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국토문제연구소 논문집 별호 45 2002.4 훌규 羅 王 京 의 훌쉴 圍 와 區 城 에 대한 地 理 tjtj1i퓨갖릎 李 훌료 職 서 울대 학교 국토문제 연구소
Journal of Gεography (Jirihak Nonchong) Monography Series 45 Apr.2002 Geographical Study on the Boundary and the Administrative District of the Capital of Shil-la Dynasty Yi, Ki-bong Institute for Korean Regional Studies, Seoul National University
地 理 學 論 講 별호는 서울대학교 극토문제연구소에서 펴내는 단행본 시리즈이다. 이 연구물은 편접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실린다. 편집위원회 편집인 박삼옥 편집위원회 검 인 박기호 닙~4-흐 ζ 박영한 è - 일 안영진 이재덕 이재하 이정록 이정만 이희열 주성재 유곤배 최병두 유우익 허우긍 Chang, Heejun Choi, Jong Nam Kim, D oo-chul Park, Bae-Gyoon Park, Soojin Seong, Jeong-Chang Y oon, Hong-ki 편집간사 검성환 조현정 <> 題 揮 i 會 海 金 昌 煥 先 生
Editorial Board Editor Park, Sam Ock Editorial Board Members Ahn, Young-Jin Chang, Heejun Choi, Byung-Doo Choi, J ong N am Choo, Sungjae Huh, Woo-kung Kim, Doo-Chul Kim, lnn Lee, Hee-yul Lee, Jaeduk Lee, Jaeha Lee, Jeongman Lee, Jeong-Rock Park, Bae-Gyoon Park, Key-ho Park, Soo-hong Park, Soojin Park, Young-han Seong, Jeong-Chang Son, lll Yoon, Hong-ki Yu, Keun Bae Yu, Woo-ik
국문초록 新 羅 王 京 의 範 圍 와 區 域 에 대한 지라적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지리학과 이기봉 본 논문에서는 신라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이 구체적인 공간 속에서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되었는지를 時 系 列 的 인 차원에서 구명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규명 을 위해 가장 기본이 된 것은 文 敵 記 錄 과 牌 文 에 나타난 각종 지리적 자료이며, 지도와 답사 및 고고학적 발굴 내용을 통해 그러한 자료에 대한 확인작업을 병행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규명된 신라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의 변화가 신라의 사 회 정치적 변화와 각종 지리적 자료의 해석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를 밝히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도출된 결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신라 왕경의 母 服 인 六 村 은 츠 國 史 記 와 三 國 遺 事 에 신라 건국 이전부 터 형성되어 있었으며, 安 康 以 南 의 兄 山 江 流 域 과 東 海 뿜 太 和 江 의 일부를 포함 하고 있는 범위로 나온다. 이와 같은 문헌기록은 안강 이남의 형산강 유역이 6개 의 작은 유역권으로 나누어져 있어 신라 건국 이전에 村 이 형성 확장될 경우에 6개의 촌이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증명될 수 있다. 그리고 6촌 의 경계션이 가장 불분명한 경주시내는 문헌기록과 홍수 사 북천의 물이 흐르던 휴 皇 폼 皇 龍 좋 址 - 雅 願 池 북쪽 - 月 城 북쪽 - 月 城 서쪽을 잇는 션을 통해 복 원할 수 있었다. 그 결과 明 活 山 高 耶 村 ( 習 比 部 )은 北 川 面 의 신당천 유역에 關 川 楊 山 村 ( 梁 部 )은 경주시내와 見 삼 面 의 소현천 유역에 않 山 大 樹 村 (후 梁 部 )은 西 面 乾 川 뭄의 대천 유역에, 突 山 高 塊 村 ( 沙 梁 部 )은 太 和 江 의 일부를 포함하는 兄 山 江 본류 유역에, 뽑 山 珍 支 村 ( 本 彼 部 )은 동천강 상류 일부를 포함하여 月 城 - 狼 山 - 明 活 山 을 잇는 선의 남쪽인 南 川 유역에 金 山 加 利 村 ( 漢 祝 部 )은 東 海 품의 감 浦 몸 陽 北 面 陽 南 面 을 포함하여 분황사-낭산을 잇는 선의 동쪽인 北 川 유역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 다. 그리고 麻 居 世 로 상징되는 外 來 集 團 과 關 英 六 村 長 으로 상징되는 土 훌 集 團 의 연합에 의해 신라가 건국됨에 따라 6촌의 범위와 경계는 그대로 小 國 신라의 영 역과 지역구분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6촌은 신라 건국 이전에 六 村 長 會 議 體 와 같은 聯 合 體 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리 고 외래집단과 토착집단의 연합에 의해 신라가 건국되었기 때문에 6촌장집단의
기반은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 하지만 신라의 건국은 麻 居 世 와 그의 紀 인 關 英 으로 대표되는 王 室 集 團 의 출현을 가져왔으며, 동시에 6촌장집단과는 다른 왕실집 단의 독자적 주거지가 필요하게 되었다. 삼국유사 의 기록에 의해 확인되듯이 왕실집단의 초기 주거지는 6촌 중의 하나인 突 山 高 體 村 ( 沙 梁 部 )의 중심지 근처이며 범람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한 현재 의 昌 林 좀 址 ( 南 山 西 北 麗 )에 있었다. 그런데 삼국사기 新 羅 本 紀 에는 건국 약 20년 후에 王 城 인 金 城 을 건설하는 것으로 나온다. 금성의 위치는 문헌기록과 도 시계획의 흔적, 고분의 분포, 北 川 의 범람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구체적인 위치는 기존의 6촌 중심지와 관계가 없으며 하천 범람의 위 험이 常 存 하는 경주시내 그 중에서도 현재의 擔 星 臺 나 그 근처로 比 定 되었다. 왕 실집단의 거주지 이동과 금성의 위치는 왕실집단이 6촌장집단과의 사회 정치적 차이를 주거지의 공간적 분리를 통해 적극적으로 이루려고 했음을 보여준다. 그리 고 그 과정에서 후대 도시의 중심이 되었던 政 治 中 心 區 域 이 경주시내에 자리잡게 되었다. 삼국사기 와 三 國 遺 事 에는 f 需 理 尼 師 今 9년 (32) 에 六 村 이 六 部 로 개편되 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 구체적인 내용으로 6촌 이름의 6부 이름으로의 改 名, 6 부의 姓 ll; 陽 與 十 七 等 官 等 制 의 설치가 나온다. 이 세 기록 모두 글자 그대로 볼 수는 없지만 당시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6촌 개편 이전에 됐 公 이나 脫 解 로 대표되는 외래집단의 합류로 인해 왕실집단의 힘이 강화되고 있었다. 그리 고 6부 중심지에도 왕실집단이 살았다는 1-2세기의 기록과 대조 검토하면서 이 때의 개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구체적인 개편 내용은 왕실집단이 6촌 중심 지로 이동하여 6촌장집단을 6촌 중심지에서조차 2급 지배층으로 격하시키는 것이 었다. 그 결과 小 國 신라는 이제 명실상부한 왕실집단의 - 元 的 인 지배체계에 의 한 共 同 運 命 體 的 地 域 單 位 로 變 鏡 하였고 6부는 그 下 部 행정단위로 재편되었다. 신라는 1 세기 중반부터 辰 韓 地 域 으로의 대외팽창을 시작하여 3세기 말이나 4 세 기 초에 진한지역 전체를 완전한 지방으로 편입한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에는 정 복된 소국의 반란이나 이탈 시도 등이 나타나는 등 아직 불완전한 관계가 지속된 다. 이것은 元 新 羅 (6부) 지역을 비롯하여 정복된 辰 韓 小 國 들 사이에 기존의 地 域 區 分 意 識 이 지속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元 新 羅 지역인 6부 전체가 정복된 지 역에 비해 정치적으로 우위에 서게 됨에 따라 특권적 지역성을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정복과정에서 지방에 대비되어 형성되기 시작한 王 京 은 그 범위가 6부의 범 - 11 -
위로 고정되게 되었던 것이다. 진한지역을 지방으로 완전히 편입한 4-5세기에도 왕경과 지방의 차별정책은 이 어진다. 그 증거 중의 하나가 신라의 전 영역을 지칭하는 新 羅 라는 국호와 지방에 대비되어 特 權 化 된 왕경을 지칭하는 흉rr 羅 라는 국호가 二 重 的 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의 증거는 왕경과 지방에 造 營 된 古 慣 의 형식이 전혀 다르며, 규모와 부장품의 종류 및 量 에서 현격한 차이가 난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왕경 과 지방의 차별정책으로 인해 왕경의 범위는 건국 이전 6촌 전체의 범위로부터 변화될 수 없었다. 1-3세기에 형성되기 시작한 왕경과 지방의 불안정한 관계는 왕경으로의 일방적 인 물자흐름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6부 각각의 생산지로서의 중요성이 유지되었으며, 왕경과 지방의 차별적인 지위 때문에 6부 각각의 인적 자원에 대한 중요성도 감소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지방과 6부 중심지로부터 정치중심구역으로 의 지배층을 비롯한 인구의 집중이 크게 일어날 수 없었다. 따라서 6부 행정구역 은 파괴되지 않고 존속할 수 있었다. 4-5세기에 강화된 지방 지배는 경주시내에 超 大 型 積 石 木 橫 慣 이 집중적으로 조 영된 사실을 통해 볼 때 왕경 그 중에서도 정치중심구역으로의 일방적인 물자흐 름을 발생시켰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6부 중심지에 거주하던 왕실집단이 정 치중심구역으로 집중하게 되었으며 아울러 지방과 6부로부터 정치중심구역으로의 피지배층의 집중도 나타났다. 이로 인해 정치중심구역이 확장되었는데, 그 구체적 인 범위는 南 川 을 경계로 나누어져 있던 梁 部 와 沙 梁 部 에 걸쳐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도시계획의 흔적, 범람의 위험성, 迎 日 冷 水 里 牌 (503) 와 薦 珍 鳳 짝 牌 (524) 에 양부와 사량부의 인물이 압도적인 비율로 등장한다는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 다. 이러한 정치중심구역의 확장은 행 里 와 같은 하부 행정단위를 출현시키는 배경 이 되었지만 건국 전부터 3세기까지 이어져 온 6촌 또는 6부적 행정구역의 전통 을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6세기 이후에도 정치중심구역으로의 인구집중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인구집중은 8세기 이후에 더욱 강화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왕경과 지방의 차별정책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둘째, 최고지배층인 진골집단의 대부분 이 왕경 출신이며, 신분 내혼을 통한 폐쇄적인 신분제를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왕 경을 떠나기가 어려웠다. 셋째 官 更 登 用 制 度 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花 郞 徒 가 인적 결합을 중요하게 여기는 제도였으며 그 정점에는 王 京 에 살았을 혈 - 111 -
骨 貴 族 이 있었다. 따라서 관직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진골귀족 뿐만 아니라 중 하 위 지배층도 왕경을 떠나기가 어려웠다. 넷째, 8세기 중반부터 격화되기 시작한 정치적 혼란은 지배층 사이에 호화 사치생활을 통한 사회적 경쟁을 강화시켰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적 경쟁을 위해 필요한 물자의 공급을 담당하던 商 人 과 E 人 層 도 왕경으로 집중하는 경향성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인구 집중으로 인해 정치중심구역은 계속 확장될 수밖에 없었다. 6-7 세기에는 경주시내 서쪽의 저지대에 해당되는 西 川 邊 과 北 川 의 범람을 가장 잘 방어할 수 있는 위치에 집중적으로 사찰이 건립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분포를 통해 하천 변에 대대적인 제방공사가 이 시기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 결 과 7세기까지의 정치중심구역의 범위는 며 川 - 北 川 - 狼 山 - 南 山 으로 둘러싸인 지역 에 걸쳐 있었다. 이것은 도시계획의 흔적 평지사찰의 분포 6-7세기의 牌 文 에 梁 部 와 沙 梁 部 및 일부의 本 彼 部 인물이 등장하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8세기 이후에는 北 川 북쪽 明 活 山 望 德 츄 址 輔 石 亨 址 까지 정치중심구역이 확장되었다. 이것 역시 도시계획의 흔적 평지사찰의 분포 35 金 入 힘의 기록에 川 北 漢 祝 部 本 彼 部 지역까지 金 入 힘이 있었다는 기록 등을 통해 확인된다. 이러한 정치중심구역의 확장을 통해 왕경 내 행정구역의 개편이 있었을 가능성 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三 國 史 記 地 理 志 에 나오는 今 按 新 羅 始 祖 麻 居 世 前 漢 五 鳳 元 年 甲 子 開 國 王 都 長 三 千 七 十 五 步 廣 츠 千 一 十 八 步 르 十 五 里 六 部 이라는 기록을 王 都 안에 三 十 五 里 와 六 部 가 있었다 와 같이 기존처럼 해석기보다는 지 금 살펴보건데 신라시조 輪 居 世 는 前 漢 五 鳳 元 年 (B.C.57) 에 開 國 하였다. (그 國 의 범위에는 첫째) 王 都 가 있었는데 (그 규모가) 長 이 3.075 步 廣 이 3.018 步 이고 츠 十 五 里 가 있었다. (둘째) 六 部 가 있었다. 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함을 알 수 있었다. 이와 같이 해석하면 왕경이 기존의 6부에서 왕도와 6부로 개편되었다고 볼 수 있 게 된다. 이와 같은 행정구역 개편에 대한 증거는 경덕왕 (742-765) 이후 왕경의 행정을 담당하는 官 府 로서 京 城 周 作 典 과 典 둠 暑 라는 두 개가 있었던 사실을 통해 확인된 다. 이 중 典 뭄 暑 는 六 部 를 담당하는 官 府 였음이 기록에 분명하게 나온다. 또한 京 城 周 作 典 에서의 京 城 이란 용어가 왕경 전체가 아니라 이후의 왕도인 도시부분 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리고 기록에 나오는 왕도의 범위인 長 3, 018보(약 5.4km), 廣 3, 075보(약 5.5Km)를 구체적인 空 間 上 에서의 정치중심구역 의 최대 확장 범위와 비교해 보아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이러한 왕도와 6부로 - IV -
