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토 장보고 신라 흥덕왕 비편( 碑 片 )에 새겨진 글귀 무역지인간( 貿 易 之 人 間 ) 은 장보고 를 지칭한다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흥덕왕(재위기간 년)은 828년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청해( 淸 海 )에 진( 鎭 )을 설치하겠다고 건의한 장보고에게

Size: px
Start display at page:

Download "멘토 장보고 신라 흥덕왕 비편( 碑 片 )에 새겨진 글귀 무역지인간( 貿 易 之 人 間 ) 은 장보고 를 지칭한다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흥덕왕(재위기간 826 836년)은 828년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청해( 淸 海 )에 진( 鎭 )을 설치하겠다고 건의한 장보고에게"

Transcription

1 1962~2012 제2권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 멘토 장보고 신라 흥덕왕 비편( 碑 片 )에 새겨진 글귀 무역지인간( 貿 易 之 人 間 ) 은 장보고 를 지칭한다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흥덕왕(재위기간 년)은 828년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청해( 淸 海 )에 진( 鎭 )을 설치하겠다고 건의한 장보고에게 병사 1만의 군진을 설치하도록 허락하고 장보고를 그 책임자인 대사( 大 使 )에 임명했다. 청해진은 오늘날의 군( 軍 ) 산( 産 ) 상( 商 ) 복합체 적 종합상사 의 성격을 띠었다. 장보고는 조공무역을 민간자유무역으로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양주( 揚 州 )에서 일본 규슈의 하카다( 博 多 )까지, 즉 한반도(청해진)-중국(적 산법화원)-일본(하카다)을 잇는 동북아 물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중동의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상인들과도 교역할 정도로 광활한 영역을 무역활동의 무대로 삼았다. 동아시아사의 권위자 에드윈 라이샤워(Edwin O. Reischauer) 교수는 장보고가 당, 일본, 신라에 걸친 해상상업제국의 무역 왕(the trade prince of the maritime commercial empire)이라고 격찬 하였다. KOTRA는 해외 네트워크 중심의 글로벌 조직이며, 코트라맨은 우리나라 의 무역과 투자를 뒷받침하는 전문 무역인이다. 무역 1조 달러 시대와 탄생 50주년을 맞이하여 KOTRA와 코트라맨은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고 있다. 이에 우리는 무역지인간 을 목표로 장보고를 좇고자 하는 것이다. 표지 제자 효봉 여태명

3 발 간 사 KOTRA가 창립 5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국가의 무 역 투자 진흥기관으로서 걸어온 반세기의 성상( 星 霜 )을 담은 KOTRA 50년사 를 펴내게 되어 감회가 새롭습니다. KOTRA는 대한민국의 무역입국과 궤를 같이 합니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계획의 시작과 함께 한 운명적인 탄 생이 그러했듯, 변방에 머물던 대한민국이 무역대국의 반 열에 오르는 숨 가쁜 여정의 굽이마다 KOTRA가 함께 뛰 어왔습니다. 미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지구촌 곳곳을 대 한민국의 경제영토로 확장하는데 KOTRA가 앞장서 달려 나갈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KOTRA 50년사 는 대한민국의 반세기 무역사이기도 합니다. 무역 1조 달러 시대를 개막하기까지 대한민국 호( 號 )가 격랑을 헤치며 항해해온 여정을 충실히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역사의 갈피마다 KOTRA가 짊어졌던 도전과 개척의 이야기도 실었습니다. 마치 자화상을 그리듯, 과장 이나 숨김없이 걸어온 길을 사실 그대로 담아냈습니다. 역사를 통해 배운다 라는 발간 취지에 충실하기 위해서입니다. 세계경제의 불확실성이 가중되고, 무역환경 또한 갈수록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 고 있습니다. 옛 선인들은 미래가 불투명할수록 역사서와 고전을 많이 읽었다고 합니 다. 과거를 음미함으로써 미래로 향하는 답을 구했던 것입니다. KOTRA 50년사 속 에 담긴 땀과 도전의 역사를 통해 우리 모두 미래를 열어갈 새로운 지혜와 용기를 얻 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또한 일반 대중에게도 한국인의 혼 을 깨우는 책자로 널리 읽히길 희망합니다. KOTRA는 창립 50주년을 더 큰 시장, 더 큰 미래 를 향해 달려 나가는 새로운 출발 점으로 삼고자 합니다. 항상 고객 및 현장 중심의 경영으로 글로벌 비즈니스를 지원하는 무역 투자의 국가 인프라 플랫폼 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관계기관 및 고객 여러분의 애정 어린 지도와 성원을 당부드리며, 창립 50주년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2012년 6월 사장 오 영 호

4 Ⅰ. 무역관 이야기 어느 무역관의 하루 미국 뉴욕 무역관 / 미국과 중국의 각축장이 된 뉴욕에서 미국 실리콘밸리 무역관 / 대박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하여 프랑스 파리 무역관 / 버리고 떠나기 독일 프랑크푸르트 무역관 / 바빠도 보람은 있다 중국 베이징 무역관 / 중여사(중국을 여는 사람들)를 아시나요? 러시아 모스크바 무역관 / 일일이 여삼추? 일일이 여일초! UAE 두바이 무역관 / 사막의 열기 속으로! D.R. 콩고 킨샤사 무역관 / 아베크 빠씨앙스(Avec Patience) 1962~2012 제2권 해가 지지 않은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사회주의 국가로의 여정 18년이 걸린 KOTRA의 유고 진출 우여곡절 끝에 모스크바에 무역관을 살어리 살어리랏다! 시베리아에 살어리랏다 한 중 수교에 이르기까지의 장정 하노이 무역관 개관식 행사까지 72일의 나날들 아바나 무역관 개설 이야기 3. 해외 무역관에서 이런 일이 라이베리아 도착 환영(?) 축포 걸프전쟁 속 쿠웨이트 탈출기 뗏목을 타고 콩고 강을 건너다 카다피 최후의 3개월 동안 레바논 전쟁의 기억 이라크, 달콤쌉쌀한 추억 여기는 바그다드입니다 2권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은 KOTRA 탄생 50주년을 상징하여 해외 50개 무역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엮되 일부 무역관의 경우 좀 더 생생한 체험담을 담았다. 아울러 1권에 수록하지 못한 이야기와 지상 좌담회, 그리고 정체성에 대해서도 기술하였다 개 무역관 이야기 유럽 북미 중남미-카리브 일본, 아시아, 대양주 중국-타이완 중동, 아프리카

5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Ⅲ. 지상 좌담회 KOTRA의 외국인투자 유치 기능에 대하여 KOTRA, 국가 외국인투자유치 기관 수임받다 1998년, 구국의 심정으로 발로 뛴 투자유치 실리콘밸리 기업의 R&D센터를 유치하라 외국인투자유치 좀 더 잘 할 수 없을까? 2. 전시박람회와 엑스포 뒷이야기 1964년 서베를린 산업박람회 참가기 대전무역전시관의 추억, 제4회 한국 국제축산박람회 유치 인구 52만 소도시 헬싱키에서의 한국상품전 한국 최대, 최고 전시회 서울국제식품전 앉은뱅이도 걷게 만든 상하이 엑스포 한국관 여수 엑스포와 KOTRA 원로 OB 및 전현직 이사 좌담회 1차 좌담회-1960년대와 1970년대의 KOTRA 설립과 초기 사업 2차 좌담회-1980년대와 1990년대의 KOTRA 성장과 변혁 3차 좌담회_ 2000년대 KOTRA 개혁과 시련, 사업다각화 2. 경영자문위원회 1차 경영자문위원회 2차 경영자문위원회 Ⅳ. KOTRA와 코트라맨의 정체성을 찾아서 이런 일 저런 사업 1970년대 초의 수출 효자품목을 아시나요? 가나에서 겪은 두 인물 KOTRA와 거의 같이 태어난 KOREA TRADE 지 코트라맨의 자동차 수출에 얽힌 이야기 중소기업 공동물류센터 탄생 비화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폴크스바겐(VW) 납품 성공기 개성공단 남북경협 협의사무소 근무 회고 나를 속 태운 뭄바이 한국상품전 프르미에르 비죵(Premiere Vision), 그 짜릿했던 순간들 트랜스포텍(Trans Portech), 글로벌 바이어 대상 사업의 물꼬를 트다 브라질 상파울루 무역관에서 열린 대통령 화상국무회의 Cartoon Connection Korea가 개최되기까지 국내 무역관의 명암 보고타 교통시스템 구축 3억 달러 프로젝트 수주 지원기 프로 골퍼 양용은 선수가 KOTRA 로고 모자를 쓴 사연 KOTRA의 여풍 KOTRA 여직원의 현주소 대의를 위해 소의를 희생하는 곳 정보와 자료의 산실에서 오늘도 꾸는 꿈 L/C 관리 여성 OB의 비즈니스 성공 스토리

6 무역관 이야기

7 01 어느 무역관의 하루 02 사회주의 국가로의 여정 03 해외 무역관에서 이런 일이 04 50개 무역관 이야기 Ⅰ

8 어느 무역관의 하루 01 미국 뉴욕 무역관 미국과 중국의 각축장이 된 뉴욕에서 009 미국 실리콘밸리 무역관 대박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하여 012 프랑스 파리 무역관 버리고 떠나기 015 독일 프랑크푸르트 무역관 바빠도 보람은 있다 019 중국 베이징 무역관 중여사(중국을 여는 사람들)를 아시나요? 022 러시아 모스크바 무역관 일일이 여삼추? 일일이 여일초! 025 UAE 두바이 무역관 사막의 열기 속으로! 028 D.R. 콩고 킨샤사 무역관 아베크 빠씨앙스(Avec Patience) 031

9 미국과 중국의 각축장이 된 뉴욕에서 미국 뉴욕 무역관 김재효 OB 세계의 심장 에 걸맞게 뉴욕은 잠들지 않는 도시이다. 2001년. 희망의 새 밀레 니엄 초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기적으로 복잡 미묘했다 이라는 전대미문 의 역경을 맞닥뜨린 미국인들은 테러와의 전쟁(War on Terror) 을 매일같이 듣고, 사이렌 소리가 그치지 않는 가운데 엄청난 삶의 변화를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가 하면 미국인들은 급부상한 중국(China Factor)에 대해 자고 나면 듣던 시기였다. 매주 월요일 아침 월가의 경영자들이 만나는 장소에선 심지어 지난주에 중국 갔다 왔다 는 인사로부터 시작한다는 농담까지 있었다. 2003년에는 우리의 제1 수출시장이 미국에서 중국으로 넘어갔다. 2004년 9월, <뉴욕 타임즈>가 대서특필한 뉴스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뉴욕 항에 들어오는 화물 중 아시아지역 화물이 유럽지역 화물을 400여년 만에 처음으로 넘어섰다는 요 지의 기사였다. 뉴욕 항은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유럽 화물의 관문 역할을 오랫동안 009 Ⅰ. 무역관 이야기

10 해왔다. 아시아지역 화물의 경우 태평양을 건너 미 서부에 도착한 후 내륙운송을 통 해 거대 소비처인 미 동부로 넘어오는 것이 정상적인 루트였다. 헌데 초대형 컨테이 너선의 발달과 중국으로부터의 수입물량이 넘쳐나자, 태평양과 파나마 운하와 대서 양을 거슬러 뉴욕 항까지 멀리 돌아온 화물이 유럽 물량을 넘어섰다니, 이른바 아시 아의 세기(Asian Century) 가 도래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하나의 증거였다. 특이한 점은 미국 수입시장에서 한 중 일 3국의 점유율은 10여 년간 25%대 에 머물렀는데, 점유율을 놓고 3국은 서로 제로섬 게임을 해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2~3%대에 정체했지만 18%에 달했던 일본은 8%로 떨어진 반면 중국은 4%에서 15%로 뛰어올랐다. 이런 환경과 가장 앞선 시장 북미에서 뉴욕의 KOTRA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했다. 무엇이 우선이고 어디에 역량을 집중해야 하며, 우리는 얼마나 경쟁적인가? 북미지역본부장이 주재한 뉴욕 무역관은 미국에 있는 무역관들이 현지 실정에 맞는 사업을 발굴하여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독려해야 한다. 또한 뉴욕 무역관은 뉴욕 무역관대로 본 부장인 필자를 중심으로 혼연일체가 되어 뛰어야 한다. 본사직원 12명에 현지직원 10명은 결코 적은 인력이 아니다. 이들이 저마다 맡은 업무에 충실하고 목표를 향해 돌진하도록 하는 것이 필자의 임무이자 책임 아닌가. 그래서 직원회의를 매주 2~3 회 개최하면서 사업들이 제대로 추진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한편 특히 앞으로 추진 해야 할 프로젝트성 과제들이 차질 없도록 의견을 교환하는 장으로 삼았다. 필자는 컵에 남은 물 반잔의 개념을 떠올렸다. 반잔밖에 없다는 생각과 아직 반 잔 남았다는 생각의 차이. 중국에는 가격에 뒤지고, 일본에는 품질에서 져 샌드위치 신세라고들 걱정했지만, 뒤집어 보면 유럽산, 일본산에 대해 품질은 거의 따라잡고 가격은 30% 이상 저렴해 기회는 우리에게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역발상이 아니면 뛰 기도 전에 포기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리고 소기의 성과를 거두려면 단타나 대증요 법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에 집요한 지구전을 요한다. 다시 말하면 무역관의 하루가 아니라 무역관 업무의 일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뉴욕의 패션 심장부에서 매년 두 번씩 한국산 고급원단을 선보이면서 주가를 올 렸던 Preview in New York 사업이 그러했고, 아시아 물동량이 뉴욕항을 덮어 나갈 때 뉴욕 인근의 뉴저지 지역에 한국상품 물류센터를 구축했으며, 이를 북미의 주요 거점지역에 순차적으로 확대해 나갔다. 역량이 훌쩍 커진 교포 무역인들도 한동안 경쟁력을 이유로 한국산을 외면했으나, 고품질의 한국산을 앞세워 유럽과 일본산에 대항해 나가도록 유도하였다. 섬유, 전자, IT, 자동차부품 등은 이렇게 시장을 재구 010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1 축해 나갔다. 또한 미국 내에서 생산은 없고 유통만이 남아 있다고 한탄할 때 유통채 널을 세심하게 파고들었다. TV홈쇼핑 시장도 두드리고, 급부상하는 전자상거래 e-bay 등을 통한 진출도 꾀했으며, 막대한 정부조달시장에도 인내심을 갖고 진출해 나가면서 거대한 중국의 파고를 넘어 나갔다. 투자유치는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뼈아픈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얻게 된 값진 경험이라면, FDI(외국인직접투자)를 누구나 알게 되었고, 단기적 투기적 성향 의 지분투자 유치보다는 그린 필드형 투자유치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점이 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까지 가세함으로써 북미지역 KOTRA는 전방위적인 투자유 치 활동으로 날을 지새우는 상황이 계속됐다. 특히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중앙 정부와 공동 주관했던 북미지역 투자유치 종합상담회는 200여 명이 참가하여 규모나 참가자의 수준면에서 가장 획기적인 프로그램이었다. 어느 도지사와 200년 전통의 듀퐁 본사의 담판 방문, 어느 광역시장과 GM본사를 들어가 거물 회장을 만나기도 하였다. IBM 뉴욕 방문시 CEO와 상담할 땐 상담실 모든 창문을 두터운 차양으로 틀어막음에 놀라자, 도청과 만일의 사태 시 유리창을 통한 위해( 危 害 ) 가능성을 없애 기 위한 조치라고 말해 안심하기도 했다. 성급한 지방정부는 투자 내용을 확정하기도 전에 국내 매스컴에 홍보해버려 외신 뉴스를 접한 투자자를 격노시키기도 했다. 뉴욕 무역관의 일상 중 빠트릴 수 없는 것이 있다. 현지 경제인들과의 만남은 물 론 한국계 커뮤니티와의 협력은 차치하고라도 예나 지금이나 본국으로부터의 수많 은 내방 인사와의 만남과 지원이 바로 그것이다. 최고 지도자에서부터 정치계의 대 표적 인물, 지방정부의 대표자, 언론계, 학계는 물론 다양한 사회 지도계층들이 내방 한다.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이들의 현지활동 지원은 시행착오를 줄여주고 성과를 높 여주는 데서 보람을 찾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우리에겐 하나의 아이콘이 된 뉴욕의 코리아 소사이어티(Korea Society) 방문 이나 연설을 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러 유력인사들이 연관을 맺었는데, 여기에는 도널드 그레이그(Donald Gregg) 당시 회장의 인지도도 한몫을 했다. 주한 미( 美 )대 사까지 지내며 한국과 오랜 기간에 걸쳐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기 때 문이다. 필자도 이곳에서 개최된 한국경제 특별 세미나에서 연설한 경험이 지금도 기 억에 남는다. 필자 김재효는 2002년 12월부터 2005년 12월까지 뉴욕 무역관에서 북미지역본부장을 역임했다. 011 Ⅰ. 무역관 이야기

12 대박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하여 미국 실리콘밸리 무역관 권중헌 미국 내에서 손꼽히는 최첨단 도시 실리콘밸리라 할지라도 아침 출근시간에 교 통이 혼잡한 건 다른 도시와 다르지 않다. 꽉 막힌 2차선 지선 도로를 지나 고속도로 로 진입하면 고급 승용차들이 줄지어 지나간다. 젊은 운전자들이 보이면 창업 이라 는 두 글자가 뇌리를 스쳐지나간다. 실리콘밸리에서는 닷컴 버블 붕괴 이후 구글, 애플 등 다수의 기업들이 대기업 으로 성장했다. 최근의 페이스북까지 젊은 층들의 창업 열풍이 대단하다. 대박을 꿈 꾸고 한 방을 기대한다고 해서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지는 말자. 현재 시장에 나와 있 지 않거나 기존 제품을 업그레이드시켜서 내놓고자 하는 열정으로 젊음을 바치는 것 이라 생각하자.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취직을 할 수 없으니 직접 회사를 차리는 것이 하나의 대안이 되고 있다. 대학 졸업생부터 해고된 노동자까지 넘쳐나는 고급인력이 취직이 어렵다보니 창업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 미국 정부에서도 실업률 해소 012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3 수단으로 창업을 적극 지원하는 분위기다.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페이스북, 트위터 등 글로벌 IT 기업들은 청년 창업의 대표적인 예다. 필자가 한국에서 이미 성공한 IT 및 SW 업체 중 미국 시장 진출에 애로를 겪고 있는 업체들에게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려고 실리콘밸리 창 업지원센터 설립계획을 구상한 것은 부임 후 한 달이 지난 2011년 10월이었다. 한국 만의, KOTRA만의 창업지원센터를 만들기 위해 필자는 우선 US MAC, Plug & Play, Rocket Space 같은 창업지원센터를 방문해 관계자들을 만나면서 열린 공간 의 중요성과 실리콘밸리의 창업 문화를 배웠다. 그리고 오늘은 실리콘밸리 창업 문화를 더욱 깊이 알기 위해 실리콘밸리 Venture Capital의 중심지라고도 할 수 있는 팔로알토(Paloalto)에 소재한 스타트 업 기업(start up)을 방문하기로 마음먹었다. GPS를 따라 간 곳에는 Plumbing & Heating 간판이 있는 건물만 보인다. 주소를 재차 확인해 보았지만 이미 문 닫은 지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창고 건물만 서있다. 출입구로 보이는 곳을 찾았지만 문은 열 리지 않고 안에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문 닫은 업체들이 유리에 종이로 덮어놓은 듯 한 인상이다. HP, 애플, 구글, 유투브 등 내로라하는 회사들이 죄다 주차장 창업 (garage startup) 이라고 하더니 여기도 그런가보다 하는 생각이 든다. 만나기로 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자 건물 뒤편에서 나온다. 건물 벽면에 그려놓 은 듯 보이는 문이 바로 출입구였다. 겉보기엔 허름해 보일지라도 요즘은 이런 창고 건물 하나 구하는 것도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KOTRA 실리콘밸리 IT센터에 남는 방이 많으니 이사 오라고 농담을 건네 본다. 보안을 생각해서인지 출입카드를 대고 문을 연 순간 빼곡히 들어찬 책상이 눈에 들어온다. 자유스러운 분위기와 함께 각자 책상에서 랩탑으로 일을 하고 있다. 로비도 없이 바로 사무실의 시작인 것이다. 예전 에는 창고였을 것 같은 커다란 방에 책상이 줄지어 있고 필자가 지나가도 신경 쓰지 않고 각자 일에 몰두하고 있다. 예전에 방문한 구글에서는 사내 곳곳에 스낵룸이 설치되어 있어 과일과 스낵, 커피 등은 오가다 먹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 스타트업 역시 큰 방 끝에는 직원들 의 편의를 위해 물, 음료수, 샐러드가 구비된 냉장고와 함께 에스프레소 머신, 빵 등 이 들어서 있다. 동행한 현지직원이 우리도 나름 실리콘밸리인데 사무실에 무료 스낵 바를 설치해 달라고 한다. 살찔까봐 걱정돼서 못 해준다고 둘러대 보지만 조그만 스 타트업에서조차 직원들을 위한 스낵바를 운영하는 것을 보니 실리콘밸리 회사들의 직원을 위한 문화가 새삼 느껴진다. 013 Ⅰ. 무역관 이야기

14 회의실에서 전략개발 부사장(VP Business Development)을 만나 이 회사의 제 품과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설립 초기에는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을 제대로 알 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펀딩을 받는 것조차 어려웠고 한동 안 연 수익이 5,000달러에 그쳤다고 하니 마음고생도 심했던 것 같다. 2002년 설립 이 후 회사 이름, 로고, 서비스 형식도 바꿨다고 한다. 설립 당시의 아이디어만 붙들고 있 지 않고 시장의 변화에 맞추어 변화한 것이다. 남부 댈러스에서 시작하였지만 벤처캐 피탈(CVC;Corporate Venture Capital) 펀딩을 받은 후 실리콘밸리로 이사 왔고, 최 근에는 기업형 벤처캐피탈 또는 OEM 기업들과의 파트너 제휴를 통한 시장 확대를 시도하고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수익도 제대로 나지 않았으나 지금은 펀딩을 해주려 는 회사들이 줄지어 있고 수익도 제법 난다는 자랑도 빼놓지 않는다. 이번 스타트업 기업 방문을 포함하여 Plug & Play, US MAC 등 비영리단체와 사기업, 그리고 각국의 무역진흥기관과 상공회의소 등에서 제공하는 각양각색 창업 지원 프로그램을 보다보면 한국의 창업지원 프로그램이 빨리 활성화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앞선다. 전날 오후 무역관을 방문한 멕시코의 TechBA 실리콘밸리 센터 아 돌포 (Adolfo) 사장이 자문단 네트워크와 멘토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고 열을 올리 는 모습을 떠올리면서 필자 마음은 벌써 창업 일보직전에 가 있다. 실리콘밸리의 최대 장점은 바로 도전에 대한 보상과 실패에 대해 재기의 기회를 주는 문화라고 생각한다. 창업지원금만을 대주는 것이 아니라 관리, 인맥 소개 등을 통한 멘토와 파트너, 투자자로서의 역할이 동시에 접목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의 창 업지원 프로그램 역시 이와 같은 문화를 이해해 주는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필자가 할 일이다. 내일은 샌프란시스코에 소재한 Rocket Space 방문이다. 필자 권중헌은 2011년 10월부터 실리콘밸리 무역관에 근무하고 있다. 014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5 버리고 떠나기 프랑스 파리 무역관 박재규 OB 파리에서 첫 무역관 근무를 마치고 떠난 지 정확히 20년 만에 다시 샤를르드골 공항에 내리니 감개가 무량했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길은 프랑스가 우승했던 1998년 월드컵 주경기장이 새로 들어선 것 이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다. 파리시내도 새로 난 도로가 거의 없고 무인 운행하는 지하철 14호선이 새로 생겼을 뿐이다. 시내 의 주차사정도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시에서 운영하는 자전거 대 여 시스템인 벨리브(Velib) 때문인 것 같지는 않다. 3년 정도 해외근무 하다가 귀국 하면 어리둥절하게 변하는 서울을 생각하면 이렇게 변하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관 광객을 불러들이는 파리는 정말 부러운 도시임에 틀림없다. 화요일, 아직 새벽의 어둠이 걷히지 않은 파리 15구의 쌩샤를르 거리는 일주일 에 두 번 장이 서는 날이다. 트럭과 천막과 진열대, 그리고 상인들의 바쁜 손놀림이 어우러져 일찌감치 거리에는 활기가 넘친다. 1시간쯤 후엔 이 소란함에 손님들까지 가세할 것이다. 거리시장은 모든 것이 풍성하고 싱싱하며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아침에 갓 구운 바게트와 크로아상을 사러 나오는 것으로 나의 하루가 015 Ⅰ. 무역관 이야기

16 시작된다. 맛있는 빵집에서 빵을 사려고 집 가까운 빵집들 다 놔두고 길 건너 우리의 단골 빵집으로 향한다. 가끔 집에 손님들이 와서 잘 때도 아침의 빵집 산책은 모두들 좋아 한다. 루브르 박물관과 오페라 극장을 잇는 오페라대로(Avenue de l Opera)에는 가 로수가 없다. 19세기 중반 오스만공작이 파리를 재정비할 때 오페라의 아름다움이 나무에 가려지지 않도록 배려했기 때문이다. 이 최고급 오피스가인 우아한 오페라거 리 19번지에 있는 파리 무역관에 처음 들어서는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일단 기 가 꺾인다. 아름다운 도시 파리에서도 가장 잘 나가는 동네에 사무실이 위치하고 있 다는 것만으로도 위상이 높아지는 셈이다. 한국인들보다는 파리를 잘 아는 현지인들 이 더 그렇다. 이 사무실에 오늘 아침 일찍, 예전에는 섬유기계 장사를 하다가 요즈음은 돈이 될 것 같으면 뭐든지 하고 있다는 K사장이 서울에서 왔다. K사장은 사실 필자가 카 라치 무역관장을 할 당시인 1990년대 말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열정적으로 수 출을 하려는 K사장의 기계 수출을 도와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번번이 성사가 되지 않 았는데 그래도 K사장은 KOTRA의 도움을 받아 열심히 시장개척을 하여 제법 성공 했고, 번 돈으로 중국에 공장을 지었다가 크게 실패를 한 참이었다. 여태껏 한 건 해 드리지 못한 게 항상 맘에 걸리는데 50세가 넘어 다른 제품으로 새로 시작을 했다는 말을 들으니 가슴이 아프다. 항상 KOTRA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수십 년 동안 사업 을 하신 분이어서 더욱 그랬다. 기계는 대부분 후진국에 수출을 했었는데 이번에는 다른 소비재를 가지고 유럽시장을 한번 뚫어 보겠다고 온 것이다. 미팅 시간 전에 시 간이 남아 간단히 시내관광을 나섰다. 파리가 평생 처음이라는 K사장은 그러나 아름 다운 세느강을 가르는 바또무슈 유람선에서도 경치 구경보다는 사업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나는 평소에 몸 고생, 마음 고생하면서 힘들게 사업을 하는 중소기업 사장들 을 보면서 저분들은 정말 돈을 많이 벌어서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 고 생 각한다. K사장이 새로 시도하고 있는 특수 플라스틱제품의 유럽수출이 꼭 성공을 했 으면 좋겠다. 점심시간에는 직원들하고 자주 가는 일본식 도시락 식당에 간다. 파리의 물가가 엄청 올라서 직원들에게는 점심 값도 부담이 된다. 오페라지역은 일찍부터 일본인들 이 자리잡은 파리의 일본촌이라고 할 수 있어 스시집과 라면집, 우동집이 즐비하다. 거리는 일본 관광객들로 붐비고 요즘은 중국 관광객까지 가세했다. 유로화로 바뀐 이후에 달라진 것이라곤 물가 오른 것밖에 없다는 사람들의 불평이 일리가 있다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7 유로 정도가 적정수준인 것 같은데 보통 한식당이나 프랑스 식당에 가면 최소 20유 로 정도는 들여야 식사를 할 수 있다. 유럽은 북미에 비하면 대략 3배쯤은 비싼 셈이 다. 그나마 독일과 프랑스는 유로존 중에서도 비교적 경제수준이 낮은 다른 나라들 에 비해서는 나은 편이다. 이런 형편이니 궁극적인 유럽합중국을 향한 첫 번째 시험 대인 통화 통합은 과감하기는 했지만 참으로 어려운 과정인 것 같다. 점심식사를 하고 들어오니 사무실이 어수선하다. 현지직원 한 사람이 흥분해 있 다. 조사대행을 의뢰한 국내업체가 조사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전화로 항의를 하는 과정에서 심한 말을 들은 모양이다. 이럴 때가 가장 난처한 경우다. 한국이 수요 자 중심의 서비스 시장이라면 프랑스는 공급자 중심의 서비스문화이다. 프랑스에서 는 백화점에서든 동네 빵집에서든 종업원에게 말을 건넬 적에 봉쥬르(Bonjours!) 라고 인사부터 해야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걸 하지 않고 바로 용건을 얘기했다가 한 번쯤은 봉변을 당하기 마련이다. 고객만족을 경영의 화두로 삼는 한국에서는 그야말로 고객은 왕이지만 프랑스 에서는 고객과 서비스 제공자가 서로 예의를 지켜야 하는 대등한 관계일 뿐이다. 프 랑스 생활이 수 십 년째인 한국인 현지직원들에게 평소에 교육을 시킨다고 시켰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저쪽이 도가 넘게 무례했던 건 사실인 것 같다. 그렇다고 누구의 편 을 들 수가 없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도록 양쪽을 모두 설득하고 조정하는 것이 관장 인 나의 임무이니까 오후 늦게 일주일에 한번 하는 주간 직원회의다. 급한 사안이 있을 때는 번개회 의를 하기도 하지만 나의 신조는 가장 여유 있는 시간에, 그리고 최단시간 내에 회의 를 끝내는 것이다. 1980년대 중반에 초파 직원으로 근무할 당시에는 거의 매일 회의 를 했다.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회의를 두어 시간쯤 하고 나서 텔렉스 실 에서 문서 몇 건 접수하면 점심시간, 오후에 손님이라도 한 명 오면 DI(시장정보 조 사보고서) 쓸 시간이 없어 자주 야근을 해야만 했다. 그때에 비하면 요즘 직원들은 정말 근무조건이 좋은 것 같다. 아니 그때가 비정상이었고 지금이 정상인 셈이다. 사 실 요즘은 결재와 소통의 수단이 그때와는 완전히 달라졌으니 옛날 얘기를 하는 것 자체가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끄러운 일이다. 오늘 저녁에는 섬유직물 전시회인 프르미에르 비죵(PV) 사전 간담회가 만찬을 겸해서 있다. PV는 프랑스에서 열리는 최고의 섬유관련 전시회로 아주 배타적이어 서 한국이 PV에 참가한다는 것이 몇 년 전에만 해도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던 것을 무역관의 끈질긴 노력으로 주최측을 설득해서 마침내 한국관을 구성하게 된 전 017 Ⅰ. 무역관 이야기

18 시회이다. 2007년 한국관 첫 개막식에는 홍기화 사장님이 직접 참석하기도 하였다. 이후로 관련협회와 함께 몇 번 참가하는 동안 전시회 예산 자체가 KOTRA에서 협회 로 넘어가면서 무역관의 역할이 점점 축소되더니 이제는 협회가 주도권을 완전히 가 져갔다. 첫해에는 우리가 직접 사전 간담회를 주관했는데 지난해부터는 우리는 그저 가서 인사말만 하는 초청 대상인사가 되었다. 길을 터놓고 우리는 물러나고 막상 협 회에서 할 수 없는 일만 우리가 도와주는 식이 되었다. 코트라맨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지만 옛날부터 우리의 역할이 수출의 첨병이라서 그런지 뭐든지 처음에 고 생해서 개척하고 만들어서 남에게 넘겨준다. PV를 비롯하여 관련 협회들이 개입되 어 있는 대부분의 해외 전문전시회들도 결국은 비슷한 전철을 밟고 있는 모양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오늘 저녁행사에 참석해서 인사말을 하는 필자의 심사가 편할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생각만 그렇지 내 기분 내키는 대로 참석 안할 배짱은 없다. 저간 의 사정을 참가업체들이 알겠는가, 협회의 실무자가 무슨 잘못이 있으며 무슨 아량 이 있어 나의 불참을 미안하게 여길 것인가. 만찬장으로 가기 위해 사무실을 나서는 데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전형적인 파리의 4월 저녁이다. 필자 박재규는 1985년 10월부터 1988년 11월까지 그리고 2008년 11월부터 2011년 8월까지 두 차례 파리 무역관에 근무했다. 01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9 바빠도 보람은 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무역관 김평희 평소의 독일 날씨답지 않게 구름 한 점 없는 아침이다. 애들은 주말 한글학교에, 아내는 벼룩시장에 태워다 주고 사무실에 들러 모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이메일을 점 검한다. 푸른 하늘과 따사로운 햇살, 비발디의 선율이 어우러져 상쾌한 토요일 아침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번 주는 참 바빴다. 쾰른 전시회에 다녀온 후 밀린 일들, 시계 시장 조사, 생산성본부 인사의 HOECST, BASF사 방문주선. 크라운제과사의 독일 에 지사 설립 문의. 지난 여름 슈투트가르트까지 가서 도와준 중고 기계업체가 이번에는 기술자 수 고비 요구가 너무 많으니 독일 회사에 얘기해 깎아봐 달랜다. 기술자 오버타임에 대 한 양국 간의 이해 차이로 오해가 생긴 모양이다. 무역관 식구들을 위해 멸치, 라면 등 귀한 음식들을 정성스럽게 선물했던 은혜도 있고 해서 냉정하게 끊지 못하고 얘기 019 Ⅰ. 무역관 이야기

20 해 보겠다고 했다. 부산에 있는 조개단추 수출업체에 물건 값을 중복 송금했다고 독일 업체가 전화 를 했다. 한국 업체가 환불을 약속했으나 두 달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다는 것이다. 국가 망신 안 당하려면 만사 제치고 알아봐 줘야 할 사항이다. 쾰른 하드웨어 전시회 참가업체가 다이아몬드 공구수출을 위해 안전검사가 필요해 검사기관, 비용 등 절차 에 관한 사항을 급히 문의해 왔다. 이곳에 와 있는 업체 부탁이니 이 또한 미룰 수 없 는 사항이다. 서울에 지사를 설립하고자 하는 독일 업체에서 문의가 왔다. 전날 크라운제과는 독일 지사 설립에 관해 문의해 왔는데 이번에는 거꾸로 서울에 사무실을 설립코자 하 는 문의이니 재무부 발간 투자가이드 라도 한 번 얼른 읽어보고 도와줄 사항이다. 현대전자 정 과장 전화가 왔다. 한국산 반도체 수입규제를 위해 EU가 실시하고 있는 반덤핑규제에 대한 문의다. 독일 주재 무역관이라 해서 독일에서 일어나는 일들 에만 신경 쓸 수 없다. 부랴부랴 EU 관련 정보를 파악해 팩스로 현대전자에 보내줬 다. 우성타이어 최 소장의 전화가 왔다. 독일 및 유럽의 버스 시장 점유율을 알아봐 달라고 한다. 며칠 전 한델스블라트지에서 벤츠사의 캐스보러사 인수 관련 기사 등 을 찾아 보내줬다. 현대종합상사에서 연락이 왔다. 독일 공작기계 산업현황 자료가 급히 필요하다고 한다. 기계공업협회에 전화하면 금방 얻을 수 있는 자료이건만 이 런 일도 쉽지 않은 모양이다. 조합별로 모아 둔 자료 중 해당 자료만 뽑아 팩스로 보 냈다. 한 주일 동안 사업목표 일 말고 과외로 한 일의 일부를 적어 봤다. 신입사원 후배들의 글들을 모아 자유소리 게시판에 게재한 것을 보았다. 참으로 똑똑하고 주관이 뚜렷한 후배들로 느껴진다. 입사 후에 교육이라고는 오리엔테이션 룸에서 일주일 동안 졸면서 들은 추억밖에 없는 우리로서는 중국 가서 연수하고 돌 아온 신입 후배들을 보면 놀랍다. 어느 신입후배의 말처럼 자기가 주체가 되어 살아 본 적이 없는 30년을 보내고 이제 진정한 자기의 주인으로서 출발하는 후배들에게 해외근무 현장을 소개할 겸 몇 자 적어보았다. 우리 회사업무 절반 이상이 해외에서 일어나는데도 첫 발령까지 4년 이상 기간 동안 준비가 너무 소홀하다는 느낌이다. 영어를 비롯해 현지어 실력이 미흡하면 하 루하루 일 처리해 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의 직장인데도 국내근무 기간을 허 송세월하고 당초의 외국어 실력도 퇴색해 버리는 수가 있다. 본사 업무도 마찬가지이지만 무역관 업무의 대부분이 사명감, 서비스정신, 애국 심 같은 좀 고상한 희생정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일하기 고달플 때가 많다. 도와주 020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1 고 지원하는 일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손님 오면 공항 나가는 일, 세일즈맨과 사절 단이 오면 상담 주선해 주는 일, 시장조사를 비롯, 전시회 준비 통관 숙박 주선 상담현장 지원 등 어느 하나 느긋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거의 모든 전화와 서 한 문의가 몰라서 묻거나 도움이 필요해 도와달라는 내용 일색이다. 그렇다고 백화 점 점원처럼 고개만 연신 굽히고 있다고 되는 서비스도 아니다. 공부를 부단히 해 평 소 알고 있어야 제대로 봉사가 가능한 고급 서비스인 것이다. 우리 회사에서 하게 되는 일, 특히 해외에서 하는 일은 임기응변으로 대처해야 하는 일이 많다. 신속한 임기응변은 평소 갖춰진 실력과 넓은 인간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잘할 수 있다. 고객들은 업무지식이 부족해 생기는 문제 못지않게 거칠고 차 가운 태도, 관료주의적 업무처리 방식을 지적한다. 봉사와 서비스가 업무의 주종을 이루지만 우리가 그리 처량한 직장은 아니다. 원래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묵묵히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고 시간이 지나면 남들이 수고를 알아주고 그들을 도와줌으로 오히려 더 큰 힘을 지니게 되는 기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작년부터 새로 하는 일 중에 주재국 일일 톱뉴스 보고 제도가 있다. 무역진흥 업 무를 하는데 그 나라 돌아가는 사정도 모르고 있으면 안 될 것이다. 국내 수요자 못 지않게 해당 무역관과 본사데스크 직원들의 정보능력 향상에도 도움이 되는 참 좋은 사업이다. 몇 달 실습 후 독일에 나와 있는 우리 상사들에게 뉴스를 요약해 보냈다. 경제 뉴스 외에 진출업체에 도움이 될 만한 상품 시장정보를 가미해 팩스로 현지 상 사들에게 보내주니 당장 고맙다는 반응들을 듣게 된다. 공관을 포함 60여개 상사 및 은행들에게 보내느라 팩스비도 들지만 본사에서 지원한 486 컴퓨터와 팩스 모뎀을 이용하니 정보서비스기관답게 일 좀 하는 같아 기분은 좋다. 장님 벙어리 신세를 면하게 해줘 고맙다 하는 전화를 여기저기서 받게 되니 관 심과 정성만 좀 들여 고객의 마음을 읽고 도와주면 우리 같은 공공기관의 이미지는 쉽게 올라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코트라맨만이 느낄 수 있는 보람 아닐까 생각해 본다. 바쁜 일상이지만 우리 회사 괜찮은 직장 같다. 필자 김평희는 1994년 4월부터 1997년 9월까지 프랑크푸르트 무역관에 근무했으며, 윗글은 1995년 봄호 사보에 실린 것을 정리한것이다. 021 Ⅰ. 무역관 이야기

22 중여사 (중국을 여는 사람들) 를 아시나요? 중국 베이징 무역관 박진형 1992년 12월의 겨울 어느 날. 칠흑 같이 깊은 어둠이 베이징 시내에 내려앉았다.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그 깊은 어둠을 뚫고 지나가는 우마차의 발굽 소리만이 빈 거리를 메운다. 집집 마다 솟은 굴뚝에서 뿜어내는 연탄가스 냄새가 골목 구석구석에서 진동한다. 택시를 타려면 시내 큰 호텔 부근까지 가야만 할 정도로 길거리는 한산했다. 1992년 8월 24일 한 중 수교가 극적으로 타결된 후 베이징에 부임했을 당시의 모습 은 이렇게 낡은 사진처럼 아련한 색으로 바래져 있다. 한 중 수교로 국내외는 떠들썩했지만, 중국의 심장 베이징은 녹록지 않은 곳이 었다. 하지만 베이징에 주재하는 스무 명도 채 안되는 한국인들은 의지의 한국인답 게 중국 시장을 뚫겠다는 그야말로 모험정신으로 충만했다. 당시 중국에 처음 온 사 람들은 식당, 무역, 여행사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중국에 대한 정보가 워낙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냥 자연스럽게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어디에서 022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3 도 들을 수 없는 생생한 현장정보가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중국 진출 1세대 (?)가 모여서 만든 모임이 바로 중여사(중국을 여는 사람들) 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그 시절 중여사 는 바로 오늘날의 한국기업 협의체의 모태나 다름없었다. 가령 김 아무개 사장이 제품을 수입했을 때 절세를 하려면 누구의 꽌시( 關 係 )를 활용해야 하 는지(당시는 제대로 통관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음)와 같은 살아있는 정보가 필요했 었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바로 이 중여사 의 핵심에 KOTRA가 우리 한국인과 한국 기업들에게 사랑방이자 해결사 역할을 해왔다는 점이다. 베이징에 처음 오는 사람이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 KOTRA 베이징 무역관일 정도로 KOTRA의 명성(?)은 베이 징에 자자했다. 중여사 회원은 한때 30여명에 육박할 정도로 커졌으나, 1세대 원로 들은 그 후 뿔뿔이 흩어지고(거의 대부분이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사업이 망해서 귀 국) 지금은 행방이 묘연할 뿐이다. 한 중 수교 이전부터 KOTRA는 중국시장을 뚫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년 베이징 국제박람회(BIF 89) 에서 한국상품전을 개최했던 일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한국이 중국으로부터 최초로 정식 초청을 받아 참가한 박람회였다. 1989년 7 월 14일, 공산정권 수립 이후 최초이자 최대의 국제적 종합박람회가 베이징에서 개 최되었다. 당시 중국 정부는 성공적인 박람회 개최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으나, 1989년 6월 4일 텐안먼( 天 安 門 )사태가 발생하면서 서방국가들이 중국에 대한 경제 제재 조치를 취하면서 우리나라의 전시회 참가 자체가 불투명하게 되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영국 등 5개국은 불참을 통보했으며, 박람회 개최일도 당초 6월에서 7 월 14일로 연기되었다. 그러나 KOTRA는 과감히 예정대로 박람회 주최국인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의 국가관으로 참가했고, 당시 텐안먼 사태 이후 세계 각국으 로부터 비난과 제재를 받고 있던 중국에 큰 도움을 주게 되었다. 문제는 있었다. 중국 과 우리나라가 아직 정식으로 수교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박람회 당국은 한국 또는 대한민국 의 국호( 國 號 ) 사용 불가, 태극기 게양 및 게재 불가, 애국가 연주 및 제창 불가를 전제로 초청한 것이었다. 코트라맨들은 중국측과 3가지 현안문제를 해결하 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끈질긴 협상 끝에 국호와 국기는 사용하지 못했지만, 한국을 간접적으로 알릴 수 있도록 태극문양의 대형 배너는 부착할 수 있도록 협조해 주었 으며, 애국가 대신 아리랑 녹음 연주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KOTRA 영문판 브로슈어에 타이베이 무역관의 주소가 Taiwan.R.O.C 로 표기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 중국 세관원이 이 문구를 삭제해야 통관을 허용한다고 하는 바람에 그 많은 브로슈어를 세관원이 보는 가운데 매직으로 023 Ⅰ. 무역관 이야기

24 일일이 지워야 하는 곤욕을 치렀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중국에서 첫 번째로 한국 의 국가관이 개막되었고, 밀려오는 중국인 관람객들로 한국관은 연일 인산인해를 이 루었다. KOTRA 브로슈어와 태극문양 부채는 내놓자마자 동이 났으며, 박람회장 안팎은 KOTRA 쇼핑백과 태극부채로 뒤덮이며, 중국 대륙에 최초로 한국 을 심게 되었다. 그때의 가슴 벅찬 감동은 아직도 짜릿한 흥분을 느끼게 한다. 올해 2월 1일부로 베이징 중국지역본부장을 맡게 되면서 꼭 20년 전 제1호 중국 무역관에서 근무했던 그 당시의 영상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다시금 그 땅을 밟는다. 10년이면 강산도 바뀐다는 말처럼 지금의 베이징은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전벽해 를 실감하게 한다. 지저분한 중국, 불편한 중국에서. 눈이 휘둥그레지고 혀를 내두를 정도로 빛의 속도 보다도 빠르게 변하는 중국. 그러나 중국을 대하는 나의 마음은 20년 전보다 더 단단한 긴장감 으로 무장하게 된다. 15여년 가까운 중 국 근무로 나도 모르게 중국에 동화되어 왔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중국, 눈뜨면 당하고 속는 중국에서 점차 중국을 이해하고 중국의 장점을 발견하며 좋아하게 되는 단계로. 그리고 이제는 중국을 대단한 나라로 바라보게 된다. 지금 이 시점에서 20년 전 베이징에서 결성되었던 중여사 가 생각난 것은 어쩌 면 중국시장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모습은 새로운 시대의 중여사 가 필요했기 때문 일지도 모른다. 20년 전 중여사 가 무턱대고 중국시장을 열겠다는 다분히 무모한 모 험심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이제는 중국을 제대로 알고 차분하게 중국인과 더불어 그 시장을 열겠다는 노력과 실천, 바로 그러한 발상의 전환으로 새로운 한 중 양국 의 미래 20년을 열어가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중국을 제대로 알고, 중국을 제대로 열어가는 사람들, 새로운 한중시대의 밑거름이 되어줄 중여사 를 기대해 본다. 필자 박진형 은 1992년 12월부터 1995년 9월까지 베이징 무역관에 근무했고, 2012년 1월부터 중국지역본부장으로 다시 베이징 무역관에 근무 중이다. 024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5 일일이 여삼추? 일일이 여일초! 러시아 모스크바 무역관 노인호 필자는 1997년 3월 말 모스크바 교외의 쉐레메쩨보(Sheremetyevo) 국제공항 에 도착했다. 공항이 어두컴컴한데다 사람들 얼굴마저 어두웠다. 게다가 겨울이 아 직 온몸에 머물러서인지 사람들은 검은색 계통의 무거운 옷을 입어 전체적으로 밝은 기운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마중 나온 우리 직원들 행색 또한 두꺼운 외투에다 TV에서나 보았던 털모자로 중무장해서 얼른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한국을 떠나 오기 전에 모스크바 무역관에서는 사무실과 집이 같은 건물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 다. 우리집은 사무실과 같은 7층일 뿐만 아니라 직선거리로 10m, 사무실까지 걸어서 가는 출근시간은 30초(?) 정도 걸렸다. 한때 1인 무역관 주재 지역에서는 건물 한 채 를 임대하여 사무실과 주거를 같이한 곳이 있었지만 허브 무역관에서 이럴 줄이야. 필자는 2010년 미얀마 무역관에서 모스크바 무역관으로 전보 명령을 받았다. 무역관 사무실은 첫 번째 근무할 때와 마찬가지였으며 일부 현지직원은 아직도 그대 로 있었다. 하지만 10년 6개월 만에 다시 돌아온 모스크바는 너무나 많이 변해 있었 다. 우선 거리에 넘쳐나는 승용차, 특히 외제 차량은 그간의 많은 변화를 실감케했 다. 모스크바 사람들의 씀씀이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음이 한눈에 들 025 Ⅰ. 무역관 이야기

26 어왔는데, 이는 러시아가 석유 수출로 얻은 과실이었다. 다시 말하면 약 10여년에 걸 친 유가상승 또는 원료가격 상승이 모스크비치(moskvich)라고 불리는 모스크바 사 람들의 소비수준을 높인 것이었다. 살인적인 물가 역시 큰 변화였다. 무역관 사무실 이 있는 월드트레이드센터 내의 호텔 숙박료는 1박에 500달러를 호가하는데 10여년 전 이 호텔 요금은 100달러 수준이었다. 10여년 전과 비교하여 변하지 않는 것들도 있었다. 바로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 양식이었다. 경찰은 여전히 커다란 모자를 쓰고 경찰봉을 휘두르며 운전자들을 위압 했다. 은행계좌를 개설하려면 수십 가지의 서류와 위임장이 필요한데 그 과정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다. 모스크바에 3일 이상 거주할 경우 등록이 필요하며, 1년마다 등록을 갱신하여야 한다. 이사물품 반입에도 톤당 3유로의 수입관세를 물리고, 통관 이 안 되어 몇 달 동안 가재도구 없이 지낼 수도 있었다. 업무는 업무대로 개인 생활 은 개인 생활대로 스트레스의 연속이다 보니 모스크바의 하루는 그야말로 여삼추였 다. 러시아 사람들은 일년에 6개월 이상 지속되는 겨울과 황량한 동토의 환경을 음악 과 미술, 문학과 발레로 견디는 것 같았다. 필자도 10여년 전에는 그들과 더불어 발 레와 음악회, 전시회 등 공연을 즐기면서 겨울밤을 보낼 수가 있었는데. 그러다 모스크바 무역관을 떠날 무렵에 일이 터졌다. 생활패턴이 갑자기 일일여 삼추( 一 日 如 三 秋 )에서 일일여일초( 一 日 如 一 秒 )로 바뀌었다. 한 러 투자포럼 (Korea-Russia Investment Forum) 준비에 매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개최 일자는 2011년 6월 14일. 지식경제부와 주러 한국대사관이 주최하고 KOTRA가 주관한 행 사였다. 모스크바 무역관은 한 러 수교 이전 북방개척 척후로 개설된 이래 러시아, CIS 및 동구지역 진출을 위한 허브로서 조사와 마케팅은 물론, 해외 투자진출과 프로젝 트 발굴사업을 추진해 왔다. 모스크바에는 세계 100대 부호 중 가장 많은 숫자의 부 호들이 거주하는 곳이기 때문에 무역관에서는 러시아 자본유치의 필요성을 꾸준히 거론해 왔었다. 그런데 러시아에서 사업을 수행할 경우 선진국과 비교하면 통상 시 간은 서 너배, 비용은 두 세배 정도가 소요된다. 성공적인 IR(Investor Relations)을 위해서는 러시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기업인을 얼마나 초청하느냐가 관건이었다. 무역관은 러시아 내에 약 3,000명의 인원 을 거느린 최대 컨설팅사인 KPMG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검토하였으나 KPMG에 서 천문학적인 비용을 요구하였다. 결국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주러시아 한국대사 관과 함께 무역관 자체역량으로 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무역관 직원 전원이 02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7 거의 전적으로 이 사업에 매달려야 했다. 일단 러시아 상위 500대 기업을 포함하여 한 국과 관계가 있는 기업 등의 명단을 작성하여 초청장을 보내고, 대상업체 전체를 유선 으로 빠짐없이 접촉하였다. 그야말로 저인망식 캠페인이었는데 대기업의 경우 접촉선 을 확인하는 데만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는 일이었다. 접촉선의 반응에 따라 초청대상 의 등급을 정하고 초청이 반드시 필요한 톱 10을 선정, 이윤호 주러대사와 함께 직접 방문하기 시작했다. 이 중에는 러시아의 실리콘밸리라고 할 수 있는 스콜코보 (Skolkovo) 센터 이사장 벡셀베르크(Vexelberg)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역관 전 직원이 힘을 합쳐 노력한 결과 모스크바 롯데호텔에서 열린 한 러 투 자포럼에 한국측은 투자유치사절단 및 주모스크바 주재 한국지상사 등 60여 명, 러시 아측은 러시아 산업통상부 차관, 러시아연방 상공회의소와 모스크바 무역투자진흥청 임직원, Reno그룹 인사 등 270여 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제조업, 기술투자, 지역개발, 투자진출 등 4개 분야로 나뉘어 포럼을 진행했고, 맞춤형 투자상담회에서는 우리측 20여 업체와 러시아측 70여 개사 간에 투자상담을 진행하였다. 또 KOTRA와 MIEPA(모스크바 무역투자진흥청) 간,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과 Skolkovo 혁 신센터 간에 MOU를 체결하기도 했다. 외국 정부로서 러시아의 심장부인 모스크바에서 IR 행사를 한 것은 한국이 처음 이었다. IR 행사장에 참석한 러시아의 기업인은 물론, 무역관에서 접촉한 러시아 주요 기업은 한국의 투자유치 노력을 평가하였으며 러시아 비즈니스 커뮤니티들의 한국투 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계기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1990년 소련이 붕괴한 후 러시 아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한국기업은 1998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 등 위기 때 마다 러시아 시장점유율을 끌어올렸다. 위기 때마다 러시아 시장을 버리고 떠난 서구 기업의 빈자리를 우리가 대신 차지한 결과였다. 러시아는 한국으로서는 절대 놓칠 수 없는 현재시장인 동시에 미래시장이다. 그런 만큼 무역관은 아침부터 항상 분주하고, 시간외 근무와 휴일 근무는 일상화되었다. KOTRA에서 모스크바는 해외근무 기피지 역 1순위다. 모스크바 무역관에 두 번 근무한 필자로서는 참으로 가슴 아프고, 함께 근 무했던 무역관 직원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필자 노인호는 1997년 4월부터 2000년 3월까지, 그리고 2010년 8월부터 2011년 8월까지 두 차례에 걸쳐 모스크바 무역관에 근무했다. 027 Ⅰ. 무역관 이야기

28 사막의 열기 속으로! UAE 두바이 무역관 이선인 OB 알라후 아크바르 (신은 위대하다). 두바이의 아침은 집 앞 모스크에서 울리는 아잔 으로 깨어난다. 하루에 다섯 번 이슬람교에서 신자들에게 기도하러 오라는 메 시지인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아잔 소리가 구수하다. 이곳에 처음 온 사람들은 새벽 아잔 소리에 잠을 설치기 일쑤지만 얼마 지나고 나면 푸근하니 좋다.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짐(gym)에 가서 간단한 운동을 한 후 샤워를 한다. 따뜻 한 물이 콸콸콸 잘 나온다. 그런데 수도꼭지를 냉( 冷 )쪽으로 바꿔도 여전히 따뜻한 물이 나온다. 처음 두바이에 부임했을 때는 보일러가 잘못된 줄 알고 무역관 현지직 원에게 물어봤었는데 여름에는 상수도가 원래 뜨겁다고 한다. 바깥 기온이 워낙 높 다보니 옥상 물탱크가 데워져서 그렇단다. 찬물을 쓰려면 냉각기를 달아야 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물론 겨울에는 찬물이 잘 나온다. 출근하려고 주차장으로 가는데 아침부터 후끈한 열기에 땀이 주룩 흐른다. 두 02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9 바이는 다른 사막지대와 달리 여름 8개월 동안은 습도가 80~90%로 습하고 기온도 한낮에는 섭씨 40~50도를 오르내릴 정도로 덥다. 새벽에도 기온이 섭씨 40도를 육 박한다. 반면 겨울 4개월 동안은 건조하고 최고 기온도 겨우(?) 섭씨 29도 내외여서 지내기가 좋아진다. 차문을 열면 후끈한 내부기온에 다시 한번 땀을 쏟고 뜨거워진 핸들을 손끝으 로 살살 돌려가며 무역관으로 나선다. 그런데 이 더운 중동나라에 우리나라 수출품 중 최고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상품이 있다. 바로 석유난로와 담요다. 지금은 책에서 나 볼 수 있는 심지 올리고 불붙이는 한국산 석유난로가 매년 300~400만 달러어치 가 팔려나간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소위 캐시미롱 담요라고 부르는 폴리에스터 담요 는 없어서 못 팔 지경이다. 메이드 인 코리아 담요는 담요 계에서 샤넬이나 구찌 정도 의 명품에 속한다. 중국산 짝퉁 코리아에 코 자만 붙여도 잘 팔린다. 이 더운 날씨에 웬 난로, 웬 담요 하겠지만 두바이가 무역중심지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두바이 위쪽 사우디의 내륙사막에서는 해가 지면 추워지기 시작한다. 겨울이 되면 더 춥다. 이란에는 겨울에 눈까지 온다. 외딴 지역에 중앙난방하기도 그렇고 우리처럼 주유소 기름차를 부를 수도 없으니 당연히 담요와 난로 수요가 많다. 게다가 담요는 선물용으로 인기 만점이다. 두바이 인구의 80% 이상이 외국인인 데 특히 파키스탄, 인도 출신 노동자들이 많다. 아시다시피 파키스탄과 인도 북쪽은 겨울에 상당히 추운 곳이므로 노동자들이 귀국이나 휴가 선물로 담요를 몇 장씩 사 가는데 이게 인기 만점이라고 한다. 출근하여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어느덧 배가 출출해진다. 식사도 할 겸 바이어 도 만날 겸 데이라 지역에 위치한 나이프 마켓(naif market)에 들린다. 두바이에서 는 수입물량의 90%가 재수출되는데 이중 50%는 이곳에서 보따리 무역으로 나간다 고 보면 된다. 두바이는 주요 무역항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세계 최대의 인공항이라 고 하는 제벨알리 무역항이고, 다른 하나는 나이프 마켓과 붙어 있는 다우포트다. 다 우(dhow)는 아랍식 전통 목선( 木 船 )인데 대부분 한강유람선보다 작은 목제 발동선 이다. 나이프 마켓에는 두바이에서 제법 유명한 무역상들도 조그만 사무실과 쇼룸을 운영하는데 모두 시장을 찾아오는 보따리 무역상들을 위해서다. 이 사람들은 에티오 피아, 수단, 예멘, 이란 등 각지에서 적게는 몇 천 달러, 많게는 몇 만 달러씩 현금을 들고 와서 식량, 타이어, 가전제품, 심지어 중고차까지 고객들이 부탁한 각양각색의 물건들을 사 모은 뒤 트럭이나 다우포트에 있는 다우 배에 실어 보낸다. 바이어와의 미팅을 마치고 사무실에 돌아오니 한국에서 손님이 와 있다. 두바이 029 Ⅰ. 무역관 이야기

30 에 처음 출장오신 중소기업 사장님이다. 바이어와 거래할 때 주의점을 묻기에 IBM 을 알려줬다. 미국 컴퓨터회사 이름 아니냐고? 천만에다. 중동과 비즈니스할 때는 반드시 IBM을 알아야 한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겠지 만 당시에는 I(In Sha Allah), B(Buckra), M(Ma Alish)을 잘못 활용하는 중동 비 즈니스맨들로 인해 곤욕을 치르는 경우가 간혹 있었기 때문이다. 인샬라는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알라의 뜻에 맡기겠다는 좋은 의미이나, 약속을 이행하지 못했을 경 우 신의 뜻 이라는 책임을 회피하는 구실로 활용되기도 한다. 부크라는 내일이란 의미이나 가능한 한 빨리 하도록 노력하겠다 라는 뜻으로, 말리쉬는 괜찮다(No problem)는 의미이나 이해해 달라 는 뜻으로 잘못 활용되기도 한다. 즉 내일 당장 계약할 것처럼 상담하고 끝날 때 인샬라 한다. 그러고 나서 며칠 동안 연락이 없어 전화해보면 부크라 한다. 기다리다 지쳐서 다시 전화하면 말리쉬 한다. 한마디로 거래가 안 되는 것이다. 중동 비즈니스는 말 그대로 IBM을 잘 알고 있어야 낭패를 보지 않는다. 어느덧 일과시간이 끝나고 집으로 향하다 보니 세상이 온통 노랗다. 우리가 황 사라고 부르는 뽀얀 모랫가루와 염분을 머금은 바람이 자주 부는데, 이 가루가 꼭 미 숫가루 같이 미세해서 자동차나 옷, 피부에 착착 달라붙는다. 세차하고 하루만 지나 도 차위에 뽀얗게 내려앉는다. 집에 들어오니 애들 뒷바라지로 한국에 머물고 있는 집사람이 만들어 주던 된장찌개 생각이 간절하다. 어김없이 저녁 기도시간에 맞춰 아잔 이 울린다. 내일도 후끈한 두바이 열기 속으로 하루는 시작될 것이다. 필자 이선인은 2003년 1월부터 2005년 5월까지 중동 아프리카본부장으로 두바이 무역관에서 근무했다. 030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1 (Avec Patience) D.R. 아베크 빠씨앙스 콩고 킨샤사 무역관 임용탁 OB 티아이에이(T.I.A.)는 This Is Africa 의 두문자이다. 그래, 이곳은 아프리카 야 정도로 해석되지만 블랙아프리카에서는 기상천외의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곳이 야 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영국의 작가 조셉 콘래드는 콩고를 무대로 암흑의 핵심 Heart of Darkness (1899)이란 논픽션에 가까운 소설을 썼고, 아담 호크쉴드 는 콩고를 사유지로 만들어 철저하게 착취했던 벨기에 국왕을 주인공으로 삼아 레 오폴드왕의 유령 King Leopold s Ghost (1998)이란 저서를 남겼다. 필자는 무역관을 재창설( 개설, 폐쇄)하기 위해 1981년 6월 하순 콩고 땅을 밟았다. 독재자 모부투가 통치했던 당시의 콩고(정식 국명은 콩고민 주공화국)는 자이르(Zaire)라 불렸고, 티아이에스의 핵심 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나 라였다. 수도 킨샤사는 약 300만 명의 인구를 껴안은 대도시였지만 거리에 교통신호 등이 있는 곳은 한 곳뿐이었고, 그것마저 고장 난 상태였으니 그 나라의 형편을 짐작 할 만할 것이다. 킨샤사 무역관은 대사관 건물 2층 구석에 손바닥 만한 공간으로 다시 개설되었 다. 그러나 말이 무역관이지 처음 6개월 동안은 차량이 없어 업무를 보려면 우리나라 같으면 몇 번이나 고려장에 갔을 법한 택시를 이용해야 했고, 문서 수발은 DHL 망이 031 Ⅰ. 무역관 이야기

32 없었기 때문에 대사관의 파우치를 이용하고 텔렉스 수발신은 외신관에게 의존해야 했다. 그러다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983년 3월 하순 무역관을 시내 대로변으로 이 전했다. 콩고는 적도 바로 밑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일년 내내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이 6시 경으로 일정하다. 집에서 사무실까지는 승용차로 약 30분이 걸렸다. 때는 1983 년 4월 하순 어느 날. 아침 9시 10분전 쯤 사무실에 도착하면 10여 가지 제목이 빼곡 하게 적힌 메모지가 책상 위에서 필자를 기다린다. 어제 종결되지 않은 미해결 업무 들이다. 어떤 건 일 같지 않는 일이면서도 단골 메뉴로 계속 리스트에 오르고 있다. 무엇부터 먼저 처리할까? 급한 불부터 끄기로 마음먹지만 1인 무역관이고 현지직원 한 명이 있다 한들 맡길 수 있는 업무는 한계가 있다. 근무 조건에는 정보나 자료, 우편통신, 시간관념 등이 포함될 것이다. 독립 이전 에 깔아놓은 시내전화는 특히 우기에는 거의 불통이었다. 편한 때가 있기는 했다. 사 전 약속 없이 업체나 정부기관에 쳐들어가도(?) 양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본사에서 내린 지시공문은 이미 보고기한이 지났거나 며칠밖에 남지 않은 것도 있었다. 가끔 날아 온 텔렉스는 거의 예외 없이 Immediatly 거나 Urgently 이고 ASAP(as soon as possible) 은 가뭄에 콩 나듯 했다. 그들에게 시간은 돈이 아니었다. 가령 높은 양반을 만나려 할 경우 비서는 5분 만 기다리라(생크 미뉘트 cinq minuites) 해놓고 30분을 넘기는 경우가 다반사였 다. 얼굴이 편치 않는 기색을 보이면 참을성을 가지란다(아베크 파씨앙스 avec patience). 공항에서 물건 하나 찾으려면 거쳐야 하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닌데다 담 당자들은 마치 그림이라도 그리듯이 시간을 끌며 사인을 한다. 은행에서 돈을 찾으 려 해도 최소 30분은 걸리는데 저액권이 대부분이라서 1,000달러를 바꾸면 007가방 에 가득 찰 정도였다. 게다가 매사에 마타비시 (급행료)라는 기름을 치지 않으면 일 이 굴러가질 않았다. 12시부터 2시 반까지는 시에스타(siesta)이고 관공서나 상점 등이 5시 반이면 셔터를 내리는 만큼 마음이 바쁘다. 오후에 출근해서 다시 한 번 오 늘 해야 할 일을 챙겨본다. 킨샤사국제박람회(FIKIN) 한국관 참가 준비, 국별 시리 즈 자이르편 원고 작성, 자동차부품 시장개척단 상담 준비 등 굵직한 사업만 열거해 도 어깨가 무겁다. 다행히 프랑스 태생의 현지직원은 5월 초 방문하게 될 자동차부품 시장개척단 상담 준비를 비교적 잘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킨샤사국제박람회는 7월 16일부터 7월 31일까지 2주간 열리는데, 한국관은 500m2에 14개 업체가 참가한다. 부산항에서 보낸 전시품이 킨샤사에서 360km 떨어져 있는 마타디 항에 제때에 도착 032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3 하여 분실 물건 없이 제대로 도착할는지도 걱정이다. 한편 4월 1일 조직을 개편한 본사는 중소기업 지원사업 에 포커스를 맞추고 해 외 무역관에 인콰이어리를 발굴하라고 압박을 가한다. 고려무역(KOTI) 성약실적도 스트레스를 준다. KOTRA와 고려무역 간에는 1983년 4월 19일 KOTRA가 소액소 량 수주와 중소기업 수출창구 역할을 해 오던 고려무역의 경영권을 맡는다는 약정을 체결했는데 그에 따른 조치였다. KOTRA가 지원 대상을 불특정 다수에서 중소기업 과 고려무역으로 전환한 것은 방향을 옳게 잡은 일이었지만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 나온다. 50여개 무역관이 우리나라 수출의 90% 내외를 점유하고 있는 선진국과 중 진국을 커버하고 있는 터에 아프리카에 있는 무역관까지 중소기업과 고려무역만을 도우라는 지시는 난센스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녁 6시쯤이 되니 적도를 지나가는 태양은 순식간에 콩고 강을 건너 대서양쪽 으로 빨려들어가고 현지직원은 핸드백을 챙긴다. 지금부터는 나 홀로의 시간이다. 9 월 30일이 마감 기한인 국별 시리즈 자이르 원고를 써야 한다. 모기가 여기저기서 달 려든다. 수동 타자기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고요한 사무실의 적막을 깨트린다. 오늘 밤에는 술 한잔이라도 걸쳐야 할까 보다. 밤 10시 넘어 귀갓길에 현지인들이 사는 동 네를 거쳐 가면 금속성 음악이 귓전을 때린다. 야자수 밑에 보도블록 몇 개 깔고 맥주 를 파는 곳이 정겹고, 내일을 잊고 춤을 추는 그들이 부럽게 느껴진다. 나는 술을 마 시면서도 내일을 생각한다. 어느 일부터 처리해야 할까 하고. 필자 임용탁은 1981년 7월부터 1983년 12월까지 킨샤사 무역관에 근무했다. 033 Ⅰ. 무역관 이야기

34 사회주의 국가로의 여정 02 18년이 걸린 KOTRA의 유고 진출 037 우여곡절 끝에 모스크바에 무역관을 040 살어리 살어리랏다! 시베리아에 살어리랏다 045 한 중 수교에 이르기까지의 장정 048 하노이 무역관 개관식 행사까지 72일의 나날들 054 아바나 무역관 개설 이야기 057

35 동서냉전의 완충지대였던 오스트리아 빈 무역관이 1970년 9월 이례 적으로 개설되었다. 수출 거점지역이 아닌 이곳에 무역관이 개설된 배경 에는 동구시장이라는 제3의 신흥시장 진출을 위한 교두보 설치의 전략적 인 고려가 작용했다. 초대관장으로 부임한 김인준은 빈에 상주하는 유고 연방공화국의 현지법인 Winex사의 사장 Bogdanovic 씨를 비밀리에 서 울로 끌어들였다. 본사는 상담에 백양메리야스와 쌍방울을 주선했다. 동 서냉전이 첨예했던 당시에 적성국으로 분류된 유고인의 방한은 하나의 센 세이션이었다. 사회주의 공산권 국가들은 북한만을 한반도 내의 유일한 합법적 정부 로 인정하고 한국을 적국으로 대하면서 어떠한 인적 물적 접촉도 기피하 1973년 11월 KOTRA 에 입사한 홍지선은 1975년 5월 시장개척부 특수시장반에 근무하 고, 1977년 4월부터 3년 동안 빈 무역관에 근무 하다 1980년 귀국한 이 후 20여 년 동안 줄곧 특수사업(지역)부장, 북방실장 등을 역임하 면서 동구, 중국 및 북방 시장을 다루었다. 던 시절이었다. 정부 관계기관은 24시간 감시의 망을 폈으며 KOTRA 담 당직원은 그의 출국 직전까지 숙식을 함께 해야만 하였다. 유고연방정부 가 북한의 강력한 외교적 항의를 무릅쓰고 자국인을 적국에 보낸 이유는 티토(Josip Broz Tito, )의 비동맹 외교정책의 유연성에도 있 지만 저렴하면서도 질 좋은 한국산 소비제품의 매력에 끌렸기 때문이다. 그의 방한을 계기로 KOTRA에서는 동구권 시장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이 넘쳤다. KOTRA는 1971년 유고에 진출하기 위해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하고 자그레브에 무역관 설치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국내신문에 대서특필되는 바람에 북한을 자극하여 북한-유고관계만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와 이 계 획은 무산되었다. 그 대안으로 이탈리아 북동부에 있는 트리에스테 (Trieste) 항에 보세창고를 설치, 운영하는 계획을 수립, 정부로부터 당시 로서는 거금인 70만 달러의 설치자금을 1972년 예산에 배정받았다. 경영 진에서는 창설요원으로 당시 연구1과장이던 전병인을 적임자로 지목했 다. 그는 KOTRA가 앞서 베트남의 다낭, 파나마의 파나마시티, 네덜란드 의 로테르담에 보세창고를 운영한 것이 모두 실패한 점에 주목하여, 설치 타당성조사 후 가부를 판단해야 한다고 경영진에 건의했고, 1972년 12월 8일 현지로 떠났다. 그는 트리에스타는 물론이고 제네바, 비엔나 등 동구 035 Ⅰ. 무역관 이야기

36 거래 전문무역상과 조사기관을 방문하여 전문가들과 면담하고 각종 자료 를 조사했다. 결국 그는 트리에스타가 해상운송 물량이 환적되는 장소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현실성이 없다 고 보고했다. 하지만 그가 2 개여 월에 걸쳐 조사하고 쓴 트리에스테 출장보고서 (부제 : 동구의 무 역제도와 시장개척전략)는 10여 년 후 KOTRA가 동구 진출을 본격적으 로 추진하는데 지침이 되었다. 1975년 KOTRA 본사는 국제입찰과 플랜트 수출, 공산권 교역사업 을 전담하는 특수시장반을 편성하면서 담당자 1인 전담을 특수시장과의 과 단위로 확대하였다. 말하자면 공산권 전담부서가 처음으로 설치된 것 이다. 무역관 역시 본격적으로 정보수집에 나섰고 1970년대 후반부터는 단순 거래알선의 차원을 넘어 프로젝트성 협력사업이 본격화되기 시작했 다. 홍지선은 <KOTRA 40년사>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1970년대의 10년 동안 KOTRA는 온통 정치색깔로 분장한 공산권 을 경제협력의 실체로 우리에게 가까이 유인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 다. 물자교역과 박람회 참가를 통해 경제협력의 한 파트너로서 한국의 이 미지를 집요하게 전달한 결과, KOTRA가 1980년대의 우리 정부의 북방 정책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 한 축으로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무엇보다 초창기에 동구권 사업에 뛰어든 KOTRA 요원들은 어떠한 지침도 없이 오직 창의력과 사명감으로 우리의 활동영 역을 넓혔고, 공산권과의 관계 개선을 향한 길에 자기희생을 마다하고 헌 신적으로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갔던 것이다. 여기에는 김인준, 전병인, 윤 덕용, 이만득, 임인주, 박행웅, 이인석, 김승태 등 OB들의 역할이 가장 돋 보였다. 03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7 18년 걸린 KOTRA의 유고 진출 사회주의 국가로의 여정 박행웅 OB 1988년 7월 5일 오후 6시, 유고의 최북단인 슬로베니아 공화국의 아름다운 브레 드(Bled) 호숫가에 있는 빌라브레드 호텔에서 유고 기업인들과 정부관리 140명, 한국 통상사절단 34명이 참가한 가운데 KOTRA 류블리아나 무역관 개관식을 개최하였다. KOTRA가 유럽 사회주의권 진출 전진기지로 유고를 지목하고 무역관을 설치하 기 위한 노력은 1970년 4월 무역사절단을 파견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후 인근지의 밀라노, 빈, 암스테르담 무역관을 통해 밀사처럼 입국하여 현지 유력 인사를 만나고 이들을 초빙하는 등 온갖 노력이 이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 지 않다. 필자는 1972년부터 유고 진출사업에 참여하기 시작해 류블리아나 무역관 초 대 관장으로서 개관식을 치른 것이 마치 기나긴 산고 끝에 아이를 낳은 심정이었다. 필자는 1983년 6월 15일 밀라노 무역관 근무 당시 우리나라 구매사절단의 유고 방문에 앞서 베오그라드에 있는 유고 최대의 무역회사인 제넥스(Genex)를 방문하기 위해 로마에서 비행기를 탄 적이 있다. 그때는 한국의 유고 입국이 금지된 상태였기 때문에 베오그라드 공항을 통해 입국할 수 있는 특별허가를 받아놓았다. 그런데 제넥 스 직원이 기다리기로 한 베오그라드 공항에 내리지 않고 중간 기착지인 스프리트라 는 곳에 내리는 바람에 공항 경찰당국에 연행되는 곤욕을 치렀다. 하룻 밤을 유치장에 서 묵고 다음날 제넥스 본사와 간신히 연락이 돼서 베오그라드로 갈 수 있었다. 그러 나 유고의 실력자 티토가 죽은 지 3년밖에 되지 않아 유고와 북한의 관계가 매우 돈독 한데다가 북한의 선전활동으로 유고인들의 한국에 대한 시각은 매우 굴절된 상황이 었기 때문에 스트리트 공항 경찰관들이 북한 대사관에 연락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 인가를 생각하니 아찔하였다. 제넥스 방문을 주선해준 사람은 제넥스의 밀라노 현지 법인장이었던 스틸리노빅 이라는 사람이었는데, 무슨 인연이었는지 이 인물이 이제는 제넥스의 부사장으로 무역 037 Ⅰ. 무역관 이야기

38 관 개관식에 참가하여 재회의 기쁨과 함께 5년 전 아찔했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개관식 리셉션이 열린 빌라브레드 호텔은 티토의 여름 별장으로 유명했던 곳으 로서 종종 외교단이 초청돼 연예가 베풀어지던 곳이기도 했는데, 그 호텔의 매니저는 2년 전 북한 대사 지재룡이 적어놓은 방명록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1975년 6월 유고슬라비아를 방문하시어 드신, 이곳 브레드 초대소는 조선과 유고슬라비아 사이의 훌륭한 친선관계에 대한 영원한 상징으로 위대한 수령님의 불변불휴의 대외활동의 불멸의 사적으로 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1986년 12월 11일 지재룡 김일성 방문 이후 빌라브레드 호텔은 베오그라드 주재 북한 대사관원 및 자그레 브 총영사관원들에게는 성소가 되었다고 하는데, 방명록에 이 글을 남긴 지재룡 북한 대사는 류블리아나까지 올라와 요로를 방문하면서 필자의 무역관 개설을 뒤늦게 방 해하기 위한 공작도 펼쳤다. 유고와 북한의 관계는 1970년대 초 김일성이 티토의 비동맹 운동에 적극 참여하 면서 밀착되었고, 1978년 티토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10일 동안 극진히 환대한 이후 에는 티토가 죽을 때까지 그 감격을 잊지 못했다고 하니 양국 간 관계가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횃불을 들고 전국을 뛰는 티토의 생일축하 행사는 김 일성 생일날의 충성의 편지 갖고 달리기로 북한에 전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국제적인 변화에 따라 한국과의 관계를 점차 중시하게 된 북부 슬로베니 아는 남부와 달리 연방정부가 환영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KOTRA와 슬로베니아 경 제회의소 간에 무역관을 상호 교환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슬로베니아의 독자적인 대 회활동이 태풍의 눈이 되어 3년 후 슬로베니아가 독립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당시 연방법규에 의하면 공화국 경제회의소가 해외 주재원을 파견할 수 없 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슬로베니아 경제회의소 회장과 KOTRA 사장 간 상호 무역관 교환설치 합의서를 가지고 필자가 1988년 6월 13일 현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들이 매우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급해진 경제회의소는 공화국 내 10대 기업으로 하여금 한 국 사무소 경비를 분담하는 형식의 공동 지사를 설치키로 밀어붙였다. 상호주의에 따 라 그들의 서울 사무실과 주택은 KOTRA 본사가 제공하고, 필자는 같은 수준과 크기 의 것을 현지에서 이들로부터 제공받도록 서울 본사로부터 매일 독촉을 받았다. 4개월 만에 유고측 서울 주재원이 파견되었고, 필자도 주택과 임시 사무실이 갖추어졌다. 03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9 유고 경제무역동향 설명회 그 이후 필자의 접촉 파트너로서 개인적인 친분을 쌓아갔던 슬로베니아 경제회 의소 담당과장은 유고정부가 내부적으로 한국과 모든 부문에서 관계를 증진시키기 로 했다는 유고정부의 대한 외교정책 문서 내용을 알려주었다. 필자는 이를 우리 정부 에 보고했는데, 이것이 도움이 되어 여러 동구 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외교수립과 자금 지원을 연계시키지 않고 무역관이 개설된 지 1년 반 후인 1989년 12월 양국 간 외교관 계가 정식으로 수립되었다. 1990년 2월 베오그라드 한국 대사관 개관 리셉션에서 필자의 또 다른 현지 협력 자인 전 연방 재무장관이 서울에서 온 우리 외무장관에게 필자를 일부러 소개하면서 필자가 양국 관계가 이렇게 진전된 데 기여한 바가 크다고 소개했을 때 우리 외무장관 의 답변은 이러했다. 이 사람은 우리의 수출을 진흥시킬 뿐입니다. 필자 박행웅은 1988년 6월 류블리아나 무역관 개설요원으로 발령을 받고 1992년 1월까지 그곳에서 근무했다. 039 Ⅰ. 무역관 이야기

40 우여곡절 끝에 모스크바에 무역관을 사회주의 국가로의 여정 신남식 KOTRA가 전 국민적 관심 속에 미수교국가 진출의 첨병 역할을 담당하던 시절 이 있었다. 1980년대 우리 정부가 북방외교 의 기치를 내걸고 공산권 국가들과의 관 계 개선을 추진할 때의 일이다. KOTRA는 철의 장막 을 뚫고 우리 기업의 진출 루트 를 개척했고, 공식적인 외교관계 수립의 초석을 깔았다. KOTRA는 언제나 이러한 역할을 수행해 왔지만 1980년대는 냉전이 끝나지 않은 때였기 때문에 국민들은 각별 한 관심을 갖고 KOTRA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 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의 첫 단추는 KOTRA와 현지 상공회의소 간의 무 역사무소 교환 설치였다. 당시 공산국가 중에서 무역사무소 개설에 가장 먼저 합의 한 국가는 유고연방에서 분리 독립한 슬로베니아였다. 그리고 1987년 12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KOTRA 무역관이 개설된 이후, 1988년 6월 슬로베니아 수도 류블리 아나, 1989년 4월 불가리아 소피아와 폴란드 바르샤바가 그 뒤를 이었다. 국민들의 관심은 자연히 소련으로 쏠리게 되었다. 공산권의 심장부인 모스크바 에 KOTRA 무역관이 언제 설치될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항으로 대두한 것이었다. 당시의 모스크바는 지금의 평양 이상으로 우리 국민들에게 신비의 베일에 싸인 곳이 었다. 이때 소련과의 관계에 물꼬를 튼 것은 88서울올림픽이었다. 올림픽 참가 준비 과정에서 우리 정부와 국민들의 우호적인 분위기를 감지한 소련정부가 먼저 악수를 청해 온 것이었다. 올림픽 기간 중 영사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1988년 9월초에 한국에 온 소련 영사단 레오니드 오신킨 대표는 KOTRA 박영수 사장을 면담하고 무역사무 소를 교환 설치하자는 소련정부의 의사를 전달하기에 이르렀다. KOTRA는 즉시 헬싱키 무역관장(권오남)을 모스크바에 파견하여 소련 연방상 공회의소와 무역사무소 상호 개설에 대한 의견을 조율토록 했고, 1988년 12월 이선 기 KOTRA사장이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무역사무소 교환 개설을 골자로 하는 업무 040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41 협력협정을 소련 연방상의와 체결했다. 이 협정에는 상호주의에 의한 무역사무소 교 환 개설 외에도 사절단 교류, 박람회 직접 참가 및 전시회 개최 지원, 무역정보 교환, 기업 간 공동사업 개발, 연례회의 개최 등이 포함되었다. 소련 연방상공회의소와의 협정에 따라 모스크바 무역관 개설요원 3명(조성우, 박영복, 이광희)이 1989년 4월 파견되었고, 2개월 후에 초대 모스크바주재 본부장 (성정현)과 직원 1명이 추가로 부임하였다. 상호주의에 따라 소련 연방상의는 러시 아 정부청사에서 500여 미터에 위치한 국제무역센터(SOVINCENTER)에 사무소 설치 공간과 직원들의 숙소를 제공했다. 호텔, 오피스 및 아파트의 복합건물인 국제 무역센터는 당시 모스크바에서 외국인이 거주하거나 사무실을 설치할 수 있는 유일 한 현대식 시설이었다. 소련 상의의 지원이 있었지만 모스크바 무역관 개설요원들은 예기치 못한 여러 어려움을 헤쳐 나가야 했다. 무엇보다 물자부족이 심각했고 상관행이 달라서 시행착 오를 많이 겪었다. 사무실 개설에 필요한 비품, 가구, 차량 등을 현지에서 구입할 수 가 없었다. 품질이 괜찮은 제품은 찾기 어려웠고 있어도 가격이 너무 비쌌다. 부득이 비품이나 가구는 본사에, 공용차량은 프랑크푸르트 무역관에 구입을 의뢰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소련에서는 생필품 부족도 심각했다. 미국보다 먼저 인공위성을 쏘아 올 렸건만 소비재 중에서 스스로 만드는 것은 저급의 식품, 주방용품, 가구, 자동차 정 도였고 볼펜으로부터 의류, 신발, 전기전자제품, 스포츠용품 등 대부분의 공산품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게다가 소련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은 품질이 조악하여 자 국 소비자들로부터도 외면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외화를 받고 수입상품을 판매하 는 슈퍼마켓이 모스크바에 몇 개 있었지만 취급 품목이 한정되어 있었고 가격이 무 척 비쌌다. 예를 들면 1리터 들이 에비앙 생수 한 병이 5달러나 되었다. 부득이 무역 관 주재원들은 생필품을 조달하기 위해 독일, 핀란드 등 인근 유럽지역을 교대로 다 녀와야 했다. 방문인사를 지원하기 위해서 무역관이 꼭 챙겨야 하는 호텔, 레스토랑 등도 열 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수도 모스크바에 괜찮은 호텔이나 레스토랑은 손가락을 꼽 을 정도였다. 공식 사절단을 위한 영빈관 외에 외국인이 묵을 만한 호텔은 국제무역 센터에 딸린 메즈두나로드나야(Mezhdunarodnaya) 호텔 하나뿐이었다. 외국 음식 점은 중식당과 일식당이 각각 하나씩 있었을 뿐이고, 러시아식당 중에 그런대로 깨 끗한 시설을 갖추고 있는 것은 두세 개에 불과했다. 그러다 보니 호텔이나 식당을 예 041 Ⅰ. 무역관 이야기

42 약하기 위해서 담당 매니저에게 선물을 갖다 주어야 하는 어이없는 일까지 겪어야 했 다. 일식당 사쿠라 의 경우 예약전화를 아예 받지 않았고 식사시간 외에는 식당 문을 굳게 닫아 놓기 때문에 예약 담당자를 만나기 위해서는 주방을 통해 무단 침입을 해 야 했다. 독점자의 횡포는 식당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1989년 7월 모스크바 무역관 공식개설이 이루어졌다. 개설 공식 행사로 7월 7일부터 13일까지 한국주간(Korea Week) 행사가 개최되었다. 정부 부 처와 주요 경제기관이 망라된 공식사절단 방문 및 한국경제세미나 개최, 대규모 한 국상품종합전시회 개최 외에 한국전통무용단과 태권도 시범단의 공연 등을 통해 한 국 경제와 문화를 알리고 모스크바 무역관 개설을 홍보했다. 한국상품종합전시회는 그 규모에 있어서 가히 역사적이라고 할만 했다. 전시면 적 5,000m 2 에 100명이 넘는 전시회 상담요원이 파견되었다. 이는 그때까지 KOTRA 가 해외에서 단독으로 개최한 전시회로서는 유례를 찾기 힘든 것이었다. 이 전시회를 통해 당시 세계시장에서 잘 나가고 있던 자동차, 가전제품, 신발 등의 소비재와 기계 류, 화학제품 등 다양한 제품이 소개되었다. 현대는 자동차를 중점 전시했고, 삼성물 산과 럭키금성상사는 전기 전자제품 외에 화학제품, 기계류, 가정용품 등을 소개했 으며, 화승과 국제상사는 신발제품을 선보였다. 중소기업 수출창구였던 고려무역은 코스모스전자 등 12개 중소기업 공동관을 구성하여 다양한 제품을 소개했다. 한국주간 행사를 위해 103명의 전시회 상담요원 외에 공식사절단 46명, 창무회 무용단 및 태권도단을 포함하여 총 200명 이상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공식사절단 에는 국회 상공위원회 3당 간사 국회의원 세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소련 상공회의소 는 이 행사를 지원하기 위해 상의 부회장을 단장으로 한 한국주간 준비위원회를 발족 했고, 서울에 주재하던 대표사무소 직원 3명이 귀국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실무적으로 많은 애로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사절단과 전시회 상담 통역원 확보 가 어려웠고, 200여명을 수송하기 위해 많은 수의 버스를 여러 코스로 운행해야 했는 데 버스기사들이 시간을 잘 지키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른 일도 많았다. 우리나라와 러시아가 공식 수교를 하기까지 모스크바 무역관은 준( 準 )공관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무엇보다 소련을 방문하는 각계각층 인사에 대한 안내 및 지 원을 도맡아서 했다. 정치인, 관료, 언론인들이 앞다투어 모스크바를 다녀가는 바람 에 무역관은 여행사 역할까지 겸해야 했으며, 때로는 한식당의 역할도 해야 했다. 한국주간 행사가 끝나고 열흘쯤 후에 정주영 회장을 단장으로 한 전경련 사절 단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현지의 느끼한 음식에 질린 정 회장이 한식 042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43 을 먹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모스크바에는 한식당이 없었으므로 무역관 주재원 부인들이 음식을 준비하고, 메즈두나로드나야 호텔에 있는 러시아 식당에 뷔페식으 로 차려 대접을 했다. 참석자는 사절단원 40여 명 외에 정 회장이 초청한 40여 명의 재소동포가 추가되어 총 100여 명이나 되었다. 이 때 이명박 현대건설 사장이 정 회 장을 수행했었고, 한식과 보드카로 기분이 고조된 정 회장은 유행가 여러 곡을 연달 아 부르기도 했다. 한국주간 행사에 이은 전경련 사절단 방문 등으로 한국과 소련간의 경협 분위기 가 고조되기 시작했고 1년 후에 대망의 수교가 이루어졌다. 모스크바 무역관은 한-소 수교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외교부 선발대 3명이 1990년 1월 30일에 모스크바에 부 임했는데 이들의 공식적인 직위는 모스크바 무역관 내 영사처 직원이었다. 2개월 뒤인 1990년 3월 2일에는 공로명 뉴욕총영사가 모스크바 무역관 영사처장으로 부임했다. 외교부에서 해결사로 소문난 특급대사급 인사였지만( 외무부장관 역임) 미수교국인 소련에 입국할 때에는 모스크바 무역관의 구성원에 불과했다. 문제는 무역관이 협소하여 영사처장에게 별도의 방을 제공하지 못한 것이었다. 본부장이 방을 내주겠다고 했지만 본인이 한사코 고사하고 무역센터 내 메즈두나로 드나야호텔 스위트룸을 숙소 겸 사무실로 사용했다. 이것이 KOTRA와 외교부 간에 미묘한 갈등을 낳기도 했다. 모스크바에 출장을 왔던 외교부 고위인사가 귀국하여 KOTRA 사장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특급대사인 영사처장을 자기 방도 없이 떠돌 게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영사처장이 직접 해명하고 나서야 외교부 본부의 오해가 풀릴 수 있었다. 어쨌든 외교부 영사처가 무역관 내에 설치된 지 8개 여월 만인 1990 년 9월 30일에 한-소 양국의 수교가 이루어졌다. 소련시장에 처녀 진출하는 우리 기업들에 대한 정착 지원도 당연히 무역관의 몫 이었다. 소련시장 진출의 선두에 선 것은 종합상사들이었다. 삼성물산을 비롯하여 현대종합상사, (주)대우, 럭키금성상사 등이 1990년 초 모스크바 지사를 설치했고 (주)선경, 코오롱상사가 뒤를 이었다. 모스크바에 부임한 지상사 개설요원들은 사무 실을 갖출 때까지 무역관에서 근무하다시피 했고, 사무실 설치와 현지 정착에 필요 한 각종 정보와 지원을 무역관에 의존했다. 요컨대 모스크바 무역관은 우리기업의 러시아시장 진출의 디딤돌이 되었으며, 한-소 양국의 수교를 위한 초석을 깔았다고 하겠다. 필자 신남식은 1989년 6월부터 1993년 3월까지 모스크바 무역관에 근무했다. 043 Ⅰ. 무역관 이야기

44 모스크바 무역관 개설 작업 낙수 필자(박영복), 조성우 부장, 이광희 과장 등 3명이 1989년 4월부로 발령받아 도쿄 무역관에서 2일 간 체재한 후 4월 13일 모스크바행 JAL 비행기에 올랐다. 이륙 30여분 후 지금 블라디보스톡 상공을 통과하고 있다 는 기내 방송이 흘러나오니 아, 여기가 정말 소련 상공이로구나 하는 감회에 젖었다. 초등학교 동창들이 환송회에서 죽지 않고 돌아오기 바란다 고 했던 말도 새삼 떠올랐다. 모스크바에 입국하고 일주일쯤 지나서였다. 우리 일행은 김치 생각이 나서 오작교 한국식당으로 저 녁을 먹으러 갔는데 식당 문을 열지 않은 채 안에서는 여러 명이 식사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들어오라 고 해서 방에 들어가니 주인 생일이라며 대접을 하는데 식사하는 사람 중에 북한 군복을 입은 군인이 보였다.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긴장이 되었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은 고려인으로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수비대장이었다. 필자가 EXPORTCENTER 전시장에 임시 사무실을 내고 전시준비를 하는데 하루는 현장을 방문하 고 돌아오니 내 책상 위에 김일성 전집을 비롯한 북한 책자 등 수 많은 북한 홍보물이 쌓여 있었다. 그 것들을 쓰레기통에 넣고 현장에 갔다 오면 또 홍보물이 쌓이고 해서 신경이 곤두서기도 했다. 전시 준 비를 위해 야간작업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부들에게 잔업수당을 주겠다며 잔업을 요구해도 본인에 게 돌아오는 배당이 적기 때문에 선뜻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말보로(적색) 담배와 맥주는 약발을 잘 받았다. 메즈두나로드나야 호텔 7층에서 열린 무역관 개관식에는 한국의 정치인, 공무원, 기업인 등 300여 명이 참석하였다. 식사 준비도 문제였지만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테이프 커팅식에서 소련 안내원 3명에게 한복을 입히기로 했는데 시간이 임박해도 오지 않아 임시방편으로 현장에서 청소하는 젊은 여 자 세 명을 급히 뽑아 한복을 입게 했던 것이다. 한국상품전시회 개최기간 동안 참가업체 식사문제를 해결하려고 사전 시식을 위해 안내원인 고려인 과 함께 평양식당에 간 적이 있었다. 북한 군인들이 대부분인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자 북한 여종업원 이 식사가 어떠시냐 고 물었다. 맛이 그저 그렇다 고 대답했더니 옆에서 그 말을 들은 북한 군인이 맛 이 그저 그래? 하고 시비를 걸었다. 그래서 맛이 그저 그런 것이 아니라 한국음식이 소련 재료를 사용 해서 만든 것이라서 전통의 한국음식 맛과 조금 다른 것 같다 고 얼렁뚱땅 변명해 봉변을 면하고 급히 빠져나온 적도 있다. 필자 박영복은 1989년 4월부터 모스크바 무역관 개설요원으로 발령을 받아 1992년 3월까지 그곳에 근무했다. 044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45 살어리 살어리랏다! 시베리아에 살어리랏다 사회주의 국가로의 여정 강상엽 영하 40도 이하의 추위는 추위가 아니요, 40km 이하는 거리도 아니며, 40도 이하의 술은 술이 아니 다. 과연 이 속담보다 러시아를 잘 표현해 줄 말이 있을까?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거리 장장 9,466km에 일주일 간 기차 여정을 아무 불평 없이 오가는 사람들, 겨울 평균기온 섭씨 영하 50 도의 야쿠치야에 영하 40도는 오히려 따스하기까지 하다는 사람들, 50도를 넘나드는 보드카에 한때 금주령이 내려 유사 석유를 들이키며 눈이 멀기도 한 사람들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랴.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막 귀임한지 채 6개월도 안된 2003년, 필자는 자의 반 타 의 반 시베리아 노보시비르스크(Novosibirsk) 무역관 개설 명령을 받게 된다. 시베리 아 하면 얼핏 떠오르는 이미지는? 유형지. 빙고! 모스크바에서 유학도 하고 국내에서 러시아문학을 전공했던 필자지만 시베리아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눈바람이 몰아치 는 아주 추운 유형지(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가사 중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 남부두는 댈 게 아니다). 잘 하면 길거리 배회하는 곰, 사슴들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그 이상도 그이하도 아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모스크바 사람들에게도 시베리아는 가 보지 못한 곳, 아니 가보고 싶지 않은 그런 곳이었다니, 국경을 떠나 모든 사람들에게 시베리아가 주는 이미지는 딱 그것이었나 보다. 모스크바에서 2주간 머물면서 신분증을 받고 2003년 9월 14일 노보시비르스크 행 밤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무슨 놈의 짐이 그리도 많던지, 지금 생각하면 홍보 팸플 릿 등은 나중에 EMS나 DHL 특사우편으로 발송해도 되었을 텐데.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고 돌이켜보면 그때는 완전 그 짝이었다. 간신히 기내에 들어서보니 100% 만석, 에어버스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많은 좌석이 꽉 찬 걸 보면서 노보시비르스크라는 곳이 그리 황량한 곳은 아니겠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밤 비행이라 잠이 올만도 했지만, 이륙 후 주위에서 본격적으로 시작 045 Ⅰ. 무역관 이야기

46 한 루스끼(우리는 흔히 로스께라고 함) 들의 술잔치와 야단법석으로 인해 잠이 오기 는커녕 이상야릇한 공포감까지 밀려왔다. 두어 시간 지났을 때쯤인가. 누군가 등짝을 두드려 패는 팍 소리가 들렸다. 아니 웬걸! 스튜어디스가 술 취해 쟁반을 엎지르고 바 닥에 엎어진 남자 승객 등짝을 두드려 패는 게 아닌가? 나는 내 눈을 의심했으나 그건 현실이었고 사실이었다. 21세기 대명천지에 이런 광경을 보게 되다니. 주위 좌석들 에서는 아랑곳없이 루스끼들의 술타령이 계속 이어졌고 내 앞날이 순탄치는 않겠구나 하는 우려가 든 건 당연했으리라. 노보시비르스크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어둠이 조금씩 걷힐 즈음 새벽 5시경. 비행 기가 착륙하기 무섭게 자리에 일어서 짐을 챙기는 어수선함 속에서 바로 이곳이 내가 무 역관을 개설해야 할 시베리아 중심부구나 하는 생각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걱 정에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겨울비가 처량하게 내리는 가운데 비행기 트랩을 내려와 보니 저 멀찌감치 쇠창살 문 바깥에 웅성거리며 서 있는 어두운 복장의 여러 무리의 사람 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쪽을 바라보던 내 눈에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 마치 내리던 비와 교차하여 비인지 눈물인지 모를 뜨거운 물줄기가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당시 유일하게 외국인이 머무를 수 있는 호텔. 이름도 욕이 라도 해줄 내 맘 같은 씨비르(Sibir)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외국인 독점 호텔이라 손바닥만한 싱글룸 하나에 당시 120달러 넘게 비쌌고, 외국인이 러시아어 못한다고 종업원이 손님에게 무안을 주거나 욕실 수도꼭지를 틀면 가끔씩 붉은 녹슨 물이 쏟 아지는 그런 호텔이었다. 이런 호텔에 필자가 5개월 가까이 살아야 할 줄 당시 감히 상상인들 했으랴! 집을 쉽게 구하지 못해 장기간의 호텔 생활이 불가피하여 본사에 지원요청을 했 을 때, 본사는 이런 필자의 호텔 생활이 편안하게만 보였는지 실링을 넘어선 숙박비 지 원에 대해 난색을 표해왔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던가? 필자가 투숙하던 방 사진 등을 찍어 보내주니 그 다음날 바로 승인 공문이 날아왔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사진 을 본 직원들이 어떻게 그런 호텔방에서 오랫동안 지낼 수 있었는지 매우 염려스러워 했다는 것이다. 자. 이제 시작이다. 주변상황이야 어찌되었든 필자는 시베리아 한복판에 외국기 관은 물론 한국기업 최초로 KOTRA 무역관을 개설하는 소명으로 왔고, 이왕 온 이상 잘 해내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니던가. 필자의 좌우명이기도 한 될 놈은 된다 를 속으 로 무수히 되새기면서 한국에서부터 접촉했던 현지인을 도착 다음날부터 고용해 개설 업무에 본격적으로 돌입하였다. 그리고 2003년 11월 무역관을 개설하였다. 04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47 시베리아라 해서 곰이나 사슴이 아무데서나 어슬렁거릴 거 라는 필자의 무식한 상상은 도착 첫날 깨져버렸고, 춥고 긴 겨울 철에 비즈니스 활기가 더욱 더 넘쳐 우리 한국 제품들의 블루오 션이 되리라는 것을 알기까지에도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외국 진출 유관기관이나 한국기업이 없다보니 다른 곳에서는 시베리아 무역투자 환경 설명회 감히 꿈도 못 꿀 주지사나 시베리아 전권대사, 시장 등과의 만남 도 쉽게 이루어졌다. 필자가 만난 지방정부 공무원, 비즈니스맨, 고려인들 모두 필자가 무역관을 개설하고 운영하는데 있어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이러한 관계는 향후에도 오래 동안 지속되었다. 낙후된 의료시설 때문에 아플 때 힘들었던 것 빼고는 일상생활과 무역관 활동에 거칠 것이 없었다. 의사의 오진으로 임신 6개월째의 둘째아이를 유산시킬 뻔 했고, 집 사람은 급성맹장염(아직까지 정말 집사람이 그때 맹장염이었는지 확신이 가지 않는 다)으로 수술실 전기도 제대로 안 들어오는 곳에서 무려 15cm나 배를 가르는 수술을 했다. 첫째 아이의 급작스러운 한밤중 복통에도 불구하고 주치의와 연락이 안 돼 아이 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아침까지 지켜봐야 했으며, 친한 선교사가 운동하다가 무릎 이 다쳤을 때 다리를 잘라야 된다는 의사의 소견(후에 한국에서 완치)에 같이 괴로워 했다. 외국인이면 1년마다 검사해야 하는 에이즈 검사에서 아는 선교사분이 러시아 병 원 오진으로 양성반응이 나와 추방되었고, 어학연수 나왔던 여대생이 교통사고로 머 리가 크게 부딪쳐 걸어서 병원에 들어갔으나 그 다음날 뇌가 부풀어 뇌출혈로 유명을 달리했던 일 모두 시베리아였기에 경험할 수 있는 아픔이었다. 하지만 이런 우여곡절 속에서도 시베리아에서 예쁜 둘째 아이를 얻었으니, 돌이켜보면 이는 시베리아가 우리 부부에게 내려준 큰 축복이 아니었는가 싶다. 필자 강상엽은 2003년 9월 노보시비르스크 무역관 개설요원으로 발령을 받아 2008년 1월까지 그곳에서 근무했다. 047 Ⅰ. 무역관 이야기

48 한 중 수교에 이르기까지의 장정 사회주의 국가로의 여정 장행복 OB KOTRA가 중국 등 북방진출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 것은 1980년 1월 7일 청 와대의 무역진흥확대회의에서 대공산권 교섭 창구로 지정되고(이병국, 한 중 경제교 류현장론 - 무역에서 외교에 이르는 길( ), 나남출판, 1997년, 144쪽) 이에 따라 4월 1 일 특수시장반 이 특수교역부 (대 공산권 교역진흥 전담부서로 교역 1, 2과 설치)로 확대 개편되면서부터이다. 이에 앞서 1979년 1월 24일 박정희 대통령은 무역진흥확대회의를 주재하고 중 공이 경제정책에 있어서 실용주의 노선으로 나가고 있는데 우리가 세계시장에서 그 들과 같은 조건에서 경쟁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우위를 계속 견지해 나가야 한다 고 강조했다. 박대통령은 다행히 우리는 경제개발에 있어 중공보다 한걸음 앞섰기 때 문에 이 시차와 발전 격차를 최대한 이용하여 전진을 계속해야 할 것 이라고 말하고 이를 위해서는 기술혁신, 중화학공업으로의 구조 전환, 수출전략 지원체제의 확립 등이 매우 중요하다 고 말했다. 이날 보고에서 최각규 상공부장관은 동구권을 비롯한 비적성 공산국가와의 교 역을 적극 추진하기 위해 교역 전문상사를 지정, 상사활동을 보장하고 현물거래 등 특수거래를 인정하며 서독,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의 대동구( 對 東 歐 ) 교역전문상사 를 활용하는 한편 현지 교역전 등의 참관을 추진해 나가겠다고 밝혔다.(경향신문 면 톱기사) 중국이 우리나라에 문호를 개방한 시기는 1980년대 중반부터이다. 그즈음 세계 적으로 경제적인 실익 우선주의가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 정치적인 관계보다 경제 가 우선시되는 경향이 생겨났다. 또한 아시아에 있어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NICs(신흥공업국)의 경제가 급격한 성장을 보임에 따라 중국으로서는 2000년대의 중진국 진입을 지향하여 경제발전에 박차를 가하던 우리나라와의 경제교류를 더 이 04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49 상 제한할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하였던 것이다. KOTRA가 중국 시장 진출을 목적으로 중국 관련 전시회에 처음 참가한 것은 1982년 화륜공사( 華 潤 公 司 )가 홍콩에서 개최한 실크전시회였다. 그러나 이 전시회 에서는 중국과 외교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국기는 물론 태극문양의 쇼핑백 조차도 태 극기를 연상한다 하여 배포를 금지당하고, Made in Korea 원산지 표기는 생각조 차 할 수 없는 수모적인 전시회였다. 그 후 KOTRA가 중국 사업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1984년경부터 였다. 8월 흑룡강성 대외무역청 산하 개발무역공사 총경리 박두성이 친지 방문차 우 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KOTRA는 피아노 합자건설 및 한약재 구상무역을 제의하였 고, 그 후 이 사업의 추진을 위해 흑룡강성과 빈번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중략) 1987 년은 중국사업 추진에 대단히 중요한 해였다. 7월 사업개발부 내의 특수사업 2과가 본격적으로 중국 업무에 착수, 한 중 피아노 프로젝트와 한약재 구상무역, 홍콩-상 해-인천-도쿄를 잇는 <선상박람회> 참가 추진, 세미나 참가, 중국시장 설명회 및 중 국의 주요 수출상품을 수집, 국내에 소개하는 중국상품전시회 개최 등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사업들이 추진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대중국 접근은 한 중 양국의 지속적 인 교역증대와 함께 중국 측의 정경분리 기조 가시화에 따라 서서히 종전까지의 구 도와는 다른 관계로의 발전을 예고하고 있었다.(임인주, KOTRA 30년사 가깝고도 멀었 던 중국시장 진출, 쪽) 1984년경부터 KOTRA가 중국 사업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데는 1983 년 5월 5일 있었던 중국 민항기 불시착 사건도 한 몫을 했다. 한 중 간의 직접적 교 섭이 1983년 5월 중국 민항기 사건 처리 과정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83년 5월 5일 오후 2시, 춘천의 미군 헬기 비행장인 캠프 페이지 (CAMP PAGE)에 승객 96명 (납치범 6명 제외), 승무원 9명을 태운 중국민용항공총국 (중국민항) 소속 여객기 한 대가 불시착 했다. 당시에는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미수교 상태였기 때문에 외교적, 정치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이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중화인민공화국 정부 간의 한국전쟁 이후 첫 번째 공 식 외교접촉이 성사되었다. 이 여객기는 5월 5일 오전 11시(한국 시각) 랴오닝 성 선양의 선양동탑 공항( 瀋 陽 東 塔 空 港 )을 떠나 상하이 홍차오 국제공항으로 가던 중이었다. 납치범들은 기내를 무력 으로 장악하고 기수를 대한민국으로 돌릴 것을 요구하였고, 중화민국(대만) 대사 면담과 중화민국 으로의 정치적 망명 허용을 요청하였다. 049 Ⅰ. 무역관 이야기

50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중국 정부는 기존의 소극적이고 제한적인 접촉에서 직접적인 교섭으로 전 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초기 간접교섭 방법을 통해 항공기와 승무원의 송 환을 협상하려 했으나, 사건 발생 3일 만에 중국민항총국장 심도( 沈 圖 ) 및 33명의 관리와 승무원이 직접 서울을 방문하여 당시 공로명 외무부차관보와 협상을 벌였다. 9개 항에 걸친 외교각서가 서명 되었으며 처음으로 중화인민공화국 과 대한민국 이라는 양국의 정식 국호가 사용되었다. 한국 정부는 이 사건을 한 중 관계개선의 지렛대 역할로 활용하려 했다. 하지만 제비 한 마리가 날아왔다고 봄이 온 건 아니다. 게다가 이에 따른 후폭풍 도 만만치 않았다. 동아일보는 1984년 4월 25일 한국-대만 불편한 관계 라는 제하 에 이런 기사를 내보냈다. 대북(타이페이) 시민들은 납치자들을 자유의 투사, 반공 의사( 義 士 ) 라고 부르며 대만 송환을 요구 했고, 같은 반공국가이자 형제국인 한국이 반공 의사를 재판한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중략) 언론도 대한국 비난 일색이고 한국의 대중공 관계개선 시도는 환상에 불과하다고까지 주장하 고 있다. 대북의 입장에서는 두 나라의 목표가 실지 회복, 반공 국시 의 유지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 다. 그러나 자유중국은 특히 중공과는 이른바 3불 원칙 즉 불타협, 불협상, 불접촉을 견지하고 대중 공 접촉이 금기사항으로 되어 있다. 한국은 6 23 선언으로 이념과 체제가 다른 국가와 접촉, 교류를 하는 문호개방정책을 취하고 이에 따라 소련, 중공 등 공산권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고 있다.(6 23 선언은 박정희 대통령이 1973년 6월 23일 발표한 평화통일외교정책에 관한 특별 성명이다) 중국 북경 대한민국 상품전 050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51 중국은 1986년 9월 20일부터 10월 5일까지 서울에서 개최된 아시안게임에 직항기 를 이용하여 선수단을 파견했다. 그 후 물밑에서 작업이 진행되다가 한국측은 1988년 4월 산둥성과 요녕성에 민간 경제조사단을 파견하여 민간 무역사무소 설치에 합의했 고, 8월 25일에는 중국 국제무역촉진위원회(CCPIT) 산둥성분회 분회장 이유( 李 瑜 )를 단장으로 하는 일행 15명이 홍콩을 거쳐 대한항공편으로 김포공항에 내렸다. 산둥성 대표단과 한국 사이에 사무소 교류방식을 두고 쌍방의 입장 차이가 커 뚜렷한 성과는 없었지만 9월 3일 KOTRA 박영수 사장과 이유 단장 간에 비망록은 남겼다. 노태우 대 통령이 88올림픽( )을 앞두고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 선언 을 통 해 사회주의권과의 관계개선 의사를 천명한 것은 1988년 7월 7일이었다. 이병국의 저서 한 중 경제교류현장론 에 의하면 CCPIT의 정홍업 회장 대리는 한 국의 민간경제조직과 접촉하고 있으며 북경과 서울에 무역대표부를 설립하는 가능성 을 모색하고 있다 고 밝혔다. 중국측이 산둥성 대신 베이징에 무역사무소 설치문제를 협의하겠다고 밝힌 것은 그의 발언이 처음이었다. 곧 이어 정 회장이 KOTRA 이선기 사장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양국간의 현안문제를 논의하고 싶다. 편리한 시간에 와 주기 바란다 는 짧은 메시지였다. 이선기 사장이 KOTRA를 비롯, 상공부 등 관련 정 부인사와 함께 중국에 간 것은 1989년 3월이었다. 한국 최초의 공식적인 중국방문이 라고 할 수 있다.(이병국, 154쪽) 1989년 3월 23일 KOTRA 대표단이 중국을 방문, CCPIT측과 회담을 갖고 서 울과 북경에 상호 무역사무소를 개설키로 원칙적으로 합의한데 이어 5월 17일에는 CCPIT 대표단이 방한, KOTRA 측과 무역사무소 개설문제를 협의했다. 그러나 회 의가 아무런 진전 없이 끝날 무렵 중국에서 6 4 천안문사태가 일어나 대표단이 급 히 귀국하고 무역사무소 협의는 일시 중단되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KOTRA는 베이 징국제박람회(BIF ) 참가를 결정하여 어려운 입장에 처한 중국을 도 와줌으로써 양국 간 관계를 개선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1989년 12월 3일 미 소 간의 몰타 정상회담(Malta Conference) 에서 냉전 종 식이 선언되었다. 1947년 시작된 냉전은 본래 두 가지 요소를 근간으로 했다. 하나는 두 개의 상호 적대적, 배척적인 이데올로기였고, 다른 하나는 핵무기였다. 무역대표부 설치에 대한 한 중 두 나라의 협의가 재개된 것은 1990년 7월이었 다. 1989년 서울에서 두 차례에 걸친 KOTRA/CCPIT 회의가 성과 없이 끝난 후 1년 여 만에 다시 만난 것이다. 이 회의가 1년여 만에 열리게 된 것은 명분보다 실리를 취 한다는 우리 측의 방향전환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이선기 KOTRA 사장은 051 Ⅰ. 무역관 이야기

52 회의 재개에 앞서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중국과는 기본적으로 무역사무소 의 개설 자체에 대해서는 의견 조정이 이루어져 있는 상태 이고 9월의 아시안게임 이전에는 무역사무소가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고 말했다. 무역사무소에 대한 협의가 재개되자 KOTRA의 실무담당자는 회사에 휴가원을 내고 휴가를 간 것처럼 한 다음 곧 베이징으로 갔다. 몇 차례의 협의 끝에 KOTRA의 이름 아래 실질적인 무역대표부의 수준으로 합의하는 데 성공했고 이 내용은 국내 고위층에 보고, 재가를 얻었다. 이 회의에서 KOTRA 측 실무책임자로 8차례나 공식 비공식 협상에 참여했던 홍지선 특수지역부장은 여러 차례의 어려움 끝에 합의에 이 르는 실마리가 된 계기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철저한 보안유지 속에 진행되던 무역사무소 개설 협상에 실마리가 풀리게 된 것은 지난 7월 의 북경담판 때였다. 비자발급, 주재원 신분보장 등에서 중국측이 중대한 양보 의사를 밝힌 것이었 다. 8월에 다시 한 번 추가협상을 갖고 10월 중 두 차례의 마무리 협의를 거쳐 무공(KOTRA) 이선 기 사장과 정홍업 중국국제상회 회장 간에 합의서가 정식 조인됐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중국측은 지금까지 써온 CCPIT라는 명칭 대신 중국국제상 회(CCOIC)를 써주도록 요청했다. CCPIT는 정부기관이므로 최근 자신들이 조직하 고 국제조직에도 가입한 민간기관 CCOIC 이름을 사용해 달라는 것이었다. 한국과 의 관계에서 조금이라도 관방( 官 方 )관계 가 아니라는 것을 북한에 보여주려는 의도 임이 분명했다.(이병국, 쪽) 1990년 8월 26일에는 한국 국제민간경제협의회(IPECK) 김복동 고문, 이한빈 회 장 등 경제사절단이 중국을 방문했고, 9월 19일 중국은 최초로 한국기업(선경)의 베이 징사무소 설치를 허가했다. 또한 9월 30일부터 10월 8일 사이에 김정기 외무부 아주국 장이 주베이징 무역사무소 개설 실무 교섭차 중국을 방문, 서울과 베이징에 민간 무역 사무소를 설치한다는 데 합의하고, 실질적 영사기능 부여에도 의견의 접근을 보았다. 뒤이어 10월 20일 KOTRA 이선기 사장이 방중, CCOIC 정홍예 회장과 한 중 무역대 표부 상호설치 합의서에 서명했다. 다음은 KOTRA가 발표한 보도자료의 일부이다. 대한무역진흥공사와 중국국제상회는 서울 및 북경에 조속한 시일내에 상호 대표사무소를 설치하 기로 합의하고 이선기 사장과 정홍업 회장은 1990년 10월 20일 9시에 북경 중국국제상회 회의실에 서 쌍방 실무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합의문서에 공식 서명했다. 쌍방 사무소의 명칭은 각각 대한무 052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53 역진흥공사 주북경대표부, 중국국제상회 주서울대표처로 하기로 하고, 20명 이내의 인원으로 구성 하기로 하였다. 쌍방의 대표사무소는 양국간의 경제무역 증진과 과학기술 등의 교류촉진을 주요 기 능으로 하며 사증 발급업무를 포함하는 정부위임 업무를 수행하기로 하였다. 실무협의에 참가했던 한 관계자에 의하면 쌍방이 끝까지 협의를 계속한 부분은 사무소의 명칭과 파견 인원수였다고 한다. 한국은 마지막 순간까지 통상대표부 수준 을 고집했으나 민간경제 관계임을 내세운 중국측의 주장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무역사무소의 이름도 양측이 각각 속셈을 극명하게 나타내는 것이었다. 한 국이 북경에 세울 사무소의 명칭을 대한무역진흥공사 주북경대표부(KOTRA Representative Office in Beijing)라고 한 것은 정부간의 관계임을 강조하려는 뜻 에서 부 를 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서울에 세울 중국측 기구를 중국국제상 회 주서울대표처(CCOIC Representative Office in Seoul)라고 처 를 강조한 것은 될 수 있으면 민간 관계라는 인상을 주려는 계산이 깔려 있다.(이병국, 171쪽) 1990년 12월 18일부터 22일까지 중국 무역대표부 설치 대표단이 방한한 데 이 어 1991년 1월 10일부터 12일까지는 베이징에서 한 중 무역대표부 교환 개설에 관 한 제2차 실무회담이 열렸다. 그리고 1월 30일 오전 11시, 우리나라는 베이징 중심가 중국 대반점 3층과 4층 그리고 23층에 무역대표부를 개설(1.27. 노재원 초대 주베이 징대표부 대표 부임)했다. 물이 흐르면 도랑이 생긴다( 水 到 渠 成 ) 는 말이 있다. 이후 한 중 관계는 경제 회담과 비밀회담, 양국 외무장관 회담과 수교협상 등을 거쳐 1992년 8월 24일 역사 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노재원 주베이징 무역대표부 대표가 주중 임시대사대리 로 부임했다. 필자 장행복은 1988년 10월부터 1990년 11월까지 홍콩 무역관, 1990년 12월부터 1992년 11월까지 베이징 무역관, 1994년 7월부터 1995년 9월까지 다롄 무역관, 1996년 4월부터 1999년 3월까지 상하이 무역관, 마지막으로 2000년 7월 부터 2004년 1월까지 칭다오 무역관에서 근무했다. 053 Ⅰ. 무역관 이야기

54 하노이 무역관 개관식 행사까지 72일의 나날들 사회주의 국가로의 여정 한정현 오사카 무역관에서 하노이 무역관(Spoke) 개설요원으로 발령받고 호치민 시의 탄손낫트(Tan Son Nhat)공항에 내린 것이 1996년 10월 8일이었다. 개설요원이라고 는 하나 해외에서 이동하는 바람에 제대로 준비할 겨를조차 없었고, 더구나 베트남 입 국비자가 나오지 않아서 1개월짜리 관광비자로 가족과 함께 입국하게 되었다. 스포크(Spoke)-허브(Hub) 개념의 해외조직 개편을 단행하고 스포크 개설을 조 기에 마무리하려는 본사는 우선 입국하여 현지에서 법적지위와 주재비자를 얻으라는 방침이었다. 그러나 당시 베트남 정부는 KOTRA와 같은 비영리기관에 대하여 별도의 법적지위를 주지 않고 민간기업의 대표사무소나 외교공관 중 하나로 등록해 주고 있 었고, 확실한 법적지위 없이 진출한 호치민 무역관이나 수출입은행 등도 민간기업과 같이 법인세를 내도록 요구하여 2 3년간의 법인세를 한꺼번에 내야할 상황이었다. 공항건물 밖으로 나오자 우선 훅하고 달아오른 더위와 습기로 숨이 막힐 것 같았 고, 말로만 듣던 아오자이를 차려입은 베트남 아가씨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2박 3일간 호치민 무역관에서 베트남과 하노이 무역관 개설관련 정보를 대략적으로 얻은 다음 하 노이로 향했다. 저녁 5시경 도착한 하노이 노이바이(Noibai)공항 청사는 시골의 버스터미널 같 이 작고 칙칙한 색상에 조명도 어두웠다. 미리 연락받은 대사관의 상무관이 가지고 온 벤과 승용차를 타고 호텔에 도착했다. 불안스런 첫날밤을 보내고 다음날부터 스포크 개설준비를 하려고 이곳저곳을 찾아다녔지만 관광비자에 법적지위가 없으니 사무실 임대계약도, 직원 고용도 할 수가 없어 어디서 시작해야 될지 막막하기만 했다. 다행히 아이들은 국제학교(UNlS)에 입학이 허용되어 필자는 법적지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한 국대사관과 베트남 외무성 등을 부지런히 찾아다녔다. 어느덧 3주가 지나가고 있는데도 베트남 외무성에서는 KOTRA의 법적지위에 대 054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55 한 회신이 없고 무조건 기다리라는 대답만 되풀이 되었다. 불안해지기 시작하였다. 남 은 일주일 내에 법적지위가 부여되지 않으면 비자기간이 만료되어 가족들을 데리고 다 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정말 답답한 심정이었다. 돌아갈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본사에는 내일까지 회신이 없으면 귀국하겠다고 보고하고 나서도 한국대사관을 비롯 하여 백방으로 수소문을 하면서 외무성의 결재가 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1996년 11월 4일 오후 4시경 베트남 외무성에서 KOTRA Hanoi Office를 한국대사관 내에 개설하도록 허가하며, KOTRA 직원에 대하여 외교관 신분 과 면책특권을 부여한다 는 공문이 대사관에 접수되었다. 비자 기간이 만료되기 하루 전날이었다. 법적지위와 비자가 해결되고 관옥을 한국대사관이 입주해 있는 대우오피스텔 4 층의 비어 있는 공간 60m 2 를 임차하여 본격적으로 무역관 개설준비를 시작하려는데 이것은 또 무슨 마른 하늘에 날벼락인가? 김영삼 대통령이 최초로 베트남을 국빈방문 하게 되면서, 주요 각료와 30대 그룹 회장을 포함한 150여 명의 공식수행원이 하노이 를 방문하는데, 박재윤 산업자원부 장관과 김은상 KOTRA 사장도 공식수행원에 들 어 있는 게 아닌가. 한국대사관에는 비상이 걸리고 하노이 스포크는 사무실 공사도 시작하기 전에 국빈방문 행사 준비에 참여하게 되었다. 본사는 본사대로 사장님이 처음으로 스포크 를 방문하니 스포크 개설을 조기에 마치고 무역관에서 업무보고를 하라는 지시와 함 께 사장님의 베트남 상공회의소 회장 예방, 진출기업 간담회 준비 등 매일같이 팩스를 보내고 있었다. 대사관은 무역관 사정은 알지만 도와줄 여력이 없었고 행사준비에서 빼주는 것이 유일하게 도와주는 것이었다. 대사관이나 주재상사 등은 미리부터 귀띔을 받고 준비를 해왔으나 뒤늦게 통보받 은 본사나 현지의 개설요원으로서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장님이 이용할 승용 차는 하노이에서 어지간한 승용차는 이미 공식수행 예정인 기업들이 다 예약해 놓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임차가 어려웠지만 베트남 상공회의소의 의전용 차량 1대를 가까 스로 배정받았다. 진출기업의 간담회 장소 물색 또한 쉽지 않았다. 숙소로 지정된 대우 호텔 내의 식당은 물론이고 대우호텔 반경 20 30분 내 거리의 식당이란 식당은 기업, 경제단체 등에서 몇 달 전부터 아예 일주일씩 예약을 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다행 히 모 경제단체에서 예약해 놓은 한국식당의 방 하나가 공식 수행에서 빠지게 되는 바 람에 비게 되어서 간담회장 문제는 해결되었다. 드디어 역사적인 한국 대통령 최초의 베트남 국빈 방문일이 다가왔다. 하노이 공 055 Ⅰ. 무역관 이야기

56 항에는 대통령과 영부인, 관계 장관과 수석, 재벌그룹의 오너회장과 공식 수행원들, 기 자들, 그리고 현지 지상사 직원 등 온통 한국 일색이었다. 사장님은 일정상 전용기로 함 께 오지 못하고 다른 비행기로 도착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공항의 공식 행사가 끝나자 마자 필자는 호치민에서 올라온 박찬신 관장님과 함께 사장님 맞을 채비를 해야 했다. 공항 행사가 끝나고 별관 귀빈실 건물로 가보니 이게 웬일인가. 이날 귀빈실을 이 용하게 된 재벌그룹 회장님이 여섯 분이나 되어 주차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행히 무역관이 준비한 상공회의소 차량은 비행기 트랩까지 들어갈 수 있게 되어서 이 문제 는 저절로 해결되었다. 호텔에 도착하고서도 경제수석이 주재하기로 되어 있던 청와대 출입기자단 만찬을 사장님이 주재하게 되어 홍역을 치렀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제한 된 지면상 생략한다. 스포크의 개관행사는 가급적 조용하게 현지 사정에 맞게 조촐하게 하라는 게 본사 의 방침이었다. 대부분의 스포크가 지방도시에 개설되었으니 그럴 수도 있었으나 하노 이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베트남의 수도에 무역관을 개설하고 개관행사를 하지 않는 다면 오히려 이상하니 격식을 좀 갖추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 대사님을 비롯하여 한 국의 주재상사와 베트남 정부 및 상공회의소 등의 의견이었다. 하지만 본사는 예산문제 도 있고 해서 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사정을 안 대사님은 예산 걱정 말고 우선 베트 남 측의 참석 인사를 본 후 개관식 규모를 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주셨다. 직접 정부부처를 방문하여 초청장을 전달하였는데, 법적지위 문제 때는 그렇게도 애간장을 태우던 사람들이 예상외로 다 참석하겠다고 하였다. 상공회의소 부회장을 비롯하여 무역부, 외무부, 투자계획부 등에서 국장급 이상이 참가하겠다고 하니, 한국 주재상사 대표를 포함하면 줄잡아 100명 정도가 되었다. 대사님도 걱정되는 눈치였 다. 이런 사정을 알고 (주)대우에서 대우 오피스텔의 비어 있던 장소를 사용할 수 있도 록 해주었고, 대우호텔에서 뷔페를 무료로 제공해 주기로 하여 장소와 예산문제가 한 꺼번에 해결되었다. 1996년 12월 20일. 하노이 무역관 개관식이 성황리에 끝나고, 필자는 처음으로 기 쁨과 보람의 눈물을 맛보았다. 5년이나 흘러 기억에도 희미한 지난 일을 정리하여 보 기로 한 것은 어려운 시절을 잘 참아주었던 가족들, KOTRA에 애정을 가지고 도와주 셨던 김봉규 대사님을 비롯한 대사관 직원 여러분, 그리고 (주)대우, 대우호텔을 비롯 한 하노이에 주재하였던 지상사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이다. 필자 한정현은 1996년 10월부터 1998년 11월까지 하노이 무역관에서 근무했다. 05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57 아바나 무역관 개설 이야기 사회주의 국가로의 여정 기현서 OB 아바나 무역관은 2002년 초부터 개설업무를 시작하였으나 2004년 상반기에야 쿠바 정부로부터 설치허가를 받아 2005년 9월 12일 개설되었다. KOTRA가 아바나 무역관을 설치해야 한다는 논의는 과거에도 꾸준하게 있어 왔 고 또한 구체적으로 설치를 위한 활동도 했었다. 그러나 최소한 2001년이 끝나는 시점 에서 볼 때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오히려 쿠바정부는 아바나 무역관의 설치 문제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우리 쪽의 환경도 만만하지 않았다. 우리 외교부는 명시적이지는 않았지만 KOTRA가 쿠바에 무역관을 설치하는 것에 대해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이것은 한국-미국-쿠바 간에 여러 가지 외교적인 문 제가 있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아바나 무역관의 창설을 구체적으로 지시하고 추진한 사람 은 오영교 사장이었다. 오영교 사장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쿠바의 전략성을 인식하고 관심을 가져오다가 중남미본부 창설을 계기로 그 임무를 중남미본부에 부여하고 추진 하도록 했다. 이것이 아바나 무역관 개설업무의 시작이었다. 쿠바정부의 무역관 개설에 대한 부정적인 분위기는 2002년 4월 필자가 쿠바 외무 부의 벨라스코(Velasco) 아태국장을 면담할 때 그가 한 말에 묻어 나있다. 그는 필자 와의 면담에서 인사말이 끝나자마자 한국과 쿠바는 적이다. 우리는 KOTRA가 동유 럽에서 한 일을 알고 있다 고 말했다. 정통 외교관이 이렇게 전투적인 표현을 사용한 다는 것은 아주 이례적이었다. 벨라스코 국장의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있었다. 첫 째, 쿠바 정부는 KOTRA가 아바나에 무역관을 설치하는 것을 정치 외교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고 둘째, 그들은 동구라파 사회주의 국가들이 개방될 때 개설되었던 무역 관의 활동내역이 꼭 상업적인 업무만 한 것이 아니며 신뢰하지 못할 활동도 있었다 라 는 불신의 표시였다. 057 Ⅰ. 무역관 이야기

58 그래서 필자는 벨라스코 국장에게 한국은 쿠바와 전쟁을 한 적이 없다. 그래서 적 국이 아니다. 단지 국가통치 이념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쿠바에 무역관이 설치된다 하 더라도 그것은 순전히 상업적인 것일 뿐 정치외교적인 의미는 없다. 양국 간에 현실적 으로 일어나고 있는 무역을 조금 더 활발하게 해보자는 의미 이상은 없다. 또 KOTRA 가 무역관을 설치할 경우 신뢰가 필요하다면 우리는 당신들이 잘 아는 멕시코 시티 무 역관 직원들을 파견하겠다. 당신들이 우려하는 그런 일들은 없다 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는 이상하게도 필자를 배웅하러 같이 걸어 나오면서 필자의 등을 가볍 게 두드리며 매우 조용하게 Step by Step Policy 라고 말했다. 매우 중요한 언질이었 다. 이것은 아마도 면담시에는 동석한 2명의 쿠바 외교부 직원이 면담발언을 속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그렇게 강하게 얘기를 할 수밖에 없었고, 필자를 배웅하면 서 진실이 담긴 조언을 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 때까지 중남미본부에서 생각해 왔던 무 역관 개설방향은 Step by Step Policy 와는 거리가 있었다. 어떻게 하든지 무역관 개 설을 도와줄 수 있는 쿠바의 유력인사를 찾아 설득하여 개설허가를 얻어내는 것이었 다. 여러 경로를 활용했었는데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았다. 즉, 우리나라의 상사들이 나 현지 교포가 알고 있다는 유력 인사들을 직간접적으로 알아본 결과 무역관 개설을 도울 만큼 유력하지가 않았다. 결국 필자는 쿠바에서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Fidel Castro와 그의 동생인 Raul Castro밖에 없다는 것과 그들을 통해 무역관 개설 문제를 논의한다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했다. 그래서 중남미본부는 유 력인사를 접촉하여 개설을 추진하는 소위 공수부대식 접근방법을 포기하고 벨라스코 국장이 조언해 주었던 Step by Step Policy 에 따라 서로 간의 신뢰를 쌓아가는 보병 전투 방식을 채택하여 추진하기로 방향을 바꿨다. 우선 중남미본부가 명목적이기는 하지만 쿠바의 민간업체를 대표한다는 쿠바 상 공회의소와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조금씩 신뢰를 쌓은 뒤 쿠바 상공회의소가 대외 무역부에 무역관 개설 필요성을 제기하게 하고, 다시 대외무역부가 외교부에 무역관 개설의 필요성을 건의하며 외교부가 이를 국가평의회에 상정하게 한다는 시나리오였 다. 이 방식은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었지만 당시에 중남미본부가 할 수 있는 가장 현실 적인 방법이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이 방향으로 업무를 추진하여 쿠바 상공회의소 와 신뢰를 쌓아갔다. 중남미본부가 년의 기간 중 쿠바에서 실시한 프로젝트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주요 내용을 보면 아바나 박람회 참가, 한국경제 세미나 개최, 한국 수출입단 05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59 파견, 한국 비즈니스맨 개별방문 추진, 쿠바 무역진흥청장 방한 초청, 쿠바 상 의-KOTRA간 사이버 상담회 개최, 2003년 중남미지역 무역관장회의 개최, 오영교 사 장 쿠바 방문 2회, KOTRA-쿠바상공회의소 업무협조약정 체결, KOTRA-쿠바 대외 무역청 업무협조약정 체결, KOTRA-쿠바 투자청 업무협조약정 체결 등이 있다. 2003년 말 필자는 본부 귀임발령을 받았다. 하지만 그때까지 쿠바정부로부터 무 역관 개설에 관한 어떤 정보도 나오지 않아 필자는 애를 태우고 있었다. 그러던 중 11 월경에 Anaiza 쿠바 투자청장이 멕시코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이때 필자는 Anaiza 청장을 접촉하여 진행상황을 문의했는데, Anaiza 청장은 무역관 개설 안건이 최종 단 계에 가 있다고 귀띔해주면서 그곳에서의 결정문제는 우리 관료들이 어떻게 간여할 수가 없다 고 말했다. 이에 필자는 무역관 개설안건이 대외무역부에서 외교부를 통과해 국가평의회에 상정되었다고 판단하고 즉시 쿠바를 방문해 Olena 무역청장에게 진행 상황을 설명해 주는 증거 서한을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따라 Olena 청장은 필자에게 쿠바 대외무역 부 장관이 오영교 사장에게 보내는 무역관 개설 진행상황에 대한 서한을 건네주었다. 이 서한에는 Anaiza 투자청장이 얘기한 것과 같이 무역관 개설 허가 안건이 관료들의 손을 떠나 정치적인 곳에 가 있다 는 문구가 있었다. 이 의미는 무역관 개설문제가 정 치적인 사안을 결정하는 국가평의회에 올라갔다는 것이어서 이제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필자는 이 서한을 오영교 사장에게 보고하고 임무를 마쳤다. 그 후 우제량 본부장이 후임 중남미본부장으로 부임하여 2004년 쿠바정부로부터 개설허가를 받고 개설에 따른 여러 가지 복잡한 행정업무를 잘 마무리한 후 홍기화 사 장이 재임할 때 아바나 무역관을 창설하였다. 끝으로 그 때 함께 현장에서 활동했던 동료 직원들의 이름을 열거하면서 그들의 노 력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자 한다. 사업을 기획하고 현지출장을 하면서 고군분 투했던 김건영 처장, 2002년 쿠바 아바나에서 사무실도 없이 3개월가량 현지 체재하며 3개의 업무협조약정을 이끌어 냈던 박성기 부장, 쿠바 상공회의소와 사이버 상담 등 많 은 시장개척업무를 추진했던 김영서 차장과 전춘우 부장, 주멕시코 쿠바대사관과 접촉 하며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측면에서 많은 도움을 준 안영주 부장, 그리고 아바나 현지에서 중남미본부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현지 통역 Felipe와 개인적 친분이 두터웠 던 김윤희 차장이 그들이다. 필자 기현서은 2002년 1월부터 2003년 12월까지 중남미지역본부장으로 멕시코 무역관에서 근무하면서 아바나 무역관 개설 준비작업을 했다. 059 Ⅰ. 무역관 이야기

60 해외 무역관에서 이런 일이 03 라이베리아 도착 환영(?) 축포 061 걸프전쟁 속 쿠웨이트 탈출기 064 뗏목을 타고 콩고 강을 건너다 067 카다피 최후의 3개월 동안 070 레바논 전쟁의 기억 073 이라크, 달콤쌉쌀한 추억 077 여기는 바그다드입니다 080

61 라이베리아 도착 환영(?) 축포 해외무역관에서 이런 일이 김인식 OB 서부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의 수도 몬로비아. 1980년 4월 8일 금요일 부활절 밤. 내 죽는 날까지 결코 잊을 수 없는 밤이다. 아프리카 서부 짱구머리 뒤통수 부분에 위치한 라이베리아의 몬로비아가 필자의 첫 해외 근무지였다. 수출입국을 위한 무역역군으로서 몬로비아 무역관에 발령받아 4 월 1일 현지에 도착했다. 혼자 스스로 업무를 파악하고 상황을 처리해야 하는 1인 포 스트 지역인데다가 임지에 도착한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은 왕초짜가 피비린내 나는 소용돌이와 맞부닥쳤던 그날들. 총소리를 처음 들은 건 밤 9시경이었다. 간헐적으로 들리던 총성이 얼마 지나지 않아 콩알 볶듯이 요란스레 밤공기를 진동시켰다. 날카롭고 불안한 금속성이었다. 집 바로 아래 사거리에서도 자동소총이 난사됐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내는 낮은 포복을 시작했다. 모성이 뭔지 7개월짜리 딸애를 안고 하는 낮은 포복이다. 무슨 일 이냐고 묻는 아내에게 부활절 축제행사가 아니겠냐고 했지만 믿지는 않는 모습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알아보라고 하우스보이를 밖으로 보냈는데 좀체 돌아오지 않 는다. 이놈은 대체 어디 가서 돌아오지를 않지. 하우스보이는 새벽 1시가 넘어서야 돌아왔다. 흥분한 흑인의 눈매는 붉었다. 도대체 무슨 난리가 났느냐 했더니 No president, no government, no policeman 이란다. 아! 무정부상태. 순간적으로 내 가 이놈한테 당하고 내 마누라가 이곳 아프리카 흑인들한테 당할 수 있겠구나 하는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우리 식구를 지키 겠다고 한다. 좋다, 내 너를 믿기로 하자, 사태가 좋아지고 나와 내 가족이 무사하다 면 후히 보상해주마. 061 Ⅰ. 무역관 이야기

62 새벽 6시경. 상황은 점점 나빠졌다. 시내 여기저기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길거리 로 쏟아져 나온 흑인 원주민들이 처음에는 무리지어 다니더니 어느새 폭도로 변해버 렸다. 상가와 슈퍼마켓이 털리고 은행과 호텔이 털렸다. 외국인이 사는 집들 역시 그 들의 좋은 먹잇감이다. 집 앞 도로에 세워둔 차가 악살박살이 났다. 하우스보이가 대 사관으로 피하라고 권한다. 길거리에 나가 군인 두 명을 샀다. 각각 300달러를 달란 다. 당시 필자의 급여가 900달러 남짓했는데.. 좋다, 주마. 아기를 품에 안은 아내가 자동차 중앙에 타고 양옆에 군인 둘을 앉힌 후 자동소총으로 공중사격하며 데모대를 헤치며 질주해 위험지역을 무사히 통과했다. 대사 내외가 우리 식구를 맞아줬다. 대사관저에 이틀 머물렀다. 영 불편하다. 일주일 전에 부임 인사한 것이 고작인 데 갓난아이까지 데리고 들어와 관저에서 뭉개는 게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무역관 과 집이 있는 곳에 돌아가겠다고 하니 대사 내외가 위험하다고 극구 만류했다. 그래 도 가겠다고 하자 아내는 아무 말 없이 기저귀 가방을 챙겼다. 넌 여기 있어라, 네가 있으면 불편하다, 무슨 일이 있으면 골목길을 달려서라도 돌아오마 했지만 막무가 내로 따라나선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겠단다. 나를 믿고 아프리카까지 따라 왔는데 그래 함께 가자. 무역관에 돌아와 보니 다행히 하우스보이가 지키고 있었다. 어둠이 내렸다. 현관문을 여러 명이 부서져라 두드린다. 문틈으로 내다보니 대여섯 명의 흑인청년들이 서있었다. 이놈들 우리가 돌아온 걸 알고 왔구나, 이제 우 리 차례구나, 이틀 사이에 백여 명의 외국인들이 죽었다는데.. 문을 열어주지 않고 버 텼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는 게 심상치 않았다. 하우스보이에게 아는 사 람들이냐고 물었더니, 그렇단다. 이놈들이 짜고 수작부리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지만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자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다. 오늘 밤 군인들이 이 건물에 불을 지를 것이니 빨리 피하라는 것이었다. 건물 1층과 2층이 은행인데 -은행 은 이미 왕창 털렸다- 은행주가 농림차관이란다. 장차관을 다 잡아들였지만 농림차 관만 못 잡았는데 이 건물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으로 생각한 군인들이 불을 지른단 다. 마침 길 건너편 집에서 펑하고 불길이 솟았다. 저렇게 화염에 휩싸이는구나. 대사 한테 전화했다, 어찌하면 되겠냐고. 그래서 가지 말라고 만류하지 않았느냐, 6시부 터 통행금지인데 지금 이 시간에 어느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 방법 없 다, 그냥 살아남아라. 더 이상 전화할 데도 도움을 청할 데도 없다. 아! 죽는구나, 이 렇게 죽는구나, 삼국지에 나오는 봉추선생 방통이 낙봉파에서 한탄하듯. 그래도 봉 추선생은 서른여섯 살이었지만, 서른한 살의 김인식이가 이렇게 죽으러 아프리카에 왔구나, 마누라는 남편 잘못 만나 이 지경에 이르렀고.. 팔다리가 갑자기 후들거렸 062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63 다. 땀구멍, 털구멍으로 온 몸의 진기가 스멀스멀 빠져 나갔다. 그래, 죽으면 죽으리 라, 한번은 죽는 것 아니냐, 아니다, 살자, 살아남자. 목욕탕 욕조에 물을 채웠다. 담 요를 욕조 물에 담갔다. 너희 놈들이 불을 지르면.. 젖은 담요를 두르고 애기를 안고 뛰어 나갈 터다. 흰색 천을 준비했다. 태극기도 준비했다. 불 지르면 창밖으로 흔들어 야지, 여기 사람 있다, 총 쏘지 마라, 이놈들아. 불 지르는 걸 그렇게 기다렸다. 기진 맥진하며 날밤을 그렇게 새웠다. 무정부상태가 2개월여 지속됐다. 그런 식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기며 해외 첫 근 무가 시작됐다. 우리 식구가 이렇듯 열렬하게 환영받은 것은 17인의 사병이 일으킨 쿠데타 덕분이었다. 상사 1명, 중사 1명, 하사 2명, 사병 13명이 주동세력이었다. 4월 8일 부활절 밤을 기해 대통령궁을 쳐들어가서 대통령을 무참하게 시해하고 장차관 들을 잡아들여 해변에서 참수하고 전시했다. 어떻게 17명의 사병이 쿠데타를 일으키 느냐고? 소가 웃을 일 같지만 역사의 응보였다. 나라 이름 라이베리아는 리버티 (liberty)에서 나왔고 수도 이름 몬로비아는 미국 몬로 대통령 이름에서 유래한다. 미 국에서 해방된 일단의 흑인 노예들은 선조들이 끌려왔던 땅인 아프리카에 무작정 와 서 나라를 세웠다. 이들은 자기 조상들이 당한 식으로 원주민 흑인들을 노예 취급하 며 나라를 운영해 왔다. 군대에서 원주민 출신이 올라 갈수 있는 최고계급이 상사였 다. 결국 이주 흑인들의 탄압에 저항한 원주민들의 성공한 쿠데타였던 거다. 우두머 리는 사무엘 도우(Samuel Doe) 상사.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던 도우 상사는 도우 원수가 되어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우리나라를 국빈방문(1982년 5월)한 적도 있지 만 1990년 9월 9일 고문을 받으면서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모든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槍 杆 子 里 面 出 政 權 ). 마오쩌둥( 毛 澤 東 )의 말이 라고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 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마태복음 26장 52절) 뿌린 대로 거두었다고나 할까. 힘들었다. 고생도 지지리 했다. 그 이후에도 서너 차례 더 생사를 가르는 고비를 넘겼다. 그렇지만 아프리카 밤하늘의 별빛처럼 내 가슴에도 빛나는 별들이 있다. 현 지부임 당시 7개월짜리 간난 딸애가 결혼해서 나를 할아버지로 만들어줬다. 아프리 카 라이베리아에서 태어난 아들은 어엿한 성인으로 성장했다. 간혹 부부회식 자리 등에서 아내를 소개할 기회에 나는 집사람을 아내이자 동지라고 소개하곤 한다. 필자 김인식은 1980년 4월부터 1983년 6월까지 라이베리아 수도 몬로비아 무역관에서 근무했다. 몬로비아 무역관은 1978년 10월 개설되었다가 1984년 12월 폐쇄되었다. 063 Ⅰ. 무역관 이야기

