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한국사회체육학회지, 제 37 호, pp. 125~136 Journal of Sport and Leisure Studies 2009. Vol. 37, pp. 125~136 이경석 ( 李景錫 ) 의생애와유도 ( 柔道 ) 사상에관한연구 임석원 ( 중앙대학교 ) * 조문기 ( 경희대학교 ) Ⅰ. 서론 어느스포츠종목이든그것의초창기선각자들의행보는이후그종목이한국가에서자리잡아나가는데지대한역할을하며, 특히정신적측면을강조하는무도 ( 武道 ) 종목에서그들의사상은무도의기술적발전측면에버금갈정도의중요성을가진다. 이학래 (1990:98) 는그의저서에서일제강점기당시경성에문화통치기를정점으로발전하다가후일종로서고등계의공작에의해일본강도관조선지부로통합되는총4개 ( 基靑柔道部, 朝鮮講武館, 朝鮮武道館, 朝鮮硏武館 ) 의유력한사설유도관이있었다고기술하고있다. 본고의연구대상인이경석은이중연무관의창설자이다. 이경석을연구의논제로한이유는아래와같다. 이경석은동경유학시절에東京留學生武道會를창설하여조선의무도보급에많은노력을기울였고귀국후에도연무관창설과보성학교에서의유도사범을지내면서, 후일한국유도가여명기를지나욱일승천 ( 旭日昇天 ) 하는시기에이르렀을때중추적역할을 담당하게되는제자들을많이양성하였다. 이후진양성과더불어그는이시기에유도의사상적측면에관한다수의기고문을통하여무도를수련함에있어중요한두축인기술과정신양자 ( 兩者 ) 에큰궤적 ( 軌跡 ) 을남기었다. 그러므로이경석의활동과사상에관해연구하는필요성은그의미가작지않다고본다. 먼저이경석에관해언급한선행연구를보면대표적연구물로이학래 (1990) 의저서를볼수있는데그는이저서를통해이경석의동경유학생무도회창설, 연무관창설과보성학교에서의지도자생활등에대해고증하고있다. 이상에서파악된선행연구에논자가새로더하고자하는내용은다음세가지이다. 첫째, 이경석의성장기환경에대해고증해볼것이다. 둘째, 이경석의일본에서의무도수련에관한내용과해방후정치활동에대해고찰해볼것이다. 셋째, 이경석의유도사상이어떠한것인지분석해볼것이다. 그러므로본연구의목적은이경석의생애와유도사상을고찰하여그가한국유도발전에어떠한역할을하였는지알아보는데있다. 연구의방법은신문, * ultrajo74@naver.com
126 임석원 조문기 잡지, 단행본등을이용한문헌고찰의방식을택하여진행한다. 마지막으로본연구의의의는기존에이경석을다룬연구에새로운내용을추가하여이경석에관한연구를더욱견고히하는것과그가유도에관해언급한글을분석함으로서이경석의유도사상이어떤것인지를알아보는데있다. Ⅱ. 이경석의생애 대한유도회는 26일원로유도인이경석 (85) 전유도회고문을 10단으로, 장경순 (69) 전국회의장 신도환 (71) 전국회의원등 7명을 9단으로각각승단 중략 지난 11월타계한석진경옹에이어국내두번째로 10 단에승단, 생존하는유일한 유성 이됐다 ( 중앙일보. 1990. 12. 27). 국내유도계최고령자이자유일한 10단보유자인유성 ( 柔星 ) 이경석옹이 8일오후 7시 40분숙환으로서울중앙병원에서 91세로타계했다. 고이경석옹은경남합천에서출생하여배재고, 일본도쿄 ( 東京 ) 주오 ( 中央 ) 대법학부를졸업한뒤 31년귀국, 사재를털어종로구수송동에조선연무관을열고후진양성에노력하는한편보성전문 ( 현고려대 ), 혜화전문 ( 현동국대 ) 강사를지냈으며오랫동안대한유도회상임고문으로활동해왔다 ( 중앙일보. 1996. 9. 10). 위의기록을바탕으로계산해보면이경석은 1906년을즈음해출생하여평생을대한민국유도발전을위해헌신하다가, 1990년유도인의최고명예인 10단에오르고, 얼마되지않아 1996년영면하게된다. 앞서의인용문을바탕으로그의생애를좀더유추해보면동아일보 1931년 7월 9일자에자비를들여연무관을창설하였다는글이발견된다. 中央道場의必要에서朝鮮硏武館創立李景錫氏가私財萬圓을던저壽松洞복 판에道場을建築. 이상에서보건데당시로서는적지않은돈인만원 ( 현재가치약 2억2천만원 ) 을쾌척하여경성한복판에도장을건설한것은그의집안이제법부유했음을짐작케해준다. 그사실을뒷받침해줄수있도록새로발견된근거를아래에적는다. 