 권24 ( 백제본기 2 책계왕 2년). ⑤ 春正月 謁東明廟 삼국사기 권24 ( 백제본기 2 분서왕 2년). ⑥ 夏四月 謁東明廟 拜解仇爲兵官佐平 삼국사기 권24 ( 백제본기 2 비류왕 9년). ⑦ 春正月 謁東明廟 又祭天於南壇 拜眞武爲左將 委以兵馬事 삼국사기 권25 ( 백제본 기 3 아신왕 2년). ⑧ 春正月 王謁東明廟 祭天地於南壇 大赦 삼국사기 권25 ( 백제본기 3 전지왕 2년). 114) 盧明鎬, 1981, 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 歷史學硏究 10, 전남대학교 사학과, 39~89쪽. 115)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3 아신왕 3년. 리성 리성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모야라성 혈 성 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성 두노성 비 리성 미추성 야리성 태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성 루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희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 성 임성 리성 취추성 발성 고무루성 윤노성 관노성 산양성 중 성 노성 구천성 등을 공취하고, 그 수도를 하였다. 백잔이 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정병을 보내어 그 수도에 육박하 였다. (백잔군이 퇴각하니 )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백)잔주가 困逼해져, 남녀생 구(생구) 1천명과 細布 천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奴 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백잔주가 저지른)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 에 순종해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의 아우와 대 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廣開土王碑文 永樂 6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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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298 제3장 고구려 남진과 백제의 정치변동 제2절 집권세력의 교체와 왕권의 약화 299 황은 군사관계에 대한 능력을 바탕으로 왕권과 연결되어 중앙정치의 주도 으로 참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의 적극적인 공세로 인 권을 장악하고 있던 진씨 가문에게도 불안한 요소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한 북경의 요새인 관미성 등의 상실, 계속된 패전으로 위기 상황이었다. 이 따라서 진씨 가문은 아신왕 사후 왕위계승 과정에서 대고구려전의 협력을 같은 대외적 환경의 악화는 국내정치에도 영향을 끼쳐 왕위계승을 둘러싼 위해 왜에 파견되었던 전지 대신 왕위를 찬탈한 설례 일파를 적극 지지했 122) 분쟁을 야기하였다. 그러나 전지왕은 반설례파 세력, 즉 國人 의 지지 을 가능성이 있다.120) 이는 전지왕 이후 상당기간 진씨 가문이 기록상에 그 로 분쟁을 수습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전지왕대의 정국은 해씨 가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전지왕 즉위에 커다란 공헌을 과 연결 속에서 운영되고 있었다. 따라서 전지왕 즉위 이후에는 이전에 성 하고 있던 해씨 가문이 병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실 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 세를 누렸던 진씨 가문이 몰락하고 해씨 가문이 새롭게 대두하였다. 그리 지 않을까 한다. 고 전지왕은 왕권을 뒷받침하기 위한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그것은 다름 전지왕이 설례 일파에 의한 왕위찬탈의 책동을 분쇄하고 즉위하자 이듬 아닌 상좌평의 설치였다.123) 해 정월에 즉위 의례적인 성격을 가진 동명묘의 배알과 범부여족의 공통적 제의인 제천사지를 동시에 거행하였다.121) 이것은 새 왕으로서의 정통성을 천명하고 그 동안의 왕위계승을 둘러싼 정치적 내분을 수습하여 지배세력 간의 광범위한 결속을 다지고자 한 것이었다. 餘信을 상좌평으로 삼고 軍務와 정사를 맡겼다. 상좌평의 職은 이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지금 의 宰와 같았다(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3 전지왕 4년). 전지왕 4년 상좌평 설치에 대한 기존의 연구를 보면, 5세기 왕권의 대귀 족 통제력이 흔들리기 시작한 시기에 설치되었고, 전지왕의 정치적 기반이 허약한 상황에서 실권을 장악한 해씨 세력이 그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2. 전지왕대 집권세력의 교체와 상좌평의 설치 취한 조처였을 것이라는 점 등을 들어, 상좌평을 귀족세력들의 이익과 의 사를 대변하기 위한 장치로 파악하고 있다.124) 5세기 초엽 백제의 정국운영에는 사두가 좌장에 임명되고 있는 것에서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신라에서 귀족회의의 의장인 상대등이 귀족의 의 보듯이, 근초고왕 이후 등장하고 있던 다양한 정치세력이 당시에도 적극적 사를 대변한다고 하는 견해125)를 일방적으로 백제사 연구에 적용한 결과가 119)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3 아신왕 7년. 120)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3 아신왕 8년. 121) 이 점에서 노중국은 설례가 섭정하고 있던 훈해를 죽이고 일시적이나마 自立爲王 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를 배후에서 지지한 세력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진씨의 전성 시대가 이때를 고비로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는 사실을 들어 진씨를 설례파와 연결시 키고 있다. 즉 고구려와 전쟁에서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진무가 병권좌평에서 자리 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진씨가문의 정치적 입지가 흔들리게 하였다. 결국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목적에서 아신왕 사후 왕위분쟁에서 禮와 연결되어 支를 지지하는 세력과 대결한 것으로 보고 있다(盧重國, 1988, 앞의 책, 135~136쪽 ; 盧重國, 1994, 4~5世紀 百濟의 政治運營 -近肖古王~阿莘王代를 중심으로, 韓國古 代史論叢 6,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72쪽). 122) 국인 으로 표현된 세력은 왕족과 해씨세력으로 구성된 전지왕의 지지세력으로 보는 것 이 일반적이다(梁起錫, 1990, 앞의 글, 79~80쪽). 123) 상좌평의 존재는 일본서기 흠명기 4년 12월에 백제 聖明王이 전의 조서를 가지고 널 리 군신에게 보이며, 천황의 조칙이 이와 같다. 어떻게 할 것인가? 라고 말하였다. 上佐 平 沙宅己婁 中佐平 木 麻那 下佐平 木尹貴 (하략) 에도 보이고 있다. 이 기사의 상 중 하좌평은 지배귀족 신분의 서열화를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일 본서기 에 등장하는 상 중 하좌평의 보유자는 사씨 목씨 등으로 동성왕대부터 분화 되었다고 보여지는 좌평에 임명되고 있는 인물의 성향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124) 盧重國, 1988, 앞의 책, 141쪽 ; 梁起錫, 1990, 앞의 글, 83~84쪽. 125) 지금까지 신라 상대등의 설치를 불교공인과 관련지어 이에 반대하는 귀족세력과의 대립 을 제도상으로 해결하려는 의도에서 설치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였다(李基白, 1986, 新羅 初期 佛敎와 貴族勢力, 新羅思想史硏究, 일조각, 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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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310 제3장 고구려 남진과 백제의 정치변동 제2절 집권세력의 교체와 왕권의 약화 311 데 송서 백제전에는 餘映(전지왕) - 餘毗(비유왕)로 왕실 계보를 기록하 백제의 직지왕이 세상을 떠나니, 아들인 구이신이 왕위에 올랐다. 왕이 나이가 어렸으므로 고 있을 뿐 구이신왕은 언급치 않고 있다. 또 전지왕이 景平 2년(424)에 송 목만치가 국정을 잡았는데 왕모와 서로 정을 통하고 무례한 행동이 많았다. 천황이 이 소식을 에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되어 있다.168) 한편 일본서기 에서는 전지왕의 사 망과 구이신왕의 즉위를 응신 25년(414)으로 기록하면서, 응신 39년(428) 조에는 전지왕이 생존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여 혼동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구이신왕의 즉위 자체는 삼국사기 와 일본서기 에도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전지왕의 사망 시기를 정확 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송서 의 기록을 존중하여 424년까지 생존해 있 었다고 한다면, 구이신왕의 재위는 424년 이후부터 427년까지로 볼 수 있 을 것이다.169) 그러나 424년 조공이 아직 전지왕이 생존한 것으로 잘못 안 듣고 그를 불렀다( 일본서기 권10 응신기 25년). 이 기사에서 즉위한 구이신왕이 나이가 어리다고 한 것은 구이신왕이 즉 위할 당시의 나이가 16세였다171)는 사실과 대략 부합하고 있다. 그리고 나 이가 어린 구이신왕이 재위한 동안 목만치가 국정을 전횡하였다고 하는 것 은 삼국사기 구이신왕기의 공백 부분을 메워주는 자료로 활용할 수 있 다. 목만치의 출자에 대해 일본서기 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백제기 에 이르기를, 목만치는 바로 목라근자가 신라를 칠 때에 그 나라 여자에게서 낳은 중국측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170)이라면, 414년이나 420년 중의 어느 해에 아이다. 아버지의 공으로 임나에서 전횡하다가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귀국을 왕래하면서 천조의 사망한 것으로 보고 구이신왕은 그 이후에 즉위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 명을 받들어 우리나라의 국정을 잡았고 권세를 세상에 떨쳤다. 그러나 천조에서 그의 횡포함을 이다. 그러나 응신기의 백제 왕력에 대한 서술 자체에서도 2가지 형태의 듣고 그를 불렀다. 라고 하였다( 일본서기 권10 응신기 25년). 다른 내용이 전해지는 만큼 일본서기 편찬 단계에 이미 이와 같은 2가지 형태의 사료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구이신왕대의 기사가 백 위의 기록에서 보듯이 목만치는 木羅斤資가 신라를 공격할 때 신라국의 제기 를 전거로 한 분주 내용은 목만치를 중심으로 구성된 만큼 그를 기년 여자를 취하여 낳은 자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목만치의 아버지인 확정의 준거로 삼을 경우 414년은 타당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목라근자는 누구인가? 송서 의 기록이 중국측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전지왕의 사망과 구 이신왕의 즉위는 삼국사기 에 기록된 420년을 따르는 것이 합리적일 것 이다. 荒田別과 鹿我別을 장군으로 삼아 구저 등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건너가 탁순국에 이르러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이 때 어떤 사람이 군대가 적어서 신라를 깨뜨릴 수 없으니, 다시 沙 白 蓋盧를 보내어 군사를 늘려 주도록 요청하십시요 라 하였다. 곧 목라근자와 사사노궤에게 구이신왕의 존재 문제를 이렇게 정리할 때 삼국사기 구이신왕의 즉위 정병을 이끌고 사백 개로와 함께 가도록 명하였다.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였다. 그 년 기사와 사망 기사만 있다는 것은 구이신왕대에 심상치 않은 사건이 있 리고 比自 南加羅 國 安羅 多羅 卓淳 加羅의 7국을 평정하였다. 또 군대를 옮겨 서 었던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일본서 쪽을 돌아 古奚津에 이르러 남쪽의 오랑캐 침미다례를 무찔렀다.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기 의 내용이다. 인 肖古와 왕자 貴須가 또한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 때 比利 中 布彌 支半 古四 의 邑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그래서 백제왕 부자와 황전별 목라근자 등이 意流村에서 서로 만 나 기뻐하고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오직 천웅장언과 백제왕은 백제국에 이르러 벽지산에 올 168) 宋書 百濟傳. 169) 노중국, 1988, 앞의 책, 137~138쪽. 170) 이 기사에 대해 이기동은 백제왕이 사망했음에도 중국에서는 이를 아직 생존한 것으로 오인하여 진호 책봉한 실례로 파악하는 입장에서 취신하지 않고 있다(이기동, 1974, 중국사서에 보이는 백제왕 모도에 대하여, 역사학보 62, 24~26쪽). 라가 맹세하였다( 일본서기 권9 신공기 49년). 171) 이도학, 1984, 한성말 웅진시대 백제왕계의 검토, 한국사연구 45, 6쪽.
