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도서관 출판시도서목록(CIP) 태봉국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재조명 = Revisiting the histori cal significance and value of the capital of the Kingdom of Taebong / 하일식 [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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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국립중앙도서관 출판시도서목록(CIP) 태봉국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재조명 = Revisiting the histori cal significance and value of the capital of the Kingdom of Taebong / 하일식 [ 지음]. -- 춘천 : 강원발전연구원, 2014 p. ; cm. -- ( 연구보고 ; 14-59) 참고문헌 수록 영어 요약 있음 ISBN : 비매품 궁예( 왕)[ 弓 裔 ] 후삼국 시대[ 後 三 國 時 代 ] 태봉( 국명)[ 泰 封 ] KDC DDC21 CIP

3 강원발전연구원장 발 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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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목 차 목차 - i -

6 태봉국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재조명 - ii -

7 목 차 표목차 - i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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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목 차 그림 목차 - 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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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요약문 요 약 문 - vii -

12

13 Ⅰ. 서론 Ⅰ. 서론 1) 흔히 궁예도성 이라 부르지만 정확한 표현이라 보기 어렵다. 후삼국 중 하나인 후백제의 도성은 정 확한 위치가 파악되지 않아 논란이 계속되지만 견훤도성 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는다. 한편 철원성 이라는 표현도 적절치는 않다고 생각된다. 태봉국과 관련 없는 지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보고자는 국호+ 도성, 즉 태봉도성 이라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신라의 도성을 신라 국도성 이라고 부르지는 않으며, 신라도성 이라는 표현이 더 널리 쓰인다. 이때 신라도성 은 경주 월성과 주변 공간을 가리킨다. 따라서 國 자를 뺀 태봉도성 이란 표현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 다. 1

14 태봉국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재조명 2

15 Ⅱ. 신라 말의 혼란과 호족의 등장 Ⅱ. 신라 말의 혼란과 호족의 등장 1. 정국 혼란과 지방인의 불만 3

16 태봉국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재조명 2) 三 月 熊 川 州 都 督 憲 昌 以 父 周 元 不 得 爲 王 反 叛 國 號 長 安 建 元 慶 雲 元 年 脅 武 珍 完 山 菁 沙 伐 四 州 都 督 國 原 西 原 金 官 仕 臣 及 諸 郡 縣 守 令 以 爲 己 屬 菁 州 都 督 向 榮 脫 身 走 推 火 郡 漢 山 牛 頭 歃 良 浿 江 北 原 等 先 知 憲 昌 逆 謀 擧 兵 自 守 (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 10 헌덕왕 14) 4

17 Ⅱ. 신라 말의 혼란과 호족의 등장 2. 농민 봉기와 체제 붕괴 3) 9 세기의 자연재해에 대해서는 하일식, 신라 말, 고려 초의 지방사회와 지방세력 -향촌 지배세력의 연속성에 대한 시론- 한국중세사연구 29, 2010 참조. 5

18 태봉국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재조명 < 그림 Ⅱ-1> 중국의 강우량 추이 4) Pingzhong Zhang 外, A Test of Climate, Sun, and Culture Relationships from an 1810-Year Chinese Cave Record, Vol.322(7 November 2008). 중국의 다른 장소를 분석한 비슷한 연구결과로 Gergana Yancheva 外, Influence of the intertropical convergence zone on the East Asian monsoon, Vol.445(4 January 2007) 가 있다. 6

19 Ⅱ. 신라 말의 혼란과 호족의 등장 唐 19 대왕 昭 宗 (889 ~904) 이 중흥을 이룰 때에 전쟁과 흉년의 두 재앙이 서쪽에서 멈추어 동 쪽에 와서, 나쁜 중에 더욱 나쁜 것이 없는 곳이 없었고 굶어 죽고 싸우다 죽은 시체가 들판에 즐비하였다. ( 海 印 寺 妙 吉 祥 塔 記 ) 6) 기유년에서 을묘년까지 7 년간(889 ~895) 에 천지가 온통 난리로 어지러워 들판이 전쟁터가 되 니 사람들은 방향을 잃고 행동이 짐승과 같았다. 나라가 기울어질 듯하고 재앙이 절에까지 이르 니. ( 五 臺 山 寺 吉 祥 塔 詞 ) 7) 5) 國 内 諸 州 郡 不 輸 貢 賦 府 庫 虛 竭 國 用 窮 乏 王 發 使 督 促 由 是 所 在 盗 賊 蜂 起 ( 삼국사기 권11, 신라본 기11 진성왕 3 년). 6) 唐 十 九 帝 中 興 之 際 兵 凶 二 災 西 歇 東 來 惡 中 惡 者 無 處 無 也 餓 殍 戰 骸 原 野 星 排 ( 韓 國 古 代 社 會 硏 究 所 編, 譯 註 韓 國 古 代 金 石 文 Ⅲ, 駕 洛 國 史 蹟 開 發 硏 究 所, 1992) 7) 自 酉 及 卯 一 七 年 中 方 圓 濁 亂 原 野 兵 蓬 人 忘 向 背 行 似 狼 猣 邦 垂 傾 破 災 接 蓮 宮 ( 위와 같음) 7

20 태봉국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재조명 8) 하일식, 해인사전권 ( 田 券 ) 과 묘길상탑기 ( 妙 吉 祥 塔 記 ), 역사와 현실 24, ) 고려사 권92, 王 順 式 傳 附 李 怱 言. 10) 崔 致 遠, 新 羅 壽 昌 郡 護 國 城 八 角 燈 樓 記, 東 文 選 권64. 11) 하일식, 1997 앞의 논문 참조. 8

21 Ⅱ. 신라 말의 혼란과 호족의 등장 12) 이상은 하일식, 고려 초기 지방사회의 주관과 관반 역사와 현실 34, 1999 참조.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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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Ⅲ. 궁예의 활동과 세력 성장 Ⅲ. 궁예의 활동과 세력 성장 1. 궁예의 출신 1.1. 출신에 대한 논란 13) 弓 裔 新 羅 人 姓 金 氏 考 第 四 十 七 憲 安 王 誼 靖 母 憲 安 王 嬪 御 失 其 姓 名 或 云 四 十 八 景 文 王 膺 廉 之 子 以 五 月 五 日 生 於 外 家 其 時 屋 上 有 素 光 若 長 虹 上 屬 天 日 官 奏 曰 此 兒 以 重 午 日 生 生 而 有 齒 且 光 熖 異 常 恐 將 來 不 利 於 國 家 冝 勿 養 之 王 勑 中 使 扺 其 家 殺 之 使 者 取 於 襁 褓 中 投 之 樓 下 乳 婢 竊 捧 之 誤 以 手 觸 眇 其 一 目 抱 而 逃 竄 劬 勞 養 育 ( 삼국사기 권50, 궁예전 ) 11

24 태봉국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재조명 14) 鄭 淸 柱, 弓 裔 와 豪 族 勢 力 新 羅 末 高 麗 初 豪 族 硏 究, 一 潮 閣, 1996, pp.66~67 참조. 15) 申 虎 澈, 弓 裔 의 政 治 的 性 格 - 특히 佛 敎 와의 관계를 中 心 으로, 韓 國 學 報 29, 1982, pp.34~35 참조. 16) 삼국유사 권제2 景 文 大 王 條. 17) 申 虎 澈, 위의 논문 참조. 18) 조인성, 태봉의 궁예정권, 푸른역사, 2007, pp.38~39 참조. 12

25 Ⅲ. 궁예의 활동과 세력 성장 1.2. 궁예가 출가한 세달사 나이 10여 세가 되어도 遊戯를 그치지 않자 여자 종(婢)이 일러 말하였다. 그대는 태어나자 마자 나라의 버림을 받았는데, 내가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몰래 길러 지금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 대의 거친 태도가 이러하니 반드시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이고, 그러면 그대와 내가 함께 화를 면 하지 못할 것이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궁예가 울면서 그렇다면 제가 떠나서 어머니의 걱정 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고 했다. 그리고 곧 世逹寺로 가니 지금의 興敎寺가 그곳이다. 머리를 깎 고 중이 되어 스스로 善宗이라 하였다.21) 19) 洪淳昶, 變革期의 政治와 宗敎 -後三國時代를 中心으로-, 人文硏究 2, 1982, pp.227~228 및 崔圭成, 弓裔政權의 性格과 國號의 變更, 祥明女子大學校文集 19, 1987, pp.289~290 참조. 20) 李在範, 後三國時代 弓裔政權 硏究, 혜안, 2007, pp.31~32. 21) 年十餘歳 遊戯不止 其婢告之曰 子之生也 見弃於國 子不忍竊養 以至今日 而子之狂如此 必爲人所知 則予與子俱不免 爲之奈何 弓裔泣曰 若然則吾逝矣 無爲母憂 便去世逹寺 今之興敎寺是也 祝髮爲僧 自 號善宗 ( 삼국사기 권50, 열전10 궁예). 13

26 태봉국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재조명 22) 朴 漢 卨, 後 三 國 의 成 立, 한국사 3, 국사편찬위원회, 1976, p ) 嘗 南 巡 至 興 州 浮 石 寺 見 壁 畫 新 羅 王 像 發 劒 擊 之 其 刃 迹 猶 在 ( 삼국사기 궁예전 ) 24) 興 敎 寺 在 白 蓮 山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3, 경기 풍덕군 佛 宇 ), 興 敎 寺 在 大 華 山 西 ( 신증동 국여지승람 권46, 강원 영월군 佛 宇 ). 25) 昔 新 羅 爲 亰 師 時 有 世 逵 寺 [ 今 㒷 教 寺 也 ] 之 莊 舎 在 溟 州 㮈 李 郡 [ 按 地 理 志 溟 州 無 㮈 李 郡 唯 有 㮈 城 郡 夲 㮈 生 郡 今 寧 越 又 牛 首 州 領 縣 有 㮈 霊 郡 夲 㮈 已 郡 今 剛 州 牛 首 州 今 春 以 今 言 㮈 李 郡 未 知 孰 是 ] 夲 寺 遺 僧 調 信 爲 知 莊 ( 삼국유사 권3, 탑상4 調 信 ). 14

27 Ⅲ. 궁예의 활동과 세력 성장 2. 후고구려 의 성립 2.1. 양길 휘하의 활동 26) 鄭 永 鎬, 新 羅 獅 子 山 興 寧 寺 址 硏 究, 白 山 學 報 7, 1969, p ) 鄭 淸 柱, 1996 앞의 책, pp.71~73 및 궁예의 세력 형성과 건국, 궁예의 나라 태봉, 일조각, 2008, p.22 ; 金 澤 均, 弓 裔 와 世 達 寺, 史 學 硏 究 75, 2004, p.59. 조인성, 2007 앞의 책도 여기 에 공감한 경우이다. 한편 일찍이 李 丙 燾 譯 註, 國 譯 三 國 史 記, 乙 酉 文 化 社, 1977 에서는 개풍군 풍덕으로 보았으나 근거를 제시한 경우는 아니었다. 28) 2012 년 12월 14 일, 문화재청 보도자료 : 궁예의 첫 출가지, 영월 흥교사터에서 통일신라 절터 확 인 29) 及 壯 不 拘 檢 僧 律 軒 輊 有 膽 氣 甞 赴 齋 行 次 有 烏 鳥 銜 物 落 所 持 鉢 中 視 之 牙 籖 書 王 字 則 秘 而 不 言 頗 自 負 ( 삼국사기 권50, 열전10 궁예) 30) 889 년 이후의 전국적인 농민봉기로 알려진 현상이 초적과 군도의 횡행 에서 지방세력의 자위조직 결성, 그리고 군사 지휘력을 갖춘 상급의 武 將 세력 등장 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거친다는 점은 하일 식, 1997 앞의 논문 참조. 15

28 태봉국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재조명 㑹 겨울 10월 北原의 賊帥 梁吉이 그 부하 弓裔로 하여금 100여 騎를 거느리고 북원 동쪽 부락 및 溟州 관내의 酒泉 등 10여 縣을 공략했다.32) 景福 元年 임자(892) 北原賊 梁吉에게 투탁하니 양길이 잘 대해주며 일을 맡겼다. 이윽고 군사 를 나누어 동쪽 땅을 경략하게 했는데, 이 때 雉岳山 石南寺에 나가 머물면서 酒泉, 奈城, 欝烏, 御珍 등의 縣을 습격하니 모두 항복하였다33) 31) 以眞聖王即位五年 大順二年辛亥 投竹州賊魁箕萱 箕萱侮慢不禮 善宗欝悒不自安 潜結箕萱麾下元㑹 申煊等爲友 ( 삼국사기 권50, 열전10 궁예) 32) 冬十月 北原賊帥梁吉遣其佐弓裔領百餘騎襲北原東部落及溟州管内酒泉等十餘郡縣 ( 삼국사기 권11, 신라본기11 진성왕 5년). 33) 景福元年壬子 投北原賊梁吉 吉善遇之 委任以事 遂分兵 使東略地 於是出宿雉岳山石南寺 行襲酒泉 奈城欝烏御珍等縣 皆降之 ( 삼국사기 권50, 열전10 궁예). 16

29 Ⅲ. 궁예의 활동과 세력 성장 2.2. 궁예의 자립 乾寕 원년(894)에 溟州에 들어갔는데 3,500명의 무리를 14隊로 나누어 金大, 黔毛, 盺長, 貴平, 張一 등을 舎上[舎上은 部長이다]으로 삼았다. 士卒과 더불어 즐거움과 괴로움, 힘든 일과 편안함 을 함께 하며 상과 벌을 공정하게 하고 사사롭게 하지 않으니 이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마음으로 두려워하고 끼며 将軍으로 추대하였다.36) 34) 일반적으로 御珍을 경북 울진으로 비정하고 있지만 확정짓기는 어렵다고 판단된다. 35) 冬十月 弓裔自北原入何瑟羅 衆至六百餘人 自稱將軍 ( 삼국사기 신라본기11 진성왕 8년) 36) 乾寕元年 入溟州 有衆三千五百人 分爲十四隊 金大黔毛盺長貴平張一等爲舎上[舎上謂部長也] 與士 卒同甘苦勞逸 至於予奪 公而不私 是以衆心畏愛 推爲将軍 ( 삼국사기 권50 열전10 궁예). 37) 金哲埈, 後三國時代의 支配勢力의 性格, 李相佰博士回甲紀念論叢, 乙酉文化社, 1964 ; 韓國古 代社會硏究, 서울대학교출판부, 1990, p

30 태봉국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재조명 38) 朴 漢 卨, 1976 앞의 논문, p ) 鄭 淸 柱, 1996 앞의 책, 1996, p.77 ; 조인성, 2007 앞의 책, p ) 조인성, 2007 앞의 책, pp.54~57. 41) 이는 하일식, 신라 왕실 직할지의 초기 형태에 대하여 - 청제비 ( 菁 堤 碑 ) 병진명 ( 丙 辰 銘 ) 의 정밀판 독과 분석- 東 方 學 志 132, 2005 에서 지적된 바 있다. 42) 하일식, 1999 앞의 논문 참조. 18

31 Ⅲ. 궁예의 활동과 세력 성장 2.3. 왕건의 歸 附 와 송악 도읍 43) 조인성, 2007 앞의 책, p ) 秋 八 月 弓 裔 擊 取 猪 是 狌 川 二 郡 又 破 漢 州 管 內 夫 若 鐵 圓 等 十 餘 郡 縣 ( 삼국사기 권11, 신라본기 11 진성왕 9 년). 궁예전에서는 이때 金 城 ( 강원도 금성), 철원 등을 격파하여 군세가 매우 성하니 浿 西 ( 황해도 일대) 지역의 호족들도 항복하였다고 기록하여 시간을 압축한 듯한 서술이 보인다 [ 於 是 擊 破 猪 足 狌 川 夫 若 金 城 鐡 圎 等 城 軍 聲 甚 盛 現 ( 삼국사기 권50 열전 10 궁예)]. 45) 乾 寧 元 年 善 宗 自 以 爲 衆 大 可 以 開 國 稱 君 始 設 內 外 官 職 ( 삼국사기 권50 열전 10 궁예)]. 46) 그러나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궁예가 병진년 (896) 에 철원( 지금의 東 州 이다) 에 도읍하였다 고 기 록하여 차이가 난다. 47) 삼국유사 권1, 왕력 궁예. 19

