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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간 時 間 을 깨 우 다 산업화 시절 인천 이야기 유네스코지정 2015 세계책의 수도,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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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시간 時 間 을 깨 우 다 산업화 시절 인천 이야기 인천만의 가치창조

4 일러두기 본 책자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인천광역시가 소장한 것이며 그 외 사진은 소장자나 촬영자의 이름을 밝혔습니다. 글은 인천광역시 대변인실 홍보콘텐츠팀장 유동현(굿모닝인천 편집장)이 인천일보에 연재한 것을 재편집한 것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부터 마흔아홉 번째 이야기 순서의 괄호 안 날짜는 인천일보 게재 일자입니다. 본 책자는 e북(전자책)으로도 발간되어 네이버 등 주요 포털과 인터넷서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5 인천만의 가치 창조, 이야기를 발굴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인천만큼 드라마틱한 역사(이야기)를 품은 도시는 없습니다. 바다에 보석처럼 떠있는 168개 섬과 유구한 역사가 흐르는 강화 그리고 신 문물이 들어온 개항장 등 도시 곳곳에 무수한 이야기들이 스며있습니다. 여기에 6 25 전쟁과 피란민의 정착 그리고 산업화 시절의 시간이 더해지 면서 그 역사 이야기의 줄기는 더 굵어지고 그 갈래는 더 길게 뻗어나갔습 니다. 인천만의 가치창조 는 바로 이러한 이야기들을 발굴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사진은 시간과 공간을 담고 있습니다. 때론 사진 한 장이 수많은 글자와 이 야기를 대신하기도 합니다. 묵은 먼지를 털고 세상의 빛을 본 사진은 우리 가 잊고 있었던 현장과 사건, 혹은 사람을 보여줍니다. 이 책에 게재한 사진들은 인천이 지닌 역사와 이야기를 새롭게 조명하는 역 할을 할 것입니다. 낡은 사진 한 장이 잠들어있던 인천의 시간 을 다시 깨 웁니다. <사진, 시간을 깨우다>에 실린 흑백 사진과 그 사진을 보고 풀어낸 이야기 를 접하노라면, 누구나 그 시절로 돌아가 사진 속 주인공과 함께 하는 듯한 착각이 들 것 입니다. 이 책을 통해 인천시민을 비롯한 많은 독자들이, 지나온 인천의 역사를 더듬 어보며 인천의 시간과 공간을 더 사랑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사진 한 장에 담긴 역사, 인천이 들려주는 그 소중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시길 바랍니다. 인천광역시장 유 정 복

6 차 례 16 콜레라, 대통령 선거에 영향 끼쳐 8 청춘의 부고장, 입영통지서 12 물맛 다른 풀장에서 헤엄치다 16 마을 황소 동원해 만든 고속도로 20 매스게임 같은 대청소 빗질 24 마녀 백옥자, 아시아를 던지다 28 인천은 한국 사이클 금빛 질주의 출발지 32 시민의 날 50년 인천현대사 고스란히 36 한국 여자배구 강스파이크 동일방직배구단 40 인천OB밴드부 에서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 되기까지 44 빛바랜 추억 속 자유공원 비둘기집 48 주판알 잘 튕겨야 취업 52 52

7 68 엄마표 겨울용 털실 옷 56 월남 파병 출항지이자 보트피플 피난지였던 인천항 60 집도 절도 없던 거리의 천사 64 부평은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의 모판 68 한국에서 처음으로 메시아 전 곡 연주한 내리교회 72 인천에서 처음 실시된 야간통행금지 76 산업화 시절의 슬로건 더 일하자 80 누구에겐 여전히 필수연료인 19공탄 84 겨울철의 불청객, 화마( 火 魔 ) 88 송림리 얼음판에서 선학국제빙상경기장까지 92 동인천 남북을 최초로 연결한 굴다리 지하도 96 사라진 아이들의 골목 놀이

8 낡은 졸업 앨범 속의 친구들 104 Made in Incheon 통기타, 세계를 노래하다 108 부부싸움도 멈추게 한 얼음땡 국기 하강식 112 빛바랜 사진첩 속 공민학교 116 한국 마라톤의 영원한 출발지 해안동로터리 120 내 고장은 내가 지킨다 향토예비군 창설 124 한국 경제의 씨앗이 된 파독 근로자 128 동인천 그 이름 60년 132 어린이 주간 최고 이벤트 우량아선발대회 모세의 기적처럼 바다 열린 아암도 140 용동마루턱의 아치형 선전 철탑 144 양동이 하나 들고 가뭄 철 농촌 일손 돕기 148 잃어버린 우리의 동인천역 광장 152 인천 수돗물로 농사지은 부천 농부들 156 망국병 인천이 치료하다 160 영세 어민의 생명줄이었던 조개 164 모기 박멸 여름철 전염병 방역 168 피서지 이동도서관 임해문고

9 184 고행도 낭만이었던 섬 기행 176 가까이 있지만 아주 멀리 있는 섬, 작약도 180 낙도 어린이들의 도시 나들이 184 시청사 이전 그 굴곡진 역사 188 동일방직의 미인선발대회 192 동상이몽( 銅 像 異 夢 ) 맥아더 동상 196 덮어놓고 안 낳으면 거지꼴 못 면한다 200 돌고 도는 로터리 조형물 204 저 눈빛, 치열한 삶을 말하다 205 배 타러 가는 새 길 206 반공가요 오디션 무대 207 물맛이 곧 술맛 208 인천 화교 이수영, 미스 월드대회 2위 그릇 생산도 뽐낼 만한 일 210 판유리공장 롱다리 급수탑 211 저 다리가 내 밥줄 끊는구나 212 오천 년 비류의 물줄기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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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첫 번째 이야기(2014년 8월 4일) 콜레라, 대통령 선거에 영향 끼쳐 날이 더워지면 전염병의 두려움이 한층 높아진다. 1970년대 초 까지 우리나라 국민은 콜레라, 장티푸스, 이질, 뇌염 등 돌림병 에 많이 걸렸다. 호열자( 虎 列 刺 )로 불리던 콜레라는 호랑이 호( 虎 ) 자 를 쓸 만큼 공포 그 자체였다. 불결한 환경과 방역 시스템이 미비했 던 1960년대 우리나라에는 콜레라가 세 번 창궐했다. 63년 316명, 64년 2명, 69년 137명이 콜레라에 걸려 사망했다. 1963년도의 콜레라 발생은 대통령 선거에도 영향을 미쳤다. 63년 9 월 인천을 비롯해 서울, 부산 등 대도시는 물론 영덕, 완도 까지 콜레 라가 창궐했다. 중앙방역대책본부는 긴급히 전국을 방역지구로 설 정했다. 야권의 각 당 대통령 후보 측에서는 그해 10월 15일 치러질 대통령 선거를 한 달 가량 연기해서 11월 26일 국회의원 선거와 동 시에 치르자고 주장했다. 통행금지 구역이 확대돼 사람들이 유세장 에 모이질 않을뿐더러 선거 당일에도 콜레라가 완전히 퇴치되지 않 으면 투표율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8

13 북한이 콜레라균 퍼뜨린다는 소문 돌만큼 국민 모두 전염병에 예민 전염병이 돌면 방역 관련자들은 주사기를 들고 거리로 나섰다. 특히 부두와 항만은 전염병 취약 지구였다. 72년 항만 근처에서 부두노동자들이 예방주사를 맞는 모습. 9

14 일반 시민들, 길거리와 시장 등 때와 장소 가리지 않고 예방주사 맞기 위해 줄 서 정부와 여당 측에서는 선거에 지장을 줄 만큼 크게 번지지 않을 것이 라며 선거일을 고수했다. 선거 결과는 박정희 후보가 승리하면서 제 5대 대통령이 된다. 만약 이때 콜레라가 더욱 더 기승을 부렸다면 선 거일도 연기되었을 것이고 역사의 물줄기는 바뀌었을 지도 모른다. 과거 인천은 전염병에 취약했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7월 인천에 콜레라균이 돌아 30여 명의 환자가 발생했다. 오십호 가량이 살던 도화동의 한 마을에서는 4명이 사망했다. 그들이 재배한 채소와 과 일이 도심으로 들어간 것으로 파악한 보건 당국은 뒤늦게 출하된 농 작물에 소독을 실시했다. 그해 인천에서 발생한 콜레라는 중국에서 넘어 온 것으로 추정되었 다. 광복군과 전재민( 戰 災 民 ) 등 1천900명을 태운 선박이 중국을 떠 나 6월 4일 인천항에 입항했다. 그런데 그들 중에 콜레라 환자가 발 생했다. 나흘 동안 상륙하지 못했고 방역을 실시한 후에야 고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인천은 항구를 통해 전염병이 유입되곤 했다. 실제로 1963년 10월 구호양곡인 대만(자유중국) 쌀 4천 톤을 싣고 인천항에 들어 온 대륭 호의 선원 한 명이 콜레라 환자로 판명돼 시립병원 제민원에 격리 수 10

15 용된 적이 있다. 보건 당국은 전염병이 돌 때마다 인천에 들어오는 외국 선원과 해외 여행이 잦은 미군 병사에 의해 콜레라가 전염되는 것으로 의심하곤 했다. 한때 북한이 콜레라균을 퍼뜨린다는 웃지 못 할 소문도 돌만큼 국민 모두 전염병에 예민했다. 인천에는 오래 전부터 전염병 환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병원이 있었 다. 일제강점기에 덕생원이란 전염병 전문 병원이 설립되었다. 개원 당시 이 병원의 명칭은 피할 피( 避 )자 를 써서 피병원으로 명명되었 다. 전염병을 피하고 싶었던 절실한 마음이 담긴 이름이었다. 이 병 원은 사정병원, 전염병원을 거쳐 덕생원으로 변경되었다. 도원동에 있던 덕생원은 6 25 전쟁 중 소실되었고 그 자리에 현재 중앙여상이 들어섰다.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면 방역 당국은 바로 주사기를 들고 길거리로 나섰다. 행인들은 너나 할 것이 없이 가던 길을 멈추고 주사를 맞았 다. 당시에는 일회용 주사기도 없었다. 앞 사람이 맞은 주사기를 소 독약 솜으로 한번 쓱 문지르고 다음 사람이 맞았다. 약이 부족했기 때문에 맞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근로자들은 공 장에서, 일반 시민과 주부들은 길거리와 시장에서 때와 장소를 가리 지 않고 예방주사를 맞기 위해 줄을 섰다. 세월이 흘러 이제 전염병은 그 종류가 다양해졌고 더 흉폭해졌다. 콜 레라, 장티푸스 대신에 싸스, 조류독감, 구제역, 신종플루, 에볼라, 메르스 등 새로운 돌림병 이 21세기 지구촌을 호심탐탐 노리며 돌 고 있다. 11

16 두 번째 이야기(2014년 8월 11일) 청춘의 부고장, 입영통지서 입대( 入 隊 )는 이 땅에 태어난 우리들이 거쳐야 하는 가장 중요 한 통과의례이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 아들도 여전 히 징집영장을 청춘의 부고장처럼 느끼는 게 사실이다. 최근 윤 일병 구타 사망사건 등 병영 내 인권유린 상황이 자주 발생하고 있어 젊은 이들의 입대 기피 현상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된다. 1948년 대한민국 창군( 創 軍 ) 이래 병역 기피를 비롯한 병무 부정사 건은 사회 부조리의 단골 메뉴가 되었다. 특히 1970년대 말까지 입 영기피, 응소기피, 징병검사 미검 등 적지 않은 병역기피는 사회적으 로, 특히 안보상 큰 문제를 야기했다. 1969년도를 기준으로 볼 때 고의든 타의든 병역 기피자는 45만 명 에 육박했다. 당시에는 병무행정이 전산화 돼있지 않아 기피자의 절 반 정도는 소재불명( 所 在 不 明 ) 이었다. 산업화 시대가 되면서 직장 을 얻기 위해 무작정 상경하는 사람이 많아 영장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2

17 1969년도 기준 병역 기피자는 45만 명에 육박. 기피자의 절반 정도는 소재불명( 所 在 不 明 ) 정부는 병역 기피자와 근무 이탈자(당시 신문 표기는 도망병)의 색 출작전 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이미 기업에 채용된 사람들은 해고 조 치하도록 했고 이를 위반하는 업주에게도 책임을 물었다. 해외에 체 류하는 사람들에게 빨리 귀국하도록 종용했고 그들의 호주와 보증 인에게 경고장을 발부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병사계 경찰관, 수사과 요원, 병무청 직원들이 일일이 직장을 방문해 기피자와 이탈자를 색출했다. 특히 미군부대 종업원 중 기피자가 많은 것으로 보고 미군부대를 샅샅이 뒤지기도 했다. 사진은 1971년도 인천공설운동장(현 인천축구전용경기장)에 소집 된 인천지역 입영 장정들의 모습이다. 언제 보아도 가슴 먹먹한 장면 이다. 줄을 서는 순간 그들의 호칭은 장정( 壯 丁 ) 으로 바뀐다. 장한 뜻을 품고 먼 길을 떠나는 젊은이들의 앞날을 축복하고 송별하기 위해 간 단하게 장행회( 壯 行 會 )가 열리지만 장정들의 머리는 벌써 논산훈련 소에 가 있다. 맨 앞에 섰다가 얼떨결에 입대 축하 꽃다발을 목에 건 대표 장정들은 이미 군기가 바짝 들었다. 13

18 기피자 중 기업에 채용된 사람들은 해고 조치하도록 하고 색출하기 위해 미군부대까지 샅샅이 뒤지기도 지금은 개별적으로 훈련소를 입소하지만 1985년까지는 단체 인솔 입영제를 시행했다. 한군데 모여 입영열차를 함께 타고 훈련소에 입 소했다. 인천에서는 주로 인천공설운동장에 모였다. 인근 부천, 김 포, 시흥 지역 등의 장정까지 포함해 보통 1천500명가량이 소집되었 다. 그날 운동장 주변의 풍경은 아수라장 그 자체였다. 환송 나온 가족과 친구들, 목도장을 파는 사람, 군번줄 파는 사람, 세면도구 주머니 파 는 사람, 각종 먹을 것을 파는 행상 등이 한데 뒤엉켰다. 완장을 찬 호송관이 인원 점검을 끝내면 줄을 맞춰 운동장을 빠져 나 와 숭의로터리를 거쳐 남부역(수인역 부근)으로 행진했다. 간혹 지역 의 고등학교 밴드부가 군가와 행진곡을 연주하며 앞장서기도 했다. 그 음악은 장정들에게는 마치 장송곡처럼 들렸다. 남의 속도 모르는 지 일부 행인들은 손을 흔들며 파이팅 을 외치기도 했다. 남부역 철길에는 이미 논산행 입영열차가 길게 서 있다. 객차 입구마 다 검은 화이버를 쓴 헌병들이 마치 저승사자처럼 뻗치기를 하고 있 다. 이제 부모, 친구, 애인과 헤어져야 할 시간. 환송하는 사람들이나 떠나는 장정들이나 얼굴에는 눈물 콧물이 뒤범벅된다. 14

19 승차! 호송 헌병들의 호루라기 소리에 장정들은 열차에 오른다. 털 컹. 입영열차는 몸부림을 한번 크게 친 후 서서히 속도를 내기 시작 한다. 열차는 지금은 사라진 주인선( 朱 仁 線 )을 달리며 가족들과 이별 한다. 잠시 후 제물포역 부근에서 경인선 철길 옆을 따라 가다가 주 안역 못 미쳐서 경인선과 합류한다. 그리곤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3 년간의 군복무 첫날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입영열차를 타는 단체 입영제는 86서울아시안게임을 앞두고 폐지되 었다. 그때 두발도 빡빡 에서 스포츠형으로 변했다. 대규모 국제경 기 개최를 앞두고 경직된 사회 분위기를 바꿔보자는 취지였다. 1971년 인천공설운동장에 집결한 입대 장정들. 이들은 숭의로터리를 거쳐 남부역으로 행진해 논산행 입영열차를 탔다. 15

20 세 번째 이야기(2014년 8월 18일) 물맛 다른 풀장에서 헤엄치다 몇 발자국만 떼면 바닷가였던 인천에서 풀장은 그리 흔한 시설 이 아니었다. 1971년 6월 22일 옛 시립도서관(현 율목도서관) 뒤편 에 율목풀장이 개장했다. 사진은 개장 첫날 시범 수영을 하는 모습이 다. 규격 없이 그저 넓게 시멘트를 부어 어른용, 어린이용 풀을 각각 한 개씩 만들었지만 이 풀장의 개장은 인천시민에게 대단한 뉴스거 리였다. 주안 염전이나 용현동 낙섬 등에서 짠물로 멱을 감던 아이들은 여름 방학 중 율목풀장에 한번 가는 것이 소원이었다. 휴가와 레저라는 개 념이 없던 시절, 풀장에 다녀온 꼬마는 동네 아이들의 선망의 대상이 었다. 어렵사리 풀장에 가면 입장료 생각에 온몸이 퉁퉁 불 정도로 물속에 서 놀았다. 이곳에서는 주로 남자들이 수영을 즐겼는데 당시 만해도 여성들이 도심 한가운데 노천풀장에서 노출이 심한 수영복 입기를 꺼려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16

21 휴가와 레저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 풀장에 다녀온 꼬마는 동네 아이들 선망의 대상 율목풀장이 들어선 자리는 원래 일본인들의 공동묘지였다. 일설에 의하면 묘지 상당수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 목숨을 잃은 일본군 이었다고 한다. 뼈가 나뒹굴던 산꼭대기 땅이 풀장 으로 환골탈태하 자마자 금세 인천의 명소가 됐다. 지하수를 퍼 올려 쓰던 이 풀장에 시체 썩은 물이 흘러든다는 괴담이 돌곤 했다. 아마도 풀장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퍼뜨린 소문일 테지만 아무튼 입술이 파래지도록 물이 차가웠던 것은 사실이다. 시멘트를 부어 만든 풀장이었지만 율목풀장은 아이들에게 인기 최고의 물놀이 시설이었다. 일본인 묘지터에 생긴 풀장이라 물이 아주 서늘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17

22 오림포스호텔 마당에 있던 투숙객 위한 풀장은 일부 여유 있는 시민들만 이용 이 풀장은 1996년 폐쇄되었고 그 이듬해 다시 공원으로 조성됐다. 공사를 하던 중 땅 속에서 귀와 목이 잘린 채 거꾸로 매장된 문인석 6점이 발굴됐다. 일제가 민족혼을 말살하려고 저지른 행위였던 것으 로 추측되었는데 그중 3개의 문인석이 현재 율목공원 맨 위쪽에 세 워져 있다. 율목풀장에 앞서 오림포스호텔(현 파라다이스호텔) 마당에 풀장이 있었다. 1965년 12월 호텔이 개업했고 이듬해부터 풀장을 운영한 것으로 보인다. 투숙객을 위한 시설이었지만 일반인 출입도 허용했 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존재도 모를 만큼 일부 여유 있는 시민들 만 이용했던 풀장이었다. 1968년 8월 20일 이 풀장에서 당시에는 굉장히 생소하고 외설스러 운 행사가 하나 열렸다. 영국에서 온 전위 미술가가 보디페인팅 시 범을 보였는데 언론에서는 이것을 나체에 그림 그리기 라고 소개해 세인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이 풀장은 1988년 경에 폐쇄되었고 현 재는 주차장이 되었다. 문학산 기슭에도 풀장이 있었다. 샘물이 풍성하게 흘러나와 땅 소유 주는 1969년 공중목욕탕으로 허가를 받아 청학풀장 을 만들었다. 18

23 주변 자연 환경이 좋아 지금도 여름철이면 어김없이 개장을 하는 이 풀장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풀장 중에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오래 되었다. 지금의 학익동 송암미술관 주변에는 새인천풀장이 있었다. 바닷물 을 끌어들인 도크식 풀장으로 동양화학 계열사인 동양관광개발에서 1974년 경부터 80년대 초까지 운영했다. 키 작은 아카시아나무 몇 그루 밖에 없었던 뙤약볕 아래의 풀장이었다. 동양화학은 1976년 1월 이곳에 해양종합관광지를 개발한다는 계획 을 발표했다. 해면 매립지 1만 5천 평에 동양 최대 규모의 매머드 수 족관과 수중터널, 해수풀장을 비롯해 휴게실, 조탕, 쇼핑센터 등을 갖춘 8층짜리 관광호텔을 세운다는 계획이었지만 조감도만 남긴 채 첫 삽도 뜨지 못했다. 인천 시내에 있던 풀장들은 개장하자마자 콩나물시루처럼 항상 만 원이었다. 문제는 위생이었다. 관리 상태가 좋지 않아 간혹 구정물 풀장 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당시에는 풀장 관리에 대한 법규가 없어 보건사회부는 공중목욕장 업법 규정을 적용했다. 1풀장 내의 풍기문란 금지 2전염병 환자 입 장 금지 3하루 세 번씩 환수( 環 水, 물갈이) 조치 4인체에 해로운 세 균을 막기 위한 염수 소독 5변소, 탈의시설 구비 등이 지켜야할 규 정이었다. 19

24 네 번째 이야기(2014년 8월 25일) 마을 황소 동원해 만든 고속도로 개통한 지 46년 만에 경인고속도로가 직선화 되었다. 서인천 나들목에서 청라국제도시까지 총길이 7.49km가 개통되면서 곧게 펴 졌다. 경인고속도로 건설은 광복 후 여러 형태로 몇 차례 입안됐으나 번번 이 예산문제에 부딪혀 실행되지 못했다. 1966년 정부는 국토균형 개 발, 공업지대 분산, 도시인구 분산, 안보상 국방도로 필요성 등을 내 세우며 대국토건설계획의 일환으로 경인고속도로 건설을 결정했다. 세계는 이미 컨테이너 시스템으로 기계화된 운송 수단이 등장했고 국내에서도 화물트럭이 점점 대형화 추세에 있는 등 물류 차원에서 도 그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철도 하나를 개설하는 예산으로 고속도 로 3개를 개통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일부 신문은 시원하게 일직선으로 뻗은 도로를 달리면 운전자의 피 로도가 덜어지면서 교통사고가 감소하고 교통 쾌적도가 높아져 사 회가 한결 명량해질 것이란 기사를 실었다. 심지어 고속도로가 많이 20

25 부자들이 기생 끼고 놀러나 다닐 길이란 폄하 속에 고속도로는 사투리를 순화 시킬 것이란 찬성 컬럼이 게재되기도 재원 마련 때문에 4차례 연기된 끝에 1967년 5월 27일 인천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경인고속도로 기공식. 민심을 의식해 7대 총선 선거운동 기간 중에 열렸다. 21

26 만들어지면 사투리도 순화될 것이라는 칼럼을 게재하기도 했다. 그 렇다고 모두 고속도로 건설을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일각에서는 고 속도로를 부자들이 기생들 끼고 놀러나 다닐 길 이라고 폄하했다. 사진은 1967년 5월 27일 오전 11시 인천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경인 고속도로 기공식 장면이다. 정일권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시민 3만 여 명이 모여 성대하게 치러졌지만 그 내막을 보면 결코 잔치 분위기 라고 할 수 없었다. 기공식은 차관 도입 문제 등으로 네 차례나 연기한 끝에 개최되었다. 기본조사 조차하지 못한 채 유권자의 표심을 얻기 위해 6월 8일 치 러지는 제 7대 총선 선거운동 기간 중에 서둘러 기공식을 했다. 그해 고속도로 건설 예산은 한해 총 투자액의 1%에 지나지 않은 고작 2천 만 원만 확보된 상태였다. 640m 밖에 공사할 수 없는 액수였다. 노선도 우왕좌왕이었다. 당초에는 종로구 사직동을 출발해 김포공 항 인근을 거쳐 인천 송림로터리에 도착하는 것으로 설계되었다. 후 에 이 노선은 서울 양평동부터 한창 건설 중인 인천항 제2도크까지 연결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인천 방향으로는 가좌 동에서 도화동 선인학원을 지나 인천공설운동장 앞길과 연결해 부 두 쪽으로 닿는 것으로 계획돼 있었다. 그런데 당시 선인학원 백선 엽 인엽 형제의 입김으로 용현동 쪽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변경된 코스는 염전 지대를 많이 통과하기 때문에 지반 침하가 심해서 공사 에 어려움이 많았다. 경인고속도로 건설의 가장 큰 어려움은 날씨도, 기술도 아니었다. 재 원( 財 源 )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150달러였다. 22

27 송림로터리에 도착하는 당초 설계안은 선인재단 백선엽 인엽 형제의 입김으로 용현동 염전지대를 통과하는 것으로 변경 우리 돈으로는 결코 개통시킬 수 없었다. 차관을 도입하기 위해 관료 들은 외국에 나가 손을 벌렸지만 쉽지 않은 문제였다. 재원 확보를 위해 채권을 발행했고 휘발유 값을 200% 인상하기도 했다. 개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철야 작업은 물론 세계 건설사에서 듣도보 도 못한 공법 을 활용했다. 길이 얼지 않도록 비닐을 덮어 씌어가며 아스팔트 공사를 했고 포장공사 장비가 부족해 인근 마을의 황소까 지 동원해 로울러를 굴려가며 도로를 다지기 까지 했다. 육사 출신 공병 장교들은 현장 감독으로 차출되었다. 그들은 영어 원서를 펼쳐 들고 일일이 체크해가며 현장을 관리 감독했다. 1968년 12월 21일 역사적인 경인고속도로 개통식이 서울 쪽 출발 지인 양평동 안양천변에 있는 당중국민학교에서 열렸다. 1967년 3 월 24일 착공해 1년 9개월 걸렸지만 본격적인 공사일로 보면 8개월 만에 만든 고속도로였다. 인천과 서울 사이 km를 18분 만에 주파하는, 세계에서 가장 싼 값으로 가장 빠르게 달리는 도로를 만든 것이다. 도로혁명 없이 산업혁명 없다 라는 취임사와 함께 박정희 대통령 내외는 개통 테이프를 끊었다. 그리고는 바로 최대속도 100km 규 정 표지판을 뒤로하고 인천 가좌동까지 시속 120km 고속 으로 시주 ( 始 走 )하면서 대한민국의 고속도로 시대를 열었다. 23

28 다섯 번째 이야기(2014년 9월 1일) 매스게임 같은 대청소 빗질 인천시는 각종 국제 행사에 참석하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클 린업(Clean-Up) 주간 을 정했다. 옛날식 표현으로 하면 대청소 강 조기간 이다. 시민 대청소 기간은 전쟁의 상흔이 채 아물지 않은 1950년대에도 실 시될 만큼 오래된 시 정책의 하나이다. 인천시에서 발행한 주간소식 지 인천공보 1955년 3월 14일 자에는 춘계대청소에 시민 궐기( 蹶 起 )하자 라는 다소 선동적 제목이 붙은 기사가 실렸다. 지난 11일부터 25일까지 설정된 춘계대청소 강조기간에 인천시에 서는 경찰 당국과 긴밀히 협조하여 명랑하고 깨끗한 고장을 이룩하 려는 적극적인 청소 사업을 추진 중에 있다. 인천시 보건과에서는 공 동변소, 쓰레기 적재장, 하수구 등 불결한 곳의 소독을 실시하는 한 편 도 당국으로부터의 예방약품이 도착하는 대로 예방주사 실시도 계획 중에 있다는 바 일반 시민은 이 행사에 적극적인 호응 협조하 여 변절기에 고개 드는 각종 질병을 미연 방지하여 깨끗한 고장, 명 24

29 대청소기간 중, 동원된 사람들 위해 치울 쓰레기를 일부러 남겨 둬 랑한 가정을 꾸미는데 힘써 줄 것이라 간망되고 있다. 1970년대 들어서자 대청소는 새마을 운동과 맞물리면서 중요한 일 상이 된다. 범시민 대청소는 도시 새마을 운동의 핵심이었다. 정부는 1972년 4월부터 각 시 도 단위별로 매월 하루를 새마을의 날 로 제 정해 운영토록 했다. 농촌이야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는 뚜 렷한 액션 이 있었지만 도시에서는 보여줄 뭔가가 없었다. 대부분의 도시는 매월 1일을 새마을 청소의 날 로 정했고 한 달에 한번 공무원과 학생들은 오전 7시부터 한 시간 동안 거리를 쓸고 다 녔다. 인천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진은 1972년 동인천역 광장에서 대청소를 하는 시청 공무원들의 모습이다. 이들 뿐만 아니라 요식업협회, 미용협회 등 직능단체와 각 학교별, 그리고 각 공장 근로자들도 동원돼 구역을 나눠 청소를 했 다. 주로 역 주변과 싸리재, 답동사거리 등 눈에 띄는 장소에서 현수 막을 내걸고 매스게임 하듯 빗질을 했다. 각 동은 주민들의 동참을 유도했다. 동사무소 옥상에 매달린 확성기 는 매월 1일 오전 6시 30분이 되면 어김없이 새벽종 이 울렸다. 70 년대에는 새마을 노래가, 80년대 초에는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 이 25

30 농촌은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는 뚜렷한 액션 이 있었지만 도시에서는 보여줄 뭔가가 없자 청소경진대회 열어 1972년 동인천역 광장에서 대청소를 하는 시청 공무원들의 모습. 동인천은 가장 번화한 거리로 시민들에게 대청소 강조기간을 계몽하기 좋은 장소였다. 26

31 울려 퍼졌다. 반경 3km 안에 사는 주민들에게는 머리 맡 자명종이 울 리는 것 같은 굉음이었다. 그야말로 조기( 早 起 ) 대청소 를 무섭게 독 려했다. 서울은 당시 유명 연예인을 동원해 선전 효과를 노리기까지 했다. 엄 앵란, 최남현 등 영화배우들이 빗자루를 들고 자신이 사는 동네에 나 타난 모습이 보도되기도 했다. 내무부는 전국청소경진대회를 열어 청소우수기관과 공무원에게 표창을 하며 지역 간 경쟁을 부추겼다. 이 때문에 대청소 강조기간 중에는 환경미화원들이 새벽 청소를 못 하게 하는 일도 있었다. 동원된 사람들이 치울 쓰레기를 남겨 둬야 했기 때문이다. 수원시는 1977년 명예로운 시민 카아드 제를 시행했다. 이 카드에 는 반상회 출석, 새마을청소 참여 등의 항목이 적혀 있다. 반상회와 새마을 청소 때 이 카드를 꼭 갖고 다녔고 반장이 확인 도장을 찍어 주었다. 관계관의 제시 요구가 있으면 보여줘야 했고 동사무소에서 민원서류 뗄 때 반드시 지참해야 했다. 6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새마을 대청소는 유명무실해졌다. 새마을운 동에 대한 거부감과 반감이 커지면서 청소 현장에는 공무원과 일부 새마을 지도자만 참석했다. 결국 정부는 1989년 4월 1일 새마을 청 소의 날 을 17년 만에 폐지했다. 27

32 여섯 번째 이야기(2014년 9월 15일) 마녀 백옥자, 아시아를 던지다 드디어 2014인천아시아경기대회가 이번 주 금요일(19일)에 개 막한다. 우리나라는 금메달 90개로 종합 2위를 목표로 하고 있다. 혹 자는 아시아경기대회의 금메달을 가벼이 여길 수 있으나 이번 대회 에 참가하는 45개국 중 금메달커녕 동메달 하나를 획득하기 위해 온 힘을 쏟을 나라도 있다. 한국도 아시아경기대회 금메달 하나에 온 국 민이 환호성을 지르던 적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사진은 1970년 방콕아시아경기대회에서 맹활약한 인천출신 선수들 의 카퍼레이드 모습이다. 오픈카에 탄 선수들은 동메달이라도 목에 건 선수들이다. 그들은 서울에서 국민 환영회를 마치고 바로 인천으 로 금의환향했다. 동인천역 광장에서 인천시장의 영접을 받은 후 검 은 짚차에 올라타고, 연도에 늘어선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축하 퍼레이드를 벌였다. 카퍼레이드 코스는 용동 마루턱을 넘어 경동사거리 거쳐 답동사거 리에서 우회전해 인천시청(현 중구청) 마당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28

33 월등히 큰 체구 때문에 대열 균형 맞지 않는다고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 개회식 입장 행렬에서 제외돼 1960, 70년대 인천에서 카퍼레이드를 하면 으레 이 코스로 진행했 다. 월남 파병 귀환 장병들과 무장간첩을 사살한 모범 용사들도 이 코스에서 시민 환영 퍼레이드를 벌였다. 사진 맨 앞 차에 탄 선수는 아시아의 마녀 백옥자이다. 그는 방콕아 시아경기대회에서 14m57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한국 육 상이 아시아경기대회에서 12년 만에 쾌거를 이룩한 것이었다. 무엇 보다 건국 이후 국제대회에서 우리나라 여자 선수가 딴 최초의 금메 달이었다. 백옥자는 1951년 십정동에서 6남매 중 외동딸로 출생해 주안국교를 졸업하고 인성여중에 입학했다가 숭의여중으로 전학해 농구와 배구 를 번갈아 했다. 다시 박문여중으로 옮겨왔는데 이렇게 여러 학교를 다니게 된 것은 순전히 남들보다 월등히 큰 체구 때문이었다. 175cm에 65kg로, 지금 기준으로 보면 평범한 체격이지만 당시에는 각 종목에서 손을 뻗친 보기 드문 거구 였다. 체격은 이후에도 더 육중해져서 1970년 12월 방콕아시아경기대회 에 참가할 때는 175cm에 86kg이었다. 이 때문에 개회식에 참가하지 29