157 312 제3장 고구려 남진과 백제의 정치변동 제2절 집권세력의 교체와 왕권의 약화 313 일본서기 신공기 49년 기사는 신라공격, 가야 7국 공격을 중심으로 한 모여서 신라를 격파하고, 뒤이어 2단계에 가야 7국174)을 평정한 다음 고해 한반도 남부공격, 백제왕과 원정군과의 회동 등 이라는 세 부분으로 구성 진175)을 향하여 진군하면서 枕彌多禮를 정복하고 최종적으로 比利 中 되어 있다. 이 정복에 있어서는 倭 계통의 인물과 백제계의 인물이 함께 나 布彌 支半 古四 등을 차지하였다고 한다. 이 지명들은 삼국지 한조에 타나고 있다. 첫 번째 부분에서는 신라공격의 주체로 大和정권의 황전별 보이는 不彌國 = 布彌, 176) 卑離國 = 中, 支半國 = 支半, 狗素國 = 古四 녹아별이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황전별과 녹아별은 탁순에 이르러 신라를 등과 일치한다.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군사가 적어서 곤란하게 되자, 사백 개로를 보내어 는 것으로 전북 김제지역, 삼국사기 지리지 당주현조에 古四州 本古沙 증원군을 요청하였다. 이 요청에 응해서 등장하게 되는 것이 첫 번째 부분 夫里 라 기록되어 있는 고사는 古沙夫里 古沙比 古泗로 일컫어지던 고 후반의 목라근자와 사사노궤가 이끄는 군대이다. 황전별 녹아별의 군대 부지역이다. 그리고 비리는 부안의 보안, 포미는 정읍으로, 지반은 皆火 벽중은 삼국사기 지리지의 城縣 本碧骨 에 해당되 와 목라근자와 사사노궤가 이끄는 증원군은 신라를 격파한 다음 비자발 남 가라 록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 등 가야 7국 공격에 들어가고 있다.172) 성명왕이 옛적에 우리 선조 속고왕, 귀수왕의 치세 때에 안라 가라 탁순의 한기 등이 처 음 사신을 보내고 상통하여 친밀하게 친교를 맺었다. 자제의 나라가 되어 더불어 융성하기를 바랐다 일본서기 권19 ( 흠명기 2년 7월). 백제의 가야 7국 공격은 일본서기 흠명기 2년(541)에도 나오고 있다. 즉 성왕의 회고에 의하면 근초고왕 때에 백제가 가야 여러 나라와 부자 관 계를 맺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가야 7국을 평정하는데 있어 목라근자가 보이고 있음이 주목된다.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의 첫 번째 부분 후반 기사에 의하면 당시 황전 별 녹아별의 군대와 목라근자와 사사노궤가 이끄는 증원군은 탁순173)에 172) 백제는 일본서기 신공기 46년과 47년의 기사를 보면 탁순국을 매개로 왜와 통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백제와 탁순국이 이전부터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백제의 가야 7국 평정에 탁순국이 포함되고 있다는 점이 이상하다. 그러 나 이것은 백제의 입장에서 볼 때 탁순국의 협력을 얻어 왜와 통교하는 것은 상당히 불 편한 부분이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겠다. 따라서 백제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할 필요 가 있었으므로 가야 원정을 통해 탁순국을 완전히 세력권에 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173) 탁순의 위치에 대하여는 대구설(鮎貝房之進, 1937, 日本書紀朝鮮地名攷, 雜攷 7(下), 72~74쪽)과 창원설로 크게 나누어지고 있다. 최근 김태식은 繼體紀 24년 9월조의 久禮 牟羅城, 欽明紀 5년 3월조의 久禮山戍, 11월조의 久禮山五城이 낙동강 서남안의 함안 창원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고 비정하였다. 따라서 탁순은 그 성의 동남쪽에 인접하고 있 었다고, 또한 구례모라성의 대체적인 입지조건은 지금의 함안군 칠원면 일대에 해당한 다. 결국 구례모라성의 동남쪽의 세력이란 창원 지방을 가리키며, 탁순국은 久斯牟羅를 포함하는 창원으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金泰植, 1993, 加耶聯盟史, 일조각, 173~ 189쪽). 그러나 卓淳이 기록에 처음 나오고 있는 신공기 49년 3월조 기사에 의하면 백 제가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병력을 집결시킨 지역으로 나오고 있음을 볼 때 창원으로 보 기는 어려울 것 같다. 탁순의 위치를 비정하는데 있어 삼국사기 백제본기 구수왕 5년 왕이 군사를 보내 신라의 獐山城을 포위하였다. 신라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 하니 아군이 패배하였다. 의 기사가 주목된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장산성은 慶山으로 비 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구수왕대에 장산성을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은 백제가 이 지역일 대를 대단히 중요시 하고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단 종래의 견해대로 대구설 을 따르고자 한다. 174) 비자발은 삼국사기 잡지 지리지에는 比自火郡, 또는 比斯伐, 창녕 진흥왕탁경비 에는 比子伐로 표기되어 있으므로 경남 창녕지역으로 보고 있다(盧重國, 1992, 昌寧 眞興王 拓境碑,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Ⅱ). 南加羅는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전에 유신의 비 에도 軒轅의 후예요 소호의 자손이다. 하였으니, 남가야의 시조 수로와 신라는 같은 성 씨였다. 라고 되어 있어 김해지역, 國은 경남의 영산 밀양 지역, 安羅는 삼국사기 잡지 지리지에서 함안군을 阿尸良國, 또는 阿那加耶이라 하고 있고, 삼국유사 오가야 조에서도 阿羅伽倻 또는 阿耶伽倻로 되어 있다. 따라서 阿尸良國=阿羅國=安羅國은 경남 함안지역, 多羅는 삼국사기 잡지 지리지의 大良州郡, 또는 大耶州郡으로 지금의 합천 지역, 가라는 고령지역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김태식, 1993, 앞의 책, 161~ 163쪽). 175) 이병도는 古奚는 삼국지 마한조의 狗奚國으로서 전남 강진으로(李丙燾, 1976, 앞의 글, 512쪽), 전영래는 古奚津을 해남으로 보고 있다(全榮來, 1985, 百濟南方境域의 變 遷, 千寬宇先生還曆紀念韓國史學論叢, 141쪽). 176) 比利 中 布彌支 半古의 4읍으로 끊어 읽는 것은 內藤虎次郞에 의해 제기된 이래 이병도 등에 의해 적극 받아들여져 왔다(李丙燾, 1976, 앞의 글, 511~514쪽). 한편 이 러한 독법을 비판하고 이를 새롭게 끊어 읽어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全榮來, 1976, 周留城 白江 位置比定에 關한 新硏究, 부안군, 16쪽). 따라서 본글에서도 새로 운 끊어 읽기가 타당하고, 이들 지명이 삼국지 에 나오고 있으므로 이를 따르고자 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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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316 제3장 고구려 남진과 백제의 정치변동 제2절 집권세력의 교체와 왕권의 약화 317 시 왜와 연결된 목만치의 역할은 자명해진다고 하겠다. 결국 구이신왕대에 위 외교를 펼치고 있었다. 50명에 이르는 수행원을 거느린 왜국 사신을 맞 는 왕모를 배경으로 한 목만치의 전횡을 통해 일시적으로 상좌평 운영체계 기도 하였는데, 이는 왜와의 외교적 비중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 에 파행이 있었으나, 일본서기 에 천조에서 그의 횡포함을 듣고 그를 불 다.193) 또 비유왕 3년에는 남중국의 유송에도 사신을 보내었으며,194) 4년 4 189) 렀다(天朝聞其暴召之) 라고 윤색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목만치의 실각을 월에는 유송의 文皇帝가 사신을 보내어 선대의 임금인 전지왕이 동진의 安 통해 원래 상태로 전환하고 있다. 帝로부터 책봉된 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濟王이라는 긴 이름을 구이신왕 다음에 왕이 된 비유왕에 대하여 삼국사기 에는 그의 출자를 본문에서는 구이신왕의 맏아들이다 라고 하고서 세주에서는 혹은 전지 가진 관작을 똑같이 수여하였다.195) 또 비유왕은 14년에도 유송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했다.196) 왕의 서자라고도 하였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라 하여, 구이신 한편 비유왕은 7년(433)에 신라에도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197) 왕의 아들설과 전지왕의 아들설을 보여주고 있다.190) 이 두가지 설 중 구이 그리고 이듬해인 434년 2월에 백제는 다시금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좋 신왕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고 이를 비유왕의 연령과 연결시켜 볼 때 전 은 말 2필을 보내고, 9월에는 祥瑞의 상징인 흰 매를 보내기까지 하였 191) 비유왕을 전지왕의 아들이 다.198) 비유왕이 신라왕의 관계를 트고자 진력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라고 할 때 구이신왕대의 목만치의 전횡, 삼국사기 에 구이신왕대에 즉위 남진 압박에 공동 대처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고구려가 427년 평양성으로 기사와 사망 기사 밖에 없다는 사실, 그리고 전지왕의 아들이요 구이신왕 천도함199)에 따라 직접 영토를 접하고 있는 백제로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의 동생인 비유왕의 즉위라고 하는 일련의 사건은 비유왕의 즉위에 어떤 없었다. 백제의 집요한 화친 교섭에 대한 답례로써 434년 10월 신라에서 정치적 암투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즉 비 양질의 금과 明珠를 보내왔다.200) 이리하여 양국 간에 이른바 나제동맹이 유왕은 목만치의 전횡에 따른 구이신왕의 실정을 기회로 그를 몰아내고 왕 체결된 것이다. 지왕의 아들로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한다. 위에 오른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비유왕은 즉위 후 3년에 상좌평 여신이 죽자 해수를 상좌평으로 192) 임명하고 있다. 그런데 비유왕 역시 정변에 의해 희생되었다. 이 비유왕의 사망에 대하 여 삼국사기 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는 비유왕의 즉위에 해씨세력이 깊이 관여한 것을 보 여주는 것이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구이신왕대에 비록 목씨세력이 크 게 부상하였지만 비유왕의 즉위를 계기로 해씨세력이 그 위치를 보다 굳힌 검은 용이 한강에 나타났는데 잠깐 동안에 구름과 안개가 끼어 캄캄해지더니 날아가 버렸다. 왕이 죽었다(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3 비유왕 29년).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따라서 비유왕대의 정치적 실권은 상좌평으로 임명 된 해수를 중심으로 한 세력에게 있었다고 하겠다. 