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 회고 나의 스포츠 기자 시절 오도광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한국일보 사회부ㆍ편집부ㆍ 경제부 기자, 체육부장, 편집부국장 겸 문화부장 일간스포츠국 국차장 KOC(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 KBS시청자위원 신문사에서 정년퇴직하여 전 언론인이라는 백수가 된 지도 15년째이 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면 왕년의 체육기자로 알아 보는 사람이 꽤 많다. 그들은 어김없이 나에게 무슨 종목의 운동을 했느냐 고 호기심에 찬 표정으로 묻는다. 무슨 운동을 했느냐는 질문은 일선기자 로 스포츠 현장을 뛸 때부터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받아왔다. 아무 스포츠도 하지 않았다고 답하면 그러면 체육학과 출신이냐고 다시 묻곤 한다. 학창시절 운동부 근처에도 가지 않았고 체육학과도 나오지 않았으 며 사회학과 출신이라고 답하면 고개를 갸우뚱하기 마련이다. 직접 운동 을 하지도 않았고 체육학을 전공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스포츠 기자로 활동했고, 일선기자에서 물러난 뒤에는 스포츠 전문지와 종합지에 스포츠 칼럼을 쓰면서 스포츠 전문가연한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짓는 것이다. 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옛 학우들은 내가 언론계에 진출하리라는 것은 전 부터 예상하고 있었지만 스포츠 기자가 되리라고는 거의 예상하지 못했고, 104 관훈저널 여름호
지금까지도 내가 체육기자로 활동한 것을 몹시 의아하게 여기고 있다. 내 가 학창시절 운동부 근처에는 발길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운동에 소 질을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자신도 체육부로 배치되기 전까지 스포츠 기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내가 일선 스포츠 기자 로 한창 활동하고 있을 때 어느 모임에서 한 후배가 나를 소개하면서 수습 기자로 입사하여 아무도 가겠다고 하지 않는 체육부에 지원하여 스포츠 기 자의 길을 걸어온 별난 사람이라고 말하여 나를 당혹스럽게 하기도 했다. 내가 스포츠 기자가 되겠다는 포부와 사명감을 갖고 체육부에 지원했다 는 것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체육부에 배치되어 체육부 영역을 크게 벗어 나지 못하고 체육기자로 언론인 생활을 마쳤지만 그것은 나의 자발적인 선택이라기보다는 주변상황과 분위기에 의해 빚어진 결과였을 뿐이다. 스포츠 기자는 나의 자의에 의한 선택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유명 정치 인이 남긴 자의반 타의반도 아니며, 자의보다는 타의가 훨씬 강하게 작용 한 결과다. 어떠한 경우라도 스포츠 기자가 될 수는 없다고 버티며 진퇴를 걸고라도 거부했거나 사양했더라면 전혀 다른 길을 갔겠지만 진퇴를 걸고 강경하게 버틸 만한 용기도 없어 주변상황에 밀리듯 체육부 배치를 수용 했고, 그 뒤로는 체육부 영역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언론인 생활을 마 쳤으니 나의 스포츠 기자 인생에 있어 자의가 차지하는 부분은 그것이 전 부다. 체육부에 배치받고 보니 공채시험을 거쳐 수습기자로 입사하여 체육부 에 배치된 수습기자 출신 체육기자는 내가 최초였다. 지금은 공채시험에 의한 수습기자 모집이 제도적으로 정착되어 모든 언론사가 유일무이한 인 력충원 방법으로 채택하고 있지만 내가 언론계에 입문한 1958년에는 공채 시험으로 수습기자를 모집하는 언론사는 극소수로 한국일보만 해마다 수 습기자 공채시험을 정기적으로 실시하였으며, 그 외 한두 신문이 부정기 적으로 수습기자 공채시험을 실시했을 뿐 나머지 언론사는 수습기자 공채 제도를 채택하지 않은 채로 편집국 인력을 임기응변으로 그때그때 적당히 나의 스포츠 기자 시절 105
충원하고 있었다. 공채시험에 의해 입사하는 수습기자들도 대부분 정치 경제 사회부 등 외근부서와 편집 외신부 등 내근부서에 배치되었고, 체 육부에는 차례가 돌아오지 않았다. 신문, 방송 등 각 언론사에서 체육부라는 취재부서가 독립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였다. 끔찍스러웠던 6 25전란의 아픈 상처 가 조금은 아물어 들고 국내 형편이 절대빈곤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던 그 무렵 스포츠 활동도 차츰 활기를 띠어 스포츠계의 토양이 완전결빙의 동토에서 해빙기를 맞기에 이르렀다. 스포츠계가 해빙의 봄을 맞은 것은 바로 이웃나라인 일본에서 아시아 지역에서는 최초로 1964년 제18회 도 쿄( 東 京 )올림픽이 열려 일본열도를 뒤덮은 도쿄올림픽의 열기가 현해탄을 건너 한반도에까지 전해진 데서도 영향을 받았다. 스포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지자 스포츠 기사에 대한 신문독자들의 구독 욕구도 급속히 높아졌으며 신문도 이에 발맞춰 스포츠난을 넓혀 나갔다. 때마침 신문지 면도 1일 4면 발행에서 8면 발행으로 늘어나 사회면 한 귀퉁이에 스포츠난 으로 구차스럽게 곁방살이를 하던 스포츠 기사가 스포츠면이란 독립가옥 에 입주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체육부도 편집국 내의 독립 취재부 서로 자리 잡게 되었고 신입 수습기자들이 체육부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내가 수습기자 출신 1호로 체육부에 배치된 수년 뒤의 현상이었다. 신문과의 첫 인연 내가 신문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부산피란시절 고교 1학년 때였다. 부 산 천막교실에서 피란수업을 하고 있던 시절 경기고( 京 畿 高 )에서는 국내 고 교로는 처음으로 교내신문이 발행되었는데 이때 문예반 활동을 하면서 교 내신문 제작에 참여했고,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 진학한뒤 서울대학교 교 내신문인 대학신문 학생기자로 근무했다. 신문기자를 직업으로 선택하기 에 이른 것은 대학 4학년때 한국일보 수습기자 모집에 응모하여 합격통지 106 관훈저널 여름호
를 받게 되면서였다. 대학 3학년 1년간 대학신문 학생기자로 활동한 나는 대학졸업을 1년 앞둔 1958년 봄 한국일보 수습기자 공채시험에 응시하여 운 좋게 합격함으로써 언론인으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1954년 창간된 한 국일보는 창간 4주년을 맞는 젊은 신문이었다. 역사가 짧기는 했지만 젊은 신문답게 참신하고 대담한 아이디어로 기성신문의 아성에 도전하여 젊은 이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었다. 한국일보는 창간과 함께 국내언 론사로는 처음으로 공채시험을 통해 수습기자를 모집하여 언론계에 참신 한 바람을 일으켰다. 전란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고 극심한 취직난의 시 대였으므로 신문기자는 젊은이들이 선망해 마지않는 인기직업이었는데 한국일보의 수습기자 공채시험은 당시 유일한 언론계 등용문이었다. 언론사로서는 유일하게 공채시험을 실시했던 만큼 한국일보 수습기자 공모에는 항상 응모자가 1천명 이상 몰려 경쟁률이 100대1이 넘었다. 한국 일보가 수습기자 공채로 성과를 올리자 다른 언론사도 점차 수습기자 공 채를 실시하여 수습기자 공채가 언론사 인력확보 제도로 정착하기에 이르 렀다. 그러나 선발주자의 이점으로 한국일보 수습기자 공채에는 타 언론 사보다 응모자가 많았는데 한국일보 수습기자 모집에 응시자가 몰린 또 하나의 이유는 응시자격을 고교 졸업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언론사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기업체가 신입사원 공채시험의 응시자격을 4년제 대학 졸업자 및 졸업예정자로 제한하였는데 한국일보는 응시자격을 고교 졸업으로 낮추었다. 광복 이전 선린상업( 善 隣 商 業 )을 졸업한 뒤 곧바로 조선은행에 입행하여 쟁쟁한 대학졸업자와 경쟁, 한국은행 부총재까지 오른 장기영( 張 基 榮 ) 사장 은 학력보다는 개인의 능력과 재능을 중시하는 입장이었고, 신문기자는 전문적인 지식 없이 고교 졸업 정도의 지능으로 입사 후 신문의 메커니즘 을 익히기만 하면 충분히 할 수 있다는 판단으로 수습기자 응시자격을 과 감하게 낮춘 것이다. 화이트칼라의 필수조건이 4년제 대학 졸업이라는 사 회적인 통념에 도전한 장기영 사장의 결단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4년제 대 나의 스포츠 기자 시절 107
