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소개 정서아 초등학교 때 언니의 연극 연습을 보고 극본을 썼고, 중학교 때 세계 고전에 빠져 소설을 썼다. 하지만 정작 품은 꿈은 달라 글과는 무관 한 삶을 살았고, 그에 대한 미련은 블로그에 에세이와 짧은 소설을 담 는 것으로 풀었다. 초기 우리집에는 천사가 산다 는 판타지적 성격이 무척 강했다. 그 러던 것이 극본으로 작업하며 변형 됐고, 현재의 소설로 재탄생했다.
비록 먼길을 돌아 지금의 자리에 섰지만, 가슴에 품은 이야기는 그 득하여 언제나 준비가 된 작가이 다. 현재 차기작을 집필 중에 있다.
목차 1. 그 녀석 2. 천사 4885 3. 그 여자아이 4. 탐색 5. 접촉 6. 짝사랑 7. 연극 8. 시작 9. 의문 10. 귀환 11. 발각 12. 대면 13. 재주 14. 작전
15. 마법 16. 습격 17. 운명의 상대 18. 변화 19. 봄이 온다는 희망 20. 여행 21. 그런 너를 좋아해 22. 초심 23. 꿈, 데이트 24. 고백 25. 소원 26. 혼란 27. 폭로 28. 이별을 위한 시간 29. 다녀왔어
1. 그 녀석 사실 따지고 들면 수상쩍은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우리집에 처음 온 그날부터가 그 랬다. 그는 내가 실수로 여자 라는 글씨를 생략하고 만든 하우스메이 트 벽보를 보란 듯이 흔들며 집을 구경시켜 달라고 억지를 부렸다. 남잔 안돼요. 이 집에 나 혼자 있 단 말예요. 라는 낯선 사람에게 함부로 해선 안 되는 엄청난 고백도 깡그리 무
시한 채 자신이 엄청 먼 곳에서 엄 청 어렵게 온 것이라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난 꼭 이 집에서 살고 싶어요. 순정만화의 주인공이라도 저런 일로 눈물을 흘리진 않을 텐데 어 쩐지 현실감 없는 캐릭터였다. 게 다가 그의 생김새도 어딘가 모르게 비현실적인 구석이 있었다. 보통의 인간이 찰흙으로 만든 얼굴을 가지 고 있다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부 드러운 지점토로 만든 얼굴을 가지 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내 눈을 똑 바로 바라보며 어거지 청을 늘어놓 고 있는 순간에는 나의 정신이 다
소 몽롱해지기도 했다. 하얗고 보 드라운 지점토의 느낌과는 달리 그 는 매우 끈질겼다. 왜 꼭 우리집 이어야 된다는 거 예요? 우리집에는 숨겨둔 보물단 지도 없고 터도 안 좋아서 밤마다 귀신 울음소리도 들려요. 나의 거절 방식도 상당히 유치해 져 갔다. 급기야 귀신울음소리까지 내며 분위기를 조성했다. 귀신은 사람들이 제멋대로 만들 어 낸 거예요. 사람이 죽으면 천사 가 바로 와서... 그는 유치원생에게 죽음의 비밀 을 일러주는 선생님처럼 떠들다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비현실적인 생김새에 참으로 어울리는 말솜씨 였다. 암튼 꼭 여기서 살고 싶어요. 집 보여줘요. 혹시...날 좋아하는 거에요? 낮에 는 내 뒤만 줄곧 쫓아다니고, 밤에 는 전봇대 뒤에 숨어서 우리집 몰 래 훔쳐보고. 그랬던 거 아니냐구 요. 짝사랑도 밤에 활동하면 범죄 인 거 몰라요? 나는 어떻게든 쫓아낼 심산으로 아무 말이나 막 던졌다. 짝사랑은 그 쪽이 하고 있잖아 요?
순간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진짜 지켜본 거예요? 내가 한 걸음 물러서며 경계의 눈 빛으로 노려보자 그는 그제서야 실 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당황 해했다. 지켜보긴 지켜봤죠. 저 위에서... 그는 난데없이 하늘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신은 다 보고 계시거든 요. 제가 여기 온 것도 그래서인 거 고. 내가 여기서 지내야만 우리가 가진 문제가 다 해결될 수 있거든 요. 그가 너무 진지한 눈빛으로 얘기 해 나는 순진한 양처럼 깜빡 속아
넘어갈 뻔 했다. 우리? 당신 사이비 종교단체에서 나왔지?? 내가 요즘 하나님을 종 종 찾긴 하지만 신을 영접한다든가 하는 건 체질에 안 맞거든요. 딴 데 가서 알아보세요! 나는 버럭 화를 내고 대문을 쾅 닫 았다. 그리고 옥상으로 슬그머니 올라가 대문 밖 사정을 살폈다. 그 는 그 자리에 꼼짝없이 서 있었다. 정말 하늘의 계시를 받은 사람처럼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지점토로 만 든 동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생긴 건 로콘데 하는 짓은 사이코 란 말이지.
그런 수상쩍은 녀석에게 나는 결 국 집을 내주고야 말았다. 이런 사태를 맞게 된 데는 나에게 도 일부분의 책임이 있다. 사건의 발단은 성실한 음주생활 로 인한 통장잔고의 바닥이었다. 부모님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며 부족함 없이 남기고 간 통장이 기 어코 0 을 찍은 것이다. 지은이는 나의 무계획성에 새삼 탄복했고 금 세 혀를 찼다. 대책이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할 만한 뚝심도 성실함도 없고, 나에 게 있는 건 오로지 귀차니즘 하나
였다. 그렇다고 노력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아르바이트를 구해보겠 다고 하루 종일 돌아다닌 날도 있 었다. 하지만 남의 돈 벌어먹고 사 는 건 각박했다. 하루 종일 게임을 해서 돈을 번다거나 하루 종일 잠 만 잔다거나 하루 종일 먹기만 한 다거나, 그런 건 귀차니즘을 무릅 쓰고라도 도전해볼 텐데... 무력감과 절망감에 빠져있는 나 를 구한 건 전봇대에 붙여진 월세 구함 벽보였다. 벽보를 보자마자 우리집 서재가 내 머릿속으로 순간 이동을 했다. 한 사람이 발 뻗고 누 울 정도의 공간과 책상, 의자, 컴퓨
터라는 옵션까지 갖추고 있는 빈 방.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고 하더니 바로 이거다 이거! 그날로 하우스메이트 벽보를 만 들어 학교 게시판이며 길거리 전봇 대며 골목 담벼락 따위에 덕지덕지 붙였다. 큰 노동 없이도 매달 일정 한 소득을 확보할 수 있다는 희망 이 가슴을 벅차게 했다. 하지만 그 희망은 오래 가지 않았다. 집을 보 러 온 사람마다 현관문을 들어서기 무섭게 도망가기 일쑤였기 때문이 었다.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 그렇듯
나의 취미나 특기는 청소가 아니었 다. 컵라면 용기 어디까지 쌓아봤 니, 설거지 그릇 언제까지 안 씻어 봤니, 거실 청소 얼마나 오래 안 해 봤니? 등에 대한 도전과 기록수립 이라면 또 모를까. 구두약처럼 시꺼먼 바닥, 소파에 언덕을 이룬 빨랫감들, 개수대에 황룡사지 9층 목탑처럼 쌓아 올려 진 그릇들, 석고처럼 굳은 걸레, 걸 레 속에서 외출 준비를 하는 바퀴 벌레들, 폭설이 내린 듯 쌓인 먼지. 그것들이 만들어낸 풍경이 아름답 지 않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 다. 그렇다고 꽁무니에 불붙은 짐
승마냥 뛰쳐나갈 줄은 몰랐다. 그 녀석은 우리집 문턱을 밟자마 자 뛰쳐나간 도망자의 숫자가 기하 급수적으로 늘고 있던 찰나, 금도 끼 은도끼를 내어줄 산신령처럼 등 장했다. 물론 처음엔 집을 내줄 생각은 눈 곱만치도 없었다. 끈질긴 사이코 를 처리하기 위해선 청각적 접근보 다 시각적 접근이 더 간단하겠구나 싶어서 나는 항복의 표정을 지으며 대문 안으로 그를 안내했다. 족히 10초면 도망가고도 남을 것이었 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그는 내가
기대할 수 없었던 전혀 엉뚱한 반 응을 보였다. 내일부터 들어오면 되죠? 그는 컵라면 용기와 과자봉지가 영역다툼을 하는 거실 바닥도 보았 고, 이불과 빨래더미가 엉켜있는 소파도 보았으며, 라면 국물이 덕 지덕지 눌러 붙은 테이블도, 석고 가 된 걸레와 그 밑의 바퀴벌레, 황 룡사지 9층 목탑, 날파리가 개미떼 처럼 모여 있는 쓰레기통까지 보았 다. 하지만 그 녀석의 얼굴엔 불쾌 감이나 당혹스러움을 포함한 그 어 떤 부정적인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 다. 오히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
리며 미지의 세계를 탐방하는 여행 가의 얼굴이었다. 집을 보러 온 사람의 긍정적인 반 응도 처음이었지만 무엇보다 결정 적이었던 것은, 남녀칠세부동석 이라는 유교의 가르침을 고수하고 자 그를 문밖으로 쫓아낼 즈음, 그 가 외친 한마디 때문이었다. 10만원 더 줄게요! 대체 얼마나 처절한 사연이길래 이런 집안 꼬락서니를 보고서도 돈 까지 얹어 계약을 하겠다는 건지 싶다. 하지만 찜찜하고 수상하다고 여기기 훨씬 이전에 나는 이미 오 케이 콜을 외친 상태였다. 그 녀석
이 조금이라도 범죄자 같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아무리 돈이 급 하기로서니 이런 수상쩍은 세입자 를 받아들이진 않았을 것이다. 수상쩍은 걸 들자면 정말 한두 가 지가 아니다. 나는 얼렁뚱땅 자필계약서를 만 들던 중, 그의 이름에서 펜을 멈췄 다. 이름이 뭐예요? 그는 망치로 뒤통수라도 얻어맞 은 사람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순간 그의 눈동자가 나의 목 아래 로 미끄럼틀을 탔다. 그러더니 이
내 고개를 들고 정직한 발음으로 대답했다. 그의 아랫입술이 바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수상쩍은 녀석의 이름은 이유 였 다.
2. 천사 4885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실장은 들고 있던 서류뭉치를 있 는 힘껏 내리쳤다. 매년 최우수 졸업생들만 선별해 서 보내는 게 관례였잖아. 교육원 에서 10년이나 썩은 천사를 대체 왜 우리 팀에 보내느냐고! 교육원 에 당장 연락해봐! 교육원에선 본부와 논의가 끝난 사항이라고, 절차대로 진행한 것이 라고 합니다. 착오는 아닌 것 같습
니다. 팀장은 최대한 차분한 어조로 말 했다. 실장의 눈에선 불꽃이 번쩍 였다. 착오가 아니다? 졸업도 간신히, 지도교사도 아닌 허드렛일이나 한 허섭스레기를 본부로 데려온 것이 정상적인 조치란 말이야? 이걸 어 떻게 납득하란 소리야? 이미 결정된 사항이고 출근까지 한 팀원을 책임지는 것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벼락같은 실장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지금 팀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마당에 그런 한가한 소리가 나와?
책임? 바로 아웃시킬 테니까 그리 알고 나가! 한마디라도 더 했다간 실장은 책 상이라도 뒤엎을 판이었다. 팀장은 울긋불긋해진 실장의 얼굴을 보며 조용히 방을 빠져 나왔다. 실장의 노기는 지나치긴 했지만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다. 팀장으로 서도 골치가 아픈 건 사실이었다. 구원 투수가 필요한 마당에 불청객 이라니... 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실 장도 저렇게 길길이 날뛰고 있지만 끝내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 다. 배치까지 끝난 팀원을 교육원
으로 다시 돌려보낼 수는 없다. 본 부와 논의가 끝났다는 건 이미 본 부장의 결재도 끝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왜?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 이 되진 않았다. 하필 이럴 때에... 팀장은 두 손가락으로 머리를 꾹 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천사본부는 천계에서 가장 핵심 이 되는 중앙기관으로 천계의 행정 과 지상 운영 서비스를 관할한다. 최상위 기관인 만큼 우수한 천사들 만 선출되기 때문에 천사본부에서 일하는 천사들의 자부심은 어느 누
구보다도 컸다. 그래서 교육원 졸 업생들이라면 누구나 열망하는 곳 이기도 했다. 천사본부를 목표로 1 학년 때부터 치열하게 공부하는 천 사들도 태반이었다. 그 중 인간수호팀은 천사본부 내 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부서였다. 교회에서 기도하며, 연못에 동전 을 던지며, 돌무지에 돌멩이 하나 를 얹으며, 보름달을 보며, 촛불을 끄며, 그렇게 숱한 상황 속에서 쉽 게 읊조리는 사람들의 소원이 사 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천사 본부 중앙컴퓨터에 자동적으로 입 력되고 있으며 그것은 다시 각 팀
의 전산시스템에 동일한 양으로 배 분되었다. 인간수호팀의 임무는 바로 그 소원을 해결하는 것이다. 소원을 해결하고 나면 화면상에 Mission Clear 라는 문구가 깜빡 이면서 해당 소원은 자동으로 삭제 된다. 물론 사람들의 소원이라고 전부 들어주는 것은 아니었다. 지나치 게 허황된 것, 타인에게 피해를 주 는 것, 사회의 미풍양속을 흐리는 것,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것, 상 식의 기준을 넘어선 것, 추상적이 고 모호한 것, 범죄에 해당되는 것 등은 중앙컴퓨터에서 자동 필터링
되어 일정 시간 후 소멸되었다. 그 렇기 때문에 각 팀의 전산시스템에 올라오는 소원들은 꼭 해결해야 하 는 미션이기도 했다. 인간들이 컴퓨터와 각종 기계에 의존해 살고 있는 것처럼 소원을 해결하는 방식도 그와 동일하다. 오래 전에는 인간 세상에 직접 내 려가 사람들의 소원을 읽고 직접 발로 뛰면서 그들의 삶에 적극적으 로 개입하곤 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모든 일이 전산화되면서 현 장에 내려갈 필요가 없어졌다. 전 산 코드를 입력하면 빠른 시간 내 에 보다 많은 소원을 해결할 수 있
었다. 굳이 그들의 삶에 개입하지 않아도 되었고 투입되는 천사의 수 도 대폭 줄었으며 무엇보다 간편했 다. 인간수호1팀은 항상 최고의 성적 을 달성하며 평균 미션 클리어율 97%를 유지해왔다. 작년에는 최고 의 팀에게 주는 Top of honor 를 수상했으며 올해도 연속 수상의 영 광을 이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최고의 주가를 달리던 1 팀에게 예상치 못한 위기가 찾아 왔다. 최근 2개월 전부터 올라오기 시작한 똑같은 소원 하나가 그들의
미션 달성율에 엄청난 태클을 걸기 시작한 것이다. 매일 3-5번은 꼭 올라오는 소원. 중복된 소원이라고 해도 해결되지 않으면 그대로 쌓이 고 쌓여 커다란 부채로 작용하기 마련이었다. 항상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다니 던 실장은 실장실에 틀어박혀 팀장 이나 팀원들에게 히스테리만 부리 기 일쑤였고 사기가 꺾인 팀원들 은 좀처럼 집중하지 못하고 산만하 고 게을러졌다. 그들은 이제 동경 이 아닌 조롱의 대상이었다. 어제 의 영광이 오늘의 영광은 아니라며 등 뒤에서 이죽거리는 천사들이 많
아졌다. 문제의 소원은 뜬금없게도 정민 선배가 저를 사랑하게 해주세요! 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가다간 우리팀 실적이 바 닥을 치겠어. 가이는 화면에 떠 있는 문제의 소 원을 노려보며 말했다. 실적이라면 실장만큼이나 신경을 써온 가이었 다. 언제까지 추락만 할 수 없었다. 1위 자리를 탈환해야 한다고 가이 는 틈만 나면 잔소리를 했다. 아무렴 실장님이 그 꼴을 가만 두고 보시겠어. 지금도 신경이 곤
두서 계시는데. 미율이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 본부장 임기가 얼마 안 남았으니 그렇지. 그렇게 공들여 실적 관리 를 했는데 물 건너가게 생겼잖아. 자기 혼자 헛물켠 거나 마찬가지 지 뭐. 솔직히 서열 2순위는 우리 팀장님이란 거 다 아는 사실이잖 아. 가이의 말에 로엔이 바로 받아쳤 다. 강압적이고 욕심 많은 실장을 좋아하는 팀원은 없었지만 로엔은 유독 심하게 진저리를 쳤다. 그래도 절차라는 게 있는데 팀장 에서 바로 본부장으로 로켓 승진시
키겠어? 가이가 그럴 리 없다는 투로 얘기 했다. 그래서 이게 다 본부장의 작전이 란 소문도 있어. 실적 부진 명분으 로 실장 자르고, 팀장은 실장 만들 어놓고 차기 본부장 거론될 때쯤 자리 넘겨주려고 한다고. 미율이 말소리를 낮추어 빠르게 속삭였다. 정말? 가이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그 러자 미율이 대답하기도 전에 로엔 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본부장님이 제대로 보신 거지.
