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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일러두기 인천역사 는 인천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갖는 많은 사람들에게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1년에 1회씩 발간하는 Re-View 誌 형식 의 학술잡지이다. 2004년 1호 <인천역사의 재조명>, 2005년 2호 <인천문학의 재조명>에 이어 2006년에는 3호 <인천경제의 재조명>, 2007년 4호 <인천민속의 재발 견>, 2009년 5호 <인천 근대 건축의 재발견>에 이어 2009년 6호 <인천지 명의 재발견>이라는 주제로 기존에 많이 알려진 사실 이외에도 간과해 버린 과제들을 발굴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관심의 폭을 넓히고자 간행하였 다. 따라서 기존의 연구실적을 종합 정리하여 방향과 문제점 등을 제시하 고 그 해법을 찾아보고자 한 것이다. 아울러 지역학으로서 인천사의 비중과 기존의 인천연구에 대한 학계에서 의 인지도 및 인용도를 측정하며, 선구지임에도 불구하고 수도권 역사의 종 속적 매체로 기능하는 근원도 밝히고자 하였다. 이렇게 기존의 연구업적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해 봄으로써 왜 그런 문제 가 발생하였는지, 현재의 연구 방법에는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 기존 인천 연구에 추가되어야 하고 관심의 초점을 맞추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연구열의 증대와 광범한 자료수집 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필요하고 현 단계에서 우리의 과제는 무엇인지 그에 대한 대안을 살펴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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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목 차 1. 인천 지명의 이해 (김병욱-인천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일제 강점기 인천의 지명 실태 (조우성-인천광역시 시사편찬위원회 위원) 인천의 지명 유래<중구 동구 옹진군> (김윤식-인천 문인협회회장) 인천의 지명 유래<부평구 계양구 서구> (이원규-동국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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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인천 지명의 이해 김 병 욱 (인천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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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 지명의 가치 인간이 태어나면 가능한 한 상서롭고 진취적이며 발전적인 기원을 담아 이름을 부여하고, 그 이름을 자랑스럽게 불러 왔다. 또한 인간은 자신들이 사는 땅의 이름도 같은 의도에서 짓고 사용해 왔다. 지명은 당해 지역의 행정적 형상적 변화의 총체를 포용하고 있는 언어로 된 실체이기 때문에 국어사, 역사학의 연구 대상이기도 하다. 직접적, 또 는 은유적으로 작명된 지명은 그 지역 주민의 공유물로서 지역, 장소 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를 창출하고, 그 것이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대 변하는 것으로 승화된다. 따라서 지명은 그 지역의 공통된, 통일된 언 어 이미지로 존속하면서 의사소통의 수단이 되고 그 지역, 또는 언어 의 성장, 사멸과 생명을 같이 하게 된다. 위와 같이 지명은 역사적 생 명력을 갖기 때문에 문화 탐구의 대상이 되고 우리 문화의 보고가 되 는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각자를 대표하는 이름이 있듯이,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환경에도 각기 이름이 있다. 산, 강, 고개, 계곡 등과 같은 자연 지물에도 이름이 있으며, 인간이 거주하고 있는 곳에도 어김없이 이름 이 붙어 있다. 전 세계의 모든 나라에도 국가명이 명명되어 있다. 이 와 같이 모든 것에 이름이 붙어 있는 이유는 다른 국가, 다른 장소, 자른 자연지물과의 차이를 나타내어 자기 정체성, 자긍심을 갖기 위함 이다. 예로부터 우리는 도읍을 중심으로 강한 자부심을 갖는 지명을 부여했거니와, 궁궐을 중심에 두고, 도성에 4 대문을 설치했던 것과, 지방에도 고을을 중심으로 주변은 동, 서, 남, 북과 같은 이름을 붙이 기를 즐겨 사용했다. 그리하여 신라의 5 소경( 小 京 ), 5 악( 嶽 ), 고구려 고분의 주인공 주위의 사신도( 四 神 圖 ) 등은 모두 우리 고대의 땅에 대 한 신앙이자 문화인 것이다. 인천 지명의 이해 7

10 지명은 순수한 우리말로 '땅 이름'이라 하며, 영어로는 'Place Name' 또는 'Toponyms'라 한다. 지명은 일반적으로 그 지역을 대표 하고 그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 에게 알리기 위해 정해진 것이다. 또한 지명은 인간 생활을 하는 동안 에 어떤 형태로든 토지를 이용하는 과정에서 붙여지는 것이므로 자연 지명이라 할지라도 순순하게 객관적인 것은 없고, 개인이나 집단의 의 지, 염원, 주관에 따라 명명된다. 따라서 지명은 그 지역의 자연환경이 나 인문환경, 즉 지현, 기후 식생, 지역성, 민족성, 역사, 문화 등을 가장 잘 표출하는 하나의 언어문화경관이다. 다시 말해 지명은 그 지 역이 지닌 문화를 표현하는 하나의 지표이다. 또한, 지명어는 과거를 담고 있는 문화경관이다. 우리나라의 지명을 보면 과거 그 지역의 기능을 알 수 있거니와 예를 들면, 지명의 끝에 '진( 鎭 )'이 붙어 있으면 군사 요충지, '분원'같이 '분( 盆 )'은 그 곳이 '도 기 굽던 지역'이었으며, '장호원', '퇴계원'과 같이 '원'이 붙어 있는 경 우는 과거에 원( 院 )이 위치하였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외국의 경우에도 지명은 그 지역의 지형, 기후, 식생 등 자연적 현 상이나 거주 민족의 특성, 거주 역사, 문화, 기능, 지역성 등 인문적 현상을 대표한다. 우리나라의 경우와 달리 외국의 지명은 일반적으로 특수한 이름과 일반적인 현상을 표현하는 이름이 복합된 경우가 많다. 이러한 예는 자연적인 현상을 지명에 반영할 경우에 많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인문적인 현상이 지명에 표현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자연적 인 현상인 늪(bayou), 모래사장(beach), 곶(cape), 산(Mt), 호수(lake) 나 인문적인 현상인 요새(Ft. 또는 Fort), 성(Saint, St, Ste. San), 마을(ville), 읍(burg)을 지명에 붙이기도 한다. 이들을 접두사 접미사 로 붙여서 지명을 만드는데 이 지명들을 통해 그 지역이 늪이 많은 지 역, 해안을 끼고 발달한 지역, 산지가 많은 지역, 호수가 많은 지역, 8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1 과거에 요새였던 곳, 천주교가 성행하였던 지역, 다른 특별한 성격 없 이 마을로 일찍 형성된 지역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독일의 경 우'-zig' '-in' '-ow'는 접미사로 '마을'을 지칭하거니와 이들은 현재 라이프치히(Leipzig), 베를린(Berlin), 테테로(Teterow) 라는 지명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이들 지명이 존재하는 지역에서 현재 슬라브어 차 체는 모두 사라지고 없으나 과거의 역사를 나타내는 이러한 지명은 지 금도 존재하여 과거의 역사를 대변한다. 또한 미국에는 과거에 특정지 역에 거주하였던 인디언의 이름에서 유래한 지명이 많이 남아있다. 미 국의 지명들 중에 영어 등 유럽어가 아닌 생경한 지명들, 예를 들면 유타( 山 사람), 나이아가라(천둥소리), 미시시피(긴 강) 등 많은 지명이 남아 있다. 이러한 지명의 분포를 통해 인디언이 어느 지역에 거주하 였는지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경우에도 원주민들 의 의해 만들어진 지명의 사용은 원주민의 문화가 그 지역에서 없어진 후에도 오랫동안 남아있어 오래된 지명들에 과거의 흔적을 보존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지명의 대한 연구는 국내외에서 비교적 많이 이루어져 왔으나, 대부 분은 지명의 형성과정에 관한 것이었고 문화경관적인 측면에서의 연구 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많은 지명 연구자들은 지명의 발생요인을 네 가지로 구분하여 지명을 분류하였다. 첫째는, 지형어로 자연환경에서 유래한 지명이며, 둘째는, 법제어로 토지제도, 세제, 정치, 군사에 관 계되어 발생한 법제적, 정치적인 지명이다. 셋째는, 사회어로 수렵, 어 로, 농경, 교환경제, 공동생활 등에 관계되는 사회경제적 지명이며, 넷 째는, 생활어로 신앙, 민속, 구비, 전승, 의식주 등의 생활에 관련된 지명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진 지명에 관한 연구도 그 지명이 사용되고 있 는 지역에 역사적 변천에 관한 연구이거나, 지명에 성인( 成 因 )분류가 인천 지명의 이해 9

12 대부분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지명이 변천해 온 과정이나 역사를 모른 채 현재의 지명 표기에 사용한 한자를 풀이한 정도에 그치는 경우도 있어 진실을 호도하기도 하거니와, '인천( 仁 川 )'을 '어진내'로 해석하는 등이 그 좋은 예이다. 따라서 고대의 지명 또 그것이 변화를 거쳐 현 대에까지 살아 숨 쉬는 지명으로 보전된 전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 리말의 변천과정, 고대로부터의 한자음 변천과정, 지명의 인위적인 변 개과정 등에 관한 심오한 탐구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러한 제반 분 야의 융합학문적 노력이 통합되어야 국가, 지역의 언어, 역사, 문화의 상관관계의 복합적인 지명의 이해, 나아가 지역 문화의 체계화가 가능 한 것이다. 인천광역시의 지명도 유사 이전부터 부침을 겪으면서 모진 생명을 이어왔고, 그 속에 인천의 문화 정체성을 담고 있어 지역학, 문화 탐 구의 대상이 되므로 고대 지명을 이해하기 위하여 고대 지명의 표기체 계를 이해하고, 그 이론을 인천의 고대 지명 자료에 적용하여 분석, 기술하는 일은 인천문화 정체성의 탐구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아래의 인천의 지명 분석 자료들은 필자가 인천의 지명을 분석, 기술 하여 한두 지면에 발표했던 내용들을 들어 지명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한다. 참고로, 이하의 고대국어 자료들을 발음할 때 음절말의 자음을 모두 외파로 즉, 받침의 자음을 파열하여 발음해야 한다. 그 이유는 훈민 정음 에 '8종성가족용야( 八 終 聲 可 足 用 也 )'라고 기록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그 이전의 우리말은 마치 일본말에서 음절말에 자음이 있을 경우, 그 자음과 발음하는 위치가 가까운 모음을 받쳐 발음하는 것을 참고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쉬운 예로 '김치 기무치'를 들 수 있다. 10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3 2. 삼국시대 지명 차자 표기 해독법 1) 고대의 지명 표기 한국어의 차자 표기는 지명 관직명 인명의 고유명사 표기에서 비롯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체계적인 차자 표기법으로 발전한 것들이 이른바 이두( 吏 讀 ), 향찰( 鄕 札 ), 구결( 口 訣 )이다. 고대 4국의 시조명이 아주 이른 시기에 '*블구내( 弗 矩 內 ), *주모( 鄒 牟 ), *온조( 溫 祚 ), *수로 ( 首 露 )'와 같이 차자 표기되었으며, 초기의 수도명도 '*사로( 斯 盧 ), *홀 본( 忽 本 ), *위례( 慰 禮 )'와 같이 차자 표기되어 이른 시기부터 전해졌기 때문이다. 서기 414년에 건립된 광개토대왕비문에 차자 표기된 지명 인명들이 많이 있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보다 이른 시기부터 지 명 인명의 차자 표기가 성행하였음을 믿을 수 있다. 만일 앞의 추정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면 이두, 향찰, 구결은 지명 인명 등의 고유명사 차자 표기법을 토대로 보다 발전한 차자 표기법이라 추정할 수 있다. 지명에 대한 초기의 차자 표기는 음차 표기이었다. 후대로 내려오면 서 훈차 표기가 추가로 발생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이는 음차 표기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하여 고안되었을 것이다. 실로 음차 표기란 의미전 달 기능이 미약한 편이다. 그래서 의미까지 아울러 나타낼 수 있는 표 기 방안을 강구하여 부족한 점을 보완하였다고 여겨진다. 음차 표기된 지명은 표기 당시의 한자음으로 읽으면 곧 고유어가 실 현된다. 그러나 가령 어떤 지명이 '훈+음+훈'으로 차자 표기되었다면 이것은 음독하면 전혀 말이 안 된다. 훈차 표기( 漢 譯 )된 지명도 음독하 면 고유 지명이 실현될 수 없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색하였을 것이다. 다만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점점 익어져 결국 한자지명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라 하겠다. 인천 지명의 이해 11

14 이 글에서는 주로 고대 지명의 차자 표기 고유어를 바르게 해독할 수 있는 어떤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고대 지명의 차자 표기법은 다 음에 제시한 바와 같이 '음차 표기, 훈차 표기, 훈음차 표기, 음+훈차 표기, 훈+음차 표기, 음+훈음차 표기, 훈음+음차 표기'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문헌에 전해오는 고대 지명에 대한 차자 표기어들을 위의 여 러 가지 차자 표기 방식 중 어느 것에 해당하는가를 먼저 판별하여야 비로소 바른 해독이 가능하게 된다. 그 판별법이 무엇인지를 제시하여 지명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2) 다양한 차자 표기법 고유문자가 창안되기 이전, 한국어사에서 한자를 이용한 인명, 지명 차자 표기는 아주 이른 시기부터 비롯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건 립 연대(A.D 414)가 확실한 광개토대왕비문에 광개토대왕이 백제로부 터 공취한 18 城 名 (지명)이 閣 彌 城, 牟 盧 城, 彌 沙 城, 阿 旦 城, 古 利 城, 豆 奴 城, 比 利 城, 彌 鄒 城, 散 那 城, 那 旦 城, 閏 奴 城, 貫 奴 城, 阿 利 水 등과 같이 음차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국사기 와 삼국유 사 에 나타난 慰 禮 城, 負 兒 岳, 彌 鄒 忽, 沸 流 水, 扶 餘, 卒 本, 斯 盧 등 도 꽤 이른 시기부터 차자 표기되어 전하여 왔던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등 옛 문헌의 기록도 乙 阿 旦, 阿 旦, 彌 鄒, 牟 盧, 那 旦, 阿 利 水 등과 같이 광개토대왕비문의 것들과 동일하거나 유사음의 차자 표기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기 500년 경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냉수 봉평 신라비에 斯 羅, 沙 啄, 斯 彼, 居 伐, 牟 羅 등의 지명이 새겨져 있다. 이처럼 이른 시기의 비문에 새겨진 차자 표 기 지명들이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후대의 문헌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비록 금석문에서 찾을 수 없을지라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옛 12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5 문헌에 나타나는 기타 지명들도 처음에는 음차 표기된 것으로 믿어도 좋을 것이다. 지명의 차자 표기를 어떻게 해독할 것인가. 우선 우리는 차자 표기 가 음차 표기인가, 아니면 훈차 표기인가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앞에서 제시한 여러 가지 차자 표기법 중 어느 것에 해당하 는 표기 현상인가를 미리 알 수 있어야 한다. 가령 어떤 지명이 단일 한 차자 표기형으로 나타나지 않고 별칭으로 다양하게 차자 표기되어 있을 때 서로를 비교 검토하면 풀이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할 수 있 다. 가령, 용비어천가 지명주석의 예를 들면 舍 和 : 斜 地, 吾 音 會 : 阿 木 河, 會 叱 家 : 回 叱 家, 所 多 老 : 蘇 多 魯, 阿 吾 和 : 阿 吾 智 등과 같 이 동일 지명에 대한 동음(혹은 유사음)자의 차자 표기가 짝지어 나타 나면 그것은 대체적으로 음차 표기일 가능성이 짙다. 그렇지 않고 買 忽 : 水 城, 薩 買 : 靑 川, 奈 吐 : 大 堤, 於 乙 買 : 泉 井 등과 같이 대응 하는 차자 표기는 후자가 '훈차 표기'에 해당하고 전자는 '음차 표기'에 해당할 가능성이 크다. 이밖에도 차자 표기 지명을 해독하는 여러 방 법을 통해 종합적인 분석 기술로 우리가 알 수 있는 지명에 대한 차자 표기어를 해독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고대국어 고유명사에 대한 차자 표기법에 네 가지의 방법 가. 음차법 : 고유명사를 유사한 한자음으로 음차 표기하는 방법으로 그 구체적인 예 지 명 : 斯 羅, 徐 羅 伐, 所 夫 里, 泗 沘, 比 斯 伐, 彌 鄒 忽, 慰 禮 忽 등 인 명 : 朱 蒙, 溫 祚, 沸 流, 類 利, 居 柒 夫, 異 斯 夫, 伐 休, 骨 正, 奈 勿, 文 周 등 관직명 : 麻 立 干, 莫 離 支, 古 鄒 加, 鞬 吉 支, 於 羅 瑕, 舒 發 翰 등 인천 지명의 이해 13

16 나. 훈차법 : 고유명사를 한자의 훈을 빌어 적는 방법으로 엄격히 말하 면 漢 譯 지 명 : 熊 津 (고마 ), 岐 灘 (가린여흘), 荒 山 (거칠뫼), 孔 岩 (구무바회), 竹 田 (대 ), 石 浦 (돌개), 北 泉 洞 (뒷 ), 馬 山 ( 뫼), 連 山 (느르뫼) 등 인 명 : 東 明, 赫 世, 原 宗, 立 宗, 荒 宗, 苔 宗, 金 輪, 銅 輪 등 관직명 : 大 ( 舍 ), 太 大 ( 角 干 ), 王, 內 臣, 內 頭, 內 法, 衛 士, 平 掌, 朝 廷 佐 平, 海 ( 干 ) 등 다. 훈음차법 : 한자의 본뜻은 버리고 훈의 음만 빌어 적는 법 지 명 : 白 ( 江 )( 泗 沘 江 ), 黃 等 ( 也 山 ), 泉 井 ( 口 )~ 宜 ( 城 ), 柳 等 ( 川 ), 鷄 林 ~ 鳩 林, 鐵 ( 原 ), 絲 ( 浦 ) 등 관직명 : 角 ( 干 ), 酒 多, ( 波 ) 珍 ( 干 ) 등 라. 음 훈 병차법 : 음 훈을 아울러 쓰는 혼합표기 방법 지 명 : 加 莫 洞 (가막골), 廣 津 (광 ), 德 積 (덕물), 善 竹 (션 ), 按 扳 灘 (안반여흘) 등 인 명 : 舍 輪 (쇠돌이), 琉 璃 明 (누리 거) 등 이상의 기본적인 네 가지 차자 표기법 중 특히 (다)(라)에는 또 다시 하위분류하여야 할 차자 표기의 활용법이 있다. (1) 음+훈, 훈+음 병 차법, (2) 음+훈음, 훈음+음 병차법, (3) 훈+훈음, 훈음+훈 병차법, (4) 음+훈+훈음, 훈음+훈+음 병차법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 활용 법 중에 특별한 방법은 '훈+음'의 순서로 표기하는 형식이 보편적인데 그 첫째 자는 '뜻'을 나타내며 둘째 자는 '음'을 나타내어 발음하면 첫 째 자의 훈독음이 실현되도록 하였다. 예를 들면 赫 居 弗 矩, 世 里 儒 利, 炤 知 毗 處, 活 里 沙 里 등이 그것에 해당한다. 14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7 이러한 표기법은 '혁거, 셰리, 소지, 활리'로 발음해서는 안 된다는 지시로 끝음절을 덧붙여 적어 바르게 발음하도록 유도한 것이라 하겠 다. 향찰 표기의 '훈주음종( 訓 主 音 從 )'법 곧, 의미 표기가 주이고, 음의 표기는 종속적 요소가 되도록 표기했던 방식이다. 지명 차자 표기에서 이러한 표기형은 다시 몇 종류로 하위분류할 수 있다. 그 기본적인 표기형은 인명 표기의 경우처럼 첫째 자의 훈독어 형(고유어형)의 말음절을 표기하는 방법으로 다음과 같은 예들을 통해 고대 지명을 이해할 수 있다. 1 活 里 ~ 沙 里 ( 慶 州 府 驛 )는 '활리'로는 말이 안 되니 반드시 '사리~살 리'( 沙 里 )로 읽으라는 표기. 2 勿 居 (백제)> 淸 渠 (신라)는 '청거'로 읽지 말고 반드시 ' 淸 '의 훈음인 '물거'로 읽어야 고유어가 실현된다는 받쳐적기 방법. 3 昔 里 火 > 靑 理 (신라)는 '청리'로 읽지 말고 '서리'로 읽어야 말이 됨 을 알려 주는 표기이다. ' 薩 水 > 靑 川, 薩 買 > 靑 川 '과 같이 ' 靑 '의 훈 이 * sar 이었기 때문. 4 音 里 火 > 靑 理 (신라)역시 '음리'와 '청리'로 읽으면 안 되고 반드시 '소리'와 '사리~서리'로 읽으라는 받쳐적기 표기 방법. 5 汀 理 6 川 里 (향가)는 '정리, 천리'로 읽으면 말이 안 되므로 반드 시 '나리'로 읽어야 함을 알려주는 받쳐적기 표기. 7 等 阿 ~ 等 良 ~ 珍 阿 ~ 月 良 > 高 山 (백제)은 '고산'으로 발음하지 말고 반드시 ' 아~ 라'로 읽으라는 받쳐적기 표기. 8 大 尸 山 > 大 山 > 泰 山 ~ 詩 山 ~ 仁 義 (백제)는 ' 大 尸 '를 '글'로 읽으라는 표기이다. 그래야 ' 大 '의 고유어가 실현되며 별칭인 詩 山 의 ' 詩 '의 훈음인 '글'과 부합. 9 水 川 ~ 水 入 伊 (지리3)는 비록 음차 표기의 대응이 없지만 <처용 인천 지명의 이해 15

18 가>의 ' 夜 入 伊 '를 의지하여 ' 入 伊 '를 '들이'로 해독할 수 있는 받쳐 적기로 해독 가능. 10 所 比 浦 (백제)> 赤 烏 (신라)의 ' 赤 烏 '는 '적오'로 읽지 말고 '소비~소 오(< * 소 )'로 읽으라는 받쳐적기로 현지에 아직도 '새오개'가 남 아있을 뿐만 아니라 沙 㑀 忽 > 赤 城 ( 삼국사기 지리2), 沙 非 斤 乙 ~ 赤 木 鎭 ( 삼국사기 지리4)에서 ' 沙 㑀 沙 非 : 赤 '의 대응이 뒷받 침. 11 그 산 文 音 山, 골 舍 音 洞 ( 용비어천가 ) 의 ' 音 '도 받쳐적기의 말음절 차자 표기이다. ' 文 '만으로도 '그 '이며 ' 舍 '만으로도 '마 '이기 때문이다. 洛 東 江 의 지류인 岐 音 江 도 일종의 받쳐적기에 해당한다. 삼국시대의 지명을 기록한 용비어천가 지명 주석 중 '가린여흘 岐 灘 '이 있기 때문에 ' 岐 音 '을 '기음'으로 읽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가름~가 '으로 발음하여야 하는 것이다. 岐 音 江 은 ' 大 川 合 流 '혹은 ' 甘 勿 倉 津 下 流 와 鼎 岩 津 의 合 處 '라 하였다. 이 合 流 (혹은 合 處 )하는 지점에서 上 流 쪽으로는 두 물줄기가 갈라지는 까닭으로 '가름강' 혹은 '가 강'이라 하였다. 그리고 11 '그 文 音 '을 토대로 이른 시기의 ' 斤 尸 波 衣 ~ 文 峴 ' ( 삼국사기 지리2,4) 의 ' 斤 尸 '를 '그시'로 추독할 수 있다. 여기 ' 尸 '가 'ㄹ, 리'가 아님 은 비슷한 환경에서의 차자 표기 지명들이 ' 仇 乙, 毛 乙 冬 非, 於 乙 買 串, 內 乙 買, 達 乙 斬, 達 乙 省, 未 乙 省, 首 乙 呑, 沙 非 斤 乙, 助 乙 浦 '등과 같이 ' 乙 '로 적혀 있기 때문이다. 물론 ' 也 尸 買 ( 也 牲 川 ), 也 尸 忽 ( 野 城 ), 于 尸 ( 有 隣 )'의 ' 尸 '가 없지 않으나 ' 也 尸 '는 ' * 야시'로 읽는 것이 옳다. 다만 ' 于 尸 '만이 ' * 유리~ * 우리'로 읽힐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 없을 뿐이다. 현대지명 '갈비( 並 甫 )골'(경북 靑 松 縣 東 ), '갈비( 並 背 )골'(경남 합천 草 溪, 德 谷 )의 ' 甫 背 '도 '비'를 받쳐적기하였다. 이 표기 자료를 근거로 ' 並 伊 武 只 '(강원 16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9 淮 陽 長 楊 )의 ' 並 伊 '도 '갈비'로 해독할 수 있으니 ' 伊 '역시 받쳐적 기 어소로 볼 수 있다. '느름( 黃 音 )실'(충북 옥천 靑 城 )의 '느름' 도 ' 黃 音 '으로 발음하면 말이 안 된다는 표기법. 그러나 이와 같 은 규칙에서 벗어나는 의 표기형이 드물게나마 나타나기 때문에 문제. 12 柳 等 川 ~ 柳 川 ( 여지승람 ) 는 '유등천'으로 읽지 말고 '버 내'로 발음하라는 받쳐적기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유천'은 한자어로 말 이 되지만 '유등천'은 말이 안 된다. '버들'의 '들'을 ' 等 '의 훈음으로 표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고유어 '벌들내'(>버드내)가 실현. 13 月 奈 ~ 月 出 ~ 月 生 > 靈 岩 ( 삼국사기 지리3)은 백제 시대 지명인데 당시의 지명 표기에서 ' 月 '은 훈차자로 씌었고 그 이후 오늘날까 지도 거의 훈차자로 씌어 왔다. ' 奈 '는 삼국사기 지리에서 거의 가 '음차'자로 씌었음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이것은 * tʌrna 로 추 독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경덕왕이 개정한 ' 靈 岩 '도 * tʌrna로 추독할 가능성이 있다. ' 靈 '의 쓰임새가 ' 突 : 珍 : 月 : 石 : 等 : 靈 '과 같이 대응되는 기록을 보이기 때문에 그 훈이 ' * tʌr'이었 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러면 ' 岩 '은 그 말음 'm'을 무시하면 'a' 만 남는다. 그리하여 * tʌr( 靈 ) * a(m)( 岩 )로 읽으면 ' * tʌr-a'가 되 니 ' 月 奈 '의 ' * tʌrna'와 그 음형이 유사하다. 다만 ' 月 奈 '의 다른 표기인 ' 月 出 ~ 月 生 '의 문제가 남아 있다. ' 出 生 '의 훈은 모두 ' * 나-'이다. 이것은 ' 月 奈 '의 ' 奈 '를 적기 위하여 훈음차 표기된 것 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 月 奈 '의 표기형 역시 받쳐적기법에 의한 ' * tʌrna'로 앞에서 풀이한 ' 珍 阿 = 高 山 '과 동일 의미로 추정케 한 다. 그러나 만일 ' 出 生 '이 훈차(한역)이고 오히려 ' 奈 '가 ' 出 生 ' 의 훈음을 적어준 음차라면 ' 月 奈 '의 추정형 ' * tʌrna'는 한역인 ' 月 出 '의 뜻이 된다. 어쨌든 ' 月 奈 '에 대한 별칭인 ' 月 出 月 生 '의 인천 지명의 이해 17

20 표기가 이른 시기의 지명이라면 ' 出 生 '에 대한 고대 훈 ' * 나-'의 확인 가능성 입증. 14 薩 川 ( 谷 )~ 矢 乃 ( 慶 尙 晋 州 )는 '음+훈~훈+음'와 같이 그 순서가 '음+훈 훈+음'으로 바뀌어 대응하는 차자 표기형이다. ' 薩 '은 * sar로 음차 표기에 흔히 씌었고, ' 川 '의 훈은 '내'이며 ' 矢 ' 의 훈은 '살'이며 ' 乃 '의 음차 표기자임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모 두가 고유어 '살내'로 발음이 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 矢 乃 '를 '시 내'로 발음하지 말고 '살내'로, ' 薩 川 '은 '살천'으로 발음하지 말고 '살내'로 발음하라는 상보적인 차자표기. 15 薪 浦 鄕 卽 鈒 浦 方 言 相 類 ( 동국여지승람 권26 )에서 ' 薪 浦 : 鈒 浦 ' 는 고유지명 '섭개'로 해독될 수 있다. ' 薪 '의 훈이 '섭'이고 ' 鈒 '의 음이 '섭'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 鈒 浦 '를 '신포'로 발음하지 말고 '섭개'로 발음하라는 뜻. 16 德 勿 一 云 仁 物, 德 物 一 云 德 水, 德 勿 島 一 云 仁 物 島 或 云 德 積 島 에 서 ' 德 = 仁, 物 = 勿 = 水 = 積 '의 등식이 성립함을 알 수 있다. '클 ( 仁 ), 큰덕( 德 )' 훈몽자회 下 25,31이니 ' 德 仁 '은 '큰~클'로 해독 하여야 한다. ' 水 '는 훈차이고, ' 物 勿 은 음차이며 ' 積 '은 훈음차 이다. ' 德 勿 ( 物 ) 仁 物 德 積 '은 '큰 클믈'로 훈 음독하여야 한다. 그런데 여기 ' 積 : 物 : 勿 '이 문제이다. ' 積 '의 중세국어 시기의 훈은 '사 ' ( 석봉천자문 10)과 '물' ( 광주천자문 10)로 다르게 나타난다. 이들 복수 중 '물'을 택하면 된다. 이 사실을 용비어 천가 덕적도의 옛 지명의 주석인 '덕물 德 積 '이 입증하여 준다. 그러나 비록 용비어천가 는 '덕물'로 표기되어 있지만 동일지명 소를 ' 德 '과 ' 仁 '으로 통용하여 표기한 것은 본래에는 훈독이었지 결코 음독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두 글자를 훈 독하여야 동일한 고유어 '큰 클믈'이 실현될 수 있기 때문. 18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21 17 發 羅 (백제)> 錦 山 (신라)> 羅 州 (고려)는 ' 發 羅 : 錦 : 羅 '의 대응을 보 인다. 雅 言 覺 非 에 ' 蜂 羅 同 訓 벌'이라 하였고, 12세기 초에 송나 라 손목이 당시 고려의 어휘를 기록한 鷄 林 類 事 에는 ' 羅 曰 速 '이 라 하였다. ' 速 '의 훈은 ' ' ( 월인석보 序 18)이다. 따라서 ' 錦 ' 은 훈차(한역) 표기이고, ' 速 '은 훈음차 표기이며, ' 羅 '는 훈차(한 역) 혹은 發 羅 의 생략 표기. 18 水 川 ~ 水 入 伊 (백제)에서 ' 水 入 伊 '를 '물들이'로 읽어야 하는 '훈+훈 +음'의 차자 표기를 통하여 ' 入 伊 '의 ' 伊 '가 끝음절임을 확인 가능. 3) 지명 차자 표기의 해독 인명 관직명 등의 고유명사처럼 지명에 대한 차자 표기도 음차 표기 에서 시작되었다. 삼국사기 권37의 고구려 지명과 백제 지명의 대부 분이 음차 표기 지명들이다. 물론 지리4의 고구려 지명들은 고유명을 한역한 대응 지명이 많다. 그러나 이것들은 본래의 백제 지명(음차 표 기의 고유 지명들)을 고구려가 광개토왕 시대에 경기, 충청, 강원의 대 부분을 일시 점령한 이후에 어느 시기엔가 한역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에 고유 지명을 먼저 음차 표기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음차 표기 지명이 한역되어 있는 경우에는 고유어형과 그것에 대한 의 미를 아울러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음차 표기만 남아 있고 그것에 대응하는 한역이 남아 있지 않을 때는 의미를 거의 알 수가 없다. 반 대로 한역 지명만 남아 있을 경우에는 그것의 고유어형을 알 길이 없 다. 때로는 고유 지명에 대응하는 한역명이 있다하더라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삼국사기 권36에 등재되어 있는 백제 지명은 ' 甘 買, 仇 和, 伐 首 只, 小 夫 里, 泗 沘, 古 良 夫 里, 奴 斯 只, 沙 尸 良, 加 知 奈, 甘 勿 阿, 夫 夫 里 ' 인천 지명의 이해 19

22 등과 같이 대부분이 음차 표기되었다. 그런 중에 한역된 지명도 ' 熊 川, 大 木 岳, 大 山, 高 山, 礫 坪, 井 村, 新 村, 湯 井 '등과 같이 상당수 끼어 있 다. 이는 백제 시대에 이미 한역 작업이 수행되었던 사실을 알려주는 예들이다. 그러나 한역되었다 하더라도 고유어이므로 발음은 고유어로 하였을 것이다. 비록 처음에는 표기 지명에 불과하였지만 한역 지명은 한자어로 표기된 고유어로 정착되어 왔다. 처음에는 한낱 표기어에 불 과하였던 한역 지명이 피한역 지명(고유 지명)과 공존하다가 근래에는 오히려 한자어로만 쓰이거나 아니면 공존한다 하더라도 더욱 우세하게 활용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가령 삼국사기 지리 4의 고구려 지명은 ' 買 忽 一 云 水 城, 水 谷 城 一 云 買 旦 忽, 三 峴 一 云 密 波 兮 '등과 같이 고유 지명에 대응하는 한역 지명이 있어 그 의미를 쉽게 알 수 있다. 즉, '매( 買 )-수( 水 ), 홀( 忽 )-성( 城 ), 곡( 谷 )-단( 旦 )' 등의 대응이 그 예 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역이 없는 경우에는 부득이 후대의 개정 과정 에서 한역된 지명에 의존하여 해독할 도리밖에 없다. 대체적으로 지명 개정에 있어서의 기본 태도에는 개정 전의 지명들을 바탕으로 될수록 그 근거를 남기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개정 전후의 지명을 세심하 게 비교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개정 전 삼국 지명을 (A), 신라 경덕왕의 개정 지명을 (B), 그리고 고려 태조의 개정 지명을 (C)로 비 교하여 지명변천 과정을 검토한다. 20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23 (A) (B) (C) (1) 烏 斯 含 達 兎 山 兎 山 (2) 夫 斯 波 衣 松 峴 (3) 息 達 土 山 土 山 (4) 扶 蘇 岬 松 岳 松 岳 (5) 夫 斯 達 松 山 (6) 夫 斯 達 松 嶽 (7) 德 勿 德 水 德 水 (8) 主 夫 吐 長 堤 (9) 奈 吐 ( 大 堤 ) 奈 隄 (10) 吐 上 隄 上 (11) 東 吐 棟 ( 梀 ) 隄 (12) 悉 直 三 陟 (13) 所 非 芳 森 溪 森 溪 (14) 岐 淵 派 川 派 川 (15) 赤 川 丹 川 朱 溪 (16) 沙 非 斤 乙 赤 木 丹 松 등과 같이 한역 지명(B)에 의하여 (A)의 의미를 직감할 수 있다. 만 일 (B)를 근거로 삼기가 불가능할 때는 부득이 (C)에서 그 의미를 찾 을 수도 있다. 그러나 (14)는 ' 岐 : 派, 淵 : 川 '이며, (15)는 ' 赤 : 丹 : 朱, 川 : 溪 '이어서 모두가 동훈(혹은 유사훈)이음자이기 때문에 여러 각도에서 인천 지명의 이해 21

24 종합적으로 비교 고찰하면 바른 해독이 가능하다. 가령 (16)의 ' 沙 非 : 赤 : 丹, 斤 乙 : 木 : 松 '이 뒷받침하기 때문에 (15)의 ' 赤 : 丹 '을 ' 沙 非 '로 해독할 수 있는 단서가 있는 예로 들 수 있다. (A) (B) (C) (17) 內 米 忽 暴 池 海 州 (18) 黃 等 也 山 黃 山 連 山 (19) 沙 尸 良 新 良 黎 陽 (20) 知 六 地 有 北 谷 여기 (17)(18)(19)(20)에서 (B)의 의미 파악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 內 米 : 海, 黃 : 連, 沙 尸 : 黎, 知 : 北 '와 같이 (C)만이 의미파악의 단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 熊 津, 白 江 '과 같이 별칭의 짝을 남기지 않은 한역 지명의 고유 지명은 어떻게 찾을 것인가. 일본서 기 (A.D.720)에 ' 久 麻 那 利 久 麻 怒 利 '와 용비어천가 의 '고마 '(제 15장), 그리고 현지에서 아직도 쓰고 있는 '고마(곰)나루'를 근거로 ' 熊 津 '을 '*고마 '로 재구할 수 있다. 또한 ' 白 江 '도 병칭인 ' 泗 沘 江 ' 을 바탕으로 고유어형을 재구할 수 있다. ' 泗 沘 '는 ' 所 夫 里 '의 변형인 바, 동일한 江 을 ' 所 夫 里 江 ~ 泗 沘 江 ~ 白 江 '이라 부른다. 그런데 ' 白 '( 江 ) 의 훈이 ' -'이니 그 훈음이 ' 泗 沘 '와 유사하다. 음차 표기의 ' 泗 沘 '를 어느 시기엔가 훈음차 표기한 것이 ' 白 江 '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어떤 지명이 '음차 표기 : 훈차 표기'의 대응을 남기지 않고 한자표기 지명으로만 기록되어 있을 때는 후대에 밝혀진 고유어 지명 을 찾아서 추정하는 방법이 가능하다. 예를 들면 백제 지명 丹 川 縣 은 ' 丹 川 (백제)> 赤 川 (신라 경덕왕)> 朱 溪 (고려 태조)'와 같이 ' 丹 : 赤 : 朱 ' 22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25 로 그 뜻은 변함없이 동음이음자로만 바뀌었다. 이 중 ' 赤 '자로 표기된 가장 이른 한글 지명이 용비어천가 의 '블근못 赤 池 '(제153장), '블근 셤 赤 島 '(제4장)이다. 여기서 지명 표기에 쓰인 ' 赤 '의 고유어 '은'을 추 출할 수 있다. ' 川 '의 고유어 역시 '달내 達 川 '(제14장), '달내 撻 川 '(제 37장)에서 '내'를 추출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른 삼국시대의 ' 素 那 = 金 川, 沈 那 = 煌 川 ' 父 子 의 이름에서 '*nay'를 발견한다. 여기에 ' 絲 川 一 云 谷 川 ' 에서의 '실내>시내'의 '내'를 추가할 수 있다. 더구나 고려가요 ' 動 動 '에 서' 正 月 ㅅ 나릿므른'의 '나리'를, ' 赤 川 '은 일차적으로 '블근내~블근나리' 로 그 고유어를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백제 지명 ' 所 比 '를 신라 경덕왕이 ' 赤 烏 '로 개정하였으니 또 다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 게 된다. 거기에 백제 전기어 지명에서 ' 沙 㑀 忽 > 赤 城, 沙 非 斤 乙 ~ 赤 木 > 丹 松 ' ( 삼국사기 지리4)와 같이 ' 沙 㑀 沙 非 = 赤 丹 '으로 나타나 ' 赤 '에 대한 옛 훈이 ' 所 比 沙 㑀 沙 非 '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 赤 川 丹 川 '은 '사비내 소비내~사비나리 소비나리'로 해독할 수 있는 가 능성을 보인다. 그러면 둘 중 어느 것이 설득력이 있는 해독인가. 둘 중 '은내~은나리'의 '은'은 15세기의 국어 자료이지만 '사비 소비'는 삼 국시대의 훈이기 때문에 오히려 전자보다 후자가 더 유력할 것으로 추 정할 수 있다. 옛 지명 ' 於 乙 買 串 '( 泉 井 口 )은 한강과 임진강의 河 口 즉 두 江 이 交 流 ( 合 流 )하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지세로 말미암아 신라 경덕 왕 16년(A.D 757)에 ' 交 河 '로 개정된 이후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우선 우리는 두 강이 하구에서 서로 交 合 하는 지형 즉 마치 서 해를 향해 낮은 산을 눕혀 놓은 것처럼 생긴 곶( 串 )을 이루고 있는 지 역임을 유의하면서 ' 於 乙 買 串 '의 구조를 ' 於 乙 + 買 + 串 = 泉 + 井 + 口 '로 분 석할 수 있다. ' 串 '에 대응하는 한자가 ' 口 '이니 ' 串 '은 '관'이 아니라 '고 지'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 串 '의 한국한자음화는 이른 시기에 진행 인천 지명의 이해 23

26 되었던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셈이다. 이 ' 口 '는 '( 甲 比 ) 古 次 : ( 穴 ) 口, ( 要 隱 ) 忽 次 : ( 楊 ) 口, ( 古 斯 也 ) 忽 次 : ( 獐 ) 口 '등과 같이 ' 古 次, 忽 次, 串 ' 의 한역이다. 앞에서 일차 언급한 바와 같이 交 河 군의 지형은 서해 쪽 으로 타원형처럼 불룩 나와 있다. 따라서 이 지명에 ' 串 '이 접미하고 있음은 지형명명법에 따른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다음은 지명소 買 : 井 의 대응 문제이다. ' 買 '가 참여한 자리에 따라 서 의미가 ' 水 川 井 '으로 달라짐을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비록 위 치에 의해 의미가 달라져도 이것들의 포괄 적 의미는 ' 水 '이다. 交 河 군 의 위치가 한강과 임진강이 交 合 하는 江 口 이니 물을 의미하는 지명소 가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그런데 여기서 ' 買 '를 ' 水 '로 한 역하지 않고 ' 井 '을 택한 까닭이 무엇인지는 확언할 수 없지만 ' 買 '가 ' 水 川 井 '의 포괄 의미( 水 )도 있으니까 별다른 뜻 없이 ' 井 '으로 한역했 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물'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 井 '자를 쓴 것은 아니고 단지 지명의 접사였을 것이다. 따라서 ' 於 乙 買 串 '의 ' 買 '는 交 河 군의 河 口 에서 交 合 하는 두 강의 '강물'을 의미한 것이라고 추정함이 옳을 듯하다. 다음은 ' 泉 '의 의미인 ' 於 乙 '로 해독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 於 乙 '이 ' 泉 '의 의미를 나타내는 지명소로 참여한 것처럼 보 인다. 만일 표기대로 ' 泉 '의 뜻이었다면 그곳에 유명한 '샘( 泉 )'이 있어 야 한다. 물론 水 酒 > 禮 泉 (지리 1)과 같이 특별한 샘이 있기 때문에 군 명이 지어진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여기 ' 於 乙 : 泉 '은 그 이면에 달리 상고하여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 交 '와의 상관성이다. 왜냐하면 ' 於 乙 '의 한역인 ' 泉 '을 경덕왕이 ' 交 '로 다시 개정하였기 때문이다. 이 3 者 관계는 ' 於 乙 = 泉 = 交 '의 등식을 이루며 ' 於 乙 > 泉 > 交 '의 표기 변화의 질 서를 유지하여 왔다. 이는 마치 후속 지명소가 ' 買 = 井 = 河 '의 등식으로 ' 買 > 井 > 河 '의 표기 변화를 하였기 때문에 ' 井 '을 '물( 河 )'의 의미로 해석 24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27 하여도 무방한 것처럼 ' 泉 '역시 ' 交 '의 의미로 풀어도 무리가 없기 때문 이다. 경덕왕이 ' 於 乙 '을 ' 交 '로 한역한 원칙은 ' 買 '를 ' 河 '로 한역한 것과 같아서 그 뜻이 ' 於 乙 '=' 交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인천 지명의 이해 25

28 3. 인천지역 고대 지명의 이해 1) 지명 인천( 仁 川 )의 변천 과정 현재의 인천( 仁 川 )이란 지명은 조선 태종 13년(1413년)부터 사용해온 바, 이 지역의 지명으로 최초로 기록된 것은 삼국사기 지리지의 매 소홀( 買 召 忽 )현이지만 그 이전의 지명으로 미추홀( 彌 鄒 忽 )이 기록되어 있다. 매소홀이란 지명은 고구려가 세력을 확장하여 인천지역을 점령 한 후 지명을 부여한 것으로 이해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경덕 왕 17년(757)에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소성( 邵 城 )을 두었고, 고려시대 에는 왕실과 인연을 맺게 되어 인주 ( 仁 州 )로 읍호를 높였고, 조선 초 태종 때 주( 州 )를 천( 川 )으로 고쳐 인천( 仁 川 )이 된 후 현재에 이른 것 이다. 백제 고구려 신라 고려 조선초~현재 미추홀 ( 彌 鄒 忽 ) > 매소홀 ( 買 召 忽 ) > 소성 ( 邵 城 ) > 인주 ( 仁 州 ) > 인천 ( 仁 川 ) 백제의 지명으로 추정되는 /미추홀/에서 '미'( 彌 )는 훈차, '추'( 鄒 )는 의미 없는 사잇소리로 추정된다. 훈차한 '미'( 彌 )는 고대국어 표기에서 대개 ' ( 買 )'로 발음했고, '물'을 의미했던 바, '수원( 水 原 )'의 고대지명 이 '매홀( 買 忽 )'인 것과 현대어에서 '미더덕, 미나리, 일 곱매(물)'등에서 그 잔존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추( 鄒 )'는 사잇소리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는 바, 고대어에서는 'ㅅ,ㅈ,ㅊ'가 분화되지 않았다는 것이 국어 사의 통설이므로 '추'로 'ㅅ'을 표기한 것으로 이해된다. '홀( 忽 )'은 '골', 26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29 곧 성( 城 )의 고유어 음차였으므로 미추홀은 '물ㅅ골'의 뜻으로 보아 무 난하다. 고구려의 지명 '매( 買 )'도 그 이전의 '미'( 彌 )를 계승한 훈차였고, '소 ( 召 )'도 앞의 '추( 鄒 )'와 같은 기능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의 '소성( 邵 城 )'은 앞 시대의 지명과 연관성은 없는 것으로 추정 된다. '소( 邵 )'는 '읍( 邑 )'의 뜻이므로 마한시대의 소국( 小 國 )을 뜻하는 미추홀( 彌 鄒 忽 )이란 명칭에서 편제를 바꿔 변방의 읍 정도로 명칭을 개 정한 듯하다. '인주( 仁 州 )'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작명한 고을 이름이므로 지명 고찰의 대상은 아니며, 조선 태종 때의 개정은 읍호를 낮추는 과정에 서 만든 글자의 변형에 불과하다. 2) 부평의 지명 부평지역의 옛 지명이 최초로 등장하는 공신력 있는 문헌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경덕왕 17년 (757)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전체 행정구역을 개편한 결과를 기록한 삼국사기 지리지이다. 이후 고려 사 지리지나 세종실록지리지 등의 문헌들에 기록된 부평의 읍호들은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 신라 고려초 의종 4년 고종 2년 주부토군 ( 主 夫 吐 郡 ) 장제군 ( 長 堤 郡 ) 수주 ( 樹 州 ) 안남도호부 ( 安 南 都 護 府 ) 계양도호부 ( 桂 陽 都 護 府 ) 충렬왕 4년 충선왕 2년 세종실록 지리지 동국여지승람 (신증) 여지도서 길주목 ( 吉 州 牧 ) 부평부 ( 富 平 府 ) 부평부 ( 富 平 府 ) 부평도호부 ( 富 平 都 護 府 ) 부평부 ( 富 平 府 ) 인천 지명의 이해 27