학을 졸업하지 못한 젊은 인재들을 크게 고무하여 한국일보 수습기자 공 채에 타사보다 응시자가 많이 몰린 것이다. 100대1이 넘는 높은 경쟁률을 뚫고 10명이 한국일보 수습기자 7기로 언 론계에 함께 입문했다. 입사동기는 한국일보 수습기자로 김창열( 金 昌 悅 전 방송통신위원장, 작고), 남재희( 南 載 熙 전 국회의원, 노동부 장관), 이종수( 李 鍾 秀 전 중앙일보 과학부장, 국립서울과학관 연구위원), 지동욱( 池 東 旭 전 한국 일보 경제부장), 최영철( 崔 英 喆 전 국회부의장), 고광애( 高 光 愛 주부) 기자였 고, 한국일보 영문 자매지인 코리아타임스 수습기자로 김태웅( 金 泰 雄 전 한국일보 뉴욕특파원, 작고), 정해헌( 鄭 海 憲 전 외교관), 조성찬( 趙 成 燦 전 외교 관) 기자였다. 졸업을 1년 앞두고 대학 4학년 재학 중 입사한 나는 10명의 동기 중 가장 연소했는데 지동욱, 고광애 두 기자가 나와 동년배였다. 3명의 연소자는 대학 미졸업이어서 응시자격을 고교 졸업으로 낮추지 않았다면 수습기자 공채시험의 응시자격조차 갖추지 못한 형편이었다. 동갑의 막내 3명을 제 외한 나머지 동기 입사자들은 모두 4년제 대학 졸업자여서 1년 이상 위 학 년의 선배였다. 동기생 중 홍일점인 고광애 기자는 수습기자 공채시험을 통해 언론계에 입문한 여기자 1호의 기록을 세웠다. 이화여대 사학과 4년 재학 중이던 고 광애 기자는 한국일보 수습기자 시험에 합격한 바로 그해 5월 이화여대 메 이퀸(May Queen)으로 선발되어 5월에 열리는 개교 축제에서 대관식을 가졌 다. 100대1도 넘는 경쟁률을 뚫고 여자 수습기자 1호가 탄생한 데다가 여 자 수습기자 1호가 이화여대 메이퀸이니 고광애 기자의 입사로 한국일보 는 회사 전체가 들썩들썩할 정도였다. 수습기자들은 어느 부서에 배치되느냐에 몹시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 다. 기자의 장래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코리아타임스 수습기자 3명은 일 단 별도 케이스라고 할 수 있고 한국일보 수습 7명 중 홍일점인 고광애 기 자는 문화부, 서울공대 출신인 이종수 기자는 과학부로 자연스럽게 결정 108 관훈저널 여름호
되었고 나머지 5명의 배치는 외신부에 지동욱, 편집부에 남재희 최영철, 사회부에 김창열 오도광이었다. 사회부에 배치되니 하는 일이라곤 안에서 전화 받는 것이어서 다소 실망 스러웠다. 하긴 처음 배치된 신입 수습기자이니 분위기를 익히기 위해서 라도 밖으로 나가 취재활동을 하기보다는 안에서 전화당번을 하면서 데스 크와 현장 취재기자 간의 중간연락을 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안에서 전화 당번만 하고 있으려니 답답하기만 했다. 수습기자시절 사회부 배치는 오래가지 않았고 편집서무를 거쳐 편집부 에 배치되어 뉴스면을 편집하였다. 신문사 입사 1년 뒤 대학졸업과 함께 징집영장을 받아 1년 7개월 동안 군복무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군에서도 신문기자 경력을 인정받아 1군사 보도실 요원으로 서울에 파견되어 나이 롱 군복무를 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한국일보에 복 귀해서는 편집부 근무를 하다가 5 16군사쿠데타의 소용돌이 속에서 취재 부서의 베테랑 기자들이 대거 퇴사하게 되자 경제부로 발령받아 농림부에 출입하게 되었다. 출입처인 농림부에 나가 보니 군부가 장악한 정부 행정부처의 취재여건 은 살벌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공보관이라는 직제가 신설되어 출입기자를 관리했고, 기자들은 공보관을 통해서만 취재활동을 해야 하고 여타 관리 들과는 일절 접촉할 수 없었으며, 공보관실이 작성하여 제공하는 보도자 료를 그대로 베껴 기사를 쓰는 것이 고작이었다. 출입기자들은 기자실과 그 옆의 공보관실 밖으로는 단 한 발짝도 내디딜 수 없어 기자실에 둘러앉 아 구악정부하의 물 좋은 시절 거침없이 행동하던 무용담으로 무료함을 달랬다. 쿠데타 주역 중 한 사람인 장순( 張 淳 ) 육군 준장이 현역군인 신분으 로 군사정부의 농림부 장관을 맡았는데 농림부를 출입하는 동안 기자단과 의 회식자리에서 한두 차례 장관을 만난 것이 고작이었다. 집권 직후 살벌했던 행정부처의 취재 분위기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금 씩 풀리는가 하는 시점에서 나는 경제부에서 체육부로 또다시 옮기라는 나의 스포츠 기자 시절 109
인사발령을 받았다. 경제부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신문사 편집국 취재부서 중 노른자위이고 체육부는 변두리의 찬밥부서였다. 체육부가 독립부서로 설치되어 있는 언론사가 한국일보와 서울신문 2사뿐이고 나머지 신문사 에는 부서로 존재하지도 못했으며, 독립부서로 설치된 한국일보도 부장 밑에 기자 1명뿐인 미니부서여서 노른자위 경제부에서 초가삼간도 못 되 는 체육부로 이동한다는 것은 문책인사나 좌천이 아니고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문책인사를 당할 만한 사유도 없이 노른자 경제부 에서 찬밥 체육부로 옮겨진 나의 인사에 대해 별로 놀라거나 하지 않고 당 연하다는 듯 수긍하는 것이었다. 곰곰이 따져보면 그럴 만한 이유가 전연 없는 것은 아니었다. 수습기자로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내가 스포츠를 많이 알고 스포츠 에 대한 애정과 이해가 깊은 스포츠팬이라는 사실이 사내에 널리 알려졌 다. 근무 중 틈틈이 나누는 잡담에서 내가 무심결에 스포츠에 대해 털어놓 는 견해나 지식이 일반인의 평균수준을 넘어섰던 것으로 비쳤기 때문이 다. 학교에서 체육점수를 70점 이상 받지 못했을 정도로 운동신경이 둔하 고 소질이 없던 나는 스포츠 경기 관람을 아주 즐겨 학교 운동팀이 출전하 는 경기대회라면 거의 빼놓지 않고 쫓아다니며 응원하였고, 모교팀이 출 전하지 않더라도 비중 있는 국내외 경기를 열심히 관람했다. 축구, 야구, 농구, 배구 등 4대 구기뿐만 아니라 수구, 아이스하키, 육상, 복싱 등 내가 즐긴 스포츠 경기는 폭넓었고, 경기장을 쫓아다니며 주워들은 토막정보들 이 축적된 나의 스포츠 지식은 옆에서 남이 듣고 보기에는 상당한 수준이 었다. 그래서 자연 근무시간 틈틈이 주고받는 잡담 중 스포츠에 관한 것이 라면 내가 거의 주도하는 상황이었다. 잡담을 나누던 체육부의 조동표( 趙 東 彪 ) 기자는 나에게 체육부에 올 생각 없느냐? 고 묻기도 했는데 나는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다. 체육부로 오라는 제의를 한마디로 사양했지만 조동표 기자는 국제경기 나 국내 중요경기가 있을 때면 나를 경기장으로 데려가서 함께 관람하곤 110 관훈저널 여름호
했다. 수습기자로 근무하면서 나의 스포츠에 관한 지식과 소양은 깊이를 더할 수 있었다. 한국일보에서는 아사히( 朝 日 ), 요미우리( 讀 賣 ) 등 일본 신문 과 미군 영자지인 성조지(Stars & Stripes)를 구독할 수 있었는데 일본 신문과 성조지의 스포츠난을 통해 미국의 메이저리그, 일본 프로야구, 국제스포 츠 동향을 접할 수 있었고, 외신부에 설치된 텔레타이프로 들어오는 외신 의 스포츠 뉴스가 나의 스포츠 소양을 깊게 해주었다. 당시 메이저리그에서는 뉴욕양키스의 미키 맨틀, 로저 매리스의 쌍둥이 M타선이 베이브 루스의 1시즌 최다 홈런기록에 도전하며 팀메이트이면 서도 치열한 홈런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외신부 소속도 아니면서도 틈만 나면 텔레타이프로 달려가 맨틀과 매리스의 홈런포 작렬 여부를 체 크했고, 루스의 기록경신이 초읽기에 들어갔을 때는 홈런이 터질 때마다 내가 기사를 직접 써서 데스크를 설득, 신문에 내도록 했다. 쌍둥이 M의 동 생 격인 로저 매리스가 61호 홈런을 날려 33년 만에 베이브 루스의 기록을 경신했을 때 국내에서는 한국일보가 가장 먼저 보도했고, 타 신문은 한국 일보를 보고서야 하루 늦게 뒤따라 보도했다. 외신부나 체육부 기자들은 해외 스포츠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외면했으나 체육부나 외신부에 속하지 않은 내가 기사를 내야 한다고 주장하며 설쳐댔기 때문이다. 노른자위 경제부 뒤로하고 찬밥 체육부로 젊은 신문을 표방한 한국일보는 국내 일간신문사 중 스포츠관계 사업을 가장 활발하게 주최하였다.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의 모국방문경기, 京 - 釜 대역전경주, 연날리기 대회, 전국장사씨름을 주최하였고 외국팀을 초청하 여 국제경기도 수시로 주최하였다. 자사 주최 국내외 경기에 대해 신문이 지면을 이례적으로 크게 할애하여 사회면 절반 정도를 스포츠 기사로 채 우곤 했다. 그럴 때면 체육부 기자 1명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워 타 부서 의 지원을 받는데 이때 체육부를 지원하는 인력은 사회부에서 차출되곤 나의 스포츠 기자 시절 111