32 태봉국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재조명 48) 이재, 궁예와 철원일대의 성곽, 제3 회 태봉 학술제 궁예와 태봉의 역사적 재조명, 철원군철원 문화원, 2003 참조. 49) 삼국사기 권50 열전 10 궁예전. 50) 申 虎 澈, 後 三 國 時 代 豪 族 硏 究, 개신, 2002, pp.324~327. 이 견해에 따르면, 905년의 철원 천도 는 이들과의 연합정치를 포기한 것이며, 자신의 전제적인 권력을 확립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된다. 51) 秋 七 月 北 原 賊 帥 梁 吉 忌 弓 裔 貳 己 與 國 原 等 十 餘 城 主 謀 攻 之 進 軍 於 非 惱 城 下 梁 吉 兵 潰 走 (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 12 효공왕 4). 20

33 Ⅲ. 궁예의 활동과 세력 성장 52) 三 年 庚 申 又 命 太 祖 伐 廣 州 忠 州 唐 城 靑 州 [ 或 云 靑 川 ] 槐 壤 等 皆 平 之 ( 삼국사기 권50 열전10 궁 예) 53) 冬 十 月 國 原 菁 州 槐 壤 賊 帥 清 吉 莘 萱 等 舉 城 役 於 弓 裔 ( 삼국사기 권12 효공왕 4). 54) 天 復 元 年 辛 酉 善 宗 自 稱 王 謂 人 曰 往 者 新. 羅 請 兵 於 唐 以 破 高 句 麗 故 平 壤 舊 都 鞠 爲 茂 草 吾 必 報 其 讎 ( 삼국사기 권50 열전10 궁예). 55) 其 六 曰 朕 所 至 願 在 於 燃 燈 八 關 燃 燈 所 以 事 佛 八 關 所 以 事 天 靈 及 五 嶽 名 山 大 川 龍 神 也 後 世 姦 臣 建 白 加 減 者 切 宜 禁 止 吾 亦 當 初 誓 心 會 日 不 犯 國 忌 君 臣 同 樂 宜 當 敬 依 行 之 ( 고려사 권2 태조 26 년). 21

34 태봉국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재조명 22

35 Ⅳ. 태봉국과 도성 Ⅳ. 태봉국과 도성 1. 철원 천도와 도성 건설 56) 弓 裔 欲 移 都 到 鐡 圎 斧 壤 周 覽 山 水 (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 12 효공왕 7). 57) 弓 裔 設 百 官 依 新 羅 制 [ 所 制 官 號 雖 因 羅 制 殿 有 巽 者 ] 國 號 摩 震 年 號 武 泰 元 年 ( 삼국사기 권12, 신 라본기 12 효공왕 8). 23

36 태봉국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재조명 58) 擇 里 志 八 道 總 論, 江 原 道. 其 中 鐵 圓 府 爲 泰 封 王 弓 裔 所 都 壤 土 雖 脊 大 野 孱 山 平 闊 明 朗 在 二 江 內 亦 峽 中 一 都 會 也. 59) 李 貞 信, 弓 裔 政 權 의 成 立 과 變 遷, 藍 史 鄭 在 覺 博 士 古 稀 紀 念 東 洋 學 論 叢, 高 麗 苑, 1984, p ) 慵 齋 叢 話 ( 慶 山 大 學 校 影 印, 慵 齋 叢 話, 學 民 文 化 社, 2000, p.16). 鐵 圓 爲 弓 裔 所 據 稱 泰 封 國 至 今 有 重 城 古 基 宮 闕 階 級 春 則 花 卉 亂 發 地 危 勢 阻 而 江 河 漕 轉 爲 難 也. 61) 신성제, 弓 裔 政 權 의 軍 事 政 策 과 後 三 國 戰 爭 의 전개,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6, pp.66~68. 24

37 Ⅳ. 태봉국과 도성 香 徒 佛 銘 文 幷 序 < 그림 Ⅳ-1> 도피안사 비로자나불과 후면이 銘 文 夫 釋 迦 佛 晦 影 歸 眞 遷 儀 越 世 紀 世 掩 色 不 鏡 三 千 光 歸 一 千 八 百 六 載 耳 慨 斯 恠 斯 彫 此 金 容 來 哲 因 立 願 之 唯 願 卑 姓 室 遂 棨 椎 自 擊 覺 長 昏 換 庸 鄙 志 契 眞 源 恕 以 色 莫 朴 見 唐 天 子 咸 通 六 年 乙 酉 正 月 日 新 羅 國 漢 州 北 界 鐵 員 郡 到 彼 岸 寺 成 佛 之 時 士 62) 龍 岳 堅 淸 于 時 [ 時 士 ( 誤 ) 伯 士 ( 正 )] 覓 居 士 結 緣 一 千 五 百 餘 人 堅 金 石 志 勤 不 覺 勞 因 ( 철원 도피안사 비로자나불 ) 62) 일제강점기 이래의 기존 판독은 時 士 로 읽어 전혀 다른 내용으로 해석해왔다 (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譯 註 韓 國 古 代 金 石 文 Ⅲ, 1994). 그러나 보고자가 실물을 조사하고 검토한 결과 이는 붙여쓴 伯 士 임을 알 수 있었다. 伯 士 는 신라말 고려초의 기술직에 사용되던 職 名 이며, 홍성 용봉사 마애불 (799) 을 비롯하여 하남 교산동 건물지에서 나온 銘 文 瓦 등 많은 곳에서 보인다. 25

38 태봉국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재조명 < 그림 Ⅳ-2> 도피안사 비로자나불 명문 제7 행 伯 士 63) 신라말 고려초의 香 徒 가 갖는 사회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蔡 雄 錫, 高 麗 時 代 香 徒 의 社 會 的 性 格 과 變 化 國 史 館 論 叢 3, 1989 참조. 26

39 Ⅳ. 태봉국과 도성 64) 趙 仁 成, 弓 裔 의 勢 力 形 成 과 建 國 震 檀 學 報 75, 1993, p.23 및 정청주, 궁예의 세력 형성과 건 국, 궁예의 나라 태봉, 일조각, 2008, pp.30~31. 65) 秋 七 月 移 靑 州 人 戶 一 千 入 鐵 圓 城 爲 京 天 祐 二 年 乙 丑 入 新 京 修 葺 觀 闕 樓 臺 窮 奢 極 侈 ( 삼국사기 권50, 열전10 궁예). 66) 河 炫 綱, 高 麗 太 祖 와 開 城, 李 弘 稙 博 士 回 甲 紀 念 韓 國 史 學 論 叢, 1969, p ) 金 光 洙, 羅 末 麗 初 의 地 方 學 校 問 題, 韓 國 史 硏 究 7, 1972, p ) 丁 善 溶, 弓 裔 의 勢 力 形 成 過 程 과 都 邑 選 定, 韓 國 史 硏 究 97, 1997, pp.56~58. 69) 金 甲 童, 羅 末 麗 初 豪 族 과 社 會 變 動 硏 究, 高 麗 大 民 族 文 化 硏 究 所, 1990, pp.29~31. 27

40 태봉국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재조명 2. 태봉도성의 공간과 생활 2.1. 후삼국의 각축전 70) 浿 江 道 十 餘 州 縣 降 於 弓 裔 (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 12 효공왕 8) 71) 李 成 制, 高 麗 太 祖 代 浿 西 人 의 動 向, 高 麗 太 祖 의 國 家 經 營, 서울대학교출판부, 1996, p

41 Ⅳ. 태봉국과 도성 2.2. 도성 내의 관청과 공간 72) ( 天 祐 ) 三 年 丙 寅 裔 命 太 祖 率 精 騎 將 軍 黔 式 等 領 兵 三 千 攻 尙 州 沙 火 鎭 與 甄 萱 累 戰 克 之 裔 以 土 地 益 廣 士 馬 漸 强 意 欲 幷 呑 新 羅 呼 爲 滅 都 自 新 羅 來 附 者 並 皆 誅 殺 ( 고려사 권1, 세가1 태조1). 신라를 멸 도라 부르고 항복해오는 자를 모두 죽였다는 기록은 삼국사기 궁예전에는 904년의 일처럼 기록되 어 있다. 73) 梁 開 平 三 年 己 巳 次 于 光 州 塩 海 縣 獲 萱 遣 入 吳 越 船 而 還 裔 喜 甚 優 加 褒 獎 ( 삼국사기 권50 열전10 궁예) 74) 고려사 권1, 태조 세가. 그런데 삼국사기 권50 열전10 견훤전에는 乾 化 二 年 萱 與 弓 裔 戰 于 德 津 浦 라 하여 연도의 차이가 있다. 75) 삼국사기 권50, 열전10 궁예. 29

42 태봉국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재조명 天 祐 元 秊 甲 子 에 나라를 세워 摩 震 이라 하고 연호를 武 泰 라 했다. 비로소 廣 評 省 을 두고 관 원을 갖추었으니 匡 治 奈 [ 지금의 侍 中 ], 徐 事 [ 지금의 侍 郎 ], 外 書 [ 지금의 貟 外 郎 ] 였다. 또 兵 部, 大 龍 部 [ 倉 部 ], 壽 春 部 [ 지금의 禮 部 ], 奉 賔 部 [ 지금의 禮 賔 省 ], 義 刑 䑓 [ 지금의 刑 部 ], 納 貨 府 [ 지금의 大 府 寺 ], 調 位 府 [ 지금의 三 司 ], 内 奉 省 [ 지금의 都 省 ], 禁 書 省 [ 지금의 秘 書 省 ], 南 廂 壇 [ 지금의 将 作 監 ], 水 壇 [ 지금의 水 部 ], 元 鳳 省 [ 지금의 翰 林 院 ], 飛 龍 省 [ 지금의 大 僕 寺 ], 物 藏 省 [ 지금의 少 府 監 ] 을 두었 다. 또 史 臺 [ 여러 외국어 통역을 맡음], 植 貨 府 [ 과실수를 심고 가꿈], 障 繕 府 [ 성과 해자의 수리], 珠 淘 省 [ 器 物 만드는 일] 을 두었다. 또 正 匡, 元 輔, 大 相, 元 尹, 佐 尹, 正 朝, 甫 尹, 軍 尹, 中 尹 등의 品 職 을 두었다. 76) 76) 삼국사기 권50, 열전10 궁예. 77) 위에 인용한 삼국사기 궁예전을 기초로 작성한 것이다. 趙 仁 成, 2007 앞의 책, pp.89~99 에서 이 미 제시된 바 있다. 30

43 Ⅳ. 태봉국과 도성 표 Ⅳ 摩 震 과 신라 고려 官 府 의 대비 新 羅 摩 震 高 麗 官 府 序 列 / 官 府 官 府 所 管 業 務 (1) 廣 評 省 兵 部 (2) 兵 部 ( 兵 部 ) 掌 武 選 軍 務 儀 衛 郵 驛 之 政 倉 部 (3) 大 龍 部 倉 部 掌 戶 口 貢 賦 錢 粮 之 政 禮 部 (4) 壽 春 部 禮 部 掌 禮 儀 祭 享 朝 會 交 聘 學 校 科 擧 之 政 領 客 府 (5) 奉 賓 部 禮 賓 部 掌 賓 客 燕 亭 左 右 理 方 府 (6) 義 刑 臺 刑 部 掌 法 律 詞 訟 詳 讞 之 政 (7) 納 貨 府 大 府 寺 掌 財 貨 廩 藏 調 府 (8) 調 位 府 三 司 掌 摠 中 外 錢 穀 出 納 會 計 之 務 (9) 內 奉 省 (10) 禁 書 省 秘 書 省 掌 經 籍 祝 疏 例 作 府 (11) 南 相 壇 將 作 監 掌 土 木 營 繕 船 府 (12) 水 壇 水 部 掌 山 澤 工 匠 營 造 之 事 詳 文 師 (13) 元 鳳 省 翰 林 院 掌 制 撰 詞 命 乘 府 (14) 飛 龍 省 太 僕 司 掌 輿 馬 廐 牧 物 藏 典 (15) 物 藏 省 小 府 監 掌 工 技 寶 藏 (16) 史 臺 ( 掌 習 諸 譯 語 ) (17) 植 貨 府 ( 掌 裁 植 菓 樹 ) (18) 障 繕 府 ( 掌 修 理 城 隍 ) (19) 珠 淘 省 ( 掌 造 成 器 物 ) 78) 趙 仁 成, 태봉의 궁예정권, 푸른역사, 2007 참조. 31

44 태봉국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재조명 79) 李 在 範, 後 三 國 時 代 弓 裔 政 權 硏 究, 혜안, 2007, p ) 前 主 以 新 羅 階 官 郡 邑 之 號 悉 皆 鄙 野 改 爲 新 制 行 之 累 年 民 不 習 知 以 至 惑 亂 今 悉 從 新 羅 之 制 其 名 義 易 知 者 可 從 新 制 ( 고려사 권1 태조 원년) 32

45 Ⅳ. 태봉국과 도성 81) 出 則 常 騎 白 馬 以 綵 飾 其 鬃 尾 使 童 男 童 女 奉 幡 蓋 香 花 前 導 又 命 比 丘 二 百 餘 人 梵 唄 隨 後 ( 삼국사기 권50 열전 10 궁예) 82) 고려사 권80 食 貨 2 戶 口 인종12 년조. 83) 徭 煩 賦 重 人 耗 土 虛 而 猶 宮 室 宏 壯 不 遵 制 度 勞 役 不 止 怨 讟 遂 興 ( 고려사 권1 태조 원년) 84) 고려사 권1 태조 원년. 33

46 태봉국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재조명 85) 尙 州 賊 帥 阿 字 盖 遣 使 來 附 王 命 備 儀 迎 之 習 儀 於 毬 庭 文 武 官 俱 就 班 廣 評 郞 中 柳 問 律 與 直 省 官 朱 瑄 劼 爭 列 ( 고려사 권1 태조 원년) 86) 한국역사연구회, 고려의 황도 개경, 창작과비평사,2002, p.53, ) 先 是 有 商 客 王 昌 瑾 自 唐 來 寓 鐵 圓 市 廛 ( 삼국사기 권50 열전 10 궁예). 34

47 Ⅳ. 태봉국과 도성 88) 加 以 饑 饉 荐 臻 疾 疫 仍 起 室 家 棄 背 道 殣 相 望 一 匹 細 布 直 米 五 升 ( 고려사 권1 태조1 8 월 신해) 89) 鄕 校 在 府 南 三 里 本 高 麗 太 祖 仕 弓 裔 時 舊 宅 垣 墻 遺 址 尙 存 (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卷 47, 江 原 道 鐵 原 都 護 府 學 校 條 ) 90) 於 是 諸 將 扶 擁 而 出 黎 明 坐 於 積 穀 之 上 行 君 臣 之 禮 令 人 馳 且 呼 曰 王 公 已 擧 義 旗 矣 裔 聞 之 驚 駭 亡 去 ( 고려사 권92 열전5 홍유). 35

48 태봉국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재조명 36

49 Ⅴ. 정리 및 전망 Ⅴ. 정리 및 전망 37

50 태봉국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재조명 38

51 참고문헌 참고문헌 [ 단행본 ] 李 基 東, 新 羅 骨 品 制 社 會 와 花 郞 徒, 一 潮 閣, 金 甲 童, 羅 末 麗 初 豪 族 과 社 會 變 動 硏 究, 高 麗 大 民 族 文 化 硏 究 所, 金 哲 埈, 韓 國 古 代 社 會 硏 究, 서울대학교출판부, 李 基 白, ( 新 修 版 ) 韓 國 史 新 論, 一 潮 閣, 鄭 淸 柱, 新 羅 末 高 麗 初 豪 族 硏 究, 一 潮 閣, 李 基 東, 新 羅 社 會 史 硏 究, 一 潮 閣, 申 虎 澈, 後 三 國 時 代 豪 族 硏 究, 개신, 신성재, 弓 裔 政 權 의 軍 事 政 策 과 後 三 國 戰 爭 의 전개,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李 在 範, 後 三 國 時 代 弓 裔 政 權 硏 究, 혜안, 조인성, 태봉의 궁예정권, 푸른역사, 김용선 편, 궁예의 나라 태봉, 일조각, [ 논문] 金 哲 埈, 後 三 國 時 代 의 支 配 勢 力 의 性 格, 李 相 佰 博 士 回 甲 紀 念 論 叢, 乙 酉 文 化 社, 1964 鄭 永 鎬, 獅 子 山 興 寧 寺 址 硏 究, 白 山 學 報 7, 朴 漢 卨, 後 三 國 의 成 立, 한국사 3, 국사편찬위원회, 申 虎 澈, 弓 裔 의 政 治 的 性 格 - 특히 佛 敎 와의 관계를 中 心 으로, 韓 國 學 報 29, 金 甲 童, 高 麗 建 國 期 의 淸 州 勢 力 과 王 建, 韓 國 史 硏 究 48, 鄭 淸 柱, 弓 裔 와 豪 族 勢 力, 全 北 史 學 10, 洪 承 基, 後 三 國 의 分 裂 과 王 建 에 의한 統 一, 韓 國 史 市 民 講 座 5, 一 潮 閣, 趙 仁 成, 弓 裔 의 勢 力 形 成 과 建 國, 震 檀 學 報 75,