톡 까놓고 실장이 한일이 뭐 있어? 우리 팀 실적 여기까지 끌어올린 것도 순전히 팀장님 덕분인데. 자 기야 팀장 닦달이나 했지. 그러고 도 자리 뺏길 것 같으니까 엄청 경 계하잖아. 그건 그래. 팀장님이 본부장님이 되셔야 하는데... 미율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 다. 그리고는 마침 생각났다는 투 로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우선 우리 팀 신입이나 잘 들어왔으면 좋겠다. 새로운 천 사 온다는 게 오늘이지 않나? 뭐 들 은 거 없어?
교육원에서 보내는 천사들이야 맨날 똑같지. 상위 1% 졸업생들. 로엔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상위 1% 졸업생들이라고 별 수 있니. 이론은 빠싹해도 실전에서는 엉망인 애들이 수두룩해. 오히려 머리만 믿고 까불어서 교육시키기 도 어렵다고. 신입이 아니라 상전 이야 상전. 가이가 퉁명스럽게 얘기했다. 신 입들이 잘난 척 하는 꼴을 보는 건 가이에게 상당한 스트레스였다. 팀 내 Top1은 언제까지도 자신이어 야 했다. 까불고 설쳐도 상관없으니 짜잔
하고 나타나 이 문제나 해결해 줬 으면 좋겠다. 미율이 턱을 괴며 한숨을 푹 내셨 다. 그 때였다. 문의 열리며 낯선 천사 둘이 들어왔다. 아마도 교육원에서 새로 보낸 신입인 듯싶었다. 앞장 서 들어온 여천사의 태도는 신입 이라고 보기엔 당당하고 노련했다. 그에 반해 그 뒤에 바짝 붙어 서 있 는 남천사는 누가 봐도 신입의 냄 새가 폴폴 났다. 하지만 막상 입을 연 것은 남천사 쪽이었다. 오늘부터 천사본부 인간수호1팀 에서 근무하게 된 4885입니다.
4885? 어쩐지 들어봄 직한 번호 였다. 교육원에서는 매년 수백 명 의 졸업생을 배출하기 때문에 아 무리 교육원에서 뛰고 날았던 천사 라 한들 실무에 있는 천사들에게는 고유이름도 수여 받지 못한 다 똑 같은 천사 일 뿐이었다. 팀원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 했다. 설마... 그 말을 내뱉은 건 미율이지만, 그 말과 동시에 모두 낯빛이 새하얘져 서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미율은 빠른 속도로 천사 네트워크에 접속 해 천사 일련번호에 4885를 입력
했다. 4885의 이력이 화면에 펼쳐 졌다. 오 마이 갓 미율은 탄식했고 가이는 그대로 주저앉았으며 로엔은 얼빵한 표정 을 지었다. 오직 4885만이 눈치없 이 해맑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신입을 선별하는 과정에 교육원 에서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 신입이 온다는 날이 오늘이 군요. 그런데 무슨 착오가 있다고 요? 본부장은 처음 듣는 소리인 냥 태
연하게 반응했다. 순간 욱 하는 기 분이 들었지만 실장은 꾹 눌러 참 았다. 독사 같은 본부장 앞에선 조 금의 틈도 보여선 안되었다. 기준에 턱없이 못 미치는 천사가 1팀에 들어왔습니다. 4885를 생각하니 다시 머리가 지 끈거렸다. 기준에 턱없이 못 미친다? 특별 한 기준이란 게 있었던가요? 실장의 마음과는 상반되게 본부 장은 여유 있게 웃었다. 그건... 교육원에선 이제까지 상 위 1%의 우수한 졸업생들만 본부 에 보내왔습니다. 허나 이번에 배
속된 천사는 상위권도 아닌 하위 1%에 해당되는 천사입니다. 그건 본부에서 판단할 문제가 아 닙니다. 이미 교육원에서 심사를 마쳤고 본부가 교육원에게 심사권 을 전부 맡겨온 이상 결정된 사항 을 뒤엎을 순 없습니다. 설마 교육 원에서 쓰임새가 없는 천사를 본부 에 보냈겠습니까? 다 이유가 있겠 지요. 그보다 더 시급한 문제가 있 을 텐데요. 본부장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 으며 엄격한 말투로 말했다. 올 것 이 왔다. 실장은 이 문제가 언급될 까 싶어 두 달 전부터 본부장실 근
처에는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웬만 한 결재는 팀장을 시켰다. 두 사람 간의 커넥션이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독사 같은 혀에 자존심 이 돌돌 말릴 생각을 하면 자연스 럽게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1팀 실적이 돌아올 기세가 없습 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해결할 수 없는 미션이 중복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바람에... 지금으로선 자연적 으로 소멸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까지요? 시간이 많지 않습니 다.
본부장의 의미심장한 말에 실장 은 뜨끔했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 는 건 저희 능력 밖의 일입니다. 기존의 방법대로만 해답을 찾으 려 하니 그렇죠. 무슨 말씀이신지... 새로운 방법을 찾을 수 없다면 고전적인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 도 하나의 방법이죠. 지금처럼 전 산 시스템이 발달하기 전에는 천사 대부분이 현장에 직접 나가 인간 을 구제하곤 했으니, 비록 많은 사 람들의 소원을 들어줄 순 없었어도 참 따뜻하지 않았습니까.
...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현장에 투입할만한 천사가 없습니다. 새로운 천사가 있지 않습니까. 준비된 저녁 메뉴를 대접하는 사 람처럼 본부장은 대수롭지 않게 대 답했다. 이제 갓 들어온 신입을 현장에 투입하라는 말씀입니까? 실장은 놀란 마음에 다소 격양된 말투로 되물었다. 하하. 오해하지 마세요, 실장. 나 는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뿐 입니다. 뭐 걱정할 게 있겠습니까? 1팀엔 우수한 팀원도 있고 팀장도 있는데.
유독 팀장이란 단어에 힘이 들어 가 있었다. 역시 타겟은 실장이었 다. 팀장을 앉히기 위해 뒤에서 무 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알 순 없지 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을 수만 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선택지 없는 선택 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실장은 막막했다. 이 상태로 소원이 자연 소멸 되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든 가 검증도 되지 않은 어처구니없는 신입에게 새 임무를 맡기는 모험을 해보든가,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어느 것도 성공을 100% 보장할 수 없다. 모험을 감행했다가 실패 했
을 경우 책임의 대가는 참혹할 것 이다. 하지만 무턱대고 기다리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그 순간 실장은 천사 4885 뒤에 서 있던 여천사가 떠올랐다. 엘리 트적인 느낌이 표정과 몸짓에 베여 있었다. 루나 라는 이름을 가진 것 은 졸업생 신분은 아니라는 뜻이고 그러고 보니 교육원 지도교사 일 을 했다는 소릴 들은 것도 같았다. 아무렴 그 꼴통보다는 못나진 않을 것이다. 저 그럼 이번에 들어온 신입 중 루... 그 때, 실장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렸고 그 루나 가 들어 왔다. 너무 자연스런 태도였기 때 문에 실장은 순간적으로 이곳이 본 부장실이라는 걸 잊기까지 했다. 루나는 실장에게 고개를 숙여 묵언 의 인사를 했다. 실장은 루나가 본부장실에 출입 한 이유에 대해 생각할 겨를 없이 본부장에게 소개시킨 뒤 정식으로 임무를 맡기겠다는 입장을 밝힐 생 각으로 빠르게 입을 열었다. 하지 만 인사를 받은 것은 오히려 실장 이었다. 정식으로 소개하지. 이 친구는 교육원 13기 수석 졸업생 루나.
수석 이란 말에 실장의 입가에 만 연한 웃음이 퍼지려는 순간, 본부 장이 일격을 가했다. 내 외동딸이네. 본부장의 소개가 끝난 뒤 실장은 황급히 자리를 떴고 본부장은 루나 에게 새 차를 내주었다. 이해가 안 되는 일을 했더구나. 실장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았지 만 본부장도 사실 적잖이 놀랐다. 무슨 말씀이세요? 이번엔 루나가 태연하게 되물었 다. 실장의 기분도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네가 그런 친구를 선택했을 거라 곤 생각지 못했다. 천사본부는 최 고의 실력자들만 모이는 곳이야. 잡일이나 하는 무능력한 천사라는 걸 알았다면 허락하지 않았을 거 야. 본부장은 엄하게 말했다. 딸의 이 번 행동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분 별력 없이 행동할 아이가 아니었 다. 그런 믿음이 확고했기에 딸의 이번 결정에 실망스럽고 화가 나기 까지 했다. 천사본부의 생리라면 자신에게
익히 들어서 충분히 알고 있을 것 이다. 당연지사 천사본부로 들어올 줄 알았던 아이가 교육원에 남겠다 고 했을 때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고 믿었기에 강요하지 않았다. 똑같은 기준으로 보지 마세요. 그 친구는 분명 다른 재능이 있어 요. 루나는 딱 잘라 대답했다. 그 친구 재능개발이라도 시켜주 려고 데려온 거냐? 본부가 그렇게 한가한 곳 인줄 알아? 그 친구는 다른 천사들보다 인간 에 대한 호기심도 이해도도 높아 요. 열의도 있고요. 절 믿고 지켜봐
주세요.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 절 믿으시잖아요. 실망시켜 드리 지 않을 거예요. 루나는 자세를 고쳐 잡고 공손하 게 대답했다. 루나의 눈빛에 실린 간절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본부 장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유 야 어찌 됐든 본부장은 더 할 말이 없었다. 분명한 건 루나와 약속을 했다는 것,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 는 것이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 만 실장을 무너트릴 카드가 될 수 도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본부 장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왜 웃으세요? 흥미롭구나. 그럼 다시 교육원으로 돌려보내 지 않으실 거죠? 루나는 잠시 갸웃하더니 본부장 의 웃음을 긍정의 표시로 해석한 듯 했다. 지켜보마. 본부장은 의자 깊숙이 몸을 젖히 며 말했다. 가만히 앉아 흥미진진 한 연극을 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 았다. 하루 종일 고민한 끝에 결정을 내 렸지만 실장은 선뜻 입을 열지 못
했다. 4885는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돌 리며 실장실을 살피기 바빴다. 사 태의 중함을 모르는 건 당연하겠지 만 눈치 없이 주변을 살피는 꼴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런 녀석 에게 현장 프로젝트를 맡길 생각을 하니 다시금 머리가 지끈거렸다. 교육원에 있었다고? 네. 교육원에서 무슨 일을 했지? 그게... 4885는 망설였다. 아무리 눈치가 없기로 서니 교육원에서 교직원들 의 식사준비, 청소, 세탁을 하고 의
상이나 머리스타일을 만져주고, 잔 심부름 따위를 했다는 이야길 곧이 곧대로 말할 순 없었다. 아무리 눈 치가 없기로 서니 자신이 본부에서 원하는 천사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교육원 졸업도 간신히 했 고, 졸업 이후도 받아주는 곳이 없 어서 교육원에 남아 잡일이나 도맡 아 해 온 자신이 본부에 들어온 것 은 기적같은 일이었다. 소식을 접 했을 때나 본부 실장실에 앉아있 는 지금이나 얼떨떨하기는 마찬가 지였다. 왜. 어째서! 하지만 이유를 알려주는 이도 이유를 물어볼 이도 없었다. 어쨌든 기적같은 일이 벌
어지고 있고, 그것이 꿈이 아니라 는 것은 확실했다. 교육원의 최상의 교육 환경과 교 직원들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 기 위해 봉사정신과 성실함으로 최 선을 다해 일했습니다. 4885 옆에 앉아있던 팀장이 고개 를 숙인 채 낮게 웃었다. 의외로 재 미있는 구석이 있는 친구라고, 팀 장은 생각했다. 교육원에선 봉사정신과 성실함 으로 가능했을 진 몰라도 본부는 최고의 실력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 야. 실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최고의 실력을 갖출 수 있도록 열심히 배우고 익히고... 또 익히 고... 암튼 열심히 하겠습니다. 4885의 모습에 결연함이 보였다. 팀장은 또다시 낮게 웃음 지었다. 왠지 4885에게 점점 마음이 갔다. 그와는 달리 실장의 표정은 점점 일그러져 갔다. 예전에는 신입이 들어오면 현장 체험부터 시키는 것이 관례였지. 인간을 직접 접하며 인간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 기초 훈련이었으니 까. 하지만 전산에 의존하기 시작 하면서 인간을 이해할 필요가 없어 졌어. 시간 낭비랄까.
실장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우리 팀에 2개월 동안 해결하지 못한 미션이 있네. 팀의 미래를 위 해서 꼭 해결해야 하는 미션이지. 그 미션을 해결하기 위해선 지금 까지와는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 해. 누군가 현장에 투입돼서 이 미 션을 직접 해결해야겠어. 팀장, 난 4885에게 이 일을 지시할까 하는 데. 네? 교육원에 돌려보내겠다고 길길이 날뛰던 때가 바로 오늘 아침이었 다. 팀장과 4885를 호출했을 땐 혹
얘기가 잘 돼서 교육원에 돌려보내 기로 결정된 건가 싶었지만 실장의 얼굴을 본 순간 잘못된 추측이라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 실장이 4885 의 교육원 생활이나 팀의 상황을 얘기할 때도 이런 지시가 뒤따라올 것이라는 것은 눈곱만치도 예상할 수 없었다. 팀장은 실장과 4885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실장은 블 랙홀에라도 빠진 듯한 얼굴이었고 4885는 어리둥절한 채 그 다음 이 야기가 이어지기를 기다리는 눈치 였다. 지금 안정된 시스템을 변형하는 것보단 신입을 활용하는 쪽이 낫지
않겠나. 기초 훈련도 되고 경험도 쌓고, 4885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거야. 어떤가? 할 수 있겠나? 그 말씀은 저보고 인간 세상으로 내려가라는 말씀이시죠? 그렇네. 시켜만 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 다. 4885는 고개가 땅에 닿을 듯 인사 를 했다.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여 지없이 드러냈다. 세부적인 지시는 팀장을 통해 하 지. 그만 나가 보게. 4885가 나가자마자, 실장의 표정 은 180도로 바뀌었다.
