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문제연구 2011년 하반기(통권 제56호) 전쟁 경험의 재구성을 통한 국가 만들기* - 역사/다큐멘터리/기억 - 1)이 명 자** Ⅰ. 들어가는 말 Ⅱ. <정의의 진격>과 <정의의 전쟁> 제작배경 Ⅲ. <정의의 진격>과 <정의의 전쟁> 비교 Ⅳ. 역사/다큐멘터리/기억 현대 남북한 체제 형성에서 주요한 전환점인 한국전 쟁은 해방 후 시작된 좌우대립과 정치적, 사회적 갈등 의 총체적 폭발이었다.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한국 전쟁은 남북의 국민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기반을 제 공했다. 해방 직후부터 남북은 적대감에 기반한 체제 만들기와 국민의 창조를 시도했지만 오랫동안 유지해 온 공동체의 경험과 일체감이 남북의 대중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남과 북을 돌이킬 수 없게 나누었고 대중들은 생존을 위해서라도 국가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전쟁이 국가를 만든다 는 틸리의 명제가 남북한 체제형성에도 적중한 것이다. 전쟁 이후 남한에서는 반공이데올로기가 정 착하고 국가의 자율성이 증대했으며 군부를 비롯한 국가억압기구가 불균형적으로 비대화하였고 대미종속 이 구조화되었다. 북한 역시 반제국주의 정서가 내면 화되고 협동농장의 완성 등 사회주의 혁명이 가속화 되고 김일성 유일지도체제가 강화되었으며 새로운 중 소관계가 성립되었다. 역사를 기억으로, 기억을 역사로 만드는 주요장치인 영화는 공동체의 기억 만들기에 기여했는데 전쟁기 동안 남북의 영화인들은 종군영화인 이라는 이름 하 에 동원되어 각종 다큐멘터리, 극영화, 시보영화를 제 작했다. 남한에서는 피난지 대구와 부산을 중심으로 국문요약 영화인들이 군부대에 소속되어 영화제작에 나섰다. 북한에서는 전쟁 발발 직후 김일성의 호소를 시작으 로 12조로 편성된 영화인들의 종군활동이 시작되었 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은 극영화보다 다큐멘터 리와 시보, 뉴스영화에 힘을 실어주었고 정부와 군부 대의 후원을 받으며 제작된 다큐멘터리는 한국전쟁에 대한 제도권 내의 공식기억을 대변했다. 남북한 체제의 관점에 의해 구성된 내러티브인 한국 전쟁에 대한 역사서술은 그 이데올로기 편차가 매우 크지만 제작방식과 목적에서는 일치한다. 역사가 반 영이 아니라 구성이며 하나의 내러티브라는 헤이든 화이트 이후 역사학의 관점을 받아들여, 이 글은 한국 전쟁 동안 제작된 남북의 다큐멘터리 <정의의 진격> 과 <정의의 전쟁>이 어떠한 경로를 경유해 국민정체 성 형성에 기여하고 있는가를 두 영화의 거울상 이미 지와 함께 분석한다. 주제어: 한국전쟁, 국가정체성, 역사의 재구성, 다큐멘터리, 집단기억, 트라우마, 정의의 진격, 정의의 전쟁 * 이 논문은 2010년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한 연구임(NO. G00072). ** 목원대학교 강사
2 통일문제연구 2011년 하반기(통권 제56호) I. 들어가는 말 한국전쟁은 해방 후 시작된 좌우대립과 정치적, 사회적 갈등의 총체 적 폭발이었다. 한국전쟁 이전까지 해방 공간에서 이데올로기 갈등에 의한 테러가 빈번했고 38선 접경지역에서 무력충돌도 잦았으며 남침설 혹은 북침설의 소문 또한 무성했다. 1) 남한의 이승만과 북한의 김일성 은 각각 국토완정론 과 남조선해방론 을 공공연히 언급하며 전쟁을 시 사했다. 따라서 해방 5년 동안 응축된 남북의 정치적, 사회적 갈등이 폭발한 것이 한국전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은 현대 남북한 체 제 형성에서 주요한 전환점으로 정치, 사회 그리고 문화적 측면에서 큰 변화를 남겼다. 사회 문화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한국전쟁은 남북의 국민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기반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국가 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영토나 인구와 같은 물적 요건도 중요하지만 국 가에 대한 동의와 공동체로서의 일체감, 국민과 비국민 구별짓기와 같 은 것도 필수요건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 이 전까지 미소군정의 남북한 분할점령, 3 8선의 성립, 정부 수립을 거 치며 남북한정권이 적대감에 기반해 체제만들기와 국민의 창조를 시도 했지만 대립과 분단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유지해온 공동 체의 경험과 일체감이 대중들의 정서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 나 전쟁은 남과 북을 돌이킬 수 없게 나누었고 대중들은 생존을 위협받 는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해줄 국가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 다. 또한 전쟁을 겪으며 얻은 경험, 상처, 분노도 국민정체성의 주요한 내용이 되었다. 1) 경무부 집계에 의하면 1945년 8월 15일부터 1947년 4월 15일까지 276건의 각종 테러가 발생했으며 이로 인해 희생된 자가 100여 명, 부상자가 천여 명이라고 한다. 군사적 무력충돌도 있어 1950년 3월 3일부터 10일까지 1주일동안 무력충돌만 18번 이나 있었을 정도이다. 독립신보, 1947년 5월 31일.
전쟁 경험의 재구성을 통한 국가 만들기 3 그 결과 정부수립 이후에도 국민적 동의를 쉽게 얻지 못했던 남북의 정권은 국가에 대한 동의와 공동체의 기억이라는 내용을 한국전쟁을 통 해 채울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전쟁을 통해 민중들 사이에 공 유하게 된 집단기억(collective memory)과 적대감이 남북한 정치지 도자에게 이로운 정치환경을 만들어주고 전쟁 전부터 시도되었던 두 개 의 국민만들기를 완성하도록 도와주었다고 할 수 있다. 역사를 기억으로, 기억을 역사로 만드는 주요한 장치 가운데 하나인 영화는 공동체의 기억 만들기에 기여해 왔다. 전쟁기 동안 남북의 영화 인들은 국가 만들기, 한 국가가 지녀야할 공통의 기억 만들기 프로젝트 에 종군영화인 이라는 이름으로 동원되어 각종 다큐멘터리와 시보영 화, 극영화를 제작했다. 남한에서는 피난지 대구와 부산에서 영화인들 이 군부대에 소속되어 영화제작에 나섰다. 북한에서는 전쟁이 일어나 자 예술인들에 대한 김일성의 호소를 시작으로 전체 예술인들의 종군창 작활동과 동시에 영화인들의 종군활동도 시작되었다. 종군활동의 결과 남한에서는 장편기록영화 6편, 극영화 20편, 각종 뉴스 및 시보영화가 제작되었고 북한에서는 기록영화 23편, 극영화 6편 그리고 남한과 마 찬가지로 각종 뉴스 및 시보영화가 제작되었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 황은 극영화보다 다큐멘터리와 시보, 뉴스영화에 힘을 실어주었고 그 래서 전쟁기 영화사의 대표작은 단연코 전쟁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 다. 정부와 군부대의 후원을 받으며 제작된 다큐멘터리는 기억의 원자 료로 기능해왔는데 북한의 경우 아직까지도 다큐멘터리를 역사자료, 역사문헌 으로까지 말하며 그 기억의 진실성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2) 제도권 내의 공식기억을 대변하며 이 작품들은 전쟁 이후에도 한국전쟁 2) 기록영화에 취급된 모든 사건과 사실, 인물생활들은 해당시기의 력사적 내용을 사실 그대로 반영한 것들이다. 이것으로 하여 기록영화는 본질에 있어서 우리 당의 귀중한 력사문헌으로 되면서 귀중한 력사자료로 된다. 배희철 외, 주체의 기록영화 (평양; 문학예술종합출판사, 1999), p.9.