52 태봉국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재조명 趙 仁 成, 태봉, 한국사 11, 국사편찬위원회, 丁 善 溶, 弓 裔 의 勢 力 形 成 過 程 과 都 邑 選 定, 韓 國 史 硏 究 97, 하일식, 해인사전권 ( 田 券 ) 과 묘길상탑기 ( 妙 吉 祥 塔 記 ), 역사와 현실 24, 하일식, 고려 초기 지방사회의 주관과 관반 역사와 현실 34, 張 俊 植, 世 達 寺 의 位 置 에 대한 考 察, 文 化 史 學, 金 澤 均, 弓 裔 와 世 達 寺, 史 學 硏 究 75, 조법종, 후백제와 태봉관련 연구동향과 전망, 新 羅 文 化 27, 황선영, 新 羅 下 代 景 文 王 家 의 王 位 繼 承 과 政 治 的 推 移, 新 羅 文 化 27, 이인재, 나말여초 사회변동과 후삼국, 한국중세사연구 29, 하일식, 신라 말, 고려 초의 지방사회와 지방세력 -향촌 지배세력의 연속성에 대 한 시론-, 한국중세사연구 29,

53 Abstract Abstract Revisiting the Historical Significance and Value of the Capital of the Kingdom of Taebong Ha Il Sik 41

54 Revisiting the Historical Significance and Value of the Capital of the Kingdom of Taebong 42

55 궁예, 태봉관련 주요 사료 궁예, 태봉 관련 주요 사료 1. 삼국사기 1) 신라본기 * 양길 휘하의 활동 년( 삼국사기 권11, 신라본기 11 진성왕 5 년) 冬 十 月 北 原 賊 帥 梁 吉 遣 其 佐 弓 裔 領 百 餘 騎 襲 北 原 東 部 落 及 溟 州 管 内 酒 泉 等 十 餘 郡 縣 겨울 10월에 북원 도적의 우두머리 양길이 그 부하 궁예로 하여금 기병 백여 명을 거 느리고 북원 동쪽 부락과 명주 관내 주천 등 10 여 군현을 습격하게 하였다. * 궁예의 독립, 장군을 칭함 년( 삼국사기 권11, 신라본기 11 진성왕 8 년) 冬 十 月 弓 裔 自 北 原 入 何 瑟 羅 衆 至 六 百 餘 人 自 稱 將 軍 겨울 10월에 궁예가 북원에서 하슬라로 들어오니 무리가 6 백 명에 이르렀고, 스스로 장군이라 일컬었다 년( 삼국사기 권11, 신라본기 11 진성왕 9 년) 秋 八 月 弓 裔 擊 取 猪 是 狌 川 二 郡 又 破 漢 州 管 內 夫 若 鐵 圓 等 十 餘 郡 縣 가을 8 월, 궁예가 저족( 지리지, 열전 등에서는 猪 足 ), 성천의 두 군을 습격하여 빼앗고, 또 한주 관내의 부약, 철원 등 10 여 군현을 깨뜨렸다. * 송악에 도읍함 년(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 12 효공왕 2 년) 秋 七 月 弓 裔 取 浿 西 道 及 漢 山 州 管 内 三 十 餘 城 遂 都 於 松 岳 郡 가을 7월에 궁예가 패서도와 한산주 관내의 30 여 개 성을 취하고, 마침내 송악군에 도 읍하였다. 43

56 태봉국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재조명 년(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 12 효공왕 3 년) 등 秋 七 月 北 原 賊 帥 梁 吉 忌 弓 裔 貳 己 與 國 原 等 十 餘 城 主 謀 攻 之 進 軍 於 非 惱 城 下 梁 吉 兵 潰 走 가을 7 월에 북원의 도적 우두머리인 양길이 궁예가 자신을 배신한 것을 미워해, 국원 10 여 곳의 성주들과 모의하여 그를 공격하고자 비뇌성 아래까지 진군하였으나, 양길 의 병사가 패배하여 도주하였다 년(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 12 효공왕 4 년) 冬 十 月 國 原 菁 州 槐 壤 賊 帥 清 吉 莘 萱 等 舉 城 役 於 弓 裔 겨울 10 월에 국원 청주 괴양의 도적 우두머리인 청길과 신훤 등이 성을 들어 궁예에 게 투항하였다. * 스스로 왕을 칭함 년(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 12 효공왕 5 년) 弓 裔 稱 王 궁예가 왕을 칭하였다. * 도읍을 옮기기 위해 철원 부양 등의 산수를 살핌 년(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 12 효공왕 7 년) 弓 裔 欲 移 都 到 鐡 圎 斧 壤 周 覽 山 水 궁예가 도읍을 옮기고자 철원과 부양으로 가 산수를 두루 살폈다. * 백관을 설치하고 국호와 연호를 제정 년(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 12 효공왕 8 년) []: 세주 弓 裔 設 百 官 依 新 羅 制 [ 所 制 官 號 雖 因 羅 制 殿 有 巽 者 ] 國 號 摩 震 年 號 武 泰 元 年 궁예가 백관을 설치하였는데, 신라의 제도에 의거한 것이다. [ 관호를 정한 바는 비록 신라의 제도에 기인하지만, 전각의 이름은 다르다 ( 巽 異 ).] 국호를 마진, 연호를 무태 원 년이라 하였다. ( 같은 해) 浿 江 道 十 餘 州 縣 降 於 弓 裔 패강도 ( 열전에서는 浿 西 道 ) 의 10 여 주현이 궁예에게 항복하였다. 44

57 궁예, 태봉관련 주요 사료 * 철원으로 도읍을 옮김 년(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 12 효공왕 9 년) 秋 七 月 弓 裔 移 都 於 鐡 圎 가을 7 월에 궁예가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 ( 같은 해) 八 月 弓 裔 行 兵 侵 奪 我 邉 邑 以 至 竹 嶺 東 北 王 聞 疆 埸 日 削 甚 患 然 力 不 能 禦 命 諸 城 主 慎 勿 出 戰 堅 壁 固 守 8 월에 궁예가 병사를 보내 우리( 신라) 변경 읍락을 침탈하여 죽령 동북에까지 이르렀 다. 왕이 나라의 강역이 나날이 줄어든다는 소식을 듣고 깊이 걱정하였으나, 힘으로 막 을 수 없었다. 여러 성주에게 명하여 신중을 기하여 출전하지 말고, 견고히 수비하도록 하였다 년(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 12 효공왕 13 년) 夏 六 月 弓 裔 命 將 領 兵 舡 降 珍 㠀 郡 又 破 臯 夷 㠀 城 여름 6 월에 궁예가 장군( 왕건) 에게 명하여 병사와 선박을 이끌고 진도군의 항복을 받 고, 또 고이도성을 깨뜨렸다 년(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 12 효공왕 14 년) 甄 萱 躬 率 歩 騎 三 千 圍 羅 州 城 經 旬 不 解 弓 裔 發 水 軍 襲 撃 之 萱 引 軍 而 退 견훤이 직접 보병 기병 3천을 이끌고 나주성을 포위하여 열흘이 지나도록 풀지 않았 다. 궁예가 수군을 보내어 이를 습격하니 견훤이 군사를 끌고 후퇴하였다. * 국호를 태봉으로, 연호는 수덕만세로 고침 년(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 12 효공왕 15 년) 弓 裔 改 國 號 泰 封 年 號 水 徳 萬 歳 궁예가 국호를 태봉으로 고치고 연호를 수덕만세라 하였다. * 연호를 정개로 고침 년(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 12 신덕왕 3 년) 弓 裔 改 水 徳 萬 歳 爲 政 開 元 年 궁예가 수덕만세를 고쳐 정개 원년이라 하였다. 45

58 태봉국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재조명 * 궁예 피살, 왕건 즉위 년(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 12 경명왕 2 년) 夏 六 月 弓 裔 麾 下 人 心 忽 變 推 戴 太 祖 弓 裔 出 奔 爲 下 所 殺 太 祖 即 位 稱 元 여름 6 월에 궁예 휘하 사람들의 마음이 홀연히 변하여 태조( 왕건) 을 추대하였다. 궁예 는 도망하여 달아나다 아랫사람에게 살해되었다. 태조가 즉위하여 원년으로 하였다. 2) 연표( 삼국사기 권31, 연표 하) 西 曆 干 支 中 國 新 羅 高 句 麗 百 濟 891 辛 亥 大 順 二 年 眞 聖 王 六 年 弓 裔 始 起 投 賊 898 戊 午 光 化 元 年 孝 恭 王 二 年 弓 裔 都 松 嶽 郡 甄 萱 七 年 901 辛 酉 天 復 元 年 孝 恭 王 五 年 弓 裔 自 稱 王 甄 萱 十 年 902 壬 戌 二 六 弓 裔 二 年 十 一 903 癸 亥 三 七 三 十 二 904 甲 子 天 祐 元 年 哀 皇 帝 祝 八 905 乙 丑 九 四 國 號 摩 震 五 弓 裔 移 都 鐵 圓 改 武 泰 爲 聖 冊 元 年 十 三 十 四 906 丙 寅 十 六 十 五 907 丁 卯 十 一 七 十 六 908 戊 辰 十 二 八 十 七 909 己 巳 十 三 九 十 八 910 庚 午 十 四 十 十 九 911 辛 未 十 五 十 一 改 國 號 爲 泰 封 改 元 水 德 萬 歲 二 十 46

59 궁예, 태봉관련 주요 사료 912 壬 申 十 六 孝 恭 王 薨 神 德 王 景 暉 卽 位 元 年 十 二 二 十 一 913 癸 酉 二 十 三 二 十 二 914 甲 戌 三 十 四 改 元 政 開 太 祖 爲 百 船 將 軍 二 十 三 915 乙 亥 四 十 五 二 十 四 916 丙 子 五 十 六 二 十 五 917 丁 丑 六 神 德 王 薨 景 明 王 昇 英 卽 位 元 年 918 戊 寅 二 十 七 十 八 弓 裔 麾 下 人 心 忽 變 推 戴 太 祖 爲 王 弓 裔 爲 下 所 殺 太 祖 卽 位 稱 元 二 十 六 二 十 七 3) 지리지 - 漢 州 鐵 城 郡 ( 삼국사기 권35, 잡지4 지리2) 鐡 城 郡 本 髙 句 麗 鐵 圎 郡 景 徳 王 改 名 今 東 州 領 縣 二 㠉 梁 縣 本 髙 句 麗 僧 梁 縣 景 徳 王 改 名 今 僧 嶺 縣 㓛 成 縣 本 髙 句 麗 㓛 木 逹 縣 景 徳 王 改 名 今 獐 州 철성군은 본래 고구려 철원군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동주이다. 영현은 2 개이다. 동량현은 본래 고구려 승량현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승령현이 다. 공성현은 본래 고구려 공목달현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장주이다. - 高 句 麗 漢 山 州 ( 삼국사기 권37, 잡지6 지리4) []: 세주 鐵 圓 郡 [ 一 云 毛 乙 冬 非 ] 철원군 [ 모을동비라고도 한다.] 47

60 태봉국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재조명 4) 열전 * 궁예열전 ( 삼국사기 권50, 열전10 궁예) - 출생 궁예는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제47 대 헌안왕 의정이며 어머니는 헌 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 성과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또는 48대 경문왕 응렴의 아들이 라고도 한다. 5월 5 일에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때 지붕 위에 흰 빛이 있어 마치 긴 무지 개가 위로 하늘에 이어진 것 같았다. 일관이 아뢰기를 이 아이는 중오일에 태어났고, 나면서부터 이가 있었으며, 또 광염이 이상하였습니다. 아마도 장차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이오니 마땅히 그를 키우지 마십시오. 라고 하였다. 왕이 중사에게 명하여 그 집에 가서 그를 죽이도록 하였다. 사자가 포대기에서 빼앗아 그를 다락 아래로 던졌다. 유모 인 여자 종이 몰래 그를 받았는데 실수하여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한 쪽 눈을 멀게 하 였다. 안고 도망가서 힘들고 고생스럽게 길렀다. - 출가 年 十 餘 歳 遊 戯 不 止 其 婢 告 之 曰 子 之 生 也 見 弃 於 國 子 不 忍 竊 養 以 至 今 日 而 子 之 狂 如 此 必 爲 人 所 知 則 予 與 子 俱 不 免 爲 之 奈 何 弓 裔 泣 曰 若 然 則 吾 逝 矣 無 爲 母 憂 便 去 世 逹 寺 今 之 興 敎 寺 是 也 祝 髮 爲 僧 自 號 善 宗 나이가 10 여 세 되었는데, 놀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 여자 종이 그에게 일러 말하였다. 그대는 태어나면서 나라로부터 버림을 받았는데 내가( 子 予 ) 차마 그냥 두기 어려워 몰래 길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그대의 경망함이 이와 같으니 반드시 다른 사람 들에게 알려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와 그대는 함께 죽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니 어 찌하면 좋겠습니까? 궁예가 울면서 만약 그렇다면 제가 떠나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 쳐 드리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하고는 곧 세달사에 갔다. 지금( 고려) 의 흥교사이다. 머리 를 깎고 승려가 되었는데, 스스로 선종이라고 법호를 지었다. - 절에서의 생활, 신라말의 혼란 及 壯 不 拘 檢 僧 律 軒 輊 有 膽 氣 甞 赴 齋 行 次 有 烏 鳥 銜 物 落 所 持 鉢 中 視 之 牙 籖 書 王 字 則 秘 而 不 言 頗 自 負 新 羅 衰 季 政 荒 民 散 王 畿 外 州 縣 叛 附 相 半 遠 近 群 盜 蜂 起 蟻 聚 善 宗 謂 乘 亂 聚 衆 可 以 得 志 나이가 들자 승려의 계율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활달하고 담력이 있었다. 일찍이 재에 48

61 궁예, 태봉관련 주요 사료 참석하려고 가는데 까마귀가 입에 물었던 물건을 들고 있는 바리 안에 떨어뜨렸다. 그것 을 보니 상아로 만든 점대에 왕 자가 쓰여 있었다. 비밀로 하고 말을 하지 않았으나 자못 자부하였다. 신라가 쇠락한 말기에 정치가 잘못되고 백성이 흩어져 王 畿 밖의 주현 들이 배반한 것과 따르는 것이 서로 반반이다. 먼 곳과 가까운 곳에서 도적들이 무리 짓 는 것이 벌처럼 일어나고 개미처럼 모여드니, 선종은 혼란을 틈타 무리를 모으면 뜻을 이룰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다. - 기훤에게 투탁함 以 眞 聖 王 即 位 五 年 大 順 二 年 辛 亥 投 竹 州 賊 魁 箕 萱 箕 萱 侮 慢 不 禮 善 宗 欝 悒 不 自 安 潜 結 箕 萱 麾 下 元 㑹 申 煊 等 爲 友 진성왕 즉위 5년 즉 대순 2 년 신해(891) 에 죽주의 도적 괴수 기훤에게 의탁하였다. 기 훤이 업신여기고 잘난 체하며 예우하지 않았다. 선종은 속이 답답하고 스스로 불안해져 서 몰래 기훤의 휘하의 원회, 신훤 등과 결연하여 친구가 되었다. - 양길에게 투탁함 景 福 元 年 壬 子 投 北 原 賊 梁 吉 吉 善 遇 之 委 任 以 事 遂 分 兵 使 東 略 地 於 是 出 宿 雉 岳 山 石 南 寺 行 襲 酒 泉 奈 城 欝 烏 御 珍 等 縣 皆 降 之 경복 원년 임자년 (892) 에 북원의 도적 양길에게 의탁하였다. 양길이 그를 잘 대우하여 일을 맡겼다. 드디어 ( 궁예에게 ) 병사를 나누어 주어 동쪽으로 땅을 공략하도록 하였다. 이에 치악산 석남사에 나가 머물면서 주천, 나성, 울오, 어진 등의 현을 돌아다니면서 습 격하여 모두 그곳들을 항복시켰다. - 세력을 키우고 독립함 []: 세주 乾 寕 元 年 入 溟 州 有 衆 三 千 五 百 人 分 爲 十 四 隊 金 大 黔 毛 盺 長 貴 平 張 一 等 爲 舎 上 [ 舎 上 謂 部 長 也 ] 與 士 卒 同 甘 苦 勞 逸 至 於 予 奪 公 而 不 私 是 以 衆 心 畏 愛 推 爲 将 軍 건녕 원년(894) 에 명주에 들어갔다. 거느린 무리가 3천 5 백 명이었다. 무리를 나누어 14 개 부대로 하고, 금대, 검모, 흔장, 귀평, 장일 등을 사상으로 삼았다.[ 사상은 부장을 말한다.] 사졸과 더불어 즐거움과 괴로움, 어려움과 편안함을 함께 하였고, 상벌에 있어 서 공정히 하고 사사로움이 없었다. 이로써 뭇 사람들이 마음으로 두려워하고 사랑하여 추대하여 장군으로 삼았다. 49

