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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과 위 가 오는 경우에는 앞말 받침을 대표음으로 바꾼 [다가페]와 [흐귀 에]가 올바른 발음이 [안자서], [할튼], [업쓰므로], [절믐] 풀이 자음으로 끝나는 말인 앉- 과 핥-, 없-, 젊- 에 각각 모음으로 시작하는 형식형태소인 -아서, -은, -으므로,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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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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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국어에서 관용표현 지도 방안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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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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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사항이 없을 경우 무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검토항목 검 토 여 부 ( 표시) 시 민 : 유 ( ) 무 시 민 참 여 고 려 사 항 이 해 당 사 자 : 유 ( ) 무 전 문 가 : 유 ( ) 무 옴 브 즈 만 : 유 ( ) 무 법 령 규 정 : 교통 환경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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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절 조선시대 이전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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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0 인물 강순( 康 純 1390(공양왕 2) 1468(예종 즉위년 ) 조선 초기의 명장.본관은 신천( 信 川 ).자는 태초( 太 初 ).시호는 장민( 莊 愍 ).보령현 지내리( 保 寧 縣 池 內 里,지금의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에서 출생하였다.아버지는 통훈대부 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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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은하 1 우리 은하 위 : 나선형 옆 : 볼록한 원반형 태양은 은하핵으로부터 3만광년 떨어진 곳에 위치 2 은하의 분류 규칙적인 모양의 유무 타원은하, 나선은하와 타원은하 나선팔의 유무 타원은하와 나선 은하 막대 모양 구조의 유무 정상나선은하와 막대나선은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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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오스본을 중심으로 한 작은 정부, 시장 개혁정책을 밀고 나갔다. 이에 대응 하여 노동당은 보수당과 극명히 반대되는 정강 정책을 내세웠다. 영국의 정치 상황은 새누리당과 더불어 민주당, 국민의당이 서로 경제 민주화 와 무차별적 복지공약을 앞세우며 표를 구걸하기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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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운 체계상의 특징 음운이란 언어를 구조적으로 분석할 때, 가장 작은 언어 단위이다. 즉 의미분화 를 가져오는 최소의 단위인데, 일반적으로 자음, 모음, 반모음 등의 분절음과 음장 (소리의 길이), 성조(소리의 높낮이) 등의 비분절음들이 있다. 금산방언에서는 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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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강 판소리계 소설 심청전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1106월 평가원] 1)심청이 수궁에 머물 적에 옥황상제의 명이니 거행이 오죽 하랴. 2) 사해 용왕이 다 각기 시녀를 보내어 아침저녁으로 문 안하고, 번갈아 당번을 서서 문안하고 호위하며, 금수능라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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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 畿 鄕 土 史 學 第 16 輯 韓 國 文 化 院 聯 合 會 京 畿 道 支 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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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국립부산국악원총서 1 홍의 삶과 예술 발행일 2009. 12. 발 행 국립부산국악원 ( 원장 박영도 ) 부산광역시 부산구 동평로 280 ( 연지동 219-2) 전화 / 051) 811-0035 팩스 / 051) 811-0045 www.ncktpab.go.kr 기 획 이해로 ( 장악과장 ) 편 집 영희 ( 학예연구사 ) 인 쇄 동아TG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4가 25-4 동방빌딩 11층 전화 / 051)468-7277 발간등록번호 : 11-1371288-000001-10 ISSN : ISSN 2092-979X Research Series by NCKTPAB No. 1 The Life and Art of Kim Jin-hong 2009 by The National Center for Korean Traditional Performing Arts in Busan Published by Park Young-Do Planned by Yi Hae-Ro Edited by Kim Young-Hee The National Center for Korean Traditional Performing Arts in Busan 280, Dongpyeongro, Busanjin-gu, 614-861, Busan, Korea Phone/ 051-811-0035 Fax/ 051-811-0045 Printed by DongaTG Publication Date : December 2009

발 간 사 예로부터 호남 소리, 영남 춤 이라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습니다. 령( ) 의 남쪽 끝에 위치한 이곳 부산은 영남 지역 중에서도 춤의 기운이 살아 숨쉬는 춤의 고장입니다. 동래학춤, 동래한량춤, 동래 고무( ) 그리고 수영야류, 동래야류 등 춤과 연희가 물의 도시 부산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국립부산국악원에서 기획한 국립부산국악원총서 의 주제가 원로 춤꾼 의 삶과 예술 로 선정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기운 생동하는 영남지 역 춤결의 역사가 재평가되고 재조명되는 것은 시대의 소명입니다. 다양한 춤의 중심에는 춤꾼이 있습니다. 춤꾼들이 내젓는 손짓, 몸짓과 교 감되고, 춤사위로 거듭나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들은 무한한 예술적 감흥을 느끼고 이를 통해 건강한 영혼을 가꾸어 나가게 됩니다. 몸의 언어를 통하여 던져주는 예인들의 삶과 애환이 무대 위의 시간 속으로 사려져가는 안타까 운 현실을 바라보노라면, 우리 춤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치열한 춤꾼의 삶 을 걸어가고 있는 그분들에게 경외심을 느끼게 됩니다.

온몸으로 이야기하는 그들만의 목소리를 문자( ) 로 옮겨 적는 구술채 록 과정을 통하여 지난한 인고의 시간들이 살아 숨쉬고 생명력 있는 울림으 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국립부산국악원총서 제1집은 예인의 삶을 통 하여 사라져가는 무용역사의 현장을 기록으로 담기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본 총서의 첫 번째 주인공은 부산지역의 원로 춤꾼 홍 명무입니다. 화려 한 무대조명 뒤에 감추어 인간 홍의 삶의 애환을 들어보고, 불꽃처럼 예술혼을 불살라온 춤의 세계를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시간을 내어 구술해 주신 홍 명무에 게 심으로 감사드리며, 선생님의 춤맥이 우리 지역에서 올곧게 전승되고 발전되길 기원합니다. 아울러 본 총서가 사라져가는 근 기초연구 자료로 활용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현대 무용역사의 2009 년 12월 국립부산국악원장 박 영 도

홍의 삶과 예술 목 차 발간사 Ⅰ. 소년 자홍, 춤을 만나다 / 13 1. 출생, 일본에서의 유년시절 14 2. 귀국, 학창시절 음악과 영화에 빠지다 19 3. 취직, 춤과 만나다 22 4. 만남, 스승 이매방과의 만남으로 한국춤에 입문 27 5. 배움, 무용이론 학습 31 6. 연습, 절대적인 스승 38 Ⅱ. 춤을 익히다 / 47 1. 남방춤이 유행하다 48 2. 춤은 하나... 춤은 그리움 53 3. 창작에서 전통춤으로 63 4. 일본에서의 명무전 70 Ⅲ. 춤집을 만들어가다 / 79 1. 전통예인들의 그늘 80 2. 병마와 싸우며 춤의 길을 보다 85 3. 열정, 춤에 미치다 90 4. 사랑은 가고, 춤은 남고 102 4

목차 Ⅳ. 춤, 삶의 여정 / 111 1. 인생은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지는 나팔꽃 112 2. 자홍 에서 홍 으로 122 3. 부산의 한량무 131 Ⅴ. 춤꾼의 가족 / 149 1. 고향, 하동에서의 유년시절 150 2. 자홍의 누나 연홍 156 3. 소년 자홍의 사춘기 160 4. 그리운 어머니 166 5. 떠나보낸 제자를 위한 제망제가 ( ) 173 6. 중학생 시절, 누이와 자형 184 Ⅵ. 명무의 길을 가다 / 209 1. 전주대사습 장원, 명무의 반열에 오르다 209 2. 동래 한량춤, 홍류 한량춤 224 3. 춤의 여백, 춤의 요소 229 4. 제자, 또 하나의 스승 239 5. 홍 춤의 맥을 잇는 사람들 242 6. 못 다한 이야기 243 7. 원로 춤꾼의 소망 245 5

홍의 삶과 예술 일러두기 1. 구술내용은 구술자의 발음을 그대로 표기하였다. 2. 구술내용 중 부연설명이 필요한 부분과 일부 방언 등에 대한 정확한 표기 및 의미 등은 주석으로 처리하였다. 3. 구술 전개과정에 발생한 불필요한 내용은 일부 생략하였다. 4. 기타기호 [ ] : 해독은 되나 정확하지 않은 부분 ** : 해독이 안 되는 부분 ( ) : 행동 등의 지문 { } : 구술 중에 삽입된 구술자, 조사자 및 기타 참가자의 짧은 말 : 대화 중 타인의 말이나 과거 구술자가 했던 말 등의 인용 구술 : 인용 구절 속의 인용 구절이나 노래 가사, 생각, 강조해야 할 내용 등 < > : 작품명 : 공연명 : 홍 : 영희 ( 국립부산국악원 학예연구사 ) 문 : 문주석 ( 국립부산국악원 학예연구사 ) 갑 : 갑용 6

일러두기 / 행 행 조사기간: 2009 년 9 월 ~ 12월 조사장소:홍무용학원 ( 부산시 동구 범일동 ), 국립부산국악원 대극장 분장실 기록내용:영상촬영, 녹음 구술조사 ㆍ채록 ㆍ 연구: 영희 ㆍ문주석 초벌채록:이지영, 신한나 사촬영:문주석, 신한나 사제공:홍 영상촬영:문주석, 신한나 기타 참가자 : 갑용 ( 홍 아들) 사용기기:캠코더(CANON DC50A) 보이스레코더(SONY ICD-SX700) 7

홍의 삶과 예술 홍 연보 [ 출생] [ 학력 및 사사] [ 수상경력] 8

일러두기 / 행 [ 공연 및 활동경력] 9

홍의 삶과 예술 [ 작품목록] [ 안무] 10

소년 자홍, 춤을 만나다 제1 차 구술 채록문 소년 자홍, 춤을 만나다 오늘은 국립부산국악원이 추하는 부산지역 명무 구술채록사업의 일환으 로 실시하는 홍 선생님의 제1 차 면담일입니다. 날짜는 2009 년 9월 17일 이구요, 지금 시간은 2시 15 분입니다. 장소는 부산시 동구 범일동에 있는 홍 선생님 무용학원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1 차 면담을 시작하겠습니다. 소년 자홍 13

홍의 삶과 예술 출생 일본에서의 유년시절 네. 저 제가 태어난 곳부터. 태어난 곳은 경상남도 하동군 횡천면 여의리 436-7. 그 본적입니다이. 본적. 본적이고. 그 다음 제가 태어나서 조금 있 다가 저 일본으로 갔어요. 어릴 때. 일본으로 연락선 타고 갔겠죠. 일본에 가서 인제 자라면서 내가 조금 철이 들고 말하자면 살으면서 내가 보고 듣 고 하게 될 때부터 이제 그 아버지가 그 저녁만 되면은 극장에 많이 보러 갔어요. 그 당시만 해도 전쟁 터지기 직전이니까. 일본이 중국을 이자 그 정복했을 그 당시지 싶으네요. 중국으로 쳐들어갔을 때. 그니까 가수들이 나와서 노래를 하면서 전부 다 중국옷을 입고 중국 부채같은 거 들고, 이래 가지고 그런 노래들도 많이 했고요. 이런 것도 봤고, 그 다음에는 이제 시간 있으면 일본 온천이 유명하거든요. 온천장에 가면은 온천을 하면은 그 온천 장 안에 식사하는 데 그 넓은 방이 있는데, 그 다다미방. 거기에 인제 식사 하면서 있으면은 다다미방 안에 조그마한 무대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일본 그 연극, 말하자면 무사들. 칼싸움하는 그런 연극같은 거 간단한 이런 거 하 는데, 그 나오는 배우들이 이제 목욕탕에 들어왔는데 그 공연하기 전에. 목 욕을 하고 있는데, 목에 하얀 거 바른 사람들이, 남자들이 한 둘이 들어와서 들앉았다가 1) 나가더라구요. 그래서 뭐하는 사람인고 싶었는데, 그 목욕 마치고 나가면서 공연을 보니까 그 사람들이 역시 배우들이었던가 봐요. 그 래서 그 무사들이 나오는 것도 보고. 그 다음에 이제 동물원에 가면은 이제 동물원이 그 목욕탕이 목욕탕의 탕보다도 더 큰 그런 탕에 거북이가 할 튼 2) 어마어마하게 큰 거북이가 떠 있는 것도 보고. 또 일본에 수족관이 있 습니다, 일본에는. 그 천장에도 고기들이 헤엄을 치고 또 벽에도 고기들이 헤엄을 치고. 이런 수족관도 구경을 하고. 일본에 명물로 유명한 다카라주 1) 들어앉았다가. 2) 하여튼. 14

소년 자홍, 춤을 만나다 가 3) 라는 가극단이 있습니다. 그게는 4) 어 주로 명가집 규수들, 가문에 그 좋은 규수들, 학벌이 있고 하는, 그런 규수들만 뽑아가지고, 여자들만 뽑아 가지고 이제 그 뮤지칼 (musical), 좀 오페라 비슷한 뮤지칼식으로 춤도 추고 노래도 하고 연극도 하고 하는데 그게 구경을 갔는데, 그 보니까 어 발 레도 하고 하는데, 발레의 기초같은 거는 러시아 선생을 불러다가 훈련을 시키고 노래의 발성법 같은 거는, 것도 5) 역시 러시아의 선생을 모셔다가 발 성법을 시키는데, 겨울에 얼음물을 깨고 그 안에 이렇게 단원을 들어가게 소리를 연습시키고 혹독한 훈련을 한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그리고 발레하 는 사람들도 아주 혹독하게 연습을 시키고. 이런 그런 얘기를 들었는데, 제가 보기로는 일본 그 아마 그 전설을 테마로 한 시대극이었지 싶은 데. 그 당시만 해도 내가 4 살 땐가 그렀는데, 하늘의 선녀가 방울을 흔들면 서 일본 선녀들은 방울을 들고 옆으로 누워가 이리 왔다가 갔다가 하는 걸 봤거든요. 참 신기하고. 그게 그 일본에서는 다카라주가가 상해( ) 에 도 가고 미국에도 가고 유명한 가극단입니다. 지금도 아직 하고 있는데. 그 가극단이 음 유키부미, 또 호시부미. 말하자면 별반, 무슨 반 무슨 반, 우리나라 같으면 개나리반 달래반 그런 반이 여러 개가 있어요. 동경에 있고 오사카에 있고. 이래가지고 몇 달에 한번씩 공연을 하게 되면은 한 20 일씩 이렇게 하거든요. 큰 그런 공연입니다. 그런 공연인데, 그런 공연도 자 3) 다카라즈카 가극단을 말함. 다카라즈카 가극단 ( ) 은 여성으로만 구성이 된 일본의 가 극단이다. 한큐 전철의 창시자인 고바야시 이치조 ( ) 가 1913 년에 만든 다카라즈카 창가 대 ( ) 를 시초로 하고 있으며, 1940 년 현재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남녀노소 누구나 즐 길 수 있는 건전한 국민적 가극을 목표로, 1914 년부터 현재까지 공연을 계속하고 있다. 운영은 창립 때부터 현재까지 한큐 전철이 운영하고 있고, 한큐 전철의 창작유희 사업본부 가극사업 부( ) 가 사업을 담당하고 있으며, 가극단 자체는 한큐전철의 직할 조직 의 형태를 띠고 있다. 현 이사장은 한큐한신홀딩즈의 이사이며 창립자의 증손자인 고바야시 고이치 [ ] 이다. 4) 거기에는. 5) 그것도. 15