비유왕은 해수세력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한 전방 189) 日本書紀 권10 應神紀 25년 細註. 190)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3 전지왕 즉위년. 191) 이도학, 1984, 앞의 글, 27쪽. 192)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3 비유왕 3년. 193)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3 비유왕 2년. 194)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3 비유왕 3년. 195)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3 비유왕 4년. 196)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3 비유왕 14년. 197)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3 비유왕 7년. 198)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3 비유왕 8년. 199)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 6 장수왕 15년. 200)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 3 눌지마립간 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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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 樂 浪 郡 ) 조선현( 朝 鮮 縣 )의 위치 -낙랑군 조선현의 평양설 및 대동강설 비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1. 머리말 낙랑군의 위치는 오랜 쟁점이었고, 현재까지도 한 중 일 사이의 역사현안이기도 하다. 낙랑군 의 위치에 따라서 동북아 고대사의 강역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낙랑군의 위치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낙랑군의 치소( 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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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진례면 산본리 685외 2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보고서 2016.04 CONTENTS 목 차 Ⅰ. 조사개요 01 Ⅱ. 조사지역과 주변 환경 02 1. 자연 지리적 환경 02 2. 고고ㆍ역사자료로 본 김해의 역사 11 Ⅲ. 조사내용 19 1. 고고분야 20 2. 민속분야 27 3. 지명분야 30 Ⅳ. 종합고찰 및 조사단 의견 35 1. 종합고찰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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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17일 발행 통권 제112호 112 발행인:李圭衡/편집인:金尙勳/주간:金泰詢/발행처:社)退溪學釜山硏究院 (우614-743) 釜山市釜山鎭區田浦洞608-1 819-8587/F.817-4013 出處가 분명한 공직사회 인간이 가지는 인성은 그 특성이 다양하여 일률적으로 판단 한 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므로 어떤 관점과 측면에서 논하느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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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部 地 域 粘 土 帶 土 器 文 化 의 時 空 間 的 正 體 性 1 中 部 地 域 粘 土 帶 土 器 文 化 의 時 空 間 的 正 體 性 李 亨 源 (한신대박물관 학예연구사) - 목 차 - Ⅰ. 머리말 Ⅱ. 硏 究 史 Ⅲ. 時 間 軸 設 定 Ⅳ. 空 間 的 分 布 樣 相 을 통한 몇 가지 問 題 提 起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주지하는 바와 같이 남한지역의
<근대이전> ⑴ 문명의 형성과 고조선의 성립 역사 학습의 목적, 선사 문화의 발전에서 국가 형성까지를 다룬다. 역사가 현재 우리의 삶과 긴밀하게 연결되었음을 인식하고, 역사적 상상력을 바탕으 로 선사 시대의 삶을 유추해 본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국가가 형성되고 문 명
2009년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교과 교육과정 적용을 위한 중학교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 ⑴ 문명의 형성과 고조선의 성립 역사 학습의 목적, 선사 문화의 발전에서 국가 형성까지를 다룬다. 역사가 현재 우리의 삶과 긴밀하게 연결되었음을 인식하고, 역사적 상상력을 바탕으 로 선사 시대의 삶을 유추해 본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국가가 형성되고 문 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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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Ⅰ. 조사개요 1 Ⅱ. 조사지역과 그 주변환경 2 1. 자연 지리적 환경 2 2. 고고 역사적 환경 9 Ⅲ. 조사내용 31 1. 조사지역 일대의 문화재 현황 31 2. 조사지역 일대의 민속 지명분야 39 3. 조사지역 일대의 고고 역사학적 분야 41 (1) 조사방법 41 (2) 조사지역의 현황 및 변화상 41 (3) 조사내용 46 Ⅳ. 종합고찰 및 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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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6월 모의평가 문제지 제 교시 성명 수험 번호. ( 물음) 강연자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을 < 보기> 에서 찾아 바르게 묶은 것은? 번부터 6 번까지는 듣고 답하는 문제입니다. 방송을 잘 듣고 답을 하기 바랍니다. 듣는 내용은 한 번만 방송됩니다.. ( 물음) 학생이 언급한 내용이 아닌 것은? [ 점] 사막화의 정의 사막화의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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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溪學派의 分化와 屛虎是非(Ⅱ)* 廬江(虎溪)書院 置廢 顚末 43)설 석 규** 차 례 1. 2. 3. 4. 5. 머리말 書院의 建立과 系派分化 配 追享 論議와 賜額 屛虎是非와 書院毁撤 맺음말 국문초록 이 글은 廬江(虎溪)書院의 건립에서부터 훼철에 이르는 과정을 屛派와 虎派의 역학 관계와 연관하여 검토한 것이다. 여강서원은 중국의 性理學을 계승하면서도 우리나라
제1장 마을유래 605 촌, 천방, 큰동네, 건너각단과 같은 자연부락을 합하여 마을명을 북송리(北松里)라 하 였다. 2006년에 천연기념물 468호로 지정되었다. 큰마을 마을에 있던 이득강 군수와 지홍관 군수의 선정비는 1990년대 중반 영일민속박물 관으로 옮겼다. 건
604 제10편 마을유래와 설화 제2절 북구지역 1. 흥해읍(興海邑) 1) 매산리(梅山里) 1914년 기산(箕山), 용산(龍山), 매곡(梅谷), 백련(白蓮)을 합하여 매산(梅山)이라 하였다. 심곡골(深谷) 골이 깊어 불린 마을명으로 옛날부터 산송이가 유명하다. 돌림산 중턱에 삼동계(參 東契)를 조직하여 산남의진(山南義陳)의 의병 활동을 도왔던 조성목(趙性穆)
농어촌여름휴가페스티벌(1-112)
좋아유~보은!여러가지 체험으로자연을누려보세요 보은군 농촌체험산업협의회 맑은물 맑은공기비단강숲마을 영동군 비단강 숲마을 보은군은 전국 어디서나 찾아오기 쉬우며, 비단강 숲마을은 자연 그대로가 마을 곳곳에 녹아 잘 보존된 깨끗한 자연환경과 천년의 신비를 간직 흐르는 곳이다. 푸르른 들녘과 알록달록 익어 가는 과일, 한 속리산과 법주사, 장안면 아흔아홉간집, 서원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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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멘트] 4ㆍ27 재보궐 선거 직후 실시한 YTN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손학규 대표의 지지도가 크게 오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정당 지지도는 오차 범위 내로 좁혀졌고,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대한 평가는 하락세를 이어갔습니다. 공동 조사를 진행한 동아시아연구원, EAI 여론 분석센터의 정한울 부소장과 YTN 정치부 이종구 기자가 스튜디오에
*세지6문제(306~316)OK
01 02 03 04 306 05 07 [08~09] 0 06 0 500 km 08 09 307 02 03 01 04 308 05 07 08 06 09 309 01 02 03 04 310 05 08 06 07 09 311 01 03 04 02 312 05 07 0 500 km 08 06 0 0 1,000 km 313 09 11 10 4.8 5.0 12 120
세계 비지니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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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화력 7 8호기 건설부지 문화재 지표조사 결과보고서 2005. 01. ( 재) 우리문화재연구원 하동 화력 7 8호기 건설부지 문화재지표조사 결과보고서 Ⅰ. 조사개요 1. 조 사 명 : 하동 화력 78 호기 건설부지 문화재지표조사 2. 조사지역 : 경남 하동군 금성면 가덕리 1336답 일원 3. 조사 면적 : 134,204m2 4. 조사 목적 한국남부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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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4 호 9 3 와 신시가지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나면 제일 먼저 이 도시에서 언제나 활기가 넘 쳐나는 신시가지로 가게 된다. 그 중심에 는 티무르 공원이 있다. 이 공원을 중심으 로 티무르 박물관과 쇼핑 거리가 밀집돼 있다. 공원 중심에는 우즈베키스탄의 영 웅, 티무르 대제의 동상이 서 있다. 우즈베 키스탄을 여행하다 보면 어느 도시에서나 티무르의 동상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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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학년도 3월 고3 전국연합학력평가 정답 및 해설 제 1 교시 언어 영역 정 답 1 2 2 1 3 3 4 4 5 4 6 2 7 2 8 5 9 3 10 1 11 3 12 2 13 5 14 5 15 3 16 1 17 2 18 3 19 4 20 4 21 2 22 4 23 1 24 5 25 1 26 5 27 4 28 3 29 2 30 4 31 1 32 2 33
제1절 조선시대 이전의 교육
제1절 우리 교육 약사 제2장 사천교육의 발자취 제1절 우리 교육 약사 1. 근대 이전의 교육 가. 고대의 교육 인류( 人 類 )가 이 지구상에 살면서부터 역사와 함께 교육( 敎 育 )은 어떠한 형태로든 지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언제부터 이곳에서 삶을 꾸려왔는지는 여 러 가지 유적과 유물로 나타나고 있다. 그 당시 우리조상들의 생활을 미루어
(132~173)4단원-ok
IV Q 134 135 136 1 10 ) 9 ) 8 ) 7 ) 6 ) 5 ) 4 ) 3 ) 2 ) 1 ) 0 100km 2 1. 1 2. 2 3. 1 2 137 138 139 140 1. 2. 141 Q 142 143 1 2 1. 1 2. 2 144 145 146 1. 2. 147 Q 148 149 150 151 1. 2. 152 100.0 weight 153