4 통일문제연구 2011년 하반기(통권 제56호) 특집 때마다 새롭게 편집되어 전쟁에 대한 남북의 집단기억을 형성했으 며 각각 남북의 반공영화와 북한의 반제국주의 혹은 전쟁영화 등 극영 화의 기본서사를 이루는 토대가 되었다. 영화가 보여주는 역사에 대해 비판적인 역사가들조차 극영화에 비해 다큐멘터리의 사실성, 객관성을 인정하며, 따라서 다큐멘터리에 대해 서는 덜 비판적이다. 다큐멘터리가 옛날 영상을 보여주고 생존자의 사 건에 대한 기억이나 전문가의 분석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매개되지 않은 이미지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 할 것은 로젠스톤이 간파하듯 다큐멘터리가 사건자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특정 스토리나 주장을 말하기 위해서 처음, 중간, 끝의 내러티 브 구조에 맞추어 시퀀스별로 세심하게 배열된 사건의 선택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3) 로젠스톤의 태도는 헤이든 화이트 이후 성 립한 반근대주의 역사학의 입장 즉 역사가 사실의 반영이 아니라 구성 이며 하나의 내러티브라는 입장을 대변한다. 레오폴드 랑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근대 역사학은 역사서술이 역 사적 사실을 통일적이고 일관되게 그리고 투명하게 전달할 것이라고 주 장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공식적 의미의 역사 외에 그 주변부에 위치했던 수많은 역사들 을 희생시키며 역사란 과거에 일어난 일 자체 일뿐 아니라 그에 대한 서술 이라는 점을 간과한다. 역사가 결국 서술 을 통해 전달된다면 서술자의 개입은 불가피하기 때문에 화이트 이후 역사학은 이 점에 착목했다. 화이트는 모든 역사연구와 서술에는 메타 역사적 구조가 내재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메타역사적 구조를 형성하 는 것은 역사가가 설정한 담론으로 이에 따라 비유적 전략과 함께 플롯 구성방식, 논증방식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경향이 결정된다. 4) 이와 같 3) Robert A. Rosenstone, Visions of the Past: the Challenge of Film to Our Idea of History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95), p.34. 4) 헤이든 화이트, 천형균 옮김, 19세기 유럽의 역사적 상상력-메타역사 (서울: 문학과
전쟁 경험의 재구성을 통한 국가 만들기 5 은 관점에서 한국전쟁 다큐멘터리가 보여주는 역사도 공식적 집단 기억 을 만들어내는 역사서술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한국전쟁 동안 남한에서 제작된 다큐멘터리 <정의의 진 격>(1951, 1952)과 북한에서 제작된 <정의의 전쟁>(1951) 5) 을 비교 하여 한국전쟁에 대한 남북의 역사서술이 만들어진 과정과 영화가 남북 의 국민 정체성 형성에 어떻게 기여했는가를 분석하려고 한다. <정의의 진격>은 전쟁기 남한에서 만들어진 6편의 장편 다큐멘터리 가운데 유 일하게 필름이 남아있는 경우이기도 하고 전쟁이 나자마자 제작된 중요 한 전쟁기록영화이기도 하다. <정의의 전쟁>은 국제영화제에 출품하여 수상한 작품으로 북한의 대표적 장편 다큐멘터리 6) 라고 할 수 있다. 두 작품은 한국전쟁 다큐멘터리가 어떠한 경로를 경유해 남북한 대중의 역 사정체성을 호명했는지에 대한 비교적 관점을 제공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Ⅱ. <정의의 진격>과 <정의의 전쟁> 제작배경 1. 전쟁기 남한 영화인의 활동과 <정의의 진격> 해방 후 일본의 제작 자본이 빠져나간 남한에서 영화 제작은 비참하 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열악한 조건에서 출발해 1946년 4편, 1947 지성사, 1991), p.17; 김기봉, 역사란 무엇인가 를 넘어서 (서울: 푸른 역사, 2000), p.133에서 재인용. 5) <정의의 진격> (1부:1951년, 2부:1952년, 감독: 한형모), <정의의 전쟁> (1951년, 감독: 천상인). 6) 북한에서 제작된 기록영화 중 카를로비바리 국제영화제에서 수상작은 3건이다. <정의 의 전쟁>(7차), <싸우는 철도일꾼>(8차)이 기록영화상 을 수상했고, 시보영화인 <조국 통일을 위하여>가 8차 영화제에서 전쟁뉴스상 을 수상했다. 본 글에서는 장편기록영화 를 대상으로 하며 <싸우는 철도일꾼>은 본격적 전쟁기록물이라고 보기 어려워 <정의의 전쟁>을 최종 텍스트로 선정하였다.
6 통일문제연구 2011년 하반기(통권 제56호) 년 13편, 1948년 22편, 1949년 20편으로 제작편수가 늘며 점차 안 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전쟁이 벌어지자 불과 몇 달만에 대구와 부산으 로 정부가 이동하고 피난민들이 그곳으로 모여들면서 전쟁기동안 지역 영화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극영화와 기록영화를 결합한 세미다 큐멘터리 양식이 흔하게 등장했으며, 무엇보다 오늘날까지 한국영화의 한 흐름으로 여겨지는 사상적 대립을 극복하려는 휴머니즘 7) 계열의 영화가 등장하는 성과가 있었다. 미국의 원조와 미군부대를 통해서 나 온 영화기자재가 여전히 중요한 문화적 자원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 완성된 극영화는 한편도 없었고 1951년부터 <내가 넘은 3 8선>, <화랑도>, <삼천만의 꽃다발> 등에 전쟁관련 내 용이 반영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쟁 기간동안 영화제작 활동은 주로 기록영화 활동에 모아졌다. 영화인들은 미공보원(USIS), 국방부 정훈 국 촬영대, 공보처를 중심으로 종군영화인의 이름으로 영화활동을 전 개했다. 진해에 녹음, 현상시설을 마련하고 뉴스영화 <전진대한보>를 만들다 창원군으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활동한 미공보원은 1953년 5 월 1일부터 <리버티뉴스>를 제작 상영했다. 국방부 정훈국 촬영대는 전쟁이 발발하자 목포에서 해군홍보영화 <사나이의 길>을 촬영 중이던 한형모 감독이 국방부 촬영대 란 완장을 만들어 종군활동을 한데에서부터 시작하는데, 후에 정식으로 국방부 촬영대라는 명칭으로 출발했으며 <국방뉴스>를 만들어 전시뉴스를 전 했고 전쟁기록영화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장편 다큐멘터리 <정의의 진 격>을 제작했다. 공보처는 경남도청 지하실에 현상소를 만들어 뉴스제작에 나섰는데 1952년 부산에서 <특별전선뉴스>를 제작하다 1953년 <대한뉴스>로 개칭, 월 1회 제작하였다. 이외에도 영화인들은 육해공군 촬영대에 소 7) 이영일, 한국영화전사 (서울: 소도, 2004), p.226.
전쟁 경험의 재구성을 통한 국가 만들기 7 속되어 군의 막대한 지원과 후원을 받으며 전시기록영화제작에 참여했 다. 1950년대 전쟁 이후 한국영화의 대표감독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홍성기, 신상옥과 같은 감독과 그 외 스텝들도 군에 소속되어 활동하며 영화제작의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뉴스나 시보영화를 제외하고 장편기록영화로 한국전쟁기에 나온 작 품은 <아름다웠던 서울>(1950), <서부전선>(1950), <오랑캐의 발자 취>(1950), <육군포병학교>(1951), <정의의 진격>(1951), <총검은 살아있다>(1953)로 총 6편이고 8) 이 가운데 <정의의 진격>만 필름이 남아있어 당시 기록영화의 성격을 보여준다. <정의의 진격> 1부는 해 방 후 평화로운 서울과 달리 전쟁을 준비하는 북한을 대조시키는 것으 로 시작해 전쟁발발과 전개과정,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후 1950년 10월 21일 이승만 대통령의 평양방문까지를 담고 있다. 2부는 1951 년의 1 4후퇴와 서울 재수복, 판문점 휴전회담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정의의 진격>은 앞서 보았듯이 한형모 감독이 다른 영화 촬영 중 촬 영팀을 목포 해군기지에 남겨둔 채 촬영 중 남은 필름 1만자와 아이모 카메라를 들고 대전으로 올라가 당시 대전도청에 있던 국방부의 승낙을 얻어 김보철, 김관수와 함께 촬영에 나가면서 시작되었다. 9) 기록에 따 르면 김광희는 동해안 전투를, 김종한은 서해안을, 한형모는 내륙의 전 8) <아름다웠던 서울>은 한국전쟁 발발 후 가장 먼저 완성된 영화인데 원래는 외국관광객 에게 서울을 홍보하기 위한 영화로 구상되었던 것이 전쟁이 나자 전쟁 전과 후의 서울 모습을 비교하는 전쟁 다큐멘터리로 재탄생한 영화이다. <서부전선>은 전쟁 당시 연합 군의 서울 수복작전을 기록하였으며 <오랑캐의 발자취>는 1951년 1.4후퇴 당시 중공 군에 의해 다시 한 번 폐허가 된 서울을 수록한 영화이다. <육군포병학교>는 제목이 보여주듯 육군포병학교 생도들의 생활상과 교육과정을 보여주어 우리 군의 사기를 전 시하고자 한 영화이다. 9) <정의의 진격>은 1, 2부로 이루어져 있으며 1부는 1950년 12월에 수도극장에서 개봉 했다. 1-2부에 모두 참여한 촬영스텝은 한형모 외에 김종한, 김광희, 양보환, 김강위, 양주남, 김관수, 심재흥이며 2부에 추가로 촬영스텝 이성춘, 김학성이 참여했고 편집 은 양주남이 맡았다.