홍의 삶과 예술 주 봤고. 그 다음에 인제 또 인제 그.. 머라 캐야 되겠노? 가설극장, 유랑극 장 비슷한 그런 게 있었어요. 천막 치놓고 하는 게. 그게서 6) 내 생각에는, 어느 선생님이지 몰라도 분명히 한영숙 7) 선생님인 것같은데, 밑에는 치마 를 입고 우에는 발레 할 때 입는 그 와 이렇게 딱 달라붙는 거, 레오타드! 그걸 입으시고 장삼을 입고 고깔을 쓰고 승무를 추드라꼬예. 그때 봤을 때 는 검은 장삼을 입으십디다. 입고 추고는 그 다음에 인자 북을 인자 치는데, 요즘은 저렇게 북 다이 8) 를 만들어 가지고 저 북을 달아놓고 치지만 그때만 해도 양쪽에 사람이 둘이 북을 들고 북을 치고 이랬습니다. 그런 것도 보고 하이튼 9) 수없이 수없이 거의 이틀에 한 번 격으로 구경을 다녔습니다. 구경 을 다니고 또 일본의 그 마쯔리 10) 해가지고 축제가 참 많아요. 많으면은 음 공연에 올라가면은 일본의 신사가 안 있습니까? 신사 앞에서 그 축제 를 하는데, 그게 보면은 그 요즘 같으면은 팥빙수 팥은 안 있고 빙수에 색 깔, 파란색 뿌리고 노란색 뿌리고, 또 저 빨간색 뿌리고 세 가지 색깔 뿌 리 11) 가지고, 꿀물로 이렇게 부아가지고 주는데, 그런 거 먹은 거 생각도 나고. 우리나라의 그 우묵. 우묵 같은 걸 갖다가 저 잘게 채를 써리 12) 가지 고 꿀물에다가 타 주는 것도 먹어봤고. 코오리사토우해가지고. 13) 사탕인데 얼음 같이 생겼어요. 그래서 얼음사탕 이라 해서 그런 것도 먹어보고. 낫또 요즘은 청국장을 나토 라 카는데 14), 일본에 가면은 아마나토 해가지고, 15) 6) 거기에서. 7) 한영숙 (, 1920~1989). 호는 벽사, 천안 태생, 큰할아버지 한성준에게 이어받은 춤은 승무, 살풀이춤, 태평무, 학춤, 훈령무 등으로 이들 중 승무는 중요무형문화재 제27 호로 지정되어 보존 전승되고 있다. ( 정범태, 한국춤백년 2, 서울: 눈빛출판사, 2008, 136 쪽.) 8) 일 틀, 대( ). 9) 하여튼. 10) 일 마츠리 [ ]. 일본에서 전통적으로 신령 등에 제사를 지내는 의식 또는 축제를 말함. 11) 뿌려. 12) 썰어. 13) 코오리사토우라고. 14) 하는데. 16

소년 자홍, 춤을 만나다 달콤한 콩을 여러 가지를 설탕에 절여가지고 먹는 게 있습니다. 참 맛있습 니다. 또, 슈마이 16) 해가지고 중국에서 나온 그 만두 같은 건데, 슈마이도 먹어보고. 일본에는 시장에 가면 생선도 팔기도 하고, 회도 떠 주고, 생선 튀도 만들어 주고, 생선 졸인 것도 있고, 생선 가게에 가면 반찬까지 다 만들어 놓은 것도 있고, 그냥 생선도 팔기도 하고 이렇습디다. 근데 어머니 따라다니면서 그런 것도 많이 먹어보고. 또 인제 그 시장 안에 그 한국 음 식 파는 데도 있으요. 17) 그서 18) 치니 콩나물 같은 그런 것도 이래 19) 사가 지고 오는 것도 보고. 하이튼 그 아버지, 어머니 덕택으로 해서 내가 영화 도 참 많이 봤습니다. 그때가 몇 살 무렵인가요, 선생님? 그때 해봤자, 세 살, 네 살. 아주 어릴 때네요. { 다섯 살} 유치원 다닐 나이? 3~4 년 동안에 어릴 때 그래가지고 음악도 듣고 영화도 보고 뭐 그때만 해도 클래식, 오페라 이런 것도 보고 또 영화에서도 오페라도 보고. 발레영화도 봤어요. 발레영화도 봤는데, < 백조의 죽음>. 제목이 그렇습니다. < 백조의 죽음 > 인데, 지금 보니까 그 안나 파블로바 20)? 예, 그 < 빈사의 백조 >? 그 걸 테마로 한 거든가 몰라도 마지막에 백조가 죽는 그런 그건데 그런 영 화를 봤는데, 그 영화를 국립무용단 그 발레단의 초창기에 임성남 21) 선생 15) 아마나토라고. 16) 중국요리 찐만두를 지칭하는 일본어. 17) 있어요. 18) 거기서. 19) 이렇게. 20) 안나 파블로바 (Anna Pavlovna Pavlova, 1881~1931) 는 러시아의 발레리나. 러시아 왕실 ( ) 발 레학교에서 공부한 후 마린스키극장에서 데뷔하였다. 1907 년부터 유럽 여러 나라에서 공연하 였으며, 1907 년 파리에서 S.P. 디아길레프의 발레뤼스에 참가하고, 1913 년 마린스키극장을 탈 퇴하였다. 이듬해 무용단을 조직, 영국을 본거지로 한 이래 17년 동안 세계 각국을 순연하였 다. 주요 출연작품으로 < 지젤 > < 백조의 호수 > 등이 있으며, 특히 < 빈사 ( ) 의 백조 > 는 대표 적인 무용이었다. 17

홍의 삶과 예술 님, 안무자로 있었던 임성남 선생님이 어느 잡지에 그 백조의 죽음을 봤다 고, 내22) 봐서 반갑데요. 그런 영화도 보고 하면서 그러니까 또 우리 누 님이 어린이 잡지를 사다 주는데, 거기 보면은 아직까지 우리나라도 그만큼 은 아름다운 책이 인자는 좀 그렇지만, 참 아름다웠어요. 그 회사가 유명 합니다. 지금도 일본에 가보니까 아직까지 그 회사가 있는데 전설적인 이야 기, 그런 거는 없어지고, 로보트같은 거, 그런 걸 주로 해가지고 하드마는. 그 보니까 그 로케트를 타고 달나라에 가면은 토끼가 인자 그 떡을 찧고 있고 하는데, 그런 어떤 그 이야기도 있었고 하는데 결국 어느 날 보니까 로케트가 나오데요. 나오고 하는데, 그런 이야기 등, 일본에 그 전해 내려오 는 재밌는 전설이나 설화같은 거 그런 책들도 많이 읽고 그림도 보고 이렇 게 하니까 어릴 때부터 미적 감각에 대한 눈이 빨리 떠 것 같애요. 말자 하면 눈도 열리고 귀도 열리고 이래가지고 박자에 대한 그런 관념이라 하나 개념이 빨리 그 열린 셈이죠. 있다가 대동아전쟁이 난다 해가지고 어머니가 죽어도 한국에 가서 죽어야지 일본에는 못 있는다 해가지고 그 한국에 연락 선 타고 돌아왔어요. 그때가 몇 년인가요? 그때가 내가 일곱 살 때. { 아, 네.} 일곱 살 때니까 그때가 몇 년인고 모르겠 네. 내가 배멀미하고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21) 임성남 (, 1929~2002). 서울 출생. 전주 사범학교를 졸업했고, 니혼 [ ] 음악학교를 거쳐 오랫동안 일본에서 무용생활을 하다 1951 년 ' 도쿄청년발레단을 ' 창립, < 백조의 호수 > 에 왕자 역으로 주연했다. 1956 년도에 귀국, ' 임성남발레단을 ' 창단하여 12회에 걸친 개인 발표회를 개 최했고, 5 16 군사정변 이후 국립무용단 단장직을 맡은 후 국립무용단 정기 공연 제6회를 공연한 바 있다. < 살짜기 옵서예 > 에서 안무의 연출을 지도하여 절찬을 받았다. 1968 년 미( ) 국무성 초청으로 도미 ( ), 2 년 동안 모던발레를 연구했고, 그 후 서울예술고등학교 무용과 과장, 무용협회 부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작품으로는 < 예불 ( )> < 오줌싸개의 향연 > 등 이 있다. 22) 내가. 18

소년 자홍, 춤을 만나다 일본에서 아버지와 함께 귀국 학창시절 음악과 영화에 빠지다 그래 한국에 나와 가지고 1 년 있다가 부산국민학교에 입학했거든요? 입 학했는데, 그 학교에서 인제 그 학예회를 하는데 그 음악시간에 내가 노래 도 빨리 배우고 하니까 또 일본에 있다가 왔기 때문에 일본말도 잘 듣고 하 니까 인제 그 뽑혀가지고 학예회에서 그 노래를 많이 불렀습니다. 노래를 많이 부르고, 그서 그때부터 그 어떤 막연하게 어 테너 가수? 테너 가수 19

홍의 삶과 예술 가 되고 싶다. 이는 23) 생각을 했습니다. 했는데, 그게 그 세월이 흘러가면 서 어머니하고 아버지하고 부부간에 좀 싸움이 많았 많으니까. 참다가 참 다가 과음 24) 을 세게 질렀습니다. 변성기와 와서 그랬는지 몰라도 목이 가드 라고예. 갔는데, 그때가 그 변성기 때가 중학교 땐데, 중학교 선배들이 니 가 그 아까운 목이 가서 안 된다. 카믄서 25) 피아노라도 연습을 하라, 손가 락 보니까 피아노 치면 좋겠다 캐가지고 그래서 피아노를 연습을 하고 있었 는데, 6 25 사변이 터지고 그 음악선생, 그 피아노 음악선생님이 학교에서 가르쳐 줬는데 피아노 선생님이 어디로 갔는지도 없고 이래가지고는 학교 는 피난민들이 전부 차지하고 학교는 휴교가 돼버리고 그래서 손가락을 안 놀릴라면 어째야 되꼬 싶어서 타자를 배았습니다. 타자 학원에 가서 타자를 배웠는데 피아노를 조금이라도 치는 솜씨가 되서 빨리 치게 되니까. 그때가 중학생 나이셨죠? 그렇지요, 중학교 2 학년 때. 중학교 2 학년 때. 네. 그랬는데, 그때 참 내가 어떤 면에서는 운이 없어서 그랬는지 1 학년, 2학년 때 다른 반은 음악시간이 있는데 우리 반은 음악선생이 없는 거라예. 시간 이. 그래서 내가 참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해도 그래도 중학교에 음악부가 있어서 그 음악부 선배하고 강당에서 연습도 많이 하고 또 그 영화도 많이 보러 갔어요. 그때 학생들이 영화 보러 가면 큰일 나거든요. 근데 < 캬라반 >, < 카르멘 > 이런 영화들을 그때 다 봤거든요. 보고 친구들한테 내가 자랑삼아 서 얘기했는데, 친구가 인제 선생님한테 고자질해가지고 내가 벌도 서고 ( 웃음) 내가 벌도 서가 26) 있기도 하고. 그런 일도 있었고 했는데, 그래 그 23) 이런. 24) 고함. 25) 하면서. 26) 서서. 20

소년 자홍, 춤을 만나다 소풍을 가든지 이렇게 학교에서 하면은 꼭 날 갖다가 노래를 시키고 또 음 악부 부장은 그때만 해도 그 생과자 귀할 땝니다. 그걸 손수건에 이렇게 다 섯 갠가 싸와가 한쪽에 조용한 데 가서 먹으라 카고. 그때는 참 내가 귀염 도 많이 받고 이래 그 학교생활도 참 그 상급생들한테 많이, 말하자면 학교 안에서 식당에서 팥빵도 사주고 뭐 우동도 사주고 또 선배들이 같이 탁구장 데려가서 탁구도 치고 내가 탁구도 참 잘 쳤습니다. 학창시절의 구술자 ( 왼쪽 아래: 홍 ) 21

홍의 삶과 예술 취직 춤과 만나다 매일 같이 탁구장도 가서 탁구도 치고 이런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6 25 사변을 만나고 나서 타이프 배워가지고 인제 그 타이프를 잘 치니까 학원 원장이 나를 갖다가 취직을 시켜주 미군부대에 취직을 시켜줬는데, 거기 가 어딘고 하면, 목공부. 인자 그 목공부 카믄 27) 나무를 다루는 데라요. 건 설, 건물 짓고 하는 데. 부대를 새로 짓는 거 하는데, 근데 그 노동자들이 출퇴큰하는 것 전부 내가 체크하고 그 다음에 월급날 되면은 이자 그 계산 해가지고 월급 얼마라 카는 거 적어주고 월급봉투에 내가 또 적어주고 이라 면은 내가 부대 장교들이 돈을 넣어가지고 주면은 한 사람씩 내주고 이런 식으로 했는데, 그 타이프를 잘 치고 하니까, 그 같은 사무실에 있는 저 상사하고 나하고 시합을 붙였는데 내가 영어는 그 사람들보다 짧지만은 이 보면은 손이 먼저 가는 거라요, 알파벳을 보면은. 그래서 그 사람들하 고 대등하게 그 3분 동안에 적었는데 대등한 그 그걸로 돼 가지고 장교가 좋다꼬 28) 나를 클럽에 함 29) 데리고 갔어요. 가서 저녁을 사주고. 저녁을 사 주고 믄서 그 다음에 저녁 먹고 나니까 오늘 쇼가 있는데 쇼 구경하고 가라 카. 그래서 보니까 쇼가 들어왔는데, 내가 일본에서 그렇게 많은 영 화도 보고 쇼를 보고 춤도 많이 일본 오도리 30) 를 시작해서 한국 전통춤 까지 < 천안삼거리 > 31) 까지 다 봤는데도 최승희 32) 씨도 춤추는 것도 봤어요. 27) 하면. 28) 좋다고. 29) 한번. 30) 일. 춤, 무용. 31) 홍의 부연설명에 의하면 당시에 유행하던 일종의 허튼춤으로 경기민요 < 천안삼거리 > 음 악에 맞춰 추었다고 함. 6.25 전쟁 당시, 그리고 전후에도 한동안 이 춤이 유행했으며, 민속음 악을 연주하는 주자가 드물어서 양악 밴드악단의 반주에 맞추어 추었다고 함. 32) 최승희 (, 1911~1969) 강원도 홍천, 또는 경성부 태생이라는 설이 있으며, 서울에서 자라 고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6 년 일본에 유학하여 현대무용가 이시이 바쿠에게 사사받았다. 일본 유학 이후 국내에서 독자적인 근대무용 공연을 가지면서 대중적으로 큰 일 22

소년 자홍, 춤을 만나다 어디에서 보셨어요? 일본에서. 일본에서요? 오사카에서 보신건가요? 예~ 예. { 네.} 딴 건 기억 안 나고, ( 갓 돌리는 모습을 흉내 내면서 ) 갓을 돌 리면서. 초립동춤? 네, 네! 근데 이매방 선생님이 한동안 이거 했어요, 초창기에. 이래 33) 추대. ( 춤사위를 흉내 내면서 ) 최승희 씨 눈도 올 다 34) 내 다 35) 하면서 그라고 < 승무> 도 최승희 씨 포즈를 < 승무> 춤에 했습니다. 그래, 춤이 하는 것은 세월에 따라 조금씩 변해가고 생각에 따라, 상황에 따라, 위치에 따라서 또 아는 것처럼, 이렇게 되고 이렇습디다. 내가 참 좋아하는 것은 서구의 사람 들은 자기가, 예를 들면 엘비스 프레슬리 36)가 자동차 정비공으로 있었다든 가 이런 그 구두닦이라든가 접시닦이 하던 것을 거리낌 없이 그런 이야기 를 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숨깁디다. 그 이유가 뭔지 몰라도. 자격지심이지 기를 모으게 되었고 < 반도의 무희 >(1936) 라는 영화에 출연하고 자서전 나의 자서전 (1936) 을 출간할 정도로 유명해졌다. 1930 년대 후반에는 수년 동안 해외순회공연을 벌이면서 세계 적인 명성을 얻었다. 광복 후 월북해서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세워 소장에 취임하고 공훈배우, 인민배우 칭호를 받은 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기도 했다. 1958 년 남편 안막이 숙청 되면서 연금당했다는 설이 나돈 이래 행적이 거의 알려지지 않아 숙청되었다는 소문이 오랫 동안 돌았다. 그러나 한설야와 함께 사후 복권된 상태라는 것이 2003 년 확인되었고, 묘지는 애국렬사릉으로 이장되었다. 최승희는 신무용의 창시자로서 한국무용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 쳤다. 작품으로는 < 영산춤 >, < 에헤라 노아라 >, < 달밤의 곡>, < 반야월성곡 >, < 우조춤 >, < 칼춤 >, < 보살춤 >, < 초립동 >, < 고구려 무희 >, < 광상곡 >, < 가면의 춤>, < 승무 >, < 인도의 비애 > 등이 있 고, 저서로 조선민족무용기본, 조선아동무용기본 이 있다. 안막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안성희도 소련에서 발레 유학을 하고 돌아와 북한에서 무용가 및 안무가로 활동했다. 1999 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가 선정하는 20 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에 뽑혔다. 33) 이렇게. 34) 올렸다. 35) 내렸다. 36) 엘비스 프레슬리 (Elvis Aaron Presley, 1935~1977). 미국의 배우이자 팝가수로, 미국과 영국을 시 작으로 전세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로큰롤의 제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23