새만금세미나-1101-이양재.hwp
새만금지역의 합리적인 행정구역 결정방안 이 양 재 원광대학교 교수 Ⅰ. 시작하면서 행정경계의 획정 원칙은 국민 누가 보아도 공감할 수 있는 기준으로 결정 되어야 관련 지방자치단체와 시민들의 분쟁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을 모 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신생매립지의 관할에 대한 지방자치단체 간 분쟁(경기도 평택시와 충청남도 당진군, 전라남도 순천시와 전라남도 광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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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1 (1-4 장) 2015년 4월 15일 다니엘 전체 이해 1. 다니엘의 배경과 상황 a. 다니엘은 히브리어 이름으로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이시라 는 뜻 b. 다니엘은 왕족으로 어린 나이에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왕실의 최고 교육을 받음 i. 16 ii. 1:4, iii. c. 하나님이 다니엘에게 꿈과 환상을 해석하는 특별한 은사를 주심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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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작품들의 열람기록은 로그파일로 남게 됩니다. 단순 열람 목적 외에 작가와 마포구의 허락 없이 이용하거나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시 저작권법의 규정에 의하여 처벌받게 됩니다. 마포 문화관광 스토리텔링 공모전 구 분 내 용 제목 수상내역 작가 공모분야 장르 어린이들의 가장 즐거웠던 나들이 장소들 마포 문화관광 스토리텔링 공모전 장려상 변정애 창작이야기 기타
대표이사 K, L 4. 주식회사 동진여객 대표이사 M 피고보조참가인들 소송대리인 법무법인(유한) N 법무법인 O 제 1 심 판 결 부산지방법원 2014. 6. 12. 선고 2014구합20224 판결 변 론 종 결 2015. 5. 8. 판 결 선 고 2015. 8. 21
부 산 고 등 법 원 제 1 행 정 부 판 결 사 건 2014누21387 여객자동차 사업계획변경 인가처분 취소청구 원고, 항소인 1. 경원여객자동차 주식회사 대표이사 A 2. 대한여객자동차 주식회사 대표이사 B 3. 신흥여객자동차 주식회사 대표이사 C 원고들 소송대리인 법무법인 D 법무법인 E 피고, 피항소인 부산광역시장 소송대리인 변호사 F 피고보조참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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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 < > 3. 4...,.,.?. * - 150 - (, ),,,.,,.,,. 2-4.. 50. ( ),,.. - 151 - ., : : :,,,......, - 152 - .. 1.,,,,.... ( ) ( ) ( ) ( ),,,,.,,, - 153 - ,,. (BC 1 ),,. (BC 37 ),,,,,, (BC 1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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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RPS 원작 : 스티브 잭슨 GURPS Lite 제작 : 숀 펀치, 스콧 헤링 편집 : 스티브 잭슨, 앤드루 해커드 국문2판 편역 : 김성일 삽화 : 토스타인 노드스트란드, 크리스 디엔, 밥 스테블릭, 에릭 윌커슨 2004년 9월판 04/09/14교 RPG로 의 초 대장 STEVE JACKSON GAMES 도서출판 초여명 목차 GURPS란? 1 용어집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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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 부 보고서 Ⅰ. 조사 개요 1. 조사 배경 및 목적 o 문화적 여유가 생기면서 만화영화 주인공이나 연예인 등의 캐릭터를 넣어 개발한 캐 릭터상품이 어린이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데, 앞으로 도 계속해서 신세대의 소비문화 를 창출해 나갈 것으로 예상됨. - 그동안 어린이들 사이에 유행했던 캐릭터로는 미키마우스, 세일러문, 아기공룡 둘 리, 바비, 헬로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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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2002 전남대학교 산악회 2002년 제12집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그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도 잊었노라. 지도교수 인사말 산은 인생의 도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산은 無 言 속에서도 自 然 의 理 致 를 가르쳐주고, 또한 많은 智 慧 를 줍니다. 그러나 生 活
하느님 사용 설명서 의 길잡이 오 헬레나 수녀 안녕하십니까? 잦은 폭우와 폭염이 유난했던 지난여름에 교육원 책임자로 새로 소임을 맡게 된 오 헬레나 수녀입니다. 시청각통신성서교육원 모든 학생들께 큰절 올리는 마음으로 인사드립니다. 유수( 流 水 )와도 같은 시간의 흐름
하나 되어 38호 차례 인사말 하느님 사용 설명서 의 길잡이 오 헬레나 수녀 _ 2 말씀과 삶 성경 필사를 마치고 _4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모든 것을 맡깁니다 최종문 토마스 주님의 말씀으로 내 삶의 허전함을 채우려 합니다 말씀 안에서 항상 깨어 있고 기도하며 살아가렵니다 조윤정 수산나 함미경 로사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걸음을 걸으며 기꺼이 용서할 수 있는 은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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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대비 2012 학년도 3월 고3 전국연합학력평가 정답 및 해설 사회탐구 영역 윤리 정답 1 3 2 4 3 4 4 1 5 2 6 2 7 5 8 2 9 4 10 1 11 3 12 2 13 1 14 5 15 1 16 3 17 1 18 5 19 2 20 3 1. [ 출제의도] 인간의 존재론적 특성을 파악 신문 기사에서는 자율적 판단에
图 书 在 版 编 目 (CIP) 数 据 韩 国 文 学 作 品 选 读 / 池 水 涌, 裴 圭 范 著. 上 海 : 上 海 外 语 教 育 出 版 社,2015 新 世 纪 高 等 学 校 韩 国 语 专 业 本 科 生 系 列 教 材 ISBN 978 7 5446 4022 0 Ⅰ. 1
韩 国 文 学 选 读 池 水 涌 裴 圭 范 编 著 上 海 外 语 教 育 出 版 社 제1강 고대가요( 古 代 歌 謠 ) / 향가( 鄕 歌 ) 1 图 书 在 版 编 目 (CIP) 数 据 韩 国 文 学 作 品 选 读 / 池 水 涌, 裴 圭 范 著. 上 海 : 上 海 外 语 教 育 出 版 社,2015 新 世 纪 高 等 学 校 韩 国 语 专 业 本 科 生 系 列 教
발간사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 하였습니다. 올해는 6 25전쟁 55주년과 광복 60년, 을사늑 약 100주년 등 우리나라로서는 역사적으로 매 우 의미 있는 해입니다. 우리가 과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지난 역사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에 영향을
푸른 바람이 되어 발간사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 하였습니다. 올해는 6 25전쟁 55주년과 광복 60년, 을사늑 약 100주년 등 우리나라로서는 역사적으로 매 우 의미 있는 해입니다. 우리가 과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지난 역사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과거를 거울삼아 오늘의 삶을 조명하고
혼자서 꾸는 꿈은 꿈에 불과하지만, 여럿이 꾸는 꿈은 현실이 되게 한다. 아빠가 나를 사랑하기는 했어? 치료나 하세요. 견디는 건 내가 하면 되니까. 너희들은 엄마라도 있지만 난 남편을 잃어 날 지탱할 수 없다고! 왜 우린하고 싶은데 못하는 게 많아? 여보, 내 곁에 오래오래 머물러 줘야 해요. 사랑해요. 아빠, 아빠의 사랑하는 첫째 딸 상 받았어.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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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事記 古 事 13 記 신화 전설 가요 계보 등을 소재로 하여 일본 건국의 유래와 제1대 神武천황부터 제33대 推 古천황까지의 事蹟을 기록한 일본 현존 最古의 典籍이며, 전체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天武천황 대에 천황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던 역사 저술사업을 元明천황이 계승하여, 太安萬侶에게 稗田 阿禮가 암송하고 있던 천무천황대의 역사 저술 내용을 필록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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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2014. Vol 102 CONTENT 2014.04 04 02 04-07 12 08-09 10-11 16 12-14 16-17 19 18-19 20-21 22 23 02 2014. 4 www.hanwooboard.or.kr 03 04 2014. 4 www.hanwooboard.or.kr 05 06 2014. 4 www.hanwooboard.or.kr
*금안1512-01-도비라및목차1~9
ISSN 1975-667 215. 12 215. 12 6 5 4 3 2 1 6 5 4 3 2 1 3 145 14 135 13 13 143. 14.7 1.4 9.2 1 7 45 4 35 41.4 85 76.9 76.8 3 7 8 75 125 4 4 1 25 8 6 4 2 2 15 1 5 15 15 36 35.3 36 14 13 12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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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편 사 회 제8편 사회 제1장 사회단체 제1절 개관(사회조직의 기능) 제2절 고창군의 사회단체 제1장 사회단체 619 고창군의 사회단체 내역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고창군의 사회단체 현황 (2009년 7월 현재) 연번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 (제179회-예결특위 제2차) (10시00분 개의) 위원장 박형덕 의석을 정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성원이 되었으므로 동두천시의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제2차 회의를 개의하겠습니다. 1. 2008년도 일반 및 특별회계 세입세출 제1회 추가경정 예산안(계속) 위원장 박형
