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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contents 2

370호-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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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 왕릉제사의 정비와 운영* 한 형 주 ** 조선시대의 왕릉은 풍수지리학과 미술사 등에서 왕릉연구가 이루어졌을 뿐 그것 의 국가의례 측면에서의 접근이 거의 없었다. 본고에서는 이중에서 제례를 대상으로 초기 왕릉제사의 제도적 정비와 의식, 종묘와 차별성, 그리고 능행의 정치사적 의미 등을 천착함으로써 국가의례에서 왕릉이 차지하는 위치를 짚어보고자 하였다. 왕릉은 태조 즉위 후 추존된 4 대왕 및 왕비 그리고 신의왕후의 齊 陵 이 조성되 었고 능제의 정비는 친모인 신의왕후 한씨의 제일에 태종의 행행이 거행되면서 이 루어졌는데, 특히 태종 8 년 태조의 사망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厚 陵 과 獻 陵 이 조 성된 세종대에는 제사와 관련된 여러 세부 사항들과 拜 陵 儀 가 수정. 보완되었다. 그 내용은 세종 사후 세종실록 오례의 왕릉과 관련된 흉례조와 길례조에 수록되었으 며, 이후 부분적 수정을 통해 국조오례의 에 수록되었다. 왕릉에서 시행된 제사는 四 孟 月 의 시제와 朔 望, 俗 節 등 다양한데, 이것은 당시 종묘 및 원묘인 문소전에서 시행된 것과 동일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고려 이래의 전 통으로 보이는데, 중국사의 경우에도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조선의 능제 는 국가 祀 典 의 大 祀 에 편입된 고려시대와 달리 大 中 小 祀 의 편재가 아닌 俗 祭 라 는 별도의 체계에 속함으로써 大 祀 로 국가의 正 禮 인 종묘와는 구분되었다. 아울러 능제를 흉례의 체계에 附 加 시킨 중국과 달리 왕릉 관련 의식을 흉례와 길례로 구분 하여 각각에 편입시키는 독자성을 보였다. 태조 ~ 성종의 100년간 종묘의 국왕친제가 41회에 불과한 반면 왕릉과 원묘(문소 전)에 대해서는 국왕이 매년 2 ~ 5 회에 걸쳐 행행했다. 그 후 문소전은 임진왜란 과정에서 파괴되었지만 복구되지 않았고, 왕릉의 사시제는 인조대에 이르러 폐지되 기에 이르렀다. 이후 왕릉제사는 속절제( 臘 日 제외)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조선시대 제사에 왕의 참여는 예상외로 많지 않다. 대표적인 제사대상인 종묘의 경우에도 대략 2 ~ 3 년에 한번씩 왕이 친행이 이루어졌을 뿐이었다. 반면에 왕릉의 친제는 매년 수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누대의 선왕이 모여 있는 혼전보다는 육신 이 안치된 개별 능에 인간적인 친근감을 느꼈고, 능제가 俗 祭 이기 때문에 제사과정 이 간략하다는 측면 등이 결합되어 나타난 것이다. 장엄한 의장을 갖춘 능행은 도성 을 벗어나 일반 민에게 우리의 왕 을 알릴 수 있는 중요한 정치행위였다. * 본 논문은 필자가 2010년 7 월 2 일에 고려대학교에서 개최된 학술포럼 능묘를 통해 본 동아시아 제국의 위상 조선왕릉과 그 주변 에서 발표한 내용을 보완, 수정하여 학술지 역사민속학 33호(한국역사민속학회, 2010년)에 게재한 원고에 근거함을 밝혀둔다. ** 경희대학교 학부대학 객원교수 45

周 縁 の 文 化 交 渉 学 シリーズ 3 陵 墓 からみた 東 アジア 諸 国 の 位 相 朝 鮮 王 陵 とその 周 縁 머리말 조선시대에 왕(비)이 사망하면 그 육신은 땅에 묻어 陵 을 조성하고, 삼년상이 지나면 그 혼을 국가 사당인 종묘에 모셔 놓았다. 양자는 모두 국가의 최고 통수권자인 왕(비)을 대상으로 유교적 인 효 를 실천하는 상징물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나 왕릉과 종묘는 死 者 의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어 별도로 모셔진 장소이고, 후자가 제례의 대상에 한정된 반면 전자는 상례와 제례가 겸행 되는 장소라는 점에서 기본적인 차이가 있다. 조선시대 국가이념인 유교의 실천 장소로 최고 권력자를 대상으로 하고, 현재 그 상징물이 거의 온전하게 남아있다는 사실로 인해 종묘와 왕릉에 대한 관심은 적지 않다. 특히 1995년 종묘에 이어 2009년 왕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됨에 따라 대중적 관심은 더욱 커지고 있다. 그런데 학계의 관심은 양자간에 다르게 나타났다. 종묘의 연구가 1990년대 이후 역사학계를 필두로 건축학, 음악사 분야에서 꾸준히 성과가 나온 반면 왕릉에 대한 연구는 그렇지가 못한 실정이다. 현재 조선시대 왕릉에 대한 연구는 건축물의 축조방식, 풍수학적인 입지 및 왕릉 주변의 석조 조 경물에 대한 미술사의 해석 등 하드웨어적인 접근이 대부분이다. 1) 역사학 분야에서는 왕릉 전체 및 일부 능에 대한 축조, 관리, 遷 葬 등 개괄적 접근 및 18세기 후반 정조 능행의 정치사적 의미를 다 룬 논고가 나왔다. 2) 반면에 국가의례 차원에서의 검토는 왕릉이 조성될 때까지의 상례의 과정을 설 명한 이범직의 논문이 유일하며, 3) 그나마 장기 지속적인 성격의 제례에 대한 연구는 전무한 실상이 다. 이같이 기존의 연구가 18세기 후반 정조대 陵 幸 의 정치적 의미에 집중된 것은 왕릉연구에 국가 의례의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아직까지 이 분야에 대한 연구성과가 부족하다는 현실에 기인한 다. 본고에서는 15세기 왕릉에서 시행된 국가의례, 그중에서도 제례에 대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먼저 조선시대 왕릉 제사가 제도적으로 정리되는 과정을 개관하고, 다음으로 왕릉제례의 내용을 祭 儀 의 검토 및 祭 期 의 변화 양상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끝으로 講 武 와 연결되었던 능행의 정치사적 의 미와 종묘 및 문소전과의 상관성 등을 검토하겠다. 조선시대 국가운영은 흔히 유교적인 禮 治 로 설명된다. 이 예치 는 인간의 기본 감정중 하나 1) 金 永 彬, 風 水 思 想 에서 본 朝 鮮 王 陵 園 墓 造 成 技 法 에 關 한 硏 究 ( 上 )( 下 ) 韓 國 傳 統 文 化 硏 究 4, 1988 1989; 金 元 龍, 李 朝 王 陵 의 石 人 彫 刻 李 朝 彫 刻 樣 式 의 變 遷 아세아연구 2-2, 1959; 洪 慶 振, 朝 鮮 前 期 王 陵 및 石 造 物 樣 式 變 遷 에 관한 硏 究 경희대 석사학위논문, 1987; 裵 允 秀, 朝 鮮 時 代 王 陵 石 獸 에 對 한 硏 究 이화 여대 석사논문, 1983;장경희, 조선후기 山 陵 都 監 의 匠 人 연구 역사민속학 25, 2007;김은선, 조선후기 왕 릉 석인 조각 연구 미술사학연구 249, 2006;장은미. 박경, 조선시대 왕릉의 공간적 분포특성 한국 GIS 학 회지 14-3, 2006;권용옥, 조선왕조 왕릉 문인석상의 복식에 형태에 관한 연구 복식 4, 1981. 2) 金 九 鎭, 朝 鮮 初 期 王 陵 制 度 世 宗 大 王 舊 英 陵 遺 蹟 을 中 心 으로 白 山 學 報 25, 1979;한영우, 정조의 화성행차, 그 8 일 효영출판사, 1998; 鄭 崇 敎, 正 祖 代 乙 卯 園 幸 의 재정운영과 整 理 穀 마련 한국학보 82, 1996;김문식, 18세기 후반 정조 능행의 의의 한국학보 23, 1997;김문식, 1779년 정조의 능행과 남한산 성 한국실학연구 8, 2004;이희중, 17, 8 세기 서울 주변 왕릉의 축조, 관리 및 천릉 논의 서울학연구 17, 2001;신병주, 문화: 왕릉으로 본 행복한 왕, 불행한 왕 선비문화 12, 2007. 3)이범직, 조선시대 왕릉의 조성 및 그 문헌 한국사상과 문화 36, 2007. 46