의 분리시기는 경성주작전이 설치되는 聖 德 王 31 년 (732) 煩 으로 파악되었다. 그 이전에 왕경의 행정을 담당하던 官 府 로는 六 部 小 藍 典 이었다. 다만 r 三 國 史 記 地 理 志 에 나오는 商 城 那 과 大 城 那 에 대한 분석을 통해 동해안의 it 浦 둠 陽 北 面 陽 南 面 지역이 縣 이 대대적으로 설치될 때 約 章 縣 으로 분리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왕경의 범위가 안강 이남의 형산강 유역이며 내부적으로 왕도와 6부로 개편되 었다는 사실을 통해 삼국유사 에 나오는 新 羅 全 盛 之 時 京 中 十 七 萬 八 千 九 百 三 十 八 戶 - 千 三 百 六 十 均 五 十 五 里 라는 기록도 새롭게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기록에 나오는 京 中 의 京 은 王 都 정도의 규모가 아니라 王 都 와 六 部 를 합한 王 京 을 의미한다. 이렇게 본다면 王 都 를 王 京 으로 보고 이 범위 안에 55리와 1,360 방, 178, 936호가 있었다고 보았던 기존의 해석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되며, 아 울러 이 기록의 신빙성도 높아진다. 주요어: 新 羅 王 京, 範 圍, 行 政 區 域, 六 村, 六 村 長, 王 室 集 團, 政 治 中 心 區 域, 六 部, 特 權 的 地 域 性, 王 都 학번: 97208-804 - v -
목 차 제 1 장 서론... 1 제 1 절 연구의 목적과 방법... 1 1-1 연구의 목적... 1 1-2 연구방법과 자료... 6 1-3 논문의 구성... 19 1-4 연구의 범 위 와 한계... 21 제 2 절 연구 동향과 문제점... 22 2-1 선 행 연 구의 쟁 점 과 검 토... 22 2-2 선 행 연 구의 문제 점... 28 제 2장 경주시내의 하천과 지형...... 31 제 1 절 기록을 통해 본 하천의 범람과 지형... 31 1-1 하천 의 범 람과 북천... 31 1-2 제 방과 숲( 數 )... 35 제 2 절 유적 발굴을 통해 본 하천의 범람과 지형... 42 2-1 유적 발굴지 의 원지 반층... 쟁 2-2 2차 퇴 적 층과 빨 층... 46 제 3절 신라 건국 전후 경주시내의 하천과 지형... 않 제 3장 건국 전후의 6촌과 정치중심구역... 56 제 1 절 6촌의 위 치 와 경 계... 56 1-1 r 삼국유사 에 나오는 6촌의 위치... 56 1-2 얄천양산촌과 금산가리촌의 위치... 61 1-3 6촌의 위 치 와 경 계... 70 제 2 절 신라의 건국과 6촌의 존속 및 정치중심구역의 형성... 73 2-1 신라 건국 이전의 6촌 관계... 검 2-2 신라의 건국과 6촌의 존속... 76 2-3 정치중심구역의 형성과 위치... 78 제 4장 6촌의 개편과 왕경의 형성... 88 제 1 절 6촌의 행 정 구역 으로의 개 편... 88 1-1 유리니사금 9년 (32) 전후 왕실집단의 강화... 88 - VI -
1-2 6촌에서 6부로의 개편... 90 1-3 6부의 행정구역화... 95 제 2 절 왕경 의 형 성 과 공간적 규모... 98 2-1 6부의 특권지역화와 왕경으로의 변화... 98 2-2 왕경 의 특권적 지 역 성 강화... 105 제 3 절 6부 행정구역의 존속과 방리제의 시행... 111 3-1 인구이 동의 경 향... 111 3-2 정 치 중심 구 역 의 확장... 120 3-3 6부 사이의 관계 변화와 행 里 制 의 시행... 127 제 5장 왕경 내 행 정 구역 의 개 편... 131 제 1 절 왕경 으로의 인구집 중 경 향... 131 1-1 왕경 인과 지 방인의 차별... 131 1-2 지 배 층의 왕경 집 중 경 향... 135 1-3 피 지 배 층의 왕경 집 중 경 향... 143 제 2 절 정 치 중심 구역 의 확장... 153 2-1 6-7세 기 사찰의 건 립... 153 2-2 신궁의 건설과 위 치... 157 2-3 주거 지 의 확장... 163 제 3절 왕도와 6부로의 행정구역 개편... 169 3-1 왕도와 6부로의 분리... 169 3-2 왕도와 6부의 관할 관부... 172 3-3 왕도와 6부로의 분화시 기... 174 3-4 왕도와 6부의 범 위... 180 제 4 절 전성기 왕경의 호수와 하부행정단위의 성격... 187 4-1 통 일 신 라 전 체 의 호수... 187 4-2 전성 기 왕경 의 호수... 195 4-3 호수의 분포와 하부 행정단위의 성격... 200 제 6장 요약 및 결론... 210 < A 日 참 m 本 고 따 據 문 쉰 헌 > 때 m μ댔 - VII -
표목차 표-1. 신 라 왕경 연 구의 시 기 구분... 12 표 -2 월성 해자 다 와 라 지역의 토양층... μ 표 -3 월성 해자 다 지역 외곽의 집터 토양층... 44 표 -4 계림북편 127~ 집터의 토양층... 45 표 -5 황룡사 발굴지의 토양층... 45 표 -6 경 주지 역 의 강수 량... 53 표 -7 r 삼국유사 에 나오는 6촌의 위치 및 소속 村... 58 표 -8 유리니사금 9년 (32) 전후의 사회 정치적 변화... 97 표 -9 니사금기 (27-356) 신라의 진한지역 정복 기록... 100 표 -10 r 삼국사기 에 나오는 2세기 전후의 가야 및 3세기 전후의 백제와의 전투 기 록... 101 표 -11 5세기까지의 금성 월성 명활성에 대한 기록... 122 표 -12 냉수리비 (503) 에 등장하는 인물의 부별 분포... 124 표 -13 봉평 비 (523) 에 등장하는 인물의 부별 분포... 124 표 -14 경 위 와 외 위... 132 표 -15 676년 이전에 창건된 사찰과 그 위치... 154 표 -16 8세기 이후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등장하는 宮... 161 표 -17 r삼국사기 잡지 직관 부분에 나오는 宮... 161 표 -18 단양 적성비 (551 이전)에 등장하는 인물의 분포... 165 표 -19 마운령 비 (568) 에 등장하는 인물의 분포... 165 표 -20 왕경 의 행 정 체 계... 171 표 -21 경 성 주작전 전읍서 대 일 임 전... 174 표 -22 육부소감전.... - VIII -
그렴목차 그림 -1. 고려 초기 東 京 留 守 官 慶 州 의 범 위... 8 그 림 -2. 경 주시 내 의 하천 과 지 형... 9 그림 -3. 경 주시 내 의 항공사진 (1967)... 10 그림 -4 하천 범람을 막아주던 경주시내의 林 數... 41 그 림 -5 경 주시 내 의 유적 발굴지... 43 그림 -6 경주시내의 지형... 47 그림 -7 경 주시 내 6촌의 경 계... 67 그림 -8 6촌의 경 계 와 위 치... 72 그 림 -9 금성 의 위 치... 84 그 림 -10 왕실 집 단의 주거 지 이 동... 86 그 림 -11 5세 기 경 상도 지 역 의 고분 분포... 109 그림 -12 1-3세기 물자와 인구이동의 경향... 114 그림 -13 4-5세기 경주지역 돌무지덧널무텀(적석목곽분)의 분포... 116 그림 -14 4-5세기 물자와 인구이동의 경향... 120 그림 -15 1-5세 기 주거 지 와 확장방향... 126 그림 -16 통일이전에 건립된 사찰 및 사지... 155 그림 -17 6세 기 이 후 주거 지 의 확장 방향... 168 그럼 -18 기존의 6부 경계 및 사찰의 분포와 왕도... 182 그림 -19 왕도와 6부 및 약장현... 184 그림 -20 경 주지 역 신 라 요지 의 분포... 202 사진목차 사진 -1 북천의 河 皮... 엄 사진 -2 남천 의 河 æ... 34 사진 -3 일제시대까지 남아 있던 북천 변의 제방... 38 사진 -4 양지 뜰에 서 바라본 황룡사지... 49 사진 -5 분황사에 서 바라본 황룡사지... 49 사진 -6 양지뜰... 51 사진 -7 월 성 서 쪽의 월 정 교지... 52 - IX -
제 1 장 서론 제 1 절 연구의 목적과 방법 1-1 연구의 목적 인류가 국가라는 조직체를 만든 이후 어디에서든 최고 통치기능1)이 입지한 지 역이 있었다. 전통시대에는 왕이 거주하는 지역이 바로 이러한 최고 통치기능이 입지한 곳이었다. 신라에 대한 문헌과 금석문의 기록에도 최고 통치기능이 입지한 지역을 가리키는 용어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2) 이러한 용어 중 王 京 이 新 羅 史 연구자들에게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王 京 이란 용어에는 최고 통치기능이 입지해 있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일정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는 영역 적 의미도 담겨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의 왕경은 구체적 공간에서 분명하게 경계 선이 그어져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계선 안의 땅은 지방과 대비되는 지역으로서 인식되었을 뿐만 아니라 출신지나 소속감의 단위로서 기능하였다.3) 하지만 신라사 연구자들이 王 京 이란 용어를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 구하고 구체적인 공간에서의 범위에 대해서는 공통된 견해의 일치를 보고 있지 1) 임덕순은 중앙정부가 국가체제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서 전개하는 국방 외교 등의 정부적 행위를 통치라고 규정하고 한 나라의 最 高 統 治 機 能 이 所 在 하는 도시를 수도로 정의하였다. 이러한 수도는 그 기능이 해당국가 전체의 통치와 관련된 기능이 입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도시와는 다르다고 보았다. 수도의 이러한 기능으로는 전국을 조직 적으로 관장 통제하면서 주도해 나가는 통어기능 (head function) 국민을 하나로 묶는 결속기능 (keystone function), 외국으로부터 정보를 수집하고 외국과의 연결을 유지하는 연결기능Oink function) 변경지방에 존재할 수 있는 원심적 요인을 제거하고 국경충돌 을 방지하는 변경통제기능 (frontier-organizer function) 을 들고 있다. (임덕순, 1985:2,18-20) 2) 문경현은 신라 왕경의 명칭에 대해 첫째 신라 왕경의 고유명칭 둘째 일국의 수도란 의 미의 보통명칭으로 나누어 구별하였다. 첫째에 해당되는 용어로는 金 城, 新 羅, 新 羅 城, 斯 羅, 東 京, 東 都, 金 京 이 있었다고 하며, 두 번째에 해당되는 용어로는 京 都, 王 京, 王 都, 王 城, 京, 大 京, 京 城, 京 몸, 京 師, 玉 京, 都, 둠, 健 후 羅 등이 있었다고 한다.(문경현, 1995:180-186) 3) r 三 國 史 記 卷 第 四 十 一 列 傳 第 一 김유신전에는 金 演 信 王 京 人 也 라고 기록되어 있고, 뒤에서 다시 다룰 것이지만 영일 냉수리비 (503) 와 울진 봉평비 (524) 에는 지방 과 대비되는 용어로서 왕경을 지칭하는 斯 羅 와 新 羅 六 部 라는 용어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제 4장 참조) 이러한 용어의 사용은 왕경이 분명한 경계선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출신지나 소속감의 단위로서 기능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못하다. 이러한 견해의 불일치는 우선 왕경의 이해에 출발점이 되고 있는 6촌 기 록을 비롯한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에 나오는 신라사 초기기록의 신빙성에 대한 학계의 논쟁 때문에 발생하고 있다.4) 또한 왕경의 범위가 신라의 역사적 전 개과정에서 과연 어떻게 바뀌었는가에 대한 분명한 기록이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다 r 삼국사기 나 삼국유사 어디에도 왕경의 범위가 바 뀌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왕경의 범위가 바뀌었을 것이라는 유추를 할 수 있는 기록만이 몇 군데 보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왕경의 범위를 짐작할 수 있게 기 록한 삼국사기 卷 第 一 雜 志 第 三 地 理 一 부분도 애매하게 기술되어 있어 이 러한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5) 이와 같은 왕경의 범위 문제는 내부의 행정구역 문제와도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왕경의 범위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내부의 행정구역의 공간적 규모나 범 위에 대한 이해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역으로 내부의 행정구역의 공간 적 규모나 범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왕경의 범위가 달라지기도 한다. 하 지만 일부의 연구자를 제외하면 왕경 내부의 하위 행정구역이 구체적인 공간상에 서 어떠한 경계를 가지고 어떠한 범위에 걸쳐 있었는가에 대해 크게 주목한 경우 는 별로 없다. 그 동안 역사학계에서는 왕경의 범위나 내부 행정단위의 맹아로 볼 수 있는 6 촌이나 6부의 문제에 대해 다양한 의견 차이를 보여 왔다. 다수의 연구자가 6촌에 대한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의 기록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6세기초의 비 문인 영일냉수리비 (503) 와 울진봉평비 (524) 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6부의 존재 에 대해서는 왕경의 하부 행정단위로 인정하였다. 그에 따라 과연 6부가 언제, 어 떠한 계기에 의해 형성되었고, 6촌과는 어떠한 관련을 갖고 있으며, 신라 역사의 전개 과정 속에서 어떻게 변화하였는가에 대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하지 만 이러한 6부의 문제는 대부분 정치사나 사회사의 일환으로 연구되었다. 따라서 일부의 연구자를 제외하면 대부분 구체적인 공간이 결여된 행정단위 사이의 정치 4)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은 다음 논문을 참조. 이종욱, 한국 고대사연구 100 년: 과거 문제 -비극과 희극의 세기를 넘어서며 r 한국사연구.!I 104 집, 1999.3 5) 이 기록에는 첫째, 新 羅 始 祖 納 居 世 前 漢 五 鳳 元 年 甲 子 開 國 王 都 長 三 千 七 十 五. 步 廣 조 千 十 八 步 三 十 五 里 六 部 라는 부분이 나온다. 이 기록에는 왕도와 35 리, 6부의 관계가 분명하게 나오고 있지 않다. 따라서 과연 이 기록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왕경에 대한 이해는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둘째, 같은 부분에 고려시대의 경주에 소속된 신라 의 행정구역으로 임관군 대성군, 상성군이 나온다. 이중 대성군과 상성군이 경주시내나 그 주변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혼란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 - 2 -