李景祥 1897년慶尙南道陜川面출생, 京城普城中學출신. 동생으로李景溱 ( 東京美術學校졸업 ), 李景錫 ( 中央大學校졸업 ) 등이있음, 20세때부친을여의고그후 10여년간동생들을훈육. 향당에서인망이매우높아서陜川面長이되었으며學務委員, 父兄會長, 面協議員뿐만이아니고道會議員이되어활동. 합천의발전과大慶南의완성을위해노력. 陜川邑內의수해를대비한제방공사, 稅務署誘致문제에도성공. 서울수송동에朝鮮硏武館을세워서동생李景錫 ( 유도4단 ) 과함께유도를가르쳤으며 1935년현재 200명의문하생을지도함. 소작인을대하는데있어서도놀라울정도의친절하고자애로운태도를보여주었으며소작료를아주저렴하게하였으므로 300여명의소작인가운데서소작료가부담이되어그의토지에대한경작을그만두거나그곳을떠나는사람은하나도없었음 ( 朝鮮功勞者銘感, 193 5:196). 위의기록은 1935년에작성된것으로이경석의성장기삶을엿볼수있는내용이다. 이를차례대로살펴보면아래와같은결론을유추할수있다. 먼저이경석이 10세를즈음하여부친을잃었다는것을알수있다. 또그와열살터울인형이경상도동생과함께연무관에서유도를지도했다고밝히고있으니응당유도에능하였을것이고이는이경석이유도에입문하게되는계기가그의형과관계가있을수도있다는것을추측케해준다. 또한이경상이자신의아버지를여의고 10년간부
이경석 ( 李景錫 ) 의생애와유도 ( 柔道 ) 사상에관한연구 127 친을대신하여동생들을훈육했다고나오는데이는이경석의인격형성과정에그의형이많은영향을주었음을짐작하게하는구절이라고본다. 더하여위의기록은이경석의형이경상이경남지방에서여러관직을거치며많은업적을남기고선정을베풀었으며, 자신의집안소작인들에게도소작료를박하게하지않고자애롭게대하여그들이자신들의생활에만족하였음을적시함으로서, 이경상의성품이매우바르다는것을알게해주어그결과이경석의인격형성과정이매우건실했을것임을간접적으로증거하고있다. 물론고향사람들에게만바르게대하고아우들을학대했을수도있는것아니냐는반론이있을수도있겠지만, 이경상이이경석과함께연무관을운영한것을볼때형제의관계가소원 ( 疏遠 ) 하지않았다는것을추리하는것은어렵지않다고생각한다. 더하여이학래 (1990:167) 의저서를보면연무관이사로이경진 ( 李景溱 ) 이등재된사실까지확인되니삼형제의관계를크게의심할필요는없다고본다. 마지막으로그의집안농토를부치는소작인의수효가 300인이라하니, 보통농촌의한부락 ( 部落 ) 당 40 가구정도인것을감안할때이는이경석의집안이굉장히부유했다는것을말해준다. Ⅲ. 이경석의활동 이경석의활동을기술함에있어그의배재고보시절부터가아닌동경유학생시절로시작하는이유는그의고보시절기록에특이한점이없기때문이다. 이는이경석이선수로서의자질보다는지도자로서의자질이더월등했던것으로판단되기때문이다. 1. 일본유학시절의활동일본東京에유학중이던조선의학생武道人들은 무도의보급발전과상무정신의앙양을목적으로 1928 년 5월 17일당시東京神田에있던朝鮮基督敎靑年會館에모여東京留學生武道會를조직하였다. 이무도회의주요구성원으로는평북의金應權, 당시권투로이름을날리던黃乙秀등이있었으나구성원의대부분은李景錫을중심으로한유도인들이었다. 그들은창립총회에서당시日本의中央大學法學部英法科에재학중이던李景錫유도 2단을위원장으로선출하였다 ( 이학래, 1990:156). 이때가 1928년이니이경석의나이를계산해보면약관 22살정도란이야기인데, 그젊은나이에그런장한일을했다는그가얼마나일찍부터계몽된인물중하나였는가를알수있게해준다. 아울러위의글은그의잃어버린조국에대한사랑과, 일본유학당시에도유도에꾸준한관심을가지고수련했음을엿볼수있게해준다. 이에대한이해를돕고자이경석의유도수련에대한기록을아래에적는다. 中大出身의李景錫君君은慶南陜川出生으로서일즉이培栽를마치고東京에건너가中央大學豫科待된다 ( 三年制 ), 同大學法學部英法科를昨春에마첫다, 君의武道修練總年數는十午年間인데이동안東京講道館, 東京硏道館에서各各三段을바덧다. 在京時에는十五年前에中央基督敎靑年會柔道部와培栽柔道部創設當時부터修業타가東京에건너가中大入學부터柔劍兩部에入門하고講道館에도入門하特히硏道館에서는德三寶문하에서柔道의極意를硏究하얏스며劍道는中大에서滿四年間, 拳鬪는渡邊姿次郞씨의講習會第一會出身이다 ( 東亞日報. 1932. 2. 5). 위의내용을보면이경석은동경으로유학가기전부터기청유도부와배재고보에서유도를수련했음을알수있다. 이후동경시절에는강도관과연도관에서수련후양관에서공히 3단을부여받았고, 특히연도관의도쿠삼보사범에게서유도의극의를가르침받아그의유도사상의뿌리가도쿠삼보사범에게서나