조선초기 왕릉제사의 정비와 운영(한형주) 인 효 를 바탕으로 하는데, 선왕을 모신 종묘, 왕릉에서의 올바른 의례를 통해 일차적으로 표현되 었다. 이 양자의 관계속에서 왕릉 의례의 내용 및 그 운영 방식을 알아보는 작업은 조선시대 예 치 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일정한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왕릉에 대한 새로운 의 례적. 정치적 접근은 향후 이 분야에 대한 연구를 다양화하는데 一 助 할 것으로 기대한다. 1. 왕릉제사의 성립과정 태조 이성계는 건국 직후 자신의 4 대조를 왕으로 追 贈 하고 그들의 묘를 왕릉으로 높였다. 그는 즉위한 다음 달 이방원을 동북면에 보내 4 조의 무덤에 즉위를 고하고, 환조의 능을 定 陵, 환조비의 능을 和 陵, 도조의 능을 義 陵, 도조비의 능을 純 陵, 익조의 능을 智 陵, 익조비의 능을 淑 陵, 목조의 능을 德 陵, 목조비의 능을 安 陵 으로 각각 올렸다. 4) 이때 定 陵, 和 陵, 義 陵, 純 陵 등은 咸 州 에, 智 陵 은 安 邊 에, 淑 陵 은 文 州 에, 德 陵 과 安 陵 은 孔 州 에 각각 위치하였다. 아울러 태조의 첫 부인인 신의왕후 한씨의 능인 齊 陵 이 마련되었다. 5) 태조는 각 릉에 陵 直 으로 權 務 2 인과 守 陵 몇 호를 정하고 아울 러 齋 宮 을 세우도록 함으로써 6) 건국 직후의 9 陵 이 마련되었다. 9 릉에 대한 제사는 다음해 정월 四 孟 月 과 臘 日 에는 종실 및 대신을 보내 시행하고, 朔 望 日 및 俗 節 에는 都 巡 問 使 가 제사를 드리도 록 정하였다. 7) 태조 5 년 8 월 왕비 강씨가 사망하였다 8) 이에 聚 賢 坊 에 왕비릉을 마련하고, 9) 왕비의 존호를 神 德 王 后 로, 능호를 貞 陵 으로 각각 정하였다. 10) 태조는 재위기간 뿐 아니라 양위 이후에도 정릉에 자 주 行 幸 하였다. 11) 그리고 貞 陵 社 塔 殿 에서 7 일간 불사를 베풀거나 12) 貞 陵 에서 精 勤 法 席 을 베푸는 13) 등 계비 강씨에 대한 추모를 끊이지 않았다. 반면에 전처인 한씨에 대한 추모는 별도로 시행하지 않았다. 태조의 이러한 행동은 韓 氏 所 生 인 정종 및 태종의 반발을 낳았다. 태종 6 년 태조가 사망하기 전까지 정종과 태종(세자기 2 번 포함)은 15차례나 제릉에 참배하였다. 그런데 실제의 제사에는 상왕인 정종이 더 많이 참여한 반면 태종은 제릉의 각종 시설물 마련 및 관리에 몰두하는 모습을 4) 태조실록 권 1 태조 원년 8 월 정사. 5) 태조실록 권 4 태조 2 년 9 월 경신. 6) 태조실록 권 2 태조 원년 10월 병자. 7) 태조실록 권 2 태조 원년 12월 정미. 8) 태조실록 권 10 태조 5 년 8 월 무술. 9) 태조실록 권 10 태조 5 년 8 월 무신. 10) 태조실록 권 10 태조 5 년 9 월 계미. 11) 태조실록 권 11 태조 6 년 정월 무진; 태조실록 권 11 태조 6 년 2 월 임인; 태조실록 권 11 태조 6 년 4 월 신묘; 태조실록 권 12 태조 6 년 10월 갑진; 태조실록 권 13 태조 7 년 정월 경오; 태조실록 권 13 태조 7 년 4 월 정축; 정종실록 권 4 정종 2 년 4 월 계축; 정종실록 권 6 정종 2 년 10월 을묘. 12) 정종실록 권 4 정종 2 년 4 월 계축. 13) 정종실록 권 6 정정 2 년 10월 을묘. 47

周 縁 の 文 化 交 渉 学 シリーズ 3 陵 墓 からみた 東 アジア 諸 国 の 位 相 朝 鮮 王 陵 とその 周 縁 보였다. 태종은 제릉의 비를 새로 만들어 權 近 에게 비문을 쓰도록 했고, 14) 그 石 室 을 새로 축조했으 며, 15) 石 欄, 石 人 등을 새로 제작하고 16) 碑 亭 을 설립하는 17) 등 끊임없이 능의 外 形 조성에 힘썼다. 아울러 제릉의 관리에도 힘썼는데, 특히 태종 3 년 4 월에 만 여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1 인당 3 升 씩 송충이를 잡아 묻도록 한 사실은 18) 그가 제릉의 추모에 얼마나 힘썼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 례이다. 반면에 정릉에 대해서는 무관심을 넘어 그 규모를 축소하기에 이르렀다. 처음 즉위했을 때 종묘, 문소전과 더불어 정릉에서 제사를 드린 후 태종은 이후 단 한번도 정릉 제사에 않았다. 오히려 동 왕 6 년에는 정릉의 兆 域 이 넓다고 百 步 이내로 축소하고, 나머지 땅에 造 家 를 허락함으로써 豪 勢 之 家 가 땅을 차지하려고 다툼을 일으키도록 만들었다. 19) 나아가 태조가 사망하자 바로 다음해에 정 릉을 도성 바깥의 沙 乙 閑 기슭으로 遷 葬 시켰다. 20) 세종대에는 정릉의 제사를 族 親 으로 하여금 주관 케 함으로써 21) 國 行 祭 祀 에서 배제시켰다. 한편 왕릉 제사는 태종대에 이르러 前 王 朝 의 왕까지로 그 대상이 확대되었다. 태종 원년 문하부 낭사에서 고려 태조가 東 民 에 功 이 있으니 그 능인 顯 陵 에 屬 戶 및 柴 地 를 지정하고, 속호의 賦 役 을 면제하며, 樵 牧 을 금지하자고 청하였는데, 당시 왕은 답변을 하지 않았다. 22) 그렇지만 태종 6 년에 태조와 惠 王, 成 王, 顯 王, 文 王, 忠 敬 王, 忠 烈 王, 恭 愍 王 의 8 릉의 관리에 새 지침을 마련하였다. 태조 릉인 顯 陵 에는 3 戶, 나머지 7 릉에 2 호의 수호군을 설정하되, 매호마다 田 一 結 을 주어 樵 採 와 火 焚 을 금지하도록 조처한 것이다. 23) 이러한 조처는 동왕 16년에 중국에서 역대 帝 王 의 陵 寢 을 奉 祀 한 제도를 본받아 전조 8 릉의 제사를 중춘과 중추 2 차례 시행하되, 수릉 2 호를 설정해 다른 역 사를 면제시켜 주고 항상 樵 採 를 금지시키도록 구체화되었다. 24) 아울러 공양군을 왕으로 삼아 25) 능 호를 내려 주었는데, 26) 세종 3 년에는 공양왕의 딸에게 陵 戶 1 호를 지급해 제사를 받들도록 하는 조처로 이어졌다. 27) 이같은 전조 9 릉 제사의 제도적 마련은 세종실록 오례에 고려 시조묘에 제 사할 때 태조위에 현종과 공민왕을 附 祭 하고, 28) 경국대전 과 국조오례의 에는 태조위에 현종, 문 14) 태종실록 권 7 태종 4 년 2 월 기축. 15) 태종실록 권 14 태종 7 년 10월 무자. 16) 태종실록 권 15 태종 8 년 3 월 기미. 17) 태종실록 권 19 태종 10년 3 월 갑신. 18) 태종실록 권 5 태종 3 년 4 월 정묘. 19) 태종실록 권 11 태종 6 년 4 월 정묘. 20) 태종실록 권 17 태종 9 년 2 월 병신. 21) 세종실록 권 1 세종 즉위년 8 월 정유. 22) 태종실록 권 1 태종 원년 정월 갑술. 23) 태종실록 권 11 태종 6 년 3 월 갑인. 24) 태종실록 권 31 태종 16년 6 월 정해. 25) 태종실록 권 32 태종 16년 8 월 갑자. 26) 태종실록 권 32 태종 16년 9 월 정사. 27) 세종실록 권 11 세종 3 년 정월 병자. 28) 世 宗 實 錄 卷 130 五 禮 吉 禮 序 例 神 位 및 吉 禮 儀 式 享 高 麗 始 祖 儀 陳 設. 48

