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8 남해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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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187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제1장 문화재 제2장 관광 제3장 문학 제4장 미술 제5장 음악 제6장 문화예술단체 제7장 언론 출판

2 1188 남해군지

3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189 제1장 문화재 1. 개요 지역 문화유산이 곧 국가 문화유산임을 인식하고 우리 것을 먼저 알고 잘 가꾸어 계승 발 전시켜야 한다. 역사의 중요성은 역사를 통해 지혜와 정신을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는 미래학이며, 한민족의 자존심을 살리는 길이다. 또한 조상들의 위대한 업적과 전술, 전략이 있기에 희망을 가진다. 그리고 우리의 문화재라는 자부심과 국제적 존재 가치를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들 문화재를 감상하면서 단순하게 조상들의 유물로만 느끼고 있다. 그러나 문 화재 그 자체 속에는 무궁한 뜻과 혼 그리고 삶의 이상이 스며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 다. 우리들은 문화재를 가까이 하면서 조상들의 숨결을 느끼고 있지만, 그 문화재가 가지고 있는 위대함을 망각한 채 단지 외형만 보고 자기 나름대로 빈약하게 평가해 버리는 단순함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문화재를 감상하면서 그 당시의 역사 문화와 찬란한 예술성이 곁들어 있는 창작물에 대한 진정한 깊은 뜻과 문화재가 주는 의미가 무엇이며 하나의 조각품에서 느껴지는 창작자의 숨 결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재를 감상할 때는 그 문화재가 지니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알아야 유물이 지니는 가치 를 더욱 상세하게 알 수 있을 것임으로 단순히 조상들이 남긴 문화유산이라고 생각해 버리면 그 유물의 가치는 빛을 발하지 못하게 되고 가치를 잊어버리고 만다. 문화재는 조상의 삶의 지혜가 형상으로 표출된 것이다. 그래서 유물들에 의해 우리는 그 시대의 생활상을 알 수 있고 또한 차츰 변천해 온 역사도 읽을 수가 있을 뿐 아니라 그 지역 의 특수성과 풍습을 알 수 있다. 지역마다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지역에 따라 삶 의 형태가 다르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상들의 창의력으로 창작한 예술성이 높은 창 작물은 요즘에도 흉내 내지 못하는 고도의 기술을 지니고 있고 국가와 백성의 안녕과 번영을 위한 행위 뿐 아니라 가족과 개인을 위한 주술적인 기단과 도구들도 삶의 한 부분이었음을

4 1190 남해군지 알 수 있다. 문화재는 역사를 정립하는데 매우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시대의 물적 증거가 되기 때문에 훼손, 멸실, 방치해서는 안 된다. 만약, 이러한 행위가 발생한다면 역사는 묻혀 버리 거나 차츰 왜곡되어 후대에 이르면 그 비밀은 밝혀지지 않은 채 구전으로 변하여 정확성을 담보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문화재는 미래 지향적이라고 한다. 우리는 문화재와 역사를 통해서 조상들의 슬기로운 지혜와 정신을 배우게 되고 우리 조상 들이 이루어 낸 창조물에 대하여 자존심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또한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는 것도 조상들이 이루어낸 것과 같이 무한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문 화재가 전 인류에게 인정받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것을 볼 때, 그 위대한 업적에 대하 여 자연히 고개가 숙여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몸소 느끼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문화재가 우 리의 문화재라는 것에 자부심과 국제적 존재가치를 나타낼 수 있다. 때론 역사가 왜곡되어지는 경우도 있는데 역사적으로 증빙할 수 있는 문화재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고 있지만, 대응할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사건들이다. 그 래서 왜곡되는 역사를 찾기 위해서는 명분을 찾아야 하는데 그 명분을 찾고 논리적으로 검토 하고 정리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인적 자원이 필요하다. 우리는 역사가 중요하다는 사실만 알고 있지 그 중요성을 상징하는 문화재에 대한 보존 방법론에 대해선 신중하지 못하다는 점 을 스스로 느껴야 할 것이다. 우리 지역의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첫째, 지역 문화재가 곧 국가 문화재라는 인식 아래 가까이 있는 문화재를 훼손하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서도 안 되며 되도록이면 원형 을 보존해야 한다. 문화재는 그 자리를 떠나면 가치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둘째, 문화재가 이미 훼손이나 소실되어 복원을 필요로 할 경우 철저한 고증을 거쳐 복원 되어야 할 것이다. 한 번 복원되면, 이후로는 복원된 것이 사실인 양 후대에 그대로 전해지 기 때문에 잘못된 것은 왜곡될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셋째, 지역의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의 향토사학자들의 노력이 필요하며 향 토사학자들이 연구할 수 있도록 배려도 필요하다. 왜냐하면, 향토사학자들은 항상 문화재에 대한 관심도가 높을 뿐 아니라 문화재와 가장 가까이 있는 연구가들이기 때문에 비록 학술적 인 깊이는 약할지라도 의견을 존중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넷째, 유 무형문화재 중 지정 비지정 문화재 보존은 행정 뿐 아니라 민간 연구 단체들 의 활동과 노력도 필요한 것이다. 행정과 민간단체의 교류가 원만하게 형성되어 문화재 보 존에 심혈을 기울인다면, 문화재는 살아 숨 쉴 것이고 그동안 미흡한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5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191 새롭게 조명됨은 물론 문화재가 곧 관광사업의 소득 자원이 될 것이라 본다. 남해는 역사적으로 많은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는 고장이며, 특히 문무( 文 武 )가 겸전하는 고장으로 호국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일 뿐 아니라 문학도 스며있다. 호국의 고장이라 일컬 어지는 것은 고려 팔만대장경의 판각지, 삼별초 주둔지, 해도원수 정지장군의 관음포대첩, 임진왜란 7년 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의 격전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학으로는 남해가 유배지였기에 조정 대신들이 당쟁으로 남해로 유배 와서 향사인들과 교유관계를 가 지면서 많은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 외 많은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으면서 비옥한 토지와 천혜의 자연경관을 가지고 있어 살 기 좋은 고장으로 전국에 널리 알려져 있는데 우리 조상들의 슬기와 지혜를 정확하고 세밀하 게 알아서 자부심과 자존심을 살려야 할 것이다. 문화재란 인위적, 자연적으로 형성된 국가적, 민족적, 세계적 유산으로 예술적, 학술적, 경관적 가치가 큰 것이라고 하며, 유형 문화재는 건조물, 전적, 서적, 고문서, 회화, 조각, 공예품 등 유형의 문화적 소산으로 역사적, 예술적, 또는 학술적 가치가 큰 것과 이에 준하 는 고고자료를 말한다. 무형 문화재는 연극, 음악, 공예기술 등 무형의 문화적 소산으로 역 사적, 예술적 또는 학술적 가치가 큰 것이다. 기념물은 사지, 고분, 패총, 성지, 궁지, 용지, 유물 포함층 등의 사적지와 특별히 기념이 될 만한 시설물로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큰 것 과 경승지로서 예술적, 경관적 가치가 큰 것 그리고 동물(서식지 번식지 도래지 포함), 식 물(자생지 포함), 광물, 동굴, 지질, 생물학적 생성물 및 특별한 자연현상으로서 역사적, 경 관적 또는 학술적 가치가 큰 것을 말한다. 민속자료는 의식주, 생업, 신앙, 연중행사 등에 관한 풍속, 관습과 이에 사용되는 의복, 기 구, 가옥 등으로 국민 생활의 추이를 이해함에 불가결한 것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에 따른 지정 문화재는 문화재청장이 지정한 문화재(보물 국보 중요무형문화재 사 적 명승 천연기념물 중요민속자료 보호물 또는 보호구역)이고, 시 도지정문화재는 특별시장, 광역시장, 도지사가 지정한 문화재와 문화재자료 역시 시 도지사가 지정한다. 보호구역은 고정되어 있는 유형물이나 일정한 지역이 문화재로 지정된 경우 당해 지정문 화재의 점유문화재를 제외한 지역으로써 당해 지정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하여 지정된 구역을 말하고, 문화재의 보존, 관리 및 활용은 원형 유지를 기본 원칙으로 하고 있다.

6 1192 남해군지 2. 문화재 목록 1) 국가지정문화재 (1)보물 지정번호 명칭 수량(m2) 소유자 소재지 지정일 관리자 1446 남해용문사 쾌불탱 전체 cm 남해용문사 남해 이동 용소 용문사 (2) 사적 지정번호 명칭 수량(m2) 소유자 소재지 지정일 관리자 관음포이충무공전몰 남해 고현 차면 ,858 유허 남해충렬사 산125외55필 ( ) 남해충렬사 남해 설천 노량 233 남해충렬사 11, 외40필 (3) 명승 지정번호 명칭 수량(m2) 소유자 소재지 지정일 관리자 남해가천마을 남해 남면 홍현 , 남해군 다랑이논 777외 한려해상국 39 남해금산 m2 남해 상주 립공원 (4) 천연기념물 지정번호 명칭 수량(m2) 소유자 소재지 지정일 관리자 29 미조리의 상록수림 3,437 남해군 남해 미조 미조 산121외3필 남해군 150 물건방조어부림 25,091 남해 삼동 물건 39-3번지 남해 산닥나무 자생 남해 고현 대곡 9,917 화방사 지 산99-1 화방사 276 남해 고현면의 느티 1주 남해 고현 갈화 남해군 나무 외3필 남해군 299 남해 창선면의 왕후 1주 남해 창선 대벽 박나무 외5필

7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 도지정문화재 (1) 유형문화재 지정번호 명칭 수량(m2) 소유자 소재지 지정일 관리자 27 장량상동정마애비 1기 남해군 73 다정리삼층석탑 1기 74 보리암전삼층석탑 1기 보리암 85 용문사 대웅전 1동 용문사 138 용문사 석불 1구 172 촌은집 책판 52매 222 남해향교 2,706 남해향교 425 남해용문사 부도군 9기 용문사 남해 남해 선소 196-9외5필 남해군 남해 이동 다정 587-1외1필 남해 상주 상주 2065 보리암 남해 이동 용소 868 용문사 남해 이동 용소 남해 이동 용소 남해 남해 북변 586외8필 남해향교 남해 이동 용소 868 3/ 용문사 426 남해용문사 목조지장 시왕상 25구 427 남해용문사 목조 1기 428 남해용문사 목조 사 천왕상 4구 429 남해용문사건륭이십 오년명운판 1점 446 남해용문사 목조아미 타 삼존불좌상 3구 (2) 무형문화재 지정번 보유자 명칭 생년월일 주 소 지정일 관리자 호 성명 남해군 남면 선구리 27 남해선구줄끗기 김찬중 남해선구줄끗기보존회

8 1194 남해군지 (3) 기념물 지정번호 명칭 수량(m2) 소유자 소재지 지정일 관리자 6 남해상주리석각 1기 국유 19 대국산성 42, 임진성 16, 남해다정리고인돌 11기 남해군 87 남해금산봉수대 1기 -100 국유 (산림청) 154 남해장성 72,580 남해군 155 전백이정의 묘 199 남해당항리느티나무 200 남해죽전비자나무 247 남해설흘산봉수대 248 남해대방산봉수대 249 남해금오산성 1기 주 주 기 기 -1,500 1기 32,429 수원백씨 문중 남해군 최금철 가천마을 노장진 장병림외 남해 상주 양아 산4-3 남해 설천 진목 산184외15필 남해 남 상가 산291외7필 남해 이동 다정 91-5외4필 남해 상주 상주 남해 이동 신전 115외12필 남해 남 평산 54-1외2필 남해 남 당항 외3필 남해 남 당항 1997외4필 남해 남 홍현 산237-1 남해 창선 옥천 산75 남해 창선 당항 산 남해군 수원백씨 문중 남해군 최금철 남해군 (4) 민속자료 지정번호 명칭 수량(m2) 소유자 소재지 지정일 관리자 13 남해가천암수바위 2기 가천마을 남해 남 홍현 남해군 (5) 문화재자료 지정번호 명칭 수량(m2) 소유자 소재지 지정일 관리자 남해 서 중현 운곡사보 41 운곡사 1,577 운곡사 외1필 존회

9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195 지정번호 명칭 수량(m2) 소유자 소재지 지정일 관리자 42 정지석탑 1기 남해군 43 당항신흥사삼층석탑 1기 44 남면향약계 16권 남면향약계 150 용문사천왕각 1동 용문사 151 용문사명부전 1동 152 화방사채진루 1동 화방사 237 난곡사 6동 난곡사 266 남해척화비 1기 남해군 남해 고현 대사 768외6필 남해군 남해 남 당항 872-1외4필 남해 남 당항 남면향약 계보존회 남해 이동 용소 용문사 남해 이동 용소 868 남해 고현 대곡 1448외2필 화방사 남해 이동 난음 난곡사 남해 설천 노량 남해군 277 남해금산영응기적비 전주이씨 남해 상주 상주 전주이씨 2기 대한중흥공덕축성비 문중 산257-3 문중 333 남해망운암석조보살좌 남해 남해 아산 1기 망운암 상 망운암 334 남해망운암 건륭을사 남해 남해 아산 1점 명동종 남해용문사건양2년영 남해 이동 용소 1폭 용문사 산회상탱 용문사 351 남해용문사소장문헌 2건5책 352 남해용문사삼장보살탱 1폭 353 남해용문사건양2년신 중탱 1폭 377 남해용문사 동종 1점 남해용문사 청동반자 1점 394 남해용문사 봉서루 1동 남해용문사 아미타여 래 오존탱 1점 남해용문사 동치3년 신중탱 1점 408 남해용문사 현왕탱 1점

10 1196 남해군지 지정번호 명칭 수량(m2) 소유자 소재지 지정일 관리자 409 남해용문사 건양2년 독성탱 1점 410 남해용문사 독성탱 1점 411 남해용문사 산신탱 1점 412 남해용문사 영정일괄 1. 용문사 영해당영정 2. 용문사 백월당영정 3. 용문사 삼화당영정 6점 4. 용문사 파화당영정 5. 용문사 칠화당영정 6. 용문사 경암당영정 416 남해운대암 제석신중 남해 창선 옥천 1점 운대암 정 운대암 417 남해운대암 지장시왕 탱 1점 418 남해운대암 아미타후 불탱 1점 (6) 등록문화재 등록번호 문화재명 소재지 수량 규모 소유자 등록일자 남해 덕신리 남해 설천 밀양박씨 제234호 4동(1층) 하천재 덕신 958 하천공 종중 3) 군보호문화재 지정 번호 명칭 수량(m2) 소유자 소재지 지정일 관리자 1 무민사 정면3간,측면2간 무민사 2 자암김구비 3 봉천사 묘정비 높이 2m 폭 90cm 두께30cm 높이2.6m 폭 80cm 두께30cm 남해군 남해군 남해 미조 미조 남해 설천 노량 376 남해 남해읍 북변 430 무민사보존회 남해군 남해군

11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영모문 팔작와가 김재동 5 국사봉 사당 정면 2.7m 측면 2.5m 적량이장 남해 남해읍 서변 144 남해 창선 적량 산4-1 김재동 마을이장 4) 비지정문화재 구분 성지 봉수대 패총 사찰 사우 금석문 도요지 자연 지리 현판 효행 고인돌 민속 동식물 명 칭 관당성, 성산성, 성산토성, 노량진성, 비란성, 남해읍성, 선소왜성, 옥기산성, 평산진성, 고진 성, 곡포보성, 성고개성, 난포현성, 상주포성, 미조항고진성, 적량성, 구도성 망운산봉수대, 원산봉수대, 성현봉수대, 대국산봉수대, 망기산봉수대, 미조 망운산봉수대, 도마리 패총 용문사, 화방사, 보리암, 망운암, 운대암, 법흥사 녹동사, 영벽정, 금산 문장암, 후송 유의양 기념비, 남산 송덕시혜비군, 3 1독립운동기념비, 난음 관방성비, 창선 감목관비군, 이어 불망비군, 망운산 미공군전공비, 이동 축마비, 미조 무민사 첨사비군, 창선 적량 김후지도몰세불망비 대곡 자기요지, 현촌 자기요지, 이어 청자요지, 정포 불무골 자기요지, 고현 달실 옹기요지, 물뫼 도기요지, 큰독개 도기요지, 서대 자기산포지, 신흥 자기산포지, 독망골 청자요지, 부윤 자기산포지, 해창 자기산포지 세존도, 금산 쌍홍문, 금산 상사암, 금산 송악, 망운산, 대장경추정지대사, 관음포, 서호 장군지, 동정 둔전 제청해관각자 심천리, 평현리, 봉성리, 우지막골, 오리, 서호리, 관당리, 당항리(창선), 서대리 동정선돌, 미조용목, 화전농악, 화계 배선대, 덕신줄다리기, 창선상여놀이, 오곡 입택굿 읍놀 이, 석교 줄싸움, 심천 선돌, 무림 밥무덤, 석평 당산, 금평 벅수, 무민사 석인상, 초전 장승, 우물 막돌탑, 정포 숲 당산, 동정 막돌탑, 관당 칠성당지, 보천 목 상여, 광천 당산, 동대 당목, 구도 당집 백로서식지, 덕신역원, 창선목장, 난음 비자당, 화계 보호수, 난음 보호수, 당항 보호수, 상가 보호수, 물건 보호수1, 물건 보호수2, 서변 보호수, 양아 보호수1, 양아보호수2, 양아 보호수 3, 동천 보호수, 오곡 보호수, 선소 보호수, 봉화 보호수, 선구 보호수, 서상 보호수, 상죽 보 호수, 당항 보호수, 평리 보호수, 양아 보호수, 용소 보호수, 봉화 보호수, 영지 보호수, 노구 보호수, 도마 보호수, 진목 보호수, 문의 보호수, 지족 보호수, 중리 보호수, 남상 보호수, 아 산 보호수, 평산 보호수,

12 1198 남해군지 3. 국가지정문화재 1) 보물 (1) 남해 용문사 쾌불탱 지정번호 및 일자 : 보물 제1446호,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868번지 규 모 : 분야-불화, 재질-미본채색, 전체 cm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본존불상 좌우에 협시보살상만을 배치시켜 삼존도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그림이다. 중앙 의 본존불상을 위시하여 좌측에는 정면을 향한 채 똑바로 서서 여의( 如 意 )를 들고 있는 보 살상이 자리하고 있으며, 오른쪽에는 좌협시보살상과 동일한 자세로 서서 연꽃가지를 받쳐 든 보살상이 배치되어 있다. 중앙의 본존불상은 어깨가 훤히 드러내고 오른손을 길게 내려 뜨려 왼손을 가슴 앞까지 들어 올린 채 두 발을 좌. 우로 벌려 연화좌를 딛고 서 있는 입불상 으로 동글 넓적해진 형태의 눈, 코, 입이 작게 묘사되고 미소가 잘 보이지 않는 경직된 표정 의 얼굴은 수평으로 들어 올려 각이 진 어깨와 더불어 18세기 후반 이후 불화에서 주로 나타 나는 전형적인 양식 특징이다. 좌협시보살상은 보관을 쓰고 여의를 들고 있는 점으로 미루 어 보아 석가모니불의 좌협시인 문수보살상으로 추정된다. 머리 크기에 비하여 어깨가 좁고 작은 발이 위축된 느낌이 들긴 하지만, 팔에 걸쳐 흘러내린 길고 굵은 천의 자락으로 인하여 전체적으로는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우협시보살 또한 좌협시보살상과 표현이 유사하다. 그 림 화단부에는 7 개의 화기가 있다. 이 괘불탱은 인물의 형태 및 신체 비례 등에 있어 18세 기 중반 이후 불화의 전형 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을 뿐 만 아니라, 조화롭고 세련된 표기법 을 보여주어 18세기 중반 이후 불화 연구의 자료적 가치가 있다. 2) 사적 (1)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 유허 지정번호 및 일자 : 사적 제232호, 소 재 지 :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 산125번지 규 모 : 이충무공유허비( 높이 187cm, 폭 75.5cm, 두께 22cm) 부 속 물 : 이충무공 유허비와 비각, 이충무공 전적비, 첨망대(누각), 이충무공 유언비

13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199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남해군 연 혁 : 삼도수군통제사 충무공 이순신장군 노량해전 중 관음포에서 순국 충무공 이순신장군 유허비와 비각 건립 1814~1903. 유허관리(김용해, 김계언, 김여홍, 김여복, 김여백, 깁정준, 김중순) 전적비 및 공사기념비 건립(군민성금으로 유허와 참배로 조성) 유허비 모각비 세움 사적 제232호로 지정 유허비 국역 청동판 세움 성웅 충무공 이순신 유허 도로변 석비 세움(증 남해라이온스클럽) 첨망대 준공 충무공 이순신 유언비 건립 이순신영상관 기공 이순신영상관 준공 핏물로 붉게 물들인 역사의 현장 관음포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호국 바다로 불린다. 전쟁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戰 方 急 愼 勿 言 我 死 ) 는 유언을 남기고 순국 하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해전지요 순국지다. 관음포는 일명 이락포라 불리어지고 있다. 이곳 유허는 주변이 수려하고 풍요를 누렸던 유 서 깊은 고장으로 왜구의 침입시마다 왜선과 왜구를 물리친 곳이며 호국충절의 얼이 서린 곳 이기도 하다. 관음포를 내려다보면, 잔잔하게 흐르는 물결이 어느 곳과 다름이 없건만, 가슴 속에 묻혀 있는 과거 역사를 떠올리며 지난 날 국난을 상기하면 잔잔한 바닷물이 용솟음치며 붉게 물들 여진다. 고려 팔만대장경 판각, 삼별초, 정지장군의 관음포대첩, 이순신장군 노량해전 등의 역사로 인하여 호국의 정신이 깃든 곳이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임진년에 명나라를 정벌하려는 야 망과 1597년 정유년에 한반도 이남을 일본 영토로 만들려는 야심으로 조선을 침략한 7년 전 쟁 중 노량해전은 최후 최대 전투이다. 1598년 8월 18일에 7년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 데요시가 병사하면서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고 조선을 침략한 병사는 모두 철군하라! 는 유언에 따라 남해안에 주둔하였던 일본 군사와 함대는 11월 10일에 철수하기로 약속하고 순 천 고니시 유키나가군( 軍 ), 남해 소오 요시토시군( 軍 ), 사천 시마즈 요시히로군( 軍 )은 창선도 에 집결하기로 하였다. 이것을 알아차린 조명 함대는 11월 9일 연합함대를 편성하여 나로도 에서 광양만으로 함대를 이동하게 되었고 일본 함대는 11월 10일에 약속대로 창선도에 집결 하였으나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군( 軍 )군만 아군함대에 의해 퇴로가 차단되었다. 11월 14 일 순천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 진린에게 뇌물을 바치고 퇴로를 열어줄 것을 호소하면서

14 1200 남해군지 간청하였으나 오로지 구국일념으로 조명연합 함대는 왜군 전선의 퇴로를 차단하니 순천 고 니시 유키나가는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지원군을 요청하였다. 11월 18일 6시경 창선도에 집 결한 일본군과 거제도와 부산에 집결한 일본군은 500여 척으로 전선을 재편성하여 순천 고 니시 유키나가를 구하기 위해 노량해협으로 진격하였다. 11월 18일 밤 12시에 이충무공은 원사기 밑에서 청수로 손을 씻고 백단향을 피운 다음 축 천 기도하기를 이 나라를 위해 적을 섬멸할 수 있다 하오면 죽어도 또한 한이 없겠나이 다 하였다. 이때에 큰 별 하나가 하늘에서 바다 위로 떨어지니 도열하고 있던 군사와 장수 들은 이상한 감회에 사로 잡혔다. 11월 19일 밤 2시부터 전투가 시작되었다. 일본 함선 200여 척이 격파 당하게 되자 일본 군은 전투에 패( 敗 )하였음을 자인하였고 50여 척은 도주를 하였지만 나머지는 관음포구에 갇혀 차단되면서 최후의 항전을 하였으나 이미 승부가 결정되어 있었다. 오전 10시경에 이 충무공은 독전 중 적의 유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퇴로가 차단 된 일본군은 함대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하였고 순천 고니시 유키나가군( 軍 ) 도 여수 앞 바다를 통하여 도주하였다. 관음포 앞 바다에서의 승리로 전쟁은 종식되었고 이 순신 장군의 영구( 靈 柩 )가 처음으로 육지에 오른 곳이 이곳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 유허이다. 공이 순국한지 234년이 지난 순조 32년(1832)에 공의 8세손 이항권이 통제사로 부임하여 왕명으로 단( 壇 )을 모아 제사하였으며, 비와 비각을 세워 추모하고 이락사라 명하였다. 비명( 碑 名 )은 유명수군도독조선국삼도통제사증의정부영의정시충무이공순신유허비( 有 明 水 軍 都 督 朝 鮮 國 三 道 統 制 使 贈 議 政 府 領 義 政 諡 忠 武 李 公 舜 臣 遺 墟 碑 ) 라 새겨져 있다. 예조판 서 겸 홍문관 대제학 홍석주( 洪 奭 周 )가 찬( 撰 )하고 형조판서 겸 예문관 제학 이익회( 李 翊 會 ) 가 서( 書 )하였다. 1965년 4월 13일 박정희 대통령은 이락사와 대성운해( 大 星 隕 海.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지 다)를 친필로 써 현판하였다. 1950년에 이충무공 전적 한글비를 세웠으며, 1991년 2월 16 일에 유허 비각이 있는 곳에서 500m정도 능선을 따라 바다 쪽을 향하면, 임진왜란 당시 치 열했던 광양 바다와 노량해협 그리고 관음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첨망대( 瞻 望 臺 )를 2층 누각으로 건립하였다. 그리고 잔디광장에는 이충무공께서 유언한 전방급신물언아사 ( 戰 方 急 愼 勿 言 我 死 ) 라는 글씨로 높이 8m의 자연석 유언비가 1998년 12월 16일(음 11월 19일) 이충무공 순국 400주년 추모식 때 제막 되었다. 글씨는 해군 대장 유삼남 참모총장의 휘호이다. 이락사의 소유는 사단법인 남해충렬사이며, 남해군에서 사적지로 관리하고 있다. 유허 경내에 입석되어 있는 비문과 시설물 그리고 고문헌은 다음과 같다.

15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01 유명수군도독조선국삼도통제사증의정부영의정시충무이공순신비 바로 남해현 동쪽 2십리쯤에 바다 물결이 넘실거리는 군용선이 드나드는 바 그곳을 일컬어 관음포라 하 니 옛 삼도통제사 증 의정부 영의정 충무 이공이 순국하신 곳이다. 공이 수군을 지휘하여 바다에서 왜구를 대파함으로서 해상에서는 왜구를 경계할 필요가 없어졌다. 지금 으로부터 230여 년 전 공은 적의 비환( 飛 丸 )에 맞아 순국했던 것이다. 아! 슬프다. 임진란은 실로 우리 동국의 양구( 陽 九. 재앙)라 말할 정도로 큰 재액이었다. 그러나 이때에 충성스럽고 용기 있는 공과 같은 이가 좌우에 있어 선조 임금님을 도와 사직을 지키고 국가의 중흥을 이루었다. 그때 이미 이종( 彝 鍾. 옛날 공신의 이름을 새겨 보관하여 오래 전한 일종의 제기)에도 새겨지고 사록에 도 등재되어 환하게 빛나도다. 그 빛이 있음이여! 지대한 공훈은 천지가 넓다한들 어찌 이를 모두 채우 겠는가? 그 충성스런 명성은 명나라 이웃 오랑캐나라에까지 떨쳐 마치 우주를 비치는 일월성신( 日 月 星 辰 )처럼 적적하였다. 이와 같이 신사( 紳 士 ) 및 부녀자 심지어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서로 한 번도 의논하 지 않고 충무공을 으뜸으로 숭앙하는 것은 대개 공이 노약하고 쓸모없는 군사로 백만의 용기 있는 적군 을 격퇴하고 일방(바다)을 막아서 홀연히 국가의 간성( 干 城 )이 됨은 장수양( 張 睢 陽. 장순의 별칭. 당나라 사람. 수양성에서 안록산을 막음)과 같고 거센 물결을 막고 종횡무진 신출귀몰한 전술을 써서 적을 섬멸 하여 후환을 남기지 않는 것은 주공 근( 瑾. 삼국시대 오나라 명장)과 같고 소수의 군사로써 중적( 衆 敵 )을 상대하여 승리를 거둠에 앞에는 강한 적군이 없고 위엄 있는 명성은 원근에서 추모하였으니 악무목( 岳 武 穆. 남송의 충신. 호 忠 武 )과 같고 천하를 재조 위태( 危 殆 )한 것을 돌려 태연하게 하고 한 몸으로서 종 국의 경중을 책임짐은 곽분양( 郭 汾 陽. 당의 명장), 이서평( 李 西 平. 당의 명장)과 같고 정성을 다하고 공 정을 앞세워 마음과 힘을 바쳐 나라에 헌신하니 덕과 위엄이 같이 나타나 어리석은 백성들까지도 뜻을 결단하고 생사를 겁내지 않음은 오직 제갈무후( 諸 葛 無 侯. 호 孔 明 )가 이러함과 같다. 그러나 제갈무후가 죽음은 병사( 病 死 )한데 반하여 공은 적과 싸우다가 순국하셨다. 공명이 죽은 후 얼마 안 가서 한나라가 위태로워졌거니와 공은 비록 죽었어도 지우금일( 至 于 今 日 )에 사목( 社 穆 )을 봉안케 하였다. 이에 공은 무 슨 유한이 있겠는가? 공의 공적과 충성은 위로는 주상께서 포상하시고 백성들로부터도 추앙을 받아 아 름다운 비취보다 빛났으며 태상( 太 常. 奉 尙 寺 의 별칭. 시호를 맡아보던 관청)에 기록되어 있고 맹부( 盟 府. 誓 約 의 소류를 넣어두는 창고)에 등재되어 있으며 그 충절과 공열은 학사 대부들에 의해서 시가로 혹은 문장으로 찬양되어 더욱 길이 빛났다. 이는 진실로 췌언( 贅 言 )이 불요( 不 要 )하는 것이다. 오직 공은 해상에서 이룩한 공이 크고 많아 그 처음 무공을 펼침은 호남수역( 湖 南 水 域 )에서 녹유( 綠 由 )함인즉 좌수영에 대첩비가 있고 흉측한 왜군의 전열 을 막아 호기지방을 안정시킴은 벽파 해전에 있음인즉 여기에는 명량대첩비가 있고 수아건곤( 樹 牙 建 閫 )하여 앉아서 청안( 淸 晏 )함을 얻었음은 삼도통제영에 있음인 즉 고성에는 충렬사비가 있고 순천의 충 렬사와 남해의 충렬사와 고금도의 탄보묘( 誕 報 廟 )에 모두 현액이 있어서 무궁토록 전하거늘 홀로 이 땅 은 정성스런 인( 仁 )을 이루는 성역이라 하겠다. 돌이켜 보건대 아직 이 공훈이 기록된 문서가 없더니 우 리 성상( 聖 上. 순조) 32년 임진년에 선조임금께서 도회( 圖 恢 )하신 네 번째 환력( 還 曆 )을 맞는 때라 주상 께서 임란 당시의 그 해를 회상하시고 함께 충신들의 공훈의 크고 작음의 차이에 따라 신위를 모시는 자리에서 공의 영위( 靈 位 )를 수위( 首 位 )로 모신 바 있다. 이즈음 공의 팔세손 항권( 恒 權 )이 마침 공이 옛날 통제하던 삼도수군통제사로 있던지라 왕명을 받들어 공이 순국한 이 자리에 사당을 지어 영( 靈 )을 모시고 여러 지방 인사와 의논하니 많은 인근 사람들이 모

16 1202 남해군지 여들어 나무를 치고 돌을 깎아 그 터를 표하고 글을 새기니 이때 사람들은 항권 통제사가 능히 그 세대 를 이었다 하더라. 그 명( 銘 )에 이르기를 오직 남해에 태양을 이고 있으니 큰 물결이 망양( 茫 洋 )하도다. 바람이 자고 파도가 없으니 이무기와 악어가 깊이 그 몸을 감추었도다. 세상이 평화로우니 아녀자들의 얼굴도 화락( 和 樂 )하고 황소도 부지런히 밭을 갈며 양잠( 養 蠶 )하고 길삼하니 이제 전쟁은 끝이 나고 평 안하도다. 누구의 주심인가. 공의 충성을 생각하도다. 무용이 뛰어나신 공이시어 실로 동사( 東 士 )를 안정시켰도다. 큰 거북과 건장한 매도 크고 분발하여 기상을 펴도다. 명량에서 갑옷 씻고 옥포에서 싸움을 끝내었다. 많은 고기잡이배가 만선으로 돌아오매 오리 떼는 물가에서 노는구나. 난여( 鸞 輿. 임금이 타는 수레)가 서서히 돌아오다 악기를 제 틀에 걸었으니 사방이 고요하도다. 공이 남긴 공훈은 만세에 빛날 것이나 공은 먼저 떠났도다. 아득한 바다 물결처럼 많은 사람들 눈시울에는 슬픔이 가득하니 공의 영령은 길이 살아남으리라. 하늘에 북두칠성이 있어 재앙을 물리치며 복을 낳으시고 적은 두 번 다시 바다를 침범할 수 없음이 확 연하니 백성들은 영원히 평안하리라. 공의 높고 어진 공열은 영구히 이어져 오직 돌처럼 굳은 절개일지 어라. 자헌대부예조판서겸지경연사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재학지성균관사규장각제학 홍석주( 洪 奭 周 ) 짓고 자 헌대부형조판서겸지경연춘추관사예문관제학 이익회( 李 翊 會 ) 쓰다. 숭정기원후사년임진( 崇 禎 紀 元 後 四 壬 辰. 1832년) 월 일 세우다 有 明 水 軍 都 督 朝 鮮 國 三 道 統 制 使 贈 議 政 府 領 議 政 諡 忠 武 李 公 舜 臣 遺 墟 碑 直 南 海 縣 東 二 十 里 溟 漲 之 所 環 蒙 衝 之 所 出 入 名 其 地 曰 觀 音 浦 者 故 三 道 統 制 使 贈 議 政 府 領 議 政 忠 武 李 公 殉 國 之 所 也 公 以 舟 師 大 破 倭 寇 於 海 中 海 上 無 倭 警 者 今 二 百 三 十 有 餘 季 而 公 則 爲 飛 丸 所 中 以 歿 嗚 呼 壬 辰 之 難 我 東 之 陽 九 也 時 則 有 忠 藎 勇 知 之 士 若 而 人 左 右 我 宣 廟 以 克 襄 中 興 烈 旣 威 銘 彛 鐘 被 竹 素 火 卓 乎 其 有 燿 矣 至 勳 塞 天 地 聲 震 華 夷 燀 爀 磊 落 軒 宇 宙 而 揭 日 星 者 薦 紳 婦 孺 不 謀 一 辭 以 忠 武 公 爲 稱 首 蓋 公 以 偏 陬 積 弱 之 旅 當 百 萬 賈 勇 之 敵 蔽 遮 一 方 屹 然 爲 于 城 如 張 睢 陽 橫 波 絶 流 出 奇 制 勝 使 兇 渠 摧 敗 煨 燼 而 無 遺 如 周 公 瑾 用 少 擊 衆 前 無 勍 敵 威 聲 所 讋 遠 邇 望 風 如 岳 武 穆 再 造 區 宇 斡 危 奠 泰 以 一 身 以 宗 國 輕 重 如 敦 汾 陽 李 西 平 若 其 開 誠 布 公 鞠 躬 盡 瘁 德 威 交 彰 甿 卒 咸 懷 而 卒 之 以 志 決 身 殲 則 惟 諸 葛 忠 武 候 是 已 武 候 之 歿 以 疾 病 而 公 之 歿 也 以 戰 然 武 候 之 歿 漢 室 遂 危 公 則 雖 歿 矣 而 遺 烈 之 所 覃 被 式 至 今 社 稷 是 賴 公 於 是 亦 可 以 無 憾 矣 公 之 功 之 忠 寵 于 綸 言 昭 于 琬 琰 紀 在 太 常 載 在 盟 府 煥 燁 乎 學 士 大 夫 之 歌 誦 敍 述 固 無 容 復 贅 也 惟 公 績 寔 多 在 海 上 其 肇 暢 武 功 由 湖 南 水 閫 則 有 左 水 營 大 捷 碑 式 遏 兇 鋒 永 靖 湖 畿 在 碧 波 之 戰 則 有 嗚 梁 大 捷 碑 樹 牙 建 閫 坐 收 淸 晏 在 三 道 統 制 營 則 有 固 城 忠 烈 祠 碑 至 順 天 之 忠 愍 祠 南 海 之 忠 烈 祠 古 令 島 之 誕 報 廟 咸 有 顯 刻 以 詔 無 極 獨 玆 爲 立 慬 成 仁 之 所 而 顧 無 文 以 徵 其 實 我 聖 上 三 十 二 年 壬 辰 宣 廟 圖 恢 之 四 周 甲 也 惟 聖 上 撫 歲 興 懷 咸 秩 忠 勞 功 宗 之 祀 首 及 于 公 于 時 公 之 八 世 孫 恒 權 實 踐 公 舊 治 統 制 三 道 水 軍 承 王 命 侑 公 于 是 地 設 壇 以 降 靈 退 諏 于 衆 伐 大 石 以 表 其 地 而 章 之 以 銘 辭 人 於 是 謂 統 制 克 世 矣 其 銘 日 維 南 戴 日 巨 渤 茫 洋 恬 風 無 浪 蛟 鰐 深 藏 閭 井 如 櫛 婦 子 熙 熙 犁 牛 箔 蠶 不 識 鼓 旗 亡 誰 之 賜 懷 我 忠 武 桓 桓 忠 武 實 奠 東 土 穹 龜 健 鶻 大 奮 厥 庸 嗚 梁 洗 甲 玉 浦 休 鋒 盈 盈 萬 艘 彼 嗚 渚 鑾 輿 徐 返 鐘 石 在 虡 公 勳 萬 世 公 則 先 逝 洪 波 渺 瀰 萬 眥 同 涕 公 靈 不 味 上 有 星 斗 驅 祲 産 祉 永 綏 黎 首 截 被 海 浦 公 仁 攸 成 維 烈 載 永 維 石 之 貞 資 憲 大 夫 禮 曺 判 書 兼 知 經 筵 事 弘 文 舘 大 提 學 藝 文 館 大 提 學 知 成 均 舘 事 奎 章 閣 提 學 洪 奭 周 撰 資 憲 大 夫 刑 曺 判 書 兼 知 經 筵 春 秋 館 事 藝 文 舘 提 學 李 翊 會 書

17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03 崇 禎 紀 元 後 四 壬 辰 月 日 立 이충무공전적비 단기 삼천구백이십오년에 왜적들이 침범하니 이것이 임진난이다. 때의 전라좌수사 이충무공은 이를 크 게 분히 여겨 거북선을 만들어 적을 옥포와 노량에서 깨뜨리고 사량과 당항포에서 무찌르며 영등포에서 크게 전공을 이루고 견내량에서 적을 꾀어 이를 패하니 붉은 피가 바다에 넘치다. 이어 안골포를 거쳐 부산을 나아가 적을 패하고 한산도에 진을 치시니 왜적이 크게 두려워하다. 선조대 왕께서 공을 칭찬하시고 벼슬을 높이시어 삼도통제사의 대임을 맡기시다. 왜장 행장이 도망하고자 하여 사자를 보내 공에게 애걸하였으나 공이 엄하게 물리치시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꺽여지다. 사천 왜적과 남해 왜적이 노량에 모여들고 또 광주로부터 적선 오백 척이 들어와서 행장과 힘을 합하였 다. 공이 이를 관음포에서 마저 싸워 적을 크게 패한 때에 불행이 적의 비환에 맞아 돌아가시니 향년이 오십사세요 그날은 단기 삼천구백삼십일년 십일월 십구일이었다. 왜란 칠 년 동안 전적이 가장 많으신 이 땅에 비를 새우니 공의 장렬하신 공적은 진실로 천추에 빛날 것이다. 단기사천이백팔십삼년(1990년) 월 일 남해군민이 힘을 모아 세우다 리홍주는 짓고 이갑성은 쓰다 이충무공전몰유허 공사기념비 우리나라 歷 史 上 에 가장 빛나는 忠 武 公 의 戰 跡 地 인 이 땅에 그 碑 閣 이 헐어지고 庭 園 이 황폐됨은 郡 民 이 크게 걱정하는 바이다. 이번에 本 郡 山 林 係 主 管 으로 工 事 를 시작하니 古 縣, 雪 川 兩 面 에서는 人 夫 七 千 三 百 名 을 奉 仕 하고 南 海, 二 東, 三 東, 西, 南, 昌 善 面 에서는 工 事 費 七 十 萬 원을 誠 納 하고 南 海, 西, 南, 彌 助 의 漁 業 組 合 에서는 各 各 三 萬 원을 헌납하여 庭 園 二 百 坪 과 運 動 場 七 百 二 十 坪 과 參 道 二 個 所 를 新 設 하고 한글 戰 跡 碑 를 세우고 庭 園 樹 壹 阡 八 百 本 을 심어서 이 工 事 를 竣 工 하다. 檀 紀 四 二 八 三 年 五 月 日 郡 守 具 兌 書 監 督 李 治 一 石 工 柳 在 實 첨망대기( 瞻 望 臺 記 ) 통영 충무에서 한려수도를 따라 유유히 흘러 남해 노량 앞바다에 이르면 관음포가 있으니 곧 삼도수군 통제사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전사하신 곳이요 관음포에 연접하여 있는 이락산은 충무공의 본향인 아 산으로 반장( 返 葬 )되기까지 수개월 동안 영구를 안치한 곳이다. 그 뒤 2백4십년을 지나 순조 32년 임진 년에 공의 팔 세손 항권이 통제사가 되니 임금의 명을 받들어 공의 영혼을 이 땅에 위안함에 단을 만들 어 영혼을 강림케 하고 큰 돌을 깎아 그 곳에다 비를 세우고 비각을 마련하니 이락사이다. 이로부터 이 고장 사람들은 물론 무릇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모두 경건하게 추모( 追 慕 )의 법도를 다 하더라. 지난 1990(경오)년에 군수 거창 유금렬 씨가 이락사 서쪽 500m 거리 산기슭에 군민의 숙원인 첨망대를 세우게 하여 그 때의 국회의원 박희태 씨가 거액의 사업비를 지원받게 하니 새로 부임한 평해 황기준 군수가 이 일을 이어 집행하여 준공하였다.

18 1204 남해군지 이후 다시 벽진 이조헌 씨가 이 고을 군수로 오셔서 모든 행정이 잘 추진되는 형편에 이 첨망대에 대해 서도 관심이 커 보완 공사를 하여 이를 마무리 짓고 1994년 갑술 5월에 군민을 모아 여러 가지 낙성 행 사를 베풀었다. 오오라!. 이 첨망대는 실로 이충무공을 위하여 지어진 것인 즉, 이 대( 臺 )에 오르는 사람 어찌 감회가 깊 지 않으리오. 예로부터 나라의 다스림이나 화평과 변란이 승제의 대운과 관계지어 진다하였으니 임란 때 왜구의 침란으로 우리 많은 백성들이 피를 흘려 엄청난 곤욕을 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비록 놈들의 살을 사료로 하고 그 가죽을 침구로 한다 하여도 오히려 그 죄에 비하면 벌 받음이 부족하리라. 당시 충무공의 대장기가 세워지고 호령 소리 들리는 곳에서 산과 바다에 맹세하여 초목과 어룡도 감동 하거든 하물며 하늘과 땅, 신과 인간이야 어떠하리. 마침내 기묘한 계책으로 왜적을 무찔러 승리로 이끌 어 함락된 산하를 빨리 수복한고 백성들이 쟁기질하고 누에 쳐서 처자와 같이 가족이 즐겁게 지내니 충 무공의 공훈은 만세에 일월과 더불어 빛을 다투리라. 이제 이 좋은 때에 첨망대에 올라 바라보면 푸른 물결은 넓고 아득한데 바람이 고요하며 물결은 잔잔하 고 교어 악어는 깊은 물에 잠겼으며 상하의 하늘빛은 만경에 한결같이 푸르러 어부의 노래 서로 화답하 고 갈매기는 자유로이 날아 오르내리니 그 승경을 눈에 가득히 하는 즐거움 무궁하리라. 그런 어찌 이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을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충무공의 충성과 효도 다함을 사모하여 배우면 그 세대 의 교육에 어찌 도움이 작다 하리오. 내 병으로 쇠약해진 몸이라서 내 힘으로는 첨망대에 올라서 그 때 거북선으로 이 바다를 오가며 왜적을 쳐 무찌르던 형상을 눈앞에 그려보는 즐거움을 맛볼 수 없는 형편 이라. 이를 한탄하던 중 모충회장 경주 김정윤씨가 찾아와 첨망대 사실의 기록을 간절히 청하였으므로 내 이미 세분 군수님의 지극한 모충의 정성과 사려 깊고 정성어린 조장( 朝 獎 )행정의 공을 높이 평가하 여 왔던 터라 청을 거절치 않고 기꺼이 받아 들여 이 사실을 영원히 전하고자 기록함이라. 대한민국 칠십육년 갑술 국화의 계절에 성균관 유도교도원 진양( 晉 陽 ) 정철기( 鄭 喆 基 )가 짓고 장수( 長 水 ) 이성숙( 李 性 叔 )이 쓰고 석명( 碩 明 ) 김외석( 金 外 碩 )이 각( 刻 )을 하여 첨망대에 현판하였다. 첨망대 기 문을 같은 해 십이월에 김해 김경수가 번역한 것임. 於 統 營 之 忠 武 循 閑 麗 水 道 攸 攸 南 下 至 南 海 露 梁 前 海 有 曰 觀 音 浦 海 者 卽 故 三 道 水 軍 統 制 使 忠 武 李 公 戰 死 之 處 也 接 海 有 山 曰 李 落 山 忠 武 李 公 返 葬 于 牙 山 本 鄕 之 前 幾 箇 月 間 靈 柩 安 置 于 此 處 經 二 百 四 十 年 純 祖 三 十 二 年 壬 辰 公 之 八 世 孫 恒 權 亦 爲 統 制 三 道 水 軍 承 王 命 侑 公 于 是 地 設 壇 以 降 靈 伐 大 石 表 其 之 而 建 閣 卽 所 謂 李 落 祠 者 也 自 是 本 鄕 人 勿 論 凡 行 過 此 地 者 無 不 敬 式 而 追 慕 焉 去 西 紀 一 九 九 年 庚 午 郡 守 劉 今 烈 氏 因 民 宿 願 而 建 立 膽 望 臺 于 祠 之 西 麓 二 百 步 地 于 時 國 會 議 員 密 陽 朴 熺 太 氏 自 中 央 得 巨 金 而 協 贊 之 劉 候 旋 而 遞 任 郡 守 平 海 黃 基 俊 繼 治 是 役 幾 乎 竣 事 而 又 復 遞 遷 今 碧 珍 李 祖 憲 氏 來 守 是 郡 庶 政 咸 理 乃 益 加 補 完 斯 臺 而 告 竣 工 以 明 年 甲 戌 夏 五 月 會 集 鄕 人 設 諸 般 行 事 以 落 之 斯 臺 經 三 侯 而 完 工 可 知 其 事 之 難 成 有 如 此 者 矣 噫 此 臺 者 實 爲 追 慕 李 忠 武 公 而 作 則 千 載 之 下 凡 登 此 臺 者 豈 無 所 思 乎 自 古 國 之 治 亂 雖 關 於 乘 除 之 數 然 追 憶 昔 日 龍 蛇 之 際 倭 寇 之 侵 亂 而 血 我 生 靈 則 雖 食 其 肉 而 寢 處 其 皮 商 有 餘 罪 存 焉 當 時 公 之 旌 纛 所 臨 喑 噁 所 被 之 處 盟 山 誓 海 而 草 木 魚 龍 猶 爲 感 動 況 乎 天 地 神 人 哉 卒 能 出 奇 制 勝 而 山 河 快 復 則 犁 牛 箔 蠶 婦 子 熙 熙 公 勳 萬 世 旣 與 日 月 而 爭 光 矣 今 夫 良 辰 住 節 登 臺 而 望 之 則 滄 波 渺 濔 而 恬 風 無 浪 蛟 鰐 深 藏 上 下 天 光 一 碧 萬 頃 漁 歌 互 答 沙 鷗 浮 沒 滿 目 勝 景 其 喜 無 窮 矣 然 豈 惟 止 此 必 須 慕 忠 武 公 之 忠 孝 兩 全 而 學 之 則 其 於 世 敎 豈 曰 小 補 哉 余 以 病 衰 不 能 登 斯 臺 而 想 像 當 日 龜 船 運 海 衝 破 倭 賊 之 狀 爲 恨 日 慕 忠 會 長 慶 州 金 正 潤 氏 訪 余 而 請 其 事 余 旣 重 三 候 之 慕 忠 誠 深 而 並 有 政 聲 於 南 土 喜 爲

19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05 傳 示 永 世 遂 爲 之 記 大 韓 民 國 七 十 六 年 甲 戌 菊 秋 成 均 館 儒 道 敎 導 員 晋 陽 鄭 喆 基 記 長 水 李 性 淑 書 충무공 이순신 장군 유언비 19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을 양력으로 환산)에 이충무공순국 400주년을 맞이하여 순국지 이 충무공전몰유허 입구 잔디광장에서 전국 추모행사를 봉행함에 따라 이충무공의 마지막 유언인 戰 方 急 愼 勿 言 我 死 (전방급신물언아사) : 전쟁이 바야흐로 한창이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를 자연석 거 북형 좌대 위에 세웠다. 높이는 8m이고 글씨는 당시 해군참모총장인 남해 출신 해군 대장( 大 將 ) 류삼남 ( 柳 三 男 )의 휘호이다. 수호도감( 守 護 都 監 ) 교지( 敎 旨 ) 및 첩지( 帖 紙 ) 망지( 望 紙 )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에 거주하고 있는 김석동( 金 石 東 )이 보관 관리하고 있는 고문서 중 이충무공전몰 유허 관리에 따른 첩지와 망지가 있다. 이 첩 망지는 충무공 순국지에 수호도감을 설치하여 비각과 주 위를 관리하고 불경자들을 잘 관찰하라는 관의 발령장이다. 첩 망지를 받은 자는 김녕 김씨 충의공파 ( 忠 毅 公 派 ) 후손들이며, 남해에 입남( 入 南 )하여 차면에 거주하면서 유적지를 관리해 왔다. 김용해( 金 龍 海. 1756~1824), 김계언( 金 啓 彦 ), 김여홍( 金 麗 鴻. 1790~미상. 4.23), 김여복( 金 麗 福 ), 김여백( 金 麗 伯. 1792~미상 12.19), 김정준( 金 鼎 俊. 1845~미상 4.14), 김중순( 金 仲 純 ) 등으로 대를 이어 유허를 관리 하였다. 교지와 첩 망지는 다음과 같다. 김용해( 金 龍 海 ) 첩지 行 縣 令 爲 差 定 事 公 事 別 監 差 定 爲 去 乎 不 輕 察 任 合 下 仰 照 驗 施 行 須 至 帖 者 右 下 幼 學 金 龍 海 準 此 甲 戌 十 二 月 日 현령이 뽑아 정하는 일은 충무공 수호별감을 뽑아 정하는 것이니 가볍지 않게 살피는 이 일 비추어 증 험하여 시행토록 모르지기 발령함에 이름. 이 사람 유학 김용해는 이에 따를 것. 갑술(1814년) 12월 일 김계언( 金 啓 彦 ) 첩지 三 道 統 制 使 爲 差 定 事 守 護 都 監 差 定 爲 去 乎 不 輕 察 任 向 事 合 下 仰 此 驗 施 行 須 至 帖 者 右 下 南 海 金 啓 彦 準 此 戊 寅 六 月 初 七 日 在 營 삼도통제사가 뽑아서 정하는 일은 수호도감을 뽑아서 정하는 것이니 가볍지 않게 살피는 이일 그대가 이를 받들어 증험하여 시행토록 모름지기 발령함에 이름. 이 사람 남해 김계언 이에 따를 것. 무인년 (1818년) 6월 7일 영에서 김용해( 金 龍 海 ) 교지 敎 旨 金 龍 海 爲 通 政 大 夫 者 道 光 元 年 正 月 日 年 乃 十 依 定 貳 加 資 事 泳 傳 김용해는 통정대부(정3품)자 임. 도광원년(1820년) 1월 일 김여홍( 金 麗 鴻 ) 첩지 行 縣 令 爲 差 定 事 忠 武 公 碑 閣 守 護 都 監 差 定 不 輕 察 任 向 事 合 下 仰 照 驗 施 行 須 至 帖 者 右 下 幼 學 金 麗 鴻 準 此 癸 巳 十 月 현령이 뽑아 정하는 일은 충무공 비각 수호도감을 뽑아 정하는 것이니 가볍지 않게 살피는 이일 비추어 증험하여 시행토록 모름지기 발령함에 이름. 이 사람 유학 김여홍 이에 따를 것. 계사년(1833년) 10월

20 1206 남해군지 김여복( 金 麗 福 ) 첩지 行 縣 令 爲 差 定 事 觀 音 浦 忠 武 公 碑 閣 守 護 都 監 差 定 爲 去 乎 不 輕 察 任 向 事 照 驗 施 行 須 至 帖 者 右 下 幼 學 金 麗 福 準 此 己 亥 八 月 日 현령이 뽑아 정하는 일은 관음포 충무공 비각 수호도감을 뽑아 정하는 것이니 가볍지 않게 살피는 이 일 비추어 증험하여 시행토록 모름지기 발령함에 이름. 이 사람 유학 김여복 이에 따를 것. 기해년(1839 년) 8월 일 김정준( 金 鼎 俊 ) 망지 南 海 金 鼎 俊 忠 武 公 監 碑 閣 守 護 都 監 差 定 着 實 擧 行 事 己 亥 六 月 日 固 城 地 方 大 隊 長 남해 김정준 충무공대감 비각 수호도감으로 뽑아 정하니 착실히 거행할 일 기해년(1899년) 6월 일 고 성지방대대장 김중순( 金 仲 純 ) 망지 南 海 車 面 居 金 仲 純 忠 武 公 碑 閣 所 在 四 山 局 內 守 護 之 節 着 實 擧 行 者 光 武 七 年 四 月 日 鎭 衛 第 三 聯 隊 二 大 隊 長 남해 차면에 사는 김중순은 충무공 비각이 있는 사방 판국의 산을 지키고 보호하는 절차를 착실히 거행 할 것 광무 7년(1903년) 4월 일 진위제 3연대 2대 대장 (2) 남해충렬사 지정번호 및 일자 : 사적 제233호 소 재 지 :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350번지 규 모 : 사우(맛배와가 높이 2.9m, 가로 3.69m, 세로 2.76m, 면적 10.18m2) 부 속 물 : 묘정비, 비각, 충무공비 및 충민공비, 내외삼문, 청해루, 한글비.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남해군 연 혁 : 1598년 충무공 순국 (이락사 운구 최초 안치, 남해충렬사 이장 안치) 1599년 아산 본향에 안치 1628년 향토인 김여빈, 고승후 사당 건립 주창 1633년 김여빈, 고승후 초옥 1칸 사당 건립 남해현령 이정권 충민공비 건립 1643년 충무( 忠 武 )시호 책봉 1658년 어사 민승중이 통제사 정익에게 사우 신축을 명함(초사철거, 이충무공비로 개건) 1660년 유명조선국삼도통제사증시충무이공묘비 건립(송시열찬, 송준길서) 1663년 현종어필 충렬사 현액 내림 1722년 5대손 충민공 봉상(통제사) 서원비각, 사당, 강당, 담장수축, 관리규칙 확립 1726년 노량 서원 개원 1746년 5대손 노은공 언상, 동전 2백민 출원 (사림, 사찰 관리비로 줌) 사당 곁에 호충암 짓고 승려 10명, 승장 1명을 두어 수직호사에 임함 1760년 지사공 태상(통제사) 청해루(2층 문루) 지음 1761년 병사공 관상(진주병사)진교에 사답 1백두 매수 헌납 1769년 6대손 한응 비각 중수와 사우 단청

21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년 훈장공 한풍(진주병사) 비각 단청, 전답매수, 전나무, 소나무, 가래나무 등 식수 1792년 7대손 건수(진주병사)문루 중수, 장도3곳 어장, 2척 어선을 원에 소속시킴 1793년 5대손 병상(전라좌수사) 이충민공비 매몰하고, 이충무공비 세움. 영의정 추증 1814년 현령 이행중 문루 중수 1871년 서원 훼철(위패 : 본당 뒤편 묻음, 제기 : 향교로 이관, 토지: 매각, 어조: 실권) 비각만 남고, 제단은 약식 축조 1899년 11대손 민승(진남대 육군 참영) 비각중수 (곤양 답 2두 매입, 비각을 수호케 함) 1907년 10대손 규진, 11대손 민승, 비각 보수 1921년 향사 박진평, 정민주 비각 중건, 수직사 복건 1922년 보존회 조직, 진주 사림은 후원회 조직 1925년 11대손 민봉, 청해루 지음 (강당, 창고를 복건) 1949년 보존회 해체와 남해 충렬사 모충회 조직, 충무공 한글비 세움 (남해군민과 경남도 초등학생 성금) 정인보 짓고, 김충현 씀 1965년 박정희 대통령 충렬사( 忠 烈 祠 ) 보천욕일( 補 天 浴 日 ) 액자 현판 1973년 대한민국 사적 제 233호로 지정, 매몰된 이충민공비 복원 1980년 충렬사력 청동판 세움 (임창순 역술, 정문장 씀) 1987년 내삼문 보수 및 단청, 관리사 내부 수리 1988년 상수도 거북형 시설 공사 및 주변 조경 1994년 사당 내 신위 교체(구 신위 본당 뒤편에 묻음) 1995년 남해충렬사지 발간 2004년 청해루 중수 2005년 사단법인 남해충렬사 법인설립 인가(경상남도 도지사) 2006년 남해충렬사지 증보판 발간 남해 충렬사는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350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면, 사적 233호로 지정되 어 있다. 충무공 이순신은 선조 31년(1598) 11월 19일에 순국하여 아산 현충사로 이장되기 전에 잠시 이곳에 안치되었던 곳으로 전하며, 공이 순국한지 35년 후인 인조 11년에 이 고 장의 선비 김여빈과 고승후에 의하여 처음으로 초옥 사당을 짓고 위패를 모신 후, 배향한 곳 이다. 노량 충렬사 창조집문(1633년)에 슬프다. 노량은 곧 충무공 이 선생이 나라에 몸 바 치신 곳이다. - 중략 - 지난 무진년(1628)에 이 고을 유학 김여빈이 이를 슬퍼하여 동지 고 승후와 더불어 여론을 앞장서 일으키고 이끌어 바야흐로 재력을 모으고 집안의 자제와 집안 노비로 터를 닦고 돌과 나무를 운반하여 한 칸 초옥을 처음으로 세우고 - 하략- 김여빈과 고승후가 초옥 사당 한 칸을 세움으로서 시작한 것을 계기로 공의 후손과 국가에서 성지로 가꾸고 보존하였으며, 1726년에는 노량서원을 개원하여 유림으로 하여금 보존 관리하게 되 었고 1746년에는 호충암을 짓고 화방사의 승장과 승병으로 하여금 수직호사( 守 直 護 祠 ) 하도 록 하였으나 1871년에 대원군 향사 철폐령에 의거 훼철되는 수난을 겪었다. 1921년에 본 고장의 사림 박진평과 정민주가 비각을 중건하고 이듬해 보존회가 조직되어

22 1208 남해군지 시설물을 복건함으로서 본래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현재는 (사)남해충렬사의 소유로 남해군에서 사적지로 관리하고 있다. 남해노량이충무공묘비( 南 海 露 梁 李 忠 武 公 廟 碑 ) 유명조선국삼도수군통제사증시이충무공묘비 숭록대부의정부우찬성겸성균관제좨 송시열 찬 정헌대부의정부좌찬성겸성균관제좨 송준실 서 남해의 노량에 3 간의 사당이 있으니 그 안에는 위패를 모시어 놓고 돌아가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제 사를 모시는 곳이다. 명나라 신종황제( 神 宗 皇 帝 ) 만력 원년에 왜놈 추장 수길( 秀 吉 )이 그의 임금을 죽이고 온 나라를 들어서 우리나라를 도둑질하러 왔다. 이충무공께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북쪽 변방에서 여러 번 큰 공을 세웠으나 사람들이 전혀 알 지 못 하였다. 신묘년(1591) 2월 전라도 좌수사로 임명되어 이충무공께서는 부임하자마자 매일 전쟁 도구를 수리하면 서 사졸들을 다독이어 보살펴 주셨다. 마침내 왜적들과 싸우게 되매 이충무공께서는 옥포에서 왜적들을 패주시키셨고 노량과 당포에서도 왜적을 물리치셨고 사량에서도 왜적과 싸워 크게 이기셔서 적장의 귀 한 목을 베시었다. 또 당항포에서도 왜적들과 싸워 크게 이겨서 적선 40여척을 격파하셨다. 이는 모두 적은 수의 수군으로 대적을 분쇄한 것이다. 임금님께서는 공의 공훈을 치하하는 조서를 내림과 동시에 그 벼슬도 올려 주셨다. 또 영등포에 이르러 서도 왜적과 싸워서 그들을 물리치셨고 견내량에 이르러서는 적을 유인 격파하여 바다를 적들의 피로 물들게 하셨고 또 안골포에는 왜선 40여척을 격파했으며, 마침내 부산으로 나아가 적선 백여 척을 격파 하셨다. 드디어 좌수영의 본영을 한산도로 옮기시고 군량을 비축하여 가면서 군사들을 재편성하고 의주 에 몽진 중이신 선조 임금님을 맞이하고자 계획하였다. 조정에서 공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하여 공이 부임하시니 왜적은 매우 두려워하면서 간첩을 이용하 여 어리석은 우리나라의 여러 장수들을 이간하였다. 원균이 또 공을 질시하여 일을 꾸미니 조정의 공론 이 양분되었다. 공은 마침내 체포되어 고문까지 받기에 이르렀다. 직언하는 대신도 있었고 임금님께서도 또한 충무공의 공훈을 생각하셔서 장군의 벼슬만 뺏는 것으로 문책하셨다. 바로 그 때에 어머니께서 별세하셨다 는 부고를 받고 바삐 곡하며 즉시 친가로 가면서 내 오직 한 마음으로 충과 효를 행하였거늘 이러한 때에 상까지 당한단 말인가? 라고 탄식하셨다. 같이 가던 군인과 민간인들은 말고삐를 붙잡고 울고 모든 사람들이 매우 한스러워하면서 같이 슬퍼하였 다. 원균은 통제사를 대신하고 있다가 적의 계략에 빠져 크게 패하고 달아나다가 자신도 전사하니 한산도도 마침내 적의 수중에 떨어지고 왜적은 드디어 서해를 덮쳐 남원까지 진격하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마침내 공을 다시 통제사로 삼으니 공은 1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급히 순천부로 들어가 달 아났던 군졸들을 조금 모아 마침내 난도( 蘭 島 )의 벽파정에서 적과 싸워 모든 왜적들을 크게 무찔러 버 렸다. 크게 승리하였다는 보고가 임금님께 들리니 임금님께서는 공의 작위를 높여 주려 하셨으나 공의 품계가 이미 높으니 그만 두고 휘하 장졸들에게만 상을 주시는 것으로 그치셨다. 명나라 장수 양호( 楊

23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09 鎬 )도 또한 돈과 비단을 보내어 위로하면서 상을 주고 명나라 조정에 공의 이름을 아뢰니 마침내 공의 이름이 온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에 공은 오히려 나물 반찬으로 밥을 드시고 잠자리를 괴롭게 하며 상주( 喪 主 )로서의 몸가짐을 지키 셨다. 선조대왕께서는 특사를 보내시어 보약을 하사하셨고 공은 눈물을 흘려 울면서 더욱 충성할 것을 다짐하셨다. 임금님께서는 공이 거느리는 수군의 세력이 너무 약한 것을 생각하셔서 먼저 물러났다가 전세를 관망하라 하셨다. 이에 공은 급히 계문을 올려서 여쭙기를 신이 한 번 항구를 떠나가면, 왜적들은 반드시 육지를 올라 멀리 쳐들어갈 것입니다. 라고 하셨다. 때마침 명나라 장수 진린과 유정이 수륙 양면으로 와서 도와주 게 되니 공은 기쁜 마음으로 그들을 맞이하셨다. 공은 고금도에 머물면서 백성들을 모아 농사를 짓게 하며, 공과 사로 그들을 편하게 하여 주시니 남쪽 의 백성들이 많이 몰려 왔다. 왜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는 오직 달아날 길을 열기 위하여 명나라의 두 장수에게 심히 공손히 굽실거리며 틈틈이 뇌물을 주니 두 장수들은 모두 길을 열어 주려고 하였다. 공 은 풍자하여 구들을 꾸짖으니 심지어 고니시 유키나가가 또 공에게까지 사신을 보내어 직접 총검을 뇌 물로 바쳤다. 공은 원수이기 때문에 왜적과는 사신을 교환할 수 없음을 엄한 말로 꾸짖어 돌려 보내셨 다. 공의 휘하 장수와 군사들은 용기가 백배로 늘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궁지에 몰리게 되자. 마침내 경상도 사천에 머물고 있던 저희 도적들을 데려다가 그를 구원하게 하였다. 어느 날 저녁때에 큰 별똥별이 바다 가운데에 떨어졌다. 군인들은 그것을 흉조로 보고 두려워하였다. 무 술년(1598) 11월 19일에 공은 명나라 장수 진인과 함께 노량에서 왜적을 맞이하여 싸워 크게 이기셨는 데 공은 갑자기 적의 총알을 맞고 운명하셨고 진인은 왜적에게 포위되어 위태롭게 되었다. 공의 조카 완( 莞 )은 담략이 있었으므로 곡성을 내지 아니하고 스스로 독전하여 마침내 진인을 구하여 내 었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겨우 도망치듯 달아날 수 있었다. 이미 공의 전사가 알려지니 우리 군사들과 명나라 장수들의 두 진영에서 모두들 목을 놓아 울어서 울음소리가 바다를 뒤덮었다. 남해에서 아산까지 천리 길에 영구를 맞이하여 호곡하며 제물을 올리는 사람들은 끊이지 아니하였다. 또한 스스로 3년 상을 지키는 이들도 있었고 중들은 곳곳에서 천도제를 베풀어 올리기도 하였다. 사람 들은 모두 말하기를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고 우리의 원수를 잡아 죽여 원한을 갚아 주신 어른이 라 고 하였다. 공은 성품이 곧고 깨끗하여 스스로의 뜻을 지켜 정의를 독실하게 지키셨다. 높은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도 항상 의를 지켜 일을 처리할 때에도 조그만 잘못이나 부끄러움이 없게 하셨다. 한번 용단을 내리시 면 어떤 강한 적이라도 반드시 이겨 내셨다. 군정은 간결하면서도 법도가 있어서 헛되이 한사람을 죽이지 아니하셨으니 삼군( 三 軍 )이 하나의 뜻으로 뭉쳐서 감히 군령을 어기는 이가 한 사람도 없었다. 공이 지킨 대의는 모함하는 왜장의 밀사를 물리쳤 고 밀사의 함정에 빠져서 화의론을 주장한 사람들로 하여금 부끄럽게 꾸짖으셔서 이마에서 흐르는 땀이 비수( 沘 水 )같게 하셨으니 공의 충성은 장충헌( 張 忠 獻. 송나라 충신)이나 악무목( 岳 武 穆. 송나라 충신)보 다도 뛰어 나셨다. 그러므로 허약한 신졸을 통솔하여 천하에서 제일 강하다는 적과 크고 작은 수십 번 의 싸움에서 한 번도 지지 아니하고 이기시어 우리나라 동남쪽을 굳게 막아 내셨다. 이것은 우리나라 가 중흥의 위업을 이룰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 공의 위열은 명나라 천자까지도 특별한 사랑을 베푸셔 서 인부( 印 符 )까지 하사하셨다. 온 나라 안의 백성들은 비록 가가호호마다 공의 신주를 모셔 존경하여도 지나칠 것이 없을 것이다. 하

24 1210 남해군지 물며 이 노량이라는 곳은 군사를 지휘하시던 곳이니 전사하시어 말씀은 없지만 공의 혜택을 입은 사람 들은 공의 충정을 두려워할 만도 하니 진실로 억만년을 두고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산을 박차고 바닷물을 내뿜는 듯하고 바람이 성나서 구름을 휘몰아 항상 대마도를 뛰어 넘고 지금의 일 본 동경까지 무찔러 버릴 기세이었으니 공의 영위( 靈 位 )를 엄숙히 받들어 모시고 있는 고장이다. 먼저 있던 옛 사당은 너무나 누추하고 좁은데다가 지대마저 낮아서 공의 넋을 모시기에는 마땅하지 아 니하기 때문에 통제사 정익은 포은 선생의 이손( 耳 孫 )으로 공의 충의에 감동되어 곧 고쳐서 새롭게 하 였다. 또 나무를 베고 돌들을 다듬어 사당을 새로 지은 뒤 민학사 정중을 인연하여 나로 하여금 그 일을 글로 쓰게 하여 거칠게나마 다 이루어지니 판서 홍공명하( 洪 公 命 夏. 조선 인조 문신)에게 알려져 임금님 까지 전하여져 아시게 되매 효종대왕께서는 이 초본을 바치게 하여 열심히 읽으시고 또한 기뻐하셨으니 자못 백성들에게 격려하시는 뜻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시며 능백처럼 푸르른 공의 꿋꿋한 혼백도 거듭 구천에서 감읍하고 계실 것이다. 여기에 시말을 갖추어 아울러 적어 두는 것은 오직 세월이 흐를수록 옛날의 일을 피나는 교훈으로 삼아 우러러 받들게 하려 함이다. 공의 휘는 순신이시고 자는 여해이시고 보관은 덕수이시다. 때는 숭정 신축( 辛 丑 1661)년 10월이다. 지금 임금님이신 현종 계묘( 癸 卯. 1663)년에 충렬( 忠 烈 ) 이라는 현액을 왕께서 쓰셔서 내려 주셨다. 이에 이르러서는 더한 영광이 없다. 비석을 세우는 일은 전후임( 前 後 任 )의 통제사 박경지( 朴 敬 祉 )와 김시성( 金 是 聲 )이 맡아 하였다. 이 해 7월 일에 추각함. 有 明 朝 鮮 國 三 道 水 軍 統 制 使 贈 諡 忠 武 李 公 廟 碑 崇 祿 大 夫 議 政 府 右 贊 成 兼 成 均 舘 祭 酒 宋 時 烈 譔 正 憲 大 夫 議 政 府 左 參 贊 兼 成 均 舘 祭 酒 宋 凌 吉 書 南 海 之 露 梁 有 廟 三 間 中 設 位 牌 以 祀 故 忠 武 李 公 者 也 神 宗 皇 帝 萬 曆 紀 元 倭 酋 秀 吉 弑 其 君 擧 國 來 寇 公 先 在 北 邊 屢 立 奇 功 而 人 不 甚 知 辛 卯 二 月 擢 授 全 羅 在 水 使 公 至 則 日 修 戰 具 撫 循 士 卒 遂 與 賊 戰 敗 之 於 玉 浦 敗 之 於 露 梁 及 唐 浦 敗 之 於 蛇 梁 斬 其 貴 將 又 敗 之 於 唐 項 浦 撞 破 其 四 十 餘 船 皆 以 少 擊 衆 上 下 書 褒 之 陞 其 資 級 至 永 登 浦 敗 之 至 見 乃 梁 誘 賊 敗 之 腥 血 漲 海 又 戰 於 安 骨 浦 燒 其 船 四 十 餘 遂 進 戰 於 釜 山 又 破 其 船 百 餘 艘 遂 置 陣 閑 山 島 積 粟 整 師 以 爲 迎 駕 龍 灣 之 計 朝 廷 爲 置 三 道 統 制 使 以 處 之 賊 畏 甚 行 間 以 愚 我 諸 將 元 均 又 嫉 搆 之 朝 廷 兩 信 之 公 遂 被 追 拷 有 大 臣 言 上 亦 念 公 功 只 削 職 從 軍 以 責 効 時 母 夫 人 卒 公 便 道 奔 哭 卽 行 曰 吾 一 心 忠 孝 到 此 俱 喪 矣 軍 民 擁 馬 號 泣 遠 近 嗟 惋 元 均 代 爲 統 制 使 爲 賊 所 誘 軍 敗 走 死 而 閑 山 遂 陷 賊 遂 由 西 海 進 陷 南 原 朝 廷 遂 以 公 復 爲 統 制 公 以 十 騎 馳 入 順 天 府 稍 收 亡 卒 遂 戰 於 於 蘭 島 碧 波 亭 皆 大 破 之 捷 至 上 欲 陞 公 崇 品 有 言 公 爵 秩 巳 高 遂 止 賞 將 士 天 將 揚 公 鎬 亦 送 銀 段 以 慰 賞 而 奏 聞 天 朝 公 之 名 遂 得 聞 天 下 時 公 猶 食 素 寢 苫 上 特 使 論 旨 且 送 草 木 之 滋 公 涕 泣 勉 從 上 念 公 舟 師 單 弱 欲 令 前 却 以 觀 勢 公 馳 啓 曰 一 臣 去 港 則 賊 必 登 岸 長 驅 矣 時 天 將 陳 隣 劉 綖 水 陸 內 會 公 接 應 有 方 俱 得 歡 心 公 進 據 古 今 島 募 民 耕 作 以 便 公 私 南 民 繈 屬 歸 之 賊 將 行 長 亟 謀 撤 歸 求 道 甚 恭 雨 天 將 中 其 賄 誘 欲 許 之 公 諷 刺 甚 至 行 長 又 遣 使 于 公 遺 以 銃 劒 公 以 讐 賊 不 可 通 使 嚴 辭 却 之 將 士 勇 氣 百 倍 行 長 計 窮 遂 引 酒 川 屯 賊 以 自 援 一 夕 大 星 殞 海 中 軍 中 畏 之 戊 戌 十 一 月 十 九 日 公 與 陳 公 迎 戰 于 露 梁 賊 大 挫 衄 公 忽 中 丸 而 絶 陳 公 被 圍 急 公 從 子 莞 有 膽 略 不 發 哭 督 戰 自 如 遂 解 陳 公 圍 而 行 長 僅 得 遁 去 旣 發 喪 我 師 與 天 將 兩 陣 皆 號 哭 聲 殷 海 中 自 南 海 至 牙 山 迎 柩 哭 奠 千 里 不 絶 亦 有 喪 之 三 年 者 僧 徒 處 處 設 齋 皆 曰 活 我 命 復 我 讐 者 公 也 公 內 有 篤 行 貞 介 自 宇 意 有 不 可 雖 達 官 要 人 必 據 義 媿 屈 之 發 謀 制 事 擧 無 遺 策 奮 勇 決 機 前 無 堅 敵 軍 政 簡 而 有 法 不 妄 殺 一 人 而 三 軍 一 志 莫 敢 違 令 至 其 擧 大 義 斤 倭 使 使 中 賂 者 顔

25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11 馬 卒 主 和 者 顙 泚 則 張 忠 獻 岳 武 穆 蔑 以 加 矣 以 故 當 積 衰 諱 兵 之 餘 遇 天 下 莫 强 之 敵 大 小 數 十 戰 俱 以 全 取 勝 蔽 遮 東 南 以 基 中 興 之 偉 烈 至 蒙 皇 上 寵 命 錫 以 印 符 則 一 國 之 人 雖 家 尸 而 戶 侑 不 爲 過 矣 況 此 露 梁 者 旌 纛 之 所 臨 喑 噁 之 所 被 其 精 爽 之 可 畏 者 固 將 億 萬 年 不 泯 蹴 山 噴 海 風 怒 雲 屯 常 有 跳 馬 島 擣 江 戶 之 氣 則 嚴 奉 之 擧 尤 在 所 先 也 舊 有 廟 牛 角 隘 下 窄 不 足 以 妥 公 之 靈 故 統 制 使 鄭 木 益 圃 隱 先 生 之 耳 孫 感 公 忠 義 卽 改 而 新 之 又 伐 大 石 以 爲 牲 繫 而 因 閔 學 士 鼎 重 俾 余 書 其 事 文 旣 粗 成 判 書 洪 公 命 夏 以 事 聞 孝 宗 大 王 亟 徵 草 本 特 賜 乙 覽 亦 豈 拊 髀 頗 牧 之 意 歟 只 今 仙 馭 上 賓 陵 栢 蕭 森 公 之 毅 魄 重 亦 飮 泣 於 九 原 矣 因 幷 記 此 以 備 始 末 俯 仰 疇 昔 爲 之 抆 血 也 公 諱 舜 臣 字 汝 諧 德 水 人 時 崇 禎 辛 丑 十 月 日 也 今 上 癸 卯 賜 額 曰 忠 烈 至 是 而 崇 報 無 憾 矣 碑 役 前 後 相 之 者 統 制 使 朴 公 敬 祉 金 公 是 聲 也 是 年 七 月 日 追 刻 충렬사 창건기( 忠 烈 祠 創 建 記 ) 슬프다. 영천에 제갈사가 있고 수양에 청성묘가 있으나 거리는 천리가 넘고 세운 횟수도 천년차가 더 되나 충성을 상주고 절개를 나타내어 주는 것은 국가의 큰 법도이라 충성을 사모하고 정의로 나아가 는 사람의 마음이 같은 바다. 그러므로 땅 이름도 서로 닮음으로 오히려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모시는 데 하물며 노량은 충무공 이 선생이 몸을 버리고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친 곳이라 지난 숭정 무진년(1629 년)에 이 고을 선비 김여빈공이 분개하여 한탄하고 탄식하여 드디어 선비 고승후와 더불어 앞장서 사당 세울 여론을 일으키고 재목을 모으고 땅을 깎아 자기 집 머슴을 거느리고 초가집 한 칸을 처음으로 세 웠다. 소상을 갖추어 나라에 올리니 그 때의 어사 민정중공이 즉시 당시 통제사 정익공으로 하여금 새 로 고쳐 짓게 하고 인하여 비를 세워 그 공덕을 칭송하였고 옛 정승 홍명하공이 이 사실을 조정에 알려 드리니 효종대왕께서 특별히 친히 읽어보시고 시호를 다시 충무로 고치시었으며 현종조에 이르러 또 사 액을 친히 내리셨다. 이와 같이 사당은 있으나 비좁고 낮아 보잘 것 없어 영혼을 편안하게 모시기에는 부족하고 지키고 관리하는 사람이 없으니 보기에 음사스러운 당집 같은지라 크게 높여 사모하는 정성 으로 누구나 눈물을 머금고 길게 탄식치 않으리오. 다음 숭정 기원후 을해년(1635년) 가에 여빈의 손자 경리가 선조의 뜻을 되살려 생각하니 분개하고 한탄함을 견딜 수가 없어 소상을 들고 대궐문 앞에 가서 두 번 세 번 상소로 호소하여 다음 정축년(1637년) 겨울에 이르러 임금님께서 들어주시는 은혜를 입었 으나 서원을 세우지 못하여 오래도록 유교를 전하지 못하였더니 이십육년이 지나 임인년(1663)에 경리 의 아우 경뢰가 다시 선비들의 여론을 주도하고 여러 고을에 통문을 보내니 도내 여러 고을에서 협력함 으로서 비로소 추천으로 원장과 도유사를 선출하여 망지를 주고 선비들로 하여금 향사와 관리를 맡아 하게 하였으니 원장인즉 신명구공이고 도유사는 김경뢰공이니라. 이내 사당의 모양새가 엄숙하고 강당 도 훌륭하고 아름다워졌는데 선생의 오대손 봉상이 통제사 때 사당을 지어 새롭게 할 뜻으로 써서 스스 로 기문까지 지어 가지고 와서 벽에다 걸고자 하였으나 중첩으로 걸어둘 필요가 없었다. 봄가을의 향사 는 八 변팔 豆 로 문묘와 더불어 차이가 없게 하고 忌 日 의 제사는 사변사두로 다른 서원과는 스스로 다르 게 한즉 조정의 풍족한 보상이 이에 이르니 유감이 없다. 다시 팔년이 지난 기유년(1667년)에 충민공을 같이 붙여 모시고자 하는 일로 경뢰의 아들 중명이 류경하공과 더불어 소상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 소했으나 후사가 막은 바 되어 비록 임금님의 허락은 받지 못하였으나 조창집에 들어 있다고 대개 그렇 게 생각한다. 그러나 큰 흠이란 것은 원생 정원이 스물 명인데 현재 열명 미만으로 말미암아 지켜 보호 하는 절도가 점점 소홀해지고 서원의 규모와 모양새가 극히 쇠잔하니 진실로 은덕을 갚음에 그 법전이 부족함으로 또한 선비들이 탄식함이다. 젊은 선비들의 모임이 유독 우리 고장에서 뿐 아니라 여러 고을 의 많은 선비들이 찾아와 뵈옵고 떠들썩하게 탄식하여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서원이 모두 원생이 이십

26 1212 남해군지 팔 명이나 이 서원만이 홀로 그렇지 아니하다는 말은 참으로 민망하고 애석한 곳이니라. 구중궁궐에 한 번 상소하기가 쉽고도 어렵도다. 어떻게 하면 목적을 달성하리오. 이와 같이 답답한 세월이 백여 년이나 되고 중명의 아들 덕호와 종손 종한이 또한 뜻있는 선비라 조상의 서원을 세운 뜻을 추모하고 조정에서 충성을 표창하는 법전을 삼가 받들어 몸을 바쳐 일깨우고자 하나 그 때 누가 능히 실마리를 열어 앞장 서 여론을 인도할 것 인고 한 선비가 있으니 박성효군이라 성효인즉 덕호와 종한의 스승이니라 학문이 풍부하고 글씨가 힘 있고 예부터 지켜오는 예절에 민첩하고 통달한 고로 마음과 힘을 같이하여 산 넘고 물 건너기를 꺼려하지 않으니 호사스러운 여행 채비와 순탄한 길이 아닌데도 서류를 지니고 외나무다리 를 걷는 안타까움을 살피건대 충성을 사모하고 본받는 정성이라, 가로데 원생 정원이 이미 대법전의 조 례에 이루어져 있으며 규정대로 처분되었으므로 따라서 이십 명으로 오늘 다시 서원을 여는 때인즉 기 원후 계사년(1653년) 3월 이니라 서원의 차림새도 이로부터 차차 떨치게 되고 지켜 보호함도 점차 잘 짜임에 이르렀으나 아, 이 사람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 공을 이루었으리오, 이 할아버지가 서원을 창건 함이 있었고 손자가 다시 원생을 베풀었으니 공이 막대하고 덕은 어디다 비할 수 없느니라 무릇 착함을 상주고 아름다움을 나타냄은 선비의 일이나 서원을 세운 이래 다만 한 권의 조창집이 있었으나 원래 첫 머리에 게시한 글이 없었으며 지난 것을 이어서 오는 일을 열어줌이 실로 희미하여서 양반들의 마음이 심히 슬프고 애석해 함으로써 창수(세우고 보수함)를 기록하니 대저 창수란 두 글자의 뜻은 앞에 든 사 실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큰 은혜와 많은 덕을 또한 느끼고 칭송함에 있어서 다음으로 그 중에서 큰 것을 뽑아 말하자면 忠 武 公 선생의 충성은 해와 달을 꿰뚫고 효도는 천지에 통하니 나라에서 대들보 같 이 깊이 돌봐주고 이어서 복을 입은 자손 길이길이 이어졌으며 대대로 이어받아 통제사의 책임을 맡 게 되었음이니라 사당을 다시 세우고 원장을 넓혀 쌓고 강당을 다시 꾸미고 문과 벽을 아름답게 한 것 이 창수의뜻이니라. 병사의 자리에 부임하면 곧 여기에 다달아 우러러 뵈옵고 선비들을 매우 정답고 친 절하게 대하고 한 가족 같이 봐주며 서원을 돌보고 지키는데 돈을 아끼지 않음은 도리이고 받들어 제 사 모심에 정성이 깊으니 이는 크고 큰 은전이니라 비록 누구라 지목하지 않으나 이 현판을 걸기 전후 의 창수의 덕은 실로 아산의 이씨가 시켜서 한 바가 명확하다. 오직 우리 선비들은 우러러 사모하고 높 여 받듬이 죽더라도 이지러짐이 없고 오래도록 잊지 않기 위하여 기문을 지었다고 이렇게 말함. 임금님께서 (정조) 즉위하신지 3년 기해(1779)년 늦봄 갑자 전 도유사 류상렬 삼가 기록하고 이때 도유 사 정점이 썼다. 噫 穎 川 有 諸 葛 祠 首 陽 有 淸 聖 廟 地 之 相 去 千 有 餘 里 世 之 相 後 千 有 餘 歲 而 褒 忠 旌 節 國 家 盛 典 慕 忠 向 義 人 心 牧 同 故 以 地 名 相 似 猶 建 祠 廟 而 享 之 矧 此 露 梁 卽 忠 武 李 先 生 捨 身 殉 國 之 地 乎 粤 在 崇 禎 戊 辰 本 邑 儒 林 金 公 汝 贇 慨 然 發 歎 遂 與 士 人 高 承 厚 首 倡 建 祠 之 論 鳩 材 鏟 土 率 其 家 僮 創 一 間 草 屋 具 狀 呈 聞 其 時 御 使 閔 公 鼎 重 卽 令 其 時 統 制 使 鄭 木 益 改 而 新 之 因 營 立 石 頌 其 功 德 而 故 相 臣 洪 公 命 夏 以 事 聞 于 朝 孝 宗 大 王 特 賜 睿 覽 改 諡 忠 武 及 至 顯 廟 朝 又 賜 恩 額 是 以 於 斯 有 廟 而 牛 角 隘 下 窄 不 足 以 妥 靈 典 守 無 人 視 若 淫 祠 思 皇 尊 慕 之 誠 孰 不 掩 淚 長 吁 呼 哉 越 崇 禎 紀 元 後 歲 乙 亥 秋 汝 贇 之 孫 慶 履 追 思 先 志 不 勝 慨 然 本 章 叫 閽 再 疏 三 疏 越 至 丁 丑 冬 果 蒙 天 聽 未 及 建 院 長 庚 星 晦 斯 文 莫 傳 越 二 十 六 年 壬 寅 慶 履 之 第 慶 賚 更 倡 士 論 發 通 列 邑 道 內 合 事 始 圈 院 長 及 都 有 司 使 士 流 主 其 享 祀 典 其 守 護 院 長 卽 申 公 命 耈 都 有 司 金 公 慶 賚 也 廟 貌 嚴 肅 講 堂 翠 然 此 乃 先 生 五 代 孫 鳳 祥 統 制 時 以 肇 創 新 之 之 意 自 製 記 文 揭 于 壁 上 不 必 疊 床 春 秋 八 邊 之 亨 與 文 廟 無 間 諱 日 四 豆 之 祭 與 他 院 自 別 則 至 是 而 聖 朝 豊 報 無 憾 矣 越 至 八 年 己 酉 以 忠 愍 公 配 享 事 慶 賚 之 子 重 命 與 柳 公 經 河 奉 章 叫 閽 而 喉 司 所 阻 雖 未 得 允 許 疏 在 肇 創 集 中 盖 可 想 矣 然 而 一 大 欠 者 仍 存 祠 生 十 人 未 蒙 院 生 二 十 額 由 是 守 護 之 節

27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13 漸 疎 院 模 之 樣 極 殘 寔 爲 崇 報 之 欠 典 抑 又 士 林 之 歉 歎 靑 衿 聚 會 非 獨 此 邑 瞻 尋 士 子 多 至 列 郡 嘖 嘖 感 歎 曰 我 東 書 院 皆 有 院 生 二 十 而 此 書 院 獨 無 之 說 誠 爲 憫 惜 處 也 九 重 天 門 一 番 封 疏 易 之 難 矣 何 以 得 達 乎 如 是 鬱 悒 百 有 餘 年 重 命 之 子 德 琥 及 從 孫 宗 漢 亦 有 志 之 士 也 追 感 先 祖 創 院 之 意 敬 奉 朝 家 褒 忠 之 典 挺 身 鼓 說 其 時 疇 能 開 端 倡 論 耶 有 一 士 朴 君 聖 孝 孝 卽 德 琥 宗 漢 之 師 也 文 富 筆 健 敏 達 古 禮 故 一 心 共 力 不 憚 跋 涉 擔 帷 順 路 隨 車 控 牒 常 亻 勺 憐 察 慕 忠 之 誠 曰 院 生 定 額 旣 在 績 大 典 考 例 定 給 事 處 分 故 仍 以 二 十 生 今 日 復 設 時 則 紀 元 後 癸 巳 三 月 也 院 模 自 此 稍 振 守 護 漸 至 網 密 於 戱 微 斯 人 孰 能 成 此 功 乎 有 是 祖 之 創 建 書 院 有 孫 之 修 設 院 生 功 莫 大 焉 德 莫 比 也 凡 褒 善 旌 美 乃 儒 宮 之 事 而 建 院 以 來 但 有 肇 創 集 一 卷 元 無 弁 首 之 揭 繼 往 開 來 事 實 矇 朧 峨 冠 博 帶 心 甚 嗟 惜 故 以 創 修 爲 記 盖 創 修 二 字 之 意 不 專 美 於 右 洪 恩 盛 德 亦 感 頌 於 左 撮 其 大 者 而 言 之 忠 武 公 先 生 忠 貫 日 月 孝 通 天 地 故 眷 深 樑 木 福 履 蒙 之 子 孫 綿 綿 世 世 相 承 爲 統 制 之 任 也 重 建 廟 宇 廣 築 墻 屋 再 飾 講 堂 輪 奐 門 壁 此 創 修 之 意 也 爲 兵 使 之 莅 也 卽 臨 瞻 謁 待 士 款 曲 之 情 視 同 一 家 顧 護 書 院 散 金 爲 儲 之 道 誠 深 奉 祀 此 莫 大 之 恩 也 雖 不 敢 指 某 揭 板 前 後 創 修 之 德 實 賴 牙 山 李 氏 之 爲 使 也 明 矣 惟 我 士 林 景 慕 崇 奉 死 無 缺 焉 永 作 不 忘 之 記 云 爾 聖 上 堂 于 三 年 屠 維 閽 茂 季 春 甲 子 前 都 有 司 柳 相 烈 謹 誌 時 都 有 司 鄭 塾 書 충민공비( 忠 愍 公 碑 ) 장군은 국가의 충렬인이다. 통제사로서 만역 정유재란을 당하여 국가의 위태로움이 정리되지 않았을 때 국난을 막고 노량에서 운명하니 청산도 그대로 벽해( 碧 海 )도 예전처럼 흐르는 구나. 불초가 욕되게 이 고을의 수령으로 부임하여 오장지원( 五 丈 之 原.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제갈공명이 위나라의 사마의(사마 중달)와 싸워 전사한 곳. 죽은 제갈공명이 살아 있는 사마중달을 패주케 한[ 死 諸 葛 生 走 仲 達 ] 고사가 있 다. 충무공께서는 노량에서 유언으로 전쟁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 하지 말라[ 戰 方 急 愼 勿 言 我 死 ]고 하여 왜군을 패주케 하였는데 공명과 충무공의 전사하실 때의 거취가 유사( 類 似 )함으로 노량을 오장원에 비 유했다)에 고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감추지 못했다. 봉록을 내어 장인( 匠 人 )을 모으고 언덕에 사 우를 세우나니 영혼은 향화에 의지하여 오래토록 안식하소서. 장군의 일월을 궤뚫는 충성은 세상천지에 알려졌으며 위대한 업적은 국사와 오성( 鰲 城 ) 이정승( 李 政 丞 )이 지은 바 행상에 상세히 실려 있으니 후 세에 알고자 하는 자 나의 누설( 陋 說 )로 약거( 略 擧 )한 것을 기대하지 말라. 덕수인으로 성은 이씨요, 휘 는 순신이라. 숭정계유(1633) 칠월 경술 행남해현령 이정건 기록하다. 將 軍 國 忠 烈 人 也 以 統 制 當 萬 曆 丁 酉 之 難 王 事 未 整 星 殞 於 露 梁 之 上 靑 山 不 改 碧 海 長 流 余 不 肖 辱 守 是 邦 吊 告 於 五 丈 之 原 不 覺 潛 然 出 涕 卽 損 俸 鳩 工 立 祠 是 原 永 屬 香 火 依 歸 良 有 以 也 將 軍 之 軒 天 地 貫 日 月 忠 偉 績 祥 在 國 史 及 鰲 城 李 相 國 所 撰 行 狀 後 欲 知 之 者 不 待 余 之 陋 說 略 擧 其 槪 德 水 人 姓 李 諱 舜 臣 也 崇 禎 癸 酉 七 月 庚 戌 行 南 海 縣 令 李 廷 楗 記 충무공비( 忠 武 公 碑 ) 오호라 선조 충무공께서 굳은 지조로 순국하신지 36년 계유에 남해현령 이정건( 李 廷 楗 )이 공의 충의에 감동하여 사우를 세워 신주를 모시고 또 짤막한 비석에 사적을 간략하게 새겼으나 전면의 각자시호 무 ( 武 )를 민( 愍 )으로 그릇 적었기로 여러 해 지낸 지금 불초가 욕되게도 호남 좌수영 절도사가 되어 벌석 ( 伐 石 )하여 고쳐 쓰나니 희( 噫 )라 선조의 풍성한 공훈과 위열은 천지에 걸려 있고 일월같이 밝고 빛남을 우암 송선생이 묘전비문( 廟 前 碑 文 )에 상세하게 기록한 바 굳이 이 비의 유무( 有 無 )를 따지리오. 이후( 李

28 1214 남해군지 候 )는 공의 공덕을 사모하고 높이 보답하는 정성으로 입석한 것이나 묘전비와 병립함이 불가함으로 비 석과 더불어 민자( 愍 字 )를 매몰하는바 그 전말을 기록하여 후세에 볼 수 있도록 대비하노라. 숭정기원후재계추 12월 일 5대손 명상이 울면서 씀 鳴 呼 先 祖 忠 烈 公 立 慬 後 三 十 有 六 年 癸 酉 南 海 縣 令 李 廷 楗 感 公 忠 義 建 祠 妥 靈 又 立 短 碣 略 記 事 蹟 而 仍 前 面 所 刻 諡 號 以 武 爲 愍 何 其 錯 子 也 歲 歷 于 今 不 肖 適 參 湖 左 節 度 伐 石 以 改 之 噫 先 祖 豊 功 偉 烈 軒 天 地 炳 日 月 於 尤 庵 宋 先 生 所 撰 廟 碑 詳 且 盡 矣 固 不 待 於 是 碣 之 有 無 而 若 其 李 候 景 慕 崇 報 之 誠 不 可 以 幷 與 石 埋 沒 故 書 記 顚 末 以 備 後 之 覽 者 爾 崇 禎 紀 元 後 再 癸 丑 十 二 月 日 五 代 孫 命 祥 泣 書 비갈( 碑 碣 ) 有 明 朝 鮮 國 三 道 水 軍 統 制 使 贈 諡 忠 武 李 公 廟 碑 ( 顯 宗 五 年 [ 一 六 三 ] 七 月 日 追 刻. 宋 時 烈 撰 ) 忠 愍 公 碑 ( 崇 禎 癸 酉 七 月 庚 戌 [ 一 六 三 三 ] 行 南 海 縣 令 李 廷 楗 記 ) 忠 武 公 碑 ( 崇 禎 紀 元 後 再 癸 丑 [ 一 七 九 三 ] 十 二 月 日 五 代 孫 命 祥 泣 書 ) 嘉 善 大 夫 三 道 統 制 李 公 泰 祥 之 碑 ( 崇 禎 三 壬 年 [1882] 五 月 立 監 造 前 判 官 文 景 一 ) 충렬사한글비(대한민국 30년 12월 일 정인보는 짓고, 김충현은 쓰다) 行 郡 守 鄭 任 煥 功 績 碑 ( 檀 紀 四 二 八 五 年 壬 辰 三 月 日 南 海 忠 烈 祠 慕 忠 會 建 ) 현액판( 懸 額 板 ) 忠 烈 祠 創 建 記 ( 于 三 年 屠 維 閽 茂 季 春 甲 子 [1779] 前 都 有 司 柳 相 烈 謹 誌 時 都 有 司 鄭 塾 書 ) 露 梁 書 院 ( 露 梁 淸 海 樓 ) 懸 板 ( 崇 禎 紀 元 后 三 壬 戌 [1802] 三 月 日 星 山 後 人 李 萬 龜 謹 識 ) 露 院 門 樓 重 修 記 ( 崇 禎 紀 元 後 四 丁 丑 [1817] 十 一 月 南 至 日 都 有 司 金 宗 浩 謹 誌 ) 碑 閣 補 修 記 ( 隆 熙 元 年 [1907] 菊 秋 十 一 代 孫 宗 有 司 敏 承 十 代 孫 奎 潽 謹 泣 書 監 董 鎭 南 忠 烈 院 齋 任 洪 鍾 勛 ) 忠 烈 祠 重 創 記 ( 歲 丁 卯 [1927] 季 春 節 振 山 河 謙 鎭 記 ) 忠 烈 祠 重 建 記 ( 壬 申 [1932] 春 三 月 日 ) 忠 武 李 公 事 蹟 한글 碑 築 臺 工 事 記 ( 檀 紀 四 二 八 二 年 己 丑 (1949) 十 月 日 南 海 郡 慕 忠 會 ) 忠 烈 祠 宿 直 舍 建 築 記 ( 壇 紀 四 二 八 三 年 庚 寅 [1950] 十 一 月 日 鄭 柱 瀯 書 ) 慕 忠 會 特 捐 諸 氏 及 事 功 記 ( 檀 紀 四 千 貳 百 八 十 七 年 [1954] 甲 年 九 月 日 南 海 忠 烈 祠 慕 忠 會 ) 故 鄭 公 民 柱 民 三 世 獻 誠 事 實 並 壬 辰 記 念 行 事 記 ( 檀 紀 四 二 九 丁 酉 年 [1957] 二 月 日 南 海 忠 烈 祠 慕 忠 會 ) 忠 烈 祠 位 土 還 元 事 實 記 ( 檀 紀 四 千 二 百 九 十 年 [1957] 丁 酉 二 月 日 南 海 忠 烈 祠 慕 忠 會 ) 대통령 각하 참배 기념(서기 1965년 4월 21일 남해충렬사 회장 김범두) 忠 烈 祠 丹 雘 記 ( 檀 紀 四 二 九 八 年 [1965] 四 月 二 十 八 日 ) 南 海 忠 烈 祠 補 修 記 (단기 4324(1991)년 4월 일 남해충렬사 모충회 회장 이영래, 부회장 이춘홍 이 대기, 총무 정수호, 관리인 강한중 방명기) 忠 烈 詞 ( 後 援 會 謹 修 揭 板 )

29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 명승 (1) 남해 가천마을 다랑이 논 지정번호 및 일자 : 명승 제15호, 소 재 지 : 남해군 남면 홍현 777번지외 규 모 : 195,428m2 시대 및 관리자 : 선사시대 남해군 망망대해가 손바닥에 노니는 생명선의 원점에 인간이 만들어 낸 억척스러움이 산허리를 타고 다랭이논을 만들었다. 마을 주민들은 부처님의 은덕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을 아래 바 다와 인접해 있는 곳에 암수바위가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13호로 1990년 1월 15일에 지정되 어 있는데 미륵불이라 부르고 있다. 해안에서부터 설흘산까지 가파른 경사에 층층이 3평에 서 3백 평에 이르고 지표가 생긴 대로 아무렇게나 올려져 있다. 설흘산과 응봉산에서 흐르는 두 계곡에는 참게를 비롯한 생물들이 서식하고 있고 뒷산에 는 엘레지, 용담, 춘란, 구절초, 원추리 등 야생 식물들이 자생할 뿐 아니라 앞 바다에는 풍 부한 해산물과 어류들이 노닐고 있다. 마을 인심은 넉넉한데다 친절하기까지 하니 마치 오랫동안 같이 지내온 가족과 같은 곳으 로 착각하기도 한다. 이 마을에는 61가구에 149명이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으며 김해 김씨 와 이씨가 많고 그 외 조씨, 하씨, 손씨, 문씨, 강씨, 권씨 등이 마을에 들어와 상부상조하며 살고 있다. 마을 아래는 해안이지만 어업을 하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마을을 간 천( 間 川 )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마을을 가운데 두고 양 옆으로 내( 川 )가 흐르기 때문에 간천 이라 불렀지만 하나의 내에 하나를 더했다는 가천의 뜻은 서로 같다고 볼 수 있다. 지형을 보면, 뒤로는 설흘산 봉수대와 응봉산 육조문이 지키고 앞으로는 수평선이 보이는 앞에 삿 갓섬으로 불리는 소치도가 하늘을 뚫고 있다. 마을 가운데 밥 무덤에 금줄이 쳐져 있고 위쪽 에 2~3백년으로 보이는 이팝나무와 아래쪽에 미륵바위가 지키고 있다. 우리나라 15번째 명승으로 지정된 다랭이 논은 자연을 그대로 살리면서 층층을 직각으로 돌담을 쌓아 필요 없는 한 치의 땅도 허용하지 않았고 윗 담이 허물어지면 아랫배미가 묻혀 버릴 정도의 작은 땅도 일궈낸 억척스러움에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이는 마을 아래 미륵 불의 자비심에 가피된 사람들의 정성과 성실성에서 비롯된 산물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까 한다. 고려시대 중기 기록인 고려도경 (1123)에 이렇게 적고 있다. 평지가 적기 때문에 산

30 1216 남해군지 전을 많이 만드는데 그 지형의 높낮이가 있어 경작하기가 무척 힘들며, 멀리서 바라보면 사 다리나 계단과 같다 라고 했다. 특히 남해는 한정된 토지뿐이다. 4면이 바다이기 때문에 앞으로는 바다가 가로 막혀 있고 뒤로는 표주박 같은 산(67.5%)들이 많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도달했기에 산비탈까지 전답을 개간한 것 같다. 남해 농경지는 전면적 357.3km2 중 80.87km2로서 22.6%뿐이다. 이런 지형을 가지고 있는 남해인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산 높은 줄 모르고 힘닿는데 까지 계속 오르다 보니 산 중턱까지 전답을 개간하 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곳이 이곳이다. 두 평 정도 되는 논이 있는데 구전되어 오는 이야기를 소개하면 이러하다. 어느 날 농군이 하루 종일 논에서 일을 하다가 해가 저물어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자기 논을 헤아려 보니 한 배미가 없어졌다. 몇 번이고 세어 보아도 똑 같았다. 결국은 포기 하고 집으로 가기 위해 벗 어둔 삿갓을 드니 그 밑에 한 배미가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만큼 작은 땅도 논밭으로 만 들어 경작했다는 억척같은 농부의 이야기이다. 가천은 2002년에 환경부로부터 자연생태 우수마을, 녹색경영대상 수상, 아름다운 마을 가 꾸기 장려상 등을 수상하였고 농촌진흥청에서 농촌전통테마마을로 지정되었다. 천혜의 자연 경관과 살아 있는 생태계에 농촌의 옛 정취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2005년 1월 3일 다랑이 논은 국가명승지 15호로 지정되었다. (2) 남해 금산 지정번호 및 지정일자 : 명승 제39호, 소 재 지 :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257-1외 7필 규 모 : m2 관 리 자 : 한려해상국립공원 남해 금산 은 지리산맥이 남쪽으로 뻗어내려 형성된 산으로 원래 원효대사가 이곳에 보광사라는 사찰을 지은 뒤 산 이름이 보광산으로 불리어 왔으나,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린 뒤 왕위에 등극하게 되자 보은을 위해 영구불멸의 비단을 두른다는 뜻의 비 단 금( 錦 )자를 써 금산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금산은 영남에서는 합천의 가야산, 방장산(지리산)과 자웅을 겨루고 중국의 남악( 南 嶽 ) 에 비견되기도 했으며, 바다 속의 신비한 명산이라 하여 소금강산 혹은 작은 봉래산 ( 蓬 萊 山 )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금산이 작은 봉래산이라는 이름을 얻을 만큼 명산으로 칭 송을 받게 된 것은 멀리 떨어진 남해의 섬 속에서 다시 아득한 섬과 바다를 눈 앞에 두고 우

31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17 뚝하게 솟은 돌산이라는 점에서 유람객에게 속세를 떠난 신비감을 주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 다. 남산은 다도해에서 유일한 큰 체적의 화강암 산임에도 불구하고 토산 성격이 강해 남해 안에서 가장 큰 규모의 낙엽수 군락을 이루고 있다. 가을이면 마치 오색 자수판을 보는 듯하 며 대규모의 낙엽수림이 화강암의 기암괴석과 어우러져 뛰어난 자연경관을 자아낸다. 이 밖에도 신라 고승인 원효대사, 의상대사, 윤필거사 등이 이곳에서 수도를 하였다고 전해지고, 중국 진시황의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이곳을 왔다갔다는 서불의 이야기가 담긴 서불과차암 과 춘 추분 때만 볼 수 있다는 노인성(인간의 수명을 관장한다는 별, 老 人 星 또는 壽 星 )과 관련된 전설 등 신비스런 전설이 많은 곳이며, 전국의 3대 기도도량인 보리 암이 위치하는 등 상징적인 의미가 많은 명승지이다. 해발 681m의 금산( 錦 山 )은 한려해상국립공원( 閑 麗 海 上 國 立 公 園 ) 가운데 유일한 산악공 원( 山 岳 公 園 )이다. 예부터 남해 소금강( 小 金 剛 )으로 알려진 산으로 기암( 奇 岩 )과 괴석( 怪 石 ) 이 어울려 자연석굴인 쌍통문( 雙 通 門 )을 비롯한 38경( 景 )으로 절경을 이룬 곳이다. 신라시 대( 新 羅 時 代 )에 원효대사( 元 曉 大 師 )가 보광사( 普 光 寺 )를 창건하였다고 하며, 현재는 신라( 新 羅 ) 신문왕( 神 文 王 ) 3년(683)에 기도처로 창건된 보리암( 菩 提 庵 )이 자리하고 있다. 4) 천연기념물 (1) 미조리의 상록수림 지정번호 및 일자 : 천연기념물 제29호, 소 재 지 : 남해군 미조면 미조리 산121번지 외 3필 규 모 : 수림면적 3,437m2 시대 및 관리자 : 미상, 남해군 미조 상록수림은 남해 어업 전진기지인 미조 항을 가기 전 마을 입구에 방풍림으로 수종은 개계피나무, 팔손이, 후박나무, 후피나무, 구피나무, 섬옻나무, 물밤나무, 막나무, 단청나 무, 사철나무, 쇠고피나무, 보리수나무, 후피향나무 등 총 231 주가 집중적으로 군생한다고 도세( 都 勢 )나 람( 覽 )에 기록하고 있다. 경상대 논문집 중 남해도의 수목 -노거수와 특수수림- 에 의하면, 총 36과 44속 62 종으로 상록 활엽수 17종, 낙엽 활엽수 45종 교목 23종, 관목 24종, 만목 15종으로 다소 복 잡한 수성을 보여 문화재적 의의가 한층 깊은 것으로 사료된다고 한다. 상록수로는 해송, 졸

32 1218 남해군지 참나무, 모람(뽕나무), 생달나무, 후박나무, 참식나무, 육박나무, 돈나무, 꼭지윤노리(배나 무), 윤노리, 개산초나무, 감탕나무, 사철나무, 사스레피(차)나무, 보리밤나무(보리수), 송 악, 자금우, 광나무, 털마삭줄, 이대(벼과) 등이고, 낙엽수로는 굴피나무, 개시(자작)나무, 구실잣밤나무, 폭나무, 푸조나무, 팽나무, 천선과나무, 좁은잎천선나무, 좀깨잎나무, 으아 리, 사위질빵, 으름덩굴, 댕댕이덩굴, 생강나무, 고광나무, 까치밥나무, 국수나무, 멍석딸 기, 복분자딸기, 찔레나무, 조록싸리, 싸리, 골남초, 쉬나무, 초피나무, 예덕나무, 회잎나무, 화살나무, 개머루, 가새잎개머루, 보리수, 말채(층층나무), 검노린재, 때죽나무, 이팝나무, 물푸레나무, 쥐똥나무, 누리짱, 계요동, 덜꿩나무, 청미레덩굴, 청가시덩굴 등이다. 상록수 림 조성 동기는 마을의 해풍을 막기 위해 방풍림으로 조성된 어부림인데 전설로는 풍수설에 의해 지형적 결함인 마을 노출을 막고 마을을 보호하는 역할과 결함을 보충하기 위해 숲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 숲이 우거지면 이 마을에서 뛰어난 인재가 나타난다고 하여 숲을 해 치는 일이 없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2) 물건 방조어부림 지정번호 및 일자 : 천연기념물 제150호, 소 재 지 :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 39-3번지 규 모 : 수림면적 25,091m2, 길이 약 1.5km, 넓이 30m, 높이 11m 시대 및 규모 : 미상, 남해군 물건 방조어부림은 해안 몽돌 밭을 따라 반원형으로 무성하게 고목으로 형성되어 있다. 나 무의 종류는 느티나무, 포구나무, 게엄나무, 마개목, 개가죽나무, 아구사리나무, 물재목, 구 림목, 뽈동나무, 사람주나무, 벚나무, 때독나무, 소나무, 참나무, 돌배나무, 돌쨍이나무, 개 방맹이나무, 유너리, 옻나무, 굴태나무 등으로 일만 여 그루가 자라고 있으며 수령은 300년 이상이다. 숲을 이루게 된 동기는 바다 바람이나 해일 등의 피해를 막고 숲 그늘이 지면 고 기들이 많이 모여 들기 때문에 조성되어 졌다. 숲이 조성된 이후 숲을 잘 보호한 결과 마을 에 각종 재난이 없고 해일 해풍 등을 막는데 도움이 컸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이 숲은 전주 이씨 무림군의 후손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방풍림으로 조성하였는데 100년 전(병술년) 흉 작으로 이 숲을 벌채하여 수림의 초근목피로 연명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200년 전에도 흉 년이 들어 국가 공용전을 납부할 능력이 없어 수림을 벌채 매각하여 공용전에 충당하였던바 불의의 천연재해와 폭풍우가 닥쳐 많은 마을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숲을 헤치면 마 을이 망한다는 전설이 있어 그 이후로는 숲을 헤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33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19 경상대 논문집 중 남해도의 수목 -노거수와 특수수림- 에 의하면, 총 36과 51속 63 종으로 상록활엽수 4종, 낙엽활엽수 59종이며 교목 29종, 관목 19종, 만목 15종으로 상당 한 다양성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조사된 상록수로는 사철나무, 보리밤나무, 송악 등이고, 낙엽수로는 굴피나무, 개서나무, 상수리, 굴참나무, 폭나무, 참느름, 푸조나무, 팽나무, 느 티나무, 천선과, 구지뽕, 종깨잎나무, 으아리, 사위질빵, 댕댕이덩굴, 백동백, 일본까치밥, 까치밥나무, 고광나무, 국수나무, 팥배나무, 꼭지윤노리, 찔레나무, 멍석딸기, 복분자딸기, 자귀나무, 아까시아, 칡, 쉬나무, 초피나무, 에딕나무, 사람주나무, 광대싸리, 옻나무, 붉나 무, 회잎나무, 화산나무, 말오줌대, 모감주나무, 무환자나무, 가마귀베게, 털갈매나무, 개머 루, 가사잎개머루, 보리수, 박쥐나무, 말채나무, 고욤나무, 검노린재, 아팝나무, 쥐똥나무, 털마삭줄, 누리장나무, 계요동, 덜꿩나무, 괴불나무, 인동넝쿨, 청미레덩굴, 청가시덩굴 등 이다. (3) 남해 산닥나무 자생지 지정번호 및 일자 : 천연기념물 제152호, 소 재 지 : 남해군 고현면 대곡리 산 99-1번지 규 모 : 수림면적 9,917m2 시대 및 관리자 : 미상, 화방사 산닥나무는 팥꽃나무과에 속하는 낙엽관목으로서 키는 1m 내외이다. 나무껍질의 섬유 는 고급 인쇄지를 만드는 원료가 되며, 경기도, 강화도, 전등사 부근 산지와 남해 화방사 주 변 여러 곳에 자생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 물산에 왜저라고 수록한 것이 산닥나무의 섬유 이다. 그 기록에 의하면 일본에서 가져왔고 강화도, 완도, 남해도, 거제도, 창녕 등지에 심 었다고 한다. 이것은 도래종의 재배 식물로서 자생장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전주에 털이 없 고 잔가지가 가늘고 녹색이며, 위쪽에서 가지가 갈라지며 잎이 부드럽고 끝이 다소 뾰족하 며 길이가 2.5~4.5cm, 너비가 1~2.5cm 뒷면은 백색을 띠며 8~9월경에 잔가지의 끝 쪽 에 10개 내외의 꽃이 군데군데 모여 핀다. 꽃받침은 황색이며, 꽃받침통의 길이가 5~7mm 이고 열매는 달걀모양인 타원형인데 길이가 약5mm 정도이다 8개의 수술과 1개의 암술이 있으며 위쪽에 있는 4개의 수술 꽃 밥은 꽃받침 통 밖으로 다소 나오고 밑쪽 4개 꽃 밥은 꽃 받침 통 위쪽에 붙는다. 열매는 짧은 자루가 있으며 털이 없고 10월경에 익는다. 현재 자생 하고 있는 산닥나무는 우거진 소나무, 잡나무 아래에서 자생하고 있어 생육 상태가 좋지 않 아 화방사 옆 양지 바른 곳에 이식하여 관리하고 있다.