62 태봉국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재조명 - 철원으로 진출, 내외의 관직을 설치, 왕건 귀부, 영역( 세력) 확장 於 是 擊 破 猪 足 狌 川 夫 若 金 城 鐡 圎 等 城 軍 聲 甚 盛 現 西 賊 宼 來 降 者 衆 多 善 宗 自 以 爲 衆 大 可 以 開 國 稱 君 始 設 内 外 官 職 我 太 祖 自 松 岳 郡 來 投 便 授 鐡 圎 郡 太 守 三 年 丙 辰 攻 取 僧 嶺 臨 江 兩 縣 四 年 丁 巳 仁 物 縣 降 (895 년) 이에 저족, 성천, 부약, 금성, 철원 등의 성을 격파하니 군세가 매우 왕성하였 다. 패서( 現 浿 ) 의 도적들 중 와서 항복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선종 스스로 무리가 많 아졌으니 나라를 세우고 임금을 칭할 수 있다고 하여, 처음으로 서울과 지방의 관직을 설치하였다. 우리 태조( 왕건) 가 송악군으로부터 와서 의탁하니 곧 철원군 태수를 주었다. ( 건녕) 3 년 병진(896 년) 에 승령현과 임강현 두 현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4 년 정사(897 년) 에 인물현이 항복하였다. - 송악군에 도읍, 양길 격파, 팔관회 등 善 宗 謂 松 岳 郡 漢 北 名 郡 山 水 竒 秀 遂 定 以 爲 都 撃 破 孔 巖 黔 浦 穴 口 等 城 時 梁 吉 猶 在 北 原 取 國 原 等 三 十 餘 城 有 之 聞 善 宗 地 廣 民 衆 大 怒 欲 以 三 十 餘 城 勁 兵 襲 之 善 宗 潜 認 先 撃 大 敗 之 光 化 元 年 戊 午 春 二 月 葺 松 岳 城 以 我 太 祖 爲 精 騎 大 監 伐 楊 州 見 州 冬 十 一 月 始 作 八 關 㑹 (897 년) 선종은 송악군이 한강 이북의 이름난 군으로 산수가 기이하고 빼어나다고 생 각하여 마침내 정하여 도읍으로 삼았다. 공암과 검포, 혈구 등의 성을 공격하여 깨뜨렸 다. 그때 양길은 여전히 북원에 있으면서 국원 등 30 여 성을 차지하고 있었다. 선종의 땅이 넓고 백성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30여 성의 강한 군사로써 그를 습격 하려고 하였다. 선종이 몰래 알고서 먼저 공격하여 그를 크게 패배시켰다. 광화 원년 무 오(898) 봄 2 월에 송악성을 수리하였다. 우리 태조를 정기대감으로 삼아 양주와 견주를 치도록 하였다. 겨울 11 월에 팔관회를 시작하였다. - 왕을 칭함, 고구려의 원수를 갚겠다 []: 세주 三 年 庚 申 又 命 太 祖 伐 廣 州 忠 州 唐 城 靑 州 [ 或 云 靑 川 ] 槐 壤 等 皆 平 之 以 功 授 太 祖 阿 湌 之 職 天 復 元 年 辛 酉 善 宗 自 稱 王 謂 人 曰 往 者 新 羅 請 兵 於 唐 以 破 高 句 麗 故 平 壤 舊 都 鞠 爲 茂 草 吾 必 報 其 讎 蓋 怨 生 時 見 棄 故 有 此 言 嘗 南 巡 至 興 州 浮 石 寺 見 壁 畫 新 羅 王 像 發 劒 擊 之 其 刃 迹 猶 在 ( 광화) 3 년 경신(900 년) 또 태조에게 명하여 광주, 충주, 당성, 청주[ 혹은 청천이라고도 한다.], 괴양을 치게 하여 그곳들을 모두 평정하였다. 공으로 태조에게 아찬의 직위를 주 었다. 천복 원년 신유(901 년) 에 선종이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지난날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깨뜨렸다. 그런 까닭에 평양 옛 도읍 50

63 궁예, 태봉관련 주요 사료 은 무성한 잡초로 꽉 차 있다. 내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 고 하였다. 아마도 태어나 자마자 버림받은 것을 원망하였으므로 이런 말을 한 듯하다. 일찍이 남쪽으로 순행하여 흥주 부석사에 이르러 벽에 그려진 신라왕의 초상을 보고 칼을 뽑아 그것을 쳤다. 그 칼 자욱이 지금도 남아 있다. - 국호 마진, 연호 무태, 여러 관서와 관품을 마련 []: 세주 天 祐 元 年 甲 子 立 國 號 爲 摩 震 年 號 爲 武 泰 始 置 廣 評 省 備 員 匡 治 奈 [ 今 侍 中 ] 徐 事 [ 今 侍 郎 ] 外 書 [ 今 貟 外 郎 ] 又 置 兵 部 大 龍 部 [ 謂 倉 部 ] 壽 春 部 [ 今 禮 部 ] 奉 賔 部 [ 今 禮 賔 省 ] 義 刑 䑓 [ 今 刑 部 ] 納 貨 府 [ 今 大 府 寺 ] 調 位 府 [ 今 三 司 ] 内 奉 省 [ 今 都 省 ] 禁 書 省 [ 今 秘 書 省 ] 南 廂 壇 [ 今 将 作 監 ] 水 壇 [ 今 水 部 ] 元 鳳 省 [ 今 翰 林 院 ] 飛 龍 省 [ 今 大 僕 寺 ] 物 藏 省 [ 今 少 府 監 ] 又 置 史 臺 [ 掌 習 諸 譯 語 ] 植 貨 府 [ 掌 栽 植 菓 樹 ] 障 繕 府 [ 掌 修 理 城 隍 ] 珠 淘 省 [ 掌 造 成 器 物 ] 又 設 正 匡 元 輔 大 相 元 尹 佐 尹 正 朝 甫 尹 軍 尹 中 尹 䓁 品 職 천우 원년 갑자(904) 에 나라를 세워 이름을 마진이라고 하고, 연호를 무태라고 하였다. 비로소 광평성을 설치하고 관원을 두었는데, 광치나 [ 지금( 고려) 의 시중], 서사[ 지금의 시 랑], 외서[ 지금의 원외랑 ] 였다. 또 병부, 대룡부 [ 지금의 창부], 수춘부 [ 지금의 예부], 봉빈 부[ 지금의 예빈성 ], 의형대 [ 지금의 형부], 납화부 [ 지금의 대부사 ], 조위부 [ 지금의 삼사], 내 봉성[ 지금의 도성], 금서성 [ 지금의 비서성 ], 남상단 [ 지금의 장작감 ], 수단[ 지금의 수부], 원 봉성[ 지금의 한림원 ], 비룡성 [ 지금의 태복사 ], 물장성 [ 지금의 소부감 ] 을 두었다. 또 사대 [ 여러 외국어 통역의 학습을 맡았다.], 식화부 [ 과일나무를 심고 기르는 일을 맡았다.], 장 선부[ 성과 해자의 수리를 맡았다.], 주도성 [ 그릇을 만드는 일을 맡았다.] 을 설치하였다. 또 정광, 원보, 대상, 원윤, 좌윤, 정조, 보윤, 군윤, 중윤 등의 품직을 설치하였다. - 철원 도읍, 연호 성책, 패서 13진 등 秋 七 月 移 靑 州 人 戶 一 千 入 鐵 圓 城 爲 京 伐 取 尙 州 等 三 十 餘 州 縣 公 州 將 軍 弘 奇 來 降 天 祐 二 年 乙 丑 入 新 京 修 葺 觀 闕 樓 臺 窮 奢 極 侈 改 武 泰 爲 聖 冊 元 年 分 定 浿 西 十 三 鎭 平 壤 城 主 將 軍 黔 用 降 甑 城 赤 衣 黃 衣 賊 明 貴 等 歸 服 善 宗 以 强 盛 自 矜 意 欲 幷 呑 令 國 人 呼 新 羅 爲 滅 都 凡 自 新 羅 來 者 盡 誅 殺 之 (904 년) 가을 7월 청주 인호 1 천을 옮겨 철원성에 들이고 서울로 삼았다. 상주 등 30 여 주현을 쳐서 가졌다. 공주장군 홍기가 와서 항복하였다. 천우 2 년 을축(905 년) 에 새 서울에 들어갔다. 대궐과 누대를 수리하였는데 극히 사치하게 하였다. 무태를 성책 원년 으로 고쳤다. 패서를 13 진으로 나누어 정하였다. 평양 성주 장군 검용이 항복하였고, 증 51

64 태봉국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재조명 성의 적의, 황의의 도적 명귀 등이 귀부하였다. 선종은 강성해졌다고 스스로 자랑스러워 하였다. 병탄하려는 마음이 커서 국인들로 하여금 신라를 멸도라고 부르게 하고, 무릇 신라로부터 오는 자는 모두 죽였다. - 연호 수덕만세, 국호 태봉, 미륵불을 자칭 朱 梁 乾 化 元 年 辛 未 改 聖 冊 爲 水 德 萬 歲 元 年 改 國 號 爲 泰 封 遣 太 祖 率 兵 伐 錦 城 等 以 錦 城 爲 羅 州 論 功 以 太 祖 爲 大 阿 湌 將 軍 善 宗 自 稱 彌 勒 佛 頭 戴 金 幘 身 被 方 袍 以 長 子 爲 靑 光 菩 薩 季 子 爲 神 光 菩 薩 出 則 常 騎 白 馬 以 綵 飾 其 鬃 尾 使 童 男 童 女 奉 幡 蓋 香 花 前 導 又 命 比 丘 二 百 餘 人 梵 唄 隨 後 又 自 述 經 二 十 餘 卷 其 言 妖 妄 皆 不 經 之 事 時 或 正 坐 講 說 僧 釋 聰 謂 曰 皆 邪 說 怪 談 不 可 以 訓 善 宗 聞 之 怒 鐵 椎 打 殺 之 주량 건화 원년 신미(911 년) 에 성책을 고쳐 수덕만세 원년으로 하고, 국호를 고쳐 태 봉이라고 하였다. 태조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금성 등을 치도록 하고, 금성을 나주 로 하였다. 공을 논하여 태조를 대아찬 장군으로 삼았다. 선종이 미륵불을 자칭하였다. 머리에는 금색 두건을 쓰고 몸에는 가사를 걸쳤다. 큰아들을 청광보살, 막내아들을 신광 보살이라고 하였다. 외출하면 항상 흰 말을 탔는데 비단으로 말갈기와 꼬리를 장식하였 다. 어린 남자아이와 어린 여자아이들로 하여금 깃발, 일산, 향, 꽃을 들고 앞에서 인도 하게 하였고, 비구 2 백여 명을 시켜 범패를 부르며 뒤를 따르게 하였다. 또 스스로 경전 20 여 권을 지었다. 그 말이 요망하여 모두 도리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어떤 때에는 반 듯하게 앉아 강설하였다. 승려 석총이 모두 사악한 설과 괴이한 말로써 교훈이 될 수 없다. 고 하였다. 선종이 이를 듣고 노하여 철퇴로 그를 때려 죽였다. - 연호 정개, 부인과 아들을 죽임 三 年 癸 酉 以 太 祖 爲 波 珍 湌 侍 中 四 年 甲 戌 改 水 德 萬 歲 爲 政 開 元 年 以 太 祖 爲 百 舡 將 軍 貞 明 元 年 夫 人 康 氏 以 王 多 行 非 法 正 色 諫 之 王 惡 之 曰 汝 與 他 人 姦 何 耶 康 氏 曰 安 有 此 事 王 曰 我 以 神 通 觀 之 以 烈 火 熟 鐵 杵 撞 其 陰 殺 之 及 其 兩 兒 爾 後 多 疑 急 怒 諸 寮 佐 將 吏 下 至 平 民 無 辜 受 戮 者 頻 頻 有 之 斧 壤 鐵 圓 之 人 不 勝 其 毒 焉 ( 건화) 3 년 계유(913 년) 에 태조를 파진찬 시중으로 삼았다. 4 년 갑술(914 년) 에 수덕만 세를 고쳐 정개 원년으로 하였다. 태조를 백선장군으로 삼았다. 정명 원년(915 년) 에 부 인 강씨가 왕이 도리에 어긋난 일을 많이 행하자 정색으로 간쟁하였다. 왕이 그녀를 미 워하여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하였으니 어찌된 일인가? 라고 물었다. 강씨가 어찌 그런 일이 있었겠습니까? 라고 하니 왕은 나는 신통력으로 보았다. 라고 하였다. 뜨 52

65 궁예, 태봉관련 주요 사료 거운 불로 쇠 절구공이를 달구어 그녀의 음부를 찔러 죽였다. 그 두 아이들도 죽였다. 이후 의심이 많아지고, 화를 급하게 내어 모든 관료, 장수, 아전들과 아래로 평민에 이르 기까지 죄 없이 죽음을 당하는 경우가 매우 자주 있었다. 부양, 철원 사람들은 그 해독 을 견디지 못하였다. - 왕창근의 일화, 멸망의 징조 先 是 有 商 客 王 昌 瑾 自 唐 來 寓 鐵 圓 市 廛 至 貞 明 四 年 戊 寅 於 市 中 見 一 人 狀 貌 魁 偉 鬢 髮 盡 白 着 古 衣 冠 左 手 持 瓷 椀 右 手 持 古 鏡 謂 昌 瑾 曰 能 買 我 鏡 乎 昌 瑾 卽 以 米 換 之 其 人 以 光 俵 街 巷 乞 兒 而 後 不 知 去 處 昌 瑾 懸 其 鏡 於 壁 上 日 映 鏡 面 有 細 字 書 讀 之 若 古 詩 其 略 曰 上 帝 降 子 於 辰 馬 先 操 鷄 後 搏 鴨 於 巳 年 中 二 龍 見 一 則 藏 身 靑 木 中 一 則 顯 形 黑 金 東 昌 瑾 初 不 知 有 文 及 見 之 謂 非 常 遂 告 于 王 王 命 有 司 與 昌 瑾 物 色 求 其 鏡 主 不 見 唯 於 勃 颯 寺 佛 堂 有 鎭 星 塑 像 如 其 人 焉 王 嘆 異 久 之 命 文 人 宋 含 弘 白 卓 許 原 等 解 之 含 弘 等 相 謂 曰 上 帝 降 子 於 辰 馬 者 謂 辰 韓 馬 韓 也 二 龍 見 一 藏 身 靑 木 一 顯 形 黑 金 者 靑 木 松 也 松 岳 郡 人 以 龍 爲 名 者 之 孫 今 波 珍 湌 侍 中 之 謂 歟 黑 金 鐵 也 今 所 都 鐵 圓 之 謂 也 今 主 上 初 興 於 此 終 滅 於 此 之 驗 也 先 操 鷄 後 搏 鴨 者 波 珍 湌 侍 中 先 得 鷄 林 後 收 鴨 綠 之 意 也 宋 含 弘 等 相 謂 曰 今 主 上 虐 亂 如 此 吾 輩 若 以 實 言 不 獨 吾 輩 爲 葅 醢 波 珍 湌 亦 必 遭 害 迺 飾 辭 告 之 王 凶 虐 自 肆 臣 寮 震 懼 不 知 所 措 이보다 앞서 상인 왕창근이 당나라로부터 와서 철원 시전에 머물렀다. 정명 4년 무인 (918 년) 에 이르러 시장에서 한 사람을 보았는데, 생김새가 크고 건장하였고, 귀밑털과 머리카락은 모두 희었으며, 옛 의관을 착용하고, 왼 손에는 자기 사발을 들고 오른 손에 는 옛 거울을 들고 있었다. 창근에게 말하기를 내 거울을 살 수 있겠는가? 라고 하 니 창근이 곧 쌀을 주어 그것과 바꾸었다. 그 사람은 쌀을 거리의 거지들에게 나누어 주 었다. 이후에는 간 곳을 알 수가 없었다. 창근이 그 거울을 벽 위에 걸어두었는데, 해가 거울 표면에 비치자 가는 글자로 쓴 글 있었다. 그것을 읽어보니 옛 시 같았는데 그 대 강은 다음과 같았다.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리니 먼저 닭을 잡고 후에 오리를 움켜 쥘 것이다. 사년 중에 두 마리의 용이 나타나 한 마리는 몸을 청목 중에 숨기고 한 마리 는 모습을 흑금의 동쪽에 드러낼 것이다. 창근이 처음에는 글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 였다가 이를 보고서는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하여 드디어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담당 관 리에게 명하여 창근과 더불어 그 거울의 주인을 찾도록 하였는데 발견하지 못하였다. 오 직 발삽사 불당에 진성의 소상이 있었는데, 그 사람 같았을 뿐이다. 왕이 한참 동안 이 상함을 탄식하다가 문인 송함홍, 백탁, 허원 등에게 명하여 그를 해석하도록 하였다. 함 홍 등이 서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렸다는 것은 진한과 마 53