(제179회-예결특위 제2차) 1 제179회 동두천시의회(임시회)예결특위 회의록 제 2 호 동두천시의회사무과 2008년 5월 21일 (수) 오전 10시 의사일정(제2차회의) 1. 2008년 일반및특별회계 세입세출 제1회 추가경정 예산안(계속) 1. 2008년 일반및특별회계 세입세출 제1회 추가경정 예산안(계속) --------------------2면 - 161
질문하실 의원님께서는 발언시간을 지켜 주시고, 집행부에 서는 충실한 답변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주실 것을 당 부드립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질문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文 化 敎 育 委 員 會 소속 李 康 珍 議 員 의 질문이 있겠습니 다. 나오셔서 질문하여 주
第 121 回 서울特 別 市 議 會 ( 臨 時 會 ) 本 會 議 會 議 錄 第 3號 서울 特 別 市 議 會 事 務 處 日 時 2000年 9月 5 日 ( 火 ) 午 前 10時 議 事 日 程 1. 서울市 政 및敎 育 行 政 에關 한質 問 附 議 된案 件 1. 서울市 政 및敎 育 行 政 에關 한質 問... 1面 (10時 35 分 開 議 ) 議 長 李 容 富 ; 의석을
인천 화교의 어제와 오늘 34 정착부흥기 35 정착부흥기: 1884년 ~ 1940년 이 장에서는 인천 차이나타운에 1884년 청국조계지가 설정된 후로 유입 된 인천 화교들의 생활사에 대한 이야기를 시기별로 정리하였다. 조사팀은 시기를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하였다. 첫 번
인천 화교의 어제와 오늘 인천 화교의 어제와 오늘 34 정착부흥기 35 정착부흥기: 1884년 ~ 1940년 이 장에서는 인천 차이나타운에 1884년 청국조계지가 설정된 후로 유입 된 인천 화교들의 생활사에 대한 이야기를 시기별로 정리하였다. 조사팀은 시기를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하였다. 첫 번째 시기는 1884년부터 1940년 까 지를 구분하여 정착 부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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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1. 모월곶, 석곶, 서곶, 개건너 검단지역이 편입되기 전, 인천의 서구 전체는 지난날 서곶으로 불리던 지역이었다. 1914년 4월 1일 부평군 모월곶면과 석곶면을 통합되어 서곶 면이 되었다. 서곶이라는 지명은 군 소재지인 부평에서 서쪽 해안에 길 게 뻗어있으므로 그렇게 지어졌다. 이 지명은 반세기 이상 사용되었다. 그래서 인천시가 구제( 區 制 )를
발 간 등 록 번 호 11-1550110-000022-01 제6회 고대옹관 국제학술심포지엄 대형옹관생산과유통연구의현황과과제 Naju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제 6 회 고 대 옹 관 국 세 학 술 심 포 지 엄 대 형 옹 관 생 산 과 유 통 연 구 의 현 황 과 과 제 2 0 1 3 520-230
100,000km DOOSAN vol. 551 06 07 DOOSAN vol. 551 08 09 DOOSAN vol. 551 10 11 DOOSAN vol. 551 12 13 DOOSAN vol. 551 14 15 DOOSAN vol. 551 16 17 DOOSAN vol. 551 18 19 ˇ ˇ ˇ DOOSAN vol. 551 20 21
2 공제회 7월부터 장기저축 일반대여 이율 3.6% 공제회 급여율 대여이율 조정 급여율 결정체계 도입 일환 매년 시중금리에 따라 조정 6월말까지는 4.32% 적용 7월 1일부터 장기저축급여 퇴직급여율 (이자율)이 4.32%에서 3.6%로 조정된다. 일반대여 이율도 장기
제1088호 www.ktcunews.com 버리고 비우면서 행복을 찾는다 한국교직원공제회가 아름다운 선율로 여 름밤을 수놓을 한여름밤의 클래식 산책-시 네마 콘서트 를 개최한다. 영화 음악평론가 김태훈의 해설과 함께 소 프라노 강혜정이 출연, 밀레니엄심포니오케 스트라의 연주로 웅장한 영화 음악의 세계 를 보여줄 이번 행사는 7월에 세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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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모의고사(문제 및 정답).hwp
2014년도 3월 31일 고졸 검정고시 모의고사 제 1 교시 국 어 세종검정고시학원 수험번호 ( ) 성 명 ( )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가)살어리 살어리랏다 ᄀ쳥산( 靑 山 )애 살어리랏다. 멀위랑 래랑 먹고 쳥산( 靑 山 )애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우러라 우러라 ᄂ새여 자고 니러 우러라 새여. 널라와 시름 한 나도 자고 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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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학기 기말고사 대비 EBS 고1 특강 국어-상 강의 교재 EBS 국어( 상) 특강 김유동 강의 전 일러두기 -------------------------------------------------------------------- 학습 범위는 교육부에서 지정한 수업 시간을 기준으로( 총 32 시간) '5. 능동적인 의사 소통 ~ 8. 언어와 세계'
제 출 문 보건복지부장 본 보고서를 국민활건강 개선방안 연구 과제의 최종보고서로 제출합니다. 2010. 12. 책임연구원 : 조 재 국 연 구 원 : 원 종 욱 윤 강 재 김 진 우 한 동 운
정책보고서 2010- 국민활건강 개선방안 연구 조재국 원종욱 윤강재 김진우 한동운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제 출 문 보건복지부장 본 보고서를 국민활건강 개선방안 연구 과제의 최종보고서로 제출합니다. 2010. 12. 책임연구원 : 조 재 국 연 구 원 : 원 종 욱 윤 강 재 김 진 우 한 동 운 목 차 요 약 1 Contents 제1장 서론 5 제1절 연구의
행당중학교 감사 7급 12000001 ~ 12000616 성동구 왕십리로 189-2호선 한양대역 4번출구에서 도보로 3-4분 6721 윤중중학교 감사 7급 12000617 ~ 12000619 영등포구 여의동로 3길3 용강중학교 일반행정 9급 13000001 ~ 1300
2016년도 서울특별시 지방공무원 임용 필기시험 장소 시험장 교통편, 소요시간 등은 반드시 응시자 본인이 해당학교 인터넷 홈페이지 등을 통해 미리 꼭 확인 하시기 바랍니다 장애편의지원 대상자는 별도로 첨부된 엑셀파일에서 본인의 최종 편의지원 내역을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장애편의지원 시험장 : 윤중중학교, 서울맹학교) 경신중학교 일반행정 7급 10001741
제 835호 창간 1994년 10월 7일 TEL 054)933-5675 2016년 3월 29일 화 요 일 요양원 반대 시위 2달째 주민 무조건 이전 요구 사업주 할 도리 다했다 郡 법적 문제는 없다 즉 문화마을에 건립된 노인복 해명했다. 지시설은 요양원이 아닌 단독주택 또한 마을주민, 면 직원, 농어 에 포함되는 노인요양공동생활가 촌공사 관계자 등과 3차례
Attractive People 크릭앤리버 크리에이터 1 영화감독 장윤현 Director s Concerto 우리가 그 에 대해 알게 된 건 접속, 텔미섬씽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대박영 화들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기억에는 감독 장윤현이 아닌 역경과 어려움이 혼돈처럼 산재
어트랙티브는 (주)크릭앤리버 크리에이터의 매력적인 이야기를 담은 격월간 매거진입니다. 영화감독 장윤현 미스터리작가 김성종 웹툰작가 박종원/심윤수 베르나의 꼬리, 천국의 신화Ⅱ, 신의 아들 에이전트와 크리에이터의 밀착 데이트 OBS 장은혜PD, mbn 이민경AD 노서아가비 노서아 가비 란 러시아 커피 의 한자식 발음표기입니다. 달을먹다, 캐비닛, 헤르메스의 기둥
정답 및 해설 - 비둘기집 원리 쪽 확인 극단적으로 생각하기 0개의 수 중에서 차가 8인 수의 쌍은 (, 9), (2, 0) 이고, 짝을 지을 수 없는 나머지 수는 (3), (4), (5), (6), (7), (8)입니다. 따라서 적어도 6+2+=9(개)의 구슬을 뽑아
정답 및 해설 영 재 사 고 력 고급 D 고_D권-해답(0-28)-ok.indd 3. 6. 2. 오후 9:05 정답 및 해설 - 비둘기집 원리 쪽 확인 극단적으로 생각하기 0개의 수 중에서 차가 8인 수의 쌍은 (, 9), (2, 0) 이고, 짝을 지을 수 없는 나머지 수는 (3), (4), (5), (6), (7), (8)입니다. 따라서 적어도 6+2+=9(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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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성주군 환경지도자 연합회 발족 민간 주도 컨트롤타워 구축 들녘활동 등 주도적 역할 2013년 11월 19일 화요일 제725호 정영길 의원, 행정사무감사 발언 돋보여 정영길 도의원이 2013년도 행정 성주과채류시험장, 농업자원관리 씨가 감사로 각각 선출됐다. 사무감사에서 경북 농어업 정책 원, 상주감시험장, 생물자원연구 앞으로 연합회는 469명의 환경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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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그리고 사람중심의 제242호 릲우리 구에 전통과 문화의 향 기를 한 데 아우르는 관광벨트가 생깁니다.릳 금정구는 국내 최장 금정산성 과 역사와 전통이 있는 범어사를 중심축으로 스포원과 회동수원 지를 연계하여 관광벨트로 구축 하는 야심찬 계획을 실행에 옮기 고 있다. 오는 2014년까지 모두 156억 2100만원의 예산을 들여 금정산 성과 범어사 구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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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훈련과 함께하는 논술 실력 쌓기 목 차 Ⅰ부 1. 문단 만들기 연습 5 가. 중심 문장과 뒷받침 문장 구별하기 7 나. 통일성을 적용하여 문단 쓰기 13 다. 일관성을 적용하여 문단 쓰기 19 2. 요약하기 연습 29 가. 중심 문장이 드러난 글 요약하기 30 나. 중심 문장이 드러나 있지 않은 글 요약하기 47 다. 재진술을 통한 요약문 쓰기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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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한국 문학의 범위와 역사 4. 문학 담당층의 확대와 다양성 추구 이 시기의 문학 양상 152 152~153 [참고 자료] 조선 후기 문학의 새로운 경향 조선 후기에는 사회변동과 더불어 문학에서도 새로운 변동이 일어나게 된다. 시조와 가사가 근대 지향적인 방식을 추구하면서 새로운 형태를 모색하고, 소설도 전기에서는 볼 수 없었 던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0 한국사능력검정시험대비(/, 목) 쪽 문. 다음 선언문의 필자와 관련된 설명으로 옳은 것은? [ 점][ 회] 내정 독립이나 참정권이나 자치를 운동하는 자 누구이냐? 너희들이 동양 평화, 한국 독립 보전 등을 담보한 맹약이 먹도 마르지 아니하여 삼천리 강토를 집어먹힌
0 한국사능력검정시험대비(/, 목) 쪽 고급 0년도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대비 (/, 목) 한림법학원 성명 수험 번호 본 문제의 소유권 및 판권은 ( 주) 윌비스 한림법학원 에 있습니다. 무단복사 판매시 저작권법에 의거 경고조치 없이 고발하여 민형사상 책임을 지게 됩니다. 자신이 선택한 등급의 문제지인지 확인하시오. 문제지에 성명과 수험 번호를 정확히 써넣으시오.