홍의 삶과 예술 미군부대 목공부 시절의 홍 싶어요. 살기 위해서 구두닦이라든가 접시닦이라든가 하나의 체험이거든요. 예술가는, 예술은 바로 체험인데 그걸 왜 그래 덮어버리는지. 그거 그거는 그 사람들 일이지만서도 쇼를 보는데, 내가 처음 듣는 음악이 너 무나 신비스러운 음악인데 음악 제목이 < 타부 > 입디다. 영어로는 TABU, 그 게 그 금지, 금지라는 그런 뜻이랍니다. 남방음악인데 쇼시키 라 카믄서 마라카스, 삼바같은 거 할 때 그 착착착착 그게 들어가는데, 아주 조용한 음 악이 착착 들어가면서 하는데, 너무 좋고 또 가끔씩 딱딱딱 두드리는 거, 룸 24

소년 자홍, 춤을 만나다 바같은 거, 쇼시키 라고 하는 게 있어요. 맞춰서 들어가는데, 음악이 첫째 신비하고 환상적이었어요. 손가락도 이래가지고 목이 왔다 갔다 하고, 또 이 골반도 한번씩 왔다 갔다 하고, 앉아서 몸도 이래 왔다 갔다 하는데 너무 나 황홀한 거라예. 내가 저 춤을, 저런 춤이 있나 싶어가지고 지금 그 무 용가였을 겁니다. 한때 저 우리나라의 유명한 그 국립무용단의 초창기에 그 안무자 송범 37) 선생님이 < 타부라의 리듬> 해가지고 남방춤을 추었습니다. 그 양반이 원래 그 현대무용이었습니다. 뒤에 가서 한국무용으로 바꿨는데, 근데 그 < 타부라의 리듬> 을 해서도 그 양반이 남자가 춘 게 아니고 여자가 춥디다. 타라반 38)을 감아가지고 길게 늘어뜨리고 눈만 내놓고 추면 참 좋더 라구요. 그랬는데 그래가지고 내가 그걸 흉내를 낸 거라예. 흉내를 내고 있 는데 인제 그 콩쿨이 있었습니다, 삼일극장 39)에 범일동에. 콩쿨이 있었는데, 37) 송범 (1926~2008). 본명은 철교 ( ). 17 세 때 신무용의 대가인 조택원 ( ) 의 문하에 들어 갔으며 춤에 뜻을 두고 대학에 학하지 않고 한동인 ( ) 에게 1 년간 발레를 배웠다. 또 장추화 ( ) 무용연구소에서 거의 독학으로 인도춤과 마리비그만 등 표현주의 경향의 모던 댄스를 익혔다. 1948 년 현대춤 계열의 작품 습작 으로 첫 선을 보인 뒤 1949 년 출 인도의 연가, 1950 년 수련몽 을 내놓아 주목받았다. 6 25 전쟁 때 피난 지에서도 망향 양자강 등을 발표했고, 1956 년에는 패배자 죽음의 승리 항거 등을 발표하여 현대인의 삶의 고뇌를 표현했다. 1957 년부터는 발레 계열 작품으로 환상교향곡 유쾌한 휴일 무도회의 권유 등을 해마다 발표하면서 방향전환을 시도했다. 1961 년 한국발레단을 창단하고 1962 년부터 13년간 한국무용협회 이사장을 지내면 서 한국춤계를 이끄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서울예술고등학교 서라벌예술대학 등에서 후 양성에도 힘썼다. 그뒤에도 창작춤 강강술래 우물가에서 전원풍경 봄의 찬미 등으로 일본 방콕 유럽 등지로 순회공연을 하면서 우리나라 창작춤 활동의 토대를 세웠다. 1972 년 국립무용단 초대 단장으로 임명되었으며, 별의 전설 왕자 호동 사의 승무 춘향전 도미부인 등을 발표했다. 중앙대학교 무용과 교수, 예술원 회원 등을 지냈다.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 예술상, 국민훈장 동백장 등을 수상했다. 38) 터번. 39) 영화 < 친구 > 의 한 장면으로 1980 년대 삼거리극장의 대명사가 된 부산 동구 삼일극장이 62년의 역사를 접고 2006 년 철거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44 년 일본인에 의해 문을 연 삼일극장은 광복 후 조일극장, 제일극장 등으로 개명해 극장을 운영해 오다 1950 년대 다시 제 이름을 찾았다. 한국 전쟁 당시 피난민들의 수용소로 쓰이면서 현대사 질곡의 현장이기도 했던 이곳은 1970 년대 극장 쇼가 유행하면서 부흥기를 맞았다. 당시 코미디언 구봉서, 배삼룡, 가수 하춘화 등 당대 일류스타 들의 공연으로 부산 공연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 부산일보 > 2006 년 11월 8일 9 면 기사 내용 발췌 ) 25

홍의 삶과 예술 미군부대 목공부 시절 (미군들이 장난삼아 구술자에게 요리사 복장을 입혀서 찍은 사) 그 당시만 해도 콩쿨에 민요도 들어가고 가요도 들어가고 클래식 노래도 들 어가고 춤도 들어가고 발레도 들어가고 종합으로 들어갑디다. 내가 간도 크 게 배우지도 안한 40) 그 남방춤을 신청을 한 거라예. 그래가지고 그 음악 40) 않은. 26

소년 자홍, 춤을 만나다 은? 캐서 타부. 라고 하니까 날로 41) 이래 42) 함 쳐다보대요. 인자 그 신청해 놓고 의상이 없어가지고 초록색 인조 난닝구, 43) 광이 반짝반짝 나거든요. 입고 밑에 바지를 걱정하니까 누나가 그 일본 잡지 보고 인도식 바지, 밑이 넓은 거, 그 바지를 만들어 줍디다. 천을 끊어가지고. 그래 그걸 입고, 그 미 제 깡통 오려가지고 목걸이도 만들고 귀걸이도 깡통 오려가 실로 뀌어가지 고 귀에 달고. 타라반 쓰고 브로치 하나 달고. 이래가 나가서 그게 입상이 됐어요. 입상이 된 것도 중요하지만 그 악사들 그 입소문이 나버렸어요. 굉 장히 이쁘고 하니까 화장도 할 줄 몰랐는데, 대충하고 나갔는데 이뻤던 가 봐요. 그게 입소문이 나가지고 부녀대에 나가게 되었어요. 부녀대에 나가서 그 어 위에다가 저 남방춤을 이렇게 추면서 두 가지를 춰야 된다 캐서 그 남방춤 바지 신라시대 그 그걸 하나 맞춰가지고 화랑들 입는 그거. 그거 입으니까 바지저고리 같이 보이고 해가 그래가지고 < 천안삼거리 > 간단하게 하나 추고. 만남 스승 이매방과의 만남으로 한국춤에 입문 선생님, 그럼 그때까지 춤을 특별하게 배우신 게 아니라 독학으로 하신 거. 보고, 인자 내 느낌으로 춘거지요. 춤의 기본은 안 되가 있는데 느낌은 인자 괜찮은 편이었고. 군예대 44)에서 이매방 45) 선생님이 소식을 들은 거라예. 그 41) 나를. 42) 이렇게. 43) 러닝셔츠. 44) 군예대 ( ). 1951 년 창설된 종군연예인 공연단. 45) 본명은 규태 ( ). 1927 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하였다. 1935 년 집안 어른인 명무 ( ) 이대조 ( ) 의 문하에서 승무를 배웠으며 1939 년 화순 출신의 박영구에게 법고와 승무를 배웠다. 1943 년 목포공업학교를 졸업하고, 1948 년 임방울명인명창대회에 참가하여 처음으로 승무를 27

홍의 삶과 예술 악사들이 혹시 저 이규택 46)씨 알아요?, 모르겠는데요., 오~ 당신 닮았 는데? 카믄서 남자들 무용하는데. 이런 소문들이 자꾸 들리는 거라요. 내 47) 보고 보는 사람마다 닮았다 카고. 그라자 어느 날, 이매방 선생님이 초 량 48) 에 연구소에 연구소를 한다는 소리를 듣고 한번 찾아갔어요. 그때 내가 찾아갔는데도 냉정하게 눈도 한번 안 맞춰 줍디다. 한 30분 앉아 있다가 왔 거든요. 와가지고 그 인자 그 열심히 춤추러 다니는데, 한번은 왔습디 다, 선생님. 와가지고는 그래 내보고는 손도 만지고는 나이가 어리니까 피 부도 이쁘고 손도 이쁘고 만져주고, 나하고 같이 춤추러 가자해서, 어딘 데요? 그러니 가보면 알아. 해서 갔더니, 다리미에 숯을 피워가지고, 분장 실입니다. 서면 49)의 극장에. 마당에 빈터입니다. 천을, 이만한 천을 20개가 됩디다. 이래 이래 잡아 놓고, 그걸 다리 50)가지고 나를 그걸 입히는 거라예. 남방춤을 니가 한 2 분 추고, 내가 한 3 분 추고, 둘이 같이 1분 추고 끝내 자. 그랬는데 이매방 선생님이 날로 51) 보고 초량에 가자 카믄서, 그때 갔는 데 초량에 장홍심 52) 씨라고, 그 최승희 선생의 딸 안승희 53) 씨라고 있습니 추었다. 1957 년과 1959 년 부산 대영극장과 원각사에서 무용발표회를 가졌으며, 1968~78 년에 미국 일본 프랑스 등의 세계무용축제에 참가했다. 1987 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7 호 승무 예 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의 승무는 힘이 있고 선이 굵어 시원스러운 느낌을 준다. 주요작 품으로는 삼현승무 보렴승무 살풀이 검무 산조 등이 있다. 1985 년 문화훈장을 받았다. 46) 명무 이매방의 본명. 47) 나. 48)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49) 부산광역시 구 부전동 일대의 번화가. 50) 다려. 51) 나를. 52) 장홍심 (, 1914~1996). 본명은 월순, 함흥 출생. 함흥권번에서 배( ) 씨 할머니로부터 춤을 배웠다. 이후 스승 한성준을 만나 사춤, 검무, 태평무, 한량무, 포구락, 승무, 살풀이춤 등을 전수받았다. 온양 출신 이강선, 한성준의 손녀 한영숙, 천흥, 강선영 등과 함께 춤을 배웠다. 해방되던 해 4 월 함경도 고향에 갔다가 그대로 발이 묶여 북( ) 의 무용가 최승희 단체에도 불려 나가 최승희의 딸 안성희에게 승무 한바탕을 가르쳐주기도 했지만 지각과 결석이 잦아 쫓겨났다. 1 4후퇴 때 월남해서 부산 이매방무용연구소에서 일을 도왔으나 서울 무대로 복 귀하지는 못했다. 만년의 장홍심은 옛 영광을 되찾지 못한 채 서울의 변두리에서 춤을 가르치 28

소년 자홍, 춤을 만나다 다. 안승희 씨 < 검무> 가르키는 유일한 무용갑니다. 장홍심. 서울에 있다가 별세했습니다. 근데 그 장홍심 선생님하고 이매방 선생님하고, 이매방 선생 님은 < 승무 > 를 가르쳐주고 또 장홍심 선생님은 이매방 선생님한테 < 검무 > 를 이래 해주고. 재주가 좋았아요. 부부는 아니라도 동거생활을 했는데, 원 채 그 장홍심 선생님은 손에 물을 안 넣는 거라요. 버선도 벗어가 구석에 처 박아 여놓는 54) 거라예. 이매방 선생님은 깨끗한 사람인 거라예. 그걸 못 봐 내는 거라예. 그래 그 흉을 보고 욕을 하면은 무용가는 손이 고와야 돼. 카 믄서 장홍심 선생님은 맨날 55) 그래 쌌고. 그래 맘에 안 든다고 헤어다고 날 보고 가자 카는 거라예. 짐 가지고 나와야 된다고. 이래 그 선생님이 족 두리도 만들어 놨고 우선에 짐 다 못 가져 왔고. 나올라 카는데 장옥심 56) 씨가 왜 가? 그러시는 거라예. 내가 소고기 미역국 끊여 놨는데. 하 시면서 이매방 선생님이 좋아하는 음식입니다. 그러더니 니나 많이 처먹어 라, 미역국. ( 웃음) 그래 인제 가자! 카믄서 이래가 온 거라예. 이래 차를 타고 오다가 저 매축지 57) 있는 데, 그58) 미군부대 있는데, 지금도 있습니다. 부산시장 옆에 있는데 가설극장에 천막을 치놨는데, 59) 임방울 60) 명창, 명 창대회 이래 써 놨는 거라예. 그래 선생님이 택시 세워가지고 둘이 들어갔 다 1996 년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 정범태, 한국춤백년 2, 서울 : 눈빛출판사, 2008, 129 쪽. 재인용.) 53) 최승희의 딸, 본명은 안승자이며, 북한에서 공훈배우가 되어 어머니의 명성을 이었다. 54) 넣어놓는. 55) 만날. 56) 장홍심. 57) 매립지. 58) 거기. 59) 쳐 놨는데. 60) 임방울 (, 1905~1961). 근대 판소리의 명창. 전남 광산군 ( ) 송정읍 ( ) 태생. 서 편제의 거목. 선천적으로 타고난 맑고 아름다운 성음에 성량이 풍부하여 막힌데가 없었다. 단가 호남가를 작곡한 것으로 유명하며, 춘향가 중 옥중가의 쑥대머리는 그의 특장이다. ( 기수,, 서울 대한민국예술원, 1985, 318 쪽.) 29

홍의 삶과 예술 거든요. 나는 그분들 모르고 하니까 선생님이 분장실에 들어갔다 오드만, 얘, 가자. 우리 바쁘다. 그래 얼른 짐을 풀어놓고 승무 의상을 얼른 다려 가지고 가서 나는 객석 흙바닥에 가마니 깔아놓고 의자도 있고 하는데, 막 올리기 젤 처음에 < 승무 > 를 춥디다. 국악할 때는 막 올릴 때 < 검무 > 아니면 < 승무 > 를 춘다 카대요? 그래 < 승무 > 를 추는데, 선생님이 흰 장삼에 흰 바지 저고리에 흰 고깔에 흰 버선에 홍띠만 탁 매고 나와서 추는데 그 조명도 없 고 낮인데, 그 모습이 그 버선발 맵시하고, 그 나비 같기고 하고, 또 학 같기 도 하고 어떤 그 굉장히 환상적인 그런 내가 볼 때 되더라구요. 저렇게 좋은 춤이 있었구나! 그래가지고 나도 한국춤을 배워야 되겠다 싶었는데, 우리 그 당시에 동네 아줌마들이 내가 그 저 연회 대회에 나가서 춤추는 것을 소문을 듣고 또 어떤 때는 분장하고 차타고 나가고 하니까 그래 인제 스승 이매방과 함께 ( 왼쪽 첫 번째: 홍, 왼쪽 세 번째: 이매방 ) 30