66 태봉국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재조명 한을 말한다. 두 마리 용이 나타나 하나는 몸을 청목 중에 감추고, 하나는 모습을 흑금 에 드러낸다고 한 구절에서 푸른 나무는 송이고 송악군 사람으로 용자를 이름으로 하고 있는 사람의 자손이니 지금 파진찬 시중을 말함일 것이다. 검은 쇠는 철이니 지금 도읍 한 철원을 말함이다. 지금 임금이 처음 이곳에서 일어났으나 마침내 이곳에서 멸망할 징 조이다. 먼저 닭을 잡고 후에 오리를 움켜쥔다는 것은 파진찬 시중이 먼저 계림을 얻고 후에 압록을 차지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송함홍 등이 서로 말하기를 지금 임금이 잔 학하고 난폭하기가 이와 같은데 우리들이 만일 이를 사실대로 아뢰었다가는 비단 우리 들만 [ 죽어서 ] 소금에 절여지는 신세가 될 뿐만 아니라 파진찬도 또한 반드시 해를 당할 것이다 하고는 이에 듣기 좋게 꾸며서 아뢰었다. 왕이 흉악하고 잔학하여 자기 멋대로 하니 신료들이 두렵고 떨려서 어찌 할 바를 몰랐다. - 왕건의 정변, 궁예 죽음 夏 六 月 將 軍 弘 述 白 玉 三 能 山 卜 沙 貴 此 洪 儒 裴 玄 慶 申 崇 謙 卜 知 謙 之 少 名 也 四 人 密 謀 夜 詣 太 祖 私 第 言 曰 今 主 上 淫 刑 以 逞 殺 妻 戮 子 誅 夷 臣 寮 蒼 生 塗 炭 不 自 聊 生 自 古 廢 昏 立 明 天 下 之 大 義 也 請 公 行 湯 武 之 事 太 祖 作 色 拒 之 曰 吾 以 忠 純 自 許 今 雖 暴 亂 不 敢 有 二 心 夫 以 臣 替 君 斯 謂 革 命 予 實 否 德 敢 効 殷 周 之 事 乎 諸 將 曰 時 乎 不 再 來 難 遭 而 易 失 天 與 不 取 反 受 其 咎 今 政 亂 國 危 民 皆 疾 視 其 上 如 仇 讎 今 之 德 望 未 有 居 公 之 右 者 况 王 昌 瑾 所 得 鏡 文 如 彼 豈 可 雌 伏 取 死 獨 夫 之 手 乎 夫 人 柳 氏 聞 諸 將 之 議 迺 謂 太 祖 曰 以 仁 伐 不 仁 自 古 而 然 今 聞 衆 議 妾 猶 發 憤 况 大 丈 夫 乎 今 羣 心 忽 變 天 命 有 歸 矣 手 提 甲 領 進 太 祖 諸 將 扶 衛 太 祖 出 門 令 前 唱 曰 王 公 已 擧 義 旗 於 是 前 後 奔 走 來 隨 者 不 知 其 幾 人 又 有 先 至 宮 城 門 鼓 噪 以 待 者 亦 一 萬 餘 人 王 聞 之 不 知 所 圖 迺 微 服 逃 入 山 林 尋 爲 斧 壤 民 所 害 弓 裔 起 自 唐 大 順 二 年 至 朱 梁 貞 明 四 年 凡 二 十 八 年 而 滅 (918 년) 여름 6 월 장군 홍술, 백옥, 삼능산, 복사귀, 이는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의 젊을 때 이름인데, 네 사람이 몰래 모의하고 밤에 태조의 사저에 와서 말하였다. 지금 임금이 부당한 형벌을 마음대로 집행하여 처자를 살육하고 신료를 죽이며, 백성 은 도탄에 빠져 스스로 삶을 편안히 할 수 없습니다. 예로부터 어리석은 임금을 폐위시 키고 지혜가 밝은 임금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큰 의리입니다. 청컨대 공께서는 탕왕과 무왕의 일을 행하십시오. 태조는 불쾌한 얼굴빛으로 그를 거절하면서 말하였다. 나 는 충직하다고 자부하여 왔는데 지금 비록 포악하고 난폭하다고 하여 감히 두 마음을 가질 수 없다. 대저 신하로서 임금을 교체하는 것은 이를 혁명이라고 하는데 나는 실로 덕이 없으니 감히 은나라, 주나라의 일을 본받을 수가 있겠는가? 여러 장수들이 말하 였다. 때는 두 번 오지 않으니 만나기는 어렵고, 잃기는 쉽습니다. 하늘이 주는 데도 54

67 궁예, 태봉관련 주요 사료 취하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습니다. 지금 정치가 어지럽고 나라가 위태로우며, 백성들이 모두 그 임금을 밉게 보기를 원수 같이 합니다. 지금 덕망이 공보다 나은 사람 이 없습니다. 하물며 왕창근이 얻은 거울의 글이 저와 같은데 어찌 가만히 물러나 숨어 있다가 포악한 군주의 손에 죽임을 당하겠습니까? 부인 유씨가 여러 장수들의 의논을 듣고 이에 태조에게 말하였다. 인으로써 불인을 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하여 왔던 것 입니다. 지금 여러 사람들의 의논을 들으니 저도 오히려 분발하게 되는데 하물며 대장부 께서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뭇 사람들의 마음이 문득 변하였으니 천명이 돌아 온 것입니다. 손수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바쳤다.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호위하고 문 을 나섰다. 앞에 있는 자들로 하여금 왕공께서 이미 의로운 깃발을 들었다! 고 외치 게 하였다. 이에 앞뒤에서 분주하게 달려와 따르는 자가 몇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또 먼저 궁성의 문에 이르러 북을 치며 떠들면서 기다리는 자들이 또한 1 만여 명이었다. 왕 이 이를 듣고 어찌할 바를 몰라 이에 미천한 차림으로 산림에 달아나 들어갔다가 곧 부 양 백성들에게 살해당하였다. 궁예는 당나라 대순 2 년(891 년) 에 일어나 주량 정명 4년 (918 년) 에 이르렀으니 무릇 28 년 만에 망하였다. * 견훤열전 ( 삼국사기 권50, 열전10 견훤) - 양길을 비장으로 삼음 是 時 北 原 賊 梁 吉 雄 强 弓 裔 自 投 爲 麾 下 萱 聞 之 遙 授 梁 吉 職 爲 裨 將 (892 년) 이때에 북원의 도적 양길이 강성하였다. 궁예가 스스로 투탁하여 휘하가 되었 다. 견훤이 이를 듣고 멀리 양길에게 관직을 주어 비장으로 삼았다. - 금성, 덕진포 등지에 궁예와 전투, 태조 즉위 開 平 四 年 萱 怒 錦 城 投 于 弓 裔 以 步 騎 三 千 圍 攻 之 經 旬 不 解 乾 化 二 年 萱 與 弓 裔 戰 于 德 津 浦 貞 明 四 年 戊 寅 鐵 圓 京 衆 心 忽 變 推 戴 我 太 祖 卽 位 개평 4 년(910 년) 견훤은 금성이 궁예에게 투항한 것에 노하여 보병과 기병 3천 명으 로써 그곳을 포위 공격하여 10 일이 지나도록 풀지 않았다. 건화 2 년(912 년) 에 견훤이 궁예와 덕진포에서 싸웠다. 정명 4 년 무인(918 년) 철원경의 민심이 갑자기 변하여 우리 태조를 추대하여 즉위시켰다. 55

68 태봉국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재조명 2. 삼국유사 1) 왕력( 삼국유사 권1, 왕력1) 後 高 麗 弓 裔 大 順 庚 戌 始 投 北 原 賊 良 吉 屯 丙 辰 都 鑯 圎 城 [ 今 東 州 也 ] 丁 巳 移 都 松 岳 郡 대순 경술(890 년) 에 처음으로 북원의 도적 양길에게 투항하였다. 병진(896 년) 에 철원 성에 도읍하였다.[ 지금의 동주이다.] 정사(897 년) 에 도읍을 송악군에 옮겼다. 辛 酉 稱 高 麗 신유(901 년) 에 고려를 칭하였다. 甲 子 改 國 號 摩 震 置 元 虎 泰 갑자(904 년) 에 국호를 고쳐 마진이라고 하고 연호를 무태( 虎 는 피휘) 라고 하였다. 甲 戌 還 鐵 圓 갑술(914 년) 에 철원으로 돌아왔다. 太 祖 戊 寅 六 月 裔 死 太 祖 即 位 于 鑯 原 京 己 夘 移 都 松 岳 郡 무인(918 년) 6 월에 궁예가 죽으니 태조가 철원경에서 즉위하였다. 기묘(919 년) 에 도 읍을 송악군으로 옮겼다. 2) 기이( 삼국유사 권2, 기이2 후백제 견훤) 唐 昭 宗 景 福 元 年 是 新 羅 眞 聖 王 在 位 六 年 嬖 竪 在 側 竊 弄 國 權 綱 紀 紊 弛 加 之 以 飢 饉 百 姓 流 移 群 盜 蜂 起 於 是 萱 竊 有 叛 心 嘯 聚 徒 侶 行 擊 京 西 南 州 縣 所 至 響 應 旬 月 之 間 衆 至 五 千 遂 襲 武 珍 州 自 王 猶 不 敢 公 然 稱 王 自 署 爲 新 羅 西 南 都 統 行 全 州 刺 史 兼 御 史 中 承 上 柱 國 漢 南 郡 開 國 公 龍 化 元 年 己 酉 也 一 云 景 福 元 年 壬 子 是 時 北 原 賊 良 吉 雄 强 弓 裔 自 投 爲 麾 下 萱 聞 之 遙 授 良 吉 職 爲 裨 將 당나라 소종 경복 원년은 신라 진성왕의 재위 6 년(892 년) 이다. 이때 왕의 총애를 받는 56

69 궁예, 태봉관련 주요 사료 신하가 곁에 있어서 국권을 농간하니 기강이 어지럽고 해이하였으며, 기근이 더해지니 백 성들은 떠돌아다니고 도둑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견훤은 남몰래 반역할 마음을 품 고 무리를 불러 모아 서울의 서남 주현들을 공격하니 가는 곳마다 호응하여 한 달 동안 에 무리는 5 천 명이나 되었다. 드디어 무진주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감히 공 공연하게 왕이라 일컫지는 못하고 스스로 신라서남도통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상주국 한남국개국공 이라고 하였다. 용기 원년 기유(889 년) 였는데, 혹은 경복 원년 임자(892 년) 라고도 한다. 이때 북원의 도적 양길의 세력이 몹시 강성하니, 궁예가 스스로 그 휘하 에 들어갔다. 견훤이 이 소식을 듣고 멀리서 양길에게 직을 주어 비장으로 삼았다. 貞 明 四 年 戊 寅 鐵 原 京 衆 心 忽 變 推 戴 我 太 祖 卽 位 정명 4 년 무인(918 년) 에 철원경의 민심이 졸지에 변하여 우리 태조( 왕건) 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3. 고려사 1) 세가( 고려사 권1, 세가1 태조1) - 왕건의 출생 太 祖 應 運 元 明 光 烈 大 定 睿 德 章 孝 威 穆 神 聖 大 王 姓 王 氏 諱 建 字 若 天 松 嶽 郡 人 世 祖 長 子 母 曰 威 肅 王 后 韓 氏 唐 乾 符 四 年 丁 酉 正 月 丙 戌 生 於 松 嶽 南 第 神 光 紫 氣 耀 室 充 庭 竟 日 盤 旋 狀 若 蛟 龍 幼 而 聽 明 睿 智 龍 顔 日 角 方 頣 廣 顙 氣 度 雄 深 語 音 洪 大 有 濟 世 之 量 태조 응운 원명 광렬 대정 예덕 장효 위목 신성 대왕의 성은 왕씨이고, 휘는 건, 자는 약천이니, 송악군 사람이다. 세조( 왕건의 부, 왕륭) 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위숙왕후 한 씨이다. 당나라 건부 4 년 정유(877) 정월 병술일에 송악 남쪽 저택에서 났다. 그때에 신 기한 광채와 자줏빛 기운이 용과 같은 형상으로 되어 방을 비치고 뜰에 가득 차서 종일 토록 서리어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지혜가 있고 용의 얼굴에 이마의 뼈는 해와 같이 둥글며 턱은 모나고 낯이 넓적하였으며 기상이 탁월하고 음성이 웅장하였으 며 세상을 건질 만한 도량이 있었다. - 신라의 혼란과 견훤, 궁예의 건국 時 新 羅 政 衰 群 賊 競 起 甄 萱 叛 據 南 州 稱 後 百 濟 弓 裔 據 高 句 麗 之 地 都 鐵 圓 國 號 泰 封 이때에 신라의 정치가 혼란하여 반란군이 각처에서 일어났다. 견훤은 반란을 일으키어 57

70 태봉국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재조명 남쪽 땅에 웅거하고 나라 이름을 후백제라 하였으며, 궁예는 고구려 옛 땅에 웅거하여 철원에 도읍하고 나라 이름을 태봉이라고 하였다. - 궁예에게 귀부 世 祖 時 爲 松 嶽 郡 沙 粲 乾 寧 三 年 丙 辰 以 郡 歸 于 裔 裔 大 喜 以 爲 金 城 太 守 世 祖 說 之 曰 大 王 若 欲 王 朝 鮮 肅 愼 卞 韓 之 地 莫 如 先 城 松 嶽 以 吾 長 子 爲 其 主 裔 從 之 使 太 祖 築 勃 禦 塹 城 仍 爲 城 主 時 太 祖 年 二 十 세조( 왕륭) 는 그때에 송악군 사찬으로 있었는데 건녕 3 년 병진(896) 에 자기 고을을 바 치고 궁예의 부하로 되니 궁예가 크게 기뻐하여 그를 금성 태수로 삼았다. 세조가 궁예 를 달래어 말하기를 대왕이 만일 조선, 숙신, 변한 지역에서 왕노릇을 하려면 먼저 송악 에 성을 쌓고 나의 맏아들을 그 성주로 삼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였다. 궁예가 그 말을 좇아서 태조를 시켜 발어참성을 쌓게 하고 이어 그를 성주로 삼았으니 그때에 태조의 나이 20 이었다. - 송악으로 도읍을 옮김, 군공을 세워 벼슬을 받음 光 化 元 年 戊 午 裔 移 都 松 嶽 太 祖 來 見 授 精 騎 大 監 三 年 庚 申 裔 命 太 祖 伐 廣 忠 靑 三 州 及 唐 城 槐 壤 等 郡 縣 皆 平 之 以 功 授 阿 粲 天 復 三 年 癸 亥 三 月 率 舟 師 自 西 海 抵 光 州 界 攻 錦 城 郡 拔 之 擊 取 十 餘 郡 縣 仍 改 錦 城 爲 羅 州 分 軍 戍 之 而 還 是 歲 良 州 帥 金 忍 訓 告 急 裔 令 太 祖 往 救 及 還 裔 問 邊 事 太 祖 陳 安 邊 拓 境 之 策 左 右 皆 屬 目 裔 亦 奇 之 進 階 爲 閼 粲 광화 원년 무오(898) 에 궁예가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을 때에 태조( 왕건) 가 와서 만나 니 궁예가 정기대감이라는 벼슬을 주었다. 광화 3 년 경신(900) 에 궁예가 태조에게 명령 하여 광주( 廣 州 ), 충주, 청주 등 3 개 주와 당성, 괴양 등 군현을 정벌하게 하여 이를 다 평정하였다. 그 공으로 하여 태조에게 아찬 벼슬을 주었다. 천복 3 년 계해(903) 3월에 태조는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로부터 광주( 光 州 ) 지경에 이르러 금성군을 공격하여 이를 함락시키고, 10 여 개의 군현을 공격하여 이를 쟁취하였다. 이어 금성을 나주로 고치고 군사를 나누어 수비하게 한 후 개선하였다. 이 해에 양주 장수 김인훈이 급히 구원을 청 하니 궁예가 태조에게 명하여 구원하러 가게 하였다. 태조가 돌아왔을 때에 궁예는 변경 방비 사업에 대한 것을 물었다. 태조가 그때 변경을 안정시키고 국경을 개척할 방책에 대하여 진술하니 좌우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게 되었고 궁예도 역시 그를 기특하 게 여겨 벼슬을 높이어 알찬으로 삼았다. 58