64 걸프전쟁 속 쿠웨이트 탈출기 해외무역관에서 이런 일이 장동락 OB 1990년 8월 2일 이슬람권의 주말인 목요일 이른 아침이었다. 거리에는 눈에 익 지 않은 전투복차림의 수많은 무장군인들이 보였다. 탱크와 장갑차 일부는 아파트를 향해, 일부는 바다를 향해 포신을 겨누고 있었다. 이라크군이었다. 외교관들이 많이 거주하는 아파트이긴 하지만, 마치 포위한 듯이 포진한 그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온 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출근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에 아이들을 달 래고 아내를 안심시킨 후, 아침식사를 거른 채 무역관으로 차를 몰았다. 도로에 50미 터마다 설치된 이라크군 검문소의 검문과 통행제한으로, 평소 20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가 1시간 30분이나 걸렸다. 무역관이 입주해 있는 RAED CENTER 건물 뒤편 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무역관이 있는 빌딩을 바라보니 수십 명의 사람들이 20~30m 떨어진 필자를 향해 소리치는데 여기저기서 들리는 총탄과 포탄소리와 뒤 섞여 무슨 소린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총탄이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 가는 소리가 들려 주차장 자동차 사이 땅바닥에 엎드리고 높은 포복으로 빌딩까지 기어 사무실로 올라갔다. 우선 전화로 본사에 현지실정을 1차 보고하였다. 이선기 사장님이 출장 중인 도 쿄로부터 팩스 메시지가 들어왔다. 서울의 MBC TV의 기자가 전화상으로 자신을 소 개하고 현지상황에 대하여 질문을 던졌다. 인터뷰에 응해 주었지만, 통신망이 끊어지 기 전에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 급박한 사정을 이해시키고 인터뷰를 짧게 끝냈다. 8 월의 작렬하는 태양 아래 빌딩 관리인 등 모두가 대피한 후라 에어컨이 가동되지 않아 서 사무실은 사우나탕을 방불케 했고, 쿠웨이트를 대부분(?) 점령한 것 같은 이라크 군에 의해 통신망이 단절될까봐 노심초사하는 마음까지 겹쳐 땀이 비 오듯 하였다. 힘겹게 작성한 현지동향 보고서를 사장님께 팩스기로 송신하면서 무심코 왕궁 쪽을 내다보았다. 그 순간 미사일형의 폭탄을 장착한 전투용 헬기 10여 대가 무역관 064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65 건물을 향해 일렬종대로 거의 코앞에 접근 해 오는 것이 보였다. 왕궁 인근의 유일한 고층인 RAED CENTER 빌딩을 공격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고 이제 죽는구나! 했다. 송신 중인 보고서도 문제지만, 도망칠 수 있는 여유가 없음을 직감하였다. 그 런데 전투헬기 여러 편대는 무역관이 입주해 있는 건물에서 불과 수십 미터쯤 거리에 서 좌로 돌며 왕궁을 폭격하기 시작하였다. 잠실 경기장만한 넓은 왕궁은 이내 불바 다로 변하며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라크의 침공이 있기 전날인 8월 1일,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서는 쿠웨이트 총리 와 이라크 총리를 단장으로 한 양국 대표단 회담이 개최되었지만 결렬되었다. 쿠웨이 트에 있는 여러 곳의 유전지대 중 양국 국경에 인접한 루마일라(Rumaila) 유정 이 핫 이슈였다. 이라크 정부는 그동안 쿠웨이트가 루마일라 유전지대에서 생산하는 원유의 3분의 2의 소유권이 이라크에 있다고 주장하여 왔었기 때문이다. 회담결과를 보고받은 후세인 대통령은 8월 1일 밤에 탱크 350대 등 화력을 국경지대로 집결시킨 후 2일 새벽 2시에 쿠웨이트로 진격명령을 내렸다. 쿠웨이트군은 이라크 국경지대에 탱크 60여 대 를 배치하고 있었지만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일부 남겨진 주요 문서를 파기하기 위해 침공당한 다음날인 8월 3일 직원을 태우 고 차를 몰아 무역관으로 향했다. 우리 차 앞에는 승용차 3대가 달리고 있었다. 왕궁 정 문 위치의 이라크 군인 2명이 100m 전방에서 기관총을 들어 올렸다. 앞차의 운전자와 옆에 탄 사람, 뒤차 2대의 각 운전자 등 4명이 우리 눈 앞에서 모두 사살되는 것을 목격 했다. 후진하려고 뒤를 돌아보니 승용차 한 대가 차 꽁무니에 바짝 다가와 있었다. 진퇴 양난이었다. 이제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왼편의 중앙분리대로 만들어진 화 단과 화단 사이의 좁은 폭을 관측하니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삶과 죽음을 가로 지른 문턱으로 보고, 급히 핸들을 왼쪽으로 꺾었다. 직원에게 엎드리라고 소리치고는 오른쪽 차창너머로 이라크 병사들을 바라보니 한 명이 분리대 화단 위로 올라서면서 사격자세를 취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라크 병사가 우리 차를 향해 총탄 세례를 퍼부었다. 실탄이 날아오는 소리와 차량 어딘가에 총알이 박히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 었으나 고개를 숙이고 몸을 낮추어 운전해서 도망쳤다. 한국 정부는 쿠웨이트 교민 철수 계획을 수립했다. 이라크 정부는 한국 정부의 전세기(KAL)가 쿠웨이트 공항에 착륙하는 것을 승인할 수 없고, 육로로 바그다드 를 경유 요르단 국경을 넘어 철수하는 것을 승인하겠다고 통보했다. 이에 한국 정부 는 다시 3단계(1차 8월 13일, 2차 8월 15일, 3차 8월 17일) 철수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라크정부는 8월 24일까지 쿠웨이트 내의 전 외교관들을 철수하라고 했다가 다시 065 Ⅰ. 무역관 이야기

66 외교관과 관용여권 소지자는 그 누구도 쿠웨이트를 떠날 수 없다고 입장을 번복했 다. 3차에 철수키로 한 필자와 가족은 철수할 수도 잔류할 수도 없어 다시금 진퇴양 난의 신세가 되었다. 대사관과 상의한 끝에 변덕이 심한 이라크 정부에 휘둘리는 것 보다는 3차 팀과 같이 일단 출발키로 결정하였다. 모든 살림살이를 고스란히 남겨둔 채, 속옷 등 아이들의 옷가지와 수돗물과 우유, 그리고 두 끼 분의 주먹밥과 담요 3장 을 차에 싣고 떠날 준비를 마쳤다. 8월 17일 새벽 4시, 3차 철수팀과 함께 대사관 앞에 집결하였다. 다섯 대씩 1개 조로 편성하니 5개조 24대였다. 필자는 3조 조장을 맡고 1차 목표 지점인 바그다드 를 향해 대장정의 길에 나섰다. 섭씨 40도가 넘는 찌는듯한 사막을 가로지르는 2,000km가 넘는 장거리 주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시동이 언제 꺼질지 모를 자동 차에 마음 졸이며 3일 이상을 달리고 또 달렸다. 이라크의 제2도시 바스라를 지나 이 윽고 바그다드에 위치한 현대건설에 도착했다. 직원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 요르단을 향해 달려 저녁 늦은 시각에 국경에 도착, 지루한 몇 시간을 보낸 후 출국승 인을 받았다. 마치 죽음의 늪에 빠져 있다가 생명줄을 붙잡은 기분이었다. 요르단의 도로는 도보 피난민으로 가득했고, 대로변의 광야 같은 넓은 들판에 는 피곤한 몸을 쉬었다 가려고 앉거나 누워 있는 사람들로 즐비했다. 필자와 가족도 차에서 나와 그들 속에 섞이어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 르겠다. 누군가가 흔들어 깨웠다. 우리 3차 철수팀을 맞으려고 100km가 넘는 암만 에서 온 우리 대사관 참사관이었다. 국경을 향해 가던 중, 반대편 도로변에 KOREA 란 글씨가 붙은 차를 보고서 멈추었다고 한다. 참사관의 구조지원 요청으 로 온 요르단 경찰의 도움을 받아 육군병원에 후송되어 입원가료를 받은 후 암만 무 역관의 도움으로 암만까지 안전하게 올 수 있었다. 다국적군의 작전명 사막의 폭풍작전(Sand Storm) 인 걸프전쟁은 1991년 1월 17 일 발발하여 2월 28일 종결되었다. 필자는 걸프 전쟁이 끝난 지 열흘도 되지 않은 상황 에서 정부와 본사의 강압에 의해 내키지 않는 쿠웨이트 출장길에 올랐다. 20일간 쿠웨 이트 전역을 다니며 본사가 제시한 많은 조사항목의 해답을 모두 찾고 구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출장목적은 중동특수를 잡기 위한 무역관의 조속한 재개설 가능성 조사였 다. 하지만 결론은 쿠웨이트 무역관 재개설 당분간 불가 였다. 필자 장동락은 1988년 7월부터 1990년 10월까지 쿠웨이트 무역관에서 근무했다. 06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67 뗏목을 타고 콩고 강을 건너다 해외무역관에서 이런 일이 고광욱 젊은 날 필자는 1980~1990년대를 아프리카 대륙에서 보내고 이제 KOTRA 창 립 50주년을 맞이하여 파리의 오페라 하우스를 바라보는 아브뉘 드 로페라(Avenue de l Opera)로 돌아왔다. 앞으로 선후진국을 넘나들며 새로운 무역 2조 달러 시대를 열어갈 후배들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현재 아프리카에 근무하고 있거나 앞으로 아프 리카지역에 무역관을 신설할 직원들을 생각하면서 이 글을 정리해 보았다. 1989년 매서운 북서풍이 한반도를 기습할 무렵인 11월 말 또다시 KAL기에 몸 을 싣고 8개월 된 막내아들을 등에 업고 우리 다섯 식구는 앵커리지를 향해 출발했다. 서울에서 약 8시간 비행한 후에 앵커리지에서 1시간의 휴식. 눈발이 흩날리는 알래스 카의 산악지대를 바라보면서 미지의 아프리카 심장부 콩고(당시 국명 자이르) 킨샤 사를 상상해 봤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앵커리지를 출발한 비행기는 해를 따라 서쪽으로 서쪽으로 약 13시간의 긴 비행 끝에 파리에 도착하여 에어프랑스로 환승했는데, 비행기 내부가 온통 컴컴한 것(?) 같았다. 기수는 다시 남쪽으로 잔잔한 지중해를 지나자마자 광대한 사하라 사막이 끝없이 펼쳐지는가 했는데, 또다시 밀려오는 밀림 그리고 밀림들. 8개월 된 아들놈에게 그 쓰다는 키니네 약을 어떻게 먹여야 할지, 검은 대륙 아프 리카의 심장부 자이르 킨샤사 무역관장으로 부임한 필자는 이제 오기밖에 남지 않았 다. 그리고 매일 밤 섭씨 30도가 넘는 열기 속에서 모기와의 전쟁은 시작되고, 열이 펄 펄 끓는 어린 아들을 안고 새벽길을 달리던 병원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타잔을 찾아 서, 그리고 황금동굴을 찾아서. 1980년대 말 냉전시대가 막을 내리자 모부투(Mobutu Sese Seko) 장기 독재정 권에 대한 국내외 압력이 고조되었다. 그리고 1989년 말 1990년 초 자이르의 파국적 인 경제상황, 정부의 극심한 부패, 인권 탄압에 대한 국제적인 비판 등과 국내 저항세 067 Ⅰ. 무역관 이야기

68 력에 의해 모부투 정권은 힘을 잃기 시작했다. 불안이 도사리고 있는 지역에서는 우선 현지인들에게 좋은 인식을 심어주어야 한다. 사회 거물급 인사도 중요하지만 주위에 있는 하류층의 현지인들을 챙기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명심하자.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어느 날 갑자기 현지직원을 옆에 태우고 그가 사는 집으 로 가자고 했다. 아프리카인들은 아이들을 많이 낳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줄 과자며 화장지 등을 사가지고 무작정 집을 방문한 것이다. 현지인들 대부분이 전화가 없어 급한 용무에 대비하여 집을 알아두는 것이 필요하기도 하려니와 현지직원 가족에게 도 좋은 빠트롱 (patron 주인님)이라는 인상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멘트로 둘 러싸인 조그만 집 내부에는 땅 위에 천 하나만을 깔고 생활하고 있는 현지인들, 모기 와 파리 그리고 도마뱀과 공생하고 있는 곳이었다. 외국인이 주로 살고 있는 동네에는 집마다 대문을 열어주고 집을 지키는 파수꾼 들이 있는데 필자는 현지 기념일이나 추수절, 연말 등에는 잊지 않고 옆집, 앞집, 뒷집 등에서 일하는 현지인들에게 조그만 선물이나 용돈(한국 돈 100~200원 정도)을 쥐 어주곤 했다. 현지인들보다 체구도 작고 힘도 없는 동양인이 현지인들을 다루는 방법 은 간단한 게 아닌가? 철따라 빵 좀 사주면 황송스럽게 생각하는 주위 현지인들에게 인격적으로 무시하지 않는 척(?) 그리고 인정 있는 빠트롱 주위의 현지인들과 적당히 친해두면 결정적인 순간에 엄청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얼마 안가서 경험하 게 된다. 1991년 9월 중순. 내일 모레면 한국은 추석이다. 무척이나 더운 콩고 강가, 킨샤사 의 저녁 무렵은 그래도 강바람이 한 줄기 스쳐 지나가고 바람 속에 들려오는 총소리. 밤새 들려오는 총소리에 초조와 불안감. 긴장 속에 아침을 맞아 무전기로 대사관과 연락을 취해 보았지만 대사관에서도 정확한 정보를 모르고 있다. 총소리는 이제 기관 총 소리로 바뀌어 점차 커져가고, 군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상가와 외국인 주택을 약 탈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이 사태를 누가 막지? 당시 자이르는 모부투 대통령의 장기 군사독재(1965년 11월 24일 집권)에 시달 려 인심이 이반되고 있는 가운데 설상가상으로 군인들의 급여가 수 개월째 지급되지 않아 군인들의 불만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화난 군인들의 행동은 엉뚱하게도 상가 와 외국인 주택 약탈로 이어져 이제는 앞집, 뒷집 등 벨기에 사업가들의 집들이 군인 들에게 털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디서 몰려들었는지 현지인들이 줄줄이 그 집에 들어 가 남은 물건들을 싹쓸이해 가고 있었다. 이제 우리집 차례인가? 대문 밖에 있는 군인 책임자를 만나 협상해보자. 마음을 06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69 다잡고 나가보니 정말로 무서운 군인들과 현지인들이 진을 치고 있다. 그런데 어라, 현지인들이 군인들을 향하여 이 집은 아니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지 않은가. 평소에 조 그마한 선물 그리고 용돈을 주고 아프리카 사람들이라고 무시하지 않은 결과였던 것 이다. 군인들은 다시 옆집을 약탈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4일 동안 계속된 소름끼치는 총소리에 가족들의 불안과 초조함이란. 언제 또 들이닥칠지 모르는 총 든 군인들에 대한 두려움(정부는 군인들의 약탈, 성폭 행 등을 방임해주는 형태로 군인들의 불만을 해소하고 있다니 이것이 국가란 말인 가?). 약탈이 자행되고 4일 만에 프랑스군의 진격이 시작되어 자국민을 포함한 외국 인 철수작전이 개시되었다. 우리 교민들은 그래도 그곳이 삶의 터전이어서 쉽게 떠나 지 못하고 철수작전 마지막 날 대사관, KOTRA 가족들과 어쩔 수 없이 뗏목 (200~300명이 탈 수 있는)을 타고 콩고 강을 건너게 되었다. 교민 철수작전의 책임 자였던 필자는 40여명의 교민들을 이끌고 콩고 강가로 나갔다. 철수작전의 마지막 날 이라 삼엄한 프랑스군의 감시 하에 콩고 강은 한없이 넓어만 보였고 9월 중순이지만 열대 강바람이 훅하고 실려 왔다. 콩고 강을 건너 콩고의 수도 브라자빌에 도착, 저녁을 간단히 마쳤다. 모두들 비 장한 심정으로 언제 다시 만날 기약도 없이 이별의 아픔을 나누면서 미 대사관에 요청 한 특별기는 파리를 향하여 떠나고. 필자는 다음날 홀로 다시 뗏목을 타고 콩고 강을 눈물로 적시면서 킨샤사 사무실로 돌아왔다. 고독과 공포 속에 해가 바뀌고 어느덧 7개월이 지났다. 1992년 4월 브라자빌 공 항에 도착한 그리운 식구들은 다시 콩고 강을 건너 필자와 합류했지만 본사는 4월 말 무역관을 폐쇄했다. 귀국하는 비행기 속에서 내 눈에는 아프리카의 행복을 기원하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후진국에서는 지도자가 나라를 어떻게 이끄느냐에 따라 전 국민 의 행복이 좌우된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면서. 휘황찬란한 파리의 오페라 하우스를 바라보며 불현듯 아프리카 생활이 그리움 으로 남는 이유는 필자의 젊은 날의 아쉬움일까? 연민, 그리고 조그마한 나의 몸집으 로 오지를 휘젓고 다녔던 열정. 큰 몸집의 아프리카인들이 그래도 빠트롱이라고 필자 에게 충성을 바쳤던 기억들. 필자 고광욱은 D.R. 콩고 수도 킨샤사무역관에서 1989년 12월부터 1992년 4월 말까지 근무했다. 필자는 모로코 카사블랑카와 코트디부아르 아비쟝에서도 근무한 경험이 있다. 069 Ⅰ. 무역관 이야기

70 카다피 최후의 3개월 동안 해외무역관에서 이런 일이 이길범 2011년 5월 29일 튀니지로 옮겨 임시 사무실을 운영한 지 꼬박 3개월이 지난 9월 8일, 드디어 트리폴리로 복귀했다. 그동안 트리폴리는 많이 변해 있었다. 카다피 상징 녹색기는 시민군 상징 삼색기로 바뀌었고, 담벼락에는 자유 리비아(Free Libya), 우리는 꿈이 있다(We have a dream) 등의 격문과 카다피를 조롱하는 그림들로 가득했다. 천만다행인 건 무역관, 주택, 현지직원들 모두 피해가 없었다는 점이다. 다 시 그때 그 상황을 되짚어 본다. 2011년 2월 17일, 녹색광장에서 대대적인 반정부시위가 예정된 분노의 날(Day of Rage) 이었다. 카다피는 자신도 한 시민으로서 부패한 정부를 성토하겠다며 위풍 당당하게 녹색광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트리폴리 시민들은 열렬히 환호했고, 이후 카 다피 군의 무차별 진압이 시작되었다. 3월 17일, 카다피 군이 마지막 남은 벵가지 탈환을 눈앞에 둔 시점, UN은 리비아 전역에 비행금지구역(No fly zone)을 선언했고 3월 19일부터 리비아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을 단행했다. 무역관에서 불과 3km 떨어진 카다피 궁은 NATO의 공습으로 초 토화되었다. 최신예 무기로 무장한 NATO 군 앞에 카다피 군은 처음부터 적수가 될 수 없었다. NATO의 공습이 반복되자 차량 통행량은 대폭 줄었고, 대부분의 점포는 문을 닫았다. 카다피의 결사항전 촉구 이후 트리폴리 시내에는 경적을 울리며 녹색기 를 흔들고 다니는 카다피 지지자들의 차량이 늘기 시작했다. 군사력이 형편없는 한 나라의 독재자를 몰아내기 위해 군사력 최강의 나라들이 연합해 최신예 무기를 퍼붓 고 있는 상황. 당시에는 왠지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2월 20일부터 인터넷과 휴대폰이 두절됐다. 상황이 급속도로 악화되자 카이로 행 전세기를 띄우겠다며 연락이 왔다. 리비아 주재 한인들과 한 번 통화하려고 며칠 밤낮 을 스무 번 넘게 시도한 끝에 2월 24일 새벽 6시, 한인 250여 명이 어두컴컴한 트리폴리 070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71 공항 앞에 모였다. 문제는 공항에 무작정 몰려든 수천 명의 난민들로 꽉 막힌 길을 어 떻게 뚫고 들어가느냐였다. 서울의 출퇴근길 전철 한 차량 안에 250여 명의 인원이 여 행용 가방을 들고 뚫고 들어가야만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공항 대합실로 진입하 려는 난민들을 향해 총을 든 카다피 군은 끊임없이 몽둥이질을 하거나 그 자리에서 사 살한 경우도 있었다. 그 날 따라 비는 왜 그렇게 쏟아지고, 매서운 바람이 부는지. 주 차장에서 1분도 안 걸리는 대합실로 들어가는데 꼬박 6시간이 걸렸다. 드디어 출국문이 열리고 한 사람씩 빠져나가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가족, 동료 들과 이별 인사를 하며 흐느끼는 모습이 보였다. 필자도 가족들을 보내는 입장이었지 만, 따뜻한 말 한마디 나누지 못했다. 머리 속엔 온통 탈출한 한인들 모두 아무런 사 고 없이 아수라장 대합실을 무사히 빠져나갔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곧 바로 대한항공 전세기가 추가로 투입되었고, 이후 4,500톤급 헬기 구축함(DDH-981) 최 영함을 비롯, 육로 탈출행렬이 이어져 1,500여 명의 한인들이 30여 명으로 줄었다. 지 금도 끔찍했던 당시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마음 속에서부터 울컥해진다. 5월 들어 무장 폭도들이 한국 건설업체 지사 사무실을 비롯해 한인 가정집에 총 기를 들고 난입, 약탈해가는 사건이 빈발했다. 자동차에 기름을 넣으려고 2km 이상 줄을 서며 며칠 밤을 새던 시민들 간의 폭력다툼이 이어졌고, 질서를 잡겠다며 주유소 에 투입된 무장군인의 총기오발로 사망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발전소용 연료도 부 족해서 대규모 정전이 예고되었다. 급기야 5월 29일 대사관 전 직원과 함께 국경을 접하고 있는 튀니지로 대이동을 공항 대합실로 진입하려는 난민들 071 Ⅰ. 무역관 이야기

72 했다. 매일같이 듣던 총소리는 튀니지에서도 귓가에 맴돌았다. 흔히 들을 수 있는 모 든 소리가 총소리로 들렸다. 호텔의 문 여닫는 소리, 식당 바닥에 떨어지는 포크 소리, 도로 위 오토바이 소리에 몸이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튀니지 남쪽에 위치한 제르바(Djerba) 섬으로 옮겨온 후 무역관 현지직원들은 정말 큰 역할을 해줬다. 그들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때로는 전화로, 때로는 트리 폴리에서 280km 떨어진 임시 사무실까지 차를 직접 몰고 와서 전화로 할 수 없었던 많은 얘기들을 전해주고 갔다. 특히 고마운 직원은 리비아 직원이었다.(나머지는 모 두 제3국인) 트리폴리를 떠나던 5월 29일 기꺼이 동행해 주었고, 동부지역 상황파악 을 위해 벵가지 출장(비행기가 뜨질 않아 1시간 거리를 3일 걸려 갔다)을 다녀오기도 했다. 더욱이 이 직원은 벵가지 출장 직후 반군으로 직접 전투에 참가, 전투 중에도 수 시로 위성전화를 통해 반군의 트리폴리 진격상황을 알려주었다. 이 직원의 전화 덕분 에 트리폴리 인근지에 잔류 중이던 한인 3명을 대전투가 벌어지기 전 무사히 대피시 키기도 했다. 이 모든 내용이 리비아 상황보고서를 통해 정보에 목말라하는 국내업체 들에게 전파되었고, 거짓 정보를 흘려 심리전까지 펼쳤던 서방언론이나 카다피 측 정 보에 식상했던 국내업체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코트라맨은 때로는 외교관으로, 때로는 기자로서의 역할도 수행해야 한다. 필자 는 코트라맨이면서 리비아 외교부에 상무관으로 공식 등재되어 카다피 정권 정보부 로부터 감시를 받으며(모든 외교관은 감시 대상이었다) 활동한 외교관이고, 사태 발 생 직후에는 각 방송사로부터 인터뷰 요청이 쇄도, 생방송으로 현장 보도가 가능한 유일한 특파원이기도 했다. 또 전쟁으로 인해 가족과 헤어져 살고 있으니 이산가족이 기도 하면서 전쟁발발 후 3개월 동안 대사관 내 사무실 바닥에 매트리스 한 장 깔아놓 고 지냈던 노숙자 아닌 노숙자이기도 했다. 필자 이길범은 2009년 8월부터 트리폴리 무역관에서 근무하고 있다. 카다피(Muammar Gaddafi)는 1969년 9월 1일 육군 대령(Colonel)으로 복무중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폐지하고 권력 을 장악했다. 2011년 초에 시작된 아랍의 민주화 시위의 영향을 받아 리비아에서도 2011년 2월 카다피 정권에 대항해 반 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카다피는 10월 20일 그의 고향 시르테(Sirte)에서 사살되었다. 072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73 레바논 전쟁의 기억 해외무역관에서 이런 일이 편보현 레바논은 페니키아인의 고향이고,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는 중동의 진주이다. 지중해 동쪽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풍광이 뛰어나고 땅과 바다에서 나는 갖가 지 산물이 풍부하다. 기후도 좋아 걸프 지역 부호들이 베이루트에 별장을 짓고 더위 를 피해 휴양을 오곤 한다. 한때는 금융 중심지로 이름을 날렸고, 중동의 파리 로 불 리기도 하였다. 인구 400만 명의 소국이지만 지정학적인 중요성으로 인해 UN 등 국 제기구는 물론 외국 기업들이 앞다투어 진출하였다. KOTRA도 중동 진출을 위해 초창기인 1968년 베이루트 통신원을 운영하다가 1969년 12월 정식으로 사무소를 개설하였다. 그러나 1978년 12월 레바논 내전으로 무역관을 폐쇄하였고, 1981년 4월 재개설하였으며 이후 폐쇄와 재개설을 반복하였 다. 필자는 2006년 2월 1일부로 베이루트 무역관 관장 발령을 받고 부임하여 1년 반 시리아 다마스커스에서 열린 중동지역 무역관장 회의. 맨 왼쪽이 필자 073 Ⅰ. 무역관 이야기

74 을 근무하다가 본사의 방침에 따라 2007년 7월 31일부로 무역관을 폐쇄하였다. 사무 실을 닫게 된 주된 이유는 해외 조직망을 축소하려는 본사의 전략적인 방침에 의한 것 이었지만, 레바논 전쟁으로 인한 급속한 경기 위축과 이로 인한 국내 기업의 진출수요 격감에 따른 고려도 작용하였다. 베이루트 무역관 발령을 받고 이것저것 분주하게 준비할 때만 해도 필자는 레바 논이라는 나라에 대해 잘 알지 못하였다. 유럽에 주로 근무했던 필자로서는 첫 중동 지역 근무이기 때문에 막연한 호기심도 있었다. 출국 전 친구들이 환송식을 해 주었는 데 레바논에 폭탄 테러가 자주 발생하니 부디 몸조심하라는 주의와 충고가 대부분이 었으나, 듣는 둥 마는 둥 하였다. 코트라맨이라면 세계 어느 지역에 떨어뜨려 놓아도 문제 없이 뿌리내리고 살 수 있을 거라는 자신 하나로 충만한 사람들이 아니던가. 그러나 이러한 자신감은 채 반년이 되기도 전에 산산이 부서져 버렸으니 이스라 엘이 레바논을 전격 침공하고 베이루트 시내가 쑥대밭이 되고 나서야 레바논이 중동 의 화약고임을 실감하게 되었다. 전쟁은 2006년 7월 12일 레바논 남부 이스라엘과의 국경지대에서 헤즈볼라 (Hezbollah)가 이스라엘 병사 2명을 납치한데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다음 날에는 베이루트 공항을 폭격하여 항공기 이착륙이 중 단되고, 이후 민간인 사상자가 매일 수십 명에 달하는 등 피해가 커졌다. 헤즈볼라도 카츄샤 로켓을 이스라엘로 무차별적으로 발사함에 따라 하이파 지역에서의 민간인 사망자 발생 등 양측의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피해는 미미하였던 반면, 레바논은 아무런 전쟁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스라엘 공군의 폭격으로 주요 도로, 교량, 발전소, 주요 항구 레이더 시설 등이 파괴되었고, 현격한 군사력의 차이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 다. 독자적인 전쟁수행 능력이 없는 레바논으로서는 국제사회의 중재와 개입만을 기 대하였는데, 중동에서의 패권을 노리던 미국은 신중동질서 (New Middle East) 구 축을 기치로 내걸고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습을 묵인하는 한편, 헤즈볼라 지원의 배후 로 지목되고 있는 이란 및 시리아의 지원을 차단하고자 하였다. 전쟁을 끝내기 위한 UN 안보리의 종전결의안이 만장일치로 채택되고 8월 14일부로 발효됨에 따라 34일 간 계속된 이스라엘과 헤즈볼라 간의 전쟁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전쟁을 체험하지 못하고 자란 필자로서는 시도 때도 없이 퍼붓는 공습과 공격이 중단될 때의 칠흑 같은 적막, 언제 다시 폭격이 재개될 것인지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 로 노이로제에 걸릴 것만 같았다. 베이루트 시내 남부에 위치한 헤즈볼라 본부에 대해 074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75 집중적으로 폭격이 이루어졌는데, 베이루트가 그리 크지 않은 도시이기 때문에 공군 력을 자랑하는 이스라엘 공군이 아무리 정교한 공격을 할지라도 실수로 우리 집에 폭 탄이 떨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였다. 베이루트 무역관은 다행히 폭격을 받지 않았 고 필자가 살고 있는 집과도 가까워 매일 출근을 하면서 폭격에 따른 피해상황이나 전쟁의 진전 상황을 점검하는 한편 본사에 수시로 사태 진행현황 및 전망을 보고하였 다. 또 한국경제신문 등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교민들의 대피 현황, 전쟁의 참 상 등에 대해 알리도록 하였다. 전기공급도 끊기고 인터넷도 제대로 연결되지 않는 등 혼자서 전전긍긍하고 있 을 때 암만 무역관의 권중헌 관장이 레바논의 사정을 신속히 본사로 보고해 주었고, 중동아프리카 지역본부의 협조와 지원으로 침착하게 사태를 정리하고 수습할 수 있 었다. 전쟁의 와중에 홍기화 사장이 전화를 걸어와 본인과 가족의 신변안전을 최우선 으로 하라는 말씀에 큰 위로가 되었다. 또 회사의 선후배 동료 여러분들이 이메일과 전화로 안부를 묻고 자기 일처럼 걱정해 주어서 얼마나 큰 격려가 되었는지 모른다. 당시 텔아비브 무역관의 이정순 관장도 위로의 메일을 보내왔다. 해외 근무 중에 전쟁을 겪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교전 당사국 무역관에 근무하면서 서로 간에 말 할 수 없이 뜨거운 동지의식을 느끼게 되다니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 아닐 수 없었다. 다음은 텔아비브 이 관장의 안부 메일에 대한 답신이었다. 안녕하세요. 텔아비브는 별 영향이 없다니 다행입니다. 이곳 베이루트는 그래도 안전한 편입니다. 거의 한 주일 이상은 공습이 없었고 조용하더니 어젯밤에는 세 발 정도가 떨어졌습니다. 쿵 소리를 들으면서 비몽 사몽간에 꿈길을 헤매고 있답니다. 어떻게 이 관장님께서 올메르트(Ehud Olmert 당시 이스라엘 총 리)에게 얘기해서 빨리 좀 끝내도록 부탁하면 안 될까요? 여름휴가는 생각도 못하고 물 건너가 버렸 습니다. 그동안에는 그럭저럭 버텼는데 기름도 제한 급유를 실시하고, 정전도 심해지고, 점점 살기가 어 려워지네요. 제 생애 가장 뜨거운 여름이 될 것 같습니다. 밖으로 나갈 수가 없으니 집사람과 아이들도 하루 종일 집안에만 처박혀 있는데, 점점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하고 있어요. 아이들한테도 안됐다 는 생각이 듭니다. 또 뭘 하고 싶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감이 가슴을 짓누릅니다. 빨리 사 태가 진정되고 무역관 업무도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도로, 교량 등 인프 라가 워낙 많이 파괴되어 모든 게 정상화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겠지요. (이하 생략) 전쟁이 발발하고 처음에는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을 수도 있었고 상점에 가서 장 075 Ⅰ. 무역관 이야기

76 을 보기도 하였는데, 날이 갈수록 휘발유 배급량이 줄어들더니 급기야 주유소 문을 닫아 버렸다. 또 슈퍼마켓에도 진열대에 물건이 사라져 먹고사는 일이 암담해졌다. 말 그대로 허리띠를 졸라매며 한 달을 살았다. 어둠 속에 촛불에 의지하여 밥 한 공기에 소박한 반찬으로 식구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데 눈물이 왈칵 솟아올랐다. 그러나 지나 고 보니 그때만큼 가족 간에 대화가 많았던 적도 없었던 것 같다. 폭격은 예고 없이 온 다. 피곤에 절어 혼곤히 잠이 들어 깨질 못하고 있는데 잠결에 사방을 진동하는 폭발 음과 함께 집이 흔들리면 잠이 싹 달아난다. 월요일 아침 이불 속에서 듣는 폭격소리 는 분노와 슬픔과 무력감의 결정체이다. 전쟁이 끝난 후 한동안 조그만 천둥소리에도 가슴이 벌떡거리고 경기가 일어났다. 2006년 8월, 전쟁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 다. 공기 중에는 여전히 화약 냄새가 났어도 숨을 크게 쉴 수 있어서 좋았고, 코르니쉬 (Corniche 베이루트의 바다를 따라 길게 나 있는 산책로로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 다. 인근에 비둘기 바위가 있다)를 다시 거닐 수 있어서 좋았다. 당시 본사로 보고하였 던 레바논 종전 보고서에는 거리에 차들이 많아졌고, 죽어 있던 도시에 생기가 도는 듯하다 고 적혀 있다. 또 비록 전쟁은 끝났으나 살아남은 자들은 힘겨운 삶은 살아야 할 것 이라는 부분도 눈에 띈다. 황혼의 엘레지가 어울리는 도시 베이루트에서 필자는 1년 6개월을 살았다. 그리 고 2007년 7월, 재개설한 지 11년 만에 무역관을 폐쇄하였다. 사무실을 새로 개설하 는 것보다 문을 닫는 것은 정말 쉽다. 단, 얼음장처럼 차가운 마음을 가졌을 경우에만 그렇다.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현지 직원들을 내보내는 일, 중요 문서들과 가구며 집 기들을 이관하는 일, 유관기관과 바이어들에게 폐쇄를 알리는 안내문을 보내는 일. 하나하나가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들이었다. 무역관이 입주해있던 Starco 빌딩 앞에 서 언제나 휘날리던 태극기를 내릴 때는 눈물이 났다. 다시 베이루트에 무역관이 개설 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하루바삐 중동에 평화가 찾아들고 레반트 무역 의 거점으로서 베이루트에 다시 무역관이 개설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그리하여 황 혼의 엘레지가 아닌 레반트 찬가가 울려 퍼져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필자 편보현은 2006년 2월부터 2007년 7월까지 베이루트 무역관에서 근무했다. 07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77 이라크, 달콤쌉쌀한 추억 해외무역관에서 이런 일이 김규식 OB 2005년 10월 28일 금요일. 험지로 알려진 이라크로부터 온 필자의 이삿짐에서 총알이 가득 장전된 권총 2자루, AK소총탄 수십 발, 방탄 조끼, 방탄 헬멧 등이 대거 발견되었다. 세관원 검수원과 사복 입은 사람들이 부산에서 열리는 APEC 정상들을 상대로 테러를 모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다. 죄목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불법무기 반입, 적성국(*AK 소총은 북한제라고 인정) 무기 밀반입 등등. 어안이 벙벙했고 한동안 의심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다행히 바그다드 근무시절 쌓 아 놓은 인맥과 신뢰(순전히 필자 생각) 덕분에 용인경찰서에 몇 번 조사받으러 불려간 것을 끝으로 기소유예 처분으로 사건이 끝났다. 알고 보니 필자가 이라크를 떠난 이후 에 현지 경비원들이 필자 짐을 싸 부치면서 총기류를 회수하지 않은 것이 직접적인 원인 이었다. 심지어 쓰레기통에 가득 들어 있던 휴지까지 버리지 않고 보낼 정도로 필자 짐 이라면 아예 손을 대지 않고 컨테이너에 그대로 입고시킨 탓이었다. 이삿짐은 그로부터 일주일이나 더 지나서 찾을 수 있었으며 나중에 세관원으로부터 필자의 이삿짐을 세 번 씩이나 샅샅이 뒤졌다는 말을 들었다. 총기류를 발견한 세관원은 그 공적으로 특진하 였다하고 신문, 라디오에도 총기류 발견 소식이 상당히 큰 뉴스로 보도되었다. 소속과 이름을 익명으로 해준 덕분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무렵 어느 날 정오 라디오 뉴스 를 필자가 직접 듣고 쓴웃음을 지은 적도 있다. 그 후 해외 출장을 갔다가 들어올 때 남 들보다 자주 검사 대상으로 분류되어 검색대에 가면 스크린에 필자의 이름과 혐의(?)가 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덕분에 필자는 가급적 휴대 소지품을 가볍게 하려는 버릇 을 갖게 되었다. 하여튼 이것이 KOTRA 소속으로서는 필자의 마지막 이라크 경험이었다. 나름 멋 지게, 인상 깊게, 평생 추억으로 간직할 만한 에피소드였다. KOTRA를 그만두고 개인 사업을 하면서 몇 년간 이라크를 멀리하고 살았다. 그러다가 2011년부터 우연한 계기 에 이라크와 관련된 일을 다시 하게 되었다. 이제는 민간인 신분으로 이라크와 관련된 077 Ⅰ. 무역관 이야기

78 일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고, KOTRA 바그다드 무역관에 근무하면서 꿈꿨던 일을 내 손으로 직접 실천하고 있다. 어려운 시기에 함께 했던 현지인은 필자 회사의 스태프로, 바이어들은 필자의 고객으로 연결되었다. 당시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일 년에 일곱 팀 씩이나 구매사절단을 한국으로 보냈다. 그후 그들 중에는 몇 년 지나 국내 대기업이나 중견기업들과 좋은 비즈니스를 맺고 있는 분들이 많다. 결국 인연은 인위적으로 맺어 지지도 없어지지도 않는가 보다.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정든 직장, 반평생을 몸담은 직장을 그만두면서 이라크에서의 경험이라 면 무슨 일이든지 못하겠느냐는 자신감, 사지에서도 보살펴준 신의 든든한 가호를 큰 버팀목으로 생각했었다. 사회에 나가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 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나름 그렇게 생각할 만했다고 본다. 필자가 바그다드 무역관 을 떠나오기 직전 한국 대사의 성화(?)에 못 이겨 무역관을 한국 대사관 경비구역 안 으로 옮겼지만 필자가 부임하던 2003년 6월부터 약 2년간은 레드존(Red Zone)에 KOTRA 사무실과 집이 있었다. 테러가 하루도 끊이지 않는 시내 상업지구 가라다 (Karada)라는 곳에 사무실이 있었고 집은 차로 30분이나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날 마다 차량 두 대에 경비원을 대동하고 출퇴근해야 했다. 가다가 지근거리에 폭탄이 떨 어져 꼼짝없이 멈춰 서있거나 위기를 감지하고 피신해야 했으며, 현관 앞에서 벌어지 는 총격전 소리에 놀라 잠을 자다말고 침대에서 내려와 엎드려 있어야 했다. 하루는 근무 중에 총알이 책상 옆을 지나 벽에 박힌 적도, 전화를 받으러 야자나무 옆에 서 있 다가 도로폭탄 파편에 맞은 야자나무 줄기에 몸을 다칠 뻔한 적도 있었다. 도처에 위 험이 깔려 있다 보니 자위조치로 늘 총기류를 휴대하고 있어야 했으며 즉각적인 자위 조치를 위해서는 서랍, 침대, 심지어 화장실에도 총기류를 비치하고 있어야 했다. 이라크에 근무하면서 겪은 일 중에 송전탑 공사 도중 피격을 받아 2명이 사망하 고 2명이 부상한 2003년 11월의 오무전기 근로자 테러사건, 온 나라를 한동안 비탄에 잠기게 하고 개인적으로 국회 청문회 참고인으로까지 불려오게 만든 2004년 5월의 김선일씨 피살사건, 그리고 이보다 한 달 앞서 한국인 목사 7명이 납치되었다가 풀려 난 사건 등은 오랜 시일이 흘러도 쉽게 잊혀지지 않을 일들이다. 그땐 필자가 KOTRA 직원인지 통신사 직원인지, 아니면 대사관 직원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수십 명의 취재 진의 방문, 거의 24시간 쉼 없이 쏟아지는 취재, 인터뷰 요청 건을 처리하였다. 당시 힘들었던 것은 피곤함이 아니라 휘발성이 강한 사건인 만큼 언론의 알 권리도 적절히 충족시키면서도 필자로 인해 정부의 의지를 훼손하지 않고 KOTRA의 자존심도 지켜 내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07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79 언론에 알려지거나 본사에 보고되지는 않았지만 아찔했던 순간들도 제법 있었다. 때론 미숙한 대응으로, 때론 지나친 만용 으로 위기를 자초한 적도 있었으며 순간적인 기지로 위기를 모 면한 적도 있었다. 그 하나는 요르단 암만에서 운영비를 찾아 바 그다드로 들어오다가 생긴 일이었다. 요르단-이라크 국경을 넘 이라크 전후복구사업 설명회 어 5시간 정도 달려 바그다드 서쪽 100km 지점인 라마디 근처 를 지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무장괴한들이 길을 가로 막았다. 필자가 탄 차도 시속 140km라는 빠른 속도로 2차선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 데 어디선가 BMW 차량이 갑자기 1차선으로 들어와 우리 차량을 갓길로 몰기 시작했 다. 열어젖힌 창문으로 괴한들이 총기류를 꺼내놓고 위협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 다. 그 순간이 엄청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겁에 질린 운전사를 달래서 도망가느냐, 아 니면 순순히 잡히느냐 하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당시 필자는 무모하게도 급정거하 라고 지시했고 미처 이를 예상하지 못한 BMW 차량과의 거리가 순식간에 벌어진 것을 알고 후진기어를 놓고 역주행토록 했다. 사생 결단식으로 핏대를 내면서 요르단인 운 전사를 윽박질렀다. 순식간에 300m 이상 거리가 떨어졌고 이판사판 하는 심정으로 여 차하면 도망갈 수 있도록 자동차를 뒤로 돌리게 했다. 마치 아프리카 누(gnu) 떼가 사 자가 다가오면 도망갈 준비를 하듯이. 한참 후 먹잇감을 포기한 알리바바(무장강도 를 일컫는 말)가 사라지자 우리는 뒤따라온 다른 차량들과 합류하여 무리 지으면서 무 사히 바그다드에 도착했다. 필자는 운이 좋았지만 한국인들 중에 출장자, 주재원 등 세 팀이나 1번 고속도로에서 노상강도를 당해서 금품을 다 빼앗기고 구타를 당했다. 뿐만 아니라 도주하려다가 총에 맞아 죽거나 다친 사람들도 꽤 많았다. 막상 글을 쓰다 보니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이젠 추억속의 한 페이지가 된 사건들 이 하나 둘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당시에는 심각했지만 이제는 달콤한 추억 그 자체다. 다치지 않고 이만한 추억을 간직하게 해준 데 감사하게 생각하고 더욱이 이라 크와의 인연이 내 인생 후반부의 삶 속에 숨 쉬고 있다는데 더욱 더 고마움을 느낀다. 필자 김규식은 2003년 8월부터 2005년 8월까지 바그다드 무역관에서 근무했다. 079 Ⅰ. 무역관 이야기

80 여기는 바그다드입니다 해외무역관에서 이런 일이 바그다드 영상 서강석 바그다드에서 김선일 사건( 피랍 6.22 피살)이 터진 지 1년쯤 후인 2005년 6월 필자는 바그다드무역관으로 발령을 받았다. 암만을 거쳐 바그다드로 가 는 비행기는 시골 완행버스처럼 지정 좌석표도 없었고, 항공 스케줄은 있으나 출발시 간을 마냥 기다려야만 했다. 보안상 지연 이유는 밝힐 수도 알 수도 없었다. 저항세력 들이 활동하기 때문이다. 사실 공항에서 무한정 대기하는 지루함보다는 2시간여의 비 행시간 중 저항세력의 공격으로 격침될지도 모른다는 초조함과 공포감이 더 컸다. 바그다드에 근무하고 있지만 바그다드 은행을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요르단 의 암만 은행구좌에서 자금을 인출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달에 한 번은 암만으로 가는 비행을 감수해야 했다. 바그다드 공항에는 전쟁과 동시에 멈춘 항공일정 안내 전광판이 불 꺼진 채 그대로 멈춰서 있다. 이착륙할 때는 급선회 회오 리 비행으로 지상을 급상승하고 착륙하는 특수 비행을 체험하게 된다. 2만 피트 상공 에 이를 때까지 바그다드 공항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면 저항세력의 로켓공격을 맛 볼 것이기 때문이다. 무역관이 있는 바그다드 시내에서 공항까지는 10여 킬로미터에 불과하지만 대 부분의 길 양옆은 시멘트 방벽으로 둘러싸여 외부에서 차량이동을 식별하기 어렵게 했다. 가는 도중에 탐지견에 의한 검색 등 3차례의 검색을 거치고 나면 2 3시간이 걸 린다. 이보다 더 어려운 것은 저항세력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경찰차량, 방탄차량에 일반 경호차량 등 모두 5대 이상의 차량이 동원되어야 공항으로의 이동이 가능하다. 차량 번호판이 없는 것은 당연하고 복면에 AK소총으로 무장하고 삼엄한 경계 속에 이동한다. 무역관은 예산이 없어 방탄차량을 구입하지 못하고 KOICA, 한국대 사관, 국정원, 무관( 武 官 )의 방탄차를 빌려 써야 했다. 전쟁 중 암만으로 대피시켰다 가 가져온 무역관 차량(싼타페)은 총 맞으면 살아날 도리 없는 무용지물이었다. 080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81 그나마 티그리스 강의 자루모양 끝자락 자드리아에 위치하고 있는 무역관은 그 린존 못지않게 전략적 요새에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이곳에 있는 시아파 민병대의 초 소가 방패막이가 되어주었기 때문이었다. 가까이 있는 집권당 당사 사람들과는 비교 적 잘 지낸 사이였다. 시아파 집권당 당수 아들이 방한한다고 하여 무역관에서 비즈니 스 항공권 3매를 지원한 적도 있었다. 바그다드 무역관에 발령받고 왔으나 무역관에 갈 수가 없어 4개월간 KOICA 사 무소에 신세를 지면서 현지직원을 불러 업무지시를 하는 원격 근무를 했다. 사무실에 가보고 싶지만 나가면 10분도 안되어 납치당한다는데 갈 수가 없었다. 4개월 후 새로 보수한 신관옥으로 이전해 근무했지만 단독 2층 빌라에서 근무와 숙식을 같이 했기 때문에 하루 종일 나갈 일이 없었다. 주변은 무장경비원과 간간히 들리는 차량 폭탄, 미군 헬기 소리, 총소리, 박격포 날아 다니는 소리뿐이었다. 바그다드 시민이 즐기는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책은 공중 사격인 것 같았다. 장례 행렬이 지나가거나 이라크가 인근국에 축구를 이겼을 때 바그다드 시내는 하늘을 향 해 쏘는 총소리와 불꽃으로 마치 폭죽을 보는 것 같았다. 미군들도 자기방어용 총기 휴대를 막지 못했다. 무역관의 주요 등재 자산에도 권총과 소총들, 실탄, 무전기 등이 들어 있다. 실탄도 수시 교체해야 한다. 이렇게 안전이 늘 위협받고 있는 바그다드 무 역관은 감옥보다 더 열악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무역관의 활동 범위는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현지 직원을 첨병으로 최대한 활용하면서 18개 지역 상공회의소를 활용하여 구매단을 구 성하게 하고 밤을 새워가면서 비자를 대행하여 방한 구매단을 구성할 수 있었고, 사 담 후세인의 고향인 티크리트 상공회의소 회장 일행의 창원기계전 참관을 지원하기 도 하였다. 전쟁 중이라 많은 사람을 접하지 못하였지만 아랍사람들 중에 가장 기억 에 남는 직원들이 바그다드 무역관 현지직원들이다. 밤을 새 일하라고 요구하지 않았 는데도 비자신청을 대행하느라 사무실에서 밤을 새는 것을 보면서 깊은 감사를 느끼 기도 하였다. 저항세력들과 사담 후세인은 모든 외세에게 이라크를 떠나라고 했고, 떠나지 않 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사담 후세인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그 날, 바그다드 현지에 있던 필자는 하루 종일 국내 언론과 방송 인터뷰로 목이 잠겼다. 여기는 바그다드입니다. 오늘 필자 서강석은 2005년 7월부터 2007년 1월까지 바그다드 무역관장을 역임했다. 081 Ⅰ. 무역관 이야기

82 50개 무역관 이야기 04 Europe 런던 마드리드 모스크바 블라디보스톡 밀라노 부다페스트 브뤼셀 빈 스톡홀름 코펜하겐 파리 프랑크푸르트 함부르크

83 Middle East & Africa 나이로비 라고스 리야드 암만 요하네스버그 카이로 트리폴리 Asia 뉴델리 뭄바이 도쿄 오사카 후쿠오카 마닐라 방콕 시드니 양곤 하노이 호치민 China & Taiwan 광저우 베이징 상하이 칭다오 홍콩 타이베이 Latin America 멕시코시티 보고타 부에노스아이레스 산토도밍고 상파울루 아바나 파나마 North America 뉴욕 디트로이트 로스앤젤레스 마이애미 시카고 워싱턴

84 모든 정치, 경제, 군사, 사회, 문화, 기술 조직은 기존 계층 체계에서 상호 접속된 매듭(node)의 총체-다시 말해 미로-인 네트워크로 변할 것이 다. 통신시스템, 도시, 전기 에너지와 식수 공급선, TV, 정보통신, 인터넷 모두 네트워크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정보의 통신시스템을 기반으로 조 직이 생겨날 것이다. 항구, 행정조직, 기업, 심지어 군대가 바로 그런 경우 가 될 것이다.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기 위해 조직은 우선 계층 체계를 줄이고 수평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늘려야 한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성 자크 아탈리가 21세기 사전 (1998)에서 내린 네트워크에 대한 정의이다. 해외 무역관(Overseas Network)은 KOTRA의 자산이요, 경쟁력이 고, 꽃이다. 조금 더 부풀려서 말한다면 해외 무역관은 우리나라의 자산이 요, 해외에 네트워크가 없는 우리 기업(특히 중소기업)들의 자산이다. 시 계바늘을 뒤로 돌리면 특히 그랬다. 그리고 시계바늘이 과거에서 현재로 돌면서 본사와 해외무역관은 본( 本 )과 말( 末 )의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본( 本 )과 망( 網 )의 수평적 관계라는 인식이 필요해졌다. KOTRA 고객들 이 원하는 열매가 열리는 곳은 본이 아니라 망이고, 무역관 망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토질에 맞는 비료를 주어야 본사는 열매를 고객 들에게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KOTRA는 1962년 해외에 4곳의 무역관을 설치한 이래 1980년에는 87개까지 늘렸다가 숨을 고른 후 1997년에는 81개국 118개 무역관 241명 근무로 최고점을 찍었다. 무역관을 설립할 때 주요 검토사항은 시장 규모 가 큰 국가(또는 도시), 시장 잠재력이 있는 국가(또는 도시), 경쟁관계에 놓여 있는 국가, 신(흥)시장으로 부상하고 있는 국가, 자원 보유 국가, 사 회주의 국가들처럼 전인미답의 국가, 그리고 제네바처럼 국제기구 전담 조직망으로 운영했거나 스와질란드 음바반에 무역관을 두었던 경우처럼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진출하는 교두보로서 정책적으로 설립이 필요한 국 가가 아닐까 한다. 하지만 무역관을 설립해 놓고 보면 수요 예측이 빗나 가 본래의 기대를 저버리기도 했고, 또 너무 성급하게 문을 닫기도 했으 며, 내전과 같이 정국이 소용돌이쳐 불가피하게 철수하기도 하였다. 그런 가 하면 같은 국가 내에서 인접 도시로 이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제다 리

85 야드, 샌프란시스코 실리콘밸리가 그런 예에 해당된다. 그동안 명멸했 던 무역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일본 : 센다이, 삿포로 아시아 대양주 : 퍼스(호주) 북미 : 미국 뉴올리언스, 애틀랜타, 시애틀, 덴버, 샌프란시스코(실리콘밸리로 이전), 캐나다 몬트리올 중남미지역 : 산호세(코스타리카), 퀴토(에콰도르), 과야킬(에콰도르), 상환(푸에르토리코), 포트오브스 페인(트리니다드토바고), 킹스턴(자메이카), 몬테비데오(우루과이), 라파즈(볼리비아), 마나우스(브라 질), 아순시온(파라과이), 몬테레이(멕시코) 구주지역 : 베를린 서베를린(독일), 리스본(포르투갈), 제네바(스위스), 더블린(영국), 마르세유(프랑 스), 리옹(프랑스), 앙카라(터키) 중동지역 : 제다(사우디아라비아-리야드), 베이루트(레바논), 마나마(바레인), 도하(카타르), 아부다비 (UAE) 아프리카 : 아비장(코트디부아르), 튀니스(튀니지), 킨샤사(자이르 콩고민주공화국), 몬로비아(라이베 리아), 다카르(세네갈), 음바반(스와질란드) 1980년대 후반 이후 동구권 및 CIS지역과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에 적 지 않은 무역관이 설립되어(CIS 지역 8개, 동구 6개, 중국 15개 등) 정부와 업계의 진 입로를 닦는 선봉에 서기도 했다. KOTRA 50년사 발간팀은 무역관 이야기로 50개 무역관을 선정했다. 그러나 막상 작업을 해보니 쉽지 않았다. OB와 YB를 대상으로 원고를 접수할 생각이었지만 우선 우리의 의도가 모든 분들께 제대로 전파된 것 같지 않았다. 다음으로 설사 알고 있다 하더라도 특히 OB들의 경우 자기 자랑 같아 쑥스러워서 원고 집필을 기피했다. 그리고 원고 집필에 익숙하 지 않은 것도 한 이유 같았다. 해외무역관을 통해서도 선배님들의 무용담 (?)이나 에피소드를 건져보려 했으나 선 후배 간 역사와 전통이 단절된 듯하여 아쉬움을 남겼다. 어떤 경우는 무역관에 과부하가 걸린 탓도 있었 을 것이다. 구전문화가 전통인 아프리카에는 이런 말이 있다. 노인 한 사람이 죽 으면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마찬가지 라는. 코트라맨들은 지난 50 년 동안 5대양 6대주에서 수출첨병 역할을 담당하면서 얼마나 많은 이야 기들을 남겼을까?

86 E urope 러시아연방 블라디보스톡 Vladivostok 독일 함부르크 Hamburg 스웨덴 스톡홀름 Stockholm 덴마크 코펜하겐 Copenhagen 러시아연방 모스크바 Moskva 영국 런던 London 프랑스 파리 Paris 벨기에 브뤼셀 Brussels 독일 프랑크푸르트 Frankfurt 오스트리아 빈 Wien 헝가리 부다페스트 Budapest 이탈리아 밀라노 Milano 스페인 마드리드 Madrid

87 London 50개 무역관 이야기 런던 무역관 프랑스 파리가 꽃의 도시라면 런던은 안개의 도시 다. 파리를 꽃으로 비유하는 것은 파리가 예술, 패션의 중심지 라는 것에서 유래한 것인데, 런던을 안개의 도시로 부르는 것은 정말로 안개가 많기 때문이다. 런던 아이 (London Eye), 빅벤(Big Ben)과 국회의사당, 버킹엄궁전(Buckingham Palace), 트라팔가 광장(Trafalgar Square), 타워 브리지(Tower Bridge) 등 런던에는 수많은 관광명소가 있다. 하지만 워털루 브리지(Waterloo Bridge)를 아는가? 영화 <애수>(1940)에서 안개 속에 모습을 드러낸 다리이다. 런던의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을 꼽는다면 1665~1666년에 창궐해 수많은 시민의 목숨을 앗아간 런던 대 흑사병 과 1666년 9월에 일어난 런던 대화재(Great Fire of London) 일 것이다. 5일 동안의 런던 대화재로 인 해 1만 3,000여 채의 집이 불타는 등 도시의 85%가 파괴되었고 당시 인구 8만 명 중 7만여 명이 집을 잃고 노숙 자 신세가 될 정도였으니까. 그 이후 산업혁명에 힘입어 런던에는 새로운 항만이 건설되고 1830년대에 시작된 철도 건설로 런던의 동쪽 끝 이스트엔드(East End) 지역이 급성장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무역관 개설 생활 및 근무 여건 영국의 의료는 무료로 운영되나 GP라는 가정의를 거쳐야 일반병원에 갈 수 있 다. 교육도 전액 무상으로 지원되지만 공교육이 붕괴되었다고 말할 정도로 일반 공립 학교는 교육의 질이 낮다. 교육이 대학진학이 목표가 아닌 사회진출(취업) 위주로 이 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에는 약 5만 명의 재외동포가 거주하고 있으며, 이 중 약 4,000명은 영국 국적이고, 상당수가 어학연수와 유학 등 학업을 위해 온 사람들이다. 영국은 광통신 인프라가 미약하여 인터넷 속도가 한국보다 느리고 용량이 큰 파 일을 다운받으려면 상당히 오래 기다려야 한다. 일반 행정절차도 시간이 많이 걸린 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영국 신사라는 표현대로 시간약속을 잘 지키며 예의바르다. 바이어나 투자가와 면담할 때는 주제를 잘 선정해야 한다. 예를 들면 좋은 주제는 날 씨, 운동(특히, 축구나 럭비), 동물(상대의 취향 확인 필요), 영국의 역사 문화 문 학 예술 대중음악 시사, 영국에서의 좋은 경험, 음식, 맥주 등이다. 반면 북아일 랜드, 종교, 영국 왕실과 왕족, 극우 좌파적 정치, 중동문제, 개인의 배경, 계급과 계 급 시스템, 인종과 이념 관계, 성(특히 동성애 관련) 같은 주제는 피해야 한다. 087 Ⅰ. 무역관 이야기

88 무역관 이야기 런던 해로즈 백화점 한국 특별전 행사를 끝내며 입점하는 데만 40여 년 걸리고 월평 균 120만 명 이상이 방문하는 영국 최대 명품 백화점 해로즈(Harrods)에 맘키즈가 고급 만년필로 입점했고, 우리나라 산삼 경옥고, 워킹화, 쥬서기 등 4~5개사 제품의 입점이 유력하다. 해로즈 백화점은 1997년 8월 말 영국 찰스 왕세자비 다이애나 (Diana Spencer)의 교통사고로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른 적이 있다. 같은 차에 함께 타고 있던 도디 알 파이드(Dodi Al-Fayed)의 아버지 모하메드 알 파이드 (Mohamed Al-Fayed)가 소유주였기 때문이다.(모하메드 알 파이드는 이 백화점을 2010년 5월 8일 Qatar Holdings에 매각했다)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이 유망한 중소 중견 브랜드를 지원하고 한-EU FTA 발 효이후 유럽 명품의 한국시장 진출이 급증한 가운데 우리 명품의 영국 및 유럽시장 진출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2011년 8월 28일부터 4주간 백화점 4층 130여m2의 전시 공간과 에스컬레이터 옆 쇼케이스에서 개최된 해로즈 한국특별전은 우리나라 19개 중견업체가 참가하여 고급 소비제품을 전시, 판매하였다. 한국의 이미지와 관광 홍 보를 결합한 멀티플 성격의 행사였다. 전시기간 중 백화점 정문에는 프리미엄 코리아 깃발 14개가 일제히 게양되었는가 하면 샤넬, 버버리, 아르마니 등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들의 전유물이던 100여 개 LED 광고패널 및 해로즈 셔틀버스에는 한국의 상품 음식 관광 문화를 알리는 이미지들 이 도배되어 백화점을 찾는 고객들과 관광객들을 사로잡았다. 해로즈 구매팀이 2011년 5월 방한하여 두바이 왕실에 납품하고 있는 2만 파운 드 가격대의 칠보 장신구, 8,000파운드를 호가하는 10년산 산삼, 5,000~6,000파운 드에 달하는 악어 핸드백 등 해로즈 백화점 이미지에 적합하고 입점 가능성이 높은 제품 위주로 직접 선정한 것도 주요 성공요인이었다. 백조가 호수 위에 우아한 모습 으로 떠 있으려면 수면 아래에선 백조의 발 이 열심히 물질해야 하는 것처럼 이런 화 려한 모습 뒤에는 보이지 않는 땀방울이 있었다. 영국에서 가장 콧대가 높다고 원성이 자자한 해로즈와 의 사업추진은 일반 전시 및 상담회 사업과는 근본적으로 달 라 시작부터 난항에 난항을 거듭하였다. 예를 들어 행사장 계 약 직전에 백화점 소유주의 명령이라면서 우리 행사장으로 영국 해로즈 백화점 예정되었던 윈도 부스를 샤넬사에 배정하여 사업 추진 포기 직전까지 갔었는가 하면, 100여 개의 LED패널 이미지 선정 08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89 시 해로즈 디자인 팀과 끝없는 힘겨루기를 하였으며, 제품 선정과정에서 판매 허용 제품을 극히 제한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품의 종류와 수량 등 세세한 사항까지 해로 즈가 관여하였기 때문에 참가 업체의 불만이 팽배하고 사업 추진 일정도 크게 지연되 었다. 예산 확보도 쉽지 않았다. 우리 본사 지원 예산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여 사업 기 획단계에서 부터 대기업 협찬을 전제로 추진하였다. 하지만 윈도 부스가 샤넬로 넘 어가자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대기업이 불참하여 4억여 원 이상의 예산 확보가 막 막한 상황에 처했다. 다행히 주영한국대사관 이호현 상무관의 적극적인 지원과 협조 를 받아 외교통상부, 농림식품부, 관광공사 등 정부부처 및 유관기관으로부터 후원 을 받고 해로즈를 설득하여 참가업체수를 당초 5~6개사에서 19개사로 확대함으로 써 어렵사리 예산을 확보할 수 있었다. 운송업체 선정 또한 난관이었다. 참가업체의 절반이 전시뿐만 아니라 직판을 하 게 되어 현지 세관에 부가세 20%를 선납하고 통관 대행 역할을 하는 수입 에이전트 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통관뿐 아니라 부가세 환급, 행사 종료 후 반송 업무를 원만 히 처리할 수 있는 유능한 에이전트급의 운송업체를 선정하는 과정 또한 만만치 않 았다. 그런데 어렵게 운송업체를 선정하고 모든 제품이 무사히 영국 항구로 들어왔 다는 소식을 접하고 막바지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운송업체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걸 려왔다. 전시품 중 악어와 타조 핸드백이 중국산 밀수품으로 의심되어 압류 조치를 당했다는 것이었다. 수십 통의 전화를 하고 세관에 직접 찾아가 설득한 끝에 주영 대 사관의 통관 협조 요청 서한과 전시 종료 직후 반송하겠다는 각서를 쓰고 개막 직전 에야 일부 제품의 통관이 이루어지는 등 통관상의 애로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사업은 마지막까지 우리를 쉽게 놔주지 않았다. 1개여 월에 걸쳐 전시 직판을 하 다 보니 재고품 관리 미흡 등으로 분실품이 발생하여 운송업체와 무역관은 해로즈 지 하의 방대한 재고 창고를 구석구석 돌면서 분실품을 찾아 나서기도 하였다. 안지성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지정민 1970년 출생 2002년 입사한 지정민 현지직원은 10년 동안 런던 무역관에서 마케팅만 담당했다. 일에 대한 열정이 매우 높은 지정민은 새로운 사업발굴에도 항상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예컨대 기존 바이어를 기반으로 신규 바이어를 창출 하고, 가벼운 네트워킹 만찬에 가서도 사업거리를 고민하며, 참가자들과 사업정보를 교환하는 등 업무에 대한 열 의가 높다. 2011년에는 무역관의 대표사업인 해로즈 한국상품전을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다. 089 Ⅰ. 무역관 이야기

90 Madrid 50개 무역관 이야기 마드리드 무역관 플라밍고와 투우는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다 스페인만이 가지고 있는 강한 자존심과 자립 심의 독특한 개인주의 성향을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스페인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개성이 뚜렷하게 나타나기 를 원한다. 라 만차의 돈키호테 (Don Quixote de La Mancha)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마드리드의 중심가에 자리한 스페인 광장 에 가면 동상이 서 있다. 세르반테스의 사망 3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졌는데 세르반테스 (Miguel de Servantes)뿐만 아니라 그가 써낸 불멸의 주인공들, 말을 탄 돈키호테와 나귀 위에 올라탄 산초 판 자(Sancho Panza)도 만날 수 있다 무역관 개설 생활 및 근무 여건 최근 물가상승과 부동산 경기 악화로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가운데 10년간 경제 호황을 누려온 스페인 국민들 사이에 상대적 불안이 증가하고 있다. 게다가 이민자 에 이어 불법체류자가 증가하면서 관광객을 노리는 소매치기가 많다. 한국에 대해 경제적으로 발전한 나라라는 긍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으며 한국인 에 대한 평판도 양호한 편이다. 스페인기업들은 전통적인 투자대상지역인 중남미에 서 탈피, 아시아지역(특히 중국 및 인도)에 대한 진출을 강화하는 추세다. 특히 최근 한-EU FTA 체결 등으로 인해 한국을 아시아시장 진출 전진기지로 주목하고 있다. 행정 및 일처리 관행은 많이 개선되었으나 여전히 느린 편이며 관료주의가 남아 있다. 무역관 이야기 긴박했던 5일 동안의 드라마 한국상품전 개막을 5일 앞두고 있던 2007년 4월 11일 수요일. 오전 10시에 시작된 스페인 한국상품전 기자간담회 를 마치고 정오쯤 사무 실에 들어온 필자에게 무역관의 이경실 과장이 다급하게 다가왔다. 관장님, 발렌시아로 들어온 컨테이너선이 그냥 돌아갔대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냥 돌아가다니? 새벽 6시경 항구에 들어왔는데 부두에 선석(배를 대는 곳)이 없어 컨테이너를 090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91 못 부리고 그냥 이태리 제노아 항으로 떠났다는 거예요.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얘기였다. 다음 주 월요일(4월 16일) 개막일까지 남 은 기간은 불과 닷새. 오늘부터 시작해서 하역, 통관, 운송하기에도 빠듯한 기간인 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한꺼번에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갔 다. 금요일에 사장님이 도착하고. 개막식에 장관이 오고. 그날 오후에 대통령이 오시 는데... 전시품을 실은 우리 컨테이너는 한진해운 선박으로 부산항을 출발, 홍콩에서 일 본 선박으로 환적하여 스페인 발렌시아 항에 3월 말경 도착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2006년 12월에 발생한 동남아 지진과 쓰나미로 홍콩에서의 출항이 많이 지연되었 다. 가슴 졸이며 도착일자를 체크하던 중 일주일 전쯤 4월 11일 도착예정이라는 확인 을 받고, 도착하면 통관 운송이 곧바로 이루어지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참 이었다. 필자는 곧바로 발렌시아 한진해운 송 지점장에게 전화를 했다. 어찌된 겁니까? 배가 그냥 떠나다니. 배가 지금 어디쯤 있나요? 빨리 배를 돌리 세요, 무조건. 현재 확인 중입니다. 일본 선사와도 연락 중이고. 현재 프랑스 공해상인 것 같 습니다. 계속 텔렉스를 치고 있어요. 무조건 입니다. 우리 두 사람 목이 걸렸어요. 압니다. 한진해운 면허취소도 걸렸어요. 최선을 다해 뛰고 있습니다. 고 노무현 대통령 스페인 국빈방문 행사의 하나였기 때문에 한국상품전은 국내 외로 관심을 받고 있었다. 개막식에 우리측 산업자원부 장관과 경제 4단체장이 모두 참석하고 스페인 측에서도 산업부장관, 마드리드 주지사, 경제단체장들이 모두 참석 키로 되어 있었다. 더욱이 그날 오후 4시경에는 노무현 대통령 일행이 행사장을 방문 해 격려하실 예정이었다. 우선 본사에 긴박한 상황을 전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전시팀이 움직이기 시작 했다. 만약에 대비해 출장기업들이 전시품을 휴대해 오도록 지침을 내려야 했기 때문 이었다. 산자부 당직실에 전화해서 한진해운 본사를 통해 일본 선사를 움직이도록 부탁했다. 대사관의 도움도 필요했다. 이춘선 대사에게 전화해서 배를 돌리려고 노력하 고 있으니 발렌시아 정부에 연락해서 선석을 빨리 내주도록 요청해달라 고 부탁드렸 다. 대통령 행사 준비로 정신없던 와중이었지만 감사하게도 대사관에서는 주정부와 091 Ⅰ. 무역관 이야기

92 항만청, 그리고 발렌시아 항에 팩스를 보내주었고 주지사와 항만청장에게 전화해서 각별히 요청해주었다. 밤늦게까지 본사에 보고서를 준비하며 혼란스럽고 바빴던 하 루가 지나갔다. 4월 12일 목요일 아침, 득달같이 송 지점장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나 상황은 아 직 비관적이었다. 수없이 많이 쌓여있는 컨테이너의 짐 하나를 부리기 위해 배를 돌 린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고는. 컨테이너선이 하루 지 체하면 선사에 약 100만 달러의 손실이 발생한다는데, 송 지점장은 계속 선장과 접촉 하고 있다고 했다. 오후에 희망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배가 더 이상 진행하지 않고 공해상에 임시 정박해 있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러면 다시 돌아올 수도 있는 건가? 이태리 제노아 항이 금주 토요일부터 부두노동자 파업이라는 소문입니다. 선 장이 오도가도 못하고 있다고 해요. 송 지점장이 급하게 전해왔다. 이제 절반은 되었구나.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다시 불러들이기만 하면. 얼마 후 또다시 연락이 왔다. 발렌시아 항으로 배가 돌아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탈리아에서도 짐을 부리지 못하게 되었으니 다시 돌아오는 것이 낫다는 판단 을 한 것이었다. 이제는 선석만 구하면 되는 일이었다. 주정부, 항만청, 항구에서 관심을 갖고 있 고 한진해운에서도 친분있는 인사를 통해 뛰고 있으니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 다. 다만 시간이 문제였다. 보고를 받은 본사에서는 참가기업 간담회를 통해 일찍 출 국하는 기업들에게 전시품을 휴대하도록 안내했다. 시시각각 상황을 파악해서 대처 하도록 지시를 내려두었다고 했다. 짧은 시간에 하역, 통관, 운송하는 일이 큰 문제였다. 어차피 정상 통관은 불가 능하고 사전 통관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일기가 사나운 초봄이라 혹시 바람이 거 세게 불면 하역장비가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날씨도 변수가 될 수 있었다. 배에 산 더미처럼 쌓여있는 컨테이너 더미 속에서 우리 짐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도 필요했다. 하역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휴일 낮에는 컨테이너가 도심에 진입하지 못하기 때문에 세관장의 특별운행증도 필요했다. 밤이 되자 배는 발렌시아에 도착해 앞바다에 정박해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 리고 선석이 나는 날짜가 모레, 토요일 밤 9시로 결정되었다는 전갈이 왔다. 그러면 이제 토요일 낮에 통관하고 밤에 하역해서 밤새 마드리드로 운송하면 되는 일이었다. 092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93 스페인 세계일류 한국상품전 가능할까? 시간을 맞출 수 있을까? 참가기업들이 전시품을 찾아 하루정도는 준비작 업을 해야 하는데 만약 도착이 늦어지면 참가기업들의 혼란과 불평은 어떻게 하나? 다행히 우리 짐은 위에서 두 번째 열에 위치해서 하역시간이 많이 소요되지 않을 것 같았다. 발렌시아 세관에서 적극적인 협조를 약속했고 특별운행증도 발급해 주기 로 했다. 낮에 도착한 한종운 팀장과 해외전시팀 직원들이 합류하면서 상황을 파악 하고 본사와 긴밀하게 연락하면서 준비업무를 원활하고 신속하게 진행하였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갔다. 불과 이틀 사이에 천당과 지옥을 오르내린 셈 이었다. 다음날 4월 13일 금요일. 더 이상 어려운 상황은 지속되지 않았다. 토요일 밤 하 역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일요일 아침에는 전시장에 컨테이너가 도착할 것이 라는 확신이 들었다. 4월 14일 토요일 낮 12시쯤 선박이 항구 앞바다에 정박해 있는 상태에서 통관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밤 10시경, 정상적으로 하역을 마친 우리 컨테 이너가 트럭에 적재되어 마드리드로 출발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일요일 아침 8시, 사장님과 함께 전시장 하역장에 도착했을 때 40 컨테이너의 문이 열리고 전시품이 전시장으로 반입되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긴박했던 5일간의 드라마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093 Ⅰ. 무역관 이야기

94 Moskva 50개 무역관 이야기 모스크바 무역관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와 글라스노스트(glasnost). 1985년 4월, 소련 공산당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 프(Mikhail Gorbachev)는 페레스트로이카 선언을 통해 정치개혁과 경제개혁을 표방하였다. 그리하여 언론의 자유와 비판이 허용되고, 인권이 크게 개선되었으며, 통제경제에서 시장경제로의 이행이 시도되었다. 글라스노 스트 역시 고르바초프가 1985년에 시행한 개방 정책이다. 종래에 반소적( 反 蘇 的 )이라고 금지된 문학작품이나 영화 연극 등이 공개되었다. 비록 제한적 공개이기는 하였으나 수동적인 국민을 활성화시키고 보수관료와 사회 의 부패를 비판하여 소련의 민주화에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 톨스토이는 러시아인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모스크바를 어머니로 여긴다 는 말을 남겼 다. 모스크바는 러시아인들에게는 수도 를 넘어서 작은 러시아 로 존재하는 것이다. 붉은 광장, 볼쇼이 극장, 양파 머리 지붕을 한 성 바실리 사원. 이 중에서도 가장 매력적인 곳은 러시아 발레를 볼 수 있는 볼쇼이 극장이 아닐까? 완벽을 추구하는 러시아 발레는 귀족 사회의 위풍당당함과 전원의 부드러운 아름다움 같은 러시아의 복합성을 잘 드러내고, 수많은 관중에게 영감을 주며, 영구한 러시아의 문화이며 자존심이라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으니까 무역관 개설 CIS 지역본부 체제로 재편 모스크바 무역관은 1989년 국교 수교 전에 개설되어 초창기에는 대사관 역할도 일부 수행하였다. 우리나라 정부기관 중에 최초로 러시아에 진출하여 수많은 시행착오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2011년 들어 벌써 설립 22년째를 맞이했다. 생활 및 근무 여건 모스크바는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로 겨울은 짧고 한랭하며 여름은 서늘하다. 모 스크바 내 American School, British School 등 외국학교의 수는 비교적 많으나 좋 은 학교는 신청자가 많아 장기간 입학을 대기하는 경우가 빈번하며 최고의 고물가 도시답게 학비 역시 매우 비싸다. 치안은 비교적 안정적이나 체첸독립주의자들의 테 러사건이 간헐적으로 발생하며, 시 외곽지역에서는 극우 민족주의자에 의한 인종 테 러도 종종 발생한다. 모스크바의 가장 큰 애로사항은 고물가와 교통 체증이다. 한편 근무면에서는 구 소련시대의 잔재로 행정절차가 매우 복잡해 사업을 추진 할 때 투입해야하는 시간과 노력이 너무 많다. 또한 최근 10년간 고물가 도시 1~3위 를 차지할 정도의 비싼 물가로 인해 주재원 및 주재원 가족들의 여가 활용은 거의 없 094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95 다. 모든 모스크바 내 도로가 항상 막힐 정도로 교통체증이 심하며, 영어가 아직까지 는 잘 통용되지 않는 등 전체적으로 근무여건은 열악한 편이다. 반면, 원자재 수출 증 가에 기인한 경제 성장률이 높고 대부분의 공산품을 수입하는 시장 특성으로 인해 우리기업의 진출 전망은 매우 밝으며 폭 넓은 한 러 간의 경제 협력 분야 및 현지에 서의 한국산 제품에 대한 인식도 좋아 사업 수행 여건은 좋은 편이다. 무역관 이야기 스릴 은 내 친구 먼저 교통경찰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러시아 교통경찰은 위반을 하지 않아도 수시로, 무작위로 지나다니는 차량을 세운다. 한번은 아주 사소 한 교통위반을 하였다. 경찰이 묻는다. 벌금을 정식으로 별도로 지정된 은행에 납부 하겠느냐, 아니면 본인에게 직접 내겠느냐 이런 경우 바로 현장에서 해결하는 것이 상책이다. 무역관 직원 모두가 몇 번씩 경험한 일이다. 특히 전시회, 한국상품전, 투자IR, 시장개척단 등 행사성 업무를 추진할 때 발생 하는 여러 걸림돌 때문에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허비되는 경우가 많다. 전시회의 경우 샘플 통관이 항상 문제가 되고, 업체 모집이 필요한 행사는 상이한 업체 상관행 즉, 러시아인의 문화나 관습의 차이로 인한 오해로 시간이 지연되는 경우가 많다. 2010년 5월, 한 러 수교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한국상품전 을 모스크바의 심장부 대통령궁 집무실이 있는 크렘린 근처 마네즈 전시장에서 개최하였다. 수차례 참석인사 변경, 분 단위 시간까지 검토한 개막식 행사(30분 예정)를 불과 30~40분 앞두고 있었다. 개막식 우리측 VIP는 지경부 장관, KOTRA 사장, 주러 한국대사 등 이며, 러시아측은 통상부 차관, 모스크바주 부지사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크렘린 경비실 출신이라고 소속을 밝힌 건장한 사내가 아주 냉정한 표 정으로 담당자인 필자를 찾아 와 처음에는 무작정 개막식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유인 즉, 바로 옆에 있는 크렘린에 외국원수가 방문해 러시아 대통령과 회의를 하 는데 개막식 행사가 시끄러워 방해가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사전에 개막식 개최와 관련하여 여러 차례 문서를 보내 승인을 받은 상태였다. 그 순간, 이 요구는 거부하기 어렵다는 생각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리 를 줄이겠다, 시간을 정확히 끝내겠다 고 통사정하였다. 물론 한 러 양국 간 국교 수립과 관련된 일종의 정부간 행사이며, 개막식 행사는 사전에 정확히 통보하여 허락 받은 사항임을 강조하였다. 또 현지 고참 직원에게 더 정확한 설명을 하고 사정하도 095 Ⅰ. 무역관 이야기

96 록 요청하였다. 그러자 차츰 누그러지더니 (다음에는 시간을 10분, 20분 더 줄이라는 타협안이 제시되었으나) 결국은 원안대로 하되 지나치게 시끄럽지 않으며, 시간을 엄수하라는 선에서 해결되었다. 이래서 모스크바 무역관은 더욱 스릴이 있다. 모스크바에서 업무추진을 하다보면 발생하는 수많은 걸림돌이 사실 알고 보면 우리가 러시아의 법률이나 제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언어가 안 통하거나, 아 니면 러시아를 다소 만만하게 보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러시아 실무 담당 공무원 들이 자의적으로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기 때문에 그런 점도 있다. 또 러시아의 법률 이나 제도가 유럽의 좋은 것을 다 포함해서 만들어 놓았는데, 이는 문서상으로만 존 재하거나, 당연히 공정하게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로마에 가면 로마인처럼 행동하라 라는 격언이 있듯이,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시장개척단 참가 업체들에게 항상 몇 가지를 강조하곤 한다. 첫째, 불평불만하지 마 세요(시간 낭비입니다). 둘째, 정신 똑 바로 차려야 됩니다(항상 긴장감을 가져야 합 니다). 셋째, 러시아를 사랑하려고 노력하세요(향후 비즈니스 추진과 정신건강에 좋 습니다).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는 말이 있다. 그 만큼 모스크바는 비정하 고 터프한 곳이다. 하지만 러시아에는 이 세상에 나쁜 날씨는 없다. 다만 나쁜 옷과 신발이 있을 뿐이다 라는 말도 있다. 쓰디 쓴 잔을 마신 모스크바 한국식품 특별판촉전 한 러 수교 1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모스크바 무역관은 한국식품문화를 소개하고 한국식품의 러시아 수출기반을 마련하고자 당시 비계획사업으로 한국식품 판촉을 위한 특별전시회를 기획하게 되었다. 농수산물유통공사의 적극적인 참여 하 에 2000년 3월 22일부터 25일까지 개최하기 위한 준비과정에서 무역관은 전시물품 의 통관불가 라고 하는 뜻하지 않은 사태를 만나 사업이 좌초한 뼈아픈 일을 겪었다. 이 사업을 추진하게 된 배경에는 그 전 해에 블라디보스톡에서 열린 소규모의 한국식품전 개최가 있었다. 당시 현장에 내방한 현지 바이어와 소비자들이 한국식품 에 좋은 반응을 보이자 모스크바에서 한국식품을 제대로 소개함으로써 러시아시장 에 우리 식품을 소개하려고 사업파트너를 물색하던 중 마침 농수산물유통공사가 러 시아에서의 식품전 개최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현지에서 전시장소를 수배하던 중 러시아식품 유통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던 현지업체를 찾음으로써 러시아시장 최초의 한국식품전 개최가 실현되기에 이르렀다. 모스크바 무역관은 통 관, 현지 홍보, 바이어 유치 등 현지 업무를 맡고 농수산물유통공사와 러시아식품유 09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97 통업체 간의 효율적인 협력사업 추진으로 러시아지역 수출에 한 획을 긋는 식품판촉 전이라는 특별행사를 개최하려 했던 것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현지통관 관행은 엄격한 정상 통관방법보다는 어느 정도 융통 성이 있어 통관업체에 맡기면 통관문제는 별 문제없이 해결되어 특별한 문제의식이 없었다. 전시회 개최를 목전에 두고 전시품 통관 불가라는 예측 불허의 사태를 맞게 된 원인을 나름대로 분석해 보면 전시품 중에 SGS(규격 인증서)를 필요로 하는 품목 에 대한 정상 서류구비가 시간문제 등으로 현실적으로 어려웠던 점과 한국 통관업체 와 러시아 통관업체 간의 협력문제 등에 대한 대응이 적절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참가업체 일행이 모스크바 행 비행기를 타기 전에 통관 불가 상황을 파악하게 되어 그 이상의 문제 확대는 없었다. 모스크바 무역관은 전시품의 현지 홍보 등 현지 지원업무가 주된 업무로서 특별사업으로 판촉전 성과거양에 비중 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통관업무는 제한된 인력사정으로 현지 한국업체에 관행적 으로 믿고 맡기는 상황이었다. 한국식품의 러시아시장 본격 진출을 위한 한국식품전 판촉전을 대러시아식품 수출교두보를 확보하고 시장다변화를 실현하기 위한 전초전으로 의욕적으로 추진 한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전시품 통관 불가라는 불측의 사태로 말미암아 행사가 좌절되고 만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으며, 점진적으로 세계를 향해 열리고 있는 러시 아시장 진출에 있어 하나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김영철 OB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알렉산더 랴보프(Alexander Ryabov) 1954년 출생 ITAR-TASS 통신사 북한특파원, 소련 외무성 근무 등 화려한 경력의 알렉산더 랴보프 씨는 러시아 최고 명문대 인 모스크바 국립대를 졸업한 모스크바 무역관의 핵심 재원이다. 1997년 KOTRA 모스크바 무역관에 입사한 후 줄곧 조사업무를 담당하고 있으며 통계 자료가 거의 없는 현지 현실에서 양질의 자료를 만들어내는 그의 능력은 항상 놀라움의 대상이다. 관료적인 러시아에서 기관, 주요기업에 보내는 외부 공문 작성은 그를 통해야만 안심이 되며 무역관의 주요 바이어들이 그의 안부를 물어볼 정도로 폭넓은 인맥은 그의 또 다른 장점이다. 이처럼 탁월한 업무 능력과 항상 성실한 모습으로 인해 젊은 한국직원들이 미스터 랴보프가 아닌 랴보프 선생님이라 호칭할 정 도로 모스크바 무역관의 대표적인 현지 직원이다. 097 Ⅰ. 무역관 이야기

98 Vladivostok 50개 무역관 이야기 블라디보스톡 무역관 블라디보스톡은 동방을 정복하라 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연해지방의 행정 중심지인 블라디보스톡은 러시 아 극동의 군사기지이며, 시베리아 철도의 시발점이고, 태평양 진출의 관문이다. 블라디보스톡은 러시아로서는 태평양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부동항이며, 대륙의 용의 눈같은 전략적 요충지이다 무역관 개설 생활 및 근무 여건 블라디보스톡의 기후는 여름에는 그다지 덥지 않고(8월 평균기온 섭씨 20도) 겨울에는 섭씨 영하 10도 아래로 내려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겨울의 체감기온은 항구도시라는 특성상 섭씨 영하 30도까지 내려가기 때문에 외출할 때는 모자, 장갑 등을 꼭 챙겨야 한다. 특별한 풍토병은 없으나, 4월부터 10월까지 뇌에 치명적인 염 증을 일으키는 클레쉬라는 진드기가 극성을 부리는데, 클레쉬에 물리면 발열혈소판 감소종합증 이 발병하고 40도 이상 고열 등의 증상과 함께 뇌염으로 번지기도 한다. 치안은 하바로프스크를 중심으로 일명 뻑치기 가 기승을 부리면서 수십 명의 동양 계 외국인이 폭행당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시내 중심가에서는 위험이 없다. 교민 수 는 250명 내외이며, 현지 활동 지상사 수는 약 20개이다. 근무 면에서 보면 인터넷을 통해 기초 통계자료를 구할 수 있으나, 한국과 비교 해 개방적이지는 않다. 예를 들어 한 대학의 졸업생 수 정보를 요청해도 쉽게 알려주 지 않고 별도의 행정처리를 요구한다. 게다가 행정절차가 복잡하고 느릴 뿐만 아니 라 확실하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다. 비즈니스계에서도 영어 의사소통은 원활하지는 않으며, 의사결정이 다소 느리다. 무역관 이야기 광개토 프로젝트를 아시나요? 1992년 4월, 상공부, KOTRA, 토지개발공사, 산업 단지공단, 안기부, 농어촌개발공사, 광업진흥공단으로 구성된 투자조사단이 특별임 09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99 무를 띠고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다. 이른바 광개토 프로젝트! 1938년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들은 스탈린의 소수민족 강제 이주정책 으로 인 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이때 열차편으로 시베리아를 횡단하던 사람들 중 일부는 이르크추크 등지에서 떨어져 나가기도 했고 추위와 굶주림으로 유명을 달 리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톈산산맥 아래 위치한 우즈베키스탄과 카 자흐스탄 등지에 정착해 짐승처럼 토굴 생활을 하면서 맨손으로 밭을 일구며 강인한 생존력 하나로 버티며 살아왔다. 광개토 프로젝트는 1938년에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등지로 강제 이주한 연해주 고려인 중에 연해주지역으로 귀환을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주를 지원해주 고, 그들의 터전마련을 위해 블라디보스톡에 주거와 농장 및 공업단지 조성을 목표 로 하는 대형프로젝트이다. 투자조사단은 블라디보스톡을 거점으로 본격적인 현지조사에 들어갔다. 주 대 상은 공단과 농장 건립의 제1후보지로 꼽혔던 나홋카 지역과 보스토치니 항 일대였 다. 보스토치니 지역은 수심이 깊고 부산과의 직항로가 개설되어 있었다. 지형도 평 탄해 공단 확장이 용이해 보였으며 인근에 미국과 러시아가 공동으로 조성하는 테크 노파크 공업단지가 위치해 있었다. 조사단은 공업단지로서 적합성뿐만 아니라 은행, 항공, 식당, 관광업, 수산업 분야의 투자여건까지 두루 조사한 뒤 대체적으로 이지역 이 이런 조건들에 양호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반면 농업여건은 자연 조건 및 토양, 강수량 등을 따져 보았을 때 대규모 기업영 농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렸다. 광물자원도 석탄, 중석, 아연 등이 풍부하게 보존되어 있었지만 광산장비가 노후되어 있었고, 광부의 생산성도 낮은 편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지역은 우선 공업단지 조성을 약 100만 평 규모로 추진하되, 입주 업 종은 농수산물 및 목재가공, 직물 및 의류, 가전제품 조립, 신발, 합성수지, 비누 등의 생필품과 자동차 부품, 농기계, 완구, 주방용품 등이 유망한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공업단지 조성에 필요한 조사를 마친 조사단이 귀국 후 작성한 종합보고서는 고 위층까지 보고되었고, 그 후 다시 정밀 조사단이 파견되어 민간기업들과 손잡고 공 단 조성계획을 추진해나갔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문민정부 들어, 전면 재검토되었고, 광개토 프로젝트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북방정책에 대해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 던 문민정부는 노태우 정부가 북방정책을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고 생각했다. 또한 카레이스키들을 연해주로 이주시키면 외교마찰을 일으킬 수도 있 099 Ⅰ. 무역관 이야기

100 극동 시베리아 개발 프로젝트 설명회 다는 점도 불편하게 여겼다. 결국 문민정부는 경제성도 뚜렷하지 않은 동토 개발에 힘을 쏟을 이유가 없다며 애석하게도 광개토 프로젝트를 좌절시켜버리고 말았다. 지금 러시아가 극동지역 개발에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 프로젝트가 얼마나 앞선 계획인지를 알 수 있다. 우리가 이 광활한 지역을 개발할 수 있었던 기회 를 놓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 때 우리가 100만 평 규모의 공단을 조성했다 면 양국의 산업에 대한 기여는 말할 것도 없고, 땅값만으로도 투자의 몇 배를 톡톡히 뽑고도 남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환익 저, 우리는 사는 줄에 서있다 에서)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올렉 구슬랴코프(Oleg Guslyakov) 1967년 출생 2008년 9월부터 무역관에 근무하고 있는 구슬랴코프는 극동 시베리아 개발협력센터의 부센터장을 역임하고 현 재는 프로젝트 및 시장개척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그는 대학시절부터 한국 문화를 접하고, 한국업체 지사장으로 근무하는 등 블라디보스톡에서 손꼽히는 한국통이며, 시장개척에도 유능할 뿐만 아니라 무역관이 현지 정부 및 기관과 접촉할 때 창구역할을 맡고 있다. 100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01 Milano 50개 무역관 이야기 밀라노 무역관 로마의 모더니티는 고대 로마제국과 르네상스 그리고 바로크의 배경 속에 드문드문 박혀 있다. 마찬가지로 밀라 노의 예스러움 역시 아르마니, 프라다, 베르사체, 세르지오 로시 따위의 명품 브랜드로 상징되는 모더니티의 허영 위에 드문드문 아로새겨져 있다. 한 나라의 수도이고 위치도 반도의 중서부지만, 로마에선 설핏 남부의 가난 냄새 가 난다. 반면에 밀라노는 흘끗 보아도 부자 도시다. 밀라노는 단지 이탈리아의 잘사는 북부 만을 대표하는 게 아 니다. 이 도시와 그 둘레는 유럽연합 안에서도 가장 부유한 지역에 속한다.(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에서) 이탈리아는 유럽 최대의 쌀 생산국이자, 기계공업과 제약업에서 유럽 1~2위를 다투고, 섬유 패션 의류 분야에 서 압도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가 하면 음악, 디자인, 문학 등 인류문화에의 공헌 차원에서도 세계 유수의 국 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밀라노는 그 위치에 따라 라틴어로 Mediolanum(대륙 가운데의 땅)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세월과 함께 밀라노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다. 밀라노가 주도인 롬바르디아주는 오늘날 이탈리아 총 GDP의 약 40%를 차지하며 이탈리아 경제의 명실상부한 대표주자이다 무역관 개설 생활 및 근무 여건 이탈리아 사람들로부터 대접 받으려면 영어로 대화하라 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탈리아인들의 영어울렁증은 한국의 그것보다 큰 편이지만, 이는 이탈리아에서 영 어로 의사소통하는 것이 그만큼 쉽지 않다는 말도 된다. 대도시의 젊은 인터넷 세대 들은 다소 예외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러한 언어장벽은 느린 행정처리와 더불어 현지 정착의 가장 큰 애로점으로 꼽히고 있는데, 특히 현지정착을 위한 첫 번째 단계인 체 류허가 신청에서부터 이탈리아의 느린 행정은 위력을 발휘한다. 한국에서라면 하루 이내에 해결될 일도 몇 달씩 기다려야 하는 일이 다반사인 관계로 현지정착을 위한 가장 큰 자산은 무엇보다 인내심이다. 비즈니스 측면에서 이탈리아인들은 위험회피 성향의 보수적인 성격이 강해 같 은 조건이라면 새로운 파트너를 찾기보다는 기존의 거래선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강 하다. 이런 성향으로 인해 일부 유명 브랜드를 제외한 한국 제품에 대해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편이다. 이탈리아와의 비즈니스에 있어 또 하나 주의할 점으로는 축구가 금기어( 禁 忌 語 )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이 한국에게 패배한 뼈아픈 사연이 101 Ⅰ. 무역관 이야기

102 몇 번 있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박두익의 결승골로 북한에 당한 패배였고, 두 번째는 청소년월드컵 4강 신화를 쓴 1983년 멕시코 대회 에서 최순호 선수에게 2골을 내주며 당한 4-1 대패였다. 세 번째이자 지금까지도 이 탈리아인들에게 흥분을 안겨주곤 하는 대( 對 )한국전 패배는 2002년 한일월드컵 16 강전이었다. 특히 이탈리아의 축구영웅 토티 선수에게 레드카드를 준 모레노 주심의 판정에 대한 불만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서 이탈리아 방송은 아직도 모레노 주심에 관한 이야기라면 빼놓지 않고 보도하고 있다. 무역관 이야기 박 대통령, 공산권 교역상사와도 거래토록 하라 1966년 4월 5일 밀라노 무역관이 개 설되었다. 개관 날짜를 한국의 식목일로 정한 데는 유럽에 첫 나무를 심는다는 숨은 뜻도 있었다. 홀로 부임한 필자는 그곳 유학생 이환식 씨를 채용하여 관옥 선정, 임대 계약 체결, 전시관 내외부 장치공사, 개관 행사계획 수립 등 둘이서 발바닥이 닳도록 뛰며 많은 고생을 했다. 무역관 개관식은 가톨릭 밀라노 교구 대주교, 밀라노 도지 사, 주밀라노 외교사절단장, 밀라노 상공회의소 회장, 주이탈리아 이종찬 한국대사 등 내외빈이 참석한 가운데 화려한 테이프커팅으로 막을 올렸다. 곧 시장조사와 개척 업무를 서두르던 중 이탈리아의 유명 백화점 Rinascente 구매담당 부사장을 만나게 되었다. 그와 가깝게 지내던 중 조만간 극동에 간다는 이 야기를 듣고, 어디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더니 홍콩과 도쿄에 간다고 했다. 필자는 기 회를 놓치지 않고 서울에도 가 보라 고 권유했다. 그는 한국에 한 번도 가본 일이 없 는데 그러면 이번 기회에 둘러 오겠노라고 하여 그가 떠나기 전 저녁 식사를 융숭히 대접했다. 그리고 본사에도 보고하여 최대한의 안내를 부탁했다. 몇 주일이 지난 후 그가 밀라노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큰 기대를 걸고 그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그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한국을 방문하지 않았다고 해 그 까닭 을 물었다. 그에 의하면 홍콩 도착 후 주홍콩 한국총영사관에 한국 입국비자를 신청 했는데, 홍콩에서 업무를 다 끝낼 때까지도 비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고, 도쿄 주 재 한국대사관에 가서 문의해 보라 하여 그렇게도 해 보았으나 도쿄에서도 일이 끝 날 때까지 한국 입국비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한국에 어떤 상품 이 있는지 모르지만 입국이 그렇게 어렵다면 흥미를 잃었다고 했다. 방한을 적극 권 유했던 필자는 무안하고 당혹스럽기도 하고 화도 났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수출진흥회의가 청와대에서 개최되어 각 102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03 국 주재 대사와 KOTRA 무역관장들이 참석하게 되었다. 필자가 보고할 차례가 되어 이탈리아 현황과 비자 문제를 보고하면서 무역진흥업무를 수행하라고 현지에 무역 관을 개설하고 인원을 파견하여 일을 하라고 하면서, 상품을 구매하려고 방한하려는 현지 상사 바이어에게 입국비자를 내주지 않으면 어찌 하라는 거냐 고 항변했다. 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이 외무부장관에게 어찌된 일인가 묻자, 장관은 보좌관을 통해 알아보고 곧 보고드리겠다고 답변했다. 얼마 후 외무부에서 경위 답변이 나왔다. 비자를 안 내준 것은 이탈리아 부사장의 여권 속에 동유럽 여러 나라를 수시로 드나든 기록이 있기 때문에 혹시 사상이 의심스러운 사람이 아닌가 하여서였다는 사연이었다. 이 보고를 듣던 박 대통령은 아니, 이태리 상인이 인근 동유럽 여러 나라를 출 입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사상을 의심하고 비자를 내주지 않았다는 것은 무언가 잘 못 된 것 같다. 외무부는 연구해서 상사 사람이 무역하러 들어오겠다면 당연히 비자 를 내주도록 고쳐 보시오 라고 지시했다. 그 이튿날 아침 도하 신문 1면에는 공산권 교역 상사와도 거래 라는 제하에 부제로 무역 더욱 확대 연구토록 박 대통령 지시 라고 게재되었다. 고석원 OB 경향신문 1966년 7월 27일자 기사를 보자. 정부는 공산권과 교역을 하고 있는 용공상사와 일체 상거래를 하지 않기로 했던 지금까지의 정책을 변경 하고 북괴 및 중공을 제외한 공산국가와 거래하는 자유진영 내의 상사들과도 상거래를 하기로 방침을 세 웠다. 박정희 대통령은 27일 원용석 무임소장관에게 외국의 용공상사나 상인이라도 그 상사 자체나 상 인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아닌 경우에는 이들과 상거래를 하여 무역을 확대하는 방안을 연구하도록 지시 했다. 정부가 외국의 용공상사와는 교역행위를 일체 하지 않는다는 지금까지의 방침을 변경하게 된 것은 지난 18일 청와대에서 열렸던 무역확대회의에서 무역진흥공사가 정부의 정책변경을 건의, 이를 박 대통령 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로베르토 벤디티(Roberta Venditti) 1968년 출생 밀라노 무역관에서 무슨 일이 발생하면 늘 찾는 이름이 있다. Roberta Venditti. 그녀는 1989년에 KOTRA에 입 사하여 20년 넘게 밀라노 무역관의 주전으로 활약하고 있다. 20년간 겪은 산전수전은 그녀를 밀라노 무역관의 구 글로 만들어주었으며 위급한 일이 발생할 때마다 늘 앞장서 해결하는 구원투수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KOTRA에 서 근무한 약 20년간 수차례 한국을 드나들며 한국 사람보다 한국 여행을 많이 한 Roberta 씨는 언젠가 홀로 제 주도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때 찍은 제주도 해녀 할머니들과의 사진은 지금도 Roberta 씨의 책상 한 곳 을 차지하며 그의 한국 사랑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 103 Ⅰ. 무역관 이야기

104 Budapest 50개 무역관 이야기 부다페스트 무역관 1999년 짐 로저스는 부다페스트를 여행한 소감을 어드벤처 캐피털리스트 에 이렇게 적었다. 한때 오스트리 아-헝가리 제국의 중심지였던 부다페스트는 여전히 성스럽고 아름다운 도시였지만 오랫동안 시간이 멈춰버린 도 시이기도 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아무도 눈에 띄는 건축물을 새로 짓지 않았고, 옛 건축물은 그대로 서 있었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박물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난 100년간 거의 아무런 변화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 나라는 계속 지기만 했으니까. 헝가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졌고, 그 이후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집권했다. 부다페스트는 가장 찬란했고 최고 수준의 문화를 자랑했던, 하지만 지금은 사라져버 린 역사적 순간의 물리적 표현물이었다 무역관 개설 공산권 국가 중 1989년 가장 먼저 한국과 수교한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무역관은 수교이전에 설립되어 양국 경제교류의 첨 병역할을 하였다. 중유럽의 센터에 위치한 부다페스트는 헝가리가 2004년 EU에 가입한 후 서유럽의 생산기지 및 물류기지 라는 독특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향후 물류중심으로서의 기능이 더욱 확대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생활 및 근무 여건 치안은 매우 양호하며, 관광지의 경우 경찰이 밤늦게까지 순찰한다. 헝가리인들 은 외국인에게 배타적이지 않으나 관공서는 다소 무뚝뚝하며 행정절차가 느린 편이 다. 현지교민은 약 1,000명이며, 현지 활동 지상사 수는 40개 내외에 인원은 800명 정도이다. 현지 교민은 대부분 지상사 파견인원으로 과거 사회주의 영향으로 현지에 정착한 한국인은 많지 않다. 부다페스트 시내에는 한국식당이 4군데 있다. 서울과 직 항은 없으나 주변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하는 항공편은 매일 있다. 물가, GDP 등 통계자료는 2개월 후에 업데이트 되며, 주요 정보는 헝가리어로만 이용 가능한 경우가 많아 정보수집이 쉽지 않다. 특히 특정 시장에 대한 비즈니스 정 보는 이용 가능한 소스가 제한적이며 유료정보는 가격이 매우 비싼 편이다. 인구 천 만 명인 헝가리는 주로 저렴한 인건비를 활용한 서유럽의 생산 공장으로서 외국기업 의 투자가 활발하며 루마니아 등 동유럽으로 시장개척을 하기에 적합하다. 104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05 무역관 이야기 2001년 12월 한국상품전 부다페스트 무역관은 2001년 12월 김대중 대통령의 헝 가리 국빈 방문기간에 한국상품전 을 개최하였다. 2001년 10월 1일 부임한 김상철 관장은 정착할 틈도 없이 10월 25일 본사로부터 VIP 방문시기에 전시회 개최를 준 비하라는 주문을 받았다. 개최시기는 12월 초라 준비기간은 사실상 한 달 남짓한 상 황이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여 이미지 자체만으 로 유럽에서 인기가 대단했다. 이러한 대통령의 세일즈 외교는 헝가리에서 우리 상품 및 브랜드 이미지를 고양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문제는 준비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또 한 달의 준비 기간 동안 국내 유수기업을 참가시키는 것을 비롯해 전시연출, 현지 관람객의 대거 전시장 참관 유도, 실질적 비 즈니스 성과 거양 등 여러 과제도 많았다. 결과적으로 현대, 기아, 대우 등 자동차 3 사와 삼성, LG 등 가전 2사, 한화 등 대기업 전시면적이 5,300m2에 달했고, 70여 중 소기업들의 참가로 성공리에 한국상품전을 개최했다. 준비과정의 무역관은 그야말로 야전부대가 치열한 전투를 치르는 현장이었다. 그 때 그 모습 그려보는 것 어렵지 않다. 관장 소리치고, 직원들 뛰어 다닌다. 저녁 먹고 또 소리치고 뛰어 다닌다. 잠은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날 새면 또 같은 전투현장 이 몇 날이고 지속된다. 참가업체 확정후 현지 대기업을 설득 TV 광고로 30초짜리 영상 광고물을 만들어 골든아워에 방영했다. 라디오 광고, 신문특집, 지하철, 인터넷 배너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여 입체적 홍보도 기획하여 밀어 붙였다. TV광고는 김 헝가리 한국상품전 105 Ⅰ. 무역관 이야기

106 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 장면을 포함한 월드컵 준비상황 등 다이내믹한 한 국을 상징하는 각종 영상자료를 활용하였으며, 내레이션 한국이 가까이 오고 있다 로 현지인들의 호기심을 끌어내는데 주력했다. 또 투입 비용 이상의 효과를 거두기 위해 KOTRA 동유럽 네트워크를 가동했다. 폴란드, 체코, 루마니아, 오스트리아, 크 로아티아 등 인근국에서 140명의 바이어를 초청하여 국가원수 방문이 민간기업의 비즈니스에 도화선이 되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디데이인 12월 8일 아침, 날씨는 쌀쌀하였지만 순조로운 개막식 행사와 함께 국 내, 현지 TV의 취재경쟁도 치열하였으며, 많은 손님들이 전시장을 찾은 가운데 성공 리에 행사를 마칠 수 있었다. 2001년 한국상품전은 1989년 한 헝 수교 이후 치러진 행사 중 가장 큰 사업이 었으며, 행사만을 위해 헝가리를 방문한 한국인사가 500명을 넘었다. 무역관에 부임 하자마자 이 행사를 치르고 난 김상철 관장은 행사준비를 하면서 임기 3년간 해야 할 현지 인맥 쌓기를 두 달만에 끝냈다. 관장은 현지 유명인사(?)로 알려져 2005년 귀임 할 때까지 부임기간 내 무역관 활동을 순조롭게 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뿌듯 해했다.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히드윅 벡시(Hedvig Vecsey) 1968년 출생 히디는 무역관 정규직원은 아니지만 연간 10회 정도 무역사절단 상담주선을 전문으로 하는 마케팅 여전사다. 관 장을 포함한 무역관 모든 직원들이 히디를 정규직원같이 대하고, 심지어 현지직원들이 한 수 배운다. 그녀는 2012년 열 살이 되는 아들 애드워드(Aduward) 육아를 위해 정규직원보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파트타임 형 태의 무역관 근무를 희망한다. 1993년에 부다페스트 무역관에 입사하여 1999년에 결혼과 임신으로 잠시 쉬었다가 2001년 한국상품전 상담 주선을 위해 무역관에 복귀했다. 10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07 Brussels 50개 무역관 이야기 브뤼셀 무역관 벨기에는 EU 및 NATO 본부를 비롯, 120여 개의 국제기구와 1,500여 개의 NGO가 소재한 일명 유럽의 수도 로서 EU 정치 및 경제 정책의 중심지이다. 1950년대 석탄, 철강분야에서 시작된 유럽통합과정 초기부터 벨기에 는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Paul Henry Spaak, Leo Tindemans 등 유럽통합을 이끈 선구자들을 배출 한 나라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비교적 익숙한 벨기에를 대표하는 특징으로는 만화 개구쟁이 스머프, 무려 1,000여 종의 맥주가 생산 되는 맥주의 본고장, 길리안, 고디바 등 초콜릿 왕국, 와플, 브뤼셀의 가장 나이 많은 시민인 오줌누는 소년 등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와는 1901년 우호통상 조약 체결 이후 1948년 한국정부 수립과 동시에 가장 먼저 한 국을 승인한 국가들 중 하나이다. 또한 한국전 당시 유엔 참전국 16개국의 일원으로 보병 1개 대대가 참전한 혈맹 으로 유럽국가들 중에서는 연이 남다르고 고마운 나라이다 무역관 개설 생활 및 근무 여건 벨기에는 사계절이 있으나, 여름은 그리 덥지 않고(8월 평균기온 23도) 겨울에 도 영하로 내려가는 경우가 많지 않으며, 눈도 많이 오지 않는다. 대신 초가을부터 다 음해 늦은 봄까지 비가 많이 내리고, 날씨도 상당히 변덕스럽다. 벨기에는 네덜란드어, 불어, 독일어를 국가 공식언어로 채택하고 있으나 사실상 북쪽의 네덜란드어권(플란더스), 남쪽의 불어권(왈로니아), 그리고 중간의 이중 언 어권(수도 브뤼셀)으로 나뉜다. 이에 따라 플란더스, 왈로니아, 브뤼셀 등 3개 지방 정부가 대등한 자격으로 중앙정부와 연합국가를 이루고 있다. 무역관이 소재한 브뤼 셀은 공식적으로는 이중언어권 지역이나 실제로는 불어가 일반적인 언어로서 일상 생활에서 불어를 모르면 상당히 불편하다(거의 모든 문서를 불어로 작성). 벨기에는 서유럽의 중심에 위치하고, 사람과 물자의 교류가 활발하여 외국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특히 브뤼셀의 경우는 전체 100여 만 인구 중 20% 정도가 외국 인이다. 일반적으로 벨기에 국민들이 이방인들을 대하는 태도는 관용적, 포용적이나 동유럽, 중동 등 일부 외국 이주자들이 사회질서, 보건 등의 측면에서 문제를 야기하 는 경우가 있어 최근에는 이들에 대한 배타적 시각이 불거지고 있다. 107 Ⅰ. 무역관 이야기

108 벨기에는 인구 1,000만의 작은 시장에 보수적 상관습으로 인해 마케팅 및 투자 유치 등 실질적 성과 위주의 비지니스 측면에서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따른다 년 현재 우리나라 지상사 수는 20여 개로 이들의 주요업무도 대부분 마케팅보다는 EU시장조사, 물류 및 공급망 관리 등에 중점을 두고 있다. 무역관 이야기 브뤼셀 그랑쁠라스(Grand Place) 오줌 누는 소년이 색동옷을 입다 오줌 누는 소년 에 색동옷을 입힌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고 한다. 당시 채훈 브뤼셀 무역관장의 한 친구 부인이 경원전문대 의상과의 김정희 교수였는데, 브뤼셀을 방문하여 오줌 누는 소년 동상에 우리나라 옷을 입힐 것을 제안한 데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이에 채훈 관장 은 브뤼세 시청의 관련기관을 접촉하여 이 일을 시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움직이지 않는 동상, 특히나 손으로 고추를 잡고 있는 모습 때문에 말이 옷을 입히는 것이지 조각난 옷 조각을 덮어씌우는 것이어서 이 색동옷을 입히는 과 정에서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으나 잘 마무리되었다는데, 조선일보 1995년 6 월 3일(토) 사회면 색연필 에서는 이를 브뤼셀 오줌누는 소년 2일 우리 색 동옷 입었다 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기사화되었다. 브뤼셀의 관광명소인 오줌누는 소년 동상이 한국의 전통 색동옷을 선물로 받았다. 채훈 대한무역진흥 공사 브뤼셀 무역관장은 2일 이 소년 동상이 입게 될 오색 색동옷을 브뤼셀 시청에 기증했다. 한국의 김정 희 경원대교수(의상학과)가 디자인한 이 색동옷은 조선시대 남자 어린이들의 돌맞이 옷 모양에 현대적인 감각을 곁들인 것이다. 브뤼셀시 당국은 2일 하루 동안 입힌 뒤 브뤼셀박물관에 영구히 전시할 예정이다. 1619년 만들어진 오줌누는 소년은 지금까지 세계 각국으로부터 581벌의 옷을 선물로 받았으며, 그 중에 는 각국의 전통의상 외에 엘비스 프레슬리의 공연복도 포함되어 있다. 한국은 지난 1957년, 1986년 회색 두루마기 등을 기증, 이번 색동옷은 한국의 의상으로서는 세 번째 선물이다. 이 동상에 처음 옷을 입한 사 람은 1698년 당시 브뤼셀을 통치하던 막시밀리안 엠마뉴엘 네덜란드 총독이었다. 창문 없는 무역관 어때요? 브뤼셀 무역관은 지난 1971년 7월 5일, 현재의 세계무 역센터(WTC) 내에 97년의 장기계약을 맺고 관옥을 개설했다. WTC는 설립자가 브 뤼셀 지방정부와 협약을 맺어 해당 부지를 100년간 임차했고, 설립자는 건물을 설립 하던 중 자금부족에 시달려 건물에 대한 분양권을 고객들에게 분할하여 판매하였다. 초대 관장은 계약 당시 무역관에 쇼룸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사무 공간(3층 이 상)이 아닌 현재 카페테리아가 위치하고 있는 상업 공간(2층)에 사무실을 임차하였 다. 상업 공간이다보니 옆집에는 식당과 술집이 있는데 금요일이 되면 오후 1시부터 10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09 음악소리와 함께 근무를 하거나 화장실에서 술취한 사람들을 자주 마주친다. 우리 무역관은 창문이 없으니 시간 가는 줄, 계절 바뀌는 줄 잘 모른다. 특히 갑자 기 비가 오는 날 우산 없이 밖에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일이 잦다. 그리고 하루 종일 햇볕이 들지 않아 근무시간 내내 전등을 켜야 하므로 전기세가 많이 나온다. 무역관에 창문을 만들려고 공사견적을 의뢰한 적도 있으나 금액이 3,000만 원 넘게 들어간다고 하여 계획을 포기한 적도 있다. 2007년 당시 빌딩의 소유주인 Fortis Real Estate에서 건물을 리모델링하기 위 해 빌딩을 매입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무역관에도 퇴거조건으로 30만 유로를 보상금으로 지급하겠다고 하였으나 가격을 협상하는 동안 Fortis가 자금난으로 BNP Paribas에 합병되는 바람에 계약이 성사되지 못했다. 지금까지 역대 총무들이 창문 없는 무역관으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하였으나 성 공한 사람이 없다. 필자(김한나)도 발령을 받자마자 무역관을 이전하려고 여러 부동 산을 접촉하였으나 무역관을 방문한 부동산은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 곁에서 보기 에 안타까웠던지 우리 무역관에서 38년을 근무한 Mr.Colson은 무역관 이전을 성공 하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크리스티앙 꼴송(Mr.Christian Colson) 1950년 출생 꼴송 씨는 1973년 벨기에에서 가장 좋은 대학교라 할 수 있는 루뱅대학교 경제과를 졸업하자마자 브뤼셀 무역관 에 입사하여 2010년 환갑을 맞이하기까지 청춘을 KOTRA와 함께 불살랐다. 브뤼셀 무역관의 살아 있는 증인인 그는 현지직원을 포함해서 KOTRA에서 가장 장기간 근무한 자로서, 그 동안 시장개척 사업에서부터 조사사업, 그리고 투자유치 사업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업을 해 본 경험이 있어 무역관의 각종 어려운 사업의 해결사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와의 장기간의 근무에도 불구하고 그가 할 수 있는 우리말은 죽깐네, 빨리빨리 등 몇 마디에 불 과하지만, 본사 파견 직원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고 현지 정착 등 개인적인 일도 내 일처럼 도와주고 있다. 최광희 1953년 출생 1987년 2월 1일 입사하여 25년 넘게 브뤼셀 무역관에 근무하고 있는 이 직원은 꼴송과 함께 브뤼셀 무역관의 든 든한 지킴이이다. 키는 작달만하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도 넉넉하고 오랜 해외생활에도 우리의 정서를 잃지 않은 정 많은 소녀 같다. 현지인들도 놀라는 고급 불어를 구사하고 있는 최광희 씨는 주로 조사업무를 담당해와 밖에서 보기에는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브뤼셀은 EU 본부가 소재하는 곳으로서 브뤼셀 무역관은 전통적으 로 조사업무 비중이 매우 높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녀의 역할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EU 단일시장 형성과 동구 로의 EU 확대 등이 우리에게 미칠 영향과 대응방안 조사, EU의 각종 제도와 규정조사, CE 마크 등 갈수록 복잡해 지고 있는 EU 환경관련 제도 조사, 국가정보 관리에 수시로 떨어지는 본사의 지시조사. 이따금씩 대사관에서조차 요청하는 조사사항까지 EU와 벨기에에 대한 조사범위는 한계가 없다. 109 Ⅰ. 무역관 이야기

110 Wien 50개 무역관 이야기 빈 무역관 오스트리아 하면 음악을 연상케 된다. 하이든(Franz Joseph Haydn)과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의 고향이기도 하고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이 떠오르기도 한다. 빈을 방문한 명칼럼니스트 고종석은 갈증이 났을까. 비엔나(현지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으로는 빈 ) 케른트너 거리의 카페 게르스트너에는 비엔나커피 가 없었다. 아니, 이 거리의 다른 카페 메뉴판에도 비엔나커피 라는 건 적혀 있지 않았다 고 투덜댄다. 발트해에서 대륙으로 가는 통상로와 도나우 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빈은 동유럽 교역의 대동맥이었다. 중세 에는 종종 헝가리의 침입을 받았고, 유럽으로 진출하고자 거침없이 서쪽으로 향하던 투르크족에게도 두 번이나 포위공격을 당했다. 투르크족의 위협이 완전히 사라진 후 빈은 동쪽 전초기지로서의 역할을 끝내고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헝가리를 아우르는 거대한 인접지의 중심이 되었다 무역관 개설 빈 사무소는 1970년 8월 18일 오스트리아 연방상공회의소에 외국정부기관으로 등록되면서 업무를 시작하였다. 빈 사무소 가 일찍이 설치된 것은 오스트리아와의 교역의 중요성도 높게 평가되었지만, 동구권 개방 이전 동구권 진출 관문으로서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지역이라는 오스트리아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크게 반영된 결과였다. 동구권 개방의 물결과 함께 동구권 지역에 KOTRA 무역관이 속속 개설되면서 종전의 역할은 대폭 축소되었으나, 뛰어난 육상 및 항공 물류 인프 라를 바탕으로 중동부 유럽 항공 물류의 중심지로서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생활 및 근무 여건 오스트리아 수도 빈은 미국의 컨설팅 기관인 Mercer가 매년 발표하는 세계에 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랭킹에서 연속 1위에 선정될 정도로, 종합적인 삶의 질이나 생활 여건이 매우 뛰어난 도시이다. 치안은 어느 나라보다 안전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심야에 혼자 길거리를 다니더라도 큰 불안을 느낄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동유럽 국가들 의 EU 가입과 시장 개방으로 이들 지역으로부터 유입된 원정 범죄단이 증가해 절도 등의 범죄 발생이 과거에 비해 많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생필품 조달에 문제가 없다. 한국식품의 경우 가격은 조금 비싸나 현지 한국식 품점이나 중국, 일본 등 아시아 식품점에서 조달 가능하다. 수도 빈에만 한국인 식당 이 30여 개, 한국식품점이 5개가 있다. 현지 교민은 2,300명 내외인데, 이 중 유학생 110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11 이 1,300명 정도이다. 음악의 나라로 유명한 국가적 특성상 유학생 중 음악 유학생이 전체의 90%가 넘는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인구 800만 명이 조금 넘는 오스트리아는 시장의 협소성과 보수적인 상관습 등 으로 무역관 업무 수행에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다. 독일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 지만, 세계인들이 즐겨 찾는 관광 대국답게 대도시와 유명 관광지에서는 영어로 의 사소통을 하는 데 큰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다만, 오스트리아 업체들과의 보다 심도 있고 원활한 비즈니스를 수행하려면 독일어 구사가 필요하다. 오스트리아가 소규모 시장인 관계로 수입상들이 다품종 소량 주문을 선호하고, 첫 거래는 시장 테스트용으로 극소량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오스트리아 기업들의 속성상 한두 번의 거래를 위해 생산업체를 물색하는 경우는 드물며, 지속적인 거래 관계 유지가 가능한 생산업체와의 접촉을 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무역관 이야기 KOTRA 최초 외국인 직접투자 유치 성공 시작은 빈에서 열린 포럼에서 KOTRA 빈 무역관 직원이 기밀 정보를 입수하고부터였다. 플라스틱 사출성형기술의 선두업체 인 엥겔(ENGEL) 이 아시아에 생산기지를 설립하려 한다는 내용의 정보였다. 빈 무역관은 정보의 진위를 파악하고 엥겔사와 연결을 취했고 바로 첫 요청에서 엥겔 측으로부터 빈 무역관장을 만날 의향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2차 세계대전 직후에 창설된 엥겔은 본사를 빈과 약 200km 떨어진 린츠(Linz) 근처 Schwertberg에, 생산기지를 오스트리아, 캐나다, 미국에 두고 있었다. 엥겔은 현재 3,500명 이상의 직원과 800만 달러 이상의 이윤을 창출해내고 있다. 뿐만 아니 라 이미 유럽과 미국의 사출성형기 관련 시장을 장악하고, 아시아 고객들의 수요가 급격하게 늘어 아시아로 제품을 수송하는 일이 잦았다. 그렇기 때문에 엥겔은 아시 아 시장을 조금 더 세밀하게 분석하고 생산기지를 설립하여 고객들에게 보다 품질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했다. 아시아에 들어설 생산기지로 한국이 유력했지만, 중국이나 동남아시아권 국가들도 경쟁 후보로 올라있었다. 1996년 7월 KOTRA는 CEO인 Neumann으로부터 구체적인 사업계획서를 넘 겨받았다. 사업계획서에는 투자총액 15만 달러 그리고 4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공장 부지, 건물 및 기계를 설치할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 그린필드 투자를 실현 하기 위해서 엥겔은 5단계 개발계획을 수립하였는데, 150여 명의 직원으로 매년 300 개의 성형사출기 생산을 첫 목표로 잡았다. 그리고 500개 생산이 최종목표였고, 한 111 Ⅰ. 무역관 이야기

112 국에서 생산되는 사출성형기의 60~70%는 주변 아시아 국가들에 수출하고자 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제시된 계획서에 부합하는 서비스와 도움을 제공해 주는 것 이 KOTRA의 임무였지만 계획서대로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장장 8개 월에 걸친 긴 마라톤협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공장 설립 예정지인 경기도 측과의 부지 매입 가격협상에서 서로 의견을 좁히지 못했다. 게다가 유럽에서는 이미 시행되 고 있었으나,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는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지원되는 별도의 지원 정책들이 없었던 것 또한 문제였다. KOTRA는 수차례에 걸쳐 수천 킬로미터를 왕복 하며 Schwertberg에 있는 본사를 방문해야만 했다. 당시 경기도 도지사도 두 차례 나 오스트리아를 방문하였으나, 일의 진행이 당초 예상보다 늦어지면서 한국 측의 관심도 점점 식어가는 것 같았다. 이런 와중에 투자 협상이 완전히 결렬될 뻔한 큰 위기도 두 번이나 있었다. 처음 에는 한국의 중소기업들이 국내에 막강한 경쟁업체가 들어서는 것에 대한 반발이 심 했다. KOTRA 측에서도 이 부분을 감안하여 투자협상을 천천히 진행할 수밖에 없었 다. 그러나 엥겔은 우리는 한국이 아닌 일본 우량품 공급업체의 막강한 경쟁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한국 업체들에게 대부분의 하도급을 줄 것 이라는 말로 한국 중소 기업들의 반발을 잠재울 수 있었다. 또한 평택의 공장부지 매입가격이 너무 비싸다 고 느낀 엥겔은 전략적으로 협상을 지연시키는 것 같았다. 약 한 달간 엥겔은 침묵으 로 일관하였고, 부지 가격이 너무 높다는 이유로 한국이 아닌 동남아시아 지역을 염 두에 두고 있다는 말들이 비공식 루트를 통해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공장부지 매입가격을 내리려는 엥겔의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한국 측에서는 재 협상을 마련하기 위해서 가격을 내리는 불가피한 선택을 해야만 했다. 협상은 재빠 르게 진행되었고 양쪽 모두 만족하는 대형 투자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긴 시 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1997년 7월 15일 마침내 (주)엥겔 머신 코리아 가 설립 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공장 설비 및 제품 생산을 하기도 전에 또 하나의 예상치 못 한 위기가 닥쳐왔다. 바로 1990년대 후반 한국을 비롯한 아 시아 국가들에 몰아닥쳤던 금융위기였다. 아시아의 금융위 기와 이에 따른 IMF 구제금융이라는 돌발 악재에 엥겔은 모 든 진행상황을 멈추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2년 뒤 한국이 경제를 회복하고 당시 경기도 도지사의 오스트리아 재방문 이 이루어진 후에야 엥겔은 평택 생산공장 건설에 들어갔다. Engel사를 방문한 당시 최진계 관장 한국에서 생산한 첫 엥겔 성형사출기는 빅토리 112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13 (Victory) 라는 시리즈 이름을 걸고 2001년 처음으로 시장에 선을 보였다. 이름과 같이 첫 생산은 성공적이었다. 뿐만 아니 라 2002년 오스트리아 본사의 생산공장이 홍수로 인해 침수되 었을 때도 대부분의 손실을 한국에서 생산한 제품들로 메꿀 수 있었다. Engel 신제품 시간이 지나면서 KOTRA는 점점 옴부즈맨 사무소 (Ombudsman Office) 와 같은 개념으로 한국 중소기업과 오 스트리아기업들의 다양한 지원요청을 받게 되었다. 건축 오류, 세금환급 또는 외국인 투자유치를 위한 현금지원제도 등 KOTRA는 엥겔 사의 요구에 부응하는 신속한 서 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고 엥겔사 CEO Neumann은 여전히 한국과 깊은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한국 명예영사로 임명 된 그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늘 한국에서의 투자 성공담, 한국 직원들의 높은 신뢰도 와 같은 우수한 현지 투자 여건들 그리고 당시 KOTRA가 제공한 유용한 서비스와 도 움이 투자성공에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를 언급하곤 한다. 엥겔은 한국 생산기지의 계속적인 높은 이윤 창출로 2012년 한국 생산기지에 1,000만 달러를 추가로 투자하 여 생산 설비를 확장할 계획이라니 왠지 기분이 좋다.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허버트 프라자허(Herbert Friesacher) 1954년 출생 프라자허는 1991년 4월 1일 무역관 생활을 시작한 이후 현재까지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 역사의 현장을 함께 하고 있는 빈 무역관의 살아 있는 증인이다. 전직 언론인(신문기자) 출신답게 폭넓은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시장조 사, 시장개척 업무 등을 거쳐 현재는 투자유치 부문을 담당하면서 오스트리아 우수 기업들의 한국 진출을 책임지 고 있다. 배우자가 일본 사람이라는 독특한 인연으로 인해 입사 이전부터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관심과 이 해가 무척 높았으며, 업무 스타일에 있어 누구보다도 한국적 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KOTRA 본사 직원 들이 현지 생활에서 부딪치는 모든 일들을 도맡아 처리하는 등 빈 무역관의 실질적 해결사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 는 우리의 든든한 노송( 老 松 ) 이다. 113 Ⅰ. 무역관 이야기

114 Stockholm 50개 무역관 이야기 스톡홀름 무역관 발트해를 끼고 북쪽으로는 북구 3국(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남동쪽에는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 아)이 자리잡고 있다. 북구 3국에 덴마크와 아이슬란드를 더하면 노르딕 국가가 된다. 커다란 내륙호와 발트해 사 이 해협에 교묘하게 자리잡은 스톡홀름은 수많은 섬과 교량으로 이루어진 스웨덴의 수도다. 북방의 베네치아라 불리는 이곳은 겨울마다 바다가 얼어붙는다. 이곳의 운명을 좌우한 요소는 발트해와 연결된 지리적 특성 및 수산 물, 목재, 금속광석, 모피 교역 그리고 바다에서 도시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수로를 통해 구불구불한 항로 를 지나야만 하는 자연적 방어기능 등이다. 스웨덴은 노르딕 국가 중 시장규모가 가장 큰 국가(인구 940만 명)임에도 불구하고 협소한 내수시장으로 인해 대부분의 스웨덴 기업은 수출과 해외 진출을 목표로 창업과 단계별 기업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스웨덴은 과거 대 기업 및 수출 주도의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유럽 빈국에서 부국으로 도약한 점이 한국과 비슷하다. 스웨덴은 WEF 국가경쟁력 순위 2위, 뉴스위크 Best nation 순위 3위 등 여러 부문에서 최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무역관 개설 생활 및 근무 여건 북한 땅굴 굴착장비가? 서방국가로서 유일하게 북한에 대사를 파견하고 있는 스 웨덴은 현재 남한과 북한 양측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있다. 북한과는 1973년 4월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1975년 3월 주북한대사관을 평양에 개설하여 그동안 주중국대 사가 주북한대사를 겸임해 왔으나 2005년부터는 평양에 대사를 직접 파견하고 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발견되기 시작한 북한의 남침 땅굴은 1960년대부터 굴착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북한은 갱도 굴착을 위해 스웨덴으로부터 유압 굴착기 등 대 량의 굴착장비를 수입해 간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당시 수출업체인 Atlas Copco 사 는 자사의 굴착장비가 남침용 땅굴을 파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줄은 몰랐었다. 이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 본사에서는 스톡홀름 무역관에 관련사항의 조사를 요 청하였고, 당시 무역관장이었던 송희팔 관장(1975~1978, 3대 무역관장)은 이를 확 인하기 위해 통계청을 직접 방문하여 스웨덴의 대북한 수출내역을 확인해보았다. 그 러나 내역은 정확히 나와 있지 않았으며, 통계청 담당자도 밝히기를 꺼렸다고 한 다.(당시 북한의 대스웨덴 수입품목은 굴착장비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통계청에서 114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15 제공한 내역서에는 북한에 해당하는 부분 중 일부분이 잘려져 있어 정확한 확인은 하지 못했다고 함) 무역관은 Atlas Copco사도 방문하였다. 굴착장비업체답게 본사건물 지하에 Test Mine 을 설치해놓고 있었는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40m를 내려가보니 굴착기 들이 바위를 뚫는 등 장비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었다고 한다. Atlas Copco에서는 이 러한 장비를 북한에 팔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러한 시설 및 장비를 보여주는 이유는 남한에도 팔기 위해서였다고 하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통계청과 Atlas Copco사에서는 직접적으로 북한에 굴착장비를 수출하 였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지 않았지만 당시 여러 언론에서는 스웨덴이 북한에 기계류 를 팔았는데 대금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보도가 여러 차례 나오기도 하였다. 스웨덴 수출보증기관에서도 북한에 외상으로 물건을 팔고난 후 대금회수가 되지 않는다고 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스웨덴은 북한과의 교류를 지속적으로 이어오고 있다. Goran Persson 스웨덴 전 총리는 EU 의장국 자격으로 2001년 서방국가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북 한을 방문하여 김정일을 만나 경제 등 여러 분야에 걸친 업무협조를 약속한 바 있다. 그 일환으로 스웨덴 정부는 북한 경제인들을 스웨덴에 초청, 경제교육 장기 프로젝트 를 진행시키기도 하였다. Goran Persson 전 총리가 방북할 때 스웨덴무역대표부 (Swedish Trade Council)와 Tetra Pak, Ericsson 등 다수의 스웨 덴기업 사장단들이 무역사절단을 구성하여 동행하였다. Atlas Copco 스톡홀름 리딩 외 지역에 있는 북한대사관은 업무공간과 주거공간을 겸하고 있어 스웨덴에 파견된 북한 외교관들이 공동생활을 하면서 서로를 감시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 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술과 담배 등을 밀수하다 스웨덴 세관에 적발되어 여러 차례 추방을 당하기도 하였고, 그 때 마다 언론에 크게 보도된 바 있다.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원선 1963년 출생 2000년 10월부터 2005년 9월까지 무역관에 근무한 원선 씨는 지사화사업을 담당하면서 최초 5개에 불과했던 회원사를 28개로 늘렸다. 그의 철저한 현지 마케팅 전략과 꾸준한 노력, 그리고 성실한 지원 등이 뒷받침된 덕분 이었다. 그는 또 전문시개단, 투자사절단 유치 등을 통해 광주시와 Ericsson의 MOU 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 행하였고 당시의 업무능력을 인정받아 현재 세계 최고의 통신기기업체인 Ericsson 사의 Fiber Network Services 부서에서 Senior Solution Architect로 근무하고 있다. 115 Ⅰ. 무역관 이야기

116 Copenhagen 50개 무역관 이야기 코펜하겐 무역관 2010년 지멘스는 유럽 30개 국가의 수도를 대상으로 유럽 녹색도시 지수 를 발표한 바 있다. 당시 유럽 최고 친환경 도시의 영광은 덴마크 코펜하겐의 차지였다. 코펜하겐은 덴마크어로는 쾨벤하븐(Kobenhavn)인데, 상인( 商 人 )의 항구 라는 뜻이다. 덴마크와 코펜하겐의 아이콘이다시피 한 1.25m 가량의 작은 인어상(덴마크어 : Den lille Havfrue)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시의 북쪽 해안을 끼고 있는 랑겔리니(Langelinie) 산책로에서 약 300m 떨어진 바위에 설치된 이 인어상은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 )의 동화 인어 공주에서 동기를 얻어, 1913년에 제작되었다. 머리는 덴마크의 유명 발레리나인 엘렌 프라이스를 모델로 하여 만들었지만, 몸 부분은 프라이스가 누드모델이 되는 것을 거부하여 작가의 부인인 엘리네 에릭센이 모델이 되었 다. 덴마크의 동화작가 안데르센은 인어 공주, 미운 오리새끼, 성냥팔이 소녀, 벌거숭이 임금님 등 아동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수많은 걸작 동화를 남겨 우리의 어린 시절 꿈을 키워주었다 무역관 개설 생활 및 근무 여건 북해와 발트해 사이 유럽 대륙의 북쪽에 위치해 있는 덴마크는 유럽 본토와 연 결되어 있는 유일한 북유럽 국가이다. 수도 코펜하겐은 407개의 섬 중 가장 큰 섬인 셸란(Sjaelland) 섬에 위치해 있으며 과거 유럽을 지배했던 바이킹왕국의 본거지였 다. 여름 기온은 서늘하고 해가 길어 지내기 편하지만 겨울철은 춥고 해가 매우 짧아 지내기 불편하다. 전통적으로 낙농업이 발달하였으나 지금은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 제약, 디자인, 전기전자 등에서도 세계 최고 기술력을 갖춘 강소국으로 발전하고 있 다. 상당수의 국민들이 영어 구사가 가능하다. 덴마크 사람들은 스스로를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교민은 250명 내외이지만 한국계 입양인은 약 8,000명 살고 있다. 덴마크는 시장규모가 작고 인근 스칸디나비아 국가들(노르웨이, 스웨덴, 핀란 드)과 하나의 상권을 이루고 있으며 간접무역이 활발하기 때문에 덴마크를 교두보 로 인근 시장을 공략해 볼 만하다. 또한 세계 최고 수준의 신재생에너지 기술 보유 국 가인 덴마크는 특히 풍력분야에서 세계 1위 풍력터빈 제조기업인 Vestas를 비롯해 Siemens, LM 등 세계 유수의 제조기업들을 보유하고 있어 한국 기업들의 부품 아 11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17 웃소싱 확대가 기대되고 있다. 그 외 가구 인테리어 등 디자인 제품, 프리미엄 음향기 기 제품 등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에 높은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어 덴마크는 우리 기 업이 교류할 분야가 많은 국가이다. 코펜하겐이 상인들의 항구 라는 뜻을 의미할 정도로 덴마크 바이어들은 상술이 뛰어난 사람들이다. 덴마크는 특히 독일, 영국, 스웨덴 등 거대 이웃 국가들의 틈바구 니에서 상거래를 발전시켜 왔기 때문에 금전적인 부분에 대해서 매우 철저하게 따지 는 성향이 있다. 무역관 이야기 덴마크 사상 최대의 국제행사를 치르며 생긴 에피소드들 2009년 12월 코펜하겐에서 덴마크 역사상 최대의 국제행사인 제15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15) 가 개최되었다. 12월 7일부터 18일까지 치러진 이 행사에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미 국, 중국 등 세계 주요국을 포함한 110개국 정상들이 참석하였고 행사관계자, 언론, 환경단체를 포함하여 1만 5,000명이 외국에서 인구 50만의 작은 도시 코펜하겐으로 몰려들었다. 무역관은 행사 준비에 초비상이 걸렸다. 코펜하겐 시내 호텔은 몇 달 전부터 예약이 불가능한 상태였고, 어렵사리 자리 가 생겨도 평상시보다 가격이 몇 배나 뛰었다. 차량 또한 동이나 인근 스웨덴, 독일에 서 빌려와야 할 정도였다. 한국에서 오는 손님 숫자가 덴마크 교민 수(250명)보다 더 많아 행사 지원을 위한 통역과 가이드 섭외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대사관도 손이 딸 려 무역관은 적극 지원에 나섰다. 지식경제부, 국회 지식경제위원회의 대표단 지원은 당연히 KOTRA의 몫이었지만, 70여 명의 취재기자단 활동까지 무역관이 지원하게 되었다. 무역관 직원 5명으로 이 많은 인원을 지원하다보니 여러 가지 어려움이 불가 피하였다. 게다가 다른 국가에서도 수많은 인원이 머물다보니 자고, 먹고, 이동하는 것 모두가 부족하고,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주최 측은 많은 행사 참석 인원을 통제하기 위해 행사장까지 차량 진입을 막았 고, 인접해 있는 지하철역까지 봉쇄해 버렸다. 기후변화협약회의 콘셉트에 걸맞지 않으냐며 덴마크 총리는 미소를 보이며 자전거를 타고 다녔지만, 다른 나라 참석자 들로서는 웃음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할 수 없이 차량, 지하철, 도보로 동 선을 짜서 비싼 가격으로 한대 밖에 임차하지 못한 봉고차로 대표단을 수시로 실어 나르는 007작전을 전개해야 했다.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15)와 관련한 낙수거리가 없을 수 없다. 117 Ⅰ. 무역관 이야기

118 환경운동가들이 회의기간 중 협약 체결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며 회의 당사국들을 압박하는 가운데 우리나라의 환경운동가들도 기발한 시위를 벌여 이목을 끌었다. 바 로 얼음펭귄과 인어공주 시위 였다. COP-15 행사 기간 중 인어공주 동상을 보기 위 해 수많은 인파가 몰릴 것은 당연한 일. 그래서 환경단체는 이 인어공주 동상 옆에 얼음으로 펭귄을 만들었다. 12월 겨울에 열린 회의였지만, 최근의 지구 온난화로 인 해 얼음으로 만든 펭귄이 회의가 끝날 무렵에는 녹아내릴 것으로 기대하였다. 이를 통해 지구 온난화가 얼마나 심각한지 경각심을 높이고, 회의 당사국들을 압박해 보 겠다는 발상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시위는 기대를 빗나갔다. 따뜻했던 날씨가 회의 일정이 시작되자마자 기온이 뚝 떨어지면서 몇 십 년 만의 폭설까지 내렸고, 그 러다 보니 얼음으로 만든 펭귄이 녹아내리기는커녕 눈을 맞은 몸덩이가 얼어붙으며 점점 뚱뚱해져(?)간 것이었다. 비록 환경단체의 기대는 저버렸지만, 얼음 펭귄은 인 어공주와 잘 어울리며 관광객의 가장 인기 있는 사진 모델이 되었다. 또 하나의 낙수거리는 코펜하겐의 화난 매춘부들이었다. 사상 최대의 외국인들 이 몰려드는 행사인 만큼 코펜하겐시에서는 외국인들의 안전한 체류를 위해 여러 가 지 대책에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 중 하나가 외국인들을 상대로 각종 성매매 호객 행위가 급증할 것이라는 우려였다. 따라서 코펜하겐시에서는 시내 호텔 160곳에 외 국인을 상대로 하는 성매매 호객행위가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를 촉구하는 서한을 보 냈다. 이에 덴마크 성매매 종사자들이 발끈하였다. 덴마크성매매노동자협회는 대변 인 성명을 통해 덴마크는 성매매가 합법인 국가이므로 합법적인 노동활동에 대해 시 와 시의회가 관여하는 것은 월권행위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유엔기후변화협약회의 출입증을 소지한 외국인에 대해 성매매를 무료로 제공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코펜하 겐 시 당국은 혹 떼려다 혹을 하나 더 붙인 꼴이 되었다.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정보영(Joergenen Sun Jeong) 1957년 출생 현재 코펜하겐 무역관장인 요한센선정은 1997년 현지직원으로 채용되어 마케팅, 지사화 업무를 맡고 있다가 2008년 10월 KOTRA 최초의 현지인 출신 무역관장으로 발탁되었다. 한국에서 만난 덴마크인과 결혼하여 1988 년부터 덴마크에 정착한 그는 지사화 사업을 담당하던 직원 시절, 지사화 업체가 방문하면 자택에서 숙식을 제공 하며 헌신적으로 보살핀 일화로 유명하다. 요한센선정 관장은 언어나 업무 면에서 한-덴마크 양국에 정통하며 관 계를 발전시킬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이다. 11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19 Paris 50개 무역관 이야기 파리 무역관 파리는 두 개의 역사가 하나로 얽혀 한 나라의 사상과 숙명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고스란히 들려주는 도시다. 전제군주국, 계몽사상, 혁명, 제정기, 산업화, 탁월한 예술성, 지적 오만 등 프랑스 역사의 주요한 테마는 모두 파 리라는 공간에 밀집되어 있었다. 파리의 면적(105.4km 2 )은 의외로 좁아서 북단에서 남단까지(직선거리 9.5km) 걸 어서 2시간이면 족하다. 서울 면적의 1/6 정도에 불과한데 인구는 서울의 1/5 정도(212만 8,000명)이므로 인구밀 도는 서울보다 다소 높다. 파리는 대체로 서쪽 남쪽이 부자 동네고, 동쪽 북쪽이 가난한 동네다. 몽파르나스와 몽 마르트르가 그 남북의 분위기를 대표한다. 에펠탑, 개선문, 샹젤리제 거리, 세느 강, 노트르담 성당, 퐁피두센터, 연간 관람객이 900만 명에 육박하는 루브르 박물관, 유럽 최대의 비즈니스 파크 라데팡스(La Defence). 파리는 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문화도시, 예술도 시, 관광도시, 외교도시, 업무도시, 금융도시, 패션도시, 박물관도시, 지하철도시. 성격이 다양한 도시는 대체로 정체성이 뚜렷하지 못하고 개성이 없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파리는 그렇지 않다. 파리는 다양함 속에서 다른 도시 와 차별화되는 개별성을 느낄 수 있다. 똑같은 것은 싫다고 한다 무역관 개설 구주본부로 승격 구 아중동지역본부로 관할지 확대 구주지역본부 프랑크푸르트로 이전 생활 및 근무 여건 프랑스 내 한국식당은 99개로 대부분 파리 시내에 위치하고 있다. 최근에는 영 업시간에 50% 이상 외국인들로 찬 경우가 많을 정도로 프랑스 현지인들의 한국음식 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고 있다. 치안은 양호한 편이나 관광명소(몽마르트르, 샹젤 리제 등)와 쌩드니(공항 시내 진입로) 지역에서는 단순 소매치기 사건 또는 차량 창문을 깨고 물건을 훔쳐가는 사건들이 종종 발생하고 있다. 사회 전반적으로 사회 주의 색채가 강해 소비자보다는 공급자 위주이므로 한국과 같은 빠르고 친절한 서비 스는 기대할 수 없다. 관공서, 병원, 식당 등 거의 모든 공공기관 및 서비스 산업은 예 약 문화가 정착되어 있어 사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많은 불편을 겪게 된다. 프랑스 전 산업계가 35시간 근무제로 수개월 전 계획을 세워 업무를 진행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임기응변식의 비즈니스는 기대하기 어렵다. 또한 기본 휴가 Ⅰ. 무역관 이야기