34 건국 이후 국제대회에서 우리나라 여자 선수가 딴 최초의 금메달 경사 못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한국 임원단은 백옥자를 개회식 입장 행 렬에서 제외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체구가 다른 사람에 비해 월등히 크기 때문에 대열의 균형이 맞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한마디로 선수단 입장 행렬의 폼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백옥자는 덩치 값을 확실하게 했다. 박문여고 시절인 1968년부터 정식으로 포환을 던지기 시작해 그해 열린 경기도체육대회에 나가 14m02로 한국 신기록을 수립했다. 이는 일본 선수가 보유한 아시아 최고 14m43 기록에 다음 가는 성적이었다. 내친김에 같은 해 열린 전국체전에서 14m75으로 아시아 최고기록을 갈아치웠다. 백옥자의 집은 가난했다. 아버지는 늙고 병들었으며 송림동 현대극 장 앞에서 콩나물 노점상을 하는 어머니가 가족의 끼니를 이어갔다. 효녀 백옥자는 집안 걱정으로 훈련에 매진하지 못하고 슬럼프에 빠 지곤 했다. 건국대 2학년 재학 중 육상연맹회장의 주선으로 국민은행에 취업하 면서 안정을 찾았고 1972년 뮌헨올림픽을 앞두고 맹훈련에 들어갔 다. 서독(독일) 정부 초청으로 퀼른대학에서 전지훈련을 했지만 올림 픽에서 자신의 기록보다 뒤진 성적으로 예선 탈락했다. 30

35 국비로 뮌헨올림픽에 관광 보낸 꼴이 됐다 라는 비판이 일었고 이 제 백옥자도 한물갔다 라는 냉소도 들렸다. 그는 1974년 테헤란아 시아경기대회를 앞두고 정초부터 인천공설운동장에 매일 나가 포환 을 던졌다. 하루에 1천 번 넘게 포환을 던진 날도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딱 40년 전인 1974년 9월 10일 테헤란. 야앗- 그날 그의 괴성은 유달리 컸다. 4kg의 검은 쇳덩이가 포물선을 그리며 하 늘로 솟구쳤다. 16m28. 믿을 수 없는 기록이 나왔다. 아시아 신기록 을 세우면서 우승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유효한 아시아의 마녀 라 는 별명을 만들어준 바로 그 경기였다. 백옥자는 현재 대한육상경기 연맹 여성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시아의 마녀 라고 불린 백옥자는 1970년 방콕아시아경기대회 투포환 경기에서 금메달을 땄다. 당시 인천시에서는 인천 출신 메달리스트들을 열렬히 환영하며 동인천역에서 시청(현 중구청)까지 카퍼레이드 행사를 마련했다. 31

36 일곱 번째 이야기(2014년 10월 6일) 인천은 한국 사이클 금빛 질주의 출발지 신문물 유입의 창구였던 인천은 자전거의 출현도 타도시보다 빨랐다. 조선인에게 자전거는 낯선 물건이었다. 개화기 초 선교사들 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조선인들은 그들의 다리에 이 상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빠르게 자전거가 보급되었던 인천에서는 자연스럽게 자전거경주대 회도 빈번하게 열렸다. 자전거경주대회는 주로 화정( 花 町 지금의 중 구 신흥동) 매립지에서 열렸다. 1925년 10월에 열린 전 조선 자전거 경기 대회에는 경성에서 손꼽히는 십여 명의 기생 선수들이 참가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우편배달부와 양조장 혹은 냉면집 배달원들은 인천자전거점원구락 부 라는 일종의 동호회를 조직하고 전조선남녀자전거경주대회를 주 최하기도 했다. 배달원과 선수의 구분이 모호했던 시절에는 자전거 급 종별경기대회가 종종 열렸다. 코스 달리기 외에 물건을 싣고 달 리는 실용운반 경주, 장애물을 피해 달리는 실용차 장애물 경주 등의 32

37 멜버른올림픽 출전팀 전지훈련 대신 비슷한 코스 인천 주원고개와 원통이고개에서 맹훈련 종목이 포함되었다. 광복 후 자전거경주대회의 열기는 전국적으로 계속되었다. 1946년 경향신문 주최 제1회 전국지역대항자전거경기대회가 열려 인천과 서울을 비롯해 수원, 군산, 목포 등이 참가했다. 아쉽게도 38선 이북 의 도시들은 한 곳도 참가하지 못했다. 경향신문은 기사를 통해 아 직은 남조선만 거행하지만 앞으로는 문자 그대로 전 조선을 총망라 해서 거행할 것을 기대한다. 고 말했다 전쟁 이후 인천은 도로경기의 출발지 혹은 결승점 역할을 했 다. 전국체전 혹은 국가대표 선발전은 서울 중앙청을 출발해 인천까 지 두 번 왕복(약 150km)하거나 그 역순으로 하는 것이 단골 코스였 다. 대회 때마다 이를 지켜보기 위해 경인가도에 수많은 시민들이 모 여들었다. 이같은 분위기 속에서 걸출한 자전거경주 선수 한명이 인천에서 성 장했다. 인천개항100주년사 에 의하면 김호순은 1952년 핀란드 헬 싱키에서 열린 제15회 올림픽에 인천인 최초로 올림픽 대회에 참가 했다. 1956년 평화신문사 주최 인천~서울 간 자전거경주대회(86.6km)에 33

38 벨로드롬이 없던 시절, 사이클 트랙경기는 인천공설운동장에서 육상 경기 하듯 경주를 했다. 코너를 돌 때 뒤엉켜 자전거끼리 부딪히는 사고가 자주 발생했다. 서 1위를 했고 그해 열린 호주 멜버른올림픽 선발전에서도 우승, 당 당히 태극마크를 다시 달았다. 연맹은 멜버른 도로경기가 아주 험난한 코스에서 치러진다는 정보 를 입수했다. 레이스가 펼쳐지는 코스에서 미리 훈련을 해야 좋은 성 적이 나오겠지만 그 당시 우리나라는 전지훈련을 갈 형편이 못되었 다. 연맹은 전국 도로 곳곳을 샅샅이 뒤졌다. 마침내 비슷한 코스를 인천에서 발견했다. 인천~주안 간에 한 곳, 주안~부평 간에 세 곳이 있다고 발표했는데 주원고개와 원통이고개 등으로 추측된다. 선수 들은 이 고개를 이용해 3, 4개월 동안 수없이 페달을 밟았지만 세계 의 벽은 높았다. 기대주 김호순은 37위를 차지하는데 그쳤다. 우리나라 사이클 실력은 전통적으로 도로경기에 강했다. 반면 벨로 34

39 계산동 벨로드롬, 효창인조잔디축구장과 함께 80년대 한국 스포츠의 두 명물로 꼽혀 드롬 경기장이 없어 트랙경기에는 아주 약했다. 사진은 1973년 지금 은 사라진 인천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사이클 트랙경기의 모습이다. 경사진 길쭉한 타원형의 벨로드롬에서 시합을 해야 하지만 당시 그 런 경기장은 꿈도 꿀 수 없던 시절이라 운동장 트랙에서 서로 부딪혀 가며 경주를 펼쳤다. 1982년 인천시는 남구 옥련동 194 일대 3만여 평 부지에 민자를 유 치해 국내 최초로 관광객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자전거 전용경기 장을 건설키로 발표했다. 또한 대한사이클연맹은 88서울올림픽을 위한 재원 확보의 일환으로 우선 인천에 경륜장(벨로드롬)을 설치해 프로사이클을 실시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와 관련해 당시 삼미슈퍼스타즈야구단을 운영하던 삼미그룹이 송 도 부근에 1983년 봄 경륜장을 착공할 것을 구상했지만 이는 실현되 지 못했다. 대신 인천시는 1983년 10월 인천에서 열리는 64회 체전 을 대비해 우리나라 최초로 계산동 체육공원 안에 국제규모의 벨로 드롬을 건설해 개장했다. 이는 당시 효창인조잔디축구장과 함께 80 년대 한국 스포츠의 두 명물로 꼽혔다. 35

40 여덟 번째 이야기(2014년 10월 13일) 시민의 날 50년 인천현대사 고스란히 10월 15일은 제 50회 인천시민의 날 이다. 시민의 날은 시류에 따라 그 날짜가 여러 번 변경됐다. 그 곡절을 살펴보면 인천 현대사 의 한 페이지를 엿볼 수 있다. 지난 1965년 인천시는 지역의 애향심 을 고취하고 시민이 다 같이 하루를 즐길 수 있는 시민의 날 제정에 나선다. 인천 역사와 관련한 유서 깊은 날 을 택하기 위해 시정자문 위원회가 소집됐다. 위원회가 난상토론 끝에 고른 날은 인천 개항일 이었다. 인천이 공 식적으로 개항한 날은 1883년 1월 1일이다. 시민들이 다 같이 하루 를 즐기기에는 날씨가 너무 춥고 게다가 연말연시이기 때문에 모두 들 바쁜 철이라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고심 끝에 참고한 것이 일본 인에 의해 편찬된 조선사대계( 朝 鮮 史 大 系 ) 였다. 그 책에 인천의 실 질적인 개항은 1883년 6월부터 시작됐다고 기록됐다. 이를 유추 적 용해 6월 1일을 시민의 날 로 정했다. 36

41 1965년 제1회 시민의 날 부평에스캄부대 미군들과 인천 거주 화교들 초청 제물포제는 자유공원에서 기념식을 갖고 동인천 등에서 차량 퍼레이드를 펼쳤다. 갑문 준공을 기념하기 위해 선박으로 개조해 카퍼레이드를 하는 대성목재. 글씨를 우에서 좌로 쓴 모습이 이채롭다. 37

42 인천상륙작전기념일, 인천항개항일, 경인선개통일 등에서 시민의 날 택일하는 설문 조사 실시 1965년 제1회 시민의 날 행사는 오전 10시부터 자유공원 광장에 서 성대하게 거행됐다. 초청객 중에는 부평에스캄 부대 미군들과 인 천의 화교들이 포함됐다. 국적은 달라도 넓은 의미에서 그들을 인천 시민 으로 간주하는 제스처를 보인 것이다. 이날 시민의 다짐(헌장) 도 처음으로 공포했는데 이 헌장은 지금까 지 매년 시민의 날 행사에서 여전히 낭독되고 있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현재 맥아더 동상 부근에 시민헌장비가 세워져 있다. 처음 제정 된 시민의 날 축하잔치에는 당시 최고 인기가수들이 총출동했다. 그 날 밤 8시부터 9시 30분까지 공설운동장에서 시민위안의 밤이 흥겹 게 진행됐다. 그날의 풍경을 한 지역신문은 이렇게 전했다. 국내 베테란급 가수인 현미와 한명숙, 박제란, 최희준 등이 출연해 그칠 줄 모르는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1968년 제4회 때부터 지역 상공계의 제안에 따라 인천시민의 날은 항도제( 港 都 祭 )를 겸해서 치르다가 이듬해부터 두 행사를 통합해 제물포제 라 개칭했다. 이 제물포제는 시민의 날이 제정된 지 10년 째 되는 지난 1974년부터 다시 날짜가 변경됐다. 동양최대 도크식 38

43 인천항 갑문 준공일 5월 10일을 기념하기 위해 변경됐다. 지난 1981년 7월 1일 인천은 경기도로부터 분리돼 인천직할시가 됐 다. 시 승격을 기념하기 위해 이 날을 시민의 날로 다시 제정했다. 그 러나 의미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길일( 吉 日 ) 을 택하지 못했다. 7월 1일은 계절적으로 폭염과 장마로 인해 행사를 치르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뒤따랐다. 해가 갈수록 시민들의 호응이 식어갔다. 날짜를 다시 변경해야 한다는 의견이 솔솔 흘러 나왔다. 1993년 인천시사 를 발간하는 시기와 맞물려 시사편찬위원회의 제 안에 따라 날짜 변경이 본격적으로 논의됐다. 1994년 인천시는 시민 1천 명을 대상으로 인천상륙작전기념일(9월 15일), 인천항개항일(2 월 27일), 경인선개통일(9월 18일), 인천 으로 개칭한 날(10월 15 일) 중 택일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많은 시민이 10월 15일 을 택했다. 1970년 대 말까지 시민의 날은 그야말로 도시 전체가 들썩거리는 축 제일이었다. 특별한 문화 행사가 별로 없던 시절, 인천시는 지역 행 사와 한데 묶어 그 기간에 경축 분위기를 한껏 돋우었다. 특히 지역 의 큰 업체들은 기업 이미지에 맞게 트럭이나 버스를 개조해 매년 카 퍼레이드를 벌여 시민들에게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했다. 현재 인천시민의 날 경축 행사는 IMF 사태 이후 지난 1998년부터 격 년제로 실시되고 있다. 짝수 해에는 간소하게 기념식만 치르고 홀수 해는 각종 경축 행사도 곁들여 열고 있다. 인천시는 올해부터 시민 의 날 을 국기 게양일로 지정하는 조례를 제정했다. 다른 해와 달리 10월 15일 시내 곳곳에 인천 시민의 긍지와 애향심이 담긴 태극기가 펄럭일 것이다. 39

44 아홉 번째 이야기(2014년 10월 20일) 한국 여자배구 강스파이크 동일방직배구단 프로배구 2014~2015 V리그가 지난 18일 시작해 6개월간의 대 장정에 들어갔다. 인천 연고 팀은 남자부는 대한항공 점보스팀, 여자 부는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팀이다. 핑크스파이더스(pink spiders)의 전신은 동일방직 여자배구팀이다. 동구 만석동에 자리 잡은 동일방직(전 동양방적)은 1934년에 문을 열었다. 설립 당시 종업원 3천 명에 직조기 1천292대로 조업을 시작 해 일본인들이 동양 최대 라고 자랑할 만큼 큰 규모였다. 1960년대 우리나라의 면방직업계는 호황을 누렸다. 동일방직은 1960년대 초 여자배구팀을 창단했고 뒤를 이어 대전방직, 경성방직, 선경직물 등 섬유 관련 업체들이 배구팀을 만들었다. 이들은 국세청, 산업은행, 제일은행, 석유공사 등과 함께 한국 여자실업배구의 한 시 대를 풍미했다. 그중 동일방직 배구팀은 강팀으로 분류되었다. 박계조배쟁탈남녀배 40

45 최천식(현 인하대 감독)의 어머니 박춘강 씨 동일방직에서 오른쪽 공격수로 활약 구대회, 전국춘계실업배구연맹전 등 각종 대회에서 우승하며 항상 톱 랭킹에 속했다. 올림픽대회, 아시아경기대회 대비 국가대표팀을 구성할 때마다 대한배구협회 최우수선수로 뽑힌 서희숙 등 주전 대 부분이 상비군으로 선발될 정도로 1960년대 내내 상위권에 속했다. 그들이 훈련하는 체육관 겸 강당은 공장 안에 있었다. 선수들의 고함 이 하루 종일 직조기 소리에 섞여 만석동 공장 담 너머로 흘러 나왔 다. 인하대와 대한항공에서 주전으로 뛴 미남 선수 최천식(현 인하대 감독)의 어머니 박춘강 씨도 동일방직에서 오른쪽 공격수로 활약했 다. 사진은 1966년 대회에서 우승한 동일방직 여자배구팀이 인천시청 을 방문해 시장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모습이다. 당시 이미 6인제 배구로 바뀐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주전 6명만이 앵글에 들어 왔다. 영원히 코트를 누빌 것만 같았던 동일방직 배구팀은 면방직 업계의 불황을 이겨내지 못하고 1971년 8월 전격 해체된다. 당시 국내 여자 실업팀 중 가장 오래된 배구팀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다행히 태광산업이 인수해서 재창단하기로 결정해 선수들은 유니폼 만 갈아입게 되었다. 창단 이듬해 1972년 실업무대에 본격 나서며 3 41

46 동일방직배구단 해체된 지 38년 만에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로 변신해 다시 고향 코트를 밟아 천하 여장군들의 금의환향. 1966년 전국대회에서 우승한 동일방직여자배구팀이 시청을 방문해 윤갑로 인천시장(가운데)과 포즈를 취했다. 선수 대부분이 국가대표로 선발될 만큼 동일방직배구팀은 1960년대 내내 최강팀으로 군림했다. 42

47 월 부산에서 열린 실업연맹전에서 5전 전승, 창단 7개월 만에 우승 을 일궈내는 파란을 일으켰다. 이후 1975년 국가대표 이순복을 주 축으로 전국대회 3관왕의 영예를 누리며 80년대 초반까지 전성기 를 구가했다. 동일방직 출신의 이순복은 1972년 뮌헨올림픽 주전과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동메달 획득의 주역으로 한국배구사의 명 플레이어로 꼽힌다. 태광산업은 방계회사인 동양합섬을 통합했는데 이 팀은 남자배구단 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로써 당시 국내에서 유일하게 같은 종목 남 녀 스포츠팀을 모두 보유한 회사가 되었다. 1991년 태광 배구팀은 태광그룹 자회사인 흥국생명에 속하게 된다. 흥국생명여자배구팀은 2005년 11월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로 새롭게 옷을 갈아입고 프 로 전환을 선언했다. 2005~2006 여자프로원년 정규리그와 챔피언 결정전을 동시에 제패, 통합우승을 달성했다. 이후 V-리그 챔프전에 서 연이어 우승을 차지하며 최초로 V3를 달성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2008년까지 천안시가 연고지였던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는 2009년 인천시와 정식 연고 계약을 체결했다. 동일방직 여자배구팀 이 해체된 지 38년 만에 다시 고향 코트를 밟은 것이다. 그동안 핑크 스파이더스는 도원실내체육관을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올 시즌부터 는 인천아시아경기대회 때 배드민턴 경기를 치렀던 계양구 서운동 의 계양체육관에 새로운 거미집 을 만들고 다시한번 인천여자배구 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43

48 열 번째 이야기(2014년 10월 27일) 인천OB밴드부 에서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 되기까지 가을이 깊어 갈수록 각종 음악 공연이 빈번하게 열리고 있다. 특히 각 교향악단은 그동안 갈고 닦은 새로운 레퍼터리를 선보이기 위해 그 어느 때 보다 분주하다. 인천의 대표적인 교향악단은 인천시 립교향악단이다. 이 오케스트라는 1966년 시립으로는 국내에서 서 울, 부산, 대구, 전북(전주)에 이어 다섯 번째로 창단되었다. 인천시사 70년대편 에 의하면 인천시립교향악단은 1966년 5월 4 일 창단에 따른 조례가 승인됨에 따라 40명의 단원으로 구성되었다. 초대 상임지휘자는 서울음대를 졸업하고 제물포고에서 음악교사를 하던 김중석이었다. 창단 기념공연은 6월 1일 오후 7시 30분 제1시민관에서 열렸다. 이 날은 제정된 지 두 번째 맞는 인천시민의 날이었다. 인천시향은 첫 레퍼터리로 슈베르트의 미완성교향곡 등 10여 곡을 연주했다. 창단 공연에 이어 보름 후 KBS에 출연해 전파를 통해 전국 시청자들에게 창단 신고를 했다. 44

49 인천시향 창단의 근간은 1965년 창단된 육군경기지구 정훈( 政 訓 )관현악단 1968년 인천시는 중구, 동구, 남구, 북구 등 구제( 區 制 )를 처음 실시했다. 인천시향은 구제 실시 기념식이 열린 시민관 무대에서 제5회 정기연주회를 가졌다. 요즘과 달리 여성 단원의 비율이 아주 낮은 것이 이채롭다. 45

50 1960년 동산중 강당에서 열린 서울시향 초청 음악회에 안익태 선생이 한국환상곡 을 연주 지휘 조례가 통과되자마자 교향악단이 일사천리로 창단될 수 있었던 것 은 이미 인천에 오케스트라의 토대가 마련돼 있었기 때문이다. 인천 시향 창단의 근간은 육군경기지구 정훈( 政 訓 )관현악단이었다. 이 악 단은 6 25 전쟁의 포연이 채 가시지 않은 1953년 6월 인천에서 창 단되었다. 1957년 해체되었다가 같은 해 인천음악애호가협회교향 악단으로 다시 발족했다. 이 교향악단의 추계대연주회가 11월 2일 인천시민관에서 열렸다. 이때 지휘자는 가곡 그리운 금강산 의 작곡가 최영섭이었다. 그는 1964년 동아방송 편곡지휘자로 스카우트되기 전까지 이 악단을 이 끌었다. 후에 인천애협교향악단원 대부분은 인천필하모니관현악단 으로 재편성되었고 아홉 차례의 연주회를 가진 후 1966년 인천시립 교향악단으로 다시 무대에 서게 되었다. 인천음악애호가협회는 1960년 5월 19일 동산중학교 강당에서 서울 시립교향악단 초청 인천시민위안음악회를 연다. 지역의 문화 예술 계 인사들과 남녀 학생들로 신축 강당은 입추의 여지없이 가득 찼다. 초로의 지휘자가 무대 한가운데 섰다. 애국가 작곡가이자 세계적인 지휘자 안익태 선생이 서울시향을 이끌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인 46

51 천 무대에서 한국환상곡 을 연주했다. 1981년 인천시가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인천시향도 한 단계 도약했 다. 마침내 모든 단원이 정식으로 봉급을 받게 되었고 85명의 단원 으로 3관 편성을 했다. 당시 단원들 대부분은 서울 출신이었고 4분 의 1은 유학파로 구성되었다. 비로소 인천OB밴드부 라는 오명을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다.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이 개관하기 전 인천의 주 공연무대는 주안에 있던 시민회관이었다. 비록 제대로 된 음향시설을 갖추지 못했지만 시향 정기연주회 때마다 1천350석의 자리가 꽉 찰 정도로 인기가 높 았다. 창단 20주년 되는 1986년 3월 17일에 드디어 정기연주회 100 회 공연을 했고 이듬해 4월에는 창단 이후 첫 해외공연 길에 올랐다. 싱가포르, 홍콩, 자유중국(대만) 등 동남아 3개국을 방문해 베토벤의 에그먼트 서곡, 교향곡 5번 운명 을 연주했다. 1994년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개관을 맞아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 자로 금노상을 영입하고 국제적인 오케스트라 규모의 4관 편성으로 그 면모를 갖췄다. 2010년부터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지휘자 금 난새가 지휘봉을 쥠으로써 인천시향은 지역을 넘어 세계무대에서 최상의 연주를 들려주는 명실상부한 메이저 오케스트라로 거듭나 고 있다. 2014년 10월 17일 인천시향은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에서 340회 정기연주회를 했다. 47

52 열한 번째 이야기(2014년 11월 10일) 빛바랜 추억 속 자유공원 비둘기집 올해 서울 창의상 최우수상은 가느다란 피아노 줄을 이용한 비둘기 퇴치법이 수상했다. 평화의 상징이던 비둘기는 이제 도시의 골칫거리 중 하나가 되었다. 정부는 2009년 배설물로 인한 건물 부 식과 차량 피해 그리고 위생상의 문제를 야기하며 혐오감을 주는 비 둘기를 유해( 有 害 ) 동물로 지정했다. 광장과 공원의 평화롭고 한가한 풍경을 완성하는 소재였던 비둘기는 오늘날 환영받지 못하는 조류 로 전락했다. 자유공원 광장에는 커다란 비둘기집이 있었다. 공원을 찾은 사람들 은 맥아더 동상과 더불어 비둘기집 앞에서도 인증샷 을 꼭 찍었다. 사진은 1982년 자유공원으로 그림 그리러 나온 인근 유치원 원아들 이 비둘기집을 보며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11층으로 된 이 비둘기집은 1967년 대성목재공업에서 제작해 기증 한 것이다. 190쌍 정원의 규모로 만들어 30쌍을 처음 입주시켰다. 해마다 식구가 늘어나 6년 만에 30배인 1천쌍이 되면서 극심한 주택 48

53 1967년 대성목재가 제작 기증한 자유공원 비둘기집, 식구 늘어 수원시와 여주군에 분가시켜 지금은 도시의 골칫거리가 되었지만 1990년대 까지만해도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 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사진은 1996년 철거되기 전의 자유공원 비둘기집. 난과 식량난을 겪었다. 결국 일부를 수원시와 여주군에 분가시키기 도 했다. 설치된 지 30년 만인 1996년 초 공원 환경개선 계획에 의해 이 비둘기집은 철거되었다. 졸지에 홈리스 가 된 비둘기들은 대부분 공원 아래 인천경찰청(현 하버파크호텔)으로 집단 이주했다. 바로 앞 에 인천항 양곡 양륙장이 있어 밥벌이가 수월했기 때문이다. 비둘기 49

54 소월미도에 인천관측소와 일본군 군용기지, 여의도비행장을 오가는 통신용 비둘기 사육장 있어 들은 하역 작업 중에 떨어진 옥수수 알갱이를 주워 먹거나 아예 인근 제분 공장으로 날아가 쌓여 있는 곡식을 축내기도 했다. 공원 비둘기의 새 거처가 된 경찰청 건물은 배설물로 골치를 앓았다. 급기야 경찰청 측은 본관 건물 옥상에 비둘기집 두 동을 설치했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인천은 오래전부터 비둘기와 인연이 깊다. 일제강점기 때 소월미도 에는 인천관측소와 일본군 군용기지, 여의도비행장을 오가는 전서 구( 傳 書 鳩 : 통신용 비둘기) 사육장이 있었다. 전서구는 다리에 각종 정보를 동여매고 인천~경성, 인천~팔미도를 매일 오전, 오후 한두 차례 적게는 5, 6마리 많게는 40~50마리가 뭉쳐서 저공으로 날아다 녔다. 이 비둘기들은 교통이 불편하고 전신, 전화 설비가 설치되지 않은 섬을 오가며 폭풍 경보와 해난 통보 등에 활용되었다. 1930년대 초 체신국은 종래 팔미도를 중심으로 한 비둘기 통신을 멀 리 등대가 있는 자월면 목덕도(88km), 태안반도 앞 옹도(91km), 격렬 비도(122km)까지 확장했다. 인천해사출장소장은 앞바다 섬의 등대 를 순시하러 다닐 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전서구를 갖고 다녔다. 훈련을 받았지만 간혹 임무 수행을 못하는 고문관 비둘기도 있었 50

55 다. 1934년 1월 영종도 부근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가 길 잃은 전서구 한 마리를 잡아 보호해 경기도청에 신고했다. 다리에는 조체 ( 朝 遞 ) 8463호 라는 쪽지가 달려 있었다. 인천해사출장소와 팔미도 사이를 날아다니며 임무 수행하던 전서구가 잠시 방향을 잃고 갈 길 을 헤맸던 것이다. 수렵금지 기간이 해제되는 가을철이 되면 전서구의 수난이 뒤따르 곤 했다. 사냥꾼들은 다른 새와 구분하지 못하고 전서구들에게 총구 를 겨누기도 했다. 체신국에서는 사냥꾼들의 총부리로부터 통신병 을 보호하기 위해 전전긍긍했다. 광복 후 대한민국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 안에도 비둘기 통신중 대가 창설될 만큼 오랫동안 비둘기 연락병의 역할은 계속되었다. 1970년대 만해도 귀소( 歸 巢 ) 능력이 있는 이 비둘기는 애완동물의 하나였다. 비둘기 애호가들의 모임인 애구( 愛 鳩 )협회가 결성돼 1년 에 한두 차례 비둘기 레이스 경기를 펼쳤다. 회원들은 자신들이 사육하는 비둘기들을 먼 지점에 갖고 가 그곳에 서 동시에 날려 보냈다. 비행 후 각기 자기 집에 도착한 시간을 특수 시계로 기록하여 각 비둘기가 날아온 분속을 계산하여 등수를 매기 는 경기였다. 멀리 제주도에서 날려 보내는 레이스를 펼치기도 했다. 비둘기들은 시속 60km로 제주~서울 간을 8시간 꼬박 비행해 집으로 돌아왔다. 51

56 열두 번째 이야기(2014년 11월 17일) 주판알 잘 튕겨야 취업 취업시즌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직장을 얻기 위해 영어, 컴퓨 터, 봉사활동 등 갖가지 스펙 쌓기에 온 힘을 쏟는다. 30여 년 전 까 지만 해도 고용시장에서 우대받는 취업 스펙 중 하나는 주산 실력이 었다. 개항장 인천은 다른 도시에 비해 일찍 근대적 상점과 회사가 많이 설 립되면서 주산이 활성화 되었다. 1924년 2월 3일 인천주산경기회와 인천남상업학교 주최로 부내 상업학교 학생들을 비롯해 은행원, 상 점원 등이 참가한 주산경기대회가 열렸다. 속산( 速 算 ), 전표산( 傳 票 算 ) 등 9개 분야에서 실력을 겨뤘는데 주로 조선은행과 식산은행에 근무하는 현직 은행원들이 좋은 성적을 거뒀다. 1920년대 후반 유도 사범 유창호는 당시 인천의 유지 최승우, 김윤 복의 도움을 받아 율목동 유도관 2층에 인천 최초의 주산 부기 학원 인 상업전수학교를 개설했다. 후에 이 학교는 동산중학교로 승격했 고 더 나아가 동산고등학교로 성장했다. 52

57 인천상공회의소, 광복 후 재건 사업의 일환으로 우리나라 주산경기대회의 효시인 전( 全 )인천주산경기대회 개최 1936년부터 인천부(현 인천시)와 인천상공회의소는 공동으로 매년 2주간 매일 밤 두 시간 동안 인천공회당에서 상점실무강습회를 열었 다. 부내 각 상점 1명씩 총 50명을 대상으로 주산, 부기, 상사요항( 商 事 要 項 )을 가르쳤다. 광복 후 인천은 우리나라 주산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인천 상의 110년사 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인천상공회의소는 재건 사 업의 일환으로 전( 全 )인천주산경기대회를 개최했다. 1946년 10월 26일 실시한 제1회 대회는 8 15 해방 후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행 된 기능보급 행사였으며 이는 우리나라 주산경기대회의 효시였다. 1949년 제4회 대회를 치르기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실시해 왔으 나 6 25 전쟁으로 한동안 중단되었다. 인천 출신 주산인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1960년 10월 8일 문교부 주 최 제6회 주산능력검정고시가 서울상고와 덕수상고에서 응시자 5천 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그들 중 인천송현국민학교 6학년생 전 숭영(12) 양이 역대 최연소로 2급에 응시, 언론에 주목받기도 했다. 1965년 5월 일본, 자유중국, 마카오, 멕시코 등이 참가한 제3회 세계 주산회의가 경희대 강당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대한민국 대표로 53

58 1960년 주산능력검정고시 5천 명 참가자 중 인천송현국교 전숭영 역대 최연소 응시, 언론에 주목받아 1970년대 인천상의가 주관한 주산경기대회 모습. 당시 인기직장이었던 은행에 들어가려면 보통 2급 이상의 주산 자격증이 있어야 했다. 인천여상 강인구 교사가 주산기능에 미치는 요인 분석 을 발표해 눈 길을 끌었다. 이듬해 12월 자유중국 타이베이에서 열린 한 일 세계 주산대회에는 이봉운 인천상의 부회장이 대표단 단장을 맡아 참가 했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주판은 필수 사무용품이었다. 은행 창구나 54

59 관공서 책상은 물론 동네 어귀 구멍가게 계산대 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었다. 1950년대 상업학교에서 주산은 의무 교육이었고 60년대 초 중학교에서는 특기교육과정이 되었다. 신학기 학교 앞 문방구의 대목 학용품으로 주판이 낄 정도였다. 한창 때는 전국 10여 개 공장에서 생산하는 주판이 한해에 10만 개씩 팔 리기도 했다. 골목마다 주산학원이 들어섰고 아이들은 한글과 구구 단을 깨치기 전에 조기교육으로 주산을 배웠다. 엄마가 만들어준 다 양한 색상의 천주머니에 주판을 넣고 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은 흔한 풍경이었다. 주산자격증은 확실한 취업증명서 였다. 1973년 중구 사동에 있는 경기은행 본점에서 상고 졸업자를 대상으로 남자행원 약간 명을 모 집했는데 고시과목은 주산, 부기, 종합상식, 작문이었다. 당시 인천 상의는 전국주산경기대회에서 입상한 지역 실업계 학생들에게 시내 기업체 취업을 알선해 주었다. 실업계고 주산부 학생들이 거둔 성적에 따라 그 학교의 위상이 오르 락내리락 하기도 했다. 각 시도의 선거종합상황실 투개표 상황집계 는 상업고 주산부 학생들이 도맡아 처리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전자계산기가 일상화되면서 주산은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대한상의 주관 1988년도 주산국가기술자격검정에 1백 11만 명이 응시한 것을 정점으로 주판알 튕기는 소리 는 점점 희미 해져 갔다. 55