3) 지은이가 4) ᄀ에 5) 위 어져야 하는 것이야. 5 동원 : 항상 성실한 삶의 자세를 지녀야 해. 에는 민중의 소망과 언어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입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가능성은 이처럼 과거를 뛰어넘고, 사회의 벽을 뛰어넘고, 드디어 자기를 뛰어넘 는
(가) 2) (가) 학년 고사종류 과목 과목코드번호 성명 3 2009 2학기 기말고사 대비 국어 101 ( ) 염창중 말할 수 있게 되어 어머니가 다시 주시거든 나에게 갚 아라. ꋯ먼저 답안지에 성명,학년,계열,과목코드를 기입하십시오. ꋯ문항을 읽고 맞는 답을 답란에 표시하십시오. ꋯ문항배점은 문항위에 표시된 배점표를 참고하십시오. (가) 우리 중에는 전쟁으로
2012 한국메세나대회 심포지엄 발표인사 소개 전성률 (서강대학교 경영학부 교수)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 동 대학 석사 미국 시라큐스대 경영학 박사(마케팅전공) 미국 피츠버그대 경영대학원 조교수 한국소비자학회, 한국마케팅학회, 한국광고학회, 한국소비문화학회 상임이사
M E 2012 한국메세나대회 심포지엄 C E N A T S Y M 2012. October.24 WED 14:00 P O S 웨스틴 조선호텔 오키드룸 I U M 2012 한국메세나대회 심포지엄 발표인사 소개 전성률 (서강대학교 경영학부 교수)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 동 대학 석사 미국 시라큐스대 경영학 박사(마케팅전공) 미국 피츠버그대 경영대학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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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을 논하다 15강 학생용 보충 자료 우리가 강의를 시작할 때 가장 먼저 무엇을 독해하는 연습을 했나요? 네 바로 논제입니다. 무엇을 묻는지 그걸 제대로 알고 있어야지. 대답을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논제를 무엇이라고 했었는지 생각나십니까? 논제=낚싯대, 제시문=연못, 쟁점=물고기 크게 볼 때 문제를 푼 다는 것은 묻는 사람의 의도를
1.기본현황 연 혁 m 본면은 신라시대 ~고려시대 상주목에 속한 장천부곡 지역 m 1895.5.26한말에 이르러 장천면(76개 리동),외동면(18개 리동)으로 관할 m 1914.3.1행정구역 개편으로 상주군 장천면과 외동면이 병합하여 상주군 낙동면 (17개 리,25개
목 차 1.읍면동 기본현황 2.지방세 징수현황 3.소규모 주민숙원사업비 집행현황 4.예산 집행현황 5.예산 미집행 현황 6.고액체납자 현황 및 징수(독려)현황 7.관외체납세 징수(독려)현황 8.특수시책 확인자 낙 동 면 장 김 진 숙 (인) 부 면 장 차 정 식 (인) 주 민 생 활 지 원 담 당 김 영 욱 (인) 민 원 담 당 전 용 희 (인) 산 업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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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시 산포면 산포로 468-3 전 화 : 061-337-1474 금융업무 일반지도업무 목재집하장 운영 낮은 자세로 발로 뛰는 바른 신문 전남도가 연간 100억여 원의 예 산이 지원되는 한옥마을(행복마 을) 조성사업을 대대적으로 손질 하기로 했 농식품부의 자료에 따르면 지 난해 내시 받은 예산이 5천432억7 천700만 원이었 그러나 전남도 는 전남도가 부담해야
기획 특집 Ⅱ. 어린이 교통사고 현황 먼저 어린이 교통사고 현황을 살펴보면, 표1은 2008년에서 2012년까지 최근 5년간 전국 어린이 교 통사고 발생현황을 나타내고 있다. 1) 표1 13세미만 전국 어린이 교통사고 발생현황 발생년도 발생건수 사망자 부상자 2008
The GyeongNam Development 어린이 교통사고 실태와 대책 기획특집 : 어린이 교통안전, 우리 손으로 최재원 도로교통공단 박사 Ⅰ. 들어가며 지난 2013년 2월 경남 창원에서 발생한 어린이 통학버스 교통사고는 태권도장에서 운행하는 차 량에 7살 초등학생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다. 이렇게 잊을만 하면 해마다 되풀이 되는 어린이 교통사고는 이제
구절초테마공원 & 산호수마을 단아하고 소담한 구절초의 재발견 이 꽃, 개망초보다는 크고 쑥부쟁이와는 닮은꼴이다. 수수하기는 하나, 볼수록 매력 있다. 시골의 길섶에서 흔히 눈에 띄는 구절초 이야기다. 정읍 구절초테마공원에 만개한 구절초는 어떤 가을꽃보다 매혹적이었다.
Special Colorful Scenery of Autumn 정읍 & 장성 시나브로 가을이 소리 없이 익어갑니다 또다시 훌쩍 다가왔다. 더위가 언제 물러가나 싶었는데, 어느덧 한가을이다. 가을은 찬연한 봄과 달리 차분하고 선명하다. 시간이 그려내는 색의 변화가 모든 산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 그 변화는 은근하지만 멈춤이 없다. 향기로운 꽃이 만발하고
역사의 위조(僞造)는 용서할 수 없다.
역사의 위조( 僞 造 ) 는 용서할 수 없다. 고노 담화 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 2014년 3월 14일 일본 공산당 간부회 위원장 시이 가즈오 시작하며 일본군 위안부 에 대한 정부의 견해를 밝힌 고노 요헤이( 河 野 洋 平 ) 관방장관 담화(1993년 8월 4 일 이하 고노 담화 ) 가 국정의 중대한 초점이 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일부 세력을 중심으로
이동걸 칼럼
김용민브리핑 일일 뉴스 브리핑 팟캐스트 http://www.podbbang.com/ch/9938 함세웅 신부와 주진우 기자의 현대사 콘서트 11월13일 서울명동성당은 매진! 11월27일 부산상공회의소 29일 대구동성아트홀 12월11일 대전기독교연합회관 12일 광주김대중컨벤션센터 Yes24에서 티켓 판매 중 2015년 11월 3일 (화) 오늘은 유봉학 한신대학교
1)대한민국의 국시 국책을 위반하는 기사 2)정부를 모략하는 기사 3)공산당과 이북 괴뢰 정권을 인정 내지 비호하는 기사 4)허위의 사실 을 날조 선동하는 기사 5)우방과의 국교를 저해 하고 국위를 손상하는 기사 6)자극적인 논조나 보도로서 민심을 격앙 소란케 하는 외
손석춘의 언론비평 16 언론이길 포기? 여전한 성역 주한미군 한미연합사 현장브리핑에서 나온 국방부 관계자의 발언은 충격적이었다. 북한 서해안의 한 지역을 상정한 상륙작전 이라는 내용도 있었다. 하지만 통일뉴스 외에 그 어떤 언론 도 이를 보도하지 않았다. 현장에 없었다면 인용보도라도 한미연합훈련의 대북 공격성 알면서도 모르쇠 해야 옳은 뉴스였지만 모르쇠 했다.
Ⅰ. 머리말 각종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초기 도읍은 위례성( 慰 禮 城 )이다. 위례성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등 많은 책에 실려 있는데, 대부분 조선시대에 편 찬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사서인 삼국사기 도 백제가 멸망한지