120 일, 여름휴가 2개월, 중간 중간 2주씩 있는 학교 방학 등으로 근무 리듬이 한국과 매 우 달라 이를 미리 확인하지 않으면 낭패를 볼 수 있다. 비즈니스계에서는 영어 의사소통에 큰 문제는 없으나 불어를 선호한다. 기업의 장을 만나려고 할 경우 최소 3개월 전에는 약속을 잡는 것이 필요하다(주요 스케줄 이 이미 잡혀 있음). 면담할 때 상대방이 최선을 다해 응대해주기 때문에 큰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착각하는 수도 있으나 실제로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인지 잘 파악하 는 것이 필요하다. 대부분 광통신망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서 한국에서 보내주는 대 용량 파일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무역관 이야기 1990년대 초 이런 일들도 있었다 파리 무역관이 개선문 근처 오쉬거리(Avenue Hoche)에 있던 1990년대 초 어느 늦은 오후. 퇴근 직전, 청바지 차림에 허름한 점퍼 를 입고, 배낭을 맨 20대 청년 한 명이 무역관을 방문했다. 손에는 헤어브러시를 들고 있어 그 모습이 영락없는 잡상인이었다. 그래서 관원들은 그 청년을 냉대하고 있었 는데 프랑스에서 오래 살아 그들의 자유분방한(?) 모습을 잘 아는 한 직원이 청년에 게 용건을 물었다. 그러자 그 청년은 브러시를 보여주면서, 이런 제품을 한국에서 만 드는지, 그리고 만든다면 어디서 수입해올 수 있는지 업체를 소개해달라고 했다. 마 침 생활잡화 시장개척단의 상담활동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점이어서 화장솔 제조업체 리스트를 전달할 수 있었고, 연결된 한국업체와 KOTRA 간 빠른 Follow- Up을 통해 거래가 순조롭게 추진되었다. 1주일 후 영화배우처럼 예쁘고 젊은 아가씨가 나타나 이 직원을 찾았다. 관원들 은 이번에도 사무실을 잘못 찾아 온 게 아닌가 하며 웅성거렸다. 당시 무역관 근처에 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엘리트 모델 에이전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확인해보니 이 아가 씨는 며칠 전 찾아왔던 청년이 일하는 회사의 여사장이었다. 이 회사는 당시 붐을 일 으키던 화장솔 등 화장품 액세서리 품목을 구매하여 유명 메이크업 업체들에게 공급 하는 업체 중 하나였다. 이 아가씨는 랑콤에서 대량의 볼 터치 화장솔 주문을 따와 중 국에서 조달할지 한국에서 조달할지 결정하지 못하던 차였는데, 마침 그녀의 직원이 플라스틱 머리솔을 가지고 나가 업체를 소개받아 오고, 그 다음날 그 업체로부터 오 퍼를 받게 해 준 한국 KOTRA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궁금하여 무역관으로 찾아 온 것이었다. 무역관은 이 여사장을 설득하여 방한 바이어로 유치하게 되었고 이것이 기 회가 되어 한국산 화장솔을 프랑스 유명 브랜드 상품으로 10여 년 이상 조달하는데 120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21 기여하게 되었다. 또 하나는 배지 이야기다. 지금은 아무도 쳐다보지도 않고 공짜로 주어도 그냥 버리고 마는 핀배지이고, 둥근 것, 네모난 것 혹은 여러가지 캐릭터 등 다양한 모티브 를 이용해 가슴에 다는 배지다. 1990년대 초에도 이러한 배지가 존재했지만 프랑스에 서는 소규모 장인이 납땜 수준으로 조악하게 만들거나 아주 고급스런 공예품으로 만 들어서 비싸게 팔았다. 많은 홍보 상품에 질려있는 요즘 사람들은 상상하기 힘들겠지 만 당시는 이러한 배지가 가격이 비싸 프로모션 아이템으로 사용하기 이전이었다. 그런데 들어보지도 못한 한국이라는 아시아 저 멀리에 있는 나라에서 10분의 1 가격으로 배지를 구입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들은 바이어가 어떻게 공급업체를 찾을 수 있는지 수소문을 해 무역관을 찾아왔다. 처음에는 한두 바이어들이 둥근 양철 모 양의 핀으로 꽂는 배지를 들고 와서 거기에 로고를 넣고 홍보용 상품으로 사용 할 수 있는지를 문의하였다.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 무역관은 핀배지 시장개척단 행사를 기 획하게 되었다. 무역관 바로 앞에 있던 호텔의 지하실 공간을 빌려 행사를 시작 했는데 대박이 터졌다. 초대한 바이어뿐만 아니라 초대하지도 않은 바이어들까지 마구 몰려와 무역 관 직원들은 이들을 들어가지 못하게 막느라고 진땀을 흘려야 했다. 지금은 가격 경 쟁력이나 수량 문제 등으로 중국에 뺏겨버린 잡제품이 한 때는 한국의 주종 수출품 목이었던 시절의 얘기다. 대를 이은 코트라맨 오정아 씨(부친 오일상 OB)의 회상 필자(오정아)는 현재 파리 무 역관에 현지직원으로 7년째 근무 중이나, KOTRA가 필자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 친 것은 40년이 넘었다. 코트라맨이던 아버지 덕분에 필자의 해외거주 경험은 다섯 살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해외거주 경험 중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곳을 들자면 단연 코 이란의 테헤란 무역관이다. 우리 가족이 테헤란으로 이사를 간 것은 1979년 8월이었다.(호메이니 Ayatollah Ruhollah Khomeini는 같은 해 2월 프랑스 파리에서 테헤란에 귀환했 다.) 당시 테헤란 시내의 화려한 백화점과 부티끄들, 5성급 호텔들, 수영장이 딸린 고 급주택가, 우거진 공원과 가로수들, 그리고 고급 승용차로 뒤덮인 거리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필자에게는 신세계로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빛 좋은 개살구 였을 뿐, 필자의 가족이 이란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팔레비(Mohammad Reza Shah Pahlevi) 국왕에 대한 대대적인 반정부 데모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121 Ⅰ. 무역관 이야기

122 영국인 초등학교로 전학하여 학교를 다닌 지 며칠 되지 않은 어느 날, 반정부 데 모가 너무 심하여 스쿨버스가 운행되지 못한다며 학교에서 학부모들에게 전화하여 직접 학교에 와서 아이들을 데려가라고 연락하였다. 그래서 모든 학생들이 하나 둘 씩 부모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데, 필자의 아버지는 끝내 오시지 않는 것이었다. 하 필이면 데모하는 군중이 KOTRA 무역관이 위치한 거리를 메우고 있어서 아버지는 사무실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필자와 함께 두 세 시간 동안 아버지를 기다리던 교장선생님이 해가 지고 더 이상 기다리기가 어려워지자 필자를 자기 집에 데려가 재 우고 다음날 함께 등교하겠다고 아버지께 제의하셨다. 교장선생님의 차를 타고 학교를 떠나는데 어린 마음에도 이러다가 영영 이산가 족이 되는 것은 아닌지, 아버지가 무리를 해서 나를 찾으러 오시다가 데모대에 휩싸 여 필자가 천애고아가 되는 것은 아닌지 차 안에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그래 도 이럴 때일수록 살아남아야 한다는 다부진 생각으로, 교장선생님 댁에 도착하여 일단 교장선생님과 사모님께서 나를 하룻밤 받아주신 것에 대해 최대한 감사인사를 드리고, 저녁식사도 언제 또 제대로 먹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걱정에 주시는 대로 열 심히 저녁을 먹고 있었다. 그 때, 벨이 울렸다. 아버지가 나를 찾으러 교장선생님 댁까지 오신 것이었다. 문제는 당시 시각이 저녁 8시 45분. 9시부터는 모든 움직이는 물체에는 무조건 집중 사격하겠다고 국왕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한 상태였다. 교장선생님 댁은 테헤란 시도 아닌 북쪽 교외 주택가로 필자의 집까지는 평상시에 한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 프리미에르 비죵 (Premi re Vision) 주최사 초청 사전심사회 122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23 다. 그 날 저녁 아버지는 개미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않은 테헤란 시내를 초고속으로 제임스본드 뺨치게 질주하셨다. 아버지의 운전 실력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놀라왔 다. 우리는 정확히 8시 59분에 집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나중에 필자가 철이 좀 든 후, 아버지께 그때 9시가 넘었으면 어떡할 뻔했냐고 물으니, 그땐 그냥 차를 세우고 차 안에서 밤을 보낼 생각이었다고 하셨다. 일단은 어린 딸을 찾아와야 한다고 생각 하셨던 아버지의 딸 사랑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언저리가 붉어진다.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김영호 1948년 출생 1979년 5월 파리 무역관에 입사하여 33년 동안 근무하면서 4번의 사무실 이전과 13명의 관장을 거친 파리 무역 관의 살아 있는 역사 그 자체이다. 1982년 제1회 서울국제박람회(SITRA)에 30여 명의 바이어로 구성된 사절단 을 인솔하여 방한한 것부터 프랑스의 각종 마케팅 및 경제무역제도 조사, 수많은 국내 중소기업의 지사화사업과 현지 세일즈, 전자입찰 지원 성공 등 그의 공과는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며, 조사사업에서부터 마케팅 사업, 투자유 치 사업 등 무역관의 모든 업무분야에 걸쳐 있다. 또한 조용하면서도 푸근한 성품으로 무역관의 맏형 역할을 하면 서 업무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어떠한 문제가 발생하여도 해결사로 자처하고 있다. 황란서 1947년 출생 흔히 마담 황 이라고 불리고 있는 이 직원은 1985년 7월 파리 무역관에 입사하여 이제 27년 가까이 근무하고 있 다. 전생의 인연인 듯 불란서( 佛 蘭 西 ) 와 같은 이름을 가진 황란서( 黃 蘭 西 ) 씨는 위의 김영호 씨와 함께 파리 무역 관의 터줏마님 으로, 지금도 나이에 맞지 않게 야근도 밥 먹듯 하는 열정을 가지고 있다. 마담 황은 그 동안 주로 마케팅 업무를 담당했으나, 그 구체적인 업적들은 대략적으로도 기술하기 힘들다. 수많은 전시회 및 시개단 바이 어 유치와 구매상담회 개최, BTG 구성 방한상담, 조사대행과 지사화업체 지원 등. 그중에서도 1990년대에 한국 산 화장솔을 프랑스 시장에 소개하여 명품으로 만든 일, PSA나 Carrefour 등 프랑스 대기업을 우리나라에 초청 한 일, 최근에는 그렇게도 뚫기 어렵다는 프르미에르 비죵(Premiére Vision) 전시회에 한국기업 참여를 성사시 킨 일들은 오래 기억될 것이다. (왼쪽 사진에서 맨 왼쪽) 123 Ⅰ. 무역관 이야기

124 Frankfurt 50개 무역관 이야기 프랑크푸르트 무역관 라인 강의 지류인 마인 강 연안에 위치한 프랑크푸르트의 공식 명칭은 프랑크푸르트암마인(Frankfurt am Main)이다. 독일의 행정수도는 베를린이지만, 경제수도는 프랑크푸르트라 할 만큼 독일의 경제 중심지이며, 영 국의 런던과 함께 유럽의 금융시장을 이끌고 있다. 프랑크푸르트는 독일 문학의 최고봉이자 세계적인 대문호 괴 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의 생가가 있는 도시로도 유명하다. 프랑크푸르트는 독일에서는 하노버에 이어 둘째 규모의 국제전시장을 갖추고 있으며, 접근성이 좋아 수많은 국제박람회와 세계 최대의 도서전인 국제도서전이 이곳에서 열리기도 한다. 또한 프랑크푸르트는 유럽 중앙부 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으로 인하여 항공, 철도, 자동차 등 교통의 중심지가 되고 있는데, 특히 프랑크푸르트 국 제공항(Flughafen Frankfurt-Main)은 매년 4,500만 명의 사람들이 드나드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무역관 개설 2002년 상임이사 주재지역 겸 구주지역본부가 파리에서 프랑크푸르트로 옮겼다. 첫 프랑크푸르트 상임이사는 김인식 ( 부임)이었고, 그 이후 김수익, 기현서, 이선인, 민경선, 조병휘 등 모두 6명의 상임이사 본부장이 9년여 동안 복무했다. 그러다 2011년 9월 상임이사 해외주재가 본사로 통합되었다. 무역관 이야기 무역관 근무를 차범근과 함께 1978년 12월 23일 토요일 오후, 서독 분데스리가 (Bundesliga) 다름스타트(Darum Stadt) 홈구장에서 차범근이 보쿰과의 경기로 분데스리가에 데뷔하는 날이었다. 입장권을 구입해 창구로 향하는데 진행요원이 본 부석 출입구로 빨리 입장하란다. 그날 카메라를 소지한 한국인은 거의 대부분 프리 패스였다. 아마 한국에서 파견한 기자로 여겼음직하다. 이날 차범근은 예상을 깨고 스타팅멤버로 경기 초반부터 그라운드를 누볐다. 나는 내 심장의 박동소리가 그렇게 큰지 난생 처음 알았다. 보쿰과의 경기는 2:2 무승부였다. 다름스타트의 두 골 모두 차범근이 직 간접 어시스트한 골이었다. 경기 후 기자회견장에서 놀라운 일이 또 벌어졌다. 그날의 MVP로 차범근 선수가 지명되었던 것이다. 월요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력일간지 스포 츠란에 주말 분데스리가 유일의 경기에서 차범근의 활약이 대서특필 되었다. 그 다음 124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25 주말 독일 대중지 Bild에 매주 게재되는 두 개의 퀴즈 중 한 개가 차범근은 어느 나라 출신인가였다. 보기가 셋인데 1, 2번은 아프리카 국명이고 3번은 Sud Corea였다. 당시 서독에는 Born에 한국 대사관, 함부르크와 베를린에는 총영사관, 프랑크 푸르트에는 삼성, 대우, 반도, 선경을 비롯한 수십 개의 한국 상사가 진출해있었고, 교민도 상당수에 달했으나 독일인에게 Corea 는 여전히 생소한 나라였다. 차범근이 분데스리가에 데뷔하자 주위의 독일 사람들이 묻는 질문은 한국에서도 축구를 하 느냐? 였다. 다시 말하면 독일에 Corea 를 진정으로 알린 사람은 차범근이었다. 다음은 윤성곤 선배의 말이다. 당시만해도 드레스셔츠, 양말, 봉재완구, 주방용기와 전자제품 등 노동집약적 인 경공업제품을 수출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던 무역관이나 상사 주재원들에게 차범근 선수의 활약상은 더 없는 격려가 되었고 사기를 진작시켰다. 코리아 하면 남 쪽이냐 북쪽이냐를 묻던 시절, 싸구려 물건만 파는 나라로 인식되고 있던 시절, 계약 성사를 위하여 밤잠 안 자고 뛰던 시절이었고, 우리나라는 한국 간호사와 광부들이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디딤돌이 된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 고생하고 있는 것과 한국 전쟁 외에는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던 때였다. (광부는 1963년 12월부터 1977년까지 약 7,900명, 간호사는 1966년 10월부터 1977년까지 1만 여명이 서독에 파견되었다.) 1979년 2월 초 뮌헨 관장인 윤성곤 선배와 윤 선배 지인 셋이서 전통 독일레스 토랑에 간 적이 있다. 한참 식사하고 있는데 한쪽 테이블에서 Corea, Corea 를 반복 하는 대화를 듣고 술이 거나했던 우리는 그 테이블에 생맥주 한잔을 웨이터를 통해 전하게 했다. 맥주를 전달받은 40대 초 남자는 맥주가 어디서 왔는지 확인하더니 맥 주잔을 들고 우리 테이블로 왔다. 당신 대화에 Corea가 반복되기에 반가워 보냈다 고 하자 그는 아! 차범근! 하며, 지난해 12월 다름스타트팀에서 차범근의 활약상 을 보았는데 자기는 이제까지 그렇게 인상적인 선수를 본적이 없다며 차범근을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치켜세워 스포츠 경기에서 스타플레이어의 위력을 절감했다. 차붐 선수의 활약에 힘입어 독일 사람들과의 대화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당신 차붐 선수 아느냐하면 당장 표정이 달라질 정도였다. 이렇게 운동선수 한 사람의 활약은 보이지 않는 외교활동이 되었다. 그것도 장장 10년간 코리아를 빛나게 했 다. 윤성곤 선배가 한 말이다. 또 하나 생각나는 경기가 있다. 프랑크푸르트 홈경기였다. 상대는 살케04. 그날 125 Ⅰ. 무역관 이야기

126 드디어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첫 골이 터졌다. 그 골은 차범근의 다리가 아닌 머리로 기록한 헤딩슛이었다. 차범근의 골이 터지는 순간, 나는 정신없이 일어나 목청이 터 지라고 골 을 외쳐댔다. 그 순간 전광판에 Tcha Bum 이라는 글자가 번쩍이더니 곧이어 차붐 이라는 한글 자막이 전광판을 덮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차붐을 소리쳐대는 내 어깨를 누군가가 뒤에서 세차게 쳐 뒤돌아보니 독 일 관중이 엄지를 세우며 Corea 최고란다. 프랑크푸르트 3년 생활 중 날아갈 것 같 은 클라이맥스였다. 그 날 경기는 프랑크푸르트팀이 2:0 승리. 경기장을 빠져나오는 우리 일행을 향 해 독일 관중은 모두 Corea! Corea! Tcha Bum 을 외쳐댔다. 교통단속이 심하기로 이름난 독일 축구경기장 주변과 고속도로 I/C 갓길에서도 주차 오케이였다. 그 무렵 공보관장과 상사 지사장 몇 명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공보관장이 대사 관에 아주 중대한 뉴스가 있습니다. 드디어 Spiel지에 한국대사 이름 석자가 기사화 되어 나왔습니다. 라며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Spiel지는 보수적인 주간지로 스포츠 선수나 연예인은 좀처럼 다루지 않는데 차범근에 대해서는 일반 지면 앞부분 10페이 지쯤에 2/3면 박스기사로 차범근을 대서특필했던 것이다. 차범근이 곧 대한민국이 었다. 차범근! 그는 6 25의 잔상만 남아있던 유럽의 심장부에 대한민국의 기상을 심어준 상징이었다. 임성빈 OB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이원장 1972년 출생 이원장 과장은 2002년부터 2007년까지 6년 동안 시장개척 및 지사화 업무를 담당했으며, 현재 다이믈러 코리아 구매담당 이사로 있다. 그는 2004년까지 전시회 위주의 마케팅을 주로 다루었으나, 그후 지사화 사업, 자동차 완 성차 업체들과의 Autopartsplaza사업 등에 주력하면서 자동차 전문가로 활약하였다. 신은경 1972년 출생 2002년 1월 무역관에 입사한 신은경 과장은 비서업무와 리셉셔니스트로 업무를 시작하였으나 서울 식품전 등 마 케팅업무 능력이 뛰어나 입사 3년 만에 마케팅 전담직원으로 전환한 직원이다. 2011년 12월 현재 담당한 지사화 업체만 누적기준으로 50여 개사에 달하며, 고객만족도와 성약지원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 외에도 Korea IT Road Show, 바이코리아, 트렌스포텍 등 수많은 마케팅 대표사업에 방한 유치 바이어 누적기준 150여 개 사가 넘는 독일업체를 한국과 현지 상담회에 유치하였다. 현재 무역관 최대의 바이어 네트워크를 확보하고 있 으며, 유통, IT 마케팅, 지사화 팀장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12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27 Hamburg 50개 무역관 이야기 함부르크 무역관 독일 북부에 위치한 함부르크는 베를린 다음으로 큰 독일 제 2의 경제도시, 상업도시이다. 흔히 프랑크푸르트가 독일 제 1의 도시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인구로만 보면 프랑크푸르트는 베를린, 함루브크, 쾰른 다음으로 독일에 서 넷째이다. 함부르크는 비틀즈의 제 2의 고향이며 유럽 제 1의 친환경도시, 거주민이 가장 행복하다고 여기는 도시이다. 함부르크 하면 독일 사람에게는 세련미 넘치는 국제도시로 각인돼 있다. 미국에 New Yorker 의 자 존심이 있다면 독일에는 Hamburger 의 자존심이 있다고들 한다. 함부르크는 한국인에게 잘 알려져 있는 만년 필 회사 몽블랑(Montblanc), 화장품 회사 Nivea, 명품의류 브랜드 Jil Sander, 주간시사지 Spiegel의 본산지 이다. 함부르크는 해운, 무역 미디어, 출판 등 서비스산업이 발달되어 있다. 전통 서비스산업 외에 최근에는 신재 생에너지 총아로 각광받는 풍력산업의 성지로 거듭나고 있다 무역관 개설 폐쇄(프랑크푸르트로 이전) 무역관 재개설 독일은 16개주로 구성된 연방국가이다. 이 중 10개 주를 북부 독일, 북유럽의 중심지인 함부르크 무역관에서 관할하고 있다. 무역관 이야기 풍력 무역관 함부르크 파이팅!!! 황금을 캐는 분위기입니다. 2008년 독일 해상풍 력 사업이 한창일 때 독일의 글로벌 풍력기업들은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국은 해 상 풍력산업 발전의 매력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했다. 게다가 한국은 조선, 해양 구조물, 발전기, 중공업 설비 기술이 축적되어 있어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는 것이었 다. 4대 조선사 위주로 풍력산업에 뛰어들고 있는 것은 그래서 이유가 있다. 함부르크 무역관에서 시작한 풍력 사업을 계기로 우리 기업들의 독일 및 유럽 진출이 증가하고 있다. 독일 풍력기업에 부품수출을 모색하고, 기술협력, R&D협력 까지 진행되고 있다. 일부 기업들은 이미 R&D센터를 함부르크 인근에 설립했다. 한 국기업 중엔 독일 풍력기업을 아예 인수한 기업, 독일 터빈기업과 기술개발을 위해 연구개발센터를 설립한 기업, 이웃나라 네덜란드 업체를 인수한 기업도 있었다. 지 멘스, 푸어랜더 등 무역관이 부지런히 방문한 유수의 독일기업들은 한국기업이 시작 만 한다면 조선처럼 세계 풍력시장의 대표주자로 등장할 수 있다는 반응이었다. 127 Ⅰ. 무역관 이야기

128 독일기업들은 2008년 함부르크 무역관이 막 풍력사업을 시작할 당시 협력 파트 너를 찾고 있었다. 태양광 분야에서처럼 무섭게 따라오고 있는 중국기업들과의 경쟁 에 대응하기 위한 것도 그 이유의 하나였다. 해상 풍력 기술도 육상과 마찬가지로 유 럽이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 독일 전력회사 RWE사는 해상풍력발전 건설 선박 2척을 한국의 대우조선에 발 주했다. 선박뿐만 아니라 구조물 설치, 발전기술, 단조 및 주조 기술도 독일기업의 관심을 끌고 있다. 풍력 타워 수출은 우리가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플렌지, 샤 프트도 한국기업의 경쟁력이 높다. 난도 높은 블레이드 부분에서도 한국기업이 최근 독일 시험인증기관의 검증을 통과했다. 현재 유럽에서의 한국기업 움직임은 부품 공 급, 기업 인수, 기술 협력, 프로젝트 참여 등 일종의 종합 예술처럼 전개되고 있고, 풍 력 원조 독일기업들은 우리의 파트너로 대두되고 있다. 독일의 원천 기술과 한국의 생산능력이 시너지를 이루면 세계의 풍력시장은 한국기업에겐 제2의 조선시장이 충 분히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여건과 분위기에 힘입어 함부르크 무역관은 2008년 독일의 풍력 붐 을 한국 수출과 연계해 볼 생각이 들었다. 조선 세계 1위인 나라가 왜 풍력은 할 수 없 을까 의문이 든 것이었다. 그래서 2008년 10월부터 3년 동안 내내 풍력은 함부르크 무역관 사업개발의 표제어가 되었고, 모든 사업의 초점을 풍력에 맞추기 시작했다. 조사도 풍력, 지사화업체 모집도 풍력, 투자유치도 풍력, 인재발굴사업도 풍력이었 다. 사업 환경도 갖춰져 있다. 관할지에는 독일 전체 풍력발전기 제조사의 80% 정도 가 소재하고 Siemens, Enercon, Repower 등 세계 10위권의 독일기업이 함부르크 와 그 인근에 본사를 두고 있다. 2010년 6월 한국과 유럽의 풍력 관련 기업을 초빙해 큰 행사를 개최했다. Korea- Europe Wind Power Plaza 로 명명된 이 사업은 한국이 해외에서 개최한 최초의 대 규모 풍력 포럼 겸 상담회였다. 유럽 무역관들을 통해 전 유럽 풍력 바이어와 기업을 초청한 가운데 유럽과 한국 양측에서 110개사 150명의 주요 풍력업체들이 함부르크 로 모였다. 풍력행사는 KOTRA를 통틀어 처음 시도하는 사업이었기 때문에 행사 개 최 파트너, 타깃기업, 국내기업, 연사 등 모든 것을 하나씩 하나씩 물어 가면서 추진 해야 했다. 하지만 함부르크 소재의 독일 풍력협회라는 걸출한 협력 파트너의 도움 과 직원들의 열의, 그리고 해외에서 최초로 개최하는 풍력사업에 대한 국내기업들의 적극적인 관심이 모태가 되어 풍력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첫해 의 성과는 이듬해인 2011년 6월 제2회 행사를 개최하는 기틀이 되었다. 12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29 모든 행사가 마찬가지일 터이지만 준비는 힘들었어도 행사를 통해 많은 인맥을 구축하였다. 특히 필자가 독일기업들의 풍력 모임에 참가하는 계기가 만들어진 것은 큰 소득 가운데 하나였다. 함부르크에 매월 모이는 독일 풍력기업들의 모임인 풍력 동아리(Windstammtisch)와 인근 해안에 위치한 해상 풍력도시 브레멘에서 개최되 는 월간 풍력행사에도 초대받아 각각 200명 넘는 풍력인사들을 매월 만날 수 있었 다. 뿐만 아니라 선박을 위한 장비 수출에 물꼬도 트였다. 독일 S조선사가 풍력선박 제조를 위해 물색하는 과정에서 우리 풍력 행사를 통해 한국기업을 소개받게 되었 고, 근 1년간의 밀고 당기는 상담지원과 협상을 통해 2,000만 달러 상당의 장비 수출 을 성사시키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큰 소득은 우리기업의 글로벌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라 하 겠다. 인력채용 포럼에서 독일의 기업 및 전문가와 함께 한국의 기업 및 전문가 그리 고 학교까지 포함해 우리 풍력인사들의 유럽 진출기회를 마련했다. 정부에서 지원하 는 해상풍력 인재양성센터(목포대)를 초빙해 발표와 함께 현지 풍력 연수기관과 업 무협약까지 체결토록 지원, 향후 필요한 우리 풍력엔지니어 양성의 파트너십을 주선 했다. 갓 시작한 우리기업의 풍력 인재물색에 도움을 주고자 엔지니어 채용박람회를 병행해 50여 건의 인재 주선 기회도 제공했다. 왜 한국은 안 될까? 부임할 때 던진 최초의 질문, 그리고 직원들의 반응, 고객 들의 수요에 따른 준비, 무엇보다도 전문성을 가미한 자료작성, 발표 준비, 현지기업 네트워킹, 비즈니스 문화 준수, 그리고 신재생에너지의 시대적 요구가 어우러져 함 부르크 무역관은 풍력 무역관으로 브랜드 이미지를 굳힐 수 있었다. 풍력 무역관 함 부르크 파이팅!!! 김평희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크누트 괼(Knut Goerl) 1970년 출생 2000년에 채용한 현지직원.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나 바이에른에 살다가 함부르크로 이주해온 남부 태생 북독일 인으로 남부의 고상함과 북부의 상인기질이 잘 혼합되어 10년 넘게 함부르크 무역관에서 투자유치를 전담하는 한국 명예 대사 역할을 톡톡히 해오고 있다. 129 Ⅰ. 무역관 이야기

130 North America 미국 시카고 Chicago 미국 디트로이트 Detroit 미국 뉴욕 New York 미국 로스앤젤레스 Los Angeles 미국 워싱턴 Washington 미국 마이애미 Miami

131 New York 50개 무역관 이야기 뉴욕 무역관 면적 28km 2 에 인구 약 1,100만을 헤아리는 뉴욕은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더 나아가 현대를 대표하는 도시이다. 뉴욕은 이주의 역사가 시작된 지 불과 170여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가 되었다. 19세기 초 반 금융자본의 출발이 뉴욕 맨해튼에서 생성되었고, 많은 신흥 백만장자들이 탄생했다. 가난하지만 억센 아일랜 드인의 이민은 이 도시의 아픈 상처인 동시에 주된 활력의 원천이 되었다. 마천루와 슬럼이 어우러진 도시의 제 국, 이민의 도시, 범죄의 도시이자 금융과 예술의 도시인 뉴욕. 5개 자치구로 이루어진 이 거대도시는 신세계의 모든 불가사의와 혼란이 집결된 곳이다.(국토연구원 엮음, 세계의 도시, 한울, 2008년) 뉴욕은 특별 하다. 세계 최고의 마천루 아래 수많은 인재가 모여들고, 거대 글로벌 기업과 천문학적 금융자본이 집중되며, 최신 유행과 문화가 넘쳐난다. 그러나 뉴욕을 세계 어느 곳보다 특별 한 곳으로 만든 근원은 인재도, 기업도, 돈도, 문화도 아니다. 뉴욕이 특별 한 것은 누구나 꿈 을 꿀 수 있고 진정으로 추구하는 자, 그 꿈 을 이 룰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꿈 을 좇아 수 없이 몰려드는 영혼과 물질들이 뉴욕의 특별 함을 계속 만들 어 가고 있다 무역관 개설 무역관이 소재하고 있는 맨해튼에는 전 세계 모든 인종이 한 곳에 모여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맨해튼 안에서 세계 를 경험 할 수 있으며, 이 자체는 북미시장 내 그 어느 곳에서도 보거나 느낄 수 없는 부분이다. 달리 말하자면, 뉴욕에서 거래를 성사 시켰다면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거래가 성사될 수 있다는 얘기다. 뉴욕 무역관의 관할지는 뉴욕주를 비롯해 뉴저지, 펜실베 이니아, 코네티컷, 메사추세츠, 메인, 뉴햄프셔, 버몬트, 로드아일랜드 주와 브리티시 버뮤다를 포함한다. 생활 및 근무 여건 맨해튼은 다민족이 모여사는 국제도시로서 과거에는 치안이 상당히 불안했으 나 줄리아니 시장 이후로 치안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Wall street, Soho, Greenwich Village 등이 있는 Lower Manhattan과 초고층 오피스들이 즐비한 Mid town, Central Park를 중심으로 한 Up town 등은 서울과 다름없이 안전한 편이나 92 Street 이후 북쪽인 Harlem 지역과 Queens 지역은 주의가 요망되며, 특히 흑인들 이 주로 거주하는 Bronx 지역은 방문을 피해야 할 곳으로 꼽힌다. 많은 미국인들에게도 가장 가보고 싶은 도시인 맨해튼은 자유의 여신상, 엠파이 어 스테이트 빌딩, 센트럴 파크 등 관광명소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맨해튼 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즐거움은 바로 세계 최고의 먹거리들을 즐길 수 있으 131 Ⅰ. 무역관 이야기

132 며, 마음만 먹으면 다른 곳에서는 만나기 힘든 다양한 문화활동이 가능하다는 것이 다. 또한, 메트로폴리탄, 구겐하임, MOMA 등 유명한 박물관들이 상당수 있고, 라이 언킹, 맘마미아, 위키드 등 전세계 마니아들이 한번쯤은 관람하고 싶어하는 브로드 웨이 뮤지컬이 있으며, 세계 최고 수준의 오페라, 연주회가 링컨센터, 카네기홀 등에 서 연중무휴로 개최되고 있다. 무역관 이야기 폭설에 갇힌 뉴욕한국섬유전 뉴욕 무역관에서는 매년 초 패션 중심지인 맨해튼에 서 뉴욕한국섬유전(Korean Preview in New York : KPNY)을 준비한다. 2011년 1 월에도 예외 없이 KPNY 사업 준비에 마케팅 담당 직원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더욱이 2010년에 1,000여 명 가까운 바이어와 미국 내 섬유 유관기관 관계자들이 참 여해 더더욱 바이어 모집에 부담이 많이 오는 상황이었다. 연말부터 텔레마케터를 동원해 일반 섬유바이어들을 모집하기 시작했으며, 홍 순용 본부장, 김종경 부관장, 안재용 차장과 뉴욕 무역관의 마케팅팀원들은 유명 의 류브랜드 디자이너 및 소싱 디렉터들이 한국업체와 1대1 상담에 참여하도록 설득하 기 위해 뛰어다녔다. 그 결과 예년 수준을 뛰어넘는 참가신청서를 받아냈고, 특히 애 버크롬비, 캘빈 클라인 등 유명 브랜드 및 Macy s와 같은 대형백화점의 시니어 디자 이너, CEO 등 VIP급 바이어들도 다수 참가하기로 확정했다. 한국기업들도 단순 섬유수출업체뿐만 아니라 의류 디자이너들이 자체 브랜드 를 들고 행사에 참여해 2011년도는 여느 때보다도 성공적인 KPNY에 대한 기대가 한층 높아졌다. 자기 브랜드를 들고 참석했던 한국 디자이너의 경우 사전에 준비해 온 200여장의 명함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 전시회 전날 밤 인근 인쇄소에 가서 추가로 명함을 인쇄하기도 했다. 드디어 1월 26일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참가업체들이 보낸 전시품목들이 화 물로 먼저 들어와 전시장인 메트로폴리탄 파빌리온(Metropolitan Pavillion)에 하 나 둘씩 들어왔고, 43개의 참가업체들도 이틀 전날 케네디 국제공항을 통해 맨해튼 에 입성했다. KPNY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25일 전시장 내 부스에 각 업 체들이 섬유제품들을 보기 좋게 정리하고 4시경 업체 직원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전시장을 나서는데,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낀 것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사실 며칠 전 부터 뉴스 기상예보에서는 KPNY 당일인 26일 동북부지역에 눈이 올 것이란 예보를 내보냈지만, 1월에는 항상 눈이 많이 왔고, 보통 하루 이틀 정도 착오는 있었기 때문 132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33 에 크게 개의치 않았었다. 1월 26일, 전시회 당일, 출근하려고 집을 나서는데 굵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출근길 맨해튼 내 대중교통도 별 지장없 이 운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우려는 됐지만, 참가확정을 한 바이어들의 참석에는 큰 영향이 없기를 바라고 출근길을 재촉했다. 마케팅팀 직원들은 메트로폴리탄 파빌리온 전시장 에 이미 나가서 바이어들을 맞이할 준비를 한창 하고 있었다. 사무실로 출근하니 여기저기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오늘 전시회가 예정대로 진행되느냐는 문의 전화였다. 인터넷으로 이곳저곳 사정을 살피니 많은 행사들이 취소되었고, 몇몇 회 사들은 직원들에게 자유조퇴(Liberal Leave)를 허락했다. 2011년 뉴욕한국섬유전 KPNY 시작 시간이 지났는데 전시장 안에는 우리 업체 들과 무역관 직원들만이 부스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눈발은 점점 굵어지더니 거리에 눈이 쌓이기 시작해 발목을 덮을 지경이었다. 많은 바이어들 이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았거나 출근을 했더라도 조기 퇴근하면서 전시장에 들르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2,000m2의 메트로폴리탄 파빌리온 공간이 텅 비어있을 생각을 하니 숨이 턱 막혔다. 이 상황을 그냥 앉아서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마케팅팀은 필수 직원만 전 시장에 남고, 모두 사무실로 돌아와 참가 신청 바이어들에게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행사는 예정대로 진행되고, 전시장 근처 대중교통 상황은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바이어 설득작업에 들어갔다. 입안에 침이 마르는 상황이 오전 내내 계속됐다. 다행히, 한두 시간 늦긴 했지만 바이어들이 머리와 외투에 쌓인 눈을 털어내면 서 하나 둘 전시장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VIP 바이어들도 모두 참석해 전시회장을 참관하고 관심업체와 상담했다. 전년보다는 다소 줄었지만 예년과 비교해 손색이 없 는 500여 명의 바이어가 전시장을 방문했다. 특별한 것은 섬유바이어인 KJMC사에 서 눈길을 뚫고 전시장을 방문하여 현장에서 전시 참가업체인 KPM과 항균, 항바이 러스 기능 섬유에 대한 500만 달러 규모의 1차 구매계약을 체결한 것이었다. 이날 뉴 욕시에는 16~18인치의 눈이 내렸고, 2011년 1월은 역사상 가장 많은 눈이 내린 1월 로 기록되었다 테러에도 근무했다 아침에 출근해서 그날의 주요 뉴스를 점검하려고 라디 133 Ⅰ. 무역관 이야기

134 오를 켰는데 갑자기 월드트레이드센터가 폭격을 맞았다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월드트레이드센터가 폭격을 맞았다는 것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서 그렇게 심각하게 듣지는 않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많이 보급되지 않았기에 라디오와 TV를 통해서만 뉴스를 접할 수 있어 이런 방송을 들어도 그 심각성을 바로 인지하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거리 곳곳에서 경찰차와 소방차들이 사이렌 소리를 크게 울리며 맨해턴 남쪽을 향해서 질주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직원들은 무역관 사무실에 있는 TV 앞으로 몰려가 이를 켜는 순간, 이미 월드트레이드센터의 한 빌딩 이 불타고 있는 모습이 생중계 되고 있었다. 2001년 9월 11일, 이날이 바로 미국이 그 리고 뉴욕이 그렇게도 자랑하던 월드트레이드센터 테러 붕괴의 날이었다 테러사태가 한국업체들과 뉴욕 및 뉴저지 바이어들과의 비즈니스에 영향 을 받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급속히 우리들의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뉴 욕인근 지역에 진출한 한국 업체들에게 인명 피해는 없는지, 비즈니스의 피해는 없는 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인명피해는 그 당시 당장 없는 것으로 파악되었으나 나중에 지 상사 직원 한 분이 미처 피하지 못해 사망했다는 안타까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월드트레이드센터 테러로만으로도 수천 명의 인명이 죽고 뉴욕뿐만 아니라 워 싱턴도 테러를 당했다는 뉴스가 전해지면서 미국의 모든 것은 테러에 대한 두려움과 응징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경제는 일시에 멈추고 얼어붙었다. 이런 현상은 경기침체 로 이어졌고 뉴욕 무역관은 더욱 더 일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경기가 힘들어질수록 우리는 더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 한국의 수출전선에서 일하는 우리는 시장상황이 나빠질수록 더욱 지혜를 짜내고 새로운 아이디어로 한국 업체들의 대미국 수출을 지 원하기 위해서 뛰어야 한다.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김태종 1949년 출생 1977년 도미( 渡 美 )한 김태종 차장은 그해 6월 1일부터 현재까지 잠깐 퇴사했던 기간을 제외하고 32년 동안 뉴욕 무역관에 줄곧 근무하고 있어 뉴욕 무역관의 산증인으로 불리고 있다. 그는 조사, 조사대행, 마케팅, 전시회, 정부 조달, 지사화 업무를 비롯해, 북미지역본부에서도 근무해 무역관 전체의 업무를 잘 이해하고 있어 본사 직원들의 현지 정착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으며, 후배 현지직원의 교육과 훈련에도 앞장서 무역관 업무 전반에 걸쳐 많은 기 여를 하고 있다. 134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35 Detroit 50개 무역관 이야기 디트로이트 무역관 미국 자동차산업의 대명사 디트로이트란 지명은 미국과 캐나다 사이를 흐르는 디트로이트 강의 프랑스어 표현인 해협가의 도시(Ville d'etroit 영어로는 City of Strait)에서 유래되었다. 이 지역은 원래 프랑스의 통치를 받다가 1760년 영국의 지배로 넘어왔고, 완전한 미국의 영토가 된 것은 미국 독립전쟁이 끝나고 13년이 지난 1796년이 었다. 디트로이트가 미국 유수의 공업도시로 발달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요건은 입지조건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5 대호의 심장부에 위치한 이 도시는 수륙교통의 발달, 기계조선공업의 성립과 더불어 성장했는데, 1903년 헨리 포드(Henry Ford)가 이곳을 자동차공장 설립지로 선정한 뒤부터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 졌다. 미국 최초의 도로포장(1907년)과 미국 최초의 교통신호 설치(1920년)가 디트로이트에서 이루어진 것도 자동차 의 생산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일본과 유럽으로부터 값싸고 성능 좋은 자동차의 수입이 확대 되면서 디트로이트를 비롯한 미국의 자동차산업은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 결과 디트로이트는 과거의 영화를 잃고 고난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무역관 개설 무역관 폐쇄 무역관 재개설 디트로이트 무역관은 2010년 12월 21일 트로이(Troy)시로 이전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디트로이트와 주변도시 경 계는 8마일로 현지에서는 백인과 흑인 거주지역, 부유층과 빈곤층을 나누는 경계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 경계가 점차 북쪽 으로 이동되고 있는 추세이다. 그래서 디트로이트에 새로 진출하는 외국기업들도 디트로이트가 아니고 그 주변도시에 자리 를 잡고 있다. 사실 종전 무역관 위치도 디트로이트가 아니라 10마일 선상인 사우스필드(Southfield)라는 시에 있었는데, 치안이 불안해지면서 건물들의 공실률이 높아져가고 있어, 우리 중소기업들이 가장 많이 진출해 있고 더욱 안전한 지역인 16마일 선상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무역관 이야기 자동차 중심도시 디트로이트의 추억 필자는 1977년 4월 1일 KOTRA에서 실시한 세일즈엔지니어 선발시험에 합격하여 입사하였다. 당시 5명의 공과대학 출신 간부 를 뽑았는데 3 명은 개인사정으로 입사 하지 않고 화공과 출신 1명과 전기과 출신인 필자 2명이 입사했다. 시장개척부 특수시장반에 발령받은 필자는 플랜트 관련 업무 를 맡았으며 그 해 10월 동남아 플랜트 시장개척 타당성을 조사를 위해 아시안 5개 국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1978년 10월 한국자동차 및 부품수출의 거점을 확보하기 135 Ⅰ. 무역관 이야기

136 위해 미국의 자동차 중심도시 디트로이트에 무역관을 개설하게 되었다. 디트로이드시에는 미국 자동차회사의 빅3 인 GM, FORD, Chrysler 및 American Motors 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GM 이 세계 랭킹 1위였다. 당시 GM에서 는 현대자동차의 포니 승용차에 대한 충격시험을 실시하고 있었다. 필자는 한국자동 차 부품을 수출하기 위해 여러 관련 기관을 방문하고 3대 자동차 회사의 간부들과 자 주 만나는 한편 자동차산업 홍보에는 전시회 참가가 가장 효과적인 만큼 매년 초에 개최하는 SAE(Society for Automotive Engineering)쇼 즉, 자동차 및 부품 전시회 에 3년간 참가하였다. 그 당시 우리나라 자동차부품 수출은 보잘 것 없었다. 부품이 라기보다 액세서리에 불과한 제품들이었다. 참가업체는 처음에는 대우 현대, 럭키 등 주로 종합상사였고, 출품품목은 Tire, Window shield, Window Shield Motor, Snow Chain, Back Mirror, Oil Filter 등이었다. 작고한 현대 정세영 사장(1928~2005)은 매년 디트로이트를 방문하였다. 무역 관이 개관된 첫해 우리 전시관을 찾은 정 회장이 누가 이 전시회를 기획 했느냐 고 필자에게 물었다. 제가 했습니다 라고 답변했더니 당신 참 배짱 하나 좋다며 필자 의 배를 툭툭 쳤다. 이런 제품들을 첨단을 다투는 국제유명 자동차 전시회에 출품 할 수 있느냐 고 물어 사장님, 한국이란 나라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아는 사람이 별 로 없는데 한국에서 이 정도의 자동차 부품과 액세서리를 생산하고 있다는 것을 알 려야 앞으로 한국 자동차제품을 미국에 수출할 수 있는 기회를 잡지 않겠습니까 라 고 대답했던 기억이 새롭다. 정세영 사장은 이 전시회를 참관할 때마다 미국의 자동 차산업에 종사하는 엔지니어 및 마케팅 전문가들을 디트로이트 중심가에 있는 프라 자 호텔의 가장 비싼 식당에 부부동반으로 초대하여 만찬을 베풀어 주었으며, 이 사 람들의 조언이 한국자동차 발전에 밑거름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 전시회 회장인 GM의 스미스 회장이 하루는 한국전시관에 이동용 실내 카를 손수 운전하고 나타나 미스터 박을 찾았다. 필자가 바로 제가 미스터 박이라고 하자 어깨를 두드리면서 이 전시회에 참가해주어 정말 고맙다고 했다. 세계 제 1위 회사의 회장이 수행원도 없이 직접 자동차를 운전하며 찾아다니던 그때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어른거린다. 필자는 미국의 자동차부품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때로는 주 정부 의 경제국장 및 관련 빅 3 회사의 간부들과 만나서면서 유대를 강화했고, 때로는 자 동차부품 전시회와 시장개척단을 유치했으며, 때로는 전시회 기간 중 Battle Creek 시에서 전시 사절단을 초대 하고 싶다고 하여 열댓 명의 한국사절단이 이 시를 방문 13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37 하기도 하였다. 이 시는 우리 일행이 방문한 날을 Korea Day 로 선포하였다. 시청 입구에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달고 오찬장소의 Head Table에도 성조기와 태극기를 마련한 가운데 시장과 시의회 의장이 참석하여 성대히 환영 해 주었던 기억이 난다. Battle Creek시가 이렇게 융숭한 대접을 한 배경이 있었다. Foreign Trade Zone이 설치 된 이 지역으로 한국 업체들이 많이 진출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는 또 Ford사 부사장이 점심에 초대해 갔더니 일본 업체들을 맹비난했다. 자동차 Plant Tour에 온 일본 친구들은 소형 카메라를 몰래 숨겨 와서 공정별로 모 두 찍어 정보를 수집 해 가는 것은 다반사이며, 특히 Ford사에서 막대한 투자비를 투 입하여 개발한 무스탕 소형 자동차를 6개월도 안되어 똑 같은 모델로 카피해서 출품 했다는 것이었다. 이밖에도 여러 에피소드가 있으나 한 가지만 더 소개하고자 한다. 필자는 3년 동안의 디트로이트 무역관 임기를 마치고 떠나기 전에 그동안 신세 지고 협력해 준 관련 업체와 유관기관 인사들에게 이임 인사 서신을 발송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크 라이슬러 사의 구매이사와 부장으로부터 귀국 전에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귀국준비 때문에 바빠서 가능하면 무역관으로 방문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으나 자기들이 보여줄 것이 있으니 자기 회사를 꼭 방문 해 달라고 거듭 요청했다. 그래서 방문했더 니 자기 회사의 현황, 제품 공정, 부품수입 Channel, 관련 벤더들의 현황 등을 설명 해 주면서 구매이사가 한국 부품수입의 가능성을 조사하기 위해 10월쯤 방한할 예정 이니 한국 부품업체와 상담일정을 주선해달라고 요청했다. 9월 말 귀국한 후 필자의 주선으로 한국을 방문한 이사는 H상사 등과 상담, 최초로 OEM용 Fastner 등 부품 200만 달러 상당금액의 계약을 D/A Base로 체결했다. 박영복 OB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남미라 1978년 출생 2002년 청년무역인 사업으로 디트로이트 무역관과 인연을 맺은 후 10년째 근무하고 있으며 꽃다운 젊은 시절을 무역관과 희로애락을 함께 해오고 있다. 부드러우면서도 호탕한 성격의 소유자로 방대한 바이어 네트워크를 보유 하고 있고, 특히 자동차 분야에서는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갖고 있다. 하루라도 그녀의 호탕하고 경쾌한 웃음소리 를 듣지 않으면 왠지 허전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말이 생겨날 만큼 그녀의 웃음소리는 디트로이트 무역 관의 트레이드마크다. 137 Ⅰ. 무역관 이야기

138 Los Angeles 50개 무역관 이야기 로스앤젤레스 무역관 새샘트리오가 1978년 불렀던 노래 나성에 가면 소식을 전해줘요...슈리슈바...하는 바로 그 나성( 羅 城 ). 미국에 서 한국사람들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곳이자 한국교포들이 제일 많이 사는 곳 로스앤젤레스다. 애칭은 천사의 도 시(The City of Angels) 다. 서울에서 직항노선을 이용할 경우, 약 11시간이 소요되는 LA는 세계적인 영화산업 의 중심지이며 할리우드나 디즈니랜드, 베벌리힐스, 유니버설 스튜디오와 같은 유명한 관광명소들이 있어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어들이고 있다. LA는 1848년 미국-멕시코 전쟁(1846~1848)의 결과 미국 영토로 편입되었다. LA지역의 인구는 히스패닉 45%, 백인 30%, 흑인 10%, 아시아계 12%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교부에 따르면 LA를 포함한 남부 캘리포 니아 주의 한인 인구는 50만 명으로 집계되며, 지역한인회에서는 유동인구를 포함해 100만 명에 가까울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무역관 개설(KOTRA 창립연도에 개설된 4개 무역관 중 하나) 관할지는 캘리포니아 주(남부), 네바다 주, 콜로라도 주, 애리조나 주, 유타 주, 뉴멕시코 주, 하와이 주이다. 생활 및 근무 여건 평평하고 넓은 분지지대에 자리잡은 LA 지역은 연평균 기온이 섭씨 18도이다. 겨울의 최저기온은 섭씨 7~8도, 여름의 최고 기온은 섭씨 28~29도이며, 11~3월의 우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비가 내리지 않는다. 습도가 매우 낮아 무더운 여름에도 그 늘에만 있으면 시원하다. LA가 소재한 캘리포니아 주의 소득(GSP) 규모는 1조 8,000억 달러로, 미국 최대 주 소득 규모이며 국가별 소득순위에서도 10위권에 해당 한다. LA 무역관이 관할하는 8개 지역 소득규모를 합하면 2조 7,000억 달러에 이르 고, 미국 GDP의 1/6을 차지한다. 캘리포니아 주의 최대 산업은 전체 산업의 40%를 차지하는 서비스업이며, 특히 컴퓨터 소프트웨어, 엔터테인먼트, 인터넷 관련 분야가 강하다. 캘리포니아 주의 제 조업은 미국 전체산업의 17%를 차지하고 반도체, 산업기계 제조 및 식품가공업이 캘리포니아 주 경제기반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무역관 관할지인 LA(캘리포니 아 주)와 라스베이거스(네바다 주)는 북미 최대의 컨벤션 개최지역이며, CES(소비 13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39 재가전), AAPEX(자동차부품) 등이 열린다. 또한 LA는 헐리우드를 배경으로 영화, 게임, 음악 등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메카이자, 신재생에너지 분야에서도 풍력, 태양 광, 지열 등 세계 산업의 선도지역이다. 남부 캘리포니아 주는 거대 한인 커뮤니티를 배경으로 OKTA(교포무역인), 한 인은행, KITA(지상사) 등 한인 경제활동의 중심지이며, 특히 서부 최대 섬유시장인 자바시장 을 기반으로 원단, 패션의류, 유통 등 관련산업이 크게 발달했다. 이러한 요소들을 바탕으로 LA를 비롯한 남부 캘리포니아 지역이 한미 FTA 발효 이후 최대 수혜지역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무역관 이야기 2012년 KOTRA 남가주 동우회 총회 개최 KOTRA 남가주 동우회(회장 임광식) 정 기총회가 2012년 2월 8일 로스앤젤레스 무역관에서 개최되었다. 전 현직 코트라맨 16명이 모인 이 자리에서는 KOTRA의 과거와 미래가 활발하게 논의되었으며 류대 형, 강중경, 고석원, 최선정, 서태원, 임광식 OB가 지난 젊은 시절에 겪었던 따끈따 끈한 이야기를 구수하게 들려주었다. 이 모임은 개최 장소가 무역관이기도 하지만 KOTRA 현직들과 함께 어울리는 만남의 모임이기 때문에 Home Coming Day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불리기도 한다. 오전 10시 30분에 시작된 총회는 점식식사를 함께하며 오후 1시 30분까지 계속되었 는데 언제나처럼 시간이 짧아 아쉬움을 남겼다. 몇몇 동우들은 차마 헤어지지 못하 여 인근 찻집으로 발길을 향하기도 하였다. 이날 모임에는 특히 김복임 동우가 홍일점으로 처음 참석하여 모두의 관심을 끌 었는데, 김 동우는 1968년 사장실 비서로 근무를 시작하여 로스앤젤레스 무역관 근 무를 마지막으로 1979년 KOTRA를 떠났다. 그후 로스앤젤레스에서 많은 활동을 해 온 김 동우는 1960대 중반에 들어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미술과 교육활동 을 왕성하게 펼치고 있어 후배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이 날도 지난해에 한국조폐공 사에서 기념우표로 제작된 바 있는 직접 그린 무궁화 그림을 무역관에 기증하여 박 수갈채를 받기도 하였다. 안타까운 점은 나이 드신 분들이 해마다 한두 분씩 참석을 못하고 있다는 점이 다. 금년도 참가자 가운데 최고령자는 86세의 강중경 동우였는데, 아직도 건강한 모 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1967년부터 1974년까지 KOTRA에 재직했던 강 동우는 1960년대 후반 베트남 사이공(현 호치민) 무역관의 설립 경위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139 Ⅰ. 무역관 이야기

140 2012 KOTRA 남가주 동우회 들려주기도 하였다. 또한 1964년 입사해서 김동조 KOTRA 2대 사장을 가까이 모셨 던 원인상 동우는 수출의 날 이 제정된 배경과 KOTRA의 초기 입지 구축 등을 화제 로 삼아 참석자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한편 무역관측에서는 KOTRA의 활약상을 비디오 화면으로 보여줌으로써 동우들 로 하여금 격세지감을 느끼면서도 자랑스런 후배들에 대한 자긍심을 갖도록 하였다. 이곳 남가주지역은 KOTRA 동우들이 가장 많이 거주(20~30명 추정)하고 있 는 지역이기 때문에 그 분들이 겪었던 소중한 경험들을 글이나 책으로 이끌어 내는 일이 우리 로스앤젤레스 무역관에 비공식적으로 부여된 과제이기도 하다. 이번 총회 에서는 이런 과제를 성공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방안들로 창립 멤버들의 한국초청 방 안, 화상회의 개최방안, 개별 방문 인터뷰 등이 논의되기도 하였다. 140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41 Miami 50개 무역관 이야기 마이애미 무역관 플로리다는 Full of Flowers 를 의미한다고 한다. 한때 캐리비안 해적들의 소굴이었던 마이애미를 중심으로 플 로리다 주(일명 SunShine State)의 특징을 들여다본다. 첫째, 한국으로부터 매우 멀다. 둘째, 산이 없다. 셋째, 스페인계 히스패닉이 많아 라틴아메리카의 문화가 지배적이다. 16세기에 에스파냐 사람들이 발견하였으며 1821년 미국인들이 점령하였다. 1959년 이후 거의 30만 명에 이르는 쿠바 난민들이 이주하여 쿠바인 거주지를 형성하고 있다.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등이 1959년 1월 1일 바티스타(Batista) 정권을 축출한 쿠바혁명 (Cuban Revolution)의 여파였다. 시 이름은 인디언 부족인 마이애미 족( 族 )에서 유래한다. 플로리다 주의 최대 산업은 리조트, 크루즈 등 관광업이다. 연간 8,000만 명을 웃도는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하여 627억 달러를 소비한다. 그 덕택에 누리는 고용효과는 100만 명. 농업 또한 플로리다 주의 주요 산업이며, 미국 전체 감귤류의 67%, 오렌지의 74%를 플로리다에서 재배하고 있다. 이밖에 항공ㆍ우주, 의료기기 등에서 강세 를 보이고 있는데 우주선 발사대가 있는 케이프캐너배럴(Cape Canaveral)도 플로리다 주에 있다. 마이애미는 중남미의 관문이고 플로리다 주 전체 교역량의 59%가 중남미를 대상으로 한 교역이다.(미국의 중남미 교역의 28% 차지) 마이애미 공항은 중남미 35개국 48개 도시에 화물노선을 취항하고 있다 무역관 개설 무역관 폐쇄 무역관 재개설 무역관 이야기 2008년 마이애미 무역관으로 발령 받은 Y과장. 그는 미국 근무라는 뜻밖의 행 운에 영어 학원에도 등록하고 평소 등한시하던 영어 서적도 뒤적거리면서 미국에 도 착하자마자 바로 업무에 투입할 수 있을 만큼의 실력을 갖추겠다는 생각으로 영어공 부에 매진하였다. 하지만 발령일이 다가오던 어느 날 Y과장은 뜻밖의 기사를 접하게 된다. 미국 현지 언론을 인용한 이 기사는 미국인들이,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백인들 이 마이애미를 떠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도 영어가 안 통해서라니 이게 무슨 뜻인가? 7월의 햇빛 뜨거운 날 Y과장은 마이애미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는 스 페인어 방송이 연이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그때만 해도 마이애미에 살면서 스페 인어를 그렇게 많이 듣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141 Ⅰ. 무역관 이야기

142 미국 동남부 최남단 플로리다 주의 대표적 상업도시인 마이애미는 지리적으로 중남미에 대한 접근성이 매우 좋다. 카스트로 정권을 피해 쿠바에서도 난민들이 많이 건너오고 중남미 부유층들이 이민을 오거나 부동산 등에 투자하면서 자연스럽게 중 남미와의 상업적 문화적 교류가 빈번해졌다. 현재는 전체 인구의 60% 이상이 히스 패닉이고 기업의 50% 이상을 히스패닉계가 소유하고 있다. 그래서 마이애미에 사는 사람들은 마이애미를 Gateway to the Americas 라고 부른다. 부임하자마자 전시회를 맡게 된 Y과장. 전임자로부터 업무를 인수받고 현장에 나가보니 통역원들이 교포 반 현지인 반이었다. 교포들은 한국어-영어 통역을 맡고 있고, 현지인들은 영어-스페인어 통역을 맡고 있었다. 실제로 전시회 기간 동안 영어 가 서툰 중남미 바이어들이 한국관을 많이 찾아왔고, 나중에 전시회 주최 측에서 발 표한 참관객 통계를 보니 참관객 절반 이상이 중남미에서 출장을 온 것이었다. 부임 인사 차 Y과장은 K관장과 함께 플로리다 주의 한국 명예총영사와 점심을 하게 되었다. 바로 옆 건물에서 변호사를 하고 있는 이 분은 KOTRA에 새로 부임한 인사와 만날 때는 항상 하는 농담이 몇 가지 있다며 Y과장에게 그 중 하나를 들려주 었다. 한국의 한 유학생이 영어를 공부하려고 마이애미에 왔습니다. 그는 영어공부 도 하고 돈도 벌 겸 식당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죠. 하루는 중남미 손님 한 분이 식당 에 와서 그 유학생과 대화를 하고 나서 식당 주인을 불렀어요. 그 손님은 식당 주인한 테 아니, 저 친구는 아시아에서 온 것 같은데 어떻게 저렇게 스페인어를 잘 합니까? 라고 했죠. 그랬더니 식당 주인이 놀란 표정을 하며 말했죠. 쉿! 저 친구는 지금 영어 북미 히스패닉 바이어 초청 수출상담회 142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43 를 하는 줄 알고 있습니다. 마이애미에 근무하면서 중남미와 비즈니스를 하는 바이어들을 만나기는 일상 사다. 그렇다 보니 중남미와 관련된 프로젝트 정보를 많이 입수하게 되고, 기관들과 의 면담도 자주 하게 되는데 간혹 특이한 사람들이 무역관에 찾아오기도 한다. 하루 는 한국-쿠바 비즈니스 기회를 위해 KOTRA와의 면담을 신청한 기관이 있어 S관장 과 Y과장이 그들과 만나보았다. 세 명이 본인들을 Junta Patriotica Cubana라는 기관에서 왔다고 소개하면서 한국-쿠바의 경제교류 세미나를 개최하고자 하는데 연 사로 참가해줄 것을 부탁했다. 행사 성격 등에 대해 물어보는데, 시간이 갈수록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 껴졌다. 쿠바는 아직 전쟁 중에 있으며 자신은 언제든지 조국의 해방을 위해 전장에 나갈 준비가 되어있다면서 최근 쿠바의 민주화 운동을 하다 암살당했다는 사람의 사 진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러면서 새로운 쿠바 탄생을 위해서는 국제적 공조가 필요 하다며 한국이 반군과 함께 해달라는 것이었다. 회의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Y 과장은 KOTRA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이미 아바나에 KOTRA 무역관이 있다는 말 을 꺼냈다. 그러자 Junta Patriotica Cubana의 회장이라는 사람이 갑자기 정색을 하며 쿠바 현 정부와 어떠한 형태로든 거래를 하는 기관과는 상종할 수 없다며 서둘 러 회의를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Y과장은 이 역시 마이애미에서만 경험해볼 수 있는 해프닝이라고 생각한다. 마이애미 근무를 하게 되면서 Y과장은 영어가 안 통한다는 말은 좀 과장된 것이 라고 느끼게 된다. 엘리베이터나 거리에서는 스페인어가 더 많이 들려도 어지간한 바 이어들은 서툴지언정 영어로 대화가 가능하다. 하지만 이제 Y과장은 안다. 마이애미 에 사는 현지인들의 다소 과장된 스페인어에 대한 푸념이나 중남미 농담들이 실은 마이애미에 자리잡게 된 중남미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마리아 트린쳇(Maria Trinchet) 1961년 출생 1981년 10월 마이애미 무역관에 입사한 Maria Trinchet는 2009년 퇴사하기까지 30년 가까이 무역관에서 마케 팅과 총무 업무를 맡았다. Maria는 수많은 본사직원들과 호흡을 맞추면서 한국기업의 미국 진출에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퇴사하고도 KOTRA에 도움을 주고 싶어할 정도로 진정한 의미에서 마이애미 무역관의 식구이고 산 증인이다. 143 Ⅰ. 무역관 이야기

144 Chicago 50개 무역관 이야기 시카고 무역관 인구 270만 명으로 뉴욕, LA 다음가는 세 번째 도시 시카고는 Chi-town', 'Windy City', 제2의 도시, 빅숄 더(Big Shoulders)의 도시 등 별명이 많다. 별명은 또 있다. 속도의 도시, 할 수 있다(Can-Do) 의 도시, 미래 를 기다릴 필요가 없는 도시.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던 19세기 후반의 시카고 시민들이 자랑스레 뽐내던 시카고 의 슬로건이다. 시카고는 또한 미국에서 가장 미국적인 도시 라고 일컬어져 왔다. 오바마(Barack Obama) 대 통령은 시카고가 배출한 정치인이다. 시카고는 운하를 이용하여 5대호 지역과 미시시피 강을 연결하겠다는 계획에 의해 어느날 갑자기 탄생했다. 이 도시를 미국경제의 거인으로 상징하는 이벤트도 있었다. 1893년에 열린 세계 콜럼버스 박람회였다. 1893년 당 상관(정3품) 정경원( 鄭 敬 源, 1841~1898)은 수개월에 걸친 태평양 항해 끝에 샌프란시스코 항구에 도착했다. 시카고세계박람회(Chicago Columbian Exposition)에 고종 황제가 직접 임명한 한국관 관장으로 부임하기 위해서였다. 고종 황제가 특별히 파견한 10여명의 악공도 동행하였다. 시카고는 1673년에 프랑스인 탐험가와 선교사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으며, 1833년에 도시로 승격되었다. 시카 고 라는 지명은 그곳에 사는 인디언 부족의 말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는데 야생 양파의 땅 혹은 강뚝 주변 늪지 대의 썩은 꽃에서 나는 냄새 를 뜻한다고 한다. 지도에서 북미를 잘 살펴보면 캐나다의 퀘벡에서 미국 남부의 뉴 올리언스까지 도시를 잇는 하나의 선이 그어진다. 퀘벡(Quebec) - 몬트리올(Montreal) - 디트로이트 (Detroit) - 시카고(Chicago) - 세인트루이스(Saint Louis) - 뉴올리언스(New Orleans)처럼 말이다. 루이 14세를 기념해 명명한 루이지애나(Louisiana)주를 포함하여 모두 프랑스와 관계가 있었다. 시카고(Chicago) 를 치카고 로 발음하지 않는 것도 그 까닭이다. 루이지애나 주는 미국의 2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이 1803년 나폴레옹에게서 매입하였고, 디트로이트는 1701년 프랑스인이 모피 거래를 위해 건설하였으나, 1760년에는 영국군에 의해 점령되고, 1783년에는 미국령이 되었다 무역관 개설 생활 및 근무 여건 시카고라는 도시명이 인디언 말로 바람 을 뜻할 정도로 시카고의 기후는 매서 운 바람과 긴 겨울이 특징이다. 미시건 호수와 접해있는 시카고는 100년 전 마피아 두목 알카포네(Alphonse G. Capone)의 주된 활동지로 유명하나 현재는 미국 여타 도시에 비해 치안이 양호하다. 시카고는 독특한 건축물과 마천루로 유명한데 1871 년의 대화재가 도시재정비의 기회가 되어 새로운 건축기법으로 빌딩을 건립하게 되 었다고 한다. 시카고 지역은 전체 면적의 8%이상이 공원지역(578개 공원)으로서, 144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45 미시간 호수 주변의 경치가 아름다우며 대도시로서는 공해가 적어 Clean City Award 를 수차례 수상한 바 있다. 시카고는 공업이 발달된 오대호 지역에 인구가 밀집되어 있으며 자동차, 항공, 기계 및 전기ㆍ전자 산업이 생산의 중추 역할을 맡고 있다. 세계 500대 기업 중 보잉 을 위시한 11개사가 시카고에 본사를 두고 있으며(시카고 위성 도시까지 포함하면 21개사), 세계 1,000대 기업 중 66개사가 본사를 일리노이 주에 두고 있다. 특히 일리 노이는 인구, 산업생산, 소득수준면에서 중서부 지역을 대표(인구: 1,290만 명)하며, 중장비(Caterpillar, John Deere), 항공(Boeing), 전자(Motorola) 산업의 주요기 업들이 위치하여 시카고 무역관 핵심 사업의 주요 파트너가 되고 있다. 무역관 이야기 우리나라가 참가한 최초의 박람회 콜럼버스의 1492년 미 대륙 발견 400주년을 기 념하기 위해 1893년 5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 6개월간 개최된 시카고세계박람회 의 공식명칭은 콜롬비아 엑스포(Columbia Exposition)였는데 47개국이 참가하였 고, 연인원 2,700만 명이 관람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관람객이 얼마나 많았던지 정경원 한국관 관장은 일기에서 밥도 안 가져다주고 이놈들이 나를 굶겨 죽이려나 보다 라고 묘사했다. 이 박람회에는 세계 최초로 발명한 지퍼가 출품되었는가 하면, 요즘 놀이시설 공원마다 갖추고 있는 페리스휠(ferris wheel) 도 처음 등장하였다. 한국관은 6~7간 크기의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주 전시관 내부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넓이는 899ft 2 였다. 주미조선공사 관 서리공사 이채연의 지휘로 총 공사비 500달러가 투입되었 다. 장치 공사는 1892년 2월 시작하여, 박람회 개막일인 1893 년 5월 1일까지도 건물공사가 미완인 채 오픈하였고, 그 나머 지는 박람회 행사 중에 공사를 완공하였다고 한다. 주 전시장 인 Manufactures and Liberal Arts 빌딩 앞에는 참가한 47개 국의 국기가 게양되어 있었는데, 박람회 주최국인 미국 성조기 바로 옆에 태극기가 걸려있었다고 한다. 박람회 개장 당일 우 리나라의 악공들은 한국관에서 스티븐 클리블랜드(Stephen 시카고 박람회 한국관 한국관 정경원 관장 G. Cleveland, 1837~1908) 미국 대통령이 지켜보는 앞에서 조선 국악을 연주하였고.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감탄하여 이들 145 Ⅰ. 무역관 이야기

146 에게 일일이 포옹으로 격려까지 해주었다고 한다. 한국은 1893년 9월 5일 오후 7시 오디토리움(Auditorium) 호텔에서 100여 명 이 참가한 가운데 연회를 베풀었다고 하는데, 현재 루즈벨트 대학 공연 강당인 이 건 물은 한국 사상 최초로 리셉션이 개최된 장소가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최초 로 참가한 한국관은 불행히도 박람회를 마친 이듬해 1894년 7월 철도 노조원들의 파 업으로 박람회 현장인 화이트시티가 전부 불타면서 한국관도 같이 사라지는 운명을 겪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 할까. 당시 출품되었던 전시품인 조복, 돗자리, 저포, 궁시, 가마, 갑옷, 화살 및 화살촉, 한지로 만든 한복, 상 등 전시물품은 박람회가 끝난 직 후, 시카고 필드뮤지엄, 뉴욕 피바디 박물관, 워싱턴 스미소니언박물관에 기증되어 오늘날에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정경원 관장은 한국을 출발할 때 제물포에서 영어를 썩 잘하는 직원을 대동하였 으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보니 그는 통역에 상당한 애로가 있었다. 그때 영어에 능통한 박용규와 서병규라는 사람이 찾아와 박람회 현지 채용을 부탁하자 현지 고용 인으로 채용하였다고 한다. 고종황제가 박람회 참가 프로젝트를 무사히 마치고 돌 아온 정경원 관장에게 성과를 하문하니 정경훈 관장은 총 2,000달러의 직판 수익을 올렸습니다 라고 답변하였다 한다. 우리나라는 1893년 시카고 박람회에 참가한 것을 효시로 1900년에는 파리 박 람회에 참가하였고 KOTRA의 국제박람회 참가활동은 1963년 시카고 국제박람회 참가부터 본격화되었다. 우리나라가 최초로 참가한 박람회와 KOTRA가 최초로 주 관한 박람회가 시카고였다는 인연이 있는 것이다. 글로벌 파트너링 사업의 시작 시카고 무역관이 한국 부품 소재 기업과 미국 글로벌 기업을 연결하여, 단순히 부품 공급에 그치지 않고 연구개발 단계, 기술협력 및 투자 까지 확대시킬 수 있는 신개념 마케팅 모델인 글로벌 파트너링 (GP:Global Partnering) 사업을 추진하려고 하니 미국 글로벌 기업을 설득하는 작업에 많은 애 로사항이 있었다. 아무리 한국 정부기관이라고 해도 미국 글로벌기업들과 미팅을 주 선하기도 쉽지 않았으며, 설사 성사된다 하여도 구매에서 연구개발에까지 이르는 장 기적인 프로젝트에 대한 미팅이라는 점을 이해시키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이를 위해 글로벌 파트너링 전담 직원을 배치하고 캐터필러, 나비스타, 존디어 등과 같은 대표 기업을 설득하기 위해 직접 방문, 미팅을 갖는 등 총력을 기울였다. 더불어 효율적이고 성공적인 상담을 위해 바이어에게 한국 업체에 대한 업체 및 제품 14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47 정보를 제공, 사전에 상담 선호 업체를 선별하고 미팅 일정을 잡았다. 그 결과 세계 최대 중장비 업체인 캐터필러사, CNH, JCB를 비롯 최대 상용차 업체인 나비스타, 미국 주요 동력장 치 업체인 이튼, GKN, 앨리슨 트랜스미션 등 20여 개사가 참 가하여 한국 업체와 열띤 상담을 펼쳤다 한미 부품소재 글로벌 파트너링 위크 글로벌 파트너링 행사에 참가한 바이어들의 한국 부품업 체들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한국부품은 품질 면에서 높은 경쟁 력을 확보하고 있으며, 여기에 기술개발 능력 까지 더한다면 경쟁력을 장기적으로 확 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그동안 미팅조차 쉽지 않았던 세계 최대 중장비업체인 캐터필러와 미국 최대 상용차 업체인 나비스타를 설득하여 KOTRA와 업무 협력을 위한 MOU를 체결, 장기적인 협력관계를 구축한 것 또한 무 역관 사업의 큰 성과였다. 한편 시카고 글로벌 파트너링에 참가했던 한국 부품업체들 은 GP 사업이 일회성 사업으로 그치지 않고 매년 개최되어 지속적으로 한국 부품업 체들을 위해 미국 핵심 업체와의 수출, 기술협력에 창구역할을 해줄 것을 당부했다. 북미 10개 무역관이 힘을 모은 2009년 한국상품전 2009년 9월 10일부터 12까지 3일 간 시카고 네이비 피어(Navy Pier)에서 개최된 한국우수상품전(Korea EXPO 2009, Chicago)은 준비 단계부터 순탄치 않았다. 행사 개최지였던 시카고 다운타운 의 네이비피어 전시장은 안전 규정상 개막 행사 무대를 위한 모든 구조물을 전시장 내에 설치해야 했다. 하지만 초청된 바이어만 700개사에 이르고 개막행사 참가 예상 인원이 많아지면서 행사장 밖 복도에 구조물을 설치해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시카고 소방서장(Fire Marshal)을 직접 현장으로 불렀고 반나 절에 걸친 설득 끝에 담판을 지을 수 있었다. 주로 브릭스(BRICs) 지역과 동유럽 등 신흥시장에서 열렸던 한국상품전이 미 국에서는 처음 개최되었고 이를 위한 홍보도 남달랐다. 특히 미국의 상징인 뉴욕 맨 해튼의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개막식 테이프 커팅 장면이 보도되었는데 KOREA EXPO 2009 celebrates grand opening of the first and largest showcase in North America of Korean technology-savvy products at Chicago s Navy Pier 라는 문구와 함께 로이터 전광판에서 약 15초간 생생하게 등장하였다. 한국 문화를 널리 알릴 수 있는 부대 행사도 준비하였다. 특히 개막식에는 유명 비보이팀 공연과 사물놀이, 전통무용공연 등 축하행사를 선보였고 전시기간 동안 태 147 Ⅰ. 무역관 이야기

148 권도 시범 등을 마련, 전시회 참관 관계자뿐만 아니라 시카고 일반 시민들에게도 높 은 호응을 얻었다. 미국 정부의 그린뉴딜 정책을 겨냥한 풍력 태양열 등 그린기술업체와 자동 차, 기계 등 대미 수출주력 부품소재 업체가 주축이 된 가운데 북미 10개 무역관이 모 두 상품전 참가 국내업체 및 유력 바이어를 유치하기 위해 협력하였다. 사전 프로젝 트 발굴을 통해 유력 바이어와 맞춤형 1:1 상담을 진행하였고, 그 결과 3일의 전시기 간에 걸쳐 총 상담건수 1,296건, 상담액 3억 5,000만 달러, 계약 추진액 3,700만 달러 의 성과를 거두었다.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황선창 1969년 출생 12년째 시카고 무역관에 재직, 시카고 조사 사업의 산 증인으로 지시조사는 물론 이슈 발굴, 책자 발간, 컨설팅 조 사 등 맞춤형 정보 생산 전문가이다. 또한 비즈니스 직결 정보 생산을 통해 마케팅 및 지사화 사업에도 기여하는 등 건전한 무역관 분위기 조성을 이끄는 현지직원의 리더이다. 이한 1972년 출생 시카고 무역관의 마케팅, 지사화 업무의 중추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특히 중장비 상용차 분야에서 높은 전문적 지식과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GP 등 대표 마케팅 사업을 주도하고 있다. 평소 전략적인 마인드로 사업 개발과 추진을 리드하고 있는 그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바이어와 국내 고객 모두에게 인기가 높다. 14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49 Washington 50개 무역관 이야기 워싱턴 무역관 워싱턴의 정식 명칭은 워싱턴 컬럼비아 특별구(Washington, District of Columbia) 이며 워싱턴 D.C.로 약칭 된다. 세계의 초강대국이라고 자랑하는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연상시키고 있다. 미국정 치를 상징하는 백악관과 국회의사당이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150개 이상의 대사관이 밀집되어 있어 세계 각국의 외교관들이 치열한 외교활동을 벌이고 있고 FBI, CIA 등과 같은 미국 정보기관이 모여 각종 첩보활동을 벌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워싱턴은 이밖에도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기구가 소재한 행정, 외교, 관광의 중심지이다 무역관 개설 무역관 폐쇄 무역협회 합동 사무실 주재 무역관 재개설 워싱턴 무역관은 한국 기업들에게 경제, 통상, 산업 정보를 제공하고 미 연방조달시장 진출 지원 업무 등을 수행하고 있다. 미 연방정부 조달시장은 2010년 기준 5,000억 달러 규모로 한국의 총 수출액과 맞먹을 정도로 거대한 시장이며 한미 FTA 발효로 양허 하한선 인하, 과거 미국내 조달실적 요구 금지 등으로 진입장벽이 더욱 낮아져 국내 기업들에게 기회가 더욱 확 대되었다. 워싱턴 무역관은 한국기업들의 성공적인 미 정부조달시장 진출을 위해 Korea Technology Week 를 매년 개최 하고 있다. 생활 및 근무 여건 워싱턴 D.C.내 치안이 가장 잘 되어 있는 지역은 주택가격이 가장 비싼 북서쪽 (NW)으로 백인 인구가 밀집해 있으며, 가장 열악한 곳은 남동쪽(SE)과 북동쪽 (NE)으로 흑인 인구 밀집지역이다. 남서쪽(SW)은 과거 치안이 좋지 않았으나 최근 도시 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지역으로 포토맥 강변을 끼고 아파트나 콘도 등의 고가 주거시설이 형성되어 치안도 개선되고 있다. 교민 수는 2010년 기준 워싱 턴DC 2,290명, 버지니아 7만 577명, 메릴랜드 4만 8,592명이다. 워싱턴 D.C 인근 버 지니아와 메릴랜드 주는 다수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으로 H 마트, 그랜드마 트 등의 한인 슈퍼마켓에서 거의 모든 한국 생필품 조달이 가능하다. 워싱턴은 다인종이 집결해있는 지역으로 외국 문화에 대한 포용력이 높은 편이 며, 인종차별 의식이 상대적으로 낮다. 미국의 국민성을 미식축구에 비유한 학자(마 149 Ⅰ. 무역관 이야기

150 틴 J. 개논)가 있다. 미국에서 미식축구, 특히 프로 미식축구가 보여주는 엄청난 속 도, 계속적인 움직임, 고도의 전문성, 일관된 공격성, 그리고 격렬한 경쟁은 모두 미 국 문화의 특징이며, 스포츠일 뿐만 아니라 공동 신념과 공동 이상의 복합체라는 것 이다. 개인적, 독립적, 직선적, 비형식적, 경쟁적이며, 자신의 방식 안에서만 우호적, 물질적, 개방적인 사람들. 무역관은 일을 하면서 한국과 미국의 시차만큼이나 어려 움을 느낄 때도 있다. 무역관 이야기 Jay Jeong 과장의 별명이 DHL이 된 사연 워싱턴 무역관에 근무하는 Jay Jeong 과 장은 이름 대신 DHL 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평소 동료 직원의 일이라면 발 벗고 나 서서 도와줄 만큼 모든 이에게 자상한 K에게 어떻게 DHL 이라는 별명이 생긴 것일 까. 그가 DHL이 된 사연은 114년 만에 5.8 규모의 큰 지진이 워싱턴 지역을 흔들어 모든 사람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던 그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1년 8월 하순, 여느 때처럼 점심시간이 막 끝나고 오후 업무가 시작되던 어 느 날. 금방 누군가가 나간 듯 사무실 문이 무겁게 닫히는 쿵 하는 소리가 사무실에 울려 퍼지고 그 때문인지 문 옆에 있는 컴퓨터의 모니터는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모니터의 움직임은 조금씩 커지고 있었고 화분의 잎들도, 앉아 있는 의자도 조금씩 움직임을 더했갔다. 그때 누군가의 이거 지진 아니야? 라는 말에 맞추어 책상마저 심하게 흔들리고 책상 위에 있는 화분이 떨어지고 형광등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이미 심해지는 진동에 어찌할 바를 몰라 몇 분동안 그렇게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자상한 Jay Jeong 과장은 큐비클(cubicle)에서 뛰쳐나와 사무실에서 가장 큰 책 상 밑으로 제일 먼저 혼자 들어가 몸을 숨기고 직원들에게 책상 밑으로 대피하라고 소리쳤다. 다들 Jay Jeong 과장의 긴박한 지시에 따라 책상 밑으로 숨었지만 이미 발에 느껴지는 진동은 심하게 울렁이며 요동쳤다. 잠시 후, 지진이 점차 멎어지자 직원들은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기 위해 서둘러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고 사무실 안은 누군가의 행방을 찾는 듯 하는 소리가 울려 퍼 졌지만 다들 Jay Jeong 과장이 직원들을 챙기는 소리이겠거니 하고 역시 직원들 챙 기는 건 Jay Jeong 과장밖에 없어 라며 서둘러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비상계단에는 층마다 사람들이 몰려 나와 계단을 꽉 채우고 있었다. 직원들도 초초하게 계단을 내 려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때 저 멀리 Jay Jeong 과장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 수영하 듯 팔을 휘저으며 틈을 헤집고 계단을 한칸 한칸 허겁지겁 내려가고 있었다. 평소에 150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51 침착하고 남을 배려하던 Jay Jeong 과장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평소 한적했던 도로는 워싱턴을 벗어나려고 줄 지어 있는 차들과 그 사이로 사 이렌을 울리며 지나가는 경찰차, 소방차들이 한 데 섞여 꽉 막혀 있었다. 건물 앞 공 원에는 가족들의 안전을 걱정하여 너도나도 동시에 휴대전화 통화 버튼을 눌러 불통 이 되어버린 전화기를 들고 초초하게 기다리는 사람들, 갑작스러운 지진에 놀란 마 음을 쓸어내리면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 무리지어 서로 지진을 느낀 생생한 상황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흩어졌던 직원 들도 삼삼오오 모여 기다리다가 저 멀리 허겁지겁 미리 계단을 내려가던 Jay Jeong 과장이 직원들이 나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곧장 건물 앞 신호등을 건너 한 블록 떨어 진 지하철로 향하는 것을 보고 적잖이 당황했다. 모든 상황이 정리되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온 직원들은 지진이 난 후 Jay Jeong 과장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대해서 하나둘씩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십분 전에 패닉 상태에 빠져있던 Jay Jeong 과장은 머쓱하게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후 여느 때와 같이 차분하게 사람들의 안부를 물어보았다. 그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안 전한 곳은 지하철 대피소일 거라는 생각으로 지하철로 달려갔다고 설명했다. 그 이후 Jay Jeong 과장은 DHL(다 버리고 혼자 래 뺐다) 라는 별명으로 직 원들의 웃음 섞인 장난거리가 되기도 했다. 실제로 Jay Jeong 과장이 별명을 좋아하 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알 수없는 일이나 Jay Jeong의 행동과 그로 인해 지어진 별명 은 오히려 무역관 분위기를 좋게 만드는 활력소가 되었다.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테리 전(Terrie Jeon) 1964년 출생 2001년 입사 이후 시장개척업무와 전시회업무를 도맡아 수행하고 있다. 현지직원 중 최고참으로서 업무적으로 나 성품으로나 모범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친누나, 친이모처럼 부드러운 인상이지만 중요한 행사가 있을 경 우 주말, 야간을 가리지 않고 열과 성을 다하는 추진력을 보여줘 외유내강형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151 Ⅰ. 무역관 이야기

152 L atin America 멕시코 멕시코시티 Mexico City 쿠바 아바나 Habana 도미니카(공) 산토도밍고 Santo Domingo 파나마 파나마 Panama 콜롬비아 보고타 Bogota 브라질 상파울루 Sao Paulo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Buenos Aires

153 Mexico City 50개 무역관 이야기 멕시코시티 무역관 오늘날의 멕시코시티는 호수 한가운데서 베네치아처럼 모습을 드러내며 아즈텍(Aztec) 왕국의 수도 테노치티틀 란(Tenochtitlan)의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1325년경 아즈텍인들이 이주하면서 생긴 도시인 테노치티틀란은 1524년 격렬한 전투 끝에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함락당하고 아즈텍 지배자들은 살해되었다. 그때 코르테스 (Hernan Cortes de Monroy y Pizarro)는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고 지역 주민들을 노예로 삼은 뒤 악명 높은 신전이 있던 자리에 교회를 세웠다. 새롭게 건설된 식민지 도시에는 멕시코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아즈텍 (Nahua Aztec)인들을 멕시카(Mexica)라고 부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멕시코에는 세 가지 독특한 문화가 생겨났다. 인디언 문화, 스페인 문화, 그리고 인디언들과 스페인 사람 들 사이의 혼인과 성적 접촉에 의해 형성된 혼합(mestizo)문화다. 9100만 명의 인구 중, 약 60%가 메스티조이 며, 30%가 순수한 인디언(아메리카 인디언)이거나 토착 원주민 계통의 인디언이다. (마틴 J. 개논, 세계문화 이해 중에서) 우리나라의 첫 이민자 1,033명은 일본 동양척식회사의 꼬임에 빠져 인천에서 배를 타고 1905년 5월 15 일 멕시코 남서부 살리나끄루스(Salinacruz)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유카탄 반도의 애니깽(선인장) 농장에서 눈 물을 흘렸던 이들의 후손이 5세대까지 이어지며 지금은 3만 5,000명으로 늘어났다 무역관 개설 생활 및 근무 여건 멕시코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휴양지인 Cancun, Acapulco, Los Cabos 등과 아즈텍과 마야 문명을 비롯한 고대문명 유적지, 그리고 디에고 리베라, 프리다 깔로 와 같은 세계적인 예술가들의 흔적이 담긴 명소들이 즐비하다. 또한 세계 각국의 유 명 아티스트들의 공연이 끊이지 않고 유네스코 세계 무형문화재에 등재된 식문화 등 으로 여가 생활을 하기에 매우 좋은 나라이다. 하지만 해발 2,300m에 위치하고 있어 고지대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건강상의 문제가 발생하기 쉬우며 일반적 으로 만성피로, 소화부진, 두통 등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멕시코에는 한국 교민이 약 1만 명 거주하고 있어 한국식품점에서 한국식자재 구입도 가능하다. 멕시코에서 제대로 된 정보를 얻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신문이나 각종 보고 서에서 사용하는 통계도 2~3년 전 것이 많을 정도로 최신 통계가 공개되는 일이 흔 치않고, 동일 주제의 통계마저도 출처에 따라 오차범위를 넘어설 정도로 다르기 때 153 Ⅰ. 무역관 이야기

154 문에 통계 자료 선정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멕시코인들은 실수를 인정하기 싫 어해 추후 본인이 책임지지 않으려는 성향이 강하며, 싫은 소리를 직접적으로 못하 는 경향이 있어 말을 바꾸는 경우도 많다. 가령 No 라는 대답을 하는 대신 Ahorita(Right now), Manana(Tomorrow) 같은 단어를 써가며 대답을 회피한 다.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단어들은 지금 당장, 내일이라는 시간을 지칭하기 보다는 언젠가라는 의미이므로 그 뜻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또한 약속한 시간에 정시에 도착하는 것보다는 10분 정도 늦게 도착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무역관 이야기 무역관 은행계좌 동결사건의 전말을 밝힌다 2002년 12월 19일 월요일 아침 현지 직 원들이 출근하자마자 무역관이 전 주 금요일인 12월 15일에 지불한 급여 수표를 가 지고 와서 은행이 수표에 대한 현금지급을 하지 않았다 고 보고해왔다. 무역관이 이를 바로 은행에 확인해 본 결과 은행은 멕시코 노동법원 16호 법정의 지시에 의하 여 무역관의 모든 계좌를 동결했기 때문에 수표를 모두 반려했으며 계좌동결에 대한 구체적인 사유는 노동법원에 문의하라고 알려왔다. 무역관은 이를 즉시 고문변호사인 브리세뇨에게 알리고 노동법원 16호 법정을 접촉하여 상황을 파악하도록 했다. 브리세뇨 변호사는 바로 노동법원과 접촉했으나 노동법원은 무역관이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브리세뇨 변호사의 무역관 대 리성을 인정할 수 없다며 16호 법정의 판결문을 줄 수 없다고 답변하였다. 무역관은 문제가 간단하지 않음을 인지하고 이를 바로 공관장에게 보고하고 공관장 위임장을 브리세뇨에게 주어 16호 법정 판결문을 사건 발생 3일 만에 접수할 수 있었다. 판결문의 내용은 경악할 수준이었다. 노동소송 당사자는 다름 아닌 아드리아나 였다. 아드리아나는 리셉셔니스트로서 2002년 1월 15일 부로 고용되어 근무하다가 12월 15일 이후 갑자기 3일간 무단결근을 하고 있었으나 그 때까지 말썽을 피운 적 이 없었던, 대체적으로 성실한 직원으로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아드리아나는 연락이 되지 않고 잠적해 버린 상태였다. 판결문에 의하면 아드리아나는 2002년 10월 1일 아침 9시 전에 무역관에 출근 하였는데 기현서 본부장이 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아드리아나, 당신은 해고야 (Adriana, esta despedida) 라고 해서 2002년 10월 1일 9시에 부당해고로 법원에 제소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 뒤 허위로 소송절차가 진행되어 무역관이 참여하지 않은 채 1심 판결이 있었으며 법원은 이때 무역관에게 아드리아나를 부당 해고한 것 154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55 에 대한 책임을 물어 퇴직금 5만 6,000달러를 지불하라고 판결하였다. 또한, 법원은 1심 판결 이후에 무역관이 퇴직금을 아드리아나에게 지불하지 않 은 것을 이유로 하여 아드리아나와 법원 서기가 무역관을 방문하여 김영서 차장을 만나 퇴직금 지불을 요청했으나 김영서 차장이 지불을 거절한 것으로 법원서기가 육 필로 문서를 작성했다. 특기사항으로 김영서 차장의 신체조건과 인상착의 등을 자세 히 기록하는 교활함도 보여주었다. 그래서 법원은 퇴직금을 확보하기 위해 불가피하 게 무역관의 은행계좌를 동결하고 동결일로부터 10일 내에 무역관 보유계좌에서 5 만 6,000달러를 인출하여 법원의 구좌에 입금하도록 지시하였다는 것이었다. 무역관은 이 판결문을 접수한 날로부터 은행의 법원으로의 의무 입금일까지는 이틀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우선 변호사를 통하여 16호 노동법정에 1심 판결 처분 중지 신청과 함께 항소문건을 준비하여 상급법원에 제출하도록 하였고, 거래은행 본 점 감사실과 접촉하여 무역관 계좌는 대사관 소유이므로 압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는 것과 아울러 본 건에는 조직범죄가 개입되어 있으므로 만약 자금을 법원으로 송 금하면 은행도 이러한 조직범죄의 개입 건에 말려들어갈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이렇 게 하여 무역관은 공용구좌의 자금이 법원구좌로 옮겨지는 것을 일단 막았다. 다음 기현서 본부장과 김건영 부본부장이 바로 16호 합의부 판사를 만나서 판 결문에 언급된 모든 사실이 조작되었다는 것과, 이러한 조작된 사실을 가지고 합의 부가 무리한 판결을 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강력히 항의했다. 이에 대해 수석 판사 는 자기는 서류만 보고 판결했기 때문에 잘못이 없으며 일단 판결이 된 것이니까 서 로 좋게 가능하다면 아드리아나와 협상을 통해 지불금액을 조금 낮춰보면 어떻겠냐 고 권고까지 하였다. 16호 법정 수석판사와 면담과정에서 무역관은 아드리아나가 법원과 공모했다 는 심증을 확신으로 바꾸고 바로 노동법원장의 면담을 신청하였다. 당시 노동법원장 은 부재중이어서 행정처장과 면담하였는데 행정처장은 판결서류를 검토하면서 16 호 법정의 공정성 상실과 판결의 부당함을 확인하고, 서류를 보며 혼잣말로 16호 법 정 판사들에 대해 험한 욕을 해대곤 하였다. 그러나 그는 판결은 판결이므로 본인이 어떻게 할 수가 없고 상급법원에서 무효판결을 받지 않는 한 동 판결은 유효할 수밖 에 없다고 설명했다. 당초 무역관은 이들과의 면담에서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동 건을 노동법원에서 공론화시킴으로서 차후 16호 법정이 동 건에 대해 자의적인 행동을 하 지 못하도록 제약을 가하려는 효과만 노린 것이었다. 한편 무역관은 멕시코 외무부도 접촉하여 이 사건을 통보하였고 무역관의 법적 155 Ⅰ. 무역관 이야기

156 지위를 빨리 부여하여 동 소송 건에 대처할 수 있도록 요청했으나 멕시코 외무부는 무역관의 법적지위 문제는 한국대사관이 무역관의 지위에 대한 공식적인 확인이 없 으면 부여할 수 없다는 입장을 확고히 할 뿐이었다. 그러나 한국대사관은 무역관의 법적지위를 공식적으로 부여하는데 있어 적극적인 입장을 보이지 않는 분위기여서 무역관의 답답한 상황은 상당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무역관은 급박한 상황 속에서 은행의 법원으로의 송금은 일단 저지했고 동 소송을 상급법원에 항소함으로써 일단 발등의 불을 껐으며, 이 결과로 아드리아나 측이 일사천리로 진행시켰던 무역관 자금 탈취계획에 제동을 거는 성과를 얻어냈다. 그 후 2003년 12월 중순 상급법원으로부터 원심 무효판결을 받을 때까지의 과 정은 결코 순탄하지가 않았다. 법원과 아드리아나 측은 우리 측 브리세뇨 변호사를 통하여 협상을 통해 해결해 보자는 분위기를 전달하였고, 무역관은 어떻게 하든 한 푼도 양보함이 없이 전액을 찾고자 하여 협상을 거부했다. 한편, 상급법원은 항소한 건에 소송절차를 진행시키지 않았고 이러한 교착상황이 몇 개월 흘렀다. 무역관은 멕시코 법원의 행태로 보아 우리 측에 대한 유리한 판결을 주는 것이 쉽지 않을 것으 로 판단하면서도 상대방에게 유리한 판결을 하기에는 상대방 측 소송서류가 허위서 류이기 때문에 이 또한 쉽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무역관은 이러한 교 착상태가 상대방이 어떻게 하든 합의를 통해 합의금을 확보하려고 시간을 확보하는 전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무역관은 전략을 바꿔서 상대방을 압박하기로 했다. 우선 1심 판결문 을 검토해 볼 때 16호 법정 서기가 아드리아나와 함께 무역관을 방문하여 김영서 차 장에게 퇴직금을 요구했다는 기술을 육필로 한 것이 있는데 이 문서가 있지도 않은 일을 증거서류로 넣은 것이므로 이것을 이용하여 법원서기를 형사고발 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브리세뇨 변호사로부터 형사고발 전담 변호사를 소개받아 범죄성립 여부 를 검토시켰다. 이 때 관련 비용으로 약 1,000달러가 소요되었다. 검토 결과 법원서기는 약 5~6년의 감옥형을 받을 수 있다는 검토가 나왔고 무 역관은 이 결과를 브리세뇨에게 알리면서 무역관은 단 한 푼을 회복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법원 서기같은 부패한 공무원은 감옥에 보내버리겠다. 곧 서울 본사에 형 사고발 승인요청을 할 것이고 본사의 승인이 떨어지고 변호사 비용이 도착하는 대로 형사고발을 할 것이다. 법원서기가 감옥에 들어가면 혼자 들어가겠나. 다른 공모자 들도 다 불어서 함께 가지 않겠는가 하고 아드리아나 측을 협박하였다. 며칠 뒤 브리 세뇨 변호사는 법원 서기는 감옥에 갈 수도 있지만 멕시코는 위험한 지역이다. 보복 15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57 이 있을 수도 있다 고 다시 무역관에 협박성 주의를 주었다. 이에 대해 무역관은 말 뜻을 인지하지 못한 척 하고 다시 본사의 방침은 정해졌다. 형사고발을 할 수밖에 없고 이제 무역관의 판단은 중요하지 않다. 지시를 수행하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고 하며 다시 한 번 압박을 가했다. 2003년 12월 중순경 브리세뇨 변호사는 갑자기 상급법원의 원심 무효판결문을 무역관에 들고 와서 이래도 형사고발할 것인가? 하고 물어왔고 무역관은 16호 법 정으로 하여금 은행 계좌 동결을 해제하는 지시를 빨리 내리도록 해라. 그 뒤에 생각 해 보자 고 하며 다시 압박했다. 며칠 뒤 무역관은 브리세뇨 변호사로부터 은행계좌 동결이 해제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무역관은 바로 동결된 계좌로부터 자금을 이체 하고 그 계좌들은 폐쇄하였다. 나중에 브리세뇨 변호사는 무역관에 5만 달러가 넘 는 소송에서 단 1달러도 주지 않고 끝난 경우는 처음 이라고 했다. 전체적인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았다. 아드리아나는 무역관이 법적지위가 없 음을 파악하고 사건이 발생했을 때 무역관의 대응력이 약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 뒤 무역관의 이러한 여건을 본인의 오빠와 공모하여 오빠 친구가 운영하는 변호사 사 무소, 그리고 법원서기 및 판사들을 끌어들여 무역관 자금을 무역관이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탈취하려고 했다. 아드리아나는 법원의 모든 절차가 끝나고 곧 자금이 빠져 나갈 것이라는 확신이 생길 때까지 사무실 동태를 보며 근무하다가 12월 15일 월급 과 보너스를 타고 잠적해 버렸다. 다행스럽게도 무역관은 자금이 빠져나가기 2일 전 계좌동결사항을 빨리 파악하게 되어 1차적으로 자금탈취를 방어를 할 수가 있었다. 이 사건은 단순하게 보면 현지직원이 저지른 단순한 사기 노동분쟁이다. 그러나 이 사건의 발생원인과 과정 그리고 결과를 보면 문제의 현지직원이 무역관의 외부적 환경을 구성하는 멕시코 사회의 거친 분위기와 무역관 내부의 취약한 환경을 파악 하고 이를 악용하여 무역관의 자금을 빼돌리기 위해 외부 공모자들과 함께 치밀한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에 옮겨 성공직전까지 갔던 아주 어둡고 음흉한 사건이었다. 범죄, 부패, 그리고 믿지 못할 사법부(Crime, Corruption and Unpredictable Judiciary) 는 라틴아메리카에 관한 저술에서 종종 라틴아메리카의 3가지의 저주 (Triple Curses) 로 언급되곤 한다. 위 사건에는 3가지의 저주가 하나도 빠지지 않고 외부환경을 구성하고 있어서 무역관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매우 큰 어려움을 겪었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무역관은 아드리아나를 포함한 범죄를 저지른 당사자들을 대적 했다기보다는 세 가지의 저주와 투쟁한 것이었다. 기현서 OB 157 Ⅰ. 무역관 이야기

158 Bogota 50개 무역관 이야기 보고타 무역관 콜롬비아는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가운데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이다. 세계에서 가장 좋은 커피를 생산하는 비 옥한 평원, 대서양과 태평양에 접한 해안, 기이한 야생 동식물이 풍부한 정글, 에메랄드 석탄 석유 등의 광물 자 원, 장엄한 안데스 산맥, 아마존 분지의 일부 지역, 영원한 봄 의 기후를 가진 메들린 등의 도시, 이런 천연의 혜택 을 자랑하고 있다. 이 나라의 한 재담가는 이방인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고 한다. 하느님이 이 세상을 만들었을 때 콜롬비아에게 온갖 형태의 혜택을 다 내려주기로 결정했다. 다른 나라들이 차별대우라고 항의하자 하느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콜롬비아에 어떤 사람들을 내려주는지 한번 보거라. 그러면 너희는 현재의 운명에 만 족할 것이다. (마샤 글레니, 국경없는 조폭 맥마피아, 이종인 옮김, 책보세, 2008년) 무역관 개설 무역관 폐쇄 무역관 재개설 생활 및 근무 여건 해발 2,640m의 고원분지에 위치한 수도 보고타는 인구 약 800만 명으로 정치, 행정의 중심지이다. 적도에 위치하고 있는 지리적 특성상 일 년 내내 기후의 변화가 없는 것이 특징이나, 고도에 따라 다양한 기후대를 보이고 있다. 콜롬비아 국민은 근 본적으로 낙천적인 라틴문화를 이어받고 있으며, 이러한 기질은 공사 구분 없이 모 든 부문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사회전반에 만연한 시간개념의 부재 이며, 상대의 지위고하에 관계없이 약속시간 30분을 넘기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기본적으로 서비스 마인드가 성숙되지 못해 수요자가 아닌 공급자 위주의 통보식 일 처리가 사회전반에 만연해 있으며, 이로 인한 시간과 비용낭비 또한 적지 않다. (공 공부문의 경우 관료주의, 부처이기주의 등으로 인한 업무진척도 저하가 가장 큰 장 애) 통계수치 및 정보접근성 역시 일방적이고 폐쇄적인 구조로 이뤄지고 있어, 정보 조사사업의 질적 성과 제고에 어려움이 있다. 치안은 우리베 정권 취임 이후 급속도로 개선되는 기미를 보이고 있으나, 전통 적으로 콜롬비아는 납치, 게릴라, 마약, 내전 등 남미 내 대표적인 치안 부재국으로 알려져 있다. 보고타 무역관에서도 2010년 8월 25일 무역관 직원 택시납치강도 사 15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59 고, 2011년 9월 8일 무역관 인턴 무장 강도사고 가 발생한 적 이 있어 직원들에게 각별한 주의를 요하고 있다. 한편 주요 치 안지수인 인구 10만 명당 살인사건 수(International Homicide Rate)로 보면 콜롬비아는 2002년 67에서 2011년 33으로 치안사정이 크게 개선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 콜롬비아 무장 혁명군(FARC) 직 세계 9위의 위험지역으로 남아있다. 무역관 이야기 콜롬비아 지하경제의 현주소 어느 나라든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겠지만, 콜롬비 아처럼 그 빛과 그림자가 극명하게 대조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콜롬비아는 대부분 의 중남미 국가들과는 달리 좌파정부를 경험한 적도 없고, 또 보수와 진보가 번갈아 집권하는 매우 안정적인 정치체제를 유지해 왔다. 하지만 아직도 정부를 위협하는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 과 같은 좌익 게릴라와 대치하고 있고, 반군세력의 정 부기관 테러, 주요인사 납치, 살인사건 등이 심심치 않게 신문지면을 장식하고 있다. 또 1인당 GDP가 9,000달러(구매력 기준)를 넘어서고 있으나 소득이 최저생계비에 미치지 못하는 빈곤층의 비율이 44%를 기록하는 등 사회적 양극화가 심각하다. 한편, 경제적으로는 밀수와 탈세 목적의 불법 활동이 상당규모의 지하경제를 형성하고 있고, 여기에 마약, 게릴라 등 정부통제를 벗어난 불법집단들의 경제활동 까지 더해 지하경제가 국가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에 있다. 최근 리까르도(Juan Ricardo Ortega) 국세청장(콜롬비아는 국세청과 관세청 이 합쳐져 있다)은 한 세미나에서 베네수엘라로 수출한 상품이 갑자기 증발하고, 콜롬비아의 연간 생산량을 넘어서는 금과 구리가 수출되기도 한다 며 돈세탁, 탈세 등 불법거래 규모가 연간 80억 달러로 추산된다고 밝힌 바 있다. 일반기업들이 세금포탈, 부가세 환급 등의 목적으로 돈세탁을 자행하기도 하지 만 상당부분은 마약, 게릴라, 무기거래, 밀입국 등 불법행위 주체들의 돈 거래 수단으 로 이용되는 것으로 의심된다. 이에 따라 콜롬비아 정부는 국세청뿐만 아니라 경찰, 정보국까지 동원하여 이러한 불법거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현재 콜롬비아 정 부는 약 1,000여 개 기업이 이러한 불법거래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011년 UN 마약범죄국(UNODC)은 콜롬비아 국가경제에서 마약산업이 차지 하는 비중이 최근 10년간 0.8%에서 0.3%로 축소되었다며 콜롬비아 정부의 마약퇴 159 Ⅰ. 무역관 이야기

160 치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이제 콜롬비아 정부가 직면한 문제는 대규모 마약 카르텔 이 아니라 소규모 마약집단 간 작아진 시장을 차지하기 위한 폭력과 테러라고 규정 하였다. UN 마약범죄국이 발표한 수치를 현재 콜롬비아 GDP인 3,200억 달러에 대 입하면, 콜롬비아 마약산업 규모는 대략 10억 달러로 추정된다. 콜롬비아 정부는 원 화로 1조 원을 상회하는 마약자금이 매년 콜롬비아 국내로 유입되어 마약집단에 전 달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감시와 규제노력을 집중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콜롬비아는 해외로 송금하기보다는 해외에서 송금받기가 더 어려운 특이한 나라가 되었다. 아이 러니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유입된 마약 달러가 지하경제에 스며들어 외부의 금융위 기와 외환위기에서 콜롬비아 경제를 지켜주는 안전판 역할도 하고 있으니, 콜롬비아 마약 달러는 현재 콜롬비아 경제특성과 떼어낼 수 없는 상관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관세포탈과 규제회피용 밀수 역시 50억 달러 내외로 추정된다. 2010년 콜롬비 아의 정상 수입규모가 400억 달러 내외임을 감안하면 10%를 웃도는 밀수시장이 존 재한 셈이다. 콜롬비아가 산유국임에도 불구하고 가격차이로 인해 인근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등에서 1일 1만 5,000배럴의 가솔린, 디젤 등 연료를 밀반입하고 있다. 또 최근 까르따헤나(Cartagena) 항에서는 컨테이너 3대 분량 4만 5,000켤레의 유명브 랜드 운동화를 밀수하다 적발되어 기사화된 적도 있는데 전체 밀수규모에 비하면 빙 산의 일각일 뿐이다. 콜롬비아는 미국의 의약안전기구(Pharmaceutical Security Institute: PSI)가 정한 10대 의약품 불법 위조국에서 10년째 벗어나지 못할 만큼 특 허, 지적재산권 분야에서도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그렇다면 콜롬비아의 지하경제는 우리나라의 대 콜롬비아 수출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현 산또스(Juan Manuel Santos) 대통령은 위로부터의 부패척결을 위해, 자 신을 후계자로 지정하여 정권을 물려준 우리베(Alvaro Uribe) 전 대통령의 측근까 지 조사하는 등 성역 없는 부패척결에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2011 년에 우리기업(LG CNS)이 수주한 보고타시 교통카드시스템 입찰 낙찰자 선정 과 정은 6시간 이상 공중파 TV에 생중계되기도 하였다. 이는 투명성 확보를 위한 정부 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하지만, 지하경제를 근절시킬 유일한 수단인 정부행정에 대해 국민들의 불신이 얼마나 깊은지를 다시 한번 일깨워준 반증 이기도 하였다. 160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61 Buenos Aires 50개 무역관 이야기 부에노스아이레스 무역관 삼바가 브라질을 대표한다면 탱고는 아르헨티나를 대표하지 않을까. 그런데 삼바축구라는 말은 있어도 탱고축구 라는 말은 과문한 탓인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탱고의 나라 아르헨티나는 북쪽으로 이과수 폭포(Iguazu Falls) 가 있는 아열대 기후부터 남쪽으로는 남극 바로 위 Tierra del Fuego 주의 한대 기후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또 서 쪽으로는 안데스 산맥의 산악기후이고 동쪽으로는 대서양에 면해 있으며, 북서쪽은 사막 건조기후, 중남부는 파 타고니아 지방으로 대평원인 팜파스가 펼쳐져 있는 다채로운 국가이다. 아르헨티나는 99%가 유럽계 백인이민자 사회이며, 이미 1910년에 지하철을 건설하고, 1930년대에 세계 5대 강국일 정도로 부유했던 나라이기 때문에 국민들의 자존심이 세고 건방지기까지 한 것으로 유명하다. 수도 부에 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는 스페인어로 직역하면 좋은 공기 또는 순풍 이란 뜻이다. 수도권인 그란부에노 스아이레스의 인구는 약 1,300만 명. 공기가 이름대로 좋을까? 무역관 개설 생활 및 근무 여건 아르헨티나는 중남미 국가 중 치안이 비교적 안전한 국가로 인식되어 있으나, 최근 빈민층, 인근국 불법 이민자, 실업률 증가 등으로 인해 교민을 상대로 하는 강 도, 절도사건이 빈번하다. 전반적으로 기후가 좋고, 과거에 부국이었기 때문에 인프 라와 문화복지시설이 좋다. 하지만 백인사회로 약간의 인종차별적 요소가 존재하고, 부패가 심하다. 교민 수는 현재 약 2만 5,000명이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자료 수집이 용이치 않을 뿐더러 공공기관이 정보를 주는데 도 인색하다. 게다가 통계자료의 경우 국립통계청(INDEC)의 통계조작이 있을 정도 로 정부자료의 신빙성이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이탈리아, 스페인계가 주류를 이루 고 있는 아르헨티나에서는 라틴민족 특유의 시간관념이 희박하여 약속시간에 늦는 경우가 많다. 국민들은 유럽계 이민사회라는 자부심이 강하고, 라틴풍의 다혈질이 며, 보수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 따라서 거래선을 쉽게 바꾸려고 하지 않으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관행으로 비즈니스 추진에 애로가 있다. 161 Ⅰ. 무역관 이야기

162 무역관 이야기 탱고 140회 관람하면 탱고 도사가 된다? 한국에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르헨티나 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무역관 역사상 관원과 관장으로 2회 근무한 사람은 이정훈 관 장이 유일하다. 그는 1997년 10월부터 2001년 2월까지 3년 6개월간 초파직원으로 근무를 했으며, 2009년 8월부터 2012년 현재까지 2년 6개월 동안을 무역관장으로 근무하고 있으니 총 6년을 아르헨티나에서 생활하고 있는 셈이다. 아르헨티나에 오는 사람이면 무역사절단 단원이든 개별 출장자이든, 아니면 개 인적인 친지들이든 간에 예외 없이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춤인 탱고(Tango) 쇼를 구경하고 싶어한다. 따라서 지금까지 6년간 근무한 이정훈 관장은 횟수로 초파 근무 시절에 110여 회, 그리고 이번 관장 임기 중 20여 회 등 총 140여 회나 탱고쇼를 안내 하고 관람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아르헨티나에 거주하는 교포를 비롯한 주재원 등 모든 한국사람 가운데 이 관장은 탱고쇼를 가장 많이 본 사람으로 자타가 공인한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이렇듯 140여 회나 탱고쇼를 보았으니 이 관장인들 구경꾼에만 머물렀겠는가. 그는 탱고춤을 직접 출 수 있는 전문가는 아니 지만 탱고쇼를 보는 데는 전문가의 경지에 이르렀다. 원래 아르헨티나의 항구도시인 보까지역에서 발생한 탱고는 항구주변 거리의 여자가 남자 선원을 유혹하는데서 출발하여 까를로스 가르델과 아스또르 삐아졸라 에 의해 예술화, 대중화됐고, 미국과 유럽에서 빅 히트를 치면서 세상에 크게 알려진 아르헨티나의 탱고 뮤지컬 땅게라 162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63 춤이다. 보통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밀롱가라는 춤과 술,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사교장 에서 탱고를 추지만 세계적인 춤으로 알려지면서 관광객을 위한 대규모 극장식이 부 에노스아이레스 시에 많이 생겨났기 때문에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이 극장식 탱고쇼 를 관람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극장식 탱고쇼는 하루 한 번만 공연하는데, 전원 프로 무용수로 구성된 팀이 밤 10시에 시작해서 12시까지 약 2시간 동안 춤, 연주, 노래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선보인다. 이정훈 관장은 지난 6년 동안 이런 공연을 140여 회나 보았으니 시간으로 따지 면 280시간 이상 탱고쇼를 관람한 기록 보유자가 되었다. 그는 그 내공을 바탕으로 한국에서 방문했던 탱고 마니아인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대학장이나 한국에 라틴 댄스를 최초로 도입한 전문댄스 학원장과도 꽤나 수준 높은(?) 대화를 할 수 있는 경 지에 이르게 되었다. 국내에서 오는 고객들이 비즈니스 이외의 문화체험을 무역관에 원할 때가 많은 데, 반복되고 피곤하고 지겹다고 피하기보다는 자신의 외국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우리가 그 시간만큼은 고객과 함께 빠 져들면 어떨까?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김은희(Judith) 1971년 출생 김은희 씨는 1997년부터 2001년까지 근무한 현지직원으로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좋다는 UBA 대학(Buenos Aires 국립대학) 정치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인재였다. 그녀는 매사에 딱 부러지고 적극적인 자세로 무역 관 업무를 도맡아서 당시 무역관이 전체 무역진흥 무역관 중 1위를 하는데 기여한 바 있다. 구스따보 뮬러(Gustavo Muller) 1972년 출생 뮐러 씨는 1996년부터 현재까지 16년간 무역관 생활을 하고 있는 베테랑으로 무역관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 다. 그는 오랜 경륜과 온화한 성품으로 본사직원과 호흡을 맞추어 오고 있으며, 무역관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도가 돋보이는 현지직원이다. 163 Ⅰ. 무역관 이야기

164 Santo Domingo 50개 무역관 이야기 산토도밍고 무역관 지도에서 카리브해를 들여다보면 쿠바(Cuba) 동남쪽에는 히스파니올라(Hispaniola) 섬이 보이고, 그 섬은 도 미니카 공화국(스페인어: Republica Dominicana)과 아이티(Haiti)로 국경이 나뉘어 있는데 도미니카공화국이 섬의 동쪽 2/3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인구는 두 국가 모두 940만 명 안팎이지만 1인당 GDP(명목)는 도미니카공 화국이 5,600달러 내외인데 비해 아이티는 겨우 740달러로 최빈국에 속한다. 도미니카공화국의 국민은 유럽계 16%, 아프리카계 11%, 흑백혼혈인 물라토(mulato) 78% 등이고 수도는 산 토도밍고(Santo Domingo)이다. 아이티는 흑인 95%, 물라토와 백인 5%이며, 수도는 2010년 대지진이 발생 하여 TV 브라운관을 연일 달구었던 포르토프랭스(Port-au-Prince)이다. 참고로 도미니카공화국을 도미니카연 방(Commonwealth of Dominica), 간단히 줄여 도미니카(Dominica)와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두 나라는 엄연히 다르다. 도미니카 공화국은 광물과 수출자유지역에서 20만 근로자들이 제조하는 공산품, 커피 카카오 담배 화훼 아 보카도 등의 농산물 등을 수출하여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으며, 미국사람들의 휴양지로도 유명할 만큼 관광분야 역시 외화 획득에 기여하고 있다. 도미니카공화국은 야구선수들을 양성하여 해외로 수출하고 있는 국가이기도 하다. 한국기업은 도미니카공화국에 세관 전산화 시스템을 중남미 최초로 이식했고, 지상파 DMB도 상용화하는 데 성공했다 무역관 개설 무역관 폐쇄 무역관 재개설 무역관 이야기 2010년 아이티 대지진의 구호활동 2010년 1월 12일 리히터규모 7.0의 강진이 아이 티를 덮쳤다. 산토도밍고에서도 크게 놀랄 정도로 강한 지진이었다. 더욱이 진원지가 지표에서 낮고, 인구 밀집지역인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 발생해 사망자 수가 30만 명 에 달하는 대재앙이었다. 대통령궁을 포함한 공공기관, 병원 등 사회기반시설이 파괴 되었고, 빈민촌의 허름한 집들이 힘없이 무너지면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164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65 아이티 지진소식이 한국에 알려졌을 때, 아이티에 한국기업이 진출해 있을 거라 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겠지만, 그 오지에도 한국인은 10여 년 전부터 진출해 약 5,000명의 현지인력을 고용하고 있었다. 미국시장을 겨냥한 봉제업체를 필두로 박스 제조공장, 전력분야에 투자진출한 한국기업의 직원들이었다. 아이티는 생활여 건이 너무 열악하기 때문에 가족은 대부분 도미니카 공화국 수도인 산토도밍고에 거 주하였고, 직원들이 산토도밍고로 한두 달에 한 번씩 휴가를 나오는 상황이었다. 통신 두절로 지진발생 이틀이 지나도 직원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산토도밍고의 가족들은 애를 태우고 있었다. 사흘째가 되어서야 천신만고 끝에 ESD사 직원들 1진 이 트럭을 구해 국경을 넘어 산토도밍고로 무사히 철수했다. 이들을 통해 다른 한인 직원들의 소식을 전해 듣고서야 가족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한인들은 한 명도 피해가 없었다. 당시 산토도밍고 무역관의 지사화업체로 아이티에 막 투자 진출한 ESD사는 포르토프랭스 시내의 발전소 위탁관리사업을 하고 있었다. 지진 발생 후 대혼란 속에서 탈출한 ESD 직원들은 아수라장이 된 발전소를 밤 새 지키고 있는 현지직원들을 그냥 두고 온 것이 마음에 걸린다 며 음식을 준비해 다 시 들어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가족을 잃은 상황에서도 현장을 지킨 현지인들을 염려해 자신들도 위험을 감수하며 다시 들어가겠다는 것이었다. ESD사는 타 외국 기업과 달리 현지인에게 점심을 무료로 제공하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던 터 였다. 현지인들이 밤샘 경비를 해준 것도 이런 평소의 온정에 대한 보답이었다. 이렇 게 서로 의리를 보여주어서였을까? ESD사는 아이티 지진을 계기로 비약적인 성장 대규모 강진이 일어난 아이티 현장 165 Ⅰ. 무역관 이야기

166 을 하게 된다. 산토도밍고 무역관에서는 이럴 때 한국기업과 같이 어려움을 나누는 것이 윤리 경영의 실천이라는 생각에 당시 윤리경영을 담당하던 본사팀에 당장 급한대로 한 트 럭분의 식수와 부피가 작고 열량이 높은 초콜릿을 살 금액을 요청했다. 본사에서는 전 직원이 성금을 모아 약 1만 달러를 보내주었는데, 이 돈으로 4 트럭분의 식수와 초 콜릿 외에도 쌀과 가마솥까지 살 수 있었다. 지진 발생 7일째 되는 19일 산토도밍고 무역관장과 직원 2명(1명은 아이티인) 은 트럭을 몰고 ESD 직원들과 함께 아이티로 들어갔다. 세계 각국에서 구호팀이 속 속 도착해 활동하고 있었지만, 무정부상태에서의 구호활동은 극히 지엽적이고, 단편 적이어서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그런 와중에도 의외였던 것은 이재민들의 침 착한 태도였다. 어렵게 ESD사에 도착해 구호품을 전달하는데, 6도의 여진이 찾아왔다. 이미 공 포에 휩싸인 사람들에게 여진 6도는 또 다른 공포여서, 구호품 전달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구호품 전달조차 쉽지 않았다. 며칠 뒤 KOTRA 명예투자자문관 임찬혁 부사장이 있는 윌비스(구 군자실업)사에 구호품을 전달하기 위해 2차로 들어 갔다. 이 때 윌비스는 파괴된 생산시설의 70%를 복구해 외국기업 중 가장 빠른 복구 사례로 CNN 등 해외언론사의 취재가 연일 이어지고 있었다. 공사 직원 성금을 모아 마련한 쌀과 가마솥 등을 전달하자, 윌비스 양희철 법인장은 국내외 언론에서 관심 을 많이 보였지만 무언가 어려움을 같이하려는 노력은 KOTRA가 처음이라며 본사 에 감사의 서한을 보내왔다. 지진 이후 아이티정부의 투자유치사절단은 매년 KOTRA 본사에서 투자유치 설명회를 하고 있다. 이런 노력의 결실로 한국 봉제업체 S사가 대규모 투자를 결정했 고, 2 3개사가 추가로 투자진출을 검토하고 있다. 하루 빨리 아이티 국민들이 지혜 를 모아 새로운 나라를 재건하기 바란다.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최상민 1976년 출생, 최상균 1978년 출생 2000년대 초 무역관에서 현지직원으로 일했던 최상민 최상균 형제는 지금 50여 명의 직원을 거느린 ESD사의 어엿한 사장, 부사장이다. 만성적 전력난을 겪고 있는 도미니카공화국에서 전력분야의 가능성을 본 두 형제는 H 사 이동식 발전기 에이전트로 독립해 비즈니스를 하다가 2010년 아이티 지진을 계기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아 이티 발전소의 공동주주이기도 한 이들 형제는 에콰도르 등 인근 국가로 사업을 확장해가면서 지금도 성공스토리 를 써나가고 있는 중이다. 16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67 Sao Paulo 50개 무역관 이야기 상파울루 무역관 브라질을 대표하는 세 가지를 들라면 대부분 리우 카니발, 이과수 폭포, 축구를 떠올린다. 이 중에서도 리우 카니 발은 세계 3대 미항인 리우데자네이루 시에서 펼쳐지는 세계 최대의 축제로 이 행사를 보기 위해서 세계 각지에 서 매년 50만여 명의 외국 관광객이 몰려들고 국내 관광객도 25만 명에 이른다. 리우 카니발은 16세기 포르투갈 에서 사순절 전에 사람들이 뒤엉켜 밀가루, 물 등을 던지며 술과 음식을 즐기던 엔뜨루두(entrudo)란 행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브라질에 건너온 후 아프리카 노예들의 전통 타악기 연주와 삼바 춤이 합쳐져서 생겨났다고 한다. 리우 카니발은 부활절 40일 전인 토요일부터 수요일 아침까지 열리는데 주로 2월 초순부터 3월 초로 기간이 매 년 바뀐다. 리우는 카니발 기간 중에는 고용주와 피고용자, 흑인과 백인,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의 구 별이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은 4일 동안 평소의 자기로부터 빠져나와 일상의 울적함과 억눌린 감정을 토해 내고 마 음 속 깊이 감추어 두었던 본능적인 충동을 풀어놓는다. 결국 사람들은 카니발을 통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 이다. 리우 카니발은 일하기 위해서 산다기보다는 인생을 즐기기 위해 사는 라틴아메리카인들 특유의 기질에 인 종, 빈부, 학력 차이를 일시에 무너뜨리고 일체감과 동조감을 갖게 하고, 관광 수입이 증대 되는 등 긍정적인 측면 이 있다. 하지만 이면에서는 재벌, 법조인, 경찰 등 수많은 사람들이 테러로 인하여 목숨을 잃고 사생아가 양산되 는 부작용도 있다 무역관 개설 생활 및 근무 여건 국토가 세계에서 다섯번째로 광대한 브라질은 시간(시차 -12시간)과 계절이 한 국과는 정반대이다. 브라질 북서부 아마조나스 주도( 州 都 )인 마나우스는 연중 고온 다습하고 중서부 지역은 연중 고온건조하다. 이렇게 지역에 따라 기후가 다양하다. 해발 약 800m에 자리잡은 상파울루는 기후가 좋으나 일교차가 15 C 이상이다. 교 민은 약 5만 여명으로 중남미에서 가장 많으며, 2013년 2월에는 이민 50주년을 맞게 된다. 교민 상당수가 의류 봉제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봉헤찌로, 브라스 지역에 대 규모 한인 의류 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브라질 의류산업 발달에 기여한 이민 1세대에 이어 1.5세대는 의사, 변호사, 검사 등 전문 직종을 중심으로 브라질 주류사회에 진 입하고 있다. 인구 2억의 브라질은 내수시장이 크며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167 Ⅰ. 무역관 이야기

168 등의 국가로 구성된 남미경제공동체(MERCOSUL)의 핵심 멤버이고, 자동차, 항공, 기계, 화학, 섬유, 가죽제화 등 제반 산업이 고루 발달한 나라이다. 유럽 등 다국적기 업들이 50년 이전부터 진출하여 자리를 잡고 있으며, 메이저 5개 기업들이 전체 시장 점유율 70~80% 정도를 차지할 만큼 독과점체제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에 브라질은 진입이 쉽지 않은 시장이다. 또한 정보가 체계적으로 축적되거나 공개되지 않아서 시 장 조사가 상당히 어렵고, 인맥을 통해 비즈니스가 진행되기 때문에 가격과 품질 경 쟁력이 있다고 해서 비즈니스가 반드시 성사되는 것도 아니다. 브라질은 관료주의, 높은 세금, 노동자 위주의 노동법 등 소위 브라질 코스트로 인한 제조업 경쟁력 약화로 수입제품에 대한 진입장벽을 갈수록 높이고 있다 년 월드컵, 2016년 올림픽 등 대규모 국제행사로 인한 특수와 지속적인 경제성장, 현 지화 평가절상에 따른 수입제품 유입 증가로 최근 브라질 산업계의 피해가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브라질 정부는 완성차 등에 대한 수입규제 강화와 현지 부품 의무사용 비율(Local Contents) 확대 같은 조치를 취하고 있다. 무역관 이야기 지구의 허파 중의 허파 마나우스를 녹이다 필자가 첫 번째 해외근무지인 상파울루에 발령 명을 받고 벅찬 가슴으로 출국길에 오른 것은 1981년 10월 말이었다. 당시 브라 질은 비자 발급이 까다로워 부임이 다른 동료들 보다 한 달이나 늦었다. 1980년대 초 브라질은 대외채무가 세계 2위 수준으로 정부는 무역수지 개선과 자국 산업보호를 위해 극심한 수입규제 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다. 게다가 브라질은 우리나라와 산업구조가 비슷하여 우리나라가 수출 가능한 대부분의 제품이 수입 금 지 품목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현지 진출한 대 우종합상사 브라질 지사마저도 브라질 진출 3년이 넘었지만 수출 실적이 거의 전무 하여 지사를 감원 감축, 폐쇄하려 할 정도로 수출 환경이 아주 열악하였다. 상파울루 무역관에서 회계와 총무, 조사업무 등을 맡아 일상 업무에 충실하면서 주말에는 여행을 다니거나 테니스를 치며 현지생활을 만끽하고 있을 즈음인 82년 말, 느닷없이 본사로부터 경고장이 날아왔다. 사유인즉 KOTRA가 중소기업 수출 대행업체인 고려무역을 인수하여 경영에 참가하고 있는데 상파울로 무역관은 지난 1년간 고려무역의 대 브라질 수출 실적이 전무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고 려무역 수출지원 실적이 부진할 경우 더욱 엄중한 처벌이나 본사 소환도 가능하다는 으름장이었다. 16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69 우리가 수출할 수 있는 대부분의 제품이 수입 금지품목으로 묶여 있기 때문에 고려무역 제품을 수출하기 위해서는 자유무역지대인 마나우스(Manaus)가 유일한 돌파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도지대에 가까운 마나우스를 세 번째 방문한 것은 1983년 11월경이었다.상파울루에서 3시간 비행하여 도착한 마나우스는 아마존 밀 림의 바다 속에 갇힌 섬처럼 외로워 보였다. 항공기의 트랩을 내리는 순간 느껴지는 열기는 마치 사우나탕에 들어서는 듯이 덥고 습하였다. 아스팔트는 뜨거운 태양열을 견디지 못하고 발로 밟으면 물렁물렁하게 들어갈 정도로 눅진거렸다. 마나우스 중심가에 위치한 아마존 호텔에 진을 치고 호텔 주위의 자유무역(상 업)지대와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자유공업지대를 매일 6개 업체 이상 방문하며 본격 적인 마나우스 공략 작업에 들어갔다. 비록 같은 나라라 할지라도 상파울로와는 물 과 풍토가 완전히 다르고 덥고 습한 기후에 땀을 과도하게 흘리며 무리하게 강행군 을 한 탓인지 마나우스 도착 3일째 밤에는 호텔 종업원에게 담요 2개를 더 추가로 요 청하여 덮었지만 오한으로 오들오들 떨면서 잠을 설쳤다. 다음날 다리가 후들거리는데도 이를 악물고 자유공업지역을 방문하여 멀티테 스터(multi-tester)기 생산회사 사장과 상담하였다. 35도가 넘는 날씨에 오들오들 떨며 힘겹게 상담을 마치고 공장을 나서는데 상담 때 사장과 자리를 함께하였던 일 본인 고문 다나까 씨가 저녁에 호텔을 찾아가도 괜찮으냐고 물었다. 쾌히 승낙하고 저녁에 다나까 씨를 만났다. 더운 날씨에 건강도 안 좋아 보이는데 너무나 진지하면 서도 필사적으로 상담에 임하는 모습에 사장과 자신이 감명을 받았고 곰곰이 검토해 보니 우리나라로부터 멀티테스터기 수입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상파울루로 돌아온 후 다나까 씨와 수시로 전화로 교신하였다. 1984년 5월경 마나우스를 4번째 방문하여 지금은 없어진 광덕물산의 멀티테스터기를 고려무역을 통하여 SKD(Semi Knock-Down) 방식으로 5,000달러어치 시험 주문계약을 체결, 수출을 성사시켰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 멀티테스터기의 대 마나우스 수출 이 2만 달러, 10만 달러로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지금은 우리나라의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자동차, 삼성SDI 등이 브라질에 진 출하여 수천 명의 종업원을 채용하여 왕성한 생산 활동을 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연간 수출액이 77억 6,000만 달러(2010기준)에 달한 상태에서 멀티테스터기 5,000 달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1980년대 초 마나우스를 네 번이나 방문하여 처음 주문 받은 5,000달러는 귀하고도 값진 수출이었다. 이 기 OB 169 Ⅰ. 무역관 이야기

170 Habana 50개 무역관 이야기 아바나 무역관 쿠바는 스타일 로 가득한 나라이다. 피델 카스트로는 혁명 초창기부터 영예로운 승리를 거머쥔 순간까지, 언제나 사진사를 대동하고 흑백제복을 멋스럽게 갖춰 입고 다녔다. 게다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전시품을 보면 알 수 있듯, 그는 어떤 고난의 순간에도 결코 부츠(그리고 셔츠와 양복바지도)를 벗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체 게바라. 무슨 할 말이 더 있겠는가? 우리는 이미 도시 곳곳에서 헤밍웨이의 흔적과 마주했다. 라 보데기타 델 메디오(헤밍웨이가 자주 찾았던 술집으로 유 명)에서 모히토를 한 모금 마시자마자 나는 곧 그 맛에 흠뻑 빠졌다. 우리는 헤밍웨이가 머물렀다던 암보스 문도 스 호텔도 둘러보았다. 헤밍웨이는 이 낡은 호텔에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를 구상했고, 이후 1939년 도 시 외곽에 집을 사 그곳에서 소설을 완성했다. 그의 집은 핀카 라 비히아로 불렸으며 이는 감시탑 농장 이라는 뜻 이다 무역관 개설 무역관 이야기 아바나 국제박람회 한국관 2002년 봄 첫 쿠바 출장. 아바나(Havana)공항 천장에 는 만국기가 매달려 있었다. 모든 나라의 국기가 다 있을 것 같은 착각을 주기에 충분 했다. 우리의 최대 우방으로 그 곳에 있을 것 같지 않은 미국의 성조기도 보이고, 같 은 사회주의 국가를 표방하고 있는 중국, 북한의 인민기도 보였다. 그러나 쿠바와 외 교관계가 없는 우리나라의 태극기는 보이지 않았다. 2002년 11월 다시 찾은 아바나. 쪽빛 카리브 바다는 눈부신 태양 아래 윙크하듯 넘실거리고, 대지는 이상기온으로 섭씨 30도를 웃도는 열기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태극기가 거꾸로 걸렸어요, 박람회 주최 측에 빨리 연락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가 아바나 국제 박람회장에 들어서자 거꾸로 매달린 태극기가 차창 밖으로 내 다 보였다. 당시 중남미지역본부(기현서 본부장, 멕시코 소재) 에서 쿠바담당자로 아바나국제박람회(FIHAV 쿠바 아바나 국제박람회 한국관 ~10) 한국관 참가사업을 맡고 있던 필자는 주최 측에 이 사실 을 통보했다. 한국관 개막이 막바지 초읽기에 들어갔지만 귓가 170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71 에는 아직도 태극기가 거꾸로 게양되어 있다 는 지방관 참가 지자체 인사의 격앙된 목소리가 들렸다. 허겁지겁 주최자 사무실을 찾아가 일갈하려는데, 쿠바 담당자는 확신에 찬 목 소리로 이미 대한민국 국기를 다시 정확히 게양했다는 것이었다. 밖으로 나가 쿠바 친구와 함께 육안으로 확인했더니, 어이없게도 태극기는 여전히 잘못 게양되어 있었 다. 우리 태극기가 수난을 당하게 된 사연은 성격 급한 지자체 인사 때문이었다. 그의 요청으로 다시 거꾸로 게양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평소와는 달리 너무나 신속하게 움직여준 쿠바친구들의 응대가 함께 이뤄낸 해프닝이었다. 한국관은 1,000m2가 넘는 규모로 스페인에 이어 두 번째 였다. 디데이인 오늘은 한국관 개막행사에 이어 KOTRA와 쿠바 측 무역진흥기관(CEPEC), 투자유치기관 (CPI), 상공회의소 등 현지 3개 기관과 양해각서(MOU) 체결과 공동 기자회견 등 숨 가쁜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KOTRA를 파트너로 하여 한국과 무역 및 투자를 확 대해 나갈 의사가 있다 는 쿠바 측 메시지가 공식적으로 전달되자 이란 테헤란에서 아바나로 급히 입국한 오영교 사장이 이들 기관장들과 함께 서명함으로써 미수교국 인 한-쿠바 간 최초로 정부기관 레벨의 협력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박성기 2004년까지는 관할 무역관인 멕시코시티 무역관이 출장 나와서 한국관을 운영 했으나 아바나 무역관이 2005년 9월 개관한 만큼 2005년부터는 직접 운영하기로 했 다. 한국에서 모집하는 중소기업들 대신 대기업 현지 에이전트들을 설득하여 자동 차, 가전, 타이어를 중심으로 멋들어진 한국관을 조성하였다. 쿠바 VIP들의 필수 참 관 코스가 되는 영광도 누렸다. 그리고 또 하나의 한국관 스타가 탄생했다. 본사에서 보내준 파란색 부직포 쇼핑백. 그동안 알고 지내던 정부 인사들, 특히 아주머니 공무 원들이 쇼핑백을 10개, 20개씩 달라고 했다. 이틀만에 동이 났다. 물자가 귀한 쿠바 에서 KOTRA 부직포 백이 장바구니로 매우 유용하다는 것이다. 2006년부터는 본사 에 특별 주문을 해서 물량을 2배로 받았고 그동안 신세진 정부, 국영기업 인사들을 위해 미리 챙겨놓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소한 물건이 그 사회에서는 이렇게 가치가 있을 줄이야. 2008년 박람회 때에는 다른 스타가 탄생했다. 플라스틱 바가지. 사출기계를 전 시한 중소기업이 기계 성능을 보여주기 위해 매일 플라스틱 바가지를 일정량 찍어 한 국관 방문객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개관 첫날부터 북새통을 이루어 입장 인원을 통 제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조금 있다가 현지 지인들의 청탁이 들어오기 시작했 171 Ⅰ. 무역관 이야기

172 다. 세뇨르 조, 바가지 몇 개만 챙겨주세요. 섬나라에 어구( 漁 具 )가 안 팔려 무역관 공식 개관 후 첫 지사화업체 신청이 들어왔 다. 낚시바늘 등 어구를 수출하는 중소기업. 바다로 둘러싸인 나라이니 당연히 시장 성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바로 오케이했다. 가입하자마자 바로 출장을 온다기에 무역관 개시부터 짭짤한 성과를 올리겠구나 하는 즐거운 생각에 현지직원에게 상담 주선을 지시하였다. 며칠 후 상담주선 상황을 체크하면서 등골이 오싹하는 기분이 들었다. 1개사밖에 상담주선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참 이상하다 섬나라인데 그럴 리가 없는데. 현지직원을 다시 채근했다. 그러나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이를 어 쩐다. 지사화업체 사장이 아바나에 도착 후 현지상황을 설명했으나 그 사장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달리 설명할 수도 없고 다음날 상담 약속이 잡힌 쿠 바 국영회사를 방문하였을 때 모든 의문이 풀렸다. 정부 방침상 어구 관련 물품은 쿠 바 수산부 산하 그 회사만 독점 수입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수입량은 많겠 지. 그것도 아니었다. 외환사정, 국가의 수산정책, 쿠바 경제상황 등 여러 요인 때문 에 연간 수입량도 터무니없이 적었다. 대금 결제조건도 1년 외상. 허탈함에 지사화업 체 사장과 함께 무역관으로 돌아왔다. 사장님 왈 여기는 안 되겠네요. 이 첫 상담이 쿠바의 국영무역시스템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고, 쿠바에 왜 생선이 없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선박용 기름 부족, 노후화된 어선, 선박을 이용한 국외탈출 방지 등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쿠바는 섬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수산업이 낙후되어 있어 생선을 구하기 가 매우 어렵다. 아바나 시내에는 말레꼰(Malecon) 이라는 방파제 도로가 있는데, 차로 10여 분 이상 달려야 하는 외견상으로는 낭만의 도로이다. 여기를 지나다 보면 바다위에 둥둥 떠있는 점들을 볼 수 있다. 자동차 폐튜브에 널판지, 스티로폼 등을 엮 어 배 대신 그것을 타고 나가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다. 잡은 생선은 먹기도 하고 길에 서 팔기도 한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작품 노인과 바다 를 읽어보면 어부인 산티아 고 노인은 걸프만으로 나가 85일째 되던 날 청새치를 잡았는데. 인터넷과의 싸움 모든 업무가 인터넷 기반에서 진행되니 인터넷 속도가 매우 중 요하다. 관옥을 계약할 때 인터넷 요금도 포함되어 있다 해서 훌륭한 사무실을 얻었 구나 좋아했는데 그 기쁨도 며칠. 윙크(WINK)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나라 포털사 172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73 이트조차 접속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초기화면 자체를 구경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입주업체들이 공유하다보니 인터넷 속도가 느리다는 것이었다. 수소문해 전용 라인 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요금을 물어보았다. 그나마 저렴한 것이 128k에 월 1,800달러. 180달러라 해도 터무니없는데 무려 1,800달러란다. 그래도 할 수 없기에 결단을 내렸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와 같이 내 맘대로 계약은 안 되고, 쿠바 정보통신부의 허 가를 받아야 한단다. 통상 2개월 정도 심사기간이 걸린다는 말에 정보통신부 담당 공무원 아줌마에게 USB 1개 찔러주고 3일만에 허가서를 받았다. 며칠 후 기다리던 전용 라인이 설치되었고 들뜬 마음으로 윙크 접속을 하였다. 덜커덕대지만 그래도 로그인하고 윙크 초기화면을 보았다. 문명세계와 다시 접속된 기쁨도 잠시. 문서수 신, 메일검색은 또 다른 고통의 시간이었다. 출근해서 오전 내내 인터넷과 싸움하면 서 재떨이에는 죄 없는 담배꽁초만 수북이 쌓여갔다. 미국의 대쿠바 경제봉쇄 때문에 쿠바는 위성 인터넷망을 사용하는데, 그만큼 인 터넷망이 불안정하다. 매일 출근하면서 머릿속에서 맴도는 말은 오늘은 좀 빠를까?. 현지인들에 대한 인터넷 통제, 고가 요금 때문에 도전( 盜 電 )과 같은 인터넷 빼돌 리기도 횡행한다. 어느날부터인가 오후 6시만 넘으면 안 그래도 느려터진 인터넷이 더 느려진다. 느리다기보다는 거의 접속불가 상태다. 통신회사 고객센터(공산주의사회 에서도 고객 이라는 용어는 쓴다)에 문의하였더니 위성망이 불안정해서 그렇단다. 오후 6시 이후에 문제가 있으면 철야 서비스 담당이 상주하니 그 곳으로 문의하 라고 한다. 오후 6시만 넘으면 접속불가 상태, 서비스 담당에게 컴플레인, 속도의 정 상화, 다시 접속불가, 컴플레인 반복. 매일 이 지경을 당하는 와중에 머릿속에 스쳐가 는 느낌이 있다. 작전을 바꾸었다. 오후 6시에 순번제인 서비스 담당에게 미리 전화 를 한다. 야! 우리 라인 건드리지 마. 자꾸 건드리면 경찰에 고발할거야. 그리고 내 일 당번에게도 내 얘기 똑바로 전해! 며칠을 계속 협박하니 효과 만점이었다. 그래 도 가끔은 제대로 인계를 받지 못한 야근 담당자가 건드리기는 했다. 조영수 173 Ⅰ. 무역관 이야기