60 열세 번째 이야기(2014년 11월 24일) 엄마표 겨울용 털실 옷 찬바람이 불면 따스한 털실 옷이 그리워진다. 예전에 뜨개질은 의( 衣 )식주 해결의 하나였다. 섬유 의류산업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 절 겨울옷은 주로 주부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돈을 주고 옷을 사기보 다는 집에서 직접 만들어 입는 손뜨개질 옷이 대부분이었다. 아이들이 크면 털실을 풀어 다시 몸에 맞게 뜨개질해서 입혔다. 첫째 아들이 입었던 옷을 막내 여동생용으로 다시 고쳐 뜨곤 했다. 옷뿐이 아니었다. 장갑, 양말, 모자, 목도리 심지어 가방까지 온갖 엄마표 털실 제품이 만들어졌다. 손뜨개질은 일제강점기에도 성행해서 주로 부유층 주부들을 대상으 로 강습회가 정기적으로 열렸다. 내리 44번지에 있는 인천가정편물 연구회에서는 1932년 10월에 2주간의 편물강습회를 개최했다. 수 강 과목은 자켓, 조끼, 스웨터, 남녀 아동복이며 강습비는 1원이었 다. 비슷한 시기 인천수예연구소에서도 유사한 내용으로 모사편물 강습회를 열었다. 56

61 1966년 대한어머니회 인천지부 주최 수출편물강습회에 육영수 여사 참석해 수강생들 격려 월동 대비 집안일이었던 뜨개질은 1970년대에 접어들자 보세가공 수출품목이 되면서 중요한 부업거리가 되었다. 사진은 1966년 인천시에서 주관한 편물강습회의 모습. 아이를 들쳐 업고 온 주부들의 모습도 보인다. 57

62 6 25 전쟁 후 물자가 부족했던 시절 손뜨개질은 더욱 중요한 가사 ( 家 事 )가 되었다. 이 뜨개질이 1960년대와 70년대에 접어들자 집안 일에 머무르지 않고 주부들의 부업거리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당시 주부가 직장에 다닌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고 부업을 갖는 것도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그즈음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털실 옷이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이로 인해 손으로 직접 뜬 털실 스웨터는 우리나라의 중요한 보세가공 수 출품목이 되었다. 특별한 기계설비 없이 바늘과 실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제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정부에서도 이 가내수공업을 적극 적으로 권장했다. 농촌지역에서 조차 겨울철 농한기에 남자들은 가마니를 짜고 여자 들은 스웨터를 짰다. 나중엔 여름철 농번기에도 털실 옷을 뜰 만큼 농가의 중요한 소득원이 되었다. 전국의 부녀복지회관이나 야간기술학교를 중심으로 편물 강습회가 자주 열렸다. 1960년대 인천에서도 가사원( 家 事 院 ) 인천지부에서 편물강습을 정기적으로 실시했으며 수료한 4천여 명의 회원들은 각 자 집에서 편물 가공품 생산에 종사했다. 1966년 5월 30일 대한어머니회 인천지부가 주최한 수출편물강습회 에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가 참석해 수강생들을 격려할 만큼 당시 에는 편물수출이 국가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사진은 1960년대 중반 인천시 차원에서 동네 대표 주부들을 모아 놓고 뜨개질 무료 강습을 하는 모습이다. 맡길 데가 없어 아이를 둘 러업고 나왔지만 엄마는 아랑곳 않고 강사의 설명에 귀를 쫑긋 세우 58

63 1962년 동인천역 북광장 인근에서 문 연 털실가게 송현모사, 신포동으로 둥지를 옮겨 장사 계속 고 열심이다. 신기술 을 익힌 엄마들은 동네로 돌아가 이날 배운 기 술을 이웃들에게 전수했을 것이다. 1966년 국내에서 첫 국내 기능올림픽이 열렸다. 이듬해 스페인 마드 리드에서 열리는 제16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전초 전 성격이었는데 첫 국내 기능대회부터 손뜨개질 종목이 포함되었다. 각 지역의 손뜨개 선수들이 참가한 가운데 국가대표를 선발했다. 국 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우리 선수들이 매번 좋은 성적을 거두자 해 외에서는 우리나라 여성의 손재주를 높이 평가했다. 이민이나 유학 을 가는 여성들이 뜨개질 기술을 익혀 가는 경우가 많았다. 신문에 1, 2개월짜리 속성 과정의 양재 편물학원 광고가 자주 실렸 고 뜨개질 강습 기사가 연재돼 인기를 끌었다. 대부분의 여성잡지사 는 아예 별책부록으로 편물가이드 를 발행해 잡지 판매에 큰 재미를 보기도 했다. 인천의 시장 어귀마다 털실 가게 한 두 개씩은 있었다. 특히 현재 동 인천역 북광장 인근에 모사 간판을 단 10여개의 가게들이 옹 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 중 1962년 문을 연 송현모사는 주부들 사이 에서 꽤 유명했다. 몇 년 전 북광장이 조성되면서 이 가게는 현재 중 구 신포동으로 둥지를 옮겨 장사를 계속하고 있다. 59

64 열네 번째 이야기(2014년 12월 1일) 월남 파병 출항지이자 보트피플 피난지였던 인천항 올해는 월남 파병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64년 5월 9일 미국 존슨 대통령은 한국을 포함한 25개 자유 우방국에 남베트남(월남) 지원 을 호소하는 서한을 발송했다. 한국 정부 측에는 1개 이동외과 병원 의 파병을 요청했다. 1964년 9월 11일 이동외과병원 인력 130 명과 태권도 교관 10명 등 총 140명이 부산항을 출발했다. 건군 이 래 최초의 해외 파병이었다. 1965년 3월 10일 2차 파병을 했다. 공병대대를 중심으로 한 경비대 대, 수송자동차중대, 해군수송분대(LST) 등으로 편성된 건설지원단 비둘기부대 는 인천항에서 미 해군 수송함에 승선해 미 제 7함대 소 속 함정과 함재기의 호위를 받으며 사이공을 향해 출항했다. 사진은 그날 오전 6시경 인천항에서 진행된 환송식의 모습이다. 동 트기 전, 이른 시각에 군 관계자와 가족들이 부두에 나와 수송함 바 로 앞에서 차디찬 바닷바람을 맞으며 파월장병들과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60

65 1966년 파월 장병 전투력 향상 위해 신흥동에 김치통조림을 생산할 인천원예협동조합 건설 그해 10월 13일 이번엔 실질적인 전투부대가 베트남으로 향했다. 사 단장 채명신 장군이 이끄는 전투사단 맹호부대 가 미 제 7함대 수송 함 베이필드 호 등 3척에 나눠 타고 인천항을 빠져 나갔다. 이후 1973년까지 약 9년간에 걸쳐 31만3천 명이 낯선 땅 월남으로 파병되었다. 동네마다 한두 명의 젊은이가 월남에 건너가 베트콩과 싸웠다. 1970년도 인천시정백서에 의하면 1968년과 1969년 인천 의 파월장병 가족세대는 692세대로 조사되었다. 인천항을 통해 나간 것은 장병뿐만이 아니었다. 각종 물자가 쉴 새 없이 월남으로 향했는데 그 안에는 김치 도 끼어 있었다. 쌀이나 고 기는 현지에서 조달이 가능했지만 김치는 그렇지 못했다. 장병들은 고국에서 만든 토종김치를 그리워했다. 정부는 김치를 통조림으로 만들어서 보내기로 했다. 1966년 8월 1일 정부 지원을 받은 인천원예협동조합은 김치통조림 을 생산할 식품가공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인근 농촌에서 생산하는 각종 농산물의 조달이 편리한 수인선과 제품을 바로 선적하기 좋은 인천항이 이웃한 신흥동(현 신광초교 뒤)에 부지 2천평을 마련했다. 1967년 3월 18일 오전 11시 드디어 국내 최초의 김치공장이자 통조 61

66 림공장의 준공식이 열렸다. 이날 농림부장관, 경기도지사, 농협중앙 회장 등이 참석할 만큼 이 공장의 가동은 그 의미가 컸다. 서독(독일) 에서 들여온 설비를 갖춘 이 공장은 연간 200만 통의 통조림을 생산 해내며 파월장병들의 전투력 향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월남으로 모든 게 나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월남 패망 후 많은 난 민들이 인천항으로 들어왔다. 1977년 8월 3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원유를 싣고 한국으로 향하던 라이베리아 선적 유조선이 남지나 해 1965년 인천항에서 열린 해군수송대(백구부대)의 환송 모습. 그들은 후에 월남에서 철수하는 장병들을 다시 안전하게 고국으로 수송하는 임무도 맡았다. 62

67 월남에서 기술자로 일하던 사람들 귀국해 도원동에 슬라브 2층집 짓고 살며 월남촌 형성 상에서 보트피플을 구조했다. 어린이 14명이 포함된 33명(남24명, 여9명)은 인천항으로 들어와 신흥동에 있던 옹진군민의 집에 수용되 었다. 이듬해 2월 13일 인도네시아에서 원목을 싣고 한국으로 오던 화물 선 상동호가 45명, 1979년 9월 28일 석탄공사가 수입하는 석탄을 싣고 오던 영국 선적의 화물선이 32명 등의 난민을 각각 구조해 인 천으로 들어왔다. 당시 인천, 부산 등을 통해 한국 땅을 밟은 월남 난 민의 수는 2천 명에 이르렀다. 그들은 한국에 잠시 수용되었다가 대다수 미국, 캐나다 등으로 이주 했다. 일부는 이 땅에 남아 주점이나 음식점을 운영하며 힘겨운 삶을 꾸려 나갔다. 신포동에서 전통복 아오자이를 입고 과일냉차 장사를 해 눈길을 끌었던 웬레슨(28)이라는 베트남 여인도 그 중 한명이었 다. 중구 일대와 부평 지역에는 뉴사이공 등의 간판을 달고 장사를 한 베트남인들이 몇 명 있었다. 월남에서 기술자로 일하던 사람들도 속속 귀국했다. 전장에서 돈을 번 그들은 중구 도원동에 당시에는 고급 주택이라고 할 수 있는 슬라 브 2층집을 여러 채 짓고 함께 살았다. 사람들은 그곳을 월남촌 이 라고 불렀다. 63

68 열다섯 번째 이야기(2014년 12월 8일) 집도 절도 없던 거리의 천사 폭풍한설이 몰아치면 지내기 가장 힘든 이들은 집도 절도 없 는 사람들이다. 거리를 떠돌며 문전걸식하던 사람을 일컬었던 거 지 라는 호칭은 거의 사라졌지만 한때 거지같은 놈, 빌어먹을 놈 이란 말은 참기 힘든 욕설이었다. 행태만 변했을 뿐 거지는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도 존재한다. 일 제강점기에도 부랑아 로 불린 걸인들의 문제는 항상 골칫거리였다. 1934년 10월 총독부 통계에 의하면 인천 인구 6만 명에 끼니를 제대 로 잇지 못하는 궁세민( 窮 細 民 )이 4천582명(일본인 4명)이었다. 아 예 주거지도 없이 유리걸식하는 걸인은 59명으로 조사되었다. 겨울철 걸인들이 추위를 피하기 위해 빈 집이나 골목에서 불을 피우 는 바람에 화재가 자주 발생했고 굶주려 얼어 죽은 시신인 강시 가 곳곳에서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신문에 자주 실렸다. 일제는 부랑아들을 수용하기 위해 경기도 사회사업협회 기부금으로 옹진군 선감도(대부도 인근) 전체를 매수해서 복지시설을 건립했다. 64

69 1955년 도원동 산꼭대기에 부랑아들을 선도하기 위해 세운 인천소년수양원, 나중에 광성중고교로 성장 1960년대 중반 인천시에서 마련한 부랑인 임시 수용소의 모습. 군용 천막 안에 작은 난로 하나 피워 놓았지만 그들의 표정에서 안도감이 묻어난다. 65

70 1964년 인천에서 열린 전국체전을 구경하기 위해 인천으로 왔다가 부랑아로 오해돼 잡혀가기도 1942년 5월 인천에서 배편으로 195명의 부랑아를 수송하면서 개원 했다. 대부분 거리를 배회하다가 잡혀간 그들은 강제 노역과 가혹 행위를 피해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했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그곳을 벗 어나는 방법은 헤엄치는 게 유일했다. 당시 적지 않은 수가 물을 건 너다 익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수용소는 1946년 2월 선감학 원 이란 사회복지시설로 간판을 갈아 달고 1982년 10월에 폐쇄될 때까지 전쟁고아와 부랑아 등을 수용했다. 광복 후에도 걸인의 숫자는 줄지 않았다. 1950년 초 전국적으로 3만 여 명의 걸인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 중 수용된 인원은 서울, 인천에 700여 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동냥, 절도, 소매치기 심지어 약탈을 일삼았다. 특히 좌 우익 분쟁의 혼란기를 틈타 북한에서 보 낸 간첩들이 남한에서 거지 행세를 하며 조직을 확장해 방화와 파괴 를 일삼는다는 소문이 퍼져 부랑인 문제는 국가 안위에도 큰 위협을 줬다. 정부는 각 도에 걸인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걸인강제수용법 을 만들어 인구 10만 명 이상 도시에 수용소를 설치하는 한편 걸인 돕기 후생복표(복권)를 발행하기로 했다. 이런 와중에 서울의 자생원 66

71 에 수용된 걸인들이 구걸하며 푼푼이 모은 돈 2천200원을 군용기 헌 납 기금으로 동아일보에 기탁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전쟁은 또 다른 부랑인들을 양산했다. 거리마다 전쟁고아와 거 지들이 넘쳐났다. 인천경찰서장으로 부임한 류충렬 씨는 1955년 12 월 16일 도원동 산꼭대기에 부랑아들을 선도하기 위하여 인천소년 수양원을 건립했다. 구두닦이 등 거리의 소년 약 500명을 모아 교육 하기 시작했는데 집 없는 아이들에게는 합숙소까지 제공했다. 이 수 양원은 1965년 광성고등공민학교를 거쳐 오늘의 인천광성중고교로 성장한다. 1960년대 산업화시기에 접어들자 농촌에서 대도시로 올라온 사람 들이 직장을 찾지 못해 거리마다 걸인, 넝마주이 등이 넘쳐났다. 보 사부는 그들이 동사, 아사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매년 12월 1일부 터 다음해 2월 28일까지 3개월간 부랑아구호정책을 펼쳤다. 인천시 와 인천경찰서는 매년 합동단속을 통해 거리를 배회하는 부랑아들 을 붙잡아 선감도로 이송했는데 실적 위주의 단속으로 부작용을 낳 기도 했다.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서 부모와 함께 살던 지유성(15)은 1964년 인 천에서 열린 전국체전을 구경하기 위해 인천으로 왔다가 동인천역 에서 붙잡혔고 장성길(16)은 운동장 근처로 행상을 하러 왔다가 단 속에 걸려 섬으로 끌려갔다. 이렇듯 인천전국체전 기간 중 감옥과 다 름없던 선감도에 수용된 아이들의 수가 82명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 돼 큰 물의를 일으켰다. 연고자 소재 파악을 위해 당시 신문에 그들 의 명단이 게재되었다. 67

72 열여섯 번째 이야기(2014년 12월 15일) 부평은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의 모판 인천이 지난해 말( ) 기준으로 승용차 100만대 시대를 열었다. 시민 3명당 1대 꼴로 승용차를 보유하게 된 것이다. 인천은 우리나라 자동차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도시이다. 이 땅 최초의 자동차로 기록된 고종의 어차( 御 車 ) 미국제 포드 승용차가 1903년 제물포항을 통해 수입되었다. 개항장답게 외국무역상이나 선교사들이 자동차를 들여와 운행함으로써 그 어느 지역보다 먼저 자동차라는 신문물을 접한 곳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인천은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의 씨를 뿌리고 싹을 틔운 지 역이다. 정부는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자동차공업을 본격적으로 발전시킬 정책을 세웠다. 재일동포 박노정에게 인천 부 평에 자동차 공장을 설립하는 것을 허가했고 드디어 1962년 8월 27 일 새나라자동차사의 간판이 내걸렸다. 그날 오후 3시에 열린 준공식에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참석했다. 최고 실력자가 만사 제쳐두고 참석할 만큼 이 공장의 준공 68

73 세단형 새나라자동차 나오자 1955년부터 망치로 두드려서 생산해 온 시발자동차의 인기는 하루아침에 곤두박질 쳐 은 그 의미가 컸다. 당시 한 신문은 그날 준공식에 박 의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구름처럼 참석했다고 보도했다. 박 의장은 치사를 통해 우수한 자동차를 우리 손으로 만들어 외화 를 절약하게 된 것이 기쁘다 며 하루바삐 우리 손으로 자동차를 만 들 수 있는 기술과 태세를 갖출 것 을 당부했다. 사진은 준공식 후 공 장 내부를 시찰하는 군복 차림을 한 박 의장의 모습이다. 그는 아직 군인 신분이었다. 8만평(건평 4천500평)의 터에 자본금 1억원으로 출발한 새나라자동 차는 일본 닛산의 1천200cc 자동차 블루버드를 반제품식으로 들여 와서 조립하였다. 말이 조립 생산이지 사실 나사와 볼트를 끼우고 맞 추는 정도의 단순 작업이었다. 닛산은 물자 제공뿐만 아니라 프레스 가공과 엔진 제작 등 기술 원조를 하기로 새나라자동차사와 7개년 기술협조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타이어 튜브, 시트, 유리 등 국산 화율은 고작 20%에 머물렀다. 일본의 파랑새 가 대한해협을 건너 날아와 새나라 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을 뿐이라는 비판이 있었지만 근대적 생산 라인에서 만들어 진 최초의 국산 승용차로 기록된다. 69

74 외국인 관광객 전용 차량으로 새나라가 사용되면서 영어 해독할 수 있는 운전수 150명을 선발해 운전대 잡게 해 지난 1962년 8월 27일 부평 새나라자동차사 준공식에 참석한 후 공장 내부를 둘러보는 군복 차림의 박정희 의장. 자동차 생산 라인이라기보다는 요즘의 공업사 수준의 모습이 당시 자동차 산업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70

75 미끈한 세단형의 새나라자동차가 시중에 나오자 1955년부터 미군 지프의 중고 부품을 조립하고 드럼통을 망치로 두드려서 생산해 온 시발자동차의 인기는 하루아침에 곤두박질했다. 새나라는 초기에 일반인들이 쉽게 탈 수 있는 자동차가 아니었다. 처 음 생산된 400대 중 150대는 외국인 관광객 전용 차량으로 사용되 었으며 이를 위해 영어를 해독할 수 있는 운전수 150명을 선발해 운 전대를 잡게 했다. 나머지 250대는 주한 UN군용이나 대도시의 일반 관광용으로 운행했다. 이를 위해 거리 곳곳에 새나라 전용 승하차장 이 설치되었다. 새나라는 출범한 지 1년도 채 안돼 갈지자 행보를 했다. 외환 사정이 악화돼 부품 수입이 어렵게 되었고 대당 수입 단가 1천40달러(당시 환율로 13만1천원)의 국내 판매가가 22만4천원의 폭리로 밝혀지는 등 자동차 탄생에서부터 부품 수입 단계에 이르기까지 각종 특혜 의 혹에 휘말렸다. 새나라자동차 문제는 국회에서 주요 의제로 다뤄지면서 정쟁으로 까지 비화돼 한동안 장안을 들끓게 했다. 결국 1963년 7월 2,772대 를 끝으로 생산이 중단되었다. 하루 10대 정도 생산을 하고 문을 닫 게 된 것이다. 새나라자동차사는 1964년 1월 31일 인천지방법원에 서 경매 처분되었고 한일은행에 낙찰되었다. 새나라자동차는 자동차의 국산화라는 거창한 꿈을 접고 1965년 신 진자동차로 넘어감으로써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어 신진자동차 는 새한자동차, 대우자동차 그리고 한국지엠으로 그 바통이 건네지 며 오늘에 이른다. 71

76 열일곱 번째 이야기(2014년 12월 22일) 한국에서 처음으로 메시아 전 곡 연주한 내리교회 성탄절을 맞아 교회마다 크고 작은 성탄축하음악회가 열리고 있다. 가장 많이 선택되는 곡은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이다. 이 곡은 연주 시간이 거의 3시간에 이르고 표현하기도 어려운 대작( 大 作 )이다. 이 때문에 대부분 할렐루야 등 일부 곡만 발췌해 연주한 다. 이런 메시아 를 한국에서 처음으로 전 곡을 연주한 교회는 1885년 아펜젤러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인천 중구 내동의 내리교회이다. 메 시아 첫 연주는 아직도 6 25 전쟁의 포연이 가시지 않은 1954년 성 탄절에 이뤄졌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60년 전의 일이다. 당시 내리교회 찬양대원이었던 이선환 씨는 원어로 된 전 곡의 악보 를 한 질 3권(총 120여권)으로 번역해 만들었다. 40여 명으로 구성 된 내리교회 찬양대는 드디어 1954년 12월 23일 내리예배당에서 헨델의 메시아 를 국내 최초로 전 곡을 연주한다. 그 어느 합창단과 찬양대에서도 꿈꾸지 못했던 대곡( 大 曲 )을 무대에 올린 것이다. 72

77 1885년 제물포에 첫발을 내디딘 아펜젤러는 그해 일본에서 주문한 풍금이 도착하자 내리교회 인근 초가에서 찬송가 봉헌 1954년 성탄절을 맞아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전 곡을 한국에서 최초로 연주한 후 기념 촬영을 한 내리교회 찬양대 모습. 직접 그림을 그려 만든 소박한 무대가 눈에 띈다.( 내리교회 95년사 에서) 73

78 그리운 금강산 작곡가 최영섭, 비목 작곡가 장일남 등 인천 통해 서양음악의 자양분을 마음껏 섭취 사진은 그날 메시아 연주회를 마치고 교역자들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한 찬양대원들의 모습이다. 앞 줄 대원의 무릎에 놓인 악보가 꽤 두 툼해 보인다. 한국에서 메시아 를 초연한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인천지역 교회는 1970년대 접어들면서 인천시메시아연합연주회를 기획한다. 인천 시사 70년대편 에 의하면 1978년 11월 4일 인천시민회관에서 메시 아연합연주회 창립기금 마련을 위한 내리교회성가대와 부평감리교 회성가대 그리고 인천시립교향악단의 연합연주회가 개최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인천시메시아연합연주회가 창설되었고 이듬해 12월 22일 제 1회 연합연주회가 열렸다. 내리감리교회, 중앙감리교회, 제 3장로교회, 송현성결교회로 구성된 초교파 연합성가대와 인천시향 이 연주하는 메시아 가 인천시민회관 무대에 울려 퍼졌다. 내리교회는 우리나라 서양음악 역사의 작은 씨를 뿌린 곳이다. 한국 의 서양 음악은 찬송가로부터 시작됐다. 1885년 4월 5일 복음을 들 고 제물포에 첫발을 내디딘 아펜젤러는 그해 7월 7일 일본에서 주문 한 풍금이 도착하자 현재의 내리교회 인근 초가에서 만복의 근원 하 나님 이란 찬송가를 봉헌했다. 74

79 풍금 소리가 울려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신기한 듯 그 집에 몰려들었 고 아름다운 소리에 금세 반해 버렸다. 선교사들이 가르치는 찬송가 는 당시 장구와 꽹과리 그리고 피리가 중심이 된 국악 음률에 익숙해 있던 조선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종교 활동에 제약을 받았던 일제강점기에도 내리교회는 인천지역 에서 열리는 각종 음악회의 좋은 무대가 되었다. 1920년 7월 4일(주 일) 인천남자엡윗청년음악부는 오전 11시부터 내리예배당에서 인천 찬양회를 개최했다. 인천과 경성에 있는 서양인, 중국인, 일본인 교 회의 음악가를 초청해 각자 언어로 독창과 합창 프로그램을 진행했 다. 1922년 4월 29일(토) 인천남자의법청년회 음악부 주최로 오후 7 시 30분부터 내리예배당에서 음악회가 열렸다. 시내 각 교회를 비롯해 일본인교회와 중국인교회 찬양대 그리고 경 성의 성악가와 기악연주가를 초청해 성대하게 음악회를 개최했다. 혼잡을 피하기 위해 20전 짜리 입장권을 판매했는데 제모( 制 帽 )를 쓴 학생에 한해 반액으로 할인했다는 내용이 당시 한 신문에 보도되 기도 했다. 이후 내리교회는 음악계의 거목들을 배출하는 산실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국민가곡 그리운 금강산 의 작곡가 최영섭은 내리교회 찬양 대를 이끌며 메시아 를 여러 번 지휘했고 한국합창계의 대부로 우뚝 서며 얼마 전까지 인천시립합창단의 지휘봉을 쥐었던 윤학원도 내 리교회 무대에서 활동했다. 비목 의 작곡가 장일남은 광복 직후 월남해 송현동에 본적지를 두고 내리교회 찬양대를 지휘하며 서양음악의 자양분을 마음껏 섭취했 다. 75

80 열여덟 번째 이야기(2014년 12월 29일) 인천에서 처음 실시된 야간통행금지 자정이 가까워지면 사람들은 초초한 표정을 지으며 부산해졌 다. 매일 밤 국민 모두가 안절부절 못하는 집단적 조건반사 를 보였 다. 30여 년 전 야간통행(야통) 금지가 실시됐던 때의 모습이다. 지 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밤 12시가 넘으면 절대로 다니지 못 했던 시절이 있었다. 1945년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다. 다음날 거리 전봇대와 골 목 담장에 영어로 쓴 종이들이 나붙었다. 영어 깨나 하는 사람이 더 듬거리며 번역을 해줬다. 그런데 단어 하나에서 막혔다. curfew. 처음 보는 단어였다. 콘사이스를 들쳐보니 유럽 중세 때 소등을 명 하는 종소리 라고 적혀 있다. 야간통행금지는 그렇게 우리에게 찾아 왔다. 광복 이후 이 땅에 내려진 미군정 포고( 布 告 ) 제 1호는 일본 식민지 정책 하에서 해방된 한국 국민의 인권과 권리를 보호하고 질서 유지 76

81 1945년 9월 7일부터 1982년 1월 4일 까지 36년 4개월가량 야간통행 금지 아래서 살아와 1966년 12월 31일 동인천역 광장의 밤 풍경. 건물 위에 설치된 미원 네온사인이 광장을 화려하게 비추었다. 나중에 맞은편 건물에 후발업체 미풍 의 광고탑도 세워져 한동안 경쟁하듯 이곳에 불빛을 쏟아냈다. 77

82 를 위해 통금을 선포할 수 있다 였다. 그 포고를 근거로 당시 주한 미군사령관 하지 장군은 인천과 서울에 통금을 선포했다. 그날부터 두 지역은 밤 8시부터 새벽 5시까지 통 행을 금지했다. 미군의 입장에서 보면 적국인 일본이 지배해왔던 한 반도 지역에 대해 경계 태세를 갖출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제도 는 1950년 7월 8일 전국으로 확대됐고 6 25 전쟁으로 남한이 전시 상황에 빠지자 요지부동으로 굳어 버렸다. 일제하에서도 실시되지 않았던 이 통금제도는 1955년 4월 내무부 고시 경범죄 처벌 제 1조 43항으로 입법화 되면서 생활 풍속도를 완 전히 바꿔 놓았다. 우리 국민은 1945년 9월 7일부터 1982년 1월 4 일까지 36년 4개월가량 야간통행 금지 아래서 살아왔다. 일 년 내내 야통 이 실시된 것은 아니었다. 성탄절과 한해의 마지막 날(31일)에는 한시적으로 통금을 해제했다. 1962년에는 군사혁명 제1주년기념산업박람회(4월) 기간에 20일간, 관광의 달(5월)을 맞아 외국인들에게 불편을 줘서는 안된다며 15일간 해제하기도 했다. 사진은 1966년 연말연시를 맞아 통금이 해제된 동인천역 부근의 야 경 모습이다. 일 년을 손꼽아 기다렸다는 듯 밤새 꼬리를 물며 질주 하는 차량들의 불빛이 번잡하다. 당시 인천에서 유일했던 네온사인 도 밤새 번쩍거렸다. 딱히 갈 곳 없었던 젊은 청춘들은 부나비처럼 화려한 불빛을 쫓아 동인천으로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1964년 1월 18일 0시를 기해 제주도가 통금에서 해제됐다. 이어서 이듬해 해안선이 없는 충북, 그리고 1966년 유명 관광지였던 경주, 온양, 유성 등이 통금에서 벗어났다. 이를 계기로 야통 금지를 없애 78

83 당국은 치안과 안보 문제, 특히 대부분 가정주부들이 통금제도를 원한다는 논리로 통행금지 존속시키려 해 자는 여론이 들끓었다. 당국은 치안 문제, 더 나아가 안보를 앞세워 존속 논리를 폈다. 심지 어 대부분의 가정주부들이 통금제도를 원한다는 핑계를 댔다. 이에 대해 언론에서는 밤늦게 기생집이나 바에서 술 먹고 다니는 특권층 일부 부인들의 하소연이라고 맞받아쳤다. 20세기에 야간 통행금지를 항시적( 恒 時 的 )으로 시행하는 국가는 지 구상에서 한국과 칠레 밖에 없었다. 치안 사태가 좋지 않았던 베트남 도 전국적으로 시행하지 않았고 분단 국가였던 독일(서독)도 이 제도 를 실시하지 않았다. 결국 정부는 1982년 1월 5일부터 이 제도를 철폐했다. 정통성에 자 신이 없던 정권은 마치 시혜처럼 국민들에게 빼앗긴 심야의 4시간 을 돌려 줬다. 무엇보다 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이 제도를 존속 시키는 것은 여러모로 거북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폐지했다. 어찌됐던 요즘 말로 하면 36년 만에 비정상의 정상화 가 된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지역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접적( 接 敵 ) 지구와 해안선 등 전국의 52군 292읍 면은 제외시켰다. 강화군, 옹 진군 전부와 인천 인근의 군자, 소래 지역 주민은 이후에도 한동안 여전히 밤에 발이 묶였다. 79

84 열아홉 번째 이야기(2015년 1월 5일) 산업화 시절의 슬로건 더 일하자 새해를 맞아 각 지자체와 기업에서는 2015년의 슬로건을 새롭 게 내걸고 있다. 슬로건은 구성원의 결집과 집단의 목표를 함축적으 로 표현하는 효과가 있다. 지방자치시대를 맞아 각 지자체마다 그 지 역 특성에 맞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있지만 관선( 官 選 ) 시대에는 중앙 에서 정한 국정지표가 전국적인 구호가 되었다. 산업화 시기 정부가 내걸었던 슬로건은 그 시절의 애환과 시대상을 잘 나타냈다.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는 게 최우선 과제였던 그 당시에 는 재건 과 부흥 이란 개념이 근간이 되었다. 지금처럼 세련된 언어 를 선택해 추상적 의미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간단명료하고 직설 적이었다. 심지어 명령적이며 선동적으로 들리기까지 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50년 전, 1965년 병오년( 丙 午 年 )을 맞아 박정 희 대통령은 신년 메시지를 통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일할 것을 모든 국민에게 호소했다. 새해에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 80

85 1965년 일하는 해 로 정한 정부는 증산, 수출, 건설에 총 매진할 것을 독려하기 위해 1966년 슬로건은 더 일하는 해 로 확정 는 변함이 없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안정과 성장을 도모하면서 특히 증산을 하고 수출을 증가시키고 국토를 개 발하여 번영을 향한 줄기찬 노력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새해를 일하 는 해 로 정한 정부의 결의는 이러한 우리들의 목표를 한마디로 집약 해 놓은 것입니다. 국정 구호 일하는 해 는 전국 행정기관은 물론 기업체와 공장 현장 으로 전파되었다. 동사무소, 공장 굴뚝은 물론 학교에도 내걸렸다. 그해 인천지역은 부평지구수출공단 지정, 시민의 날 제정, 시내 자동 전화 개통, 경인선복선(동인천역~영등포역) 개통, 인천시공보관 준 공, 오림포스호텔 준공 등의 일 을 했다. 이듬해를 맞아 대통령은 연두교서를 통해 1966년을 다시 일하는 해 로 정하고 근면과 검소와 저축을 행동강령으로 삼아 증산, 수출, 건설에 총 매진할 것을 국정 지표로 내놓았다. 최종적으로 다시 대 신 더 를 붙여 1966년 슬로건은 더 일하는 해 로 확정되었다. 그 뜻이 너무 강압적이라는 여론이 일었고 무엇보다 물가가 치솟자 사람들이 더 올리는 해 라고 비아냥거리자 그해 8월 경 청와대와 정 부 측 실무진이 모여 근면의 해 로 변경하는 것을 논의한다는 보도 81

86 슬로건 현판에 문맹자 위해 황소를 앞세워 쟁기질하는 농부의 모습도 함께 그려 넣어 1966년 초 인천시청에서 열린 5대 도시(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시장 회의 후 기념 사진. 앞 줄 가운데 짙은 안경을 쓴 이가 윤갑로 인천시장이다. 청사(현 중구청) 본관에 그해 국정 슬로건 더 일하는 해 현판이 걸려 있다. 전년도 1965년에는 일하는 해 가 걸려 있었다. 82