30 이 글에서 한자음은 karlgren의 Anolytic Disctionary of Chinese and sino-japanese (1966)와 주법고( 周 法 高 )의 한자고금음휘( 漢 字 古 今 音 彙 ) 의 재구음을 참고하였고, 재구음은 해당 어휘 앞에 'cvcvcv...' (c-자음, c-모음)와 같이 기술하였다. (1) 주부토( 主 夫 吐 ), 장제( 長 堤 ), 수주( 樹 州 ) 우선 위의 지명들에서 읍호( 邑 號 )인 '군, 주'는 성명할 필요가 없다. 고구려의 지명 주부토( 主 夫 吐 )는 '주부( 主 夫 -차)+토( 吐 -음차)'로 분 석할 수 있다. 만약 '주부( 主 夫 )'를 음차로 분석하면, 이들의 고대한자 음은 다음과 같다. ㄱ) 主 (tiu), 夫 (piu) 이들 두 음절을 합한 고대한자음은 '*tiu-piu'에 가깝게 발음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러한 발음과 유사한 고대어나 중세국어 어휘는 문헌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면 이들은 훈차로 이해되고 다음과 같 이 설명된다. 즉, 주( 主 )는 '임금, 주인[ 主 ], 어른[ 長 ], 대[ 大 ]'의 뜻이었다. ㄴ) 수만리 니미(님이)어시니 ( 용비어천가 31장) ㄷ) 主 님쥬 ( 훈몽자회 中 1 ) ㄹ) 이몸 삼기실 제 님을 조차 삼기시니- '왕을 따라 출생'(사미인곡) ㅁ) 君 님군 ( 훈몽자회 中 1 ) 위의 ㄴ)~ㅁ)의 예들은 한글로 표기된 중세국어 시기의 문헌에 나 타난 예들로 '주( 主 )'가 '임금', '주인', '어른'등의 의미장을 가졌음을 보여 준다. 28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31 '부( 夫 )'는 공자( 孔 子 )를 높여 부를 때 '공부자( 孔 夫 子 )'로 부르는 것처 럼 일종의 존경 접미사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주부( 主 夫 )'를 신라시대 지명의 개정에 '장( 長 )'으로 바꾼 의미를 대략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국어는 폐음절어, 곧 '님'으로 발음하지 않았으므로 '부( 夫 )'를 존경 접미사가 아니라고 볼 수 있는 바, 고려 초에 '장( 長 )>수( 樹 )'로 개정한 것에 유의해야 한다. '수( 樹 )'는 현대국어의 훈으로 '나무'지만 15세기의 문헌에는 '나모ㄱ '(namug)였다. ㅂ) 불휘 기픈 남 ( 용비어천가 1장) '나모ㄱ'의 형태는 현대어에도 '나무로 만든 신'을 '나막신'이라 하여, 고대어의 자취가 남아있으니 'ㄱ'은 예로부터 약하게 발음해온 까닭에 단어 속에 화석( 化 石 -고어의 일부가 단어 속에 굳어 있으면서 변치 않 는 음, 음절, 형태소 등)으로 남아 있는 경우, 장언을 제외하고는 탈락 하였다. 따라서 앞의 '주부( 主 夫 )'가 '*nimu'또는 '*nama'와 유사한 발 음의 표기로 '*nimu>*nibu'의 변천, 곧 'm>b' 음운변천을 거친 것으 로 이해된다. 이러한 변천은 '납'의 고대어 등에서 유사한 예를 볼 수 있다. ㅅ) 내물( 乃 勿 ), 나물( 那 勿 ) ~연( 鉛 )>'납'연( 鉛 ) 위의 경우, '*namur>*nama>*nabu>*nap'의 변천 곧, 'ㄹ'탈락과 'm~b(p)'교체의 과정으로 추정되며, 'm>b(p)'의 변천을 겪은 것을 고 대어로부터 변천에서 알 수 있다. 결국 같은 입술소리이므로 '*m~b(p)' 의 교체가 가능했고, '*nimu~*nibu~*nama~*nabu'의 교체형을 인천 지명의 이해 29

32 고려 초에 '*나무[ 樹 ]'로 훈차해 '수주( 樹 主 )'가 된 것이다. 한편 *namu~*nabu가 '장( 長 )'으로 대역된 예는 '내미홀일운지성일 운장성( 內 米 忽 一 云 地 城 一 云 長 城 ' 삼국사기 지리 4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 통일신라, 고려 초의 지명에서 주부( 主 夫 )는 '*nimu (*namu)~*nibu(*nabu)'로 재구될 수 있고, 그 지명소는 '임금, 어른, 주인'의 의미장을 가졌었다. 다음 '토( 吐 )>제( 堤 )'를 분석한다. ㅇ) 칠제현본칠토현( 桼 堤 縣 本 桼 吐 縣 사기 권 34 ㅈ) 내토군일운대제( 奈 吐 君 一 云 大 堤 ) 사기 권 37 ㅊ) 김제군본벽골군( 金 堤 郡 本 碧 骨 郡 ) 사기 권 34 위의 지명들에서 '토( 吐 )~제( 堤 )'의 대음이 부평의 옛 지명과 같게 나타나며, 고대 지명소에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던 것으로 '제방이 특징 인 고을'이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적 지명의 후부요소( 後 部 要 素 )로 '곡( 谷 ), 천( 川 ), 포( 浦 ), 산( 山 )'등과 같이 사용되 던 지명소의 하나로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앞의 전제에서 말했듯이 고 대어에는 유기음( 有 氣 音 - 거센소리)이 분명히 분화되지 못했던 시기였 으므로 토( 吐 )는 '*도'와 유사한 음이었을 것이며, 그것은 장소를 의미 하는 중세국어의 ', '와 대응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ㅋ) 아모 라셔 ( 월인석보 2:25 ) ㅌ) 아모 나 ( 월인석보 1:26 ) 이런 경우의 ', '는 장소[ 處 ]를 나타내는 중세국어로 앞의 '*도 (tu)'도 유사한 발음과 의미를 가진 지명소로 해석된다. 세종실록 지 30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33 리지에는 고을 이름을 '장제( 長 堤 )'가 아닌 '시제( 是 堤 )'로 기록되어 있 는 바, 장제( 長 堤 )와 글자가 유사해 오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앞의 ㅊ)에서는 '골( 骨 )~제( 堤 )'로 대응하는 경우로서 '골( 骨 )'의 고대 한자음은 '*kuət'이었고, 이 지명소는 장소를 의미하는 바, 용비어천 가 26장의'이 곧 뎌 '고데(곧에)', '처( 處 )는 고디(곧이)'라 ( 석보상절 13:12)등에서 현대어의 '곳'으로 변천한 단어이다. 이상에서 볼 때 '토 ( 吐 )~제( 堤 )'의 대응은 원래의 의미가 '제방'이지만 중세국어와 비교를 통해 볼 때 '~ 한 땅'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주부( 主 夫 )~장( 長 )~수( 樹 )'의 변천은 '음차> 훈차>훈차'의 과정을 거쳐 개정된 지명소로서 대략 '*nima(nama)> *nibu(nabu)'로 읽혔을 것이며, '임금, 주인, 어른'의 뜻을 가졌고, '토 ( 吐 )~제( 堤 )'는 '음차>훈차'로의 변천을 거쳤고, 의미는 '~한 땅'이므로 전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았다고 추정된다. 지명소 대응 해 석 의 미 주부( 主 夫 )~ 음차-*nima~*nibu~*nama~nabu 임금 장( 長 )~ 훈차 주인 수( 樹 )~ 훈차-*nama(nima)~*nabu(*nibu) 어른 토( 吐 )~ 음차~*도[tu] 제( 堤 ) 훈차~*도, 장소, 땅, 고을 위의 표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부평의 옛 지명, 곧 '주부토( 主 夫 吐 ), 장제( 長 州 堤 ), 수주( 樹 州 )'는 모두 '임금, 주인, 어른', 즉 '존장자( 尊 長 者 )가 다스리는 땅(고을)'의 의미로 이해되며, 이것은 옛 마한의 소국 중 한 나라가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지명으로 추정된다. 인천 지명의 이해 31

34 (2) 안남도호부, 계양도호부, 길주목 안남도호부 '안남( 安 南 )'에서 '안( 安 )'은 고대국어 시기에는 '*아나(ana)' 또는 'ㄴ ㄹ'로 변동한 '*아라(ara)'의 고유어 표기였을 것이다. 고대국어는 모 든 음절을 외파에 의한 개음절로 발음했기 때문이며, 'ㄴ ㄹ'의 변동 은 고대 인명, 지명에서 자주 교체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훈민 정음 의 8종성으로 받침을 다 쓸 수 있다는 기술이 미파현상이 그 때 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ㄱ) 안시 성구안촌 홀혹운환도 성( 安 市 城 舊 安 寸 忽 或 云 丸 都 城 ) 삼국사기 지리4 ㄴ) 중반군본고구려식성 군경덕왕개명금안주 ( 重 盤 郡 本 高 句 麗 息 城 郡 景 德 王 改 名 今 安 州 ) 삼국사기 지리2 ㄷ) 백성군본고구려내혜홀 경덕왕개명금안성군( 白 城 郡 本 高 句 麗 奈 兮 忽 景 德 王 改 名 今 安 城 郡 ) 삼국사기 지리2 ㄹ) 현진현본아 동호현경덕왕개명금안 읍현( 縣 眞 縣 本 阿 冬 號 縣 景 德 王 改 名 今 安 邑 縣 ) 삼국사기 지리지2 ㄱ)의 안시( 安 市 )~환도( 丸 都 )의 대응에서 '환( 丸 )'은 중세국어 시기에 는 '알'이었지만 고대국어 시기에는 개음절로 발음하는 '*아라'였을 것 이다. 이것이 '안( 安 )'과 대응하고 '안'은 '*아나'로 발음했을 것이며, 도 성( 都 城 )을 뜻하는 지명의 전접요소로 '대( 大 ), 왕( 王 )'의 뜻이었을 것이 분명하며, 'ㄴ ㄹ'의 교체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자연스런 음운 교체였던 듯하다. 결국 '안( 安 )'은'*아나 *아라'로 교체된 것을 알 수 있고, '대( 大 ), 왕( 王 )'의 의미였다. 32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35 ㄴ)의 '식성( 息 城 )~안주( 安 州 )'의 대응에서는 다음의 지명이 참고가 된다. 즉, 한 성군일운한 홀인운식 성일운내 홀( 漢 城 郡 一 云 漢 忽 仁 云 息 城 一 云 乃 忽 ) 삼국사기 지리 4의 기사에서 '한( 漢 )~식( 息 )'으로 대응한다. '한( 漢 )'은 고유어 표기에서 '한( 翰 )~간( 干 )~홍( 鴻 )'등과 함께 '크다, 길 다'의 뜻으로 차자( 借 字 )되었다. ㅁ) 1한 산현본백제대 산현경덕왕개명금홍 산현( 翰 山 縣 本 白 濟 大 山 縣 景 德 王 改 名 今 鴻 山 縣 ) 삼국사기 지리3 위의 지명 변천에서 '한( 翰 )~대( 大 )~홍( 鴻 )'으로 대응하고, 이들의 뜻 은 '대( 大 )'이며 고유어 '*가라~*거러'의 표기였을 것이며 이것이 ㄴ)의 '식( 息 )'에 대응한다. '식( 息 )'의 중세국어 훈은 '귿, 그드', '내( 乃 )'의 훈은 '곧'이므로 이들에서 'ㄷ~ㄹ'의 교체로 '가라~거러'의 대응을 추출할 수 있고, 의미는 '대( 大 )'로 ㄱ)과 같이 '안( 安 )'과 대응함을 이해할 수 있다. ㄷ)에서는 '내( 乃 )~안( 安 )'으로 대응하고 '내( 乃 )'의 중세 국어 훈은 '엇더, 엇디;'였고, 고대어로는 '*ətə'를 재구할 수 있다. 여기서도 'ㄷ~ ㄹ'의 교체를 고려하면 'ətə~ərə'가 되고, 이것은 ㄱ)의 '안( 安 )'이 '*아 나~*아라'였던 것과 대비되어 같은 계열의 지명어였다. 제천군의 옛 이름 '내 토군일운대 제( 柰 吐 郡 一 云 大 堤 )' 삼국사기 지 리2에서도 '내( 柰 )~대( 大 )'의 대응으로 의미가 '대( 大 )'였음을 알 수 있 고, 그것이 '안( 安 )'에 대응하므로 이 지명에서도 '안( 安 )~대( 大 )'의 변 천을 이해할 수 있다. ㄹ)의 변천에서는 '아동( 阿 冬 )~안( 安 )'으로 대응하며 '아동( 阿 冬 )'에서 '동( 冬 )'은 고대어로부터 근대어에 이르기까지 '* ~더'를 표기하는데 차용되어 왔다. 예를 들면, 전남 강진군의 옛 이름 '동음( 冬 音 )현이 탐 진( 眈 津 )현'으로 바뀌었는데 '동음( 冬 音 )'의 두 글자는 '*담~*돔'을 표기 인천 지명의 이해 33

36 한 것이며, 조선 영조 때의 여지도서 통진부 편에 '동을산( 冬 乙 山 )'은 '달뫼'를 표기한 것으로, 현재 그곳 주민들은 '들미'로 부른다. 따라서 '아동( 阿 冬 )'은 '*아 ~*아더'로 ㄷ)의 경우와 같이 이 지명이 '안( 安 )' 과 대응함을 이해할 수 있다. 이상 고찰한 바와 같이 '안( 安 )'은 '*아나~아라~어더~어러'의 교체 를 보인 고대어였고, 그 의미는 '대( 大 )'였으므로 '주( 主 )~장( 長 )~대 ( 大 )'로 변천해온 일관성을 가진 지명소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남( 南 )'에 대하여 고찰한다. '남( 南 )'의 중세국어 훈은 '( 훈몽자회 中 4, 석봉천자문 28)'이었다. '앞'으로 변천해 왔거니 와, 남형으로 집을 짓고 살던 우리의 주거, 생활 관습이 잘 표현된 단 어로 '북( 北 )'의 중세국어 훈 음은 '뒤 북( 北 )'이었던 것을 보면 쉽게 이해된다. '남( 南 )'의 훈( 訓 ) '앒'은 '안남'의 해석에 참고가 되지 못한다. '남( 南 )' 을 고대국어시기에는 개음절로 발음했을 것이므로 '*나마~나무~나 무~니무'등을 교체형을 가졌던 '주부토( 主 夫 吐 )'의 '주부( 主 夫 )'나 '수주 ( 樹 州 )'의 '수( 樹 )'곧 '나무'와 유사한 어형을 표기하고자 한 것이고 '남 ( 南 )'도 결국 이들과 유사한 어형을 가졌고 의미도 다르지 않다. 따라 서 '님[ 主 王 ], 어른[ 長 ], 대( 大 )'의 뜻을 가진 '안( 安 )'과 '남( 南 )'은 같은 뜻을 중복 표기한 것이며, 옛 지명에서 이러한 의미의 중복은 다수 발 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옛 '마한( 馬 韓 )'은 '한산현본백제마산현신라인 지( 漢 山 縣 本 白 濟 馬 山 縣 新 羅 因 之 ) 고려사 56, 지리1에서' '한( 韓 )'과 '마( 馬 )'가 대응하고, '한주( 韓 州 )~아주( 鵝 主 )'의 대응은 동국여지승람 17의 '아주현본거로현( 鵝 州 縣 本 巨 老 縣 )'기사를 비교하면, '한( 韓 )~아( 鵝 )~ 거로( 巨 老 )'가 대응한다. 한편 '마( 馬 )'의 고유어가 '걸(윷놀이)'과 '말(공 골어 morin의 차용)'이 있으니 이들은 모두 '가라~거러'의 표기로 마 한(마한)은 '*가라~*거러'의 중복 표기이다. 34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37 계양도호부 부평의 지명을 다룬 향토지들에서 '계양( 桂 陽 )'의 의미가 '계양산에 계수나무와 회양목이 많아서'라고 했다. 그러나, 향신료, 약재로 쓰이 는 계수나무는 열대식물이다. 한편 회양목이란 식물명에서 '회'의 한자 는 없고, '계양산'의 '양'은 '언덕 양( 陽 )'이지만, 회양목의 '양( 楊 )'은 억 지로 쓴 글자이므로 위의 해석에 근거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계( 桂 )'는 지명에 많이 사용된 글자는 아니다. '계( 桂 )'를 설문해자 ( 說 文 解 字 등 큰 자전에서 찾으면, '달[ 月 ]'과 같은 뜻을 가진 글자로 설명함과 동시에 달이 가장 가까이서 빛나는 8월을 '계월( 桂 月 )', '달'을 '계륜( 桂 輪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계( 桂 )~월[ 月 ]'은 같은 의미 로 이해할 수 있다. '달( 月 )'과 같은 음을 가진 '달( 達 )'을 '고목근현일운 달을참( 高 木 根 縣 一 云 達 乙 斬 :교동의 옛 이름, 삼국사기 지리2)', '고창 현본모량부리현( 高 敞 縣 本 毛 良 夫 里 縣 :고창군의 옛 이름, 삼국사기 지 리2), '대구현본달구화현( 大 邱 縣 本 達 句 火 縣 삼국사기 지리 2)'등의 지 명에서 '달( 達 )'이 지명의 제1음절일 때는, 고( 高 ), 대( 大 )의 뜻이 된다. '고( 高 )~모량( 毛 良 )'의 대응에서 '모량( 毛 良 )'은 음차한 글자로 현대국어 의 '털'과 유사한 '*더러~*다라'의 표기였다. 한편 '달'이 제2음절 이하에 올 때, 예를 들면 '아사달우명궁홀산( 阿 斯 達 又 名 弓 忽 山, 삼국사기 지리2)'같은 경우는 '달( 達 )~산( 山 )'으로 대 응 한다. 이상의 고찰에서 '계( 桂 )'는 '달[ 月 ]'의 이칭이므로 이 글자를 통해 '고 ( 高 ), 대( 大 )'의 의미를 갖는 '달[ 月 ]~달( 達 )'을 표기 하고자 했던 것으 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도처에 '계룡산'처럼 '계( 鷄 )'자를 쓰는 산 이름 이 많거니와, 이 글자는 '닭'의 훈을 갖지만 '달'과 유사하여 '고( 高 )'의 의미를 갖는 산 이름으로 사용되어 왔고, 전국적인 분포를 갖는다. 다음으로 '양( 陽 )'의 변 '좌부 방'은 '언덕'의 뜻이므로 '양( 陽 )'의 본뜻은 인천 지명의 이해 35

38 '높고 탁 트인 언덕( 陽 高 )'이다. 고양군( 高 陽 郡 )은 예전 '고봉( 高 峰 )현과 덕양( 德 陽 )현'을 합친 것으로 '북한산을 끼고 있는 고을'이므로 이런 지 명을 갖게 되었고, 모두 '높은 산 고을', 또는 단순히 '땅[ 陽 )]'의 뜻도 된다. 따라서 '계양( 桂 陽 )'은 '높은[ 高, 大 ]산'또는 '높은 땅'으로 '계양산' 이 '한강 서편 경인지역에서 높은 산'이므로 그러한 작명을 했을 수도 있으나, 앞의 고대지명으로부터 연관성을 생각하면 ' 높은, 큰 고을'의 의미를 일관성 있게 유지하고 있다고 보게 된다. 길주 고려 충렬왕 34년(1308) 계양도호부는 길주목으로 승격된다. 인천 의 지명 유래 에는 '임금이 좋아하는 고을이므로 길주( 吉 州 )라 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길( 吉 )'자가 지명으로 사용된 예는 매우 드물다. ㄱ) 영 동군본길 동군( 永 同 郡 本 吉 同 郡 ) 삼국사기 지리2 ㄴ) 영 풍현본고구려대 곡군( 永 豊 縣 本 高 句 麗 大 谷 郡 ) 삼국사기 지리2 ㄱ)에서는 '길( 吉 )'이 '영( 永 )'과 음과 훈으로 대응함을 알 수 있다. ㄴ)에서는 '영( 永 )~대( 大 )'로 대응하여, 이들 사이에 '길( 吉 )~영( 永 )~대 ( 大 )'의 관계가 성립함을 알 수 있다. ㄷ) 강양군본대양군( 江 陽 郡 本 大 良 郡 ) 삼국사기 지리1 ㄹ) 대두산성본비달홀( 大 豆 山 城 本 非 達 忽 ) 삼국사기 지리4 ㄷ)에서 '강( 江 )'의 중세국어가 ' '이로, '대양( 大 良 )'도 ' '과 유 사하게 음차된 것이며, ㄹ)에서 '대( 大 )'가 '비( 非 )'의 중세국어 훈( 訓 ) 36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39 곧 '그르'로 대응한다. 이 관계에서 '대( 大 )가 *그르~*거러~*가라'와 유사 한 음으로 읽혔을 것이고, 그것이 '강( 江 )'의 ' '과 대응하는 것 을 알 수 있다. 중세국어시기의 어휘들에서 다음과 같은 예를 추가할 수 있다. ㅁ) 다 기 두어자로 ( 皆 長 尺 ) 능엄경언해 1:108 ㅂ) 고리 ( 頭 ) 월인석보 2:55 ㅁ), ㅂ)에서 비슷한 음상을 가진 '기[ 長 ]'와 ' 고리'의 '고리'가 모두 앞의 ㄷ),ㄹ)과 대응한다. 따라서 '길( 吉 )'은 '*기르~*그르~*거러~*가라~*고리'등의 유사한 음차를 통해 '대( 大 ), 장( 長 ), 두( 頭 )'등의 의미를 가진 고유어를 표기한 것이며, '길주( 吉 州 )'는 '큰(어른, 머리) 고을'의 뜻이 되므로, 이전 시대 의 지명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부평부( 富 平 府 ) 앞의 길주목이 충선왕 2년(1310) 부평부로 읍호가 강등된 이후 우여 곡절을 겪으면서 현재의 부평구에 이르기까지 '부평( 富 平 )'이란 이름이 700여년 긴 생명을 이어왔고, 또 영원히 유지할 것이다. 부평이란 지명은 금화( 金 化 )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 ㄱ) 금화현본고구려부여현 부평군( 金 化 縣 本 高 句 麗 夫 如 縣 富 平 郡 ) 삼국사기 지리2 ㄴ) 평주본고구려대곡군 영푼군( 平 州 本 高 句 麗 大 谷 郡 永 豊 郡 ) 삼국사기 지리2 ㄷ) 통진현본고구려평회압현 분진현( 通 津 縣 本 高 句 麗 平 淮 押 縣 分 津 縣 ) 인천 지명의 이해 37

40 삼국사기 지리2 ㄹ) 평해군본고구려근을어( 平 海 郡 本 高 句 麗 斤 乙 於 ) 삼국사기 지리2 ㄱ)에서 '부평( 富 平 )'이 '금화( 金 化 )'에 대응하거니와 '금화'에서 '화 ( 化 )'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지명 접미사로 볼 수 있다. '금( 金 )'은 고대어의 왕명, 인명, 지명 등에 다수 나타나는 '*검'계의 지명으로 '단군왕검'의 경우와 그의 변형인 '*감, *금, *거무, *가무, *거물'등 우리나라 전역에 무수한 지명에 나타나며, 일본어의 'Kami ( 神 )', 터키어의 'gam( 王 )'들과 모두 같은 뜻이다. 따라서 '부( 富 )'는 이 전 시대의 지명들과 같은 의미를 가진 지명소로 '부자의 뜻이 아니라', '왕( 王 )', 제정일치시대의 '신( 神 )'의 뜻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평( 平 )'에 대하여, ㄴ)에서는 '평( 平 )~대( 大 )'로, ㄷ)에서는 '평( 平 )~분( 分 )'으로 ㄹ)에서는 '평( 平 )~근을( 斤 乙 )'로 대응한다. 앞의 '길주'항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기르~*거러'등이 '대( 大 )'의 뜻이었고, '분( 分 )'은 '가르-'의 훈을 가지며, '근을( 斤 乙 )'은 '*그르'를 표기한 것이다. 고대국어에서 한자 '음( 音 )'은 고유어 받침 'ㅁ', '을( 乙 )'은 'ㄹ', '은( 隱 )'은 'ㄴ'을 표기하는데 사용된 글자들이다. 또한 '평( 平 )'의 훈도 '*고라~고르'이므로 이들이 모두 유사하게 '*거러~*가라~*고 르~*고라'를 표기한 것이다. 앞의 '안남( 安 南 )'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가라~*거러~*고라' 등의 대응이 '대( 大 )'의 뜻이었으므로 '평( 平 )'도 음차한 것으로 이해살 수 있 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한자로만 해석하면, 지명소의 하나인 '벌 ( 伐 ), 곡( 谷 )'등과 같은 정도로 이해하거나 '넓은 들'어느 편으로 해석해 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예전부터 '수원( 水 源 )'이 부족한 부평들은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었을 것이고, 결코 '부자의 땅'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 38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41 정되며, '부평'은 '왕( 王 ), 신( 神 )의 고을'이란 의미로도 볼 수 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지역 최조의 읍호인 '주부토( 州 富 吐 )'는 음 차( 音 借 )를 통해 '*니마도~*니마 ~*나마도~*나마 '를 표기했고, '님의 고을'의 '왕이 다르시는 고을'의 의미로 재구할 수 있다. 경덕왕 때 고친 읍호 '장제( 長 堤 )'는 이전의 읍호를 '훈차+음차'로 변 경했고, 의미는 '어른의 땅', '어른 고을'이므로 '주부토'의 뜻을 계승한 것이다. 고려 초의 '수주( 樹 州 )'는 훈차 '수( 樹 )'와 행정 단위 '주( 州 )'로 형성된 읍호로 '수( 樹 )'는 최초의 읍호를 신라와 다른 방법으로 훈차한 것인 바, '*나마도~*나마 '를 나타낸 것이며 의미는 변함이 없었다. 고려 의종 때 고친 읍호 '안남( 安 南 )도호부'에서 '안남'은 음차로 '*아 나~*아라'와 '*나마~*나부~*나부'등의 앞시대의 계승형이 중복표기된 읍호로 재구될 수 있고, 의미는 '대( 大 ), 왕( 王 ), 주( 州 ), 장( 長 )'이었으 므로 이전의 의미를 계승한 것이다. 고려 고종 때 고친 읍호 '계양( 桂 陽 )도호부'에서 '계양'만 고유지명인 바, '고( 高 )'의 뜻이었고, '양( 陽 )'은 '산, 땅'의 듯이므로 전체적으로는 ' 훈차+훈차'된 읍호로 '높은 산(땅)', 또는 단순히 '높은 고을'이므로 이전 시대의 읍호와 같은 의미를 가졌다. 고려 충렬 때 개정된 읍호인 길주( 吉 州 )에서 '길( 吉 )'은 고대지명에서 '영( 永 )~대( 大 )'로 대응하였다 바, '*기르~*거러~*가라~*고리' 등으로 교체되는 음차로 표기된 것이며 '큰(어른) 고을'의 뜻이었다. 고려 후반 충선왕 때 '부평( 富 平 )'이란 읍호가 출현했고, 그것은 '검 [ 神 ]'계의 지명으로 '왕( 王 ), 신( 神 )'의 뜻이었고, '주부토( 主 夫 吐 )'로부터 '장제( 長 堤 )', '수주( 樹 州 )', '안남( 安 南 )', '계양( 桂 陽 )', '길주( 吉 州 )'로 읍호가 바뀌었지만, 그 의미는 연면히 계승된 것이다. 인천 지명의 이해 39

42 3) 강화( 江 華 ) 삼국사기 지리지에 기재된 지명들은 고유어를 한자( 漢 字 )로 전사 ( 轉 寫 )한 것이다. 신라 경덕왕 때의 개정은 옛 지명들을 일정한 틀, 곧 모든 지명을 두 글자로 통일했기 때문에 원래의 뜻에 얼마간의 손상은 있었으나 대게 한자식이 아닌 고유어를 표기하려는 의도도 배제할 수 는 없다. 제1절에서 기술한 삼국사기 소재( 所 載 )의 강화 관련 지명들 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강화에 이르는 옛 지명 변천 과정 백제 고구려 통일신라 고려 초 갑비고차( 甲 比 古 次 ) 혈구( 穴 口 ) 해구( 海 口 ) 강화( 江 華 ) 위의 옛 군 현의 명칭들은 삼국사기 권 2 4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고구려 개정 이전의 지명들은 앞의 책 권 4에 일운( 一 云 )이라 고 세주( 細 註 )한 기사로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장악한 장수왕 63년 (475) 이전 강화 일대가 백제의 강역이었던 시절에 사용하던 지명이 다. 옛 군 현의 명칭의 의미는 앞의 표2에 제시된 당해 시대의 지명 과 후대에 이들이 변경된 내용과의 대응( 對 應 )에서 이해될 수 있다. 훈민정음 이 제정되기 이전에는 고유어를 기록할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한자의 음( 音 )과 훈( 訓 ) 빌어 쓸 수밖에 없었다 하더라도 그 표 기된 내용은 우리말을 표기한 것이므로 '거서간(거서간), 차차웅( 次 次 雄 ), 니사금( 尼 師 今 ), 을지문덕( 乙 支 文 德 ), 거칠부( 居 柒 夫 )'같은 왕명( 王 名 ), 인명( 人 名 )을 한자로 해석해서는 그 전모를 이해할 수 없다. 한편 40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43 으로 어떤 면에서는 고대의 지명을 완전하게 해독하는 일은 불가능할 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현재까지 도달한 고대어의 재구( 再 構 )방법을 통하여 가까이 이해하는 수밖에 없다. (1) 강화( 江 華 ) 갑비고차( 甲 比 古 次 )란 강화의 옛 지명에서 갑비( 甲 比 )는 고유어 '갑'을 표기한 것이다. 이렇나 표기법은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하는 데서 오는 괴리를 극복하는 한가지의 편법이었다. 삼국사기 의 가을내( 加 乙 乃 )는 '갈나', 곧 강이 갈라진 지역, 동음홀( 冬 音 忽 )은 '둠홀', 곧 사방이 산으로 막힌 성(골)을(지리4), 송왈 작자남( 宋 曰 鮓 子 南 )은 '잣낙', '반왈 박거 ( 飯 曰 朴 擧 )'는 '밥'을 계림유사( 鷄 林 類 事 ) 에서 표기한 것이며 '백술 사읍채( 白 朮 沙 邑 菜 )'는 '삽채', 즉 현대어의 '삽주'를, '길경 도라차( 吉 梗 道 羅 次 )'는 '도랒' 즉 현대어의 '도라지'를 향약구급방(향약구급방 에서 표기한 예이다. 결국 앞의 갑비( 甲 比 )에서 비( 比 )의 성모( 聲 母 ) 'ㅂ'은 갑( 甲 )의 종성( 終 聲 )을 중복하여 표기한 것이다. 한편 '고차( 古 次 )'는 '곶, 곶이'를 표기한 것으로 앞의 예에서 '도라차 ( 道 羅 次 )'의 표기법과 완전히 동궤( 同 軌 )에 속한다. 결국 '갑비고차'는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점령하고 지명을 고치기 이 전에 쓰던 이지역의 기층어( 基 層 語 )인 '갑곶, 갑곶이'를 표기한 것으로, 이 지명은 강화읍 소속의 갑곶리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고, 그것이 고대에는 강화를 지칭하는 지명이었다, 그러면 갑비고차( 甲 比 古 次 ), 곶 '갑곶'은 무슨 의미인가? 이 지명의 한자( 漢 字 )를 하나하나 해석해서는 아우 의미가 없는 것은 자명하다. 갑비( 甲 比 )나 갑( 甲 )은 지명에 흔히 써온 글자는 아니지만 본군 교동면 양갑리( 兩 甲 里 ), 합경부독의 삼구갑 산의 갑산( 甲 山 )에 쓰고 있다. 이들 지명에서의 갑( 甲 )도 갑곶과 같은 인천 지명의 이해 41

44 뜻으로 보이거니와 남갑( 南 甲 ) 북갑( 北 甲 )을 합한 양갑리( 兩 甲 里 )는 빈 장산의 봉우리가 동남, 서북 양쪽에 하나씩 있기 때문에 '겹으로 된 봉 우리가 있는 마을'의 뜻에서 명명( 命 名 )된 지명일 것이며, 함경부도의 갑산( 甲 山 )도 허천강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백두산에서 뻗어내린 산줄 기와 개마고원의 연봉( 連 峰 )이 뻗어있어 '겹으로 뻗어 내린 산'이란 뜻 으로 이렇게 불렀을 것이다. 그 밖의 현대어에서 '갑옷'은 창검으로부 터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 옷 위에 겹쳐입는 옷, '갑리( 甲 里 )'는 곱쳐서 받는 이자. '갑석( 甲 石 )'은 돌 위에 돌을 겹쳐서 얹은 돌, '갑절'은 두 배, '갑창( 甲 窓 )'은 겹창을 의미하거니와 이들 단어의 갑( 甲 )은 한자어가 아닌 고유어로 '겹, 중복, 들'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중세국어(14~17세기 국어)에도 '갑졀'(갑절), '갑플'(거풀) 등이 사용 되었고, 겹하다의 뜻인 ' 다'( 다), 겹의 뜻인 ' 피', ' ' 등이 '다 ' ( 능엄경언해 10;76), '칠보 비' ( 월석 8;7)와 같이 사 용된 예가 있고 이들도 무두 '둘'을 의미하는 중( 重 ), 병( 並 )과 동의( 同 義 )이다. 결국 갑비( 甲 比 )는 두 글자로 고우어 ' ', 곧 '겹'이나 '둘'을 표기한 궁여지책이었을 것이며, 우리말과 다른 언어체계에서 만들어진 한자로 기록하는 한계를 보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 ', 즉 겹, 둘의 뜻 인 갑비( 甲 比 )는 무엇을 지칭한 것일까. 그것은 한강하류 곧 조강( 祖 江 )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지점이 강화 동북단에서 둘로 갈라져 강화의 북단과 강화 김표 사이의 염하로 나뉘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 로 이해된다. 갑비( 甲 比 )는 옛말 ' '을 두 글자로 표기한 것으로 바다 (강)가 둘로 갈라진 곳을 의미하는 지명형태소의 전접요소( 前 接 要 素 )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고차( 古 次 )는 앞에서 예를 든 도라차( 道 羅 次 )가 '도랒>도라 지'를 표기했듯이 '곶, 고지'일 뿐이다. 곶( 串 )은 우리나라에서만 사용해 42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45 온 한자음( 漢 字 音 )으로 강( 江 ), 바다로 돌출한 지형이나, 내륙에서 벌판 을 향해 길게 뻗어나간 지형에 써온 지명형태소( 地 名 形 態 素 )이다. 현대어에도 곶이 변형하여 여러 단어 속에 화석화( 化 石 化 )한 예가 많이 있다. 고드름(<곶얼음), 고깔(<곶갈), 곡괭이(<곶광이), 꼬챙이(<곶 챵이), 송곶(<솔곶), 꽃게(<곶궤)등이 그 예이다. 고대의 문헌자료로 '갑성군 본잭제 고시이현( 岬 城 郡 本 百 濟 古 尸 伊 縣 삼국사기 지리 3)', '소을곶( 所 乙 串 ' 향약구급방 '에서 '고시( 古 尸 )'는 두 글자로 '곶'을 불완전하게 표기한 것/ 소을곳( 所 乙 串 )은 현대어의 식 물명 소리쟁이의 고어 '솔곶'을 표기한 것이거니와 소리쟁이는 잎이 좁 고 길게 자라는 식물이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솔'이 좁다는 뜻인 것을 장년 이상의 연령층은 알고 있다. 용비어천가( 龍 飛 御 天 歌 ) 1:36 에는 '암림곶', 박통사언해( 朴 通 事 諺 解 ) 상;9에는 '보십고지'라는 고유 어 표기도 나타나며, 강화, 김포, 인천의 해안, 섬들에는 곶땅이름이 무수히 많아 석곶( 石 串 ), 모월곶( 毛 月 串 ):옛 부평구), 고잔( 古 殘, 古 殘 :-강화, 김포, 인천), 월여곶( 月 餘 串 :-옛 김포)등은 익숙한 지명이다. 특히 보수고지란 지명이 김포군 월곶면 보구곶리의 전래 지명인데 숙종 22년(1696)이 형상의 강도지 진도(진도)에 '이이곳( 犁 耳 串 )'은 속칭 보십곶( 甫 十 串 )이라 한다:고 기록 되어 있다. 보십곶이는 16세기 문헌인 박통사언해 에 각두( 角 頭 )란 한자어의 대역( 對 譯 )으로 되어있 고, 17세기에 간행된 같은 책의 중간본( 重 刊 本 )에는 보십곶이 대신 '모 롱이'라 번역해서 '곶( 串 )~각두( 角 頭 )~보십곶이~모롱이'의 간계에서 그 의미가 분명히 드러난다. 이상 살펴본 강화의 옛 이름 갑비고차( 甲 比 古 次 )는 ' 곶'의 표기로 현대어로는 갑곶, 갑곶이로 '두 갈래로 갈라진 물(바다, 강)가에 있는 곶으로 된 고을'의 뜻으로 명명된 것이다. 표에서 갑비고차에 후속되는 혈구( 穴 口 ) 해구( 海 口 ) 강화( 江 華 )도 인천 지명의 이해 43

46 전자와는 물론 그들 사이에도 필연적인 관련하에 개정되었을 것이 분 명하다. 우선 혈구( 穴 口 )에서 혈( 穴 )의 현대 훈( 訓 )은 '굴'이지만 이 어형으로 는 앞의 갑비( 甲 比 )에 정확히 대응하기에는 어려움이 있고, 다만, 'KVL'*(V는 모음) 형태의 표기로 볼 수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강화( 江 華 )에서부터 착수하는 것이 순서가 된다. 강화( 江 華 )에서 강( 江 )의 고유어는 15세기어에 ',, 걸'의 여러 형태가 있었고 그 용례( 用 例 )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매 업거들 ( 용비어천가 20) 2 강(강, 훈몽자회(훈몽자회) 상:4) 3 거레 흘러 니라 ( 두시언해 초간 20:33 ) 4 므리 다 라 거리 이 니라 ( 금강경삼가해 2:37 ) 5 힛 두 과 포에 ( 두시언해 초간 25:21 ) 위와 같이 하( 河 ), 강( 江 ), 거( 渠 )가 각각 ', 걸, '의 고유어 로 대역되어 있거니와 ', 걸'은 혈( 穴 )의 훈( 訓 ) '굴'과 어형이 대응 된다. 이런 현상은 이들 형태가 정확히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 는 표기수단으로 이해된다. 다음의 예들에서 그런 양상을 확인할 수 있고, 이들도 'KVL'의 어형이 된다. 6 궐성군 본 궐지군 경덕왕개명 금강성현 ( 闕 城 郡 本 闕 支 郡 景 德 王 蓋 名 今 江 城 縣 ) 7 동산현 본 고구려혈산현( 洞 山 縣 本 古 口 麗 穴 山 縣 ) 위의 67은 삼국사기 지리1과 2에 기록되어 있는 지명들로 6에 서는 궐( 闕 )이 강( 江 )에 대응되어 '걸'의 표기로, 7은 동( 洞 )과 혈( 穴 ) 44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47 이 대응하는 바, 동( 洞 )의 새김이 '골'이고 혈( 穴 )의 새김은 '굴'이므로 이들의 관계에서 고유어 [ 江 ]울 궐[ 闕 ], 굴[ 穴 ], 골[ 洞 ] 등의 유사 한 음과 훈으로 표기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혈구( 穴 口 )의 혈은 새 김 '굴'을 차용하여 ', 걸' 곧 강( 江 )을 표기하고자 한 것이었다. 한 편으로는 혈( 穴 )의 고대음이 Karlgren의 한자고음사전 에 'riwet'으로 재구되어 있거니와 고대한자음은 아직 입성운미( 入 聲 韻 尾 ), 즉 'ㄱ, ㄷ, ㅂ'을 받침으로 가진 한자음에서 'ㄷ>ㄹ'의 변천이 일어나지 않았으나 ' 굴, 걸'과 충분히 대응된다. 따라서 강( 江 )~ 혈( 穴 )~ 해( 海 )는 옛 지명 에서 새김이 서로 통하는 같은 단어족( 單 語 族 )에 속하는 형태소들이었 음을 알 수 있고, 'KVL'에서 모음만 교체된 어형이었음이 확인된다. 한편 이들은 앞 시대의 갑비고차와의 관계에서 '갑비'즉 ' '과 대응 되는데 갑비는 '갈라진 물'에 초점을 둔 지명이라면 혈구, 해구, 강화의 혈, 해, 강은 단순히 '물 강 바다'의 의미만 수용한 지명이 된 것이다. 남은 문제는 갑비고차의 고차( 古 次 )와 혈구, 해구의 구( 口 )와 강화의 화( 華 )의 관계를 규명하는 일이다. 구의 고유어는 15세기에도 '입'이었 지만 이것과는 형태가 다른 고대어로 '곧'을 재구 할 수 있다. 재구된 '곧'은 입과 말의 뜻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거니와 잠꼬대는 '잠+곧+ 애'로 분석되며 이때의 '곧'이 말, 말하다의 뜻임이 명백하다. 곧에서 얼마간의 음운변천을 겪어 어형이 달라지는 재구조화( 再 構 造 化 )된 것들 로 '말, 말하다'의 의미장을 가진 단어들로 '곧이듣다, 곧이곧대로'에서 의 '곧이'는 '말 그대로'의 뜻이며, '고래고래'는 '화가 나서 큰소리를 지 르다'의 뜻으로 '곧애>고래'로 변천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가로 다[ 曰 ], 가르치다'등의 단어에서 '갈-', '가르-'의 어간도 곧, '갈+모음' 의 과정에서 파생된 어형으로 추정되며 모두 '말, 말하다'의 의미를 기 반으로 갖고 있다. '꽃'의 15세기 형태는 '곶'이었고, 그것은 앞에서 설명한 '곶'과 동음 인천 지명의 이해 45

48 이의관계다. 이것은 곧>곶> >꽃으로 변천해왔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곶( 串 )과 곶[ 華 ]은 '튀어나온 것'이란 공통의 의미로 말미암아 같은 어 원에서 출발한 말이었던 듯하다. 결국 구( 口 )는 고대어 '곧'으로 재구할 수 있고 그것은 후대에 곶[ 華 ]과 형태가 같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강화의 화( 華 )는 '꽃피다'의 뜻을 가진 글자이므로 꽃과 통하여 고 대의 지명에서 '곶[ 華 ]'과 동음이의어 관계에 있는 단어로 입[ 口 ]의 의 미인 곧의 변천현 곶( 串 )을 표기하고자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일본말 에서 구( 口 )를 '구찌', 말[ 言 ]을 '고도'라 하는 것도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두 언어 사이에 형태가 유사하게 대응됨을 알 수 있고, 고대어 이해에 참고가 된다. 따라서 갑비고차의 고차( 古 次 ) 즉 '곶'은 혈구, 해구의 구 ( 口 )와 같은 조어( 祖 語 ) '곧'에서 출발한 같은 의미의 형태소로 '튀어나 온 것'이란 공통 의미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이것이 강화의 화( 華 ) 로 변경될 수 있었던 데에는 화( 華 )와 화( 花 ), 즉 고어의 '곶'이 서로 통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의기가 좀 더 좋아 보이는 쪽을 선택한 연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상을 요약하면 갑비고차( 甲 比 古 次 )는 ' 곶', 즉 '두 갈래 물(바다, 강)에 있는 곶이 고을'의 뜻이며, 후대에 고친 지명 혈구( 穴 口 ), 해구 ( 海 口 ), 강화( 江 華 )에서 혈( 穴 ), 해( 海 ), 강( 江 )은 앞이 갑비( 甲 比 )에 대 응되는데 이들은 두 갈래의 의미는 제외된 물(*바다, 강)의 뜻만을 취 한 것이다. 또한 고차( 古 次 ) 즉 '곶'은 후대의 지명들과 '구( 口 ), 화( 華 )' 로 대응되는데 모두 같은 조어( 祖 語 ) '곧'에서 출발한, 같은 의미를 가 진 지명형태소임을 알 수 있다. 46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49 참 고 문 헌 강신항 조선관역어연구, 광문사, 권상로 한국지명연혁고, 동국문화사, 김완진 한국어발달사, 상, 음운사, 한국문화사대계 V 고려대, 도수희 백제어 연구, 아세아 문화사, 백제지명연구, 백제연구 제11집 충남대, 박병채 고대삼국의 지명어휘고 백산학보 제5집 유창균 한국고대한자음연구 Ⅰ 계명대, 이기문 개정국어사개설 민중서관, 이병선 한국고대국명지명연구 재판 아세아문화사, 삼국사기 (아세아문화사 영인본) 삼국유사 (아세아문화사 영인본) 계림유사 (대제각 영인본) 고려사 (아세아문화사 영인본) 세종실록 지리지 (아세아문화사 영인본) 향약채취월령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용비어천가 (대제각 영인본) 훈몽자회 (대제각 영인본) 신증동국여지승람 (아세아문화사 영인본) 대동지지 (아세아문화사 영인본) 여지도서 (국사편찬위원회 복사본, 1759) 호구총수 (국사편찬위원회 복사본, 1789) 강도지 (강화문화원간행, 이형상, 1696) 인천 지명의 이해 47

50 강화부지 (아세아문화사 영인본, 1783) 강화부지 (아세아문화사 영인본, 1842) 강화부지 (아세아문화사 영인본, 1894) 교동부읍지 (아세아문화사 영인본, 1842) 교동부읍지 (아세아문화사 영인본, 1871) 교동군읍지 (아세아문화사 영인본, 1899) 강도지 (강화군, 1930) 조선지지자료 (복사본) 신구대조 조선전도부군면리 명칭일람 (월지유칠, 1917) 인천광역시사 (인천광역시, 2002) 48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51 일제 강점기 인천의 지명 실태 조 우 성 (인천광역시 시사편찬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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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1. 개항 직후의 전통 지명 개항 직후인 1896년, 조선은 지금까지 실시해 오던 부제( 府 制 )를 개 정하여 수도인 한성부를 제외하고 전국을 13도( 道 ), 1목( 牧 ), 9부( 府 ), 329군( 郡 )으로 개정하였다. 각 부와 군은 5등급으로 나누었는데 인천 은 1등급 인천부( 仁 川 府 )였다. 당시 인천부의 면( 面 )과 동리( 洞 里 )는 다 음과 같다. 부내면( 府 內 面 ) - 내동, 외동, 평동, 금곡리, 율목동, 용동, 만석 동, 답동, 우각동, 화촌동, 신창동, 화개동 다소면( 多 所 面 ) - 화도동, 수유동, 신촌리, 송림리, 송현동, 장천 리, 독각리 원우이면( 遠 又 爾 面 ) - 옹암리, 묵암리, 동막리, 망해리, 척전리, 한진리, 함박리, 대아도리, 소아도리, 치동, 옥동 주안면( 朱 雁 面 ) - 상십정리, 하십정리, 석촌리, 간촌리, 성리, 구 월리, 지상리, 전자리 남촌면( 南 村 面 ) - 염촌, 냉정리, 능동, 논현리, 도림리, 오봉산, 고잔리, 사리동, 여무실리, 제리동, 경신리 조동면( 鳥 洞 面 ) - 설래리, 곡촌리, 독곡리, 안락리, 음실리, 노상 리, 수월리, 담방리, 동촌 서래리, 음상리, 하음리, 만의동 신개고면( 新 介 古 面 ) - 산정리, 후음리, 시산리, 안다리, 사동, 방 곡리, 검암리, 행정리, 목하동, 재동 황등천면( 黃 等 川 面 ) - 목과면, 각하리, 중림리, 두길리, 계일리, 고공리, 구음리, 내동, 풍동 풍 일제 강점기 인천의 지명 실태 51