고대 동아시아의 왕성과 풍납토성 - 풍납토성의 성격 규명을 위한 학술세미나 - pp. 46-67 한국의 고대 왕성과 풍납토성 김기섭(한성백제박물관) 목차 Ⅰ. 머리말 Ⅱ. 한국 고대의 왕성 1. 평양 낙랑토성 2. 집안 국내성 3. 경주 월성 4. 한국 고대 왕성의 특징 Ⅲ. 풍납토성과 백제의 한성 1. 풍납토성의 현황 2. 한성의 풍경 Ⅰ. 머리말 각종 기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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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내 1. 이 책자는 2009년 1월부터 2011년 11월까지 남양주시 8272민원센터로 시민들께서 행정 전반에 걸쳐 문의 하신 내용을 이해하기 쉽도록 편집한 것입니다. 본 책자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하여 남양주시 홈페이지 에도 게재하였습니다. 2. 이 책자는 2011년 11월을 기준으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법적근거 등에서 현 시점과 일부내용이 다를 수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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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과목 지적측량 1. 경위의 측량방법에 따른 세부측량에서 연직각의 관측은 정반으로 1회측정하여 그 교차가 최대 얼마 이내인 경우 그 평균치를 연직각으로 하는 가? 가. 1초 나. 5초 다. 1분 라. 5분 2. 거리를 측정 할 때 정오차가 발생 할 수 있는 원인으로 거리가 먼 것은? 가. 온도보정을 하지 않은 때 나. 장력보정을 하지 않은 때 다. 처짐보정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고 정성철 소방령 자녀 예술경영전공 정비담 씨 소방공무원 국가직 촉구 1인 시위 지난 9월 27일 한 청년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정복을 입고 서울 광화문광 장에서 1인 시위를 벌였다. 이 청년은 지난 7월 광주에서 헬기 추락 사고로 순직한 고 정성철 소
2014.10.13 제239호 2면: 아버지의 이름으로 3면: 반복되는 입시와 수업권 침해 논란 4면: 신자유주의적 대학 개혁과 한예종 5면: 중앙일보 대학평가 논란 6면: 최정화 개인전 «총,천연색» 리뷰 7면: 현대음악, 아르스노바 8면: 세운상가 개방회로 인터뷰 9면: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 10면: 빅데이터와 영상 11면: «제국의 위안부» 리뷰 12면:
심히 운동한 친구의 체력훈련은 중반부터 효과가 눈에 띄었다. 2~3일을 계속 걷고 대피소에서 자며 열악한 로 지 생활에 대비했고, 눈 많은 설악산을 찾아 심설산행도 체험하는 등 팀워크를 다져나갔다. 항공권은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직항 대신 한 번 갈 아타는 편으로 일찍
해외 트레킹 공군 예비역들의 히말라야 트레킹 칼라파타르 빛의 신비를 맛본 역전의 빨간 마후라들 고소증 극복하고 칼라파타르(5,550m)와 고쿄리(5,360m) 정상 올라 글 사진 금기연 원정대장 예비역 공군 준장 럼 에베레스트를 다시 가봐? 누군가의 제안에 그 모두들 기다렸다는 듯이 즉석에서 합의가 이루 어졌다. 공군사관학교 동기(21기)들이 매달 두 번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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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andongzion.com 2010년 봄 통권 제30호 ANDONG ZION Newsletter 2010 SPRING Vol.30 안동재활원 요양원 단비원 인교보호작업장 예인 복지사업장 760-821 경북 안동시 서후면 이송천리 77-2 TEL : 054)841-5862, 5865 / FAX : 054)841-6816 E-mail : [email protected]
내 인생의 도서관 선비정신 지구상에는 민족마다 고유한 역사적 인간상과 삶의 정신을 갖고 있다. 일본의 사무라이나 영국의 신사도 같은 것이 그 예다. 각국의 사람들은 그것을 알게 모르게 저마다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고 또 바꾸어나간다. 그렇게 해서 한 민족이 정신적으로
2015. 12 Vol. 10 지혜의 빛, 행복을 만들다 내 인생의 도서관 선비정신 지구상에는 민족마다 고유한 역사적 인간상과 삶의 정신을 갖고 있다. 일본의 사무라이나 영국의 신사도 같은 것이 그 예다. 각국의 사람들은 그것을 알게 모르게 저마다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고 또 바꾸어나간다. 그렇게 해서 한 민족이 정신적으로 공유하면서 유전 되는 인간상과 삶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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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 東 地 方 의 印 刷 文 化 에 關 한 硏 究 - 現 傳 文 集 을 中 心 으로 - 윤동원 * 1) 1. 머리말 2. 硏 究 資 料 3 安 東 의 歷 史 와 社 會 文 化 3.1 安 東 의 歷 史 3.2 安 東 의 社 會 文 化 4. 安 東 地 方 의 特 殊 性 5. 安 東 地 方 印 刷 文 化 6. 安 東 地 方 刊 行 文 集 7.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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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발전연구원 제주발전연구원 정책이슈브리프 2015년 11월 2일 Vol. 226 발행처 : 제주발전연구원 발행인 : 강기춘 주 소 : 63147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연로 253 TEL. 064-726-0500 FAX. 064-751-2168 제주발전연구원은 지역사
226 2015. 11. 2 사려니숲길 셔틀버스 시범운영 성과 및 향후과제 제주발전연구원 손 상 훈 책임연구원 제주발전연구원 제주발전연구원 정책이슈브리프 2015년 11월 2일 Vol. 226 발행처 : 제주발전연구원 발행인 : 강기춘 주 소 : 63147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연로 253 TEL. 064-726-0500 FAX. 064-751-2168 제주발전연구원은
2015 판례.기출 증보판 테마 형법 추록본.hwp
2015 판례 기출 증보판 테마 형법 추록본 편저자 조충환 양건 p.27 첫째줄 유사판례 교체 유사판례 1동일한 형벌조항이 과거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의하여 합헌으로 선언된 바 있으나 그 후의 사정변경 때문에 새로 위헌으로 결정된 경우에도 위헌결정의 소급효를 종전의 합헌결정시점까지로 제한하는 것은 허용되지 아니한다(대판 2011.4.14, 2010도5606).