했다. 그런데 내가 스포츠에 밝다는 것이 알려진 뒤에는 사회부 기자 대신 내가 체육부 일을 돕는 인력으로 지명차출되었다. 내가 지명차출되었을 때 소속부장들도 나의 본업무에 지장이 없는 정도로 도와주라고 지시하여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체육부 일을 도와주곤 했다. 체육부 기자 정원이 1 명뿐이고 체육부엔 조동표 기자가 잘하고 있는데 설마 나를 그곳으로 보 내지는 않겠거니 하고 순진하게 판단했다. 송병효 경제부장도 야구를 좋 아해서 나에게 메이저리그와 일본 프로야구에 대해 자주 물으면서도 이 봐 오 기자, 그쪽으로 너무 깊이 들어갔다가는 체육부로 잡혀갈지도 모르 니 몸조심하게나 하고 충고 겸 경고를 하기도 했다. 송 경제부장의 경고를 듣고는 나 역시 취미 이상으로 스포츠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사리고 있었는데 송 부장의 경고 는 의외로 빨리 현실로 다가왔다. 체육부를 증원 강화하는 신문사 방침이 전격적으로 결정되어 스포츠를 잘 아는 내가 체육부 증원 0순위에 오른 것 이다. 체육부 증원방침은 장기영 사장의 결단이었다. 당시 장 사장은 대한 축구협회장을 맡고 있었으며 월드컵축구 지역예선의 결승인 한국-유고전 의 어웨이 경기를 치르기 위해 한국대표축구팀을 이끌고 유고 원정을 다 녀왔다. 유럽여행에서 귀국한 장 사장은 신문사 간부회의에서 한국일보 자매지로 발행되고 있는 서울경제신문의 4면 전면을 스포츠면으로 제작 한다는 방침을 밝히고 서울경제 편집국에는 체육부가 없으니 스포츠면으 로 편집하는 서울경제 4면 스포츠면 제작을 한국일보 체육부가 담당하며, 한국일보 체육부는 한국일보 스포츠면과 새로 나가는 서울경제 스포츠면 을 동시에 제작한다는 원칙을 제시하면서 그에 대비하여 체육부 인원을 증원 보강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장 사장은 오래전부터 스포츠 전문지 발행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그 전초작업으로 서울경제 4면을 전면 스포츠면으로 제작하여 스포츠 전문 지의 가능성을 점검하기로 구상하고 유럽여행 중 그 구상을 구체적인 계 획으로 치밀하게 다듬은 뒤 귀국과 동시에 간부회의에서 밝힌 것이다. 112 관훈저널 여름호
체육전문지 발행은 이용일( 李 容 一 ) 체육부장의 꿈이기도 했다. 오랜 꿈이 성사단계에 이르자 한껏 고무된 이용일 체육부장은 조동표 기자와 상의하 여 부랴부랴 체육부 증원계획을 짰는데 경제부에서 나를 차출하고 5 16 후 쉬고 있던 사회부 기자 1명을 복귀시키며 외부에서 또 한 명을 보강한 다는 내용이었다. 송병효 경제부장은 나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다가 버 티지 못하고 미스터 오, 어쩔 수 없으니 체육부로 가서 1년만 꾹 참고 버티 게. 그러면 내가 경제부로 다시 데려올 테니까. 그러게 내가 스포츠를 좋 아해도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취미와 본직을 구분했어 야지 하면서 나를 보내주었고, 언론계 선배인 이용일 체육부장에게는 1 년간 빌려드리는 겁니다. 1년 뒤에는 꼭 돌려보내주셔야 합니다 하고 거 듭 다짐까지 했다. 대세가 이러하니 나는 아무 말 못 하고 노른자위 경제부 를 뒤로하고 찬밥 체육부로 갈 수밖에 없었다. 증원된 체육부 진용은 편집부국장 겸 체육부장 이용일, 체육부 차장 조 동표, 기자 조두흠( 曺 斗 欽 ), 오도광( 吳 道 光 ), 이태영( 李 台 永 )으로 짜였고 편집 은 한인성( 韓 仁 聖 ) 기자가 전담하였다. 조동표 차장은 기자에서 1계급 승진 했고, 조두흠 기자는 한국일보 수습 6기로 나보다 1기 선배였고, 경향신문 에서 스카우트된 이태영 기자는 베를린올림픽 당시 동아일보 체육기자로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살사건의 주역으로 옥고를 치르기까지 한 이길용( 李 吉 用 ) 선생의 아들이다. 이길용 선생은 6 25 때 납북되었고 아들인 이태영 기자가 아버지의 길을 이어받아 경향신문에서 체육기자로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한국일보에서 스카우트한 것이다. 부장 1명에 기자 1명의 미니부서인 체육부가 5명으로 증원되어 서울경제신문 4면을 완전한 체육 면으로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그 뒤 수습기자를 받아들이고 여기자도 새로 보충하여 가족이 늘어났다. 전면 스포츠면으로 편집하는 4면의 상단에는 서울경제신문이라는 제호 를 옆으로 냈는데 스포츠면으로 제작되는 4면이 1 3면의 경제뉴스면과 는 별도로 제작되는 것임을 알리기 위한 장 사장의 아이디어였다. 스포츠 나의 스포츠 기자 시절 113
면은 서울경제신문 입장에서는 치외법권 영역이나 다름없었다. 한국일보 체육부가 제작하였으므로 서울경제 편집국장은 권한 밖이어서 전혀 관여 할 수 없었고, 실제로 관여하지도 못했다. 4면이 스포츠면으로 제작될 때 서울경제 편집국장은 4의 3국장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옮기자마자 첫 특종 백인천 일본프로야구 行 서울경제신문 4면의 스포츠면 제작은 1961년 12월부터 시작되었다. 스 포츠난이 거의 유명무실하여 경기 스코어조차 제대로 보도되지 않던 시 절, 한 면을 온통 스포츠 기사로 제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요즘 에는 스포츠 경기가 연중무휴로 계속되지만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찬바 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11월이면 거의 모든 스포츠가 경기활동을 중단하 고 동면에 들어가는 아웃시즌이어서 기삿거리가 절대부족이었다. 겨울철 에는 스피드스케이팅, 아이스하키, 피겨스케이팅 등 얼음 위에서 하는 동 계종목 경기가 있었으나 제빙시설이 전혀 없이 자연빙에 의존해야 했으므 로 얼음 위에서 벌이는 동계종목은 한강이 완전결빙되는 1 2월의 엄동설 한에 자연빙 위에서 경기를 펼치거나 서울운동장 육상경기장 테니스 코트 에 물을 뿌리고 얼린 다음 대회를 열었다. 스포츠 경기가 전혀 열리지 않는 아웃시즌이었으므로 운동장처럼 넓은 지면을 기획기사로 메워야 하기 때 문에 하루하루가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경기활동이 그치고 동면기에 들어간 아웃시즌에 스포츠면을 제작하자 니 기획기사와 읽을거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신선한 읽을거리 소재 가 된 것은 해외 스포츠였다. 외신부에 부탁하여 넘겨받은 스포츠관계 외 신파일은 가위 해외 스포츠 읽을거리의 보고라고 할 만했고, 일본 스포츠 전문지와 성조지도 중요한 소스가 되었다. 이 같은 소스를 참고하여 메이 저리그 뉴욕양키스의 MM타선, 홈런왕 행크 아론, 일본 프로야구의 한국 계 투수 가네다( 金 田 正 一 ), 재일동포 강타자 장훈( 張 勳 일본명 하리모도 張 本 114 관훈저널 여름호