174 Panama 50개 무역관 이야기 파나마 무역관 파나마 하면 운하부터 떠오른다. 북미 대륙과 남미 대륙 사이에 개미허리처럼 잘룩한 곳에 건설한 파나마운하는 1914년 개통된 이후 모든 국가에 개방되어 태평양과 대서양을 이어주는 지름길로서 세계경제의 교역확대에 크 게 기여해 오고 있고 또한 지리적 요충지로써 군사적으로도 중시되어 왔다. KOTRA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려 고 콜론자유무역지대(Colon Free Zone)에 보세창고를 운영한 적도 있으나 실패했다. 파나마시티는 국제화 도시라고는 하나 인구 130만의 작은 수도로서, 면적(275km 2 )으로만 따져도 서울시의 반 이 채 안 된다. 치안이 나쁜 구도심을 제외하면 주재원들의 생활반경은 더더욱 좁아진다. 그럴듯한 근린공원이나 문화시설도 부족하다보니 무료한 도시라는 평이 대세다. 반면, 도시가 작아 출퇴근 거리가 짧고 어디든 삼십분 내 에 갈 수 있다는 점은 큰 장점이기도 하다. 물론 도심 난개발에 따른 심각한 교통체증은 어느 대도시 못지않다 무역관 개설 생활 및 근무 여건 파나마 기후는 건기(1월~4월)와 우기(5월 ~12월)로 양분되지만, 대체적으로는 한국의 무더운 여름 날씨가 연중 계속된다고 보면 된다. 우기에는 매일 폭우가 쏟아져 도심 침수는 일상생활이다. 반면 북위 8도의 적도에 가까운 위치에도 불구하고 섭씨 37도를 넘는 날은 거의 없다. 근래에 풍토병은 많이 사라졌으나, 뎅기열은 발생사례가 꾸준히 보고되고 있다. 치안은 중남미에서는 비교적 양호한 편에 속한다고 하나 강력 범죄는 매년 증가세이다. 교민은 주재원을 포함하여 350여 명이 체류하고 있다. 주변 중남미 국가사람들조차 파나마인을 불친절하다고 평할 정도로 파나마인 들의 태도는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서비스업으로 먹고산다 지만 소비자로서의 당연한 권익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특히 다인종 국가임에도 노골적인 동양인 비하도 수시로 겪는 다. 세계경제포럼(WEF)의 글로벌경쟁력지수(Global Competitiveness Index) 2011에서는 파나마 노동생산성을 전체 142개국 중 129위, 교육시스템 수준을 131위로 평가하였 파나마 사무소 다. 정부기관은 정권교체기마다 담당자들이 통째로 바뀌다보 니 정보에 정통한 공무원을 찾기 어렵고, 이마저도 관료주의가 174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75 팽배해 있어 까다로운 절차를 요구하기도 한다. 특히 모든 국가통계를 관장하는 파 나마감사원과 관련부처가 발표하는 통계수치가 다른 경우도 종종 있다. 기업들 또 한 기본적인 정보공개에도 매우 민감한데, 대개 가족경영을 하다 보니 주식상장 및 기업공개의 필요성이 크지 않다는 점, 조세 회피처로서 묻지마 투자가 활성화되어 있다는 점도 이러한 분위기에 한 몫하고 있다. 무역관 이야기 전시회 개막 전날 느닷없는 애도휴일 선포라니 중미 최대의 종합박람회 EXPO COMER 2011의 개막을 이틀 앞둔 3월 21일, 전시 참가업체 출영송을 비롯하여 한 국관 개관을 위한 막바지 준비에 모두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와 중에, 오후 5시 30분경 현지직원 한 명이 내일이 특별 공휴일로 선포된 것 같다 는 메시지를 전해왔다. 확인해보니 파나마 대통령실에서 전 부통령 Guillermo Billy Ford(1989~1994 재임)가 서거함에 따라 3월 22일을 국가 애도휴일(Duelo Nacional)로 선포하였던 것이다. 사실 부통령은 3월 19일 서거하였지만, 주말은 주말대로 쉬고 월요일 뒤늦게 회 의를 소집하여 애도휴일 선포 결정을 한 모양이었다. 크게 존경받던 대통령도 아닌, 십 수 년 전에 재임했던 부통령이 사망했다고 공휴일까지 선포하나 의아해하면서도, 기왕이면 전시회 끝나고 선포되면 안 되나 라는 푸념 섞인 농담을 직원들끼리 주고 받으며 마지막 점검에 한창이었다. 공휴일 선포가 어떤 파장을 가져올지 어느 누구 도 인지하지 못한 채. 머리 뒤끝 어디선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불길함이었을까. 뭔가 석연치 않음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보통 개막 전날이 장치설치 마무리부터 시 작하여 전시물품 통관 및 진열을 모두 마쳐야 하는, 전시회 준비기간의 가장 중요한 시점이다. 장치업체-운송업체-전시장-주관기관 모두 정상근무를 해줘야 할 텐데 하 는 우려에서, 아무래도 확실히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싶어 연락을 취하기 시작 하였다. 다행히도 장치업체, 전시장, 전시주관기관으로부터는 정상근무를 한다는 답변 을 받았으나, 운송업체는 모두 퇴근하여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 당초 전시물품을 22일 오전 7시까지 전시장 내 세관 집하장으로 운송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긴 했지만, 확답 없이는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여러 차례의 시도 끝에 운송업체 담당자 와 연결되었는데, 얘기인즉 내일이 공휴일로 선포된 만큼 전시물품을 개막 당일 아침 175 Ⅰ. 무역관 이야기

176 에 운송해주겠다고 했다. 설마 했던 우려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개막식 당일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에 운송, 세관통관, 전시품 진 열, 정리를 일사불란하게 다 마칠 수 있을 것인가? 개막식이 끝나고 파나마와 코스타 리카 정상의 전시장 순회 때는 정돈된 상태에서 이들을 응대할 수 있을까? 일단 모든 직원들을 소집, 비상회의를 하면서 개막 당일 시나리오를 검토해봤지만 결론은 오직 하나, 개막순간까지 모든 작업을 마치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파나마가 자랑하는 국제수준의 종합박람회라 하지만, 갑작스런 공휴일 선포 앞 에서는 최소한의 상식도 통하지 않았다. 행사의 위상, 스케줄 준수의 중요성을 아무 리 떠들어대도 공휴일은 공휴일이라는 것. 얘기가 통하지 않자 결국 수소문 끝에 운 송업체 사장과 직접 접촉하여 사정을 설명하고 최대한의 협조를 해주겠노라는 약조 를 받았다. 쉽게 문제가 해결되나 싶더니 또 다른 장애물이 나타났다. 곧이어 다급한 목소 리로 전화를 걸어온 운송업체 사장 왈, 트럭이 들어간다 한들 전시물품이 보관된 보 세창고에서 문을 열어줄 수 없다 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아주 단순명료했다. 공휴일에 일꾼을 부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고객의 사정은 아랑곳 하지 않고 특별 공휴일 앞에서는 계약서도 무용지물이었다. 다시 수소문하여 보세창고 주인을 접 촉, 어르고 달래기를 수차례 거듭하여 결국 문을 열어주겠노라는 약속을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제는 세관원들이 훼방꾼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닌가. 창고업자에 따르 면 세관원들이 보세창고 자물쇠를 따줄 수가 없다고 했다는 것. 세관원들이 보세창 고로 와서 자물쇠를 열어줘야 하는데, 애도기간에 국가공무원인 세관원들이 어떻게 일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쯤 되면 폭발 안 할 사람 있을까. 공휴일엔 만사 재 끼고 논다는 논리 앞에서는 그 어떤 논리도 통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사실 운송업자-보세창고업자-세관원들의 이권을 위한 보이지 않는 담 합도 존재했을 것이라 믿는다. 결국 세관에서는 공휴일 통관 패널티로 기백 달러를 청구하겠다는 어처구니없는 해결책을 내놓았다. 이마저 싫으면 개막 당일 물건을 받 으라는 말과 함께.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전시회 주관기관인 파나마상공회의소를 접촉하여 읍소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뜬금없이 패널티라니. 갑자기 머리가 하얘졌다. 먼 여정에 지쳐있을 전시업체들에겐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스럽기도 하고, 왜 진작 공식 통관사와 계약하지 않았나 후회만 가득할 뿐이었다. 주최 측인 파나마상공회의소에 연락하여 현 사태를 보고하자 깜짝 놀라는 분위 17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77 기였다. 확인 차 몇 곳을 접촉하는가 싶더니, 이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비상회의를 소집한 모양이었다. 한 시간 가량 지났을까. 아마도 파나마상공회의소에서 핫라인을 통해 세관 등 정부부처 고위인사에 협조를 요청했던 것 같다. 결국 애도휴일 통관 중단 사태는 해프닝으로 끝나고, 통관 및 운송과 관련된 모든 업체는 정상 근무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비록 이해할 수 없는 수수료를 부과하는 여운을 남기기는 하였지만. 사실 우리 무역관은 야근을 하다 보니 늦은 오후에 발표된 공휴일 선포를 포착 할 수 있었던 것이지, 국가관을 주관하는 사람들은 대개 상황 파악조차 못하고 있었 던 것 같다. 우리 무역관의 재빠른 액션이 없었다면, 아마도 전시회 개막 당일 국가정 상과 국빈 앞에서 무질서 속에 전시품을 진열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도 일부 국가관은 22일 전시물품을 제때 받지 못해 오후 늦게에서야 전시물을 진열하는 상황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어느 누가 공휴일 하루에 범국가적으로 관심을 쏟는 전시회 자체가 뒤흔들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을까. 게다가 바로 전날 퇴근시간을 앞두고 공휴일을 선포 함으로써 대처할 시간마저 없었던 것도 이러한 촌극의 조연 역을 톡톡히 했다. 다행 히 신속한 대처로 작은 에피소드로 끝나긴 하였지만, 적어도 후진국에서는 상식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 특히 중요한 일을 앞두고는 충분한 점검에 점검을 거듭해 야 한다는 점을 절실히 느낀 사례였다.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이주성 (Daniel Joo Sung Lee) 1985년 출생 2007년 8월 1일부터 지사화 전담요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주성 씨는 파나마에서 나고 자란 파나마 국적의 한국 인이다. 따라서 그는 파나마인의 감성과 한국식 사고를 균형있게 갖추고 있어 우리나라 진출기업의 영입 0순위 대 상이었다. 그는 주요 시장개척 업무뿐 아니라 각종 행정업무도 마다하지 않는 등 조직기여도가 높다. 예를 들면 그 는 2011년 세법개정에 따른 회계프린터 도입이 의무화된다는 사실을 포착하고, 아국기업 S사를 발굴하여 파나마 시장 내 회계프린터를 수출할 기회를 창출한 바도 있다. 177 Ⅰ. 무역관 이야기

178 A sia 일본 도쿄 Tokyo 일본 후쿠오카 Fukuoka 일본 오사카 Osaka 인도 뉴델리 New Delhi 인도 뭄바이 Mumbai 미얀마 양곤 Yangon 베트남 하노이 Hanoi 필리핀 마닐라 Manila 태국 방콕 Bangkok 베트남 호치민 Ho Chi Minh 호주 시드니 Sydney

179 New Delhi 50개 무역관 이야기 뉴델리 무역관 1947년부터 1964년까지 인도 총리로 재임했던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 1889~1964)는 수입대체 산업화 모델을 채택했다. 1970년대의 석유파동 이후 인도는 외상으로 수입하는 경우가 늘어났고, 1991년에는 720억 달러의 외채를 기록했다. 당시 인도의 외환보유고는 겨우 4주 정도의 수입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지불 위기에 봉착한 인도는 마침내 시장개방을 포함해 국제통화기금의 구조조정계획 을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외국인들이 인도에서 회사를 설립하거나 인도기업의 지분을 50% 이상 차지할 수 있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현재 인도는 전 세계 소프트웨어 수출의 5분의 1을 차지하고, 인도 수출에서 차지하는 서비스산업의 비중은 중국보다 높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획, 르몽드 세계사 에서) 브릭스(BRICs)의 한 멤버인 인도는 12억 인구를 바탕으로 무한한 내수시장 잠재력과 성장가능성을 가진 나라이 다. 인도는 2005년부터 7~9%의 성장률을 지속적으로 달성하면서 2011년에는 인도 베스트 10년에 접어들었 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고속성장 가도를 달리고 있다. 인도의 경제성장에 걸림돌로 여겨졌던 인프라환경이 차 츰 나아지고 있는 상황이며 2013년부터 시작되는 제 1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서는 인도 정부가 인프라 확충 에 좀더 심혈을 기울일 것이라고 한다 무역관 개설 생활 및 근무 여건 인도 뉴델리의 5~8월은 기온이 섭씨 45~50도를 넘나든다. 말라리아, 뎅기열, 장티푸스와 같은 각종 풍토병이 빈발하며, 의료시설이 전반적으로 매우 낙후되어 있 고 의료서비스 질이 낮아, 위급한 수술이 아니더라도 한국으로 돌아가 수술을 받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한편 인도는 종교 분쟁으로 영화관이나 쇼핑몰, 시장 등 사람들 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폭탄테러가 자주 발생하며, 인도-파키스탄 갈등, 힌두-이슬 람 갈등, 힌두-기독교 갈등 등이 매스컴을 장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은 절도와 사기의 타깃이 되기 쉬운 만큼 해가 지면 밖에 돌아다니는 것을 가급적 피해 야 한다. 인도에서는 정보공개에 대한 낙후된 인식(정보공유 회피)과 정부부처 및 경제 연구소의 관련 정보 인터넷 업데이트 지연으로 각종 통계자료나 시장조사 자료를 얻 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정보조사기관별로 수치가 다르는 등 정보의 정확성이 낮 다. 한편 문서로 모든 일이 처리되며 절차가 복잡하고 많아 모든 행정절차에 걸리는 179 Ⅰ. 무역관 이야기

180 시간이 매우 지루하다. 행사를 치르더라도 정부 고위급 인사 초청 등을 위해서는 최 소한 석 달 전에 초청장을 발송해야 초청이 가능하다. 그런 반면 한국식 행사준비는 촉박한 기일 내에 일사천리로 이뤄져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 격이 맞는 현지 인사를 초청하기가 무척 힘들고 현지사정에 익숙치 않은 본사 담당팀 및 담당자와의 업무진 행에 있어서도 애로사항이 많다. 무역관 이야기 IMF 환란 직후에 준비한 뉴델리 국제산업박람회 필자가 1997년 10월 1일부터 2000 년 9월 30일까지 인도 뉴델리 무역관에서 근무하고 귀국한 지 어언 1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어렵고 열악한 지역에서 우리나라 경제마저 사상 초유의 IMF 외환위기라는 된서리를 맞아 암울했던 시기에 근무했던 인도가 60대 중반을 넘어선 나의 인생 여 정에서 가장 진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어린 시절 한때 가장 존경 하고 추앙했던 인물인 간디의 조국? 타지마할, 아잔타 석굴을 위시한 수많은 문화유 적과 찬란한 역사? 인구의 절반 이상이 충분한 영양분도 섭취하지 못한 채 살면서도 이를 숙명으로 받아들이면서 순박하게 살아가는 인도인들의 생활철학? 아마 이러한 것도 인도를 잊지 못하는 큰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도는 광활한 영토에 12억 인구, 풍부한 자원에 유능한 인재까지 고루 갖춘 나라로서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무한하고, 코트라맨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도 전해 볼 가치가 있는 시장으로서 나 자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일하고 가시적인 성과를 달성하고 돌아온 것도 인도를 쉽게 잊지 못하는 큰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 다. 사실 인도에 있는 무역관은 본사의 활동지침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자체 내에서 발 생하는 업무가 넘친다. KOTRA 해외무역관 치고 그렇지 않은 곳이 없겠지만 특히 인도는 현지업체들의 인콰이어리를 비롯하여 우리나라 업체들의 요청사항, 그리고 인도 정부 관계기관이나 경제단체기관들로부터 업무협조 요청이 많은 곳이다. 인도는 1991년부터 IMF의 권고를 수락하여 대외개방형 시장경제체제를 골자 로 하는 신경제정책을 추진, 외국인 투자를 적극 유치하여 연평균 7~8%의 고도성 장을 달성하였다. 또 1997년 필자가 뉴델리 무역관에 부임할 때에는 우리나라의 대 인도 수출과 직접투자가 획기적으로 증가하는 시기에 있었다. 대외개방형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국이 인도 경제개발의 모델로 부상한 것은 당연지사였 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도 진출을 획기적으로 증진시키는 계기를 마련코자 필자가 180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81 역점사업으로 추진했던 1999년 뉴델리 국제산업박람회 (2.12~2.17) 개최를 잊을 수가 없다. 원래 이 박람회는 2년마다 개최되는 인도의 국제박람회였으나 인도가 개 최할 때마다 주요한 경제파트너로 부상하는 국가를 Partner country로 선정하여 양국이 공동 주최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Partner country로 선정된 국가는 인도 와 공동 개최국이 되어 대규모 전시와 함께 문화 홍보행사를 독점적으로 개최하여 큰 홍보효과를 누릴 수 있으며, 1999년 우리나라의 참가 이전에는 독일과 일본이 차 례로 Partner country로 참가하였다. 이 박람회는 1996년 2월 김영삼 대통령이 인도를 방문했을 때 정상회담을 통하 여 2000년까지 양국 간 교역규모의 배증과 함께 한국의 대인도 투자를 확대시키고 자 개최를 합의한 사항이었다. 100만 달러 이상을 투입한 이 박람회에 우리나라는 면 적 4,800m2에 133개 업체가 참가하고, 종합적인 문화행사와 테이프커팅 행사에 양국 정상이 참가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필자가 인도에 부임하기 전에 본사 전시부에 서는 이 박람회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예산, 인원 등 모든 면에서 필요하면 얼마든 지 지원할 터이니 성공적으로 추진하라고 당부하였다. 필자 또한 인도에 부임하면서 이렇게 중요한 사업을 추진한다는 기대감에 마음이 부풀기도 하였다. 그런데 부임 한 달 만에 IMF 외환위기가 발생하였고, 정부의 강도 높은 구조조 정과 긴축정책에 따라 이 박람회 예산반영이 어렵게 되었으며, 국회 예산심의 과정에 서도 예산 확보가 어려울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들려왔다. 설상 가상으로 삼성, 대우, 현대, LG 등 독립 부스 참가마저 어렵게 보였다. 현지 진출기업들의 인원 감축과 이미 투자했던 사업의 철수 및 축소가 강도 높게 추진되는 상황이고보니 박람회 참가 는 가장 우선순위가 낮은 사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역관 관점에서는 인도 진출확대를 위해서는 이 사업의 추진이 꼭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본사와 업체를 계속 설 득하였으며 인맥을 활용하여 국회, 정부 관계부처와 심지어 대 기업 서울 본사에까지 로비활동을 벌인 결과 이 사업의 추진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예산은 계획대비 절반으로 삭감되고 테이 프커팅 행사에도 김대중 대통령이 참석하려다 김종필 총리로 교체되었다. 본사의 전문인력 지원도 대폭 축소되었다 뉴델리 국제산업박람회 관장과 무역관 직원 2명이 준비하느라 어려움이 많았지만 결과는 대성공으로 평가되었다. 4대 그룹 독립 부스와 133개 181 Ⅰ. 무역관 이야기

182 업체가 참가한 중소기업관 모두 바이어와 참관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언론 을 통한 홍보활동이 주효하여 전 인도에 한국을 알리는 기회가 되었다. 김덕수 사물 놀이패, 장보고의 꿈, 장동건이 모델로 참가한 앙드레 김 패션쇼 등 다양한 문화행사 는 인도인들의 갈채를 받았으며, 당시 김은상 사장의 주도로 홍보관에 설치한 김수 로왕과 인도 허황옥 공주의 결혼 이야기도 박람회 후 야사가 아닌 실화로 굳어지는 듯 했다. 지금 생각하면 박람회 추진과정에서 실수도 많았다. 가령 JP와 인도 대통령이 참가한 테이프커팅 행사에 인도 기자들이 동선을 지키지 않고 몰려들어 혼잡을 초래 했던 것도 한 예이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것은 현지 교민과 상사 부인들로 구성된 합창단이었다. 원 래 박람회 행사에는 부채춤 공연 등이 있어야 흥이 나지만 예산 부족으로 파견이 어 려워지자 필자는 차선책으로 현지 교민과 상사 부인 50여 명으로 합창단을 구성하였 다. 합창단은 두 나라 민요를 한 달 넘게 연습하여 한국의 날 행사, 리셉션 등에 김덕 수 사물놀이패와 같이 공연하게 하여 인도인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한국이 과감한 구조조정과 금모으기 등으로 점차 안정을 찾아가자 인도인들은 한국을 보고 세 번 놀랐다고 했다. 한국이 전후 폐허에서 아주 짧은 기간에 한강의 기 적을 이룩하는데 놀랐고, 1997년 IMF 환란으로 너무 빨리 몰락하는데 놀랐고, 회복불 가능하게 보이던 외환위기를 단기간에 극복하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놀랐다는 것이 었다. 박승종 OB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수산타 마하파트라 (Susanta Mahapatra) 1968년 출생 15년 동안 뉴델리 무역관에서 근무한 수산타는 각종 애로사항이 발생할 때마다 폭넓은 네트워크를 동원, 한국기 업들의 애로사항을 발 벗고 해결하는 해결사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는 2009년 8월 KOTRA를 퇴직하고, 인도 미국상공회의소 팀장을 거쳐 현재는 인도 개설 두바이 통상진흥기구 개설요원으로 근무 중이다. 산지브 모한띠(Sanjeev Mohanty)1968년 출생 15년 동안 KOTRA 뉴델리 무역관에 근무한 산지브는 현재 오리사주 상공회의소 팀장으로 재직 중이다. 그는 뉴 델리 무역관에 근무할 때 JETRO, Austrade 등 다른 나라 무역진흥기구들과의 네트워크 및 폭넓은 바이어풀을 활용, 한국을 인도에 알리는데 크게 기여한 바 있다. 182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83 Mumbai 50개 무역관 이야기 뭄바이 무역관 뭄바이(Mumbai)는 인도의 마하라쉬트라(Maharashtra) 주의 주도이다. 1995년 11월 봄베이에서 뭄바이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현지인들은 봄베이 를 고수하여 뭄바이 라는 새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인구 2,000만 명의 뭄바이는 인도의 상업 중심지이자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양의 영화를 제작하는 영화산업의 본고장이 다. 봄베이(Bombay)와 헐리우드(Hollywood)의 합성어인 발리우드(Bollywood)는 인도 뭄바이의 인기 있는 영화산업을 일컫는 비공식 이름이며, 때때로 인도 전체의 영화, 영화산업을 이르는 말로 오용되기도 한다. 마하라 쉬트라 주는 1억 2,000만 명의 인구에, 인도 28개 주에서 경제규모가 가장 크기 때문에 주라기보다는 하나의 국 가라고 볼 수 있다. 포르투갈의 항해가 바스코 다가마(Vasco da Gama)가 인도항로를 발견하고 1498년 5월 켈리컷(Calicut, 오 늘날의 Kozhikode)에 도착했으나 뭄바이는 16세기까지 어촌에 불과했다. 1662년 포르투갈 국왕은 누이동생 캐서린과 영국의 찰스 2세 결혼 때 지참금의 일부로 뭄바이를 영국에 양도했고, 찰스 2세는 당시 양항( 良 港 )을 찾고 있던 영국의 동인도회사에 연간 10파운드의 금과 교환하여 처분, 이때부터 동인도회사에 의해 해면 매립과 항만 및 도시 건설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869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됨에 따라 유럽에서 인도에 이르는 최단거 리에 위치한 뭄바이 항은 중요성을 더해갔다 무역관 개설 무역관 폐쇄 무역관 재개설 무역관 폐쇄 무역관 재개설 생활 및 근무 여건 뭄바이는 열대기후로 하절기는 25~38도, 동절기는 섭씨 18~26도이며, 특히 몬순기간(6월~9월)에는 많은 비와 고온으로 인하여 병에 전염될 가능성이 높다. 따 라서 말라리아 뎅기열 예방접종은 필수이다. 평상시 치안은 양호한 편이나, 2~3년 간격으로 대형 폭탄테러가 발생하는 테러경계 지역으로 안심할 수 없다. 현지 활동 지 상사 수는 76개 안팎이고, 현지교민은 400명 정도이며, 주재원과 그 가족이 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인도 공무원들의 늑장처리 업무와 부패, 그리고 신뢰할 만한 공식 데이터가 많 지 않기 때문에 일하기에 어려움이 많다. 또한 비즈니스계에서는 영어 의사소통이 원 183 Ⅰ. 무역관 이야기

184 활한 편이나, 지역 언어인 힌디 마라티를 모르면 불편을 느낄 때가 있다. 뭄바이의 극심한 교통체증은 유명하여 미팅 시간을 약속해도 지키기가 어렵다. 무역관 이야기 불가능은 없다! 인도 최초 국가IR 성공을 이끌어낸 고군분투기 2011년 6월, 최동석 관 장과 당시 관원이었던 박현성 과장은 사뭇 진지한 미팅을 하고 있었다. 얼마 후 박 과 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현지 조사담당관인 라제시를 불렀다. 최 관장의 말이 떨어졌 다. 라제시, 올해 우리 무역관이 한-인도 투자포럼을 개최하기로 결정했는데, 할 수 있겠나? 네, 관장님. 할 수 있습니다! 한번 해보겠습니다.(뭔지 잘 모르겠지만 말 입니다) 그렇게 라제시는 겁 없이 대답해버렸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11월 24일 D-Day를 향해 시계바늘은 돌아가기 시작됐다. 떠오르는 신흥국, 인도로부터의 투자유치라는 사명감 그 열정을 대단했지만, 문제는 아무도 IR(Investor Relations) 경험이 없었던 것이다. 최동석 관장은 다른 지역 IR 자료를 열심히 공부했고 이를 모든 직원들에게 전달, IR 준비에 노력을 기울였다. 당 시 비슷한 시기에 자동차부품 플라자 라는 대형 행사가 같이 계획돼 있었던 터라 날 이 갈수록 뭄바이 무역관의 업무부담이 더해졌다. 몇몇 직원들은 투자가들에게 매일 전화하느라 목이 쉴 정도였다. 한국으로 치면 추석과도 같은 디왈리(Diwali) 축제기간에도 모두 업무에 매달 린 덕분에 행사준비는 그럭저럭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그 불길한 예감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한-인도 투자포럼의 3박자는 한국 측 VIP, 인도 측 VIP, 그리고 투자가의 존재 였다. 그런데 이 모두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한국 측에서는 본래 장관이 참석할 예 정이었으나 국정감사로 인해 차관으로, 다시 실장에서 무역의 날 행사 때문에 국장 으로 변경되었다. 인도 측도 마찬가지였다. 상무부장관 또는 차관이 참석할 예정이 었으나 인도 의회 예산회기가 시작되어 중앙정부 고위인사는 뉴델리를 떠날 수 없어 안 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그래서 마하라쉬트라주 산업부장관으로, 또 다시 산업 부 차관인 개발담당 커미셔너가 개막 환영사 인사로 최종 확정되었다. 마하라쉬트라 주 산업부장관은 마하라쉬트라주 수상을 역임한 바 있는 거물급 정치인이었다. 잦은 변경으로 힘이 빠지기도 했지만, 무역관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마케팅팀 수장인 Hemant의 역할이 돋보였다. 그는 매일 변하는 상황에 당황하지 않고 대안을 찾아 184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85 2006 인도 뭄바이 세계일류 한국상품전 냈다. 여기에는 평소 최 관장이 맺어놓은 마하쉬트라주 주정부 고위급 인사들과의 네트워킹도 큰 힘이 되었다. 주 산업부차관 이 바쁜 일정을 미루고 우리 행사에 참가키로 한 것은 무역관 장과 절친한 사이인 마하라쉬트라주 산업개발공사의 닥터 쉬 바지사장이 차관에게 직접 건의한 결과였다. 또한 마하라쉬트 라주에 포스코, LG전자, 현대중공업 등이 대규모 제조공장을 가동 중에 있는 점도 힘이 되었다. 그런데 웬걸, 양국의 VIP가 확정되자 이번에는 인도 투자가들의 스케줄이 삐걱 거리기 시작했다. 11월은 인도판 추석인 디왈리 시즌의 연장이자, 연 최대 결혼식 기 간으로 모두들 동분서주하는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인도 투자가들도 예외가 아니었 고, 정말 꼭 필요한 미팅이 아니면 시간을 내주지 않았다. 이에 상담주선을 담당하는 직원들은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 결과는 대성공, 행사 당일에 250여 명의 인도 투자 가들이 찾아온 것이었다. 무역관은 인도 대표 한국투자 명예홍보대사를 위촉하기 위해 3명의 인도 거물 급 비즈니스맨을 접촉했다. 그런데 저마다 하고 싶다고 하는 바람에 무역관은 행복 하지만 난처한 입장에 처하기도 했다. 최 관장은 3명 모두 기분 상하지 않게 하고, 최 종적으로 인도 7대 그룹이자 쌍용차를 인수한 마힌드라그룹의 부회장이자 총괄사장 Anand Mahindra를 투자유치 명예홍보대사로 점찍었다. 사실, IR 성공요인의 하나 는 아난 마힌드라의 존재 때문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 덕분에 인도의 각종 신문, 방 송사들의 관심이 행사에 집중되어 10여 개가 넘는 언론보도가 이루어졌다. 부대행사의 하나인 업무협력 약정 체결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인도 최대 민간은행인 ICICI와 KOTRA의 업무협조 약정 체결은 행사 하루 전날까지 양측의 초안이 달라 이를 타협하느라 속이 타기도 했다. 결국 극적인 타협을 보았고, 행사 당 일에는 양측 대표가 환히 웃으며 사인으로 최종 마무리를 지었다.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니틴 샴라오 야머르게카르(Nitin Shamrao Yamgekar) 1977년 출생 2004년 4월 뭄바이 무역관 개설 때부터 현재까지 무역관을 지키는 니튼은 고졸 출신이지만 보통의 사환이 아니 다. 인도의 열악한 정주여건과 관공서들의 늑장 행정처리, 무역관 입주건물의 노후화 등에 따른 사무실 유지 보 수, 총무업무 보조를 확실하고 믿음직스럽게 해주는 해결사 역할을 해주는 무역관의 보배이다. 185 Ⅰ. 무역관 이야기

186 Tokyo 50개 무역관 이야기 도쿄 무역관 일본은 아주 냉정한 선장의 감독 아래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승무원들에 의해 움직이는 나라 같았다. 월가의 전설, 세계금융시장의 인디애나 존스로 불리는 짐 로저스가 일본을 둘러보고 한 말이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지 난 몇 십 년 동안 일본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한 가지 요인은 섬나라라는 특성에서 온 것이다. 섬나라 국민들은 모두가 동질적인 외모와 인종적 차별성, 하나의 기질을 갖고 있고, 이것은 국가적으로 긍정적인 요소다. 일본인들 은 집단적으로 무엇을 하고자 하면 대개 그 일을 해낸다. 이렇게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사회에서는 반대나 불만도 거의 없다. 1980년대 초 일본에 관해 쓴 대부분의 미국 저서들은 일본을 진심으로 찬양하였으며, 긍정적인 모습만 조명했 다. 에즈라 보겔의 넘버원 일본 (1979), 윌리엄 오우치의 Z 이론 (1981) 같은 책이 대표적이었다. 1980년대 말 일본이 말 그대로 세계를 몽땅 사들일 기세를 보이자 당시 많은 나라에서 일본에 대한 혐오감이 뜨겁게 달아올랐 다. 그리고 부동산투기 거품이 붕괴되면서 일본 경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심각한 위기상황에 빠졌다. 많 은 논객들과 시민들이 무비판적이고 찬양 일색이었던 일본관을 급격히 바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은 언제 또 다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할지 모른다 무역관 개설 생활 및 근무 여건 기후는 우리나라와 유사하나 4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만큼 처음 일본 땅을 밟을 때 대부분 습하다 는 느낌을 받는다. 4개의 섬으로 이뤄진 일본은 북서에서 동남으 로 국토가 펼쳐져 있어 지역별 기후 편차가 심하다. 일상생활과 관련해서는 물가가 상당히 비싸다. 국제인력자원 관리기업 ECA인터내셔널 조사에 따르면 2011년 기준 도쿄의 물가는 세계 1위, 나고야는 세계 3위, 요코하마는 세계 5위로 나타났다. 세계 3대 시장의 하나인 일본은 계속되는 경기위축에도 불구하고 KOTRA 사 업에 대한 기회나 수요는 무궁무진한 나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인구 1억 2,000만 명은 인접국인 우리나라에게는 무시 못할 구매력의 원천이다. 일본 국민 대부분이 정 밀함과 정확성을 최우선시하기 때문에 바이어나 투자가, 유관기관과 약속하기는 어 렵다. 하지만 일단 구두로라도 합의된 사항에 대해서는 철저히 준수하는 편이다. 18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87 무역관 이야기 도쿄 무역관 부임시 배로 현해탄을 건너다 1962년 입사한 필자는 이듬해인 1963년 1 월 26일 일본 시장조사원으로 발령받았다. 이때 함께 발령받은 사람은 동료인 이해 영 씨와 박종한 씨였다. 외환사정으로 시장조사원 파견이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일본 시장조사원은 당초 계획대로 1963년 중에 파견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만 하 더라도 우리나라와 일본 간에는 국교가 정상화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비자를 받는 데만도 4개월이 걸려 7월 26일에야 출국할 수 있었다. 헌데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라는 것이었다. 당시 서울에서 도쿄까지 항공료는 67달러 80센트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재무부에서는 우리나라 가용 외환보유액이 3,000만 달러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외화절약을 위해 배를 타고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출발 전날 김기 엽 사장에게 출국신고를 하면서 배를 타고가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리자 재무부에 직 접 전화를 해주셨다. 재무부 이재국장을 찾아갔더니 필자만 비행기를 타고 가고 가 족은 배를 타고 가라는 선심(?)을 보였다. 그러나 외환과장은 무슨 소리냐며 모두 배 를 타고 가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 선편을 알아보니 적절한 정 기선은 없고 요코하마로 가는 화물선밖에 없었다. 아무리 어려운 형편이지만 14일이 나 걸리는 화물선을 탈 수는 없었다. 3일을 기다렸다가 350톤짜리 배를 타고 시모노 세키( 下 關 )에 도착, 기차로 도쿄에 입성하였다. 그때 힘들었던 기억은 지금도 뇌리에 생생히 떠오른다. 준비금이 10달러 정도에 지나지 않아, 김기엽 사장의 주선으로 한국은행 도쿄지 점에 근무하고 있던 구본해 씨로부터 5만 엔을 빌렸다. 이렇게 필자의 시장조사원 활 동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도쿄 무역관 개설 준비를 비롯해서 국내전시를 위한 해외 상품의 포장디자인 자료수집 등의 부수적인 업무가 폭주하여 시장조사원 본래의 업 무를 수행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본사의 자금 송금이 늦어져 많은 고충을 겪었는데, 1963년 7월 28일 현지에 도착한 후 12월에 가서야 처 음으로 4개월분 월급을 받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1963년 10월 당시 방콕 무역관의 정재봉 관장이 도쿄 무역관 창설관 장으로 부임하여 함께 무역관 개설을 준비하였다. 그후 1964년 1월 7일 정식으로 도 쿄 무역관이 문을 열었다. 이렇게 무역관 개설이 빠른 속도로 진행된 것은 1964년 10 월 10일부터 개최된 도쿄올림픽 덕이 컸다. 곽의순 OB 187 Ⅰ. 무역관 이야기

188 50년간의 라이벌 KOTRA와 JETRO JETRO는 BETRO(영국 수출진흥기관)의 본을 떠서 만들어졌다. JETRO가 발족된 시기는 1958년 7월로, 그 당시 존재하였던 해외시장조사회, 국제전시협의회, 일본무역알선소협의회의 3개 기관이 통합되면서 탄생하였다. 당시 JETRO 본부는 오사카에 설치되었으나, 그 후 도쿄로 본부 기능 이 이전되었다.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 KOTRA의 설립 이후, TAITRA, HKTDC 등 여러 무역진흥기관이 설립되었는데, 현재로서는 ATPF의 참가기관은 23개에 이 르며, 매해 순번제로 협의회를 회원국들이 개최하고 있다. JETRO의 스승격에 해당 되는 BETRO는 해체되었다. 일본과 여러 교역국 간 무역마찰로 인한 수출축소/수입확대 및 일본의 장기불황 등의 갖가지 악재로 인해 JETRO 라는 브랜드가치는 과거만큼 높지 않은 것이 사실 이다. 이와는 반대로 KOTRA는 무역진흥의 양대 축이라 할 수 있는 수출촉진과 투자 유치에 전력을 다하면서 한국경제를 견인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곤 하는데, 최근 몇 년간 JETRO 간부들을 만날 때면 항상 이들이 하는 말은 KOTRA를 본받고 싶다 이다. 불과 10여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예상을 못했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정부 정책에 따른 인원 및 예산 삭감으로 인해 JETRO 직원들에 대한 업무 를 향한 동기부여가 원활히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일본 대기업들로부 터는 산발적으로 JETRO 무용론 이 제기된 적은 과거 수차례 있었으나, 최근에는 중소기업이나 일본 무역과 큰 관련성이 없는 기관들로부터도 JETRO 기능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아마도 KOTRA가 한국의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듯, JETRO 또한 일본의 고도성장기 시절 일본경제에 일정 부분 기여한 것은 부정하지 못할 일이다. 이러한 JETRO의 역사에 있어서 지금은 큰 위기 상황임에는 틀림이 없으며, 위기 타개 책의 일환으로 JETRO는 타 기관과의 해외사무소 통합 등을 계획하고 있기도 하다. KOTRA와 JETRO는 부즉불리( 不 卽 不 離 )의 관계를 지 난 50년간 형성해왔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JETRO의 축소 는 KOTRA에게도 적지 않는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양 기관은 서로 절차탁마( 切 磋 琢 磨 )하여 양국 무역투 제1회 KOTRA - JETRO 업무협의회 제39회 KOTRA - JETRO 정기협의회 자진흥의 촉진 및 제3국 내 한-일 비즈니스 협력강화를 위해 미래사업을 구상해 나아갈 필요가 있다. 올해는 KOTRA 창립 18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89 50주년이면서 KOTRA-JETRO 정기협의회가 40번째를 맞이하는 해이기도 하다. 꾸준한 것은 힘이다( 繼 續 は 力 なり, 케이조쿠와치카라나리) 라는 일본 격언이 있듯 이, 영원한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양 기관이 건전한 긴장관계에 기초하여 기동력, 추 진력, 기획력을 앞으로도 발휘할 것을 희망한다. 오오바 아리히로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오오바 아리히로(Ohba Arihioro) 1953년 출생 1986년 5월 입사한 오오바 아리히로 씨는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25년 동안 근무하면서 현재 도 쿄 무역관 현지인 부관장으로 일하고 있다. KOTRA 입사 전부터 한-일 간 경제교류 활성화의 교두보 역할을 맡기 를 희망했던 그는, 도쿄 무역관에 입사 후 줄곧 조사 업무를 담당하면서 우리 기업들에게 일본시장 정보를 제공하 고 있다. 그는 특히 조사업무 수행 당시 쌓은 인맥을 활용하면서, 일본 정부나 업계 인사와의 창구역할을 맡아, 현 재는 비단 도쿄 무역관뿐만 아니라 일본 내 전 무역관에서도 없어선 안 될 인재로 꼽히고 있다. 다음은 그가 쓴 글 이다. 이따금 한-일 양국의 업무 처리스타일을 보면 재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일본 인은 전례( 前 例 )주의 인데 반해 한국인은 전진( 前 進 )주의 라는 것입니다. 전진( 前 進 )주의 의 뜻은 전례( 前 例 )를 타파하며 한발 앞서 나가려는 것으로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똑같은 전( 前 )이라도 그 다음에 오는 글자에 따라 의미가 정반대입니다. 일본의 전례주의의 전( 前 )자는 과거를 뜻하고, 한국의 전진주의의 전( 前 )자는 미래를 뜻한다고 봅니다.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과거의 것을 소중히 여기고, 기술과 물건을 조심스럽게 가꿔나가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집니 다. 예를 들어, 법안이나 자료를 작성할 경우도, 판례나 과거의 유사한 서류를 철저히 수집하는 작업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그런 만큼 끈기가 필요해지고 시간도 많이 소요되는 거죠. 한편 한국의 스타일이란, 과거의 것을 발판으로 삼되, 바로 직전까지 없었던 부가가치를 창출하면서 자료를 작성하거나 사업을 수행해 나가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면서 실제 시험을 통해 개선책을 찾아나가는 것이 한국 스타일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 두가지 스타일의 혁신적 요소를 융합시키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 다가오고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말하 자면 made in KOREA+JAPAN 이 이제 있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189 Ⅰ. 무역관 이야기

190 Osaka 50개 무역관 이야기 오사카 무역관 흔히 일본을 상인국가라고 한다. 그 상인국가 일본에서 상인의 메카는 오사카다. 도쿠가와( 德 川 )시대 또는 에도 ( 江 戶 )시대(1603~1867) 이전부터 오사카 상인들은 번영을 거듭해왔다. 그 이면에는 뛰어난 원가 계산, 고객 중심의 서비스 정신, 근검절약, 평소의 꾸준한 공부 등의 노력이 있었다. 여기에 인내심과 올바른 상도덕, 금전관 이 더해지면서 오사카 상인은 천하의 상인이 되었다. 오사카 상인들 의 저자 홍하상의 말이다. 저자에 의하면 그 들은 하늘이 두 쪽 나도 노렌( 暖 簾 )을 지킨다 며 이렇게 덧붙인다. 노렌은 일본의 식당이나 도소매점, 심지어는 백화점과 회사에 이르기까지 입구마다 걸려 있다. 노렌은 점포나 회사의 문양이 들어간 무명천에 불과하지만, 사 실 여기엔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노렌이란 내일을 여는 것. 노렌의 뜻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신용 이다. (홍하상, 오사카 상인들, 효형출판, 2004, 34~35쪽) 서일본 중심지인 오사카는 부( 副 )수도 육성 후보지로 거론되는 지역으로서, 수도 도쿄가 재난을 당할 경우 수도 기능을 대신할 정도의 비중 있는 곳이며, 오사카 무역관 관할지인 간사이( 關 西 )지역은 흔히 2할 경제로 불리는 곳이다. GDP, 인구, 기업체 수, 수출입 규모 등이 일본국 전체에서 2할 내외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역관 관할지역에는 파나소닉, 샤프, 산요 등 가전 대기업의 본사 및 생산거점이 위치하고, 의료 바이오산업의 중심 클 러스터뿐만 아니라 히가시오사카( 東 大 阪 )시를 중심으로 중소 제조업 단지가 형성하고 있는 등 전기전자, 바이 오, 중소기업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무역관 개설 생활 및 근무 여건 간사이지역의 중심지인 오사카는 위도상 부산, 제주와 비슷한 위치에 해당하지 만 기온은 연평균 2~3도 정도 높은 편이다. 겨울철 날씨도 서울보다 온화하지만, 집 구조 등의 차이로 일반 가정은 온돌 문화의 한국인에게는 춥게 느껴질 수 있다. 한국 과 시차는 없으나 체감 시각은 오사카의 경우 서울보다 약 30분, 도쿄의 경우 1시간 빠르게 느껴진다. 한국보다 신용카드 사용률이 떨어져, 신용카드를 받지 않거나 결 재할 수 없는 곳이 예상보다 많기 때문에 사전에 카드 사용 가능 여부를 확인할 필요 가 있다. 도쿄 중심의 칸토우( 關 東 )지역은 최종 결정에 있어 신중하고 단계별 검토를 중 요시하는데 비해, 상인 기질이 강한 오사카 중심의 간사이( 關 西 )지역은 비교적 의사 190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91 결정이 신속하고 사전약속 없는 방문에 대한 거부감도 상대적으로 적다는 특징이 있 다. 일본은 현장 담당자가 결정권을 갖고 협의를 거쳐 상급자에게 전달되는 Bottom-up 방식이 많아 담당자를 먼저 공략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성향 차이로 준비, 계획, 사내조정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결정할 때까지 시간이 걸리고, 단기적 거래관계보다는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관계를 선호하여 초기 진입에 시일이 소요된 다. 그러므로 급할수록 돌아가려는 마인드로 안심과 신뢰구축이 필요하다. 최근에는 한류의 영향으로 일본은 비즈니스 한류시대를 맞이하였기 때문에 일본시장 개척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무역관 이야기 일본식 비즈니스의 높은 벽을 허문 것은 한국식 회식문화(?)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일본 대중문화를, 일본에서 한국 대중문화를 만나는 것은 어느 쪽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국에서는 법적인 제재가 있었고 일본에서는 한국이란 나라에 별다른 관심조차 없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랬던 한일교류가 본격적으로 발걸음을 내딛게 된 중심에는 KOTRA가 개최한 한 일 슈퍼엑스포가 있었다. 이 엑스포는 2002년 한 일 월드컵 공동개최를 계기로 앞으로 새로운 개념의 이웃국가로서 발전 하기 위한 디딤돌 행사였다. 2000년 도쿄, 2001년 오사카, 2002년 후쿠오카를 마지막으로 예정된 세 번의 행사 동안 한국 가수들이 대거 일본을 방문해 콘서트를 갖기도 하고 부채춤, 사물놀 이 등을 공연함으로써 한국 전통문화가 일본 NHK를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2001년 2회 행사를 준비했던 오사카 무역관은 대중가요뿐만 아니라 당시 디자이너 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앙드레김 패션쇼도 개최하는 등 풍성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볼거리로 한국 문화를 널리 알리는데 많은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행사가 일본 내 한류를 침투시키기 위한 총력전 이었다면 오사카 무역관이 한류 전파에 더욱 빛을 발한 것은 소위 늘 하는 일본 기업가들과의 만남을 통 한 각개전투 일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오사카 무역관의 이무영 차장이 있었다. 일본은 일본만의 비즈니스 문화를 가지고 있다. 어느 나라나 그렇겠지만 일본 스럽다 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중심은 역시 신용 거래 라는 것이다. 특히 대기업일수록 보수적인 성향이 강해 오사카 무역관은 신용 도가 떨어진 한국기업들을 대신해 일본 대기업들과 신용 쌓기에 돌입했다. 하지만 대기업일수록 접대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일본 사회이기 때문에 무역관이 191 Ⅰ. 무역관 이야기

192 자주 찾아간다고 하면 오히려 부담스러워하고 그렇다고 선물을 보낼 수도, 거나하게 술을 함께 마실 수도 없어 쉽지 않았다. 다만 일본기업들이 요청할 때에는 열과 성을 다해 지원해주는 것뿐이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앉아 마냥 기다릴 수도 없고, 그래도 인간적인 유대감이 형성 되어야 좀 더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을 터라, 고심하던 오사카 무역관 이무영 차장 은 한류를 활용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M회(모임명 비공개)라는 모임을 만들어 사람 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다행히 2004년 이후 사모님들의 욘사마 에 대한 사랑으로 자 연스레 한류를 알게 된 바깥 어른들이 모임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한류가 주제이다 보니 비즈니스와는 관련이 없는 느낌마저 들었다. 이 모임의 주 활동은 한국식 회식 이다. 사실 한류로 포장한 한국식 회식문화 전파 모임 이란 이름이 더 어울릴 것이다. 일본의 회식자리에서는 보기 힘든 파도타 기 샷을 한다든지 돌아가며 한국 노래를 부르는 것도 메뉴 중 하나이다. 중간중간 한 국 가수의 콘서트나 영화를 함께 보러가며 모임 본연의 활동을 첨가해 오해(?)를 사 지 않도록 했다. 현재 약 50여 명의 열혈 회원들이 모여 새로운 한국음식점을 찾아다 니거나 신곡을 부르면서 친목을 다지고 있다. 일본의 회식문화보다 역동적이고 재미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 수년째 열성적으로 운영이 가능했다. 이러한 친목을 통해 더욱 신용을 쌓는다는 전략을 장기간 묵묵히 해온 결과는 놀라웠다. 해외조달이 제로에 가까웠던 일본 도요타 계열의 경차 1위 메이커인 다이 하츠(Daihatsu)사에서는 처음 그토록 냉랭했던 반응은 온데간데 없이 친KOTRA 1986 오사카 한국상품전 192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93 가 되었다. 2011년에는 처음으로 한국 부품을 채용한 경차 미라이스 가 발매되었고 시장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일본 10대 전력회사 중 하나인 관서전력도 한국으 로부터의 조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 인연을 계기로 2011년 대지진에 의한 원 자력발전소 사고가 났을 때 오사카 무역관을 통해 붕산을 긴급 조달하기도 하였다. 또한 한국으로부터 모자수입이 전혀 없었던 일본의 모자수입상들이 한국제품을 취 급하기 시작했다. 특히 다이하츠의 담당 이사는 겨울연가 이전부터 한국 드라마를 좋아했었다며 아랫사람들에게 자신이 원조라고 신참 한류팬들의 군기를 잡기도(?) 한다는 이야기 를 자랑스럽게 들려주었다. 또한 모자 수입기업 같은 경우는 한국식 회식문화에 너 무 경도된 나머지 자주 한국을 오가며 한국의 유흥문화에 빠져들어 회사가 부도가 났다는 다소 안타까운 사연마저 들을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성공사례들이 나올 수 있었던 이면에는 우수한 한국제품과 엔고 등 여러 가지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딱딱한 비즈니스 관계에서 머물렀다면 성공에 이르기까지 좀 더 먼 길로 돌고 돌아갔을 것이다. 한국문화에 점점 친숙해지 는 일본기업인들이 많아지는 것은 오사카 무역관으로서는 든든한 백만대군을 얻는 것과 같다. 따라서 열혈 한류모임은 앞으로도 계속 일본기업인들을 사로잡기 위해 묵묵히 뒤에서 역할을 다 할 것이다.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이무영(Ohba Arihioro) 1967년 출생 재일교포 3세인 이무영 차장은 한국어와 일본어 구사능력이 매우 뛰어나다. 그는 1997년 12월 24일 입사하여 무 역관 마케팅 담당으로 시장개척에 특화하고 있으며, 특히 핵심사업인 GP사업을 전략적으로 추진, 다이하츠자동 차(주)에 최초로 한국산 자동차부품을 공급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외에도 글로벌기업인 교세라, 파나소 닉, 오므론, 롬, 쿠보타, 관서전력 등 신규 GP사업도 발굴하여 시행 중이다. 그는 한번 인연을 맺은 한국 및 일본기 업에 대한 지속적인 사후관리로 고객으로부터도 높은 호평을 받고 있다. 193 Ⅰ. 무역관 이야기

194 Fukuoka 50개 무역관 이야기 후쿠오카 무역관 일본 4대 경제권역 중 하나이자, 규슈( 九 州 )지방 최대 도시이며 아시아에서 살기 좋은 도시로 손꼽히는 후쿠오카 시는 인구 약 140만 명, 연평균 기온 섭씨 15도이며, 예부터 외국과의 왕래가 잦은 지역이기 때문에 외국인과 외 국 문화에 개방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후쿠오카는 100여년 전 야하타( 八 幡 )제철소 등이 일본의 산업 혁명을 주도했던 지역이며, 21세기 세계경제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부산에서 뱃길따라 2시간이면 도착하는 후쿠오카.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만큼 한국의 흔적이 문화 깊숙이 남아있다. 이 지역 최대 명물인 명란젓, 곱창전골은 물론이고, 일본 최고의 도자기로 여겨지는 아리타( 有 田 ) 도자 기 역시 그 시류는 조선시대 도공이었던 이삼평( 李 參 平 )이다. 일본은 20년 넘게 불황에 허덕이고 있지만, 후쿠오 카는 동아시아와의 지리적 접근성을 무기로 부산-후쿠오카 자동차산업 경제권 등 다양한 구상을 통해 일본의 아시아 소통 창구로서 새로운 도약을 준비 중에 있다 무역관 개설 무역관 폐쇄 무역관 재개설 무역관 폐쇄 무역관 재개설 무역관 이야기 한일 정상회담과 진영 단감 긴급 공수작전 가고시마현( 鹿 兒 島 縣 )에서 개최된 한 일 정상회담에 노무현 대통령의 고향에서 온 진영 단감과 고이즈미 총리의 고향에서 온 밀감이 등장, 한일 정상회담의 분위기를 훈훈하게 하는데 일조하였다. 이번 정상 회담장 연출을 담당한 꽃꽂이 작가 긴가와 씨는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와 가고시마현 등 여러 기관의 협조와 열의가 어우러져 이번 정상회담장 연출이 가능 했다 며 감사해 하였다. 2004년 12월 17일자 남일본신문 기사의 한 부분이다. 2004년 일본 규슈 최남단 가고시마에서 개최된 한ㆍ일 정상회담에 진영 단감이 등장하게 된 사연은 이렇다. 정상회담 불과 10일 전인 12월 7일. 무역관 관할지역인 가고시마현의 바이어 Y 사로부터 인콰이어리를 접수하였는데, 문의내용은 가지에 달린 진영 단감 300개 수 배 였다. 전화로 사용 목적을 들은 무역관 직원은 바로 관장에게 보고하였고, 관장은 194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95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 직접 발벗고 나서 일을 진행하였다. 하지만 12월 엄동설한에 어디서 나뭇가지에 달린 단감을 구한단 말인가. 무역 관에서는 계절적 특성을 감안, 후식용 단감으로 품목을 변경하기로 바이어를 설득한 후, 관장이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김해 소재 K사를 통해 진영 단감 300개를 이틀만 에 겨우 확보하였다. 사연을 들은 진영농협 측이 최상 등급품을 고르기 위해 조합장 이하 조합원 전원이 매달려 이틀간 꼬박 감 고르기에 나섰기 때문에 가능했다. 단감 수배가 끝난 건 12월 9일. 정상회담용 식자재는 반드시 사전에 경호팀을 통해 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이번 정상회담용 식자재는 12월 13일까지 검사를 받아 야 했다. 즉, 늦어도 13일까지는 가고시마 정상회담장에 도착해야 했는데, 일본의 식 품 검역이 워낙 까다롭다보니 검역에만 평균 4~5일 정도가 소요되었다. 게다가 부 산-가고시마 간 직항편도 없기 때문에 후쿠오카를 거쳐 내륙으로 운반해야 하고, 아 무리 서두른다 해도 13일까지 운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단감 공수의 성패는 바로 통관 기간 에 달린 셈이었다. 무역관은 항공 EMS로 공수해서는 세관에 걸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K사 사장이 직접 단감을 휴대 반입하 여 가져오고, 무역관에서는 통관 시간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기 로 하였다. 하지만, 매뉴얼 왕국 일본 에서는 모든 것이 매뉴얼에 따라 움직이며, 책임소재 나 분쟁이 일어날 만한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뒤로 몰래 뇌물을 주고 처리한다거나 빽 을 이용한 처리는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무역관에서는 당시까지 그런 시도 를 한 적이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다는 판단에 관장 이하 전 직원들이 전화 기에 매달려 백방으로 전화를 걸기 시작 하였다.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 규슈 경제산업국, 후쿠오카무역회 등 관련기 관에 지원 요청을 구하였고, 마지막으로 관장이 직접 세관으로 찾아가 정중히 상 황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는 공문을 전 달하였다. 하지만 세관 측에서 돌아온 답변은 원칙대로 하는 수밖엔 없다 는 말 뿐이었다. 진영 단감 12월 10일, K사 사장이 단감을 들 고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하였다. 관장과 195 Ⅰ. 무역관 이야기

196 담당 직원은 한 시간 전 공항에 도착하여 세관으로 달려가 다시 한 번 정중히 설명하 고 빠른 통관을 부탁하였다. 이러한 무역관의 눈물 겨운 노력이 전달되었을까, 단감 은 이례적으로 아무런 제재 없이 무사 통과하였고, 진토박이 브랜드가 붙은 오리지 널 진영 단감은 무사히 가고시마 정상회담장까지 공수될 수 있었다. 바이어 측은 단 감을 접수하자마자 무역관으로 감사 연락을 해 왔으며, 가고시마현 지사를 포함 많 은 인사들에게 KOTRA 후쿠오카 무역관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단감을 공수해 올 수 있었다고 적극 홍보해 주었다. 금액으로 따지자면 100만 원 정도에 불과한 단감 몇 상자이지만, 한 일 양국 간 우의를 돈독히 하는 데에 쓰인 단감을 공수하는 데에 후쿠오카 무역관이 크게 공 헌하였다는 점에 덧붙여 지역신문에 KORTA가 크게 홍보되고, 지사를 포함한 여러 관계자가 크게 고마워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무역관장 이하 전 직원은 큰 성취감 과 아울러 고객 감동에 대해 다시금 실감할 수 있었다.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김용환 1972년 출생 후쿠오카에서 880km나 떨어진 도쿄의 다른 직장에서 근무하던 중, 후쿠오카 무역관의 직원 모집 공고를 보고 열 살 어린 아내와 무작정 면접 보기 위해 달려와 후쿠오카 무역관의 식구가 되었다. 10년간 마케팅 업무에 종사하면 서 풍부한 실전 경험을 쌓은 후쿠오카 마케팅맨으로써 지사화 업체들의 든든한 지원군으로 맹활약 중이다. 19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97 Manila 50개 무역관 이야기 마닐라 무역관 7,000여 개의 섬들로 구성된 필리핀은 1565년부터 에스파냐가 정복, 동양의 진주 로서 에스파냐의 대아시아무 역 거점이 되고 극동에서의 가톨릭 권력의 중추가 되기도 하였다. 1898년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에스파냐-미국 전쟁(Spanish-American War)으로 미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943년 일본 점령을 거쳐 1945년 미군이 탈 환한 후 독립하였다. 국명은 16세기 중엽 파견된 에스파냐 탐험가 빌라로보스(Ruy Lopez de Villalobos)가 당 시의 에스파냐 황태자인 필립의 이름을 따서 Las Islas Filipinas 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1억에 육박하는 인구를 보유한 필리핀은 국민 대부분이 영어를 구사하며, 문맹률이 10% 내외이고, 손기술이 뛰 어나고 부지런해 인적자원이 풍부하다. 필리핀이 최근 인도를 누르고 세계 최대 콜센터 소재지로 부상한 배경에 도 자유로운 영어구사와 친절하고 온순한 국민성이 한몫했다. 전 국민의 80% 이상이 가톨릭 신자인 필리핀 국민 들은 외국인에 대해 개방적이고, 문화적 이질감도 찾아보기 어렵다. 최근에는 한류 붐까지 불어 필리핀과 우리나 라가 한참 가까워진 느낌이다 무역관 개설 무역관 이야기 바나나 구상무역의 개가를 올리다 1983년 KOTRA가 고려무역의 수출실적을 확보 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때 필자는 12월 1일부로 마닐라 무역관에 발령받아 부임하 였다. 당시 해외 무역관은 고려무역 할당 실적을 올리지 못하면 소환 당하던 시절이 었다. 마닐라공항에 도착하니 전임 관장이 마중 나와서 첫 마디를 박형, 참 어려운 곳 에 부임하여 걱정입니다 라고 말하면서 고려무역 실적은 기대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때는 아키노(Benigno Simeon Aquino)가 암살되고 100여 일이 지난 시기라 필리 핀 정국은 극도로 불안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시기였다. 게다가 남부 도서지역에 서는 필리핀 공산당 전위부대 신 인민군(New Peoples Army)들이 수시로 출몰하여 국내 치안을 불안하게 하고 있었다. 진인사대천명( 盡 人 事 待 天 命 ) 이라는 자세로 시간이 날 때면 필리핀 정부의 관 료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러던 중 곤잘레스 상공장관이 마닐라 무역관을 방문하여 국방장관과 한국을 방문하게 됐다 고 밝히면서, 한국 방문에 대비해 경제적인 조언 197 Ⅰ. 무역관 이야기

198 을 청했다. 그래서 필자는 필리핀은 한국전쟁 시 도운 혈맹인 만큼 경제적인 지원을 요청할 때 가장 쉬운 방법인 바나나를 구매해주기를 간곡히 요청하라 고 조언하였 다. 그는 이를 청와대에 요청하여 바나나와 과자봉지 등 포장용 재료인 LDPE(Low Density Polyethylene)를 Barter trade 즉, 구상무역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추진은 시식단계부터 출발했다. 무역관은 바나나를 수입하기에 앞서 국영 바나 나공사에 연락, 바나나 견본을 보내라 했고 다섯 박스를 받아 대사관 직원들과 시식 해 보았다. 아울러 바나나 견본 다섯 박스를 필리핀에어라인 편으로 본사에 공수하 여 상공부와 KOTRA 본사 임직원들이 시식하고 필리핀산 바나나의 품평을 할 수 있 는 기회를 마련했다. 당시 국내의 바나나 가격은 한 송이(다발이 아니다)에 천원 안 팎이었다. 이렇게 하여 고려무역은 바나나를 수입하고 한양화학은 LDPE를 수출하 게 되었는데, 바나나 6,000톤(금액으로 240만 달러어치)은 LDPE 와 Back to Back L/C Base로 교환하는 개가를 올렸다. 필자는 그 공로로 그 해 상공부장관상을 받기 도 했다. 박영복 OB 피나투보 화산 탈출기 1991년 6월 15일 아침, 어제부터 내리는 비가 그치지 않고 있었다. 두 달 반 전에 첫 해외부임지 마닐라에 도착한 필자는 한국 필리핀 경제친 선협의회 주관으로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100km쯤 떨어진 바탄(Batan) 지역의 투 자환경 조사와 수출가공지대 견학을 위해 현지 한국대사관 앞에서 다른 일행들과 함 께 버스에 올랐다. 약 3시간을 달려 바탄지역 관리사무소에 도착하고 상세한 브리핑을 들었다. 이 어 오후 3시경 현지에 진출한 우리 기업을 방문하기 위해 출발하려는 참에 사방이 칠 흑처럼 어두워졌다. 일행 중 한 사람이 일식이라고 해서 필리핀의 일식은 우리와 다른 가 보다 하고 잠시 어리석은 생각을 했다. 타갈로그(tagalog)어로 나오는 차내 방송 은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찾아온 이 암흑이 바탄에서 북쪽으로 약 20km 떨 어진 피나투보(Pinatubo) 화산이 폭발하여 그 화산재가 짙게 하늘을 덮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안 것은 그 뒤 한 시간이 지나 서였다. 650년 만에 크게 폭발했다는 이 피나투보 화산에서 나 온 재는 차창에 반죽처럼 눌어붙어 와이퍼로도 닦여지지 않았 다. 시계 2~3m밖에 되지 않는 길을 버스는 엉금엉금 기어갔 파나투보 화산 다. 길 위를 덮은 화산재는 도로인지 주변 농지인지 알 수 없게 19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199 했고, 나뭇가지는 땅 끝까지 휘어졌다. 경찰과 바탄지역 관리사무소는 하룻밤을 그곳에 머무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했 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화산지역을 벗어나 마닐라로 돌아가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 다. 코앞에서 선도하는 경찰차의 어슴푸레한 등을 따라 번갈아가며 밖으로 나가 유 리창을 닦으면서 멀고도 먼 마닐라 길을 재촉했다. 마침내 밤 11시 마닐라에 도착했다. 마닐라 시가지도 온통 뿌옇게 변했다. 200명 이상의 사망자와 엄청난 재산피해를 가져온 이 재난에서 살아났다는 안도감을 뒤늦게 느꼈다. 최기형 현지직원 복 터진 마닐라 무역관 마닐라 무역관은 아마 KOTRA 110여개 무역관 가운데 현지직원 근무연수가 최장인 무역관일 것이다. 현재 마닐라 무역관에 근무 중인 현지직원(한국인 제외) 면면을 보면 Armi Abalos(19년), Carlos Alveyra(15 년), Alver Atengco(3년) 등 평균 근무연한이 12년을 넘는다. 특히 2008년 10월 퇴 직한 Celerino Renao는 32세에 마닐라 무역관에 입사하여 무려 39년 7개월간 근무 했다.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세리뇨 레아니오(Celerino Renao) 1937년 출생 71세에 퇴직한 Renao는 20년 이상 조사와 조사대행을 주로 수행한 그야말로 조사의 달인이었다. 그는 바이어와 웬만한 시장/통상 정보는 모두 갖고 있어 무역관 업무의 길잡이가 되곤 했다. 퇴직 무렵 정보의 보고인 그의 PC에 서 주요 DB와 자료를 소팅, 이관하는 데만도 꼬박 3일이 걸렸다고 하니 그 진가를 알만하다. 퇴직 직전에는 넘쳐 나는 업무에 독수리 타법 PC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애를 먹기도 했지만 무역관의 큰형(큰형이라기에는 너무 나이 가 많은가?), 조사전문가로 모든 타 직원을 보듬어 주던 직원이었다. 아미 아발로스(Armi Abalos) 1955년 출생 Armi, Carlos, Alver 등 다른 직원들의 무역관에 대한 애정과 기여도도 남다르다. 필리핀 통상산업부(DTI, Department of Trade and Industries)에 근무하다 무역관에 입사한 Carlos와 Alver는 무역관의 쌍두마차다. 하지만 특히 20년째 근무 중인 Armi는 최초 Receptionist 겸 업무지원직으로 입사하여 현재는 마케팅 업무를 담 당하고 있는데, 말 그대로 무역관의 산 역사이자 문제 해결사이다. 후진국 특성상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풀어야 하 는 문제가 종종 발생하는데, 그는 특유의 친화력과 풍부한 네트워크로 늘 해결사 역할을 한다. 199 Ⅰ. 무역관 이야기

200 Bangkok 50개 무역관 이야기 방콕 무역관 타일랜드는 본래 자유의 땅 이란 뜻인데, 이는 동남아시아 국가들 중 다른 나라에 의해 한 번도 정복된 적이 없는 유일한 국가란 점과 세계적으로도 이러한 국가가 몇 안 된다는 점에서 매우 적합한 국명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방 콕은 태국어로는 끄룽텝(Krung Thep : 천사의 도시)이라고 한다. 베트남 전쟁 중에 미국인들은 태국을 유흥지 로 이용하였고, 이로 인해 방콕 등지에 매춘지역이 형성되기는 하였지만 중 상류층 여성들의 태도는 빅토리아시 대의 사람들처럼 고전적이고 보수적이다. 태국은 2000년대 아시아를 휩쓴 한류의 발상지 중 하나이며 지금까지도 아시아에서 한류가 큰 영향력을 발휘하 는 곳이다. 방콕 무역관은 이러한 태국의 한류를 활용하여 2010년 최초로 방콕에서 한류스타라이센싱 박람회 를 개최하였다. 한류스타라이센싱제품, 방송사 드라마, 미용제품 등을 전시한 이 박람회에서는 부대행사로 한류 스타들의 콘서트도 개최하였다 무역관 개설(KOTRA 최초 설립 무역관 4곳 중 하나) 무역관 이야기 방콕 무역관은 1962년 공사 설립과 같은 해에 개설이 추진된 최초 4개 무역관 중의 하나이다. 방콕은 동남아의 거점 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ESCAP 등 UN 기구 가 다수 소재하고 있어 국제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고, 특히 월남전 (2차 1960~1975)으로 태국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 가 북한이 대표부를 설치하여 동남아 외교의 전초기지로 활용하고 있어서 태국은 남 북 대치 외교의 중요한 현장이기도 하였다. 태국과 우리나라는 경제개발계획의 수립 시행시기와 주기가 같아서 1962년부 터 5개년계획이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나라가 공업중심의 불균형 성장을 태국이 농 업중심의 불균형 성장을 택한 것만 달랐을 뿐이다. 우리나라가 중화학 중심으로 정 책을 전환한 이후에 태국은 공업화정책을 시작하였으므로 우리 경제의 발전과정에 태국의 관리 및 경제계 인사들의 관심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 태 상공회의소의 출범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파월 장병들의 방콕 체재로 유발되는 경제적 파급효과와 이권만으로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 200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01 하였다. 한창시절의 한 태 상공회의소 회원은 태국의 경제계, 군의 고위 장성, 고위 공 무원, 정치인 등으로 구성된 파워그룹이었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총선이 끝나면 회원 중에서 국회의원이 몇 명씩 나오고, 장관도 배출되곤 하였다. 방콕 무역관에 사무 국을 두고 매월 임원회의를 개최하여 양국 간 관심사항을 논의 하였다. 당시 회장은 방 콕대학 총장이, 간사는 공업성 과장이 맡고 있었다. 타 무역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 는 든든한 우군이 있었으나 방콕 무역관이 이를 얼마나 활용했는지는 미지수이다. 한 태 상공회의소 회원 중에 태국 재벌그룹 총수의 비서도 있었다. 어느날 그 가 내 방에 들어와서 대뜸 활명수, 박카스에 뒤이어 나온 최고의 히트상품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라면, 삼립빵, 플라스틱 바가지 셋을 들면서 그 중에 라면을 최고로 꼽 았다. 박카스가 히트한 사회적, 경제적 배경과 라면시장의 환경을 대비하여 설명해 주었다. 별 기대 없이 던진 질문에 의외의 답변이 나오자 대화는 길어졌고 진지해졌 다. 그때까지 나는 그 사람의 정체를 잘 모르는 상태였다. 그리고 여러 날이 지난 후, 그가 나를 그의 회장께 소개시켰다. 물론 회장의 승인 을 받고 마련한 저녁자리였다. 그 그룹에서 활명수와 박카스를 생산하고 있다는 사 실도 그때 처음 알았다. 당연히 대화는 한국경제, 그것도 1970년대 초반에 포커스가 주로 맞추어 졌다. 한국과 태국의 경제 시차를 약 십년으로 본 것이다. 별다른 전문적 지식 없이 그 당시의 우리 사회상을 얘기하는데도 정말 진지하게 들어 주었다. 상품 의 라이프 사이클과 시대적 배경을 중심으로 대화가 진행되었다. 상품조사부의 경험 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우리나라 경공업제품이 알고 보면 대부분 재봉틀에서 나온다는 것도 매우 재미 있어 했다. 의류뿐만 아니라 가발, 신발 등이 모두 재봉틀에서 나오는 제품이다. 1980년대 초에 우리나라를 떠난 나이키가 맨 먼저 이전한 곳이 태국이었고 나이키는 태국의 재벌급 기업 3개와 각각 OEM 방식의 제조를 막 시작한 시점이었고 당연히 회장의 그룹도 그 중의 하나였다. 나는 태국에서 나이키가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유는, 태국이 신발을 만들기에는 주변국에 비해서 이미 잘 산다는 점과 태 국은 덥고 비가 많이 오는 지방이라 신발문화의 깊이가 없다는 점을 들었다. 회장이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후일 비서를 통해 들었다. 이후 그 비서와는 항상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관계가 되었고 어느 날 그 회장이 상무성장관이 되었다. 그날 필자(무역관)가 잘 아는 사람이 장관이 되었다고 장문의 전문을 본사에 보고하였다. 그 비서는 막후에서 장관의 일정관리 등을 하면서 사실 상의 비서실장 역할을 하고 있어서 나는 급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의 도움 201 Ⅰ. 무역관 이야기

202 을 받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 하나를 소개한다. 1983년 10월 9일 버마에서 북한의 폭탄테러로 우리 정부의 각료 등 고위인사 17 명이 사망하고 40여 명이 부상한 아웅산 사태가 발생하자 태국정부는 제일 먼저 북 한에 대하여 외교적 조처를 단행하였다. 태국주재 북한대표부의 인원을 동결하고 충 원이나 대체가 불가하게 하는 한편 북한과의 무역거래를 금하였다. 2년여의 시간이 흐른 후, 북한은 태국과의 외교관계 개선을 위한 여러 방책을 동원하였다. 그 중의 하 나로 북한은 태국이 전량 수입하는 철강제품을 싣고 와 방콕 항에 정박시켜 놓고 상 무성장관과의 면담을 요청하였다. 당시 태국은 타피오카의 풍작과 가격 폭락으로 수 확도 포기한 채 밭에서 갈아엎고 있는 판인데 철강재와 맞바꾸어 가져가겠다는 거절 하기 어려운 조건을 제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던 나에게 상무장관의 비서로부터 전화가 왔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너희 대사가 북한의 외교적 노력을 저지하기 위해 우리 장 관을 만나려고 애타게 접촉하고 있으나 아무런 신호도 주지 않고 만나주지도 않고 있으니 네가 접촉 창구 역할을 자임하고 나서라 는 전화였다. 일부러 내게 중요한 역 할을 준 것이다. 고맙고 신나는 일이었다. 오후 7시가 지난 시간이었지만 대사관에 전화했다. 참사관이 받았다. 북한 상무 부차관의 방콕 방문건을 슬쩍 꺼내자 깜짝 놀랐다. 대사관이 엄밀히 추진하고 있는 일을 무역관의 말단이 알고 있는 것도 놀라운데 장관을 만나게 해주겠다고 자신있게 나서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마침 대사 이하 직원들이 대책회의를 하고 있는 참이라 대사님이 직접 다급한 목소리로 내일 오찬 면담을 주선해 줄 수 있느냐고 했다. 당연 히 하겠다고 했다. 이튿날 우리 대사와 태국 상무장관의 오찬회동이 있었고, 북한 상무차관의 태국 상무장관 면담 시도는 무산되었다. 태국 정부의 북한에 대한 제재조치가 유지된 것 이었다. 대사관은 외교적 노력의 성과를 거창하게 보고하였을 것이다. 무역관은 이 러한 사실을 본사에 보고 할 수도 없었다. 전상우 OB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몬랏따나 럿사타버디(Monrattana Lersatha-boadee) 1974년 출생 1996년에 채용한 위 현지직원은 태국의 명문 타마삿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0년 넘는 무역관 근무경험과 능숙한 일처리로 방콕 무역관 업무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지사화사업이 주 업무지만 태국 정부인사 접촉이 나 대형 프로젝트 발굴 등에도 경험과 노하우를 활용하여 효과적으로 일을 처리한다. 202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03 무역관 엿보기 6개월만 빨랐어도 방콕 무역관 방문의 첫 일과는 처음 입주했던 무역관 건물을 확인하는 일로 시 작되었다. KOTRA 출범과 같은 해에 최초로 개설된 4개 무역관(뉴욕, 홍콩, LA, 방콕) 중의 한 곳이기에 건물의 존재 여부를 추적하는 일은 긴장감마저 느 껴졌다. 반세기 전의 일이라 실마리를 찾기가 만만치 않았다. 손에 쥐고 있는 것 은 개설 당시의 주소 한 줄이 전부. OB 주소록을 펴놓고 연신 전화기 버튼을 누 르며 줄통화를 하던 권오석 관장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어쩌면 한 장 건질 수도 있겠는데요? 이내 현지 직원에게 쪽지가 건네졌다. 기대감에 마음이 살짝 부풀었다. 사전답사차 곧바로 떠난 직원이 도착 한 것은 두어 시간 후. 그가 프린트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재개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사진이었다. 2010년 레드 셔츠(Red Shirt)의 시위 때 주변 상가가 불타 올해부터 재개발을 추진 중이라는 설명이 뒤따라왔다. 6개월 전만 해도 남아 있었다는데 아쉽네요. 쯧쯧 태국 방콕에서 열린 Korea Entertainment Expo(한류스타 라이센싱 상품박람회) 태국은 동남아 한류의 발상지! 태국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중심시장으로 불린다. 아세안(ASEAN) 중 가장 개 방된 나라이고,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무역 주도국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때 문에 관광업이 번성해 세계적 관광대국의 입지를 다졌고, 일본과 미국을 필두 로 한 대외 의존형 시장이 일찍부터 형성되었다. 한국은 2010년 1월 양국 간의 FTA 발효를 계기로 기업들의 투자진출과 정부 발주 프로젝트, 한류 문화상품 수출 등이 활기를 띠고 있다. 태국은 동남아 한류의 발상지입니다. 여기 젊은이들 한류라면 사족을 못 써요. 한류 발상지의 증거라도 대듯, 권 관장은 2010년에 열린 Korea Entertainment Expo 얘기부터 꺼냈다. KOTRA 역사상 한류 스타의 부가상 품을 소재로 개최된 최초의 경제 한류행사였단다. 한류 콘텐츠에 대한 라이선 싱 박람회에 국내 45개사, 태국 15개사가 참가해 성황을 이루었고, 현지는 물 론 국내 언론에도 대서특필될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 방콕 무역관 직원들 203 Ⅰ. 무역관 이야기

204 태국은 세계로 요원의 불꽃처럼 번지고 있는 한류의 흐름을 한눈에 보여주는 압축판이기도 하다. 1990년대 에는 일본음악의 열풍을 대변하는 J-POP 이 대세였다. 2000년대 초반에 대장금 등 한류 드라마가 상륙한 이후 한국음악의 열풍으로 이어지면서 K-POP 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원더걸스의 노바디 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 도로 히트를 쳤고, 태국산 소녀그룹인 원더풀걸스 가 탄생하기도 했다. 방콕의 유명 백화점에는 슈퍼주니어 등 한 류 가수들의 앨범이 최고의 인기 CD군을 형성하고 있다. 방콕 무역관에서 2010년에 펴낸 태국 문화콘텐츠 시장 및 한류진출 현황 은 동남아 한류의 현황과 진출방안을 제시한 현지 보고서이다. 문화콘텐츠 중심의 한류는 이제 한 단계 진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동차부품과 정부 발주 프로젝트 등 도 덩달아 한류의 바람을 타고 있는 것이다. 2011년에 동남아 최초로 태국에서 열린 Korea Autoparts Plaza 와 KOTRA 본사에서 열린 Thailand Project Plaza 등이 그것. 마침 무역관을 방문한 그날은 국제 방산전시회가 열 리고 있었는데, 한국도 Korea Defense & Security 이름으로 행사에 참가해 주목을 받고 있었다. CSR로 경제 한류 붐을 확산 시키다 무역관 개설 반세기를 맞이하는 곳답게 방콕 무역관은 글로벌 사회공헌활동에 도 모범이 되고 있다. 경제 한류 붐을 강화하는 취지라지만 그 근저에는 태국에 빚지고 있는 한국의 보은 의미가 배어 있다. 6 25때 태국이 우리를 많이 도와 주었습니다. 아시아 국가에서 가장 먼저 지원 의사를 밝혔고, 1950년 11월 7 일 1만 3,000명의 파병군이 부산항으로 들어왔어요. 전사자가 136명이나 되 고, 쌀도 4만 톤을 지원했고요 이런 연고로 2011년에 태국에 있는 한국전쟁 참전용사촌에서 후손 100명 에 대해 장학금을 전달했다. 이 행사에는 대사관, 한 태상공회의소, KOTRA가 함께 참여했다. 이밖에도 방콕 무 역관은 현장 밀착형 방문 봉사활동을 주도하고 있다.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은 한류 붐을 일반 소비자들이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의미도 큽니다. 행사 참석자 대상으로 우리 직원들이 한류의 주요 분야별로 진출현황 등을 설명해주는데, 호응이 아주 높습니다. 이래저래 코트라 맨은 참 애국 많이 합니다. 하하. 닿았다. 권 관장 특유의 빵 터지는 웃음에 맞장구를 쳤다. 애국이라는 추상명사가 참 간단하고도 명료하게 가슴에 와 방콕 에메랄드사원 204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05 Sydney 50개 무역관 이야기 시드니 무역관 1770년 제임스 쿡(James Cook) 선장이 호주 연안에 도착하고 1788년 1월 11척의 영국 선박이 700명의 죄수 와 그들을 지킬 간수를 데리고 현재의 시드니 남동쪽에 위치한 보터니 만(Botany Bay)에 닻을 내렸다. 아서 필 립(Arthur Phillip) 선장은 항해를 계속해 북쪽으로 8마일 떨어진 곳, 수심이 깊은 수로로 들어섰다. 필립 선장은 그곳에 깃대를 꽂고 영국령으로 선포하며 시드니 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당시 영국 내무장관이던 비스카운트 시드니(Viscount Sydney)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영국 식민지였던 이 섬대륙은 1901년 1월 1일 영연방국 가를 표방하면서 영국에서 독립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 후 시드니는 급속도로 번성하였고 1932년에는 시 드니의 명물 하버브리지(Harbour Bridge)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1957년 시드니의 최대 예술품인 오페라하우 스(Opera House)가 설계되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그로부터 16년 후인 1973년에야 완성되었다. 한국의 해외 광산물 총 수입의 약 40%가 호주로부터 수입되는 등 호주는 우리나라 자원 조달의 중요한 파트너이다 무역관 개설 생활 및 근무 여건 호주는 국토의 39%가 열대, 61%가 온대 기후대에 속하는 데, 서부의 40%와 북부의 80%는 열대성, 남부는 온대성, 중앙부는 대륙성 사막기후이다. 연평균 강우 량은 465mm로 세계 6대주 중 가장 건조하며, 남반구에 위치한 관계로 북반구와는 정반대의 계절 순환을 나타내고 있다. (동절기 7~9월, 하절기 12~2월) 시드니와 멜 버른은 하절기 낮 기온이 섭씨 평균 30도, 동절기 최저기온은 섭씨 평균 5도 내외로 기후 조건이 매우 좋다. 호주는 제조업이 금융 서비스업, 광업, 농 축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하 여 대부분의 공산품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산 자동차, 가전제품, 선박, 철강제품, 석유제품의 수출이 비교적 호조를 보이고 있으며, 아울러 한국제품 의 브랜드 이미지가 상승하고 있어 한국산 제품에 대한 호주 소비자의 호응도가 높 은 편이다. 하지만 일부 소비재의 경우, 서유럽과 미국의 고급 브랜드제품과 중국, 베 트남 등 개도국의 가격경쟁력을 앞세운 제품 등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어 우리나라 제품의 시장진출 확대가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205 Ⅰ. 무역관 이야기

206 무역관 이야기 2002 월드컵이 맺어준 귀중한 인연 2002년 한 일 월드컵 시절이었다. 의료관련 장비와 기자재를 취급하는 M사 대표인 Ian이 시드니 무역관의 적극적인 상담주선 으로 국내 지사화 업체인 D사를 방문하기 위하여 방한하였다. 그 때가 지사화 도입 초기인데다가, 바이어도 호주에서는 회사 규모도 크고 또 관련협회 회장도 맡고 있 는 등 제법 알려진 인물이어서, 시드니 무역관의 지사화 담당 H직원이 동행하게 되 었다. 무역관 주선으로 한국을 방문하는 바이어가 한두 명도 아니고 수시로 발생하는 무역관의 일상적인 업무의 하나이지만, 지사화 사업 도입 초기에 지사화 관련 방한 바이어는 아마 지금보다는 좀 더 융숭한 대접을 받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한 개 업체 방한하는데 지사화 담당자가 동행한다는 것은 지금 같으면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타 행사와 병행하여 BTG(Business Tour Group)나 정기방문과 겹치면 얘 기는 다르겠지만. 월드컵 기간 중인 2002년 6월 지사화기업 D사를 방문하여 상담한 후, 지사화기 업 사장과 한국 소주를 곁들인 한식을 즐기고 있었다. 소주를 몇 잔 주고 받으면서 분위기가 고조되자 바이어가 느닷없이 월드컵 축구를 관람할 수 있겠느냐고 D사 사 장과 무역관의 H직원에게 물었다. 호주에 오랫동안 거주하고 있는 지사화담당자인 H의 입장에서는 월드컵 축구 경기 관람에 대한 정보도 별로 없고, 티켓 구입하는 방법도 모르고, 가장 중요한 비용 면에 자신이 없어서 망설이다가, KOTRA 본사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다. 마침 KOTRA 본사에서는 방한 바이어들에게 월드컵 예선경기 입장권을 구입하여 제공 하는 이벤트 행사를 하고 있어서 즉시 입장권을 제공해 주었는데, 그 경기가 수원에 서 열린 한국과 이탈리아 간 경기였다. 영국계로 축구광이었던 M사의 Ian은 KOTRA에서 입장권도 구입해주고 지사 화 담당자의 안내로 수원까지 가서 당초 예정에 없었던 월드컵 경기를 뜨겁게(?) 관 람할 수 있게 되었다. 월드컵 경기 관람 다음날 하루 일정으로 서울 시내 관광을 하기로 스케줄을 짠 Ian이 갑자기 H직원에게 D사를 다시 방문하자고 하였다. Ian에게 다시 방문해야 하 는 이유를 물어 보니, 월드컵 축구 티켓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H직 원은, 비용은 이미 KOTRA에서 지불하였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업체 방문에 동 행하게 되었다. 20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07 지사화기업 D사를 다시 방문한 바이어는 월드컵 축구 관람료라며 그 자리에서 D사의 의료용카트 1컨테이너를 바로 주문하였다. 물론 첫 방문 미팅에서 제품에 대 한 호감과 경쟁력을 확인한 바이어였지만, 귀국 후 정식 구매를 할 수 있었음에도 불 구하고 하루 관광스케줄을 취소하고 업체를 재차 방문하여 주문할 줄은 아무도 예상 하지 못한 일이었다. 월드컵축구 관람에 대한 답례 때문에 제품을 구매하지는 않았을 것이었음에도, 아무튼 KORTA 본사, 시드니 무역관의 지사화 담당 직원, 한국의 D 지사화기업, 그 리고 바이어 모두 한일 월드컵 개최기간 중 이루어진 방한을 계기로 한국상품의 구 매로 연결된, 지사화사업 도입 초기의 훈훈한 성공사례라 아니할 수 없다. 방한을 통하여 한국과 한국기업에 대해 잊지 못할 추억을 갖게 된 유력 바이어는 그 해 크리스마스파티에 시드니 무역관의 H 직원을 초대한다는 초대장을 송부해 왔 다. H 직원이 부부동반으로 파티 장소에 도착하니 시드니 항구 중에서도 호화유람선 이 정박해 있는 최고급의 동네였다. 정박해 있는 호화유람선에 초청받은 손님들이 속 속 배에 올라타는데, 유람선 입구에서 밝게 인사하는 호스트는 바로 Ian이었고, 참석 한 손님들이 호주 정재계에서 알아주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것이었다. Ian은 시드니 에서 전통유람선 소유주의 모임도 이끌고 있었고, 회원들 대부분이 지역유지들로 만 나기 어려운 사람들이었는데, 초청받은 인사들과 꼼짝없이(?) 세 시간을 중간 기착지 없이 호화유람선 안에서 라이브쇼도 감상하고 산해진미도 즐길 수 있었다. 호주의 유력인사들과 활발한 네트워킹을 나눈 H 직원은 그 이후로 지사화사업 업무를 진행하는데 Ian으로부터 여러모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임형수 1963년 출생 2003년 1월에 입사한 임형수 직원은 무역관 지사화사업과 마케팅 업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현재는 지사화사업의 팀 리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한국에서 포항제철 엔지니어로 근무하다가 1991년에 호주로 이민을 와 약 7년간 모조장신구 무역회사를 운영한 경험이 있다. 207 Ⅰ. 무역관 이야기

208 Yangon 50개 무역관 이야기 양곤 무역관 정식 국명은 미얀마연방(Union of Myanmar)이다. 1885년 영국의 식민지가 되어 아시아 식민지의 거점이 되 었고 1948년 1월 4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며 국호를 버마연방(Union of Burma)이라 하였으나 1989년 6월 지금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인도지나반도 서북부에 위치한 미얀마는 해안선의 길이가 1,930km에 달하며, 면적 은 67만 8,528km 2, 인구는 4,700만 명(2008년 현재)이다. 수도는 양곤(Yangon)이었으나 신행정수도 네피도 (Nay Phi Daw)가 건설되었다. 미얀마는 135개 종족(버마족이 70% 차지)이 어울려 구성된 나라이다. 2011년 4월 49년간의 군정통치를 마감하 고 민간정부에 정권을 성공적으로 이양하여 민주국가로 첫발을 디디고 국제사회로의 진출을 본격화하고 있다. 미얀마는 1983년 10월 9일 북한요원의 아웅산(Aung San) 묘역 폭탄테러사건으로 온 국민을 전율케 했던 무대 이다. 하지만 그 악몽은 세월에 묻히고 2002년 드라마 <가을동화> 이후 한류열풍이 불었다. 양곤에는 150여 개 의 한국기업이 진출해 있고, 약 1,000명의 한국인이 체류하고 있다 무역관 개설 무역관 이야기 아웅산 사건을 곡함 1983년 10월 9일의 아웅산 묘역 폭탄테러사건은 청천벽력이 었다. 북한 요원이 설치한 폭탄이 터져 서석준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 이범석 외무 부장관, 김동휘 상공부장관,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 등 고위인사를 포함하여 한국 인 17명과 미얀마인 4명 등 21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한 사건이었기 때문이 다. 당시 양곤(랭군) 무역관장이었던 장소웅은 1983년 12월 31일자 일간 해외시장 부록으로 발간된 사보 코트라 에 고 김동휘( 金 東 輝 ) 상공부장관님이 가시던 날 이 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지나친 경어체는 오늘에 맞도록 바꾸었다. 김동휘 상공장관님이 대통령님 내외분을 수행하여 오지 랭군에 도착했을 때가 10월 8일 오후 4시 30분, 공항 하 늘은 다섯 달 동안의 지루했던 장마(monsoon)의 끝마무리여서 오랜만에 쾌청, 군데군데 뭉게구름이 파란 하늘 에 떠돌고 있어 국빈을 맞이하는 잔치 기분을 더해주었다.(중략) 다음날은 일요일, 바로 장관님께서 우리들 곁을 떠나시는 날이었다. 그것도 이역만리 랭군에서 말이다. 전날 장관님은 자정이 다 되어가도록 나와 비서관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또한 몇 가지 자료를 부탁하여 그날은 아침부터 장관님을 방으로 찾아뵈었다. 그때 장관님은 오전 10시 30분으로 예정되어 있는 아웅 산 장군 묘역 헌 20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09 화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새옷을 갈아입고 있었으므로 부탁한대로 호텔보이 등에게 쓸 현지화 잔돈 지폐를 내어 드렸다. 자상한 성격 그대로 장관님은 전날 나에게 종업원들 팁에 쓸 현지화를 새 돈으로 환전하여 오도록 부탁했 고 받은 후 돈의 모양과 가치를 한동안 물어보았다. 그리고 그중 일부를 접어 지갑에 넣은 후 나머지는 나에게 돌 려주어 지금도 가지고 있다. 이윽고 장관님은 만면에 웃음을 띠우고 호텔방을 걸어나가며 나에게 아웅 산 묘소를 다녀와서 이곳 주재 상사원 들과 오찬을 같이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며 이의 주선을 부탁하였다. 그것이 내가 장관님을 살아생전의 모습으로 뵐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 되었다.(중략) 절에서 길( 道 )을 찾다 미얀마는 전 국민의 90% 이상이 불교신도이며, 미얀마 전역 에 수만 개의 사원이 건립되어 있는 명실상부한 불교의 나라이다. 미얀마에서는 10살 정도가 되면 싱퓨도 라는 의식을 진행하는데 고타마 싯다르타의 행적을 기려 2주 정 도 절에서 생활한다. 일종의 스님 체험의식인데 이러한 싱퓨도 의식을 거쳐야만 비로 소 스스로 책임과 자아를 갖춘 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된다. 이러한 의식은 어렸을 때 뿐만 아니라, 성인이 되어서도 언제든 가능하다. 만약 일을 하다가도 아~ 불교의 가 르침이 필요하다 는 생각이 들 때는 언제든 삭발하고 절에 들어갈 수 있다. 보통 2주 내지 한 달 정도 명상과 가르침을 받는데 이러한 불교 귀의에 대해 사회 전반적인 분위 기도 너그러운 편이다. 때는 2010년 3월, 미얀마의 지사화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H사는 미얀마 발전소 설비 부품 시장개척을 위해 양곤 무역관을 방문하였다. 이미 바이어와 여러 차례 의 견을 주고받았으며, 이번 방문은 가장 중요한 부분인 정부 승인을 받기 위해 바이어 와의 공동 설명회 개최를 논의하려는 것이었다. 바이어는 군부 측 주요 인사로서 미 팅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설명회를 10월에 개최하는 것으로 하고 4월에 양곤에 서 다시 만나 서로의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수정, 보완하는 작업을 거치기로 하였다. H사의 사장님도 출장성과에 만족하여 4월 재방문을 기대하며 귀국하였다. 재방문이 예정된 4월이 다가오기 얼마 전, H사 사장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 동안 메일 회신이 빨랐던 바이어에게서 도통 회신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이상한 생각 이 들어 무역관에서 연락을 시도해 보았으나 모든 연락이 두절되었고, 바로 사무실 을 찾아갔으나 사무실마저 폐쇄되어 있었다. 방문일은 다가오는데 바이어가 행방불 명이 된 것이다! 무역관에서는 바이어의 거처 확인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조사하고 있었으나 도무지 오리무중이었다. H사 사장님과 무역관 지사화 담당자는 1년 넘게 진행해온 프로젝트가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게 어딘가 하는 조바심에 발만 동동 굴렀다. 차일피일 시간은 흘러가고, 도무지 바이어의 출처는 잡히지 않는 상태에서 일단 H사 사장님은 원래 일정에 맞춰 양곤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209 Ⅰ. 무역관 이야기

210 양곤을 방문 한 당일에 드디어 문제의 바이어 소재의 가닥이 잡혔다. H사 사장 님 방문 픽업을 위해 공항에 도착한 지사화 담당자는 우연히 공항에서 지인을 통해 그 바이어가 절에 들어갔다는 황당한 말을 듣게 되었다. 귀의한 절을 물어보니 양곤 인근 B라는 지역의 절이었다. 다음날 H사 사장과 지사화 팀장은 차를 렌트하여 B지 역의 절을 샅샅이 뒤졌다. 정장 입은 두 명의 외국인이 미얀마 절을 방문하여 사람을 찾다보니 인근 현지인들이 몰리게 되었고, 몇몇 절에서는 이것도 인연이라며 잠시 앉 아 큰 스님의 말씀까지 듣는 영광을 누렸다. 일부 절에서는 절 구경을 시켜 주겠다며 유창한 영어를 사용하는 스님에게 절의 건립배경과 역대 스님들 소개 및 상좌부 불교 의 대한 설명까지 몇 시간에 거쳐 종이에 받아 적으며(?) 들을 수 있었다. 덕분에 두 사람은 정말로 불교 교리의 지식을 약간이나마 갖추게 되었다. 꼬박 하루를 허탕친 끝에 드디어 절에서 그 바이어를 만났다. 바이어 말에 의하 면 H사 사장에게 갑작스럽게 절에 들어가게 되니 방문 일정을 3주 정도 연기해 주기 바란다는 내용의 메일을 급하게 보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확인결과 당시 미얀마 인 터넷 사정이 열악하여 메일 내용이 발송이 안 된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왔으니 그냥 갈 수 없다하여 바이어는 절에서 프레젠테이션 자료 검토를 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그건 아무래도 정서상 무리일 것 같아 다른 장소에서의 미팅을 요청했고 결국 주변 노점상으로 결정되었다. 미얀마의 노점상은 흔히 말하는 목욕탕 의자와 그것보다 약 간 큰 테이블이 마련된 정도이다. 거기서 세 사람이 노트북을 들고 영어, 미얀마어, 한국어로 미팅을 진행하게 되 니(게다가 두 사람은 정장, 한 사람은 승복) 동네 사람들이 전부 모여 들어 우리의 발 표관련 내용을 듣고 있었다. 정말로 많은 분들이 모여서 실제 프레젠테이션에 앞서 예행연습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주민 가운데 몇 사람은 실제로 의견까지 제시해 주었다. 이런 노력 때문이었을까? 10월에 있었던 발표를 성황리에 끝낸 H사는 미얀 마에 성공적으로 안착하게 되어 차기 프로젝트를 준비 중에 있다. 그러나 지금도 H 사 사장과 지사화 담당자는 불교의 교리에 대해 서로가 틀렸다고 옥신각신이다.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세인 수기 툰(Sein Shwe Tun) 1985년 출생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현지직원은 2009년 2월에 입사했다. 미얀마 제2의 도시인 만달레이에 소재한 만달레이 외대 한국어과를 졸업한 그는 한국에 유학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어에 능통해 대통령 면담 등 중요한 공 식행사의 전담통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또한 무역관의 정부, 유관기관과의 소통창구 역할을 하면서 담당업 무에 전심전력을 쏟고 있다. 210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11 Hanoi 50개 무역관 이야기 하노이 무역관 베트남의 천년 고도 하노이는 지형적으로는 해발 3,143m의 판시빵(Phan Xi Pang) 산이 위치해 있는 산맥 줄 기를 경계로 하고, 중국 운남에서 시작된 홍 강(Red River)에 의해 형성된 평야지대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다. 하노이란 강과 강 사이를 뜻하는 중국어 하내( 河 內, Ha Noi)를 음차한 명칭으로 홍 강의 토사가 퇴적되어 이루어 진 곳이라는 뜻이다. 1883년 프랑스 인도차이나 연방의 수도가 되어 프랑스풍으로 재건축되기 시작한 하노이는 1945년 8월혁명(베 트민 越 盟 이 정권을 장악한 혁명) 이후 공식적인 베트남의 수도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1946년부터 프랑스의 도시 점령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수도로서의 위치는 1954년 제네바 협상이 이루어진 이후라고 할 수 있다. 하노이는 1976년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의 수도가 되면서 주변 4개 지역을 편입하여 산업지역으로 정하였다 무역관 개설 남북으로 1,700km나 길게 이어지는 베트남의 지역적 특성에 따라 KOTRA는 수도인 하노이와 남부 경제중심지인 호치민 에 두 개의 무역관을 운영하고 있다. 1986년 베트남의 개방개혁 정책(Doi Moi) 실시 후 한국과 베트남의 무역 투자 교류 가 꾸준히 증가함에 따라 1996년 12월 20일 하노이 무역관이 개설되었다. 1인 무역관으로 출발한 하노이 무역관은 15년 만에 본사파견 4명, 현지직원 8명, 투자유치 전담직원 3명이 근무하는 대무역관이 되었다. 생활 및 근무 여건 하노이지역의 기온은 최저 섭씨 8도, 최고 섭씨 44도이며, 4계절이 존재하나 한 국만큼 뚜렷하지 않다. 5월에서 8월 기간 동안은 낮 최고 섭씨 37~38도에 습도가 88%를 웃도는 무더위가 지속되며, 1 2월은 최저 섭씨 8~10도, 최고 섭씨 18~20 도, 습도 82%로 다소 쌀쌀한 편이다. 흔히 베트남을 오토바이 천국이라고 한다. 2010년 베트남 도로교통국 발표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3,000만 대의 오토바이가 보급되었고 하노이, 호치민 등 주요 도 시에는 3명당 2명이 오토바이를 보유하고 있다. 하노이 인구를 650만 명 수준으로 본다면, 하노이 시내에는 적어도 435만 대의 오토바이가 돌아다니는 셈이다. 오토바 이들이 도로를 점유하고 있어 차량과 접촉사고가 빈번히 일어난다. 시간관념은 떨어진다. 베트남 타임 이 있어 약속시간보다 10분~20분 늦는 것 은 흔한 일이다. 비즈니스 상담회를 준비하면 이점에서 애로가 많다. 정시에 도착하 211 Ⅰ. 무역관 이야기

212 는 사람은 50% 미만이고, 심지어 나타나지 않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베트남은 공적개발원조(ODA)와 외국인 투자가 경제를 견인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6년 도이 머이(Doi Moi) 라는 슬로건 하에 실용주의 경제정책을 도입하였고, 1990년대에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등 국제사회에 편입되기 시작하였으며, 2007년 1월,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였다. 한국의 여러 기업들은 베트남이 보유한 내수시장의 잠재력, 양질의 노동력, 풍 부한 천연자원 그리고 양국의 문화적인 유사성으로 인해 베트남을 최고의 투자 적격 지로 꼽는다.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인 베트남의 특수한 법률, 행정제도, 투자제도를 익히고 노동관행과 문화를 현지인의 시각에 맞추어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무역관 이야기 베트남 한류를 이용, 한 바탕 굿판을 벌리다 필자가 2004년 1월 말 하노이 무역관장으 로 부임할 당시 베트남에서 한류는 이미 확산 추세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상상 을 훨씬 초월하고 있었다. 그 당시 방영된 <별은 내가슴에> 등 한국 드라마 덕분에 안재 욱과 김남주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기세였고, 특히 김남주가 CF 모델로 나온 LG 드봉 화장품은 외국 화장품 중에서 60% 가까운 시장점유율을 보일 정도였다. 심지어 우리 나라 탤런트들이 드라마에서 보여준 헤어스타일은 드라마 방영 1주일 후면 미장원에 머리하러 온 베트남 여인들의 성화에 못이겨 짝퉁 헤어스타일이 만들어질 정도였다. 부임 후 6개월쯤 지나 필자는 한류를 활용하여 사업을 개발할 수 없을까 고민하 다가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다. 대사관에 근무 중인 산업자원부(현 지식경제부) 소속 남기만 상무관과 대사관의 경제담당 공사, 그리고 유태현 대사 같은 공범(?)들 의 헌신적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선 필자는 베트남 진출기업 상품전시회 (Korean Products made in Vietnam Show)를 개최하고자 마음먹고 이 계획을 먼 저 상무관에게 알렸다. 남기만 상무관은 정말 좋은 아이디어라며 대사님께 계획서 를 설명하고 한번 추진해 보자고 맞장구를 쳤다. 사업계획서와 소요예산을 하루 만에 작성, 대사님께 아이디어를 보고 드렸더 니 그러지 않아도 한-베트남 수교 12주년 기념사업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했는데 마침 잘되었다며 12월 중에 추진하자는 재가가 2004년 베트남 한국상품전 났다. 어차피 KOTRA 본사 평가와는 무관한 그야말로 KOTRA 의 존재감을 현지에서 알리기 위해 하노이 무역관이 독자적으로 212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13 최초로 개최하는 한국상품전시회인 만큼, 전시 상품도 현지에 진출해서 제품을 생산하 는 우리기업 제품들로 국한시켰다. 필자는 8월부터 현지 진출기업들을 수시로 만나 이 전시회의 필요성과 성공적 개최 시 기업과 제품의 위상이 어떻게 변화할지에 대해 설명하며 참가를 권유하였다. 수차례의 합동회의를 거쳐 전시회 및 부대행사 프로그램 개발, 인테리어 장치 및 각 종 디자인 등 세세한 점까지 신경을 써서 완성도가 높은 전시회를 준비할 수 있었다. LG전자, 대우자동차(현 GM 대우), 대우전자, SK텔레콤, LG생활건강(드봉 화장 품), 미원 등 베트남 북부에 진출한 우리나라의 대기업들이 참가하기로 했다. 신원(섬유봉제), 가네트 남딩(섬유봉제), 한국라면, 코나(침낭 및 이불보), 베트 남 진출 섬유기업연합회 등 베트남 현지에서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중견기업들도 참 가의사를 표명했다. 이에 하노이 시내 장보(Giang Vo) 전시장의 한 홀을 통째로 빌 려 각종 가전제품, 자동차, 휴대폰, 화장품, 식음료, 의류, 침낭, 라면 등 우리 기업들 이 베트남에서 생산하고 판매하는 거의 모든 제품을 출품하였다. 참가비용은 참가기 업들이 모두 부담하는 것으로 추진하였다. 그런데 마침 베트남을 방문 중이던 이희 범 당시 산업자원부장관께서 주베트남 한국대사로부터 이 전시회 계획에 대한 설명 을 듣고 예산의 절반을 지원해주는 행운도 따랐다. 12월 5일부터 10일까지 6일간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서 개최된 한국상품전시회 개 막식에는 베트남 상무부장관을 포함한 유력인사들이 대거 참석하였고, 현지 국영 TV 와 일간지들은 이를 대서특필하였다. 전시회 기간 중에는 약 2만 명의 인파가 몰려와 대 2004년 베트남 한국상품전 213 Ⅰ. 무역관 이야기

214 성황을 이루었다. 특히 매일 오전, 오후 두 번에 걸쳐 경품 추첨을 할 무렵에는 야외무대 가 무너질까 걱정을 할 정도로(경품이 TV, 냉장고, 에어컨 등 고가의 제품이었음) 인파 가 몰려왔다. 한편 우리 대사관에서는 상품전시회 전후 기간에 한-베트남 양국 수교기 념 각종 문화행사를 개최함으로써 이 전시회와 부대행사 모두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부대행사로는 한-베 서예전, 황진이 오페라 공연, 한-베 사진전시회, 남사당패 사물놀이 공연, 한국기업 베트남 근로자 한국노래자랑 등이 열렸는데 압권은 한국기업 에 근무하는 베트남 근로자들의 한국 노래자랑이었다. 특히 대우호텔 내 큐(Q) 가라오 케의 음향기기를 이용한 예선을 거쳐 전시장 앞마당 야외무대에서 개최된 본선에서는 쥬얼리, 왁스, 심수봉, 임주희 등 우리나라 유명 가수들의 노래를 베트남 근로자들이 경 쾌한 율동을 곁들여 불러댐으로써 축제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상품전시회가 폐막된 후 침낭 제조업체 사장은 이 전시회에 참가하여 베트남 사람 들이 자사 브랜드가 한국 투자기업이라는 사실을 알고 품질에 신뢰를 보내 시장점유율 1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고 고마워할 정도였다. 노래자랑 행사에 참가했던 우리 진출기 업 법인장들은 행사 후 직원 간에 단합이 잘 되어 생산성도 올랐고, 심지어 회사 내부행 사에서도 예전에는 베트남 가수들을 초청하여 행사를 치렀으나 이제는 그 당시 출전했 던 댄스팀과 가수들이 직접 행사를 할 정도로 단합을 이뤘다고 술회한 바 있다. 무역관장인 필자가 본사의 지원 없이 단독으로 이렇게 큰 행사를 독자적으로 치 르고자 결심했던 배경은 크게 보면 두 가지였다. 첫째, 한류를 이용하여 현지에 이미 진출해 있는 우리 기업들의 내수확대 기회를 제공하는 현지화 전략이 필요하다. 그런 데 만약 본사의 예산지원을 얻어 개최할 경우 본국으로부터 중소기업 참가를 거절할 명분도 없고, 성약액이나 고객만족도 등 계량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었 다. 둘째, 우리 KOTRA의 업무는 국내기업 수출위주로만 편중된 감이 있어 한국 대 사관이나 진출기업들이 현지에서 추진하는 양국 간 상호 협력 프로젝트들과 충돌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행사를 개최함으로써 KOTRA의 역할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일거에 타파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KOTRA가 단순히 국내 중소기업 제품 을 주재국에 팔도록 지원하기만 한 기관이 아니라 주재국과 협력하여 윈윈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협력자라는 인식을 심어주려고 했던 것이다. 김영웅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짠 하이 옌(Ms. Tran Hai Yen) 1975년 출생 2006년 단기 용역직원으로 무역관과 인연을 맺은 후 2008년 1월 지사화 전담직원으로 채용되었다. 무역관의 맏 언니이자 살림꾼 역할을 하는 그녀의 책상에는 베트남 산업별 바이어 명함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다. 모르는 것 은 Ms. Yen에게 물어라 할 정도로 무역관 현지직원들의 대명사이다. 214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15 Ho Chi Minh 50개 무역관 이야기 호치민 무역관 유럽 열강의 해외 식민지 개척 대열에 합류한 프랑스가 베트남 남부를 손에 넣고 도시 이름을 사이공(Saigon)이 라고 개명한 것은 1859~1861년의 일이었다. 프랑스의 지배 하에서 사이공은 고무, 쌀, 경목을 수출하는 국제항 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났을 때, 베트남은 어마어마한 규모로 파괴되고 말았다. 도시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아 호치민 시티 로 개명되고 엄격한 공산주의 정치와 고립의 시절을 보내면서 사회, 물리적인 구조가 활발하게 재편되었다. 1990년이 되자 베트남 정부는 개방무역을 재개했다. 도이 머이(Doi Moi)는 1986년의 베트남 공산당 제6차 대회에서 제기된 슬로건이며, 주로 경제(가격의 자유화, 국제분업형 산업구조, 생산성의 향상), 사회사상 면에서 새로운 방향 전환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이 용어는 응우 옌 쑤언 오아인(Nguyen Xuan Oanh) 박사가 1982년 새로 만든 베트남어이다. 도이 머이는 공산당 일당 지배 체제를 유지하면서, 사회주의 지향형 발전 의 이념을 계승하였다. 베트남은 시장 경제를 도입하고 대외개방정책 을 실시하여 경제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무역관 개설 월남 패망( ) 직전 무역관 폐쇄 무역관 재개설 2년 걸린 무역관 개설 중국, 소련 등 동구권 국가들과의 수교를 위한 첨병으로 무역관이 설치되던 시기, 공사는 정부의 방침에 따라 1990년 12월, 1975년 공산화와 함께 폐쇄된 호치민(구 사이공)무역관을 재개설하기 위하여 개설요원을 파견하였다. 개설요원은 Palace호 텔에 임시사무실을 설치하고 무역관 개설작업을 추진하였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귀임한다. 베트남 정부가 1986년 도이 머이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지만 1975년 베트남 통일 이후 정부 또는 민간차원의 교류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베트 남 관료들이 무역진흥기관으로서 KOTRA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였다고 한다. 1992년 초 베트남 부수상(Mr. Le Huu Duyen)이 수교협상을 위한 방한계획이 결정된다. 개설요원은 수교협상 의제 설정에 무역관 설치를 포함시키는 것이 관건이라고 판단하고 베트남 상공회의소를 접촉하여 양기관 간 협력을 위한 합의서를 체결하 자고 제안한다. 그 결과 베트남 부수상이 한국을 방문한 1992년 7월, KOTRA와 베트남 상공회의소 간의 상호협력에 관한 합 의서가 체결된다. 동 합의서 2조에 양 기관이 희망할 경우, 상대 지역에 대표사무소를 설치한다 라고 명시함으로써 호치민 무 역관 설치를 위한 근거를 마련하게 된다. 이 합의서를 근거로 베트남 정부에 대표사무소 설치를 신청하고 1992년 11월 18일 베트남 무역부는 허가증을 발급한다. 2년여에 걸친 무역관 개설작업은 동년 11월 23일 김철수 사장의 주재하에 개최된 개소식 으로 결실을 맺게 되고 개설요원인 조 영복은 초대 호치민 무역관장으로 임명된다. 생활 및 근무 여건 베트남의 기후는 4계절의 구분 없이 우기(5월~11월)와 건기(12월~4월)로 나누어 지며 연평균 기온은 섭씨 26.9도로 1년 내내 무더운 날씨가 계속된다. 우기에는 매일 30분~1시간 가량 스콜(squall)이라고 하는 열대성 소나기가 내린다. 베트남은 말라 215 Ⅰ. 무역관 이야기

216 리아 등 풍토병의 위험은 적은 편이나 모기로 전염되는 뎅기열의 발발 빈도가 높은 만큼 주의를 요한다. 공산주의 국가인 관계로 공권력이 막강해 치안은 양호한 편이 나 오토바이를 이용한 생계형 범죄가 많아 도보로 이동할 때 조심해야 하며 밤 10시 이후에는 가급적 외출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 호치민 거주 교민 수는 7~8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베트남 전체의 1인당 국민소득은 1,000달러 내외인 반면 호치민 시의 1인당 국 민소득은 3,000달러 수준으로 베트남 도시 중 가장 높다. 호치민 시의 경제규모는 베 트남 내에서 가장 크지만 주요 정부부처는 모두 수도인 하노이에 소재하고 있기 때 문에 정부간 대형 국책사업(프로젝트 발굴 등) 수행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으며, 국가 중요사항의 경우에는 정보 입수가 어렵다. 하지만 무역관의 법적지위가 총영사관 부 속기관인 관계로 사절단, 국내외 전시회 개최시 바이어 모집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다만 바이어 대부분이 영어를 잘 구사하지 못해 의사소통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무역관 이야기 수출인큐베이터와 공동물류센터 운영 호치민 무역관은 2007년까지는 KOREA BUSINESS CENTER만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2008년부터 중소기업진흥공단(중 진공)으로부터 해외에 있는 BI(Business Incubating)를 인수하여 수출인큐베이터 사무소를 운영하게 되었고, 2010년부터는 공동물류센터까지 신규로 운영하게 되었 다. 그럼으로써 인큐베이팅, 비즈니스, 물류 3박자를 갖춘, 중소기업의 베트남 진출 마케팅을 위한 현장 전초기지 및 첨병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 특히 수출인큐베이터 사무소는 중소기업으로부터 관심과 인기가 높지만 현재 12개 사무실의 입주 공간 한계로 5개사 내외가 항상 6개월 이상 입주를 위해 대기하 는 만성 대기 사무소이다.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무실 규모 를 키워나갈 필요가 있다. 그리고 중진공과 KOTRA가 수출인큐베이터 사무소를 공 동 관리 및 운영하다 보니 입주에 관심이 있는 중소기업에게 이원화된 관리 및 운영에 대해 항상 자세히 설명해줘야 이해가 되는 수출 현장에서의 반복적인 고충도 따르고 있다. 호치민의 글로벌 비즈니스 중심지인 1군 지역의 사무실 임차료는 평당 150달러 내외로 뉴욕의 맨해튼 지역 사무실 임차료와 같다는 얘기까지 있다. 중소기업 입장 으로서는 호치민 시내에 비싼 개별 사무실을 독자적으로 개설한다는 것이 엄두가 나 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호치민 수출인큐베이터의 경우 각 사무실이 다섯 평 내외 이 21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17 기 때문에 3~4명이 근무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며 통신설비를 갖추고 있어서 마 케팅 자료만 가지고 오면 당장 비즈니스 활동을 할 수 있게끔 서비스 기능이 완비되 어 있다. 1년차 입주기업의 경우 임차료가 사무실당 70달러 내외, 관리비는 80달러 안팎만 지불하면 자기만의 비즈니스 공간을 저렴하게 꾸밀 수 있다. 한편 중소기업 수출물량 통관과 창고보관 및 내륙운송 등의 관리 지원을 통한 물류비용 절감 그리고 공급선 관리 및 수출확대에 기여하기 위해 호치민 공동물류센 터가 설치되었다. 호치민 공동물류센터 운영의 대행은 대한통운과 롯데시가 맡고 있 는데, 이들은 대기업의 신뢰도와 글로벌 물류경험 등을 바탕으로 서비스하고 있다. 특히 베트남 물류기업과 개별적으로 비즈니스를 하거나 서비스를 받다 보면 우선 예 상치 못했던 불확실성과 미심쩍은 부분을 많이 겪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물류대행업 체와 KOTRA 공동물류센터가 믿음과 신뢰를 주는 물류 안전망 역할을 하고 있다. 입주기업 N사, E사, T사 등은 수출인큐베이터 사무소에 입주하게 된 것만 해도 행운이고 고마울 따름인데 KOTRA로부터 Korea Business Center 및 공동물류센 터의 복융합 서비스까지 지원받을 줄은 몰랐다고 어깨를 으쓱한다.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디입(Tr hong Diep) 1969년 출생 Ms. Diep은 무역관을 개설할 때부터 근무하고 있는 호치민 무역관의 산증인이다. 1969년생인 Ms. Diep의 부친 은 남베트남의 인텔리로, 군의관(소령)으로 미군과 함께 일해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남베트남 이 공산화된 이후, 아버지가 사회주의 교화수용소에서 3년을 보냈기 때문에 학창시절이 어려웠고, 또 남베트남과 관련된 가정배경 때문에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음에도 처음부터 외국계 회사에 취업 자리를 알아보려 했는데, 집안 친척 소개로 처음에 온 곳이 KOTRA였다고 한다. 푸엉(Nguyen Nghia Phoung) 1976년 출생 1976년생인 Ms. Phuong은 가족의 고향이 사이공시였음에도, 아버지가 하노이 정부의 공산당원으로 활동하여 남베트남의 공산화 이후 방송국 부사장 등을 역임하여 부유한 학창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대학교도 인문사회대 등 2곳을 졸업하였으며, 기업가 가족의 배경에서 KOTRA에 입사하여 마케팅 업무를 자신감 있게 수행하고 있다. 부(Le minh Vu) 1970년 출생 1970년생인 Mr. Vu는 중부 다낭시에서 남베트남 하급장교인 아버지와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 도 수용소에서 2년을 보냈는데, Mr. Vu의 의지로 호치민 경제사회대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은행 등에서 일한 후 KOTRA에 입사하여 프로젝트 발굴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Mr. Vu는 후진국에서 추진하기 어려운 신재생에 너지, 자동차산업, 그린산업 등의 각종 프로젝트를 훌륭하게 조사해내는 노력파이다. 217 Ⅰ. 무역관 이야기

218 무역관 엿보기 오토바이의 군무에 묻히다 로, 또한 그만큼의 매연도 뿜어내며 산업화의 길을 내달리고 있다. 호치민의 거리는 곡예하듯 비좁은 도로를 헤치며 달리는 오토바이의 대열로 이 내 점령된다. 아슬한 묘기라도 부리듯 운전 솜씨들이 능란하다. 뱃속부터 오토 바이를 배우고 태어난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달리는 대열은 거대한 물살 같기도 하고, 철새들의 웅장한 군무를 보는 듯도 하다. 오토바이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사랑받는 베트남 최고의 교통수단이 다. 대중버스에서 자가용으로 건너 뛴 우리에게는 낯선 풍경이지만 오토바이는 산업화의 정도를 말해주는 척도이기도 하다. 호치민은 지금 오토바이의 속도 통일궁(대통령궁), 전쟁기념관, 인민위원회 건물 등 월남전(Vietnam War)을 상기시키는 유적들과 노트르 담 성당, 오페라 하우스 등 식민지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건물들을 찬찬히 둘러본다. 녹음을 뿜어내는 공원에서 한 가롭게 산책하는 시민들의 표정도 눈여겨본다. 역사의 고난을 이겨낸 오늘의 베트남이 초행자의 눈에 대견하고 자랑스러워 보인다. 현기증이 일던 오토바이 대열도 시내 투어를 대강 마칠 무렵에는 눈에 익어 그저 그런 일상의 풍경으로 다가왔다. 무역관 업무를 A부터 Z까지 보여주는 곳 호치민 무역관 직원들은 상당히 지적이고 능력들이 남달라 보인다. 허병희 관장은 길지 않은 재임 기간에도 불구하고 내로라 할 베트남 전문가 이다. 상당한 독서량 에 감탄부터 나왔다. 짧은 만남 동안 친절한 선생님처럼 베트남에 대한 설명을 압 축해 들려주었다. 장진 부관장 또한 그에 못지않은 지식과 언변을 자랑했다. 지사 화업체 방문차 이동하는 차 안에서 O,X 퀴즈로 베트남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를 들려주었다. 번번히 X 판정을 받는 가운데 베트남에 대한 알짜 정보가 하나 둘 저 장되었다.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를 능가할 베트남 소개서를 만화로 펴내는 작업을 진행 중인 강준경 과장, 방문자의 세세한 부분까지 치밀하게 챙기는 글로벌 에티켓맨 박형돈 과장, 유창한 베 트남어로 가이드 역할을 해준 현지채용인 노동욱 대리 등도 무역관에 대한 인상과 이미지를 대변해주고 있었다. 실제로 호치민 무역관은 무역관의 업무를 A부터 Z까지 두루 수행하고 있다. 지사화, 인큐베이팅 센터, 시장개척 단, 조사대행, 수출직결 인콰이어리, 무역정보 등 모든 사업영역이 활기차게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성공사 베트남 최고의 교통수단인 오토바이를 탄 사람들과 멀리서 보이는 한국 기업의 광고 21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19 례도 많다. 산업용 및 가정용 호스 생산업체인 (주)포나후렉스의 베트남 현지법인 건설은 그 중 하나. 이 회사는 지사 화 3년에 인큐베이팅 센터를 거쳐 현지에 공장을 짓고 완제품 생산에 돌입했다. 부지 선정이 제일 중요한데, 호치민 무역관에서 수년 동안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습니다. KOTRA가 없었다면 이렇게 빨리 생산법인을 가동하지 못했을 겁니다. 임영준 현지법인장의 말에 깊은 감사가 묻어났다. 인큐베이팅 센터에서 만난 녹차원(주)의 이희용 지사장도 무역관의 도움을 톡톡히 받고 있다고 했다. 임대 료도 저렴하고, 사업에 대한 각종 시장조사와 정보까지 쉽게 얻을 수 있으니 이보다 고마운 경우가 또 있겠습니 까? 현재 호치민 인큐베이팅 센터에는 10여 개사가 입주해 있고 입주를 희망하는 업체들이 줄을 서고 있다. 한국의 미래는 베트남과 함께 해야 합니다! 에 따른 건설회사의 진출도 눈부시다. 1986년부터 추진된 도이머이(쇄신) 정책은 베트남을 유사 이래 최고의 경제발 전 시대로 이끄는 원동력이다. 베트남의 교역규모는 2007년에 처음 1,000억 달러를 넘어선 이래 4년 만인 2011년에 2,000억 달러를 돌파했다. 이러한 교 역 증대에는 한국도 한 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베트남에게 한국은 4번째 수출 국이자 2번째 수입국이다. 대 베트남 수출은 현지 투자진출기업(주로 봉제 분 야)의 원자재인 직물을 비롯해 철강, 석유화학, 산업용 전자제품 등으로 다양하 다. 한류를 활용한 미용 및 소비재가 증가하고 있고, 최근에는 신도시 개발 붐 한국의 미래는 베트남과 함께 해야 합니다. 갈수록 우리에게 중요한 파트너가 될 겁니다. 허 관장은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발전시켜야 하는 중요성에 대해 장시간 설명을 했다. 베트남은 한국기업의 노동력 공급원이자 현지 생산기지이고, 다문화 시대에 우리의 가족이며, 자원과 노동력-기술과 자본을 맞교환하며 동반 발전할 최적 의 파트너임이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 더욱 분명해졌다. 메콩 강의 화려한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옥외 카페에서 나누는 대화는 시간 가는 것도 잊은 채 밤늦도록 이어졌다. 호치민 무역관 직원들 219 Ⅰ. 무역관 이야기

220 C hina & Taiwan 베이징 北 京 Beijing 칭다오 靑 島 Qingdao 상하이 上 海 Shanghai 광저우 廣 州 Guangzhou 홍콩 香 港 Hong Kong 타이베이 臺 北 Taipei

221 Guangzhou 50개 무역관 이야기 광저우 무역관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중국 북부와 달리 남부인들은 공산주의 체제에 살면서도 돈을 신처럼 숭배할 정도로 뼛속 까지 자본주의적 습성을 가졌다는 것. 남부인들이 숫자 8에 열광하는 이유도 8의 발음 파 ( 八 )가 돈을 벌다 라는 뜻의 파차이 ( 發 財 )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인간 중국 남부인 의 저자 정재용의 말이다. 저자는 중 국이 세계를 호령하는 경제 대국이 된 것도 결국은 남부에서 흘러나온 돈줄 덕택이라고 진단했다. 덩샤오핑이 개 혁개방 정책을 펼친 실험 무대로서 글로벌 시장에 데뷔한 중국 남부는 세계 금융 허브이자 신사업 메카로 입지를 굳혔다는 것. 특히 홍콩과 마카오, 광둥( 廣 東 )성을 잇는 주장삼각주는 뉴욕이나 도쿄를 위협하는 메가폴리스로 뜰지 주목된다고 저자는 전했다. 중국 광둥성의 성도인 광저우( 廣 州 )시는 2010년 1조 748억 위안의 GDP를 기록하며 상하이( 上 海 )와 베이징( 北 京 )에 이어 세 번째로 GDP 1조 위안 클럽 도시에 합류했다. 광저우는 세계의 공장인 중국의 공장으로 자리매김 하며 22년간 연속으로 중국 31개 성시 중 GDP 1위를 차지했으며, 우리나라와의 교역액은 중국 성시 중 둘째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광저우는 또 시장( 西 江 )과 베이장( 北 江 ), 둥장( 東 江 ) 등 주장( 珠 江 )삼각주의 세 강이 합류하는 곳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한 중국 남부지역의 행정과 문화 중심지이기도 하다. 여기에 2010년 아시안게임을 성공적으로 치르면서 광저우는 중국 제3의 도시로서의 위상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무역관 개설 생활 및 근무 여건 중국대륙의 남단인 광둥( 廣 東 )성에 위치해 있는 광저우( 廣 州 )는 오래 전부터 외국과 활발한 교류를 하며 경제적으로 발달하게 된 도시이다. 또 주강 삼각주와 태 평양에 인접해 있어 농작물과 수산물이 풍부하다. 세계의 공장이 중국이라면, 광둥 성은 중국의 공장이다 라고 할 정도로 광저우는 제조업 밀집에 따른 환경오염이 심 한 편이었으나, 최근 올림픽, 아시안게임 등 국제행사 개최를 계기로 중국 정부에서 대대적인 환경보호 캠페인 및 주거, 생활환경 개선 작업을 펼치면서 점차 쾌적한 생 활환경이 조성되어 가고 있다. 광둥성은 중국경제의 3대 축의 하나인 화남경제권의 중심지로 중국 내 경제분 야 특히 무역, 외국인투자, 대한교역 등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 중국 화남지 역의 물류 유통 중심지인 광저우와 전 세계 IT제품 제조의 메카로 불리는 심천 등의 도시들을 중심으로 주강삼각주 지역도시들에 대한 국내기업들의 진출 및 투자가 급 221 Ⅰ. 무역관 이야기

222 증하면서 무역관 사업여건도 양호한 편이다. 과거 광둥성 지역이 저렴한 노동력에 의 존한 가공수출 제조기지였다면, 앞으로는 인구 1억 명, 한국의 두 배에 달하는 면적 을 지닌 광둥성 내수시장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무역관 이야기 비즈니스 성공? 유별난 식문화까지도 포용해야 땅에 걸어 다니는 건 책상걸상 빼고 다 먹고, 하늘에 날아 다니는 건 비행기 빼고 다 먹는다는 우스갯소리가 바로 중국의 남쪽 광둥성의 얘기다. 물과 토양이 좋지 않고, 덥고 습한 기후 때문에 몸이 축나기 쉽고,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잘 먹고 건강하게 보신하는 데 관심을 많이 갖게 되었고 자연히 음식문화가 발달했다. 온갖 식재료를 구해서라도 몸에 좋은 것은 일단 먹고 보는 게 이곳 사람들이다. 비둘기, 뱀, 자라 정도는 기본이고 여기에 악어, 쥐, 삵, 물 방개, 천산갑까지도 듣거나 보거나 먹어봤다. 2010년 어느 날, 하루 종일 한국에서 오신 분들을 모시고 포산( 佛 山 )에 위치한 한 중국기업의 공장을 둘러보았다. 변압기, 개폐기, 케이블 등 온갖 전기설비를 생산 하는 자회사가 다섯 개나 되는 연매출 1억 달러 규모의 꽤 큰 그룹사였다. 그룹 일인 자인 동사장(회장)과 부동사장, 연구소장 등 세 명이 나오기로 돼 있었는데 우리가 좀 먼저 도착해서 차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었다. 포산은 광둥성에서 광저우, 선전( 深 圳 ), 주하이( 珠 海 )와 함께 1인당 GDP 1만 달러가 넘는 4대 도시 중 하나지만 역시 교외의 산업지대라 그런지 특유의 황량하고 누추한 느낌의 사무실에서 거대한 동사 장의 책상을 등지고 앉아있자니 영 어정쩡하고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불쑥 한 아저씨가 걸어 들어왔다. 청바지에 운동화, 줄무늬 셔츠. 다행히 칼라는 달렸지만 아무래도 과히 캐주얼하다. 역시 중국인은 돈이 많아도 외모에 돈을 안 써 라고 생각하며 명함을 교환하고 자리에 앉았다. 굵은 알이 박힌 반지와 누가 봐도 가 짜임이 분명한 롤렉스 시계를 보면서 인상착의를 감상했다. 중국 남쪽의 지방도시지 만 자회사를 다섯 개나 거느린 그룹 회장치고는 마력이 부족한데, 뭔가 자신이 없고 석연치 않은 기세다. 그렇게 미적지근한 대화를 이어가고 있던 중 연구소장이 들어왔다. 양복을 입었 으나 구김 간 셔츠가 허리춤에서 헐렁하게 늘어져 있었다. 그래도 이 아저씨와는 안 면이 좀 있는 사이라 분위기는 나아졌다. 필요한 말을 시원시원하게 하고 사교적인 듯 원만한 인상이 좋다. 잠시 후, 면바지에 빨간 셔츠를 입은 아저씨가 또 들어왔다. 누운 3자가 주름이 되어 박힌 송충이 눈썹 때문에 마초적인 권력자의 느낌을 물씬 풍 222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23 겼다. 이 아저씨가 동사장이었다. 아까 처음 들어온 아저씨는 부동사장을 맡고 있는 동생이었다. 그때까지 미적지근한 대화를 이끌던 부동사장의 존재감은 사라지고 괄 괄한 동사장이 대화를 장악했다. 질문과 대답과 사무실 전화와 휴대폰과 통역과 연 구소장의 중간 정리 등등 한국어, 중국어, 광둥어 3종 언어와 전화벨 소리가 어지러 이 오가는 가운데 대화는 흘러흘러 중국의 납세제도와 공산당, 기업의 사회적 책임 까지 논하게 되었다. 회의 중에도 여기저기 통화하던 동사장이 질문을 던졌다. 너네 참새 먹냐? 나는 중간에서 막아야 한다는 의무감에 아 그런 음식은 잘 먹지 못 한다 고 말 했지만, 동사장이 실망한 눈빛을 보이자 한국 측에서 없어서 못 먹는다 고 받아쳐 우리의 점심메뉴는 참새가 되었다. 음! 귀여운 참새를 구우면 잘 안 보일거야. 생각 보다 바삭바삭 맛있을지 몰라 이런 생각으로 불안감을 무마하려 애쓰면서 식당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메뉴는 구이가 아닌 샤브샤브였다. 탁자 한 가운데 이미 끓고 있는 국물 앞에 앉아 인사치레를 나누다가 식당 한쪽 접시에 손질되어 놓인 산닭의 눈과 눈이 마주쳤다. 한두 번 겪는 일은 아니지만 이럴 때마다 소스라친다. 중국에서 는 그 동물을 잡은 것을 증명하기 위해 머리를 반드시 요리 위에 내놓고 특히 귀한 손 님에게 머리를 올리는 것이 예의다. 닭을 먹으면 닭머리가, 거위를 먹으면 거위머리 가 접시 바깥쪽을 향해 평화롭게 눈을 감고 젓가락에 집혀가길 기다린다. (머리도 먹 는다.) 한 마리를 시키면 머리도 하나, 반 마리를 시키면 머리도 부리 포함 정확히 반 이 나온다. 이번 것은 털만 뽑고 아무 요리가 안 된 것이라 거의 시체 수준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중심 요리인 참새에 비하면 산닭은 눈요기였다. 만두만한 크기의 참새가 원형으로 가지런히 놓인 접시가 마치 소고기나 양고기를 담은 접시처럼 들려 나왔고 나는 그 달릴 거 다 달린 발간 고깃덩어리에 다시 한번 소스라쳤다. 퐁당퐁당 약재를 넣고 고은 거무튀튀한 탕 국물에 빠진 참새들은 잠시 후 하나둘 내 그릇에 건 져졌고, 사람들은 먹는 법을 알려주었다. 작으니까 고기만 뜯지 말고 뼈 채 씹어서 입에 넣은 다음 뼈를 뱉어내. 뭐 시키니까, 안 먹으면 삐질지 모르니까, 두 번 다시 안 먹을 거니까, 입에 넣고 몸통을 씹었더니 여린 갈비뼈가 톡톡 부러진다. 아프다고 삐약 하고 소리라도 날 것 같은 생각에 도저히 못 먹겠어서 앞니로 살금살금 고기를 긁어먹고 내려놓았다. 어휴. 이쪽은 기후가 달라서 그런지 참새가 잘 안 보이는데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 여 기서는 철새인 것 같다. 그러다보니 아무 때나 먹을 수 없는 귀한 음식이라 값도 한 223 Ⅰ. 무역관 이야기

224 마리에 45위안(7,000원)까지 간단다. 참새 한 마리는 비둘기 세 마리의 영양가가 있 고, 비둘기 한 마리는 닭 세 마리의 영양가가 있으므로, 결론적으로 참새 한 마리를 먹으면 닭 아홉 마리 먹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얼마 전 TV에 서 철새 잡는 아저씨가 나왔는데, 야생동물 보호문제에 대한 시각은 전혀 없고 마치 생활의 달인 소개하듯 아저씨의 기가 막힌 기술만 보여주던 게 생각났다. 이렇게 귀한 음식을 대접해 주었는데 우리 쪽에 잘 먹는 사람이 없어서 결례를 범할 뻔했으나, 다행히 한국에서 오신 사장님이 참새를 먹을 게 없다 며 열댓 마리쯤 너끈히 잡수시고 탕까지 떠서 후룩후룩 잘 드셨다. 음식이 좀 들어가자 곧 이어 앞에 놓인 술을 권했다. 설명에 따르면 독사를 담가 만든 10년 묵은 뱀술이란다. 뱀술은 처음이었는데 좀 꺼림칙했지만 슬쩍 마셔봤다. 맛은 나쁘지 않았다. 진짜 10년 묵혔 는지 발렌타인 17년산 저리가라 할 정도의 깊은 맛이 느껴졌다. 역시 우커장(오과 장)이 술맛을 안다면서 기사 아저씨가 자랑스러워한다. 참새 덕인지 뱀술 덕인지 분 위기는 화기애애해졌고, 오후의 일정도, 사업 얘기도 긍정적인 분위기로 마무리 되었 다. 그리고 나는 배가 고팠다. 중국으로 파견 나올 때 어느 분이 그러셨다. 너 같은 애는 뉴욕 같은 데 가서 폼 좀 잡아야 되는데 거기 가서 어떻게 하냐 고. 중국의 한 지방도시에서 참새 샤브샤브 와 뱀술 앞에서 인생을 배우는 게 내 인생에 도움이 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나쁠 것도 없지 싶다. 돈만 있으면 아무나 할 수 있는 그런 것보다는 뭔가 다르고 특별하 니까. 뱀술 잘못 마시면 기생충 때문에 큰일 나니 조심하라던데 사실 잔 돌려가며 소 주 마시는 것보다 대단히 기분 나쁘지도 않았다. 전 세계에서 중국 무시하는 건 한국 밖에 없다 는 말이 있다. 이웃나라라 더 보 고 들은 것이 많고 고속성장한 나라답게 자부심도 강하겠지만, 불과 수십 년 전 우 리, 유럽이나 미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우리를 생각하면 상대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려 는 노력 밖에는 답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비즈니스도 결국 사람 마음부터 사는 게 먼 저라면 포용력 있는 마음으로 접근하는 자세는 기본일 것이다. 오영주 224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25 Beijing 50개 무역관 이야기 베이징 무역관 중국은 1980년대 말부터 세계에서 가장 각광받는 시장이 되었다. 덩샤오핑은 1979년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와 흑묘백묘( 黑 猫 白 猫 )론을 펼쳤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의 개혁은 1984 년까지 주로 농업에 집중되었으나, 1984년부터 1989년까지는 계획경제의 권위적 방식이 국가행정의 일부를 지 방으로 분산시키고 이중가격제를 도입하여 시장에 더욱 더 많은 중요성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대체되었다. 그리 고 1990년대에 실시된 개혁의 세 번째 단계는 국가재산 전환, 민간부문 확대, 무역 개방, 외국인직접투자 및 시장 메커니즘과 제도 도입에 치중되었다. 중국은 2001년 12월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했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이 인구 2,000만 명 시대를 맞았다.(2011년 말 기준 상주인구 2,018만 6,000명) 베이징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로 중국 경제의 통합 및 조정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중앙정부기관이 밀집해 있어 주요 정보와 정책이 베이징에서 전국으로 하달되며, 정책집행의 기준이 된다. 글로벌 500대 기업이 모두 진출해 있고, 이 중 42개사는 베이징에 지역본부를 두고 있다. 베이징은 중관촌( 中 關 村 )을 중심으로 IT와 전자산업이 발달했 고, 서비스산업과 결합하여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이전이 가속화되고 있다. 중국 정부는 1988년 5월 중관촌을 중 국 최초의 첨단기술 개발구로 지정했다 무역관 개설 베이징 무역관의 역사는 한 중 수교 20년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KOTRA는 한국과 중국이 수교관계를 맺기 전인 1991년 베이징에 진출해 양국 간 경제협력 관계수립을 위한 기반을 다졌고, 20년간 중국 진출 한국기업의 동반자 역할을 담당했다. 무역관 개설 당시 현지직원을 포함해 7명에 불과했던 무역관 직원 수는 한 중 무역투자규모가 확대되면서 30명 내외로 늘 어났고, 담당 업무 또한 비즈니스 환경변화에 따라 세분화되고 있다. 무역관 이야기 베이징 무역관 창설 전후의 애환 필자는 대한무역진흥공사 주북경대표부(이하 한 국대표부) 창설요원 부임발령을 받고 1990년 10월 30일 근무하던 홍콩무역관을 떠나 외무부 측 한국대표부 일행과 합류, 곧 바로 홍콩에서 북경으로 부임했다. 당시 본사 근무 중 북경 무역관 발령을 받은 박찬혁 관장께서도 홍콩에서 합류하였다. 필자는 갑작스런 전보부임발령을 받아 개인적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었 기 때문에 이삿짐을 홍콩에서 곧 바로 북경으로 보내고 홍콩에서 학교에 다니던 두 아 이도 북경으로 동반하게 되었다. 북경에 도착한 대표부 준비요원들은 모두가 북경 소재 국제무역중심 에 사무소 225 Ⅰ. 무역관 이야기

226 를 정하고 숙소도 중국 측이 사전 결정한 국제무역중심과 연접해 있는 중국대반점 바로 옆에 위치한 한 아파트에 전원 입주하게 되었다(일반적으로 중국정부는 외교기 구나 외국정부 대표기구를 일정지역에 집중 거주시켜 통합 감시, 관리하는 방식을 활 용함) 대표부 요원 중 필자는 유일하게 부임 시 자녀를 동반하였기 때문에 아이 둘을 학교에 전입시켜야 했는데 당시는 아직 중국과 미수교인 터라 자녀들을 중국학교는 물론 외국인이 합자 경영하는 국제학교에도 전입시킬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당시 필 자의 두 아이는 중국정부의 협조로 국제학교에 전입시키기까지의 6개월 동안을 북경 무역관 임시사무소인 중국대반점 호텔 방에서 허송세월해야 하였다. 지금 두 아이는 30대 중반을 넘어 사회생활을 잘 하고 있지만 당시를 회상하면 아직도 씁쓸한 맛을 지울 수 없고 두고두고 미안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또 한 가지 통관문제 때문에 벌어진 씁쓸한 사건이 있다. 필자의 이삿짐은 당시 홍콩 총영사관 근무 중 주북경대표부 부대표로 발령받아 부임하는 윤해중 참사관의 이삿짐과 한 컨테이너로 같이 발송되었다. 윤 참사관은 필자의 대학 선배이자 고향이 같아 막역한 사이여서 별 생각 없이 한 컨테이너에 같이 보냈는데, 후에 이 일 때문에 통관할 때 무척 애를 먹었다. 이유인 즉, 중국해관 측에 의하면 외교관 이삿짐에 대해 서는 규정상 면검( 免 檢 :이삿짐 검사면제)과 면세혜택을 모두 받을 수 있지만, 필자는 외교관 여권이 아닌 관용여권(필자는 예우비자 취득) 소지자이므로 한국정부대표단 의 신분을 고려하여 면세혜택은 부여할 수 있으나 면검혜택은 안되므로 통관수속 절 차에 따라 이삿짐을 모두 개체 검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차일피일 2개월 동안 짐을 찾지 못하게 되자 한국대표부는 공문(이 공문이 한국대표부가 공식으로 중국정부에 보낸 제1호 및 제2호 문서가 됐음)을 보내 통관을 재촉했다. 그런데 필자의 짐 검사를 위해서는 컨테이너를 개봉해야하는데 같이 들어있는 외교관 이삿짐에 대해서는 컨테이너를 절대 개봉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중국해관 측 에서는 전례 없는 일인데다 한국정부대표단이라는 신분 때문에 일방적인 처리를 할 수 없어 고민하다가 결국 두 사람 다 같이 면세, 면검처리를 받긴 했으나 그러는 사이 에 3개월 이상의 시일이 경과되어 중국해관 측과 피곤한 공방전만 치렀다. 한국대표부는 총 20명 인원으로 구성되었으며, 대외적으로는 대한무역투자진 흥공사 주북경대표부 로 호칭되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주북경 한국대사관과 KOTRA 북경 무역관의 두 개 조직으로 분리되어 업무를 보고 있었다. 즉, 국제무역센터 3층과 4층에 사무실을 둔 외무부와 여타 정부부처 파견요원, 즉 외교관 여권 소지자 16명 요 22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27 원으로 구성된 주중 한국대사관과, 23층에 사무실을 둔 북경 무역관(4명)이었다. 북 경 무역관 창설 준비요원으로는 박찬혁 관장, 장행복 부관장(필자), 최중원 관원, 이 송 관원이었다(최중원 대리와 이송 대리는 제1차 선발팀과는 별도로 수개월 후인 1990년 초에 부임하였다). 따라서 중국 측 방문인사나 한국에서 찾아온 방문인사들 은 초기에 사무실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한국대표부 창 설 사실이 대외 공표되면서 북한 탈북자들이 한국대표부를 찾는 일이 수차례 있었는 데 어떤 때는 북경 무역관을 한국대사관으로 오인하여 잘 못 찾아오기도 했었다. 양 국의 협상에 따라 초대 노재원 대사의 대외직함은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주북경대표 부 수석대표, 공사는 부대표, 참사관은 대표, 여타 영사들은 조리, 박찬혁 북경 무역관 장은 조리( 助 理, Assistant), 필자는 부조리( 副 助 理 )로 호칭되었다. 북경 무역관의 법적지위에 대해서도 언급을 해야 될 것 같다. 1992년 8월 24일 한 중 양국의 수교 후, 북경 무역관의 법적지위가 모호하게 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 만 중국은 원칙적으로 외국정부기구의 명칭을 갖는 법적지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대표부가 주중한국대사관으로 격상된 후, 대사관에서 떨어져 나온 북경 무역관 은 정부기관으로서의 법적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되었고 그 후 지금까지 도 무역관의 법적지위는 일반 기업체의 지사 명칭과 같은 대표처 로서의 신분을 유지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수교 시 양국이 협정한 바에 따라 대 한무역진흥공사(주: 당시 KOTRA의 한국어 공식명칭은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가 아니고 대한무역진흥공사임)는 면제대상에 포함되어 지금까지 무역관의 법인 및 개 인소득세를 면제 받고 있다. 즉, 법적지위상으로는 기업체의 신분이지만 외교기구와 같은 소득세 면제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의 정책이 일관되지 못하고 형편에 따라 탄력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단면을 말해주고 있다. 일례로 기업체의 법인 인감 을 위조하거나 도용할 경우는 한국과는 달리 형사처벌 대상이 아니다. 다만 이로 인해 해당 기업이 경제적 손실을 입을 경우에만 형사처벌하고 있다. 단, 정부기관의 도장을 위조하거나 도용하면 형사처벌을 받게 된다. 한 중 양국 간 수천 년의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과 대등한 관계를 맺고 중국의 수도 북경에 입성했다는 자긍심으로 많은 어려움도 극복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본 사에서 현지 실정을 잘 이해해 주지 못하여 양국 국교수립 시까지 약 2년 동안 무역관 의 업무활동에 많은 제약이 따르기도 했다. 일례로 1990년 필자가 거주하고 있는 아 파트 월 임차료는 미화 4,500달러(필자의 직급별 임차료 책정액은 2,000달러 수준이 었음)였는데 보고를 받은 본사에서는 경악을 금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 227 Ⅰ. 무역관 이야기