87 가 있었다. 그러나 그 해는 그냥 더 일하는 해 로 끝까지 갔다. 사진은 1966년 초 인천시에서 열린 5대 도시(서울, 부산, 대구, 인 천, 광주) 시장회의 후 시 청사(현 중구청) 앞에서 찍은 모습이다. 청 사에 그해 국정 구호 더 일하는 해 현판이 크게 걸려 있다. 문맹자 가 많았기 때문이지 글자 옆에 황소를 앞세워 쟁기질하는 농부의 모 습도 함께 그려 넣었다. 1966년 인천은 슬로건에 걸맞게 많은 일을 했다. 제 47회 동계빙상 체전 인천개최, 인천수출산업공업단지 기공, 인천제철주식회사 공 장기공, 인천시립교향악단 발족, 인천항 제 2도크 축조공사 기공, 자 유공원 석정루 준공, 경인간 직행버스 개통, 인화여자종합고 광성 중 숭덕중 설립 등 인천 발전의 토대가 된 굵직한 일들을 많이 진행 했다. 더 일하는 해 의 과중한 업무 탓이었는가, 윤갑로 시장 후임으로 그 해 7월 12일 부임한 신충선 시장은 과로로 쓰러져 신촌세브란스 병 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9월 5일 숨을 거두었다. 향년 46세였다. 2014년 새로 출발한 민선 6기의 슬로건은 인천의 꿈 대한민국의 미 래 이며 시정목표는 새로운 인천 행복한 시민 이다. 특히 재정 건전 화의 원년 을 목표로 삼은 올해 시정철학이 담긴 사자성어는 극란신 흥( 剋 亂 新 興 ) 이다. 어려운 인천시정을 잘 이겨내서 새롭게 일으킨 다 라는 뜻이다. 50년 전처럼 다시 더 일하자 라는 의지를 담고 있 다. 83

88 스무 번째 이야기(2015년 1월 12일) 누구에겐 여전히 필수연료인 19공탄 인천연탄은행이 올 겨울 후원 받은 연탄은 28만여 장이다. 연탄 은행이 해마다 인천지역 저소득층 1천500여 가구에 지원하는 연탄 은 45만여 장에 이른다. 17만여 장이 부족한 상황으로, 장당 500원 짜리 연탄이 없어 추위에 떠는 이웃들이 있다는 것은 빛바랜 사진 속 장면이 아니라 엄연한 오늘의 이야기다. 연탄은 6 25 전쟁 후 1950년 대 초부터 취사용과 난방용으로 상용 되기 시작한 이래 한동안 국민연료로서의 위치를 굳건히 해왔다. 지 금은 저소득층의 필수연료로 인식되는 연탄이지만 한때 우리나라에 서 한해 생산량이 70억 개에 이를 정도로 연탄 마련은 한 가정은 물 론 한 도시 더 나아가 대한민국 정부가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월동대 책 중 하나였다. 연탄은 구멍의 개수에 따라 9공탄, 19공탄, 22공탄 등으로 불리었 다. 지게를 지고 가파른 언덕을 오르며 시커멓게 땀범벅이 된 연탄배 달부와 꼰 새끼줄에 연탄을 끼고 집으로 가는 가장의 뒷모습 그리고 84

89 월남으로 파병되는 군인들을 수송하기 위해 무연탄 수송 열차 동원되는 바람에 제때 연탄공장에 석탄 공급하지 못해 동구 송현동에 있던 황해연탄공장의 1960년대 말 모습이다(사진 4장 합성). 이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황해도 피난민 출신들이었다. 한 어린 소녀가 5장의 연탄을 올려놓은 빨래판을 머리에 이고 힘겹게 걸어 나오고 있다. 아이는 저 멀리 보이는 수도국산 고개 위 집까지 몇 번은 가다 쉬다 하면서 올랐을 것이다. 85

90 부서진 연탄 조각들을 모아 물로 반죽해 틀에 넣고 떡메로 쳐서 다시 연탄으로 만들어 벌이를 하던 아저씨의 모습 등은 1960년대, 70년 대에 흔하게 마주칠 수 있는 풍경이었다. 당시 인천 곳곳에는 크고 작은 연탄공장이 있었다. 송현동 황해연탄, 창영동 영화연탄, 숭의동 장흥연탄, 신생동 태성연탄, 신흥동 강원 연탄, 북성동 인천연탄, 주안 대동연탄과 제일연탄, 부평 한일연탄과 명신연탄 등이 있었다. 이 공장들은 인천지역의 하루 소비 물량 20 만개 중 절반가량 밖에 생산할 수 없어 시민들은 연탄에 늘 갈급했 다. 1966년도 연탄 파동은 의외의 사건 때문에 일어났다. 당시 월남으 로 파병되는 군인들을 수송하기 위해 36개 편 열차가 각 지역으로 동원됐다. 그 바람에 강원도 탄광지역으로 가야할 무연탄 수송 열차 가 부족해 제때 연탄공장에 석탄 공급을 하지 못했다. 결국, 그해 겨 울 시민들은 추위에 떨어야 했다. 1974년 터진 오일쇼크는 대체 연료인 연탄의 품귀 현상을 최고조로 만들었다. 정부는 인천을 비롯한 도청 소재지가 있는 12개 도시에 연탄판매기록카드제 를 도입했다. 일종의 배급제를 실시한 것이다. 돈이 있어도 마음대로 연탄을 사서 때지 못했다. 시장은 동장들에게 출하증을 배부하고 동장은 지정연 탄판매소에 출하증을 교부했다. 지금의 편의점처럼 동네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던 연탄판매소는 공 장에 가서 출하증을 제출하고 연탄을 받았다. 일반가정 소비자는 동 장으로부터 가구 단위별 연탄구매카드(일명 백색카드)를 받아 판매 86

91 1974년 오일쇼크 때 정부는 인천을 비롯한 12개 도시에 일종의 배급제인 연탄판매기록카드제 실시 소에서 연탄을 샀다. 가구당 1회 구입량은 50장 이내로 제한했다. 판 매소는 매일 판매량을 동장에게 보고해야만 했다. 시는 공장별로 감독관 2명씩을 상주시켜 생산, 출하, 판매를 통제했 다. 이쯤 되면 연탄공장은 사기업이라기보다 관에서 운영하는 공기 업 성격을 띠었다고 할 수 있다.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으면 암거래 가 생기는 법. 출하증을 웃돈 받고 팔기고 하고 카드를 돈으로 거래 하기도 했다. 육지에서 부족하면 섬의 상황은 최악으로 내닫는다. 1980년대 초 인 천 앞바다 섬으로 갈 연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게다가 백령도, 대 청도 등 5개 섬을 운행하는 선박들이 수송 이익이 좋은 건축 자재 등 만 운반하면서 연탄 수송을 기피했다. 1982년 11월 18일 하오 3시 인천항 3부두에서 연탄가공선(750톤) 2척의 취항식이 있었다. 혜민( 惠 民 )호 로 명명한 이 선박은 연탄 제조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이 취항식에 전두환 대통령 부인 이순자 여사가 참석했다. 87

92 스물한 번째 이야기(2015년 1월 19일) 겨울철의 불청객, 화마( 火 魔 ) 불을 가까이 하는 요즘, 전국 각지에서 사상자가 발생하는 화재 가 끊이질 않고 있다. 인천은 1884년 소방조( 消 防 組 ) 가 설치되는 등 개항장답게 다른 지역보다 일찍 신식 소방기구가 들어섰다. 1907년 인천은 화재로 인해 큰 재앙을 당했다. 3월 5일, 지금의 신포 동에서 불이나 무려 400채 가량의 집이 잿더미가 되었고 10월 19일 각국 거류지의 가옥 19채가 불타는 등 그 한 해 동안 7차례의 큰 화 재로 모두 587채가 전소되면서 인천부민들은 공포에 떨었다. 1926년 인천의용소방대 및 상비소방대에서 발표한 통계를 보면 지 난 5개년 동안 발생한 화재 건수는 376회였다. 원인은 아궁이와 연 통 때문에 148건, 풍로 10건, 궐연(담배) 124건, 양등( 洋 燈 ) 14건, 난 로 9건, 어린이 장난 16건, 내다버린 재 9건, 화로 18건, 방화 1건, 목욕탕 9건, 원인 불명 18건 등이었다. 88

93 전화기가 대중화되기 전, 육안으로 발견해서 출동해보겠다는 취지로 수봉산 정상에 화재감시용 망루를 설치 분류에서는 빠졌지만 경인선 화차에서 뿜어진 불똥으로 인해 심심 치 않게 기찻길 옆 초가집이 불타버렸음을 당시 신문은 보도하기도 했다. 인천에서 현대적인 소방 활동이 펼쳐진 것은 미 군정기인 1947년부 터였다. 미국으로부터 기증받은 신식 소방차 15대를 갖춘 인천소방 서는 화마에 본격적으로 맞서 싸웠다. 6 25전쟁 후 10여 년 동안 큰 화재가 없었던 인천은 1964년 한여름 에 예기치 못한 화마로 인해 많은 시민이 희생되었다. 6월 2일 일요 일 오전 11시 경 답동 주택가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았고 큰 폭발음 이 연이어 터졌다. 선박 시동용 화약을 밀조하던 무허가공장 우성화 학공업사가 화염에 휩싸였다. 인천소방대는 물론 인천에 주둔한 미 군 소방대까지 총출동해 불길을 잡기 위해 사투를 벌였지만 끝내 16 명이 사망했고 10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 가운데는 불구경을 하다가 연쇄폭발에 의해 희생된 어린이들이 많았다. 농약을 생산한다며 속이고 공장을 가동해 왔기 때문에 동네 아이들은 단순한 화재인줄 알고 현장에 가깝게 접근해 있다가 변을 당했다. 1968년 인천소방서는 유류 등 화학성 물질로 발생한 불을 끌 수 있 89

94 화재취약지구로 지정된 중앙시장, 매년 11월 초부터 아예 소방차 한 대를 입구에 배치 는 화학소방차를 도입했고 5층까지 도달할 수 있는 사다리차 1대를 배치했다. 당시 인천에는 5층 이상 건물이 거의 없었다. 1976년 내무부는 기다리는 소방에서 움직이는 소방 이라는 모토로 인천을 비롯해 6대 도시에 고층건물이나 산꼭대기에 망루를 설치했 다. 아직 전화기가 대중화되기 전 시절이라 화재 신고에 앞서 먼저 육안으로 발견해서 서둘러 출동해보겠다는 취지였다. 인천은 수봉 산 정상에 화재감시용 망루를 설치했다. 1970년대 화재 발생의 단골 장소는 시장이었다. 1970년 12월 12일 새벽에 동구 중앙시장에서 불이나 6명이 사망했고 20개의 점포를 불태웠다. 중앙시장은 화재취약 지구로 지정돼 있어 매년 11월 초부 터 아예 소방차 한 대를 입구에 배치해 놓았지만 이불가게, 포목점 등이 밀집돼 있어 불을 초기에 진압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77년 2월 27일 밤에도 시장 한복판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인천소 방차 33대를 비롯해 서울소방차와 미8군 소방차 등 44대 소방차가 출동했지만 2명이 숨지고 34개 점포를 태웠다. 중앙시장은 1960년 11월 28일에도 불이 난 적이 있었다. 90

95 인천화재 중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1999년 10월 30일 밤에 일어난 인현동 화재 였다. 이 불로 57명의 어린 영혼이 화마에 희생됐다. 인천 시내 거의 모든 고등학교 소속 학생이 한두 명씩 포함될 정도였 다. 1971년 서울 대연각호텔 165명, 74년 청량리 대왕센터 88명 이 후 건국 이래 3번째로 많은 희생자를 낸 대형 화재였다. 이 화재 사 건은 미국의 CNN 등 주요 언론에서 크게 다루며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은 내각 총사퇴를 강력하게 주장 할 정도로 이 사건은 육지의 세월호 라고 할 만큼 한동안 온 나라를 뒤흔들었다. 1963년 3월 초 남구 관교동 화재 현장. 당시에는 보기 드문 사다리 소방차가 출동해 불길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 소방차 벽면에 원조 마크 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미국에서 기증한 것으로 추측된다. 91

96 스물두 번째 이야기(2015년 1월 26일) 송림리 얼음판에서 선학국제빙상경기장까지 최근 연세대와 상무(국군체육부대) 아이스하키부가 연고지를 인천으로 옮긴다는 소식이 들리고 있다. 지난해 인천아시아경기대 회 때 사용되었던 선학핸드볼경기장이 선학국제빙상경기장으로 새 롭게 변신하면서 두 팀이 인천에 둥지를 틀게 된 것이다. 축구, 야구 등 서양 스포츠를 처음 받아들인 개항장답게 인천은 대표적 동계스 포츠인 스케이트도 다른 지역에 비해 일찍 보급되었다. 1924년 2월 10일 제물포청년회 주최로 제 1회 전( 全 )인천빙상경기 대회가 송림리(현 동구 송림동)에서 열렸다. 정식 빙상장이라기보다 공터에 물을 채워 얼린 넓은 얼음판이었다. 이것이 인천에서 처음으 로 열린 공식 스케이팅대회로 기록된다. 그런데 시합 당일의 날씨가 너무 따듯해 경기를 치르지 못하고 몇 차 례 연기를 하게 된다. 경기를 보러 갔다가 허탕 친 사람들을 위해 주 최 측에서는 시합이 열릴 경우 도심지에서도 볼 수 있는 연화( 煙 火 ) 를 피워 알리겠다고 공지한다. 이 대회가 정상적으로 치러졌는지는 92

97 빙상 경기가 정상적으로 열릴 경우 도심지에서도 볼 수 있는 연기 피워 시민들 발걸음 모아 1960년대 인천공설운동장(현 숭의축구전용경기장)에서 열린 빙상대회 모습. 오후가 되면 경기가 끝나길 애타게 기다리던 일반인들이 입장해 빙판이 물반 얼음반이 될 때까지 스케이팅을 즐겼다. 93

98 인천남중학교 정문 건너편 와룡양조장 폐수 웅덩이는 겨울철 훌륭한 동네 빙상장 아쉽게도 이후의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다. 눈에 띄는 것은 이 대회의 위원장 이길용이었다. 그는 후에 베를린올 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의 모습을 일장기를 지우 고 동아일보에 보도한 기자이다. 각종 빙상경기는 교외 지역이었던 송림리에서 주로 열렸지만 일반 인들은 주로 웃터골공설운동장(현 제물포고)과 축현역(옛 동인천청 과물시장) 앞 연못에서 스케이트를 즐겼다. 인천부에서는 부민에게 겨울철 운동을 장려하기 위해 웃터골운동장 정구 코트 부근에 물을 뿌려 폭 15간, 길이 33간 (약 1천800m2) 규모의 스케이트장을 만들 었다. 1933년 도원동으로 공설운동장이 이전되면서 부터는 이곳이 인천 빙상의 중심이 된다. 매년 겨울철이 되면 물을 채워 얼음판을 만들었 는데 야간에도 개장한 것으로 보인다. 요즘 같은 라이트 시설이라기 보다 간이 조명을 설치해 밤에도 스케이트를 즐긴 것으로 추측된다 전쟁 후 인천공설운동장이 폐허가 되면서 인천의 동계스포츠 는 한동안 그야말로 빙하기를 맞는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야 인천 공설운동장은 다시 겨울철에 스케이트장을 만들었다. 1966년 1월 8 일, 9일 이틀에 걸쳐 인천공설운동장에서 제 47회 전국체전 동계빙 94

99 상대회가 열렸다. 총 144명의 선수가 참가해 20개의 대회신기록을 수립했다. 동계체전 개최를 계기로 인천에서는 매년 빙상인 추모 전국남녀스 피드스케이팅대회 등 각종 대회가 열렸다. 심지어 1968년에는 인천 시가 처음으로 중구, 동구, 남구, 북구의 구제( 區 制 ) 실시를 기념하기 위해 시민위안회와 더불어 전국고교생빙상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인천공설운동장은 일반인들에게도 개방되었는데 종종 선수들의 연 습이나 경기 이후인 오후 시간에야 문이 열렸다. 조금 타다보면 기온 이 올라가 물 반 얼음 반으로 변해 진창 얼음판에서 달릴 수밖에 없 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운동장 보다는 아예 주안, 부평 등 교외에 있는 논이나 공터의 사설 스케이트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당시 가장 인기 있었던 동네 스케이트장은 지금의 인천남중학교 정 문 건너편에 있던 와룡양조장 저수지였다. 고구마에서 주정을 뽑은 검은 색 폐수가 공장 앞 큰 웅덩이로 흘러 나왔는데 겨울이 되면 이 곳은 훌륭한 빙상장이 되었다. 문제는 몇 번 넘어지면 옷에 보랏빛 물이 들었고 고약한 냄새가 났다는 점이다. 1990년대 중반 연수택지가 개발되면서 이곳에 국제 규격의 실내아 이스링크가 설립되었다. 1994년 3월 24일 인천 최초의 실내아이스 링크 대동월드가 개관했고 비슷한 시기 근처에 동남스포피아가 문 을 열었다. 이 링크에서 밴쿠버동계올림픽 여자쇼트트랙 은메달리스트 이은별 과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김나영 등이 배출되었다. 아쉽게도 이 두 링크는 운영난 등으로 얼마 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95

100 스물세 번째 이야기(2015년 2월 2일) 동인천 남북을 최초로 연결한 굴다리 지하도 얼마 전 부평지하상가는 미국의 세계기록인증업체로부터 단 일면적 세계최다 지하상가 점포 로 인증을 받았다. 기네스북 감이 된 부평지하상가는 1978년 준공됐으며 3만1천692m2 규모에 1천408 개의 점포가 입주해 있다. 현재 인천지역 내에는 총 15개의 지하도상가가 조성돼 있다. 그 원 조는 동인천역(인현동)에서 중앙시장(송현동) 쪽으로 뚫린 지하도이 다. 시공된 지 50년이 넘은 이 지하도는 경인선 철길 밑을 뚫어 만든 일종의 반( 半 )지하도로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 지하도 건설은 그야말로 당시 40만 인천시민의 숙망( 宿 望 ) 이었 다. 1899년 경인선 철도가 놓인 이후 인천 곳곳은 철길로 남북이 갈 라졌다. 최고의 번화가였던 동인천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이 지하도가 생기기 전에는 동인천역 광장에서 지척에 있는 중앙시 장을 가려면 배다리철교나 화평철교 밑을 통과해 약 1km 가까이 돌 96

101 피난민들이 살고 있는 빈궁한 북쪽 동네와 통하는 것이 못마땅한 역 남쪽 주민들 지하도 설치 반대 아가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1963년 2월 15일 첫 삽을 떠서 1963년 11월 20일 인 천에서 최초로 폭 8m, 길이 70m의 지하도가 개통되었다. 건설비 1 천만원은 중앙시장 송구지역 1천500평을 연고가 있는 상인 400명 에게 매각해 재원을 확보했다. 개통 초기에는 골조 천장에 백열등이 달렸고 바닥은 거친 시멘트 길 이었다. 처음엔 상가도 들어서지 않아 말 그대로 지하도로였다. 지금 은 동인천 구( 舊 ) 지하상가 로 명명되고 있지만 예전에는 흔히 굴다 리 라고 불렸다. 지하도 필요성에 대한 제기는 그 이전부터 있었다. 인천시에서 발행 한 인천공보 1955년 8월 29일 자를 보면 인천시의회 내무위원회 는 중앙시장에서 동인천역(축현역)을 직접 통할 수 있는 지하도 설치 는 대인천시 발전을 위해서 타당한 계획으로서 조속한 시일 내에 지 하도를 관통할 수 있게 촉진한다. 라고 결의한다. 그런데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이 결의가 인현동에 거주하는 주민 장인식 씨 외 99명은 동 지하도 설치를 적극 반대하니 선처해 달라 는 청원서를 인천시의장에 제출한 것에 대한 의결이라는 점이다. 동인천역 남쪽 인현동에 사는 주민들은 왜 이 지하도 설치를 반대했 97

102 1970년 중앙시장 쪽 출입구 3층 건물 무너져 행인 등 7명이 압사하는 등 대형 사고 발생 을까 하는 의문이 강하게 든다. 그 때 제출한 청원서가 전해오지 않 기 때문에 반대하는 내용을 알 수 없지만 당시 시대 상황을 비추어 그 이유를 추론해 본다. 먼저 지하도가 개통되면 중앙시장이 한결 가까워짐으로써 인현동 청과물시장이나 주변 상가가 타격을 받을지 모른다는 우려감. 다른 하나는 비교적 번화하고 정비가 잘된 남쪽 지역과 주로 피난민들이 살고 있는 빈궁한 북쪽 동네가 통하는 것이 못마땅한 잘못된 우월감 의 표시였다. 관통하기로 결정했지만 난관은 계속되었다. 이 공사를 하려면 중앙 시장 갑구 151호, 152호, 153호 점포를 철거해야만 했는데 이 세 점 포주는 부당성을 담은 진정서를 인천시에 제출했다. 인천시는 일부 가게만 희생시키는 것은 가혹하고 부당함으로 십시일반 격으로 시 장 200여 점포가 조금씩 양보하여 같이 장사하도록 중앙시장번영회 에 지시했다고 인천공보 는 전한다. 아무튼 이런 어려움들을 극복하 고 이 지하도는 공사 결정이 난 지 8년 후에나 개통된다. 사진은 개통 초기의 모습이다. 양편으로 의류점, 양품점, 제화점 등 이 들어선 이 지하도는 당시 인천에서 가장 화려했던 상가였다. 98

103 동인천역 개찰구가 남쪽으로만 나 있어 북쪽에 사는 승객들은 무조 건 이곳을 통과해야하기 때문에 항상 붐볐다. 이동을 편리하게 해주 고 장사도 그런대로 잘돼 인천 시민의 사랑을 받던 이 지하도는 붕괴 사고로 큰 위기를 맞는다. 1970년 8월 8일 오후 2시 50분 경 중앙시장 쪽 출입구 위에 있던 3 층 건물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다. 1층의 꽃장수를 비롯한 행인 등 7명이 압사하고 24명이 중경상을 입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지하 도 바로 앞 중앙시장 신축건물 파일 공사 여파로 일어난 사고로 밝혀 졌다. 큰 사고를 겪었지만 이 지하도는 오늘도 철길 밑에서 동인천의 남과 북을 여전히 이어주고 있다. 무너진 출입구 위는 다시 건물을 올리지 않고 비워둔 채 남겨 두었다. 1963년 동인천 구( 舊 )지하도를 지나는 많은 행인들. 볼거리도 많고 비가와도 비 한방울 맞지 않을 수 있어 일부러 이 길을 택해 걷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만 다닐 수 있고 자전거의 통행은 금지한다는 표지판이 걸려 있다. 99

104 스물네 번째 이야기(2015년 2월 9일) 사라진 아이들의 골목 놀이 요즘은 학원과 게임 등으로 골목에서 노는 아이들을 통 볼 수가 없다. 나이키의 경쟁 상대는 닌텐도라는 말이 있다. 게임에 빠지면 운동화를 신지 않기 때문이다. 자치기, 팽이치기, 제기차기, 줄넘기, 말놀이, 공기놀이, 실뜨기, 소 꿉놀이, 숨바꼭질, 땅빼앗기 등 예전의 놀이는 질서와 룰을 배우고 협동심과 운동력을 키워주었다. 이런 놀이가 모두 사라졌다. 사진은 1958년 중구 인현동 어느 골목에서 말뚝박기 놀이를 하는 아 이들의 모습이다. 요즘 시선으로 보면 굉장히 위험하게 보이는 이 말 뚝박기는 사내아이들에게 꽤 인기 있었던 놀이였다. 놀고 즐길 장소가 변변하게 없던 당시에는 골목이 놀이터였다 전쟁은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학교 시설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이들은 놀이 시설이 없는 학교 운동장에서 놀기보다는 당시 신작 로라고 불리는 집 앞 길거리에서 뛰어 놀았다. 그러다보니 자동차 사 고가 빈번했다. 특히 질주하는 미군 차량에 의한 윤화( 輪 禍 )가 적지 100

105 신작로에서 뛰어 놀다 질주하는 미군 차량에 의한 자동차 사고 빈번 지금은 보기 힘든 사내아이들의 놀이 말뚝박기. 1958년 겨울, 빡빡 머리에 얇은 옷을 입은 초등학교 아이들이 인현동 골목에서 추위에 아랑곳 않고 즐겁게 놀고 있다.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인천시에서 발행한 인천공보 1953년 8월 5일자는 도로 주변에서 노는 어린이로 인하여 빈발하는 교통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여러 가 지로 부심하여 오던 인천 주둔 미 제 21항만사령부 보안과에서는 어 린이들에게 노름터(놀이터)를 제공하고자 시내 5개소에 유희장을 만 들 계획을 세웠는데 시 당국과 완전한 합의를 보아 우선 신포동 동방 101

106 극장 앞 공터를 유희장으로 지정하고 지난 2월부터 공사를 착수하였 다 라고 보도한다. 당시에는 놀이터 대신에 유희장( 遊 戱 場 ) 이란 말을 사용했다. 이 신문은 이어 1953년 12월 29일 상오 9시부터 시의회실에서 제 4차 한미친선위원회가 열렸는데 미군 측에서 아동들을 윤화로부터 보호 하기 위해 아동유희장 5개소에 각각 3종류의 유희 도구를 기증할 것 을 제안하여 박수갈채를 받았다 고 전한다. 인천시에서는 5개의 유희장을 설치하기 위해 적당한 부지를 물색했 다. 대상지는 공휴지와 귀속 대지 등에 한했다. 시민 중에 이런 땅을 소유하고 있는 인사는 어린이 유희장 설치의 취지를 납득하고 자진 해서 대지를 제공해 줄 것을 요망했다. 자진했는지 강제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인천시는 인천경찰서 관내 3개소, 동인천경찰서 관내 2개소 의 부지를 확정했다. 당시 인천시장이었던 표양문 씨 집 근처 관동 100평, 인성초등학교 의 전신인 송학동 무궁화공민학교운동장 250평, 사동 33번지 200 평, 송현동사무소 근처 60평, 그리고 화수동 정미소 건너편 채소밭 200평 등이었다. 이 유희장에는 미군의 원조로 그네, 철봉, 미끄럼 대, 평행봉 등을 설치했으며 눈에 띄는 것은 씨름터까지 마련했다는 점이다. 이 5개의 유희장은 인천시가 만든 최초의 공립어린이놀이터 가 아닐까 생각된다. 인천시는 내친김에 1955년 7월 20일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 역시 미군의 도움을 받아 그네, 미끄럼대 등 놀이기구와 각종 운동대를 갖 춘 놀이터를 마련한다. 102

107 1955년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 미군의 도움을 받아 그네, 미끄럼대 등 갖춘 놀이터 마련 이즈음 정부에서는 어린이헌장을 선포한다. 1957년 5월 5일 한국동 화작가협의회에 의해 어린이헌장 9개항이 제정되었는데 그 중에 어 린이에게는 마음껏 놀고 공부할 수 있는 시설과 환경을 마련해주어 야 한다. 라는 조항이 있다. 이후 각 시 도에서는 어린이놀이터 마련 에 박차를 가한다. 놀이터가 속속 마련되었지만 그곳에서 노는 아이들은 소수였고 많 은 아이들은 여전히 동네 공터와 골목에서 놀았다. 특히 여름이 되면 인천 아이들은 염전이나 갯벌 등 자연 놀이터에서 놀았다. 대표적인 곳이 용현동 낙섬, 주안 염전, 만석동 바닷가 등이었다. 이 때문에 물 놀이를 하다가 많은 아이들이 익사 사고를 당했다. 특히 만석동 대성목재의 저목장( 貯 木 場 )은 목숨을 앗아가는 무서운 공간이었다. 여름철 아이들은 저목장에서 수영을 하거나 띄워 놓은 통나무 위에서 묘기를 부리며 뛰어 놀았다. 순간, 미끄러져 통나무 사이로 빠지면 굉장히 위험한 상황에 빠졌다. 원목 아래로 떨어지면 수압 때문에 물속으로 깊게 빨려 들어가고 빠져나오려 발버둥 쳐도 통나무에 막혀 쉽게 나오질 못해 목숨을 잃었다. 해마다 한 동네에서 한 두 명의 아이들이 이런 사고를 당해 생명을 잃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날 담임선생님들은 반 학생들에게 저 목장에서 놀지 말 것을 신신당부하곤 했다. 103

108 스물다섯 번째 이야기(2015년 2월 16일) 낡은 졸업 앨범 속의 친구들 졸업시즌이다. 정든 교실, 교정 그리고 친구들과 이별할 시간이 다. 시간이 흐르면 학창시절의 추억은 낡은 앨범에 흐릿하게 남아 있 을 뿐이다. 사진은 1966년도 축현국민학교 졸업(제 19회) 앨범에 담긴 6학년 6 반 학생들의 모습이다. 담임은 송재정 선생님이다. 운동장 한 구석에 마련한 나무로 만든 이동식 계단에 반 학생 전체가 올라가 졸업기념 사진을 찍었다. 86명 중 그날따라 한명이 결석했고 그 아이는 나중 에 사진관에 가서 따로 찍어 급우들 사진 옆에 오려 붙였다. 특이한 것은 안경 쓴 아이가 딱 두 명뿐이고 비만아로 보이는 아이는 거의 없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카메라를 보고 있는 아이들의 표정이 다소 경직돼 있다. V자를 그리는 아이는 물론 이를 드러내는 아이도 거의 없다. 절대 움직이지 마라 는 사진사의 주문이 있었겠지만 그 만큼 그들은 힘든 시기를 보낸 의젓한 아이들이었다. 104

109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일류중학교에 가기 위해 재수하는 국민학생 적지 않아 축현국민학교 1966년 제 19회 졸업 앨범 속 6학년 6반 학생 86명의 모습. 당시 통계를 보면 국민학교 여학생 졸업자 중 30% 가량은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했다. 대부분 6 25 전쟁이 끝날 즈음인 1953년도에 태어난 그들의 얼굴에 굴곡진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담겨 있는 것이다. 뒷줄에 선 몇몇 아이 들은 벌써 고등학생 티가 난다. 혼란기에 출생신고가 늦었거나 전쟁 통에 취학통지서를 받고도 한두 해 미뤄 입학했거나 혹은 중간에 공 부를 중단했다가 제 나이보다 저학년으로 편입했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두세 살 어린 친구들과 졸업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105

110 60년대 초등학교 졸업생 중 70%만이 중학생이 되었고 나머지 30%는 중학교 진학의 꿈 접어 반투명 습자지 위에는 아이들의 이름이 사진 위치대로 적혀 있다. 전 세옥, 이선영, 최현숙, 이호영, 김성자, 김영애, 임경실, 최금순, 변연 옥. 별 탈 없이 살아왔다면 그들은 지금 60대 초반의 할머니가 됐 을 것이다. 사진 속 자신들의 모습과 비슷한 손주들이 있을 나이가 된 것이다. 같은 날 졸업을 했지만 모두 상급학교에 진학한 것은 아니다. 그들 중 70%(남자는 85%선)만이 중학생이 되었고 나머지 30%인 25명 가 량은 경제적 어려움, 부모의 교육열, 건강 등으로 인해 중학교 진학 의 꿈을 접어야 했다. 어린 나이에 가사( 家 事 )를 돕거나 가게 점원으로 취직해야만 했다. 간혹 정식 중학교 대신 고등공민학교나 기술학교의 문을 두드리는 학생들도 있었다. 개중에는 중학교 입시 재수 때문에 바로 진학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당시에는 중학교도 시험을 치르고 가야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일류중학교에 가기 위해 재수하는 국민학생이 적지 않았 다. 인천에서 중학교 무시험 진학, 이른바 뺑뺑이 추첨 은 서울보다 한해 늦은 1970년에 시작되었다. 106

111 참고로 1963년도 인천지역의 국민학교 졸업생 수는 29개교에서 남 자 3천198명, 여자 2천576명으로 전체 5천774명이었다. 이 숫자는 무시험이 시행된 첫해인 1970년도에 1만2천809명(200학급)으로 급격히 증가한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인천으로의 유입인구가 하 루가 다르게 늘어났던 시기였다. 축현을 비롯해 창영, 신흥, 송현, 송림, 서림, 만석 등 시내의 웬만한 국민학교는 한 학년에 보통 12반이 넘었으며 한 학급 정원이 90명 가까이 되었다. 콩나물 교실 이란 말이 이때 나온 것이다. 한 학교의 전교 학생 수가 5천~6천 명은 훌쩍 넘었다. 사진 속 아이들이 졸업한 1966년도는 숭덕중학교와 광성중학교가 신설되었고 인화여자종합고의 개교 그리고 영화여자실업학교의 설 립 인가 등 지역 내 학교 설립이 유난히 활발했다. 2015년 2월 16일(월) 오늘은 축현초등학교 졸업식이 있는 날이다. 인천공립심상소학교라는 이름으로 1919년부터 중구 인현동에 문을 연 이 학교는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인 자녀들이 많이 재학했다. 광복 후 축현공립국민학교로 이름을 바꾸었고 1948년 졸업을 제 1회 로 친다. 2001년 연수구 옥련동으로 이전한 축현초는 오늘 68회 졸업식 을 거행한다. 남자 58명, 여자 45명 모두 103명이 학교 문을 나선다. 한 해 졸업생 수가 다해봤자 60년 전 앨범 속 한 학급의 숫자와 엇비슷 하다. 107