勳 ), 일본인의 영웅 나가시마( 長 島 茂 雄 ), 중국계 홈런타자 왕정치( 王 貞 治 ), 그 리고 프로복싱 헤비급의 플로이드 패터슨-스웨덴 출신 백인 번개펀치 잉 게마르 요한손 간의 흑백대결과 검은 철권 소니 리스튼에 관한 읽을거리 를 열심히 써댔다. 떠버리 무하마드 알리는 로마올림픽 메달리스트로 4각 의 정글에 뛰어들어 그 당시 캐시어스 클레이라는 본명으로 무패가도를 치달리며 선풍을 몰아치고 있었다. 해외 스포츠 화제는 매우 인기 있는 읽 을거리였고, 우선 사내반응이 매우 좋았고 독자들의 호응이 뜨거우니 타 사도 해외 스포츠 화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마침 이때 대만 타이베이( 臺 北 )에서 제4회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가 열 려 좋은 기사자료가 되었다. 국제경기가 많지 않던 당시는 아시아 야구선 수권대회가 매우 비중 있는 대회였지만 국내에서는 라디오방송 중계팀만 파견되었을 뿐 취재기자가 특파되지 않았다. 서울에 앉아 라디오 중계방 송, 외신 텔레타이프와 국제전화에 의존하여 기사를 만들어 지면을 메웠 다. 이 대회에는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출신 투수 김성근( 金 星 根 ), 외야수 배 수찬( 裵 壽 讚 ), 현성호( 玄 成 昊 ) 등이 국내선수와 함께 대표팀으로 출전했다. 한국은 일본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준우승에 머물렀다. 이 대회에 한국 대표팀 주전포수로 참가한 백인천( 白 仁 天 )이 귀로에 일본프로야구 도에이 ( 東 映 ) 플라이어즈와 계약을 맺고 국내최초의 일본 프로야구 선수가 되었 는데 나는 체육부로 옮긴 지 한 달 남짓한 새내기로 백인천의 일본프로야 구행을 특종했다. 백인천의 일본프로야구행 특종은 미군 성조지에서 찾아낸 노다지였다. 기삿거리가 없을까 하고 성조지 스포츠난을 훑어보니 한국선수가 일본프 로야구 도에이 플라이어즈와 계약을 맺었다는 외신기사가 단신으로 취급 되었다. 도에이 플라이어즈 하면 재일동포 출신의 장훈이 소속한 팀으로, 재일동포 학생야구팀 일원으로 모국을 방문하여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장 훈은 국내에도 팬이 많았고 그가 소속한 도에이 플라이어즈는 국내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당시 백인천은 경동고( 京 東 高 )를 졸업하고 실업팀인 나의 스포츠 기자 시절 115
농협 야구부에서 뛰고 있었으며 고교 시절부터 대형 포수로 주목받았고 한국대표팀 주전포수이자 중심타자로 활약한 유망주여서 그가 도에이 플 라이어즈에 입단하여 장훈과 함께 뛰게 된다는 것은 빅뉴스가 아닐 수 없 었다. 나는 서울에서의 확인취재를 거쳐 이를 기사화했다. 백인천의 도에이 플 라이어즈 입단 보도는 경기활동이 없는 스포츠 동면기에 멋진 특종이 되었 다. 낙종한 타 신문은 낙종의 분풀이로 백인천의 일본프로야구행을 부정적 으로 보도하며 맞불작전을 펼침으로써 백인천의 일본프로야구행은 연일 각 신문의 스포츠면에 오르내리면서 스포츠팬들의 관심을 끌어모았고, 서 울경제신문의 스포츠면 확충을 확실하게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백인천의 일본프로야구행은 지금 같았으면 국내 모든 신문이 동시에 보 도하여 특종이 되려야 될 수 없는 기사였다. 그 기사가 특종이 된 상황은 대충 이렇다.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한 한국대표팀은 서울-타이베 이 간 직행 항공편이 없어 일본 도쿄를 경유하여 귀국하였는데 항공편 접 속관계로 경유지인 도쿄에서 하루를 머물렀고, 전부터 백인천과 물밑에서 입단교섭을 벌여온 도에이 구단이 그 기회를 이용하여 백인천과 정식계약 을 맺어 발표하자 일본 신문이 모두 보도했고, 외신조차 일본 신문의 보도 를 번역하여 내보냈는데 국내에서만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성조지 기사를 보고서야 한국일보와 서울경제신문이 뒤늦게 특종한 것이다. 도쿄특파원 이 일본 신문의 스포츠면을 조금만 관심 있게 정독했든지, 국내 외신부에 서 텔레타이프를 세밀하게 체크했더라면 즉각 보도될 수 있는 뉴스였으나 모두가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체육부로 옮긴 지 한 달 안팎의 내 가 성조지를 보고 뒤늦게 특종을 할 수 있었다. 체육부로 옮겨온 뒤 취재현장을 뛰어보니 체육기자들의 스포츠에 대한 이해와 소양이 뜻밖에도 부실했다. 기자경력 4년차였지만 체육부 외근취 재는 신출내기라고 할 수밖에 없는 나보다도 처지는 것 같았다. 그동안 재 일동포 학생야구단의 모국방문경기 등을 가까운 위치에서 관람하면서 나 116 관훈저널 여름호
는 어깨 너머로 야구 스코어 기록법을 익혀 야구 스코어북을 해독할 수 있 었는데 타사 체육기자들은 야구 스코어북을 거의 해독하지 못하는 것이었 다. 그 외 경기규칙이나 스포츠에 대한 지식과 정보도 시원치 못했다. 스코 어북을 힘들지 않게 해독하고 경기규칙이나 스포츠에 대한 기본지식을 갖 춘 나는 매우 스포츠에 정통하다는 평을 들으며 체육기자 생활을 시작했 다. 불과 반세기 전의 일화지만 지금 들으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얘 기 같기만 하다. 첫 해외출장과 도쿄올림픽의 감동 젊은 힘이 약동하는 스포츠 현장을 거침없이 누비며 자유롭게 펼치는 체 육부의 취재활동은 나에게는 매우 재미있었다. 경제부 기자로 농림부를 출 입할 때는 군부 집권초기여서 기자실 밖을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고 서슬 퍼런 군인들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펴야 했기 때문에 몹시 답답했지만 체 육부서는 거칠 것 없이 뛰어다녔으므로 신바람이 났다. 매일매일 써내는 기사량도 많았고, 공휴일에는 각 경기장에서 경기가 많이 열려 휴일도 없 이 스포츠 현장을 누볐다. 내가 취재하고 쓴 기사가 특호활자 제목과 함께 스포츠면 톱기사로 다루어졌을 때는 가슴 뿌듯한 긍지마저 느끼기도 했다. 스포츠면 편집을 하는 한인성 기자는 건강한 체질이 아니어서 이따금 결 근도 하였는데 한 기자가 결근하면 편집부에서 따로 대타를 내세우지 않 아 내가 편집까지 하기도 했다. 취재하고 기사 쓰고 판 짜며 나는 체육부의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뛰었다. 일에 쫓겨 바쁘게 돌아가다 보니 노른자위 부서인 경제부를 떠나온 아쉬움을 느낄 만한 여유도 없었고 경제부로 돌 아가야 한다는 생각도 별로 하지 못했다. 송병효 경제부장은 이용일 부국 장에게 몇 차례 그동안 미스터 오를 잘 써먹었으니 이제는 돌려보내시죠 하고 나의 경제부 복귀문제를 꺼냈지만 그때마다 이 국장은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에요. 나보다도 위에서 허락을 하지 않을걸요 하면서 완곡하게 나의 스포츠 기자 시절 117
거절하곤 했다. 나는 그저 두 상사의 대화를 듣기만 했다. 스포츠 기자로 뛰어다닌 지 1년 반쯤 만에 나는 첫 해외출장 기회를 얻 었다. 도쿄올림픽 단일팀 구성을 위한 남북올림픽위원회(NOC) 대표회담 취재였다. 남북올림픽위원회 대표회담은 홍콩에서 열렸다. 구소련을 비롯 한 공산권 국가들이 1952년 제15회 헬싱키올림픽부터 대회에 출전하기 시작하여 서방 각국을 압도하는 호성적을 올리자 북한도 NOC를 조직하 고 1955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가입신청을 내며 올림픽대회 출전을 시도하였다. 이에 대해 대한올림픽위원회(KOC)는 IOC가 1국1NOC를 원 칙으로 하고, 1947년 KOC가 한반도를 총괄하는 유일한 합법 NOC로 인 정받았으므로 북한 NOC는 합법적인 NOC로 인정받을 수 없으며 한국 올 림픽선수단에는 실제로 북한출신 선수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방어논리 로 북한의 올림픽 진출을 막아냈으나 해가 거듭될수록 북한의 올림픽 진 출시도는 집요해졌고 공산권 국가들이 북한을 지원하고 나서 IOC로서도 더 이상 북한의 요구를 묵살할 수 없었으므로 남북한 단일팀 구성을 강력 히 권고하여 남북 NOC 대표가 단일팀 구성의사가 전혀 없음에도 동상이 몽으로 협상 테이블에 마주앉았다. 남북 NOC 대표회담은 휴전 성립 이후 판문점이 아닌 장소에서 남북 대 표가 형식적으로나마 협상 테이블에 마주앉은 최초의 케이스여서 내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홍콩회담은 두 차례 열렸으며 내가 출장취재한 회담 으로는 두 번째였다.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루어지기 전인 당시엔 해외여 행이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었고, 신문기자들의 단기 해외출장도 동료 들로부터 선망의 표적이었다. 한 달도 더 걸리는 신원조회 등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여권을 발급받고 떠난 홍콩출장은 꿈만 같았다. 동아일보 이효식( 李 孝 植 ), 서울신문 박영준 ( 朴 英 俊 ), 경향신문 신덕상( 申 德 相 ), 동화통신 이종성( 李 種 成 ) 기자 등이 함께 출장을 갔는데 일행 중에서는 내가 가장 경력이 짧고 나이가 어린 애송이 였다. 처음으로 해외에 나간 나에게 쇼핑천국으로 널리 알려진 홍콩은 완 118 관훈저널 여름호