적 사회적 관계만으로 6부를 연구하였던 것이다.6부라는 행정단위가 정치적 사 회적 의미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국가를 경험하지 못한 상태 에서 부족적 전통이 강한 집단이 연합하여 국가를 만들었을 경우에는 행정단위의 정치적 사회적 의미가 더욱 강해진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6부라는 행정단위는 분명히 구체적 공간상에서 존재했으며, 또한 구체적인 범위와 경계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다양한 인구집단 이 구체적인 공간을 점유하고 살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들이 고려되지 않은 상태 에서 6부라는 행정단위의 정치적 사회적 의미만을 추구할 경우에는 문제가 발생 할 소지가 있다. 구체적 공간과 분리된 상태에서 6부를 연구할 경우 실질적으로는 인구의 분포 때문에 나타난 문제가 행정단위로 표현된 집단들 사이의 정치적 사 회적 힘의 역관계만으로 이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6부를 공간과 분리된 행정단위나 정치적 사회적 집단의 힘의 역 관계라는 차원만이 아니라 행정구역의 차원에서 연구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행정 구역은 공간적 단위의 하나로 정치적 제도적 차원에서 몇 개의 하위영역으로 구 분된 것이며 6), 일체의 행정작용이 미치는 범위 또는 공공기관이나 단체의 관할권 이 미치는 지역이다,7) 따라서 행정구역의 입장에서 신라 왕경 내부의 행정단위를 다룬다는 것은 먼저 행정단위가 구체적인 공간 속에서 영역적으로 어떻게 존재했 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영역적인 문제를 밝히는 것은 범위와 경계가 어떻 게 이루어져 있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기도 하다.8) 그리고 행정구역은 설정된 뒤 오랜 시일이 경과하면서 주민 생활과 밀접한 관 계를 맺게 되고 행정구역과 주민 자신이 일체화되면서 정치 행정적으로 뿐만 아 6) 임석회, 공간조직의 관점에서 본 한국행정구역의 문제와 개편방향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7. 임석회는 이 논문에서 자연발생적인 등질지역이나 기능지역 과 행정구역의 가장 큰 차이점이 전자는 분명한 경계선을 갖고 있지 않은 반면에 후자는 명확한 경계가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일정한 행정구역으로 구 획된 경계선 안의 땅에서는 행정적인 차원에서 다른 행정구역과 분명하게 구분되 는 등질지역으로 존재한다고 보았다. 7) 최창호 r지방행정구역론 J, 법문사, 1981:13 8) 행정구역의 엽장에서 행정단위를 연구할 경우 행정 중심지 사이의 계층성과 상호 간의 기능적 관계를 중요한 연구주제로 삼을 수 있다. 하지만 신라 왕경에 대한 연 구에서는 행정단위의 중심지가 구체적으로 어디였는지 가 몇 또 중심지 사이의 계층구조 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사료나, 유물, 유적이 거의 전무하 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의 고고학적 발굴과 같은 새로운 자료가 출현한 이후로 미루어질 수밖에 없다. 잉 니
니라 정신적 문화적으로도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9) 행정구역은 인위적이고 계획 적으로 구획되는 형식지역이긴 하여도 일단 한번 설정되고 나면 쉽게 변화하기 어려운 시 공간적 지속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즉 행정구역은 사회적으로 구성되 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변동에 대하여 상당한 시간적 지체 (time lag) 를 가지게 되 는 것이며, 특히 제도화는 그러한 지속성을 강화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1 0 ) 행정 구역은 현재의 상황을 반영하는 정치 행정적인 제도임과 동시에 과거의 흔적을 담고 있는 역사적인 제도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일정 시기의 행정구역은 당시 의 상황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와 같은 특징 때문에 왕경과 그 내부의 행정 구역이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되었는지를 시계열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제기된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정치중심구역 11) 의 팽창으 로 인해 왕경의 범위나 내부의 행정구역에서 변화가 있었음을 긍정하였다. 하지만 그 변화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연구자들마다 극단적인 반대 양상을 보이는 등 다양한 견해를 피력해 왔다 12) 이와 같이 다양한 견해가 피력된 것은 단순히 사료가 부족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일부의 연구자를 제외하면 왕경과 하위 행정구 역의 변화를 추동시킨 정치중심구역의 형성과 확장에 대해 구체적인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또한 구체적인 공간상에서의 정치중심구역의 형성과 확장이 왕경 내 부의 행정구역과는 어떠한 관계 속에서 일어났으며 그것이 행정단위 사이의 관계 나 행정구역 자체를 어떻게 변화시켰는가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9) 최창호, 같은 책, 13 10) 임석회, 같은 책, 1995:14-15. 그는 이와 같은 행정구역의 시 공간적 지속을 행정 구역이 갖고 있는 지역적 성격의 하나로 보았다. 11) 신라 왕경에서 최고통치기능이 구체적으로 입지한 좁은 지역을 지칭하는 용어로 는 보통 王 都 라는 용어가 사용되어 왔다. 하지만 이 용어조차도 史 書 에 7세기 이후 에나 등장하며, 그 이전에는 왕경 내에서 최고통치기능이 입지한 지역을 지칭하는 용어를 찾기가 어렵다. 또한 王 都 라는 용어가 단순히 최고통치기능이 입지한 지역 이라는 의미 이외에 일정한 시기부터 구체적인 행정구역의 명칭으로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전 시기를 관통하여 사용하면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당시의 용어는 아니지만 왕경 내에서 최고 통치기능이 입지 한 지역을 중요시하여 이종욱이 사용한 政 治 中 心 區 域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 다. (이종욱, 1982) 그리고 王 都 라는 용어는 구체적인 행정구역으로 설정되었을 경우 에만 사용하기로 한다. 12) 기존의 연구에서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왕경과 하위 행정구역의 변화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1. 왕경의 범위가 변화되지 않았지만 하위 행정구역은 왕도와 왕기로 분화되었다는 견해 2. 왕경의 범위가 도시가 발달했던 현재의 경주시내 정도로 축 소되었으며, 그에 따라 6부도 이 누어진다. (제 1 장 제 3 절 참조) 범위 안에서만 존재하게 되었다고 보는 견해로 나 - 4 -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신라 왕경의 범위와 내부의 행정구역은 아직까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할 만큼 분명하지 못하며, 그 자체를 연구대상으로 삼은 경 우도 거의 없다. 따라서 왕경의 범위와 내부의 행정구역이 어떻게 형성 변화했는 지를 밝히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러한 연구는 정치적 사회적 연구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신라 역사에 대한 史 書 와 金 石 文 에 등장하는 왕경을 지칭하는 용어들이 단순히 공간적 의미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용어들이 지칭하는 공간적 범위와 경계가 밝혀지고, 그 속에서의 인구나 지배층의 분포를 이해할 수 있다면 사회 정치적 문제들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사서에 등장하는 단편적인 지리적 인구적 자료들은 왕경과 내부의 행정 구역의 범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해석을 달리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부분들은 신라 왕경의 도시계획에 대한 연구에도 도움을 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지금 까지 신라 왕경의 도시계획에 대한 연구자들은 주로 도시계획의 흔적과 유적 발 굴을 통한 도시계획의 범위와 구체적인 단위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어 왔다. 그 에 따라 史 書 나 金 石 文 에 등장하는 지리적 단위에 대한 용어들을 도시계획의 차 원에서만 이해하려는 경향을 보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왕경의 범위나 행정구역 의 문제는 도시계획의 차원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왕경의 범위나 행 정구역에 대한 이해는 기록과 구체적인 발굴 사이의 간극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지금까지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신라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 이 구체적인 공간 속에서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되었는지를 시계열적 차원에서 규 명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한다. 이와 같은 연구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연구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6촌의 경계와 범위, 정치중심구역의 위치를 파악하고 신라의 건국과정 속 에서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밝힌다. 둘째, 진한지역으로의 대외팽창과 통치 속에서 왕경이 형성되는 과정을 파악하 고, 그 과정에서 왕경의 범위와 내부의 행정구역이 어떻게 존재했는지를 밝힌다. 셋째, 6세기초 이후의 정치 사회적 개혁과 인구의 집중 속에서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밝힌다. R 녕
1-2 연구방법과 자료 (1) 연구지역 왕경의 범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의 연구자들 사이에 다양한 견해차이가 존재 하고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의 주요 연구대상인 신라 왕경의 범위와 구체적인 연구 지역이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점은 정확한 경계선이 남아 있지 않은 과거를 연구하는 경우에 나타나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이다. 본 논문에서는 이 러한 한계점을 인정하기 때문에 연구지역을 왕경의 범위를 살펴보기 위해 필요한 범위의 지역으로 잡고자 한다. 이러한 필요를 만족시키는 연구지역은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 하면서 경주로 설정되고 고려 태조 23년 (940) 에 개편된 13) 공간 범위이다. 이 때 설정된 경주의 공간범위는 신증동국여지승람 卷 之 二 十 一 慶 州 府 의 영역을 통 해 이해할 수 있다. 이 때 경주부의 영역 안에 있었던 안강현, 기계현, 자인현, 신 광현, 구사부독, 죽장부곡, 북안곡부콕은 古 跳 조가 아닌 屬 縣 조에 실려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오랫동안 독자적인 행정구역으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1 4 ) 따라서 고 려 초기의 東 京 留 守 官 慶 州 의 직접적인 관할 영역은 조선시대 경주부의 영역에서 위의 지역을 제외한 지역이어야 한다. 이 지역은 지금의 경주시 시내, 천북면, 현 곡면, 서면, 건천읍, 산내면, 내남면, 외동면, 감포읍, 양북면, 양남면과 울산광역시 울산광역시 두동면 두서면 지역이다. 이 지역은 크게 보면 안강 이남의 형산강 유역과 동해 바다에 인접한 감포읍 양북면 양남면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그 외에 울산만으로 빠지는 동천의 상류 일 부가 외동면 남쪽 부분에 걸쳐 있으며 태화강의 지류 일부가 울산광역시 두동 두서면 남쪽 부분을 흐르고 있다. 이 두 지역은 수계는 다르지만 지형적으로는 동 천이나 태화강의 중 하류보다 형산강 유역과 잘 연결된다 15) 13) r 고려사 卷 第 五 十 七 志 第 十 一 地 理 二 14) 안강현은 경주시 안강읍 강동면 지역, 기계현은 포항시 기계면 기북면 지역, 자 인현은 경산시 자인면 남산면 용성면, 신광현은 포항시 신광면 지역, 구사부곡은 경산시 진량면의 일부, 죽장부콕은 포항시 죽장면 지역, 북안콕부독은 영천시 북안 면의 일부이다. (한글학회 r 한국지명총람 JI, 경북편 0, IV), 1978) 15) 답사해 본 결과 태화강의 지류로서 두동 두서면 남쪽을 흐르는 대콕천과 구량천 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옛 언양현)과의 사이에 양쪽이 높은 절벽으로 이루어 진 긴 협콕이 있어 사람의 왕래가 거의 어려운 지형을 이루고 있다. (울주 반구대 - 6 -
형산강 유역은 크게 낙동강 하구에서 시작되어 양산, 언양, 경주시내, 포항시 신 광면을 지나는 양산단층선과 울산만에서 시작되어 불국사, 천북면 지역을 지나는 불국사단층선 위에 형성되어 있는 침식분지다. (조화룡, 1997) 이 두 단층은 活 斷 層 으로 佛 國 좋 統 의 화강암이 침식되어 곳곳에 많은 合 流 扁 狀 地 가 연속적으로 분포 한다. (조화룡, 1997. 황상일 윤순옥, 2001) 형산강은 남쪽의 울산광역시 두동 두서면에서 발원하여 대천 남천 북천 소 현천 신당천을 합류시켜 동쪽으로 꺾여 포항시로 빠져나간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형산강유역이라는 하나의 유역권으로 분류되면서도 형산강 본류인 서천과 각 지 류가 만들어 놓은 분지형태의 작은 유역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이러한 형산강유역 은 서쪽으로는 금호강 유역, 동쪽으로는 대종천 유역, 남쪽으로는 태화강 유역, 북 쪽으로는 안강평야와 접해 있다. 형산강 유역은 서쪽의 영천 방향과 남쪽의 울산 방향으로는 분수계에 의해 분리되지만 큰 고개가 없어 연결성이 제약되지는 않는 다. 그리고 북쪽의 안강방향도 큰 협곡 등의 제약요인이 없어 계속 연결되어 있다 고 볼 수 있다. 다만 동쪽으로 토함산 (745m) 줄기 의 높은 산지 에 의 해 가로막힌 형세를 취하고 있다. 토함산 동쪽의 동해안은 서쪽의 급경사에 비해 완만한 형세 의 산지가 이어지고 있으며, 대종천 등의 작은 하천이 발달해 있다. 대릉원 노동동 노서동, 황남동 교동 등의 초대형고분과 월성, 분황사, 황룡사 지 등 많은 유적이 현재의 경주시내 평지에 밀집되어 있다. 이러한 경주시내는 서 쪽으로는 선도산 (380m) 과 옥녀봉 (215m) 이, 동쪽으로는 명활산 (245m) 이 대칭적으 로 솟아 있다. 북쪽으로는 소금강산(1 78m) 과 그 줄기가 하나의 경계션을 이루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남산 (466m) 이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있다. 이 네 산 사이에는 동서 약 5-6km, 남북 약 3-6km 의 넓은 평지가 자리잡고 있다. 이 평지에는 크게 세 개의 하천이 합류한다. 경주시내 서쪽의 선도산 옥녀봉 끝자락에는 형산강 본류인 서천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고 있다. 경주시내 동남 쪽에서 흘러온 남천은 월성에 부딪혀 서쪽으로 꺾여 서천에 합류하는데 선라시대 에는 故 川 이라고 불렀다. 동쪽의 높은 산악지대에서 흘러온 북천은 소금강산 줄기 와 명활산 사이의 좁은 협곡을 지나 서북쪽으로 꺾여 서천에 합류하는데 신라시 대에는 關 川 과 東 川 으로도 불렸다. 경주시내는 이 세 개의 하천과 동쪽의 명활산 암각화 부근) 반면에 형산강 상류와는 낮은 분수계만을 이루고 있어 수계상으로는 태화강에 속하지만 지형적으로는 형산강 유역에 연결되고 있다. 외동읍 남쪽에 있 는 동천의 상류도 울산과의 경계선에서 작은 협독이 나타나며 형산강의 지류인 남 천과는 육안으로는 거의 구분되지 않는 낮은 분수계를 이루고 있을 뿐이다. -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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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原 圖 If' 朝 蘇 古 廣 圖 諸.n, 朝 蘇 總 督 府, 1916) 그림 -2. 경주시내의 하천과 지형 - 9 -