소년 자홍, 춤을 만나다 그 춤을 가르쳐 달라고 온 거라예. 그래 마침 이매방 선생님이 한국춤을 하 니까예. 선생님한테 내가 소개해 주고. 그래 바로 인제 춤추면서 바로 발 띨 때부터 내가 조교역할을 한기라예. 난 빨리 아니까. 장구 쳐라. 하면, 나는 장구를 못 치는데도 박자 속은 아니까 리듬 맞춰 치주고 조교 노릇을 하면 서 시간이 흘러가면서 내가 많이 모집을 해 줬어요. 대신동에 또 선생님 제 자들이 있었는데, 판사댁, 검사댁, 전화국장댁 그런 사모님들이 좀 고급스럽 게 < 승무 > 를 배우겠다. 이래가지고 인자 < 승무 > 배우는데 같이 배우고. 내 가 또, 요 또 유치원 선생들 모집해가 또 인자 유치원에서도 교실이 비니 까 < 승무 > 배우고. 여기서도 하고 < 승무 > 를 하면서 열 번 정도 배웠습니다. 많이 모집도 해 주고 그래가지고 내가 한국춤을 추게 된 거라예. 내가 피아 노를 했을란지 또 하다못해 목소리가 안 좋으면 대중가요 가수가 됐을란지 또 몰르지예. 그래 처음에 입문하고 나니까 춤이 참 좋구나 싶으고, 그 당시 만 해도 춤이라고 하는 것은 보이기 위한 것이다, 화려해야 한다. 이뻐야 된다. 현란해야 된다. 이것만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랬는데 6 25사변 나 고 나서 언젠가 그 고등학교에 다시 입학을 해야 된다. 중학교는 졸업장이 나오니까 고등학교는 입학을 해야 된다. 해서 갔더니, 머리를 깎아라 하는 거라예. 내가 부대 다녀야 해서 머리를 못 깎는다 카니까 선생님이 참 아쉬 워했어요. 배움 무용이론 학습 그래서 그냥 고등학교에 그것만 저, 입학금 내놓고 학교에 못 갔어요. 못 갔 고. 그라고 어 학교 그 선배가 한 사람 있었는데 성승민 씨라고 무용협회 부지부장도 했고 그 분을 내가 이매방 선생님께 소개를 해서 내가 발 기본 이랑 장구 가르쳐줘서 보냈어요, 가서 선생님 도와드리라고. 나는 내대로 31

홍의 삶과 예술 인자 학원하고. 선생님 대신동에 연구소 채리61) 놓고 있고. 있었는데 6 25 사변 나고 나서 부산에 몇 사람 무용학원장들이 모아가지고 강이문 62) 선생 님한테, 강이문 씨라고 무용 평론가가 있었어요, 부산에. 그 분한데 우리 무 용이론을 공부하자, 이래가지고 무용이론을 공부하면서 내가 나도 모르게 어릴 때부터 그 서점에 가서, 이번에 그 드라마로 했던 일지매. 그게 내 어릴 때 문예춘추인가? 우리나라에 잡지가 있었습니다. 그걸 내가 그 사 서 일지매 너무 이름이 좋아서 마음에 들어서 읽었었거든요. 읽다가 숯 불을 피웠는데 숯불에 중독되어서 쓰러져서 칫국 마시고 일어나기도 하 고 이런 기억도 나네요. 서점에는 우째서 63) 그런지 몰라도 자주 가게 됩 디다. 또 퍼플? 뭐라는 영화도 또 있었습니다. 흑인 영환데 자주색 피부에 말하자면 검은 피부에 인종들, 카는 그 영환데, 아주 히트 쳤습니다. 처음 소설로 나왔을 때 묶어가지고 정리하는 거 보고 하나 샀거든요. 사가 읽고 이래 쌌는데, 소설을 내가 좋아했는 거 같아요. 그런 거 하고 무용이론 공부 를 하니까 무대 공간구성, 배치 이런 거. 근데 내가 미군부대에서 밤마다 뮤 지컬 영화를 하도 많이 봤거든요. < 남태평양 > 도 유명합니다. < 남태평양 >, 그 다음에 <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도 좋지만은 < 분홍신 > 이라고 해가지 고 그 발레리나가 그 영화배우가 됐지만은 원래 발레리나였는데 그 여자가 만든 그 < 분홍신 > 이라는 영화도 있었고, 그 다음에 또 < 파리의 아메리카인 > 이라꼬 해가지고, < 비는 사랑을 싣고 > 에 나오는 짐캐리 64)라는 사람, 탭댄스 61) 차려. 62) 강이문 (, 1923~1992). 함경남도 단천군 단천면 단천리 출생. 아호 여천 ( ), 취운 ( ), 무용평론가. 부산무용가협회와 부산춤예술인협회를 결성하였다. 비전공자 출신으로 1960~70 년대 부산무용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70 년대 무용용어통일위원회 심의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80~90 년대 춤 비평가로 활동하였다. 저서로 우리춤의 전통성과 창조성 이 있다. 2004 년 20세기 부산을 빛낸 인물 26 인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63) 어째서. 64) 켈리 (Gene Kelly, 1912~1996). 본명은 Eugene Curran Kelly. 미국의 무용수 배우안무가겸 영화감독. 고전 발레 기교와 결합된 강건한 스타일의 춤은 뮤지컬 영화를 일신했고 남성 무용 32

소년 자홍, 춤을 만나다 잘 추는 그 사람이 재즈 하는 사람인데, 레슬리 캬론 65)이라는 발레리나하고 < 파리의 아메리카인 > 66) 해가지고 뮤지칼 영화를 봤는데 그런 것들 보니까 그 아주 환상적이고 춤 짜임새 같은 게 너무나 그 다양하고 구성이, 이래서 학생들 춤 짤 때도 네 사람, 군대식으로 줄로 서가지고 춤을 안 만들고 자 연대형으로 만들어서 이쪽에 몇 사람 저쪽에 몇 사람, 강이문 선생님이 작 품이 뭐 그런 작품이 다 있냐고, 군대식으로 탁탁 이래야지. 예술은 이념이 요. 이러면서. 내가 듣기에는 이념이라는 말이 지금은 괜찮지만 이북쪽 사 상 같은 느낌이 자꾸 오는 거라예, 선입견이. 그랬는데 정막 67) 씨라는 무용 평론가가 있습니다. 경성대학교도 다니고, 정 뭐시라 카드라 정영희? 정 희영씨? 이름이 바뀌어 졌습니다. 대구에 있어요. 자기 부인이 기 68) 씨 라고 대구시립발레단 69) 에. 그 양반이 그 와서 인제 그 내가 그때 데레사여 고에 그 작품을 < 연봉> 해가지고 금강산이 일만 이천 봉인데 그 봉우리가 이래 이래 쭉 안 있습니까? 그지예? 그것을 스스로 상징해가지고 < 연봉> 이 라는 이름으로 해가지고 작품을 내가 만들었습니다. 음악은 산조음악을 가 지고. 춤 구성은, 동작은 한국적이지만 배치 같은 거는 그런 쪽으로 해가지 수에 대한 일반의 관념을 크게 바꾸었다. 사랑은 비를 타고 (Singin in the rain), (1952 ) 에서 감독과 배우로 출연하여 우리나라에 많이 알려짐. 65) 레슬리 캐론 (Lesly Caron). 프랑스 출신 여배우로 1951 년 < 파리의 아메리카인 > 으로 데뷔하여 스타덤 에 오름. 66) 켈리와 레슬리 캐론이 주연을 맡고 거쉬인 (George Gershwin) 이 작곡한 1951 년 MGM 사의 헐 리우드 뮤지컬 영화. 67) 본명은 정순영. 원로 무용인, 무용평론가. 현재 대구시민문화회관연구소를 운영중이다. 경성 대 교수 역임. 68) 기전 (. 1933~ ). 대구시립무용단 초대안무자 (1981~1988. 2). 1956 년 대구공고에서 강의 하던 정막 선생과 결혼하면서 대구에 정착했고 1961 년 국도여관 목욕탕 자리 ( 현 제일은행 사 거리 ) 에 대구발레아카데미를 개설해 1972 년 문을 닫을 때까지 왕성한 발표무대를 가졌다. 또 1981년부터는 대구시립무용단 초대 안무자로 부임해 국내 유일의 공립 현대무용단으로서의 토대를 닦았다. ( 시사뉴스투데이, 2008년 12월 22 일자 기사에서 발췌). 69) 대구시립무용단. 1981 년 5월 1 일 창단. 매년 2회의 정기공연과 임시 및 특별공연 활동을 하고 있으며, 국 공립 무용단체 중 국내유일의 현대무용단체이다. 33

홍의 삶과 예술 고 했는데 정막 씨가 와서 보고 어쩌면 저런 작품이 나왔노? 참 좋은 작품 이다. 아주 좋은 작품이다. 그 보통 작품이라면은 시메트리 (symmetry) 70) 해가지고. 그 뭐 네 사람 네 사람. 대칭구조로? 전기에서는 그게 참 좋지예. 근데 발레에서도 그렇지만. 근대 시메트리 (symmetry) 를 벗어난 그걸 아시메트리 (asymmetry) 71) 라고 하대예, 그거를? 그라고 콘스트라스트 (contrast) 72) 도 까지도 들어갔네. 이 어떤 사람이고? 이 런 작품을 만들었노? 참 좋은 작품이다. 강이문 선생님은 젤 안 좋게 자기 가 평을 했는데 놀랜 거라예. 그러자 송범 선생님이 부산에 또 내려올 일이 있었는데, 그때 그 작품을 보게 된 거라예. 보고는 참 좋은 작품이다. 공간 구성이 너무 너무 잘됐다. 이렇게 또 칭찬을 하고 가셨거든요. 그래서 내가 그 내 생각이 후 73) 거는 아니었구나. 어쩌면은 좀 앞섰던 것 같기도 하 다. 그게 영화를 많이 본 그런 거였고. 또 인제 그 서점에 가서는 내가 선미 라는 꽃꽂이 책을 하나 샀거든요. 꽃을 어떻게 배치를 해서 아름답게 하는고... 춤하고 어떤 관련이 있을까? 그래 인제 보니까 선미도 높고 낮 고 중간 포인트를 어떻게 준다. 그 다음에 뭐 아름다움 속에 오브제 74) 라고 해서 그 꽃꽂이 옆에 돌을 놓지 않습니까? 돌 자체를 봤을 때는 그렇게 예 쁘지 않은데 꽃하고의 조화를 봤을 때 아름다움 그런 거 그 다음에 인 제 춤 이라는 잡지가 있습니다. 채희완 75) 교수의, 미학교수지요. 유명한 70) 영 대칭성. 71) 영 비대칭성. 72) 영 대비. 73) 뒤쳐. 수준이 떨어. 74) 불 object. 초현실주의 미술에서, 작품에 쓴 일상생활 용품이나 자연물 또는 예술과 무관 한 물건을 본래의 용도에서 분리하여 작품에 사용함으로써 새로운 느낌을 일으키는 상징적 기능의 물체를 이르는 말. 꽃꽂이에서 꽃 이외의 재료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임. 75) 채희완 (1948~ ). 경북 문경 출생. 서울대 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현재 부산대학교 예술문화 영상학과 교수이며, ( 사) 민족미학연구소 소장. 34

소년 자홍, 춤을 만나다 분인데, 그 양반이 오래 됐는데, 책에 그 아름다움에 우아미가 있고 골계미 가 있다. 골계미는 어떠 어떠한 것이다. 거칠고, 닭 뼈다귀처럼. 우아함 속 에 골계미가 있다. 내가 쇼크를 받은 거라예. 우아하고 곱고 예쁜 것만 춤 이 아니구나. 폭풍우가 치고 무섭고 겁이 나고 그것도 영화예술에서 아름다 움에 들어갈 수 있는 건갑다. 이런 생각을 하고는 다시 또 내가 알게 되었 고. 아름다움에 대한 가치 같은 것도 알게 되고. 또 어떤 그 모임이 있을 때 에 모임에서 여자 교수가 자기 작품 발표회를 앞두고 일이 바쁘고 또 인제 그 서류도 정리한다고 바쁘고 해서 밤잠도 올케 못자고 고민하는데 얼굴은 푸석하고 회의도 참석해야 하니까 화장도 한쪽은 연하고 한쪽은 하고 입 술도 이쁘게 안 발라졌는데, 그런데 미장원에 가서 공을 들여 화장도 이쁘 게 하고 아주 빈틈없이 하고. 그런데 이 쪽이 더 아름답게 보이더라구요. 밖으로 나타나는 내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을 자꾸 하게 되고. 나는 내 자신의 춤에 대해 격, 품위 이런 거 생각을 안 하고 춤을 추었었거든요. 어 떤 교수들도 그러는데 이매방 선생님에 비해서는 춤에 품위가 있다. 격이 있다. 하는데. 춤에 뭐 그런 걸 찾노? 하고 나는 있었는데 선생님이 들었 으면 아주 화가 나셨겠지요. 내 생각은 아니고 객관적인 이야기이고, 화를 내어도 그 사람들한테 화를 내야죠. 그렇죠? 광주에서 내가 춤을 추었었는 데, 나이 많은 분들이 찾아 왔더라구요. 자네 춤을 보니까 매방이 제자 같 은데. 라고 그라 카드라고요. 매방이 제자 맞제? 해서 네., 근데 매방이 하고 춤은 참 다르고, 참 좋네. 자네 춤이 참 무겁네. 매방이는 춤을 잘 춘 다. 기가 맥히는데 좀 가볍다. 춤에도 무겁고 가벼운 게 있는 갑다. 나는 무겁게 출려고 춘 것도 아닌데 그런 것도 인제 그 며 살며 사랑하며 배우 76) 라는 책을 읽어봤지만은 사람을 만나면서 어떤 이야기들 속에서 춤 하고 관련 없는 어떤 이야기 속에서도 춤하고 관련이 될 수도 있고 또 어린 76) 레오 버스카글리아 (Leo Buscaglia) 가 지은 책으로 1980 년 미국에서 첫 출판되었다. 전 세계 58 개국에 번역출판 되었으며, 5,000 만부 이상 팔린 스테디셀러이다. 35

홍의 삶과 예술 애들의 그 행동이나 이런 데서 또 이렇게 생각을 할 수가 있고요. 그래서 예를 들어 아줌마들, 기가 센 아줌마들 싸우는 거 안 있습니까? 참 웃음도 나오고, 저렇게까지 안 지려고 하는 거 저런 것도 춤으로 하면 아주 코믹하 게 만들 수 있겠구나... 좀 탈춤형식 이런 것들로. 나이가 드니까 작년에 맞 이한 가을하고 한 살 더 먹어서 맞이한 가을하고 느낌이 다릅디다. 낙엽을 이렇게 떨어지는 거 보면 젊었을 때 하고 지금하고 휠 다르고 어떤 그 세월 의 그 의미라고 할까 삶에 우리는 자꾸 인자 그 로 가까워지고 가는 쪽으 가까워 지니까 더 아름답게 보이고 더 가치 있게 보이고, 모든 것이 보이는 구나 이런 생각도 들고요. 내가 가장 고맙게 제일 처음 내가 해야 될 이야긴데 부모님이 날 낳아준 거에 대해서 그래서 내가 이 세상에서 내가 기형아거든요, 체질이. 골라야 되는데 안 고릅니다. 팔, 다리, 사지 가 멀쩡해야 하는데 몸에 비해서 다리가 너무 약하다든가 이렇다꼬예. 이런 겁니다. 발레를 못한 이유가 다리가 안 붙어요. 다리가 너무 가늘어서요. 기 형적이라고요. 뒷꼭지도 약간 둥그스름해야 하는데 지나치게 납작합니다. 그런 쪽으로는 내가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하고 서운하지만 그래도 허약체 질을 가지고 내가 무용을 안 했으면 드러누워서 식물인간처럼 지낼 겁니다. 춤이라는 것에 대한 열정과 의지가 나를 지탱하게 해주고 75, 76살이 되는 데도 아직까지 춤을 출 수 있게 해 주는구나. 참 감사하고. 부모님께 감사 하고 또 스승님들, 참 복이 많아서 좋은 스승님들을 만났는데, 첫째는 그 이 매방 선생님, 그 다음에 또 이춘우 77) 선생님 돌아가셨지만 참 춤 잘 춘다고 강이문 선생님도 참 아까워했거든요. 그 양반은 술로써 다 조졌어요. 현실 도피적인 자기는 현실이 무대였으면 좋겠는데 사변 78) 이 나니까 공연할 때는 없고 발산할 곳이 없으니까 술 마시고, 술 마시고 그래가 죽은 사람 77) 조용자와 함께 활동하던 무용가. 전통춤과 서양춤에 두루 능하였다. 특히 허튼춤을 잘 추었 다. 제자로 홍, 세란, 이도근 등이 있다. 78) 6 25 전쟁. 36