조선초기 왕릉제사의 정비와 운영(한형주) 종, 충경왕( 元 宗 )의 신위를 부제하도록 조처한 사실과 29) 연결되어 당대의 고려 계승의식 및 역대 왕의 평가를 엿볼 수 있다. 태종 8 년 5 월 태조가 사망하였다. 다음 달 그를 안장할 자리를 楊 州 의 儉 巖 으로 정하고, 30) 諸 道 의 軍 丁 6,000명을 징발하여 7 월 그믐날에 역사를 시작하였다. 31) 태조의 건원릉은 石 室 로 조성되 었고, 원찰인 開 慶 寺 에는 노비 150구, 전지 300결이 定 屬 되었다. 32) 아울러 수호군은 100호로 정해졌 고, 33) 주변에 소나무를 심는 34) 등 제반 조처가 마련되었다. 태조의 靈 柩 는 사망 4 개월만에 안장되 었는데, 35) 다음해 7 월 26일 신주를 종묘에 부묘하고, 36) 다음달 健 元 陵 의 제사에 免 喪 을 고함으로 써 37) 3 년상이 끝났다. 태종 10년 이후 건원릉에 대한 제사가 본격화되면서 관련 사항들이 정리되기 시작하였다. 태종 14년 건원릉, 문소전, 종묘, 사직제의 蔬 菜 를 典 祀 寺 에서 공급하고, 宴 享 의 所 用 은 禮 賓 寺 에서 공급 하게 하였으며, 38) 풀과 나무가 무성하면 갑작스런 野 火 에 대처하기 어렵기 때문에 陵 의 禁 火 地 외에 는 민의 耕 墾 을 수용하였다. 39) 아울러 동왕 17년 11월에는 大 明 律 失 火 條 에 의거해 失 火 한 자를 杖 80, 徒 2 년에 처하도록 규정하였다. 40) 이상의 조처와 더불어 각 릉에 예조의 관원을 보내 巡 審 시키되, 이를 문서화하였다. 태종 15년 9 월 春 秋 의 仲 月 에에 예관을 보내 諸 陵 을 巡 審 하고 그 결과를 문서로 작성하여 예조에 보관했는 데, 41) 이때 작성된 문서가 陵 案 이었다. 다음해 정월에는 보다 구체적으로 예조판서가 巡 陵 하고 그가 없을 경우에는 참의가 대행하되 능안을 작성하도록 정하였다. 42) 또한 세종 2 년에 왕은 태종비의 헌릉을 조성할 때 능실 양 옆의 돌과 개석은 全 石 을 사용할 경우 운반이 어려우니 잘라 사용하되, 獻 陵 形 止 案 에 기록하여 후세가 본받도록 명하였다. 43) 陵 案 과 形 止 案 의 작성은 왕릉 관리가 조직적 29) 國 朝 五 禮 儀 序 例 卷 1 吉 禮 壇 廟 圖 說 歷 代 始 祖. 30) 태종실록 권 15 태종 8 년 6 월 을사. 31) 태종실록 권 16 태종 8 년 7 월 신해. 32) 태종실록 권 16 태종 8 년 7 월 을해. 33) 태종실록 권 16 태종 8 년 7 월 을해. 34) 태종실록 권 17 태종 9 년 정월 신유 및 태종실록 권 19 태종 10년 정월 경오. 35) 태종실록 권 16 태종 8 년 9 월 갑인. 36) 태종실록 권 20 태종 10년 7 월 신묘. 37) 태종실록 권 20 태종 10년 8 월 정유. 38) 태종실록 권 28 태종 14년 12월 임진. 39) 태종실록 권 29 태종 15년 3 월 신축. 40) 태종실록 권 34 태종 17년 11월 신유. 41) 태종실록 권 30 태종 15년 9 월 정유. 42) 태종실록 권 31 태종 16년 정월 갑인 命 禮 曹 巡 審 山 陵 禮 曹 啓 本 曹 受 敎 春 秋 仲 月 遣 禮 官 巡 諸 山 陵 仍 立 審 陵 案 藏 諸 本 曹 今 稽 古 制 唐 以 太 常 卿 行 陵 宋 以 太 常 宗 正 卿 朝 拜 祖 宗 陵 乞 依 唐 宋 之 制 以 本 曹 判 書 巡 陵 有 故 則 以 叅 議 代 仍 立 審 陵 案 行 從 之 大 司 憲 李 原 啓 曰 臣 嘗 爲 都 巡 問 使 見 定 陵 和 陵 不 備 三 階 砌 宜 當 修 築 敎 曰 今 年 吉 則 於 寒 食 修 築 可 也 如 此 事 爲 之 誰 怨 兵 曹 判 書 朴 信 請 立 石 羊 石 人 上 可 之 43) 세종실록 권 10 세종 2 년 10월 임술 上 王 又 曰 陵 室 兩 傍 石 及 蓋 石 若 用 全 石 則 轉 輸 甚 難 無 益 於 死 者 有 害 於 生 民 今 日 之 事 永 爲 成 法 於 獻 陵 形 止 案 明 白 載 錄 俾 後 世 子 孫 咸 遵 此 法 49

周 縁 の 文 化 交 渉 学 シリーズ 3 陵 墓 からみた 東 アジア 諸 国 の 位 相 朝 鮮 王 陵 とその 周 縁 으로 이루어졌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능의 관리는 경국대전 에 寢 廟, 山 陵, 壇, 墓 는 예조가 提 調 와 의논하여 奉 審. 啓 聞 하고, 외방은 관찰사가 시행하며, 매년 정월 초하루에는 헌관이 여러 능 위에 잡목과 잡초의 유무를 살펴 보고 계달한다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44) 태종 12년 6 월 25일 상왕비인 순덕왕대비가 사망하자 45) 태종은 13일만에 脫 服 하였다. 46) 大 妃 의 尊 諡 는 定 安 王 后, 능호는 厚 陵 으로 정하고, 2 달 후 정안왕후를 厚 陵 에 안장하였다. 47) 세종 원년에는 정종이 사망했는데, 48) 태종은 아들로 27일, 세종은 손자로 13일만에 釋 服 하였다. 49) 정종의 능은 厚 陵 으로 결정하고 50) 4 개월 후 영구를 厚 陵 에 안장했다. 51) 이때 후릉의 별제와 朔 望 祭 를 健 元 陵 의 예와 같이 하도록 조처했지만, 52) 태종과 세종은 후릉의 제사에 한번도 참여하지 않았다. 이것은 정종을 祔 廟 할 때 별도의 廟 號 를 올리지 않음으로써 정통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종의 의도와 53) 연결 된 것이다. 태종 18년 8 월 왕은 세자에게 양위한 54) 후 健 元 陵 에서 추석제를 지내고 傳 位 를 고하였다. 55) 세종 은 이에 발맞추어 건원릉에 자신의 즉위를 고하였고, 56) 이어 제릉에서 제사를 지냈다. 57) 종묘뿐 아 니라 태조능인 건원릉에서도 즉위를 아뢴 것은 陵 祭 의 정치적 상징성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이러한 조처는 세종이 태종의 讓 位 로 즉위했다는 특수한 상황에 따른 것으로, 선왕의 사망으로 즉위한 후 세의 왕들에게는 계승될 수가 없었다. 태종비 원경왕후의 국상을 거치면서 능제는 좀 더 보완되었다. 세종 2 년 7 월 10일 태종비가 사 망하자 58) 능인 獻 陵 이 조성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대비의 수릉군이 건원릉에 의거하여 100호로 결 정되었다. 1 년 전 정종의 사망 후 후릉에 안장시키면서 守 護 軍 20호를 加 定 해 59) 후릉에 총 40호를 44) 경국대전 권 3 예전 奉 審. 45) 태종실록 권 23 태종 12년 6 월 무인. 46) 태종실록 권 23 태종 12년 6 월 임오. 47) 태종실록 권 24 태종 12년 8 월 경신. 48) 세종실록 권 5 세종 원년 9 월 무진. 49) 세종실록 권 5 세종 원년 9 월 무진, 기사. 50) 세종실록 권 6 세종 원년 12월 임신. 51) 세종실록 권 7 세종 2 년 정월 임인. 52) 세종실록 권 7 세종 2 년 정월 기유. 53)지두환, 조선전기 의례연구 서울대출판부, 1994, 112쪽. 54) 태종실록 권 36 태종 18년 8 월 을유. 55) 세종실록 권 1 세종 즉위년 8 월 임진 上 王 親 詣 健 元 陵 行 秋 夕 祭 兼 告 傳 位 領 議 政 韓 尙 敬 戶 曹 判 書 崔 迤 禮 曹 判 書 卞 季 良 扈 駕 祭 文 曰 嗟 我 皇 考 至 德 如 天 叨 承 丕 緖 十 有 九 年 身 纏 宿 疾 難 堪 聽 政 授 位 世 子 俾 專 政 令 向 巡 舊 都 自 春 徂 夏 且 經 令 節 恨 未 奠 斝 玆 當 秋 夕 恭 修 菲 薄 祗 謁 山 陵, 仰 贍 怵 惕 兼 告 中 情 竚 布 忖 度 俯 諒 孝 思 庶 歆 一 酌 56) 세종실록 권 1 세종 즉위년 10월 신묘. 57) 세종실록 권 1 세종 즉위년 10월 정유. 58) 세종실록 권 8 세종 2 년 7 월 병자. 59) 세종실록 권 7 세종 2 년 2 월 경술. 50