228 시 중국인의 월 임금이 RMB150~200원(미화 54달러)수준 밖에 안 되었으므로 1개 월 임차료가 이들의 6년 이상의 월급액에 맞먹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중국의 통신사정이 매우 열악하여 일반가정에도 전화가 거의 전무한 상태였으며 시내에서도 공중전화 시설이 거의 없어서 무역관 업무를 위해 핸드폰을 시급히 구입했다. 당시의 핸드폰은 모토롤라사 제품으로 마치 군용 전화기처럼 크고 뭉툭하게 생겼는데 가격이 RMB25,000(미화 6,750달러, 중국인 10년 월급액 수준) 로 외국인 외에는 소지한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의 최고가 제품이었다. 그래서 당시 음식점 같은 데서 이 핸드폰을 테이블위에 놓으면 많은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레 쳐다 볼 정도여서 그 이름이 따꺼따( 大 哥 大 : 신조어로 왕초, 두목을 뜻함) 로 불리었다. 이렇듯 일반 생필품, 식품, 채소류 등은 아주 저렴한 반면, 외국인에 대한 주택 임차료, 차량 임차료, 호텔 숙박비, 문화상품 등은 터무니없게 비싸서 일반인들은 엄두를 못 냈다. 특히 외국인은 외화권(외국인 전용화폐)을 사용해야만 했고 항공임, 철도임, 관 광요금 등 모든 분야에서 내국인보다 수 배에서 수십 배의 요금을 지불해야 했다. 필자는 북경 무역관을 시작으로 하여 1994년 7월 대련무역관 개설요원 겸 초대 관장, 1996년 상해무역관 제2대 관장, 2000년 칭따오 무역관 재개설요원 겸 초대관장 (칭따오 무역관은 원래 정승채 관장이 개설한 후 본사 방침에 따라 폐쇄 조치되었다 가 2000년에 재개설함)을 끝으로 10여 년간의 중국지역 무역관 근무를 하는 동안 중 국의 발전과정을 지켜보면서 남다른 감회를 갖고 있다. 지금의 중국은 20여 년 수교 전의 우리가 가볍게 보아 넘겼던 후진국 사회주의국 가가 아니다. GDP 규모 세계 2위(2010년 중국 GDP는 5.88조 달러로 일본을 제치고 2위로 부상), 교역규모 세계3위(2010년 2.4조 달러, 미국, 독일 다음), 제조업 세계 1 위(2010년 미국을 제치고 1위로 부상), 외환보유고 세계 1위(2011년 3월 현재 3조 달 러)인 중국은 경제성장을 발판으로 세계경제와 외교에서 그 영향력과 비중을 확대하 고 있으며,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으로 우리에게 가장 무서운 경쟁자로 다가왔다. 동 시에 우리에게는 그 어느 나라보다도 가장 가까운 경제협력국이 되었다. 양국 간의 경제교류를 보더라도 교역규모는 수교를 맺은 1992년의 63.8억 달러 에서 2011년에는 2,456억 달러로 38배가 증가되었으며, 이는 일본과 미국과의 무역량 을 합친 것과 거의 맞먹는다. 또한 중국은 우리의 최대 투자대상국이 되었고 양국 간 인적 교류는 연간 660만 명을 넘어섰다. KOTRA 중국지역 무역관도 홍콩과 대만을 포함하여 19개에 이른다. 그만큼 KOTRA의 역할과 책임도 크고 무거워졌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금년은 양국의 수교 20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또한 양국의 최고지도자 22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29 가 새로 바뀌는 해이기도 하다. 머지않아 한 중 간 FTA 협상도 본격적으로 전개될 것이다. 중국과의 상생협력이 그 어느 때 보다 절실한 때이다. 장행복 OB 쌀 지원 남북실무회담 뒷이야기 1995년 6월 25일 북경 수도공항. 주중대사관 상무 관, 필자 그리고 대한항공 직원들은 차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며 초조하게 입구 쪽 을 주시하고 있었다. 서울로 가는 비행기가 이륙해야 할 시간은 이미 30분이나 지났 다. 시계만 속절없이 바라보는 초조한 시간이 얼마나 더 지났을까? KOTRA 박용도 사장이 탄 북경 무역관 1호차가 비상등을 켠 채 먼지를 일으키며 황급히 공항 귀빈실 에 도착했고, 박용도 사장이 탑승하자마자 비행기는 서울을 향해 이륙하였다. 이로 써 박용도 사장과 북측 대표가 조금 전 서명한 남 북 간 실무합의서 내용은 북경이 아닌 서울에서 발표할 수 있게 되었다. 실무회담의 현지 지원을 책임지고 있던 박진 형 당시 북경 무역관 부관장을 비롯한 북경 무역관 직원들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 쉴 수 있었다. 박용도 사장이 북경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출국하기까지 언론의 관심은 북경에 집중되었다. 주요 언론사에서는 북경특파원이 있음에도 서울에서 특별 취재기자를 파견하였고, 작은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기자들로 북경 무역관은 북적댔다. 남 북 실무회담이 진행되는 북경 귀빈루 호텔 문 앞은 취재기자들이 항상 대기하고 있는 상태여서, 업무 지원을 위해 이곳을 드나드는 무역관 직 원들은 주목을 피하기 위해 눈에 띄지 않는 호텔의 별도 출입 문을 이용해야 했다. 북한에 쌀을 지원하기 위해 개최되는 실무회담은 KOTRA 박용도 사장과 북측의 삼천리총회사 김봉익 사장 간 에 진행되었다. 무엇보다 이 회담은 KOTRA의 홍지선 실장, 중국의 조선족 무역인 흑룡강성민족개발총공사 최수진 사장 그리고 북측 삼천리총회사 간의 긴밀한 막후 접촉이 있어서 성 사가 가능하였다. 삼천리총회사는 북한 정무원 대외경제위원 회 소속의 대외무역회사로 북한의 전( 前 ) 부총리가 이사장으 로 재직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측이 정부차원보다 는 민간차원의 쌀 지원을 희망함에 따라 이석채 재정경제원 차 관과 전금철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을 각각 수석대표로 한 쌀 지원 남북실무회담 관련 기사(매일경제) 정부회담을 한 후 실질적인 내용은 실무회담에서 협의하기로 229 Ⅰ. 무역관 이야기

230 한 것이었다. 이 회담은 1994년 조문 파동이후 남북한 경색 국면을 전환할 수 있는 중요한 계 기이니 만큼 국내외의 관심이 클 수밖에 없었다. 회담 중간 역할을 한 최수진 사장은 그동안 (대북) 교역이 막혀서 힘들었는데, 이 회담으로 (자신의 사업도?) 잘 풀릴 것 이라며 이 회담이 남북한 관계 회복뿐 아니라 북한과 중국의 교류를 포함한 북한 의 대외개방이 확대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나타내었다. 후에 고난의 행군으로 기록되 고 있는 북한의 식량난은 이 시기에 벌써 심각한 상황에 이르러 식량 지원이 절실한 시점이었다. 북한이 당초 부족한 식량을 한국이 아닌 일본 등지에서 지원받으려 했을 정도로 심각하게 경색되었던 남북관계에도 불구하고 회담에서는 우리 측은 형제동포, 북 측은 동족을 각각 강조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가 연출되었다. 우리정부는 상징성 을 고려하여 한국전쟁이 일어난 6월 25일 쌀을 실을 배를 출항시키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회담은 생각만큼 순조롭지 못하였다. 쌀 지원에 따른 선적, 배의 국기게 양, 통신수단과 방법, 차질 없는 쌀 인도 방법은 물론 무엇보다 배의 안전한 귀환과 선원들의 신변 문제 등 사안 하나 하나가 긴밀한 협의와 조정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박용도 사장의 북경 체류일정은 예정된 기간을 넘기고 있었지만 협상 타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현지에 있는 기자들은 물론 한국에서도 협상이 타결되지 않는데 대한 불안감이 일었다. 타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던 실무협상은 6월 25일 오전 12시경 극적으로 타결 되었고 1차 선적분 2,000톤의 쌀을 실은 씨아맥스호가 동해항을 출발할 수 있었다. 그 후 수차례에 걸쳐 약 15만 톤의 쌀이 북한에 제공되었다. 남북한 경색국면을 풀고 교류를 확대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다르게 이 회담은 문민정부시절 마지막 남북회담으로 기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회 담은 심각한 식량난을 겪고 있던 북한 주민들에게 인도적인 차원에서 지원하는 중요 한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남북이 서로 사과문을 주고받는 등 교류 과정에서 진기 한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먼저 사과를 한 쪽은 북측이었다. 합의서에는 쌀을 실은 배가 북한 항구에 도착 할 때 어떠한 국기도 게양하지 않기로 하였으나, 첫 선적분을 실은 씨아맥스호가 6월 29일 청진항에 도착하였을 때 북측이 인공기를 게양토록 했기 때문이다. 북측은 남 북 합의내용을 미처 청진항에 전달치 못하여 발생한 것이라며 사과했고, 향후 유사 한 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약속도 하였다. 남측도 북측에 사과문을 보냈 230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31 다. 5,000톤의 쌀을 싣고 청진항에 도착한 삼선 비너스호 선원이 8월 2일 청진항 사 진촬영을 하다가 북한 당국에 억류되었다. 남측은 선원 개인의 호기심에 의한 촬영 이었다고 사과문을 보냈고 삼선 비너스호는 귀환하였다. 또한 북측은 쌀을 인도하는 선원들의 신변보장을 위하여 사회안전부장 명의의 신변안전보장 각서를 우리측에 제공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박용국(퍄오롱궈)(Piao Rong Guo) 1978년 출생 박용국은 2004년부터 2009년까지 베이징 무역관에 몸담았고, 수년간 지사화사업을 담당하면서 우리 중소기업 의 중국시장 진출에 크게 기여했다. 현재는 지사화사업을 하면서 축적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개인사업체를 운영하 며 한국 D사의 에이전트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백영신(바이롱션)(Bai Rog Shen) 1952년 출생 1991년부터 베이징 무역관에서 근무하고 있는 백영신 기사는 그야말로 베이징 무역관의 살아있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항상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역관 식구들을 위해 웃으며 봉사해 왔고, 대형 행사를 치를 때마다 깔끔한 의 전으로 무역관을 돋보이게 했다. 2012년 KOTRA에서의 20년을 마무리하며 정년퇴임을 맞는 그에게 감사의 박 수를 보낸다. 231 Ⅰ. 무역관 이야기

232 Shanghai 50개 무역관 이야기 상하이 무역관 중국 고전인 논어 에 삼인행, 필유아사( 我 師 ) (세 명과 함께 길을 가면, 반드시 그 중에 한 명은 내가 배울 만한 스승이 있다)라는 말이 있는데, 1990년대 들어서서 중국 상하이 시에는 이 말을 패러디하여 삼인행, 필유일상 ( 一 商 ) (상하이 사람 세 명이 길을 가면 반드시 그 중에는 상인이 한 명 있다)라는 유행어가 생겼다고 한다. 베이 징이 중국의 정치문화도시라면 상하이는 현대화된 경제, 금융의 국제도시라 할 수 있다. 상하이는 동쪽으로 태평양에 머리를 내밀고 배후로는 기나긴 장강( 長 江, 때로는 양자강이라고도 함)을 꼬리처럼 달고 있다. 상하이( 上 海 )라는 지명도 바다에 접해 있으면서 드넓은 바다로 나간다 는 뜻에서 연원한다. 중국 경제 의 기관차 역할을 수행해 온 상하이, 그 중에서도 푸둥( 浦 東 ) 지역의 개발은 상하이의 엔진 역할을 맡고 있다. 푸 둥 지역은 1990년대에 경제특구로 지정되기 전만 해도 논밭이었다. 상하이는 홍콩과 함께 중국의 양대 글로벌 비즈니스 허브(hub)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포춘 글로벌 500대 기업 중 MS, GM, 폭스바겐, 바이엘을 비롯하여, 삼성, LG, SK 등 450여 개 사가 상하이에 진출해 있다. 2010년 말 기준으로 상하이에 진출한 다국적기업 지역본부는 301개사, 지주회사 210개사, R&D센터 317개사에 이른다. 특히 이들 다국적기업 지역본부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아웃소싱 센터 기능을 겸하고 있다 무역관 개설 생활 및 근무 여건 4계절이 뚜렷하다. 바다에 면한 도시라 습도가 상당히 높으며, 특히 여름은 습 하고 더워 한국 사람이 적응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겨울 역시 화동 지역은 평균 기온 0도보다 체감 온도가 훨씬 낮아 난방기기 없이는 생활하기가 쉽지 않다. 상하이 한국 교민은 약 9만 5,000명이며, 진출기업 수는 6,000여 개에 달해 상하이는 한국과 교류 가 가장 활발한 도시 중 하나이다. 상하이시장은 규모도 크고 수입제품에 대한 수요도 많다. 다만 아시아에서 가 장 큰 소비 시장으로 부상하면서 글로벌 기업들이 앞다투어 진출해 경쟁이 상당히 치열하다. 비즈니스 추진시 중국식 네트워킹(꽌시)이 여전히 가장 중요한 요소이며, 관공서의 영향력이 크다. 상하이인들끼리는 상하이 방언을 쓰며, 지역에 대한 자부 심과 배타성으로 외지인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232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33 무역관 이야기 너 시 찾았니? 중국은 전 세계에서 협회나 단체가 가장 많이 설립되어 있는 나 라이다. 각 산업별 협회는 물론이거니와 00연합회, 00교류회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 로 많은 단체가 난립(?)하고 있다. 게다가 각 지방도시마다 유사한 협회와 기관이 제 각각 또 설립되어 있으니 그 수는 가히 가름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렇게 기관ㆍ단체 수가 많은 가장 큰 이유는 중국이 이른바 꽌시( 關 係, 인맥) 사회이기 때문이다. 중 국인 특유의 꽌시를 중시하는 습성으로 인해 같은 산업이나 업종끼리, 그리고 혈연 과 지연까지 추가되어 서로서로 뭉치게 되고, 이로 인해 새로운 단체가 생겨나게 되 는 것이다. 중국인은 비즈니스를 할 때, 나 혼자가 아닌 여럿이 함께하는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네트워크를 통해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모색하고 회사를 키울 방법을 찾는다. 무역관에서 여러 가지 사업을 하다 보면 이러한 꽌시 문화가 반영된 다양한 경 험을 하게 된다. 우리 기업 역시 적절히 꽌시를 활용하여 비즈니스가 잘 풀리게 되는 경우도 있었고, 지나친 꽌시에 대한 맹신으로 인해 실패하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전 자의 경우 루트를 못 찾아 잘 안 풀리는 사업이나 중국시장 진입에 제한이 있는 분야, 예를 들어 서비스업종이나 인프라, 국가 기간산업 등이 해당된다. 이 경우 적절한 꽌 시를 활용하여 문제가 쉽게 해결되거나 비용, 시간을 많이 단축한 사례가 적지 않다. 비단 외국기업에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중국인들도 꽌시야말로 실패를 최소화하고 성공을 앞당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내수시장 진출에 있어 필요한 각종 인증이나 허가증 취득에 있어서도 꽌시는 힘 을 발휘한다. 전 세계 기업들이 모두 중국시장에 진출하고 있는데 화장품, 식품, 의료 기기 등을 팔 때 인증, 허가증 취득은 필수다. 그러나 워낙 많은 기업이 인증을 신청 하다보니 직접 개별적인 절차를 밟아서는 하세월이다. 이때 괜찮은 꽌시가 있다면 이를 잘 활용함으로써 남들보다 훨씬 빨리 인증을 취득하기도 한다. 갑자기 생겨난 환경규제 강화로 인해 막대한 돈을 들여 환경보호 설비를 추가 구입하여야 하는 상 황에서 평소 잘 알던 인맥을 활용하여 대폭 비용을 절감한 케이스도 있다. 반면 꽌시 하나만 믿고 편법과 탈법 경영을 일삼다가 하루아침에 회사를 날리고 철수하는 사례도 보았다. 평소 편의를 봐주던 인맥이 보직이동을 하면서 과거 편법 으로 혜택을 보았던 것까지 한꺼번에 토해낸 기업도 있었다. 결국 꽌시 활용은 중국 비즈니스에 있어 필요하긴 하지만 지나친 맹신은 독이 되어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233 Ⅰ. 무역관 이야기

234 2010 상하이 엑스포 있다는 것을 지켜보면서 정도경영에 기반을 둔 꽌시의 적절한 활용 이 중국시장 공 략의 성공해법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2010년 상하이 엑스포 때도 여러 가지 꽌시가 활용된 바 있다. 당시 한국관은 중 국관, 일본관, 독일관, 사우디아라비아관과 함께 5대 인기 국가관이었다. 서너 시간 동안 줄을 서야 겨우 입장이 가능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더운 여름 힘들여 줄을 서 지 않고 편하게 입장하기 위해 평소 약간이라도 아는 무역관 직원이 있으면 이들을 찾는 전화가 부쩍 늘었다. 처음에는 귀찮아했지만 시간이 좀 지나자 중국정부, 기관, 협회, 바이어 등등 무역관 사업에 도움이 되는 꽌시 구축을 위해 이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국관에 VIP 입장하는 중국인들을 따로 DB로 관리 하기 시작했다. 언제 누가 한국관을 방문했는지 기록하고 이를 중국 내 각 무역관에 송부하여 공유함으로써 친한파를 만들고 무역관 사업에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그 결과 평소에는 접촉하기 힘들던 대형 바이어들도 무역관 사업에 대거 참 가시키고, 평소 빼내기 힘들던 공공 프로젝트, 정부조달 프로젝트도 정부부처 담당 자와 한결 편하게 연결되어 입수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상하이 엑스포는 한국의 국가이미지를 높이고 앞선 첨단 기술을 선 보이는 효과 외에 중국기업인들과의 꽌시 구축을 통한 내수시장 진출확대라는 또 다 른 좋은 기회가 된 셈이다. 234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35 Qingdao 50개 무역관 이야기 칭다오 무역관 푸를 청( 靑 ) 에 섬 도( 島 ), 맑은 바다에 깨끗한 공기. 칭다오는 우리의 서해를 향해 날카롭게 삐죽 튀어나온 중 국 산둥성( 山 東 省 )의 동부에 둥지를 틀고 있다. 본래 작은 어촌이던 칭다오는 19세기에 독일과 일본에 점령당하 고 미국 해군기지가 되는 등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닌 곳이다. 하지만 그 덕에 시내 곳곳에 독일식, 스페인식, 일본 식으로 지어진 건물들이 남아 칭다오만의 독특한 모습을 형성했다. 중국 정부는 1984년에 칭다오의 구를 경제특구로 지정한 이후 칭다오는 외국인투자와 국제무역으로 번창했다. 중국에서 퇴직 후 가장 살고 싶은 도시 중 하나로 꼽히는 칭다오에는 대략 10만 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다. 하지 만 칭다오는 한때 한국 기업의 무덤 이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2007년에 칭다오에는 적어도 우리기업이 6,000여 개 있었고, 대부분 가공무역에 종사하는 중소기업들인 것으로 추정되었다. 무역관 연혁 무역관 개설 무역관 폐쇄 무역관 재개설 칭다오 지역은 중국에서 한국투자기업이 가장 많이 진출해 있기 때문에 무역관은 칭다오를 중국 진출기업 지원업무의 중점 지역으로 관리하고 있다. 예컨대 격변하고 있는 중국 기업 경영환경에 대한 지식전파를 위해 설명회, 투자스쿨 등을 개최하 는 한편 <중국 노무관리 실무가이드> 등 다양한 자료를 제작, 배포하고 있는가 하면 중국지역 최초로 한국투자기업지원센터 상근 고문 컨설턴트 제도를 활용하고 있다. 무역관 이야기 랑야타이( )선수와 한판 붙다 때는 2009년 3월. 칭다오는 봄이라기엔 쌀쌀한 날씨였다. 아직 겨울의 차가움이 남아있던 당시 칭다오 무역관은 신선식품 당일 통 관 이라는 대업( 大 業 )을 달성하고 국내 주요 유업계의 신선우유를 중국시장에 유통 시키는 업무를 진행하고 있었다. S우유를 비롯한 국내 메이저 4사가 모두 칭다오 무 역관을 통해 중국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당시 관장이었던 양장석 부장과 지사화 공동물류 담당이었던 김준기 차장은 당 일 통관 기능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한 핵심인사인 현지 통관 관련 권력자(?) 와의 인 맥 쌓기에 열심이었다. 그는 바로 황다오 상품검사국의 식품과장으로 그의 사인 없 이는 어떤 제품도 통관이 되지 않는, 말 그대로 신선식품 통관의 핵심 인물이었다. 235 Ⅰ. 무역관 이야기

236 이 사람을 잡아야 한다!! 어느 날 자동차로 칭다오 시내에서 두 시간 가량 걸리는 황다오까지 가서 즐거 운 저녁 접대를 하자 식품과장은 다음엔 자기가 저녁을 살 테니 2주 후 목요일에 꼭 시간을 비워달라는 말을 해왔다. 시간이 된다면 오후 3시경까지 와서 랑야타이 랑야타이 ( ) 공장도 구경하자는 말도 곁들였다. 랑야타이. 칭다오 사람들은 듣기만 해도 독특한 고량주의 내음이 코끝까지 느껴 지는 이 지역의 명주 이름이다. 중국의 각 지방은 유명한 대표적인 고량주(마오타이 같 은)를 한 개씩 가지고 있는데, 랑야타이는 1950년대부터 생산된 칭다오를 비롯한 산둥 성 지방에서 가장 유명한 고량주이다. 도수는 32도부터 시작하여 가장 높은 도수는 72 도까지 있으며, 손님을 대접할 때 가장 많이 이용되는 도수는 통상 52도짜리이다. 랑야타이 공장을 함께 가자는 말은 분명 그날은 본인의 힘으로 걸어서 귀가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뜻일 터. 약속 날짜가 다가올수록 비장한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초 대받은 입장에서 어차피 술로 맞짱떠야 한다면 기분 좋게 쓰러져 주는 것이 식품과장 과의 관계 형성에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드디어 결전의 날. 출발 직전, 양장석 관장과 김준기 차장은 근처 한국 슈퍼에 들러 자신들이 통관해 온 한국산 신선 우유를 나눠 마시고, 그도 부족해 겔포스와 컨 디션까지 마셔 두었다. 중국인들은, 특히 술을 좋아하고 의리를 중시하는 산둥사람들은 통상적으로 접대 기회가 생겼을 때 주빈을 문과 가장 멀리 떨어진 위치에 앉히고(도망가기 어려운 자리) 상대가 너무 먹거나 너무 취해서 거의 실신 직전에 이를 때까지 먹고 마셔야 오늘 손님 대접의 소명을 다했다 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날은 랑야타이 공장 관계자들이 함 께 할 듯하니 위장약으로도 커버가 안 될 강력한 만찬이 될 것이 분명했다. 랑야타이 공장에서 30년 된 72도 고량주를 조금씩 맛볼 때부터 느껴지던 불길 한 느낌은 점점 현실로 다가왔다. 예상대로 5시부터 시작된 만찬에는 랑야타이 공장의 국장, 처장 직함을 가진 직원 3명 이 합류했다. 랑야타이 회사가 식품과장의 그날 저녁 술자리 의 말하자면 스폰서(?)였던 것이다. 예상대로 처음부터 술공장 공장장은 시중에는 잘 팔지 도 않는 랑야타이 72도짜리를 내왔고, 향이 좋지 않냐며 칭다 오 무역관 직원들에게 기를 꺾는 눈빛을 보내왔다.(칭다오 무 역관 측은 간담이 서늘) 하지만 더욱 식겁하게 만들었던 것은 23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37 그 다음 순간이었다. 보통 백주( 白 酒 )를 마실 때 쓰는 소주잔보다 조금 큰 크기의 작 은 백주 잔이 아닌 큰 와인 잔을 들고 들어오더니, 3분의 2가 넘게 술을 채우고 건배 를 시작한 것이다. 음식이 나오기 전, 첫 잔부터 원샷, 둘째 잔도 원샷, 그 후로 약 두 시간 정도 진행된 식사자리에서 모든 잔이 대부분 원샷이었다는 것이 그날 옆에서 양 관장과 김차장을 챙기기 위해 함께 출정한 현지직원의 증언이다. 그렇다면 양관장과 김차장 두 사람은 과연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을까? 두 용사 들은 6시가 조금 넘은 시간부터 아무런 기억이 없었다. 분명 7시경 유과장이 생사여 부를 판가름 하기 위해 전화를 해서 받은 것으로 휴대폰에 남아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화기를 손에 든 기억조차 없었다. 반면 중국 측 식품과장의 호위업무와 적군 격파 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랑야타이 스폰서 측 선수들은 자신들의 차를 직접 운 전하여 돌아가는 호기까지 부렸다하니, 이 날의 전투란 사실상 칭다오 무역관 직원 들의 기존의 내공, 우유, 겔포스, 컨디션 모든 것을 합하더라도 결국엔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양관장과 김차장은 술독( 毒 )에 빠져 생고생을 했고 그 후 1년이 넘게 고량주라면 쳐다보지도 않게 된 부작용이 있었지만, 접대 당사자인 식품 과장은 매우 기분이 좋아 그 해 신선식품 통관이 문제없도록 전력 협조를 해주었다 고 한다.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장춘령(Zhang Chun Ling) 1966년 출생 장춘령 과장은 1980년대 초 중국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공부 잘하고 출신성분 좋은 학생들만 들어갈 수 있다 는 김형직 사범대학 음악학과에 1985년 입학하여 1989년에 졸업하였다. 고향 산둥성에 돌아온 그는 한국어를 쓸 수 있는 직장을 물색하다가 1997년 칭다오 무역관 식구가 되었다. 그러나 칭다오 무역관이 문을 닫게 되어 다 른 직장을 다녔는데 다시 칭다오 무역관이 개관하자 2001년 재취업할 만큼 의리의 사나이다. 서산산 씨와 함께 칭다오 무역관의 역사를 쓰고 있는 그는 각종 업무에서 리더십과 책임감을 십분 발휘해 무역관의 해결사 로 통하 고 있으며,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1년 1월에는 L3 과장으로 진급하였다. 237 Ⅰ. 무역관 이야기

238 Hong Kong 50개 무역관 이야기 홍콩 무역관 1997년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었을 때 가장 우려했던 점은 자유시장과 민주주의에 익숙한 홍콩 주민들이 사회 주의에 어떻게 적응할 것이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홍콩 정부는 중국 정부와 마찬가지로 소수 집단에 의해 운영되어 왔었고 자문위원회라는 일부 사업가들의 비정규적인 관직을 통해 의견이 수렴되어 왔었다. 또한 홍콩 정부나 중국 정부는 둘 다 관료적이었고, 권위주의적이었으며 대표성이 부족하였다. 대부분의 홍콩 주민은 돈을 벌기 위하여 이주해온 사람들이었으므로 돈만 벌 수 있다면 어느 정도 자유의 박탈을 상관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 들이었다. 그러므로 일반 홍콩인들은 정치에 무관심했다. 홍콩 사회는 경제가 지배하는 사회이지 정치가 지배하 는 사회가 아니었다. 홍콩 주재원 사이에 홍콩생활을 가리켜 남자의 지옥, 여자의 천당 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고, 홍콩이야말로 네 온사인 속의 화려한 오지 라는 말도 있으며, 영어도 안 되고 중국어도 시원스럽게 통하지 않는 언어의 사각지대 라는 말도 들린다. 홍콩 무역관에 근무했던 이성배 OB가 꼽는 <홍콩의 3경지락( 驚 之 樂 )>을 아는가? 제1경은 홍 콩식 미녀 보고 놀라는 것이고, 제2경은 홍콩의 산비탈에 서 있는 30~40층짜리 아파트와 바다를 메운 매립지에 우뚝 솟은 빌딩들을 보고 놀라는 것이며, 제3경은 홍콩사람들의 교과서적인 사고방식에 놀라는 것이라나 무역관 개설(창립연도에 처음 개설된 4개 무역관 중 하나) 생활 및 근무 여건 바다를 접한 홍콩의 기후는 연중 덥고 습한 아열대성 몬순 기후로 여름에는 후덥 지근하게 느껴지지만, 전반적으로는 춘하추동의 변화가 적은 온화한 날씨이다.(여름 최고기온 섭씨 약 33도, 겨울 최저기온 7~8도) 2012년 1월 18년 연속 전 세계 경제자 유도 1위를 기록하였으며, 수년 전 인터폴이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라고 지정했 을 정도로 치안이 좋은 편이다. 한국인 집중 거주지역은 홍콩섬의 타이쿠싱, 사이완 호, 구룡반도의 침사추이, 샤틴, 홍함 등지로 2012년 현재 홍콩 전역에는 약 1만 1,500 명의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대중교통과 택시가 발달되어 있어 자가용의 필요를 느 끼지 못한다. 홍콩인들은 성격이 느긋하고 비즈니스에서 허례허식보다는 실질적 내용 을 중시 여겨 효율적 협력이 가능하다. 다만 기업들의 업무처리의 기본적 절차에 매우 관료적인 부분이 있고 융통성보다는 원칙을 고수하여 다소 진행이 느리다. 23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39 무역관 이야기 SARS와 농민시위대여 아듀 홍콩하면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 중 아직도 많은 사람 들의 뇌리에 남아 있는 것은 SARS(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와 WTO 협정 관련 한 국 농민시위대의 홍콩 방문일 것이다. 2003년 3~4월에 집중적으로 유행하였던 SARS는 중국 광둥성에서 처음 발병 되어 전 세계 30개국으로 퍼져 8,300여 명이 감염되고 약 840명이 사망하는, 치사율 이 11%에 달하는 전염병이었다. 특히 관광의 허브 홍콩에서도 매우 심각하여 약 880 명이 감염되었고 이 중 23명이 사망하였다. 싱가포르도 홍콩에 여행한 사람으로부터 전염되기 시작해 사태가 매우 심각했다. 홍콩의 모든 경제 활동이 마비될 지경이었고 홍콩에 주재한 한국기업들도 대부 분 철수하였다. 특히 당시 무역관 근무직원 L과장이 매일 본사에 일일동향 보고를 하다가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은 SARS 사망자 수가 이라크 전쟁 사망자 수와 비슷한 수준까지 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난리통에 빛을 본 상품도 있었으 니, 바로 마스크였다. 당시 무역관에서는 한국 마스크 제조업체에 연락해 홍콩진출 을 타진하기도 하였지만 워낙 상황이 심각해 마스크 업체들에서는 한결같이 고맙지 만(?) 사양한다는 답변을 받았다는 후문도 있다. 2005년 12월, 한국 농민들의 WTO회의 반대 홍콩 원정시위 사건은 당시 홍콩 언론, 정부, 심지어 경찰에까지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시위대의 홍콩 방문 전에 이미 홍콩경찰은 한국에서 시위 진압 교육을 받고 와 무역관 바로 앞의 WTO회의장 (컨벤션센터)에 바리케이드를 쳐 놓은 상태였다. 농민 1,200명 규모의 시위대는 처음 에는 평화시위를 추진,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임차료를 내고 있던 코즈웨이베이 앞 타임스퀘어를 점거하고 삼보일배의 평화적인 시위를 했다. 그러나 행사 마무리즈 음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죽창이 등장하고, 이에 홍콩경찰은 진압을 위한 충격탄을 발사하기도 하는 등 과격시위로 변해갔다. 그리하여 당시 시위대 전원이 홍콩경찰에 연행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였고, 총영사관과 무역관을 포함한 대부분의 한국 주재원들이 총영사관에서 발급한 공문 을 들고 경찰서를 돌아다니며 농민들을 야영지로 모시고 오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 였다. 무역관에서는 심지어 우리 농민 시위대 중 자금 담당하신 분을 경찰서와의 한 참 실랑이 끝에 야영지로 다시 모시고 오는 일도 있었다. 239 Ⅰ. 무역관 이야기

240 Taipei 50개 무역관 이야기 타이베이 무역관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 Taiwan)의 면적은 3만 6,000km 2 로 남한의 1/3보다 조금 크며, 인구는 2,300 만 명으로 남한의 절반보다 약간 많다. 1949년 12월 7일 장제스( 蔣 介 石 )휘하의 국민당 정부는 국공내전( 國 共 內 戰 )에서 중국 공산당에 밀려 중국 본토에서 쫓겨났고, 타이베이는 중화민국의 수도로 선포되었다. 인구 260만 명 의 타이베이는 급격한 경제개발의 중심지이고 첨단기술 제품을 생산하는 국제적인 도시의 하나가 되었다. 이른 바 타이완의 기적 의 일부로서 타이베이는 1960년대의 외국인 직접투자를 통해 급격한 성장을 보였다. 중화민 국은 2010년 2월 기준으로 3,520억 달러의 외환을 보유하고 있어 세계 4위의 외환보유국이다. 아시아 금융위 기에도 불구하고 매년 5%의 성장을 하였고 사실상의 완전 고용을 이루었으며 물가상승률도 낮다. 대만에는 약 3,500명의 교민이 거주하고 있는데 지 상사 가족 1,000여 명, 취업자 및 자영업자 가족 900여 명, 유학생 600 여 명, 선교사 가족 400여 명 등이다 무역관 개설 무역관 이야기 단교, 그 현장에서 1992년 8월 24일. 한국과 중국은 오랜 대립관계를 넘어서 역사 적인 수교를 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이틀 앞선 8월 22일 오전 나는 관장실에서 김홍 지 관장님과 함께 대만의 중대 성명 발표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대만외교부의 주동적 인 한국과의 단교선언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중화민국 과 한국 의 단 교는 한국국민의 뜻이 아니라 노태우 정권의 뜻이며, 단교로 인한 모든 책임은 한국 에 있음을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마디를 덧 붙였다. 단교로 인해 대 만에 체류하는 한국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고. 대만에 특파원이 없던 시절이라 나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단교선언을 그대 로 받아 적어 본사에 지급으로 보고하였다. 앞이 캄캄해진 느낌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무역관은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이 엄청난 사태를 어찌 처리해야 하나? 중국과 수교를 한 이후 대륙에서 활동하게 된 사람들은 신나겠지만, 우리에게 커다 란 배신감을 느끼는 대만 사람들의 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 까? 답이 없는 온갖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커져가는 중국과의 정치경제 관계 나 역사의 흐름을 볼 때 수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이해는 되었지만 현장에서 단 240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41 교사태를 겪는 나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사실, 언제부터인가 대만 언론들이 이상한(?) 뉴스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대만 과 한국 사이에 중대한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내용이 뭔지는 아리송하였다. 현지 언론의 대사관 취재가 불발로 끝나자, 언론들이 무역관을 취재 하겠다고 연락을 해오기 시작했다.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데 주대만 한국대사 관측이 노코멘트로 일관하고 있으니 무역관에서 입장을 표명해달라는 것이었다. 우 리도 모르는 일을 어떻게 코멘트 하며 설사 안다 할지라도 대사관이 노코멘트인데 우린들 코멘트를 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한국과 대만의 외교관계에 대한 것이라면 말이다. 그날 저녁 대만 TV들은 박노영 대사가 대만 외교부로 초치되는 모습을 보도 하면서, 멍청이라는 등 온갖 욕설을 퍼붓는 뉴스를 연속 내보내고 있었다. 곤혹스러 운 모습의 대사 모습을 TV로 보면서 서서히 단교 라는 글자가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조만간 되리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있었 는데. 대만은 1990년대 들어 중요한 우방이었던 사우디아라비아와 외교관계가 단절 되었고, 한국만이 규모있는 국가로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100여 명 이상의 외교관을 서울에 주재시키며 전 세계의 정보를 입수하던 대만이 이제 그 중요 한 거점을 상실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중국과의 수교, 대만과 의 단교는 극비에 속하는 상황이어서 무역관에서는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8월 21일 출근하자마자 본사에 긴급으로 한-대만 간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지 알아봐달라고 부탁하였지만, 본사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대사관에 물어도 전혀 모르겠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하긴 그들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아니 알더라도 말할 수 있었겠는가? 8월 24일 월요일. 중국과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단교의 후폭풍이 불기 시작하였 다. 우선 대사와 무관이 먼저 대만을 떠났고 대사관이 공식 적으로 존재하지 않게 되 었다. 대사관 부속기구로 있던 우리 무역관의 입지는 어떻게 될지 예측이 불가능하 였다. 단교 소식이 보고되자 본사에서는 당장 한-대만 단교 영향을 보고하라는 지시 가 왔지만, 주요 정보를 입수하던 대만의 정부 채널과 유관기관 채널이 끊어진 상태 라 제대로 조사를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한국학교에 돌멩이가 날아들었 다는 소식과 까오슝( 高 雄 )에서 한국 학생이 린치를 당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분위 기도 좋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랴! 본사의 지엄한 명령을 어길 수는 없고, 아무튼 있는 자료 없는 241 Ⅰ. 무역관 이야기

242 자료를 동원하여 보고를 하였다. 대만과 미국의 단교, 대만과 일본의 단교 상황과 대 응같은 내용들을 조사하였던 기억이 있다. 한편, 중요한 보고는 음어화하라는 본사 의 지시에 따라 텔렉스로 보고서를 음어화(암호화)하여 보고하느라 지금은 개인사 업을 하는 정상연 OB와 함께 밤늦게까지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A4 용지 한 장을 음 어화하는데 1시간 이상 걸렸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단교로 인한 뼈아픈 기억도 있다. 그 당시 주재상사들은 단교가 되자 본사차원 에서 발빠르게 움직였을 뿐만 아니라 주재원들과 가족들에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 여 움직일 준비를 하도록 대비하는 상황이었지만, 우리 본사는 전혀 그러한 조치가 없었다. 오직 영향보고서 빨리 보내라는 재촉만 있을 뿐이었다. 당시는 인터넷이 없 던 시대이긴 했지만 전화로라도 걱정을 해주는 사람이나 부서는 단 한 곳도 없었다. 사실 이때만큼 조직에 대해 야속함을 느낀 적도 없었다. 현지에 나가있는 직원들은 마치 황량한 사막에 홀로 버려진 듯한 느낌이랄까? 단교가 되니 당장 체류비자가 문제가 되었다. 우리는 대사관 부속기구 신분이었 기 때문에 대사관이 없어진 상황에서 비자가 연장될지 어떨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 와 긴밀한 관계였던 경제부 국제무역국은 상부 명령으로 한국과의 채널을 단절한 상 황이어서 연락을 할 수 없는 관계가 되어 있었다. 더욱이 격앙되어 있던 대만외교부 에 전화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민 끝에 우리와 협력관계에 있으며 매년 정기회의와 협력사업을 하던 CETRA를 떠 올렸다. 비서장(우리의 CEO 해당)이 외교부에서 근무하다가 오신 분 임이 떠올랐다. 관장님과 나는 죄인이 된 심정으로 비서장을 내방했다. 예전과 달리 싸늘해 보이는 비서장의 표정을 보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먼저 죄송하다는 말 씀을 드리고 비자문제를 협조해 주셨으면 한다고 말씀드렸다. 다행히도 비서장은 오 히려 우리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면서 자기가 외교부를 통해 협력이 되도록 하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를 드리고 비서장 방에서 물러 나왔다. 현지 주재기업들도 어려움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장 양국 간의 항로가 끊어 졌다. 국적기가 뜰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대한항공과 중화항공이 문제가 생겼고, 대 만을 오려면 제3국을 거쳐 그 곳에서 비행기를 갈아 타야했다. 그때 항공운항을 하기 위해 나와있던 아시아나의 입장은 더욱 난처한 상황이었다. 포스코 등에 대한 철강 덤핑조사 등등. 당시 자주 찾아가 정보를 입수했던 국제무역국 파트는 상부명령으로 일절 한국과의 접촉을 허용치 않고 있어서 우리로선 업무가 굉장히 어려워졌다. 개인적으로도 여파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한번은 가족들과 저녁을 먹고 들어오 242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43 는 길이었다. 운전기사가 너 한국 사람이냐 화교냐고 묻는 것이었다. 잠시 마음속으 로 망설였다. 화교라고 그럴까? 그러나 입에서는 한국사람이란 말이 나왔다. 운전기 사가 그 말을 듣자 바로 차를 세우면서 내리라고 하는 것이었다. 더 이상 한국은 없 다면서 도로에 내쫓긴 나와 가족들은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다행히 다른 택시 기 사는 우리를 위로해주었다. 한국국민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다 양국 정치하는 사람들 탓이다. 대만 사람들 다수는 한국사람을 이해한다. 대충 그런 뜻이었다. 그런 데 그 뒤로도 택시를 타고 출근하다가 몇 번 승차거부를 당하는 바람에 택시타기가 겁나는 상황이 되었다. 차가 없던 나로서는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고는 있었지만 택 시를 자주 이용하던 터라 사실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 뒤로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사절단이 대만을 방문하고, 양국 정부의 노력으로 대표부가 설치되면서 관계가 정상화되었다. 간혹 한류 반( 反 )한류 하면서 감정의 티 격태격은 있지만 이제는 한-대만 단교의 상흔은 아물었다고 할 수 있다. 20년 전 한 대만 단교의 현장을 스케치해 보았다. 곽복선 OB 2001년 8월 22일 본사 사옥에서 KOTRA는 대만의 대외무역발전협회(CETRA)와 9년 만에 업무협의회를 재개했다. 이 협 의회에서는 양 기관의 최고 경영진이 무역투자사절단 상호 파견과 전자무역 및 전시업무 협력, 중국 등 제3국에 대한 공동 진출방안을 논의했다. 양 기관의 업무협의회는 1985년 타이베이( 臺 北 )에서 처음 개최된 뒤 지난 1991년까지 매년 열렸으 나 지난 1992년 양국 간 국교 단절로 중단됐었다.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장안기(Anki Chang) 1975년 출생 대만문화대학교 한국어과를 졸업한 후 무역관 식구가 된 장안기는 입사 후 1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줄곧 마 케팅 업무를 담당하는 시장개척업무의 베테랑이다. 그녀는 또한 현지직원들의 고민을 기꺼이 상담해 주는 포근한 성품의 무역관 맏언니이기도 하다. 청춘을 무역관에 바쳤다고 신세 한탄하기도 하지만 아직 미혼인 그녀의 한국 에 대한 애정에는 변함이 없다. 243 Ⅰ. 무역관 이야기

244 Middle East & Africa 리비아 트리폴리 Tripoli 요르단 암만 Amman 이집트 카이로 Cairo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Riyadh 나이지리아 라고스 Lagos 케냐 나이로비 Nairobi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Johannesburg

245 Nairobi 50개 무역관 이야기 나이로비 무역관 나이로비는 마사이말로 샘물이 나는 곳 이란 뜻이다. 나이로비에서 생산되는 맥주 Tusker 브랜드는 이곳을 방문하는 외국인과 한국인들 모두 격찬하는 맥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나이로비는 적도가 약간 비껴가는 곳으로 태양이 강하여 양기서린 땅 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아들을 낳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던 부부들이 이곳에서 3~4년 근무하면서 득남해 의기양양 귀국한 경우가 많다. 나이로비 무역관 모 과장도 결혼 후 7년여 동안 소식이 없었으나, 케냐에 근무하면서 야생공원을 방문하여 양기를 힘껏 거두어 드디어 임신한 소식으로 귀국한 바 있다. 누가 이런 나이로비를 험지라 하겠는가? 무역관 개설 무역관 이야기 명란젓과 나의 구세주 Y관장님 케냐 인도인들은 케냐에서 대통령 궁 같은 초호화 주택에 벤츠를 2~3대씩 굴리면서 자신들이 구축한 소위 가문의 영광 을 과시하는데 매우 민감하다. 상거래에 있어서도 자신들의 체면을 구기는 일에 민감하고 또 이런 점 을 역이용하면 성사시키기 어려운 거래도 말 한마디로 면전에서 성공시키기도 한다. 이들은 자기의 신용도를 과시하기 위해 해외에서 방문한 바이어를 저택에 초청하여 고급차가 있는 차고와 방들을 보여준 다음, 잘 차려진 위스키 바에서 한 잔 걸치게 한 후 저녁식사를 시작한다. 저녁식탁에는 인도인들이 즐기는 향 짙은 카레와 난(밀가루 반죽으로 빚어 구운 얇은 빵)이 꼭 등장하며, 초청한 바이어들에게 차려진 음식이 바 닥날 때까지 권하고 또 권하는 것이 손님대접의 예를 다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다. 케냐 인도인들의 허세부리기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순진하게 대응했다가 죽을 고생을 한 중소기업 사장님을 한국산 명란젓으로 정성스레 간호하여 구원한 Y관장 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전력기자재 제조업체의 K사장이 1999년 케냐를 방문했다. 그동안 케냐시장에 는 한국의 중계상을 통해서 물품을 공급해 왔었으나, 가격경쟁이 치열해지다보니 시 장상황도 파악하고 현지 에이전트와 직접 거래 가능성도 타진할 겸 어려운 발걸음을 하였다. 케냐 전력청에 전력기자재를 거의 독점 공급하던 인도인 에이전트가 케냐 내 245 Ⅰ. 무역관 이야기

246 인도 장사꾼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도착 첫날 Y관장이 케냐 시장정보 외에 팁 정보를 충분히 전수하기도 전에 이 에이전트로부터 허세 부리기식 저녁식사에 초대받은 것이 화근이 될 줄 누가 알았으 랴! 고급차 자랑, 셀프바에서의 한 잔, 그리고 미모가 끌리는 부인과 딸들 소개가 순 탄하게 잘 진행되었다. 그날 따라 인도식 카레와 난은 물론, 인도인들이 자랑스럽게 먹는 멥쌀한 가늘고 파란 고추까지 등장하였는데, 주인장이 귀한 손님을 위해 노력 한 것이니 모두 비워주시라고 압력을 넣은 것. 어찌하든 현지 에이전트를 기쁘게 하 려는 점도 있었고, 이들의 허풍을 모르는 순진한 점도 가세해서, 인도음식 특히 향을 싫어하던 이 사장은 입맛에 맞지 않지만 권하는 대로 다 드셨다. 위장이 국제화된 Y관장이 요령껏 사장 몫까지 적당히 덜어 먹으면서 조력한 정 성에도 불구하고, 그날 밤 숙소에서 업체 사장의 위장은 난리가 났다. 새벽 3시가 넘 은 시간에 Y관장님 긴급 호출을 받고 달려가보니 사장님은 먹은 것 다 토해내고 거 의 실신상태였다. 부랴부랴 사장님을 Y관장님 사택으로 긴급 호송하여 마침 한국산 소화제를 처방한 후 거의 이틀 동안 한국식 죽으로 간호하였다. 겨우 식사가 가능해 졌을 때, Y관장님은 사택에서도 아끼던 명란젓을 대접했는데, 불쌍한 사장님 왈, 이 명란젓 맛에 온몸이 회춘하는 느낌이 드셨다나! K사장은 이와 같은 소동을 겪고 인도인 에이전트와 좋은 관계를 맺음으로써 케 냐 전력청에 좋은 가격에 꾸준히 전력기자재도 공급하게 되어 KOTRA에 감사서한 까지 보내주었다. 가끔 케냐를 방문할 때마다 그는 명란젓과 구세주 스토리를 자랑 스럽게 들려주면서 한국인들이 낯선 아프리카에는 무역관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고 역설한 덕분에 나이로비 무역관은 존재의 이유를 실감하고 있다.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도로시 음왕기 완지루(Dorothy Mwangi Wanjiru) 1958년 출생 1983년에 채용한 현지직원. 거의 30여 년간 나이로비 무역관을 지켜온 의지의 케냐 여성이다. 처음 입사했을 때 는 케냐에서 내놓을 만한 미모를 소유했다는 그래서 무역관 간판스타였다는 후문도 있다. 관장님이 바뀔 때마다 반드시 이 직원의 도움을 거치지 않은 분이 없고 매사에 어느 것도 NO 가 없이 업무를 챙기는 믿음직스런 만능 비서 이다. 24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47 Lagos 50개 무역관 이야기 라고스 무역관 나이지리아의 유태인들 로 알려진 이보(Igbo, Ibo)족은 근면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진취적인 상인 소수집단으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나이지리아 내에서, 이보족 공동체들은 핵심적인 경제분야들을 장악하고 있다. 한편 나 이지리아는 419 사기 (나이지리아 형법의 관련 조항에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로도 악명이 높다. 대부분의 경우 419 사 기단은 탐욕이라는 기본적 본능에 호소한다. 사기 수법은 간단하다. 피해자들(나이지리아에서는 무구 라고 한다)이 있지도 않은 수백만 달러의 환상에 빠져들게 하기 위하여, 사기꾼들은 어떤 시점에 피해자들에게 은행의 변호사 에게 교제할 비용으로 수천 달러를 보내라고 요청한다. 이 때문에 419 사기를 가리켜 선수금 사기 사건 이라고 한다. 일단 걸려들면 무구 에게는 있지도 않은 수백만 달러가 곧 나온다면서 더 많은 액수를 요구한다. 팩스 머신 은 나이지리아의 글로벌 사기행위를 가능하게 했고, 인터넷이 확산되면서 419 사기는 하나의 금광으로 변모했 다. 사기꾼들은 무구를 끌어들이기 위해 많은 공사를 만들어냈는데, 그들의 연극적 기질과 구체적 세부사항은 정 말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사기꾼들은 궁극적으로 무구의 탐욕과 어리석음을 파고들었다. ( 국경없는 조폭 맥마피아 에서) 무역관 개설 라고스 무역관은 1980년 2월 우리나라와 나이지리아 간 국교를 수립할 때까지 국가를 대표하는 기관으로서 우리 기업들의 무역과 투자진출을 지원하였다. 현재 주나이지리아 대사관 상무관실을 겸하고 있는 라고스 무역관은 2011년 4월 가나 아 크라에 무역관이 개설되고 11월 카메룬 두알라에 무역관이 개설되면서 관할지가 조정되어 지금은 나이지리아를 비롯해 시 에라리온, 부르키나파소, 세네갈, 니제르, 라이베리아 등 6개국을 관할하고 있다. 무역관 이야기 천연자원의 저주인가 한국에서 나이지리아까지는 하루면 간다. 최단 코스는 두바 이를 경유하는 것인데 인천에서 두바이까지 10시간 10분, 두바이에서 라고스까지 8 시간 20분, 중간에 기다리는 시간을 감안해도 21시간이면 된다. 길다면 긴 시간이지 만 두바이까지 에미레이트 항공 최신형 A380 비행기를 타면 그리 견디지 못할 바도 아니고, 두바이공항 내 면세점을 둘러보다 보면 시간이 금방 간다. 그러나 무르탈라 무함마드 공항(Murtala Mohammed International Airport)을 통해 일단 나이지리아로 들어가게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입국자들이 입 국심사를 위해 아무리 길게 줄지어 서 있어도 공항 직원은 옆 사람과 느긋하게 담소 를 즐긴다. 공항 밖으로 나오면 또 풍경이 확 달라진다. 건물은 하나같이 낡았고 우 247 Ⅰ. 무역관 이야기

248 중충한데, 도로는 형편없다. 아스팔트에는 군데군데 구멍이 나서 폭탄을 맞은 것 같 다. 길거리의 흑인들도 우락부락하게 생겨서 위축감이 들고 과연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이 앞선다. 라고스에 부임한 지 6개월 만에 휴가차 한국을 방문하였더니 20세기 말에 머무 르고 있는 나이지리아에서 21세기에 선두를 향해 질주하는 대한민국으로 마치 타임 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외국에 나가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지만, 나이지리아에 와 보면 애국심이 두세 곱절로 늘어나는 것 같다. 다시 나이지리아에 와보니 부정부패 없는 나이지리아를 기대하는 것은 망고나 무에 사과 열리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에 생산되는 원유가 240 만 배럴로 아프리카 최대 산유국임에도 불구하고 석유제품을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된 다. 국가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은 모두 새어나가고, 국민들의 70%는 하루 2달러 이하 의 소득으로 근근이 살아간다. 만성적인 전기 부족, 시궁창 냄새나는 수도, 부족한 주택과 열악한 주거환경, 형 편없는 대중교통 서비스, 낙후된 보건시설, 끊임없는 폭탄 테러와 살인강도 등 치안 부재. 국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정치지도자들은 자신의 잇속만 챙기기에 바쁘 다. 하지만 나이지리아 사람들은 매우 낙천적이다. 언젠가 세계 각국의 행복지수를 조사하였는데 나이지리아가 가장 높게 나왔다고 한다. 설마 그럴까 하는 의구심이 들고, 약간 과장되었다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나이지리아인들은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같다. 비록 지금은 빈궁하고 삶이 고달파도 미래는 분명히 나아 질 것이라고 그들은 믿는다. 껌이나 음료수, 신문 등을 파는 길거리의 행상들, 오렌지며 바나나를 쌓아놓고 파는 노점상들, 손님과 상인들의 흥정으로 활기가 넘치는 재래시장에 가보면 악착같 이 돈을 벌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돈 문제에 관한 한 아프리카 인들이 게으르다 고 하는 선입견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만다. 나이지리아의 인구는 1억 5,000만 명이다. 우리나라의 대 나이지리아 수출실적 은 2011년 24억 8,600만 달러를 기록하여 아프리카 최대 수출시장으로 자리를 잡았 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도 떠오르는 미래시장으로서의 아프리카의 중요성이 부각 되고 있고, 우리 기업들도 아프리카 진출에 그 어느 때 보다 적극적이다. 그런데 가끔 우리업체들이 나이지리아 사기에 걸려들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마음이 씁쓸하다. 말만 잘하면 전기도 산다 지금 생각해보면 겁이 없었다. 1998년 12월 1일부로 나 24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49 이지리아 라고스 무역관 근무 발령을 받은 필자는 아내와 어린애 둘(당시 3년 2개월 된 아들과 생후 6개월의 딸)을 안고 KOTRA 무역관 중 최고의 험지라는 나이지리아 땅을 밟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대기업의 경우 나이지리아 근무 발령이 나 면 적지 않은 직원들이 사표를 쓴다는 얘기도 들렸고, 우리 교민도 대우건설과 중소 기업 몇 개사, 그리고 개인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 등 40~50명 안팎이 전부였다. 라고스에 정착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습한 날씨와 풍토병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전기 식수 도로 병원 등 열악한 인프라와 불안한 치안, 그리고 도처 에서 벌어지는 사기행각 등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매일 부딪치고 극복해야만 했다. 1999년 5월 중순, 딸내미의 첫돌을 2주 정도 앞두고 라고스에 살고 있던 거의 모든 한국 사람들(대사관, 주재원, 교민 등)에게 집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하자고 초청하였다. 문제는 전기였다. 당시 나이지리아 전력청은 하루기준 3~4시간 정도 전기를 공 급했는데 때마침 필자가 사는 아파트의 발전기 2대가 갑자기 고장이 나버려 그야말 로 전기없이 살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면 당시 라고스의 웬 만한 주택들은 모두 발전기를 2대(대형 및 소형 각 1대)를 자체 보유하고 있었고, 정 전이 되면 발전기를 교대로 최대 10시간씩 번갈아 가동했다. 물론 소형발전기가 가 동될 때는 에어컨 등은 사용할 수 없었다. 오죽하면 나이지리아 사람들조차 전력청 (NEPA : National Electric Power Authority)을 Never Expect Power Again 으 로 비아냥거렸을까. 아파트 내 발전기가 고쳐질 기미를 보이지 않아 속이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그러 던 어느 날, 흑인 운전기사가 전력청의 송전 담당자를 찾아가 사정을 얘기하면 전기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하지 않는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손님을 초대 한 당일(토요일)이 되니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 는 말처럼, 일단 한번 부딪쳐 보기 로 했다. 나이지리아에서는 아주 일상화된 사례비(?)를 당연히 준비한 후, 필자는 전 력청 분소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사무실을 방문했다. 헌데 그곳에서조차 직원 한 명이 윗옷을 벗고 있었고, 사무실 안도 전기가 없어 오후 2시경이었는데도 어두컴 컴했다. 실망스러웠지만 일단 얘기는 꺼내볼 요량으로, 우선 기사에게 사정을 설명하도 록 하고 밖으로 나와 기다렸다. 담배 한 개피를 채 피우기도 전에 기사가 돈 을 주면 전기를 준다는 얘기를 나에게 전했다. 한편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겠다는 기대와 다른 한편으로는 혹시 엄청난 금액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에 필자는 직접 전력청 분소 직원에게 오후 4시~9시까지 5시간 동안 전기가 필요한데 얼마를 주면 249 Ⅰ. 무역관 이야기

250 되겠느냐고 물었다. 직원은 잠깐 중얼거리더니 5,000나이라(Naira)를 요구했다. 우 리 돈으로 5만 원~6만 원 정도의 금액이었다. 예상보다 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기사는 좀 더 깎아 보자고 했다. 혹시나 마음이 바뀌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 바로 5,000나이라에 1,000나이라 를 더 얹어주고 전기를 넣어 달라고 부탁했다. 기사를 통해 집주소와 아파트 이름까 지 2~3번 확인시켜 준 후, 집으로 돌아와 노심초사하고 있던 아내에게 4시까지 기다 려 보자고 했다. 나이지리아에는 사기가 일반화되어 있어 약속을 지킬까 하는 걱정을 하는데 전기가 들어왔다. 냉장고와 냉동고 돌아가는 소리가 그토록 반가울 수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전력청 분소 직원의 주 업무는 자신이 관할하는 소지역(100여 가구가 1 소구역)별로 전기를 공급하는 잭을 번갈아 꼽으며 시간대별로 해당지역에 송전하는 역할이었다. 그런데 필자가 뒷돈을 주어 우리집에 전기를 달라 고 했으니 필자와 같은 구역에 속한 가구들은 행운이었지만, 반대로 하루 3시간씩 공 급받던 전기를 하루 종일 받지 못한 구역도 있었을 것이기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여하튼 전기 덕택에 딸아이의 첫돌행사를 잘 치렀고, 9시가 가까워지자 손님들 께 곧 정전될 것임을 알린 후 서둘러 자리를 마무리했는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전기 가 거의 밤 11시경까지 공급되었다. 사례비를 좀 더 주었기 때문이었을까? 지금도 가 끔씩 나이지리아에서 좌충우돌하던 시절이 떠오르곤 하는데 군대보다 싫었던 그곳이 그리워질 때도 있다. 그렇지만 누군가 필자에게 다시 나이지리아에서 근무할 수 있느 냐고 묻는다면, 본인은 크게 외칠 것이다. No! Never! 라고. 한번이면 충분하다고. 임채근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나타니엘 바티(Nathaniel Bassey) 1956년 출생 Bassey는 1987년 1월 KOTRA에 입사하여 현재까지 25년을 봉직하면서 해외시장 조사, 마케팅 지원, 우리 기 업의 현지진출 지원 등 수많은 업무를 수행하였다. 나이지리아로 수출하는 우리나라 업체치고 Bassey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이다. 이제는 한국기업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척 알아차리고 어려움을 해결 해 준다. 근무하는 동안 사장 표창도 3번이나 받았고 KOTRA 근무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다 250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51 Riyadh 50개 무역관 이야기 리야드 무역관 리야드(Riyadh)는 아라비아반도의 거의 중앙부에 위치한다. 원래는 나지드(Najd) 지방의 지방도시였으나 1824년 이븐 사우드(Ibn Saud) 가의 토르키가 이곳을 수도로 정했다. 그 후 이 왕국은 이븐 라시드(Ibn Rashid) 가에 의해 멸망되었으나, 1902년에 압둘 아지즈(Abdul Aziz 통칭 Ibn Saud 왕)가 리야드를 다시 찾 고, 1932년 제3차 와하브왕국을 세운 것이 오늘의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제다(Jeddah)는 지다 (Jiddah)라고도 한다. 사우디아라비아 남서부 홍해에 면한 항구도시이다. 이슬람 성지 메카의 외항으로서 순례 자의 대부분이 이곳을 통과한다. 사우디아라비아 유일의 무역항으로 상업활동이 활발하다. 시가지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시장도 있으나, 생산활동은 활발하지 못하다. 오늘날은 국제공항의 이용자가 많아졌으며, 대부분 의 외국공관이 이곳에 설치되어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메카(Mecca)와 메디나(Medina)라는 두 개의 이슬람 성지를 보유하고 있는 이슬람 중심지 이다. 매년 800만 명의 무슬림들이 성지 순례를 위하여 사우디를 방문하고 있으며, 모든 무슬림들이 평생 꼭 한번 방문하고 싶어하는 국가이기도 하다. 사우디는 정교일치제의 전제군주 국가로서 현재는 6대 국왕인 Abdullah Bin Abdul Aziz 국왕이 통치하고 있다. 2008년 발생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고가에서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 는 유가로 인하여 사우디의 국가재정은 매우 탄탄한 상황이며, Abdullah 국왕의 적극적인 경기부양정책으로 인 해 인프라 구축에서부터 석유화학 공장 설립까지 다양한 정부 주도 프로젝트가 추진되고 있다. 2008년과 같은 글로벌위기가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사우디 경기는 향후 10년간 최대 호황을 유지할 것으로 내다보 는 전문가가 다수이다 무역관 개설 생활 및 근무 여건 이슬람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꾸란(Koran)을 바탕으로 한 샤리아법과 이슬람 계율법이 엄격히 적용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정부는 사우디 전역에 걸쳐 음주, 돼지고기 판매, 사채업, 매춘행위 등을 금지하고 있으며, 이슬람 외의 타 종교 전교 행위나 신앙생활을 해치는 가무, 영화 등도 허락하지 않고 있다. 사우디 내에서 여성들은 아바야(abaya)라는 검은 옷으로 온 몸을 가려야하는데, 이 는 외국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 남성들 역시 노출이 심하거나 요란한 복 장을 할 경우 무따와(mutawa)라는 종교 경찰에게 제재를 받을 수 있다. 이와 같이 이슬람을 바탕으로한 엄격한 규율로 인하여 외국인들이 지내는데 있어 불편함을 느 251 Ⅰ. 무역관 이야기

252 끼는 경우가 많으며, 택시 외에 대중교통이 없는 가운데 여성의 운전 또한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외국 여성들은 실질적으로 제약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아라비아반도에 위치한 사우디는 전형적인 사막 기후이다. 여름 한낮의 기온은 섭씨 50도를 넘나들며, 11월~2월 동안 이어지는 겨울에는 섭씨 10도까지 온도가 내 려가 추위에 약한 현지인들은 목도리와 귀마개를 착용하기도 한다. 리야드는 연중 매우 건조하여 처음 리야드를 방문하는 경우 입안이 쉽게 건조해지고, 입술에 트러블 이 생기는 경우도 종종 있다. 반면 해안에 위치한 제다, 담맘의 경우 습도가 높은 관 계로 여름철 체감온도는 리야드보다 훨씬 높은 편이다. 농사가 어려운 사우디는 많 은 식품류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지만 곡식 야채 과일 등의 식품들을 무관세로 통 관하고 있어 비교적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사우디는 2011년 기준 약 2,700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이중 약 800만 명이 외국인이다. 현재 사우디에는 약 2,000명의 한국교민이 체류하고 있으며, 각종 프로젝트 수행을 위해 체류 중인 인력까지 합할 경우 2,500명 내외의 한국인이 거주 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무역관 이야기 폭탄테러 현장에 선 P과장 세계 최대의 원유 생산국이자 이슬람의 종주국으로 중 동 내에 탄탄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는 사우디와는 달리 주변 중동국가들의 정세는 늘 불안의 연속이다. 2003년 3월에는 이라크전이 발생하였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부 터 사우디를 비롯한 중동 국가들의 치안이 불안한 가운데 2월 18일 미국대사관은 필 수 요원을 제외한 직원을 사우디에서 철수하기에 이르렀고, 영국대사관도 2월 20일 부터 단계적으로 철수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KOTRA 리야드 무역관 직원들은 전쟁 시 발생할 수 있는 특수 품목의 수출 확대를 위해 연일 전망보고서를 작성하는 등 더 욱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Freedom of Iraq 라는 작전명으로 시작된 이라크전은 4월 14일 미군이 후세인 의 고향인 티크리트를 장악하면서 끝났지만 사우디 등 주변국들에 산재해있는 테러 분자들의 움직임은 계속 심상치 않았으며, 결국 우리 KOTRA 직원인 P과장이 자살 폭탄 테러의 현장에 서는 일이 발생하였다. 2003년 5월 12일, 한참 신혼생활을 즐기 고 있던 P과장은 부인과 함께 사우디의 유일한 여가활동인 쇼핑몰 눈요기를 즐긴 후 거주지인 Compound로 들어오고 있었다. P과장의 차량이 Compound 정문의 검색 대를 지나는 순간 수상한 차량이 P과장의 뒤를 바짝 쫓기 시작하였다. 이에 당황한 252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53 P과장이 차를 멈추자 곧바로 총격이 시작되었다. P과장의 차 량도 피격을 당하였으나, 테러범들의 목표는 P과장이 아닌 Compound에 거주하는 사우디 국적의 사람이었던 관계로 테 러범들은 P과장을 지나쳐 곧장 Compound 안으로 진격하였 으며, 곧이어 또 다른 차량 한 대가 앞선 차를 뒤따랐다. 테러 폭탄 테러로 파괴된 주택 범들이 진입한 Compound에서는 총소리가 이어지는가 싶더 니 거대한 폭발음이 들렸으니, 이것이 바로 차량 자살폭탄테러 였다. 눈앞에서 벌어진 폭탄테러에 놀란 P과장은 총격으로 인해 보닛에서 연기가 피 어오르는 차량에 다시 시동을 걸었다. 다행히도 차량은 움직여주기 시작하였고, 이 내 Compound를 빠져나와 근처 지인의 집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P과장의 Compound에서 발생한 자살 폭탄테러는 그동안 소규모의 테러가 주 를 이뤘던 사우디의 수도 리야드에 발생한 첫 대규모 폭탄 테러였다. 이로 인해 Compound 내에 거주하던 사우디인들이 그 자리에서 숨졌고, 한국인 가정을 비롯하 여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P과장은 Compound 입구에서 테러 차량을 만나는 바람에 총격으로 인한 차량 파손과 폭탄 폭발로 인한 아파트 파 손, 개인물품 도난 등의 피해를 당하기는 하였지만 인명피해는 면할 수 있었다.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아심 이크람(Asim Ekam) 1966년 출생 인도 출신인 Asim은 10년 넘게 리야드 무역관의 마케팅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제3국인이라는 제한적인 근무 환 경에도 불구 뛰어난 친화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의 바이어들과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여 무역사절단 등 각종 마케팅 업무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 중이다. 253 Ⅰ. 무역관 이야기

254 Amman 50개 무역관 이야기 암만 무역관 요르단은 인구의 95% 정도가 수니파 무슬림으로 구성된 이슬람국가이다. 하지만 요르단은 예수의 탄생을 기리 는 성탄절을 공휴일로 지정(레바논도 성탄절을 휴일로 한 이슬람 국가이기는 하나, 레바논의 경우 인구의 약 30%가 기독교인이다)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탄절에는 기독교를 믿는 현지인들이 성탄절 트리나 조명을 야외 에 거리낌 없이 설치할 수 있는 나라이다. 또한 현지의 유력한 바이어와 비즈니스맨들 중에는 기독교인들이 다수 있는데, 이들은 거리낌 없이 기독교인임을 밝히고 공개 장소에서 술을 마시기도 한다. 요르단은 요르단 원주민이 요르단 인구의 약 50%, 팔레스타인계 등 이주민이 약 50%를 차지하고 있으며, 수도 암만은 약 70%가 팔레스타인계 요르단인이다. 요르단정부는 다양한 인종간의 분열을 막고, 안정된 사회 분위기 를 조성하기 위해 우르둔 아우월(요르단이 먼저) 정책을 통해 국민들이 자신들의 인종보다는 국가(요르단)를 먼 저 생각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아울러 요르단 경제의 약 80%를 차지하고 있는 팔레스타인계 사람들을 견제하고, 요르단 원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정치, 행정, 군사분야에 대한 팔레스타인계 진입을 막고 있다 무역관 개설 생활 및 근무 여건 요르단의 기후는 여름에는 기온이 섭씨 40도까지 올라가고 겨울철에는 섭씨 0 도 수준까지 내려가기도 한다. 왕정 개혁을 요구하는 내부세력에 대한 견제를 위해 정부는 치안 유지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 안전한 편이다. 하지만 현지인들은 외국인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 특히 여성들의 경우 야간 외출할 때 주의를 요한다. 요 르단은 제조업 기반이 약해 대부분의 공산품을 수입에 의존하는 한편 고율의 관세 및 판매세를 부과하기 때문에 물가가 비싼 편이다. 요르단에 체류하는 한국인은 약 500 명 정도이다. 대사관을 포함한 주재원 가족 약 200명, 유학생 30명, 선교사 가족이 약 100명이며, 순수 교민은 200명이 안 된다. 우리나라가 요르단시장에 판 중고자동차 수출액은 7억 달러를 넘어 전체 수출 액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요르단은 95%가 무슬림인 이슬람국가로 종교, 문 화적으로 매우 이질적이어서 업무수행에 있어 간혹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하지만 여 타 중동국가에 비해 외국인에게 친절한 편이며, 한국에 대한 이미지도 좋은 편이다. 254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55 무역관 이야기 북한의 맹방 시리아에 태극기 휘날리다 암만 무역관은 2008년 7월 비수교국인 시리 아의 대표적인 종합상품전시회 다마스커스국제박람회(Damascus Int'l Fair : DIF)에 50개 부스 규모의 한국관을 구성하여 참가하였다. 전시회 개막 전날 참가업체들과 함께 전시회를 막바지 준비하고 최종 진행상황 을 점검하던 중 박람회 당국에 한 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태극 기 게양에 관한 문제였다. 무역관에서는 전시장 외곽에 있는 타 국기처럼 대한민국의 태극기도 게양해 주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요청했지만, 시리아 주최측에서는 맹방인 북한의 눈치를 보느라 태극기 게양은 절대 안 된다며 펄쩍 뛰었다. 사실, 이전에도 다 른 행사에 참가한 한국관에 대해 태극기를 게양한 사례가 없었다. 하지만, 무역관에서는 시리아 주최측이 이번만큼은 대한민국의 태극기를 게양 할 수밖에 없도록 강력한 근거가 되는 사진 한 장을 주최측에 보여주었고, 이 사진을 본 주최측은 매우 난감해 하며, 북한과의 관계가 있으니 전시장 바깥에는 게양할 수 없고, 전시장 내부에 태극기를 게양하도록 해줄 테니 양해를 해달라고 사정을 해왔 다. 무역관에서는 향후 주최측과의 협력관계 등을 고려하여 마지못해 양보를 했고 태극기는 전시회 기간 동안 시리아 땅에서 자랑스럽게 휘날릴 수 있었다. 시리아 주최측을 꼼짝 못하게 한 사진의 배경은 이 전시회가 개최되기 2개월 전 인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리아는 한국에서 개최된 서울국제식품전에 시리아관 을 구성하여 참가하였는데, 이 전시회를 주최한 KOTRA 본사에서는 참가국가에 대 한 예우차원에서 시리아 국기를 게양토록 배려해 주었고 이를 사진으로 남겨 참조 차원에서 무역관으로 송부해 주었는데 무역관에서는 2개월 뒤 비장의 무기로 쓰기 위해 고이 간직해 두었던 것이다.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아크람 알 바사(Akram Al Basha) 1961년 출생 이집트 소재 AUC(American University Cairo)를 졸업한 Akram은 암만 무역관에서 20년째 근무하고 있는 무 역관의 기둥이다. 주요업무는 심층조사, 프로젝트 발굴과 지원, 해외박람회 지원 등이며, 특히 현지 정부관계자 및 경제인사와의 관계가 돈독하여 무역관의 해결사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또한 한-요르단 친선협회 간사 역할을 담 당하면서 한국과 요르단 간 관계 강화에도 일조한다. 255 Ⅰ. 무역관 이야기

256 Johannesburg 50개 무역관 이야기 요하네스버그 무역관 1994년 4월 27일 새벽, 남아프리카 위로 세상의 첫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깨어나고 있는 남아프리카. 그것은 4세기에 걸친 격동에 찬 역사를 가진 백인 영웅들과 흑인 영웅들의 아프리카였다. 얀 반 리베이크, 파울 크뤼헤 르, 세실 로즈, 안드리스 프레토리우스, 올리버 탐보, 다니엘 프랑수아 말란, 헨드릭 페르부르트, 헬렌 리버만, 스 티브 비코, 크리스 바나드, 넬슨 만델라의 아프리카였다. 또한 동인도회사의 야채 재배자들, 대이주의 트래커들, 샤카 왕의 줄루족, 가축 장사꾼 코이코이족, 다이아몬드를 찾아 헤맨 코사족, ANC의 용맹한 투사들, 금광에 영혼 을 팔아버린 사람들, 아파르트헤이트를 발명해낸 사람들, 로벤 아일랜드의 도형수들의 아프리카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그것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땅 위에 하나님과 인간들이 함께 탄생시킨 다인종적 다종교적 아프리카 였다. 그리하여 오늘 이 아프리카의 주민들은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가장 신성한 행위를 완수하려 하고 있었 다.(도미니크 라피에르, 검은 밤의 무지개, 임호경 옮김, 중앙books, 2010년, 355쪽)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불행하게도 빛과 그림자 사이에 갇혀 있다. 이 나라는 한 땅에 제1세계(선진국)와 제3세계(후진국)가 공존하는 세계 유일의 나라다 무역관 개설 무역관 폐쇄 무역관 재개설 법적지위 확보(공관부속 기관) 생활 및 근무 여건 국토 대부분이 고지대이고. 대서양과 인도양 두 대양에 걸친 2,500km가 넘는 해안선을 낀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의 기후대는 지역별로 변화가 커서 내 륙지방은 반건조 기후, 동쪽지방은 온난 습윤 기후, 모잠비크 국경 부근은 아열대 기 후, 남서쪽 해안은 지중해성 기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남아공은 남반구에 위치 하고 있어 4계절이 우리나라와 반대이다. 고지대에 위치한 요하네스버그는 풍토병의 위험이 상대적으로 적고 의료시설이나 의료기술도 훌륭하지만 치안은 불안하다. 현 25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57 지 교민 수는 4,200명 내외(프레토리아와 요하네스버그 2,200, 케이프타운 1,800, 더 반 150, 기타 50)이다. 요하네스버그는 남부아프리카의 경제 중심지이나, 조사환경은 상대적으로 빈 약하다. 공개된 정보는 질이 매우 떨어지고, 유용한 정보는 외주를 담당한 컨설팅업 체로부터 구입해야 한다. 경제단체, 정부기관(중앙정부/지방정부), 공기업과 같은 경우 내부인력의 정보 분석능력이 떨어져 주로 컨설팅회사 등에 외주를 주고 있다. 영어는 공용어 중 하나로 의사소통에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TIA(This is Africa) 와 ATM(African Time Management) 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예컨대 정부 관료 들의 고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태도, 공기업들의 늦은 일처리와 잦은 방침 변경으로 충분한 사전 검토 없이 주요 현지인사를 초청하거나 프로젝트성 사업을 진행할 경우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무역관 이야기 요하네스 무역관 더블 근무자의 추억 메들리 근무했던 국가에 대한 추억은 세월이 지 날수록 실제 이상으로 아름답게 채색되고 힘들고 불편했던 기억보다 신나고 좋았던 기억이 많이 남는 것 같다. 남아공은 어찌하다 보니 두 번을 근무했기 때문에 더욱 그 런 생각이 든다. 나는 남아공은 치안 빼놓고는 빌어먹어도 천국이라고 얘기한다. 치 안이 형편없다는 말도 되고 사람 살기가 좋다는 얘기도 되겠지만 후자를 택하고 싶 다. 치안이 엉망인 반면 물산이 풍요롭고 온화한 기후가 사람 살기에 천혜의 좋은 여 건을 갖춘 나라가 남아공이다. 백주에 핸드폰 강탈 나이지리아에서 무역을 하고 있는 박 사장은 경기가 신통찮 아 남아공으로 진출할 생각으로 몇 차례 요하네스버그 무역관을 방문하여 필요한 정 보를 수집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무역관을 찾아온 박 사장은 백주에 인 파가 붐비는 대로에서 핸드폰을 강탈당했다고 했다. 렌터카를 빌려 요하네스버그 다 운타운에서 신호대기로 정지하고 있던 중 핸드폰으로 통화하고 있는데 건장한 흑인 이 성큼 다가오더니 승용차 윈도 안으로 손을 쓱 들이대고 전화기를 낚아채 가는데 순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자기는 나이지리아가 가장 위험 한 지역으로 알고 있는데 요하네스버그는 라고스보다 더 험악한 곳이라고 혀를 내둘 렀다. 현지에 주재하는 상사원들도 다운타운에 갈 때는 심호흡을 하고 가는데 불량 배들이 넘치는 시내에서 차 유리를 내리고 통화한다는 것은 전화기 여기 있소 하는 257 Ⅰ. 무역관 이야기

258 것과 다름없는 법. 1994년 남아공 흑인정권 수립 이후 치안이 극도로 문란하여 각종 범죄가 급증한 배경에는 실업률이 공식적으로는 25%이지만 실질적으로는 50%에 육박한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정부에서 단속만 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우자동차 사장 피살 남아공 근무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1999년 2월 초 상사협의회 주최로 본부로 귀임하는 김영선 대사 환송 만찬을 마치고 10시경에 모두 귀가하였다. 다음날 새벽, 만찬에 참석했던 대우자동차 사장이 숙소 입구에서 피살되었다는 날벼락 같은 전화를 받았다.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한인게 스트하우스에서 혼자 지내다가 며칠 후 가족이 남아공에 오기로 항공일정을 잡았다 고 마냥 들떠 좋아하던 권 사장님이 그렇게 허망하게 희생되다니 믿기지 않았다. 집 입구에서 사고가 발생했음에도 집안에서 아무도 총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한다. 기관 총에 소음기를 부착하여 범행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지만 확인되지 않았고, 탄피 조차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고도의 훈련을 받은 저격수가 살해했을 것이라는 추측 만 난무했다. 물론 범인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살해 동기도 밝혀지지 않아 아직까 지도 미제사건으로 남아있다. 혹자는 회사 인원 구조조정에 대한 원한관계나 경쟁업 체의 소행일 것이라고 했으나 이를 입증할 구체적인 근거가 없기 때문에 영구 미제사 건이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가기 싫은 공항 출영 공항 출영이 신경 쓰이는 곳이 요하네스버그이다. 남아공은 아프리카 경제 중심지이며 교통의 허브이기 때문에 인근 국가 여행자는 요하네스버 그에서 환승하는 일이 많다. 양질의 원유 생산으로 씀씀이가 커진 앙골라에 사업차 드나드는 상사원이나 교민사업자, 콩고ㆍ모잠비크에서 사업 중인 교민은 한국으로 여행할 경우 대부분 요하네스버그에서 환승하고 하루 이틀 쉬어가는 경우가 많다. 현금소지자가 많은 동양인은 항상 범죄 대상 1순위로 꼽히고 있고, 괴한들은 이들의 여행일정을 귀신같이 파악하고 있어 출발지에서부터 정보가 공유되는 것으로 추정 되고 있다. 공항에 도착한 여행자를 태우고 시내로 진입할 때는 항상 뒤따라오는 차 량을 주시하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사전에 주유소나 인파가 많은 곳으로 대피 할 장소를 물색하여 두는 것도 습관화되어 있다. 무역관 컴퓨터 도난 무역관은 창설 이래 인명사고가 없었던 것이 다행이지만 사 25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59 무실 컴퓨터를 도둑맞아 곤욕을 치른 일이 있다. 무역관 입주 건물이 Standard Bank로 보안시설이 완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역관 자체적으로도 시건장치를 매일 확인하고 경보장치도 되어있었지만 감쪽같이 문을 뜯고 침입하여 돈이 되는 컴 퓨터를 가지고 간 사건이었다. 다행히 도난보험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금전적으로 피해는 없었지만 컴퓨터에 암호자재를 깔아놓았는지, 사고 경위가 무엇이었는지, 사 후 조치는 적정하였는지 등등, 한동안 공관으로부터 시달림을 당하기도 했다. 신이 축복한 천혜의 부존자원국 남아공의 부러운 것 중 하나가 다양하고 풍부한 광 물자원이다. 원유 빼고는 없는 광물이 없는 나라가 남아공이다. 백금, 금, 크롬, 우라 늄, 티타늄, 알루미늄, 석탄, 철광석 등 광물자원의 보고이다. 한 때 개도 금을 물고 다녔다는 요하네스버그는 1886년 금광이 발견되면서 일확천금을 노리고 모여든 사 람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도시이다. 다만 가공품으로 수출하지 않고 원광석으로 수출 하기 때문에 부가가치가 낮은 것이 문제이지만 앞으로 2차 가공제품 수출이 활성화 되면 남아공 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광산개발을 위해서는 도 로건설이 필수적인데 그 때문인지 남아공의 도로망은 아프리카라고 믿기 어려울 정 도로 잘 발달되어 있다. 현지인 주장에 따르면 광산이 개발되면 가장 먼저 도로를 닦 고 백인 근로자를 위한 골프장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럴싸한 말이다. 실제로 골프 장 이름에 mine이 포함된 골프장이 매우 많은 것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정길원 OB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러셀르 호킨스(Russelle Hawkins) 1953년 출생 2005년 6월부터 무역관에 근무하고 있는 호킨스 직원은 프로젝트 사업 발굴 및 개발을 담당하고 있다. 부친이 한 국전 참전 용사인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인근에서 출생하여, 하버드대학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중미 온두라스와 남아공 주재 미국대사관에서 근무해 남아공 정부 인맥에 정통하다. 그는 뛰어난 사교성과 언변, 탁월한 필력으로 질의를 하더라도 회신을 받기 어려운 고압적이고 권위적인 기관들로부터 답을 빨리 받아낸다. 시 장개척에도 유능할 뿐만 아니라 무역관이 현지 정부 및 기관이나 업체와 마찰이 있을 경우 해결사 역할을 발휘하 고 있다. 한국문화(빨리빨리 등)를 잘 이해하고 있는 것도 그의 장점이다. 259 Ⅰ. 무역관 이야기

260 Cairo 50개 무역관 이야기 카이로 무역관 카이로는 고대 이집트의 수도였던 멤피스(Memphis)에서 유래되었다. 멤피스는 기원전 4세기에 지금의 카이로 남쪽, 나일 강 삼각주의 머리 부분에 입지했던 도시이다. 641년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민해온 무슬림들 중 이단으 로 몰렸던 파티미드(Fatimids) 왕국의 조하르 알루미가 969년 이집트를 정복하고 새 수도를 현재의 카이로로 정하였다. 그들은 새 수도의 이름을 승리한 이라는 의미의 알 카히라(Al Qahira)로 불렀는데 여기서 카이로라는 도시명이 유래되었다. 아랍인들은 카이로를 아랍 문화의 중심축으로 여긴다. 최고 명문대학, 최대 규모 도서관, 최다 판매부수를 자랑하 는 일간지가 여기에 있고, 최첨단 유행의 발원지이고, 심지어 아랍권에서 가장 큰 낙타시장도 있다. 카이로가 오 늘날까지 아랍 세계의 문화적 구심점으로 남을 수 있었던 진정한 이유는 그에 필적할 만한 도시가 없었기 때문이 다. 굳이 맞수를 꼽자면 베이루트가 있겠으나, 한때 자유분방한 분위기로 전 아랍권 예술가들과 한량들을 끌어들 였던 이 도시는 내전으로 쑥대밭이 되었다. (맥스 로덴벡, 카이로 에서) 무역관 개설 생활 및 근무 여건 이집트 기후는 크게 아열대성기후와 사막기후로 양분되고 있다. 수단 국경에서 카이로까지 나일강 유역은 폭 1~20km의 평야지대로 비교적 기후가 온화한 지역에 속하며, 이집트 국토의 96%를 차지하고 있는 사막지역은 일부 오아시스지역을 제외 하고 일년내내 거의 비가 오지 않는 고온 건조한 사막기후이다. 지중해와 델타지역 으로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 포트사이드 세 도시 축을 잇는 나일 델타지방은 연간 강수량이 250mm에 이르는 아열대성 농업지대이다. 현지 기후에 따른 특별한 풍토 병은 없으나 먼지가 많아서 각종 눈병, 기관지염, 감기 등이 많이 발병하고 있다. 치 안은 지난 2011년 1월 혁명 이전까지 상당히 양호한 편이었으나, 혁명 이후 경찰 공 권력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한국인을 포함한 외국인 밀집 거 주지역인 카이로 마디(Maadi) 지역 내에 소매치기, 강도, 차량 도난사건 등이 지속 적으로 발생하고 있어 많이 불안한 실정이다. 현지 교민 수는 1,500명 정도로 추정되 고 있다. 이집트가 관광국가이다보니 여행사와 식당을 운영하는 교민들이 많고, 한 국 지상사는 현대자동차, LG전자, 삼성전자, 포스코 등 현재 28개사가 진출해 있다. 260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61 이집트는 CAPMAS(the Central Agency for Public Mobilization and Statistics/ 운영하며 현지 통계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 만 이집트 통계는 제때 업데이트가 이루어지지 않고 통계치 자체가 다소 늦게 발표되 기 때문에 최신 통계를 입수하기는 쉽지 않은 실정이다. 시장정보 또한 현지 기관에 서 제공하는 정보가 매우 제한적이고, 중요 정보는 외부에 공개하지 않기 때문에 영 국 등 외국 자료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정부정책도 계획만 발표하고 실행되기까지 상당기간이 소요될뿐더러 계획 자체가 무산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이집트인들 은 일반적으로 시간약속에 대한 관념이 부족한 편이다. 최근 비즈니스 상담에서 약속 을 정확히 지키는 경우가 늘고 있는 추세이기는 하나, 통상적으로 30분에서 1시간가 량 기다리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인구의 90%가 무슬림인 이집트는 타 이슬람국가 에 비해 비교적 많이 개방되어 있는 편이다. 그렇더라도 행동에 유의할 필요는 있다. 무역관 이야기 이집트 재무부국장, KOTRA 직원 가족이 되다 이집트 재무부 산하에 이집트 민간합 동투자(PPP : Public Private Partnership) 프로그램을 추진하기 위한 PPP Central Unit이라는 기관이 있다. 그 기관을 총괄하는 재무부 공무원인 Atter Hannoura는 30년 동안 금융, 프로젝트 관련업무를 담당해 왔는데 이집트 정부 대표 로 세계은행에서 일한 경험도 있고, IT와 제약 분야에서도 근무한 적이 있는 이집트 의 인재이다. 이집트의 PPP 사업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10년 5월 이후였다. 이집트 하원 에서 이집트 PPP 법안이 통과됨으로써 이집트 국내기업은 물론 해외 유수의 프로젝 트 디벨로퍼, 컨트랙터들이 이집트시장 진출을 위해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우리의 건설 플랜트 관련 기업 역시 중동 아프리카에서 떠오르고 있는 이집트 PPP 사업에 큰 관심을 보이며, 적극적인 시장 진출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카이로 무역관에서도 이러한 시장기회를 적극 살리기 위해 본사에서 추진하는 Global Project Plaza(GPP) 행사에 이집트 PPP Central Unit의 수장인 Atter를 한국으로 초청할 기회를 마련코자 했다. 무역관의 A직원이 Atter를 면담하러 갔다. 한국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았고, 한 국을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었기 때문인지 Atter 청장은 처음에는 그리 큰 관심을 보 이지 않았었다. 그래도 이에 굴하지(?) 않고, 한국의 민간투자사업에 대한 경험과 발전 과정, 한국 투자자와 컨트랙터들의 경쟁력과 중동 산유국에서의 프로젝트 수행 경험 261 Ⅰ. 무역관 이야기

262 등을 열심히 설명하고, KOTRA 사업인 GPP에 대해 이집트의 PPP 미래를 위해, 성공 적인 사업 추진을 위해 반드시 참석해야할 행사 라고 적극 어필하였다. 이러한 노력 끝 에 Atter 청장은 재무부장관의 승인을 받아 GPP 행사에 참석하기로 결정하고, 한국 행 비행기에 카이로 무역관 A직원과 함께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Atter 청장은 공항에 내리면서부터 Korea, Wonderful! 이라며 탄성을 질렀 다. 공항 인프라가 매우 좋다는 것이었다. 이집트 PPP 사업을 총괄하며, 인프라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인사로서 역시 한국의 훌륭한 공항 인프라를 알아본다고 생각했 다. 그는 이집트공항 인프라 역시 향후 PPP 방식으로 추진할 것이며 이미 장관 승인 이 났다는 정보까지 스스럼없이 A직원에게 알려주었다. 그의 한국에 대한 놀라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인천공항에서 행사장인 롯데 잠실호텔로 가는 중에 한강 주변에 구축된 한국의 훌륭한 도로, 공원, 주택 등의 인프 라를 보고, 나일강도 이런 식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그는 이집트에서 한국은 좋은 품질과 세련된 디자인의 제품을 만드는 나라 라는 정도의 이미지만 갖 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을 직접 방문하고 나서는 훌륭한 인프라를 갖춘 선진국이라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보탰다. 행사는 성공적이었다. 많은 업체들이 이집트 PPP 사업에 큰 관심을 보였고, Atter 청장 역시 잘 조직된 행사에 대해 큰 만족감을 드러냈다. Atter 청장은 한국문화에도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한국 전통문화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을 방문하길 희망했다. 그의 살인적인 스케줄 때문에 쉽지는 않았지만 오전에 산업은행을 방문하고, 잠시 짬을 내어 무역관의 A직원은 그를 인사 Atter 청장과 함께 262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63 동, 청계천, 경복궁, 한옥마을 등 007 작전(?)을 방불케하는 스피드로 한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 심어주기 사업 을 적극 시행했다. 물론 그 전날 밤, 경복궁에 대한 역사적 배경 조사도 끝냈었다. 짧은 시간 관광이었지만 한국문화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 았고, 특히 도심 한가운데 시원함을 더해주고 있는(6월에 방문하여 한국의 습한 더운 날씨를 경험하고 있었다) 청계천을 매우 좋은 인프라라고 하면서 다시 한 번 Korea, Wonderful! 을 외쳤다. 아쉬운 방문을 뒤로하고, Atter 청장은 무역관의 A직원과 다시 업체 미팅을 위 해 종로에서 역삼동으로 급하게 이동해야 했다. 그는 A직원에게 훌륭한 행사에 참여 할 수 있게 도와주고, 좋은 기업들과의 미팅을 주선해주고, 더불어 한국문화에 대해 느낄 수 있도록 자신을 안내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며, 필자에게 인사동에서 샀다 는 자개 명함집을 주었다. A직원은 그 때부터 그를 삼촌(Ammu) 라고 불렀다. 고위 공무원에게 이렇게 부르는 것이 결례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전혀 기분나빠하지 않았고, A직원을 아들(Ibni) 이라고 하며 어깨에 손을 올리며 친근감을 나타냈다. 마지막 미팅을 마치고, 바로 공항으로 떠나 카이로로 돌아오는 길에 A직원은 Atter 청장을 삼촌(Ammu) 라고 부르며 둘의 가족관계(?)를 더욱 공고히 했다. Atter 청장은 한국 방문을 통해 한국에 대한 좋고 발전된 이미지와 훌륭한 잠재 파트 너, 그리고 한국인 조카 한 명을 얻어 이집트로 떠날 수 있었다. 그는 한국 방문 이후, 이집트에서 개최되는 한국 관련행사에 적극 참여했고, 한 국기업이 이집트를 방문하여 면담을 희망하면, 시간을 최대한 쪼개서 면담에 적극 임 하고 있다. 물론 자신의 동료들에게도 한국에 대한 좋은 인상과 발전상에 대해 널리 알리는 한국 알리미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는 중이다. 자랑스러운 무역관 현지 직원 세이프 엘딘 파탈맘(Seif El Din Fath El Bab) 1980년 출생 2007년 1월부터 무역관에 근무하고 있는 세이프는 마케팅, 프로젝트 진출을 담당하고 있다. 그는 이집트 명문 공 대인 알렉산드리아 공대를 졸업하고, 이집트 일류 건설회사인 HAC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프로젝트 분 야에 전문성을 가지고 있으며 정부기관과도 인적 네트워크가 견고히 형성되어 무역관 업무에 큰 도움을 주고 있 다. 게다가 책임감이 누구보다 강한 것도 그의 큰 장점이고 무역관의 자산이다. 263 Ⅰ. 무역관 이야기

264 Tripoli 50개 무역관 이야기 트리폴리 무역관 <매일경제>는 1983년 11월 7일 1면 톱으로 리비아 대수로 공사 수주 라는 제목에, 부제로 동아그룹, 6일 현지 서 계약 체결 을 달아 이렇게 기사를 써 내려 갔다. 동아그룹 계열회사인 동아건설, 동아콘크리트, 대한통운 3개 사 등 동아컨소시엄은 단일 공사로는 세계 최대인 32억 9,700만 달러 규모의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수주했다. 리비아 대수로 공사는 카다피(Muammar Gaddafi)가 녹색혁명의 일환으로 추진한 야심작이었다. 론리 플래닛 창시자 토니 휠러는 나쁜 나라들 에서 이렇게 썼다. 카다피는 그린북 에서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 결할 수 있는 제3의 우주이론 을 설파하고 있다. 그렇다면 리비아는 아무 문제가 없는 천국과 같은 곳일까? 리비 아는 그동안 내가 여행한 나라들 중 가장 지저분한 나라였다. 그렇다면 리비아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카다 피는 테러리즘에서 한발 물러나 시장경제체제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러나 지난 30년간 그린북 을 신봉해 온 리 비아는 과연 어떻게 달라졌는가? 사실 그리 큰 변화는 없었던 것 같다. 1969년 9월 1일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던 카다피는 장기집권과 철권통치에 반발해 일어난 반정부 시위로 권좌에서 물러나 은신하던 중 2011년 10월 20일 시민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무역관 개설 생활 및 근무 여건 2,000km의 지중해 해안선을 끼고 있는 리비아는 1년에 연평균 강수일이 30일 미만일 정도로 날씨가 매우 좋은 나라이다. 한 여름철 기온은 섭씨 40도를 오르내리 지만 습도가 낮아 생각만큼 더위가 느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겨울철인 12월에서 3 월 사이에는 최저기온이 섭씨 7도 안팎을 보이는데, 건물 내 난방장치가 없는 것이 일 반적이고 천정이 높아 체감기온이 훨씬 더 밑으로 내려가기 때문에 가정에서는 전기 스토브를 많이 사용한다. 리비아 체류 한국인은 내전이 발발한 2011년 2월 중순 이전에 1,500여 명 수준이 었다. 내전이 발발하면서 20명 내외로 줄어든 적도 있는 교민은 2012년 4월 중순 현재 130명 수준으로 늘어났다. 정치와 치안이 안정을 되찾고 전후 복구사업이 본격적으 로 전개되면 한국기업의 리비아 진출과 더불어 교민도 대폭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대다수 국민들은 국제기구에서 발표하는 1인당 1만 2,000달러에 훨씬 못 미치 는 수준의 생활을 하고 있고, 카다피의 42년간의 장기 독재기간 동안 반미노선을 유 264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65 지한 결과 거리 도로표지판, 상점 간판 등은 모두 아랍어로만 표기되어 있으며, 영어 구사가 가능한 일반시민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카다피 체제가 무너진 이 후 곳곳에 영어간판과 사설 영어학원 설립이 늘고 있다는 것이 큰 변화이다. 무역관 이야기 미국 로스앤젤레스 무역관 최인영 과장과 박성진 대리는 2012년 3월 12일(목요 일)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CAFE MAK에서 류대형 OB를 만나 약 1시간 반 동안 인 터뷰를 했다. 1972년 KOTRA에 입사한 류대형 OB는 지역조사부 구주과에 근무하 다 1976년 리비아 트리폴리 무역관에 파견되었고, 1981년에는 미국 뉴올리언스 무역 관 근무를 마치고 1984년 퇴사했다. 선배님, 먼저 트리폴리 무역관을 설치하게 된 배경 등을 좀 설명해 주십시오. 트리폴리 무역관이 1974년 개설될 당시 리비아는 북한 단독 수교국가였다. 북 한이 리비아를 북아프리카와 중동 전체에 대한 거점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대 사관에 상당히 많은 인력이 나와 있었으며 남한과의 수교를 집요하게 방해하였다. 국교 수립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었지만 시장 자체가 매우 중요하므로 외무부는 KOTRA를 앞장세웠다. 그러나 무역관이 들어가려면 설립허가가 필요한데, 당시 리 비아가 너무 배타적이었기 때문에 도저히 불가능한 상태라 대 안으로 현지 무역회사에 위장취업을 했다. 이를 위해 관용여권 을 일반 민간여권으로 바꿔서 들어갔다. 초대와 2대 무역관장 만이 민간여권으로 들어갔으며, 따라서 활동상의 제약이 상당 히 많았다. 한 예로 무역관 간판을 달 수 없었기 때문에 주택 같 은 건물에 일부는 사람이 살고 일부는 사무실로 쓰는 음성적인 류대형 OB 방법을 택했다. 리비아는 오일머니가 많은 국가이기 때문에 당시 튀니지, 알제리 등과의 중계무역이 발달해서 그쪽 국가들에 가서도 활동을 많이 했다. 비자 문제 때문에 취업에 결격사유가 있어서, 인민재판소에 불려간 적도 있었고 국세청에 서 조사를 나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음성적으로라도 무역관 업무는 다 챙겼는데, 지 금 생각해보면 우리가 참 용감했었다. 그 와중에도 수교할 목적으로 국제박람회에도 매년 참가하고, 통상사절단이나 세일즈맨이 오면 데리고 다니는 등 다 챙겼다. 그래 서 당시 트리폴리 무역관은 본사에서도 대단한 무역관이라고 인정을 많이 받은 터라 265 Ⅰ. 무역관 이야기

266 항상 포상 대상이었다. 그런 곳에서 근무했다는 것에 나는 자부심을 느낀다. 리비아 정부가 공식적으로는 한국을 배척했지만, 우리가 들어와서 일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이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순수하게 경제적 인 목적이라 자국에도 손해될 것이 없기 때문에(국세청 조사 등을 받을 때 보니) 음 성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눈감아 주었던 것이다. 리비아는 비밀경찰이 도처에 있기 때문에 외국 사람이 장기 체류하면서 하는 행동을 모를 리가 없지만 위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인정해 준 것 같았다. 그래서 나중에 건설업체들 (대우, 삼성)이 진출할 때 트리폴리 무역관장은 파워가 셌다. 주재공관이 없기 때문 에 건설회사가 계약 후 공증하는 일을 무역관장이 맡았고, 관인이 있으면 한국은행 에서 외화 매입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무역관 법적지위는 어떠했나요? 1978년에 영사관계가 수립되어 허승 총영사(후에 경제차관보까지 지냄)가 왔 다. 그는 무역관 업무를 높이 평가하여 현지 법적지위(status)를 상무관과 같이 해주 겠다고 제안하였지만 거절하고 다음 발령자부터는 상무관 지위를 받았다. KOTRA 최초의 상무관 status가 트리폴리 무역관이었다. 허승 총영사는 우리 사정을 너무 잘 알고 외무부 본부에 건의해서 KOTRA도 어려운 곳은 상무관 신분으 로 보내라고 했던 것이다. 귀국하여 본사 조직망과에서 해외무역관 법적지위 업무를 담당하면서 그 분의 협조를 너무 많이 받았다. 외무부는 처음에는 KOTRA 직원에게 상무관 지위를 부여하는 데 반대가 많았다. 이슬람권이라 현지직원 채용에도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은데. 리비아에서는 여자가 취업을 하지 못하므로 남자만 채용했는데, 현지직원을 채 용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이웃에서 나를 잘 도와주던 압달라 자야디라는 청년을 현지직원으로 채용했는데 내가 당시 업무로 높이 평가받던 대부분이 그 직원의 공이 라고 할 정도로 그는 일을 매우 잘 했다. 그래서 아마도 비밀경찰이 너를 감시하기 위해 리비아 정부에서 파견한 것 아니냐 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한국의 건설업체들 이 리비아에 진출할 때 정부부처와의 소통은 그 직원이 도맡았고, 대정부 채널은 그 직원을 통했을 정도로 능력이 출중했다. 그 직원의 아버지는 꾸란을 연구하는 학자 였고, 삼촌은 세관 관리였는데 그는 가족을 동원해서 무역관 업무를 도와주었기 때 문에 전 가족이 무보수 직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나중에 신한건설(삼 26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67 성물산)이 무역관보다 높은 급여를 제시하고 그를 스카우트 해갔다. 박람회에도 참가하셨다면서요. 리비아는 산유국으로 현금이 많지만, 산업구조 자체는 아주 열악하였다 년 3월 트리폴리 국제박람회가 개최되었는데, 삼성물산은 처음으로 12인치 컬러TV 를 획기적인 품목으로 출품했다. 사실 형식만 컬러였지 흑백에 가까웠지만 한국관 튀니지 대사, 본사 본부장, 관장이 나와서 우리의 산업이 이 정도라고, 발전된 산업구 조라고 자랑하며 참가했었다. 우리나라가 트리폴리 국제박람회에 처음 참가한 것은 1973년(5개 업체 참가, 개최기간 3월 1일~20일)이다. 기우탁 OB는 1974년 트리폴리 국제박람회 참관기를 KOTRA 동우회보인 KOTAA 뉴스에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담아 기고한 바 있다. 북한사람들도 만나셨지요? 북한사람들을 접촉할 일이 잦았다. 나는 당시 정부가 북한 실상을 과장해서 말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었지만 리비아에서 생활하면서 북한의 실상을 알게 돼 생각 이 바뀌었다. KOTRA 직원은 혼자 파견되었고 혼자 사업을 진행했지만 북한은 서로 를 감시하기 위해 꼭 두 명이 파견되고 길을 가더라도 혼자 다니지 않았다. 전시회 등 에서 북한관을 보더라도 전시품의 수준이 낮았다. 통신상의 에피소드 좀 귀국할 때가 되어 아내를 6개월 먼저 귀국시켰는데, 본사에서 트리폴리가 아주 중요한 지역이므로 무역관장은 1년 더 연장 근무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것이 당 시에는 상당한 혜택이었지만 가족이 떠난 상태였기 때문에 본사의 승인 없이 그냥 귀 국해버렸다. 무모했지만 구실은 있었다. 당시에는 본사와의 교신을 전보 몇 글자로 만 했는데 돈을 아낀다고 단어를 모두 생략해 버렸다. 본사에서 온 케이블을 읽어보 니 말이 너무 생략되어 있어서 들어오라는 것인지 계속 있어도 되는 것인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 케이블을 보낸 총무처 담당자가 내 대신 책망을 받았다. 267 Ⅰ. 무역관 이야기

268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269 01 KOTRA의 외국인투자 유치 기능에 대하여 02 전시박람회와 엑스포 뒷이야기 03 이런 일 저런 사업 04 KOTRA의 여풍 Ⅱ

270 KOTRA의 외국인투자 유치 기능에 대하여 01 KOTRA, 국가 외국인투자유치 기관 수임받다 년, 구국의 심정으로 발로 뛴 투자유치 275 실리콘밸리 기업의 R&D 센터를 유치하라 277 외국인투자유치 좀 더 잘 할 수 없을까? 280

271 KOTRA, 국가 외국인투자유치 기관 수임받다 KOTRA의 외국인투자 유치 기능에 대하여 정동식 OB 1998년 4월 8일 오후,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경제장관 간담회 회의장은 의장을 맡은 이규성 재정경제부(재경부, 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부터 묘 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경제관련 부처 장관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었고 그 중에는 산업자원부(산자부, 현 지식경제부) 박태영 장관의 모습도 보였다. 유일하게 경제장관이 아닌 신분으로 참석한 KOTRA 김은상 사장은 박태영 장관 옆 자리에 안 내되었다. 회의 안건은 국가투자유치 기관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문제였다. 당시 사 내 대책 반장을 맡고 있던 필자는 배석자 자격으로 이 회의에 참석할 기회를 가졌다. 회의가 개회되자 이규성 장관은 특유의 유려한 언변으로 안건을 발제하면서 KOTRA에 이 기능을 두는 것을 전제로 참석한 장관들의 의견개진을 촉구했다. 맨 먼 저 발언에 나선 이는 박태영 산자부장관. 그는 먼저 경제장관회의에 국무위원이 아닌 KOTRA 사장이 초청된 것부터 부당하다는 주장을 펴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정부기 관이 아닌 KOTRA가 투자유치업무를 맡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피력한 후 산 자부야 말로 국가투자유치기관으로 지정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했다. 순간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뒤에서 쳐다본 김은상 사장의 목덜미도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평소에도 쉽게 흥분하고 열을 잘 받는 분이었기에 정권 초기의 신임 장관으로부터 회의참가 자격에 관한 시비조의 지적을 받았으니 그 심정이 오죽할 것 인가 짐작이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국가투자유치기관 설치문제를 두고 본의 아니게 주무부처인 산자부와 경합을 벌이는 처지가 되었으니.... 김대중 정부는 1998년 2월 취임하자마자 외환위기의 극복전략으로 외국인투자 유치의 중요성에 주목하면서 분산되어 있는 국가투자유치기능의 통합 확대를 추진 해 오고 있었다. 그 당시 정부의 업무분장을 보면 투자유치정책업무는 재경부가, 유 치업무는 산자부가 각각 담당했다. 그리고 산자부 산하에 외국인투자의 인허가업무 처리를 위해 각 기관 파견 공무원으로구성된 행정지원단 성격의 외국인투자 종합지 271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272 원센터가 운영되고 있을 때였다. 투자유치촉진 기능도 KOTRA와 중소기업진흥공단 이 나눠 맡고 있는 상황이었다. 회의석상에서 산자부 장관이 기왕에 운영되고 있는 종 합지원센터 기능을 강화하여 산자부가 국가투자유치기능을 맡아야 된다고 주장하는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재경부의 입장은 달랐다. 외국인투자촉진법이 새로이 제정되는 상황에서 투자유치가 더 이상 인허가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촉진기능이 위주가 되어야 하며 이 러한 촉진기능은 정부부처인 산자부 보다는 해외조직망을 갖춘 KOTRA가 적격이라 는 입장을 고수하였으며 이것은 재경부 이전에 청와대에서도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재경부의 입장은 투자유치정책은 산자부가 맡되, (이후 투자유치정책기능이 산자부 로 이관됨) 투자유치를 위한 촉진기능은 KOTRA에 맡긴다는 구도였다. KOTRA는 1996년 자체적으로 외국인투자유치촉진 기능을 갖추기로 하고 투자 진흥부를 신설하였다. 당시 이사회 이사장을 맡았던 김기환 박사의 주장에 따른 것이 었다. 그러다가 필자가 투자진흥부장을 맡고 있을 당시인 1997년 말에는 투자진흥 본부로 확대개편 되기에 이르렀으니 마치 정부의 움직임을 사전에 알고 대비하기라 도 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또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시대상황과 KOTRA의 기능개 편이 운 좋게 맞아떨어진 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사정을 알고 보면 투자기능이 도입된 처음 2년간 KOTRA는 나름대로 착실한 실적쌓기의 노력이 있었고 이런 노력이 정부요로에 알려진 덕이라고 생각된 다. 예를 들면 이런 에피소드도 있었다. 1998년 1월 어느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필자 는 사장실에서 호출을 받았다. 김은상 사장은 대뜸 목포 대불공단의 토지분양가를 물 으시는 것이었다. 대불공단 하면 프레온 가스를 대체하는 신 냉매물질인 CFC를 생산 할 목적으로 3M이 대규모 투자를 계획하던 입지였다. 나중에 투자계획 자체는 불발 되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KOTRA는 이 회사의 투자유치에 온갖 정성을 기울이고 있었으며 심지어 CEO의 자가용비행기 착륙문제까지 신경을 쓸 때였다. 아무튼 토지 분양가를 알려드리고 난 후 오후에 다시 호출을 받고 올라간 사장실에서 김 사장은 만면에 웃음을 띄우고 직전에 배웅했던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의 대화내용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마침 KOTRA 주관 연례 수출구매상담회 행사에 참관차 방문했 던 당선자에게 김 사장은 KOTRA 투자유치활동에 관한 브리핑을 곁들이면서 3M이 목포 대불공단에의 투자를 추진한다고 소개하였다. 그러자 목포가 고향인 당선자께 서는 큰 관심을 나타내면서 대뜸 대불공단의 토지분양가를 질문하였고 김 사장은 미 리 준비한 대답을 하였더니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이다. 272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73 그 뒤 국가투자유치기관 설치문제가 불거지고 청와대가 먼저 KOTRA를 지목하 였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필자는 그날의 에피소드를 떠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KOTRA 투자진흥부 발족이후 최초의 투자유치 성공사례인 엥겔(Engel)사 유치과 정도 정부 관련부처의 신임을 얻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오스트리아 플라스틱 금형제 조회사인 엥겔은 3,000만 달러를 투자키로 하고 2007년 9월 경기도 장당공단에 입주 계약을 체결하였다. KOTRA는 투자가 발굴에서부터 입지 선정, 토지가격 지원, 공단 입주계약에 이르는 전 단계를 지원하였다. 특히 평당 분약가격 50만 원을 29만 원 선 까지 파격적으로 인하해 달라는 투자자의 무리한 요구가 있었는데 당시 공단 토지가 격 지원-그것도 국가공단이 아닌 일개 지방공단을-은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KOTRA는 경기도는 물론 산자부로부터 예산지원을 끌어내는데 성공하였고 이 것이 엥겔 유치성공의 관건으로 작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재경부등 각 정부기관 과 협의과정에서 논의되었던 토지가격 지원이나, 종업원 교육훈련 보조금 등의 인센 티브는 이후 외국인 투자유치 촉진법 체계에서 주요한 지원정책 수단으로 채택되기 까지 하였다. 결국 엥겔사 투자유치가 당시 재경부를 비롯한 정부 관련부서에 KOTRA의 활동을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KOTRA에 국가투자유치기관 수임과정은 그러나 순탄하지 않았다. 산자부가 뒤늦게 수임경쟁에 나섰기 때문이다. 산자부를 경유한 청와대 보고 과정에서 KOTRA 안은 번번이 2안으로 밀리곤 했다. 그러나 청와대와 재경부의 의견은 KOTRA쪽으로 기울었고 재경부는 그 결론을 경제간담회에 상정하여 확정한다는 전 갈을 우리측에 주었던 것이다. 경제장관회의에서 산자부 장관이 강하게 항변한 것은 바로 이런 배경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회의 분위기는 재경부가 주도한 대로 KOTRA 쪽으로 기울었다. 결론은 KOTRA가 국가투자유치기관 기능을 수임하되 산자부 산 하의 외국인투자유치 종합지원센터는 KOTRA에 파견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산자부 는 이에 따른 기구개편을 시행할 것과 조직개편의 결과를 차기 경제장관 간담회에 보 고하도록 요구받았다. 이윽고 회의는 산회하였다. KOTRA 수임을 축하합니다. 회의가 끝나고 당시 재경부 문제우 외국인투자 정책과장은 필자에게 다가와 속삭이듯 말하며 손을 잡아 주었다. 김은상 사장은 꿈에 서 막 깨어난 듯한 표정이었다. 273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274 이인석 OB의 회고담 1998년 IMF 외환위기 상황을 재개국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그 당시 30년 무역 역사에서 외국인투 자가 총 124억 달러였다. 그 정도밖에 안됐다. 이제 개혁 개방이 필요했다. 무역에 투자를 강조하기 시작하였고 국민의 정부 들어서서 투자를 적극 고려하게 되었다. 어떠한 형태로 도입할 것인가를 고 민하게 되었고 KOTRA에서 맡는 것으로 방향이 잡혔다. 1998년 2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고 그해 5월 국민의 정부 100대 과제 가 있었는데 기획예산처 장관이 총반장을 맡고 있었다. 100대 국정과 제 중에서 여섯 번째가 KOTRA 개혁이었다. KOTRA 역사에서 그 당시는 전환기라고 할 수 있다. 변 화된 환경에 맞게 KOTRA도 새로운 미션을 부여받은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당시 견제세력이 많았다. KOTRA 조직이 커지는 것에 대해서 중앙부처가 달가워하 지 않았다. 타협안으로 KOTRA에 무역투자유치센터를 두기로 하였는데 이것도 쉽지 않았다. 당시 산업자원부가 가져가려 했다. 논리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산업자원부 등 중앙부처(정부부처)가 맡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투자유치를 공무원이 나와서 하는 것은 맞지 않다. IMF 외환위기는 결국 공무원 의 책임이 크다. 국가 경제의 실패를 투자유치에서도 답습할 생각이냐 라는 주장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자부에서 투자를 가져가겠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청와대는 결국 KOTRA에서 투자임 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외국인투자지원센터(Korea Investment Service Center : KISC) 출범의 배경이다. 조직 개편 등 KOTRA의 대 전환이 이루어졌지만 KOTRA 내부의 열기가 크지는 않았다. KOTRA의 약점이 해외 부분은 강한 반면 국내 트렌드에는 약하다. 당시 KOTRA 사장이 대 통령께 보고하는데 보고서의 반이 영어로 작성되어 있었다. KOTRA는 변화에 무감각했고 자만심이 있었다. KOTRA의 기능 전환, 조직개편은 40년 역사에서 중요한 시기였다. (산자부에) 무역투자청이 생기려 하니까 재경부는 부처 간 견제가 필요했다. 그래서 KOTRA를 지 원한 부분도 있다. 당시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재경부는 투자유치청이 오랜 숙원이었다. 아젠다 선 점을 해야 부처로서의 입지가 확고해지므로 재경부는 적극적이었다. 그런 점을 KOTRA가 배워야 한 다. 국정 과제라면 잡는 적극성이 필요하다. 이는 국가를 도와주는 것이기도 하다. 당시 외교부에서 통 상부문을 가져갔는데 지역부분은 재경부에 남겨두도록 했다. 국내 통상 관련해서는 KOTRA가 맡도 록 했다. KOTRA가 생각하는 미래는 무엇이며, 무엇을 준비하고 있으며 누가 그것을 하는지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필자 이인석 OB는 1969년 9월 입사하여 프랑크푸르트, 취리히, 함부르크, 동베를린 무역관에서 활동하고 1998년 2월 의원 면직한 후, 김대중 정부에서 경제비서관으로 2년 반 동안 근무했다. KOTRA 50년사 팀에서는 2012년 3월 5일(월요일) 이인 석 OB와 양재동 해미식당에서 인터뷰했는데 위 글은 그 일부이다. 274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75 1998년, 구국의 심정으로 발로 뛴 투자유치 KOTRA의 외국인투자 유치 기능에 대하여 오사카 무역관 1997년 시작된 아시아 외환위기의 여파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대한민국 정부는 위기 극복을 위해 외자유치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일본계 자금에 주목하였다. 정부는 일본에 대규모 민관합동 대일 투자유치사절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도쿄에 이어 1998년 10월 9일 오사카 지역에서 투자자 관계 기업설명활동(Investor Relations: IR)을 개최하기로 하였다. 오사카 무역관은 난감했다. 부도위기의 나라에 투자할 일 본인 투자가를 찾는 것은 결코 녹록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는 말처럼 무역관장을 중심으로 전 직원 이 발 벗고 뛰었다. 무역관장은 현지 유관기관을 방문하며 협조를 요청하였다. 시간 을 쪼개며 해야 하는 관계로 방문이 어려운 곳은 유선으로 투자유치사절단 사업을 홍 보하고 일본기업 참가유도를 요청하였다. 뛰고 보니 그 수가 긴키( 近 畿 ) 통상산업국, 오사카 상공회의소 등 23개에 이르렀다 (매일경제) 김대중 대통령 세일즈 외교 275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276 무역관 직원 또한 전화기를 붙들고 매일같이 씨름하였다. 무려 3,200개사라는 텔레마케팅 대상기업을 선정하고 끊임없이 전화를 돌렸다. 이번 사업의 취지를 설명 하면 대뜸 한국 괜찮냐 는 우려스런 투자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외환위기 극복 의지, 성장 잠재력, 유망 투자분야 등에 대해 설명하며 투 자유치 IR 참가를 유도하였다. 이와 함께 행사의 성공을 위해 일본경제신문 오사카본 부, 관서TV방송 등 언론기관에도 홍보협조를 요청하고, 안내문을 1만 3,500부나 제 작하여 간사이( 關 西 )지역 주요 기업에 발송하였다. 드디어 D-데이인 1998년 10월 9일이 다가왔다. 무역관장을 비롯하여 전 무역관 직원은 긴장감으로 이날을 맞이했다. 박태영 산업자원부(현 지식경제부) 장관의 기 조연설로 시작된 이날 투자환경설명회에는 일본기업 214개사 300여 명이 참가하며 대성황을 이루었다. 김대중 대통령 방일에 맞추어 구국의 심정으로 준비한 행사는 오 사카 무역관에서 개최한 사상 최대의 투자유치 IR이 되었다. 이 외에도 부대행사로 리 셉션, 분야별 투자포럼, 투자상담회를 개최하여 일본기업 총 738개사에 1,043명 참가 라는 기록적인 숫자를 만들어 내었다. 결과 또한 만족할만하였다. 이 행사를 통해 한 화종합화학과의 합작투자건 3억 달러와 포철(현 POSCO)의 에너지 관련 분야 3억 달러를 포함해 총 9억 달러의 투자유치가 성사되었다. 대한민국은 IMF 구제금융을 받은 지 3년 8개월이 지난 2001년 8월 23일, 마지 막 남은 1억 4,000만 달러를 상환함으로써 IMF 체제에서 벗어났다. 여기에는 우리 무역관원 한 명 한 명의 땀방울도 밑거름이 되었을 것으로 믿어 가슴 뿌듯하다. 27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77 실리콘밸리 기업의 R&D 센터를 유치하라 KOTRA의 외국인투자 유치 기능에 대하여 우기훈 필자가 1982년 KOTRA에 입사한 이후 30년 가까이 근무하면서 가장 보람된 일 을 꼽아보라면 실리콘밸리에서의 투자유치 성과를 내세우고 싶다. 2002년부터 4년 동안 샌프란시스코 무역관장으로 근무하면서 Intel, Google, Siemens Medical Solution, National Semiconductor, Analog Device, AMB property, Electronic Arts 등 세계적인 기업들의 한국투자를 성사시킨 것이다. 그중에서도 글로벌 IT기업들의 R&D 센터 유치는 정부의 시책과 부합하였을 뿐 만 아니라, KOTRA의 외국인투자 유치 역량을 정부 부처와 외국기업들에게 각인시 켜 줄 수 있었다. 당시에는 IT를 전담하는 정보통신부가 있었고, KOTRA가 IT분야 투자유치를 거론하니 전문성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실리 콘밸리에서 샌프란시스코 무역관이 만들어낸 가시적인 성과로 이러한 의구심을 잠재 울 수 있었고, 정보통신부에서 운영한 I-Park와의 업무중복 문제가 불거졌을 때는 KOTRA의 경쟁력이 더욱 높이 평가받는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외국인투자 유치 과정을 돌이켜보면 무모한 도전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특히 2002년 7월 샌프란시스코 무역관장으로 부임했을 당시 샌프란시스코와 실리콘 밸리의 모든 것이 낯설었고 압박감을 심하게 느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 샌 프란시스코 무역관은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에 있었지만 주 활동무대는 실리콘밸리 였다. 전임 박두성 관장과 업무 인수인계차 함께했던 실리콘벨리로의 첫 입성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 벅찬 추억이다. 책과 언론을 통해서만 듣던 세계 IT 혁명의 진원지로 들어서는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실리콘밸리까지의 거리는 약 70마일, 자동차로 101번 고속도 로를 타고 내려가면서 4년간의 도전은 시작되었다. 샌프란시스코를 벗어나면서 글로 벌 기업들의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South San Francisco의 대표적인 바이오 회사 인 Genentech, 세계의 소프트웨어를 휘어잡고 있는 Oracle, 전자게임의 세계 1위 기 277 Ⅰ.무역관 이야기

278 업 EA, 항암치료제 기업 Gilead, 그리고 당시 대한( 對 韓 ) 투자 실행단계에 있었던 Vaxgen 등 저 글로벌 기업들의 문턱을 넘어야 한다는 걱정과 각오가 교차하는 시간 이었다. 그러나 막상 실리콘밸리를 들어서면서 지금껏 느꼈던 경이감은 새발의 피라는 것을 알았다. Intel, Cisco, Apple, HP, Yahoo, Google, Cisco 등등 전설적인 IT 기업 들의 건물과 간판들을 보면서 숨이 탁 막힐 지경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세계경제의 중심 무대에 들어와 버린 것이다. 저들 기업들이 필자의 업무 상대이고 저 세계적인 기 업을 이끌어가는 고급 간부들을 상대해야 하는 것이 임무라는 생각이 드니 자신감이 뚝 떨어지는 것이었다. 사실 필자는 프랑스에만 4번을 들락거리며 공부하고 근무하 였기 때문에 영어 실력도 그렇고 미국에 대한 이해도 역시 평균 이하라 해도 과언이 아 니었다. 그러나 실리콘밸리를 공략해야 한다는 목표가 생겼고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과제였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주경야독하며 영어공부에 몰입했고 현지직원들도 빠르 게 공대 출신으로 교체하면서 무역관의 역량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철저히 인적 네트워크로 움직이는 실리콘벨리 기업들을 파고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전화하고 메일 보내고 무작정 부딪쳐 보았지만 방문제안을 받아들이는 기업은 거의 없었다. 한국의 비즈니스 환경을 설명할 기회조차도 가질 수 없었고, 어렵사리 이리저리 관련 직원이나 임원들의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접촉을 시 도하여도 차가운 자동응답기의 목소리만 들을 뿐이었다. 이러한 답답한 상태의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본사에서 도입한 외부 전 문기관 활용 제도였다. 이 제도를 통해 알게 된 Innovation World의 Barry Soicher 사장은 우리 무역관의 구원투수였다. 그는 수십 년에 걸쳐 쌓아온 인맥을 단숨에 우 리 무역관에 끌고 들어왔다. 그를 통해 수많은 실리콘밸리 기업을 방문할 수 있었고 한국의 투자환경에 대해 브리핑을 하였다. 그는 실리콘밸리 기업의 전략을 분석해서 매월 5개의 잠재적인 대한투자 기업을 발굴하고 파일을 만들어 무역관을 방문하였 고, 함께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의 리스트에는 알토란 같은 기업들이 들어 있었다. 특 히 Google이 그중에 있었다는 것은 요즘 말로 대박감이었다. Google Engineering R&D 센터 유치에는 특별한 기억이 많다. 투자 금액은 그 리 크지 않았지만 대외적인 파급효과는 메가톤급이었다. 2006년 10월 10일 산업자원 부 장관 참석 하에 인터컨티넨털 호텔에서 개최된 투자계획 발표회는 국가경제적으 로 엄청난 순 효과를 가져왔다. 투자계획 발표 하루 전인 10월 9일, 북한이 핵실험 성 공을 공식 발표해 자칫하면 우리나라의 국가 리스크가 증폭되고 경제 전반이 경색될 27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79 우려가 있는 상황에서 세계적으로 주목 받는 기업이 대한 투자를 확정한 것이 다. 거의 모든 언론매체가 이를 보도하 였고 한국이 안전한 투자처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한 건의 외국인투자 유 치가 그렇게 큰 효과를 발휘하게 된 전 례는 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 KOTRA의 경기도-INTEL MOU 체결 IT기업 투자유치 업무에 자신감을 심어 준 것은 Intel R&D 센터였다. 2003년 5 월 본사 투자유치 TF가 Intel의 피닉스 공장을 방문함으로써 시작된 R&D 센터 투 자유치 활동은 처음에는 100억 달러 규모의 반도체 제조공장 유치에 초점이 맞추어 져 있었다. 그 후에 오영교 사장과 노무현 대통령이 Intel을 방문하면서 프로젝트에 힘이 실렸고, 2004년 1월에는 필자가 다섯 명으로 구성된 Intel 실사팀을 인솔하여 방 한해 R&D 센터 설립이 구체화되었다. 실사 기간 중 당시 손학규 경기도 지사는 실사 팀을 직접 접견하고 나중에는 실리콘밸리 Intel 본사를 방문하는 등 남다른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이러한 샌프란시스코 무역관의 활약이 투자유치 성과로 마무리될 수 있었던 것 은 일사불란한 팀워크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샌프란시스코 무역관의 도전, Innovation World의 전문적인 컨설팅, 실리콘밸리 현지기업에 근무하는 한국계 임원 급 인사들의 진심 어린 나라사랑과 지원, 박용수 팀장이 이끌었던 본사 신산업유치팀 의 순발력, 경기도 등 지방자치단체들의 열정. 이러한 요소들이 어우러져 일구어낸 성 과였다. 필자 우기훈 이사는 2002년 7월부터 2006년 7월까지 샌프란시스코 무역관장을 역임했다. 279 Ⅰ.무역관 이야기

280 외국인투자유치 좀 더 잘 할 수 없을까? KOTRA의 외국인투자 유치 기능에 대하여 허길주 OB 우리나라는 지식경제부, KOTRA, Invest KOREA 등 정부 및 정부 차원의 전담 기구와 각 지자체는 물론 위로는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외국인직접투자(FDI : Foreign Direct Investment)를 유치하기 위해 진력하고 있다. 특히 KOTRA는 주요 투자유치 대상국 최전선에서 활약하고 있다. 그러나 외국인투자 유치는 만만한 일이 아니어서 그 실적이 경쟁국에 비해 많지 않아 2011년에는 중국에 비해 1/10, 인도네시 아에 비해서도 절반밖에 안 되었다. 그만큼 투자유치 업무는 어려운 과제이고 경험도 많이 필요로 하는 전문분야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외자유치를 좀 더 잘하기 위한 방 안을 일선에서 느낀 대로 정리해 본다. 외국인투자가 일어나는 배경에 대한 정확한 인식 외국인들이 해외에 투자를 결정할 때 가장 중요시하는 점은 내부 수익률 이다. 한 마디로 돈 벌려고 한국에 온다. 따라서 외국인투자를 유치하려 한다면 투자유치 담당직원들이 외국인들이 어떻게 하면 돈을 잘 벌어가게 할 것인지 를 제1의 전제로 삼아야 한다. 행여 금년도 외국인 투자유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외국인 투자를 유 치하려고 한다면 외국인투자 유치는 어림없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가 만약 외국인들의 영업이익률이 12%~15% 달성 가능하다는 것을 설명 할 수 있다면 외국인투자가들에게 투자를 권유할 수 있는 매우 유리한 입장에 섰다고 볼 수 있다. 돈을 얼마나 벌어갈 수 있는가에 대한 자료를 제공하고 관련 설명을 해야 지 한국 혹은 지자체 차원의 투자환경 설명에만 매달린다면 그런 외국인투자유치 활 동은 외국인 투자가들의 관심을 끌지 못할 것이다. 특히 전시행정 차원에서 투자유치 를 자치단체장의 얼굴 세우기에 활용하려고 무리하게 추진하는 일은 부끄러운 일일 뿐만 아니라 성공하기도 어렵다. 280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81 외국인전용단지 조성을 통한 부지확보 우선 공장 지을 부지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부지는 당연히 외국인투자 전용 단지나 개별투자지역 지정이 가능한 곳이어야 한다. 외국인은 분양보다는 임대를 선 호하기 마련인데 이는 초기 투자비용을 줄이기 위해서이다. 일단 투자하고 나면 나중 에 공장부지 땅값이 올라 공장부지를 매각할 때 차익을 얻을 수 있겠지만 그런 것은 거의 관심 밖이다. 정부는 최근 외국인투자 전용단지 조성에 매우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외국 인투자가 국내투자와 확연히 그 효과가 구분될 때만 부지를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아 직 조성되지도 않는 외국인공단 부지의 75% 이상을 신고기준으로 투자를 유치해야 지역지정 절차를 신청할 수 있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같은 내부조건들은 투자를 유치 하려는 지자체 입장에서 보면 까다롭기 짝이 없다. 투자자 입장에서 보더라도 땅이 아 직 지정되어 있지 않는데 투자를 신고해야 하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산업인력 특히 전문인력 확보 제공 이 문제는 특히 지자체에 중요하다. 산학과 지자체가 협력하여 관련 전문인력 양 성 프로그램을 꾸준히 개발 육성해 나가야 할 것이다. 외국인투자가들이 한국에 오는 이유는 돈 버는 것 다음으로 양질의 근로인력을 쉽게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다. 투자유치 관련산업 클러스터의 형성 외국인투자유치는 이제 최적화 환경을 조성해 주는 여건 고도화가 필요하다. 한 회사 차원이나 한 지역 차원에서 독립적으로 외국인투자를 유치하려 할 경우 불가능 한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주변 연관산업이 발달하고, 연구기관, 산업진흥기관이 기 본적으로 소재하는 매력적인 요소들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또한 외국인공장 주변에 는 외국인들이 가지고 오는 원천기술에 더하여 생산현장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현장 기술애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현장 R&D(소위 Application R&D) 작업 체제가 구비 되어 있어야 한다. 예컨대 광주광역시는 광산업(Photonics) 클러스터로 유명하다. LED, Optics 등 광 관련 산업체가 광주에 오면 부지확보, 현장R&D 전담 연구소 활 용, 대학 전문인력 활용, R&D 자금확보, 유사 동종업체들과의 네트워킹 등 매우 효 율적인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281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282 글로벌 투자여건 비교자료 제공 외국인투자자는 한국만을 대상으로 삼지 않고 한국과 경쟁하는 국가들의 투자 여건도 함께 비교분석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은 우리와 경쟁관계에 있는 국가의 산업 환경(전기료, 인건비 등)에 대한 비교자료를 만들어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자료 들은 단일 지자체나 회사가 다 만들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만큼 국가차원에서 만 들어나가야 할 것이다. 외국인들의 정주환경 구비해야 정주( 定 住 )환경을 구비하는 것도 첨단기업을 유치해야 하는 우리나라 입장에서 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다. 학교나 병원 문제만 보아도 그렇다. 병원도 없고 학교도 없 는 대한민국의 경제특구에 외국자본이 들어오겠는가? 외국인 입장에서 보면, 본국으 로 돌아갔을 때 학력인정이 되는 학교도 없는 곳, 본인이나 가족이 아프면 본국에 가 서 고치고 와야 하는 곳. 만약 대한민국의 경제특구 여건이 그렇다면 첨단기술 보유기 업일수록 외국인 전문기술인력이 같이 들어와야 하기 때문에 외국인투자가 일어나기 힘들 것이다. 투자유치 전문인력 양성 외국인들과 소통이 잘되는 글로벌 감각이 있는 유치인력을 양성해야 한다. 외국 어는 기본이겠지만 글로벌 시야와 스탠더드를 잘 아는 전문가들이 필요하다. 그래야 외국인투자자들과 쉽게 마음을 열고 소통할 것이기 때문이다. 은행업무에 밝은 인력 도 필요하다. 첨단제품 공장을 한국에 지으려면 국내은행에서 얼마만큼의 자금을 조 달하기 마련인데 이 때 은행 이용이 외국인들에게는 여간 어려운 과제가 아니다. 인 적 물적 담보가 없기 때문이다. 외자유치 관련 직원들의 청렴성도 매우 중요하다. 은행과 기술신용평가 기관의 적극 활용 광주에 투자한 미국의 R사는 한국의 은행에서 대출받기 위한 수속을 밟으면서 여러 번 탄식하는 것을 보았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물적 담보만 가치를 인정하고 첨 단기술이나 노하우에 대해서는 너무나 평가해 주지 않는다 고. 우리나라에 기술을 평 가해서 담보용도로 쓸 수 있는 제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보증한도가 너무 적 고, 이 제도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져 외국인투자자에게는 그림의 떡인 경우가 대부분 이다. 282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83 우리나라 외국인투자정책은 어떻게 하면 보다 많은 자금을 들어오게 하느냐 하는 점에 초점이 과도하게 맞추어져 있 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기술과 노하우가 들어오는 것이 더 중요한 경우가 얼마든 지 있다. 예를 들어 원천기술 업체 하나 를 투자유치했다고 가정해 보자. 수년이 지나면서 원천기술을 이용하여 응용제 Living Environment Tour to SONGDO 품을 만드는 회사들이 수십 개사 이상 주 변에 몰려 산업클러스터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런 외국인업체 중 고도의 원천기술 보유회사가 들어올 경우 외국인 업체의 투자자금이 부족하더라도 금융권 융자나 기술신용보증기관 등에서 적극적으 로 투자자금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외국인투자를 담당하는 직원들은 외국인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 어떤 점을 불편 해 하는지, 어떤 점을 불안해하는 지를 역지사지( 易 地 思 之 )해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정부의 연간 목표 달성을 위한 실적내기, 자치단체장 실적 홍보용 등으로 실제 유치보다는 포장에 바쁘고 MOU 체결식이 끝나면 지원이 소원해지는 폐단 등이 없 어져야 한다. 한 개사를 유치하더라도 산업연관효과가 큰 원천기술 보유업체를 유치 해야 한다. 인건비 면에서 불리한 한국은 경쟁국과 투자유치 여건을 차별화하는 노력이 필 요하다. 부품과 부자재를 확보하기에 용이한 여건도 갖추어야 하고, 이런 기업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클러스터 조성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요컨대 우리나라 외국인투자 유치는 금액목표 달성 개념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 다. 부지도 많지 않음을 감안하여 꼭 필요한 전략적 고도기술 업체를 국가차원에서 정하고 여건을 최대한 구비하여 외국기업이나 우리나라 경제나 모두 Win Win윈하 는 FDI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 허길주 OB는 프리랜서 FDI유치 컨설턴트, 전 광주광역시 투자유치본부장, Invest KOREA 투자컨설팅 팀장을 지냈다. 283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284 전시박람회와 엑스포 뒷이야기 년 서베를린 산업박람회 참가기 285 대전무역전시관의 추억, 제4회 한국 국제축산박람회 유치 287 인구 52만 소도시 헬싱키에서의 한국상품전 290 한국 최대, 최고 전시회 서울국제식품전 292 앉은뱅이도 걷게 만든 상하이 엑스포 한국관 295 여수 엑스포와 KOTRA 299