본부장 지시야. 본부장님이요? 교육원에서 밑바닥 일이나 한 천 사가 뭘 할 수 있다고... 우리 팀 물 먹이려는 수작이겠지. 본부장이 그런 지시를 했다는 것 도 이해가 안 되긴 했지만 비로소 실장의 행동이 수긍이 갔다. 그런 히스토리가 없고서야 실장이 그런 선택을 할 리가 없었다. 그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있지. 너무 큰 이유가... 실장은 팀장을 빤히 쳐다보며 말 을 흐렸다. 정확히 나를 물 먹이려는 거지.
그래서 널 실장 자리에 앉히려고. 좋은 생각이긴 합니다만 위험 부 담이 너무 큽니다. 만에 하나 신분 이라도 노출되면... 그럴 걱정은 없어. 인간은 기적 을 보고도 믿지 않는 존재들이니 까. 팀장이 신경 써서 잘 컨트롤해.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성공 시 키도록. 팀장을 견제하긴 해야 하면서도 믿을 건 또 팀장밖에 없었다. 꼴통 천사에게 프로젝트를 맡긴 이상 팀 장의 능력이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했다. 프로젝트가 실패했을 경 우 본부장의 은총을 받는 팀장은
어떻게든 살아남겠지만 실장은 꼴 통천사와 함께 버려질 게 분명했 다. 팀의 운명도 자신의 운명도 지 금으로선 팀장 손에 달려있다. 그 리고 그 4885 꼴통에게도.
3. 그 여자아이 임주리. 나이 20살. 한국대학교 1 학년. 강아지 한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이상 끝. 긴급한 미션에 신입 을 투입시키기로 결정하기까지 걸 린 시간은 단 하루. 준비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리가 알려줄 수 있는 건 여기 까지야. 나머지는 현장에서 파악 해. 현장 데이터가 더 정확하니까. 아무렴. 그렇지 않고서야 위험 부 담을 떠안고 신입 천사를 현장에
내려 보낼 이유가 없다. 게다가 꼴 통천사라고 소문난 천사를. 게다가 팀장은 무슨 영문인지 작 전조차 일러주지 않았다. 우리 작전은 없다. 라고 운을 떼더니, 4885를 현장에 투입시키기로 결 정된 이상 여기서 작전 구상을 하 는 건 탁상공론에 불과해. 세부적 인 작전은 4885에게 맡긴다. 4885 는 일단 주리에게 접근해서 장기적 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을 찾 아. 라고 말했다. 납득할 수 없는 지시 에 팀원들은 반발했다. 그는 한마
디 더 덧붙였다. 신입이나 경력이냐가 중요하진 않아. 우리가 현장에 나간 것도 오 래 전 일이고. 전산에 길들여져 있 는 우리보다 신입이 유리할 수도 있어. 나름 일리 있는 말이긴 했다. 하지 만 그렇다고 이제 갓 출근한 신입 을 내려 보내면서 아무런 데이터도 아무런 작전도 없이 현장에 떠미는 건 너무 무책임하고 무모한 일 아 닌가. 무기 없이 전쟁터에 나온 꼴 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설렘은 컸다. 교육원에 있을 때부터 꿈꾸던 일이었다. 인간 세
상에 내려가서 인간들을 관찰하고 그들을 위해 일하는 것. 원하고 또 원했던 일이었다. 이루어지리라 꿈 에도 몰랐지만 이루어졌고 게다가 단순히 모습을 감추고 인간들을 엿 보는 일이 아닌, 그들과 다를 바 없 는 인간으로 같은 공간에서 생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누구도 가질 수 없는 기회를 가진 것이다. 하지만 눈을 부라리며 너의 행동 에 팀의 운명이 걸려있다고 말하는 실장, 하던 대로 하라는 말로 더 부 담감을 안겨주는 팀장, 그리고 저 녀석 때문에 우리는 곧 끝장이라 며 벌레 보듯 쳐다보는 팀원들. 겁
이 났다. 나의 지혜라고는 청소, 세 탁, 옷 시중, 잡일 등의 노하우밖에 없고 나의 정보라고는 교육원에서 틈틈이 읽었던 지상 서적의 자투리 내용밖에는 없다. 무엇보다 나를 떨리게 하는 건 내가 해결해야 하 는 소원이다. 정민 선배가 절 사랑하게 해주세 요! 도대체 이런 소원을 주야장천 비 는 인간은 어떤 애인 거지? 그 여자아이는 얼룩덜룩하고 너 덜너덜한 츄리닝을 입고 있었다. 머리는 높게 틀어 묶었는데 삐져
나온 잔머리가 흡사 사자 갈기 같 았다. 그 모습은 하룻밤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죽어라 밀어 보내던 것이 언제였 는지 모르게 그 아이는 얌전히 앉 아 만 원짜리 지폐를 셌다. 한 뭉치 의 돈을 여러 번 세고 또 세며 히죽 거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바지 주머니 속으로 황급히 돈을 찔러 넣었다. 계약 기간은 1년. 부모님이 일찍 오시면... 여자아이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두 줄을 긋고 다시 적기 시작했다. 주인의 사정에 의해 변경될 수
있음. 우리 부모님 외국 나가셨거 든요. 놀러~ 딸 다 키우셨다고 해 방감에 들떠 떠나셨죠. 딸이 요모 양 요꼴로 사는 줄도 모르고 자기 네들만 좋으면 만사 오케이인 아주 아주 이기적인 부모님이야. 여자아이는 정말 큰일이라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작일은 오늘 날짜 쓰고... 주소 지는 서울시 동작구 상도동... 임대 인 임주리 임차인... 이름이 뭐예 요? 이름? 아직 나에게 이름은 없다. 이름을 받으려면 천사본부에서 그 자격여부를 심사 받아야 하는데
보통 1년 이상의 재직기간을 거쳐 야만 한다. 그때까진 난 그저 천사 4885일뿐이다. 이름이 뭐냐고요. 여자아이는 손을 멈추고 채근했 다. 지상의 소설에서 나왔던 등장인 물들이 머릿속을 배회했지만 그들 의 이름은 하나같이 떠오르지 않았 다. 그 때 여자아이가 입은 티셔츠 에 박힌 YOU라는 알파벳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 겠지만 입에서 자동적으로 이유 라는 단어가 흘러나왔다. 여자아이는 내 이름을 듣더니 한
참 동안 깔깔 웃었다. 있지도 않은 내 부모님을 들먹거렸고 도통 이해 할 수 없는 상황극까지 벌였다. 내 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가 만히 있자 입을 삐죽 내밀며 동물 도 눈치가 있어야 이쁨 받는 거거 든요. 라는 말을 내뱉고는 계약서 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여자아이는 내가 스물다섯이라고 나이를 밝힐 때도 입을 삐죽 내밀 었다. 생각보다 좀 많네. 난 스물. 같이 사는 사람끼리 존대하기 귀찮은데 말 놓습니다. 불만 없지? 어째서 하필 너 같은 여자애인 거
지? 라는 불만을 토로하고 싶은걸 꾹 참았다. 난 얌전히 그 아이가 내 민 손을 잡았다. 여자아이는 붙잡 은 내 손을 격하게 흔들며 배시시 웃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계약 은 끝이 났다. 팀장이 준 유일한 작 전 팁 장기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 는 방법을 찾아봐 은 완수한 셈이 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정말 참아줄 수가 없다. 무엇보다 그 더.티.함. 철수세미를 달아놓은 듯한 헤어 스타일에 세수를 했는지 안 했는지 꼬지지한 민 낯, 입가에 흐르는 침
을 아무렇게나 훔치는 손, 입고 있 는 티셔츠를 수건처럼 쓰는 모양 새. 무엇보다 더티함을 의식하지 못하는 헤벌죽한 웃음. 그리고 그 게.으.름. 해가 중천에 떠있는데 여전히 한밤 중이라며 입 주자를 팽개쳐 놓고 방으로 들어가 는 꼬락서니. 테이블이며 바닥이며 쓰레기로 장식할 땐 언제고 슬그머 니 빠지는 행태. 경력을 최대한 살리는 게 좋다고 는 하지만 이런 건 곤란했다. 꿈에 도 그리던 지상에 와서까지 청소나 세탁에 시달리는 건 싫었다. 물론 꼭 해야 할 의무는 없었다. 주인공
이 쓰레기처리장에서 살건 말건 내 상관할 바는 아니다. 나의 임무는 쓰레기처리장에 사는 주인공의 소 원을 들어주는 것. 하지만 이건 내 생존의 문제였다. 신선한 공기와 따사로운 햇살과 꽃 향기에 익숙해져 있는 천사에겐 지 옥행과 견줄만한 공포였다. 그래서 <지상 서적>에서 본 청소기를 돌 렸고, 걸레질, 설거지, 빨래를 하고 쓰레기도 치웠다. 그리고 마지막으 로 검은 빗자루처럼 꼬질꼬질한 강 아지도 씻겼다. 그날, 여자아이와 제대로 마주한 건 저녁때가 되어서였다. 강도가
센 청소에 지친 내가 서재에서 깜 빡 잠이 들었는데 밖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깼다. 거실로 나가자 여자아이는 참을 수 없는 그 모습으로 테이블 위에 과자랑 음료로 추정되는 것들을 부 지런히 세팅하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나를 보더니 반가운 듯 웃었다. 나를 잊어버리지는 않 은 모양이었다. 마침 부르려고 했는데. 여기 와 서 앉아. 이게 뭐야? 첫 날인데 기념 파티는 해야지. 그냥 자면 섭섭하지.
입주자를 팽개쳐 두고 잠이나 자 러 들어간 주인답지 않은 상냥한 목소리였다. 그리곤 알 수 없는 이 상한 음료를 한잔씩 따르더니 내 앞에 한잔을 내밀고 자신의 잔을 높이 쳐들었다. 우리 집에 온 걸 환영해. 그 아이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우 리의 관계가 주인과 입주자의 관계 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웃음이 었다. 그리곤 아직 생소하기만 한 단어로 나를 불렀다. 유. 나는 이제부터 임주리의 하우스 메이트, 이유다.
4. 탐색 수상한 녀석의 수상쩍은 행동은 이후로도 계속됐다. 그 날도 그랬다. 그 날은 그 녀석 이 우리집에 살러 온 날이었고, 나 는 집주인의 본분을 잊고 낮잠을 퍼질러 자다가 저녁때나 돼서야 기 상을 했던 날이기도 했다. 내가 늦잠을 잔 것은 무조건 게으 름 때문은 아니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꿈 때문이었다. 아름다운 두 날개를 지닌 천사가
신비로운 빛을 내며 우리집 거실에 날아 들어왔다. 천사는 내게 가까 이 다가왔는데, 마주한 그 천사의 눈빛이 묘하게 슬펐다. 내가 천사 의 얼굴에 손을 대자 그제서야 천 사가 웃었다. 우리는 한참 그렇게 마주 서있었고, 그냥 웃었다. 이상 한 행복감이 꿈에서까지 느껴졌다. 그리고 꿈에서 깼다. 꿈같은 일이 벌어진 후였다. 그 녀석은 우리집을 헌 집에서 새 집으로 변신시켜 놓았다. 그리곤 사태의 충격을 짐작도 못한 채 서 재 바닥에 태평하게 잠들어 있었 다. 등을 동글게 말고 자는 꼴이 새
우를 연상시켜야 하건만 눈을 비비 고 또 비비고 보아도 꿈에서 봤던 천사가 자꾸만 떠올랐다. 지점토로 빚은 듯한 얼굴을 찔러 보려다 그 만두었다. 청소 좀 수상쩍게 잘 한 다고 천사라고 생각하는 건 우리집 강아지 아지도 비웃을 일이다. 그런데. 그 녀석은 술을 못 마신다 는 표현을 쓰는 것조차 민망할 만 큼 술을 못했다. 그는 아름다운 거 품이 잔뜩 피어 오르는 맥주를 찡 그리며 바라보더니 아주 찔끔 입술 을 적셨다. 그것도 나의 채근에 못 이겨. 무슨, 맥주가 사약이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섹시하 고 엣지있는 음료를 조롱하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나는 연신 툴툴 거렸다. 그럼에도 그 녀석은 장희 빈처럼 오만가지 인상을 쓰며 맥주 를 거부했고, 마셨고, 많이도 흘렸 다. 가장 수상한 건 아주 기본적인 것 의 결여. 민증 까보시지? 이...잃어버렸어. 나중에 보여줄 게. 출신을 말하는 걸 꺼리는 녀석이 수상쩍어서 민증을 달라고 했더니 만 어럽쇼. 그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리곤 아주 멀리서 왔다며 허공을 올려다봤다. 아무래도 강원도 어느 깡촌 출신인 것 같다. 내비게이션 에 이름도 뜨지 않는, 밤이 되면 마 을의 불빛이라곤 별빛 밖에 없는, 그런 깡촌. 개중에 그런 녀석들이 꼭 있다. 성 공을 꿈꾸며 혈혈단신 상경한 배고 픈 청춘. 그저 놀고 자고 먹는 게, 그것이야말로 청춘의 전부인데 왜 다들 그렇게 성공에 집착하는 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암튼 그런 청 춘들은 자신의 뿌리가 어디라고 밝 히는 걸 매우 부끄러워한다. 촌뜨 기라고 놀림받는 게 싫은 건지, 성
공하고 싶어 올라온 자신을 보는 게 싫은 건지 서울 토박이인 나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부모님은? 어렸을 때 두 분 다 돌아가셨어. 그는 조금의 찡그림도 없이 담담 히 대답했다. 괜히 더 무안하게. 나 는 무안함을 숨기려고 장희빈에게, 아니 그 녀석에게 사약 한잔을 더 하사했다. 사실 나도 혼자나 다름없어. 딸 대학 들어가자마자 해방감에 도취 되어 외국으로 훌쩍 떠나신 우리 부모님. 내가 얼마나 고생고생하며 혼자서 외롭게 컸는지 몰라. 두 분
이 눈만 맞으면 밥 차려먹으라는 쪽지 한 장 달랑 남겨놓고 외식 나 가, 미성년자인 딸 보기 부끄럽지 도 않은지 기념일마다 외박해. 그 럴 거면 동고동락할 피붙이라도 하 나 더 만들어서 들어오든가. 나는 되는 대로 주절거렸다. 기분 탓이지만 그 녀석이 큭 웃은 것 같 다. 나는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었 고, 개그가 아닌 위로를 하고자 함 이었기에 기분이 요상했다. 아무튼 수상쩍은 녀석에 대해 정 리하자면 이렇다. 이름은 이유. 나 이는 스물다섯. 성운대 휴학 중. 이 유는 군대인 게 뻔하고. 강원도 이
름 모를 산골짜기에서 부모도 없이 외롭게 컸고, 성공을 갈망하며 상 경한 고아. 취미는 청소. 주량은 개 미가 물 마시는 정도. 성격은 아직 파악 중. 공식적인 신원 보증도 되지 않은 이런 녀석과 살기 위한 대책은? 나는 LTE속도로 A4지와 펜을 찾 았다. 그 녀석이 멀뚱멀뚱 보는 앞 에서 A4지 상단에 공동생활수칙 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갓 구운 빵 같이 따끈따끈한 수칙들을 적어 내 려가기 시작했다. 야밤에 끓여먹는 라면처럼 충동적이긴 하지만.