조선초기 왕릉제사의 정비와 운영(한형주) 할당한 사실과 60) 비교할 때 과다한 조처였다. 이에 태종은 건원릉을 제외한 왕들에게 수호군을 100 호씩이나 둘 수 없다고 반대했는데, 신료들이 각 릉은 50호씩으로 나중에 전하가 合 葬 될 것을 대비 해 헌릉이 100호가 된 것이라고 설명하자 이를 수용한 것이다. 61) 이상으로 건원릉의 수릉군은 100호, 나머지 각릉은 1 인당 50호라는 방식이 확정되었다. 세종실 록 지리지에는 이 사실이 반영되어 건원릉에는 陵 直 으로 權 務 2 인과 守 護 軍 1 백 戶 를 두되, 每 戶 마다 田 2 결을 주었고 62), 헌릉 역시 같은 규모로 기록되어 있다. 63) 이밖에 齊 陵 에는 權 務 2 인과 守 護 軍 50 戶 가, 64) 함경도의 태조 4 대의 능인 定 陵, 和 陵 등에는 각각 權 務 1 인씩을 두었다고 기록 되어 있다. 65) 그러다가 세조 12년 陵 直 인 권무는 參 奉 (종 9 품)으로 바뀌었는데, 66) 이것이 경국대 전 에 그대로 수록되었다. 67) 한편 왕릉 제사의 비용은 籍 田 의 所 出 을 통해 마련하였다. 적전은 開 京 부근의 西 籍 田 과 楊 州 인 근의 東 籍 田 으로 구성되는데, 대략 4 백결의 규모로 파악된다. 농민의 賦 役 동원으로 耕 作 된 적전의 소출은 세종 7 년의 기록에 의하면 서적전에서만 5,000여석에 이르렀는데, 종묘, 사직, 왕릉 등 중 앙에서 직접 관장하는 제사의 비용으로 썼다. 68) 이와는 별도로 지방에 존재하는 中 祀. 小 祀 의 제사 대상에는 각각의 祭 位 田 이 별도로 설정되어 있어 69) 서로 구별되었다. 2. 능제의 의례적 정비 건국 직후부터 태조의 조상인 추존 4 대에 대한 능제가 시행되었고, 정종과 태종이 齊 陵 및 건원 릉에 수시로 제사했다는 기록은 관련 祭 儀 의 존재를 말해준다. 그렇지만 당시에 사용된 祭 儀 의 구 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다가 태종 15년 예조가 보고한 제향의식속에 여러 릉의 제사 시기와 巡 審 에 대한 언급이 일부 나타났다. 70) 이를 바탕으로 다음해 5 월의 健 元 陵 別 祭 儀 가 마련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 제의의 내용 역시 알 수 없는데, 다만 예조가 奠 爵 후 上 香 의 과정 및 獻 酌 후 無 拜 가 의례에 맞지 않음을 지적하여 이를 고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71) 다음해 4 60) 세종실록 지리지 경기 부평도호부 해풍군. 61) 세종실록 권 9 세종 2 년 8 월 경자 禮 曹 啓 大 行 王 大 妃 守 陵 軍 依 健 元 陵 例 置 百 戶 從 之 初 禮 曹 啓 上 王 請 置 百 戶 上 王 曰 太 祖 之 陵 則 百 戶 可 也 繼 世 之 君 若 皆 百 戶 田 民 難 繼 今 山 陵 毋 過 三 十 戶 兵 曹 判 書 趙 末 生 等 請 曰 山 陵 周 回 廣 闊 三 十 戶 難 於 守 護 且 將 爲 兩 陵 各 五 十 戶 共 計 百 戶 何 如 乃 許 之 62) 세종실록 지리지 경기 양주도호부. 63) 세종실록 지리지 경기 광주목. 64) 세종실록 지리지 경기 부평도호부 해풍군. 65) 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함흥부. 66) 세조실록 권 38 세조 12년 정월 무오. 67) 경국대전 권 1 吏 典 各 陵 殿 68)한형주, 조선초기 국가제례 연구 일조각, 2002, 149쪽. 69) 세종실록 권 51 세종 13년 3 월 경오. 70) 태종실록 권 30 태종 15년 9 월 정유. 71) 태종실록 권 31 태종 16년 5 월 계사. 51

周 縁 の 文 化 交 渉 学 シリーズ 3 陵 墓 からみた 東 アジア 諸 国 の 位 相 朝 鮮 王 陵 とその 周 縁 월 예조는 다시 健 元 陵 祭 儀 註 를 새로 편찬하여 올렸다. 이때 태종은 산릉의 제례는 세속을 따르는 데, 여기에 飮 福 禮 가 없는 것은 무슨 뜻이냐며 비난하였다. 72) 73) 74) 세종 즉위년에 이르러 拜 陵 儀 가 새로 마련되고 다음해에 拜 陵 攝 行 儀 가 제정되었다. 이 의식의 내용은 그 일부가 실록의 본문에 실려 있다. 이와 더불어 세종 4 년에는 헌릉에서 시행되는 拜 陵 儀 가 별도로 제정된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獻 陵 의 의식은 시기적으로 태종이 사망한 지 4 개월 만에 마련되었고, 제사의 대상이 神 位 가 아닌 靈 座 로 표현된 것으로 볼 때 국상중의 제사 의식으로 생각 된다. 이러한 세종 초반기의 제의는 喪 葬 儀 軌 와는 별도로 제작된 諸 陵 制 度 儀 軌 에 75) 수록되어 준 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76) 이후 세종 11년 종묘, 原 廟 의식을 일부 조정하는 가운데 拜 陵 儀 역시 내용의 일부가 수정되었다. 이때의 수정은 酌 獻 후의 拜 禮 는 모두 神 位 앞에서, 讀 祝 은 獻 官 의 왼쪽 에서 시행하며, 祝 板 은 神 位 의 오른쪽에 설치하는 등 位 置 와 관련된 사항이었다. 77) 이러한 의식의 수정과정을 거쳐 國 朝 五 禮 儀 능제의가 설정된 것으로 보인다. 주목되는 사실은 이러한 吉 禮 儀 式 으로서의 王 陵 祭 儀 가 세종 사후에 편찬된 세종실록 오례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종실록 오례에는 왕릉과 관련된 제사의식으로 山 陵 四 時 及 臘 正 至 俗 節 祭, 山 陵 親 行 祭 儀 의 2 개가 나오는데, 이 모두 國 喪 기간중에 시행되는 凶 禮 의 의식이었다. 78) 반면에 국조오례의 에는 흉례의 의식으로 四 時 及 臘 俗 節 朔 望 享 山 陵 儀, 親 享 山 陵 儀 가 있고, 79) 길례의 의식 80) 으로 拜 陵 儀, 四 時 及 俗 節 朔 望 享 諸 陵 儀 가 각각 설정되어 있다. 그러면 王 陵 과 관련된 祭 儀 의 구체적인 모습은 어떠할까. 다음의 표는 국조오례의 에 수록된 관 련 의식을 정리한 것이다. 표 1 국조오례의 왕릉관련 제사의식 種 類 拜 陵 儀 四 時 及 俗 節 朔 望 享 諸 陵 儀 節 次 四 時, 俗 節 ( 正 朝, 寒 食, 端 午, 秋 夕, 冬 至, 臘 日 ), 時 日 準 朔 望 備 節 齋 戒 散 齋 2 일, 致 齋 1 일 左 同 次 출발 1 일전에 陵 司 가 大 次, 小 次, 侍 臣 과 호종 陳 設 관의 막차 설치 출발당일 版 位, 헌관. 배향관. 문무관의 위차 설치 1 일전 陵 寢 掃 除, 獻 官, 諸 執 事 의 位 次 설치 72) 태종실록 권 33 태종 17년 4 월 갑신. 73) 세종실록 권 2 세종 즉위년 12월 임진 74) 세종실록 권 4 세종 원년 7 월 경오. 75) 세종실록 권 30 세종 7 년 10월 신사. 76)태종대부터 왕과 왕비가 사망하면 각각의 喪 葬 儀 軌 가 제작되고, 제사와 관련된 諸 陵 制 度 儀 軌 및 嘉 禮 와 관련 된 의궤가 별도로 존재했음은 이미 기존 연구에서 언급되었다(한형주, 15세기 祀 典 體 制 의 성립과 그 추이 역사교육 89, 2004, 141~142쪽). 77) 세종실록 권 43권 세종 11년 3 월 병인. 78) 세종실록 권 135 五 禮 凶 禮 儀 式. 79) 국조오례의 권 8 凶 禮 四 時 及 臘 俗 節 朔 望 享 山 陵 儀, 親 享 山 陵 儀. 80) 국조오례의 권 1 吉 禮 拜 陵 儀, 四 時 及 俗 節 朔 望 享 諸 陵 儀. 52

조선초기 왕릉제사의 정비와 운영(한형주) 車 駕 出 宮 出 宮 節 次 향일 행사전 神 座, 祭 文, 祭 器 설치 당일 神 座, 祝 板, 祭 器 설치 儀 仗 小 駕. 鹵 簿 獻 官 就 位 1( 初 嚴 ) 諸 衛. 陪 從 官 집합 2( 二 嚴 ) 輿. 輦. 大 寶 준비 左 通 禮 請 中 嚴 3( 三 嚴 )왕이 翼 善 冠. 袞 龍 袍 차림으로 輿 로 이동 왕이 근정문밖 에서 輦 으로 갈아탐 4 小 駕 陵 所 도착 大 次 에 들어감 1 行 事 5 각전 饌 具 마련 2 行 事 3 각전 祭 饌 준비, 찬자. 알자. 찬의 四 拜 후 就 位 3 행사 1 각전 獻 官 및 諸 官 就 位 4 殿 下 就 位 5 請 行 禮 1 行 事 5 각전 饌 具 마련, 陳 設 검사 2 行 事 3 각전 찬자. 알자. 찬의 四 拜 후 就 位 3행사 1 각 전 獻 官 및 諸 執 事 就 位 4 獻 官 就 位 ( 四 拜 ) 進 ( 四 拜 ) 膳 行 禮 國 王 神 位 前 跪 三 上 香 奠 爵 俯 伏 興 跪 大 祝 獻 官 神 位 前 北 向 跪 搢 笏 三 上 香 奠 爵 俯 伏 初 獻 禮 節 讀 祭 文 俯 伏 興 平 身 復 位 興 跪 大 祝 讀 祝 文 俯 伏 興 平 身 復 位 次 亞 獻 禮 亞 獻 官 神 位 前 跪 奠 爵 俯 伏 興 跪 復 位 獻 官 神 位 前 北 向 跪 搢 笏 俯 伏 興 跪 復 位 終 獻 禮 亞 獻 과 同 亞 獻 과 同 終 禮 四 拜 殿 下 小 次 로 돌아감 亞 獻. 終 獻 官 퇴장 監 察. 執 禮 퇴장 殿 下 釋 服 徹 籩 豆 徹 禮 饌 祭 文 묻음 四 拜 獻 官 퇴장 監 察 퇴장 贊 者. 謁 者 四 拜 후 퇴장 徹 禮 饌 祝 板 묻음 車 駕 還 宮 車 駕 還 宮 위의 표에서 보듯이 국조오례의 에 수록된 능제의는 拜 陵 儀 와 四 時 及 俗 節 朔 望 享 諸 陵 儀 의 2 가지 가 있다. 이중 후자가 四 時, 俗 節, 朔 望 등 정해진 기일에 시행되는 제사라면, 전자는 일정한 날짜가 없는 제사를 대상으로 의식을 정리한 것이다. 주목되는 사실은 전자가 왕의 친행을, 후자는 섭행을 기준으로 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구분은 실제의 시행에서 별로 의미가 없었다. 정월 초하루, 추석, 단오 등의 시기에 왕이 친제한 사례는 수없이 나오기 때문이다. 양 의식은 친제와 섭제를 구 분하여 설정했는데, 다만 친제. 섭제의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제사의 과정은 배릉의의 경우 제사전의 준비절차 거가출궁 행례절차 거가환궁의 4 단계로 구 분되며, 향제릉의에는 왕의 출궁과 환궁의 과정이 없다. 준비절차는 齊 戒 부터 행사 당일까지 제사를 준비하는 과정이다. 능제는 大 祀 가 아닌 俗 祭 로 규정 되어 있기 때문에 재계가 7 일이 아닌 3 일에 불과하다. 능이 당일로 왕래가 가능하면 궁궐의 별전 에서 2 일간 散 齊 하고, 正 殿 에서 1 일간 致 齊 하지만, 거리가 멀면 1 일전에 行 宮 에서 齊 宿 한다. 祭 官 은 왕의 親 祭 時 영의정이 亞 獻 官 을, 의정이 終 獻 官 을 각각 담당하고, 攝 行 일 경우 2 품관이 담당 한다. 이러한 헌관의 구성은 大 祀 및 中 祀 의 제사대상과 동일하다. 81) 능제에는 犧 牲 을 검사하고 屠 殺 하는 과정이 설정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신위에게 올리는 음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능제사의 祭 饌 은 素 膳 으로 차려지는데, 여기에는 생선과 고기가 포함되지 않 았다. 82) 이와 유사하게 운영되었던 속제인 原 廟 의 경우 세종 2 년 肉 饍 을 올리도록 조처하였고, 83) 81) 국조오례의 서례 권 1 길례 齊 戒, 齊 官. 82) 국조오례의 서례 권 1 길례 饌 實 尊 罍 圖 說 에 따르면 山 陵 親 享 及 四 時 俗 節 의 제찬은 餠, 湯, 實 果, 茶 食, 散 子, 中 朴 桂, 淸 酒 등으로 마련되고, 山 陵 朔 望 及 先 告 事 由 移 還 安 에는 羹, 飯, 餠, 湯, 實 果, 菜, 藥 果, 淸 酒 등으로 구 성되어 고기와 생선의 부류는 올리지 않는다. 83) 세종실록 권 10 세종 2 년 11월 기축. 53