소년 자홍, 춤을 만나다 이고. 그 다음에 계향 79) 씨라고 동해안별신굿의 그 석출 80) 씨라고 문화재 아닙니까? 그 사촌 여동생입디다. 그 사촌 여동생이 부산민속예술보 존회의 그 동래학춤에 소리하는 구음 보유자였어요. 계향 선생을 모시다 굿을 공부를 좀 했었거든요. < 지전춤 > 하고 신을 부를 때 인자 < 꽃춤 >, 꽃맞 이. 영혼을 저승으로 그 마지막에 천도시킬 때 그 용선, 용선 해가지고 인자 배를 띄우고. 내가 배웠습니다. 제1 회 대한민국 무용제 81) 때 내가 사용을 했었습니다. 사용했던 게 지금까지 쭉 와가지고 < 지전춤 > 이 인자 내 가 나름대로 무대화도 시키고 이래가지고 음악은 생각해보니까 그 박병 천 82) 씨의 음악이 좋을 거 같아서, 동해안별신굿의 푸너리 83)에 맞춰서 추 어야 되는데 일반인들이 이해하기에 그 장단이 어려운 거라예. 그래서 좀 해놨는데 이 춤이 굉장히 그 학자들 그 학계에 있는 분이나 민속에 관심이 많은 학자들한테 관심을 많이 받았습니다. 현대무용 하는 교수들도 < 지전 춤> 이나 용선배 띄우는 거 꽃맞이 참 좋아합디다.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고 토속적이고 좋다카고. 아! 이 춤이 좋은 춤인갑다. 생각하고. 인제 나이 가 드니까 온 미친개이가 제 집 자랑이고 반미친 개인가 자식자랑, 나도 주 79)계향 (, 1931~1991). 울산 출생. 동해안 세습단골 집안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굿 판에서 장단과 춤을 익혔으며, 포항권번, 동래권번, 경주권번 등에서도 소리와 춤을 학습하였 다. 80) 석출 (, 1922~2005). 경북 포항 출생. 전( ) 중요무형문화재 제82 호 동해안 별신굿 예능보유자. 태평소 명인. 81) 대한민국 무용제 : 대한민국 최대의 무용제, 창작무용을 통하여 무용예술 발전과 무용인들의 창작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최되었다. 1979 년부터 매년 한국문화예술흥원과 한 국무용협회의 공동 주최로 개최되었다. 1986 년부터는 한국무용협회가 행사를 직접 주관, 시 행하게 되었다. 서울국제무용제의 명칭은 처음에는 대한민국 ( ) 로 사용하다가, 제12 회(1990 년) 부터 서울무용제로 개명되었으며, 제10 회 때는 88올림픽 문화예술축전행사 를 겸하여 서울국제무용제에서 임시 명칭으로 바뀌었다. 제14 회, 제17 회부터는 다시 서울국 제무용제로 바뀌어 국제적인 무용축제로의 전화 ( ) 와 국제적인 수준으로 무대 발전시킨다 는 취지로 명칭이 개명되었다. 82) 박병천 (, 1933~2008). 전남 도 출생. 대금 명인 박종기의 손자로 어려서부터 음악을 배웠다. 씻굿을 최초로 무대에 올렸으며 중요무형문화재 제72 호 씻굿의 기능보유자였음. 83) 푸너리장단. 동해안 무속 장단의 하나. 37

홍의 삶과 예술 책이 늘어서 자랑이 하고 싶어져요. 내가 원래 안 그랬는데. < 지전춤 > 이 내 가 볼 때에 예술적 가치가 있고 보존 될 가치도 있는 춤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을 들거든요. 예감이 그렇습니다. 그 다음에 또 마지막으로 또 한 분 스승님이 계시는데, 이 < 동래 한량춤 > 을 그래도 그 부산 민속, 시에다가 신 청을 해서 부산 문화제 제14 호로 지정받도록 문장원 84) 선생님이 지정하도 록 노력하셨습니다. 굉장히 깨끗한 선비정신이 있는 분이고, 저는 항상 그 분을 무선, 춤추는 선비, 춤 무( ) 자에 선비 선( ) 자를 써서 그렇게 붙 입니다. 그래서 그 스승님하고 그 참 좋은 인연으로 그런 스승님들하고 만 난 것이 너무나 고맙고요. 그 다음에 제자들은 나를 보고 춤을 가지고 참선 을 하는 것 같다고 무선( ) 이라고 불러줬거든요. 그것도 참 고맙고. 지 금은 나이가 드니까 젊을 때는 스승의 가르침이 참 좋지만은 나이 드니까 자연, 자연 속에서 가르침을 많이 받게 되고, 일상에서 많은 것을 얻게 되 고. 스승이 자연에서 얻는 위대함, 같은 것을 알게 되고. 사람들한테서 많은 그 보면서 느끼고 겪고 보고 배우고 그것도 참 고맙고. 오늘같이 가을인데 도 햇빛이 뜨거울 정도로 따듯합디다. 그런 날에는 한적한 어느 집에 싸리 문 열고 들어가서 장독대가 있고, 봉숭아나 맨드라미가 있고, 그런 나팔꽃 도 이렇게 올라가 있고, 흙바닥에 한번 그 빨가벗고 누워서 땅도 되어보 고 싶고 하늘도 되어 보고 싶고, 흘러가는 구름도 되어 보고 싶고...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 눈시울이 붉어지시며 말을 잇지 못해 잠시 중단됨 ) 자연과 하나가 되고 싶으신. 주책스럽게. 아니. ( 미소 지음) 84) 문장원 (, 1917~ ). 무형문화재 제18 호 동래야류 예능보유자이며, 26대에 걸쳐 부산 동래에 거주해 온 토박이이다. 동래 풍류의 전통을 이어가는 한량으로 당대 최고의 즉흥춤의 대가로 평가받는다. 38

소년 자홍, 춤을 만나다 연습 절대적인 스승 그렇고 참 그 나이가 들면은 ( 눈물을 닦으시며 ) 그 친구들도 다 가고 없잖아요. 울산의 이척 85) 씨도 지난번에 갔고, 마산의 이필이 86) 씨도 갔고, 지금 전주에 최선 87) 씨가 동갑이고 서울에 정명숙 88) 씨가 동갑이거든요. 동갑내기가 공연을 또 한번 해야 합니다. 이번에 의 향기 홍이 펼치는 대물림 제가 안을 짰거든요. 서울에서도 공연을 해야 되고. 막상 하고 싶은데 돈이 들어가서 좀 그렇지만은 그래도 해야 되겠어요. 하기 위해서 내가 돈을 좀 벌어야 될 건데 시립무용단에 가서 어제하고 그제하고는 < 지전춤 > 을 연수인가 특강을 해주고 11 월 정기 공연에 출연해주기로 하고. 내일 모레는 인제 그 무용협회 행사인데 < 한량춤 > 을 출거고, 12월 25날에는 인제 그 문화회관 중강당에서 홍의 춤 해가지고 우리 가족들, 아 들하고 며느리하고 며느리의 올캐, 또 며느리의 올캐가 있어요. 네 사람이 지요. 최은희 89) 교수하고 < 한량춤 > 멤버들하고 제자들 하고 공연할 계획이 구요. 어 그래서 그 참 스승님들한테도 내가 춤을 이렇게 추게 된 것을 85) 이척 (1930~2009). 서울 출생. 박용호, 장추화에게 춤을 배웠으며, 이인범, 조광, 송범 등이 함께 춤을 추었다. 45 년 명동 시공관에서 < 초립동 > 으로 첫 공연무대를 가졌으며, 64 년부터 작고할 때까지 울산에 정착하여 공연과 무용교육에 힘썼다. 대한민국무용공로상 ( 98 년), 예총문화상 ( 06 년) 등을 수상했다. 86) 이필이 (1935~2009). 호는 일란 ( ), 경남 마산 출생. 최승희의 제자 이미라를 통하여 춤에 입 문하였다. 천흥, 권여성, 이매방, 최현 등에게 춤을 배웠다. 마산을 중심으로 활동한 무용가 로서 산조춤, 창작춤 등이 특장이다. 87) 최선 (, 1935~ ). 본명은 최정철 ( ) 이며, 전북 임실 출생이다. 1945 년 무용을 시작하였 다. 1996 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5 호 동초수건춤 ( 호남살풀이춤 ) 예능보유자로 지정됨. 88) 정명숙 (, 1935~ ). 대구 출생, 중요무형문화재 제97 호 살풀이 보유자 후보. 건국대학교 영문학과 및 고려대 체육교육과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걸, 한영숙, 이매방 등에게 가르침 을 받았다. ( 정범태, 한국춤백년 2, 서울: 눈빛출판사, 2008, 212 쪽 발췌.) 89) 경성대학교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및 동 교육대학원 졸업. 천흥, 한영숙, 병섭, 강선영, 이매방, 매자 선생 등에게 사사했다. 2000 년 창단된 울산광역시립무용단 초대안무자. 한국 춤패 배새 예술감독. 39

홍의 삶과 예술 갚아야, 은혜를 갚아야 하는데... 마음으로 갚고 해야 하는데 그렇게 잘 안 되네요. 안타깝고. 또 한 분 더, < 동래 한량춤 > 그 문화재로 되도록 애써주 신 문화재위원으로 계신 엄옥자, 90) 엄옥자 지금 무용감독님으로 계시지만 은 그분도 애를 많이 써 줬어요. 그 다음에 부산 민족예술회관에 있는 온 경 91) 이사장, 내 서류가지고 < 무고> 같은 거를 만들고 참 고마운 분이고, 고마운 분들이 참 많습니다. 다 은혜를 갚고 떠나야 편안하게 되돌아보지 않고 떠날텐데 언젤지는 몰라도. 또 하나의 스승, 절대적인 스승은 연습 입니다. 일상 때는 그 뭐 신문도 읽다가 뭐 내가 헤르만 헤세는 좋아하거든 요. 책을 읽다가 또 그 저 여러 가지 변신 카프카의 변신 같은 것도 읽어보고, 어린왕자 생택쥐페리 1 년에 한번씩은 읽습니다. 한국 예술소설 이문열 씨의 금시조, 예술이 돈이냐 법이냐 제자하고 스승하 고 갈등 같은 것도 읽어보고 이렇게 가만히 책만 읽고 싶고 연습하기 싫어 요. 공연이 있으면 연습을 해야 하는데 하기 힘듭니다. 느낌이 안 오니까 아무도 봐 주는 사람도 없고 밤에 억지고 억지로 합니다. 한번하고 두 번하 고 아프고 땡기고 척추가 안 좋아 가지고 몸이 이래. { 측만증 } 예? 척추측만증같은 거요? 네, 아마 오염된 물고기 보면 몸이 비틀어 졌지요? 한겨울 되게 추울 때 되 면 내가 몸이 그렇게 되요. 왼쪽으로 이래 됩니다. 이라면 편하고 ( 몸을 구 부정하게 보여주시면서 ) 안 볼 때는 이래 있고 사람들 볼 때는 걸어가고 억 90)엄옥자 (, 1943~ ). 경남 통영 출신으로,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학과 교수 역 임. 중요무형문화재 제21 호 승전무 예능보유자, 정수남의 선배였던 노기 ( ) 할머니로부터 춤을 처음 배웠다. 이후 정순남, 마산의 해랑, 하숙자 등으로부터 춤을 배웠다. 현재 국립부 산국악원 무용단 예술감독으로 재직하고 있다. 91) 온경 (, 1925~ ). 부산 출생. 신라대학교 무용학과 교수 역임, 부산시무형문화재 제 10 호 동래고무 예능보유자. 한국의 디아길레프로 불리는 부친 동민 ( ) 의 권유로 춤 에 입문하여 강태홍에게 한국춤을 무용을 전수받음. 전승이 끊긴 동래고무를 86년에 재현하 였으며, 동래고무총람, 부산 경남 향토무용론 을 집필하였다. 현재 ( 사) 부산민속예 술보존협회 이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40

소년 자홍, 춤을 만나다 지로 그렇게 아파요. 그게 골반으로 내려가고 골반이 아프고 주로 왼쪽 다리로 내려가 발 못 디딜 때도 있거든요. 그니까 점프가 참 하기 힘든데 그걸 인제 연습을 자꾸 안 합니까. 바에 가서 자꾸 뛰고 뛰고 또 뛰고 조금 이라도 뛰는 느낌이라도 내려고 하니까 되고. 이번에 그 화요상설에 < 지전 춤> 추고 나니까 몸이 좀 풀렸구요. 어제하고 그제하고 시립무용단에서 < 지 전춤> 가르치고 나니까 몸이 확 풀렸습디다. 오래간만에 < 동래 한량춤 > 을 모레 추니까 한번 춰 보니까, 춤이 저절로 되는 거 같아요. 춤은 그렇게 되 어야지 남 앞에 가서 추지 그냥 춤은 말도 아니고 입으로 하는 춤도 아니고 머리로 하면은 순서로 하는 거지 느낌이 안나옵니다. 머리로 느낌을 내 봤 자 공감이 안 갑니다. 그렇고 또 말로가 하는 춤은 아가리 공산당이고, 또 어떤 사람은 글이 우위고 춤은 하위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더러 있거든 요. 부처님 말씀을 들어보면 경전에 너무 얽매이지 마라. 그러면 짜 부처 님의 실된 속을 모른다. 그걸 니가 알아가지고 보고 배운 그대로 자꾸 인 제 시부리는 92) 게 무슨 전달이 되겠노? 그런데 경전만 읽고 한 사람은 도를 못 틔우고 부엌에서 열심히 열심히 그릇 씻는 할머니가 어느 순간에 깨달음 이 오는 수가 있다. 이라는데 그 말도 일리가 있어요. 물론 춤추는 사람이 무식한 것 보다는 유식한게 낳지요. 모르는 것 보다는 아는 게 낫지만 아는 데 의존해 가지고 그게 인제 그 유식한 사람이 추면 다 유식한 춤이고 그렇 다고 더러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춤 하고는 지식하고는 또 별개 예요. 춤에는 또 춤의 지식이 있습니다. 있고, 또 많은 세월이 흘러가게 되 면은 알게 모르게 알게 됩니다. 우리가 배우는 이론은 어디까지나 안내지 일로 가면 어데고, 저기 화장실이 있고 또 저기 수도가 있고, 어, 뭐 전염병 에 신종플루에 안 걸릴라몬 손을 몇 번 씻고 안내지 그게 의술하고는 다르 거든요? 안 그래요? 근데 그런 사람을 볼 때면 내가 좀 답답하다 생각이 듭 92) 지껄이는. 41