전히 별천지였다. 스타페리를 처음 타고 홍콩사이드와 구룡반도를 오가 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온갖 상품이 넘쳐흐르는 상가를 둘러보기도 했다. 한국의 KOC 대표단은 중앙정보부 간부들로 구성되어 김진구( 金 振 九 )라 는 해병장교 출신이 수석대표를 맡았고 민용식( 閔 容 植 )이라는 역시 해병장 교 출신이 좌지우지했으며, 체육인으로는 후에 대한체육회장을 지낸 김종 열( 金 鍾 烈 ) 체육회 이사와 런던올림픽 동메달리스트이자 태릉선수촌장을 역임한 김성집( 金 晟 集 ) 체육회 사무총장이 포함되었으나 특별한 역할은 하 지 못했고 실무 수행원들도 거의 중앙정보부 직원 일색이어서 KOC 대표 란 허울뿐이었다. 회담장은 구룡반도에 자리한 페닌슐라 호텔이었다. 페닌슐라 호텔은 홍 콩에서 손꼽히는 특급호텔로 윌리엄 홀덴과 제니퍼 존스가 주연한 영화 모정 을 촬영한 호텔이며 건물에서부터 빅토리아풍의 중후한 분위기가 풍 겼다. KOC 대표단은 항공편으로 회담 이틀 전에 현지에 도착했고, 북한 NOC 대표단은 회담 전날 중국 광저우에서 열차편으로 도착한다는 것이 었다. 서울에서부터 동행한 기자들과 함께 구룡역으로 나가 열차편으로 오는 북한 NOC 대표의 도착을 취재하는 것이 나의 첫 해외 취재활동이었 다. 북한 NOC 대표단은 수석대표 김기수( 金 基 洙 )를 비롯하여 7 8명 되었 는데 수석대표인 김기수는 씨름선수 출신이라는데 어깨가 딱 벌어진 당당 한 체격이었다. 국내기자와 외신기자들이 그를 에워싸고 질문공세를 폈으 나 김기수는 두고 보시오. 잘될 겁니다 만 되풀이하고는 숙소로 떠났다. 그러나 홍콩의 남북 NOC 대표 2차 회담은 요란스럽고 떠들썩하게 막을 올리고는 아무런 합의도 못 하고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수석대표가 악수 만 나누고 회의 절차와 의제 등 세부사항을 결정하기 위한 소위원회를 구 성했으나 소위원회가 두어 차례 만나더니 그대로 회담이 결렬되고 말았 다. 분단국의 단일팀 구성 올림픽 출전은 동서독의 선례가 있어 동서독 단 일팀의 선례에 따라 IOC의 중재로 IOC본부에서 열린 그전의 회담에서 흰 바탕에 파란색으로 한반도를 그려 넣은 도안을 단기로 하고 민요 아리랑 나의 스포츠 기자 시절 119
을 단가로 하는 기본원칙을 합의한 바 있어 홍콩회담에서는 선수단 규모 와 남북간 비율, 출전종목, 선발방식 등 실무문제를 협의할 예정이었으나 남북 모두 단일팀 구성에 뜻이 없어 의제조차 결정하지 못했고, 두 차례 접 촉에서는 서로 말꼬리를 잡고 얼굴을 붉히며 고성으로 다투기만 했다. 두 번째 접촉을 마친 뒤 북측 대표는 회담장에 나오지도 않고 아무런 연락 없 이 아예 호텔에서 체크아웃하고 돌아가 버렸다. KOC 대표만이 회담장에 서 오지 않는 북측 대표를 기다리다가 회담결렬을 선언하여 홍콩회담은 해프닝으로 끝나 버렸다. 회담이 너무도 싱겁게 끝나 서울에서 모처럼 달려가 취재한답시고 요란 을 떨던 기자들은 다소 실망하고 허탈감에 빠지기도 했으나 해외여행이 하늘의 별 따기와 같던 시절이라 외국바람을 쏘이고 홍콩, 도쿄 등 국제도 시를 둘러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홍콩의 남북 NOC 대표회담이 결렬되자 북한은 IOC 가입이 이루어졌고 도쿄올림픽에는 남북한이 개별참가하는 것으로 교통정리되었다. 1964년 제18회 도쿄올림픽은 올림픽사상 동양에서 최초로 열린 올림픽이었고, 일 본열도를 뜨겁게 달군 도쿄올림픽의 열기는 현해탄을 넘어 한반도에까지 전해졌다. 올림픽 무대에서의 남북 스포츠 대결이 예상되었으므로 국내신 문들은 저마다 취재팀을 구성하여 특파했는데 나는 한국일보 취재팀의 일 원으로 발탁되어 도쿄올림픽을 참관했다. 서울경제신문 스포츠면을 제작 하는 한국일보는 이용일 부국장을 단장으로 하여 체육부 조동표 차장, 오 도광 기자, 사회부 장정호( 張 廷 鎬 ) 부장대우, 사진부 조용훈( 趙 鏞 壎 ) 기자, 백 형인( 白 炯 寅 ) 기자, 코리아타임스 김태웅 기자로 취재팀을 구성하여 현지에 특파했다. 한국일보 취재팀은 국내언론사 중 가장 규모가 컸다. 도쿄올림픽은 너무도 감동적이었다. 올림픽은 보름 동안 열리지만 대회 에 앞서 열린 남자농구 예선 등이 있어 개막 10여일 전 현지에 파견되어 일 본에는 20여일 머물렀는데 인류의 제전으로 불리는 올림픽대회 참관은 너 무도 감동적이었다. 그 후 동 하계 올림픽과 아시아경기대회 등 국제종합 120 관훈저널 여름호
경기대회를 10여 차례 참관하였고, 참관한 대회가 저마다 감동을 안겨주 었지만 처음 참관한 도쿄올림픽의 감동이 가장 강렬하고 선명하게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한국에 배정된 도쿄올림픽의 취재기자 ID카드가 제한되어 한국일보 취재팀에서는 이용일 단장만 ID카드를 발급받아 대회기간 중 프 레스하우스에 투숙할 수 있었고 나머지 멤버는 취재카드만 받고 호텔의 큰방 1개를 빌려 합숙하는 등 불편도 겪었다. 도쿄올림픽에 개별출전권을 따낸 북한은 도쿄까지 선수단을 보냈다가 육상 여자 800m의 세계기록을 보유하고 있어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로 지 목된 신금단( 辛 今 丹 )이 국제연맹의 징계로 출전금지당하자 IOC 측과 갈등 을 빚은 끝에 대회개막 직전 철수하는 소동을 빚었다. 신금단의 징계는 동 서간 줄타기 외교를 벌이던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대통령이 IOC가 공 인하지 않은 신생국 경기(가네포)를 주최하자 북한이 이에 동조하여 신금단 을 무리하게 대회에 참가시킨 것이 화근이었다. 북한선수단은 배편으로 니가타( 新 瀉 )에 도착한 뒤 기차로 도쿄 우에노( 上 野 )역으로 이동했는데 북한선수단이 기차를 타고 오는 모습을 취재하려고 우에노역에 갔을 때는 6 25전란 당시의 붉은 천하 가 되돌아온 듯한 착각 을 느낄 정도로 살벌하고 광적이어서 오싹 전율마저 느껴졌다. 우에노역 플랫폼은 이마에는 붉은 띠, 손에는 인공기를 든 조총련 조직원들로 가득 찼고, 북한선수단을 실은 열차가 역구내로 들어서자 객차 안팎에서 김일 성노래, 인민공화국노래, 빨치산노래를 광적으로 불러댔다. 이 모습을 카 메라에 담던 한국 사진기자가 조총련 청년들에게 둘러싸여 곤욕을 치르는 등 분위기는 험악하다 못해 살벌하기까지 했다. 북한선수단이 대회 개막을 앞두고 한바탕 쇼를 벌인 뒤 도쿄에서 철수할 때는 1 4후퇴 당시 남하하여 서울에서 살고 있던 신금단의 아버지 신문준 ( 辛 文 濬 ) 씨가 당국의 주선으로 도쿄까지 가서 조총련 본부건물 앞에서 철 수하는 신금단과 만나는 눈물의 부녀상봉이 분단의 비극을 부각시켰다. 북한의 예측하지 못한 철수 소동으로 여자배구 등에 빈자리가 생기자 한 나의 스포츠 기자 시절 121
국은 대회조직위원회의 요청으로 해체했던 여자배구대표팀을 급하게 재 소집하여 대회에 참가하는 등 주최측에 최대한 협조하였다. 주최측에 적 극 협조하여 북한의 빈자리를 메우느라고 한국선수단 규모는 210명으로 늘어나 참가국 중 10위 이내의 매머드 선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목마르게 기대했던 금메달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은메달 2개, 동메달 1개를 획득, 선 수단 규모에 비해 성적이 너무도 초라했다. 축구, 배구, 농구 등 단체 구기 종목에서는 전패의 참담한 기록을 남겼다. 한국선수단의 성적이 초라하긴 했어도 맨발의 검은 마라톤선수 아베베 의 올림픽마라톤 2연패,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들이 겨루는 육상 100m 결승의 폭발적인 레이스 등 세계최고 기량의 불꽃 튀는 접전을 현장 에서 육안으로 생생하게 관전할 수 있어서 도쿄올림픽은 나에게 더할 수 없이 감동적이었다. 올림픽이 어째서 인류의 제전 혹은 평화와 우정의 제 전이라고 불리는지를 도쿄올림픽 참관으로 비로소 터득할 수 있었다. 도쿄올림픽을 다녀온 뒤 나의 경제부 복귀문제는 더 이상 논의되지 않았 다. 나를 경제부로 복귀시키겠다고 다짐했던 송병효 경제부장이 부장직에 서 물러난 뒤 아예 한국일보를 떠난 데다가 도쿄올림픽의 감동을 감명 깊 게 체험한 나로서는 도쿄올림픽이 끝나자마자 체육부를 떠나겠다고 하면 단물만 빨아먹고 도망치는 것 같아 이용일 부국장이나 조동표 차장과의 의리상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스포츠 전문지 일간스포츠 창간 일본열도를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던 도쿄올림픽의 열기는 한반도에도 영향을 끼쳐 도쿄올림픽 이후 국내 스포츠 활동이 눈에 띄게 활성화되었 다. 야구, 축구, 농구, 배구 등 단체구기가 대중의 인기를 끌어모았고 신문 지면이 8면으로 늘어남으로써 스포츠면도 독립된 면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중앙 종합지들은 체육부를 편집국 내 독립 취재부서로 설치 운 122 관훈저널 여름호