2~7면
3 추진위원 회가 새로 운 대응책 을 강구하 는 등 민 원이 해소 되지 않고 있다. 시화염 색단지 증 기합리화 추진위원 회에 따르 면 지난 2 월 18일 KGETS가 사진은 시화염색단지 증기합리화추진위원회 위원장 등 핵심 관계자들이 법률전문가를 초청, 에너지 공급가 현실 공문을 보 화를 위한 향후 대응방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모습 내 2월 1 일부터 에 시흥스마트허브
국립중앙도서관 출판시도서목록(CIP) 강원지역 신광역 교통망 구축과 지역 파급효과 분석 = (An) analysis on the regional economic effect and the construction of the new metro-traffic network
국립중앙도서관 출판시도서목록(CIP) 강원지역 신광역 교통망 구축과 지역 파급효과 분석 = (An) analysis on the regional economic effect and the construction of the new metro-traffic network in the Gangwon region / 노승만, 김재진 지음. -- 춘천 : 강원발전연구원,
2013회계연도 고용노동부 소관 결 산 예 비 비 지 출 승 인 의 건 검 토 보 고 서 세 입 세 출 결 산 일 반 회 계 에 너 지 및 자 원 사 업 특 별 회 계 농 어 촌 구 조 개 선 특 별 회 계 광 역 지 역 발 전 특 별 회 계 기 금 결 산 고 용 보 험 기 금 산 업 재 해 보 상 보 험 및 예 방 기 금 임 금 채 권 보 장 기 금 장 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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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 4 BTC A01 A01 A01 A01 A01 A01 A01 A02 A03 A04 A05 A06 A07 B01 B02 B03 B05 B06 B06 B06 B06 B06 B06 B06 B06 B06 B06 B07 C01 C02 C03 C04 C05 C06 C07 C08 C09 C10 C11 C12 C13 C14 C15 C16 C17 C18 C19 C20
Ⅶ. 부 록 의 령 군 북 산 종 합 개 발 계 획 7.1 산림욕 Ⅲ 의 령 군 북 산 종 합 개 발 계 획 수 립 7. 부록 1. 삼림욕(산림체험) 가. 삼림욕의 정의 삼림욕은 동서고금으로부터 신체수양의 대상으로 등장했으며, 산림 이 주는 공익적 기능과 함께 산림내에 인체에 유익한 피톤치드가 있어 이것이 산림을 찾게 하는 상승작용을 하고 있다. 삼림욕이란
수리 영역 가 형 5. 다음 그림과 같이 크기가 같은 정육면체 개가 한 모서리씩을 공유하 면서 각 면이 평행 또는 수직 관계를 유지한 채로 한 평면 위에 놓여있 다. 그림의 세 꼭짓점 A, B, C에 대한 두 벡터 BA 와 BC 가 이루는 각 의 크기를 h라 할 때,
제``교시 수리 영역( 가 형) 시간:00분 점수:00점 성명 수험 번호 쭚 반드시 본인이 선택한 유형( 가 형 또는 나 형)의 문제인지 확인하시오. 쭚 문제지와 답안지에 성명과 수험 번호를 정확히 기입하시오. 쭚 MR 답안지에 성명, 수험 번호, 응시 유형 및 선택 과목, 답 등을 표기할 때에는 반드시 수험생이 지켜야 할 사항 에 따라 표기하시오. 쭚 문항에
제4장 서부신개발지역 12월 건설교통부로부터 지구지정을 받아 2006년에 착공, 2011년 준공하였으며 이후 1단계의 개 발 성과에 따라 2, 3단계 지역도 단계적으로 개발을 추진할 계획이다. 서남부권 개발은 광역중심기능을 갖춘 새로운 자원의 미래형 혁신도시 건설과 전
한국지리지 - 대전광역시 제4장 서부신개발지역 1. 서부 신개발지역 서부 신개발지역은 대전광역시의 서부지역으로 유성과 진잠 등 오랜 역사를 간직한 지역이 위치해 있으며, 대전광역시의 부도심 역할을 하고 있다. 유성은 유성온천을 중심으로 한 관광과 위락의 중심지이며, 대전광역시 서북부지역 및 광역교통의 거점이다. 진잠은 서남부 지역의 교 통, 물류, 유통의 중심지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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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의 환경 대응과 재료 기술 포항산업과학연구원 최 광 Key word: 자동차, 환경, 리사이클 Automobile. Environment, Recycle < 목 차 > 1. 서 언 2. 자동차를 둘러싼 환경문제 3. 자동차에 있어서 중점과제와 재료기술 4. 결 언 5. 참고문헌 1. 서언 자동차는 사람에게 많은 편리성과 매력적인 요소를 제공하고 있다.
목 차 1. 공통공시 총괄 1 2. 살림규모 6 2-1 세입결산 3 2-2 세출결산 5 2-3 중기지방재정계획 7 3. 재정여건 8 3 1 재정자립도 8 3 2 재정자주도 9 3-3 재정력지수 10 3-4 통합재정수지 11 4. 채무 및 부채 12 4-1 지방채무 현황
2014년도 연천군 지방재정공시 연 천 군 목 차 1. 공통공시 총괄 1 2. 살림규모 6 2-1 세입결산 3 2-2 세출결산 5 2-3 중기지방재정계획 7 3. 재정여건 8 3 1 재정자립도 8 3 2 재정자주도 9 3-3 재정력지수 10 3-4 통합재정수지 11 4. 채무 및 부채 12 4-1 지방채무 현황 12 4 1-1지방채발행 한도액 및 발행액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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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신고대상 재활용품 수집상 현황 및 관리 2006. 3 환 경 부 Ⅰ. 재활용품 수집상의 역할과 의미 1. 그간의 역할과 활성화 필요성 2. 재활용품 수집상의 의미와 법적지위 Ⅱ. 미신고대상 재활용품 수집상의 문제점 1. 문제의 발생배경 2. 문제제기 및 민원사례 Ⅲ. 미신고대상 재활용품 수집상 현황 1. 대도시 중심의 무작위 표본조사 실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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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042.630.9637 [email protected] 6 Railway Journal Vol. 17, No. 2 April 2014 : (1917), 17 2 2014 47 :UIC(www.uic.asso.fr/railisa) http://www.unrv.com/culture/roman-roads.php < 1.>, AD200 < 2.> (, ) 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