112 스물여섯 번째 이야기(2015년 2월 23일) Made in Incheon 통기타, 세계를 노래하다 영화 쎄시봉 은 1960년대, 70년대 한국 가요계를 강타했던 포 크의 열풍을 잘 묘사하고 있다. 포크 음악의 주된 악기는 통기타 이 다. 당시 젊음의 상징이었던 통기타의 대부분을 인천에서 생산했다. 인 천에는 우리나라를 넘어 세계무대를 주름 잡았던 대형 악기제조업 체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대표적인 업체는 삼익악기와 영창악기였 다. 지금은 주로 피아노를 생산하고 있지만 1970년대 말까지 기타가 주요 생산품이었다. 1958년 부평구 청천동에 터를 잡은 삼익악기는 처음엔 외국 악기를 수입해 판매하는 업체로 출발했다. 1960년부터 해외에서 부품을 들 여와 단순 조립해 피아노를 제조했다. 독일에서 들여온 호루겔 이라 는 브랜드가 바로 그것이다. 삼익악기는 1965년 7월부터 기타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때 막 불 기 시작한 포크 열풍에 힘입어 기타는 날개 돋듯 팔렸다. 청바지 입 108

113 영창악기는 제품 홍보 위해 1995년 세계적인 흑인가수 스티비 원더를 인천 피아노공장으로 초청해 현장에서 즉흥 연주를 하게 해 고 어깨에 기타 하나 메고 있는 모습은 당시 대표적인 청춘의 심볼이 었다. 공원, 열차 안, 캠퍼스, 교회 등 어디를 가든 통기타 소리가 들 렸다. 삼익악기는 1973년 한국수출산업단지(부평구 효성동)으로 공 장을 확장해 옮기면서 세계 메이저 악기업체로 도약하는 발판을 만 들었다. 악기산업은 일일이 손으로 만드는 노동집약적 산업으로 지역 고용 에 많은 도움을 줬다. 밀폐된 허름한 공간에서 나무 먼지와 접착제 냄새를 맡으며 일했던 그들이 있었기에 가객( 歌 客 ) 김정호와 김광석 그리고 송창식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서울 영등포에 있던 영창악기는 1979년 인천 가좌동 8만5천m2 대지 위에 악기제조 종합공장을 건립해 이전한다. 대단위 악기공장 을 준공하고 연간 4천800대의 그랜드피아노를 생산함으로써 삼익 악기와 더불어 세계 3위 악기제조업체로 발돋움한다. 쌍벽을 이루던 삼익악기는 창립 20주년을 맞아 미국, 유럽, 동남아 등 전 세계 50개국에 기타 55만대, 피아노 3만대를 수출했다. 비슷 한 시기 가좌동에 자리 잡은 기타 전문업체인 서진악기는 한해 40만 대의 기타를 생산해 전량 미국으로 수출했다. 이 회사는 매년 기타 109

114 인천악기업체들 1987년 수출 1억 달러, 이듬해 바로 다시 2억 달러 돌파하며 외화 획득에 큰 공 1965년부터 기타를 생산하기 시작한 청천동 삼익악기의 초창기 작업장의 모습. 비록 허름한 작업 환경이지만 그들의 손에서 쎄시봉 멤버들의 통기타가 만들어졌다. 하나로 당시 엄청난 액수인 300만 달러를 벌어 들였다. 미국 통기타 의 둘 중 하나는 메이드 인 인천 이었다. 이렇듯 1980년대 인천은 명실공이 세계 악기의 본고장이 되었다. 1982년 미국 최대 악기업체 볼드윈사와 삼익악기사가 합작해 효성 110

115 동에 한미악기를 설립한 것을 비롯해 가좌동 월드악기, 청천동 뮐러 악기, 오류동(인천 서구) 성우악기, 갈산동 콜트악기, 고잔동 한독피 아노 등 크고 작은 악기 제조업체들이 인천에 자리 잡았다. 이 업체들은 1987년도에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한데 이어 이듬해 바 로 다시 2억 달러를 돌파하는 등 우리나라 외화 획득에 큰 공을 세운 다. 사업이 잘되자 삼익악기는 실업축구팀까지 창단할 정도였다. 1990년대 접어들자 노사분규가 잦았고 세계 경기 침체로 수출이 주 춤하면서 경영이 급속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영 창악기는 1995년 9월 15일 세계적인 흑인가수 스티비 원더를 인천 피아노공장으로 초청해 현장에서 즉흥 연주를 하게 하는 등 제품 홍 보에 나섰지만 지역의 악기업체들은 불황을 피해가지 못한다. 결국 세계 3대 피아노 생산업체인 삼익악기는 1996년 10월 법정관리를 신청한다. 인천시는 지역의 악기산업을 다시 활성화시키기 위해 2003년도부 터 인천악기박람회를 개최했다. 격년제 꼴로 열리던 악기박람회는 현재 인천에서 개최 중단된 상태다. 대표적 향토기업이었던 영창악기는 경영 악화로 현대산업개발로 흡 수된 후 2006년 본사를 성남시로 이전했고 법정관리를 벗어난 삼익 악기도 2011년 충북 음성군으로 옮겼다. 세계 전자기타 시장의 30% 를 차지했던 콜트악기는 2007년부터 극심한 노사분규를 겪으며 예 전만큼 신나는 기타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111

116 스물일곱 번째 이야기(2015년 3월 9일) 부부싸움도 멈추게 한 얼음땡 국기 하강식 사라졌던 국기 게양식과 하강식을 정부가 의무화 한다는 소식 이 전해지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최근 행정자치부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저조한 태극기 게양 비율을 높이고, 국가의식을 고취하는 방안 으로 이미 폐지된 국기 하강식을 다시 시행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이 문제는 영화 국제시장 의 국기 하강식 장면과 맞물려 관심이 더 커지고 있다. 영화에서는 언쟁을 벌이던 부부가 국기 하강식과 함께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싸움을 멈추고 경례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국기 하강식은 1978년 내무부 지침에 의해 의무적으로 시행되었다. 그해 10월 1일부터 관공서와 공공단체, 학교 등에서는 매일 하오 6 시(겨울철은 5시) 정각에 라디오와 TV에서 나오는 애국가 연주 방송 에 맞춰 범국민적으로 실시되었다. 국기 하강식을 볼 수 있거나 애국가 연주를 들을 수 있는 모든 옥외 국민은 그 자리에서 국기를 향해 차렷 자세로 경례를 하고 그것을 볼 수 없는 옥내에서는 차렷 자세만 취하되 옥내에 태극기가 걸려 있을 112

117 자칫 국기 하강식에 걸려 기차를 놓칠까봐 시간 임박하면 급하게 동인천 광장을 가로 질러가곤 해 남녀노소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가 얼음땡 이 된다. 1989년 까지 매일 해가 질 무렵 동인천역 광장에 애국가가 흘러나오면 영화 국제시장 의 한 장면처럼 모든 사람은 경건하게 태극기를 향했다. (사진 김보섭) 113

118 국기 하강식으로 총선 입후보 등록마감 1분 늦어 접수 거부 당해 출마 못하기도 때는 국기를 향하고, 없는 경우에는 애국가가 연주되는 방향을 향하 도록 했다. 운행 중인 차량이나 공연 중인 극장 그리고 경기가 진행 중인 운동장 등에서는 제외됐다. 민간단체나 직장에서는 우선 주 1회 (매주 월) 자율적으로 실시하되 점차 확대해 나가야 했다. 이를 위해 상가와 사무실 등 민간 건물에서는 국기 게양대를 의무적 으로 설치해야 했다. 크든 작든 모든 건축물의 설계도에는 우선 국기 게양대를 그려 넣어야했다. 민간건물 국기 게양대 설치 의무 조항 은 1999년 5월 삭제되었다. 이에 앞서 국기 하강식은 지나친 국가주의의 과잉이라는 비판 속에 1989년 1월 이후 사실상 폐지되었다. 당시 종교계의 요구가 결정적 이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사진은 1980년대 초 동인천역 광장에서 진행된 국기 하강식 장면이 다. 기차를 이용하기 위해 역 대합실로 급하게 향하던 사람들이 그 자리에 서서 부동자세로 경건하게 역사 위 게양대에 걸린 국기를 바 라보고 있다. 넓은 광장이 없던 인천에서는 동인천 역전에서 진행된 이 국기 하강 식이 대표적이었다. 사람들은 자칫 국기 하강식에 걸려 기차를 놓칠 까봐 시간이 임박하면 급하게 광장을 가로 질러가곤 했다. 114

119 애국가가 나올 때 심하게 불량한 태도를 보인 사람은 즉심에 회부되 기도 했고 어떤 이는 아이들로부터 공산당인가 봐 라는 수군거림과 손가락질을 당하기도 했다. 국기 하강식 시행에 앞서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두 달 앞두 고 3월 1일부터 극장에서는 의무적으로 애국가를 틀어야만 했다. 영 화 관람 전 애국가와 태극기 화면이 나오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누군가 미 8군 영내 극장에서 미국 국가가 연주되는 것을 보 고 감동받아 문화공보부 장관에게 이를 건의했다는 설이 있다. 문화 공보부에서는 전국 381개 극장에 애국가 상영을 지시했고 나중에는 읍면동 포함해서 전국 782개 모든 공연장으로 확대했다. 국기 하강식은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만들었다. 1987년 2월 탈북의 물꼬를 튼 김만철 씨 일가족이 서울 시내 나들이하던 중 오후 5시 국 기 하강식이 진행되었다. 갑자기 주위에 있던 시민들이 차렷 자세로 한동안 서있자 김 씨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안내원에게 무슨 일 이냐 라고 물었다는 일화가 있다. 1981년 3월 25일에 실시되는 제 11대 총선에 출마하기 위해 준비 중이던 울산의 한 사람은 입후보 등록마감일에 등록 서류를 갖고 선 관위로 급하게 향했다. 오후 4시 59분에 도착했으나 그곳에서 마침 국기 하강식이 진행되었다. 서류를 제출할 때는 이미 1분여가 지체 돼 마감 시간이 지났다. 선관위 측은 회의를 열어 마감을 넘겼다는 이유로 접수를 거부했고 결국 그 사람은 그 해 총선에 출마하지 못했 다. 당시 국기 하강식은 신성불가침의 의식이었다. 115

120 스물여덟 번째 이야기(2015년 3월 16일) 빛바랜 사진첩 속 공민학교 새 학기가 시작됐다. 의무교육이 되면서 초등학교는 누구나 당 연히 가는 곳 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해도 초등학 교(당시 국민학교)는 나이가 차면 그렇게 당연히 입학하는 데가 아니 었다 전쟁 후 삼시세끼 라는 말이 일부 계층에서나 쓰던 시절, 학교 다닌다는 것은 먹고 사는 것 다음 순위이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가족 생계의 일원이 돼 제 끼니는 제가 해결해야 했던 이들에게 학교는 언 감생심이었다. 어느 정도 살만해지고 여유가 생겨서 제때 하지 못한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학교 다니기에는 이미 나이가 너무 많았다. 공민학교( 公 民 學 校 )는 초등교육을 받지 못하고 학령을 초과한 사람 에게 국민생활에 필요한 기초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1946년 설립한 교육기관이다. 수업 연한은 보통 3년이었다. 이와 함께 국민학교 또 는 공민학교를 졸업한 자를 입학 대상으로 하는 고등공민학교도 설 립됐다. 수업연한은 1년에서 3년이었다. 1970년 동대문 평화시장에 116

121 1946년 인천 관내 7만6천여 명의 문맹자, 공민학교 등을 통해 2년 만에 90% 가량이 한글을 깨쳤다고 인천시 발표 서 근로기준법을 규탄하며 분신했던 전태일 열사도 국민학교를 중 퇴하고 고등공민학교를 다녔던 적이 있다. 공민학교는 국어, 사회, 산수, 자연, 체육, 음악, 미술, 실과, 반공, 도 덕 수업을 받았으며 고등공민학교는 여기에 가정, 외국어 등이 추가 됐다. 특이한 것은 두 과정 모두 반공교육이 있었다는 점이다. 졸업을 하더라도 학력이 인정되지 않았다. 때문에 공민학교를 졸업 하면 중입검정고시를, 고등공민학교를 졸업하면 고입검정고시를 통 과해야만 중학교와 고등학교 진학이 가능했다. 정부에서는 공민교육을 민도( 民 度 ) 향상과 국민 계몽을 통해 신흥국 가의 국민으로 양성하는데 활용했다. 설립 목적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문맹퇴치였다. 1948년 인천부(현 인천시)는 공민학교 증설을 강화했다. 1946년 인천 관내에 7만6천여 명의 문맹자가 있었는데 공민학교 등 을 통해 2년 만에 90% 가량이 한글을 깨쳤다고 발표한다. 더불어 그 해 5월 10일 치러지는 정부 수립 총선거에서는 누구나 글씨를 읽고 투표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피력한다. 사진은 1950년대 중반 동구 송현동에 있던 공민학교 학생들의 모습 117

122 공민학교로 시작한 중앙여상, 광성중고, 숭덕여중고 등은 많은 학생들에게 소중한 배움터 돼 1950년대 중반 송현동에 있던 판자로 지은 공민학교의 학생들. 비록 모습은 남루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눈에서 불타는 향학열을 엿볼 수 있다. 118

123 이다. 판자 교실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은 그들의 눈에서 공부를 하 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이곳 외에 답동에 시은공민학교, 주안에 성 인고등공민학교, 논현동에 성명고등공민학교 등이 있었다. 현재 인천의 사학 중에는 공민학교로 출발했거나 그것을 근간으로 하는 학교가 적지 않다. 동구에 있는 동명초교는 당시 식모를 비롯한 불우한 환경에 처한 8세에서 18세까지의 소녀 120명을 따로 학교 내 공민학교에서 교육을 시켰다. 이곳을 졸업하면 동명초교로 나이 에 맞는 학년으로 편입시켰다. 인천경찰서장으로 부임한 류충렬 씨는 1955년 도원동 산꼭대기에 부랑아들을 선도하기 위해 직업소년학교(인천소년수양원)를 건립했 다. 약 500명의 거리의 소년들을 교육하기 시작했는데 집 없는 아이 들에게는 합숙소까지 제공했다. 이 수양원은 1965년 광성고등공민 학교를 거쳐 오늘의 인천광성중고로 성장한다. 동구 수도국산 기슭에서 출발한 숭덕여중고는 1960년대 초 교회가 공민학교를 운영하면서 학교 기틀을 닦았다. 피난민들이 모여 살던 대표적인 빈민촌이었던 그곳의 많은 학생들에게 소중한 배움터가 됐다. 경제가 발전하고 수입이 향상되면서 공민학교는 급속히 문을 닫는 다. 1950년 인천시가 속한 경기도에 공민학교 2천646개 고등공민 학교 40개가 설립된 것을 비롯해 전국에 1만8천500개의 공민학교 와 340개의 고등공민학교가 있었다. 1970년대 말부터 급격히 줄어 들어 현재 전국에는 공민학교 1개교, 고등공민학교 4개교만 남았다. 119

124 스물아홉 번째 이야기(2015년 3월 23일) 한국 마라톤의 영원한 출발지 해안동로터리 인천은 우리나라 마라톤 경주의 페이스메이커(pacemaker) 역할을 해왔다. 일제강점기 때 육상 경기를 즐기던 일본인들이 인천 에 많이 거주한 탓에 인천인들은 마라손(현재의 마라톤) 을 자주 접 했다. 각종 체육행사에 으레 마라톤 종목이 끼어 있었다. 그런데 실력은 조 선인이 한수 위였다. 주로 결승점 테이프를 끊은 것은 체계적으로 훈 련을 받은 일본선수들이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 매일 길바닥을 달리 던 조선인 인력거꾼이나 신문배달원 등이었다. 이에 주최 측은 대회 공고문에 각력( 脚 力 )을 사용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자는 참가를 부 득함 이라고 명시하기도 했다. 광복 후, 1946년 7월 28일 인천에서 회사방문 계주대회 라는 독특 한 마라톤 계주대회가 열렸다. 아침 9시 인천우체국(현 중동우체국) 앞에서 스타트하여 시내의 주요 회사, 공장, 상점 등을 발로 찍고 시 청 앞에 골인하는 이색 경주였다. 아마도 인천경제의 부흥을 염원하 120

125 훈련 받은 일본선수 보다 먹고 살기 위해 매일 길바닥 달리던 조선인 인력거꾼이나 신문배달원이 한 수 위 실력 흔히 해안동로터리 라고 부르던 현재 중부경찰서 앞 삼거리는 경인역전마라톤의 단골 출발지였다. 1960년대 중반 해안동로터리에서 서울을 향해 출발하는 건각들. 121

126 1966년 9 28 수복기념 국제마라톤대회 때 맨발의 마라토너로 알려진 6 25전쟁 참전용사인 이디오피아 아베베 참가 는 레이스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 계주대회는 이후 몇 년 동안 계속 될 만큼 인기가 있었다. 1947년 6월 22일 한국 마라톤의 경사스런 잔치가 인천에서 벌어졌 다. 보스톤마라톤대회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운 서윤복 선수가 인천 항을 통해 금의환향한 것이다. 이른 아침부터 부두에는 태극기를 든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들어 민족의 기개를 떨친 영웅을 열렬히 맞이 했다. 서 선수 일행은 자동차에 올라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인천중학교에서 열린 개선 행사에 참석했다. 보스톤마라톤 제패를 기념하기 위해 바로 경인양시교환역전경주대 회 가 계획되었다. 인천부청~주안~부평~소사~오류동~영등포~서 울시청 구간을 인천과 서울에서 각각 동시에 출발해 마라톤으로 두 도시의 우의를 다지자는 대회였다. 인천의 6개 팀은 준비가 되었으 나 서울은 팀을 구성하지 못해 아쉽게도 이 레이스는 불발되고 말았 다. 대회는 성사되지 못했지만 경인간왕복역전경주대회는 광복 후 우리 나라 마라톤의 대명사로 떠오르며 매년 계속되었다. 당시 어느 도시 도 km 풀코스를 낼만한 번듯한 도로가 없었다. 열차가 달리던 122

127 철로변의 경인국도만이 그 길이를 감당할 수 있었다 전쟁을 겪은 후 마라톤 대회는 한동안 뜸하다가 1959년 한국 일보 주최로 제1회 9.28 수복기념 국제마라톤대회 가 열렸다. 참전 16개국 마라톤 선수들을 초청해 인천 해안동로터리를 출발하여 서 울 중앙청 앞까지 달리는 경기였다. 1966년 제3회 대회에는 올림픽 2연패의 영웅이자 맨발의 마라토너, 6 25전쟁 참전용사로 널리 알려진 이디오피아의 아베베가 참가해 대회 진가를 높였다. 그는 2시간 17분 4초로 대회 신기록을 수립하 며 우승했다. 이 대회는 1969년 제4회 대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인천 중구 해안동로터리는 우리나라 마라톤의 성지( 聖 地 )와도 같은 곳이다. 경인간을 달리는 마라톤의 결승점은 시대에 따라 서울의 광 화문, 시청, 삼각지, 용산, 서울운동장 등으로 바뀌었지만 출발지는 언제나 해안동로터리로 고정돼 있었다. 현재 파라다이스호텔 아래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 공원에는 국제마라톤대회 출발지를 알리 는 작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현재 인천에서는 2001년 인천육상경기연맹과 인천일보사가 공동 으로 시작한 인천국제마라톤대회를 비롯해 100km나 되는 구간을 약 15시간 안에 완주해야 하는 강화갑비고차울트라마라톤대회, 인천에 서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하는 월미건강마라톤대회 그리고 강화해변 마라톤대회, 정서진아라뱃길전국마라톤대회, 송도국제마라톤대회 등이 열린다. 3월 29일 오전 9시 제15회 인천국제하프마라톤대회 의 출발 총성 이 울리면 올해 인천에서 열리는 각종 마라톤대회가 본격적으로 시 작된다. 123

128 서른 번째 이야기(2015년 4월 6일) 내 고장은 내가 지킨다 향토예비군 창설 지난 4월 3일은 향토예비군의 날 이었다. 내 고장은 내가 지킨 다, 일하면서 싸운다 등의 모토로 1968년 4월 1일 예비군이 전국 적으로 창설돼 올해로 47년이 되었다. 요즘은 무장한 공산 게릴라들을 뜻하는 공비( 共 匪 ) 라는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무장공비가 자주 출현했던 1980년대 까지는 매우 익숙한 단어였다. 1968년 1월 21일 북한무장공비가 서울까지 침투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른바 1.21 사태 가 발생한 것이다. 향토예비군은 1961년 설치법령이 제정됐지만, 예산 부족 등으로 창 설이 미뤄져오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서둘러 예비군을 창설했 다. 창설되자마자 예비군은 울진과 삼척에 침투한 공비 소탕전에 참 가하는 등 실전에 배치되었다. 무장공비 출현은 인천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고 그때마다 예비군이 동원되었다. 1970년 6월 22일 6명의 무장공비가 공작선을 타고 인 124

129 1970년 인천 앞바다에 침투한 무장공비, 교전 끝에 전원 사살되었으나 인천 지역 예비군 중 첫 희생자 나와 천 앞바다에 침투했다. 육해공 병력과 경찰이 즉시 소탕 작전을 폈 다. 이 합동작전에는 수백명의 예비군도 동원되었다. 교전 끝에 무장 공비는 전원 사살되었다. 이때 예비군 고( 故 ) 권태화 씨가 전사했다. 인천 지역 예비군 중 첫 희 생자였다. 합동장례식이 7월 3일 오전 10시 경기도경찰국 뒷마당(현 중구 하버파크호텔 자리)에서 정일권 국무총리를 비롯해 내무부장관 그리고 시민 등 2천여 명의 조문객이 참석한 가운데 엄수되었다. 그해 11월 9일 일요일 새벽을 틈타 무장공비가 다시 율도 부근에 출 현했다. 율도는 청라도, 장도 등의 섬과 함께 매립돼 현재의 서구 청라 지역이 된 섬으로 부근에는 발전소와 정유사 등 주요시설이 있었다. 공비들은 향토예비군 무기고를 기습 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해안 지역의 유류저장탱크 등을 폭파하는 임무를 띠고 남파됐다. 소탕 작 전에는 서곶중대 소속 향토예비군과 인천화력발전소 소속 예비군 들이 동원되었다. 공비들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다 발전소 경비원 고 ( 故 ) 김성운 씨가 전사했다. 해가 바뀌어도 공비들의 침투는 계속되었다. 1971년 5월 4일 밤 11 시 야음을 틈타 무장간첩선 한 척이 동구 송현동 해안선에 나타났다. 그들은 예비군복으로 위장했다. 곧바로 해안경비정에 발견돼 격전 125

130 공비들이 인천 깊숙이 들어오는 사건이 터지자 송현동 현대제철 공장 안쪽 해안선에 전투경찰대 배치 1974년 6월 13일 인천시청 여직원들로 구성된 예비군 소대 결단식의 모습. 예비군복을 갖춰 입고 군기 바짝 든 분위기 속에서 맨 앞줄에 서있는 한 대원이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다. 126

131 을 벌이다 인천부두 쪽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교전 중 동인천경찰서 소속 고( 故 ) 김석정 순경이 사망했다. 공비들은 부두에 있던 경찰경 비정에 사격을 가하고 북으로 도주했다. 공비들이 인천 깊숙이 들어오는 사건이 터지자 이후 송현동 해안에 전투경찰대를 배치했다. 지금의 현대제철 공장 안쪽 해안선에 중대 단위의 전경대가 자리 잡고 빈틈없는 해안 경계를 펼쳤다. 당시 예비군의 활약상은 정규군 못지않았고 그에 따른 임무도 막중 했다. 1970년대 북한 김일성은 호시탐탐 남침을 노렸지만 섣불리 단 행하지 못했다. 그 이유가 당시 200만 예비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시중에 떠돌았다. 예비군 중 월남에 파병됐던 참전 용사들의 실제 전 투력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모든 지역이 전방이라 할 수 있는 인천의 향토방위에는 여성들도 예 외가 아니었다. 1996년 6월 2일 서해 최북단 백령도에 군인 부인들 로 구성된 여자예비군 부대가 창설되었다. 해병대 장교 부인 29명, 하사관 부인 62명 등 모두 91명이 4개 소대로 편성되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사격, 화생방 훈련을 실시했고 유사시 부상병 응급 처치 와 취사 등 전투 지원 임무를 맡았다. 이에 앞서 백령도에서는 1989년 4월 37명으로 조직된 우리나라 최 초의 여자예비군 부대가 창설된 상황이었다. 최연소 대원이 32세, 최고령 대원이 63세였다. 현재 인천에는 연수구를 비롯해 중구와 남 구에 여성예비군 소대가 창설됐다. 전국에는 6천300여 명의 여성예 비군이 있다. 127

132 서른한 번째 이야기(2015년 4월 13일) 한국 경제의 씨앗이 된 파독 근로자 1963년부터 70년대 후반까지 광부 8천여 명, 간호사 1만1천여 명이 서독(독일)으로 일하러 갔다. 그들이 고국에 송금한 돈은 1억 달러가 넘었고 한국 경제 도약의 훌륭한 씨앗이 됐다. 경제 개발을 위해 단돈 1달러도 아쉬웠던 당시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의 2%에 미 칠 만큼 큰 액수였다. 근로자 파견은 광부와 간호사뿐만 아니라 기능공(기술자)도 포함되 었다. 1971년 2월 7일 하오 2시 엔진조립공 5명, 선반공 5명, 기계 주형공 5명 등 똑같은 작업복을 입은 기능공 30명이 KAL기에 몸을 싣고 김포공항을 떠났다. 그들은 인천 만석동에 있는 한국기계공업(주) 근로자들로 서독 뉘른 베르크에 있는 만(M A N)사로 파견되는 기술훈련생들이었다. 산업 연수생이란 명목으로 파견된 그들은 만(M A N)사에서 먼저 4주간 의 기술 훈련을 받은 후 총 3년 동안 월 950마르크(약 14만원)을 받 고 일했다. 한국기계는 그해 말까지 3차례에 걸쳐 모두 500여명의 128

133 만석동 한국기계공업(주) 근로자들 서독 만(M A N)사에 파견돼 3년 동안 월 950마르크(약 14만원)을 받고 일해 인천 만석동에 있는 한국기계는 기술 제휴를 통해 기능공 30명을 서독(독일) 뉘른베르크에 있는 만(M A N)사로 파견했다. 그들은 대한민국 중공업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1971년 2월 공장 마당에서 열린 파견 환송식 후 기념사진. 기능공들을 서독으로 보냈다. 만(M A N)사는 당시 창업 120년의 역사를 지닌 세계적인 디젤엔진 전문업체로 대형 선박엔진, 디젤기관차, 자동차용 디젤엔진 그리고 산업용 군사용 엔진 등을 생산했다. 129

134 파독 근로자들 재독 대한의 아들 이란 이름으로 1974년 식목일 맞아 묘목 성금을 보내기도 1970년 한국기계와 디젤엔진 공장 설립을 추진하면서 기술 제휴를 맺었다. 이 때 기능공들을 서독에 파견하기로 계약을 체결했다. 그들 은 단순히 외화벌이를 위해 서독으로 건너간 것이 아니었다. 선진 기 술을 배우기 위해서 매일 기름이 뒤범벅이 된 채 고된 훈련을 받았 다. 1975년 5월 한국기계는 서독의 차관 제공과 만(M A N)사의 기술 제휴로 단일공장으로는 동양 최대 규모의 디젤엔진 공장을 준공했 다. 서독에서 훈련을 받은 기술자들이 돌아와 연 6만대의 고출력 디 젤엔진을 생산했다. 그들은 낯선 이국땅에서 고된 훈련과 작업을 하면서도 조국에 대한 사랑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서독 현지 신문에 보도된 고국의 수해 소식을 접하고 수재 의연금 330마르크(4만1100원)을 한국으로 보 냈다. 1974년 4월 식목일을 맞아 묘목 성금을 보내기도 했다. 근로 자 211명이 6개월 간 푼푼히 모은 738마르크(약 11만원)을 재독 대 한의 아들 이란 이름으로 기탁했다. 그들은 처음 서독에 와서 제일 부러웠던 것은 서독의 공업 발전보다 는 울창한 숲이었다고 강조했다. 독일 국민들은 나무 가꾸기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 1페니를 비롯해 모든 동전과 지폐 뒷면에 하나 같 130

135 이 나무와 관련된 그림이 있다 라는 설명도 함께 보냈다. 동구 만석동에 있던 한국기계공업(주)는 일제강점기인 1937년 6월 설립된 조선기계제작소의 후신이다. 군 장비 전초 공장이었던 조선 기계는 일본육군 조병창으로부터 잠수함을 건조하라는 명령 을 받 는다. 잠수함을 진수시키기 위해 도크를 신축하고 1천300여 명의 인력을 확충하고 그들을 위한 숙사( 宿 舍 ) 112동을 새로 건축한다. 이때에 세워진 집들이 현재의 만석동 아카사키촌 의 근간이 된다. 광복과 함께 조선기계는 정부 재산으로 넘어가 1962년까지 상공부 와 국방부 관리를 받으며 광산 자재 및 일반산업 기계를 생산한다. 국영기업체로 개편되었다가 1968년 신진자동차사로 운영권이 넘어 갔고 1976년 대우그룹으로 인수돼 대우중공업으로 간판을 고쳐 달 았다. 회사 이름은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만(M A N)사와 기술 제휴 를 유지하고 기술자들을 계속 파견하면서 중공업 기술요원을 양성 했다. 2005년부터 이 회사는 두산인프라코어 가 되었다. 현재 굴삭기 등 건설기계를 비롯해 공작기계, 디젤엔진 등을 생산하는 세계적인 기 업으로 성장했다. 45년 전 봇짐 하나 달랑 메고 낯선 땅 독일로 건너 갔던 30명 기능공들의 기름땀이 밑바탕이 되었다. 131

136 서른두 번째 이야기(2015년 4월 27일) 동인천 그 이름 60년 동인천역 이란 이름이 붙은 지 올해로 60년이 되었다. 1899년 경인선 개통 당시 이름은 축현역이었다. 축현( 杻 峴 )은 싸리재의 한자 이름이다. 위치는 흔히 채미전 이라고 불렀던 지금의 동인천청과물 시장이었다. 역이 생기자마자 승객이 계속 늘어나 역 시설을 확장해야만 했다. 매 일 사용하는 역을 부수고 다시 지을 수 없었기 때문에 1908년 아예 앞 쪽의 넓은 공터로 역을 옮겨 버린다. 그곳이 현재의 동인천역 자 리이다. 축현역 이라는 이름이 인천을 대표하지 못할 뿐 아니라 부르기도 어렵다는 여론이 일자 1926년 조선매일신문사는 역명을 공모했다. 상인천역, 동인천역, 인천중앙역, 신인천역 등이 거론되었고 그 중 상인천과 동인천이 1, 2위로 선정되었다. 상인천은 종착점인 인천역과 인천부청의 위쪽이어서, 동인천은 역 이 부청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선정되었다. 결국 축현역은 상인천역 132

137 1955년 축현역이 동인천역으로 바뀌면서 이 일대는 그때부터 인천을 대표하는 동인천 지역 돼 으로 바뀌었다. 광복 후 역명은 다시 바뀐다. 일본인들이 붙인 이름이 싫다고 해서 1948년 6월 1일 상인천역을 다시 축현역으로 환원했다. 그런데 서 울에서 오는 사람들이 역 이름이 어렵다고 하자 1955년 축현역을 동 인천역으로 바꿨다. 역 이름이 동인천역이 되면서 이 일대는 그때부 터 인천을 대표하는 동인천 지역이 된다. 사진은 1960년대 중반 동인천역 앞쪽 모습이다. 먼저 눈에 띄는 것 은 왼쪽의 인영( 仁 映 )극장이다. 이 극장은 1941년 11월 기공식을 한 인천문화영화극장의 후신으로 동산고등학교를 설립한 이흥선 씨가 개관했다. 1952년 경매 입찰로 김 모 씨에게 불하되었다. 인천시장은 1962년 붕괴 위험 건물이라는 이유로 극장 개축 명령을 내렸다. 김 씨는 6 25 전쟁 때 포격으로 벽에 금이 간 단층 건물을 헐어버리고 2층 건물을 신축해 재개관했다. 지붕에 인영극장 이라 고 커다랗게 써놓았다. 1970년대 초반만 해도 인천에는 19개 극장이 있었다. 안방극장 TV 와 레저 붐을 타고 서서히 극장들은 불황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73년 인영극장도 다른 업종으로 변경하기 위해 기존 2층 건물을 133

138 1960년대 중반 동인천 역전 모습으로 인영극장과 별제과 건물이 눈에 띈다. 아직 지하상가가 들어서기 전으로 하얀 선은 지하도 건설 계획선이다. 헐고 6층으로 새로 올렸다. 당시 인천에서는 가장 큰 빌딩 으로 볼링장과 탁구장 등이 들어섰 다. 후에 그 건물에는 서울신탁은행(현 하나은행)이 입주했다. 사진 오른쪽에는 당시 인천에서 보기 드문 빌딩 이 우뚝 서있다. 가 장 번화했던 동인천 지역에도 아직 이만한 규모의 빌딩이 세워지지 않았다. 이 빌딩은 별제과 건물이다. 1, 2층은 별제과점이며 3, 4층 은 별다방 그리고 5층은 음악감상실이었다. 별제과는 결혼을 앞둔 양가부모의 상견례 자리였을 만큼 1970년대 당시 인천 최고의 럭셔 리 양과자점이었다. 인천이 고향인 가수 송창식이 무명 시절 음악감상실에 가끔 모습을 134