71 궁예, 태봉관련 주요 사료 - 철원 환도, 상주에서 견훤을 여러 번 이김 天 祐 二 年 乙 丑 裔 還 都 鐵 圓 三 年 丙 寅 裔 命 太 祖 率 精 騎 將 軍 黔 式 等 領 兵 三 千 攻 尙 州 沙 火 鎭 與 甄 萱 累 戰 克 之 裔 以 土 地 益 廣 士 馬 漸 强 意 欲 幷 呑 新 羅 呼 爲 滅 都 自 新 羅 來 附 者 並 皆 誅 殺 천우 2 년 을축(905) 에 궁예가 철원으로 환도하였다. 동 3 년 병인(906) 에 궁예가 태조 에게 명령하여 정기장군 금식 등과 함께 군사 3천을 거느리고 상주 사화진을 공격하게 하였던바 태조는 여기서 견훤과 여러 번 싸워서 이겼다. 그때 궁예는 영토가 더욱 넓어 지고 군대가 점점 강하여졌다 하여 신라를 병탄할 뜻을 품고 신라를 멸도라고 불렀으며 신라로부터 항복해 오는 자들을 다 죽이었다. - 전남 지역에서의 왕건의 활약 梁 開 平 三 年 己 巳 太 祖 見 裔 日 以 驕 虐 復 有 志 於 閫 外 適 裔 以 羅 州 爲 憂 遂 令 太 祖 往 鎭 之 進 階 爲 韓 粲 海 軍 大 將 軍 太 祖 推 誠 撫 士 威 惠 並 行 士 卒 畏 愛 咸 思 奮 勇 敵 境 讋 服 以 舟 師 次 于 光 州 塩 海 縣 獲 萱 遣 入 吳 越 船 而 還 裔 喜 甚 優 加 褒 獎 양나라 개평 3 년 기사(909) 에 태조는 궁예가 나날이 포학해지는 것을 보고 다시 지방 군무에 뜻을 두었었는데 마침 궁예가 나주 지방 방비 사업을 걱정하여 태조에게 나주로 가서 지킬 것을 명령하고 관등을 높여 한찬, 해군 대장군으로 임명하였다. 태조는 성의 껏 군사들을 무마하여 위엄과 은혜가 병행되니 사졸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사랑하여 용 기를 내어 싸울 것을 생각하였고 적들은 그 기세에 위압되었다. 태조는 수군을 거느리고 광주 염해현에 머물렀다가 오월국으로 들여보내는 견훤의 배를 노획하여 돌아오니 궁예 가 매우 기뻐하여 특별히 표창을 하였다. 又 使 太 祖 修 戰 艦 于 貞 州 以 閼 粲 宗 希 金 言 等 副 之 領 兵 二 千 五 百 往 擊 光 州 珍 島 郡 拔 之 進 次 皐 夷 島 城 中 人 望 見 軍 容 嚴 整 不 戰 而 降 及 至 羅 州 浦 口 萱 親 率 兵 列 戰 艦 自 木 浦 至 德 眞 浦 首 尾 相 銜 水 陸 縱 橫 兵 勢 甚 盛 諸 將 患 之 太 祖 曰 勿 憂 也 師 克 在 和 不 在 衆 乃 進 軍 急 擊 敵 船 稍 却 乘 風 縱 火 燒 溺 者 大 半 斬 獲 五 百 餘 級 萱 以 小 舸 遁 歸 궁예는 또 태조에게 명령하여 정주에서 전함들을 수리한 후 알찬 종희, 김언 등을 부 장으로 하여 군사 2천 5 백을 거느리고 광주 진도군을 가서 치게 하여 이를 함락시켰다. 다시 진격하여 고이도에 머무르니 성안 사람들이 이쪽 진용이 대단히 엄숙하고 씩씩한 것을 보고 싸우기도 전에 항복하였다. 다시 나주 포구에 이르렀을 때에는 견훤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전함들을 늘여 놓아 목포에서 덕진포에 이르기까지 머리와 꼬리를 서 로 물고 수륙 종횡으로 군사 형세가 심히 성하였다. 그것을 보고 우리 여러 장수들은 근 59

72 태봉국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재조명 심하는 빛이 있었다. 태조는 말하기를, 근심하지 말라.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군 대의 의지가 통일되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데 있는 것이지 그 수가 많고 적은 데 있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하면서 곧 진군하여 급히 공격하니 적선들이 조금 퇴각하였다. 이에 풍세를 타서 불을 놓으니 적들이 불에 타고 물에 빠져죽는 자가 태반이었다. 여기서 적 의 머리 5 백여 급을 베었다. 견훤은 작은 배를 타고 도망하였다. 初 羅 州 管 內 諸 郡 與 我 阻 隔 賊 兵 遮 絶 莫 相 應 援 頗 懷 虞 疑 至 是 挫 萱 銳 卒 衆 心 悉 定 於 是 三 韓 之 地 裔 有 大 半 太 祖 復 修 戰 艦 備 糧 餉 欲 留 戍 羅 州 金 言 等 自 以 功 多 無 賞 頗 觧 體 太 祖 曰 愼 勿 怠 唯 戮 力 無 貳 心 庶 可 獲 福 今 主 上 恣 虐 多 殺 不 辜 讒 諛 得 志 互 相 浸 潤 是 以 在 內 者 人 不 自 保 莫 如 外 事 征 伐 殫 力 勤 王 以 得 全 身 之 爲 愈 也 諸 將 然 之 처음에 나주 관내 여러 군들이 우리와 떨어져 있고 적병이 길을 막아 서로 응원할 수 가 없었기 때문에 자못 동요하고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견훤의 정예 부대를 격파하니 군 사들의 마음이 모두 안정되었다. 이리 하여 삼한 전체 지역에서 궁예가 절반 이상을 차지 하게 되었다. 태조는 다시 전함을 수리하고 군량을 준비하여 나주에 주둔하려고 하였다. 그때에 김언 등이 자기들의 공로는 많은데 상이 없다고 하여 해이하여졌다. 태조는 그들 에게 말하였다. 부디 해이하지 말라! 오직 힘을 다하여 복무하고 두 마음을 먹지 말아 야 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임금이 포학하여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이며 아첨하 는 자들이 득세하여 호상 음해를 일삼고 있다. 이리 하여 중앙에 있는 자들은 자기 신변 을 보전하지 못하는 형편이니 차라리 정벌에 종사하고 왕실을 위하여 진력함으로써 자기 몸을 보전하는 것이 더 낫다. 여러 장수들이 태조의 말을 그럴 듯이 여겼다. 遂 至 光 州 西 南 界 潘 南 縣 浦 口 縱 諜 賊 境 時 有 壓 海 縣 賊 帥 能 昌 起 海 島 善 水 戰 號 曰 水 獺 嘯 聚 亡 命 遂 與 葛 草 島 小 賊 相 結 候 太 祖 至 欲 邀 害 之 太 祖 謂 諸 將 曰 能 昌 已 知 我 至 必 與 島 賊 謀 變 賊 徒 雖 小 若 幷 力 合 勢 遏 前 絶 後 勝 負 未 可 知 也 使 善 水 者 十 餘 人 擐 甲 持 矛 乘 輕 舫 夜 至 葛 草 渡 口 擒 往 來 計 事 者 以 沮 其 謀 可 也 諸 將 皆 從 之 果 獲 一 小 舸 乃 能 昌 也 執 送 于 裔 裔 大 喜 乃 唾 昌 面 曰 海 賊 皆 推 汝 爲 雄 今 爲 俘 虜 豈 非 我 神 筭 乎 乃 示 衆 斬 之 태조는 드디어 광주 서남 지경 반남현 포구에 이르러 적의 경내에 첩보망을 늘여 놓 았다. 그때에 압해현 반란군의 두령 능창이 섬에서 일어났는데 수전을 잘 하여 수달이라 고 불리었다. 그는 망명한 자들을 끌어모으고 갈초도에 있는 소수의 반란군들과도 서로 연계를 맺어 태조가 오는 것을 기다려서 태조를 해치려고 하였다. 태조는 여러 장수들에 게 말하였다. 능창이 벌써 우리가 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반드시 섬의 도적들과 함께 60

73 궁예, 태봉관련 주요 사료 사변을 일으킬 것이다. 도적의 무리는 비록 적으나 만일 세력을 규합하여 우리의 앞뒤를 막는다면 승부를 알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물에 익숙한 자 10여 명으로 하여금 갑 옷을 입고 창을 들고 가벼운 배를 타고 밤에 갈초도 나룻가로 가서 음모하려고 왕래하 는 자들을 사로잡아 그 계획을 좌절시키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여러 장수들이 다 그 말을 좇아서 과연 한 척의 작은 배를 잡으니 그것이 바로 능창이었다. 태조는 그 를 잡아서 궁예에게 보냈더니 궁예가 크게 기뻐하고 능창의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 말하 기를, 해적들이 다 너를 추대하여 두령으로 하였지만 지금은 나의 포로가 되었으니 어 찌 나의 계책이 신기하지 않으냐. 하고 곧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고 그를 죽였다. - 왕건이 시중이 됨 乾 化 三 年 癸 酉 以 太 祖 屢 著 邊 功 累 階 爲 波 珍 粲 兼 侍 中 以 召 之 水 軍 之 務 盡 委 副 將 金 言 等 而 征 討 之 事 必 令 禀 太 祖 行 之 於 是 太 祖 位 冠 百 僚 然 非 素 志 且 畏 讒 不 樂 居 位 每 出 入 公 門 平 章 國 計 惟 抑 情 謹 愼 務 得 衆 心 好 賢 嫉 惡 每 見 人 被 讒 輒 悉 觧 救 有 靑 州 人 阿 志 泰 本 諂 詐 見 裔 喜 讒 乃 譖 同 州 人 笠 全 辛 方 寬 舒 等 有 司 推 之 數 年 未 決 太 祖 立 別 眞 僞 志 泰 伏 辜 衆 情 稱 快 由 是 轅 門 將 校 宗 室 勳 賢 智 計 儒 雅 之 輩 莫 不 風 靡 景 從 건화 3 년 계유(913) 에 궁예는 태조가 여러 번 변방에서 공적을 나타냈다 하여 관등을 많이 높여 파진찬으로 임명하고 시중을 겸하게 하여 소환하였다. 그리고 수군 사업은 전 부 부장인 김언 등에게 맡겼으나 정벌에 관한 일들은 반드시 태조에게 품의하여 이를 실 행하도록 하였다. 이에 태조의 지위가 백관의 우두머리로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원래 태 조의 본의가 아니요 또 한편 참소를 두려워하여 그 지위에 있기를 즐겨 하지 않았다. 이 리하여 태조는 정부에 출입하고 국정을 논의할 때에는 언제나 오직 감정을 억누르고 조 심하며 군중의 인심을 얻기에 힘쓰고 착한 이를 좋아하며 악한 자를 미워하였다. 또 누가 참소를 입는 것을 보면 반드시 그를 다 구출해 주었다. 그때에 청주 사람 아지태라는 자 가 있어 본래 아첨을 좋아하고 간사하였다. 그는 궁예가 아첨을 좋아하는 것을 보고 같은 고을 사람인 입전, 신방, 관서 등을 참소하여 해당 관리가 이 사건을 심리하였는데 수년 동안이나 판결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태조는 당장에 그 흑백을 분간하여 판결을 내리니 여러 사람들이 그것을 유쾌하게 생각하였다. 이로부터 군문의 장교, 종실, 원훈들과 지혜 있고 학식 있는 무리들이 모두 태조에게로 쏠리어 그의 뒤를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 왕건이 다시 수군을 통솔 太 祖 懼 禍 及 復 求 閫 外 四 年 甲 戌 裔 又 謂 水 軍 帥 賤 不 足 以 威 敵 乃 觧 太 祖 侍 中 使 復 領 水 軍 61

74 태봉국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재조명 就 貞 州 浦 口 理 戰 艦 七 十 餘 艘 載 兵 士 二 千 人 往 至 羅 州 百 濟 與 海 上 草 竊 知 太 祖 復 至 皆 懾 伏 莫 敢 動 太 祖 還 告 舟 楫 之 利 應 變 之 宜 裔 喜 謂 左 右 曰 我 諸 將 中 誰 可 比 擬 乎 그러나 태조는 화가 미치는 것을 두려워하여 다시 외방 벼슬을 요구하였는데 건화 4 년 갑술(914) 에 궁예 역시 수군 장수의 지위가 낮아 적을 위압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태조의 시중 벼슬을 해임하고 다시 수군을 통솔하게 하였다. 태조는 정주 포구로 가서 전함 70여 척을 수리하여 군사 2 천 명을 싣고 나주에 이르렀다. 백제 사람들과 해상의 좀도적들이 태조가 다시 온 것을 알고 다 두려워서 감히 준동하지 못하였다. 태조가 돌 아와서 해상의 경제상 이익과 임기응변할 군사 방책들을 보고하니 궁예가 기뻐하여 좌 우 신하들에게 나의 여러 장수들 중에 누가 이 사람과 비길 만하겠는가 라고 하면서 칭찬하였다. 時 裔 誣 構 叛 罪 日 殺 百 數 將 相 遇 害 者 十 有 八 九 常 自 云 我 得 彌 勒 觀 心 法 能 知 婦 人 陰 私 若 有 干 我 觀 心 者 便 行 峻 法 遂 鍜 造 三 尺 鐵 杵 有 欲 殺 者 輒 熱 之 以 撞 其 陰 烟 出 口 鼻 死 由 是 士 女 股 慄 怨 憤 日 甚 一 日 急 召 太 祖 入 內 裔 方 檢 點 誅 殺 人 籍 沒 金 銀 寶 器 床 帳 之 具 怒 目 熟 視 太 祖 曰 卿 昨 夜 聚 衆 謀 叛 何 耶 太 祖 顔 色 自 若 輾 然 而 笑 曰 烏 有 是 哉 裔 曰 卿 莫 紿 我 我 能 觀 心 所 以 知 也 我 將 入 定 以 觀 了 說 其 事 乃 合 眼 負 手 仰 天 良 久 時 掌 奏 崔 凝 在 側 佯 墜 筆 下 庭 取 之 因 趨 過 太 祖 微 語 曰 不 服 則 危 太 祖 乃 悟 曰 臣 實 謀 叛 罪 當 死 裔 大 笑 曰 卿 可 謂 直 也 卽 以 金 銀 粧 鞍 轡 賜 之 曰 卿 勿 復 誑 我 그때에 궁예는 반역이라는 죄명을 덮어씌워 하루에도 백여 명씩 죽이었다. 이리하여 장수나 정승으로서 해를 입은 자가 십상팔구에 이르렀다. 궁예는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미륵 관심법을 체득하여 부녀들의 음행까지도 알아 낼 수 있다. 만일 나의 관심 법에 걸리는 자가 있으면 곧 엄벌에 처하겠다 고 하였다. 그는 드디어 3척이나 되는 쇠 방망이를 만들어 놓고 죽이고 싶은 자가 있으면 곧 그것을 달구어 여자의 음부를 찔러 연기가 입과 코로 나오게 하여 죽이었다. 이리 하여 부녀들이 모두 벌벌 떨었으며 원망 과 분한이 날로 심하여졌다. 하루는 궁예가 태조를 대궐 안으로 급히 불러들이었다. 그 때에 궁예는 처형한 사람들로부터 몰수한 금은보물과 가재도구들을 점검하고 있었다. 그 는 성난 눈으로 한참이나 태조를 바라보고 있다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대가 어젯 밤에 사람들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음모한 것은 웬일인가? 태조는 얼굴빛을 조 금도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라고 하 였다. 궁예는 또 말하기를 그대는 나를 속이지 말라. 나는 능히 관심을 하기 때문에 그것을 안다. 나는 지금 곧 입정을 하여 보고 나서 그 일을 이야기하겠다. 하고는 곧 62