周 縁 の 文 化 交 渉 学 シリーズ 3 陵 墓 からみた 東 アジア 諸 国 の 位 相 朝 鮮 王 陵 とその 周 縁 이를 기반으로 국조오례의 의 文 昭 殿 제사에서는 육선을 겸용하도록 규정되었지만 84) 능제의 경우 변함이 없었는데, 이는 불교의 영향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車 駕 의 出 宮 및 還 宮 의 과정은 왕의 행차와 관련된 단계이다. 拜 陵 시의 국왕의 儀 仗 은 小 駕 鹵 簿 와 細 仗 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종묘제사시의 大 駕 鹵 簿 와 大 仗 및 문소전 제사시의 法 駕 鹵 簿 와 半 仗 에 비하여 그 격이 떨어졌다. 85) 제사의 본 과정은 왕이 자리에 오른 후 行 禮 를 청하면서 시작되는데, 3 獻 으로 진행되었다. 初 獻 의 과정은 三 上 香 奠 爵 俯 伏 興 跪 讀 祭 文 俯 伏 興 平 身 의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반면에 亞 獻 과 終 獻 에서는 奠 爵 및 俯 伏 興 平 身 의 과정은 초헌과 동일하지만 3 번 香 을 올리는 과정 및 祭 文 을 읽는 과정은 시행하지 않는다. 3 헌이 끝나면 4 拜 후 헌관이 퇴장하고 籩 豆 를 거두어 제사가 끝난다. 이러한 의식의 제정과정에서 가장 논란이 된 것은 능에서의 四 時 祭 시행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의 여부였다. 앞장에서 언급했듯이 능제의 시기는 태조 원년 9 릉의 제사를 四 孟 月, 臘 日, 朔 望 日, 俗 節 등에 시행하도록 한 조처에서 처음 정해졌다. 이 결정은 태종대 초반까지 이어지다가 태조의 건원 릉의 제사가 시행되면서 좀 바뀌게 되었다. 태종 10년에 종묘, 계성전, 문소전, 健 元 陵, 齊 陵 에는 四 時 大 享, 有 名 日, 朔 望 日 에 제사하고 나머지 능침에는 有 名 日, 朔 望 祭 만 시행하도록 결정된 것이다. 86) 그런데 이러한 제사의 시기는 고려 및 중국의 경우와 상호 비교되었다. 고려시대 능제사가 언제 시행되었는지는 고려사 예지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반면에 세가에는 왕의 謁 陵 기사가 전기, 후기를 막론하고 적지 않게 수록되어 있는데, 그 시기는 1 월부터 12월까지 다양하게 나타났다. 87) 또한 공민왕 20년 12월에 顯 陵 에서 朔 望 祭 를 復 行 했다는 기록이 나온 것을 보면 이전부터 삭제와 망제가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88) 확신할 수는 없지만 조선 태조대 능제의 시기는 아마도 고려시대의 사실을 바탕으로 마련된 것 같다. 그런데 중국의 역사적 경험은 이와는 좀 달랐다. 송사 예지에 의하면 능제는 원래 三 代 에 없던 것이 秦. 漢 이래 점차 그 의식이 마련되었는데, 唐 代 에 이르러 淸 明, 朔 望 日, 時 節 등의 제사가 정비 되었고, 이것이 五 代 와 宋 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89) 明 에 들어와 제사 시기는 보다 명확하게 규정되 었다. 명 태조는 자신의 선조릉 제사를 冬 至, 正 旦 에 3 마리 太 牢 로 시행하고, 淸 明, 中 元, 孟 冬 및 매월 삭망에 3 마리 小 牢 로 제사하였는데, 태조의 사후 그의 능에서는 여기에 탄생일이 추가되어 치제되었다. 成 祖 이후 황제릉이 북경 근처에 조성되면서 역대의 황제들은 淸 明, 中 元, 孟 冬 에 太 牢 로 제사하고, 聖 旦, 正 旦, 孟 冬, 忌 辰 에는 遣 官 行 禮 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후 명 세종 15년(1536) 84) 국조오례의 서례 권 1 길례 饌 實 尊 罍 圖 說 文 昭 殿 懿 廟 四 時 俗 節. 85) 국조오례의 서례 권 2 가례 鹵 簿. 86) 태종실록 권 20 태종 10년 12월 무신. 87)예컨대 희종은 동왕 2 년(1206) 8 월 갑술일에 顯 陵 을, 9 월 을유일에 昌 陵 을, 갑오일에 陽 陵 에서 각각 제사를 지냈고, 공민왕은 재위 20년(1371) 3 월 정해일에 正 陵 을, 윤 3 월 계유일에 憲 陵 을, 갑술일에 景 陵 을, 11월 갑 술일에 顯 慶 善 高 德 陵 의 5 陵 을, 을해일에 正 陵 을 각각 알현하였다. 88) 고려사 권 43 세가 43 공민왕 6 공민왕 20년 12월 庚 申 朔 始 復 行 朔 望 祭 于 顯 陵 89) 宋 史 卷 123 志 76 禮 26 凶 禮 2 上 陵 上 陵 之 禮 古 者 無 墓 祭 秦 漢 以 降 始 有 其 儀 至 唐 復 有 清 明 設 祭 朔 望 時 節 之 祀 進 食 薦 衣 之 式 五 代 諸 陵 遠 者 令 本 州 長 吏 朝 拜 近 者 遣 太 常 宗 正 卿 或 因 行 過 親 謁 宋 初 春 秋 命 宗 正 卿 朝 拜 安 陵 以 太 牢 奉 祠 [ 一 四 ] 乾 德 三 年 始 令 宮 人 詣 陵 上 冬 服 歲 以 為 常 開 寶 九 年 太 祖 幸 西 京 過 鞏 縣 謁 安 陵 奠 獻 54