139 별제과 건물 음악감상실에 무명 시절 송창식 가끔 모습 보이고 와일드캣츠 리드싱어 임종임 단골로 드나들어 보이기도 했고 1980년대 인기그룹 와일드캣츠의 리드싱어 임종임 도 이곳의 단골이었다. 서울에 쎄시봉이 있다면 인천에는 별음악감 상실이 있다고 할만 했다. 별제과 옆 2층 건물에는 1953년 문을 연 대한서림이 영업 중이다. 사업이 번창하자 대한서림은 1989년 별제 과 건물을 매입, 이전해 신장개업했다. 그러나 서점은 세월을 이겨 내지 못했다. 2012년 8월부터 1, 2층을 빵가게에 내주고 3, 4층만 서점으로 운영하고 있다. 책방이 책빵 이 된 것이다. 사진은 60년대 중반 동인천의 모습이다. 위 하얀 선은 지하도 및 지 하상가 건설 계획선이다. 1970년 시정백서 에 의하면 인천시는 연 장 40m, 노폭 12m의 지하도를 개설함과 더불어 지하도 양측에 지 하상가(점포당 100~120만 원)를 조성하여 교통의 개선과 도시 면모 의 쇄신을 꾀한다. 이에 따라 1972년 새동인천 지하상가가 개통되었고 이후 1974년 동인천, 1977년 중앙로, 1980년 인현, 1983년 신포지하상가가 차례 로 건설된다. 지하상가 개통은 표면적으로 차량의 원활한 소통과 안 전한 보행이 그 이유였지만 실제로는 민방공 대피용 목적이 더 강했 다. 135

140 서른세 번째 이야기(2015년 5월 4일) 어린이 주간 최고 이벤트 우량아선발대회 내일은 93회 어린이 날이다. 어린이를 위한 다양한 행사들이 곳 곳에서 펼쳐진다. 지금은 없어진 우량아선발대회는 이즈음에 치러 졌던 대표적인 이벤트였다. 우량아선발대회는 생후 6개월부터 24개월 미만의 아기들이 참가하 는 대회였다. 당시 우량아의 기준은 질병이 없어야 하고, 각종 예방 접종을 빠뜨리지 않고 맞아야 하며 무엇보다 체중과 가슴둘레 등 신 체발달과 영양상태가 좋아야 했다. 대부분 키 크고 살집 좋은 아이들이 우량아로 뽑혔다. 요즘 시각에서 보면 약간 걱정되는 이웃집 비만아를 보고 그 놈 참 장군감이네 라 고 건네는 것이 최상의 덕담이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1971년부터는 문화방송과 남양유업 주최하는 전국 대회로 확장되 었다. 전국우량아선발대회는 변변한 행사나 이벤트가 없었던 당시 어린이날 특집 방송으로 편성돼 TV 중계까지 했기 때문에 전 국민의 관심사가 되었다. 136

141 1977년도 전국우량아선발대회에서는 금곡동에 사는 신지윤 여자 어린이가 최우량아로 선발돼 1971년 5월 인천시청 강당에서 진행된 우량아선발대회. 적당히 배가 나와야 사장님 소리를 듣던 시절이라 주로 덩치 좋은 아이들이 우량아로 선발되었다. 게다가 당시 영부인이었던 고 육영수 여사가 현장에 참석해 참가 가 족들을 격려하고 수상자 가족을 청와대에 초청해 오찬을 함께 하면 서 사회적 관심을 끌었다. 137

142 광복 후 인천시 아동애호주간 우량아선발대회에서 가수이자 MC였던 신흥동 출신 고 박상규 씨가 두 살 때 지역 최우량아로 선발돼 분유를 먹이면 누구나 우량아가 될 수 있다는 제품 홍보와 더불어 이제는 우리도 아이들 잘 먹이고 잘살게 되었다 는 정책 홍보의 측 면도 있었다. 1983년까지 계속된 이 대회는 해마다 시도별 예선을 거쳐 최종 결선 을 치렀다. 심사위원들은 전국종합대학병원 소아과 과장으로 구성 되었다. 뽑힌 아이들은 올림픽 메달리스트처럼 목에 무거운 메달을 걸고 사진을 찍었다. 일부는 분유 광고모델로 발탁돼 스타덤에 오르 기도 했다. 자기 아기를 우량아로 키우고 싶다는 욕망에 잡힌 엄마들로 인해 전 국에서 토실토실한 아기들이 구름떼처럼 모여 들었다. 내 아기를 튼 튼하고 건강하게 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시작한 이 대회는 1971 년부터 1984년까지 총 13회에 걸쳐 진행됐다. 13년 동안 참가한 연 인원이 2만여 명에 달했다. 1977년도 제17회 전국우량아선발대회에서는 인천 이 우승했다. 1 천767명이 참가한 가운데 금곡동에 사는 신지윤 여자 어린이가 최 우량아로 선발되었다. 여아가 1등으로 뽑힌 것은 아주 이례적이었 다. 138

143 우량아선발대회는 일제강점기 때도 실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총 독부는 유아애호주간( 幼 兒 愛 好 週 間 ) 을 정해 놓고 어린이들의 육체 적 건강을 강조해 어린이의 건강검진, 영양강습회 같은 선전 사업을 전개하였다. 광복 후 인천시는 아동애호주간 을 설정했다. 매년 500여명에 달하 는 만 1살 미만의 어린이들을 도립병원에서 심사하고 검진한 결과를 발표했다. 가수이자 MC였던 인천시 신흥동 출신 고 박상규 씨는 두 살 때 지역 최우량아로 선발되었다 전쟁 후 어린이들의 성장과 발육에 대한 계몽의 일환으로 우 량아 선발은 계속되었다. 인천시에서 발행한 주간신문 인천공보 1956년 5월 9일자에 그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인천시에서는 지난 8일 상오 10시 시 회의실에서 어린이애호주간 의 한 행사로서 지난 7일 시내 100여 명의 건아( 健 兒 )를 심사하여 이 에 합격한 우량아 네 명에 대한 표창장 및 기념품(은수저) 수여식이 어린이 보호자와 시청 직원이 다수 참석한 가운데 엄숙히 거행되었 다. 인천시 의사회 부회장 이중설 씨는 오늘 영예의 표창을 받은 네 명 의 우량아는 국제 수준에 도달할만한 건강체였다 라는 요지의 어린 이 심사 보고를 했다. 최 우량아는 이형원(남, 10개월 8일) 우 우량아 는 박예선(여, 11개월 26일) 양 우량아는 유원학(남, 9개월 27일) 김 학렬(남, 7개월 26일)이다. 수상 어린이들의 앞날의 건강을 축복하 는 신흥국민학교 어린이 밴드의 주악이 끝나면서 수여식을 마쳤다. 139

144 서른네 번째 이야기(2015년 5월 11일) 모세의 기적처럼 바다 열린 아암도 아암도( 兒 岩 島 )는 이제 더 이상 섬이 아니다. 전체 면적이 6,058m2(1,832평)으로 웬만한 동네 공원에도 미치지 못한 작은 섬이 었지만 한때 인천 시민들에게 바다로 통하는 유일한 출구 였다. 바 다를 갈망하던 인천 사람들의 숱한 사연과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다. 1980년대 초부터 송도(유원지) 일대 매립 공사가 시작됐다. 1980년 과 1981년 인천위생공사와 한독은 송도 갯벌을 매립했다. 이 바람 에 아암도와 그에 딸린 소아암도는 육지로 변했다. 게다가 94년 섬 앞에 왕복 6차선 해안도로가 뚫림으로써 더 이상 섬 구실을 하지 못 하게 됐다. 매립되기 전에는 송도유원지를 통해야 섬으로 건너 갈 수 있었다. 유 원지 후문부터 아암도 까지는 500여m. 사람들은 물이 빠지길 기다 렸다가 섬으로 건너갔다. 아암도로 향하는 사람들의 행렬은 마치 모 세의 기적으로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민족의 엑소더스 와 같았다. 나중에는 유원지 측에서 아예 걸어가기 편하게 돌을 깔고 시멘트를 140

145 마땅히 갈 곳 없었던 1960, 70년대 아암도는 작약도, 약사암 등과 함께 인천의 유명 관광지의 하나로 꼽혀 부었다. 해수욕장은 한 철 장사였지만 아암도 기행 은 철을 타지 않 았다. 낙조가 장관이어서 해질 무렵 아암도를 찾아 데이트를 즐기는 아베크족도 많았다. 마땅히 갈 곳 없었던 1960, 70년대 아암도는 인천의 유명 관광지의 하나로 꼽혔다. 1970년도 시정백서 에 아암도는 작약도, 약사암 등 과 함께 지역 관광 시설로 소개되었다. 육지가 되면서 점차 기억 속에서 잊혀 가던 아암도는 1990년대 들면 서 개발과 맞물려 다시 입에 오르기 시작했다. 먼저 94년 2월 인천에 서 영종도신국제공항(현 인천국제공항)을 잇는 해저터널의 출발지 가 아암도로 결정되었다. 계획은 해상에 인천대교가 세워지면서 없 던 일이 되었다. 이듬해 3월 인천시는 아암도 일대에 인공 백사장을 설치해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 처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비치를 조성하기 위해 섬 주변에 바다모래 수십 톤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모래는 조류에 온데 간데없이 사라졌고 인천 와이키키 계획도 물거품이 됐다. 비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이 일대 군용 철책은 부분적으로 제 거되었다. 바다와 통하자 시민들이 몰려들었고 덩달아 노점상들도 141

146 아암도 일대를 와이키키 해변 처럼 만들기 위해 바다모래 수십 톤을 쏟아 부었으나 조류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1970년대 중반 송도유원지 쪽에서 본 아암도의 모습. 아암도는 시민들이 바다로 나가던 출구 였다. 바닷물이 빠지면 홍해처럼 길이 열렸고 사람들은 줄지어 나가 손바닥만 한 바위섬에 덕지덕지 올라앉았다. 해변을 무질서하게 점령했다. 최대 130여 개의 포장마차가 아암도 를 감싸 안을 정도였다. 이권을 둘러싸고 연일 폭력사태가 빚어졌고 철거 과정에서 노점상 한명이 사망하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결국 6 142

147 개월도 안돼 아암도에는 다시 철조망이 쳐졌다. 황당한 아암도 매매 사건도 있었다. 송도유원지를 소유하고 있던 인 천도시관광은 1999년 4월 아암도를 개인에게 팔아 넘겼다. m2당 6 만 원 정도였다. 건물 임대료와 입장료 수입에 기댈 수밖에 없던 인 천도시관광은 적자를 벗어나기 위해 갖고 있던 땅을 판 것이다. 연수 구 주민들을 중심으로 아암도 되찾기 대책위원회 가 구성되는 등 매 각 반대 여론이 들끓었다. 인천시는 그해 12월 초 아암도를 산 매입자를 상대로 다시 매수 협 의에 들어갔고 결국 섬을 사들였다. 아암도 매각사건은 발생 8개월 만에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 바람에 아암도 주변을 공원으로 꾸미는 해양공원 조성 사업의 속 도를 내는 효과를 보긴 했다. 인천시는 2003년 12월 아암도에 초대 형 아쿠아리움 건립 추진을 발표했다. 각종 해양생물 5만5천마리를 담을 국내에서 가장 큰 3천900톤 규모의 수족관을 마련할 계획이었 지만 이마저도 불발에 그쳤다. 이후 아암도는 주변에 있던 철책과 해안초소를 없애고 폭 10m, 길이 1.2km 크기의 해양공원으로 꾸며지면서 시민의 품으로 완전히 돌아 왔다. 그러나 송도국제도시 조성과 인천대교 건설로 인해 아암도의 멋진 조망은 거의 사라졌다. 더욱이 아암도 기행 의 배후였던 송도유원지도 문을 닫으면서 섬 을 향하는 발걸음이 뜸해졌다. 인천시민들의 바다 갈증은 계속되고 있다. 143

148 서른다섯 번째 이야기(2015년 6월 1일) 용동마루턱의 아치형 선전 철탑 세월이 흐르면서 잊혀진 지명들이 있다. 용동마루턱도 그중 하 나다. 마루턱 은 산마루의 두드러진 턱(언덕)이다. 예전에 어른들이 흔히 용동마루테기 라고 부른 이곳은 현재의 내리교회 정문 앞 고개 를 말한다. 동인천역에서 답동, 신포동 방향으로 올라가는 경사진 큰 길의 정상 부를 일컫는다. 이 길이 인천 도심을 대표하는 대로( 大 路 )로 확장된 때는 광복 이후이다. 그 전까지 이 길은 그리 큰길이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 현재의 중앙동, 송학동에 사는 사람들은 주로 홍예문을 이용 해 걷거나 우마차로 상인천역(현 동인천역)에 닿았기 때문에 그렇게 효용성 있는 길은 아니었다. 지금보다 훨씬 가파른 고갯길이었기 때문에 통행도 쉽지 않았다. 일 제 말 차량이 증가하면서 홍예문길이 불편해지자 큰길이 필요했다. 상인천역에서 용동마루턱을 넘어 답동에 이르는 길의 일부 구간이 착공되었지만 광복을 맞으며 중단되었다. 144

149 동인천역을 통해 들어오는 외지인들에게 마루턱 철탑의 통과는 인천 중심가로 들어온 의미를 부여 1978년 용동마루턱에 세워진 아치형 선전 철탑의 준공식 모습. 한 때 인천의 중심가로 들어오는 관문을 상징했던 이 철탑은 지역의 쇠퇴와 맞물려 철거됐다. 패망 전 일제는 미군의 공습에 대비해 인천 도심지 곳곳을 비워두는 소개( 疏 開 )작전을 펼쳤다. 그로 인해 상인천역과 답동 간 언덕에는 헐린 집터들이 많았다. 광복 후 인천시는 그 점을 이용해 넓은 길을 내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이 소개지 공터에 전재민( 戰 災 民 ) 등이 무허가로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철거민들의 집단 반발로 공사는 순탄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6 25 전쟁을 맞게 되었다. 전쟁 후 다시 145

150 시청사가 구월동으로 이전한 직후 혹은 동인천 지역이 쇠퇴기에 접어들어 섰을 때 슬며시 용도 폐기 된 듯 이 사업을 재개했지만 여전히 철거 문제가 걸림돌이었다. 인천시장은 1953년 5월 5일 인천시가 발행한 주간신문 인천공보 에 경고문을 게재했다. 본년 3월 20일자 인건( 仁 建 ) 제60호에 의한 지장물건물 철거 명령에 순응하여 조속히 철거를 실행할 것. 만약 본 월 15일한 본 건을 이행치 않는 자에 대하여는 시가지 계획령 제35 조 규정을 적용하여 엄중 조치하겠음. 이에 해당 지구 주민들은 탄원서를 제출했다. 남북통일이 실현되고 평화가 도래할 때 까지 철거를 유예해 줄 것 이란 내용을 담았다. 1953년 4월 200여 채의 주택 철거 문제를 해결한 후 다시 본격적으 로 공사에 착수했다. 시멘트, 철근 등 미군 측으로부터 자재를 원조 받아 1955년 3월 폭 30m, 연장 615m의 도로를 뚫었다. 현재와 같은 도로는 1970년대 초에야 완성되었다. 이후 많은 시민들 이 동인천역에서 신포동과 답동사거리를 가려고 이 마루턱을 넘었 다. 월남 참전용사 귀환, 백옥자의 아시아경기대회 금메달 획득 축하 등 각종 환영 카퍼레이드를 비롯해 시민의 날 등 길놀이 행사 행렬도 대부분 이 길을 통과했다. 146

151 이 고개는 동인천과 신포동을 경계 짓는다. 한때 이 용동마루턱을 기 준으로 신포동과 경동은 어른들의 공간이요, 인현동은 학생들의 천 국이었다. 많은 차량과 사람들이 오고가던 이곳에 1978년 웅장한 아치형 선전 철탑이 세워졌다. 반원형 모양의 거대한 철탑을 처음 대했던 시민들 은 이만한 규모의 철 구조물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진 속 파리 의 에펠탑을 연상했을 지도 모른다. 시청사가 현 중구청에 있었던 당시 이 마루턱 철탑은 일종의 관문 역 할을 했다. 동인천역을 통해 들어오는 외지인들에게 이 문의 통과는 인천 중심가로 들어온 의미를 부여했다. 인천시는 본래의 목적대로 이 철탑에 시 기념행사, 국가 시책, 시정 공표, 사회계몽 등 일 년 내내 각종 선전물을 붙였다. 행인의 통행이 빈번한 거리 마루턱에 자리 잡았던 까닭에 최적의 장소에 최적의 선 전 철탑으로서 행인들의 눈길을 끄는 데는 이만한 곳이 없었다. 현재 이 철탑은 사라졌다. 언제 없어졌는지 기록이 없고 기억도 없 다. 아마 시청사가 구월동으로 이전한 직후 혹은 동인천 지역이 쇠퇴 기에 접어들어 섰을 때 슬며시 용도 폐기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147

152 서른여섯 번째 이야기(2015년 6월 8일) 양동이 하나 들고 가뭄 철 농촌 일손 돕기 극심한 가뭄으로 농민의 마음이 타들어 가고 있다. 제 때 모내 기를 하지 못하면 쌀 수확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인천지역은 벼 재배면적이 2014년 기준 약 1만1천ha에 달하고 연간 쌀 생산량은 5만7천톤 가량 된다. 경지 면적은 강화군이 70%, 옹진 군이 10%, 동구와 남구를 제외한 나머지 구가 20%를 차지한다. 동 구와 남구에는 한 평의 논도 없다. 인천시민의 1인당 연간 쌀 소비량 은 65kg이며 자급율은 30% 정도이다. 예나 지금이나 강수량은 풍 흉년의 가장 큰 변수이다. 1962년 초여 름 인천지역은 30년래 가장 극심한 가뭄으로 큰 고통을 받았다. 지 역 신문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보도했다. 모를 심은 논마저 물이 말라 먼지가 일 정도이다. 인천시 당국은 한 해( 旱 害 ) 대책 독려 차 일요일인 7월 1일 전 직원이 빠께쓰 하나씩을 들고 각 농촌에 출장하여 물푸기에 협조하고 있다. 인천 시내 각 중 148

153 1955년 극심한 가뭄으로 경인선 각 역에 설치된 급수탑이 바닥을 보이며 증기기관차가 정지하는 사태까지 발생 고등학교 교장들은 학교별로 학생을 동원, 농촌의 물푸기 운동에 협 조할 구체적인 대책 수립 회의를 시청 회의실에서 개최했다. 당시에는 물을 퍼 올릴 양수기가 흔치 않아 말라붙은 모판에 물을 퍼 주기 위해 군관민이 합동으로 양동이를 하나씩 들고 들판으로 나섰 다. 소방차를 동원해 시 변두리와 부평 등 농토에 물을 퍼주었고 인 천에 주둔한 미군소방대도 소방차를 동원해 양수작업에 협조했다. 1955년 6월에도 인천지역은 극심한 가뭄으로 고통을 받은 적이 있 다. 농촌은 물론 도시도 목말랐다. 물 부족으로 열차까지 정지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당시의 기차는 석탄으로 물을 끓여 운행하는 증 기기관차였다. 경인선 각 역에 설치된 급수탑이 바닥을 보이자 매일 부평역을 출발하는 8대 차량의 물 열차 를 운행했다. 사진은 1974년 인천시청을 비롯한 관공서와 지역 기업체 직원들이 부평으로 모내기 일손 돕기에 나선 모습이다. 모내기철을 맞아 극심 한 인력부족 현상을 겪자 도시 직장인들이 잠시 사무실을 비워두고 모두 들판에 나섰다. 70년대 접어들자 공업화 정책으로 인해 공단이 곳곳에 설립되면서 농촌인구가 도시로 몰려들자 모내기 일손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7일 내지 10일 전 노임을 선불로 지급해야했고 하루 품삯에 식사 3식, 술 149

154 1950년 6 25전쟁이 발발하던 그해, 가뭄이 심했지만 인천 농부들은 여느 때처럼 모내기 마쳐 70년대 모내기철이 되면 어김없이 도시 직장인들은 농촌 일손 돕기에 나섰다. 매스게임을 하듯 단체로 모를 심던 이 모습도 이앙기가 보급되면서 그림책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 되었다. 150

155 2회, 담배 1갑을 별도로 제공해야 했다. 인천시에서는 도시 유휴노동력을 집단으로 모집해 농촌으로 보내기 도 했다. 이런 모내기 풍속도도 70년대 말로 접어들자 서서히 변하 기 시작했다. 영농의 기계화로 모 심는 기계, 이앙기가 등장했다. 혼 자서도 하루에 10마지기 논에 모를 심을 수 있게 되었다. 풍년을 기원하며 농요( 農 謠 ) 가락이 구성지게 울려 퍼지던 논에서 모 터소리만 요란해졌다. 못줄에 맞혀 많은 사람이 매스게임을 하듯 단 체로 모를 심던 모습도 이젠 그림책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 되었 다. 전쟁이 나고 전염병이 창궐했어도 6월이 되면 이 땅의 농부들은 어 김없이 들판에 나가 모를 심었다. 그들의 피 속에 농자천하지대본 ( 農 者 天 下 之 大 本 ) 이 흐르기 때문이다. 1950년 6 25전쟁이 발발하 던 그해, 가뭄이 심했지만 인천의 농부들은 여느 때처럼 모내기를 했 다. 인천에서 발행하던 대중일보는 1950년 6월 20일(화) 염려되는 모 내기 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대풍을 예상하는 보리마저 시름시 름 말라가고 모 심을 논은 거북등처럼 갈라짐에 따라 농민의 한숨만 늘어 가고 있는데 무심한 하늘에는 흰 구름만 오락가락 도무지 비를 모른다. 대체로 6월 25일까지 비가 내리지 않으면 중부지방의 도작 ( 稻 作 )은 커다란 위협을 맞게 되리라는 바 중앙관상대에서는 금주의 날씨를 19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주초에는 호남지방과 영남지 방만 때때로 비가 내리겠으나 중부지방은 대체로 흐리고 곳에 따라 강우가 있겠다. 151

156 서른일곱 번째 이야기(2015년 6월 15일) 잃어버린 우리의 동인천역 광장 인천에는 광장 이라 불릴만한 넓은 공간이 별로 없었다. 한때 답동광장 으로 불린 답동사거리와 자유공원의 비둘기장 광장이 아 쉬운 대로 광장 역할을 했다. 시청이 구월동으로 이전하면서 청사 앞 에 광장이 조성되었지만 분수대 등이 들어서면서 그 기능은 곧 사라 졌다. 동인천역 광장은 오랫동안 인천의 대표적인 광장 역할을 했다 년대 광장은 시위와 규탄대회의 단골 장소가 됐다. 1960년 4 월, 3 15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 집회는 인천도 예외가 아니었다. 많 은 학생들이 동인천역 앞과 경동 싸리재 등에서 경찰과 대치하며 시 위를 했다. 1969년 12월 11일 승객과 승무원 50명을 태운 강릉발 김포행 KAL 기가 북한에 의해 납치되자 동인천역 광장에서는 납북된 KAL기 승 객 전원 송환촉구 및 북괴세균전 획책을 규탄하는 인천시민궐기대 회가 열렸다. 152

157 1970년 방콕아시아경기대회 투포환 금메달리스트 백옥자, 무사귀환 인천 출신 파월장병 등 동인천역 광장에서 열렬히 맞아 80년대 초만 해도 동인천역 광장에서는 약장수들의 차력이나 간단한 서커스 묘기를 종종 볼 수 있었다. 구경거리가 별로 없었던 시절이라 시민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한가롭게 공연 을 즐겼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조총련 문세광이 쏜 흉탄에 대통령부인 육영수 여사가 숨을 거두는 사건이 터졌다. 그달 28일 인천시민들은 동인천역 광장에서 김일성을 규탄하며 화형식을 치른 153

158 1989년 지하 3층 지상 5층 민자 역사가 들어서며 인천시민 애환 담긴 동인천역 광장 사라져 대규모 시민규탄대회를 열었다. 30만 명의 시민이 모였다 라고 보 도될 만큼 광장을 비롯해 용동마루턱 까지 인산인해를 이뤘다. 동인천역 광장은 시민 환영대회장으로도 활용되었다. 아시아의 마 녀 라는 별명이 붙은 인천출신 투포환 선수 백옥자는 1970년 방콕아 시아경기대회에서 투포환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 메달은 대한민국 건국 이래 여자 개인이 딴 최초의 메달로 기록된다. 그를 비롯한 인 천 출신 메달리스트들은 동인천역 광장에서 시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은 후 답동사거리를 거쳐 시청(현 중구청) 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였 다. 무사귀환한 인천 출신 파월장병도 이 광장에서 맞이했다. 1970년대 초 베트남전이 서서히 종전으로 접어들자 따이한 부대들은 하나둘 한국으로 송환됐다. 인천시는 동인천역 광장에서 월남에서 돌아 온 새까만 김 상사 들을 맞이하는 대대적인 환영식을 개최했다.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광장은 약장수들의 임시판매장으로 그만이 었다. 정력제 등 검증되지 않은 약 을 팔려면 무엇보다 행인의 시선 을 끌어야 했다. 그들은 차돌을 당수로 마구 부수고 못 박힌 널빤지 위를 맨발로 걷는 차력 쑈 나 간단한 서커스 공연을 자주 열었다. 구 경거리가 별로 없었던 시절, 광장에 마이크대만 설치해도 사람들은 154

159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90년대 들어와서 동인천역 광장은 각종 선거 때마다 유세장으로 활 용되었고 굴업도 핵폐기장 철회 촉구, 영흥도 화전 반대 등 환경 관 련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인천시민의 애환이 담긴 동인천역 광장이 사라졌다. 1989년 4월 15 일 동인천역 광장을 뒤덮은 지하 3층 지상 5층 민자역사가 들어서며 인천백화점 이 개점했다. 초기에 점포가 완전 분양될 정도로 기대감 이 컸지만 2001년 폐업했고 이후 패션전문 쇼핑몰 형태인 엔조이쇼 핑몰 로 업종을 전환했지만 이마저도 2008년에 문을 닫았다. 현재 이 건물에는 화상 경륜장과 경정장만 영업 중으로 발걸음조차 뜸해지면서 시민들은 동인천역사( 驛 舍 )와 광장을 둘 다 잃어버렸다. 대신 2012년 북광장을 얻게 됐다. 기존 광장의 반대편 송현동 쪽에 총 1만5천m2(4569평) 부지에 북광장이 조성되었다. 동인천북광장 조성 사업은 당시 인천의 유행어와 같았던 도시재생사업 가운데 선 도적으로 추진되었지만 보상비 문제로 수년간 공사가 지연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철거 작업이 마무리되고 2012년 6월 완공됐다. 27년 전 88서울올림픽 성화 봉송은 많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옛 광장 앞(대한서림 쪽)을 지나갔다. 지난해 2014인천아시아경기 대회 성화 봉송행사는 북광장에서 거행됐다. 동인천역 주변의 상권 분위기가 광장 위치에 따라 급격히 바뀌고 있다. 155

160 서른여덟 번째 이야기(2015년 6월 22일) 인천 수돗물로 농사지은 부천 농부들 현재 인천시의 급수 보급율은 98.4%이며 1인 1일 급수량은 332l이다. 가뭄이 오래되면서 급수난의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수도 시설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 대다수 주민들은 우물이 나 공동수도에 의존해 식수를 해결했다. 수도가 있더라도 고지대나 변두리 관말( 管 末 )지역은 여름철만 되면 수압이 낮아져 항상 물 기근 소동이 벌어지곤 했다. 낮은 수압 때문에 수도국이 신규 수도전 설치를 허가해 주지 않으면 밤을 이용해 몰래 남의 수도관에서 물을 대는 공사를 하는 부정 수도 사업자들이 활개를 쳤다. 가뭄이 오래되면 인천시는 하절기 비상급 수대책을 세우고 물을 많이 사용하는 목욕탕이나 수영장의 영업을 금지시켰다. 사진은 1965년 늦봄, 가뭄이 계속되면서 수돗물이 단수되고 우물이 완전히 말라버리자 인천에 주둔한 미군부대의 급수차까지 동원한 모습이다. 156

161 1967년 신시가지 개발 서울 강서구, 상수도 시설 갖추지 못해 10여 년 동안 인천 관할 정수장에서 공급하는 물 먹어 어른은 물론 아이들도 초롱 이라고 불렸던 함석 물통을 급수차 앞에 길게 내놓았다. 언제 다시 급수차가 올지 몰라 온 식구가 다 동원되 었다. 혹시 내 앞에서 물이 똑 떨어질까 봐 그들은 조바심으로 물줄 기를 바라보고 있다. 늘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천 수돗물로 한동안 서울 사람들의 목 을 축여 주었던 적이 있다. 화곡동, 신정동, 방화동 등 지금의 서울 강서구 지역은 1967년 신시가지로 개발되었다. 그런데 상수도 시설을 제때 갖추지 못해 10여 년 동안 거주 주민 절 반 정도인 10만 명은 인천시 북구수도관리사업소가 관리하는 김포 정수장(신월동 산 68)에서 공급하는 물을 먹어야만 했다. 물 값은 인천시 급수조례에 따라 서울시 수도료보다 20% 가량 비쌌 다. 주민들은 서울 시민이면서도 인천시 마크가 찍힌 비싼 고지서를 받았다. 그것도 감지덕지하게 받아야만 했다. 김포정수장에서 생산되는 11만 톤 중 7만 톤은 인천으로 가고 나머 지 4만 톤만 강서구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수압이 낮아지거나 단수 가 돼 주민들이 영등포구청(후에 강서구청)에 신고하면 인천시 수도 국으로 알아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수도( 首 都 ) 서울이 한동안 인천 157

162 부천 성지 마을, 인천으로 가는 송수관에서 새나오는 물로 논물 대고 물웅덩이에서 물놀이까지 1965년 늦봄, 가뭄으로 식수난을 겪자 인천에 주둔한 미군이 급수차를 지원했다. 시 수도( 水 道 ) 행정을 눈치 봐야만 했다. 1978년 5월 17일 하오 3시 김포정수장에서 원병의 인천시장은 구 자춘 서울시장과 김포정수장의 토지와 건물 등 관련 시설을 18억4 천867만 원을 받고 양도하는 상수도이관협정 을 체결했다. 이듬해 부터 강서구 주민들은 비로소 서울 물을 먹게 되었다. 158

163 귀한 인천 수돗물로 타 지역에서 농사를 지었던 황당한 이야기도 있 다. 경기도 부천시 성지동 30여 가구는 한동안 인천 수돗물로 2만여 평의 논을 농사지었다. 1966년 경인고속도로 공사로 인해 마을 저수 지가 메워지면서 그들은 농업용수를 잃었다. 논농사를 포기할 만 했 지만 그들에게는 또 다른 물이 있었다. 김포정수장에서 인천으로 가는 송수관에서 새나오는 물이 들판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일제 말 1944년에 설치된 이 송수관은 10여 년 전부터 곳곳에서 새나오기 시작했다. 인천시 수도국은 정기적으 로 현장에 나와 벌어진 틈을 콘크리트로 때우거나 구멍을 말뚝으로 막아놓았지만 높은 수압을 이겨 내지 못해 물이 새나갔다. 아예 농민들은 말뚝을 뺐다 닫았다 하면서 마치 수도꼭지 틀듯 자유 자재로 논물을 댔다. 심한 가뭄으로 이웃 마을들이 모내기를 못할 때 도 저수지도 없는 이 마을은 물 걱정 없이 모내기를 끝내곤 했다. 물 이 콸콸 솟는 곳은 물웅덩이까지 생겨 마을 아이들이 물놀이를 할 정 도였다. 1977년 당시 김포정수장이 송수관을 통해 인천으로 보내는 물은 하 루 5만 톤. 당시 흄관의 평균 누수율은 30% 선으로 5만 톤 중 1만5 천 톤은 땅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것은 7만 명 인천 시민의 갈증을 풀어줄 수 있는 엄청난 수량이었다. 매년 식수난으로 인천시민의 수도꼭지는 말라붙었지만 부천 성지동 마을 농부들은 십 수년 간 인천 수돗물로 일군 옥답에서 흥겨운 풍년 가를 불렀다. 159

164 서른아홉 번째 이야기(2015년 6월 29일) 망국병 인천이 치료하다 메르스 만큼이나 무서운 전염병이 결핵이다. 후진국 질병 이라 여긴 결핵이 다 퇴치된 걸로 알고 있지만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매년 2천 명 이상이 결핵으로 목숨을 잃는다. 인구 10만 명 당 5% 정도의 사망률을 보이는 전염병이다. 얼마 전 연수구의 한 중학교에서 103 명(학생 101명 교사 2명)의 결핵 환자가 발생해 임시 휴업에 들어간 적도 있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결핵 사망률을 기록했 다. 불결한 환경과 굶주림 속에서 집단 노동에 시달린 것이 주원인이 었다. 특히 외부로 열려 있는 항구이면서 전국 노동자들이 모여 일하 는 공장들이 많았던 인천은 전염병에 쉽게 노출되었다. 결핵 환자가 계속 늘어나자 조선적십자사는 결핵요양원을 설립하기 위해 전 조선을 뒤져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을 물색했다. 낙점된 곳은 당시 사람의 발길이 거의 없었던 부천군 문학면 연수리(현 연수구 연 수3동) 구릉지였다. 160