34 1220 남해군지 산닥나무가 자생하는 화방사에 지소가 있어 한지를 생산하였다. 화방사의 옛 기록 중 각 항 진상지의 본전에 대한 순영방의 등서 에 한지 종류와 가격을 정해 놓았다. 장지( 壯 紙 ) 매권( 每 卷 ) 값 벼 8말, 백지( 白 紙 ) 매권( 每 卷 ) 값 벼 4말, 밀지( 蜜 紙 ) 매권( 每 卷 ) 값 벼 7말, 명지( 名 紙 ) 매권( 每 卷 ) 값 벼 10말, 선자백색지( 扇 子 白 色 紙 ) 매권( 每 卷 ) 값 벼 15 말, 정초지( 淨 草 紙 ) 매장( 每 丈 ) 값 벼 4말, 설화지( 雪 花 紙 ) 매권( 每 卷 ) 값 벼 2섬 12말, 청화 지( 靑 花 紙 ) 매권( 每 卷 ) 값 벼 2섬, 옥색지( 玉 色 紙 ) 매권( 每 卷 ) 값 벼 1섬 10말, 도화지( 桃 花 紙 ) 매권( 每 卷 ) 값 벼 1섬 9말, 계본지( 啓 本 紙 ) 매권( 每 卷 ) 값 벼 1섬 5말, 황국지( 黃 菊 紙 ) 매 권( 每 卷 ) 값 벼 1섬 4말, 운람지( 雲 紙 ) 매권( 每 卷 ) 값 벼 1섬 4말, 죽청지( 竹 靑 紙 ) 매권( 每 卷 ) 값 벼 1섬, 전문지( 錢 文 紙 ) 매장( 每 丈 ) 값 쌀( 米 ) 2말, 대내수리지( 大 內 修 理 紙 ) 매권( 每 卷 ) 값 벼 10말, 대회준지( 大 回 준 紙 ) 매권( 每 卷 ) 값 벼 12말, 소회준지( 小 回 준 紙 ) 매권( 每 卷 ) 값 벼 10말, 소첩지( 梳 帖 紙 ) 매장( 每 丈 ) 값 벼 3말, 곡삼지( 曲 衫 紙 ) 매장( 每 丈 ) 값 벼 4말, 사 장지( 謝 壯 紙 ) 매권( 每 卷 ) 값 쌀 4말, 유승지( 油 繩 紙 ) 매장( 每 丈 ) 값 쌀 2말 6되, 입모지( 笠 帽 紙 ) 매장( 每 丈 ) 값 벼 1말 5되, 후백지( 厚 白 紙 ) 매권( 每 卷 ) 값 벼 4말, 석계장지( 釋 癸 壯 紙 ) 매 권( 每 卷 ) 값 쌀 3말 2되, 초백지( 草 白 紙 ) 매권( 每 卷 ) 값 벼 1말 5되, 유후지( 油 厚 紙 ) 매장( 每 丈 ) 값 쌀 재감( 裁 減.값을 낮춤)하여 3되 7홉 5줌, 백후지( 白 厚 紙 ) 매장( 每 丈 ) 값 쌀 재감하 여 3되 7홉 5줌, 초주지( 草 住 紙 ) 매권( 每 卷 ) 값 벼 2섬, 저가지( 楮 佳 紙 ) 매권( 每 卷 ) 값 벼 1 섬 5말, 상화지( 霜 花 紙 ) 매권( 每 卷 ) 값 쌀 5말, 본관( 本 官 )이 간혹 당상( 堂 上 )이 되는 가제( 嘉 制. 좋은 일)가 있으면 전례( 前 例 )로 전2냥씩. 이러한 종이의 질에 따라 값을 정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로 보아 한지를 대규모로 제작하 였음을 알 수 있다. (4) 남해 고현면의 느티나무 지정번호 및 일자 : 천연기념물 제276호, 소 재 지 : 남해군 고현면 갈화리 732-1번지외 3필 규 모 : 면적 418m2, 수목 높이 약 17.5m, 둘레 9.3m 시대 및 관리자 : 미상, 남해군 고현면 갈화리 마을 앞 들판 한가운데 자라고 있는 느티나무는 높이가 17.5m, 흉고 둘레 가 9.3m인 노거수로서 수령이 약 500년이 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수관의 크기가 동쪽 가 지에서 서쪽가지까지 27m, 남쪽가지에서 북쪽가지까지 25m나 된다. 구전에 의하며, 약 500여 년 전에 이 마을 이장이며 부농인 유동지씨가 자기 논의 한 가운데인 냇가에 나무를

35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21 심어서 여름철에 농사를 관리하며 휴식처로 삼아 왔다고 한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는 알 수 없으나 해방 후에까지도 매년 여름철이면 이 나무 밑에서 마을 회의를 열고 좌상, 공원, 총각, 대방이라는 임원을 선출하기도 하고 논메기 등 두레를 계획하기도 했으며, 명절에는 술과 음식을 푸짐하게 장만하여 마을의 노인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고 전해온다. (5) 남해 창선면의 왕후박나무 지정번호 및 일자 : 천연기념물 제299호, 소 재 지 : 남해군 창선면 대벽리 699-8번지외 5필 규 모 : 면적 707m2, 높이 9.5m, 밑 둥 둘레 12.6m, 밑 둥에서 11개가지, 지면 부 둘레 11m, 윗 부분의 넓이동서 21.2m, 남북 18.3m 시대 및 관리자 : 미상, 남해군 왕후박나무는 녹나무 과에 속하는 상록교목으로서 수령은 약 500년이 된다. 구전의 의하 면 약 500년전 이 마을에 늙은 부부가 살면서 할아버지는 매일 고기잡이를 하여 생계를 꾸 려가던 중 어느 날 큰 고기를 한 마리 잡았는데 고기 뱃속에서 씨앗이 나와 이상히 여겨 씨 앗을 집 앞 뜰에 심었더니 싹이 트고 자란 것이 왕후박나무라고 전하고 있다. 그 이후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가 잎이 맑고 사철 푸르며 빛을 반사하여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여겨 보호하고 있다. 그리고 이 나무를 신성하게 여겨 매 년 섣달 그믐날이면 동제를 지내고 풍년 과 풍어를 기원하고 있다. 옛날부터 이 마을에는 대나무 숲이 많았다고 하며 이충무공이 정 유재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이 마을에 있는 대나무와 짚 등을 배 위에 잘라 싣고 배 위에 불을 놓았더니 대나무 마디 터지는 소리가 큰 대포 소리 같아 왜적들이 놀라서 도망 을 쳤는데 왜놈들을 뒤쫓던 우리 군사가 이 왕 후박나무 아래서 점심을 먹으며 휴식을 취했 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6) 남해 가인리 화석산지 지정번호 및 일자 : 천연기념물 제499호 소 재 지 : 남해군 창선면 가인리 산60-20번지 외 1필지 규 모 : 면적 3,000m2. 용각류 수각류 조각류 공룡발자국, 나무화석, 빗물화석 등 시대 및 관리자 : 중생대, 남해군 가인리 해안에 있는 공룡 발자국 화석지이다. 이 곳 가인리 해안에서는 함안층의 몇 개 층 준에서 공룡발자국 화석 200여 점이 발견 보고되었다. 그 중 바다로 기울어져 있는 약 80m2 의 세립질 사암의 성층면 위에 4마리의 용각류, 조각류, 수각류 발자국이 50여 개 발견된다.

36 1222 남해군지 이 밖에 사람의 발자국 모양과 크기가 비슷한 2족 보행 용각류의 발자국 보행렬 5개가 교차 상으로 약 60여 개가 찍혀 있다. 창선의 화석들을 조사 보고한 서승조(진주교육대학) 박사가 발표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산출지의 위치 및 지질 : 창선면 가인리의 북쪽 해안에 함안층의 최상부에 해당한다. 암 질은 세립질 사암으로 암회색을 띠고 있다. 지층의 주향은 대략 남북향이며 경사는 동쪽(바 다쪽)으로 약 30도 기울어져 있다. 화석 종류 : 용각류 공룡 발자국 화석으로 중형의 용각류에 속하는 발자국 22개가 동에 서 서로 이동하며 발자국의 길이가 55cm 폭이 40cm이며 보폭은 약 200cm이다. 조각류 공 룡발자국 화석 하나는 3개의 발자국이 암반 상단에서 좌로 이동하고 이보다 서쪽에서 같은 모양의 발자국 4개(2개는 서로 겹침)가 보이며 아마도 한 마리의 공룡에 의해 찍혀진 것으로 보인다. 발자국의 길이가 27cm 폭이 16cm이다. 긴 3개의 발가락이 뚜렷이 보인다. 보폭은 약 80cm 정도이다. 조각류 공룡 발자국 화석 둘은 중간에서 약간 오른쪽 상단에 2개가 보인 다. 발자국 길이가 27cm이고 폭이 18cm 보폭은 86cm이다. 전자에 비해 발가락이 뭉뚝하 고 짧다. 조각류 공룡 발자국 화석 셋은 왼편 아래의 우측으로 이동하는 3개의 발자국이 보 인다. 조각류와 형태가 비슷하다. 수각류 화석 하나는 암반 좌편에 2개가 보인다. 날카로운 발톱구조를 잘 보여준다. 발자국 길이는 35cm 폭은 25cm이며 보폭은 2개의 발자국 사이 (약 4.5cm)에 있음직한 발자국이 관찰되지 않아 측정이 불가능하다. 수각류 화석 둘은 발자 국 형태가 사람 발자국과 흡사하여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종이다. 6개의 보행열을 보여주고 있으며 총 45개가 관찰된다. 발자국의 길이는 평균 27cm이며 폭이 12cm이다. 보폭은 평균 50cm전후이다. 따라서 발자국의 모양과 보폭에서 성인의 그것과 매우 닮았다. 1996년 발 견 및 발표 때 익룡의 발자국으로 발표한 적이 있으나 그 후 관련학자들과 수차례 토의한 결 과 새로운 종의 수각류일 것이라는 잠정적인 결론에 도달하고 있는 종이다. 학술적 가치 : 좁은 면적에 여러 종의 공룡 발자국이 동시에 산출되는 것은 당시 공룡의 종류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당시 공룡의 생태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특히 사람 발자국 모양의 공룡 발자국은 앞으로 연구 대상이다. 국내외 많은 학자(임성규, 양승영, Martin Lockley 등)들의 관심을 모우고 있다. 4. 도 지정문화재

37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 유형문화재 (1) 장량상 동정마애비 지정번호 및 일자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7호, 소 재 지 : 남해군 남해읍 선소리 196-9번지외 5필 규 모 : 1기(높이 5m, 폭 1.5m, 자연석 높이 2.5m, 폭 1.5m 전면 암각문)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선조32년. 1599), 남해군 정유재란이 끝나는 선조 31년(1598)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패한 일본군 500여 명 은 육지로 올라와 일본군이 주둔하였던 선소왜성으로 갔으나 왜성에 주둔군이 없자 주민들 의 선박을 탈취하여 일본으로 도주하였다. 일본군을 추격하던 명나라군은 선소에 도착하여 왜군을 찾았으나 이미 떠나고 없었다. 유격대장 장량상은 다음 해인 선조 32년(1599) 1월 왜성 아래 선소마을 선착장의 오른쪽 해변에 자리하고 있다. 12행 종서로 된 마애비로 중국 명나라 장수인 장량상이 동쪽을 정벌하고 바위에 글을 새겼다 하여 장량상동정마애비 라 이름붙였다. 커다란 자연석의 중앙을 직사각형으로 평평하게 갈아 글을 새겼다. 직사각형의 테 주변에 는 당초문을 아름답고 정교하게 조각하였다. 비문은 이여송과 진린이 원군으로 조선에 와서 왜군을 무찔렀다는 내용으로, 명나라 군인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전승기념비적 성격을 띠고 있다. 역사에서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명나라 장수의 마애비라는 점에서 귀중한 가치를 지 닌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파괴대상 왜구격파 기념비 목록에 이 비가 포함되었었다 한다. 동정시( 東 征 詩 ) 만력 26년(1598) 늦가을에 나라의 동쪽에 다시 일이 있게 되었다. 때는 마침 조선이 왜의 침입을 받아 7년에 이르렀다. 우리는 군사를 보내어 이들을 구원하였으나 아직도 이겼다는 보고가 없다. 천자께서는 벌컥 성을 내시어 곧 내각의 여러 고관들에게 가서 군사들을 살펴보라고 명하시었다. 경리( 經 理 )와 총독( 總 督 )을 겸한 대사마( 大 司 馬 ) 형공( 邢 公. 명나라 장수 형개)과 도독 진공( 陳 公. 명 수 군제독 진린) 이하 문무 장신 십여 인들이 조선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만나기로 하여 다투어 압록강을 건너 두어 갈래의 길로 함께 진군하게 하셨다. 생각하건대 형공과 진공은 웅대한 지략으로 세력을 신장하여 아름다운 기풍을 삼고 범이 날카로운 눈으 로 사방을 둘러보듯이 하면서 여러 장수들과 협조하여 심력을 다 기울여 충성스런 지모로 낙랑(지금의 평양)을 거쳐 계림(경주시)을 지나 부산으로 나아가 군사력을 떨쳐 왜놈들을 봉쇄한 뒤에 돌려보냈다. 태사씨( 太 史 氏 ) 구대상( 區 大 相. 명나라 문신)은 예로부터 제왕들은 군사를 내어 전쟁을 하면, 모두 씩씩 한 군대의 위용으로서 국위를 떨치고 동시에 수고로이 원수를 물리친 것을 칭송하는 말이 있었다고 하

38 1224 남해군지 였다. 이에 저 명나라와 조선의 군사들은 섬 오랑캐를 물리쳐 폭동과 반란을 제거하고 만전을 꾀하였다. 모든 일은 반드시 싸워 이겨 여기에서 순리로 다스려 위엄이 이처럼 성하니 멀리 와서 정복하여 물리친 것을 밝혀 보이어 길이 알린다. 이에 시 2장을 지었으니 비록 공석( 孔 碩 )이 지은 것이지만, 거의 위엄을 더 날리기에는 충분하다고 하겠 다. 마지막 부분 노랫말은 아래와 같다. 황제의 성냄이여! 변방의 난 평정했네. 皇 赫 怒 兮 定 夷 亂 (황혁노혜 정이란) 장사의 분발이여! 쉴 겨를 없었다네. 壯 士 奮 兮 不 遑 宴 (장사분혜 불황연) 긴 창을 비껴 듦이여! 화살도 세게 쐈다! 橫 長 戟 兮 菔 勁 箭 (횡장그혜 복경전) 완전무장 빛남이여! 별들도 밝게 빛나! 組 甲 耀 兮 星 辰 煥 (조갑요혜 성신환) 발해바다 건뜀이여! 파도도 잔잔구나! 蹴 溟 渤 兮 波 濤 晏 (축명발혜 파도안) 긴 칼 날림이여! 동쪽의 바닷가라! 猗 長 劍 兮 扶 桑 岸 (의장검혜 부상안) 백성의 받듦이여! 왜놈들이 항복했다. 佃 極 奠 兮 鰲 足 斷 (전극전혜 오족단) 황제의 성냄이여! 해외까지 벌벌 떠네. 皇 極 震 兮 窮 海 外 (황극진혜 궁해외) 나라밖 정벌이여! 죽은 해골 고요하네. 征 不 庭 兮 靜 殊 髏 (정불정혜 청수루) 무장병 기쁨이여! 공을 따라 매진했네. 甲 族 悅 兮 從 公 邁 (갑족열혜 종공매) 왜놈들 막음이여! 생선회를 치듯했네. 封 鯨 鯢 兮 戢 鱗 介 (봉경예혜 집린개) 부릅뜬 눈방울여! 땅끝까지 다 살폈네. 加 目 出 兮 極 地 界 (가목출혜 극지계) 공바위 새김이여! 길이길이 전해지네. 標 穹 喝 兮 際 荒 裔 (표궁갈혜 제황예) 이역땅 멀리 옴여! 가주로 모셔지네. 異 城 來 兮 嘉 主 會 (이성래혜 가주회) 명나라 만력 27년(1599) 3월 상순 길일에 세움 독공 정왜 유격대장 장량상 (2) 다정리 삼층석탑 지정번호 및 일자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3호,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다정리 587-1번지 외 1필 규 모 : 1기(2층석탑 높이 176.5cm) 부 속 물 : 보주( 寶 珠 ) 3개 시대 및 관리자 : 고려시대(추정), 남해군 구전의 의하면 원효대사가 신라 신문왕 때 이곳에 다천사를 창건하고 탑을 건립하였으나 다천사보다 명지인 용문사에 합사함으로서 탑만이 남게 되었다고 전한다. 마을에서는 이곳 에 탑이 있다고 하여 탑골 이라고 불러지다가 다천으로 지명이 바뀌었고 탑이 섰던 들과 북 쪽 등을 화정들 혹은 화정 등으로 불리어 오는 것을 보아 다른 명칭인 화정사의 사지로도 추 정하고 있다. 탑골 사람들은 경내에 남아 있는 이 탑을 절 대신으로 여겨 계속 불공을 드렸

39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25 으며 탑 주변에 그 흔적이 있다. 원래 이 탑은 삼층석탑이었으나 1층은 매몰되고 2층과 3층 의 탑신부만 남아 있다. 탑신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이 보이고, 지붕돌 밑 면에는 3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 상륜부에 3개의 보주( 寶 珠 :작은 공모양 장식)가 남아 머리 장식을 하고 있다.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지붕돌이 두툼해지고 밑면의 받침이 3단인 점 등 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3) 보리암 전 삼층석탑 지정번호 및 일자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4호, 소 재 지 :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산2065번지 규 모 : 1기(화강암 3층 석탑 높이 1.8m, 하대석 한 변 길이 1.2m) 부 속 물 : 탑신보호석주 4면 시대 및 관리자 : 고려시대(추정), 남해군 김수로왕비 허황옥이 인도에서 올 때 풍파를 만나 건너오지를 못하던 중 파사석을 싣고 무 사히 건너왔다고 하며 이 석재를 원효대사가 보리암 앞에 세웠다고 한다. 석탑의 재질은 화 강암으로 상륜부 이상은 결실된 채 복원되어 있다. 석탑은 하대석에서 3층 옥개석까지 높이 가 1.8m이며, 하대석 한 변의 길이는 1.2m이다. 하대면에는 우주( 隅 柱 )의 모각 없이 1면 2 조로 안상이 음각되어 있다. 하대석의 전체 높이는 29cm이고 하대면 석부의 높이는 17cm 이다. 상대면석은 1매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으며 2개의 우주( 遇 柱 )가 각출되어 있다. 탑신 석은 모두 1매의 판석으로 되어 있으며 제1탑신은 제2 3탑신석 보다 높이의 비가 커 전체 적으로 세장( 細 長 )한 탑을 이루고 있다. 두꺼운 지붕돌 과 3단의 지붕돌받침 등으로 보아 고 려시대의 탑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기단석 위에 나침반을 놓으면 자기난리가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불가사의한 일로 의문을 가지고 있다. (4) 용문사 대웅전 지정번호 및 일자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5호,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868번지 규 모 : 1동(팔작와가, 정면 3간, 측면 3간) 부 속 물 : 괘불탱, 괘불대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용문사 조선 현종 원년(1660)에 백월당 대사가 용문사를 현 위치에 정하고 선당양당( 禪 堂 兩 堂 )을 현종 2년(1662)에 준공하였다. 6년 후인 현종 5년(1666)에 일향스님이 대웅전을 창건하였

40 1226 남해군지 으며 지혜스님이 윤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용문사 대웅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규 모이며, 지붕 옆면은 여덟 팔( 八 )자 모양의 화려한 팔작지붕집이다.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으로, 앞면의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2 구씩 공포를 배치하였다. 조그마한 규모이기는 하나 오양조로 삼주의 주두를 쓰고 이중부연 ( 二 重 附 椽 )의 부들을 받아 안정장중( 安 定 壯 重 )의 기둥 윗몸에 창방을 짜 돌리고 그 위에 평 방을 돌렸다. 대들보는 전면 평수로부터 추불 벽이 있고 보 아래에는 보다지를 깊숙이 받치 고 있다.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고 후불벽 앞에는 불단을 받들었으며 부처님 머리 위에는 화 엄한 천개를 만들었다. 처마 밑에는 절의 이름에 어울리게 용의 머리가 조각되어 있으며, 공 포부분에는 연꽃무늬 장식을 하였다. 겹처마 건물로 덧서까래가 길어서 전체적으로 지붕이 위로 휘어져 들려보이며, 네귀퉁이에 추녀를 받치는 기둥인 활주가 있다. 내부의 불단 위에 는 화려한 닫집을 달아 장엄하였다. 현재에 있는 대웅전은 숙종 29년(1703)에 성화스님이 중창하였다. 용문사는 호국 사찰로서 많은 대중이 모였으므로 야외 법회를 할 때 사용할 수 있는 괘불탱이 있다. 이 괘불탱은 초파일과 같이 대중이 운집하는 날에 의식용으로 사용되 며 이때 대웅전 앞 괘불대에 괘불탱을 걸어 놓고 의식을 진행한다. 괘불탱의 그림은 석가모 니 부처가 법화경을 설법한 영취산의 모임 장면을 그린 영산회상도이다. (5) 용문사 석불 지정번호 및 일자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8호,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868번지 규 모 : 1구(좌고82cm, 폭66cm) 시대 및 관리자 : 고려중엽추정, 용문사 이 석조보살 좌상은 임진왜란이 종전 된 약 30년 후 용문사 경내 정화불사 때에 경내 마당 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데 보관에 영락비천이 착장된 점으로 보아 신라( 新 羅 ) 후대( 後 代 ) 양식( 樣 式 )을 반영하고 있는 나말여초( 羅 末 麗 初 )의 작품이라 하겠다. 자애롭고 온화하면서 존엄성을 구유( 具 有 )한 석조좌상인데 좌고는 82cm, 어께넓이38cm, 무릎 폭66cm이다. 석 재는 화강암이다. 이 석보살상은 백회( 白 灰 )를 덧칠하여 원모습은 많이 손상되었지만, 사각형에 가까운 상호 ( 相 好 )는 풍만하며 눈과 입이 작고 코가 큼직하여 다소 형식화( 形 式 化 )된 면이 보이지만 원 만성도 꽤 잘 표현되었다. 긴 상체에 넓은 무릎 등은 부피감이 풍부한 편이고 탄력적인 특징 도 있어서, 보살상의 격( 格 )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의( 天 衣 ) 두 가닥이 양 어깨를

41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27 거쳐 팔을 감으면서 흘러내렸는데, 띠주름 무늬가 단정하면서도 자연스러워 불상의 특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왼손은 배에 대었고 오른손은 가슴에 들었는데 손에 연꽃가지를 잡고 있었던 것 같다. (6) 촌은집 책판 지정번호 및 일자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72호,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868번지(용문사 대웅전내) 규 모 : 목판 52매 시대 및 관리자: 조선시대, 용문사 이 책판은 조선( 朝 鮮 ) 인조( 仁 祖 ) 때의 학자인 유희경( 劉 希 慶 )의 유희경( )의 자( 字 )는 응길( 應 吉 ), 호( 號 )는 촌은, 본관( 本 貫 )은 강화( 江 華 )이다. 남언경( 南 彦 經 )의 문인 ( 門 人 )으로 특히 상례( 喪 禮 )에 밝았으며, 선조( 宣 祖 ) 25년(1592) 임진왜란( 壬 辰 倭 亂 )이 일어 나자 의병( 義 兵 )을 모아 관군( 官 軍 )을 도왔다. 촌은집은 시( 時 ) 수창( 酬 唱 ) 전기( 傳 記 ) 묘표( 墓 表 ) 등을 수록하였으며, 판각된 책판 수량은 52매이다. 손자( 孫 子 )인 유자욱( 劉 自 )이 수집, 김창협( 金 昌 協 )이 선정( 選 定 )하여 증손( 曾 孫 )인 유태웅( 劉 泰 雄 )이 호남만호( 湖 南 萬 戶 ) 로 있을 때 간행되었다. 촌은집 책판은 촌은 유희경( 村 隱 劉 希 慶. 1545~1636)선생의 시집인 촌은집 을 간행하 기 위하여 만든 판목( 板 木 )이다. 촌은집 은 그의 시문집으로 시( 詩 ), 창( 唱 ), 전기( 傳 記 ) 와 한문학의 문체 가운데 하나인 묘표( 墓 表 ), 묘지명 등을 수록하였으며, 3권 2책으로 판각 된 책판 수량은 52매이다. 유희경의 손자인 유자욱이 편집, 정리하고 김창협이 서문을 붙였 으며, 유희경의 증손자 유태웅이 발간한 책판이다. 책판은 원래 용문사에 소장되어 있지는 아니한 것 같으나 유태웅이 호남지방에 만호로 재직하면서 판각하여 곡포보성과 인접한 용 문사에 보관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용문사 대웅전 주존불 좌대 밑에 보관되어 있다. 촌은선생은 조선 인조 때의 위항시인으로 본관은 강화이며, 자는 응길( 應 吉 ), 호는 촌은 으로 한시에 능하고 박순( 朴 淳 )으로부터 당시( 唐 詩 )를 배워 뛰어났다고 한다. 촌은집에 의 하면, 유희경은 인품이 돈독하고 산수에 비유하면 높은 산악에 이르고 호연한 강호에 이 르면 은연하기는 스스로 귀를 깨끗이 씻을 정도라고 했다. 어려서부터 효자였으며, 임진 왜란 때에는 의병으로 나가 싸워서 포상과 교지를 받았다. 특히, 상례법에 능통하여 상례초 를 남기었는데 국상이나 사대부가의 상사( 喪 事 )시에 집례( 執 禮 )하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촌

42 1228 남해군지 은선생은 벼슬을 마다하고 애연유사 군자지풍( 藹 然 有 士 君 子 之 風 )으로 여정( 閭 井 )에서 궁성 ( 宮 城 )을 지척에 둔 곳에 돌로 쌓아 물을 흐르게 하고 그곳에 침류대( 枕 流 臺 )를 지어 소연청 좌( 翛 然 淸 坐 )하여 사대부 시인을 불러 모아 시로서 화답하였다. 그 당시 시에 능한 백대붕 ( 白 大 鵬 ), 박제강, 정치, 최기남 등의 시인들과 함께 풍월향도라는 회( 會 )를 조직하여 이끌었 던 시인이다. 선생의 시는 한가롭고 담담하여 당시( 唐 詩 )에 가까우며 저서로는 촌은집 과 상례초 가 전한다. 후에 아들 일민( 逸 民 )의 원종훈( 原 從 勳 )으로 인하여 자헌대부 한성 판윤에 추증되었다. (7) 남해 향교 지정번호 및 일자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22호, 소 재 지 : 남해군 남해읍 북변리 586번지외 8필 규 모 : 면적 2,706m2 부 속 물 : 대성전, 명륜당, 서재, 외삼문, 홍살문, 동무, 서무.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남해향교 남해향교는 공기( 孔 紀 ) 2001년(1450)에 남해현령 하신( 河 紳 )에 의하여 현 관아에서 수궁 의 거리 봉강산 아래에 대성전과 명륜당이 전후하여 건좌( 乾 坐 )로 창건되었다. 선성( 先 聖 )을 봉안하고 유학을 궁구하며 사도( 斯 道 )를 진작하는 도량이었으나 임진왜란을 겪으며 건물이 전소되었다. 70여 년 동안 복건하지 못하다가 조선 현종 10년(1669)에 사당인 대성전을 고 쳐 세웠다. 그 후 현재 포교당인 법흥사 자리로 이건하였다가 고종 29년(1892)에 대성전을 비롯한 동 서 양무와 내삼문을 지금의 위치로 옮겼고 점차 그 밖의 건물들도 모두 옮겨 세 웠다. 완만한 경사지에 출입구인 외삼문, 유생들의 거처인 동재와 서재, 공부하는 곳인 명륜 당이 비교적 낮은 터에 있고, 그 뒤로 조금 높은 터에 내삼문과 성현에 제사를 지내는 대성 전이 위치하여 전형적인 전학후묘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건물의 배치는 전형적이나 서재의 남쪽에 담장을 붙여 돌단을 쌓은 것은 다른 향교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점이다 매년 공자 제례일(양 5월 11일)과 공자 탄신일(양 9월 28일)에 석전대제( 釋 奠 大 祭 )를 엄숙 히 봉행( 奉 行 )하고 있다. 대성전에는 선성선현( 先 聖 先 賢 )의 위패를 봉행하는데 남해향교는 소설( 小 設 )에 속하여 공 자를 중심으로 사성인 안자, 증자, 자사, 맹자를 배향하고 송조( 宋 朝 ) 2현인 정호 주희를 종향( 從 享 )하며 동서무( 東 西 廡 )는 동국18현( 我 國 十 八 賢 )을 각 9위식 봉안하고 있다. 동국 18현으로는 동무( 東 廡 )에 설총( 薜 聰 ), 안향( 安 珦 ), 김굉필( 金 宏 弼 ), 조광조( 趙 光 祖 ), 이황( 李 滉 ), 이이( 李 珥 ), 김장생( 金 長 生 ), 김집( 金 集 ), 송준길( 宋 浚 吉 ) 등 9현이고, 서무( 西

43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29 廡 )에는 최치원( 催 致 遠 ), 정몽주( 鄭 夢 周 ), 정여창( 鄭 汝 昌 ), 이언적( 李 彦 迪 ), 김인후( 金 麟 厚 ), 성혼( 成 渾 ), 조헌( 趙 憲 ), 송시열( 宋 時 烈 ), 박세체( 朴 世 采 ) 등 9현이다. (8) 남해용문사 부도군 지정번호 및 일자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5호,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868 6/26 규 모 : 9기 부 속 물 : 보호 석축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용문사 용문사 부도원에 위치한 총 9 기의 부도는 현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며, 석종 전면에 당 호를 새기고 있는 형태로 17~18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 후기 경남지역 종형 부도 연 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부도1 2 3은 석종형으로, 동체( 胴 體 ) 1장과 대석 1장 총 2장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동 체는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는 종 모양이다. 부도1의 지상에 노출된 기단석은 팔각형이나, 각 변의 길이는 일정하지 않다. 동체를 얹은 대석 둘레에는 복련 단판연화문이 둘러져 있으 나 다소 마모가 심한 상태이다. 부도3( 洗 淡 堂 一 行 大 師 )은 종신의 상단과 하단에 연화문이 돋 을새김으로 뚜렷하게 처리되어 있으며, 상륜은 꽃잎이 살짝 벌어진 연꽃봉오리 모양을 하고 있다. 부도4는 총 9기의 부도중 제일 작은 규모로, 기단석 1장, 동체( 胴 體 ) 1장, 옥개석 1장 총 3장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동체는 중간이 배가 불룩한 원통형 기둥 모양이며, 옥개석은 방 형으로 각 모서리가 약간 반전하고 있다. 옥개석 중앙 부분은 가운데가 둥글게 파여 있고, 그 가장자리가 약간 파손된 상태이다. 그리고 대석 1장, 동체 1장, 옥개석 1장 등 총 3장의 돌로 구성된 부도5는 커다란 자연석 암반 위에 설치하여 암반이 지대석과 같은 효과를 주고 있다. 대석은 상하로 구분하여 상단 은 원형으로 다듬고, 하단은 4각형으로 처리하여 각각 문양을 새기고 있다. 중간이 불룩한 6각형의 의 동체는 종신의 길이가 폭에 비해 긴 편이며, 동체 상하단에 역시 문양을 새기고 있다. 옥개석은 평면 4각형으로, 옥개석 중앙에는 둥근 복발이 얹혀있고, 복발에는 음각 파 문이 새겨져 있다. 부도6 7도 석종형 부도로, 총2장(대석 1장, 동체 1장)로 구성되어 있다. 동체는 아래로 갈수록 폭이 좁아지는 형식으로, 종신의 길이가 폭에 비해 긴 편이다. 종신 상하단에는 문양 이 둘러져 있는데, 상단은 양각, 하단은 음각으로 처리되어 있다. 상륜은 보주형태를 띠고

44 1230 남해군지 있다. 부도8은 기단석 1장, 대석 1장, 동체 1장, 옥개석 1장 등 총 4장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석은 자연석을 사용했으며 땅 속에 묻혀있다. 대석은 8각형으로 다듬었으며, 옥개석 은 사각의 지붕 모양을 하고 있다. 옥개석 정중앙에는 목을 쭉 빼고 있는 자라(혹은 거북이) 가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이 부도8의 경우 동체에 명문이 일체 없으나, 그 옆에 별도의 표 석[ 解 塵 堂 天 海 大 師 族 錄 碑 ]이 있다. 이 표석 전면에 걸쳐 명문이 새겨져 있으나, 비교적 얕게 새겨져 있으며 비 바람에 많이 마모된 상태이다. 부도9는 기단석 1장, 종신 1장로 구성되어 있고, 기단석은 자연석을 이용하였으며, 대석 은 없다. 동체는 아래로 내려 갈수록 폭이 좁아지는 형태이며, 동체 상단에는 11엽의 단판연 화문 양각으로 처리하고 있다. 그리고 상단 정중앙에는 보주형태의 상륜을 설치하고 있다 (9) 남해용문사 목조지장시왕상 지정번호 및 일자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6호,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868 6/26 규 모 : 25구 시대 및 일자 : 조선시대(강희 17년. 1678), 용문사 명부전 봉안의 목조지장시왕상 및 권속상들은 현재 총 25구가 남아 있으며, 상태는 아주 양호하며 현재 사찰에 보관하고 있는 백지묵서의 발원문에 의하면, 목조지장시왕상은 강희 17년(1678)에 지현( 智 玄 )이라는 금어( 金 魚 )에 의하여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장보살상은 신부가 양감 있고 건강한 모습이며, 불신의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수작이 다. 두부가 민머리인 지장보살상은 상반신을 곧게 세워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전체적으로 양감있고 건장한 모습이다. 신체적 특징은 무릎이 높고 상저전후경( 像 底 前 後 徑 )이 넓으므로 불신의 안정감을 더해준다. 상호는 사각형에 가까우며 살집이 있고 턱 부위를 모나지 않게 표현하여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이마가 아주 넓은 편이고 눈썹사이에는 백호가 돌출되어 있다. 눈은 옆으로 길고 눈꺼풀이 두꺼운 편이다. 코는 콧날을 완만하게 하고 콧방울을 작게 나타냈으며, 인중은 뚜렷하고 넓게 패여있다. 도톰한 입술은 입술꼬리를 살짝 올려 미소를 띤 모습이며, 귀는 크고 두꺼우며, 귓바퀴가 뚜렷하다. 목은 짧은 편으로 3조의 융기선을 평 행하게 처리하여 삼도를 표현하였다. 양손은 제1지와 3지를 맞대고 양 허벅지 위에 각각 두 었는데,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있다. 양손의 손톱은 비교적 크며 손마디 조각도 뚜렷 하게 처리하였다. 착의법은 상체에는 가슴 아래로 평행하게 보이는 승각기를 먼저 입고, 오

45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31 른쪽 어깨에 편삼을 걸치고 그 위에 대의를 입었다. 엉덩이까지 길게 늘어진 대의는 목덜미 에서 한번 접어서 양쪽 어깨를 덮고 흘러내렸으나, 오른쪽은 어깨부분만 감싼 변형통견식 착의이다. 대의는 양쪽어깨에서 3조의 주름선을 계단식으로 정연하게 표현하였다. 군의는 결가부좌한 양다리 아래로 넓게 드리워져있는데, 가장자리의 조각면이 매우 두껍다. 법의처 리는 매우 두꺼우며 옷주름을 굵고 간략한 몇 조의 선으로 표현하였다. 좌협시 도명존자는 오른손에 석장을 쥐고, 우협시 무독귀왕은 합장은 한 채 각각 시립하고 있다. 신체에 비해 머리가 큰 편이며 어깨가 넓어 당당해보이고 온화한 인상이다. 얼굴은 방 형이며 얼굴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다. 시왕상들은 모두 등받이와 팔걸이, 족좌가 있는 의자에 앉아 정면을 향한 자세이며, 표현 기법은 거의 동일하다. 두부에는 무독귀왕상과 같은 원류관 형태의 관을 쓰고 있으며, 손에 는 홀(제 상)을 쥔 경우, 책과 붓(제1 2상)을 들고 있거나 손을 무릎 위 에 걸친(제3상) 다양한 모습이다. 얼굴의 세부표현은 도명과 무독상과 거의 같은데, 입꼬리 가 올라간 상태에서 백색 치아를 드러내어 익살스럽게 웃는 모습은 매우 해학적이다. 착의 법은 역시 상체에는 紅 袍 를 입었고, 하체에는 청색 혹은 홍색 군의 위에 녹청 백록 청색 등의 요포를 걸쳤으며, 가슴부분에는 군의를 묶은 백색의 띠매듭이 발목까지 길게 드리워져 있다. 또한 가슴 중앙에서 부터 수( 綬 )를 아래로 길게 늘어뜨리고, 화문을 도드라지게 장식 하였는데 이는 따로 제작하여 끼워넣은 것이다. 의자는 각각 조립하여 구성하였고, 족좌를 따로 부착하였다. 등받이 양측에는 용두장식이 있고, 팔걸이의 양측에는 봉황두( 鳳 凰 頭 )를 장식하고 있다. (10) 남해용문사 목조 지정번호 및 일자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7호, 2005, 7,21.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868 6/26 규 모 : 1기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용문사 표면에 목리가 뚜렷하고, 일부 균열이 있으나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통나무 가운데를 파서 만든 구유형태의 지조( 紙 槽 )로 양끝에는 각각 37cm, 47cm의 턱받이가 마련되어 있으 며, 그 중 한곳은 턱받이 밑에 부착된 세로부재에 직경 7.5cm의 원공이 관통되어 있다. 용 기 내부의 중앙 바닥에는 배수를 위한 직경 5.5cm의 원공이 뚫려 있다. 이러한 형태의 유 물은 비교적 규모가 큰 사찰에 1~2점씩 전해지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많은 대중이 운집하는

46 1232 남해군지 법회 때 배식용 목식통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원래 조선시대 사찰에 부과되었던 지역과 관련 된 유물로 추정되며, 닥종이의 원료를 풀 때 사용하던 용기로 보인다. 이와 관련된 자료로 통도사에 2점의 지조가 전래 하고 있으며, 닥을 갈 때 사용하던 판석 과 지역혁파( 紙 役 革 罷 )와 관련된 문서들도 남아 전하고 있다. (11) 남해용문사 목조 사천왕상 지정번호 및 일자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8호,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868 6/26 규 모 : 4구 부 속 물 : 천왕문(목조 와가)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용문사 용문사 천왕문에 배치된 목조사천왕상은 조선 후기 숙종 28년(1702)에 조성된 규모가 큰 의자상이다. 현재 조선시대 대규모의 사천왕상은 17세기 소조상이 일부 확인되며, 목조사천 왕상으로는 1690년 적천사 사천왕상을 비롯해 1702년 용문사, 1704년 쌍계사 사천왕상 등 귀중한 작품이 존재한다. 특히, 조선시대 사천왕상은 고려와는 달리 도상과 그 배치, 존명에 차이가 보이고 있어 앞 으로 사천왕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향우측에 동방 직구천왕, 남방 증장천왕, 향좌측에 서방 광목천왕, 북방 다문천왕이 위치 하며, 4구 모두 발을 아래로 내린 기형으로 발밑에는 잡귀 1구씩 각각 밟고 있다. 두부에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몸에는 갑옷을 착용하였는데, 양쪽 어깨에서 발아래까지 천의자락이 흘 러내리고 있다. 손의 지물로 동방은 비파, 서방은 용과 여의주, 남방은 장도, 북방은 보차를 쥐고 있다. 사천왕상의 제작방법은 분할제작 기법으로 각 이음부분에 나무심을 끼워 처리하였으며, 때로는 철심으로 고정하였다. 상호는 방형이며 모두 분홍색이나, 다문천왕상은 적색을 띤 연한 검푸른 빛의 육신색을 발라 구별하고 있다. 보관은 일부 장식들이 탈락한 것으로 보이나, 현재 증장천왕을 제외한 나머지 천왕들의 경 우 무궁화를 장식하고 두 마리의 봉황이 서로 마주보며 배치되어 있고 그 주변으로 각종 꽃 으로 장식하였다. 증장천왕의 경우 보관 중앙에 날개를 크게 편 봉황 한 마리를 배치하고, 그 주위에 꽃과 화염문을 장식하였다. 착의는 견갑( 肩 甲 ) 흉갑( 胸 甲 ) 복갑( 腹 甲 ) 요갑( 腰 甲 )을 입었고, 머리 뒤쪽에서부터 발끝까 지 대의가 늘어뜨려져 있는데 두부에 위치한 천의에는 대형 화염문이 장식되어 있고 하반신

47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33 아래 부분에는 8자로 매듭지어 있다. 증장천왕과 다문천왕의 대의는 결실된 상태이다. 사천 왕상 발아래의 생령좌는 따로 만들어 배치하였는데 악귀가 아닌 세속 관리인의 모습이다. (12) 남해용문사 건륭25년명운판 지정번호 및 일자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9호,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868 6/26 규 모 : 1점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건륭25년. 1760), 용문사 운판은 전면에 건륭25년경진5월일( 乾 隆 二 十 五 年 庚 辰 五 月 日 ) 진주백천사 라는 명문과 배면에 도광17년정유2월일매득( 道 光 十 七 年 丁 酉 二 月 日 買 得 ) 남해용문사 라는 점각 명문 이 각각 있어 원래 건륭 25년(1760)에 진주 백천사에서 제작되었다가 이후 용문사에 소장하 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용문사 운판에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운판들 가운데 제작시기가 비교적 이른 예에 해당하 며, 제작처와 제작시기가 확실하게 밝혀진 자료로서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13) 남해용문사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 지정번호 및 일자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46호,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868 6/26 규 모 : 3구(아미타불상 높이 85cm 폭 58cm, 양협시보살 높이 86cm 폭 53cm)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용문사 삼존불은 대웅전 안에 모셔져 있는데 가운데에는 아미타불의 양옆에는 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본존인 불상은 상체가 길고 무릎이 낮은 구조로 오른 손을 들고 왼손은 발위에 올리 고 있으며 수인은 아미타구품인을 하고 있어 이 불상의 존명이 아미타불임을 알 수 있다. 이 렇게 상체가 길고 하체를 낮은 구도는 흑석사아미타불상(1458년), 천주사아미타불상(1482 년), 기림사소조삼불상, 귀신사삼불상 등에서도 나타나듯이 조선전기 불상의 양식적 특징을 이은 것이다. 머리 중앙에 정상계주, 정수리 부분에 원통형의 정상계주가 있다. 얼굴은 작 고 갸름한 편으로 직사각형 형태이며 부피감은 없다. 이목구비는 중앙에 몰려 있으며, 백호 는 도드라지게 표현되어 있다. 반개한 두 눈에 코는 콧대를 일자로 세웠고 콧망울도 살이 없 이 뾰족한 편으로 양가에 음각선을 주었다. 코와 입술로 이어지는 인중은 도톰하게 하였고 입은 아랫입술을 둥글게 하였고 윗입술에만 가운데 굴곡을 주었다.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어 있으며 가슴이 평판적인 것에 비해 아랫배는 풍만감을 나타내었다.

48 1234 남해군지 옷은 이중착의식으로 입었는데 승각기 상단은 조선시대 불상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일 자형이다. 목 양쪽으로 옷깃이 대칭적으로 접혔으며, 대의자락의 한단은 오른쪽 어깨에 걸 쳐져서 반달모양을 이루면서 끝단이 너풀거리는 물결모양을 만들었다. 대의는 크게 U자형 으로 벌어졌는데 왼쪽 어깨에서 2줄이 직선으로 아래까지 내려왔다. 왼쪽 어깨로 넘어가는 대의의 옷자락 끝이 왼쪽 팔꿈치에 만드는 U자형 옷 주름이 옆 측면으로 돌아가 이 불상이 조선 중기 이후에 조성된 불상임을 알 수 있다. 하체는 낮은 직사각형을 이루며 양 발목으로 모아지는 3가닥의 옷 주름이 규칙적인 층단을 이루고 있다. 좌우에 모셔진 협시보살좌상은 좌우보살상의 손 모양만 대칭적일 뿐 거의 형태는 유사하 다. 우협시 보살상은 양손에 걸쳐 긴 연꽃가지를 잡고 있는데 좌협시 보살좌상도 백흥암 극 락전 아미타삼존불상의 예에서 보이는 것처럼 아마 같은 형태였을 가능성이 높다. 협시보살 상들은 다른 장식은 전혀 없고 머리에만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다. 이 협시보살상은 본존불 상과 비교해서 이목구비의 선의 얇고, 아래 턱이 넓은 편이다. 또한 오른쪽 어깨에 걸쳐진 반달형의 옷자락의 처리도 더 형식적으로 처리되었고 양 발목으로 모아지면서 겹쳐진 옷 주 름이 넓게 퍼져있는 점에서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난다. 협시보살상과 본존불의 조각수법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이는 같은 시기에 조각장이 다른 경우와 혹 은 협시보살좌상이 약간 후대에 조성될 가능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2. 무형문화재 1) 남해 선구 줄끗기 지정번호 및 일자 :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6호, 소 재 지 : 남해군 남면 선구리 번지 규 모 : 고 한편길이 100여m, 행사인원 약 500여명, 예능보유자 김찬중 부 속 물 : 남해선구줄끗기 전수회관 시대 및 관리자 : 미상, 남해선구줄끗기보존회 남해 선구 줄끗기는 경상남도 남해군 남면 선구마을에서 해마다 음력 정월 보름날 아랫마 을을 남변으로, 윗마을을 북변으로 나누어 시작되는 세시풍속이며 민속놀이다. 신라 신문왕 10년에 전야산군이 설치되면서 속현인 평산현에 선구마을은 속하였고, 앞으로는 수심이 깊 은 포구이며, 뒤로는 설흘산 봉수대가 있어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였다. 위 아래 당산에 당산제를 지내는 것은 반농반어인 선구마을에 한 해 동안 풍농과 풍어를 빌며, 해난 사고의 방지, 마을의 번영을 위하여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며, 음악적 요소와 연극적 요소가 군사의

49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35 진 형태에 의하여 나타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민속적 색채 및 행사 말살정책의 비운을 맞 아 선구 줄끗기 역시 완전히 없어졌다가, 해방 후에 본 마을 거주자 향토문화 연구가인 김찬 중(발굴 당시 65세)에 의하여 중단된 민속놀이를 재현하게 된 것이다. 특색으로는 강원. 경기. 경북지역의 차전놀이, 경남 창녕의 영산줄다리기, 밀양의 개줄다 리기, 전남 광산의 고싸움 놀이 등이 혼합된 형태로 보이지만, 특색을 가진 이 지방의 전통 민속놀이이다. 줄의 모양은 문어발 형식으로 원줄에 4가닥의 작은 줄이 있다. 줄끗기 전에 고싸움을 하여 그 결과에 따라 이기는 편이 숫고가 되는데 숫고가 되면, 줄끗기 승부에서 이 길 확률이 많기 때문에 숫고가 되기 위하여 힘을 다하여 싸운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암 숫고가 결정되면, 2개의 고 를 빗장으로 연결하여 줄끗기를 시작한다. 이때 여자들은 자 기편의 줄을 무겁게 하여 줄끗기에서 이기려고 바닷가에 있는 몽돌을 치마에 담아 가지고와 서 치마폭에 싼 몽돌을 줄과 함께 움켜잡고 줄끗기를 한다. 일반적으로 암고가 승리를 하는 데 이것은 음이 생산성을 비유하는 것으로 삶의 풍요로움을 기원하는 뜻이 된다. 줄끗기가 끝나면 승부에 관계없이 달집 태우기를 하면서 화합을 다짐한다. 3. 기념물 1) 남해 상주 석각 지정번호 및 일자 : 경상남도 기념물 제6호, 소 재 지 :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 산4~3번지 규 모 : 자연암 1기(가로7m, 세로4m) 음각 시대 및 관리자 : 청동기시대,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 마을에서 상주은모래비치를 가는 도로 중간쯤에 금산 부소암을 오르는 등 산로 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중간쯤 비교적 넓고 평평한 자연암을 만나게 되는데 이 바위 위에 암각 된 고문자이다. 아직까지 무슨 내용인지 해독을 하지 못하고 있으나 전설 에 의하면, 중국 진시황이 삼신산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시종인 서불이란 사람에게 동남동 녀 500명 혹은 1천명, 3천명을 주어 불로초를 구해 오라고 하였다. 서불은 영산으로 알려진 이곳 남해 금산을 찾아와 불로초를 구하지 못하고 한동안 수렵 등으로 즐기다가 떠나면서 자 기들의 발자취를 후세에 남기고자 이 문자를 남기고 갔다는 전설이 있다. 1520년경에 간행되었다고 추정되는 이맥( 李 陌 )의 태백일사( 太 白 逸 史 ) 선도경전본훈 ( 鮮 塗 經 典 本 訓 ) 제5에 남해현 낭하리의 암벽에 신불( 神 巿 )의 옛 조각이 있다. 남해현 낭

50 1236 남해군지 하리 계곡에 있는 바위 위에 신불의 옛 조각이 있는데, 그 글에 환웅이 사냥을 나왔다가 삼 신에게 제를 드렸다고 한다. 라는 문헌 기록이 있다. 그리고 1919년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조선금석총람 상권에 남해전서불제명석각( 南 海 傳 徐 巿 題 名 石 刻 ), 소재지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양하리 라 소개하고 암각문 탁본과 지면( 地 面 )의 암석에 종( 縱 ) 1척 5촌, 횡( 橫 ) 3척 2촌 크기로 새겨짐 이라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후대인들은 해독하지 못한 서불관련 남해 암각화( 岩 刻 畵. 또는 문)를 여러 형태로 분석하고 있다. 남해도의 저자 이청기는 거란족 문자설, 인도의 데세판데 박사는 수렵선각 설, 최남선은 고대문자설, 정인보는 선사시대 각석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는 선사 석각 화설, 오경석은 서불기배일출설을 주장하고 있으며 화상문자, 그림문자, 새모양선화, 추상 선각, 한웅출렵삼신치제문, 귀인사냥터, 서불제명 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까 지 어떤 내용인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두모마을과 벽련마을 일대에는 이러한 암 각문자가 다수 있는데 새 모양, 거북등모양, 상형문자와 비슷한 암각문 등 알 수 없는 문자 가 산재하고 있다. 2) 대국산성 지정번호 : 경상남도 기념물 제19호 지정일자 : 소 재 지 : 남해군 설천면 진목리 산184번지 규 모 : 면적 42,144m2, 테뫼식산성. 둘레1.5km, 높이5~6m, 폭2.4m 부 속 물 : 칠성당터, 건물지, 연못지, 망루, 봉수대 시대 및 관리자 : 통일신라시대, 남해군 대국산성은 현성이었던 성산성에서 동북방향으로 설천면과 고현면의 경계지점인 해발 376m의 대국산에 산정식 산성(테뫼식, 테머리산성)으로 축성되어 있다. 산성에 오를 수 있 는 길은 남치, 관당, 정태, 내곡, 동비, 진목에서 오를 수 있도록 되어 있으나 폐쇄되고 현재 에는 진목과 동비 마을에서만 오를 수 있다. 지형적으로 보면 배후에 악치곡산(457m)과 금 음산(482m)이 있는 사모봉이며, 정상부가 없고 사방이 급경사로 된 혁봉일 뿐 아니라 마 안봉으로서 산성의 위치가 지형적으로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 있는 곳이다. 축조는 자연석 (20~30cm정도) 석재를 사용하여 겹겹이 쌓아 올렸으며 내부에 흙과 자갈로 메워 토루를 만들었고 길게는 직선 형성곽을 이루다가 모서리는 반원형으로 축조한 타원형 성곽이다. 형 태나 지형적으로 보아 현성이 가까이 있어 일상생활 시에는 현성의 주위(비란성, 관당성 내 외)에서 거주하다. 왜구의 침입을 받으면 산성으로 들어가 방어하고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51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37 산성 성곽 위 망루와 봉수는 왜구 침입 시 감시와 경계구역으로, 그리고 산성 중앙에 있는 건물지와 연못지는 지휘소와 식수를 해결하기 위한 곳으로 보아 현성을 보호하는 외곽성으 로 보인다. 축성 방법과 형태상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이며 조선 세조 5 년(1459)에 축성된 남해읍성 이전까지는 현을 보호하는 중요한 외곽 산성이었을 것으로 추 정된다. 1996년 은하건축사사무소에서 조사한 남해 고현(대국)산성 지표조사 보고서 에 따르 면, 산성 내 연못지와 건물지에서 주로 수습된 유물은 토기편, 청자편, 분청사기편, 기와편 등이다. 토기편으로는 회청색경질( 灰 靑 色 硬 質 )의 호형( 壺 形 ), 옹형토기, 구연부( 口 緣 部 )와 대부편( 臺 部 片 )으로 기벽( 器 壁 )이 얇고 가벼운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해당되는 것이었 고, 고려청자는 순청자 계통의 매병, 접시, 사발편 등이고 그 중에 내부에 음각문양을 한 것 도 있다. 분청사기는 조선전기에 해당하는 귀얄문이 대부분이고 늦은 시기에 해당하는 백자 편도 간혹 있다. 기와편으로는 수기와와 암기와가 혼재하고 있으며, 내면에 포목문( 布 木 文 ) 이 남아 있고 외면에는 수지문( 樹 枝 文 ), 격자문( 格 子 文 ), 어골문( 魚 骨 文 ) 등이 시문되어 있어 신라 후기와 고려 초기에 유행한 것 들이다. 수습된 유물들을 볼 때, 시기적으로는 통일신라시대 후기부터 조선시대 전기까지 주로 사 용한 것이 많아 이 성의 축조 시기는 통일신라시대였음을 추정 가능케 하였다. 지도에 나타나는 표기로는 해동지도에 대국산으로 포기되어 있고, 동여비방에 고현산성, 남해지도에 고산성 등으로 각 지도마다 지명 표기법이 달라 혼란을 초래하기도 한다. 대국산 봉수대는 설천면 진목리 산 184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대국산성(도기념물 제19호) 내에 위치하여 망운산 봉수와 창선 대방산 봉수에 응하였고 본현(성산성내에 있는 현의 소재 지)에 보고하였다. 봉수대에 오르는 길은 진목에서 농로와 임로를 따라 2.3km를 오르면 산 성과 봉수를 만날 수 있고 설천면 정태에서 오르는 길과 문항에서 오르는 길이 있다. 대국산 성과 봉수가 있는 이곳은 신라 신문왕 때 남해군에 전야산군이 설치되었고 대국산 아래 성 산이 현의 소재지이며 대국산에 외곽산성을 축성하고 봉수로서 연락과 보고를 하였다. 산성 내 서쪽 방향에 봉수대의 흔적이 있으며 둘레는 6.5m이고 직경은 3m정도 된다. 3) 임진성 지정번호 및 일자 : 경상남도 기념물 제20호, 소 재 지 : 남해군 남면 상가리 291번지외 7필 규 모 : 면적 16,460m2, 토석혼축 테뫼식산성. 둘레 283.3m, 높이 1~6m

52 1238 남해군지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남해군 임진성은 민보성( 民 堡 城 )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임진왜란 때 왜적을 막기 위하여 군, 관, 민이 힘을 합쳐 쌓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형태는 퇴뫼식으로 사암 화강암 안산암 등 할석으로 장방형 쌓기식으로 구축하고 틈새는 잔돌을 끼워 마감하였는데 남면 상가리 291 번지 해발 80m지점인 옥포 인접 구릉에 타원형 성곽으로 축성하였고 성곽 내 토루를 만들 어 통로를 만들었다. 옛날에는 성루, 감시사, 망대, 탑대, 서당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에는 시 설물은 없고 성곽의 둘레 286m, 높이 1~6m인 성곽과 동문터, 서문터, 우물지만 남아 있 다. 성벽의 바깥으로는 주변에 물길을 돌린(해자) 흔적이 있다. 조선 초기에는 왜구의 침입 이 예상되어 관리를 파견하여 지켰던 곳이었으나, 16세기중엽 이후부터는 지방 주민들이 유 사시에 피난하는 곳으로 이용되었다. 현존하는 성벽의 남쪽 동문터와 서문터 사이의 173m 는 최근 보수 공사를 거친 것이다. 구전의 의하면 임진성과 평산진성 사이의 포구를 옥포라고 하였는데 임진왜란 시 충무공 이순신이 제1차 출전하여 왜적을 무찔러 대 승첩을 거둔 거제도 옥포와 남해 옥포는 지명이 같으므로 패배한 왜적들이 옥포를 재침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남해에서는 이곳에 쳐 들어오 는 줄 알고 선조23년(1592)에 급히 서둘러 단시일에 축성한 성이라고 전한다. 4) 남해 다정리 고인돌 지정번호 및 일자 : 경상남도 기념물 제62호,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다정리 91-5번지외 4필 규 모 : 11기. 평균 상석 2~4m 시대 및 관리자 : 청동기시대, 남해군 다정리에 소재하고 있는 고인돌는 남방식과 개석식 고인돌로 논밭사이에 약 15기가 거의 일렬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고인돌의 간격은 대개 3-4m를 유지하고 있으며 주위에는 분묘 도 함께 있다. 개석은 긴 쪽이 4m정도이고 짧은 쪽은 2m정도로서 높이는 1.3m~1.8m에 달한다. 재질은 화강암과 안산암, 안산암질 낙암 등 주위에서 구하기 쉬운 암석들로 구성되 어 있으며, 형태도 다양한 편이나 장방형 계통에 가까운 편이 많고 주위에서 무문토기 편들 이 채집되어지고 있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묘제 중의 하나로서 지상에 큰 돌을 올려 봉분 을 삼는 형식이다. 고인돌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여 보면 북방식과 남방식으로 분류 할 수 있으며 북방식은 두 개 내지 세 개의 지석위에 넓적한 큰 돌을 얹히는 탁자식의 방식이며 남 방식은 지하에 냇돌 또는 관석으로 묘실을 만들고 머리 크기 정도의 돌로 지석을 한 다음 그

53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39 위에 상석을 얹기 때문에 큰 바위가 땅에 놓여 있는 것 같이 보인다. 남해 평현리, 야촌리, 심천리, 다정리, 상가리, 죽전리 평산리, 당항리, 서호리, 대곡리, 창선당항리, 서대리, 관당 리 등 100여기가 분포되어 있는 고인돌은 모두가 남방식 또는 개석식으로 마제석검, 토기 등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5) 남해 금산 봉수대 지정번호 및 일자 : 경상남도 기념물 제87호, 소 재 지 :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257-3번지 규 모 : 면적 100m2. 1기(둘레25m, 높이3.5m, 폭8m) 부 속 물 : 안내판, 연대흔적 시대 및 관리자 : 고려시대, 남해군 고려 명종 때 설치한 금산 봉수대가 위치하고 있는 금산(해발681m)의 정상에서 내려다보 면 멀리는 세존도와 대마도까지 보였고 삼천포와 여수까지 내려다보인다. 봉수대는 왜적이 침입을 할 경우 낮에는 이리의 배설물을 피워 올렸고 밤에는 불을 피워 현재의 상황을 조정 에 알리는 통신수단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 그러나 고종 31년(1894)에 현대적인 전화 통신 체제로 바뀌어 봉수제도는 폐지되었다. 봉수대의 역할은 평상시에는 1회를 올리며, 적이 나 타나면 2회를, 적이 가까이 오면 3회를, 적군이 육지에 오르면 4회를, 전쟁이 일어나면 5회 의 봉화를 올려 조정에 알렸다. 금산봉수대는 전국의 5거선 중 제2거선에 속한 최남단 봉수 대이다. 제1거선은 함경도 경흥에서 한성 목멱산(남산)으로, 제2거선은 경상도 동래에서, 제 3거선은 평안도 강계에서, 제4거선은 평안도 의주에서, 제5거선은 전라도 돌산에서 각각 신 호로 전달하였다. 금산봉수대는 가까운 창선 대방산 봉수대에 연락하면 대방산에서 삼천포 각산 봉수대로 연락이 되었고 또는 전라도 돌산 봉수대로 연락이 되기도 하였다. 금산 봉수 대는 자연석으로 쌓았으며 둘레 25m, 높이 3.5m 폭 8m 규모로 오장( 伍 將 ) 2명과 봉졸( 烽 卒 ) 10여 명이 교대로 근무하였다. 망대 아래에는 5개의 연대가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봉대의 평면은 후면에 해당하는 북서면은 모를 죽인 방형이나 남동쪽 전면은 타원형을 취하고 있으며 축조 방식은 흙과 자연석으로 혼합된 토석혼축 석축이다. 평면은 남동쪽을 축으로 하는 장변 방향의 길이는 9.88m이며, 남서쪽을 축으로 하는 단변 방향의 길이는 6.20m이다. 봉대의 상부면은 주변에 흩어진 자연석을 이용하여 직경 2.4m의 원뿔형으로 높이 1.7m정도 쌓아 놓았다. 이것이 연조( 煙 竈 )시설이나 연통( 煙 筩 )의 설치 흔적이라면 이 하부에 필연적으로 상부 유구( 遺 構 )를 받쳤던 흔적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된 다.

54 1240 남해군지 남해현지에 在 縣 東 三 十 里 北 報 晋 州 坮 防 山 峰 相 距 四 十 五 里 西 報 所 屹 山 峰 相 距 三 十 五 里 北 報 猿 山 峰 相 距 二 十 里 라 기록하고 있다. 6) 남해 장성 지정번호 및 일자 : 경상남도 기념물 제154호,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신전리 산115번지외 12필 규 모 : 면적 72,580m2. 포곡식산성. 길이15km, 높이1~2m, 넓이1.5~2m 부 속 물 : 성고개성, 곡포성, 고진성, 평산진성, 지족리 수장포~물건리 대지포 석축성 시대 및 관리자 : 고려말~조선초기, 남해군 남해장성은 길이가 15km(이동면 화계-삼동면 대지포)이고 높이1~2m, 폭1.5m~2m 이며 자연석(30~50cm)으로 겹겹이 정교하게 쌓아 올려 축성하였다. 축성방법을 보아 고 려 말이나 조선 초기에 축성된 것으로 보아지며 현재는 거의 훼손되었지만 임야 속에 있는 8.7km정도의 성지는 양호하게 잔존하고 일부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축성된 지형적 형태 는 성고개성(성현)과 곡포성, 고진성, 평산성과 연계되어 있고 수장포와 대지포간의 직선형 성곽이 형성되어 있어 외곽 방위를 위한 성으로 보이며 왜구 방비를 위한 군사적 목적이 있 었다고 볼 수 있다. 숙종31년(1705)에 이동면 난음리 난곡사 뒤편에 세워진 관방성에 관한 비문이 있다. 남 해는 동서로 양분해서 적을 막는 곳이 있는데 난포에서 유천까지 돌로서 일자 성을 쌓은 처 음과 끝이 해변에까지 이르렀고... 성의 북쪽에 병사성이 있었고 그 허리 중간 최고 처에 성 현보가 있으며 보 남쪽에 연기를 피워 올려 보고하고 경계하는 곳이 있었고...성내는 팔자성 이고 성의 각 머리는 관방성에 닿았고 한쪽은 대지포 해변으로 들어가고 한곳은 수장포 해변 으로 들어갔는데 그러한 성이 남해에 있다... 남해장성을 기록한 것이다. 7) 전 백이정의 묘 지정번호 및 일자 : 경상남도 기념물 제155호, 소 재 지 : 남해군 남면 평산리 54-1번지외 2필 규 모 : 면적 410m2. 1기(봉분 전면 5.7m, 측면 4.7m, 후면 4.6m, 높이 2.1m) 부 속 물 : 언장(석축) 시대 및 관리자 : 고려시대, 수원백씨 문중 이 분묘는 여말거유 이재 백이정의 묘라고 전해지고 있다. 남면 평산리 망기산 동쪽 계곡 인 우지막골 산골짜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봉분 주위 사방에는 평면 장방형으로 축조된

55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41 석축 담장이 둘려져 있고 봉분 주위 석축담장 내부에는 자연석을 한번 깔아 두었으며 봉분은 납작한 산석과 할석을 이용하여 길이 5.37m, 폭 4.4m 크기 평면 방형의 봉분으로 축조되어 있다. 분묘 주변에는 송림이 우거져 있으며 적석총처럼 자연석으로 축조된 방형 봉분과 그 전방의 묘축 그리고 민가 담장처럼 사방에 축조된 방호담이 경내를 보호하고 있으며 오래전 부터 남해 백씨 문중에서 관리 보호하고 있다. 특히 봉분의 호석이나 담장의 축조 수법이 여 말선초에 유행한 기법을 채용하고 있는 점이 분명하여 축조시기를 파악하는 하나의 자료가 되고 있다. 산 밑에서 묘소 가까이 자연석으로 군데군데 계단식으로 석축을 쌓아 놓은 것을 보아 역사적으로 사사로운 묘가 아님을 간접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상당군 이재 백이정을 두고 생어남해( 生 於 南 海 ) 종어남해( 終 於 南 海 ) 라는 구전과 백 만남해( 白 滿 南 海 ) 망성백씨( 亡 姓 白 氏 ) 라 하였다. 즉 백이정은 남해에서 태어나 남해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것과 남해에 백씨들로 가득 찬 전성시대가 있었고 백이정이 죽은 후에는 백 씨가 사라졌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삼동면, 이동면, 남면에는 백이정과 연 관되는 유적, 지명, 설화 등이 전하고 있으며, 백이정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난곡사 상량문 에 애군자지정( 愛 君 子 之 亭 ) 수정승지총( 守 政 丞 之 塚 ) 남해관( 南 海 貫 ) 남해인( 南 海 人 ) 그 리고 남해를 본향으로 남해인이라 5대 보첩과 8대 보첩에도 기록되어 있다( 南 海 貫 南 海 人 曰 五 代 譜 曰 八 代 普 ) 라 기록하고 있어 백이정의 본관이 남해이고 남해사람이라 적고 있다. 8) 당항 느티나무 지정번호 및 일자 : 경상남도 기념물 제199호, 소 재 지 : 남해군 남면 당항리 번지외 3필 규 모 : 면적 500m2. 1주(수고19m, 둘레6m, 수관( 樹 冠 ) 직경19m) 시대 및 관리자 : 미상, 남해군 남해군 남면 우형마을 들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이 느티나무의 수령은 약 500년으로 전하고 있다. 오랜 세월동안 이 마을의 모임 장소와 휴식처로 활용되고 있으며 마을의 무사 태평과 풍년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지내는 수호신으로 추앙하고 있다. 여름철 해 질 무렵이 되면 마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곳에 모여 정담을 나누는 장소이기도 한다. 이 느티나무 는 들판과 마을 사이 창고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임진왜란 당시 격전 장소임에도 희노애락 의 숱한 세월을 보내고 지금까지 버티고 서 있는 이 마을의 터줏대감인 셈이다. 군 내 곳곳 에 느티나무가 많이 있지만 이곳은 주변이 잘 정돈되어 있고 풍치가 넘치는 활기가 넘친다. 또한 마을의 수호신처럼 상징화 되어있는 당산나무이다.

56 1242 남해군지 9) 죽전 비자나무 지정번호 및 일자 : 경상남도 기념물 제200호, 소 재 지 : 남해군 남면 당항리 1997번지외 4필 규 모 : 면적 430m2. 1주(큰 가지3.3m, 작은 가지1.6m, 둘레7.0m, 수고12m) 시대 및 관리자 : 미상, 최금철 남면 죽전마을에 있는 군내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로서 수령은 약 600여 년이 된다고 전하 고 있다. 1970년도 새마을사업으로 마을 안길을 내면서 뿌리와 가지가 잘렸으며 길 밑에는 샘이 하나 있는데 도로와 샘 사이의 흙 축담 옆에 뿌리가 지표 밖으로 솟아 나와 웅장한 모 습이다. 나무 그늘 밑의 계곡은 휴식처이며 이 마을의 모임 장소로 활용되어지고 있다. 죽전마을은 임진왜란 후 청주 한씨가 이주하여 살기 시작하면서 농경으로 자급자족하는 터전을 마련한 마을이다. 비자나무는 남해 전역에 자연적으로 자란 나무로서 잎이 두툼하고 단단한 사철나무이며 가지에 열매가 촘촘히 열어 독특한 냄새가 난다. 비자열매는 맛이 떫 고 고소하며 옛날에 구충제나 식용유 등으로 쓰여지고 목재는 특수용재로서 고급 공예품이 나 바둑판의 재료로 사용된다. 고서( 古 書 )에 비자는 눈을 맑게 하고 양기를 돋운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예부터 한약재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비자 열매는 10~15년 되는 나무에서 수확할 수 있고 10월에 자줏빛 열매가 열린다. 조선시대 후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공 물과 고급가구재로 남벌되기도 하였다. 죽전 비자나무는 군내 최대의 거목이며, 남해군 군목( 郡 木 )이다. 비자나무에 관한 연구 결 과를 보면, 우리나라 3개 집단인 제주도와 남해, 정읍 내장산 등을 천연집단으로 구분하면서 우수한 가구재, 조경수, 약용, 식용으로 쓰이는 난대수종임으로 아직까지 개발되지 못했다. 가장 오랜 집단은 제주도이고 다음은 남해 집단임을 시사하고 있다. 10) 남해 설흘산 봉수대 지정번호 및 일자 : 경상남도 기념물 제247호, 소 재 지 : 남해군 남면 홍현리 산 237-1번지 규 모 : 면적 225m2. 1기(둘레 7.5m, 높이 6m, 폭 7m)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남해군 설흘산 봉수대는 남해군 남면의 남단 해안가에 위치한 설흘산( 雪 屹 山, 490m) 정상에 축조 되어 있다. 자연 암반을 기반으로 하여 석축한 것으로, 평면 형태는 원형이나 일부분은 각이 져 있다. 입면은 원통형이다. 동쪽 부분은 비교적 완전하게 남아 있으나 서벽은 붕괴가 심한

57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43 편이다. 무너진 부분은 후대에 일부 개축되어 전체적인 구조는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동벽의 상태가 양호하므로 조선시대 봉수의 구조를 비교적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 고 판단된다. 외곽에 여타 시설을 설치하지 않았고 연조는 1구이다. 지금은 연조 위에 막돌 탑을 세워 연조부의 관찰이 어렵다. 출입시설은 북동쪽에 두었다. 봉돈의 구축방식은 육축 식이며, 할석을 사용하여 벽돌쌓기 하였다. 신중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所 訖 山 烽 燧 東 應 錦 山 北 應 猿 山 이라 적고 있어 금산과 원산 봉수대로 주로 전달되지만, 돌산 봉수대와 가 까이 있기 때문에 제5거선인 돌산 봉수로도 봉화가 전달되었다. 11) 남해 대방산 봉수대 지정번호 및 일자 : 경상남도 기념물 제248호, 소 재 지 : 남해군 창선면 옥천리 산75번지 규 모 : 면적 1,500m2. 1기(토석혼축, 높이 약8.6m, 너비 13.5m)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남해군 창선면 대방산 정상부에 있다. 봉수대로 오르는 길은 옥천에서 오르는 동쪽로, 사포에서 오르는 서쪽로와 상신리에서 오르는 북쪽로가 있다. 금산 봉수대에서 받아 사천의 각산 봉 수대로 이어주는 중계지이다. 이 봉수대의 조응관계에 대해 진주목장창선도지도에는 남해 금산봉수와 진주 각산봉수에 두고 있다. 12) 남해 금오산성 지정번호 및 일자 : 경상남도 기념물 제249호, 소 재 지 : 남해군 창선면 당항리 산 번지 규 모 : 면적 32,429m2. 1기(둘레 약 2,000m, 높이 2~3m, 너비 1m) 시대 및 관리자 : 고려시대, 남해군 당항리 배후에 있는 금오산(해발 261m)의 정상을 둘러싸고 있는 테뫼식의 석축성이다. 기초는 육축식이다. 아래는 편축식이며, 상부의 협축부는 대부분 유실되었다. 체성은 비교 적 얄팍한 할석을 무질서하게 쌓아 축조한 것으로, 여장도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성벽에서 는 치가 확인되는 곳이 있으며, 2개의 문지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 가운데 서문지는 폭 4m 가량으로, 비교적 뚜렷하게 확인되나 남문지는 조금 애매하다. 골짜기에 해당되는 남문 지 내부에는 우물 혹은 연못으로 추정되는 시설이 있으며, 배수로를 따라 성 밖으로 물이 배 출되고 있다. 그 외에 성의 내부에서 건물지 등은 확인이 곤란하다. 다만, 진주 전송대산성 에서도 확인된 바 있는 초소와 같은 시설이 성벽의 안쪽에 축조되어 있어 주목된다. 삼천포

58 1244 남해군지 각산산성의 축조수법과 매우 유사한 것으로 보이며, 그 축조시기를 고려 말까지 올려볼 수 도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1987년 발행한 伽 耶 文 化 圈 遺 蹟 精 密 調 査 報 告 書 - 慶 南 南 海 統 營 - 43쪽에 의하면, 성의 내부에서 청자 및 기와 조각 등 유물과 우물지와 건물지의 초석 등이 관찰된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로 보아 구축연대는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진주목장창선 도지도에는 고산성으로 기록된 점을 보아 고려시대에 축조되었다가 조선시대 후기 이전에 가능을 상실한 것으로 추정된다. 4. 민속자료 1) 남해 가천 암수바위(일명, 미륵바위) 지정번호 및 일자 :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13호, 소 재 지 : 남해군 남면 홍현리 849번지 규 모 : 2기(숫바위 높이 5.8m, 둘레 2.5m, 암바위 높이 3.9m, 둘레 2.3m)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가천마을 가천마을 아래 바닷가 100m 전방에 위치한 한 쌍의 암수바위가 5m 간격으로 서 있다. 이 두 바위를 마을사람들은 각가 암미를과 수미륵으로 부르고 있다. 암미륵은 높이 3.9m, 둘레 길이 2.3m의 크기로, 여인이 잉태하여 만삭이 된 모습을 한 채 비스듬히 누워있고, 숫미륵 은 높이 5.8m, 둘레길이 2.5m 크기로, 남성의 성기 형상으로 서 있다. 매년 음력 10월 23일에 마을에서는 풍농과 풍어가 되도록 주민들은 지극한 정성으로 제를 올리고 있다. 특히 배를 가지고 있는 어민들은 해난사고를 방지하고 고기가 많이 잡히도록 기원하는 제를 지내기도 한다. 특히 자녀가 없는 가정에서는 이곳을 찾아와 기자( 祈 子 )의 복 을 비는 사람도 많이 있다. 이 바위는 영조27년(1751)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당시 현령이었던 조광진의 꿈에 어떤 노 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내가 가천에 묻혀 있는데 우마( 牛 馬 )의 통행이 잦아 일신이 불편해 서 견디기 어려우니 나를 일으켜 주면 필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하여 꿈에서 깬 현령이 관원을 모아 가천 마을에 가보니 노인이 알려준 지형과 똑같으므로 관원을 시켜 파보 니 지금의 암수바위가 나타났다고 한다. 숫바위는 일으켜 세우고 암 바위는 누운 채로 두었 다. 발견한 10월 23일에 논 다섯 마지기를 이곳에 헌납하고 매년 제사를 지내도록 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구전과 실제로 있었던 일을 보면 주위에 농사를 짓기 위해 지저분한 오

59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45 물을 뿌리거나 손가락질을 하면 손이 썩는다고 하며, 1920년에는 욕지도에 있는 한 어선이 가천 앞바다에서 표류하게 되었는데 이때 미륵노인이 나타나 구해 주었기 때문에 살아나 어 부들이 늙어 죽을 때까지 이곳에 와서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 곳이다. 우리나라의 선돌 신앙으로 기복과 기자를 소원하는 암수바위(미륵불)이지만 남해는 전국 3대 관음기도처로 불리는 보리암이 있고 수많은 사찰 터와 불교사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암 수바위도 마을에선 미륵불이라 하여 매년 음력 10월 23일에 풍년 기원제를 올리는 민속신 앙의 대상물이다. 성기 모양으로 돌을 깎아 자식을 많이 갖는 것과 농사의 풍요로움을 빌던 대상이 마을전체의 수호신으로 바뀌고, 다시 불교의 미륵불로 이어진 민간신앙의 한 예를 보여준다. 5. 문화재자료 1) 운곡사 지정번호 및 일자 : 문화재자료 제41호, 소 재 지 : 남해군 서면 중현리 1024번지외 1필 규 모 : 면적 1,577m2. 사당-팔작목조와가 부 속 물 : 외삼문, 관리사, 화장실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운곡사보존회 운곡사는 삼남의 거유 당곡( 唐 谷 ) 정희보( 鄭 希 輔 )선생을 봉안하고 있는 사우이다. 당곡선 생의 자는 중헌( 仲 獻 )이고 호는 당곡( 唐 谷 )이며 성종 19년(1488)에 남해군 이동면 초양리에 서 출생하였고 명종 2년(1547)에 60세의 일기로 졸하였다. 선생은 18세가 되던 1505년 학 문을 배우고자 함양군 수곡리 당곡으로 이거하여 생활하다 나주 박씨 집안에 장가들어 함양 에 정착하게 되었다. 당곡 선생은 정주학( 程 朱 學 )을 깊이 연구하여 이를 개척한 삼남의 대선 각자( 大 先 覺 者 )로서 당시 조정에서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기를 누차에 걸쳐 종용하고 초빙하 였으나 당곡 선생은 이를 거절하고 후학들을 지도하는 데 생애를 바쳤다. 제자로는 거유( 巨 儒 )로 이름을 떨친 옥계 노진, 구졸 양회, 개암 강익, 청련 이후백, 매암 조식, 남계 임희무 등 많은 학자들이 있다. 운곡사는 철종 4년(1853)에 창건되었으나 대원 군의 서원, 향사철폐령에 의하여 일시 철거되었다가 고종 11년(1874)에 남해군에 거주하고 있는 인근 유림들에 의하여 다시 중건되었다. 사우의 규모는 330m2여 평의 대지에 정면 3 칸, 측면 2칸의 팔작목조와가와 내삼문, 외삼문이 있다. 매년 음력 3월 15일에 인근 유림들 에 의하여 석채례( 釋 菜 禮 )를 봉행하고 있다. 당곡은 수많은 성리학서를 저술하였지만 임진

60 1246 남해군지 왜란으로 대부분 소실되고 당곡정선생실기 만 남아 있다. 이책에는 시 6편, 부 1편, 성 리잡저 16편 등이 실려 있다. 6편의 시 중 정희보 선생이 고향인 남해를 생각하며 지은 시가 있다. 달빛은 천지가 한 가지인데 인정은 초나라와 주나라가 다르구나 오늘 아침 술 따르던 곳에 마음은 보냈으나 몸이 돌아가지 못하였구나. 月 色 同 天 地 人 情 異 楚 奏 今 朝 杯 酒 處 心 送 未 歸 身 2) 정지석탑 지정번호 및 일자 : 문화재자료 제42호, 소 재 지 : 남해군 고현면 대사리 768번지외 6필 규 모 : 3층석탑 1기(높이2.25m) 시대 및 관리자 : 고려시대, 남해군 석탑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고현면 대사리 탑동마을 앞 19번 국도변 북동 편에 위치하며, 석탑은 기단부가 결실된 채 대형 자연괴석 위에 4층 석탑 형태로 복원되어 있다. 탑신석은 옥개석과 재질이 다르고 그 형태도 동일하지 않은 것을 보아 후대에 다른 석재를 이용하여 탑의 형태를 복원한 것 같다. 이들 부재( 部 材 )를 종합하여 볼 때 탑동마을 부근에 탑이 있었 다는 것은 분명하나 정확한 석탑의 형태와 조성 시기는 실측 조사와 신중한 검토 후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 탑은 고려 말 정지장군의 승첩 탑이라고 내려오고 있으나 정확한 문헌은 없다. 구전의 의한 내용을 보면, 고려 말 해도원수 정지장군 1347~1391년이 우왕9년(1383) 5월에 남해 관음포 앞바다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러 남해를 구제하였기에 이 지역 향토인들이 정성을 모 아 손수 돌을 깍고 다듬어서 만들어 세운 것이라고 전한다. 영남 읍지 남해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을 북편 20리 관당로변( 官 堂 路 邊 )에 있 으며, 높이가 10여 척이고 당초 고현치( 古 縣 峙 )에 설축( 設 築 )한 바 탑 아래 1리쯤에 한 해구 가 있다. 이름하여 관음포( 觀 音 浦 )라 하니 고려 말 해도원수 정지장군이 여기서 왜적을 섬멸 하시고 조선조 선조 때 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왜선을 대파시켰다. 지금도 왜적의 철극( 鐵 戟 ) 이 간혹 모래 속에서 나온다. 위의 내용을 볼 때, 현재 위치는 당시 바다로서 여가 있었던 곳이다. 바닷물과 육지가 맡 닿은 곳은 현 위치에서 동북 방향으로 약 1km쯤 가면 관당마을이 나타나고 관당마을 앞이

61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47 날곶이 이다. 정지장군의 대첩 탑이 있었다면 옛 도로인 관당로 주변이라 말할 수 있다. 현재의 석탑은 원형이라 볼 수 없으며, 세월이 흘러 탑이 무너져서 아래로 밀려왔고 신작 로를 만들 때 묻혀 있거나 흩어져 있던 석탑 일부분들을 모아서 세운 것이 현재에 이르고 있 다. 탑이 세워져 있는 곳은 처음의 위치가 아니고 일제 강점기 때 쌓은 관음포 방파제로 인 하여 마을 앞까지 형성되어 현재는 탑동에서 분동되어 중앙동이라 부르고 있다. 탑의 규모는 높이가 2.2m로서 기단부는 없고 자연석 위에 세워져 있다. 옥개( 屋 蓋 )는 5개 이고 하단부 1 2단(70cm 45 19cm ))은 직사각형이고 나머지는 정사각형 ( )인 마제석으로 되어 있고 옥신( 屋 身 )은 cm로 되어 있으며, 그 위에 상륜부가 얹혀 있다. 석질은 2종류로 보인다. 옥개석은 옥개받침과 어설픈 형태이고 낙수면( 落 水 面 )의 각도 매우 완만하나 전각부에 있 어서는 비교적 날렵하게 반전되어 있다. 이들 옥개석은 다층탑( 多 層 塔 )의 것으로 추증할 수 있으나 다른 것들은 부재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탑신 중 1매는 조선시대에 유행하는 탑신과 하부 받침이 함께 모각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하여 볼 때, 탑의 전체가 원래의 원형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없지 만, 구전과 읍지편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석탑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3) 당항 신흥사 삼층석탑 지정번호 및 일자 : 문화재자료 제43호, 소 재 지 : 남해군 남면 당항리 872-1번지외 4필 규 모 : 1기(높이 2.5m) 시대 및 관리자 : 고려시대, 남해군 마을 회관 앞 뜰에 세워져 있는 탑은 옛 신흥사지에서 이전하였다. 탑이 서 있는 곳의 앞 서북방향으로 약 300m지점 들판에 신흥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언제 창건되었으며 언 제 폐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현존 탑은 신흥사 경내에 축조되었던 것으로 절이 폐사되고 탑만이 남았다. 신흥사가 있었던 곳에는 현재에도 지대석이 남아 있으며 근래까지도 와편과 사찰에 필요한 물건들이 출토되어 절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절은 없어지고 석탑 만 들판에 세워져 있는 것을 이곳 마을 주민들이 보존하고자 마을회관 앞으로 이전한 것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탑은 상륜일부만 유실되고 보주를 바치는 팔각형 보개( 寶 蓋 )와 보륜( 寶 輪 )을 갖추고 있다. 하층 탑신과 각 층의 옥개석에는 우아한 장식조각이 되어 있으며 축조의

62 1248 남해군지 연대는 형태상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추정하고 있다. 4) 율곡사와 남면향약계 지정번호 및 일자 : 문화재자료 제44호, 소 재 지 : 남해군 남면 당항리 번지 율곡사 규 모 : 사당-목조기와 단칸 고궁형식, 절목 등 16권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남면향약계보존회 중종 12년(1517) 3월에 김안국( 金 安 國 )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교화( 敎 化 )를 매우 중요시하여 향리에 여씨 향약을 전국에 보급하였다. 남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남면 향약 계는 남전여씨향약을 기본 이념으로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며 풍속을 바르게 하면서 기 강을 세워 면치행정의 의결 명령기관으로 효열 표창은 물론 불효하고 친목을 해하는 자는 태 형으로 다스리는 등 향리의 풍기를 단속하고 후생을 가르쳤다. 남면 향약계는 정조 8년(1784)에 반수( 班 首 ), 계장, 공원( 公 員 )총무, 유사( 有 司 ), 재무의 삼소임을 두어 결성된 것이 오늘까지 이르고 있다. 매년 3월과 9월 중 15일에 율곡사(남면 당항리)에서 다례를 봉행하고 계회를 개회한다. 개회 전에 반드시 남전여씨향약 덕업상권 ( 德 業 相 勸 ), 예속상교( 禮 俗 相 交 ), 과실상규( 過 失 相 規 ), 환난상휼( 患 難 相 恤 )을 낭독하고 개회 한다. 향약계 규율이 엄격해서 계장, 공원, 유사의 3소임을 선출 할 때는 지역에서 덕망이 높아야 하며 사회에 지탄을 받는 자는 소임을 맡을 수가 없다. 총회에서는 면집강( 面 執 綱 ) 영세원( 領 稅 員 ) 풍헌( 風 憲 )을 임명하여 면치일반을 돌보게 하였다. 남면 향약계에는 조선시 대에 현령으로부터 하달된 절목 16권과 고문헌 등이 소장되어 있다. 1964년에 율곡사를 창 건하고 사우 내에 이이( 李 珥 )의 위폐를 봉안하고 있다. 5) 용문사 천왕각 지정번호 및 일자 : 문화재자료 제150호, 남면향약계보존회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산868번지 규 모 : 1동(정면3칸, 측면2칸, 겹처마 맛배와가) 부 속 물 : 전각, 사천왕상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용문사 용문사 천왕각은 일주문을 지나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천왕각이 있다. 천왕각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재건 후 조선조 숙종 28년(1702)에 지은 건물로 용문사의 관문이다. 천왕 각에 모셔져 있는 사천왕은 부처님의 도량과 법을 수호하시는 신으로써 동방 지국천왕, 남

63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49 방 증장천왕, 서방 광목천왕, 북방 다문천왕을 말하고 제석천( 帝 釋 天 )에 봉사하며 불법뿐만 아니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수호하는 호법신이다. 천왕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지붕은 겹처마 맛배와가로 되어있다. 사천왕을 모시고 있는 천왕각을 천왕문이라고도 하는 데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는 성스러운 도량에 잡인의 출입을 금하기 위하여 사방을 수호하던 부처님의 화현( 化 現 )이다. 삼보( 三 寶 )가 있는 사찰을 수호하는 뜻으로 천왕의 모습을 나누어 파사현정( 波 邪 顯 正 )의 정신을 일깨우는데 그 뜻이 있는 것이다. 6) 용문사 명부전 지정번호 및 일자 : 문화재자료 제151호,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868번지 규 모 : 1동(목조와가) 부 속 물 : 전각, 지장보살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용문사 명부전은 지장전 또는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대원력의 상징인 지장보살을 중앙에 모시고 명부의 시왕을 좌우로 모시기 때문에 이렇게 부fms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입 적하신 뒤부터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천상에서 지옥까지 일체중생들을 제도하시는 분인데 특히 지옥 중생을 가엾이 여겨 지옥 문전에서 항상 눈물 흘리시면서 중생제도 하신다. 이런 까닭에 보살상을 명부전에 모시고 있다. 그래서 명부전은 사후세계의 소원과 망인의 명복을 비는 곳이다. 용문사 명부전은 용문사 재건 시에 세웠다는 전설이 있으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창건기에는 초창에 설웅이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죽은 자의 영혼이 도달하는 세계를 명계( 冥 界 ), 명토( 冥 土 ), 황천( 黃 泉 ) 등으로 부르고, 이 명계를 다스리는 왕이 열 명이 있다고 하여 시왕( 十 王 )이라 부른다. 시왕은 진광 왕( 秦 廣 王 ), 초강왕( 初 江 王 ),m 송제왕( 宋 帝 王 ), 오관왕( 五 官 王 ), 염라왕( 閻 羅 王 ), 변성왕( 變 成 王 ), 태산왕( 泰 山 王 ), 평등왕( 平 等 王 ), 도시왕( 都 市 王 ), 오도전륜왕( 五 道 轉 輪 王 ) 등이다. 중생들은 죽은 날로부터 7일 단위의 일곱번과 사후 100일, 1년, 3년 등 열 번에 걸쳐서 시 왕들로부터 자신의 선악업을 심판받는다고 한다. 심판받는 동안 망자의 죄업을 사하기 위해 열 번의 재를 베푼다. 7) 화방사 채진루 지정번호 및 일자 : 문화재자료 제152호, 소 재 지 : 남해군 고현면 대곡리 1448번지외 2필

64 1250 남해군지 규 모 : 1동(목조와가 누각)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화방사 채진루는 일주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서기 전 대웅전과 마주보고 있는 건물로서, 인조 16 년(1638) 계원대사가 지었다. 화방사는 임진왜란과 영조 17년(1741)에 두 번이나 방화와 화재로 폐사되었으나 복원되고 재건되었다. 채진루 역시 화방사의 재건과 동시 맛배지붕과 목조와가 2층으로 정면 5칸과 측면 2칸으로 복원되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으로 짠 익공 양식으로 조선 후기의 수법을 보이고 있다. 8) 난곡사 지정번호 및 일자 : 문화재자료 제237호,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난음리 910번지 규 모 : 사당-팔작목조와가(정면3칸, 측면2칸) 부 속 물 : 내삼문, 외삼문, 도동제, 관리사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난곡사 보존회 난곡사는 고려시대 상당군이며 성리학을 연구하고 체계화 시킨 이재( 彛 齋 ) 백이정( 白 頤 正 ) 선생과 수제자인 익제( 益 齊 ) 이제현( 李 齊 賢 ), 치암( 恥 庵 ) 박충좌( 朴 忠 佐 ) 그리고 향현( 鄕 賢 ) 인 난계( 蘭 溪 ) 이희급( 李 希 伋 )선생을 봉안하고 있는 곳이다. 난곡사는 난계 이희급 선생을 봉안하고 있던 난계사 군자정을 1925년에 중건하여 난곡사라 칭하고 매년 음력 3월 10일에 향토 유림에 의해 제례를 봉행하고 있다. 백이정의 본관은 남포( 藍 浦 ), 자는 약헌( 若 軒 ), 호는 이재( 彛 齋 ), 보문각 학사( 寶 文 閣 學 士 ) 문절공( 文 節 公 )의 아들이며 안향의 문인이다. 충렬왕 원년(1275)에 문과 급제하여 충선왕 5 년(1313)에 첨의평리, 충숙왕 4년(1317)에 상의회의도감사를 지낸 후 상당군에 봉해졌다. 특히 후진 양성에 힘써서 이제현( 李 齊 賢 ), 박충좌( 朴 忠 佐 ), 이곡( 李 穀 ), 이인복( 李 仁 復 ), 백 문보( 白 文 寶 )등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들여온 사람은 안향이지만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체계를 세운 사람은 백이정이라 할 수 있다. 현재에 남포의 신안원( 新 安 院 ), 충주의 도통사, 남해의 난곡사에서 향사하고 있다. 시호는 문헌이다. 9) 남해 척화비 지정번호 및 일자 : 문화재자료 제266호,

65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51 소 재 지 :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번지 규 모 : 1기(높이 220cm, 폭 49cm, 두께 16cm)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남해군 척화비는 조선 고종의 부친인 흥선대원군이 고종 3년(1866)에 강화 정족산성에서 프랑스 군과의 마찰이 있었던 병인양요와 고종 8년(1871년)에 강화 강성보에서 미군과의 전투인 신 미양요를 승리한 후 외국인을 배척하고 쇄국주의를 고창하였으며, 국민에게 경고하기 위하 여 1871년 4월에 전국 요충지에 비를 세웠는데 남해 노량에도 세웠다. 내용은 양이침범 ( 洋 夷 侵 犯 ) 비전즉화( 非 戰 則 和 ) 주화매국( 主 和 賣 國 ) 계오 만년자손( 戒 吾 萬 年 子 孫 ) 병인작( 丙 寅 作 ) 신미입( 辛 未 立 ) 풀이하면 서양 오랑캐가 침략해 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 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 라고 큰 글로 쓰고 만년에 훈계하노라 병인년에 만들고 신미년에 세운다. 라고 적은 글씨로 좌측에 새겨져 있다. 처음 척화비가 입 석되었던 곳은 노량 선착장 입구였으나 일제강점기 때 무관심 속에 묻혀 있던 것을 향인이 설천중학교 입구에 이전 보전하였으나 1998년 8월 5일에 남해군과 남해문화원에서 옛 자리 를 찾아 현 위치에 이설하였다. 10) 남해 금산영응기적비 지정번호 및 일자 : 문화재자료 제277호, 소 재 지 :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산 257ㅡ3번지 규 모 : 1기(높이2m, 폭60cm) 부 속 물 : 1기-대한중흥공덕축성비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전주이씨문중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하던 중 산신의 영험에 의하여 보위에 오랐다는 전설 이 깃든 유적이다. 위치는 보리암 탑대에서 바로 건너다보이는 삼불암 아래에 있다. 천하를 장악하려는 큰 뜻을 품은 태조 이성계는 전국 명산을 찾아 산신기도를 하였으나 그 뜻을 이 루지 못하다가 마침내 금산 산신이 호응하여 등극하게 되자 영구불망의 명산이라 하여 보은 의 뜻으로 보광산을 금산으로 개칭케 하였다고 전한다. 이 비석은 광무 7년(1903) 5월 11일 에 그 유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종일품 숭정대부 의정부 찬정 윤정구( 尹 定 求 )가 임금의 뜻을 받들어 글을 짓고 써 건립하였다. 의정부 찬정 윤정구가 고종의 명을 받아 찬한 두 개의 비석은 선은전 내에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비석의 전면에 각각 남해금산영응기적비, 대한중흥송덕축성비 라고 새겨져 있다. 비문의 찬자인 윤정구는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1875년(고종12) 별시에 급제하여 이후

66 1252 남해군지 관로에 올라 여러 벼슬을 두루 거쳤던 인물이다. 그는 김윤식( 金 允 植 ) 등이 을미사변에 관련 되었으므로 극형에 처하여야 한다고 상소하기도 하였고 명성황후의 장례 때에는 궁내부협판 으로 대신서리가 되어 장례를 총지휘하였다. 광무 연간에는 고종의 측근으로 궁내부 소속의 여러 아문의 장관을 역임하며 주로 왕실 사무를 관장하였다. 1900년에 일본인과 직산금광채굴합동조약을 맺었고 궁내부 관제를 새로운 관제로 개정할 때 핵심적으로 관여하였으며, 법규교정소의 의정관이 되어 대한국국제 제정에 참여하였으 며 마지막으로 의정부찬성을 지냈다. 윤정구가 찬한 두 개의 비 가운데 남해금산영응기적 비 의 전문을 번역해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제전 에 이르기를, 차례로 산천에 망제를 지낸다. 라고 하였고, 상서 에 이르기를, 산천의 귀신이 또한 편안하지 않음이 없다. 라고 하였고, 주서 에 이르기를, 지나가는 명산대천에 고한 다. 라고 하였다. 임금은 천지 신인의 주인이라 성인이 세상에 나타나서 왕업을 일으키고 터를 열면 이 에 부응하는 상서로움이 반드시 있게 되는 것이다. 국초 설봉산의 영이한 기적은 태조 고황제께서 글로 써서 돌에 새긴 것이 있고 이어서 세 성조와 지금의 황제께서 이를 이어 받아 밝히셨으니, 대저 하늘이 덕 있는 사람을 명하게 되면 모든 신이 다 흠향하고 몰래 도와 보살피는 것은 그 이치가 밝히 드러나서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금산은 옛날의 보광산이다. 산 아래에 사는 사람들이 전하기를, 삼불암 아래에 고황제의 선유가 있던 옛 터가 아직 남아 있는데, 보좌에 오르신 뒤에 그 산을 봉하여 말씀하시기를, 온 산을 비단으로 입혀도 될 것이다. 라고 하여, 이 때문에 이렇게 이름 하였다고 한다. 기도 올리던 밤에 신인이 현몽하고 또 벌 레가 나뭇잎을 갉아 왕( 王 ) 자를 이루었으니, 아직 초매한 때이나 상서가 드러나는 것이 빛나기가 도서와 같으나 기록에서 확인할 수가 없어 그 소상한 것은 알지 못한다. 철종 기미년(1859)에 전패( 殿 牌 )를 산 아래 봉안 하였다가 뒤에 보리암으로 옮겨 봉안 하였고, 성상 무 술년(1898년)에는 본군에서 부에 청하여 중조봉 아래 용문사 불전의 별당에 봉안하였으나, 그 제도가 보잘 것 없어 이 고장 사람들이 새롭게 할 것을 도모하여 전자( 殿 字 )를 만들어서 세우고, 장차 돌을 다 듬어 새기고자 하거늘, 임금께서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신 정구에게 명하여 찬차하도록 하시니, 삼가 그 사실을 이와 같이 서술하노라. 광무 7년 5월 일. 대한중흥송덕축성비( 大 韓 中 興 頌 德 祝 聖 碑 )는 남해금산영응기적비와 동일한 시기에 역시 의정부 찬성 윤정구가 지은 것이다. 남해금산영응기적비가 고종의 명에 따라 남해 금산의 영응 기적을 공식적으로 언명해서 밝히 드러낸 내용이라면, 대한중흥송덕축성비는 대한을 중흥한 고종 황제의 공적이 조선 왕조 개국조인 태조의 공적에 비길 수 있음을 칭송하여 성 군이 되기를 축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래에 이 비의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67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53 무릇 문을 지키고 체( 體 )를 잇는 임금으로서, 문이 편안해지고 무가 강성해짐으로 인하여 온갖 법도가 해이해진 뒤에 능히 대업을 크게 일으켜서 왕의 기강을 다시 떨쳐서 사방을 바로잡아 공명을 후세에 혁 혁히 빛낸 이는, 하은주( 夏 殷 周 ) 삼대 이래로 오로지 은나라의 고종과 선왕이 있었을 뿐이니, 대개 매우 어렵다. 공손히 생각하건데, 우리 대황제 폐하께서는 성스럽고 신령스러우시며, 용기와 지혜는 하늘이 내려 주셨고, 우뚝한 공훈과 커다란 업적은 창업수통의 업적과 다를 바가 없다. 나라는 오래되었지만 하 늘의 명이 새로 내림에, 원구에서 비로소 제사하고, 오묘를 추숭하여, 시조를 높이어 하늘에 배향하고, 법도를 제작하니 옛날에 없었던 일이다. 여기 남해군 금산은 고황제께서 옛날에 일찍이 제사를 지내셨 던 곳이다. 지역민들이 전우를 건립하여 받들고, 비석을 세워서 그 일을 기록하면서, 우리 황제 폐하께 서 뛰어난 공덕이 고황제에 부합하고 의범 또한 그와 같다고 하여, 이곳을 화( 華 ) 땅의 봉인( 封 人 )이 청 축( 請 祝 )하는 곳으로 삼고자하니, 신 정구는 손 모아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다음과 같이 축송을 드린 다. 빛나는 성덕은 옛적의 선철과 같네. 요순의 어짐과 탕무의 공열이 또한 기수와 관계되어 후손에게 전해졌네. 큰 재난 평정하기를 강과 시내를 터놓듯 하였네. 재앙을 말끔히 씻어내려 나라가 편안하고 조 용하게 되었네. 만방이 어우러지고 교화되니 비단과 구슬이 광주리에 가득하네. 성취함이 있어 그에 맞 는 제수와 희생을 갖추었네. 산천과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일이 모두 차례에 맞네. 맑은 향기 하늘에 오 르니 큰 복을 내려 주시네. 비와 햇빛이 때에 맞으니 좋은 곡식이 많이 익었네. 예악이 모두 갖추어 지 고 문물과 전장이 훤히 빛나도다. 군대는 잘 훈련되고 관리들은 더욱 엄숙하네. 젊은 사람 품어주고 늙 은이는 편안하니 백성들이 편안하고 즐겁게 살아가네. 억조창생들이 추대하기 원하여 칭송하는 소리 일 어나네. 남극성이 솟으니 상서로운 빛이 찬란하며, 일월 오성이 빙 둘러 조아려 임금님의 장수를 비네. 청컨데 성인께서는 항하사( 恒 河 沙 ) 모래같이 무궁한 공적 쌓으시고 천자께서는 영원히 태산과 반석이 되소서. 대한을 중흥한 고종 황제의 공적과 덕을 칭송하여 성군이 되기를 축원하는 내용이다. 11) 남해 망운암 석조보살좌상 지정번호 및 일자 : 문화재자료 제333호, 소 재 지 : 남해군 남해읍 아산리 번지 규 모 : 1기 시대 및 관리자 : 조선후기, 망운암 남해 망운암 석조보살좌상은 현재 망운암 관음전( 觀 音 殿 ) 법당에 도금되어진 양호한 상태 로 봉안되어 있다. 망운암은 고려고찰( 高 麗 古 刹 )로서 여러 차례 중건 중수되어 왔으며, 남해의 진산인 망 운산( 望 雲 山 ) 정상 아래에 위치한 관음기도도량이다. 여기에 봉안된 이 관음좌상은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8 15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망운암에 왕래가 많았던 지역 고로( 古 老 )들의 구전에 따르면, 옛적에 경주 옥돌로 조성된 영험 높은 부처님이라 전해왔다는 것이다.