128 임석원 조문기 온것임을알게해준다. 도쿠삼보사범은미후네규조사범과더불어당시일본유도계의두거목으로그는매우청빈하며道義를숭상했던인물로이경석의유도제자인장경순 (2007:234) 의저서에잘묘사되어있다. 추가하여흥미로운사실은이경석이유도뿐만아니라검도와권투를수련했다는사실인데. 여기서이경석에게권투를사사한와타나베시지로는일본복싱의창시자로일제하한반도에서권투명인으로회자되던서정권 ( 徐廷權 ) 의스승으로알려진인물이다. 2. 귀국후유도지도자활동일본유학중동경유학생무도회를조직한이경석은졸업후귀국 1931년경성에그의유도이념을실현시킬공간인조선연무관을건립하고지도하다보성학교유도사범으로초빙 (1934 년~1944 년 ) 되어연무관, 보성학교두곳에서많은제자들을양성한다. 이시기에관한내용은기존의선행연구에서충실하게고증되었기에자세한언급은지양하고, 대신 1차자료를주로이용해중요한몇몇사실들을언급하는것으로마무리하고자한다. 먼저연무관건립에관한기사를다음과같다. 中央道場의必要에서朝鮮硏武館創立李景錫氏가私財約萬圓을던저壽松洞볻판에道場을建築朝鮮硏武館을壽松洞四六番地六號近百坪의基地를買收하고五十餘坪에理想的道場을建設코저方今設計 ( 建築設計는總督府建築科技師金宗亮 ) 中인바느저도九月中旬頃에는開館할豫定이라한다. 그리고朝鮮硏武館의創立趣旨는民衆的武道精神과體育, 德育을主眼으로한斯道의獎勵와中央道場의必要를切實히늦기어아프로더욱發展普及을圖키爲하며實로朝鮮武道의創設과斯界의總力量集中애協力함을目的으로하야創立한것이라한다 ( 東亞日報. 1931. 7. 9). 기사의하단에서보건데체육과더불어덕육을그의연무관에서교육할것임을강조한이경석은그가단순히무도기술만을전수하고자연무관을개설한것이아니고덕육즉윤리의식을수련생들에게함양하여강건한신체와정신을두루갖춘인재를양성하겠다는의지를보이고있으며, 이것의실천으로다음과같은일을하였다. 1934년에硏武館주최로열린한글강습회는李景錫의애국적인측면을여실히보여준다. 그가 1928년 5월 17일에있었던東京留學生武道會에서초대회장으로피선된것도武道로한국민에봉사하겠다는열의가남달리뜨거웠기때문이라생각된다. 당시의한글강연회의연사로는李秉岐, 李熙昇, 李允宰, 李克魯등이었다. 文武를겸비해야한다는硏武館의취지가당시의사회전면에크게부각되고있었음을알게한다 ( 이학래, 1990:95). 이와같은연무관을통한후진양성계획과더불어이경석은귀국후에도자신이조직한동경유학생무도회와긴밀한관계를지속해나가는행보를보이는데그것을아래에소개한다. 第四會全朝鮮中等學校柔道大會午後一時十分鐘路靑年會館運動室에서觀覽無料場內整理上無料入場券을當日午前十時까지靑年會館과壽松洞朝鮮講武館에서要求하는이에게줍니다. 主催在東京朝鮮留學生武道會後援東亞日報社中央基督敎靑年會朝鮮硏武館大會의任員會長李克魯本部委員 :( 總務 ) 李仁昌배상봉 ( 審判 ) 張權李景錫 ( 番査員 ) 崔在섭張松산金世곤 ( 計詩圓 ) 洪文基金여윤 ( 記錄員 ) 李吉用金正學 ( 呼名, 進行員 ) 洪聖준李윤호 ( 場內整理 ) 石鎭慶李鍾각 ( 東亞日報, 1932. 9. 10). 이것은동경유학생무도회가주최한전조선중등학교유도대회에관한내용인데후원단체이름에동아일보, 기청유도부와더불어이경석의연무관이등재되어있
이경석 ( 李景錫 ) 의생애와유도 ( 柔道 ) 사상에관한연구 129 는것을볼수있다. 또한당시관람료를면제한것이보이는데이는후원단체의지원이넉넉했음을보여주는것이라하겠다. 조금더나가대회의임원의면면을살펴보면, 눈에띄는인물로서장권, 이경석, 이길용, 석진경등이언급되고있다. 심판원으로이경석과함께등재돼있는장권은그당시기청유도부의사범으로활동하던인물이고정리원 ( 整理員 ) 을담당한석진경은그의수재자로후일유도 10단에등극한분이다. 연무관은여타의도장에비해이채로운점이두가지가있는데그중첫째는이곳에서수련하는관원중유달리사회지도층인사들이많았다는점이다. 그것을기록한동광 (1932) 이라는잡지를아래에소개한다. 