285 1964년 서베를린 산업박람회 참가기 전시박람회와 엑스포 뒷이야기 고석원OB KOTRA가 설립되고 얼마 되지 않은 1962년 8월에 입사한 필자가 제일 먼저 간 박람회가 1964년 서베를린 산업박람회였다. 서베를린이 공산권에 둘러싸인 곳이었지 만 그래도 비행기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정기적으로 들어갔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서 베를린으로 들어가는데 겁이 났다.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은 전부 반공교육을 철저 히 받았기 때문이다. 서독 정부가 한국, 대만, 베트남, 인도네시아와 아프리카 국가 등 개발도상국들 을 서베를린 박람회에 초청하여 많은 가난한 나라들이 참가했었다. 그때 우리가 가져 간 상품은 갈포벽지, 유리, 놋그릇, 면포, 한천 등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빈약하 지만 당시엔 그걸 자랑스럽게 가져가서 부스에 진열해 놓고 서 있었다. 서독 대통령과 수행원들이 한국관을 방문할 때 열심히 안내하자 보도진들이 사진을 많이 찍었다. 그들이 지나간 다음 이 일을 본사에 보고해야 할 것 같아 보도진으로부터 한국관 에서 찍은 사진을 입수하여 본사에 보냈다. 김동조 사장님이 서독의 대통령이 한국관 에 와서 관심을 가지고 상품을 봐 주셨다 는 필자의 보고를 받고 이를 청와대에 보고 했다. 그해에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의 초청을 받아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던 터라 서 독 대통령이 한국관을 방문하고 제품을 봐줬다. 각하께서 가시니까 관심을 많이 준 것 같다 등 정치적 가십도 나왔다고 한다. 혼자 박람회 준비하느라 엄청나게 고생을 하고, 박람회가 끝난 후 기진맥진해서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본사와의 교신이 끊어졌다. 서베를린에서 함부르크로 나 온 후 먼저 런던에 들러 길을 돌아다니는데 한 건물 간판에 British Design and Package Center 라고 쓰여 있었다. 들어가 보니 포장을 어떻게 하면 상품을 더 잘 팔 수 있을 지 연구하고 있어서 자료를 많이 얻어왔다. 그리고 미국에서 뉴욕 무역관과 LA 무역관, 일본에서 도쿄 무역관에 들렀다가 귀국했다. 본사에서는 필자가 박람회를 끝내고 일주일 동안 소식도 없이 행방불명되 285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286 한국관을 방문한 서독 뤼프게 대통령을 안내하는 필자 어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징계감이었다. 그런데 필자는 왜 해외를 돌아다녀야 했는 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본사에서 과장으로 근무하는데 해외 무역관이 어디 있으며 어 떻게 생겼는지는 알고 과장 노릇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본사에서 이 얘기를 하면서 영국 British Design and Package Center에서 받아온 자료를 보여주고 징 계를 면할 수 있었다. 그 이후 KOTRA에 포장개선과가 생기고, 포장전시회와 상품 디자인 및 포장전시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이후 이 전시회는 1969년 한국포장기술협 회와 한국수출포장센터로 이관되었다. 필자 고석원은 1962년 8월 입사하여 1973년 10월 퇴사했으며,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28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87 대전무역전시관의 추억, 제4회 한국 국제축산박람회 유치 전시박람회와 엑스포 뒷이야기 김종경 대전무역전시관은 1993년 개최된 대전엑스포 때(8월 7일 11월 7일) 중소기업 공동관 이란 이름으로 엑스포장 상설전시 구역 내에 건설, 운영하다가 엑스포 종료 후 리모델링을 거쳐 1995년 5월 19일 대전무역전시관이란 이름으로 재개장하였다. 그러나 전체 부지 8,832평 가운데 실내 전시공간은 4,200m2(1,270평)에 불과한 소규 모 전시장인데다 전시수요가 많지 않은 지방도시에 위치해 있고 컨벤션이나 기타 부 대시설이 없어서 전시장 가동률이 좋지 않았다. 따라서 KOTRA는 민간 전시장과 같이 유연성을 보장하고 수익위주의 운영을 위해 소사장제도를 도입하여 전시장을 운영하였다. 즉 공모를 통해 선발된 소사장이 본사와 협의하여 연간 순익목표를 정하고 본사의 지시나 간섭 없이 독자적으로 전시 장을 운영케 하는 방식이었다. 이후 벤처국방마트, 농기자재 및 종자전시회, 연구 및 실험기기 전시회, 도시 마케팅박람회 등 다양한 자체 전시회를 개발, 개최하고 충청권 지역전시회, 문화행사, 기업행사 등을 유치해 운영하였다. 하지만 규모 및 위치상 가 동률을 높이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서울에서 개최되는 대형 전시회를 유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대전무역전시관은 서울이나 부산 등지에서 개최되고 있는 전시회 중 현 지 실정에 맞는 전시회의 유치를 위해 지속적으로 전시 주최자들을 접촉하고 홍보했 다. 그러던 중 1999년부터 2003년까지 격년제로 세 차례 개최된 바 있는 한국 국제축 산박람회(KISTOCK) 가 2005년 9월 열릴 것이라는 것에 주목하고, 대전 유치를 위 해 매진하였다. 축산박람회는 국내외 축산기자재 및 사료, 동물약품, 소독장비 등 축산관련 업 체들이 참가하고 전국에서 관람객이 모이기 때문에 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한 대전이 이 전시회를 개최하기에는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행사 1년여 전인 2004년 9월부터 서울 양재동에 위치한 (사)대한양돈협회를 대상으로 지속적인 287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288 유치활동을 벌여나갔다. 이 전시회는 그동안 (사)대한양계협회, (사)전국한우협회, (사)한국낙농육우협회, (사)한국양돈협회, (사)한국축산환경시설기계협회 등의 5개 단체가 번갈아가며 주관을 맡아 왔는데, 2005년 행사 주관 단체가 (사)대한양돈협회 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처음 양돈협회의 관계자들을 만났을 때는 지방에 위치한 생소한 소규모 의 전시관에서 이와 같은 대형 행사를 개최하겠다는데 대해 의구심이 많았을 뿐만 아 니라 전시관의 규모나 시설을 볼 때 이 전시회를 개최하기에 부적합하다고 여기고 대 전 개최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여기서 주저앉을 수 없었다. 그래서 대전에서 서 울까지 KTX나 고속버스를 이용해 수차례에 걸쳐 양돈협회를 방문하면서 담당자들 을 설득하였다. 우선 대전무역전시관이 비록 지방에 있는 소규모 전시장이지만 운영주체인 KOTRA가 전 세계에 조직망을 가지고 있어 해외업체와 관련 바이어를 불러올 수 있 으며, 이를 통해 전시회를 국제화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아울러 전시회 개최를 위해 필요한 전시공간 확보, 참가업체 및 관람객 유치, 부대행사 등에 대한 여러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예컨대 대전이 국토의 중심에 위치해 있어 전국에서 관람객이 오기가 용이하다 는 점, 전시장이 대전 외각에 있고 전시장 주변에 나( 裸 )대지가 많아 젖소 젖짜기 체 험, 송아지 경매행사 등 도시에서는 할 수 없는 체험 위주의 행사 개최가 가능하다는 점, 전시장 야외 공간에서 옥외전시를 할 수 있다는 점, 전시장과 엑스포 과학공원이 울타리 하나로 인접해 있어 과학공원을 전시장으로 활용할 경우 국내 어떤 전시장보 다 넓은 전시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 관람객들에게 엑스포 과학공원 관람 기회 까지 제공할 수 있다는 점, 전시회 개최 시 대전시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점 등 여러 가지 이점을 제시하였다. 한편, 대전시장과 대전시 관계자들을 만나 행사 개최에 도움을 요청해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받았고, 엑스포 과학공원 사장 및 관계자들과도 수차의 협의를 거쳐 행사 공동개최에 합의하였다. 전시관 옥외 전시장 옆에 출입문을 만들고 엑스포 과학공원 돔(Dome) 전시장을 제3전시장으로 만드는데 동의한 엑스포 과학공원은 전시회 관 람객을 통한 공원의 전국적인 홍보는 물론 입장료 수입 등을 고려해 상호 Win Win 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이렇게 현지 우군 확보 및 행사 개최를 위한 정지작업을 마친 후 양돈협회 관계자 들을 전시장으로 초청하여 전시장 현장투어를 실시하고 대전 시장과 엑스포 과학공 28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89 제4회 축산박람회 개막식 원 사장, 관계자들과의 면담을 주선함으로써 행사의 성공 가능성에 대한 신뢰를 심어 주었다. 이후 양돈협회 관계자들도 점차 대전 개최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 었고 분위기가 점차 대전 쪽으로 기울게 되었으며, 결국 양돈협회에서는 2005년 초 제4회 전시회의 대전 개최를 결정하게 되었다. 이로써 10여 차례 이상의 서울출장을 비롯하여 대전시와 엑스포 과학공원, 지역 언론, 양돈협회 등 유관기관과의 업무협의와 설득 등 4개월이 넘는 유치 노력이 결실 을 맺었으며, 대전무역전시관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시회를 유치하게 되었다. 마침내 이 전시회는 15개국 230여 개 업체가 600여 개의 부스를 만들어 참가하였으며, 전시 회 개최기간(2005년 8월 31일 9월 2일) 중 총 15만여 명의 관람객이 다녀감으로써 대전무역전시관 개장 이래 최대의 행사로 꼽혔다. 이같은 성과에 힘입어 한국 국제축산박람회는 2007년과 2009년에도 계속해서 대전에서 개최되었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축산박람회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 전 시회는 2011년부터 전시관 인근지의 개발에 따른 전시공간의 부족 등에 따라 대구 EXCO로 자리를 옮기게 되지만 한동안 수도권을 능가하는 충청권의 특화 전시회로 지역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전시회였다고 자부한다. 이제 대전무역전시관이 매각되 고, 여기에서의 축산박람회 개최는 기록의 한 장으로 남게 되었다. 필자 김종경은 2003년 4월부터 2005년 1월까지 대전무역전시관의 소사장을 역임했다. 대전무역전시관은 2011년 10월 31일 대전시에 278억 원에 매각되었다. 289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290 인구 52만 소도시 헬싱키에서의 한국상품전 전시박람회와 엑스포 뒷이야기 이승희 2006년 2월 초 본사 전시컨벤션팀으로부터 오는 9월 핀란드 헬싱키에서 한국 상품전을 개최하기로 산업자원부와 협의 중이니 즉시 장소를 물색하라 는 연락을 받 았다. 아니 선진국에서 웬 한국상품전을? 그것도 인구 52만에 불과한 북구의 소도시 헬싱키에서. 핀란드는 유럽연합(EU) 의장국 자격으로 아셈(ASEM : Asia Europe Meeting)회의를 9월 헬싱키에서 개최하는데 아시아와 유럽의 38개국 정상들과 경제 인들이 모이는 한복판에서 한국 IT 산업의 발전상을 소개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ASEM 회의는 방문단의 규모와 비중에서 핀란드 역사상 가장 큰 행사인데 비하여 헬 싱키시의 수용능력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필자는 사업이 확정되기 전에는 장소확보는 물론 내방객 유치에 예상되는 어려 움 등을 내세워 개최가 어렵다 는 부정적인 의견을 제출했었다. 하지만 본사는 이 사 업을 확정하고, 헬싱키 전시장이든 호텔이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시장소를 확보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사업이 확정된 이상 무역관은 행사를 차질 없이 준비하는 일이 당면과제가 되었다. 그러나 헬싱키 전시컨벤션센터는 전체가 이미 ASEM 회의 장으로, 4성급 이상 호텔은 각국 대표단의 공식 숙소로 지정되어 전시상담을 위한 공 간 확보는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이때부터 무역관 직원들은 헬싱키 시내에서 행사를 치를 만한 공간이 있는 건물 은 거의 모두 현장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핀란드 최고 인기 스포츠 종목인 아이스하 키가 열리는 아이스 링크와 1952년 헬싱키 하계올림픽 메인스타디움에도 가 보았고, 심지어 헬싱키 항구에 선박을 정박해 놓고 선상전시회를 개최하는 방법이나 시내공 원에 대형 텐트를 치고 전시회를 하는 방법까지 검토해 보았다. 우려곡절 끝에 장소는 물색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인구 52만 명에 불과한 헬싱키에서 전시회가 열리는 4일 내 내 내방객을 유치하고 국내 참가기업의 비즈니스 상담 주선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290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91 였다. 노르딕(Nordic) 국가에서 개최하 는 최초의 한국상품전이었고, 행사 성격 상 국가 홍보가 최우선시 된다지만 무역 관으로서는 참가업체들의 비즈니스 목 적을 충족시키는 임무도 중요했기 때문 이다. 결국 일반 방문객과 비즈니스 방문 객으로 나누어 차별화된 유치 전략을 쓰 기로 하였다. B2B 상담을 위한 바이어 유치는 인근 무역관에서 BTG를 유치하 는 전략을 세우고 구주지역본부의 도움 을 받아 12개국으로부터 바이어를 받을 수 있었다. 장소와 내방객 유치 등이 어느 정도 윤곽을 잡아가면서 우리측 대통령 내외분이 참석하는 개막식 행사를 빛내 줄 양국 유력인사 참가자 선정과 확보가 새로운 고민으 로 떠올랐다. 개막시간이 다른 행사시간과 겹쳐져 당초 예상했던 여러 인사들의 참석 마저 어려워졌다. 행사일은 성큼성큼 다가와 불안의 연속이었는데 큰 기대를 하지 않 았던 데서 기쁜 소식이 날아왔다. 우리가 초청장을 발송한 200여 핀란드 측 인사 중 100여명이 참석하겠다 는 회신을 보낸 것이었다. 참석자 중에는 대학 총장, 유관기관 등 단체장, 주요기업 인사 등 다수의 학계 경제계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9월 8일 D-데이 아침. 개막식이 야외에서 열리는데 전날 저녁에 빗방울까지 뿌려 속을 태우던 하늘도 오히려 더 화창한 얼굴로 우리를 맞아 주었다. 핀란드 무역진흥기 관인 FINPRO와의 MOU 체결과 300여 인사가 참석한 개막식 모두 순조롭게 진행되 었다. 뿐만 아니라 전시회 개최 4일 내내 많은 방문객들이 전시장을 다녀갔고 인근 무 역관에서 유치한 12개국, 122명의 바이어와 업체당 15회 이상의 상담도 이뤄졌다. NOKIA로 대표되는 IT강국 핀란드 한복판에서 당시 세계 최초 DMB 실시간 시 현을 비롯하여 와이브로, RFID, 여러 일류상품 등 Dynamic Korea 의 발전상을 소 개하였고 Helsingin Sanomat 등 주력 일간지에도 크게 보도되어서 Premium Korea 의 이미지 확산과 헬싱키 무역관의 위상을 제고시켰다. 게다가 1인 스포크로 서 헬싱키 무역관이 이렇게 큰 행사를 치뤘다는 자부심과 향후 무역관 생활에 보탬이 될 경험을 통한 귀중한 자산까지 얻었다. 필자 이승희는 2005년 8월부터 2008년 9월까지 헬싱키 무역관장을 역임했다. 291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292 한국 최대, 최고 전시회 서울국제식품전 전시박람회와 엑스포 뒷이야기 한정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전시회 Seoul Food. 1983년 3월 25일 한국 최초의 국제 전문전시회로 개최되었던 서울식품전이 2012년 30주년을 맞이하였다. 제1회 개최 당시 69개사 4,896m 2 로 시작한 서울식품전은 2011년 1,100개사 53,541m 2 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Global Top 3 전시회로 성장하였고, 2012년 5월 8 일 11일 개최된 30회 전시회는 KINTEX 1, 2 전시장 전관을 다 사용하는 아시아 최 대 규모의 식품전시회로 발돋움했다. KINTEX 전관을 사용하는 10만m 2 급 전시회 는 공작기계전(SIMTOS)밖에 없으며, 일본에는 10만m 2 규모의 전시장이 없다. 식품 분야의 전시회로는 일본의 Foodex Japan 과 싱가포르의 Food & Hotel Asia(FHA) 를 능가하였다. 1983년 3월 25일자 매일경제에 게재된 제1회 식품전 개 막기사를 보면 30년 전 식품전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6개국 79개 업체가 참가한 제1회 한국국제식품기술전(KOR FOOD)이 25일 상 오 10시 한국종합전시장에서 윤자중 貿 公 (무공) 사장을 비롯한 관계인사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막됐다. 올림픽을 대비, 우리나라 가공식품의 개발촉진과 세계유명 제품과의 비교전시를 통한 기술향상, 식생활개선을 위한 대국민 계몽 등을 위한 것으 로 30일까지 6일간 열린다. 이 전시회에 참가한 외국업체는 이탈리아 16개사, 프랑스 3개사, 일본 3개사, 미국 2개사, 스웨덴 1개사 등 25개 업체이다. 식품전의 발전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우선 전시회 명칭은 제1회는 서울국제 식품기술전, 제2회는 한국국제호텔용품 식품전 등으로 명명하다가 3회부터 7회 까지는 한국국제식품기술전(KOR FOOD), 8회부터 25회까지는 서울국제식품기 술전(SEOUL FOOD), 26회부터 서울국제식품산업대전 으로 정착되었다. 개최장 소는 제1회부터 22년간 한국종합전시장(KOEX, 1999년부터 COEX로 개명)에서 개 최해오다가 2005년 KINTEX 개장과 함께 KINTEX로 옮겨서 개최하고 있다. 단지 2002년에는 월드컵 개최로 인해 COEX가 프레스센터로 운영되면서 서울무역전시장 292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93 (SETEC)에서 개최된 적이 딱 한번 있었다. 개최장소와 관련한 에피소드다. 2005년 경기도 고양시에 KINTEX가 개장되면서 참가업체와 KOTRA 담당자들은 개최장소 변경을 두고 고민에 빠져 있었다. 서울 삼성 동의 COEX에 비하여 당시 황무지와도 같았던 고양시 끝자락의 KINTEX는 교통, 숙박 시설, 참관객의 유치 등에서 취약점이 많았다. 그러나 KOTRA는 KINTEX의 지분 30% 를 갖고 있는 모회사로서 대형 전시회를 유치하여 KINTEX의 가동률을 높여야 하는 처 지였기에 자체 전시회를 다른 곳에서 개최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참관객과 바이어 유치를 위한 홍보도 문제였다. 그러나 전시회보다 전시장 홍보를 더 많이 해야 했던 상황 에서 개최된 2005년 제25회 서울식품전은 1층(태평양홀), 3층(대서양홀)으로 구분되었 던 COEX에 비하여 1층 한곳에서 전시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참가업체뿐만 아니라 참관 객들에게도 기대 이상의 좋은 반응을 얻게 되었다. 참가를 고민하던 업체들도 대형 전시 장인 KINTEX를 선호하게 되고 식품전의 규모도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시회 규모는 1983년 4,896m 2 로 시작해서 1992년 1만m 2, 2001년 2만m 2 로 확 대되었다. 2005년 KINTEX로 옮긴 후 첫해는 2만 1,700m 2, 2006년 2만 9,359m 2, 2007년 3만 2,157m 2 로 꾸준히 성장하였고, 2008년부터는 5개 홀 전관을 사용하는 5만 3,541m 2 로 늘어났다. 2011년 KINTEX 신관이 완공됨에 따라 2012년에는 8개 홀 8만m 2, 2013년부터 10개 홀 전관을 사용하는 10만m 2 급 전시회로 육성할 계획이었으 나, 금년부터 농수산식품부가 정부 홍보관 등으로 참여하면서 10개 홀을 모두 사용 하게 되었다. 2007년 제25회 서울식품전부터는 해외업체 참가유치를 대폭 확대할 필 요성이 대두되면서 영국의 식품분야 전시 주최기관인 Allworld Exhibitions 와 국제 관을 공동주관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해외업체의 참가가 대폭 늘어나게 되었다. 영욕의 서울식품전 30년. 조직도 사업도 변화무쌍한 KOTRA에서 30년을 이어 온 서울식품전은 신선한 감동이고 KOTRA의 산증인이라고 볼 수 있다. 1980년대 초기 KOEX의 가동률 제고 등 경영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KOEX 경영을 맡게 된 KOTRA는 전시부에 전시계획과를 신설하여 거의 불모지였던 국내 전시업계에 식품 전, 포장전 등 국제 전문전시회를 의욕적으로 개발하여 신규로 선보이게 된다. 그러 나 당시는 전시산업의 중요성과 잠재력을 잘 이해하지 못하였던 시절이어서 KOTRA가 왜 이런 사업을 해야 하느냐, KOTRA가 영업을 하고 돈을 버는 사업을 해야 하느냐 등등 사내에서조차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해외전시과, 특 별전시과가 인기가 있었던 반면 전시장에서 흙먼지를 먹어가면서 참가업체 유치를 위해서 영업을 해야 했던 전시계획과는 노가다(막일) 부서 로 통했다. 293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294 또한 정부나 경영진이 바뀔 때마다 국 내전시회는 다른 기관에 넘기자, 아니다 KOTRA가 맡아서 더 키워야 한다 등등 방침 이 수시로 바뀌었고, 이런 과정에서 KOTRA 가 힘들여서 개발한 포장전(KOR PACK), 계측기기전(KORINSTRUMENT), 주단 조전, 자동차부품전(KAPAS), 컴퓨 터그래픽스전시회 및 세미나 등등 유수 제30회 서울국제식품전 한 전시회를 협회나 조합 등에 넘겨주고 식품전만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유일하 게 남게 되었다. 그나마 식품전이 남게 된 것은 낮에는 전시장에서 흙먼지를 마시고 저녁에는 삼겹살에 소주 한잔으로 묵묵히 전시회를 지키고 키워온 전시계획과 직원 들의 땀과 노력 그리고 이후에도 애정을 가지고 식품전을 키워온 수많은 직원들의 노 력의 결실이다. 식품전은 자랑거리가 많다. 최고 최대 최초. 우선 해외참가업체 비율이 34% 로 국내전시회 중에서 가장 높고, 해외 바이어가 3,000명을 넘어서 국내의 여타 전시 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또한 2003년 식품전 최초로 UFI(국제박람회연맹) 인증 을 획득하고, 지식경제부 선정 Global Top 5 전시회에 2년 연속 선정된 후 2012년에 는 Global Top 3에 선정되었다. 또한 국내 전시회 최초로 ISO 9001(품질경영인증)을 획득하여 명실공히 한국 전시업계를 선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내전시업계로서 는 최초로 입장료 수입을 전액 세계최대 규모의 아동구호 비정부기구(NGO)인 Save the Children 과 소외계층 식품지원 복지서비스 단체인 Food Bank 에 기부하여 한 국 전시산업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고 있으며, 무역전시학회 춘계 학술세미나를 단독 후원함으로써 학계에서도 좋은 평판을 얻고 있다. 물론 아쉬움도 많다. 식품전은 외롭다. 외로운 식품전에 친구가 2~3명 더 있으 면 좋겠다. KOTRA가 신성장산업, 서비스산업 등 분야에서 새로운 전시회를 개발해 서 국내전시산업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필요성이 최근 사내외에서 이야기되기 시 작하고 있다. 필자 한정현은 1983년 입사 직후 제1회 서울식품전 업무를 담당하였고, 2012년 현재는 전시컨벤션실장으로 제30회 서울식품전을 추진하고 있다. 294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95 앉은뱅이도 걷게 만든 상하이 엑스포 한국관 전시박람회와 엑스포 뒷이야기 박은우 중국의 대국굴기( 大 國 堀 起 )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행사로 팍스 시니카 (Pax Sinica)의 위용을 과시하였던 상하이 엑스포(2010년 5 10월)는 개최 면적이나 참가 국 수, 관람객 수 등에서 모두 사상 최대 최다를 자랑하였고, 한국관의 인기는 190여 참가국 전람관 중에서 최선두권에 속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인산인해를 넘어 6시간 넘게 줄을 서야만 입장이 가능한 한국관의 폭발적인 인기는 앉은뱅이도 걷게 만드는 기적의 한국관 이라는 말까지 낳기도 하였다. 장애인에게 대기하지 않고 입장하는 특 전을 주자 일부 열성 관람객들이 박람회장에서 장애인용 휠체어를 빌려 타고 한국관 에 입장한 사례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난 데서 비롯된 말이다. 한국관은 비단 일반 관람 객뿐만이 아니라 VIP들에게도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방문코스의 하나였는데 스웨덴 국왕, 룩셈부르크 왕자, 중동 각국의 왕자, 공주들을 포함하여 여러 국가의 많은 왕족 들이 한국관을 방문했다. 한국관 도우미들은 처음에는 살인적인 더위에다 관람객의 무질서와 싸우느라 힘들어하였으나 어느 순간부터 한국관에 근무한다는 사실에 무한한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고 이구동성으로 얘기하였다. 한국관 직원들은 수천 명에 달하는 VIP를 모시 기 위해 점심도 거르는 경우가 많았다. VIP 안내는 대부분 관장인 필자가 맡았으나 사전 스케줄 조정과 안배는 KOTRA 신입 인턴사원으로 들어온 이형직 씨가 그 역할 을 너무나 잘 수행하였다. 한국관을 이야기할 때는 연면적 7,683m 2, 입단면 1만 907m 2 의 거대하고 기하적 인 건축물을 9개월 남짓 짧은 기간에 시공한 사실을 빼놓을 수 없다. 프랑스관이나 일 본관 등 한국관과 유사한 크기의 대형 국가관들은 2006년부터 건축설계가 시작되고 건축이 진행되었으나, 한국관은 국내의 무관심과 예산 회계연도 문제 등으로 2008년 10월경에야 건축 설계안을 공모하였으며, 연말이 돼서야 한글을 모티브로 제안한 매 스 스터디스 (Mass Studies)를 설계업체로 선정하였다. 295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296 그러나 난도가 높은 기본설계 및 한국과 중국 현지의 건축법규 차이 등으로 인하 여 중국당국의 승인을 포함해 제반 준비업무 추진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이 와중에 2009년 6월 필자가 새로이 엑스포전담반장으로 부임하였다. 중국에서 실제 시공이 가능한 최종 실시설계안이 도출되고 매우 까다롭고 복잡한 중국 측의 제반 절 차 등을 거쳐 2009년 7월 초가 돼서야 한국관 실시설계도면에 대한 최종승인이 이루 어졌다. 이제 개관 시점까지 남은 기간은 9개월로 일분 일초가 아쉬운 상황이었다. 엑 스포 준비업무는 건축 외에도 장치, 영상, 행사, 공연, 직매 요식, 운영준비, 사이버 엑 스포, 엑스포 관련 각종 회의 참석 및 보고 등 많은 일들을 동시에 추진해나가야 했음 에도 불구하고 인원은 부족했다. 이같은 어려운 상황을 넘어서기 위해 2009년 8월부 터 엑스포전담반 은 엑스포지원단 으로 격상된다. 하지만 한국관은 공사를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뜻하지 않은 복병을 만났다. 포동과 포서 간 박람회장의 연결을 위해 박람회 건설당국이 황포강을 관통하는 대형 서장남로 터널을 시공하게 되면서, 한국관 등 터널 인접 국가관에 갑자기 해당 터널의 구조 안정성 확보와 전시관 부지의 지반 강화를 위한 조치를 요구해 왔다. 부득이 한 국관은 원래 계획에 없던 200여 개의 파일 시공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추가적인 예 산도 문제였지만, 그로 인하여 한국관의 지반공사가 약 2주 지연되는 문제가 더욱 걱 정스러웠다. 지반공사를 마치고 8월 초부터 본격적인 철골트러스 골조공사를 시작했 는데, 이번에는 더 큰 복병이 나타났다. 철골공사에서는 조인트의 용접연결 작업이 핵심인데, 비가 오거나 습도가 높은 날은 안전문제 등으로 용접공사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2009년 8월에서 10월까 지 3개월간 상하이에는 유례없이 비오는 날이 많았고, 이 때문에 철골작업이 불가능 한 일수만 무려 20일에 달했다. 11월 초에 어렵게 철골트러스 구조물 시공을 마쳤으 나, 설상가상 일부 트러스의 접합부가 침하하여 시공을 잠시 중단하게 되었다. 자칫 하면 적기 개관을 보장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 우려되었다. 한글 자모를 형상화한 구조적으로 난해한 설계로 인해 복구방안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수소문 끝에 건 축물 철골구조 부문에서 중국 최고의 권위를 갖고 있다는 바오강설계원 을 찾아냈 고, 이 회사를 통해 복구 및 구조강화 방안을 극적으로 찾아냈다. 마침내 12월 31일에 현지 건설당국으로부터 시공재개 허가를 받아내었다. 이제 엑스포 개막까지는 4개월. 이미 많은 전시관들이 외형을 어느 정도 갖춰가 고 있었는데, 한국관은 아직까지 구조공사마저도 마치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때부터 한국관은 철야를 불사하는 주야간 돌관공사를 추진하는 한편, 구조보강공사와 내외 29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97 부 마감, 전기 및 설비, 전시장치 공정 등 모든 공정을 동시에 추진하였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공정 간의 상충을 조율하 기 위해 엑스포지원단에서는 직접 현장을 누비며 문제를 하나 하나 해결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경영진과 실무직원들이 현 지에서 겪었던 마음고생과 고충은 글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이장춘 중국 중앙상무위원을 안내하는 필자 없다. 중국 최대의 명절인 춘절연휴에 고향에 가려는 인부들 을 어렵게 붙잡아두면서까지 공사를 강행한 끝에 한국관은 2010년 4월 12일 현지 건축당국으로부터 완공허가를 받아낼 수 있었다. 호주관 등 일 부를 제외한 다른 국가관들은 아직 준공허가를 받은 국가가 없었다. 여기가 끝은 아니었다. 건축물 완공 이후에도 현지 소방관계자가 뒷돈을 요구하 며 이런 저런 꼬투리를 잡는 바람에 또다시 몇 차례 홍역을 치렀다. 그러나 이것은 긴 박한 공기로 겪었던 고충에 비하면 사소한 사건에 불과했다. 드디어 개관을 5일 앞둔 4월 26일 소방검수까지 마치고 관람객 수용의 모든 조건을 갖추었다. 5월 1일 오전 한국관은 엑스포 참가사상 최초로 대통령을 모시고 성대한 개관행사를 치렀다. 엑스 포 기간 중 박람회장 내 최고의 데이트 명소로 입소문이 났던 한국관의 아름다운 외관 뒤에 감춰진 피 말리는 눈물의 시공과정을 과연 야간 데이트족들이 짐작이나 했을까? 한국관의 외관적 특성은 한글 디자인이었다. 중국인들이나 외국인까지도 대부 분 우리가 한국어를 쓴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우리가 한글이라는 고유 문자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당초 일각에서는 한국관 외관을 장식한 한글 픽셀과 아트 픽셀의 내용을 중국어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한글을 모티브로 계속 밀고나간 것은 결과적으로 중국인과 세계인에게 한글을 제대로 홍보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아트 픽셀에 담긴 강익중 작가의 타일 작품은 한글의 뜻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을 충분히 인지시켰고, 한국관 내 키오스크 (kiosk)를 통하여 영어와 중국어로 그 뜻을 확인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다만 한국 관 건축과정에서 한글을 모르는 현지 시공인부들이 한글 픽셀이나 아트 픽셀을 거꾸 로 달거나 배치 순서를 잘못 부착해 이를 바로잡는데도 시간이 걸렸다. 한국관은 원래 열린 공간으로 설계되었다. 한국관 일부에는 천장이 뚫려 있어 하 늘을 바라볼 수도 있고, 벽이 뚫린 곳이 많아서 한국관 안에서도 인접 국가관들을 바 라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입구는 9군데나 되었다. 1층에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들 어가서 강산과 빌딩이 어우러진 한국의 전형적인 도시 모습을 체험하는 한편, 공연과 수경시설 등을 관람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열린 공간으로 시원한 강바람이 들어 297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298 와 한국관은 무더운 박람회장 안에서 가장 쾌적한 곳으로 소문나기도 하였다. 한국관 은 제주 삼다수의 협찬을 받아 매일 1,200병씩 도우미의 따뜻한 미소와 함께 더위에 지친 관람객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그러나 박람회 당국이 개막 수일 전에 관람객이 입장하는 입구는 하나만 허용되 며 다른 입구에는 철책을 둘러쳐야 한다고 규제를 가하면서 한국관의 개방성은 제한 을 받게 되었다. 이유인즉 상하이 엑스포는 기존의 다른 엑스포나 하루 수백 명 또는 수천 명이 입장하는 일반 박물관이나 전시관과는 다르며, 특히 인기가 예상되는 국가 관의 경우 관람객이 하루에 수만 명이 넘는 수준이 될 터인데, 현지인의 질서의식을 감안할 때 안전사고가 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한국관은 주위에 철책을 치는 것을 수용하되 일반 관람객 입장구와 VIP 입장구 외에 공연장 입구를 별도로 두 어 비교적 짧은 30분 내외만 기다린다면 한국관 1층에서 벌어지는 상설 공연을 관람 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열린 공간은 전시장 관리 측면에서는 골칫덩어리가 되어 관리요원들을 힘들게 만든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혹서기의 어느 날 박람회장에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 우가 몰아쳤다. 주변에 있던 많은 인파가 비를 피하기 위해 어느 한 순간 주변의 철책 을 타넘어 물밀듯이 한국관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우리는 이들을 경비원들의 안내를 받아 1층의 일정 공간에 머물도록 허용하였는데 이들은 비가 그친 뒤에도 나가지 않 고 이미 줄을 서서 장시간 기다려온 정상 입장객들 줄 쪽으로 끼어들기 시작하였다. 경비원과 운영용역회사 직원들의 역부족을 장병송 차장이 원만히 수습하는 수완을 발휘하여 안도의 숨을 내쉰 때도 있었다. 한국관이 개방한 가장 멋진 장소인 옥상에는 간이식당과 전망대가 있었는데 황 포강을 내다보는 전망은 박람회장 내에서 으뜸으로 꼽혔다. 이 때문에 많은 관람객이 옥상을 찾았는데, 어느 날 현지의 정신이상자 한 사람이 한국관 옥상 구조물에 올라 가 자살 소동을 벌이는 바람에 한국관은 뜻하지 않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3층에 자리 잡은 한국관 사무실은 개방 공간 때문에 공연소음이 적지 않았지만 한국관 직원 들은 잘도 견디어 주었다. 필자 박은우는 2009년 6월부터 2010년 11월까지 엑스포지원단장 겸 상하이 엑스포 한국관 관장을 맡았으며, 2005년에 개최된 아이치 엑스포에서의 한국관 관장을 역임한 바 있다. 29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299 여수 엑스포와 KOTRA 전시박람회와 엑스포 뒷이야기 배창헌 KOTRA 창립 50주년을 맞는 2012년에는 전 세계에 우리나라의 살아있는 바다, 숨 쉬는 연안 을 알리는 여수 엑스포(2012년 5월 12일~8월12일)가 개최된다. 국가적 대사인 만큼 KOTRA에서도 6명의 직원을 파견하여 참가국 유치와 엑스포장 조성, 각종 행사 준비에 힘을 보태고 있지만, 2007년 당시 치열했던 BIE(세계박람회기구) 인정 엑스포 개최 유치전에서의 KOTRA의 공헌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아 그 비사를 기 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2007년 11월 27일 파리, 2012년 인정 엑스포 개최지 선정을 위한 BIE 총회에서 한국, 모로코, 폴란드 3개국이 경합했다. 모로코의 탕헤르는 이슬람권의 지원을 등에 업고 최초의 아프리카 대륙 개최라는 명분으로 여수보다 우세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 나 결과는 1차 투표에서 한국 68표, 모로코 59표, 폴란드 13표였으며, 2차 결선투표 에서는 한국 77표, 모로코 63표로 여수 개최가 극적으로 확정되었다. 얼핏 낙승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사실은 국민적 관심을 바탕으로 정부 부처, 공기관, 민간기업들 이 합심하여 악전고투 끝에 얻어낸 박빙의 신승이었으며 그 중에는 KOTRA가 기여 한 결정적 2표가 있었다. 필자가 테헤란 무역관장으로 근무했던 이란에는 노르주 라는 신년 연휴가 있다. 소위 페르시안력에 따라 매년 3월 21일부터 새해가 되는데 그 시기에는 최소한 2주, 길 게는 3주까지 휴무다. 하필 그 시기에 중동아프리카지역 무역관장회의가 테헤란에서 개최되었고 당시 홍기화 KOTRA 사장은 OIETAI(이란투자청)와 IIEC(이란전시공 사)를 방문하게 되었다. 지금도 고마운 것은 신년 연휴로 고향 마샤드에 가 있던 OIETAI 사장이 왕복 2,500km의 먼 거리를 마다않고 KOTRA 사장과의 면담을 위해 달려와 주었으며, IIEC 사장 역시 휴무임에도 불구하고 전시장으로 복귀하여 면담에 응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이란이 얼마나 한국의 투자를 기다리며 전시산업 협력을 갈 망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뜻 깊은 만남에도 불구하고 299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00 우리나라의 대이란 투자 진출은 미국의 제재 등으로 지지부진하였지만, 가밤샤히디 IIEC 사장과의 만남은 여수 엑스포 유치로 이어졌다. 가밤샤히디 사장은 그해 11월 엑 스포 2012 개최지 선정 투표에 참여할 이란의 BIE 정부대표였다. 2007년 4월 여수 엑 스포 유치 건이 바야흐로 초미의 국가 어젠다로 등장하면서 여수 엑스포 유치위원회 대책회의에서 KOTRA는 당연히 뭔가 느낌이 있는 이란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KOTRA 본연의 임무를 내팽개치고 엑스포 유치에만 나설 수는 없는 터라, 이름 하여 Persian Day 행사를 기획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그해 9월 7일 서울 에서 이란 바이어 30개사를 대상으로 한 수출상담회 및 이란 투자환경 설명회, 그리 고 KINTEX-IIEC-KOTRA 3자 간 전시산업 협력 MOU 체결을 함께 아우르는 사업 이었다. 이란이 중동 최대의 시장이기도 했지만 그 즈음엔 우리 업계의 대이란 투자진 출 수요도 상당했다는 점으로 볼 때 시의적절한 행사였다. 특히 전시산업 협력 MOU 체결은 가밤샤히디 사장의 방한을 유도하여 여수 엑스포 준비 현장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이기도 했다. 그러나 가밤샤히디 사장의 여수 시찰까지에는 많은 난관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란은 소위 이슬람 형제국인 모로코를 지지하는 입장이었으므로(KOTRA가 2표 기 여했다는 표현은 이러한 의미이다) BIE 정부대표로서 한국 방문 자체를 거북스러워 했고 또 설령 간다고 해도 이란의 고위 공직자 해외출장은 대통령실의 재가를 득해야 하므로 방한 일정을 미리 정해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출국 당일 재가가 떨어지는 경우도 허다하여 이란에서 일한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다.) 한편 한국에서는 수출상 담회, 투자환경 설명회 준비는 물론 유치위원회 측에서도 전남도지사, 여수시장의 일 정까지 수시로 조정해 가며 귀빈의 여수 현장시찰 준비를 끝내고 기다렸지만 가밤샤히 디 사장의 답변은 한국 방문을 희망한다 는 것 뿐, 시간은 자꾸만 흘러가고 있었다. 너무 힘든 진통을 겪다가 출국 사흘 전, 드디어 가밤샤히디 사장은 9월 5일부터 3일간 한국을 방문하겠노라고 확답을 주었다. 즉각 스탠바이 상태에 있던 항공편 확 보에 착수했지만, 이제는 라마단이 문제였다. 2007년에는 9월 13일부터 라마단이 시 작되어 수많은 이란 사람들이 썰물처럼 두바이 등지로 빠져나가는 때였기 때문이다. 두바이-인천 구간은 대한항공의 협조로 어찌 조치했지만 테헤란-두바이 구간은 단 하나의 티켓도 절대로 구할 수 없는 최악의 항공난이었다. 기억컨대 정말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었다. 다른 사람 티켓으로 대체하는 방법, 이스탄불이나 심지어는 유럽을 경유하는 방법, 국내선으로 페르시아만의 Kish섬으로 가는 방법, 종내는 항공사 직 원 매수까지 모든 네트워크를 동원하고 모든 정보를 체크해 보았지만 백약이 무효였 300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01 고 출발 하루 전 지칠 대로 지쳐 포기 상 태에 이르렀다. 그런데, 기적처럼 한 장의 티켓이 나 타났다. 제일 후진 항공편의 제일 후진 좌 석이었지만 현지 유력 인사도, 대사관도 아닌 무역관 운전기사가 정상가의 3배를 주고 용케 구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가밤 샤히디 사장의 반응은 I am very 2012 여수 EXPO confused. 였고, 다급해진 필자는 사무 실로 찾아가 통사정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항공편은 당일 자정 넘어 출발할 뿐만 아니라 두바이에서 7시간을 기다려 대한 항공으로 갈아타는 일정이었던 것이다. 여하간 가밤샤히디 사장은 자신의 약속 때문 인지 필자의 간청 때문인지 그 날 밤늦게 공항으로 갔고 9월 5~7일 사흘간 여수 방문 등 한국에서의 모든 일정을 소화했다. 하지만 일정 내내 많이 피곤해 했으며 특히 KOTRA 사장 주최 만찬 자리에서 필자더러 work too hard 라고 원망 비슷한 언급을 했을 때는 정말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고비는 한 번 더 있었다. 11월 25일, 가밤샤히디 사장이 투표를 위해 파리로 떠나 야 하는 날인데 몸도 아프고 바쁘다며 가지 않겠다고 했다. 별 수 없이 다시 찾아가서 간청을 했고 밤늦게 공항에서 탑승 수속을 하는 것까지 눈으로 확인한 후에야 KOTRA의 역할은 끝났다. 세상일에는 느낌이 있는 법이다. 비밀투표이긴 하지만 필 자는 가밤샤히디 사장이 한국을 지지했을 것으로 100% 확신한다. 표결 결과에 의하 면 그날 가밤샤히디 사장이 파리로 가지 않았더라도, 그리고 극단적으로는 이 모든 일이 일어나지도 않고 이란이 모로코를 지지했다 하더라도 여수가 선정은 되었겠지 만 그렇게만 따진다면 그 어떤 일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는가! 해가 바뀌어 필자가 본사로 귀임하는 2008년에 들면서부터 가끔씩 상념에 잠기 곤 했다. 귀국하면 그토록 좋다는 여수에 꼭 가봐야지, 그리곤 어디 맛집에라도 앉아 주인 아주머니한테 필자가 여수 엑스포 유치에 이렇게 기여했노라고 은근히 자랑을 해봐야지, 그럼 혹시 서비스 안주라도 하나 나오지 않을까? 필자 배창헌은 2005년 8월부터 2008년 9월까지 테헤란 무역관장을 역임했다. 301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02 이런 일 저런 사업 년대 초의 수출 효자품목을 아시나요? 303 가나에서 겪은 두 인물 305 KOTRA와 거의 같이 태어난 KOREA TRADE 지 307 코트라맨의 자동차수출에 얽힌 이야기 310 중소기업 공동물류센터 탄생 비화 314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폴크스바겐(VW) 납품 성공기 317 개성공단 남북경협 협의사무소 근무 회고 319 나를 속 태운 뭄바이 한국상품전 322 프르미에르 비죵(Première Vision), 그 짜릿했던 순간들 324 트랜스포텍(Trans Portech), 글로벌 바이어 대상 사업의 물꼬를 트다 326 브라질 상파울루 무역관에서 열린 대통령 화상 국무회의 328 Cartoon Connection Korea가 개최되기까지 331 국내 무역관의 명암 335 보고타 교통시스템 구축 3억 달러 프로젝트 수주 지원기 339 프로 골퍼 양용은 선수가 KOTRA 로고 모자를 쓴 사연 341

303 1970년대 초의 수출 효자품목을 아시나요? 이런 일 저런 사업 조대형 OB 웰빙 붐과 더불어 건강 최우선의 생활양식이 급속히 확산되면서 애연가들은 간 접흡연의 피해 제공자로 몰려 공공장소는 물론 길거리에서조차 기피인물이 되는 세 상이 되었다. 하지만 시계바늘을 1971년으로 되돌리면 그 당시에도 엄연히 흡연의 인 체 유해론이 엄존하고 있었고, 이에따라 인공담배의 개발이 선진국을 중심으로 진행 되고 있었다. 다만 당시에는 흡연에 대한 직접적인 제약이 없었다는 점이 다르다면 다 르다고나 할까.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 담배의 제조원료가 되는 엽연초(우리말로 잎담배)의 수출실적이 1971년 당시로는 거액인 1,400만 달러를 기록, 그해 우리나라 총수출 실 적 13억 5,000만 달러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을 만큼 엽연초는 효자 수출상품이 었다. 수출 대상국가도 영국, 독일(당시는 서독), 미국, 네덜란드 등 주요 선진국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수출성과의 이면에는 우리나라 엽연초 수출업체들의 해외 마케팅 능력이 뒷받침되기도 하였지만 오늘날 짐바브웨라고 불리는 남로디지아라는 나라가 UN으로부터 통상제재를 받게 된 것도 크게 작용했다. 1963년 이후 영국의 자치식민지로 남아있던 로디지아는 엽연초의 세계 제2위 수 출국이자 공급국이었다. 그런데 1965년 백인정부가 흑 백인종 분리정책을 고집하여 UN으로부터 통상제재를 받게 되자 엽연초의 정상거래도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UN 의 조치로 엽연초를 로디지아로부터 공급받지 못하게 된 세계 주요 선진 수입국들은 기호품의 특성상 고객의 니즈에 부응하기 위해서 유사 대체품 물색에 긴급히 나서게 되었고, 그 대체품으로 품질과 맛, 가격 면에서 가장 적합한 한국산 엽연초 품종을 찾 아내게 되었던 것이다. 이같이 유리한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상황은 생산량 부족에다 내수까 지 늘어나서 수출물량 확보가 여의치 못했다. 더욱이 물량 부족과 제약성을 고려하면 제값을 받을 수 있는 협상의 여지가 충분했는데도 국제적인 담배 메이저들(일종의 석 303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04 유 메이저그룹들과 유사)의 영향력 아래 직접수출이 아닌 간접수출에 의존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때문에 우리 수출업체가 수입국의 요청에 따라 큰 물량 위주로 응하다 보 니 우리 엽연초의 최종 수출지와 수요자(end user) 파악에는 소홀했다. 엽연초 수출을 지속적으로 확대해나가기 위해서는 안으로는 물량 확보방안이 강구되어야 하고 밖으로는 세계적인 담배 메이저들의 일방적인 요구에 수동적으로 부응하기보다는 직접 수출하는 방안을 모색하여 제값 받는 기획 마케팅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물량확보의 해결책으로 제조연초인 궐련 즉, 담배의 내수절약으로 얻어지는 엽 연초를 수출로 전환한다는데 두고, 당시 KOTRA 연구부 중심으로 주요 품목별 담당 연구원들의 월 1회 대( 對 ) 상공부장관 수출증대방안 발표회에서 엽연초 절약을 통 한 수출전환 특단 대책 : 담배 길이 1cm 줄여 200만 달러 수출확대 라는 제안이 전격 채택되었다. 이 제안은 박정희 대통령 주재 정례 수출확대회의에서도 전격 수용되어 전매청이 궐련 제조기 대체방안을 수립하여 보고하기에 이른다. 직수출 방안에서도 KOTRA 연구부의 품목 담당자가 중심이 되어 우리나라의 담배 수출업계 중 직수출 루트를 개발 내지 확보한 업체들을 별도로 엮어서 직수출 해외수출계획서 를 전매청에 제출, 물량 배정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전매청은 제값 받 는 정상적이고 실리적인 수출이었기 때문에 요구한 물량을 배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 황이었다. 중소업계의 직수출 추진계획이 국내 일간지에 게재되자 대부분 간접수출 을 해왔던 대규모 담배수출업체들의 이의와 반발이 뒤따랐다. 이처럼 KOTRA의 수출증대를 위한 실질적인 아이디어 짜내기는 섬유제품, 기계 류 등 공산품은 물론이고 인삼, 엽연초 등 농수산물, 심지어 누에똥, 수세미, 식용 달 팽이까지 포함되었고, 문화상품으로 만화영화(Animation) 수출확대 방안까지도 제 안되고 구체화되어, 당시 배정받기 어려운 외화 사용승인을 받아 관련 시설재 도입까 지 가능케 하는 실효를 거두었다. 한 시대 세계시장에서 각광을 받았고 우리나라의 중요한 효자 수출품목이었던 담배원료 엽연초를 생각하면 KOTRA의 기여도 나름대 로 적지 않았음을 떠올리게 되고 한편으로는 1970년대의 영화( 榮 華 )를 다시 찾기는 아주 어려울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필자 조대형은 1970년 2월 KOTRA에 입사하여 1999년 6월 정년퇴임했다. 304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05 가나에서 겪은 두 인물 이런 일 저런 사업 김승철 OB 필자가 아크라 무역관에 근무했던 1980년대 초의 가나는 극심한 경제부진을 겪 다가 급기야는 외환위기를 맞아 IMF의 개입을 불러오는 위기에 처했다. 외환이 바닥 을 드러내 일반 국민들의 생활은 매우 어려웠으며, 병원에는 항생제 등 기본적인 치료 제조차 없었고 주유소에는 휘발유가 없는 실정이었다. 외화가 절대 부족한 나라에서 수출시장을 개척하려니 자연히 비정상적인 거래방식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러한 활동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특별한 사례 두 가지가 있다. 당시 가나는 외화 부족으로 인해 주요 산업자재의 수입을 위한 외화를 국제기구 의 지원에 의존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정부 관계자로부터 특수은행 인 가나 농업은행이 국제입찰을 통해 어망을 구입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물량 도 적지 않은데 다른 경쟁국들보다 뒤늦게 정보를 입수한 터라 필자는 몹시 조바심이 났다. 일단 국내업체를 수배하여 입찰참여를 추진하는 한편 농업은행의 구매담당관에 게 한국산에 대한 특별한 배려를 요청하려고 비공식 라인을 통해 접촉을 시도했다. 무슨 수단을 쓰든 계약을 따내고 말겠다는 욕심에 필자는 구매담당관에게 한국 산 어망의 구매 조건으로 모종의 사례를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말 실망스럽 고 부끄럽게도 그 담당관은 필자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며 공정하고 객관적인 평가 결과를 지켜보자고 말하는 것이었다. 아, 틀렸구나. 이 친구가 다른 업체와 이미 연결이 되어 있었구나 하고 낙심천만 이었는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한국산 어망이 품질과 가격 면에서 우수한 것으로 평가 되어 당당히 입찰을 따낸 것이었다. 필자는 그 은행 구매담당관의 공정한 업무처리와 곧은 심지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나중에 정식으로 아크라에서 가장 좋은 식당으로 담당관의 가족을 초청하여 저녁을 대접하며 현지인들에 대해 속물적인 선입견을 갖 고 있던 필자를 마음속으로 자책했다. 또 다른 사례는 필자를 실망케 한 경우이다. 현지를 방문한 국내 축구공 업체를 305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06 우연히 가나 청소년체육부의 고위관리와 연결할 기회가 있었다. 운이 좋게도 마침 가 나 정부가 축구를 국민 스포츠로 발전시키려는 드라이브를 강력하게 걸고 있어서 축 구공 10만 달러 상당의 수출계약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런 것들이 모여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가나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프로축구 선수가 당시 프로축구를 막 출범시켰던 한국의 어느 유명 팀에 스카우트되기도 하면서 한국과 가나의 스포츠 교류가 제법 활 발해지기도 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찾아왔다. 청소년체육부의 고위관리가 이 거래성사에 대한 커 미션을 요구한 것이었다. 당연히 국내 해당 수출업체에 이 요청을 전달하여 무난히 매 듭지어지기를 바랐으나, 1980년대 초의 우리나라 외환관리도 만만치 않았고 국내업 체도 적극적으로 챙기지 않는 바람에 필자만 중간에서 상당히 시달림을 당하게 되었 다. 당시 무역관 공용차량은 하늘색 벤츠로서 우중충한 아크라의 교통환경에서 제법 눈에 띄는 것이었는데, 좁은 시내에서 시도 때도 없이 이 체육부 관리의 차와 조우를 하게 되니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아크라의 통신사정이 어려워 국내업체와 자주 통 화하기도 여의치 않은 실정이었다. 결국 커미션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필자는 아크라 무역 관을 폐쇄하고 런던 무역관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런던에서 어느 날 저녁 TV 채 널을 돌리다보니 가나의 권투선수가 영국 선수와 싸우고 있었고 가나 선수가 타이틀 을 차지했다. 그런데 링사이드에서 올라와 그 선수를 행가레 치는 사람을 보니 바로 그 체육부 관리가 아닌가. 그 다음날 무역관으로 그 관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직도 커미션 문제가 완 결되지 않았으니 빨리 해결해 달라는 것이었다. 다행히 런던은 국제전화 걸기가 용이 해서 해당업체에게 자주 전화할 수 있었고 마침내 이 대단한 끈기의 현지 사나이는 소 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필자 김승철은 1982년 12월부터 1984년 9월 무역관이 폐쇄될 때까지 가나의 아크라 무역관에서 근무했다. 아크라 무역관은 1974년 4월 15일 처음 개설되었다가 1977년 1월 25일 폐쇄되었으며, 1979년 7월 1일 재개설되었다가 1984년 12월 31일 다시 폐쇄되었다. 아크라 무역관은 2011년 4월 15일 3번째로 다시 개설되었다. 30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07 KOTRA와 거의 같이 태어난 KOREA TRADE 지 이런 일 저런 사업 서호준 KOREA TRADE 지(이하 K.T지)는 우리나라의 수출 산업과 수출상품을 해외에 홍보하고 해외시장을 개척하기 위 해 KOTRA 창설과 같은 해인 1962년 탄생했다. 당시는 우리 나라를 해외에 홍보할 마땅한 자료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국 내 업체들 대다수가 자사 제품 카탈로그를 갖추지 못한 상태 였고, 그렇다고 기업을 해외에 홍보할 마땅한 매체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초창기에는 수출기업이 광고용 사진을 촬영한다는 것은 하나의 거사(?)였다. KOTRA는 1962년 72면으로 창간호를 제작한 이후 44 년 동안 통권 제394호를 마지막으로 발간하고 2006년 말 폐 간하였다. K.T지가 품목별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67 년 발간한 21호부터였으며, 1969년과 1972년에는 월간으로 1962년 창간호 발간된 적도 있으나 그때그때 사정에 따라 해마다 발간 횟수 에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1977년부터 품목별로 분책함과 아 울러 여러 품목별 카탈로그의 합본(종철) 형태를 취하다가 1980년 138호부터 품목별 단행본(중철) 제본으로 바꿨다. 발간 부수는 6호를 발간한 1981년의 경우 호당 6,000 부였지만 문구 악기편은 1만 부를 찍기도 하는 등 해외시장의 수요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 발간 언어는 영어를 위주로 하였으며 필요에 따라 불어, 포르투갈어, 아랍어, 일 어, 스페인어, 독일어 판을 찍었다. 또한 품목별 카탈로그 형태를 취하면서도 1972년 에는 1972 Major Export Commodities of Korea, 1984년에는 KOEX 상설전시장 입주업체, 1985년에는 Major Products of KOTRA s Member Companies 같은 특 집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업체에 대한 부담금 징수는 1983년 154호부터 시작되어 인 307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08 쇄 실비의 25%를 부과했으며, 1984년부터는 50%로 올렸다. 이후에도 87년 75%, 88 년에는 100%까지 업체 부담금을 올렸는데, 그 결과 광고 게재료 수입 실적이 1995년 2억 5,000만 원, 1996년 2억 9,000만 원, 1997년 3억 1,800만 원, 1998년 3억 7,900만 원으로 매년 증가했다. 1999년 2월에는 KOTRA 최초로 소사장 책임경영제가 도입되면서 소속을 기존 의 마케팅지원처에서 K.T 발간팀으로 변경하여 독립적으로 운영되었고, 초대 소사장 에 박현수 과장이 부임했다. 그리고 그해 총 면수 990면에 총수익 4억 5,740만 원을 올림으로써 총예산 3억 5,540만 원을 훌쩍 뛰어넘는 성과를 올렸다. 같은 해 12월 27 일에는 전자카탈로그인 CD-ROM 5,000매를 제작하기도 했다. 2001년에는 필자가 소사장이 되었고, 2005년 7억 3,700만 원의 수익실적을 올리기도 했으나, 2006년 조 직개편에 따라 그해 말 K.T지는 폐간의 운명을 맞이했다. 돌이켜보면 K.T지를 제작하는 데는 애로 사항도 적지 않았다. 홍보용 카탈로그 제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디자인과 사진이다. 디자인은 시대적 흐름에 따라 일정 포맷으로 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사진은 현품이나 다름없다는 인식이 작용할 때였다. 하지만 K.T제작팀은 만만치 않은 촬영 장비에 업무용 차량이 없어 버스나 기차와 같은 대중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발간 예정일까지 제작을 마치고, 적기에 배포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항시 느꼈다. 예를 들면 이랬다. 지방 출장은 행정 1명, 사진기사 1명 이렇게 2인 1조로 편성되 었는데, 행정은 대개 신입사원이 따라가고 사진은 홍보출판부 소속 사진팀의 경력직 이 동행했다. 촬영 장비는 무거운 카메라(핫셀 중형), 삼각대, 촬영에 필요한 플래시, 창간호 내면 광고 배경지, 배터리, 필름 등으로 전날부터 신경전을 벌였다. 사진팀은 다 가져갈 수 없으 니 짐을 나누자는 바람에 결국 카메라를 뺀 나머지 는 모두 행정직원이 가져가야 하는 서러움 속에 출 장 첫날부터 고행이 시작되었다. 가장 힘들었던 기억은 푹푹 찌는 무더운 여름에 용광로 생산라인을 촬영할 때였다. 플랜트 공장 현 장에 가보니 라인이 모두 작업 중이었다. 촬영하려 면 주변을 깨끗이 정리해야 하는데 작업 중인 직원 들에게 차마 도와달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팬티 차림으로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 이 되면서 공장 직원들과 똑같은 모습이 되어갔다. 30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09 그런가 하면 그 당시엔 필름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복잡한 카메라 기기의 적절한 노출과 전문가의 노하우가 접목되어야 최상의 사진이 나오는데, 먼 지방을 다녀온 다 음날, 출장 사진 10롤(1롤당 10장)이 모두 까맣게 나와 망연자실했던 기억도 있다. 필 름과 카메라 사이 스테인리스 막을 빼지 않고 찍었던 것이다. K.T 독점 해외 광고시대가 지나고 국내에 유사 매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 서 경쟁이 심화되던 시기에는 합병의 유혹과 인기매체에 대한 흑색선전이 난무하기도 했다. 따라서 경쟁우위에 서기 위해 K.T 발간팀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변화를 시도 했지만 아쉬움도 있었다. 첫째, 광고 유치와 수출기업 활성화를 위해 찾아가는 서비스 를 실시했다. 초창 기에는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광고를 실어달라고 찾아왔지만 이후에는 직접 영업을 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보너스 서비스로 유혹해야만 지면을 채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1999년 소사장제가 도입되면서 담당업무를 전적으로 소사장 자율에 맡겨 전문성을 띤 새로운 사내 부서의 모델이 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수익 목표 에 지나치게 편중된 평가시스템으로 본래의 발간 목적을 벗어났다는 점에서 아쉬운 점도 적지 않다. 셋째, 소사장이 독립적인 사업주체로 자리매김하면서 광고 에이전트 를 운영하였는데, 이는 소사장이 계열사를 만든 격이었다. 이와 같은 체제를 통해 중 국과 인도 시장을 위한 특별판을 발간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기업 광고와 함께 한류를 소개하는 지면까지 만듦으로써 국가 홍보와 브랜드이미지 홍보에도 참여했다. 마지막으로 지자체의 등장에 따른 연계사업이 있었다. 정부의 수출기업화 사업 이 정착되고 지자체가 역내 수출기업 지원을 목적으로 지역 활성화 사업을 시작하면 서 또 하나의 수익모델로 자리 잡기도 했다. 하지만 인쇄매체 광고의 내리막길에서 미디어 시대와 온라인 시대의 트렌드를 따 라가지 못하고, 합병이니 통합이니 그럴듯한 명분에 눌려 2006년 12월 KOREA TRADE지는 문을 내렸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이따금씩 고객들한테서 이런 전화를 받는다. 해외 홍보용 카탈로그 제작하고 싶은데 신청 받나요? 필자 서호준은 1992년 2월부터 2006년 12월까지 홍보출판부, KT 사업팀 등에서 KT지 발간을 담당했다. 309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10 코트라맨의 자동차수출에 얽힌 이야기 이런 일 저런 사업 지금 생각하면 쇼비니즘(chauvinism)에 가깝지만 양담배 피우는 것을 엄금하 고 국산품 애용운동 을 벌인 때가 있었다. 코트라맨들은 이를 지키기가 쉽지 않았다. 해외 근무나 출장을 마치고 귀국할 때 공항 면세점이나 기내에서 선물용으로 양담배 를 구입하는 경우가 많았고, 해외생활을 하면서 국산품을 주문하여 구입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무역관은 국산품 사용실적을 본사에 주기적으로 보고하는 일까지 있었으니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라고나 할까. 국산품 애용의 경우 한 가지는 수긍할 만했다. 바로 공용차량이었다. 1975년부터 수출되기 시작한 현대자동차는 특히 1980년대에 들어서 중남미나 아프리카 같은 후진 국에 팔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A/S 등의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포니(Pony)같은 자동차 를 공용차량으로 사용할 여지는 있었던 것이다. 수출진흥기관에서 일하는 사람이 한 국산 자동차를 타고 업체를 방문하면 모양새도 좋고 움직이는 홍보물 역할까지 하는 일석이조가 아닌가. 자동차가 오늘의 수출대종품목으로 자리잡기까지 KOTRA도 조 금은 기여한 바 있다고 생각되어 이에 얽힌 무역관 이야기를 다섯 꼭지로 정리해 본다. 조대형 에콰도르 퀴토 무역관장( )의 경우 적도의 나라 에콰도르 퀴토에 무역관이 설립된 것은 1975년 4월이다. 에콰도르 는 산유국으로 OPEC 회원국이었고 오일머니에 힘입어 외환규제가 전혀 없었지만, 당시 우리나라의 대 에콰도르 수출규모는 100만 달러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 시기에 현대자동차 수출개척 전담역 양승장 수출부 차장이 퀴토 무역관을 방문했다. 현대자 동차는 당시 몇 장 안 되는 카탈로그에 의존하는 실정이었고, 카탈로그도 다른 차종 없이 유일하게 포니 하나만 소개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색상도 노란색, 초록색, 검 정색 등 몇 가지 원색에 그쳐서 너무나 초라했다. 조대형 관장은 양 부장과 함께 현지 시장조사를 비롯하여 잠재 파트너 발굴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310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11 두 사람은 다각적으로 수배한 끝에 신규로 등장한 딜러 중 열성적이고 잠재능력 이 있다고 판단된 명문가 곤잘레스 형제 딜러를 발굴했다. 그리고 정책적으로 마진 없 는 공급가격을 제시하는 등 시장 진입을 위해 부단히 노력한 결과 택시조합을 개척하 는 데 성공하여 1976년 포니 승용차 다섯 대를 처음 에콰도르에 수출했다. 곤잘레스 형 제 딜러는 단기간에 수요가 급증하자 서울 딜러대회에까지 참석, 물량확보에 나서는 한편 포니를 매스컴에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A/S 체제가 갖춰지지 않아 문제점도 적 지 않았으나 포니의 수출물량은 크게 늘고 칠레, 코스타리카, 과테말라 등 이웃 중남미 로 확대되면서 포니는 꼬레아(코리아)보다 더 어필하는 브랜드로 각인되었다. 심창섭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무역관장( )의 경우 심창섭 관장은 1979년 6월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무역관 개설요원의 명을 받고 가족과 함께 시골 공항 같은 한적하고 아담한 몬테비데오 공항에 내렸다. 젊고 야심 만만한 심 관장은 큰 건을 터트려 보겠다는 마음으로 우리 자동차 포니 를 수출하기 로 목표를 정하고 재력이 있는 자동차 부품상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매일 관련 업체들을 접촉하는데 매달렸지만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한국이라는 이름도 모 르는 나라에서 무슨 자동차를 만드느냐며 상대를 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작전을 바꿔 우선 무역관 관용차량으로 포니를 지급으로 보내달라고 본 사에 요청했다. 당시 중남미의 스위스 라 불리던 백인국가인 우루과이에는 벤츠나 BMW 같은 고급차가 가득했다. 그런데도 포니를 몰고 거리에 나가면 모두가 처음 심창섭 OB 자녀가 포니 앞에서 찍은 사진 311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12 보는 이 귀여운 차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다가 자동차 부품상인 실력가 만시오네 사 장을 만나 설득에 들어갔고 현대자동차에서는 중남미 담당 부장을 급파하는 등 대리 점 계약이 급물살을 타게 됐다. 그리고 대리점 계약이 성사되던 날 심 관장은 포니와 헤어지게 되었다. 만시오네 사장이 우리나라에서 선적된 자동차가 도착하기 전까지 자신의 BMW를 내주는 대신 심 관장의 포니를 전시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가져갔기 때문이었다. 윤승렬 자메이카 킹스턴 무역관장(1979.4~1982.3)의 경우 윤승렬 관장이 1979년 자메이카의 수도 킹스턴에 무역관 개설요원으로 갔을 때 자 메이카는 정치적으론 친 소련, 친 쿠바 노선이었고 사회주의 체제였기 때문에 경제는 먹 고 살 식품조차 절대적으로 부족한 나라였다. 그러나 UN에서 남북한이 표 대결을 하던 당시 북한 요원들이 자메이카 정부의 허락도 없이 무단 입국하여 시내 호텔에 투숙, 인 공기를 펄럭이고 있으니 우리 정부는 대응책으로 부랴부랴 무역관을 개설했던 것이다. 선거를 통해 친미 정권이 들어선 1980년부터 자메이카 경제는 자본주의 색채를 띠 기 시작하고 치안도 안정되어 가면서 관광산업이 부활하기 시작하였다. 관광산업이 살아 나려면 렌터카 사업은 필수적이니 자동차를 자체 생산하지 못하는 자메이카는 전량을 수입하여야 했다. 윤 관장은 무역관 공용차량과 별도로 현대 포니 1,500cc를 자가용으로 한국에서 수입하였는데, 이는 카리브 해 섬나라에 최초의 국산차 상륙이었다. 당시 현대자동차의 중남미시장 담당 S 과장은 카리브 시장개척을 위해 자메이카 에도 출장을 왔다. 윤 관장은 S 과장과 포니를 타고 수도 킹스턴과 북쪽의 휴양도시 Ocho Rios와 Montego Bay에서 로드 쇼를 펼치며 현지 바이어들을 만나 상담을 진 행하곤 했다. 이러한 결과로 화교 2세 바이어인 Chin이 자동차 수입을 위해 방한하였 지만 수입규모가 적다는 이유로 한국에서 문전박대를 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윤 관장 의 자동차 사랑은 식지 않고 1984년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근무할 때 자동차의 해외 시장 개척이 열매를 맺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대우자동차였다. 윤 관장의 자동차 사랑은 아르헨티나에서도 계속되었다. 당시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아르헨티나 정부는 기존의 자동차 수입정책을 대폭 손질, 수입관세를 많이 내는 업체 순으로 수입쿼타를 할당하는 입찰시스템으로 변경하여 현금을 가장 많이 보유한 업체들이 자동차 수입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하였다. 무역관은 다방면으로 노 력한 끝에 자동차 수입업자협회 D. Attie회장을 방한시켜 기아자동차와 에이젠트 계 약을 성사시켜 한국산 자동차가 남미의 대평원을 달리는 기반을 닦았다. 312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13 임용탁 D.R 콩고 킨샤사 무역관장( ~ )의 경우 무역관 창설요원으로 임용탁 관장이 1981년 6월 하순 D.R 콩고(당시 국명은 자 이르)에 부임할 무렵 수도 킨샤사에는 포니 5~6대가 이미 굴러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제3국을 통해 간접적으로 수입된 데다가 A/S 체제를 갖추지 못한 영세상이라서 포니 는 문짝이 성하지 않은 등 달리는 흉물 이었다. 한편 우리나라는 정부 차원에서 우체 국에 마이크로버스를 무상으로 원조하여 자동차시장에 공을 들이고 있었고, 자이르 경제장관을 단장으로 한 경제사절단 방한에 이은 모투부 대통령의 방한( ~ 06.10)으로 양국 간의 협력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킨샤사 은행 소유주인 재력가 Dokolo 그룹회장이 서울국제무역박람 회(SITRA, ~10.08)에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여 본사에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했고, 본사는 현대자동차와 연결시켰다. Dokolo 는 당시 ELVE-ZAIRE라 는 자회사를 통해 A/S 시설까지 갖추고 오토바이를 수입하다 여의치 않아 대안을 찾 고 있던 중이었다. 현대자동차의 딜러로 선정된 ELVE-ZAIRE는 킨샤사의 태평로라 할 트랑트 쥬앵 거리 초입에 쇼룸을 짓고 홍보활동에 나섰으며, 킨샤사박람회(FIKIN, ~07.31)에도 포니를 출품하여 선을 보였고, 현대자동차에서는 서부아프 리카에서 가장 성공적인 진출이라며 기술자까지 파견하는 성의 를 보였다. 뉴욕 무역관의 현대차 미니버스 450대 UN 조달 성공 지원 뉴욕 무역관은 2008년부터 UN 조달시장을 뚫기 위해 UN조달본부(UNDP)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이들과 국내 유관기관과의 미팅을 주선하고 인맥을 넓혀가는 한편 2009년 5월에는 무역관 내에 UN조달지원센터를 개소하기도 했다. 그 러던 중 2009년 초 UNDP로부터 미니버스 입찰 정보를 입수해 서 현대자동차에 전달하고, 무역관 담당자(김문영)은 UNDP 의 문이 닳도록 드나들면서 제반 절차를 지원했다. 마침내 향 후 1,500만 달러 450대의 미니버스 낙찰자로 현대자동차가 선 정되었음을 통보받았다. 이후 현대자동차의 김용환 당시 부회 뉴욕 무역관의 현대차 미니버스 450대 UN 조달 성공 지원 감사서한 장은 감사서한을 KOTRA 사장에게 전달했다. 313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14 중소기업 공동물류센터 탄생 비화 이런 일 저런 사업 김상욱 1990년 말 암스테르담에 부임한 필자에게 부여된 첫 번째 과제는 로테르담에 있 는 한국유통센터(Korea Distribution Center)의 정상화였다. 이 센터는 이름만 한국 유통센터였지 한국 기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연유를 알아보니 설립 당시 몇몇 한국중소기업이 공동으로 지분 참여하겠다는 철석같은 약속을 믿고 로테르담 시정 부가 센터 설립에 상당한 보조금을 지급하였으나 실제 건립과정에서 한국기업이 참 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로테르담 시정부는 네덜란드 투자청과 함께 우리 정부를 상대 로 집요하게 한국기업의 출자를 종용해왔다. 2001년 9월 말, 필자가 암스테르담 무역관장으로 다시 발령을 받아 스키폴 공항 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10년 전 한국유통센터 인수를 위해 접촉하던 네덜란드 투자청 과 로테르담 시정부 인사들을 찾았다. 당시 과장급이었던 사람들이 부청장과 국장급 이 되어 있었다. 먼저 네덜란드 투자청 담당자를 만나 필자의 물류센터 설치 아이디어 를 구체화하기 위해 네덜란드물류협회(HIDC)의 자문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을 요청 했다. 우리 중소기업들이 공동으로 물류센터를 활용하여 활발히 수출활동을 한다면 이것은 결국 네덜란드 투자진출로 이어질 것이라고 설득했다. 필자의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물류전문 기업을 아웃소싱하려면 투자청과 물류 협회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정작 문제는 내부에 있었다. 필자는 최초의 기획안을 가 지고 2002년 초에 개최된 구주지역무역관장회의에 참석, 당시 오영교 사장에게 보고 했다. 오 사장은 사업계획안을 듣고 나서 이를 토의에 붙였는데 사업의 구체적인 내용 을 파악하지 못한 무역관장들이 KOTRA의 실패사업 중 하나였던 KMC(Korean Merchandising Center)사업을 예로 들면서 사업성공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자 연히 물류센터 사업계획안은 논의가 진행되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참가 유망 대상기업의 사전 수요조사를 포함해 내 부인사 설득 작업에 들어갔다. 특히 KOTRA 입장에서는 별도의 예산투입 없이 참가 314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15 기업 부담으로 물류센터를 운영할 수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기로 했다. 필자는 2003년 초 프랑크푸르트에서 개최된 무역관장회의에 다시 공동물류센터 사업계획안을 상정 했다. 2년 연속 공동 물류센터사업을 설명한 덕분인지 당시 참석했던 무역관장들이 대놓고 반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회의도중 커피브레이크 시간에 오영교 사장이 필자를 찾았다. 김 관장, 내가 물류센터 사업을 들어보니 우리가 크게 손해 볼 일은 없는 것 같은데 어떠냐? 고 했다. 한번 추진해보라는 말씀이었다.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가자마자 네덜란드 투자청과 물류협회 인사들을 만나 사업 계획을 설명하고 적극 추진하기로 약속했다. 문제는 예산이었다. 물류센터 사업이 회 계년도 중에 신규사업으로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업을 본격 추진하기 위해서는 국내업체 모집이 우선 과제인데 이를 위해 사업소개 브로슈어도 만들어야 하고 국내 출장 설명회도 개최해야 하는 등 할 일은 많은데 예산이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네덜란드 투자청과 네덜란드물류협회에 예산분담을 제의했다. 한 국에서 공동물류 센터 사업 설명회를 위한 사업비 중 80%를 투자청에서 50%, 물류 협회에서 30%를 대면 우리가 20%를 부담하겠다고 했다. 우리가 부담하겠다는 20% 는 필자의 한국 출장비였는데, 이것도 무역관의 운영비를 쪼개 사용했다. 당시 약 1만 달러의 예산을 이들로부터 염출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2003년 10월, 공동물류센터 사업설명회가 KOTRA 지하 1층 대회의실에서 열렸 다. 국내 설명회 참가업체 모집은 본사 시장개척부에서 담당하였는데 참가기업 모집 단계에서부터 신청자가 폭주했다. 네덜란드 투자청, 물류협회, 물류사업자(Geodis 로테르담 중소기업 공동물류센터 개소식 315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16 Vitesse) 그리고 필자 등 4명이 회의장에 입장하고서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야말 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공동물류센터의 기본 컨셉트는 다수의 국내 중소 수출기업 물동량을 취합하여 수출대상지에 소재하고 있는 물류전문기업(Logistics Service Provider)과 단체계약 을 체결토록 함으로써 창고비와 운송비 등 물류비용을 절감하자는 것이었다. 여기서 KOTRA는 현지 물류기업과의 계약체결은 물론 물류비 산정, 재고판매에 따른 보험 및 금융 알선, 신규 거래선 발굴지원 등 물류센터 사업 참가와 관련한 부가 서비스를 제공하기로 했다. 공동물류센터는 보세상태에서 운영하는 것이 유리한지 아니면 도 착과 동시에 현지 통관 후 창고에 보관하면서 판매하는 것이 좋은지 등은 지역별 특 성에 맞추어 신축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또한 참가기업이 단순 창고 업무에서 벗어나 상표부착, 포장, 조립 등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적극 추진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드디어 2004년 4월 로테르담에 최초의 중소기업 공동물류센터가 문을 열었다. KOTRA 사장과 현지 우리나라 대사, 네덜란드 투자청장, 네덜란드물류협회 고문 등 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개소식을 가졌다. 우여곡절 끝에 시작한 유럽공동물류센터 사업에 대한 국내 언론의 집중적인 보도에 힘입어 많은 중소기업들이 참여하였다. 각지의 KOTRA 해외무역관에서는 이를 벤치마킹하여 2011년 말 현재 17개국에 서 30개소의 공동물류센터로 늘어났다. 한 푼의 예산도 없이 시작한 사업이 이제는 매년 50억 원씩 투입되는 KOTRA의 대표적인 해외마케팅 지원사업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어 보람과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나 이제는 양적인 확대보다는 공동물류센터 가 질적으로 우리 기업에게 부가가치를 가져다주고 있는지를 면밀히 검토해 진일보 한 사업으로 업그레이드하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필자 김상욱은 1990년 10월부터 1992년 1월까지 그리고 2001년 10월부터 2005년 5월까지 두 차례 암스테르담 무역 관장을 역임했다. 31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17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폴크스바겐(VW) 납품 성공기 이런 일 저런 사업 나윤수 2001년 함부르크 무역관장으로 부 임하여 처음 방문한 독일 대기업이 폴크 스바겐(Volkswagenwerk AG, 이하 VW)이었다. 외환위기로 국내 자동차 메 이커들이 구조조정되는 과정에서 부품 을 공급하던 협력업체들도 어려움을 겪 고 있었다. 이에 국내 부품업체들이 해외 자동차 메이커에 부품을 직접 공급하도 폴크스바겐 볼프스부르크 본사 인근 물류창고에서 고 사를 지내고나서 기념촬영, 뒤에 보이는 것은 처음으로 납품된 자동차부품(실내등) 을 실은 트럭임. 앞줄 왼쪽 에서 다섯 번째가 필자 록 지원해야 하는 임무가 KOTRA에 부 여되었다. 경기도 지역 자동차 부품업체 를 위한 대규모 전시상담회가 미국과 캐나다에서 성공리에 개최되었으며, 유럽 자동 차 메이커를 대상으로 상담회를 개최하려는 시도도 이즈음이었다. 처음 VW의 부품 해외소싱 부서를 찾아 갔을 때 반응은 별로 시원하지 않았다. 도쿄에 기술사무소가 있는데 한국 부품업체들의 실력이 모자라서 공급업체로 선정되 기 어렵고, 따라서 VW 본사에 와서 상담회를 개최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반응이었다. 2001년이 가고 2002년 초였다. 경기도청으로부터 도내에서 가장 잘나가는 중견 부품업체들을 독일에 보낼 테니 상담을 주선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VW에서는 상담 에 응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경기도청 경제실장의 방문 요청은 받아주었다. 필자가 경 제실장을 직접 대동하고 해외소싱 부서를 방문했더니, 부서 책임자는 VW의 구매정 책이나 공급업체 선정절차는 나 관장에게 이미 다 말해 다시 반복할 필요 없으니 그 다음부터 얘기하자 는 것이었다. 독일 사람들의 놀라운 합리성이라고 할까. 그리고 2003년 여름 어느 날 프랑크푸르트로 출장가고 있는데 핸드폰 전화벨 소리가 울렸 다. VW에 납품을 시도하고 있는 주식회사 일흥이라고 회사를 밝혔다. 그러면서 입찰 317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18 에 참가하려면 영업사무소를 독일 내에 설치해야 하는데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속셈인즉, 아직 납품이 확정된 것도 없는 터에 많은 비용이 드는 영업사무소를 현지 에 낼 수가 없다. 그러므로 KOTRA가 도와줄 수 있느냐 는 의미였다. 이에 마침 지사 화 담당요원이 한국에 출장 중이므로 연락해서 지사화사업에 대해 협의하도록 조치 하겠다고 답했다. 지사화사업 회원으로 가입한 (주)일흥을 위해 담당 지사화요원은 하루가 멀다 하고 VW 본사를 들락거리면서 견적서를 제출하였다. VW 측은 부품 공급업체를 선 정할 시점이 되면 등록된 부품업체들을 대상으로 견적서를 받고, 견적서를 제출한 회 사 중에서 가격이 저렴한 몇 개 업체를 선정하여 온라인 입찰에 응하도록 통보한다. 2004년 5월 일흥이 드디어 2,100만 달러 상당의 실내등을 5년간 납품하는 공급업 체로 선정되었다는 낭보가 왔다. VW의 부품소싱 온라인 시스템은 실시간으로 입찰 참가자들의 가격투찰 상황을 적, 황, 청 3색으로 보여 주기 때문에 온라인 입찰은 피를 말리는 과정인데, 이런 과정을 거쳐 일흥이 선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였고 이때부터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공급업체가 납품을 정해진 기한 내에 이행하지 못할 경우 이에 상응하는 거액의 페널티를 물어야 한다는 VW이 제시한 선정조건 때문 이었다. 만에 하나 일흥이 공급에 차질을 빚는다면 회사가 도산할 수도 있거니와 이를 도와준 KOTRA도 도의적 책임을 면하기 어렵거나 명성에 먹칠하게 되어 있었다. 공급업체로 선정되면 부품의 원도면을 기반으로 다시 설계하고 이에 맞추어 금 형을 제작한다. 이어 샘플을 제작하여 VW으로부터 4 5차례에 걸쳐 시험을 받는 절 차를 밟는다. 그동안 도면이 인터넷망을 타고 수없이 오고갔다. 그런데 거의 샘플 검 사가 끝났다고 생각할 무렵 지사화요원 얼굴이 사색이 되어 내 방에 들어왔다. 관장 님, 일흥의 납품이 실패한 것 같습니다 라는 한마디가 필자를 아찔하게 했다. 내용인 즉, 일흥이 보낸 샘플에 대해 VW이 아연도금 검사를 했는데 금속 부분이 벌겋게 녹 슬어버렸다는 것이었다. VW으로부터 소식이 왔다. 최종 테스트였던 이번 시험은 최 악의 조건에서 테스트한 것이라며, 이미 품질기준에는 적합 판정을 받았기 때문에 납 품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부품이 우리나라에서 독일 볼프스부르크 VW 공장에 도착하기까지 물류 경로를 꼼꼼히 확인한 후에 VW에서 초도 물량 주문이 이루어졌다. 2005년 7월 일흥이 수출 한 실내등 초도 물량이 마침내 VW 공장의 전용 물류창고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한국 식당에 돼지 머리와 떡을 주문해서 VW 본사가 있는 볼프스부르크로 달려갔다. 필자 나윤수은 2001년 10월부터 2005년 7월까지 함부르크 무역관장을 역임했다. 31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19 개성공단 남북경협 협의사무소 근무 회고 이런 일 저런 사업 윤정혁 북한에 처음 가는 느낌은 두려움과 호기심이 뒤얽힌 묘한 감정이었다. 2005년 10월 28일 남북경제협력협의사무소 개소를 앞두고 사전답사 차원에서 개성을 처음 방문하던 어느 날이었다. 필자는 2004년 용천역 폭발사고가 있을 때 중국 단둥에 가 서 북한대표부와 상담회를 가진 적이 있어서 북한 사람을 처음 만나는 것도 아니었지 만, 그때와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2000년대 초반 남북당국 간 만남이 많아지면서 여러 차례의 남북경제협력추진 위원회(경추위)가 남북한에서 번갈아 열렸고, 개성의 남북경제협력협의사무소의 개 소는 그 노력의 산물 중 하나였다. 당시 KOTRA 북한팀은 통일부와 남북경협에 관한 정보를 활발히 주고받았고, 개소가 확정된 후에는 통일부의 요청 형식으로 우리 직원 의 파견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KOTRA 직원 외에도 통일부 직원 몇 명에 수출입 은행, 중소기업진흥공단, 무역협회 직원들이 각각 1명씩 파견되었다. 외국인투자가들과 개성공단을 방문한 홍기화 사장과 그 일행. 맨 오른쪽이 필자 319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20 당시 개성공단은 초기단계로 정말 휑 했다. 제대로 된 건물도 거의 없고, 숙소도 컨테이너 가건물이었다. 주변은 말 그대로 건설공사판이었다. 개성공단 주위에는 펜 스가 쳐져 있었고, 그 밖으로는 북한 당국의 허가를 받은 안내인이 동행 하지 않는 한 나갈 수 없었다. 밤에 운동 삼아 달리기라도 한답시고 깜깜한 데를 가다보면 군인을 만나 식겁하기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남북경제협력협의사무소가 개성공단에 위치해 있다 보니 개성공 단 관련 업무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사무소 업무는 개성공단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무소의 주된 업무는 남북경협을 하는 남측 기업들과 북측 간 거래를 지원하는 것이었으며, 사무소가 생기기 전에는 남측 의 기업들이 중 국 단둥이나 북경 등에서 북측 담당자를 만나서 협의하곤 했다.(당시에는 남북한을 말할 때 남측 이니 북측 이니 하는 표현을 썼고, 남북 간 교역은 수출, 수입 대신에 반 출, 반입이라는 말을 썼다.) 제3국에서 만나서 양측 기업인들이 사업 협의를 한다는 게 말이 안 되었다. 그래 서 사무소를 만들자고 제안하였고, 수년의 논의 끝에 개성공단 내에 사무소가 열리게 된 것이었다. 사무소는 3층 건물에 자리 잡아 2층에는 남한 직원들이, 3층에는 북한 직원(북한 직원들 집은 평양에 있다)들이 근무하였다. 북한 직원들은 원래 평양에 살 고 있던 사람들이어서 2, 3층 직원들끼리는 공단 밖으로 가끔 나가서 식사도 같이하 고 술도 같이 마셨기 때문에 나름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었으나, 공단에서 일하는 노동 자들과는 말을 섞기도 어려웠다. 남북 간 이메일과 전화만 되면 당사자들이 일사천리로 처리할 수 있는 일들이 모 두 사무소를 거쳐 진행되었다. 평양에서 보낸 팩스를 3층 사무실에서 받아 우리에게 주면 우리는 남한 사업자들에게 전달하고 확인 전화를 하는 일들이 쏟아졌다. 자연스 레 어떤 업체가 어떤 일을 진행하고 어떤 문제가 있는지 확연히 파악하게 되었다. 사 업진행 관련 문건뿐만 아니라 개성에 들어오기 위해 필요한 초청장도 이런 식으로 전 달되었다. 주말이면 남쪽에서 2명, 북쪽에서 2명씩 돌아가며 당직을 섰다. 주중보다는 이때 3층 식구들과 보다 친해질 수 있었다. 구내식당에서 삼겹살과 불판, 소주를 가지고 와 서 커튼을 다 내린 사무실에 차려놓고 오붓하게 술을 얼큰히 마시고 횡설수설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남쪽 TV를 같이 보며 그 사람들 반응 보기, 이런 게 오히려 재미있었다. 일하면서 다시 한번 느낀 것이지만, 북한 사람들은 굉장히 수동적이었다. 어떤 320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21 일을 하자고 먼저 제안한 적이 많지 않았다. 제안은 다 우리가 하고 그 쪽에서 검토하 는 식이었다. 철저히 상부의 지시를 기다려 일을 했다. 사무소는 남북관계의 축소판 이었다. 별 문제가 없을 때는 공단 밖에 나가서 밥도 먹고 했지만, 남북 관계가 얼어붙 으면 3층 사람들은 얼굴 표정부터 바뀌고 공단 밖에 나가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이때 우리측 파견자들은 월요일 새벽에 사전 예약된 MDL(군사분계선) 통과 차 량을 타고 개성공단에 출근했고, 금요일 저녁에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초창기에는 숙소가 완성되지 않아 컨테이너를 개조한 임시 숙소에서 추은 겨울을 나기도 했으며, 보일러가 수시로 터져 찬물로 머리를 감아야 할 경우도 있었다. 북한사람들을 대하면서 느낀 것은 지난 60여 년 동안 서로 너무나 다른 삶을 살 아왔기 때문에 서로를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필자 윤정혁은 2005년 10월 7일부터 2006년 12월 31일까지 개성공단 내 남북경제협력협의사무소 에 처음으로 파견근 무를 했다. 이후 김주철 차장이 2007년 1월 1일부터 2009년 1월 31일까지 파견되었다가 북한의 일방적인 폐쇄조치로 철 수했다. 이후 다시 개소되어 김도형 과장이 2009년 9월 7일부터 파견되어 2010년 8월 31일 다시 폐쇄될 때까지 근무했다. 321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22 나를 속 태운 뭄바이 한국상품전 이런 일 저런 사업 윤효춘 BRICs 또는 친디아(China + India)의 한 축으로 알려진 인도에서 전시회를 개 최하여 우리 기업의 인도시장 진출을 도모하자는 취지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2004년 4월 뭄바이 무역관을 개설하였으니 2년을 넘긴 2006년 11월 인도의 심장 뭄 바이에서의 전시회 개최는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본사와 주요 사항을 결정하고 전시장을 찾았다. 말이 전시장이지 단층짜리 엔지 니어링 공장 건물을 리모델링했기 때문에 여름철 비로 바닥 여기저기에 물이 고여 있 고 전력, 상수도, 주변 식당 등 어느 것도 제대로 갖추어 진 것이 없었다. 전시산업이 발달하지 않은 인도에서 단독전시회 개최는 중앙정부의 사전 승인과 함께 전기, 상하 수도, 소방, 안전 부문에서 주최자가 직접 인도 관계기관으로부터 인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난감했다. 하지만 대안이 없어 전시장을 예약하고 나니 업체모집이 문제였다. 중소기업의 인도시장에 대한 관심은 중국 등에 밀려 후순위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인도 진출 대기 업을 대상으로 접촉하고 참가를 독려했다. 현대자동차, 삼성전자, LG전자가 막판에 가서야 마지못해 참가하면서 국내 중소기업을 합쳐 70개의 기업이 참가신청을 완료 해 첫 번째 관문은 어렵게 통과했다. 단독전시회라서 전시회 홍보, 바이어 유치, 참가업체별 상담주선, 개막식 주빈 초청, 기념리셉션, 참가업체 호텔예약, 전시장 왕복 교통수단 확보 등 할 일이 태산 같 은데 필자와 김정현 과장 둘이 이 일들을 처리하려니 손이 부족했다. 선진국 같으면 전화 한 통화로 끝날 일도 인도에서는 한없이 시간만 끌 뿐 되는 일이 없었다. 게다가 인도의 11월은 초가을 날씨라 관광객이 많아서 좋은 호텔은 대부분 두 달 전에 객실 예약을 모두 마감한 터였다. 또한 호텔을 예약한 후 변동사항에 대해서는 1일분 패널티를 물렸기 때문에 김정 현 과장은 매일 매일 참가기업에 연락하여 변동사항이 있는지 여부를 점검하고 리스 322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23 트를 업데이트해 호텔과 협상하는 일로 많은 날들을 흘려보냈다. 긴급히 본사에 인력 지원 SOS를 보내고 8월부로 한상곤 차장을 증원하는데 성공하였다. 천군만마를 얻 은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개막일이 다가오면서 한 인도 경제 포럼 과 무역사절단 파견 사업을 한 국상품전시회와 동시에 개최한다는 방침이 본사에서 날아왔다.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경제협력포럼은 매일경제신문사(매경)와의 공동사업이긴 해도 인도측 연사 선정을 비롯하여 청중 동원, 홍보 등 일손이 많이 필요하였다. 전시회 개막식에는 정 세균 산업자원부 장관과 홍기화 사장도 참석할 예정이었다. 시장개발처에서는 무역협회와 공동으로 전시회 개막과 동시에 50개 업체를 파견 하여 상담을 주선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신설 무역관이라 물려받은 노하우도 없는 터 에 숙련되지 않은 직원을 상담주선에 투입하다니. 상담주선 일체를 인도기업에 용역 을 주는 것으로 가닥을 잡으니 마음이 한결 편했다. TV 자막 광고, 신문 광고, 시내 주요 간선도로상 입간판 광고, 육교 광고를 대행사 없이 진행하려니 만만치 않았다. 개막일이 다가오면서 VIP 명단에 경영평가 교수단, 비상임 이사단, 코트라 출입 기자단까지 또 추가되었다. 전시참가업체 관리요원, 포럼 참가자, 사절단원까지 합쳐 개막에 맞춰 오는 한국인 수가 500명을 넘어섰다. 매일 새벽 두세 시까지 야근을 밥 먹듯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약호텔만 5개에다 동원된 버스와 승용차가 40대에 이르 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게다가 여기는 인도다. 개막식 날 저녁에 개최한 리셉션에는 인도측 VIP가 참석하겠다고 약속까지 다 해놓고 나타나지 않아 리셉션이 어떻게 진행되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개막 이후 전시장 인근에 마땅히 먹을 만한 식당이 전혀 없어 매일 한인 사업가에게 부탁해 김밥과 도시락으로 민생고를 면할 수 있었다. 맨발로 오는 일반시민 관람객에 서부터 타타와 같은 대기업 임원까지 골고루 찾아주어 전시장은 그런대로 상담분위 기가 조성되었고 참가업체도 반응이 갈수록 나아졌다. 1주일간의 모든 일정이 끝나는 순간 필자를 포함한 뭄바이 무역관 3명은 거의 초 죽음이 되어 있었다. 참가자들을 모두 귀국시키고 다시 남은 우리 무역관 삼총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3가지의 복합사업은 영원히 잊지 못할, 그러나 내가 KOTRA에 재직하는 한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무용담으로 남을 것 같다. 필자 윤효춘은 2004년 4월부터 2007년 1월까지 초대 뭄바이 무역관장을 역임했다. 323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24 프르미에르 비죵(Première Vision), 그 짜릿했던 순간들 이런 일 저런 사업 장수영 2006년 7월 말 필자는 현지 전보를 통해 이스탄불에서 파리로 이동했다. 초파 근 무를 했던 파리를 다시 본다는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에펠탑이 눈에 들어오자 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당시에는 직원들이 산업 하나씩을 맡아서 집중 관리하는 벨트사업이란 것이 있 었는데 섬유는 원래 나의 소관이 아니었다. 그런데 섬유를 맡았던 직원이 나더러 섬유 를 좀 맡아 달라고 부탁해 섬유에 남다른 경험이 있었던 필자는 흔쾌히 그러자고 했 다. 사실인즉 2002년부터 시작된 뉴욕 섬유전시상담회를 주관했던 대구경북무역관 의 담당자로 2년 동안 일한 적이 있고, 1990년대 우리나라 직물의 유럽내 최대 수출시 장이었던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2년 넘게 근무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나름 섬유를 알 만큼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터였다. 또 하나의 행운은 파리 무역관 현지직원인 황 란서 씨의 존재다. 당시 젊은 초파 직원들은 이 분과 일하는 것을 꺼렸다. 세대차 때문 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와는 호흡이 척척 맞았다. 이렇게 팀이 꾸려지자마자 임무 가 주어졌다. 본사에서 세계 최고의 직물전시회로 불리는 프르미에르 비죵(PV : Première Vision)에 우리 기업들을 참가시키고 싶다는 뜻을 전해 온 것이다. 1973년 프랑스 리옹(Lyon) 지역의 몇몇 직물업자가 모여 시작한 PV에는 740여 개사가 세계 최고급 직물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한 업체도 참가하지 못하 고 있었다. 당시 우리 직물업체들은 PV와 하루 간격으로 파리에서 개최되던 텍스월 드 라는 전시회에 참가 중이었는데 그 숫자가 무려 120개를 넘었다. 텍스월드에 참가 한 우리 기업들은 바이어들이 한국 직물을 중국, 인도산 직물과 비교하고 있다면서 분통을 터트렸고, 특별한 대책이 없다면 한국 직물이 고사할 것이라는 우려를 한 목 소리로 전하고 있었다. 해결책은 PV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혹자는 돈을 주면 참가하 는 것이 전시회 아니냐 고 하겠지만 PV는 달랐다. 참가를 희망하는 기업은 우선 참가 희망 의향서를 제출해야 하고, 여기서 통과하면 약 15 20페이지에 달하는 정식 참가 324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25 신청서를 제출하게 된다. 이 역시 통과할 경우에만 정해진 날짜 에 파리에 있는 PV 사무실에 가서 2시간 동안 제품 프레젠테이 션을 하게 된다. 이렇게 하고도 참가여부는 순전히 PV 측이 결 정했다. 시즌별로 약 250개 기업이 참가신청을 하지만 참가 자 격을 얻는 기업은 고작 20개 정도였으니 당시 한국의 내로라하 프르미에르 비죵, 주최사 초청 기자 간담회 는 대표적인 직물업체들이 수년에 걸쳐 참가를 시도했지만 번 번이 실패한 것도 이해 못할 바가 아니었고, 다른 업체들까지 겁을 먹고 참가를 시도조차 못할 지경이었다. 우선 PV 사장과 PV 패션팀장을 만난 자리에서 KOTRA를 소개한 다음 PV에 참가할 자격이 충분한 직물업체가 한국에 많다는 사실을 알렸다. 또 파리 무역관이 우수한 한국 업체들을 뽑아서 소개해 줄 테니 검토해 달라고 부탁했고, 최종 프레젠 테이션 단계는 한국에서 진행하자는 우리의 희망도 전했다. 그들의 반응은 간단했다. 자격이 있으면 참가시켜 주겠다고 했다. 한국으로 초청하겠다는 제의에 대해서는 기 회가 생기면 갈 수 있다며 웃어넘겼다. 요컨대 실력을 보자는 것이었고, 우리의 접근 에는 호감을 보였다. 이때부터 파리 무역관과 본사, 섬유직물수출입조합이 힘을 합쳤다. 72개사의 참 가희망 업체를 모은 후 자체적으로 33개사를 선발했다. 33개사의 참가의향서를 작성 해서 PV 본사가 있는 리옹에 직접 가서 PV 측에 제출했다. 그 중에서 13개사가 탈락 하고 20개사가 정식 참가신청서를 제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PV 사장과 패션팀장을 서울 본사로 불러 진행한 최종 프레젠테이션 단계에는 18개사가 참가했다. 본사가 찍 어 보낸 사진에 홍기화 사장이 제공한 한복을 입고 좋아하는 PV 사장과 패션팀장을 보는 순간 우리의 성의가 통하고 있음을 알았다. 2007년 4월 파리 무역관, 옆 사무실의 황란서 씨가 걸어오며 짓던 그 흥분된 표 정을 필자는 아직도 기억한다. 9개사가 참가자격 획득에 성공했다는 소식이었다. PV 측을 만난 후 8개월 만의 일이었다. 참가의향서, 참가신청서, 프레젠테이션 등을 준비 하면서 PV가 지향하는 논리를 찾아내기 위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던 일, 우리 업체 들과 토론하고 설득하면서 서류를 수정하고 또 수정했던 일, 참가희망 업체 24명을 파리로 불러 진행한 연수단 행사 등 그 동안 쏟아 부은 노력만큼이나 컸던 결과에 대 한 부담감도 이 낭보 하나가 모두 날려버릴 수 있었다. 필자 장수영은 2006년 8월부터 2008년 7월까지 파리 무역관에 근무했다. 325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26 트랜스포텍(TransPortech), 글로벌 바이어 대상 사업의 물꼬를 트다 이런 일 저런 사업 김태호 2006년 말, 경남도청으로부터 4억 원의 예산을 지원할 테니 자동차부품전시회 를 창원에서 개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당시 자동차부품은 수출유망품목으로 부 상하였지만 적절한 수요처를 찾기 힘든 상황이었으며, 이미 KOAA Show 를 비롯하 여 몇몇 자동차부품전시회가 국내에서 개최되고 있어 이들 전시회와 차별화시키는 것이 첫 번째 과제였다. 우선 KOTRA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를 겨냥하기로 했다. 주문자상표부착생 산(OEM) 부품 분야, 그것도 완성차나 1차 부품업체 등 글로벌 바이어를 대거 초청할 수 있는 기관은 KOTRA밖에 없었다. 또한 창원 전시장 규모로 볼 때 전시회 자체로 는 내세울 것이 없음을 감안, 전시 외에 상담에 중점을 두는 행사로서의 컨셉트를 분 명히 했다. 전시일자는 2007년 6월 19일부터 21일까지로 정해졌는데 실제 준비업무는 2007 년 1월 말경부터 시작되었으니, 남은 시간은 5개월. 가장 시급한 것은 국내 전시업체 유치였다. 경인권과 중부권 소재 업체들은 굳이 창원까지 내려가서 전시할 필요가 있 느냐며 상담회에만 참가하겠다는 반응이었다. 우리 팀은 대거 초청되는 글로벌 바이 어와의 상담기회는 오로지 전시업체에게만 부여한다는 전략으로 대응했다. 일부 무 역관은 어렵게 초청한 바이어가 원하는 국내업체는 모두 만나 게 해줘야지 전시업체로만 상담기회를 제한하면 어쩌냐면서 강한 불만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전시업체 유치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 또한 한국 부품 사러왔어요 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 인 형식의 광고를 게재하는 한편, 관련 취재기사가 주요 일간지 에 게재되도록 하여 큰 성과를 보았다 제1회 트랜스포텍(TransPortech) 개막식 글로벌 바이어 초청도 문제였다. 그간 KOTRA가 글로벌 바이어 초청 사업을 추진한 경험은 많았지만, 글로벌 바이어만 32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27 150여명을 초청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우리 팀은 그 해에 계획 중인 크고 작은 자동 차부품 사업들을 국제수송기계부품산업 트랜스포텍(TransporTech) 이라고 명명된 이번 전시산업전에 흡수하고, 해외지역본부에는 현지 전시장에서의 설명회 개최 등 홍보사업을 하도록 독려했다. 이를 통해 우리 팀은 사업의 집중뿐만 아니라 해당 사 업을 위해 각 지역본부가 보유한 사업예산도 흡수하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얻었다. 또 한 글로벌바이어에게는 경남도에서 지원받은 자금으로 호텔 숙박 제공은 물론 항공 편까지 파격적으로 제공하였다. 대신 이들 바이어들에게는 전시장에서 최소 2일간 우 리가 주선한 국내업체와 상담해야 하는 의무(?)를 지웠다. 행사 진행을 준비하는 것도 큰 난관이었다. 아무리 작은 규모의 전시회라도 전시 매뉴얼이나 전시부스 배치, 부스 장치, 전기/비품/인터넷/청소 등등 전시회 세부 업무 는 동일하게 준비해야 했다. 게다가 처음 개최하는 전시회였고, 전시회 외에 1,500건 이상의 상담이 진행되는 대규모 수출상담회였으며, 지방 개최이기 때문에 바이어 입 국부터 창원 호텔까지 실어 나르는 인원 수송과 호텔룸 확보, 통역원 확보도 큰일이 었다. 창원 시내에 외국인이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숫자가 온 것은 처음이라서 창원 시내는 물론 마산의 모텔급까지 포함하여 7개 숙소를 확보해야 했고, 매일 아침저녁 으로 교통편을 제공해야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국내에서 총 165개사 230부스가 전시 참가하고, 해외에서 글로벌 바이어를 포함하여 300여 명의 바이어가 방문, 총 1,500여 건의 상담이 진행되었고, 해 외 완성차 1차 부품업체들의 구매설명회도 동시에 개최되었다. 이 행사를 통해 그해 말 까지 H산업, S오토모티브 등 여러 성공사례가 나오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KOTRA 예 산을 거의 받지 않고 경남도청 지원금과 부스참가비 등으로 이룬 성과였다. 그러나 필 자는 트랜스포텍의 성과를 계약 성사나 일부 수익 창출 측면보다는 KOTRA가 새로 운 사업형태를 발굴해냈다는 데 두고 싶다. 필자 김태호은 2006년 8월부터 2010년 7월까지 트랜스포텍을 주관했던 주력산업팀과 부품소재산업팀에서 근무했다. 327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28 브라질 상파울루 무역관에서 열린 대통령 화상 국무회의 이런 일 저런 사업 문진욱 2008년 11월 13일 목요일 오전 10시경, 김건영 관장이 급히 필자를 찾았다. 총리실 에서 걸려온 전화 때문이었다. 전화를 넘겨받아 총리실 담당자와 통화가 끝나자 세종로 정부종합청사의 행정안전부(이하 행안부) 전산 담당자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이명박 대통령께서 G20, APEC 등 국제회의 참석으로 장기간 국내를 비우게 되는 만큼 브라질 을 방문할 때 화상국무회의를 진행할 수 있고, 그러니 KOTRA 사이버 상담 프로그램으 로 테스트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국내기업과 브라질 바이어가 사이버 상담을 할 때 사용하는 매뉴얼을 정부청사 담 당자에게 이메일로 송부했다. 곧이어 총리실 담당자가 화상상담 사이트에 접속했고, KOTRA 사이버 상담 화면에 접속한 행안부 담당자는 화면크기, 음향상태, 트래픽 등 여러 사항을 꼼꼼히 체크했다. 헌데 아쉽게도 KOTRA 사이버상담 사이트는 불합격이 었다. 얼굴 나오는 화면이 너무 작고 화면의 중간 여백이 너무 크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대통령의 화상회의 지원은 해프닝으로 끝나는구나 싶었다. 그러나 행안부 담당자는 집요했다. 잠시 기다려 보라더니 이메일로 폴리콤 (Polycom)이라는 화상전화 프로그램을 보내왔다. 행안부에서 보낸 프로그램은 화상전 화 시스템이기 때문에 전화를 걸 수 있는 고정 IP(Information Provider)가 필요했다. 그런데 무역관 인터넷은 IP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접속 순서에 따라 자동으로 배정되었 다. 무역관 네트워크를 담당하는 브라질 기술자에게 물어보니 랜선을 하나만 남기고 다 제거하라는 것이었다. 한 회선만 인터넷에 접속하면 최초 배정된 IP 번호가 그대로 유지 되기 때문이다. 마침내 화상전화가 연결되었다. 화면과 음향 상태는 훌륭했다. 대통령이 정말 오시느냐 고 물었더니, 행안부 담당자는 기술적인 부분만 다루기 때문에 모른다고 했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화상국무회의를 무역관에서 열면 좋겠지만, 잘 되다가도 몇 시간씩 갑자기 먹통이 되는 브라질의 불안한 인터넷 상황이 걱정된다고 설명하자 답변은 의외였다. 그런 점들을 모두 감안하고 진행하는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 32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29 는 것이다. 문제는 브라질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행 안부 담당자는 브라질 시간으로 11월 13일(목) 밤-한국시간으로 11월 14일(금) 아침-에 다시 연락을 주겠다며 1차 테스트를 마무리했다. 목요일 밤이었다. 아침만 해도 화면에는 담당자 한 사람만 등장했는데 이젠 행안부 과장, 국장, 실장 등이 차례로 등장했다. 외교통상부 의전담당관도 나왔다. 화면과 음향 상태는 양호하다면서 사이버 상담실 여기저기를 화면으로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 대통 령을 모실 만한 환경이 되는지 체크하기 위해서였다. 대통령께서는 워싱턴 G20 회의 참 석차 잠시 후 출국하게 될 것이라면서 일정 중간에 화상국무회의를 보고 드리고 최종 확 정지을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브라질 시간으로는 이미 자정을 넘겼는데 본사에서 연락이 왔다. 대통령이 무역관 에 와서 화상회의를 진행하다 혹시라도 인터넷이 끊어지는 등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었다. 요지는 가급적 진행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장 상황 은 어쩔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11월 16일 일요일 저녁-한국시간으로는 11월 17일 월요일 아침-세종로 종합청사 에서 최종 테스트를 하자는 연락이 왔다. 여전히 화상국무회의 진행 여부는 미정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동안 보지 못했던 두 분이 화면에 등장해 상파울루의 날씨, 무역관 상태 등을 물어보며 수고 많다 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담당자에게 물어보니 행안부 장관과 차관이란다. 직감적으로 대통령 주재 화상국무회의는 진행되겠구나 하는 생각 이 들었다. 좌로부터 필자, 김철희 차장, 임두리 OB, 김건영 처장, 이명박 대통령, 박기식 이사(OB), 김순태 당시 상파울루 총영사, 이정상 과장 329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30 드디어 대통령이 브라질에 도착하는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브라질 첫 번째 공식일 정인 한-브 비즈니스 CEO 서밋 이 시작되었다. 행사가 중간 정도 진행되었을 무렵 김 건영 관장이 급히 필자를 찾았다. 대통령께서 화상국무회의 진행을 최종 승인한 만큼 빨 리 무역관으로 가서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무역관에 도착해 이것저것 확인하던 중 청와 대 경호실에서 연락이 왔다. 대통령이 건물에 도착 후 이용하게 될 엘리베이터와 무역관 상태 등을 점검했다. 필자는 우선 건물 관리 책임자를 불러 대한민국 대통령께서 방문할 예정이니 전용 엘리베이터 배정과 보안 등에 각별히 협조해 달라고 부탁했다. 오후 5시에 브라질 연방경찰들이 도착해 금속 탐지기로 무역관 구석구석을 수색했 고, 6시쯤에는 청와대 경호실 직원 10여 명이 무역관에 들어섰다. 그리고 저녁 8시경 정 부종합청사와 화상전화가 연결되었다. 상파울루 주지사 만찬에 참석한 대통령 일정이 분단위로 전해져왔다. 화상국무회의 진행소식을 듣고 취재하기 위해 찾아온 카메라와 기자들, 그리고 대통령 수행원으로 무역관은 금방 붐비기 시작했다. 마침내 공식 만찬이 끝나고 대통령께서 9시 50분경 무역관으로 출발했다는 연락이 왔다. 예상보다 빨리 도 착할지 모르기 때문에 김건영 관장과 본사에서 출장온 박기식 이사가 대통령을 맞이하 러 1층으로 내려갔다. 필자는 사이버 상담실로 들어가서 대통령이 등장하면 곧바로 화상국무회의를 시 작할 수 있도록 접속 상태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10시 25분경 무역관에 도착한 대통 령은 분장을 마치고 사이버 상담실로 들어섰다. 사이버 상담실에는 대통령을 수행한 이 윤호 지식경제부 장관과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도 있었다. 10시 반경 대통령이 화상을 통해 한승수 총리와 인사를 주고받으면서 국무회의는 KOTRA 상파울루 무역관에서 개최되었다. 25분 정도 진행된 화상회의가 25시간처럼 느껴졌다. 10시 55분쯤 화상국무회의가 무사히 끝났다. 대통령께서는 무역관을 떠나면서 밤 늦은 시간까지 수고가 많다며 직원들을 격려하고, 기념사진도 함께 찍었다. 대통령의 해 외 무역관 방문이라는 KOTRA의 역사적 순간은 이렇게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필자 문진욱은 2006년 2월부터 2010년 7월까지 상파울루 무역관에서 근무했다. 330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31 Cartoon Connection Korea가 개최되기까지 이런 일 저런 사업 정철 2008년 11월 본사 지식서비스산업팀에서 보낸 공문 하나가 브뤼셀 무 역관에 접수됐다. 우리 애니메이션 업계가 유럽에서 해마다 개최되는 Cartoon Forum 이라는 행사에 참가할 수 있도록 관련단체를 접촉해서 교 섭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Cartoon Forum 행사는 유럽의 여러 애니메이션 제작사와 투자가, 배급사 등이 만나는 행사로서, 여기에 참가만 하면 공동제 작사나 투자자 등 확실한 파트너를 만날 수 있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브뤼셀 무역관은 곧장 이 행사를 주관하고 있는 브뤼셀 시내의 유럽 애니메이션 협회(European Association of Animation Film : www. cartoon-media.eu ; 흔히 Cartoon 이라 약칭)와 접촉하고 면담을 요청했 다. 본사의 지원을 받아 우리나라의 애니메이션 산업에 관한 현황자료와 우리 측 제안 등을 꼼꼼히 챙기고 그 후 몇 차례 면담 신청을 재확인했으나, Cartoon 은 묵묵부답이었다. 한 달쯤 지났을까, 회신이 왔다. 이 Cartoon Forum 행사는 EU 의 예산지원을 받는 것으로서 유럽 기업이 아니면 참가할 수 없다면서 Alphamine 이란 프랑스의 어느 애니메이션 기업이 최근 우리나라 기업과 협력이 잘 이루어지는 것 같으니 그 업체나 만나보라는 내용이었다. 유럽요새 (Fortress Europe)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보다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냉정한 회신이었다. 그래도 한 가닥 끄나풀을 잡기 위해 파리 무역관에 Alphamine 연락처를 알려주 고 접촉을 시도, 다행히 이 기업의 CEO인 Christian Davin과 2009년 1월 초 방문면 담이 이루어졌다. 필자는 브뤼셀에서 TGV를 타고 파리에 당일 출장을 가서 파리 무 역관 박재규 관장 등과 함께 면담을 갖고 우리의 의도를 전달했다. 나중에 한 차례 더 파리에 출장, 파리 무역관장과 함께 오찬을 갖기도 했지만, 이러한 만남은 우리의 열 의를 전달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았다. 3월경 Cartoon은 우리 기업의 Cartoon Forum 참가 대신에 Cartoon 331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32 Connection 이란 새로운 개념의 사업을 제안해 왔다. 이는 EU 집행위가 유럽 애니메 이션 산업의 해외협력을 위한 새로운 예산을 편성 - Cartoon 측에 위임한 것도 있었 지만 - 파리에서 만났던 Christian Davin이 유럽 애니메이션 협회 이사장이 되면서 우리나라와의 협력사업에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이었다. Cartoon Connection의 개념은 유럽의 40~50개 애니메이션 기업들이 우리나라 를 방문, 우리 기업들과 3박 4일 동안 세미나도 갖고 1:1 미팅을 가질 기회를 제공함 으로써 공동제작 등 협력의 기초를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게다가 예산은 50:50으로 유럽 측과 우리 측이 분담하여 유럽 기업들의 방한 항공료나 숙박비는 EU 예산으로 충당하겠다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바이어를 초청하는 사업을 할 경우에는 해당 바이어를 찾고 방한을 설득하는 것도 어렵지만, 항공비나 체류비의 일부를 지원 해 주고 있는데, Cartoon 자체가 유럽 현지 기업들을 모집하고 방한 비용까지 부담하 겠다고 하는 것은 우리 측으로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필자는 KOTRA가 예산의 50%인 11만 유로(약 2억 원)를 부담하면서 애 니메이션 사업까지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면서 이 제안을 단순히 국내 유관기관 에 전달하는 것으로 끝낼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필자는 하루를 더 생각하고 이를 본 사 지식서비스산업팀에 보고하면서 당시 담당팀장이었던 엄성필 처장에게 전화를 해 서 우리 예산으로 직접 사업 파트너가 되는 것이 어떻겠느냐 물었고, 이에 본사는 흔 쾌히 우리가 직접 해보자고 동의를 해주었다. 일반적으로 우리 애니메이션 기업들은 기술력은 선진국에 뒤지지 않을 만큼 뛰 어나지만, 자본력과 기획력, 배급 등에 있어서는 매우 취약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데, 유럽 기업들과 협력관계를 맺는다면 이러한 우리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런 배경 하에 KOTRA와 Cartoon이 공동 주최기관 으로 이 사업을 추진하기로 원칙적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성격이 전혀 다른 유럽의 단체와 우리 KOTRA가 공동사업을 한다는 것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우선 예산 분담에 있어서도 Cartoon 측은 인건비를 포함할 것을 요구했고, 우리는 포함하지 않 는다고 했다. 개최 장소에 있어서도 우리는 서울이나 부산 등 대도시를 원했지만, Cartoon 측은 제주도나 경주와 같은 지방 소도시를 요구했다. 그들은 유럽과 우리나 라 참가업체가 3박 4일 동안 누에고치 안과 같은( cocoon ) 분위기 속에서 행사가 진 행되어야 참가업체 간 상호이해가 높아지고 실질적인 성과가 이루어진다는 것이었 다. 개최지에서는 우리가 결국 양보하여, 제주도를 선정했다. 여전히 반신반의의 자세를 보였던 Cartoon 측의 Marc Vandeweyer 회장과 332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33 Yolanda Alonso 부회장은 2009년 10월 제주도 현장을 사전 답사했고, 본사를 방문, 계약서에 정식 서명했다. 이때 엄성필 처장과 박준규 과장 등 본사에서 보여준 적극성 과 환대로 Cartoon 측은 점차 우리를 신뢰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행정 및 업무처리 방식의 차이, 문화적 차이로 오는 의견 충돌과 조정은 행사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이들은 행사장 장치의 구체적인 스펙까지 제시하고 충족 해줄 것을 요구했으며, 유럽 참가자들의 국내항공 예약 및 인천공항에서 김포공항으 로, 김포공항에서 제주공항으로, 제주공항에서 서귀포 하이야트 호텔까지 모든 이동 을 안내해 줄 것을 요구했다. 심지어 행사장 배치와 행사장 음료수까지도 의견이 맞 지 않았고, 특히 1:1 미팅 방식에 대해서는 의견이 충돌했다. 그들은 오전 세미나를 마 치고 그냥 놔두면 자연스레 원하는 참가업체끼리 상담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 고, 우리는 우리나라 기업들은 그냥 두면 머뭇거리면서 상담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것 이기 때문에 사전에 상담일정을 잡아야 한다고 맞섰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가 상 담일정을 만드는 조건으로 우리의 주장을 관철시켰다. 1:1 미팅에 관한 한 우리 KOTRA의 노하우가 최고 아닌가? 이후 우리 측은 유럽 참가업체들의 신청 을 받아 국내업체와 15분 단위로 상담일정을 만들었다. 나중에 Cartoon 측은 이런 방식을 높이 평가 하고 프로그램까지 만들어 2011년에 개최된 2회 행사에서는 자기네들이 1:1 상담일정을 만들었고, 자 기네들의 다른 사업에도 활용하고 있다. 1:1 상담은 행사장 호텔의 넓은 로비에서 개최되었는데, 15분 마다 상담종료를 알리기 위해 울린 징 은 유럽 측 참가자들에게 독특한 인상을 남겨주었다 한다 제 3회 Cartoon Connection KOTRA 유럽 애니메이션 협회 간 MOU 서명 후 기념촬영. 좌로부터 이태식 처장, 필자, 김병권 이사, 한진현 지경부 무역투자실장, 오영호 사장, Marc Vandeweyer 협회 회장, 김건영 처장, Yolanda Alonso 협회 부회장 333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34 이런 과정에서 당시 브뤼셀 무역관장이었던 필자와 담당 현지직원이었던 오예선 대리는 수시로 Cartoon 사무실을 찾아가거나 식사를 같이 하면서 본사와 Cartoon 측의 의견을 조율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그러는 동안 양측 담당자들은 상호이 해의 폭을 넓혔고, 서서히 우정의 단계로까지 발전해 갔다. 이런저런 수많은 곡절과 약 1년 4개월간의 시도와 준비 끝에 2010년 3월 23~26 일 사이 개최된 1차 Cartoon Connection은 양측 참가자 모두 크게 만족스럽게 잘 끝 났다. 당초 이 행사는 1회만 개최하는 것으로 추진되었으나,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어 느 쪽이 먼저라 할 것 없이 2011년에 다시 한 번 개최하자고 입을 모았다. 2011년 2차 행사는 전년의 수많은 시행착오의 경험으로 별다른 문제없이 잘 진 행되었고, 참가업체 모집과 항공편 예약까지 잘 이루어졌다. 그러나 행사를 열흘 정도 앞두고 터진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1986년 체르노빌 악몽을 잊지 않고 있는 유럽 참가신청 업체들의 불안감을 가중시켰고, 하나둘씩 참가를 포기하는 업체가 늘어났 다. 결국 행사 3일을 앞두고 행사를 연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행사장을 제주도에서 인천 송도로 변경하면서 치러지기는 했지만, 5월 24~27일 개최된 2차 행사도 만족스 럽게 개최되었다. 2012년 3월 19~21일 부산에서 개최된 세 번째 행사에서는 아시아 참가업체까지 아우르는 행사로 발전했고, 앞으로도 2년간 더 개최하기로 양측이 MOU를 체결하면서 아시아 기업들의 참여를 더욱 확대하기로 약속함으로써 이제 Cartoon Connection은 유럽과 아시아 애니메이션 산업 간 협력증진의 발판이 되어 가고 있다. Cartoon Connection 사업은 양측 업계의 수요가 맞아떨어져 가시적인 성과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 외에도 EU의 예산이 투입되고 KOTRA와 유럽의 관련 조합 간 명확한 역할분담으로 이루어진 한 EU FTA 시대의 대표적인 문화협력 사업이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하겠다. 또한 행사 때마다 유럽 전역에 방송되는 Euronews TV 방송국 기자가 동행 방한하여 10분 이상씩 이 행사와 우리나라를 소개하는 방송 을 여러 차례 방영함으로써 우리나라 국가 이미지 향상에도 일익을 담당했다. 필자 정철은 2008년 10월 1일부터 2011년 7월 31일까지 브뤼셀 무역관장을 역임했다. 334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35 국내 무역관의 명암 이런 일 저런 사업 이창용 2008년 12월 31일은 KOTRA 국내무역관이 막을 내린 날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공기업선진화 방안 의 일환으로 실시한 해외마케팅 창구 일원화 조치 에 따라 특별 한 기능이 있는 인천공항사무소와 제주사무소를 제외한 11개 국내 무역관을 폐쇄한 것이다. 필자는 2008년 4월 20일 대구에서 있었던 기획팀 직원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국내 무역관이 폐쇄될 것 같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설마 했었다. 그런데 2008년 6 월 1일부로 국내 무역관의 폐쇄가 결정되어 버렸다. 연말까지는 국내 무역관 청산기 간이었다. 국내 무역관 폐쇄방침을 전해들은 대구시와 경북도는 물론이고 관내 지자체와 언 론사, 그리고 일부 지역 국회의원, 지역 기업인들은 국내무역관 폐쇄방침에 대해 집요 하게 반대 운동을 전개했지만 무위에 그쳤다. 1986년 초 상용직 신분으로 입사한 필자는 우역곡절 끝에 1992년 지방전문직으 로 재입사하여 22년 10개월 동안 대구경북 무역관에서 근무해왔다. 그리고 지방전문 직의 경우 해당지역에서만 근무한다는 공사 규정에 따라 필자는 대구를 떠나서 직장생 활을 할 것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내 손으로 무역관을 개설하고, 다시 내 손으로 무역관 문을 닫 아야 하는 현실이 너무 안타까웠고 아쉬운 마음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사무실에 있던 비품과 서류 한 장에 이르기까지 내 손때가 묻지 않은 곳이 없는데 말이다. 그러나 현실인 걸 어찌하랴. 그동안 우리 KOTRA를 믿고 지지하고, 격려와 성원을 아끼지 않 았던 고객과 지자체 관계자들에게 실망을 주어서는 안 되겠기에 유종의 미를 거두자 고 다짐했다. 하지만 연말이 가까워질수록 정신적, 육체적으로 부담감이 밀려왔다. 2008년도 사 업목표를 조기에 달성해야 했고, 통상적으로 익년도 2월 말까지 진행했던 지자체 사업 의 정산을 연말까지 완료해야 했다. 그 외에도 해외마케팅 국내업무를 담당할 중소기업 335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36 진흥공단으로의 업무 인계인수, PCSI(Public-Service Customer Satisfaction Index) 고객만족도 수검, 사무실 집기비품 매각, 본사로 문서이관, 행정적인 폐쇄 등 여러 절차 를 밟아야 했고, 개인적으로는 본사 근무를 위해 서울로 이사할 준비를 해야 했다. 국내무역관은 지방 중소기업의 수출을 지원할 목적으로 1962년 11월 부산에 최 초로 개설되었다. 그 이후 대구경북, 광주전남, 전북무역관이 1974년 개설되었으며, 지 방화시대가 화두가 되던 2003년 12월에는 본사에 국내무역관과 사무소를 총괄하는 지방사업본부 까지 생기면서 지방에는 12개 무역관 3개 사무소가 활동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지방화 시대의 도래에 맞춰 국내 무역관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였다. 대구경북 무역관은 1974년 4월 KOTRA 대구사무소 라는 명칭으로 개설되었다. 하지만 5공화국 정권이 들어서면서 공기업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1982년 1월 대구사무 소는 부산사무소와 함께 폐쇄됐었고, 이후에 KOTRA의 필요성을 절감한 지자체와 지 역 상공인들의 끈질긴 대정부 건의에 힘입어 1986년 2월 24일 KOTRA 대구경북사무 소 가 재개설되었는데, 필자는 이때 개설요원으로 입사했다. 1986년 당시 해외에 무역관을 두고 있는 KOTRA는 업무 특성상 텔렉스가 있었 고, 모사전송기(팩시밀리)가 보급되기 시작한 시점이었는데 대구경북무역관에는 무역 관 개설과 동시에 팩시밀리가 설치되었다. 매일 아침 본사나 해외무역관으로부터 오는 텔렉스와 팩시밀리를 확인하는 일이 일과의 시작이었다. 1986년 6월 국내무역관으로 서는 최초로 사무용 컴퓨터(당시에는 286 AT 기종)까지 갖추게 되었다. 업체들은 물 론이고 지역 언론사 출입기자들도 우리 사무실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기업들이 컴퓨터 를 활용해서 해외 바이어 정보 등 해외시장정보를 얼마나 이용하는지가 지방언론의 경제분야 주요 뉴스가 되기도 하였다. 해외시장정보가 부족하고, 자체적으로 해외시 장개척 능력이 부족한 지방 중소기업들에 KOTRA는 꼭 필요한 존재였던 것이다. 1995년 민선 지방자치단체 단체장 시대가 도래하면서 지자체 단체장들이 경제 분 야를 중요시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대구경북 무역관에서는 문희갑 대구광역시장 에게 지자체장이 직접 인솔하는 시장개척단을 구성하여 파견할 것을 건의해 시장개척 단이 파견되었고, 이를 계기로 KOTRA-지자체 공동협력사업도 본격적으로 추진되었 다. 사업유형도 다양화되었는데, 예를 들면 해외전시회 지자체 공동관 참가사업, 수출 상담회 개최, 해외시장조사 지원사업, 해외비즈니스 개별출장 지원, 해외지사화 및 물 류 지원사업, 지자체 단독 해외전시회 개최, 지역전략산업 토털마케팅 지원사업, 국내 전시회 해외바이어 유치 지원사업 등이다. 해외전시회 중에는 정부 요청에 따라 KOTRA가 정책적으로 참가하기도 했는데, 33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37 각 지자체가 해외전시회 공동관 사업에 앞 다투어 참가함으로써 본사가 신청한 면적 을 축소 조정하는 일까지 발생하기도 했다. 또한 1990년대 후반 대구경북 무역관이 지 자체와의 협력사업을 개발하던 중에 품목 특성상 해외 전문전시회에 개별 참가하는 중 소기업 지원을 위해 대구시에 신규 사업으로 해외전시회 개별참가 지원사업 이라는 유형을 처음으로 만들어서 시행하기도 했다. 1990년 초까지 국내 무역관에는 본사 파견 직원(1 3명)과 현지 채용 상용직(남, 여 각 1명씩)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상용직 직원의 말 못할 고충도 적지 않았다. 본사 발령 직원들은 대개 1 2년 이내에 이동이 돼 상용직들이 업무의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었는 데, 상용직은 낮은 급여에 승진기회도 없었다. 이선기 사장이 여러 가지 방안을 검토했지 만 갑작스럽게 퇴임하는 바람에 처우개선 방안은 한 동안 표류하게 되었다. 다행히 1992 년 KOTRA의 지방화시대에 대비한 조직개편과 맞물려 국내 무역관에 전문직 정원 9명 을 추가로 확보하면서, 당초의 취지를 살려 국내 무역관에 근무하는 전문직은 해당지역 에서 장기 근무하는 지방전문직제도 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어렵사리 탄생한 지방전문 직 은 국내무역관이 2008년 말 폐쇄되면서 그 기능을 상실하고 공사의 전문직 으로 통 합되었다. 필자는 현재 지역협력팀 소속으로 대구경북지방 중소기업청 수출지원센터에서 근무하는데 연간 개 기업의 해외시장개척 활동을 지원하는 등 국내 무역관의 역할을 일정 부분 대신하고 있다. 하지만 지방 중소기업들의 만족도가 무역관 폐쇄 전 과 같을지는 의문이다. 2005년 체육대회 행사 때 대구경북 무역관의 가족들 337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38 이 글은 당시 광주전남 무역관장이 WINK 게시판 자유소리에 올린 참으로 참담 한 심정입니다 라는 제목의 글이다. 코트라 가족 여러분께! 한마디로 참으로 참담한 심정입니다. 길게는 30여년, 짧게는 10여년 역사의 국내무역관들이 찍 소리 도 못하고 아니 찍 소리할 사이도 없이 한 순간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저간의 사정이 어떻든 간에 현 지의 소리에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였어야 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코트라의 주요 고객은 지방의 중소업체들과 지자체임은 모두가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이들 중소업 체들과 지자체들의 아무런 의견 수렴 없이 하루아침에 이들과의 접점인 국내 무역관들이 아침 이슬처 럼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들 고객들 없이 해외가 강화된들 무슨 소용이 있나하고도 생각해 봅니다. 심각하게 숙고해야 할 과제입니다. 이번 조치와 관련하여 독일의 롬멜 원수의 다음과 같은 말이 생각 납니다. 나는 탁상에서 이루어지는 전략은 절대로 믿지 않는다 라는. 더욱 우리(국내무역관 근무 직원들)를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국내 무역관에 근무하는 지방 전문직들 에 대한 대책입니다. 아직 확실한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아 섣불리 얘기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들리는 이야기로는 본사 직원은 본사로 불러들이면 되지만 지방 전문직들에 대한 별다른 대책은 없는 것 같 다고 합니다. 그들도 우리 식구 아닙니까? 뭔가 방도(지자체나 중진공 파견 등)가 나와야하지 않겠나 생각이 듭니다. 지방 전문직들은 요즘 충격에 갈피를 못 잡고 있다고 합니다. 해외 근무라는 이점도 없이 박봉을 견디 면서 조직을 위하여 불철주야 헌신해왔던 바로 이들입니다. 이들에 대한 따뜻한 배려가 절실한 시점입 니다. 우리 회사(코트라)는 특히 금년 참으로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고객만족도 2위를 차지했다고 합 니다. 바로 이러한 결과 뒤에는 이들의 고민과 땀이 송송이 맺혀 있었습니다. 참고로 제가 몸담고 있는 광주전남 무역관은 이번 고객만족 조사에서 100점 만점(8개 사업과 연관된 100여개 업체를 상대로)을 받았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러한 결과는 관장인 저의 노력은 아니었 고 순전히 이들 지방전문직들의 노력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조직에 충성하고 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닥친 어려움을 우리는 남의 일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요? 여러 가지로 어려운 문제점이 많겠습니다만 그렇다고 나 몰라라 하면서 나중에 의리 없는 조직이라는 얘기를 들어서는 안 되겠지 요. 모두 대책을 세우고 고민하면서 좋은 결과가 나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본사에서 어련히 알아서 대책을 세우리라 생각되지만 현지 무역관에 몸담고 있는 저로서는 현지의 정 서를 반드시 전해야 할 것 같아 몇 자 올렸습니다. 혹시 이야기하는 와중에 지나친 점이 있었다면 너그 러이 양해 바랍니다. 2008년 4월 26일 비내리는 빛고을 광주에서, 고지찬 33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39 보고타 교통시스템 구축 3억 달러 프로젝트 수주 지원기 이런 일 저런 사업 권선흥 2008년 10월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 무역관에 부임한 필자는 12월 콜롬비아 북쪽 카리브해안도시 카르타헤나 시에서 콜롬비아 인프라 프로젝트 포럼이 개최된다는 소 식을 접하고 한 걸음에 달려갔다. 입이 딱 벌어질 만큼 프로젝트 정보가 무궁무진 흘러 나왔다. 수많은 프로젝트 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끈 프로젝트는 바로 지능형 교통시스 템(ITS) 구축 프로젝트였다. 보고타 시를 비롯한 여러 도시의 ITS 프로젝트가 있어서 핵심인물인 국가기획처 프로젝트 조정관을 면담했다. 그리고 한국의 ITS 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이니 우리 기업들을 한번 만나보라고 권유했다. S사 인사가 서울에서 와 조정관에게 프레젠테이션을 하자 조정관은 바로 이거라 며 만족해했고, 본사 SW산업팀이 무역관의 사업계획안에 적극적으로 호응해준 덕택 에 2009년 2월 보고타에서 ITS 설명회를 갖게 되었다. 국토해양부, 서울시, ITS 협회, S사, E사, L사 등이 참석하여 발표했는데 콜롬비아 측에서는 국가기획처 조정관과 교 통부 국장 등 중앙부처 관계자, 보고타 시 ITS 프로젝트의 핵심인물인 보고타 시 교통 본부장, 그리고 ITS 프로젝트에 관심이 있는 지자체 인사들까지 찾아와 행사장은 입 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였다. 당시 콜롬비아 측 설명회 연사로는 보고타시 교통공사 격인 트란스밀레니오사의 사장을 적임자로 판단하고 섭외를 했다. 이 회사는 후일 보고타 시 교통본부장 지휘 하에 보고타 교통시스템 발주처가 되었다. 설명회 이후 우리 기업들의 콜롬비아 ITS 프로젝트에 대한 관심 이 크게 고조되어 L사와 S사, 도로공사, ITS협회 등이 앞다퉈 개 별적으로 보고타를 다녀갔으며, 특히 이 프로젝트를 수주한 L사 는 미국 지사 직원이 수시로 무역관을 방문했다. 또 S사와는 서울시 교통카드 시스템이 전수된 보고타 시내 대중교통 OPS 서비스 계약을 체결하여 다양한 지원을 펼쳤다. 2009년 6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콜롬비아의 프로젝트 핵 339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40 심인사들로 구성된 벤치마킹 방한시찰단을 파견했다. KOTRA와 도공, L사, S사 등 5 개 기관과 관심기업의 예산 분담으로 이루어진 방한시찰단에는 보고타시 교통본부장 과 부본부장, 콜롬비아 국가기획처 조정관, 교통부 기획실장(후일 차관) 등과 주요 도 시 시장들이 참가하여 도로공사와 서울시, 안양시 등에 설치된 최첨단 ITS 시스템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당시에는 호주, 브라질, 스페인, 독일, 미국, 캐나다, 중국 등 여러 경쟁국 들이 보고타 ITS 프로젝트에 달려드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관심을 계속 붙들 어 두기 위해 11월에는 ITS+전자정부 로드쇼 를 보고타시 등 2개 도시에서 개최하 기도 했다. 2010년 2월에는 발주처인 보고타시 ITS프로젝트 담당과장을 바이코리아 행사에 방한 초청하여 보고타시 ITS 프로젝트를 발표토록 함으로써 우리 기업들의 관심을 재 차 환기시켰으며, 이때가 L사 등 우리 기업과의 네트워킹을 확실히 다져놓는 계기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도로공사 기술진이 콜롬비아를 방문하여 파스토 등 4개 중소도 시를 순회하며 수출입은행 자금으로 사업 타당성 검사(F/S)를 했고, 5월에는 4개 도시 F/S 결과보고서가 완성되었으며, 이를 검토한 콜롬비아 정부가 한국형 시스템의 경제 적 기술적 우월성에 대해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이 프로젝트는 콜롬비아 측이 정권 교체 후 EDCF 조건문제로 신청을 취소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마침내 2011년 7월, L사의 3억 달러 규모 보고타 교통시스템 프로젝트 수주로 우 리나라 첨단 교통카드 시스템이 중남미에 상륙한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이렇게 하여 한국형 AFC(요금자동징수) 및 BMS(버스운행관리시스템) 진출은 IT 서비스 부문에 서 사상 최대의 해외수출 사례가 되었다. 필자 권선흥은 2008년 10월부터 2011년 1월까지 보고타 무역관장을 역임했다. 필자는 이 프로젝트 수주 지원에 오랜 기간 몰입하다 무역관 기본사업이 상대적으로 부실해져 본사로부터 조기 소환 경고장까지 받기도 했지만, 이 건으로 2011 년 11월에는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 340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41 프로 골퍼 양용은 선수가 KOTRA 로고 모자를 쓴 사연 이런 일 저런 사업 김상묵 프로 골퍼 양용은 선수는 2009년 8월 타이거 우즈를 꺾고 메이저 대회인 미국 PGA 챔피언십에서 우승하였다. 스포츠 역 사를 통틀어 세 번째 큰 이변이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깜짝 우 승이었다. 양용은 선수는 2010년 1월 하와이에서 개최된 SBS 챔피언 십에서 또 한 번 세인을 놀라게 했다. 이유는 메인 스폰서를 나타 내는 모자 정면에 KOTRA 로고를 새기고 나타났기 때문. 양용은 선수처럼 PGA 우승 경력이 있는 선수의 메인 스폰서를 하려면 1 년에 200만 달러 이상을 줘야 했다. 언론의 관심은 물론이었고 KOTRA 직원들까지도 경위를 확인하는 전화가 빗발쳤다. KOTRA 로고 모자를 쓴 양용은 선수 필자가 브랜드사업팀장을 맡고 있던 2009년 12월 30일 늦 은 오후, 당시 양용은 선수를 지배주주로 하여 설립을 추진하고 있던 스포츠 매니지먼 트사, Y. E. Sports Dream & Future 의 필기룡 고문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 다. 양용은 선수가 2010년 1월 중에 출전하는 두 번의 PGA 시합에서 KOTRA 로고 모 자와 캐디백 사용을 희망하는데 허용해 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 같은 요청은 즉시 박기식 전략사업본부장을 거쳐 조환익 사장에게 보고되었고, 재가가 떨어졌다. 막상 허용했으나 2010년 1월 첫째 주에 하와이에서 열릴 SBS 챔피언십의 프로암 경기가 열리기 전날(5일)까지 KOTRA 로고 모자와 캐디백을 제작해서 공수하는 일이 문제였다. 연말인데다 3일까지 휴일이었고, 특히 캐디백은 3~4일 걸리는 작업이라 한 시도 지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31일 늦게까지 전국을 수소문한 끝에 부산의 한 업체 를 찾아냈고, 이로부터 KOTRA 브랜드가 세계 골프 팬들에게까지 알려지는 첫발이 내디뎌졌다. 양 선수가 2009년 12월 17일 KOTRA를 방문해서 KOTRA 홍보대사를 자임하고 341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42 나서게된 그 단초는 골프와 전혀 상관없는 컨설팅업계와의 만찬자리에서 우연히 시작 되었다. 12월 10일, 그러니까 양 선수가 공사를 방문하기 일주일 전에 박기식 본부장과 필자, 그리고 컨설팅업체들은 송년 만찬 모임을 했는데, 이 자리에서 필자가 취리히 무 역관에 근무할 때부터 안면이 있던 필 매니지먼트 컨설팅사의 필기룡 사장이 양용은 선수가 골프아카데미를 중국에 개설하는 방안을 꺼냈다. 당시 양용은 선수 측은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까지를 고려하여 스포츠 매니지먼트 사(Y. E. Sports) 설립을 추진하고 있었다. KOTRA는 서비스 산업의 국제화를 지원하 는 사업을 추진 중에 있었기 때문에 양측 실무진들은 아카데미 사업 추진시의 지원 가 능성에 대해 논의했다. 한편, 양용은 선수 측도 말 못할 고민이 있었다. 2009년 말로 끝난 Taylormade사 와의 메인 스폰서 계약 갱신이 순조롭지 않았던 것이다. 양용은 선수측은 메이저대회 를 제패한 선수 위상에 맞는 대우를 희망하였으나 불발에 그쳐 2010년 시즌을 메인 스 폰서 없이 맞아야 할 처지였다. 따라서 TV 노출이 많은 스포츠 성격상 고민에 고민을 했다고 한다. 로고가 없는 모자를 쓸까, 아니면 태극기를 새길까. 문득 KOTRA를 방문했을 때 저 개인의 이미지가 국가에 도움이 된다면 큰 영광 이다 고 했던 얘기와 KOTRA가 우리나라 중소기업들의 수출을 도와주는 기관이므 로 KOTRA를 홍보하면 국가는 물론 우리 중소기업에도 힘이 될 것이다 는 생각에서 이 같은 결심을 하게 됐다고 한다. 이로써 KOTRA는 모자와 캐디백을 만들어 주는 것 외에 계약금 한 푼 없이 세계적인 골퍼의 메인 스폰서가 되었다. KOTRA는 Y.E. Sports사에서 골프아카데미 사업을 추진할 경우 서비스업의 해외 진출과 한류 콘텐츠 확산 차원에서 적극 지원할 태세를 갖추었으나, 아쉽게도 구체적인 요청은 없었다. 양용은 선수를 활용한 KOTRA 브랜드 홍보는 당초 한 달 정도로 예상되었으나, 2011년 4월 KB 국민은행과 메인 스폰서 계약을 체결할 때까지 1년 4개월 동안 계속되 었다. 이 기간 중에 양용은 선수는 KOTRA 로고 모자와 캐디백을 사용하면서 PGA 투 어 29차례, 유러피언 투어 9차례 등 38차례의 세계 정상급대회에 출전하였다. 2010년 4 월 중국에서 개최된 Volvo China Open 우승, 그리고 2011년 3월 미국 전역에 공중파 로 생중계된 Honda Classic 준우승 등의 좋은 성적을 기록하면서 KOTRA 브랜드를 널리 홍보하였다. KOTRA는 보증브랜드 사업 홍보를 위하여 영어 버전으로 양용은 선수 광고를 시행하는 등 보증브랜드 선정기업의 수출증대를 위한 스타 마케팅을 실시하였다. 또한 2010년 8월, PGA 챔피언십 우승자 만찬(Champion s Dinner)행사를 한식으로 하고 342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43 LA무역관 가족들과 함께한 양용은 선수 싶다는 양용은 선수의 지원 요청에 따라 농림식품부 등의 협조를 받아 한식을 소개하 는 이벤트를 개최해 국가브랜드 제고의 기회로도 활용하였다. 양용은 선수가 KOTRA 모자를 쓰고 경기에 출전한 것이 어느 정도 홍보효과를 거두었는지, 그것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직접적으로 홍보효과를 측정하 기는 어렵다. 골프 채널과 공중파에서 양용은 선수가 KOTRA 모자를 쓰고 플레이하 는 것을 본 사람수와, 어느 정도 기억하는가에 따라 그 효과는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메인 스폰서 계약금과 우승 등에 따른 보너스 등을 감안할 경우 최소한 300만 달러(34억 원)는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양용은 선수는 2011년 4월 KB 국민은행과 스폰서 계약을 하는 언론 인터뷰에서 1년 4개월 동안의 KOTRA와의 인연을 이렇게 실토하였다. 잠깐이었지만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로고를 달았다. 결국 시간이 지 나고 보니까 코트라 덕으로 또 다른 인연이 만들어졌다. 선수가 메인스폰서가 없다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내가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소중한 시간이었 다. 아픈 만큼 더욱 성숙해졌다. 필자 김상묵은 2009년 8월부터 2012년 3월까지 브랜드사업팀장과 디자인브랜드팀장을 역임했다. 343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44 KOTRA의 여풍 04 KOTRA 여직원의 현주소 345 대의를 위해 소의를 희생하는 곳 350 정보와 자료의 산실에서 오늘도 꾸는 꿈 353 L/C 관리 여성 OB의 비즈니스 성공 스토리 356