8 통일문제연구 2011년 하반기(통권 제56호) 쟁상황을 기록한 것으로 전해진다. 10) 영화 시작 전 자막으로 밝히고 있듯이 <정의의 진격>에는 북한 종군영화인들이 촬영한 필름을 노획하 여 편집한 분량이 상당히 포함돼 있고 다만 UN군의 활동을 찍는 것은 금지되어 있어 UN관련 부분은 경우에 따라 극영화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다. 11) 설명적 다큐멘터리 양식으로 해설이 이미지보다 강조되고 있 으며 마치 내러티브를 구성한 후 이미지를 그에 맞추어 편집한 영화처 럼 해설이 영화의 흐름을 주도한다. <정의의 진격>은 일본 외신구락부 에서 시사회를 가진 후 외신기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아 일본의 영화배급 업자에게 판권을 양도했다. 12) 영화 시작에 앞서 자막을 통해 이 영화가 한국전쟁 발생 직후부터 제 작되었으며 적군이 촬영한 필름을 노획해 담음으로써 피아의 진상을 성실히 수록 하기로 했다고 밝히고 있다. 적군이 찍은 필름을 수용할 만큼 당시 남한에서 다큐멘터리가 현실을 성실하게 기록하는 영화로 인 정되고 있음을 짐작가능하다. 이 점은 영화가 비록 선전성을 강하게 노 정하지만 북한에서 다큐멘터리를 인식교양적 특성 과 해설선전성 에 방점을 두고 설명하는 것과 구분되는 지점이다. 13)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제작된 <정의의 진격>은 전쟁을 기록한 필름을 10) 한형모, 국방부촬영대 창설의 시대적 배경, 군영화 40년사, p.59; 정종화, 한국 영화 성장기의 토대에 대한 연구: 동란기 한국영화제작을 중심으로, 중앙대첨단영상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2, p.49에서 재인용. 11) 북한군의 기록은 전쟁초기 북한군의 서울점령 모습과 외국인 포로, 의용군의 훈련, 영천전투에서 승리한 북한군의 모습 등인데 이와 똑같은 장면들을 북한의 전쟁기록 영화 <정의의 전쟁> 및 여타 기록영화에서 확인해볼 수 있어 흥미롭다. 그외 북한군 이 포격을 가하자 도망가는 시민들의 장면과 B29 폭격기가 시가지를 폭파시키는 장 면 등은 극영화에서 발췌하여 편집되었다. 12) 정종화, 앞의 논문, 2002, p.47. 13) 남측의 <정의의 진격>에서 후퇴에 대한 정확한 언급을 하고 있는데 비해 북측의 <정 의의 전쟁>은 후퇴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는 점도 다큐멘터리에 대한 서로 다른 인식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전쟁 경험의 재구성을 통한 국가 만들기 9 이후에 편집하거나 후시녹음을 하는 과정에서 공동체의 공식기억을 만 들고 적과 나를 구별짓고, 국민의 정체성 만들기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 지는가를 보여주는 전쟁 다큐멘터리로 재탄생한다. 다음 장에서 이 점 을 북한의 다큐멘터리와 비교해 분석하겠다. 2. 전쟁기 북한 영화인의 활동과 <정의의 전쟁> 전쟁 발발 다음날인 6월 26일 김일성은 방송을 통해 모든 힘을 전쟁 의 승리를 위하여 모아야 함을 역설했다. 우리는 조국의 독립과 민족 의 자유와 영예를 수호하기 위하여 적들과 단호히 싸워야 합니다. 적들 의 야만적인 침략전쟁에 우리는 정의의 해방전쟁으로 대답하여야 합니 다. 우리 인민군대는 적들의 침공을 좌절시키고 즉시 결정적인 반공격 전을 개시하여 무력침범자들을 소탕하여야 합니다. 14) 전체 인민과 인 민군 장병들에게 그는 남반구를 해방하며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의 기치 밑에 조국통일위업을 완성할 것을 호소했다. 또한 1950년 7월 작가 예술인들과의 만남에서 작품에 인민들의 숭 고한 애국심과 견결한 투쟁의지, 승리에 대한 확고한 신심을 뚜렷이 표 현하기 위하여 직접 전선에 나갈 것을 종용했다. 이로써 종군창작활동 이 시작되었다. 종군영화반은 12개로 조직되어 각종 시보영화 및 기록 영화를 제작했다. 15) 종군영화반에 소속된 영화인은 천상인, 전동민(연 출), 박학(배우), 박병수(촬영)와 시보영화에는 정규완, 리희성, 김인 현, 최순홍, 홍인성 (촬영) 등 다수로 이들에 의해 기록영화 23편과 다 14) 김일성, 모든 힘을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전체 조선인민에게 한 방송연설 1950년 6 월 26일, 김일성 저작집, 6권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0), p.4. 15) 소희조, 위대한 수령님께서 개척하신 주체영화예술(2)-조국해방전쟁시기 영화예술사 조직령도, 조선영화, 1997년 6월호, p.23.
10 통일문제연구 2011년 하반기(통권 제56호) 수의 시보영화가 제작되었다. 종군 문학과 더불어 종군영화반이 조직 되고 연예공작대, 이동예술대 등이 소편대로 조직되어 소편대공연을 기본으로 하는 전시 공연사업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김일성의 이름이 찍힌 종군파견장 을 받았으며 안전을 위해 인민군과 같은 군복을 입고 전투상식도 배우고 군사칭호를 받기도 했다. 그리하여 어떤 종군 작가 는 군복에 영장을 달고 탱크에 올라가 조종사의 사기를 고무하기도 했 고 모터찌클 을 타고 활동하는 작가도 있었다. 16) 전선 서부에 파견된 작가들은 서울을 거쳐 대전으로 그리고 낙동강전투까지 참가하였으며 동부와 중부에 파견된 작가들은 춘천, 원주, 강릉, 소백산, 영천을 거쳐 포항, 팔공산, 금호강의 최전선의 전투에 참여했다. 예술인들에 대한 김일성의 호소는 계속되어 우리 문학예술의 몇 가 지 문제에 대하여 (1951년 12월 12일, 세계청년학생예술축전), 우 리 예술은 전쟁승리를 앞당기는데 이바지 하여야 한다 (1950년 12월 24일, 작가, 예술인, 과학자들과 한 담화)는 담화가 연이어 발표되었 다. 여기에서 김일성은 전시문학예술이 애국심을 잘 그려야 하며, 인민 군대의 영웅성과 완강성을 묘사하고, 인민군대와 전체 인민의 승리에 대한 믿음을 그리고 적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일으킬 것을 요구했다. 17) 또한 전시문학이라고 해서 사상성만 높아서는 안 되며 예술성도 높아야 한다며 고상한 예술성과 높은 사상성을 결합시키라고 주문했다. 여기 에서 고상한 예술성을 담보하는 것은 민족적 형식으로 말해졌는데 인민 문학, 구전문학, 민요와 같은 것들을 활용하라는 지침이 세워졌다. 북 한은 이와 같이 전시 문학을 항일혁명문학의 계승으로 파악했으며 자신 들의 문학예술을 전투적이고 영웅적인 것 18) 으로 발전시킨 계기로 평 16) 김선려 리근실 정명옥 저, 조선문학사-11 해방후 편(조국해방전쟁시기)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94), p.19. 17) 김일성, 앞의 연설, pp.400-401. 18) 김선려 리근실 정명옥 저, 앞의 책, p.9.
전쟁 경험의 재구성을 통한 국가 만들기 11 가하고 있다. 또한 전시의 예술인들을 동원하기 위해 1951년 창작기금설정에 관 하여 라는 내각결정을 채택해 천여 명의 작가, 예술가들에게 국가수훈 을 주었고 1952년 5월에는 무대예술인들을 우대할데 대한 내각결정 을 채택하고 6월에는 인민배우, 공훈배우, 공훈예술가 칭호가 최고인 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정해졌다. 또한 1953년 1월 하순에는 조 선인민군 창건 5돌 기념 전국문학예술상 을 내각결정으로 제정하여 문 화예술인들에 대한 보상을 실시하는 등 예술인들의 이탈을 막고 문화선 전에 활용하는 데 주력했다. 19) 이러한 분위기에 맞춰 영화인들은 1951년 4월 6일 평양에서 영화예 술인 열성자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는 심영, 문예봉, 박학 등 150여 명의 영화예술인과 김오성 문화선전성 부상, 조기천 조선문예총 부위원장, 중국영화연출가인 김산도 입석했다. 이들은 조선인민들의 영웅적 투쟁모습을 훌륭히 형상화 할 데 대한 창조적 의욕과 결의를 피 력하였으며 제작 중인 3편의 극영화를 1951년 5월 내에 완성할 것을 다짐했다. 미국이 1950년 7월 공식적으로 참전을 결정하자 북한은 이번 전쟁 을 북한 대 미국의 구도로 재정립했다. 북한은 미국의 참전으로 약세의 19) 그 결과 1951년 고형규, 유만춘, 홍성빈, 최순홍, 홍성일 등 다섯 명의 촬영기사에 게 국기훈장 3급이 수여되었고 박경* 외 8명에게는 군공메달이 수여되었다. 최순홍 은 전쟁이 시작되자 종군영화반으로 출동하여 웅진, 개성, 서울, 인천, 대전, 금산, 마산, 전주에 이르기까지 카메라를 들고 해방지구 인민들의 환희와 용감한 전투장면 을 찍었으며, 홍일성은 소백산 전투에서 직접 수류탄을 가지고 싸우고 낙동강 전투에 서는 전호에 설치한 카메라가 파괴되자 두 개의 카메라를 하나로 조립하여 다시 전 선으로 나갔으며 포항전투에서는 진격해 들어오는 인민군대의 모습을 찍기 위해 먼 저 적진에 잠입했다가 적에게 포위되어 이틀 동안 나무열매로 연명하며 포위망을 뚫 고 나왔고, 홍성빈은 포항전투에서 적군이 상륙하는 4백미터까지 접근하여 숨어 있 다가 수송선박과 부대의 이동을 촬영하여 정찰에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세계 영화 일꾼들에 보내는 결의문 채택, 로동신문, 1951년 8월 3일.