그림 -3. 경주시내의 항공사진(1 967) - 10 -
자락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동서 5-6km, 남북 3-6km 의 평야로서 남쪽과 남동쪽, 북쪽으로 열린 모습을 하고 있으며 서쪽은 선도산에 의해, 동쪽은 명활산 자락에 의해 차단되어 있다. (2) 연구시기 삼국사기 나 삼국유사 등에는 신라가 B.C.57년에 진한 소국 중의 하나 로 건국되었다가 A.D. 935년 고려에 항복함으로써 멸망한 나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신라는 약 1. 000년에 가까운 992년간 유지된 나라이 다. 이 1, 000년이란 기간은 세계 여러 지역의 국가흥망사 속에서 보아도 결코 적 지 않은 기간이다. 따라서 신라의 역사를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신라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들도 국가의 존속기간을 고려하고, 대 외팽창과정 및 정치적 상황의 변화를 첨가하여 다양한 시기구분을 행하여 왔다. 삼국유사 에서는 제 1 대 혁거세거서간으로부터 제 22 대 지증마립간까지 (B.C. 57-514) 를 上 古 제 23 대 법흥왕으로부터 제 28 대 진덕(여)왕까지 (514-654) 를 中 古, 그 이하 (654-935) 를 下 古 로 나누고 있다.1 6 ) 이 때 상고와 중고의 구분은 王 號 를 기준으로, 중고와 하고는 王 統 의 성격을 기준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r 삼 국사기 에서는 정치권력의 성격변화를 기준으로 상고와 중고를 上 代 (B.C. 57-645) 로, 태종무열왕계가 왕위를 이어갔던 제 29 대 태종무열왕으로부터 제 36 대 혜공왕까지를 中 代 (654-780) 로 나머지를 下 代 (780-935) 로 구분하였다 17) 지금까지 의 역사학계는 두 가지 시기 구분을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이용해 왔다. 본 논문에서는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이라는 측면에서 신라가 건국되어 멸망 할 때까지의 전 시기를 연구대상으로 삼는다. 하지만 신라 역사 992 년 동안 왕경 의 범위와 행정구역이 동일한 상태를 유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기구분을 행하여 연구하려 한다. 그런데 여기서 시기구분의 구체적인 기준이 무엇인가? 에 대한 문 제가 나타난다. 이런 문제가 나타나는 이유는 왕경의 행정구역이나 인구규모 그 리고 정치중심구역의 변화에 대한 정확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자료가 기록이나 유적으로 분명하게 파악될 수 있다면 질적 변화의 전환 점을 쉽게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시기를 구분하기가 어렵지만 본 논 16) ~ 三 國 遺 事 卷 第 一 王 歷 第 一 17) ~ 三 國 벚 記 卷 第 1-τ 新 羅 ~ 紀 第 τ 경순왕 9 년 - 11 -
문에서는 기존의 연구성과를 참조하고 왕경이라는 구체적인 공간의 변화라는 차 원에서 시기구분을 행하려고 한다. 표-l. 신라 왕경 연구의 시기구분 B.c. 57년 lc중반 3C 말 (4C 초) 6C초 7C후반 935 년 (멸망) 시기구분 I 맹아기 형성 정립기 번 영;기 신라의 건국부터 유리니사금까지의 시기 (B.C.57-A.D.57) 는 대체적으로 신라가 대외팽창을 하기 이전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 시기에는 6촌을 중심으로 건국되 면서 후대 왕경의 모태가 되는 공간규모가 거의 확정되고 현재의 경주시내에 정 치중심구역이 형성되는 시기이다. 따라서 이 시기를 왕경의 맹아기라는 입장에서 하나의 연구시기로 잡고자 한다. 신라의 진한지역으로의 대외팽창이 시작되는 1 세기 중반부터 5세기까지를 하나 의 시기로 잡고자 한다. 1 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어 3세기말 또는 4세기초에는 완성 된 진한지역으로 대외팽창 과정에서 왕경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4세기 와 5세기 동안 신라는 더 이상의 대외팽창을 하지 않으며, 진한지역에 대한 통치 를 강화한다. 따라서 이 시기를 왕경이 형성 정립되는 시기로 잡고자 하며, 이 시기 중 진한 지역에 대한 정복이 완료되는 3세기말 또는 4세기초를 작은 획기로 잡고자 한다. 신라의 역사에서 사회 정치적 변화가 가장 컸던 시기는 6세기초이다. 기록상으 로 보았을 때 지증마립간과 법흥왕 시기 (500-540) 에 州 에 대한 軍 主 의 파견을 통 한 지방행정제도의 개편, 신라라는 국호의 확정, 왕이라는 칭호의 도입, 순장의 금 지, 율령의 반포, 대외적 사신의 파견, 불교의 도입 등 혁신적인 정치가 이루어졌 다. 이러한 혁신적인 정치는 왕경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도 그 이전과 이후를 나누 는 큰 획기가 될 수 있다. 따라서 6세기초를 본 논문에서는 가장 큰 변혁기로 보 고자 한다. 신라는 7세기 중반까지 고구려 백제와의 치열한 교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에너지를 전쟁에 쏟아 부었다. 그러다가 제 30 대 문무왕 16 년 (676 년) 당과의 마지 막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대동강 이남의 한반도를 통일하게 되었고, 그 이후에 는 전쟁에 쏟았던 에너지를 다른 방향으로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신라 왕경의 입 - 12 -
장에서도 이와 같은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통일전쟁이 끝나면서 전쟁에 투입되었던 상당한 에너지가 왕경에 투입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 서 6세기초 이후의 기간에서 통일 전후를 작은 획기로 잡고자 한다. (3) 연구방법과 자료 지리학에서 過 去 에 대한 연구는 무엇을 중요한 연구목적으로 삼느냐에 따라 크 게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18) 첫째, 경관 변화의 연속적인 단계에 있는 어느 한 시기의 단면을 끊어 복원하는 수법을 사용하는 과거의 연구 (the study of the past)'가 있다. 둘째, 역사적 변천에 대해 일정한 기간에 걸쳐 진행된 지리 적 현상의 변화 과정을 추적하는 역사적 변천에 대한 연구 (the study of change through time)'가 있다. 셋째, 현재를 과거를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상대적으로 잘 알려진 현재로부터 덜 알려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현재 속의 과거 연구 (study of the past in the persent) 가 있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세 가지 유형 가운데 주로 두 번째 유형인 역사적 변천 에 대한 연구를 채택하여 신라 왕경의 범위와 내부의 행정구역에 대해 살펴보기 로 한다. 따라서 논문 전체적으로는 시기를 셋으로 나누고 왕경의 범위와 내부의 행정구역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어떠한 계기에 의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시 계열적인 연결관계를 중심으로 연구한다. 이와 같은 연구를 통해 일정한 시기의 단면만으로는 파악되지 않는 연구주제의 시간적 지속성과 역사성을 이해할 수 있 을 것이다. 하지만 부분적으로는 세 번째의 관점인 현재 속의 과거 연구를 이용한다. 이 연 구에서 주로 사용하는 방법은 역행적 접근 (retrogressive approach) 인데 현재를 검 토함으로써 과거를 이해하는 연구방법이다 19) 이와 같은 연구 방법은 과거에 대한 자료가 적기 때문에 자료가 많은 현재를 출발점으로 하여 과거로 소급해서 추적 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연구방법에서 말하는 현재는 단순히 일상생활 속에서 존재하는 18) Norton, W., 1984, IT'Historical analysis in geography J, New York Longman, inc, pp.27 19) 한국지리연구회 옮김 / 존스톤 그레고리 스미스 엮음IT'인문지리학사전 J, 도 서출판한울, 1992:270-13 -
현재만은 아니다. 다니오까(유 周 武 雄 )는 역행법을 직접적 비약적 방법과 간접 적 소급적 방법으로 나누었다, 20) 전자는 과거에 존재했던 고지도 고문서 유 물 유적이나 과거에 만들어졌으나 현재는 의미가 사라진 지명 등을 통해 과거를 연구하는 방법이다. 후자는 현재의 경관 속에 살아 있는 과거의 역사적 요소를 끄 집어내어 차례로 오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추적하는 방법이다. 본 논문에서도 과거의 지도나 기록 그리고 현재도 남아 있는 지명과 유물 유적을 통해 과거의 지리적 상황을 추적한다. 또한 현재의 경관 속에 남아 있는 도시계획의 흔적이나 비계획적인 도로망을 통해 과거의 주거지 확장 등을 이해하는 단서로 사용한다. 이러한 역행적 접근은 그 출발점을 현재로만 한정짓지 않는다. 과거의 문헌 기 록이 풍부하여 잘 알 수 있는 시기를 출발점으로 삼아 문헌 기록이 없는 그 이전 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기 위하여 역행법을 자주 사용한다, 2 1) 본 논문에서도 이 와 같은 방법을 부분적으로 사용한다. 신라 왕경의 범위와 내부의 행정구역에 대 한 자료가 시계열적으로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때로는 분석할 자 료가 많은 시점을 먼저 파악하고 그로부터 그 이전 시기의 상황을 추론해 내는 방법을 선택한다. 또한 신라사에서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자료가 적고 자료마다 내용이 다른 경 우도 있으며, 많은 유적 유물이 사라져 기록 속에 나오는 위치와 경계에 대해서 도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이럴 경우 위치와 경계가 어디인지를 확인하는 작업 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확인된 위치를 통해 역으로 그러한 위치 가 역사적 흐름 속에서 어떤 사회적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추론하는 방 법을 취한다. 이럴 경우에는 원인과 결과 중 결과를 먼저 살펴보고, 그것이 어떤 원인에 의해 나타났는지를 살펴보는 방식이다. 따라서 자료가 많은 현대를 연구대 상으로 삼을 때와는 정 반대의 방향으로 논리를 전개시키는 경우도 나타날 수 있 다. 구체적인 연구 방법으로는 우선 사료에 대한 검토를 행하였다. 신라의 대해 가장 자세히 기록해 놓은 문헌은 1,1 45년에 김부식에 의해 편찬된 역사에 삼국사 기 와 1281-1283년경에 승려 일연에 의해 만들어진 삼국유사 이다. 이 두 기 록은 모두 고려 중 후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신라 당대의 기록이 아니라는 단 20) 氣 地 利 夫 Ir 歷 벚 地 理 學 方 法 論.JI, 日 本 東 京 : 大 明 堂, 1987 / 윤정숙 역 역사지 리학방법론 이회문화사, 1995:144에서 재인용 21) 氣 地 利 夫 Ir 歷 史 地 理 學 }j 法 論.JI, 日 本 東 京 : 太 [껴 堂, 1987 / 윤정숙 역 역사지 리학방법론 이회문화사, 1995:145-14 -
점이 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많은 기록을 참고했고, 신라사에 대해 가장 광범위하고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본 논문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 는 사료로 간주하고자 한다. 그리고 당대에 기록된 것으로서 현재까지 분명하게 남아 있는 각종 金 石 文 도 중심되는 사료로 간주한다. 이 중 포항시 신광면 냉수리에서 발견된 영일 냉수리 비 (503) 와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에서 발견된 울진 봉평비 (524) 는 5세기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는 최고의 자료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자료로 사용한다. 기타 여러 개의 진흥왕 순수비 명활성비 남산 신성비 등의 6-7세기 비문 및 통일 이후의 각종 금석문도 필요할 때마다 자료로서 사용한다. 다음으로 진한과 신라의 모습을 기록해 놓은 중국 문헌이 있다. 이러한 문헌 중 신라초기에 대한 기록으로 가장 자세한 것은 3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 진 三 國 志 鍵 書 東 몇 傳 辰 井 韓 조이다. 이후의 진한에 대한 기록은 이 기록을 그대로 전사하거나 약간만 바꾸어 놓은 것이다. 따라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신라초기에 대한 기록으로는 이 문헌을 중심으로 살펴본다.6세기의 내용을 담은 중국 문헌으로는 梁 書 東 렷 列 傳 新 羅 조가 당대의 상황을 가장 잘 알려주는 기 록으로 나오고 있기 때문에 이 기록을 주로 참조한다. 통일과정 및 그 이후의 신 라에 대한 중국기록으로 주목되는 것은 舊 康 書 東 헛 列 傳 新 羅 조와 新 康 書 東 헛 列 傳 新 羅 조인데 이들 기록에는 왕경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가 나오기 때문 에 참고한다. 기타 일본에 있는 자료로서 주목되는 것은 정창원에 보관되어 있는 문서이다. 이 문서도 신라 및 신라 왕경에 대해 관계 있는 경우에 한하여 이용한 다. 이들 사료에 대한 이용은 단순히 기록을 인용하는 수준에서 머물 수 없다. 이것 은 첫째, 기록된 문장구조 자체가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다르게 해 석될 수 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둘째, 사료에 나오는 왕경과 관련된 용어들 이 갖고 있는 범위가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으며 구체적 위치 등이 많은 논란 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사료 자체가 후대의 사가들에 의해 왜곡되 었거나 잘못 옮겨진 경우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료의 이용 자체가 극히 제한된 범위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사료 자체가 신라의 전체적 인 역사적 전개 과정 속에서 어떤 현상을 표현하기 위해 기록되었는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것은 단순히 사료가 갖고 있는 역사적 사실의 문제가 아 - 15 -