첫째, 사적인 공간은 몰래 침입하지 않는다. 둘째, 식사 세탁은 셀프. 셋째, 제3의 인물을 초대할 시 상대 방의 동의를 구한다. 넷째, 상대의 라이프스타일에 간섭 하지 않는다. 다섯째, 전화는 절대 받지 않는다. 여섯째, 여섯째... 불펜 끝이 움직였다 멈췄다를 반 복했다. 모나미 볼펜은 톡톡톡 종 이를 두드리고, 종이에 깜장똥도 쌌다. 회오리바람도 만들었다가 칸 딘스키처럼 기하학적인 그림을 창
조하기도 했다. 여섯째, 집주인에게 흑심 품지 않는 다. 그 녀석이 대번 나를 쳐다봤다. 뭥미? 같기도 했고 왜 이래, 아 마추어처럼 같기도 했다. 헐 같기 도 했고,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주 세요! 같기도 했다. 표정마저도 참 수상쩍게 짓는다. 여자 친구 있어? 아니. 그럼 그렇지. 좋아하는 사람 있어?
아니. 건조한 녀석. 사람이 외롭다 보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정이 가기 마련이거든. 나처럼 싱싱한 스물이 있는데 마음 이 동하지 않겠어? 하지만! 되는 대로 떠들고 있었기에 어떤 말이 튀어나올지 내가 더 긴장됐 다. 난 임자 있는 몸. 희망 없는 밭에 씨 뿌리면 아주아주 곤란해. 임자? 다시 보니 그냥 멍, 까악까악 까마 귀가 날아가는 표정 같기도 했다. 순결한 마음을 유지해서 정민 선
배에게 줄 거거든. 까마귀가 날든 말든 나는 내 의견 을 피력할 권리가 있다. 그런데 까 악까악 울며 날아가던 까마귀가 총 에 맞았는지 돌연 뚝 떨어졌다. 정 민 선배 라는 말에서 뚝. 정민 선배가 누군데? 그 녀석의 표정에 수상쩍은 기운 이 감돌았다. + 한정민. 나이 스물 다섯. 한국대학교 3 학년. 주리의 대학 선배. 이상 끝.
나무 뒤에 다리 저려가며 한 시간 을 숨어 알아낸 정보는 그게 다였 다. 처음엔 고목나무의 매미처럼 붙어서 무엇을 기다리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물어보려고만 하면 그 여자아이는 입가에 손가락을 세 우고 쉿-조용히해 입 모양을 내 며 주위를 줬다. 그 이유는 한 시간이 지나서야 가 까스로 알 수 있었다. 바로 보이는 건물에서 한 무리의 남자들이 나왔다. 바로 그 순간 쿵 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심 장 소린지 발동동거림인지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그게 무엇이든 주
리에게서 나는 소리는 분명했고, 원인은 문제의 대상 때문이라는 거 였다. 그리고 그 대상은 쉽게 파악 됐다. 한정민이란 남자는 단연 돋보였 다. 푸른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폼 이 100m 멀리서 보아도 일반인 느 낌은 아니었다. 인간 신분만 아니 라면 천상에 데려다 놓아도 먹힐 타입이었다. 흠. 소원이 납득이 되 긴 하면서도, 블랙홀로 빠지는 느 낌이었다. 내 앞의 있는 여자아이 는 고작 더티하고 게으르고 뻔뻔 한, 평범하고 아니 모자라다고 말 해도 될만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
런 여자아이에게 저런 녀석을...? 천상의 모든 별빛이 일제히 숨을 거두는 기분이다. 그런데도 주리는, 저런 게 진짜 남자지. 자갈밭의 다이아몬드랄까. 하며 싱글벙글, 전혀 위기의식이 없다. 그러다가 푹, 고개를 숙이며 웅얼 거린다. 말이라도 한번 섞어봤으면. 항상 인형의 꿈 모드니... 하더니 듣도 보도 못한 가요를 기 괴한 목소리로 흥얼거렸다. 그대 먼 곳만 보네요. 내가 바로
여기 있는데. 조금만 고개를 돌려 도 날 볼 수 있을 텐데~... 소녀의 이 피 끓는 심정을 왜 하 늘은 몰라 주냐고! 인간의 변화무쌍한 모습에 정신 이 하나도 없었다. 아냐. 하늘도 다 알아. 단지 좀... 들어주기 힘들어서 그렇지. 하늘이 뭐 그러냐? 할 줄 아는 것 도 없고. 연애 초짜는 이래서 힘들 다니깐. 여우같이 살살 낚시질 잘 하는 여자들도 많던데. 내가 좀 도와줄까? 나는 내가 내려온 목적을 은근슬
쩍 밝혔다. 하늘도 못 도와주는 걸 유가 어 떻게? 주리는 천사본부 팀원들처럼 감 히 네까짓 게? 라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삐죽였다. 방법은 찾아 봐야지. 나만 믿어. 꼭 성공할 테니까. 주리가 다짐에 다짐을 하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래 꼭. 무슨 일이 있어도 한정 민이 주리 너를 사랑하게 만들 테 니까. 하지만 갈 길이 멀다. 주리는 생각
보다 아는 것이 없었다. 소원을 비 는 시간에 말이라도 한마디 걸었다 면 지금처럼 인형의 꿈 노래나 부 르고 있지 않을 텐데. 쯧쯧. 주리를 이용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이용해 한정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야 한 다. 주리는 정민의 뒤를 살살 밟으 며 내가 던져준 과제를 수행했다. 그런 와중에 오해도 있었다. 주리가 정민의 뒤를 살살 쫓을 때 하필 눈이 마주친 게 정민의 베프 길한성이었고, 길한성과 눈이 마주 치자마자 주리는 냅다 튀었다. 그 리고 며칠 뒤, 자판기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길한성에게 주리는 다
시 접근했다. 먼저 아는 체를 한 건 한성이었다. 혹시 심리학개론 이재진 교수님 수업 듣는 후배 아닌가? 아, 네. 안녕하세요. 이런 데서 선 배님을 다 뵙고 영광이에요. 주리가 어색하게 웃으며 아부를 떨었고 기분 좋아진 한성이 건넨 커피도 호호 불어가며 마셨다. 선배는 주말에 뭐하세요? 나? 남자들이야 똑같지. 영화보 고 술 마시고 게임하고. 내 친구 정 민이 아나? 나랑 같은 수업 듣는 데. 모를 리가 있나.
걔가 영화광이거든. 개봉하는 영 화마다 죄다 보러 다녀요. 어떨 땐 본 거 또 보고. 영화는 여자 친구랑 봐야 하는데 새까만 남자애들끼리 보러 다니니 참. 그러니 매표소 직 원이 이상한 눈초리로... 정민 선배의 취미를 캐치한 순간 주리는 게 눈 감추듯 사라졌고 텅 빈 공간에서 한성은 나 홀로 떠들 었다. 그래도 한성은 주리의 목적 이 한정민의 취미 캐기라는 걸 전 혀 눈치 채지 못했다. 그리고 주리의 착각도 있었다. 혈액형은? A형! 조용하고 은은한 미소. 딱 A
형이지. 주리는 자신만만하게 어깨를 으 쓱이며 우쭐거렸다. 하지만. A형은 소세지. 소심하고 세심하 고 지랄 같은 성격. B형은 오이지. 오만하고 이기적이고 지랄 같은 성 격. O형은 단무지. 단순하고 무식 하고 지랄 같은 성격. AB형은 쓰리 지. 이러지도 말고 저러지도 말라 는 지랄 같은 성격. 한정민 넌 혈액 형이 뭐냐? 때마침 혈액형 점을 보고 있던 동 기들이 정민에게 물었는데, 나? O형. 이 단순하고 무식하고 지랄 같은
놈. 하고 동기들은 정민의 어깨를 끌 어안았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주 리는 책상에 머리를 콩콩 찧었다. 한정민에 대해 정리하면 이렇다. 이름 한정민. 나이 스물 다섯. 성별은 남 자. 주리의 표현대로라면 남자 중의 남 자. 키는 182. 교우 관계는 원만함. 베프 는 길한성. 취미는 영화보기. 혈액형은 O 형. 아, 빠진 게 있네. 그리고 주리의 좌절도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게 남았지? 그게 뭔데? 이상형. 그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주리를 짐승처럼 포효했다. 자칫 잘못 들 으면 배 곯은 호랑이가 강아지라도 잡아먹으러 동네에 출몰한 줄 알 노릇이다. 왜 남자들은 긴 머리에 환장하는 거야? 긴 머리가 얼마나 더럽고 지 저분한지 알아? 유도 그런 스타일 이 좋아? 나쁘지 않지.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주리는 토라져서 다시 테이블에 엎어져 버
렸다. 하지만 남자들은 귀여운 스타일 을 더 좋아해. 주리같이. 인간에게 아부까지 해야 하는 천 사라니. 정마알? 주리는 금방 얼굴이 발그레해져 선 쌕쌕 웃었다. 음... 웃는 모습은 그나마 좀 귀엽 기도 했다. + 4885가 지상에 내려오고 달라진 것은 없었다. 실장은 여전히 히스
테릭했고 팀장은 침묵으로 일관했 으며, 팀원들은 여전히 한숨을 푹 푹 내쉬었고 틈만 나면 일손을 거 두고 앉아 앞으로의 암울한 미래와 향후 계획에 대해 논의하곤 했다. 우리 꼴통 신입께서 잘 하고 계 시려나 모르겠네. 보통 멍석을 까는 것은 미율이었 다. 난 이미 마음을 비웠다. 큰 기대 하지마. 우리 팀 운명은 끝났다고 봐야지. 4885가 프로젝트에 투입되기로 결정됐을 때, 그리고 그 이후에도 가장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가이였다. 우리야 더 좋을 수도 있어. 팀장 님이 실장님 되고 실장님이랑은 바 이바이하구. 로엔만은 조금 희망적인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바이바이하기 전까지 어떻게 버 티냔 말이지. 실장님도 반은 포기하셨을걸. 그 러니까 순순히 내려 보냈지. 괜히 우리 들쑤셔서 현장에 내려 보내봤 자 이도저도 안될 게 뻔한 데 현상 유지나 하자 이거지. 오늘의 영광이 내일의 영광은 아 니구나.
인간들 말 중에 미꾸라지 한 마 리가 강물을 흐린다는 말이 있잖 아. 그 말이 딱이다. 딱. 그 말은 로엔이 요즘 즐겨 쓰는 표 현이었다. 로엔이 꺼내지 않으면 로엔에게 전염된 다른 팀원이 대신 들먹였다. 그리곤 그런 자신들이, 그 미꾸라지인 4885가 우스워 깔 깔 거리며 한참 웃곤 했다. 로엔의 어김없는 멘트에 미율과 가이가 웃음을 막 터트리려는 순 간, 차갑고 당돌한 말이 팀원들의 뒤통수를 세게 건드렸다. 같은 팀끼리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팀원들이 일제히 등을 돌렸다. 얼 음장 같이 차가운 표정의 루나가 서 있었다. 팀원 하나 믿지 못하고 뒤에서 흉보는 건 선배로서 보여야 할 태 도는 아닌 것 같은데요. 새파란 신입이 눈을 치켜 뜨고 선 배에게 훈계를 한다는 건, 정면으 로 도전장을 내미는 것과 마찬가지 였다. 위계질서가 분명하고 보수적 인 천사본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었다. 물론 교육원에 서 보내는 상위 졸업생들이 고분고 분하고 조직에 순종적인 타입은 아 니었지만 이렇게 드러내 놓고 적대
적인 태도를 취하는 신입도 드물었 다. 조용히 흡수될 타입이 아닌 것 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연출은 콧 대 높은 신입들에 이골이 난 팀원 들에게도 당황스런 일이었다. 그럼에도 미율과 로엔은 입을 꾹 다물고 그 자리에 앉아 있기만 했 다. 가이는 그 둘의 태도가 이상하 다는 것은 미처 생각지도 못한 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그 버르 장머리 없는 신입에게 공격적으로 다가갔다. 너야말로 선배한테 이게 무슨 태 도야? 교육원에서 질리도록 보내 는 게 바로 너 같은 애들이야. 머리
좋은 것만 믿고 선배한테 까불다가 잘려 나간 애들 태반이거든. 출근 하자마자 잘려나가고 싶어? 충분한 이유가 되면 제 스스로 나갑니다. 선배님 권한은 아니죠. 루나의 반응은 놀라울 따름이었 다. 가이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 때 로엔이 가이의 팔을 살짝 붙들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 다. 야...그만해... 이해할 수 없는 로엔의 행동에 가 이가 멈칫하자, 루나는 잠시 무서 운 눈빛으로 가이와 다른 팀원들을 노려보더니 나가 버렸다. 로엔이
그제서야 가이의 팔을 붙잡은 손을 풀었다. 뭐...저..저런 게 다 있냐? 니들은 왜 가만있어? 불똥이 엄한 팀원들에게 튈 참이 었다. 로엔과 미율 사이에 암묵적인 눈 빛 교환이 이루어지더니 로엔이 가 이의 귓가에 작게 중얼거렸다. 그게 실은... 로엔이 속삭이던 입을 떼자, 가이 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그걸 왜 지금 얘기해?! 원망과 짜증과 후회가 그 말속에 가득 묻어났다.
확실하진 않아. 그래도 조심해. 미율이 누가 듣기라도 하는 듯 주 변을 살피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 다. 제가 4885를 서브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천사교육원 수석 졸업. 천사본부 장의 외동딸. 뛰어난 두뇌와 업무 수행 능력을 가졌음에도 아버지의 덕이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 본부지 원을 포기하고 교육원에 남아 지 도교사 일을 한 특이한 경력. 그 소 신, 어쩌면 고집.
팀장은 루나가 들어오기 이전부 터 루나에 대해 알고 있었다. 본부 장은 다른 곳에서 하지 않는 이야 길 팀장에게 털어놓기도 했는데, 그 이야기의 절반이 루나에 관한 것이었다. 당연히 본부로 들어올 줄 알았던 딸이 다른 길을 걷자 본부장은 꽤 충격을 받았다. 그 아이의 능력과 재능을 펼칠 곳은 본부밖에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자연스 럽게 아버지의 명예를 이어받아 같 은 길을 걷길 원했던 것 같았다. 그 래서 본부장은 루나가 천사본부를 거부했을 때 마치 아버지를 거부하
는 듯한 느낌에 괴로웠다고 털어놓 았다. 그런 루나가 어떤 심정의 변화인 지 제 발로 천사본부에 들어왔다. 아버지의 설득에 못 이겨 본부로 왔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지만, 그 안에는 분명 다른 사정이 숨겨져 있었다. 이에 대해선 본부장도 함 구했다. 부녀 사이에 무엇이 오고 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루나가 이번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4885와 한 팀이 돼서 이번 프로 젝트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교육원에서 오래 같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너도 4885를 믿지 못하 는 건가? 팀원들의 불만이 조금도 사그라 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 다. 설마 루나까지 같은 입장일 거 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아닙니다. 다만 현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을 거예요. 제 가 이곳에서 서브해주면 보다 쉽게 미션을 완료할 수 있을 거예요. 모르긴 몰라도 루나의 말은 진심 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그 진심의 원천이 무엇일까 궁금해 팀장은 잠 자코 있었다. 부탁드립니다, 팀장님. 4885가
본부에 도움이 되는 팀원이라는 걸 증명하고 싶어요. 루나의 속내를 알 수 없었지만 루 나의 진지한 태도에 팀장은 한 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긴 해도 신입이 시스템을 다 루긴 무리야. 루나는 서버에 접속해 시스템 화 면을 띄우더니 능숙한 솜씨로 코드 를 입력했다. 그 현란한 솜씨에 지 켜보던 팀원들도, 팀장도 할 말을 잃었다. 어때? 실전에 바로 투입해도 괜 찮겠어?