68 1254 남해군지 머리에 보관을 쓰고, 양쪽 무릎 위에 두 손을 각각 나란히 두었으며, 오른쪽 발은 군의 바깥으로 노출된 반가부좌의 보살상이다. 총 41.2cm 높이의 중소형 불상으로, 대좌를 생략 하고는 그 외 양호하게 잘 남아 있다. 보관의 형태, 방형의 얼굴, 의습처리 등 18세기 이후 경남지역 불상에서 볼 수 있는 보편 적인 특징을 지닌 작품이다. 12) 남해 망운암 건륭을사명동종 지정번호 및 일자 : 문화재자료 제334호, 소 재 지 : 남해군 남해읍 아산리 번지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망운암 이 동종은 옛부터 망운암에서 조석으로 타종해온 것으로 전하며, 고봉절정 암자에서 들려 오는 이 종소리에 옛 어느 고승께서 운암모종( 雲 庵 暮 鐘 ) 이라는 시를 읊었다고 한다. 총 높이 49cm 정도의 동제범종으로 천판과 종신 표면이 일부 매끄럽지 못하고 다듬은 흔적이 역력하나, 파손된 부분은 잘 보수되어 있어 그 본래의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다. 제작시기는 종의 비례와 용뉴, 범자원권문( 梵 字 圓 圈 文 ) 배치 등으로 보아 중국 범종의 영 향을 받은 조선후기 작품으로 보이나, 다행히 종신 하단에 점자 명문을 통해 건륭오십년 을사( 乾 隆 伍 拾 年 乙 巳 )년, 즉 1785년에 남해 화방사( 花 芳 寺 )에서 제작된 종임을 알 수 있 고 조선시대 범종 연구에 그 학문적 가치가 있다. 13) 남해 용문사 건양2년 영산회상탱 지정번호 및 일자 : 문화재자료 제347호,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868번지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용문사 1897년에 조성된 작품으로 화면 중앙에 위치한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양쪽에 문수 보현 보살과 사천왕이 배치되어 있고 위쪽으로 미륵 제화갈라 관음 지장보살이 배치되 어 있으며, 가장 위쪽에는 대제자상 8금강 사천왕상 등의 권속들을 꽉 차게 배치하고 있다. 권속들의 모습은 화면 아래에서 위족으로 갈수록 상대적으로 작게 표현하여 상승감을 주고 있다. 색채는 백색 녹색 적색을 주로 사용하고 있으며, 부분적으로 청색과 회색을 사용 하고 있다. 안면은 백색에 담갈색으로 음영처리를 하여 굴곡을 나타내고, 붉은 입술에 가늘

69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55 고 짙은 먹선으로 파상형의 수염 형태를 반복하여 그렸다. 바닥과 천공의 여백에는 청색을 바르고, 화면 상하단과 중간에 구름을 배치하여 도상 간에 경계를 짓고 있다. 현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하고, 표현기법이 전통화법에서 근대수법이 가미된 것으로 보이 는 화기에 의하면 화원이 편수, 영호, 봉의를 비롯하여 여러 명이 관여하였으며, 시주자도 많은 사람이 등장하고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14) 남해 용문사 소장문헌 지정번호 및 일자 : 문화재자료 제351호,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868번지 규 모 : 2권 5책 시대 및 관리자 : 18세기 초 ~ 20세기 후반, 용문사 남해 용문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이 필사본은 전적 2건 5책(만년통고 2책, 복전집 3책)은 그 내용으로 보아 18세기 초(1704년. 숙종30년)부터 20세기(1956년) 후반까지 용문사 주 지와 간부 승려의 변동사항, 사찰 내의 각종 중요사항, 시주의 명단과 시주물목, 그 밖에 국 내의 여러 가지 사건과 행사 등을 기록하고 있어서 1개 특정사찰의 사적기록물로서 뿐만 아 니라 지방에서 작성된 역사기록물로서의 사료적 가치 또한 높다고 하겠다. 또한 필사본으로서 당시의 실명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남해지역 지방사, 사찰사 연구 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15) 남해 용문사 삼장보살탱 지정번호 및 일자 : 문화재자료 제352호,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868번지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용문사 이 작품은 용문사 대웅전 반대 측 벽면에 걸려 있는 신중탱(1897년)과 동시기에 제작된 작 품이다. 이 역시 규모(세로 186.3cm, 가로 255.5cm)가 비교적 큰 편이고 19세기 삼장보살 도상 연구에 자료적 가치가 있으며, 조형성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삼장보살탱의 구성은 상하 2단으로 상단에는 세보살상과 권속들을 배치하고, 하단에는 각종 신중상들을 배치하고 있다. 먼저 상단의 경우, 중앙에 천장보살과 그 좌우에 합장형의 진주 대진주보살을 두고, 그 좌측(향우측)에는 지지보살과 용수 다라니보살이 시립하고, 우측(향좌측)에는 정형의 지장보살상 좌우에 도명과 무독귀왕이 합장하고 있다. 그리고 화

70 1256 남해군지 면 위쪽에는 천부중, 신중, 명부중 등 제권속들의 상반신만 묘사된 채 화면을 메우고 있다. 화면 하단에는 가운데 동자 2구외에 22구의 신장상이 상하 2열로 배치되어 있다. 화면 상하 단과 보살상과 권속들 간에는 각각 구름을 배치하여 도상을 구분 짓고 있다. 화면 하단은 황 토색으로 채색하여, 신중상들이 밟고 있는 지면을 표현하고 있다. 주조색은 주색 녹청 살 색이며, 부분적으로 청색과 회색을 활용하고 있다. 삼장보살의 육신부는 살색바탕에 먹선으 로 그은 뒤 다시 옅은 갈색 세선으로 윤곽을 잡고 있다. 그리고 눈썹과 콧수염, 턱수염은 짙 은 녹청색으로 채색하여 표현하였다. 이 작품은 용문사 대웅전 반대 측 벽면에 걸려있는 神 衆 幀 (1897년)과 동 시기에 제작된 작품이다. 이 역시 규모( 縱 186.3, 橫 255.5cm)가 비교적 큰 편이고, 19세기 삼장보살 도상 연구에 자료적 가치가 있으며, 조형성이 엿보여 문화재자 료로 지정하였다. 16) 남해 용문사 건양2년 신중탱 지정번호 및 일자 : 문화재자료 제353호,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868번지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용문사 본 작품은 1897년에 조성된 작품으로 19세기 신중탱화로서 규모(세로 194.5cm, 가로 213.5cm)가 비교적 큰 편이며, 작품 제작에 많은 사람이 관여하였으며, 조형성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하단 중앙에 위태천을 중심으로 12신장상을 배치하고 상단에는 범천과 제석천을 좌우측에 배치하고 있으며, 그 주위에 천녀 천동과 제권속들이 둘러싼 모습이다. 색채는 주로 백색 적색 외에 녹색과 청색을 사용하였다. 부분적으로 담묵을 사용하여 음영을 표 현하였으며, 윤곽은 먹선으로 처리하였다. 가죽표현은 담갈색을 바른 뒤 담묵으로 범피문을 표현하고 얇은 백색선과 흑색선으로 가장자리를 둘렀다. 범천 제석천상은 천부상의 착의를 하고 어깨에 각각 녹색과 청색의 천의를 걸치고 있으 며, 착의 표현에 있어 몰골법으로 문양이나 주름, 매듭을 표현하여 입체감을 주고 있다. 또한 하단부의 구슬장식 문양이나 갑옷에는 안료를 실제 구슬장식처럼 두텁게 발라 입체 감이 있게 표현하였다. 17) 남해용문사 동종 지정번호 및 일자 : 문화재자료 제377호,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868번지

71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57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용문사 남해 용문사 동종은 총고 76.5cm 규모의 종이다. 이 동종은 용문사 대웅전의 창건과 더불 어 17세기 중반에 함께 조성되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임란과 호란 이후 전국적인 불사 조영 과 함께 불전 내부공간의 의식행위를 수행하기 위해 조상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해 용문사 대웅전 내에 보관된 이 동종은 음통과 용뉴가 1개씩 있으며, 편평한 천판은 세장방형의 12개 연판으로 구성되어 있고, 종의 형태는 견부에서 종구( 鐘 口 )로 내려갈수록 넓어지고 있다. 용뉴는 입을 벌리고 있는 용의 머리와 3개의 발가락을 가진 두 발이 모두 천 판과 맞닿아 있고, 몸의 형태는 자형으로 1개의 여의주를 받치고 있으며, 꼬리 부분 은 음통을 2번 휘감고 있다. 용의 두부는 큰 눈과 날카로운 이빨, 크게 벌린 입, 뿔 표현이 생동감 넘치고 비늘 표현도 비교적 사실적이다. 음통의 구연부분은 4개의 연잎이 만개한 형 태를 하고 있으며, 그 아래쪽은 사선문으로 처리하고 있다. 상대는 돋을새김의 원권( 圓 圈 )에 범자문( 梵 字 文 )을 삽입하여 배열하였으며, 신부에는 4개의 유곽을 배치하고 유곽과 유곽사 이에는 합장형 보살입상 4구를 배치하고 있으며, 당좌는 별도로 두고 있지 않다. 유곽은 사 다리꼴 형태로 그 안에 총 9개의 볼록한 乳 와 유좌가 위치하며, 유곽대에는 연속 당초문을 나타내고 있다. 보살상은 사다리꼴의 틀 안에 돋을새김 기법으로 표현 하였는데, 두부에는 2 조의 선으로 구성된 원형 두광을 구비하고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다. 상호는 코와 입 표현이 비교적 사실적이며, 군의 위에 천의를 걸쳤으며 의습 표현이 매우 자연스럽다. 하대는 종구 에서 약 5cm 떨어진 위치에 연화당초문을 둘러 나타내고 있다. 18) 남해 용문사 청동반자 지정번호 및 일자 : 문화재자료 제378호,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868번지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용문사 원형 형태의 청동반자는 이면에 10cm 폭 가량의 가장자리를 남겨놓고 가운데가 뚫려있어 마치 징과 같은 모양이다. 반자 표면은 3조의 돌기대로 구획되어 있는데, 내구는 타격하는 부분이라 많이 마모된 상태이다. 전면 가장자리에 약 10cm의 보수흔적이 있으며, 측면에는 파손된 구멍자국이 보인다. 반자 앞면은 3조의 돌기대를 동심원권으로 둘러 내구 중구 외구로 구획되어 있다. 3조 의 돌기대는 표면에서 융기되어 뚜렷하게 도드라져 있다. 내구와 중구는 문양이 없으나, 외 구는 직경 7.4cm 크기의 범자삽입연판원문( 梵 字 揷 入 蓮 瓣 圓 文 )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5군데

72 1258 남해군지 시문되어 있다. 반자 측면도 앞면과 마찬가지로 3조의 돌기대를 둘렀고, 3개의 반원형의 귀 (고리꼭지)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설치하였는데, 고리는 따로 주조하여 붙였다. 이면은 6개 의 동심원권으로 음각되었고 그 간격이 일정하지는 않다. 제작시기는 조선 후기에 불교 공 예의 수준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 사료된다. 19) 남해 용문사 봉서루 지정번호 및 일자 : 문화재자료 제394호,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868번지 규 모 : 1동(정면 7간, 측면 4간, 팔작지붕 초익공) 부 속 물 : 2층루각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용문사 용문사는 802년(신라 애장왕3)에 원효에 의해 창건된 사찰(보광사)이나 임난에 소실되 었다. 1661년에 학진스님이 인근에 있는 보광사 건물을 옮겨와 용연 위쪽에 터를 잡았 다 하여 용문사라고 이름을 붙이고 중창하였다. 임난 이후 호국도량으로 알려져 숙종때 (1674~1720) 왕실의 축원당을 세웠고, 이후 네 번의 중수가 있었다. 봉서루에는 佛 丘 山 鳳 捿 樓 並 序 (1720년)와 靈 山 殿 天 王 閣 鳳 捿 樓 重 修 記 (1833) 등 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초창은 1720년에, 현재의 모습을 보이는 구성의 중창은 1833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용문사의 입구에서 일주문과 천왕교를 건너 천왕각을 지나면 만나게 되는 사찰 영내로 진입하는 주축상에 놓인 건물이 봉서루이다. 일주문에서 천왕각의 진입방향은 동남향의 축 이며, 봉서루 이후의 사찰배치는 남향의 축으로 놓여있어 진입축과 배치축의 전환이 이루어 지는 중요한 위치에 놓인 건물이다. 봉서루는 정면 7간, 측면 4간의 팔작지붕으로 된 중층건물로서 누하진입형식의 공간구 성을 하고 있으며, 높은 단차를 해결하기 위해 하층의 기둥을 높게 처리하였다. 이 하층의 기둥은 근년에 보수공사를 하면서 석주로 바꾸어 원래의 형상이 변경된 것으로 보인다. 다 만 하층 서측 후면의 석주 2기는 재래의 것으로 판단되는 석재로 3단으로 된 더럼형상의 기 둥을 수직으로 쌓아 구성한 특이한 형상을 이루고 있다. 하층의 공간은 전면은 비어 있으며, 후면에서는 중앙의 통로를 제외한 공간에 창고공간 을 마련하여 벽을 막았다. 상층의 바닥은 맞보형의 우물마루로 구성되어 있는 넓은 강당으 로 구성되어 있다. 벽의 구성은 전면과 측면이 바라지 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웅전을 향 한 후면은 개방되었던 것으로 파악되나, 근년에 교살창의 삼분합문을 달았다. 누의 중앙에

73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59 는 1열의 기둥열을 두었다. 지붕가구는 무고주 7량의 구조로 비교적 규모가 큰 구성을 이루었고, 천정은 연등천정으 로 네 모서리에는 선자연이 잘 구성되어 있다. 공포는 조선 후기의 초익공 형식이다. 내진주 에는 교두형의 첨자에 주두를 두었고, 종도리의 대공은 판대공으로 구성하였다. 보의 단청 은 적지 않게 변색이 되었지만 원형을 알아보기에 어렵지 않을 정도이며, 연등천정을 새로 칠하였다. 20) 남해 용문사 아미타여래 오존탱 지정번호 및 일자 : 문화재자료 제406호,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868번지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용문사 1870년 금암당 천여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부분적으로 보채한 흔적 등 훼손상태가 심하지 만 홍탱화 기법의 도상 구성이 자료적 가치가 있다. 이 작품은 아미타오존도로, 중앙에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앞쪽 좌우에 지장과 관음, 뒤쪽 좌우에 아난과 가섭이 대칭구도를 이루면서 시립해 있다. 존상들은 신체에 비해 머리가 작 은 편이며 신체비례도 좋은 편이다. 색채는 붉은색을 위주로 하여 어두운 녹청과 군청 안료 들이 사용되었으며, 사물의 윤곽과 운문 등은 황색으로 그려 장식적인 효과를 더하였다. 본존불은 2단의 나무 좌대 위 청련좌에 결가부좌하였으며, 엄지와 중지를 맞댄 양손은 오 른손은 가슴 앞으로 들고 왼손은 무릎 위에 두었다. 육신색은 황백으로 칠하고 붉은 선으로 테두리 하였는데 존상들이 모두 동일하며 아난의 얼굴은 변색되어 약간 검은 빛이 돈다. 짙은 군청으로 칠해진 본존불의 머리는 육계와 구분 이 분명하며 그 경계에는 반원형의 계주를 두고 정수리에는 원형 보주를 두었다. 넓고 둥근 얼굴에 비해 눈, 코, 입이 작고 얼굴의 중앙에 몰려 있는 느낌이다. 얼굴 표현을 좀 더 구체 적으로 보면, 눈썹은 녹청으로 짤막하게 긋고 그 아래 눈 꼬리가 살짝 올라간 눈은 상금선 만을 먹선으로 긋고 하금선은 생략하였다. 눈 꼬리 좌우는 백색을 칠하고 갈색의 동공은 테 두리하여 윤곽을 뚜렷하게 하였다. 눈썹으로부터 이어지는 코는 붉은 선으로 가늘게 긋고, 코의 양측 콧망울은 이중으로 표현 되었으며, 선홍색의 작은 입술과 녹청의 수염은 몰골법 으로 그려졌다. 본존의 두광 위에서 올라간 두 가닥의 푸른 서기는 마치 천의가 휘날리듯 양 쪽으로 퍼지면서 위로 오르고 있다. 착의법은 오른쪽 어깨에 편삼을 걸치고 그 위에 왼쪽 어깨를 덮고 오른쪽 어깨를 살짝 덮

74 1260 남해군지 어 내려오는 변형통견식으로, 짙은 녹청의 편삼자락이 오른 쪽 다리 위로 흘러내린다. 대의 는 붉은 색으로 칠하고 그 위에 황색으로 권문을 군데군데 일정하게 그려 넣어 장식하였으 며, 옷주름 선은 짙은 붉은 색으로 그렸다. 가슴아래 입은 어두운 녹청의 군의는 가장자리를 대의와 같이 초문당초로 장식하였다. 특히 이 불화에 대의나 군의의 옷주름을 이들 법의에 칠해진 색보다 짙은 동일색으로 선을 그어 표현하거나 가섭의 법의에서와 같이 선염으로 음 영을 주어 표현하였다.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시립한 존상들은 육신색이나 법의 등의 색채 처리가 동일 하다. 이들 존상 중 관음상은 머리로부터 길게 덮어 내린 천의 위에 가는 먹선으로 칠보문을 그렸는데 고려 불화와 같은 아름다움이나 얇고 부드러운 질감을 드러내기보다는 단순히 모 티브만을 계승하는 시대적인 한계를 느끼게 한다. 또한 조선후기 불화에서 일반적인 표현법으로 본존불의 대좌 고리장식이나 지장의 석장 끝장식 등 금속구 장식물은 도톰하게 하여 금분을 칠해 질감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장식성까 지 더하였다 21) 남해 용문사 동치3년 신중탱 지정번호 및 일자 : 문화재자료 제407호,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868번지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용문사 1864년 봉의, 법선 등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이 탱화는 보채 흔적이 전혀 없는 원상을 유 지하고 있으며 화기 또한 정확하게 남아있다. 작은 화면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물들을 적 절히 배치하여 안정감 있는 구도를 취하고 있다. 22) 남해 용문사 현왕탱 지정번호 및 일자 : 문화재자료 제408호,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868번지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용문사 1897년에 제작된 이 현왕탱의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고 현왕의 자세나 권속들의 역동 적인 장면은 작가의 역량을 돋보이게 한다. 이 작품은 현왕을 중심으로 11존의 권속이 원형으로 둘러 서 있으며, 권속들은 좌우대칭 구도를 이룬다. 흰 바탕 위에 담묵으로 산수를 그린 4곡병 앞에 현왕은 의자 등받이에 흰색

75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61 천이 덮인 의자를 뒤로 하고 목리문이 그려진 넓은 탁자위에 반가좌의 자세로 앉아 있다. 오 른손은 오른쪽 무릎 위에 두고 왼손은 가슴 위까지 들어 홀을 가볍게 쥐고 있는 모습으로 일 반적으로 탁자가 놓인 의자에 앉아 권속들과 망자를 심판하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현왕의 양 옆에는 관을 쓰고 공복을 입은 인물이 쟁반에 복숭아와 함을 들고 서서 그 옆으 로 등을 돌려 선 인물과 서로 이야기하듯 서 있어 인물들이 서로 유기적인 관계로 이어져 있 는 듯하며 다시 그 아래에는 산개를 든 2명의 인물이 서 있다. 현왕의 앞에 홀을 들고 등을 살짝 구부려 대륜성왕과 전륜성왕이 서 있고, 그 좌측으로 녹 사가 명부를 들고 있거나 혹은 가운데 무릎을 꿇어 망자의 죄상을 고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데 무릎 꿇은 인물은 관찰자의 시선을 집중시키면서 각자의 역할을 맡아 임무를 수행하 는 모습이 역동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인물들을 자세히 보면, 현왕의 피부색은 옅은 갈색으로, 다른 권속의 흰 피부색과 차이를 두고, 찌푸린 미간, 인중이나 턱 등에는 선염하여 음영을 주었다. 눈썹과 수염은 담묵으로 펴 바르고 검은 세선과 흰 세선을 교대로 그어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사선으로 올라간 눈, 이마로부터 뻗은 코, 몰골법으로 그린 작은 붉은 입술은 다물어 신중히 판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현왕을 표현하기에 손색이 없다. 가장자리를 검은색으로 장식한 붉은 색 관복은 바탕보다 짙은 동색의 선을 사용하여 옷주 름을 표현하고, 또한 붉은 관복 위에는 황토로 그린 원권문이 장식되었다. 권속의 의복은 주 로 붉은색과 녹청색을 번갈아 사용하여 색의 강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23) 남해 용문사 건양2년 독성탱 지정번호 및 일자 : 문화재자료 제409호,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868번지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용문사 이 독성탱은 1897년 조성된 것으로 보채 흔적과 부분적인 훼손으로 상태가 양호하지는 않 지만 부채꼴 모양의 솔잎, 붉은 해 아래 청조, 떨어지는 폭포 등은 19세기 이후 민화의 한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산수의 표현이 좋은 작품으로 판단된다. 구도는 커다란 암산을 배경으로 한 그루의 노송 앞에 독성을 배치한 구도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화면을 가득 채운 암산과 그 앞으로 노송 한 그루, 해와 새, 계곡의 물줄기 그리고 한 편엔 아름다운 꽃과 운무를 적절하게 배치하여 환상적인 심산유곡을 표현하였다. 암산에서

76 1262 남해군지 이어진 평평한 암반 위에 독성은 양다리를 옆으로 벌려 앉아서 경상 위의 책과 향로를 옆으 로 밀어둔 채 깊은 사색을 즐기며 편안하고 여유로운 모습을 그려둔 것이다. 오른 팔은 바닥을 짚어 몸을 지탱하고 왼팔은 손목에다 두 줄의 단주와 함께 손에도 다시 굵고 목리문이 그려진 단주를 쥐고 있다. 그 모습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壽 老 人 처럼 불룩 한 머리는 붉은 색을 발라 선염하고, 얼굴 및 피부색은 엷은 갈색을 펴 바르고 붉은 선으로 윤곽을 그렸으며, 이마주변, 안와선, 턱 아래 등에 부분적으로 피부색과 같은 색으로 약하게 음영을 주었다. 늘어진 흰 눈썹과 턱아래 수염은 흰색으로 그리고, 반달모양의 눈은 먹선으 로 상금선을 긋고, 하금선 눈꼬리에 끝만을 살짝 표현하였으며, 동공은 갈색을 칠하고 먹선 으로 윤곽을 그렸다. 독성은 상체를 드러낸 채 가장자리를 검은색으로 댄 붉은 가사를 몸에 두르고 있다. 붉은 가사 위에는 초문을 그린 원권문이 장식되어 있고, 가사의 옷주름은 먹선 으로 그려 넣었다. 독성 뒤의 산수는 양록으로 칠하고 먹선으로 산의 준을 표현하고 그 위에 흰태점을 올려 장식적인 효과를 더하였다. 독성의 좌측에 솟은 노송은 둥글게 아치를 이루면서 머리 위로 휘어졌고 그 노송은 갈색을 칠하고 그 위에 붉은 색을 칠하고 먹선을 한번 돌린 태점을 그려 넣어 나무의 질감을 살렸 다. 부채꼴 모양의 솔잎, 붉은 해 아래 청조와 노송 가지를 휘감은 운무, 떨어지는 폭포 등은 19세기 이후 민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며, 산수의 표현이 좋은 작품이다. 24) 남해 용문사 독성탱 지정번호 및 일자 : 문화재자료 제410호,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868번지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용문사 독성탱은 화면 가득히 독성을 배치하고 최상단의 소나무와 독성의 양측에 암석을 그려 넣 어 자연에서 수도하는 수도자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그리고 가장자리에 붉은 색을 장식한 자리위로 3/4분 정도 방향을 틀어 앉아 오른쪽 다리를 세우고 무릎 위에 오른팔을 뻗어 내 리고 왼손은 주장자를 쥐고 어깨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다. 구체적인 표현기법을 살펴보면, 피부색은 흰색이며 전체적으로 펴 바르고 붉은색으로 윤 곽선을 그었으며, 이마의 주름선이나 미간, 안와선, 턱 등은 선염하여 음영을 주었다. 담채 의 몰골법으로 그려진 흰 눈썹과 사물을 주시하는 듯한 눈은 상금선을 먹선으로 긋고, 하금 선은 먹선으로 눈꼬리의 끝만을 살짝 그어 윤곽을 그리고, 눈동자는 갈색을 칠하고 그 가장

77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63 자리와 동공은 먹선으로 마무리하였다. 꽉 다문 붉은 입술은 독성의 눈빛과 아울러 구도자 로서의 강인한 의지가 표현되기에 손색이 없다. 가슴과 배가 모두 드러나게 양 어깨에 걸친 가사자락은 전체적으로 붉은색을 펴 바르고 짙 은 붉은색으로 그어 옷주름을 표현하였다. 화면 최상단에 그려진 소나무는 부채꼴 모양으로 솔잎이 겹겹이 그려졌는데, 전체적으로 녹색을 칠하고 그 안쪽은 짙은 녹색을 칠해 바깥으로 서서히 선염해 입체감을 주었다. 또한 독성의 양측에 그려진 큐빅 모양의 바위는 바깥으로부터 청색, 백군으로 칠하고, 가운데는 본지가 드러나도록 하여 바위의 입체감을 주었다. 이 작품은 용문사에 소장되고 있는 건양2년(1897년)독성도와 마찬가지로 독성의 수도 장 면에는 민화풍 산수 배경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목구비를 섬세하게 표현하여 독성 의 정신세계를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 또한 특징이라 하겠다. 그러나 단순하게 그 려진 인체의 표현이나 인체의 비례가 맞지 않게 지나치게 표현한 볼록한 배는 이 불화가 조 성된 시대를 반영하는 듯하다. 25) 남해 용문사 산신탱 지정번호 및 일자 : 문화재자료 제411호,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868번지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용문사 구도에서 배경이 되는 자연은 중요하지 않은 듯 암산과 폭포, 하늘과 서운, 노송 등을 먼 배경으로 하여 주인공인 산신과 사자를 함께 화면 가득 도설하고 있다. 깊은 산 계곡에 비 스듬히 솟은 노송 앞에 다소 둔중해 보일만큼 큰 체구의 산신이 오른 손에 긴 지팡이를 쥐어 땅에 짚고 왼 손엔 불로초를 들고 커다란 호랑이에 몸을 기대어 우측 전방을 주시하며 앉아 있다. 복장은 흰색의 내의를 입고 그 위에 가장자리를 초문을 넣은 흰 반원문으로 장식한 단 령포를 입었으며, 가슴과 배에 의대로 묶어 내려 다소 번잡스러운 느낌을 준다. 머리카락은 빗어 올려 정수리에서 상투를 틀어 치포관을 쓰고 그 위에 작은 원문이 장식된 투명한 망건 을 썼다. 얼굴은 갈색을 펴 바르고, 이마의 굵은 주름, 턱, 인중, 안와선 등은 선염으로 음영을 주 었다. 머리카락과 수염은 담묵으로 칠하고 흰색과 검은색의 세선으로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산신이 기대고 있는 호랑이는 산신만큼 크게 그렸으며, 방울같은 큰 눈의 눈동자는 검은색 으로 그 외곽은 갈색과 녹색을 번갈아 칠하고 가장 외곽은 선홍색을 칠해 호랑이다운 눈을

78 1264 남해군지 강조하였다. 붉은색으로 칠하고 먹선으로 윤곽을 잡은 코, 입 밖으로 장난스럽게 나온 이빨 과 혀는 해학적인 분위기를 준다. 한편, 눈두덩이 위에 눈처럼 보송보송한 하얀 털이나 몸에 표현된 털은 터럭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묘사하여 호랑이와 산신의 일체된 분위기를 연출함 에 손색이 없다. 굵고 튼튼한 두 앞발을 적당하게 벌려서 힘차게 버터서서 가슴을 내밀고 얼 굴로 산신을 감싸 보호하는 듯 하며, 쭉 뻗은 허리를 따라 S자로 뻗힌 꼬리도 역동적인 힘이 넘쳐 보인다. 표범의 등 뒤엔 산신의 시자인 천재동자가 푸른 천의를 어깨 위로 나부끼며 양손으로 흰 대반에 공양물을 받쳐 들고 있다. 먼 풍경에 힘차게 떨어지는 폭포와 청명한 하늘에 떠있는 흰 구름, 마치 노송임을 나타내 듯 갈색 위에 그려진 다양한 크기의 태점과 부채꼴 모양의 솔잎 등 산수와 함께 산신과 호랑 이의 능력이 표현되기에 충분하다. 26) 남해 용문사 영정 일괄 지정번호 및 일자 : 문화재자료 제412호,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868번지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용문사 (1) 남해 용문사 영해당 영정 이 영정은 화기에서 1891년 조성되었음이 확실할 뿐아니라 영해당 기흥선사는 19세기 후 반에 용문사 화엄강주로서 활동한 업적을 남기고 있는 선사이다. (2) 남해용문사 백월당 영정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와서 삼화상 영정을 위시하여 칠화상, 팔화상 영정 등을 거의 같 은 시기에 조성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면 바탕에 족자형으로 재질과 색체, 표현기법 등으로 볼 때 문화재 자료로 보호 받음이 마땅하다. (3) 남해용문사 삼화상 영정 삼화상 영정은 면 바탕 한 폭에 지공, 나옹, 무학 삼대화상을 묘사하였다. 대부분 전통사 찰에는 이 삼화상 영정을 거의 빠짐없이 봉안하고 있는데 용문사 삼화상 영정은 각 폭이 아 닌 한 폭에 삼화상을 열거 묘사한 것이 이색적이다.

79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65 (4) 남해용문사 팔화상 영정 팔화상 영정은 약간의 음영을 가한 안면부 표현과 깊은 주름의 의복 표현 등 전통적인 초 상화법을 다르고 있으나 얼굴이나 의습선에 강한 음영법을 사용한 점이나 여러 영정을 한 폭 에 그리는 영정형식 등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양식을 잘 반영해 준다고 할 수 있다. 화면을 상하로 이분한 뒤 상단에는 향우측부터 청진당, 청하당, 청운당, 락서당을, 하단에는 향우측부터 봉성당, 우진당, 용암당, 은암당을 그린 후 오른쪽 위에 각각 명칭을 기입하였 다. 이들은 생략된 배경을 뒤로 무늬 없는 돗자리위에 좌안7분면의 결가부좌상으로 염주나 주장자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8명의 스님 가운데 행적이 확인되는 분은 별로 없지만 그 중 낙서당은 삼천포 운흥사 낙서암에 주석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시도유형문화재 제425호로 지정된 용문사 소재 부도군 9기 가운데 팔화상 중 청하당과 은암당의 부도가 포 함되어 있다. (5) 남해용문사 칠화상 영정 이 찰화상 영정은 상단의 향 우측부터 화영당, 인한당, 해경당을 하단에는 향 우측부터 세 렴당, 나월당, 효월당, 송곡당 이렇게 7인의 조사를 한 폭에 묘사하였다. 여러 명의 조사를 한 폭 바탕 상단에 3화상, 하단에 4화상을 각각 열좌한 도상 구성은 특이하다. 조성 기록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재질이나 표현기법의 흐름으로 보아 19세기말 20세기 초에 조성한 것으 로 추정된다. (6) 남해용문사 경암당 영정 경암당 영정은 가사 장삼의 양식과 배경의 푸른 색채 사용은 물론, 화면의 향 좌측 상단에 별도의 난을 구획하여 영정의 명호와 영찬을 기재한 수법 등은 19세기 이후에 나타나는 현 상이며, 이 영정 또한 19세기 후반 작품으로 판단된다. 화면중앙에 위치한 경암당은 좌안7 분면으로 왼손에는 주장자를, 오른손에는 염주를 쥐고 결가부좌하고 있다. 27) 남해 운대암 제석신중탱 지정번호 및 일자 : 문화재자료 제416호, 소 재 지 : 남해군 창선면 옥천리 1042번지 규 모 : 1점 (전체 124.5X80cm 화면 112X75cm)

80 1266 남해군지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후기(1801년), 운대암 이 신중탱은 비단 바탕에 채색한 것으로 순조 1년(1801) 화원 백인태영( 百 人 泰 榮 ), 금현 ( 錦 現 ), 서주( 瑞 珠 ), 성수( 性 守 ), 홍태( 洪 泰 ) 등에 의해 조성된 것이다. 화면은 이분하여 위쪽 에는 제석이 천자와 천녀 그리고 동자를 거느리고 있는 모습을, 아래에는 위태왕( 位 太 王. 童 眞 菩 薩 )과 팔부신장( 八 部 神 將 ) 중 3위 등이 우측을 향하도록 그려진 간략한 구도이다. 전체 적으로 녹색과 적색이 주를 이루고 있으나 검게 그을려 있어 원래의 색조보다는 많이 퇴색 되어 있다. 그리고 제석과 위태천, 천녀의 의십 일부분에는 두껍게 금박을 입혀 격을 높이고 있다. 하단의 화기에 의하면 이 신중탱은 순조 1년(1801)에 조성되어 진주 남령 대방산 구암에 봉안된 것인데 위의 근거대로 사찰의 창건 연대를 1870년으로 보았을 때 그 보다 이른 작품 이라 하겠다. 3점의 불화 가운데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것은 신중탱으로 18세기 불화의 전 통을 충실히 이은 19세기 초의 우수한 불화이다. 그리고 아미타 오존홍탱과 지장시왕탱은 19세기 화승으로 이름 높았던 금암당 천여( 錦 庵 堂 天 如 )가 증명과 금어로서 말년에 조성한 작품으로 의겸화파( 義 謙 畵 派 )의 화풍과 19세기 불화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우수한 불화 이다. 이 신중탱은 전체적으로 본지의 박락과 안료의 변색으로 인해 화면이 칙칙하고 어두운 상 태이며, 군데군데 곰팡이가 피어 있고 또한 화면 하단의 화기란 일부도 손실된 상태이다. 이 신중탱은 기존의 제석천도와는 달리 입상형의 동세를 지닌 모습으로, 이 같은 행렬상의 제 석천은 중국 명대벽화에서 확인되어 이후 우리나라에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조선시 대 신중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28) 남해 운대암 지장시왕탱 지정번호 및 일자 : 문화재자료 제417호, 소 재 지 : 남해군 창선면 옥천리 1042번지 규 모 : 1점(전체높이 102cm 폭 132cm, 그림높이 95cm 폭 124cm)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운대암 지장시왕탱은 불단 위에 흰 연화좌에 결가부좌하고 있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 명존자, 무독귀왕, 그리고 각각 5위의 시왕과 판관, 사자, 동자, 동녀들이 좌우대칭으로 정 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중앙의 지장보살은 깍은 머리에 흑갑사로 된 투명한 두건을 쓰고 오 른손에는 보주를 들었으며, 길다란 석장은 왼쪽 어깨에 걸쳐두고 있다. 의습은 통견형식으

81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67 로 그 위에 귀걸이, 팔찌 등 장신구를 장식하였다. 광배는 녹색의 두광과 갈색의 신광을 따 로 마련하였다. 지장보살의 무릎 좌우에는 도명존자( 道 明 尊 者 )와 무독귀왕( 無 毒 鬼 王 )이 있 고 그 주변에 각 5위씩 명부시왕이 배치되어 있는데 모두 관을 쓰고 홀을 들고 있다. 그 위 에는 역시 좌우에 판관, 사자, 동자, 동녀 등이 배열되어 있다. 하단 중앙의 화기를 보면 조선 고종 15년(1874)에 남화치관( 南 畵 致 寬 )과 금암천여( 錦 岩 天 如 )가 증명( 證 明 )과 천여( 天 如 )의 지도아래 아미타후불탱과 칠성탱, 신중탱 등을 조성하기도 했다. 금암천여는 1878년 78세로 입적했는데 이들 불화는 천여의 마지막 작품들이라고 볼 수 있다. 29) 남해 운대암 아미타후불탱 지정번호 및 일자 : 문화재자료 제418호, 소 재 지 : 남해군 창선면 옥천리 1042번지 규 모 : 1점(전체높이 101.5cm 폭 144cm, 그림높이 101.5cm 폭 137cm)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운대암 아미타후불탱은 붉은색 바탕에 그려진 것이다. 화면은 아미타불을 가운데로 하고 좌우에 관음, 대세지, 가섭존자, 아난존자가 협시하고 있는 간략한 구도이다. 중앙의 아미타불은 녹색의 두광과 황색의 원형 신광을 뒤로하고 연화좌에 앉아 선정인을 하고 있으며, 높은 육계와 삼도가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가슴을 보면 축 쳐진 가슴살과 유 두가 표현되어 있어 회화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의습은 통견의로서 적색과 녹색, 군청 색이 배색되어 있으며, 법의의 가장자리에는 꽃문양이 시문되어 있다. 우측의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정병과 경책을 각각 들고 있으며, 가섭과 아난존자는 구름에 하반신이 가려진 모습으로 합창한 체 시립하고 있다. 전체적인 화면 배색은 홍지( 紅 地 )에 선전( 線 措 )와 채색( 彩 色 )으로 도상을 나타냈으며, 여 백이 있는 공간에는 모두 황선으로 서운( 瑞 雲 )을 표현했다. 이 불화는 상하 부분이 오랫동안 뒤쪽으로 꺾여있어 화기 부분은 마멸이 되고 말았는데 이로 인해 조성 연대와 화원을 확인할 수가 없다. 그러나 아난존자의 상호 표현에서 1887년 조성된 운대암 지장시왕탱의 지장보 살과 유사성을 찾을 수 있어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이 된다. 6. 등록문화재

82 1268 남해군지 1) 남해 덕신리 하천재 지정번호 및 일자 : 등록번호 제234호, 소 재 지 : 남해군 설천면 덕신리 958번지 규 모 : 4동(1층)- 하천재(정5 측3), 옥산문(3칸대문), 경모헌(정4 측3), 세심헌(정3 측2)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밀양박씨 하천공 종중 조선왕조 13대왕 명종대왕(1544~1567) 재임시 1566년 퇴계 이황 선생의 뒤를 이어 양 관 대제학을 지낸 낙촌공 박충원( 朴 忠 元. 밀양박씨 규정공파 11세)의 14세손인 하천공( 荷 泉 公 ) 박병집( 朴 炳 執. 규정공 24세)선생은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가 와병 중에 분뇨를 맛보아 시병한 효자로 소문이 나 있다. 그의 아들 민암( 晩 巖 ) 박채규( 朴 彩 珪. 규정공 25세) 역시 효 성이 지극하여 선고의 유적을 추모하여 지리산 홍송을 뗏목으로 띄워 섬진강을 내려와서 바 다를 건너 선영하에 전통 한옥으로 건립하였는데 사묘 재실로서 광무중원갑자무인년(1938) 3월 20일이다. 이 전통 한옥에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사당으로 쓰이고 있다. 그 후 1953년 4월 만암공의 아들 아인( 亞 人 ) 박종한( 朴 鐘 漢 )은 국가 인재 양성을 위해 전 유산을 진주 학교법인 하천학원 대아 중 고등학교 설립에 기증하여 오민교육( 五 民 敎 育 )을 건학이념으로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웠으며 학생들에게 애국정신을 가르치기 위해 충무공 행 군대회, 창열사 참배, 모현단 건립, 남명제를 창설하였고 한국 최초로 제자들에게 인성교육 을 위한 다도 교육의 성과로 1984년 서울대학교 68명의 전국 최다 합격자를 배출한 인성교 육의 산실이 되었다. 대아중고등학교 설립자인 아인 박종한 선생은 1978년 8월 오행다도를 통해 전 국민이 영 성( 靈 性 ), 신성( 身 性 ), 족성( 族 性 ), 개성( 個 性 ), 식성( 識 性 )의 5성( 五 性 )을 깨치게 함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민족성을 만들기 위해 전 국민의 인성교육의 필요성을 느껴 이 곳 하천재에서 최범술, 박동선, 김미희 등의 다인들과 사단법인 한국차인회(현 172개 단위 차 회를 가진 한국차인협회 전신)를 발족한 역사적인 현장이다. 지금은 하천공의 손자이며 만암 선생의 아들인 아인 박종한 선생은 이곳을 하천다숙( 荷 泉 茶 塾 )으로 사용하고 있다. 한국의 전통적인 다도 수련 교육장인 하천 다숙을 국제적인 명선 도장으로 꾸며 국내외 청소년은 물론 예비신혼부부와 일반인들에게 오성다도를 즐길 수 있 도록 하고 있다. 7. 군보호문화재

83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 무민사 지정번호 및 일자 : 남해군보호문화재 제1호 소 재 지 : 남해군 미조면 미조리 539ㅡ3번지 규 모 : 사당-팔작목조와가(정면3칸, 측면2칸) 부 속 물 : 내삼문, 외삼문, 관리사, 부속관리실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무민사보존회 무민사는 최영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최영장군은 고려 명신인 최유청( 崔 惟 淸 )의 5대손으 로 충숙왕 4년(1317)에 출생하였다. 1358년에 양광전라도왜구체복사가 되어 서해안과 남해 안에 침입하는 왜구들을 격파하는데 큰 전과를 올렸고, 1380년에는 해수도통( 海 帥 都 統 )이 되어 삼남지방을 순찰하면서 독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1388년에 문하시중이 되어 왕과 밀의하여 원( 元 )을 도와 요동을 정벌하기로 결성한 후 팔도도통사가 되고 이성계는 우군도통 사, 조민수는 좌군도통사로 삼아 군사 3만으로 원정을 떠나게 되었는데 이성계가 돌연 회군 하여 왕을 폐위시키고 최영을 12월에 피살시켰다. 무민사는 언제 세워졌는지 알 수는 없으나 전설에 의하면 조선 중엽 때 미조진항 첨사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 나이가 많은 노인이 나타나서 최영 장군의 영정과 칼이 바 닷가에 있으니 찾아서 잘 모셔 놓아라 하기에 첨사는 꿈에서 깨어나 이상하게 여겨 수문장 인 봉장군에게 꿈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찾아오라고 하였다. 봉장군은 급히 바닷가에 가보니 나무로 만든 궤짝이 놓여 있어 뚜껑을 열어보니 최영 장군의 영정과 칼이 들어 있어 이것을 첨사에게 갖다 주었다. 첨사는 이것을 짚으로 싸서 모셔 놓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화재가 일 어나자 영정은 날아서 지금의 장군당 자리에 놓여 지므로 첨사는 이곳에 조그마한 사당을 지 은 것이 무민사이다. 현재 건립되어 있는 사우는 1960년 9월 9일에 중건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에도 매년 음력 3월 13일에 제향하고 있다. 2) 자암 김선생 적려 유허 추모비 지정번호 및 일자 : 남해군보호문화재 제2호 소 재 지 :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376번지 규 모 : 비석 높이542m, 폭136cm, 두께90cm, 비신 높이192m, 폭91cm, 두께34cm, 비대 높이27m, 폭130cm, 두께72cm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남해군 자암 김구(1488~1534)는 조선 중종 때 문신이며 조선4대 서예가의 한사람으로서 대흥 현감 계문의 아들이다. 김구는 성종 19년(1488)에 광주에서 태어났으며 자( 字 )는 대유( 大

84 1270 남해군지 柔 ), 호( 號 )는 자암( 自 菴 )이다. 자암은 연산군 9년(1503)에 한성시에 급제하였고 중종 8년 (1513)에 별시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부제학에 올랐으나 기묘사화로 인하여 중종14 년(1519)에 개령으로 유배되었다가 수개월 후 죄목이 추가되어 남해로 이배되어 13년이란 긴 세월동안 남해 노량 적소에서 적거생활을 하였다. 이때 남해찬가라 할 수 있는 화전별곡 을 경기체가로 지었고 삼남 일대의 유림과 남해지역의 향사들과 가까운 교우관계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특히 가깝게 지낸 남해 향사의 인명도 자암집에 나온다. 하별시( 河 別 侍 ), 박교수( 朴 敎 授 ), 강론( 姜 論 ), 방훈( 方 勳 ), 정기( 鄭 機 ), 하세연( 河 世 涓 ), 한 원( 漢 元 ), 정소( 鄭 韶 ), 강윤원( 姜 允 元 ), 정희철( 鄭 希 哲 ) 등 당시 남해에 거주한 실제 인물이 화전별곡에 나온다. 자암 김구는 중종 28년(1533)에 사면되어 복관( 復 官 )되었으나 이듬해인 1534년에 47세의 일기로 타계( 他 界 ) 했으며,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자암 유허비는 숙종 30년(1704)에 김구의 6대 후손 김만화( 金 萬 和 )가 남해 현령으로 부임하여 조상의 흔적을 찾 아 옛터에 유허비를 세우고 서원자리에 죽림서원을 세워 조상의 얼을 받들기 위해 위패를 봉 안하고 배향 하였으나 죽림서원은 고종원년(1864)에 대원군의 서당, 향사철폐령에 의거 훼 철되었다. 3) 봉천사 묘정비 지정번호 및 일자 : 남해군보호문화재 제3호 소 재 지 : 남해군 남해읍 북변동 430번지 규 모 : 봉천사묘정비(높이 260cm, 폭 83cm, 두께 32.5cm)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남해군 숙종조의 건저사대신의 한 사람인 이이명( 李 頤 命 )선생은 효종 9년(1658)에 출생하였다. 본관은 전주, 자는 지인( 智 仁 ) 또는 양숙( 養 淑 ), 호는 소제( 疎 齊 ), 시호는 충문공( 忠 文 公 ) 이다. 숙종 6년(1682)에 23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숙종 15년에 강원감사에서 승지 에 까지 임명되었으나 이 해에 기사환국으로 영해로 유배되었다가 숙종 18년(1692)에 남해 로 이배되었다. 1694년에 갑술옥사로 남인이 실각되자 사면되었다. 1706년에 비변사도로 있으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국방전략도인 요계관방도( 療 薊 關 防 圖 )를 완성하였다. 경종원년 (1721)에 경종이 병약하여 왕세제인 영조의 대리청정을 추진하다가 소론파의 반대로 실패하 게 되자 소위 건저사대신(이건명, 조태채, 이이명)이 함께 유배되었는데 이이명은 남해로 안 치되었다. 유배된 이이명은 29년 전에 유배 왔던 집을 수리하여 향사들에게 효제충신( 孝 悌 忠 信 )의 학문을 가르쳤다. 일설에 의하면 이이명이 역모를 꾸며 남해에서 왕으로 추대 되었

85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71 다는 목호룡( 睦 虎 龍 )의 모함으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던 중 1722년 한강진에서 사사 되었다. 이 사실을 안 남해 향사들은 어버이를 잃은 듯 슬퍼하여 사당을 지어 한양 노량진 사충당에 봉안하였던 영정을 가져와 모시고 봉천사라 하였다. 묘정비는 숭정기원사년 무자 오월( 崇 禎 紀 元 四 年 戊 子 五 月 )에 건립하였다고 비문에 기록되어 있으나, 1648년은 태어나기 전이기 때문에 정확한 연대를 조사하여야 할 필요성이 있다. 글은 김난순( 金 蘭 淳 )이 썼다. 이에 묘정비의 정확한 건립년도를 알고자 한다. 이이명이 태어난 년도가 효종 9년(1658) 인데 입석년도가 인종26년(1648. 숭정기원4무자오월)으로 이이명이 태어나기 10년 전이되 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록이 잘 못된 것으로 보고 비문을 지은 김조순( 金 祖 淳 )과 비문을 쓴 김난순( 金 蘭 淳 )에 대하여 알아보고 입석년도를 추정해 보겠다. 김조순( 金 祖 淳 [영조41-순조32])의 초명은 낙순( 洛 淳 ), 자는 사원( 士 源 ), 호 는 풍고( 楓 皐 ), 본관은 안동( 安 東 )으로 정조 9년(1785)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제학에 이르렀다. 순조 2년(1802)에 딸이 순조의 비( 純 元 王 后 )로 봉해지자 영돈녕부사가 되고 영안 부원군에 봉해졌다. 어린 순조를 30년간 보좌했다. 성격은 지나치게 너그러웠고 문장에 능 하고 그림도 잘 그려 죽화( 竹 畵 )에 뛰어났다. 김난순( 金 蘭 淳 [정조5-철종2])의 자는 사의, 호는 벽곡( 碧 谷 ), 본관은 안동 ( 安 東 )으로 순조 13년(1813)에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검열, 이조참의, 황해도감사, 대사헌, 우참찬 등을 거쳐 헌종 7년(1841)에 이조판서에 올랐다. 그 뒤 우참찬, 형조판서, 예조판서를 거쳐 현종14년(1848)에 판돈녕으로 기로소( 耆 老 所 )에 들어갔다. 문장과 글씨가 뛰어났다. 여기에서 김조순 그리고 김난순과 중복되는 연도는 정조 5년(1781)부터 순조 32 년(1832)까지 51년이지만, 김조순이 영돈녕부사가 되고 영안부원군이 된 순조 2년(1802) 부터 세상을 떠난 순조 32년(1832) 사이는 31년이다. 그렇다면 31년 사이 묘정비에 기록된 무자년을 근거로 삼는다면 순조 28년(1828)이 된다. 묘정비가 설립될 당시에 김조순(64세) 과 김난영(47세)은 관직에 머무르고 있을 때이고 이이명이 사사된지 106년이 되는 해이다. 앞에서 분석한 자료를 참작할 경우 1828년에 봉천사와 묘정비가 건립되었다고 추정한다. 원래 이 비( 碑 )가 봉천사 묘정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사당은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고 비만 현 위치에 입석되어 있다. 4) 영모문 지정번호 및 일자 : 남해군보호문화재 제4호 소 재 지 : 남해군 남해읍 서변리 144

86 1272 남해군지 규 모 : 팔작와가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김재동 영 모 문 은 효 자 김 백 렬 의 효 행 을 남 기 기 위 한 정 려 문 이 다. 효 자 김 백 렬 ( 金 栢 烈.1873~1917)의 호는 운천( 雲 川 )이요 가락인 탁영( 濯 纓 )의 후손이다. 통정대부인 휘( 諱 ) 원주( 元 柱 ) 호 수암( 壽 巖 )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글 읽기를 좋아하였 다. 평소에 성훈을 받들어 스스로 실천함에 있어 한 치의 소홀함도 없었고 지극한 정성으로 부모를 섬김에 만고의 효자로 칭송이 자자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황철( 黃 鐵 )이 그 소문을 듣 고 그 실정을 알고자 1909년에 이곳을 방문하여 비단에 금난선배효자 김백렬씨 라고 자필로 써서 표창하였고 우리 고을 유림에서는 특별 장의로 천거하여 후세에 본을 보게 표창 하였으며 십여 차례 효행 표창 등으로 세상에 널리 알리 졌다. 이 정려( 旌 閭 )는 그의 효행을 오래도록 기리기 위하여 1925년 9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그 이듬해 10월에 준공하였다. 그 이후로는 영모문이 있는 거리를 효자문 삼거리로 불리어져 오고 있으며 그의 효행이 많은 사 람들의 가슴마다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5) 국사봉 사당 지정번호 및 일자 : 남해군보호문화재 제5호 소 재 지 : 남해군 창선면 적량리 산4-1 규 모 : 사당-목조단간와가 정면 2.7m, 측면 2.5m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마을이장 적량 마을 뒤 북쪽 해발 212m의 국사봉 상봉에 목조로 된 단간 와가 건물이 2평 정도로 자리 잡고 있다. 이 사당은 적량 첨사가 건립하여 음력 12월 말일에 국가의 번창과 국왕의 평안을 비는 예를 올렸던 곳이며, 북방 예배 시 사용하는 기물을 보관하였던 곳으로 조선 중 종 30년(1535년)에 건립된 창고였으나 속칭 사당이라고도 한다. 첨사가 없어지면서 적량마 을 동민들이 제사례를 국사봉 사당에서 지냈다. 이곳은 동리의 평안을 빌고 수호해 주는 수 호신을 모시는 곳으로 변모하였다. 섣달 금음날 12시(자시)에 마을에서는 전례에 따라 선출 된 제관들이 제사를 올리고 오랜 세월동안 마을을 지켜 주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정성을 다하여 동제를 모셔오는 곳이다. 8. 비지정문화재

87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 성지 (1) 관당성 소 재 지 : 남해군 고현면 오곡리 관당 규 모 : 평지성. 둘레 216m, 높이 2.7m 시대 및 관리자 : 고려시대, 토지소유자 관당성은 전야산군의 소재지였던 성산성 외곽성으로 대국산성의 아래에 위치하여 있고 그 지역을 에롤 또는 안타골이라 부르며 면창( 面 倉 )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중종25년.1530)에 의하면 현의 북쪽17리 지점. 석축이며, 둘레는 720자이고 높이는 9자이다. 그리고 남해현읍지(순조32년.1832)에 폐성되었다 라 기록하 고 있다. 정확히 언제 축성되었으며 언제 폐성 되었는지 그리고 용도는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다.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에서 추정 고려국분사남해대장도감유지 발굴조사를 위해 관 당 성지를 발굴한 결과 추정 담장 기저부와 건물지 3기, 적심( 積 芯 ) 1기, 폐기장( 廢 棄 場 ) 2 기, 매납유기( 埋 納 遺 構 ) 1기가 나타났으며, 자기, 기와 등이 다수 채집되었으며, 발굴 과정 에서 관( 官 ) 명와( 銘 瓦 )가 출토되어 관사 혹은 관청 등의 공용 건물임을 확인할 수 있었 다. 또한 도연, 지석 등이 발굴되어 고려대장경 조성과 관련되는 곳일 가능성을 높게 한다고 판단하고 있다. (2) 성산성 소 재 지 : 남해군 고현면 도마리 성산 규 모 : 포곡식 평지석성. 둘레 1500m, 높이 3~4m 부 속 물 : 숯가마터,시장터,연못지,대장간지,고려장터,성안집,새정 시대 및 관리자 : 고려시대, 토지소유자 성산성은 고현면 도마리 성산에 있는 해발 82.4m의 구릉지이며 북쪽 대국산에서 길게 남 주 하는 능선 해발 40m의 낮은 구릉과 연결 된다. 이 구릉의 정상부는 토성과 석성이 중복 되어 있으며 성산 석성은 해발 76.8m의 정상부와 북쪽의 골짜기를 에워싼 포곡식으로 축조 되어 있고 길이는 약 1500m정도 된다. 남쪽은 해발 65m의 등고선을 따라 길게 축조되어 있고 나머지 부분은 해발 50m 이하까지 석축 되어있다. 문지는 서쪽 토성과 접한 곳으로 추 정하고 있으며 석성의 석재는 두께 30cm내외의 장대석을 이용하여 석축면 보다 10~15cm

88 1274 남해군지 외부로 튀어 나오도록 기단부를 쌓은 다음 길이 150cm, 높이 100cm내외 크기의 방형 또는 장방형 석재를 이용하여 막쌓기 수법으로 비교적 정교하게 쌓아 올린 것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잔존부는 3~4단 정도이고 높이 1.5~2m이다. 성산성에서 채집되는 유물로는 청동기시대의 와편, 토기편 등이 채집되는 것을 보아 신라 시대 전야산군이 설치 될 때 현의 소재지였다고 볼 수 있으며, 석성의 축성 연대는 정이오 ( 鄭 以 吾 1354~1434)의 성문기에 태종 4년(1404년)에 이웃 고을 하동, 사천, 영주, 고성, 진해 다섯 고을 사람을 부려 고현 외딴섬 한복판에 성을 쌓고 돌을 포개어 견고하게 해자를 파서 못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때 축성된 것으로 보아진다. 현재에는 돌 도끼, 토기편, 와편, 소토덩이, 소 뿔 달린 항아리 토기 등 선사시대 유물이 채집되어 지고 있어 현 남해읍성의 축성시인 세조5년(1459년)이전 현의 소재였음을 알 수 있다. (3) 성산토성 소 재 지 : 남해군 고현면 도마리 성산 규 모 : 토성, 길이 약 100m, 넓이 약 3m 높이 1.8~2m 부 속 물 : 성산석성 시대 및 관리자 : 삼국시대, 토지소유자 성산석성과 동일한 위치에 있으며 성산석성이 축성(태종4년.1404)되기 이전 신라 신문왕 10년(690)에 남해군이 전야산군으로 설치되었고 이곳이 군의 소재지였음은 이곳에서 채집 되는 각종 유물과 인근에 있는 패총 및 고인돌이 산재해 있기 때문에 추정 할 수 있다. 관음포만과 강진만이 맞닿아 있어 해산물이 풍부했기 때문에 이곳에서 집단적으로 거주하 였음을 증명할 수 있다. 이곳 토성은 성토법(흙을 부어 돋움)을 이용하였고 숯과 돌이 함께 사용되었고 토성의 견고함과 배수 시설이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토성은 구릉의 최 정상 부를 에워싼 테뫼식으로 해발 75m의 남쪽에서 능선을 따라 동쪽의 석성 앞까지 100m정도 성토법에 의한 토루의 축조가 계속되어 있다. 토루의 넓이는 3m정도, 높이는 1.8~2m정도 로 추정되며 축조 방법은 황토색, 황갈색 점토층인 생토층 위에 30~50cm의 회갈색 사질점 토 위에 약5cm의 숯이 포함된 명갈색 사질 점토층이 50cm 퇴적되어 있고 그 위에 50cm내 외의 천석이 1~2단으로 채워져 있다. 이 퇴적층에서 삼국시대의 토기편과 단선문의 평와편 이 대량으로 채집되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삼국시대 이전에 토성이 축성된 것으로 보 아진다.

89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75 (4) 노량진성 소 재 지 :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산54번지 규 모 : 성곽 둘레 약 1.5km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토지소유자 노량진성은 노량 마을 앞 산성산 (일명,앞산) 구릉에 위치하고 있으며, 축성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노량진성 앞쪽에는 덕신역, 관 원이 남해를 방문할 때 사용할 말과 가마등을 관리 하던 곳과 노량원(숙소)이 위치하고 있었 고 남해로 들어오는 첫 관문이다. 앞으로는 노량해협이 있고 부산, 마산, 사천에서 광양, 여수방향으로 가려면 이곳을 통과 해야하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요충지로서 산성이 축성되어 감시 및 망대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석축은 자연석을 이용한 석상이다. 현재에는 거의 붕괴, 멸실되었으며 석성의 둘레 는 1.5km이고 정상부에는 건물지와 주초석이 잔존하고 있다. (5) 비란성 소 재 지 : 남해군 설천면 비란리 정태마을 규 모 : 평지성. 마을전체 2/3이상 돌담으로 형성되어 있음.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건물소유자 비란성은 전야산군의 소재지인 성산성과 맞닿아 있으며 외곽성인 대국산성 아래에 위치하 고 있는 평지성이다. 문헌상으로는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다만 구전 상으로 비란성으로 전 해내려 오고 있다. 현재에는 비란리 정태 마을의 2/3이상이 자연석(20~30cm)으로 높이 2m정도의 돌담을 이루고 있다. 전반적으로 볼 때 군사적으로 축성된 성곽이 아니고 당시 군 의 관청이었던 성산성과 관당성이 있었고 왜구의 감시와 경계를 한 대국산성이 있지만 왜구 의 잦은 침입으로 백성도 평상시 안전한 생활을 하기에 불안하여 평민들이 마음 놓고 거주할 수 있도록 평지성을 축조하여 그곳에서 살도록 하였을 것이다. 평온할 때에는 전답에서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도록 하였지만, 위급한 상황에 처하면 대 국산성으로 피해 군과 민이 합동하여 왜적을 무찌르다가 다시 평온하면 비란성으로 내려와 거주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수습되는 유물은 없고 간혹 조선시대의 와편이 채집된다. (6) 남해읍성

90 1276 남해군지 소 재 지 : 남해군 남해읍 서변리 24-1 규 모 : 평지성. 둘레 863m, 높이 4m 부 속 물 : 여첩177m. 우물 1개, 샘 5개, 옹성 18개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남해군 남해읍성은 세종 19년(1437)에 읍을 설치하고 세조 5년(1459)에 읍성을 축성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남해읍지에 의하면 석축 둘레는 2.876자(863m)이고 높이가13자 (4m), 치첩이 590자(195m)로 기록하고 있으며, 임진왜란을 당하여 일본군에게 파괴되었 으나 정란 후 고치어 쌓아 지금에 이른다. 160여 년 동안 성의 여러 곳이 무너지고 여장 역 시 모두 못쓰게 허물어져서 영조 33년(1757) 9월에 현령 조세술( 趙 世 述 )이 백성을 모집하여 고쳐 쌓아 완고하기가 새것 같고 문이 남 북에 있고 성내에 우물이 하나, 샘이 5개였으며 못이 하나 있다 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에는 남해읍을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전체 둘 레 약 1.3km로서 사방이 325m내외의 정방형에 가까운 석성이다. 그러나 거의 훼손되고 잔 존하는 부분은 남해군청 서쪽의 민가와 담장을 이루는 구간에 석성 110m, 남문 좌. 우측에 90m 등만 남아있다. 잔존한 성벽 중 양호한 부분은 높이 4m, 폭 3.2m로서 내탁부는 석축 이 2단으로 나타나 있으며 경사를 이루고 있는데 당초에는 흙으로 덮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 다. 기단부는 성벽에서 30~33cm 튀어나와 있으며 축성 방법은 장대석(길이 70~100cm. 두 께25~30cm)을 겹쌓기 수법으로 쌓았고 큰 돌 사이에는 잔돌을 끼워 쌓았다. 현재에는 우 물 3개소와 남문지 옆 성위에 나지막하게 쌓은 담 1개소만 남아 있다. (7) 선소 왜성 소 재 지 : 남해군 남해읍 선소리 번지 규 모 : 천수각(중앙 지휘본부) 석축(일본성곽 축성법) 부 속 물 : 일지루(1차), 이지루(2차), 삼지루(3차 방어석축))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선소이장 임진 정유재란은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2년 임진년에 명나라를 정벌하려는 야망 과 1597년 정유년에 한반도 이남을 일본 영토로 만들려는 야심으로 조선을 침략한 7년 전쟁 으로 노량해전은 최후 최대 전투이다. 1597년 도요토미가 2차 침입을 위하여 명령을 내리 고 먼저 가토, 고니시 등을 장수로 하여 14,500명의 군사를 선봉대로 1월 15일에 조선을 침 략시키고 3월 중순까지 총병력 141,500명을 남해안에 침략 시켰다. 10월에 북상한 일본군 은 겨울을 대비한다는 이유로 수만의 군졸을 울산에서 순천에 이르기까지 남해안 800리에

91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77 성을 축성하고 분둔 하였는데 남해에는 선소리 윤산( 輪 山 ) 천남대( 天 南 臺 )에 왜장 와키자카 야스지 쇼오 요시토시가 1597년 11월에 왜성을 축성하고 1,000여명의 군졸을 거느리고 주 둔하였다. 1598년 8월 18일에 도요토미가 병으로 죽으면서 조선을 침략한 왜군을 철군하라는 유언 에 따라 남해안에 주둔하였던 일본군의 철수가 시작되었고 이때 왜성지에 주둔하였던 왜군 들도 철군하였다. 현재에는 천수각이 있었던 중앙지를 제외하고는 밭으로 개간되어 있으며, 성곽들은 일지루에서 삼지루까지 기반부가 남아 있다. 성지의 규모는 사천왜성보다 크고 순 천 왜성과 비슷하다. (8) 옥기산성 소 재 지 : 남해군 서면 대정리 382 규 모 : 산정식산성. 둘레 약300m, 높이 2~3m 폭 1.5m 부 속 물 : 할석석축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남해군 옥기산성은 해발 252m에 위치한 옥기산 9부 능선에 자연석(20cmx25cm) 직선형 석축 방 법으로 축성되어 있으며, 정상봉을 중심으로 급경사를 이룬 혁봉의 지형으로서 산성까지 진 입할 수 있는 길은 금곡 마을과 자작촌에서 골짜기를 이용하여 진입 할 수 있고 장항에서는 능선을 이용하여 진입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나 매우 가파르다. 옥기 산성은 임진왜란시 왜 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조선 선조 때 주민의 힘으로 성을 쌓아 왜적의 침입을 막았다고 전하 며, 타원형의 석성으로 둘레 약 1000자, 높이 7~10자, 폭 5자로서 북쪽 일부는 붕괴 되었 고 남문지만 양호하게 남아 있다. 산성 중앙에서 보아 남쪽의 성곽은 길이 60여m, 높이 2m로 자연석 석축을 쌓고 석축 내 흙과 잡석으로 채워 토루(110cm)를 만들었고 동 서 북쪽은 겹 석축으로 높이 150cm 두 께 90cm로 낮게 쌓은 퇴뫼식 산성이다. 문지(160cmx110cm)는 남쪽 중앙에 있으며 동쪽 에서 서쪽의 길이는 60m. 문지에서 우측 남 북의 길이는 10m. 좌측 남북의 길이는 30m 로서 타원형으로 석축 되어있다. 산성내외에 유물이 채집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왜적의 침 입을 감시 경계하는 망대 역할을 하였던 곳으로 추정한다. (9) 평산진성 소 재 지 : 남해군 남면 평산리

92 1278 남해군지 규 모 : 진성. 둘레 500m, 높이 1m, 폭 4m 부 속 물 : 성곽. 만호비 시대 및 관리자 : 고려시대, 평산이장 삼국사기지리지에 남해군은 신문왕 초에 전야산군을 설치하였는데 해중에 섬이라...중 략...평현산은 본래 평산서현을 경덕왕이 개명하였는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라는 기록 으로 보아 평산현를 지키는 포구의 진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 그리고 세종실 록에 의하면 세종 13년(1431) 7월 27일에 경상도 감사가 아뢰길 남해도 남쪽편의 바깥쪽 가화포, 고을포에 사는 백성들이 경작하는 우현의 바깥쪽 대양의 진토의 전토는 백 성들이 개간하여 경작하는 것을 금하소서 임금은 그대로 따랐다. 이것은 백성들이 살기에는 좋은 곳이나 왜구들의 침입이 잦아 경계하였던 것으로 영현에는 고인돌군이 많이 있어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살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세조 12년(1466)에 관제 개혁과 지방군 직제를 개편하여 진주 목사인 첨절제사 휘하에 남 해현령이 절제도위 첨사 휘하 평산포 만호가 관장하고 있었다. 성종 21년(1490) 9월에 진보 를 구축하기 위하여 평산포 진성을 축성하였다. 현청에서 25리 지점에 돌로 쌓았으며 둘레 가 1558자, 높이가 11자의 큰 성이었고 만호는 무관으로 종4품이며, 군관 2인, 진리 24인, 지인 14인, 사령 8명으로 고려시대 우수사를 설치하였다가 조선조에 만호진으로 대처하였 고 거북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 능노군 145명, 사부 28명, 화포수 10명, 포수 34명 이 주둔하였다. (10) 고진성 소 재 지 : 남해군 남면 당항리 590번지 규 모 : 평지성. 둘레 약 380m, 높이 3.3m, 폭 2~5.5m 부 속 물 : 정지( 井 池 ), 건물지 시대 및 관리자 : 고려시대, 두곡이장 고진성은 남면 당항리 두곡 마을 고진곡을 올라가기 전 들판 가운데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축성하였다. 정상에서 앵강만을 향하여 동남 방향 경사면을 따라 축성하였고 남서쪽은 구릉 의 중간부분 능선을 이용하여 축성한 퇴뫼식 평지성이다. 석성의 형태는 기단부 아래 잡석 으로 약 40cm을 쌓은 다음 그 위에 장대석(30cmx1m)을 눕혀서 석축면 보다 40cm정도 튀 어나오게 기단부를 쌓고 그 위에 방형 또는 장항형(1mx1.4mx30cm)의 석재를 쌓았다. 현재에는 1~3단 정도 잔유하고 있으며, 석성의 둘레는 1,250자이고 대부분 직선형 성벽 쌓기로서 원형을 유지하고 있지만 현재에는 전답으로 개간되어 많이 훼손되어 있다. 그리고

93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79 남 서 북쪽은 외곽으로 궁형성벽이 형성되어 있는데 둘레는 약 24m정도로 돌출되어 있 어 전망이나 감시를 하던 곳으로 보이며 문지인 것 같다. 축성 연대는 고려 공민왕 10년(1361)에 축성된 것으로 전하고 있으며, 평산현의 외곽성으 로 앵강만으로 침입하는 왜적들을 방지하고 감시하였을 것이고 백성을 보호하는 역할도 겸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형태상으로 보아 고려시대 남해현의 소재지였던 성산성의 축성 방법 과 형태가 거의 비슷하므로 같은 시기에 축성된 것으로 보아지며 군내에서도 가장 오래된 성 곽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11) 곡포보성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302번지 규 모 : 보성. 둘레 약 400m, 높이 1~3m 부 속 물 : 조세창고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남해교육청 이동면 용소리 화계 마을에 있는 구, 성남초등학교터가 곡포보성지로서 성곽은 학교 외곽 담으로 석축 되어있고 일부는 담장으로 사용되어져 있다. 곡포보성지는 평산현과 난포현의 중간지점에 있으며 앞으로는 수로를 이용 할 수 있는 앵강만이 위치하고 있는 곳이다. 옛날 에는 화계 마을 안에 굴강이 있었으나 지금은 매립되어 민가로 형성되어 있다. 곡포보성의 서쪽에 있는 성축은 장대석의 길이 90cm, 두께 20cm로 기단을 정교하게 기 초한 다음 그 위에 20cm정도의 안쪽으로 높이 110cm, 길이 100cm, 두께 22cm되는 방형 또는 장방형의 마대석으로 1단 혹은 2단으로 쌓았다. 현재 거의 멸실되고 104m정도 기단이 남아 있고 1~2단 정도만 유지하고 있다. 도로변과 근접한 곳에 우물지가 있는데 문지인 것 으로 보인다. 동쪽 역시 70m정도만 잔존하고 있으며 축조 형태는 서쪽과 같은 방법으로 축 성되었다. 다른 유물은 채집되지 않고 있다. 진주진관 남해현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현 남쪽30리 지점에 있다. 석축인데 둘 레는 960자이고 높이는 11자이다. 임오년 중종17년(1522)에 우고개보를 혁파하고 여기에 옮겼고 권관(종9품)을 설치하여 방수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계속 조세물 창고로 유지 하다가 고종 21년(1884)에 곡포진성이 미조진성으로 옮김으로서 폐성 되었다. (12) 성고개성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성현리

94 1280 남해군지 규 모 : 산정식산성. 둘레 760자 부 속 물 : 구, 성현 봉수대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성고개성은 강진바다와 앵강만을 양쪽에 두고 난포현(현, 이동면)을 보호하는 외곽성으로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전달 할 수 있는 봉수대가 있었던 곳이다. 위치는 성현 마을에서 상 주로 가는 도로와 화계로 가는 두 갈래 도로에 인접하여 있는 얕은 구릉지에 위치하고 있으 며 현재에는 성곽의 기단부와 봉수대였음을 알 수 있는 약간의 흔적만 남아 있다. 신증동국 여지승람과 진주관 남해현지에 의하면 현의 남쪽 22리 지점에 있다. 석성이 있으며 둘레 가 760자이다. 권관을 설치하여 방수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문종 원년(1451)에 남해현 성현의 수어군수는 300명뿐인데 2번 나누어 서로 교체하니 괴로움이 다른 데에 갑절이나 되어 온당하지 못합니다. 원래의 군사 300명과 거제 남해의 정역이 없는 사람 51 명을 추세하면 351명인데 아울러 청컨대 감사로 하여금 또 남해 부근의 각 고을에서 원수외 의 일수 및 한량과 함부로 적에게 빠진 인정 49명을 찾아내게 하여 합하여 400명을 만들어 4번으로 나누어 서로 교체하여 방수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고 한다. 그 후 중 종17년(1522)에 성고개성을 혁파하고 상주보성으로 옮겼다. 이러한 점을 보아 강진만으로 침입하여 현 소재지까지 침략하는 왜적을 경계하고 방어하였던 중요한 요충지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축성 연대는 알 수 없으나 형태로 보아 자연석을 이용하여 퇴뫼식으로 석축된 것 을 보면 왜구의 침입이 잦은 조선시대 초기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13) 난포현성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난음리 장전, 난음, 양지 규 모 : 동헌터(양지마을), 생원골(난음마을), 서역골(조금마을), 사창(장전마을), 망대( 비자등) 부 속 물 : 당산제터 시대 및 관리자 : 통일신라시대, 난음이장 난포현은 신라 신문왕 때 전야산군의 속현이었다. 처음에는 내포현이라고 하였는데 신라 경덕왕 때에 난포현으로 개칭하였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심하여 사람이 못 살게 되자 폐 현이 되었다. 소재지는 지금의 이동면 난음리 일대이다. 오랜 세월을 지내오는 동안 그 당시 의 유적은 없어지고 신라 말 고려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와편과 지기들이 채집되는 등 흔 적만 남아 있다. 동헌은 양지 마을이었고 그 동쪽 마을을 지금도 객사골이라고 칭하며 현재 난곡 저수지가

95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81 있는 곳을 생원골이라고 한다. 양지 마을과 조금 마을 사이의 마을을 서역골이라고 하며, 조 금촌( 調 琴 村 )이라고 불리는 곳은 그 당시 관기( 官 妓 )가 거문고를 타며 놀았다는 전설이 있 다. 평지마을과 장전마을 사이의 들을 사창( 社 倉. 국가의 곡식을 보관하던 창고)들이라고 한 다. 성터로는 비자등 구릉에 석축 하단부에 해당하는 석축이 20여m가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고 정상은 망대가 설치되었던 곳으로 추정한다. 장전마을의 별락산( 別 駱 山 ) 북록( 北 麓 )을 거쳐 성고개성까지 석축이 이어졌으며, 조금촌과 양지마을을 지나 난화방까지 성곽이 이어 진 것으로 추정된다. 비자등 성터에는 돌무덤이 현존하고 있고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당시 성곽에 사용하였던 자연석과 마석들은 간척지의 방파제와 하천의 제방을 쌓는데 사용되어 성곽이 훼손되었다. (14) 상주포성 소 재 지 :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규 모 : 성곽 둘레 약 500m, 높이 3~4m. 부 속 물 : 성곽 시대 및 관리자 : 고려시대, 상주초등학교장 현재 상주초등학교의 담장과 뒷산을 둘러싸고 있는 평지석성이다. 석축 형태를 보아 고려 시대에 왜구 방비용으로 축성 되었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둘레는 약 500m이고 석성의 높이는 3~4m정도이나 거의 대부분 붕괴되고 민가의 담장과 전답의 담으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양호하게 잔존하는 부분에는 화포의 흔적이 남아 있어 왜구를 물리치는데 큰 역할을 한 성( 城 )으로 보인다. 상주포성은 1437년에 재 축성 되어졌고 중종17년(1522)에 이동면 성현에 있는 성고개성이 혁파되어 상주포성으로 옮겼으며 권관( 權 管 )을 설치하여 방수한다 라고 동국여지승람에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 시에는 남해에서 제일 먼저 침략을 당했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15) 미조항 고진성 소 재 지 : 남해군 미조면 미조리 규 모 : 진성. 둘레 약700m, 높이 4m 부 속 물 : 석축성곽 시대 및 관리자 : 통일신라시대, 미조이장 미조항은 중요한 항구이며 군사적으로 요충지였다는 사실은 조선왕조실록 곳곳에 빠짐 없이 기록되어 있다. 중요한 지역이었기에 중종 39년(1544)에 미조항진 첨사를 당하관에

96 1282 남해군지 서 당상관인 무신을 가려서 차출하여 지휘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성종실록에 보면 (전략) 긴요한 중에서도 더욱 긴요한 것은 남해의 땅 미조항과 사천의 땅 삼천진 입니다 (중략) 미조항과 삼천진 두 곳에 요해를 설치하는 것은 진실로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큰 진( 鎭 )을 설치하고 그 성보를 높게 쌓아서 (후략) 라는 기록이 있다. 미 조항 고진성은 성종 14년(1486)에 석축 된 성으로 둘레 2,146자, 높이 11자로 축성하여 수 군첨절제사(종3품)를 지휘관으로 하였다. 성종 5년(1474)에 왜구에 의해 함락되기도 하였 으나 중종17년 (1522)에 인근 각 진의 당령군사( 當 領 軍 士 )들을 뽑아 중수 하였다. 남해현 읍지에 보면 현의 동쪽 60리 지점에 있다. 성화( 成 化 ) 병오년( 丙 午 年 )에 진이 설치되었다. 그 뒤에 왜적에게 함락되어 혁파했다가 가정( 嘉 靖 ) 임오년( 壬 午 年 )에 다시 설치하였다. 첨 사는 무관으로 종3품이며 군관3인, 진리38인, 지인20인, 사령17명이며, 전선1척, 병선1 척, 사후선2척, 능노군153명, 사부28명, 화포수10명, 포수34명 봉수군20명으로 기록된 것 을 보아 미조항진은 군사적으로도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에는 거의 멸실 훼손되어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고 다만 밭으로 개간되어 있는 언덕아래 자연석으로 길이 150m, 높이 1m정도의 석축만 남아 있다. (16) 적량성 소 재 지 : 창선면 진동리 적량 규 모 : 평지진성 부 속 물 : 첨사김정필선정불망비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적량이장 진동리 적량에 위치한 적량성(일명 진동성)의 축성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세종실록에 의 하면 세종 2년(1420)에...도내의 거제, 남해, 창선의 3개 섬 가운데 전지( 田 地 )가 많은 곳에 목책( 木 柵 )을 만들거나 토성을 쌓고 백성이 무기를 가지고 들어가서 농사를 짓게 하고 밤에는 성에 들어가서 굳게 지키며 부근 항구에 있는 병선으로 하여금 그들을 수호케 하였 다 라는 기록을 보아 세종 2년(1420)에 축성 되었다고 추정하며 군비로는 전선1, 병선1, 사후선2, 장졸227명, 군량미427석으로 통영 통제사에 속해 있으면서 첨사가 다스렸다. 특 히 적량성을 지키기 위하여 굴강을 파고 병선 등 선박을 감추어 두기도 하였는데 굴강은 지 금 농토로 개간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에는 왜적을 방비하는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이충무공전서에 의하면 적량 만호 권 전( 權 詮 )은 통제사 이순신의 아장( 亞 將 )으로 선조31년(1598) 11월 19일 노량

97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83 해전에서 통제사 이순신과 동시에 전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패하자 배설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가다가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적량성을 불태우고 떠났다는 설도 있다. 현재 적량성은 대부분이 택지화되고 붕괴, 멸실되었으며 일부 석축이 민가의 담장으로 이 용되어 잔존하고 있다. 임진왜란 후 적량성에는 고종 26년(1889)에 세운 비석이 하나 있는 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절충장군행첨사김후정필선정불망비( 折 衝 將 軍 行 僉 使 金 候 廷 泌 善 政 不 忘 碑 ), 래하기묘수공신폐( 萊 何 基 墓 隨 公 神 弊 ). 소아민기익맥휼기( 蘇 我 民 基 益 脈 恤 飢 ). 채 목자비천추유덕( 砦 木 自 備 千 秋 遺 德 ). 름김혜산수공지( 凜 金 惠 山 水 公 之 ). 광서( 光 緖.고종26 년.1889)15년 기축( 己 丑 )6월 일 군민립( 軍 民 立 ). 감역( 監 役 ) 김문홍( 金 文 洪 ) 수민( 首 民 ) 박 두흡( 朴 斗 洽 ).이라 적혀 있다. (17) 구도성 소 재 지 : 남해군 창선면 부윤2리 규 모 : 평지진성 부 속 물 : 굴강터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부윤2리 이장 부윤 2리에 위치하고 있는 거북형상의 섬을 구도( 龜 島 )라 부르며 성이 축성되어 있는데 이 성을 지명에 따라 구도성이라고 부른다. 섬의 북쪽에 돌로 쌓아져 있는 곳을 예방 끝 이라 고 부른다. 임진왜란 때 군사를 예방 끝에 복병시켜 놓았기 때문에 왜적을 미리 막았다고 전 하며 굴강을 만들어 이곳에 병선을 감추고 군사는 성 안에서 양병( 養 兵 )하였다고 한다. 축성 연대는 알 수 없으나 형태상으로 보아 적량성보다 먼저 축성된 것으로 보이며 적량성의 전신 이라 전한다. 현재 성곽은 해변 쪽으로만 남아있고 육지에 가까운 곳에는 석축 흔적이 없다. 성곽 내는 밭으로 개간되어 있으며 굴강은 논으로 개간되어 있어 원형을 찾아 볼 수 없다. 지금으로부터 약 60여 년 전(1940년경)에 이곳에 농사를 짓고 있던 농부가 대완구, 동전 등 을 채집하였다고 전하며 구전에 의하면 구도성의 첨사가 적량성으로 옮겨 갔다고 한다. 2) 봉수대 (1) 망운산 봉수대 소 재 지 : 남해군 서면 연죽리 산38-1번지

98 1284 남해군지 규 시 모 : 1기 대 : 조선시대 망운산 봉수대는 남해의 진산인 망운산(786m)의 정상 반대편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봉수대에서는 한려해상과 강진만 그리고 앵강만을 한꺼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며 남해 읍성 관아에 보고하는 봉수대이다. 그리고 원산 봉수대와 창선 대방산 봉수대에 응하고 있 다. 망대는 남아 있으나 설치 연대와 흔적은 찾아 볼 수 없다. 단종실록에 의하면 단종 2년 (1454) 정월 12일 남해현의 망운산과 성현의 두 봉화는 모두 긴요치 않으니 청컨대 이를 혁파 하소서. 그 군인들은 성현 방호소로 옮겨 붙이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에 망운산 봉수대는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망운산 봉수대를 오르는 길은 서면 중 리에서 시멘트로 포장된 도로를 따라 4.3km쯤 오르면 KBS중계소가 나오는데 중계소 뒤편 에 봉수대가 위치하고 있다. 서쪽에서 오르는 길은 서면 노구에서 망운암을 경유하여 정상 으로 올라 봉수대로 갈수 있고 남해읍 신촌에서, 남해읍 오동리에서, 고현면 화방사에서 등 산로를 따라 오를 수 있다. (2) 원산 봉수대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다정리 617번지 규 모 : 토석혼축, 둘레 20m, 직경 7.4m, 높이 1.7m, 폭 2.6m 시 대 : 조선시대 원산 봉수대는 이동면 다정리 617번지 원산(해발620m)에 위치하고 있다. 원산 봉수대에 오를 수 있는 길은 용문사를 경유하여 등산로를 따라 1.1km오르면 봉수대가 위치하고 있 다. 다른 길은 이동면 앵강고개에서 농로를 따라 1.5km를 오르면 봉수대를 만날 수 있는데 2 개의 길이 있다. 원산 봉수의 역할은 동쪽으로는 금산 봉수, 남쪽으로는 설흘산 봉수에 응 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현의 남쪽 20 리에 있고 동쪽으로는 금산 봉수에 응 하고 서쪽으로는 본 현에 보고하고 끝났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본 현은 이동면 에 현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일컬어 난포현( 蘭 浦 縣 )이다. 축성은 토석 혼축이며, 규모는 둘레 20m이며 직경은 7.4m, 높이는 1.7m, 폭 2.6m이고 망대로부터 서북방향 10m지점에 5개 의 연대가 있었던 흔적이 있다. (3) 성현 봉수대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성현리

99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85 규 시 모 : 1개 석축 크기 가로 290cm, 세로 240cm. 대 : 조선시대 성현 봉수대가 있는 곳은 강진만과 앵강만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얕은 구릉지로 성현 마을에서 상주와 화계로 가는 앵강고개 두 갈래의 도로 사이에 솟아 있는 산( 山 ) 정산에 위 치하고 있다. 봉수대에 오르는 길은 앵강고개 휴게소에서 마주보이는 구릉지로서 도로에서 300m정도 오르며, 정상에는 성고개성이 높이 130cm, 둘레 760자로 축성되어 있고 성내 서남쪽에 봉수대가 있었던 흔적으로 자연석 돌무지가 쌓여 있는데 가로가 290cm, 세로가 240cm로서 망대인 것으로 보인다. 성현 봉수대의 역할은 금산 봉수대와 원산 봉수대 그리 고 설흘산 봉수대에 응하고 본 현 및 난포현에 보고 하였다. 단종실록 기록에 의하면 단종 2년(1454) 정월 12일 남해현의 망운산과 성현의 두 봉화 는 아울러 긴요치 않으니 청컨대 이를 혁파 하소서. 그 군인들은 성현 방호소에 옮겨 붙이소 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그리고 세조 13년(1468) 3월 2일 봉수대는 한 사람도 지 키지 아니하니 봉수를 삼가고 멀리 척후를 보내고 군사들은 성안을 지키게 하소서 하니 임 금이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그 후 중종 17년(1522)에 성현 봉수대가 있는 성고개성도 혁파 되어 상주포성으로 옮겼다. (4) 대국산 봉수대 소 재 지 : 남해군 설천면 진목리 산18-4번지 규 모 : 1기(둘레 6.5m, 직경 3m) 시 대 : 조선시대 대국산 봉수는 설천면 진목리 산18-4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대국산성(경상남도기념물 제 19호)내에 위치하며, 망운산 봉수와 창선 대방산 봉수에 응하였고 본 현(성산성내에 있는 현 의 소재지)에 보고 하였다. 봉수대에 오르는 길은 진목에서 농로와 임로를 따라 2.3km를 오 르면 산성과 봉수를 만날 수 있고 설천면 정태에서 오르는 길과 문항에서 오르는 길이 있다. 대국산성과 봉수가 있는 이곳은 신라 신문왕 때 남해군에 전야산군이 설치되었고 대국산 아 래 성산이 현 소재지이며 대국산에 외곽 산성을 축성하고 봉수로서 연락과 보고를 하였다. 산성 내 북쪽 방향에 봉수대의 흔적이 있으며 둘레는 6.5m이고 직경은 3m정도 된다. (5) 망기산 봉수대 소 재 지 : 남해군 남면 유구리

100 1286 남해군지 규 시 모 : 1기 대 : 조선시대 망기산 봉수대는 남면 유구리 망기산(해발340m)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면 평산포에 있는 평산 만호에 소속된 봉수이다. 가천에 있는 설흘산 봉수대와 전남 여수에 있는 돌산 봉수에 응 하였고 평산 만호에 마지막으로 보고하는 봉수이다. 망대 일부 외에는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망기산 봉수에 오를 수 있는 길은 남면 평산리에서 2.3km를 오르면 봉수대를 만날 수 있고 또는 남면 율곡리에서 오를 수 있는 길이 있다. (6) 미조 망운산 봉수대 소 재 지 : 남해군 미조면 미조리 규 모 : 1기 시 대 : 조선시대 미조 망운산 봉수는 망운산 정상(해발230m)에 위치하고 있는 봉수로서 미조항진에 소속 된 봉수이다. 망운산 봉수는 금산 봉수에 응하였고 미조항 본진에 보고 하였다. 미조항은 군 사적으로 중요한 항이었고 요충지였기 때문에 첨사는 당상관 무관 종3품이 지휘관이었다. 이곳에 마지막으로 보고하는 이곳 봉수대 역시 금산 봉수와 직접 연결하는 중요한 봉수 역할 을 하였다. 현재에는 망대와 연대의 흔적만 일부 남아 있다. 이곳 봉수대에 오르는 길은 미 조에서 1.1km 오르는 동쪽로와 설리에서 오르는 서쪽로가 있다. 3) 패총 (1) 도마리 패총 소 재 지 : 남해군 고현면 도마리 규 모 : 전답 5.580m2 시 대 : 철기시대 남해대교와 남해읍을 연결하는 19번 도로의 중간지점에 위치하는 고현면 도마리 서도마 마을의 뒷산 구릉에 위치한다. 이 구릉은 삼봉산에서 길게 뻗어 내린 자락중의 하나인데 해 발고도는 67m내외이다. 현재 해안선에서는 500m정도 떨어져 있으나 간척사업을 하기전의 해안선에서는 150m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구( 舊 )해안선이라고 생각되는 지점에서 유적까지 는 그렇게 험준하지 않은 편이며 천천히 걸어 올라갈 때 10분정도의 시간이 소요 된다. 구릉

101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87 의 상부는 약간의 평탄면이 형성되어 있고 이 평탄면은 작은 경사를 이루면서 삼봉산으로 연 결되고 있다. 패각과 토기는 이러한 평탄면의 여러 곳에서 채집되는데 패각은 주로 구릉지 형성 평탄면 의 사면에서 확인된다. 유적의 면적은 1,300평정도로 보고 있으나 실제로는 구릉 전체에서 유물을 채집 할 수 있다. 유적은 삼봉산과 연결되는 남쪽을 제외하고는 주위가 탁 트인 입지 로서 전망이 좋다. 현재 유적이 분포하는 구릉은 평탄면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계 단식 논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유적의 상면은 현재 밭으로 경작되고 있는데 경작면이 얕아 파괴는 심하지 않으나 농로를 개설하면서 또는 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패각층의 일부가 절단되어 군데군데 단면이 드러 나 있는 상태다. 단면이 노출되어 있는 패각층에서 다수의 유물을 채집 할 수 있다. 채집되 는 유물로 보아 김해 패총에서 출토되는 토기편과 동일한 것으로 보이므로 초기 철기시대 유 적으로 판단되고 있다. 4) 사찰 (1) 용문사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산 868번지 규 모 : 대웅전, 석불, 종각, 천왕각, 봉서루, 명부전 등 부 속 물 : 민간신앙 대상 목장승, 성주조앙신 시대 및 관리자 : 삼국시대, 용문사 용문사의 유래는 원효대사가 금산을 찾아와 보광사를 짓고 산명을 보광산이라했다. 이때 에 현 용문사에 첨성각이 세워졌다고 전하고 있으며 금산에 있었던 보광사를 이곳으로 옮겼 다고 전한다. 다른 유래는 현종 원년(1660)에 남해현의 유림이 금산에 위치한 보광사의 입 구가 향교와 면대하였다 하여 다른 데로 옮기라하므로 백월당 대사가 남쪽에 있는 용소위에 터를 정하고 용문이라 하였다. 백월당과 동지스님들은 힘을 합하여 먼저 선당양당( 禪 堂 兩 堂 )을 지었고 승당( 僧 堂 )은 신운 ( 信 雲 )이 모화( 募 化 )하여 다음 해인 현종2년(1661)에 준공 하였다. 그리고 6년 뒤인 현종 5 년(1666)에 일향( 一 香 )이 대웅전을 창건하였고 지해( 智 海 )가 윤색( 潤 色 )하였으며, 성암( 性 巖 )이 봉서루를 창건하였고 태익( 太 益 )이 낙성한 것이다. 그리고 나한전은 보휘( 寶 輝 ), 명부 전은 설웅( 雪 雄 ), 향적전( 香 積 殿 )은 인묵( 印 黙 ), 첨성가은 설잠( 雪 岑, 천왕각은 유탁( 庾 卓 ),