54 전반면( 田 反 面 ) - 양지리, 안혁리, 가대리, 매착리, 장락동, 도리 현, 도두리, 신촌, 진촌, 강창리, 검의동, 율도리, 백전리, 육내 리, 무지천리 이포면( 梨 浦 面 ) - (동명 미상) 이 가운데 '이포면'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인천도호부 조( 條 )에 '남양접 자관문 남거 일백리( 南 陽 接 自 官 門 南 距 一 百 里 )'즉 '인천도호부 청사가 있는 관교동에서 남쪽으로 1백 리가 떨어진 남양( 華 城 郡 )과 접해 있다.' 고 한 것으로 보아 그 권역이 지금의 경기도에 속해 있던 것으로 보인다. 2. 일제강점기의 행정구역 개편 그 후 1914년 10월 조선총독부에 의해 행정구역 개편이 있었다. 그 에 앞서 조선총독부는 1911년 전국의 지명과 지지( 地 誌 ) 사항을 조사 정리하여 '조선지지자료'를 펴냈는데 이 자료에는 당시의 순우리말 지 명과 한자 지명을 병기하고 있어 주목된다. '조선지지자료'에 나타나 있는 순우리말 지명과 한자 지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부내면( 府 內 面 ) 용동( 龍 洞 ), 외동( 外 洞 ), 내동( 內 洞 ), 평동( 平 洞 ), 화개동( 花 開 洞 ), 만 석동( 萬 石 洞 ), 우각동( 牛 角 洞 ), 금곡동( 金 谷 洞 ), 율목동( 栗 木 洞 ) 신창동 ( 新 昌 洞 ), 화촌동( 花 村 洞 ), 답동( 畓 洞 ) 52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55 2) 다소면( 多 所 面 ) 화동리( 禾 洞 里 슉골), 옥정동( 玉 井 洞 옥우물꼴), 비룡동( 飛 龍 洞 비령이), 은행정( 銀 杏 亭 은은졍이), 독정리( 讀 亭 里 독졍이), 사미리 ( 士 美 里 ), 성촌( 城 村 잿말), 양지지동( 陽 地 之 洞 양지겻), 충훈리( 忠 勳 里 츔부), 송내촌( 松 內 村 솔안말), 션앙당이, 도마리( 道 馬 里 ), 청대곡 ( 靑 岱 谷 대골), 월랑촌( 月 朗 村 달랑이), 여의리( 如 意 里 여의실), 장 천리( 長 川 里 장사래), 신기( 新 基 새터), 독각리( 獨 脚 里 독갑다리), 송림리( 松 林 里 ), 매화지( 梅 花 址 ), 신촌( 新 村 새말), 간촌( 間 村 새꼴), 만취당( 晩 翠 堂 ), 송현리( 松 峴 里 ), 수문통( 水 門 桶 수문통거리), 화도리 ( 花 島 里 ), 수유리( 水 踰 里 무넘이), 신촌리( 新 村 里 새말), 션앙당이(한 자명 미상), 약우물터(한자명 미상) 3) 주안면( 朱 安 面 ) 전재동( 全 在 洞 젼재울), 상십정리( 上 十 井 里 웃말), 석암리( 石 巖 里 석바위), 하십정리( 下 十 井 里 아래말), 성리( 城 里 셩말), 구월리( 九 月 里 ), 석촌( 石 村 돌말), 간촌( 間 村 샛말) 4) 구읍면( 舊 邑 面 ) 도장리( 道 章 里 ), 학산리( 鶴 山 里 ), 산성리( 山 城 里 ), 향교리( 鄕 校 里 ), 관 청리( 官 廳 里 ), 승기리( 承 基 里 ), 학익리( 鶴 翊 里 ) 일제 강점기 인천의 지명 실태 53

56 5) 서면( 西 面 ) 신기( 新 基 ), 표산( 瓢 山 ), 마리( 麻 里 ), 늑현( 勒 峴 ), 경고지( 更 古 之 ), 간 촌( 間 村 ), 부수지( 浮 水 之 ), 신촌( 新 村 ), 묵동( 墨 洞 ), 후곡( 後 谷 ), 내곡( 內 谷 ), 청릉( 靑 陵 ), 야곡( 冶 谷 ), 가곡( 稼 谷 ), 동촌( 東 村 ), 척전( 尺 前 ), 동막 ( 東 幕 ), 옥동( 玉 洞 ), 옹암( 瓮 岩 ), 한진( 漢 津 ), 대암( 大 岩 ) 6) 남촌면( 南 村 面 ) 고잔리( 古 棧 里 ), 내동( 內 洞 안말), 갈산현( 葛 山 峴 갈뫼), 석정( 石 井 돌우물), 괴화동( 槐 花 洞 괴얏말), 논현리( 論 峴 里 논고개), 운봉( 雲 峰 ), 산후동( 山 後 洞 산뒤), 동촌( 東 村 동역), 신촌( 新 村 새말), 수곡 ( 水 谷 슉골), 이무실( 伊 茂 室 ), 사리동( 沙 里 洞 사리울), 도림리( 桃 林 里 ), 능곡( 陵 谷 능꼴), 사리( 四 里 ), 일리( 一 里 ), 와우동( 臥 牛 洞 원우 꼴), 염촌( 鹽 村 번말), 경신리( 慶 信 里 ), 냉정( 冷 井 찬우물), 관곡( 官 谷 관허꼴) 7) 조동면( 鳥 洞 面 ) 수현( 水 峴 무너미), 조곡( 鳥 谷 샛골), 담방리( 淡 方 里 담방이), 장 자동( 壯 字 洞 ), 곡촌( 谷 村 골말), 설내( 雪 乃 ), 운곡( 雲 谷 음실), 연락 동( 宴 樂 洞 연내골), 만의동( 晩 宜 洞 만의골) 8) 신현면( 新 峴 面 새오개면) 산정리( 山 井 里 산우물), 고잔( 高 棧 ), 다자동( 多 子 洞 다자골), 죽원 54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57 ( 竹 院 다니), 방곡( 芳 谷 방꼴), 사음리( 舍 音 里 말음이), 국동( 局 洞 국시랑), 포동( 浦 洞 포촌), 구곡( 鳩 谷 구심이), 사곡( 寺 谷 졀골), 임 리( 林 里 슈풀이), 고기동( 古 基 洞 여터골), 미산( 米 山 살미), 한정 ( 寒 井 찬우물), 검암( 儉 巖 금바위), 은행정( 銀 杏 亭 ), 상기동( 上 基 洞 우터골), 신촌( 新 村 새말), 사천장( 蛇 川 場 뱀내장), 대야동( 大 也 洞 댓골), 재궁곡( 齋 宮 谷 재궁골), 방아교( 方 牙 橋 방아다리) 9) 전반면( 田 反 面 밧뒤면) 양지동( 陽 支 洞 양지말), 송내동( 松 內 洞 솔안말, 일명 길마재), 가 대동( 家 岱 洞 가대말), 장락동( 長 樂 洞 장락골), 매착리( 梅 着 里 ), 신기 촌( 新 基 村 새터말), 율동( 栗 洞 밤배셤), 도두리( 道 頭 里 도두머리), 강창리( 江 倉 里 ), 진촌( 陳 村 진말), 검의리( 儉 義 里 검월리), 도현리( 桃 峴 里 도리재), 은행동( 銀 杏 洞 일명 뭇지내), 중동( 中 洞 ), 신흥동( 新 興 洞 ), 능내동( 陵 內 洞 ) 10) 황등천면( 黃 等 川 面 누릿내면) 두곡( 杜 谷 두무져리), 목과동( 木 果 洞 모가울), 불아위( 佛 阿 尉 ), 중 림( 重 林 ), 탄평( 炭 坪 숫두루지), 식곡( 食 谷 식골), 두길( 斗 吉 ), 어연 ( 魚 淵 ), 옥련동( 玉 蓮 洞 ), 함박리( 咸 朴 里 ), 계일( 桂 日 ), 수로곡( 壽 老 谷 ), 구미( 九 美 ), 가일( 佳 日 ), 건정리( 乾 井 里 건쥬물), 고공리( 古 孔 里 ), 내곡 ( 內 谷 안골), 후곡( 後 谷 뒷골), 덕석곡( 德 石 谷 덕셕골) 일제 강점기 인천의 지명 실태 55

58 3. 일본식 정명( 町 名 )의 등장 그러나 1914년 4월 행정 구역 개편에 의해 부군면이 통합되어 인천 부의 판도는 종래 10개 면 가운데 부내면 전역과 다소면 일부만이 편 입되고 나머지는 신설된 부천군에 흡수되었다. 이 때 경기도 고시 제8 호에 의해 정해진 인천부의 정 리( 町 里 ) 명칭이 대거 일본식으로 바뀌 었다. 당시의 정 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곡리( 金 谷 里 ), 화평리( 花 平 里 ), 내리( 內 里 ), 용리( 龍 里 ), 외리( 外 里 ), 우각리( 牛 角 里 ), 부도정( 敷 島 町 ), 도산정( 桃 山 町 ), 송림리( 松 林 里 ), 송 현리( 松 峴 里 ), 율목리( 栗 木 里 ), 만석정( 萬 石 町 ), 사정( 寺 町 ), 산근정 ( 山 根 町 ), 용강정( 龍 岡 町 ), 신정( 新 町 ), 궁정( 宮 町 ), 빈정( 濱 町 ), 화정 ( 花 町 ), 신화수리( 新 花 水 里 ), 해안정( 海 岸 町 ), 본정( 本 町 ), 유정( 柳 町 ), 중정( 仲 町 ), 산수정( 山 手 町 ), 항정( 港 町 ), 지나정( 支 那 町 ), 화방정( 花 房 町 ), 송판정( 松 坂 町 ) 그 후인 1936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는 부천군 다주면과 문학면의 일부를 병합하여 부역( 府 域 )을 확장하였다. 그 결과 인천부는 인구 10 만 3백3명, 총면적은 km로 전보다 약 4배가 권역이 늘어나게 됐다. 이 때의 행정 구역은 본정( 本 町 ), 중정( 仲 町 ), 궁정( 宮 町 ), 욱정( 旭 町 ), 빈정( 濱 町 ), 해안정( 海 岸 町 ), 항정( 港 町 ), 산수정( 山 手 町 ), 산근정 ( 山 根 町 ), 만석정( 萬 石 町 ), 화방정( 花 房 町 ), 송판정( 松 坂 町 ), 용강정( 龍 岡 町 ), 미생정( 彌 生 町 ), 도산정( 桃 山 町 ), 신정( 新 町 ), 화정( 花 町 ), 부도정 ( 敷 島 町 ), 유정( 柳 町 ), 율목정( 栗 木 町 ), 화평정( 花 平 町 ), 화수정( 花 水 町 ), 용운정( 龍 雲 町 ), 서경정( 西 京 町 ), 경정( 京 町 ), 창영정( 昌 榮 町 ), 금곡정( 金 56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59 谷 町 ), 송현정( 松 峴 町 ), 송림정( 松 林 町 ), 앵정( 櫻 町 ), 대화정( 大 和 町 ), 일 지출정( 日 之 出 町 ), 주안정( 朱 安 町 ), 학익정( 鶴 翼 町 ), 송도정( 松 島 町 ) 등 이었다. <인천부세일반 > 이로써 인천부의 지명은 예로부터 전해오던 고유의 땅이름에 일본식 행정단위 명칭인 '정( 町 )'을 붙이거나 일본에서 흔히 사용해 오던 지명 들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게 되었다. '언어의 쇠말 뚝'들을 박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인천부사( 仁 川 府 史 )'에서 일본인들조차 ''시가지 전부를 우리 (일본)마을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중략) 우리 마을 이름을 명하는 것은 다소 온당치 못한 점이 있지만, 세월이 경과함에 따라 일반의 호칭이 되기를 바란다.''며 자신들의 명 명행위( 命 名 行 爲 )가 부당했음을 자인하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인천의 지명 실태 57

60 4. 일본색으로 바뀐 인천 지명 1940년 4월 1일, 인천부는 2차로 부역( 府 域 )을 확장했다. 당시 부천 군 관할이었던 서곶( 西 串 ), 문학( 文 鶴 ), 남동( 南 洞 ), 부내( 富 內 ) 등 4개 면이 편입되었는데, 새로 확장된 면적은 km, 인구는 171,000명 으로 늘어났다. 이 때 편입된 지역의 정명( 町 名 )들은 일제가 얼마나 집 요하게 식민지화를 획책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들 정명들 은 과거와는 달리 더욱 왜색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 문학면( 文 鶴 面 ) 원정( 元 町 관교리), 문학정( 文 鶴 町 문학리), 무학정( 舞 鶴 町 도장 리), 청학정( 靑 鶴 町 청학리), 연수정( 延 壽 町 연수리), 동춘정( 東 春 町 동춘리), 목월정( 木 越 町 간석리), 정지정( 鄭 志 町 구월리) 2) 남동면( 南 洞 面 ) 만수정( 萬 壽 町 만수리), 장수정( 長 壽 町 장수리), 운연정( 雲 宴 町 운연리), 낭속정( 浪 速 町 서창리), 수정( 壽 町 발산리), 신도산정( 新 桃 山 町 도산리), 오보정( 五 寶 町 와우리), 논현정( 論 峴 町 논현리), 일향정( 日 向 町 고잔리) 3) 부내면( 富 內 面 ) 대도정( 大 島 町 십정리), 소화정( 昭 和 町 대정리), 백마정( 白 馬 町 58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61 산곡리), 천상정( 川 上 町 청천리), 서정( 曙 町 효성리), 대정정( 大 正 町 부평리), 작전정( 鵲 田 町 가현리), 동운정( 東 雲 町 도두리), 삼 립정( 三 笠 町 후정리), 길야정( 吉 野 町 갈월리), 명치정( 明 治 町 마 분리), 향취정( 香 取 町 항동리), 이등정( 伊 藤 町 구산리) 4) 서곶면( 西 串 面 ) 천간정( 淺 間 町 가좌리), 촌산정( 村 上 町 대정리), 구수정( 久 水 町 포리), 현무정( 玄 武 町 신현리), 천대전정( 千 代 田 町 가정리), 일진 정( 日 進 町 심곡리), 흑전정( 黑 田 町 공촌리), 정상정( 井 上 町 연희 리), 이가정( 李 家 町 고잔리), 춘일정( 春 日 町 시천리), 과생정( 瓜 生 町 검암리), 운양정( 雲 揚 町 백양리) 이처럼 제1차, 제2차의 부역 확대에 따라 편입된 위 정명들은 1945 년 일제가 패망하기까지 인천부의 지명으로서 존속하였는데, 특히 제2 차 확대 때 편입된 지역의 정명( 町 名 )들은 군국주의적 성향이 특히 짙 게 나타나 주목된다. 1940년 4월 당시 사용되던 인천부의 정명 중 전 통 지명을 제외한 것들을 유형별로 대별해 보면 다음과 같다. 왕호( 王 號 ) 차용 - 명치정( 明 治 町 부개동), 대정정( 大 正 町 계산동), 소화정( 昭 和 町 부평동) 공신명( 功 臣 名 ) 차용 - 화방정( 花 房 町 북성동), 이등정( 伊 藤 町 구산동), 정상정( 井 上 町 연희동) 일제 강점기 인천의 지명 실태 59

62 무관명( 武 官 名 ) 차용 - 대도정( 大 島 町 십정동), 과생정( 瓜 生 町 검암동), 목월정( 木 越 町 간석동), 천상정( 川 上 町 청천동), 촌상정( 村 上 町 서곶 고잔리) 일정명( 日 町 名 ) 차용 - 본정( 本 町 중앙동), 중정( 仲 町 관동), 산수정( 山 手 町 송학동), 항정( 港 町 항동), 빈정( 濱 町 사동), 궁정( 宮 町 신생동), 욱정 ( 旭 町 답동), 유정( 柳 町 유동), 도산정( 桃 山 町 도원동), 미생 정( 彌 生 町 선린동), 송판정( 松 坂 町 송월동), 용강정( 龍 岡 町 인 현동), 산근정( 山 根 町 전동), 경정( 京 町 경동), 서경정( 西 京 町 내동), 운용정( 雲 龍 町 용동), 앵정( 櫻 町 도화동), 일지출정( 日 之 出 町 용현동), 신도산정( 新 桃 山 町 도림동), 일향정( 日 向 町 고 잔동), 원정( 元 町 관교동), 오보정( 五 寶 町 남촌동), 백마정( 白 馬 町 산곡동), 향취정( 香 取 町 일신동), 현무정( 玄 武 町 신현동), 흑전정( 黑 田 町 공촌동) 군함명( 軍 艦 名 ) 차용 - 운양정( 雲 揚 町 백석동), 부도정( 敷 島 町 선화동), 춘일정( 春 日 町 시천동), 서정( 曙 町 효성동), 길야정( 吉 野 町 갈산동), 대화정 ( 大 和 町 숭의동), 삼립정( 三 笠 町 삼산동), 천간정( 淺 間 町 가좌 동), 천대전정( 千 代 田 町 가정동), 일진정( 日 進 町 심곡동), 동운 정( 東 雲 町 서운동), 춘일정( 春 日 町 시천동), 낭속정( 浪 速 町 서 창동), 송도정( 松 島 町 옥련동) 60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63 5. 일제 잔재 지명 말소해야 왕호나 공신의 이름을 차용해 정명으로 삼은 것은 내선일체( 內 鮮 一 體 )와 같은 관념의 동일선상에서 식민화 획책 저의를 드러낸 것이며, 청일 노일전쟁에 참여한 무장( 武 將 )이나 군함의 이름을 거침없이 정 명( 町 名 )으로 삼은 것은 군국주의 일본의 단말마를 그대로 드러낸 예로 판단된다. 특히 군함명 차용의 경우, 소위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 '운양호( 雲 揚 號 )'를 위시해 청일 노일전쟁에 참전해 승리한 전함, 순양함, 장갑순양 함, 구축함, 수뢰정 등을 망라하고 있는데 이는 인천항을 모항처럼 드나들 던 일본 제국주의 군함들의 전승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 가운데는 군국 일본이 자랑해 오던 '삼경함( 三 景 艦 )'도 포함되어 있다. '삼경( 三 景 )'이란 일본의 3대 절경 즉 미야기 현의 송도( 松 島 ), 교토의 교립( 橋 立 ), 히로시마의 엄도( 嚴 島 )를 가리키는데 일본 해군은 그 이름을 딴 순양함 3척을 취항시켜 소위 '3경함'이라 이르며 해군의 자랑으로 삼아왔다. 3경함 가운데 한 척인 '송도함'은 동학농민운동 이후 인천항을 수시 로 드나들던 4천 톤급 순양함이었는데 청일전쟁 때는 연합함대 기함으 로, 노일전쟁 때는 제3함대 제5전대로 참전한 바 있다. 그러다가 1908 년 4월 대만 마공( 馬 公 ) 지역에서 선내 폭약고 폭발로 침몰, 370명 중 270명이 사망했다. 일제는 그 후 나가사키 사세보 해군기지에 이들의 '순난자의 비'가 세웠다. '송도호'는 침몰한 지 28년이 되는 1936년, 인천부 문학면 옥련리의 정명( 町 名 )으로 부활하였다. 일찍이 인천에 '송도( 松 島 )'란 이름의 섬이 없었으며, 육지 한가운데의 지역을 '소나무 섬'이라 칭한 얼토당토않은 명명( 命 名 )은 국군주의 일본이 전승을 과시하는 한편 무력의 위세를 암 일제 강점기 인천의 지명 실태 61

64 암리에 과시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정명에 군함의 이름을 14개나 차용한 것이 바로 그러한 정황을 반증한다고 하겠다. 광복 직후인 1945년 12월 23일 인천의 유일한 국문신문 '대중일보' 는 ''8 15해방 이후에도 아직 거리에는 가증스럽고 더러운 왜색이 일 소되지 못하고 국치적인 정명( 町 名 )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대단 히 한심스러운 일이었다.''며 이에 따라 시 당국은 정명개정위원회를 조직하고 여러 차례 협의를 거쳐 '정( 町 )'을 '동( 洞 )'으로 고치고, '정목 ( 町 目 )'을 '가( 街 )'로 개칭하기로 하고 이를 1946년 1월 1일부터 시행하 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이로써 비로소 우리 고유의 동명(동명)을 찾게 됐는데, 명치정( 明 治 町 )은 부개동, 대정정( 大 正 町 )은 계산동, 소화정( 昭 和 町 )은 부평동, 이 등정( 伊 藤 町 )은 구산동, 대도정( 大 島 町 )은 십정동, 목월정( 木 越 町 )은 간 석동, 산수정( 山 手 町 )은 송학동, 미생정( 彌 生 町 )은 선린동, 운양정( 雲 揚 町 )은 백석동, 춘일정( 春 日 町 )은 시천동, 길야정( 吉 野 町 )은 갈산동, 삼 립정( 三 笠 町 )은 삼산동, 천간정( 淺 間 町 )은 가좌동, 천대전정( 千 代 田 町 ) 은 가정동, 낭속정( 浪 速 町 )은 서창동, 송도정( 松 島 町 )은 옥련동 등으로 환원되었다. 일제강점기 35년사는 이렇듯 땅이름의 수난사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인천시연수구지명위원회가 이 같은 지명사( 地 名 史 )를 모른 채 관할 신도시의 법정동 명칭을 '송도동( 松 島 洞 )'이라 한 것은 역사의 시계바늘을 되돌려놓은 몽매한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1) 역사상 인천광역시 관내에는 '송도( 松 島 )'란 이름의 섬 이 없었고, (2) 신도시 지역은 섬이 아닌 동시에 소나무와도 무관하므 로 '송도( 松 島 소나무 섬)'일 수 없으며 (3) 1936년 일본이 승전을 기 려 군함 명칭을 육지의 정명( 町 名 )에 사용한 14개 정명 가운데 하나였 으므로 이를 파기해야 마땅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62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65 그러나 아직도 이 땅에는 군국주의 일본이 박아놓은 '언어의 쇠말뚝' 들이 녹이 슨 채 깊숙이 박혀 있는 실정이다. 예를 들어 그 옛날 외리 ( 外 里 )라 부르던 지역을 '경정( 京 町 )'에서 비롯된 '경동( 京 洞 )'이라 아직 칭하고 있고, 원래의 땅이름과는 상관없이 일본 전함 '미가사( 三 笠 )'호 를 기린 '삼립정( 三 笠 町 )'에서 유추해 '후정리( 後 井 里 )'를 '삼산동( 三 山 洞 )'이란 부르고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일제 강점기 인천의 지명 실태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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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김 윤 식 (인천 문인협회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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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1. 중 구 현재의 중구 항만 일대의 지명이 성창포( 城 倉 浦 )였는데, 조선 초 태 종 때 제물량( 濟 物 梁 )이 설치되면서 제물포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이 후 인천부( 仁 川 府 ) 다소면( 多 所 面 )이었다가 1903년 8월 행정구역 개편 에 따라 부내면( 府 內 面 )으로 불리었다. 개항 당시까지도 별다른 동명 ( 洞 名 )을 가지지 못했다. 부내면은 다소면 지역에 속했던 선창리와 고 잔리, 송림리를 떼어 제물포 지역을 총괄하는 면으로 개편한 것이다. 제물포를 관할하는 관청이 있다 하여 읍내( 邑 內 )라고도 불리었다. 중구는 1968년 인천에 구제가 실시되면서 탄생한 구이다. 1) 내동( 內 洞 ) 구한말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 船 倉 里 ) 지역이었다가 1903년 부내면 이 생길 때 이곳에 시청 격인 인천부 청사가 생기면서 부( 府 )의 중심 지역이라 해서 부내면 내리( 內 里 )라고 불렀다. 안말, 안골 내리가 싸리재의 안쪽이라고 해서 우리말로 안말, 안골로 부르기도 했다. 의장지( 義 莊 地 ) 개항 직후 내동에 있던 청국인 묘지 자리를 부르던 이름이다. 서경정( 西 京 町 ) 1936년 일제가 내리를 경정( 京 町 )의 서쪽이라고 하여 서경정으로 개 칭했다. 광복 후 다시 우리 식으로 내동으로 개칭했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67

70 2) 경동( 京 洞 ) 구한말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 지역으로 1903년 부내면에 편입되면서 인천부 청사 바깥 마을이라는 뜻으로 외리( 外 里 )라 불렀다. 1912년에는 일제가 이 일대에 살던 조선인과 일본인 마을을 나누어 조선인촌은 외 리로 부르고, 일본인촌은 내리의 일부를 합해 일본식으로 경정( 京 町 )이 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다시 외리로 고쳤다가 1936년 인천부 부역 확장 때, 경성으로 가는 길목 마을이라는 뜻을 살려 다시 경정으로 환원했다. 바깥말, 바깥굴 외리를 싸리재의 바깥쪽이라 해서 우리말로 바깥말, 바깥굴이라 불렀다. 경성통( 京 城 通 ) 개항 직후 외리의 큰길 이름을 경성통이라 불렀다. 서울로 가는 길 목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었다. 광복 후인 1946년 1월 동명 개정 때 일본식 명칭인 정( 町 )만 동( 洞 )으로 바뀌어 경동으로 명명했다. 싸리재[ 杻 峴 ] 동인천역에서 동인천 길병원을 지나 기독병원을 향해 올라가는 샛길 을 싸리잿길이라고 불렀다. 인천 토박이들은 싸리재를 대체로 옛 상업 은행 앞 야트막한 언덕을 지칭했다. 싸리재는 '옛날 이곳에 싸리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내동과 경동 일대를 부르던 삼리채( 三 里 寨 )에서 유래했다고도 하는데 어느 것도 정확하지 않다. 축현( 杻 峴 ) 내동, 경동 일대를 싸리나무와 관계된 곳으로 생각했기에 싸리재를 한자로 싸리나무 축( 杻 ) 자와 고개 현( 峴 ) 자를 써서 축현( 杻 峴 )이라 했 68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71 고, 이렇게 해서 인근에 있는 역명과 학교 이름도 축현역(현 동인천 역), 축현초등학교로 불렀다. 긴담모퉁이 싸리재에서 기독병원을 지나 신흥동으로 넘어가는 사이 길에는 담처 럼 긴 축대가 있는데 이것이 신흥초등학교 쪽으로 굽어 있어서 이곳을 긴담모퉁이라고 불렀다. 이곳은 원래 신흥동과 경동 사이에 솟아있는 야트막한 구릉지였는데 신흥동과 동인천역의 통행을 위해 길을 뚫으면 서 축대를 쌓아 그것이 담처럼 생겼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3) 내경동( 內 京 洞 ) 1977년 내동, 경동, 용동을 합해 행정동으로 내경동( 內 京 洞 )이라 명 명했다. 내경동은 물론 내동과 경동의 앞 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4) 동인천동( 東 仁 川 洞 ) 1998년 11월 다시 내경동과 인현동(인현동)이 합해져 행정동 동인천 동이 탄생했다. 5) 용동( 龍 洞 ) 1903년 부내면이 신설되면서 용리( 龍 里 )라고 불리게 되었다. 1936년 에는 용운정( 龍 雲 町 )으로, 광복 후에 우리 식으로 용동이 됐다. 용리나 용운정, 용동 모두가 이 마을이 용처럼 생긴 고개 주변에 있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하는데 확실하지 않다. 용동은 1977년 내동, 경동과 합해 내경동이 되었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69

72 용동 큰 우물거리 용동의 큰 우물은 자연 우물을 1881년에 정비한 것으로 근래 수돗물 이 보급될 때까지 이 일대의 식수원이었다. 물맛이 좋고, 가뭄이 들어 도 물이 줄지 않았다고 한다. 그 앞길을 용동 큰 우물거리라고 불렀다. 용동마루턱이 동인천에서 경동, 신포동 쪽으로 올라가는 경사진 대로의 정상 부분 을 지칭한다. 6) 인현동( 仁 峴 洞 ) 인현동은 부내면 지역이었다. 1912년 일본식으로 용강정( 龍 岡 町 )이 되었다. 1946년 동명 개정 때 인현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인현동은 지 난 1998년 11월 인근의 내경동과 통합돼 행정동 동인천동에 속해 있다. 참외전거리 참외전거리란 지금의 동인천역 앞에서 배다리에 이르는 경인철도 주 변 거리를 일컫던 말이다. 이 길에 참외를 비롯한 과일 등 청과물이 모이던 곳이었다. 와전되어 채미전거리라고도 했다. 배다리 경동에서 내려와 경인전철 철교를 지나면 동구 금곡동 초입에 이른 다. 과거 이 일대에 큰 갯골이 있어 만조 때면 바닷물이 들어 왔고 여 기에 배가 닿을 수 있는 다리가 있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7) 전동( 錢 洞 ) 전동은 다소면 선창리에 속한 야트막한 산지( 山 地 )였다. 1892년 이 70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73 곳에는 현대식 화폐를 만드는 기관 전환국( 典 圜 局 )이 설치돼 1900년 서울 용산으로 옮겨갈 때까지 운영됐다. 전환국이 서울로 옮겨간 뒤 부내면에 속했는데 1906년 전동( 典 洞 )으 로 불리다가 1914년 전국적인 행정구역 통폐합 때 산근정( 山 根 町 )으로 바뀌었다. 1946년 전동( 錢 洞 )으로 바뀌는데 전환국이 돈( 錢 )을 만드는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응봉산( 鷹 峰 山 ) 전동에 있는 제물포 고등학교의 뒷산 이름이 응봉산이다. 모양이 '매 [ 鷹 ]의 부리'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졌다고 하나 순 우리말로 산을 뜻하 는 뫼, 매와 뾰족한 것을 의미하는 부리의 합성어인데 이를 한자로 고 치면서 응봉산이 된 것이다. 오포산( 午 砲 山 ) 응봉산은 시계가 귀했던 년대에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주 기 위해 대포를 걸어 놓고 매일 낮 12시 정각이면 한 방씩 공포를 쏘 았던 탓에 오포산( 午 砲 山 )이라 불렀다. 웃터골 일제 때 오포산( 午 砲 山 ) 관측소 밑에 자리잡은 넓은 분지를 이르던 지명이었다. 지금의 제물포고등학교 교정이다. 시내에서 높이 올려다보 이는 곳이어서 웃터골로 부른 듯하다. 만국공원( 萬 國 公 園 ) 인천을 대표하는 공원중 하나인 만국공원은 1888년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다. 인천항 개항 이후 인천으로 몰려든 서양 사람 들이 한데 모여 살던 만국지계( 萬 國 地 界 )안에 공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각국공원( 各 國 公 園 ) 만국지계는 달리 각국지계( 各 國 地 界 )라고도 불렸기에 이 공원은 각국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71

74 공원이라는 이름도 갖고 있었다. 서공원( 西 公 園 ) 일본이 우리 나라를 강제로 병합시킨 뒤 이들 조계는 일본의 압력으 로 없어지게 돼 1913년 4월 만국조계에 이어 같은 해 11월에는 청국조 계도 없어지고 말았다. 그 뒤 일제는 지금의 인천여상 자리에 자신들 의 신사( 神 社 )를 세워 그곳을 동공원( 東 公 園 )이라 부르면서, 그 맞은편 에 있는 만국공원의 이름을 서공원( 西 公 園 )이라고 바꾸었다. 자유공원( 自 由 公 園 ) 1945년 광복이 되자 서공원은 다시 만국공원이라는 이름을 되찾았 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겪고 난 1957년 이승만 정부는 우리의 건국기 념일인 개천절에 이곳에 맥아더 동상의 제막식을 가지면서 공원의 이 름을 자유공원으로 바꿨다. 8) 송학동( 松 鶴 洞 ) 개항 당시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에 속해 있었고, 자유공원 일대에 만국지계 또는 각국지계라 불리던 서양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생기자 그 안에 편입됐다. 별다른 동네 이름이 없이, 1912년 일제가 자기들 식으로 산수정( 山 手 町 )이라고 불렀다. 1946년 송학동으로 명명했는데 이곳 언덕이 소나무가 울창하고 운치 가 있는 곳이어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송학동은 1977년 행정동으로 중앙동에 포함되었다. 약대이산 원래 약대인산( 藥 大 人 山 )이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약대인은 개화기 72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75 지금의 송학동 3가 1번지에서 성 누가병원을 운영한 미국인 의사 랜디 스(한국명 南 得 時 )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는 선교를 겸해 의료 활동을 했는데, 한국인에 대한 헌신적인 자세와 뛰어난 의술로 사람들이 그를 약대인( 藥 大 人 )으로 불러 존경을 표시하고, 그의 병원이 있던 응봉산 남서 언덕 끝을 약대인산이라 불렀는데 그 발음이 외전되어 약대이산 이 되었다. 9) 관동( 官 洞 )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의 일부로 개항 당시에는 별다른 이름이 없었다. 그러다가 1912년 일본인들이 자기들 식으로 중정( 仲 町 )이라 불렀다. 1914년 전국적인 행정구역 개편 때는 일본인들이 이곳을 본정( 本 町 ) 1 3 정목( 町 目 )으로 나누어 인천부( 仁 川 府 )에 편입시켰다. 10) 중앙동( 中 央 洞 ) 중앙동은 인천항 개항 당시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에 속해 있었다. 1912년에는 부내면 본정( 本 町 )이 되었다. 1946년 우리 이름으로 중앙 동이 되는데, 본정 1 3 정목은 그대로 중앙동 1 3가로 바뀌었다. 중앙동이란 본정과 마찬가지로 '인천 시내의 중심에 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1977년 중앙동은 인근의 관동, 해안동, 항동, 송학동을 합쳐 행정동으로 중앙동이 되며 그 동사무소가 있는 중심동이 되었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73

76 11) 해안동( 海 岸 洞 ) 매립 전에는 해안지대였는데 1924년 해안정으로 명명한 것을 광복 후 해안동으로 바꾸었다. 12) 항동( 港 洞 ) 항동은 선착장과 여객부두, 세관 등 인천항의 주요 시설이 있는 곳 이란 뜻에서 생긴 동명이다. 현재의 항동은 대부분 바다였으며 구한 말 부내면에 속해 있었다. 칠통마당 지금의 하버파크호텔 해안 일대를 부르던 말로 각지에서 실어 오는 볏섬을 하역하던 선창이다. 지금은 인천 내항의 도크에 포함되었다. 제물포 포구 현 파라다이스 호텔 아래쪽 기독교 선교 100주년 탑과 중부경찰서가 있는 일대 항동 지역이 제물포 포구 자리로서 1883년 개항한 개항 장이다. 13) 북성동( 北 城 洞 ) 구한말 인천부 부내면 지역으로 한적한 어촌과 산지였다. 1903년 만 석동에 편입되었다가 1912년 화방정( 花 房 町 ) 1 3정목으로 인천부에 편입됐다. 화방은 일본 공사였던 하나부사[ 花 房 義 質 ]를 일컫는 말로, 그가 이곳 에 처음 상륙했다 하여 일본인들이 갖다 붙인 이름이다. 74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77 1946년 옛날 북성( 北 城 )이 있던 곳이라 하여 북성동이라는 이름으로 고쳐 불렀다. 1977년에는 인근 선린동과 행정동으로 합쳐졌다. 북성곶( 北 城 串 ) 북성구지라고도 했는데 대한제분 뒤쪽 바다로 길게 뻗은 포구였다. 북성포대 병인양요 이후에는 외국의 침략에 대비해 북성 주변 바닷가에 북성 포대를 세우기도 했지만, 인천항이 개항하면서 이도 필요가 없게 돼 결국 없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인천항이 개항한 뒤 외국인들이 이곳으 로 많이 몰려들면서 새로운 변화를 하게 된다. 월미도( 月 尾 島 ) 1866년 병인양요 때 우리나라를 침공한 불란서 제독 로즈(Rose)의 이름을 따 저들이 로즈섬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14) 연안동( 沿 岸 洞 ) 항동 7가 대부분과 북성동 1가 일부(소월미도 지역)을 관할하는 행 정동으로 원래 중앙동이었던 것을 1985년에 분동( 分 洞 )한 것이다. 연안부두( 沿 岸 埠 頭 ) 인천항 연안여객선터미날이 있어 서해안 일대 덕적 백령, 승봉, 이 작, 영흥, 작약도 등을 운항하는 뱃터 일대를 이르는 명칭이다. 남항부두( 南 港 埠 頭 ) 인천항의 남쪽, 연안동에 위치한 부두로 주로 화물선과 낚시배들이 이용하는 부두이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75

78 15) 선린동( 善 隣 洞 ) 인천부 부내면에 속한 지역이었다. 청국지계에 해당하던 곳으로 1914년 지나정( 支 那 町 )이라 하여 인천부에 편입하였다. 1936년 1차 부 역 확장 때에는 미생정( 彌 生 町 )으로 고쳤다. 광복 후 친선을 도모한다 는 의미에서 선린동으로 하였다. 1977년 북성동과 통합되었다. 청관( 淸 館 ) 선린동 일대 중국인들이 모여 살던 곳을 이르는 말이다. 현 인천화 교소학교 자리에 청국 영사관인 이사부( 理 事 府 )가 있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처럼 청나라 관청이 있는 동네라는 뜻에서 이렇게 불렀다. 16) 송월동( 松 月 洞 ) 구한말 다소면 고잔리에 속한 야트막한 구릉지대로. 별다른 동네 이 름이 없다가 1903년 부내면이 생기면서 만석리( 萬 石 里 )가 되었다. 1912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소나무 언덕이라는 뜻의 송판정( 松 坂 町 )으 로 명명했다. 1946년 송월동으로 바뀌었는데, 응봉산의 소나무 숲 사이로 달이 밝 게 보인다는 뜻에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솔골, 솔울 소나무 고을이라는 순 우리말 이름으로도 불렸다. 솔울을 송울, 그 것이 송월로 그리고 松 月 로 표기된 것으로도 추측된다. 송산( 松 山 ) 소나무 산이라고 이름으로도 불리었다. 76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79 17) 신포동( 新 浦 洞 ) 인천항 개항 이후에 생긴 지명으로 원래는 구한말 다소면 선창리에 속해 있었다. 1903년 부내면이 생길 때 새로 번창하는 마을이라는 뜻 에서 신창동( 新 昌 洞 )이라고 했다. 1930년대 들어 개포동( 開 浦 洞 ), 혹은 일본식으로 화정( 花 町 )으로 불 렸다. 화정은 사창가를 뜻하는 이름으로, 답동성당 언덕 아래나 인천여 상 주변이 일본인 사창가여서 붙었던 이름이다. 한때는 신정( 新 町 )이라 는 이름으로도 불리다가 1946년 신포동이 되었다. 1977년에 사동, 신생동, 답동과 신포동을 합해 행정동으로 신포 동이 됐다. 터진개 원래 이름은 순 우리말로 터진개였고, 한자로는 탁포( 坼 浦 )였다. 바 다 쪽으로 터져 있고 배가 드나드는 갯가여서 붙은 이름이다. 닭전거리 터전개에 있던 닭과 달걀이 가장 많이 흥정되던 시장 거리이다. 인 천 인근에서 베로 실어 날랐다. 18) 사동( 沙 洞 ) 구한말 인천부 부내면 지역에 딸려 있는 작은 섬으로 모래섬이어서 사도( 沙 島 )라 불렀다. 1900년대 초 일본인들이 이 일대를 매립해 육지 가 됐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 이름을 바꿀 때 바닷가 마을이라는 뜻으로 빈 정( 濱 町 )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계속 사용되다가 1946년 사동이 됐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77

80 1977년에는 인근의 답동, 신생동과 합쳐져 행정동으로 신포동에 들 어갔다. 오푼도( 五 分 島 ) 사도는 한동안 오푼도라고도 불렸는데 이 섬에서 일본인과 중국인들 이 5푼짜리 위폐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19) 신생동( 新 生 洞 ) 구한말 인천부 부내면 지역으로 대부분 바다였다. 이 일대는 일본인 들이 매립을 해서 새로 생긴 땅이다. 일본인들은 1912년 이곳에 궁정 ( 宮 町 )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붙였으니 이는 이곳에 자신들의 신궁( 神 宮 ), 곧 신사( 神 社 )를 지었기 때문이었다. 광복후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에서 신생동으로 고쳐 불렀다. 1977년 신생동은 다시 행정동으로 신포동에 편입됐다. 동공원( 東 公 園 ) 1890년 일본은 지금의 인천여상 자리에 신궁을 세우고 공원을 만들 었는데 이것이 동공원이다. 20) 답동( 沓 洞 ) 구한말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에 속해 있던 곳이다. 1903년 부내면이 생길 때 답동이 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일본식으로 사정( 寺 町 ) 이 된다. 그 후 1936년에는 욱정( 旭 町 )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가 광 복 후 다시 답동이 되었다. 1977년 행정동 신포동에 속하게 되었다. 78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81 논골 이 지역이 대부분 논이었기 때문에 논골로 불렀다고 한다. 논골은 한자로 답리( 沓 里 )인데 탁계( 濁 溪 )라고도 하였다. 탁계는 깨끗하지 못한 개울이라는 뜻으로 이곳 개울에는 물이 맑지 않았던 듯하다. 21) 신흥동( 新 興 洞 ) 구한말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의 일부로 개항 초기 시의 외곽 지역이 었다. 1903년 유곽이 있는 곳이라 하여 화개동( 花 開 洞 )이라 불렀다. 1912년 화개동의 일부와 주변의 신창동, 와정동( 瓦 鼎 洞 ) 일부를 합쳐 일본식 이름으로 화정( 花 町 )이라 했다. 광복 후 화정의 유곽이 폐쇄되고 새롭게 발전하고 부흥한다는 뜻으 로 신흥동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데, 당시 1가동, 2가동, 3가동이었던 곳은 신흥동이 되면서 역시 1가, 2가, 3가가 되었다. 화가동, 하가동 이곳 화개동을 와전된 발음으로 화가동, 혹은 하가동으로 불렀다. 꽃골말[ 花 谷 村 ], 꽃굴 화개동을 부르던 순 우리말이었다. 모랫말 사동이나 신흥동이 생기기 전, 이 일대 해안가를 모랬말이라고 불렀다. 와정동 기와를 굽는 곳이 있다 하여 이렇게 불렀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79

82 21) 신선동( 新 仙 洞 ) 신선동은 1983년에 생긴 동이다. 당초에 신흥3동과 선화동이었던 것 이 1977년 신흥2동이 됐다가, 1983년 다시 신선동으로 바꾸면서 신흥 3동과 선화동의 앞 글자를 하나씩 따서 붙인 이름이다. 22) 선화동( 仙 花 洞 )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에 속해 있던 1900년대 초까지 별다른 동명이 없었다. 부내면이 생길 때 화개동이 되었다. 신선동의 일부로 옛날 사 창가가 있어서 유명했던 곳이다. 23) 도원동( 桃 源 洞 ) 구한말 다소면 장천리( 長 川 里 )와 독각리( 獨 脚 里 )의 일부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도산정( 桃 山 町 )으로 인천부에 편입되었다. 개 항 직후 일본인들이 이 산에 복숭아 과수원을 만들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광복 후 왜식 동명 개정 때 도원동으로 개칭하였다. 황골고개 황굴고개라고도 불렀다. 숭의동에서 배다리로 넘어가는 도원동 고개 마루턱이 황골고개다. 황굴은 황골의 발음이 바뀐 것으로 이것은 항굴 곧 한골에서 온 것이다. 크다는 뜻의 순 우리말 한과 골짜기 또는 마 을 등을 뜻하는 골이 합해진 말로 해석한다. 그러니까 황골고개는 큰 골짜기나 큰 골짜기 마을로 풀이된다. 80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83 24) 율목동( 栗 木 洞 ) 율목동은 구한말 인천부 다소면 송림리 지역이었다. 제물포 지역에 부내면이 생기면서 이곳이 면소재지가 됐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율목리가 됐다. 한자의 뜻 그대로 율목동은 밤나무가 많은 조그만 언덕에 생긴 마을이어서 붙은 것이다. 1977년 유동과 율목동을 통합하였다. 새동네 율목동에 새로 생긴 마을로 신촌말이라고도 한다. 25) 유동( 柳 洞 ) 유동은 구한말 인천부 다소면 송림리에 속해 있었다. 1903년 부내면 이 생기면서 부내면 우각리( 牛 角 里 )가 되었고, 1906년에는 우각동이 되었는데, 이 우각동이 1912년 우각리와 유동으로 다시 나뉘었다. 경인철도가 이 동네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철도 북쪽은 현재의 창영 동이 되고, 남쪽은 유동이 됐다. 유동은 이곳에 버드나무가 있었기 때 문에 생긴 이름이다. 유목동( 柳 木 洞 )이라고도 했고, 우리말로는 버드나 무골 또는 버들골로 불렸다. 1914년 일본식 이름으로 유정( 柳 町 )이 되었다가 광복 뒤에 그대로 유동이 되었으며, 1977년에 행정동으로 율목동 관할이 됐다. 26) 영종동( 永 宗 洞 ) 본래 인천부 지역으로 자연도( 紫 燕 島 )였다. 고려 인종 때 송나라 사 신 서긍( 徐 兢 )이 귀국 후 여러 가지 견문을 모아 엮은 고려도경( 高 麗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81