니라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당시 또는 후대의 기록자가 어떻게 인식하여 표현했 는가의 문제이다. 따라서 사료를 이용할 때 역사가가 어떤 역사적 사실을 표현하 기 위해 왜 그런 기록을 채택하고 남기게 되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22) 이럴 경우 사료가 당시의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지 않더라도, 또는 일정부분 시 기나 구체적 용어에서의 잘못이 있더라도 일단 기록자가 그런 사료를 남기게 된 근거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본 논문에서는 사료의 이용과 해석에서 기록자가 지리적 측면에서의 어떤 역사적 변화를 표현하기 위해 그 사 료를 기록하게 되었는가를 먼저 파악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또한 史 書 에는 왕경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 나오지 않더라도 다른 사료를 통 해 전체적인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면서 왕경의 변화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이 것은 삼국사기 나 삼국유사 가 과거의 사실이나 기존부터 전해져온 내용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어 전체적인 역사의 흐름을 표현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23) 따라서 신라의 대외확장과 지방에 대한 대우 사회적 정치적 변화가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게 된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도 연구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왕경에 관한 사료만 이용 하는 것이 아니라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의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지는 22) r 삼국사기 원전의 성립과정에 대한 연구를 보면 편저자인 김부식은 자료를 취사선 택은 하였을 망정 왜곡하거나 삽입 과장하지는 않았다고 한다.(이강래, 1996) 23) r삼국사기 편찬자의 책임자인 김부식이나 삼국유사 의 저자인 일연 모두 역사를 해석하기보다는 과거의 사실이나 기존부터 전하는 내용을 정확하게 기록하 는 것을 중요한 목적으로 삼았다. 다음과 같은 표현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신라말의 유명한 유학자 최치원이 제왕연대력을 지었는데 모두 某 王 이라 칭하고 居 西 千 등의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 그 말이 圖 野 하다 해서 칭할 수 없겠는가? 左 傳 과 漢 書 는 中 國 史 書 임에도 오히려 楚 語 인 觀 於 옳와 셉 fjj. 듭닫인 孤 쫓 등이 남아 있다. 지금 新 羅 의 사실을 기록함에 그 方 듬을 그대로 두는 것 또 한 마땅하다. ( 羅 末 名 倚 崔 致 遠 作 帝 王 年 代 層 皆 稱 某 王 不 言 居 西 千 等 皆 以 其 듭 制 野 不 足 稱 也 揮 첼 日 左 漢 中 國 史 書 也 觸 存 楚 語 觀 語 훈셉 如 語 擺 짧 孤 쏠 等 今 記 新 羅 事 其 存 方 듭 亦 宜 훗)" ( r 三 國 史 記 대저 卷 第 四 新 羅 本 紀 第 四 지증마립간 즉위)" 옛 성인은 바야흐로 禮 樂 으로 나라를 홍하게 했으며, 인의로서 가르침을 베 풀었으니 怪 力 亂 神 은 말하지 않은 바가 있다. 명을 얻고, 도록을 받아 반드시 다른 사람보다 神 異 한 점이 의 하지만 제왕이 장차 흥할 때에는 부 있다... 그러한 즉 삼국 시조가 모드 神 異 함에서 發 하였다고 해도 어찌 괴이하다 할 수 있겠는가? 이 紀 異 를 다른 編 보다 앞에 두는 이유는 그 뜻이 여기에 있다. ( 大 批 古 之 聖 人 方 其 禮 樂 興 채 仁 義 設 敎 則 怪 力 亂 神 在 所 不 言 然 而 帝 王 之 將 興 也 鷹 符 命 受 圖 錄 必 有 以 異 於 人 者... 然 텃iJ프 國 之 始 祖 皆 發 於 神 異 : { 可 足 怪 歲 此 紀 異 之 所 以 漸 諸 編 也 意 (E 斯 훤)" ( r 二 E 候 l 遺 事 卷 第 一 紀 異 第 一 ) - 16 -
사료를 이용함으로써 부족한 사료를 보충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그리고 신라 왕경의 행정구역 및 유적 전설 등에 대해 기록해 놓은 그 이후의 기록을 통해 그 이전의 기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을 조 서 L 시대와 보 충하는 방법을 택한다. 조선시대의 기록 중 가장 자주 이용되는 것은 新 增 東 國 瓚 地 勝 寶 과 東 京 雜 記 이다. 이 두 기록은 선라의 역사를 간직한 경주에 대해 가장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유적의 구체적인 위치까지 기록해 놓은 경우도 많다. 조선시대의 다른 기록들은 기본적으로 위의 두 기록을 그대로 옮겨 쓴 경우가 많 기 때문에 특별한 내용이 있거나 위의 기록과 차이가 날 경우에만 참고할 것이다. 일제시대의 기록으로는 조선총독부에서 1916년과 1917년에 발간한 朝 蘇 古 題 圖 讀 4- 新 羅 統 i 時 代 1-, 朝 蘇 古 題 圖 諸 5- 新 羅 統 一 時 代 2- J 가 현재는 사라 진 유적 및 유물이 기록되어 있어 참고한다. 해방 이후의 기록으로는 경주시사편 찬위원회에서 1971 년에 발간한 慶 州 市 誌 와 경주시에서 1980년에 발간한 新 羅 의 빛 이 각종 유물과 유적의 위치 등에 대해 당시까지의 연구를 중심으로 자 세히 기록되어 있다. 또한 한글학회에서 1978년에 발행한 한국지명총람 J 5( 경북 편 I)의 경주시 부분과 1979년에 발행한 같은 책 7( 경북편 IV) 의 월성군 부분은 지명과 과거의 지리적 변화에 대해 가장 자세한 기록이 있어 참고한다. 조선시대 이후의 이러한 문헌자료들이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에 나타나 는 왕경 관련 사료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보충자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기록 들 역시 신라 왕경의 구체적인 상황을 모두 정확하게 기록했다고 볼 수 없다. 또 한 그 이전의 기록인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의 내용과 상치되는 부분도 있 다. 따라서 이 기록에 나오는 자료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전 시기의 기록과 꼼꼼한 대조를 하면서 이용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문헌자료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기 위해 고하는 방법을 택한다. 일제시대의 지도자료로서 주목되는 地 形 圖 l:50,oooj 그리고 조선총독부에서 1916년에 발간한 우선 지도 자료를 참 것은 舊 韓 末 韓 半 島 近 世 韓 國 五 萬 分 之 一 地 形 圖 朝 蘇 總 督 府 製 作 一 萬 分 一 朝 蘇 地 形 因 集 成 J, r 朝 蘇 古 題 圖 諸 ÎJ 에 나오 는 지도 등이다. 이들 지도에는 우선 경주 지역의 자연지리적 특징을 이해하는데 O 돕 주 자료가 들어가 있다. 현재는 북천의 상류에 보문호와 덕동호가 만들어져 있고, 하 천 변에 제방이 충분히 건설되어 있어 홍수 시 범람의 위험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그에 따라 북천의 경우는 하천의 폭이 일제시대에 비해 % 정도로 줄어드는 등 - 17 -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일제시대 초기의 지도에는 현재보다는 인공적인 제한이 덜 가해진 상태의 하천 상태가 표현되어 있어 고대 경주 지역의 지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줄 수 있다. 또한 이들 지도에는 시가지의 확대 도로의 건설 경지정리 등 현대적인 기술로 재정비되기 이전 경주지역의 도로망 논밭의 경계선이 표시되어 있다. 특히 직선 으로 남아 있는 도로망과 논밭의 경계선 상태는 도시계획에 대한 연구자들에게 신라 때의 격자형 도시계획의 흔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리고 비격자형 도로망이 나 논밭의 경계선은 격자형 도시계획이 이루어지기 이전의 초기주거지나 주거지 가 확장되지 않은 외곽지역의 흔적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들 지도에 나타난 도 로망과 논밭의 경계선을 통해 주거지 형성과정과 범위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찾아낼 수 있다. 현대의 지도 중에는 경주국립박물관과 경주시에서 1997년에 발행한 1:10,000 축 적의 慶 州 遺 題 地 圖 를 가장 중요한 자료로서 이용한다. 이 지도에는 각종 기록 과 민간에서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 유물과 유적에 대한 발굴을 종합하여 1997년 까지 확인된 경주통합시 지역의 각종 유물 및 유적의 위치와 범위 등에 대한 자 세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유물 및 유적의 연대와 색인까지 꼼 꼼하게 해 놓았다. 이러한 유물 및 유적의 위치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신라 왕경의 변화를 살펴 보는데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이다. 왕경의 변화에 대한 이해가 정치적 사회적 차 원에서 머물지 않고 구체적인 지리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려면 기록에 나오거나, 또 는 기록에 나오지 않더라도 존재했던 많은 유물과 유적의 정확한 위치가 파악되 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물과 유적의 위치 파악과 시대적 변화 양상을 통해 왕경의 전체적인 변화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 에서 이 지도의 자료적 가치는 높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지도에서 가장 많이 수록된 사찰의 위치는 왕경의 변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줄 수 있 다. 경주시내에 분포되어 있는 평지사찰은 사찰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6세기 이 후의 주거지 확장과정과 범위를 이해하는데 하나의 지표가 될 수 있다. 따라서 특 별한 잘못이 확인되지 않는 한 이 지도를 신라시대의 유적 및 유물의 위치를 알 려주는 가장 중요한 지표로 삼고자 한다. 경주지역에서 발굴된 유적의 조사보고서도 중요한 자료로서 이용한다. 이러한 유적의 조사보고서에는 발굴된 유적지의 상세한 내용과 추정연대가 기록되어 있 - 18 -
다. 이러한 내용 중 士 層 에 대한 기록은 고대 경주시내의 지형적 특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특히 유적이 만들어진 연대가 밝혀진 경우 유적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토층 상태를 통해 인간에 의해 인공적인 교란이 발생하기 이 전 경주시내의 지형적 특정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찾아낼 수 있다. 또한 유적 이 만들어진 위치와 연대에 대한 확인을 통해 신라인들이 경주시내의 지형적 특 징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에 대한 시사점도 제공받을 수 있다. 유적의 조사보고서는 이러한 지형적 특징과 변화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주거 지의 확장 방향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한다. 우선 지표에서 나타 난 도로망이나 논밭의 경계션을 통해 추측된 주거지가 과연 사실에 부합하는지를 지하 유구에 대한 발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표에는 나타나지 않 지만 지하에 묻혀 있을 수도 있는 고분의 유무를 확인함으로써 지표의 상태를 통 해 추측한 주거지역이 맞는 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유적지가 조 성된 연대와 위치를 통해 기록의 내용을 확인하고 그 지역으로의 주거지 확장에 대한 시사점을 찾아낼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각종 문헌과 지도 발굴보고서에서 확인되는 유적과 유물의 위치 및 경주지역의 지형적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 1998년부터 2001 년 사이에 5차례에 걸 쳐 현지답사를 행하였다. 현지답사가 측량이나 새로운 자료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 의 형태를 띄지는 못했지만 기록이나 지도에서는 알아내기 힘든 유적과 지형의 구체적인 특징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유적과 지형 사이의 관계를 비롯하여 경주시내와 관련된 하천의 河 皮 및 河 福 상태, 경사도 등 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경주시내뿐만 아니라 형산강의 지류들이 만들어 놓은 작은 유역권을 직접 답사하면서 삼국사기 나 삼국유 사 에 등장하는 6촌(부)의 위치 및 형성원인과 과정에 대한 전체적인 상을 그려 나갈 수 있게 되었다. 1-3 논문의 구성 기존의 신라사 연구는 주로 역사학 고고학 도시계획학의 차원에서 이루어졌으 며, 이 중에서 역사학계의 연구가 가장 활발했다. 하지만 신라 왕경의 범위와 행 정구역과 같은 지리적 문제는 각 분야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보조적인 역할의 입 장에서 다루어져 왔다. 본 논문은 신라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의 문제가 그 자체 - 19 -
만으로도 중요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지리적 공간 속에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문제제기 속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제기를 해결하기 위해 신라 왕경 의 범위와 행정구역을 시계열적 차원에서 밝히는 것을 연구목적으로 삼았다. 이러 한 연구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논문을 구성하였다. 제 1 장에서는 구체적인 연구를 진행시키기에 앞서 연구의 목적과 연구 지역, 연 구시기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선행연구의 쟁점을 검토하고 연구 성과와 한계를 파 악하여 본 논문의 의 의 를 알아보았다. 제 2 장에서는 경주시내의 하천과 지형적 특징을 알아보았다. 현재는 제방공사와 댐의 건설 등으로 인해 하천과 지형이 많이 바뀌었다. 따라서 각종 기록과 발굴조 사보고서, 지도 자료를 통해 인공적인 제한이 가해지기 이전 경주시내의 하천 범 람과 지형과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것은 신라 왕경에서 가장 중요한 지 역이었던 경주시내에서의 6촌의 경계, 왕성의 위치, 도시의 확장 방향 등을 이해 하는데 기초로서 이용될 것이다. 제 3장에서는 신라 건국 전후 6촌의 경계와 정치중심구역의 위치를 살펴보았다. 안강 이남의 형산강 유역과 경주시내의 지형적 특징을 중심으로 6촌의 위치와 경 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져 있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았 다. 그리고 신라의 건국과정에서 이러한 6촌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으며, 국가의 형성과 함께 등장한 정치중심구역의 위치와 그것이 상징하는 사회 정치적 의미 에 대해 알아보았다. 제 4장에서는 먼저 6촌이 어떻게 6부로 개편되었으며 이것이 지배층의 분포와 정치적 사회적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았다. 다음으로 신라의 진한 지역으로의 대외팽창과 통치과정 속에서 형성 정립된 왕경의 범위가 6부와는 어 떤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신라의 팽창된 영토 속에서 물자와 인구의 이동경향을 파악하고 그것이 왕경이라는 구체적인 공간상에서 지배층을 비롯한 인구의 분포에 어떻게 나타났으며 행정구역 사이의 관계변화나 새로운 행 정단위의 출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았다. 제 5장에서는 먼저 6세기와 9세기 사이에 왕경으로의 인구 및 물자의 집중 경향 이 어떠했으며, 그것이 구체적 공간상에서 정치중심구역에는 어떠한 영향을 미쳤 는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중심구역의 변화가 왕경의 범위, 행정구역 사이의 관계나 개편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났는지 알아 보았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정치중심구역이나 행정구역의 변화에 대한 규명을 바 - 20 -