102 1288 남해군지 수각정( 水 閣 亭 )은 각오( 覺 悟 )가 이루었다. 숙종 34년(1708)에 염불암( 念 佛 庵 )을 중창하였고 관음( 觀 音 ), 백운( 白 雲 ) 두 암자는 고을 사람들의 발원으로 축조하였는데 없어지고 백연암을 절의 서쪽에 신축하였다. 숙종 때 수국사로 지정되어 왕실의 보호를 받은 사찰로서 경능관( 敬 陵 官 )과 익능관( 翼 陵 官 )이 발급한 수국사금패( 守 國 寺 禁 牌 )가 있고 언제 사용되어졌는지 알 수 없는 세 개의 총신 으로 된 삼혈포가 있으며, 숙종조의 하사품으로 경내 축원당에 걸어 두었던 궁수( 宮 繡 )와 궁 중( 宮 中 )매듭의 희귀한 유품인 번( 幡 )을 소장하고 있다. 용문사에는 경상남도유형문화재 대웅전과 석불을 비롯하여 문화재자료 천왕각, 명부전, 건양2년영산회산탱, 소장문헌, 삼장보살탱, 건양2년신중탱 등이 보존 관리되어지고 있다. 용문사 부도 부도( 浮 屠 )란 승려( 僧 侶 )의 사리( 舍 利 )나 유골( 遺 骨 )을 안치( 安 置 )한 묘탑( 墓 塔 )으로 부도 ( 浮 圖 ), 부두( 浮 頭 ), 불도( 佛 圖 )등 여러 가지로 표기( 表 記 )되고 있는데 원래는 불타( 佛 陀 )와 같이 번역( 飜 譯 )한 것이라고 하며 또는 솔도파( 率 屠 婆 )족( 族 )의 탑파( 塔 婆 ) 전음( 轉 音 )이라고 도 한다. 어원( 語 源 )으로 본다면 불타( 佛 陀 )가 곧 부도( 浮 圖, 부도( 浮 屠 ))이므로 외형적으로 나타난 불상( 佛 像 )이나 불탑( 佛 塔 )이 바로 부도( 浮 屠 )일 수 있다. 본래 부도의 건립은 법제문 도( 法 弟 門 徒 )들이 선사( 先 師 )를 섬기는 극진( 極 盡 )한 마음에서 선사가 입적( 入 寂 )한 뒤 정성 ( 精 誠 )을 다하여 세우는 것이다. 용문사 부도군은 일주문 ( 一 柱 門 )에 이르기 전 우측 약간 높 은 곳에 입적하신 분의 부도9기가 있다. (2) 화방사 소 재 지 : 남해군 고현면 대곡리 1448번지 규 모 : 대웅전, 나한전, 명부전, 종각, 채진루 부 속 물 : 남해충렬사비 복원목판, 화방복지원 시대 및 관리자 : 삼국시대, 화방사 신라 신문왕 때 원효대사가 보광산(현 금산)에 보광사를 세우고 망운산 남쪽에 연죽사를 건립한 것이 화방사의 전신이다. 고려 1200년대 진각국사 혜심이 연죽사를 현 위치의 서남 쪽 400m에 옮기고 영장사라 개칭하였다. 진각국사는 멀리 신령스러운 기운이 바다에 감추 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바로 떼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서 산을 바라보니 호산의 좋은 형상인 망운산이 나타났다. 그는 말했다. 영구( 靈 區 )가 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냐 그 뒤 절 이름

103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89 을 영장이라 하고 승도를 거처하도록 했다. 영장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소실되었는데 인 조 15년(1637), 서산대사의 제자인 계원( 戒 元 )과 영철( 靈 哲 ) 두 선사가 지금 위치에 이건 중 수( 移 建 重 修 )하고 연화형국 의 뜻을 취해 화방사라고 했다. 화방사 역시 103년이 지난 1740년에 화재를 입었다. 사방이 일시에 재가 되고 승도들이 흩어졌으나 다음해인 영조17년(1741)에 석순, 충찰, 충념 등이 동지들을 모아 재건하였다. 기풍 당당한 대웅전 뜨락 오른쪽으로는 대밭을 배경으로 사색에 잠긴 부처상과 범종루가 있다. 왼쪽으로는 이승과 저승을 이은 듯 1998년에 축조한 9층 석탑이 서 있다. 화방사의 백미는 명월당에서 맞는 달맞이이다 범종루에는 반야범종과 함께 법고, 운판, 목어 등 사물이 좌우에 있는데, 사물을 모두 갖 춘 곳이 드문데다 사물의 청아한 소리가 아침, 저녁의 예불 시간에 산사의 적막한 기운을 쫓 아내고 있어 예사롭지가 않다. 범종루 옆 대밭 앞에는 작은 석불이 지키고 있으며, 속세와 성전을 구분 짓기라도 하듯 돌담이 사찰을 둘러싸고 있다. 예전에 선방이 자리했을 법한 대 숲 빈터가 사찰 건물과 어우러져 있다. 채진루는 대웅전 앞마당으로 출입토록 대웅전과 마주보게 배치되어 있다. 마당에서 출입 이 쉽도록 누각바닥이 마당과 같은 높이로 만들어진 이 누각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오량( 五 樑 )구조로된 2층 맞배지붕집이다. 세부장식이 조선말기 수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채진루에는 화방사 효천 주지스님이 1997년 해를 꼬박 넘기는 원력불사로 복원한 이 충 무공 충렬묘비 목판비문이 서 있다. 이 목판비는 높이 3m, 폭1.6m로 나무판 앞, 뒤에 충 무공의 충절을 기리는 내용으로 1300여자가 새겨져 있고 남해 충렬사에 입석되어 있는 비와 똑같은 크기와 내용이다. 당시에 탁본해 두었던 것을 새로 복원하였다. 대웅전의 본래 명칭은 보광전이었으나 보광전이 1981년 10월 1일에 화재로 소실되자 1984년 12월 29일에 신축 복원하고 대웅전이라고 하였다. 대웅전을 중심에 두고 좌우에, 특히 조선조에 많이 유행하였던 부불전인 명부전과 응진전을 배치한, 이른바 3불 전형 배치 를 보이고 있다. 불전의 수에 따라 보통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 모두 예배용 전각으로 구성 된 것을 3불 전형이라 한다. 화방사의 3불 전형은 특이한 사례로 양산의 장안사에서도 찾을 수 있다. 화방사의 3불 전형은 초기 사찰의 가람 구성 형식을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초기의 사찰은 탑원, 금당원, 승원 세 영역이 뚜렷이 구분된다. 고려때까지도 금당원 안에는 순수한 예배용 전각들만 배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가운데 탑원과 금당원이 통합돼 당탑제( 堂 搭 制 )가 성립하며, 이 금당원 영역이 중심 불단 영역이 된다고 볼 수 있다. 화방사는 초기 금당원의 순수성을 간직한 것이다. 따라서 별도의 승방구역, 즉 승원( 僧 院 )

104 1290 남해군지 을 구성하게 된다. 화방사의 또 다른 특징은 대웅전 앞마당에 최근에 세워진 탑에서 남해 한 려수도의 장관을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섬에 위치한 사찰만이 누릴 수 있는 공간의 장점 을 최대한 살렸다. 화방사는 호국 사찰로서 남해 역사의 산실로도 유명하다. 오랫동안 이순 신 장군의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효천 주지스님이 번역하고 있는 중건중 수기 5편은 번역이 끝나면 사찰과 남해의 역사를 재조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밖에도 현판기문 6편, 완문절목 13편, 선생안 7 편을 비롯한 고문서가 남아 있다. 화 방사에는 옥종자에 얽힌 이야기도 전해 온다. 옥종자는 사찰이 건립되어 불상을 봉안할 때 불을 밝히는 옥돌로 만든 등잔으로 한번 불을 붙이면 깨뜨려서는 안 되고, 어떠한 이유에서 든지 불이 꺼지면 다시 불을 붙여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 옥종자는 1234년 이전에 만들어 져 점화된 뒤 임진왜란 때 꺼진 것으로 알려져 현재 사용하지 않고 있다. 영장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 된 것을 인조15년(1637)에 서산대사의 제자인 계원( 戒 元 ), 영 철( 靈 哲 ) 두 선사가 현 위치에 이건중수하고 연화형국의 뜻을 취해서 화방사라 하였다. 그러 나 103년 후인 영조16년(1740)에 화재를 입어 법우( 法 宇 ), 선( 禪 ), 승( 僧 ), 첨( 瞻 ), 상( 象 ) 사 방이 일시에 재가 되었고 승도들이 흩어졌으나 다음해인 영조 17년(1741)에 석순, 충찰, 충 념등이 동지들을 모아 승( 僧 ), 선( 禪 )양당을 재건하고 치원( 致 願 )의 권화에 힘입어 각황( 覺 遑 )의 보전을 경영하면서 석순은 답( 沓 )과 전천여금( 錢 千 餘 金 ), 충찰은 답( 沓 )과 전오백여금 ( 錢 五 百 餘 金 ), 충념은 전십여금( 錢 十 餘 金 ), 신상관( 申 常 寬 )이 합전팔십여금( 合 錢 八 十 餘 金 )과 관전곡미( 貫 錢 斛 米 )를 내어 상실과 첨성, 향각을 세우고 단청하였다. 1981년 10월 1일 보광 전이 화재로 소실되자 1984년 12월 29일에 보광전 자리에 신축 복원하고 대웅전이라 현액 ( 懸 額 )하였다. (3) 금산 보리암 소 재 지 : 남해군 상주면 산 2065번지 규 모 : 목조와가 정면3간, 측면 2간 부 속 물 : 보리암, 보광전, 종각, 삼층석탑, 해수관음보살상 시대 및 관리자 : 신라시대, 보리암 신라 신문왕 때 원효대사가 남해 보광산(현, 금산)에 입산수도하기 위하여 산록에 보광사 를 지었다. 그 사운이 융성해 지므로 이 보리암을 세웠다는 남해 고사찰 중에 하나이다. 산세 준험한 금산 준봉 명당에 자리를 잡으며 기암절벽이 신기의 극을 다하고 망망대해를 한눈에 굽어 볼 수 있는 선경( 仙 境 )일뿐 아니라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 금산 보리암, 낙산사

105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91 홍련암, 강화도 보문사 중의 하나이다. 관음 성지에서 지성으로 발원하면 한 가지 소원은 성 취된다는 관음도량이기도 하다. 경내에는 특기할만한 문화재는 많이 없으나 그 옛날 인도 월지국에서 김수로 왕비 허태후 가 가져온 석재를 원효대사가 이 보리암에 세웠다고 하는 보리암전삼층석탑이 있다. (4) 망운산 망운사 소 재 지 : 규 모 : 부 속 물 : 시대 및 관리자 : 망운산 정상 부근에 있는 망운사는 창건연대는 알 수 없지만 화방사의 부속 암자로 화방사 를 건립할 때 같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개의 명승지들이 관광지로 탈바꿈되어 세속화되고 있지만 아직은 동자승의 눈빛처럼 맑음을 간직한 곳이다. 망운암에는 중병을 앓 고 있는 사람들이 기도를 하면 병이 낫는다는 영험을 안고 있는 기도도량이다. 보물급에 해 당하는 보살을 형상화한 석불이 있는데 수 백년의 인고의 세월을 이겨냈다고 전한다. 승용 차로 가려면 서면 노구마을에서 진입하는 것이 좋다. 35분쯤 오르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지 점이 남해 최고봉인 망운산의 정상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무심히 흐르는 구름, 작은 섬들 사 이로 한가로이 오가는 배들 뿐 거치는 것이 없다. 풍광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세속의 잔때를 가시며 산길을 따라가면 이내 돌 일주문이 담담히 객을 맞는다. 그 옆엔 불심을 담은 돌탑이 공들여 서 있다. 망운암 주지는 불가에서 수행의 한 방편으로 삼는 선서화를 그리는 성각스 님이다. 스님은 자신 만의 예술세계를 선보이며 각종 자선전시회를 마련하는 등 화폭 가득 자비로운 불심을 전하고 있다. (5) 대방산 운대암 소 재 지 : 규 모 : 부 속 물 : 시대 및 관리자 : 창선면 상신마을 도로에 있는 운대암이란 이정표를 따라 마을을 질러 산길을 오르면 지리 산 계곡처럼 깊은 계곡 아래 저수지 물빛이 청명하다. 새소리를 길잡이로 하고 소나무 숲 산 빛을 깨치며 몇 구비를 더 돌면 운대암 범종루가 길을 막아선다. 아름드리 거목 나무 옆 산

106 1292 남해군지 기슭 부도에 머물던 눈길을 거두며 범종루를 지나자 층층 돌계단 위로 푸른빛 찬연한 청기와 를 인 작지만 위용스런 무량수전이 버티고 서 있다. 고려 초부터는 망경암이라 불리며 대방산 중턱에 창건되어 명당의 제일 기도도량으로 번 창하여 오던 중, 조선시대 때 운대암이라 개칭되었다. 상좌중이 낙상( 落 傷 ) 사망하여 한 동 안 절이 비었다가 임진란 후에 세월선사( 洗 月 禪 師 )께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으며 120여 년 전 안타깝게 여긴 법정화상께서 오창( 五 倉 )의 원력을 세우시고 불심이 깊은 신도를 얻고자 기도에 정진하고 있던 중 발심을 하여 오차 중창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 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대작불사를 하였으며 법당(무량수전)과 산신각을 1990년 12월에 완공케 되었다. 현재 에는 오차 중창 때 지어진 요사채가 시멘 블록조여서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서광화상께서 우리 고유의 문화인 목조 기와로 새로 중창하였다. (6) 법흥사[포교당] 소 재 지 : 규 모 : 부 속 물 : 시대 및 관리자 : 법흥사는 1900여 년초 용문사와 화방사가 합동으로 현재 남해읍사무소 자리에 증건했다 가 남해향교 옆 현 포교당으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남해불교대학을 열어 불교 대중화를 위 해 힘쓰고 있는 절이다. 1997년 복지법인 연꽃어린이집을 개원하여 법당에서도 아이들의 밝은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남해군민에게 불교문화를 전하고 있다. 전통사찰로 대웅전의 경건함을 간직하고 있지만 불자들의 마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품어주 며 생활신앙을 실천하는 사찰이다. 다른 절은 외부 관광객들이 다수이지만 법흥사의 불자는 남해주민이 거의 대부분이다. 5) 사우 남해군의 대표적인 사우로는 남해 충렬사, 이락사, 운곡사, 난곡사, 율곡사가 있지만 지정 문화재에 수록되어 여기에서는 비지정된 녹동사와 영벽정만 수록한다. (1) 녹동사 소 재 지 : 남해군 고현면 대사리 1041번지

107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93 규 모 : 사당-목조와가(정면3칸, 측면2칸,) 부 속 물 : 녹동정사(정면3칸, 측면2칸, 목조와가) 회산유집 2권 시대 및 관리자 : 근현대, 녹동사보존회 녹동사는 남해군 고현면에서 거주한 선현( 先 賢 ) 삼위를 봉안하고 있는 곳이다. 선현삼위는 김창성( 金 昌 聲 ), 자( 字 )는 덕수( 德 洙 ), 호( 號 )는 석계( 石 溪 )이며, 한분은 김유용( 金 裕 鏞 ), 자 는 영환( 永 煥 ), 호는 회산( 晦 山 )이다. 다른 한분은 하한위( 河 漢 緯 ), 자는 형서( 亨 瑞 ), 호는 몽 와( 蒙 窩 )이다. 이 삼인은 모두 오학잠덕( 奧 學 潛 德 )하여 후진교도( 後 進 敎 導 )와 유풍진작( 儒 風 振 作 )으로 세 인으로부터 추앙을 받은 분이다. 특히 석계선생은 고종4년(1867) 12월 10일에 고현면 탑동 에서 출생하여 8세 때부터 예의범절이 어른과 같았고 배움이 지극하였을 뿐 아니라 시율도 탁월하였다. 회산 선생은 종신 훈장으로 후학들을 강수하는데 전력을 다 하였고 몽와선생은 회산선생과 종신토록 죽마고우로서 한학을 하였던 분이다. 녹동사는 3분의 신위를 봉안하고 그 뜻을 받들기 위해 임술년(1922년) 초에 녹동정계를 조직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사당 은 1978년에 창건하였고 석채례( 釋 菜 禮 )는 매년 음력 3월 18일에 봉행한다. (2) 영벽정 소 재 지 : 남해군 서면 연죽리 규 모 : 사당-목조기와 평가 3간 부 속 물 : 회정선생문집 3권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나주임씨 문중 영벽정은 회정 임병한( 悔 亭 林 炳 漢 )선생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회정선생의 자는 선중 ( 聖 仲 ), 호는 회정( 悔 亭 )이며, 본관은 나주로서 고( 考 ) 응상( 應 相 )의 장자( 長 子 )로 연지동( 蓮 池 洞. 현, 서면 연죽)에서 병진년에 태어났다. 나주임씨 고려대장군 비( 庇 )의 27세손이요 귀 래정( 歸 來 亭 ) 붕( 鵬 )의 후손이다. 회정 선생은 어릴 때부터 학문의 도를 닦고자 하였으나 메마른 벽촌이라 사우의 가르침을 받지 못함을 한탄하다가 소문에 최계남( 崔 溪 南 )선생이 선진적 강도( 講 道 )를 한다기에 찾아가 문하생이 되어 수년간 유학하면서 성리학을 깊이 배우고 연구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고향에 거주하고 있는 후생들을 가르치면서 향촌의 풍속을 일변시키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 하고 4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지금부터 약 100년 전에 회정 선생의 학식과 인품을 기리는 마음에서 중국 궐리 행성부 공 교총회의 명에 의하여 경신년에 영벽정이 건립하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매년 음력 4월 상정

108 1294 남해군지 ( 上 丁 )일에 석채례를 올리고 있다. 선생께서 남기신 많은 유고문집이 있었는데 모두 유실되 고 현재에는 3권만 남아있다. 6) 금석문 (1) 금산 문장암 소 재 지 :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남해금산 규 모 : 자연암 시대 : 조선시대 문장암(일명 명필바위)은 남해 금산의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중종 때 대사성을 지낸 한림학사 주세봉 선생이 전국을 다니며 풍류를 즐기다가 남해에 있는 금산이 명산이라는 소 문을 듣고 찾아와 금산 쌍홍문을 통하여 이곳 정상까지 올라와보니 과연 아름답기가 이루 말 할 수 없고 신비로운 전설이 가득함으로 감탄하여 자연암(일명, 나막신바위)에다 유홍문 상금산 ( 由 虹 門 上 錦 山 ) 이라는 각자를 한 것이 문장암이다. 주세봉( )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상주( 尙 州 )이고 자는 경 유( 景 游 )이며 호는 신재( 愼 齋 )이다. 중종17년(1522)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별시문 과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로 관직을 시작하였다.1541년에 풍기 군수가 되어 풍 기지방의 교화를 위하여 향교를 이전하고 사림 및 그들의 자제를 위한 교육기관으로 1543 년에 백운동서원[소수서원]을 건립한 것이 우리나라 서원의 시초가 되었고 1549년에 황해 도관찰사가 되어 해주 수양서원을 건립하였다. 주세봉은 내직에 있을 때는 홍문관, 성균관 등 학문기관에서 관직을 맡았고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교학진흥을 통한 교화에 힘썼다. 현재 소수서원(경북 용풍군 순흥면 내죽리)에 봉안되어 있는 주세봉의 초상화(세로 134cm, 가로 62.5cm)는 보물 제717호로 지정되어 있다. (2) 후송 유의양 기념비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성현리 남해동산 규 모 : 기단석 크기 245cm X 275cm, 높이(삼단)85cm 시 대 : 현대 후송 유의양(1718~?)의 남해 유배 이유는 1771년 사판 간행(관료명부)으로 유배당하였 다. 영조 39년(1763)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을 거쳐 사서, 수찬, 교리를 역임 하던 중 영조

109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년(1771)에 삭탈관직 당하고 남해로 유배 와서 남해견문록을 저술하였다. 남해견문록은 기행문체로서 유의양이 보고 느낀 것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내용인즉 남해 읍 남문 밖에 있는 김시위라는 사람의 집을 거소로 정해 놓고 관가에서 주는 사령이나 식모 조차 거절하고 자기의 하인 한 사람만 데리고 유배기간동안 남해 곳곳을 찾아다니는 여유를 가졌다. 남해 충렬사와 이충무공 서원에 관한 이야기, 선소의 장량상동정마애비, 금산의 나 막신바위, 명필바위, 봉수대, 유혈도, 목화봉, 의상대, 용굴, 음성굴, 홍문등을 찬하였고 용 문사를 답사한 느낀 점 등을 기록하였을 뿐 아니라 남해의 세정을 살펴서 기록하였다. 남해 의 풍속인 장례식과 혼례식에 관한 이야기, 전복 따는 포작이야기, 효자, 열녀를 일반 백성 과 비교한 내용, 남해의 방언 등을 기록한 것으로 보아 6개월 동안 남해의 풍경, 유적지, 풍 속 등을 조사하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현재에는 남해동산에 후송 유의양 기 념비가 있다. (3) 송덕 시혜 사적비 소 재 지 : 남해군 남해읍 남산리 남산 규 모 : 사적비 19기 시 대 : 조선시대 남해군 남해읍 남산 입구에는 남해를 거쳐 간 관리들의 송덕 시혜사적비가 한 곳에 집중 적으로 있다. 사적비의 비명을 보면, 관찰사김상국명진선정비( 觀 察 使 金 相 國 明 鎭 善 政 碑 ), 행 현령이후용주구폐불망비( 行 縣 令 李 侯 容 柱 球 弊 不 忘 碑 ), 행현령이후규풍선정비( 行 縣 令 李 侯 圭 豊 善 政 碑 ), 현령김후증거사비( 縣 令 金 侯 增 去 思 碑. 1847년), 통상국민공형식영세불망비( 統 相 國 閔 公 炯 植 永 世 不 忘 碑 ), 순상국윤공자승영세불망비( 巡 相 國 尹 公 滋 承 永 世 不 忘 碑 ), 행사천군 수겸분사무장윤후순백송덕비( 行 泗 川 郡 守 兼 分 司 務 長 尹 侯 順 伯 頌 德 碑 ), 순상국조공석우영세 불망비( 巡 相 國 曺 公 錫 雨 永 世 不 忘 碑 ), 현령성후00휼민선정비( 縣 令 成 侯 00 恤 民 善 政 碑 년), 서리군수윤후순백선정비( 署 理 郡 守 尹 侯 順 伯 善 政 碑. 1691년), 행현령이공제완영세불망 비( 行 縣 令 李 公 濟 完 永 世 不 忘 碑 ), 행형령신후석균휼민선정비( 行 縣 令 申 侯 碩 均 恤 民 善 政 碑 ), 행 현령이후신경선정불망비( 行 縣 令 李 侯 身 敬 善 政 不 忘 碑. 1786년), 현령박후청정비( 縣 令 朴 侯 霽 淸 政 碑. 1624년), 행현령0후0구폐시혜비( 行 縣 令 0 侯 0구 弊 施 惠 碑. 1888년), 김대규시혜비 ( 金 大 奎 施 惠 碑 ), 선현묘직원하계두시혜비( 先 賢 廟 直 員 河 啓 斗 施 惠 碑 ), 고후유적비수립인효자 김천금기념비( 古 侯 遺 蹟 碑 收 立 人 孝 子 金 千 金 記 念 碑. 1952년), 통상이공한창구폐불망비( 統 相 李 公 漢 昌 球 蔽 不 忘 碑. 1784년)가 건립되어 있다.

110 1296 남해군지 (4) 3 1독립운동 기념비 소 재 지 : 남해군 남해읍 남산동 남산 및 설천면 문항리 솔곳 규 모 : 남산1기, 솔곳1기 시 대 : 1968년 3월 1일 기미 3.1독립만세는 남해에서도 봉화처럼 전파되었다. 설천면 남양리 이예모는 1919년 4 월 2일 하동에서 독립선언서를 구하여 품에 품고 남해로 돌아왔다. 동지인 정순조, 정학순, 정몽호, 윤주순 등을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독립선언서를 보이면서 궐기 할 것을 다짐하고 각 마을의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4월 3일 오후 3시경 설천면민은 남양리 노상에서 모두 집결하여 큰 태극기는 정순조가 들 고 독립선언서는 이예모가 낭독 한 후 남해읍을 향하여 시위행진을 하였다. 4월 4일은 남해 읍 장날이었다. 군중들은 장꾼으로 가장 하여 남해읍 시장으로 모여들어 1천여 명이 오후3 시경에 숨겨온 태극기를 끄집어내어 일제히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3.1운동비사의 기록에는 4월 6일 읍내에서 수천 명이 만세를 부르면서 시위행진을 하자 헌병이 제지함에 군중은 헌병을 물리치고 그대로 계속하여 만세를 부르다가 해산하였다. 이 동, 삼동, 남, 서, 각 면 각동에서 일제히 일어나 만세를 부르고 고현, 설천, 창선 각 면은 동 네마다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면서 시위운동을 하였다. 4월 6일 오후 3시경에 고현면 포상리에서는 다시 700여명의 애국 군중이 재차 봉기하여 이곳 산상에서 독립만세를 고창 한 후 남해읍을 향하여 시위를 전개하였다. 남산에 있는 남해3.1독립운동기념비는 1968년 3월 1일에 세웠고 독립유공자명단은 다음과 같다 이예모, 정흥조, 정몽호, 정임춘, 윤희도, 정용교, 하상근, 윤주순, 정재모, 양태환, 정순조, 강한문, 하준호, 정갑린, 원복상, 유승운, 박내규, 정익주, 이찬덕, 김희조, 정학순, 유찬숙, 양재문 등 23명이다. 설천 문항에는 1985 년도에 남해3.1독립운동발상기념비를 세웠다. (5) 이동면 난음리 관방성비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난음리 규 모 : 1기 시 대 : 조선시대 관방성비는 강희 44년(1705)에 건립되었다. 난곡사 뒤편 노거수 아래에 관방성이라는 사 실을 고증하는 비가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관방성을 장성(남해장성)이라 칭하고 1996년 3

111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97 월 11일에 경상남도기념물 제154호로 지정하였는데 장성(이동 화계 ~ 삼동 대지포)과 장성 의 중간 지점인 삼동 봉화에서 수장포로 축성된 성곽을 두고 관방성 혹은 마성 이라는 논쟁 이 있었다. 그래서 강희 44년(1705)에 전만호 정양길, 유학 정효영, 최준걸 등이 조정에 건의하니 조 정에서는 사관으로 사천현 조영유석과 고을태수 김만상이 김목관이 되어 난포현을 살펴보고 마성이 아니라 관방성임을 밝혀 조정에 보고한 사실을 기록한 비문이다. 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지에 상고해 보면 신라 경덕왕 때 난포에 내포현을 설치하였다. 그 당시 삼국이 각기 서로 침벌하 고 군, 현에 군사들이 각자 살아감을 꾀하기 위하여 혹, 산봉우리에 산성을 쌓아 도적을 피한 흔적이 있 으며 바닷가에도 그러한 흔적이 있다. 남해는 동,서로 양분해서 적을 막는 곳이 있는데 난포에서 유천까지 돌로서 일자성을 쌓았는데 처음과 끝이 해변에 이르렀고 길이는 5 리를 넘었으며 그 이름을 관방성이라 하였다. 성의 북쪽에 병사성이 있 었고 그 허리 중간 최고 처에 성현보가 있으며 보 남쪽에 연기를 피워 올려 보고하고 경계하는 곳이 있 었고 성안의 북으로는 난포현, 남쪽으로 상주현이 있고 동쪽으로 미조항에 수영이 있었다. 서로 각 머리 는 관방성에 닿았고 한쪽은 대지포 해변으로 들어가고 한 곳은 수장포 해변으로 들어갔는데 그러한 성 이 남해에 있는데 어느 임금 때 어느 해에 쌓았는지 모르겠다. 그 안에 소금산, 동천, 고천, 적량 등이 있다. 그 곳에 전답이 있었는데 태복이 점유하여 변방에 있는 백 성은 원통을 신원하지 못하고 앉아서 수 백 년 동안 전해오는 전답을 잃어 버렸다. 지금까지 원통한 것 이 골수에 빼어들고 슬펐으나 태복에서는 빼앗은 것이 충속이 되어 흥선에서 거두는 것을 본 받아 염치 없는 욕심을 나타냈다. 또한 도적을 막는 관방성을 마성이라 하여 그 안에 있는 전답을 모두 빼앗을 계 책으로 태복에 거짓으로 보고하니 태복에서는 말 점호하는 부하 직원들을 보내 백성을 살피지 않고 다 만 부역만을 주역으로 삼는 것은 나라 임금을 속여 태복으로 삼으려는 계책이었다. 도리 아닌 짓을 한 것에 읍인 전만호 정양길, 유학 정효영, 최준걸 등이 슬퍼하여 나라에 호소하니 나라 에서 허락하여 본도에 특별한 강명관을 시켜 그 곳에 가서 조사하여 조치하라고 하니 사관으로 사천현 조영유석이 실제로 주장하고 고을 태수 김만상이 감목관이 되어 김중임과 같이 난포현에 가서 성을 서 너 번 순찰하여 살펴보니 도적들이 닿았고 관방한 것을 알아 결국은 마성이 아니고 관방성이란 것을 알 았다. 사관은 다 같이 상부에 이 사실을 보고했다. 다음해 정월 일에 최준걸이 두 번째 상경하여 원통함을 영의정 신상국 앞에 실상을 폭로하니 영의정으 로부터 그렇게 하라는 허락을 받았다. 변방 백성은 옛 물건과 전답을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우리 변방이 두 번째 살아 난 것이 이때부터이므로 영의정 신상국의 백성 사랑과 사관의 강명과 목관의 공정함을 영 원히 잊지 않기 위해 돌을 깎아 세웠다. 강희44년(1705) 을유 11월 28일 기 서 유학 강적조 일면풍헌 하윤옥 도감유학 강 수 편수각 승 법 수

112 1298 남해군지 (6) 창선 감목관비군 소 재 지 : 남해군 창선면 오룡리 면민동산 규 모 : 11기 시 대 : 1722년 ~ 1908년 (1)유태웅선정비( 劉 泰 雄 善 政 碑. 1722년) (2)안경휼민선정비( 安 暻 恤 民 善 政 碑. 1981년) (3)이희오선정비( 李 羲 午 善 政 碑. 1822년) (4)김동람애민선정비( 金 東 覽 愛 民 善 政 碑. 1783년) (5)박민엽거사비( 朴 敏 燁 去 思 碑. 1783년) (6)김목순영세불망비( 金 穆 淳 永 世 不 忘 碑. 1853년) (7)김사묵영세불망비( 金 思 黙 永 世 不 忘 碑. 1908년) (8)정덕용불망비( 鄭 悳 鎔 不 忘 碑. 1908년) (9)장준선지성구 ( 張 俊 善 至 誠 救. 1727년) (10)심정고구폐불망비( 沈 正 考 捄 弊 不 忘 碑. 1867년) (11)원현창구폐선정비( 元 顯 昌 捄 弊 善 政 碑. 1881년) (7) 고현 이어 불망비군 소 재 지 : 남해군 고현면 이어리 규 모 : 5기(불망비4기, 시혜비1기) 시 대 : 1531년 ~ 1912년 (1)정씨시혜비( 鄭 氏 施 惠 碑. 1912년) (2)박준성영세불망비( 朴 準 成 永 世 不 忘 碑. 1531년) (3)정만석휼민불망비( 鄭 晩 錫 恤 民 不 忘 碑. 1884년) (4)조석우영세불망비( 曺 錫 雨 永 世 不 忘 碑. 1861년) (5)이한창구폐불망비( 李 漢 昌 捄 弊 不 忘 碑. 1784년) (8) 망운산미공군전공기념비 소 재 지 : 남해군 서면 망운산 옥조봉 규 모 : 1기 시 대 : 근현대(1956년)

113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99 정상에서 내려와 연대봉 중간쯤 되는 남쪽 방향 아래 옥조봉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군과 싸우다 전사한 미국 공군의 전공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2차 세계대전이 치열하였던 1945년 8월 7일 밤 전남 여수시에 있는 일본군 진지를 폭격한 미 공군 B-24 폭격기 레이 디. 럭2호가 일본군의 고사포에 왼쪽 날개를 맞고 저공비행하여 공군 기지로 돌아가던 중 망 운산 운남골( 雲 南 谷 ) 산 중턱에 부딪혀 미 공군 대위 에드워드B 밀즈 2세를 비롯하여 11명 의 장병이 전사를 하였다. 군사 전문가가 주장하는 이 사건 분석 내용은 다르다. 일본은 이미 패망에 이르렀고 원자 탄이 투하된 이후이기 때문에 고공 폭격기인 B-24가 동원된 대규모 폭격은 한반도에 없었 기 때문에 이 비행기의 주 임무는 폭격이 아니라 정찰 비행이었다는 것이다. 추락 원인도 고 사포 공격이 아니라 계기 조작의 잘못이라는 점이다. 미공군기 추락 이튿날 향토인 김덕형씨의 노력으로 시신과 유품을 수습하여 매장해 주었 고 그 후 김덕형씨와 박진평씨(1958년 작고)가 기념비 건립을 위해 노력한 결과 11년 후인 1956년 5월에 308cm의 높이의 자연암에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쓴 글씨로 미공군전공기 념비 를 세웠다. 비의 상단부는 130cm로서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휘호로 새겨져 있고 하단부는 너비 약 162cm, 높이 약 178cm의 영문으로 새겨져 있다. 태평양전쟁 기간 동안 맥아더 장군과 트루만 미대통령의 지도 아래 일본군의 침략에 대항하여 정의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전투를 수행하던 11인의 미 공군 용사들이 1945년 8월 7일 여기서 전사하다. 우리 는 그 용감한 전사들을 기억하고 그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서 이 기념비를 엄숙하게 제작 한다 11인의 공군용사는 다음과 같다. 에드워드 B밀즈 JR, 로날드 L존슨, 조셉 M 오랜비치, 니콜라스 M 시모니치, 헨리 C 루페르트, 토마스 G 버른위스, 제임스 E 머레이, 존 F 레그나울트 JR, 월터 R 후버, 위렌 E 티츠워스, 스티븐 T 월 리스 시체매장인 김덕형 / 설립자 김덕형, 박진평 / 후원자 김종남 건립일1956년 5월 대한민국 경상남도 남해군 기념비 건립은 1956년 5월에 완료하고 그 해 11월 30일에 제막식을 가졌다. 제막식 때 미 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특사를 보냈고 우리나라 1차 교육 과정기(1954년~1963년) 초등 학교 6 학년 교과서(1858년 발행) 내용에도 있다.

114 1300 남해군지 (9) 이동 난음 축마비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난음리 1128번지 규 모 : 1기 시 대 : 조선시대(1655년) 임진왜란으로 전국 각지에 있는 목장에는 말이 거의 없었고 금산 목장에도 말이 없었는데 흥선도에 있는 말을 금산 목장으로 백여 필을 옮겼다. 그 곳 백성들이 피해를 입어 백성들이 진정을 하니 도관찰사가 장계를 올려 말을 흥선도로 돌려보냈다는 내용의 축마비가 순치12 년(1655)에 남해군 이동면 난음리에 세워졌다. 효종 5년(1654)에 상소문에 대하여 내린 비답으로 아뢴 일은 해조로 하여금 의처( 議 處 ) 하게 하겠다고 고대명( 高 大 鳴 ) 등의 상소에 대해 답변하였고 효종 8년(1657)에 대한 상소문 역시 해조( 該 曹 )에서 의논( 議 論 )하여 처리하도록 하겠다는 정주장( 鄭 周 章 ) 등의 상소에 대해 비답하였다. 이동면 난음리 축마비( 二 東 面 蘭 陰 里 逐 馬 碑 ) 순치12년(1655) 이동면 난음리 1128번지 황문찬씨댁 마당에 축마비 자연석 기단부가 있다. 비석은 없어지 고 기단부만 있는데 기단부에 새겨진 내용은 이듬해 흥선에 있는 말 백여 필을 이 산(금산) 으로 옮겨서 목장( 牧 場 )하고 그 산의 적송재를 불 지르니 백성들이 말떼의 피해를 입어 그 생업을 잃고 1년 사이에 여러 사람들이 근심하고 떠돌며 서로 흩어지는 자가 태반이고 이고 지고 길을 떠나가니 고을이 장차 비게 되었다 이다. 갑오년(1654) 가을에 고을 사람 전 찰 방 고대명( 高 大 鳴 ), 유학 정주장( 鄭 周 章 ), 윤귀승( 尹 貴 承 ) 등의 진정과 도관찰사가 장계를 올 려 을미년(1655) 봄에 말떼를 다시 흥선 옛 땅으로 돌려보냈다는 기념비이다. 이 비는 세운지 178년이 지나자 풍우에 씻기고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세우게 되는데 이동면 무림리 현 시장 내에 축마비를 다시 세웠다. 역문한 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해현은 벽지( 僻 地 ) 바다 속에 있는 섬으로 금산이 그 가운데 있고 그때(고려 말)는 독립한 현( 縣 )이 아 니고 일보( 一 堡 )였으며 금산에는 군마( 群 馬 )를 놓아 먹였다. 산은 험하고 송재( 松 材 )가 많았으며 민전( 民 田 )이 그 사이에 끼어 있고 목초가 무성했다. 조선 초에 하남현이라 칭하고 현령을 배치했는데 말 떼가 전야를 침범하여 농작물에 큰 피해가 있어 목 마를 흥선도로 옮겨 보내고 황전을 개척하고 송재를 길러서 병선용재( 兵 船 用 材 )에 대비했으며 백성이 즐거이 농업에 종사해 왔다.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고 조정의 국방계획의 일환이었다. 이렇게 근 이백년을 내려왔는데 순치말진( 順 治 末 辰. 1655년)에 흥선도 목자( 牧 子 ), 목관( 牧 官 ) 등이 국 방의 중요성을 모르고 모략을 꾸며 타도( 他 島 )에 목마를 쫓기 위해 점마신( 点 馬 臣 )에게 호소하여 그 익 년(1656년)에 말 백 여필이 다시 우리 고을로 옮아온 때문에 전토( 田 土 )에 피해가 막심하여 농민들은

115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01 그 업을 잃고 남부여대( 男 負 女 戴 )하여 타읍( 他 邑 )으로 이산( 離 散 )해 가는 자가 속출해서 1년 동안에 태 반이 줄었고 읍( 邑. 난음리)은 폐허되었다. 갑오( 甲 午. 1654년)년 가을에 읍의 전찰방( 前 察 訪 ) 고대명( 高 大 鳴 ), 정주장( 鄭 周 章 ), 윤귀승( 尹 貴 承 ) 등 이 규합( 呌 閤 ) 진정해서 조정에 건의하여 을미( 乙 未. 1655년) 봄에 그 목마( 牧 馬 )를 다시 흥선도로 되쫓 았다. 우리 현령이 다방면으로 홍보 활동을 하고 주장한 공은 후세민이 길이 잊지 않고 칭송해야할 것이다. 그때의 현령은 이후홍규( 李 候 弘 奎 )인데 정의를 숭상하고 절개가 굳세며 직무에 충실한 이로 난곡사( 蘭 谷 祠 ) 옆 비명에 첨피금산( 瞻 彼 錦 山 ) 능극우천( 崚 極 于 天 ) 아후지덕( 我 侯 之 德 ) 여지제언( 與 之 齊 焉 ) 이라 찬양하였다. 감찰방( 監 察 訪 ) 고대균( 高 大 鈞 ), 향소( 鄕 所 ) 박이직( 朴 而 直 ) 등이 순치12년(1655) 을미 12월에 난곡사 옆 비를 건립했는데 박인걸( 朴 仁 傑 )은 짓고 유학( 幼 學 ) 고문환( 高 文 煥 )이 썼다. 이 비가 오래되어 각자( 刻 字 )가 불명( 不 明 )해진 고로 고우명( 高 友 明 )이 영세불망( 永 世 不 忘 )의 비명이 소 멸됨을 안타까이 여겨 분연히 뜻을 결( 決 )하고 비를 다시 건립키 위하여 현령의 허락을 얻고 향당( 鄕 黨 ) 과 의논해서 새로 세웠는데 그 뜻이 얼마나 아름답고 장하랴! 이 고우명( 高 友 明 )은 전 고찰방( 高 察 訪 )의 육세손이고 당시의 태수는 유후상표( 柳 候 相 杓 )라는 이었다. 도광( 道 光 )13년(1833) 계미 4월 10일 유학 하길원 근발( 幼 學 河 吉 源 謹 跋 ) 유학 하백원 근서( 幼 學 河 百 源 謹 書 ) 향소 이경문 감( 鄕 所 李 慶 文 監 ) 고창성( 高 昌 聖 ) 무진 3월 다시 세우다 유사 박재찬 고명학( 有 司 朴 載 燦 高 明 鶴 ) (10) 미조 무민사 첨사비군 소 재 지 : 남해군 미조면 미조리 무민사 규 모 : 7기 시 대 : 조선시대 (1)절충장군행첨사최공종림거사비( 折 衝 將 軍 行 僉 使 崔 公 琮 林 去 思 碑 ) (2)절충장군행첨절제사권공희학불망비( 折 衝 將 軍 行 僉 節 制 使 權 公 喜 學 不 忘 碑 ) (3)통정대부돈녕도정권공선복불망비( 通 政 大 夫 敦 寧 都 正 權 公 先 福 不 忘 碑 ) (4)행첨사이공중길 ( 行 僉 使 李 公 重 吉 ) (5)행첨사장공문 선정비( 行 僉 使 張 公 文 善 政 碑 ) (6)전첨사김공우고선정비( 前 僉 使 金 公 友 皐 善 政 碑 ) (7)가선대부행첨사김공춘복영세불망비( 嘉 善 大 夫 行 僉 使 金 公 春 復 永 世 不 忘 碑 ) (11) 현령 김후지도 몰세불망비 소 재 지 : 남해군 고현면 오곡리 규 모 : 1기

116 1302 남해군지 시 대 : 조선시대(숙종28년) 가청 고개 북동쪽의 농공단지 뒤쪽 산 능선 아래 좁은 길목에 글씨가 새겨진 자연암 이 능선 아래쪽에 비스듬히 반쯤 땅에 묻힌 채 전면이 땅속에 있고 후면이 하늘을 향하여 방 치되어 있던 것을 농공단지 부지 정리 때, 19번 국도변에 옮겨 놓았다. 그 후 1993년도에 남해문화원에서 비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현재 입석되어있는 농공단지 입구로 옮겼다. 현령 김지도는 숙종 25년(1699) 12월 22일에 남해 현령으로 부임하여 숙종 28년(1702) 5월까지 2년 5개월 동안 현치( 縣 治 )하였다. 불망비는 숙종28년(1702. 강희41)에 현령 김지도가 남 해를 떠난 3개월 후인 8월에 세웠다. 사암제의 암괴에 수( 首 )와 비신( 碑 身 ), 비대( 碑 臺 )를 일 매석의 마애비( 磨 崖 碑 ) 형식으로 새겼다. 縣 令 金 侯 志 道 沒 世 不 忘 碑 康 熙 四 十 一 年 八 月 日 建 7) 도요지 (1) 대곡리 자기요지 소 재 지 : 남해군 고현면 대곡리 규 모 : 삼봉산하 남쪽 말단 시 대 : 조선시대(16세기) 고현면 대곡리 현촌 고개에 있는 요지로 대곡리 자기요지의 구릉에 사면에 입지하고 있다. 대곡리 자기요지는 삼봉산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구릉의 남쪽 말단 사면에 위치한다. 남쪽 으로 마주보는 증본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구릉을 마주보고 있고 이들 구릉 사이에는 소규 모의 침식평야가 발달하여 약간의 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유적 바로 앞으로 고현면 대 곡리와 중현리를 동서로 잇는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화방사로 향하는 도로와 정포리, 중현리, 대곡리로 가는 도로의 교차점으로 교통의 요지에 해당되는 곳이다. 요지는 절토된 단면과 밭 주변에 자기편들이 산재해 있어 도로의 개설과 경작, 그리고 가옥이 들어 서면서 가마의 대부분은 파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빠른 시일 내에 조사를 통하여 남아 있 는 요지의 범위를 확인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대곡리 자기요지와 비슷한 양상으로 유물 이 출토되고, 위치적으로도 가까이에 있어 같은 요장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으로 판단된다. 수습유물로는 분청자기, 백자, 가마벽체, 요도구(도지미) 등이다. (2) 현촌리 자기요지

117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03 소 재 지 : 남해군 서면 현촌리 규 모 : 삼봉산하 남서쪽 구릉 시 대 : 조선시대(16~17세기) (1)유적의 위치와 현황 서면 현촌 마을 계제곡에 자리하고 있는 이 요지는 대곡리 자기요지에서 북서쪽으로 약 15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삼봉산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구릉 경사면의 남서쪽 말 단부에 위치하는데 앞선 대곡리 자기요지와 떨어진 거리는 200m이내지만 가마가 위치한 공 간은 앞의 두 요지와는 구별된다고 하겠다. 낮은 구릉에 들어선 요장으로 추정되는 곳의 앞 쪽으로 가옥이 들어서있고, 농작물이 경작되고 있는 상태이기에 일부는 훼손되었으리라 판 단된다. 주택 축대와 축대 사이, 밭 그리고 절토된 단면에서 다수의 도편이 확인되며 현촌리 계제곡 전 지역에서 자기편이 수습된다. 유물의 특징으로 보아 인근의 대곡리 자기요지와의 관련성 등을 연구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위치상으로 고현면 앞바다와 서면 앞바다로 통 할 수 있는 중간 고개 마루의 중요한 교통로에 자리하고 있어 생산된 자기를 수송 할 수 있 는 최적지를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수습유물로는 분청자기, 백자, 가마벽체, 요도구(도지미) 등이다. (3) 이어리 청자요지 소 재 지 : 남해군 고현면 이어리 규 모 : 강수산 말단부 경사면 일대 시 대 : 고려시대(11~12세기) 고현면에서 남해읍으로 가는 1024지방 국도를 따라 가다보면 오른쪽에 있는 강수산의 말 단부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고현면의 남쪽에 있는 관대봉에서 북서쪽으로 발달 하는 구릉의 북동쪽 사면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대부분의 요지가 구릉의 남쪽 사면이나 남서 쪽, 도요지는 남동쪽 사면에 위치하는 점을 고려하면 그 위치는 이례적이다. 우리나라는 겨 울에 북서풍이 강하게 불어오므로 이 바람을 막기 위해서 남쪽 사면이나 남동사면을 이용하 여 가마를 조성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기 때문이다. 이 유적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요지로 계곡부 사면 위치하며 지표에서 소토와 다수의 도편 등이 확인된다. 주변에는 지금 은 사용하지 않은 주민 운동장인 배구장과 민묘 몇 기가 위치하나 요지는 훼손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 일대에 대한 발굴 조사를 실시한다면 정확한 요지의 분포 범위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118 1304 남해군지 수습된 유물의 양이 많고 동일 시기의 다른 가마와 유사한 특징을 보이 며 요도구나 가마벽체 등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일정기간 지역의 수요를 담당하기 위해 가마를 설치, 운영한 곳으로 추정한다. 수습유물로는 청자, 가마벽체, 요도구(도지미) 등이다. (4) 불무골 자기요지 소 재 지 : 남해군 서면 정포리 규 모 : 정포리 불무골 또는 사기장골 시 대 : 조선시대 불무골 자기요지는 서면 정포리에 위치하며 불무골 사기장골 이라 불리는 곳이 다. 불무골 역시 행정구역상 서면에 속하나 고현면과 근접하고 남해군 문화유적분포지도 조 사에서 확인된 바 있으나 구체적인 유적확인을 위해 재조사를 실시하였다. 정포 마을에서 진지리 패총 방향으로 가는 해변도로를 따라 1km가량 진행하면 불매골 농장이 보이는데 이 농장이 위치한 능선에 요지가 있다. 요지는 앞서 조사된 대곡리 자기요지나 현촌리 자기요 지, 그리고 이어리 청자요지와 공간적 특징이 전혀 다르다. 그리고 정포리 일원은 현촌리에 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경사면을 따라 내려가면 도달하는 포구가 발달 되어 있고 지금도 배가 정박하고 있는 지역이므로 현촌리나 대곡리에서 생산된 자기들이 계곡을 흐르는 물길을 이 용하여 정포로 옮긴 뒤에 이곳 정포에서 물길을 따라 수요지로 수송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불무골이 라는 명칭도 불무 는 불못 즉 불로서 큰 못을 이룬 것을 나타내는 말로 당 시 이 일대에서 자기 가마나 제련로가 있던 것을 우리말로 표현한 것으로 추정하며, 현재는 축사가 있고 주변 능선은 계단식 밭으로 모두 개간되어있는 상태이다. 남해군 문화유적분포 지도조사 결과 경사면에 위치한 등요와 주변에서 다수의 분청자편과 초벌구이한 자기편, 소 토 등이 확인되었다고 하나, 현재는 축사의 범위가 넓고 주변의 계단식 밭이 재정리 되어있 어 유물이 수습이나 유구의 범위 확인 등을 할 수 없었다. (5) 달실 옹기요지 소 재 지 : 남해군 고현면 갈화리 달실 규 모 : 달실 골무정 초입 시 대 : 조선시대(18~19세기)

119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05 달실 옹기 요지는 고현면 갈화리 달실 마을에 위치하며, 골무정골 초입의 옹기점이라 불리 는 곳이다. 사학산에서 북쪽으로 발달하는 구릉 말단부의 서쪽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은 상당히 경사가 급한 지역으로 북쪽으로 열린 U자형 지형의 동쪽에 해당되며 계곡의 중앙으로 바다 쪽을 향하여 길이 나있다. 요( 窯 )는 밭으로 개간되고 인근에 민가가 들어서면 서 대부분 파괴되어 흔적을 확인 할 수 없었다. 주민 전언에 의하면 개간 당시 상당수의 벽 체 편과 동전( 銅 錢 )이 출토되었다고 하는데, 그 행방은 알 수 없다. 지면과 출토 유물 등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시대 후기의 민수용 옹기를 제작. 판매하던 곳으로 추정되나, 수습된 유물 의 양이 작아 구체적인 시기는 판단하기 어렵다. 수습유물은 옹기편이다. (6) 물뫼 도기요지 소 재 지 : 남해군 창선면 부윤리 규 모 : 부윤 물뫼일대 부 속 물 : 동대만 시 대 : 근대(20세기) 관 리 자 : 토지소유자 물뫼 도기요지는 창선면 부윤리 369번지에 위치한다. 창선도는 동대만을 사이에 끼고 양 분되어 섬이 나누어지는데 창선도 동쪽의 아래쪽에 위치하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창선면 수산리와 상죽리의 경계를 이루는 지역으로 얕은 구릉을 이루고 있으며 주변에는 침식 평야 가 발달하고 있는데 창선면의 동서를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로서 거쳐야 하는 곳이다. 유적 주변일대는 대부분 논밭으로 개간되어 도로를 중심으로 일부 민가가 형성되어 있다. 유적 이 위치하는 곳은 나지막한 구릉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구릉일대는 5세기를 중심으로 하는 고분군과 옹기요가 분포하고 있음이 이미 확인된 지역이다. 고분군이 형성된 구릉의 남동쪽 사면은 과수원으로 개간되었는데 과수원 주변 일대와 과수원 조성 시 단을 지워놓은 단의 면 에서 적갈색 계통의 도기편과 가마벽체 등이 다수 수습되었다. 유적은 과수원으로 개간되면 서 이미 상당히 훼손된 것으로 보이며, 지형적으로 가마는 구릉을 의지하여 조성된 등요였 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습유물은 도기 등이다. (7) 큰 독개골 소 재 지 : 남해군 창선면 가인리 522번지 규 모 : 가인리 큰 독개골 구릉일대

120 1306 남해군지 시 대 : 고려시대 추정 큰독개골 요지는 창선면 가인리 522번지에 위치한다. 동대만을 사이에 끼고 양분되는 오른쪽 지역의 북쪽 큰 독개골이라는 소만의 북동쪽에 접한 구릉에 입지하고 있다. 현재 가 마가 확인되는 지역 주변으로 해식애가 발달하여 배가 접안하기 어려운 지역이지만 큰독개 골이 위치하는 소형만은 서쪽으로 여러 배의 접안이 비교적 용이할 것으로 판단되어 이 지역 에 가마를 조성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한편 큰 독개골이라는 명칭은 대형의 독을 (큰 독) 만드는 바다에 (개) 접한 골짜기(골)라는 뜻으로 해석 할 수 있어 이곳에서는 대형의 독만 전문적으로 생산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으로 연결되는 구릉은 경사도가 급한 편이라 만에 완만한 구릉의 말단 일부에서 요업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 된다. 정 확한 요의 위치는 확인 할 수 없었으나 다량의 가마 벽체가 발견되어 이 일대에 가마가 조성 되었던 것을 확인 할 수 있고 이 일대에 대한 발굴 조사를 실시한다면 정확한 가마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건조 시 드러난 해안 바닥에서 벽체와 도기편이 다량 수습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조업 당시보다 현재의 해수면이 높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고 바다와 인접 한 구릉 사면에 위치한 가마가 훼손되면서 지상으로 드러난 도기편과 가마벽체가 경사면을 따라 내려 왔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수습 유물로는 도기, 가마벽체 등이다. (8) 서대 자기산포지 소 재 지 : 남해군 창선면 서대리 규 모 : 서대리 배방산 일대 부 속 물 : 고려청자, 조선백자 수습 시 대 : 고려 ~ 조선시대 서대 자기 산포지는 창선면의 서쪽 서대리에 위치하며 배방산의 북쪽에 해당되며 지족리, 광천리를 지나 사천 방향으로 북상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곳이기도 하고 서쪽으로 열린 포 구인 점을 감안하면 이 일대에서는 교통의 요지에 해당한다. 서대 마을은 북쪽의 조금산과 남쪽의 배방산 사이에 이루어진 소형의 침식 계곡 사이에 형성된 침식평야를 배후로 남쪽으 로 이어지는 완만한 경사면에 위치해 있는데 밭과 분묘가 들어서 있어 이미 가마의 상당부분 은 훼손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남해군 문화유적분포지 조사 시 수습된 유물 중 분청자편 은 신흥리 앞 바다에서 인양된 자기류와 동종의 것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였는데 이번 조사에 서는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주변으로 여러 시기의 도편이 섞여 수습되는데, 가마 벽 체나 요도구 등이 발견되지 않아 현재로서는 유물 산포지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

121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07 다. 수습 유물은 청자, 백자, 옹기 등이다. (9) 신흥리 자기산포지 소 재 지 : 남해군 창선면 지족리 신흥마을 규 모 : 신흥마을 앞바다 시 대 : 조선시대 창선면 지족리 신흥 마을 앞 바닷가로 현재 선착장이 있는 주변으로 많은 자기편들이 수 습되고 있으며 일부는 남해향토역사관에 보관중이다. 어로 행위 혹은 파도에 의해서 밀려온 유물로 생각되며 근처에는 굴강 유적이 확인된다. 이곳은 해안에 암반이 돌출하여 포구가 들어서는 어려운 지역이므로 대개 가마가 교통의 요지에 들어선다는 점을 참고하면 이 일대 의 지표조사에서 가마벽체나 요도구의 파편이 전혀 확인되지 않아 가마가 조성되었던 지역 으로 보기는 어렵고 신흥리 앞 바다가 중요한 연안 항로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비 교적 부피가 큰 자기나 옹기 등은 반드시 선박을 이용하여 운송하였으므로 불의의 사고로 배 가 침몰하면서 선적되어 있던 자기가 바다 아래로 가라 앉아 있다가 어로 활동이나 태풍 등 으로 발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해역에서 자기가 인양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경상남도와 우리 경남문화재연구원에서 해저면 탐사 조사를 실시하였는데 뚜렷한 성과는 없었다. 덧붙 여 둘 것은 앞서 주변 유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사천 송전리 분청자요에서 수습된 분청자 와 유사한 부분이 있으므로 유물과의 상관관계와 이동경로 등도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다. 수습유물은 분청자, 백자, 옹기 등이다. (10) 독망골 청자요지 소 재 지 : 남해군 창선면 수산리와 상죽리 경계지역 규 모 : 독망골 시 대 : 고려시대(11~12세기) 독망골 청자요지는 물뫼 옹기 요지를 지나 창선 목장 감목관 선정비군 앞에서 보현사 방향 으로 우회전하여 500m가량 진입한 곳에 위치한다. 나지막한 언덕 구릉부에 위치하며 현재 는 민묘가 들어서 있고 일부는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이 지역은 창선면 수산리와 상죽리의 경계를 이루는 지역으로 얕은 구릉을 이루고 있으며 주변에는 침식평야가 발달하고 있는데 창선면의 동서를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로서 가인리나 오룡리에서 동대리나 당항리를 거쳐 삼천포 지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도편은 남사면 일대에 고루 분

122 1308 남해군지 포하고 있으며 도지미와 가마벽체도 확인된다. 요지의 위치는 골짜기 사이로 추정되지만 현 재 진입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도편의 양이 매우 많고 넓게 분포하고 있는 점이나 도요 도구 인 도지미가 확인되는 점, 구릉의 남사면에 위치한 점 등으로 이 지역 일대에 요지가 위치하 였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수습 유물은 청자(대접 접시 완 잔), 가마벽체, 요도구(도지미) 등이다. (11) 부윤리 자기산포지 소 재 지 : 남해군 창선면 부윤리 규 모 : 죽산마을 방파제 좌측 계곡 시 대 : 고려시대 유적은 창선면사무소에서 물뫼 도기요지 방향으로 진행하다 죽산 마을(대산골 마을)방향 으로 우회전하여 500m 가량 진입하면 방파제가 나오는데 방파제를 따라 가면 좌측 계곡부 에 위치한다. 계곡부는 이미 밭과 논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남쪽 사면은 도로개설 공사로 인 해 깎여 나간 상태이다. 유적은 구도성( 龜 島 珹 )과 마주보는 해안가로 창선면의 가장 남쪽에 위치하며 주변에 해식애가 발달하여 배를 접안하기 어려운 지형이지만 자기 산포지가 위치 한 곳은 약간 만입하는 지형이며 외해의 파도를 막아주는 방파제 구실을 하여주기 때문에 포 구가 들어서기에 최적의 지형적 조건을 제공하고 있다. 이것은 요지가 상림과 태토를 확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생산된 자기를 운송로를 확보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조건이므로 그 런 점에서 남해는 가마를 조성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이라 할 수 있다. 계곡 사면에서 는 소량의 청자, 도기, 백자편들이 확인되었고 가마벽체도 소량 수습되었다. 요지 추정지는 해안가와 바로 접하고 있는데 물이 빠진 해안가에서 분청자편과 백자편도 일부 수습되었다. 도편의 양이 작아서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낮은 구릉의 사면과 해안가와 바로 접하는 위치적 특성으로 요지가 위치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지만 도로개설과 경작지 조성으로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수습유물은 청자(무문 상감), (시유)도기, 백자, 가마벽체 등 (12) 해창 자기산포지 소 재 지 : 남해군 창선면 당저2리 규 모 : 해창골 내피산 시 대 : 조선시대(19세기) 창선도의 해안 당저2리 해창골에 위치하고 있는 내피산과 이어진 작은 구릉 사면에 위치

123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09 하나 현재는 대부분이 밭으로 경작되어 원지형을 찾아보기 힘들다. 해창이란 명칭은 고려시 대 창선도의 각종 조세와 특산품을 모아 서울까지 해로로 운송하였다. 이때 거둔 조세와 특 산품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는데 이 창고를 해창이라 부르는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낮은 구릉 사면과 해안가와 바로 접하는 위치적 특성으로 요지가 위치하였음을 추정 할 수 있지만 경작지 조성으로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수습 유물은 백자, 옹기 등이다. 8) 자연지리 (1) 세존도 소 재 지 : 남해군 미조면 미조리 관 리 자 : 국립공원관리공단 한려해상관리사무소 옛날에 세존이 금산에서 성불하여 석주( 石 舟 )를 타고 쌍홍문을 통하여 이 섬의 한복판을 뚫고 지나가면서 섬의 중앙에 커다란 동굴이 생겼다고 한다. 이 섬은 무인도로서 암석으로 형성되어져 있고 암반이 하늘을 뚫을 듯 높이 솟아 있다. 남해에서는 옛날 비가 내리지 않아 기우제를 지낼 때에는 제일 먼저 남해의 진산인 망운산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그래도 비가 내 리지 않을 경우에는 제물을 준비하여 이곳 세존도에서 제를 올렸는데 그때에는 반드시 비가 내렸다고 하므로 세존도는 신성시하는 곳 중의 하나이다. (2) 금산 쌍홍문 소 재 지 :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관 리 자 : 국립공원관리공단 한려해상관리사무소 석가 세존이 금산에서 득도하여 돌로 만든 배 석주( 石 舟 )를 타고 인도로 가기 위해 무념무 상으로 걸어가는데 산이 가로 막고 있다가 갑자기 웅장한 바위에 무지개 같은 구멍이 생기면 서 석가세존의 길을 열어 주어 석가 세존이 그 곳을 통과하여 미조리의 도툼바리(울룩불룩형 의 반도)를 밟고 세존도를 통하여 인도로 갔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므로 쌍홍문에서 세존도 를 바라보면 구멍이 일직선이 되어있다. 쌍홍문은 남해 금산의 제1경이며 등산로를 통하여 올라오면 반드시 이곳을 통과하여 오를 수 있다. 쌍홍문의 앞에는 장군암이 있어 수문장의 역할을 하며 쌍홍문 안에는 구멍이 세 개 뚫어져 있는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그곳에 돌을 던져 구멍에 들어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다.

124 1310 남해군지 (3) 금산 상사암 소 재 지 :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관 리 자 : 국립공원관리공단 한려해상관리사무소 옛날 어떤 고을에 곱게 자란 무남독녀를 가진 부자가 많은 하인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 하인들 중에 돌쇠라는 하인이 주인의 딸을 무척 사랑하고 있었지만 신분의 차이로 마음만 태 우고 있다가 그만 병이되어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시들시들 앓다가 죽고 말았다. 며칠 후에 돌쇠의 혼이 뱀으로 변하여 어느 날 밤에 딸이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가 딸의 몸을 칭칭 감 고 말았는데 뒤 늦게 이것을 본 부모는 어쩔 줄을 몰라 굿을 하였으나 뱀은 떠나지 않고 딸 의 몸에서 떼어내려 해도 떨어지지를 않아 몹시 걱정을 하고 있던 중 어느 날 수염을 길게 한 노인이 부잣집에 나타나 금산에 있는 높은 벼랑에서 굿을 해 보라고 하며 어디론가 사라 져 버렸다. 그래서 부모는 뱀이 감고 있는 딸을 데리고 금산에서 제일 높은 벼랑위로 가 굿 을 시작하였다. 굿이 진행되자 딸의 몸을 칭칭 감고 있던 뱀이 서서히 풀어지면서 뱀이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 후 사람들은 그 벼랑을 상사바위라고 부르기 시작 하였고 지 금도 상사바위라고 부르고 있다. 또 하나는 전설은 조선 숙종 때 전라남도 돌산에 살고 있던 어떤 한 사람이 남해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는데 그가 살고 있는 안집 여자가 너무나 아름다 워 그만 상사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 후 둘이 이 바위에서 상사를 풀게 되어 목숨을 건졌다 는 낭만적인 야화가 깃들어 있는 바위이다. (4) 금산 송악 소 재 지 :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산257-3 규 모 : 높이 6~8m, 둘레(밑부분)25~47cm 관 리 자 : 국립공원관리공단 한려해상관리공단 남해금산(명승 제39호) 쌍홍문 입구 장군암에 자생하고 있는 송악은 드릅나무과에 속하는 덩굴식물로 줄기 둘레가 최고 45cm, 최저 21cm, 높이 약7~8m나 되는 상록수이며 줄기마 다 많은 기근이 나와 바위나 나무에 붙어 오르면서 자라며, 수분을 많이 필요로 하는 식물로 서 공중 습도가 높은 곳에서 자생할 뿐 아니라 우리나라 남쪽 지방에 자생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 이 송악은 200여 년 전 쌍홍문 앞 장군암 절벽에 어느 고승이 심었다고 전하며 잎은 어긋나 있는 사철나무로서 잎살이 두껍고 표면은 광택이 나며 잎 모양은 난형으로 3~5갈래 얕게 갈라져 있고 길이는 3~6cm, 폭2~4,cm. 가장자리는 밋밋하고 잎자루는 2~5cm쯤 된

125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11 다. 꽃은 황록색으로 여러 개가 둥글게 모여서 10~11월에 산형으로 피며 5수성으로 지방은 하위이다. 이 송악은 담장나무, 상춘, 토고 용인이라고도 불리며 지혈, 항경련 작용, 백일해 등 약용으로 쓰이고 있다. (5) 망운산 소 재 지 : 남해군 남해읍 아산리 규 모 : 해발 785m 부 속 물 : 기우제단터, 성혈, 미공군전물유허, 봉수대, 지척측량중심석, 망운암 남해군의 진산인 망운산은 남해군에서 제일 높은 봉으로 역사 유적이 많은 곳이다. 정상 에는 기우제를 지냈던 흔적이 가로 5m, 세로 4.2m가 평평하게 북쪽을 향하도록 되어있고 옆에는 제관이 않을 수 있도록 돌로 된 의자가 놓여있다. 반대 방향에는 원형 (둘레2.5cm, 깊이10cm)의 성혈( 性 穴 )이 있는 것을 보아 민간인이 소원을 빌기 위해 치성을 드린 장소인 것 같다. 남해에 비가 오지 않을 경우 제일 먼저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그래도 비가 오 지 않을 경우 세존도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며 망운산 기우제의 축문은 자암집에 기록되 어 있다. 그리고 정상 반대편에 있는 연대봉( 煙 臺 峯 )또는 가매봉에는 봉수대의 흔적이 있다. 망운산 봉수의 설치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단종 2년(1454)에 남해 현의 망운산과 성현의 두 봉화는 긴요치 않으니 혁파하였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당시( 밤) 전남 여수시에 있던 일본군 진지를 폭격하던 미 공군B-29 폭격기 레디.럭H호가 일본군의 고사포에 왼쪽 날개를 맞고 기지로 돌아가던 중 망운산 남쪽 봉우리에 떨어져 공군 대위 에드워드B 밀즈 2 세를 비롯하여 12명의 장병이 전사한 것을 이튿날 향토인 김덕형씨와 박진평씨가 시신을 거 두어 들였고 11년 후인 1956년 5월에 높이 348m 지점에 미 공군전공기념비를 세웠다. 연 대봉 옆에는 1971년 4월 14일에 여수, 순천지역의 텔레비전 난시청을 해소하기 위해KBS 1, 2, 3TV 중계와 표준, 음악, 교육FM를 중계하는 여수방송국 망운산 중계소가 있다. (6) 고려대장경경 판각 추정지 대사마을 소 재 지 : 남해군 고현면 대사리 88번지 일대 규 모 : 마을 후 전답일대 고려대장경판의 판각지로 추정하고 있는 마을이다. 구전에 의하면 신라35대 경덕왕 때 승 전법사가 망덕사라는 절을 창건하였는데 화재로 소실된 것을 1216년에 원묘국사가 옛 터에 제자 원영( 元 瀯 )과 법안( 法 安 )을 시켜 80여 간을 중건하고 만덕사라 칭하였다고 하며 나라

126 1312 남해군지 에서 선사( 禪 師 )의 칭호를 받았다고 한다. 대사 마을의 유적이 있는 곳은 대사리 88번지 밭 이다. 이곳은 녹두산에서 길게 남으로 뻗은 능선으로 대사 마을의 북편에 해당한다. 유적은 이 능선중 해발 60~70m능선상이다. 또한 서쪽으로 길게 뻗은 능선은 종지 등으로 불리 우 고 있으며 종각( 鐘 閣 )이 있었다고 전한다. 88번지 주위에는 와편과 토기, 자기편이 산재하여 있다. 특히 88번지 석축 단면 하부에 매몰된 와층은 개간하기 위하여 축을 쌓아 매립한 지역 으로 고려시대의 막새 편과 잡석과 함께 1m이상 매몰되어있다. 여러 가지를 종합하여 볼 때 대사 마을에 규모가 상당히 큰 사찰이 고려대장경 판각 20여 년 전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대 장경 판각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아진다. (7) 관음포 소 재 지 :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 규 모 : 관음포 관음포라는 명칭은 고려시대 이전부터 불리어온 것으로 보인다. 관음포는 호국 성지라고 부를 수 있는 역사적인 곳이다. 첫째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국보 제32호인 고려대장 경판이 남해 고현 지역에서 판각 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근거는 고려대장경중 종경록 권 27에 정미세고려국분사남해대장도감 이라는 간기가 있고 정안( 鄭 晏.?~1251)이 사재 를 털어 남해에 정림사( 定 林 社 )를 짓고 고려대장경판 간행에 참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 며 경판 판각에 필요한 수 많은 목재를 운송하는 데는 해상 경로를 이용하기에 관음포가 가 장 적합한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둘째로는 고려 말 우왕 9년(1383)에 해도원수 정지( 鄭 地. 1347~1391)장군의 남해 관음포 대첩이다. 왜선 120척이 남해로 쳐들어옴으로 정지 장군 이 이곳 관음포에서 화포를 쏘아 적선 17 척을 불살라 버리니 이때부터 왜군은 감히 쳐들어 올 생각을 못했다고 하며 이때 사용한 화포는 최무선( 崔 茂 宣. 1326~1395)이 발명한 것으로 관음포에서 사용은 두 번째이고 이동하는 해상전투로는 첫 번째이다. 셋째로는 1592년부터 1598년 사이 일어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다. 관음포에서 임진왜 란의 종말을 짓는 노량해전이 1598년 11월 19일에 있었고 성웅 충무공 이순신 삼도수군통 제사가 나라를 구하고 순국하신 곳이다. 임종 전에 전방급신물언아사( 戰 方 急 愼 勿 言 我 死 ) 바야흐로 전쟁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 말하지 말라 라고 유언하였다. (8) 서호 장군터

127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13 소 재 지 : 남해군 서면 서호리 규 모 : 석축일부 서호 마을 뒤 산골에 대밭이 있고 큰 돌로 축대를 쌓아 집을 지었던 흔적이 있다. 그 터는 옛날에는 장군이 살았다고 하는데 그 장군이 조공선(세금을 모아조정에 바치는 선박)을 부채 로 부처서 이곳까지 불러 들여 약탈을 자주하기에 조정에서 군사를 풀어 그 장군을 잡게 하 였다. 그러자 장군은 지네로 변하여 주춧돌 밑에 숨어 있었는데 군사들은 이곳에 와서 장군 의 마누라를 잡아 어디에 있느냐고 고문을 하여도 큰 마누라는 죽어도 못 가르쳐 주겠다고 하여 군사들은 작은 마누라를 잡아 안 가르쳐 주면 죽이겠다고 하니 살려주면 대답하겠다고 하여 장군이 지네로 변신하여 주춧돌 밑에 숨어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군사들이 주 춧돌 밑을 살펴 끄집어내어 보니 아주 큰 지네였다. 군사들이 다시 작은 마누라에게 묻기를 이 지네를 어떻게 죽이느냐 하고 물으니 마누라는 짚신으로 밟아 죽이면 된다고 하여 그리하여 군사들은 그 지네를 짚신으로 밝아 죽였다는 전설이 있다. 이곳을 가르켜 현재에 는 장군터 또는 재앙구터 라고 부르고 있다. (9) 둔전 소 재 지 : 남해군 서면 동정리 규 모 : 서면 동정리 앞들 남해에 있는 둔전은 병사들의 군량을 경작했던 곳이라고 전하고 있다. 둔전제도는 고려, 조선시대에 각 지방에 배치한 주둔병( 駐 屯 兵 )의 군량을 지급하고 각 관아의 경비에 충당하 기 위하여 미간지를 개척하여 경작한 전답이다. 고려 숙종 이후에는 지방 관청의 경비에 쓰 도록 하는 관둔전( 官 屯 田 )과 주진( 州 鎭 )에 주둔하는 군대의 군량과 경비에 쓰게 하는 군둔 전( 軍 屯 田 )이 있었는데 사전겸병의 폐단도 많았다. 남해에 있었다고 하는 둔전은 조선 선조 때 영의정 유성룡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생각해 보건대,남해 지경은 땅이 넓 고 또 기름지며 주사( 舟 師 )가 그 앞을 막고 있으니 김해, 창원 및 좌우도의 적에게 함몰된 사 람이 스스로 빠져 나와서 돌아온 자를 모두 그 가운데 두고 부족하면 진주, 흥선(현 창선)등 지에 나누어 두며 농우와 곡종을 주어 각자의 생업을 가지게 하여 추수한 뒤에 혹은 그 3분 의1을 취하여 군량으로 하고 나머지는 스스로 먹게 하면 군인과 일반 백성이 서로 의지하여 이로움이 이보다 큰 것이 없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 내용은 남해 둔전이 아니고 김해 평야 일대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나 남해에도 이때쯤에 둔전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128 1314 남해군지 9) 현판 (1) 제청해관각자 소 재 지 : 남해군 남해읍 서변리 남해군청 문화관광과 규 모 : 목판 음각 1매(크기 가로 70cm, 세로 39.8cm, 두께 3cm) 조선 정조 때 남해 치정을 감찰하기 위해 암행어사로 파견 된 김학순( 金 學 淳 )씨가 고시( 古 詩 )를 각자하여 현재 남해 군청에 현판으로 보관되어 오고 있다. 고성칠면사위명( 孤 城 七 面 四 圍 溟 ) 남유명산우금병( 南 有 名 山 又 錦 屛 ) 일범풍이린봉도( 一 帆 風 利 隣 蓬 道 ) 백세인다견극 성( 百 歲 人 多 見 極 星 ) 개국지초여지재( 開 國 之 初 與 地 載 ) 화옹어차묘응정( 化 翁 於 此 妙 凝 停 ) 미 필선원구세외( 未 必 仙 源 求 世 外 ) 도화심처유어선( 桃 花 深 處 有 漁 船 ) 글 뜻을 풀이하면 남해 칠면은 사방)이 바다에 에워 쌓였고, 남에는 명산이 있고 또한 금수병풍( 錦 繡 屛 風 )일세 (금 산을 칭함) 한 돛대 바람을 이용하여 봉래섬을 이웃하니 백수( 百 壽 )한 사람이 많음은 노인성 ( 老 人 星 )을 봤기 때문 일세. 개국 초부터 여지승람에 등재되었음은 조화옹( 造 化 翁 )의 묘( 妙 ) 한 재주에 엉키고 머물렀음 일세. 반드시 도원 선경을 이 세상 밖에서 구 할까보냐, 도화 ( 挑 花 )핀 깊은 곳에 어선도 노닐도다. 라고 풀이되며 제목인 청해관은 당시 공관( 公 館 )의 명 칭인 것으로 풀이된다. 10) 고인돌 유적 (1) 심천리 고인돌군 소 재 지 : 남해군 남해읍 심천리 954-1번지 규 모 : 3기 시 대 : 청동기시대 망운산(785.9m) 관대봉(594.7m)이 동측으로 길게 뻗어 구릉의 사면에 입지한 고인돌군 이다. 유적이 입지한 구릉은 고현에서 남해로 진입하는 안쪽에 해당되는 곳으로 예부터 길 목에 해당되는 곳이다. 이 구릉은 산지에서는 급애를 이루다가 유적지와 가까운 배후에서 경사 변환을 이루어 해안을 향해 완만하게 파출되어 있다. 이러한 지세는 일찍이 인간에 의 한 토지 이용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구릉의 정상 부위로는 심천 마을이 자리하며, 고인 돌의 바로 북측 배후에는 한국전력공사 남해지소가 들어서 있다. 아마도 상기한 건축에 의 해 다수의 고인돌이 훼손된듯하다. 실제, 민가 건축 시 마제석검 등이 검출된 예도 있다고

129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15 전하나 그 행방을 알 수 없다. 고인돌은 설상 구릉의 남사면에 입지해 있는데 지금은 3기가 분포한다. 재질은 쳐트 및 역암이고, 형식은 개석식이다. ( 1 ) 호 고 인 돌 : 3 기 중 북 쪽 의 것 이 다. 상 석 의 평 면 형 은 마 름 모 꼴 에 가 깝 다. (250X150X60cm.) (2)호 고인돌: 민 묘를 사이에 두고 1호 남쪽으로 3m떨어진 밭둑에 걸쳐 있다. 평면형은 타원형에 가까운 부정오각형이다. (320X180X70cm.) (2) 평현리 고인돌군 소 재 지 : 남해군 평현리 규 모 : 4기 시 대 : 청동기시대 평현리 앞 들에 발달한 선상지에 두 무리로 나뉘어 분포한다. 1개소는 평현리 양지 마을 회관 앞 경작지 3기가 삼각상으로 배치되어있다 다른 1개소는 그 서쪽으로 약 200m 정도 떨어져 4기가 군집한다. 1987년도의 조사 당시에는 12기의 고인돌이 분포하는 것으로 보고 되었으나 지금은 7기만 남았다. 당시의 보고에서 평현 마을 쪽에 분포한다는 6기 중 2기가 유실되었고 산자락 아래 분포하던 3기는 확인되지 않았다. 아마도 경지정리 과정에서 유실 된 듯하다. 고인돌이 입지한 지형은 선상지의 선앙부에 해당된다. 각각의 배치는 선앙부에 선상지의 길이 방향과 직교한다. 구조는 모두 개석식이다. 이 중 한 기는 90도로 세워져 있 고, 다른 한기는 상석의 가운데 정( 釘 )자국이 관찰된다. 경작의 불편을 이유로 경작자가 상 석을 이동하거나 깨트리기 위한 자국인 것이다. 고인돌군의 보존을 위한 대책 수립이 절실 하다. (3) 봉성 고인돌군 소 재 지 : 남해군 평현리 봉성마을 규 모 : 5기 시 대 : 청동기시대 평현 고개 서쪽의 충적지에 입지한 고인돌군이다. 1987년도의 조사에서는 모두 5기의 고 인돌이 군집 분포하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최근 시행된 경지 정리 시 대부분 원래의 위치를 이탈하여 농로 곁으로 이동되었고, 1기만 원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고인돌이 입지한 지형 대는 배후의 봉성 마을에서부터 발달한 선상지의 선단부에 해당된다. 원래는 5기의 고

130 1316 남해군지 인돌이 선단을 따라 열상분포( 列 狀 分 布 )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의 보고서에서 고인돌의 형식에 대해 기반식과 개석식이 혼재해 있는 것으로 보고하고 있으나, 개석식만 남았다. (1)호 고인돌은 5기 중 가장 동쪽에 있는 것으로 최대형이다. 재질은 쳐트이고, 형태는 장 방형이다. 상석이 놓인 방향은 선상지 선단의 방향과 일치한다. 구조는 개석식이고, 상석에 성혈이 개설되어있다. 360X320X150cm. 그 밖의 4기는 경지 정리시 원래의 자리에서 밀어 내어 농로 곁에 붙여 두었다. 각 상석의 크기는 다음과 같다. (2)호는 140X70X50cm. (3)호 는 180X140X180cm. (4)호는 220X200X60cm. (5)호는 170X140X80cm이다. (4) 우지막골 고인돌군 소 재 지 : 남해군 죽전리 우지막골 규 모 : 6기 시 대 : 청동기시대 우지막골 선상지는 입지한 고인돌군이다. 고인돌군이 입지한 곳의 지형은 배후의 대부산 에서 유입된 토사의 퇴적으로 이루어진 충적선상지이다. 상석은 오희천을 경계로 그 동서에 배치되어 있는데 서쪽에는 한 기만 남아 있어 배치를 파악 할 수 있다. 동쪽에 군집을 이룬 고인돌은 구릉의 외연에 연한 선상지의 선측을 따라 열상으로 배치되어 있다. 입지 선정 시 지형을 반영한 특징을 보여준다. 상석의 재질은 쳐트이고, 형식은 개석식이다. (1)호 고인돌은 신기촌 마을 곁 경작지에 있다. 상석이 놓인 방향은 선상지의 길이와 일치 한다. 남쪽으로 기울어졌다. 200X190X114cm. (2)호 고인돌 : 오희천 동쪽 경작지에 있다. 상석은 선상지의 길이 방향과 일치한다. 160X120X140cm. (3)호 고인돌은 2호의북쪽에 있다. 상석이 놓인 방향은 선상지의 길이 방향과 교차한다. 190X140X50cm. (4)호 고인돌은 3호의 북쪽에 있다. 상석은 선상지의 길이 방향과 교차한다. 273X200X100cm. (5)호 고인돌은 4호의 북쪽에 있다. 상석은 선상지의 길이 방향과 교차한다. 320X175X96cm. (6)호 고인돌은 5호의 북쪽에 연접해 있다. 상석은 선상지의 길이 방향과 교차한다. 215X130X57cm이다.

131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17 (5) 오리 고인돌군 소 재 지 : 남해군 남면 평산리 오리마을 규 모 : 3기 시 대 : 청동기시대 구 간석지와 연한 선상지의 선단( 扇 湍 )에 입지해 있다. 원래는 더 많은 수의 고인돌이 군집 분포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3기만 남아 있다. 배치상의 특징은 선단의 길이 방 향을 따라 열상( 列 狀 )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배치는 금호강변의 매호 동 고인돌에서 확인된 바 있다. 또한 고인돌의 입지 장소가 해안과 가까운 선상지의 선단이 란 점이 주목된다. 입지 고도는 해발10m 미만대로서 고인돌 축조 당시에는 더욱 해안과 가 깝게 배치되었을 것이나 지금은 부근 해역이 간척되어 바다와는 다소 멀어 졌다. 경지정리 직전에 제작된 지형도를 살펴보면 고인돌이 입지한 곳에서 북쪽으로 불과 100m 정도의 거 리의 간석지에 분포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고인돌군의 주변으로 경지정리가 행해져 원 지형면은 삭토 되고, 겨우 상석만 남겨진 상태이다. 3기 모두 재질은 쳐트이다. 형태는 괴상 ( 塊 狀 )이고 형식은 기반식과 개석식이다. (1)호 고인돌은 3기 중 동쪽의 것이다. 상석의 평면형은 제형( 悌 形 )에 가까우나 한 변은 퇴 비더미에 덮여있다. 상석의 길이 방향은 선상지의 선단과 나란히 동-서축이다. 개석식이다. 220X95X100cm. (2)호 고인돌은 1호 고인돌의 서쪽에 연접해 있다. 상석의 길이 방향은 오 리천의 길이 방향을 따르고 있어 남-북 축에 가깝다. 그리고 길이에 비해 높은 편이어서 괴 체감을 느끼게 한다. 기반식이다 cm (3)호 고인돌은 2호의 남-서축으로 약 40m정도 떨어져 있다. 평면형은 장방형이다. 개석식이다. 280x155x120cm (6) 서호리 고인돌 소 재 지 : 남해군 서면 서호리 규 모 : 1기 시 대 : 청동기시대 대정들 을 끼고 있는 중심 마을인 서호마을에 1기의 고인돌이 존재한다. 유구의 위치 는 마을로 진입하는 소로와 지방도로 사이 마늘밭에 위치한 이 고인돌은 마을 이정표, 재실 과 비각을 끼고 있다. 주민들의 전언으로는 예전에 이 마을에는 고인돌이 3기 분포하고 있었 으나 경지정리 관계로 소실되고 현재는 이번에 확인된 1호 고인돌만 남아있다고 한다. 이곳 의 해발 고도를 보면 서상 마을 앞 바다에서 서호 마을 앞의 넓은 경작지와의 해발고도 차이

132 1318 남해군지 는 불과 10m밖에 되지 않으며 서상만과의 거리도 1.5km 정도이다. 그렇게 본다면 서호마 을 고인돌과 장항리 연봉산 무문토기 산포지와의 연관성도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고인돌의 상석은 그 규모가 가로 255cm, 세로 260cm, 높이110~135cm이다. 재질은 역암 으로 상석의 상면은 고르지 못하다. 상석 아래 동편에 고인돌 1기가 받쳐져 있다. 주변에서 채집된 유물은 없다. (7) 날끝 고인돌군 소 재 지 : 남해군 오곡리 관당 규 모 : 5기 시 대 : 청동기시대 대국산 끝자락의 속칭 날끝 이라 불리는 두각지에 입지해 있다. 좁은 범위에 6기의 고 인돌이 L 자상을 이루며 군집 분포한다. 재질은 화강암이며 형식은 개석식이다. 고인돌 은 구릉의 사면에 입지한 관계로 매스무브먼트(mdssmoyement)에 의해 사면의 아래쪽으로 쓸려 내렸다. 이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2.3호 고인돌이 아래로 쓸려 내려감에 따라 하부구조 가 드러난 점을 들 수 있다. (1)1호 고인돌은 상석의 재질은 변성 퇴적암이 쳐트이고 평면형은 방형이다. 상석이 놓인 방향은 구릉의 길이 방향을 대체로 따르고 있으며 방위는 북북서-남남동이다. 상석의 동북 쪽 모서리가 깨어져 나갔고 전체적으로 서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상태이다. 250X180X50cm (2)호 고인돌은 상석의 재질은 화강암이고 형태는 방형이다. 상석이 놓인 방향은 등고선의 유동 향과 일치하며, 방위는 남-북향이다. 상석은 매스무브먼트(mdssmoyement)에 의해 구릉의 아래쪽으로 기울어있고, 상석의 동쪽 아래에는 매장 주체부의 개석으로 보이는 판상 석이 드러나 있다. 137X130X66cm (3)호 고인돌은 상석의 재질은 퇴적암계이고 형태는 방형이다. 상석이 놓인 방향은 구릉 의 축과 일치하며, 방위는 동-서향이다. 상석은 매스무브먼트(mdssmoyement)에 의해 아 래쪽으로 기울었다. 이에 따라 구릉의 위쪽으로 약 1m정도 범위에 하부구조가 드러나 이다. 126X140X46cm (4) 고인돌은 상석의 재질은 화강암이고 형태는 장방형이다. 상석이 놓인 방향은 구릉 의 길이방향과 일치하며 방위는 동-서향이다. 형식은 개석식이다. 역시 메스무브먼트 현 상이 관찰된다. 상석의 위쪽에 하부구조 혹은 부대시설로 추정되는 석 열이 드러나 있다.

133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X180X95cm (5)호 고인돌은 상석의 재질의 화강암이고, 형태는 부정장방형이다. 상석이 놓인 반향은 구릉의 흐름을 대체적으로 따르고 있으며, 방위는 북서-남동향이다. (8) 당항리 고인돌군 소 재 지 : 남해군 당항리 규 모 : 12기 시 대 : 청동기시대 당항리 일대에 고인돌 12기가 군집 분포해 있다 이 고인돌군은 당항리를 중심으로 열상 분포해 있다. 대체적인 분포의 범위는 지금의 도석이 놓인 방향은 마을 배후 구릉의 유동향 을 대체로 따르고 있으며, 주택의 길이 방향과 일치하다. 재질은 안산암질역삼. 사암 등이며 형태는 판상이다. 구조는 대부분 개석식인데. 기반식이 간혹 섞여 있다. 상석의 규모는 남해 군에서 조사된 중에서는 가장 큰 것에 속한다. (1)호는 당항 마을 북 동측 산록에 있다. 상석은 상록의 길이 방향을 따른다. 재질은 화강 암이다. (2)호는 민가의 장독대로 사용되고 있다. 상석이 놓인 방향은 산록완사면의 길이방향을 따 르고 있다. (3)호는 민가에 있다. 방향 상동 (4)호는 민가 옆 콩밭에 있다. 재질은 안산암이다. 상석은 아래가 묻혀있어 정확히 알 수 는 없지만 개석식으로 추정된다. 방향 상동 148X155X50cm (5)호는 540번지의 민가 안 대밭에 있다. 재질은 안산암이고, 나무에 부분적으로 덮여 있 어 형태는 알 수 없다. 방향 상동 220X145X60cm (6)호는 정개문 ( 鄭 凱 文 )의 묘역 앞에 있다. 재질은 안산암이고, 구조는 개석식이다. 방 향은 위와 같고 매스무부먼트(mdssmoyement)에 의해 바다를 행해 기울었다.195x125x 38cm (7)호는 묘역의 서단에서 10m정도 서쪽에 있다. 재질은 안산암이고 구조는 개석식 이다. 방향은위와 같고, 매스무브먼트(mdssmoyement)에 의해 바다를 향해 기울었다. 260x155x40cm (8)호는 재질은 안산암질역암이다. 방향은 위와 같고, 매스무브먼트(mdssmoyement)에 의해 바다를 향해 기울었다. 235x90x40cm.

134 1320 남해군지 (9)호는 주유소 동측에 90도로 경도되어 있다. 190x70x36cm (10)호는 재질은 안산암이고, 형태는 삼각상이다. 매스무브먼트(mdssmoyement)에 의해 바다를 행해 기울었다. 245x155x40cm (11)호는 주유소 아래 민가에 있다. 바닥이 묻혀 있어 형태나 구조를 알기 어렵다. 155x?x? (12)호는 주유소 아래의 경작지에 둠벙을 개설하면서 묻어 버렸다. (13)호는 주유소 서측 경작지상에 있다. 재질은 역암이고, 구조는 개석식이다. 논둑에 걸 쳐져 바다 쪽으로 경도되어 있다. 상면에서 성혈1개가 관찰된다.390x230x80cm (9) 서대리 고인돌군 소 재 지 : 남해군 창선면 서대리 규 모 : 3기 시 대 : 청동기시대 동대리에서 서대리로 이르는 고개 마루에 입지해 있다. 창원대학교 박물관의 발굴 조사를 거쳐 그 1기에 대한 구조가 밝혀진 바 있다. 상석의 재질은 안산암질역암이고, 형태는 부정 장방형게의 판상형이다. 발굴된 고인돌은 고개 마루에 입지한 기반식 고인돌로서 조사 당시 2매의 지석이 노출되어 있었다. 이 고인돌은 거대한 상석을 가진 기반식 고인돌을 고개 마루 의 정점에 설치한 것에 주목할 만하다. 하부 구조의 묘광은 화강암 풍화토인 황갈색의 석비 레토를 굴착하여 확보하였다. 매장부의 구조는 석곽형이다. 내부에서 출토된 것으로 여겨지 는 마제석촉 4점이 수습되었다. (1)호는 상석 : 440x230x60cm, 석곽 잔존규모 : 50x30x54cm. (2)호는 1호 고인돌의 동남쪽으로 약 30m 정도 떨어져 있다. 밭둑에 걸쳐져 있어 상석이 남쪽으로 약간 기울었다. 장축방향은 능선의 길이방향을 따랐다. 410x270x150cm (3)호는 고인돌의 남동쪽으로 약 30m 정도 떨어져 있다. 상석은 밭둑에 걸쳐 있는데 반절 된 상태이다. 상석의 배치는 능선의 축을 대체적으로 따르고 있다. 주변에도 다수의 암괴가 흩어져 있다. 280x270x170cm 11) 민속 (1) 동정 선돌

135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21 소 재 지 : 남해군 서면 대정리 동정 규 모 : 1기(높이 1m) 부 속 물 : 밥무덤 서면 동정마을 입구에 입석되어 있는 선돌은 마을의 수호신으로 숭배하고 있으며 마을에 서 음력 10월 보름날에 금줄(왼 새끼줄, 참 종이)을 치고 황토를 뿌린 다음 동제를 모시고 있다. 이 선돌을 일명 홀 바위라고 하는데 의식을 집행 할 때 집례가 홀기( 笏 記. 식순)를 들 고 서 있는 형상 같다하여 홀 바위라고 하며, 마을 앞 들(옛 포구)은 이에 연유하여 홀포( 笏 浦 )라고 한다. 선돌은 길쭉한 자연석이나 일부만을 가공한 거석을 똑바로 세워 기념물 또는 신앙 대상물 등으로 삼는 유적으로서 고인돌, 열석( 列 石 )과 함께 대표적인 거석문화의 하나 이다. 남해에서는 대국산 아래 남치 마을 뒤 5부 능선에 자연 그대로 입석된 자연암 역시 선 돌로서 소원을 빌었던 흔적이 성혈( 性 穴 )로 나타나 있고 동정 선돌은 네모난 자연암이 입석 되어 있는데 매 년 동제를 모시는 곳이다. 장승 마을 (경주 김씨 집성촌)과 둔전 마을(진양 정씨 집성촌)로 이루어진 동정 마을의 동 제는 음력 시월 상정일을 기해 함께 지낸다. 제장은 장승 마을 입구의 선돌(높이1.43m, 둘 레0.98m), 장승 마을 중앙에 막돌탑( 조산: 높이2.80m, 둘레5.70m), 둔전의 막돌탑 (조 산), 쇠막골의 막돌탑(조산) 등 네 곳이며, 이 곳 모두에 밥 무덤이 있다. 이중에 실제로 제가 행해지는 곳은 장승 마을 중앙의 막돌탑(조산)이며, 다른 곳에서는 제가 행해진 후 밥 무덤 에 제물을 묻기만 한다. 동제 일주일 전에는 제장 주변 청소와 금줄(부정을 타지 않은 총각 이 꼬는 것이 좋다고 함)을 치는 등 제반 준비를 하며 동재 당일 낮부터는 장승 마을과 둔전 마을을 돌며 지신밟기를 행한다. 밥 무덤에 묻히는 제물에는 메, 편,(흰떡, 가래떡), 미역, 목화씨(팥이나 콩을 대신하기도하며 농사가 잘 되길 기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함) 등이 있다. (2) 남해 화전농악 소 재 지 : 남해군 서면 서상리 장항 규 모 : 단원 약 35명(상쇠 1명, 쇠 2명, 징 2명, 장구 6명, 북 10명, 소구 10명, 기타 관 리 자 : 전수자 박희오(상쇠), 화전농악보존회 4명), 기타 화전은 남해의 별칭이며, 화전농악은 남해에서 자연 발생된 전통 민속악으로서 특히 질굿, 판굿, 거듭나기굿을 비롯한 경쾌한 가락은 전국 어느 곳에서나 찾아 볼 수 없는 남해의 특유 한 가락이다. 전수되어온 지역은 남해군 남면 석교리이며 마지막 전수자는 한석동(1866~1943)옹으로

136 1322 남해군지 유일하게 남해 풍물 굿 12채박을 재연하였다. 이후 한회포(1884~1953), 한점식, 전찬기 등 으로 전수되어 현재에는 김태우(석교), 박희오(장항) 등으로 이어져 그 맥을 유지하고 있다. 농악은 1년 동안 마을의 안녕과 풍농, 풍어를 비는 민속으로 주로 정월대보름에 지신밝기를 시작으로 연중 개최되는데 길사에는 물론이나 상례에도 참여하기도 한다. 화전농악은 제42 회 개천예술제 전국농악경연대회( )에서 대상을 수상하였고 제23회 경상남도 민 속예술경연대회( )에 노력상을 수상하였으며 상쇠 박희오는 개인 연기상을 수상하 는 등 그 맥을 유지하고 있다. 화전농악의 흐름은 모음굿, 질굿(길굿), 당산굿, 문굿, 진굿, 질굿거듭나기, 삼채굿, 정기(부엌)굿, 성주.조앙굿, 지신밝기굿, 새미(우물)굿, 춤굿, 덧배기 굿, 4채굿, 개인따드래기굿, 덩덕굿, 호우굿, 종굿으로 진행된다. (3) 남해 화계 배선대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화계리 규 모 : 참가인원 약 100여명 부 속 물 : 선박, 깃발, 솟대 등 관 리 자 : 남해 화계 배선대 보존회 화계 마을에서는 민속 신앙과 민속 놀이로 화계 배선대를 매 년 정월대보름날에 행하여 왔 다. 그러나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문헌이 없어 그 근원을 찾을 수 없으나 현재 생존하고 있는 마을 촌노들의 구전에 의하면 어릴 때까지만 하여도 배선대를 지내는 문서함 같은 궤짝이 있 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배선의 뜻은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한자인 선( 船 )에다 한글인 배자 를 서두에 넣어 배선이라고 하고 앵강만에 있는 용왕신을 배선장군이라 하여 배선대를 지냈 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1900년 전 후만 하여도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계승되었다고 하며 소요되는 경비는 각 집에서 쌀을 거두어 경비를 충당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굿에 필요한 무속인은 마을에 거주 하고 있으면 마을 무속인이 하였으나 없을 경우에는 타 지역에 있는 무속인을 불러 배선대를 지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중단되었다가 해난 사고 등이 자주 일어나자 마을 회의를 열 어 배선대를 복원해야 된다는 주민들의 여론에 따라 마을 어촌계가 주동이 되어 배선대를 지 내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어촌의 인력 부족으로 배선대에 필요한 솟대 설치와 복잡한 것을 피하기 위해 나무로 만든 솟대 대신 석재를 다듬어 배선대라는 글귀를 넣은 석 비를 세워 매년 제를 모셔 왔으나 1996년에 전통적으로 내려온 민속신앙과 민속놀이인 배선 대를 복원하여 제29회 경남도민속예술경연대회( )에 출품하여 우수상를 수상하

137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23 였다. 진행과장은 4 과장으로 솟대세우기, 풍어제, 배선대, 대동 놀이로 진행되며 참솔로 된 솟 대가 마을 안에 복원되어 있다. 배선대를 보존 계승하기 위하여 1996년에 화계배선대보존 회(회장 박기철)가 결성되어 복원 계승사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4) 덕신 줄 당기기 소 재 지 : 남해군 설천면 덕신리 규 모 : 고 길이(1개 100여m) 부 속 물 : 당산나무, 조산 덕신 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약 700년 이전으로 보며, 농업을 주업으로 하였 고 신앙은 토속신앙이다. 덕신 마을의 산세는 배산임수이며 마을 앞에는 커다란 분지가 형 성되어 있을 뿐 아니라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는 산 능선이 마주 보고 있어 풍수지리설로 보 면 좌청룡, 우백호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래서 풍수지리설에 따라 못에는 용이 놀이를 해야 마을의 재앙을 물리고 새해에 편안하고 대풍을 이룬다는 뜻에서 약 300년 전 130여 호의 마 을 주민들이 마을 앞 들판 중앙에 조산(다물락, 일명 여의주)을 만들어 마을을 지키는 수호 신의 상징물로 숭배하였다. 그리고 마을 가운데로 흐르는 계곡 하천을 기준으로 동쪽에 있 는 윗마을을 동편이라 칭하고 서쪽에 있는 아랫마을을 서편이라 칭한 후, 윗마을에서는 위 에 있다하여 숫고를 만들고 아랫마을에서는 아래에 있다하여 암고를 만들어 매 년 정월대보 름날에 줄 당기기를 한 것을 볼 때, 민속신앙과 놀이를 곁들였다고 볼 수 있다. 진주진관 남해현지의 기록에 의하면, 덕신은 고려 중기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덕신역 원이 곤양 양포역과 연결되어 있었고 조선 중종 때는 역장( 驛 長 )의 벼슬이 종 6 품(병마절 제도위 감목관)이었다. 그리고 중마( 中 馬 ) 5필, 복마( 卜 馬 ) 4필과 22명의 역리( 驛 吏 )가 있었 다. 구전에 역장과 역졸이 줄 당기기에 참여하였다고 전하는 것은 사실이며, 관과 민이 합심 한 줄 당기기 민속놀이였다. 그러던 중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으로 잠시 중단되었다가 마을 주민들이 옛 기억을 되찾아 원형대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색으로 첫째, 줄 당기기 행사 전에 동편은 동편에 있는 밥 구덩이(밥 무덤) 2 개소와 서 편은 서편에 있는 밥 무덤 2 개소에 각각 줄을 매고 작은 상에 메를 비롯한 간단한 제물과 제주를 준비하여 밥 무덤 있는 곳으로 가서 사방 신제를 올린 후, 마을에 있는 당산 나무에 당산제를 지내고 마을 들 가운데 있는 수호신인 조산에도 제를 올리는 것은 민속 신앙적 요 소이며 둘째, 줄 당기기 전에 미리 암 숫고가 정해져 서편인 암줄이 미리 줄 당기기 장소

138 1324 남해군지 에 도착하여 숫줄을 꼬신다. 셋째, 줄 당기기 중 끌려가면 줄꾼이 모두 줄 위에 앉아 끌려가 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며, 6군데 인근 마을(동편은 월곡 마을, 남치 마을, 용강 마을. 서편 은 노량 마을, 감암 마을, 왕지 마을)에서는 작은 줄을 가져와 원줄에 묶어 합세한다. 줄 당 기기에 참여하는 줄꾼은 한 해의 액운이 없어지고 소원이 성취된다는 속설이 있어 많은 인 원이 참여하고 있다. 넷째, 줄 당기기에서 숫고가 이기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는 생산성을 가진 암줄이 이기기를 바라지만, 마을에 덕신 역원이 있어 관리에 대한 부러움 도 있었고 숫고는 남성을 상징하므로 남성의 지배력에 의존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섯째, 이 미 암 숫고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암줄의 용두는 크게 만들고 숫고의 용두는 암줄 용두보 다 약간 적게 만든다. 줄 당기기 순서로는 입장 사방신제 당산제 조산제 줄으르기(용트림) 줄 당기기 대동놀이 퇴장 순이다. (5) 창선 상여놀이 소 재 지 : 남해군 창선면 단항리 부 속 물 : 목상여 관 리 자 : 창선상여놀이보존회 전통 사회는 신분 사회이므로 입는 의복이나 사람이 타는 가마까지도 신분에 따라 차이가 있었지만, 사람의 죽음에 임해서는 차등을 두지 않았다. 사례 편람에 이르기를 대여( 大 轝 ) 를 사용하면 정말로 좋으나 가난한 사람은 쉽게 구비할 수 없는 점이 있으니 일반적으로 사 용하고 있는 것을 따라서 사용해도 무방하다 라 하였다. 또한 고구려 장례 풍속에는 죽은 사람을 산 사람처럼 기쁘게 해서 보내는 전통도 있었다. 수서( 隨 書 ) 고려전에 초종( 初 終 ) 에는 곡을 하며 울지만 장례를 치를 때는 북을 치며 춤추고 음악을 연주하며 보낸다 라는 내용이 있는데 남해의 장례 풍속 중 호상일 경우 위와 같은 행동을 하였다. 후송 유의양(1718~1788)의 남해견문록에 어버이의 장례를 모실 때에 수일 전을 기하 여 집에 차일을 치고 술과 고기를 많이 장만하여 동리 사람들을 모아 각별히 많이 먹이고 무 당과 경재인을 모아 아침부터 밤이 되기까지 굿을 하고 새벽에 발인하여 갈 때에 북과 장구 를 치며 피리와 저를 불어 상여 앞에 인도하여 산까지 가니 앞 내용과 같이 남해 장 례 행렬에 악공들이 실제로 악기를 연주하였다. 상여 역시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전립을 쓰고 철릭을 입은 악공과 광대 꼭두들인데 이것은 감사나 지방 수령 등의 행차에 동원 된 악공 또는 광대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139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25 남해에서는 출상 하루 전 날에 헛 상두 어르기 를 한다. 이것은 출상 때 망자를 장지까 지 편안하고 기쁘게 모시기 위해 상두꾼들이 미리 연습을 하는 것으로 출상일과 같이 풍물을 울리고 사위를 상여에 태워 어르기도 하며 마을을 한 바퀴 돈다. 이러한 장례의식은 전국에서도 보기 어려운 풍속임으로 보존 가치성이 아주 높아 전통 민 속 문화로 계승되어져야 할 것이다. 남해 목상여는 1970년 대 새마을 운동 당시부터 1980년대 초반으로 마을 상여집에 보관 되어 있었으나 마을 주민들에 의해 불태워졌고 상인들과 수집가들이 구입하여 군 외로 반출 되었다. 각 마을에는 상여계가 조직되어 대부분 마을마다 상여집이 있었으며, 큰 마을에는 두서너 채, 작은 마을은 두서너 마을이 합하여 한 채가 보관 관리되었으며 출상 때 사용되었 다. 남해 목상여의 특징은 첫째, 상여가 화려했다. 하단부터 상단까지 꽃, 동자 악공꼭두, 봉, 용, 저승사자 등이 단청으로 장식되었고 둘째, 원통나무를 이용하여 수공으로 제작되었 으며, 셋째, 목재는 수양버들이나 냇버들이었다. 이러한 남해 목상여는 예술적으로도 가치 가 높고 민속자료로도 연구대상이 되었으나 현존하는 상여가 없어 마지막 상여 제작기능보 유자 유천준(남해읍. 2005년 12월 사망)의 고증과 도면을 바탕으로 복원하였다. 상여놀이의 형태는 호상일 때 전해져 내려오는 장례 풍속으로 망자를 기쁘게 보내드리기 위해 놀이가 곁들여진 상례이다. 진행과장은 헛 상두어르기 발인 출상 마을 안길돌기 사위 상여태우기 외다리 건너기 비탈길 오르기 하관 뫼다지기 등으로 진행된다. 상여행렬 앞에는 풍물과 악기 연주자가 연주를 하면서 상두꾼들의 발을 가볍게 해 주고 앞 소리꾼도 꽹과리를 치면서 상여소리를 하는데 주로 반야심경, 회심곡 등을 인용하지만 망자 와 관련되는 사설도 읊는다. 2005년에 남해군 창선면 단항마을에서 보존회(회장 김치구)가 결성되어 상여놀이를 재현 하였으며, 2005년과 2007년도에 경남도 민속예술축제에 남해군 대표로 출전하였다. (6) 오곡 입택굿 읍 놀이 소 재 지 : 남해군 고현면 오곡리 관 리 자 : 오곡 박삼영 인간의 생활 속에서 풍속이 계승되고 전승되어지는 것은 삶의 일부분을 치지하고 생활의 곁에서 그 행위가 지속되어 왔기 때문이다. 입택 굿은 인간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어 행 복을 추구하고 잡귀를 막음으로서 생활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함이며, 우환 없는 집에서 하

140 1326 남해군지 는 굿으로 감사의 뜻과 자손의 번창을 빌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굿의 유래는 중국 전국시대 노나라 때 편작( 扁 鵲. 名 醫 )이 친구 집에서 무악 소리가 들려 찾아가 그 연유를 알아보니 친구의 안주인이 원인 모를 병에 걸렸는데 약의 효험이 없어 무 당에게 물어보니 집에 머리가 아홉 달린 귀신이 있다고 하면서 기르는 소를 잡아 대접하면 아내의 병이 낫는다고 했다. 친구는 농사짓는 소를 잡지 못하고 굿을 중단하고 있었다. 이 때 편작은 친구 집에서 머무르기로 작정하고 문구멍으로 밖을 살펴보니 머리가 아홉 달린 귀 신이 천정에 있기에 소를 잡아 굿을 하라고 했다. 그래서 친구는 소를 잡아 대접하니 귀신이 내려와 먹고 집을 나가는 것이었다. 친구의 아내는 편작이 처방 해 준 약을 먹고 병이 완치 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는 사람들이 병든 뒤에 굿을 하는 것보다 집안이 무고할 때 예방하 는 뜻에서 미리 굿을 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 데에서 입택 굿 유래된 것으로 본다. 오곡 마을에서는 옛날부터 조상들로부터 전해지고 있는 입택 굿 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승되고 있으며 현재에는 본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박삼영(1946년생. 60세)에 의해 계승 되어지고 있다. 입택 굿은 집을 새로 지어 집들이 하는 놀이로서 가정에 읍 이 들어 와야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일종의 민속신앙으로 믿고 있으며, 낮에는 술과 안주 로 대접하고 해가 질 무렵 저녁에는 풍물을 앞세우고 입택 굿을 시작한다. 특징은 읍 으로 가장한 사람의 복장과 움직이는 형용에 따라 구경꾼들의 폭소를 자아 내게 한다는 것으로 이 놀이가 잘 진행이 되어야 가정에 복을 받을 수 있다하여 집 주인은 읍 의 비위를 잘 맞추어 주는 일종의 생활 신앙이다. 읍 놀이 진행 과장으로는 제 1 과장은 입문 굿이고, 제 2 과장은 읍 입문이며, 제 3 과장은 읍 맞이, 제 4 과장은 성주 굿, 제 5 과장은 조앙 굿, 제 6 과장은 뒷풀이다. (7) 석교 줄 싸움 소 재 지 : 남해군 남면 석교리 규 모 : 6개 마을 줄싸움 부 속 물 : 6개 암 숫고 석교 마을은 남해안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앵강만을 마을 앞에 두고 있다. 석교라는 마 을 명칭이 있기 전에는 장승 마을 이라고 하였는데 마을 입구에 벅수가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벅수는 단순한 경계표나 이정표 역할과 함께 잡귀와 질병으로부터 사람들을 지켜 주는 수호신 역할을 하여 주었고 장승제를 모셔 주민들이 힘을 모아 마을의 액을 밖으로 몰 아내고 마을을 정화시켰다.