84 圖 經 ) 에 '경원정( 慶 源 亭 ) 맞은편 섬에 제비가 많이 날아 붙여진 이름'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조선 효종4년(1653) 남양부에 있던 영종포진을 이곳으로 옮겨 와 용유, 무의, 삼목, 월미, 신불, 물치, 응도 등 7개 섬을 관할하면서 점차 영종으로 불리다가 아주 굳어지고 말았다. 애초에는 송산, 외중 촌, 북촌, 예호, 구읍, 삼목, 전소, 후소 등 8개 동리였다. 영종동은 현 법정동 운남, 중산, 운서, 운북동을 아우르는 행정동 이름이다. 백운산( 白 雲 山 ) 영종도의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있는 백운산( 白 雲 山 :255m)은 이 섬 에서 가장 높은 주봉( 主 峰 )이다. 아침저녁마다 산꼭대기에 흰 구름이 자욱하게 낀다고 해서 백운산으로 불린다. 저녁 무렵 석양에 비치는 오색구름이 산봉우리에 머물 때면 선녀들이 내려와 놀고 간다는 전설 이 있기도 하다. 27) 중산동( 中 山 洞 ) 1914년 구읍리와 송산리 일부, 외중촌리 일부를 합쳐 중산리라 하였 다. 이 마을 전체가 백운산에 둘러싸여 있다고 해서 붙인 지명이다. 구읍( 舊 邑 ) 구읍동, 구읍리로도 불린다. 조선 때 영종진이 소재하던 곳이다. 뱃 터로 유명한 태평암( 太 平 巖 )이 있었다. 태평암은 너르고 평평하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월촌( 月 村 ) 중산동의 가장 큰 동으로 지형이 달 모양이라는 설과 달이 영종지역 에서 가장 먼저 비춘다고 해서 붙었다는 설이 있으나 불명하다. 큰 마 을을 큰월촌, 혹은 큰월춘이라고 불렀다. 82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85 돌팍재 돌팍은 돌의 지방 토속어이며 재는 고개를 뜻하는 말이다. 외중촌 ( 外 中 村 ), 대비현( 大 碑 峴 ), 석현( 石 峴 )으로도 불렸다. 송산( 松 山 ) 궁궐 건물을 짓거나 수리할 때 쓰기 위해 기르던 소나무 조림지역이 다. 이 송산 밑에 솔미 마을이 있었다. 마장포( 馬 場 浦 ) 마당개라고 부른다. 말목장이 있던 곳이어서 붙은 이름이다. 중촌부락 돌팍재 북쪽 구읍과 운남리의 전소 중간 위치이다. 외중촌리( 外 中 村 里 ) 지금의 중산동에 위치하며 돌팍고개 아래에 위치한 마을로 중촌의 바깥이 되므로 외중촌이라고 부른다. 장길목 돌팍재 남쪽 마루턱에 있는 마을로 장길, 장길항( 長 吉 項 ) 등으로 불린다. 놀거리 놀커니로도 불리는데 이것을 노는 거리라는 뜻으로 한자로 유거리 ( 遊 巨 里 )라 표기했다. 서리골 일제가 서리라는 발음을 좇아 상동( 霜 洞 )이라 했으나 억지스럽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83

86 여음말 염말, 여앗말, 영아랫말이라고도 했다. 돌팍재 동쪽 옛날 영종진의 아래에 위치한 마을이라 해서 붙은 지명이다. 영하리( 營 下 里 ), 영핫말 곧 영( 營 ) 아랫마을 이라는 뜻이다. 연방죽 구읍과 긴 방죽이 있어서 붙은 지명이다. 방축안 언내( 堰 內 ), 월촌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월촌 방죽의 안쪽이 된다. 소당골 돌팍재 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 이름으로 지형이 소댕처럼 생겼다 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소당이골로도 불리는데 일제 때 전혀 의미가 다르게 소당동( 小 堂 洞 )이라고 표기했다. 두묵개 두미포( 斗 尾 浦 ), 두모포( 豆 毛 浦 ), 두무개 등으로 불린다. 꿩골 돌팍재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엎드린 꿩처럼 생겼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꿩이골로도 불리고 한자로는 치동( 雉 洞 )으로 표기한다. 안양골 송산 골짜기 마을로 안양사( 安 陽 寺 )라는 절이 있어 부른 지명이다. 절골 사동( 寺 洞 )으로 쓴다. 소당골 서쪽 골짜기에 절이 있었다고 해서 붙 은 지명이다. 84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87 짓치골 지초동( 芝 草 洞 )으로 표기하며 지치풀이 많아 붙여진 지명이다. 버덕말 버덩말로도 발음하는데 꿩골 남쪽 마을로 버덩이 있다고 한다. 이것 을 일제 때 엉뚱히게 부덕촌( 富 德 村 )으로 표기했다. 28) 운서동( 雲 西 洞 ) 1914년 후소리( 後 所 理 ) 일부와 삼목리, 신불도를 통합한 지역이다. 백운산 서쪽 마을이다. 가막골 가마골, 가마굴, 가마동의 별칭이 있다. 운서리의 가장 큰 마을로 지 형이 가마솥처럼 생겼다 해서 부른 이름이다. 한자 명칭은 부동( 釜 洞 )이다. 넙듸 넙동애라고 불렀다. 넓다는 의미로 광동리( 廣 東 里 )라고도 불렀다. 가 막골 북동쪽 마을로 넙듸산 밑이 된다. 넙듸산 넙듸 북쪽 산으로 옛날 봉화를 올렸다. 모래말 눈들 남쪽 마을로 모래가 많아 사촌( 沙 村 ), 사동( 沙 洞 ), 모래밭 등으 로 불렀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85

88 눈들 은골 서쪽 큰 바위를 눈돌, 혹은 한바위, 백암 등으로 불렀다. 눈돌 이 이 마을을 지칭하는 이름이 되었다. 한자명은 와석동( 臥 石 洞 )이다. 모래말 눈들 남쪽의 모래가 많은 마을이다. 사동이라고도 불렀다. 삼목도( 三 木 島 ) 삼목도는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에 끼어있던 작은 섬이다. 섬 가운데 에 큰 나무 세 그루가 있어 붙은 이름이라고도 하고, 섬에 물이 들어 오고 나가는 갯골 목이 세 곳이어서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어은골 넙디 북서쪽 마을. 깊은 골짜기 안에 숨은 듯하다 해서 붙인 호칭이다. 고미알 은골 북쪽의 마을. 뒷산 모양이 코처럼 생겨서 붙은 지명이다. 젓개 삼목과 눈들 사이의 갯골이다. 게가 많이 나와 젓을 담근다는 의 미이다. 서풀 신불도( 薪 佛 島 ) 안에 있는 마을이다. 숲이 많고 불당이 있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하나 '섶풀'의 와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용수말 가막골 서쪽 마을로 마을 앞에 용마가 났다는 작은 소( 沼 )가 있 었다고 한다. 86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89 벌미( 浌 尾 ) 용수말 남쪽 마을이다. 장안말 댕굴 북서쪽에 위치하는데 마장이 있었다. 마장 안쪽 마을이란 뜻이다. 큰말 대촌( 大 村 ). 넙듸 남쪽 마을. 인근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다. 삿갓봉 넙듸 뒷산 봉우리가 삿갓처럼 생겼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용우물 우물 뒤쪽에 추( 秋 )씨 성을 쓰는 사람이 묘를 쓰고 아들을 낳았는데 장차 국가 변란에 연루될 것이 두려워 죽이니 용마가 나와 사흘 동안 슬피 울다가 사라졌다고 해서 용우물이라고 부른다. 앵현( 鸎 峴 ) 꼬리목, 꾀꼴목으로도 불렸다. 지형이 꾀꼬리 형상이어서 붙은 고개 라고 한다. 29) 운남동( 雲 南 洞 ) 1914년 전소리와 외중촌리 일부, 후소리 일부, 송산리 일부를 통합 해 운남리라 하였다. 영종의 백운산 남쪽이라 하여 붙은 지명이다. 전소리( 前 所 里 ) 전소, 전수, 신읍, 큰말, 전소리, 전소방 등으로 불렸다. 운남리의 으뜸 마을로 구읍( 舊 邑 )에 있던 영종진이 이곳으로 옮겨와 있었기 때문 에 신읍( 新 邑 )이라 불렸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87

90 당현( 堂 峴 ) 당고개라고 불렀다. 당제를 지내는 사당이 있어서 붙은 고개 이름이다. 마산현( 馬 山 峴 ) 말을 놓아먹이던 산 고개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잔다리 전소 북동쪽 마을로 부근에 작은 다리가 많아 그렇게 불렀다. 소교 ( 小 橋 )로도 불렸다. 남디 남도( 南 道 ) 발음이 와전된 것으로 백운산 남쪽 기슭 도로에 인접해 있다하여 부른 명칭이다. 반길안 남디 서쪽의 마을이다. 지형상 반쯤 길( 吉 )하다 해서 부른 이름이라 고 한다. 반길안( 半 吉 安 )으로 쓴다. 관청말 전소의 동쪽에 옛날 관청이 있었다 하여 붙은 마을 이름이다. 일제 때 궁창리( 宮 倉 里 )로 표기했다. 도수장께 마을에 도수장이 있어서 붙은 지명이다. 말우물 마정( 馬 井 )이란 뜻이다. 전소 남쪽에 큰 우물이 있다. 오가리골 잔다리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 마을로 처음에는 다섯 집이 살다가 관 88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91 청말로 이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오가동( 五 家 洞 ), 석오가동( 石 五 佳 洞 )으로도 불린다. 30) 운북동( 雲 北 洞 ) 북촌리, 예호리, 후소리 일부 지역을 통한 지역으로 운북리라 하였 다. 백운산 북쪽 지역 마을이다. 대산( 大 山 ) 북촌리( 北 村 里 ) 즉 운북동에 있는 산이다. 용호산( 龍 虎 山 ) 예호리( 禮 湖 里 )에 있는 산이다. 논골 토질이 좋아 논이 많았다고 한다. 한자로는 답동( 畓 洞 )이다. 동강( 桐 江 ) 오동나무 숲이 있고 마을 앞으로 내가 흘러 붙은 지명이다. 동강리, 동개 등으로도 불렸다. 일제 때 동강리( 東 江 里 )로 표기했다. 장촌( 章 村 ) 웃말 서쪽 덕수 장씨 집성촌으로 점차 이렇게 불렸다. 박촌( 朴 村 ) 박씨 집성촌이어서 붙은 지명이라고도 하고 돌무더기가 많아 박다골 로 부르다가 박촌으로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예단포( 禮 丹 浦 ) 옛날 효자가 많아 예대포( 禮 待 浦 )라고 부르다가 어느 때부터인가 예 단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예호리( 禮 湖 里 )로도 불렀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89

92 살무지 동넷담 남쪽 벌판 마을이다. 임진왜란 때 사람이 많이 죽은 곳이라 해서 붙은 지명이다. 댕굿부리 산부리가 댕구, 즉 대완구( 大 碗 口 )처럼 생겼다 해서 붙은 별명이다. 강촌 마은골 서쪽 마을로 강씨들이 살았다고 하나 일제 때 표기는 강촌 ( 江 村 )으로 되어 있다. 바다 마을에 강( 江 )을 붙인 것이 억지스럽다. 살개 강촌 북서쪽 갯가 마을로 살캐라고 한다. 일제는 이것을 화살을 뜻 하는 전포( 箭 浦 )로 표기했다. 젓개 장촌 남서쪽 마을이다. 염포( 鹽 浦 )로 표기한다. 금산( 錦 山 ) 금산( 禁 山 )이라고도 한다. 나라에서 입산을 금지하였다는 전설이 전 해온다. 장금 장구도, 장구염, 장고도라고도 한다. 예단포 북쪽에 있는 무인도이 다. 모양이 장구 처럼 생겨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31) 용유동( 龍 游 洞 ) 섬의 모양이 용( 龍 )이 수영하며 노는( 游 ) 모습이라 해서 붙여졌다는 90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93 설이 있으나 신빙성이 없다. 조선 시대 이 섬의 한자 표기는 용유도 ( 龍 流 島 )였다. 섬의 모양이 용( 龍 )이 흐르듯이( 流 ) 오르내리는 모습이라 고 해서 붙은 것이라는 설명이 있다. 32) 남북동( 南 北 洞 )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남리, 북리, 관청말, 날개, 둥개, 영구리 등을 통합해 남북리라 하였다. 1989년 중구에 편입되며 남북동이 되었 다. 대표적인 남리와 북리의 머리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관청말 관청이 있어 붙은 마을 명칭이다. 또 기와집이 있어서 기와집말이라 고도 불렀다. 남리( 南 里 ) 관청말 남쪽 마을이다. 날개 나루개라고도 한다. 관청말 동쪽 마을로 나루터가 있어 붙은 이름이 다. 한자로는 비포( 飛 浦 )로 쓴다. 영구리현( 永 九 里 峴 ) 남리 남동쪽 마을에 있는 고개이다. 북리( 北 里 ) 관청말 북쪽에 있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둥개 두무현( 斗 武 峴 ), 두무고개라고도 부르는데 북리 남서쪽에 있는 마을 의 고개 지명이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91

94 부시내고개 관청말에서 나루개로 넘어가는 고개. 한자로는 부소현( 扶 蘇 峴 )이 라고 쓴다. 비석거리 한양 조씨의 비가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33) 덕교동( 德 橋 洞 ) 거잠리, 곰냉이, 마시란, 순묵개 마을을 합쳐 덕교리라고 하였다. 남 북리에 있는 순지( 蓴 池 )라는 연못에서 나온 용마가 이 개천에서 울다가 승천한 뒤 덕( 德 )을 받아 잘 살게 되었다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거잠포( 巨 蠶 浦 ) 덕교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큰 누에 형상을 했다고 해서 붙 여진 지명이다. 거잠이라고도 불렸다. 곰냉이 마시란 남동쪽 마을의 지명이다. 마실안 지형이 말안장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하는데 마을 안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싶다. 범머리산 오성산 남쪽에 있는 산으로 범의 머리처럼 생겼다 해서 붙은 지명이다. 범산이골 함무굴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범이 살았다고 한다. 92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95 참나무골 오성산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참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잠진도( 蠶 津 島 ) 섬의 지형이 누에의 머리처럼 생겼다 해서 붙은 지명이다. 34) 무의동( 舞 衣 洞 ) 대무의( 大 舞 衣 )와 소무의( 小 舞 衣 )를 합쳐 무의동이라 하였다.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춤을 추었다는 이야기와, 안개가 많이 낀 날 어부들 이 이 섬을 지나다가 말을 탄 장수가 옷깃을 날리며 달리는 모습처럼 보여서 붙인 이름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세종실록지리지에 의 한자 표기는 없을 무( 無 )로 표기되어 있다. 개안 무의동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앞에 갯가가 있다. 포내( 浦 內 )로 표 기했다. 광명리 샘꾸미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큰무리 대무의도를 부르던 순 우리말이다. 여기서 무리는 물을 뜻한다. 즉 큰무리는 큰물을 의미한다. 떼무리 소무의도의 순 우리말 토착어이다. 췌무의( 贅 舞 衣 )로 표기한 기록도 보인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93

96 샘꾸미 마을에 샘이 있다 하여 붙은 지명이다. 꾸미는 구멍을 뜻하는 고어 '굼'의 변화로 보인다. 사렴산 큰무리 동쪽에 있는 섬이다. 상엽산( 桑 葉 山 )이라고도 부르는데 섬 모 양이 뽕나무 잎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사실미재 사시미재라고도 하는데, 이것을 일제 때 사슴을 뜻하는 녹현( 鹿 峴 )이 라고 표기했는데 오히려 실미도와 더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36) 을왕동( 乙 旺 洞 ) 늘목 또는 을왕, 을항, 얼항 등으로도 불렸다. 이곳 왕산( 旺 山 )에 고 려 희종의 자손으로 알려진 어떤 왕자의 묘지가 있어 붙은 이름이라는 해석이 있으나 고증할 수 없다. 높은 산이 없이 느릿하고 길게 늘어진 목이라는 뜻의 '늘목'에서 비 롯됐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말을 한자로 표시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변 한 것으로 보는 설도 있다. 너먼말 늘목 서쪽의 마을로 넘어에 있는 마을 곧, 건너말이라는 뜻이다. 목개 늘목 남서쪽 마을로 못이 있는 포구라는 의미로 한자로는 지포( 池 浦 ) 라고 표기했다. 94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97 학방재 학방, 곧 서당이 있었던 마을이다. 호군재 일제 때 표기로는 호군현( 護 軍 峴 )이다. 진( 鎭 )이 있어서 붙은 지명으 로 보인다. 봉구지재 옛날 봉수 터가 있었다고 해서 일제 때 봉고지현( 烽 古 址 峴 )으로 표 기했다. 밤나무골 밤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가마여 늘목 북쪽에 있는 섬으로 모양이 가마처럼 생겨서 붙여진 지명이다. 여는 물속에 잠겨 있는 바위를 이르는 순우리말이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95

98 2. 동 구 인천부 부내면의 일부 지역으로 금곡, 우각, 화촌, 평동, 만석, 묘도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다소면의 송림, 송현, 신촌, 화도, 수유 등의 동리를 병합하여 금곡, 우각, 화평, 만석, 송림 신화 수 등을 포함하였다. 1968년 인천에 구제가 실시되면서 생겼다. 1) 금창동( 金 昌 洞 ) 1985년 창영동과 금곡동을 통합하여 금창동이 되었다. 2) 금곡동( 金 谷 洞 ) 쇠골이라는 의미이다. 아마도 쇠골의 쇠를 쇠붙이의 의미로 보아 쇠 금 자를 서서 금곡리로 한 듯한데 인근의 쇠뿔고개와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쇠골[ 金 谷 ] 쇠가 난다고 하여 쇠골 또는 금곡( 金 谷 )이라 하였다. 3) 창영동( 昌 榮 洞 ) 원래 인천부 부내면 우각동 지역으로 1936년 일제시기에는 새롭게 번창하기를 기원한다는 뜻으로 창영정으로 명명했던 것을 광복 후 창 영동으로 개칭했다. 96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99 우각동 창영리의 중심이 되는 마을로서 쇠뿔고개, 우각현 등으로 불렸다. 쇠뿔마을을 한자로 의역하여 우각동이 도니 것이다. 그러나 금곡동에 서 쇠가 났다면 이 언덕도 역시 쇠가 나는 높은 언덕을 뜻하는 즉 '부 리>불'이었을 것인데 그것을 엉뚱하게 쇠뿔로 의역한 것이 아닌가 싶다. 배다리 바닷물이 이곳까지 통하여 배가 드나들고 선창이 있었던 곳이라 하 여 붙여진 지명이다. 4) 송림동( 松 林 洞 ) 송림동은 원래 인천부 다소면( 多 所 面 )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새말, 매하지, 장승거리, 샛골, 활터고개를 병합하여 송 림리라 하였는데 1936년 제1차 인천부역 확장 때 일본식으로 송림정 ( 松 林 町 )이 되었다가 1946년 송림동이 되었다. 1995년 3월 1일 행정구 역 개편에 따라 인천광역시 동구 송림1 6동이 되었다. 본래 수도국산으로 불리는 만수산 일대에 소나무가 많아서 송림( 松 林 )이라는 지명이 붙었다. 새말 바깥 송림이라고도 한다. 송림 바깥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이 다. 신촌이라고도 불렀다. 샛골 송림3동에 있는 마을로 간곡( 間 谷 ), 조곡( 鳥 谷 )이라고도 불리는데 간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97

100 곡은 '사이골 >샛골>간곡'으로 바뀐 것으로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 이다. 조곡은 '사이=새'를 새[ 鳥 ]로 표기한 것이다. 안송림 송림 안쪽에 있는 마을을 가리킨다. 활터고개 활터가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도 하고, 이 언덕을 오르려면 숨이 차 헐떡거리게 된다고 해서 헐떡고개라고도 부른다. 송림동 재능대학 앞 도로를 가리킨다. 달리 고개가 활처럼 휘어져서 붙여졌다고도 한다. 활터를 한자로 고쳐 궁현( 弓 峴 )이라 불렀다. 만수산( 萬 壽 山 ) 주민들이 산에 올라가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관습이 있어 송림산에 붙여졌던 이름이다. 수도국산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매화지( 梅 花 址 ) 송림동의 전주 이씨 가문 출신으로 참판과 관찰사를 지낸 이만영( 李 晩 永 )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세운 매화당( 梅 花 堂 ) 앞의 연못자리에 서 유래한다. 부처산 송림5동에 있는 산으로 일본 절이 있었다. 그 산비탈에 부처골이 있다. 음나무고개 활터고개 동쪽에 있는 고개로, 커다란 느릅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유 현( 楡 峴 )이라고 불렀다. 장승거리 송림동 마을 입구에 장승이 서 있었다고 전한다. 98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01 쥐뿌리 산기슭이 마치 쥐처럼 생겨 붙여진 지명이다. 지금의 송림동과 화평 동의 경계가 되는 지역이다. 5) 송현동( 松 峴 洞 ) 송현동은 본래 인천부 다소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에 절굴을 병합하 여 송현리가 되었고 1936년 제1차 부역 확장 때 일본식으로 송현정( 松 峴 町 )이라 하다가 1946년 송현동이 되었다. 현재 송현 1 2 3동으로 편제되어 있다. 솔고개 소나무가 많은 고여서 우리말로 솔고개, 한자로는 송현( 松 峴 )으로 표 기했다. 수문통( 水 門 桶 ) 송현3동 지역에 바닷물이 들고 나는 수문통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절굴 절이 있었던 마을이라고 해서 절굴이라고 하는데 절골의 와전이다. 똥고개 송현동 외곽 바닷가에 분뇨를 폐기하면서 붙은 이름이다. 그 앞의 언덕을 가리킨다. 수도국산( 水 道 局 山 ) 1910년 인천시에 상수도가 개통될 때 이 산에 배수변( 配 水 弁 )시설을 함으로써 시민들이 수도국산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99

102 6) 만석동( 萬 石 洞 ) 만석동은 원래 인천부 부내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괭이부리와 다소면의 수유리 일부를 병합하여 만석정( 萬 石 町 )이 되었다. 1946년에 일본식 동명을 청산하면서 만석동( 萬 石 洞 )이 되었다. 괭이부리 만석동 서쪽에 섬의 산부리가 고양이처럼 생겼다 해서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한자로는 묘도( 猫 島 )로 표기한다. 지금은 매립되어 육지가 되었다. 묘도포대 터 괭이부리에 있던 포대 터를 이르는 명칭이다. 만석이 마을 양곡 만 석을 쌓을 수 있는 야적장이 있었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수유리( 水 踰 里 ) 화수동, 만석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무네미라고 부른다. 바다 건너 마을이라는 듯에서 물넘이>무너미>무네미가 되었고 이것을 한자로 의 역해 수유리라고 한 것이다. 작약도( 芍 藥 島 ) 괭이부리 북서쪽에 있는 섬으로 본디 이름은 물치( 勿 淄 ), 무치( 舞 雉 ) 였다. 작약도는 일제 때 붙인 이름이며 병인양요 때 불란서 함대가 해 도에 자기들 함선의 명칭을 따 보아제(Boisee)섬으로, 신미양요 때, 미 국함대에 의해 우디 아일랜드(Woody Island)로도 불렸다. 100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03 7) 화수동( 花 水 洞 ) 화수동은 원래 인천부 다소면 지역의 작은 포구였는데 1914년에 신 촌리와 화도동, 수유리를 병합하여 신화수리( 新 花 水 里 )로 개칭했다. 1936년 화수정( 花 水 町 )이라 하다가 1946년 화수동이 되었다. 행정구역 은 화수1 2동이다. 새말 화수동에 새로 된 마을로 신촌동( 新 村 洞 )이라고 불렀다. 화도( 花 島 ) 화수동에서 가장 큰 마을로 지형이 꽃과 같다거나 꽃이 많아 붙여진 땅이름이라고도 하나 고증할 수 없다. 쌍우물 무네미 어귀에 쌍으로 있던 우물 이름이다. 화도고개 화도에서 화평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화도진터 화도 마을 일대에 있는 화도진의 터[ 花 島 鎭 址 ]을 일컫는다. 8) 화평동( 花 平 洞 ) 인천부 부내면( 府 內 面 )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화 촌동( 花 村 洞 )과 평동( 平 洞 )을 병합하여 화평리가 되었다. 1936년 화평 정( 花 平 町 )이라 하였다가 1946년 화평동이 되었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01

104 벌말 화평동에서 가장 넓은 벌판에 마을이 형성되어 벌말이라고 부르던 것을 한자로 의역하여 평동( 平 洞 )으로 부른 것이다. 화촌동( 花 村 洞 ) 곶( 串 )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곶마을'이라 부르던 것을 '꽃마 을'로 생각해 한자로 화촌( 花 村 )이라고 적어 부르게 된 것으로 추정 된다. 구름다리 전동에서 화평동으로 건너가는 경인 전철 위의 다리가 높아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102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05 3. 옹 진 군 고려 때의 지명은 옹천( 甕 遷 )이라는 기록이 삼국사기 지리지( 三 國 史 記 地 理 誌 )에 있으나 고려 초기에 지금의 지명인 옹진( 甕 津 )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천연 요새가 마치 독(항아리)을 눕혀 놓은 것 같은 형상이어서 붙은 지명이다. 그러나 이 같은 지형을 가진 옹진군은 황해도 옹진 지역으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옹진군은 휴전 후 당시 옹진군에 포함되었던 도서 중에 백령, 대청, 소청, 연평, 소연평 등을 포함한 섬들로서 이루어진 행정 구역 명칭이다. 1) 북도면( 北 島 面 )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부천군에 편입되면서 부천군 북쪽의 섬이 라 하여 북도면으로 불렸다. 가. 신도( 信 島 ) 섬 주민들이 매우 순박하고 성실하고 정직해서 신의가 두텁다 하여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시 믿을 신( 信 ) 자를 써서 신도라고 했다고 전 한다. 달리 진염도( 眞 鹽 島 )라고도 하는데 이 섬에서 제조하던 화염( 火 鹽 )의 품질이 뛰어나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고남리( 皐 南 里 ) 신도리에 있는 마을로서 언덕 남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언덕 고( 皐 ) 자에 남녘 남( 南 ) 자를 썼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03

106 구로지( 九 老 地 ) 강화도에서 노인 아홉 명이 이주해 와 자리잡고 살았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구로지 먹염 신도 서쪽 작은 무인도로 중앙에 있는 큰 웅덩이에 귀 달린 먹구렁 이가 용이 되어 승천하기 위해 닦던 곳이라고 해서 먹염이라고 불렀 다. 해방 후 신오도로 불러 오고 있다. 절골 신도2리 고남리 중턱에 위치한 골짜기로 이곳에 절이 있었다고 붙은 지명이다. 염촌( 鹽 村 ) 조선 말엽인 1882년경부터 가마솥을 이용해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굽는 벗이 있어서 벗마을로 부르다가 한자 지명 염촌으로 불렀다. 1916년 일본인이 제작한 지도에는 평촌( 坪 村 )으로 표기 했는데 벗마을 을 벌마을(넓은 벌이 있는 마을)로 오인해 붙인 지명으로 추측된다. 숯목재 고개 구로지에서 새말로 넘어가는 고개로 이 부근에서 옛날에는 숯을 많 이 구웠다고 해서 붙은 지명으로 한자로는 탄현( 炭 峴 )이라 표기한다. 신촌( 新 村 ) 6 25 전쟁 이후 황해도 옹진군에서 피난 나온 주민들이 집단으로 거 주하면서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해서 붙은 지명이다. 개부리 벗말 앞산 뿌리로서 바다로 벋어 나갔다고 해서 개부리라고 부른다. 104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07 마성( 馬 城 ) 구봉산 북쪽 중턱으로부터 왕봉산 북록까지 조선 때 경영하던 말 목 장으로 말이 흩어지지 않도록 흙이나 돌로 쌓은 담을 이른다. 마장( 馬 場 ) 구봉산 북쪽해안 산기슭의 작은 마을이다. 아전( 衙 前 )들이 주재하여 목장의 일을 보던 곳이라 하여 마장이라고 불렀다. 가운데말 벗말 중앙에 있는 마을로 앞으로, 넓은 논 뜰이 한눈에 보이고 바다 가 내다보이는 중심 마을이라 해서 붙은 지명이다. 골안말 벗말 서쪽 끝 마을로 골짜기 안에 있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벗개 벗말 앞 논 뜰 가운데 창고가 있는 쪽을 벗개라 한다. 염벗이 있던 갯가여서 부르던 지명이다. 나. 시도( 矢 島 ) 살섬으로도 불린다. 주위에 어장과 갯골이 많아 고기 잡는 '살'을 많 이 쳤다 하여 살 전( 箭 )자를 써서 '살섬'이라고 불렀다고 하며 또 사람 이 살 만한 섬이라 하여 '살섬'이 되었다고 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이나 대동지지 에서는 살 거( 居 )자, 섬 도( 島 ) 자를 써서 거도( 居 島 ) 또는 거을도( 居 乙 島 ) 등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 같은 한자 표기는 살 섬을 한자화 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 다른 의미로는 섬의 모양이 화살 같아서 화살 시( 矢 ) 자를 붙였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05

108 다고도 하고, 강화도에서 군사 훈련을 하면서 이 섬을 화살 목표지로 삼았다고 해서 시도( 矢 島 )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당말레산 당제를 지내던 산이다. 당집에서 지내는 마을의 재인 당 마을 재가 당말재, 당말래로 음운이 변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근래 신령한 산 이란 의미로 한자로 영신산( 靈 神 山 )이라고 불렀다. 노적산 산 모양이 노적과 같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오막골 어막골의 변음이다. 배가 들어오면 어물 거래도 하고 요기를 위한 술집 등이 있던 어막을 이르는 말이다. 노루메기 당재 넘어 산줄기가 선착장까지 길게 뻗은 모습이 노루목 같다고 해 서 부르던 지명이다. 개잘 땅이 기름지고 풀이 무성하여 생활이 어려운 시절 이곳에서 개잘풀 (개질경이)을 뜯어 죽을 끓여 연명했는데 그 뒤로부터 이곳을 개잘, 개 질 등으로 불렀다. 늦은구지 늦바람을 많이 타는 구지>곶이라 하여 부르던 지명이다. 옛날에는 고기와 새우를 잡아 말리던 곳이다. 딴산 늦은구지 동쪽의 외딴 산이라고 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옛날부터 말 목장의 죽은말을 묻던 곳이어서 마산소로도 불리었다. 106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09 살막구지 이 섬에서 처음으로 살을 맸던 갯골이 있는 살터로 살막이 있었던 곶이다. 이 때문에 시도를 살섬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장골 시도 서쪽 골짜기로 이웃 섬이나 육지의 해안에서 시체가 자주 떠 내려 와 이곳에 걸리곤 하여 이곳을 송장골이라고 부르다가 장골로 불리었다. 다. 모도( 茅 島 ) 통진( 通 津 )의 조강포( 組 江 浦 ) 어부들이 이곳에서 그물에 띠(풀) 뭉치 만 걸리고 고기는 잡히지 않아 띠염이라 부르면서 띠 모( 茅 ) 자와 섬 도( 島 ) 자를 써서 모도( 茅 島 )라고 부르게 되었다. 띠염의 염은 작은 섬 을 이르는 순 우리말이다. 가무리부리 가무락조개가 난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서두무리 가무래기산 골짜기 바위 새 틈에서 샘물이 나온다 하여 새틈물로 부 르던 것이 서두무리로 변음되었다고 한다. 박주가리 모도의 모양이 박쥐 모양이어서 붙은 지명이다. 가리는 곡식을 쌓은 것 같은 높은 더미가 있는 곳을 뜻한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07

110 라. 장봉도( 長 峰 島 ) 폭은 좁으나 길이가 길고 높고 낮은 산봉들이 섬의 길이대로 끊이지 않고 줄지어 있다고 해서 장봉도라는 지명을 얻었다. 옹암( 甕 岩 ) 독바위란 지명이다. 마치 독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바위에서 유래 하여, 독 옹( 甕 )자와 바위 암( 岩 )자를 써서 옹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평촌( 坪 村 ) 장봉도 지형은 대체로 길이에 비하여 폭이 좁아 들판을 볼 수 없는 섬인데, 유독 이 지역만은 남북의 폭이 넓은 편이어서 넓은 농경지와 나름대로의 큰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래서 들판이 넓다 하여 평촌( 坪 村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당너머 평촌에서 국사봉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신당이 있었기 때문에 당넘 어, 또는 당고개로 부르기도 했다. 말문고개 평촌 동쪽의 이 고개는 조선조 숙종 때에 이곳에 성을 쌓고 군마를 사육하던 곳이라 하여 말문고개라고 했다. 진촌( 鎭 村 ) 진촌으로 부르게 된 것도 수군진( 水 軍 鎭 )이 있었던 데서 유래된 지 명이다. 진촌 뒤 잿등 너머 해안을 '대빈창'이라고 부르는데 강화도와 교동통어영( 喬 桐 統 禦 營 )을 왕래하는 배들이 기항하던 장봉진의 전용포 구였다. 108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11 싸리골 싸리나무가 많아 싸리골이라 불렀다. 한자로 싸리나무 축( 杻 )자를 써 서 축동( 杻 洞 )으로 표기했다. 와도( 臥 島 ) 개구리가 누워 있는 형태라 하여 개구리 와( 蛙 ), 또는 누울 와( 臥 )자 를 써서 와도 라 한다. 구전으로는 아염이라고 전해진다. 뱀섬 평촌 남쪽 해상에 있는 무인도로서 옛부터 뱀이 많기로 유명하다. 이 섬으로 고기를 잡으러 어선들이 갔다가 뱀 때문에 고기를 못 잡고 다른 곳으로 피했다고 하여 뱀섬 또는 사도( 蛇 島 ), 사염이라 불려 왔다. 날가지도 평촌 앞 해상에 항상 고기떼가 몰려들어 날개 달린 새 모양으로 뛰 어 논다하여 날가지라고 부르면서 날가지도라는 지명을 얻었다. 한자 로는 비가지도( 飛 加 之 島 )로 표기했다. 섬의 형상이 개구리가 뛰어나가 려는 모양이어서 개구리를 먹이 삼아 물고기들이 날듯이 몰려들었다고 도 한다. 만도( 晩 島 ) 본래 섬이 하나였는데 오랜 세월 동안 조수( 潮 水 )의 침식( 侵 蝕 )으로 인하여 섬 중간이 갈라지면서 동만도( 東 晩 島 ), 서만도( 西 晩 島 ) 두 개의 섬으로 되었다. 양쪽 섬 모두가 어선들이 풍랑을 피할 수 있는 만( 灣 )으로 되어 있 어 만도( 灣 島 )라고 표기하기도 하나, 장봉도 지역 중에서 가장 늦게 해 가 지는 곳이라는 뜻으로 늦을 만( 晩 )자, 만도( 晩 島 )라고도 했다고 한 다. 또는 1915년경에 이르러 다른 곳보다 늦게 어장이 열렸다 하여 붙 은 지명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09

112 2) 연평면( 延 坪 面 ) 연평면의 전 명칭은 송림면( 松 林 面 )이다. 송림면은 연평도 일대 섬들 로 구성되었다. 1995년 3월 1일 인천직할시가 인천광역시로 개편되면 서 옹진군 전 지역이 인천광역시에 편입되었으며, 1999년 7월 20일 송림면의 명칭을 연평면으로 개칭하였다. 대연평도 고려사 등의 문헌에는 평평할 평( 平 ) 자로 쓰여 있는데, 연평도의 지형이 높고 낮음이 없이 대체로 평탄하고 길게 뻗은 형태의 섬이어서 이런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1800년대 후반에 와서 들 평( 坪 )자로 고 쳐 쓰이기 시작했다. 소연평에 대해 대연평으로 구별한다. 가. 동부리( 東 部 里 ) 1962년 행정동 분리에 따라 섬 동쪽 지역을 동부리라 했다. 작은지리 소서구지 앞에 있는 바위로 골짜기 옆에 버려진 모양이어서 작은바 위라고 한다. 된진몰 연평면 동부리에 위치한 마을로 된진몰 또는 돈진몰 등으로 부르는 데 이 마을에 됫박( 升 )을 짓는 목수가 살아 되짓는 마을이 음의 변화를 겪어 되진몰>된진몰이 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동쪽나루를 동진( 東 津 )몰로 부르다가 된진몰이 되었다고도 한다. 110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13 벌염 섬 동쪽의 바위로서 쓸모없이 생겼다고 해서 버려진 섬이라는 뜻으 로 붙여진 이름이다. '버린'의 음이 축약되어 '벌'이 된 것이다. 서구지 해변가로 돌 줄기가 길게 뻗어 나와 붙은 지명 석곶( 石 串 )의 발음이 변음된 것이다. 이곳에 새마을이 생겼다. 낭밭 벼랑 위의 밭이라는 뜻이다. 낭은 벼랑을 뜻한다. 낭까리봉 산의 생김새가 마치 볏섬을 쌓은 것처럼 생겼다고 해서 노적가리봉, 혹은 낟가리봉으로 불렸는데 낟가리가 낭까리로 변음되어 낭까리봉으 로 불린다. 문뱃낭 양쪽 절벽이 대문같이 열려져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문바위 낭 이 변음된 것이다. 고래중골 죽은 고래가 떠밀려온 것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고래중골은 고래 죽은골에서 '죽은'이 축약된 것이다. 불바래기 성어기 때 밤이면 해주 지방이나 옹진반도 어선들이 불을 밝힌 것이 이곳에서 한눈에 보인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부엉이바위 부엉이가 날개를 펼치고 앉은 모양새여서 붙은 명칭이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11

114 소바위 소가 등에 짐을 진 채 누운 형상이라고 해서 부른 이름이다. 작은 바위 골짜기 옆에 버려진 모양의 작은 바위여서 이렇게 불렀다. 아가리바위 바위 모양이 마치 개의 입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이렇게 불렀다. 나. 서부리( 西 部 里 ) 1962년 행정동명으로 명명되었다. 파산골 이곳으로 배가 들어가기만 하면 파선한다고 해서 붙은 지명으로 바 람이 강하게 부는 바람받이였다. 구룬누루 마을 동쪽으로 아홉 번째에 자리잡고 있는 골짜기라 하여 구룬누루 (나루)라고 하며 한자로는 구리동( 九 里 洞 )이라 했다. 서강모루 서쪽 모퉁이에 있는 지명으로 원래 의미는 서각( 西 角 )몰이었을 터이 나 서강과 모루로 변음된 듯하다. 112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15 다. 남부리( 南 部 里 ) 1980년 동부리와 서부리의 일부를 분리해 남부리로 명명하였다. 기러마재 소의 길마 같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기르마, 기러마로 변음된 것이다. 아리까리 한자로 하가오리( 下 加 五 里 )라고 표기한다. 즉 아래가오리>아래가리> 아래끼리가 아리끼리로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가오리( 加 五 里 )는 골, 고을의 이두식 표기로 추측된다. 매두락까리 두 골짜기마다 각 한 마지기씩이라 하여 한 마지기를 뜻하는 두락 ( 斗 落 )에 각각의 의미로 매( 每 ) 자를 붙여 이루어진 지명이다. 까리는 골의 변음이다. 흔히 이곳 발음으로 매드라까리라고 한다. 한자로 상가 오리( 上 加 五 里 )로 쓰는데 상( 上 )을 위 또는 맏으로 부르는 과정에서 맏 가오리로 되었다가 맏이 '매드'로 변음되고 아리까리에서와 같은 음의 변화가 생긴 것으로 추측된다. 개모가지낭 개 모가지처럼 생겼다고 해서 부르던 낭떠러지이다. 부랄조리개낭 절벽이 높아 밑을 내려다보려면 남자도 겁이 나 불알이 졸아든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부랄은 불알의 와음( 訛 音 )이다. 삼태기낭 조ㄹ피골 옆의 절벽으로 삼태기 모양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13

116 용뒤바위 바위 모양이 용의 머리같이 생겼다 해서 부른 이름이다. 용두에 음 운 'ㅣ'가 첨가되었다. 진상바위 안목 선착장의 바위로서 임금께 진상하는 조기를 이 바위에서 말렸 다 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안고 도는 바위 등대 아래 바위로 썰물 때도 물이 나가지 않아 3~4미터 높이의 절 벽을 부둥켜안고 건넌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못 도는 바위 아리까리와 매드라까리 사이에 있는 바위이다. 만조시에는 다닐 수 없어서 산을 넘어 가야 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병풍바위 가래칠기와 매드라까리 사이의 바위로 병풍을 쳐 놓은 것 같다 해서 붙은 명칭이다. 꽹과리바위 병풍바위와 함께 있는데 꽹과리 모양이어서 부른 명칭이다. 상여바위 매드라까리에 있는 바위로 모양이 마치 상여와 같이 생겨서 부른 명 칭이다. 자랑바위 수면 위에 솟은 바위가 자기 자태를 자랑하는 모습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반대로 물이 들면 어디에 숨는지 모르게 사라졌다가 물이 빠지면 우뚝 솟아 사람들을 놀리는 것 같다고 해서 조롱바위라고도 한다. 114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17 라. 중부리( 中 部 里 ) 1980년 동부리와 서부리에서 분리되어 한가운데에 있는 마을이라 하 여 이름 붙여진 행정동명이다. 망재 고개에 서면 사방의 바다와 주변 마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가운데재 섬의 한가운데에 있다고 해서 가운데 재라고 불렀다. 소연평도( 小 延 坪 島 ) 해발 214m의 산봉이 삿갓모양을 하고 있어 서해를 항해하는 선박들 이 표적( 標 的 )으로 삼던 섬으로, 산연평도( 山 延 坪 島 )로 부르기도 한다. 이밖에 새연평, 쇠연평 등의 호칭도 있는데 이 고장에서 '새'로 불리는 띠풀, 억새풀, 새풀 때문에 새연평도란 별칭이 생긴 것이다. 또 이 섬은 전체가 자석광석으로 작은 돌맹이 하나도 쇠소리가 나며 보통 돌보다는 몇 배의 무게가 나가기 때문에 이 섬이 대연평도에 대 고 ''덩치만 크다고 대연평이냐, 무게로 달면 내가 대연평이다''라 비아 냥거렸다고 한다. 쇠로 된 섬이라 하여 쇠연평이란 별칭이 붙었다고도 한다. 연화봉 소연평도 중심 산으로 보통 섬의 중앙 산봉우리를 연화봉이라고 부 른다. 연목 가운데 핀 연꽃보우리라는 의미이다. 부군당( 府 君 堂 ) 마을 성황당으로 당제를 지내는 곳인데 이를 높여 부르는 명칭이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15

118 높은낭 비가 오면 물이 폭포같이 떨어지는 높은 낭떠러지라고 해서 붙은 이 름이다. 막태골 높은낭 너머의 골짜기로 눈이 많이 내린 날 이곳을 지나다가가 떨어 져 죽었다 해서 마지막 가는 골짜기라는 뜻으로 부르는 지명이다. 갈생동( 葛 生 洞 ) 칡이 많이 난다 해여 붙은 지명이다. 얼굴바위 영락없는 사람의 옆얼굴 형상을 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옹돌강변굴 독 같이 생긴 굴이 있는 해변이라 하여 붙은 명칭이다. 은골 우물에서 은이 나왔다 해서 붙은 지명이다. 서포 김만중이 이곳으로 피난해 살 때 있었다는 일화다. 은구덩이라고도 불렀다. 노른돌 남쪽 바다 속의 바위이다. 구름이 낀 것처럼 빛이 누렇게 보여서 부 르는 명칭이다. 숨쉰바위 구멍 뚫린 바위에서 물이 나오는 소리가 사람이 숨쉬는 소리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116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19 구지도( 求 地 島 ) 연평 황금어장 중에 황금어장으로 항상 생선을 구하는 섬이라 하여 구어지도( 求 漁 地 島 )라고 부르다가 구지도( 求 地 島 )로 부르게 되었다. 당섬 임경업 장군의 사당이 있었다 하여 당섬, 당도( 堂 島 )라 하였다. 모이도( 毛 伊 島 ) 당섬 선착장 남쪽에 안목 선착장이 있는데 그 건너 쪽에 보이는 작 은 바위섬이 '모이도'이다. 고기들이 많이 모이는 섬이라 하여 '모이도' 라 불렀다고 한다. 책도( 冊 島 ) 바위 모양이 책을 쌓아 놓은 형태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동 풍을 막아주는 섬이기도 하며, 셋으로 벌어져 있어 벌염이라고 부르기 도 한다. 시루섬 섬 모양이 시루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자로는 시루 증( 甑 ) 자를 써 증도( 甑 島 )라 불렀다. 거도( 鋸 島 ) 그 형상이 톱처럼 생겼다 하여 톱섬이라고 불렀다. 검은섬 흑도라고도 하는데 섬의 흙이 검은색이라서 붙은 이름이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17

120 3) 백령면( 白 翎 面 ) 백령면은 백령도 지역으로 고구려 시대에는 곡도( 鵠 島 )라고 하였고 고려 시대부터 백령도라 하였다. 백령( 白 翎 )은 물새의 흰 깃털을 의미 한다. 백령도 곡도( 鵠 島 )에서 보듯 원래 지명은 고니 곡( 鵠 ) 자, 고니섬이었다. 철 새 도래지로 특히 고니가 많이 날아왔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 섬 모양 이 따오기가 흰 날개를 펼치며 비상하는 모양 같다고 해서 백령도( 白 翎 島 )라 했다고도 전한다. 가. 진촌리( 鎭 村 里 ) 진( 鎭 )이 있던 마을이라 해서 진말, 진촌 등으로 불렸다. 뒷메재 북산( 北 山 )의 재라는 뜻이다. 북산은 마을의 뒤에 있기 때문에 뒷메 로 불렀다. 월내도촌( 月 乃 島 村 ) 1 4후퇴 때 황해도 장연군 월내도 피난민들이 이곳이 피난 와 초막 을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 생긴 마을이다. 비석거리 백령진의 진장인 첨사들의 선정비가 줄지어 섰던 곳이다. 이촌몰 연안 이씨 집성촌이어서 붙은 지명이다. 북촌으로도 불렀다. 118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21 동골몰 천주교회 자리에 백령진이 있을 때 그 동쪽 마을이라 해서 부르던 명칭이다. 동끝몰이라고도 하고 동쪽 곶에 자리잡은 마을(몰)이라 해서 동곶몰이라고도 했다. 두룡산촌( 頭 龍 山 村 ) 백령진지 에 ''장연 장산에서 바다 밑으로 비슬비슬 백령도 쪽으로 와서 두룡산이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용의 머리 부분 마을이라 하여 두룡산촌으로 부른다. 기여넘에 용기원산의 경사가 심해 기어 넘어야 한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시루안 용기원산 서쪽 골짜기로 마치 시루같이 생겼다 하여 시루안이다. 말내린골 용기원산 골짜기로 옛날 말목장이 있을 때 말을 이 골짜기로 몰아 배에 실었다고 해서 말 내린 골이라고 불렀다. 선대 앞 용기원산 동쪽에 바위로 정상이 편편해서 선녀들이 내려와 놀던 바 위라 해서 선대라고 불렀다. 말등바위 말등대라고도 한다. 용기원산과 한늬 쪽으로 이어지는 낮은 산줄기 에 있는데 바위 모양이 말 잔등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한늬 물속 바위를 뜻하는 한여라고도 하고 북풍 곧 하늬바람받이라는 뜻 이라고도 한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19