영했다. 부장과 데스크는 주로 사회부 등 타 부서에서 경력을 쌓은 경험자 들이 맡았으나 수습기자가 배치되어 일선취재를 맡았다. 체육부는 찬밥 신세에서 벗어나 차츰 위상을 정립하기 시작했다. 1사1체육기자 시절에는 체육기자 한 사람이 스포츠 전 종목을 커버하였으나 체육부가 설치되고 기자 수가 많아지자 체육기자도 경기종목별로 전문화되기에 이르렀다. 대 한체육회에 가맹된 경기단체가 40개에 가까웠으므로 신문사별로 체육기 자 1명이 4 5개 종목씩 분담하였다. 이에 따라 체육기자도 경기종목별로 전문화되었고, 스포츠 기사도 단순한 승패 보도에 그치지 않고 경기상보, 작전분석, 전력평가 등 전문화되어 갔다. 한국의 스포츠 저널리즘이 본궤 도에 올라 성장 발전의 기반이 다져지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스포츠 저널리즘이 궤도에 오를 무렵 스포츠 저널리즘의 또 하나의 이정표인 스포츠 전문지 일간스포츠가 창간되었다. 자매지인 서울경제신 문의 한 면을 완전 스포츠면으로 제작해온 한국일보가 또 하나의 자매지 인 일간스포츠를 창간한 것이다. 서울경제신문의 스포츠면 제작은 스포츠 전문지 발행을 위한 준비라고 할 수 있었는데 서울경제신문 스포츠면을 통해 5년여에 걸쳐 스포츠 전문지의 가능성을 나름대로 주의 깊게 점검한 장기영 사장은 1967년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서울경제신문 지면을 서울 경제 편집국으로 완전 환원시키고 스포츠 전문지 발행을 지시한 것이다. 스포츠 전문지의 제호는 일간스포츠로 정해졌고, 창간준비 실무작업의 임 무는 한국일보 체육부에 주어져 이용일 편집부국장 겸 체육부장이 창간작 업을 총지휘했다. 한 달여의 준비작업 끝에 일간스포츠는 1967년 9월 27 일 첫 호를 내고 창간했다. 일간스포츠는 편집국체제만 갖추었고 공무국, 영업국, 광고국, 기타 지원부서는 한국일보에 전적으로 의존했으며, 편집 국도 한국일보 편집국 사무실의 한 귀퉁이에 자리 잡았다. 창간 준비작업을 지휘한 이용일 한국일보 편집부국장 겸 체육부장이 일 간스포츠의 초대 편집국장에 임명되었고 조동표 체육부 차장이 체육부장 에 승진하여 일간스포츠와 한국일보 체육면 제작을 총괄했으며 나는 체육 나의 스포츠 기자 시절 123
부 차장으로 임명되었다. 일간스포츠와 한국일보 양쪽의 통합 체육부로 운영되던 체육부는 얼마 뒤 분리되어 조동표 부장이 일간스포츠 편집부국 장 겸 체육부장으로 승진하고 내가 한국일보 체육부장에 올랐으나 한국일 보 체육부는 부장 밑에 기자 1명만 배치되었고 실제로는 통합운영이나 다 름없었다. 편집국은 취재부서로 체육부 레저부 연예부 등 3개 부를 두었 고 내근부서는 편집부와 교정부로 구성되었다. 연예부와 레저부는 국내 일간신문 편집국에서는 처음으로 설치된 취재부서였다. 일본 스포츠 신문 을 모델로 하여 스포츠 기사와 함께 연예 오락 등 젊은 독자층의 취향에 맞는 기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기로 편집방침을 정하고 연예기사를 담당하 는 연예부와 오락기사를 담당하는 레저부를 신설한 것이다. 연예부 기자 는 외부 주간지에서 스카우트했고 레저부 기자는 한국일보의 잉여인력을 재활용, 배치했다. 이때 한국일보가 자매지로 창간한 일간스포츠는 한국 최초의 스포츠 전 문지는 아니었다. 5 16쿠데타 직후인 1962년 제호가 똑같은 일간스포츠 가 창간되었으나 경영난으로 악전고투하다가 1년도 버티지 못하고 경제전 문지로 전환하였으며 제호도 한국경제신문으로 바꿨다. 굳이 따진다면 5 16 직후 창간된 일간스포츠가 한국 최초의 스포츠 전문지로 기록되겠으 나 1년도 버티지 못한 채 단명했으므로 존재가치를 별로 인정받지 못한다. 5 16 다음 해 창간되었다가 단명했던 일간스포츠를 선발 일간스포츠, 한국일보 자매지로 창간된 일간스포츠를 후발 일간스포츠라고 한다면 후 발 일간스포츠는 선발 일간스포츠의 전철을 밟지 않고 창간 초부터 호조 를 이루었다. 광고수주와 보급망 구축 등에서 한국일보의 기존조직과 노 하우를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스포츠 전문지가 정착 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성숙을 기다려 창간시기를 택한 것도 성공의 중요 한 원인이었다. 창간시기의 적절한 선택은 장기영 사장의 혜안이었다고 평가된다. 5 16 이듬해 서울경제신문의 4면을 스포츠면으로 제작하기 시 작할 때 장 사장은 이미 스포츠 전문지 창간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시대적 124 관훈저널 여름호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서울경제신문의 4면을 스포츠면으로 제작, 스포츠 전문지의 가능성을 점검하면서 창간시기를 기다리는 신중함 을 보였는데 바로 그 시점에 선발 일간스포츠가 섣불리 창간되었다가 실 패의 고배를 들고 만 것이다. 결국 신중하게 여건의 성숙을 기다리며 능력 을 키우다가 창간시기를 절묘하게 선택한 장 사장이 후발 일간스포츠를 성공으로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일간스포츠는 창간 초부터 가판의 비중이 매우 높았다. 일간스포츠의 독 자층은 어쩔 수 없이 스포츠팬들이기 마련이고 스포츠팬은 예나 지금이나 젊은이들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일간스포츠 독자들은 집에서 정기구독을 하기보다는 매일 아침 가판대에서 일간스포츠를 사서 출근길이나 등굣길 차내에서 일간스포츠를 열독했다. 당시 국내에서 가장 인기를 모았던 경 기는 고교야구였다. 고교야구 전국대회가 열리면 동대문야구장은 입추의 여지없이 초만원을 이루며 열기에 휩싸이곤 했는데 고교야구 전국대회는 주요 일간신문이 대한야구협회와 공동주최했다. 조선일보가 청룡기 전국 야구선수권대회, 동아일보는 황금사자기 지구별고교야구쟁패전 그리고 중앙일보는 쌍룡기 전국우수고교야구대회를 주최하고 있었으나 한국일 보만 고교야구 전국대회를 주최하지 못했다. 한국일보는 고교야구 전국대회 대신 여름방학 기간에 재일동포 학생야 구단 모국방문경기를 주최했다.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의 모국방문경기는 그 당시까지 일본에 비해 낙후되었던 야구기술 도입에 크게 기여했으나 60년대 후반부터 인기가 하락되었다. 초기에는 재일동포팀이 국내 고교팀 보다 실력이 월등했으나 한국 고교야구의 실력이 거의 일본 고교야구의 수준을 따라잡게 되자 여름방학 기간에 선수를 끌어모아 구성한 급조팀인 재일동포 학생야구팀은 국내 고교팀과 대등한 경기를 하기가 점차 어려워 졌다. 그러자 야구팬들의 관심도 갈수록 떨어지고 현지에서는 해마다 선 수단 구성도 쉽지 않아 재일동포 2세 선수와 모국을 연결하는 가교역할을 하던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의 모국방문경기가 존폐위기에 빠졌다. 나의 스포츠 기자 시절 125