141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27 세종 13년(1431)의 기록을 보면 남해도 남편 쪽의 바깥쪽 가화포. 고을포에 사는 백성 들이 경작하는 우현 안쪽 평산 영전의 한 곳의 전토를 평산 만호에게 수호하게 하고 내왕하 면서 경작하게 하고 그 우현의 바깥쪽 대양의 가의 전토는 백성들이 개간하여 경작하는 것을 금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라고 하였다. 줄 싸움의 유래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일제강점기이전에는 행해졌으나 일제강점기에 민 속행사 말살 정책에 의하여 중단되었다. 해방 후 다시 시작되었지만 마을 주민의 감소로 차 츰 사라지는 것을 마을 촌로들이 뜻을 모아 옛날 형태로 복원하였다. 민속놀이의 형태를 보 아 정월대보름날을 기하여 마을의 안녕을 비는 것에 비롯되었으며 왜구의 침입이 잦았기 때 문에 마을 보호와 민속놀이로 마을민이 단합하는 군사의 진( 陣 )형태를 갖추고 있다. 줄 싸움의 특징은 일반적인 줄다리기와는 진행 과장이 다르다. 정월대보름이 되기 3일 전 쯤에 먼저 석교 마을에서 고가 달린 큰 줄을 만들어 인근 마을인 월포, 두곡, 우형, 홍덕, 홍 현 마을 등을 순회하면서 우리와 줄 싸움을 하자고 시비를 걸면 각 마을에서는 각기 고를 한 개씩 만들어 정월대보름날 석교 마을 앞 제일 넓은 논으로 모인다. 모인 후, 각 마을 별로 순 번을 정하는 것이 아니고 나름대로 인근 마을에 시비를 걸어 뱀이 서로 엉키는 형태가 되는 데 이때 서로가 안에 조이지 않으려고 고를 바깥쪽으로 돌면서 흥을 북돋운다. 만약 이때 안 으로 잡히면 줄다리기를 포기하고 다른 편을 응원한다. 결국은 2편 만 남으면 고를 빗장치고 줄다리기를 하는 것이 특징이다. 순서를 보면, 제1장(장승제 및 고 제작)으로 마을 주민들은 마을 회의를 1주일 전에 개최 하고 재관을 선정한다. 주민들은 고 제작을 위하여 짚을 모은 후 대보름 3일 전까지 고를 제 작한다. 정월대보름 당일 날 장승 앞에서 장승제를 지낸다. 제2장(인근 5개 마을에 줄 싸움 권장)은 석교 마을에서는 대보름 3일 전에 이미 만들어진 고를 메고 풍물를 치면서 인근 마을인 월포, 두곡, 홍덕, 우형, 홍현 마을 등을 차례로 돌면 서 대보름날 줄 싸움하자고 시비를 걸며 약을 올린다. 그러면 각 마을에서는 마을 회의를 열 고 고를 제작한다. 제3장(줄싸움)은 본장으로 6개 마을에서 정월 대보름날이 되면, 각 마을에서 만들어 놓은 고를 메고 석교 마을 앞 제일 넓은 논을 향하여 노래를 부르고 풍물을 앞세워 모이게 된다. 모이면서 상대편들의 사기를 염탐하고 자기 팀보다 약하다고 느껴지는 상대를 골라 즉시 돌 진하여 줄 싸움을 한다. 6팀 중 3팀은 이기고 3팀은 지는데 진 팀은 재도전을 하지 않고 자 기 마을과 가까운 마을을 응원한다. 이긴 3팀 중 주관한 석교 마을을 제외하고 2팀이 승부를 가리게 되면 석교팀과 이긴팀은 줄다리기로 들어간다. 이때 역시 진팀은 자기 마을과 사이

142 1328 남해군지 좋은 마을팀에게 가서 응원을 한다. 마지막 제4장(대동놀이)은 줄다리기가 끝나면 6개 마을은 승부에 관계없이 각 마을에서 장만하여 온 음식을 들면서 하루 종일 춤을 치며, 흥겹게 하루를 보낸다. (8) 심천 선돌 밥무덤 소 재 지 : 남해군 심천리 심천마을 규 모 : 밥무덤 1기 시 대 : 조선시대 짚은 내 라고도 불리는 심천 마을의 동제는 음력 시월 보름을 기해 행해진다. 제장은 마을 중앙 길에 위치한 선돌(주민들은 박돌 이라고 칭함)과 밥 무덤이 있는 당산이다. 그 외 마을을 둘러싼 동서남북 방향의 경계지점 네 곳에는 밥 무덤이 있다. 제관은 동제 지내기 약 3개월 전 마을 회의를 통해 주민들 중에서 선정된다. 진설되는 제물에는 닭, 돼지가 포함된 다. (9) 무림 밥무덤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무림리 무림마을 시 대 : 조선시대 무림 이란 지명은 마을 앞뒤로 소나무와 밤나무를 비롯한 울창한 숲이 마을을 둘러쌓 고 있어 유래 되었다고 한다. 무림 마을은 남해 군민의 날 화전문화제에 이동면 대표로 출전 할 정도의 실력을 갖춘 농악대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무림 마을의 동제는 음력 시월 보름 삼경에 행해지며, 제장은 산제가 행해지는 마을 뒤 당산과 야제가 행해지는 밥 무덤 등 두 곳이다 (10) 석평 청룡등 당목, 들녘 당산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석평마을 규 모 : 당목 밥무덤 시 대 : 조선시대 석평 마을의 동제는 원래 음력 삼월 보름에 행해지는 춘단제 와 시월 보름에 행해지는 추단제 등 한 해 두 차례 행해졌으나, 10여 년 전부터 추단제 만 지내고 있다. 추단 제의 첫 번째는 청룡제라 불리는데 청룡등 중턱의 당산목인 포구나무에서 행해진다. 두 번

143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29 째 제는 청룡등 에서 북서쪽으로 길게 뻗은 보량 끝자락의 밥 무덤에서 행해진다. 세 번째 제는 석평 남쪽 들녘의 당산에서 행해진다고 하여 당산제라 부른다. 제를 주관하는 자는 초 헌, 아헌, 종헌을 비롯하여 동제를 지내는 데 필요한 일들을 처리할 집사, 축문을 읽어줄 대 축, 가장 깨끗하다고 평가 받아 제물을 직접 준비해야 할 판주 등 모두 여섯 명이다.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은 각각 청룡등, 보량, 당산 등세 곳의 제관이 된다. 진설되는 제물에는 닭, 서대, 낭태가 포함된다. (11) 벅수골 벅수. 밥무덤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금평리 벅수마을 규 모 : 석장승 시 대 : 조선시대 복곡천을 따라 형성되어 있는 금평리는 금평리 본마을 복곡, 벅수골, 옛골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벅수골의 동제는 음력 시월 열나흘 삼경에 행해진다. 제장은 벅 수골 대밭의 당산과 벅수골에서 금평 마을로 들어가는 삼거리에 위치한 벅수 (원래의 것은 나무로 되어 있었는데 1994년 벅수공원을 조성하면서 석장승으로 바꿈)등 두 곳이다. (13) 무민사 석인상 소 재 지 : 남해군 미조면 미조리 본촌마을 무민사경내 시 대 : 조선시대 무민사의 본당 건물 동쪽 편에 축대 아래에 있다. 투구를 쓰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아 마치 장군이 칼을 집고 서 있는 형상이다. 조선조 후기에 불상, 장승, 석인상의 여러 요소를 가미 한 민간 신앙으로 이러한 석상들이 만들어진다. 지금도 이 석인상은 주민들의 주된 기도처 로 이용 되고 있다. (14) 초전 장승 소 재 지 : 남해군 미조면 초전마을 시 대 : 조선시대 초전 마을은 갈대가 많은 곳이라 하여 불리게 된 도로 위편의 새밭금 과 해안에 인접해 있으면서 방풍림이 형성되어 있는 초전 숲 등 두 개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초전 마을의 동제는 음력 시월 삼경을 기해 행해진다. 제장은 초전 못에 연접한 장승 도로 위

144 1330 남해군지 편 새밭금의 천룡당산, 신장, 당집의 순으로 행해진다. 장승은 이곳 주민들에게 신장( 神 將 )으로 불리는데, 원래의 것은 재질이 나무로 되어 있었으며 위치도 도로 아래 배나무 단지 내에 있었다고 한다. 20여 년 전 도로를 확. 포장하는 과정에서 마을의 경계지점이자 비교적 위치가 높은 현재의 곳으로 옮기게 되었으며 관리의 어려움으로 인해 재질도 나무에서 돌로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제관은 마을에서 부정한 일을 당하지 않았고 생기 복덕이 있는 주민 이 맡는다. (15) 우물당산 막돌탑 소 재 지 : 남해군 서면 정포리 우물마을 규 모 : 1기, 밥무덤 시 대 : 조선시대 수질과 수량이 대단히 좋은 참 샘 이 있다하여 유래된 우물 마을의 동제는 음력 시월 보름을 기해 행해진다. 제장은 마을 입구 도로변의 당산, 정포 마을로 가는 들녘의 구릉에 위치한 막돌탑 등 두 곳이다. 밥 무덤은 당산 주변 세 곳과 막돌탑(높이1.50m, 둘레8.60m) 아래 등 네 곳에 있다. 제관은 시월 초순경 마을 회의를 거쳐 주민들 중에서 생기복덕을 두 루 갖춘 사람을 선정한다. 동제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은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등 세 명의 제관과 집사, 대축 등 다섯 명 가랑이다. 진설되는 제물에는 소뼈와 서대, 낭태 등이 반드시 포함 되어야 하며, 특히 소뼈는 제가 끝난 후 당산나무 옆 밥 무덤에 묻는 것을 원칙으로 삼 고 있다. 동제에 필요한 경비는 호당 일정액을 염출하는 것 이외에 각 가구당 쌀 두 되씩을 걷어 마련한다. (16) 정포마을 숲 당산 소 재 지 : 남해군 서면 정포리 정포마을 규 모 : 노거수 14그루, 밥무덤 2곳 시 대 : 조선시대 진양 정씨, 문화 유씨, 파평 윤씨가 많은 정포 마을에서 음력 시월상정일을 기해 동제를 지 내는 제장이다. 숲이 마을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어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며 포구나무, 모과 나무, 느티나무 등 세 종류 열 네 그루의 나무가 있다. 동제를 지내는 곳은 마을 숲 내에서도 상당, 중당, 하당으로 구분되어 있다. 동제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음력 구월 하순 마을회의를 거쳐 주민들 중에서 선정된다.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 축관, 전사, 집사, 산인, 찬장, 사식,

145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31 사촉 등 모두 20명 가랑이 동제를 지내는 데 직접 참여한다. 진설되는 제물에는 쇠고기, 목 화씨, 나물, 밥, 대추, 감, 등이며 제물의 준비는 제관의 집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17)동정 막돌탑 선돌 소 재 지 : 남해군 서면 동정리 장승, 둔전마을 규 모 : 선돌 1기, 막돌탑 4기 시 대 : 조선시대 장승 마을 (경주 김씨 집성촌)과 둔전 마을(진양 정씨 집성촌)로 이루어진 동정 마을의 동 제는 음력 시월 상정일을 기해 함께 지낸다. 제장은 장승 마을 입구의 선돌(높이1.43m, 둘 레0.98m), 장승 마을 중앙에 막돌탑( 조산: 높이2.80m, 둘레5.70m), 둔전의 막돌탑 (조 산), 쇠막골의 막돌탑(조산) 등 네 곳이며, 이 곳 모두에 밥 무덤이 있다. 이중에 실제로 제가 행해지는 곳은 장승 마을 중앙의 막돌탑(조산)이며, 다른 곳에서는 제가 행해진 후 밥 무덤 에 제물을 묻기만 한다. 동제 일주일 전에는 제장 주변 청소와 금줄(부정을 타지 않은 총각 이 꼬는 것이 좋다고 함)을 치는 등 제반 준비를 하며 동재 당일 낮부터는 장승 마을과 둔전 마을을 돌며 지신밟기를 행한다. 밥 무덤에 묻히는 제물에는 메, 편,(흰떡, 가래떡), 미역, 목화씨(팥이나 콩을 대신하기도하며 농사가 잘 되길 기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함) 등이 있다. (18) 칠성당지 소 재 지 : 남해군 고현면 오곡리 관당 시 대 : 조선시대 칠성당 끝 이라 불리는 두 각지에 있었던 당집 터이다. 이곳의 지명은 칠성당이 있었 던 곶( 串 )이란 의미이다. 주민들의 전언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남해현령으로 부임하는 이들 은 이 곳 칠성당에서 참례하고 현성으로 향했다고 한다. 당시 이 앞으로는 고현에서 남해현 성으로 이르는 길이 개설되어있었다고 하며 이때 남해로 향하는 고갯길은 가창이 고개 를 통했다고 한다. 농공 단지 앞의 김지도불망비( 金 志 道 不 忘 碑 )는 이러한 사실을 방증하는 자료로 주목된다. (19) 보천 목상여 소 재 지 : 남해군 창선면 서대리 보천마을 시 대 : 조선시대

146 1332 남해군지 마을 회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상태가 양호하다. 현재는 목상여를 이용하는 일이 드물지만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자연 마을 단위로 초상이 났을 경우 목상여를 이용하여 망자를 장지 까지 모시는 것은 일상적이었다. 당신에는 동네 아낙들이 주축이 된 밥 계에서 함께 조문객 들을 맞이했고 마을의 장정들은 망자를 태운 목상여로 장지까지 운반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20) 서대 국사당 막돌탑 소 재 지 : 남해군 창선면 서대리 서대마을 규 모 : 제장 4곳 시 대 : 조선시대 산두곡 서쪽의 큰 마을이라 해서 유래된 서대 마을의 동제는 음력 11월 3일일 행해진 다. 제장은 마을 뒤편 국사봉의 국사당 마을 안쪽 당산, 외밭들 막돌탑, 마을과 바다 사이 막 돌탑 등 네 곳이다. 국사봉과 국사당이란 지명은 과거 나라와 임금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 를 지냈던 당집이 있다. 하여 유래되었으며 왜적의 침입이 있을 시에는 봉화를 울리기도 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현재는 당집은 없어졌으며 대신 건물의 초석으로 이용된 것으로 생각 되는 석열이 높여져 있어 과거의 흔적을 짐작 할 수 있다. 국사당 뒤편에는 불쓴바우 로 불리는 바위가 있는데 제의 시에는 이곳에 명태 한 마리를 울려 높고 촛불을 켜둔다. 밥 무 덤은 네 곳뿐만 아니라 동쪽과 서쪽 구릉 등 여섯 곳에 위치해 있다. 제는 원래 마을에서 생 기복덕이 있는 주민이 맡았으나 제관 선정의 어려움으로 인해 10여 년 전부터는 삼동면 지 족의 스님이 대신하고 있다. 그 외 마을이장, 개발위원, 어촌계장 등은 제를 지내는 전 과정 에 동참하며 제가 행해진 후 밥 무덤에 진설되었던 제물을 묻는 일을 담당한다. (21) 광천 큰 당산. 당목. 당집 소 재 지 : 남해군 광천리 광천마을 규 모 : 당목, 당집 시 대 : 조선시대 광천 마을의 동제는 음력 11월17일 행해진다. 제장은 마을 중앙의 큰 당산, 인근 사포 마 을과 경계지점의 광신이재 에 위치한 작은 당산이다. 밥 무덤은 본 당산과 작은 당산 바 로 아래에 위치한 곳 이외에 보천 마을과의 경계 지점 등 세 곳에 위치해 있다. 제관은 생기 복덕을 두루 갖춘 사람이 맡지만 동제를 앞두고 마을에 흉사가 생길 경우 스님에게 맡긴다.

147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33 (22) 동대, 당집. 당목 소 재 지 : 남해군 창선면 동대리 동대마을 규 모 : 당목, 당집 시 대 : 조선시대 산두곡의 동쪽에 위치해 있다. 해서 지명이 유래된 동대 마을의 동제는 음력 십일월 보름에 행해진다. 제관은 마을에서 생기복덕을 두루 갖춘 사람이 직접 주관함을 원칙으로 하지만 적격자가 없을 경우에는 인근의 스님에게 맡기는 경우도 있다. 동제는 마을 뒤 하천 을 따라서 갈림길에 위치한 당집에서 행해지며 밥 무덤은 당집 위와 삼거리 도로변에 있다. (23) 구도 당집 소 재 지 : 남해군 창선면 부윤2리 구도마을 규 모 : 당집 시 대 : 조선시대 마을 앞에 위치한 거북이 모양 섬으로 인해 지명이 유래된 구도( 龜 島 )의 동제는 섣달그믐 자정을 기해 행해진다. 제장은 대산골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산의 정상부에 위치한 당집이 며, 밥 무덤은 당집 아래 당집 좌측 5m 지점 우측 당집 5m 지점 등 세 곳에 각각 위치해 있 다. 제관은 구도 마을 내 4개반 별로 순차적으로 돌아가면서 맡고 있다. 12) 동 식 조 생물 (1) 백로 서식지 지정번호 : 남해군조 지정일자 : 소 재 지 : 남해군 남해읍 봉전리 규 모 : 백로 2천여마리 부 속 물 : 수종( 樹 種 )가시 참나무와 적송 관 리 자 : 남해군 남해읍 봉전 마을 뒷산이 전국에서도 대규모 백로 서식지이다. 남해군에서는 이곳을 조수 보호구역으로 지정하였고 백로를 군조로 지정하고 있다. 이곳에 2.000여 마리의 백로가 서 식하고 있는 곳으로서 백로는 주로 소나무에 서식하는데 봉전 마을의 수종은 특이하게도 가 시참나무가 수종을 이루고 있고 부분적으로 적송이다. 이곳에 서식하고 있는 백로의 중요

148 1334 남해군지 먹이 공급지는 남해읍쓰레기 매립장 일대의 갈대밭, 갯벌, 하천이며 이곳과 봉전과는 중요 통과 경로인 것이다. 1973년 12월 24일에 군조( 郡 鳥 )를 해오라기로 지정하였으나 해오라기 아닌 백로라는 사실이 입증됨에 따라 1998년에 군조를 백로로 바꾸었다. 이곳에 서식하고 있는 백로는 중대백로로서 온몸이 순백색이고 부리, 목, 다리가 길다. 번식기에는 등에서 장 식깃이 나오고 목의 아랫부분에서도 깃이 나온다. 이 깃은 겨울에는 사라지며 어린 새끼에 는 깃이 없다. 부리는 검고 눈앞과 눈 주위는 녹청색이며 다리는 까맣다. 검은 부리는 겨울 에는 노랗게 변한다. 4월 말부터 6월 말까지가 번식기이며 2~4개의 알을 낳아 암수가 번갈 아 가면서 알을 품고 부화시킨다. (2) 난음 비자당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난음리 규 모 : 난음마을 앞 구릉 이동면 난음리 장전마을 앞 북서쪽에 배( 船 )한 얕은 구릉이 있다. 이곳에는 40여 년 전 까 지는 비자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으나 식수는 하지 않고 벌 채만 한 관계로 현재에는 몇 그루만 남아있는 실정이며 천연기념물에서 해제 되었다. 그 산 봉에 당집이 있었고 옆은 깊은 우물이 있으나 허물어지고 흔적만 남아 있다 광복 후에 도 당집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며 선박이 입. 출항하면서 무사 항해를 위해 기원한 곳이 라고 한다. 특히 남해의 진상품인 유자, 치자, 비자를 난포에서 수로를 이용하여 경주의 월 성, 송도의 개성, 서울의 한성까지 무사히 운송 될 수 있도록 난포 현령이 이 당집에서 용신 에게 제를 올렸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에는 흔적마저 찾아볼 수 없고 해변에 있었던 선창도 육지가 되었다 동란 때까지도 당집이 있는 아랫마을에 무속인이 살고 있었으나 지금 은 다른 지역으로 이거했다고 한다. 구전에 의하면 조선 인조 16년(1638년)에 허목( 許 穆 )이 지은 남해기행문에 비자당이란 곳을 지났다. 비자당은 남해 고을에서 이 십리 떨어진 곳 이며 해안에 비자목이 많다. 산봉에 사당 하나가 있는데 나이 많은 노인들에 의하면 신라 때 어떤 왕자가 이 섬에 들어 왔다가 죽어서 신이 되었다고 한다. 오늘날까지도 바다 가운데에 서 그 신께 제사를 지낸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3) 아산리 보호수 지정번호 : 경상남도나무 수 종 : 느티나무

149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35 소 재 지 : 남해군 남해읍 아산리 규 모 : 수령500년 시 대 : 조선시대 오동 마을 정자목으로 주민들의 쉴 수 있는 휴식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수고는 13m, 흉 고 직경은 650cm이며, 나무가 충격이나 병충해 등 기타 요인으로 인해 줄기에 구멍이 생겨 느티나무를 죽이는 원인이 되므로 2006년 12월에 나무외과수술을 시술했다. (4) 오리 당목 지정번호 : 경상남도나무 수 종 : 느티나무 소 재 지 : 남해군 남면 평산리 오리마을 시 대 : 조선시대 매서운 바닷바람과 풍랑이 직접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심었다고 전해지는 오리 마을 숲의 입구에 있다. 수령은 약 400년 정도이다. 당목 아래에는 조그마한 선돌괴 밥 무덤 이 있다. 오리 마을의 동제는 음력 시월 보름에 행했으나 현재는 지내지 않은 경우가 많다. 제관 선정과 경비 마련의 어려움 동제를 지내야 할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약화되면서 최근 3 년 동안 연속해서 지내지 못했다고 한다. (5) 양아리 보호수 지정번호 : 경상남도나무 수 종 : 팽나무 소 재 지 :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 1983 규 모 : 수령300년 시 대 : 조선시대 백련 마을의 정자목으로 주민들의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으며 수고는 12m, 흉고 직경은 290cm의 팽나무이다. (6) 양아리 보호수 지정번호 : 경상남도나무 수 종 : 느티나무 소 재 지 :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 1983 규 모 : 수령300년 시 대 : 조선시대

150 1336 남해군지 경상남도나무 인 팽나무와 같은 지번에 있는 약 300년 정도의 수령인 느티나무 이며 수고는 18m, 흉고 직경은 380cm이다. 도로에 인접하고 있으며 주민들의 휴식처를 제 공하고 있다. (7) 양아리 보호수 지정번호 : 경상남도나무 수 종 : 느티나무 소 재 지 :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 1983 규 모 : 수령200년 시 대 : 조선시대 경상남도나무 팽나무, 경상남도나무 느티나무와 함께 백련 마을의 주민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으며 수고는 18m, 흉고 직경은 370cm이다. (8) 용소리 화계 보호수 지정번호 : 경상남도 수 종 : 느티나무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규 모 : 수령550년, 수고 14m 시 대 : 조선시대 화계 마을 안에 위치한다. 수종은 느티나무이며 나이는 약 550년 정도이다. 높이는 약 14m정도이다. 느티나무는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낙엽성 교목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 국과 일본에서도 자란다. 우리나라에서도 제주도에서부터 평안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분포하지만 북쪽으로 갈수록 그 수가 줄어든다. 팽나무와 함께 우리나라 남부지역의 대표적 당목 혹은 정자목이다. (9) 난음리 보호수 지정번호 : 경상남도나무 수 종 : 느티나무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난음리 규 모 : 수령650년, 수고19m 시 대 : 조선시대 난곡사 바로 옆에 있다. 느티나무이며 수명은 약 650년 정도이고 높이는 약19m이다. 마

151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37 을의 당목이며 나무 주위에 3개의 밥 무덤이 있다. 이 밥 무덤들은 각각 산, 나무, 바다에 제 물을 진설하는 것으로 제는 음력 10월 15일에 올렸으나 지금은 행해지지 않는다. (10) 당항리 보호수 지정번호 : 경상남도나무 수 종 : 느티나무 소 재 지 : 남해군 남면 당항리 규 모 : 수령550년 시 대 : 조선시대 당항리 마을 당목으로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동제를 지내고 있으며, 수고는 15m, 흉고 직경은 600cm이다. (11) 상가리 보호수 지정번호 : 경상남도나무 수 종 : 느티나무 소 재 지 : 남해군 남면 당항리 197 규 모 : 수령550년 시 대 : 조선시대 마을의 휴식공간을 제공하는 정자목으로서의 역할과 매 년 음력 10월 15일 동제를 지내는 마을의 당목이다. 수고는 15m, 흉고 직경은 600cm이다 (12) 물건리 보호수 지정번호 : 경상남도나무 수 종 : 느티나무 소 재 지 :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 규 모 : 수령350년 시 대 : 조선시대 은점 마을의 정자목으로 주민들의 휴식 공간을 제공하고 있으며, 3회(2004년, 2007, 2008년)에 걸쳐 나무외과수술을 시술하였다. (13) 물건리 보호수 지정번호 : 경상남도나무 수 종 : 이팝나무

152 1338 남해군지 소 재 지 :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 규 모 : 수령200년 시 대 : 조선시대 은점 마을의 정자목으로 수종은 이팝나무이다. 수고는 20m, 흉고 직경은 310cm이다. 2001년 나무외과수술을 시술하였다. (14) 서변리 보호수 지정번호 : 남해군나무 수 종 : 느티나무 소 재 지 : 남해군 남해읍 서변리 24-1 규 모 : 수령 460년 시 대 : 조선시대 남해군청 청사에 있는 느티나무이며 나무 아래에서 각종 문화 행사를 하는 명소이다. 그 리고 관공서를 찾는 민원인에게 계절이 바뀔 때 마다 좋은 경관을 선보이는 풍치목이다. 수 고는 21m, 흉고 직경은 500cm이다. (15) 동천리 보호수 지정번호 : 남해군나무 수 종 : 느티나무 소 재 지 : 남해군 삼동면 동천리 내 동천마을 규 모 : 수령 350년, 수고20m 시 대 : 조선시대 내 동천마을 회관 앞에 있다. 높이는 약 20m이며 수령은 약 350년 정도이다. 수종은 느티 나무이다. 느티나무는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낙엽성 교목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과 일본에서도 자란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에서부터 평안도까지 분포하지만 북쪽으로 갈수 록 점차 그 수가 줄어든다. 팽나무와 함께 우리나라 남부지역의 대표적 당목 혹은 정자 목이 다. (16) 오곡리 보호수 지정번호 : 남해군나무 수 종 : 회화나무 소 재 지 : 남해군 고현면 오곡리 1534 규 모 : 수령 400년

153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39 시 대 : 조선시대 오곡 마을 입구에 있는 정자목으로 마을 주민들에게 편안한 휴식처를 제공하여 준다. 수고 는 14m, 흉고 직경은 500cm이다 (17) 선소리 보호수 지정번호 : 읍면나무 수 종 : 팽나무 소 재 지 : 남해군 남해읍 선소리 규 모 : 수령 200년 시 대 : 조선시대 선소 마을 주민의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으나 도로 확장으로 도로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선소 앞바다의 풍경과 잘 어울려진 팽나무 정자이다. 수고는 9m, 흉고 직경은 350cm이다. (18) 내산마을 보호수 지정번호 : 읍면나무 수 종 : 느티나무 소 재 지 : 남해군 삼동면 봉화리 내산초등 정문 규 모 : 수령 300년, 수고 19m 시 대 : 조선시대 내산마을 입구에 있는 내산 초등하교 정문 앞에 위치한다. 높이는 약 19m이고 수령은 약 300년 정도이다. 수종은 느티나무이다. 느티나무는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낙엽성 교목이다. 가지마다 가득하게 달리는 잎은 긴 타원형이며, 나란히 생겨난 엽맥이 특징적이다. 느티나 무 목재는 무늬와 색상이 아름답고 중후하다. (19) 선구마을 보호수 지정번호 : 읍면나무 수 종 : 팽나무 소 재 지 : 남해군 남면 선구리 1376 규 모 : 수령 350년 시 대 : 조선시대 선구 마을 주민의 휴식을 제공하는 휴식목이며 수고는 14m, 흉고 직경은 350cm이다. 수 종은 팽나무이며 2004년 12월 나무외과수술을 시술했다.

154 1340 남해군지 (20) 서상 당목 지정번호 : 읍면나무 수 종 : 느티나무 소 재 지 : 남해군 서면 서상리 서상마을 시 대 : 조선시대 현풍 곽씨가 많이 거주하는 서상 마을의 동제는 음력 시월 보름 자정을 기해 행해진다. 제 장은 면사무소 내에 있는 당목은 느티나무이며 그 아래에는 밥 무덤이 있다. 동제 일주일 전 에는 제장 주변을 청소하고 금줄을 치는 등의 준비를 한다. 제는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 집 사, 축사 등의 주관 하에 행해진다. 밥 무덤은 밥, 미역, 목화씨 등을 묻는다. (21) 냉천 당목 지정번호 : 읍면나무 수 종 : 느티나무 소 재 지 : 남해군 창선면 당항리 냉천마을 시 대 : 조선시대 찬샘 혹은 찬새미 라 불리기도 하는 냉천 마을의 동제는 음력 시월 보름 (원래 섣 달그믐이었으나 7~8년 전부터 조정)자정을 기해 행해진다. 제장은 마을 뒤편 연태산 자락 에 위치한 당집과 마을회관 옆 벚나무 등 두 곳이다. 밥 무덤은 두 곳 이외에 당항 마을로 넘 어가는 고개 마루에 위치한 모린내고랑, 질마치 등 네 곳이다. (22) 당항 당목 지정번호 : 읍면나무 수 종 : 푸조나무 소 재 지 : 남해군 창선면 당항리 당항마을 규 모 : 수령 200년, 수고 19m 시 대 : 조선시대 당고개 라 불리기도 하는 당항 마을의 동제는 음력 섣달그믐을 기해 행해진다. 제장 은 도로 위 금오산 자락의 야산에 위치한 소나무와 마을 중앙의 푸조나무(수령200년. 수고 19m)등 당목 두 기로 마을에서는 둘 모두 당산 할배 로 부른다. 밥 무덤은 당산 두 곳 이외에 마을 진입로 두 곳 등 모두 네 곳에 위치해 있다. 제관은 차례대로 순번을 정해 놓는 다.

155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41 (23) 평리 보호수 지정번호 : 마을나무 수 종 : 팽나무 소 재 지 : 남해군 남해읍 평리 규 모 : 수령 120년 시 대 : 조선시대 평리 마을회관 안에 휴식목으로 수고는 10m, 흉고 직경은 410cm이다. (24) 양아리 보호수 지정번호 : 마을나무 수 종 : 느티나무 소 재 지 :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 하천변 규 모 : 수령 210년 시 대 : 조선시대 학교 앞 하천변에 있는 정자목이다. 수고는 15m, 흉고직경은 300cm이다. 2회(2001년, 2007년) 나무외과수술을 시술했으며 느티나무의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25) 용소리 보호수 지정번호 : 마을나무 수 종 : 팽나무 소 재 지 :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210 규 모 : 수령 200년, 수고 10m 시 대 : 조선시대 1024지방도에서 질마재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한다. 수종은 팽나무이며 나이는 약 200 년이다. 높이는 10m에 달한다. 팽나무는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낙엽성 교목이다. 이 나무는 우리나라 제주도에서 함경도에 이르기까지 각처에 분포하나 지역적으로는 영호남의 곡창지 대에 많다. 은행나무, 느티나무와 함께 크게 자라는 대표적 수종이다. (26) 봉화마을 보호수 지정번호 : 마을나무 수 종 : 느티나무 소 재 지 : 남해군 삼동면 봉화리 봉화마을

156 1342 남해군지 규 시 모 : 수령 250년, 수고 19m 대 : 조선시대 봉화마을 입구에 위치한다. 높이는 약 19m이고, 수령은 약250년 정도이다. 수종은 느티 나무이다. 느티나무는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낙엽성 교목이다. 느티나무의 한자 이름은 귀목 인데 이것이 잘못 알려져 귀목이니 괴목이니 하게 된 것이다. 조사 지역의 주민들도 대부분 귀목이라 증언하였다. 이 나무는 팽나무와 함께 우리나라 남부 지역의 대표적 당목 혹은 정 자 목이다. (27) 영지리 보호수 지정번호 : 마을나무 수 종 : 팽나무 소 재 지 : 남해군 삼동면 영지리 1124 규 모 : 수령 150년 시 대 : 조선시대 영지 마을에 있는 당목으로 매년 동제를 지낸다. 수고는 14m, 흉고 직경은 340cm이다. (28) 노구 가직대사 삼송 지정번호 : 마을나무 수 종 : 소나무 소 재 지 : 남해군 서면 노구리 노구마을 시 대 : 조선시대 진양 정씨 집성촌인 노구 마을에 송학당 가직대사가 남상 마을 중리 마을과 함께 심었다고 전해지는 삼송중 하나이다. 마을에서는 음력 10월 21일 가직대사 삼송을 당산으로 두고 동 제를 지냈으나 최근에는 마을 회관에서 제를 지내고 있다. 밥 무덤은 동서남북 방향의 마을 의 경계지점 네 곳에 있다. (29) 도마 당목 지정번호 : 마을나무 수 종 : 녹나무 소 재 지 : 남해군 고현면 도마리 중도마 마을 시 대 : 조선시대 원래 고현면의 중심지였던 도마리의 동제는 도마 본마을, 동도마, 서도마, 성산, 질개 등

157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43 다섯 마을이 통합해서 지냈으나 현재는 지내지 않고 있다. 대신 5~6년 전부터 고현면 사무 소가 있었던 자리인 도마 마을 입구의 녹나무에서 정월대보름을 기해 제를 지내고 있다. 이 제는 면사무소의 이전으로 좋지 않은 일이 연이어 일어나는 것에 대한 우려로 고현면 주관으 로 행해진다. (30) 고사 보호수 지정번호 : 마을나무 수 종 : 팽나무 소 재 지 : 남해군 설천면 고사리 고사마을 규 모 : 수령 180년, 수고 12m 시 대 : 조선시대 2001년 12월 1일 지정된 팽나무로 수령이 180년 정도 되었다. 높이는 약12m이다. 팽나 무는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낙엽성 교목이다. 이 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제주도에서 함경도에 이르기까지 각처에 분포하나 지역적으로는 영호남의 곡창지대에 많다.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와 함께 오래 그리고 크게 자라는 대표적인 수종이다. (31) 문의리 보호수 지정번호 : 마을나무 수 종 : 팽나무 소 재 지 : 남해군 설천면 문의리 520 규 모 : 수령 150년 시 대 : 조선시대 문의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는 정자목이며 수고는 16m, 흉고직경은 360cm이다. (32) 지족리 보호수 지정번호 : 마을나무 수 종 : 팽나무 소 재 지 : 남해군 창선면 지족리 97 규 모 : 수령 170년 시 대 : 조선시대 지족 마을 회관에 위치한 휴식목으로 마을 주민들에게 편안한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다. 수 고는 13m, 흉고 직경은 300cm이며 2001년 나무외과수술을 시술하였다.

158 1344 남해군지 (33) 남상 가직대사 삼송 지정번호 : 마을나무 수 종 : 소나무 소 재 지 : 남해군 서면 남상리 남상마을 시 대 : 조선시대 영조 23년(서기1748) 남상마을에서 태어난 가직대사 법명 가직( 可 直 ) 호( 呼 ) 송학당( 松 鶴 堂 )이 심은 소나무이다. 가직대사는 인근 화방사에서 도를 익혀 여러 가지 신기 묘술로 선행 을 베푼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리, 노구 마을과 더불어 남상 마을에 심은 가직대사 삼송은 역시 기가 약한 지역에 나쁜 액이 침범하여 마을에 좋지 않은 일들이 생길 것을 우려한 가직 대사의 고향에 대한 애정이 담겨져 있다. 남상 마을에서는 가직대사 삼송 앞에서 마을 이장, 새마을지도자, 청년회장 등이 주축이 되어 사월 초파일 삼경을 기해 가직대사의 뜻을 기리 고 동네의 안녕을 기원하는 삼송제를 지내고 있다. 삼송제 당일, 마을의 각 가정에서는 일찍 소등하여 삼송제에 정성을 기울인다. 제관, 축관, 집사 등은 관복을 갖추고 소나무 주변에 미리 설치해 둔 갓등에 불을 밝힌 후 마을 주민들이 참관한 가운데 제를 지낸다. (34) 중리 가직대사 삼송 지정번호 : 마을나무 수 종 : 소나무 소 재 지 : 남해군 서면 남상리 중리마을 시 대 : 조선시대 전주 이씨 집성촌인 중리 마을 ( 운흥동 이라고도 불림)에 송학당 가직대사가 마을의 평안을 위해 심었다고 전해지는 소나무이다. 마을에서는 음력 시월 보름을 기해 소나무 앞 에서 제를 지내고 있다. 중리 마을은 당산 두 곳과 조산 세 곳 등을 통칭하여 오당산 이 라 부르고 있으며 오당산과 마을의 젖줄인 계곡 물 아래 등 여섯 군데에 밥 무덤이 있다. (35) 미조 용나무 소 재 지 : 남해군 미조면 미조리 산 규 모 : 1주(수고 7~8m, 흉고 직경 80cm) 시대 및 관리자 : 조선시대, 김화복 남해군 미조면 미조리 사항 마을 미화산( 彌 華 山 ) 절벽(일명, 빗바위) 중턱에 자리 잡고 있

159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45 는 이 용나무는 뿌리 하나가 절벽을 따라 땅 속 깊이 내리고 있고 뿌리 하나는 하늘 쪽으로 약2m정도 힘차게 뻗어 오르던 줄기가 그 지점에서 땅속 공간 절벽 아래로 굽어 치고 있어 마치 용이 꿈틀 거리는 것과 같고 소나무 껍질에서 윤이나 번들거리는 것이 용의 비늘과 같 다하여 용나무라 불리어 지고 있다. 수고는 7~8m, 둘레3m, 흉고 직경80cm로서 수령은 약 700년으로 보이는 소나무이다. 옛날에는 풍어제와 어선들의 입 출항 시에 무속행위 등을 많이 행하였다고는 하나 현재 에는 어획량의 감소와 어민들의 무관심 등으로 용나무만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용 나무는 남해 사람들이 어려움에도 끝까지 극복 할 수 있는 인내와 성실함을 상징 할 수 있는 자연적인 표상이라고 볼 수 있다. 13) 기타 (1) 덕신 역원 설천면 덕신리에 있었던 덕신 역원은 소역이기는 하나 고려 중기부터 내려온 남해의 유 일한 역이었다. 조선 중엽에는 덕신역을 비롯하여 노량원, 지족원이 있었으나 노량원과 지 족원은 항구의 조창역할을 한 것이고 덕신 역원은 육상 역원으로 곤양 양포역과 연결이 되 었다. 덕신역은 전국 8선 중 6선에 해당되었고 처음에는 종 9 품 역승( 驛 丞 )이 지휘하였으 나. 중종 30년(1535년)에는 종 6 품 찰방( 察 防 )이 관장하였다. 진주진관 남해현지의 기록에 의하며 덕신 역에는 중마 5필이 있고 복마 4필이 있었으며 역리는 22명이었다. 노량원) 은 노량의 남쪽 해안에 있고 현의 북쪽 40리 지점이다. 지족원은 현의 동쪽 30리 지점에 있 다 고 기록하고 있다. 역참제도는 신라 때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존속 발전하여 왔다. 역참의 역할은 공문서의 전달과 관리의 안내와 숙박, 관물의 수송 그리고 정령 및 공부의 전 달과 특수 물자의 수송 등을 목적으로 전국적인 규모와 계통을 이루었다. 역참에는 역전, 역 정, 역마가 있었고 역장, 역리, 역졸을 두어 역정을 담당하게 하였다. (2) 창선 목장 소 재 지 : 남해군 창서면 전역 규 모 : 창선면 전역 창선면의 창선 목장은 섬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전국에서도 대규모 목장으로 알려져 있으 나 어느 때 설치되었는지 알 수 없다. 순조 11년(1811년)에 발간된 진주목 읍지의 목장지

160 1346 남해군지 기록에 의하면 창선도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 쌓여있고 땅은 진주에 예속되었으나 세금은 사복( 司 僕 )에게 바친다. 동쪽에서 서쪽까지 길이가 30리요 남쪽에서 북쪽까지 너비가 25리 이며 둘레가 60리 이다. 기라( 箕 羅 ). 고조선과 신라 때 에는 어느 땅에 속한 무슨 군이었는 지 알지 못하겠으나 전해오는 말로는 고려 때 흥선현을 만들고 현감을 두었다고 한다. 조선 조에 와서 비로소 목장을 설치하고 국마를 방목 하였으며 감목관을 두었는데 전결( 田 結 )을 주어 그 세금으로 말을 기르게 하였다 고 기록하고 있으며, 진주목 읍지에는 창선 목장 은 주( 州 )의 남쪽 90 리 창선면에 있으며 목자가 489 명이요 위 양마(먹여기르는 말)가 882 필 이라고 적고 있다. 추측컨대 조선 성종 17년(1484)이후 부터 중종 38년(1543년)까지 59년 사이에 창선도에 사람들이 찾아와서 살기 시작했고 말 목장이 설치된 것으로 추정한 다. 목장이 없어진 시기는 임진왜란 이후 평온이 찾아 올 무렵부터 목장들이 쇠퇴하기 시작 하여 창선 목장도 조선조 말기에 없어졌다고 추정하나 감목관 선정비가 1864년까지 있는 것 을 보아 관직은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창선면 사무소 앞에는 감목관을 지낸 분들의 선 정비, 영세불망비등 9기가 입석되어있다.

161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47 제2장 관광 1. 개요 관광이란 기분전환과 더불어 휴식을 취하며 인간 활동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고 미지 의 자연환경을 접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험과 교양을 넓히기 위해 정해진 곳을 떠남으로 성 립하는 여가활동의 일종이다. 즉 관광이라 함은 사람이 일상생활을 떠나 다시 돌아올 예정 으로 타국이나 타 지역의 문물, 제도 등을 시찰하고 풍경 등을 감상 유람할 목적으로 여행 하는 것이다. 관광은 미시적 관광과 거시적 관광으로 구분한다. 즉 미시적 관광은 사람이 일상생활로 부 터 떠나 다시 돌아올 예정으로 이동하여 영리를 목적하지 않고 풍물 등을 즐기는 것이며, 거 시적 관광은 그와 같은 행위에 의해서 파생되는 사회 현상의 총체라고 말할 수 있다. 1967년을 국제연합에서 국제관광의 해 로 지정하여 관광은 모든 사람들 그리고 모 든 나라의 정부가 찬양하고 권장할 가치가 있는 기본적이면서도 바람직한 인간 활동이다 라는 취지의 결의문을 채택한 바 있다. 따라서 관광은 인간 활동 생활에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오늘날 우리 사회의 새로운 산업으 로 등장하였다. 2. 관광 자원의 종류 관광자원이란 관광대상이 될 수 있는 소재를 관광자원으로 생각하고 이것을 개발함으로서 관광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또한 보존. 보호하지 않으면 훼손되고 감소되는 점에서 관광 자원이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관광자원의 분류는 학자들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관광자원을 크게 유형 자원과 무형자원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유형자원을 자연자원과 인문자원으로, 무형자원을 인적자원과 비인적 자원으로 소분류하고 인문자원을 문화자원과 관광 동기 충족 산업시설로

162 1348 남해군지 나누고 있다. 관광자원이 유형물이든 무형물이든 그것이 관광객을 유인할 수 있고, 또 관광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산업성을 띠고 있다면 관광자원이 되는 것이다. 관광자원은 자연자원 과 인문자원이 병행함으로서 가치를 높일 수 있다. 1) 자연 자원 인간은 일상생활을 떠나 자연의 모습을 접할 때 많은 감명을 받게 마련인데 그것이 관광의 커다란 효과이다. 그리고 자연현상은 관광자원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산지 하천 평야 호수 계곡 폭포 도서( 島 嶼 ) 온천 공원 기후 기상 토양 동식 물 등이 중요한 자원이며, 또한 민족의 고유한 전통적 문화를 반영해 주는 문화재와 인위적 으로 개척한 보양지( 保 養 地 ), 휴양지 공업단지, 다목적댐, 산업시설 등도 중요한 자원이다. 2) 인문 자원 인문자원은 문화자원과 관광 동기 충족 산업시설로 구분한다. 문화자원은 한 민족의 전통 적 문화를 반영해 주는 자원으로서 미술공예품, 건조물, 조각과 같은 유형문화재와 보양지, 휴양지 등 인위적으로 개척한 것이 있다. 3) 무형 자원 무형자원은 인적자원과 비인적 자원으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인적자원은 국민성, 풍 속, 습관, 전통적인 고유 기술 언어 인심 예절 등 국민이 오랫동안 생활해 오는 동안 정립 되어진 인간생활의 규범가치이며, 비인적 자원은 인간 생활의 문화가치의 성격을 띤 것으로 한 나라의 고유 종교 철학 사상 체계 역사 제도 문학이 여기에 속하며, 우리나라의 경 우 전통적 음악인 창( 唱 ), 가극, 향가( 鄕 歌 ) 같은 것이 모두 비인적 자원의 범주에 속한다. 4) 기타 자원 최근 경향으로 생산의 과정, 즉 공장 등에서의 생산 공정과 기술도 관광자원화 되고 있는 추세로 이는 관광자원의 활성화가 이를 뒷받침해 준다.

163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49 우리나라의 경우 서울 등의 대도시가 산업관광의 대상이 되고 있다. 특히 요즘은 구매를 하기 위한 구매관광, 먹고 마시기를 위한 미각( 味 覺 )의 관광도 무시할 수 없는 관광자원이 다. 3. 남해군의 관광자원 1) 개요 남해는 우리나라 남단에 위치한 76개의 도서로 구성된 다도군으로 차량으로 서울에서 4시 간 30분, 대전에서 2시간 30분, 부산에서 2시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노량해협, 금산, 상주은모래비치 등 지역의 일부가 한려해상국립공원에 포함되어 있어 해 안경관, 희귀동식물, 문화유적, 해수욕장 등을 기반으로 해상 관광권이 형성되어 있다. 전 국을 10대 관광권으로 구분할 때 남해군은 한려수도권에 속한다. 기온은 연중 온화하며 영 하의 날씨가 매우 적고 한서의 차가 적어 우리나라 제일의 기후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남해 대교, 창선대교, 창선.삼천포대교의 개통으로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다. 특히 우리고장은 고려 중엽부터 조선중엽에 이르는 동안 왜구들의 끈질긴 침공과 약탈이 있었으나, 고려 말 왜구를 물리친 최영장군, 해도원수 정지장군, 노량해전의 이순신 장군 등 조상들의 거룩한 정신으로 오늘의 남해를 형성하였다. 예로부터 산천이 수려하여 신선이 살 고 있는 섬이라 하였으나,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유배지로 유배객들이 남긴 유배문학이 형 성된 곳이다. 남해안의 특징인 리아스식 해안의 절경은 훌륭한 해양 관광자원이다. 산악, 해안, 사 찰, 사적과 유적지, 천연기념물, 특산물 등 풍부한 관광자원은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 어 남해를 찾는 관광객이 해매다 증가하는 추세이다. 그리고 물과 공기가 맑고 풍경이 수려 하여 전국을 대표하는 장수의 고장이다. 인심이 후하여 사람 살기 좋고 경치 또한 좋은 곳이 며, 갖가지 전설과 역사를 간직한 명승고적 절경 절승영악의 소금강산이라 불리는 금산, 은가루를 뿌린 듯한 반짝이는 상주은모래비치을 가진 남해는 수백만의 관광객을 부르는 국 민관광 휴양지로서 그 명성이 날로 더하고 있다. 남해지역의 관광자원은 타지방 관광자원보다 도서지방 특유의 자원이 많은 편이다. 예를 들어 구분하면 국립공원, 해안선, 사적, 사찰, 해수욕장, 도서경관, 천연기념물, 특산물, 낚 시터, 각종 체험 프로그램 등이 있다. 그리고 특색 있는 자연자원, 인문자원, 무형자원, 기타

164 1350 남해군지 자원 등이 훌륭한 관광자원으로 거듭나고 있다. 2) 산악 (1) 금산 남해읍에서 20km쯤 달리다 상주은모래비치에 가기 전 좌회전해서 들어가면 남해의 소금 강으로 불리는 금산이 있다. 창선 삼천포대교가 개통되어 미조항과 상주은모래비치를 찾 아가는 방법이 있으나 해안의 절경을 같이 즐기려면 남해대교 방면으로 가는 길이 좋다. 비 록 해발 681m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기암괴석이 산 전체를 둘러싸고 있고 아름다운 해안과 맞물려 절경을 이루고 있다. 원효대사가 신라 문무왕 3년(663년)에 이 산에 보광사를 창건하면서 산 이름을 보광산이 라 칭했으며, 금산이란 이름은 조선 건국 이전에 이성계가 조선의 건국을 앞두고 보광산에 서 백일간 기도를 올려 조선을 건국하자 그 보답으로 산을 온통 비단으로 덮겠다고 한 것에 서 유래되었다. 이름이야 어찌되었던 금산은 아름다운 산이다. 마치 고운 비단 치마를 입고 있는 것처럼 산은 수려하며 눈부신 비경이 곳곳에 숨어있다. 금산의 제1경인 쌍홍문을 비롯, 무려 38경 이 해발 681m의 조그마한 산에 자리하고 있다. 상주면에서 등산로를 이용하면 기암괴석들로 뒤덮인 금산의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다. 금 산의 등산길은 사방으로 여러 개의 길이 있으나 그 정문은 쌍홍문이다. 두 개의 큰 굴이 웅 장한 바위에 뚫려있다. 이 문으로 들어와 굴 속에서 땀을 식히고 금산 38경의 절경을 가슴으 로 음미하면 될 것이다. (2) 망운산 786m, 남해 최고 높이를 자랑하는 망운산, 그러나 남해안 제1의 명산인 금산에 가려 진가 가 숨겨진 곳이다. 금산은 남해를 찾는 손님들의 산이라면, 망운산은 남해인들이 가장 아끼 는 산이다. 고현면 대곡 마을에 있는 화방사에서 조용한 산사의 정적을 뒤로하고 산길을 올 라 정상에 오르면 점점이 떠있는 자그마한 섬들과 강진만, 연죽저수지, 청정해역의 서상 앞 바다, 멀리 지리산, 여천공단, 여수, 삼천포가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에는 기우제를 지냈던 흔적인 듯, 평평하게 북쪽을 향하도록 되어 있고, 옆에는 제관 이 앉을 수 있도록 돌로 된 의자가 놓여있다. 남해에 가뭄이 심할 경우 제일 먼저 이곳에서

165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51 기우제를 지내고, 그래도 비가 오지 않을 경우 상주리 앞 바다 세존도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고 한다. 정상 반대편에 있는 연대봉에는 봉수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 5월에 철쭉군락지의 꽃들이 만개하면 가족단위나 친목회 등의 모임에서 많이 찾아오며, 정상까지는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남해읍에서 관광안내판을 따라 남해대교 방향으로 3분 정도 가면 고현면 이 어 마을이 나온다. 그곳에서 좌회전하여 5분 정도 가면 화방사 입구에 이정표가 있어 찾기가 쉽다. 화방사 그늘에 차를 세워두고, 망운산 등산로로 들어선다. 길이 험난하지 않으므로 가 벼운 마음으로 등반을 할 수 있다. (3) 설흘산 남면 홍현마을에 있는 설흘산(488m)은 망산(406m)과 인접해 있다. 설흘산에서 내려다보 면 깊게 들어 간 앵강만이 한눈에 들어오고 서포 김만중의 유배지인 노도가 아늑하게 내려다 보인다. 인접하고 있는 전남 해안지역과 한려수도의 아기자기한 작은 섬들도 조망할 수 있 는 곳이다. 설흘산 정상 부근에는 봉수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원래 봉수대는 주위를 넓게 관측할 수 있는 곳에 정한다. 설흘산 역시 한려수도와 앵강만 그리고 망망대해를 관측할 수 있는 곳이다. 남면 구미지역과 응봉산으로 오르는 등산로는 망망대해와 기암괴석 그리고 아 래에 보이는 가천 다랭이 마을의 풍경을 같이 즐길 수 있는 산행코스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 이지 않고 있다. (4) 호구산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금산부터 오르고 그 다음은 남해 최고봉인 망운산에 오른다. 그리고 돌아 갈 시간에 쫓겨 황급히 섬을 떠난다. 이 때문에 남해의 잘록한 허리춤에 자리한 호구산(627m)을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남해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쯤 호구산의 거친 산세에 눈길을 빼앗기게 된다. 지형도에는 산 이름이 표기되어있지 않 지만, 송등산, 괴음산등의 산군을 엮어 호구산으로 대표되는 호구산군립공원 으로 지정 되어 있다. 호구산이 남해군의 군립공원으로 지정된 것은 그만큼 자연경관이 뛰어나고 보존 가치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호구산은 호랑이 형상을 닮았다는 유래가 있고, 옛날 호랑이 가 지리산에서 건너와 이 산에 살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정상에 오르면 멀리 광양, 여 수, 하동, 통영이 모두 보이며 잔잔히 펼쳐진 바다가 포근함을 느끼게 한다. (5) 대방산

166 1352 남해군지 소맥산맥은 여러 갈래의 지맥을 뻗어 남해 바다로 이어진다. 남쪽으로는 강진만과 북쪽으 로는 삼천포 해협이 연결 되어있는 섬 중에 섬, 창선 본섬의 가운데에는 남북으로 깊게 들어 온 동대만과 당저만이 중앙으로 양분되어있고 대방산(468m)은 봉수대와 함께 창선의 중심 에 우뚝 솟아 있다. 그리고 연태산, 속금산, 망치산, 여봉산 등은 사이좋은 오누이와 같다. 단조로울 수 있는 바다에 리아시스식 해안은 생기를 불어 넣은 듯하고, 정원의 꽃들을 감싸 듯 울타리를 친 올망졸망한 섬들은 거인 나라의 잘 가꾸어진 정원과 연못에 초대받은 손님 인 듯 착각에 빠지게 한다. 정상에서 보이는 금산과 망운산의 기풍이 대방산과 더불어 어울어진 이 곳은 산악인들의 사랑방과 같은 곳 이다. 정겨운 오솔길을 지나 대방산의 아쉬움을 달래며 내려오다 보면 모 든 이에게 향상 열려있는 운대암에서의 소담스런 차 한잔은 여정의 피로와 아쉬움을 달래기 에 부족함이 없다. 3) 해수욕장 해안 섬 (1) 상주은모래비치 남해읍에서 상주까지 국도 19호선을 따라 20분 동안 달리다 보면 금산의 기암괴석이 마치 한 폭의 병풍처럼 둘러섰고, 좌우로 뻗어 내린 산세가 두 팔을 벌려 타원을 그린 듯 감싸주 고 있는 호수 같은 바다가 바로 상주은모래비치이다. 그리고 망망한 남해에 임한 좁다란 만 의 입구에는 그림 같은 섬들이 가로 질러 대해의 파도를 막아주어 해수욕장이라기보다 둥근 천연 호수라 부름이 적절하리만큼 수면은 언제나 잔잔하고 사월의 미소처럼 조용하다. 해수욕장이란 모래와 숲과 맑은 바다를 가져야 한다. 대부분의 해수욕장들은 한두 가지 조건을 갖추었을 뿐인데, 상주은모래비치는 이 세 가지 조건을 완벽히 갖춘 곳이다. 더구나 전국 3대 기도도량 중의 하나인 보리암과 명승지인 금산을 하루 코스로 다녀올 수 있다. 여름철만 해도 1백여 만 명의 손님이 찾는다는 상주은모래비치는 자타가 공인한 전국 최 고의 해수욕장이다. 이젠 여름철 관광지는 옛말이 되었다. 겨울에는 전지훈련지로 운동선수 들이 백사장에서 구슬땀을 흘린다. 여기에 잔디구장과 실내체육관만 갖춘다면 오히려 전지 훈련장으로 좋은 조건을 갖추게 될 것이다. 그리고 봄. 가을에는 수련활동을 갖는 대학생들 과 다양한 행사로 찾는 관광객들로 인해 4계절 관광지로 상주은모래비치는 발돋움하고 있 다. 상주마을 앞바다는 천연해수욕장 뒤편으로 소금강산이라고 일컫는 남해 금산의 절경이 둘러싸고 있다. 금산 양편으로 쭉 뻗어 내린 산세는 두 팔을 벌려 어머니가 사랑하는 자식을

167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53 감싸고 있는 형상이다. 반원형을 그려 2km에 이르는 백사장의 모래는 마치 은가루를 뿌린 듯 부드러워 주단 위를 걷는 감미로운 감촉을 느끼게 해 준다. 백사장을 감싸고 있는 울창한 송림 또한 상주의 자랑이다. 잔잔한 물결과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는 송림이다. 바다 밑은 기 복이 없고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수심이 얕기 때문에 어린이들 물놀이에도 알맞다. 가까운 곳에 오염 된 강물이나 바다가 없어 밑바닥의 모래알을 헤아릴 수 있을 만큼 물이 맑고 깨 끗하다. 백사장의 면적은 54만 4500m2이고, 폭은 100m, 길이는 1500m 송림의 면적은 16,674 m2이며 해수욕이 아니라도 송림에서 시원한 바람으로 땀을 식힐 수 있다. 바다 수온은 23 25, 수심은 0.5m 4m로 해수욕을 즐길 수 있는 최상의 관광지이다. 해변에서 마주 보 는 나무섬과 돌섬이 남해 먼 바다의 거센 파도를 달래듯 해안을 막고 서 있는데 낚시터로도 유명하다. 상주에 저녁 늦게 도착했다면 숙박을 한 뒤, 새벽에 금산에 올라 일출의 장관을 보고, 금산 38경을 돌아본 뒤, 시원한 상주은모래비치의 깨끗한 바닷물에서 해수욕을 즐기 거나 해변을 산책한다면 최상의 여행으로 기억이 남을 것이다. 이곳을 찾는 100만 해수욕객의 편의를 위해 남해군은 해마다 시설을 보완하여 사계절 휴 양지로 만들고 있다. (2) 송정솔바람해변 상주은모래비치에서 동쪽으로 4km, 미조 초등학교에서 북서쪽으로 3km 떨어진 곳에 있 는 송정솔바람해변은 특색있는 남국의 정취로 완벽한 해수욕장의 이미지를 주기에 충분하 다. 부드러운 은빛 백사장과 명경지수( 明 鏡 之 水 )같은 바닷물이 송림과 함께 자리 잡고 있다. 맑은 바닷물과 송림으로 유명한 이곳은 서남향의 부드러운 은빛 백사장 앞으로 탁 트인 남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와 찾는 이의 마음을 시원하게 열어준다. 백사장 길이 1,500m, 폭 90m, 면적은 약 49,933m2에 이르며, 수온은 연평균 18, 송정의 또 다른 매력은 해수욕장을 조 금만 벗어나면 몽돌과 기암괴석이 뒤섞인 해안을 볼 수 있다. 해수욕을 한 뒤, 짠내를 씻어 내며 자연의 청량감을 느껴볼 수 있는 멋진 해안이다. 송정솔바람해변의 부근은 아름다운 경관으로 인해 관광지로 지정을 받았다. 경상남도와 남해군은 송정솔바람해변을 비롯하여 부근825,625m2 부지를 2011년까지 714억원을 투자 하여 공공시설과 숙박시설, 그리고 야영장, 휴양소, 전망대를 만들어 국제적인 해양휴양지 로 개발할 계획이다. 송정까지 왔다면 아름다운 항구, 미조항에 반드시 들러 싱싱한 회를 맛보고, 활기차고 부

168 1354 남해군지 지런한 어민들의 생활상도 한번 체험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니면 물미해안도로를 따 라 섬을 나가면서 물건방조어부림과 창선교, 죽방렴을 구경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3) 두곡-월포 해수욕장 남면 가천 마을에서 잘 닦인 남면 해안도로를 달리다보면 발길이 멈춰지는 곳이 있다. 몽 돌의 향연과 훈훈한 인심, 조용한 피서지로 이름난 두곡 월포 해수욕장을 그냥 지나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두곡 월포 해수욕장은 바다가 월포 두곡 두개 마을에 이어져 있다 해 서 월포 두곡 해수욕장 이라 부르기도 한다. 순월개 는 지형을 본 따서 지은 옛 이름이다. 몽돌이 해변에 쫙 깔렸다. 남해에는 상주은모래비치만 있는 줄 알고 온 사람들이 탄성을 지른다. 먼 날을 위해 남해 사람들이 감추어 둔 해수욕장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산 같은 파도가 몽돌에 부딪히는 광경이 장관이다. 몽돌 사이로 하얀 바닷물이 빠져나가면, 바그르 바그르 소리가 난다. 이런 몽돌과 모래가 적당히 섞여 해변의 전체적인 짜임새 가 지루하지 않은 것이 이 해수욕장의 특징이다. 해변에는 방풍림으로 조성한 소나무 숲이 바람막이를 하고 있다. 항상 거친 파도와 바닷바람과 싸워야 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 이다. 두곡 월포 해수욕장은 폭은 70m 정도지만 길이는 900m에 달한다. 주변에는 낚시터가 많고. 가까운 곳에는 가족휴양촌, 청소년들의 수련을 위한 남해군 청소년수련원도 쾌적한 시설을 자랑하고 있다. (4) 사촌해수욕장 자연적으로 조성된 백사장과 300여 년 전에 지역 주민들이 방풍림으로 조성한 송림이 있 으며 주변 해안에서 낚시와 피서를 함께 즐길 수 있는 곳 이다. 자연경관이 좋아 여름이면 많은 피서객이 찾아오고 있다. 남해군에서 지정 관리하고 있는 해수욕장은 모두 4개로 상주, 송정, 두곡 월포 그리고 사 촌해수욕장이다. 남면 사촌마을에 위치한 해수욕장은 길이 650m, 넓이 20m로 전체면적이 약 13,210m2인 아주 작은 해수욕장이다. 곱고 부드러운 모래가 있고 가족단위의 관광객에 게 알맞은 장소이다. 인근 해안에는 갯바위 낚시로 전국에 알려져 있으며, 선구마을에서 설 흘산으로 오르는 등산로는 해수욕은 물론 산행, 낚시 등을 같이 즐길 수 있는 보기 드문 곳 중에 하나이다. 근처 낚시터에서 낚시를 하다가 고기가 잡히지 않아도 이곳에 있는 것만으 로 행복하며 조용한 휴식을 즐기기에는 좋은 곳이다. 그리고 수심 1.5m 수온은 25도로 해

169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55 수욕을 하기에도 적당한 곳이다. 남해군에서 폐교를 이용한 보물섬 캠핑장을 운영하고 있는 데 각종 체험 프로그램과 저렴한 가격으로 편안하고 즐거운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5) 선구-항촌 몽돌해수욕장 남면 해안도로를 따라가다 사촌해수욕장을 지나 언덕길을 오르면 왼쪽으로 작은 쉼터가 있고 아래로는 선구해수욕장이 보인다. 사촌해수욕장 바로 이웃 마을이 선구마을이다. 사촌 해수욕장을 지나 남으로 3분 정도 달리다 보면 가던 발길이 저절로 멈추게 된다. 좀 전에 보 았던 사촌해수욕장의 그 많던 모래는 없고 눈앞에 펼쳐진 1.3km의 해변이 검은 테를 두른 듯 온통 몽돌해변이다. 반달형 해안의 오른쪽이 선구마을, 왼쪽이 항촌마을이다. 선구에서 항촌까지 이어진 1.3km의 몽돌해변에는 조용히 지는 해를 보려는 사람들, 낚시하는 사람 들, 가족과 함께 어촌체험을 하려는 사람들, 그리고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끊이지 않고 찾는 다. 선구마을은 음력 정월 대보름 민속놀이 선구줄끗기로 유명한 곳이다. (6) 모상개해수욕장 창선면 진동리(창선도)에 있는 모상개해수욕장은 관광지도에 표기는 되어 있지만 남해인 들도 잘 모르는 곳이다. 아직 개발을 하지 않아 교통이 조금 불편하다. 가는 길도 농로길이 라 겨우 승용차 한 대 지나다니는 길이 많다. 가다가 반대편에서 경운기라도 오면 수백미터 를 후진해야 한다. 하지만 모상개해수욕장을 보면 이런 수고스러움이 감탄사로 바뀌게 된 다. 장포 마을을 지나 4km 쯤 산길을 힘들게 굽이굽이 돌면 나오는 조그마한 바닷가. 여기 가 모상개 해변이다. 백사장 길이 200m, 폭40m의 작은 규모지만 물이 맑고 깨끗하며 모래 도 눈부시다. 조용한 휴식을 가지려는 사람들에게는 인기있는 장소이다. 넓게 펼쳐진 남해 바다의 장관을 보고 있노라면, 여기까지 들어온 여정이 결코 후회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7) 천하해수욕장 남해의 해수욕장을 꼽으라면 제일 먼저 아름다운 백사장이 길게 펼쳐진 상주, 사촌, 송정 해수욕장이 떠오른다. 모두 금산 자락을 밟고 선 아름다운 해변이다. 이미 해수욕장으로 인 정받은 해변들이어서 관광 코스가 잘 갖춰진 곳이기도 하다. 이렇듯 유명한 해수욕장들 사 이에 꼭꼭 숨겨진 바다가 하나 있다. 바로 천하 몽돌 해변. 한여름 더위에는 어느 해변이나 사람들로 붐비게 마련이지만 이곳은 그래도 한가한 편이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바다를 완 벽히 사랑할 수 있는 곳, 번잡함을 피해 조용한 바다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미조면 송정리의

170 1356 남해군지 천하해변이다. 천하해변의 몽돌은 돌 색깔이 하얀 편이다. 크고 작은 몽돌들이 천하에서부터 금포마을까 지 약 8백m 정도 이어진다. 바로 옆의 송정이나 미조해수욕장이 금빛 모래사장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거칠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맨발로 몽돌 위를 걷는 즐거움을 맛보는 것은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느낌을 준다. 천하해변에는 조개가 많다. 몽돌 사이사이에 서 조개를 캐내는 아주머니들이 이리저리 몽돌을 젖히며 허리를 펴지 못할 정도로 열중하게 만드는 조개 밭. 바구니 하나 들고 한나절 조개잡이를 나서면 그대로 자연학습장으로 다가 오는 몽돌 해변. 아이들과 함께 물놀이 가기엔 최적의 장소이다. (8) 설리해수욕장 송정해수욕장에서 미조방향으로 해변도로를 타고 2km정도만 가면 도로 아래로 아담한 설리마을이 보인다. 소담스런 모래밭의 면적은 59,504m2에 백사장 길이는 300m, 넓이는 60m정도가 된다. 수심은 1m로 수온은 연평균 18도, 해수욕하기에 적당한 곳이다. 편의시 설은 충분하지 않지만 한적한 이곳은 조용한 사색과 해수욕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설리마을은 속칭 설꽂이 라고도 한다. 이 아름다운 마을에서 새로운 삶을 설계하는 것도 좋다. 남해에서도 가장 남쪽에 있는 설리는 일 년 내내 따뜻한 기온으로 눈이 오지 않는 마 을이다. (9) 물미도로와 해안 남해의 물미해안도로(3번국도)는 19번 국도를 타고 금산 남쪽해안 미조리를 지나 남해도 동쪽으로 접어들면 삼동면의 물건마을과 미조를 잇는 물미해안도로가 시작된다. 3번 국도 의 시작이자 종점인 곳에서 좌회전을 하면 만나게 되는 물미도로는 남해가 가장 자랑하는 드 라이브 코스이다. 한려수도 절경과 해안절벽 위를 달리는 도로가 굽이굽이마다 펼쳐진 미조 도, 팥섬, 마안도를 지나 울창한 물건리 방품림을 조망하며 드라이빙을 하다보면 절로 감탄 이 터져 나온다.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미조항,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과 고깃배들, 숲이 우 거진 나선형의 해안선들, 바닷가 마을이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물미도로 구간에는 전망 좋은 곳에 작은 꽃밭과 벤치가 놓인 쉼터가 마련되어있어 잠깐의 휴식을 취할 수 있다. 길가에 핀 화사한 꽃들과 바다를 친구 삼아 사계절의 기운을 느끼며 드라이빙을 즐길 수 있는 곳,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아기자기한 시골마을, 푸른 바다 한 가운데 솟아있는 하 얀 등대, 그리고 구불구불 펼쳐져 있는 해안도로는 드라이브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171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57 (10) 남면해안도로 평산 고개를 넘어 유구 마을로 접어들면서 시작되는 남면 해안도로는 바다와 작은 섬들, 기암괴석 등이 해안 마을과 조화를 이루며 이국적 정취를 자아내는 남해의 대표적인 해안관 광도로다. 남면 해안도로는 남해 섬의 서쪽에 위치하여 해질녘 낙조에 비치어 보석처럼 빛 나는 바다가 일품이며, 장항 숲이나 구미 숲에서 보는 일몰도 장관이다. 또한, 홍현에서 향 촌까지 해안 절벽을 따라 놓여진 도로의 양쪽에는 깎아지른 산과 해안절벽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11) 이동-지족간 해안도로 남해읍 선소에서 삼동면 지족을 잇고 강진만을 연결하는 해안관광도로가 있다. 강진만을 배경으로 한 해안도로는 한 폭의 수채화와 같고 해안 곳곳에는 낚시를 즐기는 가족과 갯벌체 험에 신난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 삼동면 해안도로 끝자락에 죽방렴 안에서 헤 엄치는 익살스런 게를 보고 푸른 바다만큼 시원한 웃음을 바람결에 날려 보낸다. 창선교 위 에서 낙조를 보는 것은 남해가 주는 또 다른 선물일 것이다. (12) 조도 아름다운 미조항 바로 앞에 있는 섬, 섬의 모양이 새가 날고 있는 모양같다하여 이곳 사람 들은 새섬 이라 부르길 좋아한다. 실제로 미조마을에서 보면 큰 섬 끝의 솟은 부분이 부 리이고, 가운데 솟아오른 섬 봉우리가 몸통, 작은 섬 쪽은 꽁지처럼 보인다. 조도는 멀리서 보면 섬이 두 개인 것처럼 보이는데, 그 중 마을이 있는 곳을 큰섬, 작은 섬을 조도라 부른 다. 사람이 사는 새섬, 호도와 근처의 작은 무인도를 모두 합쳐 조도 라 부르기도 한다. 본래 2개의 섬이었던 큰 섬과 작은 섬이 제방으로 연결돼 인위적으로 한 섬이 됐다. 섬 주변은 삼치, 준치, 장어 등 고기가 많기로 유명한데, 특히 이곳에서 잡히는 멸치는 일 반 멸치보다 기름이 많고 크기가 작아 최상품으로 쳐준다. 조도는 부리 앞에 새 모이처럼 동 그랗게 떠 있어 쌀섬이란 뜻의 이름이 붙은 미도( 米 島 )를 비롯하여, 죽암도, 노루섬, 목과섬, 호도, 애도, 사도 등 10여개의 크고 작은 섬들에 둘러싸여 있다. 작은섬에는 큰섬, 작은섬, 호도를 통틀어 제일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괭이나 낚싯대만 가지면 농사를 짓고 고기도 잡을 수 있어서 섬사람들은 별 어려움 없이 생 활을 하고 있다. 조도에는 35가구에 93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172 1358 남해군지 전기는 물론 선착장, 방파제, 진입로, 농로, 물탱크 등 각종 시설이 정비되어 있고 1999년 에 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해수담수화 시설을 갖추었다. (13) 호도 미조항 주변에는 유인도인 호도, 조도와 작은 섬 16개가 남항과 북항 주변에 위치하고 있 다. 호도의 섬 모양이 호랑이 같다하여 범섬(호도)이라 부르며,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해군의 기지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인근 해역은 청정해역이며 전국에서 아주 유명한 낚시포인트로 낚시꾼들이 많이 찾고 있다. 호도에는 14가구에 23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14) 마안도 미조면 송정리에 있는 작은 섬으로 섬의 모양은 말안장 형상을 하고 있다. 전국에 있는 낚 시꾼들이 즐겨찾는 유명한 곳이며 마안도 앞 콩섬은 다이빙 전용 섬이다. 오염되지 않은 청 정 바닷속을 감성돔, 돌돔, 능성어, 볼락들과 함께 헤엄치고 있노라면 자연과 한 몸이 된것 에 경이로움을 느낄 것이다. 낚시를 즐기는 이들은 밤 볼락과 야간 갈치낚시, 낮에는 고등 어, 삼치. 방어 낚시를 직접 해 보며 손맛을 즐기기에 충분한 곳이다. (15) 세존도 금산 상봉에서 남쪽 바다를 바라보면 멀리 희미한 점으로 보이는 섬, 가을철 맑은 날 신 비스럽게 보여주는 섬, 이 섬이 바로 세존도이다. 전설에는 석가세존께서 금산 상봉에서 득 도 한 후, 돌로 배를 만들어 타고 쌍홍문을 지나 세존도의 바위섬을 뚫고 지나갔다고 하는 데 그때 돌배가 지나간 흔적이 바로 금산의 쌍홍문과 세존도에 난 2개의 동굴이라고 전한 다. 세존도 라는 섬 이름도 이때 세존께서 이곳에 머물다 가셨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 는 것이다. 그런 이유인지 섬 꼭대기에는 스님 모양을 닮은 스님바위가 있고 동굴 천장에는 미륵 이라는 글씨도 있다고 하는데 불교와 깊은 인연이 있는 섬임에는 틀림이 없다. 세존도는 남해군의 최남단에 자리 잡고 있다. 상주에서 직선거리는 25.68km나 된다. 동 경128도 5분12초, 북위 34도에 위치한 바위섬으로 면적은 약33,000m2. 사람이 살지 못하 니 바다 갈매기가 이 섬의 주인인 셈이다. 일년 내내 부는 바람에 이름 없는 키 작은 풀들만 바위틈에 조금씩 자라고 있다. 역광을 받아 드러난 섬의 윤곽은 마치 해룡 두 마리가 몸을 비벼대며 희롱하는 듯한 기묘 한 생김새이다. 매끈한 구석없이 삐죽삐죽 솟은 섬의 표면은 해풍의 장난에 편치 않은 속내

173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59 를 짐작케 해준다. 해저의 섬 모습도 깎아지는 듯한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섬 정면에 있 는 구멍과 날카롭게 들쭉날쭉 솟은 정상의 돌촉들은 콧대 높은 비경으로 세존도의 도도함을 보여주고 있다. 2개의 동굴이 있는 세존도 사진은 금산 북쪽에서 본 모습인데 이 섬은 보는 방향이나 장소 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을 가졌다. 남해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부처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은 누구나 세존도에 한 번 가보기를 원한다고 한다. 주위에는 유인도로 간 도(칠이)가 있으며, 흰영, 구들영, 목도, 소치도, 승치도, 삼여도 등 사람이 살지 않는 작은 섬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 (16) 노도 옛날 이곳에서 배의 노를 많이 생산했다 하여 노도( 櫓 島 )라 부른다. 현재는 19가구에 25명 의 주민이 거주하며 정겹게 살아가는 곳으로 면적은 0.41km2이다. 노도 주민들은 넓은 바다 를 삶의 터전으로 고기도 잡고 섬의 텃밭을 가꾸며 욕심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연꽃의 맑고 청아함을 닮은 노도 앞 바다는 볼락, 농어, 감성돔이 많은 섬이지만, 서포 김 만중의 유배지로 많이 알려져 있다. 서포는 이곳에서 사씨남정기 와 서포만필 등을 집필했다. 1988년 남해청년회의소에서 유허비를 설치하였으며, 2004년 12월 남해군에서 초옥을 복원하였다. 초옥과 유허비, 허묘, 우물지 등을 구경하면서 서포 김만중의 문학작품 을 감상할 수 있다. 서포는 1689년부터 3년간 이 섬에서 유배생활을 한 뒤, 5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곳에 옹달샘을 파 물을 마시고, 솔잎 피죽을 먹으며 근근이 연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7) 염섬 남해대교에서 출발하여 설천면 남양 마을 해안도로를 따라가며 자연을 즐기다 보면, 동흥 마을 앞 리아스식 해안을 낀 염섬을 볼 수 있다. 염섬에는 완만한 바위가 많고 장수바위, 할 머니바위 등에 걸터앉아 여유로운 낚시를 즐길 수 있다. 도다리, 노래미, 뽈락 등이 잘 잡히 는 곳으로 가족과 함께 낚시와 피서를 즐기기에 알맞은 곳이다. 요즘은 가족단위 단체 체험 관광객들이 증가하여 이곳을 찾는 사람이 많다. (18) 진섬 노량 마을에서 설천해안도로를 따라 설천면 소재지인 남양 마을을 지나 4km정도가면 설

174 1360 남해군지 천면 문항마을 이정표가 있는데 왼쪽 내리막길로 내려가면 장수마을, 박사마을로 잘 알려진 문항 마을이다. 진섬은 마을 앞바다를 지키는 문항의 자랑이다. 바닷물은 명경처럼 맑고 낚 시가 잘되며 바위에 붙은 자생 굴은 돌로 깨뜨려 먹는 맛이 일품이다. 하지만 물때를 맞추기가 힘들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섬에 들어가야 하고 바 닷물이 들기 전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문항 마을에는 폐교를 이용한 자연생태학교가 있어 가족 단위 갯벌체험관광객이 많이 찾아오고 있다 4) 사찰 (1) 호구산 용문사 남해군립공원으로 지정되어있는 호구산. 해발 650m의 산에는 남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용문사가 있다. 매점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시원한 계곡에 잠시 머물며 호랑이가 누워있 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호구산 계곡의 맑은 물을 마신다. 그리고 용이 승천했다는 용소 마을 에 차를 세워야 한다.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들꽃, 산꽃향에 묻혀 산길을 걷다보면 속세 의 번뇌가 한꺼번에 사라질 것이다. 매점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걷노라면 일주문 입구 우측 약간 높 은 곳에 부도가 보인다. 부도란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한 묘탑이다. 부도는 법제문도( 法 第 門 徒 )들이 선사를 섬기는 극진한 마음에서 선사가 입적한 뒤 정성을 다하여 세운 것이다. 남부지방에서는 찾기 힘들며 모두 9기로 용문사가 선사를 많이 배출한 오래된 전통 사찰이 라는 상징적인 의미이다. 원효대사는 남해와 인연이 매우 깊은 것 같다. 용문사의 역사도 원효대사로부터 시작한다. 원효대사가 금산을 찾아와 보광사을 짓고 산명도 보광산이라 했으며 이후 호구산에 첨성각 을 세우고 금산에 있었던 보광사를 이곳으로 옮겼다고 전한다. 용문사는 보광사의 후신으로 등장하는 사찰인 셈이다. 조선시대 현종 원년(1660)에 남해현의 남해향교와 이 절의 입구가 면대하였다하여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백월당 대사가 남쪽에 있는 용소마을 위에 터를 정하고 용문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백월당 대사는 스님들과 함께 먼저 선당양당( 禪 堂 兩 堂 )을 지었 다. 승당은 신운이 모화하여 다음 해인 현종2년(1661)에 준공했다. 그리고 6년 뒤에 일향이 대웅전을 창건하였고 지해가 윤색하였으며 성암이 봉서루를 창건하였고 태익이 낙성했다. 이 밖에 나한전은 보휘, 명부전은 설웅, 향적전은 인묵, 첨성각은 설잠, 천왕각은 유탁, 수

175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61 각정은 각오가 낙성한 것으로 기록이 남아 있다. 이어 숙종34년(1708)에는 염불암을 중창 하였다. 관음, 백운 두 암자는 고을 사람들의 발원으로 축조했다는데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뒤에 백련암을 절의 서쪽에 신축하였다. 용문사는 임진왜란 때 사명당의 뜻을 받들어 승려들이 용감하게 싸운 호국사찰이다. 그 증 거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 용문사에 보관 중인 삼혈포라는 대포, 그리고 숙종이 호국사찰임 을 표시하기 위해 내린 수국사 금패가 그것이다. 조선 숙종( )은 용문사를 수국사로 지정하고 왕실에서 용문사 경내에 축원당을 건립하고, 위패를 비롯하여 연옥등, 촉대, 번 등을 하사했다. 그러나 연옥등, 촉대 등은 일본 강점기에 없어지고 지금은 번과 수국사 금패만 보존되어 있다. 모든 절이 그렇듯 용문사 일주문도 일반 건축물과 달리 일직선 기둥 위에 지붕을 얹었다.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 번뇌로 부산한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가르 침이다. 옆에는 세속의 번뇌를 씻고 불국토로 들어가라 속삭이는 듯이 맑은 개울이 흐 르고 있다. 용문사는 민초들 곁에 영원히 있고자 했던 사찰이다. 돌다리를 건너면 불법을 수 호하는 사천왕을 모신 천왕각에는 동방 지국천왕. 남방 증장천왕. 서방 광목천왕, 북방 다문 천왕이 있다. 용문사 천왕문에서 특히 눈여겨 볼 것은 사천왕 발밑이다. 다른 절 사천왕이 마귀를 밟고 있는데 비해 용문사 사천왕 발에 밟혀 신음하는 것은 관리와 양반이다. 권력을 탐하거나 아 부하지 않고 민초들 곁에 있고자 했던 용문사의 정신을 잘 알 수 있다. 탐진당 불이문에서 바라본 용문사 대웅전, 팔작지붕, 다포식 건축물은 우선 화려한 느낌을 받는다. 대웅전을 제외한 탐진당, 적묵당을 비롯한 절집은 가파른 비탈에 세우느라 처마들 이 서로 닿지 않도록 한쪽은 팔작식 지붕, 다른 쪽은 겹처마 맛배지붕으로 지었다. 처마 밑 공포는 화려한 다포식과 단아한 주심포식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불자가 많아 법당이 비좁아 뜰에서 법회를 올릴 때 부처님 상을 내걸었던 괘불대, 거대한 구시통(설겆이통)은 불자의 수가 상당했음을 추정케 한다. 하지만 용문사의 백미는 단연 산신각 뒤를 돌아올라 산자락에서 지긋이 내려다보는 풍광 이다. 처마들이 연 이어진 용문사 지붕 앞으로 호구산, 금산 자락이 삼각형을 이룬 가운데에 호수처럼 담겨있는 앵강만을 보지 않으면 용문사 구경은 공염불이 될 것이다. (2) 금산 보리암 683년 원효 대사가 이곳에서 초당을 짓고 수도하면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뒤로 산 이름

176 1362 남해군지 을 보광산, 초당 이름을 보광사라고 했다. 훗날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조선 왕 조를 건국하였는데, 그 감사의 뜻으로 1660년 현종이 이 절을 왕실의 원당으로 삼고 산 이 름을 금산, 절 이름을 보리암으로 바꿨다. 금산의 정상에 자리 잡고 있는 보리암은 금산의 온갖 기이한 암석과 푸르른 남해의 경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절이다. 경내에는 원효대사가 좌선했다는 좌선대 바위가 눈길 을 끌며, 부근의 쌍홍문이라는 바위굴은 금산 38경 중의 으뜸으로 알려져 있다. 강원도 낙산 사 홍연암, 경기 강화도 보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기도처의 하나로 신도들이 연일 줄지 어 찾고 있다. 빼어난 경치와 남해의 금강, 동물형상의 바위가 많아 바위동물원으로 불리는 금산이다. 그리고 쪽빛 바다와 초록빛 들녘의 조화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산으로 한려해상 국 립공원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금산 정상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우리나라 3대 기 도처 중 가장 유명한 보리암이 있다. 또한 금산은 바위마다 불교에 얽힌 전설들을 간직하고 있고 보리암은 대장봉 형리암 화엄봉 일월봉 삼불암 등 기암괴석들에 둘러싸여 있다. 상주마을 금산 입구에서 보리암으로 오르는 코스는 울창한 숲과 남해바다가 조화를 이루는 최고의 산행코스이다. 하룻밤 묵으며 금산의 일출을 보면 천지신명의 조화를 느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일출이 절경이다. 자동차로는 앵강 고개를 넘어 이동면 벅시골에서 복곡저수지 를 지나 금산 8부 능선까지 도로가 나있다. (3) 망운산 화방사 화방사는 남해 제일봉인 망운산으로 곱게 난 도로를 따라 오를 수 있어 진입이 매우 수월 한 편이다. 남해대교에서 19번 국도를 타고 들어오다가 이어마을에서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 다시 3km 정도 가다보면 고찰 화방사를 만날 수 있다. 조상들의 고된 삶이 그대로 묻어나는 계단식 논이 아래로 보이는 길을 따라 옹기 종기 모여 앉은 대계 마을과 푸른 기운이 넘치는 강진만 풍광에 넋을 놓다 보면 어느새 풍경 소리를 느낄 수 있다. 약수터 곁 돌다리 아래 차를 세우고 다리를 건너 일주문으로 향한다. 일주문 돌계단을 오 르면 겹처마 맛배지붕인 채진루와 팔작지붕 대웅전이 고개를 내밀며 채진루 맞은편에는 천 연기념물인 산닥나무 자생지가 있다. 신라 신문왕 때 원효대사가 보광산(금산)에 보광사를 세우고 망운산 남쪽에 연죽사를 건립 한 것이 화방사 역사의 시작이다. 고려시대인 1200년대에 진각국사 혜심이 연죽사를 현 위 치의 서남쪽 400m에 옮기고 영장사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177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 경 승 (1) 남해대교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진주, 사천, 곤양을 거쳐 진교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남해방향으로 19번 국도를 타고 10.5km를 남행하면 남해대교가 있다.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한려해상국 립공원 지역이며 성웅 이충무공을 봉안한 충렬사가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인 남해의 관문인 남해대교는 1968년 5월10일 착공하여 1973년 6월22일 준공된 최초의 현수교이다. 상부구조는 현수교로 된 3경간 연륙교이며, 하 부구조는 구주식으로 되어있다. 노량 밑의 수심은 깊고 조류가 빨라 다리를 놓기가 힘들어 양쪽 언덕에 강철선을 단단히 묶고 거기에 다리를 매다는 공법으로 시공하였다. 하동과 남 해를 잇는 남해대교의 길이는 660m, 높이 80m(해저 20m, 해상 60m), 교폭 12m, 교각 사 이 404m의 아름다운 현수교로 관광객들의 유치와 지역사회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남해대교를 가로 지른 노량 해협의 거센 물살은 남해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산 증인이 요, 역사의 마당이다.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이 시작된 곳으로, 또 고려에서 조 선시대에 이르는 무수한 유배객들이 자신의 적소로 건너오기 위해 나룻배를 탔던 한 맺힌 곳 이었다. 남해대교가 놓여 지기 전, 남해 사람들은 나룻배를 타거나 도선으로 노량의 물살을 가로질 러 다녀야 했지만 36년 전부터는 승용차로 1 2분이면 거뜬히 물을 건너오면 벚꽃 터널이 오는 손님들을 반겨준다. 봄이면 하늘이 보이지 않는 벚꽃의 터널이 장관이다. (2) 창선 삼천포대교 건설교통부가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중에 선정되었다. 2003년 4월 28일 개 통되어 남해군 창선도와 사천시 삼천포항을 연결하는 다리이다. 4개의 섬(창선도, 늑도, 초 양도, 모개섬)으로 연결되었으며 5개의 다리(단항교, 창선대교, 늑도대교, 초양대교, 삼천포 대교)로 모두 다른 공법으로 만들어져 각각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그리고 남해의 관광 명물로 탄생한 창선 삼천포대교의 총 연장 길이는 3.4km의 연륙교로서 천혜의 자연경관 및 조화있는 형식의 교량 건설로 관광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창선.삼천포대교 개통은 창선 면 뿐만 아니라 남해군이 도약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고 수려한 자연경관과 조화된 관광지 개발로 관광객의 수가 급증하였다.

178 1364 남해군지 창선.삼천포대교는 창선도의 육상 교량으로 150m길이의 PC빔교인 단항교, 창선과 사천 늑도를 잇는 340m의 하로식 아치교인 창선대교, 사천시의 늑도와 초량을 잇는 340m 길이 의 PC BOX인 늑도대교, 초양섬과 모개섬을 잇는 202m의 종로식 아치교인 초양대교, 모개 섬과 사천시를 연결하는 436m의 콘크리트 사장교인 삼천포대교라는 다섯 개의 교량이 다리 박물관을 방불케 하는 장관을 연출한다. 전체 공사비는 1,830여억 원이다. 남해군 또한 주변개발을 통해 명실상부한 한려수도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으며 창선 삼천포대교 주변에 전망타워, 콘도, 호텔, 유람선 등이 투자 유치되고 해양레포츠 시설이 들 어서고 있다. 창선면 북쪽 끝 단항의 해발 150m 높이에 있는 전망타워에서 일출과 일몰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일몰 후 창선. 삼천포대교의 차량의 불빛과 야경은 바다와 어울려 환 상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 (3) 창선교 남해읍에서 삼동면 지족을 잇고 강진만을 연결하는 해안관광 도로의 끝에 창선과 남해 본 섬을 연결하는 창선교가 있다. 지난 1993년 성수대교가 붕괴되기 며칠 전 창선교가 붕괴되 었고 그 후 재건설된 창선교는 창선면 지족마을과 삼동면 지족마을을 잇는 길이 440m의 콘 크리트 사장교로 1995년 12월 20일에 개통하였다. 원시어업인 죽방렴과 물 속까지 그림자를 드리운 창선교는 남해 12경 중 4경에 들어가는 곳이다.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는 지족해협은 물살이 매우 빨라 고기의 맛이 담백하면서 쫄 깃하다. 지족해협의 특산물로는 죽방멸치, 개불, 미역이 있다. 창선교 아래의 바다는 지족 해협으로 물살이 전국에서 세 번째로 빠른데 썰물과 밀물 때는 마치 폭포소리를 연상케 한 다. 그리고 원시성이 그대로 간직한 죽방렴은 길이 10m 정도의 참나무로 된 말목을 갯벌에 박아 주렴처럼 엮어 만든다. 조류가 흘러오는 방향을 향해 V자형으로 벌려 원시적으로 고기 를 잡는 방법으로, 지족 해협에 24통이 남아 전국에서 가장 많으며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드 물다. 수십 척의 소형 선박들이 개불을 잡는 광경과 죽방렴과 앵강만을 배경으로 연출되는 일몰의 광경은 남해 섬을 찾는 사람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준다. (4) 금산 38경 남태평양 이스터 섬의 모아이석상은 인간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석상이라면 금산 38경은 자연의 힘으로 만든 신비로운 석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오랜 세월동안 남해를 묵묵히 지 켜보며 서 있는 역사의 산증인 일 것이다. 인간이 신에게 염원하는 신성스러운 장소인 보리

179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65 암도 자연과 함께 하기에 참으로 조화롭다. 금산 38경은 세월의 흔적을 전설과 유래로 전하 며 금산을 찾는 이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최고의 자랑거리며 남해의 자존심이다. 1 망대 금산에서 제일 높은 상봉으로 이곳에 오르면 일망지하에 금산 38경과 금산을 에워싼 만경 창파를 한 눈에 굽어 볼 수 있다. 특히 천인의 조화인 듯 일출을 맛 볼 수 있는 곳이다. 고려 시대부터 사용되었던 봉수대가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 사방 조망이 넓고 매우 아 름다워 망대라 부른다. 2 천마암 망대 아래 동쪽에 있는 두꺼비 모양의 바위로 이성계가 기도하고 있을 무렵에는 회두암이 라 불렀다고 한다. 3 삼사기단 좌선대 아래편에 있으며, 신라시대의 원효대사와 의상대사, 윤필거사의 삼도인( 三 道 人 )이 기단을 쌓고 기도를 올렸다고 전해 내려온다. 삼사기단은 윤필거사의 기단이고, 지금의 금 산 보리암 자리는 원효대사의 기단터이고, 보리암 바로 위 형리암 아래 오른편에 좁다란 곳 이 의상대사의 기단터라고 한다. 4 화엄봉 대장봉과 농주암의 왼쪽에 있는데 바위모양이 ( 華 嚴 ) 두 글자 모양이라 화엄봉이라 하 였다고 전한다. 원효대사가 이 바위에서 화엄경을 읽었다고 전하나, 화엄종은 의상대사가 포교한 것으로 의상대사일 것으로 추측된다. 5 문장암 망대를 오르는 계단에 마주하고 있으며 정상을 지키는 길목에 있는 바위이다. 일명 명필바 위라고도 한다. 조선 중종 때 대사성을 지낸 한림학사 주세붕선생이 남해에 있는 금산이 명 산이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와 쌍홍문을 통하여 망대에 올라가 보니, 아름답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금산의 절경에 감탄하여 자연암에다 유홍문 상금산( 由 虹 門 上 錦 山 ) 이라는 글을 새겨 넣었는데 이를 문장암이라 한다.