165 전 조선을 뒤져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을 물색한 끝에 연수동 구릉지에 남한 최초의 결핵전문병원 세워 1957년 인천결핵요양원 앞뜰에서 고아 결핵 환자들이 간호사들과 햇볕을 쬐며 놀이를 즐기고 있다. 161

166 학교, 대합실, 극장, 음식점 등에 가래나 침을 뱉어 담는 그릇(타구)을 꼭 놓아야 인천결핵요양원은 1940년 11월 20일 연수장( 延 壽 莊 ) 이란 이름으 로 개원했다. 목숨이 연장 된다 는 의미의 마을 이름과 절묘하게 맞 아 떨어진 병원명이었다. 남한에서는 최초로 세워진 결핵전문병원 이었다. 너무 외져서 접근하기 쉽지 않아 적십자 측은 수인선을 운영하는 경 동철도주식회사에 송도역과 남동역 사이 요양원에서 가장 가까운 지점에 임시 정거장 설치를 요구했다. 수인선 기차는 결핵요양원을 위해 역 시설도 없는 임시정거장에서 1분간 정차를 했다 전쟁으로 헐벗고 굶주린 한국인의 건강은 계속 악화됐다. 망국 병인 결핵 퇴치를 위해 인천시는 매년 12월초 1주일간을 결핵예방 주간으로 설정했다. 계몽 강연회를 수시로 열고 포스터를 학교와 거 리에 붙이는 등 예방에 만전을 기했다. 그 중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특이한 예방 행정이 있었다. 타구 혹은 담( 痰 )통 이라 불리는 가래나 침을 뱉어 담는 그릇의 설치를 법령으 로 의무화한 것이다. 학교, 병원, 제조소, 선박 발착 대합실, 철도 정 차장, 극장, 다방, 음식점, 이발소 등 도지사가 지정하는 장소에는 적 당한 수의 타구를 배치해야만 했다. 162

167 인천시가 발행한 주간 신문 인천공보 1953년 8월 5일자에는 시 보 건과장(정귀학)이 쓴 타구 설비의 중요성 이란 기사가 실렸다. 타구 안에는 액체 소독제를 투입하여두는 것이 원칙이나 형편에 따 라서는 냉수로 대용하는 것도 무방한 바 필히 조석마다 제거하여야 하는데 침은 지하에 매몰하거나 변소에 투기하여야 한다. 대중의 출 입 장소에는 물론 각 개인 가옥에도 타구를 설치해 노상( 路 上 ) 토담 ( 吐 痰 )을 스스로 억제함이 필행( 必 行 ) 조건이라고 믿는다. 60년대 접어들어도 결핵 환자가 줄지 않자 급기야 정부는 1968년 서울, 부산, 인천 등 5대 도시 모든 동사무소에 결핵 관리요원 1명씩 을 배치하는 계획까지 세웠다. 그만큼 당시에는 결핵이 국민보건은 물론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났다. 인천결핵요양원에도 환자들이 밀려들어왔다. 인천시는 환자들의 편 의를 위해 송도역에서 요양원까지 가는 도로를 뚫었고 병실을 증개 축 했다. 앞뜰을 3천 평으로 넓히고 잔디와 옥향나무 등을 심어 대저 택의 정원처럼 꾸며 놓았다. 소나무 숲 너머 염전과 갯벌 사이를 달 리는 수인선 협궤열차의 목가적 풍경은 환자들에게 안식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영화 촬영의 단골 장소가 되기도 했다. 90년대 들어 입원 환자가 감소하면서 요양원의 운영이 점차 어려워 졌다. 1991년 연수신시가지 건설계획에 따라 1천여 평의 땅이 수용 되면서 아름다운 정원이 뚝 잘려나갔다. 반세기 동안 이 땅의 무서운 결핵균에 맞서 사투를 벌였던 인천결핵요양원은 1996년 6월 5일 문 을 닫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63

168 마흔 번째 이야기(2015년 7월 6일) 영세 어민의 생명줄이었던 조개 모내기철이 끝났다. 이즈음 바다 갯벌에서도 모 가 자라기 시 작한다. 6월부터 조개류들은 산란기에 접어들며 온 몸에 독을 품는 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조개를 멀리하게 되고 이 틈을 타 여름철 갯벌의 모 는 무럭무럭 자란다. 대규모 매립이 되기 전 인천은 갯벌로 둘러싸여 있었다. 때마다 그곳 에서 많은 조개들을 걷어 들였다. 냉장 시설과 물류가 발달하지 않았 던 시절, 잡은 조개들을 멀리 보내지 못했다. 인천 근방에서 생물로 소비되는 조개가 많았다. 어떤 음식을 주문하 던지 식당마다 맑은 조개 국물이 곁들여 나왔다. 남는 조개로 집집마 다 조개젓을 담가 일 년 내내 요긴한 반찬으로 삼았다. 송현동, 만석동, 화수동 등 바다와 접한 동네에서는 공터에 쌓아놓은 조개무지를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비가 와서 곤죽이 된 골목길에 조 개껍질을 깔아놓기도 했고 아이들은 큰 조개를 골라 시멘트에 갈아 구멍을 내 피리를 만들어 불었다. 164

169 1963년 지금의 송도국제도시가 들어선 척전 및 동막 앞 갯벌에 대규모 백합 양식장 마련 1963년 6월 14일 인천시는 처음으로 대규모 백합 양식장을 마련했 다. 지금의 송도국제도시가 들어선 척전 및 동막 앞 갯벌에서 시장 대리를 비롯한 공무원과 530명의 조합 어촌계원들이 참여한 가운데 백합 양식장 종패 살포식이 있었다. 조합원들은 갯벌에서 캐낸 조개를 위판장에 팔지 않고 모아두었다 가 6만6천m2(2만평) 갯벌 위에 골고루 뿌렸다. 값이 비싼 백합의 남 획으로 씨가 말라가는 것을 막는 한편 뭍으로부터 700여 m 떨어진 곳에 종패장을 마련해 어민들의 편의를 제공했다. 인천시는 이후 패류 양식장 확대에 주력해 1970년부터 1979년 까 지 10년 동안 백합 256정보(1정보는 약 9천900m2), 가무락 123정보 를 마련했다. 인천시사(70년대 편) 에 따르면 1979년 인천의 수산업 종사자는 2 만2천여 명(남 1만 명, 여 1만2천 명)이었다. 여자를 금기시 했던 어 업 분야에 여자가 남자 보다 많았던 것은 패류 양식장이 본격적으로 개발돼 조개를 캐는 여성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인천수협 산하에는 연안(만석) 고잔 동막 소래 송도 척전 등 6개 어촌계가 조직되었다. 그중 연안과 소래는 어선을 운영하는 어 촌계이고 나머지는 조개를 채취하는 어촌계이다. 165

170 인천에서는 어떤 음식을 주문하던지 식당마다 맑은 조개 국물이 곁들여 나왔고 집집마다 조개젓을 담가 1982년 4월 8일 수협중앙회 창립 20주년을 맞아 송도에서 조개까기 대회가 열렸다. 각 어촌계를 대표한 선수 들은 등에 참가 번호를 달고 대회에 나섰다. 주어진 조개를 가장 먼저 까는 사람이 우승자이다.(사진 박근원) 어촌계 회원이 되려면 어촌계 관내 지역에 거주하며 6개월 이상 어 업에 종사한 사람이 1구좌(구좌당 1천원) 이상 출자를 하면 되었다. 1979년 말 현재 송도 336명, 척전 508명, 동막 318명, 고잔 151명 등의 어촌계원들이 있었다. 166

171 그들이 채취하는 패류는 백합, 가무락, 키조개, 동죽, 바지락, 굴 등 이었다. 조개잡이는 전쟁 통에도 인천시민의 생계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전쟁으로 농토는 피폐했지만 바다는 온전했다. 너도나도 호구 지책으로 갯벌로 나서면서 패류는 점점 씨가 말랐다. 1955년 6월 14일 김정렬 인천시장은 백합(생합)의 산란기를 앞두고 이의 채포( 採 捕 )를 금지하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광범한 송도 일대에는 조개류 번식에 가장 입지적 호조건을 구비한 천혜의 어장으로서 1천여 호 영세 어민의 생명선이기도 한데 8 15 해방 이후 어업 도의를 망각한 일부 사람은 자연의 고마움을 잊고 남 획한 결과 어장 대부분 소진되었다. 특히 인천 토산품으로 널리 선전된 백합 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영 세 어민의 앞날의 생계를 위해서는 물론 수산자원의 증식 확보상 심 히 유감스러운 바이다. 인천시는 단기 4286년(1953년)부터 획기적 인 패류 증산을 목표로 일정한 해면을 획정하여 양식구를 설치하고 일정 기간 채포를 금지하였다가 춘궁기에 이를 개방하여 어촌 경제 에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양하고 있다. 여타 해면에 있어서도 크기 미달의 조개는 채포를 엄중 단속 중에 있 으나 특히 패류 중 백합은 7월 1일부터 8월 20일 까지 50일 간은 산 란양식 기간이다. 해당 어민이나 일반시민은 이 취지를 혜량하시고 각종 취체 규칙을 준수할 것은 물론 자아 반성하여 천혜의 자원을 자 손만대에 계승 향유하려는 넓은 시야에서 이 기간 중에는 백합잡이 를 일절 중지하여 주시기를 요망하나이다. 167

172 마흔한 번째 이야기(2015년 7월 13일) 모기 박멸 여름철 전염병 방역 1949년 9월, 북한군 남침에 앞서 모기 가 먼저 남한을 기습 공 격했다. 개성에서 발병한 뇌염은 80여명의 사망자를 내고 서울로 남 하해 70여 명을 숨지게 했다. 당시 인천시가 포함된 경기도에서만 9월 10일 현재 700명 넘는 환 자가 발병해 247명이 사망했다. 인천에서는 부평, 문학, 송림 등에서 뇌염 환자 8명이 발병해 3명이 사망했다. 한반도 전체가 모기 공격 에 떨었다. 국무회의에서는 일주일간 국민학교 휴교를 긴급 결정했고 요정급 음식점은 모기가 극성을 부리기 시작하는 하오 7시 이후 영업을 금 지 시켰다. 시내 극장들도 뇌염이 수그러질 때까지 휴관을 단행했고 모든 열차는 안팎을 철저하게 소독하고 운행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소독약이 부족해 제대로 된 방역을 할 수가 없었 다. 우리나라 보건부장관은 유행성 뇌염모기의 박멸을 위해 주미 한 국대사 장면을 동해 미국 정부 측에 소독약 원조를 요구했다. 장면은 168

173 뇌염 예방 위해 요정급 음식점은 모기 극성 부리기 시작하는 하오 7시 이후 영업 금지 1960년대 인천 골목 구석구석을 방역하는 모습. 구경하는 아이들은 연막소독차가 등장하지 않은 것이 못내 섭섭한 표정이다.(최성연의 1960년대 인천풍경) 169

174 콜레라 방지 위해 숙박을 하든 취업을 하든 꼭 소지해야 할 가장 중요한 증명서는 대변 검사서 인천 출신으로 후에 총리까지 지낸 인물이다. 13만 톤의 DDT가 부산항으로 들어왔고 정부는 급히 소독약을 공중 살포하는 한편 전국에 긴급 배포했다. 소독약은 왔지만 분무기가 절 대적으로 부족했다. 인천시 보건계는 중앙에서 받은 뇌염방역 소독 용 분무기 20개를 업소, 공장, 동회 등에 빌려 준다는 것을 공지했다. 희망자는 보건계를 방문해 차용증을 쓰고 빌리되 대여시간은 1개소 최고 3시간이었다. 인천 지역에서 발행되었던 대중일보는 1949년 9월 8일자에 시민 계 몽용 뇌염 예방법 을 게재했다. 불필요한 못이나 유수지는 배수하거 나 매몰할 것, 집집마다 모기장을 치거나 모기 없는 장소에서 잘 것, 저녁 외출을 금할 것, 저녁 목욕을 하지 말 것 등이었다. 뇌염 발생에 앞서 1946년 7월에 호열자(콜레라)가 온 나라에 퍼져 큰 피해를 봤다. 인천 시내로 전염병이 침범할 우려가 커지자 시장과 경찰서장은 호열자 방역포고 제3호 를 포고한다. 여관이나 하숙집에서는 여행 금지구역에서 내방한 객으로서 검변 ( 檢 便, 대변검사) 증명서의 소지가 없을 시는 그 숙박을 거절할 것(위 반 시 책임은 영업주), 여관업 하숙업 요리점 음식점 기생권번의 170

175 종업원은 필히 매주 1회씩 검변을 받을 것(검변 증명서는 1주간 유 효하며 본 증명서가 없는 자에게는 취업을 정지시키고 검변 비용은 업자 각자의 부담으로 함) 등의 내용이었다, 당시 숙박을 하든 취업 을 하든 꼭 소지해야할 가장 중요한 증명서는 바로 대변 검사서 였 다. 콜레라를 비롯한 장티푸스, 이질 등 대부분의 전염병은 불결한 식수 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당시 남한 전역에서 사용하고 있는 우물은 공설, 사설 합쳐 20만 개소에 이르렀다. 전 국민의 90%는 시설이 불 량한 우물을 통해 물을 마셨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인천시는 우물부터 정비했다. 공동우물의 덮개와 지붕을 씌우기 위해 각 동에 목재와 시멘트를 배급했고 시 위 생반 전원을 출동시켜 시내에 산재한 우물 1천260개소에 소독을 실 시했다. 더불어 인천시는 전염병을 옮기는 파리, 모기 등을 제거하기 위해 시내에 있는 돼지우리를 모조리 교외로 이전하도록 강력하게 조치한다. 만일 이에 응하지 않는 경우 전염병예방령 에 의거해 발 견 즉시 도살할 것을 경고한다. 70년대 들어오면서 방역 활동이 정착되고 시민들의 위생 관념이 높 아지면서 전염병 발생도 확연히 줄어들었다. 인천시사 70년대 편 에 의하면 1970년도 장티푸스 459명, 콜레라 159명 등 639명 전염 병 환자가 발생해 13명이 사망했던 것이 1972년과 1977년 그리고 1978년에는 환자 발생이 전무했으며 1979년에도 디프테리아 환자 2명이 발생해 치유됐을 정도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171

176 마흔두 번째 이야기(2015년 7월 20일) 피서지 이동도서관 임해문고 임해( 臨 海 ) 라는 단어는 이제 거의 사어( 死 語 )처럼 되었다. 한 때 바다에 가까이 있다 라는 의미로 임해공업단지, 임해관광, 임해 도로 등은 흔하게 사용되었던 단어이다. 임해도시 인천에서 매년 8월 중순 바다를 테마로 개최되는 전국임 해사진촬영대회 는 1956년부터 시작된 우리나라 대표 여름철 사진 축제 중 하나이다. 임해문고( 臨 海 文 庫 ) 는 여름철이 되면 바닷가 피 서지에 임시로 개설되는 이동도서관이다. 우리나라의 임해문고는 인천 바닷가에서 처음 개설되었다. 1947년 여름, 국립중앙도서관은 휴가철을 맞아 바닷가를 찾는 피서객들에 게 책을 쉽고 편하게 제공하기 위해 인천부립도서관과 함께 월미도 해수욕장에 임해문고 를 설치해 운영했다. 경향신문은 8월 31일자에 이를 보도했다. 국립도서관에서는 인천 월미도해수욕장 캠프촌에 8월 23일부터 9월 5일까지 2주일 동안 임 해문고를 개설하고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독서가에 편의를 제 172

177 1947년 여름, 인천부립도서관은 월미도해수욕장에 우리나라에서 처음 임해문고 운영 공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시행 첫해 임해문고의 개설 일자가 피서철과 맞지 않아 호응이 낮았 는지 이듬해 1948년에는 여름바닷가 성수기인 7월 21일부터 8월 25일로 조정해서 개설했고 1949년은 아예 7월 1일부터 8월 20일까 지 기간을 더 확대했다. 1950년 이 땅에는 여름 바닷가가 없었다 전쟁으로 한참 동안 임해문고는 개설되지 못했다. 1967년이 되서야 국립중앙도서관은 변산해수욕장에 임해문고 텐트를 다시 쳤다. 그 사이 월미도해수욕 장은 군 주둔과 매립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임해문고는 68년 경포대해수욕장에 들어섰고 69년 인천에 다시 송 도해수욕장에 설치되었다. 이때부터 임해문고는 여름철 해수욕장 풍경의 하나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해변 한쪽에 커다란 군용 텐트를 치고 아래 부분을 걷어 올렸다. 사방이 트인 텐트 안은 시원했다. 책꽂이에는 무거운 주제의 책보다는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소설과 시집 등이 주류를 이뤘다. 책은 신분증만 있으면 빌려주었다. 간혹 신분증이 없는 사람은 그 안에서 읽거나 돈을 맡기고 빌려가기도 했 다. 독서캠페인을 벌이기 위해 수영복을 입은 사서가 책 몇 권을 들 173

178 수영복을 입은 사서가 책 몇 권을 들고 파라솔 사이를 누비며 출장 다녀오기도 예전 피서지의 익숙한 풍경 임해문고 는 우리나라 최초로 1947년 월미도해수욕장에 개설되었다. 1986년 송도해수욕장의 임해문고 모습이다. 174

179 고 파라솔 사이를 누비며 출장 을 다녀오기도 했다. 임해문고 설치 여부는 그 시대의 유명 해수욕장의 기준이 되기도 했 다. 국립중앙도서관60년사 에 의하면 1977년 임해문고가 개설된 곳은 인천 송도해수욕장을 비롯해 낙산해수욕장, 포항 송도해수욕 장, 연포해수욕장, 만리포해수욕장, 변산해수욕장 등이었다. 이들 해 수욕장은 70년대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나가던 피서지로 꼽히던 곳 이었다. 사진은 1986년 인천 송도해수욕장에 설치된 임해문고이다. 대부분 수영을 한 후 시원하게 웃통을 벗은 채 찾아와 독서삼매경에 빠진 모습이다. 입간판과 천막에 새마을 마크가 찍혀있다. 새마을운동이 1970년대 후반부터 정신적 측면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함에 따 라 농어촌 중심으로 새마을문고사업이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임해문고 개설은 공립도서관에서 해수욕장이 속한 지역의 새마을문고 측으로 바통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이즈음 숲과 함께 하 는 작은 도서관 이라는 슬로건과 함께 임간문고( 林 間 文 庫 ) 도 등장 했다. 말 그대로 전국의 유명 계곡이나 휴양림에 개설한 이동숲속도 서관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전국 유명해수욕장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리지만 최근 임해문고나 임간문고의 설치는 예전만 못하다. 피서객들은 노 트북이나 PDA 등 휴대용 단말기를 통해 e북을 읽거나 아예 휴대폰 삼매경에 빠져서 책을 멀리 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서관 서가 깊숙이 꽂힌 책들은 모처럼의 바깥바람 쐬는 기회조차 사라지고 있다. 175

180 마흔세 번째 이야기(2015년 7월 27일) 고행도 낭만이었던 섬 기행 이번 주부터 여름휴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168개의 섬을 보유하고 있는 인천에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닿을 수 있는 크고 작 은 섬들이 있다. 섬으로 바캉스를 떠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육지에 딸린 해수 욕장에 비해서 접근하기가 불편했고 숙박, 놀이 시설 등이 제대로 갖 춰 있지 않았기 때문에 피서지로 선택받지 못했다. 1960년대 초 만 해도 가까운 영종도조차 격일제로 여객선이 운행되었기 때문에 섬 기행은 고행 그 자체였다. 노송을 배경으로 고운 모래밭이 2km나 펼쳐져 서해의 명사십리 라 고 일컬었던 덕적도 서포리는 인천역 뒤쪽에 있던 객선부두에서 출 발해 3시간이나 걸려야 도착할 수 있었다. 6 70년대 수도권 관광지 의 지존 으로 늘 꼽혔던 곳이지만 시설은 열악했다. 1969년 여름 당 시 여관 5개, 여인숙 10개, 방가로 3개(객실 26개), 야영천막 50개 그리고 해변 바로 뒤 민박 등이 숙박 시설의 전부였다. 뒷산에서 내 176

181 티켓 확보하기 위해 노숙하며 밥해 먹는 여행객들의 모습은 휴가철 여객선 부두 주변 풍경 중 하나 1981년 연안부두에서 을왕리로 가는 관광5호 여객선을 타는 피서객들. 숙박시설이 부족해 야영을 해야 하기 때문에 짐을 많이 들어야 했다.(사진 박근원) 177

182 미군 군수품을 개조해 만든 캠핑 장비와 양식(쌀)을 가져가야 하기 때문에 섬 여행 짐은 언제나 산더미 려오는 지하수를 받아 상수도 시설이 돼있고 해변에 백열등이 켜있 다는 것이 자랑거리 였을 정도다. 이로 인해 당일치기 섬이 인기였다. 옹진군과 강화군이 편입되기 전 인천시의 유일한 섬 관광지였던 작약도는 70년대 하루 평균 5천 여 명, 여름철 성수기에는 14만 5천 명이 방문할 정도였다. 연안부두에서 보트급의 소형 선박 7척이 수시로 사람들을 실어 날랐 다. 그러나 섬임에도 불구하고 해수욕장이 없었고 숙박시설로는 작 은 여인숙 하나만 있어 피서지로서는 한계가 있었다. 지금은 선사를 통해서 단체로만 갈 수 있는 팔미도는 70년대 말 까 지 연안부두에서 하루 3, 4회 배가 운항되었다. 서해 연안에서 가장 물이 맑다는 평가로 사람들이 많이 찾았던 섬이다. 이즈음 인천 앞바다 섬에 새로운 해수욕장들이 개발되었다. 1970년 7월 새한상사 가 북도면 시도에 둑을 쌓고 보트, 천막 등의 시설을 갖추고 해수욕장을 처음 개장했다. 하인천 객선부두에서 매 시간 마 다 쾌속정 5척이 왕복 운행했다. 왕복 배 삯은 입장료 포함해서 당시 로서는 매우 비싼 400원이었다. 개인 소유였던 사승봉도도 74년 6월에 처음으로 개방되었다. 8노트 정도의 철선이 연안부두에서 출발해 이작도에 도착한 후 승봉도 행 정선으로 다시 옮겨 타야 도착할 수 있었다. 178

183 80년대 접어들면서 섬으로 가는 교통과 숙박 시설이 개선되자 여름 휴가철이 되면 인천 연안부두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지금처럼 인터넷을 통한 예약시스템이 돼 있지 않아 무작정 여객터미널로 달 려가야 했다. 배표를 손에 쥐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다음날을 기약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서너 배, 심한 경우 열 배가 넘는 암 표를 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날씨가 따라줘야 섬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날씨가 나쁘면 여 행을 포기하거나 주변에서 운항금지가 해제될 때까지 무작정 기다 려야 했다. 노숙하며 밥해 먹는 여행객들의 모습은 휴가철 여객선 부 두 주변에서 빠질 수 없는 풍경 중 하나였다. 주머니가 얇은 학생들 은 주로 야영을 했다. 미군이 야전에서 사용하던 군수품을 개조해 만든 텐트, 코펠, 버너, 침낭 등 캠핑 장비를 갖춰 가야 했다. 무엇보다도 섬에서도 귀한 양 식(쌀)은 꼭 챙겨가야 할 필수 품목이었기 때문에 여행 짐은 언제나 산더미였다. 이런 모습으로 서너 명만 줄을 서도 마치 피난 행렬을 연상케 했다. 육지로 귀환할 때 다시 전쟁을 치러야 했다. 왕복권을 발매하지 않는 섬으로 여행을 가는 경우 다시 배표를 구하기 위해 일행 중 한명은 휴가를 포기하고 선착장에 아예 나가 있어야 했다. 간혹 일기가 불순해 운항이 건너뛴 경우 귀향객들로 선착장은 그야 말로 난장판이 되었다. 어떻게든 휴가 복귀 기간을 맞춰야했던 직장 인이 고깃배를 전세 내 육지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이제 전설 이 되고 있다. 179

184 마흔네 번째 이야기(2015년 8월 17일) 가까이 있지만 아주 멀리 있는 섬, 작약도 인천에는 168개의 섬이 있다. 인천시는 섬마다 특색을 살려 바 다 위 보석 으로 만들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작약도는 해양관광지 개발을 이야기 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섬이다. 일제강점기 작약도는 일본인 스즈키 하사오 개인 소유였기 때문에 존재감이 거의 없었다. 1956년 서울 영등포에 있던 밀가루 회사 동 립산업이 경기도로부터 이 섬을 140만 원에 사들였다. 섬에 있는 5 만 그루 소나무만 해도 1천500만 원의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그 돈 에 불하된 것은 정치적 배경이 작용했다는 등 여론이 들끓었다. 무인 도 작약도가 세간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 이 섬은 한바탕 보물찾기 소동에 휩싸인다. 섬 소유주 스즈 키가 패전 후 일본으로 돌아갈 때 3억 환어치의 금괴를 가져갈 수 없 게 되자 섬 한구석에 해골과 함께 급히 파묻고 갔다 는 어느 일본인 의 편지가 공개되면서 엄동설한에 발굴 소동이 한바탕 벌어졌다. 외부인의 출입 금지는 물론 어선조차 접근 못하게 삼엄한 경비를 펼 180

185 3억 환어치의 금괴 묻혀있다는 소문으로 엄동설한에 한바탕 보물찾기 소동 벌어져 친 가운데 극비리에 지질학자 등 전문가와 인부들만 섬에 들어갔다. 철야 작업을 하며 불도저로 이곳저곳을 파헤쳤지만 해골만 몇 기 나 왔다. 금괴는 얻지 못하고 섬만 골병들게 했다. 1963년 1월 1일자로 이 섬은 부천군에서 인천시로 편입되었다. 때 마침 한강에서 수영이 금지되자 많은 서울 사람들이 경인지역의 유 일한 해양관광지 작약도로 몰려들었다. 동인천경찰서는 해수욕 시 즌 마다 한동안 이 섬에 일종의 여름파출소인 서비스센터 를 개설하 기도 했다. 정 사복 경찰관을 상주시켜 불량배, 수배자, 음주 수영객 을 단속하고 확성기로 일기예보와 선박 안내도 했다. 인천시에서 발행한 1969년도 시정백서 에는 당시 인천의 관광지로 송도유원지, 작약도, 약사암, 문학동약수터, 월미도유원지가 게재되 었다. 연간 방문객수는 송도유원지 30만 명, 작약도 3만 5천 명, 월 미도유원지 2만 5천 명 순이었다. 작약도의 주요 관광 대상물로는 등대와 울창한 수목을, 주요 시설은 해수욕장, 호텔, 막걸리홀을 소개했다. 그러나 이것은 오기( 誤 記 )인 듯하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아주 작은 백사장이 있었기 때문에 해수 욕장은 그렇다 치더라도 호텔 시설은 갖추고 있지 않았다. 호텔커녕 여인숙 한 채도 없었다. 181

186 1963년 한강에서 수영이 금지되자 많은 서울 사람들이 경인지역의 유일한 해양관광지 작약도로 몰려들어 1959년 인천시 서곶출장소 공무원들이 작약도로 소풍 겸 당일 피서를 다녀왔다. 양은그릇과 댓병소주 몇 병을 챙겨들고 만석부두에서 배를 탔다. 바위에 걸린 물고기는 현지에서 잡은 건지 아니면 안주로 챙겨간 것인지 궁금하다.(사진 화도진도서관 심현빈 제공) 182

187 동립산업의 부도로 73년 작약도는 경매시장에 나왔다. 7만 2천700 m2(2만 2천여 평) 크기의 이 섬은 3년 후 1억 1천342만 원에 한보개 발로 넘어갔다. 쾌속관광선 2척을 운항한 덕에 여름철 하루 적게는 5천 명 많게는 1 만 명이 섬으로 들어왔다. 인천 사람치고 소싯적에 작약도에 한번 놀 러 가 보지 않은 이가 드물 정도였다. 행락객이 많다보니 한보는 불 법으로 입장료를 징수하고 무허가 방갈로와 음식점을 운영하는 등 탈법을 저질렀다. 게다가 섬에 설치된 10여 개 화장실의 인분을 10년 넘게 바닷물이 가장 높아지는 만조시각을 이용해 2, 3개월에 한 번씩 바다로 흘려 보냈다. 그야말로 인천앞바다를 똥바다 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후 유원지사업 허가 취소 등 인천시와의 법정 분쟁으로 장기간 방 치되다가 섬은 원광으로 소유권이 바뀌었다. 원광은 민자를 유치 해 2001년까지 영종도에서 작약도를 연결하는 리프트 설치, 100여 실 규모의 호텔을 비롯해 카페촌, 전망대, 해상박물관 등을 조성하는 국내 최대의 해상관광단지 개발 계획안을 내놓았다. 이 개발안은 한 뼘도 진척되지 못했고 섬은 2005년 다시 진성토건 으로 넘어갔다. 이후 작약도는 청사진만 몇 장 더 그려지고 뱃길마 저 닫히면서 행락객의 발걸음이 완전히 끊어진 채 사람들의 기억 속 에서 점점 멀어졌다. 그렇게 작약도는 아주 가까이 있지만 가장 멀리 있는 섬이 되었다. 183

188 마흔다섯 번째 이야기(2015년 8월 24일) 낙도 어린이들의 도시 나들이 낙도( 落 島 ) 의 사전적 의미는 뭍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섬 이 다. 과거의 시선은 물리적 거리와 문명의 혜택은 반비례한다고 보았 다. 정부나 기업은 외딴 섬 주민을 고립적 존재로 간주하고 그들에게 문화적 체험을 제공하기 위해 애썼다. 낙도 어린이 서울나들이 는 그 일환이었다. 90년대까지 인천 앞바다의 섬은 대부분 낙도 취급을 받았다 년 10월 초 서해상 휴전선과 맞닿은 섬, 말도(강화군 서도면) 어린이 31명은 공군이 내준 배편으로 인천에 도착한 후 3박 4일 일정으로 서울 구경을 했다. 동아일보사를 방문한 어린이들은 섬 안에 7대 밖에 없는 라디오로 방송은 들어보았지만 신문을 처음 대하고는 무척 신기해했다. 말도 에는 신문을 구독하는 집이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당시 부잣집 아이들 학교로 알려진 서울리라국교 어린이들 가정에서 분산 숙박했다. 요즈음 말하면 홈스테이인데 섬 아이들은 184

189 강화군 말도 어린이들 서울리라국교 가정에서 분산 숙박하고 그 답례로 섬에서 캔 굴 한 망태기를 전달 1983년 여름, 축현국교가 진행한 낙도 용유도 어린이 초청 견학 프로그램. 과연 도시가 아직도 섬에 비해 선진지 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185

190 연말 유행처럼 진행되었던 인기가수 디너쇼 수익금 일부는 주로 낙도 어린이들에게 전달 답례로 자신의 부모들이 말도에서 캔 굴 한 망태기를 전달했다. 낙도만 오지( 奧 地 )가 아니었다. 첩첩산중 두메산골도 오지 중의 오지 였다. 강원도 산간벽지 아이들의 서울나들이 코스에는 인천 바다 구 경이 포함되곤 했다. 74년 5월 20일 강원도 치악산 기슭 일론분교 46명 어린이들은 럭키 (현 LG) 초청으로 서울을 방문했다. 창경원, 남산공원, 방송국 등을 둘러본 후 인천에 도착해 바다와 도크를 구경했다. 생전 처음 배를 본 아이들은 배 위에 또 집이 있네 하고 연신 탄성을 질렀다. 정규 남 인천시장은 아이들에게 세계아동문학전집을 선물로 주었다. 낙도 아이들의 뭍 나들이 프로그램은 기업 이미지를 위해 주로 기업 체들이 주관했지만 특별한 인연으로 아이들을 초청하는 경우도 적 지 않았다. 67년 4월 베트남 주재 한국인기술자 2천여 명은 성금을 모아 을릉도와 진도 어린이 60명의 서울나들이를 진행했다. 아이들 이 베트남으로 위문편지를 쓴 것이 인연이 되었다. 이날 그들이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 어린이 밴드부의 우렁찬 환영을 받았다. 인천에서 서울까지 원정간 인천신흥국교 밴드부를 선두로 아이들은 중앙청까지 행진했다. 186