12 통일문제연구 2011년 하반기(통권 제56호) 처지에 있음을 세계에 호소하기 위해 당시 제작한 다큐멘터리를 영문판 으로 제작해 UN 등 국제사회에 보내 적극적으로 반제국주의에 맞서는 약소국가 북한의 이미지를 선전했다. 그리고 이후 북한의 다큐멘터리 는 미제국주의로부터 남한을 해방시키는 주제로 수렴되었다. 미제는 조국강토에 무차별 폭격, 강점지들에서 천인공노할 야수적 만행을 감 행했으므로 미제의 침략적 본성과 야수적 만행을 조선인민과 세계 인민 앞에서 철저히 폭로규탄하는 것은 전세계 인민들 속에 우리 인민이 진 행하는 전쟁의 정의의 성격을 옳게 인식시키고 전체 인민들의 전쟁의 최후 승리에로 불러일으키는데서 커다란 의의 20) 라고 말해졌다. 세계 에 전쟁의 부당성을 호소하기 위해 영문판으로 만들어진 영화 가운데 <정의의 전쟁>도 포함된다. 전쟁 시기 북한에서 기록영화 23편, 시보영화 83편이 만들어졌 다. 21) 기록영화는 주제에 따라 미제 침략자를 무찌르는 애국적 투쟁 (<정의의 전쟁>, <승리를 향하여> 등)과 미 제국주의자들의 만행을 폭 로하는 영화(<세균만행>, <신천대중학살사건>), 인민의 승리를 묘사한 영화(<정전담판>, <승리의 날>), 일련의 행사관련 영화(<제3차국제청 년학생축전>)로 이루어졌다. 시보영화는 전쟁이 시작된 직후인 1950 년 6월 30일 전시시보 1호를 내놓은 후 48호까지 제작된 <조국통일을 위하여> 22) 와 35호까지 제작된 <조선시보>가 있다. 이 가운데 국제적 성과를 낸 작품도 있어서 장편기록영화 <정의의 전쟁>(1951), <싸우 는 철도일꾼>(1952) 그리고 <조선시보>(제6, 8, 15, 17, 19, 21호) 20) 김선려 리근실 정명옥 저, 앞의 책, p.14. 21) 사회과학원력사연구소, 조선전사 27-현대편, 조국해방전쟁사3 (평양: 과학백과사전 출판사, 1981), p.383. 22) 조선전사 27-현대편, 조국해방전쟁사3, (평양: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1)에서는 48호까지 나왔다고 되어있으나 리령의 빛나는 우리 예술 에 실린 문의영의 글에서 는 40호까지 나왔다고 되어있어 다소 편수의 차이가 있다.
전쟁 경험의 재구성을 통한 국가 만들기 13 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개최된 카를로비바리 영화제에서 각각 기록영 화상(각각 제7차, 제8차), 전쟁 뉴스상(제8차)을 수상했다. 23) 천상인이 연출하고 홍성빈, 조창서 등의 활동으로 제작된 <정의의 전 쟁>은 전쟁 1단계로 불리는 시기의 영상을 수록하고 있다. 북한에서 우리 인민과 인민군장병들이 발휘한 대중적 영웅주의와 숭고한 애국 심, 불굴의 투쟁정신을 서사시적 화폭으로 생동하게 24) 보여주고 있다 고 평가받은 이 영화는 첫 부분에서 해방 후 민주건설시기 북한의 모습 과 미군정기의 남한의 현실을 대조적으로 보여준 후 미국이 어떻게 전 쟁준비를 계획적으로 하고 있었는가를 화면에 담는다. 둘째 부분에서 는 조국 통일전쟁에 나선 조선인민의 한결같은 염원과 제의를 보여주고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라는 김일성의 전투적 호 소에 감응한 인민들이 전선과 후방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영화는 해외에서도 인정받은 작품으로 전쟁기억을 형성하는 데 토대가 되었으며 북한에서 전쟁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여 집단기억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를 확인시켜주는 주요한 작품이다. Ⅲ. <정의의 진격>과 <정의의 전쟁> 비교 1. 전쟁 이전의 몽타주: 해방공간의 물신화 <정의의 진격>과 <정의의 전쟁>에서 가장 공을 들이는 부분 중 하나 가 전쟁 발발 이전의 서울과 평양의 모습이다. 두 영화는 짧은 몽타주 23) 북한의 전쟁 기록영화들은 현재 단독으로 확인할 수 있는 영화가 없다. 다만 전쟁시 기 미군노획문서로 남아있는 자료에 제목 없는 영화가 산재해 있다. 북한의 신문과 잡지 및 전체 구조를 알 수 있는 기록영화를 통해 내용을 정리해볼 수 는 있을 것이다. 24) 사회과학원력사연구소, 앞의 책, pp.383-384.
14 통일문제연구 2011년 하반기(통권 제56호) 편집을 이용하여 해방, 군정기, 남북 정부 수립에서 전쟁을 시작하는 시점까지 순차적으로 보여주는 몽타주 시퀀스로 시작한다. <정의의 진 격>은 전체 영화를 소개하는 자막 이후 전쟁 발발 이전까지 세 부분 즉 해방이후 남한의 모습, 북한의 상황요약, 그리고 전쟁 발발을 보여주는 화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한의 모습은 태극기가 걸린 중앙청, 이승만 의 연설모습, 독립문, 명동성당, 파고다공원, 널뛰기하는 아이들, 밭갈 이와 모내기를 하는 농부들의 짧은 몽타주로 이루어진다. 이어지는 북 한의 상황은 스탈린과 김일성의 몽타주가 조국을 팔아 벼슬을 산 김일 성, 스탈린의 괴뢰정부 로 소개되고 청소년을 강제징집하여 군사훈련 을 시키는 등 오랫동안 전쟁준비에 몰두하는 모습으로 보여진다. 한편 북한의 전쟁 기록영화 <정의의 전쟁>에서 전쟁 이전 해방공간 은 떠오르는 태양, 소련의 해방탑, 김일성의 연설 모습, 벌판을 뛰노는 양들, 공장의 굴뚝과 기차, 진수식을 하는 배, 수풍땜의 몽타주로 보여 진 후 애니메이션과 만화, 기록사진을 동원해 미국이 전쟁을 준비하는 모습과 미군정하의 불행한 남한의 모습을 전시하는 몽타주를 제시한다. <정의의 전쟁>도 전쟁 전의 상황을 잘 보여주기 위해 해방시기부터 1950년까지를 세세하게 묘사한다. 남한의 <정의의 진격>과 다른 점은 해방공간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 그리고 미국의 세계 제패노력을 중심 으로 내러티브를 전개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세계 곳곳에서 독 재자 미국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미국이 남한에 일본순사의 호위 를 받으며 들어와 서울시 인민위원회 간판을 떼는 것을 시작으로 남한 에서 일제 시대의 억압이 되풀이되고 있음을 각종 화면자료로 제시한 다. 주로 남측의 상황을 전하면서 울부짖는 여자와 아이들, 불타는 집, 쫓겨나는 사람들이 남측의 이미지로 보여지는 동안 김일성이 회의하고 연설하는 모습, 김일성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열렬한 모습을 중간중간 끼워 편집하고 있다. 이는 남측에서 미국과 이승만의 독재가 진행되는
전쟁 경험의 재구성을 통한 국가 만들기 15 동안 착실히 민주개혁과정을 거쳐 자연스럽게 대중들로부터 지지를 얻 어 가는 김일성을 이미지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두 영화 모두 전쟁 이전 자신들의 해방공간을 어떠한 분쟁 이나 다툼이 없는 평화롭고 자연을 연상시키는 순수한 공간으로 그린 데 반해 상대의 공간은 갈등과 전쟁의 기운이 가득한 공간으로 묘사하 고 있다. 25) 이렇게 영화의 초반부에 자신들의 해방공간을 이상적인 공 간으로 묘사함으로써 뒤에 이어지는 전쟁의 갑작스런 시작이 준 당혹감 과 전쟁으로 빚어진 비참함을 대조적으로 강조할 수 있으며 전쟁의 책 임을 상대에게 넘길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이 몽타주 시퀀스는 아직 까지도 논쟁 중인 전쟁 시작의 책임을 의식한 설정으로, 평화롭던 우리 를 그들이 일요일 새벽 침략해 들어왔다는 대중적 서사를 만들기 위한 장치이다. 주지하듯이 남북은 현재까지도 한 치의 타협 없이 남침설과 북침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외국의 많은 학자들이 이미 한국전쟁(Korean War) 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남한에서 한국전쟁은 흔히 전쟁의 시작일 인 6 25 로 불려지고 북한에서 그것은 조국해방전쟁 으로 불려지고 있다. 남한에서 흔히 한국전쟁을 가리키는 6.25 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에 의해 전쟁이 기습적 으로 시작되었다는 점, 그리고 전쟁으로 인 해 초래된 모든 불행과 고통은 전쟁을 도발한 북한의 책임으로 귀착된 다는 결론이 전제된 명칭 26) 으로 한국전쟁에 대한 남한의 인식과 의도 가 담겨있다. 오늘날 남한의 대중들에게 친숙한 한국전쟁의 이미지는 대부분 반공영화를 통해 만들어진 것으로 1950년 6월 25일 새벽 소련 25) 북한에서 한국전쟁을 다룬 역사책에도 이런 점이 반복된다. 예컨대 황재헌은 전쟁 전 의 상황을 조선은 아름다운 자연의 극치와 풍부와 자연부원으로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하여 미제의 탐욕을 불러일으켰고 라고 적고 있다. 황재헌, 조선전쟁도발의 흑막 (평양: 금성청년출판사, 1995), p.5. 26) 김동춘, 전쟁과 사회 (서울: 돌베개, 2000), p.19.