180 1366 남해군지 6 만장대 망대의 서남쪽에 마치 깎아 세운 듯 천인단애를 이루고 있는 절벽으로 남성스런 위용을 뽐 내고 있다. 그 높이가 만장같이 높고 반듯하다고 하여 만장대라 부른다. 7 저두암 좌선대 왼쪽에 있는 바위로 그 모양이 마치 어미돼지가 새끼돼지를 업고 있는 모양처럼 보 여 저두암이라 부른다. 8 일월봉 화엄봉 왼편에 있는 두 개의 바위가 충암 절벽을 이루고 있는데, 가까이에서 보면 일자형 이고, 멀리서 전체를 보면 월자형으로 보여 일월봉( 日 月 峰 )이라 부른다. 9 대장암 금산 보리암 뒤에 우뚝 솟은 큰 바위로 웅장하고 위엄 있게 창공을 찌르며 서 있는 모습이 대장을 연상시킨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대장암 옆에는 반드시 용호농주형의 바위가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10 음성굴 만장대 서쪽에 있는 굴로서 높이 2m, 길이 5m 밖에 되지 않는 조그마한 굴이다. 돌로 두 드리면 장구소리와 같은 풍악적인 소리가 들림으로써 음성굴이라 한다. 이 굴 안에 들어가 서 돌로 땅 밑을 두드리면 땅이 울리는 소리에 저절로 흥겨워 노래와 춤이 추어진다고 한다. 해식동굴로 알려져 있다. 11 촉대봉 향로봉 옆에 있으며 그 모양이 촉대와 같이 생긴 작은 바위로 원효, 의상, 윤필, 삼사가 기 도를 올릴 적에 촉대로 썼다는 전설이 있다. 12 흔들바위 일월봉 왼쪽 제석봉 뒤쪽 맞은편에 있는 흔들바위로 거북모양처럼 생겼다하여 구암이라

181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67 하였으나 한 사람의 힘으로도 움직일 수 있다 하여 흔들바위라고도 부른다. 바위의 무게는 35톤가량 되며. 거북 모양의 목 부분을 위로 추켜세우듯 밀면 가장 잘 흔들린다고 한다. 13 형리암 금산 보리암 바로 뒤에 있으며 대장봉에 마치 허리 굽혀 절하는 모양처럼 생겨 형리바위라 이름 지어졌다. 바위가 곧 떨어질 듯 위험을 느낄 정도로 허리 굽어보이는 모습이 신비롭게 보인다. 14 용굴 음성굴 오른편에 있는 용굴은 옛날 용이 살다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다. 굴은 길 고 넓게 생겼고 전등을 가지고 가야 만 굴 안을 잘 볼 수 있다. 그리고 해식동굴로 알려져 있 다. 15 향로봉 삼사기단 왼편 아래쪽에 있으며 마치 모양이 향로처럼 생겨 향로봉이라 부른다. 이 향로 또한 삼사가 기도를 올릴 적에 촉대봉과 함께 사용하였다는 전설을 전하고 있다. 16 부소암 금산 당가( 堂 家 )에서 서남쪽에 있는 큰 바위로서 옛날 중국 진시황의 아들 부소가 이곳에 살다가 갔다는 전설이 남아 있어 부소암이라 부르고 있다. 17 탑대 천인단애 위에 보리암전삼층석탑이 있는 이 절벽을 탑대라 한다. 이 탑대는 보리암 바로 밑에 있으며 전망이 좋아 봄철의 푸른 숲과 가을철의 만산 단풍경은 천하 절승이라 많은 관 광객들이 모여드는 자리이다. 18 쌍홍문 음성굴에서 서남쪽으로 가면 큰 바위에 두 개의 구멍이 있는 돌문이 있다. 옛날 세존이 석 주를 만들어 타고 쌍홍문의 우편으로 나가면서 세존도의 한복판을 뚫고 갔다고 한다. 조선 중종시대 한림학사 주세봉선생도 금산에 쌍홍문이 있어 일부러 올라왔다고 하며 쌍홍문은

182 1368 남해군지 보리암을 오르는 통문이며 해식동굴로 알려져 있다. 19 사자암 좌선대에서 상사암으로 가는 길의 우측에 있는 큰 바위인데 그 모양이 흡사 사자와 같다하 여 사자암이라 부르고 있다. 20 남해상주리 석각 상주면 양아리에서 금산 부소암에 오르는 산중턱 평평한 자연암에 특이한 형태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전설에는 중국 진시황의 시종 서불이 불로초를 구하러 동남동녀 500명을 거느 리고 남해 금산을 찾아 왔다가 새겨놓고 갔다고 전해지나 해독되지 않고 있다. 일명 서불과 차라고도 한다. 21 천구암 탑대의 동쪽에 자리 잡은 크지않은 바위모양이 마치 비둘기처럼 생겼다하여 천구암이라 한다. 천구암 앞에서 북동쪽을 바라보면 조선태조기단과 삼불암을 조망할 수 있다. 22 사선대 쌍홍문에서 천구암쪽으로 가면 마침 신선신녀와 같은 모양의 바위가 4개 있다. 옛날 삼신 산 사선이 놀다갔다는 전설에 따라 사선대라 한다. 23 팔선대 상사암 앞쪽에는 여덟 개의 바위들이 있다. 여덟 개의 바위들이 서 있는 모습이 마치 여덟 신선들이 춤추는 모양과 같다하여 팔선대라 한다. 24 세존도 세존이 금산 쌍홍문에서 돌배를 타고 섬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갔다는 전설이 있는 섬이다. 상주은모래비치에서 40km 떨어져있지만, 날씨가 좋으면 세존도를 볼 수 있다. 섬 한복판에 원형으로 된 해상 동굴이 있으며, 나무도 식수도 없는 바위로 된 무인도이다. 가뭄이 심할 땐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세존도는 낚시가 잘되는 곳이며 수많은 낚시꾼들이 모여드는 장소이기도 하다.

183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조선태조기단 백일기도 후에 이성계가 조선태조로 등극하였다는 전설이 깃든 유적으로 탑대에서 건너 보이는 삼불암 아래에 있다. 나라를 세우기 위해 이성계는 전국 명산을 찾아 기도를 올렸으 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던 중 금산에서의 백일기도 후 조선을 건국하자 영구불망의 금산이라 하여 비단으로 두른다는 뜻으로 보광산을 금산으로 개칭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26 백명굴 사선대에서 북쪽으로 내려가면 임진왜란 때 100명 내외의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피난했던 굴이다. 유적으로 굴 안에 방을 놓았던 아궁이 흔적이 남아있고 굴의 드나드는 문은 적으나 들어가면 놀랄 만큼 넓다. 백명굴은 해식동굴로 알려져 있다. 27 상사암 금산에서 가장 웅장하고 큰 바위이며 로맨틱한 이름을 지니고 있는 바위이다. 숙종 때 전 라남도 돌산 사람이 남해에 이거하여 왔다가 주인집 여자가 너무 예뻐 상사병에 걸렸는데 주 인집 여자와 이 바위에서 상사를 풀어 목숨을 건졌다는 낭만적인 야화가 깃들어져 있는 곳이 다. 28 노인성 노인성은 남극성으로 우리나라 남단인 금산에서 춘분과 추분의 전3일 후3일의 7일 동안 가장 잘 보인다하여 먼 길 임에도 불구하고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 노인성은 생명을 맡은 별 이라 이 별을 보면 오래 산다는 전설이 있다. 춘분에는 술시, 추분에는 인시에 잘 보이며 춘 분, 추분이 아니라도 보이기는 하지만 춘분과 추분에 가장 잘 보인다. 29 가사굴 탑대 밑 동쪽에 있는 암굴이며 길이 험하여 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이곳은 대천수같이 맑은 샘물이 있어 수양이나 기도를 하는 분들이 토굴을 짓고 몇 달씩 지내기도 한다. 그리고 천동천녀가 가사를 입고 목욕을 한 후 물을 길어 갔다는 전설도 있다. 가사굴은 백명굴 및 조선태조기단과 함께 금산 38경중에 가장 조용한 선경이다.

184 1370 남해군지 30 천구봉 일월봉을 바라보고 아래쪽에 있는 바위로 마치 개 의 형상을 하고 있다하여 천구봉이 라 부른다. 31 구정암 구정암은 상사암에 이어진 바위 위에 아홉 개의 홈이 있어 빗물이 고이면 마치 아홉 개의 샘처럼 보인다하여 생겨난 이름이다. 세어 보면 실제 구멍이 아홉 개는 더 되는 듯하다.그리 고 구정암의 물은 상사풀이를 할 때 썼던 물이라 하며, 이 물로 세수를 하면 재수가 좋다고 한다. 숙종 때 귀양 왔던 약천 남구만선생은 구정암을 보고 몇 해 동안 이 아홉 개 샘을 팠 으랴 하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32 일출경 금산의 일출은 장엄하고 신비로우며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절경 중의 절경이다. 끝없는 수평선과 맞닿는 하늘, 온 천지가 불타는 듯 타오른 여명, 아침이면 끓는 바다 속에 서 붉게 솟아오르는 일출은 관광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33 삼불암 조선태조기단 뒤편 직립대암벽 위에 세 개의 바위가 있다. 두 개는 서 있고 한 개는 누워 있는데 세 개의 바위가 마치 부처님의 좌상같아 삼불암이라 한다. 태조 이성계가 백일기도 를 하기 전에는 세 개의 바위가 다 누워있는 모습이었으나 백일기도를 마친 후 세 개의 바 위 중 두 개의 바위가 일어났다고 한다. 그때 세 개의 바위가 모두 일어났다면 이성계는 중 국의 천자( 天 子 )까지 겸하였을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34 제석봉 일월봉 아래 천구암 왼편에 있으며. 일월봉이 있으면 반드시 제석봉이 있기 마련이다. 무 당의 신인 제석신이 내려와 놀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바위로 금산의 절경이 한 눈에 보이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35 감로수 상사암에서 조금 남쪽으로 가다보면 바위 밑에서 실오라기처럼 새어 나와 고이는 물이 있

185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71 다. 숙종께서 병중에 이 물을 마시고 쾌유하셨다하여 구군천( 九 君 泉 )이라 글자를 새겨놓았 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 물을 만병통치의 감로수라 불렀다고 한다. 36 천계암 조선태조기단 뒤편에 있으며 이성계가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닭의 울음소리가 나서 쳐다 보니 닭은 없고 닭의 모양을 한 바위가 있으므로 이 바위를 천계암이라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37 좌선대 좌선대는 고승들이 수도 좌선을 했다는 장소로 바위 윗부분은 가부좌를 한 자세로 들어 갈 만큼 파여 있다. 바위 꼭대기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으면 자연과 내가 하나 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38 농주암 대장봉 왼편에 세 개의 바위가 있다. 한 개는 구슬처럼 서 있고, 왼편에는 용, 오른편에는 호랑이가 있어 용호가 마치 구슬을 가지고 노는 모양과 같다 하여 농주암이라고 한다. 6) 낚시터 남해군은 4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청정해역이며 어종이 다양하고 풍부하여 낚시가 잘 되는 곳이다. 그리고 최고의 낚시터로 타 지역 낚시꾼들에게 손꼽히고 있으며, 주말이면 자리 잡 기 힘들 만큼 많은 낚시꾼들이 찾아옴으로서 남해 관광에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1) 가문여 2번 자리 가문여 끝바리를 돌아 나오는 곳에 튀어나온 곶부리로, 수심은 10 12m이며, 들물에는 좋은 조황을 보인다. 그리고 갯바위 가까이에 밑밥을 뿌려야하며 들물에는 범섬 끝바리쪽으 로 흘러가므로 위에서 찌가 멀어지게 된다. 멀어지는 거리에 비례해서 수심도 16 18m로 깊어지므로 고부력 채비로 뒷줄을 지긋이 잡아주거나, 잠길찌로 공략 범위를 넓혀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먼 바다로 나가는 조류에 채비를 태우지 말고, 비껴가는 조류에 붙어서 흘리면 가문여 여밭쪽으로 돌아가며 바닥을 공략할 수 있다. 여기서 잠길찌

186 1372 남해군지 채비를 (1호 어신찌에-1호) 수중을 달면 보통의 경우 2B정도의 부력이 남는데(0.8호 어신 찌에-1호 수중을 달아 잠기게 하던지) 분납하여 잠기게 만든다. 조류가 빠를수록 빨리 잠기 게 하면 된다. 그리고 바닥 수심이 10m일 때, 1 2m 적게 주면 된다. 잠기기 시작하면 뒷 줄을 펴주는 식으로 견제를 하며 흘려주면 된다. 유속의 흐름에 많이 좌우되는데 바닥에 닿 을 때 쯤 뒷줄을 지긋이 당기면 다시 떠오르며 입질이 있으면 원줄에 입질이 전해진다. (2) 가문여 3번 자리 여기는 올 겨울 미조권 조항을 이어가는 몇 안 되는 포인트이며, 갯바위 가장 자리에 잘 발달된 수중여가 많아 겨울 감성돔의 좋은 먹이 공급처가 된다. 워낙 가까운 곳에 수중여 가 많으므로, 수심이 나오지 않을 것 같지만, 의외로 수심이 좋다. 갯바위에서 20m원투하 면 13m정도 나오며, 조류가 살아나는 4물부터 조황이 좋다. 가문여의 중간에 위치한 관계 로 들물에 공략 할 수 있다. 날물에는 밀려드는 조류에 의해 밑걸림이 잦다. 멀어지는 속도 가 빨라지면 수심을 15m로 맞춘 후 원투함과 동시에 줄을 팽팽하게 감아 천천히 채비를 내 리는 것이 밑채비가 엉키지 않고, 밑걸림도 줄이는 방법이다. 채비 정렬 후 뒷줄을 잡아줄 때는 넌지시 잡아주어 밑걸림을 줄이면서 바닥을 탐색한다. 한편 갯바위 주변에 여가 산재하여, 물밑에 여가 보이므로, 초심자들은 겁부터 먹지만, 챔 질 후 강제 집행할 것을 생각하니 목줄이 터지는 경우가 많다. 강제집행을 하지 말고, 챔질 후 낚시대의 각도를 도로 세워준 후 릴링과 펌핑을 하면 아무 문제없이 올릴 수 있 다. 감성돔은 절대 자신의 몸이 상하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3) 모[띠섬]밭여 주변 수심이 다양하고, 조류 소통이 원활하여 예부터 그 아성에 도전할 포인트가 없다. 볼락의 명성에 가려 돌돔, 감성돔 낚시는 할 수가 없었으나 볼락 개체수가 줄어들면서 참 돔, 돌돔낚시가 성행하였고 감성돔꾼들의 물망에 오르게 되었다. 미조권에 돌돔 낚시꾼의 수가 예전에 비해 줄어드는 반면 참돔이나 감성돔꾼들의 가세로 요즘 밭여에는 낚시꾼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다. 규모는 작으나 여의 바닥 면적이 넓어서 동쪽이 3 8m (소밭여쪽), 서 쪽이 8 12m이며, 북쪽(모도 바라보는 쪽)은 수심이 아주 낮아 낚시가 불가능하며, 여에서 40m 주변 수심이 2 4m이므로 낚싯배의 접안도 힘들다. 대부분 낚시는 남동쪽이나 남서쪽 에서 이뤄지며 조류의 소통인 들물과 날물이 뚜렷해서 전유동이나 잠수찌 낚시가 이뤄진다. 여 의 규모가 작아 주의보시에는 너울이 여를 넘어 주변 수심은 남쪽이 10 16m(반경

187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m) 이므로 낚시꾼의 주의가 필요하다. (4) 범섬 끝바리 이 포인트는 미조권을 대표하는 범섬 끝바리이다. 본류대의 영향을 직접 받으므로 12물 4물까지 낚시하기에 좋으며, 수심이 13 18m로 한 겨울은 물론 여름철까지 꾸준한 조황 을 이어가는 곳이다. 사진으로 보이는 곳은 들물 때 공략할 수 있고, 주변은 8 13m로 끝 바리를 돌아 나오는 조류에 직벽 가까이 노리면 된다. 밑채비에 분납하여 목줄이 반탄 조류 에 밀려나지 않게 하고, 10m이상 원투하면 수심이 13m 18m로 깊어진다. 반대편에선 썰 물에 공략하는게 좋다. 끝바리 낮은 자리쪽으로 채비를 흘리면 되지만 쑥섬쪽에서 외섬쪽으 로 흐르는 조류에 태우게 되면 갯바위에서 멀어짐과 동시에 수심이 너무 깊은 곳으로 흘러가 므로 뒷줄을 잡아주어 갯바위 주변을 노려야 한다. 낮은 자리 주변 수심이 14 16m 이므로 끝바리에서 16m로 맞춘 후 낮은 자리쪽으로 잡아주면서 흘리고, 원투거리가 10m이상 멀어 지면 18m 19m 맞춘 후 막대찌로 공략하는 것이 좋다. (5) 호도(범섬) 가문여 끝바리 이 포인트는 대체로 조류 소통이 원활한 포인트로 사리 때 보다는 12물 4물까지 조황이 좋은 포인트로 주변 수심이 12 14m로 한 겨울에도 좋은 조황을 보이는 곳이다. 북서풍이 나, 남서풍에 취약해서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나, 동트기 전에 북서풍이 약할 시간에 진입하 여 오전10시 정도에 옮기는 것이 좋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은 들물에 조황이 좋고, 날물에 는 멀리 외섬쪽으로 흘러가므로, 전유동을 하기에 적당하다. (6) 새섬 노랑바위 주로 들물에 사진의 왼쪽끝자락(바다를 보고)에서 15 20m 원투하여 8 10m 맞추면 된 다. 가을부터 겨울까지 꾸준한 조황을 기록한다. 한 겨울엔 날씨가 좋은 날 오후에 내려 봄 직하다. 보통 12물 4물까지 낚시가 이뤄지고, 물 힘이 좋을 땐 종조류가 발생하며 와류에 의해 뒷줄 조작이 힘들다. 들물에 1시간 정도 갯바위로 밀려들기 때문에 낚시하기 까다롭 다. 그러나 밑밥과 채비를 멀리 원투하면 밀려오다가 발밑에서 밑걸림이 발생하는데 이때 입질이 자주 들어오므로 빨리 거둬들이지 말고, 약간 기다려 보는 것이 좋다. 썰물에는 반대 로 노량 바위끝에서 쌀섬방향으로 흘리는데 이때는 수심 8m정도 맞추고, 고부력 찌로 잔존 부력을 B~2B정도 남기는 것이 좋은데 본류가 가까이 흐르면서 반전 조류와 뒤엉켜 종조류

188 1374 남해군지 가 많이 발생한다. (7) 미조 죽암도 해마다 봄이면 미조를 제집처럼 찾던 볼락꾼들이 요즘 뜸한 걸 보면 볼락 낚기가 어려워진 모양이다. 하지만 아무리 불황이라고 해도 나올만한 곳엔 볼락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포인 트가 바로 죽암도다. 미조에서 낚싯배로 20분이면 진입할 수 있는 곳으로 볼락 포인트론 제 격인 곳이다. 죽암도 볼락 포인트 중에서 가장 유망한 곳은 죽암도 서쪽 갯바위와 죽바위 동굴 포 인트다. 두 포인트 모두 낚시 여건이 좋아 안전하게 낚시를 즐길 수 있다. 서쪽 갯바위는 큰 섬과 마주보는 섬 서쪽 곶부리로 포인트 주변에 수중여가 많이 발달돼 있다. 섬과 섬 사이에 물골이 있어 조류가 상당히 빠른 편이다. 따라서 적당한 물때는 사리를 피한 3 4물, 12 14물이다. 입질은 중들물에 상당히 활발하게 이어진다. 조류가 센 걸 감안해 봉돌을 바늘 위 10cm 정도에 물려주는 게 좋다. 수심은 평균 2 3m 정도 밖에 되질 않기 때문에 m 민장대를 사용하는 게 좋다. 만약 릴찌 낚시를 할 경우에는 찌밑 수심을 1.5 2m 정도 에 맞추면 적당하다. 포인트 주변으로 이동이 원활하며, 7 8명 정도가 낚시를 해도 별 무 리가 없다. 죽바위 동굴 은 조류 흐름이 약해 3 8물 사이에 좋은 조황을 보인다. 평균 수심은 3 4m 정도로 m 민장대를 사용하면 무난히 공략할 수 있다. 5 6명 정도 인원이 적당하며 직벽 위쪽만 빼면 포인트 이동이 원활하다. 들 날물 모두 입질을 받을 수 있지만 마릿수는 들물이 다소 앞선다. 입질은 대부분 발밑에서 이어지기 때문에 채비를 최 대한 갯바위 가까이 붙여야 한다. 돌 틈 사이에 숨은 볼락을 공략하기 위해선 바늘 바로 위 에 좁쌀봉돌을 물려 채비를 끌어주는 테크닉을 구사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갯바위 부근에 크고 작은 수중여가 많고 해조류가 많아 밑걸림이 자주 생기지만 좋은 조과 를 얻기 위해선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한다. 밑밥을 준비해 조금씩 뿌려주면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8) 삼동면 양화금 옛 초소 밑 한때는 남해를 대표하는 낚시터로 이름이 높았던 양화금은 최근 그 명성이 많이 퇴색된 분 위기다. 주변에 새로운 낚시터들이 속속 개발되면서 많은 이들의 관심이 분산되고, 상대적 으로 교통이 불편하다는 단점 때문에 일부 단골꾼들을 제외하면 찾는 이들이 많지 않다. 하 지만 구관이 명관 이라고 양화금은 결코 시들지 않는 만만찮은 조과를 자랑하고 있다.

189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75 특히 옛 초소 밑 일대는 씨알과 마릿수 모두 돋보이는 조황을 이어가며 최근의 양화금 활황 세를 주도하고 있다. 이곳은 날물 땐 조류 소통이 거의 없다. 따라서 입질 빈도 역시 현저히 떨어진다. 하지만 들물이 시작되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왼쪽으로 조류가 흐르기 시작하면 곶부리 주변에 서 소나기 입질이 쏟아져 꾼들을 정신 차리지 못하게 만든다. 씨알은 평균 45cm급. 물론 50 cm가 넘는 대물도 수시로 출몰한다. 반드시 곶부리 주변에 이르면 뒷줄을 잡아 수중여를 타 고 돌아 들어오게 유도해야 시원스런 입질을 보장 받을 수 있다. 수심은 9m 정도, 그러나 수중여가 제법 커 수시로 밑걸림이 생기므로 뒷줄을 잘 컨트롤해야 밑걸림은 줄여 입질을 받 을 수 있다. 밑밥은 발밑과 왼쪽 조류의 상단에 꾸준히 뿌려줘야 한다. 이곳에서 입질하는 감성돔은 수 중여 주변에 웅크리고 있다가 시간이 되면 입질을 하는 게 아니라 주변 양식장 언저리에서 어슬렁거리다 밑밥을 따라 갯바위 주변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꾸준한 밑밥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 가지 단점은 낚시자리가 그리 넉넉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물론 주변에도 좋은 포인트가 많아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지만 소개하는 포인트는 입질이 한 곳에서 집중되므로 2명 이상은 함께 낚시하기 곤란하다. (9) 창선면 장곶이 대바위 물 내려오는 곳 낚시하기 딱이야! 장곶이 대바위 물내려오는 곳, 창선면 장곶이 대바위 와 물 내려오는 곳 은 장곶이에서도 손꼽히는 명포인트로 특히 봄, 가을에 좋은 조황을 보인다. 하지만 여름에도 얼마든지 감성돔을 낚아낼 수 있다. 봄, 가을에 비해 씨알은 다소 잘지만 마릿수는 오히려 많다. 장곶이 일대는 봄부터 감성돔 입질이 시작돼 늦가을까지 시즌이 이어진다. 바닥에 수중여 밭이 펼쳐져 있고 조류 소통이 좋아 감성돔 낚시터로 예전부터 사랑받아온 곳이다. 올 시즌 들어서도 꾸준한 조황을 기록하며 연일 꾼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장곶이에서 여름에도 감성 돔 손맛을 볼 수 있는 대바위 일대를 소개한다. 봄부터 가을까지 감성돔이 꾸준하게 낚인다. 봄에는 대물 포인트로 인기가 높고, 여름, 가 을에는 마릿수 재미가 좋다. 올 시즌에도 봄부터 좋은 조황을 기록하며 많은 꾼들이 선호하 는 일급 포인트로 대접 받고 있다. 낚시자리가 다소 높은 편이지만 갯바위가 넓고 평평해 발판이 매우 좋다. 주변 포인트로 걸어서 이동이 가능하고 야영낚시도 즐길 수 있다. 포인트 가 넓은 편이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낚시를 즐기기에도 안성맞춤이다.

190 1376 남해군지 주변 수심이 8 10m 정도로 낚시하기 적합하고, 조류도 완만한 편이어서 초보자들도 쉽 게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물 밑 바닥은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곳곳에 수 중여가 자리 잡고 있어 감성돔이 접근하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 들물, 날물에 상관없이 감성돔 입질을 받을 수 있다. 특히 중들물부터 중날물 사이에 좋은 조황을 보인다. 1 낚시자리 오른쪽으로 조그만 홈통을 끼고 있기 때문에 낚시꾼들 사이에서 대바위 안 통 이라고 불린다. 지류대의 영향을 받는 곳으로, 사리물 때에도 조류 속도가 완만한 편이 다. 갯바위에서 약 15 2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있는 수중여 부근에 입질이 잦다. 특히 조 류가 갯바위 쪽으로 밀려들 때는 입질 받을 확률이 가장 높다. 채비를 수중여 너머로 던진 다음 조류에 태워 흘리면서 수중여 주변을 공략하면 된다. 밑밥도 수중여 뒤쪽에 뿌리는 것 이 좋다. 2 흔히 대바위 직벽 자리라고 불린다. 이곳에서는 멀리서는 입질을 기대하기 어렵고 가까 운 지역을 중점적으로 공략해야 한다. 주로 낚시자리에서 10m 안쪽의 갯바위 주변에서 입 질이 잦다. 따라서 채비가 10m 이상 벗어났다 싶으면 다시 흘리는 것이 좋다. 물이 홈통 안 쪽으로 밀려들 때 입질을 받을 확률이 매우 높다. 이때는 뒷줄을 견제한 채로 채비를 갯바위 부근에 붙잡고 있는 것이 유리하다. 주변 수심은 8m 내외다. 3 만조수심이 6 7m 정도로 다른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얕은 편이다. 갯바위 주변에 수 중여들이 복잡하게 널려 있다. 밑걸림만 잘 극복하면 조과는 어느 정도 보장받을 수 있다. 수중여 윗부분을 공략한다는 생각으로 찌밑 수심을 조절해 낚시하면 된다. 방향에 관계없이 조류가 어느 정도 움직일 때 입질 받을 확률이 높다. 조류가 갯바위 쪽으로 밀려들 때는 채 비를 15m 정도 던져 뒷줄을 사리면서 곧 바로 챔질할 수 있도록 대비해야 한다. 밑밥은 발 밑에 꾸준하게 품질하는 것이 유리하다. (10) 상주면 구들여 대물낚시의 산지인 구들여는 무인 등대가 있는 미조와 갈도 사이에 있는 돌섬으로 해마다 낚시꾼들에게 대물의 꿈을 안겨 주는 그런 곳이다. 여름 시즌에는 돌돔과 참돔 낚시를 해볼 만하고 연중 낚시가 가능한 곳이다. 전체적인 수심은 미조쪽으로는 수중여가 멀리까지 뻗 어있어 10m 17m 정도 보이지만 조류가 흐르면 20m 25m의 수심을 보인다. 사진의 오 른쪽이 갈도 보이는 곳으로 평균 수심이 8m 19m 정도로 참돔 낚시와 돌돔 낚시를 함께 할수 있는 포인트고 사진의 왼쪽으로는 15m 17m 정도의 수심을 나타낸다.

191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77 [ 구들여 참돔 낚시법 ] 참돔 낚시는 다소 강하게 쓰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채비는 감성돔과 비슷하다. 참돔 낚시에 서는 낮 시간대에는 전유동 채비로 입질이 좋고 밤 시간대에는 5호찌이상 고부력 찌 로 반 유동 낚시를 많이 하는 편으로 미끼는 크릴도 사용하지만 청갯지렁이 참갯지렁이가 많이 사 용되고 있다. 구들여에서의 채비법은 다양하지만 개개인에 맞는 낚시면 가장 좋은 채비법이 라 생각든다. 먼저 낮 시간대에는 밑밥이 시각적 효과가 크므로 밑밥 띠와 함께 채비를 흐르 게 하는 것이 최우선이고, 밤 시간대에는 반유동으로 대상 어종의 유영층을 먼저 찾을 수 있 다. 예를 들어 맨 먼저 흘린 채비가 다섯 발을 주고 해도 입질이 없을시 다음은 여섯 발을 주 고 그래도 입질이 없다면 일곱 발씩으로 내리고 올리고를 반복하다보면 입질이 온다. 그것 이 고기들의 유영층이다. (11) 고현면 엄나무섬 남해군 고현면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들은 매 년 어김없이 대물감성돔을 배출하는 곳으로 많은 단골꾼들을 확보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화끈한 조황을 보이고 있는 섬이 엄나 무섬 이다. 엄나무섬은 고현면 앞바다에 자리 잡고 있다. 갈화리에서 낚싯배를 이용하면 채 5분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있고, 낚시자리가 넓고 평평해 가족을 동반해 나들이 겸 낚시를 즐기기에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뿐만 아니라 2호 목줄도 단번에 터트릴 만큼 씨알 굵 은 감성돔들이 많이 낚이는 초여름 일급 감성돔 낚시터이기도 하다. 엄나무섬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덩치는 작지만 섬 전역이 나무숲으로 된 무인도다. 1 낚시 자리가 넓고 편해 여러 명이 자리할 수 있지만, 입질 지점이 정해져 있어 두 명 정 도가 낚시 하는 게 바람직하다. 수면과의 높이차가 얼마 되지 않지만, 주위에 크고 작은 섬 들이 많아 외해의 높은 파도도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므로 비교적 안전하다. 전체적으로 완 만하게 경사를 이루는 지형이라 낚시자리 바로 앞은 수심이 그렇게 깊은 편이 아니다. 주 공 략지점은 선 자리에서 15m 정도 떨어진 곳이다. 수심은 6m 정도 날물에는 이렇다 할 재미 를 보기 어렵다. 대부분 중들물이 받히기 시작하면서 입질이 들어와 만조 전후까지 계속된 다. 들물이 되면 낚시자리 정면 쪽에서 조류가 밀려들어 오다가, 큰 줄기는 낚시자리 왼쪽으 로 나가고 들물가지 조류가 낚시자리 오른쪽으로 갈라져 흐른다. 채비를 낚시자리 정면 20 m 지점에 던진 다음 가지조류에 태워 오른쪽으로 흘리면 입질을 받을 수 있다. 수심은 6m 정도지만 제법 조류가 빠르고 감성돔이 웬만해서는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찌밑 수심을 실제 수심 보다 조금 더 주는 게 좋다.

192 1378 남해군지 2 엄나무섬에서 씨알 굵은 감성돔이 낚이고 들물 포인트다. 낚시자리가 만조가 되면 잠 기기 때문에 초들물부터 중들물까지 낚시를 할 수 있다. 자리가 넓지는 않지만 평평한 형태 를 하고 있어 편하게 낚시를 즐길 수 있다. 갯바위 가까운 곳 보다는 15m 이상 떨어진 거리 에서 입질이 잦다. 낚시자리 바로 앞은 채 2m가 안될 정도로 얕고, 10m 이상 떨어져야 6 m 정도 수심이 나온다. 눈에 띌 정도로 큰 수중여는 없지만 작은 수중여들이 넓은 지역에 고르게 분포하고 있다. 밑걸림이 많지 않고, 조류 소통이 좋아 초보자도 손쉽게 감성돔을 낚 을 수 있다. (12) 남해군내 낚시터 현황 설 천 면 서 면 남 면 상 주 면 미 조 면 삼 동 면 창 선 면 낚 시 터 수 심 지 질 주 요 어 종 왕 지 동 흥 방 파 제 5~15m 모래, 자갈 볼락, 도다리, 감성돔, 노래미, 농어 감 암, 노 량 서 상, 예 계 모래, 자갈 도다리, 노래미, 볼락, 농어, 장어, 작 장, 남 상 10m 염 해, 상 남 바위 감성돔 유 구, 선 구 볼락, 농어, 도다리, 조기, 쥐치, 20~40m 바위, 자갈 향 촌, 가 천 감성돔 소 량, 대 량 바위, 자갈 볼락, 농어, 노래미, 도다리, 망상어, 상 주, 금 포 10m 노 도 모래 감성돔 미조항 방파제 설 리 팔 랑 개 방 파 제, 볼락, 망상어, 농어, 도다리, 참돔, 새섬, 빗바위 5~30m 바 위, 혹돔, 돌돔, 용치, 노래미, 우럭, 범 섬, 외 섬 죽바위 세존도 배 낚 시 열기 물건리, 항 도 양화금, 노루목 10m 바위, 자갈 볼락, 노래미, 혹돔, 감성돔, 농어 장 포, 적 량 단 항 10m 바위, 자갈 볼락, 노래미, 농어, 감성돔, 도다리 (13) 조수표 물때 음 력 일 자 밀물시간 썰물시간 물때 음 력 일 자 밀물시간 썰물시간 :24 9: :48 15: :12 10: :36 16:36

193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00 11 ; :24 17: :48 11: :12 18: :36 12: :00 19: :24 13: :48 19: :12 14: :36 20: :00 15:00 (14) 어종 1~2월 : 볼락, 노래미, 가재매기 3~4월 : 볼락, 노래미, 가재매기 5~6월 : 볼락, 망상어, 감성돔, 뱅애돔, 농어, 보리멸(밀징어) 9~11월 : 볼락, 감성돔, 뱅애돔, 노래미 12월 : 볼락, 노래미는 계절을 가리지 않는 어종으로 많이 잡히고 있다. 감성돔의 이동 상태를 보면 설천면 앞바다(모천 앞)에서 5 6월에 나타나서 7월 설천면 왕지, 감암 앞바다에 나타났다가 9월 서면 앞바다, 10월 남면, 11월 미조부근 낚시터이서 많이 잡힌다고 한다. 7) 등산 남해는 4면이 바다로 쌓인 관계로 산행코스 역시 타 지역보다 빼어나다. 정상을 올라 바라 본 다도해의 경관은 정상에 오르지 않은 자는 맛볼 수 없는 절경이다. 특히 남해는 산악이 높지 않아 낚시를 겸한 외래 등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1) 망운산(786m) 망운산 산행코스는 4개가 있다. 제1코스는 화방사에서 망운사를 거쳐 정상으로 오르는 2.97km로 정상까지 1시간 20분이 소요된다. 제2코스는 오동마을에서 출발하여 정상에 오르며 3.43km로 1시간40분이 소요된다. 제3 코스는 남해읍 신촌마을에서 시작, 장군봉~공동묘지~관대봉~주능선~망운산 정상~망운 암~저수지~오동마을로 하산하며 대략 4시간이 걸린다. 지능선에서 산행이 시작돼 등산로 찾기는 매우 쉽다. 남해읍 신촌마을에서 200m 걸으면 언덕 어귀에 망운산 등산로 안내도가 보인다. 이곳을

194 1380 남해군지 들머리로 산행을 시작한다. 100m쯤 오르면 등산로라고 적힌 이정표가 나온다. 산길 바로 옆으로 무덤이 잇따라 터 를 잡고 있지만 하나같이 묘를 정갈하게 써놓아 보기가 좋다. 곧 약수터가 나오며 망운산 정 상이 왼쪽이라고 적힌 이정표가 나온다. 신기마을 쪽으로 내려가는 오른쪽 길 옆에는 체육 공원이 보인다. 지도상으로 이곳은 장군봉이다. 우측으로 강진만의 푸른바다가 펼쳐져 있고 그 뒤로 창선도가 남해도와 마주하고 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량도도 희미하게 시야에 잡 힌다. 발밑으로는 남해공설운동장을 비롯한 남해읍이 한 눈에 들어온다. 망운산 정상과 신기마을을 알리는 이정표가 10여분 뒤 한 번 더 나오지만 전과 마찬가지 로 남은 거리가 적혀있지 않다. 직진하여 오르막길을 택한다. 전방이 확 트인 공동묘지가 기 다리며 노란색의 원추리꽃 군락지를 지나면 꽤 넓은 경사진 반석이 나온다. 쉼터이자 전망 대다. 고도가 점차 높아지면서 조망범위도 넓어졌다. 오른쪽으로 여수만과 오동도 돌산도 등 전라도 여수 땅이 새로이 나타나고 창선도 뒤로 삼천포 화력발전소가 보인다. 창선도 오 른쪽에는 호구산, 그 옆으로 송등산 귀비산, 그 뒤로 설흘산과 응봉산이 시야에 잡힌다. 이 쯤이면 올라갈수록 멋진 조망에 매료돼 비교적 가파른 오르막 길도 전혀 힘들지 않다. 계속되는 오르막길. 20여분 후 정면에 어마어마하게 큰 바위가 가로막고 서 있다. 왼쪽으 로 크게 돌아 바위 뒤로 가서 밧줄을 타고 오른다. 관대봉 정상이다. 가마봉 혹은 시루봉이 라고도 부른다. 관대봉은 관음보살상 좌우에 화엄신중이 호위하는 형상이라서, 가마봉과 시 루봉은 멀리서 보면 각각 가마와 시루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망운산 정상이 가 까워 진다. 이렇게 35분 정도 오르면 세 갈래 길이 나 있는 주능선에 닿는다. 광양항과 광양 제철소가 보이고 그 오른쪽으로 하동발전소가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온다. 왼쪽은 방송중계 소 가는 길, 오른쪽으로 길을 잡는다. 7, 8분 후 직진 망운산, 우측 망운암 이라고 적힌 이정표가 보인다. 이곳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망운산 정상이다. 이름처럼 항상 맑은 구름이 머무른다는 이곳 정상에 오늘 따라 온 사방에서 농도 짙은 운무가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 하산은 돌탑과 그 뒤쪽의 작은 정상석을 지나 경사가 심한 좁은 비탈길로 시작된다. 석간 수를 지나 바윗길로 걷다보면 망운암에 닿는다. 돌로 만든 간결한 일주문을 지나 우측으로 난 길로 하산한다. 30여 분 길을 헤치고 나아가면 물소리가 시원한 계곡이 나오고, 이 계곡 을 건너 산길을 내려가면 오동저수지. 저수지에서 다시 15분 정도 걸으면 오동마을이 나온 다. 제4코스는 서상에서 출발하여 수리봉을 거쳐 정상에 오른다. 거리는 5.78km로 3 시간정 도 소요된다.

195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81 (2) 금산(681m) 금산을 오르는 산행코스는 2개가 있다. 제1코스는 남쪽 상주 해수욕장 방면에서 올라가 그 길로 하산하는 것이다. 다른 산은 능선을 타고 다른 산봉으로 산행을 이을 수 있지만, 금 산은 그런 산행을 하는 것 보다 보는 즐거움이 더 큰 산행 코스이다. 왕복 5km로 비교적 짧 은 산행거리이지만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놓칠 수 없는 명산이다. 탐방안내소를 지나 완경사의 돌길을 걸어 올라가면 평평한 바위들이 보도블록처럼 깔려 있다. 돌탑을 지나 계곡을 건너면 경사가 급하고 계단길이 시작된다. 출발지점에서 금산 정 상까지 절반 거리인 1.15km 지점에 샘터와 화장실이 있다. 거북이 형상으로 만들어 둔 샘 터의 물은 갈증을 시원하게 풀어준다. 샘터를 지나 쌍홍문까지의 산길은 점차 가팔라져 최 고의 난코스이다. 20분 남짓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면 기괴한 형상의 쌍굴이 시야에 들어온 다. 이것이 금산38경이며 금산의 비경인 기암괴석들이 정상일대 1km내로 독특한 지형으로 등산객의 눈을 즐겁게 한다. 높은 밀도의 기암봉들이 운집해 있고 한려수도가 한눈에 내려 다보이는 망대에서의 조망은 명산의 조건을 완벽히 갖추었다. 제2코스는 복곡 탐방안내소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셔틀버스로 산중턱의 제2주차장까지 이동해야 한다. 시간적 여유가 없으면 복곡저수지 주차장에 있는 셔틀버스를 이용하면 된 다. 10여분을 굽이 올라 8부 능선에서 하차하여 20여분 만 걸으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 (3) 설흘산(482m), 응봉산(426m) 설흘산.응봉산을 오르는 산행코스는 5개이다. 제1코스는 가천마을~안부사거리~설흘산 (봉수대)~안부사거리(회귀)~응봉산~칼바위~(선구리)선구마을 순이다. 산행 시간은 3시간 이며 약 8km이다 산행 전반부에서 주변 조망을 즐기고 후반부에서 암릉을 타는 순서가 대 부분의 코스이며 비교적 간단하고 길이 좋아 편안한 마음으로 산행을 즐길 수 있다. 가천마을 주차장에 닿으면 산행 들머리는 1024번 지방도의 오름길로 연결된다. 이동면에 서 당항 중촌을 거쳐 왔다면 길을 되돌아 올라가면 되고 서상에서 선구를 거쳐 가천으로 왔 다면 진행 방향 정면으로 직진하면 된다. 들머리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면 도로 오른쪽(아래) 이 가천마을이다. 산행 들머리는 다랭이마을 대형 입간판과 버스정류소가 있는 지점에서 1024번 지방 도를 따라 4분쯤 올라가면 만난다. 도로 왼쪽(산쪽)의 시멘트길이다. 초입 부분에 가천테 마펜션 입간판과 설흘산 등산로 푯말이 있어 참고한다. 이후 시멘트길을 따르면 테마

196 1382 남해군지 펜션을 지나 유리로 온실을 만든 농막(축사) 앞에 닿게 된다. 등산로는 여기서 농막의 왼쪽 을 돌아 올라가 만나는 계곡으로 이어진다. 본격적인 산길은 이 골짝부터 시작된다. 안부사거리에서 등산로는 이정표의 설흘산 방향을 따른다. 안부로 올라서면 오른쪽이다. 이 안부는 설흘산에 갔다가 되돌아와야 할 지점이다. 설흘산 정상 직전에 만나는 안부(삼거 리)까지 10분, 다시 오른쪽으로 올라가 닿는 정상까지 4분이 더 걸린다. 정상은 켜켜이 쌓은 돌탑 봉수대가 있다. 망망대해 한가운데 점으로 솟아 육지가 그리운 소치도와 서쪽에서 바 다로 길게 뻗어나간 돌산도의 열도 또한 보는 이의 마음을 한동안 붙잡는다. 이곳은 매년 새 해가 되면 해돋이를 보기위해 남해 사람들이 즐겨 찾는 일출의 명소이다. 정상에서 전망대 까지 3분거리이다. 정상에서 내려가 안부사거리로 되돌아가 매봉산(426m)까지는 오솔길이다. 이정표가 잘 나와 있는데다 길도 대부분 능선을 이어가고 있어 길 찾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다만 육조 바위 갈림길에서는 매봉산 방향은 오른쪽의 오름길임을 염두에 둔다. 안부사거리에서 이정 표가 있는 안부삼거리까지 10분, 헬기장까지 5분, 육조바위 갈림길까지 6분, 매봉산까지 10 분이 더 걸린다. 직진방향의 내리막을 내려서면 얼마가지 않아 암릉을 만나게 된다. 이번 코스의 사실상 하 이라이트다. 너럭바위 뾰족바위 칼바위 등의 기암은 물론, 깎아세운 바위 벼랑들을 잇달아 맞닥뜨리게 된다. 위험을 덜기 위해 최근에 설치된 시설물들이 있고, 소치도가 더욱 가깝게 보이는 너럭바 위까지 12분, 첨봉 앞에 세워진 목조계단까지 12분, 평화로운 향촌마을이 발 밑으로 들여다 보이는 또 다른 너럭바위까지 30분이 더 걸린다. 이후 제단과 등산안내도를 거쳐 산행 종료지점인 선구리 선구마을 팽나무가 있는 곳까지 25분쯤 소요된다. 제2코스는 홍현에서 출발하여 설흘산(482m)정상을 경유하여 응봉산을 거쳐 가천마을로 내려오는 코스이다. 산행시간은 1시간 30분정도이며 약 3.98km의 거리이다. 제3코스는 가천마을에서 바로 응봉산(426m)으로 가서 설흘산 정상을 경유하여 다시 가천 마을로 돌아오는 산행코스이다. 산행시간은 1시간 30분이며 약 4km의 거리이다. 제4코스는 가천마을에서 설흘산 정상까지만 가는 가장 단거리로 소요시간은 30분정도이 며 약 1km의 거리다. 제5코스는 가천마을에서 설흘산 정상까지만 가는 산행길이지만 소요시간은 30분정도이며 약 1.1km이다.

197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83 (4) 호구산(619m) 호구산 산행코스는 5개이다. 제1코스는 앵강고개에서 출발하여 치마폭처럼 펼쳐진 앵강만 을 바라보며 호구산 등선을 타며 소요시간은 3시간이다. 약 4.4km의 산행길이다. 제2코스는 이동면 다정리에서 출발하여 호구산 정상에 오르는 코스이다. 호구산은 소나 무, 벚나무, 단풍나무 등 수림이 울창하여 삼림욕을 즐기며 여유롭게 등반할 수 있는 코스 다. 암봉으로 된 정상에서 바라보는 앵강만의 풍경은 놓칠 수 없는 볼거리다. 물을 베고 누 워 있는 다도해 섬들 사이로 서포 김만중이 유배생활을 하며 ` 사씨남정기 를 집필했던 노 도를 볼 수 있다. 1시간 30분정도 소요되며 약 1.8km의 거리이다. 제3코스는 용문사에서 염불암을 거쳐 정상에 올랐다 다시 내려오는 코스이다. 용문사 천 왕문을 지나 계곡 건너 왼쪽 등산로를 따라 5분쯤 오르면 염불암이 있다. 염불암 대웅전 우 측으로 난 숲이 울창하고 정상으로 가는 길은 숨이 턱에 찰 정도로 급경사를 이뤄 오르기가 쉽지 않다. 호구산 정상가는 길은 암벽이 많아 주의가 필요하다. 1시간20분정도 소요되며 약 1.66km의 거리이다. 제4코스는 남면 당항에서 출발하여 송등산(617m)를 지나 호구산으로 가는 등산코스이다. 2시간 30분이 소요되며 약 4km의 거리이다. 제5코스는 남해읍 평리에서 출발하여 괴음산(605m)를 지나 송등산(617)를 경유하여 호구 산정상까지 소요시간은 3시간 30분이며 약 4.8km의 거리이다. (5) 망산(286m) 망산 등산로 및 봉수대 정비사업으로 망산 동쪽의 미조리 지역과 서쪽의 송정리 지역을 연 결하는 좁은 등산로와 망산 정상의 봉수대를 정비하여 아름다운 해안경관 및 일출을 조망할 수 있는 새로운 등산코스로를 개발하고 있다. 제1코스로는 송정에서 출발하여 쉼터를 경유 하여 망산(286m)에 오르는데 약 1.85km이다. 제2코스로는 송정솔바람해변이 있는 송남에 서 출발하여 쉼터를 경유하여 망산(286m)에 오르는데 약 1.07km이다. 제3코스는 미조중 학교에서 출발하여 쉼터를 경유하여 망산에 오르는 코스로 약 0.94km이다. 제4코스는 설 리해수욕장 방면으로 300m 좌측 망산 등산로 입구에서 출발하여 망산에 오르는 코스로 약 1.04km이다. 제5코스는 미조항에서 출발하여 망상에 오르는 코스로 약1.3km이다. (6) 대방산(468m)

198 1384 남해군지 대방산은 창선면을 대표하는 산이다. 창선면 옥천마을에 있는 대방산(468m)을 오르는 산 행코스는 2개이다. 제1코스는 길이 편해 등산객들이 제일 많이 오르는 코스로 옥천마을에 있는 운대암 사찰 앞을 지나서 창선저수지 위로 난 길을 따라 오르는 동쪽코스이다. 제2코스 는 창선일주 등산로이다. 제1코스는 옥천마을 동쪽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8부능선 정도 경사면에 석축을 쌓은 평탄 한 건물지가 여러 곳에 보인다. 여기를 지나 200m정도 더 오르면 대방산의 정상에 도착한 다. 제2코스는 창선연륙교~질마산~연태산~금오산~속금산~국사봉~대방산코스는 최근 남 해군에서 이 산릉을 연결하는 창선일주 등산로 를 새로 개설하였으며 15km에 5시간정 도 소요된다. 다리가 끝나는 창선의 단항 사거리에서 오른편 산자락에 세워진 휴양의 섬 남해 라는 광고판 옆이 등산로 입구이다. 처음부터 힘들게 올라가는 가파른 산길은 바닷가에 위치한 산들의 공통점이다. 연달아 만나는 몇 기의 묘지를 지나 15분이면 전망이 좋은 바위에 선다. 모개도, 초양도, 늑도, 창선도 등 4개의 섬을 잇는 창선 삼천포대교가 각 산자락으로 이어 지고, 삼천포항 너머로 우뚝 솟은 와룡산이 시가지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뒷동산 같은 작은 봉우리를 넘어서면 해송에 둘러싸인다. 잠시 후 지적삼각점(경남-442호)이 있는 무명 봉에 닿는다. 벌목으로 민둥 능선이 되어버린 건너편 산릉을 쳐다보며 일단 한 굽이를 내려 섰다가 오른다. 경사는 그렇게 심하지 않다. 산행을 시작한 지 1시간이 채 안 돼 삼각점(사 천 425, 2002 재설)이 있는 연태산(339.2m)이다. 봉우리에서 동쪽으로 내려서는 뚜렷한 길 은 냉천마을과 연결된다. 이어갈 길은 봉우리에 못 미처 있는 묘지 뒤쪽이다. 봉우리를 벗어 나면 전망이 뛰어난 바위지대이다. 이곳에 서면 앞으로 가야 할 봉우리가 산등성이로 이어 진다. 금오산 대방산이 건너편에 지척이고, 속금산 국사봉 대방산이 차례로 솟았다. 멀리 이 산릉 좌우에 위치한 금산, 망운산은 물론이고 오른편 강진만 건너 하동의 금오산 도 또렷하다. 바위지대를 내려서면 해송이 빽빽한 숲길은 경사가 가파르다. 급격하게 떨어 지는 산비탈길을 15분이면 세 갈래로 나눠지는 콘크리트 임도를 만난다. 산자락으로 뻗은 직진하는 임도를 따라가면 곧 산길로 접어든다. 15분이면 산봉우리를 두르고 있는 금오산성 지(경남도기념물 제249호)에 이른다. 고려시대에 쌓았다는 이 성은 금오산(261m)의 정상 부를 빙 둘러싸고 있는 테뫼식 석축성이다. 얄팍한 할석으로 축조된 성은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 곳곳이 무너지고 수풀에 묻혔지만 그 형태만은 뚜렷하게 남아 있다. 성터를 따라 오른 편으로 돌다가 내려서면 서쪽의 대방산쪽으로 제법 넓은 산길이 열린다. 여기에서 조심해야

199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85 할 것은 고사리밭이 끝나는 지점에서 왼편 급경사의 산비탈로 내려서야 한다는 것이다. 숲 속을 벗어나 공동묘지를 만나면서 이어가야 할 맞은편 산릉을 볼 수 있다. 묘지군 오른편으 로 나아가면 곧 율도고개로 내려선다. 운치 있는 노송 옆에 기와를 얹은 5각 정자가 쉼터를 제공한다. (7) 금음산(481m) 고현면 차면리 구두산(451.1m)~덕신재~남재~금음산 대국산을 잇는 산맥으로 고현면, 설천면을 경계하고 있으며 옛날 남해도와 육지를 잇는 도로 중 덕신재가 있는 산행코스이 다. 산행코스로는 4개가 있다. 제1코스는 금음산 정상길은 거의 없어졌으나 문항리 임도에 서 도보로 1시간정도 소요된다. 제2코스는 용강마을 뒤에서 도보로 1시간 30분면 금음산 정 상에 오를 수 있다. 제3코스는 고현면 북남치에서 덕신재까지 도보로 1시간정도 소요된다. 제4코스는 설천면 진목리에서 대국산까지 도보로 1시간정도 소요된다. (8) 삼봉산(422m) 서면 현촌과 고현면 오곡을 경계하고 고현면 갈화, 서면 정포 뒤편의 사학산을 줄기로 하 고 있는 산행코스이다. 제1코스는 고현면 대계고개에서 1시간, 제2코스는 고현면 선원에서 40분, 제3코스는 고현면 오곡에서 1시간정도 소요된다. 8) 체험관광 (1) 가천다랭이마을 다랭이 마을은 선조들이 농토를 한 뼘이라도 더 넓히려고 산비탈을 깎아 석축을 쌓고 계단 식 논을 만들었다하여 지어진 명칭이다. 그리고 다랭이 논과 바다, 산이 어우러져 절묘한 조 화를 이루고 있어 관광객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마을이다. 농가에 머물며 체험하고 옛 조상의 슬기와 지혜를 느끼고 배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농사체험 : 다랭이 만들기, 다랭이 새참, 손모내기, 짚공예, 농사체험 바다체험 : 몽돌바닷가 산책, 선상체험, 떼배타기, 그물낚시 먹거리 체험 : 물메기탕, 톳나물, 멍게비빔밥, 흑염소 불고기 (2) 신흥해바리마을

200 1386 남해군지 반농반어의 마을로 남해군에서 유자를 최초로 생산하고 보급한 곳이다. 현재 유자원이 잘 조성되어 있으며 전형적인 어촌마을이다. 해바리의 해의 의미는 남해 푸른 바다와 옛날 조 상들이 물때를 맞추어 횃불을 들고 야밤에 어로 행위를 하던 것을 합성한 뜻이다. 바리는 우 리 남해에서 굴이나 조개 등을 잡으러가는 것을 바리라고 한다. 농사체험 : 유자수확, 유자청 담그기, 유자핸드메이드비누 만들기, 유자 쥬스 만들기, 마늘심기, 마늘쫑 뽑기 등 바다체험 : 갯벌생태체험(바지락, 고둥 등), 한밤중 홰바리 체험(낙지 잡이) 먹거리 체험 : 유자물메기탕, 바지락탕, 완두콩 칼국수 등 (3) 송정한솔마을 송정마을은 소나무와 해수욕장의 은빛 모래, 푸른 바다와 깨끗한 해변을 가지고 있는 체험 마을이며 자연이 살아 숨 쉬는 청정지역이다. 그리고 지친 도시인들의 안식처가 되어주며 도시민과 농업인이 교감을 나눌 수 있게 하는 농촌체험마을이다. 농사체험 : 체리수확, 옥수수. 포도 수확, 메주만들기, 영농체험학습 바다체험 : 갓후리, 갯벌, 선상어부체험 먹거리 체험 : 한방토종닭 백숙, 장어구이, 멸치 회무침, 전어회무침 (4) 왕지등대마을 임금의 꿈을 발원하던 태조 이성계가 금산에서 백일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왕지마 을의 정취에 취해 잠시 다리를 풀었다하여 굽을 왕, 땅 지 를 써서 왕지마을로 전해오고 있다. 그리고 옛날부터 서당이 많고 선비들이 많아 선비마을 로 알려져 있다. 남해대교에서 마을까지의 아름다운 벚꽃 길이 조성되어 있으며 연중 찾아오는 수많은 관 광객들에게 다양한 낚시 체험프로그램으로 마을을 알리고 있다 농사체험 : 마늘 파종, (옥수수, 고구마) 수확, 유자주스 만들기, 유자청 만들기 바다체험 : 뗏목체험, 선상어부체험, 바다낚시, 어패류 경매 먹거리 체험 : 생굴 튀김, 굴 구이, 조개탕 (5) 두모드므개마을 마을 한가운데 흐르는 하천에는 은어, 참게, 민물장어등이 서식하며 청정 1급수 물이 하천 을 따라 흐르고 있다. 두모 마을은 친환경 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있으며, 마을 뒤의 금산의

201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87 정기와 마을 앞 서포 김만중의 유배지인 노도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넓고 깨끗한 갯벌에 는 다양한 바다생물들이 서식하고 있어 바다생태를 체험하기에 알맞은 곳이다. 문화체험 : 노도문화 체험 바다체험 : 선상어부체험, 개매기 체험, 선상낚시, 정치망 체험 먹거리 체험 : 해초비빔밤, 갈치회 (6) 홍현해라우지마을 마을의 지형이 무지개 형상을 하고 있다하여 명칭을 해라우지라 부른다. 마을 앞 시원하 게 둘러싸인 송림과 바다 끝에 달려 있는 논들은 마을을 찾는 손님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한 다. 농사체험 : 옥수수따기, 마늘쫑 뽑기, 콩 수확 바다체험 : 바지선낚시, 석방렴 체험 먹거리 체험 : 전복죽, 전복회, 멍게비빔밥 (7) 적량해비치마을 마을 입구의 다랭이논은 사계절 꽃피우고 향기는 가는 이의 발길을 붙잡는다. 다랭이 논 과 임야에서 재배되는 고사리와 산나물은 마을의 특산물이다. 해비치 마을은 나전칠기와 같 은 전통 공예 체험과 갯벌 체험 등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을 오는 손님에게 선보이고 있다. 문화체험 : 전통공예체험, 해돋이, 정월대보름 달집 태우기 농사체험 : 고사리밭 체험, 동물농장 바다체험 : 통발, 뗏목낚시, 돌망, 도다리 잡기, 후리기, 그물당기기 먹거리 체험 : 홍합탕, 고사리 비빔밥, 해물 비빔밥 (8) 덕월아이펀마을 올망졸망한 섬을 끼고 있는 해안과 서쪽으로 넘어가는 일몰과 노을이 유난히 아름다운 마 을이다. 마을 앞에 힐튼남해골프&스파리조트가 있으며 2007년부터 덕월마을과 힐튼이 아 이펀이란 이름으로 힐튼을 찾는 내.외국인관광객들에게 다양한 체험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문화체험 : 통태달구지 타고 동네 한바퀴, 떡 만들기, 임진성 탐방 농사체험 : 친환경 벼 수확, (마늘, 고구마, 옥수수, 시금치) 수확 바다체험 : 무인도 체험, 갱번 체험, 선상 어부 체험

202 1388 남해군지 먹거리 체험 : 우묵가사리 묵 만들기, 전복죽, 회 (9) 설천문항마을 웅장한 산세와 지형이 마치 아홉 마리의 용과 흡사하고, 마을 골목에는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다하여 문항이라 한다. 마을 앞바다에는 상장도와 하장도라는 두 개의 섬이 있는데 하루에 두 번 모세현상이 일어난다. 마을의 해안을 산책하며 다양한 해산물을 채취 할 수 있다. 바다체험 : 바지락, 우럭, 맛조개 체험, 낚시체험, 후리그물 고기잡기, 자연산 돌굴 따 기 먹거리 체험 : 바지락탕, 쏙 튀김 (10) 창선냉천마을 임진왜란 때 왜구를 치러 온 병사들이 배고픔과 목마름을 달래며 행군하던 중 마을에 들러 먹을 것을 청하였다. 하지만 왜구의 수탈로 초근목피로 근근이 생명을 유지하던 주민들이 병사들에게 곡식 대신 샘물을 떠나 대접하였는데 갈증에 시달리던 병사들은 얼음같이 차가 운 물을 마신 후 정신을 가다듬고 전투에 나갔다고 한다. 여름에는 얼음처럼 차고 겨울에는 따뜻하며 물 맛 또한 일품이라하여 마을 이름은 냉천이라 지었다고 한다. 냉천의 맑은 물이 갯벌에 흘러들어 조개, 낙지, 문어, 쏙, 키조개등 다양한 어패류가 서식하고 있다. 바다체험 : 조개 캐기, 쏙 잡이, 키조개 캐기, 붕장어 잡기, 낚시 체험, 문어.낙지잡이 먹거리 체험 : 쏙 튀김, 쏙 된장찌개, 조개구이 (11) 삼동지족마을 남해 12경중 하나인 원시어업 죽방렴과 창선교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 지족 해협과 넓 은 갯벌이 펼쳐져 있는 곳이 지족마을이다. 마을 해안이 둥근 반달 모양과 같다하여 달반 월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촌체험으로 맨 손으로 고기를 잡고 죽방렴에 잡힌 고기들도 볼 수 있다. 바다체험 : 바지락 캐기, 바지선 낚시, 맨손 고기잡기 체험, 쏙잡이 먹거리 체험 : 바지락 칼국수, 멸치 회, 멸치 쌈밥 (12) 삼동은점마을

203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89 바닷가에 은굴이라는 동굴에서 많은 은을 캐 거래했던 점포가 있었다하여 은점이라 불려 졌다고한다. 몽동해변의 수정과 같은 맑은 바닷물과 해산물은 마을을 찾는 관광객에게 신나 고 재미있는 체험의 장이 되도 있다. 바다체험 : 어부통발체험, 맨손 문어잡기 체험, 선상낚시 체험, 벗굴따기 체험, 전복.고 둥잡기체험 먹거리 체험 : 도다리 쑥국, 대구탕, 물메기탕, (13) 서면유포마을 봄이면 아름다운 철쭉이 만개하여 손님을 반갑게 맞이하고, 시원스레 돌아가는 물레방아 는 유포마을의 삶을 대신하여 보여준다. 유포마을은 바닷일과 농사일을 함께하며 소담스레 살아가는 작은 마을이다. 바다체험 : 멍청이 낚시, 뗏목타기, 갯벌체험, 조개캐기, 먹거리 체험 : 갱번 먹거리 만들기(해초비빔밥, 조갯국, 매운탕) (14) 스마일농장 상주면 상주리에 202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상주 은모래비치와의 거리는 1km 내외이 다. 규모는 6,600m2이며, 느타리 버섯 3동, 체리 990주, 녹차 5,300주 등 작목이 다양하며 각종 동물체험도 함께 하고 있다. 농장체험 : 녹차, 체리, 느타리 버섯 등의 재배과정 교육과 수확, 장대로 감 따기, 염 소, 닭, 오리 등 동물체험 (15) 석보농장 삼동면 동천리 822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물건방조림과, 독인인마을에서 4km내외이다. 규모는 9,900m2이며 참다래, 옥수수, 고구마 등 작목이 다양하며 화전한우의 사육과정을 함께 체험하며 배우는 프로그램이다. 농장체험 : 참다래 재배교육 및 수확, 고구마 캐기, 한우 사육체험 (16) 허브빌리지농장 삼동면 물건리565-4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해오름예술촌 안에 5,000m2의 허브농장이 있다. 쉼터, 조각공원, 체험장 등 기본 편의시설이 되어있으며 다양한 체험과 볼거리를 제공

204 1390 남해군지 하고 있다. 농장체험 : 허브.야생화 체험, 염색 체험, 알공예 체험, 도자기 만들기 체험, 칠보공예 체험, (17) 에덴농장 창선면 당저2리 375-2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규모는 13,200m2이며 숙박시설, 회의실 등 편의시설이 되어있다. 다양한 작목으로 계절별 체험이 가능하다. 농장체험 : 유자수확, 마늘 수확, 농장견학, 갯벌체험 9) 갯벌과 갯벌체험 (1) 갯벌의 정의 갯벌이란 갯가의 넓고 평평하게 생긴 땅'으로 연안습지의 일부분이다. 습지보전법에 정 의된 내용을 보면 연안습지는 간조와 만조차이로 드러나는 해안의 공간으로 내륙습지와 대 비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정의에 의하면 연안습지는 해안의 바위해안, 모래해안, 갯벌 을 모두 포함하고 있지만 갯벌이 그 중 가장 큰 규모를 차지하고 있다. 만조 때에는 물속에 잠기고 간조 때에는 공기 중에 노출되는 갯벌은 육상과 해양이라는 거 대한 두 개의 생태계를 접하는 곳으로 생태계의 완충 작용뿐만 아니라 연안 생태계의 모태역 할을 맡고 있다. (2) 갯벌의 형성 갯벌이 형성되려면 해안을 침식하는 파랑의 작용이 약하게 발생하거나, 육지로부터 퇴적 물질들이 유입될 수 있는 하천이 바다에 접하고 있어야 한다. 뻘이나 모래같은 입자들은 육 지로부터 풍부한 영양 염류나 기타 바다 생물의 먹이가 되는 유기물을 갯벌에 공급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또한, 물이 빠졌을 때(간조) 드러나는 평평한 부분이 넓게 펼쳐지려면 밀물과 썰물 때 나타 나는 해수면의 차이가 커야하며 평탄한 지형과 이들이 쌓일 수 있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3) 갯벌의 기능

205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어류 정화 기능 갯벌은 육상에서 배출되는 오염물질을 정화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연안을 따라 산업이 발달하여 많은 오염 물질을 배출하고 있다. 따라서 갯벌의 정화기능에 대한 가 치는 상당히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갯벌 생태계가 가지고 있는 자정능력으로는 염생 식물 (칠면초, 갈대 등)과 저서규조류, 미생물에 의한 오염원을 흡수하고 분해한다. 미국조 지아 대학교 오덤(Odum) 교수팀의 연구 조사 결과 펄갯벌 1km2의 미생물에 의한 흡수와 분 해 능력은 하루 BOD(생물학적 산소요구량) 기준 2.17톤의 오염물을 정화 할 수 있는 것으 로 도시하수처리장 1개소의 유기물 처리 능력과 맞먹고, 500마리의 갯지렁이는 하루에 1인 1일 배설물량 2kg를 정화시킨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 생물 뿐만 아니고 갯벌에 사는 전 생 물이 정화작용에 직 간접적으로 관여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2심미적 기능 갯벌의 생태적 다양성은 생물 실험실, 오락적 장소, 문화유산 등의 교육적과 심미적 이용 가치를 제공하고 있다. 최근 갯벌의 문화적 가치와 가치의 계량화를 위한 연구가 활발히 이 루어지고 있다. 3 홍수 및 태풍 조절 기능 갯벌은 지역의 수계의 흐름에 영향을 준다. 홍수에 따른 급속한 물의 흐름을 완화시켜 저 장하는 역할을 하여 물의 흐름을 장기간에 걸쳐 조금씩 흘러 보낸다. 갯벌은 단기간 홍수량 을 조절하여 홍수에 따른 인명 및 재산 피해를 감소시킨다. 또한 갯벌은 태풍의 영향을 감소 시키는 완충 역할을 한다. 따라서 갯벌은 태풍으로부터 피해를 감소시키는 역할을 한다. (4) 갯벌의 종류 갯벌은 퇴적물의 조성에 따라 모래갯벌 (sand flat)과 펄갯벌 (mud flat)로 구분되고, 두 가지 특성이 함께 나타나는 것을 혼성갯벌로 구분된다. 위치에 따라 해변 갯벌과 하구역 갯 벌로 구분할 수 있다. 퇴적물 조성을 해안의 물리적인 특성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에 해수유 동이 심하게 노출된 해안에서는 모래 갯벌이, 보호 된 해안에서는 펄갯벌이 형성된다. 이렇 게 형성된 갯벌들의 물리 퇴적학적 환경차이는 생물, 생물생산, 물질순환 등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206 1392 남해군지 1 펄갯벌 펄갯벌은 흐름이 완만한 내만이나 강 하구의 후미진 곳에 형성되며 경사가 완만한 편으로 어떤 곳은 5km가 넘는다. 펄갯벌에는 수로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뻘 함량이 90퍼센트 이 상으로 잘 발달한 지역에 표층 퇴적물의 평균 입자 지름은 0.031mm에 이른다. 뻘 함량이 비 교적 높은 펄갯벌은 모래갯벌보다 퇴적물의 간극이 좁아 산소나 먹이를 포함하는 바닷물이 뻘 속 깊이 침투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이곳에 서식하는 생물들은 지표면에 구멍을 내거나 관을 만들어 이를 통해 산소 공급과 바닷물이 흐르도록 하고 있다, 2 혼성갯벌 모래펄갯벌이라고도 하는데 모래와 펄이 각각 90퍼센트 미만으로 섞여있는 퇴적물로 구성 된 갯벌이다. 대개는 세 가지 유형의 갯벌들이 한 지역에서 동시에 나타난다. 즉 저조선 부 근에는 모래갯벌이 고조선 부근에는 펄갯벌이 그리고 그 사이에 혼합갯벌이 존재한다. 강화 도, 동검도 주변은 펄갯벌이나 서쪽으로 갈수록 혼합갯벌 또는 모래 갯벌로 바뀐다. 이것은 모두 물의 흐름이나 움직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3 하구역 갯벌 육상 퇴적물이 흐름이 완만한 하구 주변부에 퇴적되어 대규모의 갯벌을 생성한다. 따라서 이곳에는 육상에서 유입되는 많은 유기물이 집중되고 탁도가 높아 대양의 식물성플랑크톤과 같은 일차생산자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대신에 하구역 갯벌은 담수 유입이 많은 곳이다. 그 리고 하구와의 거리에 따른 일정한 염분 구배를 가지고 있어 더욱 다양한 환경 조성에 기여 한다. 또한 홍수에는 대량의 담수가 일시적으로 유입되어 퇴적 환경을 바꾸는 등 극적인 환 경 변화를 연출하는 곳이기도 하다. 담수는 필연적으로 육상의 오염 물질과 영양염류와 결합된 현탁물들을 운반하여 하구역을 부영양화 시켜 쉽게 오염지대로 만들기도 한다. 서해안으로 향하는 강의 하구역에 발달한 한강의 강화도와 영종도 갯벌, 금강, 만경강, 동진강 하구의 군산, 김제, 부안 갯벌 등은 육 상에서 공급된 퇴적물이 완만한 흐름의 하구 주변에 퇴적되어 대규모의 갯벌을 형성하고 있 다. 이곳에서는 하구의 제방을 따라 갈대밭이 광활하게 펼쳐지며 바다를 향하여 모래나 뻘 로 된 감조 저습지가 발달하였다. (5) 갯벌체험

207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93 남해 갯벌은 수심이 완만하고 니질이 좋아 다양한 조개류가 서식하는 곳으로 현장 체험 이 가능하며 어촌계에서 직접 관리하는 어장과 관광객을 위한 체험장이 구분되어있다. 또한 초보자도 채취가 가능하며 고둥이나 게 등 다양한 수산물을 채취하기 좋은 갯벌이다. 갯벌체험은 간조시 물때가 4물 12물 사이에 가능하다. 1 돌발체험 현재 해안에 설치되어 있으나 수산자원의 감소로 조업은 불가하고 견학만 가능하다. 2 모세현상 체험 만조시는 어선을 이용해야만 이동이 가능하나 간조시는 두 개의 섬이 육지로 연결되는 것 을 모세현상이라 한다. 관광객이 걸어서 두개의 섬으로 진입할 수 있다. 섬에는 해안산책과 아울러 해안에 있는 고둥, 게 등 수산 동.식물을 채취할 수 있다. 3 굴양식장 견학 남해는 청정해역으로 굴 수하식양식장이 조성되어 있다. 어선을 이용하여 양식장의 견학 할 수 있으며, 양식 순기에 따라 육상에서는 굴 종묘, 채묘를 위한 채묘연 조립을 하고 있어 직접체험이 가능하며, 1 3월에는 양식한 굴을 운반하여 직접 굴까기 및 시식을 할 수 있 다. (6) 갯벌 체험하기 좋은 곳 1 남해읍 입현매립지 위 치 : 남해군 남해읍 입현리 면 적 : 198,000m2 망운산에서 남해읍을 거쳐 흐르는 봉래천의 하구에 매립으로 조성된 인공적인 습지이며, 1980년 매립이 진행된 후 방조제에 의해 갯벌이 대부분 유실되고 하천의 건천화로 인하여 토사 유입 없이 자갈과 바위로 이루어졌다. 겨울철에 많은 종류의 물새들이 월동하여 남해군의 새로운 자연생태계를 형성하며, 매립 전에 진흙갯벌이 광범위하게 존재했었으며, 현재 수달 서식지로 보고되고 있다. 그리고 남 해군의 모태라 할 수 있는 강진만으로 흘러드는 중요한 지점에 위치하여 오염원을 차단하는

208 1394 남해군지 효과를 가지며, 높은 봉우리가 차례로 보이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지형적 조건과 경관이 흥미롭다. 국제적으로 인공습지도 습지의 기준에 포함시켜 보호한다는 사실을 볼 때, 그 중 요성이 높다. [ 체험내용 ] - 철새탐조 : 봄 가을(도요, 물떼새류), 7 8월(백로, 왜가리 등), 12 2월(오리, 갈매기 류) - 관찰가능 조류 : 왜가리, 쇠백로, 쇠청다리도요사촌, 중대백로, 괭이갈매기, 중부리 도 요,뒷부리도요, 노랑발도요, 깝작도요, 알락도요, 힌꼬리좀도요, 민물도요, 청다리 도요, 흰 빰검둥오리, 쇠물닭, 흰물떼새, 청둥오리, 붉은부리갈매기, 개개비, 꼬마물떼새, 멧비둘기 - 환경기초시설 탐방 : 남은 음식물을 이용한 지렁이 사육시설(에코파크 체험), 하수종말 처리장, 분뇨처리장, 생활폐기물 매립장 등 2 이동면 초양 - 광두 갯벌 위 치 : 남해군 이동면 초음리 면 적 : 299,000m2 해안선을 따라 모래와 자갈로 이루어진 갯벌이며 육지의 흙과 모래가 직접적으로 유입되 는 큰 규모의 하천은 없다. 육지부와 갯벌지역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바지락 양식장 을 하고 있다. [ 체험내용 ] - 바지락잡이 체험, 사구식물 관찰, 철새 탐조, 굴 채취 체험 3 이동면(광두-고암)갯벌 위 치 : 남해군 이동면 석평리, 삼동면 영지리 일대 면 적 : 1,827,000m2 강진만의 해류가 지족해협을 통해 드나드는 길목에 만입된 지역에 형성된 갯벌지역이며 비교적 갯벌의 퇴적이 많았으나 해안선이 단순화되면서 점점 갯벌이 유실되고 있어 자갈이 드러나는 곳을 발견할 수 있다. 과거 이동면의 갯벌은 넓게 형성하고 있었으며 변화의 정도 가 큰 것으로 보아 강진만내의 갯벌 생태계의 변화를 주도하는 중요한 지역 중의 하나라 볼 수 있다. 고잔 갯벌의 경우 부드러운 진흙 갯벌이 남아있는 지역으로서 비교적 보전 상태가 양호하여 이동갯벌의 과거모습을 알 수 있는 좋은 예가 되는 지역이다.

209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95 [ 체험내용 ] - 바지락잡이 체험, 사구식물 관찰, 철새 탐조, 굴 채취 체험 4 고현면 관음포 갯벌 위 치 : 남해군 고현면 대사리, 포상리 면 적 : 894,000m2 남해의 서북쪽에 위치, 1971년 농경지 확보로 갯벌의 많은 부분이 매립되었다. 모래와 갯 벌지역으로 대사천이 있으며, 일부지역에는 모래와 뻘이 씻겨나가 자갈이 드러나는 곳도 있 다. 관음포이충무공전몰유허쪽의 해안선은 비교적 개발에서 자유로운 편이며, 백로류를 비 롯해 큰뒷부리도요, 중부리도요가 집단으로 발견되고 홍머리오리, 청머리오리 등 월동하는 생물의 종류와 숫자가 많다. 광양만의 영향권에 있다. 5 지족해협(지족,전도,둔촌) 지역의 갯벌 위 치 : 남해군 삼동면 지족리, 금송리, 동천리 일대 면 적 : 612,000m2 지족해협의 빠른 물살을 이용한 원시어법인 죽방렴이 남아있는 곳으로 멸치잡이 등으 로 고소득과 생태관광을 위한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지족해협의 물살이 빠르고 지형적 인 조건으로 인해 넓은 면적의 갯벌이 형성되어있지 않다. 또한 평상시에는 물속에 잠겨 있 다가 일 년에 몇 차례 물 밖으로 나타나며 람사협약에서 간조시 수심이 6m를 넘지 않는 지 역을 습지의 영역으로 규정하고 있으므로 남해지역의 중요한 습지 지역 중의 하나이다. [ 체험내용 ] - 원시 죽방렴 체험, 바지락잡이 체험, 다양한 게 종류 및 갯지렁이 관찰, 철새 탐조, 염생 식물 관찰 6 동대만 갯벌 위 치 : 남해군 창선면 동대리, 수산리 일대 면 적 : 3,571,000m2 자갈과 모래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해류의 흐름이 느리며 흘러드는 창선천이나 부윤천은 상신 매립지나 오룡 매립지를 지나 유입되고 있어 해수의 영향이 큰 지 역으로 보인다. 2001년 5월 한 일 공동 갯벌 생태계조사에서 흑기러기가 서식하고 있는

210 1396 남해군지 사실이 밝혀졌다. 오룡 부락쪽에 있는 철내섬은 자연생태계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생태계 의 보고로서 만조 때는 물이 들어 섬이 되지만 간조 때가 되면 물이 빠져서 사람들이 그냥 걸어서 들어 갈 수 있는 지역이다. [ 체험내용 ] - 바지락 잡이 체험, 갯지렁이 및 게 종류 관찰, 머드 팩(갯벌 마사지), 자연산 고사리채 취, 철새 탐조, 자연산 굴 생장 모습 관찰, 철내섬 생태계 탐사 ( 관찰조류 : 백로, 왜가리, 흑기러기, 중부리도요, 노랑부리 백로, 각종 오리류) 7 고현면 이어리 갯벌 위 치 : 남해군 고현면 이어리, 도마리 면 적 : 198,000m2 남해읍 매립지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모래와 자갈로 이루어져있으며 일부지역에서는 갯 잔디 등 염생 식물이 분포하고 있다. 해안도로의 개설로 인해 모래갯벌의 형태 변화가 일어 나고 있다. 이어리 갯벌로 흘러드는 동산천이 있으나 하천 하구가 직강화 및 콘크리트 구조 물로인해 하천 하구의 생태계가 단순화되어 하천 하구가 해양 생태계로 이어지는 연결 고 리의 역할을 대부분 상실한 상태이다. 8 고현면 도마 갯벌 위 치 : 남해군 고현면 도마리 면 적 : 580,000m2 1970년대 갯벌의 많은 부분이서 농경지로 매립되었으며, 현재 방조제 바깥쪽에 진흙과 뒤 섞인 갯벌이 형성되어 있다. 국제적인 희귀 조류인 검은머리 갈매기가 관찰된 지역이기도 하다. 최근 해안도로 개설을 위해 수문 보강공사를 하거나 제방을 보강하는 작업이 진행중 에 있다. 9 갈화, 정포, 노구, 염해 갯벌 위 치 : 남해군 고현면 갈화리, 서면 정포리, 노구리 면 적 : 955,000m2 남해의 서쪽지역과 광양만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광양만의 해류가 외해로 빠져나가는 길 목에 있으며, 모래 갯벌이다. 일부지역은 간척되어 농경지나 양식장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211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397 갯완두, 개멧꽃 등 사구 식물을 볼 수 있다. 광양만과 직접적인 영향권에 있으며, 광양제철 소와 광양만의 대규모 매립에 의한 생 태계 변화가 심한 지역으로 보인다. 10 강진만 갯벌 위 치 : 남해군 강진만 면 적 : 5,298천km2(약 529ha) 북으로는 진주만에 접해있고 남쪽으로는 남해군 고현면, 읍, 이동면, 삼동지역에 접했며, 대부분 민가나 논으로 형성되어 있다. 강진만의 저질은 간석지를 제외한 전 해역이 주로 뻘 로 구성되어 있으며, 피조개, 새 조개, 바지락, 고막, 갯지렁이, 게가 많이 서식하고 있다. 람사 표준 물새에 근거한 특별한 범주(제3범주)중 어느 물새의 종의 전체 중 세계 서식수의 1%이상이 정기적으로 서식 또는 번식하는 습지에 해당된다. 검은머리갈매기 52개체 발견 (98.1.7~8), 검은머리갈매기 72개체 발견( ) 중부리도요 403개체 발견( ), 노랑발도요 347개체 발견( ) 강진만의 피조개, 바지락의 양식장은 그 규모가 전국적 으로 아주 큰 중요한 어장으로 패류의 경우 남해군 전체 생산량의 80%이상을 강진만 해역에 서 생산하고 있다. 11 진목, 고사, 모천, 문항, 봉우 갯벌 위 치 : 남해군 설천면 강진만 일대 면 적 : 1,895,000m2 강진만 북서쪽에 위치하며 남쪽과는 다른 모습으로 모래 해변이 존재하며 갯잔디와 갈대 밭이 분포하고 해안생태계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남아있다. 해안선에 접해있는 농경지 지역 은 친환경농업지역으로 지정되어 있고, 모래해변에서 는 흰물떼새가 산란하며 백로의 서식 지로 이용되고 있다. 고사갯벌은 해안 생태계의 변화가 심각하게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며, 모래갯벌에서 자갈이나 바위갯벌로 진행 중에 있는 상황이다. 모천갯벌은 모래로 이루어졌 으며 인근 야산과 갯벌선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고 바위를 이용한 갯벌 유실 경계선이 만 들어져 있다. 문항갯벌은 모천에서 문항사이에 분포한 갯벌로써 해안선의 보전상태가 양호 한 편으로 갯잔디가 분포되어 있으며 서식하는 저서생물도 다양할 것으로 예측되며, 모래갯 벌로 이루어져 자갈층이 적고 부분적으로 진흙갯벌이 형성되어 있다. [ 체험내용 ] - 갯벌에 대한 이해, 갯벌체험, 갯벌 생물관찰, 갯벌관련 비디오보기, 갯벌놀이, 역 할극

212 1398 남해군지 등 (7) 갯벌체험 1 (주)자연이야기 위 치 : 남해군 남해읍 북변리 주식회사 자연이야기는 지난 10여 년 동안 지역의 자연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해 열심히 활 동해 온 환경운동연합의 실무자들로 역사, 문화 그리고 유적 등에 관하여 충분한 교육을 받 고 자원봉사자들이 모여서 각종 생태기행과 자연체험학습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회사이다. 생명, 감동, 상상력을 사훈으로 바다생태체험학습, 갯벌생태체험학습, 원시어업 죽방렴 체 험학습, 갓후리어장 체험학습, 생명의 숲 체험학습 등 다양하고 유익한 체험학습 프로그램 을 운영하여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감수성에 파동을 주어 장차 소중한 지구 생명의 지킴이로 키워내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지역의 모든 볼거리와 즐길거리, 먹거리를 소 개하고 안내하여 대한민국에서 가장 쾌적하고 풍요로운 남해의 자연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한 다. 바다체험 : 해변체험(홍합,고둥잡기,해조류 따개비 채취), 몽돌 바닷가 산책, 갯벌체험 문화체험 : 남해문화역사탐방, 시골학교 운동회, 삿갓배미 찾기, 미륵봉 일출, 2 남해갯벌생태학교 위 치 : 남해군 설천면 진목리 909 우리의 아이들에게 산으로 들로 나가 햇살 아래 돋아나는 새순의 신비함을 느끼게 하고, 야생초의 꽃내음도 맡으며 산새들 속삭이는 숲 속의 오솔길을 도란도란 걷게 하고 싶다. 참 게, 도둑게, 방게, 말똥게, 장군게(갯게) 오순도순 모여 사는 냇물 따라 순비기꽃 향기에 취 해도 보고 드넓은 갯벌에는 물새, 말뚝망둥어, 조개, 갯고둥, 따개비, 방게, 콩게, 갈대, 갯 잔디 등과 함께 조화롭게 살고 있다. 맨발로 땅을 일구며 생명을 보살피는 기쁨을 함께하며 농사짓는 학교를 만들고 싶다. 바다에 나가 뗏배(작은 배)의 노젓는 맛을 보여주고 싶다. 이 것은 남해갯벌생태학교가 도시민들에게 세상을 기르는 큰 일꾼은 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바다체험 : 해변체험(갯벌 생태계 관찰하기, 따개비 채취), 뗏배타기, 낚시체험 체 험 : 농사체험, 어부체험, 숲속관찰

213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 특산물 및 향토식품 남해지방의 특산물로서 모시, 유자, 치자, 비자, 마늘, 멸치 등을 들 수 있으며 특히 모시 의 품질은 아주 뛰어나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화학섬유에 밀려 일부지역에서 부업으 로 맥을 잇고 있는 실정이다. 유자, 치자, 비자는 남해의 삼자이며 이곳의 기후와 풍토에 잘 맞아 품질도 좋아 농가 소득 증대에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해를 거듭 할수록 생산 량도 증가하여 다양한 가공법으로 국내외 수요도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또한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천혜적인 여건과 303km 해안선, 7,320ha에 달하는 광활한 바다의 간사지는 수출 품목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피조개, 새조개, 바지락 양식에 적합한 지 역이다. (1) 농산물 1 유자 유자는 중국의 양자강 상류가 원산지로 옛날부터 우리나라에서 재배되었다고 한다. 장보 고 가 당( 唐 )나라에 갔을 때 상인의 집에서 유자를 선물 받아 오다 풍랑을 만나 남해에 안 착하였을 때 도포 자락 속에 있던 유자가 깨어져 그 씨앗이 남해에 전파되었다고 전한다. 이 고장을 비롯 제주도, 거제도, 완도 등 일부지역에서 생산되고 있는 유자는 내한성이 강한 상 록수이다. 10월 말에 익는 열매로 노란색 감귤모양이다. 특히 남해산이 비타민 C의 함유량 이 많고 질도 좋아 호평을 받고 있으며 약용으로 위장 기능 강화, 해독제로 쓰이며 유자 껍 질은 거담제, 건위제로 사용된다. 그리고 유자차와 유자청으로 인기가 높고 향기가 좋아 관 상용으로 쓰인다. 유자청은 익은 열매를 깨끗이 씻어 물기를 제거하고 쓴맛을 없애기 위해 껍질 중 노란 부위를 얇게 깎아내어 4등분한 후 씨와 속을 제거한다. 그 다음에 0.5cm 정도 의 두께로 얇게 썬 후 설탕 또는 벌꿀로 덮기를 반복하여 용기에 채운 후 밀봉한다. 서늘한 곳에 보관하며 1년 이상 저장이 가능하다. 종래에는 주로 약용이나 가정에서 차용으로 이용 되어 왔으나 최근에는 식품회사에서 가공품으로 개발하여 보급되고 있다. 2 치자 치자는 언제부터 재배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오래 전 부

214 1400 남해군지 터 토산품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부터 자생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치자는 기 후가 온난한 해안지대를 좋아하는 상록 활엽 관목으로 내한성에 약하고 내열성에 강하여 남 해 특산물로 군내 어느 곳이나 재배가 가능하다. 치자의 잎은 광택이 있고 6월에 피는 백색 꽃에는 짙은 향기가 있어 아름다운 조경수인 동시 공해에 강한 습성이 있다. 10월 11월에 따내는 홍적색의 열매는 무공해 천연 염료로서 공업용, 약용으로 널리 쓰이고 있으며 국내 판로나 수출 전망이 좋아 소득증대에도 기여하고 있다. 1973년 12월 24일 군화( 群 花 )로 지 정 되었다. 3 비자 비자나무는 상록수로서 남해의 야산에 자생하고 있다. 열매는 10년 15년이 되어야 열리 며, 맛은 달고 떫으나 기생충을 없애는 약용으로 쓰이고 치질을 낫게 하는 작용을 한다. 목 재는 특수용재로서 품위있는 공예품이나 최상품의 바둑판 재료로 쓰인다. 1979년 1월 27일 군목( 郡 木 )으로 지정 되었다. 4 마늘 선사시대부터 재배 된 남해 마늘은 단군신화와 더불어 우리의 식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주된 양념채소이며, 원산지는 중앙아시아이다. 마늘은 중국 진나라의 장화가 쓴 기록과 삼 국유사의 건국신화에 기록되어 있다. 마늘은 우리민족의 역사와 함께 한 식물이며 통일신 라시대에는 약용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남해의 마늘은 강한 해풍을 맞고 자랐기 때문에 맛이 강하며, 암예방, 당뇨병, 성인병예방, 향균작용, 해독 살균작용, 혈액순환 등 약용으로 도 효능이 아주 뛰어나다. 마늘 농사를 짓는 농가 7000가구에서 연간 400억 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으며, 벼농사보 다 농가 소득이 높은 게 마늘이다. 남해는 마늘이 잘 자랄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으며, 농 토와 기후가 잘 맞으며 수확량과 품질도 우수하다. 흔히 해풍 을 먹고 자란 마늘이란 말 을 하는데, 농업 전문가들에 의하면, 아주 극미세한 염분이 바람 속에 섞여 마늘이 자라는데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마늘이 생산된다고 한다. 5 시금치 남해군의 대표적 농산물인 시금치는 일반 시금치와는 달리 청정해역을 바라보는 인근 노 지에서 재배되며 해풍을 먹고 자란다. 각종 미네랄성분을 다량 함유하고 있고, 높은 당도와

215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01 신선도가 오랫동안 유지되는 웰빙식품으로 각광받고 있다. 특히 잎이 두꺼워 삶아도 허물거 리지 않고 씹는 맛이 좋다. 잎수가 많고 선명한 녹색을 띠며 비타민, 칼슘, 철분이 많아 시력 감퇴, 빈혈, 폐암과 비만 예방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처럼 남해 시금치가 인기를 모으자 남해군은 지난해 지역농업과 함께 보물섬 남해시금치 명품 클러스 트사업을 추진해 오고 있다. 6 고사리 창선면은 전국 최대의 고사리농장을 가진 보물섬으로, 403가구가 220ha에 이르는 고사리 를 집단으로 재배하고 있다. 올해 생산한 건고사리는 무려 110톤이 넘는다고 한다. 주민들 은 고사리로 35억여원의 농가소득을 올렸으며, 농가당 평균 870만원의 소득을 올린 셈이다. 이들 중엔 3000만원 이상의 소득을 올린 농가도 60여 가구가 된다고 한다. 창선면 전체에서 지난해 벼농사, 마늘농사 등 두 작물을 합친 소득보다 고사리로 올린 것 이 더 높은 것을 보면 고사리는 보물섬 창선면의 주 소득원이다. 고사리는 땅속줄기에서 시차를 두고 20개 이상의 순이 터져 나온다. 그래서 고사리 채취 는 4~6월의 3개월 동안 17~20차례 계속 수확할 수 있다. 산기슭 밭 고사리는 위로 올라가 며 딴다. 수확기에 산기슭을 아낙네들이 줄지어 올라가며 고사리를 따는 모습은 한 폭의 그 림을 연상케 한다. 남해 고사리는 섬유질이 적고 부드러워 수입산과 구별되며, 품질이 뛰어나다. 그리고 전국 의 국내산 고사리의 35%를 보물섬 남해가 공급하고 있다. 7 참다래 참다래는 과육의 빛깔이 선명한 에머럴드 빛을 띠고 있으며 비타민C가 아주 풍부하다. 육 류 섭취 시 참다래를 곁들여 먹으면 좋다. 그리고 염류 섭취가 많은 사람들에게 좋으며, 근 육, 폐신경 조직을 지키는데 도움이 되는 항산화물질을 다량 함유하고 있다고 한다. 1978년도 박정희 대통령은 난대성 식물을 자원화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던 중 당시 해 외에서 인기가 높았던 참다래를 국내에 들여오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남해로 들여온 참다래 나무는 당시 남해원예시험장의 김규원 연구사(현재 영남대학교 원예 학과 교수)와 정일성 시험보조원(현재 다초조경 대표)이 맡아 연구 관리했고 3년쯤이 지난 1981년 즈음 첫 수확을 했다. 당시 국내에는 수원(원예시험장 본소), 남해(난대성 식물시험장), 나주(과수시험장), 김해

216 1402 남해군지 (채소시험장) 등 4곳의 원예시험장이 있었고, 그 중에서 뉴질랜드와 기후가 비슷한 남해로 들여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남해에 참다래 나무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참다래 나무 를 직접 보고, 재배 방법을 배우기 위해 전국에서 찾아오는 농민들로 관광버스가 하루에도 몇 대씩 줄을 이었다고 한다. 이 후 참다래 나무의 시장화를 위해 한 기업에 묘목을 전달했 으며, 그 기업에서 대규모로 번식시켜 전국에 보급시키게 된 것이라고 한다. 8 알로에 일반적으로 알로에는 껍질을 벗겨 미끌미끌한 속살을 먹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껍질 채 먹 는 알로에가 있는데 사포니아종이다. 알로에 중 유일하게 알레르기를 일으키지 않고 살균작 용, 당뇨병, 항암작용, 관절염 등에 특효가 있으며 근래에는 아토피 피부에도 좋다고 알려져 있다. 9 파프리카, 오이, 땅두릅, 나무두릅, 호박, 재래메주, 된장, 간장, 우리밀 국수, 호박 즙, 청정쌀 등이 있다. (2) 축산물 1 화전한우 남해화전한우는 맑은 물과 깨끗한 공기의 자연 환경 속에서 1989년 한우 사육 농가 7명이 결성하여 현재는 35농가가 모여 한우를 100%로 조기 거세하고 고급육 생산에 힘써서 탄생 한 브랜드이다. 1990년 전회원이 일본 구마모토현 아소근 선진지 견학, 1994년 영농조합법 인 등기, 1995년 남해화전한우 상표등록( NO ) 및 전국 한우 능력평가 대회에서 농 산물물질관리법 규정에 의한 축한물 품질인증서(승인번호: )를 받았고, 2002년과 2003년 2004년 3년 연속으로 인증 받았다는 것은 남해 한우 농가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 다. 남해화전한우는 고급육 생산만을 고집하고, 소비자 입맛에 맞고 소비자가 찾는 고기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명품 한우브랜드의 선두주자로 자랑스런 으뜸 특산품이다. 2 토종닭 자연초와 한방약재를 첨가한 사료로 사육하는 양마골 토종닭은 유자나무 과수원과 야산 의 자연상태에서 사육하여 육질이 쫄깃하며 저지방으로 담백한 맛을 자랑하고 있다.

217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특란 및 자연방사 유정란 특란은 효소사료 급여로 비타민을 보강하여 생산하였으며, 농장에서 직송하는 신선한 달 걀이다. 자연방사유정란은 암, 수탉을 자연 상태로 방사, 수정하여 생산한 무공해 달걀이다. (3) 수산물 1 피조개 피조개 ( 英 名 :Mussel, 日 名 :아까가이)는 타지에 따라 꼬막, 털꼬막, 새꼬막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 외형은 완전히 성장하면 각장이 120mm(새꼬막 75mm)로 제일 크다. 남해안 일대에서 생산되는 피조개 중 남해 강진만의 피조개가 인기가 높아 국내외 수요가 많아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어민들은 대량생산을 위해 양식을 많이 하고 있으며, 생산량 도 급증하고 있다. 각장이 7cm이상(2.5 3년생)이 되면 채취하게 되며, 겨울철에 채취되는 피조개가 육질량이 제일 많다. 피조개는 혈액을 맑게 해주며, 장수 및 건강식품으로 널리 알 려진 최고급 패류로서 국내 수요 충족보다 대일 수출에 더욱 활기를 띠고 있다. 2 새조개 속칭 갈망조개, 해방조개라고 한 새조개는 남해안 내해 내만지역의 수중 뻘에서 8월 4 월에 생산되는 조개이다. 매년 채취량이 줄어들고 있으며 그 맛은 닭 육질과 같이 쫄깃하다. 어패류 중 고급에 속해 국내 수요 및 대일 수출에 각광을 받고 있다. 3 바지락 남해안 각 연안에 자연 서식되고 있는 조개로서 생존과 번식력이 강하다. 간척지나 얕은 바다 어디든 생산이 가능하며 생산량도 많다. 각 마을의 어촌계에서 연중 채취하여 마을 소 득 증대에 기여하고 있다. 가격이 저렴하고 요리방법에 따라 맛이 다양하다. 4 굴 수자원 보호지역으로 지정된 남해에서 생산된 굴은 비타민A와 칼슘이 다량 함유된 식품 이다.