탕으로 왕경의 전체 호수를 알아보고 그러한 호수의 대략적인 분포를 통해 각 행 정단위의 성격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살펴본다. 제 6장에서는 앞에서 분석한 내용을 요약 정리하고 본 논문의 의의와 한계를 논한다. 1-4 연구의 범위와 한계 본 논문에서는 왕경을 다루면서도 범위와 내부의 행정구역에만 초점을 맞추었 다. 이러한 초점에 따라 왕경의 핵심부분인 정치중심구역에 대해서도 최초의 입지 와 확장 과정이 행정구역 사이의 관계나 개편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라는 차원 에서만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따라서 정치중심구역으로 표현된 도시부분의 구체적 인 구조에 대해서는 살펴보지 못하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고고학적 발굴과 도 시계획에 대한 면밀한 연구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 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행정구역에 대해 공간적 범위 경계 위치 등을 알려주는 정확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공간상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는데 한계를 가지고 있다. 본 논문에서 살펴 본 범위와 경계도 100% 정확하다고 할 수 없다. 다만 당시의 상황을 최대한 잘 반영하고 전반적인 흐름을 이해하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의 정확성만을 가지고 있 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더 정밀한 자료가 나타날 경우에는 세세한 부분에서의 교정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자료의 부족을 다른 자료를 통해 보충하였 지만 그렇더라도 충분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전반적인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들도 이용하였으며 그로 인해 상황의 변화를 간접적 으로 알려주는 자료를 통한 추론의 형식이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을 다루면서도 주로 왕경 전체와 6촌, 6부, 왕도와 6부 와 같은 큰 단위만을 대상으로 놓았다. 작은 단위의 구체적인 경계나 위치 등은 연구대상으로 놓지 않았으며 전체적인 변화나 체계를 설명해야 할 경우에만 다루 었다. 이것은 큰 단위의 행정구역 문제도 아직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아서 이 문제 를 밝히는 것 자체가 본 논문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 이외에도 작은 단위의 행정구역을 알 수 있는 자료가 극히 희박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 서 만약 큰 단위의 행정구역 문제가 밝혀졌다고 하더라도 작은 단위의 행정구역 문제까지 밝히려면 사료나, 유적에 대한 더 많은 자료가 수집되어야 할 것이다. - 21 -
제 2 절 연구 동향과 문제 점 2-1 션행연구의 쟁점과 검토 신라 왕경에 대한 논의와 연구는 일제시대 일본인에 의해 시작되었고 해방이후 한국인 학자들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많은 축적이 이루어져 왔다. 하지만 서로 하나의 합일점을 찾기보다는 서로의 주장을 내세우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이러 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신라시대의 왕경에 대한 문헌 자료가 극 히 부족하고, 유물 및 유적의 상당 부분이 오랜 시간 속에서 사라져버렸기 때문이 다. 그에 따라 왕경의 범위와 내부의 행정구역 자체를 연구의 대상으로 놓기보다 는 다른 연구의 일환으로 부분적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선행연구의 검토가 종합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기가 어렵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여 쟁점이 되 는 부분을 중심으로 지금까지의 논의를 살펴보고 그 성과와 한계점이 무엇인지를 알아봄으로써 본 논문이 취해야 할 방향을 정립할 수 있도록 한다. (1) 6촌(부)의 형성시기와 위치 6촌(부)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를 비롯한 대부분의 문헌 속에서 신라가 건국될 때부터 신라가 멸망한 고려 초 (940) 까지 계속적으로 나온 다. 이러한 여러 기록 속에서 6촌(부)은 신라 건국의 모태가 되고 있으며, 신라 초 기부터 멸망할 때까지 약간씩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왕경의 지역구 분 단위의 하나로서 묘사되고 있다. 또한 이 6촌(부) 지역은 신라사 연구자들에게 보통 신라가 대외팽창을 하기 전의 원사로국 지역이며 나중에 왕경으로 변모하는 지역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하지만 일제시대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해 삼국사 기 의 초기기록에 대한 신빙성문제가 제기된 이후 지금까지도 6촌(부)에 대한 여 러 기록에 대해 찬 반 두 가지의 입장으로 나뉘어져 합일점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6촌(부)에 대한 연구는 왕경이라는 구체적인 지역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크 게 두 가지 차원에서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첫째, 나중에 왕경으로 변모하는 6촌(부)이 언제부터 존재하면서 하나의 공동운 명체적 단위로서 인정되었는가의 문제이다. 6촌(부)이 신라의 대외팽창과정에서 공동운명체로서의 역사적 경험을 얼마나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왕경의 범위와 성 - 22 -
격이 결정된다. 이렇게 결정된 왕경의 범위와 성격은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끈질 기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이러한 6촌(부)의 형성시기 문제는 단순히 신라 초기 의 역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둘째 6촌(부)의 위치 및 범위의 문제도 신라 초 기의 정치중심지가 형성되는 배경뿐만 아니라 나중에 나타나는 왕경의 범위나 행 정구역의 변화, 인구규모 등의 문제와도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6촌(부) 의 규모를 크게 보느냐 작게 보느냐에 따라 왕경의 지역구분에 대한 여러 기록의 검토가 달라질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왕경의 인구규모에 대해서도 왕경의 공간 규모 문제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6촌(부)의 형성시기와 위치 및 범위에 대한 선행연구의 견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6촌(부)의 형성시기에 대한 견해는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의 초기 기록 24) 을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두 가지로 나쉰다.1. 두 사서의 초기기록 대부분을 신뢰하는 입장에서는 건국 당시에 이미 6촌(부)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보고 있다. (이종욱, 1980. 최재석, 1987. 등) 이런 견해의 입장에 서면 6촌(부)은 신라 초기부 터 하나의 역사적 공동운명체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 된다. 2. 두 사서의 초기기록을 신뢰하지 않거나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에서는 6촌(부)에 대한 설 화가 후대에 만들어진 후 소급되어 정착되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6촌(부)은 신 라 건국 당시부터 있었다기보다는 신라의 대외팽창 과정에서 나타난 산물로 보고 있다. 이러 견해 내부에도 두 가지의 입장이 나타나고 있다. 첫째 6촌(부)은 신라 가 진한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麻 立 千 期 (356-510) 이후에나 형성되었다고 보는 견 해가 있다. 이 견해 내부에도 지방의 지배세력을 중앙의 귀족으로 전화시키는 과 정에서 성립되었다고 하는 설( 末 松 保 和 1936:1954. 김철준 1952. 1953:1990. 노중 국, 1994. 등)과 자체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설( 武 田 幸 男, 1990. 주보돈, 1992.) 로 나 뉘어진다. 둘째, 경주나 그 인근지역에 위치한 지역집단들을 모체로 6부가 성립되 었다고 보면서도 신라 건국부터가 아니라 니사금시기 (B.C.57-356) 의 늦은 시기에 형성되었다고 간주한다. (전재덕, 1996) 24) r삼국사기 에는 첫째, 신라 건국 전부터 ( 古 ) 朝 蘇 의 유민들이 경주지역의 山 갑 間 에 흩어져 6촌을 이루고 살았다는 사실과 둘째 6촌장이 양산 밑의 나정 곁에서 태어난 혁거세를 키워다 왕으로 세웠다는 사실과 셋째 유리니사금 9년 (32) 에 6부 를 개편하여 성을 하사하였다는 내용이 나오고 있다 r 삼국유사 에는 이러한 사 실과 함께 고려 태조 23 년 (940) 다시 한번 6부의 개편이 있었으며 그 때 부가 있 는 위치의 방향과 각각의 부에 소속된 마을 2-4 개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 23 -
6촌(부) 지역이 왕경으로 바뀌게 된 시기에 대해서도 연구자마다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왕경이 언제 형성되었는가의 문제도 신라의 대내적 대외적인 정 치적 성장과정에 대한 이해 차이로부터 발생된다. 즉 신라가 정복지를 언제 지방 으로 편재하게 되었는가, 또는 정복지의 주민들이 6부를 언제부터 왕경으로 인식 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문제로 집약될 수 있다. 이 부분에서도 신라의 초기 역사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l. 신라에 대한 삼국사기 와 삼국 유사 의 기록을 신빙하여 1 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진한지역으로의 대외적 팽창 과정에서 왕경이 형성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종욱 1982) 2. 4세기 중반부 터 시작된 마립간시대에 이미 정복지를 지방으로 편재했다고 보고 이 때 왕경이 형성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강종원 1993. 김창호 1995. 등) 3. 5세기말 또는 6세기초가 되야 정복지를 완전히 지방으로 편입했다고 보아 이 때 왕경( 王 京 )이 형성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6촌(부)의 위치 및 규모에 대한 문제는 그 형성시기에 대한 문제보다 별로 많이 다루어지지는 못했다. 이것은 역사학계의 6촌(부)에 대한 연구가 대부분 왕과 6부 의 정치적 관계 및 대외적 관계에서의 신라의 정치적 성장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 문이다. 따라서 6촌(부)의 위치 및 규모에 대한 연구가 적을 뿐만 아니라 연구 자 체도 형성시기에 대한 입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 부분 에 대해서도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 의 초기기록을 신빙하느냐의 문제에 따라 크게 둘로 나누어지고 있다.1. 두 사서의 기록을 대체적으로 신빙하는 견해 에 서 는 삼국유사 卷 第 一 紀 異 第 新 羅 始 祖 麻 居 世 王 조에 나오는 6촌(부)의 위치에 대한 방향과 주요 촌락에 대한 기록을 통해 안강 이북을 제외한 형산강 유역에서 찾고 있다. (이종욱 1982:1984.) 2. 두 사서의 초기기록을 불신하거나 비 판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에서는 지금의 경주 시내와 그 주변에서만 6촌(부)의 위치 를 찾고 있다. (이병도 1959. 김원룡 1976. 이기동 1984. 등) 이 견해 중 6촌 설 화에서 각 촌장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산을 중심으로 살펴본 연구(이병도, 1959) 와 고분의 분포라는 입장에서 살펴본 연구(김원룡 1976) 로 나누어진다. 그 외에 6 촌 중 3촌이 경상북도 지역에 있었다가 경주 평야로 옮기게 되었다는 견해(김철 준, 1952. 1953:1990) 와 토성을 중심으로 6촌의 위치를 알아본 견해(오영훈, 1992), 신라 초기의 고분을 가지고 6촌 중 일부의 1997) 위치를 비정한 견해도 있다. (권오영, - 24 -