345 KOTRA 여직원의 현주소 KOTRA의 여풍 최재천 이화여자대학교 석좌교수는 여성 상위 시대 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썼다. 앞으로 산업구조가 점점 더 정보산업화하고 근력을 이용해야 하는 일들이 줄 어들면 여성들의 경제력이 몰라보게 향상될 것이다. 사랑의 해부학 이라는 책으로 우리 독자들에게도 친숙한 미국 럿거스 대학의 인류학자 헬렌 피셔는 최근 제1의 성 이라는 제목의 새 책을 내놓았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 이 이제는 당당히 제 1의 성 으로 거듭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이 책에서 피셔는 여성의 사회 진출이 급 속하게 늘 것이며 경제권도 상당 부분 여성들이 거머쥘 것이라고 예측한다. (최재천,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효형출판, 2001년, 쪽) 이 글에 설명을 붙이면 프랑스의 여성 실존주의 작가 시몬 드 보부아르( )는 제2의 성 (1949)에서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라 고 주장했었는데, 피셔(1945 )는 제1의 성 (1999)에서 여자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 니라 태어나는 것이다 라고 보부아르의 50년 전의 주장을 뒤집은 것이다. 달리 설명 하면 보부아르는 여자는 제1의 성 인 남자에 의해서 규정되는 제2의 성 이라고 말했 는데, 피셔는 여자는 남자에 의해서 규정되는 제2의 성 이 아니라 남자를 규정하는 제1의 성 이라고 반박한 것이다. 어쩌면 지난 50년 동안 그만큼 달라진 여자의 위상 을 반영했다는 이야기도 되겠다. 우리 주변에서 남존여비( 男 尊 女 卑 ), 남성 우월주의, 남아 선호사상이라는 용어 들이 슬며시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 여성 차별금지, 여권( 女 權 ) 신장, 여성 상위시 대, 남녀평등, 양성평등(Gender equality), 여풍( 女 風 ), 남성 역차별 같은 용어들이 스스럼없이 둥지를 튼 것만 봐도 남녀 간의 권력이동(?)을 실감한다. 1969년에 제작 된 신상옥 감독의 영화 <여성상위시대>가 여풍( 女 風 ) 도래의 예고편인 듯 하지만, 이 제 여성 비하 발언을 했다가는 몰매 맞는 세상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황혼 이혼 에 나도 족( 族 ) 이니 젖은 낙엽 이니 하는 말을 들으면 남자들은 괜히 어깨가 움츠러들 것이다. 각종 시험에서 여자가 수석을 차지하는 것은 다반사가 되었고, 심지어 여성금 지구역으로 일컬어졌던 육 해 공군 사관학교에서까지 여자 생도들이 남자 생도들 345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46 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상이 되었지 않은가. 지난 50년 동안 KOTRA에서도 더디기는 했지만 여성 직원들의 상당한 위상 변 화가 있어왔다. 1962년 창립 당시 여성 입사자는 모두 7명이었는데 대부분이 비서직 이었다. 최장기 근무자는 4년 반을 근무한 김신자 OB였으며, 나머지 분들은 1년을 채우지 못했다. KOTRA에서 겪게 되는 고된 업무 때문이라기보다는 결혼하면 일반 적으로 직장을 그만두던 한국적 사회상이 반영된 것이었다. 그리고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KOTRA에서 근무하는 여성 직원은 타자수, 비서, 전화 교환원이 대다수를 차지했고, 통상직 여직원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설사 여성이 공채를 통해 통상직으로 입사했더라도 해외 무역관 근무는 거의 상 상조차 할 수 없었고, 결혼하면 회사를 떠났다. 50년사 팀에서 추적한 바에 의하면 1970년 공채 입사한 박영자 OB가 통상직 1번 타자이지 않았을까 추정하지만 재원이 었던 박 선배님은 수출정보센터에 잠시 근무하다가 서병국 OB와 결혼하면서 사직하 였고, 1980년에 입사한 심우진 OB는 약 4년 반 동안 근무하다가 결혼하면서 사표를 냈다. 당시는 남자 통상직 직원이라 하더라도 해외에서 활동하려면 운전기사 역할을 포함해 팔방미인(multi-player)이 되어야 했고, 그러면서도 외교관에 준하는 임무를 수행한다는 구실로 미혼인 경우 해외 발령조차 내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여성이야 오죽 했겠는가. 이렇게 가뭄에 콩나듯 하던 여성 통상직의 입사가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유희숙(1985.4), 김선화(1988.1), 정은주(1989.1), 최조환(1990.1) 등에 의해 문이 조 금씩 열리더니 1995년에는 고상영, 김명희, 안영주 세 명이 입사했고, 이제는 여성이 KOTRA 여성 직원 근무 현황 여성 직원 수( 일 기준) 구분 상세구분 통상직 총 입사자수 (신입사원) 여성 입사자 수 직급 이상 별정직 총 직원 수 총 여성 직원 수 총 직원 수 총 여성 직원 수 전체 직원 수 전체 전체 여성 직원 수 전 직원 중 여성의 비율(%) 직급 이상 : 1, 2, 3, 4, 5직급(통상직, 전문직, 정원 외 관리), 임원 포함 별정직 : 계약직 갑 을, 상용직, 기능직 포함 34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47 여성 직원 수 변화 추이 신입사원 중 여성의 비율(%) 별정직 중 여성의 비율3(%) 직급 이상 직원 중 여성의 비율(%) 전 직원 중 여성의 비율4(%) 통상직 입사자의 거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가 되었다.(표 참조) 그리고 여성 무역관장 까지 배출하게 되었는데 여성 무역관장으로 해외에 파견된 첫 사례는 2005년 멕시코 몬테레이(Monterrey)에 무역관을 개설했던 한연희였다. KOTRA 창설 50주년을 맞 이한 2012년 6월 현재 여성 해외무역관장은 고상영 난징 무역관장, 최조한 마닐라 무 역관장, 유희숙 키예프 무역관장, 김명희 소피아 무역관장 등 4명이다. 그런가 하면 2004년 KOTRA의 여성 부장 제1호가 된 김선화는 서울신문에 커리어 우먼 으로 대 서특필되었을 만큼 KOTRA 여성 직원사에 한 획을 긋기도 했다. 한편 KOTRA 전체 여성 직원 수가 매년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특히 각 분야에 서 활약하고 있는 5직급 이상 여성 직원의 수가 꾸준히 늘고 있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 다. 그래프에서 볼 수 있듯이 전 직원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과 5직급 이상 직원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꾸준한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는 데 비해, 상용직과 계약직 및 기능직 같은 별정직의 여성 수는 거의 변동이 없다. 과거에는 여성 직원 대부분이 별정직으로 근무했었다. 2004년 8월 직무전문가제도가 도입되었고 2012년 2월 1일 현재 총 13명의 직무 전문가 중 3명이 여성인데 그중 1명이 통상직(김윤희)이다. 나머 지 2명은 상용직(정도숙, 송연)으로 10년 넘게 한 분야에서 근무하고 있다. 통상직의 경우 KOTRA 특성상 해외와 국내 간 순환근무가 거의 의무적이다 보니 10년 넘게 한 분야 또는 한 국가에서 근무한 직원은 드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상용직의 경우 다수 의 여성 직원이 오랜 근무 경험을 토대로 전문가로서의 자리를 굳건히 다지고 있는데, 한 분야에서 10년 이상 근무한 여성 전문가는 다음 표와 같다. 이와 같이 여성 직원이 증가하고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냄에 따라 이를 뒷받침 할 제도들이 최근 잇달아 도입되기도 하였다. 국내 장기근무제, 동반 휴직제, 탄력 근 347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48 각 분야의 여성 전문가 기준 성명 근무기간 분야 성명 근무기간 분야 홍기령 20년 전산(서버, MIS, 홈페이지 등) 이은숙 21년 해외홍보 및 광고(홍보자료 제작), 투자홍보관 운영 김정옥 16년 전시 디자인(홍보, 그래픽) 정도숙 27년 중국 조사, 해외투자 및 투자유치(중국지역) 이재은 24년 해외전시, 옵션식 해외마케팅 박선희 15년 직원 급여 및 조직도 관리 송 연 25년 해외전시회 한국관 선정 및 운영 윤경희 21년 감사 업무 지원 김숙영 17년 견본류 면세통관 보증 및 바이어 입 출국 지원 추경애 21년 정보 교열 교정 김도은 16년 재무 지출(출납) 이선영 20년 무역자료실, 정기간행물, 디지털자료센터 관리 금향숙 28년 문서 수 발신 기문향 20년 해외마케팅(전시, 시장개척단) 조선옥 28년 견본류 면세통관 보증 및 바이어 입 출국 지원 이은주 16년 무역자료실, 해외업체 검색 조미순 28년 제안제도(개인 업적평가) 손경미 24년 감사업무 지원 윤소영 17년 직원 보건, 건강(의무실) 조민경 20년 간행물 및 국가정보 판매 유미경 16년 직원 교육 이동숙 23년 교육연수, 글로벌 마케팅 김진국 23년 조직망 지원 및 직원 복리후생 황정숙 17년 IT관련 컨소시엄, 정순이 26년 해외전문전시회, 무역사절단 해외마케팅 (자동차 부품산업, 애니메이션 게임) 무제, 해외 부부 근무제, 단시간 근로제 등이 그것이다. 2008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국내 장기근무제는 국내 정원의 20% 내에서 신청을 받아 본사에서 계속 근무하게 함으로써 전문성을 높이는 제도이다.(지역조사, 기획, 경영전략, 고객상담 등 업무 연속성이 시급한 분야부터 우선 배치) 그 배경에는 해외 순환근무와 관련하여, 남성의 이직률은 매우 낮은 데 반해 출산과 육아 문제로 가족 과 떨어져 지내는 경우가 많은 여성들은 이직률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이 여성 직원의 수는 매년 증가 추세이며, 신입사원 공채에서도 근래 몇 년간 입사자 의 절반이 여성인데 시대 흐름에 어울리지 않는 제도 때문에 애써 양성한 인재들이 해 외 주재 근무를 피해 퇴사하는 등 인재유출이 있어 이를 방지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 2009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동반 휴직제는 외국에서 근무, 유학 또는 연수하는 배 우자를 동반하게 된 경우 휴직이 가능하도록 한 제도이다. 맞벌이 부부의 증가는 현실 이다. 글로벌시대에 접어들어 학업이나 근무로 해외에 주재하는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시대에 맞는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직원 근무환경을 개선하고 인재유출을 방지하기 위 해 도입되었다. 2009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탄력 근무제란 임산부와 장애우에게 출퇴 근 시간의 자율선택권을 부여함으로써(±1시간 이내) 편의성 및 근무 만족도를 높이는 34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49 데 있다. 금요일 전 직원을 대상으로 한 탄력 근무제 역시 가정과 직장의 양립을 도모하 자는 것이다. 2010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해외 부부 근무제는 해당 언어 직군(전공언 어)이 같은 경우, 해외무역관 부부 근무가 가능하도록 한 제도이다. 최근 여성 입사자 의 증가와 더불어 사내결혼이 크게 늘고 있는데 해외 근무지가 다르면 가정생활에 애 로가 적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육아문제 등으로 여성 직원이 퇴사하는 경우가 빈번하여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2011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단시간 근로제 는 직원의 일과 가정이 양립할 수 있도록 주 40시간 근무제보다 짧은 시간의 근무방식 을 도입한 것이다.(1일 최소 3시간, 1주당 15시간 이상 35시간 이하 근무 원칙)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의 큰 고민 중의 하나가 출산율 저하이다. 여러 가지 원인 중 하나는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확대되면서 육아와 사회활동을 양립하기 어렵기 때 문에 출산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많은 여성들이 직장보다 출산과 육아를 선택했었다. 하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보면 우수한 여성인력을 십분 활용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경제를 활성화하는데 필요하다는 인식이고 개인적으로는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가정 경제를 꾸려나가기 어렵고, 여성 스스로도 자기발전의 기회를 포기 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여성 직원만을 위한 제도에 그저 좋아할 수 없는 것 또한 현실이다. 역차 별의 문제가 존재하고, 이러한 제도상의 혜택을 누리는 여성 직원은 직장에서 눈총 받 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똑똑한(?) 여성들은 첫 아이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 도 추가적인 자녀 출산계획을 접게 된다. 육아는 여성들만의 책임이 아니다. 낳기만 하면 국가에서 키워주겠다 는 정부의 의지와는 달리, 육아는 여성 직원들의 문제 라 는 공사 남성 직원들의 인식은 이율배반적인 면이 있다. 실제로 공사에서 지금까지 육 아휴직을 낸 남성 직원은 2명뿐이며 동반 휴직제, 탄력 근무제 등의 제도도 대부분 여 성 직원들이 활용하고 있다. 사기업과 비교할 때 KOTRA의 여성 직원에 대한 인식과 배려는 상당히 높은 수 준이다. 하지만 깨지 못하는 관념과(물론 KOTRA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겠지만) 잘못된 접근 방법은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시기상의 문 제일 뿐 머지않아 이러한 틀을 깨고 남, 여성 직원이 공동으로 육아와 직장의 양립을 고민하고 함께 관련 제도를 누릴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은 남아 있다. 10년, 20년 전에 비해 제도가 많이 개선되었으며, 정부가 주축이 되어 여러 방안을 제시하고 있고, KOTRA의 경영층이 큰 관심을 보이는 등 보다 더 나은 환경이 조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부터 잇달아 도입되고 있는 여러 제도들이 이를 증명한다. 349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50 대의를 위해 소의를 희생하는 곳 KOTRA의 여풍 김선화 KOTRA라는 조직은 언제 알게 되었는지? 그리고 KOTRA에 입사하게 된 배경은? 전공이 무역학(재학 중 학과명이 국제경제학과로 바뀌었다)이다보니 수업과정 에서 자연스레 KOTRA라는 기관의 업무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지원을 하게 된 계기는, KOTRA가 취업 시즌에 학교 강의실에서 개최한 입사설명회로, 당시 설명 을 나온 두 사람의 월등한 입담 때문이었다. 내가 다니는 학교 출신의 KOTRA 직원 중 모로코 카사블랑카에 근무한 3직급과 입사 1년차인 신입사원이 함께 나와 KOTRA 입사설명회를 진행했는데, 특히 3직급 고참 직원이 카사블랑카 무역관에서 의 경험을 험프리 보가트와 잉그리드 버그만이 출연한 영화 카사블랑카 를 인용해가 면서 설명하는데 소위 뿅 갔다. 대학 졸업을 앞둔 한창 감수성이 풍부한 여대생에게 안개 낀 공항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쌍발기 에 태워 보내는 험프리 보가트 이야기를 하면 어쩌란 말인가! 이 두 남녀 주인공처럼 코트라맨의 생활이라는 것이 대의(국가 경제의 젖줄인 수출)를 위해 소의(개인의 편안한 생활)를 희생하는 것이라는데! 실제로 그 당시만해도 우리는 대한민국 수출의 선봉장, KOTRA 외에는 할 수 있는 곳이 없다 라는 자긍심이 사내외에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입 사 후 정말 오랫동안 자긍심을 가져왔었다. KOTRA 입사 당시 여성 통상직 직원은 거의 없었을 텐데 적응하는데 문제가 없었는지? 물론 에피소드는 많았다. 주로 황당한 것들이 많았지. 1988년 1월 입사 당시 신 입사원 20명 중 여직원은 나를 포함하여 총 4명이었다. 우리보다 3년 먼저 입사한 여 직원 선배가 한 명 근무하고 있었다. 여직원이 갑자기 4명이나 입사할 수 있었던 이유 는, 당시 KOTRA와 대만 무역진흥기관이 공동행사를 개최했는데 행사에 참가한 사 장님께서 다수의 여직원이 이미 대만 무역진흥기관에 근무하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 고 간부직도 제법 있었던 데다가 여러 부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 350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51 고 한국의 남녀차별을 개탄하면서 KOTRA도 신입사원을 채용할 때 여직원을 채용 하라고 지시하였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이유야 어쨌든 간만에 무려 4명의 꽃다운 신 입 여직원의 입사는 회사 내 주목을 끌었던 것이 사실이다. 당연히 회사 내 문화도 여 직원에 대한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기억에 남는 것은 두 가지로, 입사 초기부터 여직원들은 해외근무를 시키지 않는 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신입사원 교육 때나 근무기간 중에도 공공연하게 여직원들은 국내 근무만 해야 한다고 교육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장님의 지시를 받은 실 무진들은 우리 KOTRA의 구조적 과제인 정기적인 해외근무로 인한 사내 전문성 부 족 을 여직원 채용 및 국내 근무제로 해결하려고 했던 것 같다. 물론 회사의 인사 규정 상으로는 남녀를 불문하고 해외 근무를 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왜 해외근무를 하면 안 되는지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해외발령 시기가 되기 전까지 굳이 이를 이슈화를 할 필요는 없겠다는 것이 우리 신입 여직원들의 생각이었다. 또 하나의 기억은, 바지 이다. 입사 후 1년이 되어갈 무렵의 어느날 아침, 바람을 통해 건너건너 들려온 이야기. 다른 부서에 근무하는 우리 4명 중 한 명의 여직원이 치 마가 아닌 바지를 입고 출근했다는 이야기였다. OO씨가 오늘 아침 바지를 입고 출 근했대 라는 이야기가 수선스럽게 복도에서 오갈 때 나는 마음속으로 그게 뭐 어때 서요? 라고 물었다. 다행(?)히도 정장바지를 살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부득이 학교 다닐 때 입었던 치마만 계속 입을 수밖에 없었던 나는 조신한 여직원 부류에 속해 있 었다. 나는 아직도 그날 그 동료 여직원의 바지가 무엇이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최 소한 청바지를 입고 오지는 않았으리라 확신한다. KOTRA에 입사한 후 후회한 적이 있는가? 없었던 것 같다. 에피소드야 에피소드인 것이고, 기본적으로 회사 일이 재미있었 다. 입사 후 대부분 조사부서에서 근무를 했었고 해외 무역관에서도 마지막 1년 반을 제외하고는 조사관련 업무를 맡았었는데, 항상 내가 맡은 지역의 시장과 무역관련 제 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러한 변화가 우리 수출기업에 어 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내는 것이 재미있었다. 시장과 제도는 계속해서 변하니까 안 이하게 있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우리의 경쟁자는 박사학위를 가진 외부 연구소들이 었다. 수출 선봉장인 우리의 KOTRA가 질 수는 없었다. 수년 전부터는 마케팅 업무 를 맡고 있는데, 이 역시 조사업무와 다른 매력이 있다. 일은 재미있게 해야 한다. 남 자든 여자든 이 점은 다른 게 없다. 351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52 해외근무가 여직원에게는 많이 어려운 도전이 되고 있다. 지금까지 해외근무를 세 번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어려운 점은 없었나? 남녀를 불문하고 KOTRA에 입사한다는 것은 해외근무를 기본적으로 수용한다 는 것이다. 물론 중간에 결혼이나 다른 이유로 상황이 바뀔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상 황 변화 시 해외근무를 부담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내 변화된 인생에 어떻게 더 잘 이용 할 수 있나 하는 방향으로 생각해야 한다. 도전이 아니라 기회로 보면 좀 더 쉬워질 수 있다. 얼마 전에는 미래전략팀장을 맡았고, 지금은 FTA사업팀장을 맡고 있다. 2006년 모 일간지(서울신문)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칼라 힐스가 아니라 그냥 김선화라고 불 러주세요 라고 답변했는데 지금 맡고 있는 일은 통상전문가로 한보 더 다가 선 것 같다. 어떤 사람을 자신의 롤 모델로 삼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롤 모델은 초기 에나 필요하다고 본다. 자신의 길을 정한 이후는 나의 길을 만들어가야 한다. 입사 후 상당기간 GATT나 WTO 관련 통상업무를 하다 보니 언론에서 한때 미국 무역대표 부의 통상담당자였던 칼라 힐스를 원용한 것 같은데, 처음부터 맘에 들지는 않았다. 나는 다른 그 누구보다는 내가 되고 싶다. 굳이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면 코트라맨이 라고 불리는 것이 좋다. KOTRA 창립 50주년을 맞아 선후배 또는 동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여풍이라는 토픽이니까 여직원을 대상으로 우선 말한다면, 자녀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감정 즉, 엄마인 자신의 감정과 자녀의 감정을 혼돈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특 히 해외근무와 관련하여 우리 애가 외로워하지 않을까, 힘들어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을 하게 되는데, 그 걱정 속에 자녀만의 감정이 아닌,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을 이입시 켜서는 안 된다. 이 부분은 엄마로서가 아니라 제3자로서 냉정하게 판단하고 결정해 야 한다. 두 번째는 남직원에게 하고 싶은 말인데, 남성의 시각과 가치관으로 여자 동료의 행동을 판단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오죽하면 남자는 화성인, 여자는 금성인 이라고 까지 했겠는가. 여자의 리더십과 행동은 남자의 그것과 다르다. 있는 그대로 차이를, 판단하지 말고 받아들여 주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는 우리 모두 KOTRA를 좋아했으면 좋겠다. KOTRA를 단순히 직 장이라기보다는 나 자신의 한 부분으로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 바로 오늘 KOTRA 를 갑자기 그만두더라도 우리는 KOTRA를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내가 행복해지는 길이고 나 스스로가 자랑스러운 길이다. 352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53 정보와 자료의 산실에서 오늘도 꾸는 꿈 KOTRA의 여풍 조현선 KOTRA 창립 50주년 기념 사사에 글을 올릴 수 있는 연차가 되다니, 문득 20년 이란 세월이 확! 실감납니다. KOTRA와의 인연은 1990년 대학교 4학년 때 무역자료 실로 실습을 나오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선배님들도 모두 좋으시고, 근무 환경도 깔끔 하고, 집에서도 가깝고. 아! 여기서 근무하면 괜찮겠다 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침 퇴 직하는 분이 계시다기에 입사방법 물어보고, 인사팀에 서류 제출하고 약 10개월 정도 이제나 저제나 채용 일정을 확인하다가 1991년 6월 1일 드디어 첫 출근을 하게 되었 습니다. 당시 무역자료실엔 김용백 실장님, 민경환 선생님, 유희숙 과장님, 그리고 김 향숙, 이미영, 안연신, 김미승, 이종님, 현정원, 박혜원 선배님과 성시만 씨 등 사람들 이 정말 많았습니다. 지금 인원의 세 배였으니까요. 박혜원 선배를 사수로 업무 배우고, 자료 파악하고, 사람들 익히고, 하루하루가 바쁘지만 재미있게 보냈던 기억이 납니다. 입사하고 아직 누가누군지 파악도 안 될 때 창립 30주년 기념행사에서 안내 요원한다고 한복 입고 뛰어 다녔고, 고전기타부 동아 리 활동하면서 12층 강당에서 연주회도 하고, 포천 베어스타운으로 MT도 다녀오고, 매주 볼링부 활동하면서 무역협회 등과 친선대회도 하고, 스키부 활동도 하고 꽤나 바쁜 신입사원 시절을 보냈습니다. 1993년도에는 얼떨결에 여직원회 회장도 했었는 데, 이때 상품개발부로부터 중소기업 일류화상품 개발 지원을 위해 면세로 수입했던 물품을 지원받아 바자회를 열어 수익금으로 불우이웃도 돕고 여직원회 기금을 확보 했던 것도 즐거운 추억입니다. 좋은 직장에서 좋은 분들과 인연이 되어 정신없이 배우며 3년, 6년 지내다보니 문득 저의 위치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사서직을 찾아 입사할 때에는 직제에 대해선 잘 모르다가 업무를 하면서 직제 구분도 알게 되고 회사 규정도 보게 되면서 전문직에 대한 바람이 소록소록 생겼습니다. 하지만, 선배님들께 물어봐도 긍정적인 답변을 듣 기는 어려웠습니다. 층층이 계신 선배님들도 그냥 다니고 계신데 어찌 하는 마음에 전 353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54 문직에 대한 바람은 그냥 꿈 으로 묻히고 일상은 흘러갔습니다. 그러던 차에 1997년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당시 부장님과 과장님이 동시에 해외발령을 받으신 것입니 다. 그러면 무역자료실에는 상용직만 남게 되는데 말입니다. 이때 운 좋게도 담당 처 장이셨던 최윤홍 선배님께서는 다른 통상직을 배치시켜줄지, 전공분야이니 업무를 맡아서 해보겠는지 선택할 수 있게 해주셨고, 저는 업무를 받았습니다. 새로 신입사원이 된 듯 일을 하나하나 배워나갔습니다. 1999년 우리 공사가 드 디어 사옥을 가지게 되었을 때는 무역자료실도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을 보냈습니다. 무역협회에서 서가를 기증받아 수리해도 책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매일 무너져 고 생했는데 이제 우리 건물에 제대로 된 가구를 들여놓을 수 있게 되었으니 기쁨이 오죽 했겠습니까. 새집 살림 장만에 1년 후배인 이선영 씨와 저는 몸이 열 개라도 된 듯 부 산하게 움직였습니다. 다른 도서관 다니면서 벤치마킹 대상은 모두 사진 찍어 자료를 수집하고, 카탈로그를 뒤지다 마음에 차는 것이 없으면 직접 디자인하고, 백마로, 파 주로 서가 및 가구 생산 공장에 수도 없이 따라 다니며 생산 공정 체크하고, 이사가 임 박해서는 염곡동 사옥 건립 현장에서 백묵 들고 서가 배치도를 시멘트 바닥에 그려가 며 공을 들였습니다. 몇 개월의 준비를 거쳐 마지막 한 달 동안 6만여 점의 자료 이사 작업을 마치고 1999년 6월 7일 다시 문을 열었을 때는 정말 뭐라 말할 수 없이 뿌듯하 고 또 뿌듯한 마음이었습니다. 이즈음 하드웨어와 함께 소프트웨어도 보강하였습니 다. WIN 기반 자료관리시스템을 도입했고, CD자료를 무역관과 공유할 수 있는 CD-NET 시스템을 도입했고, 우리 공사 발간물을 홈페이지에서 파일로 서비스하기 시작하며 무역자료실은 한걸음 더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이러는 와중에 뜻밖에도 저는 꿈 이 이루어졌습니다. 어쩐 일인지 다이어리를 앞 뒤로 뒤져봐도 전문직이 된 배경을 상세하게 적어놓질 않았습니다만, 제 기억에 규정 상 자격요건을 갖춘 상용직을 전문직으로 전환한다 는 노사합의 사항으로 제가 전문 직이 된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도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얼떨결에 전문직이 되고 10년은 금방 지나갔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맞게 업무 및 서비스는 아날로그방식과 디 지털화가 적절하게 병행되고 있고, 무역자료실의 대외 위상도 차곡차곡 높아져 벤치 마킹하겠다고 찾아오는 곳도 꾸준하고, 고정 예산은 아니지만 예산도 늘어 많은 자료 를 임직원에게 서비스할 수 있게 되었어요. 어찌 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아야하는데 나의 마음 한 구석에는 불안감이 상주합니다. 10년 후, 20년 후 무역자료실에 대한 걱 정 때문입니다. 20년 세월을 지내고보니 남는 것 중 절반 이상을 사람이 차지하고 있는 것 같습 354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55 KOTRA 자료실 니다. 무역자료실의 지금이 있기까지는 앞서 계셨던 선배님들의 성실한 노력이 있었 고 물려받아 잘 이어나갈 수 있는 저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물려줄 후배가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과거 20년간 인원이 1/3로 줄어드는 과 정에는 부득이 퇴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꼭 두 명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발생했었습 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뒤를 이어갈 후배를 양성하지 못하고 있는 요즘, 저와 1년 후배인 이선영 씨는 가끔 우리도 같이 그만두게 되면 어쩌냐? 하는 말을 합니다. 혹 자는 걱정도 팔자라고 별 걱정 다한다고 합니다만 애정을 갖고 공들였던 세월만큼 앞 으로 꾸준한 발전에 대한 욕구도 큰 것 같습니다. 무역자료실의 주된 역할은 우리 공사 발간물을 포함하여 무역 투자 관련 자 료를 수집 파악 관리하여 최선의 방법으로 이용자에게 적절하게 제공하는 것입니 다. 두루뭉술하게 들리시죠? 이런 일이 조직 내에서 올바른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기 본자세가 명확한 정체성이 확립되어야 합니다. 모호한 정체성은 직업적 존재감을 약 화시키고 이는 역할 축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조직 내에서 독립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서비스하기 위해서는 이용 대상과 동등한 입장에서 요구하고 제공 할 수 있어야 하기에 사서직의 전문직화가 절실합니다. 또 압니까? 50년 후에는 KOTRA 부설 무역도서관이 되어있을지. 하루 빨리 공석에 후배가 들어와서 우리 공 사의 새로운 50년을 무역자료실도 함께 꿈 꾸길 희망해봅니다. 355 Ⅱ.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56 L/C 관리 여성 OB의 비즈니스 성공 스토리 KOTRA의 여풍 조대형 OB 1967년 2월 KOTRA에 입사한 심금숙 OB는 여직원이 가뭄에 콩 나듯 귀한 시절 에 당시로써는 인기 부서의 하나인 조사부에서 업무를 시작했다. 1970년 초 KOTRA 에 신설된 기구인 수출정보센터 와 주요 수출품목들의 수출전략 수립과 수출 증대방 안 창출 임무를 띤 연구부 가 설립되면서 연구부 업무지원을 위해 그녀는 조사부에서 차출되었다. 연구부는 이낙선 상공부장관의 특별 지시로 연구담당 전체 직원에 상공 부장관 위촉 연구원 이라는 별도의 직함을 명함에 표시, 사용하도록 할 만큼 각광받 는 부서였다. 그녀의 담당업무는 당시로써는 무역업체 대표들이 자나 깨나 학수고대 하는 애인 이상의 것, 즉 신용장(L/C) 관리와 수출실적 집계 관련 업무였다. 신용장은 지금도 수출업계에서 시대의 변화와는 관계없이 환영받는 귀한 서류이 지만 귀금속이나 현찰 가치와 대등했을 뿐만 아니라 야간 통행금지 시간(자정부터 새 벽 4시까지)이 있던 당시 통금시간 위반으로 경찰조사를 받을 경우 수출신용장을 제 시하면서 수출품을 밤새 생산 출하해야 하는 공장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 하면 경찰이 순찰차로 집까지 모셔다 줄 정도의 위세를 대변했다. 업계에서는 물론이 고 정부에서도 수출의 선행지표인 신용장의 내도액은 두세 달 후의 국가 전체의 수출 실적과 직결되기 때문에 신용장 관리업무는 유능한 직원이 아니면 맡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신용장에는 바이어 정보와 수출 대상국, 수출가격 같이 중요한 정보가 모두 들어 있기 때문에 관리에 남다른 주의는 물론 함부로 공개할 수 없는 대외비 서류라서 담당직원의 신뢰성은 가장 중시되는 덕목이었다. 신용장은 품목별 연구 담당자들에게는 일차적으로 파악해야 하는 기본 필수정 보였다. 따라서 그녀는 바쁜 일상 업무에다 연구부 직원에 대한 지원업무 범위(공개 측면)를 정하는 한편 신용장을 엄격히 관리(공개 남용의 제한 측면)해야 하는 상반된 업무 특성의 갈등 속에서도 효과적인 조율로 업무를 원활하게 지원하였다. 심금숙 OB는 사려 깊은 덕목과 출중한 업무능력에 남다른 후덕한 용모까지 갖 35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57 추어 40여 명의 품목별 연구부 소속 남자 직원들의 사랑을 독차지한 홍일점이었고, 미혼 직원들 간에는 보이지 않는 경쟁이 가열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내부 의 막강한 경쟁자들을 모두 물리치고 외부의 한 무명용사와 백년가약을 맺기 위해 1973년 5월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KOTRA 6년 근무를 접고 그녀 자신의 가정 설계를 위한 낭보는 연구부 품목 담당자들에겐 비보가 아닐 수 없었다. 세월은 흐르고 연구부 직원들의 먹먹했던 지난 날도 시간에 파묻혀 모든 걸 잊게 해 준 한참 뒤인 2002년, 한 일 월드컵축구 4강 신화 이후 서울 광화문과 종로 일대 가 젊은이들의 활기를 분출하는 공간으로 상징되면서 도심 속 만남의 휴식공간이 자 리잡아가기 시작할 무렵 심금숙 OB 역시 젊은이들과 함께 호흡하는 사업을 시작하 기로 계획을 세웠다. 일종의 하우스 맥주집인 영국 스타일의 펍(pub)을 2008년 초 종 로 한복판에 창업(그 이전에는 카페 형태로 출발)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좌우에 2호점과 3호점을 계속 확대해 나갔다. 이렇게 성공을 거둔 데는 건 전성과 서울의 정통성을 고수한 점 외에도, 사명을 산타페 로 하여 미국풍을 가미하 고 이를 부각시키는 실내 장식에 과감하게 투자하여 역동적인 젊은층 고객을 매료시 킨 것이 적중한 것 같다. 그녀는 단순히 수입 병맥주를 받아 판매만 하는 영업 스타일에서 그간의 경험을 살려 비용을 투입하여 자체의 독특한 맥주를 제조하는 복합스타일의 영업으로 확대 발전시켜 나갔다. 2012년에 들어서는 코엑스 조선호텔이 사정에 의해 매각하는 맥주 주조설비를 인수하여 보다 더 큰 맥주 제조공장(약 40평 규모)을 일산에 신설하고 있 는 중이며 2012년 상반기에 오픈 예정이다. 이를 계기로 그녀는 우리나라만의 특성이 있는 과일이나 곡류 성분을 활용한 자체 개발의 맥주 생산까지도 계획하고 있다. 그 녀의 사업장에서는 독특한 명칭의 맥주인 헬레스, 허니브라운과 둔켈, 바이젠 등 젊은 이들의 취향을 이끌어나가고 있는 것이 장기이고 특징이다. 심금숙 OB의 사업장이 계속 늘어나면서 개발 신제품이 출시될 때는 최근 한류 붐을 타고 5,000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이룬 막걸리의 뒤를 따르는 한국산 별난 토종 맥주가 생산, 조만간 소비자에게 소개될 것으로 기대된다. 심금숙 OB는 주산과 부기 검정고시에도 합격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데다 지난 1960~1970년대에 KOTRA에서 6년 동안 내공을 쌓은 바 있기 때문에 그 꿈이 이루어지리라 확신한다. 357 Ⅰ.무역관 이야기

358 지상 좌담회

359 Ⅲ 01 원로 OB 및 전 현직이사 좌담회 02 경영자문위원회

360 지상 좌담회 지난 50년 역사의 길목에서 KOTRA의 설립과 발전, 개혁을 주도했던 선배님들과 현직 이사님들을 대상으로 좌담회 를 가졌다. 이번 좌담회는 3차로 나누어 1차는 초기 원로님들을 초청해 1960년대와 1970년대 KOTRA 설립 과정과 초기 사업 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2차는 1980년대와 1990년대 KOTRA 성장기와 변혁기를 이끌었던 선배님들 을 대상으로 가졌다. 3차 좌담회는 현직 이사님들과 최근에 KOTRA를 떠난 이사님들이 한 자리에 모여 2000년대 개 혁과 사업 다각화 시대에서의 경험과 의견을 나누었다. 이와 함께 대학 교수 및 연구소 연구원 등 외부 전문가들을 초청 해 2차례에 걸쳐 경영자문회의를 개최하였다. 1차 경영자문회의는 무역 2조 달러 시대를 향한 한국형 무역성장 모델 과 KOTRA 라는 주제로, 2차 경영자문회의는 다문화 사회현황과 국가 기업의 역할, 서비스산업의 국제화 전략 등 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는데, 이 내용을 좌담회 형태로 구성해 보았다. 원로 OB 및 전현직 이사 좌담회 1차 좌담회 361 2차 좌담회 375 1차 경영자문위원회 401 3차 좌담회 386 2차 경영자문위원회 411

361 1차 좌담회 1960년대와 1970년대의 KOTRA 설립과 초기 사업 일시와 장소 2012년 3월 8일 10:30~15:00 서울교육문화회관 참석자(재직 기간) 장무환 (1962년 6월~1982년 1월) 이은직 (1962년 6월~1991년 5월) 김인준 (1964년 7월~1977년 5월) 이창렬 (1964년 6월~1995년 8월) 김만율 (1967년 3월~1998년 8월) 김성준 (1970년 2월~2001년 12월) 김인식 (1975년 3월~2005년 5월) 사회 사회(김인식) 올해는 KOTRA가 설립된 지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동안의 변화는 한 마디로 상전벽해나 천지개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릿고개의 가난한 시절에서 OECD 강국, 수출대국, IT 초강국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우리나라 발전에 근간이 된 중심축에 우리 KOTRA가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오늘은 초창기 원로 선배님들을 모시고 1960년대와 1970년대를 중심으로 당시 상황과 경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선배님들의 경험은 후배들에게 초심을 잃지 않게 하고 KOTRA 발전,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에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먼저 KOTRA가 창립된 1960년대의 시대적 상황과 창사에 관련된 이야기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361 Ⅲ. 지상 좌담회

362 장무환 1961년 5 16 혁명 이후 한국은행에서 근무하던 저는 상공부로 파견근무를 나 가게 되었습니다. 상공부에서 근무를 시작하면서 저는 10월경 외화획득을 위해 미군 군납을 검토해보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저는 군납 통계와 수출가능 품목 등을 조 사하고 업계와의 간담회도 개최했지만, 외화획득이 목적이라면 군납보다는 수출을 촉진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지원하기 위해 일본 JETRO나 영국 의 BETRO를 본뜬 무역진흥공사 설립을 제안하였습니다. 제가 수출의 중요성에 대해 눈을 뜬 것은 1957년 약 2개월 동안 수출상품 발굴과 자료 수집을 위해 동남아 몇 나라를 조사하면서부터였습니다. 당시 저는 일본 오키나 와, 필리핀, 홍콩, 베트남, 태국, 싱가포르 등지를 돌아다녔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이 들 국가들은 우리보다 잘살고 있었습니다. 저는 자원이 없는 우리나라가 잘살기 위해 서는 수출밖에 길이 없다고 생각했으며, 현장 조사를 토대로 저는 수출5개년계획을 작성하여 상공부 장관에게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어떻든 무역진흥공사를 설립하자는 저의 제안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고, 저는 JETRO를 방문 조사해보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이에 1961년 12월 15일 2주간의 일정으로 갑작스럽게 출장을 갔습니다. 도쿄 JETRO 본사에서 각 부서를 돌면서 설 립 동기, 업무현황, 해외조직망 등에 대해 문의하고 자료를 수집했으며, 이후 오사카 지역의 상공회의소와 JETRO 지부, 수출기업 등을 방문 조사하고 12월 31일 귀국했 습니다. 출장결과 보고서는 정래혁( 丁 來 赫 ) 당시 상공부 장관에게 보고되었고, 조속히 무역진흥공사 설립을 구체화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이후 상공부 차관 박충훈( 朴 忠 勳 )을 위원장으로 하고 재무부 차관과 외 장무환 무부 차관, 한국은행 수석부총재, 한국무역 협회 상근부회장을 위원으로 하는 공사 설 립추진위원회가 1962년 4월에 구성되었으 며, 저는 여기서 간사를 맡았습니다. 간사인 저는 거의 혼자 실무를 담당하면서 대한무 역투자공사법 시안을 만들었고, 설립추진위 원회 1차 회의에 이 시안을 상정했습니다. 이후 몇 차례 서면 결의를 통해 이 시안은 큰 수정 없이 확정되어 상공부 장관의 결재를 받았고, 혁명정부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승 인도 받아 확정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실제 설립추진위원회가 개최된 것은 한 번에 불 362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63 과했습니다. 당시 최고회의에서 박태준 상공위원은 KOTRA 설립법안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었으며, 군복 차림의 정래혁 장관도 점잖은 분이셨습니다. 초대 사장으로는 설립추진위원회에 참여했던 김기엽( 金 基 燁 ) 한국무역협회 상 근부회장이 내정되었고, 이사들도 최고회의 추천으로 일부 군 출신이 포함되어 내정 되었습니다. 저는 KOTRA 설립에 실무를 담당하기도 했고 정래혁 장관의 권유도 있 어서 KOTRA로 자리를 옮겼고, 김기엽 사장 내정자와 설립을 위한 구체적인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설립추진위원회가 4월에 구성되고 6월에 공사설립이 공식 발표된 것 에서 알 수 있듯이 KOTRA 설립은 매우 급속도로 추진되었습니다. 저는 재무부를 찾아가 500만 원으로 기억되는 창업비 지원 공문을 그 자리에서 받았는데, 이 창업비는 사무실 물색과 집기 구매 등에 사용하였습니다. 설립 자본금 에 있어서는 취약한 국가재정에도 지인 공무원을 통해 전액은 아니었지만 1차 불입금 1억 원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사옥은 적당한 곳이 없어서 우선 중구 저동 의 한일은행 별관 3층 건물로 정했고, 추후 필요시 이전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KOTRA 직원들은 어떻게 선발했습니까? 장무환 사장과 임원들은 설립 이전에 내정되었고, 간부직원들도 설립 이전에 면접을 통해 선발하였는데, 무역협회와 상공회의소, 상공부 출신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JETRO 달리 KOTRA의 경우는 정부 관리가 많이 내려오지는 않았고, 초기 간부직 원들은 상당히 쟁쟁한 분들도 많았습니다. 이은직 저는 1962년 5월 군 제대를 하고 일자리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신문을 보니 대한무역진흥공사라는 국영기업체가 직원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 었습니다. 그러나 당시만 하더라도 저는 무 이은직 역이 무엇인지 공사가 무엇인지도 잘 몰라 서 주위 선배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랬 더니 다들 전망이 매우 좋고 해외여행도 가 능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해외여 행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입사시험은 6월 초 경동고등학교에서 치러졌는데, 가보니 은행과 대기업 등에서 다니던 친구들도 많 363 Ⅲ. 지상 좌담회

364 이 보였습니다. 약 350명 정도가 응시했고 45명이 합격하였습니다. 소위 공채 1기생 들이었는데, 이들은 6월 21일 정래혁 상공장관, 박태준 상공위원, 김기엽 사장님이 참 석한 현판식을 지켜보았습니다. 초창기 업무에 대해서 생각나는 것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인준 저는 1964년 입사해서 해외선전과에 배치발령을 받았습니다. 당시 과장은 KOTRA라는 영문 명칭을 만든 것으로 알려진 임광원이라는 분이셨습니다. 해외선전 과는 무역진흥 이라는 출판물 간행이 주요 업무였는데, 과장님은 어느 날 다른 한 사 람과 함께 무역진흥 홍보 포스터를 붙이고 김인준 오라는 지시를 했습니다. 저는 장교출신이 고 나이도 많은 편이었는데, 이럴 수가 있나 싶었습니다. 낮에는 도저히 나갈 수가 없었 습니다. 매일 한일은행 지하 다방에서 캄캄 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와서 저는 풀칠 을 하고 저의 파트너는 재빨리 포스터를 붙 였습니다. 윗분들은 다음날 포스터가 붙어 있나 확인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경찰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이기도 했는데, 함부로 공공시설에 포스터를 붙이면 안 된다는 것이 었습니다. 저는 겁도 없이 나라를 위한 일인데 왜 허가를 받아야 하느냐고 되물었고, 그 경찰은 다 허가를 받게 되어 있으니 알아보고 오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직 위를 막론하고 잡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당시는 무역 이라는 말이 밀수를 떠올리기도 해서 반드시 긍정적인 어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이창렬 저는 1964년 입사해서 조사부에 배치를 받았습니다. 제가 조사부에 배치받을 수 있었던 것은 논문 점수가 좋았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당시 KOTRA 입사시험 과목 은 영어와 논문, 경제학 3가지였습니다. 어떻든 조사부에 가 보니 쟁쟁한 선배님들이 있었고, 시장개척 이전에 시장조사의 기초를 다지는 역할들을 하셨습니다. 당시 국제 무역 환경을 보면 전후 출범한 GATT 체제는 선진국 위주로 되어 있다는 한계를 넘어 서기 위해 1964년 12월 개도국의 무역과 경제발전을 위한 UN 상설기구로 UNCTAD(UN무역개발회의)가 발족했습니다. UNCTAD와 ITC(국제무역센터)는 364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65 International Marketing Research의 이론과 실제'라는 자료를 내놓았는데, 우리 는 이를 신속히 입수해서 번역했고, 시장조사 길잡이로 활용했습니다. 당시 조사부 하면 한국은행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KOTRA 조사부를 정보원으로 한 기사가 연일 신문에 게재되어 큰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이은직 공채 1기 시험에 재미있는 문제가 나왔는데, 그것은 여러 상품 중 현재 우리가 수출하고 있는 상품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예시에 유일한 공산품으로 합판이 나와 있었는데, 연간수출이 5,400만 달러에 불과했던 당시에 합판이 수출되고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KOTRA가 설립된 1962년 우리나라의 수출은 5,400만 달러였고, 1억 달러를 넘어선 것은 1964년이었습니다. 올해 수출목표 6,094억 달러가 달성된다면 1964년에 비해 무려 6,100배에 이릅니다. 1964년에 1억 달러를 수출하기 위해 1년이 걸렸다면 이제는 1억 달러를 수출하는 데 1시간 20분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나라 수출이 급속히 늘어날 수 있었던 것은 수출입국의 국가적인 기치 아래 정책적 의지나 국민들의 염원이 대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1960년대 당시 수출증진을 위한 코트라맨의 열정이나 정책적 의지, 국민들의 관심 등에 대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만율 1960년대 초는 무역규모도 작고 산업구조도 매우 취약했습니다. 대부분 미국 의 원조에 의존하는 소비재 수입이 많았고 수출은 적어서 무역불균형이 심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수출만이 살길이고 자립경제의 원동력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으며, 1965년부터는 직접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주재하였습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끝나갈 무렵부터 수출에 대한 정부의 의지는 더욱 강해 졌고, 1967년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공산품 수출산업을 육 성했으며, 이 시기에 KOTRA는 조직망을 크게 확대하였고 많은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창렬 1967년으로 기억됩니다. 박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에서 농산품뿐만 아니라 공 산품도 수출되어야 한다는 소위 농공병진( 農 工 竝 進 ) 방안이 논의되었습니다. 관련 정부부처에서는 정책자료 작성에 부심했고, 상공부를 비롯해서 농림부 등 여러 부처 는 우리 KOTRA에 자료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KOTRA는 세계무역이 공산품 365 Ⅲ. 지상 좌담회

366 위주로 팽창하고 있기 때문에 수출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공산품 개발과 육성이 필요 하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공문을 요청한 정부부처에 발송했습니다. 문제는 한 달 뒤 개최된 국무회의에서 각 부처가 발표한 내용들이 거의 비슷했다는 것입니다. 김만율 남대문 사옥 위에는 1억 달러 수출을 기념하는 탑과 함께 매일매일의 수출실적 을 표시하는 전광판이 부착되어 있었습니다. 오가는 버스 안에서나 행인들이 쉽게 보 도록 해서 전 국민적인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이었죠. 1960년대 초반에는 박 대통령이 수시로 KOTRA를 방문하셨고, 수출확대회의를 주재하시면서 KOTRA가 준비한 수 출유망상품 전시회도 직접 관람하시곤 했습니다. 이은직 1964년 KOTRA의 국내사업부에는 포장계가 있었습니다. 포장은 상품가치를 높이고 수출경쟁력을 높이는 기초가 된다는 취지에서 포장계에서는 정기적으로 포장 전시회를 개최했습니다. 그런데 한일은행 건물에서 첫 번째 포장전시회가 열리고 있 을 때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불시에 방문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교대로 전시장 에 나가 있던 박용국 씨는 느닷없이 방문한 박 대통령을 처음에는 몰라보다가 놀라서 본사에 전화를 하기도 했습니다. 김인준 수출의 날 행사도 국민들의 수출에 관심을 높이기 위해서 매년 개최한 행사입 니다. 1988년 무역의 날 로 개칭되면서 무역협회로 이관되기 이전에는 우리 KOTRA 가 행사를 주관했습니다. 저는 1964년 12월 5일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개 최된 제1회 행사 때 밤을 새워가며 전시장 상품을 진열하고 포스터를 붙였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전시품을 찾는 데도 무척이나 어려웠습니다. 업체를 찾아가 합판조각을 구하고, 광산물은 유리병에 넣었고, 김을 가져다 놓았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나라 수출은 급속도로 증가했습니다. 그러나 초창기에는 수출할 만한 상품이 별로 없었습니다.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쌀과 김을 수출하기도 했고, 한때는 공중화장실에서 소변을 모으기도 했으며, 은행잎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당시 수출상품과 수출상품 개발을 위한 노력을 말씀해 주십시오. 36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67 장무환 1960년대 초반 우리나라의 주된 수출상품은 중석이었습니다. 그밖에도 수산 물, 광석, 무연탄 등도 수출되었고, 지금은 생각하기 어려운 돼지털( 豚 毛 )이나 누에똥 도 수출상품으로 개발되었습니다. 이후 가발이나 합판과 같은 공산품도 점차 수출에 서 큰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김성준 1970년 수출정보센터 가 설립되었습니다. 50여 명의 직원들은 당시 이낙선 상 공부 장관과 KOTRA 사장, 주요 간부들 앞에서 매달 최소한 한 가지씩 수출진흥방 안에 대해 발표를 해야 했습니다. 이때 쥐 가죽이니 은행잎, 누에똥 등 기발한 수출상 품들이 제시되기도 했습니다. 발표한 수출증진 방안이 현실성이 없어 보일 때는 이낙 선 장관으로부터 그 자리에서 혼쭐도 나고 무안도 당했습니다. 이은직 1971년에 미국 론진사가 최초로 전자손목시계를 개발했습니다. 당시 수출정보 센터 운영부장 겸 연구부장 정준두 씨는 타임지를 통해 이 사실을 알고 뉴욕 무역관을 통해 이 손목시계를 사오도록 했습니다. 당시 가격이 무려 800달러였던 것으로 기억됩 니다. 이를 이낙선 장관에게 보고했고, 이낙선 장관은 즉시 상공부 담당과장들에게 지 시해서 우리나라도 개발에 착수토록 했습니다. 그것은 삼성전자나 대우전자, LG전자 의 전자제품 개발에 하나의 자극제가 되었다고 봅니다. 한때 이 전자손목시계는 우리 의 주요 수출상품이었으며, 선진국으로부터 수입규제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다음은 초창기의 전시회, 박람회 사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보겠습니다. KOTRA는 해외 전시회, 박람회 사업을 통해 단순한 상품 촉진뿐만 아니라 우리 문화를 해외에 알림으로써 미약하지만 한류의 불꽃을 처음 지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은직 1966년경인데, 그 이전에는 전시회, 박람회라고 하면 종합박람회만 생각했습 니다. 정준두 씨가 특정 전문품목의 수출증진을 위해서는 종합박람회보다는 전문전 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미국에서 당시 유행하던 것이 소위 Trade Show 였는데, 예를 들면 전자제품 트레이드 쇼, 섬유제품 트레이드 쇼 등이었습니다. KOTRA는 전 문전 참가 및 개최의 필요성을 상공부에 건의했고, 미국의 스웨터 트레이드 쇼 참가를 시작으로 각종 해외 전문전에 참가하기 시작했습니다. 367 Ⅲ. 지상 좌담회

368 김인준 1971년 10월 오스트리아 그라츠 국제무역박람회에 참가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대금연주자 이생강 씨를 한국관에 초청해서 하루에 한 번 대금연주를 했는데, 현 지인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빈 대나무 통에서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오는 것을 무척이나 신기하게 생각했었던 것 같습니다. 1975년 자카르타 국제박람회에서 는 김덕수 사물놀이패와 무용단이 와서 공연을 가졌습니다. 공연시간인 오후 2시경 이 되면 다른 관은 텅 빌 정도로 한국관에 사람들이 몰려와 기쁘기는 했지만, 저의 집 쌀독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아마 한류의 시초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창렬 이창렬 KOTRA 국내 견직물 산업의 경쟁력 을 높이기 위해 1968년 미국 백악관 실내장 식 디자이너인 틸레트(Tillett)씨를 초청하 여 견직물 디자인을 크게 개선하고 국내는 물론 뉴욕과 파리에서 전시회를 개최했습니 다. 1978년 제가 오클랜드 무역관에 근무할 때는 본사의 지원을 받지 않고 현지 이충성 대사님의 후원으로 도예작가 최순영 서울대 교수의 작품을 전시한 코리아 아트쇼 를 개최해서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습니다. 이 후 포니 600대를 뉴질랜드에 수출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은 KOTRA 사옥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보겠습니다. 1962년 6월 중구 저동 한일은행 별관에서 문을 열었다가 그해 10월 중구 충무로의 한일빌딩으로 사옥을 이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후 1964년 8월 남대문 사옥으로 이전했고, 1973년 8월부터 시작된 회현동 시절과 1988년 8월부터 시작된 삼성동 시절은 무역센터에 세 들어 살다가 1999년 6월 마침내 염곡동에 자체 사옥을 마련하여 이전했습니다. 이러한 사옥 이전과 자체 사옥 마련과 관련한 이야기를 부탁합니다. 장무환 중구 저동의 한일은행 별관 사옥에서는 4개월 정도밖에 있지 않았고, 충무로의 한일빌딩 사옥에서도 2년도 채 있지 않았습니다. 이후 남대문 옆의 상공장려관이었던 건물을 우리 사옥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강용옥 당시 수석이사가 상공부와 교섭하는 등 이 분의 노력이 컸습니다. 이후 현재 대한상공회의소 자리에 있던 남대문 사옥을 36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69 너무 쉽게 양보해버렸습니다. 사실 양보하지 않았어야 했으며, 아니면 최소한 다른 부지라도 확보했어야 했습니다. 김인준 당시 저는 KOTRA를 떠나 대한상공회의소 전무로 있을 때였는데, 공교롭게 KOTRA로부터 남대문 사옥을 구입하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당시 서석준 상공부장관이 저와 정수창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장성환 KOTRA 사장 등 몇 사람을 장관실로 모이게 하고, 숭례문 보호를 위한 공간 확보 차원에서 대한상공회의소가 KOTRA 사옥을 구매하도록 종용했습니다. 그러나 대한상공회의소 측에서는 구매한 다고 하더라도 90%가 통행로로 이용되고 10%만이 사용 가능한 상황이어서 구매를 꺼리고 있었으며, 대한상의 상임위원회도 승인을 해주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결국 상 공부장관의 권유도 있고 해서 대한상공회의소는 KOTRA 사옥을 22억 원에 구입하 긴 했으나, 저는 10% 대지밖에 사용할 수 없는 건물을 친정 KOTRA로부터 너무 비 싸게 구입했다는 비난을 받아 쫓겨날 뻔했습니다. 이후 KOTRA 측에서는 사옥을 위 한 대토 구입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김성준 염곡동 사옥 마련의 일등공신이라면 이선기 사장을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 해에는 부지 구입을 위한 예산신청이 거절당했으나, 이선기 사장은 과거 인맥을 총동 원하여 다음 해에 가까스로 대지구입 예산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부지 예산확보 문제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당신을 접촉하라 하시고 어려우면 쪽지라도 전달 하라면서 열정적인 노력을 보이셨습니다. 이를 발판으로 사옥 건립이 진행되었으나, 안타깝게도 도중에 건축회사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일부 직원들이 송사에까지 휘말 렸으며 재정적인 피해도 입었습니다. 다음은 본사와 해외 무역관 간의 통신문제에 대해 이야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1960년대, 1970년대만 하더라도 통신수단이 여의치 않아서 현재 KOTRA 직원들은 이해하기도 힘든 여러 에피소드가 있을 것입니다. 김인준 케이블을 이용하기는 했지만 너무 비싸서 텔렉스를 주로 이용했고, 전화는 감 히 이용할 생각을 못했습니다. 369 Ⅲ. 지상 좌담회

370 김성준 텔렉스를 사용하다 보면 특히 월말이나 분기말에는 좀처럼 연결이 되지 않아 애 를 많이 먹었습니다. 낮에는 연결되지 않는 게 일반적이고 운이 좋아야 밤늦게 연결되 었습니다. 제가 이스탄불 무역관에 근무할 때 일입니다. 어렵게 분기말 보고서 등을 본사에 텔렉스로 보내놓고 보니 새벽 1시 반이 넘었습니다. 이스탄불은 좀처럼 눈이 오지 않는데, 그날 따라 유난히 눈이 많이 와서 집으로 돌아오다 차가 미끄러져 혼난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현지 종합상사들도 우리에게 아쉰소리를 하며 무역관 텔렉 스를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이은직 1969년 1월 저는 자카르타 무역관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당시는 텔렉스도 없 었던 때라서 본사와의 교신 수단으로 한국 총영사관의 외교 파우치를 이용했습니다. 그러던 중 총영사관 직원들과 함께 입수한 중요한 정보를 제가 먼저 정리해서 매주 수 요일 발송되던 파우치 편으로 본사에 보고했습니다. 총영사관 측은 미처 이 정보를 정리하지 못했는데, 제가 먼저 본사에 보고한 것이죠. 그 정보는 여러 신문에 대서특 필되었습니다. 그 이후 저는 담당 참사관으로부터 꾸지람을 들었고 인도네시아 생활 이 참 어려워졌습니다. 텔렉스나 파우치 말고도 해외시장 정보를 신속히 입수하기 위해 AP-DJ를 들여 놓은 것도 다른 기관에서는 없었던 일이 아닌가 합니다. AP-DJ 정보를 선별하고 밤새 정리해서 청와대를 포함한 정부기관과 종합상사에게 제공한 것도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다음으로 코트라맨의 사건사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수많은 해외조직망 때문에 코트라맨들은 수시로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50년 역사상 아직까지 비행기 사고를 당한 사람이 없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큰 복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지만 세간을 흔들었던 안타까운 사건들도 없지 않았으며, 아프리카와 같은 오지에서 고생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김성준 1977년 저의 전임 이스탄불 관장이었던 Y 관장이 불미스럽게 미국으로 망명한 것은 우리에게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밝힐 수 없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이스탄불 무역관은 감사를 받고 일시 폐쇄되기도 했습니다. 370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71 이창렬 1979년 파리 무역관의 부관장이었던 H 사건은 가장 불미스러운 일 중의 하나 일 것입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H 부관장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상단체와 연결되어 이용당했다고 합니다. KOTRA 후배들은 이념적으로 건강하고 확고한 신 념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라고스 무역관에 근무했던 장용식 씨는 현지 에서 얻은 풍토병으로 결국 유명을 달리하기도 했습니다. 해외 무역관에 근무하면서 수행했던 보람된 활동이나 사업 수행 과정에서 겪었던 말 못할 애환 등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은직 1969년 1월 자카르타 무역관 근무를 시작하면서부터 저는 수출가능 품목을 눈 여겨 찾아보았지만 적당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본사에 근무하면서 부산에 출 장, 몇몇 어망업체를 방문한 것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어망의 대인도네시아 수출 가능 성을 조사했는데, 국영무역을 빼놓고는 화교들이 상권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데다가 일본산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거래조건이 우리 업체에게 익숙한 L/C 가 아니라 외상거래였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어망업체는 남양어망, 경일 어망, 대한어망 등 3개사였습니다. 그러나 2년 뒤에는 한국산이 일본산을 제치고 인 도네시아 시장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여기서 저는 큰 몫을 담당했다고 자부하고 있습 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어망을 수출했던 국가는 인도네시아였습니다. 김만율 김만율 저는 1974년 마닐라 무역관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1인 무역관이었 으나 수시로 세일즈맨단이 파견되어 왔습니 다. 당시 필리핀 시장도 80% 정도를 화교들 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세일즈맨단 으로 파견될 기업들이 보내온 샘플을 들고 마닐라의 차이나타운의 화교상사들은 열흘 동안 100여 개사를 방문하면서 사전상담을 하기도 했습니다. 40도 가까이 되는 나라에서 땀깨나 흘렸습니다.우리나라의 수출상 품이 점차 경공업제품에서 중공업제품으로 전환되면서 제가 마닐라에 근무한 1974~1978년 사이 우리나라의 대필리핀 수출은 900만 달러에서 8,500만 달러로 늘 어났습니다. 371 Ⅲ. 지상 좌담회

372 또 하나 기억에 남는 사업이라면 제가 1991~1994년 시카고 무역관장으로 재임하 던 때 미국에서는 처음으로 시카고 한국상품 상설전시장(KMC : Korea Merchandise Center)을 개설한 것입니다. KMC 사업은 민간업체가 주도하는 현지 한국상품 전시 장을 만들어 시장개척을 한다는 것으로서, 저는 현지 교포무역인이었던 홍순완 사장 을 설득하여 1992년 10월 김철수 사장님과 시카고 총영사, 일리노이주 부지사 등 현 지 유력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시카고 KMC 개소식을 가졌습니다. 서울시와 경기 도, 경북도 등 지방정부와 본사의 지원으로 총 42개사가 참여하였는데, 이 전시장은 10년 가까이 운영되었습니다. 김성준 김성준 이스탄불 무역관 근무시절입니다. 아 시다시피 지중해의 사이프러스는 터키령과 그리스령으로 나누어져 있는 분쟁지역입니 다. 저는 터키령 사이프러스에서 시장 조사 겸 상담회 개최를 위한 사업을 추진했습니 다. 일정이 잡히자 터키령 사이프러스의 어 느 일간지에 한국의 상무관이 와서 상담회 를 갖게 되었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그런데 이 기사를 그리스 외교부에서 보고 한국 대사관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취소하지 않으 면 자기네들은 북한을 불러오겠다고 해서 외교문제로 번졌습니다. 서울 본사에서도 전화가 왔습니다. 행사 2~3일을 앞두고 이런 일이 일어나자 참 난감했습니다. 상담 회를 취소하면 터키 측에서 이의를 제기할 것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고 육지책으로 생각한 것이 출발 당일 갑자기 아프다고 침대에 누워버린 것입니다. 이렇 듯 KOTRA 관장들은 때로는 외교문제가 될 수 있는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신중히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마무리 단계로 KOTRA는 여기 참석하신 OB 선배님들께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장무환 저는 KOTRA 창설에 일조를 했다는 점에서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 다. 또한 이러한 KOTRA는 저에게 평생직장이었고, KOTRA를 통해 국가발전에 기 여했다고 생각합니다. 372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73 이은직 KOTRA는 저의 청춘과 인생을 바칠 수 있었던 광장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힘든 일도 없지 않았고 월급도 많지 않았지만, 인도네시아와 스위스, 독일, 일본 등지 에서 좋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준 큰 광장이었습니다. 특히 KOTRA를 떠나놓고 보니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임을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김인준 저는 만 13년 동안 KOTRA에서 일했습니다. 그동안 독일과 비엔나, 자카르타, 타이페이 등에 근무하면서 국제적인 시야를 넓힐 수 있었고, 이를 배경으로 저는 1991 년 UNIDO에 지원하여 연봉 12만 달러로 2년 동안 UN 배지를 달고 일할 수 있었습 니다. 후배들도 KOTRA를 발판 삼아 더 큰 물로 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창렬 KOTRA는 저에게 제2의 어머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스물아홉에 결혼했으 니 어머니가 29년 동안 키워주셨다고 치고, KOTRA에서 31년 동안 녹을 먹었으니 KOTRA가 어머니처럼 나를 키워주고 지켜주었던 제2의 어머니라고 말할 수 있지 않 겠습니까? 김만율 KOTRA는 저에게 있어 꿈과 희망이었고, KOTRA는 우리 경제를 이끈 견인차 라고 자부합니다. KOTRA에는 존경하는 선배님들도 많고 자랑스런 후배들도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남기거나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만율 KOTRA는 시대상황을 미리 예견, 예측하여 미리 한 발 앞서가는 기관이 되었 으면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고객인 중소기업들에게 좀 더 개방적이고 종합적으 로 정보를 제공하여 세계시장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광장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후배들에게 무한한 열정을 가지고 도전해 보라는 조언을 하고 싶습니다. 이창렬 KOTRA 경영진에게 하고 싶은 말은 코트라맨들이 언젠가 KOTRA를 떠날 때 제2의 사회활동을 할 수 있도록 체계적인 지원제도를 마련하였으면 합니다. 예를 들 어 정년을 앞둔 직원들로 하여금 글로벌연수원 컨설팅 과정을 거치도록 하고 필요하 면 자격증도 주어서 퇴직 후 보다 활발히 수출자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 373 Ⅲ. 지상 좌담회

374 습니다. 그리고 후배들에게는 인문학적 소양을 함양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현재와 같은 산업융합 시대에서 필요한 창의력을 높이려면 풍부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어 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인준 요즘 신의 직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KOTRA도 그 중 하나로 받아들여지기 도 합니다. 신의 직장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가 많지만, 긍정적인 의미도 있다고 봅니다. KOTRA는 긍정적인 의미의 신의 직장이 되었으면 합니다. KOTRA만큼 해 외를 넓게 볼 수 있는 직장이 없습니다. 여러 차례의 해외근무를 통해 다양한 외국어 와 현지 문화를 익힐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인식 김성준 후배들은 대학에 다닐 때처럼 KOTRA 에서 일하는 동안 제2의 전공을 개발하길 바랍니다. 어느 특정 언어도 좋고, 특정 지역 이나 특정 산업도 좋습니다. 장무환 후배들 중에 많은 지역전문가가 배출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자면 같은 지역이나 국가에서 반복해서 근무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비록 근무와 생활여건이 나쁜 개도국이라 하더라도 인센티브와 같은 충분 한 보상책을 마련해서 동일지역 반복근무를 하게 한다면 글로벌 시대에 매우 경쟁력 있는 지역전문가가 나올 것입니다. 후배들이 겪을 도전은 선배들이 겪은 도전보다 적지 않을 것입니다. 보다 어려운 도전을 앞둔 후배들에게 선배들의 열정과 노력이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선배들은 후배들이 KOTRA를 우리나라와 세계경제에 이바지하는 기관으로 만들어가는 것을 지켜볼 것입니다. 장시간 감사합니다. 374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75 2차 좌담회 1980년대와 1990년대의 KOTRA 성장과 변혁 일시와 장소 2012년 3월 9일 10:30~15:00 IKP 3층 브뤼셀실 참석자(재직 기간) 박찬혁 (1966년 4월~1995년 6월) 김용집 (1968년 12월~1998년 12월) 김두환 (1970년 2월~2002년 3월) 백창곤 (1971년 6월~2002년 3월) 이효수 (1975년 3월~2005년 12월) 심창섭 (1975년 3월~2004년 1월) 김상관 (1975년 3월~2006년 2월)사회 사회(김상관) 영국의 역사학자였던 E.H. 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라고 했습니다. KOTRA는 이제 창립 50주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새로운 50년을 준비하고 100년을 향해 나가는 순간에 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선배님들을 모시고 좌담회를 갖게 되어 영광스럽습니다. 오늘 2차 좌담회에서는 1980년대와 1990년대 KOTRA의 성장과 변혁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해외생활을 하시면서 유익했거나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 주시기 바랍니다. 375 Ⅲ. 지상 좌담회

376 김두환 1998년 제가 도쿄 무역관에 근무할 때 일입니다. 당시는 IMF 외환위기를 벗어 나기 위해 몸부림치던 시기로서 정부는 외국인투자 유치정책에 역점을 두고 있었습 니다. 이런 상황에서 취임 후 처음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는 동안 투자유 치를 위한 대규모 행사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당초 이 행사는 산자부 사업으로 지 정되었지만, 저의 건의로 KOTRA가 주관하게 되었습니다. 부담도 적지 않은 행사였 지만, 일본 기업들의 대한투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크게 누그러뜨리는 계기가 되 었을 뿐만 아니라 KOTRA의 사업영역과 위상을 높이는 기회도 되었습니다. 특히 투 자유치 설명회 행사에서는 실제 한국에 투자하고 있는 외국기업들을 연사로 초청해 서 사례를 발표하게 함으로써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박찬혁 박찬혁 저는 1980년 10월 1일부로 타이베이 무역관에서 본사로 귀임했습니다. 당시는 귀 국자들이 무역관 근무에서 느낀 점과 건의사 항 등을 사장에게 보고토록 되어 있었습니 다. 저는 타이완 무역센터(World Trade Center)가 건립되는 것을 보고 우리나라도 유사한 센터가 필요하다는 것을 당시 윤자중 사장님에게 보고했습니다. 윤 사장님과 경영 진은 저의 제안에 관심을 보이고 타이베이에 조사단을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조사결과를 청와대에도 보고하게 되었고, 이것이 무역센터와 코엑스 건립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준비작업은 모두 KOTRA가 했으나, 예산은 대부분 무역협회에서 나왔 고 정부투자기관으로서 KOTRA가 무역센터와 코엑스를 운영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 다는 의견으로 결국 무역협회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김용집 저는 1972~1975년 동안 파리 무역관 관원으로 일했고, 1978~1981년 동안은 파리 무역관장으로 파견되어 파리에서만 6~7년을 근무했습니다. 당시 파리에서는 여성 기성복박람회(Prêt-à-porter)가 개최되고 있었는데, 정부의 섬유산업 고급화 정책에 따라 우리기업들도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디자이너라 하면 충무 로나 명동에서 여성용 옷가게를 운영하는 사람을 통칭했는데, 노라노 씨나 이신호 씨 와 같은 당시 유명한 디자이너들도 이 박람회에 참가했습니다. 그런데 이들 디자이너 들이 기성복박람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상용여권이 아닌 문화여권을 발급받아야 했 37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77 습니다. 그래서 저는 상공부 담당국장에게 건의해서 상용여권으로 이들 디자이너들 도 참가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 박람회 참가업체들은 박람회장이 아닌 호텔에서도 바이어들과 개별상담을 했기 때문에 옷을 호텔로 옮겨야 했습니다. 이 일을 도와주면 서 저는 크지 않은 키에 여성복 여러 벌을 머리서부터 둘러쓰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파리에서 근무하면서 거둔 또 하나 자랑거리라면 우리나라에도 세계미용인협회 지 사를 두도록 한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일본에 있는 이 협회 지사에 가서 참가신청을 해야 했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파리에 있는 세계미용인협회를 찾아 가 한국에도 지사를 두도록 설득하여 성사시킨 것입니다. 당시 한국 미용인협회 회장 은 그것을 계기로 김영삼 대통령 영부인의 전속 미용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코 트라맨은 수출의 첨병일 뿐만 아니라 민간 외교관으로서도 역할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백창곤 백창곤 1986년은 우리나라 무역사에서 처음 으로 흑자가 난 해였습니다. 이후 상공부는 당시 심해졌던 미국과의 통상마찰을 고려해 서 대미수출 촉진보다는 대미수입에 역점을 두라는 시책을 무역관 발령자들에게 주지시 켰습니다. 저는 1987년 10월 마이애미 무역 관으로 발령을 받았는데, 지금껏 수출진흥만 을 위해 뛰어왔는데, 수입촉진이라니 상당히 생소하기도 했습니다. 마침 마이애미 무역관 생활을 시작할 무렵 현지 우리나라 영사 관이 철수하게 되어 우리 무역관은 영사 업무까지 담당하게 되었고 현지 명예영사가 무역관 사무실에 상주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명예영사에게 우리나라의 대미 수입 촉진 정책과 당시 강조되었던 투자유치 업무를 설명하였는데, 이분은 큰 관심을 갖고 도움을 주었습니다. 수출지원 업무 일변도에서 수입촉진 업무와 투자유치 업무까지 해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심창섭 저는 1975년 입사해서 1979년에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무역관 개설요원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출국 전에 현지 우리나라 대사관에 협조공문을 보냈음에도 이들 은 저를 매우 싸늘하게 맞이했습니다. 여기는 무역관이 필요 없으니 돌아가라는 식이 었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무역관의 필요성을 알려주기 위해 밤샘을 하면서 각종 무 377 Ⅲ. 지상 좌담회

378 역, 경제정보를 정리했습니다. 그러던 중 우루과이 정부가 대폭적인 수입자유화 조치 를 발표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정리요약하고 우리나라에 미칠 영향까지 분석해서 대 사관에 보고했습니다. 대사관은 제 보고서를 외무부 본부에 보고했고, 이 내용이 우 리나라 일간지에도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점차 대사관은 저에게 우호 적으로 변해갔습니다. 그리고 저는 KOTRA의 저력을 보여주기 위해 자동차 수출 가 능성을 모색했습니다. 무역관 공용차도 현대 포니로 요청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우루과이는 우리보다 잘 사는 곳이어서 거리에는 벤츠나 BMW와 같은 차들이 즐비 했는데, 제가 앙증맞은 포니를 몰고 지나가면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곤 했습니다. 한 번은 신호위반을 해서 여자 경찰관에게 걸렸는데, 차가 예쁘다면서 그냥 보내주더군 요. 어떻든 저는 포니 자동차의 우루과이 수출 길을 여는데 기여했습니다. 이효수 저는 31년간 KOTRA에서 일했고 KINTEX 근무까지 합치면 34년 동안 KOTRA와 인연을 이어왔습니다. 해외는 파리 근무를 시작으로 선후진국에서 고루 근무했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발령지였던 카메룬의 두알라 근무시절 이야기를 하고 자 합니다. 제가 인사팀에서 만들었던 선후진국 순환근무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프 랑스어 점수를 가지고 있고 파리에서 첫 근무를 한 제가 카메룬을 피하기는 어려웠습 니다. 어떻든 저는 1984년 임지에 도착했으나, 카메룬의 생활환경은 열악했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것 중의 하나는 말라리아 약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말라리아는 예 방약이 없고 매주 한 번씩 치료제를 먹어야 했습니다. 약의 복용량은 몸무게에 따라서 달랐는데, 저는 한 알, 안사람은 반 알, 유치 이효수 원에 다녔던 두 아이들은 1/4알씩 월요일 아 침마다 어떤 의식을 치르듯 쓰디쓴 약을 먹 었습니다. 3년 동안 가족들에게 참 미안했습 니다. 그러나 다행히 저는 걸리지 않았지만, 몸이 약한 순서대로 아이들과 안사람이 말라 리아에 걸렸습니다. 당시만 해도 카메룬은 농산물을 수출하고 석유를 자급자족하고 수 출을 할 정도로 비교적 건실한 나라였고 구 매력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카메룬 상공회의소 회장을 단장으로 한 30여 명의 구매단을 구성해서 방한하기도 했고, 두알라에서 1,500km 떨어진 북쪽 오지를 소규 모 플랜트 프로젝트를 위해 비행기로 오갔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두알라에 37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79 부임하기 1년 전인 1983년에 취임했던 폴 비야 대통령이 아직까지도 장기집권하면서 그 아름답고 평화스러웠던 국가가 점차 피폐해지고 있는 것은 보는 것은 안타깝기도 합니다. 다음은 1980년대를 중심으로 선배님들께서 재임하시는 동안 힘들었지만 가장 보람되고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자랑스러운 업적이나 사업에 대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용집 1984년 경영평가 제도가 도입된 이래 처음으로 KOTRA가 1989년 수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때는 이선기 사장님이 계실 때인데, 이선기 사장님은 KOTRA를 위해 많은 일을 하신 사장님 중의 한 분으로 기억됩니다. 저는 당시 기획관리부장을 하면서 나름대로 많은 일을 했다고 자부하지만, 모든 것이 이선기 사장님 덕분이 아닌가 합 니다. IMF 외환위기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경제기획원 차관을 역임하셨던 이선기 사장님은 우리 KOTRA 예산이 1,000억을 넘어가던 시절에 우리 예산을 무리 없이 확 보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선기 사장님 김용집 의 가장 큰 공로라 하면 염곡동 사옥 부지를 확보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나중 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밖에도 베이징 과 모스크바에 무역관을 개설하면서 KOTRA 의 북방시장 개척의 정점을 찍었고, 직원들의 복리후생도 크게 증진시켜 부장급의 퇴직금 을 대폭 높였습니다. 또한 타자수 여직원과 교환원, 운전기사 등 기능직 직원들을 정규 직 일반직원으로 전환했을 뿐만 아니라 무역협회로부터 100억 원의 무역특계자금 지 원을 받아 국내외 사택을 구입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부사장제를 처음 도입한 것도 이선기 사장님 재임시절이었습니다. 원래 이선기 사장님은 부사장제에 대해 부정적이 었으나, 저의 끈질긴 노력으로 부사장제도가 처음 시행되었고 부사장의 대외접촉이 용이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KOTRA 사옥 건립과 관련해서 뒷이야기를 좀 더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예산절감을 위해서라도 우리 자체 사옥의 필요성은 오래 전부터 거론되어 왔습 니다. 우여곡절 속에 부지매입을 위한 40억 예산이 확보되었는데, 이 금액으로는 서울 379 Ⅲ. 지상 좌담회

380 에서 살 수 있는 땅이 없었습니다. 서울시를 통해 간신히 부지가 될 만한 곳을 알아보 니 염곡동의 체비지밖에 없었습니다. 그것도 연구단지로 설정되어서 우리는 무역정 보센터라는 명칭으로 매입에 성공했습니다. 사옥을 건립하는 과정도 순탄치만은 않 았습니다. 50% 선금을 지불했던 건설회사가 도중에 부도가 났으나, 보험연장이 되지 않은 것이 원인이 되어 책임자와 실무자들이 수십억의 엄청난 변상금을 지불해야 한 다는 감사원 감사결과가 떨어졌습니다. 감사원 재심을 통해 개인이 부담해야 할 변상 금은 크게 줄어들었지만, 이미 KOTRA를 떠난 저는 수천만 원을 변상해야 했습니다. 이것도 현직 동료들이 십시일반 부담을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얼마를 도와주었 는지는 모르지만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심창섭 1986년 4월~1989년 4월 제가 콜롬비아 보고타 무역관장 시절입니다. 보고타 에 부임하고 나서 무역통계를 보니 콜롬비아가 우리나라에 건견( 乾 繭 )을 수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아하게 생각해서 조사를 해보았더니 일본 양잠( 養 蠶 )기업들이 콜롬 비아에 진출해서 우리나라로 수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점차 인건 비가 상승해서 양잠산업의 경쟁력이 약화되고 있었으나, 생사( 生 絲 )는 한때 우리나 라의 중요한 수출상품이었습니다. 여기서 생사라는 것은 건견에서 실을 뽑아서 실크 직물을 만들기 이전의 원재료를 말합니다. 심창섭 그래서 저는 우리나라 양잠 기술자와 기술의 콜롬비아 진출 필요성을 안기부와 경제기획 원 합동감사팀에 제안했습니다. 저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중남미 최초로 우리나라 양잠산 업이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업으로 저 는 안기부장상도 받았고 명예 콜롬비아 시민 상을 받기도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사업 은 언어상 문제와 중남미 노동자 관리 미숙 등으로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우리 기업이 개도국에 진출한다는 것이 간단치만은 않 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고, 이런 해외진출 지원에는 보다 전문적 지식과 체계적인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백창곤 1997년 말 닥친 IMF 금융위기로 우리 경제는 무척 암울했습니다. 그러나 이것 은 KOTRA에게 오히려 큰 기회가 되었습니다. 외국인투자 유치의 필요성이 강조되 380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81 면서 1998년 4월 IK의 전신인 KISC (Korea Investment Service Center)가 KOTRA 내에 개소된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외국인투자 업무는 외교통상부로 갈 것 인지 아니면 산자부로 갈 것인지 논란이 있었는데, KOTRA는 오스트리아 엥겔사의 투자유치 성공사례 등을 들어가면서 로비활동을 벌인 결과 이 업무를 끌어안게 되었 습니다. 또한 1998년 APEC 정상회담 합의에 따라 1999년 6월 APEC 투자박람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했습니다. 이후 저는 차기 APEC 투자박람회 개최지였던 중국의 옌 타이시의 초청을 받아 노하우를 전수하기도 했습니다. 이효수 저는 1975년 입사하자마자 전시부에서 일을 시작했고 마지막 보직도 전시부서 였기 때문에 저의 주특기는 전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1976 년 KOTRA가 삼성동에서 전시장을 건립하는 계획을 심도 있게 검토했는데, 예산문 제로 이 프로젝트가 무역협회로 넘어간 것입니다. 삼성동 코엑스가 생기게 된 시발점 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대규모 쇼핑몰로 변모했지만, 서울시나 국가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괜찮은 방향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KOTRA는 인류의 대 잔치인 엑스포에 꾸준히 참가해오고 있고, 올해 열릴 여수 엑스포에도 우리 직원들이 파견되어 지원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마음 든든합니다. 저는 부산전시컨벤션센터 (BEXCO) 건립에도 1년여간 참여했습니다. 부산시와 함께 국방부를 설득하여 비행 장을 양보 받았고 그 대지에 BEXCO를 건립한 것입니다. 이 역시 부산시 발전과 해 운대가 홍콩에 버금가는 빌딩숲으로 변모하는데 KOTRA가 기여한 것으로 볼 수 있 습니다. 또한 저는 개인적으로 일산 KINTEX 건립에도 참여했습니다. 이렇듯 KOTRA는 여러 전시장을 짓는 모태가 되었습니다. 전시사업에 관한 한 우리 KOTRA가 독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두환 저는 여러 사업을 하면서 우리 코트라맨들이 예산제약과 중소기업 지원이라는 틀에 갇혀서 새로운 아이디어 발상이나 우수한 사업수행 능력을 제한받고 있다고 생 각합니다. 제가 1997년 4월~1999년 3월 기간 중 아주지역본부장 겸 도쿄 무역관장 을 하면서 한 일 슈퍼엑스포를 생각하게 된 것은 이러한 우리의 제약을 넘어서기 위 한 것이었습니다.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를 앞두고 우리의 대일수출이 감소되는 추 세에서 한일관계와 한일 경제협력을 획기적으로 증진시키고 활성화시키는 방안을 모 색했습니다. 그래서 3개 유명 기획사를 접촉해서 취지를 설명하고 아이디어를 요청했 습니다. 놀랍게도 이들 기획사들은 성사여부가 불투명한데도 훌륭한 기획안을 제시 381 Ⅲ. 지상 좌담회

382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산규모가 어마어마했습니다. 당시 KOTRA 전체 전시예산이 100억 원 정도였는데, 무려 150억 원 규모의 기획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포기하 지 않고 김대중 대통령의 한일정상회담 의제로 슬그머니 끼워 넣었고, 이것이 합의사 항에 포함되었습니다. 추진하는 과정에서 우여곡절도 많았고 지금 사회를 보고 계시 는 김상관 처장의 고생도 많았지만, 3년에 걸쳐 단순한 상품수출만이 아닌 투자와 문 화까지 아우르는 대규모 한일슈퍼엑스포가 성공적으로 개최되었습니다. 저는 이를 통해 예산과 사업적인 제약이 있더라도 우리 코트라맨이 아이디어를 제한시키지 말 자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이 한 일 슈퍼엑스포를 통해 난타가 일본에 알려지고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업을 하시면서 겪었던 웃지 못할 이야기나 에피소드가 있으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박찬혁 저는 1984~1987년 사이에 홍콩에서 근무했습니다. 그때는 중국의 문을 두드 리기 위해 노력하던 시기라 우리 무역관도 홍콩과의 관계보다는 중국과의 통상관계 에 신경을 썼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온 사절단이나 인사들이 있을 경우는 각별히 주 의를 기울였는데, 한번은 중국에서 어떤 사절단이 온다고 해서 만찬자리를 마련했습 니다. 그런데 이 중국측 일행들이 마오타이를 7~8병이나 가지고 왔습니다. 우리 측 일행과 모두 합쳐봐야 10여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 술을 다 마신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떨 것인지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우리 무역관 관원은 화장실에서 나오지 못했고. 그럼에도 정말 위험한 만행이었지만, 저는 늦은 시간에 역주행을 마 다하지 않고 이 일행들을 숙소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또 한번은 중국 본토에서는 전 시회 개최가 어려웠던 때라 중국인들의 왕래가 잦았던 마카오에서 한국 지상사들과 함께 전시회를 개최했습니다. 저희들은 지상사 대표들과 함께 호기심에서 마카오에 있던 북한식당에 갔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대사관에서 이것을 질책해서 해명을 하 느라 고생한 적도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으신 말이나 향후 KOTRA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 등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두환 KOTRA의 가장 중요한 지원대상은 당연히 중소기업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382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83 김두환 저는 그 지원대상을 중소기업에 국한하지 말 고, 대기업이나 연구기관 등으로 다양하게 확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자원개발 과 같은 대형 프로젝트에서는 대기업과의 협 력관계가 중요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제 가 퇴직 후 대덕특구 연구단지에서 일할 때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기술력이 뛰어났지만, 마케팅은 매우 취약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KOTRA 본사에 몇 차례 도움을 요청했지만,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했습 니다. KOTRA가 이런 연구기관과도 정기적으로 협의를 가지면서 지원해준다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KOTRA와 JETRO의 관계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시다시 피 KOTRA는 JETRO를 본받아서 설립한 것으로서, JETRO는 우리와 매년 정기협 의회를 갖는 유일한 무역진흥기관입니다. 이 정기협의회를 통해 KOTRA는 JETRO 로부터 벤치마킹도 많이 했고, JETRO의 예산으로 적지 않은 공동사업도 했습니다. 그러나 김철수 사장님은 KOTRA가 일방적인 수혜자 입장에서 벗어나 이제는 대등한 입장에서 공동사업을 수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우리 KOTRA는 투자유치업무를 끌어들였고 다양한 사업을 개발함으로써 이제는 10여 년 전부터 오히려 JETRO가 우리를 벤치마킹하고 부러워하는 상황으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이 KOTRA 선후배들의 노력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이제는 KOTRA 가 세계적으로 가장 경쟁력 있는 무역투자진흥기관이 아닌가 합니다. 백창곤 앞으로는 창의력이 있는 사람들의 시대가 될 것입니다. 코트라맨은 해외에서 직간접적인 체험을 통해 아이디어가 풍부하다고 봅니다. KOTRA의 자산은 우수한 인재입니다. 더 나아가 저는 모든 코트라맨들이 어느 분야에서이건 박사학위를 받았 으면 합니다. 그리고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는 의외로 KOTRA 출신들의 도움을 필요 로 하는 곳들이 많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2002년 KOTRA를 떠나 대구로 왔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양 재동에서 택시를 타고 KOTRA 가자고 하면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택시기사 에게 KOTRA를 이야기했더니 금방 알아들었습니다. 그 기사분은 KOTRA는 영어도 잘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다니며, 월급도 많다고 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직장 중 383 Ⅲ. 지상 좌담회

384 KOTRA 만한 곳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입사시험을 치를 때 어느 선배님이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당신이 권력을 추구하면 사법고시나 행정고시를 볼 것이고, 부를 찾으려면 장사를 하거나 기업에서 일자리를 찾아라. 하지만 우리나라의 수출을 위해 일할 생각이라면 KOTRA에 들어와라. KOTRA만큼 청렴한 조직도 드뭅니다. 국영 기업이어서 주인이 없다고 할 수도 있고 사장이 수시로 바뀌기도 하지만, KOTRA는 나름대로 전통을 유지하고 시대요구에 부응한 사업개발로 발전을 계속해 오고 있습 니다. 그리고 택시기사가 얘기했던 것처럼 KOTRA에는 KOTRA를 뒷받침하는 인재 들이 많습니다. 저는 후배들을 믿습니다. 김용집 과거 감사원 감사에서 KOTRA 존폐 문제가 거론되기도 했지만, KOTRA후배 들은 항시 위기감을 갖고 KOTRA 기능을 조정하면서 시대의 요구에 부응해야 할 것 입니다. KOTRA의 새로운 기능과 관련해서 저는 KOTRA가 스포츠 마케팅도 지원 해 주기를 바랍니다. 제가 KOTRA를 떠나 월드컵 조직위에서 근무하면서 느낀 것이 기도 하지만, KOTRA 해외 무역관들은 현지인맥 형성을 통해 우리나라 스포츠맨들 이 세계적으로 뻗어 나가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끝으로 우리 KOTRA 후배들은 해외에 나가면 경제 분야에서는 우리나라를 대표한다는 자부심을 가져줄 것을 부탁하고 싶습니다. 제가 1972년 파리에서 첫 해외근무를 시작할 때 월 급은 613달러에 불과해서 조그만 아파트에서 정말 어렵게 생활했습니다. 후배들은 현재의 풍요에 만족하지 말고 우리나라 경제대표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일해 주었으 면 합니다. 심창섭 KOTRA는 사장의 영향력이 매우 크기는 하지만, 우리 KOTRA의 주인은 우리 자신임을 다시 한 번 인지해 주기 바랍니다. 그리고 코트라맨들은 해외에서 근무하면 서 경험도 많고 매너도 좋지만,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지식과 감각이 부족해서 퇴직 후 기업체에 들어가면 1년을 버티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 해 평소에 관심분야에서 전문지식을 높이고, 회사적인 차원에서도 사회적응 교육이나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코트라맨들은 아직도 권위적이고 상류층 적인 기질이 없지 않은데, 입사 때부터 봉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이효수 우리나라는 통상개방 국가를 지향해야 합니다. 따라서 선진국, 개도국을 가릴 것 없이 무역관이 필요하며, 누군가는 개도국에서도 근무해야 합니다. 후배들은 도전 384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85 정신을 가지고 개도국에서도 긍지를 갖고 일할 자세가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여러 직 업이 있지만, 남을 잘되게 하는 직업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의 주업무는 중소기업들을 잘되게 하는 것입니다. 후배들은 KOTRA가 봉사하는 기관임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중소기업을 섬기는 자세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퇴직 후를 대비하는 지혜를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KOTRA를 그만두고 지방에서 3년 동안 근무했습니다. 지방에는 아직도 KOTRA와 코트라맨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다는 것을 후배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제 KOTRA는 사람으로 치면 지천명( 知 天 命 )의 오십입니다. 이 나라와 이 시대가 KOTRA에 요구하는 것을 잘 파악하고 실천하면서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기를 바라며 오늘 좌담회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상관 385 Ⅲ. 지상 좌담회

386 3차 좌담회 2000년대 KOTRA 개혁과 시련, 사업다각화 일시와 장소 2012년 3월 16일 10:30~15:00 소피아실(구 영상회의실) 참석자(재직 기간) 황민하 (1979년 12월~2009년 9월) 박기식 (1981년 6월~2010년 9월) 이한철 (1981년 9월~2011년 6월) 민경선 (1982년 9월~2009년 8월) 오성근 (1983년 1월~현 부사장)사회 우기훈 (1982년 9월~현 중소기업지원본부장) 배창헌 (1984년 6월~현 글로벌정보본부장) 김병권 (1985년 4월~현 전략마케팅본부장) 사회(오성근) 바쁘신 가운데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창립 50주년 기념 사사 편찬을 위하여 3차에 걸친 좌담회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좌담회로 서 현 이사님들과 최근에 KOTRA를 떠나신 이사님들을 모시고 2000년대를 중심 으로 KOTRA의 주요 변화와 사업에 대해 의견을 나누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돌이켜보면 2000년도 초반부터 KOTRA는 공기업 혁신의 선도자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황두연 사장님이 혁신의 개념을 도입하였고, 이를 전사적으로 완성하고 꽃을 피운 것은 오영교 사장님이셨습니다. 공기업 최초로 팀제를 도입하고, BSC(Balanced Score Card, 균형성과 평가제도)에 입각한 MBO 제도 운영, 다면평가, 전 직원 연봉제 등 공공부문에서는 생각도 못한 혁신을 우리는 과감히 38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87 시행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아픔을 겪었던 기간도 있었지만 10여 년이 지난 지금 뒤돌아보면 이 같은 노력이 있었기에 KOTRA가 초일류 무역진흥기관으로 자리 잡을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러면 먼저 2000년 초기의 공공기관 경영혁신을 선도하게 된 배경과 당시의 상황 등에 대해 먼저 이야기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박기식 1998년 3월 국민의정부가 출범했지만, 1997년 말 불어 닥친 IMF 외환위기로 인해 공기업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축소경영, 다운사이징이 강조되고 있었습 니다. 그리고 1999년 4월 황두연 사장님이 부임했습니다. 얼마 후 저는 전략경영추진 프로젝트 팀장직을 맡게 되었고, 당시 사회적 박기식 인 분위기와 정부정책에 따라 다운사이징과 이를 위한 신속한 의사결정 체제를 검토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오준석 박사와 이민호 부장 등과 함께 3개월 동안 BPR(Business Process Reengineering) 작업을 했습니다. 저 이전에 전임자인 나윤수 팀장과 기조실이 이미 구조조정 및 전략경영 팀제 도입 방안을 제출한 상태이기는 했지만, 이러한 작업과 검 토는 2000년 3월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 결과 모든 업무 프로세스를 표준화하고 매 뉴얼화하는 SOP(Standard Operation Procedures)를 마련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팀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종전까지의 4단계 결재를 3단계로 바꾸 자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2000년 10월 1일부로 팀제를 도입하였고, 상위직급부터 순차적으로 연봉제도도 도입하였습니다. 황 사장님은 2001년 2월 KOTRA를 떠났기 때문에 비교적 짧은 기간 재임하였지만, 상당히 많은 제도를 이때 도입하였습니다. 100개 이상 되는 무역관의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인트라넷의 전자결재를 도입하였으 며, 전자무역팀을 신설한 것도 이때였습니다. 2000년대 들어 조직의 근간이 된 많은 제도를 도입한 것이죠. 그리고 2001년 4월 오영교 사장님이 부임해서 혁신은 가속화 되었습니다. 외부에서는 오영교 사장님이 KOTRA 개혁을 주도해서 노무현 대통령의 특보와 장관까지 갔다고 하지만, 사실 혁신을 할 수밖에 없었던 김대중 정부 상황에 서 황 사장님이 개혁의 기초를 다졌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87 Ⅲ. 지상 좌담회

388 우기훈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박기식 이사님은 우리가 혁신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하셨는데, 2000년대 초의 혁신은 사실 우리의 자발적인 개혁이었습니다. 외부에서 혁신을 하라는 지시도 없었고 당시 팀제를 당연하게 생각 하는 곳도 별로 없었습니다. 2000년대 초 혁신의 줄기는 공공기관으로서 공공성에 기 업성을 가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기업의 성과관리 시스템을 도입 했고, 이 성과제도에 맞게 팀제를 시행했으며, 그 피드백으로 연봉제를 도입했던 것입 니다. 이는 기업문화에도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예를 들면 그 이전만 하더라 도 직원 평가는 상사와 사장에 의해 전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이제는 기업성이 짙은 성 과관리 체계에 의해 평가가 이루어진 것이죠. 팀제도 팀원들의 창의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운영됐다고 생각합니다. 황민하 황민하 KOTRA의 개혁이 당시 상황에 따른 자발적인 움직임이었으며, 그 결과 오늘날 KOTRA의 발전된 모습이 있다는 평가는 다 소 지나치다고 봅니다. KOTRA가 지금까지 해 온 혁신의 내용을 볼 때, 대부분이 자발적 이라기보다는 경영평가라는 외부적인 변수에 의한 어쩔 수 없는 혁신이 아닌가 생각합니 다. 혁신의 결정체였던 구조조정은 누구도 해 서는 안 되는 작업이었지만 결국 제가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구조조정을 위한 기준 이 노조와 협의되었다고는 하지만, 모든 직원이 동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결과 1/4 정도의 간부직원을 떠나보내야 하는 뼈아픈 혁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장님들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혁신을 해야 한다 는 모양 갖추기 식의 혁신이 얼마나 많았고, 경 영평가를 위한 혁신이 얼마나 많았으며, 혁신의 성공을 위해 직원들의 동의는 충분히 구했는지도 자문해 봐야 할 것입니다. 저는 혁신이 가장 필요한 대상은 사장과 임원들 이 아닐까 합니다. 정작 본인들은 혁신하지 않으면서 직원들에게만 혁신을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고, 위에서 변하면 아래도 자동적으로 변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진정으로 KOTRA가 변화의 방향을 제대로 잡 고 왔는가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 역시도 부사장으로 재임하면서 해야 한다 고 하니 어쩔 수 없이 했던 것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 혁신들이 진정 나를 깎는 마음으 로 자발적으로 한 것이었는지 자문하면 반성할 점들이 많습니다. 38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89 민경선 KOTRA의 혁신이 경영평가라는 외부적인 요구에 의해 이루어진 면도 없지 않 지만, 조직이나 개인을 위해서도 경영평가는 잘 받아야 할 상황이었기 때문에 직원들 의 적극적인 참여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역관이나 개인에 대한 BSC, MBO 평가, 다면평가 등 여러 혁신 과정에 있어서 직원들의 불만이 있었던 것은 사실 입니다. 100여 개가 넘는 해외 무역관들이 서로 다른 환경에서 일하고 있고, 제공하는 서비스의 종류나 품질이 서로 다른데도 이를 일률적인 잣대로 재다 보니 공정성 시비 가 있었습니다. 다면평가의 경우도 사전에 직원들에게 충분히 이해시키고 모의평가 등을 통해 문제점은 없는지 확인했어야 함에도 단번에 시행해서 직원들 간 편차가 크 게 나타났고, 이로 인해 불이익을 받은 직원들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문제점에도 그간의 혁신들이 결과적으로 조직의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보다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김병권 팀제를 포함해서 경영평가나 여러 인사제도 등의 제도 자체가 완벽하거나 잘 만들어졌다기보다는 우리 직원들이 이러한 제도를 잘 활용했다고 봅니다. 특히 팀제 의 경우 결재라인이 짧아졌고 간부들과 경영층 간의 의사소통이 원활해졌다는 면에 서 성공적인 개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기훈 개혁 이전에 조직원들과 충분한 협의가 없었다는 지적에 대해서 저는 기획예산 위원회 폐지 과정을 예로 들어 다른 의견을 말하고 싶습니다. 예전에는 1직급으로 구 성된 기획예산위원회가 의사결정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황두연 사장님은 기획예산위원회의 문제점을 인지하고 의사결정 과정에서 이 위원회를 폐지하려고 했 고, 직원들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 많은 설득작업을 했습니다. 황 사장님은 마지막에 1 직급들을 다 불러놓고 기획예산위원회를 폐지할 예정이니 이의나 반대하는 사람은 말 하라고 했습니다. 사전에 설득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그로써 기획예산위원회가 폐지되었습니다. 팀제라는 것도 갑자기 도입한 것이 아니라 많은 갈등 해소와 설득의 과정을 통해서 도입하였고, 그만큼 성과를 발휘한 것입니다. 박기식 2000년대 들어 KOTRA는 혁신의 전시장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KOTRA는 해외에서 유행하고 있는 경영이론과 경영 흐름을 그때그때 잘 파악하고 우리의 경영 에 잘 접목했습니다. 그리고 KOTRA는 남들이 안 할 때 팀제와 연봉제, 다면평가제 도 등을 도입했습니다. 다만, 문제점이라고 하면 너무 급히 새로운 것을 도입하려다 389 Ⅲ. 지상 좌담회

390 보니 몇 년간 준비해야 할 제도를 1년도 안되어 시행하려다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는 점입니다. 그 예로 제가 주 책임자로서 추진하려 했던 지식경영 시스템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조직의 변화가 우선이었음에도 당시 저는 단순히 전산 시스템만 갖추면 될 줄 알았습니다. 지식경영 시스템의 성공을 위해서는 조직 차원에서 필요한 지식과 정의가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보다 체계적인 접근으로 서두르지 않고 지식경영 시스템을 만들어나가겠습니다. 저희가 경영의 중심에 고객 을 둔 것도 이때부터 인 것 같습니다. 물론 외부적으로도 1999년부터 시작된 공기업 고객만족 평가가 도입되어 고객 만족을 위한 경영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상황이기도 했습니다만, 이 점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우기훈 우기훈 고객만족 평가제도가 처음 시작되었 을 때 저는 각 팀으로부터 고객 리스트를 모 아보고자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팀에서는 장부를, 어떤 팀에서는 명함철을 가져왔고, 일부 팀에서는 엑셀로 정리된 리스트를 가져 왔습니다. 한마디로 고객의 데이터가 체계적 으로 정리되고 축적되지 않았으며, 그러다보 니 고객만족평가에서 KOTRA가 좋은 점수 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이후 고객관리 시스템에 있어서 획기적인 금자탑을 이루신 분이 바로 황민하 부사장님입니다. 이후 어떠한 후임자가 온다 해도 고객관리 업무를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든 것입니다. 황민하 CS 경영이 들어온 후부터 KOTRA의 전반적인 사업 구조가 바뀌기 시작했다 고 볼 수 있습니다. 종전까지의 KOTRA 위주 사업에서 고객위주의 사업으로 바뀐 것 입니다. 그러나 여느 사업과 마찬가지로 초기에는 직원들 간에 공감대 형성이 잘 이루 어지지 않았습니다. 2003년도 우리의 고객만족 점수가 너무 저조해서 저는 이를 개선 해보라는 임무를 맡고 2004년 3월 카이로 무역관에서 갑자기 본사로 들어와 CS경영 팀장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KOTRA에 CS 경영마인드를 널리 심은 것은 오영교 사장님의 큰 업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든 저의 과제는 바닥으로 내려간 390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91 고객만족평가를 끌어올리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우선 고객 데이터베이스 구축 과 관리 시스템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레인보우 라는 자체개발 CRM 시스템이었습니다. 레인보우 시스템은 고객의 요청사항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상당히 우수한 시스템이었습니다. 이를 보완하고 개선해 서 사용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고객관리 시스템에 있어서도 기 존의 것을 몽땅 버리고 새로운 것을 들여오다 보니 적지 않은 시행착오가 있었습니다. 요컨대 KOTRA가 고객 위주의 사업으로 방향을 전환하도록 물꼬를 튼 것이 CS경영 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제가 KOTRA를 떠나 민간기업에서 일하다 보니 KOTRA의 고객만족경영은 아직도 개선할 여지가 많 다는 것입니다. 고객 만족 측면에서 보면 아무리 우리가 잘한다 해도 만점을 받을 수 는 없는 것입니다. 고객관리 시스템과 관련해서 ERP, CRM으로 변하면서 조직 내부는 물론 고객들 이 활용하는 부분에서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현재는 뉴 CRM 이라고 ERP에서 분리된 상태입니다. 또한 고객만족도 평가 모집단에 있어서도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감사원에 의해 지적되어 KOTRA가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황민하 고객만족도 평가 모집단은 KOTRA 입장에서 보면 억울한 점이 많습니다. 석 탄공사의 경우는 연탄 찍어내는 공장과 중간 배달업체가 주 고객으로 50~60개사면 됐고, 조폐공사와 같은 경우는 수표 찍어내는 업체가 주 고객입니다. 반면에 KOTRA는 수출입과 관련된 모든 업체 및 유관기관들이 고객입니다. 1년에 KOTRA 서비스를 받는 업체가 1만 8,000개사 정도이며, 그 중 두 번 이상 서비스를 받은 고객 만도 1만 2,000개사에 이르는데, 그들 모두를 고객이라고 지정한다면 사실상 불특정 다수의 고객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다른 공공기관처럼 고객모집단을 만든다면 고객 수는 KOTRA가 가장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두세 번 이상 서 비스를 받은 업체로 고객을 제한한 것이었는데, 그것을 감사원이 문제 삼은 것입니다. 감사원이 KOTRA의 사업성격을 이해하는데 미흡했고 우리 역시 그들을 이해시키려 는 노력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떻든 나중에는 서로 협의하여 모집단 수를 줄일 수 있었는데, 이 점에 있어서는 앞으로도 잘 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391 Ⅲ. 지상 좌담회

392 민경선 사기업에 있어서 고객은 자사의 상품을 구매해줌으로써 수익을 가져다주는 대 상이기 때문에 고객 만족이 지상과제입니다. 그러나 KOTRA의 경우는 기업이 주요 고객이기는 하지만, 그 비용을 부담하는 것이 정부이다 보니 자칫 기업에 대한 서비스 가 부실해질 수도 있습니다. 황민하 부사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의 서비스를 받는 기업이 연간 수만 개에 달해 고객 수가 제한된 수자원공사나 석탄공사 등 공기업에 비 해 불리하고, 그만큼 고객관리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고객만족도 평가제도를 통해 고 객과의 소통이 늘어나고 서비스가 개선되었으며, 기업들의 KOTRA에 대한 이해도와 KOTRA 브랜드 가치가 크게 향상되었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다음은 2007년에 처음 도입된 ERP를 포함해서 CRM, KOPES 등 우리 KOTRA의 여러 정보화 시스템에 대해 의견을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박기식 어떠한 정보화 시스템도 꼼꼼히 검토하지 않고 시급하게 어떤 조직에 적용한다 면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ERP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ERP는 제조업체에서 사용 하던 시스템으로서 우리나라에 도입되는 과정에서 ERP 업체들의 농간도 있었고, 서 울시가 추진하는 사업이라 신속히 진행하려 했던 속사정도 있었으나, 사실 제게도 어 느 정도 잘못이 있었음을 인정합니다. 당시에는 정보통신이면 다 된다는 소프트웨어 맹신주의도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실패의 원인은 너무 무리하게 도입했다는 것과 상품이 아닌 서비스를 제공하는 우리 기관의 특성에 ERP가 맞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우기훈 2004년 고객만족경영이 도입된 이후 경평은 다가오는데 CRM 시스템 하나 없 었습니다. 3개월을 앞두고 담당자에게 급조로라도 만들어달라고 했는데, 그때 나온 것이 레인보우 시스템이었습니다. 외부가 아닌 내부 상황과 업무를 잘 아는 우리 직원 이 만들었기 때문에 직원들이 사용하기 편하게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밖에 도 성과관리 시스템인 KOPES나 우리 직원들이 잘 알지 못하는 지식자산대차대조표 라는 시스템도 우리 내부에서 만들었는데, 이는 우리 KOTRA의 역량이 얼마나 대단 한가를 알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음은 우리 KOTRA 역사상 처음으로 배출된 자체 사장에 대해 의견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2005년 4월~2008년 7월 기간 중 재임하신 첫 자체 사장은 392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93 처음에는 직원들로부터 많은 기대를 받았으나, 혹독한 감사원 감사 등 많은 애환을 가져왔습니다. 박기식 저는 첫 자체 사장이신 홍기화 사장님 밑에서 2년 7개월 동안 기조실장을 맡았 습니다. 홍 사장님은 한마디로 전임 오영교 사장님이 이루어놓았으나 일면 부풀려지 기도 했던 혁신을 정리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직원들의 환영을 받으며 부임 한 홍 사장님은 우리 직원들의 생각을 잘 알고 있었으며 전략경영 프로세스를 만드는 등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ERP를 너무 무리하게 추진하였고, 부풀려진 개혁 을 바로잡아가는 과정에서 감사원 감사가 기폭제가 되어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습 니다. 분명 마이너스 효과가 적지 않았지만,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도 되었습 니다. 그러나 자체 사장 재임 시절에 Contact KOREA가 출범했고 자본금도 50억에 서 500억으로 늘어났습니다. 자체 사장으로서 조직을 알았고 그만큼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싶습니다. 황민하 홍 사장님은 열심히도 하시고 그만큼 의욕도 컸다는 점에서 저도 같은 의견입 니다. 다만 ERP에 대해서는 조금만 생각을 바꿨더라면 직원들의 시행착오도 크게 줄 이고 예산 낭비도 적었을 것입니다. 여러 사업을 개선하려고 노력했고 아이디어도 많 았지만, 감사원 감사가 너무 길게 이루어지는 바람에 직원들의 에너지가 많이 허비되 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영교 사장님 이임 후 후임 사장님이 물색되던 중 오영교 사장님이 이미 행안부 장관으로 내정된 상태였기 때문에 노무현 대통령이 모범적인 혁신을 했던 기관인 만큼 그것을 승계하기 위해 내부에서 사장을 찾으라는 지시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박기식 저는 감사원 감사를 받을 때의 비망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2006년 3월 어느 날 사장님과 부사장님 그리고 저 세 사람은 감사원장을 만났습니다. 그때 감사원장은 KOTRA가 대통령은 속여도 나는 못 속인다. 전 세계 무역관 성적이 실시간으로 그 래프로 나타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 감사원이 혁신 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데 당시 KOTRA가 정부혁신의 전도사인 것처럼 비쳐지는 것 에 대해 감사원이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393 Ⅲ. 지상 좌담회

394 2003년 12월 5일에는 KISC가 IK로 재출범했고, 2006년 10월에는 IKP가 완공되었습니다. 이렇듯 2000년대에는 KOTRA의 투자유치 업무와 인프라에도 큰 변화가 있었는데, 이에 대해 말씀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황민하 IK가 출범할 때 저는 고충처리팀장으로 부임했습니다. IK는 분명 국가적인 차 원에서도 필요한 조직이었고 KOTRA로서도 발전에 큰 획을 그을 수 있는 조직이었 습니다. 그러나 정부와의 협상 과정에서 행정적인 권한이 없어 외투기업들의 고충만 수집하고 전달할 뿐 문제해결 능력이 부족했습니다. 이로 인해 초대 옴부즈만이나 관 련 직원들은 상당한 한계를 느끼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법무, 세무 등 다방면 에서 전문적인 지식이 축적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IK가 출범하면서 선진국 무 역관에 대해 투자유치 업무와 목표가 갑자기 강화되기 시작해서 상당히 혼선을 빚기 도 했습니다. 투자유치 목표는 하달되었지만, 투자유치를 위한 자료나 교육, 업무 시 스템 등이 매우 부족했으며, 국가별로 투자유치 환경이 다름에도 획일적인 가이드라 인이 주어졌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IK의 투자유치 기여도가 점차 높아졌습니다. 우기훈 IK 단장이 외국인이었을 때는 이들의 조직문화 융화에 조금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외국인 단장들은 어떻게 보면 조직 운영을 개인적인 관점에서 하지 않았나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IK 성과 측정과 관련해서 이를 투자유치 신고액을 기준 으로 할 것인지는 아직까지도 논란이 있고, IK가 출범할 당시에는 투자청을 설립해야 한다는 말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IK는 여러 제한에도 많은 성과를 올렸고, 여러 지원제 도를 만들어냄으로써 좋은 결과를 가져온 사례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IK는 한국에 R&D 센터를 설립하면 연구인력 인건비의 80%를 지원해주는 제도를 운영하기도 했 는데, 이를 통해 구글이나 지멘스와 같은 해외 대기업의 투자를 끌어올 수 있었습니다. 다음은 2000대 이루어진 사업의 다각화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2000년대 들어 KOTRA는 해외진출 지원사업을 본격화하면서 Global KOREA 를 출범했고, 각종 산업자원협력 사업, 지식서비스 사업, 디자인브랜드 사업, 그린사업 등 다양한 사업들이 개발되었습니다. 먼저 Global KOREA 출범의 주역이었던 민경선 이사님부터 이야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394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95 민경선 민경선 IMF 외환위기 이후 우리 정부는 투자 유치에 주력해 왔기 때문에 기업의 해외진출 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이 없지 않았습니 다. 그러나 2006년 하반기부터 총리실을 중 심으로 범정부 차원에서 기업의 해외진출 촉 진 방안이 논의되기 시작했습니다. 정부가 나 서서 우리 기업의 해외진출 지원을 논의한다 는 것 자체가 중요한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볼 수 있었죠. 어떻든 기업의 해외진출 지원은 크게 정보제공과 컨설팅이었기 때문에 KOTRA의 정보서비스본부가 이를 맡게 되었습니다. 당시 이 업무를 두고 무역협회와 상당히 경쟁을 했는데, 결국 무역협회는 전문 컨설팅을 맡고 KOTRA는 정보제공을 맡는 것으로 정리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KOTRA는 31개 유관기관 정보를 통합 공급 하는 OIS 포털을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런 과정을 거쳐 2007년 4월 1일 Global KOREA(GK) 본부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명칭은 투자유치본부인 Invest KOREA 에 대응해서 우리 기업의 글로벌화를 지원한다는 뜻으로 작명되었습니다. GK는 정보 조사와 해외진출 지원을 담당하는 두 개 파트로 나뉘었으며, GK 본부가 추진한 해외 진출 지원 업무는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정보제공으로 OIS 구축을 통한 온라 인 정보 제공과 국별 해외 투자진출 가이드 등 오프라인 자료발간, 칭다오 무역관 등에 설치된 투자진출지원센터의 운영과 지경부, 수출입은행 등 유관기관 파견직원으로 구 성된 해외투자진출지원센터 운영 등이 있었습니다. 둘째는 해외 프로젝트 진출지원으 로 해외 자원개발, 플랜트 수출 등의 정보를 수집하고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정 보수집도 중요하지만 이런 정보를 국내 적격업체에 적시에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 문에 국내 건설회사나 자원개발 회사, 엔지니어링 기업들과의 네트워크 구축에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셋째는 ODA 사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도국의 프로젝트에 참여하 기 위해서는 ODA가 매우 중요하고, KOTRA로서도 개도국과의 경제협력이 해외진출 지원업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해야 한다고 판단해서 KOICA가 독점하고 있던 ODA 사 업에 적극 참여하고자 했습니다. 대표적인 개도국 ODA 사업으로 카자흐스탄 무역컨 설팅 프로젝트를 KOICA에서 수주 받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던 것을 들 수 있습니다. 김병권 지금은 해외진출사업이 웬만큼 자리를 잡았다고 보여지며, 현지 진출업체나 현 지 투자유치기관들과의 관계도 한층 성숙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해외진출사업은 395 Ⅲ. 지상 좌담회

396 김병권 KOTRA 해외 무역관의 위상을 한 단계 업그 레이드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셈이지요. 이 때문에 무역관 문을 두드리는 업체들의 수도 크게 늘었구요. 제가 자카르타 무역관 근무 시 시작했던 중부자와 섬유공단조성 사업이 최근 KOICA로부터 24억 원의 ODA자금을 받아서 타당성 조사를 하는 것으로 결정났 고, KOTRA는 LH공사와 파트너로 이 사업 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영역으로 분류되는 서비스나 의료, 바이오, 그린 사업 등의 경우 정부 관련부처와 협력을 통해 사업 플랫폼을 만들어가고 있는데, 얼마나 효과적이고 강력한 플랫폼을 구축하느냐 하는 것이 KOTRA의 미래 역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입니다. KOTRA는 또한 국가브랜드 지원센터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전후해서 해외에서 보는 한국의 이미지에 대해 조사 자료를 발표했는데, 그 이후 총리실에서 국가이미지의 중요성을 인지하여 총리실 산하에 국가이미지위원회 를 설립했고, 현 정부에서는 이 기능이 브랜드 위원회 로 확대 발전되었습니다. KOTRA 사장은 국가 이미지 위원회와 브랜드 위원회 모두에서 민간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조환익 사장님은 KOTRA가 갖고 있는 최고의 자산이 KOTRA의 브랜드이다. 이를 브랜드 파워가 약한 중소기업을 위해 써야 한다 라는 판단 하에 KOTRA 보증브랜드 제도를 도입하기도 하였습니다. 오영호 사장님이 취임하신 후 브랜드는 디자인과 밀접히 연계되어 있다고 보시고 현재는 브랜드 디자인을 함께 다루는 방향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습니다. 민경선 오성근 부사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2002년 월드컵을 전후해서 해외 무역관을 동원해 현지 설문조사를 실시해서 분석했던 것은 KOTRA가 상당히 앞서서 해냈던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합니다. 당시 저는 해외조사팀장으로서 이 조사사업을 기획했는 데, 월드컵 개최로 우리나라의 국가 이미지를 크게 향상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음 에도 어느 기관이나 컨설팅 업체에서도 이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KOTRA가 발표한 국가이미지 설문조사 분석자료는 언론으로부터 큰 주목을 받았고 관련 논문에서도 39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97 많이 인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무총리실의 국가이미지위원회 설립까지 이어지게 되 었던 것입니다. 우기훈 보증브랜드 사업은 일부 부작용도 있습니다. KOTRA가 보증은 해준다면서도 책임을 지기는 어려운 상황이어서 상당한 리스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리스크 관 리를 위해 보험에 들기도 했지만, 항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박기식 KOTRA의 브랜드 파워 향상과 관련해서 2008년 양용은 선수가 KOTRA 모 자를 쓰고 메이저 골프대회에 참가한 것은 KOTRA를 널리 알리는데 큰 도움이 되었 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한철 이한철 2000년대 중반부터 여러 가지 사업들 이 한꺼번에 들어왔습니다. 그 배경에는 정 부의 조직개편도 있었습니다. 정보통신부가 없어지고 지경부로 합쳐지면서 KICA가 KOTRA로 흡수되었고, 방위산업 해외진출 지원 등 새로운 기능들이 동시다발적으로 KOTRA로 떨어졌습니다. 2010년에는 KOTRA법이 개정되어서 ODA 사업과 방위산업 지원기능, 국가브랜드 사업들이 정식으로 KOTRA 사업으로 추가되 었습니다. 그린사업은 산업 전반에 걸친 것이라 KOTRA의 기능 추가로 보기는 어렵 습니다. 또한 종전에는 대부분의 사업이 지경부와 관련이 있었는데, 지금은 보건복지 부, 행정자치부 등 다른 정부기관과도 공동으로 사업을 전개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 다. 문제는 이같이 기능과 사업이 갑자기 늘어나면서도 인원이 충분히 늘어나지 못했 다는 것입니다. KOTRA 보증브랜드 사업만 보더라도 사업 자체는 좋으나, 인력이 부 족한 실정입니다. 그러나 KOTRA가 ODA 사업을 시작한 것은 인력증원에 큰 도움이 되어서 지난해부터 해외조직망이 확장되고 인력도 늘어났습니다. ODA 기능을 가져 가기 위해 처음에는 수출입은행과 KOICA가 경쟁했으나, 나중에 KOTRA가 그 경쟁 에 끼어들어 우리의 몫으로 만들었습니다. 397 Ⅲ. 지상 좌담회

398 조직의 선진화 명분으로 기능이 축소 또는 통폐합되고, 국내 무역관이 폐쇄되기도 했으나, 정부부처가 통폐합되면서 이들의 해외 관련 업무를 KOTRA가 가져올 수 있었고, 이에 따라 KOTRA의 기능과 예산 등이 확대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기능 확대에 비해 인력은 충분히 증원되지 않았으며, 부족한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 비정규직 직원이 크게 늘어났습니다. 물론 비정규직 채용 확대는 정부방침에 의해 어느 정도 의무사항이기도 하지만, KOTRA 내부적인 필요에 의한 것도 그 원인이 있습니다. 비정규직 직원 문제는 앞으로도 어떻게 이끌어나가야 할 것인지 많은 고민이 필요한 사안입니다. 배창헌 배창헌 2011년 9월 1일 조직개편 때 고객네트 워크본부가 신설되고 새로운 기능들이 부여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다른 본부와 부서에 서 필요인원이 충원되었는데, 이는 시장개척 단이나 조사업무 등 기존의 사업들을 상대적 으로 부실화시키는 원인이 되었고 고객 만족 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 됩니다. 이한철 KOTRA가 KICA를 인수하면서 여기에 근무하던 IT전문가들도 흡수했습니 다. 이들 전문 인력들은 그 분야에서는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해외에서의 활동은 KOTRA 무역관이 하는 일 이상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만할 것은 아니지만 해외 활동에 있어서는 KOTRA가 충분히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단지 KOTRA가 맡는 기능이 너무 많다 보니 각 기능을 대표하는 국내 기관과 같은 조건에 서 경쟁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고민이 필요합니다. 또한 KOTRA가 전적으로 맡을 기능과 각 기관이나 기업과의 협력차원에서 지원만 해주는 기능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황민하 3M의 경우 연매출의 70%가 최근 3년에 개발된 사업에서 나오고 나머지 30% 가 기존의 사업으로부터 나온다고 들었습니다. KOTRA의 경우 기능 확장은 충분히 잘 되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예산과 인프라를 갖추고 직원 교육 등 충분한 준비과정 을 거쳐서 원했던 성과를 올리고 있는지는 검토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새로운 39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399 사업을 추진할 때는 충분한 예산과 인력을 투입해야 하고, 성공사례를 만들어 자타가 인정하는 사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성근 오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마 밤 새워 해도 시간이 부족할 것 같습니다. 좌담회를 마무리하기 전에 더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신 분은 말씀해 주시지요. 민경선 저는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이야기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전문가가 되라는 것입니다. KOTRA의 강점과 특성은 100개 가 넘는 해외 무역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코트라맨 하면 해외분야 전문가로 비 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이나 일본 전문가를 빼면 특화된 지역 전문가를 찾아보 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KOTRA에서만큼 해외분야 전문가가 되기 용이한 조직 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해외의 네트워크를 보다 적극적으로 구축할 필요 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해외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 KOTRA 말고도 많습니다. 따라서 중소기업들이 우리 KOTRA에 기대하는 것은 좀 더 심도 있 는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좀 더 용이하게 일을 추진할 수 있는 해외 네트워크라 할 것 입니다.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서비스 마인드로 더욱 무장할 것을 부탁드리고 싶습 니다. 우리는 중소기업들로부터 옛날 어느 무역관의 누구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는 데, 지금 그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 라는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해외에서의 조그만 도움은 KOTRA의 이미지 제고와 KOTRA 존립 논란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김병권 올해 초 FTA Biz Plaza 가 KINTEX 전시장에서 열렸는데 오찬 시간에 제 옆 자리에 세계적인 의류소싱 제조업체인 GUESS사 구매 책임자가 앉았습니다. 제가 GUESS가 만들어진 때가 언제냐고 물었더니 30년 전이라고 답하더군요. 기업에서 30년이라는 생존기간은 결코 짧지 않은 것이라서 생존 비결을 물었더니 Connecting inspiration to customers 라고 답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GUESS가 왜 브랜드 가치 를 지속 발전시켜 나가는지 알겠다고 칭찬을 했습니다. 그분이 KOTRA는 얼마 되었 느냐고 묻기에 50년이라고 했더니 놀라며 비결을 묻기에 Constant evolution 이라 고 답했지요. 개인적으로는 KOTRA가 과거의 점진적 진화와는 성격이 다른 또 다른 399 Ⅲ. 지상 좌담회

400 진화의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고 봅니다. 국가의 해외마케팅 인프라로서 확실히 자리 매김하고 리소스를 충분히 확보함으로써 새로운 사업영역과 사업방법을 뿌리내려야 할 시점이라고 봅니다. KOTRA 위상이 어느 때보다도 빛나 보이는 이 시점에서 오히 려 더 고민이 깊어지는 느낌입니다. 참석하신 모든 분께 다시 감사드립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이상으로 좌담회를 마치겠습니다. 400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401 무역 2조 달러 시대를 향한 한국형 무역성장 모델과 KOTRA 1차 경영자문위원회 일시와 장소 2012년1월 4일 KOTRA 소피아실 참석자 남택운 상무(퓨어플러스) 심영섭 선임연구원(산업연구원) 이종재 소장(한국 SR전략연구소) 이학노 교수(동국대학교) 임채운 교수(서강대학교) 오준석 교수(숙명여자대학교) 정인교 교수(인하대학교) 최낙균 선임 연구위원(대외경제정책연구원) 오영호 KOTRA 사장(사회) 사회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착수한 이래 KOTRA는 수출진흥업 무를 수행해왔으며, 관련업무를 지속적으로 확대하면서 성장을 거듭해왔습니다. 1995년에는 외국인 투자유치 기능을 추가했고,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본격적인 해외자본의 투자유치를 수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무역을 기반으로 산업고도화를 성공적으로 이끎으로써 국제사회의 롤모델(Role Model)이 되고 있습니다. 본인은 이를 한국형 무역성장모델 이라고 명명하고 있으며, 3대 전략을 정리했습니다. KOTRA의 주요업무를 새롭게 묶는 시도 정도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본 회의의 주요 목적은 앞으로 KOTRA가 어떤 역할을 해나갈 것인가 하는 것입 니다. 금년은 특히 세계적으로 29개국의 정상이 바뀌는 해입니다. G20, 유로존 11개국 정상이 교체되며 우리나라에서도 총선과 대선이 실시됩니다. 정부 정책의 원활한 작동을 기대하기 어려우며, 우리에게 항상 민감한 문제인 북한 문제까지 포함하면 힘겨운 해가 될 것으로 예상이 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 수출진흥기관인 KOTRA의 역할은 더욱 중요합니다. 일면 절박한 심정으로 회의를 소집한 측면도 있습니다. 따라서 KOTRA의 조직, 업무 등 내외부의 활동과 위상에 대해 날카로운 의견을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인교 KOTRA는 무역투자 진흥기관이지 정책부서가 아닙니다. 정책 수립에 대해 관 여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역할 외의 문제이며, 어떻게 정책을 잘 수행할 수 있는지에 대해 연구를 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나라는 선진 통상국가 구축을 위해 많은 노력 401 Ⅲ. 지상 좌담회

402 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무역 1조 달러, 수출 7위, 무역 5위 국가로 도약하는 등 외 형적으로 많은 성장을 이뤘습니다. 그러나 외형적 성장에 상응하는 내형적 성장까지 이뤄졌는가, 이 부분을 생각하면 의구심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내실을 다지기 위해서는 우선 국민들의 통상 마인드가 선진화 되어야 합니다. KOTRA가 여기에 기여할 부분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통상의 중요성은 계속 강조될 것입니다. 통상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더 이상 WTO와 배치되는 국내법이 제정돼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나라의 농업, 중소기업 관련 규제는 통상대국에 걸맞지 않는 부끄러운 내용이 많습니다. KOTRA가 이 부분에 대해서 직언은 어렵더라도 간접적으로나마 의견을 제시하는 역 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여태까지 많은 FTA 체결이 이뤄졌으나 아직 적극적으로 활용이 되고 있다고 보 기에는 힘든 상황입니다. 우리는 FTA 허브 국가로 성장해야 합니다. 국내에서 제품 을 제조하면 무관세로 해외에 수출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해 적극적으로 투자를 유치 해야 합니다. FTA 허브국가 실현을 위해 KOTRA는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또한 중국을 포함한 신흥시장 관리에도 만전을 기해야 하고, 기존의 시장점유율 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특히 미국, EU 등의 선진시장과의 FTA 체결로 인 한 영향에 대해 많은 고려가 필요합니다. KOTRA의 보고서는 글로벌 트렌드를 한눈에 보여주는 것이 가장 큰 강점입니 다. KOTRA의 브랜드는 글로벌입니다, 지엽적인 정보라 할지라도 글로벌 시각에서 다뤄져야 합니다. 누가 보더라도 KOTRA라는 브랜드가 글로벌을 대상으로 한 브랜 드라는 점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사회 KOTRA의 브랜드가 글로벌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은 깊이 생각해봐야 할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심영섭 저는 현재의 시점에서 KOTRA의 역할을 수출진흥에서 국가진흥으로의 변화 를 모색하면 어떨까 제안합니다. KOTRA의 역할이 국가 브랜드(Marketing of Nation) 제고로까지 확대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KOTRA는 상품 위주의 시장 접근을 위주로 활동해왔습니다. 그러나 포스트 1조 달러 시대에는 이전처럼 시 장으로 상품을 도착시키는 것만을 목표로 해서는 지속가능성을 확보할 수가 없습니 402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403 다. 이제부터는 국가 전체를 마케팅해야 합니다. 외국에서 활약하는 여러 기관들이 자 기 영역에는 충실하지만, 전체적인 코디네이션 기능은 부족하며,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은 KOTRA만이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교역규모 정도면, 이제부터는 포용력을 가져야 할 시점이라고 봅니다. 이에 관한 벤치마킹 대상 국가는 홍콩입니다. 홍콩은 대륙과 해양, 동양과 서양, 전통 과 현대, 실물과 금융, 영어 중국어라는 G2의 언어, 고부가가치 산업, 뛰어난 고등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Doing biz 평가, IMD평가가 높고 글로벌 기업의 본사 가 많습니다. 상사 중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는 점도 홍콩의 강점입니다. 이는 비즈니스 측 면에서 신뢰의 상징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홍콩에서 내려지는 상사 중재는 모든 글로벌 시장에서 통할 수 있다는 신뢰가 시장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입 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측면이며, 현재 삼성동 무역센터에 조그맣게 설치돼 있는 우 리 상사 중재 역할과 극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인력 차원에서는 전문가 양성이 중요하나, 이미 양성된 전문가를 국가적 전문가 로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15년여 독일어권 국가에서 근무한 경력을 갖고 있는 전 문가를 KIET에 초청해 강연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이 분으로부터 간부진급에 오 르게 되면 이전까지 쌓아온 모든 노하우를 포기하고 이전의 경력과는 완전히 단절된 다른 보직을 맡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굉장히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런 체제가 잘못됐다기보다는 오랜 현장경험을 통해 어렵게 쌓은 전문지식을 국가적 으로 자산화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부분도 KOTRA의 중요한 임무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정보 소프트웨어 분야는 마케팅 활동에 전문성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KOTRA의 담당자는 행정전문가입니다. 삼성 등의 기업은 소프트웨어 전문가를 영입 해 이런 점을 보완하고 있습니다. KOTRA도 전문가 영입과 신입사원 역량 강화 등을 통해 소프트웨어 전문가 육성을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 KSP(Knowledge Sharing Program) 사업과 관련해서는 일부 냉소적인 반응도 있지만, 대외적인 국가 위상강화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나라를 10대 교역대상국으 로 여기는 국가는 총 52개국이며, 이들은 한국으로부터 제품교역 이상의 역할을 기대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충족시키는 것이 국가 브랜드 제고이자, 코리아 프리미엄을 실 현하는 길입니다. KSP를 통해 개발도상국에 물고기를 잡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 가능합니다. 먼저 403 Ⅲ. 지상 좌담회

404 공여국의 입장을 이해하여 한국이 한국형 무역 성장전략을 통해 최빈국에서 무역선 진국으로 성공한 경험을 갖고 있는 나라, 개발도상국의 경험을 바탕으로 선진국으로 진입한 나라, 농업국에서 산업국으로, 수원국에서 원조국으로 변신한 나라라는 점을 알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협력 파트너로서 한국의 신뢰를 쌓는 필요조 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우리는 파트너 국가에서 IT강국, 지속가능한 성장을 모색하는 나라, 혁신 모멘텀과 변화의 방향을 잘 찾아가는 나라로 인식되어야 하며, 수원국이 이러한 같은 경험을 가지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스마트 통상전 략입니다. 또 이러한 맥락에서 KSP를 KOICA 등에게만 맡기지 말고 KOTRA가 직접 나서 야 할 것입니다. 다시 강조드리지만 우리는 스마트 통상으로 혁신을 나누는 교역국가 가 되어야 합니다. 사회 두 분 말씀으로 모든 내용이 거의 다 나온 것 같습니다. KOTRA는 무역투자, 통상을 위한 국가 인프라 기관으로 발전해나가야 한다는 것이 현재의 구상입니다. 국가 인프라 기관이라는 관점에서, 무역관이 KOTRA만의 것인가 하는 점도 생각을 해봐야 할 것입니다. 유관단체가 해외지부 설립, 프로젝트 수행 등을 위해 협조를 요청해올 때 KOTRA가 앞장서 도움을 줄 수 있어야 진정한 인프라 기관의 위상을 구축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인원과 예산의 제약이 있는 만큼 모든 역할을 KOTRA가 수행할 수는 없습니다. 업무를 무제한적으로 늘이는 것보다는 새로운 역할을 위해 어떤 업무를 덜어낼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어차피 대기업은 글로벌 시장에서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을 만큼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중소기업의 무역역량을 보완하는 것이 애초에 KOTRA를 설립한 취지이며, 앞으로의 방향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아예 KOTRA는 중소기업을 위한 기관 이라고 못 박고 나가는 것이 현재 요구되는 방향에 적합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또 KOTRA가 방산센터, 자원개발 업무도 수행하고 있습니다. 개발도상국 관련 업무를 하다보면 G2G가 많이 요구되기 때문에 KOTRA가 일부 역할을 맡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할 때 진흥기관 성격을 띠고 있던 KOTRA가 개발기관으로 전환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갖고 있습니다. 실제로 교역 상대국의 요구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404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405 중남미나 중앙아시아 등지를 가보면 일본의 종합상사들이 우리가 필요한 부분을 연결시켜주는 등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종합상사 기능의 일부를 KOTRA가 수행함으로써 그 공백을 메워줘야 할 것입니다. KOTRA는 성과평가를 잘하는 기관으로 분류됩니다. 다시 말하면 실제 해외무역관 업무에서 KOTRA의 성과가 실제 업체의 수요보다 우선시되다 보니, 평가에 기여가 별로 안 되는 업무는 기업이 필요하더라도 배제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과평과에 대한 별도의 코멘트가 필요합니다. KOTRA는 650여 명 정규직 외에 무역관 현지직원의 수가 훨씬 많습니다. 보직을 순환하는 본사 직원의 공백을 대체할 수 있는 중요한 자원이 바로 현지직원입니다. 어떻게 이들을 활용하는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전문직, 경력직의 채용과 활용도 중요합니다. 종합상사 경험이 많은 남택운 상무님께서 이 부분에 관해 조언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남택운 지난 50년 동안 KOTRA는 필요한 조직을 갖췄고, 이를 기반으로 각 분야에 걸 쳐 지원 서비스를 충실하게 수행해왔습니다. 그런데 뭔가 핵심이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조직은 달려갈 방향이 필요합니다. 서비스만 갖고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 습니다. 이 조직이 과연 무엇을 갖고 먹고살아야 하나, 생각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말 해 수익성입니다. 조직체는 스스로 생존할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이 돼 있어야 합니다. 해외, 국내 각 조직체별로 수익성 창출을 위한 방향을 설정한다면 KOTRA는 향후 50년 동안 과거의 몇 배에 해당하는 획기적인 변화가 가능할 것입니다. KOTRA에는 이미 하드웨어가 완비돼 있습니다. 그러나 먹고살기 위한 소프트 웨어가 없습니다. 계속 국민의 세금만 갖고 살아갈 수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저는 언 젠가 분명한 한계에 부딪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목표를 향 해 달릴 때 조직원들은 열정과 보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창립 50년을 맞아 사장님께 서 그런 방향을 설정해주시기를 바랍니다. KOTRA의 수익성이 확보된다면 이를 통해 중소기업 지원을 더욱 강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현재 KOTRA는 예산의 제약으로 중소기업이 원하는 모든 것을 지원 할 수 없습니다. 수익성 강화가 전제될 때 조직원들이 더욱 융통성을 갖고 업무에 임 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재미와 보람을 느낄 것입니다. 직원이 실질적으로 사업을 해봐야 합니다. 직접 사업을 하지 않고 중간에서 다리 405 Ⅲ. 지상 좌담회

406 나 놓아주는 서비스 선에서 끝낸다면 창의적인 업무처리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쉽게 말해 장사를 해봐야 어떻게 팔지를 고민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공사로서 공익성 의 배치는 차후의 문제입니다. 일단 수익성 창출을 목표로 두시면 분명히 좋은 결과 가 나타날 것입니다. 현지직원 문제에 대해서는 우선 대우나 삼성의 사례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 다. 기업이 글로벌화하려면 본사부터 글로벌화를 해야 합니다. 대우의 경우를 보면 해외지사 우수 현지 조직원을 선발하여 본사로 파견을 보냅니다. 이를 통해 본사는 본사대로 해외 파견 전 직원들이 현지인들과 협력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 문에 조직원들의 글로벌 콘셉트를 만들 수 있습니다. 본사에 오는 현지인은 현지인대 로 더욱 큰 애사심을 갖게 됩니다. 이종재 KOTRA 업무 영역의 재구성 측면을 생각해 볼 때 교역확대라는 것이 상품서비 스만이 아닌 인력 측면에서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최근 FTA가 속속 체결되면서 자격 증 상호인증제가 시행되고 있습니다. 최근 동남아에서는 한국에서 자동차 서비스 자 격증을 땄다는 간판을 걸기만 해도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합니다. 국내 인력 중에 자 격증을 가진 사람이라면 해외에서 충분히 통할 수 있으며, 그런 것을 KOTRA가 같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76개국 116개 무역관이 있습니다. 76개국에 나와 있는 KOTRA가 현지에서 자료를 수집하고, 한국 사람들이 와서 할 수 있는지를 파악한다 면 일자리 문제 해결에 충분히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영섭 박사님의 스마트 통상전략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제일 반가웠던 부분 이 제가 하고 있는 SR(Social Responsibility, 사회공헌)에 관한 언급이었습니다. 최근 KOTRA 사이트를 보면 각 무역관에서 각국에서 이뤄지고 있는 CSR 현황 을 많이 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런 것도 하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 니다. 각 국가들의 요청이 있을 때 KOTRA가 중심이 되어 현지에 나가 있는 기업들을 연계, 사회공헌 사업을 전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격 제고를 위해 KOTRA는 충분히 역할을 할 수 있고, 모든 국가와 기업이 그 방향으로 가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국내외적으로 양극화 현상에 당면해 있는 현 상황에서 과연 기업들이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해외 진출한 국내기업들이 얼 마나 자리 잡게 하느냐, 모든 것이 KOTRA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낙균 최근 이뤄지고 있는 변화의 큰 틀은 새로운 녹색산업, 중소기업, 새로운 40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407 글로벌 네트워크, 이 세 키워드를 잇는 변수가 있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중소기업들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어떻게 뒷받침하느냐 하는 것이 앞으로를 위한 KOTRA의 가장 큰 숙제라고 할 때 통합형 무역형 기업으로서의 변신과, 중소기업 쪽을 완전히 점령 하는 무역투자 지원기관으로서의 변신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를 조금 발전시켜 보면, 최근 ODA 화두가 앞으로 5년, 10년 동안 클 것이기 때문에 무역투자에 ODA(공적개발원조)를 더하는 융합형 지원기관의 과정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개발도상국의 니즈를 파악하는 데 강점을 갖고 있는 KOTRA가 국가별 협력업 무를 잘 수행해나갈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중소기업과 관련해서는 외부 유망기업 및 성공사례와의 비교가 중요합니다. 특 히 인재의 육성, 중소기업의 육성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의 젊은 인턴들을 6개월 정 도 해외에서 연수, 훈련시키는 프로그램도 가능할 것이며, 한국의 시장과 산업에 관심 이 있는 외국인들을 현지 KOTRA에서 육성하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 을 것입니다. ODA관련해서는 KOTRA Peace Corps 를 조직, 외국시장을 타깃으로 하여 중 소기업을 창업하고 싶어하는 한국의 젊은이들을 외국 현지에 내보내 니즈를 파악하 도록 하는 활동 등을 연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임채운 지금까지 우리가 해왔던 방식을 국가적, 구조적으로 바꿔야 하는데 여기에 KOTRA의 궁극적인 역할이 있습니다. 양적인 확대보다는 질적인 고도화, 다변화, 균 형화가 필요합니다. 1조 달러 달성의 내용을 보면 대표적인 것이 불균형 입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중화학공업, 대기업, 7대 주요품목, 주요시장, 완제품에 지나치게 편중돼 있습니다. 이에 양극화 문제의 심각성도 대두되고 있습니다. 과거 수출성장 시대에는 낙수효과가 있어서 수출이 증가할수록 내수나 서민경제, 고용에 효과가 나타났으나 지금은 그게 차단돼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정부의 정책에도 그 원인이 있습니다. 환 율, 금리 등이 대기업의 수출에만 일방적으로 유리한 상황을 조성한 데서 온 결과입니 다. 그 결과 내수나 서민경제가 피폐해지고, 고용이 감소했으며, 중소기업의 이익이 적어졌습니다.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2조 달러 달성이 바람직한가를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하는 데, 여기서 KOTRA의 기여도, 혹은 무용론이 대두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역 1조 달러를 달성하는 데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LG화학 등 대기업의 기여가 결정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한 KOTRA의 기여도는 과연 얼마만큼이나 됐 407 Ⅲ. 지상 좌담회

408 을까요? 독자적인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중소기업 수출에 KOTRA가 얼마나 기여했 는가, KOTRA가 없었더라면 이러한 실적은 과연 불가능했는가, 하는 점을 냉정히 따 져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KOTRA의 역할은 과연 무엇인가요? KOTRA의 현재 주력 사업분야는 수출진흥 과 외국인투자유치입니다. 이는 모두 마켓에 대한 접근(access), 자본(money)에 대한 접근(access)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보다 광범위하게 확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켓이 나 머니 네트워크를 넘어 리소스 네트워크, 리소스플랫폼으로 바꿔나가는 것을 제안 합니다. 사실 시장이나 투자에 대한 광범위한 네트워크가 필요한 이유가 전부 리소스 때문입니다. 정보, 지식, 기술, 돈, 서비스, 자원, 인력 등의 리소스가 있으며, 이러한 리 소스를 필요로 하는 곳들을 연결하는 것이 KOTRA의 역할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초점은 글로벌 유망산업과 관련한 중소기업, 또는 벤처기업에 대한 지원입니다. 수출유망 중소기업을 발굴해 인큐베이팅하고 컨설팅할 수 있는, 중 소기업의 글로벌 역량을 극대화해줄 수 있는 기반을 KOTRA가 마련해줘야 합니다. 중소기업이나 중견기업의 가장 큰 어려움은 자본이나 기술이 아닌 사람입니다. 제품이나 기술이 글로벌 스탠더드에 도달했다고 해서 글로벌 기업이 될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구성원들의 마인드도 중요하고, 기업문화도 중요하고, 이를 뒷받침하 는 매니지먼트도 중요합니다. 문제는 우리 중소기업이 그런 인력을 구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평범한 대졸인 력이 중소기업을 기피하는 마당에 글로벌 능력을 갖춘 고급인력이 중소기업을 선택 할 리가 만무합니다. 이 부분에서 현지인력과의 연계가 필요합니다. 사실 해외에서 공부하고 있는 우리나라 2세 인력 중에 대학을 마치고도 취업을 못하고 있는 인력이 아주 많습니다. 이런 인력들을 KOTRA 무역관에서 인턴이나 직 원으로 고용해 1년 정도 글로벌 콘셉트를 갖추게 한 후 중소기업에 연결을 해줌으로 써 고용을 유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만 잘 이뤄진다면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글로벌 인 력을 구할 수 있고, 일자리를 찾고 있는 인력의 입장에서는 우리나라의 경쟁력 있는 중소기업에서 커리어를 개발할 수 있습니다. KOTRA의 역할이 반드시 필요한 부분 입니다. 이학노 KOTRA 이름의 무역 을 보면, 수출을 무역(Trade)이라고 이름을 지었을 뿐 실 제로 대부분의 업무는 수출 위주입니다. 하지만 수입도 중요합니다. KOTRA가 앞으 로 Sustainable Trade 를 실현해나가기 위해서라도 수입 쪽, 특히 값싸고 좋은 수입 40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409 소재 부품 영역을 집중적으로 연구해야 합니다. 현재 수출 쪽의 한 길로만 달려왔지만 수입 쪽도 질 좋은 수입을 해야 하고, 그것을 KOTRA가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인바운드 투자에만 주력하고 있는데, 양쪽 바퀴가 잘 맞아 돌 아가기 위해서는 아웃바운드에도 투자가 필요합니다. KOTRA가 이름 그대로 무역 투자를 잘 풀어서 수출뿐만 아니라 수입, 인바운드 투자뿐만이 아닌 아웃바운드 투자 에도 신경을 써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또한 KOTRA는 중소기업의 종합상사를 지향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해외 지사화 사업도 하고 있으나 시대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무역규모가 1조 달러 시대를 넘어 2조 달러 시대로 들어서고 있기 때문에 중소기업의 종합상사화를 지향하겠다는 슬로건이 필요합니다. 해외에서 열리는 박람회나 전시회의 내실화에도 역량을 기울여야 합니다. 또 전 국적으로 무역학과 교수들이 많은데, 무역학과 교수들과의 네트워크 구축에도 역할 을 해줬으면 합니다. 오준석 공적 통상진흥기관으로서의 경쟁력과 관련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 다. KOTRA가 모든 일을 다할 수는 없습니다만, 경우에 따라서는 다해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이에 KOTRA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잘할 수 있는가를 우선 파악해 야 하며, 잘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핵심역량을 구축해 유지할 수 있도록 중장기 적인 투자와 관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역량의 한계를 넘어서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는 아웃소싱 네트워크를 체계적으 로 구축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긴급한 일과 중요한 일이 동시에 발생했을 때, 긴급 한 일 때문에 중요한 일이 점점 뒤로 처지게 되는 이른바 사이먼(Simon)의 법칙 을 늘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아웃바운드 교역과 관련해서는 우리 기업들의 해외투자가 산업공동화로 이어지 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국내에 COI(Cluster of Innovation)를 구축하는 것이 우선적 입니다. 또 인바운드 교역과 관련해서는 rebound investment 나 round trip investment 등 국내로 돌아오는 기업에 대한 유치활동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외국기업들에 대해 한국이 FTA의 허브라는 인상을 줄 수 있어야 하며, 이것이 가능 하게 하는 핵심적인 사항은 제도의 경쟁력(regulation competitiveness)입니다. 세계 전역에 설치돼 있는 무역관은 국제조세 가이드의 기능을 가질 필요가 있습 니다. 해외에 진출한 국내기업들의 생산시설과 사업장 증대에 따라 국제조세분쟁이 409 Ⅲ. 지상 좌담회

410 증대하고 있으며, 해외투자 시 현지국 정부와 전략적인 조세협상을 할 수 있도록 KOTRA가 충분한 역할을 해줘야 할 것입니다. 우리 기업들이 outbound investment 를 하는 과정에서, KOTRA가 tax strategy 를 지원하고, 객관적으로 절차를 기록, 관리하는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수요는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형성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서비스교역 비중에 대한 관리와 관련해서는 우리나라 국제수지 구조를 볼 때 서 비스교역 비중이 낮기 때문에 이에 대한 견제와 압력이 들어올 것이 분명하므로, 우리 입장에서 교역규모를 성장시킬 수 있는 동력으로 활용하려는 방안이 필요합니다. 주 요 항목은 금융서비스, commercial service, 관광 등으로 구성돼 있으며, 문화나 국 가 브랜드 마케팅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ODA의 통상전략적 연계도 필요합니다. 청년 창업, 퇴직자들의 경험과 축적된 지식자원을 국제교류에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하며, 다문화가족 구성원들의 인적교 류를 통해 글로벌 브레인화를 추진할 필요도 있습니다. 410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411 2차 경영자문위원회 서비스산업의 국제화 전략 외 일시와 장소 2012년 2월 16일 KOTRA 프라하실 참석자 곽재원 부회장(한국과학기술단체 총연합회) 김시범 교수(안동대학교) 남영숙 교수(이화여자대학교) 문휘창 교수(서울대학교) 심영섭 선임연구위원(KIET) 안세영 교수(서강대학교) 안현실 논설위원(한국경제신문) 이만우 교수(고려대학교) 이영상 대표이사(데이터스트림즈) 이장우 교수(경북대학교) 이종재 소장(한국SR전략연구소) 이창양 교수(KAIST) 임채운 교수(서강대학교) 유관희 교수(고려대학교) 오영호 KOTRA 사장(사회) 사회 금년 6월 21일은 KOTRA가 창립 50주년을 맞는 날입니다. 이를 기해 지금까지 추진해왔던 주요 사업들의 내용과 성과를 살펴보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함께 고민해보기 위해 이렇게 자문위원님들을 모셨습니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우리 공사에서 준비한 주제발표부터 들으신 후에 관련된 조언을 받는 형식으로 진행하겠습니다. 금일 회의 이후부터는 분기 1회 정도 자문회의를 꾸준히 개최해서 지속적으로 위원님들의 자문을 구하고자 합니다. 411 Ⅲ. 지상 좌담회

412 주제발표 : 서비스산업의 국제화 전략(이태식 단장) 사회 지난 5년 동안 우리나라의 무역성장률은 평균 7%선이었습니다. 그런데 2020년까지 목표로 하고 있는 2조 달러 달성을 위해서는 9% 이상의 무역 성장이 필요합니다. 현실과 목표 사이에 약 2% 정도의 격차가 있는 셈입니다. 이를 메우기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우리는 서비스산업의 국제화와 수출 중소기업 비중의 증가 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공사가 미처 보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안현실 우리 무역에는 2조 달러 달성이라는 명확한 목표가 있습니다. 수치적인 목표는 정해졌으니 내용을 다듬는 작업이 필요해 보입니다. 예를 들어 무역증가를 통한 경제 성장, 경제성장을 통한 소득증가 등으로 논리를 정리하면 국민의 공감을 보다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서비스산업의 국제화에 관해서는 우선, 우리 서비스산업은 경쟁력이 떨어진다 는 시각부터 바꿔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식의 접근은 서비스 분야의 반 발과 저항감을 불러일으키기 쉽습니다. 오히려 우리 서비스산업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 해볼 만하다. 적절한 개방을 통해 더욱 강화시켜야 한다 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 이 낫다고 봅니다. 실제로도 우리 서비스산업의 수준은 결코 낮지 않습니다. 제조업 에 체화돼 수출되는 서비스는 이미 상당한 수준입니다. 사회 아주 정확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공감이 갑니다. 저뿐만 아니라 공사 전체의 시각이 지금 하신 말씀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여러 가지 자료 가운데 일부만 뽑아서 말씀드리다 보니 공사의 시각이 충분히 설명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김시범 서비스산업의 국제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문화 콘텐츠 그 자체를 수출하는 데 포커스를 두는 것보다는 그로 인해 1, 2차 산업이 어떤 긍정적인 효과를 볼 수 있는가, 이것을 살펴보는 것이 KOTRA 입장에서는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쌀이 대장금 이라는 브랜드로 대만에 수출된 적이 있지 않습니까? 문화 콘텐츠와 재화가 함께 진출하면서 시너지효과를 만들어내는 이런 부분은 KOTRA가 강점을 가질 수 있는 분야입니다. 412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413 그리고 기업의 신입사원이나 신임 발령자에 대한 지식서비스산업 교육을 강화할 필요도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기관과의 협력도 매우 중요하죠. KOTRA의 강점을 잘 활용해 업계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현실적인 정책을 만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이영상 우리나라는 그동안 대기업과 제조업 위주의 경제성장을 해왔습니다만, 이로서 는 한계가 너무 명확합니다. 앞서 사장님께서 현실과 목표 사이에 2%의 격차가 있다 고 설명하셨습니다. 이를 지식서비스와 같은 미래형 산업으로 보충해야 한다는 공사 의 판단은 매우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K-팝을 위시한 한류붐이 체감상 엄청난 것 같지만, 정작 이익을 내기 시 작한 것이 불과 2년 전부터라는 SM엔터테인먼트 이수만 사장의 이야기에도 주목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지식서비스산업 인프라는 상당히 척박한 편입 니다. 불법복제 문제를 비롯한 지적재산권 보호의 문제, 불공정한 거래 관행 등 개선 하고 보완해야 할 난제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모든 산업이 다 마찬가지입니다만 인프라와 여건이 잘 정비돼 있지 못하면 소득 증가나 고용창출로까지 이어지기가 힘듭니다. 특히 지식서비스산업은 날이 갈수록 타 산업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소프트웨어의 지원을 받지 못 하는 삼성이 애플이나 구글을 이길 수 있을까요? 전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자칫 잘못 하면 이제껏 힘들게 쌓아온 제조업의 경쟁력까지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KOTRA는 무역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인프라 구축에도 역량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곽재원 KOTRA의 역할은 무역정책을 추진하는 것인데 서비스산업의 지원책을 보면 산업 자체에 대한 정책도 많이 실행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혹 다른 기관과의 관계 설 정에 어려움이 없지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심영섭 그렇습니다. KOTRA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KOTRA가 할 수 있는 일,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중점적으로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다른 위원님들도 지적을 하셨지만, 제조업만 갖고서는 무역 상대국이나 국민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어렵습니다. 제조업에 체화된 서비스에 경쟁력이 있다고는 해도 사실 관련통계가 분리돼 나오고 있지도 않습니다. KOTRA가 우리 서비스산업의 해외진출 총괄기관으로서 역할을 준비하고 있는 것 413 Ⅲ. 지상 좌담회