191 조류가 인연이 돼 인천 섬 아이들이 서울 구경을 한 적도 있다. 98년 5월 26일 천연기념물 361호로 지정된 노랑부리 백로 서식지 장봉도 의 장봉초교와 신도초교 전교생 45명은 한국조류보호협회의 후원으 로 2박 3일 동안 덕수궁, 남산타워, 용인민속촌 등을 구경한 후 전국 농업지도자연수원에서 숙박했다. 낙도와 산간벽지 아이들의 청와대 초청 방문은 정권 홍보 차원에서 좋은 소재로 활용되었기 때문에 매년 5월 거의 거르지 않고 진행되 었다. 심지어 연말에 유행처럼 진행되었던 인기가수 디너쇼는 불우 이웃돕기 라는 타이틀이 항상 붙었는데 수익금을 낙도 어린이와 소 년원에 주로 전달했다. 낙도 어린이가 불우이웃의 범주에 포함되었 던 시절의 이야기다. 7 80년대 까지 인천의 섬 학교는 창영국교 청라분교, 송현국교 세어 분교 등 처럼 대부분 도시 학교의 분교 형태였다. 본교가 분교나 농 어촌 학교 학생들을 초청해 도시 구경을 시켜주곤 했다. 사진은 83년 8월 8일부터 10일까지 축현국교 초청 용유국교 학생들 의 도시 나들이 모습이다. 30년이 지난 현재 축현초교는 학생 수가 점점 줄어 연수구 옥련동으로 이사 갔고 영종국제도시 내에 속하게 된 용유초교는 이제 무의분교를 둘 만큼 성장했다. 최근 인천일보에서 발간한 2015 인천연감 을 보면 인천지역의 분 교 상황은 다음과 같다. 대청초 소청분교, 인천공항초 신도분교, 인 천남부초 이작분교, 삼목초 장봉분교, 용현남초 자월분교, 주안남초 승봉분교, 영종초 금산분교(운북동), 용유초 무의분교, 계양초 상야 분교, 서도초(주문도) 불음분교 등이다. 187

192 마흔여섯 번째 이야기(2015년 8월 31일) 시청사 이전 그 굴곡진 역사 최근 인천시의 신청사 건립 용역과 맞물려 청사 이전 문제가 불 거져 나오고 있다. 현재의 구월동 시청사는 1985년 중구 관동에서 이전했다. 현재 중구 청사로 사용하고 있는 옛 시청사는 인구 6만8천 명이었던 시절(1932년 8월) 일제가 인구 10만 명을 포용하기 위한 시세에 맞 춰 건립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이듬해 5월 연건평 1451m2 지하 1층, 지상 2층 콘크리트 건물로 지었다. 그곳에 터를 잡은 것은 배후가 산(응봉산)으로 싸여 있고 전면은 바 다가 내려다 보여 풍수지리로 볼 때 당시 인천 제일의 명소였기 때문 이라고 전해진다. 광복 후 인천시는 그 건물을 그대로 사용했고 64년 인구 50만 명 증 가 추세에 맞춰 본관 한 층을 증축했다. 68년 1월 구제( 區 制 ) 실시 이 후 급격한 인구 증가와 80년대 인구 100만 명에 맞춰 75년 별관을 준공하는 등 공간을 넓혀왔다. 188

193 시청이 처음 들어섰을 때 주변은 온통 허허벌판으로 밤이 되면 한줄기 불 빛 조차 보기 힘들어 그러나 81년 7월 1일 직할시로 승격(인구 114만)되면서 본청 기구 가 증가함에 따라 3층 옥상에 가건물 까지 올렸지만 그 수요를 감당 하지 못했다. 이즈음 청사 이전 논의가 시작되었다. 당시 안찬희 인 천시장은 제 20회 시민의 날 (84년 7월1일) 기념사를 통해 시청사 이전에 대해 언급했다. 인구의 격증 현상에 따른 새로운 민원 행정 수요에 대비한 각종 행 정제도의 개선과 행정전산화를 위한 전산실 운영, 봉사행정 능률 제 고를 위한 새로운 시청사의 신축 등 명실상부한 임해공업도시, 관광 위락도시, 국제항구문화교육도시로 발전하기 위한 직할시로서의 면 모를 갖출 수 있도록 기반 구축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전 장소는 구월 신시가지 라고 불렸던 구월지구였다. 이 지역은 1980년대 들어 도시계획 확장에 따라 구획정리사업이 진행되던 곳 으로 농장과 과수원 등이 있는 한적한 교외지역이었다. 신청사는 83년 9월 28일에 착공하여 2년 1개월만인 85년 10월 29 일에 준공했고 12월 9일 업무를 시작했다. 부대시설로 테니스코트 4면, 배구코트 2면, 잔디축구장 등 당시 행정기관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제대로 된 스포츠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189

194 노태우 전 대통령 동서 금진호 상공부장관, 시청 이전하기 직전에 지금의 길병원사거리 부근 땅 매입 1990년대 초반의 구월동 붉은고개마을. 1985년 인천시청사가 들어서면서 철거되기 시작해 2000년 까지 보상 문제로 투쟁하면서 일부가 끝까지 남아 있었다. 시공업체는 한보건설이었다. 1997년 IMF 금융위기를 일으키게 한 장본인 중의 하나로 꼽히는 이 그룹은 결국 해체되었지만 한 때 재계 순위 14위로 인천시청을 시공할 때가 전성기라고 볼 수 있다. 시청사 내 녹화 작업과 청사 주위 미관 작업은 시민들이 헌수한 각종 나무를 활용했다. 170명이 348그루를 기증했는데 그중 수령 1백년 이 넘는 사철나무가 포함돼 화제가 되었다. 도화초등학교 초대 교장 을 지낸 정진종 옹이 가꾸던 높이 5m 직경 7m의 나무로 50톤 대형 크레인과 10명의 인부를 동원해 6시간 이상 작업 끝에 옮겨 심었다. 190

195 시청이 들어섰을 때 주변은 온통 허허벌판이었다. 밤이 되면 한줄기 불빛 조차 보기 힘든 지역이었다. 당시 지역신문은 사설을 통해 시 청 건물만 서있고 식당이나 다방, 대서소 등 각종 보조기능을 담당하 는 업소들이 없어 시청을 찾는 시민들이 당분간 불편을 감당해야 할 것 을 우려했다. 시청 이전은 부동산 투기를 불러 일으켰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동서 인 금진호 상공부장관은 재직 중이던 83년 7월 구월동 토지 653m2 를 매입했다. 2년 뒤인 85년 12월 시청사가 금 장관이 소유한 땅(지 금의 길병원사거리 부근)과 불과 300여m 떨어진 곳으로 이전함으 로써 땅 값이 급등했다. 구월동 일대가 행정 중심지로 된다는 정보를 미리 입수해 토지를 매입했다는 의혹으로 인해 한동안 여론이 들끓 기도 했다. 시청 주변에는 붉은고개마을 이 있었다. 70년대 중구 북성동 등 시 내에서 개발에 밀려온 사람들이 몰려와 살았다. 자고 나면 흙벽돌집 이 몇 채 씩 새로 생기면서 거대한 무허가 빈민촌을 형성했다. 시청이 이곳으로 들어오면서 그들은 다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붉 은 고개 주민들은 2000년까지 보상 문제를 놓고 당국과 치열한 투쟁 을 벌였다. 외지인들은 골목에 들어가기조차 힘들만큼 분위기가 살 벌했다. 다소 섬뜩한 마을 이름도 한몫했다. 마지막까지 남았던 붉은고개 자 리가 지금의 시교육청 옆 중앙공원 부근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 는 그 흔적이 다 사라졌고 구월 3동에 붉은고개공원 이라는 이름만 남겼다. 191

196 마흔일곱 번째 이야기(2015년 9월 14일) 동일방직의 미인 선발대회 가을을 맞아 전국적으로 각종 축제가 봇물 터지듯 열리고 있다. 지역 축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 지역 특산물이나 지역 관광 등 을 홍보하기 위한 향토미인 선발대회이다. 아가씨, 아줌마, 미스 등 한때 전국에서 100여 개의 미인대회가 열렸다. 한 대회 에 보통 진 선 미 3명을 선발한다면 하루에 한 명꼴로 미인 이 탄생 했다는 계산이다. 대한민국은 가히 미인대회 공화국 이란 비아냥을 듣기에 충분했다. 그 의미는 좀 다르지만 년대 여자 대학에서도 메이퀸 선발 대회 가 유행처럼 열렸다. 가장 유명했던 행사가 1908년 이화여대 창립기념일에 처음으로 개최된 이대 메이퀸 선발대회 이다. 메이퀸 은 첫 대회에서 설립자 스크랜톤 부인이 초대 여왕으로 선발된 이래, 1925년 이전까지는 주로 학교의 유공자나 존경받는 선생님들이 선 출되었다. 이 후부터는 학생들 중에서 메이퀸이 뽑혔다. 192

197 동일방직은 노무관리의 한 방편으로 사내 축제 마련, 미스동일선발대회 는 행사의 하이라이트 전문 MC까지 초청해 진행한 미스 동일 선발대회는 사내 축제였지만 만석동 일대를 들썩이게 한 행사였다. 193

198 분임조별, 기숙사 층별 등 자신이 속한 그룹의 대표를 미스동일 로 만들기 위해 그들은 함께 웃고 울었을 것 인천에서도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오래 전에 개최되었던 한 미 인대회 가 있다. 만석동에 있는 섬유업체 동일방직에서 개최한 미스 동일대회 이다. 동일방직은 업종상 여성들이 많이 근무했던 회사였 다. 일본인들이 동양 최대 라고 자랑한 동양방적 인천공장은 1934년 직조기 1천292대를 갖추고 조업을 시작했다. 하루 품삯이 당시로서 는 높은 편인 쌀 2되 정도여서 조선인들은 이 공장에 들어가길 원했 다. 개업 초기 만 13세 이상 20세까지 여성으로 약간의 일본어를 해 독할 수 있는 학력 수준의 미혼자로 한정해서 모집했다. 처음 채용된 조선인 여직공은 1천200명이었다. 보통학교(현 초등학 교) 졸업 정도였지만 일본어 구사 능력이 그리 좋지 않았다. 면직 기 술을 전수하기 위해 오사카 본사에서 일본 여성 숙련공 55명이 왔으 나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많았다. 공장 측은 일본어에 능숙한 여자고등학교 출신을 통역사원으로 채 용하기도 했다. 여직공 중에는 가정에서 벗어나 나름 자유로운 생활 을 하고자 일부러 공장에 취업한 경우도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인천 출신 영화배우 도금봉(본명 정옥순)도 이 공장에서 잠시 일했던 것으 로 전해진다. 194

199 광복 후 동일방직으로 회사명을 바꾼 이 회사는 한때 3천 명의 종업 원을 둔 회사로 성장했다. 회사 내에 기숙사를 두었고 산업체 야간학 교도 개설했다. 이러한 제도 도입으로 생산율은 크게 향상되었지만 그에 따른 여직공들의 단조로운 사내 생활, 엄격한 시간 규제 등으로 이직률이 높은 편이었다. 게다가 다른 업종의 여성인력 유입과 경쟁 업체의 성장은 이직률에 한몫 했다. 인천시사 70년대 편 에 의하면 1978년 현재 인천 관내 에는 전방(17만추), 한일방직(5만추) 등 규모가 큰 면방직공장이 있 었다. 동일방직은 노무관리의 한 방편으로 사내 축제를 마련했다. 주로 창 립 기념을 겸해 치러진 이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미스동일대회 이다. 선발 기준, 포상금 등 프로그램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여성 특유의 감성으로 인해 일 년 중 가장 관심 을 갖는 이벤트였을 것이다. 분임조별, 기숙사 층별 등 자신이 속한 그룹의 대표를 미스동일 로 만들기 위해 그들은 몇날 며칠 전략 을 짜며 함께 웃고 울었을 것이 다. 그것이 그들이 겪었을 단조로움과 무료함을 벗어 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일이었다. 산업화 시절 진정한 대한민국의 메이퀸 은 바로 그들이었다. 195

200 마흔여덟 번째 이야기(2015년 9월 21일) 동상이몽( 銅 像 異 夢 ) 맥아더 동상 매년 인천상륙작전일(9월 15일) 즈음해서 맥아더 동상은 한바 탕 홍역을 치른다. 동상을 철거하자는 의견과 존치하자는 의견이 심 하게 충돌한다. 맥아더 동상은 9 15 인천상륙작전이 거행된 지 7년이 지난 1957년 9월 15일 인천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 세워졌다. 동상 건립은 그 해 4월 내무부의 발의로 추진되었다. 건립기금은 전국 25만 명 공무 원들의 월급에서 100환씩을 갹출해 조성하기로 했다. 공무원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는지 이 결정은 전 국민 성금 형태로 바뀐다. 이승만 대통령은 경무대 관저에서 열린 임시 국무회의에서 공무원 을 대상으로 기금을 강제로 모으지 말고 국민의 자유 의지 에 따라 모금하도록 지시한다. 동상건립위원장은 이기붕 민의원 의장이 맡 는다. 당초의 건립 장소는 월미도였다. 동상 조각은 내무부의 발주로 홍익대 교수 김경승 씨가 담당했는데 그는 이 공로로 이듬해 서울시 문화상 (미술부문)을 수상했다. 196

201 당초 건립 장소는 월미도였으며 공무원 대상 기금 갹출 계획을 국민의 자유 의지 모금으로 변경 건립문은 노산 이은상 시인이 썼고, 영문 번역은 시인 변영로의 형이 자 외무부 장관을 지낸 변영태가 맡았다. 그런데 건립문 초안에 문제 가 있었는 지 제막식 3일 전에 이기붕 민의원 의장과 내무장관, 문교 장관이 국무원 사무국장실에서 급히 모여 건립문 중 일부를 삭제, 수 정했다는 기사가 보도되기도 했다. 어떤 내용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 건립문은 현재 동상 기단 아래 박혀 있다. 인천시는 동상 제막을 위해 1천여 평의 광장을 축조했고 광장에서 인천역까지 약 3km 도로의 포장을 했다. 동상 주변 조성 공사는 제막 식 하루 전에야 겨우 끝냈다. 동원된 석공과 목공은 연인원 2천500 명이었고 소요된 자재는 석재 3천재, 시멘트 700포대였다. 동상 건 립이 결정된 지 80일 만에 모든 걸 끝냈다. 1957년 9월 15일 오전 9시 20분 이승만 대통령을 제외한 대한민국 최고위급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최규남 국 방장관은 식사( 式 辭 )를 통해 우리는 두 분의 맥아더 장군을 모시고 있으니 즉 한 분은 미주에 살아계신 그 분이요 다른 한분은 움직이지 않는 이 동상인데 우리는 영원히 이 땅에 머무는 이 맥아더 장군을 존경하고 싶습니다 라고 말했다. 197

202 제일제당(현 CJ) 인천1공장에 또 다른 맥아더 동상이 한국의 은인상 이란 이름으로 이승만 대통령 동상과 나란히 서 있어 맥아더 동상 앞에서의 기념 촬영은 일종의 인증샷 이었다. 건립 초기 고( 故 ) 한희융 서곶초교 교장(오른쪽)과 교직원들이 동상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사진제공 화도진도서관 심현빈) 198

203 당초 이 제막식에는 동상의 주인공인 맥아더 장군이 가족들과 함께 참석할 예정이었다. 이를 위해 서울시는 제막식 다음날인 9월 16일 오전 10시 서울운동장에서 환영시민대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하고 정 부에서는 한국 최초의 일등건국공로훈장을 그에게 수여키로 계획을 잡았다. 그러나 77세의 맥아더는 건강상, 미국 정치 분위기상 등의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다. 같은 모양의 맥아더 동상이 경복궁 안에도 하나 더 세워졌고 이듬해 2월에는 서울 세종로에 개관한 반공회관 앞에 비슷한 모양의 동상이 설치되었다. 반공회관의 이 맥아더 동상은 우리나라 역사에 적지 않 은 영향을 미친다. 1960년 4 19 혁명 때 시위대에 의해 이 반공회관이 일부 불타는 사 건이 일어 났다. 그런데 그 앞에 있던 동상은 전혀 훼손되지 않았을 뿐 더러 그 목에 공산 침략의 격퇴자 라는 작은 현수막과 함께 화환 이 걸렸다. 미 국무부는 이 상황을 전달받고 4 19 혁명이 항간에 떠돌던 반미 데모가 아니었음을 판단했다고 한다. 물론 그 때 인천의 동상도 손상 되지 않았다. 인천에는 현재 자유공원의 동상 외에 또 하나의 맥아더 동상이 있다. 중구 신흥동 3가 인하대병원 바로 옆에 자리 잡은 제일제당(현 CJ) 인천1공장에 맥아더 입상(1.2m)이 있다. 한국의 은인상 이란 이름 으로 이승만 대통령(1.2m) 동상과 나란히 서있다. 고( 故 )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이 이들의 업적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지난 1984년 세운 것이다. 199

204 마흔아홉 번째 이야기(2015년 10월 5일) 덮어놓고 안 낳으면 거지꼴 못 면한다 이달부터 2015인구주택총조사 가 전국에서 일제히 실시된다. 지난 1925년 첫 조사를 시작으로 5년 주기로 시행해온 이래 올해로 열아홉 번째다. 조사결과는 저출산 고령화의 해법을 마련하는 기초 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대한민국은 현재 인구절벽 끄트머리에 서 있다. 여성 한 명이 평균 낳을 합계출산율은 1.2명 내외이다. OECD 국가 중 가장 낮은 출산 율과 가장 빠른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다. 2017년부터는 생산가능인구가 감소하게 되고 2030년부터는 전체 인구도 줄기 시작한다. 우리나라 인구증가율이 급격하게 떨어지게 된 것은 도가 지나친 가족계획정책이 한몫했다. 한 가구당 평균 가족이 7명을 넘어섰던 1960년대 초반 당시 인천 인 구(40만 명) 보다 큰 도시가 매년 하나씩 생겼다. 이에 위기감을 느 낀 정부는 61년 11월 가족계획을 국가 정책으로 내걸고 62년부터 본격적인 국민운동에 들어갔다. 200

205 전국재건국민운동부녀회원을 동원, 가가호호 방문해 피임을 계몽하면서 부부의 밤일 에 적극적으로 개입 77초마다 1명 씩 늘어나는 인구 문제에 경각심을 주기 위해 80년대 초 주안역 앞에 세워진 인구탑. 20여 년 전 사라졌던 인구탑이 최근 몇몇 지자체에서는 지역 인구증가 축하 이벤트용으로 다시 등장하고 있다. 201

206 가족계획 모범 도시 인천은 80년대 말 단산 가정 중 1자녀 이하 가정이 차지하는 비율이 전국에서 가장 높아 전국 183개소의 보건소에 각각 2명 씩 총 366명의 일선 지도원을 배 치하고 피임약과 피임 기구를 무상으로 배급 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1만6천 명의 전국재건국민운동부녀회원을 동원, 가가호호 방문해 피임을 계몽하면서 부부의 밤일 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인천시는 가족계획에 매우 모범적인 도시였다. 인천시 시정백서 에 따르면 1963년도부터 69년도까지 인천의 가족계획 실적을 보면 정 관시술(남성)은 2천46명이며 루프시술(여성) 28만41명에 달했다. 이의 영향으로 인천은 80년대 말 단산 가정 중 1자녀 이하(무자녀 포 함) 가정이 차지하는 비율이 전국에서 가장 높았다. 가족계획사업과 관련해 인천시사 70년대편 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인천시는 4개 보건소와 서곶보건지소, 남동가족계획상담소에 지도 원을 두고 사업에 임하고 있는데 1979년도에는 가임대상자 40여만 명 가운데 정관수술, 난관, 루우프, 월경조절, 먹는 피임약, 콘돔 등 6 개의 방법을 지도, 138,376명에게 가족계획사업을 벌였는데 사용이 편리한 콘돔이 82,509명, 먹는 피임약 44,500명으로 제일 많고 남 자가 해야 하는 정관수술은 1,099명으로 가장 적어 아직도 가족계획 의 영구적인 피임은 모두 시술을 피하고 있는 감이 없지 않다. 202

207 가족계획 슬로건은 시대에 따라 진화했다. 60년대 구호는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세 살 터울 셋만 낳고 단산하자 였 다. 70년대는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였으며 80년대는 둘도 많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로 바뀌었다. 우표, 담뱃갑, 극장 표, 통장, 주택복권 등에 빠짐없이 이 표어들을 넣게 했다. 가족계획에 협조하면 많은 혜택을 주었다. 불임시술 받으면 예비군 훈련을 빼주고 아파트 청약권까지 줬다. 고자 아파트 란 말이 등장 했을 정도다. 영세민들이 불임 수술을 할 경우 금전적 혜택을 주기 도 했다. 그 결과 80년 2.83이었던 우리나라의 합계출산율은 90년 1.59로 떨어졌다. 이는 세계적인 성공 사례로 널리 알려져 많은 나라 의 교과서에까지 실릴 정도였다. 2005년 합계출산율은 1.08로 급격하게 추락했다. 홍콩 마카오를 빼 면 세계 최저였다 쇼크 에 정부는 2006년 부랴부랴 대통령 직 속으로 저출산고령화사회위원회 를 만들어 출산장려 정책을 펼쳤 지만 현재 합계출산율은 1.21에 머물고 있다. 저출산 악몽은 현실로 다가와 2060년엔 생산가능인구와 노인 어린 이 인구가 같아진다. 이제 새로운 슬로건이 필요한 때이다. 덮어놓 고 안 낳으면 거지꼴 못 면한다. 203

208 쉰 번째 이야기 돌고 도는 로터리 조형물 예전 숭의로터리는 다른 지역에서 인천으로 들어올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 이었다. 그러다보니 로터리는 조형물이나 아치를 세워 인천의 상징이나 행사를 알리는데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사진은 항구도시의 상징으로 1965년 시비 200만 원을 들여 숭의로터리에 세 운 어민상( 漁 民 象 ) 이다. 이 동상은 78년 인천에서 열린 59회 전국체전 대비 도시미화 작업 때 철거되었다. 그 자리에 폭 25m, 높이 5m 짜리 전국 최대 규 모의 3단 분수대가 설치되었다. 어민상 은 자유공원으로 이전했다가 몇 년 후 철거되었다. 204

209 저 눈빛, 치열한 삶을 말하다 연안부두가 생기기 전 지금의 인천역 뒤편 부두와 어련( 漁 聯 :경기도 어업조합연 합회), 그리고 어시장 일대를 흔히 선창가 라고 불렀다. 생선 궤짝을 지고 가는 지게꾼, 생선 몇 마리 좌판에 내놓은 아주머니들, 한염( 韓 鹽 )해운의 소금 컨베이 어벨트 소음 등은 당시 선창의 일상적인 풍광이었다. 사진은 1960년대 말 선창 어시장 경매장의 모습이다. 그날 팔려나갈 생선을 놓 고 치열한 경매가 펼쳐지고 있다. 이른 새벽이지만 반짝이는 경매인들의 눈빛은 그 시절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대변하는 듯하다. 205

210 배 타러 가는 새 길 1973년 5월 1일 인천 연안부두가 개설되었다. 인천역 뒤편에 있던 객선부두와 어선부두가 이듬해 이전했고 제빙공장과 소금업체 등도 연안부두 쪽으로 대이 동했다. 75년에는 어시장도 개설되었다. 사진은 연안부두 가는 길을 포장하는 모습이다. 왼쪽에 제일제당(현 CJ) 공장과 굴뚝이 보이는 걸로 봐서 72년 혹은 73년 경 사진으로 파악된다. 제일제당 인 천공장은 70년 수인역 부근 신흥동 2만4천여평(8만m2) 부지에 세워져 백설표 설탕을 생산했다. 멀리 수도국산과 광성중고의 모습이 보인다. 206

211 반공가요 오디션 무대 1970년대에는 반공가요경연대회 라는 독특한 대회가 있었다. 사진은 1970년 4월 29일 예총 주관, 반공연맹 주최로 인천에서 열린 행사이다. 경연 대회답게 무대에는 트로피가 놓여있고 옆에는 심사위원들도 있다. 반공가요였지만 전자 기타, 아코디언 등의 악기로 반주를 한 듯하다. 어떤 노래가 반공가요였는지 궁금하다. 69년도 승공사상계몽회중앙본부는 반 공국민가요집 레코드를 낸 기록이 있다. 아마 거기에 수록된 노래들이 주를 이 루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문득 그날 경연대회의 심사기준이 궁금해진다. 박자? 음정? 가사전달? 아니면 전투적인 무대매너? 207

212 물맛이 곧 술맛 1960년대까지 만해도 용동 큰우물 인근 율목동, 신흥동, 내동, 창영동 주민들 이 이 우물을 길어다 먹었다. 물이 달고, 끝맛이 시원해 옛날 우물 주변에 있던 대화 등 5개의 양조장이 이 물을 길어다 술을 빚었다. 양조장들은 매일 아침저녁 으로 우마차를 동원해 물을 길어 나르곤 했다. 인천시가 60년대 중반까지 큰 우 물 바로 옆에 담배 가게를 내주는 조건으로 가게 주인한테 물 관리를 하도록 했 다는 일화도 있다. 사진은 1967년 용동 큰우물 기공식 장면이다. 현판은 인천 출신으로 당시 최고 의 서예가였던 동정( 東 庭 ) 박세림의 작품이다. 208

213 인천 화교 이수영, 미스 월드대회 2위 6, 70년대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들은 자식들을 주로 대만의 대학으로 보냈다. 인천의 당면 공장에서 일하던 화교 노동자의 딸 이수영은 1944년 인천에서 출 생해 화교학교를 다니다 13세 때 대만으로 건너가 대북국립예술전문학교 음악 과에 재학 중이었다. 18세 그녀는 1961년 미스 차이나에 뽑혔고 그해 런던에 서 열린 미스 월드대회에서 2위로 입상했다.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준( 準 )월드 미스에 뽑힌 것이다. 1962년 1월 25일 이수영은 김포공항으로 금의환향했다. 자유중국 대사 부부, 화교 200여 명, 미스 코리아 진선미 등 많은 사람들이 환영 나왔고 인천시민회 관에서는 미스 차이나의 밤이 성대하게 열렸다. 209

214 그릇 생산도 뽐낼 만한 일 예전에는 국가나 지역 홍보를 위해 자동차나 전자제품 등을 생산하는 공장을 단체로 시찰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사진은 1966년 인천 어느 부인회에서 도자( 陶 瓷 )를 생산하는 공장을 시찰하는 모습이다. 당시에는 그릇 생산도 뽐낼 만한 일이었다. 사진 속 현장은 주안에 있던 중앙도자회사 로 추측된다. 이 회사는 일제 말 민 족자본으로 세워진 회사로 종업원 360여 명이 연간 6백 톤의 흙으로 그릇, 꽃 병 등 1천만 개의 제품을 생산한 회사였다. 경영난을 겪다가 1973년 진흥기업 으로 넘어갔고 결국 90년대 초에 공장은 없어졌고 그 터에 진흥아파트가 들어 섰다. 210

215 판유리공장 롱다리 급수탑 6 25 전쟁을 겪은 후 우리나라는 유리 한 장도 만들 수 없는 빈궁한 처지가 되 었다. 운크라(유엔한국재건기구)의 도움으로 1956년 만석동 석탄공사 저탄장 자리에 인천 판유리공장 건설을 시작했다. 2월 14일 오후 2시 이승만 대통령이 장관들을 대동하고 대통령전용열차 를 타고 기공식에 참석했다. 그만큼 이 공 장은 당시 충주비료 공장, 문경시멘트 공장과 함께 3대 기간산업의 중요한 공장 이었다. 판유리공장의 롱다리 급수탑(사진 왼쪽 둥근 탑)은 만석동 공장 지대의 상징물 이었다. 해는 서쪽으로 기울면서 이 급수탑에 딱 걸린다. 노을을 배경으로 환상 적인 그림이 연출되곤 했다. 송현동, 화수동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면서 고된 하 루를 마무리했다. 이 공장은 군산으로 이전했고 이름도 한국유리(한글라스)라고 고쳤다. 현재 만석동에서는 더이상 롱다리 급수탑을 볼 수 없다. 211

216 저 다리가 내 밥줄 끊는구나 인천교는 1958년에 건설돼 송림동과 가좌동 사이 깊숙한 갯골을 이어준 다리 다. 갯고랑 너머는 개건너 라고 하던 서곳으로 지금의 서구 일대이다. 인천교 가 놓이기 전에는 송림동에서 서곳 방면으로 가려면 번작리나루 혹은 번지기 나루 라고 불리는 이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건너야 했다. 노를 젓는 사공이 돈을 받고 사람들을 건네주었다. 놓일 당시 만해도 인천의 대표적인 다리라는 뜻에서 인천교 라고 이름 지어졌다. 공사 중인 다리 옆을 노 저어 가던 사공은 저 다리 가 내 밥줄을 끊는구나. 하고 푸념했다고 한다. 사진은 1971년 6월 12일 인천교 확장 공사를 하는 장면이다. 이 다리도 주변 갯벌이 매립되면서 다리로서의 기능을 다해 1998년에 완전히 사라졌다. 212

217 오천 년 비류의 물줄기 2015년 10월 15일 인천시민의 날 인천의 정신과 뿌리가 담겨있는 문학산이 50여년 만에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군부대가 주둔하기 위해 1959년 시설 공사에 들어간 이후 지금까지 문학산 정상부는 민간인 통제구역이었다. 이곳은 1962년부터 1979년까지 미군 방공포대가 주둔했고, 그 이후에는 우리나라 공 군부대가 사용했다. 문학산 군부대는 2011년 병력을 철수했다. 사진은 군이 주둔하기 전, 기슭 개울에서 아낙들이 빨래하는 모습이다. 비록 나 무 한그루 없는 민둥산이었지만 주민들은 오랜 세월 이 산에 기대어 살았다.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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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 인천 이야기를 담은 冊 섬, 숨이 되다 2015 ㅣ 인천광역시 ㅣ 300페이지 수도권에서 한 시간 거리의 바다와 그 바다가 품은 168개 보물섬. 인천시는 이들 섬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고 관광자원으로 활성 화하기 위해, 인천만의 가치창조 의 일환으로 섬 프로젝트 를 추 진하고 있다. 이에 인천 섬이 품은 매력을 널리 알리고 인천만의 가치를 창조하고자 단행본 <섬, 숨이 되다>를 발간하였다. 동인천, 잊다 있다 2015 ㅣ 인천광역시 ㅣ 288페이지 동인천역 이라는 이름을 얻은 지 60년이 되었다. 이 책은 한 때 인천의 최고 중심지였던 동인천 지역의 소소한 이야기를 모은 기 록물이다. 역사( 歷 史 )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이 땅에 처음 기찻길 이 놓인 1899년부터 2015년 오늘까지 동인천이 만들어 낸 갖가 지 서사( 敍 事 )를 엮었다. 시간 먼지 되어 날다 2014 ㅣ 인천광역시 ㅣ 213페이지 인천시가 보유한 낡은 앨범은 인천 이야기 창고 이다. 1960년대 부터 70년대의 인천 시정, 지역 행사, 시민 생활상과 관련된 사진 중에서 이야기 로 풀어낼 만 한 것을 골랐다. 사진 밑에 적힌 촬 영 날짜와 간단한 설명을 단초 삼아 이야기를 만들어서 인천시 인 터넷신문 <i-view>에 매주 연재했다. 골목, 살아(사라)지다 2013 ㅣ 인천광역시 ㅣ 400페이지 2010년부터 2년 동안 <굿모닝 인천>은 인천의 원도심 스무 곳의 골목을 취재해 매달 연재했다. 수문통에서 백마장까지 부제처럼 동구 송현동부터 부평구 산곡동까지 인천 24개 동의 오래된 골목 의 사진과 글을 담았다.

220 주요 참고 문헌 자료 인천시사 70년대편(인천직할시) 인천시 시정백서(인천시) 1960년대 인천풍경 사진집(화도진도서관) 인천역사문화총서시리즈(인천시역사자료관) 인천이야기 100장면(조우성) 인천의 어제와 오늘 블로그(김식만)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외 <비매품> 시간 時 間 을 깨 우 다 산업화 시절 인천 이야기 발행일 2015년 10월 26일 펴낸이 인천광역시장 유정복 펴낸곳 인천광역시 대변인실(대변인 우승봉) 글쓴이 유동현(굿모닝인천 편집장) 편집디자인 인쇄 (주)웨스트코 * 이 책에 서술된 내용은 글쓴이의 견해이며 인천시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책을 받고자 하시는 분은 인천광역시 대변인실 홍보콘텐츠팀( )으로 연락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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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사진은 시간과 공간을 담고 있습니다. 때론 사진 한 장이 수많은 글자와 이야기를 대신하기도 합니다. 묵은 먼지를 털고 세상의 빛을 본 사진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인천의 현장과 사건, 혹은 사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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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스님의 이 달의 법문 성철 큰스님 기념관 불사를 회향하면서 20여 년 전 성철 큰스님 사리탑을 건립하려고 중국 석굴답사 연구팀을 따라 중국 불교성지를 탐방하였습 니다. 대동의 운강석굴, 용문석굴, 공의석굴, 맥적산석 굴, 대족석굴, 티벳 라싸의 포탈라궁과 주변의 큰 불교학과반(1년 과정) 기초교리반(6개월 과정) 매주 화요일 저녁 7시 매주 목요일 오후 2시 / 저녁 7시 5월 5일 5월 12일 5월 19일 5월 26일 어린이날 휴강 인도불교사 2 / 이거룡 교수님 인도불교사 3 / 이거룡 교수님 중국불교사 1 / 이덕진 교수님 5월 7일 5월 14일 5월 21일 5월 28일 백련암 예불의식 및 기도법 / 총무스님 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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