팀장은 팀원들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 필요 없는 질문을 던졌다. 이 정도면... 하루 이틀만 교육해 도 문제없겠는데요. 가이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 자존심이 강한 팀원이니 그렇게 말 하는 것만도 루나의 능력을 인정했 다고 볼 수 있었다. 연락 수신은 어떻게 할 건데? 로엔이 호기심에 찬 얼굴로 물었 다. 그건 저에게 생각이 있어요. 루나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더 니 작은 물체를 꺼내 보였다. 인간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핸드폰
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물건을 함 부로 반입할 수 없기 때문에 천계 에서는 귀한 물품이기도 했다. 조금만 개조하면 되요. 루나는 확신에 찬 얼굴로 대답했 다. 그 표정에 동의를 한 듯 팀원들 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순간이지만 일말의 희망이, 마 음속에 차올랐다.
5. 접촉 유는 참 이상하다. 지가 남자면서 나에게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자가 어떤 여자냐고 물었다. 그것도 짝 사랑 삼매경 중인 불쌍한 솔로에 게. 하긴 짝사랑도 못해본 녀석이 그 런 걸 알 턱이 있나. 수상쩍고 건조 한 녀석. 그러면서 뭐? 자기만 믿으 라니. 도와주겠다니. 순 뻥. 남자의 허풍이 아닐까 모른다. 나는 서러운 마음에 네이버에게
물어보라고 씩씩거렸다가 되려 그 게 누구냐는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되받았다. 유는 어디 가면 만날 수 있냐고 진지한 표정까지 지었다. 사람을 놀리는 것도 정도가 있지. 나는 화가 나서 문을 쾅 닫고 방으 로 들어왔다. 그런데 그 녀석에게 세뇌 당한 걸 까. 분명 잠이나 자려고 했는데 정 신을 차리고 보니 네이버 창을 띄 워놓고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것 이다.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자는... 두근두근...
-예쁜 여자. 귀엽고 예쁜 여자. 착하 고 예쁜 여자. 요리 잘하고 예쁜 여자. 센스 있고 예쁜 여자. 지적이고 예쁜 여자. 세상의 모든 남자를 찌질이로 만 들어 버리는 네이버에 기대를 한 내가 잘못이지. 어쨌든, 그 때 자동적으로 떠오른 건 김태희도 송혜교도 아닌 류소희 였다. 긴 생머리에 갸름하고 흰 얼 굴. 늘씬한 팔과 다리. 하늘하늘한 몸짓. 보조개가 쏙 들어가는 미소 와 향긋한 내음. 기막힌 건 그 다음이었다.
예쁜 여자. 귀엽고 예쁜 여자. 착 하고 예쁜 여자. 요리 잘하고 예쁜 여자. 센스 있고 예쁜 여자. 지적이 고 예쁜 여자? 그 녀석이 바로 내 뒤에 서 있는 것이다. 속 터지는 진실을 상기시 켜주며.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자란 게 이 런 거야? 저도 남자면서 아닌 척 모르는 척 순진한 얼굴로 묻는 꼴이 가관이 다. 게다가 공동생활수칙 1번. 사 적인 공간은 몰래 침입하지 않는 다. 들어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겁 도 없이 주인님 방에 침입한단 말
이야? 뭐야? 남의 방에 함부로 들어오 고 그래?! 나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유는 순 진한 눈망울을 껌뻑거리며 내 머리 꼭대기부터 발꼬락까지 훑어 내린 다. 과연 네이버의 대답과 나의 상 태가 얼마나 일치하는 지 확인해보 겠다는 건데, 이거 엄연히 성희롱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의 행동이 불쾌하거나 기분 나쁘지가 않다. 다른 남자 같았으면 인정사정없 이 두들겨 팼거나 당장 대문 밖으 로 쫓아냈을 것이다. 그 녀석이 그
렇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수상쩍은, 선한 인상과 분위기가 있다. 그러 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허락하게 만드는 수상쩍은 매력이 있다. 그렇다고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것 은 아니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린 다 고 유의 눈빛에 울컥한 나머지 나 도 모르게 냉철한 자기비판을 내지 른 것이다. 그래! 나 예쁘지도 않고 착하지 도 않고 요리 잘하지도 않고 센스 도 없다! 유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또 순 진하게 쳐다본다....그래도 귀엽다며...
나는 여름 내내 피 한 방울 빨지 못한 모기가 되어 아주 작은 목소 리로 잉잉거렸다. 응, 그랬지. 유는 아주 가뿐하게 웃더니 들어 올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나가 버렸다. 야! 처음 집을 보러 왔을 때의 뻔뻔함 이 그 뒷모습에 오버랩 됐다. 아이 쿠, 십 만원 더 준다는 말에 덥석 잡은 내가 바보지. 그래도 유가 들어오고 나서 집은 신세계가 됐다. 흡사 월간 인테리어 잡지에 소개
되는 집인 것 같다. 나는 소시민 계 층에서 귀족 계층으로 몇 단계를 껑충 뛰어 올랐다. 아름다운 실내 환경, 편안한 휴식 공간. 집에서 광 고라도 찍을 기세다. 물론 불편 사항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부모님이 떠나고 TV 소리 와 컴퓨터 잡음, 내가 기지개를 켜 고 하품하는 소리 밖에는 나지 않 던 집에서 온갖 잡다한 소리가 끊 임없이 세어 나온다. 커튼을 치는 소리로 아침이 열리고, 물소리, 그 릇 부딪히는 소리, 걸레가 바닥을 가르는 소리, 테이블이 이리 저리 옮겨지는 소리, 현관문이 수시로
열렸다 닫혔다 하는 소리, 아지의 웃음소리. 그리고 끊임없는 잔소 리. 그건 저기다 치워야지, 거기가 쓰 레기통이야? 지금 바닥 닦고 있잖 아. 언제까지 잘 거야. 천천히 좀 먹어. 이불은 아무데나 끌고 다니 지 마. 등등. 우리 엄마보다 더한 잔소리꾼이 여기 있었다. 상대의 라이프스타일에 간섭하지 않기로 약속했건만, 이렇게 하면 계약 위반이지. 나는 분명 취미는 혼자 즐기면 안 되겠냐고 따지려 고 했다. 취미가 청소인 건 알겠으 니 맘껏 해보라고. 하지만 내가 그
말을 할 수 없었던 건 그 녀석의 또 다른 특기를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수상한 자식. 쓰레기처리장 같은 집안을 바퀴벌레가 미끄러질 만한 곳으로 만들더니만, 이번엔 후라이 팬 하나로 임금님 수라상을 차려놓 은 것이다. 컵라면 하나 사들고 들 어온 내가 민망하고 미안하게 말이 지. 그리고는 심심해서 TV에 나오는 거 따라 해 봤어. 이런다. 강원도 깡촌에서 요리 수 련을 받은 것도 아니란다. 그냥 이 라고 그는 툭 별스럽지 않게 얘기 한다. 전생에 수라간에서 일했던
최고상궁인 게 분명하다. 요리도 참 다채로웠다. 떡볶이, 잡 채, 해물파전, 불고기, 새우샐러드, 연어스테이크에 이르기까지 정말 요리프로 보고 제멋대로 만든 듯한 메뉴 구성이었다. 보기 좋은 떡이라고 꼭 맛이 있겠 어? 기대도 않고 한입 먹어보았건만, 살다 살다 이런 감동이 또 없다. 나 름 요리 좀 한다는 엄마도 이런 감 동을 안겨준 적은 없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유를 끌어안 은 것이다.
+ 누군가 등 뒤에 닿는다. 주리가 내 등에 곡선을 그리고 있다. 도심의 냄새가 절묘하게 섞여 주리에게는 묘한 살 내음이 난다. 그것이 인간 의 냄새인지 주리만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닿는다 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우주 밖에 있는 존재가 우주 안에 들어오는 것. 서로 다른 존재가 같 은 존재가 되는 일. 같은 세계에 있 으면서도 서로 다른 개별적인 존재 일 뿐인 천사에겐 신기한 감촉이 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어쩌면 내 등은 인간의 등을 닮았 을까? 주리는 천사를 끌어안은 줄도 모 르는 채 흥분된 목소리로 물었다. 유, 너 사람이 아니지? 아뿔싸. 등의 감촉에서 인간과 다 른 점을 느낀 걸까. 이렇게 빨리 정 체가 들통 날 수는 없는데, 나는 순 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래서 정말 수상쩍을 정도로 말을 더듬었 다. 아...아냐. 나...나...사...사람...맞 아. 하지만 주리에게 중요한 건 내 대 답이 아니었다.
유는 분명 하늘에서 내려준 내 수호 천사일거야. 혼자 고단하게 사는 나를 가엾이 여겨 신이 보내 준 선물일거야. 주리는 동화를 쓰고 있었다. 사실 이기도 한 이야기를 사실인 줄도 모르고 하는 주리가 재밌다. 하지만, 방세 깎아달라는 심보는 아니 지? 달달하고 상냥하던 주리는 금세 자취를 감추고 도끼눈을 뜬 주리가 으르렁거렸다. 인간 세상의 요리를 따라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인간보다 우수한 능력을 가진 천사들에겐 보 편적으론 쉬운 일일 테지만, 나에 겐 보다 그렇다. 천상에서는 하위 1%에 속하는 천 사라고 놀림을 당하긴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능력 정도는 갖추고 있 다. 발달된 신체 능력과 예민한 직 감. 특히나 교육원에서 잡일을 도 맡아 한 덕에 자질구레한 손재주는 어느 천사보다 특별하다. 인간이 과거를 잊지 못하는 것처 럼, 인간이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그 지겨웠던 교육원 일을 여기까지 와서 하고 있으니 이 같
이 답답한 천사가 또 어딨을까. 천 사들이 나를 비웃는 것도 이런 미 련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늘은 새로운 영역에까지 발을 넓혔다. 청소에서 식사로. 생소한 식재료와 복잡한 요리 과 정. 그럼에도 인간 세상의 요리 프 로는 정말 재밌다. 그래서 나도 모 르게 엄청난 음식들을 만들었고 주 리에게 청소는 취미, 특기는 요리 인 인간 남자가 됐고, 갑작스럽게 백허그도 당했다.
천사의 일지. 일. 인간은 게으르다. 칫솔질을 하며 조는 주리, 고양이 세수 를 하는 주리, 머리에 물을 묻히고 방금 감 은 척 하는 주리, 매일 라면만 끓여먹는 주리,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주리, 잔소리 좀 그만 하라고 신경질 부리는 주리. 이. 인간은 잘 먹는다. 이걸 누가 다 먹는다고? 라는 말이 무색하게 나의 요리들 은 순식간에 주리의 뱃속으로 공간 이동을 했다. 식사를 마친 주리도 TV앞으로 공간이동을 했다. 볼록
한 배가 티셔츠 아래로 보일 듯이 보이지 않게 오르락 거렸다. 한 손 에는 과자 봉지까지 들고 우적거리 면서. 간만에 사람다운 식사를 했네. 그런 건 어디서 배운 거야? 그냥 혼자 해본 거야. 와... 난 라면 물 맞추는 것도 힘 들던데. 주리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너도 참 잘 먹어. 나도 진심으로 감탄하 고 있었다. 물론 입 밖으론 내뱉진 않았지만.
셋. 인간은 변덕스럽다. 나가라고 바락바락 소리 지르다가 귀 엽지 않냐고 불쌍한 표정을 짓는 주리. 류 소희 때문에 울상이 되었다가 한정민 때문에 바로 방긋거리는 주리. 각자각자 사는 게 좋다고 굴 땐 언제고 숟가락을 문 채 더불어 사는 사회가 좋은 거라며 속보이는 소리를 하는 주리. 와락 안을 땐 언제고 돈 때문에 이러냐고 경계 태세 를 갖추는 주리. 그리고 가장 중요한 넷. 작전. 드디어 좋은 아이디어를 찾았다.
주리가 볼록한 배를 두드리고 누 워 있을 때 나는 TV 드라마에 정신 을 뺏긴 상태였다. 머리를 질끈 묶 고 수수한 복장의 여자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미끈미끈한 남자의 손에 붙들려 매장으로 들어갔다. 여자는 남자가 골라준 옷을 입고 겸연쩍은 표정에 수줍은 미소를 담고 나타났 다. 거만하게 앉아있던 남자가 자 동으로 몸을 일으키더니 대번 홀딱 반한 표정을 짓는 것이다. 옷이 날개긴 날개네. 나는 배를 문지르며 혼잣말을 하 고 있는 주리를 쳐다보았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 말이 있
었지. 그 말처럼 주리에게 날개옷 을 입혀줘야겠다. 주리를 매장에 끌고 가고, 옷을 고르고, 옷을 입고 나오는 주리를 차례로 상상했다. 그 다음엔... 인간에게 절대 반할 리 없는 천사 가 그 곳에 앉아 있는 것이다.
6. 짝사랑 이재진 교수의 [심리학 개론]. 주리가 유일하게 강의실에서 정 민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다. 정민은 항상 가장 왼쪽, 두 번째 줄에 앉는다. 그래서 이 수업만큼 은 교수님의 관심이 집중될 지언정 가운데 줄의 중앙 자리만을 고집한 다. 정민의 옆얼굴을 훔쳐 보는데 최적의 자리이니까. 정민을 보고 있을 때면 꽃잎이 흩 날리는 벚꽃나무 아래 앉아있는 것
같다. 여름이 와도 가을이 와도 절 대 지지 않는 벚꽃나무. 그래봐야 아직 봄이긴 하지만. 3월에 핀 봄 꽃이 질 생각을 안 하는 구나. 지은이 넋을 놓고 있는 나를 또 핀 잔한다. 꽃이 어디 그냥 꽃이어야지. 그냥 꽃이 아니지. 이십 년 만에 핀 꽃인데. 지은의 핀잔은 계속 됐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어쩜 저렇게 잘 생겼을까? 같은 인간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아. 나는 손바닥으로 볼을 감싸며 감
탄을 연발했다. 아주 중증이다. 중증이야. 남들 첫사랑 뗄 적에 잠만 퍼 자더니. 네가 몰라서 그렇지 나도 첫사랑 은 뗐다. 네가 첫사랑? 고등학교 때의 나를 떠올리는 듯 지은은 비아냥거린다. 고등학교 때의 나를 떠올리면 나 도 지금의 내가 생경스럽긴 하다. 지은은 젊은 체육 선생님에 빠져 서 쉬는 시간마다 창문에 매달리거 나 복도를 어슬렁거리며 선생님의
그림자라도 살피려 애를 썼고, 반 친구들은 삼삼오오 모여 남자친구 자랑이나 미팅 얘기나, 남자 연예 인 누구누구가 좋더라 하는 이야기 로 떠들썩한 수다를 떨었다. 나는? 나는 책상에 엎드려 잠만 퍼잤다. 남자친구에게 받았다는 꽃 바구니도 부럽지 않고, 내숭을 떠 는 건 쓸데없는 것, 외모를 꾸미는 건 귀찮은 것, 키스는 잠자는 숲 속 의 미녀를 깨우는 용도로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엄마의 거짓말도 한 몫 했다. 저런 남자는 대학교만 가면 널리 고 널렸어.