조선초기 왕릉제사의 정비와 운영(한형주) 에 中 元, 孟 冬 의 제사가 霜 降 일로 바뀌었지만 나머지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90) 여기서 조선 왕릉과 달리 명의 황제릉에서는 犧 牲 이 사용된 반면 四 時 大 享 및 臘 享 祭 가 능에서 시행되지 않았다는 차이 를 드러내고 있다. 이같이 중국과 다른 능제의 시행은 당대인들에게 부담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태종 15년 여러 제 사들의 의식이 조정되었는데, 이때 목조 이하 여러 산릉은 元 日, 寒 食, 端 午, 秋 夕, 冬 至, 臘 日 에 遣 使 行 祭 하고, 健 元 陵, 齊 陵 에는 朔 望, 元 日, 寒 食, 端 午, 秋 夕, 冬 至, 臘 日 에 제사하도록 바꿈으로써 이 전에 시행되던 사시대향이 폐지되었던 것이다. 91) 그런데 다음해에 이르러 사시대향은 다시 복구되 었다. 이때 태종은 종묘에서만 사시대향제를 시행하는 것은 불가하니 文 昭 殿, 濬 源 殿, 健 元 陵, 齊 陵 에서 사시대향제를 시행하는 것이 어떠한지 하문하였는데, 하륜이 正 法 으로는 종묘에서만 시행하는 것이 맞지만 굳이 반대하지는 않는다는 입장을 보임으로써 사시대향이 복구된 것이다. 92) 그런데 이후 능제사의 시기가 바뀌었다는 별도의 기록이 실록에 나오지 않았음에도 세종 사후에 편찬된 세종실록 오례에는 건원릉. 제릉의 제사가 朔 望 및 正 朝. 寒 食. 端 午. 秋 夕. 冬 至. 臘 日 등 의 歲 時 에만 시행될 뿐 사시대향의 규정은 보이지 않아 좀 혼란스럽다. 언뜻 생각할 때 세종대 언 젠가 사시대향이 다시 제외된 것으로 이해하기 쉬운데, 아마도 세종실록 오례에 태종 15년의 기 사가 수록된 것에 그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왕릉의 축판을 쓸 때 건원릉 과 제릉에 孝 子 國 王 臣 署 를 칭하고 정릉과 후릉에는 國 王 姓 署 라 칭한 것으로 보아 그 기준이 태종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93) 이 때문에 국조오례의 에도 태종 16년 이후의 사실을 근거로 능제 의 시기가 朔 日 과 望 日, 俗 節 ( 正 朝, 寒 食, 端 午, 秋 夕, 冬 至, 臘 日 )및 4 맹월의 상순이라고 규정된 것이다. 94) 사실 능에서 사시대향을 지내는 것이 부당하다는 주장은 일찍부터 나왔다. 정종 원년 왕이 예조 에 제릉의 제사를 종묘의 향례와 같게 하라고 명하자, 예조는 능제는 古 制 가 아니며, 이미 원묘에 서 사시제를 시행하니 따로 능에서 제사할 필요가 없다 고 반대하였다. 95) 또한 앞에서 언급했듯이 태종 16년에 하륜은 왕과의 대화에서 능에서 사시대향을 시행하는 것은 正 法 이 아님을 분명하게 지 적하였다. 그렇지만 왕릉에서의 사시대향은 이후에도 그대로 시행되었다. 90) 明 會 典 卷 90 禮 部 48 陵 墳 等 祀 陵 寢. 91) 태종실록 권 30 태종 15년 9 월 정유 禮 曹 啓 祭 享 儀 式 啓 曰 文 昭 殿 朝 夕 上 食 床 用 九 楪 饌 用 五 器 啓 聖 殿 文 昭 殿 四 時 大 享 有 名 日 別 祭 攝 行 用 油 蜜 果 四 注 床 饌 九 器 又 啓 穆 祖 以 下 諸 山 陵 元 日 寒 食 端 午 秋 夕 冬 至 臘 日 遣 使 行 祭 健 元 陵 齊 陵 朔 望 及 元 日 寒 食 端 午 秋 夕 冬 至 臘 日 之 祭 一 依 前 例 春 秋 仲 月 遣 禮 官 巡 諸 陵 仍 成 審 陵 案 藏 諸 本 曹 (밑줄없 음) 又 啓 啓 聖 殿 文 昭 殿 朝 夕 上 食 及 有 名 日 別 祭 外 除 四 時 大 享 濬 源 殿 依 諸 山 陵 有 名 日 祭 例 遣 使 行 祭 而 除 朔 望 慶 州 全 州 平 壤 太 祖 眞 殿 有 名 日 別 祭 依 前 例 令 本 道 使 臣 守 令 行 祭 而 除 四 時 大 享 皆 從 之 92) 태종실록 권 32 태종 16년 7 월 정유 復 文 昭 殿 濬 源 殿 健 元 陵 齊 陵 四 時 大 享 祭 上 曰 四 時 大 享 獨 於 宗 廟 行 之 不 可 亦 欲 行 於 健 元 陵 文 昭 殿 濬 源 殿 齊 陵 何 如 河 崙 啓 曰 以 正 法 止 祭 宗 廟 可 也 若 欲 徧 行 寧 失 於 厚 亦 非 大 失 也 宗 廟 祭 止 五 室 祖 父 喪 服 異 制 此 乃 親 親 之 殺 遂 命 復 行 93) 세종실록 오례 길례서례 축판 諸 陵 德 智 義 稱 孝 曾 孫 嗣 王 臣 署 安 淑 純 稱 孝 曾 孫 國 王 臣 署 定 稱 孝 曾 孫 嗣 王 臣 署 和 稱 孝 曾 孫 國 王 臣 署 健 元 稱 孝 子 嗣 王 臣 署 齊 稱 孝 子 國 王 臣 署 貞 稱 國 王 姓 署 厚 稱 國 王 姓 署 94) 국조오례의 서례 길례 시일. 95) 정종실록 권 1 정종 원년 4 월 신축. 55

周 縁 の 文 化 交 渉 学 シリーズ 3 陵 墓 からみた 東 アジア 諸 国 の 位 相 朝 鮮 王 陵 とその 周 縁 왕릉의 제사시기가 바뀐 것은 시대가 한참 흐른 인조대 초반에 이르러서였다. 인조 2 년(1624) 이괄의 난을 수습한 뒤 국가의 재정을 긴축하는 과정에서 各 陵 의 五 享 大 祭 를 정지했던 것이다. 96) 그러다가 인조 8 년에 이르러 그 제사를 다시 복구하였다. 97) 그런데 이러한 조처에 대하여 사간원 및 시독관 李 省 身, 부제학 趙 翼 등은 태묘에서 지내는 五 享 을 능침에서 지내는 것은 煩 瀆 하며, 아울 러 이 제사는 禮 經 에 없어 祀 典 에 어긋날뿐 아니라 의리에도 맞지 않는다며 다시 혁파할 것을 강력 하게 주장하였다. 98) 결국 이 주장이 수용되어 인조 14년에 陵 寢 의 五 享 祭 祀 는 정식으로 혁파되었 다. 99) 이 결정은 이후 준수되었고, 결국 국조속오례의 에서도 능제중 사시대향과 납향제는 빠지게 되었다. 100) 3. 陵 幸 의 의례 정치적 성격 국가의례는 제도적인 정비 여부를 통해 일차적인 이해가 가능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실제의 운영, 특히 통치권자인 왕의 참여 여부를 분석함으로써 심층적 접근이 가능해진다. 조선초기 국왕의 능행 사례는 상당히 많다. 우선 그 현황을 정리하면 다음의 표 2 와 같다. 표 2 태조~성종연간 국왕의 능행 및 친제 현황(단위 : 회) 祭 祀 對 象 主 祭 者 陵 號 王 ( 妃 ) 名 太 祖 定 宗 太 宗 世 宗 端 宗 世 祖 成 宗 합계 健 元 陵 太 祖 15 29 10 1 5 4 64 齊 陵 神 懿 王 后 9 12 2 2 1 26 貞 陵 神 德 王 后 8 1 9 厚 陵 定 宗 / 定 安 王 后 獻 陵 太 宗 / 元 敬 王 后 20 1 7 5 33 英 陵 世 宗 / 昭 憲 王 后 1 8 2 11 顯 陵 文 宗 1 3 4 8 昭 陵 顯 德 王 后 2 2 光 陵 世 祖 / 貞 熹 王 后 5 5 昌 陵 睿 宗 / 安 順 王 后 6 6 敬 陵 德 宗 6 6 합 계 8 24 42 32 6 25 33 170 위의 표를 보면 태조 ~ 성종의 102년간 국왕의 능행은 170회에 이르고 있다. 문종과 예종의 사례 가 보이지 않는 것은 그들의 재위기간이 先 王 의 3 년상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실록에 보이는 능 행의 기록방식은 다양하다. 태조대의 경우 위에서 보이는 貞 陵 行 幸 의 事 例 모두가 上 幸 貞 陵, 上 96) 인조실록 권 4 인조 2 년 2 월 계축. 97) 인조실록 권 22 인조 8 년 정월 계미. 98) 인조실록 권 22 인조 8 년 정월 병오 및 2 월 무진, 병자. 99) 인조실록 권 32 인조 14년 6 월 신묘. 100) 국조속오례의 서례 권 1 시일. 56