75 궁예, 태봉관련 주요 사료 눈을 감고 뒷짐을 지더니 한참이나 하늘을 향하여 고개를 젖히고 있었다. 그때에 장주 최응이 옆에 있다가 짐짓 붓을 떨어뜨리고는 뜰로 내려와 그것을 줍는 척하고 태조의 곁으로 달음질하여 지나가면서 귓속말로 왕의 말대로 복종하지 않으면 위태롭다. 고 하였다. 태조는 그제야 깨닫고 사실은 제가 모반하였으니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라 고 말하였다. 궁예는 껄껄 웃고 나서 그대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라고 하 면서 곧 금은으로 장식한 말안장과 굴레를 주었다. 궁예는 또 말하기를 경은 다시는 나를 속이지 말라 고 하였다. 遂 以 步 將 康 瑄 詰 黑 湘 金 材 瑗 等 副 太 祖 增 治 舟 舸 百 餘 艘 大 船 十 數 各 方 十 六 步 上 起 樓 櫓 可 以 馳 馬 領 軍 三 千 餘 人 載 粮 餉 往 羅 州 是 歲 南 方 饑 饉 草 竊 蜂 起 戍 卒 皆 食 半 菽 太 祖 盡 心 救 恤 賴 以 全 活 初 太 祖 年 三 十 夢 見 九 層 金 塔 立 海 中 自 登 其 上 마침내 보병 장군 강선힐, 흑상, 김재원 등을 태조의 부장으로 삼았다. 태조는 전함 백 여 척을 더 건조하였는데 그 중 큰 배 10여 척은 각각 사방이 16보요 그 위에 누로를 세웠고 말을 달릴 만하였다. 태조는 군사 3천여 명을 거느리고 군량을 싣고 나주로 갔 다. 이 해에 남방에 기근이 들어 각지에 도적이 일어나고 수졸들은 다 콩을 반쯤 섞어 먹으면서 지냈다. 태조는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구원하였는데 그 덕으로 다 살 수가 있 었다. 처음 태조의 나이 30세 때에 꿈에 9층 금탑이 해 중에 서 있는데 자기가 그 위에 올라가 보였다. - 예언, 태봉도성 내 시장의 모습 貞 明 四 年 三 月 唐 商 客 王 昌 瑾 忽 於 市 中 見 一 人 狀 貌 瓌 偉 鬚 髮 皓 白 頭 戴 古 冠 被 居 士 服 左 手 持 三 隻 梡 右 手 擎 一 面 古 鏡 方 一 尺 許 謂 昌 瑾 曰 能 買 我 鏡 乎 昌 瑾 以 二 斗 米 買 之 鏡 主 將 米 沿 路 散 與 乞 兒 而 去 疾 如 旋 風 昌 瑾 懸 其 鏡 於 市 壁 日 光 斜 映 隱 隱 有 細 字 可 讀 其 文 曰 三 水 中 四 維 下 上 帝 降 子 於 辰 馬 先 操 雞 後 搏 鴨 此 謂 運 滿 一 三 甲 暗 登 天 明 理 地 遇 子 年 中 興 大 事 混 蹤 跡 沌 名 姓 混 沌 誰 知 眞 與 聖 振 法 雷 揮 神 電 於 巳 年 中 二 龍 見 一 則 藏 身 靑 木 中 一 則 現 形 黑 金 東 智 者 見 愚 者 盲 興 雲 注 雨 與 人 征 或 見 盛 或 視 衰 盛 衰 爲 滅 惡 塵 滓 此 一 龍 子 三 四 遞 代 相 承 六 甲 子 此 四 維 定 滅 丑 越 海 來 降 須 待 酉 此 文 若 見 於 明 王 國 泰 人 安 帝 永 昌 吾 之 記 凡 一 百 四 十 七 字 정명 4 년(918) 3 월에 중국 상인 왕창근이 저자 가운데서 갑자기 웬 사람을 만났다. 그 는 얼굴이 이상하고 수염과 머리가 희며 옛날 관을 쓰고 거사가 입는 옷을 입었으며 왼손 에는 도마 세 개를 들고 오른손에는 옛날 거울 한 개를 들었는데 거울은 사방이 1척 가량 이었다. 그 사람은 창근을 보고 자기 거울을 사겠느냐고 하였다. 창근은 쌀 두 말을 주고 63

76 태봉국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재조명 그것을 샀다. 거울 주인은 그 쌀을 길가 거지들에게 다 나눠 주고 가 버렸는데 그 빠르기 가 선풍과도 같았다. 창근이 거울을 저자 담벽에 걸어 놓으니 일광이 옆으로 비쳐 그 속에 있는, 가늘게 쓴 글이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은은히 보이었다. 그 글에는 삼수중과 사유 ( 동서남북 ) 아래, 옥황상제가 진마 에 아들을 내려보냈다 ( 三 水 中 四 維 下 上 帝 降 子 於 辰 馬 ).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칠 것인바 이를 일러 운수가 일삼갑에 찼다고 하는 것이다( 先 操 鷄 後 搏 鴨 此 謂 運 滿 一 三 甲 ). 밤이면 하늘에 오르고 낮이면 세상을 다스려 자년이 되면 중 흥 위업을 이룩하리 ( 暗 登 天 明 理 地 遇 子 年 中 興 大 事 ). 종적과 성명을 감추거니 혼돈 속에서 누가 신 과 성 을 알리요 ( 混 蹤 跡 沌 名 胜 混 沌 誰 知 愼 與 聖 ). 부처남 뇌성이 진동하고 신 령한 번개가 번쩍이며 사년( 巳 年 ) 에 두 용이 나타나서 그 하나는 청목 속에 몸을 감추 고 다른 하나는 흑금 동쪽에 형적을 드러내리 ( 振 法 雷 揮 神 電 於 巳 年 中 二 龍 見 一 則 藏 身 靑 木 中 一 則 現 形 黑 金 東 ). 지혜로운 자는 이것을 보고 우매한 자는 보지 못하나 구름을 일으 키고 비를 따르면서 사람들을 데리고 정벌을 한다( 智 者 見 愚 者 盲 興 雲 注 雨 與 人 征 ). 때로는 성하고 때로는 쇠하기도 하나니 이렇게 하는 것은 악독한 잔재를 없애기 위함이다( 或 見 盛 或 見 衰 盛 衰 爲 滅 惡 塵 滓 ). 이 용의 아들 서넛이 여섯 갑자에 대를 바꾸어 가면서 계승하리 ( 此 一 龍 子 三 四 遞 代 相 承 六 甲 子 ). 이 사유에서 기필코 축 을 멸하리니 바다 건너오는 때는 유 를 기다려라 ( 此 四 維 定 滅 丑 越 海 來 降 須 待 酉 ). 이 글을 만일 현명한 임금에게 보이면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고 임금은 길이 행복하리 ( 此 文 若 見 於 明 王 國 泰 人 安 帝 永 昌 ). 나의 기록 은 전부가 1백 47 자이다 ( 吾 之 記 凡 一 百 四 十 七 字 ) 라고 적혀 있었다. 昌 瑾 初 不 知 有 文 及 見 之 謂 非 常 獻 于 裔 裔 令 昌 瑾 物 色 求 其 人 彌 月 竟 不 能 得 唯 東 州 勃 颯 寺 熾 盛 光 如 來 像 前 有 塡 星 古 像 如 其 狀 左 右 亦 持 梡 鏡 昌 瑾 喜 具 以 狀 白 裔 歎 異 之 令 文 人 宋 含 弘 白 卓 許 原 等 觧 之 含 弘 等 曰 三 水 中 四 維 下 上 宰 降 子 於 辰 馬 者 辰 韓 馬 韓 也 巳 年 中 二 龍 見 一 則 藏 身 靑 木 中 一 則 現 形 黑 金 東 者 靑 木 松 也 謂 松 嶽 郡 人 以 龍 爲 名 者 之 子 孫 可 以 爲 君 主 也 王 侍 中 有 王 侯 之 相 豈 謂 是 歟 黑 金 鐵 也 今 所 都 鐵 圓 之 謂 也 今 主 初 盛 於 此 殆 終 滅 於 此 乎 先 操 雞 後 搏 鴨 者 王 侍 中 御 國 之 後 先 得 鷄 林 後 收 鴨 綠 之 意 也 三 人 相 謂 曰 王 猜 忌 嗜 殺 若 告 以 實 王 侍 中 必 遇 害 吾 輩 亦 且 不 免 矣 乃 詭 辭 告 之 창근이 처음에는 글이 있는 줄 몰랐는데 나중에 그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궁예에게 바쳤다. 궁예는 창근으로 하여금 거울 판 사람을 찾게 하였으나 달이 차도록 찾지 못하 였다. 오직 동주 발삽사의 치성광여래 불상 앞에 토성을 맡은 신의 옛날 소상이 있는데 그것이 거울 주인의 상과 같고 그 좌우 손에는 역시 도마와 거울을 들고 있었다. 창근이 기뻐하여 그 사실을 자세히 써서 올리니 궁예는 경탄하고 이상히 여겨 글을 잘 아는 송 64

77 궁예, 태봉관련 주요 사료 사홍, 백탁, 허원 등에게 그 글을 해석하게 하였다. 사홍 등이 서로 말하기를 삼수중 과 사유 아래 옥황상제가 진마에 아들을 내려보냈다 는 것은 진한, 마한이라는 뜻이요 사년에 두 용이 나타나서 그 하나는 청목 속에 몸을 감추고 다른 하나는 흑금 동쪽에 형적을 드러내리 라는 것은 청목 은 소나무니 송악군 사람으로서 용 으로 이름 을 삼은 사람의 자손이 임금이 되리라는 말이다. 왕시중 ( 왕건) 은 왕으로 될 기상이 있는 데 아마 그를 두고 이른 말일 것이다. 흑금 이라는 것은 철인데 그것은 지금 국도 철 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 궁예왕이 처음 여기서 일어났는데 결국 여기서 멸망한다는 말일 것이다.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칠 것 이라는 것은 왕시중이 임금이 된 후 에 먼저 계림( 신라) 을 점령하고 다음에 압록강 강안까지 회복하리라는 뜻이다. 라고 하 였다. 세 사람은 서로 의논하기를 왕은 시기가 많아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니 만일 이 글을 사실대로 고한다면 왕시중이 반드시 해를 입을 것이요 우리도 역시 화를 면치 못 할 것이다 하고 거짓말을 꾸며서 궁예에게 보고하였다. 至 六 月 乙 卯 騎 將 洪 儒 裴 玄 慶 申 崇 謙 卜 智 謙 等 密 謀 夜 詣 太 祖 第 共 言 推 戴 之 意 太 祖 固 拒 不 許 夫 人 柳 氏 手 提 甲 領 被 太 祖 諸 將 扶 擁 而 出 令 人 馳 且 呼 曰 王 公 已 擧 義 旗 矣 於 是 奔 走 來 赴 者 不 可 勝 記 先 至 宮 門 鼓 譟 以 待 者 亦 萬 餘 人 裔 聞 之 驚 駭 曰 王 公 得 之 吾 事 已 矣 乃 不 知 所 圖 以 微 服 出 自 北 門 亡 去 內 人 淸 宮 以 迎 裔 遁 于 巖 谷 信 宿 飢 甚 偸 截 麥 穗 而 食 尋 爲 斧 壤 民 所 害 6 월 을묘에 기병 장군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은밀히 모의하여 밤중에 태 조의 저택으로 가서 그를 왕으로 추대할 뜻을 함께 말하였다. 태조는 굳이 거절하여 허 락하지 않았으나 부인 유씨가 손수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입히니 여러 장수들이 옹위하 고 나오면서 사람을 놓아 말을 달리며 외치기를 왕공이 벌써 의기를 들었다 라고 하 였다. 이때에 분주히 달려와서 함께 참가한 자들이 이루 헤일 수가 없었고 먼저 궁문으 로 와서 북을 치고 떠들면서 기다리는 자도 만여 명이나 되었다. 궁예가 이 소문을 듣고 깜짝 놀라 말하기를 왕공이 벌써 승리를 얻었으니 내 일은 다 글렀다. 하고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리 하여 그는 변복을 하고 북문으로부터 도망쳐 나가니 궁녀들이 궁 안 을 깨끗이 하고 태조를 맞아들였다. 궁예는 산골로 도망하였으나 이틀 밤을 지난 후에는 배가 몹시 고파서 보리 이삭을 잘라 훔쳐 먹었다. 그 후 곧 부양 백성에게 살해되었다. ( 고려사 권1, 세가1 태조 원년) - 918년 6월 15 일( 음), 6월 16 일( 음) 夏 六 月 丙 辰 卽 位 于 布 政 殿 國 號 高 麗 改 元 天 授 65

78 태봉국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재조명 丁 巳 詔 曰 前 主 當 四 郡 土 崩 之 時 剷 除 寇 賊 漸 拓 封 疆 未 及 兼 幷 海 內 俄 以 酷 暴 御 衆 以 姦 回 爲 至 道 以 威 侮 爲 要 術 徭 煩 賦 重 人 耗 土 虛 而 猶 宮 室 宏 壯 不 遵 制 度 勞 役 不 止 怨 讟 遂 興 於 是 竊 號 稱 尊 殺 妻 戮 子 天 地 不 容 神 人 共 怨 荒 墜 厥 緖 可 不 戒 乎 朕 資 群 公 推 戴 之 心 登 九 五 統 臨 之 極 移 風 易 俗 咸 與 惟 新 宜 遵 改 轍 之 規 深 鑑 伐 柯 之 則 君 臣 諧 魚 水 之 歡 河 海 協 晏 淸 之 慶 內 外 群 庶 宜 悉 朕 懷 群 臣 拜 謝 曰 臣 等 値 前 主 之 世 毒 害 良 善 淫 虐 無 辜 老 稚 嗷 嗷 莫 不 含 寃 幸 今 得 保 首 領 遭 遇 聖 明 敢 不 竭 力 以 圖 報 效 여름 6월 병진일에 포정전에서 정식으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 수로 고쳤다. 정사일에 조서를 내려 말하길 이전 임금( 궁예) 은 우리나라 정세가 혼란할 때에 일어 나서 도적들을 평정하고 점차 영토를 개척하였으나, 전국을 통일하기도 전에 대번 혹독 한 폭력으로 하부 사람을 대하며 간사한 것을 높은 도덕으로 생각하고 위압과 모멸로써 요긴한 술책을 삼았었다. 부역이 번거롭고 과세가 과중하여 인구는 줄어들고 국토는 황 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전은 굉장히 크게 지어 제도를 위반하고 이에 따르는 고 역은 한이 없어서 드디어 백성들의 원망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형편에 함부로 연호를 만들고 왕으로 자칭하였으며 처자를 살육하는 등 천지에 용납할 수 없는 죄를 지어 죽 은 사람에게나 살아 있는 사람에게 다 원한을 맺었으며 결국은 정권을 전복 당하였으니 어찌 경계할 바가 아니랴. 내가 여러 신하들의 추대에 의하여 왕위에 올라 모든 풍속을 변혁하고 다 함께 새롭게 나아가려 하노니 마땅히 새 규율을 세우고 이전 일을 심각한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임금과 신하는 고기와 물처럼 서로 화합할 것이며 이 나라 강산들도 편안하고 밝아지는 경사를 맞이할 것이니 내외의 모든 신하와 백성들은 마땅 히 나의 뜻을 알지어다! 여러 신하들이 절을 하면서 감사의 말을 올렸다. 저희들은 이전 임금이 선량한 사람들을 해치고 죄 없는 사람들을 학대하여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불평과 원한에 싸여 있던 그러한 세상에서 살아오다가 다행히 지금 생명 을 유지하여 현명한 임금의 세상을 만났으니 감히 자기 힘을 다하여 국은에 보답하도록 노력하지 않겠습니까. - 6월 17 일( 음) 戊 午 王 謂 韓 粲 聰 逸 曰 前 主 信 讒 好 殺 以 卿 貫 鄕 靑 州 土 地 沃 饒 人 多 豪 傑 恐 其 爲 變 將 欲 殲 之 乃 召 軍 人 尹 全 愛 堅 等 八 十 餘 人 俱 以 非 辜 械 繫 在 途 卿 其 亟 往 放 還 田 里 무오일에 왕이 한찬 총일에게 다음과 같이 타일렀다. 이전 임금이 참소하는 말을 믿 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였다. 그대의 고향인 청주는 토지가 비옥하고 호걸이 많아 이들 66