<클래식>에서 손예진과 빗속을 뛰어가는 조인성을 보며 침을 흘 리고 있을 때, 엄마는 말했다. 그게 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딸자식을 번듯한 대학에 보내겠다는 부모의 비겁한 거짓말인줄은 미처 몰랐다. 어찌됐든 그 거짓말 하나로 나는 조인성의 발톱만큼도 안 되는 남자 들이 득실거리는 대학에, 엄마가 바라는 번듯한 대학에 당당히 합격 했다. 그리고 나의 우울한 대학 생활이 시작되었다. 어딜 가나 코흘리개 아니면 아저 씨.
연예인 급 외모의 오빠들이 매일 점심을 사주겠다고 덤비고 과제를 도와주고 캠퍼스를 같이 걸을 거 라던 믿음이 근거 없는 망상이라는 걸 깨달았을 즈음. 까슬까슬한 턱 수염에 우울한 분위기로 아저씨 패 션을 즐기는 오빠들, 당구장이나 PC방에서 죽치며 담배 냄새나 찌 든 오빠들, 통통하고 기름진 얼굴 에 느끼한 말투로 술 마시자고 꼬 득이는 오빠들에 분노를 발산하던 즈음. 그 날은 강의를 땡땡이치고 미팅 을 하러 나간 지은 때문에 대리 출
석을 한 뒤 기어나와 봄날 햇볕 아 래 벤치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잔 날이었다. 알 수 없는 알파벳 철자 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영어 교 재 책을 취침용 안대로 삼고 봄날 햇살을 이불삼아 딥 슬립을 담뿍 즐겼다. 잘생긴 훈남들만 취합한 소개팅 이라고 유혹하는 지은의 손목에 이 끌려 가지 않은 건 참 잘한 일이었 다. 금방이라도 꽃향기 찾아 날아 갈 듯한 흰 나비 모양의 핀이 지은 의 머리에서 춤을 췄다. 지은은 이 런 포인트가 청순미를 더해주는 거 야. 라며 지난 호 연예잡지에서 읽
은 듯한 패션 센스를 제 것인 냥 읊 어댔다. 그리고 물 빠진 청바지에 창고대방출로 값싸게 구입한 티셔 츠를 헐렁하게 걸치고 있는 내 손 을 꼬옥 잡고서 어차피 안 될 거 대 리출석이나 해달라고 부탁했다. 미 팅이 있는 날은 미리 얘기해주겠으 니 다음을 기약하잔 말도 잊지 않 고 했다. 흠... 뭘 모르는 소리. 비록 연애 따위에는 부적합한 패션일진 몰라 도 대학의 낭만을 즐기기 위해선 이 보다 더 적합한 패션이 어디 있 단 말인가. 분명 지은은 아직 여드 름 흉터가 얼룩덜룩 남아있는 남자
들의 개그 콘서트에서 차용한 식상 한 유머에 입술 근육을 억지로 움 직이며 피곤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터였다. 늘어지게 낮잠을 한숨 자고 텅 빈 창고 같은 배를 채우러 매점으로 이동하던 때였다. 태양 같은 발광체가 100m 앞에 서 번쩍거리고 있었다. 발광체는 감청색의 폴로셔츠를 입고 도서관 계단 턱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산등성이 위로 튀어 올라온 아침 태양이 온 세상의 암흑을 걷어가 는 것처럼 그는 방위 1km까지 거 뜬히 밝히고도 남을 광채를 온몸에
서 뿜어내고 있었다. 대학 홍보 팜 플렛에서 금방 튀어나온 듯한 준수 한 포즈와 광고모델이라고 해도 좋 을 빼어난 옷태, 로댕이 깎아놓은 듯한 또렷한 이목구비와 180cm는 훌쩍 넘길 키와 길고 매끈한 몸매. 창조주도 반할 만큼의 완벽한 존 재에 내가 어찌 반하지 않을 수 있 었을까. 떨어뜨린 핸드폰을 주어 그의 사 진을 찍으려고 하는 찰나,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는 꺼림칙한 물체가 있었다. 긴 생머리를 바람에 나부끼며 한 여자가 정민의 코앞까지 들어 왔
고, 정민은 기다렸다는 듯 책을 덮 었다. 그리고 둘 다 프레임 밖으로 사라졌다. 나는 다시금 핸드폰을 바닥에 떨 어뜨렸다. 이게 다 긴 생머리 때문이야. 그 여자가 류소희였다. 지금도 정 민의 옆에 앉아있는 꺼림칙한 물 체. 이 시간을 그저 즐거운 마음으 로 만끽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 그렇게라도 책을 잡고 싶겠지. 저게 다 머리빨이라니깐. 청순가 련섹시가 저 긴 생머리에서 나오는
거야. 나도 머리 길러봐. 청순가련 섹시큐트지. 그럼 어디 길러봐라. 청순가련섹 시큐트 좀 보게. 귀찮아. 나는 바로 꼬리를 내렸다. 청순가 련섹시큐트가 될 것은 확신하지만, 아침마다 그 긴 생머리를 감고 말 리고 정리할 자신은 없었다. 그런 절박함도 없으면서 무슨 연 예를 하겠다고. 평생 그림의 떡이 나 먹고 꿈이나 꾸지. 아, 사는 게 힘들다. 사랑도 힘들 고 생계도 힘들고. 세입자 아직 못 구했지? 그러니
까 알바나 착실히 해보라니깐. 무슨 소리야. 못 구하긴. 일주일 이나 됐는데. 정말? 그런데 왜 말 안 했어? 어? 그냥... 깜빡했어. 남자를 집에 들였다는 말을 어떻 게 하나 고민하다가 타이밍을 놓친 거였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할 말 못할 말 있는 거니까. 용케 금새 구했네. 들어오기 바 쁘게 도망간다더니. 들어올 사람은 다 들어오게 돼 있는 거지. 나는 우쭐대며 말했다. 대학생?
응. 성운대 다닌대. 복학 준비 중 이고. 복학? 무슨 일로 휴학을 했는 데? 그야 당연히 구... 당연히 군대라고 나오는 말을 황 급히 막았다....대는 아닐 테고 나도 모르겠 네. 뭘 개인 프라이버시까지 알려 고 드냐? 한 집에 사는 사이고 같은 대학 생이면 물어볼 수도 있지. 그래야 빨리 친해지고. 공동생활수칙 4번. 상대의 라이 프스타일에 간섭하지 말 것. 그게
우리 규칙이야. 며칠 사이에 별 걸 다 했구나. 성 격은 어때? 착해? 아님 깐깐해? 요 즘 싸가지 없는 여자애들이 워낙 많아서 편하게 돈 벌어보려다 된통 마음고생만 하는 수도 있어. 완전 착해. 개는 청소가 취미고 요리가 특기야. 방세도 십 만원이 나 더 주고. 진짜? 너 땡잡았다. 눈 뜬 봉사가 있긴 있었구나. 니네 집에 놀러 가 면 볼 수 있는 거지? 친구하면 좋겠 는데. 공동생활수칙 3번. 친구, 지인, 가족의 방문은 필사적으로 막는
다. 유치하다 유치해. 그래도 한번 보고 싶은데. 언제 학교로 놀러 오 라고 해라. 복학 할 때까지 시간도 많을 거 아냐. 금방 탄로날 게 뻔한데, 정숙한 친 구보다 진실한 친구를 택했어야 했 다. 같이 놀기엔 우리보다 훨씬 세월 을 앞서 가고 있거든요. 그래? 그럼 더 좋지. 나 언니 가 져보는 게 소원이었단 말야. 언니? 큭 웃음이 났다. 하긴 영 틀 린 말은 아니다. 청소하고 요리하 는 것만 보면 언니라고 할 수도 있
으니까. 그 순간 좁쌀만하던 내 눈이 수박 처럼 커졌다. 그 수상쩍은 녀석이 하필 그 순간 에, 다른 곳도 아닌 내 강의실로 들 어오는 것이 아닌가. 유!
7. 연극 각본 없는 연극이 막 시작됐다. 난 볼 생각도 없는 공연의 관객석 에 앉아있었고, 배우는 돌연 등장 했다. 인지도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신인 배우가 뚜벅뚜벅 관객석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이다. 신인 배우의 이름은 유였다. 나쁜 자식. 멋대로 연극을 시작한 것도 모자라 관객석에 있는 나까지 배우 로 만들겠다고 다가온다. 아주 해 맑은 웃음으로 내가 부인할 수도
없게 주리야 라고 불렀다. 관객의 반응은 좋았다. 사람들은 일제히 나와 유를 쳐다봤고, 그 다 음 장면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도대체 이 녀석은 왜 나타난 거 지? 암튼, 정민 선배 앞에서 <주리의 하우스메이트>란 연극을 벌이게 할 순 없다. 순결한 내 이미지는 훼 손되고, 나의 짝사랑은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알고 보면 가사일 잘 하는 언니일 뿐인 녀석 때문에. 절 대절대 남자라고 볼 수 없는 녀석 때문에. 여긴 왜 왔어?
나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얘기했 다. 제발 내 표정을 보고 허튼 소리 는 하지 말아달라고 나는 다림질로 도 펴지지 않을 주름살을 잔뜩 만 들었다. 학교 구경. 동물원 구경 나온 아이마냥 해맑 은 나의 하우스메이트. 곧 강의 시작이거든. 얼른 나가. 나는 주름살을 더 세밀하게 만들 며 유를 밀었다. 누구야? 지은이까지 연극에 가세했다. 제 발 여주의 착한 친구 역할이어야 할텐데.
어...그게... 당황했는지 다음 대사가 얼른 떠 오르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전 주리와 같... 위험하다는 걸 깨닫기도 전에 나 의 손이 재빠르게 유의 입을 막았 다. 유는 하고 싶은 대사를 다 하지 못해 답답해하는 눈치였다...아주 멀고 먼 친척이야. 9촌의 8촌쯤? 그런 친척이 있었어? 하며 지은이 유를 쳐다봤고 나는 유를 노려봤다. 아주 멀고 먼.. 강원도 깡촌이란 곳에서 온 친척이죠.
능구렁이. 유가 드디어 나와 호흡 을 맞추기 시작했다. 아.. 어쩐지. 순수해 보이시는 게 서울사람은 아닌 것 같았어요. 전 주리 베프예요. 한지은. 중학교 때 부터 들들 볶으며 요렇게 지내왔네 요. 뭔 프요? 이럴 때 보면 유는 강원도 깡촌이 아니라 달나라에서 온 것 같다. 베프. 베프라고. 베스트 프렌드! 진짜 순수하시다. 꼭 딴 세상에 서 온 사람 같아요. 지은이 큭 웃었다. 나처럼 어이없 음의 웃음이 아니라 호의적인 웃음
이었다. 이 녀석이 무슨 어린 왕자 라도 되는 줄 아시나. 솔직히 알고 보면 그렇긴 하죠. 농담도 귀엽게 하시네요. 여주를 따돌리고 자기들끼리 봄 날 분위기 형성하는 꼴이라니. 여 기저기서 여성 관객들이 수근 거리 는 소리가 들린다. 게다가 신인배 우의 말랑말랑한 웃음. 오늘 유의 표정 연기가 아주 물이 올랐다. 근데 여긴 왜 왔어? 곧 강의 시작 이라구. 같이 갈 데가 있어서. 끝날 때까 지 기다릴게. 세 시간 꽉 채워 끝날 텐데 기다
리시게요? 혼자 심심하시겠다. 괜찮아요. 이게 제 할 일이라. 뭐가 니 할 일 이라는 거냐. 밖에서 기다릴게. 유가 나갔고 연극은 일단락됐지 만 관객들의 시선은 여전히 나에게 쏠려 있었다. 야, 완전 훈남이잖아. 저런 친척 있는 건 왜 말 안했어? 얘기할 거리가되냐. 며칠 있다 갈 건데 뭘. 지금 니네 집에 있는 거야? 으응. 친척이니까... 나는 친척이란 단어에 잔뜩 힘을 줬다. 앞 좌석에 앉아있던 여자 몇
몇이 그럼 그렇지 라는 표정으로 등을 돌렸다. 안전장치가 제대로 먹힌 것 같은데 영 기분이 찜찜하 다. 그 언니가 뭐라 안 그래? 그래도 여자 둘만 있는 집에 남자가 있는 건데. 그.. 그 언니야 뭐... 뭐라 그러겠 어. 주인 마음인 거지. 그 언니 완전 천사표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아닌 것 같다. 유의 연극은 강의시간이 종료됨
과 동시에 납치극으로 변질되었다. 나는 인문과학학부 건물 앞에서 복 면도 쓰지 않은 유에게 납치되었 다. 지은은 이 범죄에 공모한 사람 처럼 묘한 웃음을 흘리며 쏜살같이 사라졌다. 유가 감금 장소로 선택한 곳은 명 동의 어느 옷가게였다. 감금 장소 로는 아주 부적합하게 밝고, 넓고, 사람도 많고, 감시 카메라도 있었 다. 유는 가게 안을 휙 둘러보더니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녀석이 무엇을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유는 매장의 왼쪽부터 오른쪽까
지, 아래부터 위까지 왔다갔다하며 진열된 옷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들춰봤다. 옷을 들었다가 나를 한 번 슥 쳐다보고 다시 내려놓고, 하 기를 수십 번도 더 반복했다. 유의 얼굴은 암흑세계의 보스처럼 점점 어두워졌다. 아까 말랑말랑한 웃음 을 짓던 신인 배우는 완벽히 사라 진 후였다. 어쨌든 유의 행동은 어느 누가 보 아도 쇼핑을 하는 모습이었고, 카 테고리는 여성 의류 였다. 그렇단 나는 왜 납치했지? 의문을 가지려 는 찰나에 유가 옷 하나를 손에 들 고 다가왔다. 캐주얼하면서 청순한
느낌의 원피스였다. 유는 다시금 암흑계의 보스같은 표정으로 내 몸 에 옷을 가져다 됐다. 감탄사도 물 음표도 아닌 정체를 알 수 없는 부 호가 유의 얼굴에 나타났다. 이 원피스 괜찮지 않아? 내 스타일 아니거든. 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쇼핑에 필요한 도구로 나를 이용할 목적인 게 분명하다. 그럼 녀석은 이거 니 꺼 아니거든? 하고 핀잔을 줄게 뻔 하다. 네 스타일이 뭔데? 생각지 못했던 유의 질문에 나는 얼음땡 놀이를 시작했다. 나는 눈
동자만 이리저리 굴리며 내 스타 일 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MD추천이나 주문폭주 또는 베스 트 상품. 옷을 고르는 센스 따윈 필 요 없다. 그 덕에 나의 옷은 취향을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들쑥날쑥하 다. 내 패션을 흠잡는 친구들에게 는 여러 가지 취향을 섭렵하는 게 나의 스타일 방식으로 부득부득 우 기곤 했다. 이제 바꿀 때가 되지 않았어? 나의 대답 따윈 필요 없다는 눈빛 으로 녀석이 당돌하게 반문한다. 이런 원피스는 류소희 같은 애들이 나 어울리는 것이라고 하고 싶었지
만, 제 무덤을 파는 꼴 같아 입술을 우물거리며 참았다. 입어 봐. 몰라. 귀찮아. 그러지 말고 한번 입어보라니깐. 류소희 같은 애들만 입으라는 법 있어? 헉. 독심술이라도 쓰는 걸까. 뭘 또 촌스럽게 입어보고 사냐? 이런 걸... 잘 안 입어서 그렇지 내 가 또 옷 빨이 좀 좋아. 그 녀석 앞에서 바보 꼴이 되고 싶 지 않아 나는 쇠심줄 같은 고집을 부렸다. 유는 절대로 믿을 수 없다 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내 맘대로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다른 코너 로 이동했다. 어쩌다 보니 남성복 코너로 들어왔다. 마네킹은 요즘 연예인들이 자주 입고 나오는 스타 일로 입혀져 있었다. 체크 무늬 남 방이나 유니크한 티셔츠도 있었다. 유는 내가 똥고집으로 입길 거부 한 원피스를 손에 들고 다른 옷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유를 늘 근거리에서만 봤지 원거리에서 10초 이상 바라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흰 남방과 검은색 바지. 유의 한결같은 복장이다. 옷에서 진한 체취나 페브리즈나 향수 냄새가 나
지 않는 것이 옷 하나를 가지고 일 주일 내내 입는 것 같진 않았다. 그 렇다면 저 옷만 여러 벌? 저야말로 한결같은 패션의 소유자이면서 변 신이니 어쩌니 해대기는.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도 없고 애인도 없 고 잘 보일 사람이 없다고는 쳐도 중학생이 교복을 입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은행 직원이 유니폼 입고 일하는 것도 아니고 일반인이 똑같 은 옷을 매일 입을 이유가 뭐가 있 을까. 혹시 돈이 없나? 부모님도 안 계시고 알바를 하는 것도 아니니 용돈이 나올 구멍이 없는 것 아닌 가. 난 급작스런 동정심에 휩싸였
다. 나는 눈에 띄는 옷들을 팔에 걸 치기 시작했다. 셔츠와 남방, 티셔 츠, 스키니진, 데님팬츠, 스판 면바 지 등이 켜켜이 쌓였다. 직원이 이 상한 눈초리를 줬지만 개의치 않았 다. 나는 계산을 마치고 돌아오는 유 의 손을 잡아 끌었다. 그리고 팔에 걸려 있는 옷 무더기와 함께 탈의 실로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뭐하는 거야? 유가 나오려고 문을 열었지만 힘 으로 막으며 말했다. 그거 하나씩 입고 나와 봐.