122 마나루 섬 북쪽 말 목장에서 말을 싣고 내리던 나루터의 명칭이다. 원래는 말나루였던 것이 마나루 혹은 만하루로 불린다. 당개 진촌의 서낭이 갯가에 있어 붙은 이름이다. 서낭당이 있는 갯가라는 뜻이다. 벼락친골 옛적에 큰 바위가 벼락에 맞아 부서졌는데, 바위 밑의 큰 구렁이도 같이 벼락을 맞아 죽었다고 해서 벼락 친 골이라고 부른다. 작개골 자갈돌이 많아서 붙은 이름이다. 잿등마을 백령면 사무소가 있는 위치는 약간 높은 지대이어서 잿등마을로 부 른다. 잿등마을은 진촌 1리와 진촌 2리와의 경계지점이다. 침뱉는팽나무재 마을의 당나무인 탱나무가 마근대미 남서쪽 해안가 언덕길에 있는데 지나갈 째마다 돌을 주워 던지고 침을 뱉으며 좋은 길나들이를 기원했 다고 해서 생긴 지명이다. 사곶 진촌 3리로 사곶동( 沙 串 洞 )이다. 용기포 서쪽 천연비행장(사곳 해수 욕장) 안쪽에 있는 마을로 백령진지 에는 이곳을 사을곶지( 沙 乙 串 地 ) 라고 표기했는데 지금도 살곶지, 살쿠지라고 부르고 있다. 이두식 표기 로 '모래를 꿴 곳'이라는 의미로 추측된다. 사곶 모래 평야는 동쪽은 120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23 넓고 서쪽으로 점차 좁아지면서 긴 꼬챙이 같은 형상을 하고 있어 모래 사( 沙 )자와 꼬챙이 곶( 串 )자를 써서 사곶이라고 부르게 되었을 것이다. 안골뿌리 지리넘이 라고도 하는데, 용기포와 사곶 사이 용난개울 쪽의 산뿌리 로서 물이 빠지면 해안가로 통행하게 되고 물이 들어오면 안골뿌리 등 마루로 넘어가는 길이 있어 이렇게 불렀다. 지리넘이는 지름길이라는 뜻이다. 박우물 하루 밤만 자고나면 아침에는 물이 넘쳤다는 우물이다. 붉은 물이 고이면 콩과 팥이 잘 되고 맑은 물이 고이면 벼가 잘 된다고 한다. 생뫼태 '성 밑에'의 변화된 발음이다. 백령진을 중심으로 쌓았던 석심토성 밑의 마을이라 해서 붙은 지명이다. 아래모리 진말 아래 마을이라 해서 이렇게 불렀다. 모리는 마을>말>몰>모리로 변음된 것이다. 관창동( 官 倉 洞 ) 진촌4리로 진내면에 속하였다. 관청 물품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다 하여 관창동( 官 倉 洞 )으로 불렀다. 관창동은 간창동, 간채동으로 불리워 지기도 하였다. 고봉포( 高 峯 浦 ) 백령면 진촌리의 진말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좌우 양쪽에 산봉우리 두 개가 마주보고 있어 후일 이를 고봉포( 高 峯 浦 )라 불렀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21

124 미산봉( 美 山 峰 ) 고봉포 서쪽 산봉우리로서 모양이 묘하고 아름답다 하여 붙은 이 름이다. 사자바위 고봉포 앞의 바위로 모양이 사자 형상이어서 붙은 이름이다. 염수개 염벗이 있던 갯벌이다. 헐갑 미산봉 서쪽의 지명으로 토지가 척박하여 곡식을 심어도 농사가 되 지 않는 땅이라 하여 헐값이라는 뜻으로 불리던 곳이다. 비아지( 飛 蛾 地 ) 나방이가 많이 날아서 붙은 지명이다. 어리골 염수개 아래쪽 장수리의 산쪽으로 우묵하게 들어가 배를 갖다 댈 수 있는 골짜기를 부르는 이름이다. 한자로는 어이곡( 魚 伊 谷 )으로 쓴다. 애사리 바위 애스리라고도 부른다. 음력 보름과 그믐날에 조수가 제일 먼저 들어 온다 하여 애사리 바위라는 명칭이 붙었다. '애'는 '어린', 혹은 '처음'이 라는 우리말로서 첫 사라라는 듯이다. 용기포( 龍 機 浦 ), 용기원( 龍 機 院 ) 진촌5리로 대용기원( 大 龍 機 院 )과 소용기원( 小 龍 機 院 )으로 불린다. 용 기포는 소용기원산 밑에 있는 포구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122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25 용토로( 龍 吐 露 ) 진촌 서쪽의 두룡산( 頭 龍 山 )을 용의 머리 부분으로 보아 마치 용이 토해낸 물체의 모양과 같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용기원은 용틀원의 용( 龍 )과 틀 기( 機 )자를 써서 한자화 한 것으로 당초의 용토로가 용틀 원, 용기원으로 변한 지명임을 알 수 있다. 돔바위 도미가 잘 잡힌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나. 북포리( 北 浦 里 ) 진촌리와 경계를 한 서쪽지역으로 백령도의 중앙 지역이다. 당후동( 堂 後 洞 ) 당산( 堂 山 ) 뒤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당후동이라 하였다. 또한 6 25전쟁 이전까지 마을 앞에 큰 서낭당나무가 있었는데 당나무 뒤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당뒤 또는 당후동으로 하였다. 신미동( 新 美 洞 ) 신미동은 6 25전쟁 후에 피난민들에 의하여 형성된 마을이다. 신화동( 新 化 洞 ) 북포2리이다. 아파트촌 동쪽 언덕(침뱉는 고개) 너머에 있는 마을이 다. 1 4후퇴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와서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 어 신화동( 新 化 洞 )이라 하였다. 아파트촌( 北 浦 3 里 ) 북포3리로 신미동 동쪽의 군부대 영외거주자들의 거주지이다. 이 지 역은 주택지가 아니고 농지였는데 군부대 아파트를 건축하면서 큰 마 을이 형성되었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23

126 박가의 산 옛날 박씨의 묘소가 있던 곳이라 하여 부른던 지명이다. 벗두개 옛날 염벗둑이 있던 갯가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벗둑개가 벗두개 로 변음된 것이다. 쇠골산 쇠골 즉 금곡( 金 谷 )의 의미로 광산이 있던 산을 일컫는다. 벙무리 지형이 부엉이를 닮았다 해서 붙은 지명이다. '부엉이+머리'가 축음 이 되어 '벙+머리'가 되고 다시 머리가 무리로 변화한 것이다. 가게골 옛날 어느 선비가 과거를 보려고 이 골짜기에 초막을 치고 글을 읽 었다고 해서 과거골로 불리다가 음이 변화해서 가게골이 되었다. 마근대미골 옛날 베옷을 만들던 삼밭이 있었다 해서 붙은 지명이다. 감친골 밖에서는 안이 잘 보이지 않는 마을이어서 '감쳐진 골'의 의미였는데 김친골로 변음이 된 것이다. 개머리 갯벌 맨 위쪽이라서 붙은 지명이다. 한자로는 개야두동( 介 也 頭 洞 )이 라고 쓴다. 임당수 두무진 동북쪽 바다를 이르는 이름이다. 이 바다를 고소설 심청전에 나오는 임당수라 하여 망산 정상에 심청각을 세웠다. 124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27 다. 가을리( 加 乙 里 ) 백령진지 방리조에 대갈염( 大 乫 鹽 ), 소갈염( 小 乫 鹽 ) 등의 지명이 보 이는 데 바로 가을리( 加 乙 里 )의 옛 지명이다. 땅이름 갈( 乫 )자와 소금 염( 鹽 )자를 써서 '갈염'이라고 했다. 조선 선조 때부터 염벗이 있었던 곳이다. '갈염'이란 말은 염도 높은 갯벌을 쟁기를 대고 갈아엎어 만든 소금 이라는 뜻으로 갈염( 乫 鹽 )으로 표기했다. 그러다가 이곳 지명까지 갈염 으로 부르게 되었고 그것이 '가을염', '가을동' 등으로 변하면서 큰마을 을 '대갈동' 또는 '대가을'그리고 작은 마을을 '소갈동' 또는 '소가을'로 부르게 된 것이다. 대가을동( 大 加 乙 洞 ) 가을1리로서 동쪽의 북포1리인 당뒤마을과 도로를 경계로 하고 있고 서쪽은 소가을동이다. 백령진지 에는 대갈염( 大 乫 鹽 ), 대가염( 大 加 鹽 )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소가을동( 小 加 乙 洞 ) 가을2리이다. 대가을동 서쪽 논벌 건너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 소 갈염( 小 乫 鹽 ) 또는 소가염동( 小 加 鹽 洞 ) 등으로 기록되었다. 통박골 이 마을에 밀양 박씨가 제일 먼저 들어와 살았다고 하는데 자손이 번창하면서 집성촌을 이루면서 붙은 지명이다. 돌다리, 돌따리 소가을리와 대가을리 사이 경계지점에 있던 옛날 징검다리를 여전히 돌다리로 부른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25

128 최촌몰 최씨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다. 벗당개 염벗과 당산이 있는 갯가라서 붙은 지명이다. 석장골 옛 무덤 자리를 이른다. 잔대동 가을3리이다. 대가을동 서쪽 마을로 두무진과 장골 마을 사이에 위 치한다. 옛날 군사상 이곳에 장벽을 잔디로 쌓았다 하여 붙은 지명이 다. 잔디>잔대로 바뀐 것이다. 고작끝 잔대동과 소가을동 사이의 논밭을 장골논뜰이라고 하는데 그 맨 위 골짜기 지명을 고작끝이라고 한다. 소자네집골 소자라는 영감이 살던 집이 있는 골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소 자는 효자의 사투리로 보인다. 빗바위 머리 빗는 빗 모양의 바위를 가리킨다. 새두멍 조기가 잘 잡히던 바다 골이라 해서 붙은 명칭이다. 두멍은 큰 가마 나 독을 의미하는데 새롭게 발견한 조기 어장을 깊은 독 형상에 비유 해 생긴 말로 추측된다. 126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29 높은낭뿌리 망보던 뿌리라고도 한다. 옛날 중국 배들이 들어오던 것을 망보던 높은 낭떠러지이다. 움푹이여 물개들이 서식하는 움푹한 바위이다. 갈난골 골이 가라졌다고 해서 부르는 지명이다. 라. 연화리( 蓮 花 里 )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연지동, 중화동, 소갈동 일부를 병합하면 서 연지와 중화의 이름을 따서 연화라고 하였다. 연지동( 蓮 池 洞 ) 연화 1리이다. 백령도의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 큰 논벌이 있다. 이 논벌이 예전에는 큰 연못으로서 삼국유사 에 나오는 '서해신 이 머물렀다는 신지( 神 池 )'라고 한다. 또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 沈 淸 )이를 옥황상제가 한 송이 연꽃으 로 변하게 하여 이 마을 앞 연당( 蓮 塘 )에 떠오르게 한 데서 유래해 연 지( 蓮 池 )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음지마을 삼각산을 등지고 북향한 마을이어서 저녁이면 해가 삼각산에 가려 일찍 그늘이 진다 하여 붙은 지명이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27

130 양지마을 통박골 쪽에서 남향한 마을이어서 마주보는 음지 마을보다 해가 잘 비춘다 하여 붙은 지명이다. 삼각산( 三 角 山 ) 마을 남쪽의 높은 산으로 정상에 3개의 봉우리가 있어 이렇게 부른다. 마성 옛날 말 목장의 돌 울타리를 이렇게 불렀다. 석성이라고도 한다. 우무골 당산 위 우묵하게 들어간 골짜기에 붙여진 이름인데 큰 비가 내릴 때는 이 골짜기 물이 대단하다. 쇠상이골 연지동 논뜰 북쪽 두무진 넘어가는 중간 지점의 지명이다. 긴작새 연지동 앞 해안 지명인데 남쪽에 진흙 뻘과 자갈이 많다 하여 긴작 새라고 부른다. 국나무골 두무진 가는 쪽의 논들 건너 지명으로 옛날 국영 말 목장이 있을 때 국마목골이라 불렸는데 이것이 와음되어 국나무골로 불렸다. 중화동( 中 和 洞 ) 연화2리이다. 백령도 서남단 해안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서 중화진 ( 中 和 津 ), 중해촌( 中 海 村 ), 중화동( 中 和 洞 )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백 령진지 중화진으로 기록되어 있어 포구( 浦 口 )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 128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31 배들이 우리나라를 왕래할 때 기항하여 식수와 식량, 부식 등을 마련 하던 포구라 하여 중화진( 中 華 津 )이라고도 했었다. 바른골 첨사( 僉 使 )가 있는 진촌 마을로 바로 가는 골짜기라 하여 바른골이 라 하였다 한다. 메막골 묘말골이라고도 발음한다. 옛날 묘가 있던 곳이라 하는데 어느 효자 가 묘 앞에 막을 치고 3년 동안 시묘를 살았다 하여 부르던 지명이다. 해진골 부처산 밑의 골짜기로 주위 높은 산 때문에 햇볕이 잘 들지 않고 일 찍 해가 진다 하여 해진골이라 하였다. 변음이 되어 새진골로도 부른다. 망산( 望 山 ) 증화동 포구 동쪽 해안에 솟은 산봉을 망산이라고 한다. 바다를 경 계하고 봉화를 올리던 산이다. 장군여 바위가 두 개가 있어 웃장군여, 아랫장군여라고 부른다. 장군 형상 을 닮았다는 것이 아니라 감곶의 센 물살을 오랜 세월 꿋꿋이 견디는 자세가 장군의 기상을 닮았다 해서 붙은 지명이다. '여'는 물속 바위를 이르는 우리말이다. 슬픈여 고기잡이 나간 남편이나 아들을 기다리던 바위로 풍랑으로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들은 아낙네들이 이 바위에서 몸을 던졌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29

132 물내린골 부처산 남쪽 절터 쪽에 항상 물이 흘러 떨어지는 골이 있어 붙은 지 명이다. 용머리 큰우물 중화동 장로교회 밑의 큰 탱나무 옆 우물이다. 지형적으로 용의 머 리가 우물물을 마시는 형국으로 수원이 풍부하고 수질이 좋아 명당 우 물로 이름이 높다. 용난굴 부처산 서쪽 정상에 있는 곧게 뚫린 굴이다. 용이 나와 승천했다는 전 설이 있다. 굴의 깊이를 알기 위해 명주실 꾸러미를 넣어 보았으나 끝이 닿지 않았다고 한다. 또 소 매는 밧줄로 깊이를 재다 밧줄을 놓쳤는데 용 난굴 서쪽 감곶 해안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이 밧줄을 건졌다고 한다. 가게꼴 과거( 科 擧 )골의 변음이라고 한다. 이곳은 옛날 금광이 있던 골짜기로 현재도 큰물이 나면 금 부스러기가 떠내려 온다고 하는데 과거보는 것 을 금을 캐는 것이 비유해 '팔자가 되어야 금을 캔다'는 뜻으로 불렀다 한다. 절골과 7말 되지기 부처산 남쪽에 절이 있던 마을인데 이 절 앞에 중들이 짓던 7말 7되 지기 밭이 있었다고 한다. 감곶뿌리 장수리에서 서쪽 감곶으로 돌아가는 산뿌리를 이른다. 130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33 두무진( 頭 武 津 ) 연화3리이다. 백령도 최서북단에 위치한 지역으로 북쪽은 북한의 장 산곶을 마주보고 있고 그 중간은 항상 흰 물보라가 치고 있는 효녀 심 청의 혼신이 잠겨있는 인당수( 印 塘 水 )가 보이는 곳이다. 두모포( 頭 毛 浦 ), 두문진( 頭 門 津 ), 두무진( 斗 武 津 ) 등으로도 전해지고 있다. 두모( 頭 毛 )란 40 50m 높이의 기암괴석 머리 부분에 풀과 나무가 자라면서 마치 큰 바위에 난 털 모양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또 여러 모양으로 높이 치솟은 바위가 전투모를 쓰고 바다를 지키는 형태 라 하여 두무( 頭 武 또는 斗 武 )라고 명칭이 붙여졌다. 한편 백령도의 지명이 따오기[ 鵠 島 ]로 불리고 있는 것과 상관하여 두무진은 새의 머리 부분으로 포구 좌우로 뻗어나간 능선이 마치 백령 도로 들어오는 문( 門 )의 형국과 같아 두문진 또는 두문( 頭 門 ) 등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망골재 옛날 중국 배를 감시하던 망대가 있던 높은 고개이다. 높은낭 두무진 오른쪽 해안의 높은 벼랑인데 여기에도 중국 배를 감시하는 기와집 망대가 있었다고 한다. 수문장바위 두무진 포구 왼쪽 입구에 수 있는 바위이다. 포구와 마을을 지켜주 며 출입하는 배들을 보살피는 바위라 하여 마을 사람들이 이렇게 불렀 다고 한다. 신사바위 바위의 모양이 중절모를 쓴 서양 신사 같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31

134 찬물나드리 바위 밑에 있는 물줄기로 물이 썰면 바위 틈에서 차가운 물이 나오 고 들물 때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마. 남포리( 南 浦 里 )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당시 장촌동, 화동, 중화동 일부를 병합하여 남포리라 하였다. 장촌( 長 村 ) 남포1리이다. 백령도 남쪽 해안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으로 북 쪽에 석장골산을 등에 업고 남향하여 산 밑에서부터 해안까지 길게 형 성되어 있다. 마을의 형태가 길다 하여 장촌( 長 村 )이라 했다. 또 마을 에 장씨가 많이 살았다고 해서 장촌( 張 村 )이라고 한다. 뾰족산 마을 북쪽에 오뚝하게 솟았다 해서 뾰족산이라고 불렀다. 그 밑에 석장골이 있어서 석장골산이라고도 부른다. 장문산 장씨 문중의 산이라 하여 장문산이라고 칭한다. 이 산은 옛날 봉하 도 올리고 해적이나 수상한 배를 살피던 곳으로 망산, 또는 봉화재라 고도 불린다. 웃마을 장촌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웃골마을이라고 부른다. 전주 이씨들이 먼저 들어와 살았다고 해서 이촌몰이라고도 한다. 132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35 아랫말 김해 김씨들이 모여 살아서 김촌몰이라고도 불린다. 웃골 이촌몰 위쪽 골짜기를 이른다. 당밖길 서낭당 바깥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긴골재 당밖길에서 오리틀 쪽으로 넘어가는 골 이름이다. 긴 골짜기 끝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배진골 긴골재 너머에 있는 골짜기로 예전에는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배를 띄웠다 하여 배진골, 즉 배 젓는 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장금이 금이 매장되어 있다 해서 장금( 藏 金 )이라 불렀다. 대루뿌리 김해 김씨가 처음 들어와 이곳에다 배를 대고 집터를 닦았다는 곳으 로 작은 대루 큰대루가 있다. 대루는 해적이나 이상한 배의 동향을 살 피는 망루 같은 곳이다. 병창지연산 일제 때 산 위에 병참기지를 지었던 곳이라 하여 붙은 근대의 지명 이다. '병참기지를 지은 산'이라는 뜻이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33

136 일왕구미 해당화가 많아 그 열매가 풍부해서 그 과년해서 붙은 지명으로 해당 화 열매 맛이 일년감(토마토)과 같다 하여 일년감기미라고 부르다가 일 와기미로 와전되었다고 한다. 해무당재 여자서낭이 있는 산줄기를 말한다. 삼치골 장촌마을 지형이 삼태기 형상이라 하여 붙은 또 다른 이름이다. 오리틀 옛날 이곳에 오리들이 많이 날아와서 붙은 지명이다. '오리'와 '들'의 합성어이다. 개동뚝 갯골을 막아 크게 쌓은 둑이라는 뜻이다. 양취동골재 옛날 양을 치던 골짜기를 부르는 지명이다. 양 치던 골짜기의 와음이다. 노루메기 지형이 노루목 같다 하여 붙은 지명이다. 탁바위 해안으로 튀어나와 높에 솟았다 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소돌기뿌리 병창지연산 줄기 남쪽으로 뾰족하게 나온 산뿌리로 산줄기가 가파르 고 높아 소도 바로 넘지 못해 리 산부리를 돌아야 한다 하여 붙은 지 명이다. 134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37 창바위 바위에 뚫린 구멍이 창으로 뚫린 것 같다 하여 붙은 지명이다. 일세 물발이 센 해변으로 물이 한번 들어왔다 나가면 깨끗이 씻어진다 하 여 부르는 이름이다. 일세( 一 洗 )의 의미일 듯싶다. 화동( 化 洞 ) 남포2리이다. 장촌에서 북쪽으로 고개 너머에 광활한 백령간척지를 앞에 두고 있는 마을이다. 역대촌( 驛 垈 村 ) 또는 역촌( 驛 村 )으로 부르던 마을로 고려시대 역사( 驛 舍 )가 있던 곳으로 전해진다. 역리동( 驛 里 洞 ), 역대촌( 驛 垈 村 ) 또는 역촌( 驛 村 ) 등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백령도지 에 는 관기동( 官 基 洞 ), 향교동( 鄕 校 洞 ), 역리동( 驛 里 洞 ) 등의 이름으로 기 록되어 있고, 백령진지 에 는 역대동( 驛 垈 洞 )으로 되어 있다. 오군포( 五 軍 浦 ) 화동( 化 洞 ) 동남쪽 콩돌해안 지역이다. 예전에는 현재의 콩돌해안과 연결되어 C자형 만( 灣 )을 이루고 있었다. 백령약지 ( 白 翎 略 誌 )에 의하면 신라군과 당군( 唐 軍 )이 연합하여 백 제를 공략한 후, 당군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고구려 주둔군과 화동사 토( 化 洞 沙 土 )에서 격전하던 곳이다. 오군포( 化 洞 五 軍 浦 )는 당시 고구려 의 오군장( 五 軍 長 )이 주둔하던 곳이다. 개창바위 바위에 구멍이 나 있는데 창 구멍 같아서 부르는 이름이다. 돔낭 오군포 해안의 낭떠러지로 도미가 많이 낚이어서 부른던 지명이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35

138 월암 바위 모양이 달고 같다 하여 붙은 이름으로 여기 논뜰을 달바위논뜰 이라고 부른다. 어둔골 양쪽 산이 높고 골이 깊어 어둡다고 해여 붙여진 지명이다. 이곳의 밭을 어둔골밭이라고 부른다. 사여초리 회초리 형상으로 바다로 뻗어나갔다 하여 부르는 이름인데 산에서 살아나간 뿌리라 하여 산여초라고도 한다. 이랑구미 장촌 앞 해안으로 옛날 살이나 통발을 놓던 어량( 魚 梁 ) 지역인데 어 량구미가 이랑구미로 바뀌었다고 한다. 돌달목께 돌다리가 있던 목으로 돌다리목을 돌달목으로 축음해 부른 것이다. 역퇴밑재 화동 웃물에서 애랫골로 넘어가는 정상마루를 이르는 지명이다. 이 곳에 역사가 있었던 곳으로 역사 건물 퇴밑 고개를 의미한다. 군서골 두룽산 남쪽 골짜기인데 아랫 군서골, 윗군서골이 있다. 오군포에 군사가 주둔하고 있을 때 군대 막사가 있었기 때문에 붙은 지명이다. 군사골이 군서골로 변음되었다. 두룽산 두루미 형상이라 하여 붙은 산 이름이다. 두루미산이 두룽산으로 변 음되었다. 136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39 이패재산 산이 홍합 형상이라 하여 한자로 이패( 貽 貝 )라 쓴다 가진물산 가지 모양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4) 대청면( 大 靑 面 ) 1914년 지방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대청도는 대청리로, 소청도는 소 청리로 개편되어 황해도 장연군 백령면에 통합되었다. 8 15광복 후 백령면 전체가 옹진군에 편입되면서 대청도 지역도 옹진군에 소속되었 다. 1995년 인천직할시가 인천광역시로 개편되면서 인천광역시 옹진군 대청면으로 편제되었다. 대청도, 대청리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옥죽동, 고주동, 내동, 선진동, 사탄동, 등을 병합하여 대청리라 하였다. 서긍( 徐 兢 )의 고려도경( 高 麗 圖 經 ) 에는 ''대청서( 大 靑 嶼 )는 멀리서 바 라보면 울창한 것이 마치 눈썹을 그리는 검푸른 먹[ 黛 ]과 같다 하여, 고려인들이 이름을 붙인 것이다''한 것에서, 이 섬이 '푸른 섬'이란 이름 으로 불리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포을도( 包 乙 島 )라고도 했는데 이것은 '푸른 섬'의 우리 음을 한자 로 기록한 것이며, 이를 다시 한자화한 것이 청도( 靑 島 )인 것이다. 그 밖에 대청도를 암도( 岩 島 )라고도 하는데 섬 주위가 모두 암벽이기 때문 에 붙여진 지명으로 보인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37

140 가. 내동( 內 洞 ) 대청 1, 6, 7리이다. 선진포( 船 津 浦 ) 북서쪽 검은낭 능선 너머에 있 는 마을이다. 대청면에서는 유일하게 들판이 형성된 농경지역으로. 동 서 남 방향으로 동내동, 서내동, 양지말, 양진말 등이 있으며 해 안에는 옥죽포( 玉 竹 浦 )가 있다. 바다 잘 보이지 않는 깊숙한 농촌 느낌 이어서 안골 또는 내동( 內 洞 )이라 하였다. 서내동( 西 內 洞 ) 대청1리이다. 옛날에는 매가 많이 서식해 이곳을 매막골로 불렀다. 내동을 동서로 구분하면서 서내동이 되었다. 동내동( 東 內 洞 ) 대청6리이다. 원래는 학이 많이 서식하던 곳이어서 학동( 鶴 洞 )이라고 부리던 곳으로 매막골과 합쳐지면서 내동이 되고 다시 동쪽이라 해서 동내동이 되었다. 양지동( 陽 地 洞 ) 대청 7리이다. 서내동 뜰 동쪽에 남향 마을로 가장 양지바른 지역이 라 하여 양지동 또는 양진말 등으로 불렀다. 동내동과 농경지를 사이 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삼각산 대청1리에 있는 산으로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 태자 신황이가 유배 와서 왕궁을 짓고 살며 그 앞의 산을 도읍의 산이라 하여 삼각산이라 고 불렀다고 한다. 매막골 옛날에 매를 키우던 매막이 있었기 때문에 붙은 지명이다. 대청도 138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41 매는 다른 지역보다 매가 날쌔고 사냥을 잘해 나라에 진상했다고 한다. 백촌몰 백씨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다. 심촌몰 심씨들 집성촌이다. 축동( 築 洞 ) 옛날 방풍, 방사림을 조성하고 방죽을 쌓았다 하여 붙은 지명이다. 양지동 서내동 아랫마을로 남향한 마을로 양지바르다 하여 부르는 지명이다. 사탄동고개 서내동에서 남서쪽으로 올라가는 높은 고개로 그 너머에 사탄동이 있다. 사탄동에서는 내동고개로 부른다. 모래고개 동내동과 선진동 사이에 있는 검은낭 산줄기의 당고개를 이르는 이 름이다. 옥죽포에서 불려 올라온 모래는 산을 넘어 선진동 논골 쪽으로 쌓이 고, 동쪽에서 바람이 불면 다시 내동 쪽에 모래가 쌓였다고 한다. 엉꼴 도장꼴 안쪽 골짜기로 매가 서식하였다고 해서 을골, 즉 응곡( 鷹 谷 ) 이라 하던 것이 변음되었다고 한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39

142 갈낭골부리 파도가 세차게 들어와 부딪는 부리여서 붙은 이름이다. 곧, 미친 듯 한 파도라는 의미로 광란( 狂 瀾 )골이라 하던 것이 변해 갈낭골이 되었다 는 것이다. 서고개 내서동 북쪽 산마루 지명으로 서쪽에 있다 하여 부르는 지명이나 고 개가 셋이 있어 세 고개라고 부르던 것이 서고개가 되었다는 이야 기도 있다. 신바위 흰 바위라는 의미였는데 발음이 변했다. 학골 학곡( 壑 谷 ) 즉 골짜기가 깊은 고을이라 해서 붙은 지명이다. 일설에 는 학이 서식하던 곳이어서 그렇게 불렀다고도 한다. 옥박골 골짜기가 바가지 쪽같이 생겼다고 해서 부르는 이름이라고도 하고 옷나무가 많아 옷밭골이라고 부르던 것이 변음되었다고도 한다. 강들 대청 6리에 있는 이 지역은 도랑이 넓었으나 물이 잘 배수가 되지 않아 강물처럼 물이 가득했는데 어느 날 용이 지나면서 꼬리를 치니 그 자국이 배수로가 되어 물이 빠져 기름진 옥토로 변했다고 한다. 이 들판을 강틀, 강틀이라고 부른다. 140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43 나. 선진동( 船 津 洞 ) 대청2리이다. 옛날 중국 상선들이 기항하여 짐도 내리고 여장을 풀었다고 하여 '배진포'라 하던 것을 한자로 고쳐 선진포( 船 津 浦 )라 하였다. 소당골 상당히 길고 큰 골짜기로 소서낭당골이라는 뜻이다. 내려바지 모래고개에서 동남쪽으로 경사진 모래고개를 이르는 이름이다. 첫산골짜기 검은낭 큰산 남동쪽 골짜기로서 큰산에서 선진동쪽으로 첫 번째 골 짜기라는 듯이다. 검은낭 선진동 북쪽 해안을 끼고 뻗은 검은 낭떠러지 암벽의 색깔이 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다. 옥죽포( 玉 竹 浦 ) 대청 3리이다. 내동 동쪽 해안 어촌마을로 원나라 순제가 태자 때에 대청도로 유배와서 처음으로 발을 디딘 곳이라 하여 옥자포( 玉 子 浦 )라 고 불렀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 명칭 변경 때에 옥죽포로 기록했다. 조수방여( 潮 水 防 與 ) 검은낭뿌리 앞에 있는 바위로 조수를 막아준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41

144 두리장수리 대진동 앞의 모래장수리로 길게 둘려진 장수리라 하여 부르는 이 름이다. 선대 평평한 바위로 선녀가 놀다가 갔다고 하여 선대 바위로 부른다. 물꼴 검은낭 큰산 밑에서 선대 쪽으로 흐르는 물의 수원지를 이르는 말이다. 딴동산 선대 서쪽에 다로 떨어져 있는 동산을 지칭하는 말이다. 농여 바위 모양이 농짝 같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작은 미아꼴 지형이 배의 오른쪽 같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배의 오른쪽을 '미 앞'이라 부르는데 이것이 마아로 변음된 것이다. 미아동 섬바지뿌리 서쪽 마을로 큰미꼴로 불린다. 섬바지 섬이 바지 같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난추리낭 새매의 일종인 난추리가 서식하는 낭을 일컫는다. 142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45 라. 사탄동( 沙 灘 洞 ) 대청 4리이다. 정조실록 에는 사언동( 沙 堰 洞 )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두리와 오지낭 사이로 강한 물살이 모래를 몰고 들어와 마을 앞에 큰 모래뚝이 생기게 되면서 모래 사( 沙 )자와 언덕 언( 堰 )자의 사언동으 로 부르게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변경 때에 사탄동( 沙 灘 洞 )으로 개 칭하였다. '사언동'이란 '모래언덕 마을'이고 '사탄동'이란 '모래여울'이어 서 모래와 관련이 된다. 지두리끝 서내동 넘는 산줄기가 문짝에 다는 지도리같이 생겼다고 해서 지도 리, 지도리끝, 지도리뿌리라고 하던 것이 모음조화로 도>두가 되었다. 시루여 바위 모양이 시루같이 생겨서 부르는 이름이다. 마당여 바위 모양이 마당처럼 넓다 하여 마당여라고 부르며 한편 바위가 검 다고 해서 검은여라고도 한다. 지리루미 해안 지형이 잘숙하게 들어가서 부르는 이름이다. 말구리 옛날 말목장이 있을 때 이곳에서 말이 잘 굴러 떨어졌다고 해서 붙 은 지명이다. 삿갓봉 말구리 산의 모양이 삿갓처럼 생겨서 붙은 이름이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43

146 사지미기 사탄동 장수리 남쪽 구석진 곳의 산뿌리 모래 물목을 이른다. 서풍바지 사지미기뿌리와 작은오지낭 사이의 해안으로 서쪽 바람을 마주하는 곳이라 하여 붙은 지명이다. '서풍받이'가 원음이다. 돌쇳낭 삼각산 줄기가 사탄동 동남쪽으로 뻗어 내려오면서 이루는 절벽 이 름이다. 여기 암석에 철분이 많이 함유되어, 쇠가 있는 돌이라는 뜻으 로 이렇게 이름지어졌다. 돌쇨랑, 돌쇹낭이라고도 표기한다. 작은오지낭과 큰오지낭 까마귀가 서식하는 낭떠러지라고 해서 붙은 명칭이다. 신작시 부치미산뿌리 일대 지명으로 해안의 모래와 자갈이 희어서 생긴 이 름이다. 신작시는 곧흰작시로 다시 흰장술이 변한 발음이다. 부치미 산세가 부채 형상을 닮아 부르는 이름이다. 원래는 부채메이던 것이 변음되었다. 노적봉 노적가리 형상이어서 부르는 이름이다. 강남두 노적봉 안쪽에 굴곡이 져서 들어간 모래장수리 지역이다. 세찬 물결 이 미친 듯하다고 해서 광랑두( 狂 浪 頭 )라고 하던 것을 발음하면서 강남 두가 되었다고 한다. 144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47 창구멍 바위에 구멍이 뚫려 있는 모양이 창으로 깊이 뚫어 놓은 것 같다 하 여 창구멍이라고 한다. 기르마가리 큰 기르마와 작은 기르마가 있다. 지형이 소의 길마 같다고 해서 붙 은 지명이다. 기르마가리는 소의 길마에 짐을 실은 것 같다는 의미이다. 독바위 벼락낭 바위 속의 굴이 깊고 모양이 장독같이 생겨서 붙은 이름이다. 갑죽도( 甲 竹 島 ) 갑옷을 입은 형태라 하여 갑죽도( 甲 竹 島 )라는 지명이 붙여졌다. 마. 고주동( 庫 柱 洞 ) 대청5리로 대청도에서 제일 높은 삼각산( 三 角 山 ) 동쪽 계곡에 위치 한 마을이다. 고려 충혜왕( 忠 惠 王 ) 1년(1330)에 원( 元 )나라 원순제( 元 順 帝 )가 태자 때에 대청도로 유배 오면서 600여 명(100여 가구)의 식솔 을 인솔하고 왔었기 때문에 그 식구들이 먹을 식량을 비롯한 기타 물 자를 저장하기 위하여 가장 오지인 이곳에다 창고를 지었다 하여 고사 동( 庫 舍 洞 )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변경 때에 고주동( 庫 柱 洞 )으 로 개칭하였다. 논아래 고주동 해안 갯물이 들어오던 갈밭 지역을 논 아래라고 불렀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45

148 느랑구미 지형이 책상 나무판 같다 해서 붙은 지명이다. 널뿌리 느랑구미를 줄여서 이렇게 불렀다. 마당여 바위가 넓적하게 생겨서 붙은 이름이다. 서쪽기미 마당여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오목하게 들어간 곳이 있는데 마당여 서쪽에 있다 하여 서쪽기미라고 부른다. 배감치기 배를 감출 만한 곳이라 하여 배감치기라고 부른다. 물내린골 삼각산 골짜기에서 내리는 개울로 물이 마르지 않고 항상 흐른다 하 여 물내린 골이라 부른다. 가는골 양쪽 산등성이 사이로 좁게 골이 졌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말굴리 옛날 말목장에서 자주 말이 굴러 떨어져 죽었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숯골 숯을 굽던 골짜기를 이른다. 세배낭 바위 모양이 지나가는 사람에게 세배를 하는 것 같다 하여 붙은 이 름이다. 146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49 꼴밭 나무는 없이 소나 말을 먹이는 꼴만 있다고 해서 꼴밭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5) 소청도( 小 靑 島 ) 소청리( 小 靑 里 ) 고려도경 에 ''소청서( 小 靑 嶼 )는 대청서( 大 靑 嶼 )와 모양이 같은데 다만 산이 약간 적고 주위에 초석( 礁 石 )이 많을 뿐이다''라 하고 있어 대청도와 같이 푸른 섬으로 불리었다. 가. 예동( 禮 洞 ) 소청1리이다. 이룻마을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지는데 그 유래에 대하 여 아는 이가 없고 다만, 섬 서쪽 해안에 있는 '가래끼미'(노화동) 아이 들과 예동 아이들이 서로 놀다가 싸움이 나면 서로 '이룻동네놈'이니 '가래끼미놈'이니 하며 욕설을 하며 편싸움을 하였다 한다. 예동( 禮 洞 ) 은 1914년에 개칭한 마을 명칭인데 이 마을 사람들이 예의가 바르다고 하여 '예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나. 노화동( 蘆 花 洞 ) 서남쪽 해안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다. 가락거메 가래끄메, 가래끼 미, 가래꾸미, 가래나무꼴 등으로 불렀다. 이 지역은 갈대가 많이 나와 갈꽃이 필 때에는 해안과 습지가 모두 흰 갈꽃으로 덮혀 '갈꽃마을'이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47

150 라 하기도 하였다. '가래끼미'나 '가래꾸미'등은 갈대가 있는 계곡을 말 하는 것으로, 갈 로( 蘆 )자와 비둘기 구( 鳩 )자, 꼬리 미( 尾 )자를 쓰고 가 래구미로 불렀다. 현재 갈 로( 蘆 )자와 꽃 화( 花 )자인 노화동이지만 '가 래끼미'로 불리고 있다. 탑동( 塔 洞 ) 소청도 예동 뒤 당산 너머 북쪽 해안에 있는 선착장을 탑동선착장으 로 부른다. 소청도에 '절골'이란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절과 연관이 있던 탑이 있어 '탑동' 또는 '탑골'이라 불렀다. 능동( 能 洞 ) 능골 등으로도 부르는데 소청도 예동 동쪽 산 위쪽에 있다. 능( 能 )자 는 착한 능, 능할 능자로 풀이되고 있어 착한 마을이라는 지명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곳에 살던 주민들이 예동( 禮 洞 )으로 이주를 하게 되 면서 능동( 能 洞 )의 명맥을 이어 예동( 禮 洞 )으로 바꾼 것으로 추측된다. 큰새거메 예동 동쪽 삼박산 줄기 북쪽 골짜기이다. 넓은 평지라 해서 큰새라 고 한 듯하다. 거메는 굼, 구미, 끔 등과 같은 어원으로 우묵하게 들어 간 지형을 뜻한다. 작은새거메 산 밑 골이 좁아서 작은새라고 했다. 작은새끔이라고도 한다. 서지거메 삼박산 남쪽 줄기 끝 골짜기로 지세가 느릿하다 해서 서지( 舒 遲 )골 이라 불렀다. 148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51 대거메 지대가 약간 높아서 붙은 지명이다. 가락거메 노하동의 옛 지명으로 갈[ 蘆 ]이 많아 붙었다. 돔여 도미가 많이 낚여서 붙은 바위 이름이다. 돌아서가는 바위 바위 절벽이 잡을 만한 것이 없어 몸을 붙이고 조심조심 돌아간다는 바위. 바깥가두리, 안가두리 돔여 밖에 있는 두 개의 바위 이름이다. 일제 때 철선이 침몰한 후 배를 가둔 여라 해서 큰 바위를 안가둔여, 작은 바위를 바깥가둔여라 고 했다. 이것을 안가두리, 바깥가두리로도 부른다. 은구덩이 등대 서쪽 산 너머에 옛날 중국인들이 은을 캤다는 구덩이가 있다. 새밭아래 밭 아래쪽에 갈과 억새가 많고 새가 많이 날아와 살아서 붙은 지명 이다. 뛰어넘바위 바위가 섬과 아주 가까워 뛰어넘어도 될 것 같다는 뜻에서 붙은 이 름이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49

152 길나들이 굴, 바지락을 잡으러 모두 이쪽 길로 다녔다 해서 마을 출입구라는 뜻으로 부르는 지명이다. 또리여 바위 모양이 똬리 같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줄여 바위에 밭이랑같이 줄이 나 있어 붙은 이름이다. 진너등 바위가 길게 깔려 있는 곳을 긴 너덩바위라고 한다. '긴'이 '진'으로 바뀌었다. 너덩은 너덜겅의 사투리로 보인다. 가마웅덩이 지형이 가마솥 같다 하여 부르는 지명으로 아나루 선착장 옆이다. 너와돌맥 이 지역에서는 지붕을 덮던 청석( 靑 石 ) 조각을 너와라고 했는데 그 광맥이 있는 곳이라 하여 '너와광맥', 곧 '너와돌맥'이라 불렀다. 아나루 아진포나루를 줄여 부르는 말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내진( 內 津 )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나루는 안나루의 변음으로 보인다. 개나리여 개것, 즉 굴, 바지락 등을 이 바위에 날라다 놓았다 해서 개나리여 라고 부른다. 150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53 토끼여 토끼 모양 바위이다. 빗바위 머리 빗는 빗과 같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통여 바위 모양이 우뚝 선 나무통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각여 뿔 모양이어서 붙은 바위 이름이다. 이랑구미 산 중턱부터 밭이랑같이 생겼다 하여 붙은 지명이다. 고래난골 옛날 고래가 밀려들어왔다고 해서 부르는 곳이다. 서구이 낭떠러지로 높바람을 받는 곳이다. 이 암벽에 다이아몬드 같은 희귀 한 돌이 박혀 있다. 분바위, 분암( 粉 岩 ) 예동 동남쪽 서지고개 남쪽으로 뻗어나간 산줄기 끝에 돌출한 바위 를 분바위라 부른다. 또 이 바위를 '월띠'라고도 하는데, 분바위란 가루 분같이 희다는 뜻이고 '월띠'란 달 월( 月 )자와 띠 대( 帶 )자인 월대( 月 帶 ) 로서 그믐밤에도 달같이 희게 보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보습낭 낭떠러지 모양이 밭 가는 보습 같다고 해서 부르는 명칭이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51

154 불바라기 밤중에 도미 낚시를 할 때 마을의 불빛이 바라보인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올망배 어장 청어잡이 배를 올망배라고 하는데 이는 청어를 옭아 잡았다고 해서 부르는 말로 그 어장을 이른다. 멍골 머위가 많아서 붙은 지명이다. 머위>멍이 된 듯하다. 서가테 서쪽 끝이라는 말이다. 서쪽 가장자리 끝을 의미한다. 6) 덕적면( 德 積 面 ) 덕적면 지역은 덕적도( 德 積 島 )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995년 인천 직할시가 인천광역시로 개편되면서 옹진군이 인천광역시에 편입되어,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으로 편제되었다. 덕적도( 德 積 島 ) 덕적도는 덕적군도( 德 績 群 島 )의 모도( 母 島 )이다. 덕적도의 옛 지명은 덕물도( 德 勿 島, 德 物 島 ), 득물도( 得 物 島 ), 인물도( 仁 勿 島 ) 또는 수심도 ( 水 深 島 ) 등으로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152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55 가. 진리( 鎭 里 ) 진1리이다. 진마을 또는 진말 등으로 부르며 수군진( 水 軍 鎭 )을 설치 하였던 곳이라 하여 진마을로 불린다. 도우( 渡 右 ) 면사무소 동쪽 잿등을 돗재 또는 도우고개 등으로 부르는데 이는 도 우마을을 넘어 다니는 도우재[ 渡 右 峴 ]를 가르킨다. 1910년에 간행된 조선지지 인천부 덕적면 지명조에서도 건널 도( 渡 )자의 도우( 渡 右 ) 로 표기되어 있어 나루터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도 진두( 津 頭 ) 또는 진도( 津 渡 )로 부르고 있다. 망재 진마을 서쪽 고개이다. 서해 해적이나 왜구를 감시하던 망대가 있어 서 붙은 지명이다. 도끝뿌리 돗재 줄기가 남쪽으로 뻗어나가다 진마을 쪽으로 약간 돌아오면서 해안에서 그친 돌출된 뿌리라고 한다. 도굿이뿌리라고도 한다. 통갯목 조수가 드나드는 목이라 하여 통갯목이라고 부른다. 까끔에뿌리 진말 앞 방파제를 잇는 뿌리로서 까뀌로 깎아 낸 것 같다 하여 부르 는 산뿌리 이름이다. 튀전바위 바위가 평평하여 몇 사람이 둘러앉을 수 있는 바위로 옛날 나무꾼들 이 이곳에서 노름을 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53

156 밧지름 덕적도 수군진이 있던 진리 바깥 마을이라 하여 바깥진리[ 外 鎭 里 ]라 고 불렀다. 바깥진리가 변음되어 '밧지름'이 되었다. 어둠굴 밧지름과 진마을 경계 지역 골짜기인데 후미지고 외져서 부르는 지 명이다. 어르낌 통갯목을 지나 까끔에뿌리를 돌아가서 우묵하게 들어간 곳 지명이 다. 이넘에, 저넘에 도우고개를 넘어가서 왼쪽 골짜기를 이넘에, 오른쪽을 저넘에라고 부른다. 돌목재 도우마을 끝 뒷등을 돌목재라고 부르는데 돌아넘어 간다 하여 붙은 지명이다. 넉바위개 도우 동쪽 끝의 넓적한 바위가 있는 갯가를 이르는 명칭이다. 감투여 먹염바위 밖에 있는 바위로 마치 감투 모양이라 하여 부르는 이 름이다. 먹염 밭지름 앞쪽에 있는 섬으로 모양이 옛날 목수들이 사용하던 먹통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먹도[ 黑 島 ]라고도 불렸다. 154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57 예개, 구포( 舊 浦 ) 진2리이다. '예개'혹은 '이개'라고 부르는데, 이 마을에 이씨( 李 氏 )가 처음 들어와 살게 되면서 이가마을[ 李 家 村 ] 또는 이포( 李 浦 ) 등으로 부 르다가 '이개'가 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또 예개는 왜개[ 倭 浦 ]라고 불렀 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고려 말에 일시적으로 왜구( 倭 寇 )의 근거지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현재는 모두 농경지로 변하여 이 마을의 유일한 곡창인 문전옥답이 되었지만, 포구였다 하여 옛 구( 舊 )자와 갯 포( 浦 )자를 써서 구포( 舊 浦 ) 라 표기하고 예개(옛날 개포)라 부르고 있다. 번데기 평지가 넓어 벙덩이라고 부르던 것이 번뎅이, 번데기로 변음되었다. 초장뒤 풀이 무성해서 초장지라고 부르던 곳이다. 지가 뒤로 발음되었다. 어름실큰산 어름실이란 열매가 나는 나무가 있는 산을 이른다. 괭이산 산 모양이 고양이를 닮았다 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망태골 망태기같이 생긴 골짜기여서 부르는 이름이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55