79 궁예, 태봉관련 주요 사료 이 사변을 일으킬까 두려워서 장차 청주 사람을 모조리 섬멸해 버릴 목적으로 군인 윤 전, 애견 등 80 여 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불렀던 것이다. 지금 그들이 포박된 채 오는 도 중에 있으니 그대는 빨리 가서 이 사람들을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라! - 6월 21 일( 음) 壬 戌 以 韓 粲 朴 質 榮 爲 侍 中 以 蘇 判 宗 偘 少 爲 僧 務 行 姦 詐 內 軍 將 軍 犾 鈇 幼 爲 髡 鉗 巧 言 取 容 皆 得 幸 弓 裔 好 行 浸 潤 多 陷 良 善 誅 之 임술일에 한찬 박질영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소판 종간은 어려서부터 중이 되어 간 사한 일을 하기에 힘쓰고 내군 장군 적부는 어려서부터 남의 집 하인으로서 간사한 말 로 아첨을 잘 함으로써 다 궁예에게 총애를 받았으며 참소하기를 좋아하여 선량한 사람 들을 모해한 것이 많기 때문에 이들을 처형하였다. - 6월 27 일( 음) 戊 辰 以 白 書 省 孔 目 直 晟 爲 白 書 郞 中 徇 軍 郞 中 閔 剛 爲 內 軍 將 軍 詔 曰 朕 聞 乘 機 革 制 正 謬 是 詳 導 俗 訓 民 號 令 必 愼 前 主 以 新 羅 階 官 郡 邑 之 號 悉 皆 鄙 野 改 爲 新 制 行 之 累 年 民 不 習 知 以 至 惑 亂 今 悉 從 新 羅 之 制 其 名 義 易 知 者 可 從 新 制 무진일에 백서성 공목 직성을 백서낭중으로, 순군낭중 민강을 내군장군으로 각각 임명 하였다. 조서를 내려 말하길 내가 듣건대 기회를 타서 제도를 개혁함에는 옳고 그른 것을 상세히 하여야 하며 풍속을 지도하고 백성을 훈계함에는 호령을 반드시 삼가야 한 다고 하였다. 이전 임금( 궁예) 이 신라의 품계, 관직, 군현 명칭들은 다 비속하다 하여 새 제도들을 만들었었는데 여러 해를 통용하였으나 백성들이 잘 알지 못하였고 혼란을 일 으키게 되었다. 이제 이런 것들을 다 신라 제도로 다시 고쳐야 하겠다. 그러나 그 이름 중에서 알기 쉬운 것들만은 새 제도를 좇아도 될 것이다. - 8월 11 일( 음) ( 八 月 ) 辛 亥 詔 曰 前 主 視 民 如 草 芥 而 惟 欲 之 從 乃 信 讖 緯 遽 棄 松 嶽 還 居 斧 壤 營 立 宮 室 百 姓 困 於 土 功 三 時 失 於 農 業 加 以 饑 饉 荐 臻 疾 疫 仍 起 室 家 棄 背 道 殣 相 望 一 匹 細 布 直 米 五 升 至 使 齊 民 賣 身 鬻 子 爲 人 奴 婢 朕 甚 悶 焉 其 令 所 在 具 錄 以 聞 신해일에 조서를 내려 말하길 이전 임금( 궁예) 이 백성을 보기를 초개와 같이 하면서 오직 자기의 욕심만 채우려고 하였다. 이리 하여 허무한 도참설을 믿어 갑자기 송악 도 67

80 태봉국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재조명 읍을 버리고 철원으로 돌아가 궁전들을 지으니 백성들은 토목 공사에 시달리고 농사철 을 빼앗겼었다. 게다가 또 기근이 거듭 들고 역질이 계속 유행하여 가정을 버리고 길에 서 굶어 죽는 자가 허다하였다. 곡식 값이 폭등하여 세포 한 필 값이 겨우 쌀 5승밖에 못되어 백성들은 자기 몸과 처자를 팔아 남의 노비로 되는 자가 많았다. 나는 이를 심히 불쌍히 여기노니 이들을 다 그 현재 있는 곳에서 등록하여 나에게 보고하라! 이에 이 렇게 노비로 된 사람들 1천 여 명을 조사하여 국고에 있는 포백으로 그들의 몸값을 물 어 주어 본가로 돌려보냈다. 2) 지 * 지리지 - 고려사 권58, 지12 지리3 동주 ( []: 세주) 東 州 本 高 句 麗 鐵 圓 郡 [ 一 云 毛 乙 冬 非 ] 新 羅 景 德 王 改 爲 鐵 城 郡 後 弓 裔 起 兵 略 取 高 句 麗 舊 地 自 松 岳 郡 來 都 修 葺 宮 室 窮 極 奢 侈 國 號 泰 封 及 太 祖 卽 位 徙 都 松 嶽 改 鐵 圓 爲 東 州 [ 弓 裔 宮 殿 古 基 在 州 北 二 十 七 里 楓 川 之 原 ] 成 宗 十 四 年 置 團 練 使 穆 宗 八 年 罷 之 顯 宗 九 年 改 知 東 州 事 高 宗 四 十 一 年 降 爲 縣 令 官 後 陞 爲 牧 忠 宣 王 二 年 汰 諸 牧 降 爲 鐵 原 府 別 號 昌 原 [ 成 廟 所 定 ] 又 號 陸 昌 有 寶 盖 山 屬 郡 一 縣 七 동주는 원래 고구려의 철원군인데,[ 모을동비라고도 한다.] 신라 경덕왕은 철성군으로 만들었다. 그 후 궁예가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의 옛 땅을 빼앗고 송악군에서 이곳에 수 도를 옮기고 궁실을 매우 떠벌려 짓고 나라 이름을 태봉이라고 하였다. 고려 태조가 왕 으로 되자 수도를 송악으로 옮기고 철원을 동주라고 고쳤다.[ 궁예가 있던 궁전의 옛 터 가 이 주의 북쪽 27 리 지점인 풍천원에 있다.] 성종 14년에 단련사를 두었다가 목종 8 년에 이를 없앴으며 현종 9년에 지동주사로 고쳤고 고종 41년에 낮추어서 현령관으로 하였다가 후에 목으로 승격시켰으며 충선왕 2년에 전국의 목을 없애게 됨에 따라 낮추 어서 철원부로 하였다. 창원[ 성종이 정한 명칭이다 ] 또는 육창이라고도 부르며 여기에는 보개산이 있고, 군이 1 개, 현이 7 개 속해 있다. - 고려사 권58, 지12 지리3 북계 北 界 本 朝 鮮 故 地 在 三 國 爲 高 句 麗 所 有 寶 藏 王 二 十 七 年 新 羅 文 武 王 與 唐 將 李 勣 夾 攻 滅 之 遂 倂 其 地 孝 恭 王 九 年 弓 裔 據 鐵 圓 自 稱 後 高 麗 王 分 定 浿 西 十 三 鎭 成 宗 十 四 年 分 境 內 爲 十 道 以 西 京 所 管 爲 浿 西 道 後 稱 北 界 肅 宗 七 年 又 稱 西 北 面 後 以 黃 州 安 岳 鐵 和 長 命 鎭 來 屬 辛 禑 十 四 年 復 屬 西 海 道 領 京 一 大 都 護 府 一 防 禦 郡 二 十 五 鎭 十 二 縣 十 中 葉 以 後 所 置 府 二 郡 一 68

81 궁예, 태봉관련 주요 사료 북계는 원래 고조선의 옛 땅인데 삼국시기에는 고구려의 땅으로 되었던바, 보장왕 27 년에 신라 문무왕이 당나라 장군 이적과 함께 쳐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마침내 이 지 역을 합쳤으며, 효공왕 9년에 궁예가 철원을 근거지로 하여 자칭 후고구려 왕이라 하고 이 지역 패서 13 진을 설치하였다. 성종 14년에 전국을 10개의 도로 나룰 때에 서경 관 할하의 지역을 두고 패서도로 만들었다가 후에 북계라고 불렀다. 숙종 7년에 다시 서북 면이라고 불렀고 후에 황주, 안악, 철화, 장명진을 이 북계에 소속시켰으며 신우 14년에 는 옛날대로 서해도에 소속시켰다. 여기 관할 하에 부가 1 개, 대도호부가 1 개, 방어군이 25 개, 진이 12 개, 현이 10 개 있고, 중엽이후 설치된 부가 2 개, 군이 1 개 있다. * 백관지 - 고려사 권77, 지31 백관2 문산계 國 初 官 階 不 分 文 武 曰 大 舒 發 韓 曰 舒 發 韓 曰 夷 粲 曰 蘇 判 曰 波 珍 粲 曰 韓 粲 曰 閼 粲 曰 一 吉 粲 曰 級 粲 新 羅 之 制 也 曰 大 宰 相 曰 重 副 曰 台 司 訓 曰 輔 佐 相 曰 注 書 令 曰 光 祿 丞 曰 奉 朝 判 曰 奉 進 位 曰 佐 眞 使 泰 封 之 制 也 太 祖 以 泰 封 主 任 情 改 制 民 不 習 知 悉 從 新 羅 唯 名 義 易 知 者 從 泰 封 之 制 尋 用 大 匡 正 匡 大 丞 大 相 之 號 건국 초기에 벼슬 등급은 문관, 무관으로 나누지 않고 대서발한, 서발한, 이찬, 소판, 파진찬, 한찬, 알찬, 일길찬, 급찬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신라의 제도였고, 대재상, 중부, 태사훈, 보좌상, 주서령, 광록승, 봉조판, 봉진위, 좌진사라고도 하였는데 이것은 태봉의 제도였다. 태조는 태봉의 임금( 궁예) 이 제 마음대로 제도를 고쳤기 때문에 백성들이 익숙 하게 알지 못한다 하여 모두 신라의 제도를 따르고 다만 그 이름과 뜻이 알기 쉬운 것들 만 태봉의 제도를 따랐으며 이내 대광, 정광, 대승, 대상이라는 벼슬 이름을 썼다. * 식화지 - 고려사 권78, 지32 식화1 녹과전 ( 辛 禑 十 四 年 ) 七 月 大 司 憲 趙 浚 等 上 書 曰 新 羅 之 末 田 不 均 而 賦 稅 重 盜 賊 群 起 太 祖 龍 興 卽 位 三 十 有 四 日 迎 見 群 臣 慨 然 嘆 曰 近 世 暴 歛 一 頃 之 租 收 至 六 石 民 不 聊 生 予 甚 憫 之 自 今 宜 用 什 一 以 田 一 負 出 租 三 升 遂 放 民 閒 三 年 租 (1388 년) 7월 대사헌조준 등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신라의 말기에 토지는 고르 게 돌아가지 못하는데 세납 부과는 무겁게 되어 도적들이 무리지어 일어났습니다. 태조 ( 왕건) 가 건국하고 즉위한 지 34일 만에 여러 신하들을 맞아 만나보고 개탄하면서 말하 기를 근년에 백성들에게 혹독하게 수탈하여 토지 1경의 조를 6석까지 받아 냈으므로 69

82 태봉국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재조명 백성들이 살기 어렵게 되었다. 나는 이것을 아주 가련하게 생각한다. 지금부터는 마땅히 십분의 일을 받는 제도를 써서 밭 1부에 조 3 승을 받도록 하라. 고 하면서 드디어 민 간에서 거두어들이는 3 년간의 조를 면제하여 주었습니다. 3) 열전 - 홍유열전 ( 고려사 권92, 열전5 홍유) 洪 儒 初 名 術 義 城 府 人 弓 裔 末 年 與 裴 玄 慶 申 崇 謙 卜 智 謙 同 爲 騎 將 密 謀 夜 詣 太 祖 第 言 曰 自 三 韓 分 裂 群 盜 競 起 今 王 奮 臂 大 呼 遂 夷 滅 草 寇 三 分 遼 左 據 有 大 半 立 國 定 都 將 二 紀 餘 今 不 克 終 縱 虐 太 甚 淫 刑 以 逞 殺 妻 戮 子 誅 夷 臣 僚 民 墜 塗 炭 疾 之 如 讎 桀 紂 之 惡 無 以 加 也 廢 昏 立 明 天 下 之 大 義 請 公 行 殷 周 之 事 太 祖 作 色 拒 之 曰 吾 以 忠 義 自 許 王 雖 暴 亂 安 敢 有 二 心 以 臣 伐 君 斯 謂 革 命 予 實 不 德 敢 效 湯 武 之 事 乎 恐 後 世 以 爲 口 實 古 人 云 一 日 爲 君 終 身 爲 主 况 延 陵 季 子 曰 有 國 非 吾 節 也 乃 去 而 耕 焉 吾 豈 過 季 子 之 節 乎 儒 等 曰 時 難 遭 而 易 失 天 與 不 取 反 受 其 咎 國 中 民 庶 受 毒 痡 者 日 夜 思 欲 復 之 且 權 位 重 者 並 遭 虐 殺 略 無 所 遺 今 之 德 望 未 有 居 公 右 者 衆 情 所 以 望 於 公 也 公 若 不 從 吾 等 死 無 日 矣 况 王 昌 瑾 鏡 文 如 彼 豈 可 違 天 死 於 獨 夫 之 手 乎 於 是 諸 將 扶 擁 而 出 黎 明 坐 於 積 穀 之 上 行 君 臣 之 禮 令 人 馳 且 呼 曰 王 公 已 擧 義 旗 矣 裔 聞 之 驚 駭 亡 去 홍유의 처음 이름은 홍술이니 의성부 사람이다. 궁예 말기에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과 함께 기병대장으로 되었는데 이들이 밀모하고 밤에 태조( 왕건) 의 집으로 찾아 가서 말하 기를 삼한이 분열되고 뭇 도적이 봉기하였을 때 지금 임금이 용기를 분발하고 크게 호 통쳐 도적들을 쳐 없애고 요좌 지방의 3분의 1에서 그 절반 이상을 점유한 후 나라를 건 설하고 도읍을 정한 지도 이미 2 기( 紀 -12 년) 가 넘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끝을 잘 맺지 못하고 포악한 행위가 태심하여 형벌을 남용하여 처자를 살육하고 관리들을 죽여 없애니 백성은 도탄에 빠져 임금을 원수 같이 여기게 되었는바 걸이나 주의 죄악도 이 보다 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폭군을 폐위하고 현명한 사람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대 의이니 청컨대 공은 은과 주의 옛일을 본받아 실행하셔야 하겠습니다 라고 하니 태조는 안색을 변하며 거절하는 말이 나는 충의를 신조로 삼고 있으니 왕이 비록 난폭할지라 도 어찌 감히 두 마음을 가지겠는가? 신하로서 임금을 정벌하는 것을 혁명이라고 하는데 나는 실로 박덕한 몸인데 어찌 감히 성탕과 무왕의 옛 일을 본받을 수 있겠는가? 후세의 난신들의 구실로 삼을 것을 두려워하는 바이다. 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하루라도 임금으 로 삼았으면 종신토록 주상으로 섬긴다. 고 하였으며 황차 계찰 같은 사람은 말하기를 나라를 영유하는 것은 나의 절조가 아니다. 라고 하면서 피해 가서 농사를 지었는데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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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D6963726F736F667420576F7264202D20B1E2C1B6B0ADBFACB9AE28B1B9B9AE29> 인류문화에 공헌하는 한국학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이성무 1. 국제정세의 변화와 한국학 한국학은 한국에 관한 인문사회과학적 연구를 말한다. 그런데 현대의 한국학은 한국이 세계 속에서 협력 경쟁하면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국제정세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현대의 한국학은 인류문화에 공헌하는 한국학이 되어야 한다. 20 세기에는 두 차례의 세계사적인 전환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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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51 창화현이라고도 한다. 현종 9년(1018) 양주에 예속시 키고 후에 감무를 두었는데, 본조(조선) 태조 6년 (1397)에 양주에서 치소를 이곳 견주로 옮겼다가 뒤 에 지금의 치소로 옮겼다. 지금의 古 州 內 이다. 라고 하여 두 기사간에 다소의 차이점이 있 50 양주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6. 조선시대 태조 2년(1393) 조선이라는 새로운 국호가 정해 지고 신왕조의 기틀이 잡혀지자 국도의 천도가 제기 되었다. 천도론은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지덕이 쇠한 개경에 머무를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 제기되었지만, 실질적 으로는 고려의 전통적인 세력기반을 떠나서 조선왕조 의 새로운 정치기반을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태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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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은 상태이고, 그러한 시도도 찾아 보기 힘 든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 론 最 近 에 들어 國 內 國 녔3 學 界 나 i1îi 會 經 濟 史 學 界 에서 당시의 政 治 社 會 經 濟 文 化 의 諸 現 象 에 對 한 昭 究 가 활펠허 이루어지고 t 也 理 學 옮움 醫 第 6 號, 1979 年 12 月 pp.116rv150 日 帝 의 對 韓 初 期 植 民 地 政 策 이 韓 半 島 의 士 地 와 人 口 의 地 城 的 變 化 에 ul 천 영 향 : 19101919 李 樹 成 1. 序 (1) 昭 究 目 的 (2) 짧 究 方 法 (3) 짧 究 資 料 및 範 圍 텀 갖 4. 日 帝 의 韓 半 島 統 治 構 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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