第 6 官, 紳士들의體育熱전조선으로체육열이퍼저나가는영향을받음인지서울에는신사들중에체육열이발흥하야수염을버친나리들이운동복을끼고단니는것을볼수잇다. 壽松洞에잇는朝鮮硏武館에는사범李景錫씨의지도하에수련단이조직되어 1회, 2회의수련을햇는데거기참가한사람들은朝鮮語辭典編纂會의李克魯박사, 金善琪군을위시하야普專의李寬求씨, 金賢準박사, 玉선珍교수등이며野談家金振九씨, 東方評論主幹白寬洙씨, 의사李甲秀씨, 獨逸哲學博士安浩相씨등등이다 ( 東光. 1932:30). 사회지도층인사들이연무관에서수련하는기사가따로보도될정도이면, 그들의숫자가상당했음을뜻하고아울러연무관의유도수련내용이매우충실했음을짐작할수있다. 이와같은사실과더불어연문관이가진두번째로이채로운점은당시에여자부를설치했다는점이다. 朝鮮最初의實驗으로女子에게도柔道敎授異彩의硏武館活動연무관에있어서더욱특기할것은여자부 ( 女子部 ) 의신설이다무술 ( 武術 ) 이남자에게만한한것이아니라여자에게잇어서도연마할수잇다는것이다동 관에서는금년초에여자부를신설하야다수한회원을가지게되엇다고하며동관의현재사범으로잇는이경석씨가일즉이동경유학시대부터여러해동안유도 ( 柔道 ) 에관심케되어연구하엿왓든만큼장래에잇어서이사업에분투노력하리라고하는데동관은재단법인 ( 財團法人 ) 으로계획하야우리민중의보건에꾸준이진력하리라고한다 ( 東亞日報. 1934. 1. 1). 참으로대단한일이다. 당시일천했던여성들의사회참여를볼때다른운동도아닌육체와육체를직접충돌하여기량을겨루며, 상대의관절과기도, 동맥을제압하는운동인유도를 1930년대에교육했다는사실은실로놀라운일이아닐수없다. 아울러이것은유도보급에대한이경석의불같은열의와개척정신을충분히느끼고도남음이있는대목이라하겠다. 이상열거된노력의결실로이경석은 1934년늦가을강도관 4단으로승단하게되며그것을보도한기사를아래에더한다. 硏武館李師範講道館四段府內壽松洞에잇는朝鮮硏武館師範李景錫氏는이번에東京에잇는講道館四段으로昇段되엇다는通知가 에到達되엇다는데朝鮮人大學部出身으로講道館四段은처음이라고한다 ( 東亞日報. 1934. 11. 25). 이영걸 (2001) 의저서에서신도환이자신의유도수련과정을회고한글을보면강도관은 다른곳에서취득한단은인정하지않을정도로권위가높은곳이다 라는말이나온다. 그런데그런엄한기준을가진곳에서이미일본에서귀국한이경석에게승단을예외적으로허용한것을보면이경석의지도자로서훌륭함이어느정도였는가를미루어짐작하게해준다. 이후해를거듭하며, 연무관은더욱성장하던중뜻하지않은시련을맞이하게되었으니그때가 1938년 6 월이었다. 메이지유신을시작으로제국주의의길을걷게된일본의침략야욕은 1937년중일전쟁을시작
130 임석원 조문기 으로극에달하게된다. 이전쟁을돕고자일본은지난문화통치기간동안보인비교적유연한자세를포기하고이후韓民族에게다방면에걸친많은제약을가하였다. 이것은한민족유도계에도예외가될수없어이른바경성의유력사설도장들의독립성을해체하여, 각도장들을일본강도관조선지부로흡수하게된다. 다음은이사실을보도한기사이다. 京城私說武道團體講道館支部에合流歷史잇는四個團體에大變革鐘路暑의慫慂으로체육기관의통일을위하야당국에서조선내의체육기관의통제에손을대 게되엇음은 보한바어니와금번당국의종용 ( 慫慂 ) 에의하야경성부내사설무도 단체四단체가오는七월一일부터강도관조선지부 ( 講道館朝鮮支部 ) 에로합류하게되엇다. 부내에는종래무도회 ( 武道會 ) 와강도관 ( 강도관 ) 의정규 ( 正規 ) 에의하지안코독립한사설도장 ( 道場 )-강무관 ( 講武館 ) 조선무도관 ( 朝鮮武道館 ) 연무관 ( 硏武館 ) 기청유도부 ( 其靑柔道部 ) 四개소가잇어다년간유도 ( 柔道 ) 발전에진력하여왓는데수일전종로경찰서고등계에서四도장의책임자를초치 ( 招致 ) 하야유도의통일적발전을위하야강도관조선지부 ( 講道館朝鮮支部 ) 에합류하기를종용한바잇엇으므로오는七월一일부터이에가맹하기로되엇다. 그리하야역사깊은전기四개소사설도장은六월三十일부로독립적역할을끝막고장차로는강도관조선지부의一구성원으로서나가게되엇다 ( 東亞日報. 1938. 6. 24). 내용을살펴보면제호 ( 題號 ) 에종로경찰서 종용 이라고나오고있으며, 이것은결국 1938년의유도관합병이일경의공작에의해자행된것이라는것을당시동아일보기자가행간 ( 行間 ) 을통해은근히알리는것이라할것이다. 