16 통일문제연구 2011년 하반기(통권 제56호) 제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이 단숨에 서울까지 밀고 내려오는 이미지이다. 북한은 전쟁초기 계급해방, 민족해방의 차원에서 남조선 해방론을 외치다가 1950년 7월 7일 미국과 연합군의 참전이 결정되자 한국전쟁 을 조국해방전쟁 으로 재규정했다. 북한의 조국해방전쟁 역시 남한을 미국의 종속국가로 규정하고 남한을 전쟁의 당사자에서 배제시키면서 남한을 해방하기 위해 미국에 맞서 싸운 전쟁이라는 전쟁의 목적을 부 각시키고 있다. 결국 남북한 영화 어디에서도 전쟁 전의 서울과 평양의 암울하고 혼란했던 모습은 찾을 수 없고 실제 해방공간의 혼란상과 상 관없이 평화로운 시절 혹은 돌아가야 할 고향 으로 담론화되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도입부에 편집한 몽타주는 두 편의 다큐멘터리와 상관없이 전쟁 전에 찍혔을 기록영상을 편집한 것인데 과거의 시간에 대한 향수 어린 이미지로 전쟁 전의 해방공간을 순수한 시공간으로 위상 짓는 역 할을 한다. 이는 해방공간을 국가공동체의 고향의 기억으로 위치시킴 으로써 우리가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지켜야 할 곳, 전쟁을 끝내고 돌 아가야 할 곳이라는 정서를 구축해냈다. 남한영화 <정의의 진격>에서 해방공간은 평화로운 미군정을 지나 민 주적인 절차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를 세우고 근대사회로 진입하려는 건 설적인 시공간으로 화한다. 태극기와 독립문 사이에 편집된 이승만의 이미지는 관객이 그를 해방의 주도적 인물이자 평화로운 해방공간을 건 설한 인물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어지는 이미지 는 전쟁에서 지켜야 할 것은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고, 농부가 즐겁게 농사를 짓는 해방공간이라는 의미이다. 북한의 <정의의 전쟁>에서 해 방공간은 토지개혁, 민주선거, 중요산업 국유화 등 민주개혁이 이루어 지는 평화로운 민주건설기 이다. 주지하다시피 토지개혁 27) 과 민주선 27) 1946년 3월 5일 북한에서 실시된 토지개혁은 일본인, 일본국가, 매국노 및 계속적
전쟁 경험의 재구성을 통한 국가 만들기 17 거, 중요산업 국유화는 북한이 여러 문헌과 영화에서 반복 재생시키는 원체험과 같은 것이다. 특히 해방 당시 인구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농 민에게 가장 뚜렷하게 각인된 해방의 성과인 토지개혁은 너나없이 토지 를 나눠 갖고 내 땅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파라다이스와 같은 경 험의 제공이었다. 그리하여 북한은 왜 이 전쟁에서 이겨야 하는가, 전 쟁을 끝내고 회복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하는 전쟁의 목적과 정당성을 특히 토지개혁에 맞추었다. 그러나 남북의 다큐멘터리가 몽타주를 통해 보여주는 해방공간과 달 리 실제 해방공간은 그렇게 평화롭지도 이상적이지만도 않았다는 점에 서 두 영화는 의도적으로 해방공간을 물신화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신화(fetishism)란 전체에서 대상을 분리시켜 부분에 의미를 과잉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영화의 해방공간은 대다수 대중들이 기대했던 해방의 이미지일 뿐 다음의 기사가 보여주듯 실제로는 일제의 자본이 빠져나가고 혼란한 치안과 정치적 대립이 혼종했던 현실에서 곧 꿈 속 의 잠꼬대 가 되어버렸다. 병술년도 어느듯 저므러간다. 3천만 겨레를 억매어 노앗던 40 년동안의 사슬을 끊어 동댕이치고 커다란 기쁨을 얼사안고 보 플어올은 가슴 속에 지녔던 풀은 히망은 아득한 안개속에서하 염업시 매암을 돌고 잇다. 기나긴 세월을 두고 몽매에 그리든 자주독립은 눈압에 아롱거리듯 어슥 암흑 속에서 더듬은 손길 에는 잡힐상도 십지않은 해방 제3년은 줄달음질처 닥어오고 잇 다 한편 각 생활필수품의 생산은 더욱 줄어들어서 물가는 이 으로 소작을 주는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할 것이며 소작제를 철폐하고 몰수한 일체 토지를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여 그들의 소유로 만들 것 이라는 북조선 임시인 민위원회 명의로 발표된 20개조 정강 에 따른 것이었다. 토지개혁의 결과 김일성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농민의 신임을 얻음으로써 향후 정치활동의 대중적 지지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고 농촌지역까지 공산당 조직이 확대시킬 수 있었다.
18 통일문제연구 2011년 하반기(통권 제56호) 통화팽창의 선에 딸아서 나날이 날개 도친 듯이 올으고 있는데 더욱 섯딸대목을 당해서 일반생활고는 한층 심해가고 있다. 자 주독립이란 이제와서는 일반민중에게는 꿈 속의 잠고대인 인상 시퍼지고 다만 그날그날의 아츰꺼리 저녁꺼리 걱정만이 눈앞에 닥쳐오고 잇는 서글픈 현실이 되고 말엇다( 한성일보, 1946. 12. 29). 28) 좌우대립으로 서울 거리는 시끄러웠고 급등하는 물가와 주택난, 실 업난으로 대중들은 제대로 숨을 쉬기 어려웠다. 1945년 8월에 비해 1948년 8월까지 물가가 열 배 상승했고 해방의 기대가 물거품이 되고 오히려 경제적 악순환이 되풀이 되면서 노동자, 시민들의 격렬한 노동 쟁의 및 구국투쟁이 빈번했다. 좌우이데올로기 대립은 테러를 만연하 게 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과 관련해 갈등이 줄어들지 않았고 정부 수 립 후에도 이승만 정권은 환영받지 못했다. 29) 남한에 비해 안정적으로 민주개혁을 이루긴 했지만 북한의 민주개혁 도 순조롭지만은 않아서 반동분자의 테러 라고 표현되는 저항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반대운동이 대규모 저항운동으로까지 발전하지는 않았지만 대표적으로 1945년 11월 23일에 발생한 신의주 학생들의 시위사건과 같이 개혁에 모두 호의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30) 북한의 28) 유팔무, 미군정기 남한사회의 삶의 질 과 일상생활,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미군정기 한국의 사회변동과 사회사 1 (춘천: 한림대학교아시아문화연구소, 1999), pp.283-284. 29)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박찬웅의 동생은 이것이 이승만이 권력을 강화하 기 위해 꾸민 각본이라고 해석한다. 6월 25일에 북한군이 아군의 불비(일요일이기 때문에)를 틈타 38선 전선에 걸쳐 침공해왔으나 용맹무쌍한 아군은 분전감투 이를 격퇴했다. 그러나 한번 실패한 북한군은 다음에는 더 큰 규모로 침공할 것이 명백하 니 거국일치하여 태세정비를 해야한다. 그러므로 대통령의 권한은 증대돼야 하고 국 회는 정부의 시책에 전면 협조해야 하고 국민들은 한층 더 악질 적색분자를 경계하 고 경찰은 전력으로 이들을 색출해야 한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것이 다. 박찬웅, 6.25 일지 (서울: 아우내, 1994), p.3.
전쟁 경험의 재구성을 통한 국가 만들기 19 민주개혁 내용이 중요하긴 했지만 당시 상황에서 제대로 시행하기 어려 웠고 선언적 수준에서 상징적 효과만 가질 수 밖에 없었다는 한계도 있 었지만 31) 이런 사실은 은폐된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물신화는 차이를 부인하는 전략이다. 영화에서 여성스타들에게 가해진 물신화가 여성의 육체를 파편화하고 조각난 육 체의 일부를 완벽한 것으로 봄으로써 남성과 다른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부인했듯이 32) 두 영화 속에서 자신들이 속한 해방공간은 실제와 달리 완벽한 이상적 공간으로 재탄생한다. 이렇게 두 영화는 해방공간의 다 양한 요구를 감춰버리고 해방공간을 친밀하고 친숙하며 안정적이고 균 형적인 공간으로 그림으로써 전쟁에서 승리해 회복하여 돌아가야 하는 공간으로 이상화한다. 이제 해방기 서울과 평양은 실제 장소(place)에 서 벗어나 상상의 공간(space)으로 이상화되고 물신화된 것이다. 물신 화 된 해방공간의 몽타주 시퀀스는 내부의 갈등을 봉합하고 실제 해방 공간의 수많은 차이의 목소리를 부정한 채 위협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서울과 평양을 이상화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해방공간은 실제 장소를 떠나 영화 속에만 존재하는 이상적 공간으로만 남겨지게 될 뿐이다. 30) 김하영, 북한 체제의 초기 집단정체성 형성에 관한 연구, 북한연구학회보 제9권 1호(2005), pp.42-43. 31) 류길재, 북한의 국가건설과 인민위원회의 역할, 1945-1947,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북한 해방 8년사 연구 (서울: 백산서당, 1999), p.48에서 재인용. 32) 수잔 헤이워드 지음, 이영기 옮김, 영화사전 (서울: 한나래, 1997), p.47.