158 나. 북1, 2리( 北 里 ) 덕적도 북쪽으로 국수봉을 서북간에 두고 만을 이룬 해안 일대이다. 쑥개, 애포( 艾 浦 ) 북1리이다. 쑥개는 이곳의 해안일대가 모두 쑥 덤불을 이루고 있었 던 데서 유래하였으며 쑥 애( 艾 )자와 갯 포( 浦 )자를 써서 애포( 艾 浦 )라 표기하였다. 쑥개마을은 남쪽이 큰쑥개, 북쪽이 작은쑥개이다. 능동( 陵 洞 ) 확실하지는 않으나 어느 왕자의 분묘가 있어 이 마을 지명을 능동 ( 陵 洞 ) 또는 능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양반재 산의 모양이 잘 생기고 품위가 있다 하여 붙은 지명이다. 배넘이 고개 배가 넘어 다녔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소재골, 소현동( 昭 峴 洞 ) 쑥개마을 북쪽 끝 언덕진 도로 소재고개 너머에 있다. 본래 작은 언 덕[ 小 峴 ]이라 하여 소재라고 하였으며, 마을 앞에까지 물이 들어오면 마치 못 같다 하여 늡 소( 沼 )자 고개 현( 峴 )자를 써서 소재 또는 소재 골로 불렀다. 살막끔 옛날 막을 치고 고기 잡는 살을 매던 갯골이라 해서 살막끔이라고 불렀다. 156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59 큰함박골, 작은 함박골 계곡이 함지박 같이 생겼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굴끼미 해변에 굴이 길고 깊어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이다. 선미도( 善 尾 島 ) 덕적도 서북쪽 능동( 陵 洞 ) 망재능선 해안에서 약 600m 거리에 있 다. 섬은 작지만 해발 233m와 156m의 높은 산봉이 솟아있어 산세가 대단히 험하다 하여 섬 이름을 악험( 惡 險 )으로 불렀다. 악혐으로도 불 렸다. 후에 선미도( 善 美 島 )로 개칭하였다가, 덕적도의 꼬리부분이라 하 여 미( 美 )를 꼬리 미( 尾 )자로 바꾸었다. 다. 서포리 익포( 益 浦 ) 서포 1리 이다. 조수( 潮 水 )가 마을 앞까지 모래를 밀고 들어와 때로 는 넘쳐 모래 둑을 이루어 넘칠 익( 益 )자와 갯 포( 浦 )자를 써서 익포라 고 했다. 익개라고 한다. 투구바위 바위 모양이 투구를 쓴 형상이어서 붙은 이름이다. 동무끝 해수욕장 동편 끝이라는 의미이다. 용난데 바위에 뚫린 구멍이 밑에까지 내려가 붙은 이름이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57

160 선대바위 서녀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평평한 바위를 이른다. 말밭개 바위 모양이 말 같이 생겼다 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갈가마터 그물에 갈물을 드려 가마에 삶던 곳을 이르는 지명이다. 배상터 짚으로 배를 만들어 굿을 하며 물에 띄우던 곳이다. 벗개, 우포( 友 浦 ) 서포2리이다. 벗개는 서포리해수욕장 서쪽 능선인 벗재[ 友 峴 ] 너머의 덕적도 주봉인 국수봉(해발313m)을 북서쪽에 두고 남향한 마을이다. '벗'이란 소금을 생산하는 곳으로 이 갯벌에 자염( 煮 鹽 )을 만들던 염벗 이 있었다 하여 '벗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벗'을 동무로 생각하여 우 ( 友 浦 )라 한 것인데 잘못된 것이다. 회룡골 덕적도의 주봉인 국수봉 줄기가 이 마을 뒤쪽으로 내려와 동남쪽으 로 구불구불 뻗어 나가고 있고, 마을 앞 남쪽지역에서 산줄기가 다시 돌아 들어온 형태이다. 마치 용이 나가다가 다시 돌아선 모양과 같다 하여 회룡동( 回 龍 洞 ), 회룡골, 호롱골, 호릉골 등으로 부른다. 용담이 이곳에 용이 나타나서 어부들을 놀라게 했는데 그 후 주민들이 정월 보름이면 바다 용에게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이곳을 용이 있는 곳이 라 하여 용담이라고 했다. 158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61 병막꼴 예부터 전염병이나 몹쓸병을 앓는 사람을 격리시켰던 곳으로 병막꼴 로 불리었다. 고래미골 고래 꼬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숭어대갈골 골짜기 모양이 숭어 머리 같다 하여 부르는 골짜기 이름이다. 신골 깊고 큰 골짜기로 골이 깊다 하여 심골, 즉 심곡( 深 谷 )으로 불리었는 데 이것이 신골로 발음이 바뀌었다. 보습꾸미 소를 대고 밭을 가는 쟁기의 보습같이 생긴 골짜기라 하여 붙은 지 명이다. 굴업도( 掘 業 島 ) 서포3리로 덕적도 서남방 13km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섬이다. 대동 지지 에 ''굴압도는 사야곶 서쪽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굴압도'는 지형이 물위에 구부리고 떠있는 오리의 모양과 같다 하여 굽을 굴( 屈 ) 자와 오리 압( 鴨 )자를 썼다. 1914년 팔 굴( 掘 )자와 일 업( 業 )자를 써서 덕적면 굴업리( 掘 業 里 )로 만들었다. 굴업( 掘 業 )은 땅을 파는 일이 주업이라는 뜻으로 굴업도는 쟁기를 대고 갈만한 농지는 거의 없고 모두 괭이나 삽 등으로 파서 일구어야 하기 때문에 굴업( 掘 業 )이란 지명이 되었다고 한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59

162 덕물산( 德 物 山 ) 덕적의 고지명인 덕물도의 이름을 따서 붙인 산 이름이다. 연평산( 延 坪 山 ) 연평도 쪽을 가리키고 있다 하여 붙은 산 이름이다. 대뿌루산 대뿌루 열매 나무가 많이 있어서 붙은 지명이다. 준치여 준치 낚시를 하는 바위라는 뜻이다. 마당여 준치여 바깥의 넓적한 바위를 이른다. 마당처럼 널찍하다는 뜻이다. 지바래 집 아래쪽이라는 말을 발음 그대로 표기한 것이다. 문턱넘어 바위 모양이 문턱 같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방구나무골 나무에서 방귀 냄새가 난다 하여 붙은 지명이다. 소생도래 원음은 소샘도래이다. 바위가 소가 마시는 우물을 돌아가서 있다 하 여 붙은 이름이다. 느다시뿌리 큰마을 서쪽으로 느닷없이 뻗은 산뿌리라 하여 붙은 지명이다. 160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63 단여 덕물산 북쪽 가까이에 떨어져 있는 바위로 첫단여, 중단여, 긑단여 이렇게 3개의 바위가 있다. 목금이 모래사장이 사리 때면 물이 차서 못 건너다닌다는 뜻에서 붙은 지명이다. 단개비여 곤충 단개비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부르는 작은 바위이다. 각흘도 곰바위 바위 형상이 곰이 서 있는 형상이다. 라. 소야리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나루개, 기동, 선촌을 병합하여 부천군이 되었다가 1973년 옹진군에 편입되었다. 소야도( 蘇 爺 島 ) 덕적도 남쪽에 갯골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섬으로 사야곶도 ( 士 也 串 島 ), 사야곶섬, 사야도( 士 也 島 ) 또는 사야도( 士 冶 島 ) 새곶섬 등 으로 기록되어 있다. 섬의 생김새가 새가 날아가는 모양과 같다 하여 '새곶섬'으로 불렀는 데 한자로 사야도( 士 也 島 ), 사야도( 史 冶 島 ) 또는 사야곶도( 士 也 串 島 ) 등 으로 표기한 듯하다. 통일신라 태종 무열왕 7년(660) 당나라의 소정방 ( 蘇 定 方 )의 함대가 이곳에 정박한 일이 있는데, 그것을 따 소씨 노인 [ 蘇 爺 ]이 머물렀던 곳이라는 뜻에서 소야도가 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61

164 나루깨, 진포( 津 浦 ) 소야도 북쪽 끝의 해안 마을로 조선지지 에 나루깨라고 기록하고 있어 소야도의 유일한 나루터였음을 알 수 있다. 밧뿌리 나룻개 앞 모래사장 오른쪽 산뿌리를 돌아가면서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뿌리를 밧뿌리라고 불렀다. 장군섬 텃골 앞 동북쪽 바위섬으로 우뚝 솟은 모양이 마치 장군 같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목바위 뱃말 앞 선착장 밖의 바위섬으로 물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좁 은 목으로 이 바위목이 나와야 굴을 따러 나간다 하여 목바위라고 부른다. 무푸레섬 이 섬은 해안에 안개가 몹시 끼어 방향을 알 수 없을 때 표적이 된 다 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안개 속에 퍼렇게 보인다는 의미이다. 텃골, 기동( 基 洞 ) 나루깨에서 남쪽으로 터골 고개 너머 마을로서 소야도에서 가장 먼 저 생긴 마을이라 하여 텃골 마을로 불렸다. 조선지지 에 는 기동이라 표기되어 있다. 큰말 소야리 중심에 있는 가장 큰 마을이어서 붙은 지명이다. 대촌( 大 村 ) 이라 불렀다. 162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65 뱃말 뱃마을의 준말이다. 포구가 가장 크고 배도 많아서 붙은 지명이다. 한자로 선촌( 船 村 )이라 표기했다. 국사봉( 國 思 峰 ) 당나라 소정방이 이 정상에서 자기 나라를 향하여 제사를 지냈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마끝 마파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남쪽 끝이라는 뜻의 지명이다. 반도목 뱃마을 남쪽으로 돌아가면 지형이 좁아진 곳으로 이곳을 반도목, 혹 은 반도골목이라고 불렀다. 이곳은 잘룩해졌다가 다시 넓어지면서 남 쪽 반도골 쪽으로 부채처럼 넓어진 지형이다. 때뿌루 소야도에서 유일하게 서쪽 해안에 위치하고 있는 가장 작은 마을로, 띠( 茅 )풀이 많아 띄뿌리라고 부르다가 때부리>때뿌루로 되었다. 중뇌꼴 소야도에서 중요한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한자로는 중로동( 中 路 洞 )이다. 마. 문갑리( 文 甲 里 )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부천군이 되었다가 1973년 옹진군에 편입 되었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63

166 문갑도( 文 甲 島 ) 신증동국여지승람 에 ''독갑도( 禿 甲 島 )는 덕적도 남쪽에 있으며 주 위가 25리이고 목장( 牧 場 )이 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그 형태가 마치 장수가 반질한 투구를 쓰고 있는 모양과 같아 대머리 독( 禿 )자와 갑옷 갑( 甲 )자를 서서 독갑도라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후 이 섬의 지명을 문갑도( 文 甲 島 )로 적고 있는데 구전에 의하면 원래 글월 문( 文 )자와 궤 갑( 匣 )자, 문갑도( 文 匣 島 )였다고 한다. 또 세 상의 혼란을 피하여 이 섬으로 피신을 한 학자들이 후손들에게 한학을 가르쳤는데 어찌나 향학열이 높았던지 집집마다 문갑( 文 匣 )이 없는 집 이 없었다 하여 문갑도( 文 匣 島 )라 부르게 되었다 하기도 하고, 섬의 형 체가 문갑과 같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도 한다. 할미여 섬의 모양이 할미 같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성제바위 형제바위의 와음이다. 어루우이 마을 오른쪽 약간 굴곡진 곳을 이르는 지명이다. 어루는 우묵하게 생긴 곳을 의미한다. 호망너머 중국 배를 망보던 산 너머 쪽을 부르는 지명이다. 문턱뿌리 산뿌리 모양이 문턱처럼 생겼다 하여 부르는 지명이다. 거막바위 바위가 검은 빛이어서 붙은 이름이다. 164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67 진난드렁 물이 빠지면 갯벌이 생기는데 길게 두렁이 난다 하여 붙은 지명으로 길난두렁이 원래의 발음이다. 진모래 모래사장의 모래가 원체 고와서 부르는 이름이다. 한월리 북풍받이로 겨울에 북쪽 언덕을 넘어 이 마을에 가면 아주 춥다 하 여 붙은 지명이다. 용나간굴 한월리 모래사장 동쪽 산기슭 바위뿌리에 굴이 있는데 이 굴을 용나 간굴이라고 한다. 응달말 윗말 오른쪽 아래 남쪽 산기슭에 있어 햇빛이 잘 들지 않는다 하여 붙은 지명이다. 통개 물이 갯가로 통한다 하여 붙은 지명이다. 말바작 말발자국이 있어 말바작이라고 부르는 바위인데 이곳에서 용마가 나 와 굴업도를 건넜다고 한다. 화류산( 花 柳 山 ) 봄이면 꽃놀이하는 산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65

168 바. 백아리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부천군이 되었다가 1973년 옹진군에 편입 되었다. 백아도( 白 牙 島 ) 대동지지 에 배알도( 拜 謁 島 )로 기록되어 있다. 섬의 모양이 허리 를 굽히고 절하는 모양과 같다 하여 절 배( 拜 ) 자와 뵈올 알( 謁 )자를 써서 배알도라 불렀다. 빼아리, 삐알 등으로 불렸다. 1910년에 간행된 조선지지자료 에는 백아리( 白 牙 島 )로 기록되어 있는데, 섬의 모양이 어금니 같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선단( 仙 丹 )여 덕적도 남쪽 해상에 솟은 세 개의 붉은 바위의 이름이다. 붉은 선녀 바위라는 뜻이다. 처녀 바위, 총각바위, 마귀할멈바위로 부르기도 한다. 큰장불 모래와 자갈로 된 해안을 이른다. 큰장부리로 곧 큰장수리의 이 지 역 방언이다. 작은재빼기, 큰재빼기 재빼기는 잿등이라는 말이다. 큰 마을로 가는 산등성이 중 처음 등 성이를 작은 재빼기, 조금 더 높은 곳이 큰재빼기이다. 말보는재 마을 보는 재라는 뜻이다. 이곳에서 큰마을 작은마을이 다 보인다 하여 붙은 지명이다. 갱건너부리 강(바다) 건너에 있는 산부리를 이르는 말이다. 166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69 지두멍 지형이 두멍 같다 하여 붙은 이름인데 물이 없는 두멍이라 하여 지 두멍이라 한다. 노랑서너메 노랑서라는 바위 너머 쪽을 이르는 지명이다. 굿구멍 굴이 뚫려 있는 바위인데 굴구멍이 굿구멍으로 변음이 되어 불린다. 삼복여 바위 세 개가 엎드려 있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한자로 삼복( 三 伏 ) 이라 쓴다. 목가시 지형이 사람의 목 같은 형상이라 하여 부르는 지명이다. 부잘리 부자네가 살았다고 해서 붙은 지명으로 부잘네라고 불렀다 한다. 선배부리 부잘네 위쪽 불쑥 나온 지형으로 배를 댈 수 있어서 선배부리라고 불렀다. 개건너뿌리 이곳 지명은 부잘리 쪽에서 갯벌 건너 뿌리라는 지명으로 이를 개건 너뿌리라고 부른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67

170 그물배깨진데 북풍받이로 배를 대기가 어려운 곳인데 바람에 쫓겨 들어간 배가 그 물과 함께 그대로 깨졌다고 해서 부른 지명으로 어선이나 그 외 배들 은 댈 수 없는 곳이었다. 못섬 덕적도 남서쪽 14km 거리에 있는 작은 유인도이다. 마을은 큰산 서 쪽 해안에 자리잡고 있는데 마을 안에 작은 못이 있어 못섬[ 池 島 ]이라 부른다. 아래달뿌리 마을 왼쪽 해안 바위 뿌리로서 선착장이 생기기 전에는 이곳에 배를 댈 수 있다 하여 배 달 뿌리라고 불렀다. 아래 달 뿌리는 마을 아래 배가 닿을 바위 뿌리라는 뜻이다. 자랑바위 상봉 동쪽으로 길게 뻗어간 산줄기 끝의 바위로서 가장 앞에 서서 자랑할 것도 없는 섬을 자랑한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사. 울도리( 蔚 島 里 )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부천군이 되었다가 1973년 옹진군에 편입 되었다. 울도 덕적도 남방 17km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덕적면의 가장 남쪽 끝 섬 이다. 대동지지 에는 막힐 울( 鬱 ) 자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1907년 168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71 에 간행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표에는 초목우거질 울, 혹은 고을 울 ( 蔚 ) 자로 바뀌어 기록되어 있다. 수목들이 울창하고 무성하였다 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추측된다. 한편 '울고 왔다 울고 가는 섬'이라 하여 울섬이 되었다고도 한다. 다른 섬의 처녀가 이 섬으로 시집와서 고기잡이를 나간 남편 걱정으로 울어서 울섬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또 육지 사람들이 이 섬에 들어 올 때 무서운 파도에 울고, 섬 주민들의 착한 마음씨에 감동되어 떠날 때 또 울게 된다 하여 울섬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그밖에 지형이 울타리 모양 같다 하여 울섬이라고 한다. 마을은 섬 중앙 해안에 북향하고 있으면서 동서쪽 섬 끝이 모두 마을로 향하고 있고, 활등과 같이 에워싸고 있을 뿐 아니라 섬 동쪽 끝에는 7 8개의 작은 무인도들이 북서쪽으로 굽어들어 마치 징검다리 형상으로 마을을 에워싸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여러 섬들의 명칭이 목바점, 큰바점, 웃바점 등으로 불리는데 '바 점'은 '바자섬'이란 말이 축음화 하면서 변한 것으로 바자울타리 같은 섬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울섬의 연유라고도 한다. 살막끔 살막꾸미라고도 하는데 울도 큰마을 서쪽 언덕 너머 해안가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마을 앞 갯골에 살[ 漁 箭 ]을 매던 살터와 초막이 있었다 하여 붙은 지명이다. 큰투구바위 바위 모양이 투구 같아서 붙은 이름이다. 두 곳에 있는데 큰 것을 큰투구바위, 작은 것을 잘투구바위라고 부른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69

172 방골밑 밤나무가 많은 골짜기 아래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밤골이 방골로 잘 못 발음된 것이다. 굼베너머 큰 바위 너머라는 말이 변한 것이다. 목바점 울도 동북쪽 바위섬으로 간조시에 연육이 되는 통로라는 의미의 '목'과 바자(울타리) 섬'이 합쳐진 명칭이다. '바자+섬'이 축음되어 '바점'이 되 었다. 큰바점 바자 섬 중에 가장 크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가운데바점 바자 섬 중에 한가운데 있다고 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웃바점 바자 섬 중 제일 위쪽에 있다 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목덕도( 木 德 島 ) 목덕도란 지명 유래가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덕적도 주민들이 이 지 역을 먹뎅이라고 부른다. 먹뎅이를 발음 비슷하게 한자 목덕( 木 德 )으로 기록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170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73 7) 자월면( 紫 月 面 ) 고려 시대부터 조선조 말까지 소물( 召 勿 ), 소홀( 召 忽 ), 조홀( 祖 忽 ), 조월( 祖 月 ) 등으로 불리다가 갑오경장 이후부터 자월( 紫 月 )로 불리기 시작했다. 자월도( 紫 月 島 ) 소홀도( 召 忽 島 )는 용비어천가 에 '죠콜섬'이라 기록하고 있다. 소( 召 ) 의 의미는 읍( 邑 )이고 홀( 忽 )은 성( 城 )의 뜻이므로 '작은 성이 있는 섬' 또는 '작은 섬' 정도의 뜻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작달만한 섬>자 달 섬으로 변화하면서 이를 한자로 옮기며 자월로 표기한 것이라는 추 측이다. 이와는 달리 자월도는 옛날부터 토지가 비옥하여 전답이 많아 세금 을 거두는 남양부 호방이 이 섬에 왔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가려 했으 나 거센 바람이 여러 날을 두고 부는 통에 돌아가지 못하고 초조한 마 음으로 남양( 南 陽 ) 쪽을 바라보니 검붉은 달만 희미하게 보여 그 달을 자월( 紫 月 )이라고 했다고 해서 부르게 된 것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가. 큰마을 자월 1리이다. 이 섬에서 가장 먼저 사람이 살기 시작한 중심 마을 이어서 부르는 지명이다. 마귀할멈 공깃돌 팔선녀뿌리 해안에 있는 다섯 개의 아름드리 돌을 이르는 말이다. 옛날 힘센 마귀할멈이 이 다섯 개의 돌을 가지고 공기놀이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71

174 벼락바위 장골 해수욕장 동쪽 바위이다. 옛날 한 어부가 고기잡이 나가 3일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부인이 따라 나섰는데 이 바위 밑에서 큰 지네 가 남편을 물고 있었다는 것이다. 남편이 죽자 부인은 실신했다가 깨 어 옆의 바위에 올라 바다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후 갑자기 뇌성벽력이 치고 이 바위가 벼락에 맞아 부서졌다. 부부를 죽 게 한 지네가 바위에 있었기 때문에 하늘에서 벼락을 쳐 지네를 죽인 것이다. 그때부터 이 바위를 벼락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비슷한 내용이나 부인이 대성통곡을 하자 벼락이 쳐서 지네를 죽였 다고 하여 통곡바위로도 불린다. 장골 조선시대 100여 호가 살던 큰 마을로서 한 달에 몇 번씩 장이 섰다 하여 장골[ 場 谷 ]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또 삼남지방(충청, 전라, 경상도)에서 세곡( 稅 穀 )을 싣고 서울로 향 하여 가던 배들이 자월도 풍무골[ 風 無 谷 ] 해안에 체류할 때 선원들과 호송 관리들이 짜고 세곡을 빼내 장골에 갔다 팔았다고 해서 붙은 지 명이라고 하고, 세곡선이 들어오면 이 배를 기다리고 있던 해적들이 세곡을 약탈하여 장골에서 흥정을 했다 해서 부르는 지명이라고도 한 다. 골이 길어 장골[ 長 谷 ]이라고도 하나 장이 섰다는 데서 유래한다는 쪽이 더 신빙성이 있다. 풀모골 대장장이가 살며 풀무질을 했다 하여 풀무골이 풀모골로 전해진다. 독바위 바위 모양이 독 모양이어서 붙은 이름이다. 172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75 안독바위 독바위 안쪽에 있는 바위이다. 막터골 장골해수욕장 북쪽 산 밑이다. 사람이 죽으면 이곳에다 가매장을 하여 막을 치고 장례 준비를 하던 곳이라 하여 막터골, 막태골이라 부른다. 다심물 간만의 차가 심하여 생긴 지명으로 다섯물이 되어야 배가 뜬다는 의 미인데 발음이 변음되었다. 구터골 옛날 마을 집터가 있던 곳이다. 가린골재 마을 서북쪽 고개로 겨울에 서북풍을 가려준다(막아준다)고 해서 붙 은 지명이다. 매리 옛날부터 매가 서식하며 새끼를 치고 번식하는 곳이라 하여 붙은 지 명이다. 국사봉( 國 思 峰 ) 나라에 국상이 생겼을 때 이 산에 올라 왕도를 바라보며 국운을 기 원하던 봉으리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73

176 나. 고살이골 자월 2리이다. 장골해수욕장 동쪽 죽바위고개 너머의 마을이다. 마 을 서쪽 산기슭에 절이 있었다 하여 고사곡( 古 寺 谷 ), 고사골 등으로도 부른다. 하늬개 양반집에서 학대받던 하녀가 바위에 올라 바다에 투신하자 이 불쌍 한 사연을 전하기 위해 이 바위를 하녀개라고 부르던 것이 발음이 변 해 하늬개로 불린다고 한다. 한편 서북풍인 하늬바람받이라는 의미로 한리포( 寒 里 浦 )라고도 부른다. 죽바위 대나무가 무성하여 붙은 이름이다. 달바위 배가 닿을 수 있다해서 붙은 지명이라고도 하고 바위가 달덩이처럼 둥글다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분목골 초원지대로 원래 풀목골[ 草 木 谷 ]이었는데 음이 변화한 것이다. 진장북리 모래와 뻘이 긴 해안 뿌리라는 뜻으로 긴장수리뿌리라는 말이 변한 것이다. 떡바위해안 바위 모양이 떡 치는 판 같이 생겼다 해서 붙은 명칭이다. 174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77 어류꼴해안 고사리골 북쪽해안으로 떡바위와 딴섬뿌리 사이에 굴곡진 갯골이 다. 고기들이 서식하기에 알맞은 곳으로 고기가 잘 잡힌다 하여 어렵 골, 어리골 또는 어류곡( 漁 留 谷 )이라 부른다. 다. 사슴개 자월 3리이다. 녹포( 鹿 浦 )라고도 부르는데 자월도 서쪽 끝 지역으로 마을 앞 남쪽으로 뻗어나간 바위줄기가 마치 사슴 뿔 같다 하여 붙은 지명이다. 갑진뿌리 깊은 골짜기 밑 달맞이재에서 남쪽 해안으로 내려온 산뿌리로서 경 사가 급하다 하여 급진뿌리라고 부르던 것이 변하여 갑진뿌리가 되었다. 목섬 사슴개 마을 앞으로 뻗은 뿌리 끝에 있는 작은 섬으로 이 뿌리에서 목이 잘려나가 섬이 되었다고 해서 붙은 명칭이다. 톱뿌리 바위 줄기가 마치 톱 모양을 닮았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변남금 사금이 났다고 해서 부르는 지명이다. 내렴 내리막길이 있어서 붙은 지명이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75

178 주걱뿌리 사슴개 마을 서북쪽 끝뿌리로서 주걱 같은 모양이어서 붙은 지명이다. 마바위 물이 빠지면 사람이 말을 타고 있는 형상의 바위가 있어 붙은 이 름이다. 먹통도 목수의 먹통과 같이 생겼다 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어둠골 골이 깊고 나무가 무성하여 낮에도 어둡고 후미지다 하여 붙은 지명 으로 어둠굴로도 부른다. 이두굴우물 삼신우물이다. 마장터 옛날 말 목장이 있을 때 말을 검사하여 들고나던 곳이다. 라. 대이작도( 大 伊 作 島 ) 이작 1리이다. 자월도 남쪽 10km 거리에 위치하고 중앙에 해발 188m 높이의 산이 동서분수령을 길게 이룬 섬이다. 신증동국여지승 람 에 ''이즉도( 伊 則 島 )는 독갑도 동쪽에 있으며 주위가 35리이고 목장 이 있다''라 기록되어 있어 대이작도와 소이작도가 합쳐진 지명이 이즉 ( 伊 則 )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남양읍지 ( 南 陽 邑 誌 )는 이작( 伊 作 )으로 표 기하고 있다. 176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79 고려사 에는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 왜구( 倭 寇 )들이 이 섬을 점거 하고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세곡선을 약탈하던 근거지라 하여 이적 ( 夷 賊 ) 또는 이적( 二 賊 )이라 부르고 있다. 마을안뿌리 마을 앞 오른쪽 산뿌리를 마을안뿌리라고 부른다. 이곳이 옛날부터 배를 대던 곳으로 외지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사람이나 결혼해 신부를 맞아 돌아오는 신랑이 들어오는 곳이라고 해서 들어오는 뿌리라고도 부른다. 댓골뿌리 골짜기에 대나무가 많아서 붙은 지명이다. 마을안뿌리와 반대로 마 을을 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여기서 배를 탔다. 이별못텡이 상여가 댓골뿌리로 나가는 도중에 멈추어 슬픈 상여소리를 하며 노 잣돈을 받던 곳이다. 휘청골 골이 깊고 큰 골짜기로 후미지다 하여 붙은 지명이다. 마배 높은 바위 위에 매가 앉는다 하여 매바위라 부르던 것이 음운 도치 현상으로 마배가 되었다. 고리장 아래 고려장 지내던 곳 아래쪽 후미진 곳을 이르는 지명이다. 계남마을[ 界 南 里 ] 게가 많이 잡히던 곳이다. 이 마을은 게와 연관되는 여러 가지 민속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77

180 들이 있었는데, 특히 게를 잡아 집집마다 처마에 매달아 귀신을 쫓는 풍습이 있었다. 본래 게가 나는 게남마을인데 계남( 界 南 )이란 지명으로 변하였다. 스황끝뿌리 승봉도 쪽 끝뿌리라는 뜻이다. 옛날 승봉도를 승황도( 承 黃 島 )도로 불 렀기 때문에 붙은 지명이다. 큰풀안 속리산 남쪽 해안 일대를 큰풀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풀은 갯벌을 이르는 것으로 간조시에 모래 둑이 동서로 길게 대이작도 크기만 하게 생기는데 그 안쪽이라는 말이다. 돌얼레 망재 남쪽 해안으로 고기가 많아 돌살을 매던 곳으로 돌어렵이란 말 이 돌어려>돌얼레로 변음되었다. 돌성머리 김검두라는 사람이 계남리에서 밥을 얻어먹지 못하고 화가 나서 계 남리 사람들이 다니는 길을 돌로 성을 쌓아 막았다고 해서 무모한 바 보짓을 이르는 지명이 되었다. 아기업은재 큰말과 장골 사이에 있는 언덕으로 아기를 업은 듯한 형상이다. 178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81 마. 소이작도( 小 伊 作 島 ) 이작 2리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에 대이작도와 함께 이즉( 伊 則 )이 라고 기록되고 있다. 현재도 소이작도 북쪽해안에 휘청골이라는 깊은 계곡이 있는데, 해적들이 살던 집터와 그들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어 이적도( 夷 賊 島 )라 부른다. 손가락바위 큰마을 왼쪽 윗목섬 끝에 따로 떨어져 있는 바위로 마치 손가락 하 나를 하늘을 향해 뻗히고 있는 형상이다. 장간여 벌뿌리 동쪽 해안의 바위 이름이다. 물이 많이 들어올 때 잠간 물에 있다가 다시 나타난다 하여 장간여라는 이름이 붙었다. 물에 잠긴 바 위라는 의미인 듯하다. 벌안 벌섬이라고 불렀다. 백아도의 벌섬과 이름이 같아 1974년 군명자문 위원회의 결정으로 벌안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마을이 갯벌 안쪽에 있다 하여 벌안(뻘안)으로 불렀다. 또 바닷가 바 위들이 벌집처럼 구멍이 뚫려 있다 하여, 떼 벌( 筏 )자와 언덕 안( 岸 )자 를 써서 벌안( 筏 岸 )이라 하였다. 반듸평전 해안의 넓적한 평지로 애초 번데이평지라는 지명을 이렇게 부르게 되었다. 진뿌리 벌안마을 너머 남쪽 동산 뿌리인데 약간 길게 나왔다고 해서 긴뿌리 로 불리었는데 구개음화되어 진뿌리가 되었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79

182 바. 승봉도( 昇 鳳 島 )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 승황도( 承 黃 島 )로, 남양읍지 에는 승황동 ( 昇 荒 洞 )으로 표기되어 있고, 1910년에 간행된 조선지지자료 는 승봉 리( 昇 鳳 里 )로 표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 申 )씨와 황( 黃 )씨가 새 로이 경작하며 살던 곳이라 하여 신황도( 申 黃 島 )라 불렀다고도 하며, 봉황새가 승천하는 모습이라 하여 승봉도( 昇 鳳 島 )라 하였다 전해진다. 부두치 이곳으로부터 승봉도의 1번지가 시작된다. 부두치로 발음하나 오리 부( 鳧 ) 자와 머리 두( 頭 ) 자, 그리고 따 지( 地 )를 쓴다. 승봉도의 머리 부분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각을레 안말 앞 용심산 해안 지형을 이르는 말로 을( 乙 ) 자형으로 구븐 소 의 뿔 형상이라 해서 붙은 지명이다. 굼말 구( 舊 ) 마을이란 뜻이다. 벗도래동네 옛날 염벗을 돌아서 건너다닌 마을이라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이일레마을 본래는 옐레마을이었는데 이것이 이일레로 불리는 듯하다. 옐레는 얼레빗을 의미하는 말로 이곳의 지형이 이와 같은 모양이어서 붙은 지 명이라고 한다. 사승봉도( 沙 昇 鳳 島 ) 대이작도 동쪽 끝 마을인 게남마을 남동쪽에 있는 작은 섬이지만 간 180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83 조시에 노출되는 은빛 모래사장이 대평원을 이루어 있다. '모래가 많은 승봉'의 의미로 불리는 지명이다. 남대문바위 바위 모양이 남대문 같이 생겼다 하여 붙은 이름으로 굴이 있어 더 욱 남대문 형상으로 보인다. 선갑도( 仙 甲 島 )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 선협도( 仙 俠 島 )로, 대동지지 에는 선접도 ( 仙 接 島 )로 표기되었고, 1895년 남양군에서 인천부 덕적면으로 이속되 면서 선갑도( 仙 甲 島 )로 개칭되었다. 경치가 아름다워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놀다 가기도 하였다고 하고, 선녀와 만날 수 있는 섬이라 하여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8) 영흥면( 靈 興 面 ) 1914년 지방행정구역의 개편과 군 면의 통폐합으로, 영흥면 지역은 신설된 부천군( 富 川 郡 )에 편입되었다. 1973년 부천군에서 옹진군으로 편입되었고, 1995년 옹진군이 인천광역시에 편입되어 인천광역시 옹진 군 영흥면으로 편제되어 운용되고 있다. 영흥도( 靈 興 島 ) 영흥도는 고려시대부터 문헌에 나타난다. 고려 말 나라가 망할 것을 예측한 왕족 익령군( 翼 靈 君 ) 왕기( 王 琦 )가 이곳에 왔는데, 그의 군호인 영( 靈 )자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다시 흥했다는 의미의 흥( 興 )를 붙여 영흥( 靈 興 )이 되었다고 전해온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81

184 신령이 도와주어 살림이 나아졌다고 하여 신령 령( 靈 )자와 또 일 흥 ( 興 )자를 붙여 영흥도( 靈 興 島 )라 하였다고 전해온다. 가. 내동( 內 洞 ) 내1리이다. 고려 말에 고려왕실의 익령군( 翼 靈 君 ) 왕기( 王 琦 )가 고려 가 망할 것을 미리 알고 자기의 측근인 임씨( 林 氏 )와 채씨( 蔡 氏 )가족들 과 함께 개경( 開 京 )을 탈출하였는데, 배를 타고 서쪽으로 가다 닿은 곳 이 영흥도 북쪽 해안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마을 논틀 건너 서쪽에 지금도 '왕가( 王 家 )마을'이란 지명이 전해지고 있는데, 택리지 ( 擇 里 志 )에서도 고려왕실 익령군 왕기가 살던 삼칸옥 [ 三 間 屋 ]이 영흥도에 있고 그 안에 그가 사용하던 유품( 遺 品 )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익령군과 함께 탈출한 임씨( 林 氏 )들은 이 마을에 서 대대손손이 이어 살면서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삼박골 박 같은 봉우리가 세 개가 있다 하여 부르는 지명이다. 논벌 삼박골 앞 논밭이 있는 곳을 부르는 지명이다. 가잣골 한자로 가자( 家 資 )라고 하며 부자마을이라는 뜻이다. 둠버리 삼박골 동네에서 내동으로 넘어가는 골짜기 지명으로 두멍같이 깊은 곳이라는 뜻이다. 182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85 도당재 마을 공동으로 당제를 지내는 높은 고갯길이다. 나. 양진말 내 2리이다. 내동 서편말이라고 한다. 벌건너 장골 아래쪽 마을로 구능 밖에서 뻘 건너에 있다고 해서 붙은 지 명이다. 장내 국사봉 밑에서 진두 쪽으로 빠지는 수원지가 있는 곳으로 긴 개울 장내[ 長 川 ]라고 한다. 서편마을 영흥중학교 북쪽 구능( 舊 陵 ) 너머에 있다. 내동 논틀 서쪽이라 하여 서편마을로 부른다. 고려 말 이곳에 와서 숨어살았다는 고려왕실 익령 군의 삼칸옥이 있던 곳으로 지금도 왕가마을로 전해지는 곳이다. 학골[ 鶴 洞 ] 벌 건너 이웃마을로 거목( 巨 木 )이 무성하였기 때문에 학이 새끼를 쳤다고 하여 '학골'이라고 부른다. 또 왕씨들이 이곳에 살면서 서당을 설치하여 학자들을 배출한 마을이라 하여 '학( 學 )골'이라고도 한다. 고개넘어 국사봉 북쪽 능선 동쪽 계곡에 있는 내2리 서쪽 고개 밑의 마을이 다. 옛 지도에는 영외( 嶺 外 )로 표기되어 있다. 이 고개는 상당히 높은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83

186 것으로 알려져 있어 이쪽 저쪽에서도 모두 고개 넘기가 힘들고 어렵 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우무동골[ 牛 舞 洞 谷 ] 벌건너 남쪽 산비탈에 있는 마을로서 소먹이 풀이 많아 소를 끌고 이곳으로 오면 소가 좋아하며 춤을 추는 모양을 한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구능재[ 舊 陵 峴 ] 구능재[ 九 陵 峴 ]라고도 표기한다. 왕씨 묘라고 하며 본래는 능( 陵 )같 이 컸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낮아졌다 한다. 묘가 9기가 있어 구능( 九 陵 )이라고 불렀다. 장뒤[ 場 後 ] 조선시대 국영목장이었던 마성( 馬 城 ) 뒤쪽이라 하여 장뒤라 불렀다. 다. 도장골 내 3리이다. 이 골짜기까지 들어가는 길이 상당히 길어 도장골[ 道 長 谷 ]이란 이름이 붙었다. 막꾸지 조수가 드나들던 물목으로 살을 매고 고기를 잡던 곳으로 어막( 魚 幕 ) 을 쳤던 곳뒤의 마을들로 모두 어막 배후에 있어서 어막 뒤쪽 마을이 라는 뜻으로 막후지( 幕 後 地 )라고 불리다가 막꾸지가 되었다고 한다. 184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87 라. 버드니 내 4리이다. 개울가에 버드나무가 숲을 이루어 버드니라고 했다고 전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붉은노리 옛날 이곳에 뻗어 나온 망재 줄기가 나무는 하나도 없이 붉은 흙뿐 이어서 붉은 노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소장골 이 마을에 서당이 있어 많은 학자들을 배출하였으므로 서장골[ 書 藏 洞 ]로 불렀다 하고, 선비들이 시를 읊으며 지내던 정자가 있어 이를 서정( 書 亭 )이라고 하여 서정골이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태나골 태내골, 태나골이라고 하는데 깊은 골짜기에 마을이 있어 마치 어머 니 뱃속의 태와 같이 감싸진 마을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지명이다. 중박골 서쪽 양노봉 밑 골짝에 절이 있었는데 이 절의 중들이 종사를 지었 다고 하여 중밭골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중박골로 불린 것으로 추측하 고 있다. 돈판재 옛날 나무하러 가던 사람들이 이 고개에 모여 돈내기 투전을 하던 고개라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사청터 옛날 이곳에서 활도 쏘고 창던지기 연습을 하던 곳이라 하여 붙은 지명이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85

188 통수골 이곳에 있던 한학당은 글공부 외에도 호신술을 통한 체력단련까지 수련하던 곳이라 하여 통수골[ 通 修 谷 ]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덕골 이곳에 살던 성씨 예부터 여러 사람에게 덕을 베풀어 그 고마움을 기리기 위해 덕골이라고 불렀다. 쉿골 옛날부터 논이 있는 마을이어서 쉿골이라고 불리었다. 쉬는 곡식을 의미하는 고어이다. 슁여골 마을이 산으로 가려져 있어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게 숨어 있는 것 같다고 해서 숨어골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변음되어 슁여골이 되었다 고 한다. 용담이 마을 앞 우물에서 용이 나와 하늘로 올랐다 하여 용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마. 진두( 津 頭 ) 내 5리이다. 영흥도 동남 쪽에 돌출된 부위로 여객선 선착장이 있는 마을이다. 진두는 본래 가시나무 덤불의 작은 섬이었는데, 이 진두를 바깥두이라 하고 제1제방 소나무 동산 밑의 나루터를 안두이라 한다. 두이( 頭 以 ) 또는 도이( 渡 以 ) 등으로도 불렀다. 도이나 두이는 진도( 津 渡 ) 나 진두( 津 頭 )를 뜻하는 것으로 갯골을 건너다니는 나루터를 말한다. 186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89 도너메 도이너메라는 뜻으로 나루터 넘어라는 듯이다. 번등 쓸모없는 땅이라는 말이다. 내 5리 주택지 일원의 옛 지명으로 소도 맬 수 없는 이추나무(작은 대추나무) 덤불이 가득한 곳이어서 이추나무 번등이라고도 한다. 석섬 영흥도 진도선착장 남쪽 작은 섬들로서 세 개의 봉우리가 산( 山 )자 처럼 생겼다 하여 석섬 또는 삼서도( 三 嶼 島 )라 하였다. 바. 장경리( 長 耕 里 ) 내 6리이다. 영흥도 국사봉( 國 思 峰 ) 서쪽 해안지대이다. 농경지가 되 가 전에는 간조 때 넓은 갯벌이었던 곳으로, 갯벌 동북쪽에 염벗을 설 치하여 소금을 생산하였다. 소금을 생산하기 위해서 갯벌을 갈아엎 어야만 했는데 갈아야 할 갯벌이 길다 하여 장경( 長 耕 )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우물동네 우물 하나로 온 마을이 길어 머고 살았다 하여 마을 이름을 한우물 동네라고 불렀다. 막재 한우물동네에서 내4리로 넘어가는 고개 밑에 가난하게 살던 사람들 이 초막을 짓고 살았다 하여 막재[ 幕 峴 ]라고 불렀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87

190 어엽굴 고기잡이배가 모이던 곳으로 어렵골로 불리던 것이 변음이 되었다. 신노루 장경리 해수욕장 남쪽 신노루고개 너머 계곡해안 마을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후미지고 외딴 곳이다. 경사가 진 지형이나 막다른 벼랑을 노루막이라 하는데, 내리막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산내리막골, 산노루 막으로 부르다가 신노루로 변하였다. 수해( 水 海 ) 어렵골 뒤 잿등 너머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이곳 바다에는 고기가 많아 사냥 수( 狩 )자 고기 어( 漁 )자를 써서 수어( 狩 漁 )골이라고 부르다가 수해( 水 海 )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전에는 밴댕이막골이 라고 불렀다. 가두리 한우물 논벌 건너 산 밑에 있다. 이곳에 집이 두 집뿐이었다 하여 가두리[ 家 二 里 ]라 불렀다. 사. 가마깨촌 내 7리이다. 1 4후퇴 때 옹진반도의 봉구면 가마깨 부포리( 釜 浦 里 ) 에서 나온 피난민들이 산비탈에다 자리를 잡고 정착하게 되면서 가마 깨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전에는 이 지역을 삼앞이라 불렀다. 은골 은곡( 恩 谷 )이라고 한다. 흉년과 한발이 겹쳐 한 노인이 죽어가는 것 을 보고 옆집의 개가 물을 물어다 노인의 입에 넣어주어 목을 축이게 188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91 하였다. 노인은 사람도 아닌 개의 은혜도 갚지 못하고 죽는구나, 탄식 하며 죽었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네몰 산뿌리의 모양이 누의 머리 같다 하여 부르던 지명이 변음되어 네물 로 불리게 되었다. 방계골 가마깨촌과 이웃하고 있는 마을이다. 방씨( 方 氏 )들이 살았다 하여 방 가골[ 方 家 谷 ]이었는데 방계골로 되었다. 아. 소정동( 蘇 亭 洞 ) 외 1리이다. 노가리 소장골 마을에서 남동쪽 해안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이곳에는 많 은 염벗이 있었는데, 소금을 만들어 볏짚으로 엮어 만든 섬[ 俵 ]에다 넣 어 노천( 露 天 )에다 곡식을 쌓은 것처럼 높이 쌓았다 하여 노가리라는 지명이 되었다. 살개 고기 잡는 살을 매는 갯골이어서 붙은 지명이다. 살돌석 살개 남쪽 옆의 지명인데 옛날 돌살을 매던 곳이어서 붙은 지명이다. 괭이뿌리 지형이 농기구인 괭이 모양으로 구부러져 있어서 붙은 지명이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89

192 닻돌 작은 어선들이 들어와서 뱃줄을 매던 돌이 있던 곳이어서 부르는 명 칭이다. 강가뿌리 400년 전후에 진주 강씨들이 이곳으로 와서 이삿짐을 내린 곳으로 알려졌다. 김가뿌리 나주 김씨들이 역시 400년 전후해서 이곳으로 이주해 배를 대었다 는 곳이다. 자. 업평동( 業 坪 洞 ) 외 2리이다. 예로부터 업평( 業 坪 ), 어평( 漁 坪 )이라고 한자로 쓰고 업 벌로 불렀다. 농경지가 넓다 하여 부르는 지명인지, 서쪽 섬업벌 쪽 어장을 뜻하는 지명인지는 알 수 없다. 물흘리 물이 계속 흘러내린다고 하여 붙은 지명이다. 뒷전골논 옛 업벌진에서 경작하던 둔전( 屯 田 )을 이르던 이름이다. 업벌( 業 伐 ) 고기가 많고 물이 맑아 어청( 漁 淸 )이라고 하다가, 배들이 많이 드나 들 뿐 아니라 마을 앞 갯벌에 살터도 많고 패류 등이 많아 고기 많은 벌이라 하여 어평( 漁 坪 )이라 하였다. 1920년대에 간척사업으로 마을 190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93 앞에 넓은 갯벌이 문전옥답으로 된 후부터, 어평( 漁 坪 )이란 지명을 일 할 업( 業 )자와 들 평( 坪 )자의 업평( 業 坪 )으로 고치고 업벌로 불렀다. 이금이 사금이 났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이금은 모래를 쌀 일듯 하여 캔다 는 뜻이다. 어둠골 노적봉 밑의 골이 깊고 어두워 붙은 지명이다. 순밀 바닷물이 조용히 밀고 나간다고 해서 붙은 명칭이다. 높은앙뎅이 산 모양이 웅덩이 같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당미 서낭당 끝이라는 지명이다. 당산꼬리를 당미라고 한다. 채나무산 찬물 샘이 있는 골짜기 산이라 하여 찬물 나는 산이란 부르다 채나 무산으로 변음되었다. 무선내 한자로 무선천( 舞 仙 川 )물이 맑고 외딴 곳이어서 선녀들이 내려와 춤 을 추며 목욕을 하던 곳이라 하여 붙은 지명이다. 느리재 절골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고갯길이 길고 느리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91