3. 광복후정치활동끝나지않을것같던일제통치가 1945년 8월 15일자로끝나게된다. 이후이경석은해방된조국에일조하고자잠시정치활동에가담한다. 또한이시기에소공동강도관조선지부도장을놓고연무관과기청유도부, 조선무도관, 조선강무관, 경찰유도인들사이에마찰이일어나는사건이발생하게된다. 이에그사건을먼저소개하고다음으로이경석의정치참여활동에대해언급할것이다. 유도계는 1945년 9월조선유도연맹을창립하여연맹도장으로소공동의강도관조선지부의도장을사용하기로하였다. 도장인수작업을위임받은석진경과이원영이소공동에가서당시도장을관리하고있던일본인아베에게퇴거를명하자아베는조건으로삼만원을요구한다. 이에인수인들은그요구를거절하고 3일후재차방문하나아베는이미그곳을이경석에게매도하고도망을갔다 ( 이학래, 1990:167). 이사건은일제가패망한지한달이다되도록정신을못차린아배의농간과연무관에대한이경석의열정이맞아떨어져일어난사건으로, 후일이것은한참동안한국유도인들간의반목의불씨가된다. 당시소공동도장은적산 ( 敵産 ) 건물로패전국사람과거래할필요가없는것이었기에이경석의이행보는다소아쉬운감이있는대목이라할것이다. 다음에나올인용문은이경석이참여한건국치안대활동에관한기록을선별편집하여인용한것이다. 이경석의해방후첫활동은건국치안대 ( 建國治安隊 ) 활동에서비롯된다. 이단체는 8 15해방직후조선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인여운형이치안유지를위해조직한자치단체로서조선총독부로부터치안권을인수받은여운형이 1945년 8월 16일오후 3시휘문중학교강당에서당시 YMCA 체육부간사이고유도사범이던장권 ( 張
이경석 ( 李景錫 ) 의생애와유도 ( 柔道 ) 사상에관한연구 131 權 ) 을대장으로조직했다. 이단체의주축은시내의체육계대표및체조교사등이었다. 이경석은이단체에서동원부장직을수행했다. 같이활동한인물중경리부장에석진경, 소방대장에방영두등이있었다 ( 건국치안대, 한국브리태니커온라인 ). 광복직후부터체육계인사들이해방조국에일조하려던모습이참으로인상깊다. 그중대장장권을비롯하여이경석, 석진경, 방영두등유도인들의참여가눈길을끈다. 임정및연합군환영준비회조직 ( 略 ) 趙炳玉, 金性洙등유지는종로청년회관에서임시정부와및연합군을환영하는환영준비회를조직하고警護部 : 姜秉遠金武森徐相天李景錫卞天壽鄭仁朝曺東煥吳鳳煥鄭寅昌權寧萬孫基葉沈相福曺順同方榮斗李仁德 ( 전단, 국사편찬위원회온라인 ). 위의내용은임시정부요인환국을경축하는환영회를준비한다는전단의일부내용을인용한것인데, 이경석은이환영회에서경호임무를부여받게된다. 함께기록된이름중에유도인방영두와역도인으로유명한서상천의이름이눈에뛴다. 己未獨立宣言記念全國大會準備委員會에서는오는 2 월 4일오후 2시부터동아일보사 3층에서위원회를열고 3 1 기념행사에대한협의를하게되었으며명예회장이하각부서는다음과같다. 명예회장 : 李承晩金九회장 : 申翼熙競技部 : 李吉用朴永鎭李丙學金鉉國石泳河李景錫徐相天李南明徐相國韓軫熙 ( 朝鮮日報. 1946. 2. 1). 이글은 3.1절기념행사에관한기사의일부내용이다. 이행사에서이경석은이길용, 서상천, 한진희등과함께기념식의경기부를담당했음을확인할수있었다. 계속하여동아일보 1946년 6월 18자와조선일보 1948년 4월 17일신문에이경석은각각조선건민회와민주독립당에서부위원장과훈련부장을지낸사실이확인되고, 한성일보 1948년 9월 24일자에민주독립당이친김일성노선을걷자민주독립당을탈당하게되는것이보도되는것을끝으로, 이후그의정치활동에관해눈에띄는자료는보이지않는다. 이상의자료들을본다면이경석은반공주의자로추정된다. 하지만용인대학교 50년사 (2003:31) 을보면전혀상반되는주장이적시되어있다. 그러나그주장은그것의근거에관한공신력있는자료를밝히고있지아니하고있는관계로그주장의내용을그대로적시하기에는다소문제가있는것이기에본연구에서는그내용을적시하지아니한다. Ⅳ. 이경석의유도사상 이경석은동경유학시절과귀국후연무관시절에유도에관하여동아일보에다총 13회에걸친기고문을남기며, 각각의제목은 1929년 9월 유술의의의와유도의역사, 1931년 5월 유도의근황그유래본질, 1932년 1월 유도와학리 등으로구성된다. 이에이것들에대한분석에들어가는것으로그가어떤유도사상을가지었는가알아보기로한다. 1. 유술의의의와유도의역사柔術의意義와柔道의歷史는이경석이동경유학시절동아일보에기고한것이므로이것을처음으로시작한다. 이에모든기고문을옮기려하였으나지면의부족함과원문의마멸이심한관계로그의 6번의기사중중요한부분을발췌하여적시한다. 柔術은어떠한것인가를그形體上으로말하면武器를가