20 통일문제연구 2011년 하반기(통권 제56호) 2. 사운드와 보이스오버 내레이션: 집단 기억(Collective Memory)과 정체성 만들기 해방공간이 물신화되었다면 전쟁의 체험은 집단의 공식기억으로 분 류되는 과정에서 선별과 삭제의 과정을 거쳤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역 사가인 르낭(Ernest Renan)은 민족 만들기의 본질적 요소는 망각과 잘못된 역사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33) 사회적 기억은 정체성 만들기 와 관계되는데 이 과정에서 기억되어야 할 것과 망각되어야 할 것의 선 택이 이루어지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말이다. 망각과 민족적 신화의 구 성도 사회적 기억 만들기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전쟁기 남북의 다큐멘터리는 사운드와 보이스오버 내레이션 의 권위를 활용해 이와 같은 사회적 기억 만들기를 시도한다. 남북의 한국전쟁기록영화 <정의의 진격>과 <정의의 전쟁>은 모두 설 명적 양식의 다큐멘터리이다. 설명적 양식의 다큐멘터리는 이미지에 비해 이미지를 설명하는 사운드가 우위를 점하는 다큐멘터리로 고전적 다큐멘터리나 TV용 다큐멘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이다. 설명적 양식의 다큐멘터리에서 화면에 대상이 이미지화 될 때 화면상으로 모습 이 보이지 않는 내레이터가 그 화면에 대해 관객에게 설명해준다. 선전 성이나 설득성을 지향하는 전쟁 다큐멘터리나 사회주의 다큐멘터리 34) 33) Ernest Renan, What Is Nation? (New York, London and Toronto; Oxford University Press, 1939), pp.190-191, Ali A. Mazrui, Cultural Amnesia, Cultural Nostalgia and False Memory: Africa`s Identity Crisis Revisited (New York: SAPINA and ISAP, 2000), p.87에서 재인용. 34) 소련의 언론매체에 종사하는 이들은 모든 정보와 오락의 내용물을 선택하고 보여주 는 데 있어 이데올로기적 편향이 작동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렇지 않은 척하는 것은 순진하거나 위선적이라 여겼다. 따라서 사회주의 국가건설에 유용한 방법 안에서 소 비에트 국민의 교육과 교화를 돕고자 하는 열망과 다큐멘터리를 연결했고 해설이 주 요한 기능을 했다. 잭 앨리스 베시 맥레인 지음, 허욱 김영란 이진욱 김계중 노
전쟁 경험의 재구성을 통한 국가 만들기 21 역시 설명적 양식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종 설명적 양식의 다큐멘터리에서 이미지는 사운드에 종속되어 사운드가 영화의 내러티 브를 만들어간다. 사운드 가운데에서도 보이스오버로 들리는 영화의 해설자의 목소리는 신의 목소리 로 불릴 만큼 권위적이다. 해설자는 영 화에 등장하지 않지만 이미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관객에게 설명해 준다. 해설자의 전지전능한 보이스오버 내레이션(voice over narration) 이 이미지에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며 가치평가를 해준다. 바로 이러 한 해설자의 권능을 이용해 <정의의 진격>과 <정의의 전쟁>은 전쟁이미 지를 이데올로기화하고 있으며 선택된 역사적 사실을 공식 역사와 기억 으로 가공한다. 우연히 두 영화가 공통으로 담고 있는 전쟁 초기 인민군이 점령했던 90일간의 서울의 모습과 그에 대한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은 기억만들기 가 망각과 거짓 기억을 고안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가장 잘 드러낸 다. 35) 이 이미지는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동안 북한의 종군영화인에 의해 찍힌 것이 서울 수복 후 국군에 의해 노획되어 <정의의 진격>에 포함된 것으로 북한의 영화 <정의의 전쟁>에서도 똑같은 이미지가 반복 된다. 전쟁 초기 북한군이 점령한 서울의 이미지는 스탈린과 김일성의 사진을 들고 행진하는 사람들과 건물마다 이들의 사진이 걸리고 미처 피난을 떠나지 않은 서울 시민들이 부역이나 인민군대 자원을 약속하는 이미지이다. 이미지가 찍혀진 의도와 달리 해설자는 그 이미지에 새로 운 주석을 다는 행위를 통해 상대의 이미지를 우리 의 기억으로 만들고 있다. 이 이미지는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에 의해 북한의 영상에서는 해 경태 옮김,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역사 (서울: 비즈앤비즈, 2011), p.45. 35) <정의의 진격>과 <정의의 전쟁>에는 각각 상대 종군영화인이 찍은 기록필름이 포함돼 있다. <정의의 진격>은 인민군이 점령했던 90일간 서울의 모습을 담은 필름과 그 외 에도 북한군이 찍은 필름을 포함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고 <정의의 전쟁>은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남측에서 찍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 이미지가 들어있다.
22 통일문제연구 2011년 하반기(통권 제56호) 방된 서울 의 역사적 모습으로 소개되지만 남한의 영상에서는 강제부 역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참혹했던 때 로 평가절하 된다. 이렇게 우리 의 기억에서 해방 은 타자의 기억에서는 강점 이 되고 자발성 은 강제 로 전환한다. 두 영화 어디에서도 90일간의 서울 체험은 상대화되지 못하고 우리의 정의 를 입증하는 증거자료로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해설자가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을 통해 국가정체성, 국민정체성을 만 들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북의 영화는 오버랩된다. <정의의 진격>에서 해설자는 때때로 무성영화 시절 극영화를 해설하던 변사와 같이 감정이입을 유도하거나 이미지에 논평을 가한다. 설명적 양식의 다큐멘터리일지라도 요즘의 다큐멘터리에서 해설의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객관적인 목소리를 지향하는 것과 달리 <정의의 진격>의 해설자는 노골적으로 선전성을 드러낸다. <정의의 진격>에서 정의는 유엔(UN) 곧 미국과 동일시된다. 따라서 해설은 미국과 남한을 포함하는 자유주 의 정의 진영 대 공산주의 진영으로 대결구도를 구축하면서 정의롭지 못한 전쟁의 당사자 공산당은 무조건 민족에서 배제해야 할 존재라는 논리를 편다. 즉 남한은 자주국가이며 평화를 애호하고 무엇보다 유엔 의 인정을 받은 국가이다. 당연히 미군이 움직이는 것은 정의가 살아있 음을 입증한 것이고 미군은 정의의 군대 이며 미국과 함께 하는 한 정 의의 편이 될 수 있다는 논리로 남한이 미국적 정의를 받아들이고 있음 을 보여준다. <정의의 진격>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보여주는 또 하나는 미국화 에 대한 욕망, 미국 시민으로 편입하고 싶은 열망이다. 전쟁의 소식이 전해지자 바빠진 유엔 사무실과 안전보장이사회가 우리의 전쟁을 자기 들의 일처럼 여기고 있음을 전달하고 연합군의 참전소식과 함께 사운드 는 급격한 변화를 느낄 정도로 밝고 경쾌하게 흘러나온다. 연합군의 이 미지가 보일 때는 인내심 깊은 영국군, 잘 싸우는 미군 이라는 해설이
전쟁 경험의 재구성을 통한 국가 만들기 23 들리고 반드시 크고 작은 작전 전후로 미군과 긴밀하게 상의하는 회의 장면이 편집된다. 서울 회복 후 이승만이 의사당에 들어오는 길을 인도 하는 맥아더와 작전에 성공한 백선엽 등에게 미건국훈장 이 수여되었 음을 대단한 영광인 것처럼 전하는 장면에서는 미국시민으로 편입되고 자하는 욕망이 극대화된다. 이와 같은 해설은 전후 친미 반공국가의 보루를 자처하며 미국적 가 치와 제도를 받아들이며 미국화의 길을 욕망한 남한 사회의 집단적 욕 망을 투사한다. 해방 후 미군정을 거치며 이미 시작된 미국화에 대한 선망이 전쟁을 거치며 가중된 현실과 사회적 정체성에서도 미국을 역할 모델로 설정하여 동경하는 한편 자기비하와 체념의 자기인식에 들어서 고 있음을 비춰주고 있다. 한편 해설이 화면내용의 정치사상적 본질과 의의를 뚜렷이 부각시킬 때 오히려 좋은 해설이라고 보는 북한의 전쟁 다큐멘터리도 남한의 경 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36) 해설자는 정권의 대변자로서 이미지를 해석 하고 있으며 이미지에 의미를 부여하는 권능을 누린다. 조국해방 전쟁 은 침략적인 야수 미제와의 싸움이었습니다. 라고 전쟁의 의미를 정리 하고 하루 700에서 1천 대의 비행기로 2회씩 북반부 전지역에 폭탄을 투하했다는 사실을 전달해주기도 하지만 미국이 북한의 78개 도시를 지도에서 없애겠다 고 말했다든지 조선이 100년이 걸려도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미군이 떠벌렸다 는 식으로 대중의 감정을 자극하는 역 할을 수행한다. 37) 36) 앞서 밝혔듯이 <정의의 전쟁>은 러시아 국립문서보관소에 있는 자료로 해설이 러시 아어로 더빙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말 해설을 들을 수 없다. 다만 <정의의 전쟁>의 이 미지와 80%이상 일치하는 전쟁기록 편집물인 <6 25>를 참고해 해설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6 25>는 북한이 2000년에 제작해 2001년 방영했으며 15분 분량의 짧 은 영화를 대부분 <정의의 전쟁>에서 나오는 이미지로 채우고 있다. 37) 북한에서 기록영화의 인식교양적 특성을 강조하고 있어 해설자가 애국심과 대중적 영웅주의, 불굴의 투쟁정신 을 강조하는 것이 당연히 여겨진다. 화면이 있고 해설이
24 통일문제연구 2011년 하반기(통권 제56호) 북측의 <정의의 전쟁>에서 해설은 북한 대 미제국주의의 대결구도를 만들면서 남한을 상대자에서 제외하고 사회주의적 생활태도를 새로운 민족의 내용으로 만들고자 한다. 전쟁 후 새롭게 해방된 웅진 등 해방 구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인민군의 공산주의에 대한 친절한 설명과 비로 소 안심하는 인민들의 모습, 깨끗하고 안정된 평양거리와 대조되는 미 군정하 서울의 이미지, 사열식을 통해 보여지는 인민군의 당당한 군인 이미지와 대조되는 국군과 미군의 폭도이미지, 만화를 통해 묘사되는 미국의 손에 잡혀 흔들리는 이승만의 이미지는 더 이상 남한이 자주적 이거나 독립적이지 않고 미국에 종속된 체제로 그들을 해방하여 진정한 민족주의를 실현하는 사회주의를 학습시켜야 함을 역설하려는 의도이 다. 북한은 해방 후 민주개혁을 시도했지만 대중들의 거부감을 고려해 전면적으로 실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전쟁 후 본격적으로 사회주의를 내세우며 자본주의, 봉건주의 잔재를 제거하고 사회주의양식을 집단 정체성으로 기억하고 역사화하려고 했는데 이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남북의 영화 모두에서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의 전권을 행사하 는 해설자는 남성, 엘리트이다. 이는 현실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은 남성이며 이들 남성은 권위적인 태도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문화적 으로 구축된 가정을 암시 38) 하는 것이자 한국전쟁에 관한 공식역사가 남성 중심적이며 남성이 아닌 여성, 엘리트가 아닌 다양한 민중들의 기 억은 말살되고 있음을 방증한다. 결국 전쟁을 통해 새롭게 만들어진 국 가/국민정체성은 남성 엘리트에 의해 선택된 기억으로 남한에서는 미 없는 기록영화 즉 무언의 기록영화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 수 없고 심장을 격동시 킬 수 없다 며 북한은 해설의 기능을 매우 중시한다. 북한에서는 화면내용의 본질과 의의를 외면하고 대상에 대한 단순한 소개와 설명으로 그친다면 화면내용에 대한 옳 은 견해와 사람들의 혁명적 교양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며 중립적 보이스오버 를 거부한다. 한영호, 기록영화해설문의 본질적 기능과 그 역할, 조선예술, 2000 년 2호, p.53. 38) 빌 니콜스, 앞의 책, p.105.