인기하락의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모국방문경기를 중단하고 신설한 고 교야구대회가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였다. 한국일보 체육부장이던 나는 고교야구연맹과 새로운 전국고교대회 창설에 동분서주한 끝에 어렵 사리 봉황대기 대회를 탄생시켰다. 그러지 않아도 운동선수들의 학업소홀 이 사회문제로 거론되고 있는 판에 산하단체인 고교야구연맹과 공동주최 로 고교야구 전국대회를 신설한다고 하니 야구협회에서는 난색을 표시했 으나 김종락 야구협회장과 장기열 사장 간의 합의로 실무진의 반대를 무 릅쓰고 대회가 창설되었다. 봉황대기대회는 여름방학 기간에 대회를 주최 하는 것으로 선수들의 학업소홀 지적을 피했고, 기존 대회와 차별화하기 위해 지역예선 없이 참가신청만 내면 출전할 수 있도록 했으며, 대회 대진 도 매회전 추첨방식으로 결정한다는 대회규정을 만들었다. 지역예선 철폐로 전국고교야구팀이 총출전하는 방식을 취하니 참가팀이 50개팀을 넘어 최대규모의 대회가 되었고, 매회전 추첨대진제로 1회전부 터 우승후보가 맞붙는 골든카드가 속출하여 팬들의 인기를 끌어모았다. 봉 황대기 고교야구대회는 창설과 함께 전국고교야구대회 중 최대규모에 최 고 인기대회로 자리 잡았다. 봉황대기 대회는 발기에서 대회규정 마련까지 모든 것을 나와 고교야구연맹 풍규명( 馮 圭 明 ) 사무국장이 함께 만들었다. 오보가 端 初 를 이룬 한필성-한필화 남매의 혈연확인 북한선수단의 도쿄올림픽 철수 해프닝 과정에서 꿈결같이 이루어진 북 한 여자육상선수 신금단과 그의 아버지 신문준 씨의 찰나적인 상봉은 국 토가 남북으로 분단된 한민족이 겪고 있는 이산의 아픔을 전 세계에 생생 한 화면으로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다. 1 4후퇴 당시 헤어진 후 13년 만에 이역의 땅에서 극적으로 마주친 부녀의 상봉은 1분이 될까 말까 할 정도의 지극히 짧은 한순간에 불과했으나 북한선수단의 철수 장면을 취재한 사진 과 동영상에 의해 생생한 화면으로 전 세계에 알려졌고, 이산의 아픔이 강 126 관훈저널 여름호
렬하게 부각되었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971년 삿포로 프레동계올림픽에 서 한민족이 겪고 있는 이산의 아픔이 애절한 절규와 함께 모두의 가슴을 두드렸으니 바로 북한 빙상선수 한필화( 韓 弼 花 )와 오빠 한필성( 韓 弼 聖 ) 씨의 전화통화였다. 신문준-신금단 부녀와 한필성-한필화 남매의 케이스는 너무도 닮은꼴이 었다. 관련선수가 북한의 여자 최고스타인 점이 닮은꼴이었다. 신금단은 육상 여자 800m의 세계기록 보유자로 강력한 우승후보였고, 한필화는 1964년 인스브루크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1,500m에서 은메달 을 차지했고 1972년 삿포로 동계올림픽에서 역시 강력한 우승후보의 하나 로 손꼽혔다. 한국전란의 소용돌이에서 철부지 계집아이였던 두 선수는 고향에 남고 아빠와 오빠 등 가장 가까운 혈육이 남으로 탈출함으로써 10 여 년간 서로 애타게 그리워하며 지내다가 이역에서 꿈결같이 소식을 들 은 것도 닮은꼴이었는데, 도쿄와 삿포로로 떨어지기는 했지만 한반도와 가깝고 동포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일본이라는 것도 공교롭기만 했다. 신금단은 도쿄올림픽에 출전 자체를 못해 메달을 포기해야 했지만 삿포로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한필화는 상위권에 오르지 못해 메달 획득에는 모두 실패한 것도 닮은꼴이었다. 한필성-한필화 남매의 국제전화 통화는 나의 기사가 단초가 되었으므로 나와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때와 장소는 1971년 1월 삿포로 프레동 계올림픽이었다. 프레올림픽이란 올림픽 주최국이 준비상황 점검을 위해 본대회 1년 전에 올림픽과 똑같은 환경에서 개최하는 일종의 예행연습 대 회로 프레올림픽에는 정선된 외국선수들이 초청받아 출전한다. 1971년 삿 포로 프레동계올림픽은 1972년 삿포로 동계올림픽 1년 전에 열렸다. 그전 까지 호칭 등의 문제로 사사건건 말썽과 트집을 일삼아온 북한은 호칭문 제가 타결되자 1972년 올림픽부터는 정상적으로 참가한다는 원칙을 세우 고 1971년 삿포로 프레동계올림픽에도 선수단을 파견했는데 북한선수단 에 한필화가 포함되었다. 나의 스포츠 기자 시절 127
당시 한국은 스피드스케이팅에서는 북한보다 열세였으나 남북대결을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고 여기고 프레올림픽에 참가했다. 국제무대에서의 남북 스포츠 대결이라는 빅이벤트가 걸려 있어 국내 각 신문에서도 취재 팀을 현지에 특파하여 취재경쟁을 벌였는데 한국일보에서는 내가 취재팀 의 핵심이었다. 취재팀이 구성되자 IOC 위원인 장기영 사주(이때는 사장에 서 물러나 사주로 신문사 경영을 담당했다.)가 경쟁에서는 시작이 가장 중요 하네. 상대를 이기려면 상대보다 먼저 시작하고 먼저 뛰어야 하네. 그러니 타사 기자들보다 한발 먼저 떠나게. 나도 개회식엔 참가할 테니 거기서 만 나세 하며 다그치는 것이었다. 장 사주의 성화같은 독촉에 나는 타사 기자들보다 한발 먼저 현지에 도 착하였고, 그길로 선수단 임원을 만나 한국선수들의 훈련상황을 물었다. 선수단 임원은 이것저것 대답하다가 지나가는 말처럼 얘는 여중 3학년인 신인인데 이번에 제 이모와 한판 벌여 어떤 결과를 보일지 주목되지요. 이 기기는 힘들겠지만 승부란 알 수 없으니까 하는 것이었다. 그가 지목하 는 신인선수는 숭의여중 3학년생으로 선수단의 막내인 김영희( 金 暎 姬 )였 다. 이모와 조카라는 말에 나는 귀가 번쩍했다. 이모라니? 누가 누구의 이모라는 거요? 한필화 친언니의 딸이 김영희이니 북의 한필화가 이모 이고 김영희가 남의 조카라는 것이다. 김영희의 어머니는 1 4후퇴 때 혼 자 남하한 실향민으로 이름이 한계화( 韓 桂 花 )이며 북한 한필화의 친언니이 고 그의 딸인 김영희가 외가쪽 소질을 이어받아 빙상선수가 되었고 종목 도 한필화와 같은 1,500m여서 이번에 이모와 조카가 대결하게 되는데 이 번에는 크게 기대할 수 없어도 앞으로 대성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이 그 임원의 설명이었다. 직감적으로 이건 기막힌 특종! 이라고 판단한 나는 다른 기자에게는 절 대로 말하지 말라고 당부한 뒤 취재계획을 짰다. 우선 임원의 말만 액면 그 대로 믿을 수 없어 빙상연맹 관계자들에게 확인하니 모두들 틀림없는 사 실이라고 답하는 것이었다.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선수단 숙소로 달려가 128 관훈저널 여름호
코치의 양해를 받고는 김영희에게 사실을 확인하니 엄마가 늘 이모 얘기 를 들려주면서 이모처럼 세계정상급 선수가 되라고 말했다고 또렷하게 답 하는 것이었다. 우선 서울본사에 연락을 취하고 김영희의 어머니에 대해 서는 서울에서 취재해 달라고 부탁하고 추적을 계속했다. 남은 것은 북한 선수단과 한필화의 반응이었으나 북한선수단과의 연락이 불가능했다. 궁 리 끝에 북한측의 반응은 한국일보와 제휴관계에 있는 요미우리신문에 의 뢰하기로 하고 취재상황을 설명하니 요미우리 측도 아주 좋은 기삿거리라 며 공동취재에 응낙했다. 확인과 후속 취재에 만 하루를 보냈으나 요미우리 기자가 취재한 북한측 의 반응은 예상대로 노코멘트, 확인거부였다. 말할 수 없다 모르겠다 처음 듣는 소리다 하는 그들의 답변은 사실인정으로 들리기까지 했다. 북의 한필화와 남의 김영희가 이모와 조카 사이로 이번 대회에서 난생처 음으로 만나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1,500m에서 이산의 아픔을 딛고 레이 스를 벌이게 되었다는 기사가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나갔다. 한국일보 는 1면 중간톱이었고 요미우리신문도 크게 다루었다. 때마침 미국의 아폴 로 달착륙선이 발사된 기사가 1면톱이어서 삿포로 취재팀은 아폴로만 아 니었다면 우리 기사가 1면톱이 될 수도 있었다며 아쉬워했다. 한국일보와 요미우리의 보도가 나가자 서울과 삿포로는 발칵 뒤집혔다. 경쟁사 취재팀들은 삿포로에 도착하자마자 강펀치를 얻어맞은 꼴이 되었 고, 국제전화를 통해 서울로부터 불호령으로 융단폭격을 당했다. 그러나 가장 쇼크를 받은 것은 북한팀이었다. 북한팀은 임원과 선수들에게 금족 령을 내리고 모든 훈련 스케줄을 전면 취소한 채 훈련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외부로부터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그들의 당황해하는 모습이 너무도 뚜렷하게 표출되었다. 그들의 당황해하는 모습에 제대로 급소를 찔렀구나! 하는 기분이 들어 기고만장해지기까지 했다. 하루 동안 침묵을 지킨 북한선수단은 다음 날이 되어서야 기자회견을 열어 한필화에게는 한 계화라는 언니가 없으며, 한국의 김영희가 한필화의 조카라는 보도는 남 나의 스포츠 기자 시절 129