홍의 삶과 예술 디다. 제 생각이지 공통된 생각은 아니겠지만, 춤추는 사람으로써 감히 그 래도 많이 앞세울 만한 것은 없지만 오래 세월을 보냈으니까 예술 가( ) 자를 붙이고 싶고요. 예술 가 자로써는 그 춤 손색이 없는 그런 어떤 그 춤을 추어야지 자꾸 예술가하고 학문가하고를 구분을 못하는 사람들 이 춤을 추려고 애를 쓸까. 물론 그런 사람들이 학교에서 학도들을 가 르치고 하는 것은 좋은데 그러면 그 학생들이 춤보다는 해석을 잘해요. 그 게 걱정이 될 때가 있어요. 그래서 배운 사람들도 또 생각이 있으면은 전문 가가 어떤 사람이다라는 것을 생각을 해서 전문가한테 배워야 하는데 지금 형편으로서는 무조건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에 가야 된다. 질적 보다는 양 적인 것에 많이 치우치거든요. 그래서 그런 것도 예술을 하는 사람은 물론 시대에 맞게 살아야 되지 만은 그래도 너무 배금주의가 되거나 물신주의가 되어서는 안 되거든요. 마, 묵고 살만 하면은 그라고 자기가 발표 할 수 있 는 정도의 여건이 되면은 그걸로 만족하고 살아도 되지 싶은데도 끊임없이 욕심을 부리는 사람이 있거든요. 춤에 욕심을 부렸으면 참 좋겠는데. 그 다음에는 인제, 엄마들이 좋은 현상이라고도 할 수도, 안 좋은 현상이라 고도 할 수 있는데, 어머니반이 너무 많아요, 문화교실이. 그 양반들이 이제 는 춤보다는 입심이 더 늘어가지고 어느 무용가는 어떻고 어떤 무용가는 어 떻고 평론가가 다 되어 버렸어요. 평론가 보다 더 많이 알아요. 그래서 그 런 게 감히 염려가 되고. 또 절에 가서도 엄마들이 다 날뛰고 춤을 추 니까 무용가들이 그 가서 춤을 춰주어야 하는데 엄마들이 춤 다 추고, 심지 어 엿장사들 그 약 팔고 하는데, 엄마들이 그 나와서 춤을 추더라꼬요. 참 보니까 참 그렀테예. 그 약장사는 약장사답게 그 또 하나의 프로거든 요. 저질이 됐든 고질이 됐든 바구니도 요만한 거 가 와가지고는 옷도 한 5 천 원짜리 저고리 천 뻣뻣한 거, 빨간 치마에 초록 저고리 입고 ( 입술을 가리키며 ) 요도 빨가이 바르고 비녀도 이제 이렇게 그거하게 찔러야 하는 데 옛날에 부엌데기 아줌마처럼 납딱하게 붙이가지고 이래가지고 그 춤 42

소년 자홍, 춤을 만나다 도 안 되는 춤을 요만한 무대에서 셋이서 나와서 추는 것을 보니 기가 막히 덥니다. 할머니들이 취미를 위해서 추고 건강을 위해서 추고 엄마들을 위한 발표회로서 춤을 추는 건 좋은데 이건 너무 춤이 난장판이 되 가지고. 이건 완전히 이건 마 노인학교의 놀이처럼 된 것 같아서 염려스러워요. 한 양 말씨에 풀잎에도 신이 든다는 말이 있던데, 그걸 두고 하는 소린가? 하는 생각도 들고, 또 뭐 이렇게 신종플루 이것도 생태계가 파괴되고 인간이 지 어서 만든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지듯이 인간이 머리가 좋다고 생각해가 지고 빚어낸 결과의 하나, 인과응보. 이걸 타파해 나갈 수 있는 발전적인 뭐 시 안 나오면은 그야말로 안 그렇겠습니까? 내가 춤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엄뚱한 93) 얘기를 하고 있네. 오늘은 이만해도 되겠습니까? 너무 길게 해서 미안합니다. 93) 엉뚱한. 43

춤을 익히다 제2 차 구술 채록문 춤을 익히다 자, 오늘은 국립부산국악원이 추하는 명무 구술채록 사업의 일환으로 홍 선생님의 제2 차 면담일입니다. 날짜는 2009년 9월 23 일이구요, 지금 시각은 오후 2시 36 분입니다. 장소는 부산시 동구 범일동에 있는 홍 선 생님의 자택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2 차 면담을 시작하겠습니다. 네, 말씀을 듣겠습니다. 홍무용학원에서 구술하는 홍 47

홍의 삶과 예술 남방춤이 유행하다 지난 번에 말씀하신 것 중에 제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남방춤이라고 하신 거요, 남방춤이 인도계 무용을 말씀하시는 거죠? 그렇지요. 남방 쪽에, 남방 쪽에 오리엔탈 그 리듬이니 뭐, 타부라 94)의 리 듬, 요즘 그 밸리댄스 하는데 보면은 < 타부라의 리듬 > 95) 해가지고 그 음악 에 맞춰서 골반을 이렇게 흔드는 그런 춤도 춥디다만은, 고 당시로써는 춤 이 태국 쪽에도 가깝고, 또 인도에도 가깝고 손가락을 보면은 또 손가락 사 용을 많이 하고 목을 옆으로 왔다갔다 하고 그거는 뱀을 상징해가지고, 코 브라, 목을 이렇게 하는 그래 하십디다. 그때 6 25사변 때 장추화 96) 씨 라고 무용가가 있었는데 그 장추화 씨 밑에 송범 선생님하고 걸 97) 선 생님 하고, 정무연 98) 씨, 그 다음에 이춘우 선생이 이매방 선생님하고 친 구였습니다. 그런데 춤을 아주 잘 춰요. 맨손 춤을 강이문 선생님은 이춘 우 선생님 춤을 아주 좋아했었거든요. 여담이라 캐야 될까? 국장님, 판사댁 사모님이 취미가 고상해 가지고 그때가 다네모시계 99) 가 유행할 땐데 한국 춤을 기초적인 춤을 배우다가 이매방 선생님의 승무를 배우게 되었거든요. 승무를 어느 정도 다 띠고 나서 어머니들이 밥을 산다꼬 해가지고 이춘우 94) 따블라. 인도의 전통타악기. 95) < 따블라의 리듬> 무용가 장추화의 작품. 96) 장추화 ( ). 월북 무용가. 최승희의 제자이며, 국내에서 처음으로 전위적인 무용작품을 공연함. 97) 걸 (, 1926~2008). 서울 출생. 1946 년 최승희의 제자인 장추화의 무용연구소에서 현대 무용, 남방무용, 발레, 한국무용을 배웠으며, 1949 년 무용연구소를 만들어 독립하였다. 국립무 용단 창단 멤버로 활동하였으며, 걸류 산조춤을 창시하였다. 98) 정무연 (, 1927~ ). 본명은 정항섭, 경기도 용인 출생. 서울 배재고교를 졸업하고, 장추화 무용연구소에서 남방춤을 배웠다. 일본 도쿄 가와가미고로 무용연구소 입소하여, 라틴음악과 라틴무용을 배웠으며, 귀국하여 스페인춤, 라틴춤, 전통춤 등을 공연하였다. 75년 이후 부산에 서 정무연 무용학원 정무연 무용단 운영, 한국무용협회 부산지회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99) 일종의 변형된 사금융 형태로 일반적인 계모임보다는 운영자금의 규모가 크다. 48

춤을 익히다 남방춤을 추던 구술자의 모습 선생하고 나하고 갔는데, 그 인자 그 송도의 부산의 송도에 횟집이 있는데 홀이 넓고 이렇는데 거기서 밥을 먹고 여흥으로 술 마시고 장구 치면 춤도 추고하는데 이춘우 선생님이 초대받아 와가지고 보니까 춤을 참 잘 추니까 어머니들이 호감을 가지고, 그 다음에 무슨 파티가 있을 때 초청을 했는데 이매방 선생님은 샘이 나가지고 춤 잘 춘다 하니까 술을 자꾸 권하는 거라 예, 이춘우 선생한테. 술이 떡이 되도록 만들어 놓고 춤을 추라 하는 거라 예. 춤을 추다가 이리이리 비실비실 하니까 때리 눕혀가지고 막 때리고 49

홍의 삶과 예술 그게 그만큼 춤에 대한 질투, 시기심, 이매방 선생님이 그런 게 참 강한 사 람이거든요. 고런 에피소드들도 있었고. 그때 그 고거는 잠깐 접어두고. 우리나라의 춤의 잡지가 처음 나온 게, 조동화 100) 씨가 발행한 춤 지입 니다. 우리나라에서 무용 잡지가 처음 나온 거거든요. 그랬는데 그 조동화 선생하고 또 그 정막 씨라고 있었어요. 나 요 봐야 알겠다. 잠깐만요.( 책 을 뒤적이며 그 잡지를 찾으심.) { 네.} 남방춤 추던 시절의 홍 100) 조동화 (, 1922~ ). 함경북도 회경 출생. 함귀봉무용연구소에서 현대춤을 배우고, 문철 민 문하에서 무용이론과 비평을 공부함. 1956 년 조선일보에 춤 평론을 기고한 이후부터 무용 평론가로 활동함. 춤 지 발행인. 50

춤을 익히다 정막 씨인데요? 지금 이름을 고쳐가지고 정순용 101) 씨인가? 나중에 찾아보 면 압니다. 정막 씨는 확실하고. 그 양반하고 그 양반도 무용평론가거든요? 그 양반이 지금 대구에 있습니다, 정막 씨가. 그기서 명무전 을 해가지 고 우리가 함 갔다가 왔거든요. 정막 씨하고 같이 무용을 공부를 했습니다. 지금은 조동화 씨는 무용이론이나 무용평론 쪽이지만은. 그때 장추하 선생 한테 공부를 배웠어요. 그때 장추화 선생이 남방춤을 추고 그라고 우리나라 의 < 꼭두각시춤 > 을 장추화 선생이 아마 안무를 했지 싶습니다, 최초로. < 초 립동춤 > 은 최승희 선생이 했겠지만 있었는데 그 그때 당시에 남방춤이 유행해가지고 내가 사도 없어졌어요. 장추화 씨가 치마 입고 손가락 이 렇게 해가지고 찍은 사이 있었는데 지금 없어졌지만은, 그 밑에서 배웠기 때문에 그 송범 씨라고 국립무용단에 제1회 때부터 안무자로 있었던 그 분 이 < 타부라의 리듬> 해가지고 그 남자 그 남방옷을 입고 춤을 많이 추었어 요. 공연을 많이 했습니다. 부산에서는 정무연 선생이 일본에서 가서 캐스 터네츠를 배워가지고 스페인 춤을 추면서 남방춤도 추고 부산에서 처음 으로 이매방 선생님이 대영극장 102) 에서 발표회를 했습니다. 발표를 할 때에 정무연 선생을 불러다가 찬조출연을 부탁했는데 남방춤을 추는데, 그 남방 춤 춤출 때에 < 사사이 춤> 103) 해가지고, 코브라 인도사람 피리를 불면서 항 아리를 놔놓고 나더러 코브라의 춤을 추라고 하는 거라예. 장갑 끼고 손만 내가지고 추다가 그 다음에 같이 정무연 씨와 남방춤을 추고 그랬었거든요. 내가 춤을 추게 된 동기는 저번에도 얘기했지만, 미군부대 장교 식당에 식 사 마치고 쇼를 봤을 때 그 음악하고 춤하고 너무나 아름답고 환상적이고 신비스럽고. 내가 뭐 여러 춤을 추었지만 발레 현대무용 같은 것도 영화를 통해서 다 봤거든요, 그랬는데. 그 춤을 처음 보고 음악도 처음 들은 거라 101) 정순영. 102)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 5 가에 위치. 103) 사사의 춤. 송범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1952 년에 발표됨. 51

홍의 삶과 예술 예. 너무 좋아서 춤을 흉내 내다가 그게 발단이 되어서 무용에 아마 예, 춤을 추게 되고 이매방 만나가지고 < 승무 > 추는 거 보고 거기서 또 한번 감 동을 받은 거라예. 너무나 그 모습이 나비 같기도 하고 학 같기도 하고 버 선발 맵시가 조명도 없지만 발 맵시하며 장삼 뿌렸을 때 그 또 어떤 고갯짓 같은 거 이매방 선생님 특유의 고갯짓이 있습니다. 이매방 선생님은 만주 에도 살아서 중국말도 하실 줄 알고 일본 문화를 많이 접했기 때문에 국의 뭐라 캅니까?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경극이요? 경극 스타일을 참 좋아하시거든요? 경극배우 뭐 매란방 104) 좋아한다고 들었어요. 중 군예대에서 남방춤을 추는 모습 104) 매란방 중국 북경 출생 본명은 매란 자는 완화이며 경극의 황금시대를 (, 1894~1961).,,, 연 입지전적 인물. 52

춤을 익히다 춤은 하나 춤은 그리움 그 양반 그도 한국춤을 추어서 옛날에 < 양산춤 >, < 초립동 > 도 추고 어깻 짓을 하면서 눈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최승희 씨, 매란방 씨 중국 스타일 그게 들어간 것 같애요. 어떤 고갯짓 같은 거는 일본의 히메사마 공 주, 공주의 뒷모습, 일본사람들은 앞모습만 감상하는 게 아니라 뒷모습, 머 리 이렇게 쓰고 하는 듯 안하는 듯 하면서 이렇게 하는 게 있거든요. 그게 이매방 선생님 < 승무 > 춤에서 보여요. 송화영 105)이도 그랬어요. 선생님 춤 에 일본의 그 무용의 모습이 들어간 것 같다고. 송화영도 참 영리하거든요. 나는 알고는 있었지만은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은, 그게 흉은 아니고 그 게 춤은 결국 하납디다. 멋이라는 것이 어느 평론가가 와서 그것도 무용 평론가가 아니고 철학 전공을 하는 대학교수인데, 멋이 뭐냐고 묻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멋이라는 것은 아름다움이고 특히 사람마다의 나름대로의 특 징이 있는 내적 아름다움의 발산, 그렇게 말을 해야지 어떻게 말로써 표현 을 할까 아참, 멋있다 춤을 오래 춰가지고 춤을 잘 추는 것 같지도 않 은데 어딘가 멋이 있다. 또 사람도 짜 멋이라는 게 이목구비가 반듯한 것 도 이쁜 거지만은, 일하는 여성들 사무실에서 야간작업을 해가지고 밤새 미 106) 를 했는데 어떤 모임에 나가야 하는데 밤에 잠을 못자서 일에 매달려 그래도 참석은 해야 하고 분은 발라야 하고, 아이쉐도우도 한쪽은 옅고 한 쪽은 짙고 입술도 바른 다고 발랐는데 약간 삐뚤어졌고, 이랬는데 얼굴에 분이 떠서 퍼석하이 그랬는데, 어느날 그게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더라구요. 그래서 그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그 안에서 이렇게 우러나오는 그게 아름다 움이지 겉으로 완전히 다듬어 그런 아름다움은 아니고, 근데 보는 사람들 105) 송화영 전북 부안 출생 이매방에게 승무와 살풀이를 배웠으며 국립국악 (, 1953~2006).., 원 무용단 단원으로 활동하였음. 106) 밤샘. 53

홍의 삶과 예술 은 그렇게 발라도 멋있게 보이는 거라예. 뭐 약간 입술이 번져도 멋있게 보 이고, 그렇게 멋을 말했는데 질문하는 사람은 엄뚱하게 107) 질문을 하고 나 중에 그 어떤 책에다가 써놨는데 마음에 안 들더라구요. 내가 체계적으로 미학에 대해 공부한 것도 아니고 학벌도 안 되지만은 그래도 오래 살아오면 서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예술 쪽보다도 불교 서적을 읽으면서도 느끼고 마음을 비운다던가 그런 것을 내가 빨리 받아들이고 이래 했기 때문에 근데 너무 엄뚱한 질문을 해서. 세상은 정말 요지경 속이구나 어떻 게 저런 사람이 춤을 평을 할 수 있을까? 그래도 음악 귀가 뚫려야 되거든 요. 내 제자 중에 남자 제자가 있는데 가는 108) 팝송만 듣고 살은 애라요. 자 기 엄마 말도 잘 안 듣고 공부도 열심히 안하는 앤데, 춤을 배우러 왔는데 한국무용을 추는데 너무 너무 음악을 잘 타는 거라예. 그라고 춤을 잘 춥디 다. 꼭 한국무용만 잘 하는 것도 아니고 현대무용도 가르쳐 보니까 곧 잘 하고. 어째서 저렇게 잘 하는가 싶었더니 음반을 이만큼 들고 왔더라구요. 밤새도록 듣고 그렇게 음악 귀가 뚫리고 몸도 좀 놀리 보고 해야지 알건 데, 학교에서 철학과 공부시키다가 뭐 춤도 많이 보지도 안 했을 긴데, 기껏 해봐야 공연 하는 거는 안 봤겠습니까. 그래 보고 하는 거는 아니라고 생각 하거든요. 예를 들어 춤추는 어떤 직장에 있으면서 맨날 그 머 지나가면서 국악 악기 소리도 들리고 또 뭐 춤추는 것도 지나가면서 보며 팔 올리고 그 렇게 해서 젖어가지고 글 쓰는 거 하고는 다르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사 람들도 있고, 또 춤도 보면은 그 저번에 이야기 했는가 몰라도 입으로 춤추 는 사람, 마음으로 춤추는 사람, 또 머리로 춤추는 사람 이래 있습디다. 머 리로 춤추는 사람은 춤 동작은 확실하고 무난하고 잘 추게 보입니다. 감동 은 없어요. 좀 못 추는 듯한 춤이라도 마음으로 추는 춤은 시선 집중이 되 고 내가 그 107) 엉뚱하게. 108) 그 아이는. 문장원 선생님을 발표회에 모셔가지고 특별출연을 시켰는데 54