전쟁 경험의 재구성을 통한 국가 만들기 25 국적 정의와 지향을 보여주며 북한에서는 사회주의적 생활양식을 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민중의 기억은 망각되거나 사회의 예속된 앎 39) 의 저변으로 흘러들었다. 한국전쟁의 공식역사는 영문도 모른 채 제2국민병으로 끌려갔다 다시 보국단으로 전전한 박상규의 기억 40), 빨치산으로 활동한 허영철의 기억 41) 그리고 기억조차 되지 않는 억울 한 죽음과 국가에 의해 저질러진 폭력과 학살의 피해자들의 기억 같은 것을 희생하고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3. 증거 제시적 편집: 부정적 경험으로 국민을 통합하기 국민만들기의 통합과정은 국가의 긍정적 기능에 기초하는 경우도 있 지만 부정적 집단기억을 역사화함으로써 우리와 대립되는 적을 만들고 이에 대조되는 우리로서 국민을 통합하는 경우도 있다. 전쟁기 다큐멘 터리는 긍정성보다 부정적 경험이 강조된 집단기억을 역사적 사실로 강 조하여 국민통합을 시도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 증거제시적 편집을 활용 하고 있다. 증거제시적 편집이란 주장의 전개에 도움이 되는 이미지들을 끌어들 여 묶어내는 것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종종 편집에서 시공간적 연속 성이 배제되고 주장을 뒷받침할 이미지를 선택하여 편집한다. 42) <정의 39) 푸코는 예속된 앎 을 2가지 의미로 사용한다. 하나는 에속된 앎은 형식적 체계 안에 감싸여지고 은폐된 역사적 내용을 뜻하며 다른 하나는 충분히 가공되지 않은 앎, 비 개념적 앎들로 폄하된 일련의 앎들, 순진하고 낮은 위계, 과학적 인식적 수준에 못미 치는 앎을 의미한다. 미셀 푸코, 박정자 옮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1976년 콜레 주드 프랑스에서의 강의 (서울: 동문선, 1998), p.24. 40) 김양섭, 박상규 1922년 6월 30일생 (서울: 눈빛, 2005), pp.131-174. 4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민족문화연구소 편,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 (서울: 선인, 2001), pp.408-423.
26 통일문제연구 2011년 하반기(통권 제56호) 의 진격>과 <정의의 전쟁>은 편집위주로 구성된 다큐멘터리로서 내레 이션의 증거로 이미지를 편집하고 있다. 특히 나와 적을 가르고 적의 부정성을 근거로 내부의 통합을 이끌어내기 위해 증거제시적 편집을 활 용하고 있는데 국가가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시민권을 확대하 여 국민의 동의를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처벌, 학살과 같은 부정적 경 험을 강조함으로써 국민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 라고 할 수 있다. 43) <정의의 진격>과 <정의의 전쟁> 모두에서 가장 감정적인 장면은 전 쟁의 희생자와 그 유가족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정의의 진격>에서 전 쟁초기 피난민들의 이미지와 북한군에 의한 지주 및 군경가족의 처벌을 보여주는 이미지, 서울 수복 후 개성과 평양으로 올라온 국군에 의해 발견된 시신들과 시신 속에서 가족을 찾으며 우는 여인들 그리고 중공 군 개입 후 후퇴하는 피난민들의 이미지가 해당된다. 이 가운데 북한군 에 의해 소위 반동분자 라는 이름으로 처벌된 사람들의 처벌장면과 시 신 이미지는 북한 측이 찍은 영상에서 발췌한 것으로 촬영과 편집의 의 도가 어긋나 있다. 촬영 시 이것은 전쟁의 정당성과 북한 체제의 정당 성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지만 남한 영화에 편집되면서 이 장면은 북한 의 부당함과 폭력성의 증거로 화했다. 이처럼 이 이미지들은 의도와 상 관없이 편집의 위치에서 그리고 해설에 의해 무자비한 공산당의 만행의 증거로 채택되고 있다. 사운드를 통해 감정적 효과를 극대화하기도 하 는데 1.4후퇴 당시 피난길에 버려진 아기와 울음소리의 편집이 대표적 이다. 영화 전체를 통해서 내레이션 외에 간간히 대포나 총격소리 외에 사운드가 들리는 것은 이 장면이 처음이기 때문에 화면을 가르는 아기 42) 빌 니콜스, 이선화 옮김, 다큐멘터리 입문 (파주:한울, 2005), p.179. 43) 정민현, 한국 국민의 정체성에 관한 연구-한국전쟁시기를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정 치학과 석사논문, 2007, p.77.
전쟁 경험의 재구성을 통한 국가 만들기 27 의 울음소리는 후시녹음임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에게 보다 직접적 감정 을 일으킨다. 이는 추위에 버려져 죽음의 위기에 처한 아기처럼 국가가 없는 국민도 마찬가지라는 해석으로 관객을 이끌기에 충분하다. 이와 같은 이미지의 편집은 이 참경을 빚은 공산당 이라는 의미가부 여되고 있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전쟁의 책임을 공산당 에게로 돌리 고 남한은 전쟁책임에서 벗어나면서 국군과 미군에 의한 폭력과 학살을 가리는 한편 어느 체제를 선택하는 것이 올바른 국가를 선택하는 것인 가에 대한 대답을 유도한다. 공산당은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무리이 기 때문에 북한을 선택할 경우 당신들도 이렇게 비참하게 될 수 있다는 간접적 협박과 공포심이 그 기저에 깔려있음을 물론이다. <정의의 전쟁>을 포함한 북측의 전쟁 다큐멘터리에서도 예외 없이 국군과 유엔군의 만행이 고발되고 있다. 이 다큐멘터리는 북한이 유엔 에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기 위해 제작한 영화로 미국의 세균전에 대한 고발 뿐만 아니라 부역자와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의 기록들을 담 고 있다. 세균탄을 싣고 왔을 것으로 추측되는 미사일의 잔해들, 손이 뒤로 묶인 채 썩어서 너덜너덜해진 부역자 및 국민보도연맹원의 시신들 의 전시는 공포에서 분노로 다시 복수심으로 관객을 유도한다. 이 이미 지들은 남한의 <정의의 진격>에서와 정반대의 거울 이미지이다. 한편 북한의 영상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장면 가운데 하나는 미군의 비행기 폭격장면이다. 비행기 폭격은 최첨단 무기로 표상되는 미국의 이미지였다. 세계대전 당시 폭격기가 적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고 적을 마비시킬 목적으로 찢어질 듯한 사이렌 소리를 내면서 목표물을 향해 떨어지던 44) 그 이미지가 북한의 다큐멘터리에서도 반복된다. 미 국의 비행기 폭격은 북한지역을 초토화시킨 것으로 알려지는데 45) 비 44) 폴 비릴리오, 권혜연 옮김, 전쟁과 영화 (서울: 한나래, 2004), p.29. 45) 북한은 미국의 폭격이 계속되자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 중앙위원회의 호소문 형식으
28 통일문제연구 2011년 하반기(통권 제56호) 행기 폭격으로 인한 피해를 북한은 매우 세세하게 열거하며 보여주는 데 주력한다. 비행기를 통해 수도 없이 떨어지는 폭탄과 완전히 파괴된 평양의 길거리 이미지는 미국의 평화애호 이미지를 훼손한다. 북한은 이러한 사실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해 대응 무기가 없는 북한 전 지 역을 대상으로 무자비하게 펼쳐진 미국의 비행기 폭격을 공들여 보여준 다. <비행기 사냥꾼조>를 비롯해 전쟁 후 제작된 수많은 극영화에서 당 시 공포경험은 되풀이 되는데 이것은 비행기 폭격의 공포를 내부단결의 촉매제로 활용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결국 남북은 공히 적대감을 통해 내부가 통합되었다는 환상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한국전쟁은 남북한 대중 모두에게 집단적 트라우마(trauma)를 유 발한 현대사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개인적 트라우마와 달리 집단적 트라우마는 종종 집단 내에서는 결집효과를 발생시킬 수 있 다. 46) 기억이 강할수록, 잔인할수록 내부의 통합은 쉽게 이루어진다. 적의 부정적 이미지는 반대로 아군의 긍정적 이미지를 만들어주기도 한 다. 따라서 이러한 나쁜 기억의 편집은 적의 부정적 이미지를 선전하면 서 그에 대조되는 아군의 긍정성을 암시함으로써 국민들의 통합을 획득 하기 위한 경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전쟁이 남긴 집단적 슬픔은 분노 를 수반하여 발화성의 상황으로 쉽게 발전한다. 사람들은 조화와 안정 이 깨지면 쉽게 폭력적 행위를 표출하기 마련인데 한국전쟁에서도 그러 했다. 국군과 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신천대학살, 노근리 인민학살과 국 민보도연맹가입자에 대한 잔인한 처형 그리고 1950년 9월 퇴각하는 로 외부에 계속 도움을 요청했다. 북한에 따르면 1952년 6월 11일에서 12일 양일 사이에만 해도 4백여 대의 항공기가 6천여 개의 네이팜탄, 시한탄을 투하해 1천 6백 개 이상 토굴집이 파괴되고 6천여 명의 아이, 부녀자가 희생되었다. 국립출판사, 조 국통일민주주의 전선 문헌집 (평양: 국립출판사, 1954), p.202. 46) Arthur G. Neal, National Trauma and collective Memory(New York: M.E. Sharpp, 2005), p.4.