왜? 유가 문에서 팔을 떼고 물었다. 주인님 선물. 그렇게 당황한 척 하더니만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데 1분도 허비하 지 않았다. 새 옷으로 갈아입은 유는 꽤 근사 했다. 왜 지은이 유가 등장할 때면 샤방샤방한 눈빛을 하는 지 알 것 같았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같이 걸으면 흘끔흘끔 쳐다보는 여학생 들도 많았다. 무엇보다 강의실 사 건은 어떤가. 마치 흠모하는 연예 인을 바라보는 부담스런 시선. 이 방인에게는 사뭇 과했던 눈빛.
그럼에도 나는 까닭 없이 고개를 저었다. 유는 실망한 표정으로 탈 의실로 들어갔다. 유의 패션쇼는 계속됐다. 쇼는 은 근히 재밌었다. 모델이 훌륭한 탓 이었다. 무엇을 걸치고 나오든 옷 이 몸에 착착 감겼다. 게다가 흰 남 방과 검은 바지만 고수하는 녀석이 막 집은 옷을 가지고 기가 막히게 코디해서 입고 나왔다. 알면 알수 록 진귀한 녀석이었다. 매장 내에 손님도 직원도 하던 일 을 멈추고 유의 패션쇼를 감상했 다. 음식점에서 밥을 먹다 말고, 서 빙을 하다 말고, TV프로그램에 정
신이 팔린 사람들 같았다. 유의 패 션쇼를 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 게로 옮겨졌다. 시선이 뜨거웠다. 유가 골라준 원피스라도 입고 있을 걸 하는 후회가 들면서 한편으론 우쭐해졌다. 일곱 번째 옷을 끝으로 패션쇼는 끝이 났다. 유는 탈의실에서 주리 가 던져준 한 무더기의 옷을 들고 나왔다. 패션쇼를 보고 있던 직원 이 달려와 알아서 옷 정리를 해주 었는데, 나를 귀찮게 해도 괜찮으 니 패션쇼를 더 해주면 안되겠냐는 표정이었다. 옷 갈아입는 것도 쉬운 일이 아
니네. 참 복잡하게들 입는구나. 유가 너무 신경을 안 쓰는 거지. 그건 주리도 마찬가지잖아. 그래도 유니폼 입고 다니는 사람 만 할까. 유니폼? 별로 재밌는 말도 아닌데 유는 웃 었다. 그럴 지도 모르겠다. 유는 화를 내지도 않았다. 대신 주 리의 옷이라며 몇 가지 것들을 건 네주었다. 이거 내 옷이었어? 나는 새로 고른 옷들에 묻혀 있는 원피스를 끄집어내며 물었다.
그럼. 유는 오히려 그럼 누구 건지 알았 냐는 표정을 지었다. 남의 것이 아 니라 내 옷을 고른 거라니 납치극 도 즉흥연극도 용서가 되는 것 같 다. 그렇지만 이게 다 몇 벌인지... 상의 두 벌 바지 한 벌 원피스 한 벌 스커트 한 벌, 골고루도 골랐다. 엄마가 정해준 한달 용돈 삼십 만 원이 고스란히 나갈 판이었다. 그 래도 옷은 썩 마음에 들었다. 무엇 하나 빼기가 아쉬웠다. 옷 욕심이 없는 나도 이 옷을 입기만 하면 한 여름밤의 꿈처럼 정민의 마음을 사 로잡을 것만 같았다.
계산대에서 눈을 꽉 감았다 뜨고 나니 지갑에서 엄마 카드를 꺼내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의 묘미가 반 전에 있듯 현실도 그렇다. 됐어. 내가 낼게. 유가 빳빳한 지폐를 지갑에서 꺼 냈다. 다이아몬드를 들고 있는 것 처럼 유의 손이 번쩍거리는 것 같 다. 아니 유 자체가 번쩍번쩍 빛이 난다. 그 많은 현찰은 어디서 났니. 너는 도대체 어디서 왔니. 이대로 끝난다면 주인님 체면이 말이 아니다. 나는 마네킹에 코디 된 조끼를 벗겨 소심하게 들이밀며 말했다.
이건 내가 사줄게. 어...어. 고마워. 나의 초라한 마음이 녀석의 웃음 한 번에 눈처럼 녹아버린다. 도대체 넌 어디서 왔니. 부모도 없고, 네가 살던 곳은 전혀 알 수 없는 곳이고, 너의 과거도 모 르고, 어쩌면 너의 현재도 모르는 것 투성이야. 네 신원에 문제는 없 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잖아. 쇼핑을 마치고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어느새 유의 어깨에 기대 잠이 들었고, 유도 똑같이 내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그런데 말이지. 참 신기하게도...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 처럼 네가 참 편해.
8. 시작 내 짝사랑에도 드디어 움이 텄다. 햇살이 비추는 벤치 아래에서 정 민이 말을 걸어왔다. 아주 나른한 오후의 일이었다. 사 랑이 시작되는 오후 같지 않게. 이 기적같은 일의 전적인 공은 유 에게 있다. 인정하기 싫지만 사실 이 그랬다. 몇 개월 동안 정민의 50m 근방에 서 떠돌던 먼지 같던 나를 정민의
발 앞에 세워 놓아준 사람은 유였 다. 나는 정민의 전화번호를 들고 한걸음에 집으로 뛰어 들어가 유를 끌어안았다. 한번 안고 나니 두 번 은 쉬웠다. 마네킹인냥 서서 벅찬 감격과 고마움을 떠들어대기에는 나는 그리 차분한 성격이 아니었 다. 목을 끌어안고 발을 동동 구르는 나와는 달리 유는 내 등을 몇 번 토 닥이는 걸로 감격의 표현을 다했 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컬러 양말을 신고 가지치기가 안 된 나뭇가지처
럼 이리 삐쭉 저리 삐쭉한 머리를 하고 서 있는 나를 바라보던 유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 생물을 바 라보던 유는 그 생물체가 나임을 깨닫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마구 오물거렸다. 하 지만 그 움직임마저 비웃음처럼 느 껴져 나는 바로 주눅이 들고 한편 으론 거세게 토라졌다. 그리고 이제 바꿀 때가 되지 않았어? 라고 핀잔을 주던 유의 말이 자동 적으로 떠올랐다. 나도 변신을 한다고 했는데 요모
양 요꼴인 걸 어째. 그러게 이런 원 피스는 류소희 같이 청순미가 철 철, 여성미가 흠뻑 넘치는 여자애 들이나 입는 거라고, 나는 볼멘소 리를 했다. 유는 입을 삐죽 내밀고 우뚝 서 있 는 나를 방으로 들여보내고 문제의 컬러양말부터 벗기게 했다. 무지개 색이 아주 알록달록한 컬러양말이 었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면 서도 신은 건 원피스를 입고 서 있 는 내가 흔해빠진 여자 같았기 때 문이었다. 머리빨을 세워보려니 평 소 잘 쓰지 않는 드라이기가 손에 서 따로 놀았다. 그래서 모자를 쓸
까 하다 눈에 띈 게 컬러양말이었 다. 이거라면 정원 손질하다 망친 듯한 머리에서 시선을 분산시키면 서도 확 눈에 들어오는 패션을 완 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는 그걸 별 미련 없이 벗으라고 했다. 그 다음은 유가 시키는 대로 메이 크업 용품을 죄다 사냥해 왔다. 내 가 가진 것이라곤 립글루즈 밖에 없었기 때문에 베이스, 비비크림, 마스카라 등 모든 것들은 엄마 화 장품에서 훔쳤다. 유는 거울 앞에 나를 앉히고 머리 를 빗기 시작했다. 유의 손놀림은
마치 10년 경력의 스타일리스트 같았다. 자연스러운 컬이 유의 손 끝에서 완성되었다. 내가 감탄사를 연발해도 유는 동요 없이 머리손질 을 끝마쳤고 바로 메이크업을 시작 했다. 어차피 살짝만 할 거야. 얼마나 달라지나봐. 유는 도망가려는 나를 힘으로 앉 히곤 부드럽게 말했다. 끙. 녀석이 저리 말하는 데 거절할 재간이 없 었다. 게다가 머리를 만지는 거나 옷 코디를 하는 거나 유의 미적 센 스는 스무 살의 눈으로 보기에는 프로 같았다.
살짝 한다는 유의 말대로 메이크 업은 금방 끝났다. 거울 안에는 모 르는 여자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 다보고 있었다. 기적이 일어나기 3시간 전. 나는 흘끔흘끔 쳐다보는 남자들 의 시선에 기분이 한껏 고취되어 있었다. 그 기분은 강의실에서까지 이어졌다. 동기들과 얼굴만 익숙 한 학생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 다. 내가 지은이 옆에 앉을 때까지 나라는 걸 짐작도 못한 얼굴들이었 다. 여긴 자리 있는데요?
지은은 한술 더 떴다. 왜 이래. 원피스 입은 거 첨 봐? 그래. 첨 본다. 원피스를 원피스 같이 입은 건 새삼 처음이다. 나를 놀리는 건지 흉보는 건지 헷 갈렸다. 그러더니 응큼하게 떠보는 것이다. 너, 유랑 진도 나갔구나? 뭐? 진도?? 우리 진도 나가고 하 는 사이 아니거든. 우린... 친척이 잖아. 나는 정민이 들을까 나즈막히 속 삭였다. 아 맞다. 맞다. 자꾸만 까먹네. 너 때문이야. 솔직히 전혀 같은 피가
흐르는 사이 같진 않단 말야. 게다 가 유가 온 다음부터 네가 갑자기 변하니까 그렇지. 그것도 여자로. 그건 유가 내 사랑의 큐피트라서 그래. 정민 선배랑 잘 되게 도와준 다고 했단 말야. 진짜? 왜? 글쎄... 내가 불쌍해 보였나? 암 튼 그러니까 그런 위험천만한 발언 하지 말라고. 난 정민 선배보다 유가 더 좋던 데... 진짜 친척 맞는 거지?? 그... 그럼. 그리고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나는 딸꾹질을 삼키며 유지태의
대사를 진지하게 따라 했다. 지은 은 아쉬운 눈치였다. 기적이 일어나기 10분 전. 사랑이 오는 나른한 오후. 아주 오 래 숨바꼭질을 하던 사랑이 이제 야 기지개를 켠다. 바람이 불고 햇 살이 내리쬐는 벤치에서 나는 사랑 이 걸어오는 소리를 미처 듣지 못 한 채 고개를 까닥거리며 졸고 있 었다. 누군가 말을 걸었고, 그 누군가가 정민임을 안 순간 나는 몸을 휘청 하며 앞으로 고꾸라질 뻔 했다. 그 런 나를 정민이 받았다. 몇 초간 상
황을 분별하지 못해 아주 얼빵한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정민은 나를 벤치에 고이 앉히고 제 소개를 했다. 나는 입도 뻥긋 못 하고 고개만 주억거렸다. 내 눈동 자엔 음소거가 된 정민의 영상이 가득 찼다. 소리가 재생되기 시작 한 건 클라이막스에 이르러서였다. 주말에 시간되면 같이 영화 보러 갔으면 좋겠는데. 고개만 주억거리던 나도 그제야 혼인서약을 하는 신랑처럼 크게 외 쳤다. 좋아요!! 갑작스럽게 터진 목소리에 나는
입을 막았고, 정민은 대수롭지 않 은 듯 번호를 찍어주었다. 마지막 말이 귓가에 대롱대롱 맺혀 떨어지 지 않는다. 연락할게. 정민은 정확하게 3일 하고도 14 시간 만에 연락을 해왔다. 정민의 연락이 올 때까지 핸드폰 은 내 신체 일부였다. 세수를 할 때 도 밥을 먹을 때도 옷을 입을 때도 핸드폰은 내 손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한 순간 한 번, 문자의 내용을 확인하고 또 한
번, 유에게 달려가 문자를 보여주 며 또 한 번 나는 그렇게 세 번 소 리를 질렀다. 문자의 내용은 기가 막혔다. [오늘 용산 CGV에서 3시에 보자.] 정민 선배가 나한테 데이트 신청 을 했다고! 나는 흥분한 채, 유의 주변을 빙글 빙글 돌며 탈춤을 췄다. 핸드폰이 손끝에서 나부꼈다. 나는 아지와 놀겠다며 마당으로 나가려는 유의 팔을 붙들고 원 모 어! 를 외쳤다. 한 번 더 무도회장
에 나가는 신데렐라로 만들어 달라 고 나는 이른 아침부터 사정을 했 다. 어쩌다 이런 주인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사랑 밖에 중 요한 것이 없다. 유는 지난번에 산 옷 중에 둥근 소 매와 리본으로 포인트 된 블라우 스와 체크무늬 스커트를 골라주었 고, 머리는 끝부분만 둥글게 말아 전체적으로 긴 생머리 느낌의 소녀 로 만들어 주었다. 기분이 마치 삼 국통일을 이룬 신라의 왕이라도 된 것 같았다. 중간 중간 보고 올리겠습니다! 나는 경례까지 하며 씩씩하게 말
했다. 유는 그저 가만히 웃었다. 안타깝게도 기적은 거기서 끝이 었다. 내 앞에 나타난 정민은 혼자가 아 니었다. 처음 정민을 봤던 그 때처 럼, 짝사랑에 가슴앓이 중인 어느 때처럼, 정민 옆에는 류소희가 있 었다. 게다가. 귀엽네. 옛날에 가지고 놀던 마 루인형 같은데? 라는 류소희의 조소 가득한 눈빛 과 말투. 신생아였네. 난 3학년. 정민 오빠 와 같은 학년이야.