(2) 6부 사이의 관계 6부 사이의 관계는 그 동안 역사학계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 중의 하나이 다.25) 이것은 그 동안 역사학계에서 6부를 행정구역의 차원에서 접근하기보다는 행정단위로 표현된 집단 사이의 정치적 사회적 힘의 역학관계의 차원에서 연구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구가 활성화된 것은 6-7세기에 만들어진 비문에 나오 는 거의 모든 6부인의 이름 앞에 部 名 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6부라는 행정단위의 정치적 사회적 관계를 비문에 나오는 部 名 을 붙인 인물의 수의 비율 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특히 6세기초의 영일냉수리비 (503) 와 울진봉평비 (524) 에는 왕과 갈문왕 앞에까지 部 名 이 붙어 있기 때문에 6부라는 행정단위는 왕 과 6 部 主 (또는 6 部 千 支 ) 사이의 정치적 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까지 이해되었다. 이러한 6부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구체적인 공간상에서의 왕경의 행정구 역이라는 지리적 차원에서도 중요하다. 첫째 6부 사이의 관계의 변화는 정치적 사회적 힘의 역학관계의 차원에서만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배층의 공 간적 이동과 그로 인한 분포의 차이라는 차원에서도 다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6세기 이후의 비문에서 나타나는 部 名 을 관칭한 인물의 수적 비율이 정치중 심구역의 확장 방향을 알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6부 사이의 관계를 이와 같은 두 가지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왕경의 행정구역의 개편이 왜 지연되었으며, 그러한 지 연 요소가 어떻게 극복되었는지를 밝힐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해결하 기 위해서 지금까지의 6부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역사학계의 쟁점을 포괄적으로 정 리해 본다. 6부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역사학계에서 크게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뉘어지고 있다. 이 두 가지 입장 역시 이미 앞에서 설명했듯이 삼국사기 와 삼국유 사 에 나타나는 신라사 초기기록에 대한 신빙성 문제에 대한 견해차이로부터 발 생하고 있다 26) l. 신라사 초기기록을 신빙하지 않거나 비판적으로 신빙하는 입장에서는 6부를 단위정치체나 부체제로서 연구하였다. (노태돈 1975. 이문기, 1987. 노중국 1994. 전재덕, 1996. 주보돈, 1998. 등) 이 연구는 내부적으로 다양한 견해의 차이가 있으 25) 6촌(부)에 대한 정치 사회사적 연구의 입장 차이는 한국고대사회에서 펴낸 韓 國 古 代 史 빠 究 17 J, 서경문화사, 2000 에 잘 나와 있다. 26) 이 부분에 대한 정리는 전덕재 r신라육부체제연구 JJ, 일조각, 1996 pp.l -9를 참 조 - 25 -
나 6부 각각의 사이나 왕과 6부주 사이의 정치적, 사회적 힘의 역관계를 강조하였 다. 그리고 이러한 6부의 독자성이 6세기나 더 이후에 왕권의 강화와 함께 사라지 면서 왕경의 행정단위로 변모하였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견해 사이에도 6부의 공 간적 위치를 비정한 경우가 있으나 그것을 6부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데는 거의 활용하고 있지 않다. 2. 신라사 초기기록을 신빙하는 입장에서는 유리니사금 9년 (32) 6촌에서 6부로 의 개편기록을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이미 이 시기에 6촌이 사로국 내의 행정구역 단위로 개편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종욱 1982) 이 견해는 6촌이 이미 행정구역단 위로 변모하였기 때문에 6부의 세력이 왕보다 낮은 지위로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왕의 명령을 받는 위치에 있었다고 보았다. 특히 이 견해는 6촌의 전체적 범위를 안강 이남의 형산강 유역으로 보고 삼국유사 의 기록을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6촌의 대략적인 위치를 비정하였다는 점 정치중심구역을 구체적 공간상에서 살펴 보고 논리를 전개시켰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3) 중대 (654-780) 이후 신라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 이미 연구의 목적에서 살펴보았듯이 삼국사기 의 지리지에는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의 개편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경주시 내의 신라 유적에 대한 발굴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왕경의 도시계획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되었고 그에 따라 도시계획의 단위와 범위가 서서히 밝혀지게 되었 다. 하지만 삼국사기 지리지의 기록 자체가 애매하기 때문에 연구자들마다 왕 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에 대해 합일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또한 왕경의 도시계획 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되면서 도시계획이 이루어진 범위 안에서만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에 대한 논쟁이 이루어지는 경향도 나타나게 되었다. 중대 (654-780) 이후 이러한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의 문제는 삼국사기 나 삼국유사 에 나오는 각종 지리적 인구적 자료에 대한 이해를 달라지게 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신라 왕경의 번영 정도, 도시계획의 범위와 단위의 문제와 직 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까지의 중대 (654-78이 이후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에 대한 견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왕경의 범위는 행정구역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었는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 라서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의 문제는 동시에 논의될 수 있다. 선행연구에서 이 - 26 -
문제에 대해 분명하게 입장을 밝힌 경우는 별로 없지만 크게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1. 왕경을 작게 보는 입장이 있는데 이러한 견해 내부에도 다양한 입장이 존재 한다. 첫째Ir삼국사기 지리조의 王 都 長 三 千 七 十 五 步 廣 三 千 十 八 步 츠 十 五 里 六 部 라는 기록에 나오는 왕도만을 왕경으로 본다고 분명하게 규정지은 견해가 있다. ( 村 上 四 男, 1962. 木 村 誠, 1984.) 이러한 견해는 위의 문장을 長 3, 075보, 廣 3,018 보의 공간규모를 갖는 왕도에 35 리와 6부가 있었다 고 해석하였다고 볼 수 있다. 둘째, 분명하게 규정짓지는 않았지만 연구과정 속에서 암묵적으로 표시한 경우 로서 현재의 경주시내 정도로 작게 보는 입장( 購 島 玄 治 郞, 1930. 윤무병, 1987. 田 中 俊 明, 1992. 김한배, 1998. 등)이 있다. 이 견해는 도시계획을 연구하면서 도시계 획이 이루어진 부분을 주로 왕경으로 인정하고 있다. 셋째 r 삼국사기 지리조의 王 都 長 3, 075보, 廣 3, 018 의 기록을 적극적으로 해 석하여 동서로는 명활산과 선도산 남북으로는 소금강산과 포석정 또는 삼롱 사이 로 보는 입장(장순용 1977. 민덕식 1989. 등)이 있다. 이 견해 역시 도시계획의 차원에서 왕경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왕경의 범위를 도시계획이 이루어진 범위 얼 것으로 설정하고 있음은 둘째의 견해와 같지만 더 넓은 범위로 보는 점이 다 르다. 이러한 세 가지 견해의 입장에서 서면 6-7세기 또는 중대 (654-780) 의 어느 시기 에 왕경의 범위가 축소되었으며 6부 역시 경주시내 정도의 규모에서 새롭게 재편 된 것으로 보게 된다. 2. 왕경을 크게 보는 입장이 있다. 이 입장은 기본적으로 6촌(부)이 신라 초기부 터 있었으며, 그 위치가 안강 등을 제외한 형산강 유역에 있었다는 입장을 표시하 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는 왕경이 王 都 와 王 離 로 나누어져 있었다고 보고 있다. 이 때 왕도는 삼국사기 지리조에 나오는 크기이고 왕기는 그 외부에 배치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井 上 秀 雄 1974. 오영훈 1992. 이종욱 등). 이러한 견해 사이에 도 왕도와 6부(왕기)의 분화시기에 대해 신라 초기부터 있었다는 견해(이종욱, 1982), 문무왕 때쯤 분화되었다는 견해(오영훈, 1992), 경덕왕대에 있었다는 견해 ( 木 村 誠, 1984) 등이 있다. 이와 같은 견해의 입장에 서면 왕경의 범위가 축소되지 않았으며, 언제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왕경 안에서 왕도와 왕기로의 행정구역의 개편이 있었다고 보게 된다. - 27 -
지금까지는 왕경의 범위와 상위 행정구역에 대해서만 살펴보았다. 그런데 삼 국사기 신라본기에 자비마립간 12 년 (469) 에 京 都 의 功 里 이름을 정하였다는 기록 이 있다.27) 그리고 삼국유사 에 55 리.1, 360방과 360방이라는 두 개의 기록이 동시에 나오고 있다. 여기서 행은 도시계획의 단위로 인식되었으며, 따라서 도시 계획의 연구자들에게 방이 왕경 내에 몇 개가 있었는가에 대한 견해차이가 발생 하였다. 이것은 도시계획의 단위인 功 의 크기에 대한 문제임과 동시에 도시계획이 어디까지 이루어져 있었느냐는 범위의 문제이기도 하다. 여겨서 미리 지적하고 넘 어가야 할 것은 기존의 연구자들은 대부분 행이 도시부분에만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논리를 전개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부분에 대한 기존의 견해를 정 리하면 다음과 같다. 購 島 玄 治 郞 은 방의 수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았지만 대략 304-321 개가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 顧 島 玄 治 郞 1930) 김병모도 방의 수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 하지는 않았지만 도시계획의 기본 단위가 총 5767R 가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김병 모, 1884) 이에 비해 윤무병은 동서와 남북으로 6개의 방이 있어 36방이 있었다고 분명하게 언급하면서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오는 35리를 35개의 방 중 왕궁이 제외된 35방으로 해석하였고 360방은 36방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윤무 병, 1987) 민덕식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오는 왕도 長 3, 075보, 廣 3, 018보의 기록을 현재의 5.60아n.5,593m로 보고 1. 360방이 이 범위 안에 모두 들어간다고 보았다. 이외의 학자들은 방의 수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고 있다. 2-2 선행연구의 문제점 신라 왕경에 대해서는 주로 역사학 고고학 도시계획학에서 연구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를 통해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에 대한 여러 문제들이 논쟁의 대상 으로 부각되었으며 상당한 연구성과가 축적되었다. 하지만 선행연구의 검토과정 에서 신라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에 대한 견해 차이가 매우 심하게 나타나고 있 음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견해 차이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근본적으로 이 문제 를 규명할 만한 자료가 극히 부족하기 때문에 발생하였다. 또한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에 나오는 신라 초기기록에 대한 신빙성 논쟁도 왕경의 범위와 행정 구역에 대한 견해 차이를 크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 차이가 발생한 것이 27) Ii프 國 벚 記 卷 第 三 新 / 羅 本 紀 第 갚 자비마립간 12년 - 28 -
단순히 자료의 부족이나 기록에 대한 신빙성 논쟁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차 원에서 선행연구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의 문제를 구체적인 공간이 결여된 행정단위라는 차원에서 살펴보는 경우가 많았다. 왕경이나 그 내부의 행정구역이나 모두 구체적인 공간상에서 존재하는 것이며, 일정한 영역적 범위와 경계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연구가 주 로 역사학계에서 이루어짐에 따라 행정단위의 정치적 사회적 의미에 초점을 맞 추게 되어 구체적 공간상에서의 문제는 상당히 등한시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하지 만 이미 앞에서 여러 번 강조했듯이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이 구체적으로 어떻 게 이루어져 있었는가는 왕경과 행정단위의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이해하는데 전제조건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에 대한 문제를 구체적인 공간상에서 바라보는 지리적 차원의 연구 필요성이 제기된다. 두 번째로 왕경 내 행정구역 사이의 관계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지배층을 비롯 한 인구이동과 재분포 그 과정에서 나타난 정치중심구역의 형성 확장과의 연계 속에서 파악하는 관점이 미흡했다. 왕경과 지방, 왕경 내에서도 정치중심구역과 다른 지역 사이에 지배층을 비롯한 인구의 이동이 있을 수 있으며 행정구역 사이의 관계 변화를 이러한 인구의 이동 이라는 차원에서 바라볼 펼요가 있다. 특히 지배층의 이동은 행정단위로 표현된 집단의 정치적 사회적 힘의 역관계를 바뀌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인 구이동과 재분포의 핵심에는 정치중심구역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정치중심구역 의 형성과 확장이 기존의 행정구역의 경계와 어떤 관련이 있으며 그것이 행정구 역과 연관되어 금석문이나 사서의 자료에 어떻게 기록되게 되었는지를 살펴볼 필 요가 있다. 세 번째로 왕경의 범위나 행정구역의 문제를 형성과 변화라는 시계열적 차원에 서 바라보는 관점 이 미 약했다. 왕경의 범위나 행정구역 모두 당시대의 필요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 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역사성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 라서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이 신라의 역사 속에서 시계열적으로 어떻게 변모했 는가를 살펴볼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것은 신라가 건국되기 이전 신라의 범위가 과연 지역적으로 어떻게 구분되어 있었으며, 각 지역단위 사이에는 어떠한 정치 적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 - 29 -