194 섬업벌 업벌 서쪽 바다에 있는 섬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다. 차. 용담( 龍 潭 ) 외 3리이다. 원래 사람이 살지 않던 곳으로 우물이 있었는데 이 우 물을 예부터 용담으로 불렀다. 용이 이 우물에서 승천하였다고 해서 유래된 지명이다. 용담이 앞장술 용담이 마을 앞 모래와 자갈로 된 해안의 지명이다. 선재도( 仙 才 島 ) 고려시대에는 소우도( 小 牛 島 ), 독우도( 犢 牛 島 )로 표기되어 전해지다 가 조 후기에 선재도( 仙 才 島 )로 불렸다. 소우( 小 牛 )나 독우( 犢 牛 )는 모 두 송아지를 뜻하는 것으로, 영흥도를 어미 소 같이 따라다녔다 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추측된다. 또 원( 元 )이 일본을 정벌하기 위하여 선재도 해안에서 배를 만드는 데 이때 섬의 수백 년 자란 나무를 베어다 만들었다고 해서 선재도( 船 材 島 )라는 설도 있다. 배를 만들던 배촌( 船 村 )이 있지만 타당성은 없어 보인다. 다만 소우도란 지명이 속되다 하여 선재도로 개칭하였다고 전 해진다. 행정구역은 1리, 2리로 되어 있다. 뱃말 원( 元 )이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선재도의 수백 년 자란 나무를 베어서 배를 지었다 하여 선재도( 船 材 島 ) 또는 선촌( 船 村 ), 배촌 등 으로 부르게 되었다. 192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95 갑진말 산비탈이 각이 진 형태로 경사가 급해서 붙은 지명이다. 각진말이 갑진말로 변음되었다. 구름몰 골우물[ 谷 井 ] 마을이 변음이 되어 그럼몰이 되었다. 문말 조선시대 한양에서 어떤 선비가 이곳에 와서 젊은이들을 위하여 서당 을 열고 글을 가르쳤다 하여 글월 문( 文 )자, 문마을로 불렀다고 한다. 대량구지 대량곶( 大 樑 串 )이다. 논골 큰산 동쪽의 돌출된 곶인데 옛날 이곳에 수백 년 자란 나무를 베어다 집의 대들보와 기둥으로 썼다 하여 붙은 지명이다. 붉은봉우리 연화봉을 이르는 말로 연꽃이 붉어 붉은 봉우리라고 부른다. 참배터 물때가 참이 될 때 배를 대는 곳이라 하여 붙은 지명이다. 너출뿌리 산 밑에서부터 바다 쪽으로 바위가 너출너출 길게 뻗어 나갔다 하여 너출뿌리 또는 너출나루터라고 부른다. 목데미 물이 빠지면 연육이 되고 물이 들면 바다가 되는 물목의 자갈더미라 하여 붙은 지명이다. 인천의 지명 유래 [중구, 동구, 옹진군] 193

196 홍수만 홍수와 같이 큰 바닷물을 막았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두무리 북쪽 해안 쪽 지명인데 두물[ 二 水 ]을 의미한다. 두물에는 사리에도 물이 많이 들어오지도 않고 적게 들어오지도 않고 항상 그대로 물이 차 있는데 이곳이 그렇다 하여 두무리라고 불렀다. 버드러지 해안이 양쪽으로 뻐드러져 있어서 붙은 지명이다. 벗듸강변 벗둑이 있었던 강변이어서 붙은 지명이라고 한다. 측도( 測 島 ) 이 섬의 주변은 물이 맑아 고기가 노는 모습을 그대로 들여다 볼 수 있어, 바다 밑을 그대로 들여다보면서 측량할 수 있다 하여 측도( 測 島 ) 라 부른다. 한때 선재도의 곁에 있다하여 곁 측( 側 )자의 측도로 되었다 가 다시 맑을 측( 測 )자 측도로 고쳤다. 부도( 鳧 島 ) 섬의 형태가 오리가 떠있는 것 같다 하여 오리 부( 鳧 )자를 써서 부 도( 鳧 島 )라 칭하였다. 둔두레섬 여기저기서 떠밀려 내려온 부서진 섬들이 이곳에 모여 하나로 붙여 지면서 ''도두룩하게 언덕이 졌다'' 하여 둔두레섬이라고 부른다. 194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197 인천의 지명 유래 <부평구 계양구 서구> 이 원 규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198

199 1. 부 평 구 1) 부평( 富 平 ) 오늘날 구명( 區 名 )이자 동명( 洞 名 )으로 사용되는 '부평'이란 지명은 고려 충선왕 2년(1310)에 길주목( 吉 州 牧 )을 폐지하고 부평부( 富 平 府 )라 칭하면서 비롯된 것이다. 드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어서 '넓은 들'이라 는 뜻으로 지어진 지명이지만 '쌀농사가 풍부한 부유한 들판'은 아니었 다.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 중기까지도 수원( 水 源 )이 부족한 불모의 벌 판이었다. 조선 후기에 해안에 제방을 쌓고 일제강점기에 한강 제방을 만들면서 풍요한 벌판이 되었다. 고려 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쳐 당시 관아가 있던 부평의 중심은 부평 도호부 부내면( 府 內 面 )이었고 오늘날의 계산동 지역이었다. '부평 읍내' 란 이곳을 가리켰다. 부평동 1914년 일제가 전국의 토지 측량을 끝내고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부 평은 인천의 일부와 합해져서 부천군이 되었고 지금의 부평동 지역은 부천군 부내면 대정리( 大 井 里 )로 명명되었다. 옛 부평읍내 지역(현재의 계산동)은 부내면 부평리가 되었다. 경인철도가 대정리를 지나며 부평 역이 만들어지고 경인 국도가 통과하게 되면서 부평 일대의 중심은 원 래의 부평리에서 이곳으로 이동되었다. 1940년 제2차로 인천부( 仁 川 府 )를 확장하면서 부평은 인천부로 속하 게 되고 대정리는 소화정( 疎 和 町 ), 부평리는 대정정( 大 井 町 )이 되었다 광복 후 소화정은 부평동, 대정정은 계산동이 되었다. 1968년 인천이 구제를 펴면서 북구에 속하고, 1995년 인천직할시가 광역시로 바뀌면서 부평구와 계양구로 분리되었다. 인천의 지명 유래 [부평구, 계양구, 서구] 197

200 대정리( 大 井 里 ) 현재 부평동의 옛 명칭이다. 큰 우물이 있는 마을이라 붙여진 지명 으로 볼 수 있다. 부평역에서 옛 부평 읍내(현 계산동) 쪽으로 가는 큰 길 왼쪽, 그리고 좀 더 가서 오른쪽에 큰 우물이 있었는데 부평로터리 를 만들면서 묻혀버렸다. 큰 우물과 연관이 없다는 설도 있다. 그 정도의 우물들은 어느 마을 에나 있었기 때문이다. 옛 지명에서 정( 井, 丁, 亭 )은 의미 없이 마을 이름을 지면서 붙이는 접미사 기능을 가졌다. 이곳은 윗마을과 아랫마 을, 두 개의 취락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아랫마을이 대촌( 大 村 )을 이루 고 있었다. 그래서 큰 마을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지명으로 보는 것이다. 1940년 지명을 일본식으로 바꿀 때 일본 천황의 연호를 따서 소 화정( 昭 和 町 )이라고 붙였다가 8 15 광복 후 소화정을 부평동으로 바꾸었다. 동수동( 東 樹 洞 ) 쌍굴다리를 지나 경인국도로 올라가는 중간지역이다. 지난날 부평2 동이면서 동수동으로 불리운 지역인데 그 기원은 부평지역 대부분이 조선시대에 부평부 동소정면( 同 所 井 面 )이었고 민간에서는 '동소제이'혹 은 '동수제이'라고 불러왔다. 1950년대 말, 정부는 일제강점기에 망각되고 혹은 바뀐 우리말 지명 을 통일하고자 전국의 시장, 군수, 면장에게 재래지명을 정확히 조사하 여 지도에 경위( 經 緯 )를 표시하여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그리하여 1961 년 4월 22일 국무원 고시로 국가 표준지명 을 발표하였다. 거기에 동수제이는 동소방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동수'라고 불 렀고 한자로 동수( 東 樹 )로 표기되었다. 그리하여 지하철역명도 '동수'가 되었다. 동쪽에 큰 나무가 서 있었는가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지만 '동 소정면'의 발음에서 유래한 것이다. 198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201 다다구미 현재의 롯데백화점 앞 원통천 복개로 만들어진, 화교학교가 있는 개 울가 일대를 일컫는다. 일제 강점기에 부평조병창을 확장할 때 다다구 미( 多 田 組 )의 현장사무소가 앉은 뒤 생긴 일본어 지명이다. 수도사거리 부평대로 옆 부평동 439번지 일대이다. 인천에 상수도가 개설되고 노량진 저수장에서 인천의 송현동 수도국산으로 보내는 5백 밀리 상수 도관이 이곳을 지나갔다. 여기 큰 도로가 개설되고 옛 김포 국도와 사 거리를 이루게 되어 붙여진 지명이다. 굴다리를 지나 경인국도로 올라 가는 중간지역이다. 홍중과 삼릉 현재의 부평2동 일대를 일제강점기에 '히로나까 사택'혹은 '홍중사택' 이라고 불렀다. 히로나카( 弘 中 )라는 군수공장이 들어서고 종업원 사택 이 즐비하여 그렇게 불렀는데 뒷날 그 공장이 미스비시( 三 菱 )로 바뀌어 '미스비시 사택' 혹은 '삼릉사택'이 되고 줄여서 삼릉이라고도 불렀다. 청산해야 할 일제 지명의 잔재이다. 2)산곡동( 山 谷 洞 ) 오늘날의 산곡동은 1910년 경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조선지지자료 에 '산곡리, 뫼끝말'로 기록되어 있다. 뫼끝말은 원적산의 남쪽 줄기가 휘 어 돈 끝에 형성된 마을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산곡동이라는 명칭은 1914년 행정개편 때 부천군 마장면( 馬 場 面 ) 산곡리로 기록하며 비롯되었다. 인천의 지명 유래 [부평구, 계양구, 서구] 199

202 백마장( 白 馬 場 ) 일제 강점기에 붙인 일본식 지명이 백마정( 白 馬 町 )이었는데 그것이 음운변화한 것이다. '백마'는 일제시 군사훈련장이 있어서 군대가 백마 를 타고 다녀서 붙여졌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날 이곳이 마장면( 馬 場 面 )이었고 고려시대부터 말을 기르고 군사훈련장으로 사용하여 이 일 대의 넓은 벌판을 '마장뜰'이라고도 불렀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일 본인들이 '마장정( 馬 場 町 )'이라고 하지 않은 이유는 예로부터 상급단위 로 마장면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마장면에 있는 마장뜰의 일부를 백마정으로 이름 지은 뒤 이곳의 지 명은 백마장과 마장뜰이 동시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바처 럼 백마정은 옛 마장뜰의 일부였다. 백마장은 1950년대에는 이것이 산곡동 일대를 모두 지칭하는 대표지 명이 되기도 했다. 1961년 4월 22일 정부가 국무원 고시로 발표한 국 가 표준지명 에 도 산곡동 부락 전체를 '백마장'이라고 기록했다. 장끝말 백마장 벌판, 다시 말해서 마장뜰의 끝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지명이 다. 민가 20여 호가 살았는데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조병창을 확장하면 서 징발해 마을은 사라졌다. 조병창 자리에 군부대가 주둔했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지명만은 그대로 남았다. 원적산( 元 積 山 ) 부평구와 서구를 경계 짓는 산이다. 옛날에는 석곶면(서구의 남쪽 승학현 너머 의 가정, 석남, 가좌동 일대의 옛 법정지명)과 마장면의 경계였다. 여지도서 등 옛 문헌들에는 '원통산'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부평지역 토박이들은 원적산으로 불러 왔다. 한동안 행정상의 오류로 철마산으로 지칭되기도 했다. 200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203 장끝고개 원적산 줄기가 남으로 뻗어가서 원통산으로 이어지는 곳에 있는 고 개이다. 지난날 산곡동 일대 벌판을 지칭하던 마장뜰의 끝에 있는 고 개라 하여 붙여졌던 지명이다. 화랑농장 1950년대 초에 상이용사 출신 지도자로서 제2기 인천시의원을 지낸 김국환 진상상구 등이 불모의 황무지를 개척해 농장을 열고 '화랑농 장'이라 명명했는데 그것이이 지역을 대표하게 되고 지명이 되었다. 지금 현대아파트와 부광고등학교, 약수터가 있는 언덕 너머 마을을 가리킨다. 구루지고개 화랑농장에서 서쪽 구릉을 넘어 서구의 가좌동과 십정동으로 넘어가 는 고개이다. 한국전쟁 때 생선장수와 소금장수들이 많이 넘어 다녔는 데 경사가 급해 걸핏하면 넘어져 구른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혹 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곳에 군용으로 쓰기 위해 토굴을 많이 팠는데 그래서 붙은 지명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구로현( 九 老 峴 )이 라는 지명도 있으나 한자로 음차한 것으로 보인다. 3) 청천동( 淸 川 洞 ) 청천동 예로부터 청천동이었다. 원적산에서 발원한 물이 드넓은 마장뜰을 인천의 지명 유래 [부평구, 계양구, 서구] 201

204 적시며 흘렀는데 청천동은 그 시냇물이 흐르는 지역에 형성된 취락이 었다. 그래서 우리말 지명으로 '맑은내'라고 불렀고 한자 지명은 청천 리였다. 그리고 상급 행정단위인 마장면의 사무소가 이곳에 있었다. 이곳을 가리켜 '마제이'라고도 했는데 그것은 위의 산곡동에서 설명 한 마장뜰과 다름 아니다. 마장뜰의 중심은 낡은내(청천동)이고 거기 면사무소가 있었던 것이다. '마장'이 '마제이', '마재이'로 변하는 것 은 국어에서 ㅇ음이 탈락하면서 생기는 일반적 음운현상과 같다. 1961년의 국가 표준지명 은 청천동의 부락이름을 '마재이'라고 하나 만 기록하였다. 양곗골 청천동에서 안하지 고개 사이에 큰 분지가 있는데 촌로들은 이곳이 안하지 연못이라고 믿고 있다. 여기서 원적산 쪽으로 올라가면 넓은 지대가 있는데 옛날에는 큰말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음 성 나환자촌이 자리잡고 나환자들이 양계를 했다. 그래서 양계촌이라 고 불렀다. 지금은 청천동농장이 자리잡고 있다. 깎은산 청천동 뒤편으로 이어진 원적산 3부 능선에 일제 강점기에 군사시설 을 만들기 위해 평평하게 깎아 놓았고 한국 전쟁 시 주둔한 미군이 헬 기장으로 만들며 손질을 더해 더 넓어졌다. 일제 강점기에는 '깎은산' 으로 부르고 미군 주둔 이후에는 헬기장이라는 지명이 더 생겼다. 최 근에는 체육시설을 설치했고 장수산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연원을 알 수 없는 지명이다. 신노게들 현재 GM대우자동차 공장 일대이다. 지난날 이곳은 맑은내의 물을 받아 농사를 짓는 천수답 지대였는데 신노개들이라고 불렀다. 새로 길 202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205 을 낸 들판이라는 의미로 신로야( 新 路 野 )라고 지었을 것이라 유추할 수 있으나 근거는 불확실하다. 4) 갈산동( 葛 山 洞 ) 갈산, 갈월 산에 칡이 가득하게 자라서 붙여진 지명이다. 전설에 의하면 대들보 를 삼을 정도로 굵은 칡도 있었다고 한다. 칡넝쿨이 가득한 산중턱에 달빛이 비치면 그 정경이 매우 아름답다고 하여 '갈산명월'이라는 어구 가 생겼고 옛 지명도 갈월리였다. 그러다가 1946년 갈산동으로 고쳤 다. 지금도 부평지역의 토박이 노인들은 갈월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새갈 일제강점기에 국방도로를 개설하며 갈산동의 북쪽 산의 흙을 파다가 썼다. 이 토취장 자리가 꽤 넓은 평지가 되었는데 거기 민가가 들어서 기 시작해 취락이 생겼다. 새로 생긴 갈월리라는 뜻으로 새갈월리라고 불렀는데 줄어들어 '새갈'이 되었다. 국방도로는 뒷날 경인고속도로의 근간이 되었다. 신트리 부평동과 갈산동의 경계 부근에 무논지대와 둑이 있었고 밋밋한 평 지가 있었는데 한국전쟁 이후 인구가 늘어나면서 민가가 생기기 시작 해 20~30호로 늘어났다. 그래서 신트리라는 지명을 붙였는데 민가가 위아래로 계속 늘어나자 위쪽을 윗신트리, 아래쪽을 아랫신트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금의 여성회관 동쪽, 근린공원 주변이다 인천의 지명 유래 [부평구, 계양구, 서구] 203

206 굴포천( 掘 浦 川 ) 굴포천이란 흙을 파내고 만든 하천이라는 의미의 보통명사이다. 아 울러 부평구 지역에 있는 하천을 이르는 고유명사이기도 하다. 옛날에 한강물을 원활하게 끌어들이기 위해 이 지역의 구불구불한 하천들을 직선으로 곧게 뚫는 공사를 하고 '직천( 直 川 )'이라고 불렀는데 나중에는 이들 직선공사를 한 하천들을 통틀어 '굴포천'이라 부르게 되었다. 같은 직천이라도 한다리가 있는 곳을 대교천이라 부르고 벌말 근처 의 직천은 북포( 北 浦 )라고 불렀다. 갈산동을 지나는 직천은 여러 갈래 의 굴포천들 중 하나이다. 엄밀하게 좁혀서 말한다면 원통천이 옳다. 이 하천은 원래 현재의 서부간선도로를 따라 흐르게 되어 있었으나 현 재의 여성회관 뒤편으로 흐르게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사근다리 예전에는 갈산동에서 부평역으로 가는 현재의 '부평로'가 한강수리조 합의 서부용수로( 西 部 用 水 路 )의 둑을 이용해 열려 있었다. 그러니까 수 리조합 수로 둑과 국도 겸용이었다. 이 수리조합 용수로는 원통천과 연결되었고, 물이 넘치면 여수토교( 餘 水 吐 橋 )에서 수위를 조절하였다. 그런데 그 주변이 약간 높고 평평한 지대여서 민가들이 들어서기 시작 했다. 거기 사는 사람들은 용수로를 건너기 위해 나무다리를 만들었고 이것이 오래 되어 삭아갔기 때문에 '삭은다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것이 오늘날 이 지역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204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207 5) 삼산동( 三 山 洞 ) 삼산 이 지역에 삼산이라 이를 수 있는 3개의 산봉우리는 없다. 이 지역 에 대한 지명으로 옛 문헌자료에는 없는데 1940년 일제가 전국을 일본 식 지명으로 '정( 町 )'으로 고칠 때 '삼립정( 三 笠 町 )'으로 썼다. '삼립'은 러일전쟁 때 전투에 참가한 미카사 마루( 三 笠 丸 )에서 차용한 것으로,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붙인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아직도 잔재하는 왜식 지명의 하나로 청산해야 할 것이다. 1961년 4월 22일 정부가 국무원 고시로 발표한 국가 표준지명 은 삼산동의 취락을 후정리와 영성미로 나눠 기록했다. 후정리( 後 井 里 ) 옛날 갈산 밑에 갈월 마을이 있었고, 갈산의 동쪽 줄기가 길게 뻗어 가서 영성산( 靈 成 山 )으로 이어진 아래 삼태기처럼 푹 꺼진 곳이 있었 다. 거기 우물을 파니 물맛이 좋았다. 이 우물 주변에 마을이 들어서 고, 산등성이 뒤편의 우물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뒤우물말' 또는 후정 리라 하였다. 아직도 남은 일재 잔재인 삼산동이라는 지명을 버리고 후정리로 회복해야 할 것이다. 영성산 영성미 후정마을 동쪽 400~500미터, 삼산동 90번지 부근에 해발 100미터 정도로 솟은 영성산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국방도로를 뚫으며 이곳 에서 흙을 파 갔다. 그래서 산의 형상은 사라지고 지금은 자취만 남아 있다. 토박이 원로들이 '영성산', '영성뫼'라고 부르는 것은 그런 이유 때 문이다. 토박이 노인들은 영성산 아래 마을을 '영성미'라고도 부르는데 위에 서 설명한 '영성뫼'에서 유래한 것이다. 인천의 지명 유래 [부평구, 계양구, 서구] 205

208 서부수로와 데부뚝 일제강점기에 한강수리조합이 농업용 수로를 만들 때 갈산에서 영성 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관통해 용수로를 팠는데 그것을 서부간선수 로라고 불렀다. 이 서부간선수로의 둑을 데부뚝이라 불렀다. 이것은 큰 둑을 의미하는 대보( 大 湺 )에서 음운이 변천한 것이다. 장제( 長 堤 ) 영성뫼 동쪽으로 드넓게 펼쳐진 들을 '영성뫼들'혹은 '영성미들'이라 고 불렀다. 그 앞으로 현재의 삼산동과 중동, 상동의 경계를 이루는 삼산동 141번지 일대는 원통천과 맑은내, 돌내[ 石 川 ] 등의 세 하천이 모여 연못처럼 물이 고였다. 이것의 범람을 막고 이 물을 직포로 보내 기 위해 만든 긴 둑을 '장제'라고 불렀다. 목숙교( 苜 蓿 橋 ) 위에서 말한 원통천과 맑은내, 돌내 등의 하천이 합류한 곳에서 인 공수로를 파서 직포로 연결시켰는데 그 수로를 목숙교라 하고 그 위에 통행을 위한 다리를 만들었다. 그 다리 이름이 목숙교였다. '목숙'은 콩 과에 속하는 이름의 월년초다. 그곳에 그 풀이 많이 자라 였다. 이름 이다. 지금은 콘크리트 다리로 바뀌었고 '목수통', '목수교'라고도 부른 다. '목숙'에서 ㄱ음이 탈락하여 생긴 현상으로, 지명기원을 알지 못하 는 사람들은 막연하게 그렇게 부르고 있다. 6) 부개동( 富 開 洞 ) 부개 '부개'라는 지명은 옛 문헌에 없다.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인천으로 206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209 올 때 '부평이 시작되는 곳'이어서 붙은 지명이라고도 하고, 마을 뒷산 인 부개봉( 富 蓋 峯. 復 蓋 峯 )에서 유래한다는 설도 있다. 혹은 산위에서 굽어보면 산 앞이 환하게 열려 있어서 그렇게 붙였다고도 한다. 아무 튼 1946년 일본식 지명을 청산해 새롭게 지명을 만들 때 고친 것이 분명하다. 옛 지명은 마분리였다. 1961년의 국가 표준지명 은 부개동의 취락을 마분리, 굴재미, 벽돌 막, 신부동으로 나눠 기록했다. 마분리( 馬 墳 里 ) 이곳에 말무덤이 있어서 마분리라고 불렀는데 말무덤이라는 의미가 탐탁지 않아서 지명을 부개동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옛날에 이 지 역을 통과해 역마( 驛 馬 )가 달렸고 주변에 있던 대야원, 오류원 등 역참 에서 말이 죽으면 이곳에 묻었다고 한다. 그리고 고려시대부터 마장뜰 (산곡동, 청천동 일대)에 국영 말목장이 있었고 거기서 죽은 말을 이곳 에 묻은 터라 붙여진 지명이라고도 한다. 등잔산( 燈 盞 山 ) 부개산 북쪽 작은 봉우리를 말한다. 산의 형상이 등잔을 켜는 접시 같아서 붙여진 지명이다. 그런데 뒷날 여기에 대규모 변전소가 생겼 고, 토박이들은 전기가 곧 등불을 켜니 그 의미가 일치하니 신통하다 하였다. 굴재미 등잔산 구릉을 경인철도가 관통하면서 생긴 굴다리 부근을 굴재미라 불렀다. 쌍굴 철로다리의 서울 쪽의 삼태기처럼 움푹 들어간 곳에 생 긴 마을이다. '굴재뫼'에서 모음이 탈락해 '굴재미'로 바뀐 것이다. 인천의 지명 유래 [부평구, 계양구, 서구] 207

210 신복동( 新 福 洞 ) 1920년대에 일본인 고니시( 小 西 )라는 사람이 방죽을 막고 농토를 개 간하여 소작인들이 들어오고 마을이 생겼는데 일본인의 이름을 따서 '고니시말'이라고 했다. 그것이 어느 때부터인가 고니새마을로 바뀌었는 데 이곳은 고니(두루미)와는 연관이 없다. 광복 후 지역 유지들이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자 새롭게 복을 받는다 는 뜻으로 신복동으로 개칭하였으나 오래 가지 못하였다. 많은 토박이 원로들은 그냥 '고니새말'로 기억하고 있다. 국가 표준지명 의 신부동 은 신복동의 오기( 誤 記 )로 보인다. 7) 일신동( 日 新 洞 ) 일신 일신동은 옛날에 부평군 동소정면 항동리( 航 洞 里 )와 구산리( 龜 山 里 ) 였다. 1940년에 일본식 지명으로 바꿀 때 향취정( 香 取 町 )이라 했는데 광복 후 일본식 지명을 청산하면서 전혀 새로운 지명인 일신동으로 명명되었다. 중국의 사서( 四 書 ) 중 하나인 대학 에 나오는 일신 우일신( 日 新 又 日 新. 나날이 새롭고 또 새로워지다)에서 착안한 것임 을 알 수 있다. 항동 항동, 황골, 황굴로 불리었다. 현재 부개동의 부개초등학교가 앉아 있는 마을에서 남쪽으로 산등성이 너머 남향으로 마치 배의 모양으로 길게 드러누운 산록에 있던 50여 호 되는 마을이었다. 일제강점기에 군사시설을 만들면서 철거되었다. 마을 형상이 배의 모양이라 붙여진 지명으로 볼 수 있는데 음운변화 208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211 로 인해 지명이 바뀌는 것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견을 내놓기도 한 다. 국어의 '한'은 크다는 뜻과 가운데라는 의미를 가진 형용사였고 지 금은 '한길'등 복합어에만 남아 있는데 그것이 대개 '황'으로 변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소>황소, 한새>황새가 그렇다. 그런 의미 로 유추하면 이 마을은 '한골'에서 '황골'로 바뀐 것으로 볼 수 있다. 황골은 이 마을을 가리키던 순 우리말 지명이었다. 1961년의 국가 표준지명 은 일신동의 취락을 '황굴'하나만 기록했다. 구산 아홉 구( 九 ) 자를 써서 구산리( 九 山 里 )로도 기록되어 있으나 이 지역 과 9개 봉우리는 연관이 없다. 부천에 있는 성주산에서 바라보면 서쪽 으로 뻗어 일신동으로 향한 봉우리가 마치 거북이 엎드린 듯한 형상이 어서 붙은 지명이다. 무네미고개 구산과 용봉산( 龍 鳳 山. 남동구 장수동과 경계를 이루는 산) 사이, 즉 구산동에서 장수동으로 넘어 다니는 고개이다. 현재는 8차선으로 확장 되어 있다. 또 위로는 외곽순환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송내 지하차도에 서 장수동으로 넘어가는 순환도로 밑의 길을 말한다. 전국에 '무네미, 무너미'라는 우리말 이름, 혹은 수유( 水 踰 )라는 한자 어 지명을 가진 장소는 많다. 모두 물넘이와 유관하며 대개는 분수령 ( 分 水 嶺 )과 관계가 있다. 인천의 지명 유래 [부평구, 계양구, 서구] 209

212 8) 십정동( 十 井 洞 ) 열우물골 마을에 우물 열 개가 있어서 우리말 지명으로 '열우물' 한자 지명으 로 '십정'이라했다 하나 우물 열 곳은 확인할 수 없다. 십정동은 함봉 산 서쪽 윗열우물골과 수출5공단 일대의 아랫열우물골, 이렇게 두 지 역으로 나뉜다. 윗열우물골은 구석말, 양짓말, 음짓말로 나뉜다. 그리고 십정동은 부평구의 다른 동들과 달리 지난날 부평의 일부가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는 인천부 다소면( 多 所 面 ) 소속, 일제 강점기에는 다주면( 多 朱 面 ) 소속이었다. 구석말 동향사 사찰이 있는 일대이다. 양짓말과 음짓말 사이 북서쪽으로 깊 이 들어가 있어서 그런 지명이 붙었다. 양짓말 해가 잘 드는 양지쪽에 있다는 뜻으로 붙여진 지명이다. 윗열우물 62번지 일대이다. 음짓말 함봉산 서쪽 밑이라 겨울에 일조시간이 짧은 터라 붙여진 지명이다. 윗열우물 22번지와 144번지 일대이다. 참새미 물맛이 좋고 차가운 우물이 있어서 '참샘'이라고 불렀는데 음운변화 하여 '참새미'가 되었다. 현재의 십정공원 부근이다. 백범로( 白 凡 路 ) 십정사거리에서 서쪽으로 서구 경계를 넘어 가좌사거리 방향, 동쪽 으로 간석오거리를 지나 수원 방향으로 가는 길이다. 백범 김구 선생 을 기리기 위해 붙인 지명이다. 210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213 2. 계 양 구 현재 계양구는 20여 개의 전통적인 취락을 효성 1,2동과 계산 1,2, 3,4동과 작전 1, 2동과 작전서운동과 계양 1, 2동 등 법정동으로 나누 고 있다. 여기서는 법정동보다는 전통적인 취락과 지명을 토대로 기술 하기로 한다. 1) 효성동( 曉 星 洞 ) 새별이 옛날에는 물이 흐르지 않아 토지가 척박하고 억새풀이 무성하여 '새 벌'이라 불렀는데 음운변화로 '새별'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전국 토지 를 측량하여 한자지명으로 고쳐 쓸 때 샛별, 새벽별로 잘못 인식하여 효성( 曉 星 )으로 쓰게 되었다. '풀이 많은 들판'이라는 의미에서 '새벽별 이 뜨는 곳이라는 의미'로 바뀐 것이다. 중구봉( 重 九 峯 ) 철마산과 계양산 사이에 있는 산으로서 고려시대에 중구절( 重 九 節 : 음력 9월 9일) 행사를 하여 그런 지명이 붙었다고도 하고, 작은 산봉 우리가 9개라 그렇다고도 한다. 이촌( 李 村 )말 김촌( 金 村 )말 임촌( 任 村 )말 효성동에 있는 3개 성씨의 집성촌을 이르는 지명이다. 이촌말은 중구봉 남록의 동쪽에 자리잡은 마을로 전주이씨 집성촌이 다. 산 밑에 있어서 안말이라도 하였다. 김촌말은 이촌말 남쪽 벌판에 있는 마을로 안동김씨 집성촌이다. 아 인천의 지명 유래 [부평구, 계양구, 서구] 211

214 랫말이라고도 하였다. 임촌말은 중구봉 남록의 서쪽에 자리잡은 마을로 풍천임씨 집성 촌이다. 넘말이라고도 하였다. 길마재 되내미 중구봉을 남쪽에서 바라보면 봉우리 두 개가 솟아 있어서 그 형상이 마치 길마처럼 생겨서 거기 있는 오솔길을 길마재라 하였다. 되내미고 개라는 지명도 같이 사용하였다. 고개 아랫마을을 되내미마을이라 하 였다. 안하지 조선왕조 초기에 새 도읍지를 찾을 때 부평지역도 대상에 넣어 지형 을 조사했는데 골짜기가 990개라 하여 아흔아홉고개라한 것이 안하지 고개로 음운변화했다고 한다. 혹은 조선시대에 서구 원창동 포리에서 삼남지방의 세곡미를 싣고 한양으로 운반할 때 이 고개를 넘었는데 고 개 아래 안( 安 ) 씨 성을 가진 주모가 주막을 열고 있었다고 해서 붙여 진 지명이라고도 한다. 안하지골은 이곳에 있는 골짜기를 일컫는 지명이다. 2) 계산동( 桂 山 洞 ) 계산동 조선시대나 일제강점기까지도 계산동이라는 지명은 사용하지 않았 다. 조선시대 말기 부평군 군내면( 郡 內 面 ) 상동과 하동이었으며 부평의 관아 소재지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대정정( 大 井 町 )이었는데 광복 후 지 명에서 일재 잔재를 청산할 때, 계양산 남쪽에 위치한 터라 새롭게 계 212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215 산동이라고 명명하였다. 지난날 부평부의 중심이었는데도 부평동이 되 지 못한 것은 경인철도의 통과로 새로운 부평지역의 다운타운으로 부 상한 오늘날의 부평지역에 그 명칭을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계양산( 桂 陽 山 ) 계양산은 부평을 상징하는 산이다. 해발 395m로 서울 서쪽에서 가 장 높은 산, 강화를 제외한 인천에서 가장 높다. 계양구의 계산동, 방 축동, 목상동과 서구 공촌동의 경계지역 안에 있다. 계양산에는 세 개의 깊은 골짜기가 있다. 호랑이가 출몰했다는 범 골, 경명현이 아래의 깊은 계곡인 산곡, 계양산 서쪽 산자락 아래에 옛날 절이 있었다는 불당골, 이 세 가지 지명은 지금도 사용된다. 계양산 옆으로 난 낮은 구릉을 타고 넘어가는 경명현( 景 明 峴 )이라는 유명한 고개가 있다. 서곶과 부평을 이어주는 유일한 고개였으나 거의 같은 방향으로 경명로가 개설되어 의미가 사라졌다. 이 고개는 고려시대부터 매사냥으로 유명했다. 고려 충렬왕은 경명 현에 와서 매사냥을 자주 하였고, 경명현 서쪽에 국영 매방을 두었다 고 전한다. '징매'라는 지명은 충렬왕이 매를 징발( 徵 發 )했다 하여 징매 [ 徵 鷹 ]라고 한 것에서 유래한다고 설이 유력하다. 이 경명현을 중심으로 동서로 쌓은 성을 중심산성( 衆 心 山 城. 계양산 성이라고도 했다)이라 했다. 고종 7년 서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는 데 공해루( 控 海 樓 )라는 문루도 세웠었다. 공해루 200미터 남쪽에 '중심 산성 사적비'가 세워졌었는데, 인천시립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계양산은 예로부터 전국적으로 알려져 문장가들의 글에 등장한다. 고려 때 이규 보( 李 奎 報 )의 망해지( 望 海 誌 ), 풍수가 김위제( 金 謂 磾 )의 남경( 南 京. 오 늘의 서울) 천도 상소문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근방의 문인들이 부평팔경을 시문으로 묘사 인천의 지명 유래 [부평구, 계양구, 서구] 213

216 하였는데 거의가 서곶지역의 것들이고 계양산의 절승에 대한 것이 제일 많다. 이 산에서 생산되던 부싯돌과 회양목은 품질이 좋아서 전국적으로 팔려 나갔다 한다. 부싯돌은 이제 불필요해져 원석이 남아 있겠지만 20~30년 전까지 산록에 지천으로 많던 회양목은 멸종되어 버렸다. 계양산에는 만일사를 포함해 12개의 사찰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하나 도 남아 있지 않다. 온수골 옛날 이 곳의 큰 바위 밑에 따뜻하고 맑은 물이 고였다고 한다. 고 려 중엽 부평의 행정 명칭이던 안남도후부 관아를 오류동에서 계양산 중구봉 아래로 이전한 이후 고려가 망할 때까지 존치했다. 고양골 조선시대에 충신 조헌( 趙 憲 )이 통진현감을 지내다가 죄인을 잘못 다 스려 죽게한 일로 이곳에 와서 귀양을 살았는데 그 후 '귀양골'로 불리 웠다. 그것이 음운변화하여 고양골이 되었고 사람들은 내력을 알지 못 하고 고양( 高 陽 )으로 쓰기 시작했다 한다. 옛날에는 물이 흐르지 않아 토지가 척박하고 억새풀이 무성하여 '새 벌'이라 불렀는데 음운변화로 '새별'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전국 토지 를 측량하여 한자지명으로 고쳐쓸 때 샛별, 새벽별로 잘못 인식하여 효성( 曉 星 )으로 쓰게 되었다. '풀이 많은 들판'이라는 의미에서 '새벽별 이 뜨는 곳이라는 의미'로 바뀐 것이다. 214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217 3) 작전동( 鵲 田 洞 ) 작전동 조선시대까지도 계산동이라는 지명은 사용하지 않았다. 옛 지명인 작정리( 鵲 井 里 )와 화전리( 化 田 里 )에서 한 글자씩 따서 일제 말기에 만 든 것이다. 조선 말기 부평군 서면의 일부였던 가현리( 佳 峴 里. 가루개)와 화전리 [된말]과 신대리( 新 垈 里. 새대), 작정리[까치말 까치울] 취락이 있었는 데 1940년 이 곳을 인천부에 편입시킬 때, 대표적인 두 마을의 이름에 서 한 자씩 따서 작전정( 鵲 田 町 )이라 한 것이다. 1961년 4월 22일의 국무원 고시 국가 표준지명 은 작전동의 취락 을 가루개, 까치말, 된밭, 새대라고 적었다. 가현(가루개) 계양산의 한 줄기인 가현산( 佳 峴 山 ) 아래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인 지 명이었다. 우리 말 지명으로는 가루개, 가을개, 갈개 등으로 불리워 왔다. 화전(된밭) 중구봉 남쪽 줄기가 가현산을 이루고 남쪽으로 계속 흘러 큰 마을까 지 내려왔다. 이곳에 지난날 부평군 서면 사무소가 있었다. 오랜 세월 이 지난 뒤 이 산은 사람들에 의해 밭으로 변했고, '된밭'이라고 불렀 다. '산이 변해서 밭이 된 땅'이라는 의미였는데 한자 지명으로 고치면 서 직역하여 화전( 化 田 )이 되었다. 신대(새대) 조선시대에 새로 생긴 마을어서 당시부터 '새대', '새터'라고 불렀다. 이것을 한자어 지명으로 바꾸면서 신대( 新 垈 )가 되었다. 인천의 지명 유래 [부평구, 계양구, 서구] 215

218 쇠면 옛 화전리 일대가 부평군 소속의 서면 소재지였는데 음운이 변해서 쇠면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쇠면'이라고 하면 위에서 설명한 '된밭', 즉 화전을 일컫는 것이었다. 4) 서운동( 瑞 雲 洞 ) 서운 상서스러운 구름이라는 의미를 가진 지명이다. 가뭄이 들어 모두가 비를 기다릴 때 이곳에서 바라보면 계양산에 상서스런 구름이 뜬 뒤 비가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지어진 지명이다. 그러나 옛날 문헌들에 이 지명은 없으므로 광복 후에 명명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옛 문헌의 지명은 '도두리( 道 頭 里 )'였다. 도두머리 부평의 안산 격인 망동산 줄기가 동쪽으로 흘러와 이곳에 이르러 동 산을 이룬 터라 동두( 東 頭 ), 즉 동쪽의 머리라고 했는데 동어반복으로 동두머리가 되고 그것이 음운이 탈락되어 도두머리가 된 것이다. 혹은 부평에서 서울로 가는 길의 머리였으므로 그렇게 불렀다는 설도 있다. 한다리 이곳을 지나 흐르는 직포, 즉 굴포천 위에 놓였던 다리를 우리말 지 명으로 '한다리', 한자로는 대교( 大 橋 )라고 불렀다. 조선 말기 고종 때에 무지개 형태의 홍예문을 세 개나 만들었다고 부평부읍지 에 전한다. 부평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이라 통행이 잦은 명물이었다. 일제말기 국 방도로를 만들며 헐려 버렸다. 216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219 5) 박촌동( 朴 村 洞 ) 박촌말 부평 제1의 대성( 大 姓 )인 밀양박씨가 많이 살아 붙여진 지명이다. 마가묘말 옛날에 마 씨( 馬 氏 )의 무덤들이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송현말 박촌말의 금계봉 줄기가 동쪽으로 더 흘러가서 끝부분에 소나무 동 산을 이루었고 그 아래 마을이 들어섰다. 그래서 붙여진 지명이다. 금계봉( 金 溪 峯 ) 박촌말에 뻗쳐와 있는 계양산 동쪽의 한 봉우리로서 아름다운 계곡 이 있어서 붙은 지명이다. 일명 적유봉( 狄 踰 峯 )이라고도 하는데 병자호 란 때 월곶첨사 김득남 장군이 굴포촌의 다리를 필사적으로 사수하여 청나라군사는 자기들이 다리를 놓고 건너서 이 산을 넘어 이동했다고 하여 '오랑캐가 넘어간' 의미를 살려 적유산이라 했다고 한다. 6) 동양동( 東 陽 洞 ) 동양리 예로부터 이곳에 동녘말과 양지말이 있었다. 두 곳을 합해 한 자씩 따서 동양리라 하여 유래된 지명이다. 동녘말 가장 동쪽에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당뫼의 바깥쪽이어서 '바깥당 뫼', '바깥당미'라고도 한다. 인천의 지명 유래 [부평구, 계양구, 서구] 217

220 당산( 堂 山 ) 당뫼 당미 우리말 지명으로 '당뫼'라고도 한다. 동양동의 맨 끝에 있는 산이며 당굿을 하던 장소라 '당뫼', '당산'이라고 한다. 혹은 산세가 둥글게 생 겨서 '둥그재산'이라고도 한다. 요즘은 '당미'라고도 부르나 '당뫼'가 단 모음화된 것이다. 7) 귤현동( 橘 峴 洞 ) 귤현 구부러진 고개라는 뜻이다. 이 마을에 구부러진 고개가 있어서 ' 굴현( 堀 峴 )'이라 했는데 귤현( 橘 峴 )으로 잘못 표기되어 그것이 지명 이 되어 버렸다. 큰말 김포국도에서 김포방향으로 가는 길에 성황당 고개가 있다. 이 고개 를 넘어 내려가다가 오른쪽 산기슭을 끼고 돌면 보통곡( 普 通 谷 )이라는 골짜기가 나오고 그곳을 지나면 큰 마을이 나온다. 부근에서 가장 큰 마을이라 그런 지명이 붙었다. 방터 귤현다리 근처에 솔밭이 무성한 지대가 있는데 이곳을 '방터'혹은 방 기산( 方 基 山 )이라 한다. 방씨들이 이주해와 터를 잡고 많이 오랫동안 살아서 붙은 지명이다. 218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221 8) 상야동( 上 野 洞 ) 우리말 지명은 '윗벌말'이다. 드넓은 벌판 가운데 있어서 붙은 지명 이다. 한자 지명으로 고치면서 윗벌말을 상야리, 아랫벌말을 하야리 라 하였다. 9) 평동( 平 洞 ) 벌판 가운데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우리말 지명은 '벌말'이다. 10) 노오지동( 老 吾 地 洞 ) 옛날에 깊은 연못이 있었는데 거기 오래 묵은 잉어가 살았다. 그래 서 '노어지( 老 魚 池 )'라 불렀는데 음운이 변화해 '노오지'가 되고 한자 지 명도 다르게 쓰여졌다. 줄미 옛 문헌 자료는 노오지동을 한글로 '줄미'라고 적었다. 산에 묘가 줄 을 지어 있어서 '줄뫼'라고 했는데 그것이 단모음화한 것이다. 11) 선주지동( 仙 住 地 洞 ) 제방을 쌓기 전에 한강 물이 이곳까지 들어오고 배를 대는 곳이어서 '선주지( 船 駐 池 )'라 하였다. 혹은 큰물이 들 때 여기 배를 대고 수재민 들을 구해 실어날라 '선주지리( 仙 舟 之 里 )'라 했다고도 한다. 이것들이 잘못 기록되어 '선주지리( 船 住 地 里 )'가 되고 '신선이 사는 땅'이라는 의 미로 바뀌어 버렸다. 인천의 지명 유래 [부평구, 계양구, 서구] 219

222 오미들 마을 서남쪽에 있는 넓은 들을 말한다. 12) 이화동( 梨 花 洞 ) 제방을 쌓기 전에 한강 물이 이곳까지 들어오고 배가 드나드는 곳이 어서 '배곶( 船 串 )'이라고 하였다. '배고지', '배꼬치'로 불리기도 했는데 한자 지명으로 바꿀 때 잘못 인식하여 배꽃[ 梨 花 ]이 피는 동네가 되어 버렸다. 한자 지명 작업을 할 때 이곳이 한강물과 멀어 단순히 생각한 때문이었다. 13) 오류동( 梧 柳 洞 ) 오류 오리울, 오릿골, 오류올 등의 우리말 지명도 있었다. 오동나무와 버 드나무가 마을입구에 많이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 혹은 오리나 무가 많아서 그렇다고도 한다. 윗말과 가운뎃말, 아랫말이 있다. 진등말 긴 등성이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긴등'이라고도 하는데 장기( 場 基 )에서 태리( 台 里 )로 향하는 등성이에 한국전쟁 때 월남해 온 피난민 들이 정착하며 이 마을이 생겨서 붙여진 것이다. 가운뎃말 오리울 윗말과 아랫말 사이에 있는 마을로 '골밭'이라고도 한다. 이 곳에 고려시대에 수주( 樹 州 ) 관아 소재지로서 그 자취가 최근까지 남아 있었다. 220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223 거수골말 큰 나무가 있어서 거수( 巨 樹 )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혹은 이곳 에 고려시대에 수주향교가 있어서 선비들이 모여 학문에 열중했기 때 문에 유리된 지명이라고도 한다. 말머리산 거수골 동북쪽 뒷산이다. 이 산 기슭에 수주향교가 있었다고 전한 다. 그래서 으뜸가는 산이라는 의미로 마루머리산이라고 변화되어 말 머리산이 되었다. 14) 갈현동( 葛 峴 洞 ) 산에 칡이 많아 갈산( 葛 山 ), 우리말 지명으로는 '칙미', '갈미'라고 했 다. 행정 명칭도 부평군 황어면 갈산리였는데 1990년대에 부평구에 갈 산동이 따로 있어서 중복을 피하기 위해 갈현이라 하였다. 1961년의 국가표준지명 에 이곳은 부천군 계양면으로 실려 있는데 기록된 지명은 '갈산리'이다. 하오개 이 마을에 있는 고개로 학고개[ 鶴 峴 ]가 자음탈락 현상으로 하오개가 되었다. ㄱ음이 중복되어 하나가 탈락했고, 국어에서는 1 모음 아래 ㄱ이 탈락하는 것이 두드러진 현상이다. 만가벌 갈현동, 둑실동, 목상동 사이에 걸쳐 있는 큰 벌판으로 계양산에서 흘러온 개울의물이 넉넉하여 1만 개의 집들이 농사를 지을 만하다고 하여 붙은 지명이다. 인천의 지명 유래 [부평구, 계양구, 서구] 221