218 1404 남해군지 5 전복 청정해역에서 생산되는 전목은 싱싱한 해초를 먹고 자라 바다의 영양분을 그대로 있다. 담고 6 죽방멸치 남해군 죽방멸치가 국내 대표 브랜드로 최근 한국발명진흥회가 주최한 2008년 지역브 랜드 컨설팅 지원 사업 에 선정돼 브랜드 경쟁에서 우월성을 확보하였다. 특히 남해죽방멸 치는 이번 브랜드 컨설팅 지원 사업에 선정됨으로서 장기적인 브랜드 발전 방향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고 대한민국 최고 명품 브랜드로 거듭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남해죽방멸치는 유속이 빠른 남해군 지족해협 앞바다에 V자형 참나무로 말뚝을 박아 밀물 과 썰물을 이용해 고기를 잡는 전통 어업인 죽방렴에서 잡힌다. 따라서 죽방멸치는 전부 살 아 있는 상태로 잡혀 품질이 좋을 뿐만 아니라 건조 및 포장과정에서 정성을 다함으로 소비 자로부터 최고 상품으로 인정받아 값비싸게 판매되고 있다. 청정해역에서 갓 잡아 삶은 후 햇볕에서 자연 건조시킨 제품으로 칼슘이 풍부하다. 죽방 멸치는 수요는 많으나 그 양이 한정되어 있어 공급량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7 개불, 키조개, 개조개, 홍합, 돌멍게, 멍게, 갈치, 전어, 물메기, 낭태, 쭈꾸미, 문어, 낙지 등 8 젓갈 신선한 멍게, 갈치속, 명란, 생멸치를 원료로 만든 육젓은 칼슘과 단백질이 풍부하다. 멸 치 육젓, 액젓은 지하 3m 저장고에서 2 3년을 자연 숙성시킨 천연조미료이며, 비열처리 식품이다. (4) 공산품 1 남저(모시) 모시풀은 쐐기풀과에 속한 다년생 귀화식물로 줄기는 원주형이며 1 2m가량이고 잎은 난 형으로 밭에서 재배된다. 모시풀은 1년에 2번 수확이 가능하며 모시 껍질로 짠 피륙을 저포 라 부른다. 특히 남해군에서 생산된 저포를 남저라 부르며 남저는 양과 질이 전국에 이름이

219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05 나 있으며 농가부업으로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2 삼베 남해 삼베는 광택이 뛰어나고 질기며, 풀이 잘 먹는 시원한 여름철의 고급 옷감이다. 3 만복당향 자연향료를 사용한 만복당 향은 정신을 맑게 하며, 불전용, 기도용, 거실용, 승용차 방향 용으로 사용한다. 4 금산당향 한방향 자연 향료만을 사용한 한방 향으로써 정신을 맑게 하여, 불전용, 기도용, 거실용, 승용차 방향용으로 사용한다. (5) 건강식품 1 백년초 백년초(손바닥 선인장)는 한방재료와 음료, 식품의 재료로 널리 쓰이고 있다. 2 남해죽염 다이옥신 걱정없는 남해건강 마을 죽염은 1200 이상의 고열에서 9번 구워 탄생한 죽염 이다. 3 마늘환 몸에 좋은 남해 마늘과 약간의 한약재(구기자, 토사자, 사상자, 복분자,오미자, 감초)를 넣 어 복용하기 쉽게 환으로 만든 상품이다. 4 흑마늘 생마늘을 특정한 온도, 습도에서 자연 숙성시킨 것이 흑마늘이다. 이 과정에서 마늘 본래 의 성분은 유지되면서 마늘 특유의 냄새와 맛을 제거한다. 흑마늘은 냄새와 맛에 예민한 사 람도 별 거부감 없이 마늘을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만든 건강식품이다. 흑마늘은 생마늘에

220 1406 남해군지 있는 특정 유효 성분을 확대하고, 생마늘에 존재하지 않는 유효성분이 재생성된다는 점이 생마늘과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유백색의 생마늘과 달리 검은 빛을 띠고, 입에 넣었을 때 젤리처럼 녹으며 맛은 새콤달콤한 맛이 난다. (6) 향토음식 남해는 청정해역에 둘러싸인 도서지방으로 신선도 높은 해산물과 농산물이 풍부하다. 특 히, 해안에 있는 횟집의 생선회와 더불어 상추, 들깻잎, 그리고 남해산 풋마늘과 함께 먹는 맛은 특미이다. 텁텁한 토속주에 메기찜 요리, 정식상에 오르는 전어 밤젓은 관광의 한 몫을 톡톡히 차지 하고 있다. 또한 바다에서 채취하는 자연산 돌굴과 미역은 특산물로 관광객의 입맛을 돋군 다. 물맛이 좋아 이 고장 촌로들의 즐겨 마시는 토속주는 입에 감칠맛을 안겨준다. 우리 고 장의 관광자원으로서의 각광을 받는 향토음식을 몇 가지 소개한다. 1 메기찜 겨울철이면 이 고장 남쪽 해안에서 다량의 메기가 잡힌다. 메기의 아가미는 젓갈로, 알은 된장국에 쪄 먹으면 일품이다. 마른 메기를 된장(가정에서 담근 것)을 알맞게 발라 찐 메기 고기를 메기찜이라 한다. 겨울철 가정이나 식당에는 남해지방 특미로 구수한 맛도 있겠지만 토속주와 곁들이면 그 맛이 일품이다. 2 전어밤젓 전어는 3 4월경 남해 연안에서 많은 양이 어획된다. 전어밤이란 전어내장 중 타원형의 완두콩알 만한 크기로 이것으로 담은 것을 전어밤젓이라 말한다. 남해읍 선소리가 주산지이 고 생산이 공급을 따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남해를 찾는 외부 관광객은 이 전어밤젓 때 문에 남해를 다시 찾는다고 할 만큼 구미를 돋우는 음식이다. 식당에서 정식 주문 시 반드 시 오르는 남해 특미 향토음식이다. 3 갈치회, 멸치회, 멸치쌈 11) 주요 관광시설

221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07 (1) 나비 생태공원 위치 : 경남 남해군 삼동면 봉화리 번지 일대 나비생태공원은 1999년부터 2006년까지 봉화리에 조성되었다. 나비생태관에는 제1 2 전시실, 체험학습관이 있고 나비온실, 애벌레관 등과 판매소, 매표소, 들꽃동산, 주차장 등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다. 1997년 남해군이 환경시범지방자치단체로 지정되면서 자연생태계 보전 방안의 일환으로 곤충과 식물 등 자연 생태계를 테마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생태탐방과 자연학습의 기회제공은 물론 자연의 소중함과 환경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기 위해 조성되었다. 나비를 주제로 하는 제1전시관 54평, 곤충을 주제로 하는 제2전시관 54평, 체험학습장 28평, 전시관 28평을 건립하여 각종 곤충의 성장과 표본을 전시하여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 다. 그리고 나비온실 238평을 건립하여 나비 온실에서 사시사철 각종 꽃이 피고 나비가 날 아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곳에는 나비 외에도 다양한 볼거리를 준비하여 도심의 어린이와 어른이 보기 어려운 장 수풍뎅이, 가슴벌레 등도 전시되어 있다. 생태체험학습의 일환으로 곤충모형 만들기, 번데 기 붙이기, 애벌레 먹이주기, 나비 및 곤충 표본 만들기, 나비채집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 발하고 있다. (2) 원예예술촌 위치 : 경남 남해군 삼동면 봉화리 원예예술촌은 2000년부터 시작한 남해안 관광벨트사업으로 독일마을과 함께 문화예술촌 으로 추진하던 중 예원 영농조합법인이 국제적 품위를 갖춘 꽃 문화 관광지로 조성하겠다는 투자의사를 밝혀 지난 2006년 12월에 투자자 양해 각서를 체결하였다. 사업자 선정 절차를 거쳐 21필지 1만 4128m2를 분양받아 2007년 4월부터 조성에 들어가 2년여 동안 예원 회원 들이 손수 정비해 개촌하였다. 현재 원예마을 19동과 정원 7개소, 전망데크, 주차장 주변 담장 정비와 시설보완 등을 통 해 꽃과 나무가 어우러진 세계 각국의 정원으로 꾸며져 있다. 그리고 원예마을과 꽃 터널, 조각공원, 분수, 산책로 등의 특색 있는 원예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원예마을에는 예원 회원 들이 입주하고 있는데 탤런트 맹호림씨 부부와 박원숙씨 등이 거주하면서 언론의 집중 조명

222 1408 남해군지 을 받고 있다. 각박한 생활에 찌든 도시민들에게 작지만 정성들여 가꾼 정원이 있는 주택에서 생활의 활 력을 불어 넣고 관광객에게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할 수 있는 휴양과 체험공간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3) 해오름예술촌 위치 : 경남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 해오름 예술촌은 삼동면 동천에 거주하는 정금호씨가 1년여에 걸쳐 민자 8억여원을 들여 폐교였던 물건초등학교를 새 단장해 만든 문화공간이다. 예술촌은 미술, 사진, 공예품들을 전시한 호정갤러리, 전통 천연염색 실습과 천연염색 연구실, 민속자료실 및 국악실, 한지 공 예실, 미술 창작실, 도예 체험실 및 창작실, 차 문화관, 독일 와인 문화관, 특산물 및 공예품 판매장, 야외공연장을 갖추고 있다. 남해 문화예술을 보여주는 공간이며, 창선 삼천포대교 개통 후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 소이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실습 및 체험교육를 하기에 좋은 곳이며 운동장 앞 배경으로 자리잡은 바다풍경도 멋있다. 해오름예술촌은 각 학교, 직장 등과 연계해 각종 문화예술체험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으 며, 도자기, 천연염색, 전통예절, 차 문화와 관련된 여러 강좌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문 화와 예술을 접하며 쉬어갈 수 있는 쉼터의 역할도 하고 있다. (4) 바람흔적 미술관 위치 : 경남 남해군 삼동면 내산리 내산 입구에 위치한 바란흔적 미술관은 빨간색 포인트가 인상적인 미술관 건물과 수많은 바람개비들이 있는 매우 특색있는 문화공간이다. 이 바람개비들은 최영호 작가가 설치한 설 치미술의 작품들이다. 설치 미술의 테마는 모두 바람이다. 그 첫 번째 마당은 바람개비를 이 용해 스쳐지나가는 바람의 흔적을 찾는 바람흔적의 마당이고 두 번째 마당은 바람으로 목 탁, 범종, 운판, 목어의 소리를 조화시키는 바람소리의 마당으로 많은 작품들이 준비되어 있 다. 은은한 커피향이 풍겨나오는 1층 전시관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공간이다. 전시를 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전시할 수 있으며 무명 작가들의 작품을 무료로 전시할 수 있도록 대여

223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09 해 준다. 바람부는 날 일제히 돌아가는 바람개비들이 장관을 이루며, 미술관 주위로 잔디밭이 조성 되어 있어 가족들의 나들이 장소로 좋다. (5) 요트학교와 요트관광 위치 : 경남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 2008년 10월 전국 요트 동호인 선수권 대회 를 성황리에 개최했던 남해군이 요트인구 저변확대를 통한 요트와 크루즈 관광 1번지로의 비상을 위해 2009년부터 정식 요트학교를 설립, 본격적인 운영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남해 세일링 스쿨(Namhae Sailing School) 이 삼동면 물건마을에 들어서게 되는데 요트교육 전문기관에 민간위탁 방식으로 운영하게 된다. 요트 장비로는 당기급 11대, 크루즈급 1대, 코치 보트 1대와 안전 장비 33조, 교육 부자 재 등을 교육 장비를 갖추게 되고 지도자는 영국 요트협회 지도자 자격과 문화체육관광부 2 급 지도자 자격증을 갖춘 전문 지도자를 배치하게 된다. 요트학교와 요트관광은 남해를 해양레포츠의 메카로 자리 매김하게 될 것이다. (6) 국립남해편백자연휴양림 위치 : 경남 남해군 삼동면 내산리 1998년에 개장한 국립남해편백자연휴양림의 1일 수용인원은 최대 1,000명, 최적 400명 으로 한려해상국립공원 북쪽 해발 681m의 금산 동쪽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산림욕과 함께 남해바다의 절경을 즐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휴양림 입구를 지나 편백나무 숲 속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1시간 정도 걸어 올라가면 전망대에 이르는데 한려해상국립공원의 크고 작은 섬들과 금산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전망을 연출한다. 휴양림내에는 숲속의 집, 야영장, 산림 욕장, 야외교실, 물놀이장 등 위락 편의시설들이 갖추어져 있다. 숙박 시설은 8평형 숲속의 집 20동을 비롯하여 총 24동의 시설이 마련되어 있고 떼섬, 난초섬, 콩섬, 미조도 등 숲속의 집 각 동의 명칭을 다도해의 여러 섬들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 재미있다. (7) 보물섬 마늘나라

224 1410 남해군지 위치 : 경남 남해군 이동면 다정리 면적 : m² 부지, m²평 2층 건물 보물섬 마늘 나라 는 남해군 이동면 다정리에 세워진 전국 최초 마늘센터의 이름이다. 예로부터 유명했던 보물섬 남해마늘의 명성을 되찾아 다른 지역과 차별화를 하기 위해 38억 원 가량을 투입하여 남해마늘을 알리기 위한 연구실, 센터, 자료실, 광장 등을 마련하여 마 늘의 모든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마늘 나라에서는 마늘에 관한 모든 것을 보여주고, 학술적인 연구자료를 집대성하고 실증 실험과 체계적인 마늘 연구를 통해 보물섬 남해 마늘의 우수성을 내외에 알려 나갈 것을 목 적으로 하고 있다. 마늘에 대한 세계적인 연구 센터로서의 도약은 물론, 학술 세미나와 농경 문화의 체험도 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있다. 세계 최대의 마늘 조형물은 보물섬 남해 마늘의 우수성을 알리고 농업인들에게 새로운 희 망을 주고 미래 마늘 산업의 성장과 남해 마늘의 명품화를 알리며 관광객을 반기고 있다. (8) 남해국제탈공연예술촌 위치 : 경남 남해군 이동면 초음리 예술창작 및 연구를 돕기 위해 폐교된 다초 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하여 2006년 12월에 착 공, 2008년 8월에 남해국제탈공연예술촌을 개관하였다. 예술촌의 촌장은 전동국대학교예술 대학장 김흥우교수이며, 촌장이 평생 모아 온 공연 예술 관련자료들을 남해군에 기증함으 로 남해국제탈공연예술촌이 만들어졌다. 국내외에 발간된 전문서적 2만여점, 세계탈인형 1300여점, 영상자료 3,000여점, 팜플릿 4,000여점, 포스터 3,000여점, 각종 미술품 500여점 등이 전시되어 있다. 2층 상설탈전시 관에는 매년 새로운 탈을 바꾸어 전시하며, 기획 전시실은 상황에 맞추어 전시하고 있다. 도 서관은 향상 개방되어 있으며, 실험극장은 군민과 관광객을 위해 금,토,일은 공연 내지 영상 물을 상영하고 있다. (9) 남해스포츠파크 위치 : 남해군 서면 서상리 1182

225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11 광양제철소 건립시 준설한 실트질 준설토로 매립된 서상매립지는 갈대가 무성하고 황폐화 되어 있던 곳이었다. 지금은 군민과 관광객의 여가와 휴식을 즐기는 운동 휴양지와 국내외 프로팀의 겨울철 전지훈련장으로 활용할 복합스포츠파크로 조성되어 있다. 겨울철 온화한 기후와 수려한 자연경관을 활용한 남해SportsPark를 만들어 스포츠마케팅 활성화와 함께 4 계절 스포츠 관광지로 가꾸어 군민 소득 증대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주요시설로는 축구장, 야구장, 테니스장, 풋살 경기장, 중앙공원, 야외공연장, 대한야구캠 프, 남해스포츠파크호텔 등이 있다. (10) 남해향토역사관 위치 : 남해군 서면 서상리 번지 남해향토역사관은 2000년 10월 25일 건립되었으며, 이어 2001년 3월 19일 제2종 박물 관으로 문화체육관광부에 등록되었다. 스포츠 파크 완성과 함께 문화 공간으로 남해의 자연 과 더불어 남해인의 삶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우리 선조들의 삶과 역사가 살아있는 공간으로 아이들과 함께 관람하며 지역 향토사를 알리는 공간이다. 스포츠파크 안의 조각공 원도 함께 관람 할 수 있도록 연결되어 있어 문화와 역사가 공존하는 곳이다. (11) 힐튼 남해골프 & 남해스파리조트 위치 : 남해군 남면 덕월리 힐튼 남해골프 & 남해스파리조트는 남해안 다도해 아름다운 섬에 있는 세계적인 호텔이 다. 리조트 체인 그룹 힐튼에서 직접 운영하는 한국 최초의 힐튼 월드 와이드 리조트이다. 현대적이면서 동시에 자연 그대로인 듯한 디자인이 절묘한 조합을 이루고 있으며 18홀의 PGA 챔피언쉽 골프 코스와 최고급 스파 시설을 갖추고 있어 남해를 찾는 골프매니아들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천혜의 자연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온화한 해양성 기후로 일년 내내 골프와 레저를 즐 길 수 있는 한국의 몰디브인 남해는 창선 삼천포대교 개통 이후 다른 도시와의 접근성이 더 좋아졌다. (12) 남해이순신영상관

226 1412 남해군지 위치 :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 경상남도가 이순신 프로젝트 의 일환으로 건립한 이순신 영상관 을 2008년 12월 12일 남해군 고현면 일대에 개관하였다. 공사비 148억원이 투입된 이순신영상관은 최첨단 영상관과 전시관, 관광안내소, 농산물 판매소, 공원 등 부대시설을 갖춰 이순신 장군의 숭고 한 호국정신을 재조명하는 역사체험 학습장으로 운영하고 있다. 거북선 모양을 본 떠 건립된 영상관은 국내 최초의 돔형 입체영상관으로 벽면과 지붕 전체 가 스크린으로 되어있어 훨씬 실감나는 입체영상을 구현한다. 특히 영상관에서 상영되는 영 화 마지막 바다, 노량 은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의 치열했던 전투장면을 실감나는 3D 입체영상으로 재조명하였다. 5개의 테마로 구성된 전시관에는 이순신 장군과 임진왜란 관련 영상 및 당시 조선과 일본 의 전투 선박을 복원한 조형물, 갑옷과 무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13) 남해삼베마을 위치 : 남해군 고현면 갈화리 남해지역자활센터에서 2007년 3월에 삼누리 삼베사업단을 만들어 운영해 왔다. 그리고 폐교가 된 갈화초등학교 자리에 경상남도로부터 무상 사용허가를 받아 건물을 개 보수하여 2007년 7월 31일 보물섬 남해삼베마을로 탄생시킨 것이다. 보물섬 남해삼베마을은 사라져 가는 전통 삼베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 지역주민의 일자 리 창출과 함께 남해의 새로운 관광 명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여러 체험 활동이 가능한 체험 삼베마을이다. (14) 남해독일마을 위치 :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 독일의 이국문화와 전통문화예술촌을 연계한 특색있는 관광지 개발을 위하여 지난 2001 년부터 삼동면 물건리 일원 10ha의 부지에 남해군에서 30여억 원을 들여 기반을 조성하였 다. 그리고 40여 동을 지을 수 있는 택지를 독일교포들에게 분양하였다. 남해군은 1960년대 어려운 시기에 조국 근대화와 경제발전에 헌신한 독일거주 교포로써

227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13 정착생활 지원과 조국의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게 하고 그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주택 건축은 독일교포들이 직접 독일의 재료를 수입하여 전통 독일식으로 신축하였으며, 지금은 29동 정도가 완공되어 교포들이 생활하고 있으며 관광객 을 위한 민박도 운영하고 있다. (15) 남해아메리칸빌리지 위치 :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한국으로 돌아오는 재미교포들이 남해에 정착할 수 있도록 유도한 사업으로 이동면 용소 리지구와 남면 항촌지구에 미국풍 전통 건축양식이 가미된 고급 민박형 펜션 43채와 근린생 활시설을 남해군에서 조성해 주고 있다. 그리고 각종 스포츠대회 참가 선수와 영어캠프 입 주자 숙박 알선, 영어캠프 운영 때 원어민 교사의 보조역할 등을 하며 지역민과 함께 할 수 있도록 협조하고 있으며, 이국적인 풍경에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16) 남해유스호스텔 위치 : 남해군 삼동면 금송리 숙박 정원 626명을 수용할 수 있고 대강당, 세미나실, 수영장, 각종 편의시설을 갖춘 청소 년수련원이다. 인명구조선 2대, 166HSB, 고무보트 등이 있어 다양한 해양체험을 할 수 있 는 곳이다. 그리고 둔촌리 일대의 갯벌체험과 생태체험학습, 해양레프팅 등의 프로그램으로 많은 청소년들이 찾아오고 있다. (17) 남해 문화 거리 위치 : 남해병원 앞에서 남산교까지 1.5km 구간 2007년 4월말 완공한 남해문화거리는 남해병원 앞에서 남산교까지 1.5km 구간이다. 그리 고 주 정차 공간 조성과 휴게 문화 공간 조성, 가로수, 조경수 식재, 전선 지중화를 통해 남해읍 시가지를 특성화시켰다. 남해군은 1970년대 말 조성된 남해읍 간선 도로를 보물섬 남해의 이미지에 맞는 미관 재 창출이 시급하다는 판단에 따라 사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먼저, 도로변에 무질서

228 1414 남해군지 하게 서있던 전주를 철거하고 전기 통신 선로를 지하에 매설한 후 가시나무, 먼나무 조형 해송 2종과 낙엽수인 이팝나무 등 4종을 구간별로 특색있게 식재하였다. 또한 보물섬 에비 뉴(특색있는 거리) 조성을 위해 꽃과 나무가 어우러지는 휴게공간 45개소를 조성하고, 중심 시가지에는 독특한 문화공간 연출을 위해 유배거리 8개소, 문화거리 7개소, 명승거리 7개 소, 호국거리 8개소 등 30개소가 자리하는 등 거리의 문화를 접할 수 있게 하였다. 이와 같이 간선도로 정비사업이 완료되어 보물섬 관광 남해의 중심 거리가 말끔히 단장되 어 지역 주민과 관광객이 문화를 함께 누릴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1 유 배 거 리 [ 유배 과정 ] 주제 - 유배과정 재현 내용 - 국문에 임해 곤장, 주리 등 형별과정 큰칼을 차고 있는 옥살이 모습 부모 형제와의 이별 소달구지에 실려 유배가는 모습 적소관아 도착 안치된 초옥의 생 활 등 입체로 재현. 연출 - 유배역사와 유배문학의 전반적인 설명을 담은 도자기 타일 안내문을 바닥부착, 관람객의 이해를 돕는 한편 설치문 주위에 1인용 석재 벤치를 배치하여 구조물 자체가 탁자 의 기능을 겸비하게 하여 대화의 장 조성. 소재 - 갈바 위 소부 도장, 지정그래픽 출력물 취부. 장소 - 남해농협 북부지소 앞 [ 화전별곡과 자암 김구 ] 주제 - 자암 김구의 화전별곡 내용 - 남해에서 창작된 총6장의 대표적 유배문학인 화전별곡을 누구나 쉽게 대할 수 있 도록 만들어 남해가 유배문학의 산실임을 알림과 동시에 한석봉, 안평대군, 양사 언과 함 께 조선 전기 4대 서예가로 추앙받던 자암 김구 선생의 숨결을 직접 느껴 볼 수 있는 공간으 로 조성했다. 연출 - 6개의 대리석판 기둥을 병풍을 펼쳐놓은 형상으로 연출하고 양 옆에는 자암 김 구 의 약력 및 내용들을 넣어 화전별곡의 감동을 더해 주는데 기여하도록 연출했다. 소재 - 갈바위 소부도장, 화강석마감 장소 - 경남은행 앞

229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15 [ 서포 김만중과 구운몽도 ] 주제 - 사씨남정기, 구운몽 내용 - 조선시대 최고의 유배문학이라 할 수 있는 서포 김만중의 소설인 구운몽과 사씨 남정기를 통해 남해 유배문화의 위상을 제고. 연출 - 8폭의 구운몽도를 기둥 조형물에 배치하여 설치하고 충의문학에 대한 내용임을 암시하는 내용을 기재. 기단석의 측면에 구운몽과 사씨남정기의 해제를 기록. 소재 - 갈바위 소부도장, 지정그래픽 출력물 취부, SUS마감. 장소 - 서울약국 앞 2 명 승 거 리 [ 남해의 섬 세존도 ] 주제 - 남해의 섬, 세존도 내용 - 남해를 찾아온 관광객들이 좀처럼 가보기 어려운 세존도를 모형으로 만들어 남 해다도해 절경을 홍보. 연출 - 세존도의 모형을 최대한 리얼하게 조형화하여 설치. 그 속에 조명 연출 효과를 극대하여 세존도의 모습을 극대화. 소재 - 부식철판, 지정 스카시부착 장소 - 보디가드 앞 [ 남해의 아름다운 山 ] 금산 해발 681m의 금산은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유일한 산악공원으로 기암괴석을 중심으로 한 38경과 조선 태조 이성계의 건국설화가 깃들어 있다. 망운산 망운산은 남해군에서 가장 높은 해발 786m의 진산으로 봄에는 철쭉이, 가을에는 억새가 흐드러져 등산객이 많이 찾는 명산이다. 원산 호구산 남해군립공원인 원산 호구산은 일명 납산으로 불리며, 해발 627m로 능선을 따라 산행하

230 1416 남해군지 면서 내려다보이는 앵강만의 풍경이 일품이다. 대방산 창선면에서 가장 높은 해발 468m의 대방산은 봉수대를 비롯한 8경이 숨은 보석처럼 빛나 는 산으로 정상에서 보는 남해바다가 장관이다. 설흘산 해발 488m의 설흘산은 선구에서 칼바위와 육조문을 지나는 산행코스로 최적이며, 능선 아래, 가천 다랭이 마을과 망망대해가 눈길을 잡는다. [ 남해의 아름다운 다리 ] 주제 - 남해의 아름다운 교량 (창선 삼천포대교, 남해대교, 창선교) 내용 - 남해의 교량을 소개. 연출 - 다리의 형태를 모티브로한 구조물을 세우고, 설명 패널을 더하여 남해의 아름다 운 다리에 대하여 설명. 소재 - 갈바위 소부도장, 지정그래픽 취부. 장소 - 효자문 앞 남해대교 1973년 6월22일 남해도와 하동을 연결한 남해대교는 총연장 660m의 당시 동양 최대의 아름다운 현수교로 이충무공이 순국한 노량해전의 역사가 숨쉬는 곳에 세워졌다. 창선교 1992년 7월 30일에 붕괴된 아픈 역사를 딛고 1995년 12월 30일에 완공된 창선교는 삼동 면 지족과 창선면 지족을 잇는 440m의 다리이며 양쪽으로 죽방렴을 조망 할 수 있다. 창선 삼천포연륙교 2003년 4월 28일 개통된 창선 삼천포연륙교는 남해군 창선면과 사천시 대방동 사이에 있는 3개의 섬을 공법이 다른 5개의 다리로 연결한 3.4km의 연륙교이다. [ 보물섬의 역사 유적 ] 주제 - 역사유적 (관음포 이충무공전몰유허, 충렬사, 임진성, 노도) 내용 -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충혼이 스며있는 충렬사와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유허, 임 진성과 서포 김만중 선생의 유배지인 노도 소개. 연출 - 기본 구조물을 제작하여 설명 패널을 더하여 남해의 역사에 대하여 설명.

231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17 소재 - SUS위 그래픽 취부, 오석 마감. 장소 - KTF 앞 이충무공전몰유허 임진왜란 7년 전쟁을 승리로 종식시킨 후 왜적의 총탄을 맞아 순국 후 처음으로 영구를 모 신 곳. 충렬사 이충무공 전몰유허에서 영구를 옮겨 3개월간 가묘에서 안치된 후 충남아산 현충사로 운구 안장되었다. 임진성 임진왜란 때 민 관 군이 합심하여 왜적을 막기 위해 쌓은 성으로 성루망대 탑대 등이 있었다고 한다. 노도 남해는 고려 조선시대 35명의 유배객이 적거 생활을 한 곳으로 특히 노도는 서포 김만중 선생이 주옥같은 문학작품을 남긴 유배문학의 산실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2) 축제 (1) 화전문화제 축제기간 : 격년제 10월 중 불꽃놀이, 화전 가요제 등 전야제 행사로 군민의 날 및 화전문화제가 시작됨을 알린다. 전 야제를 시작으로 3일간 남해 고유의 민속놀이와 예술행사, 체육대회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 으로 군민들의 화합을 다지는 축제이다. 그리고 남해의 추수감사제이다. 유자향기 그윽한 풍성한 결실의 계절에 열리는 화전문화제는 특색있는 지역 축제로 전국에 널리 알려져 있으 며 50만 내외 남해인의 화합과 전진을 다짐하는 한마당 잔치라 할 수 있다. 군민들은 화전문 화제를 통해 내외군민 모두가 한 가족임을 확인하고 남해가 가진 독특한 지역문화를 계승 발 전시키고 있다. 화전문화제 기간 중에는 남해의 모든 문화가 한자리에 모이며, 그 동안 갈고 닦은 기량들 을 선보이며 선의의 경쟁으로 체육 진흥의 기틀을 마련하고 있다. 화전문화제는 또한 줄다 리기, 널뛰기 등 우리 전통. 민속놀이의 경연장이 된다. 2003년에는 전국적으로 많은 피해

232 1418 남해군지 를 입힌 태풍 매미 로 인하여 행사가 취소가 된 적도 있었다. (2) 보물섬 마늘축제 축제기간 : 매년 5월중 5회째 보물섬마늘축제를 개최하였다. 마늘축제는 남해마늘의 명성을 알리고 마늘산업의 세계화 추진 및 관광산업과 연계한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남해마늘의 우수성을 전국에 홍보하고 차별화된 프로그램으로 군민과 관광객이 함께 하는 체험형 축제로 거듭나고 있다. 농. 어업인 단체 참여확대를 통한 지역특산물 판매증진 에 목표를 두고 있으며, 장평소류지에 조성 된 꽃동산에 각종 부대 행사를 개최하여 관광객 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하고 있다. 낙서의 장, 건강생활실천 홍보관, 청사초롱 달기, 보물섬 산길달리기 대회, 전국보물찾기 등반대회, 탈공연장 공연(봄 영상제) 등 여러 가지 볼거리와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남해 최고의 축제이다. (3) 이충무공노량해전승첩제 축제기간 : 매년 11월중 임금마저 백성을 버리고 도망친 전쟁에 왜군은 파죽지세로 북으로 진격했다. 자칫 일본에 게 나라를 빼앗길 뻔 했던 운명이었지만, 이충무공의 탁월한 전술로 조선을 지킬 수 있었다. 이순신장군은 적의 총탄에 쓰러져 죽음을 앞두고도 지금 전쟁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적에 게 알리지 말라 라는 이 한마디만 남기고 노량 앞바다에 전사하셨다. 이것이 7년 전쟁의 마지막 전쟁인 노량해전이다. 이런 이충무공의 남다른 나라 사랑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지 난 2001년부터 이충무공의 탄신일인 4월 28일을 전후하여 승첩제를 3일 간 개최하였다. 하 지만 2004년 이충무공노량해전승첩제부터는 노량해전에서 이충무공이 전사한 11월 19일 전후로하여 3일간 개최함으로서 더욱 의미있는 축제로 거듭났다. (4) 남해섬공연예술제 축제기간 : 매년 여름방학 중 보물섬 남해는 상대적으로 대도시에 비해 문화를 누릴 수 있는 여건이 열악하다. 남해국제

233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19 탈공연예술촌은 정기적으로 각종 행사를 개최하고, 지역 주민이 참여하는 다양한 행사를 개 최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연말부터 남해섬공연예술제 가 개최되어 관광객과 군민들로 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으며, 방학을 이용한 축제는 청소년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 고 여가 선용을 통한 재충전의 기회를 주고 있다. 그리고 영상제 개최를 통해 지역주민들에 게 좋은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5) 해맞이 축제 축제기간 : 매년 1월 1일 상주 해돋이, 남면 가천 해돋이축제, 창선면 적량 해돋이축제, 창선면 당저 갈대밭 해넘 이축제, 사랑의 유람선 러브 크루저호 선상해넘이 해돋이 미조유람선선상해돋이 등이 있다. (6) 달맞이 축제 축제기간 : 매년 음력 1월 15일 (정월대보름) 고현면 지신밟기, 화계 배선대, 덕신 줄다리기, 선구줄끗기, 용왕제, 남해읍 정월대보름 행사, 은점 달맞이 행사, 창선 광천마을 대보름행사 (7) 미조 해산물축제 축제기간 : 매년 10월 중 남해군의 최남단이자 해상의 관문인 미조항은 섬 동남쪽 끝에 있는 어업 전진기지이다. 미 조의 해산물 축제는 만선의 고깃배가 항구를 수시로 드나들며 생동감 넘치는 바다의 다양한 해산물들을 관광객들에게 맛보이기 위한 축제이다. 미조항 주변에서 열리는 보물섬 미조해산물 축제는 무료 해산물 시식회를 통해 다양한 해 산물을 부담 없이 맛 볼 수 있고, 가두리, 갓후리, 개매기 체험, 해상 퍼레이드, 맨손 장어잡 기, 용왕제, 가족낚시 체험, 노래자랑으로 관광객의 흥을 돋우는 특색있는 축제이다. (8) 여름 페스티벌 축제기간 : 매년 여름 매년 여름이면 상주은모래비치와 송정솔바람해변에서 남해를 찾는 관광객들을 위해 일정 기간 동안 공연 및 다채로운 행사 프로그램으로 관광객의 즐거움을 더해 준다.

234 1420 남해군지 13) 유람선 관광 (1) 상주유람선 (러브크루저) 위 치 : 경남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1624번지 남해의 해안절경과 곳곳에 깃든 전설을 듣고 싶으면 상주은모래비치에서 출발하는 러브크 루저호를 타면 된다. 사랑의 유람선 러브크루저호는 리아스식 해안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각 별한 관광 코스의 하나이다. 돌섬, 서포 김만중 선생의 유배지 노도, 석가세존이 다녀갔다는 세존도, 용왕이 승천하면서 만들어졌다는 비룡계곡, 거북동굴, 용왕바위, 용굴 등 해안선을 따라 볼 수 있다. 매년 1월 1일이면 해맞이를 위한 출항을 한다. 420인승의 유람선에는 해 물뷔페와 연회장이 갖춰져 있으며, 1층에는 연회장, 2층에는 관람실, 3층에는 실내 관람실 과 선상카페를 갖추고 있다. (2) 남해대교 유람선 위치 :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앞바다 노량에는 100여명이 승선할 수 있는 유람선이 여러 척 있으며, 주요 코스와 요금은 손님 이 원하는 대로 조절이 가능하다. 하동군의 하동화력과 광양의 제철소 등도 같이 볼 수 있 으며 남해대교를 배경으로 하는 낙조는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는 유람선관광코스이다. 1 1코스 - 노량을 출발하여 난초섬, 섬진강 하구, 하동화력, 하동 노량을 지나 설천 노량 으로 순회하는데 시간이 길지도 않고, 남해바다는 잔잔해 노량 해안을 둘러보기에 좋다 2 2코스 - 노량에서 출발하여 섬진강 하구, 광양제철, 여천공단을 지나 바다에서 보는 마을풍경이 아름다운 서면 염해, 노구, 고현면 갈화지구를 지나 노량으로 돌아 나오는 코스 이다. (3) 미조유람선(3해금강호) 위치 : 남해군 미조면 미조항

235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21 미조항 유람선은 주변의 섬들 사이를 지나가는 코스로 용나무-사랑바위-스핑크스바위- 조도.호도-쌍용굴-무인등대-무인도 등 10여 곳을 둘러보는 코스로 약 1시간 남짓 걸린다. 14) 관광사업 (1) 개요 관광사업이란 관광객을 위하여 운송, 숙박, 음식, 운동, 오락, 휴식 또는 용역을 제공하거 나 기타 관광에 부수되는 시설을 갖추어 이를 이용하게 하는 업을 말하며 사업의 종류는 여 행업, 숙박업, 관광객 이용시설업, 국제회의 용역업, 관광 편의시설업으로 나누고 있다. 또한 관광산업의 업종을 세 가지로 분류하면 1 준비에 관한 업종 : 관광정보를 제공하는 신문, 방송, 출판, 통신과 같은 매스컴과 관계 되는 업종과 예약과 상담을 취급하는 여행업 2 이동에 관한 업종 : 교통 3 체류에 관한 업종 : 관광지의 음식과 수면이라는 행위에 관해서 음식업과 숙박업을 들 고 있는데 관광산업의 분류체계가 단순하고 일목요연하다. (2) 관광기반 시설 1 도로 남해군의 도로는 총연장 234.9km로서 국도 72.3km, 지방도 46.8km, 군도 115.8km이다. 특히 남해대교와 창선 삼천포 대교의 개통으로 육지와의 일일생활권 교통으로 남해 서 울, 남해 부산, 남해 대전, 남해 마산, 남해 창원, 남해 삼천포, 남해 진주, 남해 순천 등을 고속직행이 운행하게 되어 교통혁신을 가져 왔으며, 반면 육로교통의 발달로 해 상교통은 소멸하게 되었다. 시내 간선도로의 교통체계는 노폭이 협소하고 소통이 원활치 않아 혼잡한 편이나 우회도 로가 개통되어 시내교통 사정은 원활한 편이다. 남해 일부 해안도로는 잘 정돈 되어있어 쾌 적한 관광을 즐길 수 있다. 2 도로교통

236 1422 남해군지 경제성장과 교통수단의 발달에 따른 교통량의 증가는 우리고장도 예외 일 수 없다. 자가용 과 영업용의 차량의 증가로 남해군의 시외버스 운행은 2008년 말 현재 남흥여객 회사만 유 일하게 운행되고 있다. 3 해상교통 남해군은 4면이 바다로 둘러쌓인 도서지역으로 육지와의 유일한 교통수단은 해상교통인 선박이었다. 조선후기 경상남도 소재 조창 중 적량(창선면 적량리)과 해운항인 노량진(설천면 노량리), 호포진(서면 서호리) 등은 해상교통을 맡고 있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인근 지역인 하 동, 사천, 삼천포, 통영, 전남 광양, 여수시와의 해상 교통은 활발하였다. 남해군 해운 발달사의 구체적인 자료가 없어 알 수 없으나 노량항에 최초의 발동선인 공주 환(92톤)이 1925년 부산 여수 간을 월1회 운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해상교통은 급 격히 발달하여 1961년 말 노량항에 기항 경유한 여객선도 경복호를 비롯 9개 선박이 운항 되었다고 한다. 남해군 직영 운항선박은 망운산호를 비롯하여 3개 선박이 운항되었으며 선박들은 1970년 대를 고비로 퇴역하였다. 남해군을 육지와 잇는 여객선 겸 화물선인 금남호는 1966년 6월 10일 건조 운항되어 1973년 6월 21일까지 남해군 설천면과 하동군 금남면을 잇는 교통수단 을 다하다가 남해대교 개통과 함께 퇴역하였다. 1970년 4월부터 한려개발주식회사의 엔젤 호가 부산 여수간, 노량. 미조항을 1일 4회 기항 운항하였다. 1993년 말에는 금남호 등 2 개 선박이 서상 여수, 창선 삼천포 등지를 운항하고 있었으나 남해대교와 창선 삼천포 대교가 2007년 말 완공되어 현재 모두 퇴역한 상태이다. 현재 여수항에서 남해 서면 서상까지 하루 2회 운행하는 선박이 유일한 해상교통이다. (3) 관광사업체등록 현황 1 관광 사업체 여행업 관광숙박업(호텔) 관광객이용시설업 연별및 관광 수상관광 한국전통 가족 자동차 관광 읍면별 일반 국외 국내 호텔업 호텔업 호텔업 호텔업 야영장업 유람선업

237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남해읍 이동면 상주면 삼동면 미조면 남 면 서 면 고현면 설천면 창선면 공중위생 관계 업소 위생 기타 연별및 위생 세척제제 합계 숙박업 목욕장업 이용업 미용업 세탁업 관리용역 위생용품 읍면별 처리업 조업 업 제조업 남해읍 이동면 상주면 삼동면 미조면 남 면 서 면 고현면 설천면 창선면 3 식품 위생 관계 업소 식품제조 및 가공업 판매ㆍ운반ㆍ기타업 연별및 식품제조 식품 식품 즉석판매 식품 식품 읍면별 계 계 기타 가공업 첨가물 소분업 가공업 판매업 운반업

238 1424 남해군지 남해읍 이동면 상주면 삼동면 미조면 남 면 서 면 고현면 설천면 창선면 4 여행알선업체 현황 업 체 명 소 재 지 전 화 차량보유 주 요 업 무 화전고속관광 남해읍 북변리 대 뉴올림피아관광 남해읍 북변리 금산관광여행사 남해읍 북변리 자연이야기 남해읍 북변리 국내ㆍ해외관광여행업, 여권ㆍ비자 발급 대행업 -효도관광, 신혼여행, 수 학여행, 관광버스 전세대절 -국내ㆍ해외관광여행업, 여권ㆍ비자 발급 대행업 -효도관광, 신혼여행, 수 학여행, 관광버스 전세대절 -국내관광 여행업 -효도관광, 신혼여행, 수학여행 -생태여행알선업 ( 참고문헌 남해의 얼 (남해군, 1985) 남해문화 (남해문화원, 1988) 남해군지역 통합개발계획 (남해군.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3) 현대관광학개론 (서하문화사, 1986) 한국관광자원론 (영운출판사, 1984) 경상남도사 사천군지 유자재배기술 (남해군)

239 유자재배 (남해군농촌지도소) 통계연보 (남해군)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25

240 1426 남해군지 제3장 문학 1. 개요 감정의 표현방법으로는 언어와 문자가 있으며 남해에는 구전되어 오는 설화, 전설, 민요 등이 있다. 구비문학에 앞서 문자로 정착이 되어있는 것 만 본다면 남해의 문학은 금산의 바 위 위에 새겨진 남해도각자( 南 海 島 刻 字 )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남해도 각자를 속칭으로 서불과차 라 한다. 상주면 양아리 금산 중턱에 넓이 7m 4m 정도의 반석이 있는데, 반석 한구석 윗면에 손가락 굵기 정도의 선으로 문자를 음각해 놓은 것이 있다. 이것이 서불과차인데 각자면의 넓이는 길이 1m, 폭 50m정도이며 이 그림글자 의 모양에서 사람, 짐승, 수레 등 여러 가지를 연상할 수는 있으나 정설은 없다. 중국학자는 한자 초기의 갑골문자로 서불기배일출( 徐 市 起 拝 日 出 ), 즉 서불이 아침에 일어나서 솟아오르는 해를 보고 예배를 드렸다고 주장했으며, 정인보는 훈민정음 이전의 한 국 고대문자로 추측하여 사냥을 하러 이곳에 물을 건너와 기를 꽂다 라고 해독하고 있 다. 그리고 서불과차가 문자가 아닌 암각화라는 주장을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사기( 史 記 ) 진시황 본기에 표기된 서불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한 내용으로 보는 이도 있다. 현재까지는 그것이 그림인지 글자인지 구분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인간의 행적과 심정을 후세 에 알리고자 하는 중요한 기록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남해도 각자는 이곳을 지나간 사람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고 좀 특이하게 표현하자면 남해의 문학은 과차문학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가 있다. 과차문학이라는 견지에서 보면 조선조에 정치적 이유로 유배를 당한 유배객들이 남긴 작품이라 하겠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자암 김구의 화전별곡, 서포 김만중의 구운몽, 후송 류의양의 남해문 견록 등이 있다. 남해의 문학의 전성기는 1945년 광복 이후부터다. 일제강점기를 벗어나 자주독립 을 했고, 우리의 문자로 문화를 재창조해야 할 시대적 상황을 맞게 되었다. 이런 시대적 요 청에 따라 남해 출신 인사들이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1950년대 대표작가로 시나리오 작가

241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27 이청기, 시인 김선현, 1960년대 대표작가로 소설가 정을병, 문신수, 백시종, 김진희, 평론가 박종현 등이 있다. 그 이후 많은 작가들이 데뷔하여 지금은 많은 문인들이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문학을 연구하여 업적을 남긴 학자는 정병욱, 김봉군, 양왕용, 박성석 등이 있다. 2. 조선시대의 남해문학 조선시대 남해의 문학은 유배객들의 작품이 주를 이루고 있다. 남해는 유배객들의 아픔과 서러움이 문학작품으로 재탄생한 문학의 성지이며, 남해를 소재로 하고 있다. 유배객들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제1편 역사에 수록되어 있으므로 간단하게 기술하기로 한다. 1) 자암 김구( 金 絿 )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 때 조광조 일파로 몰려 개령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남해로 이 배되었다. 13년간 남해 노량에서 향사들과 인근 선비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며 화전별곡 을 지었다. 1531년(중종 26)년에 남해에서 다시 임피로 이배되었다가 1533년에 사면되어 고향인 예산으로 돌아가니 부모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임종을 보지 못한 한을 안고 부모의 산소에서 아침 저녁으로 통곡하며 흘린 눈물에 풀이 말라죽었다고 한다. 이듬해 그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화전별곡 은 남해를 소재로 한 6장의 경기체가로 가사체의 느낌을 준다. 설천면 노량리에 자암김선생적려유허추모비가 있으며 저서로는 그의 문장을 모은 자암집 이 있다. 2) 서포 김만중 ( 金 萬 重 ) 서포 김만중은 1689(숙종 15)년 기사사화 때 노도에 유배되어 적거생활 4년 만에 배소에 서 생애를 마감하였다. 남해 유배 중 한글소설인 구운몽 사씨남정기 를 지었으며, 평 론집 서포만필 조비정경부인행장 외에 한시인 사친시 남해적사고목죽림유감우 심작시 등을 썼다. 특히 사씨남정기는 숙종이 인현황후를 폐출하고 장희빈을 왕비로 맞아들인 왕의 마음을 바꾸려는 동기에서 쓴 목적소설로 유명하다. 구운몽은 효성이 지극했던 그가 어머니의 아픈

242 1428 남해군지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하룻밤 사이에 지어 보낸 작품이라고 한다. 일본 천리대학교에서 발 견된 서포연보 에는 선천 유배 시 패설을 지어 어머니에게 보냈다는 기록이 있어 그것이 구운몽 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정확한 내용은 아니다. 노도에 정상박이 짓고, 남해 청년회의소가 세운 김만중 유허비가 있다. 3) 소재 이이명 소재 이이명은 1689년 기사환국으로 영해로 유배되었다가, 장인인 서포 김만중이 세상을 떠난 1692년 남해로 이배되었다. 1708년 숙종의 신임을 한 몸에 받으면서 좌의정에 올라 노론정권의 핵심적 존재로 활약하였다. 1692년 첫 번째 유배 온 후 장인의 적사에 들러 시들어 가는 매화나무를 옮겨 심고 난 후 매부 를 지어 칭송하였다. 4) 약천 남구만 숙종 2년(1676년)에 허적의 서자 허견의 횡포가 심하여 한성좌윤으로 있던 남구만이 숙종 5년(1679년)에 탄핵상소를 하다 남해로 유배되었다. 그가 유배 중 남긴 시는 제영등망운 산 제영등금산 이 있다. 5) 후송 류의양 류의양은 영조 47년(1771)에 관직을 삭탈 당하고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 나 와 홍문관 부교리로 재등용되었으나 다시 아산으로 정배되었고, 그 이듬해 풀려나왔다가 또 다시 종성으로 유배되는 등 파란 많은 관직 생활을 했다. 남해로 유배되어 1년 남짓 지내면 서 직접 보고 느낀 바를 기록한 남해문견록 을 저술하였다. 이 글에는 당시의 유배 생활 의 실상을 알 수가 있다. 6) 태소 김용 조선후기의 문신이며 호는 태소이다. 영조 47년(1771년)에 남해로 유배와서 태소집 남

243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29 천잡록 을 저술하였으며 내용을 보면 유배생활기를 알 수 있다. 태소집은 규장각에 소장되 어있다. 7) 조현명 조현명의 충렬사헌시( 忠 烈 祠 獻 詩 ) 1730년 경상감사를 지내고 1750년 영의정을 지냈 다. 8) 정이오 정이오(1347년 ~ 1434년)는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예문과 대제학을 지냈으며 추 증된 그는 정지장군을 추모하며 읊은 시 관음포를 지나며 가 남아있다. 9) 김학순 정조 때 암행어사 김학순이 지은 제청해관 題 淸 海 館 은 남해군청에 현판으로 각자되 어 있으며, 제청해관각자( 題 淸 海 館 刻 字 )의 규모는 목판 음각 1매(크기 가로 70cm, 세로 39.8cm, 두께 3cm)이다. 그의 저서로는 화서집 이 있다. 10) 정희보 당곡 정희보선생은 성종 19년(1488년) 이동면 초곡 마을에서 출생하였으며, 1505년 남해 에서 함양으로 이주하여 학문을 탐구하였으며, 35세(1522년) 남해로 돌아와 초옥을 건립하 고 영.호남의 문인들을 가르쳤다. 저서로는 당곡집 이 있다. 11) 비문 비문으로는 송시열이 지은 노량 충렬사 묘비문인 유명조선국삼도수군통제사증시충무이 공묘비( 有 明 朝 鮮 國 三 道 水 軍 統 制 使 贈 謚 忠 武 李 公 廟 碑 ), 홍석주가 지은 이락사 비문 유명 수군제독조선국삼도수군통제사증의정부영의정시충무이공이순신유허비( 有 明 水 軍 都 督 朝 鮮 國

244 1430 남해군지 三 道 統 制 使 贈 議 政 府 領 議 政 謚 忠 武 公 李 舜 臣 遺 墟 碑 ), 김조순이 지은 봉천사묘정비( 鳳 川 祠 廟 庭 碑 ) 등이 있다. 3. 근현대의 남해문학 조선후기 무르익었던 시조, 소설 등의 문학의 맥은 끊기고 신식 교육과 더불어 대부분의 문예사조는 일본을 통해 신문학 운동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창가가 유행했고 신소설이 등장했다. 식민지 교육으로 우리의 언어와 문자는 점점 밀려나고, 일본어와 일본 정신을 주 입 받으며 전통의 단절과 민족의 정신마저 왜색으로 물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일제강 점기에 남해 땅에서 민족 문학을 일군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정한이다. 일제 36년간 그들의 식민지 백성으로 전락되어 갖은 압제와 수탈에 시달렸다. 그들은 황 민화정책의 일환으로 1938년부터는 초등학교 조선어 교육을 폐지시켰고, 교과서마저 없애 버렸다. 우리의 언어와 문자사용을 철저히 금지시키고, 일본어 학습과 일어상용만을 강요했 으며 이름도 일본식으로 부르게 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우리 사회는 각 분야에 걸쳐 우리 것을 되찾았는데 그 첫 과업으로 문자를 되찾았다. 마을마다, 학교마다 한글강습회를 열었고. 극히 초보적인 단계 에서 문화의 복원을 시작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자주 독립을 원하고, 문화적으로는 자아를 되찾아 새로운 출발을 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남북 분단과 극렬한 좌우대립, 혼란과 무질 서, 연이어 일어난 한국전쟁 등으로 우리 민족은 더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비극과 절망 속 에서 가치관에 혼돈이 일고, 부정과 비리로 윤리와 도의는 근저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정신보다는 물질을, 고유문화보다는 외래 문물을 숭ㄹ상하는 새로운 사대주의가 판을 치고, 극단적 이기주의와 향락주의가 세상을 풍미했다.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에서 우리의 혼을 찾아 민족의 정서를 다듬고 인간의 문제를 탐구하여 모두가 행복해 질 수 있는 긴 목소리를 남기는 일은 문학도가 담당을 해야 한다. 해방 후 등단한 남해 출신 문인들이 굳이 문학의 길을 택하게 된 것은 이 소명에 응한 것이라 할 것이다. 그들은 향토를 공통분모로 동질성이 형성되고 시대를 걱정하는 공동의식으로 학문 탐구와 문필 활동을 하였다. 1) 소설가

245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31 (1) 김정한(소설가) 김정한은 1908년 경남 동래군 북면 남산리에서 출생했는데, 호를 요산( 樂 山 )이다 년 남해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부임했고, 1939년에 남면 남명공립심상소학교로 전근되었 다가 1940년에 동아일보 동래지국장으로 부임했다. 일제 강점기 현재의 남해초등학교, 남 명추ㅗ등학교에 재임하면서 투철한 민족정신으로 말과 글을 잃어버리는 민족은 그 영속성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굳게 믿고 모든 학생에게 우리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교육하였다. 그의 본격적인 문학 활동은 남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남해에 8년간 교사로 재직 중 단편소설 사하촌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 에 데뷔했으며, 남해에서 항진기, 기로, 그러한 남편, 당대풍 등을 집필했다. 사하촌은 지주이며 특권계급인 승려와 사하촌의 농민과의 대립을 그린 작품이다. (2) 문신수(소설가, 아동문학가) 1928년 서면 작장리에서 출생했으며, 1947년 경상남도초등교원양성소를 수료하고 그해 부터 초등학교 교사로 임용되어 덕신, 남상, 대서, 남해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1961년 7월 자유문학 제3회 신인상에 단편소설 백타원( 白 楕 圓 ) 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였다. 이후 문학춘추( 文 學 春 秋 ), 현대문학( 現 代 文 學 )등 여러 문예지에 단편 소설을 발 표해오다가 동화 수필 등에 이르기까지 장르에 구애 없이 다양한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저서로는 창작집 부부합창(1977.범우사), 수상집 2인수상집(1987. 詩 文 學 社 ), 동화집 아름다운 음악소리(1988,아동문예사), 단방귀 이야기(1991.윤진문화사), 소년 소설 꿈꾸는 겨울나무(도서출판 윤성) 등이 있다. 문화상으로 경상남도 문화상, 평화문학상, 경남아동문학상등을 수상했다. 2002년 5월 11일 사( 死 )후 경남 문학장을 치루었고, 2003년 5월 문신수 문학비를 제막 하였다. (3) 정을병(소설가) 1934년 이동면 금평리에서 출생하여 2009년 별세하였다. 한국신학대학을 졸업, 미국 하 와이대학 동서문화센터에서 수학하였다. 1988년에는 국제펜클럽 서울대회 준비위원장으로 세계작가대회를 주관했다. 그 공로로 1990년에는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았다. 1961년 현대문학에 단편소설 부도( 不 渡 ) 63년 2월에 반( 反 )모랄 등이 추천을 받

246 1432 남해군지 아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 단편 내일은 종점 그대들의 조상은 맹장염 작품A 작품B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중편 개새끼들 (현대문학, 1965) 카토의 자유 (현대문학, 1966) 유의촌 (홍익출판사, 1968) 은 주간 한국에 연재과정에서 도규계( 刀 圭 界 )의 물의를 일으킨바 있었다. 일본 미국 방글라데시를 비롯 지중해 연안 국가만 해도 11번이나 여행하면서 전업 작 가로서 창작에만 힘을 써 받아들인다는 문제 도피여행 피임사회 병든 지구 성 한탄강 떠나 간자의 행복 등 단행본만 60권이 넘는 저서를 간행, 한국 문단 초유의 경이적인 기록을 남겼다. 그는 문예창작 활동으로 문화훈장을 비롯하여 현대문학신인문학상, 한국일보 문학상, 한 국소설문학상, 문장용타자기 제작 보급 공로 한글학회 공로상, 대한민국문학상 등을 받았 다. (4) 김진희(소설가, 출판인) 1937년 본명은 영선( 榮 善 ). 남해읍 남산리에서 출생했으며, 일본 고쿠사이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1963년 문학춘추를 통해 문단에 데뷔하였다. 월간 동양문학, 농민문학, 한맥문학 등을 발행하였다. 저서로는 밤에 타는 태양 (1977.예림) 종이남자 (1978.미조출판사) 사랑의 이상기류 (1979.대광) 소돔성의 밤 (19ㅎ80.보이스사) 꽃배암 (1981.문예 루) 보이지 않는 육체 (1980.부산일보 연재, 천광출판사) 달리는 성군 (1982.충청일 보 연재) 신홍길동과 금불상 (1988.독립문출판사) 바람 2006 등의 작품이 있고 번역 집으로는 동남아에 흐르는 비애 (1980.천광출판사) 등이 있다. 한국문인협회, 한국소설 가협회 이사로,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한국문예협회 이사, 크리스천 문인협회 이사 등 을 역임했다. (5) 백시종(소설가) 본명은 수남, 남면 평산리에서 1944년 출생했으며, 서라벌예술대학 미술과 졸업, 삼남교 육신보사, 전남교육사 기자 등을 거쳐 대한 가족계획협회 지도부 교육 간사, 1980년부터 현 대그룹 종합 기획실에서 10년 동안 사보 편집 및 제작담당, 동 통합홍보실 부장 등 역임하였 다. 1966년 5월 현대문학지에 단편소설 햇빛 아래 로 추전을 받았고 1967년 1월 동아일 보 신춘문예에 소설 비둘기, 대한일보에 뚝 주변 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이후 단편 해구 일곱시부터 여덟시 외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단행본으로 망망대해

247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33 들 끊는 바다 등 장편대하소설 전 7권 걸어 다니는 산 돈 황제 바람난 황제 서울의 눈물 등 20여 권의 저서를 간행하였으며 망망대해 로 제1회 한국소설 문학 상을 수상했다. (6) 장형규(소설가) 1957년 창선면 오용리에서 출생했으며.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기업 문화진흥원 사무국장등을 지내다가 지금은 전업 작가로 창작에 전념, 여러 신문에 연재소설 을 쓰고 있다.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봄으로 가는 꽃가마 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그 후 단편소설 아이 어느 하루의 미로 안개의 나날들 아버지를 찾아서 덫 고 향 뿌리내리기, 장편소설 황도십이궁 외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특히 데뷔작 봄 으로 가는 꽃마차 는 할머니의 죽음과 후대의 생명의 연결성을 암시한 좋은 작품으로 평가 받아 KBS TV에 영상으로 소개된 바 있다. (7) 류미아(소설가) 1954년 남해읍에서 출생했으며, 조선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여수여자 고등학교 교사로 취임한 후 중등 교직에 종사하였다. 1988년 1월 동양문학 에 단편 내 부의 밧줄 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하였으며, 왕성한 창작활동으로 각 문예지에 다수의 작 품을 발표하였다. 1993년에는 전작 정평소설 부치지 못한 편지 를 출간하였다. (8) 정영선(소설가) 1963년에 출생하여 부산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1997년 문예중 앙 평행의 아름다움 으로 등단했다. 2001년 부산소설문학상과 2006년 부산작가상을 수상했으며 대표작으로는 소설 실로 만든 달 이 있다. 2) 시인 (1) 김선현(시인) 1932년 이동면 용소리에서 출생했으며, 1957년 동국대학교 문과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교원으로 18년간 재직 후 일본 동지사 대학, 경응 대학, 상지 대학 등에서 6년간 연구생으로

248 1434 남해군지 유학하고, 1981년부터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시 달리아 (현대문학 1956년 12월) 꽃 병 바다 등으로 서정주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 현대문학, 신태양, 자유 문단 등에 역작을 발표했으며, 서정주의 시를 지향하면서도 보다 관념적인 이미지와 시작태 도를 보여주고 있다는 평판을 받았다. 89년에 미국에서 시집 낙엽 지는 계절의 변두리 를, 92년에는 국내에서 시집 인간산 고개 넘어 를 출간했다. (2) 박평주(시조시인) 1932년 이동면 용소리에서 출생했으며, 1983년 52세로 별세했다. 경남대학교 국문과 졸 업하였으며 교사, 월간 자동차, 경우신보등의 편집국장를 지냈다. 60년대 진주 남가람 문학 회 동인, 시조작가 협회 회원, 한국불교 문학가 협회 운영위원 등 활발한 문단 활동을 했다. 1965년 12월 시조문학 지에 시조 휴전선 산접동 (1966.9) 관등기 등을 추천 받아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 자유종 선인장의 변 절원서설 등 많은 시조를 발표했으며, 동 시조 부문의 개척과 이론에 관한 논문과 수필 등을 다수 발표했다. 저서로 시조집 산접동, 접목소묘, 종소리, 수필집 사향의 정 등을 남겼 다. (3) 김정휴(시조시인, 소설가, 스님) 1944년 남해에서 출생했으며, 1960년에 표충사에서 출가한 후 불교 전문 강원의 강사, 불교신문, 법보신문 편집국장, 주필, 불교 방송 상무직 등을 역임했다. 1971년 조선일보 신 춘문예 시조부문 당선으로 문단에 데뷔하였다. 저서로는 무상( 無 常 )속에 영원( 永 遠 )을 산 사람들 달을 보면 달을 봐야지 손가락 끝을 왜 보고 있나 역대 종정 법어집 백척 간두에서 무슨 절망이 있으랴 편저, 소설 열반제 슬플 때마다 우리 곁에 오는 초인( 超 人 ) 등 10여 권이 있다. (4) 감충효(시조시인) 1950년 남해읍 죽산리에서 출생했으며, 진주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직에 있 으면서 시조 창작에 전념하고 있다. 지금은 경기도 동두천 탑동초등학교에 재직중이다. <교 육자료지> 에 시조를 시조를 천료하고, 1980년부터 <나래시조> 동인으로 참여하여 많은 시 조를 발표하였으며, 남해문학회 창립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공동 시집으로 늘어진 시 간조이기 아날로그의 반란 회귀선의 돛대 등 다수가 있다.

249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35 (5) 이수정(시인) 1934년 고현면 대곡리에서 출생했으며, 원광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남해군청 공무원으 로 근무하다 교육계에 투신하여 중학교에 재직하고 있다. 시조 난 몰라라 밤 막차 (1983 년 11월 현대시학) 문단에 데뷔하였고, 건배( 乾 杯 ) (1984년 10월) 탐라 환상 6월의 들녘에 서서 물구나무서기 등 작품을 발표하였으며, 경남문인협회 이사를 역임하고 있다. (6) 정왕선(시인, 수필가) 1935년 남면 선구리에서 출생하여 남해읍에서 성장하였다. 남해농업고등학교를 나와 (1955), 동아대학교 정치과(1961), 동 대학원 경제과를 졸업(1963)한 후 행정고등고시에 합 격(1963)하여 국세청 사무관으로 공직을 시작, 지방 국세청장, 한국증권대체결제주식회사 사장 등을 역임하고, 한국화재보험 이사장에 재임했다. 1993년 8월 <한맥문학>에서 박화 목 추천으로 시 산( 山 ) 을 발표하여 문단에도 데뷔했다. 1994년 1월호부터 한맥문학에 테마에세이 자유에 대한 변명 을 연재하였다. 2006년 10월 14일 그의 문학적인 업적을 기리는 시비가 중앙 문인들의 성금으로 남해읍 광포리 동 회관 옆에 세워졌다. (7) 이처기(시조시인) 1937년 남해읍 북변리 출생하여 부산 사범대학 미술과를 졸업하여 중등학교 교원, 교사 교감직을 거쳐 현재는 함안 교육청 장학사로 재직 한 바 있다. 1989년 현대시조 신인상에 고수( 鼓 手 ) 가 당선되었고, 이어 겨울억새 가 천료되어 문단에 데뷔하였다. 저서에는 널문리 가는 길(1993 白 象 ) 이 있다. 남해문학회 회원으로 지역에서 문학 활동과 신인 발굴에도 열성이다. 한국문인협회, 경남문인협회 회원, 마산문인협회 이사와 경남시조문학 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8) 김우태(시인) 1964년 서면 남정리에서 출생하여 부산대학교 인문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남해신 문 창간 및 편집에 참여하다가 지금은 경상남도 도보편집실 기자로 활동한 바 있다 년 전남대학교 주최 문예행사에서 오월문학상을 받은 뒤 198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비 갠 아침 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그 후 두렁길, 귀뚜라미 외 다수의 시

250 1436 남해군지 를 발표했다. (9) 박수옥(시인) 이동면에서 출생했으며, 창원대학교 무역학과 졸업 동 대학원 교육학과을 마쳤으며, 대학 원 재학 중인 1989년 4월 동양문학 에 시 시의 여인 노을의 과거분사 등이 당선 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그 후 시작의 미학 마부와 미인 사이 오솔길 달 짝 사랑 등 시를 발표하였다. (10) 박홍배(시인,소설가) 1954년 남면 홍현리에서 출생했으며, 남해종합고등학교를 나와 동아대학교 문리대 영어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수학했다. 1991년 농민문 학 신인상에 시 꿈의 농가 가 당선되었고, 이어 시와 의식 에 단편소설 회전목 마 를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했다. 이보다 앞서 1988년에는 시집 바람 같은 사람 바람 같 은 생각 을 간행한 바 있고, 1991년에는 시집 제모습찾기 를 간행하였다. 이외에도 단 편소설 침묵의 창( 槍 ), 카페 아사달, 반란 등의 작품이 있다. (11) 고두현(시인) 서면에서 출생하였으며, 경남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경제신문 문화부 차장으 로 근무하고 있다.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김만중 유배 시첩 남해 가는 길 이 당 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저서로는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와 시읽는 CEO 가 있다. (12) 한은숙(시인, 수필가) 1952년 창원시 북면 마금산 온천에서 출생하여 동아대학교 국어국문학과 1977년 졸업 하고 현재 남해여자중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다. 수필부분은 1994년 문예한국 여름 호에 신인상을 수상, 시 부분은 2005년 한국문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했다. 통영문인협회 사무국장, 부회장, 통영시 정책자문위원 역임했다. 대표작으로 수필집 초원의 집 과 감 나무 밑 장닭은 울고 있었다 가 있고 공저 10여권, 시집으로 가을 가로수 가 있다. (13) 황길엽(시인)

251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37 창선면 출신이며, 부산 여성문학인 이사, 동래문화예술인협회 편집주간, 제10회 부산여 성문학상 수상, 시집 도회에서 띄우는 편지 가고 없는 사람아 등 다수가 있고 현재 부산민족작가회의 이사이다. (14) 임종린(시인) 1937년 8월 2일 남해읍 남변리에서 출생하여 1950년 남해초등학교, 1953년 남해중학교 와 1956년 남해제일고등학교를 거쳐 1962년 해군사관학교 졸업(16기)하고 1990년 연세 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수료했다. 한국문인협회 회원 윤리 위원장(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세계시인협회 회원, 한국해양문학가협회 고문, 명지대학교 사회학교수, 서울평양학 회 회원, 대한민국 성우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시집으로 머물고 간 흔적 원시 의 현장 슬픈 여정 분노의 횃불 수필집 세월이 삼켜버린 슬픈 고독 (2004년) 빨간 명찰 속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소설로는 새옹지마(아직도 못다 부른 연가) 등 이 있다. 한맥문학에서 제4회 서포문학대상을 수상했다. (15) 성각(스님,시인) 창선에서 출생하여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에서 출가 득도하였다. 동국 대학교 선학과와 문화예술대학 불교미술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을 수료하 고 원광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95년 한맥문학 신인상에 당선 되었 으며, 2005년 시와 수필, 2006년 문학 21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경향신문 객원 논설위원, 경남 도민일보 칼럼 리스트, 동의대학교 초빙교수이다. 호가 소암( 素 巖 )이고 저서로는 선시집 어느덧 내 모습은 산이 되어 (2006년)과 선예술의 이해, 한용운의 채근담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 등 다수가 있다. (16) 윤병근(시인) 1921년 서면 상남리에서 출생하여 동아대학교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동주여자상업고등학 교 교장, 동주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1999년 문예한국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하였고 고 향의 마을회관 뜰에 벽파(호)의 애향시비가 서 있다. 대표시집으로 대표시집 세월의 이름 으로 가 있고 그 외 꿈은 식지 않으리 등 다수가 있다. (17) 정치훈(시인)

252 1438 남해군지 1954년 미조에서 출생하여 2004년 5월 문학세계 개간 시세계 신인문학상 수상으로 천료 했다. 대표시로는 귀향 이 있다. (18) 강달수(시인) 남해군 이동면 다천리에서 출생하였고 동아대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1997년 3월, 월간 심상 신인상 을 수상하여 시인으로 등단하였고 초읍여중, 덕명정보여고 교사, 부산펜클 럽 사무국장, 부산시인협회 이사 감사, 사하문인협회 부회장, 요산문학제 운영위원, 계간 부산시인 편집위원, 계간 문예시대 주간을 역임하였다. 현재 부산시인협회 부회장, 화전문 학회 감사, 국제펜클럽 부산지역위원회 운영위원, 민주평통 사하구협의회 문화예술분과위원 장, 을숙도 문학회장, (사)한국여성 인적자원개발원 강사, (사)부산예총 문학예술강사, 동림 기획 대표로 활동 중이며 시집에는 라스팔마스의 푸른 태양 등이 있다. (19) 서관호(시인) 창선면 냉천리 출생했으며, 진주교육대학, 경성대학교, 경남대학교대학원 졸업하고 시조 현대시조 수필 문예시대 통해 등단했다. 경상대 외래교수, 부산사직여자중학교운영 위원장과 부산시조시인협회 사무국장 역임했다. 현대시조 운영위원, 문예시대 편집위 원 공무원문예대전 4회 입상, 4.19기념 오행시 우수상을 수상했으며 대표 시조집 물봉선 피는 마을 과 수상록 세월은 강물처럼 이 있다. (20) 김오남(시인) 1906년 경기도 연천군 군남면 출생이며, 최초의 현대 여류시조시인. 진명여고와 일본여자 대학 영문과 졸업. 남으로 창을 내겠소 의 시인 김상용의 동생. 진명여고 교사로 재직 중 1930년 시조로 등단 후 최남선 이광수 정인보등과 함께 시조 부흥을 위해 노력했다. 경남 남해군 창선면 오룡리 출신인 정봉윤(1959년-1962년까지 진주고등학교 교장 역임) 씨와 함께 한 때 창선에서도 생활을 했다. 한문투의 시어를 통해 인생의 관념을 읊었다. 진명여고 를 거쳐 1930년 도쿄에 있는 일본여자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1931년부터 진명여고 수 도여고 등에서 20여 년 동안 교사로 근무했다. 문단생활은 1932년 신동아 에 시조 13수 를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카프의 계급주의 문학에 맞서는 국민문학파들의 시조부흥론에 참여하기도 했다. 애달픈 생각 (신가정, ) 마음 속 노래 (신가정, )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여 주목을 받았으나, 지나치게 관념세계에 집착한다는 평을 받았다.

253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39 유곡 ( 幽 谷 ) 원망 죽은 조카 생각 등에서는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한 은은한 정서를 읊었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인생의 무상함과 자연과의 교감을 숙명론에 따라 노래하 는 현실도피의 성향을 보여주었다. 1953년 첫 시조집 김오남시조집 을 펴냈고, 수필을 쓰고 그 글의 끝에 시조를 붙인 시집 심영 ( 心 影. 1956) 여정 (1960)을 펴냈다. (21) 임채성(시인) 남해 창선면에서 출생했으며, 200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부문에 당선되었다 년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부문에 까마귀가 나는 밀밭 이라는 작품으로 당당히 프 로 작가로 입문한 그는 아마추어시절 중앙일보에서 매월 시행하는 중앙시조백일장에서 2003~2007년까지 장원2회,차상3회 등 5년 연속(1년에 한번만 수상 가능) 입상, 동서식품 에서 시행하는 설록차문학상에 2회 입상하는 등 문학적 자질을 인정받아 왔다. (22) 하정심(시인) 1957년 남해에서 출생했으며, 200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찻물 끓이기 가 당선 되어 등단하였다. 대표시로는 봄은 어디에서 먼저 오는지 등이 있다. (23) 김미형(시인) 남해에서 출생했으며, 월간 신춘문예 데뷔하여 제7회 황진희문학상 본상 수상. 대표시집 내 안에 있는 너 가 있다. (24) 한정호(시인) 1966년 서면에서 출생했으며, 경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거쳐 동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0년 한국문단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으며 엮은 책으로 김상훈 문학연구 꽃보다 아름다운 시 포백 김대봉 전집 정진업 전집 정진업 전집2 등이 있다. 경남대 연구교수를 거쳐 2008년 현재 경남문학관 학예연구사로 역임 중이다. (25) 김경남(시인) 1949년 삼동면에서 출생했으며, 1971년 한국무디신학교를 졸업했다. 1995년 한맥문 학 에서 시부분과 1996년 소설부분으로 등단하였다. 한국문인협회 남해지부장을 역임하고 있다. 대표작으로 시집 남해쪽빛바다 (1999년) 소설 분노의 세월 (1996년) 이 있고

254 1440 남해군지 1997년 한맥문학상을 수상했다. (26) 김현근(시인) 1958년 삼동면에서 출생했으며, 남해군청에 근무하며 2004년 한국문인 에서 죽방 렴 단상 외 1편의 수필로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하였다. 2007년 제10회 공무원문예대전 시 부문에서 습관에 관한 독설 로 행정자치부 장관상을 수상하였으며, 저서로는 앵무새가 우는 바다 등이 있다. (27) 양 왕 용 (시인, 문학박사) 1943년 창선면에서 출생하였으며,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후 동 대 학원 박사 학위 과정을 수료하였다. 중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현재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국 어교육과 교수로 재임 중이다. 1966년 김춘수( 金 春 洙 )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한 후 한국시 ( 韓 國 詩 ), 에스프리, 절대시( 絶 對 詩 ) 등의 동인으로 지도적 역할을 다했다. 저서 에 제1시집 갈라지는 바다(1975), 달빛으로 일어서는 강물(1981), 여름밤의 꿈 (1986), 논문집 한국근대시연구( 韓 國 近 代 詩 硏 究 ), 등 다수가 있다., 정지용시 연 구, 갈라지는 바다, 여름밤의 꿈 1991년 시문학본상 수상, 1997년 한국 크리스 챤 문학상(시부분), 2000년 설상문학상 본상, 2006년 부산시 문화상(문학부문)을 수상했다. 3) 수필가 (1) 김종도(수필가) 1938년 서면에서 출생했으며, 1958년부터 삼남초등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정년퇴직하였 다. 한국방송대학교와 경상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하였고 교단문학 을 통하여 수필 가로 등단하였다. 저서로는 머물다간 흔적 잎새없는 나뭇가지 공저 남해사투리사 전 등이 있다. (2) 하영제(수필가) 이동면에서 출생했으며. 남해군수를 거쳐, 농림수산식품부 차관으로 재직하고있으며, 동 국대 대학원 행정학 박사. 한맥문학 추천으로 등단하였고, 저서로는 오늘도 탑을 쌓 고 가 있다.

255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41 (3) 김상곤 (수필가, 동화작가, 소설가) 1942년 삼동면 북섬에서 출생하였다. 근로예술제 수상, 한국수필 신인상 부산일보 신춘문 예 동화당선상, 화전문학회 회장이며, 가산문학회장, 부산사하구문협회장을 지냈다. 저서로 는 콩트와 수필집 자갈치 어촌설화집 동화집-웅어의 전설 가 있으며, 2008 년 5월 29일 제30회 부산 아동문학상을 수상했다. (4) 박인아(수필가) 1959년 남해읍에서 출생했으며 1973년 해양초등학교를 거처 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2002년 한국문인에서 박하향기 로 수필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하였고 격 월간 종합문예지인 한국문인 편집차장을 2006년 8월까지 역임했다. 2006년 한국문인상을 수상했고 공저로 한국명수필선 내 마음속의 지우개 추억찾기 새들도 고향을 그리워할까 사임당 문학 28집, 29집, 30집, 31집 등이 있다. (5) 이덕만(수필가) 미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경남대학교 경상대학 무역학과 졸업했다. 남해문화진흥회 운영 위원과 경성대학교 국제경영대학원 석사동문회 회장을 역임했다. 부산의 성광출판사 대표로 있으며 화전문학회 원로 회원이다. 대표작으로 허리케인 눈 속의 기적 (2005.화전문학) 망운지정 등 다수 작품이 있다. (6) 송명화(수필가) 부산교육대학과 동 대학원 수료. 계간 문학도사 신인상 수상, 월간 수필문학 에서 천료했다. 2005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수필이 당선됐다. 부산시 문인협회 회원. 계간 에 세이문예 주간. 부산 수필학회 학술이사. 부산 여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을 역임하고 있다. (7) 박민기(수필가) 1918년 남해읍 북변동에서 출생하여 1987년 진주시에서 별세하였다. 남해공립보통학교 18회 졸업, 해인대학 국문학과, 정경과 수학, 1938년 소학교 교원 검정시험에 연속 2회 합 격, 1940년부터 중현, 고현, 갈화초등학교 교사를 거쳐 대서초등학교 초대 교장, 진주 천전 및 봉래국교 교감, 산청 교육부 학무과장, 진양 문산, 진주 봉원(초대), 중안, 진양 반성초등

256 1442 남해군지 학교 등 주요 초등학교 교장직을 역임했다. 1960년대에 영문( 嶺 文 )에 수필로 등단한 후 한글문화협회 진주 지부장을 지냈고, 저서로 는 흥부와 곰의 꼬리 그날까지 파도처럼 소신의 창에 햇살이 이 있다. 국민훈 장 석류장이 있고 눌원 문학상을 받았다.. (8) 신택환(수필가, 소설가) 1936년 남해읍 광포리에서 출생했으며,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였다 년 월간 수필문학 에 수필 치자 목 한 그루 를 추천 받아 문단에 데뷔했고, 한국농민 문학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9년에는 동양문학 소설부문 신인상에 우물 속 천국 이 당선되어 소설가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 주었다. 저서에 수필집 신택환 수필 집 있습니까, 내 가슴에 작크가 있다면, 파도의 속삭임, 바다가 보이는 오솔 길, 장편 에세이집 도둑맞은 젊음,소설집 깊은 함정, 돌아앉은 山 등 다수가 있다. 한국수필가 협회 공로패와 제2회 한국수필상을 수상했다. (9) 김일두(수필가, 변호사, 명예법학박사) 1923년 삼동면 영지리 시문에서 출생하였다. 1948년 고려대학교 법정과를 졸업, 제2회 조선변호사시험(사법고시)합격, 30여 년간 국가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961년 저술 한 세계 일주기 구름을 헤치고 에는 55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63년 7월 박문하 등 과 함께 부산수필동인회를 경설, 계간으로 동인지 수필 을 간행하면서 본격적인 문학 활 동을 하였다.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고문변호사 등을 역임하고 상훈으로는 녹조소성훈 장, 황조근정훈장 등이 있다. 저서로는 구름을 헤치고 세계가 부르짖는 인권 수필집 알몸인간 명찰편액순례 낙조( 落 照 )는 불탄다 억울타 난 죄 없어 취미와 인 생 산책 아쉬운 세월( 歲 月 )이여 가 있다. (10) 이상범(수필가) 1944년 남해읍 평리에서 출생했으며, 동아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뒤 중등학교 교 직에 종사하였으며, 1979년 경남수필문학회에 수필 차창 으로 데뷔하였다. 1983년 남해 문학회 창립을 발기하여 총무로 활약하고있다. 주요 작품으로 사랑의 현수교 차창 약속 손 웃음 눈물 등이 있으며 목련 이 가을에 재회 벼랑에

257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43 서 등의 시도 있다. (11) 이면기(수필가) 1933년 남해에서 출생하였으며,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을 졸업했다. 1984년 한국일보 신춘 문예에 수필 구도로( 舊 道 路 ) 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였다. 저서로는 수필집 C타임 이야기(1993. 교음사) 가 있는데 이 책에는 당선작 구도로 를 비롯 모두 67편의 수필 이 수록되어 있다. (12) 박현국(수필가) 1935년 남면 석교리에서 출생했으며, 경남대학교 법정대학 법학과를 졸업, 동아대학교 경 영대학원 경제 행정학과,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85년 7월 도서출판 국제 에 제 1수상집 고향의 봄 을 출간했고, 1990년 4월에는 제2수상집 우리 동네 징소리 를 펴냈다. 4) 아동문학가 (1) 김상남(아동문학가) 1937년 미조면 송정리 송하에서 출생했으며,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부산대학교 상 과를 수학, 초등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했으며, 한국아동문학가협회 부회장, 부산 소설가협 회 간사 등을 역임했다. 1970년에 한국 일보사 콩트 현상 공모에 동양화 한 폭 이 당선. 1973년에는 소년중앙 문학상에 소년소설 비둘기 가 당선, 1974년 조선일보 신문예에 는 소설 출토기 가 당선되고, 1975년 문화공보부 공모 소년소설 꽃댕기 등이 당선되 어 문단에 데뷔하였다. 특히 꽃댕기 는 제1회 한국문학 창작상을, 등대지기의 아들 은 제2회 해강 아동문학상을 받았다. 저서로 소년소설 봄부터 걸린 고뿔 흰구름 먹구 름 춤추는 과녁 등이 있다. (2) 박춘희(아동문학가) 1950년 남해읍에서 출생했으며,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동대학원 국문학과 석사과정을 수 료하였다. 동화 분홍웃음 (1972년, 새교실), 새벽에 오는 기차 가 소년에 추천되었고, 1976년에 동화 가슴에 바다를 담고 가 소년중앙 문학상에 최우수로 당선되어 문단에 데

258 1444 남해군지 뷔했다. 저서에는 달맞이꽃 가슴에 뜨는 별 외 다수가 있다. (3) 이재천(아동문학가) 1928년 남면에서 출생했으며. 1947년 부산 제일공업학교를 거쳐 경남초등교 원양성소를 수료한 후 진주 봉래초등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다. 1977년 경남아동문학회 연간집 하얀 찔레꽃 에 동화를 발표하면서 데뷔하였다. 그 후 다수의 동화와 동시도 발표하였다. (4) 박윤덕(아동문학가) 1951년 이동면 초음리 출생. 진주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로 활동, 지금은 마 산월영초등학교에 재직한 바 있다. 1988년 경남신문 신춘문예에 유채꽃은 피는데 가 당 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그 후 연두빛 바람, 초록바다의 미소 등 많은 동화를 발 표했다. (5) 김태두(아동문학가) 1946년 서면 서상리에서 출생했으며, 진주교육대학을 3회로 졸업한 후 초등학교 교사 취 임 후 지금은 마산 구암초등학교에 재직한 바 있다. 1992년도에는 경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을 졸업했다. 교육자료지 에 동시 추천을 완료했고, 1989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동화 깜순이와 아람이 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소원은 언니가 되어 알쏭달쏭 별난 과자 하얀 악마들 요정과 빛 좋은 개살구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세상에서 제일 큰 어항 (1993. 윤진문화사) 등이 있다. (6) 김창영(아동문학가) 1956년 서면 남정리에서 출생하였고, 남해종합고등학교와 경남대학교 공업경영과를 졸업 하고, 한국방송통신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수학했다. 남해신문 편집국장을 역임했었다 년 마산 시민 백일장 시 부문에서 장원, 1991년에는 부산문화방송 신인문예상을 받았으며, 1992년 4월 어린이문예 부산문화방송 발행, 월간 아동문학 대상, 소년소설 부문 당선으로 문단에 데뷔하였다. 열쇠 목걸이 외 다수의 동화를 발표했다. 5)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희곡작가, 시나리오작가 외 기타

259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45 (1) 정병욱(국문학자, 수필가, 문학박사) 1922년 설천면 문항리에서 출생하여 1982년 세상을 떠났다. 연희전문을 거쳐 1948년 서 울대 문리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부산대학 및 연세대학 조교수, 서울대 문리대 교수, 미국 하버드 대학 및 프랑스 파리 대학 교환 교수, 서울대학교 박물관장, 대한민국 학술원 정회원 등을 역임했는데 시인 윤동주와도 친교가 있었다. 1952년에 국문학 개념 규정에의 신제언 을 자유세계에 발표한 이래 여러 지면에 수많 은 국문학 관계 논문을 발표했고, 대표적 저서로 국문학산고 와 시조문학사전 및 수 필집 바람을 부비고 서 있는 말들 등을 간행하였다. (2) 박성석(문학박사) 1947년 서면 서호리에서 출생했으며,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수료했으며, 충남대학교에서 논문 한국 무가의 희곡적 연구 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진주상업고등학교 교사, 경남간호전문대학 교수를 거쳐 현재 경상대학교 인 문대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저서에 한국의 민속 이 있고 그 외 다수의 논문과 수상을 발 표했다. (3) 김봉군(문학평론가, 문학박사) 1941년 창선면 장포리에서 출생했으며, 서울대학교(사대 국어과, 법대 법학과)를 졸업하 고 동 대학원에서 현대 문학을 전공했다. 현재 성심여자대학교 교수, 서울대 강사로 재직 중 이며, 초. 중. 고등학교 교과서를 집필하였다. 1971년 김용호( 金 容 浩 )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하였고, 1984년 현대문학,1987년 문학사상,1991년 시조생활 에 평론이 당 선되어 평단에 데뷔했다. 주요 논문으로 시조시의 현대적 지평 춘원문학에 나타난 종 교 의식 김동인의 창작심리 한국 기독교 문학 서설 한국 문학에 나타난 죄와 구 원의 문제 외에 한용운론, 서정주론, 유치환론, 김현승론, 박두진론, 구상론, 오영수론 등 다수가 있다. 저서에 한국현대작가론 문학개론 공저, 날개야 돋아라 날자날자 날 자 이상론, 등이 있다. (4) 정영자(문학평론가,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신라대교수) 1941년 남해에서 태어나 통영시에서 성장했다. 1964년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88 년 문학박사 학위을 취득했다. 신라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6년 1월 20

260 1446 남해군지 일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으로 선출되었다. 1979년 현대문학 에 평론 원형의 재생 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저서로는 한국문학의 원형적 탐색 한국여성시인연구 한국페미니즘문학연구 한국여성소설연구 현대문학의 모성적 탐색 한국현대 여성문학론 인간성 회복의 문학 등이 있으며, 수필집으로 황금비례 오를수록 환 하게 밝아오는 아침 오랜 날의 꿈, 시집 내게로 와 출렁이는 바다 자지지는 못하 지만 추억할 수 있는 사람 외에도 헤아리지 못할 정도의 작품을 남기고 있다. 상훈으로는 1987년 한국평론가상, 1994년 부산시 문화상, 1997년 한국비평 문학상 2002년 국제펜클 럽 펜문학상 평론부문 을 수상했다. (5) 박종현(평론가, 철학자) 1934년 이동면에서 출생했으며, 65년 서울대 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했다. 1961년 3월 자 유문학지에 문학평론 파우스크의 인간상 으로 제2회 신인상을 받고 문단에 데뷔했다. 이 후 승산 없는 대결 운명애( 運 命 愛 )의 사상 정을병의 아테나이의 비명 현대문학 에 지워진 십자가 희랍인들의 탐구정신의 전개 과정 소크라테스에 있어서의 로고스 에 관하여 외 많은 평론을 발표했다. 성균관 대학교 철학과 교수 재직하였다. (6) 김흥우(희곡작가) 1940년 서울에서 태어나 1964년 동국대학교 동 대학원에서 연극학을 전공하였으며 동국 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와 예술 대학장을 지냈다. 2006년 3월 6일 세계 각종 탈, 공연 예술 서적 등 19종 30,791점을 남해군에 기증하였다 월 15일 개관한 남해국제탈공연예 술촌 촌장으로 있다. 현재 (사)한국희곡작가협회 이사장과 동국대학교 명예교수이다. 또한 한국문인협회 희곡분과 회장이다. 2002년 한맥문학상 대상과 2004년 예총 예술문화상 대 상(연극부문), 2005년 한국희곡작가협회 공로상 등을 수상했으며 저서로는 연극원리 현대연기론 극장예술 전환기의 희곡 한국의 놀이와 축제 김흥우의 연극갈 한국의 지역축제 외 다수가 있다. (7) 이청기(시나리오 작가) 1919년 고현면 대곡리에서 출생했으며, 남해공립보통학교를 제20회로 졸업하고, 일본 교 토중학교, 니혼대학 등에서 수학한 후 부산일보 기자로 언론계 종사, 국제팬클럽 한국본부 위원, 영화윤리 전국위원회 초대위원장, 공보부 장관 자문위원, 서울특별시 문화위원, 이화

261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47 여대 강사, 주간 새마을 신문 상임 고문, 남해향토문화연구회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1959년 시나리오 교차로 로 문단에 데뷔, 그 후 서울의 휴일 등을 발표했 고, 저서로 조국송가 사향록 남해도 사향록 등이 있다. (8) 박길부(번역문학가) 1941년 이동면 용소리에서 출생했으며,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도서출판 예 하의 사장으로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다. 1987년 월간 문예지 동서문학 이 주는 신인 번 역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그의 번역서로는 마지막 사랑을 위하여 (1990) 장미정원 (상.하,1991) 물위의 하룻밤 (1991) 우리는 이제 숲으로 가지 않는다 (1992) 등이 있다. (9) 홍춘표(문화예술인) 1949년 삼동면 고암(수장포)에서 출생하여 한양대 경영대학원과 연세대 행정대학원을 마 쳤다. 한국 문인협회 발전 기획위원과 양천문학회 수석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청년시절 영 화예술에 몰두하며 베를린영화제 특별은곰상을 탄 강대진 감독과 함께 영화 당신은 여 자 버림받은 여자 흐느끼는 백조 겨울여자 등 다작에 제작 기획을 담당하며 조 감독으로 일 해오다 1973년 남해를 배경으로 한 영화 뱃고동 을 제작 주연을 하였다. 1875년 서울신문 총무국에서 기획을 맡아 청계천 종말하수처리장과 남산3호 터널 등 기록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재활인의 재활을 그린 삼육문화영화도 만들기도 했다. 그 는 시인으로 등단 후 KBS HD TV문학관(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을 김충길 프로듀서와 기획하면서 한 역사소설 서포 김만중 노도에서 고복하다 를 시와 소설로 엮어 집필하기 도 했다. 6) 기타 이 외에도 각 장르에서 문예 활동을 하고 있는 분이 많은데 알려진 명단은 다음과 같다. 김용엽,김유섭,강철도,이시영,박영덕,서재심 등이 현재 남해에서 문학 활동을 하고 있으 며, 시에 강정희(서울), 소설에 김민숙(서울), 박정남(서울), 박남희(서울), 이명주(서울), 평 론에 김기훈(서울), 수필에 김치곤(서울), 권대근(부산), 김상봉(서울), 김욱태(서울), 류명춘 (서울), 박종대(대구), 이정윤(서울), 이범산(서울), 이호월(서울) 등이다.

262 1448 남해군지 5. 문예 활동 수많은 남해 출신 문인들은 향토 문학의 뿌리이며, 시대를 밝혀주고 증언해 주는 등불인 동시에 남해의 자산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이 타지에 거주하고 있어 향토와의 연관 성이 희박하다. 고향 출신 문인들끼리의 모임, 향토 문예 진흥을 위한 공동 행사 등이 없고, 횡적인 유대도 부족하다. 그에 따라 향토 내의 문예 운동은 극히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이 런 가운데 문예 운동의 싹이 트기 시작했는데 1962년 12월에 결성한 가칭 한국 예총 남해 지부였다. 한글학자이며, 고현중학교 교장인 김계원( 金 桂 元 )이 문신수의 중앙문단 데뷔 축 하회를 발기하여 모임을 이룬 자리에서 예총 남해지부 결성을 제의하여 조직을 가지게 되었 고, 1963년 4월 13일에 김계원이 남해지부장으로 선출되었다. 지부가 발족이 되어 중앙의 승인 문제와 향토내의 문예행사 계획 등에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는데 1964년 김계원이 경 상남도교육연구소장에 취임하게 되자 이 일을 맡아 추진할 사람이 없었다. 예총 남해 지부 는 모처럼 생긴 향토의 문화집결체로서 우렁찬 출발을 시도했으나 무산되고 말았다. 남해는 문화적 토양이 척박한데다 문학에 대한 주민들의 관심이 희박했던 관계로 그 뒤 다 시 이런 운동이 일어나질 않았다. 그러나 개별적인 활동은 기록할 만한 일들이 많다. 특히 과차문학( 過 此 文 學 )이라는 입장에서 타지방 출신 문인들이 직장 관계로 이 지역에 와 살면서 남긴 문화적 업적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1977년에는 남해종합고등학교 재직 중인 시인 이우걸이 첫 시집 지금은 누군가 와서 를 출간 했고, 처음으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1981년에는 제2시집 빈 배에 앉아 를 간 행하여 호평을 받았다. 1981년에는 남해수산고등학교에 재임 중인 시인 전기수( 全 基 洙 )가 제4시집 남해도( 南 海 島 ) 를 발간하였다. 이 시집에는 남해만을 소재로 한 주옥같은 시 40편이 수록되어 있 다. 이 고장을 하나의 시집에 담은 책으로서는 이것이 처음인데 저자는 남해도가 앞으로 더욱 아름다워지고 풍요로워지고 슬기로워지기를 빌면서 남해의 시를 썼다. 한국의 저명한 아동문학가인 임신행( 任 信 行 )은 1985년부터 1989년까지 5년간 이동 및 북 창선초등학교에 근무하면서 소년소설 난지도 하늘에 뜬 무지개 아기도깨비의 파란 수 첩 안개섬 동굴 해뜨는 섬 이상한 섬다람쥐 초록머리 물떼새 은빛갈매 기 금빛 갈매기 및 도깨비 시리즈 전 10권과 시집 동백섬 수놓기 섬엉컹퀴

263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49 비에 맞으며 등을 펴냈다. 여러 차례로 동시화전을 개최했고, 남해 문학의 활성화를 위해 다방면으로 헌신 노력을 했다. 시조 시인 강경주는 지족 및 북창선초등학교에 근무하면서 1987년 첫 시조집 어둠을 비 껴앉아 를 출간했고, 그 후 발표한 작품을 모아 1990년에 제2시조집 사랑의 역설 을 펴냈다. 이 외에도 남해에 거주하면서 문학 활동을 한 시인으로 이병환, 이현우, 민병재 등을 손꼽 을 수 있다. 1) 남해 문학회 남해문학회는 문학회원의 창작활동을 장려하고, 문학적 향기를 향유하게 하며, 문학회원 들 간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1982년 3월 5일 창설하기로 결의한 후 1983년 4월 23일 문 신수 선생을 초대회장으로 추대하여 창립되었다. 1984년 10월 9일 한글날을 기념하여 제 1회 글짓기대회를 실시하였으며 그해 12월 10일 남해문학 제1집을 발간하였다. 그 후 2008년에 제 10집을 발간하는 등 회원들은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1997년 제 1회 문화의 날 행사 주관하여 거리 시화전 및 초중 글짓기 대회를 개최하였고, 2003년 5월 17일 故 문신수 선생 문학비 제막식를 남해스포츠파크내 문학동산에 세웠다. 남해문학회 주요업무 및 행사로는 문학작품 발표 및 교류, 문화의 날 학생백일장 주간, 화 전문학제 개최, 문학동인지 발간, 문학 소년소녀 지원 등이 있다. (1) 연혁 1982년 3월 5일 문학회 창설 (2) 역대회장 연 번 성 명 재 임 기 간 중 요 실 적 비 고 1 ~ 6대 문 신 수 ~ 창립, 문화제주관, 남해문학 발간 7 ~ 11대 이 상 범 ~ 문화제주관, 남해문학발간 12대 강 철 도 ~ 현재 학생글짓기, 거리시화전

264 1450 남해군지 2) 한국문인협회 남해지부(남해문인협회) 한국문인협회 남해지부(남해 문인협회)는 지방 문학의 특수성과 향토성을 활성화 시키고 회원 상호간의 창작활동을 통한 친목도모와 지방문화 육성 발전에 기여함으로 목적으로 설 립되었다. 전국 시군에 걸쳐 대부분 한국문인협회 지부가 설립되어 있는데 유독 남해에는 한국문인협회 지부가 없어 문협지부(문인협회)를 통한 지역 문화의 발전과 위상 제고의 필요 성을 간절히 느껴오던 중 취지에 동감하던 한국문인협회 자격요건을 갖춘 정주환, 강득송, 최광형, 김경남 등 다수의 문인들이 한국문인협회 남해지부를 결성하고 한국문인협회의 승 인 절차를 마침으로 명실상부하게 남해를 대표하는 문인단체로 한국문인협회 남해지부(개칭 남해문인협회)가 설립되었다. 2002년 9월 20일 남해문협 창간하여 2006년 제5호 발간하였 다. 2002년 10월 작은 문학제를 개최하여 시와 음악의 만남과 문학 강연을 하였으며, 2003 년 11월 제1회, 제2회에 화전문학제 개최하여 시 낭송회, 백일장, 문학 강연, 문인의 밤을 개최하였다. (1) 연혁 1998년 10월 8일 한국문인협회 남해지부(남해문인협회) 창립하여 2000년 4월 17일 한 국문인협회로부터 지부 승인되었다. (2) 역대회장 연 번 성 명 재 임 기 간 비 고 초 대 정 주 환 ~ 대 김 경 남 ~ 현재 연임 3) 기타 번 호 단 체 명 회 장 회원수 비고 1 화 전 이 우 회 김정윤 시조 2 남 해 시 우 회 고용윤 시조

265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향토 외의 문예운동 1) 화전문학회 (부산) 부산에 거주하는 향토 문인들의 모임으로 2005년도 창립하였고, 1년에 1회씩 화전문 학 지를 창간하고 있다. (1) 연혁 2005년 6월 화전문학 창간호를 발행하여 2006년 12월 화전문학 2호 발간하였다. 2) 한맥문학회 (서울) 1988년 1월 한맥 문학은 농민문학가협회로 처음 결성되어 1993년에 한맥 문학으로 개칭 하였다. 1989년 8월 30일 월간 한맥 문학을 창간하여 2007년 10월 현재까지 한 호도 결간 없이 통권 206호를 발행하였다. 현 발행인은 김진희(본명 : 김영선)는 한국문인협회이사 겸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를 역임하고 있다. 월간 한맥 문학 및 협회 공로 문인 작고시 문학 비 건립하고 불우문인 돕기 연 1인 300만원 전달, 문인자녀 장학금 지급, 한맥문학상, 서포 문학상, 한맥문학협회상이 있다. (1) 연혁 1988년 1월 농민문학가협회 결성하여 1989년 8월 30일 월간 한맥 문학 제1호 발간하였 다. 1993년 한맥문학가협회로 개칭하고 2007년 월간 한맥문학상, 서포문학상, 한맥문학가 협회상 제정하였다. 7. 남해의 방언 1) 개요

266 1452 남해군지 남해는 우리나라의 가장 남단에 위치한 제주, 거제, 진도 다음의 섬으로서 예로부터 천혜 의 경관을 가지고 있다. 남해인들은 풍속이 순박하며 길쌈을 잘하며, 무예정신을 숭상하여 옛되고, 소박함을 좋아해 왔다. 그리고 바다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만큼 해전지와 유배지로 서의 역사적 배경을 가진 곳이다. 그 후예들이 남해 본토인으로 형성된 집안과 유적들도 많 다. 이로 인하여 남해 방언은 다른 지방보다 상당히 고유성을 많이 보유하고 있음이 특징이 라 하겠다. 남해 방언은 다른 육지 방언과 비교해 볼 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같다. 첫째, 동일한 기어( 基 語 )였으나 음운 변화의 과정이 달라서 어형상 차이를 나타내는 경우 이며, 둘째, 처음부터 타 방언과 개별로 발달해온 경우의 어형들이 상당히 많으며, 셋째, 타 방언에서 전혀 볼 수 없는 것, 넷째로, 육지어와 동화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혼태적인 어형들이 있음이 중앙의 방언과 구 별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여기 동아대학교 교수가 직접 수집해 분류한 것을 옮겨 보면 합성법에 관한 것으로 1 통어적 합성어와 비통어적 합성어로 나누어, 통어적 합성어는 합성체언, 합성용언, 합 성부사, 비통어적 합성어는 대등적 합성어, 종속적 합성어, 파생적 합성어로 나누었으며, 굴절법에 관한 것으로 1 종결어미의 존대법에 관한 서술형, 의문형, 명령형, 청유형 2 비 존대의 종결어미를 역시 서술형, 의문형, 명령형, 청유형별로 분료했고, 2 연결어미에 있어서 동 구속형, 방임형, 설명형, 비교형, 선택형, 중단형, 익심형, 의도 형, 목적형, 도급형 등으로 나누어 제시 하였다. 2) 방언 (1) 합성법에 관한 것 가. 통어적 합성어(Syntactic Compound)

267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합성체언 개똥벌거지( 개+똥+벌거지) : 개똥벌거지가 볼시로 날고 있네이. 양철동우( 양철+동우) : 물질로 갈란다. 양철동우 가지고 오니라. 속캐( 솜+목화) : 어무니는 튼정지에 속캐타로 갔십니다요. 사나을( 사흘+나흘) : 가거든 사나을 있다가 오개이. 나무새( 마물+새( 草 ) : 밥상에 나무새가 빠졌구나 갖구 오니라. 아래우( 아래+우ㅎ) : 아래 우히 빤듯하게 따듬어라이. 물구시( 물+구시) : 개가 물구시에 빠졌다요. 모깨불( 모깨+불) : 모구가 난다. 모깨불을 많이 피어라이. 통오짐( 통+오짐) : 어찌나 아팠던지 똥오짐을 못 가린다요. 뿔동짐치( 뿔동+짐치) : 뿔동짐치 담구고 상추 케오니라. 이상은 명사+명사로서 대등적인 합성어이다. 멧 - 새 : 멧새알 찾이로 가자마. 꾸짓 - 뽕 : 뽕( 桑 )이 모지레몬 꾸짓뽕을 따다 먹이라. (꾸짓뽕은 산에서 자란 야생종의 뽕 이다.) 모시 - 배 : 삼베보담 모시베 옷이 쉬원하다이. 시리 - 밑 : 시리밑이 딸딸 긁어 묵어라이. 푸 - 시리 : 나락논에는 푸시리를 많이 비(베어) 넣으몬 거림이 좋다이. 웃 - 목 : 아이를 윗목에다 니피라이. 찐 - 지리기 : 찐지리기는 씰어 모아 탯비리라(태어 버려라). 대 - 껍질 : 발( 謄 )은 대껍질을 잘 깍아서 만드몬 참 찔기다요. 그 외 깃-밥, 꼿-비, 눈-쌀, 말-밤 등 이상은 수식적인 합성명사이다. 몯 - 아들 : 김서방네 몯아들이 군에 갔다네. 몯 - 딸 : 몯딸이 좋으몬 아래가 따라가는 기라요. 접 - 옷 : 칩다. 접옷을 푹 쩌입어라. 산 - 아이 : 사나이가 거짓말을 하몬 되겠나이. 이상은 파생적인 합성명사이다. 한 - 물 : 오널은 한물 맞이 갑시다이다.

268 1454 남해군지 새 - 아제(재) : 새아제가 내 고무신얼 다 사왔네요. 외 - 짝 : 와, 신얼 외짝만 신고 다니네마. 외 - 섬 : 외섬( 外 島 )에는 물이 음서(없어), 밥을(얼) 몬 해묵는다네. 외 - 토리( 孤 ) : 밤( 栗 )은 외톨이가 더 다니라이. 새 - 아지매 : 오널 새아지매 오넌 날이다이. 이상은 관형사(형)+명사로서 관형사와 합성어이며, 외 는 접두사로 볼 수 있을 것도 같으나, 외롭다 에서는 어근( 語 根 )으로 쓰이기 때문에 관형사로 보았다. 사근 - 다리 : 산에 사근다리(삭은 나뭇가지)하로 가자마. 한 - 심 : 자(저애) 한심시는 소리에 성(걱정)이 가신다이. 간 - 잠 : 간밤에 내 꿈이 좋읍디이다. 쫀 - 머리 : 쫀머리에 수건을 씨니 보기 좋네이다. 들 - 보 : 용두머리가 굽은 걸 보니 들보가 끊은 모양이다이. 헌 - 디 : 헌디에다 약을 볼라 보제. 날 - 포리 : 방에 날포리가 몬(못) 들어오게 해라이. 이상은 용언의 관형사형과 합성이다. 막 - 말 ; 막말을 허지 마라, 니가 당한다이. 혼챗 - 말( 혼자의 말) ; 네 혼챗말만 가지고 쎄우몬(우기면) 꼭 지는 기다이. 이상은 부사+명사의 합성이다. 2 합성용언 폿대 - 내다 : 너무 잘 헌다고 폭대내지 마라이. 폿대 - 보다 : 사람을 폿대보고 말하지 맙시다이. 땅내 - 맡다 : 나락이 볼수록 땅내맡았십니다요. 여름 - 베리다 : 올해는 이리 가무는 걸보니 여름베렀구나. 그물 - 빼다 : 날궂을라쿤다 갱번(바다)에 가 그물빼에라이. 기(귀) - 복다 : 기복고로 자네도 한 잔 마시 보게. 지심 - 메다 : 밭에 가서 지심메고 오깨이다이. 한물 - 지다 : 내일 한물지걸랑 바래가세이. 바래 - 가다 : 어무니, 내 바래갔다 오깨이다.

269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55 바래간다 는 바다에 가서 해초나, 패류를 채취하는 것을 이른다. 메엉 - 잣다 : 모실가지 말고, 메엉잦고 있거라이. 모실 - 메다 : 네 밥만 묵우몬 모실멜래이. 꾸리 - 감다 ; 저녁 묵고, 모종방에 가서 꾸리감데이다. 사근다리 - 치다 : 철수는 갓( 山 )에서 사근다리치데이다. 치부 - 타다( 추위타다) : 소가 치부타서 떨고 있데이다. 다무랑 - 쌓다( 담쌓다) : 아부지가 다무랑 쌓고 있데이다. 질 - 질이다 샌치(송아지) 질딜이고 오깨이다. 이상은 명사+용언의 합성이다. 가리 - 지리다 : 너무(남의) 말을 가리지리지 마라이. 치기 - 여기다 : 네 제로( 彼 ) 치기여겨 바 좃더니 너무 허데요. 바 - 조다( 보여주다) : 내 바좆더니 잊어 묵었나이. 우또 - 오다 : 니넌 우또오니라이. 무던히 - 여기다 : 아무말 말고, 그저 무던히여기고 있거라이. 쭈굴시 - 앉다 : 하루종일 쭈굴시 앉았더니 다리가 뭉쳤다이. 음신 - 여기다 : 너무 음신여기지 마시다이 음지가 양지 됨디다이. 엇덧 - 트몬( 얼핏하면) : 가아는 엇덧트몬 틀어지더라이. 이상은 부사+용언의 합성이다. 히개 - 지다 : 아픈 데가 멥씨(몹씨) 히개졌데이다. 씨러( 쓸어)지 : 바람 때문에 한쪽으로 씨러졌읍니다요. 씨러 - 비라다( 버리다) : 깨끔시리 씨러버맀데이다. 일( 일으)- 바시다 : 환자를 조심시리 알바시 주시다이. 끼미( 꾸미어) - 주다 : 참 이쁘게 끼미주었다이. 틀어 - 지다 : 가아넌(그 아니는 어덧트몬 틀어지데이다. 쏘데 - 뎅기다 : 저녁 묵고 모실 쏘대뎅길래이. 싸 - 뎅기다 : 밥만 묵으면 어데 싸뎅깁디이다. 볼바( 밟아) - 비리다 : 내가 애써 숭거(심어) 놓은 걸 다 볼바비릿다요. 따 - 돌리다 : 내만 따돌리고 가끼가이? 숭거( 심어) - 보다 : 한 번 숭거보고 말 헤라이. 이상은 부사형+용언 용언으로 된 합성이다.

270 1456 남해군지 3 합성부사 못 - 다 : 네가 못다허고 남굴 것을 와 시작헷네. 몬 - 첨 : 네가 몬첨(먼저) 헤보아라마. 내 - 내 : 가고는 내내 오지 않더라. 다문 - 다문 : 모를 다문다문 숭거라(심어라) 듬성 - 듬성 : 듬성 듬성 숭거라. 모디 - 모디 : 열매가 모디모디 열었네요. 다북 - 다북 : 그릇마다 다북다북 담아라. 나. 비통어적 합성어(asyntactic Compound) 1 대등적 합성어 오리 - 내리다 : 멧(몇)번을 오리내리던고이다. 걷어 - 지다( 쥐다) : 다구지게 걷어지고 있데이다. 드나 - 들다 : 에지간히 드나들어라마. 띠( 뛰) - 놀다 : 철이가 바깥에서 띠놀고 있십니다요. 들 - 락( 나( 出 ))거리다 : 에지간히 들락거리고 있어라마. 거다 - 밀다 : 베늘이 터지지 않게 거다밀 시다요. 깨 - 배다 : 철수를 일찍 깨배서 데리고 갑시다이. 부리 - 씨(키)다 : 큰 눈을 부리씨고 달라든다요. 달라 - 들다 : 제발 달라들지 말고 좋은 말로 해라이 2 종속(수식)적 합성어 바치 - 들다 : 똑 바로 바치들고 서 있거라이. 석 - 버물다 : 메미(매우) 고로 석버물제이다. 거다( 걷어) - 올다 : 조심시리 거다올리게이.