414 으로 압니다. 이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하는 노력도 병행해야 합니 다. 우선 내수시장을 글로벌화하는 것부터 신경을 썼으면 좋겠습니다. 해외의 고객들이 한국 시장에 진입하는 데 불편한 점은 없는지 항상 모니터링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또 장기적으로는 KOTRA가 앞장서서 서비스산업 관련요원을 양성하는 체제를 갖춰야 합니다. 서비스산업이란 신뢰와 문화를 파는 것이라고 보면, 핵심역량은 결국 사람에 달려 있습니다. 이장우 지식서비스산업에서 내수시장의 글로벌화가 중요하다는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 합니다. 국내와 해외를 구분하지 않고 같은 선상에서 글로벌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이 지식서비스산업이고 이를 국제화하기 위해 어디에 우선적으로 집 중해야 하는지 전략을 구체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분야별로 특성에 맞는 글로벌 전략 의 수립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사회 여러 자문위원님들의 의견 감사드립니다.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앞서 안건과 같이 주제발표를 진행하고 의견을 듣겠습니다. 주제발표 : 다문화사회로의 전환 과제(김두영 실장) 사회 우리는 이미 다문화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문화 인력은 이미 국가적으로도 매우 중요하고 소중한 자원입니다. 이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더불어 100여 개에 이르는 해외무역관의 효율적 활용에 대해 의견을 구하기 위해 발제를 준비했습니다. 심영섭 : IMD의 세계 경쟁력 보고서에 한국의 문화적 개방성을 조사해 수록한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총 55개 조사 대상국 가운데 2006년부터 2008년까지 3년 동안 55위를 기록했습니다. 2007년 8월에는 UN의 인종차별철폐위원회에서 우리나라에 게 단일민족 국가 이미지 극복을 위한 조치를 취하도록 권고한 적도 있습니다. 모두 가 표면적으로는 다문화사회로 이동하고 있지만 사회 깊숙한 곳에서는 이를 인정, 또 는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들입니다. 브라운 대학 경제학과의 오디스 겔러 교수는 2008년 한 세미나에서 이런 발언을 한 적이 있습니다. 414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415 기술적 경제적 체계 전환이 이뤄지는 시기에는 문화적 다양성이 사회에 미치 는 영향이 커진다. 지난 수십년 간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의 발전 과정에서 는 문화적 동질성이 큰 도움이 됐지만, 앞으로의 전환기에는 오히려 약점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도 비슷한 발언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이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끼어 있는 샌드위치 신세에서 벗어나 산업선도 국가 로 나아가려면 세계와 협력을 해야 한다. 해외 무역관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어떻게 하면 문화적 동일성과 다양성을 모 두 강점으로 활용할 수 있는, 하이브리드 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지 연구해야 한다 고 봅니다. 대륙과 해양,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중국어와 영어 등 G2 언어의 일상 화, 글로벌 보편성과 지역적 특수성, 물류와 중계를 통한 부가가치 창출. 여기에 뛰어 난 기업환경과 혁신역량이 결합돼 높은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는 홍콩의 사례를 적극 적으로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습니다. 안세영 서강대 국제대학원에서는 현재 40여 개국에서 온 100여 명의 학생들이 공부하 고 있습니다. 이 다문화 인재들은 졸업 후 종합무역상사에 취직해서 중국이나 베트 남, 우즈베키스탄 등의 지사로 나가 활약합니다. KOTRA에서 이런 인재들을 인턴십 으로 활용해 교육을 실시한 후 현지 무역관에서 활용하도록 한다면 굉장히 효과가 클 것입니다. 사회 굉장히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당장 KOTRA에서 실천할 수 있는 방안 같습니다. 문휘창 : 우선 근본적인 논리와 체계부터 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의 경제발전을 대전 제로 보면 국제화는 이를 위한 첫 번째 수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차 산업의 시 대를 지나 2차 산업의 시대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KOTRA의 역할이 굉장히 좋았습니다. 이게 꾸준히 이어졌어야 하는데 2차 산업의 발전에서는 고용이 배제된 성장이 돼버렸습 니다. 따라서 이를 만회하기 위한 전략, 즉 고용과 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사 냥할 수 있는 돌파구가 서비스산업이라는 논리를 개발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예전에 제조는 우리나라의 대우가 하고, 금융과 법적인 문제만 미국 현지의 회사 가 맡아 해결했던 차종이 있었습니다. 이 비용이 무려 자동차가격의 3분의 1에 달했 습니다. 이 정도로 제조업에서도 서비스 비중이 큽니다. 415 Ⅲ. 지상 좌담회

416 국제화는 상품의 국제화(무역), 생산요소의 국제화(해외투자), 사람의 국제화 등 3단계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단계별 국제화에서 첨병 역할을 하는 곳이 바로 KOTRA입니다. 역할이 정말 막중합니다. 사회 상당히 정리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의견 감사합니다. 이만우 KOTRA에서 주로 이야기하는 서비스산업은 대체로 서비스와 관련된 콘텐츠 혹은 재화에 가까운 것들로 보입니다. 국제화의 대상이 되는 서비스산업의 콘텐츠를 좀 더 정교화시킬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문화와 관련해 한 말씀 드리자면 요즘 대학생들로부터 각광을 받는 프로그램 으로 LG 글로벌 챌린저 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를 벤치마킹해서 KOTRA가 아웃바 운드로 우리 상품을 해외에서 어떻게 판매하고 있는지 조사할 수 있도록 국내 대학생 을 지원하고, 인바운드로는 자국에서 한국의 상품을 어떻게 판매하면 좋겠다는 제안 을 갖고 있는 해외 현지의 대학생을 지원하는 식으로 운영한다면 굉장히 획기적인 프 로그램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창양 서비스를 구분해서 공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선 존재 형태에 따라 스탠드 어론(Stand alone) 서비스와 임베디드(Embeded) 서비스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스 탠드어론 중에서도 우리가 외국에 직접 공급할 수 있는 서비스가 있고, 우리나라로 고객을 불러들여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도 있습니다. 이렇게 크게 세 가지로 나눠 여 기에 맞는 전략을 세우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서비스는 전적으로 경험재이고, 내구재입니다. 따라서 무조건 내다 판다는 자세 보다는 고객이 더 많이 체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겠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Human to Human 채널을 만들어 가능한 경험을 확산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또 장기적으로는 우리의 문화, 사회의 매력을 높여야 합니다. 이를 통해 창조계 층(Creative Class)을 유인해야 합니다. 임채운 우리나라에는 서비스산업과 관련된 전문기관이 많습니다. KOTRA는 그런 기 관들과 경쟁을 하는 게 아니라 그곳의 전문가를 데려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 다. 이게 무슨 말씀인가 하면 KOTRA의 강점은 마켓과 고객에 있습니다. 따라서 서 비스산업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해외의 시장과 고객을 찾아내고 이를 국내의 기업 41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417 에 연결해주는 역할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전문기관들과 협력을 하면 서비스 프로세 스와 시스템을 얼마든지 공유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를 잘 연결해주는 것만으로도 큰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사회 자문위원들의 고견에 감사드립니다. 마지막 주제에 들어가볼까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 공사가 올해 50주년을 맞았습니다. 이를 기념해 국제 컨퍼런스를 개최하고자 합니다. 잠시 설명을 듣고 관련 논의를 진행하겠습니다. 주제발표 : 50주년 기념 컨퍼런스 프로그램(한선희 실장) 안세영 우리 무역의 미래라고 하면 중국과의 연관성을 빼놓을 수가 없는데 세미나 계 획에 관련 내용이 보이지 않습니다. 안충영(옴부즈만) 적절한 지적이십니다. 신흥시장 부상과 FTA 확산에 대한 한국의 대 응 이라는 주제 속에 BRICs 내용이 포함돼 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남영숙 거시적인 관점에서 한국 무역의 진로와 KOTRA의 역할을 좀더 자세하게 정리 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다른 나라, 특히 개발도상국들과의 상생관 계 구축을 모색하는 세션이나 연설을 포함해야 전체적인 균형도 맞추고, 컨퍼런스의 취지도 잘 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안현실 KOTRA 창립 50주년 기념 국제 컨퍼런스 라는 행사명 자체가 KOTRA의 내 부 행사 같은 느낌을 줍니다. 한국 무역 50년, KOTRA 50년 국제 컨퍼런스 정도로 조정하면 행사의 취지와 규모를 더 잘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회 의견 감사합니다. 준비된 주제에 관한 논의는 이 정도로 마치고 좀 더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다양한 주제를 다뤄보면 어떨까 합니다. 서비스산업은 소분류가 113개에 이릅니다. 80여 개 정도로 분류되는 제조업에 비해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습니다. 여러분들께서 지적해주신 것처럼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분야입니다. 여기에 KOTRA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위원님들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417 Ⅲ. 지상 좌담회

418 유관희 물론입니다. 선택과 집중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고, KOTRA가 주도적인 역 할을 해야 합니다. KOTRA는 시장개발에 많은 노하우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강점 을 갖고 있는 의료산업이나 바이오산업, 건설, 교육 같은 분야에 적합한 시장을 우선 적으로 찾아서 소개해주셔야 합니다. 문휘창 앞서 무역과 투자, 인적교류 등 국제화 각 단계에 대한 차이점에 대해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이를 잘 활용하면 경쟁을 넘어 협력으로 가는 것도 가능합니다. 국제화 1단계인 무역은 필연적으로 긴장을 유발합니다. 생산요소를 이동시키는 2단계 해외 투자부터 협력의 요소가 발생하는데, 3단계 인적교류와 다문화사회 진입부터는 협력 의 가능성과 중요성이 더욱 높아집니다. 개인적으로 일본에서 은퇴한 분들이 각국에서 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일본어를 가르쳐주는 강좌에 참가한 적이 있습니다. KOTRA에서 직접 수행하기 어려운 사업 일 수도 있겠지만, 씨앗을 뿌리는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유사한 노력을 통해 국제화를 3단계의 차원까지 나아갈 수 있는 것은 물론, 분쟁 을 피하고 협력의 토대를 구축할 수 있습니다. 무역은 인바운드와 아웃바운드가 있습 니다. 3단계의 인바운드와 아웃바운드, 총 6개의 셀을 충실히 채운다면 아주 세련된 국제화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구분 무역 투자 인적교류 Out-bound 수출 대외투자 유학/이민 등 유출 In-bound 수입 투자유치 다문화 등 유입 사회 말씀 감사합니다. 무역 1조 달러는 수출뿐만 아니라 우리 시장이 이미 5,000억 달러 이상의 가치를 갖고 있고, 그만큼 세계경제의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특히 최근에는 우리나라의 발전 모델에 관심을 갖는 나라들이 많습니다. 이런 나라들을 시장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협력파트너로 보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우리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전수해주고, 자연스럽게 시장을 키워서 동반 성장할 수 있는 방안이 없을까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41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419 김시범 다문화와 관련해서는 비즈니스 차원에서만 보지 말고 사회공헌의 개념 즉, Human Touch 의 방식으로 접근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JETRO에서는 은퇴한 비 즈니스맨들을 일본에 진출한 기업들에게 멘토로 지원한 적이 있습니다. KOTRA도 해외에서 근무하다 은퇴한 인력을 근무했던 나라 기업의 멘토로 지원을 해준다면 여 러모로 굉장히 의미가 깊고 효과도 좋을 것입니다. 더불어 창립 50주년을 맞아 해외근무자들의 경험을 모아서 정리해보는 사업도 구 상해볼 만합니다. 지난 시절의 경험을 모아 국가별, 지역별로 정리한다면 소중한 경험 을 공유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물론 대상국가에게도 소중한 자료가 되겠지요. 곽재원 일본의 아시아경제연구소는 전후의 세계질서를 연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입 니다. 1998년에는 JETRO에 통합돼 싱크탱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 싱 크탱크가 전략을 짜고 정부가 패키징합니다. 이걸 갖고 JETRO가 선두에 서는 거죠. 흔히 일본이 전만 못하다 하지만 일본 종합상사들의 역량은 아직 막강합니다. 일 본의 무역을 지탱해주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는 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종합상사 와 해운회사들의 역량이 많이 무뎌졌습니다. 무역생명선 3개 중 남아 있는 것은 KOTRA뿐입니다. 일본과 우리의 사례를 비교해보면 생각할 거리가 참 많습니다. 남영숙 아마도 KOTRA라는 현재 패러다임 전환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계신 게 아닌가 생 각합니다. 이러한 상황 인식 하에서 소울서칭(Soul-searching)을 하고 계신데 사실 지금 이 시점이 자본주의의 소울서칭 시기입니다. 굉장히 필연적이고 적절한 고민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경영환경이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경제적 가치 창출은 사 회적 가치 창출로 연결된다 이것이 과연 실현 가능한 명제인지 KOTRA뿐 아니라 우 리나라의 많은 기업들이 증명을 해야 하고, 도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사회공헌은 기업이 사회에 베푸는 시혜가 아닙니다. 기업을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을 만족시키는 차원에서 전개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KOTRA나 외 교통상부가 해야 할 일이 참 많습니다. 이종재 KOTRA가 창립 50주년을 맞아 다문화를 논의의 주제로 삼았다는 것은 굉장 히 시의적절해 보입니다. 다만 국내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해외로도 눈을 돌렸으면 합니다. 우리의 기업들이 세계 시장에서 사랑받을 수 있도록 돕는다면 경제적 효과는 물론이거니와 국격을 높이는 데도 상당히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419 Ⅲ. 지상 좌담회

420 실제로 캄보디아에서는 토요일마다 교복을 만들어 현지인들에게 나눠주는 우리 기업이 있습니다. 정부에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현지 국민들로 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단지 물건을 팔겠다는 생각만으로는 무역 2조 달러 시대를 맞을 수가 없습니다. 국가 전체의 브랜드 가치를 높여야 합니다. 서비스 부문은 정의에서부터 구분이 어렵습니다. 용어 선택도 쉽지 않습니다. 이 에 서비스 수출 활성화 를 보다 쉽게 무역구조의 다양화 와 같은 포괄적 용어로 수용 하면서 세부시행계획을 구성하는 방안을 제안 드리고 싶습니다. 안현실 이코노미스트 지에 이민의 효과(Immigration effect) 라는 사설이 실린 적이 있습니다. 이 사설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1세대 이민자의 수가 2억 명이 넘는다고 합니 다. 국가 내에서 이민자를 적대시하는 이유로 흔히 꼽히는 재정수지의 악화, 임금하락 등은 사실이 아니며, 무역 네트워크의 구축 등에서 오는 긍정적 경제효과가 더 크다는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외국인의 유입은 무역 네트워크의 발전으로 이어집니다. 미국의 경우 전체 인구 의 8분의 1이 이민자이고, 이들이 전체 하이테크 기업의 4분의 1을 창업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KOTRA는 다문화 문제에 더욱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사회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미국의 전 재무부 장관 루빈은 이민자를 받아들여 시민으로 만드는 미국은 항상 젊은 나라다. 그리고 항상 새롭고 힘 있게 나아간다 는 말을 했습니다. 미국과 달리 유럽에서는 이민자를 항상 이방인으로 취급하다 보니 사회 문제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심영섭 우리가 짧은 기간에 고도산업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데에는 KIST 같은 연 구기관의 역할이 컸다고 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혁신역량이 뛰어난 국가에 연구기 관 설립을 지원해주면 어떨까 합니다. 노하우셰어링(Knowhow sharing)이 아니라 이노베이션셰어링(Innovation sharing)을 하자는 것입니다. KSP에서 ISP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KOTRA는 마케팅이나 물류 같은 가치사슬 중 다운스트림(Downstream) 을 주로 지원해 왔습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국내 기업과 해외 기업이 함께 R&D를 수행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준다면 동반성장의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KIST, 생산기술원 등과의 MOU 체결을 통해 적극적인 시도를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420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421 사회 감사합니다. 현재 KOTRA에서는 국내 중소기업과 해외 글로벌 기업들을 연결해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판로개척뿐 아니라 R&D 분야까지 관여하고 있는데 사실 내부의 인력만으로 관련업무를 소화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기술교육대학에서 인턴을 모집해서 이 사업에 투입할 예정이고, 향후 다른 기관과의 협력도 확대해나갈 계획입니다. 소위 오픈 이노베이션(Open Innovation)을 통해 필요한 자원을 외부에서 조달해 사업을 행해나갈 계획입니다. 옴부즈만 해외의 인재들을 연결시켜 주는 것은 KOTRA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반면 KOTRA 내부에도 해외근무를 통해 각국 문화에 대한 이해 기반이 넓은 인재들 이 상당히 많습니다. 이런 인력들도 중소기업을 도울 수 있는 소중한 자원입니다. 서비스 부문에서도 다시 찾고 싶은 나라를 만드는 관광 인프라 구축에 대해 노력 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장우 경제 전략의 차원에서 수출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술적인 측 면에서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과거의 사례를 보면 KOTRA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지만 다른 기관과 협력하는 데는 조금 부족한 면이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KOTRA 외부에도 많은 전문가가 존재합니다. 협력관계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이창양 스페인 IE MBA에 가서 보니 LG같은 기업이 현지에서 상당히 좋은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현지의 우수한 학생들에게 우리의 우수한 문화, 기업의 이미지 를 심어주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면 향후 글로벌 시장에서 우리의 우군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영상 소프트웨어 시장이 굉장히 중요하고 방대한 시장인데 이 분야에 대한 KOTRA 의 인식은 아직 많이 부족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소프트웨어 산업에서도 네트워 크가 중요합니다. KOTRA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관련업계에 지식 서비스산업의 중요성을 분명히 전달하고 협력관계를 구축한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사회 오늘 말씀해주신 내용을 잘 정리해서 앞으로 KOTRA가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는 데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소중한 말씀, 감사드립니다. 421 Ⅲ. 지상 좌담회

422 KOTRA와 코트라맨의 정체성을 찾아서 KOTRA의 탄생 423 KOTRA의 명칭 426 KOTRA의 임무 429 KOTRA와 코트라맨의 역할 432 KOTRA의 정체성과 정체성의 위기 세기가 요구하는 KOTRA와 코트라맨 438 Ⅳ

423 KOTRA의 탄생 1962년 1월 경제기획원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이름으로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계획 (1962~1966년)을 발표했다. 계획 298쪽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한국의 경제, 문화, 교육, 과학, 예술 등 제 분야의 해외선전과 외화획득을 위하 여 외국관광객의 유치 및 국내 주재 UN군을 대상으로 한 불비한 관광시설의 개선 및 신설을 촉진하고 국고보조에 의한 민간사업을 장려하며, 수출진흥 5개년계획 완수를 위하여 수출물자의 수집, 수출부진품목의 개발, 선도적 시장개척 등을 목적으로 수출 진흥공사( 輸 出 振 興 公 社 )의 설립과 그 밖에 국토의 개발, 보전, 이용의 고도화를 기하 고자 국토 전반에 걸친 과학적인 기술조사와 천문 및 대지측량으로 국토의 정확하고 치밀한 국토조사사업을 계획하였다. (5개년계획 6(장) 계획의 부문별 내용, 9(절) 기 타 서비스업, 1(항). 바. 관광 및 기타 사업 298쪽) 한편 서울대 박태균 교수는 그의 저서 원형과 변용-한국 경제개발계획의 기원 에서 제1차 경제개발계획의 뼈대가 이루어지는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1962년 1월 경제기획원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을 발표하였다. 공식적으로 이 계획에는 민주 당 정부 하의 부흥부 재무부 관료, 최고회의 기획위원회, 경제기획원, 한국은행, 학계, 기술계에서 참여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기획국 문서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기본적으로 건설부안(민주당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안)을 토대로 하여 최고회의안과 박정희 명의로 작성된 지침이 계획안의 기본골 간을 이루었다. 즉, 최고회의의 박정희, 유원식 등과 최고회의 의장 자문위원인 박희범, 정소영 등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었다. 당시 최고회의에서 결정한 정책이 상당히 세부적이었기 때문에 관료들이 조정하거나 수정할 내용은 거의 없었다. 경제기획원 안이 일부 최고회의 지도자들의 견해를 그대로 반영했다는 사실은 계획안이 발표되기 직 전인 1962년 1월 8일 박정희의 직접 지시에 의해서 수정 및 조치사항 이 경제기획원에 전달되었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중략) 경제기획원에서 발표한 계획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은 두 가지이다. 첫째로 산업화 전략이 균형성 장론과 수입대체산업화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계획에서 공업화의 목표로 에너지원의 개발, 경제구조의 균형적 개발,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고용의 증대, 수출증대, 기술의 진흥 의 순서로 중 요도를 설정하였다. 공업화에서 주목되는 것은 지금까지 알려졌던 바와는 달리 수출주도보다는 경제 구조의 균형적 개발 이 더욱 중요하게 고려되었다. 산업화 전략에서는 핵심사업에 중점적으로 투자하 는 방식의 불균형성장론을 따르고 있지만, 목표에서는 수입대체산업화와 산업 간의 균형성장이 제시 되었다.(박태균, 원형과 변용-한국 경제개발계획의 기원,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7년 319~321쪽) 423 Ⅳ. KOTRA와 코트라맨의 정체성을 찾아서

424 이보다 5년 이상 앞선 1956년 12월에도 수출5개년계획과 수출진흥요령(안)을 국무회의에 상정한 바 있었다. 의결사항 제10호를 보면 이렇게 적혀 있다. 안건내용 : 재외공관에 상무담당관을 증치하고 월 2면 이상 정기적으로 경제상황을 보고케 한다. 설명 : 별지 12와 같이 재외공관 전체에 있어서 상무관 2인밖에 없으므로 상무를 전담하는 공무원을 증치하여 우리나라 수출상품의 해외선전과 수출시장 조사개척에 종사케 하고자 함. 1962년 4월 11일 대한수출진흥공사법안 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 상임위원회에 공사법이 상정되었다가, 4월 13일 대한무역진흥공사법안 으로 법안명이 수정되어 위 원회에 상정, 통과되었는데, 국가재건최고회의 상임위원회 회의록 제27호( 및 4.13.)의 일부를 보면 참석자들의 다음과 같은 의견 개진이 보인다. 상공부 장관 : 기존 기관과의 연관성에 대하여는 무역협회, 상공회의소, 상역관이 있지만 상공회의소 는 대 중 소 기업체의 육성과 업계의 여론을 정부에 반영케 하는 국내적인 기구이며, 무역협회는 수출입을 통한 해외활동이 실현되고 있으나 수출을 위한 집중적 기구로서는 되어 있지 않음. 일본의 경우에 있어서도 JETRO의 꾸준한 노력의 결과로서 이루어진 것이며 우리의 노력도 총 집중되어야 할 것임. 성창환 고문 : 필요성은 있는 것이나 재정면에서 곤란성이 있다고 생각됨. 무역은 국제시장에서 격렬 한 경쟁을 각오해야 할 것임. 수출뿐만 아니라 수입에 있어서도 꼭 필요한 것이며 국제시장을 신중히 관찰하기 위하여서는 10억, 20억을 쓰더라도 이러한 기관은 필요하며 민간기업을 육성하기 위하여 도 필요함. 무역협회 경우와는 약간 다르다는 것은 국가와 민간의 협조를 이룩하는데 그 성과가 커 질 수 있는 것이며 상역관의 경우는 실업가의 미묘한 동태를 관찰하기 어려울 것임. 김윤근 위원 : 과연 20억의 돈을 들여서 공사를 만들어서 그만한 성과가 있는지. 그 돈을 융자하여 주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 아닌가 생각됨. 반( 半 )공무원들이 과연 20억의 돈에 해당되는 성과를 올릴 만큼 일에 대한 성의가 있는지. 박태준 위원 : 보상금 제도가 현재 얼마나 도움을 주고 있는가 보면 알 수 있지만 이 돈을 민간에 융 자한다는 것은 비효과적일 것임. 상공부 장관 : 타당한 질문임. 일장일단이 있음. 종사할 인원에 대하여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 며 국가이익을 위하여 신중히 연구된 것임. 424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425 국가재건최고회의 상임위원회 회의록 제27호( ) 상공부 차관 : 제22조의 3항 중 무역거래에 관한 정보의 제공에 관하여 무역거래의 알선으로 함이 보 다 능률적으로 사업을 전개할 수 있음으로 원안대로 무역거래의 알선으로 해주는 것이 좋겠음. 이태준 고문 : 알선으로 한다면 중간에서 거래알선을 통한 부러카(broker)같은 인상을 주게 될 것이 라는 의견도 있었던 것이며 제공이라 하여도 못하는 것은 아님. 박태준 위원 : 공사는 Service업을 위주로 한다지만 적극성을 갖기 위하여는 알선해주는 기회를 가 져야 할 것임. 상공부 차관 : 요는 offer같은 것을 취급하고자 하는 것임. 부의장 : 무역거래의 알선으로 하는 것이 좋겠음. 상공부(현 지식경제부 전신)에 재직하다 1962년 6월 6일 KOTRA로 적을 옮긴 장무환 OB는 KOTRA 창설에 산파역을 담당하셨던 분이다. 선배님 말씀에 의하면 1961년 하반기 수출진흥기구가 필요하다는 제안을 일본무역진흥회(JETRO), 영국수 출진흥기관(BETRO) 등의 예를 들어 설명했고, 12월 15일부터 2주 동안 JETRO 본 부와 해외사무소 등에 관한 설명 및 각종 자료를 수집했다고 한다. 그리고 1962년 3월 가칭 대한무역진흥공사 창설을 위한 추진위원회 (위원장 상공부 차관, 위원 외무부 차관, 재무부 차관, 한국은행 부총재, 한국무역협회 상근부회장, 간사 장무환)를 구성 하여 시안을 마련, 상공부 장관의 결재를 거쳐 최고회의 승인을 받아 무역진흥공사법 이 확정되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 있는 1956년 12월의 수출5개년계획과 수출 진흥요령(안)과 관련해서도 그는 의미있는 말을 했다. 수출상품의 발굴과 자료수집 을 위해 1956년에 동남아(오키나와, 필리핀, 홍콩, 베트남, 싱가포르 등)를 돌아다니 면서 우리나라는 자원이 없는 나라이므로 잘살기 위해서는 수출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귀국 후 정부수립 후 처음으로 수출5개년계획(안)을 수립한 바 있다 고 밝혔다. 1962년 6월 21일 대한무역진흥공사(이하 공사 또는 KOTRA)의 출범을 알리는 팡파르가 울렸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이다. 1960년대 이후 우리 경제는 대외지향적 경제개발을 기본전략으로 하여 수출주도형 공업화로 일관하였고, 그 선봉( 先 鋒 )에는 항상 우리 공사가 있었다. 그리고 2011년에는 우리나라가 수출 5,000억 달러를 돌파 함과 동시에 무역 1조 달러라는 이정표를 세움으로써 명실상부한 무역대국으로 자리 매김하게 되었다. 425 Ⅳ. KOTRA와 코트라맨의 정체성을 찾아서

426 돌이켜보면 1964년 12월 5일 수출실적 1억 달러 돌파를 기념하여 수출의 날 을 제정하고 광화문 네거리를 가로지른 경축 대형 아치를 세운 것이 바로 엊그제처럼 느 껴진다. 아치의 양 기둥에는 수출 늘려 자립하자 와 오늘의 수출 내일의 번영 이라 는 문구가 선명했다. 그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수출은 국력( 國 力 )의 총화( 總 和 ) (1971), 전 산업의 수출화 (1973), 그리고 1977년 10월 17일에는 대한무역진흥공사 창립 15주년을 기념하여 무역입국( 貿 易 立 國 ) 이란 휘호를 써 코트라맨들의 사명감 을 북돋고 사기를 진작시켰다. 1977년은 우리나라의 수출이 100억 달러를 돌파한 해 였다. KOTRA의 명칭 아이를 낳으면 이름을 짓듯이 회사를 설립해도 이름을 짓는다. 작명은 세상에 태 어났음을 만방에 선포하고 신고하는 의식이다. 시인 김춘수는 <꽃>이란 시에서 이렇 게 읊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국내 한 일간지는 1998년 5월 11일 외국 바이어들이 외우기 쉽고 부르기 편하게 수출을 위하여 영어식 작명 붐이 일고 있다며 이렇게 예시한 적이 있다. 텐트 분야 에서 세계 1위 기업으로 우뚝 선 (주)진웅 이윤재 회장은 해외에서 TP Lee 로 통한 다. TP는 Tent & Pole(텐트와 폴대) 의 약자. 1979년 창업할 때 세계 텐트시장을 석 권하겠다는 꿈을 담아 만든 이 이름이 그의 닉네임으로 굳어졌다. 회사 이름을 2000 년 초 진웅 에서 지누스(ZINUS) 로 바꿨지만 이 기사에 등장한 이윤재 회장은 1975 년 KOTRA에 입사했던 OB다. 정설은 아니지만 해상왕 장보고( 張 保 皐 )라는 이름도 궁복( 弓 福 )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있다. 신라 관습상 평민은 성( 姓 )을 갖지 못했기 때 문에 당나라로 건너가 궁복의 弓 자와 비슷한 張 씨를 택한 것으로 보이고, 보고라는 이름은 본래 이름인 복( 福 )의 음을 그대로 따라 지은 것으로 생각된다 는 것이다.(한 창수, 천년전의 글로벌 CEO, 해상왕 장보고, 삼성경제연구소, 2004년, 20쪽) 42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427 텔레비전 드라마는 작명을 잘해야 시청률이 뜬다는 속설이 있다고 한다. 이름 ( 名 명) 이 프로의 명( 命 명) 을 좌우한다나. 상호를 작명하는 데도 10계명이 있다고 하는데 긍정적인 계명 몇 가지만 들면 이런 것이다. 첫째, 발음이 잘 되어야 하며 기억 하기 좋아야 한다. 둘째, 주 고객층을 파악해 그들의 취향에 맞게 짓는다. 셋째, 상호 를 들으면 어떤 업태인지 알 수 있어야 한다. 외국회사를 예로 들자면 나이키(NIKE) 는 옛 그리스의 승리의 여신에서, 코카콜라(CocaCola)는 코케인으로 알려진 코카 (Coca)의 잎과 콜라(Kola)의 열매가 주 원료가 된다고 해서, 펩시(PEPSI)는 소화효 소 펩신(Pepsin)이란 단어를 따서, 소니(SONY)는 사운드를 의미하는 라틴어 Sonus) 에서 파생했는데 미국의 젊은이들이 일종의 슬랭으로 Sonny 로 부른데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대한무역진흥공사가 탄생할 때 필연적으로 함께할 수밖에 없는 영문 표기에도 선배들의 지혜가 담겨 있다. 미국 대학에서 마케팅을 전공하고 국내 대학 강단에 잠시 섰다가 1962년 6월 6일 KOTRA에 입사한 임광원 OB가 코트라 30년사, 한국의 수 출진흥 30년 에 남긴 글을 인용해 보기로 하자. 제일 먼저 필자에게 주어진 과제는 대한무역진흥공사를 영어로 여하히 표기하 는 게 좋겠는지 이사회에 제시해 보라는 임광순 이사의 지시였다. 그래서 필자는 우선 국문에 충실하면서도 관료적인 뉘앙스가 짙은 Board, Authority 또는 Agency 등을 피해서 Corporation이 가장 무난하다고 생각해서 Korea Trade Promotion Corporation 으로 정한 다음, 당장 Cable Address가 필요하므로 전신약호 겸 약성 어(Acronym)로 쓰기 위해서 KTPC 대신 KOTRA 로 작명해 보았다. 이왕 전신약호 를 새로 만들 바에야 Korea Trade Promotion Corporation이라는 긴 기관명을 자주 사용하기가 불편할 뿐 아니라 이미지를 심는 데 불리할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더 구나 공사의 임무는 우리나라 수출상품의 시장개척을 위한 과감한 마케팅 활동인 만 큼 아직 한국의 실태와 잠재력을 잘 모르는 해외 바이어들을 상대로 한 뉴코리아의 긍정적인 이미지 구축과 아울러 수출진흥기구 자체의 아이덴티티를 세계적으로 심어 줄 필요가 절실했다. 그래서 Korea에서 Ko 만 떼어내고 Trade Promotion에서 Tra 만 떼어 부르기 도 쉽고 기억하기도 쉬운 다섯 자의 약성어를 만들었다. 이사회의 토의 과정에서 공사 를 Korea Export Development Agency 로 표기함이 어떻겠는가 하는 조사 이사의 의견도 있었으나, 수출 일변도 인상을 줄 수 있다고 해서 채택되지 않고 필자의 안대 427 Ⅳ. KOTRA와 코트라맨의 정체성을 찾아서

428 로 낙찰되었다. 그후 KOTRA 는 국내외에서 많은 사람 입에 오르내리는 하우스홀드 네임이 되었다. (KOTRA 30년사 140쪽) 성명철학까지 들먹일 필요는 없겠다. 50년 전이었지만 탁월한 작명이었던 것 같 다. Korea와 KOTRA, 음절과 운율도 그렇거니와 KOTRA라는 기관이 한국 무역을 대표한다는 대표성에 있어서도 이 이름보다 나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기왕 작명이 거론된 만큼 WINK (Worldwide INtranet of Korea)라는 이름에 대해 서도 한마디 말을 하자면 참 잘된 작명이 아닌가 생각된다. 코트라맨이 컴퓨터를 켜 면 맨 먼저 잘 들어오셨다 고 윙크를 보내니까 말이다. 대한무역진흥공사(Korea Trade Promotion Corporation)라는 이름은 1995년 8월 4일 대한무역진흥공사법에 투자(Investment) 및 산업기술협력 지원 기능을 추 가한 공사 관련법이 공포되면서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rea Trade-Investment Promotion Agency)로 바뀌었다. 공사 는 변함없되 영자 표기가 Corporation 에서 Agency 로 바뀐 것도 주목할 만하다. 뉘앙스가 Corporation 은 민간기업, Agency 는 정부기관에 더 가깝다는 말이 들리기도 한다. 1995년 당시만 해도 세계는 국경 없는 지구촌 경제가 형성되면서 선진국의 기술 보호주의가 심화되는 시대로서 우리 기업이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업경 영의 세계화가 절실한 형편이었다. 즉, 기업경영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외국인 투자가 를 국내에 유치하거나 우리 기업이 해외에 진출하는 방법밖에는 없는데, 기업이 독자 적으로 추진하기보다는 범국가적 차원에서 체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정부 는 그 임무를 우리 공사에게 맡겼던 것이다. 이와 같이 KOTRA라는 훌륭한 이름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2000년대 초까지 여러 개의 이름을 혼용함으로써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왔다. 대한무역진흥공 사 라는 호적상의 이름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본사는 무공 을 고집하다 보니 외부에 서는 한국무역진흥공사, 무역공사, 무진공, 코트라 라고 부르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국내외 조직망의 명칭도 해외 및 국내 지사 와 사무소 에서 무역관 으로, 최근 에는 센터 로 바뀌었고, 영문 표기 또한 KOREA TRADE CENTER(KTC)에서 KOREA BUSINESS CENTER(KBC)로 바뀌어 KTC에 익숙했던 해외 인사들을 어리둥절하게 하였다. 2008년 7월 22일부터 2011년 6월 22일까지 KOTRA 사장을 역임한 조환익씨는 저서 우리는 사는 줄에 서 있다 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든다. 나는 유력 일간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코트라의 불판과 메뉴판을 모두 바꾸겠다 42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429 고 선언했다. 코트라 임직원들도 모두 전투복으로 갈아입었다. KBC의 명칭도 원래 의 무역관 에서 관이라는 낡고 보수적인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 코리아 비즈니스 센터 (Korea Business Center, KBC)로 바꾸고 KBC의 책임자를 현지에서 과감히 발탁 해 기용하기도 했다. (조환익, 우리는 사는 줄에 서 있다, 청림출판, 2011년, 163쪽) 장강의 뒤 물결은 앞 물결을 밀어내고 長 江 後 浪 推 前 浪 세상의 새 사람은 옛 사람을 바꿔친다. 世 上 新 人 換 舊 人 세대교체를 뜻하는 이 구절에 혹자는 너무 밀지마라 뒤 물결아, 너는 네가 평생 뒤 물결인줄 알지만 너도 곧 앞 물결이 된다 고 말하며 장강의 앞 물결은 바다를 향 해 달려 나가고 뒤 물결은 앞 물결의 빈자리를 채운다 고 고쳐 짓기도 한다. 또 혹자 는 가을에 거둔 나락은 열매이지만 봄이 되면 다시 논으로 가서 볍씨가 된다 고 나락 이나 볍씨나 공동운명체임을 강조하기도 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다 는 말도 있 고, 구관( 舊 官 )이 명관( 名 官 ) 이란 속담도 있는데 구관들이 힘들여 구축한 시스템을 신관( 新 官 )들은 왜 깡그리 무시하려 들까? KOREA TRADE CENTER(KTC)라는 명칭도 그렇다. 우선 무역(Trade) 과 비즈니스(Business)라는 용어 중 어느 쪽이 KOTRA의 정체성과 업무의 성격을 더 명확히 고객들에게 전달하는지 묻고 싶다. 관 이라는 낡고 보수적인 이미지라고 바꾼 이유를 댔지만 도서관, 박물관에도 같은 관 을 쓰고 있다. 그래서 의심한다. 대사관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감이 들어서였을 까? 그것도 아니라면 무역관 대신 무역센터 로 하면 되지 않겠는가. KOTRA의 임무 이 법은 대한무역진흥공사를 설립하여 수출진흥을 위한 해외시장의 조사 개 척, 수출입거래의 알선 등과 상공부장관이 정하는 수출입업무를 담당하게 함으로써 국제수지의 개선과 국민경제의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1962년 4월 24일 법률 제1059호로 공포한 대한무역진흥공사법 제1조이다. 그리고 제10조에서는 공사 가 제1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다음 각호의 사업을 행한다고 되어 있다. 1. 해외시장의 조사 개척 및 정보의 수집과 그 성과의 보급 2. 국내산업과 상품의 해외에의 소개 선전 3. 무역거래의 알선 4. 무역에 관한 박람회 전시회의 개최 또는 이에의 참가 및 참가의 알선 429 Ⅳ. KOTRA와 코트라맨의 정체성을 찾아서

430 5. 상공부장관이 정하는 수출 또는 수입 6. 소액 또는 소량수출을 촉진하기 위하여 대통령이 정하는 상사에 대한 업무 지원 7. 제1호 내지 제6호의 사업에 부대되는 사업 제10조는 2000년대에 들어 시대의 흐름에 맞춰 이렇게 개정된다. 1. 무역 진흥과 외국인투자 유치를 위한 해외시장의 조사 개척 및 정보의 수집과 그 성과의 보급 2. 국내의 산업 상품과 외국인투자 환경의 해외 홍보 및 국가브랜드 제고 관련 지원 3. 무역거래, 국내외 기업 간 투자 협력과 산업기술 교류의 알선 및 국제개발협력기 본법 제2조 제1호에 따른 국제개발협력 지원 4. 무역 및 투자에 관한 박람회 전시회의 개최 또는 참가 및 참가의 알선 5. 지식경제부장관이 정하는 수출 또는 수입 6. 외국인투자의 유치 및 국내기업의 해외투자(해외 자원 에너지 개발을 포함한다) 지원 7. 국제 경쟁력 강화를 위한 해외 전문인력의 유치 지원 8. 방위산업법 제38조 제1항 제4호에 따른 방산물자와 방산물자에 준하는 물자(이 하 방산물자 등 이라 한다)의 수출과 관련한 다음 각 목의 사업 9. 시설의 운영, 전문인력의 교육 훈련 및 육성 등 제1호부터 제8호까지의 사업에 딸 린 사업 10. 다른 법률에 따라 공사가 할 수 있는 사업 이와 같은 사업을 수행하려면 조직과 사람과 돈이 필요하다. KOTRA 조직은 1962년 6월 21일 기획실, 총무부(총무과, 인사과, 경리과), 조사부(제1과, 제2과, 제3 과), 해외사업부(시장개척과, 해외전시과, 선전과), 국내사업부(지도알선과, 상품계 획과, 출판과, 전시관)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1962년 6월 23일 공채 1기생 42명을 선 발했다. 출신학교를 보면 서울대 대학원 1명, 서울대 15명, 고려대 9명, 연세대 6명, 외 대 3명, 동국대 2명, 기타 6명(일본 중앙대, 대구대, 단국대, 영남대, 중앙대, 부산대 각 1명)이었다. 1962년에는 공채 입사 전후에도 시채( 試 採 ), 전형( 銓 衡 ), 특채 연고 방식 을 통해 우수한 인재들을 뽑았는데 임광원, 곽의순, 장무환, 박종한, 정준두, 고석원, 이풍직 등이었다. 이들을 포함하여 1962년 국내 근무 직원은 98명, 해외 근무 직원은 430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431 4개 무역관 6명으로 총 104명이었다.(당시는 사무소 였지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는 앞으로 무역관 으로 통일한다) 대만은 타이페이에 통신원 1명을 두었는데, 통신원 제도는 1962년부터 1972년까지 활용했고 1966년에는 12명이나 두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KOTRA와 무역협회를 자꾸 혼동했다. 무역 이란 이름에서도 쌍생아 같은 느낌이 들었겠지만, KOTRA가 남대문 사옥을 매각하고 회현동의 무역 협회 빌딩과 삼성동 무역회관 건물에서 오랫동안 전세살이를 한 것도 한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KOTRA는 정부투자기관이고 무역협회는 무역업체를 회원으로 조직, 운영되는 민간 경제단체이며 경제 4단체 중의 하나라고 구분하여 설 명해 봤자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또 KOTRA는 해외 무역관 중심의 조직이고, 무역 협회는 국내 회원 중심의 조직이라고 말해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였 다. 업무에 있어서도 어느 쪽이 먼저였느냐를 따질 것 없이 따라하기 가 있어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동안 업무가 다소 달라지거나 다양화되기는 했겠지만 무역협회(KITA)의 주 요 업무를 보면 무역업계의 애로 타개, 해외시장 개척, 전문전시회 개최, 민간통상협 력, 무역관련 조사연구 및 정보 제공, 무역기금 지원, 무역전문인력 양성, 전자무역 인 프라(u-Trade Hub) 확충, 수출입 물류개선 및 하주권익 옹호 등 무역증진을 위한 제 반 사업을 수행한다고 되어 있다. 게다가 무역인력 양성 전문기관인 무역아카데미는 KOTRA가 운영했던 수출학교의 후신이고, 이름이 바뀌고 확대되었지만 전시컨벤션 전문기관인 (주)COEX의 모체였던 KOEX는 1980년대에 KOTRA가 운영한 적도 있 었다. 해외에는 KOTRA 유사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무역기관이 적지 않다. 가장 대표 적인 기관은 일본의 JETRO(Japan External Trade Organization)다. 1951년 설립 된 JETRO의 주요 업무는 중소기업 등의 해외판로 개척 지원(해외전시회 참가 지원, 사절단 파견, 해외시장 조사, 비즈니스 자문 등), 일본기업의 해외진출 지원(지적재산 권 보호를 위한 조사 및 정보 제공, 투자환경 조사, 해외견본시 개최 등), 해외경제정 보의 조사 및 분석(세계 각국의 경제무역투자 동향, 산업 시장정보 등을 조사분석, 정기간행물이나 조사보고서 발간 등) 등이다. 중국에는 1952년 설립된 중국국제무역 촉진위원회(CCPIT : China Council for the Promotion of International Trade), 대만에는 1970년 설립된 중화민국대외무역발전협회(TAITRA : Taiwan External Trade Development Council), 호주에는 1985년 설립된 AUSTRADE 등이 있다. 431 Ⅳ. KOTRA와 코트라맨의 정체성을 찾아서

432 1926년 정부투자기관으로 설립된 이태리의 대외무역공사(ICE : Istituto Nazionale per il Commercio Estero)는 2010년 당시 본사 429명, 해외 88개국 116개 사무소(본 사직원 95명 현지직원 622명)를 두고 시장개척단 파견 및 바이어 매칭, 상품 및 서비 스의 해외 시장성과 경쟁제품 조사, 현지시장 제품 홍보 마케팅 B2B 상담회 전시 회 지원 등 수출지원, 무역 FDI 해외파이낸싱 입찰공시 등의 정보서비스, 투자 지적재산권 컨설팅 및 전문교육 서비스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2011년 상반기 중 이태리의 재정위기가 부각되면서 이태리 정부는 서둘러 재정 긴축안을 마련하고 의회를 통해 일사천리로 통과시켰는데, 이 긴축안에 ICE 폐지안이 들어 있었다. KOTRA는 해를 거듭할수록 해외 네트워크를 넓혀갔다. 1962년 창설된 4개 무 역관(뉴욕, 로스앤젤레스, 방콕, 홍콩)을 제외하고 KOTRA가 설치한 지역별 최초 무 역관 개설일자를 보면 아시아에서는 1971년 7월 12일 타이페이( 통신원 운영)에, 일본은 1964년 1월 7일 도쿄( 일본 시장조사원 파견)에, 유럽은 1966년 3월 14일 암스테르담( 브뤼셀 통신원, 맨체스터 통신원 운영)에, 대양주는 1967년 7월 1일 시드니( 통신원 운영)에, 중동은 1967년 5월 15일 테헤란( 중근동 시장조사원)에, 중남미는 1966년 1월 4일 파나마 ( 리마에 통신원 운영)에, 아프리카는 1966년 11월 7일 라고스( 나이로비에 아프리카 시장조사원)에, 그리고 동구 러시아는 1987년 12월 10일 헝가 리 부다페스트에 무역관을 개설했다. 국내에서는 1962년 11월 2일 부산에 첫 무역관 을 두었다. KOTRA와 코트라맨의 역할 코트라맨은 좋게 말해서 팔방미인이오, 속된 말로 잡놈 기질도 있어야 합니다. 입사시험에서 남들을 제치고 들어올 만한 실력, 위아래 사람에게 찍히지 않는 오뚝이 같은 처신술, 얼치기 상품지식을 가 지고도 바이어들에게 들통이 잡히지 않을 만한 설( 舌 )을 풀 수 있는 중개사, 통계수치 조합해서 전년 대비 증감률에 세계경제가 어찌될 것이라고 예견하는 진단사, 정부기관 대표랍시고 고담준론을 읊 으며 여름에도 긴팔 셔츠를 입어야 하는 폼잡는 신사, 내일 아침 순회전시회 개막을 앞두고 밤 새워 가설무대를 치장하는 인테리어 기술자, 전도자금 정산서 풀칠해서 맞추는 회계사. 그뿐이오 운전기 사, 통역, 뚜쟁이, 관광 안내인, 한국식당 주인...어느 것 하나 소홀하고 부족하다면 팔방( 八 方 )에서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때로는 욥 의 수난마저 감수해야 합니다. KOTRA에 1967년부터 1978년까지 몸담았던 박철성 OB가 퇴사 전에 쓴 글이 다. 코트라맨들에게 붙여진 이름은 많다. 예를 들면 수출첨병, 개척자, 조사정보원, 매 432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433 치메이커, 국제 홍보맨, 협상가, 관광가이드, 계급없는 외교관, 멀티플레이어(팔방미 인), 중소기업의 친구 등이다. 수출첨병과 개척자는 우리나라에 수출업체와 무역일꾼 들이 많지 않을 시기에, 조사정보원은 지역 및 상품조사와 경제무역 관련 자료 및 정 보 수집자로서, 매치메이커는 거래알선으로 얻게 된 별칭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 국 제 홍보맨은 해외전시박람회를 개최하거나 참가하고, 홍보출판업무(예 Korea Trade, KT&B, KT&I, How to Trade with Korea 발간)에 앞장섰던 전력 때문에, 협상가는 미수교국 및 북방외교 창구역할로, 계급없는 외교관은 특히 개발도상국에 서 상무관의 타이틀을 달고 외교관을 대신한 데 대하여, 그리고 중소기업의 친구는 1980년대 초부터 KOTRA가 고객을 불특정다수에서 중소기업으로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얻은 닉네임이었을 것이다. 관광가이드는 해외 무역관 직원들을 두고 하는 말 일 터이고, 멀티플레이어 또는 팔방미인은 지금까지 말한 모든 별칭을 통틀어 붙여준 것이라 하겠다. KOTRA 50년사 팀은 2011년 가을 YB와 OB를 대상으로 몇 가지 설문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코트라맨은 이다 였다. 회신율이 극히 낮아 신 뢰도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겠으나 참고로 밝히면 1순위에서는 개척자, 멀티플레이 어, 수출첨병 순이였고, 1 3순위를 합하면 멀티플레이어, 개척자, 수출첨병, 매치메 이커, 계급없는 외교관 순이었다. 정부정책 및 시책과 관련하여 코트라맨은 소방수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 소방수 는 화재가 났을 때 불 끄는 사람을 의미하지만 야구에서 위기 때 마운드로 올려 보낸 투수에게도 소방수 역할이라는 칭호를 붙인다. 그런데 왜 코트라맨들은 소방수가 되 어야 했을까? 그것은 대한무역진흥공사법이 가지고 있는 태생적 운명이고, 특히 제14 조에 발목이 잡혀 있는 것 같다. 1 상공부(현 지식경제부)장관은 공사의 경영목표 달성을 위하여 필요한 범위 안에서 공사의 업무를 지도 감독한다. 2 상공부장관은 공사에 대하여 통상정책 수립에 필요한 최소한의 범위 안에서 보고서 및 자료를 제출 하게 할 수 있다. 고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KOTRA는 년대에 각 종 통상회의 기초자료를 작성했던 기억이 난다. KOTRA는 심지어 1979년 고추의 흉작으로 고추파동이 일어났을 때 멕시코 무 역관에서 멕시코산 고춧가루 수입에 뛰어든 적도 있었고, 1989년 4월 노태우 정부가 획기적인 주택공급 확대정책의 일환으로 분당과 일산 신도시 건설을 발표했을 때 국 내 시멘트 공급량이 딸리자 해외 전 무역관에 시멘트 수입 가능성을 조사케 하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코트라맨들은 해외 바이어들을 유치하느라 433 Ⅳ. KOTRA와 코트라맨의 정체성을 찾아서

434 얼마나 뛰어다녔던가? 1983년 4월 1일 공사조직 개편에 따른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시장개척부는 특 히 그 형태가 밑바닥부터 완전히 탈바꿈하여 종래의 기능별 편제로부터 거래알선 위주 의 품목 담당제로 일신했고, 소액소량 수주와 중소기업 수출창구 역할을 해 오던 고려 무역이 수년간 누적되고 있는 적자와 사업침체로 허우적거리자 1983년 4월 19일 경영 권을 KOTRA에 맡겨 86개 해외 무역관은 성약지원이란 이름으로 방방 뛰기도 했다. 이와 같은 여러 역할 가운데 사실 코트라맨이 가장 힘들고 고객으로부터 원성을 들을 가능성이 큰 것이 매치메이커 역이 아닌가 한다. 매치메이커 역할을 수행함에 있어서도 거래알선, 외국인투자자 유치 등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특히 중소기업에게 바이어를 찾아주고 성사시키는 일은 처녀총각 중매하는 것만큼이나 까다롭다. 중소 기업이라고 하더라도 구멍가게 형태부터 중견기업에 이르기까지 역량이 천차만별이 고, 수출하려는(또는 수출하고 있는) 품목이 수없이 많고, 조그마한 서비스에 만족하 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잘 도와주더라도 어지간해서는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가령 서비스 업종인 식당을 예로 든다면 종업원의 서비스가 탐탁치 않 더라도 음식만 맛있으면 손님은 불평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혼 중매인은 양쪽의 수준 이 엇비슷해야 운이라도 떼지 아무라도 대줄 경우 한쪽으로부터 불만을 사기 십상이 다. 게다가 바이어라 하더라도 이미 우리나라의 A라는 업체와 만족스럽게 비즈니스 를 잘 하고 있어 무역관이 보호해 주어야 할 바이어도 있지 않은가. 수출하려는 중소기업은 거의 예외 없이 자기 입장에서 생각한다. 자기중심적인 것이다. 무역관은 제한된 인력과 시간을 쪼개서 한국의 여러 중소기업을 상대해야 하 지만 그런 사정을 거의 참작하지 않는다. 또 어떤 악덕(?) 업체는 극히 일부이기는 하 지만 KOTRA와 코트라맨의 약점, 즉 정부투자기관 고객만족평가와 경영평가에 약 하다는 점을 이용하려 들기도 한다. KOTRA의 정체성과 정체성의 위기 먼저 정체성(Identity) 이란 뭔가? 정체 란 용어가 누구누구의 정체( 正 體 )를 밝힌다 거나 정체불명 처럼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사용되기는 하지만 정체성이라는 용어는 우리 주변에도 널려 있다. 가수 배일호의 노래 신토불이 나 이장희의 노래 나 는 누구인가 도 정체성을 부른 것이다. 코트라맨이 WINK에 들어가려면 나의 정체성 (identity ID)과 비밀번호(password)를 입력하여야 한다. 내가 정당한 사용자라는 것을 식별할 수 있도록 컴퓨터에 밝혀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정체성이 걸려 있는 것은 또 있다. CI, CIP, BI다. CI는 Corporate Identity, 434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435 CIP는 Corporate Identity Program, BI는 Brand Identity의 약자이다. Identity가 들어가 있는 이와 같은 용어들은 회사가 대외경쟁력 강화 및 차별화를 꾀하는 브랜드 이미지를 통일하려는 데서 등장했다. 우리 코트라에도 공사 이미지 통일화계획 (corporate identification manuel)이 있다. 정체성은 곧 동일성이다. KOTRA의 정 체성은 KOTRA 업무 및 사명과의 동일성이며, 코트라맨의 정체성은 그 역할을 얼마 만큼 성실하고 훌륭하게 수행하는가이다. 정동식 OB는 KOTRA 40년사, KOTRA 40년 한국경제 40년 에서 코트라는 코트라맨이 생각하는 것만큼 크다 라는 제목으로 이런 글을 남겼다. 우선 코트라의 정체성(identity) 문제를 들고 싶다. 코트라는 특별법으로 만들어진 고유한 기능을 가진 정부투자기관이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수입개방, 여행자유화, 외환자유화조치 이후 코트라 의 정체성은 이전에 비해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또 1990년대 후반 인터넷 비즈니스가 본격화되면 서 코트라는 업무의 패러다임 자체가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여건에서 협회 나 조합은 그렇다 치더라도 중소기업청, 농수산물유통공사(현 농수산식품유통공사), 중소기업진흥 공단 등이 그들 나름대로 수출촉진사업이나 투자유치업무를 관련 법령이나 정관 상에 못박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여행사나 컨설팅회사에서 해외박람회 참가나 시장개척단 업무를 추진하고 있으 며 사이버 정보회사들이 수출입 알선과 해외시장 정보를 상업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과거의 독점적 서비스가 지금은 경쟁적 서비스체제로 접어든 것이다. 따라서 경쟁기관을 앞서기 위 한 경쟁력 강화가 주요과제로 등장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또 경쟁력의 평가자로서 고객의 비중이 어 느 때보다 커지고 있다. 앤 노튼은 저서 정치, 문화, 인간을 움직이는 95개 테제 에서 모든 주체는 여러 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면서, 정체성은 수행적( 遂 行 的 )이다. 정체성이 수행적이 라는 생각은, 정체성이 차이를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 다시 말해서 정체성의 단일성에 복합성과 다중성이 내포되어 있음을 뜻한다. (97쪽)고 쓴 후 역할이나 정체성의 수 행도 변한다. 반복은 언제나 반복되는 것을 바꾸기 때문 이라고 덧붙였다. 성격과 역 할이 다양한 조직은 대체로 정체성이 뚜렷하지 못하고 개성이 없는 것이 일반적이긴 하지만 정동식 OB의 진단은 지금도 유효하다. KOTRA의 정체성을 언급한 또 다른 두 개의 글을 읽어보기로 하자. 435 Ⅳ. KOTRA와 코트라맨의 정체성을 찾아서

436 조직은 세계 70여 개국을 연결하는 100개 이상의 해외 무역관이 있고, 국내 역시 각 광역지자체별로 지방무역관을 거느리고 있어 해외 정보나 비즈니스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네트워크를 구축하 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다양한 언어구사 능력과 지역별 전문지식을 겸비하고 있는 천 명 이상의 인 력(해외 현지인력 포함)이 역동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히 국제적인 조직으로서 손색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임 당시 KOTRA를 보는 주변의 시각은 그리 고운 것만은 아니라는 데 고민이 있었다. 이제 민간의 기능이 강화되었는데 KOTRA가 과연 필요한 존재이냐 는 식의 KOTRA의 정체 성에 관한 문제에서 시작하여 KOTRA 직원의 기본적인 자세나 활동, 심지어는 인사청탁 등 구체적인 운영 면에 이르기까지 비판의 소리가 심심찮게 들리는 실정이었다. (오영교, 변화를 두려워하면 1등 은 없다, 더난출판, 2003년, 20 21쪽) 가장 큰 위기는 코트라가 정체성 위기를 겪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코트라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은 대부분 부정적이었다. 코트라가 현재 하고 있는 시장개척과 투자유치 업무는 민간기업도 할 수 있 는 분야가 아닌가? 코트라가 실질적으로 중소기업을 도와주는 것이 무엇인가? 코트라는 역사적 사명을 다한 조직이므로 더 이상 필요한 조직이 아니다. 대체적으로 위와 같은 코트라 무용론이 팽배 해 있었다. (중략) 나는 이럴 때 코트라가 어떤 돌파구를 만들어주지 못하면 코트라의 존재 의의가 심 각한 도전을 받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와 같이 이중삼중의 절대적 위기상황 속에서 나는 코트라 사 장 취임 첫해를 맞았다.(조환익, 우리는 사는 줄에 서 있다, 청림출판, 2011년, 쪽) KOTRA 무용론은 KOTRA가 미성년자에 해당하는 1970년대에도 등장했다. 그 시대가 어떤 때인가? 박정희 대통령이 수출의 총사령관 역할을 맡았던 때가 아니 던가. 그런데도 주로 정부 관리들 입에서 무용론이 나왔다. 미관말직에 있는 관리들 조차 자기 수족처럼 움직여주지 않을 때 내뱉는 말이 무용론이었다. 지금 경영평가를 받고 있는 정부투자기관 중 한국관광공사를 제외하면 KOTRA처럼 서비스를 주된 업무로 한 기관도 거의 없다. 무형이랄까 비계량 업무가 큰 비중을 차지하다 보니 고 객들의 입에 용훼되기 십상이다. 가령 유형의 실물을 다루는 한국전력공사나 한국도 로공사에게 무용론을 말할 수 있겠는가? 무용론이 등장하게 되는 또 하나는 업체들의 KOTRA에 대한 인식이다. KOTRA가 1983년 4월부터 (주)고려무역을 본격적으로 지원하게 되면서 대기업들은 KOTRA 해외 무역관을 경쟁상대로 여기거나 무용론을 들먹이기 시작했다. 본사가 지혜롭지 못하게 중남미, 아프리카 할 것 없이 모든 무역관에게 고려무역을 지원하라 고 독려하는 것은 대기업을 돕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또 중 436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437 소기업의 경우 1980년대 전후만 하더라도 KOTRA는 대업계 서비스에서 대부분 돈 을 받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공짜였다. 그러나 1983년 경영평가제도가 도입되고부터 수익을 올리라는 요구를 받게 되었고 과거의 공짜관행에 익숙한 업체는 불만을 표출 하기 시작했다. 달리 표현하면 고속도로에서 통행료 내는 것은 마땅하다고 생각하지 만 바이어 명단 주고 돈 내라고 하면 미간을 찌푸린다. 참고로 KOTRA는 창립 50주년을 맞이하여 KOTRA 이용 경험이 있는 국내외 649개사를 대상으로 브랜드 인지도, 연상 이미지, 충성도, 품질 인식 네 부문의 브랜 드 파워를 조사했다. 그 결과 브랜드 연상 이미지는 국내나 해외나 기준점 90에 가까 운 87점과 89점을 각각 받았으나, 브랜드 인지도는 기준점 94에 한참 못 미치는 52점 과 50점을 받았다. 달리 말하면 지각된 품질과 연상 이미지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고 객이 이를 KOTRA의 역량으로 직접 연결하지 못함으로써 KOTRA 브랜드에 대한 지 속적 이용이나 이탈을 방지하는 역할이 떨어졌던 것이다. 이는 곧 조직 명칭의 통일화 와 사업 호칭(naming) 및 브랜드 적용 체계 구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환익 사장은 KOTRA 직원들이 매사 수동적이었고 국내 근무를 빨리 때우고 해외 근무나 나갈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고 힐난했는데 이 구절은 물론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려는 언사로 받아들이고 싶으면서도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게다가 KOTRA 자체의 탓이 왜 없겠는가. 썩은 사과(Bad Apples)의 법칙, 깨진 유리창의 법칙, 디테일의 힘(Power of Detail), 나무통( 木 桶 ) 이론 등 극소수가 조직 전체에 치 명타를 가하고 조직을 망친다 는 이론들에 기대지 않더라도 코트라맨 가운데 소위 양 지를 찾아다니며 즐긴 엔조이파 가 없었다고 누가 부정하겠으며, 또 썩은 사과 곁에 서 물든 토마토파가 없지 않았음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하지만 부분으로 전체를 매 도해서는 안 되고, 몇 개의 사례를 들면서 전체인 양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KOTRA 50년사 팀은 설문조사에서 코트라맨이 버려야 할 행태에 대해서도 물 어봤다. 그 결과 1순위에서는 소신부족(소극성), 이기주의(남에 대한 이해부족), 공과 사의 혼동, 독불장군(trouble-maker), 기회주의 순으로 응답했고, 1, 2순위를 합했 을 때는 소신부족, 이기주의, 지나친 자존심 순으로 나타났다. 이밖에 기회주의, 공과 사의 혼동, 자화자찬, 독불장군, 패배주의는 거의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성찰이란 자 기의 잘잘못을 반성하고 살피는 것이다. 핵심 가치 따지는 게 능사가 아니다. 고객이 안중에도 없다는 인식, 이것이 1926년 설립된 ICE(이태리 대외무역공사) 를 하루 아침에 문닫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던 엄연한 사실에 우리는 귀를 기 437 Ⅳ. KOTRA와 코트라맨의 정체성을 찾아서

438 울여야 한다. 약 3억 달러의 예산에다 성과는 없고 고객들조차 변호하지 않는 관료적 인 공룡조직에 철퇴를 가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고객평가 외에는 성과를 측정하기 어려운 진흥기관의 속성으로 인해 희생양이 됐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ICE의 최후 를 코트라맨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KOTRA의 살 길은 지칠 줄 모르고 진화 하는 고객 눈높이에 있다 21세기가 요구하는 KOTRA와 코트라맨 변해야 한다. 모두 변해야 한다. 지금 당장 변해야 한다. 이 말은 KOTRA뿐만 아 니라 세상 도처에서 통하는 화두다. 왜 변해야 하느냐고 묻지 말라. 마음속에는 이미 이래서는 안 되는 데 라는 답이 있기 때문이다. 과제는 어떻게 변하느냐이다. 겉이 아 니라 속을 바꿔야 한다. 형식이 아니라 내용을 바꿔야 한다. 조직의 이름만 자꾸 바꿀 게 아니라 KOTRA 본연의 임무와 사명에 부합하게 바꿔야 한다. 빈번한 조직 개편은 오히려 KOTRA의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하는 면도 있다. 창조적 파괴 라는 말도 있 고, 파괴적 혁신 이나 창조적 혁신 이라는 말도 들린다. 하지만 21세기가 요구하는 KOTRA와 코트라맨이 되고, 새로운 50년을 기약하기 위해서는 거창한 구호보다 조 그마한 실천부터 필요하다고 본다. 우선 점수에 목매다는 것부터 바꿨으면 좋겠다. 서비스를 저울 위에 올려놓는다 는 것도 이상하지만, 국내에서도 지역마다 옥토와 박토가 있는데 하물며 지구상에는 환경과 여건이 천차만별인 나라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소수점 까지 도출하여 평가한다고? 겸손하게 A, B, C, D 학점처럼 평가한다면 모를까 이건 난센스다. 정교하다고?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기 전에는 그들도 계획경제가 정교하 게 짜여져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점수에 코박고 살면 소심해지고 수동적이 된다. 점 수와 관계가 없다 싶으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습성에 길들여진다. 점수벌레는 좀벌레 처럼 KOTRA와 코트라맨을 갉아먹는다. 둘째는 신성불가침(?)이라 할 경영평가제도에 대해서도 논의할 필요가 있지 않 을까? 먼저 과열된 공기업 경영평가 라는 조선일보 칼럼( )부터 읽어보기 로 하자. 정부 산하기관은 매년 3월 정부의 경영평가와 감사직무평가를 받는다. 우 리의 독특한 공기업 평가 시스템은 이제 해외에서 벤치마킹할 정도로 자리 잡았다. 그 동안 경영평가는 경영목표 달성이나 공적 서비스 품질 제고에 기여해왔고, 경쟁을 통 한 조직 발전을 이끈 긍정적인 면이 크다. 그러나 역기능도 만만치 않다. 그 역기능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자는 거다. 이 칼럼에서는 역기능으로 전시성 성과와 공익보다 수익에 치중하게 되는 등 단기 실적, 그리고 우수 인재들이 본연의 목적 달성보다 보 438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439 고서에 매달리는 등 경쟁이 과열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객관성에도 문제가 있다고 지 적했다. 또 파이낸셜 뉴스( )에서는 공기업에 대한 정부의 경영평가제도에 대해 공기업들의 불만이 크다며 이렇게 썼다. 경영투명성과 대국민 서비스 향상에 기여했 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현행 경영평가방법과 운용방식은 공기업들 간 소모적인 과 당경쟁을 낳는 데다 경영평가 준비에 따른 업무효율성 저하와 사실상의 중복감사(감 사원 감사, 국회 국정감사, 상급기관 및 자체감사에 이어 제4의 감사)로 되레 경영비 효율을 초래한다는 지적이다 라고. 셋째, 썩은 사과가 발붙일 수 없는 조직으로 바꿔야 한다. 썩은 사과의 악영향에 물든 시스템은 이미 오염된 사과상자와 같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아무리 썩은 사과를 골라내봤자 다른 사과들이 금새 썩어버리게 된다. 때문에 상자 자체를 바꾸지 않고서 는 영원히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상자, 즉 조직시스템 자체를 바꾸는 것만이 근본적 인 해결책인 이유이다. (미첼 쿠시 엘리자베스 홀로웨이, 당신과 조직을 미치게 만 드는 썩은 사과, 서종기 역, 2011년, 161쪽) 공기업 민영화, 공기업 개혁, 공기업 방만 경영, 공기업 구조조정이란 말이 나오는 것도 이런 썩은 사과들 때문이고, 신이 내린 직장 이란 말이 들리는 것도 묵묵히 일하는 다수보다 소수의 썩은 사과들 때문이 아 니겠는가. 농수산식품유통공사 감사를 지낸 강동원씨는 철밥통 공기업 (2011)이란 저서를 펴냈는데 씁쓸하지만 한때 잘 나갔던 KOTRA OB가 큰 몫을 담당했다. 넷째, KOTRA는 글로벌 KOTRA가 되어야 하고, 코트라맨은 글로벌 코트라맨 이 되어야 한다. KOTRA가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해외무역 투자지원센터로 거 듭나야 한다는 말은 우리에게 구각을 벗어던지라는 요구이다. KOTRA 초창기부터 의 사훈( 社 訓 )인 창조, 개척, 봉사는 지금도 그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필자가 1975년 KOTRA에 입사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 중의 하나는 직원들이 왼쪽 가슴 포 켓에 꼽고 다니는 WHAT CAN I DO FOR YOU 라는 아크릴 팻말이었다. KOTRA 는 고객지향, 고객감동이란 말이 있기 전에 이미 고객을 향한 DNA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글로벌 인재의 조건에 대해서는 수많은 단어들이 나선다. 예를 들어 전문성, 의사소통 능력, 문제 해결 능력, 창의력, 책임감, 도전의식, 균형감각 등이다. 코트라 맨이라면 여기에다 친화력, 공적 마인드, 이문화 포용력(또는 문화적 똘레랑스)을 추 가하여 갖추라고 권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소통과 연대이다. KOTRA는 본사가 있기는 하지만 지구 곳곳에 흩 어져 있는 조직이다. KOTRA의 강점은 해외 네트워크지만 강점이 약점이 되기도 한 439 Ⅳ. KOTRA와 코트라맨의 정체성을 찾아서

440 다. 무슨 말인고 하니 소통과 연대가 접착제 역할을 하면 강점이 되지만, 그 반대일 경 우 모래알처럼 흩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본사와 무역관, 선배와 후배와 동료, 통상 직과 전문직 및 상용직, 심지어 YB와 OB 간의 소통과 연대가 절대로 필요한 이유이 다. 조만간 은퇴할 선배는 이제 갓 입사한 후배들의 30년 동안의 미래를 위해서도 연 대의식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와 같이 소통과 연대로 뭉칠 때 우리는 고객 에게도 알찬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고, 나아가 KOTRA의 방향과 진로를 결정 하는 아젠다 설정에도 힘을 보탤 수 있을 것이다. 비전이 없는 조직은 죽어가는 조직이나 다름없다, 비전이 미래를 만든다 고 설파했던 오영교 사장 재임 당시 기획조정실은 공사의 비전과 과제 라는 제목으로 이런 글을 남겼다. 지금의 우리 공사 비전은 세계적 무역 투자 전문기관 이다. 이러한 비전이 가 지는 의미는 먼저, 세계 란 공사가 활동하는 전세계적인 영역을 나타내고 나아가서 는 실시간 경제와 글로벌 경제 체제에 적응하는 지식정보와 네트워크 경쟁력을 갖춤 으로써 세계 무역투자의 중심이 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무역 투자 란 공사 의 고유사업영역으로서 공사의 기본임무이자 공사 전문화의 대상을 나타내며, 이는 공사 전문화를 실행하는 객체인 것이다. 한편, 전문 이란 고부가가치 지식창출 전문 가 집단을 지향한다는 의미로 고유사업 영역의 전문성 확보와 아울러 양적인 서비스 에서 질적인 서비스의 확대를 의미한다. 또한 기관 으로는 공익성과 기업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국가기관을 나타낸다. 이러한 공사의 비전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무역 투자 부문에서 세계 수준의 전문가 집단이 되겠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명실상부( 名 實 相 符 )라는 말이 있다.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KOTRA가 과연 얼마만큼 이름과 실상이 꼭 맞아떨어졌는지 성찰해보지 않을 수 없다. 장보고는 우리 무역인의 대선배님이다. 1996년 5월 손보기 교수 등 국내외 학자 8명은 장보고의 뜻을 기리기 위해 전남 완도항에서 중국 적산( 赤 山 ) 법화원( 法 華 院 ) 으로 배를 타고 가면서 국제선상 학술회의를 열었고, 1999년 초에는 뮤지컬 장보고 의 꿈 을 예술의 전당 오페라 극장에서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작가 최인호는 2002년 해신 을 <중앙일보>에 연재한 후 책으로 발간하였고, KBS는 해신을 원작으로 드라 마로 제작해 년 방영하기도 하였다. 범선 항해시대의 청해진 완도 해역은 나( 羅 ) 당( 唐 ) 일( 日 ) 3국 항로의 요충지 였다. 완도 앞바다는 이곳을 통과해야만 당나라와 일본에 갈 수 있는 항해의 길목이 었다. 장보고의 해상지배는 동북아 제국의 중앙집권적 질서가 약화되고 해상 질서가 440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441 혼란에 빠진 시대적 환경 속에서 성립되었다. 그는 강력한 군사력과 광범한 네트워크 를 바탕으로 청해진이라는 복합적 자립적인 조직을 구축했다. 더욱이 대담하게 글 로벌 스탠더드를 수용함으로써 당과 일본을 교역망에 포섭하고 재외 신라인을 활용 하여 글로벌 네트워크를 완성시켰다. (한창수, 천년전의 글로벌 CEO, 해상왕 장보 고, 삼성경제연구소, 2004년, 43쪽) 한창수는 장보고의 성공 요인을 다음과 같이 들었다. 1 시대를 정확히 읽었다. 2 인재를 거느릴 줄 알았다. 3 군사력(sea force), 조선술과 항해술 등 실력을 갖추었다. 4 선발자의 이점(first mover s advantage)을 극대화했다. 5 네트워크를 활용했다. 6 가치(global values)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이 정도 혜안을 가진 실력자라면 무 역지인간( 貿 易 之 人 間 ) 장보고를 우리의 멘토로 삼고도 남지 않을까. KOTRA 50년을 뛰어넘어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면서 말이다. 임용탁 / KOTRA 50년사 전문위원 441 Ⅳ. KOTRA와 코트라맨의 정체성을 찾아서

442 KOTRA 50년사에 참여하신 분들 편찬위원회 편찬위원장(부사장) 오성근 편찬부위원장(이사) 배창헌, 우기훈, 김병권 편찬위원 강영수, 김두영, 김성수, 김영웅, 김종춘, 김평희, 나윤수, 나창엽, 노인호, 박동형, 박상협, 박영하, 소병택, 안상근, 양기모, 어성일, 원종성, 윤재천, 이규선, 이태식, 정 철, 정 혁, 정호원, 조은호, 한선희, 한정현, 함정오 50년사 편찬 TF 정 철, 최현진, 임용탁, 김태성, 윤승휘 도움을 주신 분들 원고 집필 강상엽, 강영수, 고광욱, 권경덕, 김경율, 권선홍, 권용석, 권중헌, 김건영, 김두희, 김문영, 김병권, 김상묵, 김상욱, 김선화, 김영웅, 김유정, 김종경, 김태호, 김평희, 나윤수, 노인호, 류영규, 문진욱, 박성기, 박은우, 박진형, 박종근, 박해열, 박현성, 배창헌, 복덕규, 서강석, 서호준, 신남식, 신환섭, 안지성, 양장석, 엄성필, 오정아, 우기훈, 윤정혁, 윤효춘, 이길범, 이승기, 이승희, 이종건, 이창용, 임채근, 장수영, 정 철, 조영수, 조현선, 최정석, 추경애, 편보현, 한정현 OB 고용하, 곽복선, 권오남, 기현서, 김규식, 김돈유, 김승철, 김영철, 김인식, 김재효, 민경선, 박기식, 박범훈, 박승종, 박영복, 박재규, 박종식, 박찬신, 박행웅, 심창섭, 안홍철, 윤승렬, 이 기, 이선인, 이인석, 임성빈, 임용탁, 장동락, 장병선, 장행복, 전상우, 정길원, 정동식, 조대형, 차종대, 채 훈, 최용식, 최진계, 허길주 외부 김달호 외부 기관 현대기아자동차, 한국우편사업진흥원, 국립경주박물관, 국가기록원, 한국산업기술미디어문화재단( 기관 을 찾아서 영상제공), KTV(대한뉴스 출처), JETRO, TAITRA, CCPIT, AEON, AUSTRADE, 보잉코리 아, 한국바스프, 화승R&A, 다쓰테크, 벨금속공업

443 좌담회 김두환, 김만율, 김상관, 김성준, 김용집, 김인식, 김인준, 민경선, 박기식, 박찬혁, 백창곤, 심창섭, 이은직, 이창렬, 이한철, 이효수, 장무환, 황민하(이상 OB), 김병권, 배창헌, 오성근, 우기훈 경영자문위원회 곽재원(한국과학기술단체 총연합회), 김시범(안동대학교), 남영숙(이화여자대학교), 남택운(퓨어플러스), 문휘창(서울대학교), 심영섭(KIET), 안세영(서강대학교), 안현실(한국경제신문), 이만우(고려대학교), 이영상(데이터스트림즈), 이장우(경북대학교), 이종재(한국SR전략연구소), 이창양(KAIST), 이학노(동국대학교), 임채운(서강대학교), 오준석(숙명여자대학교), 유관희(고려대학교), 정인교(인하대학교), 최낙균(대외경제정책연구원), 오영호, 류대형 OB, 강중경 OB, 고석원 OB, 최선정 OB, 서태원 OB, 임광식 OB 역대 사장 장성환, 윤자중, 한봉수, 김철수, 박용도, 황두연, 오영교, 홍기화, 조환익, 홍석우, 오영호 사진 및 영상 제공 김도훈, 김삼식, 이석만 OB, 이영선, 서강석, 김종섭, 박상협, 박성기, 김상관 OB, 한정현, 고석원 OB, 홍순완(외부) 제작에 도움을 주신 분들 기획 제작 원고 집필 원고 감수 기획 진행 사진 촬영 편집디자인 일러스트 (주)사사연( ) 최익근, 임용탁 우재욱 송미경, 정용환, 황선경, 김민환 신한호, 홍태식 김봉재, 김근화, 조재영, 이진아 마인드C 분해 제판 인쇄 제작 윙윙아이디 넥스트프레스(주)

444 1962~2012 제2권 해가 지지 않는 KOTRA, 도전하는 코트라맨 인쇄 발행 발행인 발행처 비매품 2012년 5월 30일 2012년 6월 10일 오영호 KOTRA 서울시 서초구 헌릉로 13번지

652

652 축 사 2003년 11월 5일 수요일 제 652 호 대구대신문 창간 39주년을 축하합니다! 알차고 당찬 대구대신문으로 지로자(指걟者)의 역할 우리 대학교의 대표적 언론매체인 대구대 신문이 오늘로 창간 서른 아홉 돌을 맞았습 니다. 정론직필을 사시로 삼고 꾸준히 언로 의 개척을 위해 땀흘려온 그 동안의 노고에 전 비호가족을 대표하여 축하의 뜻을 전하 는 바입니다.

More information

새만금세미나-1101-이양재.hwp

새만금세미나-1101-이양재.hwp 새만금지역의 합리적인 행정구역 결정방안 이 양 재 원광대학교 교수 Ⅰ. 시작하면서 행정경계의 획정 원칙은 국민 누가 보아도 공감할 수 있는 기준으로 결정 되어야 관련 지방자치단체와 시민들의 분쟁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을 모 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신생매립지의 관할에 대한 지방자치단체 간 분쟁(경기도 평택시와 충청남도 당진군, 전라남도 순천시와 전라남도 광양시

More information

???? 1

???? 1 제 124 호 9 3 와 신시가지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나면 제일 먼저 이 도시에서 언제나 활기가 넘 쳐나는 신시가지로 가게 된다. 그 중심에 는 티무르 공원이 있다. 이 공원을 중심으 로 티무르 박물관과 쇼핑 거리가 밀집돼 있다. 공원 중심에는 우즈베키스탄의 영 웅, 티무르 대제의 동상이 서 있다. 우즈베 키스탄을 여행하다 보면 어느 도시에서나 티무르의 동상이나

More information

사진 24 _ 종루지 전경(서북에서) 사진 25 _ 종루지 남측기단(동에서) 사진 26 _ 종루지 북측기단(서에서) 사진 27 _ 종루지 1차 건물지 초석 적심석 사진 28 _ 종루지 중심 방형적심 유 사진 29 _ 종루지 동측 계단석 <경루지> 위 치 탑지의 남북중심

사진 24 _ 종루지 전경(서북에서) 사진 25 _ 종루지 남측기단(동에서) 사진 26 _ 종루지 북측기단(서에서) 사진 27 _ 종루지 1차 건물지 초석 적심석 사진 28 _ 종루지 중심 방형적심 유 사진 29 _ 종루지 동측 계단석 <경루지> 위 치 탑지의 남북중심 하 출 입 시 설 형태 및 특징 제2차 시기 : 건물 4면 중앙에 각각 1개소씩 존재 - 남, 서, 북면의 기단 중앙에서는 계단지의 흔적이 뚜렷이 나타났으며 전면과 측면의 중앙칸에 위치 - 동서 기단 중앙에서는 계단 유인 계단우석( 階 段 隅 石 ) 받침지대석이 발견 - 계단너비는 동측면에서 발견된 계단우석 지대석의 크기와 위치를 근거로 약 2.06m - 면석과

More information

2009답사본문완성(1223)

2009답사본문완성(1223) 1200 1999 12 100 2000 100 2003 50 5 2004 2005 1200 21 2009 2009 2009 12 22 8 1 4 50 4 10 8 2 13 5 1 2 3 3 42 38 42 3 4 23 1 5 9 200 4 1984 9 10 8 3 67 2 500 3 3 1964 1972 228 600 7 912 10 15 8 1

More information

1. 수요자 맞춤형 원스탑 현장 지원체계를 강화 합니다. (1) FTA 통합 콜센터(1380)를 통해 원스탑 애로해소를 지원합니다. * 전화번호 키패드상에? 를 형상화하는 1380번호를 부여하고, FTA활용 관련 전문상담을 시행하는 콜센터를 FTA 무역종합지원 센터 內

1. 수요자 맞춤형 원스탑 현장 지원체계를 강화 합니다. (1) FTA 통합 콜센터(1380)를 통해 원스탑 애로해소를 지원합니다. * 전화번호 키패드상에? 를 형상화하는 1380번호를 부여하고, FTA활용 관련 전문상담을 시행하는 콜센터를 FTA 무역종합지원 센터 內 보 도 자 료 http://www.motie.go.kr 2013년 6월 27일(목) 9시 30분 부터 보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문의: 산업부 총괄기획과 안성일 과장(02-2110-4535), 김성철 사무관(02-2110-4542) 활용촉진과 신동준 과장(02-2110-4511), 임 택 사무관(02-2110-4514) FTA 이행과 박종한 과장(02-2110-4801),

More information

시간 時 間 을 깨 우 다 산업화 시절 인천 이야기 유네스코지정 2015 세계책의 수도, 인천 시간 時 間 을 깨 우 다 산업화 시절 인천 이야기 인천만의 가치창조 일러두기 본 책자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인천광역시가 소장한 것이며 그 외 사진은 소장자나 촬영자의 이름을 밝혔습니다. 글은 인천광역시 대변인실 홍보콘텐츠팀장 유동현(굿모닝인천 편집장)이 인천일보에

More information

............

............ 제2장 1. 모월곶, 석곶, 서곶, 개건너 검단지역이 편입되기 전, 인천의 서구 전체는 지난날 서곶으로 불리던 지역이었다. 1914년 4월 1일 부평군 모월곶면과 석곶면을 통합되어 서곶 면이 되었다. 서곶이라는 지명은 군 소재지인 부평에서 서쪽 해안에 길 게 뻗어있으므로 그렇게 지어졌다. 이 지명은 반세기 이상 사용되었다. 그래서 인천시가 구제( 區 制 )를

More information

며 오스본을 중심으로 한 작은 정부, 시장 개혁정책을 밀고 나갔다. 이에 대응 하여 노동당은 보수당과 극명히 반대되는 정강 정책을 내세웠다. 영국의 정치 상황은 새누리당과 더불어 민주당, 국민의당이 서로 경제 민주화 와 무차별적 복지공약을 앞세우며 표를 구걸하기 위한

며 오스본을 중심으로 한 작은 정부, 시장 개혁정책을 밀고 나갔다. 이에 대응 하여 노동당은 보수당과 극명히 반대되는 정강 정책을 내세웠다. 영국의 정치 상황은 새누리당과 더불어 민주당, 국민의당이 서로 경제 민주화 와 무차별적 복지공약을 앞세우며 표를 구걸하기 위한 4.13 총선, 캐머런과 오스본, 영국 보수당을 생각하다 정 영 동 중앙대 경제학과 자유경제원 인턴 우물 안 개구리인 한국 정치권의 4.13 총선이 한 달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정당 간 정책 선거는 실종되고 오로지 표를 얻기 위한 이전투구식 경쟁이 심 화되고 있다. 정말 한심한 상황이다. 정당들은 각 당이 추구하는 이념과 정강 정책, 목표를 명확히 하고,

More information

Microsoft Word - 青野論文_李_.doc

Microsoft Word - 青野論文_李_.doc 식민지 조선에 있어서 농촌진흥운동기의 경신숭조( 敬 神 崇 祖 ) -조선총독부의 신사정책과 관련하여- 아오노 마사아키( 青 野 正 明 ) 모모야마가쿠인대학( 桃 山 学 院 大 学 ) 번역:이화진 들어가는 말 본고에서는 주로 1930 년대 전반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실시된 농촌진흥운동 1 에 있어서, 신사정책( 神 社 政 策 )과 관계가 있다고 예상되는 농본주의(

More information

<B5B6BCADC7C1B7CEB1D7B7A52DC0DBBEF7C1DF313232332E687770>

<B5B6BCADC7C1B7CEB1D7B7A52DC0DBBEF7C1DF313232332E687770> 2013 소외계층 독서 인문학 프로그램 결과보고서 - 2 - 2013 소외계층 독서 인문학 프로그램 결과보고서 c o n t e n t s 5 22 44 58 84 108 126 146 168 186 206 220 231 268 296 316 꽃바위 작은 도서관 꿈이 자라는 책 마을 기적의 도서관 남부 도서관 농소 1동 도서관 농소 3동 도서관 동부 도서관

More information

<B9E9B3E2C5CDBFEFB4F5B5EBBEEE20B0A1C1A4B8AE20B1E6C0BB20B0C8B4C2B4D92E687770>

<B9E9B3E2C5CDBFEFB4F5B5EBBEEE20B0A1C1A4B8AE20B1E6C0BB20B0C8B4C2B4D92E687770> 2011 어르신 생활문화전승프로그램 柯 亭 里 義 兵 마을 백년터울 더듬어 가정리 길을 걷는다 주관 춘천문화원 후원 한국문화원 연합회 문화체육관광부 -차 례- 제1장 구술 자료의 가치 1. 역사적 측면 2. 문화적 측면 3. 미래 삶의 터전 제2장 지명으로 전하는 생활문화전승 제3장 구술로 전하는 생활문화전승 1. 의암제를 준비하는 사람 류연창 2. 고흥 류

More information

주지스님의 이 달의 법문 성철 큰스님 기념관 불사를 회향하면서 20여 년 전 성철 큰스님 사리탑을 건립하려고 중국 석굴답사 연구팀을 따라 중국 불교성지를 탐방하였습 니다. 대동의 운강석굴, 용문석굴, 공의석굴, 맥적산석 굴, 대족석굴, 티벳 라싸의 포탈라궁과 주변의 큰

주지스님의 이 달의 법문 성철 큰스님 기념관 불사를 회향하면서 20여 년 전 성철 큰스님 사리탑을 건립하려고 중국 석굴답사 연구팀을 따라 중국 불교성지를 탐방하였습 니다. 대동의 운강석굴, 용문석굴, 공의석굴, 맥적산석 굴, 대족석굴, 티벳 라싸의 포탈라궁과 주변의 큰 불교학과반(1년 과정) 기초교리반(6개월 과정) 매주 화요일 저녁 7시 매주 목요일 오후 2시 / 저녁 7시 5월 5일 5월 12일 5월 19일 5월 26일 어린이날 휴강 인도불교사 2 / 이거룡 교수님 인도불교사 3 / 이거룡 교수님 중국불교사 1 / 이덕진 교수님 5월 7일 5월 14일 5월 21일 5월 28일 백련암 예불의식 및 기도법 / 총무스님 성철

More information

포천시시설관리공단 내규 제 24호 포천시시설관리공단 인사규정 시행내규 일부개정(안) 포천시시설관리공단 인사규정 시행내규 일부를 다음과 같이 개정 한다. 제17조(기간제근로자의 무기계약직 임용) 1 기간제근로자 관리규정 제16조 를 제19조 로 한다. 제20조(인사기록)

포천시시설관리공단 내규 제 24호 포천시시설관리공단 인사규정 시행내규 일부개정(안) 포천시시설관리공단 인사규정 시행내규 일부를 다음과 같이 개정 한다. 제17조(기간제근로자의 무기계약직 임용) 1 기간제근로자 관리규정 제16조 를 제19조 로 한다. 제20조(인사기록) 포천시시설관리공단 인사규정 시행내규 개정이유 및 주요내용 개정구분 :일부개정 개정이유 조항에 대한 오류 수정 및 근무성적평정 작성 기준 변경사항을 적용하여 인사관리 업무에 만전을 기하고자함 주요내용 신 구조문 대비표 참조 개정 규정안 :덧붙임 신 구조문 대비표 :덧붙임 그 밖에 참고사항 :덧붙임 포천시시설관리공단 인사규정시행내규(전문) 포천시시설관리공단 내규

More information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봅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체험합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집시다. 5. 우리 옷 한복의 특징 자료 3 참고 남자와 여자가 입는 한복의 종류 가 달랐다는 것을 알려 준다. 85쪽 문제 8, 9 자료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봅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체험합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집시다. 5. 우리 옷 한복의 특징 자료 3 참고 남자와 여자가 입는 한복의 종류 가 달랐다는 것을 알려 준다. 85쪽 문제 8, 9 자료 통합 우리나라 ⑵ 조상님들이 살던 집에 대 해 아는 어린이 있나요? 저요. 온돌로 난방과 취사를 같이 했어요! 네, 맞아요. 그리고 조상님들은 기와집과 초가집에서 살았어요. 주무르거나 말아서 만들 수 있는 전통 그릇도 우리의 전통문화예요. 그리고 우리 옷인 한복은 참 아름 답죠? 여자는 저고리와 치마, 남자는 바지와 조끼를 입어요. 명절에 한복을 입고 절을

More information

상품 전단지

상품 전단지 2013 2013 추석맞이 추석맞이 지역우수상품 안내 안내 지역우수상품 지역 우수상품을 안내하여 드리오니 명절 및 행사용 선물로 많이 활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지역우수상품을 구입하시면 지역경제가 살아납니다. 즐거운 한가위 보내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 경기동부상공회의소 임직원 일동 - 지역우수상품을 구입하시면 지역경제가 살아납니다.

More information

::: 해당사항이 없을 경우 무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검토항목 검 토 여 부 ( 표시) 시 민 : 유 ( ) 무 시 민 참 여 고 려 사 항 이 해 당 사 자 : 유 ( ) 무 전 문 가 : 유 ( ) 무 옴 브 즈 만 : 유 ( ) 무 법 령 규 정 : 교통 환경 재

::: 해당사항이 없을 경우 무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검토항목 검 토 여 부 ( 표시) 시 민 : 유 ( ) 무 시 민 참 여 고 려 사 항 이 해 당 사 자 : 유 ( ) 무 전 문 가 : 유 ( ) 무 옴 브 즈 만 : 유 ( ) 무 법 령 규 정 : 교통 환경 재 시 민 문서번호 어르신복지과-1198 주무관 재가복지팀장 어르신복지과장 복지정책관 복지건강실장 결재일자 2013.1.18. 공개여부 방침번호 대시민공개 협 조 2013년 재가노인지원센터 운영 지원 계획 2013. 01. 복지건강실 (어르신복지과) ::: 해당사항이 없을 경우 무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검토항목 검 토 여 부 ( 표시) 시 민 : 유 ( ) 무

More information

2

2 1 2 3 4 5 6 또한 같은 탈북자가 소유하고 있던 이라고 할수 있는 또 한장의 사진도 테루꼬양이라고 보고있다. 二宮喜一 (니노미야 요시가즈). 1938 년 1 월 15 일생. 신장 156~7 센치. 체중 52 키로. 몸은 여윈형이고 얼굴은 긴형. 1962 년 9 월경 도꾜도 시나가와구에서 실종. 당시 24 세. 직업 회사원. 밤에는 전문학교에

More information

화이련(華以戀) 141001.hwp

화이련(華以戀) 141001.hwp 年 花 下 理 芳 盟 段 流 無 限 情 惜 別 沈 頭 兒 膝 夜 深 雲 約 三 십년을 꽃 아래서 아름다운 맹세 지키니 한 가닥 풍류는 끝없는 정이어라. 그대의 무릎에 누워 애틋하게 이별하니 밤은 깊어 구름과 빗속에서 삼생을 기약하네. * 들어가는 글 파르라니 머리를 깎은 아이가 시린 손을 호호 불며 불 옆에 앉아 있다. 얼음장 같은 날씨에 허연 입김이 연기처럼

More information

ÆòÈ�´©¸® 94È£ ³»Áö_ÃÖÁ¾

ÆòÈ�´©¸® 94È£ ³»Áö_ÃÖÁ¾ 사람 안간힘을 다해 행복해지고 싶었던 사람, 허세욱을 그리다 - 허세욱 평전 작가 송기역 - 서울 평통사 노동분회원 허세욱. 효순이 미선이의 억울한 죽음에 대 해 미국은 사죄하라는 투쟁의 현장에 서 그 분을 처음 만났다. 평택 대추리 의 넓은 들판을 두 소녀의 목숨을 앗 아간 미군들에게 또 빼앗길 순 없다며 만들어 온 현수막을 대추초교에 같이 걸었다. 2007년

More information

歯1##01.PDF

歯1##01.PDF 1.? 1.?,..,.,. 19 1.,,..,. 20 1.?.,.,,...,.,..,. 21 1,.,.,. ( ),. 10 1? 2.5%. 1 40. 22 1.? 40 1 (40 2.5% 1 ). 10 40 4., 4..,... 1997 ( ) 12. 4.6% (26.6%), (19.8%), (11.8%) 23 1. (?).. < >..,..!!! 24 2.

More information

<5BC1F8C7E0C1DF2D31B1C75D2DBCF6C1A4BABB2E687770>

<5BC1F8C7E0C1DF2D31B1C75D2DBCF6C1A4BABB2E687770> 제3편 정 치 제3편 정치 제1장 의회 제1절 의회 기구 제2절 의회기구 및 직원 현황 자치행정전문위원회 자치행정전문위원 산업건설위원회 산업건설전문위원 제1장 의회 321 제3절 의회 현황 1. 제1대 고창군의회 제1대 고창군의회 의원 현황 직 위 성 명 생년월일 주 소 비 고 322 제3편 정치 2. 제2대 고창군의회 제2대 고창군의회 의원 현황 직 위

More information

120229(00)(1~3).indd

120229(00)(1~3).indd 법 률 국회에서 의결된 공직선거법 일부개정법률을 이에 공포한다. 대 통 령 이 명 박 2012년 2월 29일 국 무 총 리 김 황 식 국 무 위 원 행정안전부 맹 형 규 장 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소관) 법률 제11374호 공직선거법 일부개정법률 공직선거법 일부를 다음과 같이 개정한다. 제21조제1항에 단서를 다음과 같이 신설한다. 다만,세종특별자치시의 지역구국회의원

More information

01Report_210-4.hwp

01Report_210-4.hwp 연구보고서 210-4 해방 후 한국여성의 정치참여 현황과 향후 과제 한국여성개발원 목 차 Ⅰ 서 론 Ⅱ 국회 및 지방의회에서의 여성참여 Ⅲ 정당조직내 여성참여 및 정당의 여성정책 Ⅳ 여성유권자의 투표율 및 투표행태 Ⅴ 여성단체의 여성정치참여 확대를 위한 운동 Ⅵ 여성의 정치참여 확대를 위한 향후 과제 참고문헌 부 록 표 목 차 Ⅰ 서 론 . 서론 1.

More information

<C3D1BCB15FC0CCC8C45FBFECB8AE5FB1B3C0B0C0C75FB9E6C7E228323031362D352D32315FC5E4292E687770>

<C3D1BCB15FC0CCC8C45FBFECB8AE5FB1B3C0B0C0C75FB9E6C7E228323031362D352D32315FC5E4292E687770> 총선 이후 우리 교육의 방향 당 체제에서 우리 교육의 전망과 교육행정가들의 역할 박 호 근 서울시의회 의원 교육위원회 위원 서론 년 월 일 제 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선거는 바로 민의 의 반영이기 때문에 총선결과를 살펴보고 왜 이러한 결과가 나왔는가를 분석해 본 후 년 월 일을 기점으로 제 대 국회의원들의 임기가 시 작되는 상황에서 우리 교육이 어떻게

More information

목 차 營 下 面 5 前 所 面 71 後 所 面 153 三 木 面 263 龍 流 面 285 都 已 上 條 367 同 治 六 年 (1867) 正 月 日 永 宗 防 營 今 丁 卯 式 帳 籍 범례 1. 훼손 등의 이유로 판독이 불가능한 글자는 로 표기함. 단, 비정 이 가능한 경우는 ( ) 안에 표기함. 2. 원본에서 누락된 글자는 [ ] 안에 표기함. 단, 누락된

More information

639..-1

639..-1 제639호 [주간] 2014년 12월 15일(월요일) http://gurotoday.com http://cafe.daum.net/gorotoday 문의 02-830-0905 대입 준비에 지친 수험생 여러분 힘내세요 신도림테크노마트서 수험생과 학부모 600명 대상 대입설명회 구로아트밸리서는 수험생 1,000명 초대 해피 콘서트 열려 구로구가 대입 준비로 지친

More information

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20 11-36 1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20 11-36 1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교육과학기술부 고시 제 2011 361호 [별책 3] 중학교 교육과정 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20 11-36 1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2 와 같습니다. 3.

More information

시험지 출제 양식

시험지 출제 양식 2013학년도 제2학기 제1차 세계사 지필평가 계 부장 교감 교장 2013년 8월 30일 2, 3교시 제 3학년 인문 (2, 3, 4, 5)반 출제교사 : 백종원 이 시험 문제의 저작권은 풍암고등학교에 있습니다. 저 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전재와 복제는 금지 되며, 이를 어길 시 저작권법에 의거 처벌될 수 있습니다. 3. 전근대 시기 (가)~(라)

More information

¸é¸ñ¼Ò½ÄÁö 63È£_³»Áö ÃÖÁ¾

¸é¸ñ¼Ò½ÄÁö 63È£_³»Áö ÃÖÁ¾ 정보나눔 섭이와 함께하는 여행 임강섭 복지과 과장 여름이다. 휴가철이다. 다 들 어디론가 떠날 준비에 마음 이 들떠 있는 시기가 아닌가 싶다. 여행 매니아까지는 아니 지만, 나름 여행을 즐기는 사 람으로서 가족들과 신나는 휴 가를 보낼 계획에 살짝 들떠 있는 나에게 혼자만 신나지 말 고 같이 좀 신났으면 좋겠다며 가족들과 같이 가면 좋은 여행 눈이 시리도록

More information

177

177 176 177 178 179 180 181 182 183 184 185 186 187 188 (2) 양주조씨 사마방목에는 서천의 양주조씨가 1789년부터 1891년까지 5명이 합격하였다. 한산에서도 1777년부터 1864년까지 5명이 등재되었고, 비인에서도 1735년부터 1801년까지 4명이 올라있다. 서천지역 일대에 넓게 세거지를 마련하고 있었 던 것으로

More information

제주어 교육자료(중등)-작업.hwp

제주어 교육자료(중등)-작업.hwp 여는말 풀꽃, 제주어 제주어는 제주인의 향기입니다. 제주인의 삶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삶의 향기이고, 꿈의 내음입니다. 그분들이 어루만졌던 삶이 거칠었던 까닭에 더욱 향기롭고, 그 꿈이 애틋했기에 더욱 은은합니다. 제주어는 제주가 피워낸 풀잎입니다. 제주의 거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비바람 맞고 자랐기에 더욱 질박합니다. 사철 싱그러운 들풀과 들꽃향기가

More information

<C3D6C1BE5FBBF5B1B9BEEEBBFDC8B0B0DCBFEFC8A32831333031323120C3D6C1BEBABB292E687770>

<C3D6C1BE5FBBF5B1B9BEEEBBFDC8B0B0DCBFEFC8A32831333031323120C3D6C1BEBABB292E687770> 우리 시의 향기 사랑하는 일과 닭고기를 씹는 일 최승자, 유 준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강사/문학평론가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More information

초등국어에서 관용표현 지도 방안 연구

초등국어에서 관용표현 지도 방안 연구 80 < 관용 표현 인지도> 남 여 70 60 50 40 30 20 10 0 1 2 3 4 5 6 70 < 관용 표현 사용 정도> 남 여 60 50 40 30 20 10 0 4학년 가끔쓴다 써본적있다 전혀안쓴다 5학년 가끔쓴다 써본적있다 전혀안쓴다 6학년 가끔쓴다 써본적있다 전혀안쓴다 70 < 속담 인지도> 남 여 60 50 40 30 20 10 0 1 2

More information

6±Ç¸ñÂ÷

6±Ç¸ñÂ÷ 6 6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44 45 46 과천심상소학교 졸업증서(문헌번호 03-004) 일제강점기 과천초등학교의 유일한 한국인 교장이었던 맹준섭임을 알 수 있다.

More information

과 위 가 오는 경우에는 앞말 받침을 대표음으로 바꾼 [다가페]와 [흐귀 에]가 올바른 발음이 [안자서], [할튼], [업쓰므로], [절믐] 풀이 자음으로 끝나는 말인 앉- 과 핥-, 없-, 젊- 에 각각 모음으로 시작하는 형식형태소인 -아서, -은, -으므로, -음

과 위 가 오는 경우에는 앞말 받침을 대표음으로 바꾼 [다가페]와 [흐귀 에]가 올바른 발음이 [안자서], [할튼], [업쓰므로], [절믐] 풀이 자음으로 끝나는 말인 앉- 과 핥-, 없-, 젊- 에 각각 모음으로 시작하는 형식형태소인 -아서, -은, -으므로, -음 . 음운 [ㄱ] [국], [박], [부억], [안팍] 받침의 발음 [ㄷ] [곧], [믿], [낟], [빋], [옫], [갇따], [히읃] [ㅂ] [숩], [입], [무릅] [ㄴ],[ㄹ],[ㅁ],[ㅇ] [간], [말], [섬], [공] 찾아보기. 음절 끝소리 규칙 (p. 6) [ㄱ] [넉], [목], [삭] [ㄴ] [안따], [안꼬] [ㄹ] [외골], [할꼬]

More information

민주장정-노동운동(분권).indd

민주장정-노동운동(분권).indd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노동운동사 정 호 기 농민운동 1 목 차 제1장 연구 배경과 방법 07 1. 문제제기 2. 기존 연구의 검토 3. 연구 대상의 특성과 변화 4. 연구 자료와 연구 방법 07 10 12 16 제2장 이승만 정부 시대의 노동조합운동 19 1. 이승만 정부의 노동정책과 대한노총 1) 노동 관련 법률들의 제정과 광주

More information

<C0CEBCE2BABB2D33C2F7BCF6C1A420B1B9BFAAC3D1BCAD203130B1C72E687770>

<C0CEBCE2BABB2D33C2F7BCF6C1A420B1B9BFAAC3D1BCAD203130B1C72E687770> 해제 면양행견일기 沔 陽 行 遣 日 記 이 자료는 한말의 개화파 관료, 김윤식 金 允 植 (1835~1922)이 충청도 면천 沔 川 에 유배하면서 동학농민혁명 시기에 전문 傳 聞 한 것을 일일이 기록한 일기책 이다. 수록한 부분은 속음청사 續 陰 晴 史 의 권 7로 내제 內 題 가 면양행견일기 沔 陽 行 遣 日 記 로 되어 있는 부분 가운데 계사년 癸 巳 年

More information

조선왕조 능 원 묘 기본 사료집 -부록 : 능 원 묘의 현대적 명칭표기 기준안 차 례 서 장 : 조선왕실의 능 원 묘 제도 11 제 1부 능 원 묘 기본 사료 Ⅰ. 능호( 陵 號 ) 및 묘호( 廟 號 )를 결정한 유래 1. 건원릉( 健 元 陵 ) 21 2. 정릉( 貞 陵 ) 22 3. 헌릉( 獻 陵 )

More information

E1-정답및풀이(1~24)ok

E1-정답및풀이(1~24)ok 초등 2 학년 1주 2 2주 7 3주 12 4주 17 부록` 국어 능력 인증 시험 22 1주 1. 느낌을 말해요 1 ⑴ ᄂ ⑵ ᄀ 1 8~13쪽 듣기 말하기/쓰기 1 ` 2 ` 3 참고 ` 4 5 5 5 ` 6 4 ` 7 참고 ` 8 일기 ` 9 5 10 1 11, 3 [1~3] 들려줄 내용 옛날 옛날, 깊은 산골짜기에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 이

More information

<C1B6BCB1B4EBBCBCBDC3B1E2342DC3D6C1BE2E687770>

<C1B6BCB1B4EBBCBCBDC3B1E2342DC3D6C1BE2E687770> 권2 동경잡기 東京雜記 동경잡기 173 권2 불우 佛宇 영묘사(靈妙寺) 부(府)의 서쪽 5리(里)에 있다. 당 나라 정관(貞觀) 6년(632) 에 신라의 선덕왕(善德王)이 창건하였다. 불전(佛殿)은 3층인데 체제가 특이하다. 속설에 절터는 본래 큰 연못이었는데, 두두리(豆豆里) 사람들이 하룻밤 만에 메 우고 드디어 이 불전을 세웠다. 고 전한다. 지금은

More information

<32303132BDC3BAB8C1A4B1D4C6C75BC8A3BFDC303530395D2E687770>

<32303132BDC3BAB8C1A4B1D4C6C75BC8A3BFDC303530395D2E687770> 조 례 익산시 조례 제1220호 익산시 주민감사 청구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 1 익산시 조례 제1221호 익산시 제안제도 운영조례 일부개정조례 3 익산시 조례 제1222호 익산시 시채에 관한 조례 폐지조례 12 익산시 조례 제1223호 익산시 시세 감면 조례 전부개정조례 13 익산시 조례 제1224호 익산시 행정기구설치조례 19 익산시 조례 제1225호 익산시

More information

38--18--최우석.hwp

38--18--최우석.hwp 古 詩 源 < 顔 延 之 > 篇 譯 註 * 崔 宇 錫 1) 1. 序 文 2. 古 詩 源 < 顔 延 之 > 篇 譯 註 3. 結 語 1. 序 文 沈 德 潛 (1673-1769)의 字 는 確 士 이고 號 는 歸 愚 이다. 江 南 長 洲 (현재의 江 蘇 省 蘇 州 ) 사람으로 淸 代 聖 祖, 世 宗, 高 宗 삼대를 모두 거쳤다. 특히 시를 몹 시 좋아한

More information

교사용지도서_쓰기.hwp

교사용지도서_쓰기.hwp 1. 재미있는 글자 단원의 구성 의도 이 단원은 도비와 깨비가 길을 잃고 헤매다 글자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고 글자 공부를 하게 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자칫 지겨울 수 있는 쓰기 공부를 다양한 놀이 위주의 활동으로 구성하였고, 학습자 주변의 다양한 자료들을 활용함으로써 학습에 대한 흥미를 갖고 활동할 수 있게 하였다. 각 단계의 학습을 마칠 때마다 도깨비 연필을

More information

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과 임제 신해진(전남대) 1. 머리말 세조의 왕위찬탈과 단종복위 과정에서의 사육신을 소재로 한 작품은 남효온( 南 孝 溫 )의 (1492년 직전?), 임제( 林 悌 )의 (1576?), 김수민( 金 壽 民 )의 (1757) 등이 있다. 1) 첫 작품은 집전( 集

More information

cls46-06(심우영).hwp

cls46-06(심우영).hwp 蘇 州 원림의 景 名 연구 * 用 典 한 경명을 중심으로 1)심우영 ** 목 차 Ⅰ. 서론 Ⅱ. 기존의 경명 命 名 法 Ⅲ. 귀납적 결과에 따른 경명 분류 1. 신화전설 역사고사 2. 文 辭, 詩 句 Ⅳ. 결론 Ⅰ. 서론 景 名 이란 景 觀 題 名 (경관에 붙인 이름) 의 준말로, 볼만한 경치 지구와 경치 지 점 그리고 경치 지구 내 세워진 인공물에 붙여진

More information

0429bodo.hwp

0429bodo.hwp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 명단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 이 명단은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의 후손 또는 연고자로부터 이의신청을 받기 위해 작성 되었습니다. 이 인물정보를 무단 복사하여 유포하거나 인터넷을 통해 전 파하는일체의행위는법에저촉될수있습니다. 주요 훈포상 약어 1. 병합기념장 2. 대정대례기념장 3. 소화대례기념장

More information

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동경잡기東京雜記 권1 진한기辰韓紀 경상도는 본래 진한(辰韓)의 땅인데, 뒤에 신라(新羅)의 소유가 되었다. 여지승 람(輿地勝覽) 에 나온다. 진한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있다. 스스로 말하기를, 망 명한 진(秦)나라 사람이 난리를 피하여 한(韓)으로 들어오니 한이 동쪽 경계를 분할 하여 주었으므로 성책(城栅)을 세웠다. 하였다. 그 언어가 진나라 사람과 비슷하다.

More information

<C3D6BFECBCF6BBF328BFEBB0ADB5BF29202D20C3D6C1BE2E687770>

<C3D6BFECBCF6BBF328BFEBB0ADB5BF29202D20C3D6C1BE2E687770> 본 작품들의 열람기록은 로그파일로 남게 됩니다. 단순 열람 목적 외에 작가와 마포구의 허락 없이 이용하거나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시 저작권법의 규정에 의하여 처벌받게 됩니다. 마포 문화관광 스토리텔링 공모전 구 분 내 용 제목 수상내역 작가 공모분야 장르 소재 기획의도 용강동 정구중 한옥과 주변 한옥들에 대한 나의 추억 마포 문화관광 스토리텔링 공모전 최우수상

More information

LG Business Insight 1119호

LG Business Insight 1119호 당신도 의 덫에 빠질 수 있다 유형마다 강점이 있다. 동전의 양면처럼 에도 빛과 그림자 가 존재한다. 리더가 지나치게 강점만을 강조할 경우 어두운 그림자가 구성원들을 그늘지게 만들 수 있다. 스스로의 덫에 빠지지 않도록 리더가 유념해야 할 포인트들을 짚어본다. 조범상 책임연구원 [email protected] 한국 여자 축구가 세계를 제패하던 순간, SK 와이번스

More information

미디어펜 기고문

미디어펜 기고문 시대를 이끌어 간 기업가, 이병철 안 재 욱 (경희대 경제학과 교수) 고독한 결정 1983년 2월 일본 도쿄의 오쿠라 호텔. 이병철 회장은 반도체 사업 진출 여부를 놓고 며칠째 잠도 제대로 자지 못 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마침내 서울에 있는 중앙일보 홍진기 사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반도체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누가 뭐래도 밀고 나가겠다. 도쿄 선언

More information

untitled

untitled 베이징 올림픽 이후 중국의 변화와 한국의 과제 발간사 금년 8월 8일 중국 베이징에서 올림픽 게임이 개최된다. 일본의 동경 올림픽 과 한국의 서울 올림픽 개최가 한일 양국을 크게 변화하는 시점에 개최되었 듯 베이징 올림픽 역시 중국이 크게 변화하는 시점에 개최됨으로써 앞으로 우리는 중국의 많은 변화를 보게 될 것이다. 베이징 올림픽 개최 이후 여러 측면에서

More information

-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진행과정 후쿠시마 제1원전(후쿠시마 후타바군에 소재)의 사고는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북부 지방 을 강타한 규모 9.0의 대지진으로 인해 원자로 1~3호기의 전원이 멈추게 되면서 촉발되었다. 당시에 후쿠시마 제1원전의 총 6기의 원자로 가

-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진행과정 후쿠시마 제1원전(후쿠시마 후타바군에 소재)의 사고는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북부 지방 을 강타한 규모 9.0의 대지진으로 인해 원자로 1~3호기의 전원이 멈추게 되면서 촉발되었다. 당시에 후쿠시마 제1원전의 총 6기의 원자로 가 한국 원자력발전소의 위험성 201211307 임형주 다니엘 1. 들어가는 글 - 원자력발전소의 위험성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인해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일본은 물론 주변의 많은 국가들이 피해를 입고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원전피해의 영향은 고농도 오염지역으로부터 시작해서 점 점 가시화되어 직접적으로 나타나고, 그 범위 또한 점차적으로 넓어질

More information

삼성그룹 전망 토론회 자료집

삼성그룹 전망 토론회 자료집 삼성그룹 전망 토론회 자료집 이건희 일가 없는 삼성그룹을 상상하라! 일 시 : 2014년 8월 28일(목) 오후 2시 장 소 : 민주노총 13층 대회의실 주 최 : 투기자본감시센터 / 사민저널 / 좌파노동자회 사 회 : 이대순 투기자본감시센터 공동대표 발 제 : 정승일 사민저널 편집기획위원장 토 론 : 김봉수 성신여대 법학과 교수, 허영구 좌파노동자회 대표

More information

e01.PDF

e01.PDF 2119, -., 4.25-40 4 km -.. km,, -,.,,,,,,,,,,,..... . 90%..,.., 20 1 - -.,.. 2172,. - 3 - < > 1.! 6 2.. 10 3.? 18 4. 22 5. 26 6.. 32 7. 36 8.. 44 9.. 49 10.. 61 11. 65 12. 76 13.. 80 14. 85 15.. 90 16..

More information

원이며 경제 정책의 중심이었다. 토지가 재산의 시작이라 할 수 있기에 제한된 땅의 크기를 가지고 백성들에게 어느 정도 나누어 줄지, 국가는 얼마를 가져서 재정을 충당할지, 또 관료들은 얼마를 줄 것인지에 대해 왕조마다 중요한 사항이었다. 정도전의 토지개혁은 그런 의미에

원이며 경제 정책의 중심이었다. 토지가 재산의 시작이라 할 수 있기에 제한된 땅의 크기를 가지고 백성들에게 어느 정도 나누어 줄지, 국가는 얼마를 가져서 재정을 충당할지, 또 관료들은 얼마를 줄 것인지에 대해 왕조마다 중요한 사항이었다. 정도전의 토지개혁은 그런 의미에 육룡이나르샤 정도전의분배정치, 현재의패러다임은? 정 영 동 중앙대 경제학과 자유경제원 인턴 정치란 무엇인가! 정치란 나눔이요! 분배요! 정치의 문제란 누구에게 거둬 서 누구에게 주는가. 누구에게 빼앗아 누구에게 채워주는가! 육룡이 나르샤 에서 정도전( 鄭 道 傳 )이 토지개혁을 위해 백성들과 권문세족이 모인 자리에서 토지대장문서를 태우기 전 외친 말이다. 인기리에

More information

2008.11 1

2008.11 1 중국경제, 생활 올 가이드 베이징의 터줏대감들 세 필의 준마 우주를 누빈다 미국 발 금융위기 세계가 쑥대밭 国 内 零 售 价 : 10 元 20 0 8 11 2008.11 1 50 2008.11 단 신 Express 40 세 필의 준마 우주를 누비다 44 오를 수 있든 없든 오직 노력 뿐 46 포기를 모르는 지성파 우주인 48 경제 포커스 미 국 발 금 융 위기

More information

Ⅰ. 머리말 각종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초기 도읍은 위례성( 慰 禮 城 )이다. 위례성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등 많은 책에 실려 있는데, 대부분 조선시대에 편 찬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사서인 삼국사기 도 백제가 멸망한지

Ⅰ. 머리말 각종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초기 도읍은 위례성( 慰 禮 城 )이다. 위례성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등 많은 책에 실려 있는데, 대부분 조선시대에 편 찬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사서인 삼국사기 도 백제가 멸망한지 고대 동아시아의 왕성과 풍납토성 - 풍납토성의 성격 규명을 위한 학술세미나 - pp. 46-67 한국의 고대 왕성과 풍납토성 김기섭(한성백제박물관) 목차 Ⅰ. 머리말 Ⅱ. 한국 고대의 왕성 1. 평양 낙랑토성 2. 집안 국내성 3. 경주 월성 4. 한국 고대 왕성의 특징 Ⅲ. 풍납토성과 백제의 한성 1. 풍납토성의 현황 2. 한성의 풍경 Ⅰ. 머리말 각종 기록에

More information

<32303032BEC7BFECC1F62E687770>

<32303032BEC7BFECC1F62E687770> 2001-2002 전남대학교 산악회 2002년 제12집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그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도 잊었노라. 지도교수 인사말 산은 인생의 도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산은 無 言 속에서도 自 然 의 理 致 를 가르쳐주고, 또한 많은 智 慧 를 줍니다. 그러나 生 活

More information

<5BC1F8C7E0C1DF2D32B1C75D2DBCF6C1A4BABB2E687770>

<5BC1F8C7E0C1DF2D32B1C75D2DBCF6C1A4BABB2E687770> 제8편 사 회 제8편 사회 제1장 사회단체 제1절 개관(사회조직의 기능) 제2절 고창군의 사회단체 제1장 사회단체 619 고창군의 사회단체 내역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고창군의 사회단체 현황 (2009년 7월 현재) 연번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More information

<B9E9BCAD31B1C72DC0DBBEF72D32B1B32E687770>

<B9E9BCAD31B1C72DC0DBBEF72D32B1B32E687770>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백서 (상) 발 간 사 2005. 1. 출범한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가 그 소임을 다하고 2년 동안의 활동을 마치면서 그 동안의 성과를 담은 백서를 출간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고 보람된 일로 생각합니다. 정부 수립 이후 우리의 사법제도에 변화와 발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 기본적인 틀은 반세기가 지나도록 적지 않은 문제점과 한계를 내포한

More information

진단, 표시・광고법 시행 1년

진단, 표시・광고법 시행 1년 진단, 표시 광고법 시행 1년 표시 광고규제 법규는 통합되어야 한다! 정은종 호텔롯데 경영지원실/지적재산권법 석사 표시광고법 시행 1년 입법과정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던 표시광고법이 제정되어 시행( 99년 7월)된지 벌써 1년이 지났다. 공정거래법 23조1항6호의 부 당표시광고 규정이 분가하여 탄생한 표시광고법은 기존 공정거래법이 부당표시광고(허위 과장, 기만,

More information

<C1A634C2F720BAB8B0EDBCAD20C1BEC6ED20BDC3BBE720C5E4C5A920C7C1B7CEB1D7B7A5C0C720BEF0BEEE20BBE7BFEB20BDC7C5C220C1A1B0CB20C1A6C3E22E687770>

<C1A634C2F720BAB8B0EDBCAD20C1BEC6ED20BDC3BBE720C5E4C5A920C7C1B7CEB1D7B7A5C0C720BEF0BEEE20BBE7BFEB20BDC7C5C220C1A1B0CB20C1A6C3E22E687770> 종편 시사 토크 프로그램의 언어 사용 실태 점검 1) 2016년 2월 5일, 두 프로그램의 시청률은 TV조선 2.0%, JTBC 3.1%이다. (닐슨코리아 제공) 제18차 - 논의내용 - 1 방송사 등급 프로그램명 방송 일시 출연자 TV조선 15세 이상 시청가 강적들 2016. 1. 13(수) 23:00 ~ 00:20 2016. 1. 20(수) 23:00

More information

autumn 2013 Vol.53 특집 行 갈 행 充 찰 충 04 무한상상 국민창업 프로젝트 22 현장에서 만난 CEO 48 중기 포커스 10 중기 리포트 (주)투바앤 김광용 대표 부산울산지방중소기업청 단디벤처포럼 잠든 창업 DNA, 플랫폼으로 깨워라 28 공감톡톡 5

autumn 2013 Vol.53 특집 行 갈 행 充 찰 충 04 무한상상 국민창업 프로젝트 22 현장에서 만난 CEO 48 중기 포커스 10 중기 리포트 (주)투바앤 김광용 대표 부산울산지방중소기업청 단디벤처포럼 잠든 창업 DNA, 플랫폼으로 깨워라 28 공감톡톡 5 autumn 2013 Vol.53 특집 1 무한상상 국민창업 프로젝트 특집 2 중기 리포트 잠든 창업 DNA, 플랫폼으로 깨워라 연중기획 1 키워드로 트렌드 읽기 할배돌 의 유 쾌한 반란 연중기획 2 전통시장이 있는 풍경 금산국제인삼시장 현장에서 만난 CEO (주)투바앤 김광용 대표 공감톡톡 나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으로 언제나 힐링! Autumn 2013 Vol.53

More information

인천 화교의 어제와 오늘 34 정착부흥기 35 정착부흥기: 1884년 ~ 1940년 이 장에서는 인천 차이나타운에 1884년 청국조계지가 설정된 후로 유입 된 인천 화교들의 생활사에 대한 이야기를 시기별로 정리하였다. 조사팀은 시기를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하였다. 첫 번

인천 화교의 어제와 오늘 34 정착부흥기 35 정착부흥기: 1884년 ~ 1940년 이 장에서는 인천 차이나타운에 1884년 청국조계지가 설정된 후로 유입 된 인천 화교들의 생활사에 대한 이야기를 시기별로 정리하였다. 조사팀은 시기를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하였다. 첫 번 인천 화교의 어제와 오늘 인천 화교의 어제와 오늘 34 정착부흥기 35 정착부흥기: 1884년 ~ 1940년 이 장에서는 인천 차이나타운에 1884년 청국조계지가 설정된 후로 유입 된 인천 화교들의 생활사에 대한 이야기를 시기별로 정리하였다. 조사팀은 시기를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하였다. 첫 번째 시기는 1884년부터 1940년 까 지를 구분하여 정착 부흥기

More information

<BCBAC1F6BCF8B7CA28C3D6C1BE2933C2F72E687770>

<BCBAC1F6BCF8B7CA28C3D6C1BE2933C2F72E687770> 大 巡 대학생 하계 성지순례 자 료 집 宗 團 大 巡 眞 理 會 目 次 성지순례의 취지 11 행사 일정표 12 계룡산 동학사 13 천호산 개태사 31 반야산 관촉사 41 모악산 금산사 54 황토현 전적지 92 상제님 생가 시루산 104 모악산 대원사 115 종남산 송광사 126 진안 마이산 135-1 - 도 기 ( 道 旗 ) 우주 자연의 근원적 의미가 도(

More information

2013년 산업통상자원부 업무보고 창조경제 생태계 기반 조성 글로벌 전문기업 육성

2013년 산업통상자원부 업무보고 창조경제 생태계 기반 조성 글로벌 전문기업 육성 2013년 산업통상자원부 업무보고 창조경제 생태계 기반 조성 글로벌 전문기업 육성 2013년 산업통상자원부 업무보고 창조경제 생태계 기반 조성 글로벌 전문기업 육성 순서 I. 일반현황 4 II. 우리의 경제상황 진단 정책방향 8 III. 분야별 현황진단 및 업무계획 12 1. 융합 확산을 통한 성장동력 창출 13 2. 협력 생태계 조성으로 글로벌 전문기업 육성

More information

산업통상자원부 업무보고에 대한 분석.hwp

산업통상자원부 업무보고에 대한 분석.hwp 2013년 산업통상자원부 업무보고에 대한 분석 2013. 6 산업팀 - 1 - 종합 평가 ㅇ 2013년 업무계획 내용의 상당부분이 지난 2년간의 업무보고 내용과 상당 부분 중복됨. - 다만, 산업부 업무의 특성상 사업의 일관성 및 지속성이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는 점을 고려하면 그 중복성이 아주 과도하지는 않은 것으로 판단됨 - 2013년

More information

2015년 12월 22일 (화) 오후 7시 / 프린스 호텔 주최_ 주관_ 2015년 C O N T E N T S 목 차 인사말 축사 01 02 03 진행순서 토론흐름 5-8 page 9 page 10 page 04 05 06 07 토론규칙 사전조사결과 청년수당 서울 성남 정책(안) 비교 대구시 청년관련 정책 10 page 11-20 page 21 page

More information

1. 경제자유구역 1 경제자유구역의 탄생 배경 세계는 지금 세계의 경제는 무역의 자유화 및 운송 통신 과학기술의 발달로 질이나 양적 인 면에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세계시장이 국경없는 거대한 단일시 장이 되어가고 있음. 주변환경 특히, 최근들어 중국경제는 세

1. 경제자유구역 1 경제자유구역의 탄생 배경 세계는 지금 세계의 경제는 무역의 자유화 및 운송 통신 과학기술의 발달로 질이나 양적 인 면에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세계시장이 국경없는 거대한 단일시 장이 되어가고 있음. 주변환경 특히, 최근들어 중국경제는 세 Ⅱ. 주요 시정성과 Part 1 대형프로젝트 1. 경제자유구역 1 경제자유구역의 탄생 배경 세계는 지금 세계의 경제는 무역의 자유화 및 운송 통신 과학기술의 발달로 질이나 양적 인 면에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세계시장이 국경없는 거대한 단일시 장이 되어가고 있음. 주변환경 특히, 최근들어 중국경제는 세계최대 시장으로서 다국적기업들의 공장지대가 되어가고

More information

기사전기산업_41-56

기사전기산업_41-56 기사전기산업_41-56 2014.01.24 10:31 PM 페이지44 (주)씨엠와이피앤피 Energy News & Information 정부 공기업 지자체 부문 건물에너지 관리시스템(BEMS) 최대 30% 에너지 절감 국가 총에너지 사용량의 21%를 사용하는 건물부문에 건설기술(CT) 정보통신기술(IT) 에너지기술(ET)을 융합한 건물에너지 관리시스템(BEMS:

More information

Vol. 5

Vol. 5 Vol. 5 Vol. 5 Vol. 5 Creative Economy Brief Vol. 5 2015. MAR. Vol.02 특집 창조경제 박람회 살아있는 창조경제 이야기 02 I. 2015년 역동적인 혁신경제 구현 방안 10 II. 사례로 보는 창조경제 26 III. 창조경제인 인터뷰 38 IV. 창조경제 주요 동향 44 V. 이슈포커스 날개 달린 스마트

More information

140307(00)(1~5).indd

140307(00)(1~5).indd 대한민국정부 제18218호 2014. 3. 7.(금) 부 령 보건복지부령제233호(영유아보육법 시행규칙 일부개정령) 6 고 시 미래창조과학부고시제2014-21호(학생인건비 통합관리지침 일부개정) 9 교육부고시제2014-70호(검 인정도서 가격 조정 명령을 위한 항목별 세부사항) 11 법무부고시제2014-66호(국적상실) 15 법무부고시제2014-67호(국적상실)

More information

<3230313320B5BFBEC6BDC3BEC6BBE74542532E687770>

<3230313320B5BFBEC6BDC3BEC6BBE74542532E687770> 58 59 북로남왜 16세기 중반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흔든 계기는 북로남 왜였다. 북로는 북쪽 몽골의 타타르와 오이라트, 남왜는 남쪽의 왜구를 말한다. 나가시노 전투 1. 16세기 동아시아 정세(임진전쟁 전) (1) 명 1 북로남왜( 北 虜 南 倭 ) : 16세기 북방 몽골족(만리장성 구축)과 남쪽 왜구의 침입 2 장거정의 개혁 : 토지 장량(토지 조사)와

More information

<C7D8BFDCC0DABABBC0C720B1B9B3BBC0AFC4A120C3CBC1F8B9E6BEC828C3D6C1BE292E687770>

<C7D8BFDCC0DABABBC0C720B1B9B3BBC0AFC4A120C3CBC1F8B9E6BEC828C3D6C1BE292E687770> 해외자본의 국내유치 촉진방안 2009 수출전략처 수출기획팀 해외자본의 국내유치 촉진방안 1. 외국인 투자유치 필요성 세계평균보다 낮은 외자유치 성적 한국의 외자유치 성과지수 성적( 05 ~ 07) : 총 141개국 중 130위 - 홍콩(1 위, 8.652 점), 싱가포르(7 위, 5.394 점), 한국(130 위, 0.197 점) 등 한국의 외자유치 잠재지수

More information

2011 복지국가정책 아카데미

2011 복지국가정책 아카데미 2011 복지국가정책 아카데미 일 시 : 2011. 4. 6 ~ 5. 11(매주 수요일 저녁 7시 ~ 9시) 장 소 : 전북사회복지협의회 교육장 (전북사회복지회관 5층) 공동주관 : 전북발전연구원 여성정책연구소 전북사회복지협의회 복지국가 SOCIETY 주 최 : 전북발전연구원 여성정책연구소 여성정책연구소 2011 복지국가정책 아카데미 CONTENTS _목차

More information

<3130BAB9BDC428BCF6C1A4292E687770>

<3130BAB9BDC428BCF6C1A4292E687770> 檀 國 大 學 校 第 二 十 八 回 학 술 발 표 第 二 十 九 回 특 별 전 경기도 파주 出 土 성주이씨( 星 州 李 氏 ) 형보( 衡 輔 )의 부인 해평윤씨( 海 平 尹 氏 1660~1701) 服 飾 학술발표:2010. 11. 5(금) 13:00 ~ 17:30 단국대학교 인문관 소극장(210호) 특 별 전:2010. 11. 5(금) ~ 2010. 11.

More information

11민락초신문4호

11민락초신문4호 꿈을 키우는 민락 어린이 제2011-2호 민락초등학교 2011년 12월 21일 수요일 1 펴낸곳 : 민락초등학교 펴낸이 : 교 장 심상학 교 감 강옥성 교 감 김두환 교 사 김혜영 성실 근면 정직 4 8 0-8 6 1 경기도 의정부시 용현로 159번길 26 Tel. 031) 851-3813 Fax. 031) 851-3815 http://www.minrak.es.kr

More information

이용자를 위하여 1. 본 보고서의 각종 지표는 강원도, 정부 각부처, 기타 국내 주요 기관에서 생산 한 통계를 이용하여 작성한 것으로서 각 통계표마다 그 출처를 주기하였음. 2. 일부 자료수치는 세목과 합계가 각각 반올림되었으므로 세목의 합이 합계와 일 치되지 않는 경우도 있음. 3. 통계표 및 도표의 내용 중에서 전년도판 수치와 일치되지 않는 것은 최근판에서

More information

3232 편집본(5.15).hwp

3232 편집본(5.15).hwp 정태제 묘 출토 사초 사진 정태제 묘 출토 사초 상권 정태제 묘 출토 사초 상권 45 정태제 묘 출토 사초 하권(표지) 정태제 묘 출토 사초 하권 46 2 중기( 重 記 ) 중기( 重 記 )란 호조에서 각 관청의 회계를 감독하거나 경외( 京 外 )의 각 관청이 보유하고 있 는 국가 재산의 누수를 막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작성하도록 규정한 회계장부나 물품조사서

More information

10월자율소식 완료-청.indd

10월자율소식 완료-청.indd 2012년 10월 ㅣ 제56호 & (137-940) 서울특별시 서초구 양재동 275-1번지 삼호물산빌딩 A동 509호 Tel : 02)589-4603~4 Fax : 02)589-1700 www.korfish.or.kr 발행인 : 회장 박재영 기사 편집 : 경영본부장 최광림 자율관리어업 새로운 10년 준비 비전 2020 선포 전북 고창에서 10월 9~10일,

More information

Ⅰ. 글로벌 경제환경 변화 29년은 세계 및 국내경제의 역사 속에서 의미 있는 한 해로 기록될 것이다. 리먼 쇼크 이후의 금융시장 혼란과 경제주체들의 심리 위축은 상당한 기간의 경기불황을 예고하는 듯 했지만 글로벌 경제위기를 수습하기 위한 각국의 금융안정화 대책과 재정

Ⅰ. 글로벌 경제환경 변화 29년은 세계 및 국내경제의 역사 속에서 의미 있는 한 해로 기록될 것이다. 리먼 쇼크 이후의 금융시장 혼란과 경제주체들의 심리 위축은 상당한 기간의 경기불황을 예고하는 듯 했지만 글로벌 경제위기를 수습하기 위한 각국의 금융안정화 대책과 재정 21년 국내경제 전망 경제연구실 [email protected] 금융연구실 [email protected] Ⅰ. 글로벌 경제환경 변화 Ⅱ. 국내경제 전망 Ⅲ. 맺음말 21년 우리경제는 수요회복과 기저효과에 힘입어 상반기에는 5.8% 성장률을 보일 것으로 예 상된다. 그러나 기저효과가 줄어드는 21년 하반기 성장률은 3%대에 머물 것으로 보여 21년 국내경제 성장률은

More information

2015 판례.기출 증보판 테마 형법 추록본.hwp

2015 판례.기출 증보판 테마 형법 추록본.hwp 2015 판례 기출 증보판 테마 형법 추록본 편저자 조충환 양건 p.27 첫째줄 유사판례 교체 유사판례 1동일한 형벌조항이 과거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의하여 합헌으로 선언된 바 있으나 그 후의 사정변경 때문에 새로 위헌으로 결정된 경우에도 위헌결정의 소급효를 종전의 합헌결정시점까지로 제한하는 것은 허용되지 아니한다(대판 2011.4.14, 2010도5606).

More information

<3036C0FCB9AEB0A1BFA1B0D4B5E8B4C2C1DFB1B9C5F5C0DAC6F7C4BFBDBA2E687770>

<3036C0FCB9AEB0A1BFA1B0D4B5E8B4C2C1DFB1B9C5F5C0DAC6F7C4BFBDBA2E687770> 전문가에게 듣는 중국 투자 포커스 머 리 말 우리나라 기업의 중국 투자진출이 해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습니다. 공식통계에 따르면 2006 년 3월말 현재 한국의 對 중국 투자 누계는 1만 4천여 건에 142억 7천만불을 기록했습니다. 비공식적으로 진출한 기업이 많고, 철수한 기업이 공식적으로 집계되지 않는 등 여러 사유 로 인해 정확한 집계는 힘들지만 현재 중국에는

More information

제1절 조선시대 이전의 교육

제1절 조선시대 이전의 교육 제1절 우리 교육 약사 제2장 사천교육의 발자취 제1절 우리 교육 약사 1. 근대 이전의 교육 가. 고대의 교육 인류( 人 類 )가 이 지구상에 살면서부터 역사와 함께 교육( 敎 育 )은 어떠한 형태로든 지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언제부터 이곳에서 삶을 꾸려왔는지는 여 러 가지 유적과 유물로 나타나고 있다. 그 당시 우리조상들의 생활을 미루어

More information

2015-12 전자업종.hwp

2015-12 전자업종.hwp 2015-12 이슈페이퍼 2016년 금속산업 전망: 전자업종 이유미 (금속노조 노동연구원 객원연구위원) 1. 전자업종 생산동향과 전망 2015년 9월(누적) 정보통신방송기기 1) 생산액(매출액)이 242조9,272억원으로 전년대비 1.8% 하락했고 수출액 역시 1,295억 2,474만달러로 2.1% 하락했다. 휴대폰 생산액 및 수출액 (단위:생산액/억원,

More information

??

?? 한국공항공사와 어린이재단이 함께하는 제2회 다문화가정 생활수기 공모전 수기집 대한민국 다문화가정의 행복과 사랑을 함께 만들어 갑니다. Contents 02 04 06 07 08 10 14 16 20 22 25 28 29 30 31 4 5 6 7 8 9 10 11 12 13 15 14 17 16 19 18 21 20 23 22 24 25 26 27 29 28

More information

FTA People 글 김보람 기자 사진 김기남 기자 고태진 관세법인 한림 대표관세사 만년 삼수 인생, FTA로 술술 풀립니다~ 지금은 대부분의 무역에서 FTA를 빼놓을 수 수습 시절을 거쳐 2005년 개업 관세사로 나 설팅 이라는 문구 때문인지 조금씩 FTA 컨설팅

FTA People 글 김보람 기자 사진 김기남 기자 고태진 관세법인 한림 대표관세사 만년 삼수 인생, FTA로 술술 풀립니다~ 지금은 대부분의 무역에서 FTA를 빼놓을 수 수습 시절을 거쳐 2005년 개업 관세사로 나 설팅 이라는 문구 때문인지 조금씩 FTA 컨설팅 September 2014 vol. 28 FTA 시대, 한국 농업의 경쟁력을 말한다 한 중 FTA의 돌파구, 메이드 포 차이나 가 답이다 미리 준비하는 한 호주 FTA 활용 전략 FTA People 글 김보람 기자 사진 김기남 기자 고태진 관세법인 한림 대표관세사 만년 삼수 인생, FTA로 술술 풀립니다~ 지금은 대부분의 무역에서 FTA를 빼놓을 수 수습 시절을

More information

歯20010629-001-1-조선일보.PDF

歯20010629-001-1-조선일보.PDF 6. 29 () 11:00 ( ) 20 0 1. 6. 29 11( ).(397-1941) 1. 2. 3. 4. 5. 1. 28, 60() (,, ) 30 619(, 6. 29) () 6 (,,,,, ),,, - 1 - < > (, ), () < > - 2 - 2.,,, 620,, - 3 - 3. ( ) 1,614,, 864 ( ) 1,6 14 864 () 734

More information

[경기도] 방한 태국인 80%가 경기도 찾는 이유는? 34 [경기도] 경기도 농촌관광 활성화에 300억 원 투자 35 [경기도] 역사문화길 삼남길에 걷는 재미 더한다 36 [경상북도] 경북 전통한옥 체험숙박 대박 조짐 38 [경상남도] 경상남도, 하동항 신규건설, 조선

[경기도] 방한 태국인 80%가 경기도 찾는 이유는? 34 [경기도] 경기도 농촌관광 활성화에 300억 원 투자 35 [경기도] 역사문화길 삼남길에 걷는 재미 더한다 36 [경상북도] 경북 전통한옥 체험숙박 대박 조짐 38 [경상남도] 경상남도, 하동항 신규건설, 조선 관광관련 정부정책 제 345호 (2013년 2월 셋째 주) 정책정보통계센터 Tour.go.kr [국토해양부] 연안침식 증가 추세, 정비예산 2배 늘려 3 [국토해양부] 멸종위기 해양동물을 실내 번식으로 보호한다 5 [국토해양부] 설 연휴 연안여객선 수송실적 전년 比 7% 상승 6 [국토해양부] 서울-홍콩 항공노선 요금 스케줄 선택 폭 확대된다 8 [지식경제부]

More information

13백점맞는세트부록2년(49~57)

13백점맞는세트부록2년(49~57) 0 0 0 0 < > 0 0 0 0 0 0 00 0 0 000 00 00 00 00 0 00 00 00 00 00 00 0 00 00 0 00-0-00-0-00-0-00 00 0 00 < 0 0 0 ---- -0--- 0 00 0 0 < 0 0< 0-------- - ---- 0 0 00 > =0 0 0 0--0-0 0 =0 = =

More information

<33B1C7C3D6C1BEBABB28BCF6C1A42D31313135292E687770>

<33B1C7C3D6C1BEBABB28BCF6C1A42D31313135292E687770> 제 1 부 제1소위원회 (2) 충남지역(1) 부역혐의 민간인 희생 -당진군ㆍ홍성군ㆍ서산군(2)ㆍ예산군- 결정사안 1950. 9ㆍ28수복 후~1951. 1ㆍ4후퇴경 충청남도 당진 홍성 서산(2) 예산군에서 군 경에 의해 발생한 불법적인 민간인 희생으로 진실규명대상자 33명과 조사과정에서 인지된 자 151명이 희생된 사실을 또는 추정하여 진실규명으로 결정한 사례.

More information

<C1DFB1DE2842C7FC292E687770>

<C1DFB1DE2842C7FC292E687770> 무 단 전 재 금 함 2011년 3월 5일 시행 형별 제한 시간 다음 문제를 읽고 알맞은 답을 골라 답안카드의 답란 (1, 2, 3, 4)에 표기하시오. 수험번호 성 명 17. 信 : 1 面 ❷ 武 3 革 4 授 18. 下 : ❶ 三 2 羊 3 東 4 婦 19. 米 : 1 改 2 林 ❸ 貝 4 結 20. 料 : 1 銀 2 火 3 上 ❹ 見 [1 5] 다음 한자(

More information

96부산연주문화\(김창욱\)

96부산연주문화\(김창욱\) 96 1 96 3 4 1 5 2 ( ),, TV,,,,, 96 5,,,, 3, ), ( :,1991) ), ), 13 1 3 96 23, 41, 4 68 (1) 11, 1223, (3/18 ) ( ) 6, 1 (4/2 ) 16, ( ), 1 (5/3 ), ( ) ( ) 1 (2) 96 8 33 41 (4/25 ), (9/24 ), ( ) 961 (5/27 )

More information

2 <제429호> 트렌드 2016년 4월 18일 아시아, 세계 교역의 중심축에 우뚝 서다 80년대 1개뿐이었던 세계 10대 교역국, 4개로 늘어 세계교역 비중 1962년 11.2%에서 2014년 37.8%로 지난 수십 년간 세계

2 <제429호> 트렌드  2016년 4월 18일 아시아, 세계 교역의 중심축에 우뚝 서다 80년대 1개뿐이었던 세계 10대 교역국, 4개로 늘어 세계교역 비중 1962년 11.2%에서 2014년 37.8%로 지난 수십 년간 세계 산업부 지정, 국내 최초 수출마케팅 전문회사 kr.ec21.com www.weeklytrade.co.kr 2016년 4월 18일 Tel.02-6000-3119 세계경제 회복 올해도 기대난 IMF, 올 성장률 전망치 3.2%로 하향 조정 아직 비상사태는 아니나, 경계해야 할 상황 최근 우리 수출의 기록적인 부진은 시장 요인, 특히 세계경제의 성장

More information

ÀϺ»Æí-ÃÖÁ¾

ÀϺ»Æí-ÃÖÁ¾ 古事記 古 事 13 記 신화 전설 가요 계보 등을 소재로 하여 일본 건국의 유래와 제1대 神武천황부터 제33대 推 古천황까지의 事蹟을 기록한 일본 현존 最古의 典籍이며, 전체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天武천황 대에 천황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던 역사 저술사업을 元明천황이 계승하여, 太安萬侶에게 稗田 阿禮가 암송하고 있던 천무천황대의 역사 저술 내용을 필록하도록

More information

목 차 국회 1 월 중 제 개정 법령 대통령령 7 건 ( 제정 -, 개정 7, 폐지 -) 1. 댐건설 및 주변지역지원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 1 2. 지방공무원 수당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 1 3.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시행령 일부개정 2 4. 대

목 차 국회 1 월 중 제 개정 법령 대통령령 7 건 ( 제정 -, 개정 7, 폐지 -) 1. 댐건설 및 주변지역지원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 1 2. 지방공무원 수당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 1 3.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시행령 일부개정 2 4. 대 목 차 국회 1 월 중 제 개정 법령 대통령령 7 건 ( 제정 -, 개정 7, 폐지 -) 1. 댐건설 및 주변지역지원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 1 2. 지방공무원 수당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 1 3.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시행령 일부개정 2 4. 대도시권 광역교통관리에 관한 특별법 시행령 일부개정 3 5. 영유아보육법 시행령 일부개정 4

More information

종사연구자료-이야기방2014 7 18.hwp

종사연구자료-이야기방2014 7 18.hwp 차례 1~3쪽 머리말 4 1. 계대 연구자료 7 가. 증 문하시랑동평장사 하공진공 사적기 7 나. 족보 변천사항 9 1) 1416년 진양부원군 신도비 음기(陰記)상의 자손록 9 2) 1605년 을사보 9 3) 1698년 무인 중수보 9 4) 1719년 기해보 10 5) 1999년 판윤공 파보 10 - 계대 10 - 근거 사서 11 (1) 고려사 척록(高麗史摭錄)

More in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