132 임석원 조문기 지지안코힘이弱한者가强한者와對抗하야能히防禦하며能히勝利할수잇는것인데卽힘으로써直接힘에反 안코敵의힘을利用하야能히勝을得할수잇는方法을硏究하는것이다. 柔術은自己의心力體力으로 行할수잇는武術이다. 心力이라함은智, 情, 意의작용을말함이다. 元來柔術은日本特有의技術이지만始祖는어떠한사람이며如何한時代에始作된것은分明치안타그러나自己를防禦함은人生의自然性이라그起源도上古일것이며아즉武器가업슬以前부터이러한體術만은잇섯다고생각된다. 陳元贇이가日本柔術의發達을助成하얏다는事實만은부인할수업다고한다. 秋山四郞兵衛를始祖라고捉唱하는說이說에依하면寬文初年長崎의醫師秋山四郞兵衛義時라는者가支那로부터縛打의術及人體急所를배워와서柔術을工夫하얏다. 野見宿祠를始祖라는說이說은柔術을日本固有의것으로써古代에發生한것이라하야垂仁天皇七年野見宿祠가. 중략 세상에서는이것이 [ 씨름 ] 의初라고傳하나그시대에는 [ 씨름 ] 과유술의구별이업섯다고한다. 精力善用自他共榮이라는精神을가진勝負와體育智育, 德育을兼備한武道가柔道이다 ( 東亞日報. 1929. 9. 11~15 18). 이경석은유술이柔能制剛의원리에입각하여어느一人一代에완성된것이아니고여러사람의노력과오랜세월의흐름을타고이루어졌으며, 이것을바탕으로정력선용자타공영이라는기치아래체계화된것이오늘날의유도라하였다. 여기서나오는유능제강은노자의도덕경에서나오는말이고정력선용자타공영은근대유도의창시자가노지고로가주창한말이다. 2. 유도의근황그유래본질柔道의近況그由來와本質은 1931년 5월에기고 한글로서, 동년봄에귀국한이경석이연무관을건축하기전에집필한글이다. 이글역시중요부분을선별하여보도록한다. 從來의柔術과講道館柔道와의相異한點을말하면柔術은攻擊防禦를目的으로하는種類의武術이엇다. 그러나講道館柔道는單히攻擊防禦의練習에止함이아니라人事諸般의事에이것을應用하며또한道의本源의極히深遠한硏究과廣汎하고複雜한此의練習을目的으로하는것이다. 武術은그原理를攻擊防禦에應用한것이지만이原理는武術以外의어떠한일에든지應用할수잇다. 例컨테人間의身體를健康케하는데應用할時에는그것이體育이다또는智德을기름에應用하나면智德의修養法이된다. 武術을다만武術로써의練習方法을取할때에는往往衛生等을等閑히하기쉬웁고自體發達의根本原則의考慮에缺하는일이적지안흠으로도리어武術의大成을妨害하는일이생기게된다. 歐洲諸國에서도盛行하나그中에英, 獨, 伊와루마니아흉아리등더히하고한다. 印度에서도 [ 타고루 ] 翁이東京을차저가슬때에講道館長嘉納씨에게敎員推薦의依賴를하야高垣氏를派遣하야印度의만흔靑年男女에게가르키고있다한다. 筆者가講道館에서修行中에印度人 [ 데스판데 ] 군과交分이투터웟는데그는印度에柔道를널리퍼트리기위하야派遣된사람이다 ( 東亞日報. 1931. 5. 9:13~15). 두번째연재물에서이경석은유술에대해그것은주로도수격투 ( 徒手格鬪 ) 의측면만이강조되지만, 유도는우리삶의전반에걸친여러분야에서그적용이가능하다고하여이것이바로유술과유도의다른점이라말하고있다. 또한무술교육이단순히체육교육에만이용되지않고지육, 덕육교육에도이용될수있음을강조하고있다. 더하여그는동경강도관수련시절유도의
이경석 ( 李景錫 ) 의생애와유도 ( 柔道 ) 사상에관한연구 133 세계보급과그문호개방에성별에차별을두지않음을체험하였음을글에서밝히고있다. 이상과같은강도관에서이경석의경험은그가후일귀국하여연무관을개관했을때보여준한글강습회와여성유도부창설과같은일의모태가되었을것이라고논자는생각한다. 3. 유도와학리柔道와學理는이경석의마지막연재물로이것은그가막연무관을세우고나서집필한글이다. 이연재물을앞서와마찬가지방식으로소개한다. 柔道와物理學의關係적은體軀의사람이柔道의技術로써큰體軀의사람을能히넘길수잇는것이物理學의方則에符合된다고볼수잇다. 柔道와生理學의關係柔道가生理衛生에適合하다는것은여러분이다아는바이지마는 單히말하고저한다. 