271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57 걸치 - 앉다 : 청에 좀 걸치앉아 시어다 가거라. 뿓 - 들다 : 꼬뜰개를 야무지게 뿓들고 오니라이. 뿓 - 댕기다 : 메미 뿓댕기시다.( 附 擧 ) 짓 - 눌리다 : 돌로 꼼짝 못하게 짓눌리라마. 맞 - 보다 : 저 사람이 내로(나를) 뜰버지게 맞보고 있더라이. 뜰버 - 지다 ; 구멍이 좀 크게 뜰버지게 허게이. 욱 - 잡자 : 안 헐라쿠거덩 데기 욱자부시다요. 쪼굴 - 잡다 : 하리 젱일(종일) 쪼굴잡아 앉아 있었더니 다리가 애린다. 내 - 바래다 : 뱉에다 내바래어 꺼슬리라. 걸 - 끼다 : 꼬쟁이다 쭉 껄끼어 몰야라. 디리 - 쎄다 : 옻에는 끓는 닥짐(닭김)을 디리쎄몬 잘 낫는다요. 디리 - 밀다 : 불썩(갑자기) 디리밀믄 어쩌라고 그레내마. 걷어 - 씰다 : 얄팔하게 웃만 거더씨러라이. 나 - 놀다 : 방안에만 있지 말고 제발 빢에 나돌다가 오니라. 우가( 욱가) - 잡다 : 양쪽을 다 우가 잡아라. 비러( 빌어)- 묵다 : 게으르몬 비러묵는 길 밖에 없네이. 우기 - 넣다 : 두 손으로 잘 우기넣어라이. 떠 - 부치다 : 한 쪽으로만 떠부치지 마라이. 건니 - 띠다 : 바로 보고 멀리 건니띠제요. 건니( 건너)는 부사로도 볼 수 있으나 종속적인 합성어로 보아둔다. 3 파생적 합성어 빗 - 틀다 : 짝고 빗틀어서 멍이 들었다. 삣 - 깍다 : 삣깍지 말고 줄얼 대어 바로 깍아라이. 훌 - 써리다 : 개가 보리밭을 훌써리고 댕깁니다요(다닙니다). 찟 - 바수다 : 쌩고구마(생고구마)럴 잘도 찟바사 댄다이. 헤 - 푸다 : 제발 살림을 헤푸게 살지말고 애끼씨라. (2) 굴곡법에 관한 것

272 1458 남해군지 가. 종결어미의 존대법 1 서 술 형 아주높임 가) -ㅂ니다이다. -ㅂ디이다, -ㅂ니다요. 등 할부지께서 진지를 드시-ㅂ니다이다. 어무니가 지끔 가시-ㅂ니다요 지끔 돌아 오시-ㅂ니디이다. 어무니가 진지를 오시-ㅂ다이다. 순이가 책얼 보-ㅂ니이다. 순이가 책얼 보-ㅂ니다요. 지끔 돌아 오시-ㅂ니다이다. 나) -데이다. -네이다 등 아부지께서 이리로 오시-데이다. 꽃이 많이 핐-데이다. 약얼 볼수로(벌써) 다 묵었-데이다. 할부지께서 이리로 오시-네이다. 어무니가 주무시-네이다. 철구가 책을 보-네이다. 예사높임 -요(이)다. -아여이다. -아이다. -어이다. -제다(이). -제요(이). -네요이. -데요 이 등 오디(어디) 갔다 오-요(이)다. 지끔 차( 車 )-아여이다. (와여이다.) 우매(어머니) 참 잘 허-네요이. 지끔 막 가-데요이. 내가 참 잘 허-제다(이).

273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59 그래도 나넌 가-아이다. 순이는 잘 못 허-제요이. 지끔 한참 묵-어이다. 예사낮춤 -제요. -네요. -네(이). -데요. -(우)요 등 내가 이만 허몬 잘 허-제요. 나는 몬제 가-네이. 아, 참 잘 허-네요. 철이가 막 일어나서 밥얼 묵-데요. 쌀이 없어 죽얼 묵-우요.. 예, 지끔 허-요. 오널 잘 묵었-네이. 오늘 많이 묵얶-네. 자네 잘(오)았-네. 아주낮춤 -ㄴ다. -내. -네. -대 등 배같에 누가 오-ㄴ다. 내가 허-내. 비가 오-내. 지끔 허고 있-대. 반 말 -ㄴ다마. -끼다마 등 순이가 더 잘 허-ㄴ다마. 내일 오-ㄴ다마. 또 오-끼다마. 2 의 문 형

274 1460 남해군지 아주높임 가) -ㅂ니까이다. -십니까이다. -ㅂ다까이다. 등 오디(어디) 가시-ㅂ니까이다. 오디 가시 - ㅂ디까이다. 오디 가싯 - 십니까이다. 온제(언제) 가시겠-십니까이다. 하마 다 가싯겠-십니까이다. 오널은 일을 허-ㅂ니까이다. 오널은 일을 허-ㅂ다까이다. 지금쭘(지금쯤) 다 헸겠-십니까이다. 나) -ㄴ다고이다. - 능/넝 고이다. - 넝/능 가이다. - 가이다. -ㄹ랍니까이다. - (우)ㄹ랍니까이다. - ㄹ랑가이다. - 아/어 여이다. -것제이다 등 오널 가시 - ㄴ다고이다? 아바씨가 허시 - ㄴ다고이다? 할무니가 방에서 머 허시 - 넝/능 고이다? 철수가 온제 오 - 넝/능 고이다? 어지(어제) 남은 것을 허시더 - ㄴ가이다? 지끔 가서 온제 오시 - ㄹ랍니까이다? 어무니가(어머님이) 허 - ㄹ랍니까이다? 이리 돘다가(두었다가) 온제 묵 - 우르랍니까이다? 성님이(형님이) 언제 오 - ㄹ랑가이다? 아부님이 그걸 잡수 - ㄹ랍니까이다? 어머님이 자시 - ㄹ랍니까이다? 그 신이 밥얼 순이가 묵 - 어여이다? 생이가 온제(오) - 아여이다? 이것은 하 - 겄제이다? 예사높임 -소, - 으/우 ㄹ라요, -제요, -ㄴ다고요, -ㄹ랑가요, - 넝/능 가요 등

275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61 당신은 매일 술로 일을 삼-소? 당신은 죽우나(죽으나) 노름우로 일얼 삼- 으/우 ㄹ라요? 돈은 천언도 넘-제요? 지끔 가몬(가면)-온제 오-ㄹ라요? 순이가 그걸 허-ㄴ다고요? 가아가 온제 가-ㄹ랑가요? 창식이가 요새 음석(음식)을 잘 묵- 넝/능 가요? 밥을 많이 묵-울라요? 안 묵-우-ㄹ라요? 예사낮춤 -아, -ㄴ가, - 넝/능 가, -ㄴ다고, -(우)ㄹ랑가 등 지끔 네 오디 가-아? 가아가 좀 알더-ㄴ가? 자네도 거제(거기에) 가- 넝/능 가? 머, 못 허-ㄴ다고? 내일은 꼭 주-라랑가? 자네가 허-ㄹ랑가? 자네가 다 묵-우ㄹ랑가? 아주낮춤 -나, 네/내, -ㄹ래, -(우)끼가, -끼고 등 네 오디 가-나? 멋 하로 가-내? 여기(여기서) 멋 허-네? 가몬 온제 오-ㄹ래? 남아서 멋(무엇) 허-끼고? 가서는 오-끼가? 죽얼 못-(우)끼가? 안 묵-우끼가? 반 말

276 1462 남해군지 -아마, -나마, - 내/네 마, -ㄹ래마, -(우)끼가마, -(우)ㄹ끼가마 등 네 이자석 오디 가-아마? 느그집에 쎄기 안 가-나마? 이걸 내가 허-ㄹ래마? 안 헌더더만 잘 허-네마? 지금 가몬 온제 오-내마? 네가 허-끼가마? 네가 묵-우끼가마? 네가 묵-울래마? 네가 다 묵-울끼가마? 이는 평교간( 平 交 間 )에 많이 쓰이는 반말이다. 3 명 령 형 아주높임 -다이다, -다요이, - 우/으 소이다(이), -이다(이) 등 할부지, 이리 오시-다이다. 가시거들랑 꼭 기벌 전하시-다이다. 기벌 전하시-이다이. 조심시리(조심스러이) 허시-다요이. 주거들랑 꼭 받-으소이다. 많이 드시고 오-소이다이. 가거던 많이 묵-우소이다이. 못초름(모처럼) 오싰넌데 많이 잡수시이다이. 예사높임 -(우)소다(이), -소요, -소요이, -이소다, -(우)소다, -(우)소이 등 날이 치부니(추우니) 옷을 많이 쩌 입-우소다(이). 틀리지 않게 잫 허-소다(이). 늦것십니다. 어서 가-이소다.

277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63 가거던 쎄기 오-소다(이). 가더던 또 오-소요이. 늦십니다. 쎄기 허-소요. 많이 묵-우소다. 그것도 못 허몬 그만 죽-우소이. 어서 떠나-소이. 예사낮춤 -게, -게이, -개 등 우리 집에 놀로 오-게. 가거든 또 오-게이. 넬(내일) 아침은 집에 와서 묵-게이. 김서방 잘 가-게이/-개이 위의 경우에 존칭보조어간 -시- 를 삽입시켜 가시게이, 오시-게이 등으로 쓰 면 수하( 手 下 )인 경우라도 아주 높임이 된다. 아주낮춤 -니라(이), -아, 아/어 라(이) 등 바쁘다. 쎄기 오-니라(이). 배고프제이 많이 묵-어라(이). 악아, 이리 오-니라(이). 틀리넌지 똑똑히 (보)-바라(이). 반 말 -라마, -나라마, - 아/어 라마 등 늦것다 쎄기 헤-라마. 네가 꼭 오-니라마. 많이 묵-어라마. 부지런히 책을 읽-어라마. 답답하다 나-아라마(놓아라).

278 1464 남해군지 4 청 유 형 아주높임 -이다, -다이 등 제랑 같이 가-ㅂ-시-이다. 체린건(차린 것은) 음지만 많이 드-ㅂ-시-이다. 같이 읽-읍-시이다/-다이 같이 좋다고 허-ㅂ-시-다이. 예사높임 -세이 등 자네도 같이 가-세이. 자네도 같이 허-세이 등 아주낮춤 -자이 내랑 같이 자-자이. 우리 많이 묵-자이. 실컨 자-자이. 우리 쎄기(속히)허고 놀-자이 등 반 말 -자마 오놀 따시다 우리 산에 가-자마. 영화 보로 가-자마. 늦다, 같이 가-자마. 쎄기(속히) 허자마 등 나. 비존대의 종결어미

279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서 술 형 가) -(우)끼요다, -(우)끼다이 -ㄴ다이, -ㄴ다요다, -제이, -(우) 깨/께(이), - 넌/는 다이, - 내/네 이, -(우)요다이, -(우)끼다 등 허(하)다, 가다, 먹다 등의 말에서 허-끼다이/-끼라이/-깨, /-끼요다이, 가-끼다이/-끼라이/-깨/-낑ㅅ다이, 보-끼다이/-끼라이/-깨/-끼요다이, 저건 내가 허-ㄴ다이, /-제이/- 넌/는 다요(다). 이건 내가 묵-(우)깨이, /- 넌/는 다요(다). 이건 내가 묵- 넌/는 다이, /- 내/네 이. 이건 내가 허- 내/네 이, /-요다이. 저건 내가 보- 내/네 이, /-요다이. 순이가 참 잘 허- 제/재 이. 순이가 잘 허-ㄴ다요. 철수도 지끔은 잘 허- 내/네 이. 철수가 잘 묵- 넌/는 다이. 철수가 잘 묵-(우)요다이. 술 나) - 넌/는 다고요, -ㄴ다고요, - 넌/는 데요, -네요 등. 이건 어째도 내가 허-ㄴ다고요. 이건 내가 묵- 넌/는 다고요. 아니 개가(그 아이가) 잘 허- 넌/는 데요. 이 신문은 내가 보- 넌/는 데요. 자신의 행위 의향이나 상대자에게 강조하거나, 다시 다짐하는 뜻으로 연결되는 서 형어미이다. 다) - 넝/능 +간네요, 감네이, 기라(이), 기라네, 깅간네, 깅갑소 깅갑소다, 강가부 네/제, 강가부다이 등 지끔 묵- 넝/능 간네요.

280 1466 남해군지 오널 오- 넝/능 갑네이. 이건 묵- 넝/능 기라(이). 이건 묵- 넝/능 기라네. 이건 묵- 넝/능 깅간네. 이건 묵- 넝/능 깅갑다이,/-깅갑소,/-깅갑소다. 순이가 가끔 약얼(약을) 묵- 넝/능 가부제/네. 안묵넌다더만 묵- 넝/능 가부다이. 이는 어건에 연결되어 상대의 행위나 어떤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라) - 이/으/우 +끼다, 께이, 끼라이, 끼 네/내 요, 깨요(다), 낑갑다/감네,끼세 이 등 내가 읽-으끼다이,/-으끼라이. 이건 내가 묵-우끼다이/-우끼라. 아이, 잘 읽-으깨요. 이 사람아, 이분에게 잘 읽-으끼라네. 내가 읽-으끼세이. 가아가 아매(아마) 몬제 묵-우끼요(이). 이건 내가 묵- 우/어 낑감네. 이건 내가 묵- 우/이/으 끼세 끼라네. 주로 미래의 의향이나 상황을 나타내는 어미들이다. 마) - 으/우 ㄹ랑갑다, -ㄹ강갑네, -ㄹ랑가제 이/요 등 우메(어머니)도 장에 가-ㄹ랑갑다,/-랑감네,/-ㄹ랑가배요,/-르랑가배이 등으로 나타난다. 2 의 문 형 가) -나(야), -내(야), -까이, -ㄹ래(야) 등 네가 허-나(야)? 지끔 오-냐(야)? 너 오디(어디) 가-내(야)?

281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67 지끔 가몬 온제 오-ㄹ래(야)? 꼭 그리 허-ㄹ래(야)? 우매(어머니) 내 허-까이? 나) -제, -제와 등 순이야, 지끔 가-제? 지끔 가몬 온제 오-제? 그걸 네가 허-제와? 네가 몬제 가-제와? 다) -ㄴ다고, -ㄴ다고요, -ㄴ다고다 등 머, 안 허-ㄴ다고? 꼭 못 가-ㄴ다고? 철수가 온제 오-ㄴ다고요? 차가 지끔 오-ㄴ다고요? 차가 오-ㄴ다고요? 철이가 지끔 머(무었) 허-ㄴ다고다? 라) - 넝/능 가이, - 능/능 갑제이/갑제이, - 넝/능 갑제다/갑네다, - 넝/ 능 가 부제이/가부네이, - 넝/능 가배다(요), - 넝/능 기라고다(요), - 넝/능 다고다( 요) 등 순이가 지끔 밥을 묵- 넝/능 가? 갑식이가 인자(이제)일허고 오 넝/능 갑제이? 갑식이가 일허고 오- 넝/능 가부제이? 갑식이가 인자 오- 넝/능 갑네이? 맛이있게 묵- 넝/능 갑 제/네 다? 그 일을 잘 허- 넝/능 갑 제/네 다이? 밥얼 지끔까지 묵- 넝/능 가배요? 이기(이것이) 묵- 넝/능 기라고다? 목이가 지끔 책 읽- 년/는 다고다? 의문이 뜻을 나타내는 형태소가 첨가되는 것과 그것의 끝음절의 억양이 상승되는 것

282 1468 남해군지 이외는 서술형과 같다. 같은 마) 낑가?, -ㄹ낑가요?, -ㄹ낑가다? 등은 의문형어미만 다르고 나머지는 서술형과 형식이므로 생략한다. 바) -ㄹ라쿠던가, -끼라쿠던가다, -ㄴ다쿱디까다, -(우)끼라쿱디까다, -(우)ㄹ끼라 쿠 데 /네 다이 등 순이가 멋을(무엇을) 허-ㄴ다 쿠던가? 순이가 멋 허-ㄴ다쿱니까다? 순이가 멋을 허-끼라쿱디까다? 순이가 밥을 묵-(우)ㄹ가쿠던가다? 순이가 약을 욱-(우)ㄹ라쿱디까요? 사) -(우)ㄹ끼요다이, - 우/어 끼요다이 등 자기도 가-ㄹ끼요? 자기도 묵-우ㄹ까요다이? 내가 가-끼요다리? 내도 묵-우깨요다이?/-어끼요다이? 아) -네마, -제마, -고마 등 와, 인자 오-네마? 저기(저적이) 머언고 가 보-제마? 지금 머 허-네마? 너개 허-제마? 이거(이것이) 머었-고마?(무엇인가?) 3 명 령 형 가) -라(이), - 아/어 라(이), -니라이, -거라이, -오라이 등 쌕이 헤-라(이).

283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69 쌕이 묵-어라(이) 조심시리 헤-라이. 잘 가-아라이. 시험 잘 처-라이. 순이가 몬제 허-거라이. 마엄얼(마음을) 독하게 묵-어라이. 상열이 밥 많이 조-오라이(주어라). 나) - 게/개 이, -게요이 등 아거바(결혼한 자기 아들의 호칭) 잘 가-게이. 이분에게 잘 허-게요이. 갔다 또 오-개이. 찬찬히(천천히) 많이 묵-게요이. 다) -라캐도(이), -라캐도다, -(우)라캐도다, -(우)라쿵깨다 등 이건 네가 허-라캐도(이). 아제가 묵-우라케도다, / -우라쿵깨다. 문 좀 여-라쿵깨다. 아제가 허-라캐도다. 4 청 유 형 가) -가이, -재, -세이 등 기겅(구경)하고 가-자이. 내랑 같이 허-세이. 내랑 같이 묵-자이. 나) -다그제이, -ㄴ다그재이 등 정말로 그렇-다그제이. 참 못뎃-다그재이.

284 1470 남해군지 꼭 그렇-다그제이/재이. 늘 욕만 허-ㄴ다그제이/재이. 다) -자마 노리(노루) 자부로 가-자마. 내랑 같이 가-자마. 내랑 같이 허-자마. 라) -다쿠자이, -다쿠세아 -ㄴ다쿠자이, -ㄴ다쿠세이, -(ㄹ)끼라쿠자이, -(ㄹ)끼라 쿠세 이, -ㄴ다쿠자마, -(ㄹ)끼라쿠자마 등 내하고 같이 허-ㄴ다쿠자이. 내랑 네랑 헸-다쿠세이. 우리가 허-ㄹ끼라쿠자이 우리가 허-ㄴ다쿠자마. 우리가 묵-(우)끼라쿠자마. 꼭 보았-다쿠자이. 많이 묵었-다쿠세이. 다. 연 결 어 미 1 구 속 형 -몬, -(우)몬, -(우)이, -(우)ㄴ깨내, -(우)ㄴ깨, -(우)깨 등 우리 한물지-몬 바래가세이 손님이 다 차-몬 떠나갑니다이. 네가 몬재 묵-우몬 나도 묵는다(이). 네가 묵-우이 나도 안 묵었나마. 네가 묵-운깨내 가아도(그도) 묵더라이. 그 사람이 묵-우ㄴ깨 나도 묵었제. 네넌(너는) 밤만 묵-우몬 모실 메더라이.

285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방 임 형 - ㄴ/넌 다캐도, - ㄴ/넌 다마넌, -제마넌, - 아/어 도 등 내가 허-ㄴ다캐도 나넌 몰라. 자네가 묵-넌다캐도 나넌 안 묵는다이. 너넌 가-ㄴ다마넌 나는 안 간다. 너넌 묵-는다마넌 나넌 안 묵는다이. 너넌 허-제마넌 나넌 못해. 순이넌 놀-아도 영수는 부지런히 일헌다이. 자네넌 많이 묵-어도 나넌 못 묵네이. 3 나 형 형 -몬서, -(우)멘서, -(우)고, - 아/어 가아 등 나는 걸어 가-몬서 이바구도 했다. 순이넌 밥얼 묵-우멘서 책얼 보더라이. 산은 높-우고, 물은 지푸더라이. 게기럴(생선을) 낚-아가아 집으로 가더라이. -아가아/ -어가아 는 -아서/ -어서 에 맞서는 말이다. 4 설 명 형 -넌대, -(우)ㄹ라쿠니, -(우)라쿵깨, -ㄴ깨, -(우)이 등 동쪽에 헤가 돋-넌대(이), 처엄에는 뿌연 빛깔이 깔리더라이. 바람이 쌔기 부-넌대(이), 막 종우가 날리더라이. 내가 가-ㄹ라쿠니, 움매가 쎄기 안오나이. 내가 묵-우라쿵깨, 못 묵우라 허네이. 그 사람이 산에서 내려 오-ㄴ깨, 지게를 지고 갑디다이. 껌은 구름이 사방에서 모이드-ㄴ깨 금시로 소내기가 옵디다이. 자시(자세히) 보-이, 자기 아이가(아닌가). 내가 밥얼 묵-우이 순이가 오데이다. 5 비 교 형

286 1472 남해군지 -매 자네가 그리 하-매 더군다나 넘이야 말헐 것도 있는가? -매 는 조사가 아닌 어미로서 표준어의 -거든 에 맞서는 말이다. 6 선 택 형 -던가, -던지 등 내가 밥얼 묵-던가, 죽을 묵-던가 상관허지 마라이. 넘이사 가-던지, 말-던지, 무신 상관이요. 7 중 단 형 -더가, -다 등 어제넌 죽얼 묵-더가, 오널은 밥을 묵었다이. 학교에 가-더가, 뜻밖에 돈을 주었다. 나넌 앞에서 죽었-다가 살아 났다이. 가거던 오래 끌-다 오지 말고 쎄기오니라이. 이 일얼 열심히 허-다 그만 돗다. 8 익 심 형 -(우)ㄹ수로 날이 가-ㄹ수로 치버지네이(추워진다). 억지로 묵-우ㄹ수로 입맛은 떨어지네다. 시집은 살아 가-ㄹ수로 고생만 많네이. 일이 허-ㄹ수로 끝이 음네요. 9 의 도 형 -(우)ㄹ락고, -작고 등 순이가 오널 오-ㄹ락고 헌다요. 순이가 몬재 묵-우ㄹ라고 허데이다. 곧 가-ㄹ락고 허더라이. 죽-작고 허니 뒤가 도라벤다.

287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73 사업이나 허-작고 허니 돈이 있어야지 말-작고 했더니 친구가 권하고 10 목 적 형 -(우)로 아부지넌 갓에(산에) 나무 허-로 갑니다요. 그만허고, 밥 묵-우로 가세이. 그만 자고 논메-로 가자이. 눈이 온깨 꿍잡-우로 가자이. 11 도 급 형 -두로 지난 밤은 밤새-두로 비가 왔다요. 시간에 늦지 않-두로 쎄기 오니라이. -두로 는 표준어의 -두로 에 맞서는 말이다. 그 외 연발형, 첨가형, 반복형 등은 표준어와 비슷하고 큰 차이가 없으므로 생략한 다. 3) 남해 사투리 사전 남해의 방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큰 획을 만든 것은 남해사투리 사전 의 발간일 것이 다. 남해신문사의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 받아 그 동안 모아 온 남해의 순수 사투리를 집 대성하여 김종도(수필가, 전 초등학교장)와 김우태(시인, 전 남해신문 편집국장)의 공저( 共 著 ), 박인권(전 동주대학 교수)의 감수로 2005년 12월에 첫 발행하였다. 서문에서 밝혔듯이 이 시대가 지나가면 영원히 없어질 귀중한 자료들을 한데 모았다는데 의미를 두며 그후 독자 들의 요구에 의하여 개인 사비를 들여 재 발간하였고, 김종도 저자는 군내 전 읍.면 및 자연 부락에 300여부를 기증하였으며, 군내 각 초. 중. 고. 대학에도 무료 배부하였다. 그 체제를 보면 제1부는 책을 만든 의미와 용어의 정의, 이론적 배경을 실었고, 제2부에 서는 남해말의 특징을 하나하나 예를 들어가면서 설명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제3부에 있 는 낱말인데 약 3,500개의 낱말에 하나하나 예문을 들어가면서 설명하여 특히 출향인사들

288 1474 남해군지 에게 향수를 달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부록으로 남해의 속어, 속담과 알기 쉬운 사투리 도표도 만들었으며, 우리고장의 재미있는 마을 이름과 참고로 유의양의 남해문견 록 도 실어져 있다. 참 고 문 헌 문신수, 세계문예대사전(상하권) : 성문각 1975 김병걸, 한국문학대사전, 서울 : 문원각 1973 이재철, 세계아동문학사전, 서울 : 배영사 1989 권영민, 한국현대문인대사전(상하권), 서울 : 아세아문화사 1991 이홍식, 새 국사사전, 서울 : 교학사 1985 이청기, 사향록, 서울 : 남해향토문화연구회 1984 김기동, 한국고대소설개론, 서울 : 대창문화사 1956 박성의, 김만중 구운몽, 사씨남정기 서울 : 정음사 1964 김만중, 구운몽, 서울 : 문공사 1983 김계원, 나의 생각, 서울 : 배영사 1969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남해지부, 남해(회지 창간호), 프린트판 1963 김면익, 자암집, 필사본 1959 남해문화원, 남해문화(제2집) 1986 남해초등학교 연혁지 및 이력서철 남해문학회, 남해문학, 부산 : 동백출판사, 84창간호, 87제2호, 89제3호 김형주, 남해지방의 방언, 남해방언의 조어법 연구(합성어를 중심으로) 1979 본문에 예시된 문인들의 개인별 저서와 신문 잡지 기타의 참고 자료는 생략함.

289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75 제4장 미술 1. 개요 미술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방법에 있어서 시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예술이다. 우리나라 미술의 맥은 인류의 삶과 함께 시작했으며, 선사시대의 토기에서 고려시대 고려자기와 조선 시대의 조선백자 등으로 이어 왔다고 할 수 있다. 3.1운동을 계기로 우리나라 미술은 정치 적으로는 반일 투쟁으로 표면화되었다. 이때부터 유럽 근대미술과 접하게 되었고 전람회도 생기게 되었고, 민간전으로 조선서화협회전(약칭 협전)와 관전인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 전)가 시작되었다. 협전( 協 展 )은 한국인으로 조직되었으므로 선전( 鮮 展 )과 대치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에는 선전( 鮮 展 )과 대결할 만한 다른 권위 있는 민간전이 없었고, 민족 미술가들만의 협 전은 여러 형편으로 선전과의 대결이 불가능하였다. 뿐만 아니라 어떤 강력한 재야 작가들 의 집단적 움직임이 따로 존재하지도 못하던 시대였다. 그런 판국에 민족지들을 포함한 모 든 매스컴과 세론이 무조건 선전의 권유를 과장해서 선전해 주는 보도를 일삼음으로서 갈수 록 조장되고 있었다. 선전을 외면하고, 의연한 민족적 긍지로 협전에만 열심히 협력한 작가 는 극히 드물었고, 협전은 1936년 15회전을 끝으로 와해되었다. 초기 선전은 1부 동양화, 2부 서양화 조각, 3부 서( 書 )로 하여 일반 및 학생들의 출품작 들을 심사, 진열함에 있어서 입선과 1 4등의 시상제도로 운영되었다. 심사위원의 작품과 특정 작품의 참고, 특별 진열도 병행되었고, 사군자는 처음에 동양화부에 포함시켰다가 나 중에 서부( 書 部 )로 가져갔다. 선전 출품자가 처음부터 조선인과 일본인의 총합이었고 선전에서의 비율은 일본인이 압도 적으로 많았으며, 특히 서양화부에서는 완전히 일본인의 무대나 다름없었다. 초기 선전에서는 몇몇 조선인을 서화계 인사로 심사위원에 끼었으나 그것은 동양화부와 서부에 한해서였다. 그리고 조선인 심사위원들의 참여란 동양화부에선 서양협회의 중심인사 가 일본인 주심밑에서 부심격으로 총독부의 정치적 배려로 위촉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290 1476 남해군지 그 후 민간 작은 단체가 생겼으나 관전인 선전만이 그 맥을 이어 왔다. 선전은 년간 23회전을 끝으로 8.15해방과 더불어 사라졌다. 오늘날에도 식민지 시대의 선전과 망령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 망령에게 입을 벌리게 하는 작가들은 선전에서의 조선총독상 수상 경력을 마치 해방 후인 국전인 대통령 상 수상과 똑같은 영광의 기록으로 말하려 드는 것이다. 8.15해방 직후에는 동양화의 후 소회( 後 素 會 ), 청전화숙전( 靑 田 畵 塾 展 ), 서양화의 신미술작가협회가 겨우 신진미술가의 명 맥을 보여 주었다. 즉 민족의 독립과 경제적 토대 없이는 미술도 성장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는 미술의 범위가 동양화, 서양화, 조작, 소조, 공예, 서예, 건축, 사진 예술에 까지 다양하게 분류되고, 다시 세분화 되고 있다. 2. 남해미술의 여명 남해군은 석불과 석탑, 부도를 비롯한 화방사, 용문사의 대웅전의 고건축물과 상주리 석 각등의 고미술 작품들이 많이 산재하고 있다. 특히 조선 중종 때 한림학사인 주세붕 선생의 유홍문상금산( 由 虹 門 上 錦 山 이 금산 문 장암에 새겨진 각자와 제각과 용연위에 위치한 용문사의 대웅전에는 사찰 이름을 따라 용머 리 조각이 많이 붙어 더욱 웅장하고 화려함을 느끼게 하고 있다. 3. 남해의 미술작가 1) 화가 (1) 이준(남해읍) 1935년 일본 태평양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이대미대부교수, 이대서양학과교수, 이대미대 학장, 88년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세계미술제 운영위원장을 역임하였고, 제2회 국전에 서 대통령상(작품 : 만추)을 수상하였고, 또한 국민훈장 동백장, 3.1문화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홍익대 대학원 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2) 김봉기(고현면) 제13회 국전에서 대통령상(작품 : 과수원 풍경의 풍년)을 수상하였고, 현재 미국에 거주하

291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77 고 있다. (3) 이문성(남해미술교육연구회 회장) 남해미술교육연구회는 15명으로 조직되어 있다. 각급 학교 교내 미술전람회 개최 권장, 군내 각종 전람회 및 학생 미술 실기대회 적극 참여, 화전문화제 회원 전시회 활동 등으로 지역미술 발전에 정진하고 있다. 그 외 많은 미술인들이 군 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다. 2) 사진작가 (1) 강희옥(이동면) 사진 동호인들의 군내에서의 활동도 돋보인다. 1957년 제8회 독립기념 촬영대회에서 입 상을 계기로 개천예술제 특상, 1968년 국전 입선 등 56회 입상, 입선을 한 바 있으며, 여수 진남제(호남촬영대회) 심사위원을 역임한바 있고, 대표작으로 물레 협력 벽 등의 작품을 남겼다. (2) 이중문(남해읍) 제1회 개천예술제(1963년) 진부 행사에서 초대작가를 역임하였고, 제1회 경남도 주최 관 광사진 및 포스타 현상 모집에서 사진부 특선을 수상하는 등 수상경력이 많다. 대표작으로 목섬전경 다도해 한려수도의 석양 등의 작품을 남겼으며, 우리나라의 저명한 관 광풍경, 명승고적, 새마을 사업의 사진을 35미리 슬라이드로 엮어 자비( 自 費 )로 도일( 渡 日 ) 하여 재일동포에게 고국의 참모습을 보여주고 고국을 방문케 한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3) 이우홍(남해읍) 1986년 동아사진전에서 동상을 입선하였고, 대표작으로 적해 등의 작품을 남겼다. (4) 김창수(서면) 1957년 개천예술제에서 특상을 수상하는 등 수상경력이 많다. (5) 이준호

292 1478 남해군지 교사사진연구회 회장으며, 화전문화제행사, 회원전시회를 갖는 등 군 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다. (6) 정금호 (7) 박대업 (8) 김근중 3) 서예가 (1) 김용옥(상주면) 1914년 상주에서 태어나 1998년 별세하였다. 그의 독특한 필정으로 수차에 걸쳐 개인 서 예전을 개최하여 국내는 물론, 일본( 日 本 ), 중국, 미국에까지 명성을 떨치고 있다. 수상으로 는 일본시사문화상, 제18회 눌원문화상, 중화민국 국민장영예장, 중화민국 명인서법석걸패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주해동몽선습, 천자문행서정선, 중국서제서전, 성경금구서전 등이 있다. 한국서도협회 명예회장, 한국서예교류협회 부회장, 국제종합예술진흥회 명예회장을 역임했다. (2) 이삼표(남면) 1981년 전국서도민전입선 계기로 1985년 서울미술제 특선, 1986년 한국전통서예대상전 은상, 전국예술문화대전 금상, 특선 3회 등 수상경력이 많다. 현 남해전화국에 근무하고 있 으며, 남해서도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남해군민헌장 및 자연보호헌장의 글귀는 이삼표 의 필적이다. (3) 이성숙(이동면) 서예에 능하여 해서, 초서, 전서, 예서 등에 능하여, 전국 서예대회에서 입상을 수차례 하 였으며, 경남 서예협회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 남해서도회( 南 海 書 道 會 )를 다년간 운영하 였으며, 많은 서도인을 배출하였다

293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79 (4) 한석현(남해읍) 1981년 부산, 경남서도민전, 1986년 전국예술문화대전 입선 등을 수상하였으며, 남해문 화원장으로 역임하였다. (5) 채현표(고현면) 1973년 경남도교육위원회서예전에 입선하는 등 수상경력이 많으며, 현 화전이우회 회장 으로 재직하였다. (6) 윤효중( 作 故 ), 윤기섭(설천면 作 故 ) 우리고장의 이름난 선필이며, 특히 윤효중은 조선환여승람에 선필로 해서, 초서, 전서, 예 서 어느 것에도 정통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7) 김준기(상주면) 1940년 상주에서 묵해 김용욱의 아들로 부산에서 태어나1995년 한국예술상을 수상하였 다. 대한민국 서예대전 지도자상, 한국 문화예술상 등 수상하였고, 전국서예실기대회 심사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2004년 자랑스런 문화시민대상, 제13회 전국 서예휘호대회 심사위 원 역임하기도 했다. (8) 최민렬(남해읍) 1967년 남해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93년 동아미술제 동아미술상, 2005년 서울 서 예 비엔날레 인기상, 경기미술상, 중부일보 문화상 등을 수상하였다. 세계서예전북비엔날 레, 전라북도 미술대전, 강원도 미술대전, 경상북도 미;술대전, 대한민국 한글 서예대전 등 에서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 2006년 경향신문 주관 고뇌하는 한국서예가 100인전 에 초대 받은 그의 독특한 서체는 그의 호를 따서 밀물풍 한글꼴로 불리고 있다.. 4. 단체 1) 남해서도회

294 1480 남해군지 남해서도회(회장 박민주)는 29명으로 조직되어 있다. 1975년에 창립되어 매년 화전문화 제 행사에 서도전시회 및 서도대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남해 문화의 날 행사에 서예대회를 주관하고 있다. 1992년도에는 회원작품을 군내 읍면에 순회 전시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 외 많은 서도인들이 군 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다. 현재 군내에는 서예학원이 1개소가 있 다. (1) 연혁 남해서도회 창립 서도회 부설 남해서예학원 개원 제1회 서예전시회 개최 (매년 개최) 남해서도회 후원 이성숙 선생 서예전 개최 남해문화의 날 서도대회 남해군립도서관 주부서예교실 후원 충무공 노량해전 승첩제 전국 휘호대회 ~2009 남해문화의 날 서예대회 주관 ~2009 서예전시회 개최 년 경상남도 문화예술활동 우수단체상 수상 (2) 조직 고 문 회 장 총 무 비 고 하 종 현 박 민 주 박 근 규 회원 : 16 명 (3) 실적 서예전 27회 외 화전문화제, 문화의 날, 노량 승첩제 행사시에는 서예대회 및 휘호 대 회 를 주관하고 있다. 2) 남해미술교육연구회 남해군내 초.중등 학교에 근무하는 미술교사 및 향토출신 작가들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295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81 모임으로 1987년 12월 23일 창립 회원전 개최를 계기로 남해에서는 최초로 순수미술 연구 단체로 출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고, 남해 문화의 질적 향상은 물론 후진 양성과 작품 활동 을 통하여 향토문화 발전에 도움을 주고 있다. (1) 연혁 제1대 회장 이처기 취임 제2대 회장 박춘수 취임 경상남도 중. 고등학생 종합 미술 실기대회 개최 ~ 1998 남해 군민의 날 및 화전문화제 전시회 개최 제3대 회장 이문성 취임 년 영호남 교류전 6회 개최 제4대 회장 백종기 취임 화전문화제기획 남해현대미술페스티벌(작가 50여명 참여) (2) 주요활동 - 회원간의 상호 친목 및 정보 교환 - 학교 교육의 충실, 후진 양성을 위한 미술부의 활성화 - 군내 각종 실기대회 운영 및 심사 - 향토 문화 발전을 위한 노력 (3) 주요실적 제1회(1987년)부터 현재까지 11회의 회원전을 남해군 군민의 날 화전문화제 행상의 일 환으로 전시회를 개최하였고, 89년에는 본회에서 경남 학생 종합 미술 실기대회를 유치하였 으며, 매년 4월 남해문화원이 주최하고, 본회에서 주관하여 남해 문화의 날 초, 중등학생 사 생대회를 개최하여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으며, 꾸준한 연구 활동을 통하여 1995년 홍민표 (해성중 근무), 권영석(서면중 근무) 회원이 경남 예술회관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현재까 지 6회에 걸쳐 백종기(해성고등학교 교사) 회원이 서울 및 경남예술회관, 남해문화체육센타 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1998년부터 영호남 교류 전 차원에서 섬진강을 끼고 있는 남해(남해 미술교육연구회 - 회장 이문성), 하동(하동미술동우회 - 회장 오원동), 광양시(광양미술협 회 - 회장 김선영)와 3개 시,군이 6회에 걸쳐 전시회를 가져 지역 향토 문화에 발전을 이바

296 1482 남해군지 지하고 있다. 이후 2005년부터 화전문화제 행사기간 중 전국 각지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현대미술 작가들을 초대하여 남해 현대미술페스티벌이라는 이름을 걸고 설치미술과 같이 전 시를 추진하고 있다. 3) 남해사진동우회 1991년 3월 10일 배명신을 초대회장으로 남해 사진동우회를 결성하였다. 15회에 걸쳐 사 진동우회 전시전을 열었으며, 현재 김강중이 회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8명의 회원이 작품활 동을 하고 있다. 4) 기타 단체 연번 기 관 및 단 체 명 대표자 주 소 전화번호 1 화 전 이 우 회 김정윤 강정규 고현면 도마리 도산 2 남 해 시 우 회 고용윤 서면 노구리 묵 병 회 박홍빈 남해읍 북변리 남해미술교육연구회 백종기 해성고등학교 5 바람흔적미술관 최영호 삼동면 봉화리 내산 마르소 5번가 박영희 이동면 다정리

297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83 제5장 음악 1. 개요 삼국이전의 음악이 어떤 행태인지는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마을 사람들이 모여 노래와 춤 을 즐기는 원시종합예술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연중행사로서 일정한 시기를 가리어 노래와 춤으로써 하늘을 섬기는 풍습이었다. 부여는 은정월, 고구려와 동예는 10월에 각각 제천의식을 가졌는데 이때에는 온 마을의 남녀노소가 한데 모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래하고, 춤추고, 술을 마시며 즐겼다고 한다. 이 모임을 부여는 영고, 고구려는 동맹, 동예는 무천이라고 각각 이름 하였다. 삼한에서는 늘 5월에 씨를 뿌리고 나면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사람이 무리를 지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술을 마시면서 밤낮을 쉬지 않았다고 한다. 그 춤은 10여명이 일제히 시작하여 서로 따르면서 땅을 높게, 낮게 밟기도 하는데 손과 발이 서로 박자에 잘 맞으므로 탁무( 鐸 舞 )와 비슷한데가 있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은 국중 대회였다. 이 굿의 주제자( 主 祭 者 )는 무격이었을 것이다. 변한과 진한은 법속( 法 俗 )이 마한과 다름이 없으나, 특히 변한과 진한에는 현악기가 있었 다는 기록을 삼국지 동이전에 찾아 볼 수 있다. 신라 제2대 남해왕( 南 解 王 ) 2년(6) 봄에 시조묘를 세웠는데 그 주제자가 남해왕의 여동생 인 아로였다. 남해왕은 차차웅이라고 하였는데, 차차웅은 무( 巫 )의 뜻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세종실록과 세조실록에 전하는 악보보다 더 오래된 악보는 아직까지 발견 되지 않고 있다. 증보( 增 補 ) 이전의 음악사는 고려 이전은 문헌중심의 정리가 되어 있었고, 조선에서는 문헌을 배경 악보를 통하여 본 실제 음악의 소장에 주안점을 두었다. 조선후기에는 가곡, 가사, 시조를 비롯하여 판소리 등의 음악이 대두하여 19세기 무렵 전 성기를 이루었으며, 아울러 산조, 잡가 등의 음악이 마치 부챗살과 같이 벌어져 각각 그 특 징을 부각시키며, 차차 틀이 잡혔다. 우리나라 고유의 현악기에는 가야국의 가야금과 고구려의 거문고를 들 수 있다. 거문고는

298 1484 남해군지 고구려에서 통일신라 이후에 전해졌으므로 통일신라 이전의 현악기는 가야금으로 지목된다. 대체로 고구려 악은 북조의 서량기와 비교되고, 백제악은 남조의 청악과 맥락을 같이한 듯 하다. 554년 백제에서 악인을 일본에 파견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신라는 통일 신라 이전 각 부족들의 의례적인 족신제 등에 쓰이던 음악과 화랑도의 활동에 반영된 음악 및 개인의 창착 곡 등이 있다. 경남은 우리나라의 성성( 聲 聖 )인 가야의 우륵이 탄생 활동한 곳으로 우리나라 어느 지역보 다 예술에 대한 감수성이 예민한 지역으로 본다. 이러한 지역적인 배경에 따라 특정적인 문 화의 뿌리를 갖고 있다. 도청을 중심으로 한 마산권은 양악, 서부지역인 진주권은 전통음악, 한려수도를 대표하는 충무지역은 전통 민속놀이 음악을 중심으로 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2. 남해의 우리음악 1) 국악 우리 고장에는 국악에 대한 인식도가 낮고, 그 동안 지도할 지도자가 전무한 상태에서 일 부 판소리가 전해오고 있었다. (1) 문혜란 (국악인) 1990년대 말 남해전문대 교수의 부인인 문혜란은 남해농업협동조합 2층에서 몇 명의 문 하생을 모아 가야금 지도를 했으며. 그 후 남해문화학교에서 지도하였다. (2) 박채란 (국악인) 2003년 8월 박채란은 박채란국악연구소 를 개설하였으며, 각종 행사시 가야금 병 창을 공연하면서 외연을 확대하고 있는 실정이다. 박채란은 매년 박채란 국악무대 를 열 고, 일본 공연을 주관하였으며, 현재는 주부반 10여명과 학생반 10여명을 지도하고 주부반, 학생반을 지도하여 개천예술제등 각종 대회에 해매다 입상하는 등 좋은 성과를 올리고 있 다.

299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85 (3) 노경미 (국악인) 서면 노구 출신이며 1952년생으로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졸업,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이수, 서울시문화재 제21호 휘몰이잡가 전수자이다. 현재 사단법인 한국전통민요 협회 파주시 지부장이며 제25회 전주 새사습 민요부 장원, 전국 경서도 민요경창대회 제5회 명창부 대상수상, 맑은 소리샘 국악 연구소 원장(현), 서울 국악예술고등학교 출강하고 있 다. (4) 손심심, 김준호 (국악인) 남면 가천 출신이며 동래 학춤 이수자로 선정되었고, 현재 KBS 6시 내고향 금요일 고향 노래방 MC로 활동하면서 남편인 김준호와 함께 국악활동을 하고 있다. (5) 최낙영, 장영자 (국악인) 최낙영은 부산 출신 한국국악교육원 교육국장이며, 준 문화재인 양승열 선생에게서 호남 우도 농악을 배우고 있으며, 부인 장영자는 판소리를 배우는 국악인으로 현재 남해에서 활 동하고 있다. (6) 조애란 (국악인) 삼동면 양아금 출신으로 현재 청주 놀이 마당인 울림 에서 판소리로 활동하고 있으며, 2000년도에는 남해문화체육센터에서 완창발표회도 가진바 있다. 경주 정순임 선생에게서 사사 받았다. 2) 농악 남해군의 음악은 경남의 서부지역인 진주권에 속하나 옛날 관문인 평산현과 인접한 여수, 순천, 남원 등지에서 전수되었거나 노량의 관문과 인접한 진주, 창선과 인접한 삼천포 등지 에서 접목 되었다고 유추해 볼 수 있다. 또한 남해는 유배지였던 관계로 민속놀이 등은 중앙 놀이와 닮은 데가 많다고 민속예술경연대회 참가 시 평을 받았다. 사면이 바다인 남해는 민 요악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1) 화전농악

300 1486 남해군지 남해의 농악은 화전농악에 그 맥락을 이어 오고 있는데, 개천예술제, 도 민속경연 대회에 출전하여 입상하였으며, 특히 제42회(1992)개천예술제에 참가하여 영예의 대상을 수상하였 다. 화전농악 은 한점식(남면 作 故 )에 의해 그 맥락을 이어오다 전찬기(서면)에 전수, 박 희오에 전수되어 오고 있다. 박희오는 제24회(1992년) 도 민속경연대회 농악상쇠부문에서 개인상을 수상하였고, 신황민(남해읍 作 故 )는 제25회(1974년) 개천예술제에서 지도상 1위 를 수상하였다. 3) 시조창 (1) 서현숙(남해읍) 부산전국시조경창대회(1961년) 입상, 백제문화제(1986년) 대상(대통령상)을 수상하는 등 전국시조경창대회 등에서 수상경력이 많으며, 1986년부터 전국시조경창대회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특기는 지름시조이다. (2) 박춘영(남해읍) 전국예약시조부문 상임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3) 허순동(남해읍) 시우회 회장으로서 화전이우회에서 율창을 지도하고 있다. (4) 이정표(서면) 제12회 한려문화제(1988)에서 시조경창대회 특부 1등을 수상하였다. 그 외 많은 본고장 시조인들의 활동이 있다. 3. 남해의 서양음악 1) 성악 (1) 강윤철(설천면) 제40회 개천예술제(1990) 성악경연대회 최우수상을 수상, 남해 어머니 합창단 을 창

301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87 단,. 마산시립합창단 단원, 남해어머니 합창단 창단, 남해어린이 합창단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남해여자 고등학교 음악교사로 재직하였다. 2) 합창단 (1) 보물섬 남해 군립합창단 남해문화원에서 운영하고 있는 보물섬 남해군립합창단은 2007년 3월 27일 창단식을 갖고 2007년 10월 26일 화전문화제 처녀출연과 함께 3 1절 기념식 광복절 기 념행사, 보물섬 마늘축제 군민을 위한 신년음악회 등 다양한 군내 문화예술행사에 출연하고 있으며, 지휘자 양성욱, 부지휘자 오환용, 반주자 김미연, 단무장 이수자외 단원 30여명이 활동하고 있다 (2) 남해시대합창단 3) 관악 (1) 윈드오케스트라 관악단 1996년 남해초등하교 김정현 교장이 관악부를 창단하였으며, 개천예술제,대한민국 관악 합주대회,와룡문화제 등에 다수 입상하였다. 현재 김태정교장, 임재효단장, 60여명의 학생 들을 단원으로 매년 12월 정기 연주회를 하고 있으며 지역문화축제에도 참여하고있다. 4. 대중음악 (1) 고재억(가수) 제2회 남인수가요제(1992)에 참가하여 은상을 수상하였고, 제3회 남인수가요제(1993) 창 작부문에 장대비 를 불러 대상을 수상하였다. 발표곡은 고재억 애향곡집(남해연가외 11 곡), 뽕작당신(원점외 17곡)과 대상곡인 장대비 를 서두로 한 디스크(C D)를 제작하여

302 1488 남해군지 많은 음악애호가들이 애창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의 예명은 남해일이다. (2) 이정수(작곡가) 5. 기타 음악단체 번 호 단 체 명 회 장 회원수 비고 1 국악동우회 김 봉 문 19 2 화전민속악연구회 박 영 인 8 3 화전농악대표단 박 희 오 35 4 남해군음악협회 하 미 자 12 5 남해음악교사회 강 상 용 15 6 다물패사물놀이 김 광 준 19 7 남해군음악협회 하 미 자

303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89 제6장 문화예술단체 1. 남해문화원 남해문화원은 지방문화원진흥법 제4조 제1항의 설립근거를 두고 이 법은 문화원의 설 립 운영 및 지원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여 지방문화원을 건전하게 육성 발전시킴으로써 지역문화를 균형있게 문화를 진흥시키는데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향토문화조사 연구사업 (고유문화의 계발 보급 보존 전승 및 선양, 향토사의 발굴 조사 연구 및 자료수 집 보존), 지역축제 개발 육성사업(문화행사개최 문화의 자료수집 보존 및 보급), 주민 문화의식 함양사업(문화에 대한 사회교육사업), 환경보존 등 지역사회발전을 위한 문화활동 사업(지역전통문화의 국 내외교류, 문화창달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1965년 2월 25일 전 직언론인 유지 등의 발의로 각급기관장 등 4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 1965년 3월 10일 설립허가등기를 하였다. 문화원 창립을 계기로 남해군의 후원 하에 남해사회단체협의회와 뜻을 모아 각종 문화행 사를 전개하여 문화의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남해문화원은 부설 향토사연구소, 남해문화학 교, 다문화가족지원센터, 보물섬남해예술단, 군립합창단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1994년 7월 8일 지방문화원 진흥법에 의하여 특별법인으로 재인가 하였고, 1998년 3월 6일 문화예술진 흥법 제14조에 의거 문화관광부장관의 승인을 받아 제1기 문화학교를 개강하여 현재 제13 기 문화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1999년 12월 24일 남해군 남해읍 차산리 760번지 일원에 건축면적 2,023.5m2에 약 40억(문화원출연 2억8천만원)의 건축비를 들여 문화체육센터를 완공하여 이곳으로 이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1) 연혁 년 2월25일 초대 장정백 원장 취임 사단법인 남해문화원으로 설립등기

304 1490 남해군지 년 7월30일 제2대 안주봉 원장 취임 년 3월10일 제3대 장대우 원장 취임 년11월15일 개천예술제 전국농악경연대회 우수상 수상 후 전국대회에서 3회수상 년 8월15일 제4대 이찬우 원장 취임 년 9월11일 제5대 한남종 원장 취임 년 7월30일 단행본 남해문화 제1집 처녀 발행, 현재8집 발행 년5월3일 제6대 류정렬 원장 취임 년12월29일 정기 단행본 정대장 익환공 전기 를 비롯 8집 까지 매년 발행 년3월27일부터 1996년8월31일까지 제7-8대 한석현 원장 재임 년11월23일 남해문화원부설 향토사연구소 개소 년9월23 일 문화관광부 지방문화원설립 인가 년4월25 제1회 남해 벚꽃축제 개최 년9월6일부터 2004년 8월31일까지(제9-10대) 이동선 원장 재임 년5월24일 전국최초로 제1회 임란순국수군만인위령제봉행 및 제1회 문화의 날 행사 개최, 현재 12회째 개최 년 9월8일 남해문화원 남해문화학교인가(문광부장관 승인) 제1기부터 시작 제12 기 문화학교수료(18개 교실 운영) 년 9월22일 상주면 벽련리 노도 서포 김만중 유허의 현판, 안내판, 진입로 등 개설 년 9월 26일 팔만대장경 판각 학술세미나 개최(군청회의실) 년 3월 1일 3.1절 기념행사 남산 3.1기념탑 봉행, 현재 설천면왕지 3 1운동발상 지에서 군민합동기념 행사로 발족 년3월16일 이충무공순국 400주년 추모학술세미나개최(군청회의실) 년10월26일 남해 군민기원제를 문화원에서 인수 봉행 연례행사로 실시 년12월24일 문화원사건립비 2억8천만원을 문화체육센터 건립비로 이전 년11월29일 제3회 전국 문화 기반조성 평가에서 문광부장관 장려상을 수상 년 3월31일 남해문화유적지 발간 년 5월 1일 망운산철쭉제 봉행 3회 실시 년 2월10일 남해인사록 발간 년 3월 5일 고서속의 남해사료 발간 년 4월 26일 이충무공 성수채수 봉송헌정식을 남해문화원과 아산시번영회

305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491 공동주관으로 매년 개최 현재 12회 개최 년 9월 1일 제11대 이호균원장 취임 년 12월 25일 남해문화저널 8집 발간 년 12월 30일 남해현읍지 발간 년 2월 15일 한국문화원연합회 운영위원 선정(이호균원장) 년 10월 24일 남해문화원 부산진문화원 자매결연체결 년 12월 26일 남해문화저널 9집 발간 년 1월 24일 내고장역사 인물 현판식 매년 2명 선정 현재 12 人 설치 년 3월 28일 남해군립합창단 창단식 년 4월 17일 남해문화원 부산진문화원 문화교류 년 9월 6일 경상남도지사배 사투리 웅변경연대회 동상 수상 년 10월 15일 경상남도지사배 문화예술단체상 수상 년 12월 14일 제10기 남해문화학교 392명수료(연인원2,523명) 년 12월 31일 8962부대 2대대 장병위문공연, 현재 2회째 실시 년 1월 30일 보물섬 남해예술단 정기공연(합창단 팝재즈오케스트라 등) 년 4월 26일 함평나비세계곤충엑스포 우정의 날 축하공연(보물섬남해예술단) 년 5월 20일 제12회 남해문화의 날 개최 년 8월 12일 대한민국관광문화서비스대상 혁신문화진흥사업 大 賞 수상(이호균 원장) 년 9월 1일 제12대 이호균원장 취임(재임) 년 9월 8일 국회 인권위원회 결혼이민여성인권보호 정책토론회패널(이호균원장) 년 11월 1일 남해문화원 8962부대 남해대대 자매결연 년 12월 20일 다문화가족사업 문화관광체육부장관상 수상(하희숙사무국장) 년 5월 20일 다문화가족지원사업 국무총리상 수상(남해문화원) 2) 주요사업 지역문화 조사ㆍ연구사업 1) 향토사료의 수집, 보존, 발표 - 매향암각비 건립

306 1492 남해군지 - 내 고장 역사인물 현판 건립 - 팔만대장경 관련 자료 수집 - 도민속예술축제 출품작 조사(감안용신굿, 고현오곡집들이업놀이) 2) 지역주민 자긍심 및 애향심 고취 - 향토도서 발간 보급 우리문화의 세계화 촉진 1) 한ㆍ일 문화 교류 2) 중국자매도시(호남성시) 학생 한국전통문화체험 3) 중국자매도시(돈황시ㆍ익양시) 교류 한국전통예술공연 4) 동아시아 서복학술대회 학술발표 교류(한ㆍ중ㆍ일) 이호균 원장 소외계층 사업 1) 도서벽지 학생 문화체험 사업 2) 결혼이주여성 한국전통문화교육 지역주민 문화의식 함양사업 1) 문화학교를 통한 사회교육 2) 군내 학생 전통예절교육 3) 남해교육청(군내교사) 향토문화유적 특강 4) 육군 8962부대(육군장병) 향토문화유적 특강 5) 전통문화와 현대문학의 접목 정부에서 위탁한 각종 사업 1) 공모를 통한 각종 사업 - 교육과학기술부 평생학습 소외계층 프로그램 - 문화체육관광부 통합복권 기금운영사업 -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문화예술행사

307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 주요실적 도 민속예술제, 개천예술제 화전농악 대상 수상 문화관광부장관 승인 문화학교 등록 및 운영 팔만대장경 학술 세미나 개최 남해군민 기원제봉행 연례행사 제3회 전국 문화 기반조성 평가에서 문광부 장관 장려상 수상 이충무공 성수채수 봉송 헌정식 남해문화원 아산시 번영회 공동주관 매년 개최 내 고장 역사인물 현판 건립(문화체육센터 앞) 매향암각비 건립(이동면 석평리) 남해문화원ㆍ부산문화원 자매결연 8962부대 제2대대(남해대대) 자매결연 경상남도지사배 문화예술단체상 수상 대한민국관광문화서비스대상 혁신문화진흥 사업 大 賞 수상(이호균원장) 다문화가족사업 문화관광체육부장관상 수상(하희숙사무국장) 다문화가족지원사업 국무총리상 수상(남해문화원) 4) 문화원 도서출판 현황 번 호 출판년도 도 서 명 남해문화(제1집) 남해문화(제2집) 남해문화(제3집) 남해문화(제4집) 정대장 익환공 전기 남해문화(제5집) 남해문화(제6집) 남해문화(제7집) 남해문화유적지 남해세시기와 민속지 사진으로보는 문화유산 문화학교 교본 1권 문화학교 교본 2권

308 1494 남해군지 가례의범 문화학교 교본 3권 향약의 대강 문화학교 교본 4권 남해인사록 문화학교 교본 5권 화전사연구 고서속의 남해사료 문화학교 교본 6권 남해문화(제8집) 문화학교 교본 7권 풀어쓴 남해읍 현지 문화학교 교본 8권 남해사투리 글짓기 공모 수상작 문화학교 교본 9권 남해문화(제9집) 문화학교 교본 10권 보물섬 남해의 동명유래집 남해문화저널(제10집) 5) 역대 문화원장 명단 성 명 재 임 기 간 주 요 실 적 초대 장 정 백 ~ 문화원 사단법인설립등기 2대 안 주 봉 ~ 대 장 대 우 ~ 개천예술제 전국농악대회우수상 전국대회3회 수상 4대 이 찬 우 ~ 대 한 남 종 ~ 남해문화 제1집 처녀발행 6대 류 정 렬 ~ 장익장 익환공 전기 발행 7대~8대 한 석 현 ~ 남해문화원부설 향토연구소개소 문화관광부 지방문화원 설립인가 9대~10대 이 동 선 ~ 문화원 문화학교 인가/문광부 장관 승인 제3회 전국문화기반조성 평가 문광부 장관 장려상

309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2대 이 호 균 ~ 현재 ㆍ자매결연 남해문화원 : 부산진문화원,8962부대2대대 남해예술단,군립합창단창단 ㆍ남해문화저널8,9,10집발행 혁신문화진흥대상 수상 국무총리표창 2. 기타 문화예술학회 1) 남해 서복회 2006년 4월 17일 박창종 등 27명의 회원들이 뜻을 모아 우리군의 역사와 문화유적을 연 구, 보존하며 후손들에게 계승하고자 남해서복회 라는 문화 학술 연구회를 창립하였다. 현재는 70여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연혁 창립총회 남해군 방문(각종 현안 논의) 임시 이사회 및 임원회의 사무실 개소(새마을회관 2층) 미조 설리 꽂이 현장 답사 서불과 남해 주제 학술심포지엄 정기총회 중국 현지 문화탐방 (2) 주요실적 2006년 9월 14일 미조 설리 꽂이 현장 답사하였으며, 2006년 10월 20일 서불과 남 해 주제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2007년 4월 10일 중국 현지 문화탐방을 하였다.

310 1496 남해군지 2) 서포 김만중선생 기념 사업회 (1) 연혁 발기인 35명 참여 확정 창립총회 개최 남해관련 서포문학의 재조명 학술대회 개최 서포 김만중선생 유허고증 및 관광자원화 기본계획 용역 (책임연구원 설성경, 선임연구원 김성철) 설천중학교 설성경 교수 초청 특강 개최 남해여중 구운몽 33권 기증 서포 김만중선생 유적지 답사 (김반, 김익겸의 묘, 창주시적공원, 긍사재,대전시민회관) 남해향토역사관에 서포 김만중 선생 영정 봉안 서포 김만중 문학세미나 참가(대전시민회관 소극장) 노도 서포초옥 건립부지 매입에 동참 유배문학 한마당 및 학술대회 개최 초대 김성철 회장, 2대 이종수 회장 이취임식 서포 김만중선생 유적지 답사 (김반, 김익겸의 묘, 연세대학교, 충곡서원, 돈암서원, 사계 김장생 선생묘) (2) 주요실적 1 남해관련 서포문학의 재조명 학술대회 - 서포 연구 대학교수 13명이 발표와 토론을 벌인 전국 최대의 학술대회 좌장으로 충남 대 사재동 교수를 비롯하여 서울대 김병국 교수, 연세대 설성경 교수, 고려대 심경화 교수, 부 산대 이헌홍교수, 인천대 우쾌제 교수, 부산교대 이신성 교수, 정의연 남해향토역사관 장 등 7명의 발표와 창원대 민긍기 교수, 대전보대 노태조 교수, 경상대 허권수 교수, 경성 대 박 정식 교수, 공주대 유병환 교수, 건국대 정운채 교수 등 6명이 지정토론자로 참석 - 발표교수들의 주제를 엮어 남해관련 서포 문학의 재조명 1,000권 발간 - 남해군을 서포문학의 성지로 확고하게 자리매김

311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서포 김만중선생 유허고증 및 관광자원화 기본계획 용역 - 고문인 연세대 설성경 교수가 책임연구원으로 김성철 회장이 선임연구원으로 서포 김 만중선생 유허 고증 및 관광자원화 기본 계획 용역을 수행하여 서포 김만중 선생을 주제로 한 관광인프라 조성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동력 제공 3 서포 김만중 선생 영정 봉안 서포 김만중 선생의 조카인 죽천 김진규가 그린 원본을 토대로 춘당 전동수 화백이 그대 로 재현한 영정을 김성철 회장의 희사금 300만원의 예산으로 구입하여 향토역사관에 봉안 4 유배문학 한마당 및 학술대회 - 유배문학 및 고소설 관련 연구 대학생과 대학원생, 소설가, 시인, 평론가등 문인들 60여 명을 대상으로 2박 3일간 남해 유배문학 한마당 및 학술대회 개최 - 진주교대 송희복 교수, 연세대 설성경 교수의 초청특강과 서포 김만중 유배지 노도 및 남해군 일원의 답사로 남해군이 진정한 유배문학의 산실임을 전국에 홍보 (3) 역대 회장 대 수 회 장 재 임 기 간 비 고 1 김 성 철 ~ 이 종 수 ~ 현재 3) 남해역사연구회 남해는 자연이 살아 숨 쉬며 천혜의 자연 경관이 한데 어우러져 옛부터 신선의 섬이라 불 리게 되어 오다가 최근에 보물섬 이라 이칭하게 되었다.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활기찬 삶을 영위하고자 노력을 하고 있으나 문명의 발달로 차츰 기계화되어 가면서 삭막한 인간세 계를 만들어 가고 있다. 남해의 역사가 다른 지역보다 특이한 점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역사문화를 하 나하나 캐어내어 다듬고 바로 정립하여 미래를 더욱 아름답게 꾸미기 위하여 이 회를 창립한 목적이라 할수 있다.

312 1498 남해군지 (1) 연혁 및 사업실적 발족 총회 초대회장 정의연 선임 정기총회(임원 선임 및 사업계획 의결) 비영리 사회단체 신고(진주세무서) 평생학습동아리 사업 수행 서포 김만중선생 입석상 제막식(용문사 입구) 이순신장군과 노량해전 발간(남해군 보조금) 제6회 이충무공노량해전승첩제 초청 강연회 개최(남해충렬사) 디지털남해문화대전 편찬 선행연구사업 계약(한국학중앙연구원) 홈페이지 개설( 남해도 유배객들 발간(남해군 보조금) 남해유배문학관 학술세미나 개최(남해스포츠파크호텔) 제7회 이충무공노량해전승첩제 해상학술발표회 개최 (2) 주요실적 2006년 4월 평생학습동아리 사업 수행, 같은 해 서포 김만중선생 입석상 제막식(용문사 입구) 이순신장군과 노량해전 발간(남해군 보조금), 제6회 이충무공노량해전승첩제 초청 강연회 개최(남해충렬사), 2007년 디지털남해문화대전 편찬 선행연구사업 계약(한국학중앙 연구원) 남해도 유배객들 발간(남해군 보조금), 남해유배문학관 학술세미나 개최(남해 스포츠파크호텔) 제7회 이충무공노량해전승첩제 해상학술발표회를 개최하였다. 4) 문화예술단체 현황 번 호 단 체 명 회 장 회원수 1 화전이우회 김 정 윤 15 2 남해시우회 차 명 훈 22 3 남해서도회 박 민 주 21 4 국악동우회 신 백 공 19 5 선구줄끗기보존회 정 군 삼 100

313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화계배선대보존회 박 기 철 30 7 화전민속악연구회 박 영 인 8 8 화전농악대표단 박 희 오 35 9 남해문학회 강 철 도 남해미술연구회 백 종 기 남해군음악협회 하 미 자 남해음악교사회 강 상 용 남해사진동우회 김 강 중 8 14 다물패 사물놀이 김 광 준 한국웅변협회남해군지부 장 행 복 화전다인회 이 소 영 남해감암용신굿보존회 김 성 중 남해사랑청년회 김 희 자 동화읽는어른모임 김 미 경 문인협회남해지부 김 경 남 남해화전분재회 김 재 열 한국다도협회남해다향지부 이 금 숙 남해묵병회 김 희 수 전통공예연구회 배 상 근 6

314 1500 남해군지 제7장 언론 출판 1. 신문 1) 우리나라 신문의 생성 우리나라 신문의 전사적( 前 史 的 ) 분류로는 조보( 朝 報 ) 또는 기별보( 寄 別 報 )를 들 수 있다. 조보는 조선 세조 때부터 승정원에서 취급했으며,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중종 15년 (1520) 사관이 이를 써서 상공 관계자에게 반포하였다는 것과 기록원을 늘리자는 기록이 있 다. 인종 때에도 이러한 기록이 보인다. 이는 승정원에서 처결된 사항을 기록 서사하여 발행 한 것으로 그 내용은 조칙(조서)을 비롯하여 장주( 章 奏 ), 묘당( 廟 堂 )의 결의사항, 서임( 敍 任 ), 사령 그리고 지방관의 장계 등이 있다. 기록서사는 기별서리가 주로 맡아 보았고, 그 배달은 육조판서의 필요에 따라 기별군사가 하루에 몇 번이고 돌렸다. 또 이것을 서울에 주재하는 경주인( 京 主 人 )들도 서사하여 각각 자기 고을에 기별하였다. 민간 최초의 조보( 朝 報 )는 선조 11년(1578)에 비롯되었다. 조정의 것과 다른 점은 인행( 印 行 - 印 刷 )으로 날마다 발행하였는 데, 이는 민간신문의 초기 형태라 보아진다. 다음으로 우리나라의 근대적 정기성을 띤 신문 으로는 1883년에 창간된 한성순보가 우리나라에서의 신문의 효시이다. 한성순보는 수신사 로 일본에 갔던 박영효가 3개월 이상 일본에 머무르면서 국민들을 계몽시켜 개화운동을 전 개하기 위해서는 신문발간이 긴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착수한 신문이다. 이 신문은 1883년 10월 1일 최초의 근대적 신문으로 비롯 정부가 발간한 관보에 가까운 것으로 순 한문으로 된 책자 형식의 체제였으나, 당시 국민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내 용은 관보와 함께 세계정세와 문명국가의 정치, 경제, 사회제도를 소개하였다. 이보다 13년 후인 1896년 4월 7일에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신문사에 신기원을 이룩한 신문이다. 이 신문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민간신문이라는 것 외에도 한글전용과 띄어쓰기 를 과감히 단행했다는 점에서 그 후의 신문제작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문학사, 국어 운동사적인 면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315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501 또한 이 신문은 그 발간의 취지나 사상, 민중계몽과 자주정신을 깨우치고, 이를 행동으로 이끌었다는 점 등에서 우리나라 근대사에 횃불과 같은 존재이다. 창간된 후 폐간까지의 약 4 년간은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개화파와 황국협회등 수구파가 격돌했고, 이런 상황에서 독 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활동을 민중 속으로 확산 시키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이 독립 신문이 창간된 1896년 4월 7일을 기념하기 위해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1957년 4월 7일 당 시의 한국 신문들이 모여 한국신문인협회를 결성하고, 4월 7일을 신문의 날 로 제정, 오 늘에 이르고 있으며, 신문윤리 요강도 그날에 제정 되었다. 1898년에 이르자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개화파들의 활동은 절정에 달했고, 그 여세로 여러 민족지들이 한꺼번에 나타났다. 매일신문, 제국신문, 황성신문 등의 일간지들이 같은 해에 창간되었고, 그때까지 격일간이던 독립신문도 일간으로 발간되었다. 1898년은 우리나 라에 본격적인 민간신문의 시대가 온 셈이었다. 독립신문은 창간 2년 후인 1898년 정부가 매수하여 1899년 12월에 폐간해 버렸다. 이들 신문들은 신문 경영면에 차이가 있었다. 독 립신문은 서재필 개인 소유, 매일신문은 협성회의 기관지, 황성신문은 지금의 주식회사격인 합자회사였다. 이들 신문 가운데 황성신문과 제국신문은 각기 다른 특징을 가친 체 경술국 치 때까지 대표적인 민족지로 발행되었다. 당시 황성신문은 국 한문 혼용으로 지식층을 대 상으로 발행되었던 반면 국제신문은 각기 다른 특징을 가진 체 경술국치 때까지 대표적인 민 족지로 발행되었다. 당시 황성신문은 국 한문 혼용으로 지식층을 대상으로 발행되었던 반 면 제국신문은 한글 전용을 고수하여 서민과 부녀자들에게 널리 읽혔다. 그러나 이들 신문 들은 우리의 민족혼을 일깨우며, 허물어져 가는 국운을 일으켜 보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으 나 선각자들의 보람도 헛되이 1910년 8월 29일 민족통한의 국치일을 맞았으니 이후 위 신 문들은 그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1910년 이후 10년 동안은 신문의 암흑시대가 계속되었다가 1920년 3월 6일에 조선일보 가 창간되었고, 같은 해 4월 1일에는 동아일보가 창간되었다. 1919년 3.1운동은 민족지가 다시 살아나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는 3.1운동이 일어나자 조선통치의 방침을 표면으로나마 문화정책으로 바꾸어 회유정책의 일환으로 1920년 동아일 보, 조선일보, 시사신문 등 3개의 신문을 일간지로 허가해 주었고, 1921년 시사신문이 자진 폐간하자 1924년 주간지였던 동명의 허가를 일간으로 바꾸어 시대일보를 발행할 수 있게 했 다. 한편 일인들은 허가의 제한을 받지 않고 계출( 屆 出 )만 하면 신문 잡지를 발행할 수 있었 으나, 한국인들은 서울에서 3개지를 발행할 수 있는 외에는 지방지로는 대구에 경제지 남선

316 1502 남해군지 경제일보가 형식상 한국인 명의로 발행되었는데 이것 역시 일본인을 위한 일어신문이었다. 1920년 이후 1945년까지 연도별로 일간지가 발행된 숫자를 보아도 한국에서 발간한 일간지 는 무려 31종을 하회( 下 廻 )한 해가 없었던 반면에 한국인 명의로 발간된 일간지는 총독부 기 관지 매일신보까지 포함해서 5종을 넘지 못했던 엄청난 격차를 보였다. 이와 같은 차별 정책과 억압 속에서 발간이 허가된 민족지들 조차도 기사에 대한 탄압과 언론인 구속, 재정난 등으로 신문 경영에 이중 삼중의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민족지들의 저 항은 1920년대에 가장 강력했으며 1925년 무렵에는 동아, 조선, 시대 3개 민족지가 매우 평균 한 번씩 압수를 당할 정도였다. 일제치하에서 민족지가 발간된 20년 동안에 동아일보 는 무기정간 4회, 판매금지 63회, 압수 489회, 삭제 2,423회의 행정 처분을 받았고, 조선일 보도 같은 기간 동안 4회를 비롯 수많은 행정처분을 받았다. 이외에는 사법처분으로 언론인 이 구속되거나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로 복역해야 하는 경우도 수없이 많았다. 2) 친일언론 강요시대 1931년 일제는 만주 침공을 계기로 언론 탄압을 더욱 강화하였다. 지면을 놓고 삭제, 압 수하는 태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언론의 친일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3개 민족지 가운데 동아일보를 제외하고는 조선일보와 시대일보는 모두 경영진의 잦은 교 체와 경영난으로 고통을 받았으며, 시대일보는 경영이 어려워 발행권도 여러 차례 바뀌었 다. 경영난으로 1926년 11월 판권이 바뀌어 중외일보로 개제( 改 題 ) 발행되었으나 1931년 9 월 폐간되었다. 중외일보는 1931년 10월 14일 김찬성이 다시 중앙일보로 개제하여 허가를 받아 운영하다가 1933년 2월에 경영진이 바뀌어 다시 조선 중앙일보로 개제하여 1937년 폐 간할 때까지 발간을 계속하였다. 1936년 8월에는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경기에 우승하자 조선 중앙 동아일보가 각각 손선수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말소한 사진을 신문에 보도하자 동아일 보는 무기 정간을 당하고, 조선 중앙일보는 자진 휴간 형식으로 무기 정간에 들어가 결국 다시 살아나지 못하고, 폐간되고 말았다. 동아일보는 이듬해인 1937년 7월에 복간했으나 1940년 동아일보, 조선일보는 일제의 강 압에 견딜 수 없어 1940년 8월 10일자로 폐간하고 말았다. 민족지가 모두 폐간 당한 뒤 우리말 신문으로는 총독부 유일의 국문기관지인 매일신보가 남게 되었고, 일어신문으로는 역시 총독부 발행의 경성일보과 각 도에 1개씩 일어신문이 발

317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503 간되었다. 한편 경상남도에서는 1909년 진주에서 경남일보가 창간되었으나 항일논조들이 말썽이 되 어 창간 5년만인 1914년 폐간되고 말았다. 1908년 일본인에 의해 창간되었던 마산일보가 경영난으로 1916년 경성일보가 이를 매수 남선일보지로 개제하여 발행을 계속했다. 3) 광복 후 신문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억눌렸던 언론계는 제일 먼저 활기를 되찾았다. 미군정은 언론의 자유를 약속하며 신문 발행을 허가제가 아닌 등록제를 시행하여 누구나 자유롭게 신 문을 발행할 수 있도록 했다. 1945년 9월 22일에는 민중일보가 창간되었고, 9월 25일 동방신문, 10월 4일 동신일보, 10월 5일 신조선보, 자유신문 등이 창간되었다. 11월 23일에는 조선일보가, 같은 날짜로 매 일신보가 서울신문으로 개제되었다. 12월 1일에는 동아일보가 복간되었다. 이때를 전후해 서 신문의 수효는 급격히 늘어나 1946년 5월 28일 현재 신문잡지 등 정기 간행물은 242종 에 달했고, 이해 9월에는 일간지 57종, 주간지 49종, 통신 13, 격월간 154종 등 정기 간행 물이 무려 274개로 늘어났다. 이러한 수적인 증가와 함께 여러 가지 부작용이 늘어났다. 해방직후부터 좌익계열이 조직적으로 언론계에 침투하여 출판노조의 총파업을 유발시켜 한때 모든 신문을 마비시킨 바도 있었다. 이러한 혼란과 좌파의 발효를 막기 위해 미군정 당 국은 1946년 5월 28일 신문잡지 등의 정기 간행물에 대한 법령 제88호를 공포하여 종래의 등록제를 다시 허가제로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군정 당국은 첫째로 무질서한 정기 간행문의 범람을 막고, 둘째는 좌익계열의 언론 선동 공세를 봉쇄하는데 그 저의가 있었던 것이다. 해 방과 더불어 겨우 자유로운 신문 발행이 허용되었지만 1년도 못가서 다시 허가제로 환원되 고 만 것이다. 신문의 자유 발행을 보장한 등록제는 해방 후 군정하의 1년이 못되는 기간과 4.19후 민주당 정권하의 짧은 기간 동안에만 시행 되었을 뿐이다. 군정기간 동안에는 언론 의 자유가 원칙적으로 허용 되었으며, 좌파 신문의 혼란조장으로 좌파의 여러 신문들이 정 간되었고 언론인들이 구속되어 재판을 받는 기록이 남아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정부는 반국가적 언론인은 국시위반이라 하여 엄중히 처벌했으니 좌익 신 문들은 모두 일소되었다. 언론계가 차츰 정비되고, 안정을 되찾던 1950년 한국전쟁으로 언 론은 또다시 모진 시련기를 맞았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은 임시 수도가 된 부산으로 내려 가 발간되었고, 정부는 1951년 1월 2일 일체의 간행물, 인쇄물, 강연원고, 각본 등은 사

318 1504 남해군지 전에 검열을 요 한다. 는 전시통제 조치를 발표하여 검열 하에서 신문을 발행했던 것은 전 시하의 불가피한 조치였다. 그러나 언론 자유는 중앙과 지방의 중요도시 도처에서 생겨나기 시작한 일간.주간 신문들의 수요는 나날이 늘어났으며, 1961년 5월 현재 정부에 등록된 일 간신문만도 전국에 115개나 되었다. 4.19이후에는 신문의 홍수시대를 이룩하였다. 당시 경 남.부산에서 부산일보, 국제신문, 자유민보, 민주중보등의 일간신문이 발행 되었고, 진주에 서는 경남일보, 마산에서는 마산일보가 발간되고 있었다. 또한 마산에서는 1956년 주간 마 산타임즈가 발간되었으나 얼마 후 경영난으로 사라졌다 혁명 후 공화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시 군 단위에 문화공보실이라는 언론 전담 기구 가 설치되면서 정부시책의 홍보과 함께 언론기관의 유기적인 협조를 취하게 되었다. 1963년에 각 신문사에서 처음으로 지방에 주재기자 제도를 두어 신문에 지방판을 만들고, 그 기사를 전담 취재하게 함으로서 신문 보급업무와 기사취재 업무가 지방에도 구분된 것이 다. 그러나 지방주재기자 제도의 초창기에는 진주에 주재하면서 경남의 서부지역을 취재토 록 하다 차츰 각 시 군에 주재 시키게 되었다. 사회가 발달하고, 민도가 높아짐에 따라 신 문 구독률이 높아지고, 신문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극대화 되면서 많은 신문사들이 흥망 을 계속하는 가운데 취재와 보도에 열띤 각축을 벌였고, 민주주의 발전과 사회정의 실현에 큰 몫을 담당하여 왔다. 그 후 1980년에 이르러 제5공화국의 언론정책에 따라 언론 통폐합이 되어 동아, 조선, 서 울, 경향, 중앙, 한국등 6개의 중앙지와 매일한국 등 2개의 경제기 및 지방지로서 부산일보 지국만이 우리 고장에 설치되었다. 1988년 제6공화국의 출범으로 인하여 사회 각 분야의 민주화 발전이 추진되면서 언론분 야에도 민주화의 욕구가 한꺼번에 분출되어 그동안 중단되었던 신문의 재 창간을 비롯한 수 많은 신문들이 탄생되어 신문의 대 홍수를 이루게 되었다. 1993년 말에는 다음과 같이 많은 언론기관의 지국이 설치되었으며, 주민들의 알 권리도 상당히 향상되었다. (1) 지방지(지사, 지국) 현황 신 문 명 대 표 자 소 재 지 전화번호 비고(주재기자) 부 산 일 보 북변리 국 제 신 문 경 남 일 보

319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505 경남 도민 일보 경 상 일 보 경 남 신 문 경 남 매 일 (2) 지역신문(본사) 신 문 명 대 표 자 소 재 지 전화번호 비고(주재기자) 남 해 신 문 정 문 석 남변리 남 해 시 대 김 광 석 서변리 망 운 신 문 최 옥 심 남변리 인터넷 남해뉴스 남해춘추월간지) 이동민 북변리 ) 남해지역의 신문 남해지역의 신문은 남해신문을 모태로 1990년 5월 10일 창간하였으며 1991년 1월 10일 남해정론신문이 곧이어 창간 발행되었다.1993년에는 두 신문이 합병되었으며, 그 후 남해 뉴스, 남해환경신문, 주간남해, 화전신문이 창간. 폐간되는 과정을 거쳐 발전해왔다. 망운 신문도 소식지 9호를 끝으로 발행 작업이 지연되어 오다가 2003년도부터 재창간 되어 오늘 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는 남해신문, 남해시대, 망운신문, 남해인터넷뉴스 4개의 주간신문 과 월간지 남해춘추가 발행되고 있다. 남해리뷰는 상당기간 지역 언론발전에 기여하였으나 폐간되었다가 지금은 남해춘추로 재창간되어 월간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 남해신문 1 연혁 1990년대는 지방자치시대 개막을 예고하고 있었다. 지방자치시대 개막은 지역 언론 창간 을 필요로 했다. 충남 홍성신문, 충북 옥천신문 등 전국 각 지역에서 풀뿌리 지역 언론이 창 간되기 시작한 때를 같이하여 남해에서도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1989년 가을부터 남해 신문 창간준비에 들어갔다. 남해신문을 창간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자본이나 토호세력들로부터 구속받지 않는 지역 언론을 만들고자 군민들에게 1주 5000원 갖기 운동 을 시작하여 이들의 호소에 호응한

320 1506 남해군지 200여명의 군민(소액 주주)들이 모여 1990년 5월10일 남해신문을 창간하였다. 남해신문은 창간 10여 년 만에 전국 지역 언론인들이 부러워하는 모범적인 지역 언론으 로 자리 잡았다. 이는 군민주주 신문으로서 소유구조의 건강성(자본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바탕으로 편집권의 독립, 직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융합된 결과이다. 남해신문은 철저하게 군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논조의 건강, 언론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 구독료와 광고료 수입 이 균형을 이룬 자립경영을 바탕으로 지역주민들의 삶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남해신문의 판형은 타블로이드이며 일반주간신문이다. 매주 1만 5천부를 발행하고 있으며 군내 독다 및 향우 독자 7,500세대도 포함하고 있다. 남해신문은 온라인 세계 남해인터넷방송국 개국하였고, 지역사회에도 초고속통신망이 들어옴으로써 인터넷을 통한 정보화 사회로 급속하게 나아가는 것에 앞장서 고 있다. 그리고 지역정보화시대를 앞서 열기 위해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디지털남해/ 는 군민들에게 남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을 가능한 동영상을 통 해 현장을 생생하게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탄생한 남해신문의 온라인 매체이다. 디지털 남해의 최종 목표는 남해인터넷방송국 개국이다. 그로 하여금 남해군민들이 필요한 정보를 언제든지 찾아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2 주요실적 1995년 남해신문 부설 향토사연구소 개설하였으며, 2000년 창간 10주년 기념 중국 기예 단 초청, 군민 무료 공연을 개최하였다. 2005년 문화관광부 산하 지역신문발전위원회 평가 우수지역 신문사로 선정되었다. 3 역대 대표이사 현황 연번 성 명 재 임 기 간 주 요 실 적 1 김 두 관 ~ 남해신문 남해정론 합병 2 강 명 규 ~ 남해신문 24면 32면 증면 인터넷신문 개통 3 한 관 호 ~ 영상외 주사업 시행 4 정 문 석 ~ 현재 우수지역 신문사 선정 5 박 춘 식 ~현재

321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507 (2) 남해시대 0 다. 1 연혁 2006년 3월 6일 인터넷신문 남해타임즈 등록하고 4월 17일 (주)남해시대를 창간하였 2 대표이사 연번 성 명 재 임 기 간 주 요 실 적 비 고 1 김 광 석 ~ 현재 남해시대 창간 3 주요실적 2006년 9월 제1회 보물섬 가을 음악회 개최하였으며, 2007년 제1회 신년음악회 개최(문 화체육센터)하였다. (3) 망운신문 1 연혁 망운신문은 1991년 9월 1일 발행인 김재동, 편집국장 문경연을 중심으로 남해군 남해읍 북변리 234번지에서 출발을 하였다. 1981년 언론 통폐합으로 해직될 당시 경남매일(경남신 문 전신)에 재직 중이던 문경연은 지역의 언론문화 창달과 정론지를 지향하며 필치를 날렸 다. 1991년 9월 1일 소식지 제1호를 시작으로 1992년 11월 7일 제9호를 발간하고 창간을 목 전에 두고 있는 가운데 1993년 실질적인 사주이던 문경연이 당시 편집국장의 복직으로 인해 창간작업이 순연되었지만 정년퇴임 후 창간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 후 울산매일에 재직 중이던 문경연의 사망에 따라 창간 작업이 순연되어 오던 중 부인 인 최옥심(현 망운신문 발행인)이 당시 울산매일의 남해ㆍ하동 파견기자로 근무하던 아들인 문지홍과 함께 유업을 이어 2003년 3월 14일 남해군 남해읍 서변리 189-1번지에서 재 창 간을 하였다.

322 1508 남해군지 2 주요실적 영호남 동호인 탁구대회, 판(PPAN)무료법률 상담 등을 개최하였다. 3 역대 발행인 연번 성 명 기 간 비 고 1 김 재 동 ~ 송 백 윤 ~ (직무대행) 3 최 옥 심 ~ 현재 재창간 4 대표이사 연번 성 명 기 간 비 고 1 지 용 철 ~ 현재 재창간 5 역대 편집인 연번 성 명 기 간 비 고 1 문 경 연 ~ 문 지 홍 ~ 현재 재창간 (4) 남해인터넷 뉴스 (5) 남해춘추 2. 방송 1) 우리나라의 방송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방송국이 설치된 것은 1926년 11월 체신국 청사의 방 한 칸을 빌 려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을 조직한 것이 그 시초이다. 이듬해 2월 16일부터는 정식으로 방 송이 시작되었으나 당시의 방송은 아주 미미한 것이어서 한 사람이 편성, 연출, 방송을 도맡 아 보았으며, 출력은 1KW에 지나지 않았고, 청취자 수는 겨우 5천에 불과하였다. 호출부호 는 JODK로 우리말과 일어이었다. 개국 당시의 수신기 보급 대수는 겨우 1,440대(일인소유

323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65, 한국인 275)였고, 방송 내용도 뉴스, 강연, 음악 등 간단한 것이었으며, 방송시간의 대부분을 동경방송의 중계에 할당되었다. 그러다가 1932년 4월에는 사단법인 조선방송협회로 명칭을 바꾸고, 제1방송( 日 本 語 ), 제 2방송( 韓 國 語 )으로 분리 방송하였다가 이듬해인 1933년 4월에는 출력을 10KW로 늘리고, 2중 방송을 개시하여 제1방송( 日 本 語 ), 제2방송( 韓 國 語 )를 동시에 방송하였다. 지방방송도 확충되면서 1934년에 부산방송국, 1935년에는 평양, 36년에는 청진, 37년 이리, 함흥, 38년에는 대구, 광주방송국이 개국했다. 이외에도 각 지방에 지방방송국을 설 치하여 1945년에는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에 방송국(서울ㆍ부산ㆍ대구ㆍ대전ㆍ광주ㆍ목 포ㆍ이리ㆍ마산ㆍ청주ㆍ춘천ㆍ평양ㆍ함흥ㆍ원산ㆍ해주ㆍ신의주ㆍ성진ㆍ청진)이 설치되 었고, 1944년 8월에는 수신기 등록 대수가 3만 5천대에 이르렀다. 해방이 되자 방송 프로의 개편을 단행, 한글 강좌와 국사의 이해에 많은 시간을 할당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해설과 교양강좌에도 주력하였다. 당시 방송협회는 진공상태에 빠져 사회 의 혼란한 틈타 한때 정당 사단법인들이 방송의 권리권을 둘러싸고 분규가 있었으나 결국 군 정청 공보부에 소속되어 방송업무를 담당하다가 정부 수립 후 공보처에서 관리하였다. 방 송협회는 청취료로 유지되어 오다가 해방 후 방송의 대중화와 청취자의 증가로 청취료의 징 수는 사실상 폐지되고, 한국전쟁이후에는 청취료제도 마저 폐지되었다. 우리나라의 방송은 6.25사변을 당하여 서울 정동송신소를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크게 손실을 입었으나, 1951년 에는 복구되고, 1955년에는 연희동에 100Kw, 수원에 단파 100Kw의 송신소가 각각 준공 되었다. 1927년부터 1954년까지는 민간 방송이 없는 KBS의 독점시대였다. 1954년 12월 15일 기독교방송이 개국되면서 국영과 민영의 공존하는 시대로 들어섰다. 이어 1959년 4월 15일 부산문화방송국이 개국되었으며, 부산문화방송은 명실상부한 민간상업방송국이었다 년 12월에는 서울문화방송국이 개국, 1963년 동아방송, 1964년 라디오 서울이 개국하여 후 에 동양방송으로 바꾸었다. 1950년대 말에는 농어촌 지역에 유선방송시설이 등장하였는데, 당시의 라디오 보급률은 1개 마을 1대 정도였다. 라디오가 없는 가정에서 라디오 방송을 듣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매 일 붐비든 때였다. 1960년대 농어촌 주민의 생활상은 매우 어려운 실정으로 라디오의 보급률이 낮아 이로 인 해 등장한 것이 유선방송으로 마을회관 또는 일정한 장소에 방송시설을 갖추고, 유선으로 스피커를 설치해 라디오 방송을 각 가정에 중계하여 주었다. 청취료는 하곡( 夏 穀 ) 또는 추곡

324 1510 남해군지 ( 秋 穀 ) 수확 시에 실정에 맞게 징수하여 운영함으로써 라디오를 구입할 형편이 어려운 농어 촌의 구석구석까지 방송의 혜택을 주었다. 이러한 유선방송 사업은 1958년부터 1968년까지에 걸쳐 이루어 졌고, 행정기관의 공지사 항 통보 및 막간을 이용한 레코드판을 들려주었고, 개인의 급한 연락 등을 전해주는 등 다양 하게 활용되었다. 그러나 생활수준이 점점 향상됨에 따라 라디오의 보급률이 높아지면서 라 디오 유선방송은 1972년을 끝으로 그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한편 TV는 1940년 무렵부터 실용화되었고 1960년대부터 선을 보이기 시작하여 1970년 대 중반부터 점차 보급률이 높아졌다. 우리나라에서는 1956년 5월 15일 한국최초의 상업 방송인 HLKZ가 개국하였다. 그러나 상업라디오의 성공과는 달리 TV방송은 수상기 보급의 부진과 광고의 부족 등 여러 여건의 미숙으로 초기에는 성공을 못하다가 1961년 12월 KBS TV의 개국으로 12월에는 동양TV가 상업방송으로 출발했고, 1969년 8월에는 또 하나의 상 업 TV인 문화TV(MBC)가 개국하여 TV 3국( 局 )의 정립시대에 들어서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 게 되었다. 그러나 방송국과의 거리가 먼 관계로 수신 상태가 불량하였고, 특히 MBC TV시 청은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이에 등장한 것이 TV중계유선방송사로서 전국난시청 지역에선 TV중계유선방송사가 설치되었다. 1927년 경성방송국(JODK)이 첫 전파를 전달한지 65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전국방방곳 곳방송망을 통하여 KBS, MBC, CBS, BBS, PBC, 교통방송, 아시아극동, 라디오 방송과 KBS-TV, MBC-TV, CBS-TV, SBS-TV 방송등의 매체가 전달되고 있다. 2) 남해지역의 유선방송 남해지역의 방송시설로는 1971년 4월 1일에 설치한 서면 연죽리 산 38번지의 망운산 TV 중계소와 남면 당항리 당항중계소가 KBS 1.2,교육 FM TV중계를 하고 있어 시청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이들 TV중계소는 MBC-TV 시청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따라 서 MBC-TV 시청을 위해서는 유선방송 시설로 시청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는 남해군 관 내에 KBS망운산 중계소 및 당항중계소가 있으나 MBC-TV 중계시설이 없으며, 가시권이 되지 못하므로 TV중계소를 설치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이에 따라 수차례에 걸쳐 남해군민 의 MBC-TV시청을 바라는 민원을 진주문화방송에서 받아 들여 1991년 9월 1일부터 남해 읍 입현리 산57( 月 拘 山 )에 진주문화방송 남해 간이 TV중계소를 1991년 12월 23일 준공을 하였다. 이는 남해읍 외 6개면(이동ㆍ삼동ㆍ창선ㆍ고현ㆍ설천ㆍ서면)의 일부지역 난 시청 은 완전 해소되어 군 전체 가구의 40%인 8천여 가구가 양질의 화면을 즐길 수 있으며, 지역

325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511 정보를 보다 빨리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출력 채널은 UHF 41체널이다. 3) 홍보매체 보급 현대는 매스미디어(mass media)의 대홍수 시대라고 일컬을 정도로 대중매체가 범람하고 있는 시대이다.매스미디어(mass media)란 인쇄매체(printd media), 전파매체(etectronic media), 광학매체(opitical media)의 총칭이다.인쇄매체(prined media)는 신문, 책, 잡 지 인쇄물을 말하며, 우리에게 전문적인 지식, 정보, 생활에 필요한 교양을, 전파매체 (etectronic media)는 라디오, TV등을 말하며 정보, 지식을, 광학매체(opitical media)는 그림 필림, 슬라이드, 영화를 빛을 통해서 우리가 볼 수 있다. 특히 인쇄매체(prined media) 인 신문은 일반관심사 및 공개(속보)로 고지욕( 告 知 慾 )을 충족시켜 주고 있다. 오늘날 신문, 라디오, TV, 잡지 각종 간행물의 수많은 홍보매체, 고도 산업화한 사회, 시 각을 다투는 정보화 사회에 적응코자 노력하는 현대인들에 보다 신속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 면서 정치, 문화, 사회, 경제적 발전을 주도하는 역할과 함께 끊임없이 변화하는 새로운 문 화를 전달함으로서 인간생활을 보다 깊이 있고, 가치 있는 삶으로 이끄는 문화적 TV 1만 5 천 5백대 그리고 6개의 TV중계유선방송사와 음반 판매소가 43개소가 있으며, 1가구당 0.7 부의 신문을 구독하고 있다. 남해군 TV중계 유선방송사현황은 다음과 같다. (1) TV중계 유선방송사현황(2007년) 유선방송사명 대표자 주 소 전화번호 이동유선 윤 의 영 남해군 이동면 무림리 삼동유선 배 주 이 남해군 삼동면 금송리 남해유선 (고현 설천) 정 희 섭 남해군 남해읍 평리 미조유선 윤 양 수 남해군 삼동면 지족리 남면유선 윤 금 수 남해군 남면 당항리 서면유선 정 규 현 남해군 남해읍 선소리 창선유선 김 동 겸 남해군 창선면 수산리 상주유선 정 규 현 남해군 남해읍 선소리 ) 한국방송공사 망운산중계소

326 1512 남해군지 (1) 연혁 1971년 4월 14일 문공부 여수방송국 망운산 TV 중계소(출력 : 2KW, CH : 4) 개소되었 으며, 1973년 3월 1일 한국방송공사 여수 방송국 망운산 TV 중계소 발족되었다. 1977년 12월 30일 제1TV 출력증강 2KW 10KW 및 표준FM (표준 : FM 출력 : 1KW, 주 파소 : 95.9MHz)시설 신설. 1980년 제3TV방송 및 교육 FM (제3TV : 출력 : 30KW, CH 30),(교육FM : 출력 : 3KW, 주파소 : 106.3MHz), 1984년 제2TV방송 및 제1FM신설 (제2TV : 출력 : 30KW, CH 32)(제1FM : 출력 : 3KW, 주파소 : 94.5MHz), 1984 년 한국전기통신공사 위탁 운용되었다. 1986년 제2TV CH변경. (CH 23 CH 24), 1988 년 한국방송공사 여수방송국 망운산 중계소로 환원되었다. 1988년 제1TV 예비 송신기(톰 슨:10KW)증설, 제3TV 예비 송신기(VARLAN : 10KW) 증설 1990년 12월 27일 제 3TV 교육FM 문교부로 이관 및 방송 위탁 운용하고 있다. (2) 역대소장 1 대 박 진 철 2 대 길 호 갑 3 대 오 현 수 4 대 문 관 철 5 대 정 재 철 6 대 임 현 욱 7 대 원 종 록 8 대 강 영 순 9 대 서 정 원 10 대 이 경 호 11 대 노 홍 용 12 대 홍 기 정 3. 출판 책의 최초의 재료가 된 것은 BC 3000년경부터 이집트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파피루스인 데, 갈대 줄기로 만든 펜에 검댕이나 숯을 물에 탄 잉크를 묻혀 문자를 썼다. 105년 후한 시대에 채륜이 종이를 발명하였는데, 7세기의 당나라 초기에 목판인쇄가 발명 되자 책은 비로소 종이와 인쇄에 의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때까지의 책은 손으로 베껴 쓰 는 필사본이었고, 두루마리 형태로 되어 있었다. 중국은 특히 송 원나라 2대에 걸쳐 출판 이 크게 번영하여 출판의 선진국이 되었다. 한국에는 중국과 가까운 관계로 종이와 목판인 쇄 또는 책 자체가 일찍부터 소개되었는데, 어느 시기가 지난 다음 그것만으로는 수요를 충

327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513 족할 수 없어 스스로 목판인쇄술을 개발하게 되었다. 751년 이전의 목판인쇄물로 추정되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이 1966년에 불국사석가 탑 속에서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현재 남아있는 인쇄물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 다. 그 후 조선 500년 동안 역대 왕들은 중요한 국가사업의 하나로 동활자ㆍ철활자 등을 20 여 차례에 걸쳐 주조하고 주조한 해의 간지( 干 支 )에 따라 활자 이름을 붙였는데, 세종은 특 히 인쇄사업을 중시하여 인쇄 종사자들을 우대하였다. 조선의 수많은 간행본은 크게 관판 본ㆍ사판본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7세기 중엽부터는 출판지나 출판자의 이름이 적혀 있 는 매매 목적의 방각판으로 볼 수 있는 판본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요즈음의 출 판사에 해당할 만한 상호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19세기 초에는 출판지나 상호와 비슷한 이름이 밝혀져 있는 방각본들이 많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19세기 중엽에는 서울의 야동ㆍ홍수동ㆍ석교ㆍ무교 등의 이름이 명시된 신간본과 또는 지방의 완산ㆍ전주 등지에서 개판된 매매 목적의 방각본이 많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방각본은 영리를 목적으로 한 만큼 값싸게 출판하기 위하여 인쇄나 지질이 매우 좋지 못하였다. 유럽에서는 14세기경에 제지법이 보급되고 동시에 목판인쇄도 하게 되었는데, 그때까지는 주로 수도원 안에서 수도 사가 필사본을 만들어 시판하는 것이 고작 출판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1920년에는 출판을 통한 민족정기의 앙양을 도모하고자 민간자본금 30만 원의 주식회사 인 한성도서주식회사가 창설되었다. 본격적인 문고출판은 1938년 학예사 간행의 조선문 고 가 시초였고, 그 다음으로 박문서관이 간행한 박문문고 가 있었는데, 판형은 국반 판, 장정은 반양장이었다. 당시의 출판물은 대부분이 문학에 치우쳐 있었다. 45년 8.15광복을 전후하여 손꼽을 만한 출판사로는 박문서관ㆍ영창서관ㆍ덕흥서림ㆍ이문당ㆍ삼중당ㆍ정음사와 한성도서주식회사 등이 있었다. 8.15광복 후 한때는 출판사가 우후죽순처럼 창립되어서 1,000여 사로 늘어났다. 오늘날 에는 한국의 출판문화도 경제성장과 함께 크게 신장되어 발행종수로 보아 세계 제10위의 출 판대국이 되었다. 또, 1983년에는 출판의 꽃이라고 하는 세계백과사전 (전 30권)이 두 산동아에서 출간되고, 이희승편 국어대사전 도 민중서림에서 초판발행 20년 만에 개정 판이 출판되었다. 컴퓨터 조판기술도 개발되어 한국에서는 아가페출판사가 처음으로 82년 10월 성경성구대전 7권을 컴퓨터에 의해 편찬ㆍ발행하였다. 한편, 두산동아ㆍ금성출판사 와 삼화인쇄 등도 컴퓨터 조판 시설을 도입ㆍ가동 중이어서 출판의 컴퓨터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328 1514 남해군지 1) 남해군내 인쇄출판사 현황 남해군에는 소규모 인쇄업이 있었는데 1972년도 업자들이 모여 합동인쇄 라는 제법 규모가 큰 업체를 만들어 지역에 공헌하다가 시대의 변화와 과학ㆍ정보의 발달로 쇠퇴하여 그 오랜 전통을 유지하고 있으며 남해의 인쇄사 와 출판사는 다음과 같다. 업 체 명 대 표 자 신고일자 비 고 남해신문(주) 박 춘 식 2005 도서출판 무진재 김 성 철 2006 문성출판사 박 문 호 2007 도서출판 남해시대 김 광 석 세기 희망기획 정 의 연 2008 우리기획 윤 해 수 2008 시움 송 중 영 2008 업 체 명 대 표 자 신고일자 비 고 합 동 인 쇄 강 명 수 1973 문성사 박 문 호 1989 태우 인쇄소 박 성 관 1999 무 진 재 김 성 철 1997 시움 송 중 영 2008 인쇄 참 고 문 헌 근대한국미술사의 연구(미근사, 1992) 신문학 강의(중앙대학교 출판국, 1979) 경남도사(1988) 남해의 얼(남해군, 1985) 사천군지

329 제10편 문화 관광 예술 1515

330 1516 남해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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