224 15) 둑실동( 纛 室 洞 ) 한자 원음은 '독실'이지만 '둑실'로 읽는다. '둑'이란 임금이나 군대 가 이동할 때 앞에 세우는 일종의 군기( 軍 旗 )를 말한다. 조선시대에 임금이 부평에 행차할 때 마을의 집집마다 '둑'을 달아서 붙여진 지명 이라 한다. 고구랑굴 구구랑굴, 구주랑굴이라고도 한다. 고려 때 이곳에 무덤이 많아서 고려구묘굴이라 한 것이 음운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범무골 산골에 깊이 숨은 마을로 호랑이가 없던 골짜기라 붙여진 지명이다. 음운이 변해 '범어골', '봄모골'이라고도 불리웠다. 봄모골을 한자로 춘 모동( 春 牟 洞 )이라 표기하였다. 16) 목상동( 木 霜 洞 ) 나무서리 계양산 북쪽으로 나무가 무성하게 많아서 '나무소리'라 한 것이 '나무 서리'가 되고, 한자지명으로 표기할 때 '서리'를 서리( 霜 )로 잘못 인식하 여 바뀐 지명이다. 이매산 계앙산 줄기로서 수림이 무성한 채로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이다. 아메산, 앞메산이라고도 한다. 222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225 윗말 윗나무서리라고도 한다. 계양산 줄기인 아매산의 북쪽에 있는 마을 이다. 나무서리마을로서는 위쪽에 해당된다. 말등매산 계양산 줄기가 북쪽으로 뻗어 이 마을까지 이른 봉우리를 말하며 '말산', '말동산'이라고도 한다. 말의 잔등처럼 생긴 형상이라 붙은 지명 이라 한다. 호곡산( 虎 谷 山 ) 호랑이가 사는 굴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17) 다남동( 多 男 洞 ) 여아에 비해 남자 아이 출산이 유난히 많고 남자 인구가 많아 붙 은 지명이다. 본래는 '다랑이[ 多 郞 ]'이었는데 1914년 일제가 전국측량 을 끝내고 지명을 한자로 적을 때 보다 쉬운 '다남'으로 적어 생긴 지 명이다. 조선시대에 역참의 하나인 금륜역( 金 輪 驛 )이 있어서 금륜, 역동, 역 말, 역골 등으로 불리웠는데 남자 인구가 많다는 특징이 강조되어 지 명이 바뀌었다. 1961년의 국가표준지명 은 '역동'이라 기록했다. 한우재 다남동에서 계산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하늘같이 높은 고개라는 의미, 혹은 고개가 매우 높아 거어서 넘으려면 땀이 비 오듯이 많이 나는 고개라는 의미로 지어진 지명이라 한다. 인천의 지명 유래 [부평구, 계양구, 서구] 223

226 18) 장기동( 場 基 洞 ) 이곳에 황어장터가 있어서 '장이 서는 곳'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지명이다. 19) 임학동( 林 鶴 洞 ) 전략적 요충인 계양산의 밑이라 군대가 주둔하고 군막( 軍 幕 )이 있었 으므로 '예막골', '이막골'등으로 불리웠는데 한자어로 표기할 전혀 의미 가 다른 '임학'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곳이 백로의 주요 서식지였긴 하지만 두루미의 서식과는 관련이 멀다. 응오니고개 전란이 일어나 계양산에서 전투가 일어날 때마다 백성들이 모여 우 군이 이기기를 응원하던 곳이라 붙은 지명이라 한다. 20) 용종동( 龍 宗 洞 ) 이 마을을 향해 뻗어온 계양산 줄기의 형상이 마치 용의 등마루( 宗 ) 와 같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21) 병방동( 兵 房 洞 ) 조선 세조 때 계양산에 성을 쌓고 이곳에 군대가 주둔하는 병방 을 두었으므로 붙여진 지명이다. 이곳의 병방은 오래 가지 못하고 폐지되었다. 224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227 22) 방축동( 防 築 洞 ) 마을 앞에 크고 긴 방죽이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쇠루지고개( 釗 老 之 峴 ) 다남동에서 방축동으로 넘어오는 고개이다. 옛날에 뇌를 녹여 창과 검을 만들어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 인천의 지명 유래 [부평구, 계양구, 서구] 225

228 3. 서 구 서곶과 검단의 지명 유래 인천광역시 서구지역은 지난날 서곶( 西 串 )과 검단( 黔 丹 )이었다. 지금 도 토박이들은 별도지역으로 인식하고 있고 검단이 독립되어 분구될 가능성도 크다. 검단지역이 편입되기 전, 인천의 서구 전역은 지난날 서곶으로 불리던 곳이었다. 1914년 4월 1일 부평군 모월곶면과 석곶면 을 통합해 서곶면이라 하였다. 지명은 군소재지인 부평에서 서쪽 해안 에 길게 뻗어있으므로 그렇게 지어졌다. 이 지명이 반세기 이상 사용 되었으므로 인천시가 구제( 區 制 )를 변경하여 서곶출장소를 폐지하고 북 구에서 서구를 분리할 때, 서곶구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서곶은 '서쪽으로 길게 뻗은 해안'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지명이다. 동아출판사가 발행한 국어사전 에 의하면 우리말의 '곶'또는 '고지'는 바다나 호수로 길게 뻗은 육지의 끝부분을 가리킨다. 그리고 장산곶이 나 장기곶처럼 지명 뒤에 붙어 바다로 뻗어나간 곳이라는 의미로 확장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인천이라는 고유 지명에 '곶'자를 붙이면 인 천의 한 해안지역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지칭되는 것인데, 주지하는 바처럼 서곶은 그렇지 않다. 한자로 표기할 때는 땅이름을 나타내는 '곶 ( 串 )'자를 차용하는 것이 위의 장산곶이나 장기곶처럼 일반화되어 있다. 검단은 이곳의 해안이 넓은 갯벌로 되어 있는데다가 개흙이 유난히 검어서 검( 黔 )자를 쓰고, 드넓은 갯벌이 석양에 낙조가 시작되면 그것 이 마치 홍학의 날개와 같이 아름다워서 단( 丹 )자를 써서 그렇게 부르 게 되었다고 말한다. 한편으로는 검( 黔 )이 신성하고 으뜸이라는 뜻을 가졌고, 단( 丹 )은 제 226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229 단을 나타내기도 하므로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제단'이라 는 거룩한 뜻을 가졌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실 초기 백제의 도읍지라 고 추정되는 하남시의 위례성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검단이라는 지명 이 있다. 그리고 검단의 검( 黔 )자 외에 검소할 검( 儉 )과 소매 금( 衿 )자로 표기 된 경우도 있었다. 16세기 문헌인 신증동국여지승람 에 는 검소할 검, 18세기 후반의 호구총수 에는 검을 검, 19세기 후반의 김포군읍지 는 소매 금을 썼다. 이것은 모두 우리말의 어떤 고유어를 음차하여 쓴 때 문이다. 1) 마전동( 麻 田 洞 ) 마전동에는 마전, 여래, 가현, 원현, 능내, 완정, 청마 등의 오래된 마을이 있다. 마전( 麻 田 ) 삼바지를 한자어로 표기한 것이다. 지금도 토박이 노인들은 삼바지 라고 부른다. 이 삼바지는 '삼밭이'에서 음운변화한 것으로 보이는데, '밭'을 관습상 대표음화시켜 '받'이라 부르게 되고 거기 접미사 -이가 붙어 구개음화된 것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이 마을에 예로부터 삼( 麻 ) 을 많이 심어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고 모두들 믿고 있는데 특산물이 지명으로 정착하려면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중종 25년(1530)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에 는 김포 토산품으로 마를 기록하지 않았다. 인천의 지명 유래 [부평구, 계양구, 서구] 227

230 여래( 如 來 ) 현 검단초등학교의 소재지이자 지난날 면사무소와 경찰지서가 있었 던 곳이다. 전래되어 온 명칭은 '여리'였고 지금도 토박이 노인들은 그 렇게 부른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이 곳을 지나던 풍수쟁이가 마을 이 름을 '여래'로 고치면 번영하리라 하여 그렇게 고쳤다고 하고, 혹은 옛 날 마을에 마음씨 착하고 적선을 잘하던 스님이 살았는데 그를 기리기 위해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가현( 歌 絃 ) 검단지역의 가장 큰 산인 가현산(해발 215m)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옛날에는 '간약골'로 불렀는데 마을 뒤에 가현산이 앉아 있어서 그렇게 바뀌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단순하지가 않다. 가현산의 옛 이름 은 가린산이었고 그래서 가린골이라고 불렀는데 음운이 변화하여 가련 골로, 가련골이 다시 간약골로 바뀌었다. 국어 고어에서 '갈'은 크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으므로 가린골은 큰 골이 있는 산, 가린골은 큰 골, 즉 큰 골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러가현산 각종 지리서에 그 가린산이 가현산으로 기록련골서 마을이름도 가현으 로 비롯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검단의 토박이 노인들은 자을 간약골이 라고 부른다. 원현 오늘날의 검단사거리이다. 원현은 역원이 있던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역원이란 조선 초기 국가가 역마가 달리는 역로의 인가가 드문 지역에 여관을 열어 쉬어가게 하는 시설이었다. 이곳에 역원이 있었다는 기록 도 있고 '원터'라고 구전되어온 것도 있다. 그리고 기와 조각이 발견되 기도 하거니와 고을 사또가 이곳에서 묵을 때 정조를 지키다가 죽은 처녀의 혼령이 나타나 신원( 伸 寃 )을 해 주었고 정조문( 貞 操 門 )을 세워 주었다는 전설도 있다. 228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231 능내( 陵 內 ) 전래된 지명은 능안이다. '능안'이라는 지명은 왕이나 왕족의 능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 지명으로 전국에 수많은 곳에 같은 지명이 있 다. 이 마을 골짜기 안에는 2기( 基 )의 고분이 있었고 그중 하나가 ' 강릉'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리고 주변에는 망부석 등 석물들이 땅 속에 묻혀 있다. 완정( 完 井 ) 토박이들이 부르는 지명은 '완재이', '완쟁이'이다. 전설로는 이 마을 우물의 물맛이 좋아 '완전한 우물'이라는 뜻으로 붙였다는데 그런 우물 이 없으니 근거가 약하다. '완정리( 完 丁 里 )'라고 쓴 기록도 보이는데 '완 전한 장정'이라는 의미로 추론이 된다. 그러나 고어에서 정( 井, 丁, 亭 ) 이 마을 이름을 짓기 위해 단순히 사용한 경우가 많으므로 분명하게 짚어 설명하기는 어렵다. 청마( 靑 麻 ) 마전의 어원이 되는 삼바지 마을이다. 예로부터 마을 많이 심어 온 마을이라 이런 지명이 붙었다 하다. 2) 당하동( 堂 下 洞 ) 원당의 아랫마을이라는 듯으로 붙여진 지명으로 독정, 신기, 광명, 족저 등의 오래된 마을이 있다. 독정( 獨 亭 ) 마을 중심부인 건넛말(양단말)의 뒷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 의 밑자락, 곧 건넛말 입구에서 마을회관을 향한 오른쪽 언덕에 '정자 인천의 지명 유래 [부평구, 계양구, 서구] 229

232 목'이라 부르는 큰 소나무가 있었다. 지난날 그 아래 큰 정자가 있었고 그 큰 소나무를 정자목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정자에서 유래하여 독정 이라는 지명이 붙은 것으로 토박이들은 믿고 있다. 그런가 하면 마을 서편에 독을 굽던 옹기가마가 있어서 독정이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볼 수도 있다. 정자 옆의 500년 된 큰 소나무는 고사( 枯 死 )했고 가마터는 산업화에 밀려 사라졌다. 지금은 지명만 남아 있다. 신기( 新 基 ) 예로부터 새텃말로 불리던 마을이다. 새텟말, 새템말, 새탬말 등도 있으나 근원은 새텃말로 보인다. 전주이씨 집성촌인데 10대 전에 말뜻 그대로 이곳으로 와서 새로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한 곳이라 붙여진 이 름이다. '신기'는 1914년 일제가 전 국토의 삼각 측량을 끝내고 모든 지명을 한자로 붙일 때에 편의상 그렇게 해석해서 붙였다. 광명( 光 明 ) 비가 갠 뒤 멀리서 이 마을을 바라보면 아침 햇살이 유난히 맑아 붙 은 지명이라 한다. 혹은 옛날에 마을 뒷산에서 봉화를 올려 마을이 환 하게 보여 그런 지명이 붙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여기 봉수대가 있었 던 기록이나 흔적은 없다. 이 마을은 '광메이', '광맹이', '괭매이', '괭매 기'로도 불리는데 모두 광명에서 음운이 탈락한 것이다. 광명마을의 마을화관 일대를 텃골, 중심부라 하여 본동, 느티나무가 있다 하여 느타나무말이라고도 한다. 족저( 足 儲 ) 예로부터 산수가 아름답고 인심이 좋으며, 집집마다 복을 받아 돈다 발에 묻힐 정도로 부유한 마을이어서 저축할 '저( 儲 )'자를 써서 그렇게 불렀다 한다. 그러나 국어 음운론적으로 본다면 '저'는 한자의 본래 의 230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233 미 저축 외에 담이나 동산의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족'은 발이라는 의 미 외에 당제나 굿을 나타내는 지명으로 사용되었다. 원당 마을에 천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당이 있었고 이곳은 원당의 발치 아래여서 족저 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볼 수도 있고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장소라는 의미로도 유추할 수 있다. 3) 금곡동( 金 谷 洞 ) 금곡동은 금곡, 좌동, 신동 등의 오래된 마을이 있다. 금곡( 金 谷 ) 예로부터 쇳골로 불러온 마을이다. 금곡리 산 200번지 일대를 '동은 터'라고 부른다. 지난날 금, 은, 동 광산이 있었고 1950년대 말까지 철 광석이 생산되었다. 지금은 폐광의 흔적만 남아 있다. 선사시대에는 금속에 대한 지배권을 가진 사람이 부족장이 되기 마 련이었다. 금곡리 주변지역, 대곡동의 두밀과 황곡, 김포시의 양촌면 마산리 일대에 지석묘들이 있는데 이것들과 원당, 당하의 족저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좌동( 佐 洞 ) 옛날에 남원양씨( 南 原 梁 氏 ) 선조 터의 왼편에 마을이 형성되어 왼쪽 마을이라는 뜻으로 생긴 지명이라 한다. 혹은 옛날에는 자하동이라 했 는데, 지명이 좌동( 左 洞 )으로 변한 뒤 마을의 형상이 왼손을 편 것과 같다는 것을 안 망해사( 望 海 寺 ) 주지스님이 사람 인( 人 ) 자를 붙여야 번영할 것이라 하여 도울 좌( 佐 )로 고친 것이라 한다. 인천의 지명 유래 [부평구, 계양구, 서구] 231

234 신동( 新 洞 )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이지만 최근의 일이 아니고 최근 지명도 아니다. 액200년 전에 대포리(인접한 지역이며 김포시에 속한다)에 살 던 전주이씨들이 이주하며 새 마을을 형성하며 명명한 것이다. 순수 우리말 명칭으로 새말이라고도 불렀다. 4) 오류동( 梧 柳 洞 ) 오류골, 봉화촌, 대촌, 금곡, 좌동, 신동, 반월동, 금호동 등의 오래 된 마을이 있다. 오류동 오동나무와 수양버들이 많아 그 의미를 살려 명명한 것이라는 설도 있고 마을 북쪽 들판에 오리가 많아 '오리울' 또는 '오리골'이라 했다가 변화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옛 문헌에 오류동으로 기록된 것이 없어 법정리는 아니고 자연취락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다른 취락들을 포괄하는 지명이 되었다. 봉화촌( 烽 火 村 ) 백석산( 白 石 山 )의 봉수 아래 있는 마을이라 붙여진 지명이다. 세종 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북으로는 통진 약산, 남으로는 부평 축곶산으로 이어지는 봉수였다. 봉수제가 본격적으로 시행인 것이 조선 초기이므 로 그때부터 있었던 마을로 보인다. 백석산은 해발 57m에 이르는 이 마을의 주산으로 정상이 석영으로 된 거대한 바위이며 매우 성스런 형상을 하고 있다. 옛날 봉수대가 있 었던 봉우리를 '봉우둑'이라 하는데 지금 흔적은 없다. 그 자리에 서면 사방이 일망무제로 탁 트이는 절경이고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이라 복원 할 가치가 있다. 232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235 대촌( 大 村 ) 백석산 남쪽에 있는 마을로 인근에서는 가장 규모가 커서 붙여진 이 름이다. 큰말이라는 우리말 지명도 같이 썼다. 인접한 백석산 동남쪽 마을을 '모렴'이라 불렀는데 유래는 불분명하다. 1951년 단봉초등학교 개교 시에 검단의 '단'과 봉황새의 '봉'을 따서 교명을 단봉( 丹 鳳 )이라 했는데 이곳이 오류동이어서 오동나무를 좋아하는 봉황을 선택한 것이 라 한다. 반월촌( 半 月 村 ) 금호동( 金 湖 洞 ) 마을 서쪽에 있는 섬이 반월도여서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 혹은 마 을을 안고 있는 산의 형상이 반월형이어서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금 호동은 6 25동란 후 월남해 온 실향민들이 갯벌에 제방을 쌓고 간석 지를 만들어 입주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5) 왕길동( 旺 吉 洞 ) 왕길동은 대왕, 소왕, 사월, 안동포 등의 오래된 마을이 있다. 대왕( 大 旺 ) 왕길리의 여러 마을 중 가장 큰 마을로 옛날부터 큰외리로 불려 왔 다. 봉화촌에 면사무소가 있고 그 주변에 있는 마을들을 외리라고 부 른 것이었다. 그러다가 지명을 한자음으로 바꿀 때 왕성하게 번영하라 는 기원을 담아 대왕으로 고친 것이었다. 소왕( 小 旺 ) 작은외리로 불려온 곳으로 큰외리(대왕)의 서쪽, 단봉초등학교 남쪽 에 있는 마을이다. 인천의 지명 유래 [부평구, 계양구, 서구] 233

236 사월( 沙 月 ) 속사곶( 束 沙 串 )과 거월( 巨 月 ), 두 개의 취락이 있다. 속사곶은 속새 우지라고 부르는데, 옛날 해안에 제방을 쌓아 농토를 만들면서 속사, 즉 모래를 담아 묶은 가마니를 쌓아 만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 다. 거월은 큰 달이라는 뜻인데 유래가 분명하지 않다. 안동포( 安 東 浦 ) 왕길동의 서남단 곶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는 '부성개'라는 지명으로 불렀는데 그뜻은 '부자로 성실하게 사는 갯마을'이었다. 그런데 안동권 씨들이 들어와 살게 되면서 안동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간척사업을 하기 전 김포 검단지역의 대표적인 포구로서 중선배들이 포구에 가득 했었다. 6) 원당동( 元 堂 洞 ) 원당 원당은 당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경천( 敬 天 )사상을 바탕 으로 한 원시 재래신앙, 혹은 무속적인 행위로 펼쳤던 제천행사의 제 단으로 보이는 현장이 산 중턱에 있다. 우리말로 '원데이'라고도 한다. 발산( 鉢 山 ) 바리때기 산이라는 의미이다. 마을의 형상이 남쪽만 트이고 동, 서, 북쪽이 산으로 둘러싸여 마치 바리때와 같기 때문이다. 예로부 터 '바리뫼'로 불려오다가 '바리미'로 변화했는데 1914년 일제가 모든 지명을 한자로 표기할 때 바리 발( 鉢 ) 자를 붙여 행정상 지명으로 사용 한 것이다. 234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237 고산후( 高 山 後 ) 옥계봉에서 송우산에 이르는 산줄기를 고산이라 부르는데 그 산의 뒤편에 형성된 마을이라 고산후라 불렀다. 7) 불로동( 不 老 洞 ) 불로 마산( 馬 山 ) 불로는 늙지 않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만수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 이 있고 그곳에 칡이 많아 장수한다는 의미를 갖는데 거기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마산은 마을에 마산 혹은 말무덤이라 부르는 해발 55미터 정도의 구릉이 있는데 그 형상이 긴 무덤과 같아 그렇게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조선시대는 행정명칭이 마산리였으며 마산면으로 불리던 때가 있었다. 목지( 木 枝 ) 옛날 이 마을에 당이 있었고 당 뒤에 있던 큰 나무의 가지가 당을 덮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이곳이 지형적으로 중요한 길목이라 그렇게 불렀다고도 한다. 전래된 우리말 지명은 '게기'인데 '된고개'가 음운변화한 것이다. 이곳에서 원당으로 가는 금정산 서쪽 고개가 매우 높고 험해서 다니기 힘들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지명이다. 갈산( 葛 山 ) 이 마을 앞에 있는 만수산이 칡이 많아 칡 갈( 葛 ) 자를 써서 붙인 지명이다. 전래된 우리말 지명은 '갈메' 혹은 '갈메울'이다. 인천의 지명 유래 [부평구, 계양구, 서구] 235

238 8) 대곡동( 大 谷 洞 ) 대곡 대곡은 큰 골이라는 뜻이다. 이곳의 취락들이 가현산의 동남쪽 큰 골에 위치하고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태정 조선 선조의 옹주인 정숙옹주가 황곡에 살면서 출산하고 태를 이 곳 뒷산에 묻었다 하여 태정( 胎 亭 )이라 했는데 바뀌었다고 한다. 우리말 지명으로 '태제이'라고 하는데 태정을 이르는 말이다. 두밀( 斗 密 ) 두밀은 분지처럼 사방이 막힌 곳을 가리키는 의미이다. 우리말로 된 말을 한자음을 빌어 표현한 것이다. 황곡( 黃 谷 ) 전래된 우리말 지명은 '황골', '황굴'이다. 땅이 비옥해서 늘 풍년이 들고 들판이황금물결 친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설원( 設 院 ) 옛날에 고위 관리나 왕족이 행차하던 중에 묵고 가던 원이 이 마을 에서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 그런데 서원( 鋤 院 )이라는 기록도 보인다. 전래된 대표적인 지명은 설원이었다. 236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239 9) 백석동( 白 石 洞 ) 백석 흰 돌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한돌, 한둘, 한들 등으로도 불린다. '흰돌'이라는 마을의 뒷산인 한뫼산에 흰 돌이 많기 때문에 붙여진 것 이다. 그러나 재래지명 '한들'의 해석 오류라고도 볼 수 있다. 이곳의 한들 부락은 검단으로 가는 서곶로 국도를 타고 달리면 왼쪽에 보이는 마을인데 커다란 무논지대를 끼고 발달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마 을의 원로들은 '한들' 또는 '한둘'이라고는 하지만 '흰돌'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넓은 벌판을 가로지르는 큰 둑을 '한들방죽'이라고 일컫는다. 독정 독정이는 독재이 또는 음달 마을이라고도 부른다. 같은 지명을 가진 한국의 많은 지역이 그런 것처럼 옹기 가마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하는 원로들도 있다. 50~60년 전에 이곳에 옹기 가마가 있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이훈익의 인천지명고 는 다른 해석을 하였다. 이곳에서 대를 이 으며 살고 있는 광산김씨 선대에서 관찰사를 지낸 사람이 이주해 와 서 자기의 아호대로 독정( 篤 亭 )이라는 정자를 지은 뒤 붙여진 지명이라 고 했다. 거월리( 巨 月 里 ) 독정이 사거리에서 서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 나타나는, 지 난날 해안에 닿아 있던 부락이다. 한 쪽 면은 왕길동에도 닿아 있다. 물론 지금 바다는 매립되어 없고, 이 오솔길 옆으로는 매립지 도로가 관통하고 있다. 거월은 큰 달이라는 뜻 그대로 이 마을에서 달이 유난 히 크게 보이기 때문이라고 원로들은 유래를 설명한다. 인천의 지명 인천의 지명 유래 [부평구, 계양구, 서구] 237

240 유래 의 서구편을 집필한 조찬석 교수(인천교육대학교)는 '달'이 들어간 지명이므로 농사의 풍요와 마을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는 천신제를 지 낸 마을의 뜻을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10) 시천동( 始 川 洞 ) 시천 우리말 지명은 '시시내'로 시내가 시작된다는 뜻을 가진 지명이다. 계양산 서쪽에서 시작되는 큰 계곡을 끼고 있어 그런 지명이 저절로 붙었다. 한자음으로 시천천( 始 川 川 )인데 이 마을의 앞자락으로 흐른다. 계양산의 서북쪽 계곡에서 발원한 것으로 '시천들'이라는 들판을 비옥 하게 적셔준다. 이 마을은 한강의 서쪽 방향에 우뚝 솟은 계양산 쪽으 로 깊숙이 들어앉은 지형적 특성 때문에 고려시대 전략상 요충지였다 고 전한다. 점말 동이를 구워 파는 동이점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최근에도 이 지 명이 사용된다. 그러나 지금은 민가가 거의 없다. 안골 갯골에서 동쪽 성황당 고개로 올라가는 곳에 있다. 갯골은 시천동의 끝부분, 지난날 방파제를 막기 전에 이곳까지 배가 들어와서 붙여졌던 이름이다. 꽃뫼와 구슬원 꽃메 또는 화산( 花 山 )이라고 부르는 작은 산이 있다. 마을 앞산으로, 계양구 목상동으로 넘어가는 쪽에 있다. 꽃봉오리 형상이어서 붙여졌 238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241 다. 구슬원( 球 瑟 院 )이라는 여각촌이 꽃뫼 밑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곳에서는 왕도 개성과 삼남지방을 왕래하는 길목으로, 손님을 끌기 위 해 공치기 놀이와 비파를 뜯었다고 전한다. 삽작굴 삽자골 揷 紫 谷 이라고도 한다. 꽃뫼 바로 밑에 있다. 나무를 꽂아 심었다는 뜻으로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지금은 변전소가 들어와 있다. 11) 검암동( 黔 岩 洞 ) 지난날 바로뫼, 검바위, 간재울 등 세 개의 자연취락이 자리잡고 있었다. 바로뫼는 서곶로를 중심으로 위쪽이라 상동이라고도 하고, 검바위는 중간이라 중동이라고도 하며, 간재울은 아래쪽이라 하동이라 고도 한다. 바로뫼 '바로 산 아래 있는 마을'의 의미였다고 원로들은 말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발아현( 發 阿 峴 )이라는 고개 이름도 있고 발아장( 發 阿 場 )이라는 저 잣거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여기서의 한자 표기 발아( 發 阿 )는 위의 '바로'의 음차로 보인다. 오늘의 우리말 부사 '바로'는 중세어에서 '바 ' 였다. 발아현은 고려시대부터 지금의 신작로가 생기기 전까지 국도 구 실을 하는 길의 고개였다. 지금의 서곶로에서 동사무소 곁을 스쳐 오 른쪽으로 올라가는 고개를 가리킨다. 옛날에 바로뫼에 면사무소가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모 월곶면의 중심지였던 듯하다. 그러다가 부평부가 관할 동리 명을 확정 할 때 세 취락을 검암리( 黔 岩 里 )와 간재리( 艮 才 里 )로 구분해 명명하였 인천의 지명 유래 [부평구, 계양구, 서구] 239

242 는데 구한말에 다시 검암리 하나로 통합되었다. 검바위 검암동의 세 취락을 대표하는 지명이 되었지만 이 마을에 거대한 검 은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 이 바위를 서인천고등학교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파트 한 채가 누워 있는 것만큼 큰데, 색깔 이 완전한 검정색이어서 이 마을의 가장 저명한 지형지물이 됨을, 그 래서 검바위란 지명이 붙여졌음을 금방 알 수 있다. 이 검바위 위쪽에는 고인돌도 있다. 이 마을을 벗쩍말이라고도 하는데 까닭을 알 수 없다. 간재울 검바위의 아랫마을이다. 인천 지명고 는 이 마을이 북동쪽을 등지 고 앉았다는 뜻의 간방( 艮 方 )에서 유래한다고 설명한다. 동양의 전통적 인 방위개념으로 보면 간방은 북동을 중심으로 한 15도 범위 내의 방 위를 말한다. 풍수지리에서 이 간방을 등지고 앉음은 매우 안정된 것 이다. 이 마을이 처음에는 간좌울이었다가 간재울로 음운이 변화한 것 이라고 인천지명고 는 설명한다. 12) 경서동( 景 西 洞 ) 경서동은 경명현 서쪽에 있다고 하여 붙인 지명이다. 고잔( 古 棧 ), 범 머리 虎 頭, 심포리( 沈 浦 里 ), 빈정촌( 濱 汀 村. 過 騎 平 이라고도 한다) 등 네 개의 자연취락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앞바다에 난지도( 蘭 芝 島 ), 청라도( 靑 蘿 島 ), 세어도( 細 於 島 ) 등의 섬들을 안고 있었다. 이 섬 들은 경사가 약한 갯벌 위에 놓여 있어서 썰물 때는 걸어서 왕래할 수 있었다. 240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243 고잔 경서동의 본마을이다. 계양산의 활기가 바다를 향해 뻗쳐나가 작은 반도를 이룬 지역에 앉은 마을로 넓은 의미로는 경서동의 여러 소규모 취락을 포괄하기도 한다. 경서동이 고잔이라는 재래의 지명을 버린 것 은 국내에 같은 지명이 무수히 많기 때문이었다. 고잔( 古 棧 )의 어원은 이렇다. 해변을 향해 쭉 뻗어간 곳을 '고지' 또는 '곶( 串 )'이라고 부르 고, 곶 바로 앞에 우묵하게 패여 있는 곳을 '곶+안'으로 합성하여 만든 말이다. 그래서 리아스식 해안이 발달한 서해안에는 많은 동명이소( 同 名 異 所 )가 있다. 인천에도 오늘의 중구 일대, 남구 고잔동, 서구의 석 남동, 그리고 이 곳 경서동까지 4곳이나 있다. 범머리 虎 頭 산 이름이자 마을 이름이다. '버머리'라고도 불렀는데, 인근 연희동의 바다로 뻗어간 반도를 용의머리라고 부른 것과 대칭이 된다. 2~3km 떨어진 두 마을은 그렇게 바다로 뻗은 반도가 대응되어 조화를 이루었다. 심포리 고려시대에 수군기지가 있었던 바다 쪽 포구 마을을 가리킨다. 심포 ( 沈 浦 )란 포구가 물에 잠겼다는 뜻이다. 곰말과 골프장 사이로 길게 자 리잡은 마을이다. 빈정촌 빈정천이 지나가는 빈정교 주변 마을을 가리킨다. 빈정천은 계양산 서록에서 발원하여 서해로 흘러가는 수량이 풍부한 하천을 가리킨다. 이 하천은 상류에서 공촌동을 지나오기 때문에 공촌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국립지리원의 지도에 표시된 지명은 빈정천이다. 서곶로 에서 국제컨트리클럽 간판을 보고 서쪽으로 진입하는 길의 오른쪽은 윗독점(검암동 쪽)이고 왼쪽(연희동 쪽)은 아랫독점이라고 부른다. 지난 인천의 지명 유래 [부평구, 계양구, 서구] 241

244 날 이 곳에 가톨릭 신자들이 모여들어 공소( 公 所 )를 열고 옹기를 구웠 는데 가마가 위아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빈정촌과 아랫독점은 동일하 다고 보아도 된다. 과기평( 過 騎 平 ) 위의 빈정촌, 독점 등을 아우르는 지명이기도 하다. 병인양요 후 이곳에 계우정( 桂 虞 停 )이라는 군사기지가 설치되고 기병들이 말을 달려 지나는 곳이라 그런 이름이 붙었다. 이 마을 출신 원로들은 괴기펄이 라고도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과기벌'의 음운변화로 보인다. 난지도 옛날에 한약재의 명약 난지초( 蘭 芝 草 )가 자생했기 때문이라고 전한 다. 난점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난지염'의 음운변화인 듯하다. 사멸 된 우리말에 '염'이라는 것은 섬과 동의어였던 것이다. 난지도는 뭍과 워낙 가까운데다 간척사업을 하면서 만든 방죽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섬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육지화되었다. 40~50년 전에는 인구가 50호 에 달했으나 지금은 한두 가구만 살고 있다. 청라도 청라경제특구의 지명이 된 섬이다. 난지도와 달리 뭍과 상당히 떨어 져 있었다. 청라( 靑 蘿 )는 푸른 넝쿨이라는 뜻이다. 섬에 푸른 넝쿨과 관목들이 무수히 많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그러나 편의상 붙인 한자지명이기도 하다. 경서동과 연희동의 뭍에 사는 사람들은 파란 섬이라는 뜻으로 '파렴' 이라고도 불렀는데 멀리 보이는 그 섬이 유난히 푸른색으로 보였다. 서곶 앞바다의 섬들 중 가장 컸으며, 그곳에 서곶초등학교의 분교가 설치되어 있었다. 242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245 그밖에 뱀섬[사도( 蛇 島 )], 까투렴, 노렴[장도( 獐 島 )], 범염[호도( 虎 島 )], 세어도 등의 섬이 경서동에 속해 있었다. 일부는 매립되어 사라지고 일부는 아직 섬으로 남아 있다. 13) 연희동( 連 喜 洞 ) 근대 서곶의 중심지였다. 연일과 샛말 등 두 개의 자연취락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바다를 향해 반도처럼 뻗쳐나간 곳이 있는데 그 곳을 '용의 머리'라고 부른다. 거기에도 작은 취락이 있었다. 연일 연희동의 본말이다. 신라시대부터 여자들이 모여 비단을 짰던 곳이 라고 전한다. 근방 여인들을 모아 직조 기술을 가르치던 교습소 구실 을 했다고도 전한다. 그래서 본래 '여희( 女 姬 )'라는 지명을 가졌었는데, 그것이 연일로 바뀌었다. 조선조에 이르러 여( 女 )자를 천하게 여겨 연 희동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 마을의 형상이 베틀에 앉아 베를 짜는 여인과 같아서 '여희'라는 지명이 붙었다는 전설도 있다. 두 가지 전설 이 모두 여인과 직조에 연결하여 지명 유래를 설명하는 공통점이 있 다. 그러나 연희동에 정작 비단과 베 직조의 근원이 되는 뽕나무밭이 나 삼밭은 남아 있지 않고 원로들도 그런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샛말 연희동과 공촌동의 사이에 끼여 있어 그렇게 붙여졌다. 1991년부터 시작된 도시개발로 인해 큰 도로가 관통해 나가고 자연취락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연희동 본말에서 샛말과 공촌동으로 가는 고개를 새꼬 랄고개라고 불렀다. 그리고 고개 밑에 있는 작은 취락을 새꼬랄말이라 고 불렀다. 고개의 모습이 새의 꼬리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어 그런 인천의 지명 유래 [부평구, 계양구, 서구] 243

246 지명이 붙었다. 지금 연희파출소가 있는 곳이다. 용의머리 연희동 본말에서 뻗어간 땅의 모습이 용과 같고 바다에 이른, 마치 용의 머리 같은 곳에 취락이 있어 그렇게 붙여졌다. 연희동에는 수군기지인 연희진( 連 喜 鎭 )과 해안 포대가 있었다. 병인 양요와 신미양요 뒤에 서해로 침범해 오는 서구 열강의 함선을 격파하 기 위해 1878년에 만든 것으로서 연희진은 연희동 247번지에 있었다. 포대는 용두산에 있어서 용두포대라고 불렀는데 군사적 요충이어서 앞 바다가 매립되기 전까지만 해도 국군의 해안 경비초소로 사용되었다. 서곶면사무소가 1914년에 연희진터에 들어섰다. 이 건물은 1940년에 인천부 서곶출장소로 바뀌었다. 1945년 광복 직후 명칭이 바뀌어 인천 부 서곶지청이 되었다. 이것은 1948면 8월 15일 정부수립과 함께 다시 출장소로 바뀌었다. 그리고 출장소가 현재의 서구 보건소 자리로 이전 한 뒤 한동안 건물이 보존되었으나 1990년대의 도시 개발로 없어졌다. 14) 공촌동( 公 村 洞 ) 공촌동은 부평과 서곶의 진산인 계양산의 서록( 西 麓 ) 아래에 위치하 고 있다. 옛 이름 고현리( 古 縣 里 )가 삼국시대 부평지역의 통치 중심지 여서 붙여진 이름이라 전하는데 확인할 길은 없다. 법정동의 변천과정 은 이웃 마을들과 같다. 지난날 부평부( 富 平 府 ) 모월곶면 소속으로 본 마을과 갈뫼[ 葛 山 ] 마을, 그리고 하천 건너편 과기평 마을 등 세 개의 자연취락이 자리잡고 있었다. 위의 경서동에서 설명한 것처럼 과기평 은 공촌, 경서, 검암동의 경계가 합쳐진 곳이다. 244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247 공촌( 公 村 ) '고현'에서 음운이 변한 것이 아니다. 마을 형태가 한자의 공( 公 )자와 같아서 지어졌다고 전한다. 한 능선의 동서에 마을이 앉아 계양산 정 상에서 내려다보면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다. 과기평 경서동에서 기술했으므로 설명을 생략한다. 갈뫼 '공( 公 )'자를 이루는 능선 너머 마을로 칡이 유난히 많아 붙여진 지명이다. 15) 심곡동( 深 谷 洞 ) 철마산( 鐵 馬 山 )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기피울과 양가말( 梁 家 村 )이라 는 두 개의 자연취락이 자리잡고 있었다. 옛날에 부평부가 관할 동리 명을 확정할 때, 두 곳을 합해 심곡리로 명명하였다. 심곡 옛 이름 기피울을 한자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가정동에서 승학현을 넘어와 연희동으로 가는 서곶로 국도 위쪽은 철마산 골짜기로 깊숙이 뻗어갔다. 그래서 기피울이라고 한 것이다. 양가말 서곶로 국도에 인접한 마을을 양가말이라 했다. 지금 극동아파트가 있는 자리이다. 양씨( 梁 氏 )가 많이 살아 그렇게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에는 고려 때부터 남원양씨가 많이 살았다고 하나 지금은 조선초 기에 이주해 온 김해김씨, 전주이씨, 풍천임씨( 任 氏 ) 등이 집성촌을 이 루며 살고 있다. 인천의 지명 유래 [부평구, 계양구, 서구] 245

248 절골말[ 寺 洞 ] 현재 인천시 공무원교육원이 있는 부분을 절골말이라고 불렀다. 옛 날에 절이 있어서 그렇게 부른 것으로 보인다. 80세가 넘은 원로들이 그 곳에 절이 있었다는 전설을 모르고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오랜 지 명인 셈이다. 이 절골말은 임씨( 任 氏 )가 집성촌을 이루며 오랜 세월 살 고 있어 임촌말이라고도 부른다. 16) 가정동( 佳 亭 洞 ) 철마산 옆을 넘어가는 승학현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여기부터가 북서곶, 지난날 석곶면이었다. 지난날 부평부 석 곶면 소속으로 가정마을과 산밑마을, 그리고 봉화촌이라는 세 개의 자 연취락이 자리잡고 있었다. 부평부가 관할 동리명을 확정할 때, 세 곳 을 합해 가정리( 佳 丁 里 )로 명명하였다. '가정( 佳 亭 )'을 잘못 쓴 것인데 한동안 그냥 통용되었다. 가정( 佳 亭 ) 이곳의 본마을이다. 명칭은 조선조의 개국공신 조반( 趙 胖 )이 말년에 이곳에 와서 가정( 佳 亭 )이라는 정자를 세운 것에서 유래한다. 그 뒤 이 마을은 가정촌으로 불리웠으며, '가경주'또는 '개경주'라는 변형된 지명 도 사용되었다. 봉화촌 마을 서쪽 바다에 가까운 마을이다. 부락이 등지고 있는 축곶산에 봉수가 있어서 그렇게 지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취락은 축곶산에서 방 아머리까지 서쪽으로 뻗쳐간 능선 아래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봉화재', '봉오재'또는 '봉우재'라는 변형된 지명도 사용되었다. 246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249 산밑마을 산밑주막이라고도 불렀다. 승학현 밑에서부터 지금의 경인고속도로 서인천 인터체인지까지 자리잡았던 마을을 가리키는 지명이었다. 승학 현을 넘어가는 고개 입구(현재의 한국전력 건물과 주유소 시설 뒤편)에 주막이 있었다고 전한다. 17) 신현동( 新 峴 洞 ) 석남동과 가정동 사이에 위치한 마을로 지난날에는 새오개 마을, 큰 말, 작은말로 나뉘어져 있었다. 앞에서 설명한 가정동처럼 지난날 석곶 면이었다. 법정동의 변천과정은 이웃 마을들과 비슷하다. 지난날 부평 부 석곶면 돌곶이[ 石 串 ]의 한자음 표기이다. 돌곶이는 오늘의 가정동, 원창동, 신현동, 석남동, 가좌동을 통틀어 부르던 지명이었다. 석곶면 소재지가 어디였는가는 불확실하지만 신현동이었던 것으로 인천지명 고 는 기록하고 있다. 신현 지금도 나이 많은 서곶 사람들은 새오개라고 부른다. 원창동에 세곡 의 하역과 보관을 위한 포리( 浦 里 ) 항구를 만들고 큰 창고를 지었다. 서울까지 육로로 실어가기 위해 새로 길을 닦으면서 고갯길을 만들 고 그 고갯길을 '새고개'라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음운변화되어 새오개가 된 것이다. '새고개>새오개'의 음운변화 등식은ㅣ모음 아 래에서 ㄱ이 탈락하는 현상으로 국어에서는 흔한 것이다. 옛날의 새 고개길은 마을 서쪽에 있으며 지금 도시화되어 알아보기 힘들지만 원 창동과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도당굿을 하던 도당산에 있어 도당재고 개라고도 한다. 인천의 지명 유래 [부평구, 계양구, 서구] 247

250 큰말 북쪽 취락을 큰말 또는 큰새오개라고 했다. 작은말 남쪽취락을 작은말 또는 작은새오개라고 불렀다. 18) 석남동( 石 南 洞 ) 원적산( 元 積 山 ) 기슭에 발달한 마을이다. 석곶면의 남쪽이라는 의미 였는데 지난날 번작리( 番 作 里 ), 고잔( 高 棧 ), 옻우물, 박가뫼말[ 朴 家 墓 村 ] 등 네 개의 자연취락이 자리잡고 있었다. 번작리 번지기로도 불린다. 옛날에 이곳은 포구였고 군대의 기지와 초소가 있어 근무당번을 정해 번을 섰던 터라 그런 지명이 붙었다. 포구 앞에 는 노송( 老 松 )들이 무성하게 우거진 둥근 형의 동산이 앉아 있었다. 두 루미와 백로 들이 마치 널어놓은 빨래처럼 앉아 있던 평화로운 곳이었 다. 그러나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오늘날 '거북시장'이라 이르는 저자와 그 아래쪽 마을이 옛날의 번작리이다. 고잔 해변을 향해 쭉 뻗어간 구릉을 이르므로 많은 동명이소( 同 名 異 所 )가 있다. 인천에도 오늘의 중구 일대, 남구 고잔동, 그리고 경서동까지 4 곳이나 있었다. 석남동의 고잔이 특이한 것이 있다면 유독 높을 고( 高 ) 자를 쓴다는 것이다. 이 곳 고잔은 1960년대만 해도 인가가 두세 채에 불과했다. 248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251 옻우물 북쪽 마을이다. 발음되는 대로 '오두물'이라고도 불렀다. 옛날 이 곳 에 우물이 있었는데, 옻이 오른 사람이 와서 몸을 씻으면 잘 낫는다 하여 붙여졌다. 옛날에는 계곡에 숲이 우거지고 맑은 샘물이 흘렀다. 작은 규모의 간장공장이 있었고 노송들이 키를 자랑하며 서 있었다. 지금 석남초등학교가 들어선 곳부터 거북시장의 위쪽(북쪽) 끝, 그리고 신도로 옆의 지금 강남시장이라 부르는 곳까지가 옛날의 옻우물 마을 이다. 지난날 병을 낫게 한 우물샘이 있던 그 자리는 지금도 석남약수 터라 불리며 물통을 든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다. 전국 각 지방의 토 산물과 음식을 파는 장사꾼도 모여들어 작은 저자처럼 변했다. 박가뫼말 동쪽 산 밑에 있었으며 '바그메'라고도 불렀다. 이곳에 박씨의 묘가 있어 그런 지명이 붙었다고 전하는데, 이곳에서 평생을 산 주민들은 박씨보다는 배( 裵 )씨가 더 많았다고 말한다. 이곳에서는 초콜릿 빛깔의 찰흙이 많이 나와 아이들이 맛있게 먹기도 했다. 이곳에는 약 30년 전 부터 '마가의 다락방 기도원'이 자리잡고 있다. 19) 원창동( 元 倉 洞 ) 조선시대에 삼남지방에서 배편으로 올라온 세곡을 하역하고 보관하 던 해안 마을이다. 세곡 창고가 있었다는 뜻으로 붙여진 지명이다. 지난날 갯말과 환자곶( 還 子 串 ) 등 두 개의 자연취락이 자리잡고 있 었다. 부평부가 관할 동리명을 확정할 때, 두 마을을 합해 포리( 浦 里 ) 라 하였다. 그리고 해안 바로 앞에 있는 율도( 栗 島 )와 장구도( 長 丘 島 ), 매섬 鷹 島 등이 포리의 관할로 들어왔다. 인천의 지명 유래 [부평구, 계양구, 서구] 249

252 갯말 원창동의 본마을이다. 포리, 포촌 등으로도 불렸다. 바닷가에 있는 마을, 선착장이 있어 배가 머물 수 있는 부두라는 의미를 담은 지명들 이다. 이 갯말은 간뎃말, 아랫말로 나누어 부르기도 했다. 갯말은 바닷 가에서부터 산의 구릉 위로 길게 자리잡았었는데 구릉 위에 있던 취락 이 윗말이었다. 환자곶말 조정의 대여양곡 보관창고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환자( 還 子 )란 가 난한 백성들이 춘궁기에 관으로부터 곡식을 빌어간 뒤 추수가 되면 갚 는 차용제도를 말한다. 율도 우리말로 밤염이라고 불렀다. 뭍에서 보면 밤톨같이 생겼다 하여 붙 여진 이름이다. 1898년에 화약고가 만들어졌으나 곧 폐지되었다. 원창 동 환자곶 해안에서 썰물을 따라 갯벌을 걸어 나가 섬에 가고, 밀물에 앞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갯벌은 매립으로 지금 육지가 되었다. 20) 가좌동( 佳 佐 洞 ) 서구의 남쪽 끝이다. 가재울과 건지( 乾 池 )골, 감중절리( 甘 中 節 里 ), 그 리고 능안말이라는 세 개의 자연취락이 있었다. 그리고 썰물 때마다 길이 열리는 앞바다에 소염도( 素 鹽 島 )라는 작은 섬이 있었다. 가재올 옛날에 '가재올' 또는 '가재울'이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한다. 이곳에 맑은 시내 가좌천( 佳 佐 川 )이 있어 가재가 많이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250 인천역사 6호-인천 지명의 재발견

253 건지골 가좌동 전체를 놓고 볼 때 북쪽이 된다. 가좌천 아래쪽에 연못이 있 었는데 시내의 물이 흘러들지 않아 마른 연못이 되어서 건지( 乾 池 )라고 불렀다. 이 건지에서도 큰 가재 한 마리가 나왔다고 한다. 가재올은 크게 보면 가좌동 전체를 말하며 좁은 의미로 보면 건지골 마을을 지 칭한다. 감중절리 감중사( 甘 中 寺 )라는 절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절은 빈대가 많아 승려와 신도 들이 견디지 못해 문을 닫았다고 전해진다. 취락이 큰 편이어서 큰감중절과 작은감중절로 나누어 불렀다. 큰감중절은 아 랫감중절로도 불리며 지금 가좌1동 사무소가 있는 부분을 가리킨다. 작 은감중절은 윗감중절로도 불렸는데 현재 가좌3동 사무소 근방이 된다. 인천의 지명 유래 [부평구, 계양구, 서구]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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