고 신라의 건국과 대외팽창 속에서 건국이전의 상태가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으 로 어떻게 계승 변화되었지를 연속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네 번째로 왕경의 범위를 도시계획의 흔적이 나타나는 범위만으로 한정시키는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삼국사기 나 삼국유사 에 기록되어 있는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에 대한 사료를 도시계획의 틀에 맞추어 이해할 필요는 없다. 도시계획에 대한 연구가 구 체적인 계획의 단위와 도시의 내부구조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고 있는 것은 분 명하지만 그것이 왕경 전체에 대한 지리적 문제를 모두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왕경은 도시, 그것도 계획된 도시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 라서 삼국사기 나 삼국유사 에 기록되어 있는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에 대한 사료를 도시계획의 틀을 벗어나 보다 자유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다시 도시계획의 연구성과를 바라볼 필요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된다면 오히려 도시계획의 틀 속에서 사료를 바라볼 때보다 도시계획의 단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 30 -
제 2장 경주시내의 하천과 지형 제 1 절 기록을 통해 본 하천의 범람과 지형 1-1 하천의 범 람과 북천 경주시내는 형산강 본류인 서천과 남천 북천 등 세 개의 하천이 합류하는 지점 에 있다. 현재는 곳곳에 人 工 提 防 이 만들어져 있고, 북천 상류에는 보문호와 덕동 호가 건설되어 있어 이들 하천의 범람 위험이 적다. 하지만 일제시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경주시내는 범람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던 지역이다. 이런 사실은 고대 에도 마찬가지였으며Ir삼국사기 의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해 그것을 알 수 있 다. 자료 2-1) (아달라니사금) 7 년(1 60) 여름 4월에 暴 雨 가 내려 알천(북천)의 물 이 넘쳐 人 家 가 표류하였고 金 城 北 門 이 저절로 무너졌다1) 자료 2-2) (유례니사금) 7년 (290) 여름 5월에 큰 물이 나서 월성이 무너졌다, 2) 자료 2-3) (흘해니사금 41 년 (350)) 여름 4월에 큰 비가 열흘이나 내려 평지의 물이 3-4R 이나 되었고, 官 私 屋 舍 가 漂 沒 하였으며, 산이 13 개소나 무너졌다, 3) 자료 2-4) (소지마립간 18년 (496)) 여름 5월에 큰 비가 내려 알천(북천)의 물 이 불어나 人 家 200 여가가 표류하였다, 4) 위의 자료는 경주시내와 분명하게 관련되어 있는 범람 기록만 뽑은 것이다, 5) 큰 1) 七 年 夏 四 月 暴 雨 關 川 水 益 漂 流 人 家 金 城 北 門 自 짧( D" 二 츠 國 벚듭ê J 卷 第 二 新 羅 本 紀 第 τ 阿 達 羅 尼 師 今 7 년) 2) 七 年 헐 t1. 月 大 水 月 城 頻 짧Jr-~ 國 ~ 記 卷 第 新 羅 本 紀 第 유례니사금 7 년) 3) 夏 四 月 太 샤IT?셋 句 츠f J:번 水 三 四 }긍 j폈 沒 官 私 넓: 舍 IJI 朋 十 프( Jr츠 國 필 記 卷 第 τ 新 羅 本 紀 第 품 解 尼 師 今 41 년) 4) 夏 liη 大 n~ 關 川 水 振 렌 沒 그 白 - 餘 家 ( Jr 三 國 닷] 記 卷 第 三 新 羅 木 紀 第.드즈 소지마립간 18 년) 5) Ir삼국사기 에 6세기 이후에는 홍수 시 범람에 의한 경주시내의 피해상황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없다. 이것은 6세기 이후 제방 건설이 충분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으 로 볼 수 있다. 다만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해 북천은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선덕왕이 죽음에 이르러 아들이 없자 群 댄이 후사를 논의하여 왕의 族 子 댐 )C 을 세우려고 하였다. 주원의 집은 京 北 20 리에 있었는데 때마침 큰 비가 내려 알천의 물이 불어나 주원이 건널 수 없었다. 혹자가 말하기를 人 君 의 큰 자 - 31 -
홍수가 나면 고지대에 해당되는 月 城 이 무너질 정도이고 평지에는 3-4R 이나 물 이 고일 정도라면 경주시내가 모두 물에 잠기는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위와 같은 대홍수는 매년 일어나는 것은 아닐 것이며, 몇 십 년만에 한 번씩 일어 났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하지만 대홍수의 상황을 통해 볼 때 몇 년에 한 번 일 어나는 홍수일지라도 그 영향이 결코 작지 않았을 것으로 볼 수 있다. 홍수 시 이 러한 범람에 대한 기록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경우에도 찾을 수 있다. 자료 2-5) 東 川 : 北 川, 關 川 이라고도 하는데 부의 동쪽 5 리에 있다. 樹 領 에서 나와 握 淵 으로 들어간다.%- 傳 에 뱃물이 동북쪽으로부터 읍의 거주지로 곧장 뚫고 들어오므로 고려 현종 때 전라 충청 경상 3도의 군정을 징발하여 돌을 쌓아 제방을 만들고,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조성해 수해를 방지했다 고 한다.6) 자료 2-6) 奉 德 츄 鍾 : 신라 혜공왕이 종을 주조하였는데 구리의 무게가 12만 근이었다... 뒤에 봉덕사가 북천에 잠기자 天 順 4 년(1 460) 경진에 靈 妙 좋로 옮겨 달았다.7) 자료 2-7) 공조 (I 費 )에서 경상도 제언 순찰사( 慶 尙 道 提 體 逃 察 使 ) 선형( 宣 炯 ) 의 계본(햄 本 )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경주( 慶 州 ) 북천( 北 川 )의 물길이 바로 읍 성(몸 城 )으로 향하고 또 성밑에 해자( 核 字 )가 모두 메어서 막혔습니다. 본주( 本 州 )는 다른 고을의 예( 例 )와 같지 아니하여 집경전( 集 慶 觀 )이 있고, 또 객인( 客 人 )이 경유하는 곳이니, 청컨대 명년 농한기에 본주의 백성을 뽑아 내어서 제방 ( 提 防 )과 해자를 수축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8) 자료 2-8)... 이번의 수재는 개벽이래 없었던 것이다. 경주는 府 內 가 큰 바다로 변해버려 민가가 잠기지 않은 것이 없었다... 9) 자료 2-9) 본조 영조 18년 9월에 경주에 큰 물이 나서 신라 헌덕왕릉을 무너 뜨리니 상께서 香 祝 을 보내고, 道 뚝에게 명해서 그것을 수리하게 했다. 좌의정 송인명이 장계를 올려 말하기를 경주의 신라 헌덕왕릉은 북천변에 있습니다.8 월 22 일 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는데 물길이 陸 寢 을 비껴 충돌하여 동서 長 리는 진실로 사람들이 도모한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今 日 에 폭우가 내 리니 하늘이 혹 주원을 세울 수 없게 한 것이 아닌가... 끼 三 國 벚 記 卷 第 十 新 羅 本 紀 第 十 원성왕 즉위) 이와 같은 내용은 삼국유사 卷 第 二 紀 異 第 二 원성대 왕 부분에 도 비 슷하게 나온다. 6) 東 川 ~r;. 北 )11 - 될 關 川 在 府 東 五 里 出 微 領 立 鋼 淵 [ 新 增 H깜 傳 川 流 自 東 北 直 衝 둠 居 故 高 麗 顯 宗 朝 發 全 羅 忠 淸 慶 尙 三 道 軍 T 藥 石 寫 提 盛 植 林 數 以 防 水 害 :Zi;( r 東 京 雜 記 卷 一 llj 川 ) 7) 奉 德 좋 鐘 新 羅 惠 悲 王 驚 鐘 鋼 重 十 二 萬 ft... 後 좋 倫 於 北 川 天 順 四 年 康 辰 移 縣 手 靈 妙 좋( r 新 增 東 國 與 地 勝 寶 卷 之 : 十 一 慶 州 府 古 題 ) 8) r 朝 蘇 王 朝 實 錄 세조 12 년 1 월 19 일 9)... 今 此 水 % 乃 開 關 以 來 之 所 未 有 者 慶 州 則 府 內 變 寫 大 海 間 舍 無 不 휠찬 沒... ( r 朝 蘇 王 朝 實 錄 선조 38년 7 월 23 일) - 32 -
廣 44 척을 허물어 무텀을 범하는 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內 外 의 계단과 섬돌 도 모두 파괴되어 깊은 내를 이루었으니 10) 위의 기록을 통해 고려와 조선에서도 범람의 위험이 상당히 강하게 존재했으며, 범람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곳에 입지해 있었을 읍의 거주지나 읍성조차도 위협받 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범람의 위협이 몇 십 년만에 한 번씩 일어나는 것일 지라도 주요 건물과 거주지까지 위협하는 일은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기록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알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사 실은 홍수 시 경주시내에 범람 위험을 일으키는 하천은 關 川 즉 北 川 이라는 사실 이다.11) 북천은 길이가 21km 이고 유역 면적이 85.9k따로서 형산강 본류인 서천은 말할 것도 없고 길이가 21km 이고 유역 면적이 112.9knf 인 남천( 故 川 )보다도 작 다.1 2 )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천이 경주시내의 범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이유는 그림 -2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림 -2를 보면 북천은 동쪽 높은 산지에서 발원한 여러 물줄기가 합해져 내려 오다가 소금강산과 명활산 줄기의 협곡을 통과하자마자 바로 경주시내의 평지로 쏟아져 나온다. 반면에 남천은 토함산 줄기의 서쪽 급경사지에서 발원하지만 곧바 로 평탄한 들을 만나 오랫동안 흐른 후 월성 남쪽에서 경주시내에 들어선다. 이러 한 두 하천의 특정은 경주시내와 맞닿는 부분에서의 하천 바닥의 퇴적물을 통해 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진 -1 은 소금강산과 명활산 줄기의 협곡에 있는 북천을 찍은 것이다. 하천 바 닥에는 여러 크기의 바위 자갈 모래가 뒤섞여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은 경주시내 서북쪽에서 형산강 본류와 합류될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 이것은 북천의 구배가 경주시내에 도착할 때까지도 급격히 약화되지 않아 홍수시 하천의 운반능력이 컸 기 때문이다. 사진 -2는 윌성 남동쪽 끝에서 찍은 남천의 모습이다. 하천 바닥은 순수한 모래로만 이루어져 있다. 이곳보다 경사가 급한 곳에는 돌과 자갈이 섞여 있으나 북천에 비해서는 모래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와 같은 상황은 남천이 이 10) 本 朝 英 祖 十 八 年 九 月 慶 州 大 水 짧 新 羅 憲 德 王 陸 上 遺 香 祝 命 道 ê 修 之 左 議 政 宋 寅 明 햄 日 慶 'l '1 新 羅 憲 德 王 陸 處 於 北 川 邊 八 月 二 十 二 日 大 風 雨 水 勢 橫 衝 陸 寢 뿔 破 東 西 長 廣 四 十 四 R 至 犯 瑩 域 內 外 階 柳 亦 皆 :f: E 破 使 成 深 川... ( rr 文 敵 備 考, 朝 蘇 σ) 林 數 JJ, 朝 蘇 總 督 府 林 業 試 驗 場 1928:39에서 재인용) 11) 북천이 역사적으로 경주지역에서 가장 범람이 심한 하천이었음은 朝 蘇 η 林 數 J, 朝 蘇 總 督 府 林 業 試 驗 場 1928:41-42 에 잘 정리되어 있음. 12) 0" 慶 州 市 둡JE, 경주시사편찬위원회, 1971:34,36-33 -
탁 트인 평지가 시작되는 소금강산과 명활산 사이의 협콕인 숲머리에서 찍은 사진. 하상 에는 돌과 자갈 모래가 뒤섞여 있고 하천 뒤쪽으로는 보문호의 둑이 보이고 있다. 사진 -1 북천의 河 皮 월성 동남쪽, 경주국립박물관 서쪽에서 찍은 사진. 하상에는 모래만이 쌓여 있다. 가운데 에 보이는 바위는 새로 발굴한 일정교지의 흔적이다. 사진 -2 남천의 河 皮 - 34 -
미 완만한 평지를 지나면서 운반력이 급격히 약화된 후 월성 남쪽을 지나기 때문 에 나타난 것 이 다 13) 이러한 두 하천의 특징 때문에 河 福 의 차이가 매우 컸다. 남천은 길이는 북천과 비슷하지만 유역면적이 넓음에도 불구하고 하폭은 북천보다 훨씬 작다. 그림 -2와 그림 -6은 1916년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북천 상류에 보문호나 덕동호가 만 들어지기 전이다. 이 지도를 통해 북천의 하천폭이 그 길이와 유역면적에 비해 서 천이나 남천보다 지나치게 넓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홍수 시 갑작스런 유량증가 에 의한 북천의 범람 위험이 매우 컸다는 것을 보여준다. 1-2 제방과 숲( 數 )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경주시내는 범람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것으로 인해 범람을 막아내기 위한 제방의 건설과 숲의 조성에 대한 각종 기록도 많을 수밖에 없다. 최원석에 의하변 경상도 지역에서 비보숲이 가장 많은 지역이 바로 경주라고 한다. 그에 의하변 경주에는 총 15개소의 數 林 이 분포하고 있으며, 그 다음으로 9 개소의 안동 5개소의 진주 4개소의 고령 3개소의 밀양 함안 청도 영해가 잇고 있다. 그리고 그가 조사한 총 15개소의 數 林 중 수해 방비용으로 사용 된 것은 7개소라고 하는데 모두 경주시내에 있다. 그리고 수해 방지용이 아닌 8 개 중 4개도 경주시내에 있다. (최원석 2000:260.264)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경주의 중심지가 경상도의 다른 어떤 고을의 중심지보다도 범람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 으며, 그에 대한 방비도 가장 많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북천 변에 제방이 건설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제시한 자료 2-5 와 자료 2-7을 통해 알 수 있다. 특히 조선시대에 북천 변에 제방의 건설과 보수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속담의 유래에 대한 기록을 통해 알 13) 이러한 남천의 상황 때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올 수 있었다. 문천은 일명 남천이 오... 배반 인왕 양리의 사이에 跳 珠 懶 玉 하는 淸 流 를 이루다가 반월성을 지나 서로 서천 에 流 注 하는 동안은 흐름이 아주 완만하여 북천의 石 傑 을 굴러 내리게 하는 급류와 대 조적이다. 옛날은 지금처럼 뱃바닥이 돋아지지 않아 故 川 倒 沙 라 일렀던 만큼 물이 서로 흐르는지, 동으로 흐르는지 모래가 치오르는 듯하여 白 沙 뿜 流 는 언덕의 푸른 잔디와 천 경림 남정수 등 앞뒤의 숲들 그 남쪽에 萬 졌 笑 森 처럼 전개하는 남산의 봉우리들 그 佳 麗 한 풍광은 자고로 騎 人 팎 客 의 歌 詩 에 많이 올랐음."( r 慶 州 -n]~.펴, 경주시사편찬위 원회, 1971:38) 맨 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