전쟁 경험의 재구성을 통한 국가 만들기 29 인민군에 의해 저질러진 대전형무소에서의 우익인사와 그 가족에 대한 학살 그리고 사적인 보복은 집단적 분노가 폭력적 행위로 발화한 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 이러한 내용은 은폐되고 상대의 폭력에 대한 부정적 행위만을 편집해 제시한다. 정체성의 선택을 위해 분노와 복수의 사회적 기억 만들기가 편집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부 정적 경험을 통해 내부를 통합시켰다는 믿음이 환상인 이유이다. 요컨대 남북은 분단시기 동안 충격, 공포와 분노의 집단기억을 자극 하는 영화의 제작을 지속해왔고 공식 역사에 그것을 수용해왔으며 교육 을 통해 기억과 역사를 후대에게 전달해왔다. 부정적 경험에 의한 통합 과정은 남한에서는 연좌제와 레드콤플렉스, 반공의식의 내면화를, 북 한에서도 마찬가지로 연좌제와 제국주의에 대한 항시적 공포와 경계의 내면화를 만들어왔으며 남북한 모두에서 이것을 빌미로 독재정권이 유 지될 수 있었다. Ⅳ. 역사/다큐멘터리/기억 미국이 승리하지 못한 첫 번째 전쟁이자 유럽의 재무장을 촉진시켜 군사예산의 증액을 부추겼으며 헌법상의 승인절차를 거치지 않고 선전 포고도 없이 미국대통령이 치안활동의 명목으로 했던 전쟁 47) 그러나 세계사에서 잊혀진 전쟁이 한국전쟁에 따라붙는 수사이다. 한반도 도 처에서 400만 명이 사망했고 그 가운데 절반이 민간인이었으며 1953 년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지만 전쟁을 촉발시킨 문제 중 어떤 것도 해결 되지 않고 오직 증오와 분열만 남긴 한국전쟁은 남북한에서조차 너무 쉽게 잊혀지거나 공식기억으로 편입해버렸다. 현재 남한에서 한국전쟁 47) 존 톨랜드 지음, 김익희 옮김, 6.25전쟁 (서울: 바움, 2010), p.8.
30 통일문제연구 2011년 하반기(통권 제56호) 은 불과 60여년 전의 일임에도 젊은 세대에게 까마득한 과거사가 되었 으며 북한에서는 너무 우려먹어 식상한 무엇이 되어 버렸다. 전쟁 이후 남한은 국가의 자율성이 증대했으며 군부를 비롯한 국가 억압기구가 불균형적으로 비대화하였고 대미종속이 구조화되었다. 북 한 역시 협동농장의 완성 등 사회주의 혁명이 가속화되고 김일성 유일 지도체제가 강화되었으며 새로운 중 소관계를 성립했다.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남한 사회에는 전쟁이 남긴 반공의식과 레드콤플렉스가, 북 한 사회에는 극단적 반제국주의가 독재정권에 의해 조장되고 대중들의 의식에 내면화되었다. 이와 같이 전쟁은 남북한 사회문화를 파괴하는 동시에 체제이데올로기에 적합한 사회문화로 변화시킨 사건으로 현대 남북한을 성립시켰다. 국가는 전쟁을 만들고 전쟁은 국가를 만든다 48) 는 틸리의 명제가 한 국전쟁의 경우에도 적중했다. 남북은 전쟁의 기억과 전쟁이 제공한 적 대감을 이용해 체제를 형성, 유지하는 데 성공한 한편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는 데 성공했다. 전쟁의 기억은 정치, 역사 등 다양한 사회담론 을 통해 가공되고 교육을 통해 재생산되었다. 특히 일반적으로 객관적 정보와 이미지로 인정받는 다큐멘터리는 전쟁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와 인식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제목의 역사/다큐멘터리/기억은 다큐멘터 리가 기억을 역사화하고 역사를 대중들이 기억하도록 기억과 역사를 이 어주는 매개임을 보여준다. 그동안 한국전쟁 다큐멘터리는 집단 기억 속에 확고하게 자리잡아야 하는 전쟁에 관한 참조사항을 제공하며 남과 북에서 내부가 통합되었다는 환상을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 한국전쟁 기 동안 제작된 남한의 <정의의 진격>과 북한의 <정의의 전쟁>은 그 이 데올로기적 편차는 매우 크지만 설명적 양식이라는 제작방식과 전쟁의 48) Charles Tilly, Coercion, Capital and European States, A.D.990-1990 (London: Oxford; Blackwell, 1990), 김동춘, 앞의 책, p.52에서 재인용.
전쟁 경험의 재구성을 통한 국가 만들기 31 기억을 공식 역사화하고 그에 기반해 국민정체성을 호명하려는 목적에 서는 일치한다. 한편 선택된 기억이 공식 역사가 되는 사이에 억압된 기억은 전쟁에 대한 깊은 상처가 되어 여전히 남아있다. 전쟁은 집단적 트라우마를 유 발하는 지속적이고 강력한 원인이며 모든 트라우마는 해결이 석연치 않 을수록 커지기 마련인데 그런 의미에서 한국전쟁만큼 미해결의 집단적 트라우마를 남긴 사건은 없었다. 전쟁에 관한 민중들의 기억은 표출되 지 못한 채 예속된 앎으로서 떠다니고 있으며 이는 아직도 우리가 한국 전쟁을 다뤄야하는 이유이다. 과거에 제작된 한국전쟁 다큐멘터리와 같이 영화가 공식역사를 대변해 온 점도 있지만 이제 인구의 대다수가 전쟁을 간접적 이미지로 배우는 시대에 대안적 기억을 제공할 가능성도 영화에서 찾을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기존의 반공시각과 달리하는 영화들의 등장 즉 전쟁에서 북한의 책임만이 아니라 남한의 책임을 질 문하는 영화들이 등장하고 오랫동안 공식역사에 억눌려있던 역사적 상 처를 꺼내드는 영화들이 만들어지는 현상이 대표적 예가 될 수 있 다. 49) 지금까지 한국전쟁에 대해 서로 정의를 다투어 남북이 자신들의 기억에 절대적 신뢰를 보내왔다면 이제는 전쟁 체험과 기억을 상대화하 여 한국전쟁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성찰하고 해결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 이다. 여기에 남과 북이 문화적 정서적 차원에서 재화합할 가능성도 있 다고 할 수 있다. 접수일: 10월 11일, 심사일: 10월 31일, 게재확정일: 11월 14일 49) 구체적으로 남한에서 제작된 <길소뜸>, <JSA 공동경비구역>, <만남의 광장>, 북한에 서 제작된 <새>, <우물집녀인> 등은 전쟁의 경험을 상대화하거나 영화의 초점을 전쟁 이 남긴 상처로 옮겨가고 있다. 이들 작품에 대한 분석을 포함하지 못한 것은 이 논 문의 한계로 여겨지며 전후(POST WAR)영화에서 전쟁의 이미지에 대한 비교분석 은 향후 과제로 남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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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통일문제연구 2011년 하반기(통권 제56호) Abstract The Korean War Documentary : History / Documentary / Memory The Korean War was an explosion of unresolved problems connected to ideology, politics and society. Considered from a cultural viewpoint, the Korean War produced a foundation that was important for constructing state identity in South and North Korea. Both Korean governments tried to create a state or state identity directly after liberation from Japaness colonial rule. Nevertheless there was a feeling of shared Korean culture regardless of the division of South and North Korea among the public. But after the Korean War, the division was finalized and Koreans had to choose which state to settle in. Charles Tilly described this as 'a state was made through war'. After the Korean War, the South Korean government took the role of a bulwark against communism, increased the role of the state in society and developed a pro-american line. The North Korean government assumed a broad anti-imperial sentiment, accelerated the Kim Il Sung ideology and the socialist revolution, for example through agricultural cooperative farms. Movies contribute to form the memory and history of communities. During the Korean War both South and North Korean filmmakers were mobilized by their governments and
전쟁 경험의 재구성을 통한 국가 만들기 35 made many documentaries, newsreels and feature films. Filmmakers called 'war filmmakers' made movies in Deagu and Busan in South Korea. Right after the beginning of the war, Kim Il Sung enlisted the help of filmmakers and the resulting films moved many people to volunteer for the army in North Korea. Because they were of prime important documentaries and newsreels were made with support by the government and army. As official government narrative the Korean War documentary was different in the two Koreas. This article follows White`s assumption that history is a narrative that has been made by someone, not a mere representation of facts. I try to map the mirror image between the South Korean documentary, A March of Justice and the North Korean documentary, A War of Justice and analyze the relationship of war documentary and state-identity. Keywords: the Korean War, state-identity, reorganization of history, documentary, collective memory, trauma, March of Justice, A War of Justi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