춤을 익히다 선생님이 안 출려고 하는 거를 내가 잠깐 나가서 팔만 올렸다가 내려오라고 했는데 그날도 선생님이 앵겨가지고 춤을 추기 시작하는데 그렇다고 젊은 사람처럼 씩씩하게 추는 것도 아닌데 관객들이 압도당하다시피 해가지고 박수를 치고 우는 사람도 있고 슬프게 추 않아도, 그게 마음으로 추는 춤 이고 혼이 영혼이 깃든 춤이 아닌가 싶어요. 그런 사람들이 기초를 닦아가 지고 날렵하게 추는 사람하고는 게임은 안 됩니다. 안되지만 그 사람이 살 아온 역사, 연륜, 그 예술은 체험이거든요. 쌓여온 체험, 이런 것이 발산이 될 때에 그때에 훌륭한 춤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내가 봤을 때도 선생님이 참 부럽더라구요. 어쩌면 저렇게 출 수 있을까. 새로운 것도 없이 약간 약 간 요래 추는데. 아, 춤은 없는데 보고 난 뒤에 여운이 남는 그런 것 이 춤이구나! 현란하고 요란한 동작의 춤인데도 보고나면 안 남는 것 안 있 습니까? 박수치고 야~ 캐도 안 남으면은, 그런 춤보다는 여운이 남는 춤이 짜 춤이 아니겠나 예를 들어 글을 볼 때도 명필하고 달필하고 있는데 달필은 참 잘 쓰게 보이거든요. 말하자면 예쁘고 아름답고 이래 보이는데, 명필은 어떻게 보면 잘 쓴 것 같지 않은데 게도 109) 자꾸 이렇게 보면은 마 음에서 우러나와서 쓴 글, 정성을 다 쏟아서 쓴 글, 에너지 같은 것이 느껴 지고 못 쓴 듯해도 그런 게 명필이고 잘 쓰고 이쁘고 눈에 쏙 들어오는 것 은 달필이고 이렇거든요. 그래서 나는 춤을 글로 치자면 나는 명필 쪽으로 하고 싶은 거라요. 춤을 잘 춰서 객석에 잘 보일려고 하면 손목을 한 번 돌 릴 걸 세 번 돌리고 테크닉을 많이 쓰게 되거든요. 발도 한 번 놀릴 걸 여섯 번 놀리고. 바이올린 하는 사람 그 누굽니까? 그 유박? 그 사람은 순간적 으로는 감탄을 하겠는데 감동은 안 받아집디다. 안 받아지는데 이다. 그런 생각이 자꾸 들어요. 대중을 위한 그것도 좋지만, 역시 그 너무 쇼적 게가 있어야 좋은 건갑다. 특히 우리 같은 경우는 전통춤이니까 서양음악을 무 109) 그래도. 55

홍의 삶과 예술 말하자면은 지루박이나 뭐 자이브보다도 블루스 같은 음악, 탱고, 이런 음 악 쪽이 춤도 참 좋데요 보니까. 룸바 같은 것도 좋고. 자이브나 지루박 같은 것은 경쾌하기는 해도 춤의 맛이라는 것은 안 느껴지는 것 같애요. 이 렇는데 그라고 또 한 가지는 춤을 출 때는 제자들한테도 얘기해 주는데, 첫째는 마음을 편안히 가져라. 둘째는 춤을 천천히 추거라. 그 다음에는 춤 을 천천히 추면서 공손하게 추거라. 손짓 발짓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좀 추는 사람들은 그런 면이 있거든요. 세 가지를 강조를 많이 합니다. 느 리게 겸손하게 편하게 편해야 됩니다. 고래야 되고. 내가 지금 이렇 게, 그 다음에 쭉 어렸을 때부터 살아왔지만은 내가 살아있는 현실이라는 것은 나한테는 꿈같은 것이고, 현실이 꿈이고, 무대에 섰을 때 내가 현실감 을 비로소 느낍니다. 그러니까 항상 기다리며 사는 그런 삶이라요, 말하자 면 그리움을 기다리며 사는 삶, 춤은 나에게 있어서 하나의 그리움 같은 것 이고, 그 그리움을 만났을 때에 비로소 춤이 감동을 줄 수 있는 추는 춤이 나오고 출 때마다 그렇게 되면 참 좋을 텐데 소발에 쥐잡기로, 일년에 한 번 될 때도 있고, 일년에 서너 번 될 때도 있고 이래요. 지난번에 < 지전춤 > 췄을 때는 뭔가 이렇게 와가지고 이렇게 됐는데 그렇게 그것을 위해서 내가 살고 있는 것 같은 그래서 일상생활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요. 내가 또 그 자아노출과 그 커뮤니케이션이 잘 해야 되는데 나는 오히려 그 뭐라 카 노, 폐쇄증? 잘 안 나서거든요. 사람을 잘 안 만나고 집에 있을 때는 그냥 하루종일 있고 쇼핑하러 갈 때, 한바퀴 백화점, 마트 같은 데 돌고, 아이쇼 핑도 하고 사고 싶은 거 있으면 사고. 시대 감각적으로 어떤 것을 더 많이 선호하는가. 이런 것도 아줌마들한테 어떤 게 잘 팔리는 가 물어보고. 신문 을 읽어도 문화면 쪽 같은데, 스타일 같은 거 중앙일보 스타일 해서 금요일 마다 나옵니다. 올 시즌 유행색상, 뭐 어 보라색이다, 보라색도 붉은 보라 색이 있고 푸른 보라색이 있는데 푸른 보라색 쪽이다. 눈에는 푸른 보라색 을 바라고 눈머리에는 황금색을 바라고 어떻게 하고 그렇게 눈을 강조했을 56

춤을 익히다 때는 입술은 연하게 베이지 핑크니 그 다음에 의상에 있어서도 20대 남자 들 입는 옷 보면은 스키니 (skinny jean) 해서, 검정 스키니, 셔츠도 어깨 도 잘록해서 좀 말라깽이같이 모자 하나 딱 쓰고 가방 쪼깨난 110) 거 매고 참 귀엽고 보기 좋아요. 그러고 여자들도 조금 다양합디다. 요기는 풍성한 듯 하면서도 허리는 조여주고 하는데 지금은 어깨가 커지는 시대인 거라요. 왜 어깨가 커지는고 하면은 경제 불황, 한파를 지금 맞고 있는데 여자들도 활동성이 있어야 된다해서 어깨를 자꾸자꾸 혜수 < 스타일 > 드라마 보 면은 어깨가 이렇게 크고 10 년 전에 유행했었거든요. 다시 돌아오는 것 같 애요. 그런 쪽으로는 보통 때는 얘기를 안 합니다. 그 다음에는 인제 스타 일이나 얼굴 색조 같은 거 중요하지만은 또 하나는 인제 테레비를 보면서 < 게이샤의 추억 > 해가지고 그, 혹시 봤습니까? 일본 영환데 헐리우드에서 만 들어졌어요. 유명한 감독이죠? 이름 자꾸 잊어버린다. 그 영화를 이래 보면 은 일본의 오도리( り) 111) 에서도 환상적인 자극을 주는 그런 어떤 춤들이 있습디다. 장쯔이 112)가 추는데 아주 그 좋테요. 나막신 신고 나와서 우산 쓰고 나와서 참 좋았고 그 다음에 그 용호 뭐시더라? < 용호쟁투 > 던가? 대 나무 위에서 칼싸움을 하는데 그런 것도 환상적이고 좋고, 중국 무술영화도 많이 보고 그런 데서도 얻는 것도 있지만은 춤은 일상이라서 살아보니까 그렇습디다. 예를 들어서 개미들이 물고 오고 가고 부지런히 하는데 거기다 가 음악을 넣으면 춤이 되겠는 거라요. 또 일반 사람들이 걷는 스타일 여러 가데 그런데도 음악을 맞추면은 춤이 되는 거라예. 걸어가는데도 꼬부랑 할머니처럼 이래 돼야 걷는 사람도 있고 나이 많아가지고 이래 뒤로 히 떡 113) 넘어져서 걷는 사람도 있거든요. 또 옆으로 되가 있는 사람도 있는데 110) 조그만. 111) 일 춤. 112) 장쯔이 (, 1979~ ). 중국의 영화배우. 113) 활짝. 완전히. 57

홍의 삶과 예술 음악을 맞춰서 세 가지를 합쳐 보면, 그것도 춤 동작으로 할 수 있도록 생 각하게 해 주거든요. 그런 쪽으로도 내가 많이 그 유심히 봅니다. 가을이 되니까 가끔씩 바람이 불면은 이캐 나무가 가지가 흔들리는 것도 바람에 따 라서 여러 가지로 다르고,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에 바람이 불면은 나뭇잎이 멀리서 보면 한쪽은 하얗게 보이고 한쪽은 파랗게 보이더라구요. 그런 것들 이 전부다 빛의 효과고 하니까 춤추는 사람은 조명도 기초 정도는 공부도 해야 되겠다 싶은데, 아직까 못하고 있고. 조명이 좋고 나쁘고는 분간은 할 수가 있어요. 그라고 인제 그 얘기 합디까? 아직 안하셨어요. 내가 살아오면서 용두산 공원에 갔던 거 용두산 공원에서 누가 발레를 연습시켜준다고 해서 내가 안 갔습디까? 용두 산 공원에. 가서 발레를 해보니까 도저히 안 되겠는 거라예, 다리가 벌어져 서. 그래서 마 포기해 버리고, 했는데 거게 다닐 때가 내가 조금 정신적인 성숙기였다고 할까? 그때가 몇 살 무렵이셨어요? 어 열여섯이나 다섯이나 근데, 용두산 공원에 갔다가 오면서 저기 길거 리 시장이 있어요, 요 앞에. 맛있는 음식들, 과일들 파는 거보면 먹고 싶고 하는데 용두산 공원까지 다녀올 차비만 가지고 다녔거든요. 그때는 내가 돈 을 안 벌일 때니까. 먹고 싶은 거 참고 했던 생각이 나요. 그 이후로 내가 군예대 가고 타이프 배워서 미군부대 취직하고 그럴 때는 내가 조금씩 벌이 니까 그런데는 구애는 안 받았고, 또 옛날 사 보면 알지만 내가 머리숱이 굉장히 많아 가지고 머리를 좀 길게 해가 있었는데, 부녀대에서도 그라고 몇 년 전에도 해랑 114) 선생님의, 우리나라 무용에 최승희, 조용자, 또 그 남자무용가 조택원 115) 씨, 그 다음이 해랑 선생님입니다. 부잣집 아 114) 해랑 (, 1915~1969). 마산 출신. 일본에서 이시이 바쿠, 다카타 세이코에게 현대무용을 사사. 최승희와 함께 한국 신무용을 개척한 거장으로 꼽힘. 58

춤을 익히다 들인데 일본에 유학을 보냈드만 공부는 안 하고 무용을 배웠어요. 춤이 좋 아가지고 ( 웃음) 동네 아가씨들, 조금 별난 아가씨들과 부잣집 아들이니까 옷 해 입혀 가지고 춤 가르쳐가 발표회하고 이랬던 분인데, 해랑 선생님 그 내가 무슨 얘기 하다가 이래 됐노? 용두산 공원에서. 그래했는데, 인제 그 해랑 선생님의 그 추모공연이 있었거든요? 그때 서울에서도 유명하지만 최현 116), 무용가 최현 남자 선생하고. 최연? 현? 최현입니다. 그 다음에 일본에 있는 정막 씨라고 해랑 선생님의 양아들이 었죠. 최현 씨하고는 형동생하는 사이고 그 다음에 그래가지고 추모공연 때 도 갔다 오고 했는데 해랑 선생님이 나를 양아들 삼겠다고 대학까지 공부 시켜 주겠다고 그랬습니다. 왜 그랬는고 하면은 마산에 있는 해랑 발표회 를 준비하는데 조금 오라 캐서 그래 갔더니만은 누가 그 당시만해도 남방춤 춰야하고 음악을 해야 하는데 한 가지 빠지는 게 있는데, 거문고 같은 건데 둥 땅 둥따둥따 ~ 만 하면 된다고 그거는 할 수 있으니까 나를 이래 보더만 자기 밑에 오면 대학공부까지 시켜주겠다고 그때만 해도 이매방 선생님 춤 이 좋았었거든요. 선생님, 그럼 그 자리에서 거문고 연주하셨던 거예요? 115) 조택원 (, 1907~1976). 함경남도 함흥 출생, 1928 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이시이 문하에 서 무용을 배웠다. 1932 년 귀국하여 국내 외에서 무용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초기의 현대무용적 경향에서 탈피하여 한국적인 소재를 바탕으로 우리 춤의 흥과 아름다움을 담아 내고자하였다. 116) 최현 (, 1929~2002). 본명 최윤찬. 부산 출생. 17세에 해랑 무용연구소에 들어가 궁중무 용과 민속무용 등 전통춤을 두루 익혔고, 대다수 무용가들이 민속춤 계승에 주력하고 있던 시대에 드물게 선비춤의 맥을 이으며 전통무용에 기반한 창작무용을 선보임. 76년 최현무용 단 창단, 서울예전 ( 현 서울예대 ) 교수, 국립무용단장, 세계무용연맹 한국본부 초대 회장 등 역임. 86 년 아시안게임 문화축전 식전행사에서 < 영고 >, 88 년 서울올림픽 폐회식에서 < 안녕 > 안무. 94 년 대한민국 화관 문화훈장 수상. 대표작으로 < 비상 >, < 시집가는 날>, < 허행초 >, < 초 라니 >, < 춘향전 >, < 심청> 등이 있음. 59