조선초기 왕릉제사의 정비와 운영(한형주) 如 貞 陵 과 같이 단순히 능에 간 사실만을 기록할 뿐이었다. 이 경우 과연 태조가 정릉에서 유교적 인 능제를 시행했는지 의심스러운 면이 있다. 반면에 정종 이후에는 拜 齊 陵, 謁 健 元 陵, 親 祭 于 健 元 陵 등과 같이 능행이 제사와 연결되어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단오, 추석 등 의 명절 제사에는 上 詣 健 元 陵 行 秋 夕 祭 와 같이 능제의 이유를 설명한 사례가 많다는 것이다. 諸 陵 중에서 제사를 많이 받은 것은 태조와 時 王 의 친부모들이었다. 친부모의 제사가 많은 것은 당연 하지만, 건원릉의 제사 역시 이들 못지않게 시행되었다. 王 統 에서 창업군주가 갖는 상징 및 권위가 절대적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보인다. 성종의 경우 추증된 친부인 덕종과 의리상의 아버지인 예 종에게 똑같은 횟수로 제사함으로써 자신의 정통성과 人 情 을 동시에 표현하였다. 이 시기 왕의 능행은 선왕(비)의 국상기간을 제외할 경우 연 평균 2 회를 상회할 것으로 보인 다. 이것은 동기간의 종묘친제가 41회에 이르러 연평균 0.4회인 것과 비교할 때 4 배가 넘는다. 그 리고 당시 중요한 국가제사였던 환구제가 7 회, 사직. 선농. 문묘의 제사가 각각 3 회씩 시행된 것 101) 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나마 선왕의 또 다른 제사 대상인 原 廟 ( 文 昭 殿 )에서 태종 10년~ 성종의 85년간 99회의 친제가 시행되어 연 평균 1.2회에 이르렀다는 102) 사실과 비견될 수 있다. 고려사 예지에는 선왕과 관련된 제사로 宗 廟, 景 靈 殿, 諸 陵 이 설정되어 있는데, 이는 선초의 종 묘, 문소전, 왕릉의 제사와 유사하였다. 103) 그런데 종묘 뿐 아니라 景 靈 殿 과 諸 陵 을 모두 大 祀 에 포 함시킨 104) 고려와 달리 조선에서는 문소전과 왕릉을 종묘와 구분하여 俗 祭 로 규정하였다. 이것은 세종실록 오례에는 大 中 小 祀 의 辨 祀 에 문소전과 왕릉의 명칭 자체가 보이지 않다가 국조오례 의 에서야 俗 祭 라는 별도의 범주안에 이 양자가 포함된 것이다. 또한 왕릉은 세종실록 오례에 凶 禮 의 대상으로만 기술되었을 뿐 吉 禮 條 에는 그 내용이 없었는데 국조오례의 에 이르러 拜 陵 儀 와 四 時 及 俗 節 朔 望 享 諸 陵 儀 의 2 가지가 길례의식속에 편입된 것이다. 왕릉이 俗 祭 로 규정된 것은 국가차원의 공적인 제사와 왕의 사적인 제사를 구분하려는 당대인들 의 예인식에 기반한 것이다. 그런데 보다 규범적이고 복잡한 공적인 제사보다 사적인 제사에 그 접 근이 쉬웠다. 대사인 종묘제의 재계가 7 일인데 반하여 속제인 왕릉제는 3 일에 불과하였고, 태조 이하 역대의 선왕 모두를 제사의 대상으로 삼은 종묘제와 달리 왕릉제는 특정 선왕만이 치제대상으 로 한정되었다. 그 결과 제사의 과정도 간략하여 행례에 대한 왕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아울러 魂 이 모셔진 혼전보다 육신이 묻힌 능에 친근감을 느끼는 것은 人 之 常 情 이라 하겠다. 한편으로 왕릉으로의 行 幸 은 君 主 들에게 佛 事 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조선초의 국왕들이 유교적인 통치와는 별도로 불교에 관심이 많았음은 주지의 사실인데, 105) 이것이 반영되어 당시 왕릉을 守 護 하 기 위한 願 刹 의 설립 및 운영은 상당히 일반적이었다. 건원릉을 위한 開 慶 寺, 제릉을 위한 衍 慶 寺, 101)한형주, 15세기 祀 典 體 制 의 성립과 그 추이 역사교육 89, 2004. 102)한형주, 조선초기 국가제례 연구 2002, 일조각, 126쪽 ~128쪽. 103) 景 靈 殿 은 고려의 原 廟 로 여기에 御 眞 이 봉안되었고, 그 운영이 불교적 성격이 강하였지만, 5 묘제로 운영되었 고, 궁월 내에 존재한다는 점 등으로 당대인들은 文 昭 殿 과 유사하다고 파악하였다. 문소전에 대해서는 한형주, 조선전기 文 昭 殿 의 성립과 그 운영 역사민속학회 24, 2007, 참고. 104) 고려사 권 61 지 15 예 3 景 靈 殿, 諸 陵. 105)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 일조각, 1993. 57

周 縁 の 文 化 交 渉 学 シリーズ 3 陵 墓 からみた 東 アジア 諸 国 の 位 相 朝 鮮 王 陵 とその 周 縁 헌릉과 영릉을 위한 報 恩 寺, 광릉을 위한 奉 先 寺 등이 그 대표적인데, 여기에는 선왕의 초상화가 봉 안되어 있었다. 능행과정에서 왕이 佛 事 를 시행한 기록은 태종 9 년 건원릉 능행길에 개경사에서 法 會 를 시행한 사례가 나오지만 106) 일반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당시의 국왕들은 개별적 차원에서 불교를 후원했을 뿐 공식적인 행동은 대부분 삼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종 즉위 후 世 祖 妃 貞 熹 王 后 의 주도아래 世 祖 의 願 刹 로 奉 先 寺 가 세워지면서 107) 상황이 바뀌게 되었다. 봉선사에서 죽은 세조를 위해 凶 禮 로 서의 佛 齋 가 시행되었고, 108) 훗날 세조비 정희왕후가 죽었을 때 역시 불재가 시행된 것이다. 109) 세조의 국상이 끝난 이후에도 이 상황은 이어졌다. 貞 熹 王 后, 昭 惠 王 后, 章 順 王 后 의 3 大 妃 가 光 陵 에 나가 제사한 후 봉선사의 奉 先 殿 에서 제사를 드리거나, 110) 茶 禮 를 시행하는 111) 등 광릉 제사 후에 봉선사 禮 佛 이 연속적으로 시행된 것이다. 이러한 대비들의 행동은 성종에게도 그대로 나타났 다. 성종은 재위 2 년 광릉의 제사 후에 崇 恩 殿 ( 奉 先 殿 )에 가서 茶 禮 를 행하고 奉 先 寺 에서 香 幣 를 올리고 禮 佛 를 시행했다. 112) 또한 광릉의 제사 후에 봉선사의 봉선전에서 세조에게 제사를 드리거 나, 113) 봉선전에 나아 세조의 晬 容 을 拜 謁 하고 다례를 행하기도 하였다. 114) 능제를 거행한 후 원찰에 들려 예불하는 모습은 종묘를 비롯한 국가제사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상의 이유로 왕 릉에 대한 국왕의 接 近 性 은 종묘제보다 높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국왕은 왕릉의 참배과정에서 종묘제 참여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통치의 효과를 얻을 수 있 었다. 우선 평소 접하기 어려웠던 일반 백성들에게 자신이 우리 왕 임을 알리는 좋은 기회를 얻었 다. 능행시 왕은 小 駕 鹵 簿 와 細 丈 을 갖추고 움직였다. 수십 개의 깃발 및 다양한 儀 物 을 앞세우고, 번쩍이는 갑옷과 활, 칼을 찬 수많은 군사들의 호위속에서 이루어진 장엄한 왕의 행렬은 백성들에 게 감탄과 두려움을 자아냈지만 동시에 그들의 왕이 가시적인 존재로 다가왔다. 세종 15년 4 월 왕 이 獻 陵 에 제사하고 돌아올 때 興 仁 門 에서 光 化 門 에 이르는 좌우의 길옆에는 만여명으로 추산되는 인원이 그 행렬을 觀 望 하였고, 115) 동왕 23년 5 월 헌릉을 배알하고 돌아올 때 興 仁 門 부터 闕 門 의 좌 우까지 結 彩 하니, 大 小 의 부녀자가 다투어 浮 階 를 맺었는데, 구경하는 인원이 千 萬 에 이르렀다고 한다. 116) 능행은 왕이 백성들의 생활상을 직접 목도하고, 그들과 접촉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태종 106) 태종실록 권 17 태종 9 년 5 월 임진. 107) 예종실록 권 6 예종 원년 1 년 6 월 기묘. 108) 예종실록 권 7 예종 원년 9 월 무자; 성종실록 권 1 성종 즉위년 12월 무진; 성종실록 권 2 성종 원 년 정월 임오, 병신. 109) 성종실록 권 154 성종 14년 5 월 임인. 110) 성종실록 권 15 성종 3 년 2 월 기축. 111) 성종실록 권 28 성종 4 년 3 월 병오; 성종실록 권 114 성종 11년 2 월 무진. 112) 성종실록 권 9 성종 2 년 3 월 갑술. 113) 성종실록 권 145 성종 13년 윤 8 월 신묘. 114) 성종실록 권 83 성종 8 년 8 월 병진; 성종실록 권 232 성종 20년 9 월 갑술. 115) 세종실록 권 60 세종 15년 4 월 병오. 116) 세종실록 권 92 세종 23년 5 월 경자. 58