조선이 조작한 허위날조의 모략극이라고 주장하며 반격에 나섰다. 이때 서울의 한국일보에 한필화는 내 동생이 틀림없다 고 주장하는 중 년남자가 나타났다. 바로 한필성씨였다. 이번에는 북한선수단이 한필성- 한필화의 혈연관계를 시인했다. 상황의 완전한 반전이었다. 그러자 정보 당국은 한필성 씨를 서둘러 일본에 보내 한필성-한필화 남매의 상봉을 시 도했다. 그러는 사이 삿포로 프레동계올림픽이 폐막되었고, 도쿄올림픽에 서의 신문준-신금단 부녀의 짧은 상봉이 자신들에게 이롭지 못했다고 판 단한 북한선수단은 한필성 씨가 현지에 도착하기 전 철수해 버렸고, 상봉 을 못한 두 남매는 전화를 통해 목멘 절규로 혈육을 부르며 이산의 아픔에 몸부림쳤다. 기막힌 특종이라고 믿었던 한필화-김영희 혈연관계 보도가 허망한 오보 로 반전되어 허탈감에 빠진 나는 한필성-한필화 남매의 혈연확인과 목멘 통화는 나의 오보로 인해 성사되었다는 것으로 자위했다. 그 당시의 살벌 했던 남북관계로 미루어 보아 한필화-김영희 혈연관계 오보가 아니었다면 한필성 씨는 감히 나서서 한필화가 내 여동생이라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 고, 서로의 혈연확인이나 목멘 통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바로 그런 점에 서 나는 지금까지도 한필화-김영희 혈연관계 오보를 부끄럽게 생각지 않 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이때 삿포로 프레올림픽에 특파되었 던 타사 기자들은 한필화-김영희 혈연관계 보도에서 시작하여 한필성-한 필화 남매의 전화통화에 이르기까지 반전을 거듭하는 상황을 뒤쫓느라고 기진맥진하여 나를 심하게 원망까지 하며 투덜댔다. 나는 유구무언일수밖 에 없었다. 체육부는 다른 취재부서에 비해 해외출장 기회가 많은 편이었다. 4년 주 기 열리는 올림픽과 아시아경기대회가 번갈아 가며 열리고, 그 외에도 동 계올림픽, 유니버시아드대회, 중요 종목의 국제대회, 해외전지훈련, 개별 팀의 해외원정이 있어 단기 해외출장은 거의 해마다 한 차례 정도 다녀올 수 있었다.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에는 해외출장이 기자들에게도 선망의 130 관훈저널 여름호
대상이었다. 나에게는 아시아경기대회, 올림픽 등 종합체육제전 취재기회 가 많이 돌아와 단일경기종목의 해외취재 기회는 많지 않았다. 1968년 제19회 멕시코올림픽에는 신문협회를 중심으로 신문공동취재 단이 파견되어 취재활동을 벌였는데 공동취재단은 종합일간신문사의 취 재기자 혹은 사진기자 1명씩으로 구성되었다. 나는 한국일보를 대표하여 참가했다. 최초로 구성된 풀팀은 서울신문의 정달선( 鄭 達 善 ) 편집국 부국장을 단장으로 하여 동아일보 최경덕( 崔 慶 德 ) 사 진부장, 경향신문 신광일( 申 光 一 ) 사회부 차장, 신아일보 임승준( 林 升 準 ) 정 경부장, 조선일보 최영정( 崔 永 定 ) 체육부장, 중앙일보 한인성( 韓 仁 聖 ) 체육 부 차장, 한국일보 오도광 체육부 차장으로 구성되었으며 UPI통신의 텔렉 스를 이용하여 원고를 송고하였기 때문에 UPI통신의 김준환( 金 俊 煥 ) 특파 원이 객원으로 동행했고 통신은 공동취재단에 참여하지 않아 합동통신의 김희진( 金 熙 鎭 ) 체육부장과 편용택( 片 鎔 澤 ) 체육부장이 독자적으로 특파되 었다. 각 신문이 독자적으로 취재팀을 파견하면 경비가 과다하게 지출되므로 경비절감을 이유로 공동취재팀을 파견하였으나 각 신문사 간 취재경쟁이 없었으므로 공동취재팀의 취재활동은 김빠진 맥주처럼 싱겁기만 했고 취 재단이라기보다는 올림픽 참관단에 가까웠다. 실제로 멕시코올림픽 취재 팀에는 부장 혹은 데스크급 고참들만 참가했기 때문에 국내스포츠 경기현 장의 취재경험을 가진 기자는 나 한 사람뿐이었다. 올림픽공동취재단이 취재활동 면에서는 문제가 많았으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시기였던 만큼 멕시코올림픽 이후에도 1972년 제20회 뮌헨 올림픽, 1976년 제21회 몬트리올올림픽, 1974년 제7회 테헤란 아시아경기 대회, 1982년 제9회 뉴델리 아시아경기대회까지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국 가에서 열린 대회에는 매번 공동취재단이 파견되었으며, 나는 테헤란 아 시아경기대회 때는 공동취재단 단장을 맡았다. 나의 스포츠 기자 시절 131
엉뚱한 문책인사로 재충전 4년뒤 복귀 분리운영되던 한국일보 체육부와 일간스포츠 체육부를 통합운영하기로 신문사 방침이 결정됨에 따라 나는 한국일보-일간스포츠 통합체육부장을 맡게 되었다. 1972년 뮌헨올림픽이 끝난 직후의 일이었다. 두 신문의 체육 면을 혼자서 통괄하는 것은 몹시 바쁘고 고됐다. 그러나 국내 유일한 스포 츠 전문지의 체육부장과 종합지 체육부장을 겸한 만큼 체육계에서의 영향 력은 한마디로 막강하였다. 나의 스포츠 기자 생활에서 이때가 최전성기 라고 할 수 있었다. 체육계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나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김택수( 金 澤 壽 ) 대한체육회장의 집요한 경질요구로 인해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연예부장으로 좌천되는 문책성 인사를 당하고 말았다. 김택수 체육회장이 장기영 사주에게 나의 경질을 요구한 것은 스포츠 기사와 지 면제작에 대한 견해차 때문이었다. 스포츠 기사의 생명은 경기장의 뜨거 운 열기를 독자에게 생생하게 옮기는 데 있다고 판단하고 경기 기사를 중 시하였으며 경기장에서 인기 있는 스타플레이어가 기사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신조였으며 그 같은 신조를 철저히 지키며 지면을 제작 하였다. 그러나 김택수 회장은 스포츠 기사에서도 자신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그릇된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당시 공화당 원내총무로 3선 개헌을 성사시켰으나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심한 견제를 받아 여당 공천 에서 떨어지고 대한체육회장으로 밀려나 있는 처지에서 체육회장직을 정 계복귀의 도약대로 삼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자질구레한 동정기사 하나 에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한 김 회장은 경기 기사를 중시하는 일간스 포츠와 한국일보 체육면이 자신의 기사를 소홀히 다룬다는 불만을 품고 한국일보 경영진에 끈질기게 나의 교체를 요구했으며, 열 번 찍어 안 넘어 지는 나무 없다는 속담 그대로 나는 1975년 11월 일간스포츠 및 한국일보 체육부장에서 밀려나 일간스포츠 연예부장으로 좌천되고 말았다. 132 관훈저널 여름호
스포츠 기사와 스포츠면 제작의 정도를 정립하겠다고 노력하다가 전혀 생소한 연예부로 밀려난 문책성 인사는 나에게 엄청난 좌절이었다. 나로 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고, 수용할 수 없는 인사였다. 인사에 불복하고 타사로 옮겨 갈 것인가, 아예 언론계에서 발을 뺄 것인가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그대로 눌러앉아 연예부에서 2년간 울분의 세월을 보내고 나 니 신문사 측에서 한국일보 편집부국장 겸 문화부장으로 명예회복을 시켜 주는 것이었다. 앞서의 문책성 인사가 적절치 못했다는 것을 인사권자가 뒤늦게나마 인정하고 시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문책성 인사에 반발하지 않고 눌러앉아 참을성 있게 새 임무에 충실하기를 잘했다고 자 위했다. 문화부 역시 나에게는 생소한 분야였으나 한국일보 문화부장은 일간스 포츠 연예부장보다는 훨씬 비중 있는 직책이어서 나름대로 총력질주했다. 문화부장 직책에 긍지를 갖고 재미를 붙이려는 시점에 나는 다시 일간스 포츠 편집국 국차장으로 발령받아 4년 만에 일간스포츠 편집국으로 복귀 했다. 일간스포츠 연예부장과 한국일보 문화부장으로 지낸 4년간 신문기 자로서 행동반경을 넓히고 안목을 한층 깊게 해주어 나로서는 의미 있고 유익했던 재충전의 기회였다고 여겨진다. 일간스포츠로 복귀해서는 국차장이 일선취재기자를 직접 지휘하는 직 위가 아니어서 다시 스포츠 기자로 뛸 수는 없었으나 한국에서는 최초의 본격 스포츠 칼럼이라고 할 수 있는 오도광 스포츠 칼럼 을 주 1회 집필하 였고, 1984년 제23회 로스앤젤레스올림픽 한국일보 취재팀 단장을 맡았 으며, 정년으로 물러날 때까지 스포츠 칼럼니스트로 신문 잡지 방송에 관여했다. 나의 스포츠 기자 시절 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