柔道는護身術을體得하는興味와同時에四肢白骨을平均히움직이어서全身의筋肉을充分히伸 사캄으로完全圓滿히發達되는것인胃病, 肺病, 병, 肋膜炎등諸病은柔道를修行함으로써豫防할수잇다. 柔道와心理學의關係心理學은心的現想을硏究하는科學인데柔道와는關係가업는것갓치마는柔道가護身術인同時에體育法, 修身法인것은勿論이다. 臨機應變하야敏活한동작으로써强敵을制壓하는것도知識, 感情, 意思等의作用으로써인데知, 情, 意의三者는柔道의硏究上密接한關係가有하다. 古來로부터柔道가不動心, 心氣力의一致無念無想이라함은모다心의修業이다. 卽이것이心的現像이다. 其外에도유도의수련이윤리도덕상에미치는 1. 正義를尊重함 2. 驕奢의風習을憎惡함 3. 忍耐力을强하게함 4. 勇猛의氣像이豊富하여짐 5. 모던判斷을敏速히함 6. 犧牲的精神을養成함 ( 東亞日報. 1932. 1:27~29). 이경석은위의연재에서유도가물리학, 생리학, 심리학과어떻게연관되는지설명하고, 아울러유도수련이윤리도덕을양성할수있음을예시를들어강조하고있다. 이상을종합해보면이경석은유도의원리가과학적이며그수련을통해건실한인간완성이가능함을말하여, 유도가주요한교육방법의하나임을지적함으로서과거조선을지배하던문약 ( 文弱 ) 의풍조에무의기상을첨가하고자하는혁신의웅지 ( 雄志 ) 를갖고있었음이나타난다. 다음은體力向上과그鍛鍊策이란주제로동아일보에서당시유력한체육계인사들을취재한내용인데이경석은그취재에씨름, 柔道를獎勵京城에本部두워指導란제목의長文의글을기고한다. 다음은그중일부이다. 民族保健의盛衰는直接그民族그國家의盛衰를말함이다. 그럼으로어느民族을勿論하고그民族의體位向上을僞하야努力함은當然한일이다. 朝鮮人의競技로 하고싶은것은조선씨름, 柔道,, 拳鬪등이다 ( 東亞日報. 1938. 1. 4). 글에서보듯이이경석은국가의성쇠를결정하는요소중국민의체력향상이중요한역할을한다고역설하고있다. 이는나폴레옹과의전쟁에서모국이패하자독일체조를개발하여자국민을강건하게만들고자한얀의생각과일맥상통하는내용이라할것이다. 또한이내용을토대로이경석이유도를동포들에게보급하여망국회복을위한역량을기르려했음을알수있다. 그도그럴것이당시는이미우리민족은일제에게구속당한상태이니체력향상을논하며민족의성쇠를말한것은힘을길러장차나라를회복하고자하는의지가아니고무엇이겠는가? 마지막으로이경석의유도보급을통한망국회복의의지가절절 ( 切切 ) 히묻어나오는훈화 ( 訓話 ) 의일
134 임석원 조문기 부를소개하면서이경석의사상에대한고찰에서나오도록한다. 사람은동서를막론하고문무를겸비해야한다. 영국에서도인격만이아니라스포츠를해야만젠틀맨으로인정받는다. 조선조 500년동안문인우대만하다가지금일본의속국이되지않았나. 나는법학을전공했지만유도를했으니武인유도를국민에게보급하는것을사명으로삼았다. 지금은유도가일본의國技처럼되어있지만, 이것은우리화랑과무관하지않다. 신라시대의검술, 마술, 궁술등무예 5기중의하나가유술인데, 이것이일본으로전래되어현재유도의모체가되었다. 그렇다면유도의요체는무엇인가. 자기가가지고있는체력과정신력을가장보람되게사용하는것, 그게유도인것이야. 그래서나는부모님으로부터물려받은유산을전부투자해너희들을가르치는데, 너희들도이런역사성을분명히알고유도를배워야한다 ( 장경순, 2007:228). Ⅴ. 결론 이상과같이이경석의생애와사상에관하여검토해본결과다음과같은결론을얻었다. 첫째, 생애부분에서는부친을일찍여의었으나형이경상의건실한훈육아래매우유복한환경에서성장하였고, 이를바탕으로유도입문의계기도형과관련이있을수있다는것을알수있었다. 둘째, 활동부분에서는일본에서의유도수련과정에대해알수있었고, 선행연구의성과인귀국후경성에조선연무관을개관하여한국유도발전에초석을이루는제자를많이배출한사실을확인했으며, 아울러해방후에는잠시정치에관여한사실을확인했다. 셋째, 유도사상부분에는유도가단순히체육육성만을위한교육방법이아니라지와덕을병행하여육 성할수있는전인적교수법임을몸소체득하고, 이것을통해망국회복의역량양성방법으로삼았음과, 더하여여성에게도유도의문호를한국최초로개방하는혁신적행보의근거를확인하였고, 또한아직스포츠과학이란단어가생소한일제하한반도에유도를과학적으로분석하는탐구정신을가진인물임을인지할수있었다. 