조선초기 왕릉제사의 정비와 운영(한형주) 10년 제릉에 제사하고 돌아오던 왕은 성문앞에서 구걸하는 여자 소경을 보고 측은히 여겨 米 豆 를 내려주고, 환궁한 뒤에는 鰥 寡 孤 獨 169인을 演 福 寺 에 모아 米 豆 1 석씩을 내려주는 은혜를 베풀었 다. 117) 세종 19년에는 왕이 건원릉에 제사한 후 東 郊 로 나가 직접 농사의 상태를 살펴보았고, 118) 성 종 20년에는 왕이 건원릉과 현릉에 제사를 드린 후 환궁하다가 中 良 浦 의 大 晝 停 에서 扈 駕 人 에게 술 을 내리면서 연변의 농부에게도 술을 내려주었다. 119) 또한 성종은 다음해 영릉에 오가는 과정에서 여주, 이천 등지의 백성들이 피해를 입었다며 그들의 田 租 를 반감시켰고, 아울러 利 川 을 지나면서 지역 유생 2,3인을 뽑아 생원, 진사로 삼았다. 120) 이러한 행위를 통해 조선의 왕은 두렵기보다는 친 밀한 존재로 다가설 수 있었다. 이상의 능행 과정에서 보이는 통치자의 親 萬 民 의 모습은 王 道 政 治 구현 방식의 하나였다. 그런 데 능행과정에서 이보다 더 중시했던 것은 講 武 의 시행이었다. 당시의 왕들은 능행을 사냥 및 大 閱, 陣 法 훈련 등과 연결시킴으로써 군사력의 강화를 꾀하였던 것이다. 능제가 끝난 후 왕이 사냥하는 모습은 정종 2 년 3 월에 처음 나왔다. 이때 정종은 세자(이방원) 와 함께 齊 陵 에 제사하고 壺 串 에서 사냥하였다. 태종은 재위 4 년 9 월 제릉에서 제사하고 放 鷹 을 구경하였고, 121) 동왕 10년에는 제릉을 제사한 후에 白 馬 山 에서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였다. 122) 이후에 도 태종이 拜 陵 후 사냥을 구경했다는 기록은 실록에 여러 번 나왔다. 123) 태종대에 능행과 강무가 결부되는 방식은 정착되었다. 그런데 다음대의 세종은 父 王 의 이런 방식 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재위 32년간 32회에 걸쳐 拜 陵 했지만 단 한번도 능행중에 사냥한 적이 없 었다. 다만 세종 31년 2 월 세자가 건원릉에 배알한 후에 豐 壤 등지에서 사냥한 사례가 보이는데, 이 것은 당시 代 理 聽 政 중인 세자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조처로 보인다. 세종 이후의 왕들은 태종대와 같이 능행과정에서 상시적으로 사냥을 했다. 심지어 어린 단종의 경우에도 6 차례의 능행중에 5 번을 사냥할 정도였다. 세조대에 이르러 이런 경향은 더욱 강화되어 능행과정에서 사냥 뿐 아니라 다양한 군사훈련이 펼쳐졌다. 동왕 원년 9 월 건원릉, 헌릉을 배알한 후 峨 嵯 山 에서 사냥한 후 習 陣 을 하였고, 124) 동왕 4 년 3 월 헌릉과 영릉을 제사한 후 箭 串 에 이르 러 閱 武 하고 매사냥을 구경했던 것이다. 125) 세조대의 이러한 방식은 성종대에 그대로 이어졌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당시의 신료들 역시 능행중의 講 武 를 당연한 것으로 파악했다는 사실이다. 성종 4 년 7 월 경기도에 蟲 災 가 발생하자 왕은 承 政 院 을 통해 齊 陵 의 제사만 지내고 강무는 정지할 뜻을 비추었다. 이때 鄭 昌 孫 崔 恒 등은 117) 태종실록 권 20 태종 10년 12월 무오. 118) 세종실록 권 88 세종 22년 3 월 을묘. 119) 성종실록 권 231 성종 20년 8 월 기유. 120) 성종실록 권 245 성종 21년 윤 9 월 갑오. 121) 태종실록 권 8 태종 4 년 9 월 경술. 122) 태종실록 권 20 태종 10년 9 월 기축. 123) 태종실록 권 21 태종 11년 3 월 을축;권 24 태종 12년 8 월 계해;권 34 태종 17년 8 월 을미 등. 124) 세조실록 권 2 세조 원년 7 월 기묘. 125) 세조실록 권 12 세조 4 년 3 월 무자. 59

周 縁 の 文 化 交 渉 学 シリーズ 3 陵 墓 からみた 東 アジア 諸 国 の 位 相 朝 鮮 王 陵 とその 周 縁 강무는 田 獵 이 아니라 武 事 를 講 하는 것이기 때문에 폐지할 수 없다고 반대하였다. 이에 왕은 領 議 政 申 叔 舟 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당시 신숙주는 배릉 후 돌아오는 길에 2 ~ 3 번 打 圍 로 行 軍 을 시 험하는 정도는 괜찮다고 타협점을 제시하였다. 126) 사실 경건하게 시행되는 拜 陵 과 살생을 수반하는 講 武 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세종이 능행중 강 무를 시행하지 않았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성종 8 년 9 월 敬 陵 과 昌 陵 에 대한 제사가 끝난 후 예 조판서 許 琮 은 오늘 淡 服 을 입고 拜 陵 하여 슬픔이 다 가시지 않았는데 전하가 굳이 친히 사냥을 할 필요가 있겠냐며 왕의 사냥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성종은 사냥은 陵 寢 에 있는 사나운 범을 쫒아내 기 위한 것이라 대답한 뒤 친히 戎 服 을 입고 사냥을 거행하였다. 127) 며칠 뒤 성종은 능행중의 사냥 은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능침을 위해 사나운 짐승을 쫒는 행위라고 再 次 변명하였다. 128) 이상에서 보듯이 조선초기의 왕들은 선왕에 대한 효 를 내세워 일 년에 몇 차례씩 능행을 시행 하였다. 그리고 제사가 끝나고 돌아올 때 자연스럽게 講 武 와 大 閱, 習 陣 등 군사훈련을 시행함으로 써 자신이 최고의 軍 事 統 帥 權 을 가졌음을 과시하였다. 맺음말 조선시대의 왕릉은 선왕(비)의 3 년상 동안에는 凶 禮 의 대상이었지만 이후 길례의 대상으로 왕 조의 멸망기까지 존속하였다. 기존 학계에서는 풍수지리학과 미술사 등에서 왕릉연구가 이루어졌을 뿐 그것의 국가의례 측면에서의 접근이 거의 없었다. 본고에서는 이중에서 제례를 대상으로 초기 왕릉제사의 제도적 정비와 의식, 종묘와의 차별성, 그리고 능행의 정치사적 의미 등을 천착함으로써 국가의례에서 왕릉이 차지하는 위치를 짚어보고자 하였다. 왕릉의 제사는 태조 즉위 후 추존된 4 代 의 왕과 왕비의 능 및 신의왕후의 齊 陵 이 조성되어 그 제사가 시행되면서 시작되었다. 이때 陵 直 과 守 護 軍 이 설정되었고, 四 孟 月 祭, 朔 望 祭, 俗 祭 등의 제 사가 결정되었다. 능제는 태종 초반 신의왕후 한씨의 齊 陵 에 친제가 거행되면서 정리되기 시작했는 데, 특히 동왕 8 년 태조의 사망으로 健 元 陵 이 조성되어 흉례가 시행되고, 2 년 후 3 년상이 끝나면 서 본격적으로 제사의 시행 및 의식의 정비가 모색되었다. 왕릉 주변의 禁 止 설정, 능제의 재정 확 보, 健 元 陵 親 祭 儀 와 攝 行 儀 의 제정 등이 그 실례이다. 이후 세종 즉위년에 정종, 동왕 2 년에 태종 비 원경왕후, 동왕 4 년 태종이 잇달아 사망하여 厚 陵 과 獻 陵 이 조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흉례와 관 련된 제반 의식들이 재검토 되었고, 제사와 관련된 여러 세부 사항들과 拜 陵 儀 가 수정. 보완되었다. 그 내용은 세종 사후 세종실록 오례의 凶 禮 조에 수록되고, 이후 부분적 수정을 통해 국조오례 의 의 길례조와 흉례조에 관련 항목들이 기재되었다. 왕릉에서 시행된 제사는 四 孟 月 의 시제와 朔 望, 俗 節 (정조, 한식, 단오, 추석, 동지, 납일)등 다양 한데, 당시 종묘 및 원묘인 문소전에서 시행된 것과 동일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고려 이래의 전통으 126) 성종실록 권 32 성종 4 년 7 월 경술. 127) 성종실록 권 84 성종 8 년 9 월 정묘. 128) 성종실록 권 84 성종 8 년 9 월 계유. 60

조선초기 왕릉제사의 정비와 운영(한형주) 로 四 時 祭 가 능제에서 배제된 중국사의 경험과 달랐다. 그런데 조선의 능제는 국가 祀 典 에 大 祀 로 편입된 고려시대와 달리 俗 祭 라는 별도의 체계속에 속함으로써 국가의 大 祀 인 종묘와 구분되었다. 아울러 능제를 흉례의 체계에 附 加 시킨 중국과 달리 왕릉 관련 의식을 흉례와 길례로 구분하여 각 각 편입시키는 독자성을 보였다. 왕릉의 제사 시기가 종묘 및 원묘와 동일하다는 사실은 왕의 친행이 종묘보다는 왕릉에 집중시키 는 결과를 낳았다. 태조 ~ 성종의 102년간 종묘의 국왕친제가 41회에 불과한 반면 왕릉에는 170회에 걸쳐 이루어졌고, 문소전에서는 85년간 99회의 친제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현상으로 원묘인 문소전 의 폐지 및 왕릉에서의 사시제 폐지를 주장하는 여론은 조선전기 내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결국 임진왜란 과정에서 원묘인 문소전은 파괴되었지만 복구되지 못하였고, 왕릉의 사시제는 인조대에 이르러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왕릉제사는 속절제( 臘 日 제외)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조선시대 제사에 왕이 참여한 사례는 예상외로 많지 않다. 대표적인 제사대상인 종묘의 경우에도 대략 2 ~ 3 년에 한번씩 왕의 친행이 이루어졌을 뿐이었다. 반면에 왕릉의 친제는 매년 수차례에 걸 쳐 이루어졌다. 누대의 선왕이 모여 있는 혼전(종묘)보다는 육신이 안치된 개별 능에 인간적인 친 근감을 느꼈고, 陵 幸 중에 願 刹 에의 行 幸 이 쉬웠으며, 능제가 俗 祭 이기 때문에 제사과정이 간략하다 는 이유 등이 결합되어 나타난 것이다. 장엄한 의장을 갖추어 진행된 능행은 일반 민에게 우리의 왕 을 알리는 동시에 그들의 생활상을 왕이 직접 관찰하여 통치의 기반으로 삼았던 중요한 정치 적 행위였다. 아울러 조선초기의 국왕들은 능행의 과정에서 講 武, 大 閱, 陣 法 등 군사훈련을 상시적 으로 시행함으로써 그들의 군사통수권을 과시하는 정치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