선배라는 권력을 내세우는 얄팍 한 수법에 그만 당돌한 청춘에서 소심한 청춘으로 단박에 굴러 떨어 졌다. 게스트는 거기서 끝나지 않 았다. 한성인 아직 인가? 한성 오빤 5분 늦게 오는 게 기본 이잖아. 나는 망부석처럼 서서 그들끼리 대화를 나누며 남은 게스트를 기다 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마 지막 게스트는 영화시작 5분을 남 겨놓고도 나타나지 않았다. 정민이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 한 것만도 수 십 번일 것이다.
그만 기다리자. 시간도 다 됐고. 류소희가 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왜 전화를 안 받지. 정민은 한 번 더 통화를 시도했지 만 소용은 없는 듯 했다. 연결되지 않는 신호음을 들으며 정민은 왜인 지 나를 쳐다보았다. 괜찮지? 오는 지도 모르고 있던 나에게 왜 그런 걸 묻는 걸까. 네. 사정이 있을 거야. 많이 들떠 하 더니... 마지막 말은 들으라는 소린지 듣
지 말라는 소린지 중얼거리는 음 성이 컸다. 영화 상영 내내 나는 팝콘을 씹고 콜라를 빨고 스크린을 뚫어져라 보 면서 되도록 정민과 소희에게 신경 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 만 긴장을 풀고 있는 사이에 보면 내 눈은 그들을 향해 있었다. 꼭 마 주보고 있지 않아도 둘 사이의 흐 르는 유대감과 친밀감이 몹시 부러 웠다. 절대 낄 수 없는 벽이 그 사 이에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고 맥주를 마 시러 가자는 정민의 달콤한 청을 뒤로 한 채 나는 망설임 없이 그 자
리를 도망쳤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예고에도 없 던 비였다. 류소희의 등장이 그랬 던 것처럼. 얄궂은 비는 쉽사리 그 칠 기미가 없었다. 나는 그대로 비 속으로 뛰어 들었다. 아직 꽃을 피 우기도 전인데 내 짝사랑은 갑작스 런 소나기에 젖었다. 춥고 아프다. 옮기는 발끝마다 비가 내리고, 틔 우지 못한 꽃잎이 바르르 떨고 있 었다. 그리고. 유가 서 있었다. 눈물이 대롱대롱 매달린 발끝에 유가 있었다. 유가 성큼 내 발끝까 지 들어와 내 머리 위에 검정 우산
을 씌워 주었다. 또르르 얼굴에서 미끄럼틀 놀이를 하던 물방울들이 눈물만 제외하고 일제히 사라졌다. 다 젖었네. 유... 나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얼 굴로, 비가 오는 거리에서 유의 이 름만을 부르고 있었다. + 검은 우산 밑의 주리는 평소와 다 를 바가 없었다. 잔뜩 의기소침하고 슬퍼 보이던 주리의 모습은 한 순간의 착각이었
나 보다. 장대비가 내렸고, 비를 보 는 것도 빗속을 걸어보는 것도 처 음이었다. 비는 단번에 인간 세상을 흐릿하 게 만들었고, 온갖 소음들로 가득 했던 도시를 하나의 소리로만 가 득 채웠다. 옷이 젖고 옷 틈으로 빗 물이 스며드는데 그 감촉이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비를 맞으며 걸어 오는 주리의 축 쳐진 어깨가 크게 와 닿지 않았다. 정민 선배가 여우 꼬리를 달고 나올 줄 누가 알았겠어. 여우 꼬리 만 없었으면 정민 선배랑 다정하게 얘기도 하고 영화도 즐겁게 봤을
거야. 차라리 한성 선배라도 나왔 다면 머쓱하지나 않았지. 빗소리 밖에 들리지 않던 풍경 속 으로 주리의 재잘거림이 스며들었 다. 집으로 돌아가는 그 긴 시간 동안 주리는 거세게 떨어지는 빗방울만 큼 바쁘게 떠들었다. 공들여 말아 놓은 머리카락 끝이 힘없이 풀어져 있었고, 새로 산 옷도 빗물에 젖어 농도 짙은 색으로 변해 있었다. 비는 대문을 여는 찰나 그쳤다. 주 리는 오랫동안 집을 떠난 아이처럼 현관 안으로 재빠르게 들어갔다. 마술은 몽땅 사라졌다. 낡은 트레
이닝 차림의 주리가 젖은 머리를 긁적이며 내 앞에서 서 있었다. 그 리고 우리 맥주 한잔 할래? 하며 환영할 수 없는 부탁까지 해 왔다. 주리는 나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냐고 물었다. 비에 젖지 않은 현관 앞 계단에 앉 아 캔맥주 하나를 몽땅 마신 후였 다. 주리는 캔 하나를 더 땄고 내 손엔 아직 반도 마시지 않은 맥주 가 들려 있었다. 나에겐 해결해야 할 임무만 있고, 그것은 바로 너 때
문이라고 시큼한 맥주를 마시며 얘 기하고도 싶었다. 주리는 알콜에 취해 있었고 나는 처음 보는 비에 취해 있었다. 저번에 없다고 그랬지, 참. 그래 도 첫사랑은 있었겠지? 제 사랑에 대한 공감대를 얻고 싶 었는지 주리는 같은 주제의 질문을 끈질기게 했다. 아니. 대답할 수 있는 건 두 음절뿐이었 다. 스물다섯 먹을 동안 도대체 뭘 한거야. 강원도 깡촌에서 감자만 캐셨나?
천사 교육원에서 잡일이나 했다 고 정정할 순 없었다. 그럼 주리는 그 정민 선배란 사 람이 첫사랑이야? 아니. 난 좀 일찍 성숙했다구. 내 첫사랑은 말이지. 내가 열 살 때 옆 집 살던 대학생 오빠였어. 마치 엄청난 비밀을 일러주는 것 처럼 주리는 입을 모으고 작은 목 소리로 말했다. 나 목마도 태워주고 과자도 사주 고 구구단도 가르쳐주고... 정말 좋 은 오빠였는데... 그래서 그땐 빨리 스무 살이 되고 싶었어. 주리의 손에 든 캔이 또다시 찌그
러졌고 주리는 바로 새 캔을 땄다. 정민 선배를 보면 그 오빠 생각 이 나기도 해. 그래서 좋아하는 건 지도 몰라. 그 오빠랑은 왜 안됐는데? 보나마나 나이 차이 때문인 게 분 명했지만 대꾸할 말이 없어 궁금한 듯 물었다. 어쩌다 보니까... 주리는 예상과는 달리 말을 얼버 무렸다. 출생의 비밀이라도 간직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바로 씩씩하게 태도를 바꾸 었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 거라
잖아. 대신 두 번째 사랑은 이어졌 으면 좋겠어. 네 소원이 이루어지는 게 내 소원 이기도 해. 아는지 모르겠지만. 별은 참 많다. 주리가 하늘을 보며 무심히 말했 다. 나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 다. 지상에서 보는 별은 먼지처럼 작고 훅 불면 꺼질 듯 희미했다. 그 렇지만 그 또한 아름다웠다. 그래 서 주리에게 저 곳이 네가 말하는 강원도 깡촌이라고 고백할 뻔도 했 다.
9. 의문 비록 첫 데이트가 실패와 좌절로 끝나긴 했지만 정민에 대한 나의 짝사랑마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했고, 사람이란 모름지기 지조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에 찬물 을 끼얹는 사람이 있었다. 누구도 아닌 내 베프. 난 시크한 정민 선배보다 샤방샤 방한 유 오빠쪽이 더 낫더라. 왜 하 필 친척오빠여가지고. 안 그럼 밀
어붙였을 텐데. 얼마나 친해졌다고 오빠라는 말 을 낼름 하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저 태도를 보아선 밀어주고 싶은 게 아니라 밀어붙이고 싶은 눈치란 말이지. 내 행동이 수상쩍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오전 강의시간부터 폐인처 럼 책상에 엎드려 잠을 퍼잔 게 문 제였다. 전날 맥주를 마시며 별을 보았던 것까진 좋았다. 첫사랑을 떠올리며 지금의 사랑에 대한 각오를 다진 것도 좋았다. 훅 하면 날아갈 듯한 먼지 같은 별까지 헤아리며 두 시
를 넘긴 게 문제였다. 맥주캔 세 개 를 찌그러뜨렸을 때 일어났어야 했 는데, 후회란 모름지기 뒤늦은 법 이다. 암튼 무척 부지런했던 내가 그런 게으른 양상을 보인 것이 지 은의 의심을 샀다. 왜 아침부터 폐인 모드야? 밤에 넘 늦게 잤거든. 세시쯤이 던가... 신데렐라처럼 12시면 땡 하면 자 는 애가 어젯밤은 무도회라도 다녀 왔어? 마당에서 별 봤거든. 서울에도 별이 많이 보일 때도 있더라. 솔직하게 얘기한 게 화근이었다.
웬일이야. 니가 밤에 잠자는 거 말고 다른 일을 다 하고. 참, 잘생 긴 오빠는 갔어? 잘생긴 오빠? 아, 유... 당분간은 좀 있을 거라서. 자기가 한 거짓말은 상시 기억하 고 있어야만 순발력 있게 대처할 수 있다. 설마 어젯밤에 유랑 별 본거? 으응... 무지 친한가봐? 으응... 뭐... 유와 나의 관계의 깊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난 시크한 정민 선배보다 샤방샤
방한 유 오빠쪽이 더 낫더라. 왜 하 필 친척오빠여 가지고. 안 그럼 밀 어붙였을 텐데. 지은이 했던 말을 반복하며 안타 깝기 짝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랑은 물리적인 힘에 의해 이루 어지는 게 아니라고. 나는 제법 대견한 말투로 대꾸했 다. 하지만 그런 근엄한 모습은 아 차 하는 순간 무너졌다. 친하지도 않은 동기 때문에. 저번에 강의실에 왔던 남자, 혹 시 남자친구야? 우리의 대화에 갑작스럽게 끼어 든 앞자리의 동기. 친한 것도 아니
고 안 친한 것도 아닌 애매한 관계 랄까. 무슨! 친척오빠야. 나는 화들짝 놀라 크게 대답했다. 하지만 눈에 띄게 밝아지는 동기의 얼굴을 보니 기분이 썩 좋진 않았 다. 그럼 나 전화번호 주면 안돼? 그건 안돼! 나는 강한 어조로 딱 잘라 얘기했 다. 너무 순식간에 튀어나온 말이 었기에 내가 어떤 대답을 했는지도 5초가 지나서야 서서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전에 지은과 여우같은 동기가 놀란 토끼눈이 되
어 나를 쳐다보았다. 개인정보보호 원칙이 있지. 허락 없이 타인의 정보를 흘린 순 없어. 나는 주섬주섬 얘기했고 동기는 등을 확 돌려버렸다. 동기의 태도 로 봐서는 급조된 내 변명을 받아 들이는 것 같진 않았다. 급조된 변 명이긴 하지만 사실이긴 사실이다. 서로에 대해 간섭하지 않고 프라이 버시를 지켜줄 것. 그것이 우리 사 이의 규칙 아니던가. 다만, 동기보다 거슬리는 건 지은 의 눈빛. 요상하고 의심스런 눈빛 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애써 지은의 눈빛을 피하며 이미
펼쳐진 책을 덮었다 폈다 하며 딴 청을 부렸다. 사실 나도 내가 왜 그 랬는지는 모르겠다. 정말 내가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 다. 왜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정 민이 말을 거는데 빚 독촉에 시달 리는 가난뱅이처럼 도망쳐 버린 것 이. 정민은 내가 자판기 앞에서 동전 을 뒤적이고 있을 때 홀연히 등장 해 주셨다. 그리고 내가 머뭇거리 는 사이에 동전 투입구에 동전까지 넣어 주었다. 어젠 잘 들어갔어? 밖에 나와 보
니까 비가 오던데. 우산 있었어요. 그랬구나. 잠시 침묵이 흘렀다. 둘 사이에 까 마귀가 졸면서 날아가는 것 같았 다. 그래서 였을까. 나는 먼저 말을 걸어온 정민에게 안녕을 고한 것이 다. 그럼 저... 안녕히 계세요. 나는 정민의 반응을 살필 것도 없 이 후다닥 도망쳤다. 뒤에서 정민이 아닌 한성의 목소 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주리 후배 ~ 라고 내 이름을 부른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걸었다. 왜 그랬는지 정말 모르겠다. 유가 없으면 이 모양이다. 나 혼자서는 역시 어림도 없다. 집에 돌아가니 유는 텅 빈 냉장고 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장을 보러 마트에 간다고 했다. 잠깐, 나도 갈래! 빛의 속도로 현관을 빠져나가려 는 그 녀석을 붙잡고 나는 방으로 튀어 들어가 빠르게 겉옷을 걸치고 나왔다. 요리를 잘하는 유에 비하 면 장을 보는 유의 모습은 어쩐지 어색하고 서툴러 보였다. 히말라야
산맥을 등단하여 대자연에 압도당 한 사람처럼 코너를 돌 때마다 꼼 짝없이 서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정 글에 사는 신기한 야생동물을 만난 사람처럼 상품 하나하나를 보며 호 기심과 감탄과 알 수 없는 표정을 랜덤으로 지었다. 유 역시 마트에 장을 보러 온 게 처음일 수도 있겠다. 어린 꼬마를 카트에 태우고 장을 보는 아줌마를 보니 불현듯 생각났다. 강원도 깡 촌에서 살았고, 부모는 없었다. 도 심에서 살고, 부모도 있는 나 역시 마트 나들이가 처음인데 저 녀석은
어떨라고. 그런 생각에 혼자 울쩍 해질 뻔도 했지만 여기저기서 진동 하는 기름 냄새, 고기 냄새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평일이라 사람이 드문 마트 안을 종횡무진 뛰어다녔고, 시식 코너를 지나치지 못했다. 맥주와 과자와 라면과 각종 인스턴트 음식 들을 카트에 잔뜩 밀어 담았다. 그 럴 때마다 유는 잡은 물고기 풀어 주는 낚시꾼처럼 카트의 물건을 진 열대로 되돌려 놓곤 했다. 그래서 계산대에 당도했을 때 남은 거라곤 각종 식자재와 맥주 여섯 캔이 전 부였다.
그럼에도 유에게 화를 내지 못한 건 유가 또 현금을 내밀었기 때문 이다. 그럴 때의 유는 참 멋있다. 유가 멋있는 순간은 또 있다. 만능 요리사 유. 뭐가 먹고 싶냐고 물어 보는 유. 내가 말한 음식을 동화같 이 만들어 주는 유. 저녁에 뭐 먹을까? 떡볶이! 불고기! 부침개! 잡채! 스 테이크! 피자! 나는 생각나는 대로 얘기했다. 그 리고 말하는 대로 들어주는 유. 유가 요리하는 모습은 한편의 마 술같다. 아주 빠르고 능수능란하면 서 예술적이다. 가히 사람의 솜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