이상열거된사실을종합해보면이경석의유도사상은애국, 혁신, 탐구라는세단어로함축될수있다. 이와같이이경석은잃어버린조국을찾기위한민족의역량을기르는방편으로동경유학생무도회와조선연무관을창설하여유도를교육하였고, 수련생들에게유도의무력외에도유도정신에관한교육을통해유도가가진지력을또한교수했고, 그결과김성곤장경순등을위시한많은훌륭한제자가양성되어, 이들이후일한국유도의간성으로활동하게되니그가한국유도계에끼친공로는참으로크다할것이다. 참고문헌 이학래 (1990). 한국유도발달사. 서울 : 보경문화사. 이영걸 (2001). 한판에도전한다. 서울 : 서울올림픽기념국민체육진흥공단. 조선공로자명감간행위원회 (1935). 조선공로자명감. 경성 : 조선총독부. 장경순 (2007). 나는아직도멈출수없다. 서울 : 오늘. 편집부 (2003). 용인대학교 50년사. 李景錫 (1929. 9월 11일 ). 柔術의意味와柔道의歷史 (1). 東亞日報, A5. 李景錫 (1929. 9월 12일 ). 柔術의意味와柔道의歷史 (2). 東亞日報, A7. 李景錫 (1929. 9월 13일 ). 柔術의意味와柔道의歷史 (3). 東亞日報, A5. 李景錫 (1929. 9월 14일 ). 柔術의意味와柔道의歷史 (4). 東亞日報, A5. 李景錫 (1929. 9월 15일 ). 柔術의意味와柔道의歷史 (5). 東亞日報, A5. 李景錫 (1929. 9월 18일 ). 柔術의意味와柔道의歷史 (6). 東亞日報, A7. 李景錫 (1931. 5월 9일 ). 柔道의近況그由來와本質 (1). 東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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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임석원 조문기 ABSTRACT A Study on the Lee, Kyung-Suk's Life and Judo Thought Yim, Suk- Won Cho, Moon-Gi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understand the contributor of korean judo by studying of Lee, Kyung-Suk's life and judo thought, who was founder of student studying abroad martial arts unions in Tokyo and Chosun-Yonmuguan( 硏武官 ). This study covers his life, judo thought and achievements contributing to Korean judo history. The methods of this study are uses of newspapers, magazines and books. The result of this research is as follow. First, Lee, Kyung-Suk was grown in rich environment. Second, he learned many martial arts(judo, kendo, boxing) in Tokyo and was engaged briefly in politics after independent of Korea from Japanese empire. Third, his judo thought was patriotism, renovation and quest. Accordingly, Lee, Kyung-Suk was a truly great Judo-master. Key Words:Lee, Kyung-Suk's life and Judo thought, Yonmuguan, martial arts, Judo-master 접수일 : 2009. 5. 29 게재확정일 : 2009. 8.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