홍의 삶과 예술 거문고 칠 줄 모르는데, 그 두 줄만 가지고 왔다 갔다 하라는 거라예. { 네.} 그래서 시켰는데 그래 했지요. 그런 경험도 했었고, 그래서 그 이매방 선생 님의 춤이 또 좋았던 건, 어머니들, 춤을 좋아하는 어머님들이 배우는데 춤 을 이렇게 보니까 뭔지 모르겠는데 참 좋다, 지금 보니까 사선을 쓰더라꼬 예. 예들 들어서 ( 춤 동작을 하며) 이래 할 거를 이렇게 하든가 그걸 알더라 구요. 선생님이 스페인 춤을 춘다고 하시더만, 아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 이었구나.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한국무용으로써는 사선 잘 쓰는 사람이 이매방 선생하고 서울에 가면은 예종 117) 의 현자 118) 교수가 잘 쓰고. 현 자 교수는 원래 발레로 기본을 닦는 사람이거든요. 나는 누가 가르쳐준 게 아니고 나도 모르게 춤을 추다 보니까 사선을 많이 쓰게 되더라구요. 춤 이 론은 내가 한 3년인가 강이문 무용 평론가한테 공부했을 때 얘기하기를 맞 선 볼 때에 똑바로 보는 것보다는 사선으로 앉아서 보는 게 가장 아름답다.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사선에 대한 아름다움 터득했고. 이런 경험도 했었고. 참 그 내가 춤을 추고 있으니까 집에서는 몹시 반대를 했 지요. 절대로 못하게 해서 비밀로 하고 있으면서 한번은 어느 극장에서 공 연을 하는데 아버지한데 초대권을 한 장 드린 거라예. 심심한데 구경하러 가십시오. 하고, 하고 나는 얼른 가서 분장해서 춤을 추고 다시 와서 시치 미 떼고 아버지한테 구경했습니까? 하니 그래, 했다., 괜찮습디까? 괜찮 더라. 젊은 아가 나왔는데 영국놈도 아니고 한국놈도 아니고 ( 웃음 ) 춤을 괜 찮게 추더라. 내가 남방춤 췄었는데 난줄 모르고. 예. 카믄서. 그랬는데 이매방 선생님 만나서 우리 집에서 춤도 가르치고 모집해주고. 아버지 좋아 했는데 고생한다고 못하게 하셨고. 이춘우 선생도 놀러오고, 이매방 선생도 놀러오고 술도 먹고. 이래 싸이, 니가 아직까지 장구가 약하다. 장구를 갔 다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밤에 동네사람들이 욕할까봐. 피멍이 들고 새카맣 117) 한국예술종합학교. 118) 현자 (1947~ ). 서울 출생.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60

춤을 익히다 게 될 정도로 연습도 하고. 참 많은 그 사람들 모임 있는데 가면은 내가 너 무 왜소한 데다가 머리는 또 베토벤 같이 해 있으니까 좀 이렇게 바라보 는 시선이 뭐라 할까 비웃는 시선들이 많았어요. 많았는데, 나는 그때 왜 그 런데 대해서는 의식을 하지 않고 굉장히 내가 춤을 춘다는 데에 대해서 오 히려 자부심을 가지고. 그 사람들이 그렇게 보는 것에 대해서 하이고. 119) 싶더라고요. 지금은 완전히 기도 다 죽어버리고 했는데, ( 웃음) 그때는 나도 대단한 것 같애요. 그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도 당당하게 가서 있었고, 이랬 는데도 다 쳐다보지요, 남자나 여자나 한번씩 한사람 처음에 쳐다보면 그 다음 몇 사람, 그 다음 몇 사람 그래 했고 하도 그렇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영화를 많이 보면서, 뭐라 카노 그 주인공들이 어떤 역경을 이겨나간 다든가 이런 것들을 통해서 그렇고. < 스타 탄생> 이란 영화를 내가 바바라 스트라이센더 120) 그 배우가 있습니다. 노래를 참 잘하죠. 그 배우가 출연한 < 스탄 탄생 > 하고, 또 주자 갈란드 121)라고 키가 자그마한 여잔데 노래를 참 잘 불렀습니다. 옛날 배운데. 그 여자의 딸이 배우가 되가지고 < 캬바레 > 라 는 영화에 출연해가지고 춤도 참 잘 췄는데 눈이 참 크고, 주자 갈란드라는 영화배우가 < 스타 탄생> 에 나오는 영화를 한 편을 봤고, 세 가지를 봤어요. 테레비에서도 보고 극장에서도 봤지만 그래 보면서 스타가 되기 위해서 그 노력, 피나는 노력을 하는 거 그런 어떤 그것을 보고는 나도 저렇게 노력을 해야 겠다. 처음에는 나는 노력파도 아니었어요. 무대 나가서 분바 르고 손들고 다리 들고 하면 되는 줄 알고 ( 웃음) 사람들이 이쁘다고 좋 다고 해 주니까 내가 잘하는 줄 알고, 개뿔도 모르고 그럴 때거든요. 그런 119) 아이구. 120) 바바라 스트라이젠드 (Barbra Streisand). 1942 년 뉴욕 출신의 미국 팝 가수. 뮤지컬 배우, 영화 배우로도 활동함. 121) 주디 갈란드 (Judy Garland, 1922~1969). 미국 미네소타주 출생. 가수겸 영화배우로 < 오즈의 마 법사 > 에 아역으로 출연하여 육성으로 부른 주제곡 Over the rainbow' 가 1940 년 아카데미 작곡 상과 주제가상을 받음. 61

홍의 삶과 예술 것도 보고. 그 다음에 세익스피어의 그 줄리엣 역할을 인자 어떤 인자 아 카데미 시상식에 배우들이 파티에 왔는데 어떤 여자가 연기는 하고 싶은데 인정을 못 받고 하니까 계단 위에서 줄리엣의 대사를 읊는데, 수단? 수단 뭐였는데 내가 참 감동을 받았어요. 그 대사를 읊는데 처음에는 모두 얘기 하고 그래 쌌다가 한 사람이 그거 보고 두 사람이 그거 보고 하니까네 뭔고 싶어서 보드만은 전부 다 그 쏠려서 몰입해서 보는데, 그때 그 연기 같은 거. < 에쿠스 > 라는 연극을 봤는데 강대기 지금 가끔 테레비에 나옵디다, < 임꺽정 > 할 때도 나오고. { 네, 네.} 그때 젊었을 때 강대기 연기하는데 와~ 그때 그 눈! 그 눈의 연기! 그걸 내가 보고는 그라고 그걸 몇 번 보러 갔 거든요. 보러 가고 그때만 해도 < 에쿠스 > 의 작품 내용보다는 강대기의 연기 가 보고 싶어가지고. 그게 맨 처음에 보탬이 되었고 그라고 나서 문순태의 징소리 레비에서도 라는 소설이 나왔어요. 그 소설을 읽었는데 참 좋구나 했는데 테 < 징소리 > 를 하더라구요. 참 좋다. 혼자서 추는 춤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그 어떤 옛날을 회상하면서 없어져 가는 것들, 마을이 없어지는데 그런 것들 향수를 느끼면서 춤을 한번 추어보자. 그래가지고 < 징소리 > 라는 춤을 한 번 추었는데, 그때 서울에 그 현대무용하는 이명숙이든가? 유명한 교수가 있었는데 근데 그 교수가 내보다 하루 앞이였습니다. 하고 내가 그 다음날 징소리를 했는데 안 가고 봤던 가봐요. 내가 발표를 하니까 모두 인 자 교수들하고 와서 봤던 가봐요. 제목이 < 징소리 > 니까 참 좋아가지고는 봤 는데, 너무 좋았다고 굉장히 그때 칭찬을 많이 받았어요. 부산민속협회 그 할아버지가 날로 122) 찾아와 가지고 자네 춤추는 게 계룡산에 그런 춤 추는 사람이 있었네, 계룡산의 무당이 미쳐가지고 반미친 게이 무당춤인 데 그래 징을 들고 춤을 추쌌테. 자네하고 춤은 똑같 안 해도 그런 사람 이 있었다. 우째서 그렀는가 싶었는데 그 당시 내가 < 징소리 > 때문에 많은 122) 나를. 62

춤을 익히다 사랑을 받았습니다. 안무도 했고, 그라고 인제 그때 그 강대기 < 에쿠스 > 눈 연기와 민속예술협회의 어떤 느낌, 춤 호흡과 내 살풀이, 살풀이의 춤 호흡, 약간 탈춤형식에다가 살풀이 호흡에다가 강대기의 연기에다가 그때 참 많 이 호평 받고. 그 아들도 < 징소리 > 추었어요. 사 있을 겁니다. 내가 군무로, 남자들 군무로 만들어가 남자들 춤추게 했거든요. 네. ( 사을 보면서 ) 창작에서 전통춤으로 ( 함께 사을 보면서 ) 저 사을 갖다가 옛날에 지태 씨가 살아있을 때 부산일보사에 박숙자 여자 기자가 있었어요. 그 기자가 찍어준 사입니다. 그래가지고 저 사을 포토사에 내보라 해서 그래 냈었거든요. 그래서 뒤에 내가 작품을 < 장터 > 라는 작품을 내가 만들었었거든요? < 연> 이라는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 장터> 는 그야말로 우리나라 장터의 엿장사, 새벽에 일어나 면은 그 두부장수의 그 흔드는 소리, 뭐 이런 거 해가지고 날이 밝아지면서 비단도 팔고 생선장수, 쭉~ 이래가지고 했는데 < 장터 > 하고, < 연> 이라는 작 품은 정월 보름날 되면 액땜으로 우리가 연을 띄우거든요. 액을 면하고. 연 을 날리다가 결국 끊어서 날려 보내버리거든요. 그걸 내가 옷을 사각으로 만들어가지고 돈 안 들게 구멍 뚫어서 이래 하면은 연처럼 보이게 너덜너덜 하게 천을 달아가 연꼬리처럼 보이거든요. 그래가 춤을 만들어가지고 이래 하면서 그 다음에 무당이 나와서 연이 날라가면은 < 지전춤 >, 그때 < 지전춤 > 도 굉장히 호평을 받았고. 박용구 씨라고 서울에 음악 평론가가 있습니다. 춤 지 조동화 씨하고 박용구 씨하고 다 살아계신가 모르겠다. 그 분이 좋게 평을 했습디다. 그런 것도 했었고 그 다음에 탈해가지고 괄로 123)해서 123) 괄호. 63

홍의 삶과 예술 마음의 신념, 념. 탈로 해서 작품을 만들었었거든예. 그것도 굉장히 호평을 받았어요. 동래 민속관에 탈 만드는 데가 있었거든요. 탈 만드는 거 이래 보다가 아~ 탈이라는 작품을 함 해봐야 싶으다 해서 인제 사람들 앉혀놓고 탈 만드는 장면, 서서 만드는 사람, 앉아서 만드는 사람, 만들다가 고민하는 사람, 이런 걸 무대 배치해 놓고 양조 음악에 고민하는 장면. 그 사람들 살 124) 돌아보면 검은 막을 쳐놓고 있는데 그 사람이 탈 만들다가 잠이 사르 르르 들면 불이 꺼지면서 이쪽에 검은 천이 이래 내려갑니다. 사람들이 천 을 들고 있다가 이래 내리면서 탈 하나씩 얼굴이 나오는 거라요. 그래 탈춤 을 한바탕 추고 다시 들어가면은 검은 천이 올라가면은 이 자던 사람들이 일어나서 다시 탈을 만드는 라요. 굉장히 그것도 호평을 받았고. 그 사람들이 말하자면 탈 춤추는 꿈을 꾼 거 젊은 시절 구술자의 춤추는 모습 124) 살짝. 64

춤을 익히다 무용극 형식이네요? 그 다음에 제1회 대한민국 무용제에 제가 그 각본을 써가지고 어디서 힌트 를 얻었는고 하면은 전국민속경연대회가 있는데 거기에 부산민속예술협회 에서 출전을 했는데 나도 따라갔었거든요. 보니까 동해안 별신굿에서 나와 가지고 하는데 배가 나오고 그 다음에 배에서 내려가지고 막 춤도 추고 굿 비슷하게 간단하게 하고 다시 배를 끌고 나가더라구요. 그래서 음 싶어서 서점에 갔더만 동해안 별신굿 이래 난 문고판이 있더라구요. 을유문고 애랑당 애화. 애랑이라는 여자가 남자를 애인이 있었는데 그 총각이 고 기 잡으러 갔다가 안 돌아온 거라예. 안 돌아와서 이 아가씨가 기다리다가 기다리다가 물에 빠져 죽어버렸는 기라예. 그 죽고 난 뒤부터는 고기가 안 잽히고 풍랑이 일고 해서 굿을 하면서 아가씨 원을 풀어줘야 한다고 해서 남자의 상징 남근을 크게 깎아 만들어서 당을 세워가지고 지금 강원도에 당 이 있답니다. 그걸 이렇게 모셔서 제를 지내고 나서는 고기도 잘 잽히고 사 람도 안 죽고 전설이 간단하게 돼 있습디다. 그걸 다시 내 나름대로 재밌게 얘기를 꾸며가 각본을 써 가지고 보냈더만 서울에서 각본심사에 통과 되었 다고 했는데, 출전한 작품 중에서 제일 좋았던 게 복희, 화숙의 현대무 용, < 창살에 비치는 세 개의 그림자 > 이래가지고 했는데 현대무용자, 외국 에서 갓 나와서 하니까 새로운 느낌이 있어서 좋아했고, 그 다음에 < 해랑당 애화 > 인거예요. 그때 백봉 125) 선생님도 안아주고, 조동화 선생님도 욕 봤 다고 안아주고, 하여튼 많이 찾아왔어요, 분장실에. 국립국장에서 했거든요. 그랬는데 상을 갖다가 강이문 선생님이 대통령상을 복희, 화숙 쪽으로 주려니까 홍 쪽으로 주면 좋겠다, 다시 투표를 하자 이래 놓으니 마 심 125) 백봉 (, 1927~ ). 본명 충실. 평양 출생. 최승희 무용연구소에 들어가 춤을 배우고 최승희무용단원으로 동남아시아 각국 순회공연을 하였다. 최승희의 시동생 안제승과 결혼 하여 최승희와 동서지간이 되었다. 53 년 백봉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활동하였으며, 경희 대 무용학과 교수, 서울시립무용단장도 역임하였다. < 화관무 >, < 부채춤 > 을 최초로 안무하였 으며, 1999 년 20 세기를 빛낸 예술인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65

홍의 삶과 예술 사위원들이 심사가 틀어져가 마지막 것을 떠라버리고 다른 사람 것을 채워 가 최우수상 올리고 복희, 화숙을 대통령상 주고 이랬던 기라예. 근데 작품으로써는 굉장히 호평을 받았는데 그래가지고 그 외에 < 어느 광대의 이야기 > 해서 부산무대예술제에 작품을 냈고 그 다음에 < 승전무 > 해가지고 승무를 다룬 이야기를 무용을 했고요. 무용극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제가. 만들고 창작무용을 좀 했어요, 젊을 때. 하다가 역시 창작무용은 1회용 인 거라예. 그렇게 공을 들여 가지고 왜 이럴까? 특히 한국 사람들은 더 그렇 습디다. 한국은 왜 한 번만 보면은 두 번은 인정을 안 해주는가 모르겠다. < 로미오와 줄리엣 > 같은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이렇게 하는데 좋은 작품은 나라에서 아니면은 예술가들이 자꾸 키워주어야 합니다. 한번 하고 나면은 싹 없애버리고 또 새로운 거 해야 하고 이래서 내가 짜증도 나고 전통춤 은 그 춤 하나로 10 년, 20 년 추면 춤은 늘거든요. 느니까 자연히 인정을 받 는다 말입니다. 창작무용은 한 번 하다가 열 번 하다가 한 번 못하면 확 평 에다가 내라버리고 나 인자 춤 출란다. 혼자 추니까 편합디다. 많은 사람 거느리고 가르칠라하면 시간 맞춰서 안 오지요. 그러면 또 막 애가 쓰이고, 밥 먹을 때나 세수할 때나 작품 생각하고 있으면은 어떤 때는 나 씻을 때 생각이 퍼뜩 떠오르면은 얼른 씻다가도 메모를 해야지 안 그러면 잊어버립 니다. 그래가지고 많이 했습니다, 작품을. 지금은 인자 참 춤추는 게 좋다 싶으고. 가끔씩 창작무용을 이렇게 보면은 좋기도 하면서 내가 또 생각을 많이 합니다. 창작무용도 인제는 한계에 왔구나 싶고 데 탈피를 해야 하는데 지금까지의 어떤 것들을 그걸 벗어나야 하는 모색을 해야 하는데 어떤 쪽으로 갈까 기대 반 또 뭐 불안 반, 이런 식으로 보고 있고. 춤에 대해서 내가 그 그렇다고 내가 춤에 왕자라든가 뭐 무슨 권위를 세울려든 가 그런 쪽은 아닙니다. 그냥 평범한 춤꾼으로서 춤에 대한 애착이 있고, 그 래서 춤에 대해 고민을 해보고 그런 거지, 통제를 하고 이런 그건 아니거든 요. 춤추는 예술가는 항상 열려 있어야지 어떤 것을 통제한다든가 대체적으 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